[자오선] 맛있는 관계 제 1 편 < 내 생애 가장 황당한 3개월 > “이럴 수가...... 이럴 수가......어찌 이런 일이......” 김신규 (34세, 내과 전문의)는 당황하고 있었다. 말로만 들었던 이런 일이, 책에서나 보았던 이런 일이, 과거 미국 유학시절 지도 교수에게 들은 바 있지만 믿거나 말거나 흘려 들었던 그런 일이 지금 신규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이다. “믿을 수가 없습니다. 제 주변에 실제로 이런 증상을 가진 환자가 나타나리라고는!” 조찬영 (28세, 음식 평론가/푸드 저널리스트)은 당황하고 있었다. 한 달이 넘도록 지속되고 있는 소화불량, 체증, 뱃속 더부룩함 그리고 이유 모를 미열까지. 감기 초기 증상이라 믿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찬영도 체증이 도를 넘어 이제는 음식을 보기만 해도 헛구역질이 나오는 지경에까지 이르자 석진의 닦달에 떠밀리는 셈치고 병원을 찾았던 것이다. 어쩐지 아무리 약을 먹어도, 손가락을 바늘로 따도 차도가 없다 싶었다. 의사가 저렇게 손가락을 부들부들 떨 정도의 중한, 그리고 희귀한 병이었다니. “......얼마나 남은 겁니까.”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 내 28세의 삶. 그래도 후회 없이 살아왔다. 지난 한달 간 피곤한 몸을 핑계로 싱싱한 큐트 보이들의 유혹을 거절해왔던 것이 살짜꿍 후회되기는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 생각하면 무엇하리. 여기서 나가면 그 중 유독 귀여웠던 인우를 불러 맘껏 사랑하리. 정수도 예뻐해 주리. 내친 김에 동영과도 한번 자 주리. 그동안 튕겨서 미안했다. 어머님 먼저 가는 소자를 용서해 주세요. 그토록 소원하시는 손주를 안겨드리지 못하고 가서 죄송합니다. 누나 미안해. 내가 몰래 누나 노 메이크업 사진 주간지에 몇 번 팔아먹었어. 하지만 그건 철없던 어린 날, 유흥비를 마련하기 위해 한 일이었어. 덕분에 영규, 찬정이는 쭉쭉빵빵 모델 누님들을 사귈 수 있었지. 그 녀석들이 얼마나 누나에게 고마워했는지 몰라. 그리고 누나는 화장 안 해도 예뻤잖아. 몇몇 안티들 빼고는 모두가 입을 모아 진정한 피부 미인/자연미인이라고 칭송했더랬지. 그중 ‘차니빠 (조찬희 빠돌이)’로 가장 이름 드높았던 아이디 ‘Sexy Cha'가 바로 나였어, 누나. 누나가 컴퓨터 좀 그만하고 밥 처먹으라고 소리질렀을 때도 나는 그 악질 안티 ‘완전 소중 자영’과 있는 힘껏 싸우고 있었다고. 누나 동생인 것이 들킬까봐 오프라인 모임에는 나가지 못했지만 지금도 동우(전 조찬희 팬클럽 회장)말에 의하면 아직까지 팬클럽 회원들 사이에서는 ‘Sexy Cha' 가 전설로 남아있대. 아무튼 내 진심은 그래. 언제나 누나가 자랑스러웠어. 매형과 함께 영원히 행복하길. 내게 남아있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조카 얼굴 한번 보지 못하고 떠나는 무정한 삼촌은 되고 싶지 않았는데... 마지막으로 내 베스트 프렌드 석진아. 네가 갖고 싶어하던 비디오와 잡지 그리고 전설의 한정판 시노하라 료코 브로마이드 너 주고 떠날게. 네가 진작 달라고 할 때 줬어야 하는 건데. 왜 사람은 죽을 때가 돼서야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을 깨닫게 되는 것일까. 왜.... 와이... 와이...WHY 이렇게 한없이 찬영이 여름날, 끝도 없이 펼쳐지는 망상을 펼치고 있을 때 의사 신규는 간신히 호흡을 가다듬고 그 앞에 손가락 7개를 펼쳐 보였다. “7개월입니다. 7개월 남았습니다. 지금이 3개월 째이니까 딱 7개월 남았군요.” 7개월... 겨우 7개월이란 말인가. 말로만 듣던 시한부 인생, 1년도 아니고 7개월이라니 하느님 너무 하십니다. 찬영이 그렇게 신을 원망하고 있을 때였다. “태아가 무사히 안착이 되어 자라고 있다고는 하나 아직은 임신 초기. 2~3개월 째가 가장 유산의 위험이 높으니 만큼 무엇보다도 산...” 남자인데 모(母)라고 해도 되는 걸까. 그는 잠시 망설였지만 곧 결단을 내리고 남은 말을 진지하게 이어 나갔다. “모......의 안정을 최우선으로 하셔야 합니다.” 이 때 진지한 그의 표정에 감화되어 함께 고개를 끄덕이고 있던 찬영의 머리 속으로 일말의 의문이 스치고 지나갔던 것은 불행 중 다행이 아니라 할 수 없다. “그런데 의사 선생님. 태아라뇨? 임신은 또 무엇이고 유산은 또 무엇인가요?” “임신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누가요? 우리 누나가요?” “아니요. 환자 분이 말입니다.” “제가요? 제가 뭘 했는데요?” “임.신.하셨습니다. 현재 임신 3.개.월째세요.” “하.하.하. 아이 참, 농담도 잘하셔. 굳이 이런 웃기지도 않은 농담으로 저를 위로해주실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제게 남아있는 시간이 얼마인지, 제 병명이 무엇인지 그것만 말씀해 주십시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남아있는 시간은 7개월, 병명은 아니지만 증세 명은 임신입니다.” 이 사람이! 가만히 있었더니 누굴 가마니로 아나! 당신 의사 맞아! 앞으로 살날이 며칠 남지 않은 불치병 환자에게 이 무슨 악질적인 장난이야. 쇼크요법이라도 사용하려는 거야? 굳이 따지자면 불치병이라고 할 수도 있군요. 생명에 위협을 주지 않는다는 점만 빼면 말입니다. 더는 못 참겠어! 당신 의사 협회에 정식으로 고소할거야! 라며 찬영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선 순간이었다. 찬영의 어깨를 눌러 의자에 다시 앉힌 신규가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라고 정중히 찬영에게 요구해왔다. 그러더니 몸을 돌려 진찰대 옆으로 늘어서 있는 책장을 두서 없이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약 오분 여. “여길 봐 주시겠습니까. 150페이지 40번째 줄부터 쭈욱 끝줄까지를요. 보시기 쉽도록 형광펜으로 표시해 드리겠습니다. 옆의 사진을 보시면 더욱 이해가 빠르시겠네요. 남자의 몸으로 출산에 성공한 미국의 샘 페리 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뒷장을 넘기시면 프랑스의 쟌 피에르 라고 하는 사람의 사진도 실려 있습니다. 옆에 서 있는 남자가 아이 아버지, 그리고 그 뒤편에 서 있는 남자가 닥터 슈바리에입니다. 닥터 슈바리에는 이 연구를 바탕으로 기존의 성 개념을 허무는 획기적인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보수적인 의학계에서는 그의 연구를 수정란 조작을 통한 사기라고 주장하며 받아들이지 않고 있지요. 사실 저도 이렇게 본인을 만나 뵙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구요. 아이가 참 예쁘죠?” “네. 예쁘... 지금 당신 뭐 하자는 수작이야! 이런 삼류 말도 안 되는 꼬부랑말 책 하나 가지고 날 속여먹을 수작이야? 당신 어디 미친 거 아니냐고? 진료비 적선한 셈 칠 때니까 당신이야말로 정신과 가보라고! 난 이만 갈 테니까!”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분명 속이 메슥거리고 소화가 잘 되지 않고 체기가 계속된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리고 또 열이 나고 빈혈 증상에, 이유 없이 피로하고 밤엔 잠이 오지 않고 자주 배가 고프나 음식은 쉬이 먹히지 않으며 즐겨 먹던 음식이 갑자기 역해지고 헛구역질이 나시지 않으십니까?” 문 쪽으로 향하던 찬영의 발길이 멈추었다. 그렇다. 그것은 분명 찬영을 한 달간 넘게 괴롭히는 증상이기는 했다. 그러나 남자가 임신이라니, 그것도 이 위대한 조찬영, 남자 중의 남자, 게이 중의 게이, 탑 중의 탑으로 불리고 있는 조찬영이 임신이라니 말이 되냔 말이다. 서 있던 찬영을 재차 의자에 앉힌 신규는 굳은 표정으로 안경 코를 쓰윽 하고 밀어 올린 뒤 자신이 가진, 자신이 배운 모든 의학적 지식을 동원하여 하나하나, 차근차근 설명해 나가기 시작했다. ********* “뭘 이렇게 오래 걸리냐? 무슨 병이래? 끽해야 위궤양 아니면 스트레스에 의한 단순 소화불량일거라고 큰 소리 탕탕 치더니 된통 걸린 모양이네. 어디가 안 좋아서 그런 거래?” 병원 문을 나서자 차를 몰고 온 석진이 계단 밑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온몸의 힘이 빠진 찬영이 터덜터덜 걸어와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탄다. 작업이 예상보다 일찍 끝난 탓에 와본 걸음이기는 했지만 찬영의 하얗게 질린 얼굴을 보자 이렇게 데리러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석진이었다. “너 정말 어디가 심각한 거야? 이 자식아 그러니까 내가 술 좀 작작 마시라고 했잖아.” “나... 잠깐 잘란다. 집에 갈 때까지 깨우지 마.” 조수석 의자 등받이에 힘없이 몸을 기댄 찬영이 눈을 감고 말했다. 뭔가 심각하긴 심각한 모양이다. “야, 임마 말해 봐. 말을 해야 알지. 이 형님 답답해서 죽는 꼴보고 싶어서 그래?” 시끄러워, 새꺄. 나 잘 거라니까. 얼굴을 찌푸린 찬영이 재킷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석진의 얼굴에 던진다. 팔랑, 석진의 이마를 맞고 떨어진 종이를 석진이 운전대를 쥐지 않은 나머지 한 손으로 잡아챈다. “뭐야? 이거? 사진?” “너 가져. 선물이야.” “초음파 사진? 너 초음파 검사도 했냐? 이 동그라미 쳐진 작은 건 뭐야? 궤양 덩어리냐?” “회충이다. 새꺄.” “뭐? 아악 디러운 새끼. 너 임마 앞으로 나랑 같은 식탁에서 밥 먹을 생각하지도 마.” 차라리 궤양이면, 아니 하다 못해 회충이었더라도 이렇게 절망스럽지는 않았을 거다. 지끈거리는 머리에 이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이야기를 들은 탓인지 몸 또한 천근만근 무겁게 느껴진다. 찬영은 진저리를 치는 석진의 부산함을 자장가 삼아 며칠만에 찾아온 수마에 간신히 몸을 맡겼다. ...남성 인구 1억 명 당 1명 꼴로 나타나는 희귀 병...... 이걸 병이라고 해야 할지는 의문입니다만...입니다. 1억 명 당 1 명이라구요? 우리나라 인구수가 채 5천만 명이 안 되는데... 네, 4천8백만 명쯤 되는군요. 아무튼 확률 상으로는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세계인구는 64억, 그중 절반을 남성이라고 할 때 단순 인구수로 따지자면 찬영씨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될 남자 분이 32명쯤 되는 셈이네요. 그러나 이것도 다만 추측일 뿐 그 중에서 실제로 임신까지 이르게 될 확률은 더욱 적어지죠. 대부분의 남성분들은 여성과 관계하여 부부인연을 맺고 아이를 낳으며 살아가니까요. 동성애자의 비율을 대략 10퍼센트로 가정한다면 32 나누기 10, 즉 기껏해야 3명 정도의 확률이군요. 이거 대단하네요. 64억 대 3 이라... 저 이해가 잘 되지 않는데요......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남자가 임신할 수 있다는 소리는 생전 처음 들었습니다. 이런 일이 생리적으로 가능한가요? 닥터 슈바리에의 이론에 따르면 가능합니다. 실제로도 체외수정 후 복강 내로 수정란을 삽입하여 제왕절개로 출산한 사례도 있었구요. 그 사진도 있는데 보시겠습니까? 싫습니다. 그런데 그건 체외수정이잖아요. 제가 묻고 싶은 건 정자와 정자가 만나 어떻게 수정이 되느냐 그걸 알고 싶다는 겁니다. 여성의 난자와 달리 정자 그 자체가 몸 속 기관을 타고 침입해온 타인의 정자와 다투다가 공존을 위해 세포 변이를 일으켜 즉 수정란으로 변형되는 것입니다. 저기......자랑은 아니지만 이번이 첫 섹스는 아니거든요? 이 전에는 이런 일이 한번도 없었다고요. 섹스한다고 다 임신하면 세상은 아이들로 꽉 차 있게요. 그러니까 ‘우연’에 가까운 확률이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로또 1등에 당첨될 확률보다 더 낮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어려운 확률 낮은 일이 왜 저한테 일어난 거냐구요. 글쎄요......인체의 신비......(침묵) 이 사람이 지금 장난하나! 환자분 화내시면 뱃속의 태아에 해롭습니다. 다 필요 없고 이거 당장 치료해 주세요. 없애 달라고요.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남자든 여자든 하늘이 내려주신 소중한 생명이거늘 없앤다는 말씀을 그리 쉽게 하실 수 있는 겁니까. 하늘이 듣고 땅이 듣고 제가 듣고 아기가 듣고 있습니다! 나한테는 그 생명 필요 없다니까 그러시네! 아이 아버지 말씀도 들어 보셔야죠. 누가 아이 아버지야! 누가! ...아무튼 낙태는 범죄입니다. 살인 행위에요. 의사로써 절대 허락할 수도 묵인할 수도 없습니다. 더욱이 여성의 경우와는 달리 남성의 낙태는 전례가 없는 일이라 어떠한 위험이 발생할지 누구도 장담 할 수 없습니다. 생명을 위협받을 수도 있지요. 그럼 어쩌라고요. 낳으셔야죠. 이 인간이 미쳤나! 지금 나더러 애를 낳으라고?!!! 당신 미쳤어!!!!!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구!....말도.... 말도..... ....... 말도... “깼냐? 거의 다와가. 자면서 뭘 그렇게 꿍얼꿍얼거리냐. 누가 먹을 거 빼앗아가기라도 하 디?” 익숙한 교차로가 보이는 걸 보니 진석의 말대로 집 근처에 거의 도착한 듯 싶다. 꿈속에서도 억울했는지 몸에 잔뜩 힘을 주고 잔 모양이다. 어깨며 팔이 쑤시기까지 하다. 아으으 신음 소리를 내며 기지개를 켜던 찬영은 차안에서 느껴지는 혼탁한 공기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이게 무슨 냄새야... 담배? 야 이 새끼야! 니가 지금 누구 앞에서 담배를 피는 거야! 잘못 되면 어떻게 하려고오!” “거참 몸 한번 징하게 챙기네. 한번 아프더니 인생관이 다 바뀌었냐. 너도 피는 담배 왜 날 못 피게 하냐.” “나 담배끊었어. 아니 끊을 거야. 그러니까 너도 끊어. 최소한 내 앞에서는 절대 피지 마.” 조찬영, 너 오늘 진짜 이상하다? 의사가 뭐라 그랬는데 그래. 담배 끊으랬어? 그래, 그러니까 너도 피지 말라고. 간접흡연 그게 얼마나 무서운 건데. 석진이 주차하는 틈을 기다려주지 않고 찬영은 먼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 위로 올라간다. 복도 끝 집 501호. 비밀번호 6자리를 누르자 삐하는 소리와 함께 도어록이 풀리고 문이 열린다. 뒤이어 땡하고, 뒤따라온 석진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투덜투덜 잔소리와 함께. 좀 기다려주면 덧나냐? 조찬영? 덧나냐고. 옷을 갈아입기가 무섭게 침대 속을 파고 드는 찬영을 석진이 쯧쯧 소리를 내며 바라본다. 또 자냐 그래? 뭐라도 먹고 자지 그래. 됐어, 생각 없어. 나 내일 아침까지 깨우지 마라. 초저녁인데 내일 아침까지 내쳐 자려고? 야, 오늘 기정이형 송별회 있잖아. 안 가볼 거야? 인우랑 애들이 너 요새 안 보인다고 징징대던데. 너 그러다가 동 바람한테 애기들 다 빼앗긴다? 나중에 길길이 날뛰면서 후회해도 그땐 늦어. 안 그래도 어제 보니까 정수가 동 바람한테 찰싹 달라붙어 있던데. 동 바람, 김신주, 김신주, 동 바람. 천하의 재수 없는 새끼. 빠드득 찬영의 이빨 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찬영이 ‘서 바람’ 즉 서초구 최고의 바람둥이라면 신주는 ‘동 바람’ 동대문구 최고의 바람둥이였다. 타고난 미모와 늘씬하게 빠진 몸매, 개구지고 장난끼 많은 성격, 막내다운 애교와 톱 탤런트를 누나로 둔 빽(몇몇 숭배자들은 찬희보다 찬영이 더 요염하고 섹시하다며 오도방정을 떨어대기까지 했다)까지 모든 걸 갖춘 찬영은 최고 킹카의 자리를 몇 년째 고수해 왔다. ‘동 바람’ 신주가 나타나기 전까지. 1년 전 갑자기 나타난 김신주는 모든 면에서 찬영과 반대였다. 화려한 외모의 찬영과 달리 선이 똑 떨어지는 단정함으로 금욕적인 이미지까지 엿보이는 신주의 외모는 서릿발처럼 냉정한 그의 성격과 맞물려 사람들에게 ‘도전하고 싶은’ 욕망을 자극시켰다. 저 딱 부러지는 성격의 얼음 왕자가 내게만 미소를 보여준다면 얼마나 짜릿할까. 저 균형 잡힌 체격이 내 옆에서만 서 있어 준다면. 남녀 모두가 그 경쟁에 뛰어들었지만 신주는 찬영이 그랬듯 진성 게이였고 불행하게도 남자 취향마저 같았다. 자신이 찍은 큐트 보이가 신주의 팔에 매달려 사라지는 것을 보며 찬영은 이를 뿌드득 갈아야만 했다. 바로 지금처럼. 신주와 찬영은 직업마저도 서로 원수지기에 딱 알맞았다. 큐트 보이들을 꼬실 때와는 달리 직업적으로는 신랄한 평으로 이름 높은 음식 평론가/푸드 저널리스트 조찬영과 스물 일곱이라는 젊은 나이에 퓨전 레스토랑 ‘피카소’를 운영하고 있는 오너 김신주. 찬영은 ‘피카소’의 높은 인기는 아랑곳 않고 혹평을 퍼붓는 기사를 ‘요리 전문 잡지 Coozen'에 기고함으로써 신주의 심기를 어지럽혔고 이성을 잃는 법이 없던 신주 역시 ‘당신 비평은 쓰레기야. 제대로 맛을 볼 줄 알기는 아는 거야? 이 미각치’ 라며 일부러 찬영의 단골 바에까지 찾아와 언성을 높였다. 그 결과 둘의 사이는 한층 악화되었고 한 달에 2번 정도 겹치던 작업 반경은 아예 대놓고 붙으려 함인지 매주 금요일 같은 장소, 같은 시간으로 싱크로 되었다. 이 둘을 화해시키려고 하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찬영 측근과 신주 측근이 모여 머리를 맞댄 결과 한번은 거의 화해 직전까지 간 적도 있었다. 화해뿐일까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둘은 부둥켜안고 키스를 하다 서로를 더듬으며 어디론가 사라지기까지 했다. 둘을 화해시키려고만 했지 화해를 넘어 러블리한 관계가 되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던 측근들은 다음날 그들이 제자리로 돌아오기까지 애타게 속을 끓여야 했다. 밤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둘은 사이가 더욱 나빠져 있었다. 그것이 언제냐면 바로 3개월 전. 3개월 전... “아아아아악!! 김신주 이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새끼!!!!” 한 서린 찬영의 비명과 그냥 곱게 자도록 놔둘걸, 괜히 건드렸다 싶은 석진의 한숨이 묘한 앙상블을 이루며 초저녁 공기를 수놓는 어느 여름날의 일이었다. 제 2 편 < 내 안에 ‘애’ 있다 > 임신했다 말할까~ 애 가졌다 말할까~ 아니야, 아니야, 난 말 못해, 난 남자이니까. 도대체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 찬영이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임신 선고를 들었던 일주일 전 그 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식음을 전폐하며 (어차피 입덧-입덧이라니 오, 주여- 때문에 뭔가를 제대로 먹을 수조차 없었다)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지만 뾰족한 수 하나 없이 시간만 흐를 뿐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생각하기도 지겨워진 찬영은 오늘 아침 눈을 뜨자마자 그래, 의사 말대로 일단 아이 아버지(?)에게 알리자. 나머지는 그 다음에 생각하는 거야, 라고 스칼렛 오하라 같은 결론을 내렸던 것이었다. ‘무슨 용건이신데 그러십니까. 전화로 얘기하면 안될까요. 아시다시피 곧 오픈하는 2호 점 일로 제가 요즘 아주 바빠서요’ 라는 신주의 싸가지 없는 응답에도 꼭 만나서 이야기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던 찬영이었으나 막상 김신주의 서릿발 뚝뚝 떨어지는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니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고 있다. “장사 아주 잘~ 되나 보네? 2호 점, 그것도 청담동에 오픈이라니. 그러다가 괜히 본점까지 날리는 거 아냐?” “제가 본점을 날리던 굴리던 그건 조찬영씨가 상관하실 일이 아니지요. 아니, 조금의 참견까지는 받아들이겠습니다. 그 ‘누군가’의 고매한 평론 덕분에 유명세를 타게 된 것 같아서요. 매출 20퍼센트 정도의 상승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지금도 무척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부디 2호 점에도 왕림하시어 평가해 주시기를 바라마지 않는 바입니다.” 도대체 뭐냐, 이 인간은. 하필이면 제일 바쁜 날을 골라 만나야한다고 생떼를 쓰더니 기껏 와서 한다는 소리가 뭐? 날씨가 좋아? 경제가 어렵다고? 중동 사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조찬영 답지 않게 꺼칠한 피부에 피죽도 못 얻어먹은 얼굴을 하고 나타났길래 어디 아프기라도 한 것일까 잠시나마 신경을 썼던 신주 스스로가 우습게 느껴질 정도였다. “아침에 뉴스 봤어? 중국에서 조류독감이 발생했다던데 메뉴에서 닭은 빼는 게......” “이제 그만 본론을 말씀해 주시지요. 설마하니 제 가게 걱정을 같이 하자고 여기까지 와 주신 것은 아닐 테니 말입니다.” “......” 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인간이 내 얘길 믿어주기나 할까. 찬영은 그것이 고민이었다. 찬영 스스로도 아직까지 100퍼센트, 아니 50퍼센트도 납득하지 못하고 있는 이야기이며 차라리 꿈이었으면 하고 바랄 정도로 원치 않던 일이 아닌가. 이럴 줄 알았으면 의사의 말대로 병원으로 직접 데려갈 것을 그랬다. 의사가 하는 말이니 자신의 말보다는 훨씬 더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다. “...있잖아...” “말씀하십시오.” “만약에...... 이건 어디까지나 만약에 말이지. 어느 날 갑자기 어떤 여자가 찾아와 나 임신했어요~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할거야?”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또냐, 라고 말하고 싶은 듯 신주의 양미간 사이가 찌푸려진다. 짜증을 겨우 참고 있다는 얼굴이다. “말 그대로야. 누가 찾아와서 임신했다고 하면 어떡할 거냐고.” “저 바쁜 사람이라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찬영씨에게 그런 시덥지 않은 질문이나 들으려고 약속 미루고 여기 앉아 있는 것 아니에요. 그런 이야길 계속 하실 생각이시라면 이만 제 가게에서 나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게 본론이야. 이 대답이 듣고 싶다고. 너랑 같이 잔 여자가 임신을 했어. 그리고 널 찾아왔어. 너랑 의논이 하고 싶대. 그렇다면 넌 어떻게 할거야?” “대답할 가치도 없는 질문이지만 그렇게 듣고 싶으시다니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전 그런 초보적인 실수는 하지 않습니다. 이제 됐나요?” “네가 실수했다고 쳐. 실수했다고 치고 그 다음엔 어떻게 할거냐고?” “그런 실수는 하지 않습니다. 제가 그런 책임지지 못할 일을 하는 남자로 보이십니까? 당신 눈에는?” “그게 아니라 가정을 하자는 말이야. 네가 어떤 여자를 임신시켰어. 임신 3개월이야. 중절은 할 수 없어. 그럼 어떻게 할거야?” “말귀를 못 알아들으시는군요. 그런 일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됩니다. 제가 게이라는 것은 찬영씨도 잘 알고 있는 사실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 자식아! 가정을 하자고. 가정 몰라? 가정? 가정 시간에 졸았어?” “나가 주십시오. 대화할 가치가 없는 분이시군요. 이 정도까지 무례하신 줄은 몰랐습니다.” “누가 할 소리! 나야말로 이 정도로 꽉 막힌 인간인줄은 생각도 못했어.” 대답 없이 노려보기만 하는 신주의 태도에 찬영은 더욱 화가 난다. 이런 놈에게 의논을 하려 하다니 자신이 어리석었다.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은 것이다. 아무리 취했다고는 하나 한순간 괜찮은 놈이라 생각했던 그 날의 자신이 원망스럽다. 한참을 고개를 숙이고 관자놀이만을 지긋이 누르던 신주는 결심한 듯 비서실의 은영을 호출했다. ‘삐익’ ‘네? 사장님.’ “오늘 4시에 잡혀있었던 이병진씨와의 약속 취소해 주세요. 그리고 다음주 중에 다시 스케줄 잡아 주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차가운 물 한잔과 두통 약 부탁드립니다.” ‘네. 더 필요하신 것은 없으신가요?’ 탁자 위에 놓인, 찬영이 손도 대지 않은 오렌지 주스 잔을 신주는 흘낏 쳐다보았다. 그 까다로운 입맛으론 주스 한잔도 평범하게 못 받아 마시겠다는 건가. “가볍게 끼니를 대신할 만한 것을 좀 가져다 주십시오. 우유라던가 빵 같은 것.” 벌써 점심시간이건만 저 인간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제대로 된 식사가 가능할 리 없다. 그렇다고 찬영을 데리고 주변 다른 식당을 찾아가는 것도 신주는 내키지 않았다. 또 무슨 꼬투리를 잡으며 불평을 늘어놓을지 상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린다. 도대체 저의가 뭐란 말인가. 6개월 전 취재 일로 레스토랑을 방문했을 때를 제외하곤 생전 한번 찾아오지도 않던 인간이. 게다가 그 모욕적인 평이라니. ...‘파블로 피카소는 대표적 입체파 화가로 미술사에 그 뛰어난 예술 혼이 길이 기억되고 있지만 레스토랑 피카소는 어설픈 퓨전 요리의 대표적 실패 예로 길이 기억될 것 같다. 적어도 내게는 말이다. 도대체 어디에 테마를 두고 있는지 종잡을 수 없는 인테리어와.....(중략)......각각의 재료들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으며......(중략)......동양과 서양의 레시피가 만나 그 장점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심각한 불협화음을 이루고 있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 (중략)......부디 ‘퓨전’이라는 두 글자가 오너의 부족한 안목을 감추는 방패막이가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떠올리자 다시금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다. 냉정해 보이는 외견과 달리 신주는 그 누구보다 예민한 감성과 신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조찬영이 성격이 좋다고? 어디가? 아무리 취했다고는 하나 하룻밤이나마 저 인간을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던 스스로가 저주스러울 지경이었다. “왜 이러시는 겁니까. 아직도 그 날 아침의 일이 분에 안 풀려서 그러시는 겁니까. 이미 그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건 ‘그런’뜻이 아니었다고.” 그 얘기는 왜 또 꺼내는 거냐. 지나치게 열을 낸 까닭에 기력이 소진해 잠시 소파에 고개를 기대고 쉬고 있던 찬영의 눈이 파르르 독기를 되찾는다. “이 자식! 아직도!...” 그따위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려는 거냐, 찬영이 나머지 말을 잇기 전 문가에서 노크소리가 들려온다. ‘들어오세요’ 라는 신주의 말이 떨어지자 커다란 쟁반을 든 은영이 문을 열고 들어온다. “셰프께서 준비해 주셨습니다. 그럼 맛있게 드십시오.” 세팅을 마친 은영은 허리를 굽혀 찬영에게도 정중하게 인사까지 하고 나간다. 간단하게 준비해달라고 했더니 또 이 모양이다. 이건 거의 풀 코스 수준이 아닌가. 신주는 작게 한숨을 내어 쉬고 수프 뚜껑을 열었다. “크램차우더네요. 입에 맞으실지는 모르겠지만.” “욱!” 신주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찬영이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고 뛰쳐나간다. 복도 중간의 화장실로 들어간 찬영에게서 욱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정도면 입맛이 까다로운 걸 넘어 신경과민이 아닌가. 조개향이 비릿하게 느껴졌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예민하게 반응할 필요는 없었다. “조찬영씨, 괜찮습니까?” “우......욱 말 시키지..... 욱” “식사가 입에 맞지 않으시면 다른 걸로 준비할까요?” “...됐어...너나 많이.... 우우욱...” 사실 해물요리라고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좋아하는 찬영이었다. 그러던 것이 한달 전서부터는 해물은커녕 어묵도 비려 먹지 못할 정도가 되고 말았다. 그뿐인가 갓 지은 쌀밥에서는 쌀 비린내가, 된장찌개에서는 된장 비린내가, 두부에서는 콩 비린내, 김치에서는 김치 냄새, 고기에서는 육류 특유의 역한 냄새가 끼쳐 그야말로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오늘 아침 속이 조금 진정된 듯 하여 석진이 쑤어준 잣죽을 먹었었는데 지금의 사태로 도로아미타불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의논이고 뭐고 이 음식냄새 가득한 공간에서 한시라도 빨리 탈출하는 것이 급선무다. 저따위 녀석을 찾아온 자신이 실수한 것이다. 가능성조차 인정하지 않으려고 드는 녀석이니 필시 자신이 아닌 여자가 찾아왔어도 저 얼음만큼이나 차가운 낯짝으로 상처를 주었을 것이 분명하다고 찬영은 생각했다. 저 녀석이 게이라서 다행이었다. 입안을 대충 헹구고 나오자 팔짱을 낀 채로 화장실 입구에 삐딱하게 기대 서 있는 신주의 모습이 보였다. 얼굴이 아까보다 더 딱딱하게 굳어있다. “바쁜 사람 업무 방해, 식사 방해해서 미안한데 나로서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뭐 지금은 괜한 짓이었다는 생각이 들지만. 아무튼 다신 이럴 일 없을 거야. 그럼.” 그러니까, 안녕. 바이바이 잘 있어, 사요나라 라고 말하는 듯 찬영이 등을 돌려 걸어간다. 이번엔 또 뭣 때문에 화가 난 거냐고. 찬영의 속마음이 전혀 짐작도 되지 않는 신주다. 어째서 매번 이딴 식인 거냐. 3달 전 그 날도 그랬다. 출근해서 전화를 받기 전까지의 신주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다. ‘사장님 전화입니다.’ “누구죠?” ‘조찬영씨라고 전해달라고 하시는데요.’ “아, 연결해 주세요.” 휴대폰 번호를 메모에 적어두고 왔는데 못 본 모양이다. 신주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전화 연결을 기다렸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아, 일어나셨군요? 제 휴대폰 번호를 적어두고 왔는데 못 보셨나 봐요. 다음부터는 그 번호로 걸어주시면 제가...” ‘봤어.’ “네?” ‘봤다고. 봤으니까 걸었지. 너 이거 무슨 뜻이야?’ 찬영의 목소리가 다시없이 차갑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어젯밤에는 분명... “무슨 뜻이라니요?” ‘이 수표 뭐야? 화대야? 내가 너한테 몸 팔았어?’ 아......수표. 그랬다. 곤히 잠이 든 것 같아 깨우지 않고 약간의 돈과 자신의 전화번호를 적은 메모를 침대 옆 테이블에 두고 나왔더랬지. 하지만 그건. “그런 뜻이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그건 제가 찬영씨..” ‘그런 뜻이 아니면 뭐야? 너 설마 지금까지 데리고 논 애들한테 다 이랬었니? 그럼 다들 좋다고 받디? 나도 좋아해야 하는 거야?’ “그런 뜻이 아니라구요. 아침 사드리고 싶었는데 일 때문에 급히 나오게 돼서 그게 안타까워서 식사하시라고 놓고 나온 겁니다. 아무거나 드시는 분도 아니시지 않습니까.” ‘나라고 식사 때마다 10만 원짜리 스테이크 먹는 줄 알아? 누가 아침을 그 돈주고 먹어?’ “제대로 챙겨 드셨으면 해서 그런 겁니다. 어제 무리하셨잖아요. 집에 가실 때 택시도 타고 가셔야 할 것 아닙니까.” ‘나 택시 비 있어. 있다고. 그리고 그 정도 가지고 무슨 택시를 탄다고 그래. 흥, 자신이 변강쇠라도 되는 줄 착각하나 보지?’ “왜 그렇게 비뚤어지게 받아들이십니까. 그런 뜻 아닌 거 아시잖아요.” ‘그런 뜻 아니면 뭐야? 나 지금 기분 진짜 드러워. 콜걸 된 기분이라고.’ “조찬영씨를 콜걸이라고 생각한 적 없습니다. 왜 스스로를 격하시키시는 겁니까.” ‘호텔 비도 네가 아침에 내고 갔다며. 왜 네가 다 내는데?’ “제가 내면 안 되는 거였습니까?” ‘같이 즐겼는데 왜 네가 다 내는데? 내가 너한테 봉사했어?’ “제가 내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로서는 조찬영씨가 왜 이렇게 화를 내시는지 이해가 가지 않아요.” ‘낸다면 내가 냈어야지. 내가 연장자잖아. 이래봬도 여태껏 어린 사람에게 돈 내게 한 적 없다고.’ “까짓 호텔비 누가 내면 어떻습니까. 그 다음이 중요하죠. 전 어제 일을 계기로 앞으로 조찬영씨와 좋게 지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누가 할 소릴. 내가 진짜 미쳤지. 너하고... 젠장. 기분 더 드러워지니까 끊는다. 앞으로 아는 척 하지 말자.’ “이봐요. 조찬영씨!” 뚜뚜뚜뚜뚜... 끊어진 전화 연결음만이 들려왔다. 그 이후에도 신주는 찬영의 오해를 풀기 위해 찾아가 대화를 시도하려 했으나 신주를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하는 찬영의 태도에 서서히 그 역시도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 다음에는 모든 사람들이 익히 아는 대로 더욱 더 깊어진 감정의 골만이 패였을 뿐. “으......” 위경련이다. 저 사람과 대거리를 하고 나면 늘 이렇게 위경련이 찾아오곤 한다. 언제 한번 큰형의 병원을 찾아가 진찰을 받아봐야 할 것 같다. ********** “어? 찬영이 형이네. 야, 인우야. 찬영이 형 왔어.” “찬영이 혀엉!!!!!!” 토끼같이 귀여운 것들. 몇 주 못 보았다고 저리 반가워하며 달려오다니. “찬영이 혀엉~~ 보고 싶었어요오~~~ 그동안 왜 안 오신 거에요오~~” 허리에 매달려 얼굴을 묻고 눈물까지 글썽인다. 역시 이 맛이야. 남자는 애교! 그렇지! 유독 몸집이 작은 (인우는 키가 165cm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여자라고 오해할 정도의 가녀린 몸매를 갖췄다. 정수도 남자치고는 키가 작은 편.) 녀석들의 애교에 찬영은 신주로 인해 더럽혀진(?) 혼이 정화되어 가는 것을 느꼈다. “형 얼굴이 반쪽이 되셨어요! 석진 형한테서 몸이 아프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많이 안 좋으신 거에요?” 그렇게 티가 날 정도인가. 안 되겠다. 이러면 인기 전선에도 이상이 있다구. “아 그냥. 좀 속이 안 좋아서. 이젠 괜찮아. 나 많이 말라보여?” “반쪽이 되셨다니까요. 그래도 멋있어요오오~~! 섹시함에 청순미가 더해졌다고나 할까.” “이 자식이! 형을 놀려? 누가 청순해?” 혀 엉 .. 이... 여. 아부부부. 양손으로 볼을 잡아 늘리자 진저리를 치며 도리질을 하는 모습이 너무 귀엽다. 정수 이 녀석, 넌 어딜 도망가? 이리 안왓? “오랜만에 오셨네요. 찬영 선배. 통 식사를 못하셨다고 들었는데. 석진이 형이 걱정 많이 하더라구요.” 찬영과 석진의 대학 후배인 지환이다. 석진에게는 형이라 부르면서 찬영에게는 굳이 선배라 부르며 거리를 두는 지환이 찬영은 왠지 모르게 껄끄러웠다. 찬영의 아지트나 다름없는 이곳 바 ‘토탈 이클립스’의 바텐더 자리를 지환에게 소개시켜준 것도 찬영이었는데 지환은 그리 썩 고마워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말로는 ‘고맙습니다. 선배. 덕분에 살았어요’ 라고 했지만 어찌나 진심이 담겨있지 않던지 함께 있던 인우가 눈치 없이 ‘저 사람 누구에요? 형 되게 싫어하나봐요’ 라고 속삭이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왜 날 미워하나. “석진이 왔다 갔니?” “예. 아까 5시쯤 오셨다가 나가셨어요. 선배 죽 쑤어 준다고 전복 사러 시장가신다던데요.” 뭐시? 전복? 그 새끼가 나를 죽이려 함인가. 전복을 떠올리기만 해도 속이 뒤틀리는 것 같은 찬영이다. “찬영이 형 얼굴이 새파래졌어요. 괜찮아요?” “나 잠깐 화장실 좀......” 이젠 더 나올 것도 없거늘. 위액이 역류해 쓰리기까지 하다. 입을 씻고 세면대 위의 거울을 들여다보는데 지환의 모습이 거울에 비친다. “괜찮으세요?” “괜찮아. 먹은 게 좀 얹혔나봐.” “병원에라도 좀 가보지 그러세요. 선배가 계속 이 상태니까 석진 형이...” “석진이가 왜?” 실수다. 자신이 모르게 본심이 나와버렸다. 지환은 입술을 깨물었다. 저 사람 둔한 거야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로 인해 석진이 상처받는 것도, 또 그걸 지환이 지켜보게 되는 것도 한두 번이 아니지 않았던가. “아니에요. 석진 형이 걱정하신다고요.” 하필이면 이런 모습을 지환에게 보여주고 만 찬영도 영 마음이 편치 않다. 지환의 목소리에 날이 서 있는 것 같이 들리는 건 입덧으로 신경이 예민해져 있기 때문일까. “나오세요. 따뜻한 차 타드릴게요.” 지환의 뒤를 이어 화장실을 나오자 정수와 인우가 달려든다. 형 괜찮아요오? 동그란 눈을 데구룩 굴리면서 올려다보는 그 모습이 꼭 다람쥐 같아 찬영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자식이 생기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 딩동딩동딩동 딩동딩동. 거실에 앉아 TV채널을 돌리고 있던 신주의 귓가에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 아버지는 일찍 잠자리에 드셨고 형수도 인영이, 진영이를 데리고 친정 나들이를 갔다. 가정부 아주머니도 오늘 제사라며 나오시지 않으셨기에 지금 저 벨소리를 멈추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신주 뿐. “이야~~우리 사랑하는 막~내. 막내야 큰형이 오늘 기분이 좋아서 술 한잔했다. 끅.” 역시, 큰형이다. 큰형은 술이 들어가면 말이 끝없이 많아진다. “우리 사랑하는 여보야랑 인영이 공주님~ 진영이 왕자님 어디로 갔어? 벌써 자나? 안 보이네.” “형수랑 인영이, 진영이 오늘 외가 간다고 했잖아. 자고 내일 온대.” “아아아~ 맞다, 맞다. 맞다. 그렇지. 아까 전화했었지이. 아이고오 그럼 이걸 어쩐다아? 우리 사랑하는 공주님~왕자님 주려고 통닭 사왔는데에~” “놔뒀다 내일 먹으라고 하면 되잖아. 어서 씻고 자. 어머니, 아버지 주무셔.” “안돼안돼안돼! 내일 먹으면 맛~~~이 없단 말이지! 지금 꼭 먹어야 한단 말이지! 이걸 어쩌나~ 어쩌나. 네가 먹을래?” 가뜩이나 속이 쓰린데 무슨 통닭이란 말인가. “됐어. 뒀다가 내일 인영이, 진영이 줘.” “안된다니까아~~ 지금 먹자! 좋았어! 오랜만에 큰형이랑 술 한잔 해! 맥주 오케이!” “형 많이 취했어. 들어가서 자.” “안 취했어. 안 취했어, 괜찮아. 괜찮아. 자~ 통닭 먹자!” “나 요즘 소화가 잘 안 돼서 통닭은 무리야. 위도 안 좋고.” “소화가 안 돼? 네가 왜 소화가 안 돼? 너도 임신했냐?” “형 들어가서 자. 내일 출근해야 하잖아.” “너도 임신한 거 아니야? 여자만 임신하는 걸로 생각하면 크은 오산이야아. 남자도 임신할 수 있다고. 알아? 알아? 막내?” 뭔 소릴 하는 건지. 한숨을 내쉰 신주는 신규를 부축해 2층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계단을 올라가면서도 형의 입은 쉴 줄은 모른다. “우리 병원에 말이지. 임신한 남자환자가 찾아왔더란 말이지. 처음엔 나도 믿을 수가 없었다고. 내가 옛날에 옛날 옛적에 미국에서 공부할 때 그런 얘기를 듣긴 했는데 말이지. 믿을 수가 없었다고오. 그때는. 너도 기억하지? 내가 그때 사진도 보여줬잖아. 그치?” 그 믿거나 말거나 하는 책을 말하는 건가. 유학에서 돌아온 신규가 보여줬던 그 책의 내용을 신주가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것은 형수가 임신당시 소문난 애처가였던 신규가 입버릇처럼 차라리 내가 임신했으면, 남자도 임신할 수 있다던데 하고 중얼거렸기 때문이다. 형수는 유독 심한 입덧과 난산으로 고생했었다. 그때 낳은 쌍둥이가 인영이, 진영이다. “정말, 정말로, 진짜로 진짜 임신했더라고. 임신 3개월이던데. 입덧 때문에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있더라고. 욱욱거리면서. 냄새만 맡아도 토하고. 아...진짜 우리 여보야도 그때 무진장 고생했지. 내가 그때 얼마나 속이 상했는지.” 조찬영씨도 아무것도 못 먹던데, 그럼 조찬영씨도 임신인가. 일순 어이없는 상상에 신주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찬영씨, 아, 그 환자 이름이 조찬영인데......찬영씨 어떡하나...그렇게 못 먹어서 어떡하나...” 지금 뭐라고? 지, 지금 뭐라고? 신규의 입에서 믿을 수 없는 사람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음식 갖고 밥 벌어먹고 산다는 사람이, 아 뭐라더라, 푸드 저널리스트? 그렇게 못 먹어서 어떡하나...그 말이지. 내 걱정이 돼서 잠이..” “형 지금 뭐라고 했어? 조찬영이라고 했어? 키 크고 얄쌍하게 생기고 말 싸가지 없게 하는 그 조찬영이 맞아?” “어어? 잘 아네. 조찬영씨 말 참 싸가지 없게 하지. 나보고도 당신 미쳤어? 막 이러든데...” “그 조찬영이 임신? 임신했다고? 형 정신 차려봐. 형 지금 취해서 헛소리하고 있는 거 아냐?” “헛소리라니! 버릇없이! 큰 형한테! 진짜야. 초음파로 애기 사진도 찍었다고...오늘 애기 아버지한테 얘기하러 간댔는데. 잘~ 됐나 몰라?” 이럴 수가 말도 안 돼. 지금 큰형이 술 취해서 헛소리, 그래, 헛소리를 하는 거야. 하지만 아까 낮에 봤던 찬영의 모습은...! 신주의 머리 속이 정신 없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분명 며칠 굶은 사람처럼 얼굴이 안 돼 보였다. 또한 전과는 달리 체격이 눈에 띄게 말라 있었다. 그 뒤에 스프 뚜껑을 열자마자 헛구역질을 했었지. 그리고 처음에 누가 찾아와서 임신했냐고 하면 어떻게 할거냐고... ‘너랑 같이 잔 여자가 임신을 했어. 그리고 널 찾아왔어. 너랑 의논이 하고 싶대......임신 3개월이야. 중절은 할 수 없어. 그럼 어떻게 할거냐고.’ ...3개월... 3개월 전. 젠장!!!!!! “......애기 아버지가 누군지 참... 어라? 막내야 어디 가?” 갑자기 뛰쳐나가는 신주를 바라보며 신규는 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무슨 얘기를 하다가 말았더라? ********* “카모마일 차에요. 드세요. 속을 진정시켜 줄 겁니다.” 그 시각 찬영은 ‘토탈 이클립스’에 앉아 지환이 타준 차를 마시고 있었다. 녀석, 칵테일만 잘 타는 줄 알았더니 차도 잘 타는 구나. “속이 안 좋으시니까 당분간 술은 드시지 마시구요. 자극적인 음식도 드시지 않는 게 좋아요.” “너 꼭 의사 같다야. 의사 같은 말만 하네.” 지환에 비하면 더욱 의사 같지 않던 신규가 떠올라 찬영은 피식거리며 웃었다. 나보다 더 허둥대던 그 모습이라니. 다음에는 꼭 아이 아버지도 데리고 오라고 했었는데 이를 어쩐다. 됐다. 천하의 김신주가 그 말을 믿을 리가 없지. 그러고 보니 둘이 이름이 비슷하다. 김신규, 김신주. 하하하. 우연이겠지. 떨어진 안주거리 재료를 사러 밖으로 나갔던 정수와 인우가 입에 햄버거 하나씩을 물고 들어온다. “다람쥐들 뭐 먹냐?” “햄버거요. 저 앞에 로토리아에서 세일 하더라구요. 불고기 버거가 1000원이에요. 싸죠?” “맛있냐?” “네~” 역시 애들이다. 햄버거 하나 물고 저리 좋아하다니. 햄버거 먹은 지도 꽤 오래 되었다. 푸드 저널리스트 일을 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패스트 푸드 하고는 멀어졌다. 원체 입맛이 까다로워 체인점 햄버거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지만 학생 때는 친구들과 어울려 가끔 먹곤 했다. 햄버거... 햄버거라... 정말 차가 효과가 있는지 냄새를 맡아도 속이 메슥거리지 않는다. 지금이라면 먹을 수 있지 않을까? “그거 얼마라고? 천원?” “네.” “가서 5개만 사와.” “5개나요? 형 드시게요?” “응. 너네도 하나씩 더 먹고 지환이도 주고.” “전 됐습니다.” 짜식, 싸가지 없게 거절하는 지환이다. 그래도 내가 지금 기분이 좋으니 용서해 주마. 왠지 정말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생각하니까 자꾸 다른 것도 먹고 싶어진다. 두툼한 해물 파전, 싱싱한 광어 회, 기름에 갓 튀겨낸 도너츠, 레몬 즙을 뿌린 연어 샐러드, 새콤한 제주 감귤...제주 감귤... 아, 먹고 싶다. 제주 감귤. 아까부터 무슨 상상을 하는 건지 히죽거리고 있는 찬영을 지환은 곱지 않은 눈으로 쳐다보았다. 속이 안 좋다던 사람이 햄버거라니 미쳤어. “형~ 다녀왔어요.” 봉지를 손에 든 인우가 입구에서부터 소리치며 들어온다. 그런 인우를 어느 새 모여들기 시작한 바의 손님들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다. 인우는 꽤 인기가 좋았다. 인우가 정말 좋아하는 것은 찬영이라지만 찬영은 더욱 그래서 인우를 건드리지 않고 놓아둔 채 귀여워하기만 했었다. 원나잇 스탠드를 즐기는 찬영 같은 타입은 인우 같은 순둥이에게는 상처만 줄뿐이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찬영 또한 오는 남자 마다 않고, 가는 남자 잡지 않는다를 모토로 순간의 쾌락에 충실하고 있었다. 찬영과 가장 비슷한 타입이라면 역시 신주가 아닐까. “드세요. 형.” 햄버거 하나를 꺼내 찬영의 손에 올려 준 인우가 눈에 가득 기대를 담고 찬영을 올려다본다. 뭐라도 드시게 해야 해. 자꾸 드셔야지 마르지 않지. 지금처럼 마르다간 전에 없던 갸날픈(이전에도 늘씬한 편이었지만 지금은 살이 빠져도 너무 빠져 버렸다) 이미지까지 더해져 더욱 경쟁자가 늘어나 버리고 말 것이다. 안 그래도 오랜만의 찬영의 출현에 바의 공기가 웅성웅성 달라져 있지 않은가. 한 입, 그리고 또 한 입. 이거 의외로 너무 맛있다. 간만에 먹는 육류에 찬영은 전율마저 느끼고 있었다. 패스트 푸드가 이리도 맛있다니 지금 상태로 제비집 요리라도 먹는다면 기절할지도 모른다. 맛있어서. 마치 햄버거 시에프의 모델이라도 된 것처럼 활짝 웃으며 베어먹는 그 모습을 지환을 제외한 대다수가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맛있다. 한 개 더 먹을래.” “그러실래요?” 신이 난 인우가 이번엔 새우 버거를 꺼내 내민다. 자신이 먹으려고 따로 사온 것이었지만 찬영 형이 먹는다면 그 무엇도 아깝지 않다. 이럴 수가. 이번엔 새우 버거도 무사히 클리어해냈다. 이거 이거 그 입덧이라는 것이 다 끝나버린 건 아닐까. 제대로 먹을 수만 있다면 그 무엇도 무서울 것이 없다. “또 먹을래.” “또요? ” 클리어. “더 줘.” “...또요?” 클리어. “하나 더.” “형 그만 먹어요오!” “그래요, 형 그만 먹어요. 배탈나요.” “그만 드세요. 안 먹다 먹으면 속이 놀란다구요.” 보다 못한 지환까지 한마디 거든다. 미식가이긴 했지만 대식가는 아니었던 찬영이 아닌가. “지금 안 먹으면 또 언제 먹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이래 내.” 안 된다니까요. 울상인 인우를 무시하고서 찬영은 다섯 개째의 버거 봉지를 벗겼다. 배는 부른데 자꾸 먹고 싶은 것이 스스로도 이상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이 버거, 지금 못 먹으면 또 한동안 못 먹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자기 합리화를 시킨 찬영이 버거를 입에 문 순간이었다. 요란하게 출입문이 열림과 동시에 이쪽으로 돌진해오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 이름하여 김신주. 버거를 입에 문 채로 정지한 찬영외 많은 이들의 시선이 신주에게 가 꽂혔다. 어디서부터 뛰어온 것인지 거세게 숨을 몰아 쉬던 신주가 겨우 숨을 고르고 입을 연다. “...조...찬영 씨.” 끄덕끄덕 “조..찬영 씨.” 끄덕끄덕 “조찬영 씨...” 왜 이놈아. “조 찬영씨. 임신했어요?” 툭, 소리와 함께 찬영의 입에 매달려 있던 버거가 바닥에 떨어져 내린다. 찬영의 심장도 함께 떨어져 내린다. 형 드러워요오! 뭐하는 거에요오. 내가 아까 바닥 닦았는데에. 정수와 인우의 비명도 함께 곤두박질쳤다. 쿵쾅. 제 3 편 < 빠라빠라 빠라밤 > 잠시 정적이 흘렀다. “......” 수습해야 한다. 이 사태를 수습해야 해. 찬영은 간신히 꿀꺽 하고 마른침을 삼킨 뒤 입을 열었다. “아.하.하.하. 김신주. 시비 거는 방법도 가지가지로구나. 좋아. 그 시비 받아주겠어! 자! 나가서 싸우자!” 마치 국어 책을 읽듯 높낮이 없는 어색하기 짝이 없는 억양이다. 자신이 자리에서 일어났는데도 불구하고 돌하루방처럼 딱딱히 그 자리에 서 있는 신주를 노려보며 ‘이 눈치 없는 자식! 눈치가 없으면 코치라도 있던가, 이해가 느리면 동작이 빠르기라도 하던가’ 라고 마음 속으로 욕을 한바탕 퍼부은 찬영은 신주의 어깨를 툭툭 쳐 밖으로 나가자는 제스처를 취했다. 찬영이 한참을 앞선 뒤에야 정신을 차린 듯한 신주가 황급히 그 뒤를 따라 나간다. “둘이 지금 뭐한 거야?” “글쎄? 싸움?” “그런데 왜 츄리닝이야?” “글쎄? 유행?” 고개를 갸웃거리는 정수와 인우였다. 그 장면을 지켜보던 지환 역시 잠시 문 쪽을 노려보다 곧 닦고 있던 유리잔으로 고개를 돌린다.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 동영만이 달라진 바의 분위기에 어리둥절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무슨 일 있었나요? ********* 급한 김에 옆 건물 1층 커피숍 유리문을 열고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혼이 나간 것 같은 신주를 대신해 찬영이 ‘커피 2잔, 아니 커피 1잔이랑 레모네이드 하나요.’라고 주문한다. 쯧쯧쯧, 집에서 그대로 뛰쳐나온 것인지 츄리닝 바람에다 머리도 평소의 단정함은 어디로 갔는지 전부 하늘로 솟아있다. “할말 있어?” 찬영의 질문에 예? 하고 얼빠진 얼굴로 대답하는 신주다. 사람 바보 되는 것 한순간인 모양이다. “...찬영씨, 아까 찾아왔었죠. 할말 있다고. 그거 임신했다는 얘기하려고 그랬던 것 아니에요?” 쪼옥 하고 빨대로 레모네이드를 빨아들이며 찬영은 신주의 표정을 살폈다. 저거, 저거 설마 정말로 눈치 채고 하는 소리는 아니겠지? 빙 돌려서 했던 이야길 듣고 담박에 알아차릴 정도로 저 녀석이 머리가 좋은 녀석이었던가? 무엇보다 남자가 임신했다는 소릴 곧이들을 사람이 어디 있어? “무슨 얘길 하는 건지 통 모르겠는데, 나는. 자다 꿈 꿨냐?” 예? 반문하는 신주에게 찬영은 검지로 머리를 가리켜 보였다. 머리를 만져보더니 그제야 자신이 무슨 꼴로 여기에 앉아 있는지 눈치 챈 듯 당혹스런 표정을 지어 보인다. 츄리닝을 입고 나온 것도 몰랐나 보다. 천하의 김신주가 cb리닝이라니. “푸훗, 아 미안. 하지만 너무 웃겨서.” 뭐가 웃깁니까? 당신은 이 상황이 웃겨요? 금세 표정이 험악해지는 신주다. 누구는 혼란스러워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누구는 태평하게 주스나 마시고...주스? “이제 괜찮은 겁니까?” “뭐가.” “입덧이요. 아까는 전혀 못 마시더니.” 푸헛, 하마터면 마시던 주스가 입 밖으로 뿜어져 나올 뻔했다. 야, 너는 그 단어가 그렇게 쉽게 입 밖으로 나오디? “시치미 떼도 소용없어요. 다 알고 왔으니까. 찬영씨 김신규 내과 갔었죠? 거기 우리 큰형이 하는 곳이에요. 찬영씨 진찰했던 의사가 저희형입니다.” 젠장, 재수 없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금세 흙빛으로 변한 찬영의 얼굴을 바라보며 신주는 초조하게 말을 이어갔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는 사람은 저희형이랑 저랑 찬영씨랑 이렇게 세 사람밖에 없으니까. 제가... 저지른 일 제가 책임져야죠.” 저지른 일? 우리가 범죄 저질렀냐? 책임을 진다고? “어떻게 책임질 건데.” “어떻게...든요.” “또 돈주려고?” 또 그이야기입니까? 신주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네가 어떻게 책임질 건데. 나랑 결혼이라도 할거야?” “원하신다면 네덜란드 이민을 가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게 해드리겠습니다.” “진짜...웃겨서 말도 안 나오네. 네덜란드 이민? 드라마 찍냐. 이러다가 며칠 후엔 너희 어머니 나타나서 돈 봉투 던지면서 우리 아들이랑 헤어져 주세요, 이러고 너는 강제로 유학 떠나고 나는 숨어서 애 낳고 그러다 애 크면 너 돌아와서 우연히 다시 만나고 그렇게 불륜놀이 하다가 너희 어머니한테 들켜서 애만 뺏기고 나는 울면서 ‘미워도 다시 한번 2’ 찍는 거야? 그래?” “저 농담하는 거 아닙니다. 진지하게 생각해 주세요.” 그래, 저렇게 서릿발 풀풀 날려야 내가 아는 김신주 같지. 암. “나도 농담하는 거 아냐. 너 쩔쩔 맬 필요도 없고 나 책임질 필요도 없어. 네가 나 싫다는 데 강제로 한 것도 아니고, 콘돔 안 써도 되니까 빨리 하자고 한 것도 나야. 나도 임신할 줄은 생각도 못했지만 너한테도 상상 못할 일이었을 거야. 아까는 그냥 알리긴 해야 할 것 같아서 갔던 거고, 말은 못했지만 결국 이렇게 알게 되었으니까 다 됐네. 예스, 임신했습니다. 두유 언더 스탠? 이걸로 끝.” 남아있는 레모네이드 방울까지 깨끗하게 빨아 마신 찬영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신주는 간신히 억눌렀던 최후의 인내심, 그 마지막 신경이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끝은 뭐가 끝이야! 그렇게 통보하고 가면 끝이야? 당신이 그렇게 단정 내리고 통보하면 내가 네, 알았습니다. 앞으로 일절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이럴 줄 알았어? 아이 아빠는 나야. 아이 아빠는 나라고.” 야, 왜 소리는 지르고 그래, 당황한 찬영이 손사래를 치며 신주의 입을 막으려고 애쓴다. “그 아기 절반은 내가 만들었어! 절반은 내 거라고. 권리가 있으니 책임도 다 하겠다고. 책임지겠다는데 뭐가 불만이야.” 두 남자 사이에서 오가는 요상한 대화 내용에 주위 손님들의 신경이 집중되고 있다. ‘그래서 아기 엄마가 누구라는 거래요?’‘저도 모르죠’‘저 남자는 누구래요?’‘글쎄요, 여자 측 오빠? 남동생? 남편?’ 급기야 막 나가기 시작하는 신주의 태도에 찬영의 신경도 끊겼다. “글쎄 그 책임 필요없다니까 그러네! 신경 꺼!” “신경을 어떻게 꺼? 당신이라면 신경 끌 수 있어?” “내가 신경 끄라면 끄는 거야. 내가 혼자 낳아서 혼자 키울 거야. 그 책임 거부할게. 그러니까 권리도 줄 수 없어.” “그런 게 어디 있어. 소송할 거야. 당신.” “이 자식이 누굴 해외 토픽란에 나오게 하려고. 판사가 잘도 믿겠다. 바보야.” 원치 않았던 아이,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임신, 그것도 오늘 처음 알게 되었을 텐데 어떻게 저렇게 집착할 수 있지? 찬영은 신주의 반응이 통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이를 키워 보기나 했어? 아이 낳고 키우고 하는 일이 얼마나 힘이 드는 일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저리 고집을 피워대는 찬영이 신주는 통 이해되지 않는다. “아이 낳아 봤습니까? 아이 길러 봤어요? 막내로 컸다면서 어린 아기 시중 들어본 적이나 있어요? 그게 얼마나 힘들고 사람 피 말리게 하는 건지 알고 있습니까? 아기가 하루에 몇 시간이나 자는지 밥은 하루 몇 번 먹여야 하는지 목욕은 어떻게 시켜야 하는지 알아요? 그것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혼자 낳아 기른다는 소리를 합니까?” 뭐 그까이꺼 그렇게 어렵겠어. 닥치면 하는 거지라고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게 다 보인다구요. “공부하면 되잖아. 그런 건 책에 다 나와있어.” “아기의 감정은 책에 나와 있지 않아요. 요리란 레시피가 다가 아니다 라고 말하던 사람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윽, 그건 내가 6개월 전 ‘피카소’를 평가하면서 썼던 말이잖아. 기실 기사에 썼던 것처럼 그렇게 최악의 맛은 아니었다. 오히려 훌륭한 쪽에 속했다. 그럼에도 그렇게 비꼬았던 것은 다분히 신주에 대한 악감정에서였다. 찬영은 점점 코너에 몰리는 자신을 느꼈다. “그럼 너는 그걸 다 알아?” “엄마들만큼은 아니더라도 찬영씨보다는 많이 알고 있습니다. 제 조카 인영이, 진영이 때문에 고생하는 형수 모습 봤었고, 힘들어하는 형수 보면서 자신이 더 힘들어하던 형도 봤습니다. 힘든 것도 알고 보람도 알아요. 한 생명을 키운다는 것은 찬영씨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렇게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왜 제가 임신하게 된 거란 말씀입니까, 하느님. 거기 있으시면 대답 좀 해보세요. 찬영은 애꿎은 커피 숍 천장만 노려보았다. 다 맞는 말이긴 한데 이대로 순순히 항복하긴 왠지 분하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지금 몸 상태로 취재 일 계속하실 수도 없지 않습니까.” 생각 안 해봤다. 단순히 속이 안 좋은 줄 알고 미뤄두었던 취재 기사 건은 어쩔 것인가. “오피스텔을 하나 구하겠습니다. 안 그래도 슬슬 독립해야 할 때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생활비 및 기타 비용은 제가 부담 할 테니 그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금 나보고 너랑 같이 살라는 얘기야? 동거하자고?” “네. 동거라기보다는 제가 보살펴드리는 형태로 말입니다.” 이게 또 슬슬 제멋대로 하려고 드네. 내가 너랑 동거 시작하면 우리 애기들 다 뒷목 잡고 쓰러져. 그리고 그 놈의 돈 유세는 어떻게 시도 때도 없냐. 신주가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한들 곱게 들리지 않는 찬영이었다. 그간 깊이 패인 감정의 골은 한순간에 메울 수 있는 게 아니다. “나도 돈 있고, 나도 집 있어. 정 힘들면 그때 가서 도와달라 할 테니까 섣불리 간섭하려 들지 마.” 이건 숫제 벽이다. 벽에다 대고 이야기를 했어도 이보다 더 답답하지는 않을 것 같다. 타협의 여지를 보이지 않는 찬영의 태도에 신주는 다시금 위가 쓰려오는 것을 느꼈다. “알았습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저도 더 이상 어쩔 수가 없네요. 그러나 저 이대로 물러나지 않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만 조만간 다시 이야기 매듭짓도록 하죠. 며칠 생각하실 생각을 드리겠습니다.”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내가 원하는 건 그냥 내버려두는 것 뿐이야. 이렇게 말했다간 저 자식 또 길길 날뛰며 물고늘어지겠지? 커피숍 벽면에 걸려있는 시계가 밤 12시를 가리킨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구나. 새삼 지각한 찬영은 피곤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내일 아침 일찍 회의가 있어서요. 찬영씨도 이만 귀가하셔서 주무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집까지 데려다 드리고 싶지만 그것도 허락하지 않으시겠죠?” 실은 너무나 피곤한 나머지 신주가 데려다 준다고 우기면 못 이기는 척 응하려 했던 찬영이었다. 이놈아, 그딴 식으로 물어 오면 내가 ‘아니어요. 데려다 주시어요’ 라고 할 수가 없잖아. 찬영의 묘한 표정을 보고 미리 거절이라 지레짐작한 신주는 찬영이 방심한 틈을 타 계산서를 먼저 집어들고 카운터로 걸어갔다. 그래도 이것만은 내가 내고 갈 테다. “하아......” 햄버거 기운 다 썼나 보다. 찬영은 테이블 위로 몸을 추욱 늘어뜨렸다. 석진에게 전화해서 차 가지고 나오라고 해야 할 것 같다. ********* 못 보던 여자 구두가 현관 입구에 놓여있다. 디자인이 화려한 것을 보면 분명... “엄마~! 아들 왔어. 누나 와 있나봐?” 아니나달라 부푼 배를 한 찬희가 거실 소파에 누워 박 여사-찬우, 찬희, 찬영 형제의 모친-가 깍아 주는 참외를 집어먹고 있었다. 팬들은 저 모습 못 봐서 다행이다. 찬영은 ‘찬희 누님은 집에서도 우아하게 드레스를 입고 앉아서 에어컨 바람에 옷자락을 휘날리고 있을 거다’ 라고 주장하던 동우의 말을 떠올렸다. 광고가 애들 다 버려놓는다니까. 그 광고 카피가 뭐였더라. ‘가끔은 장풍만으로 집안을 제압하고 싶다’ 였던가? “찬영이니? 찬영이 너 오랜만이다 얘, 어쩜 누나 집에 한번 들르지도 않니. 매형이 얼마나 섭섭해하는지 알아?” 아닐걸요, 누나. 어쩌다 한번 놀러 가면 매형이 어서 집에 가라고 얼마나 눈치를 줬는데. 결혼 3주년이 되 가도록 어떻게 그렇게 만날 신혼 같이 산단 말이오.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에요~ 까르르’ 그 카피 거짓말이 아니었구나. “이리 앉아 봐봐. 오랜만에 누나랑 얘기 좀 해.” 산달을 앞둔 찬희가 힘겹게 몸을 일으킨다. 정말 애기 낳으려면 배를 저렇게까지 부풀려야 한단 말이야? “어머어머어머! 엄마 얘 얼굴 까칠해진 것 좀 봐. 왜 이렇게 말랐어. 너?” 허구헌날 술 마시러 다니느라 집에도 안 들르고 쏘다니니까 그렇지. 찬희 곁에 앉은 찬영의 등짝을 철썩 하고 박 여사가 후려갈긴다. 아, 아퍼. 왜 계속 때려. 이어지는 매질을 찬영이 몸을 이리저리 돌려 피한다. “내가 이놈, 찬영이 생각하면 밤에 잠이 다 안 와. 고래등같은 집 놔두고 조막 만한 오피스텔인가에 얹혀 사는 거 하며, 남자가 직업이 요리 나부랭이가 다 뭐야. 찬희야 너 아는 사람 중에 참한 아가씨 없니? 이놈 장가가고 나야 사람 구실 하겠다 싶어.” “얹혀 사는 거 아냐. 돈 같이 냈다구.” “엄마는, 찬영이가 어디 내말 들어? 우리 소속사 얼굴 좀 반반한 애들 중에 찬영이한테 안 직접거린 애가 어디 있다구. 그래도 콧방귀도 안 뀌는 게 저놈 저거 분명 취향이 이상한 거야.” “그 누나들 다 별로였어. 그리고 나 때문이 아니라 누나한테 잘 보이려고 접근했던 거라고.” 물론 그 얼굴 좀 ‘반반한’ 신인들 중에서 ‘남자’녀석들은 한 입에 꿀꺽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 중에는 이미 스타로 발돋음한, 이름만 대면 알만한 남자 배우들도 여럿 끼어있었다.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스캔들 기사가 스포츠 신문에 실린 다음 날이면 전화를 걸어 와 ‘찬영아, 아닌 거 알지? 나 그 여자랑 아무 사이 아니야’ 라고 귀찮게 구는 영화 배우 신동진이 그 대표적 예다. “늦둥이라고 오냐오냐했더니 순 저 잘난 줄만 알아서. 아이구 저게 사람 구실 언제 할꼬. 늙은 에미 손주 소원 안 들어줄 거야?” 쿨럭, 먹던 참외가 목에 걸려 버렸다. 엄마 손주 소원은 들어드릴 수 있을 지도 몰라요... “참외 처음 먹어? 얘가 추접스럽게 왜 이래.” TV속 이미지와는 달리 실제로는 입이 걸은 찬희가 찬영의 등을 암팡지게 때린다. 이 여자가 어딜 봐서 한 떨기 백합이라는 거야. “찬희야, 저녁 먹고 갈 거지? 오서방 여기로 오라고 해. 갈비 좋은 게 들어와서 재워 놨어. 큰아버지가 잉어를 보내오셨는데 그것도 푹 고아놨으니까 갈 때 가지고 가.” “엄마 나도 잉어.” “이 녀석이, 임산부 걸 왜 빼앗아 먹으려 들어. 그게 아무나 먹는 건 줄 알아?” (철썩) 아씨... 진짜 아퍼. “나도 좀 줘어! 아들이라고 차별하는 거야?" “이 녀석이 이젠 별걸 다 먹으려 드네. 넌 김치나 가져가. 괜히 이것저것 가져갔다가 썩히지 말고.” 김치...김치... 욱! “쟤가? 쟤가 왜 저런다니?” “보나마나 어제 늦게까지 술푼게지 뭐. 어머 이 포도 너무 잘 익었다. 이따 진국씨 오면 먹으라고 그래야지.” 그 날 저녁은 아주 가관이었다. 갈비가 구워지는 족족 집어다 매형 밥그릇에 넣어주는 찬희나 고기라도 몇 점 집으려고 하면 옆구리를 찔러대며 눈치 주는(‘한 점씩 먹어. 한 점씩’) 박 여사나. 서럽기 그지없는 찬영이었다. “오호호호 진국씨 이거 좀 먹어 봐요~” “아냐. 우리 자기가 더 많이 먹어야지. 그래야 우리 자기처럼 이쁘고~ 씩씩한 공주님 낳지~ 그치?” “난 진국씨 닮아 잘 생기고 튼튼한 왕자님 낳을 건데?” “안 돼. 난 벌써 리틀 찬희. ‘리희’라고 이름까지 지어 놓았는 걸.” “몰라~몰라. 난 ‘리국’이라고 짓고 싶어잉” “아유~ 우리 깜찍이 같으니라고. 그런데 처남은 왜 밥을 안 먹나? 고기 안 좋아하나?” 아, 예... 그게 매우 쏠립니다. “입맛이 별로 없네요. 매형 많이 드세요.” 내가 어쩌다 이런 신세가. 그 날 찬영은 밥상머리 앞에서 한숨쉰다고 또 박 여사에게 등짝을 맞아야만 했다. 그만 때려.난 소중하니까를 외친 찬영이 몇 대 더 맞았던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철썩 철썩. 아, 아퍼어! 철썩. ********* 가게문이 열리자마자 들어온 한 인영에 인우의 눈매가 가늘어진다. 저 자식 왜 또 왔담. “신주 형 요즘 자주 오시네요?” 눈치 없는 정수가 반갑게 아는 척을 한다. 저 자식 저거 찬영 형한테 또 시비 온 거란 말이야. 이 둔탱이. 유리잔을 닦는 인우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간다. “그러다 깨진다. 살살 닦아.” 어김없이 날라 오는 지환의 한마디. 이 자식도 보기 싫어. 이 놈도 은근히 우리 찬영이 형 노리는 거 아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빤히 들여다보이는 인우의 머리통을 내려다보며 지환은 어깨를 으쓱한다. 내가 미쳤냐. 그런 뺀질이를 왜. “찬영이 혀엉~!” 왔군. 다람쥐처럼 달려가는 인우를 보며 지환은 눈초리를 매섭게 재정비했다. 조찬영. 마구 노려봐주마. 그러나 인우보다 지환보다 더 빠른 인간이 있었으니 그 이름하여 또 김신주. “나가자.” 저러다 한 대 맞지 싶은 주위의 기대와는 달리 찬영은 화난 기색도 없이 자신에게 성큼 다가선 신주를 향해 살짝 고개짓한다. 그 모습은 슬로우 모션 처리되어 인우에게는 청순하게, 정수에게는 섹시하게, 지환에게는 얄밉게 각자 그 다양한 잔상을 남겼다. “찬영이 혀엉! ” “아, 미안. 인우야. 나중에 올게.” 인우의 처절한 부름을 뒤로하고 문을 나선 찬영은 멋쩍은 듯 신주를 향해 웃어 보였다. 이 인간이 왜 이럴까 의심스러운 신주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가슴에 얹고 갑작스런 위경련에 대비했다. “생각해 봤는데 말이지.” “말씀하십쇼.” “너의 도움을 무작정 거절하는 것도 태교에 좋지 않을 듯 싶어서 말이지. 그래서 말인데 이건 어떨까?” “네?” “앞으로 내가 부르면 넌 무조건 오는 거야.” “예?” “밤이건 낮이건 가리지 않고 말이지. 무조건 콜!” “콜이요?” “이건 내 오피스텔 비밀 번호야. 다른 열쇠는 안 걸려있으니까 그 번호만 누르고 들어오면 돼.” 어리둥절한 신주의 손에 찬영이 종이 쪽지 하나를 건넨다. “올림픽 대로를 타고 미사리 방향으로 가다가 강일IC에서 구리방향으로 턴하는 거야. 강 건너 계속 직진하다보면 남양주 IC가 나올 거거든? 거기서 조금 더 다가보면 도농사거리가 나올 텐데 그게 바로 46번 경춘가도야. 46번 경춘가도 타고 쭈욱 가다보면 남양주 경찰서 지나고 도농삼거리가 나오는데 이게 두 갈래 길이거든? 여기서 좌측으로 가. 그리고 다시 쭈욱 가다보면 남양주 시청 나올 거야. 그냥 앞만 보고 막 달려. 가다보면 마치 터널이 나오고 천마산 휴게소가 나올 건데 그 근처에 스키장도 있어. 아, 그 스키장 물 좋았었지. 암튼 샛눈 팔지 말고 가다보면 대성리가 나오거든? 그리고 청평, 가평 사이좋게 지나. 그럼 딱 강촌이 나오는 거야. 강촌 기차역을 뒤편으로 해서 왼쪽을 바라보면 ‘순정 토담 두부’라고 쓰여진 간판이 하나 보일 거야. 거기 두부전골 정말 맛있어. 정말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맛이지. 가서 직접 먹고 와도 좋겠지만 내가 일이 있어서, 아무튼 포장도 해주거든? 그대로 냄비에 넣고 보글보글 끓이면 그 맛 그대로 살아나지.” 강촌? 토담두부? 포장을 해준다고? 그런데 포장이 왜...... 아직 상황파악이 안된 신주를 향해 찬영은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뭘 가만히 보고 서 있어? 빨리 갔다와. 강촌까지 갔다오려면 3시간은 걸릴 거야.” “예?” “아~ 진짜. TV 드라마도 안 봤어? 이럴 때 먹고 싶다는 거 안 사다주면 태교에 무척 안 좋아. 몰랐어?” “예?” “다녀와 빨랑, 나 어제 밤에 갑자기 생각나서 그거 먹고 싶어서 잠도 못 잤어.” 그러니까 지금 저보고 강촌에 가서 그 두부를 사와라 이 말씀인 것입니까? 설마... 신주의 손에 놓인 종이가 가녀리게, 사정없이 떨리고 있다. “그냥 서울에서 찾아 드시면 안될까요? 제가 아는 동네에도 두부 잘 하는 곳 있는데.” “안 돼. 꼭 그 두부여야 해. 그게 먹고 싶어.” “거기도 맛있습니다.” “안 된다니까.” “맛...” “안 돼!” 그렇다. 저 인간 조찬영은 음식 평론가였다. 그것도 무척 까다로운. “앞으로 잘 부탁해. 아.빠.” 아....아빠.... 이것이 24시간 콜 야식 센터. 김신주맨~의 탄생이었다. 오빠 달려. 제 4 편 < 화성에서 온 신주, 금성에서 온 찬영 / 당신이 잠든 사이에 >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7살이 되던 해. 김신주는 결심했다.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지.’ 그 맹세를 지키기 위해 책을 많이 읽고 공부도 열심히 했다. 학교 성적은 우수했고 주위의 평가 또한 높았다. 그가 자신이 게이임을 자각한 것은 20살 되던 해, 가을 축제가 끝난 뒤 2차 뒤풀이 현장에서였다. 어려서부터 많은 고백을 받아왔지만 남자로부터의 고백은 처음이었다. 그는 일단 ‘네가 좋아!’를 외치고 기절해버린 복학생 선배를 자취방까지 데려다 주기로 결심했다. 선배의 주머니를 뒤져 열쇠를 꺼내고 자취방 문을 열었다. 방바닥이 싸늘했기에 이불을 펴 주기로 했다. 자면서 불편할 것 같아 재킷을 벗겨 주기로 했다. 내친 김에 양말도 벗겼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팬티도 벗기고 있었다. 너무 집중한 것이 탈이었나 보다. 이걸 다시 입혀야 하는 걸까. 그는 진지한 고민에 빠졌다. 그 고민 한 시간쯤 했나 보다. ‘으으응’ 신음소리를 내며 선배가 잠에서 깨어났다. 충분히 오해할 수 있을 만한 상황이었다. ‘이건 말입니다. 선배가 생각하시는 그런... ’ 상황이 아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그의 입은 ‘그런’ 다음을 더 이상 이어갈 수 없었다. 선배의 입술이 그의 입술을 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황종료. 자빠뜨려진 신주는 그 후 열락을 맛보았다. 기승위는 지금도 신주가 가장 좋아하는 체위 중 하나이다. 그 선배와는 3개월쯤 사귀다 헤어졌다. ‘넌 너무 완벽해. 난 그게 짜증나’ 그것이 이별의 이유였다. 세월이 흘렀다. ‘형은 너무 정중해요. 절 사랑하긴 하는 건가요’,‘당신 마음 속 어디에도 제가 머물 구석은 없었어요.’, ‘당신은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사람’,‘하룻밤 사랑으로 만족해요. 이제 이 기억 안고 살아 갈 수 있어요.’, ‘넌 눈부시지만 난 눈물겹다. 점점 작아지는 나를 느껴’ 이별의 이유도 쌓여갔다. 명성도 쌓여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다가왔다가 지 맘대로 떠나갔다. 떠나라고 한 적도 없었건만 알아서 떠나갔다. 어느새 그는 ‘전설의 동대문구 바람둥이’가 되어 있었다. 스물 다섯이 되던 해. 요식업에 새바람을 일으켜 보겠다며 열심히 레스토랑 개업을 준비하고있던 둘째형이 실연을 이유로 가출을 했다. 아예 국외로 떠 버렸다. 그 인간은 지금도 연락이 잘 되지 않는다. 아무튼 주인 잃은 식당 터와 오너 잃은 종업원들만이 그에게 남겨졌다. 우선 저 빈터와 저 사람들을 보살펴야겠다. 그는 그렇게 결심하였다. 이왕 맡은 일은 열심히 하는 성격. 사업은 어느새 번창했고 그는 올 가을에 오픈 할 청담동 2호 점을 목표로 열심히 달리고 있...... 어라? 달리고 있긴 하는데 그 길이 아니다? “아저씨!!! 아저씨!!! 국밥 한 그릇! 국밥 한 그릇만 포장해주세요!” 다행이다. 신호무시도 감행하며 달려온 결과 일일 한정 300그릇, 원조 장터 국밥의 최후의 1그릇을 사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따 그 총각, 급하기도 하셔잉. 오늘 못 먹으면 내일이 있고, 내일 못 먹으면 모레가 있지 않은가. 내 이 시장바닥서 국밥 팔아온 지 벌써 20년인디 젊은이처럼 그렇게 애타게 국밥 찾는 사람 처음 보았소. 많이 굶었는가베? 바쁘지 않음 여서 먹고 가지 그라요? 내 기다려 줄텐게.” 아닙니다. 아저씨. 꼭 ‘지금’ 먹어야 한다고. ‘오늘’아니면 안 된다고 그분이 그러셨습니다. 숨을 몰아쉬는 신주의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이 똑 하고 굴러 떨어진다. 그 어딘가의 어떤 사람들이 보았더라면 섹시해서 죽어버렸을지도 모를 그 멋진 모습을 보는 이는 불행히도 ‘원조 장터 국밥집’ 주인 아저씨와 그 옆집 ‘진짜 원조 장터 국밥집’ 주인 아주머니뿐이다. 분명 ‘진짜 원조 장터 국밥집’이 아닌 ‘원조 장터 국밥집’이라 했다. 신주는 ‘모란시장 내 원조 장터 국밥집. 국밥 1그릇. 주인 아저씨 좀 느끼하게 생겼음. 그 옆의 진짜 원조 집이랑 헷갈리면 넌 죽었어.’ 라고 쓰여진 종이쪽지를 펴 다시 한번 상호를 확인했다. 가게 상호만 듣고 갔다가 ‘원조’,‘진짜 원조’,‘진짜 진짜 원조’‘우리가 원래 원조’로 이어지는 유사 간판들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맨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지금’아니면 안 된다는 말 또한 거짓이 아니었다. 그놈의 아기는 어찌나 변덕이 심하신지 사러 갔다 오는 그 짧은 시간에도 마음을 뒤집어 조금 전까지 먹고 싶어 죽겠다던 그 음식들을 찬영이 야멸차게 거절하게 만들었다. ‘우욱, 그거 저리 치워. 당장 치우지 못해!’ 입을 막고 진저리를 치는 찬영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한 신주다. 오늘은 그래도 서울시내에 있는 곳이라 다행이었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는 그분은 한 젊은 사나이를 전국 방방곡곡 네비게이터 한 대 벗삼아 한없이 헤매이게 만들었었다. 지난 몇 주간. ‘......전설의 된장명인을 찾아 나선 길이었지. 지도 하나 달랑 들고 떠난 여행이었는데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고 그로 인해 다리가 물에 잠기고 말았어. 더 이상 갈 수 없어 되돌아오는 길, 아뿔싸 그만 산 속에서 길을 잃고 말았던 거야. 이곳은 어디인가, 나는 어디를 걷고 있는가. 가도, 가도 민가는 나오지 않고 불길한 까마귀 소리만 귓전을 맴돌았어.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이윽고 날이 저물고 사방이 고요 속에 잠기자 낮에는 미처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어. 저 멀리 보이는 히끄무레한 빛. 가까이 다가가자 번쩍 번쩍 빛나는 빛. 그건 ‘24시 할매 원조 올챙이 국수’를 안내하는 천사의 네온사인이었다네. 내 그 천사를 다시 한번 만나고 싶으이. 자, 강원도 평창으로 출발!’ ‘......난 그곳에서 환상의 산채 비빔밥을 만나고 말았던 거야. 내 평생 그렇게 맛이 있는 비빔밥은 처음 먹어 보았어. 싱싱한 나물과 잘 숙성된 고추장의 조화. 꼬들꼬들하게 지어진 보리밥하며 한 입 베어 물면 입안 가득 퍼지는 알싸한 맛의 풋고추까지. 그건 인간의 맛이 아니었어. 비법을 묻는 나에게 그들은 겸손하게도 지리산이 스스로 키운 것이라고만 했지. 그 곳에서 2박 3일을 머물며 난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렸네. 이별을 아쉬워하는 그들에게 난 꼭 다시 찾아올 것이라고 약속했어. 그러나 그것이 마지막. 다시는 그곳을 찾을 수 없었네. 다시 찾아간 그곳은...... 재개발 중이더라구. 아무튼 그들은 ‘버들골 산채 비빔밥집’으로 다시 태어났네. 자, 지리산으로 출발!‘ ‘그 고장 7월은 청포도가 익어간다잖아? 지금쯤 다 익었을 거야. 자, 댕겨오게. 충북 영동 마곡리!’ 그뿐인가. 지난 주말엔 생애 처음으로 팔뚝만한 잉어를 낚는 진귀한 경험도 하게 해주었다. 주방에서 잉어를 고아야만 하는 이유를 셰프가 묻지 않아 다행이었다. (아무래도 셰프는 사장님이 레스토랑의 발전을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며 맛의 비결을 캐고 있는 것으로 오해하고 제멋대로 감동까지 받아버린 듯 하다.) 그래도 해외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신주였다. 아기 입맛이 한국적이라서 정말 다행이었다. *********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8살이 되던 해. 조찬영은 결심했다. ‘우주 정복자가 되어야지.’ 그 맹세를 지키기 위해 태권도 학원도 다니고 속셈 학원도 열심히 다녔다. (우주 정복자는 산수도 잘해야 한다고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남들 다 하는 수준만큼만 하고 그만두긴 했지만 찬영이 얻은 것은 남들 다 보유한 검은 띠가 아니라 한 무리의 추종자들이었다. 그렇게 그는 태권도 학원을 정복하고 속셈학원을 정복하고 피아노 학원을 정복하고 미류 초등학교를 정복했다. 내친 김에 우석 중도 정복하고 남는 봄방학에는 미술학원도 정복했다. 열일곱이 되어 해금고에 입학한 그는 때마침 연예계에 데뷔한 누이 찬희로 인해 더더욱 유명해졌다. 그들은 ‘니가 정말로 조찬희 남동생이야?’라고 물으러 왔다가 ‘맞구나~!’를 외치며 그에게 빠져들었다. 지금은 누가 이어받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해금고 ‘공식 아이돌’의 전설은 찬영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맛있는 음식이 좋고 맛있는 사람이 좋았다. 까다로운 입맛만큼이나 그는 연인도 까다롭게 골랐다. 헤어지지 못하겠다며 칼부림까지 동원하던 어느 미친놈과의 결별이래 그는 부담 없는 원나잇으로 삶의 방침을 바꿨다. 아무리 마음에 드는 녀석이었다고 할지라도 2주를 넘기지 않았다. 시식은 자유지만 단골은 까다롭게 고를 것. 그것이 그의 인생 철학이었다. 그래도 한번 먹어만 봐 달라는 음식점과 남자들이 줄을 이었다. 어느새 그는 ‘서초구 최고의 바람둥이’가 되어있었다. 순풍에 돛달 듯 달리던 바람은 모두가 알다시피 1년 전 동쪽에서 내려온 고기압 바람에 의해 잠시 중단되었다. 이 자식! 난 태풍이 되어 보일 테다! 찬영은 저 홀로 분에 겨워 그렇게 결심했다. 스물 다섯 되던 해, 밀라노에서 의상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는 형 찬우도 만날 겸 유럽 배낭여행을 떠났다가 현지 음식에 흥미를 느껴 요리 학교에 등록을 했다. 단기 과정을 마치고 귀국했을 때 공항에서 우연히 과거 연인 중 한 명이었던 남성과 재회했다. 그는 요리 전문지 ‘Coozen’의 수석 에디터가 되어 있었다. 그의 권유로 취미 삼아 기고했던 글들이 반향을 불러일으키면서 어느새 그는 그 글로 밥 벌어먹고 살 정도가 되어 있었다. 즐겁고 놀고 맛있게 먹고 적당히 일하면서 살아왔다. 무리한 목표를 정해놓고 몸이 부서질 때까지 일하는 그런 삶은 질색이다. 그런 사람도 질색이다. 좋은 게 좋은 거다. 그랬던 그는 지금 명상에 잠겨있다. 아니, 자세히 보니 졸고 있구나. “조찬영, 들어가서 자라. 편한 침대 놔두고 뭐 하는 짓이냐.” 갑자기 어울리지도 않는 명상을 하겠다며 명상 음악 시디까지 사들고 집에 들어왔던 찬영은 1곡이 채 끝나기도 전에 꾸벅꾸벅 거실 바닥에 머리 찧기 운동을 하고 있다. 저러다 말겠지 싶었는데 벌써 오늘로 일주일째다. “들어가 자라니까.” 석진은 가볍게 찬영의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반쯤 잠에 취한 찬영이 불명확한 소리를 내며 입가에 흐른 침을 닦는다. “우우웅......지금 몇 시?” 밤 12시다. 오늘밤도 역시 그 녀석을 기다리고 있나 보다. 찬영을 바라보는 석진의 얼굴에 쓸쓸한 미소가 스친다. 통 음식을 먹지 못하던 찬영이 웬일로 죽 한 그릇을 말끔히 비운 어느 아침의 일이었다. “이제 속 괜찮은 거야? 먹을 수 있겠어? 저녁 때 맛있는 거라도 해줄까?” 뭐가 좋을까. 기름진 음식은 아직 무리일 테니 가볍게 쌀 국수라도 만들까 궁리하던 석진에게 찬영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이제 괜찮은 거 같다. 그리고 너 이제부터 밥하느라 수고할 필요 없어졌어. 따로 전담반이 생겼거든.” 전담반? 혹시 찬영 어머니가 도우미 아주머니라도 보내주시려는 걸까. “앞으로 7개월 간 어떤 사람이 내 식사를 책임지기로 했거든. 아, 어제 밤에 먹었던 두부 전골도 그 녀석 솜씨야.” 요리사 연인이라도 생긴 것일까. 얼마나 솜씨 좋은 녀석이길래 찬영의 입에서 7개월이라는 구체적인 기간까지 나오게 만든 거냐. “누군데 그래? 누구길래 천하의 조찬영이 7달이나 참고 봐준다는 거냐?” “있다. 그런 놈. 앞으로 종종 보게 될 거야.” 말이 나와서 얘긴데 혹시 먹고 싶은 것 없냐? 장난스럽게 눈까지 반짝이고 있는 걸 보니 누군가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데 그러냐. 이거 나도 기대해도 되는 거야?” 석진은 초조한 속내를 애써 감춘다. 출근을 했어도 하루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심혈을 기울여야 할 화보 촬영임에도 불구하고 영 집중이 되지 않아 결국 모델, 스탭 모두를 지치게 만들었다. ‘석진씨 오늘 왜 그래? 이래 가지고 어디 독립하겠어? 가뜩이나 선생님이 석진씨 주의 깊게 보고 계시는데 이런 식으로면 곤란해.’ 생전 쓴 소리 안 하던 ‘Girl View(20대 초반을 타겟으로 하고 있는 여성 패션잡지. 찬영의 누이 찬희 역시 이곳 전속모델로 발탁되어 연예계 데뷔했다)'의 김기자에게까지 한마디 들었을 정도이다. 밤늦게 집에 돌아온 석진은 오피스텔 입구에서 의외의 인물과 마주쳤다. “여긴..... 웬일로?” 소문이 자자한 피카소의 오너 김신주다. 다른 사람을 만나려고 온 것일까? 이러다 또 찬영이 눈에 띄면 신경전이 벌어질텐데. 석진은 단순히 그렇게 생각했다. “퇴근이 늦으시군요. 마침 잘 되었습니다. 이거 찬영씨에게 좀 전해주세요.” 질문엔 대답하지 않으면서 종이가방 하나를 내민다. 얼떨결에 받았더니 꽤 묵직하다. “뭘 좋아하실지 몰라서 종류별로 다 사왔습니다. 양이 꽤 넉넉할 테니 석진씨도 함께 드세요.” “찬영이 만나러 오셨어요?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올라갔다 가시지 그러세요?” “아닙니다. 용건은 그것 뿐. 다른 게 필요하면 또 전화하겠죠. 그럼 저는 이만.” 잠시 알 수 없는 소리를 늘어놓더니 곧 단호하게 등을 돌려 가버린다. 밝은 곳으로 들어서자 ‘초밥 전문 ZEN'이라고 쓰여진 글자가 보인다. 석진도 들은 바 있는 압구정에 위치한 고급 일식 집이다. 입맛이 까다로운 찬영도 일전 만족을 표한 바 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상황은 김신주가 찬영을 주려고 먼 압구정까지 가 초밥을 사왔다는 것? ‘다른 게 필요하면 또 전화하겠죠’ 김신주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찬영이 신주에게 전화를 한다고? ‘앞으로 7개월 간 어떤 사람이 내 식사를 책임지기로 했거든’ 아침에 들은 찬영의 말이 머리를 스친다. 그 어떤 사람이 김신주라는 소리야? 그런 거니. 찬영아? 문이 열리는 동시에 찬영이 뒤를 돌아본다. 석진의 손에 들린 종이가방에 잠시 시선이 머물더니 곧 난감한 기색을 보인다. “너도 초밥 사왔냐? 이런......왜 하필이면 둘 다 ‘ZEN’이냐. 석진이 넌 서브(막내-서브-메인) 월급 얼마나 된다고 거기를 가고 그래?” 역시 신주가 초밥을 사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소리다. “내가 사온 거 아냐. 오다가 앞에서 김신주씨하고 만났어. 너한테 전해주라고 해서 가져온 거야.” “만났어? 짜식 건방지게 올라와서 주고 갈 것이지. 기껏 번호까지 알려줬구만.” 종이가방을 받아든 찬영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진다. 연어, 참치, 도미, 광어, 장어, 새우, 광어, 소라, 전복, 고등어, 방어......종류별로 다 사왔구나. 짜식 하여간 돈 유세는. “김신주가 왜 너에게 초밥을 사줘?” 석진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려 나온다. 둘이 사귀기라도 하는 거야? “어? 말 안 했었나? 아니다. 아침에 말했잖아. 앞으로 어떤 사람이 내 식사를 책임지기로 했다고.” “그게 김신주란 얘기는 하지 않았잖아.” “뭐 조금 쪽팔려서. 그래도 뭐 이제 알았으니 됐네. 그거 김신주다.” “내 말에 대답 안 했잖아. 조찬영. 김신주가 왜 너에게 초밥을 사주냐고. 왜 네 식사를 책임져?” 초밥 하나를 집어 입에 물고 있던 찬영이 잠시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어......그게. 그럴 일이 좀 있었어. 김신주랑. 미안하다 석진아. 아무리 너에게라도 말못하겠어. 그건. 네가 좀 이해해라.”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거야? 찬영아. 그것도 김신주 그 놈이랑. 김신주란 말만 들어도 기분이 나빠진다던 사람이 너 아니었어? 나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일이라니. 대체 김신주랑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 “누구세요?” “접니다. 찬영씨.” “너구나? 들어와라.” 출입 비밀번호를 받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초인종을 누르는 신주였다. 짜식 귀찮게 꼭 문을 열어줘야 들어온다니까. 누가 부잣집 도령 아니랄까봐. “석진씨는요?” “그놈 오늘 외박이다. 지방 촬영 갔어.” 가져온 상자(그 안에는 갓 튀겨낸 깐쇼 새우와 누룽지 탕이 들어있다)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신주는 석진이 없는 틈을 타 거실을 한바퀴 돌아보았다. 석진이 있을 때는 왠지 모르게 이 곳에 머무르는 것이 껄끄러운 신주다. 1년 전 처음 찬영과 트러블이 있었을 때는 ‘신주씨가 이해해주세요. 찬영이 저 녀석이 원체 까탈스러워서 그렇지 원래 나쁜 녀석은 아니거든요.’라며 따라나와 찬영 대신 사과까지 했던 석진이었다. 조용하고 다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요즈음 찬영의 집에서 마주치는 석진은 어딘가 모르게 날이 선 듯 날카롭다. 뒤통수가 따가워 돌아보다 석진의 시선과 맞부딪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신주씨 오셨군요. 찬영이 녀석 때문에 괜히 고생하시네요.’ 말투와 표정은 변함 없이 상냥하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다. “마실래?” 와인 잔을 꺼내든 찬영이 이쪽을 향해 잔을 흔들어 보인다. 화이트 와인은 의외로 기름진 중국요리하고도 잘 어울린다. 신주의 레스토랑에서도 자주 권하곤 하는 조합이다. “뭘 노려보고 그러냐. 가벼운 와인 한 두 잔은 오히려 건강에 이롭다고 저번에 TV에 의사가 나와서 한 말 못 들었냐? 중국 음식하면 소흥주(사오싱주紹興酒)가 딱인데 아까워라......등소평(찬영이 소흥주에 붙인 애칭)씨 우리 내년에 봅시다. 내년에 내가 맘껏 사랑해 줄게.” 마음 같아선 포도주스를 드시라 하고 싶은데 와인 잔까지 꺼내든 폼을 보니 도저히 말을 들을 것 같지 않다. 그래도 고량주를 마시겠다고 하지 않는 게 어디인가. 신주는 말리는 것을 포기하고 테이블 세팅을 돕기 위해 부엌으로 향했다. “......찬영씨 안경도 쓰십니까?” 들어올 때는 눈치 채지 못했는데 가까운 데서 보니 검은 색 뿔테 안경이 찬영의 콧등에 얹혀있다. 최근 유행한다는 사각 뿔테 안경이다. “그래. 왜 쓰면 안되냐?” 쯧쯧, 또 저 비뚤어지게 받아들이는 거 봐라. “누가 안 된다고 했습니까? 의외라서 조금 놀랐을 뿐입니다......어울리시네요.” “눈이 좀 나빠. 많이는 아니고. 짝짝이거든. 넌 시력 몇이냐?” “양쪽 모두 1.5입니다.” “다행이네. 단점은 닮지 말아야지. 우리 누나도 눈 나빠서 라식 수술했거든. 난 그럴 정도는 아니고. 글 쓰거나 영화 보거나 할 때만 써. 자, 먹자.” 김신주와 단둘이 앉아 저녁식사를 하다니 예전엔 생각도 못해본 일이다. 괜스레 겸연쩍어진 찬영은 신주가 오기 전까지 읽고 있던 책을 다시 펼쳐 읽는 시늉을 하며 애써 신주의 시선을 피했다. 사람을 앞에 두고 이게 무슨 짓인가. 같은 식탁에 앉기는 하되 내 얼굴 쳐다보기는 싫다는 건가. 어쩜 저렇게 노골적으로 싫은 티를 낼 수가 있지. 기분이 상한 신주는 와인을 연거푸 들이마시기 시작한다. “그게 소주냐? 와인이지. 와인으로 원샷하는 녀석은 내 생전 처음 본다. 그것도 ‘퓨전 식’?그래 가지고 잘 되겠냐? 2호 점?” 2호 점 얘기에 눈에 바짝 힘이 실리는 신주다.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오픈을 미루고 있는데. 그 어느 누구가 시도 때도 없이 이걸 사와라, 저걸 사내라 하는 통에 영 사업에 집중을 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저 자식 눈에 힘주는 것 좀 봐라. 그거 조금 비꼬았다고 아주 눈빛이 달라지네. 에이. 이런 말을 하려고 했던 게 아니었는데. 저 녀석이랑 함께 있으면 영 입이 자제가 되지 않는다. 실은 이제 그만 음식 심부름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했었다. 오늘은. 한동안 입덧으로 고생을 했고 반쯤은 자신의 책임이기도 하지만 이런 상황을 겪게 한 신주가 얄미워 몇 주 일부러 고생을 시켰다. 그 수많은 맛 집들 중에는 찬영이 가보지 못했던 곳도 다수 끼어있었다. 인터넷 검색으로 부러 외진 곳을 골라 심부름을 시켰던 것인데 짜증 한번 내지 않고 무사히 음식을 공수해내는 신주에 미안함과 감탄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음, 저 눈빛을 보니 그 마음 80% 다운 그레이드 되고 있다. 내일은 거제도로 보내 주마. 어색한 식사를 끝낸 신주와 찬영이 차 한잔씩을 들고 TV앞에 앉았다. “저거 재밌네.” “그러네요.” “또 태풍이야?” “그러게 말입니다.” “저런, 물가가 또 오르네.” “식 재료비도 무척 올랐습니다.” “......” “......” 새벽 1시. 이만 가보겠습니다 라고 말을 꺼낼 타이밍과 그래, 잘 가라 하고 응수할 타이밍을 놓친 두 사람의 어색한 침묵이 계속 되고 있다. ‘아아아앙 오빠 더 깊이~’ ‘오 마이 갓~ 오 마이 갓~ 오~ 베이비!!!’ ‘허억 허억 헉 헉 허어억’ 젠장, 이 시간에 왜 이렇게 야한 프로만 한단 말인가. 19금 마크만 달면 다야? 임산부 뱃속의 아기도 보고 있다! “다른 거 보자.” “그러죠.” “!” / “!”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리모콘에 손을 뻗었다가 손을 겹치고 말았다. 당황해서 떨어뜨린 리모콘이 바닥에 떨어져 튕기며 화면 속 채널을 빠르게 바꾼다. ‘녹차의 맛에 한번 빠져보시겠습니까~ 안어벙이 추천하는 깜박 녹차 바! 슈퍼에 있습니다.’ “...저...저거 맛있겠다.” “사올까요?” 대답도 듣지 않고 뛰쳐나간다. 여기로부터 가장 가까운 편의점은 걸어서 500미터. 지하철 역 근처까지 걸어 나가야 한다. 엘리베이터도 누르지 않고 걸어서 1층까지 내려간 신주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 순간 아이스크림 CF가 나왔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들킬 뻔했다. 한창 나이 스물 일곱, 혈기 왕성한 김신주는 케이블 TV 에로 영화 음향에 자극 받아 그만 세우고 말았던 것이다. 그것을. 너무 오래 굶은 탓이었을까. 2호 점 오픈 준비하랴 찬영에게 음식 사다 바치랴, 근 한 달을 그 흔한 자위 한번 안하고 지내왔던 신주는 한계에 부딪쳐 있었다. 와인을 마셔서 그런가. 안경을 쓴 찬영씨가 무척 지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섹시해 보이기도 하고......김신주 맨 달린다. 편의점을 향해. 그 모습을 5층 베란다에서 지켜보고 있던 찬영은 끌끌 혀를 찼다. 저거 반대 방향이다. 바보. ********* 새벽 2시가 되어 가는 시간에 초인종을 누르는 것은 이웃에도 민폐일 듯 싶다. 신주는 이미 외우고는 있었으나 한번도 눌러본 적은 없던 6자리 번호를 차례로 눌렀다. 삐하는 소리와 함께 도어록이 풀리고 문이 열린다. “찬영씨?” 지지지지직 방송이 끝난 텔레비전 소리만이 집안을 가득 채우고 있다. 다가가자 소파에 외로 누워 잠들어 있는 찬영의 모습이 보인다. 리모콘을 들어 TV전원을 끄자 조용해진 거실을 찬영의 고른 숨소리가 마저 채워 나간다. 사온 아이스크림을 냉동고에 넣고 돌아온 신주가 방안 옷장에서 이불 한 장을 꺼내 가지고 나온다. 안아서 침대에 옮겨도 좋으련만 애써 깊이 잠든 찬영을 깨울까 그것이 두렵다. 자면서 뒤척였는지 티셔츠 자락이 배꼽 위로 올라가 늘씬한 배를 드러내고 있다. 셔츠 자락을 내리려던 신주의 시선이 찬영의 드러난 배 위로 머문다. ‘저 안에 정말 있기는 하는 걸까?’ 함께 찾아간 병원에서 형의 설명을 듣고 (김닥터는 이날 쇼크로 과 호흡을 일으키기까지 했다)초음파로 아기의 위치까지 확인했음에도 여전히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찬영의 숨소리에 맞추어 오르락내리락 하는 배가 보인다. 잠을 깨우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신주는 자신의 오른쪽 뺨을 찬영의 배에 가까이 가져갔다. 찬영이 숨을 쉬고 아기가 숨을 쉰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귓가에 느껴진다. 아직 임신 초기라 태동이 느껴지지는 않을 거라고 형은 말했다. 쿵쿵쿵 찬영의 맥박소리가 귀를 타고 신주의 심장에까지 가 닿는다. 그리고 신주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우우웅.....우...” 뒤척임에 놀라 황급히 떨어졌다. 허둥대느라 살짝 테이블에 허리까지 부딪힌다. 신음소리도 죽인 신주의 귓가에 찬영의 잠꼬대가 들려온다. “우움......순대...” 가볍게 입맛을 다시더니 곧 얼굴을 찡그렸다가 다시 미소를 짓는다. 기분 좋은 꿈을 꾸고 있나 보다. 그나저나 순대는...순대는 어디에서 파는가. 하아아. 다시 문을 나선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다. 새벽의 거리로 다시 나아간다. 오늘 밤도 달린다. 열심히. 제 5 편 < 2005 태교 보완 계획 / 전격 바람 봉쇄 작전 > “사아아아아아아암초오오오오오오온!” “시이이이인주우우우 사아아아아암초오오오오온! 달려온다. 악마들. “시인주~삼촌! 인영이 안아줘! 인영이!” “아냐! 진영이 먼저 안아줘! 삼촌 진영이 꺼야!” “아냐! 인영이 꺼야!” “아냐! 진짜진짜진짜진짜진짜! 진영이 꺼야!” “아냐! 진짜진짜진짜진짜진짜진짜 하늘 땅 별 땅 맹세! 인영이 꺼야!” “......우주! 번개! 마왕! 지옥! 바람! 별! 맹세! 진영이 꺼야!” “별은 아까 내가 했어! 이 똥개야!” “니가 언제 했어! 언제! 몇 시! 몇 분! 몇 초!” 잠시 동생 진영을 노려보던 인영이 진영에게 다가가 진영의 가슴을 홱 하고 밀친다. 주춤 뒤로 밀려난 진영이 주먹을 쥐더니 제 누나의 머리칼을 죽어라고 잡아당기기 시작한다. 인영은 진영의 팔을 세게 꼬집는 것으로 반격에 나선다. “이거 놔! 이 똥개야!” “니가 먼저 놔! 이 할망구야!” “똥개! 말미잘! 해삼! 쇠똥구리야!” “똥개! 말미잘! 해삼! 쇠똥구리! 장수풍뎅이야!” “똥개! 말미잘! 해삼! 쇠똥구리! 장수풍뎅이! 소금쟁...” 워워워. 하얗게 질린 채 속수무책으로 서 있기만 하는 신주를 대신해 형수 선진이 교통정리에 나선다. “우리 인영이 진영이, 유치원에서 공부 열심히 했구나. 소금쟁이도 배웠어?” 형수 지금 소금쟁이가 문제입니까...... “인영이는 딱정벌레도 알아!” “진영이는 송장벌레도 알아!” “우리 공주님, 왕자님 너무 똑똑해. 삼촌은 하루종일 일하다 오셔서 피곤하니까 아빠한테 갈래? 아빠한테 가서 우리 딱정벌레랑 송장벌레가 어떻게 생겼는지 가르쳐 주고 오자.” 먼저 가는 사람 도둑~놈! 뒤에 가는 사람 경~찰! 아~빠~! 아빠~!! 언제 신주에게 신경이나 썼냐는 듯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인영이, 진영이다. 여전히 혼백이 나간 듯한 신주를 향해 선진은 방긋 웃어 보인다. “도련님 요즘 왜 그렇게 바쁘세요? 애인이라도 생겼어요?” “네?” 저...그게...‘애인’에서 ‘인’자 빼고 ‘애’가 생겼습니다. “요즘 매일 늦게 들어오시잖아요. 그저께는 외박도 하시고.” 요거 생긴 거에요? 선진은 짓궂게 새끼손가락까지 세워 흔들어 보인다. 청순하고 우아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선진은 고교시절 소문난 날라리였다는 과거가 있다. 삥 듣기다 한눈에 반한 신규가 7년을 쫓아다녀 결국 결혼에 골인했다. 신주가 쉽게 대답을 하지 못하자 선진은 한술 더 떠 말에 리듬까지 실어 놀려대기 시작한다. “얼레리 꼴레리~신주 도련님~애인 생겼대요~ 애인 생겼대요~. 여보~! 도련님 방에 혼수 놔드려야겠어요.” 응? 뭐라고? 인영이, 진영이에게 시달리느라 정신이 없는 신규가 그래도 마나님 말씀은 철썩 같이 알아듣고 대답을 해온다. “그만 하세요. 형수. 그런 거 아닙니다.” 아니에요? 진짜? 에이~맞는 거 같은데?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선진은 놀림을 멈추지 않는다. 아빠, 인영이는 바퀴벌레가 좋아. 아빠 진영이는 송장벌레가 좋아. 다행히 쌍둥이의 재잘거림에 신규는 이쪽 이야기를 알아듣지 못하고 있는 듯 하다. “아니라면 미안하지만요. 그래도 제가 보기에는 도련님 요즘 달라진 것 같은데요?” 제가요? 짚이는 데가 있는 신주가 식은땀을 흘린다. 늘 반듯하고 딱 부러지던 김씨 가문 막내가 츄리닝을 입고 뛰쳐나갔다 한밤중에 돌아오질 않나, 아침식탁에서 한숨을 푹푹 내쉬질 않나, 그러다가 혼자 고개를 숙이며 씨익 웃기도 하는데 집안 어르신들이 그 변화를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지 않나. 안 그래도 어머님께 ‘막내가 요즘 왜 저런다니. 여자 생긴 거 아냐? 네가 좀 넌지시 물어봐라. 괜찮은 여자면 집에도 좀 데려오라고 그래’ 라는 지령을 내려 받은 선진은 애써 시선을 피하는 막내 도령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취조하듯 뜯어보았다. “집에 한번 데려와 보시지 그러세요? 어머님, 아버님이 궁금해하시고 계신데.” “예? 예?” 무섭다. 형수. 역시 괜히 추리소설 작가가 아니다. (선진의 직업은 추리소설 작가이다. 교묘하고도 화끈한 플롯, ‘범인은 이 안에 없다!’로 시작되는 황당한 폭로전을 무기로 상당한 매니아층을 형성하고 있다.) 말을 돌려야 한다. 당황한 신주는 자기도 모르게 좀 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질문을 던지고 만다. “형수는 임신했을 때 태교 어떻게 하셨어요?” 아뿔싸. 이러면 더 의심받는다. 의심할거야. 의심할거야. 의심 받는다아! “태교요? 글쎄요. 좋은 음악 챙겨듣고 맛있는 거 먹고 그랬죠. 좋은 생각하려고 애쓰고. 내가 그때 무슨 음악을 들었더라...?” 다행히 형수는 과거의 추억 속으로 날카로운 추리의 칼날을 돌린 듯 하다. 잘 됐다. 이참에 더욱 유도하자. “무슨 음악을 들으셨는데요?” 한참을 골몰하던 선진이 입을 연다. 아빠! 우리 유치원에 이~따만한 개미 있어! 아냐! 요따만 해! 아냐! 이따만 해! 웃기지 마~요따만 해! 내기할래? 쌍둥이의 총알 같은 수다가 BMG로 깔리고 있다. “너바나요.” 얼터너티브 락 밴드 너바나 말씀이십니까. 보컬이 자살했다던. “그리고 메탈리카랑 레드 제플린, 스키드로우와 핑크 플로이드도 좋았죠.” 아빠! 진영이가 자꾸 나보고 할망구래! 아빠! 인영이가 자꾸 나보고 똥개래! 우리 공주님 왕자님, 그런 말 쓰면 못써. 인영이, 진영이가 그런 말 쓰면 아빠 자꾸 울고 싶어진다. 아빠 울지 마아~ 아빠 울지 마아! 인영이가 잘못했어. 아냐, 진영이가 잘못했어. 아빠아! 으엉. ...쌍둥이 성격 형성의 원인을 알 것 같은 신주였다. “클래식 같은 건 안 들으셨어요?” “듣긴 들었죠. 신규씨가 자꾸 억지로 틀어놔서 가끔. 그런데 클래식은 틀어놓기만 하면 졸려서 잘 안 듣게 되더라구요.” 제 아빠를 잡아당기며 우느라 정신이 없는 쌍둥이를 바라보며 신주는 며칠 전 찬영의 집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찬영씨. 찐빵 사왔습니다. 식기 전에 드세요.” 응, 알았어. 거기 두고 가. 뭔가에 열중한 찬영은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 오늘은 안흥까지 갔다왔다. 다녀오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저 태도가 뭐란 말인가. 부아가 난 신주는 작업에 흠뻑 빠져있는 찬영의 귀에서 헤드폰을 벗겨 내었다. 음악이 끊기자 그제서야 뒤를 돌아보는 찬영이다. “거기 놓고 가. 왜 그래?” “사람이 왔으면 좀 돌아보기라도 하고 그래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 녀석이 오늘 따라 왜 이래? 며칠 전 찬영의 집에서 자고 간 이래 부쩍 곰살맞게 구는 신주가 찬영은 못마땅하다. “나 글 쓰는 거 안보여? 거기 두고 가면 알아서 먹을게. 지금 배 안고파.” 1시간 전까지 배고파 죽겠다던 그 사람 어디로 갔습니까. “음악 들으면서 글이 써지십니까?” “응. 아주 잘. 그러니까 헤드폰 이리 내.” “같이 듣죠. 얼마나 좋은 음악이라서 그러시는지 저도 좀 듣고 싶네요.” 미심쩍은 얼굴로 신주를 올려다보던 찬영이 마우스를 쥐고 있던 오른손을 들어올려 스피커와 연결되어있는 헤드폰 선을 잡아 뺀다. ‘Hands up put'em high don't let your gun cry don't you put'em down low don't let your passion die...’ 귀를 찢을 듯한 음향이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온다. ‘새빨간 색의 피는 누구나 흘리니까! 죽을 때는 빌린 내 몸 흙이 될 테니까 ! 복수는 나의 것! Turn my MIC up(Turn my MIC up) 복수는 나의 것(복수는 나의 것) 승리는 나의 것(승리는 나의 것) Put your hands up (Put your hands up)!’ -소외된 모두, 왼발을 한보 앞으로! -by 드렁큰 타이거 새빨간 피? 복수는 나의 것? 무슨 이런 노래가. “좋지? 드렁큰 타이거다.” “저는요. 찬영씨. 찬영씨가 어떤 음악을 듣건 상관하지 않습니다. 평소상태 그대로이시라면요. 하지만 찬영씨는 지금 아이를 가지신 몸이 아니십니까.” “그래서?” “저런 선정적인 가사의 노래를 꼭 들으셔야겠습니까?” “선정적이라니?” “피니 복수니 하는 것 말입니다.” “그게 어때서?” “뱃속의 아이에게 꼭 저렇게 잔인한 가사의 노래를 들려주셔야 하느냐 말입니다.” 잔인? “......할 말이 없다. 그러는 너는 평소에 어떤 음악을 듣고 사는데?” “라흐마니노프라던가 파야, 스트라빈스키, 쇼팽 그리고 베토벤을 즐겨 듣습니다.” “인생 그렇게 살면 재미있냐?” “클래식을 들으면 재미없는 삶이고 가요를 들으면 재미있는 삶입니까? 그건 찬영씨의 편견일 뿐입니다.” “누가 할 소릴. 훌륭한 리듬(라임)에 훌륭한 가사다. 내 아들에게 들려주기 전혀 부끄럽지 않은 노래야.” “어떻게 그리 아들이라고 단정하십니까. 여자아이일 가능성은 생각 해보지 않으셨나요?” “내 느낌엔 아들이야. 분명히 그래. 그리고 너네 형이 성별 알려준다는데 굳이 듣고 싶지 않다고 했던 건 너잖아.” “현행법상 태아의 성별을 알려주는 것은 불법입니다. 법을 어기면서까지 알고 싶지는 않아요.” 나는 궁금하단 말이다. 이 자식아. “정정, 아무튼 딸에게 들려줘도 전혀 부끄럽지 않은 노래다. 난 멋진 것만 보고 멋진 것만 들어서 멋진 녀석... 아들이던 딸이던 멋진 녀석!을 낳을 테니까 샌님 같은 클래식은 필요 없어.” 매일 밤 듣고 있는 명상음반(수록곡 대부분이 클래식과 뉴에이지 계열)CD가 이 이야길 듣는다면 배신감에 자진할지도 모르건만 찬영은 오기 때문에라도 신주에게 굽힐 수 없었다. “멋진 거라구요? 평소에 뭘 보시는데요?” “으음...퀴어 아이?” 내셔널 지오그래픽을 본다는 수준의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퀴어 아이가 다 뭡니까. 저야말로 할 말이 없습니다. “찬영씨의 태교 방식은 분명 잘못되어 있습니다. 지난번 일만 해도 그래요. 임산부가 19금 마크가 붙은 저질 포르노를 보다니 그게 말이 됩니까?” “내가 보고 싶어 봤어? 우연히 채널 돌리다가 본 거잖아. 이제 와서 그 얘길 왜 꺼내? 그리고 채널 금방 돌렸잖아.” “잠시라도 뇌에 영향을 미쳐 해가 된다는 것 모르십니까.” 김신주 역시 오기라면 지지 않는다. 일부러 본 것도 아니오 기실은 포르노라기보다는 3류 에로영화에 가까운 퀄리티였다는 것, 또한 결과적으로 그 화면들로 인해 자극 받았던 것은 본인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트집잡기를 멈추지 못하는 신주였다. “이 자식이...진짜...” 너 오늘 끝장을 볼... 신주씨 오셨군요. 오늘은 찐빵이네요? 그때 마침 석진이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두 사람의 대립은 극까지 치달아 때 이른 양육권 분쟁에까지 이르렀을지 모른다. 서로에게 자녀교육을 맡겨서는 안되겠다고 굳게 다짐하는 두 사람이었다. ********** 안 자겠다고 버팅기는 쌍둥이들을 간신히 재운 신규가 침실로 돌아왔을 때 선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기야, 막내 도련님 있잖아.” “응? 신주가 왜?” “이건 어디까지나 내 추측인데 말이지, 아냐. 확실해. 적중률 80퍼센트.” “응?” “도련님 여자 생긴 거 같지 않아?” “예?” 예? 여보님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당황하면 나오는 존댓말이 두서 없이 신규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여, 여자라뇨, 신주가요? 여자? 여..여자? 그. 그.그럴리가요.” “도통 여자 사귀는 눈치가 아니어서 혹시 우리 도련님이 동성애자인건 아닐까 걱정했었거든. 그런데 요즘 보니까 누군가 있긴 있는 것 같애. 그래서 슬쩍 떠 봤는데. 글쎄 나보고 태교를 어떻게 했었냐고 묻지 않아? 그리고 언제더라. 보름쯤 되었나. 갑자기 밥 먹다 말고 형수는 인영이, 진영이 가졌을 때 뭐가 제일 드시고 싶으셨어요? 이렇게 묻지 않았어? 자기도 그때 들었지?” 들었습죠. 전 그 때 심장이 터져 버리는 줄 알았습니다... “그때는 그냥 흘려들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이상하잖아. 그치? 자기야, 우리 도련님 속도위반 한 건 아닐까? 어머님에게 말씀드려야 하나? 아니다. 내가 나서긴 좀 그렇지? 아무래도 본인 입으로 듣는 게...” 여...여보님...그게 실은... “어떤 사람일까? 나 너무 궁금한 거 있지? 저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막내 도련님을 넘기다니. 예쁘겠지? 혹시 도련님이 좋아하는 그 탤런트 조찬희 닮...” “여!!!여보님!! 밖에서 무슨 소리 들리는 것 같지 않아요? 도...도둑인가? 강..강도야? 아, 아니다. 우리 왕자님 우는 소리구나!” 진영아, 아빠가 간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거늘 뛰어나가는 신규를 바라보며 선진은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다. 저 사람이 왜 저래? 그나저나 올케라...우후훗 생각만 해도 흐뭇하다. 손아래 올케가 생기면 하고 싶은 일이 많은 김씨 가문 맏며느리 선진이었다. ********** “이게 뭐냐?” 이른 아침부터 들이닥친 신주가 내놓은 2장의 오페라 티켓을 바라보며 찬영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토란도트?’ 이거 그 VIP석이 50만원씩이나 한다는 그거냐? “재작년 상암 월드컵 경기장에서 공연했을 때 바빠서 가지 못했는데 칭찬이 자자하더라구요. 예매가 늦어서 VIP석은 못 구하고 R석입니다.” R석이면 25만원. 2장이니 50만원. 지금 주말 몇 시간의 여흥에 50만원을 날리겠다는 소리야? “저녁 7시 30분 표입니다. 시간이 넉넉하니 예술의 전당에 들려서 전시회도 좀 보고 식사도 하고 그러고 가죠.” 오전 10시에 ‘밀레와 바르비종파 거장전’을 보고 근처 한정식 집에 들러 점심을 먹은 후 다시 예술의 전당으로 돌아가 ‘대영 박물관 한국전’을 관람한 뒤 시간이 남으면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 찰나의 거장전(사진전)’까지 본 후 저녁식사를 한 뒤 세종문화회관으로 향한다. 이것이 신주가 세운 2005 김신주 태교 보완계획이었다. “아, 미안. 나 ‘찰나의 거장전’은 보고 왔는데. 석진이가 표를 얻어 왔길래 지난주에 보고 왔어. 그리고 ‘밀레와 바르비종파 거장전’도 벌써 보고 왔는데. 그 날 시간이 남아서. ‘대영 박물관 한국전’은 나 영국 갔을 때 다 보고 온 건데... 또 봐야 해?” 일그러지는 신주의 표정을 살핀 찬영이 급히 말을 돌린다. “아니다. 아니야. 나 그 때 바빠서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또 봐도 될 것 같다. 내가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좀 좋아하지. 생각하니까 다시 보고 싶네. 미라도 그립고 디오니소스도 너무 그리워.” 억지 춘향격으로 나선 전시회 관람은 최악이었다. 방학을 맞은 초등학생들의 난입과 주말을 맞은 직장인들의 인파, 데이트를 하러 온 커플들과 오랜만에 문화 생활을 즐기러 나온 중년 부부들, 수행평가 과제를 하러 온 중, 고교생들까지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입구에서부터 길게 늘어선 줄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고 내리 쬐는 태양이 불쾌지수를 한껏 높이고 있다. “더우시죠? 가서 양산이라도 사올까요?” 예상을 뛰어넘은 인파에 안절부절못하던 신주가 연신 찬영의 눈치를 살핀다. “양산은 무슨. 아가씨도 아니고. 무슨 구경 낼 일 있냐. 조금만 기다리면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냥 있자.” 돌아가자고 해도 이왕 산 표가 아깝다며 고집을 부리며 버티고 서있는 찬영이었다. 화난 걸까. 화난 걸까. 그래 분명히 화나신 게야. 평일에 다시 오자. 표는 그때 써도 된다더라. 신주가 그렇게 말하려는 순간. “아, 들어간다. 가자.” 입장이 시작되었다. 전시관 안에서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앞뒤로 꽉꽉 들어찬 사람들. 여기 저기서 고개를 디밀어 오는 사람, 발을 밟는 사람, 큰 소리로 떠들며 관람을 방해하는 사람, 영 관심을 보이지 않는 어린 아이들에게 설명을 해주려 애쓰는 부모들. “엄마! 고추!! 왕 고추!!” “아니, 얘가. 부끄럽게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엄마, 저기도 고추! 아빠, 고추가 뭐야? 어머 자기야, 저 조각상(안티노스 반신상, 젊은 나이에 죽은 하드리안 황제의 친구로 미소년의 얼굴을 하고 있다) 꼭 자기 닮았다 그치? 정말. 자기야, 뭐 갖고 싶어? 금반지, 은반지, 자기가 원하는 거 다 훔쳐다 줄게. 깔깔 난 저 크리스탈이 갖고 싶어. 임자, 임자 얼굴이 저 돌(모아이마에아 상)과 똑같이 생겼구랴. 뭐라구욧! 정신 없는 그 광경을 찬영이 빙그레 웃으며 지켜보고 있다. “뭐가 그렇게 즐거우세요?” “아니, 그냥. 너 방금 저 부모들 되게 극성스럽다 그 생각했지?” “예? 아뇨......조금...조금은요.” “우리가 더 극성스러운 거 알고는 있냐? 쟤네들은 그래도 유치원이라도 다니지. 이 녀석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다.” 찬영이 자신의 아랫배를 슬쩍 가리켜 보인다. “그렇네요.” 신주의 얼굴에도 웃음이 번져간다. 그렇다. 이 안에서 가장 극성스러운 부모들은 그와 찬영이었다. ********** 투란도트 공주는 타타르인(人)에 대한 복수를 위해 자신에게 구혼하는 젊은이들에게 세 가지 수수께끼를 내어 풀지 못하면 참수형에 처하였다. 멀리서 투란도트 공주를 지켜보던 칼라프는 공주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아버지 티무르와 그를 사랑하는 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수수께끼에 도전하겠다고 선언한다. 첫번째 수수께끼 공주 : 그것은 어두운 밤을 가르며 무지개 빛으로 날아다니는 환상. 모두가 갈망하는 환상. 그것은 밤마다 새롭게 태어나고 아침이 되면 죽는다. 왕자 : 그것은 ‘희망 (La Sprenza)?? 두 번째 수수께끼 공주 : 불꽃을 닮았으나 불꽃은 아니며, 생명을 잃으면 차가워지고, 정복을 꿈꾸면 타오르고, 그 색은 석양처럼 빨갛다. 왕자 : 그것은 ‘피 (Il Sangue)?? 세 번째 수수께끼 공주 : 그대에게 불을 주며 그 불을 얼게 하는 얼음. 이것이 그대에게 자유를 허락하면 이것은 그대를 노예로 만들고, 이것이 그대를 노예로 인정하면 그대는 왕이 된다. 왕자 : 그것은 바로 당신, ‘투란도트 (Turandot)!?? 모든 수수께끼를 풀었지만 그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투란도트에게 ??새벽녘까지 내 이름을 알아내보시오. 알아맞힌다면 그대의 승리. 원한다면 내가 죽으리다??라고 칼라프는 말한다. 칼라프의 이름을 알아내기 위해 투란도트는 칼라프의 노예 류를 데려다 고문하고 류는 사랑하는 왕자를 위해 스스로 자결해 죽음을 맞는다. ‘얼음에 싸인 당신도 뜨거운 불꽃에 무릎을 꿇고 그 사람을 사랑할 것입니다. 몸도 마음도 지쳐버린 나는, 밤이 새기 전에 이 눈을 감는 것입니다. 그 분이 다시 이기는 것을 보지 않아도 되도록... 다만, 그 때문에 눈을 감는 것입니다.' 칼라프는 투란도트에게 나는 ‘티무르의 아들, 타르타르의 왕자’라고 자신의 이름을 밝힌다. 이윽고 동이 트고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는 칼라프에게 투란도트는 왕자의 이름을 안다고 말하며 몸을 돌려 칼라프의 눈을 응시한 채 그의 이름은 ??사랑??이라고 외친다. '이 젊은이의 이름을 알아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Amor)!' -오페라, 투란도트(Turandot) 공식 홈페이지 인용- 전 3막으로 이루어진 공연은 2시간 30분이라는 긴 시간을 모두 소요하고서야 끝났다. “오늘 고마웠다. 잘 봤어. 정말 멋지더라.” “아뇨. 저야말로. 함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오피스텔 앞에서 내린 찬영이 들어가다 말고 다시 내려와 말을 건다. “있잖아...” “네?” “내일 시간 있냐?” “예?...예.” “좋았어. 그럼 내일 12시에 역 앞에서 보자. 거기 일요일엔 차 대기 힘드니까 차 놓고 나와.” ‘거기’라뇨? “내일은 답례로 조찬영식 ‘오페라’를 보여주지. 기대해라.” 말을 마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입구로 사라져 버린다. 조찬영식 오페라라니 그게 뭐란 말인가. 일요일. 낮 12시. 5번 출구 앞. 청바지에 티셔츠. 가벼운 차림에 한쪽 어깨에 카메라 가방을 멘 찬영이 신주를 기다리고 있다. 신주는 꽤 무거워 보이는 그 가방이 몹시 신경이 쓰였다. “그거 무겁지 않으십니까?” “안 무거워.” “요즘 가볍고 작은 카메라도 많이 나오던데요.” 제가 하나 사드리겠습니다. 차마 그렇게 말은 못하고 신주는 찬영의 눈치만 살핀다. “똑딱이(콤팩트형 디지털 카메라의 속칭)는 영 취향에 맞지 않아서 말이지. 그리고 이거 내 것도 아냐. 석진이가 대학교 때 쓰던 거 빌려온 거야.” “들어드리겠습니다.” “뭘? 이걸?” 니가 지금 이 카메라 가방을 들어준다고 하는 것이냐. 응? 네 눈에 내가 바람불면 픽하고 쓰러질 듯한 아가씨로 보이냐? “뭘 들어준다고?” “그 가방 말입니다. 무거워 보여서요.” “까불지 마라. 학교(조소과 출신) 다닐 때는 몇 십 킬로 짜리 조각도 번쩍 들어 옮기던 나야. ” 내려가자. 영 불만족스런 표정으로 따라오는 신주가 찬영은 못마땅하다. 이까짓 것 들어준다고 설치지 말고 나중에 정말 도움이 필요할 때 도와달란 말이야.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원치 않는 도움은 도움이 아닌 도전으로 받아들이는 찬영이었다. “홍대 2장 주세요.” 홍대라면 꽤 멀지 않은가. 왜 차를 두고 나오라고 했는지 의아스러운 신주다. 입이 비쭉 나온 신주를 무시하고 찬영은 먼저 개찰구를 통과했다. 주말이라 그런지 평일과 달리 지하철 안은 젊은 남녀들과 가족 단위의 승객들로 가득 차 있었다. 빈자리에 생기는 족족 찬영에게 앉으라고 눈짓 해대는 신주를 무시하면서 찬영은 보따리를 머리에 인 할머니에게 자리를 양보한다. 아이구 고마워라. 내 요즘 다리가 아파서 오래 서 있지를 못해. 할머니 어디까지 가세요? 나? 수원. 수원 딸네 다니러가. “여러분, 안녕하심니까~. 목마른~ 사슴이~ 우물을~ 찾듯 저 역시 여러분의 따뜻한 도움을 받기 위해 이 지하철에 올랐슴니다~. 자, 이 공작새 부채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중국 현지 공장에서 생산된 하이 퀄리티의 부채로 원래 한 개에 5천 원 하던 것을 폭탄 세일! 소비자 감사~ 세일! 초 파격가! 천원에 모시고~ 있슴니다~. 자, 뜨거운 여름 더위를 한 순간에 날려 버릴 공작새 부채! 공작새 부채가 단돈 천 원! 천 원!” “자, 여러분 마이클 잭슨, 마이클 잭슨 아시죠? 그리고 마돈나! 마돈나! 아시죠. 라이크 어 버진~ 처녀도 총각도 아저씨도 아줌마도 모두 들어봐! 들어만 봐! 마이클 잭슨, 마돈나, 휘트니 휴스턴, 아이 올웨이즈 러뷰. 웬 다이아 모두 아시죠? 이 희대의 명곡을 모두 모아 CD열 장에 담았습니다. 이 시디 열 장에 아바, 비틀즈, 엘비스 프레슬리 다 들어 있어. 음질도 어찌나 좋은지 들으면 뿅 가.” “내게 강 같은 평화! 내게 강 같은 평화! 내게 강 같은 평화! 넘치네! 할렐루야!” 잡상인의 종류도 걸인의 종류도 다양하다. 대림 역에 닿았을 때에는 갖가지 물건들이 신주의 손에 들려있었다. “그게 다 뭐냐?” “......” 부채에 CD에 만능 볼펜, 교통 카드 커버, 전도 책자 그리고 또 그건 강냉이? 요령이 없는 건지 순진한 건지 바보인 건지 거절을 하지 못해 주는 대로 다 사고 내미는 대로 돈을 쥐어준 신주가 겸연쩍은 표정을 하고 서 있다. “할머니 수원 가신다고 하셨죠? 다음 역에서 갈아 타셔야 해요. 아시죠?” 응응. 내 알어. 신도림. 신도림이지? 네. 갈아 타셔야 해요. 할머니 음악 좋아하세요? 응 음악? 내 송대관이 좋아해. 태진아 하고. 트로트는 아니지만 이거 갖고 가서 들으세요. 더우니까 부채도 부치시고 가시면서 출출하실 테니까 강냉이도 드시구요. 뭘 이렇게 많이 주나. 총각들 먹지. 신도림 다 왔어요. 할머니. 신도림? 어이쿠 내려야지. 안녕히 가세요. 할머니. 응 응 총각들도 잘 가. 잘 살어. “나머지는 니가 알아서 처리해라.” 처음 이미지와는 달리 보면 볼수록 어벙한 놈이다. 이놈. 이거 우리 아기 두뇌 교육에 애로사항이 꽃피는 것 아닐까. ‘이번 역은 홍대 입구, 홍대 입구 역입니다’ “내리자.” 6번 출구를 빠져나오자 후끈 달아오른 땅의 열기가 느껴졌다. 젊은이들로 가득 찬 홍대 거리다. 우선 점심부터 먹자. 라면 좋아해? 찬영이 앞서가며 묻는다. “라면이요?” 갑자기 웬 라면. 화학 스프가 잔뜩 들어간 몸에도 안 좋은 것을. 의아한 표정을 한 신주에게 찬영이 재차 묻는다. “인스턴트 라면말고 생 라면. 굳이 따지자면 ‘라멘(ラ－メン)’이라고 해야 하나? 일본 라면 먹어 봤어?” “아니요.” “그게 돼지 뼈를 우린 국물을 쓰는 거라서 냄새가 좀 강하거든. 청국장이나 그런 냄새 심한 것 못 먹냐?” “아뇨. 가리는 것 없습니다.” 잘 됐네. 그럼 그걸 먹자. 말을 마친 찬영이 성큼성큼 앞서간다. 홍대 정문을 지나 극동방송국 쪽으로 향하더니 일방통행 표시가 그려진 골목 안으로 이끈다. “들어가자.” ‘하카타 문고(博多文庫)’ 라고 쓰여진 간판이 신주를 맞이하고 있다. 문고? 서점? 어리둥절한 신주를 내버려두고 찬영은 서슴없이 문을 열고 들어간다. “이럇샤이~마세!(いらっしゃいませ)” “이럇샤이~!(いらっしゃい!)” “이럇샤이~마세~!” 일본어? 여러 명이 동시에 외치는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다. 앉아라. 먼저 테이블에 앉은 찬영이 신주를 재촉한다. 메뉴판도 없이 벽에 흰 종이로 ‘청라면’ , ‘인라면’ , ‘차슈 덮밥’ , ‘사리’ , ‘공기밥’ 이라고만 크게 쓰여있다. “인라면은 국물이 진하고 청라면은 조금 순해. 넌 처음이니까 청라면 먹어라. 여기 청라면하나, 인라면 하나에 차슈 덮밥 하나 주세요.” 제멋대로 주문을 마친 찬영이 그제서야 신주를 향해 돌아앉는다. “돈코츠라는 건 돼지 돈에 뼈 골자를 써서 돈골, 일본 발음으로 돈코츠, 돼지 뼈를 우려낸 라면이라는 뜻이야. 차슈 라는 건 돼지고기 수육 같은 거고. 아무튼 중요한 건 맛이 끝내준다는 거지.” 그렇습니까. “또 하나 끝내주는 게 저 오빠들이지. 후훗” 찬영의 시선이 다시 세 명의 청년들에게로 향한다. “땀에 절어 일하고 있는 저 섹시한 모습을 보면 덮치고 싶어지지 않냐?”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눈을 부릅뜬 신주가 청년들을 노려본다. 흰 수건을 머리에 둘러 묶고 또 목에 걸친 청년들이 분주히 면을 삶고 국물을 따르고 있었다. “하이, 돈코츠 오마치! (はい！豚骨お待ち)” “챠슈~ 오마치!” 음식도 평범하게 갖다 주지 않는다. 뭐라 하는 건지 통 알아들을 수 없는 신주는 사약 받는 심정으로 자신 앞에 놓인 라면 그릇을 노려보았다. “먹어라. 맛있다.” 바닥이 넓은 플라스틱 수저를 들고 한 입, 입에 넣어보니 돼지고기 특유의 진한 냄새가 입안 가득 퍼진다. 고개를 찡그린 신주의 표정을 찬영이 가만히 쳐다보고 있다. “안 맞으면 먹지 마. 내가 다 먹을 테니.” 아뇨, 괜찮습니다. 먹을 만 하네요. 한 입, 두 입 더 떠 넣어보니 깊고 구수한 맛이 느껴지는 듯도 하다. 먹다 보니 맛있다. 이거. 젓가락을 입으로 옮기는 손길이 빨라지자 숙제 검사를 받는 심정으로 신주를 지켜보던 찬영의 표정이 그제서야 활짝 풀린다. “맛있냐?” 대답은 하고 먹어라. 이놈아. 잘 먹었습니다. 계산을 하려고 일어나는 신주를 찬영이 제지한다. 오늘은 내가 다 살테니까 넌 가만있어. 다 합쳐도 어제 표 한 장 값도 안되겠지만 그래도 답례다. 어느새 손님으로 가득 찬 라면 집을 빠져나오자 시계가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밥도 먹었으니 이제 가볼까. 따라 와. 찬영의 발길이 다시 성큼 성큼 앞을 향한다. “산책도 할 겸 천천히 걷자.” 횡단보도를 건너 주차장 골목(홍대 럭셔리 수 노래방 근처 진입로로 통칭 ‘주차장 골목’으로 통한다)으로 내려온 찬영이 카메라를 꺼내들고 늘어선 상점가-옷가게, 음식점, 노래방, 커피숍-를 찍기 시작한다.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신주의 시선을 눈치 챈 찬영이 말을 해온다. “연습하는 거야. 이따가 아는 녀석들 찍어주기로 했거든. 원래 석진이가 찍어주기로 했는데 일이 있어서 못 왔어. 나라도 카메라 들고 찍어주는 시늉이라도 해야지 어쩌겠냐.” 한참을 이곳 저곳을 찍어대더니 갑자기 어정쩡하게 서 있는 신주에게로 카메라 렌즈를 향한다. “잘 됐다. 네가 연습 상대 좀 되어 줘. 자 웃어! 스마일!” 예? 웃으라고요?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훤한 낮에 난데없는 카메라 플래쉬 세례를 받게 된 신주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선다. “어딜 도망가. 웃으라니까!” 사진이라니, 봄, 가을 소풍, 수학여행 때의 단체사진 그리고 졸업 사진 외에는 찍혀본 경험조차 없다. 가족사진을 찍을 때조차 굳어 있어 형수 선진에게 한동안 놀림을 당했던 신주다. 시선을 피하려 애쓰는 신주를 쫓아가며 찬영은 끈질기게 셔터를 눌러댄다. 사진 찍기가 취미였던 아버지 밑에서 자라 카메라가 두렵지 않은 찬영에게는 신주의 반응이 신선하고 또 재미있었다. 지나가는 행인에게 부탁해 투 샷도 찍어본다. 어색하기 그지없는 신주의 표정과 장난끼 가득한 찬영의 웃음이 묘한 대조를 이룬다. ********** 훤칠하게 잘 생긴 남자 두 명이 거리와 근접한 노천 까페 의자에 앉아 유유자적 오렌지 주스를 마시고 있다는 것은 무척이나 주위의 시선을 끄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모델인가봐, 탤런트 아냐? 나 어디서 본 것 같아. 수런대며 지나가는 여자들을 향해 찬영은 지극히 왕자스러운 태도로 한 손을 흔들어 보인다. (탤런트 조찬희의 도도함과 특유의 여왕 기질은 집안 내력이었다) 뜨악한 표정으로 찬영을 쳐다보는 신주를 향해 찬영은 찰칵 하고 또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그만 찍으세요. 좀.” 이거 필름 다 되어서 갈아 끼우려고 그런 거야. 가방에서 새 필름 통을 꺼낸 찬영이 뚜껑을 열어 필름을 교환한 뒤 빈 셔터를 눌러 촤르륵 살짝 감아 놓는다. “요즘은 디지털 카메라도 필름 카메라 못지 않는다고 하지만 난 왠지 필카가 좋더라구. 정감 있고 적당히 신비스럽고. 현상될 때까지 기다리는 즐거움도 있고.” “의외네요. 찬영씨. 기다리는 건 싫어하시는 성격일줄 알았는데.” “나? 내가 이래봬도 기다릴만한 가치가 있는 일에는 엄청 인내심을 발휘하는 사람이라구. 그러는 너야말로 의외다. 잡상인 하는 말 따윈 듣지도 않고 무시할 것 같았는데. 의외로 순둥이잖아.” 순둥이라뇨. 발끈하는 신주를 향해 실실 웃기만 하던 찬영이 잠시 후 정색하고 다시 말을 이어 나간다. “생각해 봤는데. 너와 내가 함께 만든 아기인 이상 아이 인생에서 너를 배제할 수도 없는 거고 앞으로 이렇게 함께 해야 할 시간들이 많겠지?” 배제하면 가만있지 않겠다. 얼굴에 그렇게 쓰여 있구만. 배제 안 할 테니까 안심하라고. “그래서 말인데. 네가 딱 두 가지만 지켜 줬으면 좋겠어.” “두 가지라면?” “첫째, 앞으로 절대 내 앞에서 돈 가지고 유세 부리지 마. 그 날 나 무척 기분 나빴다. 아기 일이 아니었다면 나 평생 너 안 보고 살아갔을 거야.” 그러니까 그 일은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둘째, 내가 먼저 부탁하기 전에는 절대 내 일에 끼어 들려 하지마. 섣불리 참견하려 드는 것 딱 질색이야.” 참견과 배려의 경계는 어디에서 그어야 하는가. 신주는 알 수 없었다. 더도 말도 덜도 말고 딱 본인이 필요한 만큼만 주고받겠다는 찬영의 태도에 신주는 씁쓸함을 느꼈다. “내가 원하는 건 이 두 가지가 전부야. 너도 내게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해.” 저는요, 찬영씨. 찬영씨가 제게 기대줬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차갑게 거리 긋지 말고요. “없습니다. 그런 거.” “그래? 혹시 앞으로도 생각나면 말해. 나도 딱 두 가지까지는 들어줄게.” 나가자. 6시 반이네. 공연 시작할 때 다 됐다. 말을 마친 찬영이 신주를 또 어디론가 이끈다. 이번엔 한적한 빌딩 지하로 내려간다. 계단을 반쯤 내려가자 층계참에 줄을 지어 앉아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인다. 그 사람들 중 하나가 일어나 찬영에게 다가온다. “조! 웬일이야! 우리 공연하는 거 알고 왔어?” 험상궂게 생긴 그의 포옹을 받은 찬영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의 등을 두드린다. “오라고 문자까지 보내놓고 무슨 소리야. 보내놓고 까먹었냐?” “하하, 그랬었나. 그래도 진짜로 올 줄은 몰랐지. 석진이는? 같이 안 오고?” “그 자식 오늘 일해. 대신 내가 카메라 들고 왔으니 죽이게 찍어주마.” “네 실력을 어떻게 믿냐. MT때 너한테 카메라 맡기면 다 흔들리고 핀트 나가고 심령사진처럼 찍어 놨으면서.” “언제 적 얘길 하는 거냐. 나 그 뒤로 많이 늘었다. 석진이도 이제 나보고 하산하랬어.” “포기하라고 하산시킨 게 아니고? 아 그런데 이 분은 누구셔?” 레이저빔처럼 쏟아져 나오는 신주의 시선을 느낀 남자가 그제서야 포옹을 풀고 아는 척을 한다. “김신주라고 나보다 나이는 한 살 어리지만 뭐, 친구라고 볼 수 있지. 내 친구려니 해.” 친구면 친구고 아니면 아니지 친구려니 해는 뭡니까. “잘 생기셨네요. 전 잘생기신 분을 보면 괜히 친밀감이 느껴지더라구요. 하하하. 인디 록 밴드 ‘삼다수’를 이끌고 있는 최기현이라고 합니다. 제가 제주도 출신이라서요. 하하하.” 그다지 우습지도 않은데 끊임없이 웃어댄다. 그 손 좀 떼시지. 찬영씨 어깨에 손은 왜 놓고 있는 것이냐. “이게 누구야? 조찬영 아냐. 너 임마. 이게 얼마만이야. 안 죽고 살아 있었네?” 계단 위에서 나타난 또 한 명의 남자가 대경실색하며 달려온다. 이놈은 한술 더 떠 찬영의 목에 헤드락을 걸고 머리를 때리기까지 한다. 이 놈! 임산부에게 무슨 짓이냐! 신주의 분노를 아는지 모르는지 찬영은 그저 옛 친구들과의 회포풀기에 정신이 없다. 신주가 몇 번이나 어색한 헛기침을 하고 나서야 친구들과 떨어진 찬영이 신주에게 다가온다. “공연 잘 해라. 실수하면 마구 비웃어 줄 테니까.” “너야말로 이번에도 심령 사진 찍으면 다음부터 입장 안 시켜줄 줄 알아라.” 이름도 생소한 몇 개의 밴드가 공연을 마치고서야 ‘삼다수’밴드의 차례가 다가왔다. 여기 저기서 환호성과 휘파람 소리가 들려오는 걸 보니 이 근방에서는 꽤 알려진 밴드인 모양이다. 귓전을 울려대는 드럼소리와 함께 공연이 시작되었다. 드럼을 두드려대는 남자가 처음 인사했던 최기현이고 보컬을 맡은 남자가 두 번째로 아는 척을 해왔던 유진영이다. 양 옆에서 일렉트릭 기타를 연주하고 있는 두 명의 남자 역시 찬영의 친구인 모양이다. 연신 손을 흔들어 주고 있는 찬영을 신주는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보았다. ********** “어땠냐?” “네?” “공연 나쁘지 않았지? 어제 보았던 오페라하고는 규모도 다르고 수준도 다르고 인지도도 다르지만 저 녀석들 열정 하나만은 세계적인 오페라와 비교해서 뒤지지 않는다. 네가 좋아하는 클래식도 만들어진 당시에는 인정받지 못하는 유행가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몰라. 그래도 세월이 흘러 지금은 고전으로 대접받고 있잖아. 언젠가 저 녀석들의 노래도, 내가 듣던 노래도 고전이 되어 세계적으로 재평가 받을 날이 올 것이라고 믿는다. 이걸 말해주고 싶어서 널 여기까지 데려왔다.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 찬영이 왜 자신을 이곳까지 데려왔는지 진작부터 눈치채고 있던 신주였다. 조찬영이란 남자는 참 얄궂은 데가 있다. “물론, 어제 네가 보여준 공연도 정말 좋았다. 나 감동 받았어. 여전히 비싼 가격이라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뭐 무대 장치며, 캐스팅이며 엄청난 돈이 들어갔을 테니까. 참, 전시회도 좋았다. 재미있었어. 나 앞으로 네가 권해주는 음악도 들을게. 이러면 됐지?” 찬영씨 혼자서만 이렇게 나오는 게 어딨습니까. 머쓱해진 신주가 자신도 오늘 공연 잘 봤다. 노래 좋더라. 이렇게 말을 하려고 하던 참이었다. “찬영아~~~~~!” “조찬영~~!” “조!!!!!!” “조 바람!” 공연을 끝낸 ‘삼다수’ 멤버들이 찬영을 부르며 돌진해 오고 있었다. 그 중 유독 키가 컸던 보컬 녀석이 제일 먼저 도착해 끌어안는가 싶더니...싶더니.. “흐으음!!!! 읍!!!!!” 그대로 딥 키스를 실행하는 게 아닌가. 전광석화의 속도로 둘을 떼어낸 신주가 보컬의 얼굴에 주먹을 날린다. 당황한 찬영과 기현이 간신히 진영에게서 신주를 떼어놓는다. “야, 임마. 무슨 짓이야. 왜 애를 때리고 그래.” 신주를 계단 위로 끌고 올라간 찬영이 화를 내기 시작한다. “찬영씨에게 몹쓸 짓을 하지 않았습니까.” “쟤들 다 내 친구고 어렸을 때부터 알던 녀석들이고 가족이고 피붙이 같은 애들이야.” “가족끼리 키스를 하나요? 찬영씨 저 사람이랑 부부에요?” “왜 오바하고 그래. 친한 친구끼리 그럴 수도 있지. 공연 잘 되어서 기분 좋아서 그런 거잖아. 넌 술 마시다 그런 적 없어?” “없습니다. 저는요. 친구 사이에 그런 일 하지 않아요.” 이 꽉 막힌 놈 같으니. “아까 했던 말 정정하겠습니다. 저 찬영씨에게 바라는 것 있어요.” 뭔데, 말해 봐라 이놈아. “앞으로 6개월 간 태교에만 충실해 주십시오. 다른 남자와 접촉, 키스 안됩니다.” “그러니까 아까 그건 그런 게 아니었다니깐.” “우정이든 뭐든 안됩니다. 절대로 안 되요. 약속해 주십시오.” 이...이 녀석이...날 보고 말라죽으란 말이야? “그런 게 어디 있어. 똑같이 저질렀는데 너는 즐기고 나는 못 즐겨?” “물론 저도 금욕하겠습니다. 찬영씨랑 똑같이. 6 개월 간. 다른 남자들 만나지 않겠습니다. 약속 못하십니까?” 겨우 6개월인데? 신주가 그렇게 덧붙이는 듯 해 찬영의 오기가 끓어오른다. “알았어! 알았다고! 그렇게 해! 너도 다른 놈 만나면 죽을 줄 알아!” 계약 성립. 그렇게 동서 양쪽으로 불던 바람은 이날을 계기로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린다. 제 6 편 < First? First! /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죠? > “찬영이 형, 요즘 살찐 것 같아요.” 가만 찬영의 눈치를 살피고 있던 인우가 결심한 듯 눈을 꼭 감고 던진 한마디였다. “그냐(그렇냐)? 나 배도 나왔는데.” 그러나 시큰둥하게 대답하며 여전히 시선을 읽고 있던 책으로 돌리는 찬영이다. 용기를 내어 던진 말에 찬영이 별 반응이 없자 인우는 금새 울상이 된다. 형, 정말 똥배 나왔어요? 입 속의 사탕을 우물거리던 정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찬영에게 묻는다. “그렇다. 어쩔래? 남의 똥배 신경 쓰지 말고 네 똥배나 신경 쓰시지.” 역시 막대사탕을 우물거리며 대답하는 찬영이다. 찬영이 ‘앞으로 내 앞에서 담배 피면 죽음이다. 나 없는 자리에서 피우도록. 자 이제 모두 담배 대신 사탕을 빤다. 실시!’라고 선언한 이래 정수와 인우 역시 울며 겨자 먹기로 사탕을 먹고 있었다. 지환에게도 권했으나 기가 막히다는 듯 노려보는 시선만 돌아올 뿐이었다. 그래도 찬영 앞에서의 담배는 자제하는 듯한 눈치이니 절반의 성공을 거둔 셈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형. 이건 똥배가 아니라 근육이라니까요.” “무슨 근육이 그리 흐물흐물하냐. 에어백이냐.” 형, 한번 만져봐도 돼요? 미쳤어? 니가 내 배를 왜 만져. 저리 안갓! 까불다 급기야 한 대 맞고 마는 정수를 바라보며 인우는 어떻게 하면 찬영을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릴 수 있을까 깊은 고민에 빠졌다. 사람이 바뀌어도 이렇게 바뀔 수 있을까. 천하의 조찬영이 금주, 금연에 이어 남자까지 끊다니. 아무리 귀엽고 예쁘게 생긴 뉴 페이스가 접근해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무슨 이상한 종교단체에라도 빠진 건 아닐까. 인우는 의심해본다. 파트너 체인지를 그만둔 것은 환영할 일이지만(쉽게 함락되지 않는 그 모습이 멋지다며 추종자가 늘어 결과적으로는 인우의 신경을 더 쓰이게 하고 있지만) 담배를 끊다니. 세상에서 가장 섹시하게 담배를 피우는 그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말인가. 담배 한 대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인 뒤 눈을 감고 한 모금 빨아들이고 다시 입술을 벌려 천천히 내뱉는다. ‘아...살 것 같아’ 그렇게 속삭인 뒤 생긋 웃으며 다시 눈을 감고 음미하는 그 요염한 모습을 볼 수 없다니 인우는 그것이 안타까웠다. 그 모습이 보고 싶어 찬영의 단골 담배가 자신의 취향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늘 한 갑씩 사서 휴대하고 있지 않았는가. 인우가 그렇게 말하자 정수는 ‘네가 몰라서 그렇지 막대사탕 쪽이 더 섹시하다’ 라는 의견을 내세웠지만 여전히 사탕보다는 담배가 백 배 더 섹시하다고 생각하는 인우였다. 바뀐 것은 기호식품 선호도뿐만이 아니었다. 요즘은 옷 스타일도 바뀌어 늘 캐주얼이다. 오늘은 연회색 카고 팬츠에 헐렁한 검정 색 민 소매 후드 티셔츠를 입고 왔다. 10살은 어려보이세요. 형. 꼭 고등학생 같아요 라고 지나친 아부를 하다가 볼 꼬집힘을 당한 정수와 달리 인우는 스타일리시한 셔츠에 세미 정장 바지를 받쳐입던 예전의 찬영의 모습이 못내 그리웠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변화는 눈에 가시 같은 동 바람 김신주와 격의 없이 지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 이놈이랑 친하게 지내기로 했다. 앞으로 내 친구려니 해.’ 그렇게 선언한 이래 이틀에 한번 꼴은 김신주와 함께 나타난다. 지구가 멸망하려나 두려움에 떨었던 바의 사람들도 이제는 적응이 된 듯 둘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아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고 있다. 그리고 살이 뽀얗게 오르기 시작한 것도 그렇다. 눈에 띄게 수척해가던 몇 달 전의 모습과 달리 찬영이 어느새 상큼한 바디라인을 되찾은 것은 환영할 일이다. 그에 더해 피부도 반짝반짝, 머릿결도 살랑살랑...그래, 그것까지는 좋다 이거야. 그러나 저 살, 아기처럼 뽀얗게 오르고 있는 볼 살...저것이 다 그 망할 놈의 김신주가 물어다 오는 먹을 것을 먹고 찐 살이 아닌가. ‘저놈은 우리 모두의 적이다!’라며 광분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적이 주는 음식을 받아먹으며 행복해 하다니...형 왜 이렇게 되신 거에요. 동서고금, 인간과 금수를 막론하고 수컷이 제가 먹지도 않을 먹이를 물어오는 것에는 단 두 가지 이유밖에 없다. 구애(求愛)와 자녀양육. 설마 두 번째 이유일리도 없으니 저것은 명백한 구애행위가 아닌가. 그런 사심이 들어간 음식을 먹고 배탈도 안 나세요? 형? 어느덧 진실에 접근해가고 있으나 스스로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인우는 신주의 험담을 함으로써 음식에 눈 먼 찬영의 눈을 틔어보고자 애썼다. “찬영이 형, 제가 들었는데요.” “응? 뭘?” “김신주 대학 후배를 만났거든요. 엊그제.” “그런데?” “소문이 아주 장난이 아니더라구요. 글쎄.” “무슨 소문?” “남자 관계가 장난 아니게 복잡했대요. 여자 관계도. 그 대학에서 김신주랑 안 잔 사람이 없었다잖아요.” 물론 거짓말이다. “그래서?” “그리고 성격도 엄청 차갑고 비열해서, 다들 이용만 당하고 울며 버림받았다잖아요. 양다리는 물론이고요, 삼다리, 사다리 오다리...” “한인우.” “육다...네. 형” “듣고 싶지 않으니까 그만 하자. 없는 자리에서 남의 험담 듣는 것 기분 좋지 않아.” “그래도 형...” “그리고 내가 아는 한 김신주 그런 짓 할 녀석 아니야. 소문은 소문일 뿐이지.” 네가 감히 내 앞에서 우리 아기 아버지 욕을 해? 애가 듣고 있거늘. 그리고 김신주가 네 친구야? 나이도 어린것이 왜 이름을 막 불러. 신주에 대한 시기에 눈이 멀어 마구 험담을 해 대던 지난날의 자신은 생각도 못하고 인우를 꾸짖는 찬영이었다. 그 모습은 마치 신나게 남편 욕을 하다가도 상대방이 맞장구쳐 주면 오히려 발끈하여 화를 내고 마는 새댁의 모습을 닮아 있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때마침 도넛 상자를 한 손에 든 김신주가 나머지 한 손으로 바의 문을 조용히 열고 들어온다. 찬영이 요즘 맛 들린 크리스피크림 도넛이다. “드세요. 찬영씨. 따끈따끈해요. 인우씨랑 정수씨도 같이 드시죠.” “그래, 너희들도 먹어라. 이게 은근히 맛있더라고. 중독성이 있는 것이...” 시럽이 잔뜩 얹힌 도넛 하나를 벌써 해치운 찬영이 두 개째의 도넛을 집어들고 인우에게 권한다. 도리도리. 나만이라도 절개를 지키며 적이 주는 음식물은 받지 않겠다라고 결심한 인우가 고개를 내젓는다. 어린 시절 외할머니 손에서 자라 ‘고무신 한 짝이라도 받으면 그 양반에게 표(투표)를 하는 것이 도리지’라고 귀에 못 박히도록 들어온 인우다. “형, 그거 하나에 200칼로리래요.” 그런 거 일일이 따지면 어떻게 먹고 사냐 그래. 이야, 우유랑 먹으니까 더 맛있다. 찬영씨, 여기. 신주가 검지로 자신의 입가를 가리킨다. 응? 손등으로 닦아내는 찬영을 제어한 신주가 제 손가락으로 조심히 찬영의 입가에 묻은 초코 가루를 털어 낸다. ********** 1시간 전. “여기가 ‘토탈 이클립스’야?” “그래. 여기. 여기가 그렇게 물이 좋대.” 조오았어. 내 오늘 대어를 낚아 보이겠어. 가리봉 섹시 킹 이우섭. 나 오늘 강남 진출한다. 우섭의 어깨에 힘이 바짝 들어간다. 부천과 부평, 그리고 구로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자칭 ‘전설의 구로 보이즈’ 우섭과 창훈이 각자 풍운의 꿈(퀴어 애즈 포크의 저스틴과 브라이언이 되어 보이겠다는 원대한 꿈)을 품에 안고 압구정에 도착한 것이다. “여기 조찬희 남동생도 단골이래.” “남동생이 단골이면 무슨 소용이야. 조찬희가 단골이어야지.” “우린 게이잖아. 임마. 조찬희 얼굴에 성전환이면 그게 더 좋지 않아?” “그런가? 김태희 남동생은 안 온대?” 바쁘게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는 우섭과 창훈에게 메뉴 판을 든 인우가 다가온다. 우와, 알바생도 진짜 귀엽게 생겼어. 저기 바텐더도 잘 생겼어. 역시 물이 다르네. 달라. “주문하시겠습니까?” “‘버진 키스’ 주세요.‘ “난 ‘섹스 온 더 비치’.” 이글거리는 눈빛을 날리는 우섭과 창훈이다. 노골적인 추파를 받은 인우의 얼굴이 잠시 경련으로 흔들리더니 곧 평상심을 되찾는다. 알바생 경력 2년. 한인우는 프로다. “‘버진 키스’. ‘섹스 온 더 비치’ 나왔습니다. 좋은 시간 되십시오.” 서빙을 마치고 돌아가려는 인우를 우섭이 붙잡는다. “저...잠시만요.” “네. 손님.” “여기 조찬희 남동생이 자주 온다면서요. 누구에요? 오늘 왔어요?” “예?” 인우의 표정이 살풋 찌그려진다. 이런 사람들이 종종 있다. ‘연예인 누구누구’를 보러 온다던지 하는. 그 중에서는 이 두 사람들처럼 톱 탤런트 조찬희의 남동생인 찬영을 보러 오는 부류도 간혹 있었다. “그런 사람 없습니다.” 싸늘하게 대꾸를 날린 인우가 우섭의 팔을 뿌리치고 사라진다. 민망해진 우섭이 괜히 창훈에게 화풀이를 해댄다. “새끼야, 없다잖아!” 왜 욕을 하고 그래. 임마. 이상하다...분명 여기라고 그랬는데. 창훈 역시 머쓱해져 머리만 긁적인다. 없으면 할 수 없지 뭐. 여기 킹카 많은데 천천히 골라잡자구. “나, 한 놈 찍었다.” 한참을 두리번거리던 우섭의 눈에서 드디어 별이 반짝인다. “누구?” 저기, 바에 앉아있는 애. 사탕 먹는. 파트너도 없는 것 같아. 혼자 앉아있잖아. “이 형님. 다녀온다. 건투를 빌어라.” 옷매무새를 다듬은 우섭이 발걸음도 당당하게 길을 나선다. 부디 이기고(?) 돌아오시옵소서. 창훈은 그런 친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진심으로 그의 첫 사냥 무사성공을 빌었다. “저기...” 못 들었나 보다. 우섭은 용기를 내어 그가 읽고 있는 책 가장자리를 두드렸다. “저기요.” 누구? 나? 찬영이 천천히 고개를 든다. 이 놈은 또 뭐야. “실례가 안 된다면 옆자리에 좀 앉아도 될까요?” 리마리오도 울고 갈 버터 바른 목소리로 우섭은 회심의 대사를 날렸다. 이 대사 한마디면 부천, 부평, 구로 통틀어 안 넘어오는 녀석이 없다. “그러시죠.” 옳다커니. 너도 넘어오는 구나...가 아니었다. 관심 없다는 듯 다시 읽던 책으로 시선을 돌리는 찬영이 아닌가. 튕기는 걸까. 귀엽구나. “독서를 좋아하시나 봐요. 무슨 책 읽고 계세요?” 큐트에 지적이기까지. 너 오늘 딱 걸렸어. 기념할만한 압구정에서의 초야를 너와 함께 보내기로 이 형님 방금 결심했다. 어린 녀석이 꽤나 심심한가 보구나. 찬영은 무심히 책을 들어올려 표지를 우섭에게 보여준다. “어린 왕자?...아아... 어린 왕자. 참 좋은 책이죠. 생떽쥐베리를 좋아하시나 봐요?” 어린 왕자 이 녀석. 참 오지랖이 넓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참이다. 신주 이놈은 이게 뭐 그리 감동적이라고 꼭 읽어야 한다고 강조를 했던 것일까. 뱃속의 아기도 졸고 있지 않은가. “아뇨...별로. 재미없네요.” 그리고 이어지는 침묵. 이쯤에서 뭔가 호감 있는 반응-미소라던가 고개 끄덕임, 눈웃음-이 돌아와야 하는데 영 마뜩찮다. 역시 높은 레벨만큼이나 호락호락하지 않구나. 우섭의 투지에 불이 붙는다. 너 오늘 내가 꼭 자빠뜨린다. 어떻게 해야 잘 꼬셔서 밖으로 데리고 나갈 수 있을까. 술이라도 먹일까. 아 그렇다 술. 친목도모를 위한 우리들의 필수품. 술이 몇 잔 들어가면 저 탐스러운 볼에도 화색이 돌고 경계심도 봄눈 녹듯 녹아내려 스스로 앵겨오지 않을까. “혼자신가 봐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제가 한잔 사드려도 될까요?” “술 안마십니다.” 설마 이 어린 녀석이 자신에게 작업을 걸고 있으랴. 그것도 어디서 팔팔년도 서울 올림픽 시절 구닥다리 멘트를. 그렇게 지레짐작하는 찬영이었다. 보아하니 솜털 보송보송한 것이 척 봐도 갓 스물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다. 그저 무료함을 달래려 기차 옆 좌석에 앉은 이에게 인사를 하듯 그렇게 말을 걸어오고 있는 것이겠지...라는 찬영의 생각과는 달리 우섭은 제 멋대로 찬영을 그의 ‘저스틴’으로 규정짓고 머릿속에서 A단계, B단계, C단계를 넘어 Z단계까지 진행시키고 있는 중이다. 옷 입은 것도 비슷하구려. 나의 저스틴. “보기 드물게 순수한 영혼을 지니셨군요.” 쨍그랑. 이때, 본의 아니게 그들의 대화를 엿듣게 된 ‘토탈 이클립스’의 메인 바텐더 강지환 (26세)은 충격을 이기지 못해 바텐더 생활 19개월만에 처음으로 유리잔을 바닥에 떨어뜨리는 대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지환아, 괜찮아?” 사람들의 이목이 쏠리고 서빙 중이던 정수가 달려온다. 바닥에 떨어진 유리조각을 수습하던 지환의 시선이 놀란 토끼눈이 되어 내려다보고 있는 찬영의 시선과 만난다. 이 인간은 요즘 들어 왜 이렇게 어려 보이는 건데. 순진한 애들 헷갈리게 후드 티 같은 거 입고 바에서 사탕 빨고 있지 말고 늘 하던 대로 한 놈 꼬셔서 후딱 밖으로 나가버리란 말입니다. “강지환. 이 형 애 떨어질 뻔했다. 손 안 다쳤냐?” “괜찮습니다.” 찬영의 ‘형’발언에 우섭이 희껍하며 놀란다. 기껏해야 자신의 나이 또래이려니 생각했는데 바텐더보다 나이가 많단 말이야? 저 바텐더는 아무리 봐도 스물 다섯 아래로는 안 보이거늘. 그럼 도대체 나이를 몇 개나 잡수셨단 말인가... 뭐 연상도 좋다. 아래, 위로 플러스 마이너스 다섯 살까지는 커버할 자신이 있는 우섭이었다. “바텐더가 조심성이 없군요. 분위기도 그런데 어디 다른 데로 갈까요?” 어서 바삐 모텔로 가서 서로의 입술 사이즈 및 상세 바디사이즈를 맞춰 보는 것은 어떨까요. 그렇게 말을 이으려고 했는데... 듣고 있지 않다. 하필이면 비싼 컵을 깼네. 웃기시네. 지난번에 자네가 깬 것이 더 비싸다네. 인우와 정수가 몰려들어 호들갑을 떨고 있는 와중, 찬영은 지환 손의 상처를 살피고 있었다. 혹시 저 바텐더와 내연의 관계? 바텐더 눈빛이 매서워 보이는데 괜히 집적거렸다 한 대 맞는 건 아닐까. 두려워진 우섭은 슬며시 1보 후퇴(찬영의 옆자리에서 옆옆 자리로 옮기는 소심한 이사)를 감행한다. “형 어디가요?” “나 잠깐. 화장실.” 잠시 자리를 비우는 찬영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못내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던 우섭은 정공법-당사자에게 직접 물어보기-을 택하기로 한다. “저기요...” “네, 손님.” 어느새 수습을 마친 지환이 정중한 태도로 대답을 해 온다. 새끼, 만만치 않을 것 같다...그리 생각하면서도 우섭은 다시 용기를 내본다. “저 분 있잖아요. 방금 화장실 가신...” “찬영 선배요?” “아, 이름이 찬영이었군요. 저...혹시 찬영씨와 사귀는 사이세요?” “예?” 컵 하나를 더 깨뜨릴 뻔한 지환이다. 내가 어딜 봐서 찬영 선배와 사귀는 사이라는 거냐. 이건 나에 대한 도전이야. 그리 생각한 지환이 눈을 부릅뜬다. “아닙니다. 단순한 선, 후배에요.” “아...그렇군요. 저... 찬영씨 현재 특정 파트너 있을까요?” “그런 건 본인한테 직접 물으시죠.” 이 사람이고 저 사람이고 다 조찬영, 조찬영. 저 뺀질이 어디가 좋다고 다 이들 난리인 거냐. 찬영 선배도 그렇다. 바람둥이면 바람둥이답게 하던 대로 놀 일이지 왜 빈틈을 보여서 사람들 마음을 심란하게 만드는 것이냐. 보라고. ‘날 먹어 보아요’ 페로몬을 풀풀 풍기고 있지 않은가. “하하. 그렇네요. 그런 건 본인에게 물어봐야죠.” 일단 바텐더와는 아무 사이 아닌 것 확인. 의기양양해진 우섭이 찬영의 뒤를 따른다. 정말 물어보려는 것이냐. 그러다 무슨 일 당해도 나는 모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환이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는다. 문소리에 고개를 드니 좀 전 말을 걸어오던 옆자리 풋내기 녀석이다. 가볍게 목례를 한 찬영이 다시 나가려는 순간. “나 어때?” 그만 손목을 잡혀 벽에 밀쳐지고 만다. 이건 무슨 시츄에이션? “나 어때요? 찬영씨? 아, 찬영씨 이름은 바텐더한테 들었어요. 찬영씨라고 불러도 되죠?” 나름 박력 있는 자신의 행동에 뿌듯함을 느낀 우섭이 몸을 더욱 밀착시켜 온다. 애초에 타겟으로 노리던 것은 조찬희 남동생이었지만 찬영도 꽤 괜찮다. 그리고 어딘가 모르게 조찬희와 꽤 닮은 듯 하다. 저 노려보는 시선이 꼭 과거 청춘 시트콤 ‘넌, 스탑’ 출연당시의 조찬희(당시 불량소녀 역)를 보는 듯하다. 후후후 뿌듯해 하는 우섭의 생각과는 달리 이 상황은 객관적으로 볼 때 꽤 우스꽝스러운 데가 있었다. 무엇보다 찬영보다 우섭의 키가 더 작았기에 제압이라기보다는 매달린 형국. 박력이라곤 쥐뿔도 없다. 너라고 부를게. 뭐라고 하든지 남자로 느끼도록 꽉 안아줄... -내 남자라니까- “으아아아아!!” 찬영의 손에 중심을 잡힌 우섭이 비명을 질러댄다. “뭐라고? 이놈아? 찬영씨? 하. 기가 막혀. 찬영씨이? 너 임마 몇 살이야! 몇 살이나 먹었어? 응?” “아야야야야야......스...스...스물 한...살이요오...” “아우! 진짜! 요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게 어디서 좆을 세우고! 당장 힘 못 빼?” 용서하세요오오 형니이임~ 눈물 쏙 빠지게 혼이 난 우섭이 아랫도리를 부여잡고 신음을 한다. 내 참 어이가 없어서. 물비누를 듬뿍 짜내 손을 살균 세탁한 찬영이 마지막으로 우섭의 머리에 꿀밤을 먹이고 사라진다. 은근히 화장실 쪽을 주시하고 있던 지환이 찬영이 문을 열고 나오자 황급히 고개를 돌린다. 지환이 너 이 자식 갑자기 바쁜 척 해도 소용없어. “강지환 너. 누가 남의 이름 함부로 가르쳐 주래? 그걸 가르쳐 줬다고 할 수 있는 걸까. 그리고 선배 이름이야 여기서 30분만 있다보면 다 알게 되지 않습니까. “찬영이 형 왜요? 그 자식이 무슨 짓 저질렀어요?” 10분에 한번씩 선배 이름 불러대는 저 한인우 녀석 때문에라도요. “인우야. 형이 그렇게 만만해 보이냐?” 만만이라뇨! 형은 제게 언제나 쉽지 않은 사람! 누가 형을 만만하게 본다고 그러세요? 강지환이 그랬어요? 제가 때려줄까요? 그때 마침 화장실에서 엉거주춤 포즈로 나오고 있던 우섭이 찬영을 보고 움찔거리며 뒷걸음쳐 원래 있던 자리로 이동한다. 그 뒤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힐끔거리는 우섭의 시선을 느낄 때마다 찬영은 조용히 한 손을 들어올려 주먹 쥐는 시늉을 해 보였다. 또 눈치 없는 피라미가 겁도 없이 덤벼들다 찬영에게 호되게 당한 모양이다. 가엾은 영혼 같으니. 정수는 구로 보이즈에게 측은지심을 보내면서 찬영에게 예전부터 물어보고 싶었던 질문을 던진다. “찬영이 형.” “왜?” “예전부터 궁금했었는데요. 형도 누굴 짝사랑하거나 차여보거나 한 적 있으세요?” “짝사랑? 그건 없는 것 같은데...” 그렇죠? 형은 어딜 봐도 남을 짝사랑하기보다는 사랑 받는데 어울리는 사람이에요. 부럽다 형. “음...차여본 적은 한번 있다. 내가 먼저 대시했는데 반응이 없더라구.” “우와. 찬영이 형이요? 누군데요? 어떤 사람?” “이름은 원래 모르겠고 오래되어서 얼굴도 잘 기억이 안나. 그게 언제더라... 나 중학교 2학년 겨울 방학...” ********** 30분 전. 아직 날씨도 더운데 왜 꼭 그 도넛을 사오라고 난리냐고. 망할 누나 같으니. 현태는 도저히 바뀔 기미가 안 보이는 신호등 빨간 불빛을 바라보며 투덜거렸다. 대학 졸업 후 1년. 백수 된 죄로 집안에서 근근히 심부름꾼 노릇을 하며 삶을 영위해 오고 있는 현태다. 이 더운 날, (벌써 9월 초순인데 아직도 이 더위라니) 집에 가만 들어앉아서 콩국수라도 시켜 먹으면 얼마나 좋아. 먹고 살이나 팍팍 쪄라. 마녀! 아, 불이 바뀌었다. 어서 건너가야지. 마음이 급해진 현태가 좌우 주위를 살피지 않고 도로에 뛰어든 순간이었다. 끼이익! 파란 불임에도 불구하고 횡단보도를 그대로 지나가려던 차 한 대가 현태와 부딪치려는 그 순간. 죽는 구나. 그렇게 생각한 현태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이 새끼야! 미쳤어! 눈까리가 안 보여? 어딜 뛰어들어 이 새끼야! 이게 누구 신세를 조질려고!” “아저씨. 지금은 명백한 파란 불입니다. 이분이 좌우를 살피지 못한 것은 잘못입니다만 신호를 위반한 아저씨 잘못이 더 큽니다. 횡단보도는 엄연한 보행자 우선 구역이 아닙니까.” 맞아, 맞다구. 난 분명 파란 불로 바뀐 걸 보고 뛰어 들었...아? 나 안 죽었어? 멀쩡하네. 귀도 잘 들리고 눈도 잘 보이고 아앗? 현태는 그제서야 낯선 이의 품안에 자신이 안겨 있다는 걸 깨달았다. “괜찮으십니까? 많이 놀라셨죠? 아무리 파란 불이라고는 해도 주위를 살피시면서 걸으셔야 해요.” “가...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괜찮습니다. 다치지 않으셨으면 그걸로 됐어요. 많이 놀라신 것 같은데 걸으실 수 있겠습니까.” 쿵덕쿵덕쿵덕 심장이 마구 두방망이질을 한다. 이 심장이 미칠 듯이 뛰는 것은 방금 전 사고에 놀란 탓인가. 아니면 자신을 구해 준 이 남자가 평소 찾던 자신의 이상형에 완벽히 부합하기 때문인가. (현태의 이상형은 다니엘 헤니다) 서양인의 외모는 아니지만 눈, 코, 입 그리고 귀까지 완벽히 수려한 저 얼굴. 자신을 포근히 감싸주었던 장신의 균형 잡힌 몸매, 그리고 이 신사적인 태도. 아아아아아 드디어 만났구려. 나의 다니엘. “충격을 많이 받으셨나 보군요. 병원에 데려다 드릴까요?” 병원보다 당신의 품속을 더 원츄합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저와 함께 저희 집으로 인사드리러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아,아,아, 괜찮습니다. 멀쩡해요. 괜히 저 때문에 시간을 지체하셔서. 으아, 또 빨간 불!” 허둥대는 현태를 보던 신주가 빙그레 웃는다. 큰형 신규가 생각나서이다. 어린 시절에는 덜렁이 큰 형이 의사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신주의 웃음에 다리가 풀린 현태가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만다. 당신은...당신은... 유 아 마이 선샤인!! “괜찮으세요? 역시 병원에 가 보시는 것이...” “괘,괜찮습니다. 죄, 죄, 죄송해요.” “가시는 곳까지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어디 가시는 길이세요?” 당신 가시는 곳이라면. 어디까지라도. 그렇게 말하고 싶은 본심을 꾹 누르고 현태는 간신히 횡단보도 맞은편에 있는 도넛 가게를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인다. “아, 저기 가시던 길이셨군요. 저도 마침 저곳에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잘 되었네요. 함께 건너가죠.” 다행히 신주의 목적지와 같은 곳에 가려던 중이었나 보다. 찬영이 즐겨 먹는 크리스피 크림 도넛. 오늘도 1 더즌을 사 들고 ‘토탈 이클립스’로 향하려던 참이었다. 건너편에 보이는 유리 창문 위로 도넛이 현재 튀겨지고 있음을 알리는 붉은 ‘NOW' 네온사인이 밝혀져 있는 것이 보인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달콤한 도넛 냄새가 콧속으로 스며든다. 평소엔 달다고 질색했던 이 냄새가 이리도 향기로울 줄이야. 아, 아름다운 밤이에요. 현태는 끌리듯 신주의 뒤에 서서 그의 넓은 어깨를 몽롱하게 바라본다. 무려 등짝도 황홀하게 잘나신 분. “주문하시겠어요?” “네. 오리지널 글레이즈드로 절반, 나머지는 섞어서 절반 그렇게 주세요.” 시식용으로 나눠주는 도넛을 한 입 베어 무는 그 모습마저도 시에프의 한 장면 같다. 내가 이 가게의 사장이었다면 당장 이분을 픽업해 광고모델로 세웠을 것을.... 그리 생각하는 현태였다. “주문하시겠습니까?” “저분과 같은 걸로 주세요...” 오리지널 글레이즈드 아니면 입에 대지를 않는 그의 누나가 봤다면 뒷목 잡고 쓰러질 광경이었지만 이미 현태의 머리 속에 누나의 존재는 우주 광년 저 멀리 애저녁에 사라져 있었다. “다 사셨어요?” “예, 예.” 당신과 나의 손에 다정히 들린 도넛 박스가 이리 정다워 보일 수가 없네요. 이 도넛 박스를 들고 덕수궁 돌담길을 당신과 하염없이 걷고 싶습니다. “이제 좀 진정이 되셨어요?” “아, 예.” “저는 선약이 있어 먼저 가봐야 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예. 저도 이만 집으로...” 가긴 어딜 가. 나도 데려 가요~ 마음 속 외침을 전할 길이 없는 현태는 그저 이글거리는 시선으로 신주를 하염없이 응시할 뿐이었다.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예... 안녕히...” 가시리 가시리잇고, 나를 버리고 가시리잇고 위증즐가 태평성대. 이대로 놓칠 수 없다. 그렇게 결심한 현태는 신주의 뒤를 쫓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었다. 신주는 다른 가게들은 그냥 지나치면서도 유독 유아용품 가게 앞에서만은 발길을 멈추고 한참을 그 안을 들여다보는 것이 아닌가. 살 것이 있으면 들어가 자세히 살펴볼 일이지. 그것도 아닌 듯 그저 진열된 아기용품만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손님 들어와서 구경하세요.” 신주를 눈치 챈 점원이 문을 열고 들어오기를 권한다. “아, 아닙니다...” 들어오라고 하면 또 안 들어간다. 저게 무슨 심리인가. “아기가 몇 개월이에요?” “예? 예?” “남자 아이에요? 아니면 여자 아이?” “저... 그것이...아직...” 귀까지 빨개져 대답한다. “아직 임신 중이에요?” “네...” “임신 몇 개월이에요? 산달 되시기 전에 미리미리 준비해 두시는 것이 좋아요.” “5개월 째 접어듭니다. 딸인지 아들인지는 아직 모르구요.” “그렇구나. 아직 여유 있으시네요. 나중에 시간 나시면 아기 엄마랑 꼭 한번 들러주세요. 잘 해드릴께요.” “예.” 쿠쿵. 뭐시라, 뭐시라, 뭐시라. 애가 있다고? 마누라가 있다고? 애 아빠였던 말이냐! 이런 날벼락이 있나. 너무나 크나큰 충격에 현태는 입을 다물지 못한다. 이런 젠장, 세상에 쓸만한 남자는 결혼했거나 아니면 파트너가 있거나 그것도 아니면 일반이라더니! 게이들은 어디 가서 멋진 남자를 구한단 말인가. 하긴 저렇게 멋진 사람이 여태껏 솔로일 리가 없다. 좀 전에 마주친 현태조차 첫눈에 반하여 이렇게 스토킹을 하고 있지 않은가. 아아... 내가 좀 더 빨리 당신을 만났더라면. 이리 쉽게 포기하기엔 너무나 아쉬움이 큰 현태였다. 그렇다고 내가 가정을 파괴하겠다는 것은 아니야. 그저 조금만 더 당신의 모습을 눈 안에 담아두고 싶을 뿐. 그의 아내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아기까지 가졌다니 부러움에 미칠 것 같다. 그에게 어울리는 매력적이고도 현숙한 여성이겠지. 분명 선남선녀 커플일거야. 그에게 못 미치는 그런 여자라면 내가 너무 억울하잖아. 조금, 조금만 더 스토킹하겠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당신의 아내 얼굴만 보고 돌아가겠습니다. 조금만 더 당신을 따라가게 해 주세요. 아기, 아기 용품이라...아직까지도 얼굴이 화끈거리는 신주다. 다음주에 같이 가보자고 하면 찬영씨가 응해 주실까. 지금껏 무심히 스쳐왔던 아기 옷들, 아기 용품들이 요즘은 그렇게 눈에 잘 들어올 수가 없다. 서울에 이렇게 많은 유아용품 판매점이 있을 줄이야. 골목을 돌아 왼쪽으로 꺾으면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작게 ‘토탈 이클립스’ 간판이 매달려 있다. 찾아오는 사람들은 대개 입 소문을 타고 찾아오기에 큰 간판을 걸어둘 필요조차 없다. 어? 여기 게이바 아니었어? 실제로 와본 적은 없지만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던 현태가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동명의 다른 바인가. 결혼도 한 일반남성이 게이바를 찾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것도 임신한 아내를 둔 행복의 절정기에 있는 사내가 말이다. 멀찍이 뒤쳐져서 신주의 뒤를 따라오던 현태는 신주가 계단을 내려가 문 안쪽으로 사라지고 난 한참 후에야 살그머니 문을 열고 안쪽의 동정을 살핀다. “어서 오세요.” 인우의 인사에 화들짝 놀란 현태가 근처 테이블 아무 곳에나 앉아 자리를 잡는다. 이곳을 봐도 남자, 저곳을 봐도 남자, 어느 곳을 보아도 남남 쌍쌍이다. 역시 게이바였어. 이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그 멀쩡한 사내가 아내를 두고 바람피우는 최악의 게이였단 말인가. 아니야. 아직 속단은 이르다. 게이바에 들린다고 무조건 게이로 단정지을 수는 없지 않은가. 현태는 그 남자를, 그 남자의 진실 됨을, 나이스한 바디를, 자신을 구해주던 그 올곧음을 믿고 싶었다. 설마, 아닐 거야. 어디로 갔지? 한참을 두리번거리던 현태의 시선에 드디어 신주의 모습의 잡힌다. 이럴 수가. 한 청년의 옆에 다정히 앉아 청년이 도넛 먹는 (아내 주려고 산 것이 아니었단 말이냐)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혹여 사레라도 걸릴까 우유를 따라 먹이고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도 털어 주면서. ‘우리 이쁜이. 잘도 먹는구나.’ ‘아잉 몰라몰라. 배고팠단 말이야.’ ‘아니 이런~ 우리 이쁜이 입가에 내 허락도 없이 묻다니 요런 얄~미운 초콜릿.’ ‘아이 몰라, 어디 묻었어? 요기? 요기?’ ‘기다려, 베이비. 그대 입가에 묻은 건~방진 가루, 내가 처단하겠~어.’ 당신 부숴 버릴 거야. 어느새 본 적도 없는 신주의 아내의 심정에 절절히 싱크로 하고만 현태가 주먹을 불끈 쥐며 분노하는 순간. 옆 테이블에서 누군가가 현태보다 앞서 주먹을 내리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찬영. 저 제비 같은 놈이 그렇게 좋단 말이냐. 나를 거절한 이유가 겨우 저까짓 놈 때문이었던 거야? 비록 저놈이 나보다 키가 좀...많이 크고, 잘 생기고, 몸매 좋고, 비싼 옷을 걸치고 있다고는 하나 너를 향한 이 마음만은 저놈 못지 않아! 여전히 ‘너라고 부를게’ 모드에 빠져있는 가리봉 이우섭이다. 찬영씨는 간섭을 싫어하신다. 그러나 나는 간섭하고 싶다. 그러므로 간섭하기 위해선 빛보다 빠른 속도로, 공기처럼 투명하게, 어둠처럼 은밀하게 찬영씨가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에 간섭을 생활해 나가는 수밖에 없다. 오늘-찬영 입가의 부스러기를 털어 주어도 찬영이 발끈하며 손을 올리지 않는 정도-의 수준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남몰래 노력을 해 왔던가. 두 사람의 오해와는 12광년쯤 떨어져있는, 이것이 오늘의 신주의 현실이었다. “저 나쁜 놈!” / “제비 같은 새끼!” 이번엔 동시에 욕설을 내뱉고 만 현태와 우섭이 움찔하며 서로를 돌아본다. 공동의 분노를 지니고 있는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았다. “정말 나쁜 놈이죠.” “그렇습니다.” “부인도 있는 주제에 바람을 피다니.” “예? 부인이 있다고요?” “네. 그것도 임신 5개월이 된 청순 가련(이 근거는 어디서 왔는가)한 아내라고 합니다.” “뭐라고요! 곧 있으면 애 아버지가 될 놈이 감히 찬영씨를 꼬셔?” “그럼 그쪽은?” “예, 저는 찬영씨의 사랑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구로 보이즈, 가리봉의 이우섭이라고 합니다.” “저는 결혼 적령기의 누나를 모시고 사는 신사동의 박현태로서 이 세상 바람 피는 유부남들은 결코 용서 할 수 없는 입장입니다.” “저런 파렴치한 놈은 게이계의 수치입니다.” “그렇습니다. 암적인 존재죠.” 저는 저 제비를 맡겠습니다. 저는 저 찬영씨라는 분을 설득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정의감에 불타는 그들, 어느새 역할까지 분담했다. 때마침 신주가 급한 전화를 받았는지 휴대폰을 들고 밖으로 나간다. 우섭은 주먹을 불끈 쥐고 비장하게 그 뒤를 따랐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오늘 무슨 날인가. 왜이리 말 걸어오는 사람들이 많아? 찬영은 의아해하면서도 정중히 인사를 돌려준다. “...그분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계시나요.” “예?” 그분? 웬 그분? 아까 놈은 순수한 영혼을 지녔네 뭐네 하더니만 너는 또 그분타령이냐. 종교활동이야? “그분이 가정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계셨나요?” “그분이라뇨?” “그분 말입니다. 당신도 잘 알고 있는 그 사람, 아니 그 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 분? 예수님? 부처님? 알라신? 아니다. 그러면 놈이라고 할 리가 없다. 게다가 웬 가정. “형제관계가 어떻게 되시나요.” “예? 형이랑 누나 하나 있는데요.” “누나도 있으신 분이 그런 파렴치한 행동을 하신 단 말입니까.” 뭐야, 이놈. 미친 거 아냐? “당신 같은 사람들의 행동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지 아십니까. 당신의 누이가 겪게 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당장 멈추세요.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가 가장 빠른 때입니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아무것도 몰랐다. 그렇게 변명하고 싶으시겠지요. 그러나 당신 무의식 어딘가 에서는 알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참회하십시오. 그리고 뉘우치십시오. 그리고 깨끗한 게이로 다시 태어나는 겁니다.” “지금 종교활동 하시는 겁니까? 전 사이비 종교는 믿지 않는데요.” “진실에서 등 돌리려고 하지 마세요. 지금 저 밖에는 당신을 위해 싸우고 있는 당신의 전사도 있습니다.” 지대로 미친놈이다. 그렇게 생각한 찬영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우당탕탕, 누군가가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재빠른 인우와 정수가 먼저 뛰어나간다. 신주형? 괜찮아요? 정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무슨 일이야? 문을 열고 나간 찬영의 눈앞에 널브러져 있는 한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어? 이거 아까 그 피라미 아냐? 계단 위에서는 화난 표정의 신주가 옷매무새를 흩트린 채 숨을 몰아쉬고 있다. “찬영씨를 놓아줘!” 어느새 일어난 우섭이 다시 신주에게 덤벼든다. 가볍게 제압 당한 우섭이 다시 구석에 처박힌다. “찬영씨 아는 사람이에요?” “글쎄?... 조금?” 그것이...안다고 해야할지 모른다고 해야할지 애매한 상태다. 보아하니 신주를 자신의 연인으로 오해하고 덤벼든 모양인데 저 피라미 녀석 아직도 미련을 못 버렸단 말이야? “진실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그분은 언젠가 가정으로 돌아갈 몸. 결국 상처받는 것은 당신이십니다!” 뒤따라온 현태가 격렬하게 부르짖는다. 아니 저 사람은? 현태를 알아본 신주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한다. “김신주, 아는 사람이냐?” “글쎄요?... 조금?” 충격을 많이 받으셨나? 역시 병원에 데려다 드려야 했었나보다. 안타까운 표정의 신주를 아랑곳하지 않고 현태는 마저 웅변을 이어나간다. “당신! 가정으로 돌아가십시오! 아내가 당신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당신!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전사에게로 돌아가세요!” 순식간에 얼어 붙어버린 공기를 뚫고 한 통의 전화벨이 낭랑하게 울린다. 전화 받으세요. 주인님 전화 받으세요. “여보세요? 응. 엄마? 나 지금 압구정. ... 정말? 알았어. 곧 갈게.” 통화를 끝낸 찬영이 신주에게 눈짓한다. “가자. 우리누나 아기 낳는대.” 예정일을 훨씬 넘기고도 태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아 애를 태우던 조카가 이제야 세상 빛을 볼 마음이 든 모양이다. “찬희 누나 아기 낳는대요?” “그래. 너희들은 나중에 와. 전화할게.” 아기 진짜 이쁘겠다. 이따 밤에 특종 TV연예에 나오는 거 아냐? 그럼 진국이 형 인터뷰하겠네? 너무 기대된다. 아기 빨리 보고 싶어. 어느새 잊혀진 두 사람. 신사동 그 사람, 현태와 가리봉 킹카 우섭이 쓸쓸한 귀가를 한 것은 그로부터 10분 후의 일이다. 나름대로 사상이 맞는 이 두 사람이 연인이 된 것은 그로부터 더 먼 훗날의 일. “차 안 가지고 왔어?” “네. 오늘 제 차가 쉬는 날이거든요.” 고지식한 놈. 누가 바른 생활 사나이 아니랄까봐 차량 10부제, 이런 것도 꼬박꼬박 지킨다. “세원 산부인과 가 주세요.” 퇴근시간, 도로가 막힌 탓에 택시는 꽤 가까운 거리를 오랜 시간을 걸려 이동한다.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앞차를 바라보며 찬영은 생각났다는 듯이 신주에게 물었다. “너, 대학 때 장난 아니었다며? 진짜야?” “네? 뭐가 말입니까.” “육다리까지 걸쳤다며. 전교생이랑 다 자봤다며 진짜야?”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그렇게 믿으시면 섭섭합니다.” “에이, 사실을 말해 봐. 너 날렸지?” “날리긴 뭘 날려요. 찬영씨야말로 이상한 놈이 접근하게 내버려두고 뭐하시는 겁니까.” “뒤집어 쒸우기냐. 난 그래도 육다리는 걸쳐 본적 없다.” “아니라니까요.” “너 언제부터 날렸냐. 첫 키스 언제 해봤어?” “얘기를 왜 자꾸 그런 쪽으로 돌리세요. 아니라니까요.” “언제 해봤는데? 그것만 말해 봐. 다른 건 안 물을게.” 쑥스럽게 왜 자꾸 그런 걸 물으시는지 모르겠다. 첫 키스... 첫 키스라... 듣기만 해도 그 날의 일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신주다. “그게...중학교 1학년 겨울 방학 때의 일인데요...” 13년 전. 김신주 14세의 겨울. 그 날 신주는 학원 수업을 마치고 늦게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날씨가 추웠던 탓에 코트와 목도리로 중무장을 하고 귀에는 생일선물로 받은 소니 워크맨의 이어폰을 끼고 베토벤의 교향곡을 들으며 걸어가고 있었다. 도중에 진눈깨비가 내리기에 가방에 넣어두었던 우산을 꺼내 폈다. 골목길을 지나는데 어디선가 삑삑 거리는 호루라기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멈춰 주위를 살펴보는데 누군가가 다람쥐처럼 날쌔게 뛰어나가는 것이 보였다. ‘아이씨, 막혔잖아.’ 때마침 카세트 B면의 플레이가 끝나고 A면으로 다시 스르륵 돌아가기 시작했기에 신주는 그 그림자의 중얼거림을 들을 수 있었다. 삐삐삑 호루라기 소리가 가까워져 오던 그때. 골목길을 다시 돌아 나온 그림자가 신주의 우산 속으로 숨어들었다. 삐삐삑 이 다람쥐 같은 놈 어디로 갔어? 비에 젖은 생쥐 같은 꼴을 하고 추위에 벌벌 떨고 서 있던 소녀- 무척 보이쉬한 느낌의 소녀였다. 숏커트에 털 달린 청 자켓, 청바지, 엉덩이까지 내려온 긴 체크 남방- 가 신주의 품속을 파고들었다. 무슨 잘못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신주는 이 소녀를 감싸주어야만 할 것만 같은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너무 추워하는 것 같아 신주는 우선 자신의 목도리를 풀어 소녀의 목에 감아 주었다. 그리고 단추를 풀어 소녀가 더 쉽게 들어올 수 있도록 코트 자락을 열어 주었다. 삐삐삐삐삑! 저쪽으로 갔어! 분명해! 호루라기를 목에 건 한 무리의 사내들이 신주의 곁을 지나치는 순간 소녀가 발꿈치를 들어올려 신주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대어왔다. ‘...!...’ 딴딴딴 딴. 딴딴딴 따. 베토벤의 제 5번, 운명 교향곡 그 첫 소절이 신주의 귓가에서 크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사내들이 다른 골목으로 빠져나간 후에야 소녀의 입술이 살며시 떨어진다. ‘*%&$(#)@( ’ 뭐라고? 소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신주가 그제야 한쪽 이어폰을 귓가에서 벗겨낸다. ‘...이야. 꼭 찾아와. 이건 그때 돌려줄게.’ 발랄하게 목도리를 흔들어 보이던 소녀가 등을 돌려 등장했던 때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진다. 그건 꿈이었을까. 꿈이 아니었다. 환한 전봇대 불빛이 땅에 떨어진 신주의 우산을 휘영청 비추고 있었다. 목에 걸었던 목도리도 분명 사라지고 없다. 어디로 찾아오라고 했지? 분명 입 모양이 우..선 중? 우석 중? 운명 교향곡보다 더 빠르게 신주의 심장이 뛴다. “우선 여중, 우석 여중. 그리고 나중에는 서울에 있는 모든 여중이랑 남녀공학을 다 찾아 돌아다녔어요. 그런데 결국 그 소녀는 못 찾았어요. 서울 아니라 인천이랑 수원, 일산까지 돌아다닐 걸 그랬나 봐요.” 대한민국의 모든 남성이 그러하듯 긴 생 머리에 청순한 글래머가 취향이던 신주의 취향은 그 날 부로 커트 머리에 보이쉬한 소녀로 바뀌었다. 그 취향이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쳐 큐트 보이를 찾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사실, 찬영씨는 어딘가 모르게 그 소녀를 닮았어요. 말투 건방진 것도 그렇고...지금처럼 눈 동그랗게 뜨고 쳐다볼 때는 더욱, 더욱이요. 그렇지만 지금은 찬영씨가 제일 좋습니다. ...바보 같은 놈. ‘여중’을 찾아 돌아다녔으니까 그렇지. 내가 ‘우석 중’이라고 그랬지. ‘우석 여중’이랬냐. 신주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하얗게 질려가던 찬영의 표정을 다행히 신주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집에 가면 그 목도리부터 불태워 버릴테닷! ‘형도 누굴 짝사랑하거나 차여보거나 한 적 있으세요?“ ‘차여본 적은 한번 있다. 내가 먼저 대시했는데 반응이 없더라구. 그게 언제더라... 나 중학교 2학년 겨울 방학...’ 13년 전. 조찬영 15세의 겨울. ‘찬영이 저 녀석. 다 저녁때 어딜 또 나간다고 저리 방을 헤집어 놓는 거니?’ ‘엄마, 쟤 오늘 그 시시껄렁한 서초 패밀리인지 뭔지 단결식하는 날이라잖아. 콩알만한 것들이 모여서 단장이네, 회장이네 웃기지도 않는다니까.’ 엄마! 내 청 자켓 어떻게 했어? 빨았어? 몰라, 어떻게 해! 오늘은 청 자켓 데이란 말이야! 청 자켓을 꼭 입고 나가야 한다면서 한 시간째 제방 옷장, 찬우 옷장, 철지난 옷을 쌓아둔 옷 방까지 뒤집어엎고 있는 찬영이다. ‘옷을 입었으면 제자리에 벗어놔야지. 아무데나 뭉쳐두니까 못 찾는 거 아냐. 이 추운 날씨에 무슨 청 자켓이야. 따뜻하게 코트 입고 나가.’ ‘안 된다니까. 나만 빼고 다 청 자켓 입고 올텐데 나만 코트입고 나가면 쪽팔려서 어떻게 해.’ ‘누나 거 입고 나가. 찬희 쟤 사두고 생전 입지도 않더라.’ ‘여자 걸 쪽팔리게 어떻게 입어!’ ‘찬영아, 괜찮아. 저거 유니섹스야. 남녀 공용이라고.’ ‘으악! 누나 변태! 어떻게 여자가 그런 말을 해!’ ‘멍청한 놈아! 그게 아니라 남녀 공용이라는 뜻이라고.’ ‘진짜?’ ‘그래, 찬희 꺼 입고 나가. 찬희 꺼는 털 달려서 좀 따뜻하겠네.’ 쪼르르 찬희 방으로 달려간 찬영이 찬희의 청 자켓을 들고 나온다. ‘밥 안 먹고 나갈 거야? 찬영아 밥 먹고 나가.’ ‘싫어. 안 먹어. 청국장 맛없어.’ ‘그렇게 자꾸 편식을 하니까 키가 안 자라잖아. 이 마른 것 좀 봐. 눈만 땡그래 가지고 그러니까 사람들이 자꾸 여자애로 오해하지.’ ‘누가 기집애야! 나는 진짜 사나이야!’ ‘찬영이 너 키 160도 안되지? 맨 앞줄에 앉는 거 아니야?’ ‘누가 160이야! 163이야! 그리고 맨 앞줄 아니야. 세 번째 줄이야.’ ‘찬영아, 나가서 머리도 좀 자르고 와. 지저분하게 그게 뭐야. 그러다 단발되겠네.’ ‘개학하면 어차피 자를 텐데 뭐. 방학동안에 기를 거야.’ 으아아, 늦었다. 운동화를 신는 둥 마는 둥 꺾어 신더니 쾅 소리를 내며 현관문을 닫고 달려나간다. 배신자들. 패밀리의 절반이 형제의 맹세를 버리고 청 자켓 대신 다른 옷을 입고 나타났다. 코트까지는 이해해주겠어. 오리 털 파카 입은 녀석들은 또 뭐야. 곧 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3학년 선배들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마련한 단결식이다. 패밀리 중 한 명이 동대문구에 가면 주민등록증 검사를 하지 않고도 들어갈 수 있는 나이트 클럽이 있다는 정보를 물어왔다. 오늘은 바야흐로 대망의 나이트 진출일. 주민증 검사를 하지 않는다 해도 솜털 보송보송한 그들을 받아 줄 수 있는 간 큰 나이트 클럽은 없었다. 결국 입장도 못해보고 쫓겨난 일행들은 공터에 모여 슈퍼에서 훔쳐온 맥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다가 취해서 결국 다른 패거리들과 시비가 붙었고 경찰의 추격을 피해 도망치던 찬영이 도착한 곳이 하필이면 신주의 집 근처 그 골목이었던 것이다. 앞뒤 안 가리고 뛰어든 우산 속에 놀란 표정을 한 잘생긴 소년이 있었다. 어딜 봐도 모범생으로 보이는 소년. 중 3? 고 1 쯤 되었을까. 키가 무척 큰 녀석이었다. 삐삐삐삐삑! 저쪽으로 갔어! 분명해! 다가오는 호루라기 소리에 찬영은 며칠 전 TV드라마에서 보았던 내용을 그대로 흉내내 소년의 입술을 덮쳤다. ‘너 내가 찜했다. 나 우석 중의 조찬영이야. 꼭 찾아와. 이건 그때 돌려줄게.’ 분명 찾아올 거라 믿었는데 소년은 겨울이 지나 봄이 되도록 소식이 없었다. 이 놈! 인질(목도리)이 소중하지 않단 말이냐. 그것이 조찬영 최초의 대시 실패 기록이었다. 그랬는데...그랬는데... 괴물 같은 자식, 그 키로 중 1이었다고? 중 1? “다 왔습니다. 손님들. 6500원 나왔습니다.” 열 받는다. 택시 비 네가 내라. 찬영은 예의바르게 택시 비를 지불하고 내리는 신주의 옆모습을 마구 노려보았다. “몇 층이죠?” “5층이래.” 엘리베이터가 땡 소리를 내며 양쪽으로 열린다. “그런데 찬영씨, 찬영씨 첫 키스는 언제였어요?” “그런 건 뭐 하러 묻냐. 비밀이다.”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왜 저만 밝혀야 하나요.” “초등학교 2학년 때.” “초등학생이요?” “그래, 2학년 때. 옆집 개한테 뺏겼다. 푸들이었지.” “그런 거 말구요. 진짜 첫 키스요.” “푸들이라니까. 이름은 삼돌이.” 나쁜 놈. 나도 그 때가 처음이었어. 땡 소리를 내며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열린다. 5층이다. 제 7 편 < 마돈나, 나의 침실로 > “아아아아아아아~악! 나 죽어!” “아아아아아아!” 분만실로 향하는 산모 하나가 남편으로 추정되는 남자의 머리를 잡아뜯고 있었다. 앞서거니, 뒷서거니, 부창부수, 그들의 비명이 좁은 산부인과 복도를 쩌렁쩌렁 울리고 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남자 1의 표정이 하얗게 질린다. 한 템포 느리게 남자 2의 표정도 어두워간다. 남은 남자 3은 스스로 제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고 있다. 분만실 문이 열리고 머리에 너스캡을 단정히 쓴 간호사 하나가 차트를 손에 들고 나와 이름을 호명한다. “오현나씨 보호자 되시는 분?” 대기하고 있던 남자 하나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일어난다. 네! 저! 접니다. “축하드려요. 아주 잘생긴 아드님이십니다. 산모, 아기 모두 건강해요.” 만세! 덩실덩실 춤까지 추는 사내를 남자 3가 부러운 눈빛으로 봐라보다 다시 간호사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저기... 제 아내는 아직 멀었습니까?” “조찬희씨 보호자 되시죠?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곧 소식이 있을 거에요.” 30분전에도 같은 말을 하지 않았던가.. 들어간지가 언제인데 왜 아직까지 소식이 없는지. 마치 1분이 10분처럼, 10분이 100분처럼 느껴지는 진국(오진국, 35세)이다. 찬영아, 집에 좀 다시 갔다오자. 급히 오느라 그만 기저귀를 놓고 왔네. 박 여사의 말에 남자 1, 찬영이 일어선다. “기저귀? 1층에 매점 있던데 거기서 사면 안 돼?” “이래서 사내놈들은 몰라도 한참 모른다니까. 종이 기저귀 쓰면 아기 엉덩이에 발진 나요. 면 기저귀로 채워줘야 그나마 덜하지. 너도 나중에 결혼해서 새아기 임신하면 이 엄마가 다 알아서 챙겨줄 테니까 엄한 종이 기저귀 같은 거 사놓지 말고, 알았어?” 엄마, 나중이 아니라 몇 달 후에 당장 내가 필요한데... 조카의 기저귀를 가져오면서 몇 장 빼돌릴 결심을 하는 찬영이다. 찬영씨, 같이 가죠. 따라 일어서는 신주를 찬영이 다시 앉힌다. 넌 여기 있다가 혹시라도 도중에 아기 나오면 당장 전화해 줘. 집 근처니까 시간 얼마 안 걸릴 거야. 박 여사와 찬영이 사라진 복도에 덜렁 신주와 진국 두 남자만이 남아있다. 한동안 이어진 어색한 침묵을 진국이 먼저 깨뜨린다. “경황이 없어서 그만 인사도 못 드렸네요. 오진국이라고 합니다.” 진국이 양복 주머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내민다. ‘진 엔터테인먼트 대표 오진국’ 신주도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진국에게 건넨다. “아...‘피카소’ 사장님이셨군요. 젊으신 분이 대단하네요. 음식 맛도 깔끔하고 분위기가 좋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처남 친구 분이실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별 말씀을요. 언제 한번 찾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내(?)의 누이의 남편 그리고 아내의 남동생의 남편이라는 참으로 묘한 관계의 두 사람이었다. “첫 출산이라서요.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너무 오래 걸리네요.” 연하의 신주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 자못 부끄러운지 진국이 머리를 긁적이며 변명을 한다. “아기 이름은 지어놓으셨어요?” “아들이면 리국, 딸이면 리희라고 붙이려고 합니다. 아들이건 딸이건 상관없으니 부디 엄마 고생 덜시키고 건강하게만 나와 줬으면 좋겠어요. 입덧 때도 어찌나 고생을 시키던지 괜히 저까지 밥을 못 먹겠더라구요.” “찬희 누님도 입덧이 심하셨나봐요?” “말도 마십시오. 음식 냄새만 맡아도 새파랗게 질리면서 화장실로 달려가는데 어찌나 마음이 아프던지요. 덕분에 장모님께서 고생 좀 하셨죠. 회사 일로 제대로 신경을 써주지 못한 것이 너무 후회되네요. 길어야 10달인 것을. 휴가라도 냈어야 하는데.” 그 심정 충분히 이해합니다. 진국의 고초가 눈에 보이는 듯 그려지는 신주다. 찬영의 임신사실을 안 지 벌써 두 달. 그간의 고생이 파노라마처럼 신주의 눈앞에 펼쳐진다. ‘비, 비린내 나! 당장 치워! 욱!’ ‘또 먹고 싶으니까 그렇지. 빨리 갔다와. 시간 얼마쯤 걸릴 것 같아?’ ‘아침부터 웬 순대야. 속이 이렇게 울렁거리는데 순대를 어떻게 먹어. 너도 참, 생각이 있는 애니?’ “참 힘드셨겠어요.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참 순수한 청년이구나. 눈에 눈물까지 맺히면서 위로해오는 신주에게 진국은 가슴 찡한 감동을 받았다. 처남에게 이렇게 건실한 친구가 있었다니. 처남 중매서는 김에 이 청년에게도 참한 아가씨 하나 소개시켜드려야겠다. “그것도 이제 끝인걸요. 아니 이제 시작인가요? 벌써부터 애는 어떻게 키우나. 학교는 어디를 보내나. 대학은 어디가 좋을까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까요. 하하하.” “저도 그렇습니다. 딸이면 엄마 닮아 참 예쁠 텐데 그것이 커서 사내놈을 데려오면 아까워서 어떻게 결혼시키나 벌써부터 그런 걱정을 하고 있어요.” “아빠말고는 다 늑대지요. TV뉴스를 보다보면 어찌나 가슴 철렁한 일이 많은지... 딸자식 가진 부모도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세상이 어서 와야 할텐데 말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다 자기 누이이고 딸이라 생각하면 결코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없을 텐데요.” 아들이라고 해도 결코 안전하지는 않거늘. 자신이 한 짓은 생각도 못하고 파렴치범에 대한 분노를 터트리는 신주다. 스스로 제 욕망하나 다스리지 못하고 그게 무슨 짓입니까. 그런 놈들은 외국의 사례처럼 화학적 거세를 시켜야 한다는 것이 제 소견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두 고자로 만들어버려야 해요. 태어나지도 않은 딸 걱정을 하면서 그렇게 두 사람의 마음은 하나가 된다. 기저귀가 든 가방을 들고 돌아온 찬영이 어느새 친해진 신주와 진국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던 것은 그로부터 30분 후의 일. ********** 아이 이름은 ‘리국’으로 결정되었다. 찬희가 오랜 진통 끝에 사내아이를 낳았던 것이다. “매형, 아무리 그래도 아이 이름으로 ‘오리국’은 너무하지 않아? 그 이름 분명히 놀림 당할 거라구.” 찬영의 진지한 충고도 신주의 진심 어린 축하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진국이다. ‘아기가 너무 예뻐요. 그렇게 예쁜 아기는 처음 봤다니까요.’ 간호사의 의례적인 칭찬에도 입이 귀까지 걸려 연신 고개를 조아린다. 어느새 소식을 알고 들이닥친 연예 TV 리포터와 카메라에 의해 둘러 쌓여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누나 보러 가자.” 부러움에 한없이 진국을 바라보고 서 있는 신주의 허리춤을 찬영이 쿡 찌른다. 여기 있으면 배경으로 찍혀서 TV 나온단 말이다. “찬영씨, 잠깐만요.” 병실을 코앞에 두고 신주가 발걸음을 멈춘다. 얼굴에 긴장된 기색이 역력하다. “왜? 뭐 불편한 거 있어?” “그게 아니라 긴장이 돼서요. 찬영씨 가족을 만나는 거잖아요.” “그게 왜? 아까 매형이랑 우리엄마도 봤잖아.” 장모님을 장모님이라 부르지 못하고 그저 인사만 드렸던 신주다. 어머님 앞에서도 떨렸지만 지금 신주가 이렇게 긴장하는 것은 찬희가 그저 찬영의 누나만이 아닌 톱스타 조찬희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13년 전 그 날의 첫사랑 소녀를 찾을 길이 없어 실망하던 그의 앞에 신인 탤런트 조찬희가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 1년 후의 일. 눈매며 입매며 무척이나 닮았지만 소녀가 1년 사이에 그리 부쩍 클 수는 없었을 테니 분명 동일인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찬희를 보고 있노라면 설레는 마음을 어쩔 수 없었다. 형수 선진의 놀림을 받으면서도 조찬희에 관한 일이라면 화보집에서 비디오, 기사 스크랩에 이르기까지 온갖 정성을 쏟아온 신주다. 12년을 동경해온 스타를 만나는데 제 아무리 신주라도 긴장되지 않을 수 없다. “제가 누님의 팬이었거든요.” 네가? 처음 듣는 소리에 찬영도 놀란다. 이 녀석이 우리누나 팬이었단 말이야? “너 혹시...내가 우리누나 닮아서...” 의혹이 가득 담긴 찬영의 눈빛을 받은 신주가 뒤늦게 진화에 나선다. “아닙니다, 찬영씨. 그건 아니에요. 전 찬영씨를 찬영씨 그 자체로. 찬영씨가 찬영씨이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입니다.” 흐음. 진짜야? 신주의 ‘좋아한다’는 발언에 머쓱해진 찬영이 신주에게서 등을 돌려 병실 문을 힘차게 열어제친다. “누나!” 찬영이 왔니? 평소와 달리 힘없는 목소리로 찬희가 대답한다. 얼굴이 퉁퉁 붓고 붉게 상기된 것이 힘들었던 출산과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 하다. “진국씨는?” “매형은 기자들한테 붙들렸어. 좀 있어야 올 수 있을 거야.” 뭐라구? 금새 입이 샐쭉해지는 찬희를 신기하다는 듯 신주가 쳐다본다. 가까이서 보니 정말 많이 닮았다.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데...지금이 인터뷰할 때야? 찬영아, 문 잠가! 오진국씨 출입 금지야!” 성격 까탈스러운 것까지 어찌 그리 닮았는가. 찬영씨 아기 낳을 때는 한시도 자리를 떠나지 말아야지. 그리 결심하는 신주다. “누나. 그게 어디 매형 잘못이야. 매형이 얼마나 누나 걱정을 했는데.” 흥! 정말 서러운 모양인지 눈에 눈물까지 고인다. 이 좋은 날 울긴 왜 울어. 찬희를 달래면서 박 여사가 찬영에게 눈짓한다. 어서 진국을 데려오라는 뜻이다. 다시 문 쪽으로 향하는 찬영을 찬희가 불러 세운다. “찬영아, 우리애기 봤어? 예쁘지?” “아직 못 봤는데 간호사들 말로는 너무 예쁘대. 누나 쏙 닮았대.” 정말? 금세 또 활짝 웃는 찬희다. 가서 아기랑 매형이랑 둘 다 데려올게. 누나. 찬영이 신주의 팔을 끌고 다시 복도로 나선다. “기분이 어때?” “예?” “우리누나 팬이었다며. 실물 본 느낌이 어때?” “예쁘시던데요. TV에서보다 훨씬 더 예쁘셨어요.” 여지껏 봤던 찬희 누님 모습 중에서 오늘이 가장 아름다웠어요. 찬영씨. 지금껏 보지 못했던 ‘어머니’의 모습이라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그리 좋으냐? 활짝 웃는 신주를 오해한 찬영이 심통을 부린다. “그래. 역시 나는 대용품이었다는 거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찬영씨. 당황한 신주가 앞서가는 찬영의 뒤를 쩔쩔매며 따라간다. ********** “우와, 저 쪼그만 발 좀 봐.” 오므렸다 폈다 앙증맞은 아기의 발가락을 바라보면서 찬영이 연신 감탄사를 연발한다. 이렇게 갓 태어난 아기를 보는 것은 처음이다. “정말 예쁘네요. 꼭 인형 같아요.” 신주 역시 6년 전 쌍둥이 조카를 처음 봤을 때의 감동을 되살리고 있었다. 쭈글쭈글 오징어 외계인. 신주의 농담에 삐친 신규는 한동안 신주에게 아기를 보여주려고 하지 않기까지 했다. 한참을 아기를 물고 빨고 정신 없던 찬희가 그제야 찬영 옆의 신주를 눈치 채고 찬영에게 묻는다. “찬영아, 못 뵈던 분인데 이분은 누구시니?” 처음 뵙겠습니다. 처형. 또다시 처형을 처형이라 부르지 못하고. 신주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한 찬영은 그저 신주를 ‘아는 동생’이라고 소개할 뿐이다. “누나 팬이래. 싸인해 줘.” 어머나, 얘는 나 화장도 안 하고 엉망인데 말도 안하고 데려오면 어떻게 해. 팬 떨어지면 네가 책임질 거야? 금세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하며 팬 관리 모드에 들어간 찬희를 신주가 빙그레 웃으며 바라본다. “실물이 더 예쁘신걸요. 아기도 누님 닮아서 정말 예뻐요.” 정말? 고마워요. 아기 예쁘다는 말이 더 듣기 좋게 들리는 것을 보면 찬희도 영락없는 애 엄마가 다 되었다. 살풋 잠이 들었던 아기가 깨어나 칭얼대기 시작하자 거침없이 단추를 푸르고 젖을 먹인다. “옳지, 옳지, 우리 리국이 배 많이 고팠쪄?” “누나, 이름 바꿔라. 차라리 ‘소(小)국’이라고 하면 어때?” 리국이 어디가 어때서? 소국이 더 이상해! 아니야, 리국이 더 이상해. 투닥거리는 남매를 박 여사가 한 대씩 때려 제압한다. 찬희 넌, 애 엄마가 되가지고 철없이 동생하고 싸우니. 찬영이 넌 누나 힘든데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왜 까불고 그래. 장모님 때리지 마세요오. 찬희 방금 아기 낳았잖아요. 진국이 항의하다 함께 덤으로 얻어맞는다. 그리고 여기 인정받지 못한 막내 사위 하나. ‘차라리 절 때리세요. 장모님. 우리 찬영씨는 임신중이란 말입니다!’ 가슴속의 외침을 차마 전할 길이 없는 신주였다. 젖을 배불리 먹은 아기는 금세 또 잠이 든다. 사랑스러운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찬영이 찬희에게 묻는다. “누나, 아기 낳을 때 많이 아팠어?” “많이 아팠지. 죽는 줄 알았어. 너무 아파서 나도 모르게 수술해달라고 막 울었는데 간호사언니가 들은 체도 안 하지 뭐야. 기어코 그 말이 나와야 정말로 아기 나올 때가 된 거라나.” “제왕절개 하면 안 아파?” “안 아프긴...딱 그때만 모를 뿐이지. 낳고 나서 더 힘들대. 생살을 찢어놨는데 오죽 아플까. 진통제 없으면 며칠을 잠도 못 잔다고 인경이 언니가 그러더라. 너도 알지? 나 코디해 주던 인경이 언니. 그 언니야 몸이 약해서 할 수 없이 제왕절개 한 건데 할 수만 있으면 꼭 자연분만 하라고 신신당부를 하더라고. 자연분만이야 아기 얼굴보고 나면 아팠던 거 싹 지워지는데 제왕절개는 며칠 가도록 계속 아프니까 산후 우울증도 쉽게 오고 그런대. 전신이 막 찢어지는 것 같다더라.” 으아. 찬영의 손이 파들파들 떨린다. 각오는 했지만 그렇게 아프다니. 제왕절개는 그나마 덜 아플 줄 알았는데 이게 무슨 소리인가. 나 돌아갈래. 옆에 서 있는 신주가 괜히 미워진 찬영이 가만히 있는 신주의 왼팔을 꼬집는다. “찬영씨?” 이 자식 머리털을 죄다 뽑아서 대머리를 만들어 버릴까. 힘줘~! 씨받이의 한 장면을 떠올린 찬영이 손가락에 더 세게 힘을 싣는다. “찬영씨? 찬영씨 왜 그래요?” 생각할수록 분한 찬영이 오른팔마저 꼬집으려는 순간. 쿵 하고 뱃속에서 무언가 생경한 감각이 느껴졌다. “어?” 또다시 쿵. 착각이 아니다. 뭔가가 뱃속에서 발로 차는 듯한...아! 어리둥절해하는 신주를 끌고 병실을 나온 찬영이 두리번거리다 복도 끝의 남자 화장실로 들어간다. 들어가자마자 문을 잠그고 자신의 손을 다짜고짜 옷 속으로 집어넣는 찬영의 행동에 적잖이 놀란 신주가 눈에 띄게 당황한다. “찬영씨 왜 이래요? 어디 아파요?” “가만 있어봐. 쉿!......방금 발로 찼어? 느껴져?” “예?” “만져 봐. 이 녀석 움직인다.” 살짝 부풀어오른 찬영의 배에서 미약하지만 규칙적인 태동이 느껴지고 있다. 쿵쿵 발로 차는 아기의 움직임이 손바닥 전체로 느껴진다. “이거 웃긴 놈이네. 즈아빠 꼬집었다고 지금 항의하는 거야?” 네 편드는 거 보니까 딸인가 보다. 아니다. 그렇게 단정지을 수도 없지. 다리 힘이 센 걸 보면 역시 아들일지도. 야, 김신주 왜 대답 안 해? 굳었... “찬영씨, 어떻게 기다리죠? 저 당장 보고 싶어요. 우리 아기. 아까 진국형님이랑 찬영씨 기다리면서 그 생각했어요. 진국형님은 조금만 기다리면 아기를 만날 수 있겠구나. 부럽다. 눈은 어떻게 생겼을까. 코는 어떻게 생겼을까. 찬영씨를 많이 닮았을까. 나를 얼마나 닮았을까. 하루 종일 머릿속에서 이 생각이 떠나지를 않아요. 남자 몸으로 아기를 갖게 된 찬영씨는 참 힘드실 텐데 저만 이렇게 즐거워서, 설레어서 죄송합니다.” 와락 찬영을 껴안은 신주가 떨리는 음성으로 말을 해온다. 더운데 왜 끌어안고 난리야. 이 자식! “...놔. 숨막히니까 놓으라고.” 죄송합니다! 찬영씨! 신주가 황급히 찬영에게서 떨어진다. 감격에 겨워 자신도 모르게 저지른 행동이다. “나가자. 우리 화장실에서 뭐하고 있는 거냐. 냄새나는 데서.” 잔뜩 골이 난 표정의 찬영이 먼저 화장실을 빠져나간다. 화가 많이 난 것 같다. 얼굴이 빨갛다. ********** “...그래서요. 찬영씨. 이번 일요일날 이사를 하려고 합니다.” 응? 뭐라고? 원고를 손보느라 정신 없던 찬영이 끝말만을 알아듣고 고개를 든다. “지난주에 말씀드렸잖아요. 인테리어 공사가 마무리되어서 입주하기만 하면 된다고. 환경벽지라고 요즘은 아기 방 전용제품도 나오더라구요.” “나는 이사하겠다고 대답 안 했는데.” 또 저 고집. 신주는 한숨을 내쉰다. “언제까지 여기 계시려구요. 배가 더 불러오면 석진씨에게는 뭐라고 할 겁니까.” “똥배.” 찬영씨가 아프리카 난민도 아니고 다른 데는 두고 배만 동그랗게 불러오는 걸 똥배라고 하면 누가 믿겠습니까. “난 여기가 편해. 조금만 더 버텨볼게. 네가 먼저 가 있어.” “한번 가보시지도 않고 무조건 여기가 편하다고 하시면 어쩝니까. 거기도 편해요. 넓고 환하고 아기랑 찬영씨를 위해 필요한 물건 다 갖춰놓았어요. 작긴 하지만 정원도 딸려있는 집입니다.” “글쎄, 나중에 간다니까. 네가 먼저 가서 새집증후군이 있나 없나 체험해 보는 거야. 알았지? 아빠. 파이팅.” “그래서 일부러 완공한 지 몇 년 된 건물 중에서 골랐다니까요. 전문가 불러서 검사도 해봤는데 아무 이상 없었어요.” 아, 싫다니까. 완강한 찬영의 태도에 신주도 부아가 치민다. “왜 여기 있겠다는 겁니까. 혹시 석진씨 때문입니까? 석진씨랑 헤어지고 싶지 않아서요?” “너 그거 무슨 뜻이야. 내가 너랑 그랬다고 세상 모든 남자들하고 다 그러는 줄 알아? 석진이랑 나 8년 우정이야. 넌 지금 나하고 석진이 둘 다 모욕한 거야.” “절 속물이라고 하셔도 할 수 없어요. 전 찬영씨가 석진씨랑 둘만 있는 것 싫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바도 못 가게하고 싶어요. 인우씨, 정수씨가 찬영씨 옆에서 맴도는 것도 싫고 다른 사람들이 찬영씨 쳐다보는 것도 싫습니다.” “나 네 부인 아니다. 더 이상은 월권이야. 내가 분명 네가 말한 조건 지키겠다고 약속했지? 약속은 확실히 지켜. 내 가까운 사람들 만나는 것까지 간섭하려 들지 마.” 어디서 감히 은근슬쩍 소유권 주장을. 내가 아이에 대한 권리를 준 댔지. 언제 나에 대한 권리도 준다고 했냐. 이럴 줄 알았으면 6개월 간 집밖으로 나가지 말아달라, 이런 조건을 내걸 것을 그랬다. 6개월의 금욕 기간이 끝나면 ‘아이 교육상 안 좋다’라는 이유를 들어 20년 간 다른 남자와의 접촉 금지를 떼써볼 참이다. 그리고 아이를 일찍 결혼시켜 손자를 빨리 보게 하는 거다. ‘손자 교육을 위해’ 이 조건으로 또 20년. 그 때쯤이면 찬영씨도 온전한 내 사람이 되어있지 않을까. 조찬영 포획계획 40년. 신주의 원대한 포부를 알리 없는 찬영은 이 참에 신주에 대한 선을 확실히 그어야겠다고 결심한다. “착각하지 마. 김신주. 너를 친구이자 아는 동생으로 받아들이겠다고 했지. 연인으로 받아들이겠다고 하지 않았어. 아이에 대한 네 의사와 권리는 존중하지만 나에 대한 권리는 없다는 걸 알아둬.” “찬영씨와 전 단순한 친구관계가 아니지 않습니까. 찬영씨는 제 아이를 가졌어요. 전 찬영씨가 가진 아이의 아빠란 말입니다. 그리고 이제 곧 한집에서 세 사람이 함께 살아가게 될 텐데. 이런 관계가 단순한 친구일 수 있습니까? 사람들은 이런 관계를 두고 보통 ‘가족’이라고 하지 않나요?” “......” 딱히 반박할 말을 찾을 수 없는 찬영이 눈동자만 데구룩 굴린다. “섭섭합니다. 찬영씨. 제가 찬영씨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아시면서 어떻게 그렇게 차가운 말씀을 하시나요.” 우리 이사 같이 하죠. 네? 그렇게 말하면서 또 은근슬쩍 거리를 좁힌다. “어딜 은근슬쩍 넘어와. 내가 접촉은 하루 한번이라고 했지? 아까 들어오면서 현관에서 만졌잖아. 오늘은 그걸로 끝이야.” “그건 우리 아기에게 아침 인사 한 거구요. 본격적인 대화는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습니다. 오늘은 아기에게 읽어주려고 동화책도 사왔는데 그 짧은걸 한번으로 치시면 곤란합니다.” 그 날 찬희 병실에서의 태동 이후 틈만 나면 부자간의 커뮤니케이션을 이유로 갖은 접촉을 해오는 신주다. 참다 못한 찬영이 하루 한번씩만 허락한다며 조건을 내걸었다. 언제든 신주가 원하는 시간에 터치 타임을 갖는다. 부위는 복부 한정. 시간 제한은 없으나 하루 한번의 기회를 놓치면 그 날 더 이상의 접촉은 불가 한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건너뛰더라도 다음날로 이월(移越)되지 않는 것이 원칙. “시끄러워! 이미 기회는 지났어. 나 일 해야 하니까 정 얘기하고 싶으면 이걸로 대화하던지.” 그러면서 신주에게 던져주는 것이 양쪽이 실로 연결된 종이컵 2개다. “이게 뭡니까?” “보면 모르냐. 종이컵 전화기다. 전자파는 해로우니까 이걸로 대화하도록 해.” “...이게 들립니까?” “잘 들려. 슬기로운 생활. 2학년 책에도 나온다. 진동의 원리를 이용한 전화기. 멀리서도 잘 들리니까 저만큼 떨어져서 얘기해.” 명명 ‘사랑의 대화’. 효능, 불필요한 접촉 없이도 아버지와 태아의 대화를 가능케 함. 제조업자, 조찬영. 사용연령, 3세 이상. 김신주용. 정말 이걸 쓸려는 생각인지 종이컵 한쪽을 자신의 배에 갖다 댄 찬영이 신주에게서 등을 돌려 저만치 멀어진다. 정말이지 찬영씨에겐 두 손, 두 발 다 들었습니다. 빙그레 웃으며 실이 꿰어진 종이컵 안쪽을 바라보던 신주가 장단을 맞춰주려는 듯 컵을 입에 가져댄다. “여보세요. 찬영씨 들립니까?” “이 바보야. 내가 아니라 아기하고 얘기하라니까.” “흠흠...따님, 혹은 아드님. 아빠입니다. 잘 들립니까?” “......” “잘 들립니까?” “잘 들린다잖아!” “그런가요? 그럼 잘 듣고 계신 걸로 믿고 계속 이야기하겠습니다. 따님, 어쩌면 아드님. 어찌하면 좋을까요. 찬영씨가 제 말을 너무 안 들어서 아빠는 속상해 죽겠습니다. 다 준비해 두었으니 몸만 오시면 되는데 오지 않겠다고 저리 고집을 부립니다. 저는 따님, 혹은 아드님과 늘 같은 곳에 있고 싶어서 그러는데 말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제일 먼저 당신의 얼굴을 보며 눈을 뜨고 당신의 얼굴을 가장 마지막으로 눈에 담으며 하루를 마감하고 싶습니다. 꿈속에서도 만나면 더욱 좋겠네요. 제 마음은 이런데 찬영씨가 알아주지 않아서 아빠는 그것이 슬픕니다. 여보세요. 아기님.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길, 귀를 막았어야 하는데. “여보세요? 아기님? 찬영씨. 아기가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요.” 이번엔 종이컵을 귀에 갖다댄 신주가 천연덕스럽게 능청을 떤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찬영씨. 이거 고장났나 본데요?” “...내...내가 해석해줄게. ‘아버지, 바보. 시끄러워요. 배고프니까 나가서 점심이나 사와요.’ 알았지? 가서 사와. 빨리.” 뭘 사올까요? 몰라, 아무거나 맘대로 사와. 너네 식당 가서 훔쳐오든지! 신주를 등 떠밀어 내쫓은 찬영이 현관문에 기대 손 부채를 부친다. 느끼한 자식. 어떻게 얼굴 표정 하나 안 변하고 저런 말을 하냐. 젠장 9월인데 왜 이렇게 더워. 얼굴에서 열이 난다. 팍팍. ********** 그리고 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변화였다. 신주가 6개월 금욕을 내걸었을 당시, 오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찬영이 그 조건을 받아들였던 것은 임신을 계기로, 정확히는 입덧을 계기로 성욕이 현저히 감퇴되었기 때문이었다. 인간의 3대 욕구. 수면욕, 식욕 그리고 성욕. 수면욕과 식욕이 제대로 채워지지 않았으니 마지막 성욕은 발현될 기회조차 없었던 것. 그랬던 것이 입덧이 가라앉고 불면증이 치유되고 잘먹고 잘 자는 안정기에 들어서자 점차 잊혀졌던 자기 몫의 주장을 해오기 시작한 것이다 ‘하고 싶다.’ 내가 미친 게 아닐까. 김신주의 저 등짝이 이리 섹시해 보이다니. 미쳤다. 분명히 미친 게야. 나의 취향은 어디까지나 큐트 보이가 아닌가! “찬영씨? 이쪽이 아니에요? 맞는 것 같은데.” 불이 나간 현관의 전구 전극을 돌려 맞추던 신주가 찬영이 거세게 머리를 가로젓고 있는 것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한다. 임산부가 이 무슨 위험한 행동입니까. 들어오다 찬영이 의자 위에 올라가 있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전구를 빼앗아든 신주다. ‘딸깍’ 전극이 홈에 맞물려 제자리를 찾아 들어간다. “찬영씨. 제대로 된 것 같은데요. 한번 불 켜보세요.” 환하게 밝혀진 불이 신주의 턱 선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까지 어김없이 비추고 있다. 저, 저 목울대 움직이는 것 좀 보라지. 꿀꺽,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킨 찬영이 신주의 목젖을 넋 놓고 바라본다. ‘하고 싶다. 정말로.’ “찬영씨?” 가만히 서 있는 찬영을 이상히 여긴 신주가 찬영의 어깨에 손을 얹는다. 으아악. 소스라치게 놀란 찬영이 요란스럽게 어깨를 털더니 저만치 밖으로 달아난다. 내가, 내가, 내가, 천하의 조찬영이 저 김신주를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다니. 이건 마치 욕구불만에 가득 찬 과부가 뒤뜰에서 웃통 벗고 장작 패는 마당쇠를 훔쳐보고 군침을 흘리는 것 같지 않은가. 마님은 왜 돌쇠에게만 쌀밥을 주었는가. 학창시절 친구들과 빌려 본 에로비디오의 제목이 찬영의 머리 속을 뱅뱅 맴돌고 있다. “전구도 갈아 끼웠으니 찬영씨, 저는 이제 우리 아기님과 둘만의 시간을 가지려고 하는데요.” ‘사랑의 대화’가 찬영의 손에 의해 파괴된 이래 대화시간이 부족하다는 신주의 항의에 찬영은 하루 두 번으로 터치 타임을 늘렸다. 단 시간제한을 두어 한번에 15분을 넘지 않도록 규칙을 바꾸었다. 터치 타임...듣기에도 에로하지만 실제로도 자극이 강하다. 찬영은 덕분에 배꼽에도 성감대가 있다는 것을 절절이 깨달았다. 찬영을 뒤에서 안은 신주가 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온다. 방금 손을 씻고 왔기에 차가운 신주의 손에 찬영이 움찔하며 허리를 비튼다. 원을 그리며 배를 쓰다듬는 손길. 다시 가볍게 쥐었다가 살살 문지르는 터치에 오금이 저린다. 신주가 찬영의 튼살 방지를 위해 공부해왔다는 임산부 맛사지다. 아으으. 튼살 방지 크림에 최음제 성분이라도 든 것인지 아주 미치겠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양반이다. 맛사지가 끝나면 대화를 한답시고 배꼽에 대고 말을 해 오는데 이게 참 죽을 맛이다. 말을 할 때마다 나오는 입김이 배꼽을 살살 자극해 전신의 피를 끓게 만든다. 귓가에 대고 숨을 불어넣으면 보통 자지러지지 않는가. 배꼽도 마찬가지다. 혀까지 넣었으면 기절했을 거다. 분명. 따님 혹은 아드님, 낮잠 잘 잤어요? 아빠입니다. 자식을 부르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흥분하다니 이런 생 변태가 따로 없다. 아침, 저녁으로 애국가를 불러대는 이 심정을 그 누가 알겠는가. “그! 그만! 15분 넘었어! 손떼!” 15분은 너무 짧지 않습니까. 찬영씨. 볼멘 표정의 신주가 간신히 찬영에게서 떨어진다. 정말이지 찬영씨는 너무 차갑다. 일, 이분 정도 눈감아주면 어때서 그리 차갑게 딱 자릅니까. 눈도 안 마주치고 시계만 쳐다보고. 전 상처입었다구요. “석진이 집에 올 시간 다 됐어. 너 그만 가라.” “제가 꼭 가야할 이유가 있나요? 함께 있죠. 석진씨랑 얘기도 하고.” “얘기는 무슨 얘기! 이 좁은데 셋이 있으면 정신 사나워. 집에 가서 빨리 자라. 새 나라의 사장님 돼야지.” “저와 같이 있는 게 그렇게 싫으십니까?” “싫어. 싫으니까 빨랑 가.” “제가 싫으셔도 이사는 꼭 하셔야 합니다. 찬영씨를 이대로 이곳에 둘 수 없어요.” 안 돼. 나 말라죽는 꼴을 보고 싶으냐. 지금도 미치겠다. 제발 좀 가라. 가. 그대로 버티고 선 신주를 피해 찬영은 자신의 방으로 도망쳐 문을 잠갔다. 이대로 가다가는 김신주를 덮치는 사태가 벌어질 것 같다. 조만간. ********** 김신주 등짝의 망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바를 찾았는데 이건 그야말로 지뢰밭이다. 평소에는 큐트 보이만을 쫓느라 몰랐는데 여기 은근히, 아니 대놓고 물이 좋구나. 여기를 봐도 실한 등짝, 저리를 봐도 실한 등짝. 오늘 전국 실한 등짝 정모라도 하는 것이냐. “찬영이 형 무슨 안 좋은 일 있어요?” 한숨만을 푹푹 쉬어대는 찬영이 이상한지 인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다. 인우야, 형 취향이 바뀌었나봐. 성적 취향도 입덧처럼 그리 변덕스런 것 인줄 내 미처 몰랐다. “한인우, 재롱 잔치.” “예? 형?” “재롱 좀 부려봐. 형 우울타.” 너의 귀여움을 내게 맘껏 발산해 주렴. 이 형 늦기 전에 다시 꿈과 환상의 네버랜드로 돌아가고 싶구나. 재롱 잔치라니, 재롱 잔치라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에요. 형. 제 나이가 몇인데. 벌써 꺾어진 오십이란 말입니다. 초등학교 들어간 조카가 있어요. “형 정말 무슨 일 있으신 거에요?” 아직 세상엔 안아보지 못한 꽃돌이가 이다지도 많거늘 난 어느새 마당쇠가 아니면 만족을 못하는 마님이 되어버렸단 말인가. 눈을 질끈 감고 머리를 누르며 괴로워하는 찬영을 보다 못한 지환이 코코아 한잔을 타 내민다. 어린애와 여자, 그리고 성질 까탈스런 게이를 달래는 데는 단 것 만한 것이 없다. 이것이 강지환 26년 삶의 지혜다. 뜨거운 코코아를 마시며 잠시나마 진정되었던 가슴은 지환이 대걸레를 들고 바닥청소를 시작하면서부터 다시 쿵덕대기 시작했다. “강지환.” “예?” “너 운동 하냐?” 가볍게 몸 푸는 정도로 하고는 있습니다만 왜 그렇게 뜨거운 눈길로 저를 바라보십니까 선배? “아니다.” “예?” “아니야, 아냐. 내가 미쳤지. 신경 쓰지 말고 청소해. 인우야, 형 간다.” 대걸레라는 거 꽤 섹시한 소도구구나.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면서 찬영이 쓸쓸히 문을 나선다. ...옷 속으로 손을 넣어 등줄기를 쓸어 내리는 손길에 허리가 뒤로 젖혀진다. 절반쯤 풀린 셔츠 단추가 거친 손길에 의해 툭툭 떨어져 나간다. 찬영아...귓가에서 속삭이는 음성에 상대의 손가락을 잡아 입안에 넣고 하나씩 빨아 그 맛을 음미한다. 찬영아, 잠깐만. 그거 해야지. 그거? 그게 뭔데. 찬영아, 잠깐만 기다려. 금방 가서 가져올게. 아아, 귀찮아. 석진아. 그냥 하자. 우리. 기분 좋게. 응? ... 잠깐만, 잠깐만, 잠깐만, 지금 뭐라고 했어? 석진? 석진? 세상에...손석진?!! “찬영아. 일어났니?” 찬영아...찬영아...방금 전까지 귓가에서 자신에게 속삭이던 바로 그 목소리가 방문 밖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빼도 박도 할 수 없는 석진의 목소리. 그렇다. 8년 친우 손석진의 음성이었다. 꿈속의 그 상대는. “찬영아, 나 오늘부터 파리 출장이다. 알지? 저번에 얘기했던 그 화보집 건. 아침 차려뒀으니까 일어나면 데워 먹어. 가서 전화할게. 다녀온다.” 오늘부터 보름간 파리 출장이라고 어젯밤 석진이 말했었다. 그리고 아침 비행기 시간에 맞춰야 한다며 석진은 일찍 자러갔고 찬영은 그 뒤로 TV채널을 돌려보다 1시쯤 잠자리에 들었다. 분명 우리 아무 일도 없는 것 맞지? 너무도 생생한 꿈에 잠시 현실이 혼동되는 찬영이다. 미쳤어, 미쳤어, 미쳤다. 아무리 굶주렸다고는 하나 어떻게 가장 친한 친구를 상대로 그런 꿈까지 꿀 수 있을까. 젠장, 석진이가 깨워주지 않았다면 아무리 꿈속이었다고는 하지만 그대로 끝까지 가버릴 뻔했다. 어떻게 된 거야. 조찬영. 미쳤어? 이대로는 안 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짐승 같은 욕구를 잠재워야 해. 그렇게 결심한 찬영이었다. 참선...독경을 읊는 스님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섹시하다. 기도...신께서 응답하지 않으신다. 팔굽혀펴기...아기에게 무리 가니 패스. 결국 결론은 하나였다. “하자.” 예? 뭘 말입니까? 석진의 부재를 틈타 며칠 머물 작정으로 짐을 싸들고 온 신주가 문을 열자마자 뛰쳐나온 찬영의 발언에 의아한 얼굴을 한다. “섹스하자.” 섹스요? 찬영씨, 갑자기 왜 그런...으아아. 갑자기 매달려오는 찬영에 놀란 신주가 찬영을 간신히 떼어놓는다. “하기 싫어?” 신주의 제지에 금세 분노 10초 전 모드에 들어간 찬영이 눈을 부릅뜬다. “찬영씨, 무엇보다 여긴 현관이고요. 그리고 그건...그건 우리 앉아서 차근차근 얘기부터 해봅시다.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하시게 된 겁니까.” 이놈이! 하고 싶으니까 하자는 거지. 하는데 이유가 필요해? 넌 지금까지 상담부터 받고 섹스했냐? “더 이상 못 참겠어. 그냥 하자.” “지금까지 참으셨어요? 찬영씨?” 제가 싫어서 터치 타임 외엔 손가락 하나 못 대게 한 것 아니었습니까? “니가 다른 놈이랑 접촉도 못하게 하잖아! 나는 어떻게 풀라고! 나도 엄연히 욕구를 가진 성인 남자야. 오른손 애인도 한두 번이지 어떻게 6개월을 그러고 사냐.” “정확히는 이제 4개월 반 남았습니다만.” “4개월이던 5개월이던 나는 더 이상 못 참아. 다른 남자들과의 접촉 금지였으니까 너랑 접촉하는 건 약속 위반이 아닌 거 맞지?” 예상하지 못했던 찬영의 발언에 당황하면서도 신주는 금세 또 엉겨붙어오는 찬영을 침착하게 떼어놓는다. “시간 제한 풀어줄게. 너 원하는 대로 만져.” 꽤 솔깃한 제안이긴 합니다만 찬영씨. “이제 겨우 4달 반 남았습니다. 찬영씨. 조금만 더 참아 주세요. 이러는 것 아기에게 좋지 않습니다.” 웃기지마. 내가 그 후에도 너랑 자고 싶어할 것 같아? 니가 감히 날 거절해? 그것도 두 번이나? 거절당해 약이 오른 찬영이 씩씩 격한 숨을 몰아쉰다. 감히 신주가 거절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찬영이다. “저도 찬영씨랑 하고 싶습니다. 제가 왜 찬영씨랑 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이럴 수 밖에 없는 제 심정도 좀 이해해 주십시오. 찬영씨는 다른 임산부들보다도 더욱 조심해야 하지 않습니까. 유례가 없는 일이라 그 결과를 예측하기 힘들다고 신규형도 그랬구요. 일반 부부들도 임신 중엔 성관계를 자중한다고 들었습니다.” 시끄러워. 듣기 싫어. 그런 변명 따위. 너 지금 실수 한 거야. 이런 기회가 또 오기나 할 것 같아? 애만 낳았단 봐라, 아예 할렘을 차려버릴 테다. 그 날 저녁 잔뜩 독이 오른 찬영이 신주가 곁에 다가오지도 못하게 하는 통에 터치 타임은 건너뛸 수밖에 없었다. 문을 닫아 건 찬영의 방문 앞에서 한참을 신주는 머리만 긁적이다 새벽녘 좁은 소파 위에서 몸을 구부려 새우잠을 청했다. ********** ※ 슈크림럽 님이 입장하셨습니다. 마이아벨 : 저희 남편은 임신 아랑곳하지 않고 자꾸 하자고 보채는 통에 죽겠어요. ㅋㅋㅋ 주부3단 : 슈크림럽님 어서 오세요. ^^ 마이아벨님 부럽습니다. 전 벌써 두 번째 아이인데 저도 시큰둥하고 남편도 시큰둥해서 그냥 한 달에 한번 정도하고 있어요. 슈크림럽 : 어머 무슨 얘기들하고 계셨어요? >.< 콩깍지맘 : 신입회원인 섹시차님께서 남편 분이 영 하려고 들지 않아서 욕구불만이 쌓였다고 그러셔서요. 다들 함께 의논중이였답니다. ^^ Sexy Cha : 저...남편;;;;은 아니고 그냥 애 아버지입니다. -_- 슈크림럽 : 어머나. 아이까지 가지셨는데 왜 결혼을 안하셨어요? 혹시 미혼모? 스틸라이프 : 슈크림럽님 실례예요. 섹시차님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으시겠죠. Sexy Cha : 그녀석이 하자고 그랬는데 제가 싫다고 그랬습니다. -_- 슈크림럽 : 어머 죄송해요. 제가 생각 없이 그만. >.<;; 신촌마미 : 저도 아무래도 아기가 걱정이 되어서 조심스럽게 했어요. 첫아기라 남편도 저도 무척 걱정했거든요. 살살하시면 괜찮지 않을까요? 마이아벨 : 그게 하다보면 이성을 잃어 가지고 막 하게 되더라구요. ㅋㅋㅋ 스틸라이프 : 마이아벨님 ㅋㅋㅋ는 통신체입니다. 쓰지 말아 주세요. 마이아벨 : 알았어요 -_- 허니베베 : 저도 얼마 전까지는 만사가 귀찮고 피곤해서 남편이 하자고 해도 슬슬 피했거든요. 그런데 한 임신 5개월쯤 지나니까 막 땡기는 거에요. 그래서 하자고 했더니 그 배를 하고서 어떻게 하냐고 막 그러는 거 있죠. 한 대 때리고 싶은 걸 겨우 참았어요. 자기하고 싶을 땐 하자고 그렇게 조르더니 정말 너무하지 않나요! Sexy Cha : 제 말이 그 말입니다! 주부3단 : 그래도 막상 남편이 거절하면 그게 또 엄청 자존심이 상하더라구요. 내 매력이 떨어졌나 그런 생각도 들고, 밖에서 바람 피는 건 아닐까 그런 의심도 들고요. 슈크림럽 : 어머 혹시 섹시차님 남편, 아니 실수, 아이 아버지께서 바람피우는 거 아닐까요? 스틸라이프 : 슈크림럽님! -_-+ 슈크림럽 : 스틸라이프님은 왜 자꾸 저만 갖고 그러세요？ 전 말도 못하나요? 마이아벨 : (귓말) 슈크림럽님. 스틸라이프 저 여자 정말 재수 없지 않나요? Sexy Cha : (귓말) 귓말 잘못 보내셨습니다 -_- ********** 상쾌한 아침 공기. 맑고 아름답게 지저귀는 새 소리. 알싸한 약수터 물맛까지 모든 게 완벽한 아침이었다. 그 말을 듣기 전까지는. 자 이제 가볼까? 적당히 경사가 진 마을 뒷산은 아침 조깅 코스로 안성맞춤이었다. 신규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운동화 끈을 고쳐 매던 그 순간. “큰형. 물어 볼게 있는데.” 응, 뭔데. 물어 봐라. 나~나나나~나나나나난 나~ “임신 중에 해도 돼?” 쿨럭, 신규는 그대로 거꾸러지고 만다. “큰형 괜찮아?” 놀란 신주가 한달음에 달려온다. 이, 이 녀석. 이 형을 앞으로 얼마나 더 놀래키려고 하는 것이냐. 다음부터는 제발 예고 좀 해다오. “네, 네가 말하는 그 상대란 물론 찬영씨를 가리키는 거겠지?” “응.” 멀쩡한 남자를 임신시킨 것도 모자라 그런 짓까지 시도하려는 것이냐. 막내! “물론, 물론...해도 되긴 하지. 적절한 성관계는 자극을 줘서 아기 감각 발달에 도움을 주기도 하거든. 유산 경험이 없다면 산달까지도 가능하다. 물론 산모가 원한다는 보장 하에서 말이야.” 너 이 녀석 강제로 하려는 건 아니겠지! 아무리 내 막내 동생이라도 그건 용서 못한다. “그건 걱정 없어. 찬영씨도 원하니까.” 쿨럭, 또 다시 계단에서 구를 뻔한 신규다. 상상하면 안 된다. 상상하면 안 돼. 머리 속에 두둥실 떠오른 신주와 찬영의 농도 짙은 섹스 신을 몰아내려는 듯 신규는 허공을 마구 휘젓는다. “진작 물어볼 걸 그랬네. 큰형 고마워.” 날아갈 듯 달려가는 신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신규는 마지막 한 마디를 외쳤다. 신주야! 살살! 살살 해야 해...... 그 시각 찬영은 패션 잡지에서 오려낸 남자 모델들의 사진을 자신이 ‘체인징 파트너’라 명명한 다트 판 위에 붙이고 있었다. 그저께는 남자 가수 특집이었고, 어제는 남자 배우 특집이었다. 그러니 오늘은 남자 모델 특집을 할 차례인 것이다. ‘그게 뭡니까? 찬영씨?’ ‘보면 모르냐. ‘체인징 파트너’, 밤의 친구. 밤참 메뉴 고르는 것을 도와주는 기구다.’ ‘밤참이라구요?’ ‘그래. 그 ‘누구’가 날 거들 떠도 보지 않으니 이런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지 않냐. 어이쿠! 오늘밤은 ‘주드 로’ 일세. 대박이잖아.’ 금발머리 배우의 사진에 입맞추는 찬영을 바라보는 신주의 양미간 사이로 굵은 주름이 패인다. 이러기입니까. 찬영씨. 정신적인 바람도 바람이라구요. 못마땅한 표정을 한 신주를 찬영이 슬쩍 곁눈질한다. 이러고도 안 넘어오면 넌 남자도 아니다. 바보야. 내 팔자야...천하의 조찬영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담. 찬영이 한숨을 내쉬던 그때, 기척도 없이 현관문이 벌컥 열린다. “어? 너 또 츄리닝이냐?” 이른 아침부터 웬 일이냐. 너 오늘은 저녁때 온다고 하지 않았어? 운동화를 벗어 던진 신주가 말도 없이 찬영에게로 뚜벅뚜벅 걸어온다. 너, 너 왜 이래! ‘체인징 파트너’ 때문에 화난 거야? 오늘밤은 하지 말까? “찬영씨.” “응?” “합시다.” 뭘? 설마 ‘그거’? 갑자기 왜? 너답지 않게 왜 이러냐. 야, 무서워. “하자구요. 섹.스.” 이 자식 눈빛이 정상이 아니야! “나, 나, 나중에 하면 안될까? 네 말대로 우리도 자중..." 읍! 성난 황소처럼 강하게 신주가 찬영의 입술을 집어삼킨다. 버둥거리던 찬영의 팔이 신주의 등을 마구 때리다 서서히 잦아진다. 눈부신 아침 햇살이 두 사람의 얼굴을, 목을, 등을, 다리를 타고 흘러내린다. 지금 시각 오전 7시 15분. 제 8 편 < 벽에도 귀가 있다 > 그동안 너무 오래 굶었던 탓일까. 아주 정신을 못 차리겠다. 키스, 식사로 따지자면 입맛을 돋우기 위한 전채요리, 프랑스어로는 오드되브르(hors-d'oeuvre), 영어로는 애피타이저(appetizer), 러시아어로는 자쿠스카(zakuska), 중국어로는 첸차이[前菜] 그래, 서양식 식사에서 정해진 식사 메뉴 코스에 앞서 식욕을 돋우기 위하여 대접하는 소품의 음식, 고작 이것이거늘 키스만으로도 너무 좋아서 갈것 같다니 역시 조찬영, 넌 미쳤어. 옷을 벗기기 쉽도록 들어올렸던 두 팔을 신주의 목에 걸치며 찬영은 신주의 귓가에 열에 들뜬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런데 너...갑자기 왜 마음이 변한 거야? 금욕하자 더니.” 그게요, 찬영씨. 찬영의 솟아오른 가슴돌기를 입안에 넣고 살살 굴리면서 한 손으로 무릎까지 내려간 찬영의 바지를 마저 끌어내리던 신주가 잠시 동작을 멈추고 뒷말을 이었다. “아기한테 좋대요.”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신주의 애무에 허리를 비틀어대던 찬영이 고개를 바로 하고 다시 물었다. “아기의 뇌에 자극을 줘서 감각발달에 도움을 준다고 합니다.” 뒤이어 속옷에까지 손을 뻗쳤던 신주는 다음순간 걷어차여 거실바닥을 뒹굴 수밖에 없었다. 찬영의 발차기가 복부에 작렬한 것이다. “...찬영씨?” 고통에 얼굴을 찡그렸던 신주는 뒤이어 갑작스럽게 날아든 물건-방석, 잡지, 스카치 테이프, 다트판-을 피하지 못하고 사정없이 머리와 몸 이곳저곳을 얻어맞았다. “찬영씨, 왜 이러십니까. 제가 무슨 실수라도 했습니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찬영의 손에 들려있던 가위가 신주가 앉아있는 곳 바로 뒤의 벽에 날아와 부딪쳐 떨어진다. “너는 내가 씨받이로 보여?” “씨받이라뇨, 찬영씨.” 이건 또 무슨 변덕인가. 영문은 알 수 없지만 우선은 화가 난 찬영을 달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한 신주가 몸을 일으켜 찬영에게 다가왔다. “손 저리 치워!” 접근한 신주의 손을 홱하고 뿌리친 찬영이 몸을 부들부들 떨며 소리친다. “니 머릿속엔 오직 아기밖에 없지? 아기만 건강하게 잘 나오면 됐다 싶지? 내가 그렇게 하자고 할 때는 거절하더니 이제 와서 아기한테 좋으니까 하자고? 뭐, 감각발달에 도움을 줘? 잘났다. 그래! 김신주! 네 말대로 너~무 자극이 잘 되어서 천재 나올 것 같다. 조기교육 잘 시켜서 하버드 대학이라도 보내지 그래?” 지금까지 이런 대접 받아본 적 없다. 처음부터, 그래, 1년 전부터, 아니 13년 전부터 찬영을 이렇게까지 화나게 하고 신경 쓰이게 하고 분해서 눈물까지 보이게 한 건 저 인간 김신주, 저 자식 하나밖에 없었던 듯 싶다. 조찬영 일생에 욕정이나 열정, 애정 때문이 아닌 태아발달의 도구로 섹스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네놈이 감히 날 이딴 식으로 취급을 해? “제 말이 그런 식으로 들렸다면 사과할게요. 찬영씨. 하지만 제 말의 의도는 그런 것이 아니었어요. 아시잖아요. 제가 찬영씨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저는 찬영씨가 너무 소중해서...” “시끄러워! 입 닫아! 변명 듣고 싶지 않아.” “변명이 아니라 진심입니다. 저도 찬영씨와 하고 싶었어요. 좋아하는 찬영씨와 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찬영씨 몸에 무리 갈 것 같아 참았던 것이고 행여 아기에게 해가 되지는 않을까 해서 망설였던 겁니다. 임신으로 이미 힘들어하는 찬영씨에게 더 이상의 몸의 부담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어요. 정말입니다.” “너 진짜 재수 없어!” 분을 못이긴 찬영이 신주에게서 등을 돌리고 거실바닥에 얼굴을 묻는다. 안절부절못하는 신주를 내버려둔 채로 한참을 그렇게 침묵을 지키고 있던 찬영이 잠시 후 빨개진 눈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가자뇨? 어딜...” “방으로 가자고. 여기서 할거냐? 이 딱딱한 데서?” 앞서 방으로 향한 찬영이 마지막으로 몸에 걸치고 있던 팬티를 제 스스로 벗어 바닥에 내려놓는다. 그러더니 엉거주춤 서 있는 신주를 밀어 침대로 밀어 쓰러뜨리고 옷을 벗기기 시작한다. “찬영씨?” “나 아직 화 풀린 거 아니거든. 아무튼 하기는 하겠는데 네가 나의 욕망을 무시했으니 나도 네 욕망을 무시할 작정이야. 지금부터 너 입 꼭 다물어. 말도 하지말고 몸 움직이지도 마. 손가락 하나 까닥하기만 해봐. 신음소리라도 크게 내면 그 길로 끝인 줄 알아. 다신 없어.” 간편한 운동복 차림이라 벗기기 쉬워 금세 알몸이 된 신주를 앞에 두고 찬영은 그렇게 선언했다. ********** 그것은 참으로 무서운 형벌이었다. 성 고문이 따로 없구나. 입술 끝을 비집고 나오려는 신음을 간신히 참으며 신주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자신의 다리 사이에 자리 잡은 찬영의 동그란 머리통이 보인다. 찬영은 벌써 10분 째 신주의 것을 할짝할짝 맛만 보며 신주의 애간장을 태우고 있었다. 솟아오른 귀두가 저리 애처롭게 부들부들 떨며 눈물을 흘리고 있거늘 잔혹한 찬영씨는 용서해줄 기미조차 보여주지 않는다. 아이스크림이었다면 벌써 다 녹아서 사라져버렸을 것을. 찬영의 입 속으로 숨어버린 신주의 분신은 녹기는커녕 더욱 더 그 크기를 부풀리고만 있다. 온몸의 피가 모두 한곳에 모여 훌라춤을 추고 있구나. 어서 찬영씨의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 강력 입주 희망. 피켓 들고 데모하는 신주의 힘줄들의 항의가 더더욱 거세어져가고만 있다. 더 이상 나는 못 참겠소. 강제로라도 들어가겠네. 힘줄 21호가 그렇게 외친 순간 피리 부는 사나이 찬영의 츄릅거리는 그 유혹의 멜로디, 그 곡조에 투항선언을 해버린 애액 19호가 벙커를 탈출하고 따뜻한 남쪽나라 찬영의 입 속으로 먼저 뛰어들었다. 한번 무너져 내린 전선은 걷잡을 수 없이 파괴되어갔고 뒤를 이어 나머지 이들도 앞뒤 다투어 조국의 품에 안겼다. 병사 잃은 벙커의 주인 김 대장 또한 쾌감을 어쩌지 못하고 시트만 꼭 쥐고 있을 뿐. 다행히 신주가 열 손가락 까닥한 것을 찬영은 눈치채지 못한 듯 싶다. 오른손을 들어 슥 하고 입을 닦아내더니 손바닥을 뒤집어 입 속의 애액 군단을 다시 석방시킨다. 방출된 병사들은 아버지를 부르짖으며 따뜻한 남쪽나라 그곳에서의 무용담을 본체에 자랑하기 바빴다. 뱉어낸 신주의 정액을 다시 신주의 본체(페니스)에 고루 발라놓은 찬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어떻게 하면 덜 아프게 삽입(당)할 수 있을까를 놓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찬영의 뜨거운 시선을 받고 다시금 생기발랄해진 페니스가 흔들흔들 웰컴 투 오르가즘, 우리 함께 해요를 외치고 있는 가운데 에라, 모르겠다. 일단 그냥 가보자 라고 결심한 찬영이 허리를 들어 접속을 시도한다. 들여보내고자 하는 찬영의 의지와 들어가고자 하는 신주의 의지가 만났으니 일사천리로 진행될 법도 했으나, 찬영의 아래 문지기의 반항이 심상치 않다. 굳게 다물린 주름이 너는 손가락부터 들여보내는 예의도 모르느냐 라고 외치고 있으니. “젠장...” 상관인 내가 원하는데 감히 아랫도리 네가 반항을 해? 체질상 하극상은 용서 못하는 찬영이 문지기를 준엄하게 꾸짖은 뒤 무력진압을 단행한다. “아...” 겨우 선단만 집어넣었을 뿐인데 너무 아파서 눈앞이 새하얗게 변한다. 고통으로 파들파들 떨리는 몸이 제것이 아닌 양 감각조차 멀어졌다 재빠르게 다시 돌아와 전신에 극도의 통증을 구석구석 전하고 있다. 고통스럽기로는 신주도 마찬가지. 끊어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찬영의 입구가 사정없이 신주의 물건을 조여대고 있는 것이다. ‘찬영씨, 무리하시지 마십시오. 몸 다치실까 걱정됩니다.’ 한동안 섹스를 못하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게 말해야겠다고 결심한 순간 찬영이 ‘잇!’ 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신주의 것을 뿌리까지 집어넣었다. “악!” 결국 악 소리를 내며 엎어진 찬영이 미동조차 없자 걱정이 된 신주가 ‘찬영씨!’를 목놓아 부르려는 찰나 찬영이 한 손을 들어 신주의 입을 막았다. 한참을 씩씩거리며 숨을 고르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우고 한 손으로는 벽을, 나머지 한 손으로는 신주의 배를 짚고서 다시금 자리를 잡는다. 어찌나 입술을 꼭 깨물었는지 아랫입술에서 피가 새어나오고 있다. 천천히, 천천히 찬영이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치의 틈도 없이 신주의 페니스를 감싼 찬영의 내벽이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며 신주를 빨아들이고 있다. 황홀한 쾌감이 전신을 내달리고 있건만 내색조차 할 수 없으니 이 또한 죽을 맛이다. 찬영이 한번씩 허리를 내달릴 때마다 쾌락의 불꽃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작렬한다. 찬영의 탐스러운 엉덩이가 신주의 사타구니와 맞닿을 적마다 앓는 듯한 신음소리가 찬영의 입에서 새어나온다. 이마에서 시작된 땀방울이 턱을 타고 내려가 쇄골에 닿은 뒤 유두에 맺히고 다시 미끄러져 배꼽 안에 잠시 머물다 반쯤 발기된 찬영의 성기 끝에 머문다. 등뼈를 타고 내려온 또 다른 물방울은 엉덩이 사이 갈라진 계곡에 머무르다 맞닿은 신주의 사타구니 위로 내려와 작은 웅덩이를 만든다. “...아흑...아...” 저 앙다문 입술에 키스를, 목덜미에 진한 자국을 그리고 붉게 달아오른 양 유두를 깨물어 그 과육의 맛을 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건만 신주는 그저 찬영 모르게 허리를 슬며시 들어올려 찬영이 움직이기 편하도록 작은 도움을 주는 수밖에 없었다. 엉덩이 사이를 타고 내려온 애액으로 흥건히 젖은 시트가 어느새 신주의 허리까지 축축이 젖게 만들고 있다. “아... 윽...응...으응” 고통뿐이었던 찬영의 표정이 점차 쾌락으로 바뀌어 간다. 요동치듯 흔들리던 허리가 꺾이고 갈 곳을 잃은 두 손이 신주에게 쉴새없이 매달려 온다. 이윽고 찬영의 몸부림이 사그러들었을 때 이대로 찬영을 깔아 눕힌 채 마구잡이로 허리를 움직이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던 신주 역시 고통일지 쾌락일지 모를 정점을 맞이했다. “하아, 하아, 하아....” 신주의 가슴위로 쓰러진 채로 한동안 숨을 고르던 찬영이 그제야 생각난 듯 신주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해온다. “김신주 해제. 해제라고. 이제 움직여도 돼.” 구속에서 풀려난 신주가 기다렸다는 듯 찬영의 뺨을 감싸쥐고 솜털처럼 달콤한 키스를 해온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주면서 가볍게, 물기 젖은 눈 꼬리를 쓸어주면서 따스하게, 피가 말라붙은 입술을 매만지면서 다정하게, 탈진한 찬영을 안고서 그렇게 키스를 해온다. “넌 참 웃긴 놈이야. 움직이지 말랬다고 진짜 그렇게 한번을 안 움직이냐. 신음소리 한번 안 내고.” “움직였으면 화내셨을 거잖아요. 아니면 제가 움직이길 바라셨던 겁니까?” “아니. 잘 했어. 덕분에 화 풀렸다.” “찬영씨, 저는 언제나 찬영씨가 우선이에요. 비록 하룻밤의 실수였고 찬영씨는 바라지 않았던 일이었겠지만 저에게는 그 날의 실수가, 실수가 아닌 기적이었습니다. 이렇게 우리 두 사람 함께 있게 만들어준 아기가 그래서 저는 무척이나 고맙고 소중합니다. 그러나 찬영씨. 제게 있어 찬영씨 보다 더 소중한 사람은 없다는 걸 알아주세요. 아기보다도 더 찬영씨가 귀중합니다. 믿어주세요. 찬영씨. 앞으로 어떤 날이 오더라도 저에게 있어서 가장 최우선은 찬영씨라는 것. 저를 좋아해 주시지 않더라도, 제가 싫으시더라도 그것만은 꼭 믿어 주십시요.” “ ... 않아.” “예?” “너 싫지는 않다고.” “싫지 않으시면 그럼 좋아하십니까?” “이 자식이! 누가 그렇게 앞서가래! 아무튼 싫지는 않아. 오늘은 거기까지! 이 자식이... 왜 실실 웃고 난리야! 이거나 빼! 출근 안 할거야?” 지금 시각 오전 8시 30분. “까짓 거. 뭐. 지각하죠, ...어쩌죠? 이거 뺄 수 없게 되어버린 것 같은데. 한번 더 할까요?” 가뜩이나 부어오른 입구에 어느새 다시 발기해버린 귀두가 걸려 빠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이...이!......야! ” “이번엔 찬영씨가 가만히 있어 주세요. 이제 제 차례입니다.” 힘이 빠져서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으니 조금전 신주의 꼴을 찬영이 당하게 생겼다. 어느새 잘난척 맨~ 김신주의 모습을 회복한 신주가 찬영의 귓가에 숨을 불어넣으며 속삭인다. ‘단 신음소리는 마음껏 내셔도 좋습니다. 아셨죠?’ ********* 누가 내줄 까보냐. 이 자식! 그런 각오였겄만.. “흐으흑....아흑..." 이건 반칙이지 않느냐. 나는 삽입만 했다고. 다른 덴 건드리지도 않았잖아. 그런데 넌 이게 뭐야. 억울한 찬영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신주는 찬영의 온몸 구석구석을 유린하는 손길을 멈추지 않는다. 오른쪽 귀, 왼쪽 귀 K.O패. 목덜미 K.O패. 겨드랑이 K.O패. 발가락, 손가락 K.O패. 허벅지 및 무릎 K.O패. 엉덩이 및 중심부 진행 중. 어찌됐던 페니스를 빼야한다는 핑계로 행해졌던 2번째 정사에서 부어오를 데로 부어오른 찬영의 애널을 식힌다는 명목으로 신주는 후후 입김을 불어넣으며 한 손으로 찬영의 발기된 페니스를 쓸어 내리고 있는 중이었다. 아직 멀었습니다. 찬영씨. “간지럽다니까...하아...앗! 차거! 이거 뭐야? 얼음?” “네. 얼음입니다. 우와, 금세 녹아버리는데요? 용광로가 따로 없어요. 찬영씨 안.” “아윽...차거...미쳤어!!! 그걸 왜 먹어!!!” 여기도 식혀드리려고요. 입 속의 얼음 탓에 발음이 뭉개진 신주가 얼음을 문 채로 찬영의 페니스를 집어삼킨다. 차가운 얼음이 성난 페니스를 마사지하는 쾌감에 저절로 기분 좋은 신음소리가 입 밖으로 새어 나온다. 아응응...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내는 거야. 에라이. 나도 모르겠다. 방출. 사정으로 흐려진 눈에 입가에 흐른 액을 닦아내지도 않고 다시 혀를 애널에 가져다 대는 신주의 모습이 보였다. “이씨!...아흑...너 왜 이렇게 서비스가 좋아! 지금까지 잤던 애들한테도 다 이랬어?” “글쎄요. 생각이 안 나는데요. 저는 찬영씨를 만나기 전에 만났던 사람들은 다 잊었어요. 과거가 중요한가요? 뭐. 앞으로 미래가 중요하지.” “너! 우리 누나가 예뻐? 내가 더 예뻐?” “당연히 찬영씨죠.” “그럼, 네 첫사랑이 더 예뻐? 내가 더 예뻐?” “둘 다 예쁘긴 한데...찬영씨가 더 예뻐요. 좋아요?” “좋긴 뭐가 좋아! 이 자식아! 아.....아흣... 거...거기...그만!” 벌써 가시면 곤란하다니까요. 저는 조금 더 오래 찬영씨와 함께 이런 짓, 저런 짓 다 해보고 싶단 말입니다. 싫다, 싫다 외쳐대는 찬영의 말과는 달리 아래 입구는 벌써 신주를 맞이할 준비로 촉촉이 젖어 열려있는 채였다. 시험삼아 손가락을 하나 넣고 슬며시 돌리자 찬영이 허리를 튕기며 자지러진다. “아...안 돼! 아흐...아으....으응.” 완벽히 자신의 통제 아래 있는 찬영이라니, 사진이라도 찍어서 백만 년 보존해두고 싶다. 손가락이 움직이는 방향에 따라 찬영의 엉덩이가 따라 움직이며 조였다 풀었다 수축운동을 하고 있다. 이만하면 됐다 싶어 손가락을 빼내자 아쉬운 듯 입구가 움찔거리며 담아두었던 정액을 슬며시 흘린다. 한결 부드러워진 입구에 가볍게 입맞춤을 하자 찬영이 달뜬 신음소리를 흘리며 애원하듯 신주의 팔을 붙든다. “몸도 피곤하신 듯 한데 오늘은 그만 할까요?” 물론 마음에도 없는 말이거늘 그 소리에 깜짝 놀라 찬영이 반쯤 감았던 눈을 반짝 뜨고 몸까지 세워 일으킨다. 평소 찬영답지 않은 솔직한 반응에 신주가 푸훗거리며 참았던 웃음을 터트린다. “풋...찬영씨 너무 귀여...아얏!” 까불면 맞는 것이 당연한 이치. 오늘 벌써 몇 대나 맞았는지 모르겠다. 손도 어찌나 매운지 눈물까지 찔끔 나올 정도다. “농담이었어요. 찬영씨. 그만하면 제가 더 곤란해요.” 화 푸세요? 네? 신주의 너스레에 전의를 상실한 찬영이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만 날릴 뿐이다. 내 팔자야, 이 딴 놈이랑 하겠다고 사진까지 오려붙인 나나, 아침 댓바람부터 하겠다고 운동복 입고 뛰어온 놈이나... 아가야, 넌 우리 뭘 믿고 거기 안착한 거니? 기가 막히다는 듯 웃는 찬영의 눈치를 슬슬 살피던 신주가 은근슬쩍 몸을 다시 밀어붙여 온다. 어느새 찬영을 다시 누이고 다리까지 벌렸다. “그럼, 가겠습니다. 찬영씨.” 예고와 동시에 한껏 부풀린 중심으로 찬영의 입구를 사정없이 파괴한다. “아, 아퍼!” 아무리 풀어주었어도 크기가 크기인 만큼 아픔이 느껴지지 않을 리 없다. 뜨겁게 죄어오는 내벽에 머리끝까지 곤두서는 쾌감을 느끼며 신주는 천천히 다시 깊은 진입을 시도한다. 2번의 정사로 매끄럽게 젖어있는 찬영의 안이 신주를 부드럽게 이끈다. 신주의 허리에 감긴 찬영의 다리 역시 신주를 더욱 옥죄이며 더 깊은 결합을 요구해오고 있다. 서로의 샅과 샅이 맞닿아 떨어질 적마다 발생하는 음란한 울림이 흥분을 더욱 고취시키고 있다. 귀두만 걸친 채 빼었다가 강하게 다시 찔러 넣는다. “아흑!” 달콤한 신음이 윤활제처럼 두 사람의 피부와 피부 사이를 타고 끈적하게 흐르고 있다. 꿀처럼 달아요, 찬영씨. 너무 기분이 좋아서 찬영씨 안에서 나오고 싶지 않은데 어쩌죠? 나 여기서 평생 살까봐. 너무 뜨거워서 녹아버릴 것 같아. 벌써 녹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럼 책임져 주실래요? 끊임없이 이어지는 신주의 속삭임을 더는 견딜 수 없다는 듯 귀를 막고 도리질을 치는 찬영을 침대 끝까지 밀어붙인 신주가 귀를 덮은 찬영의 양손을 떼어 자신의 어깨에 고이 올려 놓는다. “아흐흐흐윽...아흑...아흑....흐으으으....윽...” 극도의 쾌감에 결국 찬영의 울음이 터진다. 씨익 미소지은 신주가 피치를 올려 막판 스퍼트에 더욱 발차를 가한다. “흐으으으윽.... 으흑....나...나 좀.... 어떻게....아으응.....아으..흑” “하아...좋아요? 찬영씨?” “흐어어어엉...흐으윽... 너...너...끝...끝나고...주...죽었어...아아....아아아아....으으응..아흐...” 성난 성기가 신주의 배에 부딪쳐 통통거리며 튀어 오른다. 안과 밖이 마구 비벼지는 감각에 온몸의 구멍이란 구멍이 모두 열려 환희의 비명을 내지른다. 허리가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입술과 입술, 가슴과 가슴을 맞닿게 하고 샅과 샅을 다시 떨어지게 만든다. 기절 직전에 이른 찬영이 꼭 움켜진 손가락으로 신주의 등판에 깊은 생채기를 그었을 때 기다렸다는 듯 신주가 크게 몸을 내두르며 찬영의 몸 속 깊숙이 사정을 했다. 지금 시각 오전 9시 20분. ********** “여보세요? 네. 김신주 휴대폰입니다.” “사장님? 저 은영입니다. 출근이 늦으셔서 전화 드렸습니다. 혹시 무슨 일 있으신 건가요?” “신주 형 신규라고 합니다. 신주가 휴대폰을 놔두고 갔네요. 그 녀석 아직 출근 안 했습니까?” “네. 지금껏 늦으신 적이 한번도 없었는데 이상하네요. 벌써 11시가 다 되가는걸요. 오후에 약속도 잡혀있으신데 우선 취소해 두는 게 좋을까요?” “아닙니다. 어디에 있을지 짐작이 가네요. 제가 가게로 전화하라고 일러두겠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막내야. 네가 이 형의 꿀맛 같은 토요일을 이리 망칠 수 있는 게냐. 우리 병원은 오늘 휴업이란다. 찬영씨 전화번호를 알아내려면 내가 또 병원에 나가야 하지 않겠니... ********** 그 시각 신주는 더럽혀진 침대 시트를 벗기고 새 시트를 깔고 찬영을 아침 먹여 재우고, 또 세탁기를 돌리느라 시계 따위 들여다볼 틈조차 없었다. 그나저나 어느 놈이 이렇게 자꾸 찬영씨에게 전화를 해대는 것이냐. 이미 상황 종료. 너희들은 미련을 가져도 소용없단 말이다. 휴대폰 채로 함께 세탁해버리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며 신주는 다만 전원을 꺼놓는 것으로 분풀이를 대신했다. ********** “아기 발바닥을 간질이면 부챗살 마냥 발가락을 쭉 펴는 것은?” “...바빈스키 반사요.” “그럼 아기의 머리를 위로 들어올렸다가 갑자기 내려놓거나 양팔을 들었다 내려놨을 때 또 손가락으로 건드리거나 큰 소리로 자극했을 때 나타나는 반응은?” “모로 반사. 등을 펴고 팔과 다리 그리고 손가락을 벌렸다 오므리는 것. 생후 3~4개월이면 소실되는 것이 정상.” “다 맞췄네? 언제 다 외웠어?” “대학교 때 교양 수업으로 ‘육아발달 강좌’를 들은 적이 있거든요. 그때 마침 쌍둥이가 태어나서 들어보면 뭔가 형수에게 도움이 되어드릴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들었죠. 한번 배웠던 거라 그런지 다시 한번 읽어보니까 다 생각이 나네요.” “그런 건 시험보고 나면 다 까먹지 않아? 보통?” “생각나는 것도 많아요. 그거 외에도 흡철 반사라던지...” 창으로 내리쬐는 가을 햇살이 따뜻하니 자꾸 졸음이 온다. 찬영은 들고 있던 육아 책을 바닥에 내려놓고 신주의 품안에서 그대로 잠을 청했다. 7개월 째 접어들면서 배는 더더욱 불러오고 틈만 나면 눕고 싶어지고 누우면 잠이 오니 몸이 나른해 외출할 의욕조차 생기지 않는다. 고른 숨소리를 내기 시작하는 찬영을 바라보며 신주는 걸쳤던 체크셔츠를 벗어 찬영의 몸에 덮어 주었다. 찬영씨를 집에 고이 들여놓기까지 그간 고생이 참 많았다. 집에 한번 놀러와 보시라고 아침, 저녁으로 노래를 하고 이사하면 더 화끈하게 해드릴게요 라고 잠자리에서 수작을 걸다 맞기도 많이 맞았다. 배가 점차 불러오고 석진의 부재를 틈타 몰래 사랑을 나누는 일이 점점 힘들어지자 찬영은 자연스럽게 새집에 머무는 시간을 늘리기 시작했다. 하루 이틀 밤 자고 가던 것이 사흘이 되고 일주일이 되고 열흘이 되었을 때 신주는 찬영이 잠이 든 틈을 타 이사 짐을 모두 옮겨놓고 시치미를 뚝 떼었다. 펄펄 뛸 줄 알았는데 찬영은 의외로 ‘그래도 석진이한테 얘기는 하고 가져왔어야지.’라고 혀만 끌끌 찼을 뿐 별 말이 없었다. 찬영과 신주의 동거는 빼도 박도 못하는 연인선언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리 고운 눈치는 아니었지만 석진과 지환, 인우와 정수까지 암묵적으로 신주를 찬영의 사람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신혼(?)의 달콤함이라는 것이 이런 것일까. 찬영의 배웅을 받으면서 나서는 출근길이 즐겁고 퇴근 후 돌아오는 귀가길이 날아갈 듯 가볍다. 직원들의 성화에 단합대회를 가지면서도 신주는 1차만 참석한 뒤 법인카드를 은영에게 맡긴 채 집으로 서둘러 돌아오곤 했다. 집에 꿀단지를 묻어두었냐는 놀림에도 그저 빙그레 웃기만 할 뿐이어서 신주를 노리던 여직원들 마음에 깊은 수렁을 남겼다. 퇴근길에 사오는 아기용품이 벌써 방 하나를 가득 채워간다. ‘이렇게 많은 걸 어디다 써!’ 찬영은 구박하면서도 굳이 말리지 않는 눈치다. 남자아이일지 여자아이일지 모르니까 남아용, 여아용 하나씩. 핑크, 하늘색, 연두색, 노란색 어떤 것이라도 좋다고, 굳이 남자 색, 여자 색 구별지어 선입관을 심어줄 필요는 없다고 찬영은 말했다. 내일은 드디어 청담동에 2호 점을 오픈하는 날이다. 오픈 기념으로 기존 단골 손님들과 VIP고객을 상대로 런칭 파티 초대장을 돌렸다. 찬영도 꼭 참석하겠다고 우기고 있다. 기쁜 한편 요란스러운 파티에 몸이 불편한 찬영이 행여 쉬이 지치지나 않을지 걱정이 앞선다. ********** “찬영씨 어디 불편한 곳 없으세요?” “없어. 없다니까. 가서 볼일 봐. 오늘의 주인이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어떻게 해. 다들 찾는다. 가봐.” 부른 배를 감추기 위해 껴입은 옷이 조금 갑갑한 감은 있지만 그런 대로 실내 공기가 맑아 견딜 만하다. 가운데가 텅 빈 2, 3층 복층 구조로 지어진 실내라 1층에서 벌어지고 있는 파티가 아주 잘 내려다보인다. 찬영은 신주가 만들어 놓은 특별석 (1층에서는 이쪽을 올려다 볼 수 없으나 찬영이 앉은 2층 테라스에서는 1층 구석구석을 살펴보는 일이 가능하다)에 앉아 신주의 동선을 따라 1층의 동정을 곁눈질 중이었다. 저 녀석 아주 신났구만 그래. 올 수를 맞은 성적표를 부모님에게 내 보이는 어린 아이처럼 눈을 반짝거리며 찬영의 평가를 기다리던 좀 전의 신주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 녀석 분명히 학창 시절에도 올 수만 맞았을 것이 분명하다. ‘잘 만들었네. 인테리어도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마구 풍긴다. 잘했어. 100점.’ ‘음식도 이번에는 마음에 드실 거에요. 그 이후로 셰프와 밤을 새면서 단점을 보완하다시피 했거든요. 이번에 특별히 W호텔에서 주방장으로 계시던 분도 힘들게 영입했고 식 재료 구입에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과연, 맛 역시 훌륭하다. 다시 취재 전선에 복귀하면 정정 기사를 내야 하지 않을까. 이건 뭐 꼭 특별히 2호 점이 잘 되야 나도 좋고 우리 아기도 좋기 때문만은 아니다. 정확한 정보를 대중들에게 알려주는 것. 이것이 바로 푸드 저널리스트의 역할이지 않은가. 그런데 저 자식, 신주 옆에 찰싹 붙어있는 저 새끼는 뭐야? “신주씨 이런 멋진 레스토랑을 또 하나 지으시느라고 그동안 그렇게 바쁘셨군요.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 기섭씨처럼 ‘피카소’를 자주 들러주시는 분들 덕분이지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가까워져서 더 자주 들리게 될 것 같은데요. 하하. 오픈 기념으로 언제 한번 또 밤낚시 어떻습니까. 우리 마누라가 그때 먹었던 잉어 찜이 그렇게 맛이 좋았다고 또 먹고 싶다고 성화를 하네요.” “정말 그때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덕분에 월척을 낚게 되어 저도 무척 즐거웠어요.” “이번엔 가물치를 한번 낚아볼까요? 가물치가 정력에도 좋고 임산부 산후 조리에도 그만이라고 하더라구요.” 으아, 저 자식 왜 귓속말을 하는데? 신주 넌 뭐가 좋아서 웃는 거야! 저 대머리가 그렇게 좋아? “지영 선배 아니세요? 귀국하셨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이렇게 직접 와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지훈 선배도 잘 계시죠?” “정말 오랜만이다. 신주야. 너 신입생으로 들어오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언제 이렇게 다 자라서 어엿한 사업가가 다 되었니? 지훈이 그 자식 말도 마. 금발 글래머에게 홀딱 빠져서는 결혼하겠다고 난리야. 엄마는 아주 머리 싸매고 누웠다고.” “신주 이 새끼야! 부러워 죽겠다야! 누구는 아직도 고시원 틀어박혀서 취직 공부나 하고 있는데...저번에 보니까 너 잡지에도 실렸더라. 20대 CEO 매력 남이라나 뭐라나. 분하다! 나 오늘 이 가게 음식 거덜내고 갈 거다.” “신주 선배 정말 오랜만이에요. 저 다음달에 결혼해요. 꼭 와주실 거죠?” “신주씨 저 다음달에 공연 뒤풀이를 여기서 할까 하는데 예약 받아 주실 거죠?” “사장님~ 객실에서 진사장님이 찾으십니다.” 여자, 남자, 여자, 그리고 또 남자, 아니 저 놈 가수 강정민 아니야? 저 자식 게이였어? 그리고 저 여직원, 왜 콧소리를 내면서 남의 애 아빠를 부르고 그래! 질투에 눈이 먼 찬영이 진지하게 아래층으로 포크를 떨어뜨릴까를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 누군가 계단을 타고 올라와 찬영의 맞은 편 의자에 앉았다. “우리 신주 오빠 얼굴에 구멍나겠네. 그만 좀 쳐다보지 그래요?” 얜 또 뭐야. ‘우리 신주 오빠?’ “2층에 올라가지 말래서 왜 그러나 싶었더니 이런 곳에 숨겨놓은 줄은 몰랐어요.” “누구시죠?” “아, 실례. 지연경이에요. 신주 오빠랑은 어렸을 때부터 집안끼리 아는 사이죠.” “그런데요?” “참나, 척하면 삼천리 몰라요? 우리 언젠가는 결혼할 사이라구요. 괜히 그때 가서 울고불고 추하게 매달리지 말고 지금 깨끗하게 헤어지지 그래요?” 뭐라고 아가야? 너 귀여운 얼굴을 해 가지고는 어쩜 그렇게 진부한 발언만 해대니.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보았구나. “우리 오빠가 조찬희 팬인 건 아세요? 아시죠? 탤런트 조찬희.” “알고 있습니다만?” “어머, 알면서도 사귀어요? 자존심도 없어요? 대용품 취급을 당하면서도 사귀다니, 매저에요?” 이 기지배가! 그리고 말은 바로 해야지. 내가 우리누나 대용품이 아니라 우리누나가 내 대용품이었다고. “그러고 보니 진짜 닮았다. 혹시 친척이에요?” “친동생입니다. 지연경양.” “어머! 어머! 어머! 신주 오빠 그렇게 안 봤는데 집요하다! 집안 뒷조사까지 해서 꼬신 거에요? 소설 같아. 어쩜 너무 비참하시겠다.” 문학적 재능이 넘치는 아가씨다. “그래도 난, 받아줄 수 있어요. 용서해 줄래요. 신주 오빨. 오죽 힘들었으면 그랬을까. 내가 다 안아줄래요. 오빠의 모든 것을. 그런데 물어볼 게 하나 있는데요. 오빠.” 갑자기 웬 오빠. 붙임성도 넘치는 구나. “조찬희 정말 턱 깎았어요? 저는 눈만 한 거 같아서 눈만 한 거 같다고 그랬는데 친구들이 분명히 턱도 깎았다고 그러잖아요. 옛날 사진 보면 깎은 것도 같고 안 깎은 것도 같고 잘 모르겠어요.” “안 깎았습니다. 경락 마사지 받았어요. 열심히. 꼬박꼬박.” 그 사진 내가 올린 거라서 잘 알거든? 더불어 눈은 원래 쌍꺼풀 있었는데 잘 풀려서 가끔 ‘아이참’ 쓰고 그래. “나도 경락 마사지 받고 싶은데 엄마가 안 시켜줘요. 너무 어려서 피부에 손상간다구. 나도 해보고 싶다. 나도 경락 마사지 받고 얼굴 작아져서 신주 오빠랑 사귈래요.” 그게 꿈이니? 참 소박하구나. “아무튼! 저 1년 후면 졸업하니까! 그때까지 꼭 헤어져 주세요! 오빠가 저보다 나이 많으니까 양보해요!” “아가씨 몇 살?” “고2요.” “열 일곱 살?” “네. 오빤 몇 살이에요?” 아가야, 이 오빠 스물 여덟 살이거든? 너 발육이 좋아서 오빠가 깜박 속을 뻔했다. 한 살 더 하면 띠 동갑이거늘 네가 지금 이 오빠보고 놀아달라고 하는 거니? 여차하면 뱃속에 애가 있다 폭로하려 했던 찬영은 예상을 뛰어넘은 여자아이의 연령에 그만 사기가 풀썩 꺾이고 만다. “스물 여덟 살이야. 오빠는.” “꽥, 아저씨다!” “오빠라니까. 신주는 오빠고 난 왜 아저씨야. 한 살 차인데.” “신주 오빠는 오빠니까 그렇지요. 알았어요. 오빠라고 할게요. 오빠, 신주오빠랑 어디서 만났어요?” “술집.” “오빠가 꼬셨어요?” “아니.” “그럼 신주 오빠가 꼬셨어요? 뭐라고 하면서 꼬셨어요?” “기억 안나. 술 취해서.” “우와. 만난 지 백일 지났어요? 나는 신주 오빠랑 만난 지 삼천일도 지났어요. 오빠 ‘천일 동안’이란 노래 들어봤어요?” “응.” “들어보셨구나. 이승환 꺼. 전 그 노래만 들으면 막 눈물이 나요. 다음 세상에서 다시 만나지 말자니 너무 슬프지 않아요?” “그런가?” “‘심장병’이란 노래도 너무 슬퍼요. 제가요, 이승환 오빠도 좋아했는데 결혼해서 기분 팍 상했어요. 배신인 거 있죠. 그것도 제가 젤 싫어하는 채림이랑.” 너의 사랑 신주 오빠는 이미 애도 있어. “채림도 얼굴 고쳤죠? 그쵸?” “몰라.” “에이~ 알면서. 가르쳐줘요. 연예인들 다 같은 병원에서 얼굴 고치고 그런다면서요.” “나는 몰라. 우리누나는 ‘아이참’이야.” “‘핑클’의 성유리랑 이효리도 처음에 ‘아이참’ 썼대요. 참 ‘애니클럽’ 보셨어요? 지대 멋져요.” “아니.” “꼭 보세요. 에릭도 나오거든요. 제 써드가 그래서 이승환에서 에릭으로 바뀌었어요.” “써드? 그럼 세컨드는 누구야?” “태지 오빠요~태지 오빠는 영원히 결혼 안 했으면 좋겠어요.” “나도 서태지 좋아하는데.” “진짜요? ‘락페’ 같이 구경 가실래요?” “올해는 힘들겠고 내년에 가자.” “내년엔 고3이잖아요오~ 올해 같이 가요오~” 올해는 애를 낳아야 해서... 그런데 너, 나를 떨궈내려는 게 처음 목표 아니었니? 악녀는 머리도 좋아야한다. 찬영이 새롭게 깨달은 사실이었다. ********** “신주야, 우리 연경이 못 봤냐?” 신주의 이웃 사촌인 연성이다. 부모님 대에서부터 친분이 쌓인 사이라 가족처럼 지내오고 있다. “연경이가 왔어? 전화로는 시험 공부해야 해서 못 온다더니?” “1시간만 놀고 다시 공부하러 간다고 해서 데리고 왔더니 그새 어디로 숨었네. 이 다람쥐 같은 기지배 어디로 간 거야?” “간만에 좀 놀게 내버려 돼. 내년이면 더 놀지도 못하잖아.” “하나뿐인 여동생 걱정되어서 그런다. 하고많은 남자 중에 너 같은 게이에게 시집가는 게 인생 목표일게 뭐람.” “연경이 아직도 나한테 시집온대?” “그래. 며칠 전엔 네 뒤도 밟아서 네 애인 얼굴보고 왔다던데? 조찬희 닮았다며? 누가 빠돌이 아니랄까봐.” “찬영씨를? 언제 따라왔지? 나 찬희 누님 닮아서 찬영씨 사귀는 거 아니다. 오해하면 안 돼. 찬영씨 들으면 큰일 나.” “만나서 너 포기하라고 그럴 거라고 하던데? 오늘 데리고 왔어?” 뭐라고? 그러나 2층으로 달려간 연성과 신주가 목격한 것은 너무도 화기애애한, 무려 자매모드까지 느껴지는 다정한 두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래서요. 신주 오빠가요. 저 다 크면 진지하게 생각해 보겠다고 그랬는데 저 다 큰 거 같지 않아요? 반에서 키도 5번째로 크구요. 가슴도 C컵이에요.” “정말 C컵이야? 우리누나는 뽕 넣던데.” “정말로요? 프로필 구라였구나. 몸무게 정말 45키로 맞아요? 적으나 크나 다 45키로래.” 그것까지는 모르겠는데. 어? 신주 왔구나. “이연경! 너 여기서 뭐하냐. 과외 시간 다 되가는데.” “아이, 깜짝이야. 놀랬잖아! 왜 소리지르니? 바보 오빠야.” “안녕하세요. 찬영씨. 저 신주 친구 이연성이라고 합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조찬영입니다. 안녕하세요.” “저희 바보 동생이 실례가 많았죠? 이해해 주세요. 어려서 아직 철이 없답니다.” “아닙니다. 덕분에 재미있었어요.” 연성에 의해 끌려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연경이 뒤를 돌아보며 다시 한번 외친다. “찬영 오빠 내년 수능 보는 날 까지 만이에요! 그 후엔 돌려주셔야 해요! 꼭이요!” 싫어~ 안 갈래. 무슨 소리야, 이 자식아, 하루치 과외비가 얼만데. 너 임마 거기 못서? 소란스러운 남매의 퇴장을 바라보며 찬영이 씨익 웃는다. “너 능력 좋다? 저런 영계 약혼자도 있고.” “약혼자는요, 무슨. 친구 동생이에요. 아직 어려요. 애기인 걸요.” “다 크면 진지하게 생각해보겠다고 했다면서?” “10년 전에 한 소리에요. 그걸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었구나. 대학생 되면 연애하느라 바빠서 저 같은 건 안중에도 안 들어올걸요. 연경이가 아직 사랑을 못해봐서 그래요.” “너는 해 봤어? 사랑?” “저는 지금 하고 있지요. 찬영씨랑.” ...찬영씨랑. 그 말에 두근하고 심장이 뛴다. 요즘 들어 이 심장 아주 제멋대로다. 무심히 아침 신문을 보면서 커피를 한 모금 들이마시는 그 아랫입술에도 뛰고, 자고 일어나 까치집이 된 눌린 뒷머리를 보고도 뛰고, 샤워직후 젖은 머리칼을 털어 내는 긴 손가락을 보면서도 뛰고 또 뛰고 지금처럼 난간에 기대어선 길다란 옆모습을 보고 또 뛰고...섹스 도중 절정에 이른 그의 표정을 보면서도 뛰고...아, 생각하니까 지금 그 표정이 참을 수 없이 보고 싶어져 버렸다. “여기 옥상 열려있어?” “지금은 잠가뒀는데 열쇠는 제가 갖고 있어요. 여름에는 야외 테라스로 활용할까 생각중이거든요. 그런데 옥상은 갑자기 왜요?” 올라가자, 지금. 찬영의 눈 꼬리가 유혹하듯 길게 휘었다. 올라가죠. 지금 당장. ********** 인테리어 공사를 하면서 임시로 옥상에 쌓아두었던 구 건물(이 건물은 과거 뷔페식당이었다)의 의자가 미처 치우지 못한 채로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신주는 그중 비교적 상태가 양호한 것을 골라 앉은 뒤 찬영을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이 의자들 재활용센터에 넘길 생각이었는데 이런 용도로 다시 쓰이게 될 줄은 몰랐다. 겹겹이 싸고 있던 셔츠의 단추를 벗기자 봉긋 솟아오른 유두와 7개월 째를 맞이한 부풀어오른 배가 신주를 맞이한다. 우선 배에 입맞추는 것으로 아기에게 먼저 양해를 구했다. 그 다음으로 위쪽에 맺힌 두 개의 과실을 따 맛을 보는 것으로 전희의 시작을 알린다. 달콤한 신음을 흘리며 허리를 뒤로 젖히는 찬영의 허리를 잡아 균형을 유지하고 허공에 들린 찬영의 발 대신 자신의 양발을 단단히 바닥에 고정시켜 두 사람의 육체를 지탱한다. 나오니까 좋다. 시원하고. 바람도 불고 하늘도 구름 한 점 없이 파랗다. 임신 커뮤니티에서 알게 된 아기 엄마 중의 한 사람이 어제 옥상에서 빨래 널다 말고 화끈한 한판을 치렀다는 소리에 귀가 솔깃해서 올라오자고 한 것만은 결코 아니다. 자연 학습, 이 얼마나 좋은가. 남자 임산부의 처지로 남들만큼 자유롭게 산책도 하지 못하는 처지에 이렇게 남들 눈치 안 보고 맘껏 야외에서 시원한 공기를 만끽할 수 있는 기회가 어디 흔한가. 집의 정원 나들이도 좋지만 가끔은 이렇게 색다른 곳에서의 섹스도 기분전환에 크게 도움이 될 듯 하다. 신주의 셔츠 단추를 푸르고 넥타이도 풀러 가슴과 가슴을 맞대었다. 유두와 유두가 맞부딪치는 자극에 저절로 허리가 공중으로 들린다. 조금씩 새어나오는 신음을 신주가 입술로 막는다. 입안에서 느껴지는 샴페인 향이 달큰하다. 이 얼마나 오랜만의 알콜인가. 신주의 혀와 입천장, 치아 사이에 남아있는 샴페인 취기를 남김없이 빨아 삼킨다. 부풀어오른 신주의 분신이 엉덩이 사이로 느껴진다. 의자 등받이를 잡고 있던 손 하나를 가져와 신주의 지퍼를 내렸다. 성난 성기를 꺼내 손으로 움켜쥐고 가볍게 기둥을 쓸자 신주의 혀가 더 깊이 들어와 찬영의 입안 구석구석을 헤집어 놓는다. 찬영의 허리를 잡고 있던 신주의 손이 바지 속으로 들어와 엉덩이 사이를 가르고 마른 입구를 비벼댄다. 지퍼 내리는 소리에 엉덩이를 들자 성급하게 바지와 속옷을 한꺼번에 내리고 달아오른 페니스를 입구에 가져댔다. “아... 안 돼...아직...” 찬영의 만류에 신주가 비어있는 손가락을 찬영의 입술로 가져간다. 입술을 열어 들여보내고 입안에 담긴 손가락 하나하나를 빨아 촉촉이 적셔놓는다. 침이 흘러 턱을 타고 계속 아래로, 아래로 흐른다. 입 속에서 빠져나온 손가락이 조심스럽게 주름을 벌리고 안으로 하나씩 침입한다. “아흣...” 신주의 손가락이 찬영의 경직된 입구를 어루만져 안팎으로 골고루 윤활유를 발라놓는다. 임무를 마친 손가락이 빠져나가자 아쉬움에 찬영이 스스로 허리를 움직여 신주의 성난 페니스를 자극하며 삽입을 조른다. “어서...으응...” 양손으로 찬영의 허벅지를 받쳐들어 입구를 겨냥한 뒤 강하게 찔러 넣었다. 아픔에 사그라드는 찬영의 성기를 잡은 신주가 괜찮다, 괜찮다 다정히 쓸어주며 위로한다. “괜찮습니까? 찬영씨?” “...으...괜찮으니까...어서...” 다시 시작된 삽입에 찬영의 몸이 앞으로 쏠린다. 찬영의 양 겨드랑이에 팔을 끼워 넣어 단단히 봉쇄한 뒤 천천히 피스톤 운동을 시작했다. 안쪽은 뜨겁고 바깥은 서늘하다. 찬영의 안에서 달구어져 나온 신주의 붉은 성기가 바깥의 찬 공기를 만나 차가운 기운을 품고 다시 찬영의 속으로 들어간다. 익숙한 포인트를 찔러 올리자 찬영의 허리가 요동치듯 흔들린다. “아으흣...아응...아흣, 아흣...아흣!” 찬영이 느끼고 있음을 확신한 신주의 움직임이 더욱 빨라진다. 두 사람의 무게를 못이긴 낡은 의자가 삐걱삐걱 미친 듯한 비명을 내지른다. “거기...좀더!...거...거기...아흣!...아으응” “하아...흣...다리 좀 더 벌려봐요...찬영씨...흣!...” 겨드랑이 사이에 넣은 손에 힘을 주어 들어올렸다가 다시 앉히자 체중이 실려 더 깊은 곳까지 들어가 박힌다. 그렇게 여러 번 되풀이하자 오늘도 어김없이 찬영의 입에서 울음이 터져 나왔다. “어흐흐흑...좋아.....흐윽...아흐흑.....아으응...아윽...” 울음과 동시에 터져 나오는 ‘좋아’란 소리, 그 소리가 듣고 싶어 신주는 항상 한계까지 찬영을 몰아붙인다. 극도의 쾌감에 사로잡혀 질러대는 무의미한 말일지라도 그 말이 듣고 싶었다. “...하아...찬영씨...하아...좋아요?...말해봐요...좋아요?” “아흐흐흐흑....흐어...조...좋아..너무 좋아...흐윽...” 너무 좋아, 그 소리에 머리 속이 하얗게 변하며 허리가 제멋대로 움직인다. 발버둥을 쳐대는 찬영을 더욱 깊이 끌어안으며 신주는 찬영의 몸 속 가득히 참아왔던 사정을 했다. ********** “저기요.” “네, 손님?” “실례지만 여기 흡연실이 어디죠?” “죄송합니다. 손님. 원래 흡연실은 2, 3층에 있는데 오늘은 개방하지 않고 있습니다. 번거로우시더라도 바깥이나 비상구 쪽 계단을 이용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8세기 사교계 모임도 아니고 이게 뭐냐. 모두들 차려입고 와선 하하호호, 사장님 사업 잘되시죠? 사모님 건강은 좀 어떠세요? 자제 분이 그렇게 공부를 잘 한다면서요. 비싼 밥 먹고 할 얘기가 그렇게 없냐? 이래서 내가 오기 싫다고 그렇게 말했건만 인우 저 자식, 나는 왜 끌어들여서. 예의 상 그냥 받았을 뿐이지 정말 올 마음은 없었다고. 지환은 손에 들린 금박 입힌 초대장을 노려보며 인우를 향해 궁시렁거렸다. “이왕 왔으면 얼굴 좀 펴라. 우리가 또 언제 이렇게 비싼 음식을 다 먹어보겠냐. 정수는 오늘 할아버지 제사라고 오고 싶어도 오지도 못했는데. 이왕 온 것 맘껏 먹고 신나게 놀다 가면 좋잖아.” “너나 실컷 놀아라. 나는 담배가 고파서 밖에 나가서 좀 피고 올 테니까.” “담배 필 거면 나도 같이 가. 찬영이 형 안 보이는 틈에 몰래 피고 와야지.” 그러면 저 수 많은 인파를 뚫고 또 현관까지 나가야 하는데, 그리고 또 다시 입장할 때 그 민망스런 ‘어서 오십시오.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사(메이드 복장을 곱게 차려입은 미녀들의 허리 90도 인사. 영화 찍는 것도 아니고 그게 다 뭐냐)를 들어야 하잖아. “계단으로 가자. 계단. 추운데 바깥에 나갈 필요까지 뭐 있겠냐.” 꽤나 공들여 지은 것이 분명한 이 건물은 중앙에 2, 3층으로 연결되는 좌우가 똑같은 유럽식 계단(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오던 바로 그 계단)이 설치되어 있었다. 장식적 목적이 다분한 그 계단에서 시선을 돌려 홀 구석 쪽을 바라보면 초록색 비상구 표시등이 달린 평범한 철제문이 다소곳이 몸을 숨기고 있었다. 문을 열자 역시 지극히 평범한 계단이 아래, 위로 이어져 있다. 지하의 주차장 그리고 1,2,3층, 그 위로 옥상과 연결되어 있는 듯 하다. 인우가 깡충거리며 2층으로 연결된 계단을 오른다. “힘 빠지게 뭐 하러 올라가. 여기서 피다 들어가지.” “담배는 역시 야외서 펴야지, 임마. 우리 옥상 올라가 보자. 열려 있을까?” 못이기는 척 지환도 따라나섰다. 2층 계단을 지나 3층으로 연결된 계단을 오르려는 순간, 어디선가 짐승이 앓는 듯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무슨 소리지?” 위에서 들려오는 소리다. 계단을 한층 더 오르자 소리는 더욱 분명해졌다. 완전히 문이 닫히지 못한 옥상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아흑....흣....아흣....아....” 사내의 교성이다. 누군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옥상에서 일을 치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으악, 이게 웬일이야. 우리 엿보고 가자. 응?” “보긴 뭘 봐. 그냥 내려가자. 담배 맛 떨어진다.” “보~고 가~자~ 원래 몰래 훔쳐보는 게 더 짜릿한 거야. 난 담배 맛 더 땡기는구만.” 얼굴과는 안 어울리게 중년 아저씨 소리를 하며 인우가 살살 계단을 오른다. “아흣...그만...그만...제...발...아흥...아흑...”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음성이다. 인우와 지환의 얼굴이 차례로 굳는다. “하아...정말...그만 할까요? 찬영씨?...하아...” “시...싫어...흐윽...아아아...아...아파...아흑.” 변태새끼. 얼굴이 달아오른 인우가 금세 뛰쳐나갈 기세다. 성급히 계단을 뛰어 올라가는 인우의 어깨를 지환이 제지한다. “이거 놔, 새끼야!” “네가 가서 뭐 하게. 떼어놓기라도 할거야?” “찬영이 형이 싫다잖아. 김신주 저 새끼가 억지로 하는 게 틀림없다고!” “멍청아, 듣고도 몰라? 어딜 봐도 화간이야. 동거까지 하는 사이에 뭘 바래?” 입술을 깨문 인우가 지환의 얼굴을 외면한다. 꼭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 “아흐으흥...아흑...조...좋아...흐윽....흐윽...아흣...흐어어엉...” 듣기 싫게 끼익 거리는 소음에 이어 찬영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내려가야 하는데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하는데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다. 빌어먹을 사내새끼의 본능 같으니, 의지를 무시한 아랫도리가 서서히 발기하고 있다. 그것은 인우도 마찬가지인 듯 고개를 떨구고 발 밑만 응시하고 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아래층에서 누군가 올라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너희들, 여기서 뭐 하냐? 담배 피러 올라왔냐?” 석진이다. 제 9 편 <하나의 밀알이 비로소 썩을 때 별들의 씨앗이 우주의 맥박 가득히 새처럼 깃을 쳐오르는 것을 ...그대는 알아? > 일이 늦게 끝나 못 올 것 같다던 인간이 왜 여기까지 올라왔는가. 지환은 입술을 깨물었다. 낭패다. “대충 마무리하고 왔다. 맛있는 것 먹으려고. 너희들 표정이 왜 그러냐? 유령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이다? 혹시 둘이 이상한 짓 하고 있었던 것 아냐?” 차라리 그게 나았겠다. 지금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비하면. 석진이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 것인가. 지환은 제발 찬영이 더 이상 민망스런 신음소리를 흘려주지 않기만을 바랐다. “아,아니에요, 석진이형. 지환이 저 자식이 옥상 올라가 보고 싶다고 해서 그냥...” “옥상? 안에도 으리으리하던데 위에도 뭐 있냐? 전망 좋아?” 한인우 저 바보 새끼. “석진이형, 아니에요. 아무 것도 없어요. 추워서 저희도 막 도로 내려가려던 참...” 순간 끼익끼익거리는 듣기 싫은 소음과 섞이어 찬영의 흐느끼는 신음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 얼어붙은 공기를 깨고 석진이 미소를 짓는다. “찬영이구나. 너희들도 참, 이런 자리는 피해줘야지. 뭘 듣고 있어. 내려가자, 춥다.” 내려가자, 춥다. 무심한 석진의 발언에 인우가 가슴을 쓸어 내리는 것도 잠시, 지환이 소리지르기 시작한다. “형은 밸도 없어요? 여기를 왜 와요? 형이. 미쳤다고 김신주 밥을 먹으러 와요!” 아래 계단을 내딛었던 석진이 지환을 돌아보며 서늘하게 말한다. “내가 여기를 오면 안 되는 이유가 뭔데?” “......” “여길 오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 네가 그걸 알아? 강지환?” 네가 그걸 알아? 강지환? 석진의 목소리가 다시없이 차갑다. 강지환, 너 왜 이래?미쳤어? 언제 찬영과 신주가 계단을 다시 내려올지 모르는 상황. 인우가 쩔쩔매며 지환의 소매를 잡아끈다. “좋아하잖아! 조찬영 저 새끼 좋아하잖아. 오래 전부터 좋아했잖아. 이 중에 조찬영 저 인간말고 그거 모르는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가게 사람들도 다 알아. 손석진 닭 쫓던 개가 됐다고. 죽 쒀 개 줬다고. 사람들이 다 그렇게 수군거린다구요!” 옆에서 보고 있는 사람이 오히려 속상할 정도로 그렇게 좋아했잖아. “너와는 상관없는 얘기다. 강지환.” “형은 비겁해요! 고백하지도 못할 거면서 바라보기는 왜 바라봐요. 차지하지도 못할 거면서 잘해주기는 왜 잘해줘요. 그렇게 좋은 친구인척 하고 있으면 누가 알아 줄 것 같아?” 고백하지도 못할 거면서... 비상구, 푸른 등이 켜진 철제문을 열고 석진이 사라진다. 3층과 이어지는 통로다. “네가 심했어. 강지환. 형한테 사과해라.” 차지하지도 못할 거면서... ********** 열중하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실내로 돌아오니 새삼 한기가 든다. 그 짧은 새에 감기라도 든 것일까. 겹쳐 입었던 셔츠 중 하나를 뒤처리하는 데 써버렸던 찬영은 혹시나 눈치 채일까 신주의 양복 상의를 빌려 어깨에 걸치고 의자 깊숙이 몸을 구부리고 앉았다. 달아오른 두 뺨에 차가운 음료수 잔을 갖다 대 열을 식히고 있으려니 신주가 걱정이 되는 듯 찬영과 자신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짚어 체온을 가늠한다. 그 모습을 인우가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 “열이 좀 있는 것 같은데 감기 기운 있었어요? 찬영 씨?” “아니, 아침엔 멀쩡했는데 갑자기 그러네. 바깥이랑 여기랑 온도차이 때문인가 봐.” 열이 난다 생각하니 괜스레 몸까지 축 늘어지는 것 같다. 테이블 유리에 한쪽 뺨을 묻은 찬영의 머리를 신주가 살살 다칠세라 조심스레 쓰다듬는다. 신주의 손길이 기분 좋은 듯 찬영이 눈을 감고 그 손길에 자연스레 몸을 맡긴다. “찬영 씨, 먼저 집에 가 계실래요? 데려다 드릴게요. 가서 좀 쉬세요.” “아냐. 뭘 수고스럽게 그래. 기다렸다 같이 가지 뭐. 너 내려가라. 사람들이 찾잖아.”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은영이 계단을 올라와 신주에게 손짓한다. “사장님. 최 기자 님 오셨는데요.” “알았어요. 은영 씨 내려갈게요.” 아쉬운 듯 돌아보며 신주가 계단을 내려간다. 신주의 동선을 따라 움직이는 찬영의 고개를 인우가 가만히 바라보다 발 밑으로 시선을 돌린다. “...찬영이형.” 응? 왜? 찬영의 시선이 인우에게로 향한다. 그답지 않게 풀이 죽은 인우가 포크를 들어 접시 위의 애꿎은 감자만을 찔러댄다. “김신주 사랑해요?” 쿨럭. 하마터면 사레들릴 뻔했다. 입 속에 담긴 무알콜 칵테일을 간신히 목으로 넘긴 찬영이 당황한 기색을 감추려 애쓴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인우야. 그거 마시고 취했냐?” 여전히 고개를 숙인 인우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간다. “제가 좋아하는 시가 하나 있는데요. 찬영이형. ‘하나의 아름다움이 익어가기 위해서는 하나의 슬픔이 시작되어야 하리’ 그렇게 시작되는 시에요. 그 시에 그런 구절이 있어요. ‘하나의 손과 손이 어둠 속을 헤매어 서로 만나지 못하고 스치기만 할 때 그 외로운 손목이 할 수 있는 일은 다만 무엇인지 알아?’ ” “그걸 다 외우다니. 장하다. 인우야. 국문과답다.” “웃자고 하는 얘기 아니에요. 형. 이루어지지 못하는 사랑이 얼마나 슬픈지 그 얘기를 하려고 하는 거에요.” “그래서?” “그러니까 가능한 잡아줄 수 있는 손목은 기회 있을 때 잡아야 한다구요.”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인우야.” “좋아하는 사람에게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솔직히 말해야 하는 거에요.” “응?” “기회를 놓치면 외로운 손목이 되어버려요. 형. ...저 먼저 일어설게요, 손님이 몰릴 시간이라서 가게에 가봐야겠어요.” 몇 걸음 걸어가던 인우가 뒤를 돌아보았다. “제가 볼 때는. 형은 김신주를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아요.” ********* 앗, 차거, 욕실 천장에 맺힌 물방울이 떨어져 목덜미를 적시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어느새 물이 다 식어버린 것도 모르고 있었다. 찬영은 잠갔던 온수 수도꼭지를 틀어 욕조에 뜨거운 물을 다시 받기 시작했다. ‘형은 김신주를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아요.’ 인우의 말이 머리끝에서 뱅뱅 맴을 돈다. 그래, 예전만큼 김신주가 싫지는 않다. 오히려 좋아하는 편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히 가까운 사람에의 호감인지 그 이상의 것인지는 아직 확신하기 힘들다. 지금껏 그 이상을 넘어서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사랑한다며 죽자 사자 매달리던 언젠가의 어떤 녀석은 칼을 쥐고 위협까지 해오며 스스로의 감정을 찬영에게 강요했다. 서로에 대한 흥미가 떨어졌는데도 불구하고 만남을 지속할 것을 요구해오던 어떤 사람들 역시 찬영에게는 이해 밖 인물들이었다. 신주는 그들과는 달랐다. 자신의 감정을 강요하지 않고 다만 일상처럼 자연스럽게 흘리듯 고백해올 따름이었다. 벌써 4개월 째. 신주처럼 오래 만남을 지속했던 적이 없었다. 신주처럼 묵묵히 자신의 변덕을 받아주며 끊임없는 애정을 베풀어온 상대도 없었다. 여자든, 남자든 그 녀석 주위에 사람들이 몰리는 것을 보면 화가 난다. 정신이 들면 어느새 그 녀석의 모습을 쫓고 있다. 역시......사랑? 아아아아, 어렵다. 이래서 이 집으로 이사오는 것이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다. 김신주의 애정으로 가득 찬 이 공간에서 그 녀석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버틸 자신이 없다. 정수리 끝까지 물 속에 담그고 욕조 속에서 가만히 숫자를 세었다. 하나 둘 셋, 열둘까지 세었을 때, 문이 열리고 개켜진 잠옷을 든 신주가 욕실 안으로 들어왔다. 머리끝까지 물 속에 담근 찬영을 보고 놀랐던 모양이다. 황급히 달려와 찬영을 세워 일으킨다. “찬영 씨! 괜찮아요?” 어, 괜찮아. 왜 그래? 신주의 태도에 덩달아 놀란 찬영이 눈동자를 크게 뜬다. “놀래라. 목욕하다 쓰러진 줄 알았어요. 무슨 목욕을 이렇게 오래합니까? 물 다 식었네. 감기 걸리겠어요.” 장식장에 비치된 커다란 목욕수건을 가져와 몸을 닦아주기 시작하는 신주를 찬영이 만류한다. 나 아직 비누칠도 안 했단 말이야. 어서 하고 빨리 나갑시다. 신주가 한술 더 떠 목욕용 스펀지에 샤워바스를 묻혀 찬영의 팔을 문지르기 시작한다. 저 녀석 은근히 소녀취향이다. 딸기 향이 다 뭔가. 그러고 보니 오늘 행사를 치르느라 무척 피곤했을 텐데 신주는 아직 외출복을 입고 있는 채였다. 그 누군가가 욕실을 점령하고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장난 끼가 동한 찬영이 플라스틱 바가지에 물을 떠 비누칠에 열심인 신주의 목덜미에 물을 붓는다. “찬영 씨, 뭐 하는 거에요. 옷 다 젖었...” 넥타이를 끌어당겨 그대로 입술을 맞췄다. 젖은 머리칼을 한 찬영의 미소에서 13년 전 그 날의 소녀를 떠올린 신주가 멍하니 찬영을 바라보고만 있다. 그새를 놓칠세라 찬영이 신주를 끌어당겨 욕조 안으로 밀어 넣는다. “엇...” 젖은 몸에 감긴 셔츠와 넥타이, 바지와 속옷을 찬영이 벗겨낸다. 둥실 떠오른 옷들을 건져 욕실 바닥에 던지자 욕조 안엔 신주와 찬영 둘만이 남았다. “이건 명백한 유혹이라고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찬영 씨?” “유혹은 무슨. 물도 절약할 겸 한번에 씻자는 거지.” 능청을 부리며 찬영이 찰랑하고 손바닥으로 물을 휘젓는다. 틀어놓은 온수가 식은 물과 섞이어 적당히 기분 좋은 온도가 되었다. 엇갈려 앉은 발끝이 서로의 중심부를 은밀하게 자극한다. 자신의 다리 사이에 놓인 찬영의 발목을 끌어당겨 허벅지 위로 앉힌 신주가 찬영의 이마를 덮은 젖은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빗어 넘긴다. 천장 위에 맺힌 물방울이 뚝뚝, 욕조 위로 빗물처럼 떨어진다. 가볍게 스펀지를 오른 손에 쥐자 풍부한 거품이 왼손 바닥으로 떨어졌다. 따스한 물 속에 반쯤 잠긴 찬영의 등줄기를 목덜미에서부터 쓸어 내리자 찰랑하는 물소리와 함께 허리를 슬며시 비트는 것이 느껴진다. 남아있는 거품을 가슴 쪽에 가져가 양 유두 주위로 원을 그리며 문질렀다. 가슴돌기를 덮은 거품이 천천히 허리 쪽으로 흘러내린다. 그 움직임을 따라 미끄러트리며 거품 묻힌 손을 찬영의 다리 사이로 가져갔다. 발기된 성기와 성기를 맞대어 손으로 만든 원 안에서 서로 부딪치게 만들었다. 맺히기 시작한 이슬이 목욕물에 섞여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잔물결 소리와 함께 기포가 수면 위로 솟아오른다. 동시에 방출된 두 사람의 반투명한 정액이 눈 깜짝할 사이에 물과 섞이어 역시 어디론가 사라진다. 나른한 한숨을 내쉬는 찬영을 끌어안아 고개를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만들었다. 물위를 둥둥 떠다니는 스펀지가 찬영의 등에 와 부딪친다. 잠시 서로의 심장소리를 들으면서 숨을 쉬었다. 벌려진 엉덩이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오후의 정사로 부어오른 입구를 매만졌다. 슬며시 가운데 손가락을 침입시키자 허벅지가 파들하고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움직임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조심스럽게 손가락 하나를 더 밀어 넣었다. 잠시 머무르다 빼낸 손가락 끝에 농밀한 액체가 묻어 나온다. 신주가 남겼던 오후의 흔적이다. 신기한 듯 바라보고 있자 찬영이 뒤통수를 후려갈긴다. “야, 너는 꼭! 분위기 깨지게!” 분위기를 깨는 건 찬영 씨지요. 전 그냥 좋아서 쳐다본 건데. 지난번 하기 직전에 제 배를 걷어찬 건 어디의 누구였습니까. 신주가 억울한 듯 입술을 내민다. 그 입술에 대고 찰싹, 가볍게 매타작을 날린 찬영이 벌주고 약 주듯 솜털처럼 가벼운 키스를 날린다. 쪽, 가벼운 마찰음이 욕실 벽에 부딪쳐 작은 메아리가 되어 돌아온다. 곧이어 긴 키스가 이어진다. 찬영의 입 속에선 신주가 사다놓은 치약의 민트향이, 신주의 입 속에선 진한 와인 맛이 느껴진다. 자신이 사놓은 옷을 입고, 자신이 요리한 음식을 먹고, 물을 마시고, 샤워를 하고 머리를 감고 자신과 같은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는 찬영이 신주는 사랑스러웠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김신주 브랜드, 자신의 손이 깃들어 있다. 큰일이다, 이 녀석에게 길들여져 버렸어.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의 손이 묶여 있었다, 발이 묶여 있었다, 마음도 묶인 것 같다. 손가락 까닥 하지 않아도 신주가 모든 것을 해결해놓는다, 가려운 곳을 긁어준다, 춥지 않게, 덥지 않게, 주변의 온도마저도 바꾸어 놓는다. 어린 왕자와 헤어진 여우는 어떻게 되었을까. 왕자에게 까탈부리며 스스로를 지키던 장미인줄만 알았는데 어느새 그에게 길들여진 여우가 되어버렸다. 여우다. 나는. 신주의 퇴근시간만을 기다리며 하루를 보내는 조찬영이 되었다. 신주가 건네 준 책의 끝에 여우의 최후는 나오지 않았다. 돌아오지 않는 왕자를 기다리며 하루 하루를 그렇게 보내다 죽었을까. 물 속에 잠긴 두 사람의 움직임이 빨라진다. 물이 넘쳐흘러 욕실 바닥을 적신다. 신음소리가 매끄러운 사기 표면을 타고 흘러내린다. 뿌옇게 김이 서린 거울에 두 사람의 실루엣이 어른거린다. 첨벙 바닥에 고인 물이 졸졸 배수구를 타고 흐른다. ********** “ 으...” 무심코 눈을 떴을 때 찬영은 자신의 목이 지독하게 쉬어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밤중 내내 신음을 질러댔던 탓만은 아니다. 전신에서 느껴지는 이 익숙한 통증은 찬영이 감기몸살에 걸렸음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었다. 창 밖이 검은 것을 보니 아직 새벽인 듯 싶다. 침대 옆 협탁에 놓아둔 휴대폰에 손을 뻗어 시간을 살폈다. 4시 20분. 잠자리에 든지 채 3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아침이면 출근해야 하는 신주를 깨울 수가 없어 찬영은 다시 눈을 감았다. 끙끙 어디선가 들려오는 신음소리에 신주는 평소보다 일찍 잠이 깨었다. 옆에 누운 찬영에게서 심상치 않은 기색이 느껴지고 있었다. 스탠드 불빛에 드러난 찬영의 얼굴은 온통 땀으로 절어 있었다. “찬영 씨, 찬영 씨, 눈 좀 떠봐요. 괜찮아요?” 으으...신음소리를 흘리며 찬영이 눈을 떴다. 눈이 부신지 눈을 가늘게 뜨고 엎드려 고개를 베개에 묻는다. “괜찮아...으으...감기. 감기야.” 임산부가 감기라니 큰일이다. 아이에게 해될 것이 두려워 박카스 한 병조차 마음대로 마시지 못하는 것이 임산부 아닌가. 남들처럼 병원에 갈 수도 처지이니...어제 야외의 정사가 영향을 미쳤음이 틀림이 없다. 집에 돌아와서는 감기 기운이 있는 사람을 붙잡고 또 섹스를, 그것도 욕실에서 치렀다. 다 자신의 불찰이다. 신주는 어리석었던 어제의 자신이 화가 나 견딜 수가 없었다. “미안합니다. 찬영 씨. 괜히 저 때문에...” 저 자식, 또 시작이다. 뭐가 또 자신의 탓이란 말인가. 어제 하자고 덤빈 사람은 분명 찬영이었거늘 죽을죄를 진 사람 마냥 또 울상을 짓고 있다. “으...머리 울려...말시키지 마...끄응” 안절부절못하던 신주가 결국 거실로 나가 수화기를 든다. 어젯밤 오랜만의 부부동반 모임에서 기분 좋게 한잔하고 집으로 들어와 늦은 잠자리를 청했던 신규는 이른 아침부터 울려대는 전화벨 소리에 꿀맛 같은 단잠을 방해받을 수밖에 없었다. “여보쇼...” ‘형, 난데.’ 또 너냐. 목소리만 들어도 뒷골이 당겨온다. 오늘은 또 무슨 일인 것이냐. 인턴, 레지던트 생활도 진작에 지난 내가 이런 이른 아침에 호출을 받아야 할 이유가 오늘은 또 무엇이란 말이냐. ‘찬영 씨가!’ 역시. 웬만해선 상식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지 않는 자신의 막내 동생. 그러나 그 신주가 상식 밖의 일을 저지르는 순간에는 언제나 그 배후에 찬영이 있었다. 현재 신규가 아는 국내 유일무이한 남자 임산부. 까탈스럽기 그지없는 조찬영씨. “찬영씨가 왜? 무슨 일 있어?” ‘찬영씨가! 감기에 걸렸어!’ 감기...그래, 지난번 때보다는 중한 병이긴 하구나. 2주전 신주는 찬영이 넘어져 크게 다쳤다며 엑스레이를 찍어야 한다고 호들갑을 떨어댔다. 겨우 무릎 생채기 하나였건만 어찌나 난리를 피워대는지 신규가 다 부끄러울 정도였다. “상태가 어떤데? 많이 아프대?” ‘땀을 많이 흘리고 화를 내. 열도 좀 있는 것 같았어.’ 안정을 취해야할 사람 앞에서 그리 호들갑을 떨어대니 화를 안낼 수가 없지. 눈에 안 봐도 선하다. 그리고 신규의 별난 제수 씨 찬영은 화도 잘 내는데다가 화내면 참 무서운 사람이었다. 자신과의 첫 대면에서도 불같이 화를 내던 그 첫인상이 잊혀지지 않는다. 생채기 사건 당시 신규는 자신의 막내 동생이 눈앞에서 임산부에게 두들겨 맞는 진귀한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마른 몸 어디에서 그런 힘이 솟아나는지. 괴력의 임산부, 찬영은 성질을 한껏 부린 뒤 탈진 해 주저앉아 신주를 2차 호들갑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너 집에 가서 죽었어!’를 외치는 꼬장꼬장한 찬영에 신규는 경의를 표하며 자신의 막내 동생, 신주에 대한 가슴 깊은 연민의 정을 느꼈다. “일반 조제약을 먹으면 안되니까 우선 따뜻한 물을 많이 마시게 하고 열이 내려가도록 물 수건을 이마에 올려드려. 땀을 많이 흘려 젖었을 테니까 옷도 갈아 입히고. 나도 이따가 퇴근하면서 들릴 테니까.” ‘형 지금 와주면 안 돼?’ “지금이 몇 시인 줄이나 아냐. 아직 해도 안 떴다.” ‘그럼 출근하면서 잠깐 들리면 안 되나?’ “이놈아...내가 지금 가도 소용이 없어. 일단 어떤 약을 먹어야 하고 어떤 약을 먹으면 안 되는지 확인해야 하니까. 그럼 점심시간에 들릴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알았지?” ‘그럼 전화로 물어보고 오면...’ “약도 병원에 가야 있다. 시끄러워. 이놈아. 끊어!” 자기 무슨 일이야? 통화 소리에 깨었는지 선진이 눈을 비비며 물어온다. 그 모습도 어찌나 아름다운지 신규는 아침부터 넋을 잃었다. “별일 아니야. 자기야. 더 자.” “막내 도련님 목소리인 것 같던데?” “아, 제수 씨가 감기에 걸렸다고 해서...” 제수 씨? 선진의 눈이 금세 생기를 되찾는다. 오호라, 알고 있었단 말이지? 나에겐 비밀로 하고 둘이서만. “방금 제수 씨라고 했지? 자기?” “내, 내, 내, 내가? 아, 아, 아니야. 아닙니다. 신규 친구 중에 ‘재수’라고 친구가 하나 있는데 그 친구가 임신, 아니 그게 아니고, 감기에 걸렸다고 해서요...” “바른대로 말해. 그 아가씨 어디 사는 몇 살이야? 그쪽 부모님은 알아? 임신한 거? 지금 둘이 동거하고 있지?” “아니요, 모를...아니, 그게 아니고 임, 임신은 누가 임신을 했다고 그러세요. 여, 여보님.” 아니나달라 신주의 전화로 시작한 신규의 하루는 오늘도 그 시작부터 평탄치 않음을 예고하고 있었다. ********** “드세요. 찬영 씨. 뭘 좀 먹어야지 약을 먹죠.” 오전 중에 다녀간 신규가 특별 조제해 온 감기 약을 주고 갔다. 임산부가 감기에 걸렸다는 건 면역력이 떨어졌다는 증거라며 극히 조심해야 한다고 산부인과 전공의 친구가 말했다고 한다. 열이 나 입맛이 떨어진 찬영이 고작 두 숟가락을 떠넘기고 죽 그릇을 내려놓는다. 만사가 다 귀찮고 저 시끄러운 녀석 입 좀 제발 다물었으면 좋겠다. “그 약 꼭 먹어야 하냐?” “왜요? 찬영 씨. 이건 특별히 제조해 온 거라서 임산부가 먹어도 되는 약이래요.” “그래도 싫어.” “먹어야지 낫죠. 찬영 씨가 건강해야 아기도 건강한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정상적인 임신이 아니거늘 화학성분이 들어간 약을 먹는다는 것이 영 내키지 않는 찬영이었다. 남들과 다르기에 해될까 더욱 겁이 난다. “원래 감기란 게 약 먹으면 일주일, 약 안 먹으면 7일 간다고 그러잖냐. 난 잘 테니까 좀 내버려두고 넌 지금이라도 가게 가봐. 오늘부터 일반손님 받는 날이잖아. 콜록.” “지배인이 다 알아서 잘 하고 있어요. 이렇게 아픈 찬영 씨를 두고 제가 어떻게 가게를 갑니까?” 아프냐? 나도 아프다. 신주는 이미 좌포청 종사관 황보윤을 넘어, 그대가 죽으면 나도 죽으리, 레드문의 사다드 수준이 되어 있었다. 인류 최대의 적, 그것은 신주에게 있어 에이즈가 아닌 연인의 인플루엔자, 감기 바이러스다. 기침을 해대는 찬영의 모습이 가을동화에서 백혈병으로 쓰러지던 송혜교보다도 더 애처롭다. 버티고 서서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는 신주에 두 손, 두 발 다든 찬영은 뭔가 일거리를 던져줘야 자신이 편해지겠다는 생각에 가만 머리를 굴렸다. “인터넷 찾아봐. 콜록.” “인터넷이요?” “감기에 좋은 민간요법 같은 거 찾으면 나올 거야. 생강차를 마시면 좋다. 그런 거. 그런 거라면 먹을게.” 말이 떨어지게 무섭게 달려나간다. 컴퓨터는 찬영이 작업실로 쓰고 있는 서재에 두었다. 꿈을 꾸었다. 습한 정글 속을 헤매는 꿈. 덥고 축축한 늪의 가장자리를 카누를 타고 건너가고 있었다. 언젠가 케이블 TV에서 보았던 애니메이션, ‘정글은 언제나 맑은 뒤 흐림’ 거기서 등장하던 포쿠테가 이곳 저곳에서 나타나 다정히 손(혹은 귀인가)을 흔들어주고 있었다. 어디로 가면 구름이를 만날 수 있을까, 천천히 노를 저어 가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갑자기 배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콜록, 터져 나온 기침이 작은 카누를 사정없이 흔들고 있었다. 안 돼! 이건 꿈이야. 소리치며 눈을 떴다. 여기는 어디? “...정글?” 정글을 빠져나왔는데도 불구하고 덥고 축축하고 시야가 뿌옇게 흐리다. 눈꺼풀을 몇 번 깜박이자 차츰 익숙한 침실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창문, 커텐, 협탁, 스탠드, 그리고 저것은 가습기? 대형 에어컨처럼 생긴 커다란 가습기가 희뿌연 연기를 쉴새없이 뽑아내고 있었다. 한 대도 아니고 무려 두 대. 결코 좁은 편이 아니었던 침실이 그로 인해 비좁게 느껴진다. 땀을 많이 흘렸는지 잠옷이 다 젖었다. 이 실내온도는 정상이 아니었다. 벽에 걸린 실내 온도계가 29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 자식이 날 죽일 셈인가.’ 대체 보일러 온도를 얼마나 높인 것인지 10월 중순이거늘 방안에서 완연한 여름 날씨를 느낄 수 있었다. ‘딩동’ 먼 곳에서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누가 온 것일까. 벨 소리가 여러 번 울리도록 거실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없다. 신주도 외출한 모양이었다. 무심코 나가려던 찬영은 퍼뜩 자신의 상태를 깨닫고 옷장 문을 열어 점퍼를 꺼내 걸쳐 입었다. “누구세요?” 잔뜩 쉬어 탁해진 목소리가 부어오른 후두를 뚫고 입술 밖으로 새어 나온다. “퀵 서비스인데요. 문 좀 열어 주세요.” 거실 창문으로 커다란 상자를 어깨에 이고 들어오는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현관문을 열어주자 끄응 소리를 내며 ‘00청과물’이라 쓰여진 상자하나를 힘겹게 내려놓는다. “이게 뭐죠?” “내용물은 모르겠습니다. 너무 급하다고 하셔서 가능한 빨리 가져왔습니다. 문 닫지 말아주세요. 한 상자 더 있거든요.” 말을 마친 남자가 정원을 지나 다시 대문 쪽으로 향한다. 이번에는 ‘나주 배’ 라고 쓰여진 상자를 어깨에 메고 들고 온다. “여기 싸인 좀 해주세요. 김신주 씨 댁 맞으시죠?” 역시 그 녀석 짓인가 보다. 남자가 오토바이를 몰고 사라진 후 찬영은 사무용 칼을 가져와 상자를 뜯었다. 도라지, 도라지, 백 도라지, 도라지 무침을 몇 날 며칠을 해먹을 작정인지 살이 통통하게 오른 도라지가 검은 비닐 봉지 속에서 수줍게 몸을 감추고 있었다. 두 번째 봉지에서는 대추가, 세 번째 봉지에서는 꼭지 달린 감이, 네 번째 봉지에서는 생강이 가득 들어 있다. 두 번째 상자에서는 겉에도 쓰여있듯이 상(上)품의 배가 빼곡이 들어차 있었다. 제사라도 지내려는 걸까. 이 조합은 뭐란 말인가. 한참을 그렇게 뒤적거리고 있는데 열린 현관문 사이로 양손에 커다란 비닐봉지를 든 신주가 계단을 올라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슬리퍼를 꿰어차고 밖으로 나가자 신주가 봉지를 내려놓으며 반색을 한다. “찬영 씨, 왜 나왔어요? 추운데. 안에 계시지.” “안이 너무 더워. 너 나 찜쪄 먹을 작정이냐?” 네 사랑에 아주 질식하겠다. 신주야. “그건 또 뭐냐?” “이거요? 꿀이랑 무랑 오렌지 주스랑 뭐 그런 것 좀 사왔어요. 감기에 좋다길래.” 임산부에게 좋은 한방 차, 생강차, 약도라지차, 대추차, 모과차, 감꼭지차, 유과차, 감잎차. 또는 배 속을 파내어 꿀에다 잰 후 중탕하거나 무를 갈아 꿀과 함께 하룻밤 삭힌 뒤 먹으면 좋다. 신주가 프린트 해 놓은 종이엔 그렇게 쓰여져 있었다. 감기를 넘어 폐렴에 걸렸던 어린 시절에도 이 정도로 극진한 대접은 받아보지 못한 것 같다. 이 녀석은 어떻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지? 배 끓인 물을 후루룩 들이마시며 찬영은 토라진 신주의 등을 가만 쳐다보았다. 가습기 하나를 환불하라고 했더니 저리 뿔이 났다. “쓸데없이 돈 쓰지 말라고 내가 그랬지?” “쓸데없이가 아니잖아요. 하나는 거실에 두면 되는 거고. 아이 방에도 하나 사놓으려고 했는데.” “너무 커. 용량 과다야. 너는 어떻게 정도를 모르냐? 그러고도 장사 잘 하는 게 참 용하다.” “장사 얘기가 거기서 왜 나옵니까?”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석유 한방울 안 나오는 우리나라에서, 아니다. 가스 보일러지? 아무튼 가스 보일러라고 해도 저렇게 막 틀어놓으면 되냐? 이러다 겨울 되면 어쩌려고 그래?” 음...어쩐지 바가지를 긁어대는 마누라의 대사가 되어 가는 것 같다. 이쯤에서 달래줄까? 사실 정도를 지나쳐서 그렇지 감동은 받았다고. “...아기 이름은 생각해 봤어?” “‘리영’이요.” “...매형이랑 놀지 마라.” 언제 그렇게 친해졌는지 연락처까지 주고받고 가끔 만나기까지 하는 모양이었다. 매형은 신주를 찍어두고 소속사 비서로 일하는 아가씨와 소개시켜줄 작정이었는데 신주가 거절한 모양이다. 게이일 줄은, 그것도 자신의 처남과 그렇고 그런 관계일 줄은 생각도 못하고 그저 동거중인 연인이 있는 것으로, 그 연인이 임신 중이라 자신의 조언을 구하는 것으로만 알고 있다. 매형, 그게 바로 나야. 한바탕 땀을 흘리고 난 덕분인지 열이 많이 내려갔다. 이런 무지막지한 처방도 효과가 있는 가 보다. 등돌린 신주에게 다가가 등뒤에서 목덜미를 껴안으며 매달렸다. ‘고마워’ 라고 속삭이자 입 꼬리가 슬며시 올라가는 것이 보인다. 역시 나는 여우가 된 것 같다. 집안의 여우. ********** 며칠을 집안에서 몸보신을 하며 연신 차를 끓여 마셨더니 감기가 나아질 기미를 보였다. 기침은 이미 가라앉았고 부어 올랐던 목이며 쑤셔 왔던 팔 다리도 이제는 미미한 통증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이제 살 것 같다. 기침을 하는 내내 배가 당겨서, 가슴 밑으로 저려오는 그 느낌을 견딜 수 없었다. 마치 그 지독했던 입덧을 다시 하는 것 같았다. 이틀을 결근하고 하루는 조퇴를 했던 신주도 오늘은 정상적인 시간에 출근을 했다. 간만에 입맛이 돌아 외식을 하자고 했더니 아직 찬바람을 쏘이면 안 된다고 극구 만류를 한다. 먹고 싶은 음식이 있으면 사오겠다는 말에 딱히 이거다 하고 떠오르는 것이 없어 찬영이 망설이고 있자 가게 가서 전화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신주가 차고를 빠져나갔다. 시럽에 절인 유자 몇 점을 덜어 컵 바닥에 떨어뜨리고 끓는 물을 붓자 금세 새콤하고 달콤한 향내가 피어올랐다. TV 전원을 켜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고 있으려니 빈 침실에서 휴대폰이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신주가 벌써 가게에 도착했을 리 없으니 다른 사람임이 분명했다. 더군다나 신주는 ‘집’전화로 전화를 걸어오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다. 찬영이 기껏 외출해봤자 근처 상가가 고작이지 않겠는가. 뭐가 그리 불안하다고 전화를 걸어대는지. 찬영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지금의 전화는 몇 달 째 코빼기도 안 보인다고 집에 좀 들리라고 성화대는 박 여사의 전화이거나 간간이 안부 전화를 걸어오는 석진임이 분명했다. 낯선 번호에 의아함을 느끼면서 폴더를 열자 지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찬영 선배. 접니다. 강지환이요.’ “너구나. 웬일이냐? 네가 나한테 전화를 다하고.” ‘지금 석진이형 입원한 병원에 있습니다. 소식 못 들으셨죠?’ “석진이가 입원을 했어? 갑자기 왜? 어디가 아픈데? 설마 교통사고라도 난 거야?” ‘위경련으로 쓰러졌어요. 어제 바에서 술을 마시다 쓰러져서 응급실로 실려갔습니다. 지금은 꽤 안정을 찾은 상태이지만요.’ “어느 병원이야? 몇 호실?” ‘연세 병원 405호실이에요. 오실 수 있으신가요?’ “당연히 가야지. 지금 곧 갈게.” 전화를 끊은 찬영은 급히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석진은 다른 건 몰라도 자기 몸 상태 하나는 철저하게 통제하는 편이었다. 그랬던 그가 몸이 망가질 때까지 술을 마셨다니 믿을 수가 없다. 무슨 스트레스를 얼마나 받았으면 쓰러지기까지 했겠는가. 아기와 신주에게 정신 팔려 옛 친구의 안부를 묻는 것 마저 잊었던 자신이 찬영은 부끄러웠다. 오늘따라 도드라져 나와 보이는 배가 유독 신경이 쓰인다. 거울 앞에 선 찬영은 망설이다 결코 사용하지 않으리라 결심했던 복대의 포장을 풀었다. 병실 안에는 초췌한 모습의 석진이 지환의 시중을 받으며 누워 있었다. 찬영이 들어서자 허리를 세워 일으키는 것이 보인다. “어떻게 된 거냐? 손석진? 술 마시다 쓰러지기까지 다하고. 요즘 일이 잘 안 되냐? 메인이 또 구박해?” “찬영이 네가 불렀니?” 찬영 쪽은 쳐다보지도 않으면서 석진이 지환을 추궁한다. 네. 제가 불렀어요. 형. 그럼 두분 이서 천천히 얘기 나누시죠. 지환이 의자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간다. 싸늘한 분위기에 찬영이 어색하게 서 있자 석진이 고개를 들어 그제야 찬영을 응시하며 앉으라고 손짓한다. “별 거 아니야. 그래서 부르지 말라고 했던 건데. 그냥 속상한 일이 좀 있어서 마셨어.” “위경련이었다며?” “내 위가 좀 예민하잖냐. 그냥 며칠 안정하고 속 좀 다스리면 나을 거래. 이렇게 찾아 올 필요까지도 없었는데.” “무슨 소리야. 당연히 와야지. 너랑 내가 보통 사이냐.” “별 거 아니야. 신경 쓰지 마라.” “어떻게 신경을 안 써. 바에서 쓰러졌으면 지환이가 어제 밤부터 쭉 있었던 거야? 피곤할 텐데 들어가라고 해. 내가 있을게.” “지환이 곧 돌려보낼 거야. 너도 비 오기 전에 돌아가라.” 병실 창 밖으로 올려다 보이는 하늘은 구름이 잔뜩 끼어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습기를 잔뜩 머금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켜두었던 TV의 날씨 예보프로그램에서 오늘 비가 내린다고 했었다. 급히 나오느라 현관 옆에 놓여진 우산을 그만 지나치고 나왔다. 내가 TV를 껐던가? 현관문은 잘 잠그고 나왔는지 갑자기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생각에 잠긴 찬영의 옆모습을 석진이 차갑게 응시한다. “잘 지내니?” “...응? 뭐라고?” “잘 지내? 김신주랑?” “아? 어...어. 그럭저럭.” “어디 아팠었어? 얼굴 살이 다 빠졌네.” “어. 그냥 감기...” 석진의 손이 다가와 찬영의 뺨을 쓰다듬는다. 찬영은 당황하고 있었다. 어딘가 찬영이 알았던 그 손석진이 아닌 것 같다. 깍지 않은 수염이 지저분하게 자란 턱이, 퀭하게 들어간 눈두덩이가, 차가운 손가락이 너무도 낯설다. 8년을 알아왔던 석진에게 이런 모습이 있었던가.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흐른다. 배에 두른 복대가 답답해 숨이 막힐 것 같다. 그때 마침 찬영의 점퍼 주머니에 들어있던 휴대폰이 시끄럽게 울어대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찬영 씨 접니다. 집 전화를 안 받길래 휴대폰으로 했어요. 어디 바깥이에요?’ “어, 응. 여기 병원이야. 석진이가...” ‘병원이요? 갑자기 왜요? 다시 안 좋아졌어요? 열 나요?’ “내가 아니고 석진이가 위경련으로 입원을 했어. 여기 연세병원인데 이따 퇴근하고 올래?” ‘아니, 지금 갈게요. 석진씨가 아프시다는데 당연히 가 봐야죠.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가면서 사갈게요.’ “석진이 먹게 과일 바구니라도 사와라. 귤이라던가.” ‘알았어요. 회의 끝내고 곧 갈게요.“ 신주의 전화를 받으면서 부드러워졌던 찬영의 표정이 석진의 시선과 만나자 다시 미묘하게 굳어진다. 다시 다가가는 석진의 손길을 저도 모르게 찬영이 뿌리친다. “...아, 미안. 나도 모르게 그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 석진이 다음 화제를 이어나간다. “감기 아직 안 나았구나. 옮을까봐 그래?” “어, 응. 미안. 요즘 감기 독해서 걸리면 고생한다 너.” 평소대로 돌아간 석진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꺼낸다. 메인이 독립하게 되어 자신이 그 자리를 맡게 될 것 같다는 이야기. 잡지들은 벌써부터 내년도 판을 준비하느라 촬영이 줄줄이 밀려 있다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들을 석진은 쉬지 않고 지껄였다. “석진아. 미안. 나 화장실에 좀 다녀올게.” 아무래도 복대를 푸르고 와야 할 것 같다. 복부를 압박하는 복대 때문인지 점점 숨이 가빠오고 있다. 병실 문을 나서자 복도 끝에 지환이 벽에 기대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추울 텐데 내내 복도에서 찬영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피곤하겠다. 집에 가서 한숨 자고 나와. 여긴 내가 있을게.” “당신이 왜요?” “......” “팔자 좋네요. 여기 저기 받아주는 남자들이 많아서. 정말 부러워요. 어디 그 비법 좀 들어봅시다. 나도 팔자 좀 피게.” “강지환, 너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김신주 집에 얹혀 살면서 손 하나 까닥하지 않는다면서요? 취재 일 중단한지도 오래되었고 의뢰 들어오는 것도 다 거절했다면서요.”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상관은 없죠. 굳이 따지자면. 그러니까 배워보려고 그러는 거라니까요. 남자 홀리는 법. 친구, 후배, 동생, 연상, 연하 가리지 않고 홀리는 그 비법이요.” “강지환. 말조심해라. 참는 데도 한계가 있어.” “찬영 선배 원래 그런 사람이었던가요? 때와 장소 가리지 않고 다리 벌리고 허리 흔들고..” “...너.” “소리만 들어도 불끈불끈 솟던데요? 얼마나 황홀했으면 밑에 사람이 있는 것도 몰라요? 아님 들으라고 일부러 그랬어요? 그렇게 하니까 석진이형도 김신주도 정신을 못 차리죠. 아아, 그게 비법이었구나. 선배. 그렇게 안 봤는데 하는 짓이 아주 창녀나 다름 없...” 철썩. 찬영의 손이 지환의 뺨에 내리쳤다. 말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뒤를 돌아 멀어져 가는 찬영의 등을 노려보던 지환이 소리를 내지른다. “그 새끼 좆이 그렇게 좋아? 손석진이 꺼보다 더 좋았어? 몇 년 간 함께 살아왔던 사람을 그렇게 한순간에 정리해버릴 만큼 좋았어? 8년 간 자기 하나만을 바라봐 온 사람을 한순간에 바보로 만들어 버릴 정도로 그렇게 좋았어? 석진이형이랑 잤던 그 다음날 바로 사람들 앞에서 그 새끼랑 물고 빨며 온갖 추태는 다 부리더니 또 그 다음날은 와서 그 새끼 욕을 하데? 결국 이렇게 쉽게 넘어갈 거면서 그동안 고고하게 저 혼자 잘난 척은 왜 했어? 더 돈 많은 새끼 잡으려고 그런 거야? 그럼 김신주랑도 오래 못 가겠네. 씨발! 이럴 거면 왜! 석진이형이랑!...” “...너...지금 뭐라고 했어? 지금 뭐라고 한 거야!” “......” “내가 석진이랑 뭘 했다고? 조찬영이 손석진과 잤다고 그러는 거야? 너 지금?” 믿을 수가 없다. 강지환 저놈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가. “강지환. 입 다물어. 네가 함부로 할 얘기 아니다.” 어느 틈에 병실을 빠져나온 석진이 찬영의 뒤에 서 있었다. 지환이 찬영을 밀치고 계단 밑으로 뛰어내려가 버린다. “찬영아, 들어가서 얘기하자.” “무슨...얘기? 지환이가 나 화나게 하려고 거짓말을 지어낸 거잖아. 사실 아니잖아. 그런데 무슨 얘기를 해? 나 더 이상 들을 얘기 없어.” “사실이면? 그 얘기가 사실이면. 지환이가 한 얘기가 진짜라면 어쩔 건데? 그러면 뭐가 달라지니?” “...석진아...” “너와 내가 하룻밤을 보냈다면 뭐가 달라지니? 그러면 손석진이 김신주 되고, 김신주가 손석진 되니? 뭐가 달라지는데?” “...달라져. 달라져...많이 달라져...그러면...나는...나는...” “사실이야. 그래, 너, 나랑 잤어. 올해 4월. 신입생 축하 모임이 있었던 그 날에.” 올해 4월. 신입생 축하 모임이 있던 날. 김신주와 일이 있었던 바로 그 전날. “난 기억이 안...” 순식간에 덥쳐든 석진의 입술이 거칠게 파고 들어왔다. 석진의 머리칼을 잡아 비틀어 간신히 벗어나자 석진이 입술을 일그러트리며 웃었다. “이래도 기억이 안 나?” “...!...” 분명 기억에 있는 입술이다. 지난 9월 석진이 파리 출장을 가던 날 아침 꾸었던 꿈. “그럼 그게 꿈이 아니었어?” 툭하고 뒤에서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노랗게 잘 익은 귤 하나가 굴러와 찬영의 발 끝에 부딪쳐 멈춰 선다. “...신주.” 늘 다정했던 신주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간다. 상냥했던 표면에 금이 가고, 떨어져 나간 자리에 얼음처럼 차가운 아름다운 얼굴이 그 자리에서 새로 솟아난다. 마치 그것이 제 본모습이었던 양 모르는 사람을 보듯, 타인을 보듯 찬영을 무표정하게 응시한다. “신주야, 그게 아니...” 그게 아니야. 그래도 나는 너를... 신주가 찬영에게서 등을 돌린다. 등을 돌린 신주의 손목을 찬영의 손이 붙잡았다. “신주야, 내 말 좀 들어봐. 그게 아니...”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눈이 무심하게 찬영의 시선과 부딪쳤다. 그리고 시선을 내려 자신의 손목을 쥔 찬영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그대로 손을 털어 차갑게 뿌리친다. ‘그러니까 가능한 잡아줄 수 있는 손목은 기회 있을 때 잡아야 한다구요.’ ‘좋아하는 사람에게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솔직히 말해야 하는 거에요.’ “신주야...” 찬영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신주가 뚜벅뚜벅 복도를 걸어 계단 밑으로 사라진다. ‘김신주 사랑해요?’ 심장이 너무 아파서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다. 갑옷처럼 찬영을 조인 복대가 숨도 쉬지 못하게 찬영을 쥐어짠다. ‘너는 해 봤어? 사랑?’ ‘저는 지금 하고 있지요. 찬영씨랑.’ ...나도. 나도...너랑. “찬영아 왜 그래?” “찬영선배 왜 그래요?” 신주가 내려가는 것을 보고 도로 올라온 지환이 주저앉는 찬영을 보고 놀라서 달려온다. 석진도 당황한 기색이다. 숨을 쉴 수가 없어... “지환아, 의사 선생님 불러와!” 배를 감싸쥔 찬영이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린다. “...안 돼. 여기선 안 돼...김신규 선생님에게 가야 해...” “찬영아! 정신차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흐려지는 의식을 간신히 붙든다. 잦아들었던 기침이 다시 터져 나온다. 멀리서 달려오는 간호사와 의사의 모습이 보였다. ...김신주를 사랑해. 너를 사랑해. 제 10 편 < 사막의 여우 > “환자 분 진정하세요! 환자 분이 왜 이러시는 거죠?” “저도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쓰러져서...찬영아. 왜 이래? 의사 선생님이잖아.” 배를 감싼 찬영이 진저리를 치며 의사와 간호사의 손길을 뿌리친다. 완강한 거부에 찬영을 안심시키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한 의사가 차분히 말을 걸어온다. “환자 분 진정하세요. 환자 분께서 저를 믿어주셔야 진료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평소 큰 병을 앓고 계시던 것이 있었나요?” 가늘게 몸을 떨던 찬영이 천천히 고개를 가로젓는다. “숨쉬기가 괴로우신 거죠?” 이번엔 세로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배를 감싸고 계신 것을 보면 배 쪽에 통증이 있는 듯 한데 정확히 어느 부위가 아프신 건지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숙여진 찬영의 고개가 조금도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이어진 침묵에 한동안 찬영의 대답을 기다리던 의사가 다시 입을 연다. “저에게 말씀해주실 수 없는 문제입니까?” “......” 극도로 치료를 거부하는 환자의 경우 치료와 관련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거나 정신적인 상처가 육체의 상해보다 심각해 우선 심리학적 치료를 먼저 요하는 경우가 많았다. 찬영도 그런 케이스 중 하나라 짐작한 의사가 고개를 들어 간호사에게 신경 정신과 담당의를 불러 오라 손짓한다. 간호사가 의사를 부르러 간 사이, 찬영의 입이 열렸다. “...저를 담당해주고 계신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이 오시면 치료를 받겠습니다.” 담당의가 따로 있다는 말에 안심하는 의사와 달리 석진은 당황한 기색이다. 병원도 여러 곳을 다녀봐야 한다며 특정 단골병원을 만들지 않는 찬영이었다. 그런 찬영이 담당의라니. 몇 달 전 눈에 띄게 말라가던 찬영의 모습이 뇌리를 스쳤다. 설마... 찬영의 연락을 받은 신규가 모든 진료를 중단하고 병원으로 찾아왔다. 자신의 환자라며 돌아가서 진료하겠다는 신규의 발언에 의사도 흔쾌히 동의해 찬영과 석진, 지환은 함께 신규의 차에 올랐다. 통원치료가 가능하다는 의사의 말에 석진도 망설임 없이 퇴원 수속을 밟았던 것이다. 신규의 진료실로 사라진 찬영이 한참 후에야 모습을 드러냈다. 입원실이 따로 없는 내과라 주사실에 누워 링겔을 맞기로 했다. 한 방울씩 떨어져 내리는 원액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던 지환이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선배, 혹시 큰 병이라도 앓고 있는 겁니까? 올해 들어 갑자기 살이 빠졌다 찌고 또 술이랑 담배도 다 끊었잖아요.” “석진아, 너에게 물어볼 말이 있는데.” 지환의 질문을 무시하고 찬영이 석진에게 질문을 던진다. “내 마음은 이미 정해졌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면 너와도 의논을 하지 않으면 안 돼. 솔직하게 답해 줘. 내가 정말 너와 그런 일이 있었니?” 외면한 석진의 시선이 벽에 붙여진 기하학적 무늬의 장식 띠지에 머무른다. “그건...” 그 날은 오랜만에 졸업생들이 한자리에 모인 자리였다. 동아리 신입생들의 신고식 겸 OB와의 상견례라면서 절대 빠져서는 안 된다고 아직도 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남아있는 기학이 몇 주전부터 전화를 때려댔던 것이다. 학교를 졸업한지 꽤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전설의 주인공으로 남아있다는 찬영이 호기심에 가득 찬 신입생들과 후배들의 술 한잔 청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주량 이상으로 마셔대고 있었다. “선배 정말 조찬희 동생이에요?” “...어....어...응. 응.” “선배 정말 예쁘게 생겼다. 선배는 연예인 안 해요?” “으히히히. 내가...왜 그런 걸 왜 해애~” “연예인이랑 사귀어본 적 있어요? 엑스파일 그거 진짜에요?” “몰라, 몰라, 몰라... 노 코멘트으! 자 다음 사람~! 우리 짠~ 하자! 짠! 건배!” 찬영은 취하면 실실 웃으면서 아무에게나 엉겨붙는 술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술버릇 탓에 처음에는 ‘업어 가는 사람이 임자’ 라는 오해를 받기도 했지만 외견만을 보고 접근했다가 나가떨어진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의외로 쉽게 함락 당하지 않는 성격이었던 것이다. 아무리 취했어도 술김에 가벼운 상대와 깊은 관계를 맺고 그 관계를 이어나가는 일은 없었다. 지금처럼 뺨에 뽀뽀를 해댄다거나 붙잡고 부르스를 추자며 잡아끄는 일은 있어도 말이다. 막상 나이트 클럽에 가면 부르스는 추지도 않는 주제에 말이다. 그런 찬영의 모습을 지환이 혀를 끌끌 차며 쳐다보고 있는 중이다. 한 학번 아래의 지환은 동아리 총무직을 맡을 정도의 꼼꼼한 성격에 약간의 결벽증을 가지고 있어서 노세노세 하는 찬영을 늘 마뜩찮게 여기곤 했다. 몸을 가눌 수 없게 취한 상태에서도 여전히 3차를 외쳐대는 찬영을 후배들의 무리에서 간신히 빼냈다. 회식 자리였기에 일부러 차를 가지고 나오지 않은 석진이 택시를 잡느라 비틀거리는 찬영을 잠시 지환에게 맡겨둔다. “너어...너어...너어...임뫄! 강지화니...너눈 왜! 와이! 나를~ 그어케 미어하냐아~ 엉? 마래바...마래바....자샤...” “아, 진짜. 선배가 무슨 용가리 통뼈에요? 그 많은 술은 왜 다 받아 마셔 가지고 이 난리에요. 난리가. 이거 참. 정신 좀 차려 봐요!” 밤늦은 시각이라 택시 잡기가 쉽지 않았다. 귀가 방향이 같은 지환이 함께 택시에 올랐다. 택시 안 가득 동하는 짙은 술 냄새에 얼굴을 찡그리던 택시기사가 운전석 창문을 활짝 열었다. “석찌나...석찌나...아이구우...이뿐 내 친구우...우리이... 딱! 따아악 한 잔망...한 잔만... 더 하고 가자아...응?” “찬영아, 너 많이 취했어. 집에 가서 자야지.” “야아...야아...그렁게 어디써어...야아...한 잔망...으응?” 오늘은 유독 많이 취했는지 목에 팔을 감아오며 애교를 부린다. 뺨에 뽀뽀를 해댄다 싶었더니 어느새 입술에 쪽 소리를 내며 가벼운 입맞춤까지 날린다. 그 소리가 재미있다는 듯이 킬킬대며 웃던 찬영이 연거푸 입맞춤을 해왔다. 살짝 벌려진 입술을 가만히 받아주었다. 점점 진해지는 키스에 택시 운전사가 세상 말세를 중얼거리며 창 밖으로 찍하고 침을 내뱉는다. “야...우리이...지배 가서....조은 거...하자아...응?” 늘어진 찬영을 차에서 먼저 내리던 지환이 어이없다는 듯 바라본다. 찬영의 뺨을 두들겨 깨우면서 석진은 지환에게 잘 들어가라는 인사를 했다. 집에 도착한 석진은 찬영을 제방 침대에 눕히고 잠옷으로 갈아 입혔다. 잠과 술에 취한 찬영이 석진에게 엉겨붙어 온다. “찬영아, 자야지.” “우리이...조은 거...하자니까아...응?” 찬영이 지금 제정신이 아닌 것은 알고 있다. 분명 깨어나면 후회할 것이다. 찬영은 석진이 자신에게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좋은 친구로 참았기에 8년 간 찬영의 곁에 있을 수 있었다. 좋은 친구로 행세했기에 찬영과 동거하는 행운까지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힘들다. 힘들었다. 이런 기회는 다시 없다. 찬영도 원하고 있지 않은가. 어쩌면 이일을 계기로 친구에서 연인으로 바뀔 수 있을지 모른다. 한 상대와 2주 이상 관계를 지속하지 않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어쩌면 자신은 다를지도 몰랐다. 석진은 스스로를 속였다. 두 눈을 질끈 감고 입혔던 찬영의 잠옷을 다시 벗기기 시작했다. 애무는 달콤했다. 내일 아침 일 따위는 모른다. “찬영아, 잠깐만. 그거 해야지.” “그거어? 그게 머?...먼데..?” 잠깐만, 기다려. 금방 가서 가져올게. 석진은 콘돔을 가지러 자신의 방으로 건너갔다. 사두고 한동안 쓰지 않아 놓아둔 곳을 찾아 헤매느라 잠시 시간이 흘렀다. 간신히 콘돔을 찾아 찬영의 방으로 돌아왔을 때 찬영은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마법은 풀렸다. 바닥에 떨어진 이불을 들어 찬영의 몸에 덮어준 뒤 석진은 그대로 방을 나왔다. “누구누구는 좋겠어요. 만년 짝사랑이랑 드디어 그런 짓도 하고.” 다음 날 저녁 들린 바에서, 어딘가 붕 뜬 듯 불안해 보이는 석진을 오해한 지환이 입을 삐죽거렸다. “놀리지 말아라. 쪽팔린다.” “...어? 정말? 정말 같이 잤어요?” “뭐가 그렇게 궁금하냐. 이놈아. 노 코멘트다.” 말도 안 돼! 미쳤어요? 지환이 얼굴을 찌푸린다. 문이 열리며 김신주가 친구들과 함께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석진의 친구이기도 한 태훈이 석진을 보고 한쪽 눈을 찡긋한다. 화해의 장이니 뭐니 하는 그 우스꽝스러운 짓을 정말로 할 생각인가 보다. 어제 그렇게 퍼 마셨는데 또 무슨 술이냐. 아 진짜... 동영이 새끼. 말로는 툴툴거리면서도 찬영은 올 생각인 것 같았다. 밤 9시. 찬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날밤 이후 모든 것이 변했다. “솔직하게 답해 줘. 내가 정말 너와 그런 일이 있었니?” 왜 하필 그 녀석인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찬영이 김신주와 사라졌을 땐 불안하면서도 가슴 한구석으로 믿는 구석이 있었다. 조찬영이 결코 한 상대와 2주를 넘긴 적이 없다는. 그 부질없는 통계를 믿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찬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토록 싫다던 김신주를 불러내고 자신과 찬영만의 공간에 들였다. 김신주에게 전화하고 김신주를 기다리고 김신주를 향해 웃었다. 목이 말라 잠이 깼던 어느 날 새벽, 신주와 섹스하는 찬영의 신음소리를 들었다. 그 녀석이 찬영의 모든 것을 석진으로부터 빼앗아 갔다. 그래서 일부러 그랬다. 신주가 걸어오는 것을 보면서, 신주가 뒤에 서 있는 것을 알면서 일부러 그런 말을 했다. 김신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찬영에게 그런 행동을 했다. 그 날밤 내가 지체하지 않았다면 우리 사이 역시 달라졌을까? 김신주의 자리에 손석진이 서 있을 수 있었을까. 그러나... 우리 사이엔 아무 일도 없었다. “그건...거짓말이었어. 우린 아무 일도 없었다.” “석진이형!” “지환이 네가 오해하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바로잡지 않았어. 미안하다. 미안하다. 찬영아.” 긴장이 풀리자 다리의 힘이 빠진다. 조바심이 나 누워서 들을 수가 없어 일어나 벽에 기대고 서서 석진의 대답을 들었다. 주저앉는 찬영을 보고 놀란 지환이 찬영을 부축해 일으킨다. 잠깐...이게 뭐지? 찬영의 복부에서 무언가 부풀어오른 것이 느껴진다. “찬영 선배...선배 배가 왜 이래요?” 반사적으로 찬영이 배를 감싼다. 석진이 다가와 찬영의 점퍼 지퍼를 내렸다. 비정상적으로 부풀어 오른 찬영의 배가 보였다. ********** “이 새끼야! 미쳤어! 저리 안 비켜?” “죽으려고 작정했어! 새꺄! 나와!” “총각! 빨리 좀 비켜요! 이러다 늦겠네!” 빵빵빵빵 사방에서 시끄러운 클랙션 소리가 울렸다. 교차로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서 있는 신주를 보다못한 택시 운전사 하나가 문을 열고 걸어와 신주의 어깨를 잡아 흔든다. “이 사람이 지금! 정신이 있어? 없어? 가뜩이나 신호가 밀려서 열 받아 죽겠는데 뭐하고 있는 거야!” 아. 그제서야 정신이 든 신주가 멍하니 남자를 바라보았다. 길을 건너가려고 했던 것까지는 기억이 난다. 교차로? 왜 이 한가운데에 서 있는지 모르겠다. 퍼붓기 시작한 빗줄기가 신주의 얼굴을 아프게 때리고 있다. “젊은 사람이 이거 실성했구만? 여기서 이러다 누구 송장 치르게 하지말고 건너갈 거면 빨리 건너가라고!” 운전사에게 등 떠밀린 신주가 비틀비틀 걸어간다. 그 광경을 인도에 선 사람들이 호기심에 가득 찬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 나는 오늘 무슨 일을 하려고 했었지? 가게에 도착하자마자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여러 번 울려 자동응답기로 바뀌도록 받는 이가 없었다. 찬영 씨가 잠깐 외출을 했나. 휴대폰으로 당장 전화를 걸어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작작 좀 해대라는 찬영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귓전을 맴돌았다. 10분만 더 기다렸다 걸어보도록 하자. 그때 마침 아침 회의가 시작되어 신주는 전화를 걸 수가 없었다. 2호 점에 대한 기존 고객들의 반응보고와 신 메뉴에 대한 전문가 평가가 이어졌다. 한시간을 넘어가자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잠시 회의를 중단시키고 복도에 나가 전화를 걸었다. 그래, 나는 찬영 씨에게 무슨 음식을 사가면 좋을까 묻기 위해 전화를 걸었었다. 찬영의 친구인 석진이 입원해서 그쪽에 가 있는 중이라 했다. 별다른 오후 약속이 잡히지 않은 날이라서 자신도 그쪽으로 가겠다고 그리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차를 주차장에 주차시키고 다시 정문으로 나가 과일 바구니를 사든 후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도중에 지환을 만난 것도 같다. 병실을 묻는 신주의 질문에 그는 405호실이라고 대답했다. 4층에 도착하자 복도 끝에 서 있는 찬영과 석진의 모습이 보였다. 눈이 마주친 석진에 신주는 먼발치에서나마 고개를 숙여 먼저 인사를 했다. 다음순간 신주는 찬영이 가진 아이의 아버지가 자신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소리를 들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이해조차 되지 않았다. 찬영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과 관계를 가졌다. 그 사람은 석진이다. 고로 그 아이는 석진의 아이일 수도 있다. 그게 어때서? 신주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나는 이미 그 아이를 사랑하고 있다. 그래서 신주는 그 아이의 아버지가 될 수 있다 그리 생각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찬영과 함께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항상 찬영의 마음이 문제였다. 찬영은 자신이 아이 아버지라는 조건 하에서만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만큼만 허락했다. 유일하게 찬영을 붙들 수 있는 선녀의 날개옷 같은 것이었다. 선녀가 그러했듯 찬영은 두고 온 자유가 늘 그리웠을까. ‘너와 내가 하룻밤을 보냈다면 뭐가 달라지니? 그러면 손석진이 김신주 되고, 김신주가 손석진 되니? 뭐가 달라지는데?’ ‘...달라져. 달라져...많이 달라져...그러면...나는...나는...’ 작은 성을 쌓았다. 소중한 사람을 가두고서. 찬영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높이, 높이 쌓았다. 매일 벽돌을 이고 날라 한 장 한 장 튼튼하게 쌓았다. 성은 말 한마디에 쉽게 무너져 내렸다. 성은 유리로 만든 것이었다. 한순간에 금이 가 잘게 부서져 내렸다. 이렇게 깨지기 쉬운 얄팍한 것이었다. 그 순간 신주 안에서 작동하기 시작한 것은 자기보호 본능이다. 자신을 지켜라. 뇌가 지시를 내렸다. 더 이상 상처입지 않게 너 자신을 지켜라. 여기서 무너지면 너는 더 이상 기능할 수 없어. 달라지는 것이었다. 상황은 변하는 것이었다. 찬영은 이리도 쉽게 떠날 수 있는 가능성을 언제나 가지고 있던 것이었다. 이 자리를 벗어나라. 뇌가 명령을 내렸다. 자신의 팔을 붙든 찬영이 뭐라고 말을 했던 것도 같다. 그러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뇌가 두 귀에게 말했다. 듣지 마. 더 이상 듣지 마. 마음보다 손이 먼저 찬영을 뿌리쳤다. 첫째로 뇌가 움직이고 두 번째로 신체가 움직이고 마지막으로 마음이 아팠다. 너는 내게 아픔을 주는 사람이었다. 거리에서 길을 잃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다. 멍하니 서있는 신주의 다리를 작은 여자아이 하나가 잡아끈다. 참 예쁜 아이 하나가 조그만 입을 벌려 뭐라고 말을 한다. “아저씨! 전화 와써!” 답답하다는 듯 툭툭 치며 말을 건네 온다. 비를 맞고 있는 신주가 불쌍한 듯 자신이 들고 있는 작은 우산을 높이, 높이 쳐든다. 저렇게 작은, 예쁜 아이가 갖고 싶었었다. “아저씨! 울지 마!” 천천히 소리가 돌아왔다. 휴대폰 벨이 울리고 있었구나. 주머니에 손을 넣어 휴대폰을 꺼냈다. ‘큰형’ 불빛이 깜박거린다. “여보세요?” ‘너 임마! 뭐 하는 자식이야! 찬영씨가 쓰러졌다. 병원으로 와.’ 신호등 파란 불빛이 켜졌다. 여자아이가 걸어가며 손을 흔든다. 노란 병아리 우산이 아장아장 여자아이의 손에 들려 함께 길을 건넌다. ********** “찬영아, 이게 무슨...” 석진이 말을 잃었다. 지환 역시 말을 잇지 못한다. 다시 침대에 올라앉은 찬영이 잠시 망설이더니 입을 열었다. “나 아기 가졌다. 지금 임신 7개월 째야.” “......” “믿건 믿지 않건 너희들의 자유지만 상관없이 나는 몇 개월 뒤에 진짜 아이를 낳아. 극히 희박한 확률로 나 임신할 수 있는 남자였대.” “말도 안 돼...” “그렇지? 나도 처음에 그렇게 생각했는데...진짜더라구. 정말 내 안에 아기가 생겼더라구. 손도 있고...발도 있고... 가끔 발로 차기도 한다? 얘 되게 웃겨...” 찬영이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진짜였다. “...그럼 그 아기 아버지가...?” “설마...김신주?” 찬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나간다. “나는 그 녀석을 사랑해. 사랑한다. 설령 내 아이의 아버지가 그 녀석이 아니더라도 그 녀석을 놓치고 싶지 않을 정도로 그 녀석을 사랑해. 왠지 그 녀석이라면 그래도 괜찮다고 말해줄 것만 같았어. 물론 그 경우엔 석진이 너의 동의가 필요했겠지만. 나는 이 아이를 그 녀석과 함께 키우고 싶어.” 올 여름 바의 화장실에서 헛구역질을 일으키던 찬영의 모습이 떠올랐다. ‘강지환. 이 형 애 떨어질 뻔했다. 손 안 다쳤냐?’ 내가 무슨 짓을 한 것인가. “선배...” 정녕 그 밤은 마법의 밤이었다. 8년 만에 찾아온 기회를 저버린 것은 자기 자신이었다. “미안하다. 찬영아. 내 욕심 때문에...” 너를 갖고 싶다는 욕심 때문에 한 사람을, 아니 두 사람을 상처 입혔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것인가. “선배 미안해요. 난 그것도 모르고 심한 말을...” 나의 거짓이 김신주를 떠나가게 만들었다. 찬영을 쓰러지게 만들었다. 가장 친한 친구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선배 아기는 괜찮아요? 아까 배가 아프다고...” ‘조산의 징후가 있어요. 찬영씨. 이대로라면 예정보다 빨리 태어나게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말씀드렸다시피 산도의 역할을 하는 기관이 없기 때문에 제왕절개를 하셔야만 해요.’ “괜찮아. 지금은 자고 있대.” 세 사람 모두 같은 사람을 떠올리고 있었다. 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 “오셨어요? 친구 분 주사실에 계세요. 어머나 웬 비를 그렇게 많이 맞으셨어요?” 낯이 익은 간호사 하나가 신주에게 인사를 건넸다.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서둘러 주사실로 향했다. 열린 문틈으로 석진의 말이 들려왔다. “...아기 아빠는 나다. 찬영아, 내가 우선인 것 알지?” “무슨 소리입니까. 형. 저도 책임이 있어요.” “참나...웃기고들 있다. 그래,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니들 쏙 빼 닮은 아기 낳았으면 참 좋겠다.” 찬영은 미소짓고 있었다. 문 틈새로 그런 찬영의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는 석진의 모습이 보였다. 찬영이 석진에게 미소짓고 있었다. 찬영은 신주 없이도 홀로 그렇게, 온전히 행복해 보였다. ********** 얼굴을 굳힌 지환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선배, 만약에 김신주가 이대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제가 아기 아버지가 되어 드리겠습니다. 다 저 때문인 거니까 제가 책임을 질게요.” 책임을 져? 하이고. 이 놈의 남자들이란 어쩌자고 이렇게 모두들 발상이 단순하고 순진한지 모르겠다. 저도 남자이건만 찬영은 어느새 다 큰 남자 행세를 하려고 드는 지환이 우습고 재미있었다. “무슨 소리냐, 강지환. 책임은 내가 져야지. 그렇게 따지자면 이 안에서 아기 아빠는 나다. 찬영아, 내가 우선인 것 알지?” “참나...웃기고들 있다. 그래,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니들 쏙 빼 닮은 아기 낳았으면 참 좋겠다.” “그런데 아들이랍니까? 딸이랍니까?” “몰라, 이놈아. 책임은 무슨 책임이야. 누가 들으면 오해할 소리하지 말고 가서 간호사 누나나 불러와. 링겔 다 맞았다고 그래.” 때마침 신규가 간호사와 함께 주사실로 들어온다.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간호사가 입을 열었다. “어? 이상하다. 아까 까지만 해도 이 앞에 계셨는데. 찬영 씨, 신주 씨 못 보셨어요?” “신주가 왔어요?” “저랑 조금 전에 통화할 때까지만 해도 거의 다 도착했다고 했거든요. 신주 이 녀석 오늘 좀 이상하네요... 찬영 씨 무슨 짓이에요! 위험...!” 강제로 주사 바늘을 빼낸 찬영이 주사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복도 이곳저곳에도 신주의 모습이 없다. 찬영은 급히 출입문을 열고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나 너에게 할 말이 있어. 신주야. 후두둑 빗방울이 머리 위로 떨어졌다. 비에 젖은 은행잎 하나가 바람에 실려 처연하게 허공을 맴돌았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찬영은 신주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 낯선 번호가 울렸다. “여보세요?” “뭐 하냐? 막내! 잘 있었냐?” “...작은형?” “그래. 나다. 부모님 모두 잘 계시지?” “어...” “내 식당 잘 하고 있냐? 그거 완전 너한테 준거 아니다. 나 한국가면 좀 떼줘야 해. 장가갈 밑천은 있어야지.” “어...” “무슨 대답이 그래. 임마! 어? 너 우냐?” “...작은형...” “너...혹시 실연 당했냐? 그래서 그래? 그 마음 내가 알지. 참나...우리 형제 왜 이러냐?” “작은형...” “형한테 올래? 신주야?” “......응.” ...응. ********** “이번엔 또 뭡니까?” ‘학교 앞 분식 집 있잖아. 거기 튀김이랑 김 말이 세트. 떡볶이랑 순대도 사와.’ “그냥 아무거나 좀 먹으면 안돼요? 선배? 이 시간에 학교까지 언제 가요.” ‘갔다와. 거기 이제 24시 분식천국으로 업그레이드했대.’ “아, 진짜. 선배 너무 하는 거 아닙니까?” ‘책임진다며? 겨우 이런 것도 못해? 애가 먹고싶다잖아.’ “제가 말한 책임은 이런 게 아니라니까요.” ‘이런 책임이라도 제대로 하는 게 어때? 석진이는 출장 가서 못 온다잖아.’ “알았어요! 끝나고 갈게요.” 지환이 짜증을 내며 전화를 끊었다. 가만히 엿듣고 있던 인우가 눈을 가늘게 뜨며 의혹의 눈초리를 보낸다. “너 지금 찬영이형이랑 통화했지? 그치?” “아냐. 다른 사람이야.” “거짓말하지마. 찬영이형 목소리 던걸. 너 찬영이형 집에 가려고 그러지?” “아니야. 다른 선배 집 가는 거야.” “왜 나만 못 가게 하는 거야! 너도 석진이형도 나만 쏙 빼고 찬영이형 만나러 가고! 찬영이형은 여기 오지도 않고오!” “찬영이형 외국 갔다니까.” “외국 어디로 갔는데!” “...미국.” “미국 어디?” “마이애미.” “웃기지 마! 지난번엔 라스베가스라며!” “라스베가스에서 마이애미로 옮길 수도 있지. 여행이잖아.” “그럼 다음엔 뉴욕이냐? CSI 찍으러 갔어?” “......” 너 그런 프로그램도 보고 있었냐? 안 어울리게. 낭패다. 지난번에도 미행을 한다고 눈치 다 채이도록 졸졸 따라와서 떼어놓느라 정말 힘들었다. 오늘은 또 무슨 핑계를 대고 도망을 쳐야하나. 어느새 단골이 된 구로 보이즈, 우섭과 창훈이 인우를 손짓해 불렀다. 인우가 그쪽으로 정신이 팔린 틈새를 타 지환은 슬며시 바텐더 유니폼을 벗어놓은 뒤 문 밖으로 내달았다. 미안하다. 한인우. 오늘 고생 좀 해라. 그래도 조금만 있으면 마감이지 않느냐. 지환이 들고 온 봉지를 본 찬영이 반색을 하며 부엌으로 가 물 컵과 젓가락을 들고 온다. 몸도 무거울 텐데 잘도 움직인다. 먹으라며 권하는 찬영에게 사양을 표한 뒤 지환은 소파에 앉아 졸린 눈을 비볐다. 신주가 사라진지도 벌써 보름이 지났다. 집으로 들어오라는 석진의 권유를 뿌리치고 찬영은 이 집에 홀로 남았다. 쇼핑이나 장보기 같은 소소한 일들은 석진과 지환이 번갈아 가며 돕고 있지만 임산부 혼자 출산을 준비하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신주가 사라진 것이 찬영에게는 가장 큰 고통이 아닐까 싶다. 그 증거로 석진과 지환이 이곳저곳에서 공수해오며 가져다 주는 영양가 있는 음식을 밤낮으로 먹고도 전혀 살이 오르고 있지 않질 않느냐. 살이 오르기는커녕 젓가락을 쥔 손이 보는 이가 애처롭도록 말랐다. 이틀에 한번씩 신규가 와 포도당 주사를 놓고 간다. “선배, 그렇게 잘 먹는데 왜 살이 안찌는 거에요?” “애정이 없어서 그래. 네가 사오는 음식에는 애정이 없잖아.” “아, 진짜. 애정은 없어도 땀과 노력이 있잖아요. 그리고 조금은 애정도 있어요. 선배에 대한 존경심 뭐 이런 거.” “네가 그런 것도 갖고 있었냐? 넌 하극상 전문이잖아.” 몸은 말랐어도 밉살스런 입버릇은 그대로다. 실제로도 지환은 찬영을 다시 보고 있었다. 남자의 몸으로 임신을 하는 당혹스런 일을 겪고도 찬영은 여전히 건방진 조찬영, 원래 모습 그대로를 지키고 있다. 솔직하고 당당하고 거침없고... 그래서 모두들 저 사람을 동경하고 또 사랑해 버리는 것 같다. 나 혼자서 다 할 수 있어. 애도 혼자 낳을 거야. 찬영의 말대로 조찬영이라면 능히 그럴 수 있을 것도 같다. “저, 갈게요. 선배. 필요한 것 있으면 전화하세요.” “어. 잘 가라. 인우에게 안부 전해 줘.” “이제 둘러댈 레퍼토리도 없어요. 지금은 어디 있다고 그럴까요?” “뉴욕에 있다고 그래. 과학수사대 구내 식당 취재하러 갔다고.” “거참, 임산부가 그런 것 좀 보지 말아요. 저 갑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그래, 잘 자라.” 멀리서 대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찬영은 화장실로 달려가 억지로 쑤셔 넣었던 음식물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아이를 생각해서 먹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토기를 참을 수가 없었다. 걱정하는 지환과 석진의 앞에서는 맛있게 먹는 척을 했지만 전혀 맛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신규의 눈은 속일 수가 없었다. “찬영 씨, 거식증, 폭식증이 얼마나 무서운 병인지 아세요? 먹기 힘드시면 차라리 조금만 드세요. 그렇게 라도 흡수시키는 편이 낫습니다. 아무리 포도당 링겔을 놓아드려도 이런 식이면 찬영씨와 아기 모두 버티기 힘들어요. 신주 녀석 어디에 있던지 제가 꼭 찾아서 데려올게요. 저 믿으세요. 네?” 낮은 그래도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석진과 지환이 돌아가고 난 후에 찾아오는 혼자만의 밤은 너무나 견디기 힘들었다. 잠이 오지 않아 뜬눈으로 새우며 마구잡이로 책을 읽고 마구잡이로 먹어댔다. 그러다 화장실에서 탈진해 쓰러지기 일쑤였다. 신주가 만들어 놓은 성은 여전히 견고했다. 그 성은 침입자를 허용하지 않는 성이었다. 신주의 행방은 그 날 오후에서부터 끊겨 있었다. 흥신소에 의뢰까지 하며 행방을 좇았지만 그 날 오후 인천공항에서 국제선 비행기를 탄 것을 끝으로 더 이상 실마리가 잡히지 않았다. 2년 전 집을 나간 뒤 행방이 묘연한 둘째 신우에 이어 신주까지 그렇게 되고 마니 신규는 걱정이 태산 같았다. 찬영의 상태를 호전시키기 위해서는 신주가 필요하다. 태어날 아이를 위해서도 신주가 필요하다. 하필이면 이런 때에 왜 말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인지. 신규는 자신의 막내 동생이 원망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 그의 상태를 가장 먼저 눈치 챈 사람 역시 선진이다. 신주의 연인에 대해 캐물어도 신규가 대답해주지 않자 토라졌던 선진은 신규가 피우는 담배 개피수가 늘어나자 신규가 무엇인가로 고민하고 있음을 눈치챘지만 보고도 모르는 척 신규를 사려 깊게 배려했다. 더 이상 이대로 찬영을 내버려 둘 수가 없다. 선진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녀 역시 신규가 먼저 고민을 털어놓기를 기다리고 있는 눈치였다. 쌍둥이들을 재우고 온 선진이 커피 두 잔을 끓여 내왔다. 선진이 먼저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자 신규는 피워 물었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꺼트린 후 입을 열었다. “여보, 내가 지금부터 당신에게 하려는 이야기는 신주에 관한 일이야. 당신도 이미 짐작하고 있겠지만 신주에게는 아이를 가진 연인이 있어. 물론 신주의 아이야. 그 사람의 이름은 조찬영이라고 해. 믿을 수 없겠지만 부디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길 바래...” ********** “한우물 길 24-2 번지...여긴가?” 선진은 들고 온 가방을 힘겹게 내려놓았다. ‘김신주’. 문패를 보아하니 이 집이 맞는 듯 싶다. 제법인데? 작지만 아늑해 보이는 붉은 벽돌집이 대문 틈 사이로 들여다보였다. 선진은 호흡을 가다듬고 문패 밑에 달린 초인종 버튼을 눌렀다. ‘누구세요?’ “안녕하세요. 한선진이라고 해요. 김신규 아내 되는 사람입니다.” ‘......’ 징, 소리를 내며 대문이 열렸다. 정원 옆으로 난 계단을 따라 올라가자 아담한 현관이 나타났다. 문이 열리고 작은 얼굴 하나가 빼꼼이 고개를 내밀었다. 제 11 편 첫눈에 보아도 영양상태가 안 좋은 것을 알겠다. 커다란 눈이 의심의 눈초리를 띄고 선진을 내려다보고 있다. “나 안 들여보내 줄 거에요? 먼데서 여기까지 왔는데. 아...오늘 날씨 정말 춥다. 그쵸?” “...신주 여기 없어요.” “네. 알아요. 도련님 만나러 온 게 아니라 찬영 씨 만나러 온 거에요. 그간의 사정은 신규 씨에게 다 들었어요.” “...아세요?” 남자인 자신이 임신한 것을 알고 있느냐, 그런 뜻인 듯 하다. 얼굴만 문밖으로 내놓고 목 아래는 문 안쪽으로 감춘 채 조금도 보여주려고 하지 않는다. “다 알고 왔어요. 그러니까 우리 얘기 좀 하죠?” 손아래동서와의 첫 만남에는 기선제압이 중요한 법. 선진은 자신의 특기인 ‘웃고 있으나,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 미소를 지어 보였다. 눈과 입술은 활짝 웃되 전신 오오라를 이용하여 ‘언니 지금 화났거든’ 이라는 메시지를 동시에 전달하는 선진만의 34년 전통 쌍문동 날라리 포스다. 담당기자, 말 안 듣는 쌍둥이, 그리고 김가네 형제, 특히 맏형 신규에게 쓰면 제일 효과가 좋다. 눈동자만 깜박거리던 찬영이 잠시 후 결심한 듯 문을 조금 더 열어준다. 기회를 놓칠세라 선진은 문틈 사이로 오른발부터 밀어 넣고 방긋 웃으며 어깨에 힘을 실어 문을 밀고 들어갔다. 마치 다단계 상품판매원을 보는 듯한 선진의 행동에 찬영이 두어 발자국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난다. 정말이지 신주 도련님, 돌아오면 이 형수 그냥 안 넘어갈 거라구요. “목이 말라서 그런데 물 좀 주시겠어요?” “페퍼민트 티 사다놓은 게 있는데 드시겠어요?” “어머나. 저 페퍼민트 티 아주 좋아해요.” 오늘만큼은 엘레강스 선진 모드를 버리고 뻔뻔형수 모드를 유지하지로 결심한 선진이다. 네, 주세요. 냉큼. 이라는 선진의 태도에 찬영이 움찔거리며 부엌으로 이동한다. 한 손을 허리춤에 대고 움직이는 찬영의 모습에 그제야 부른 배로 시선이 머문 선진이 화들짝 놀라 앉았던 소파에서 일어난다. “어머나, 내가 깜박했네. 찬영 씨 몸도 불편한데 앉아 있어요. 어디 있는 지만 알려주시면 제가 가져올게요.”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손님이신데 어떻게...” “손님은 무슨. 편하게 생각해요. 이제 한가족이나 마찬가지인데 안 그래요? 동서?” “예?” 동서? 찬영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른다. 동서, 동서라니... 신규와 신주에게 말로만 듣던 형수의 이미지와는 너무 다르지 않은가. “저...그냥 찬영이라고 불러주시면 안될까요?” “왜요? 듣기 불편해요?” “네...그게...좀...” 후후후. 그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던 신주 도련님을 움쭉달싹 못하게 만들어놓을 작정 같았으면 이 정도 각오는 해주셨어야죠. 전 정말이지 동서가 생기면 함께 장도 보러가고 제사도 준비하고 어머님 흉도 몰래 보고 그렇게 재미나게 지내고 싶었단 말이에요. 제 꿈을 깨게 만드신 책임은 지셔야 하는 거에요. 앞으로 평생. “알았어요. 그럼 찬영 씨라고 부를게요. 그럼 됐죠?” “네.” 찬영이 달그락거리며 쟁반에 찻잔 2개와 티 포트를 받쳐 내온다. 빛깔 고운 초록으로 잘 우려난 찻물이 쪼르륵 소리를 내며 찻잔에 담긴다.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자 쌉싸름한 페퍼민트 향내가 입안 가득 퍼진다. 선진은 차를 마시면서 슬며시 곁눈질로 찬영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구석구석 살폈다. 설마, 설마 했는데 정말로 그 조찬희와 빼 닮은 여자, 아니 남자일 줄이야. 친동생이라니 닮은 것은 당연하지만 말이다. 자기 딴에는 숨겨놓는답시고 침대 밑 서랍에 조찬희 브로마이드와 잡지 기사 등을 넣어두던 고교시절의 신주가 생각나 선진은 쿡쿡거리며 웃었다. 철지난 옷을 덮어 위장해봤자 그걸 모를 리가 없지 않겠는가. 선진의 웃음에 찬영이 의아하다는 듯 숙였던 고개를 든다. 눈동자에 떠오른 물음에 선진이 웃음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갑자기 다른 게 생각나서...” “...이상하지 않으세요? 남자가 아기를 가졌다는 게...” “이상해요. 이상하고 솔직히 화나요. 왜 여자들 고유 영역까지 뺏고 그래요? 찬영 씨?” “...죄송합니다.” “어이구. 찬영 씨가 저한테 죄송할 게 뭐에요. 오히려 내가 미안해요. 다 제가 도련님 교육을 잘못시킨 탓인걸요. 제 사람 놔두고 도망이나 가고. 신우 도련님이나, 신주 도련님이나. 어쩜 하나들 같이...” “......” “찬영 씨 아침은 먹었어요?” “...네.” “뭘 먹었어요?” 실은 먹지 않았다. 새벽 늦게 잠이 들어 일어난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먹으면 또 쏟아낼 것이 뻔해 아침은 건너뛰고 점심이나 가볍게 먹으려고 하던 참이다. “그냥...가볍게 빵 같은 거 먹었습니다.” “홀몸도 아니면서 그렇게 먹고 어떻게 버티려고 그래요. 저 부엌 좀 빌려도 되요?” 찬영이 대답도 하기 전에 선진이 일어나 들고 온 가방 속에서 음식 재료들을 꺼내기 시작한다. 백숙용 닭, 손질된 장어, 인삼, 가물치, 찹쌀, 잣, 호두...이 많은 게 어떻게 저 작은 가방 안에 다 들어있었나 싶다. 두 팔을 걷어붙여 우선 쌀을 꺼내 씻은 뒤 물에 불리기 위해 바가지 채로 식탁에 올려두었다. 다음은 닭을 손질할 차례. 내장을 빼내 깨끗이 씻고 핏물을 제거하기 위해 냉수에 담근 채로 30분 간 놓아두는 것이 포인트. 싱크대 위 찬장을 열자 라벨이 붙여진 채로 가지런히 놓여있는 양념통들이 보였다. 눈에 익은 신주의 글씨체다. 둘째인 신우와 셋째 신주 모두 음식솜씨가 있는 편이어서 휴일이면 두 형제가 머리를 맞대고 궁리하여 듣도 보도 못한 음식을 멋지게 만들어 내놓곤 했다. 그 결과가 오늘날 퓨전 레스토랑 ‘피카소’의 대성공으로 이어진 것이다. 비서인 은영과 의논하여 신주의 부재는 해외출장을 간 것으로 처리해 놓았다. 정말이지 하루라도 빨리 돌아오지 않으면 안 된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신주의 부재는 여러 사람들에게 그가 얼마나 능력 있고 건실한 사람이었는가를 깨닫게 해 주고 있었다. 아니, 다른 사람은 차치하고라도 신주는 저 남자 동서에게로 가장 먼저 돌아오지 않으면 안 된다. 아무리 선진이 보양 식을 만들어주고 집안 일을 살펴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임시방편일 뿐이다. 눈 밑의 다크 서클을 보아하니 밤에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는 모양이다. 저 없이는 밥도 못 먹고 잠도 자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 어디를 갔는지... 선진은 자신도 모르게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개피를 꺼내 피워 물었다가 퍼뜩 놀라 개비를 부러뜨렸다. 임산부 앞에서 큰일날 뻔했다. 뒤를 돌아보자 찬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선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계면쩍은 웃음을 지어 보이자 ‘괜찮아요’ 라고 말하는 듯 미소를 지어 보인다. 아, 정말이지...예쁘지, 착하지, 집안 좋지, 직업 좋지, 초스피드로 아이까지 떡하니 가졌지, 남자라면 것만 빼면 평소 어머님이 부르짖으시는 며느리 감에 100 퍼센트 부합한다. 딱이다. 결혼이나 시켜버렸음 좋겠다. 여자이기만 했어도 어머님께 말씀드려 본가로 데려가 보살필 수 있었을 텐데. 어머님이 오죽이나 기뻐하셨을까. 공주 님 모시듯 데려가 금이야 옥이야 갖은 진미를 해다 바쳤을 것이 뻔하다.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시부모님은커녕 자신의 친정(?)어머니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숨어 있는 찬영이 선진은 애처로웠다. 자신과 신규가 힘닿는 대로 도움을 줄 수밖에 없다. 이 망할 놈의 도련님. 어서 돌아오지 않으면 임산부 유기죄로 인터폴에 수배해 버릴 테다. 역시나 직업답게 생각하는 것도 살벌한 선진이었다. 쌀이 불려지기를 기다리며 선진은 말리는 찬영을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두 팔을 걷어붙여 집안청소와 밀린 빨래를 해치우기 시작했다. 남자 둘이 사는 집답지 않게 구석구석 깔끔하게 꾸며진 집이었다. 침실 하나, 서재 하나, 아기 방으로 보이는 작은 방 하나. 방 세 개에 거실 하나, 작은 정원이 딸린 전원주택. 그야말로 신혼집다운 공간이었다. 파스텔 톤으로 꾸며진 아기 방을 보자 선진은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원목으로 만든 아기 요람, 바람 따라 흔들리는 장난감 모빌, 안데르센의 동화가 그려진 벽지, 바닥에 놓인 우유병과 기저귀, 딸랑이, 분유통들, 서랍을 열자 빼곡하게 들어있는 배냇저고리와 아기용 의상, 아기 양말들이 눈시울을 뜨겁게 만들었다. 두 남자가 머리를 맞대고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자신과 신규가 그러했듯 예쁘고 건강한 아기가 나오기를, 그 아기가 자라 무럭무럭 자라기를 밤을 새우며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했겠지. 준비성 하나는 알아주는 막내 도련님답게 구석에 놓인 작은 책장에는 전래 동화책부터 어린이용 백과사전, 영어교재까지 꽂혀져 있어 선진을 또 웃음 짓게 만들었다. 신주가 어떤 설레임으로 이 아기 방을 준비했을지, 어떠한 마음으로 이 작은 집을 사고 빈 공간을 알차게 채워놓았을지 선진은 신주에게 직접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자신의 도련님이 얼마나 저 남자를 사랑했었는지 느낄 수 있었다. 구석구석 찬영에 대한 배려와 사랑으로 채워져 있었다, 이 집은. 막내 도련님은 정말로 독립하여 ‘가정’을 꾸린 것이었다. 쌀이 알맞게 불려졌기에 끓여두었던 닭을 꺼내 건져서 찢고 육수는 체에 걸러 기름기를 제거했다. 냄비에 준비된 재료를 넣고 센 불에서 끓이기 시작했다. 고소한 닭죽 냄새가 부엌과 이어진 거실에까지 스며들었다. 일단 끓기 시작했기에 불을 줄이고 주걱으로 저으면서 쌀이 푹 퍼지기를 기다렸다. 완성된 죽을 국자로 떠 그릇에 담았다. 소파에 앉아 졸고 있던 찬영을 소리쳐 부르자 눈을 비비더니 쭈뼛거리며 다가온다. 과연 다 먹을 수 있을까 걱정부터 앞서는 찬영이었다. 아무리 냄새가 먹음직스러워도 속에서 거부하면 이미 그것은 음식이 아닌 고문의 도구나 다름이 없다. “어?” 선진이 찬영 몫으로 떠놓은 것은 기껏해야 다섯 숟가락이 될 듯 말 듯한 적은 양이었다. 자신을 쳐다보는 찬영에게 선진은 웃으면서 수저를 꺼내 건네주었다. “조금씩 먹어요. 찬영 씨. 그거 다 먹으면 더 줄게요. 먹고 싶어지면 또 먹어요. 먹기 싫으면 놔두었다 먹고. 우리 그렇게 조금씩 양을 늘려가요. 찬영씨.” 한 숟가락 떠 입안에 넣었다. 반사적으로 거부반응이 일어나는 것을 입술을 꼭 깨물고 간신히 참아냈다. 그렇게 두 숟가락, 세 숟가락을 입안으로 흘려보냈을 때 목구멍 안쪽에서부터 희미하게 고소한 닭죽의 맛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찬영이 그릇을 다 비우자 선진이 딱 그 만큼만을 더 떠서 그릇위로 올려놓는다. “감사합니다...맛있어요.” 17일만에 처음 느낀 음식의 맛이었다. 고소한 닭죽의 향내가 신경을 자극해 입안에 침을 고이게 만들고 있다. “정말? 나 사실은 닭죽은 자신이 없거든요. 실은 어머님이 잘 만드시는 요리인데 어깨 너머로 보고 배웠어요. 어머니가 음식 솜씨가 참 좋으시거든요. 전문가에게 칭찬 받기는 처음이네.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라도 너무 기분이 좋은데요?” “정말이에요. 정말 맛있어요.” 찬영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선진이 자신도 죽 그릇을 들고 식탁에 앉았다.‘정말. 내가 만들었지만 너무 맛있다’ 너스레를 떨며 죽 그릇을 비워낸다. 부엌 창문으로 들어온 초겨울 햇살이 따스하게 식탁 주위를 비추고 있다. ‘어허 가만있어요. 임산부는 저기 가서 앉아서 TV라도 보고 있는 게 도와주는 겁니다.’ 찬영의 만류에도 기어코 설거지까지 마친 선진이 모과차를 타 들고 거실로 돌아왔다. 소파에 앉은 찬영이 손발이 저린 듯 제 손과 발을 주무르고 있었다. “손발이 자주 저리죠? 나도 그랬어요. 아기가 자라면서 아기집이 골반혈관이랑 대정맥을 눌러서 혈액순환이 느려지는 거래요. 그 탓으로 수분이 손발에 몰려서 붓는 거니까 아기를 낳고 나면 괜찮아져요. 발 이쪽으로 줘봐요.” 선진이 소파 밑에 앉아 찬영의 맨발을 손으로 잡았다. 당황해 빼내려는 찬영의 다리를 누르고 놓아주지 않으면서 선진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찬영의 발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 배를 해 가지고 혼자서 무슨 발을 주무른다고 그래요. 나 임신했을 때도 신규 씨가 이렇게 주물러 줬어요. 신주 도련님이 있었다면 당연히 해줬을 일이니까 내가 대신할게요. 이 빚은 나중에 도련님한테 톡톡히 받아낼 거니까 찬영 씨는 그저 마음 편히 이런 저런 일을 해달라고 요구하기만 하면 돼요.” “이제 괜찮아요. 안 저리니까...” “찬영 씨 누나 있죠?” “네.” “누나랑 나이 차이가 어떻게 되요?” “여섯 살이요.” “그럼 찬영 씨 나이가 어떻게 되지? 스물 네 살?” “네?” “그럼 스물 셋? 스물 둘? 어머, 우리 도련님 도둑놈이네.” “...스물 여덟이에요. 누나는 서른 네 살이고.” “어머나. 난 도련님보다 어린 줄로만 알았어요. 도련님이 워낙에 어른스러워 보이는 타입이라 찬영 씨가 상대적으로 어려 보여서. 그만 실례를 했네요.” “괜찮습니다.” “조찬희 씨도 서른 넷이구나. 나랑 동갑이네요. TV에 나오는 걸 보면 워낙에 젊어 보여서 동갑이라고는 생각 못했어요.” “누나 프로필 나이는 서른으로 나오니까요.” “어머나 네 살이나 속였다니 너무해. 그래도 워낙 예쁘니까 용서해줄래요.” “형수님도 예쁘세요. 우아하고...신주가 형수님 이야기 많이 했었어요.” “제 얘기를요? 뭐라고 했을까나. 궁금한데요?” “형수님이 친누나처럼 잘 돌봐주셨다구요. 그리고 무척 아름다우신 분이라고.” “도련님이 저한테 혼날까봐 미리 포석 깔아두고 갔군요. 그래도 소용없어요. 도련님은 돌아오면 좀 맞아야 해.” 신주 이야기가 나오자 또 의기소침해지는 찬영이었다. 그 낌새를 눈치 챈 선진이 말을 돌린다. “찬영 씨도 날 누나라고 생각해요. 누나 친구라고. 찬영 씨 누나랑 어머님께서 찬영 씨 이러고 계신 거 알면 많이 속상해하실 텐데. 아시면 발만 주물러 주셨겠어요? 금이야 옥이야 귀하게 기른 자식이 아이를 낳는다는데 얼마나 해주고 싶은 게 많으시겠어요. 내가 찬영 씨 누나 몫이랑 어머님 몫까지 다 해줄게요. 그러니까 마음 편히 어리광부리고 기대도 좋아요.” 찬영의 발등 위로 얹힌 선진의 손위로 뚝뚝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어머나 찬영 씨 왜 울고 그래요. 이제 곧 부모 될 사람이 울면 어떻게 해. 엄마가 울면 아기도 안에서 울어요. 뚝 그쳐요. 네? 내가 재미있는 이야기 해줄까요? 이건 신규 씨에게 들은 이야기인데요. 둘째인 신우 도련님이 무척 말썽꾸러기였거든요. 매번 막내인 신주 도련님을 괴롭히고 놀려대서 늘 어머님께 야단을 맞곤 했었는데 하루는...” 그 날 오후, 간식거리를 사들고 온 지환이 초인종을 눌렀을 때 검지를 입술에 갖다댄 선진이 문을 열어주었다. 쉿. 찬영 씨 지금 자고 있어요. 거실 소파에 모로 누운 찬영이 간만에 찾아온 포근한 단꿈을 꾸고 있었다. 발소리를 죽인 지환이 쇼핑백 봉지만을 놓고 조용히 뒷걸음쳐 사라진다. ********* 도쿄, 신오오쿠보(東京, 新大久保) 해가 저문 거리를 짧은 교복 차림의 여학생 셋이 왁자지껄 떠들며 걸어오고 있었다. 어젯밤에 보았던 TV 쇼 이야기를 하며 까르르 웃음을 퍼트리던 그녀들의 발걸음이 ‘味のソナタ(맛의 소나타)’라고 쓰여진 간판 앞에서 멈춘다. 평일인데도 불구하고 신오오쿠보(新大久保:아시아인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으며 한국 음식점과 한국 서적, 음반을 취급하는 가게가 많다)는 한류상품을 찾아온 일본인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최근 드라마 ‘겨울연가(일본명 :冬のソナタ)’ 와 ‘대장금 ('일본명 :궁정여관 장금의 맹세, 宮廷女官 チャングムの誓い)의 대히트로 일본 전역에 대대적인 한류붐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 유학생들이 찾는 것이 고작이었던 거리의 분위기는 그로 인해 새롭게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味のソナタ’는 그렇듯 한류 드라마의 히트를 타고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한국 음식점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여타 다른 음식점들과는 달리 떡볶이, 김밥, 쫄면, 한국식 라면류의 분식점 음식을 전문으로 해 차별화를 꾀하고 있었다. 드라마에서 주인공들이 길거리에서 즐겨먹던 그 음식들을 먹어보고자 하는 사람들은 꽤 많았다. 그에 더해 한국인 꽃 미남 요리사가 일한다는 소문에 힘입어 ‘味のソナタ’는 10대 여학생들과 20대 OL(Office Lady의 준말)여성들, 그리고 욘사마의 팬인 3~40대 주부들 사이에서 높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こんにちは。안녕하세요” 여자아이 중 하나가 떡을 물에 불리고 있던 사내에게 말을 건다. “いらっしゃいませ。またきたね。어서 와. 또 왔구나?” “キャアア!! 私 憶えてるの。꺄아아. 저 기억하세요?” 신우가 반갑게 반말로 맞자 여자아이의 얼굴이 금세 환해진다. 손님에게 반말이라니 다른 가게 같았으면 진작에 문을 닫을 사유가 되었겠지만 신우의 능글맞은 반말은 ‘味のソナタ’의 인기 요인 중 하나가 되어 있었다. “憶えているよ。名前水木だったけ。물론 기억하지. 이름이 미즈키였지?” “いやだあ! 水野なの。シンウさんって意地わるい！아니에요. 미즈노라구요. 신우 오빠 너무해요!.” “ごめんごめん。今日は何食べるの。 아, 미안. 오늘은 뭐 줄까?” “トクポクキ食べたいけど。今日はシンジュさんいないの。 떡볶이 먹으려구요. 그런데 신주 오빠는요? 어디 갔어요?” 요즘 들어 신주를 찾는 손님들이 부쩍 늘어났다. 일본어를 한마디도 못함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사람들의 접근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 차가운 매력 때문인지 여자들 사이에서 ‘얼음왕자’라 불리며 높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신주에게 말을 걸어보겠다며 한국어, 영어를 연습해오는 손님까지 있을 정도이다. “今、買い物中。すぐ來ると思うけど。뭐 사러갔어. 금방 올 거야.” “よかった。シンジュさん見たいと言うから友たちつれてきたの。 다행이다. 친구들이 신주 오빠 보고 싶다고 해서 같이 데려왔거든요.” “なんだ。シンジュ見にきたの。もう俺なんか捨てるつもり。뭐야. 신주 보러온 거야? 이제 나 같은 건 퇴물이다 이거지?” “シンウさんもいいけとシンジュさんのほうがもっとかっこいじゃん！なんか王子って感じ。 신우 씨도 좋지만 신주씨가 더 멋진걸요. 왕자님 같다고나 할까.” “あいつが王子か。だったら俺は王になる。그 놈이 왕자라고? 알았다. 그럼 난 왕 하지 뭐.” “だめ！シンウさんは王じゃない。ぜんぜん似合わね。안돼요. 신우 오빠가 왕이라니 정말 안 어울리는걸.”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낸다더니. 딱 그 짝이었다. 나의 시대는 갔는가. 신우는 한숨을 쉬며 고추장이 담긴 플라스틱 용기 뚜껑을 열어 주걱으로 듬뿍 담겨있던 고추장을 떠냈다. 고추장이 뜨거운 물에 풀려 빨갛게 퍼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주부 손님 하나가 신우에게 말을 건넸다. “ね、ね。シンジュさんと兄弟ってほんとう。있잖아. 신주 씨하고 진짜 형제 맞아?” “ ほんとうです。名字も同じシン字使うし、漢字も同じなんです。 정말이에요. 이름에도 같은 신자를 쓰는 걸요. 한자도 같다구요.” “でも顔ぜんぜん似てないわ。얼굴이 전혀 안 닮았어.” “似ってるよ。ちゃんと。닮았어요. 꽤.” “どこが。 어디가?” “二人ともかっこいでしょう、いけメンでしょう。愛の馬鹿でしょう。둘 다 멋지죠, 잘나가죠, 결정적으로 연애 못하죠.” “普通、自分で言うか。그게 자기 입으로 할 말이야?” 부드러운 이미지의 첫째 신규, 단정한 이미지의 막내 신주와 달리 신우는 타고난 장난꾸러기 같은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겉모습만 양아치인 것이 아니라 하는 행동 역시 그러했다. 친구들과 어울려 중학교 때부터 경찰서를 들락거리길 수 차례. 그럼에도 성적은 좋아서 결코 근신이상의 무거운 벌은 받아본 적이 없다. 첫째와 셋째가 다 우등생에 모범생이니 자신 하나만은 자유롭게 살아도 되지 않겠느냐 이것이 언제나 신우가 내거는 핑계 중 하나였다. 너도 이제 나이를 먹어가니 뭔가 제대로 하나는 이뤄놓아야 않겠냐는 아버지의 말에 느닷없이 떠올린 것이 레스토랑이었다. 정형화된 것은 싫으니 퓨전 레스토랑. 동서양의 만남, 멋지지 않은가. 일단 하겠다고 결심하자 불같은 투지와 정열이 신우 안에서 솟아올랐다. 한번 빠지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성격. 그러나 식기도 잘 식는 것이 그의 단점이었다. 자신을 버리고 떠난 지독히도 독한 놈 하나 때문에 폐인이 된 자신을 깨달은 순간 신우는 레스토랑이고 뭐고 안중에도 없이 그냥 이 나라를 떠나버려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홍콩, 대만을 거쳐 인도에 머무를 때였다. 물갈이 탓에 설사에 시달리는 신우에게 가져온 배탈 약을 나눠주었던 사람이 지금의 ‘味のソナタ’의 마스터. 건길이었던 것이다. 건길과 죽이 맞아 몇 달 며칠을 소주잔을 기울이다가 그의 원대한 포부-신건길 떡볶이 프랜차이점을 일본 땅에 세우겠노라-에 반해버린 신우는 그대로 그를 따라 일본에 입국, 오늘날에 이르게 된 것이다. 불법체류자가 될 뻔한 위기를 거쳐 지금은 도쿄모드에 재학중인 학생으로 변신, 당당히 유학비자를 받아냈다. 신우가 버리고 간 레스토랑을 동생 신주가 건사해 그럴듯한 퓨전 레스토랑으로 재건해냈다는 소식은 우연히 길에서 만난 옛 친구에게 들었다. 신혼여행을 일본으로 왔다는 옛 시절 ‘동대문구 막가파’의 행동대장 민기였다. 그 이후 가끔 마음 내키는 대로 신주에게는 연락을 간간이 하곤 했는데 그 날도 그냥 시간이 남길래 걸어본 전화였다. 그냥 슬쩍 꺼낸 말에 정말로 올 줄은 몰랐다. 그 길로 비행기를 잡아타고 하네다 공항에서 내린 신주가 물어, 물어 정말 신오오쿠보까지 찾아오고 말았다. 대단한 녀석이다. 일본어도 한마디도 못하는 주제에. 일 시작한지 며칠만에 자신을 보러오는 단골손님까지 만들고 말이야. 녀석은 무언가에, 아니 누군가와의 사랑에 단단히 상처 입은 눈치였다. 어떤 사람에게 그렇게 데인 거냐고 신우가 물어보아도, 얼마나 예뻤기에 그리 잊을 수 없는 거냐고 슬쩍 질러보아도 굳게 다문 입을 열지 않았다. “ね、ね。彼來ないの。時間ないのに。그 사람 안 온대? 나 더 기다릴 시간 없단 말이야.” “待てってば。食べるうちに來るかもしれないんじゃん。좀 기다려봐. 지지배야. 먹고 있는 동안에 올지도 모르잖아.”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더니 그때 마침 신주가 식료품이 가득 담긴 봉지를 들고 가게문을 밀고 들어왔다. “キタ！왔어!” “あの人なの。かっこいい！！！！ 저 사람이야? 잘 생겼다! “ほんとうかっこいい！！！ドラマみたい！진짜 잘생겼다! 한국 드라마에 나오는 배우 같아.” “ね、理奈韓國語できるんじゅん。なんかしゃべて。お願い。리나 너 한국어 배웠다면서. 뭐라고 말 좀 해봐. 부탁이야.” “嫌だ。恥ずかしいよ。 싫어. 쪽 팔리단 말이야.” “しゃべてば。こっち見てるよ。말해보라니까. 이쪽 쳐다보잖아.” 꺅꺅거리는 여학생들의 음성에 신주의 시선이 잠시 그쪽에 머물다 다시 되돌아온다. 봉지에서 식료품을 꺼내 묵묵히 냉장고에 집어넣고만 있다. 쇼트커트 헤어스타일의 여학생 하나가 쭈뼛거리더니 서투른 한국말로 신주에게 말을 걸기 시작한다. “안뇽하세요” 한국말이라 그러했는지 신주가 잠시 동작을 멈추고 여학생을 돌아본다. 꺄아꺄아거리는 여학생들의 목소리가 좁은 가게 안을 시끄럽게 울린다. “안녕하세요.” “처는 야마구치 리나(山口理奈)입니다. 여르여솟(16)살이에요. 한국어를 곤부하고 있습니다.” 리나, 굉장해!(理奈, すごい!)라고 외쳐대는 친구들의 응원에 힘입은 리나가 친구들을 향해 손가락으로 브이자를 그려 보이더니 친구에게 부탁 받은 질문을 건넨다. “여자...친구...이써요?” 순간 신주의 눈동자 위로 혼란스러운 감정들이 떠올랐다. 신우 역시 파를 썰던 동작을 잠시 멈추고 이쪽을 쳐다보고 있다. “없어요...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있습니다.” “片想い.. 짜쿠사랑이에요?” “네. 짝사랑.” 뭐라고 그래? 애인 있대? 애인은 없는데 짝사랑하는 사람은 있대. 우와 리나, 너 대단하다. 그걸 다 알아들었어? 헤헤. 엄마랑 언니랑 한국 드라마 팬이어서 함께 배우고 있거든. 저번에 한국에 불고기 먹으러 갔었는데... 일본은 해가 지는 시간이 빠르다. 겨울이 오면 오후 네, 다섯시만 되어도 금세 땅거미가 짙게 내려 어둠으로 거리를 덮는다. 해가 뜨는 시간 또한 빠르다. 벌써 훤히 밝아온 창문 가를 바라보며 신주는 가만히 밖에서 들려오는 까마귀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한국에 비둘기가 있다면 일본엔 까마귀가 있다고나 할까. 주택가를 걷다보면 삼삼오오 내려앉아 음식물 쓰레기 봉투를 뜯고 있는 까마귀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다. “네가 좋아하는 녀석이 너 싫다던?” 신우도 잠이 깬 모양이다. 팔꿈치를 구부려 머리를 괴고 신주 쪽을 바라보며 말을 걸어온다. “작은형 안 잤어?” “누구누구가 밤새도록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어대서 말이지. 여기 지진 나면 너 때문인 줄 알아. 이놈아.” “미안...” “내가 좋아하던 놈은 내가 바람 같아서 싫다더라구, 언제나 장난 같아서 믿지 못하겠다고 그렇게 말하고 떠나더라. 네가 좋아하는 놈은 뭐라던? 넌 나랑은 다르게 연애도 근면성실 바른 생활 맨 김신주, 그럴 줄 알았는데 말이야.” “못 들었어. 못 들었는데 그냥 알 것 같아서 그냥 도망쳤어. 직접 들으면 더 못 견딜 것 같아서.” “이제 보니 완전 겁쟁이네. 우리 막내. 너 엄마 젖 더 먹고 와라.” “나는 작은형 하나도 안 닮은 줄 알았는데...그래서 형이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라고 자기가 봤다고 놀렸잖아.” “세살 밖에 차이 안 나는데 그걸 어떻게 봤겠냐. 그냥 너 태어나서 관심이 그쪽으로 쏠리니까 질투했던 거야. 이게 바로 가운데 낀 둘째의 비극이라는 거다.” “실연 당해 도망친 것까지 어쩜 이렇게 똑같냐. 가게도 버리고.” “그러게. 누가 그런 걸 닮으래? 남자 꽁무니 따라다니는 건 왜 따라하냐? 바보야.” “...형? 알고 있었어?” “그걸 모를 리가 있겠냐. 내 동생인데. 나 몇 년 전에 모텔에서 너 남자랑 나오는 거 봤다. 너한테 안 들키려고 숨었다가 그 자식이 오해해서 얼마나 고생했던지.” “봤구나...진작 말을 하지 그랬어.” “형제 모텔 차릴 일 있냐. 신규 형한테는 말하지 마라.” “큰형은 알아. 나 이반인 거.” “으앗, 신규 그거, 기절 안 했냐? 소심해서 형수한테도 만날 혼나는데.” “하하..큰형 많이 놀랐지. 큰형이 나 많이 도와줬어.” “아아..바보형이랑 아부지랑, 어머니랑 형수랑 괴물 쌍둥이들까지 다 보고 싶다. 내년 설에는 오랜만에 가서 돌아온 탕자 놀이나 한번 해볼까.” “다들 작은형 걱정 많이 하고 있어. 가서 얼굴 좀 비추고 와.” “너는 안 가게? 당연히 너도 같이 가야지. 너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건데. 잘못 하다간 불법 체류자 된다 너.” “...가면 못 참고 보러 갈 거야. 가서 보고 나면 그 사람 감정에는 상관없이 또 나 좀 봐달라고, 나랑 같이 있어달라고 매달리게 될 거야. 이젠 핑계가 없으니 납치라도 하려고 들지 몰라. 이런 내 자신이 무서워. 하루에도 열두 번씩 그런 상상을 하는 내가 미워. 그 사람 행복하기만 하면 된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떠나 왔었는데...” “사랑은 이기적인 거야. 뭐가 사랑을 위해 사랑을 버린다냐.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 웃기지 말라고 그래. 다 자기 핑계고 변명이지. 단순하게 그냥 나 너 좋다, 너도 나 좋아하냐? 그럼 우리 같이 살자. 이거면 끝이지. 뭐가 또 필요해. 무슨 확인이 또 필요하다고 그 녀석이나 이 녀석이나.” “아니야, 작은형. 난 정말 찬영 씨가 행복해지길 원해서...” “멍청아, 지금 니가 헤어진 거냐? 아직도 연애 계속 하고 있네 뭘. 이 방에 한 사람 더 있네. 어이~! 남자 제수 씨~ 안녕하세요? 저 김신우입니다. 이 바보 녀석 데리고 한국으로 좀 돌아가세요. 이 녀석 때문에 제 인기전선에 지장이 많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데려 가세요.” “작은형...” “너 오늘 나랑 어디 같이 좀 가자. 구리구리한 얼굴, 구리구리한 머리, 보기 싫어. 새로 태어난 김신주를 제수에게 보여주는 거다. 김신주가 싫다고 하면 머리 바꾸고 옷 바꾸고 이름 바꿔서 다시 접근하는 거야. ‘김신조’ 어때? 멋지다. 간첩이름하고 똑같네. 밑으로 동생 하나 더 있었으면 우리 아부지 분명 그 이름 썼을 거다.” JR야마노테선(JR 山手線)을 타고 하라주쿠(原宿)에서 내렸다. 한 방향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을 뒤따라 역에서 나오자 시끌벅적한 번화가가 눈앞에 나타났다. 신주를 끌고 길을 건넌 신우가 건널목 바로 앞에 있는 빌딩 속으로 들어간다. ‘Boy Meets Girl' 간판이 붙어있는 꼭대기 층에 이르자 문이 자동으로 열린다. 옷가게 마냥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는 실내에 신주가 고개를 두리번거리자 신우가 신주의 목덜미를 잡아 소파에 앉힌다. “작은형? 여기는?” “미용실이야. 여기 대빵 미용사가 내 친구 형이거든. 잠깐만 앉아서 기다려라.” 불안이 엄습해 왔다. 이곳 저곳에 놓인 소파에 앉아 잡지책을 보고 있던 여자들이 흘끔거리며 신주를 곁눈질한다. ********** 3시간 후. 어색한지 자꾸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 내리는 신주의 등을 신우가 철썩하고 내리쳤다. “머리 진짜 잘나왔다니까! 처음부터 그렇게 나오기 힘든데. 인물이 확 사네. 이제 옷만 바꾸면 되겠다.” “옷도 사게? 나 옷은 괜찮은데...” “그 머리에 그 옷이 어울린다고 생각하냐? 나만 따라와라. 이 형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나이스하게 바꿔줄 테니까.” 좁은 골목길은 교복차림의 소녀들과 화려한 차림의 10대 남녀들로 가득 차 있었다. 다소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미니스커트를 차려입은 소녀들이 참새처럼 떠들며 신우와 신주의 곁을 스쳐간다. 거리의 풍경은 한국의 번화가와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골목 중간, 크레페 모형이 전시되어 있는 작은 상가에 신주의 시선이 멎는다. “먹고 싶냐? 사줄까?” ‘예전에 누나랑 일본을 간 적이 있었는데...누나 촬영할 때 따라 간 거거든. 패션잡지에 나오는 희한한 옷을 입은 애들이 다 거기에 있더라구. 하라주쿠의 다케시타도오리(竹下通り)라고 하는 골목이었는데, 실은 엄청 기대하고 갔었는데 조금 실망이었어. 그냥 작은 골목 하나더라구. 물론 거기에서 조금 더 가면 브랜드 명품점들이 늘어서 있는 곳도 나오긴 했지만. 아무튼 그 골목에서 크레페를 하나 사 먹었는데. 그게 꽤 맛있었어. 원뿔형 크레이프에 바나나와 딸기를 잘게 잘라서 넣고 생크림을 바른 건데... 어? 너 표정이 왜 그러냐? 내가 설마 지금 그걸 거기 가서 사오라고 하겠냐. 나도 사람인데. 지금은 그냥 이대에 가서 비슷한 걸 사오면 되는 거구, 일본에는 우리 나중에 함께 가자. 응?’ 자식, 취향하고는. 사내자식이 초코 바나나 딸기가 다 뭐야. 동전을 꺼내 값을 치른 신우가 툴툴거리며 종이에 감싸인 크레페를 건네준다. 부드러운 식감이 입안 가득 느껴진다. “사준 사람 보람 없게 표정이 그게 뭐야. 맛없어도 맛있는 척 먹으면 좀 안 되냐? 그게 보기엔 그래도 하나에 400엔이나 한다. 우리나라 돈으로 4000원이나 하는 거라고.” 주부들로 북새통을 이룬 길가 상점에 낯익은 얼굴들이 보인다. 배용준, 권상우, 장동건, 원빈. 한류 스타들의 사진이 벽 가득 진열되어 있다. ‘겨울 연가’, ‘가을 동화’, ‘천국의 계단’ 눈에 익은 드라마 DVD도 보인다. 탤런트 조찬희의 얼굴이 표지에 실린 여성 잡지 하나가 신주의 눈에 들어왔다. ‘톱 탤런트 조찬희, 그녀가 밝히는 육아비법 대 공개, 출산 풀 스토리’ “아이구, 이 빠돌이 같으니라고. 여기까지 와서 그걸 보고 있냐? 그래. 왜? 하나 사줄까?” 그러고 보니 사진 한 장 가져오지 못했다. 기록을 남겨야 한다며 틈틈이 찍어두었던 찬영의 사진을 보면 가슴아플까봐 일부러 지갑 속에서 빼내 휴대폰과 함께 차안에 두고 나왔다. 공항 주차장에 놔두고 왔으니 신규에게 연락이 갔을 것이다. “그만 보고 가자. 오늘 갈 데가 많다. 여기서 조금만 더 걸어가면 시부야(?谷)야거든. 시부야라포레에 가면 거기 또 나 아는 사람이...신주야?” 신주의 시선이 걸어가는 한 남자의 뒷모습에 멈춰 있다. 신우는 조금 전 저 남자와 어깨를 부딪혔다. ‘I'm sorry'들려오는 영어에 외국인이라 짐작한 신우가 자신도 영어로 사과를 건넸다. ‘That's allright' 다시 돌아온 남자의 답변에 뒤따라오던 신주의 걸음이 멈췄다. 찬영 씨일 리가 없다. 찬영 씨가 일본에 있을 이유가 없다. 무엇보다도 찬영은 아직 임신 중일 터였다. 석진과 함께 출산을 준비하고 있을 터였다. 그런 찬영이 지금 이 거리에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That's allright' 가볍게 혀를 굴리는 억양의 음색이 찬영과 너무 닮았다. 걸어가는 뒷모습 또한 찬영과 닮았다. 저렇게 멈춰서 한 손을 턱에 괸 채로 생각에 잠긴 옆모습이... “찬영 씨!” 신주가 느닷없이 뛰쳐나가자 당황한 신우가 신주에게 밀쳐진 사람들에게 연신 사과를 하며 신주의 뒤를 따른다. “찬영 씨!” 길에 멈춰선 남자의 어깨를 잡아 채 돌려세웠다. 눈을 동그랗게 뜬 남자의 앞 얼굴이 신주의 얼굴과 같은 높이에서 만난다. “찬영...!” 찬영이 아니다. 찬영이 아니었다. 얼굴 윤곽이며 뒷모습이 꽤 닮기는 했지만 찬영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남자는 찬영보다 큰 키를 가지고 있었다. 찬영보다 남자다운 얼굴 윤곽을 가지고 있었다. 온화한 표정을 한 사내가 빙그레 웃으며 신주를 쳐다보았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뜻의 일본어가 뭐였지? 형에게 들었었는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신주는 멍하니 서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 말 한마디만 되풀이했다. “우리 막내를 알아요?” 남자의 입에서 나온 한국어에 신주를 뒤따라온 신우가 더욱 놀란다. “네?” 신주를 제치고 신우가 반색을 하며 남자의 곁에 다가선다. “혹시 디자이너 조찬우 선생님 아니세요?” 디자이너? 신주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신우를 쳐다본다. “영광이에요. 선생님. 저 선생님 작품 정말 좋아합니다. 팬이에요. 도쿄 컬렉션 참가하러 오신 거에요?” “여기서 내 팬을 만나다니 영광이네요. 시간 되시면 보러 오시겠어요? 프레스 티켓 보내드릴게요.” “정말이세요? 이야! 프레스 티켓이라니! 친구들이 들으면 부러워서 미치려고 할 걸요.” “거기는 이름이 뭐죠?” “...김신주입니다.” “조찬영으로 오해하고 저 따라오신 거죠?” “네?” “저 찬영이 형 되는 사람입니다. 우리 막내랑 아는 사이이신가 보네. 찬영이 친구인가?” “...!...” “제 동생 친구의 형이시라니. 이거 대단한 인연인데요. 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젊어 보이세요.” 찬영에게서 유럽에 가 있는 형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 생각난다. 국내에서 한창 인기 절정의 지위를 누리고 있을 때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유학 길에 올라 처음부터 다시 공부하기 시작했다고. 그 사람이 지금 눈앞에 있는 조찬우인 모양이었다. 찬영 씨, 나 찬영 씨 형님을 만났어요. 찬영 씨가 천재 디자이너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말하던.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신우를 뒤로하고 신주는 골목을 다시 거꾸로 올라가기 시작한다. “김신주 임마! 너 어디 가!” “작은형! 공항 쪽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해?” “야! 임마! 표가 있는지 없는지는 알아보고 가야지! 같이 가! 임마! 앗, 선생님. 이것 제 명함인데요. 염치불구 하지만 프레스 티켓 꼭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가서 또 인사드릴 테니까 저 모른척하시면 안 돼요. 아셨죠?” 말을 마친 신우가 앞서 가는 신주를 향해 뒤따라 뛰기 시작한다. 명함을 받아든 찬우가 일본어로 쓰여진 명함을 뒤집어보며 어깨를 으쓱한다. 뒷장은 다행히 한국어다. ‘CLUB?(클럽 사쿠라) 쭉쭉빵빵 미남미녀 항시 대기. 시간당 만엔으로 모십니다. 봉사료별도. (03) -5282-XXXX 가부키조 37-1’ 명함 잘못 주셨다. 아홉 살 차이나는 막내 동생은 정말이지 친구들도 꼭 저같이 귀여운 남자들만 사귀는 모양이다. 어깨를 들썩이며 웃는 찬우의 주위로 여학생들이 저들끼리 수군대며 지나간다. 11월을 하루 앞둔 어느 한낮의 일이었다. ********** 다행히 취소된 좌석이 하나 있었다. 1시간 후에 출발하는 대한항공편 보잉 777-200ER이다. 두 손을 모아 쥐고 앉아 입술을 깨물고 있는 신주를 내려다보며 신우는 주머니에서 담배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가 금연구역인 것을 깨닫고 얼굴을 찌푸리며 다시 주머니에 담배 곽을 구겨 넣었다. “작은형, 가서 얼굴만 보고 올게. 보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아.” “오길 뭘 또 와. 가서 부모님한테 효도하면서 가게 잘 꾸리고 있어. 다음엔 형이 갈게.” “찬영 씨 행복하라고 그렇게 두고 오면 편할 줄 알았는데. 잊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하나도 편하지 않다, 작은형. 무얼 봐도 찬영 씨 생각만 나고. 찬영 씨가 좋아하는 음식, 찬영 씨가 좋아하는 옷, 찬영 씨가 즐겨 듣는 음악, 그런 거만 생각나서 미치겠어. 길가는 사람들이 다 찬영 씨 같고, 사람들의 목소리가 다 찬영 씨 목소리로 들려.” “새끼, 중증이네. 그런 건 신규형이 와도 못 고쳐. 가서 잘 해봐.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까 뵈었던 조찬우 선생님의 동생 맞지? 너 꼭 잘해야 한다. 잘해서 이 형 든든한 연줄 하나 만들어 줘. 난 태어나서 한번도 뭐가 되고 싶다던가, 무얼 하고 싶다던가 그런 게 별로 없었거든. 레스토랑도 그 때 막 불타오르다가 식어버렸고. 그 녀석이 떠날 때도 너 없으면 내가 못살 줄 아냐, 허세만 부렸었어. 그 녀석 모델이었거든. 그래서 두고 보자, 이 자식. 내가 디자이너 되어서 너 손끝으로 부릴 테다. 내 앞에서 무릎꿇게 할 테다. 그렇게 마음먹고 의상 학교에 등록을 했어. 그런데 복수심만으로 버티기엔 호락호락하지 않은 곳이더라구. 정말 좋아하지 않으면 버티기 힘든 곳이었어. 그렇게 아득바득 밤을 새우고 코피를 흘려가며 과제를 해가고 옷 만드는 법을 배우면서 어느 날 문득 깨달았어. 내가 정말 이일을 좋아하고 있구나.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찾았다. 이 형, 올해로 서른이다. 그래도 늦었다는 생각하지 않아. 아까 그분 내가 정말 존경하는 선생님이거든. 그분도 나이 서른에 모든 걸 다시 새로 시작한 분이야. 형은 그분처럼 되고 싶다. 그 선생님 애인도 얼마나 이쁜 줄 아냐? 무려 슈퍼모델 아이라 클루야. 빅토리아 시크릿 전속 모델인데 몸매가 아주~ 끝내주지. 아무튼 너 꼭 잘해야 한다. 응? 애인이 안되면 친구라도 하자고 꼭 물고 늘어져. 알았지? 아...이 놈 안 듣고 있네? 정신 차려 이놈아. 2시간이면 건너간다. 응?” 잠시 후 탑승이 시작되었다. 게이트 바깥에서 자신을 배웅하는 신우의 모습이 점차 조그맣게 멀어진다. 2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다시 되돌아가는데 스무날이 넘게 걸렸다. 스무날을 참아놓고도 몇 시간을 참지 못해 입안의 침이 바짝바짝 마른다. “음료 드시겠습니까?” 작은 창으로 내려다보이는 도시는 어느새 어둠이 깔려 불을 밝힌 수만의 불빛들로 뒤덮여 있었다. 머물렀으나 머물지 않았던 땅. 신주는 멀어지는 불빛을 보며 마음 속으로 조용히 도시와 신우에게 작별 인사를 보냈다. ********* 찬영은 이미 그곳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신주는 석진의 집으로 가기에 앞서 자신과 찬영이 머물던 그 작은 집에 한번 가보기로 결심했다. 함께 산 기간은 겨우 한달 남짓. 그러나 신주에게는 그 시간들이 지금껏 살아왔던 그 어떤 날들보다 소중하고 행복했다. 집에 가서 씻고 옷을 갈아입고 신우가 제멋대로 바꾸어버린 머리스타일을 원래대로 되돌리고 단정한 모습으로 찬영을 만나러 가야겠다. 찬영이 가진 아이의 아버지가 될 수는 없어도 친구로서 당신 곁에 남고 싶다고 남게 해 달라고 그렇게 청해야겠다. 집이 가까워 올수록 부질없는 기대가 가슴 속 어딘가에서 솟아오르는 것을 신주는 눈을 꼭 감고 간신히 눌러 제어했다. 찬영이 그곳에 있을 이유가 없다. 너도 알고 있잖아. “아저씨, 골목 끝 집에서 세워주세요.” “아, 저 대문에 불켜진 집이요?” “네?” 끼익 소리를 내며 택시가 멎었다. 주머니에서 쏟아져 나오는 일본 지폐와 동전을 무심코 건네다 운전기사에게 핀잔을 들었다. 만 원짜리 지폐를 겨우 찾아내 운전기사에게 건넨 뒤 허둥지둥 차에서 내렸다. 환히 켜진 대문의 불빛이 ‘김신주’ 자신의 이름 석자를 또렷하게 비추고 있다. 그럴 리가 없어. 찬영은 아닐 것이다. 큰형이 와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집을 처분하려고 집안 정리를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분명 그럴 것이다. 찬영이 불을 켜두었을 리가 없다. 초인종에 가져갔던 손가락을 물리고 신주는 주머니에서 집 열쇠를 찾아들었다. 달깍, 기름칠을 해두었는지 대문은 경쾌한 소리를 내며 신주에게 제 몸을 활짝 열어주었다. 거실에도 불이 켜져 있는 것이 보인다. 한 걸음 한 걸음 계단을 오르는 신주의 발걸음이 빨라졌다가 다시 느려진다. 더 이상 부질없는 기대는 하지 않기로 결심하지 않았는가. 현관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손잡이를 잡아 돌리자 소리 없이 부드럽게 문이 열린다. 신주가 사 두었던 찬영과 자신의 슬리퍼가 문 아래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구두를 벗어 그 옆에 놓은 뒤 복도를 걸어 천천히 거실로 다가갔다.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창문 쪽으로 흔들의자가 놓여있는 것이 보인다. 누군가의 팔이 의자 팔걸이에 걸쳐져 있는 것이 보인다. 어쩌면, 어쩌면 혹시... 신주는 입술을 깨물었다. 흔들의자까지 일곱 발자국. 그 걸음, 한 걸음 한 걸음을 천국을 걷듯 지옥을 걷듯 걸어간다. 앞으로 한 발자국. 마침내 내딛었을 때 신주의 눈 속으로 흔들의자에 앉아 곤히 잠들어 있는 찬영의 모습이 들어왔다. 이건 꿈일까, 환상일까. 손을 내밀어 만지면 사라질 신기루일까. 신주는 조심조심 손을 내밀어 찬영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매만졌다. 진짜다. 진짜 찬영의 머리칼이다. 진짜 찬영의 얼굴이다. 진짜 찬영의 입술이다. 찬영의 속눈썹이 흔들리더니 다음 순간 까만 눈동자 두개가 깨어나 꿈을 꾸듯 가만히 신주를 응시한다. 자신의 볼을 감싼 신주의 손길이 기분 좋은 듯 살며시 웃어 보이더니 다시 눈을 감는다. “찬영 씨...” 반짝 하고 찬영의 눈이 다시 떠진다. 동그랗게 뜬 눈동자 두 개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깜박이며 신주의 얼굴을 비춘다. “찬영 씨, 잘 있었어요?” 듣고도 믿을 수 없다는 듯 찬영이 손을 들어올려 자신의 볼을 감싼 신주의 손을 더듬거리며 만지기 시작한다. “찬영 씨...” 순간 찬영이 와락 신주의 목을 끌어안았다. 신주의 무게가 더해진 흔들의자가 뒤로 넘어갈 듯 균형을 잃고 흔들리기 시작한다. “위험해요. 찬영 씨. 잠깐만...” 자신을 감싼 찬영의 떨림이 피부 너머로 전해져 온다. 스무날만에 다시 만난 찬영은 너무나 약해져 있어 신주가 세게 움켜쥐면 손가락 사이로 부서져 내릴 것만 같았다. “...김신주... 너 맞아?” “네. 저에요. 찬영 씨.” “너 과일 사러 어디까지 갔었던 거야?” “먼 데까지요...아무거나 사오면 찬영 씨가 화내시니까 좋은 걸 사러 먼 데까지 갔었어요.” “맛없으면 나 화낼 거야.” “네. 화내주세요. 찬영 씨.” “나 많이 화났었어. 너 각오해야 해.” “찬영 씨 너무 보고 싶었어요.” “나는 너 죽이고 싶었어.” “찬영 씨 왜 이렇게 말랐어요. 밥 안 먹었어요?” “너야말로 꼴이 이게 뭐야. 천하의 김신주가 거지가 되어 돌아왔네.” 밉살스럽다는 듯, 사랑스럽다는 듯 찬영이 신주의 얼굴을 매만진다. 입술을 만지고 콧등을 만지고 눈썹을 만지다 이마를 거쳐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넣어 쓸어 내린다. “머리 꼴이 이게 뭐야. 내일이면 애 아버지 될 사람이. 누가 이랬어. 너 머리카락 한올까지 다 내 꺼인 거 몰라?” “작은형이 그만 자기 멋대로...” “너 기껏 도망 간 게 일본이었어?” 다 알고 있다는 듯 찬영이 장난스럽게 웃는다. 어떻게 알았어요? 찬영 씨. 신주가 신기하다는 듯 눈동자를 크게 뜬다. “겨우 2시간 걸리는 일본에 가서 숨어 있었어? 그렇게 가까운데 있으면서 왜 나보러 안 왔어?” “그건...” “형이 말한 금발 양아치가 너를 말하는 건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너였구나. 형이 전화했었어. 웬 금발 양아치 한 마리가 일본에서 날 찾고 있다고.” “아...아까 뵈었던 분. 찬영 씨, 저 찬영 씨 형님 만났어요. 일본에서.” “너 지금 꼴이 얼마나 웃긴 줄 알아? 머리하고 옷하고 완전 딴판이야. 하나도 안 어울려. 너 꼭 내 동생 같다. 열 아홉 살 날라리 같아.” 머쓱해진 신주가 제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어 넘긴다. 자신이 생각해도 금발은 너무했다. 신우 형. 바보. “찬영 씨는 꼭 제 딸 같아요.” 이게 또 맞으려고? 너 나 분 풀릴 때까지 맞으려면 오백 살까지 살아야해. 그거 알아? 찬영이 찰싹 아프지 않게 신주의 뺨을 때린다. 그 벌 다 받을게요. 그러니까 찬영 씨도 오백 살까지 사셔야 해요. 아셨죠? 신주가 다시 찬영을 품에 안는다. “보고 싶었어요. 찬영 씨.” 나는 너 죽이고 싶었다니까. 찬영이 입을 삐죽이며 아프지 않게 살짝 신주의 볼을 꼬집는다. “사랑해요. 찬영 씨.” 전신에 스르륵 힘이 빠졌다. 눈꺼풀이 찬영의 의지를 무시하고 자꾸 감긴다. 저 녀석 더 혼내줘야 하는데...자꾸 힘이 빠져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가 없다. “찬영 씨!” 흐려지는 의식 사이로 놀라 소리지르는 신주의 모습이 보였다. 신주가 찬영의 이름을 안타깝게 소리쳐 부르고 있다. 괜찮아. 네가 있으니까. 괜찮아. 이제 잠들어도 좋아요. 누군가가 귓가에서 속삭였다. 배 안에서 누군가 똑똑하고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제 12 편 < 행복한 맛 > 수술실의 불빛은 다섯시간이 지나도록 꺼지지 않았다. 너무 세게 주먹을 쥐어 손바닥을 파고 들어간 손톱이 피를 나게 하는 줄도 모르고 신주는 그렇게 긴 시간동안을 간절히 찬영과 아기가 무사하기만을 바라며 선 채로 기도하고 있었다. 손가락 사이를 타고 흘러내리는 핏방울을 보다 못한 지환이 간호사에게 붕대와 소독약을 빌려와 신주의 손을 소독하고 붕대로 감아놓는다. “선배는 괜찮을 겁니다. 강한 사람이니까.” 자신의 말도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지환에게 손을 맡긴 채로 고개는 돌려 연신 수술실 쪽만을 바라본다. 선배는 내내 이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과 석진이 가져다 준 음식을 찬영이 자신들 앞에서만 맛있게 먹는 척을 했다는 사실을 어젯밤 병원에 도착하고서야 신규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몸무게가 늘었어야 정상인 임산부가 오히려 체중이 줄어들었다니 보통 일이 아니다. 아기와 아기집 무게만 어림잡아도 4키로는 넘을 텐데 아기의 저 체중 가능성까지 의심되고 있는 상황이다. 골반이 좁은 남자의 신체구조상 아기를 만삭까지 담아두는 것은 애초에 무리였다고는 해도 자신이 아니었다면 찬영은 지금보다 양호한 건강상태로, 더욱 안정된 환경에서 아기를 낳을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잘못이다. 곁에 선 남자의 까칠한 얼굴, 한숨 섞인 숨소리까지도 자신의 잘못이었다. 사정을 몰랐다고는 하지만 자신이 찬영과 신주에게 저지른 잘못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월권이었다. 자신이 내뱉었던 가시 같은 말들이 환청처럼 돌아온다. 치졸한 질투였다. 화풀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 사이에서 가장 비겁했던 이는 바로 자신이었다. 선배 나 지환이야. 선배는 늘 그랬듯이 강한 모습으로 얄밉도록 당당했던 그 모습 그대로 우리에게 돌아와야만 해. 지환은 철든 이후로 찾지 않았던 신을 다시 찾았다. 십 년 만에 재개한 기도는 두서 없고 서툴러서 신께 무사히 가 닿을 수 있을지 지환도 알 수 없었다. 지방 촬영을 하던 중에 연락을 받고 올라온 석진이 통제구역 팻말이 붙여진 문을 열고 들어왔다. 실제로 수술에 참가한 두 명의 의사와 신규, 베테랑 간호사를 제외하고는 찬영의 상태를 비밀로 부쳤기에 외부에는 복막염 환자의 개복 수술이 한창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규의 미국 유학 시절 지도교수였던 닥터 글렌이 자신의 조수를 데리고 귀국해 집도를 맡았다. 신규에게서 자세한 사정을 들은 그는 이미 일주일 전 입국해 대기 중이었다. 갈수록 나빠지는 찬영의 상태에 하루라도 빨리 수술을 해야한다고 권했던 것도 그다. “찬영이는 아직 저 안에 있니?” “네. 벌써 다섯시간 째에요.” 아기가 자리잡은 복강(腹腔)은 간, 지라, 이자, 신장 등의 기관이 소화관과 함께 자리잡고 있어 보다 세심한 절제술을 필요로 한다. 아기와 찬영의 건강상태를 고려하면서 천천히 진행하는 수술이라 일반 제왕절개 수술의 배가 넘는 시간이 소요되고 있었다. 지환이 강제로 의자에 끌어다 앉힌 신주가 굳은 표정으로 수술실을 응시하고 있었다. 석진이 눈짓을 하자 지환이 슬쩍 자리에서 물러난다. 일어선 지환이 커피를 뽑아오겠다며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석진이 가방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신주에게 내밀었다. 이것이 무엇이냐며 물어오는 신주의 눈빛에 석진이 가만히 웃으며 봉투를 열어 보라 손짓한다. 봉투 속에는 인화된 사진이 스무 장 남짓 들어있었다. “이건...” “진작 드렸어야 했는데 기회를 놓쳐서 이제야 드리게 되었네요. 뵙게 되면 드리려고 지난 가을서부터 가지고 다녔었어요.” 지난 여름 함께 갔던 홍대에서 찬영이 찍었던 사진들이었다. 사진 연습을 한다며 신주를 향해 마구 셔터를 눌러대던 그 날의 찬영의 모습이 떠오른다. 언제 이 많은 걸 찍었나 싶을 정도로 다양한 신주의 모습이 사진 속에 담겨있다. “이런 말이 있어요. ‘멋진 사진을 찍고 싶다면 우선 피사체와 사랑에 빠져라.’ 카메라는 사실 기계에 불과하지만 그 기계를 조작하는 것은 사람이기에 사진 찍는 사람의 감정이 고스란히 투영되기 마련이거든요. 알고 보면 명작이라 불리는 이 세상 유명한 예술 작품들은 대개 연인에게 바치는 세레나데에서 시작된 경우가 많았어요. 사랑은 테크닉을 넘어선 테크닉인 셈이죠. 찬영이가 찍었던 사진 중에 가장 잘된 것들이 그 안에 들어있어요. 공교롭게도 그게 다 신주 씨를 찍은 사진들이더라구요. 그래서 알았어요. 찬영이의 마음이 신주 씨에게 가고 있구나. 겉으론 아닌 척해도 저 녀석 신주 씨를 꽤 마음에 들어하고 있구나. 좋아하고 있구나. 하지만 인정하기 싫었습니다. 내가 그토록 노력해도 얻어낼 수 없었던 찬영이의 마음이 만난지도 얼마 안된 신주 씨에게로 기우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찬영이에게도 사진을 주지 않고 버텼습니다. 필름에 빛이 들어가서 다 망쳤다고 거짓을 말했어요. 그 날처럼 또 거짓말을 했던 거죠. 그 날 했던 말들은 모두 거짓이었습니다. 제가 찬영이를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나 우리는 여전히 친구입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친구로 남을 거에요. 지금 찬영이의 마음 속에 누가 있는지는 신주 씨가 가장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가장 마지막 사진은 행인에게 부탁해 찍었던 신주와 찬영의 투 샷이었다. 그 여름날의 찬영이 신주와 어깨를 맞대고 활짝 웃고 있다. 말없이 사진 속의 찬영을 쓰다듬는 신주를 석진이 오랜 친구처럼 따스한 눈길로 바라본다. 수술실 쪽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 태어난 아기는 1.5kg의 남자아이였다. 31주차의 다른 아기들 체중과 비교할 때 체중은 비교적 정상이나 출산 예정일을 두 달이나 앞서 세상에 나왔기에 한 달은 인큐베이터에서 지내야 할 것이라고 신규는 말했다. 폐의 성숙이 덜 되어 있어 산소호흡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기는 곧바로 대학병원내의 신생아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면회가 자유롭지 못한 곳이라 면회 시간에 맞추어 인큐베이터 너머로 아기를 바라보는 것만이 신주에게 허락될 뿐이었다. 회복실로 옮겨진 찬영은 만 하루가 지나도록 의식을 회복하지 않아 신주를 안타깝게 만들었다. 호흡을 기계에 의존한 채 잠들어 있는 찬영을 지켜보는 일은 신주에게 있어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식사도 거른 채로 앉아있는 신주를 신규가 다그쳐 지하 식당으로 내려보냈다. 신주가 잠시 자리를 비운 새에 의식을 회복했던 찬영은 약에 취해 몇 번 눈동자만 깜박이다 다시 잠이 들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신주가 회복실에 도착했을 때는 찬영은 이미 일반병실로 옮겨져 고른 숨을 내쉬며 잠이 들어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제대로 몇 마디 나눠보지도 못하고 내내 그의 잠든 모습만을 지켜봐야 하는 신주가 손을 뻗어 잠든 연인의 얼굴을 안타깝게 쓰다듬는다. “찬영 씨... 저는 완벽한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어렸을 때부터요. 부모님에게나 형들에게나 선생님 앞에서나 친구들 앞에서나 직원들 앞에서도, 그리고 찬영 씨 앞에서까지 완벽한 사람으로 있고 싶었어요.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해왔죠. 그런데 그러는 사이에 착각에 빠지고 말았나 봐요. 완벽에 가까운 사람이 되었다고 스스로를 부풀려서 생각해 왔던 거에요. 찬영 씨 앞에선 더더욱 완벽한 사람으로 있고 싶었어요. 찬영 씨에게는 완벽한 연인이 되고 아기에게는 완벽한 아빠가 되어주고 싶었어요. 하지만... 사실 전 아무것도 아니었던 거에요. 완벽은커녕 실격에 가까운 인간이죠. 이렇게 힘든 찬영씨를 놔두고 그저 자신이 상처받을까 그게 두려워서 도망친 천하의 겁쟁이였어요. 저는 찬영 씨 곁에 있을 자격이 못 되는 사람입니다......그래도 찬영 씨와 함께 있고 싶어서... 참 이기적이죠? 저란 놈 이렇게 엉망진창이란 거 저도 처음 알았어요.” “아...진짜. 너 때문에 못 살겠다.” “찬영 씨?” 어느새 깨어난 찬영이 신주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고생고생해서 애 낳고 깨어나자마자 들어야 하는 게 삽질이냐?” “죄송합니다. 찬영 씨.” “갑자기 웬 완벽타령이야. 내가 언제 완벽한 놈 되어 달라고 했어?” “죄송합니다.” “나 완벽한 놈 싫다. 재수 없어. 너 처음에 틈새 하나 없이 너무 잘나서 내가 싫어했던 거 몰라?” “......” “아기 일로 찾아갔을 때도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게 굴던 놈이...언제더라...너 운동복 입고 뛰어왔던 날이었던가? 그때부터 살짝 귀여워 보이더라. 지하철에서 거절도 못하고 온갖 것 다 받아들고 얼빵하게 서 있던 것도 좋았고...언제부터인가 네 그런 자잘한 부분들이 내 맘으로 들어와서 자리잡고 살기 시작했어. 한번 들어오고 나니까 안 나가더라? 거참...” “......” “바보 같은 놈, 돌아올 거면 도망가지를 말던가. 도망갔으면 돌아오지를 말던가. 너는 이제 기회 없어. 마지막 기회를 잃은 거야.” “예?” “내가 너를 갖겠다고 결심했으니 너는 이제 화장실도 내 허락 맡고 가야 해. 내 허락 없이는 숨도 쉬지 마. 무조건 네가 양보해야 해. 무조건 나 받아주고 내가 하라는 대로 해야 해. 나랑 같이 평생 살아줘야 해. 나는...너 때문에 무서워졌으니까. 처음으로 세상이 무서워졌으니까. 혼자 자는 밤이 무섭다는 거, 혼자 먹는 밥이 맛없다는 거, 그런 거 처음 알았으니까. 곁에 있던 녀석 하나 없어졌다고 이렇게 흔들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거 나도 처음 알았어. 내 눈이 자꾸 널 그리고 심장이 너를 원하고 또 원해서 내 말을 하나도 안 듣더라. 너 때문에 나는 고장이 났어. 네가 책임져야 해.” “책임질게요. 찬영 씨. 평생...다음 세상에서도.” “이 세상에서나 잘해. 내가 얼마나 못됐는데 다음 세상에서까지 떠맡으려고 해?” “다음 세상에서도 또 만나고 싶어요. 찬영 씨랑.” “......나도.” 이제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때의 너처럼. “사랑해. 신주야.” 얼마나 듣고 싶던 말이었던가. 남몰래 소망하던 그 말 한마디를 기어코 받아낸 신주가 어린 아이처럼 어깨를 떨며 흐느껴 운다. 언제나 다 큰 어른인 척 하더니 사실은 아기였다, 이 녀석. 큰아들, 작은아들, 이렇게 두 아들을 키워야 할 것 같다. 에구. 내 팔자야. 찬영이 혀를 차며 신주의 눈물을 닦아준다. 울지 마라. 이놈아. 네가 우니까 내 마음이 또 아프잖냐. “우리 애기 봤어?” “네...아주 예뻐요. 찬영 씨.” “아들이라며?” “네. 찬영 씨 많이 닮았어요.” 의식이 돌아왔던 일순간. 눈앞에 있던 신규가 아들이라고, 아주 건강하다고 소리지르고 있었다. 거봐, 내 예상이 맞잖아. 웃으려는데 자꾸 졸음이 와서 다시 눈을 감았었다. “눈도 똘망똘망하고 갓난아기인데도 이목구비가 뚜렷하다고 간호사들이 예쁘다고 난리에요." “누가 낳았는데. 당연한 거 아니야?” “한달 정도 인큐베이터에서 더 크고 나와야 한 대요. 원래 막달에 쑥쑥 크는 거라서 한달 후엔 몰라보게 자라있을 거라고 하더라구요. 찬영 씨 몸이 회복되면 함께 보러가요.” “한 달을 어떻게 기다려? 좀 속성으로 자라서 걸어서 여기까지 오라고 해. 내가 저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지금도 얼마나 아픈지 알아?” “네. 그러라고 할게요.” 뭘 그러라고 할게요냐. 찬영이 의식을 회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지환과 석진이 문가에 서서 신주와 찬영의 닭살행각을 들으며 진저리를 치고 있다. 선배, 선배 무사히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이 났었는데 그 눈물 도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찬영 씨.” “왜?” 감싸쥔 찬영의 손에 연신 입맞춤을 하던 신주가 다시 말을 꺼낸다. “화장실 다녀와도 되요?” 가지 마! 찬영이 빽 소리를 지르며 베개를 집어던진다. 그걸 머리에 맞고도 뭐가 그리 좋은지 신주의 얼굴엔 웃음이 가득하다. “내가 진짜 말을 안 하려고 했는데 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감히 니가 내 손을 뿌리치고 도망을 가? 그것도 다른 나라로? 너 내가 인터폴에 국제 수배하려고 했어. 그거 알아? 어떻게 전화 한 통을 안 할 수가 있어? 어떻게 니가 날 그렇게 기다리게 만들 수 있어?” 분하고 분하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어떻게 스무날을 자신을 안 보고 살 수 있는가. 신주가 돌아오면 앙갚음으로 그 날짜에 두 배를 더해서 가출을 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던 찬영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자신 역시 신주를 하루라도 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 같다. 젠장 분하다. 이렇게 된 거 몰래 카메라라도 설치해놓고 뒷집으로 가출을 해야겠다. “미안해요. 찬영 씨. 더 때려주세요. 찬영 씨 화가 풀릴 때까지 맞을게요.” 이제는 SM(사디즘/마조히즘)커플로 거듭났는가. 인사고 뭐고 이 커플 곁에는 얼씬도 하지 말아야지 결심하는 지환이다. 속없는 석진만 그 모습을 바라보며 껄껄 웃고 서 있다. ********** 3개월 후. 어떠냐? 예쁘지? 지환과 정우, 인우를 앞에 두고 찬영은 아기 자랑에 한창이다. 처음엔 찬영이 형이 어딜 가서 애를 낳아 가지고 왔다고 배신감에 땅바닥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렸던 인우도 이제는 아기에게 홀딱 반해 2대째 이어지는 조가 팬클럽 활동에 여념이 없다. “너무 귀여워! 저 하품하는 것 좀 봐!” “찬영 형 얘 말도 할 줄 알아요?” “저번에 한 마디 했어. 얘 천재거든.” “태어난 지 백일 밖에 안되었는데 벌써 말을 해요?” 선배 그건 ‘옹알이’하는 겁니다. 아무리 콩깍지가 씌웠다고는 해도 말은 바로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김신주 씨가 그 말도 안 되는 천재교육 15년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걸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공포스럽다구요. “지환아, 얘가 너 째려보는 것 같은데?” “설마. 낯가리는 걸 거야. 지환이 쟤가 좀 인상 사납게 생겼잖냐. 아기 놀라니까 고개 돌리고 있어라. 응?” 저 아가는 다른 건 몰라도 시니컬한 표정 하나 짓는 것만큼은 천재인 듯도 싶다. 노려보는 걸로도 모자라 가끔은 피식 웃으며 한쪽 입 꼬리를 올리기까지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방긋방긋 잘도 웃어주면서 왜 나한테만 그런 심란한 표정을 보여주는 것이란 말이냐. 너 임마. 내가 너 먹이려고 밤새 야식 사다 나르던 그 기억을 벌써 잊었던 말이야? 고작 3달 전의 일이잖냐. 기억해 내. “아아아아! 너무 귀여워!” “인우야, 살살 안아. ‘우리 주’ 놀란다.” “주영아, 사랑해! 네가 여자였으면 이 형 너 다 클 때까지 수절했을 거야.” 헛된 게이의 맹세로다. 남자라서 오히려 더 다행인 것 아닌가? 정우와 인우의 난리부르스를 바라보며 지환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조주영. 얼핏 들으면 여자아이 같기도 하고 2005년 최고의 축구신동 박주영이 떠올려지기도 하는 저 이름은 서로 아기 이름을 ‘영’과 ‘주’로 짓겠다고 싸운 어느 닭살부부의 양보 없는 한판 승부의 결과였다. ‘주영’으로 아기 이름을 짓고도 지금도 서로 ‘주’와 ‘영’으로 부르며 영양가 없는 사랑싸움을 계속 하고 있다. “박주영 팬 인줄 알 거에요. 선배. 올해 태어난 남자아이들 중에 저 이름 갖고 있는 아기들 많을 텐데.” “시끄러워. 이름짓는데 하등 도움도 안 준 네가 할 소리냐?” 그럼 어떻게 합니까. ‘조’씨로는 아무리 해도 예쁜 이름이 안 나오던걸요. 뭘 붙여도 이상했어요. “조무럭도 괜찮았는데...무럭무럭 잘 클 거 같잖아?” “조무럭, 조물럭... 주물럭 생각나서 안 돼. 왕따의 화신 같은 이름이다.” 오리국과 조물럭. 고깃집 형제 같은 이름이다. 다소 평범하더라도 ‘주영’이가 좋아. 의미가 담겨 있으니까. ‘무럭’이라는 이름을 붙이지는 않았어도 아기는 무럭무럭 자라 어느새 5kg의 몸무게를 자랑하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커 가는 모습에 일상의 모든 것들이 감동으로 다가온다. 아기로 인해 힘들고 외로웠던 일, 찬영은 모두 잊었다. “영아!” 차고 문 열리는 소리가 나기 무섭게 신주가 아기 이름을 부르며 집안으로 뛰어들어왔다. 신주의 손에 들려진 ‘꼬마 박사 미니 실험실’ 종이박스에 찬영의 시선이 머문다. “허구헌날 뭘 그렇게 사 갖고 들어오는 거야! 그건 또 얼마짜리야?” “찬영 씨. 앞으로의 대세는 과학계라니까요?” “과학계든 인문계든 미리 사놓는 것보다 그때 가서 최신품으로 사는 게 훨씬 낫다니까. 더 이상 쌓아둘 데도 없다. 임마.” 기가 죽은 신주는 아랑곳 않고 인우와 정수가 자기들 맘대로 상자를 가져가 뜯어보며 쑥덕거리기 시작한다. “엇. 이거 나 어릴 때 갖고 놀던 건데. 포장만 바뀌고 똑같네? 그때는 3천원이었어.” “5만원? 헉 되게 비싸다. 우리 조카도 비슷한 거 갖고 있던데 그건 2만원짜리더라구.” “어쩜. 이러니까 우리나라 과학계가 이 모양인거야.” “수학계도 만만치 않아. 나 수학의 정석 연필 자국 하나 없이 깨끗한데 그거 그대로 놔뒀다가 주영이 줄까?” “교육과정이 자꾸 바뀌어서 그건 힘들지 않을까?” “괜찮지 않나? 기본은 똑같잖아. 모르긴 몰라도 홍성대 그 아저씨 재벌 되었을 거다. 맨투맨 종합 영어, 그 아저씨도.” 니들 다 집에 가. 얼른! 찬영이 골을 내며 인우와 정수, 지환을 내쫓는다. 저녁도 안 주고 내쫓다니 찬영이 형 너무해요~ 커플 아닌 사람 어디 서러워서 살겠습니까. 정수야. 우리도 커플이야. 아아악. 한인우, 강지환 니들 그 손놓지 못해? 매일 툭탁거리더니 언제 그런 사이가 되었는지 지환이 인우의 어깨를 감싸며 정수의 약을 올린다. 커플 지옥! 솔로 천국! 절규하는 정수의 음성이 점차 멀어진다. 주영과 까꿍 놀이를 하며 은근슬쩍 찬영의 눈치를 살피던 신주가 슬며시 찬영의 곁에 다가와 앉는다. 수술 후 몸이 완전히 회복되기까지는 적어도 6개월이 걸린다. 몸조리를 하느라 3개월 내내 집안에서만 있었던 찬영은 며칠 전 새로 창간된 요리잡지의 에디터 자리를 제의 받고 고민 중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자신의 일이니 참견하지 말라고 했을 찬영이 진지하게 신주의 의사를 물어왔다. “찬영 씨가 하시고 싶으시면 하세요. 제가 힘닿는 데까지 도와드릴게요.” 마음 같아서는 1년 정도 푹 쉬며 아무 일도 하지 말라 하고 싶지만 찬영의 직업 또한 찬영 만큼이나 존중받아야할 일이었다. “프리가 아니라 아예 기자로 소속되어 일 하는 건 시간적으로도 제약이 많을 것 같아서. 주영이가 클 때까진 아무래도 무리겠지?” “찬영 씨가 하시고 싶으시면 제가 가게 일을 줄이고 집에 있을게요. 보고는 집에서 받아도 되니까. 유능한 매니저를 둔다면 못할 것도 없어요.” “아니야. 이번만 기회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한군데 소속되어 일하는 것보단 지금처럼 프리로 뛰는 게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어서 적성에 맞기도 하고...” 서로가 서로를 배려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한 부분을 양보하는 것.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일정을 조정하는 것.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참견은 더 이상 참견이 아닌 배려가 된다는 것을 찬영은 깨닫게 되었다. 찬영의 눈 속에 가득 담긴 자신의 모습이 보인다. 겉으로 골을 내고 가끔 퉁명스럽게 굴어도 찬영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신주는 이제 찬영이 말하지 않아도 안다. 완벽하지 않아도 좋아. 어린 시절부터 가졌던 강박을 신주는 찬영으로 인해 깰 수 있었다. 나는 불완전한 김신주 네 자체로 좋으니까 너도 불완전한 날 온전히 받아주었으면 좋겠어. 그렇게 서로를 배려한다. 믿는다. 사랑한다. 살아간다. 앞으로 남은 수많은 날들이 함께여서 더욱 행복하다. 두렵지 않다. 창 밖으로 눈이 내린다. 정원 가득 소복하게 내려 쌓이는 눈을 함께 지켜보았다. 곧 구정 설이 다가온다. 그 날이 오면 세 사람이 함께 찬영의 부모님을 만나러 가기로 약속했다. 두 사람, 아니 세 사람이 함께 지내는 계절이 눈처럼 쌓여간다. 신주의 품안에 안긴 주영이 두 손을 버둥거리며 기쁘다는 듯 찬영을 향해 소리내어 웃는다. “나 배고파.” 찬영이 신주를 바라보며 웃었다. 신주 역시 미소지으며 마주 앉은 찬영을 바라본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의 입술이 겹쳐졌다. 그렇게 눈을 감고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 달콤한 키스를 나누었다. - END - ***** [외전] 지미(至味)한 관계 눈이 올랑가? 매캐하게 구름이 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매향은 펄펄 소리를 내며 끓고 있는 국솥에 잘 마른 시래기를 한웅큼 털어 넣었다. 끊는 물에 들어가자마자 호르륵 퍼지는 시래기 향내가 코끝까지 얼큰히 올라온다. 옳지 이만하면 되얏다. 매향은 부지깽이를 집어들어 아궁이 밑 장작을 고루 뒤섞는다. 발갛게 달아올라 톡하고 부러지는 소나무 장작 소리가 곰살맞게 매향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꽃피고 새우는 삼짇날 지나고 창포물에 삼단겉헌 머리 감던 단옷날 지나고 님과 함께 목간하던 저 강물처럼 시푸런 그 여름날 지나고 능금같이 여물던 가을날 지내갔으니 소나무 삭정이맨쿠로 비틀어진 이내 몸만 남았구나. 날씨가 더 궂어지기 전에 곳간 가득 땔나무라도 채워줄 사내 하나 있었으문. 소싯적 날리던 평양기생 출신이었으나 몸쓸 놈에게 몸과 마음을 다 바치어 나이 쉰이 다가오는 지금, 쫓겨나 겨우 장터 구석에 주막 하나를 열어 근근히 연명해 나가고 있는 매향이었다. “매향아, 부르는 소리 안 들리어? 내 아까부터 국밥 한 그릇 달라고 목 터지게 불렀건만 무에 정신을 팔아서 연즉 소식이 없는겨. 지금 내를 장돌뱅이 인생이라고 무시하는겨?” 장이 열리는 날마다 매향의 주막에 단골처럼 들르는 소금장수 사내 최가다. 벌이가 좋으면 내 그깟 연지분 하나 못 사줄까. 말만 뻔지르르 해놓고 그 흔한 참빗하나 사주는 꼴을 못 보았다. 오늘도 날이 궂은 통에 파리만 날렸다고 지레 엄살을 피워 쌓는다. 그 본새가 얄미워 매향은 듣고도 못 들은 척 저 홀로 잘 타고 있는 아궁이 장작만 들쑤시었다. “내 말 안 들리어? 망둥이가 뛰니까 어물전 꼴뚜기까지 뛴다고 매향이 지금 너까지 날 무시하는겨?” 매향아, 매향아, 주모......주모...주모. 왜 그리 불러 쌓소. 그깟 국밥 내 찬거리 손질 마치고 떠준다 안 하요. 방금 넣은 시래기 채 풀리지도 않았겄소. 국밥 갖다주면 뭐하요. 이 내 손에 떨어지는 건 웬수처럼 징글징글한 외상값 장부밖에 없다 안 하요. “그리 바쁘면 내 다른 곳으로 가리다. 이 근방 다른 주막이 예 또 어디 있소?” 어매, 남새스러워라. 여태 최가 혼자 부르는 줄로만 알고 무시를 해댔던 매향의 볼이 금세 발그스름해진다. “아,아니어라. 안 바쁘요. 여기 앉아 게시소. 내 금방 손질 마치고 상 채려 올릴텐게.” “그럼 염치 불구하고 부탁하리다. 내 탁주 한 사발과 국밥 한 그릇 말아주시오.” 알았어라. 워쩜 저렇게 풍신 좋은 사내가 다 있을꼬. 인물도 훤칠한 것이 꼭 춘향전 속 이 도령이 걸어나온 것 같구먼. 쉰이 다된 지금에도 인물 좋은 사내를 보면 절로 가슴이 두근거리는 매향이었다. 소박한 차림에 미투리를 신었건만 흐르는 분위기로 보아 예사 사내는 아닌 듯 보인다. 말씨를 보아하니 한성에서 온 모양인데 뭣을 할라꼬 이 먼 곳까지 오시었을꼬. 주책 맞은 호기심이 동한 매향은 소반에 국그릇을 올리면서도 연신 마당 평상에 앉아있는 사내를 훔쳐보았다. “이리 날씨가 추분데 어디서 오시었소? 내 소금쟁수 최가라고 하요. 고향은 청주요. 내 머리빡에 피 마르면서부터 워낙이 이곳 저곳 돌아 댕기며 소금 팔러 댕기싸서 집에 붙어있는 날이 거의 없고마 그래도 머 내 본가는 청주요. 임자는 어디서 오시었소?” 오지랖넓은 최가가 어느새 붙어 앉아 사내에게 말을 시키고 있다. 손님도 적은 주막에 혼자 붙어있기 적적했던 모양이다. “한양에서 온 김가라고 합니다.” 한성 사람이고마이. 그 먼데서 여그까진 무삼 일로 오시었소? 사람을 좀 찾으려고요. 사람? 누기요? 혹 이 근방에 곽가라고 하는 유과 잘 빚는 노인이 살고 있지 않습니까? 아, 곽씨 할배를 찾는가? 그 할배 진즉 밀양 사는 딸네로 옮긴지 오래요. 마누라 죽고 이자 더 이상 엿 골 맴도 안 난다 카더만 밀양으로 시집간 작은 딸네가 홀랑 모시고 가뿌렀소. 그 양반 찾기 힘들거고만. 그렇습니까...... 최가의 대답에 사내는 어지간히 실망한 눈치다. 피곤이 몰려오는 듯 손을 들어올려 양 눈두덩이를 꾹꾹 누르고 있다. 그 안쓰러운 모습에 매향은 저도 모르게 밥 한 주걱을 더 퍼 올려 고봉으로 수북하게 담아 놓는다. 이기 뭐시여. 지금 사람 차별하는가. 억울한 듯 내지르는 최가의 목소리 따위 귓등으로도 들리지 않는다. 어느 년은 서방 복이 좋아서 저런 옥 깎아놓은 듯한 사내랑 살고 어느 년은 서방 복은커녕 장시 운도 없어서 요로코롬 하루 벌어 입에 풀칠이나 겨우 하매 살고. 매향의 푸념에 동조하는 양, 삽살개가 제 꼬리를 쫓으며 죽어라고 짖어댄다. 언 땅 위로 사락, 올해의 첫눈이 색시처럼 참하게 내려앉는다. 물어 물어 예까지 찾아왔거늘 밀양으로 이사했다니. 눈앞이 캄캄해지는 신주다. 남의 눈에 띄지 않게 평복으로 위장하고 있지만 신주는 본래 대대로 이름난 학자를 배출하기로 유명한 명문가의 셋째 아들로 일찍이 과거에 급제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홀로 문장을 읽으며 지내오고 있었다. 그랬던 그가 이리 변복을 하고 먼 시골 장터에까지 찾아오게 된 사연은 다음과 같다. 넉 달 전 한성. “그 소식 들으시었소? 경빈조씨가 또 회임을 하였다 하오. 지난해 줄줄이 왕자를 낳은 데 이어 또 회임이라니 만약 이번에도 또 왕자를 생산한다면 현 세자의 처지는 바람 앞의 등불이 되고 말 것이오.” “또 회임이라니. 안 그래도 전하의 총애가 경빈과 그 왕자들에게 집중되어 있거늘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이요.” “날로 기세등등해가는 조 대감의 얼굴을 어찌 보란 말이요. 내 그 얼굴을 이곳에서 계속 보느니 낙향하여 인재 훈육에 남은 생을 바치리다.” “어린 시절 외척의 전횡으로 그리 고생을 하셨음에도 어찌 모르신단 말인가. 전하의 발길 닿는 곳에 이 나라 종묘 사직의 운명이 달려 있거늘. 이를 어찌하면 좋소.” “최 대감, 소문에 듣자하니 그대의 여식이 매우 외모가 출중하다 하던데 어떻소? 이참에 후궁으로 들여보내 경빈을 대항케 하는 건?” “이미 신 대감의 여식이 궁으로 들어가 독수공방한지 벌써 3년이오. 자색이 뛰어나다 칭송이 자자해 기대를 했건만 괜히 엄한 신 대감의 여식만 눈물 흘리게 하지 않았소.” “경빈 조씨 하나의 미모가 열 후궁 안 부럽다 하니 어쩔 수가 없지 않소.” “이러다 정녕 세자를 폐하게 되는 것은 아니오?” “막아야지요. 암 막아야지요. 이 내 목숨 바스러지는 한이 있어도 막을 것이외다.” 신주의 가슴도 끓어올랐다. 외척이라니. 그 끔찍한 외척의 역사가 다시 시작되는가. 임금의 총애를 등에 업고 무소 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경빈과 그의 아비, 조 대감의 횡포가 도를 지나쳐 정비 소생인 세자의 안위마저 위협해 오고 있는 수준이었다. 정계에 관심 있는 젊은 선비들은 날이면 날마다 삼삼오오 모여 앉아 구 실세인 이 대감과 현 실세인 조 대감 어느 줄에 서는 것이 앞으로의 출세에 유리한가 헤아리며 눈치를 보기 일쑤였고 발빠른 몇몇 중신들은 조 대감의 비위를 거스를세라 이 말도 옳다, 저 말씀도 옳다, 아부하기에 바빴다. 나라가 어찌 되려고 이러는가. 대대손손 우국충정, 김가의 셋째 아들 신주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연신 술을 들이킨다. “그만 하시게. 벌써 몇 병째인지 아시는가. 자네 심정은 잘 알고 있다만 그러다 몸 상하면 나라를 위하고 싶어도 더 위할 수가 없게 되네.” 죽마고우 규의 만류였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신주와 달리 길고 가늘게 사는 것이 인생 최대 목표인 규는 일찌감치 장가를 들어 슬하에 자식을 여럿 두고 있다. “나라가 나를 취하게 하네. 나라가 나를 취하게 해. 세상이 이리 돌아가는데 내 어찌 취하지 않고 배길 수 있단 말인가.” 학의 목처럼 길쭉한 병을 한 손에 잡고 흔들리는 손으로 술을 따르던 신주의 손이 공중에서 멈춰 선다. “...술이 다 떨어졌군. 이보게! 여기 술 한 병 더 가져다 주게. 안주도 더 채워주고.” 대답이 없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가야금 소리와 은 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듯한 여인들의 웃음소리만이 창호지문 찢어진 틈새를 타고 들어와 귓가를 간지럽힐뿐. 외친 지 한참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자 분노한 신주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술 달라니까! 뭣들 하고 있는 게야! 게 아무도 없느냐! ” 문까지 홱 밀어젖히고 고래 소리를 지른다. 가야금 소리가 끊기고 귓전을 살랑살랑 간질이던 여인들의 웃음소리도 멎었다. 이 켠 저 켠에서 곱게 분을 바른 여인들이 장지문을 열고 빼꼼히 이쪽을 쳐다본다. “우리는 손이 아니야? 이런, 이제 보니 애향이, 월영이, 도화 죄다 거기 가 있었군그랴. 이 김신주가 왔는데 코빼기도 안 비치다니 이럴 수가 있는가.” 에구머니, 눈을 마주친 월영이, 도화가 황급히 눈길을 피한다. 신주를 서방님으로 모시겠다던 애향 역시 고개를 떨구고 도망치듯 자리를 피한다. 잠시 후 여인네들에 감싸여 있던 한 사내가 천천히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거 원 시끄러워서 즐길 수가 있어야지. 술 처먹었으면 곱게 집으로 가 잠이나 처잘 일이지. 어디서 배워먹은 짓거리요?” 이런. 하필이면 그 조 대감집 막내자제 조찬영이다. 조정에서 끗발 날리고 있는 제 아비와 형 찬우와 달리 벼슬에는 영 관심이 없어 기생놀음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다고 하는 그 조찬영 말이다. “오라, 누군가 했더니. 기생오라비가 제집을 찾아 와 있었군 그래. 큰 누이는 궁에 보내놓고 작은 누이는 이곳에 보내놓았나 보지?” 이보게, 말을 조심하게. 조 대감집 막내아들 조찬영일세. 비록 지금은 한량이지만 어릴 적인 신동소리를 들었던 인재라하더군. 애꿎은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염려가 된 규가 신주를 만류한다. 일전 들은 바 있다. 경빈의 미모를 빼 닮아 미색이 자자한 사내로 마음에 들면 남녀를 가리지 않고 품는다 하던. “뭬라?” 술이 확 깨는 모양이다. 세상사 관심 없다는 듯 느물거리던 찬영의 입가에서 웃음이 사라지고 눈에 찬기가 서린다. “아니면 예서 손님시중 들고 있었던 겐가? 과연 듣던 대로 월영이, 애향이를 능가하는 자색이로세. 이리 건너 오시오. 내게도 술 한잔 따르지 않겠는가. 천하의 주상전하도 감탄하시었다는 경빈의 치마폭 대신 내 오늘은 그대의 옷자락에 취할까 하네만.”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치 챈 기생들이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기 시작한다. 노려보고만 있는 두 사내 사이에 낀 규만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주춤거리고 있었다. “왜 맘이 동하지 않소? 내가 혹 거렁뱅이일까 그것이 저어되는 게요? 걱정 놓으시게. 논 팔고 소 팔고 집 팔아 꽃값은 넉넉히 치르리다.” 대답 않고 서 있는 찬영의 태도가 더 화를 돋구었던 듯 신주의 비아냥이 더욱 강도를 높여간다. “혹시 아오? 내 이일을 계기로 빈 마마의 매제가 될지? 그러면 주상전하와 동서 사이가 되는 게 아니오. 내 이렇게 엮여 그 더럽다는 출세 한번 해보리다.” 어느 안전이라고 떠들어대드냐, 그 주둥아리 닥치지 못할까, 이리 나오지 않는 찬영이 규는 더욱 두려웠다. 그 후로도 계속된 침묵 끝에 심약한 규가 자진을 일으키기 직전 노려보고만 있던 찬영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유화야, 가서 술 한 병 더 갖고 오니라. 오늘 길에 새 안주상도 봐 오면 더욱 좋고.” 극도로 화가 난 나머지 저 오만 방자한 녀석을 몸으로 죽여버려야겠다, 그렇게 결심한 찬영이었다. 그러더니 사시나무 떨 듯 떨고있는 규에게 다가와 말을 건다. “당신은 이만 자리를 비켜주지 않겠소. 내 저분하고 긴긴 밤을 보내야 할 것 같소만.” 암요, 그러문입죠. 그러셔야죠. 찬영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규는 줄행랑을 친다. “분명 그대 입으로 값을 치르겠다, 정녕 그리 말씀하시었소.” “그..그렇소. 대장부 한 입으로 두 말하지 않소.” 눈에 가시 같은 경빈의 동생이 월영이, 애향이 그리고 자신이 은근히 맘에 두었던 도화까지 끼고 앉아 유유자적하는 꼴을 보고 있자니 배알이 꼴려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말이었다. 주먹에는 자신이 있던 터라 찬영이 모욕을 참지 못하고 덤벼들면 가볍게 제압하여 망신을 주리라, 다만 단순히 그렇게 생각했었다. 예상을 빗나가는 찬영의 반응에 당혹을 느끼면서도 신주는 물러설 수가 없었다. ********** 그 후로도 댓 병, 끊임없이 새 술이 날라 온다. 꽤 시간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시중을 들겠다던 주위를 물리고 신주 옆에 자리잡은 찬영의 자태엔 한 점 흐트러짐이 없다. “드시오. 동래포에서 잡아왔다는 귀한 고래의 고기를 포로 말린 것이오.” 한술 더 떠 젓가락으로 집어 입에 넣어주기까지 한다. 술잔이 비면 따르고 입이 비면 끊임없이 안주를 집어 권한다. 이미 주량을 넘어선 신주의 정신을 붙들고 있는 것은 이대로 넋을 놓으면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는 본능의 경고와 사나이 마지막 남은 오기였다. 그 무슨 일이 어떤 일일지 차마 상상도 하지 못하면서 말이다. 이윽고 수북히 쌓여있던 안주마저 다 떨어져 갈 무렵 몽롱한 신주의 시선 끝으로 찬영이 가까이 다가와 앉는 것이 보였다. “내 누이가 그리 밉소?” 아니, 그것이 밉다기보다는 자고로 여인은 투기하지 말아야 하며 측실은 측실의 본분을 지켜 정실의 위협이 되지 말아야... 아니, 왜 자꾸 가까이 오는 것이오. “그래서 내도 밉소?” 꿀꺽, 더 이상 붉어지지 못할 정도로 달아오른 신주의 목덜미에서 크게 침삼키는 소리가 들려온다. 슬금슬금 신주가 뒤로 물러날수록 찬영 역시 꼭 그만큼 다가와 둘의 거리를 좁힌다. “이...이러지 마시오. 내 실언하였소.”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 오색나비, 꽃, 풀, 벌레 따위가 수 놓여진 병풍이 지척에 자리잡고 있어 신주의 퇴로를 막고 있었다. “이...이러지...마시... 흣!” 신주의 중심을 찬영의 무릎이 자극하고 있었다. 은근히 힘을 주어 눌렀다 떼었다 하는 통에 점점 그 부피가 커져만 가고 있다. “아니되오... 그대 이러면 아니... 아흣!” 어느새 신주의 바지 고름을 풀어버린 찬영이 솟대처럼 솟아오른 신주의 것을 입에 물었다. 촉촉하고 따스하고 말캉말캉 부드러운 혀끝이 애태우는 듯 속살대는 듯 신주의 것을 제멋대로 희롱한다. “아...으....아....흐응...” 간질이며 올 듯 말 듯 부족한 쾌감에 신주가 참지 못하고 찬영의 상투를 잡아 쥐고 위 아래로 마구 누르기 시작한다. “캑!” 신주의 거친 손길에 숨이 막힌 찬영이 신주의 허벅지를 밀어내며 벗어나려 애쓴다. 이제 와서 그런 소극적인 행동이 말이 되오? 도리질을 하는 찬영의 허리를 신주가 양 무릎을 꺾어 걸쇠를 만들어 가두어 버린다. “흐윽!” 이윽고 움쭉달싹 못하게 된 찬영의 턱을 잡고 있던 신주가 드디어 전신을 떨며 첫 방사의 씨를 뿌렸다. “쿨럭, 쿨럭, 쿨럭...” 사정의 여운에 힘이 빠진 신주를 떠밀어 간신히 벗어나게 된 찬영이 연신 기침을 해대며 진저리를 친다. 술을 먹여 흥분하게 만든 후 옷을 벗겨 문 밖으로 쫓아 망신을 주려고 했던 계획이 오히려 찬영이 수치스러운 쪽으로 잘못 흘러가 버렸다. “하아...” 찬영의 입가에 묻은 희뿌연 액체와 눈물을 머금고 있는 눈 꼬리, 그리고 흐트러진 옷매무새, 마지막으로 죽어라 노려보는 찬영의 시선으로 다시금 부활해버린 신주의 물건이 어쩔 줄 몰라하며 주인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다. 이미 이성은 남한산성으로 달려가는 두 필의 말에게 주어 보낸 지 오래. 신주는 웃옷마저 벗어버린 후 본격적으로 찬영, 분노에 떨고 있는 조씨 가문 막내 자제를 덮치기 시작했다. “이거 놓으시오! 놓으란 말이오! 이 양반이!! ” 이거 못 놔? 이거 안 놔? 이 자식아! 그러게 정력에 좋다는 굴이며 목이버섯까지 집어 먹이는 게 아니었다. 찬영은 예상을 뛰어넘은 신주의 괴력에 속수무책으로 끌려가며 마지막으로 남은 속곳 한 장마저 빼앗기고 말았다. “그대 얼굴만 고운 줄 알았더니 살결도 고우시구려.” 태초의 알몸이 된 찬영을 한 동안 음흉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신주가 드디어 돌진, 거세게 아랫도리를 밀어 붙여오기 시작한다. “아, 아파, 아... 아! 아파, 아아 아아아악!” 그 날 신주는 한 마리 범이 되었다. 용이 되었다. 거북이도 되었다 봉황이 되고 끝으로 학이 되어 찬영의 깊은 곳에 내려앉았다. 다음날 해가 중천에 뜨고 나서야 눈을 뜬 신주는 분노에 떨고 있는 찬영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내가 죽일 놈이오, 나를 죽이시오. 나를 이대로 관가에 고발하여도 변명할 말이 없소. 이 자리에서 죽으라 하면 죽겠소. 기가 막힐 노릇이나 찬영 또한 도발한 죄 있으니 신주를 끌고 관가로 향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사내가 사내에게 겁간 당하였다는 수치스러운 소리를 어찌 할 수 있겠는가. “듣기 싫소. 당장 나가시오. 내 미친개에 물린 셈치고 잊을 테니 당신도 그리 하시오.” 신주의 심정을 아는 듯 모르는 듯 찬영은 고개 돌려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쓸쓸히 문밖을 나서는 신주에게 찬영의 다음 말이 들려왔다. “다시 내 눈에 띄면 그땐 사단이 날 줄 아시오.” 여보... 하룻밤 사이에 만리장성을 한번도 아니고 다섯 번이나 쌓은 신주 입장에서는 이미 찬영이 남이 아닌 님이었다. 지난밤 찬영의 몸 이곳저곳에 꼭꼭 눌러 새긴 꽃잎마저 그리웠다. 전하를 탓할 것이 아니었다. 손윗동서의 마음을 이제야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은 신주였다. 그 날밤, 신주는 괴이한 꿈을 꾸었다. 가위와 실타래를 손에 든 한 노파가 나타나 옛다 하면서 신주에게 잘 익은 복숭아 하나를 던져주는 것이 아닌가. 뉘신지는 모르나 감사히 받겠습니다. 인사를 마치고 고개를 들자 그 노파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실하게 잘 익은 복숭아를 한 입 베어 물자 달콤한 즙이 입안 가득 퍼졌다. 그렇게 입맛을 다시다 깨어나니 이미 해가 장지문을 뚫고 구들 한 가운데까지 들어와 있었다. 그립소. 찬영...... 어져, 내 일이야, 그릴 줄을 모르더냐. 이시라 하더면 가랴마는 제 구타야 보내고 그리는 정(情)은 나도 몰라 하노라 -황진이- 그렇게 신주가 님 향한 그리움으로 하루하루 말라가고 있을 무렵, 찬영 역시 연유 모를 솟증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그렇게 석 달이 지나고 설악 단풍이 곱게 물든 어느 가을날. “아니... 당신!” 신주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석 달 전 불같은 밤을 함께 나눈 이래 줄곳 그의 가슴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타오르는 등불이었던 찬영이 지금 자신의 눈앞에 서있는 것이 아닌가. “여긴 어인 일로...” 반가워 다가서는 신주를 향해 찬영은 대뜸 주먹부터 날린다. 어이쿠, 왜 이러시오. 무슨 일이 있소? 여즉 화가 안 풀린게요. “내를 책임지시오!” “찬영...” “내를 책임지란 말이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이긴 하오만 갑자기 무슨 심경의 변화인 게요. 어리둥절한 신주를 끌고 찬영은 근처 산을 오른다. 이윽고 인적이 끊긴 깊은 산중에 다다를 무렵. “태기가 있다 하오.” 라며 닫았던 말문을 다시 열었다. “태기라니? 경빈 말이오?” “누이야 진즉 태기가 있지 않았소. 누이가 아니라 다른 이요.” “뉘를 말하는 것이오? 내 답답해 돌아가시겠소.” “내요.” “내라니? 그대를 말하는 것이오.” “그렇소.”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소. 그대는 사내가 아니오.” “그렇소. 나는 사내요. 사내인데 아를 뱄다 이 말이오.” “사내가 아를 뱄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 “이 뱃속에 아가 있다 그 말이요. 내 몸이 좋지 않아 의원을 찾았더니...” 찬영이 들려준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이유 없이 헛구역질이 나고 음식을 보기만 하면 구토를 하고 속이 답답하여 의원을 찾으니 그 의원 대경하여 하는 말이 태기가 있다는 것. 어찌 그럴 수 있느냐 묻자 구전으로만 전해오는 일이기는 하나 가끔 사내가 아를 갖는 일이 옛날 옛적 고래에는 있었다는 것이었다. “어찌 그런 일이...” 말을 잇지 못하는 신주를 노려보던 찬영이 참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른다. “내가 왜 그대를 찾아왔는지 진정 모르시겄소!” “...?...” “이 뱃속의 아가 누구의 아인지 진정 모르시겠는가 그 말이오.” 가만, 누구의...... 잠시 생각에 잠겼던 신주의 입이 경악으로 크게 벌어지기 시작한다. “그,그,그,그...말인즉슨 그 아가 내 아다 그 말이요?” “그렇소! 내를 책임지시오! 처녀가 애를 배어도 큰일날 판국에 총각이 애를 배었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이오!” 아니 그런... 그런...말도 안 되는 일이... 그런 일이......천지신명이시어.........감사합니다. 여기는 다시 돌아와 삼거리 주막. 매향이 펄펄 끊는 국 한 그릇과 주발 가득 담긴 보리밥 한 공기, 흘러 넘칠 듯 담겨있는 탁주 한 사발, 그리고 열무김치를 소반에 받쳐 내온다. “이기 뭐시여! 지금 사람 차별하는가!” 억울한 듯 내지르는 최가의 항의 따위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매향은 생긋 웃어 보인다. “국이 무척 뜨겁소. 호호 불어가며 드시랑게.” 고맙소. 답례를 한 신주가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 시래기 국을 한술 떠 목으로 넘긴다. 뜨근한 국물이 몸에 들어가니 이제 좀 살 것 같다. 부잣집에서 곱게 자라 여간 입이 까탈스럽지 않은 찬영이었다. 통 음식을 입에 넣지 못하는 모습을 보다 못한 신주가 찬영이 평소 즐겨 먹었다는 먹거리를 찾아 이리 전국 각지를 헤매게 된 것이다. “하이고마, 펑펑 쏟아지네.” 웬 눈이 이리도 오시는지. 조용히 내리던 눈이 금새 함박눈으로 그 모습을 바꾸었다. “잘 먹고 가오. 많이 파시게.” 어매, 벌써 가시오? 날도 궂은데 예서 주무시고 가시지. 아쉬워하는 매향의 전송을 받으면서 신주는 끊어진 미투리 신짝의 끈을 고쳐 매었다. 갈 길이 멀다. 밀양... 밀양이라.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그 뒷모습을 삽살개 한 마리만이 지켜보고 있었다. 후일담 하나. 훗날 정승자리에까지 오른 김씨 가문 17대손 김신찬의 모친의 기록은 소실되어 있다. 다만 가문 대대로 전해지는 분재기 문서에 ‘조씨 부인’이라 쓰여져 있는 것을 보고 성이 조씨였거니 추측만 할 뿐이다. 후일담 둘. 문장가로도 명성을 떨친 김신찬이 젊은 시절 남긴 산문집 ‘지미(至味)한 관계’를 보면 ‘두분 금슬이 매우 좋으셨다’고 쓰여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특집 고전극 ‘지미(至味)한 관계’ 완 - 덧. 지미(至味) : 아주 좋은 맛. 또는 맛 좋은 음식이라는 뜻. 예 ) 지미를 맛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