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 1. 소설 속으로... "저 시키, 잡앗!" 갈라진 목소리가 골목 안을 울렸다. 덩치 좋은 남자 네 명은 있는 힘껏 다리에 힘을 불어 넣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그들의 시선에는 한 남자의 뒷모습이 맺혔다. 가죽점퍼에 청바지. 나이키 운동화를 신은 남자는 빠른 속도로 달리는 중이었다. "걸렸어! 막다른 골목이다." 뒤를 쫓던 남자 중 턱에 흉터가 있는 짙은 눈썹의 사내가 표정 을 밝히며 외쳤다. 쫓고 있는 대상이 막 방향을 틀어 들어간 골목 은 담으로 막혀 있는 막다른 길이었다. 네 명의 사내는 뛰는 것을 멈추고 골목길을 꽉 채워 막았다. 건들거리는 자세의 그들은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입가에 미소 를 띠는 것을 잊지 않았다. 입에서 토해진 하얀 김 사이로 보이는 미소는 꽤나 유쾌해 보였다. 키가 크고 두꺼운 스웨터를 입은 남자가 손가락에서 뼈 맞추는 소리를 냈다. 으드득. "X새끼,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뱁새눈을 가진 사내는 점퍼 아래쪽 허리춤 에서 무엇인가를 꺼내들며 이를 갈았다. 가로등 불빛 아래 푸르스름한 빛을 내는 그것은 날이 잘 선 회 칼이었다. "적당히 담가. 일 크게 만들지 말고." 짧게 자른 스포츠머리에 젤을 잔뜩 발라 세운 사내가 뱁새눈의 어깨를 툭 쳤다. "걱정하지 마. 그래도 따끔한 맛은 보여줘야지." 입 꼬리를 당겨 웃는 뱁새눈은 스포츠머리와 눈을 한 번 맞추고 는 골목길로 들어섰다. 나머지 셋도 그 뒤를 쫓았다. 행여 튀어나 와 도주할까봐 준비하는 것도 있지 않았다. 어스름한 어둠이 깔린 골목의 끝. 겁에 질린 채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을 녀석을 생각하며 음침한 웃음과 함께 걸음을 옮기는 네 명의 사내들. 눈이 어둠에 익어 골목의 막다른 끝을 확인한 그들의 얼굴이 일 그러졌다. "이 자식, 어디로 사라진 거야?" "씨X, 뭐야?" 넷은 저마다 입에서 거친 욕설을 쏟아내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저, 저기!" 흉터의 사내가 굳은살이 박인 손을 들어 한쪽을 가리켰다. 세 명의 고개가 동시에 위로 들렸다. 막 차올랐다가 기우는 달빛 아래에 한 사람의 실루엣이 담장 위 를 달리고 있었다. "씨X새끼! 어떻게 저리로 올라간 거야?" "뭐해? 어서 쫓지 않고?" "어떻게 저길 올라가?" "아, 쥐새끼 같은 놈! 또 놓치네!" 네 사내의 아우성을 들었는지 달을 등에 진 남자의 고개가 그들 에게로 향했다. 이어 한쪽 팔로 다른 한쪽 팔을 잡으며 앞쪽으로 뻗는 남자. 그의 가운데 손가락이 곧게 펴져 있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한 네 명의 사내는 더욱 크게 욕설을 퍼부었다. 잡히면 죽는다는 둥, 묻어 버리겠다는 둥 별의별 욕설이 다 나 올 그 순간 옥상 위의 사내는 몸을 돌려 사라지고 있었다. "X만한 새끼, 다음번엔 진짜 죽여 버리고 말겠어." 회칼을 들고 있는 뱁새눈이 말을 씹어 뱉었다. "두고 보자, X발놈!" 담을 타고, 옥상 위를 건너뛰던 남자는 허름한 건물 위에 도착해서야 멈춰 섰다. "허억, 허억! 젠장, 거기서 마주칠게 뭐람? 어쩐지 오늘 하루 종일 재수가 좋더라니." 침을 탁 뱉으며 남자가 중얼거렸다. 그는 가죽점퍼 안쪽에 손을 넣었다 뺐다. 가늘고 긴 손가락에는 여러 개의 지갑이 들려 있었다. 방금 전까지 인상을 찌푸렸던 남자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한 달 내내 놀고먹어도 되겠군." 차례차례 벌려보는 지갑 안쪽에는 푸르스름한 지폐가 가득했다. 그는 능숙한 동작으로 지갑에서 돈만을 뺐다. 두툼한 지폐 다발만을 안주머니에 다시 넣고 지갑은 아무렇게나 던져버렸다. 입을 오므려 휘파람을 불면서 건물에서 내려가던 남자는 우뚝 멈춰 섰다. "아이, 진짜! 깜짝 놀랐잖아?" 남자는 인상을 팍 찌푸렸다. "아, 아저씨는 누구세요?" 커다란 눈을 가진 꼬마 계집애가 눈물을 글썽이며 물었다. 놀란 것으로 따지면 아이 쪽이 더 크리라. 남자는 이 야밤에 왜 꼬마 계집애가 옥상 위를 나다니는 건지 곧 알아챘다. 널찍한 옥상 한 켠에 있는 가건물을 본 것이다. "너…… 저기 사냐?" 사내는 작은 창으로 흐릿한 전등불이 새어나오는 건물을 턱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네. 우리 집이에요." 소녀는 여전히 겁먹은 얼굴로 대답했다. 남자는 그런 계집아이가 귀엽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애써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근데 왜 안자고 밤늦게 나다니는 거냐?" 남자가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자 소녀는 조금 안심이 된 표정으로 대답했다. "할머니가 아파요." 남자는 그제야 계집아이의 손에 들린 약봉지를 봤다. "엄마, 아빠는?" "돈 벌러 나가셨어요." "늦게 오시냐?" "……." 나이 어린 소녀인지라 감정이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났다. "왜 그래? 갑자기?" 소녀의 눈에 다시금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언제 오실지 몰라요……. 할머니는 맨날 낼 밤에 온다고 하는데……." 남자는 계집아이의 말을 듣고 대충의 사연을 알아들었다. 자신도 고아원 출신이다. 어릴 적 부모님이 다시 돌아올 거라 믿고 몇 년을 보낸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할머니…… 언제부터 아팠냐?" 남자가 문득 물었다. "세 밤 됐어요." 소녀는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보이며 말했다. "약값은 할머니가 준 거냐?" "아뇨. 약국 아저씨가 지어주신 거예요. 약국 아저씨가 언제든 할머니가 아프면 약 지으러 오라고 했거든요. 할머니는 싫다고 하 지만…… 기침을 너무 많이 해요." 남자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대충의 사정은 뻔했다. 옥상의 가건물에서 사는 할머니와 손녀. 생활고에 시달리지 않는다면 외려 이상하리라. 쥐꼬리만큼의 정부 지원금을 받거나 허리 굽은 할머니가 길거리 를 다니며 박스 따위나 주워 연명하고 있을 터였다. "너…… 밥은 먹었냐?" "어제 밤에……." 남자는 계집아이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을 놓치지 않 았다. "젠장, 어쩐지 오늘 일이 너무 잘 풀린다 싶었다니까." 남자가 갑작스레 인상을 쓰며 헛발질을 하자 소녀는 놀란 표정 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런 소녀를 보며 남자는 점퍼 안쪽에 손을 푹 집어넣었다. 퍼런 지폐다발을 꺼내드는 남자. 그는 그중 절반을 갈라 소녀에게 내밀었다. "……?" 소녀는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해? 받아." 남자는 약간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소녀가 머뭇거리자 남자의 인상이 구겨졌다. "왜? 적어서 그래? 그럼 이것까지 다 가져, 젠장!" 다른 한손에 있던 나머지 지폐까지 소녀에게 건네는 남자. 소녀는 아직도 남자의 돌발적인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 했 다. 남자는 계집아이의 손을 자신이 잡아 당겨 돈을 쥐어줬다. "이걸로 맛난 거 사 먹어. 할머니 밥도 사드리고."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소녀의 얼굴을 잠 시 쳐다본 남자는 획하니 몸을 돌렸다. 몇 걸음을 옮기던 남자가 다시 소녀 쪽으로 달려왔다. 그리고는 소녀의 손에 쥐어진 지폐다발에서 만 원짜리 한 장을 뽑아들었다. "이거 한 장만 날 다오. 줬다 뺏었다고 욕하지 말라고. 나도 하 루는 보내야할 거 아냐." 남자는 씩 미소를 지으며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허리를 세웠 다. "저……." 몸을 돌리려던 남자를 계집아이의 작은 목소리가 불러 세웠다. "이거요." "응? 그게 뭐냐?" "할머니가 돈은 그냥 받으면 안 된다고 했어요." 남자의 시선이 소녀의 손바닥에 놓인 플라스틱 반지로 향했다. 아마도 돈을 받은 대가로 선물하고 싶은 것이리라. "짜식! 교육 하나는 제대로 받았군. 고맙다." 남자는 사양하지 않고 소녀의 손에서 반지를 받아들었다. "그럼 이 오빠는 간다." 계집아이에게 손을 흔들어주는 남자. "소원을 들어주는 반지에요." "응?" "그거…… 할머니가 소원을 들어주는 반지라고 했어요." "하핫, 그래? 죽이는 반지구나. 잘 있어." 남자는 말과는 달리 아무렇게나 점퍼 주머니에 반지를 쑤셔 넣 으며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몸을 돌렸다. 소녀 역시 약봉지와 지폐 뭉치를 들고 집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털썩. 비닐봉지에 담겨진 묵직한 것이 장판위에 던져졌다. "X팔! X도 아닌 놈이 착한 척은……." 신발을 벗으며 남자는 투덜거렸다. 하지만 썩 기분 나쁜 표정만은 아니었다. 남자는 손에 들린 다른 비닐봉지에서 라면을 꺼내 들었다. 계집아이에게서 되찾아온 만원을 들고 방으로 돌아오다가 동네 책방에서 무협소설을 빌려온 것이다. 9권이나 되는 긴 소설인지라 담배 하나를 사고 나니 라면밖에 살 수가 없었다. "주제를 알아야지. 남 호주머니나 터는 주제에 쓸데없는 동정심은……, 젠장! 당장 지 처먹고 살 돈도 없으면서……." 남자는 계속 투덜거리는 것을 멈추지 않고 물을 끓였다. 잠시 후 라디오를 틀고 라면을 먹으며 책을 펼쳐드는 남자. "라면 먹을 때는 역시 무협지가 최고지!" 스스로 처량함을 잊기 위해 괜스레 더욱 지금의 상황을 즐기는 그였다. 남자는 젓가락으로 라면을 집어 입에 넣으며 책을 펼쳐들었다. 할 일 없을 때마다 보기 시작한 무협소설, 판타지 소설이 꽤 되 는 남자였다. 신간이 나올 때마다 빼놓지 않고 봐 왔다. 그런데 9 권이나 나와 완결된 책을 어째서 한 번도 못 봤던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인기가 많아 그가 대여점에 갈 때마다 없었다면 이해가 갈 법도 하지만 그렇다고 생각하기엔 책이 너무 깨끗했다. 표지를 넘기자 편집자 서문이 맨 앞에 있었다. "오라! 작가가 죽었구먼. 쯧쯧! 세 번째 글을 쓰고 죽어버리다니 젊은 나이에 안 됐네." 라면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중얼거렸다. 그제야 9권의 책이 한꺼번에 대여점에 들어온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작가의 마지막 유작(遺作)이라고 하면 괜스레 사람들이 더 몰려들곤 한다. 아마도 책방 주인이 그걸 노리고 한 질 구입했으리라. "응? 전작이 한 번 들어본 적도 없는 책인걸. 쥐뿔만큼도 인기 없는 작가였나보군. 출판사만 신났겠네. 죽은 놈만 불쌍하지. 쯧쯧……." 고인의 명복을 빈다는 편집자의 서문에 잠깐 눈길을 준 남자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휘리릭 퍽! "젠장! 이걸 글이라고 썼냐?" 출혈된 눈의 남자가 책을 벽에 집어 던진 후 씩씩거렸다. 벽에 부딪친 책은 뒷장을 드러낸 채 바닥에 아무렇게나 나뒹굴었다. 어찌되었건 유작이라기에 인내심을 갖고 밤을 새워 책을 읽어나갔다. 그러다 7권에 이르러 결국은 책을 던져버리는 남자였다. "젠장, 내가 써도 이거보단 낫겠다." 무슨 놈의 책이 저렇게 엉터리인지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일관성, 개연성은 눈을 씻고 찾아볼 수가 없는 소설이었다. 말도 안 되는 사건들이 끊임없이 벌어져 당최 무슨 내용인지 조차 파악하기 힘들었다. 등장인물은 또 왜 그렇게 많은 건지. 캐릭터의 이름을 외우는 것만 해도 쉽지 않을 정도였다. 예쁜 여자들이 많이 등장하는 것은 좋았다. 하지만 계속되는 개연성 없는 기연(奇緣)과 마치 세상이 주인공을 위해 짜여진 것과 같은 내용의 전개는 남자의 짜증을 불러 일으켰다. "X팔, 아무리 무협지라지만 정도껏 해야 하는 거지. 참나, 이야깃거리 떨어지니까 난데없이 차원이동까지……. 어이없네, 정말. 이걸 글을 쓴 놈이나, 책이라고 낸 놈이나……. 돈이 아깝다, 아까워. 라면이나 더 살걸." 괜스레 화를 버럭버럭 내고는 뒤로 누워버리는 남자. 그대로 잠이 들어 버렸다. "젠장, 그 엉터리 파지 묶음 때문에 늦어 버렸잖아." 남자는 뒤늦게 잠에서 깨어 거리로 나섰다. 여기저기서 캐럴이 들려오고 거리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다들 신났군.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깔치나 하나 구해놓는 건데." 내일이면 크리스마스 이브. 최근 들어 좀처럼 성탄절의 분위기를 느낄 수 없다지만 그래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은 다소 상기되어 있었다. 좀 늦은 감이 있지만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을 보고서는 남자의 표정이 한결 누그러졌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비하느라 다들 지갑이 두둑할 터. 이렇게 사람들이 많다면 어제 못지않게 수입을 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새해까지 따뜻하게 보낼 수 있을 테니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슬슬 시작해 볼까?" 남자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는 자연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툭 "아! 죄송합니다." 롱 코트를 입은 중년인과 어깨를 부딪친 남자. 중년인은 고개를 푹 숙이는 남자에게 자기도 살짝 고개를 숙였다. 사람 많은 길거리에서 부딪치는 것은 한사람만의 일방적인 잘못이랄 수 없기 때문이다. 중년인은 아마도 젊은 청년이 예의 바르다고만 생각할 것이다. 남자는 재빨리 자리를 벗어났다. 그의 안주머니에는 두둑함이 느껴지는 중년인의 지갑이 들어있음은 물론이었다. 중년인과 부딪쳤던 장소에서 멀리 떨어진 남자는 골목에 들어서 자연스럽게 지갑을 열었다. 첫 건수에서 재수가 좋아야 하루 종일 재수가 좋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그렇기에 보통은 전부 턴 후에 나중에 내용을 확인하지만, 첫 번째 건만은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확인을 하곤 했다. 악어가죽으로 만들어진 지갑에는 꽤 많은 돈이 들어있었다. "앗싸! 오늘 답 나오겠는 걸!" 남자는 지갑에서 만 원짜리를 골라 꺼내들었다. 수표는 자칫 곤란한 문제가 생길 수 있어 현찰만을 챙겨야했다. 요즘 10만 원짜리야 별 문제 없다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세 보진 않았지만 적어도 삼십만 원은 족히 되어 보이는 현찰. 과연 크리스마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 금액을 현찰로 지갑에 넣고 다니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남자는 지갑을 골목 어두운 곳에 던지고 다시 사람들이 북적이는 거리로 향했다. 채 한 시간도 되지 않는 동안 남자는 여덟 개의 지갑을 손에 넣었다. 한 장소에서 지나치게 건수를 많이 올리면 꼬리를 밟히기 마련. 남자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두둑한 안주머니가 그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만들어냈다. 방으로 돌아오는 남자의 얼굴에는 화색이 만연했다. 단지 추운 날씨에 얼굴이 빨개진 것만은 아니었다. "어제 착한 일을 해서 복을 받은 건가? 푸흐흐흐, 매일 오늘만 같으면 재벌 되겠군!" 두둑한 주머니를 생각하니 발걸음이 경쾌해졌다. 대략 오늘의 수입이 삼백이 넘었다. 명동, 강남역, 신천을 돌아다닌 결과였다. "내일은 진짜 메리 크리스마스가 되겠……!" 방으로 돌아가는 쪽. 골목을 도는 순간, 남자는 중얼거리던 말을 멈춰야만 했다. '저 새끼들이 여길 어떻게 알고?' 남자는 골목에서 서성거리는 두 명의 남자를 보는 순간 몸을 돌렸다. 걸리면 좋을 꼴을 보지 못함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골목을 벗어나 반대쪽으로 뛰려던 남자의 의도는 포기해야만 했다. 'X됐다!' 골목을 가로 막은 다른 두 명의 남자를 발견한 것이다. "헤헷, 명필이형." 남자는 재빨리 얼굴에 미소를 짓고는 턱에 흉터가 있는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또 도망가 보시지?" 명필이라 불린 사내가 인상을 험악하게 구기며 비아냥 거렸다. 남자를 중심으로 네 명의 사내가 점차 거리를 좁혀오는 중이었다. "하핫, 그게 아니라……." 남자는 어색한 웃음과 함께 뒤통수를 긁었다. "그게 아니긴 뭐가 아냐, 새……!" 고명필이 한손을 들어 올려 때리는 시늉을 하는 순간 남자의 몸이 스프링처럼 앞으로 튀어 나갔다. 퍼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남자의 몸이 벽에 부딪쳤다. 이미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준비하고 있던 스포츠머리가 남자의 옆구리를 걷어찬 것이다. "콜록, 콜록!" 갑작스레 옆구리에 충격을 받은 남자는 바튼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호흡을 잇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개수작 피우지마, 새꺄." 흉터의 사내가 소리를 버럭 지르며 주먹으로 남자의 얼굴을 후려쳤다. "큭!" 악다문 이빨 사이로 신음소리가 새어나갔다. "이 X팔 새끼가 또 지X이네!" 키 큰 사내가 발로 남자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남자는 헛바람을 들이키며 허리를 숙여 다리를 감싸 쥐었다. "X만한 새끼. 우릴 완전히 물로 보는구먼." 뱁새눈의 사내가 허리춤에서 회칼을 뽑아 들며 나섰다. 그것을 본 남자의 눈에 공포가 맺혔다. 이놈들은 일을 저지르고도 남을 놈들이다. 그것이 남자의 생각이었다. 그는 통증을 억지로 참아내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혀, 형님들……." "미친 또라이 새끼. 이럴 때는 형님 소리가 절로 나오나 보네. 어디 또 손가락 세워 보지, X새꺄." "X랄 하는 거지." 타악. 흉터의 사내가 남자의 뒤통수를 때렸다. "X새끼야. 니가 언제까지 도망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냐, 응? 우리가 그렇게 띄엄띄엄 보여, 응?" "어쭈? 이 X만한 게 이젠 말도 씹네?" 퍼억 다시 한 번 옆구리에 꽂히는 키 큰 사내의 주먹. 남자는 통증에 겨워 눈을 찢어져라 떴다. 헛구역질이 치밀었다. "왜 또 도망쳐 보지, 응?" 흉터의 사내가 남자의 머리채를 잡아 흔들었다. 남자는 와중에도 억지로 미소를 지어보려고 노력했다. 구타의 양을 조금이나마 줄여보려는 간절한 시도였다. "어쭈? 이 새끼가 쪼개네?" 짜악 남자의 고개가 빠르게 돌아갔다. 흉터의 사내가 그의 뺨을 후려친 것이다. 그 순간 남자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무엇인가 가슴에서 울컥하고 목으로 치밀어 올라왔다. 머릿속에서 아차 하는 마음이 들면서도 손이 제 멋대로 움직인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보다 손이 더 빠르다. 소매치기는 손이 빨라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타깃이 된 사람의 안주머니에 손이 들어가는 순간 상대에게 잡히고 말 것이다. 남자의 손도 빨랐다. 그의 손은 자신의 머리채를 잡아 쥔 사내의 손을 잡았다. "아아! 이 X새끼가?" 팔이 비틀린 흉터의 사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X만한 게 미쳤나?" 뱁새눈의 사내가 움직였다. 반사적이고, 다분히 신경질적인 움직임이다. 감정이 이성을 지배할 때 나타나는 동작이다. "커억!" 흉터의 사내 팔을 비틀며 허리를 세웠던 남자의 입이 벌어졌다. 가늘고 긴 눈은 있는 대로 크게 떠졌다. 불에 데인 것 마냥 화끈한 통증이 옆구리에서 시작되었다. 아찔한 통증이 전신으로 퍼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들지 않았다. 절로 다리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중이었다. 와중에도 시선은 자신의 옆구리로 향했다. 길게 찢어진 가죽점퍼. 그 사이로 꾸역꾸역 비집고 나오는 선혈. 힘겹게 손을 들어 올려 상처에 가져다 대었다. 손가락 사이로 뜨끈뜨끈한 피가 줄줄 새어 나왔다. "뭐, 뭐야? 진짜 담근 거야?" "너무 깊이 찌른 거 아냐?" 사내들도 놀랐는지 소란을 떨었다. 키 큰 남자는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누가 이 광경을 본 사람이 있는지 살피는 것이다. "뭐하고 있어? 튀어!" 스포츠머리가 피가 뚝뚝 떨어지는 회칼을 들고 서 있는 뱁새눈의 어깨를 잡아챘다. "저, 저 새끼는?" 허리를 숙인 채 피를 흘리는 남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냅둬. 뒤지든지 말든지." 네 명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뱁새눈은 고개를 돌려 남자를 한 번 더 살폈다. 남자는 한손으로 벽을 짚고 다른 한손으로 옆구리를 감싸 쥔 채 서 있었다. "저 새끼 죽는 거 아냐?" "X만아, 그렇게 무식하게 찌르면 어떡해?" "X발, 엉기는 걸 냅두란 말야?" "닥치고 뛰기나 해." 사내들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남자는 현기증을 느꼈다. 당장이라도 주저앉고 싶었다. 그대로 누우면 좀 편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뒷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들까 고민했다. 짧은 시간이 흐른 후 그는 벽을 짚으며 걸음을 옮겼다. 병원에 가면 짭새들의 실적만 올려줄 것이다. 크리스마스를 코앞에 두고 철창신세를 확정짓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일단 방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정 상황이 악화되면 그 때 119에 전화를 하면 될 것이다. 죽는 거보다는 철창이 나으니까. 바지를 타고 흐르는 피가 그의 걸음 뒤에 짙은 흔적을 남겼다. 어떻게 열쇠구멍을 맞췄는지 몰랐다. 눈앞이 흐릿해졌다, 선명해졌다하기를 반복했다. 생각보다 상처는 깊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온 몸이 찢어지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입을 열지는 못했지만 내심으로 연신 욕설이 나왔다. 즐거운 크리스마스는 물 건너갔다는 생각에 화가 났다. 주머니에 있는 두둑한 지폐뭉치를 생각하면 더 화가 난다. 이 돈이면 연말까지, 아니 신년이 올 때까지 그저 신나게 놀기만 해도 될 터였다. 마음 같아서는 소리라도 질러보고 싶지만 숨을 내쉴 때도 욱신거리는 상처였다. 신발을 신은 채 방 바닥에 몸을 눕혔다. 아니, 쓰러졌다고 말하는 것이 옳으리라. 더 이상 서 있을 기력이 없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모양이었다. 이대로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점퍼를 벗어 상처를 살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뿐이었다. 몸을 움직일 힘이 남아있지를 않았다. 억지로 상체를 비틀어봤지만 통증 심해질 뿐이었다. 결국 남자는 결심을 해야만 했다. 이제 스물두 살. 아무도 찾지 않는 골방에서 출혈과다로 죽을 수는 없었다. 평생을 혼자 살아온 남자는 여우 같은 마누라와 토끼 같은 자식들에 둘러싸인 죽음을 상상했었다. 적어도 죽을 때만은 혼자이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 자신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눈물을 흘려주길 바랐다. 누군가에게 기억되고 싶었다. 혼자 죽는다는 것, 그것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더구나 여우의 여자도 찾지 못한 지금 이렇게 일찍 갈 수는 없었다. 악소리가 절로 나오는 통증을 이기고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여전히 흐릿해졌다 선명해지기를 반복하는 시선이었지만 버튼을 누르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쥐어짜내는 음성으로 죽어가고 있다고, 빨리 와달라는 말을 했다. 나중에는 욕도 한 것 같다. 아파 죽겠으니 자꾸 말시키지 말라고 소리를 질렀다. 물론 실제 목을 울려 나온 소리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어쨌거나 주소는 제대로 부른 것 같았다. 이제 사이렌을 울리며 119구조대가 오기만을 기다리면 된다. 그 순간 왜 그게 보였는지 모른다. 남자의 눈에 들어온 것은 아까 집어 던졌던 엉터리 무협소설이었다. 젊어서 죽은 작가의 글이었다. 욕을 해 댄 것이 후회가 되었다. 한편으로 엉터리지만, 그 작가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그 사람은 저렇게 책을 남겨 자신이 있었음을 증거했다. 남자하고는 달랐다. 흐릿했던 시야가 선명해지며 펼쳐진 페이지의 글자가 또렷하게 보였다. 초지일관 잘생기고, 머리 좋고, 재수 좋고, 성격 좋은 주인공이 무림을 제패하다시피 한 후 차원을 이동하는 장면이었다. 주인공이 이계로 넘어가기 위해 주문을 외우는 장면. 나우트 움리오 사하미안 쿰바트 오미하라 우카드메……. 마지막 줄을 읽으며 시야가 흐릿해졌다. 남자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른다. 이렇게 죽는 바에야 저 엉터리 소설처럼 자신도 어딘가로 번쩍하고 이동해버렸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남자는 의식의 끈을 놓쳐가고 있었다. 보일러 스위치를 넣지 않은 방의 온도가 차갑게 식어가는 그 순간 사내의 핸드폰에서 꼬마 아이의 목소리가 '열두 시'를 외친다. 언제부터인가 내리기 시작한 눈이 작게 난 창 밖을 수놓기 시작한다. Vol 2. 기적은 말도 안 되는 일을 가리키는 말. "일어나! 언제까지 잘 거야?" 누군가 옆구리를 툭 차는 바람에 정신을 차렸다. 흐릿해졌던 의식이 돌아오면서 제일 먼저 화가 치밀었다. '어떤 새끼가 환자의 상처를 걷어차는 거야?' 눈을 떴다. 거친 광목천이 먼저 들어온다. '응?' 이처럼 까끌까끌한 느낌의 천을 병원에서 쓸 리가 없다. 더구나 바닥도 딱딱하다. 한순간 철렁하는 마음이 든다. 옆구리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없다. 피가 철철 흘러넘치던 상처인데 걷어차이고 이 정도라면 말이 안 된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오직 한 가지 가능성뿐이다. 골방에서 쓰러진 후 119 구급대가 오고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을 것이다. 상처가 완치된 후에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신원이 밝혀진 후 교도소로 이송된 것이리라. 교도소가 아니고서야 이런 천을 딱딱한 바닥에 깔고 누워있게 할 곳은 없으니까. 목을 들려하자 뻐근한 통증이 느껴졌다. 하긴 깊은 상처가 깨끗이 나았을 정도면 꽤 오랜 시간동안 의식을 잃고 있었을 것이다. 목이 굳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낯선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요상한 헤어스타일을 한 소년들이 보인다. 옷을 입고, 이불을 개느라 분주한 모습이다. '어라? 그새 죄수복이 바뀌었나?' 얼굴에 홍조가 가득한 열예닐곱 살 남짓의 소년들이 입고 있는 회색 옷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이 마지막으로 소년원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저런 옷이 아니었다. '응? 그러고 보니 왜 날 소년원으로……?' 남자는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은 이미 스물 두 살이다. 소년원에 올 나이가 아니었던 것이다. "너 그렇게 꾸물대다간 오늘도 연장수련이야." 눈 꼬리가 쭉 째진 소년 하나가 남자에게 비웃듯 말을 했다. '이 새끼가 누구보고 너야? 응? 오늘도?' 남자는 소년의 말에서 이상한 점을 찾아냈다. 얼마나 오랫동안 의식을 잃고 있었는지 모를 판에 오늘도…… 라니? 그럼 어제는? "좀 쉬게 해 줘. 어제 고생이 많았잖아." 어쩐지 어른스럽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남자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눈을 크게 떴다. 눈부시게 하얀 피부. 짙고 깔끔한 눈썹. 반짝이는 두 눈과 날카로운 콧날. 붉디붉은 입술과 강인한 턱선. '응? 이게 무슨 무협지, 주인공 묘사 같은…….' 어쨌거나 텔레비전에 나오던 그 어떤 아이돌스타보다 훨씬 잘생긴 소년이었다. "주혁(主奕), 좀 더 눈을 붙이도록 해. 나머지는 우리가 정리할게." '응? 주혁? 날 보고 하는 말인가?' 남자는 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브라운관에서 튀어 나온 것과 같은 저 소년은 자신을 향해 주혁이라 불렀다. 그것도 매우 친근하게. 하지만 자신의 이름은 따로 있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주혁이라는 이름을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그래봤자, 일각도 안 되는 시간인데……." 눈이 째진 소년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후후, 반각이라도 눈을 더 붙이는 기분, 너도 잘 알잖아." 잘생긴 소년은 너무도 새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눈이 째진 소년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 때 얼굴에 여드름이 가득한 다른 소년 하나가 이불을 정리하고 미소년에게 물었다. 앞선 두 소년에 비해 나이가 좀 어려 보였다. "지학(志鶴)사형. 벌써 운룡대팔식(雲龍大八式)에 들어가셨다면서요. 축하해요!" 여드름의 소년은 부러움이 섞인 눈으로 잘생긴 지학이라는 소년에게 말했다. "하핫, 고마워. 사부님께서 관대하게 처분해 주신 거야." 두 소년의 말을 들은 남자는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운룡대팔식? 뭐야, 그거 무협지에서 자주 나오는 말이잖아? 젠장, 이거 꿈이야?' 어째 꿈에서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느끼며 꿈이라는 것임을 자각하는 건지는 몰라도 남자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지독한 명필 일당에게 칼침을 먹은 후 의식을 잃었다. 그 와중에 자신은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그제야 모든 상황을 납득할 수 있었다. 따지고 보면 의식도 못 차린 놈을 교도소로 보낸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발상이었다. 더구나 왜 자신이 소년원으로 가겠는가? '허구한 날 무협지만 읽더니 꿈을 꿔도 이런 식이군.' "자식이……. 좀 더 잘 수 있다는 게 그렇게 좋냐? 피식피식 웃음을 짓게?" 각진 턱에 떡 벌어진 어깨를 가진 소년이었다. 코 밑에 거뭇한 수염까지 난 게 소년이라기보다는 장성한 청년의 이미지가 강하게 풍겼다. "그나저나 지학, 이 사형을 앞지르다니 너무한 거 아냐?" 소년답지 않은 소년이 지학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철환(鐵煥) 사형. 원래 사형은 경공과는 거리가 좀 멀지 않습니까. 대신 종학금룡수(從鶴擒龍手)의 마지막 초식을 익히고 있다고 들었는데……. 제가 사형을 쫓으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지학이라는 소년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무슨 소리야? 사제의 자질은 우리 곤륜파의 자랑이라고! 나 같이 둔한 녀석의 뒤를 쫓을 생각은 아예 버려." 철환은 우람한 팔을 들어 지학의 어깨를 붙잡았다. 강하게 움켜쥔 그의 손에 담겨진 것은 진심이었다. "사문(師門)의 명예를 높여야한다는 것은 잊지 않고 있습니다. 아마 여기 있는 모두가 그렇겠죠?" "푸하하핫, 그럼, 그렇고말고!" 철환의 호방한 웃음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아직까지 눈을 껌뻑이며 피식거리던 남자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생각했다. '이거야 원! 이제 보니 어제 밤 읽었던 엉터리 소설의 첫 부분이잖아? 그럼 저 꽃미남이 주인공인건가?' 남자가 보고 듣는 것 모두가 어제 읽었던 그 개념 없는 먼치킨 소설의 첫 장면과 똑같았다. 남지학(南志鶴)이라는 저 천재 소년이 남발하는 기연을 겪으며 무림을 종횡무진(縱橫無盡)하다가 몰락해가는 곤륜파(崑崙派)를 다시 세운다는 뻔한 스토리가 꿈에서 재연되는 것이다. '그럼 지금 나는 그 어리버리한 선주혁(善主奕)의 역할을 하는 건가? 젠장, 꿈에서라도 좀 멋진 모습을 하면 안 되는 거냐? 재수 없는 놈은 꿈을 꿔도 이 모양이군.' 남자는 투덜거리며 몸을 뒤척였다. 그러면서도 지금의 상황이 꼭 나쁘지만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은 자신이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지나치게 피를 많이 흘려 이러다 정말 죽어버리는 게 아닌가하고 걱정을 했던 것이다. 더구나 이런 꿈을 꾸는 동안은 옆구리 상처에서의 지독한 통증을 느끼지 않아도 되니 다행일 수밖에 없었다. "이제 그만 일어나지?" 처음 자신을 깨웠던 찢어진 눈매의 소년이 소리를 질렀다. 남자는 저 소년이 누군지 알았다. 무협지를 읽을 때 대충 읽어버릇했기에 정확한 이름까지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엑스트라 중 하나였다. 성격이 별로 안 좋은 그는 멍청하기 짝이 없는, 지금은 자신이 그 역할을 맡은 선주혁을 괴롭히는 놈이었다. 그 때마다 주인공인 남지학이 나서서 구해주곤 했다는 것도 기억났다. 꿈이지만 어쩐지 녀석에게 화가 났다. 사실 따지고 보면 멍청한데다 저딴 녀석에게 당하기만 하면서 계집애처럼 질질 짜던 선주혁이라는 캐릭터가 더 열 받게 했다. 그런 놈이 있다면 자신이라 해도 괴롭혀주고 싶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이 그 역할을 하는 중이었다. 그는 몸을 일으켰다. 뻐근한 것은 목뿐만이 아니었다. 어깨와 허리, 허벅지 등 근육이 있는 곳은 모두 쑤셔왔다. 알이 배긴 것이다. "서두르는 게 좋을 거야. 어제처럼 호되게 안 당하려면." 자신을 보며 키득거리는 째진 눈이었다. 소설 속에서 이 멍청한 캐릭터는 지난 날 수련의 진도를 쫓지 못한 이유와 연발하는 실수로 벌을 받았다. 달이 중천에 오를 때까지 검을 휘둘러댔으니 몸이 성할 리 없었다. '젠장, 실감나는 꿈이군. 이런 것까지 세세하게 느껴지다니.' 내심 투덜거리는 남자는 괜스레 짜증을 째진 눈에게 전이시켰다. 소설 속의 선주혁을 보고 비웃고 있음을 알고 있지만 일단 그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새끼, 두고 보자. 비록 꿈이지만 너 같은 놈에게 당할 내가 아니다.' 방을 나선 남자, 아니 꿈이라고 생각되는 이 상황에서의 선주혁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무협지에 자주 나오는 말로 선경(仙境)이라는 것이 있다. 그야말로 경치가 좋은 곳을 뜻하는 건데 신선들이 노닐 정도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선주혁이 지금 바라보는 풍경이 그랬다. 살갗을 에는 듯한 칼바람이 코끝을 베고 스쳐지나감에도 선주혁은 눈앞의 절경에 눈만을 휘둥그레 뜨고 있어야만 했다. 그의 눈앞에는 널찍한 공터 너머로 하얀 눈[白雪]이 뒤덮인 험산준령(險山峻嶺)들이 안개인지 구름인지 모를 것 사이로 당당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쩐지 보고만 있어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광경이었다. '몸이 다 낫고…… 형기가 끝나면 중국 관광을 꼭 다녀와야겠다. 돈도 얼마 안 든다는데……. 실제로도 이렇게 멋있을까?' 멍하니 절경에 넋을 빼앗긴 선주혁의 등을 누가 강하게 떠밀었다. "뭐하고 있어? 아침 수련에 늦고 싶은 거야?' 째진 눈이었다. '저 새끼가, 정말!' 선주혁은 째진 눈의 뒷모습을 잡아먹을 듯 노려봤다. 소설에서처럼 곤륜파의 아침은 수련으로 시작됐다. 무공의 수위를 떠나 전 제자가 한 자리에 모여 몸을 풀고 기본을 다지는 것이다.얼핏 봐도 삼백 명은 족히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넓은 연무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선주혁의 허리 밖에 안 되는 키의 꼬마 애들에서부터 이십 대 중반의 청년에 이르기까지 연령이었다. 선주혁 자신을 비롯한 삼분의 일가량은 각양각색의 복장을 하고 있었으며 나머지 삼분의 이는 은은한 청색이 감도는 도복(道服)을 입고 있었다. 틀어 올린 머리에 나무로 만들어진 비녀를 꽂은 모습. 무협지에서 말하는 도사(道士)들인 것이다. '거 참! 정말 디테일한 꿈이군, 그래. 이런 비율까지 명확하게……. 그나저나 내가 이렇게 기억력이 좋았나?' 책에서 스쳐 읽고 지나갔을 장면까지 세심하게 기억하고 있지 않다면 이런 꿈을 꾸기 쉽지 않을 것이다. 맨 앞에 마주 선 삼십대 중반의 도사의 구령에 맞춰 삼백여 인원이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곤륜을 대표하는 절기이자 가장 기초적인 무공인 육양수(六陽手)의 초식을 펼치는 것이다. '이런! 육…… 뭐시긴가 하는 그건가? 젠장, 내가 그딴 걸 알 리가 없지.' 허공을 향해 때론 느릿하게 때론 빠르게 손을 움직이는 사람들. 이리저리 경쾌하게 발을 움직이는 모습이 독특했다. 끊임없는 한풍(寒風)이 가득한 연무장이건만 금세 후끈한 열기로 달아올랐다. 선주혁은 엉겁결에 옆 사람의 동작을 따라해 보려 했다. 느린 부분이 진행될 때야 어찌어찌 따라 간다지만 소맷자락이 펄럭이는 소리가 날 정도로 빠르게 초식이 전개되는 부분을 따라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기 때문에 더 힘들었다. '젠장, 꼭두새벽부터 이게 웬 난리야? 그나저나 무공이라는 거 생각보다 훨씬 어렵군. 이 추운 날씨에 땀이 다 나네.' 단지 흉내를 내는 것에 불과함에도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히는 것을 확인한 선주혁이 내심 투덜댔다. 그리고 어느 한 순간 사람들의 신형이 일제히 공중으로 솟구쳐 올랐다가 수평으로 한 바퀴를 회전한 후 내려섰다. 선주혁도 덩달아 뛰어 올랐다. 대충 옆으로 한 바퀴 돌려 착지하는 데까지는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다리를 길게 쫙 벌리며 양팔을 크게 내뻗으며 문제가 생겼다. 다음 동작을 따라해야 하므로 착지 중에도 옆 사람의 동작 만을 살핀 게 실수였다. 땅에 시선을 두지 않은 관계로 균형을 잃으며 자빠져 버린 것이다. 털퍼덕 자빠진 선주혁. 인상을 크게 찌푸려야했다. 기온이 낮아서인지 흙바닥이 단단하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대차게 자빠졌으니 그 충격은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이런 젠장! X라 아프네!' 양 손으로 무릎을 비비며 선주혁이 투덜거렸다. 여기저기서 키득대는 소리가 들렸다. 꼬마 아이들조차 따라하는 육양수의 초식이었다. 입문한지 십 년이 넘는 선주혁이 기본적인 초식조차 제대로 펼쳐내지 못한다는 사실은 절로 웃음을 자아내게 할 일이었다. '이래서야 원래 소설속의 띨띨이보다 더 어리버리하잖아?' 재빨리 땅에서 일어나 어색하게 웃음을 지으며 상황을 모면하려고 하는 선주혁. 그러나 상황은 그다지 만만치만은 않았다. "선주혁! 대체 뭘 하는 거야? 아직도 잠에서 덜 깬 거냐?" 맨 앞에서 날카로운 눈초리로 곤륜파의 젊은 제자들을 살펴보던 삼십대 중반의 도사였다. 선주혁이 기억하는 바로는 저 인간도 자신에게 우호적인 캐릭터가 아니었다. 어제 있었다는 그 얼차려(?)도 저 인간이 시킨 것이었고, 이후에도 선주혁이 뭘 잘못할 때마다 가차 없이 혼을 내는 인물이다. 선주혁은 한차례 호통에 허둥지둥 옆 사람의 동작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어설픈 동작이었다. 그를 바라보던 삼십 대의 도사가 손에든 목검을 들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선주혁은 왠지 모를 불길함을 느끼며 가능한 절도 있게 동작을 펼쳐내는 시늉을 했다. 여기저기 쑤셔오는 근육통 속에서 생판 처음 보는 자세들을 따라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손바닥을 내뻗는 순간이었다. 선주혁은 손등의 뼈가 부러지는 것 같은 통증에 저도 모르게 아얏 소리를 내질렀다. 도사가 목검으로 손을 내리친 것이다. "지금 그걸 육양수라고 전개하는 거냐? 네가 감히 수련을 우습게 보는 건가?" 도사의 이마에 푸르스름한 혈관이 돋았다. '젠장, 이 엉터리 소설가! 무슨 놈의 도사가 너그러움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이 이렇게 발끈하는 성격이냐고? 수양이라는 걸 괜히 하는 거냣!'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의 통증에 손을 문지르며 선주혁이 내심으로 투덜거렸다. '응? 그러고 보니…… 아까 넘어졌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도사는 목검을 선주혁의 미간에 겨누고 뭐라 한참을 떠들어댔고, 주변에서는 은근히 눈치를 보며 키득댔지만 선주혁의 귀에는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제야 느낀 것이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고 코끝이 찡하게 아려오는 추위. 꽝꽝하게 얼어붙은 땅바닥의 차가움과 무릎의 쓰라림. 금세 팅팅 불어 오른 손등의 뼈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통증. 이 모든 것은 생생한 감각이었다. 결코 꿈에서는 느낄 수 없는! '마, 말도 안 돼!' 내심 부르짖는 선주혁. 그러고 보니 꿈이라기엔 모든 것이 너무 생생했다. '혹시…… 내가 미쳐버린 것인 건가?'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 몸에서 피가 다 빠져나가 뇌에 부작용이 생겨버렸을 수도 있었다. 미친 사람들은 오락가락하며 헛것을 보지만 당사자에게 있어서는 지금의 자신처럼 현실로만 느껴질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면 이 모든 게 해석되지 않았다. 간혹 기적이라는 게, 정말 말도 되지 않는 일이 세상에서는 일어나곤 한다. 한 자리에서 번개를 몇 번이나 되풀이 해 맞을 확률이라는 로또도 매주 여러 명의 당첨자가 나오지 않은가? 그러니 영화나 판타지에서 흔히 보듯 차원이동이나 타임 슬립이라는 것이 실제로 있을 수도 있다고 가정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건 차원이동과는 달랐다. 사람들이 알지 못하지만 존재하는 그런 기적의 문제가 아니었다. 차원이동이나 타임 슬립은 이미 존재하는, 혹은 존재했던 세계로 가는 거다. 지금 자신처럼 엉터리 작가의 허구의 세계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만약 이게 현실이라면 소설 속으로 들어왔단 말이다. 저도 모르게 실소가 터져 나왔다.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상상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결론은 미쳤다는 것밖에는 없다. '그래, 내가 결국 미쳐버린 거구나.' 따악 두개골이 빠개지는 통증에 선주혁은 제자리에 주저앉아야만 했다. 눈앞이 깜깜해지는 통증에 비명이나 신음을 내뱉을 여유도 없었다. 눈물이 줄줄 흐르는 와중에 고개를 들어보니 도사의 목검이 흔들거리고 있었다. 한참 호통을 치고 있는 중에 실실 웃었으니 저 목검을 휘둘렀으리라. 멍한 정신 속에서도 선주혁은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젠장! 지금 내가 미쳤다는 것을 깨닫는 중인데……!" 서럽다면 서럽고, 슬프다면 슬플 그 상황도 전혀 모르고 다짜고짜 목검을 휘두른 상대에게 느껴지는 강한 분노. 비록 자신이 미쳤기에 보는 환상일지라도 분노의 감정이 옅어지는 현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울컥하는 마음에 두 다리에 불끈 힘을 주고 일어서는 선주혁! "야…… 이, 씨X새끼야! 왜 때리고 난리 부르스야?" 목에 핏대를 세우고 버럭 소리를 질러 버렸다. 눈을 휘둥그레 뜨는 곤륜파의 젊은 제자들과 선주혁을 마주한 도사. 선주혁이 말한 '씨X새끼'와 '난리 부르스'의 의미를 알 수는 없 었다. 하지만 '왜 때려'와 '난리'에 담겨진 의미는 그의 언성과 표정으 로 명확히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맨 앞에 붙은 '야'라는 말도. 곤륜파의 문규(門規)는 엄격하기 그지없다. 감히 사문의 존장(尊長)에게 있어 반항이란 꿈도 꾸지 못할 일 이었다. 그런데. 평소 얌전하고 순하기 그지없는, 그래서 더욱 멍청해 보이는 선 주혁이 대사형(大師兄)인 청풍(靑風)에게 대들고 있는 것이다. 모두가 놀라는 것도 잠시. 서열에 있어서 까마득한, 그리고 멍청하기로 유명한 사제가 자 신에게 반항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은 청풍의 무지막지한 응징이 시작되었다. 사형에게 반항하는 것 역시 기사멸조에 해당하는 중죄(重罪). 청풍이 이 자리에서 당장 선주혁을 때려죽인다 해도 뭐라 할 사 람은 아무도 없었다. 퍼억 퍽 퍽 퍽 사정없이 선주혁을 내려치는 목도가 만들어내는 음향이 산중의 연무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온몸이 부서지는 통증 속에서 남자, 아니 이제는 확연히 선주혁 이 되어버려야 하는 그는 많은 생각을 했다. 모든 게 환상일 뿐이라는 결론에 입각한 행동은 자제해야 했다. 어차피 미쳤으니 아무거나 해도 된다는 생각 역시 접어야만 했 다. 환상 속에서 자신에게 가해지는 그 어떤 충격이라 해도 통증 자 체는 현실에 비교해 눈곱만큼도 가볍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두들겨 맞는 일에는 이골이 났을 그였지만, 그제 청풍에게 맞은 것에 비하면 이전의 구타는 그야말로 깃털로 사람 을 치는 것에 불과했다. 아무리 반항을 했어도 사형제지간인지라 청풍이 손속에 사정을 두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무공을 익힌 그가 때리는 일격, 일격에는 보통의 사람들이 낼 수 없는 강렬한 위력이 담겨져 있었고 선주혁 은 양일간 혈변을 봐야할 정도였다. 뼈를 상하지 않게 맞았다고는 해도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는 처지로 누워 천정만을 바라보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자칫 함부로 행동했다가는 이 정도, 아니 이 이상의 고통도 느 낄 수 있다는 위기감은 선주혁에게 강하게 다가왔다. 미쳤건, 환상이건, 꿈이건……, 자신의 몸을 사리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어째서 자신이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은 오래가 지 않았다. 자신도 상식을 가진 인간이고, 상식을 벗어난 일은 이 해할 수 없는 게 당연한 일이었으므로. 문제는 이와 같은 처지에서 어떻게 몸을 보존하며 잘 살아남을 수 있는가에 대해 해답을 찾아내는 것이다. 지금의 이 상황에 적응하지 못한다면 또 다시 이런 일이 벌어지 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젠장, 뭘 알아야 대책을…… 응?' 그나마 마음대로 움직이는 안면근육을 움직여 인상을 찌푸리던 선주혁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알잖아! 모든 것을! 그 엉터리 작가가 쓴 내용을 알고 있으니 결국 미래를 내다볼 수 있다는 건가?' 선주혁의 눈이 흔들렸다. 그리고 반짝이기 시작했다. 억지로, 억지로 읽어가긴 했지만 불과 반나절 전에 읽은 소설의 내용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은 기억조차 잘 나지 않는 세세한 면까지 소 설의 내용과 일치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일단 이 상황에 적응해 살아남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던 중, 중요한 한 가지를 깨달은 선주혁은 퉁퉁 부어오른 입술에서 느껴 지는 통증도 잊은 채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것은 원래의 선주혁 이란 인물에 대해 알던 곤륜파의 그 누구도 보지 못했던 종류의 미소였다. Vol 3. 선주혁이라는 캐릭터의 몸은 의외로 건강했다. 적어도 한 달 이 상을 누워 있어야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보름이 채 가기 전 에 어느 정도 거동이 가능할 정도가 되었다. 이러네 저러네 해도 무공을 익힌 몸이었다. 소설에서도 선주혁 은 유독 자질이 떨어지는 것으로 나온 것이 아니었다. 마음이 여 리고 우유부단해 본래의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으로 나왔다. 십 년이 넘게 탄탄한 내공을 쌓아온 선주혁의 몸은 자연스럽게 진 기가 유통되고 있었고 지독한 외상을 빠르게 치유했던 것이다. 외상을 치료하는 곤륜파의 약에 특효가 있는 것도 물론이다. "이제 엄살 그만 떨고 일어나지?" 정우재(鄭宇齋). 늘 선주혁을 괴롭히는 뱁새눈이었다. "그만한 외상을 가지고 보름이나 누워있다니, 다들 신웅지연(新雄之宴)을 준비하느라 바쁜 거 안 보여?" '이 자식아, 피똥 싸고 누워있는 데 엄살로 보이냐?' 선주혁은 내심으로 이를 갈며 투덜거렸다. 그 때 이 엉터리 소설의 멋진 주인공이 나섰다. "주혁 사제. 무슨 일이 있는 거야? 한 번도 운기행공(運氣行功) 을 안하다니……." 남지학은 염려 가득한 눈으로 선주혁을 바라보며 물었다. "저 녀석, 일부러 그러는 거라니까요. 일주일이면 말짱해졌을 것 을 가지고……. 그런다고 누가 동정이라도 해 줄줄 알고?" 정우재는 계속해서 선주혁을 몰아붙였다. "흠……. 그건 아닌 거 같은데. 주혁이 조금 이상하다는 거 못 느껴?" 남지학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정우재의 말에서 선주혁을 구제해줬다. 사실 그의 말대로 선주혁의 행동은 이상한 게 많았다. 운기행공을 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상처가 아물 것 이다. 거동을 할 수 있을 정도라면 정좌(正坐)를 하고 조식(調息) 을 취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닐 테니. 그런데 선주혁은 한 번도 운기행공을 하지 않았다. 게다가 홀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천장을 바라보며 피식거 리고 웃기를 반복했다. 모진 매를 맞고 정신이 이상해진 게 아닌 가 싶을 정도였다. 사실 선주혁이 대사형인 청풍에게 대든 것 자체도 쉽게 납득하 기 힘든 일이었다. 겁 많고 얌전한 것으로 유명한 그가 어떻게 그 런 행동을 할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다. 남지학은 선주혁이 누워 있는 침상 쪽으로 다가가 앉으며 말했다. "주혁. 힘든 일이 있으면 함께 고민하자고. 사형제가 괜히 있는 게 아니잖아. 그리고 열심히 운기행공을 해. 어혈(瘀血)이 풀리면 서 더 빠른 회복이 가능할 테니 말이야." 선주혁의 고민을 함께 하려는 남지학의 행동을 정우재는 여전히 못마땅한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젠장, 운기행공을 어떻게 하는 건지 알아야 하지.' 남지학의 말을 들으며 선주혁은 투덜거렸다. 수많은 무협지를 보며 대주천(大周天)이니 소주천(小周天)이 하 는 말은 듣고 또 들었다. 경락의 이름이나 혈도 등등 많은 것을 들은 풍월은 있지만 그게 실제로 어디에 붙어 있는 건지 알 리 없 는 그였다. 대개의 경우 그런 내용은 지루하기 마련이어서 건너뛰 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자세히 읽어둘걸.' 내심 후회하는 선주혁이었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이었다. 오래된 책에서 비롯된 퀘퀘한 냄새가 풍기는 서가(書架)의 사이 를 가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십육칠 세가량의 소년이 서성이고 있 었다. 곤륜산에 쌓인 만년설이 반사한 따가운 해살에 태워진 피부. 보통의 경우 까무잡잡한 피부는 건강하고 튼튼해 보이기 마련이 건만 소년의 경우는 달랐다. 유독 호리호리한 체형에 큰 눈을 가 져 무공을 익혔음에도 어쩐지 병약해 보이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후훗, 역시 난 천재라니까. 이런 곳이 있을 줄 알았지.' 소림사에 장경각(藏經閣)이 있다면 각 문파에도 무공의 비급을 보관하는 곳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비록 소설에서 나온 적은 없지 만 이 정도의 디테일을 가지고 상황이 돌아간다면 충분히 가능성 이 있다는 생각에 이곳 장서고(藏書庫)를 알아냈고, 단박에 달려와 비급을 살피는 중이었다. 장서고의 일층은 곤륜파의 제자라면 누 구나 출입이 가능한 바, 병중이라는 이유로 수련에서 빠질 수 있 는 선주혁은 마음껏 비급을 살필 수 있었다. 다행히 곤륜파의 제자들은 모두가 분주했다. 오 년에 한 번씩 열리는 신웅지연의 준비에 바빴기 때문이다. 신웅지연이란 인근 한 청해파(靑海派)와 곤륜파가 후진들의 실력 배양을 위해 준비한 일종의 축제였다. 각 파에서 서른 이하의 후기지수가 출전해 서로 의 실력을 비교하는 행사다. 무협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이와 같은 행사가 이번에는 곤륜 파의 주최로 이뤄지기 때문에 모두가 분주한 모습이었다. 소설 속 에서는 이와 같은 행사가 있게 된 이유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을 했었다. 늘 그렇듯 흥미진진한 사건이 아니면 대충 읽고 넘기는 선주혁 이었기에 자세한 기억은 나지 않았다. 대충 기억이 나는 것은 중원의 타 문파에 비해 지나치게 외곽에 위치한 곤륜파는 뛰어난 무공에도 불구하고 실전의 경험이 부족해 날이 갈수록 몰락의 길로 향하고 있다고 했다. 또한 구파일방에 끼지 못하는 청해파는 곤륜파의 절기와 상대함 으로서 자파의 무공을 보완하고 발전시킬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 다. 그에 양 문파가 매 오년마다 신웅지회를 개최함으로서 상호의 발전을 도모하고 있다는 것이다. 양문파가 번갈아가면서 개최하게 되는 신웅지회는 문파의 체면 이 걸린 행사가 되어 버렸고, 그에 대한 준비로 인해 곤륜파 전체 가 떠들썩했다. 이와 같은 곤륜파의 분주함으로 인해 원래부터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는 선주혁은 다른 사람들의 특별한 주목 없이 이곳 장서고 에서 여유 있게 공개된 비급을 살펴볼 수 있었다. "다행이다. 말이 통하는 것뿐만 아니라 글도 읽을 수 있구나!" 서가에 빼곡히 꽂힌 책들의 제목을 살펴보며 선주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행여 말은 통하는 데 글을 읽을 수 없으면 어쩌 나 하는 우려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문이라고 해 봐야 자신의 이름 석 자와 몇 개의 기초적인 것밖에 모르는 그였기 때문이다. 중국어를 한다는 사실도, 자연스레 한문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 도 선주혁의 이해의 범주를 넘어선 일이었다. 그는 더 이상 놀라 거나 낯설어하지 않기로 했다. 문제는 그에게 주어진 환경에 최대 한 빨리 적응해 살아남는 것이었다. 두 번 다시 개처럼 두들겨 맞 으며 살고 싶지 않은 그였다. 상황에서 적응해 살아남기 위해 무공을 익히는 것을 필수라고 결론내린 그였기에 장서고를 찾았다. 이제 와서 새삼스레 기초적 인 심법이나 초식에 대해 누군가에게 물어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미친 놈 취급을 할 게 분명할 테니. 만약 이 장서고를 떠올리지 못했다면 대충 아무 산비탈에서나 한판 구를 생각도 했다. 머리에 충격을 받아 기억상실증에 걸렸다 고 하고 무공에 대해 처음부터 알아갈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럴 경우 누군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일일이 간섭하고 귀찮은 일이 다량으로 발생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고, 마침 장서고가 떠 올라 비급을 통해 무공을 익힐 방법을 택했다. 소설 속에서의 선주혁은 탄탄한 무공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파 리 한 마리 못 죽이는 여린 성품 탓에 본연의 실력을 발휘하지 못 할 뿐, 실제로 머리가 나쁘거나 자질이 떨어지는 문제는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운용의 방법만 알면 현재 자신의 몸이 지닌 능 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선주혁이었다. 엄청난 상처를 빠르게 회복하는 치유력 하나만으로도 자신을 감 탄시키는 신체인 만큼 선주혁이 가진 본연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 다면 당장이라도 억울한 괄시는 안 받을 수 있다고 결론지은 것이다. 어느 한 순간 선주혁의 큰 눈이 반짝였다. 서가에 꽂힌 비급의 제목 때문이었다. 태청심법(太淸心法). 곤륜파의 대표적인 심법이자, 가장 기본이 되는 심법이었다. 그는 반가운 얼굴로 태청심법의 비급을 꺼내들고 읽기 시작했다. 책의 첫 머리에는 태청심법이 만들어진 이유와 사용에 대한 지 루한 말로 가득했다. 몇 장을 넘기자 사람의 몸에 무수한 점과 선 을 그려 놓은 게 보였다. '이거다!' 선주혁은 제 자리에 서서 책장에 그려진 혈도의 이름과 경락을 외우기 위해 노력했다. 수많은 무협지에서 강조했던 것처럼 운기 행공을 잘못하면 자칫 주화입마(走火入魔)에 걸릴 수 있었기 때문 이다. 아무리 환상 속이라도 반병신이 되어 평생을 보내거나 죽음 에 이르고 싶지 않은 선주혁이었다. '내가 옛날에 공부를 이렇게 했으면 서울대는 떼놓은 당상이었을 거다. 젠장!' 곤륜파에서 여러 개의 작은 방을 연공실(練功室)로 사용하고 있 었다. 심법을 중시하는 곤륜파인지라 다른 이의 방해를 받지 않고 개인이 들어가 운기행공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따로 준비한 것이다. 그 많은 방 중 하나를 차지해 조식을 취하고 있는 선주혁은 기 본적인 운기행공을 시도하려는 중이었다. 장서고에서 비급을 읽는 것만으로 혈도와 경락을 암기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목숨일 걸린 일이라 생각하고 덤벼드 니 자연스레 머릿속에 자리를 잡아갔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외웠 다고 생각하는 데까지는 일주일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틈틈이 태청심법에 대한 이해를 도모했지만 태청심법을 운용하 기에는 무리라는 생각에 소주천을 목표로 했던 선주혁이었다. 행공 이전에 전신의 힘을 뺀 상태인 방송에 들어가기는 쉽지 않 았다. 자기도 모르게 어깨나 목 주변, 그리고 팔다리에 힘이 들어 가 있는 것을 새삼스레 느껴야만 했다. 그저 긴장을 푸는 것조차 이렇게 힘드니 앞으로 얼마나 더 힘든 고비를 넘겨야 할지 모른다 는 생각이 들었지만 선주혁은 포기하지 않았다. 소매치기 기술을 배울 때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으로 자위하며. 완벽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전신의 힘을 뺐다고 생 각은 선주혁은 호흡을 고르기 시작했다. 복부를 움직여 숨을 쉬는 단전호흡이었다. 의식을 집중해 호흡을 시작하니 생각보다 긴 호 흡을 할 수 있었다. 선주혁이라는 캐릭터 자체가 십 수 년간 익혀 왔기 때문인지 한 호흡의 길이가 매우 길었던 것이다. 마음이 편안해 질 무렵 태청심법에서 말한 기침단전(氣沈丹田) 의 단계를 시도했다. 호흡 시에 의념을 이용해 기가 단전에 가라 앉는 것을 머릿속으로 명확히 그리는 것이다. 몇 번의 호흡이 반복되는 동안 선수혁은 실제로 기가 단전 부위 에 모여드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단전의 위치도 명확하게 잡 았을 뿐더러 호흡을 통해 기가 흘러가는 경로도 확연했다. 신기한 느낌에 절로 흥분되긴 했지만 선수혁은 애써 고요한 마 음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강박관념처럼 주화입마에 대해 두려워하 는 것이다. 그렇게 호흡을 이어가자 의식하지 않았음에도 단전에서 움직임 이 일었다. 선수혁은 이상한 현상에 약간 놀라움을 느꼈지만 그 움직임을 거스르려하지 않았다. 태청심법에 적힌 내용을 떠올린 것이다. 단 전에서 일어난 기운은 회음(會陰)을 거처 등 뒤로 향했다가 다시 단전으로 돌아왔다. 이른바 소주천이 행해지는 것이다. 선수혁은 그와 같은 느낌에 신이 나서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진기의 흐름은 명확해졌고, 기운도 강하게 느껴 졌다. 내친김에 태청심법을 운용해볼까 하는 욕심이 생겼지만 선주혁 은 애써 자신을 억눌렀다. 처음부터 무리를 해서 좋을 것은 없었 기 때문이다. 몇 번에 걸쳐 소주천을 마친 선주혁은 일종의 마사지와 같은 수 공(收功)으로 마무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몸도 마음도 한결 개운해진 듯한 느낌이었다. '시작이 아주 좋은 걸! 정말 불행 중 다행이군. 기왕이면 주연이 었으면 좋았기지만, 생각보다 쓸 만한 몸뚱이라서 말이야.' 신웅지회까지 한 달여가 남았다. 선주혁의 이상한 경험이 시작된 지 벌써 한 달하고 보름이 지난 것이다. 그간 몸은 완전히 회복되었고, 태청심법도 기본적인 내용을 습 득했다. 의식에 앞서 몸이 먼저 알고 있었기에 빠른 진보를 보일 수 있었다. 초식 또한 마찬가지였다. 비급에 그려진 그림이나 설명만으로 초식을 익힌다는 것은 무공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선주혁이 빠르게 진도를 보일 수 있는 이유는 몸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비급에 적힌 동작을 취하려하면 의식에 앞서 몸이 먼저 자세를 잡아갔다. 이에 신이 난 선주혁은 심법을 익히고, 초식에 익숙해지는 데에 하루 종일을 투자했다. 그리고 선주혁의 이와 같은 행동은 곤륜파의 제자들의 비웃음을 샀다. 곤륜파의 제자들은 무공을 단계별로 익힌다. 누가 무슨 무공 을 익히고 있냐가 그 사람의 경지를 가늠하는 척도가 되는 것이 다. 그런데 선주혁이 나이어린 제자들과 어울려 기초적인 무공을 수련하는 모습을 보고서는 다들 웃음을 머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본래부터 사람들을 사귀는 데 익숙지 않고 늘 홀로 떠돌던 선주 혁이기에 더 했다. 심지어 그의 사부조차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 았던 것이다. 선주혁은 이를 오히려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초식과 심법을 익히 는 데에 주력했다.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선주혁의 이와 같은 행동은 그가 소매치기의 기술을 배운 데서 비롯되었다. 소매 치기를 잘 하기위해선 빠른 손과 예민한 손의 감각, 대담한 마음 가짐, 긴장의 이완, 타이밍의 포착 등등 익혀야할 것이 많았다. 그 모든 것이 완벽해졌을 때야 들키지 않고 남의 지갑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다. 단 하나라도 능숙하지 못하면 바로 철창신 세를 지는 게 소매치기다. 그가 열여섯 살 때,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되었다가 바로 목덜미 를 잡힌 적이 있었다. 다행히 몇 대 맞고 끝이 나긴 했지만 그 때 의 아찔했던 기억을 그는 잊지 않고 있었다. 완벽하지 않으면 실 전에서는 무용하다는 것. 그것이 선주혁이 가진 사고의 근간이었 고, 그가 지금 신체가 익힌 무공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 력하는 이유가 되었다. "타앗!" 절로 치미는 호기를 이기지 못하고 기합성을 내지른 선주혁. 그가 펼쳐낸 육양수의 일장에서는 위맹한 기운이 역력히 느껴졌 다. 정말이지 일장에 바위라도 부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육양수를 처음부터 끝까지 되풀이하길 몇 번.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삼십육 초식을 전개하기에도 버거웠는데 이 젠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몇 번에 걸쳐 초식을 전개할 수 있었다. 그런 자신이 대견스러운 선주혁이었다. 그는 만족감과 상쾌한 기분에 숨을 깊이 들이 쉬었다. "네 녀석이군. 모든 무공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놈이." 등 뒤에서 들려오는 걸걸한 음성. 선주혁은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어둑한 가운데 칙칙해 보이는 인상의 중년인이 서 있었다. 고슴 도치처럼 삐죽삐죽 솟은 수염이 얼굴에 가득했고, 거의 흑인처럼 시커먼 얼굴이었다. 눈에서 반사된 햇볕에 그을렸다기보다는 원래 피부가 까맣다는 것을 짐작케 했다. 떡 벌어진 어깨와 커다란 체구를 봐서는 도복을 벗고 손에 칼 하나 쥐어주면 영락없는 백정의 생김이었다. 도관과 도복이 이토 록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아야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선주혁은 반사적으로 포권(抱拳)의 자세를 취했다. 사문의 존장을 보고 예를 갖추지 않는다고 그간 몇 번의 지적을 받았던 경험 때문이다. "안녕하십니까" 선주혁은 나름대로 공손하게 예를 갖췄으나 중년의 도사는 고개 조차 까딱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뭐, 이런 인간이 다 있어? 사람이 인사를 하면 받아야지.' 겉으로는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속으로 투덜거릴 그 때 중년의 도사가 선주혁에게 물었다. "왜 무공을 처음부터 다시 익히는 게냐?" 은근히 깔아뭉개는 말투였다. 기껏해야 마흔이나 넘었을까 싶은 용모의 사내가 마치 꼬마 애한테 질문하듯 말하자 선주혁은 기분 이 썩 좋지 않았다. 하지만 곤륜파의 규칙이 엄격함을 어렵지 않 게 기억해낼 수 있었고,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그, 그게…… 확실하게 제 것으로 만들고 싶어서입니다." "확실하게 네 것으로……?" "네. 어쩐지 기억이 잘 안 나는 느낌이라…… 그러니까 완전히 까먹었다는 건 아니고, 느낌이 그렇다는 거죠." 선주혁의 말에 중년도사의 고리눈에서 빛이 쏟아져 나왔다. '헉! 저게 안광이라는 거구나! 완전히 후렛쉬 저리 가라인데?' 신기해하면서도 선주혁은 내심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초식을 잊어간다는 말이냐?" "아…… 네, 그게 기분만 그렇다는 거죠. 그냥 기분만요……." 선주혁이 뒤통수를 긁적일 그 순간 중년도사의 신형이 흔들렸 다. 이어 갑자기 확대되는 그의 모습에 선주혁의 눈이 휘둥그레졌 다. 어느새 중년도사가 그의 코앞까지 다가온 것이다. 그리고는 손 을 세워 수도(手刀)를 만든 중년도사가 날카로운 기세로 선주혁의 목을 베어갔다. 선주혁은 너무도 빠르고 위맹한 수도를 얼핏 바라봤을 뿐 미처 반응할 틈조차 갖지 못했다. 다행히 중년도사의 수도는 선주혁의 목 한 치 옆에서 멈춰 섰. 섬뜩하고 공포 가득한 순간에 선주혁은 간이 철렁 내려앉는 것 만 같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당장이라고 주저앉고 싶을 정도였다. 중년도인은 미간을 찌푸리고 송충이 같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 었다. "초식을 잊어간다고 하지 않았느냐?" 다분히 실망스러운 표정이었다. "그, 그게…… 점차 기억이 나는 중입니다. 이제 육양수 정도는 확실히 기억이 나는……." 워낙 놀랐는지라 선주혁은 애써 태연한 척을 하려했지만 절로 말이 더듬거려졌다. "그러니까…… 그냥 기억이 나질 않는 것뿐이냐?" 중년도인이 인상을 찌푸리며 묻자 선주혁은 또 무슨 봉변을 당 할지 몰라 황급히 대답했다. "아, 아닙니다. 이젠 확실히 기억이 납니다." 손까지 휘휘 저으며 대답한 선주혁. 그를 보며 고리눈의 중년도사는 더욱 인상을 찌푸렸다. "쯧! 괜한 시간을 낭비했구나. 하긴 그 나이에 벌써 초식에서 벗 어나는 경지에 이를 리가 없지." 중년도사의 말을 듣는 순간 선주혁은 왜 그가 실망스러운 표정 을 지었는지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는 선주혁이 진도를 거꾸로 나 가는 것을 탓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다. 무협을 보다보면 늘 나 오는 경지, 초식을 벗어나는 그 경지에 올랐는가에 대해 확인하려 왔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눈앞의 중년인은 스스로 그 경지를 올랐거나 넘어선 고수라는 뜻이었다. 선주혁의 두 눈에서 반짝임이 일었다. 이마에 주름을 잡으며 몸을 돌리려는 중년도인의 귀에 갑작스레 낭랑한 음성이 울렸다. "비록 자질이 부족한 제자입니다만 가르침을 내려주십시오." 그대로 신형을 날리려던 중년도인은 갑작스레 다부진 음성으로 말하는 선주혁을 돌아봤다.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그가 물었다. "너 내가 누군지 모르는 게냐?" "죄송합니다." "허참! 곤륜파에서 날 모르는 녀석이 있었다니. 내가 무진(無塵)이다." 어이없는 표정으로 말을 내뱉은 무진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선주혁은 다급해졌다. '무진, 무진, 무진이 누구더라……?' 이름을 되뇌는 동안 머릿속에 번쩍 떠오르는 한 캐릭터에 대한 기억. 꽤나 비중 있는 캐릭터였음에도 선뜻 기억이 나지 않았던 것은 역시나 눈앞에서 직접 보게 된다는 의외성 때문일 것이다. 무진진인. 지금 선주혁의 사부인 정현(正玄)진인의 사숙이자 곤륜파가 자 랑하는 검호(劍豪)였다. 이제 막 중년으로 보이는 것은 정순한 내 공 때문이었다. 정현진인이 오십을 넘어섰으니 최소 칠순은 되었 을 그였다. 무자배의 원로로서 곤륜오선(崑崙五仙) 중의 일인인 그는 어찌 보면 무협에서 등장하고 또 등장해 닳고 닳을 정도로 흔한 캐릭터 였다. 원래 무공으로만 따지면 전대의 장문인이 되었어야 하나 무 공에 미쳐 있어 양보를 했다는 식의 흔한 설정 속의 인물이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소설을 쓴 엉터리 작가는 이 인물을 지나치게 대단하게 그리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무진진인이라는 걸출한 인물 이 있는데 왜 곤륜파가 몰락의 길을 걷는지 이해가 안 갈 정도였 다. 깊게 따져보자면 주인공이 나서서 설치기 전에 무진진인이 무림 을 한바탕 뒤집어엎으면 그걸로 끝이었을 거다. 물론 그러면 이 소설은 애초부터 시작도 못했을 것이겠지만. '하여튼 개념 없는 소설이라니까! 아니, 지금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되지. 저 정도의 절정고수에게 무공을 배울 수 있다면 그것 또 한 기연이 될 터. 저 인간을 잡아야 해!' 선주혁의 머리는 빠르게 무진진인에 대한 기억을 되짚고 있었 다. 소설의 초기에 무진진인은 주인공인 남지학을 못마땅하게 여겼 다. 선주혁 식의 표현대로라면 바른생활 사나이라는 것을 싫어하 는 것이다. 호방하고 거칠기까지 한 진무진인과 궁합이 맞지 않는 다는 뜻이었다. 물론, 일관성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던 소설은 후반부 에 가서 무진진인이 주인공을 적극적으로 돕는 것으로 나온다. 문 파의 명예가 우선이고, 강호 정의가 어쩌고 하는 설득력 없는 문 장 몇 개로 대충 넘어가면서. 생각이 거기에까지 이르자 선주혁은 소설 속에 나타난 무진진인 의 모든 것을 명확히 기억해냈다. 강호에서 그를 가리켜 부르는 별호까지도. "무치(武癡)!" 무진진인에 대해 기억을 해 낸 것이 기뻐 저도 모르게 튀어 나 간 말이었다. 선주혁은 스스로도 놀라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무진진인에게는 곤륜일검(崑崙一劒)이라는 명예로운 별호가 있 었다. 자타가 공인하는 곤륜파 최고수임을 드러내는 별호였다. 반 면 무치란 그가 지나치게 무공에만 매달리는 것을 비난하는 의미 가 담겨진 별호였다. '젠장, 하필 튀어나가도 그게 튀어나갈 게 뭐냐? 이놈의 주둥이 야, 주둥이야! 어째서 제멋대로 움직여 죽기를 자처하는 거냐고?' 맘 같아서는 주먹으로 입을 한 대 후려갈기고 싶을 정도였다. 과연 무진진인의 거대한 고개가 뒤쪽으로 다시 돌려졌다. "어이없는 놈이군. 감히 사문의 존장을 힐난해보겠다는 거냐?" 단지 고개를 돌려 인상을 찌푸렸을 뿐인데 선주혁은 온 몸을 바 위로 짓누르는 것 같은 압박감을 느꼈다. 숨을 쉬기가 버거울 정도의 압력이었으나 선주혁은 애써 웃음을 지어 보이며 다시 포권을 취했다.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흥! 곤륜파의 기강이 실로 해이해졌군. 네 놈은 누구에게 배우 고 있다고 했더냐?" 무진진인의 말투는 동물원에서 본 호랑이가 으르렁대는 느낌이 었다. 'X됐다.' 형형한 안광을 뿌리는 무진진인의 말을 들은 선주혁의 생각이었 다. 이대로 자신의 사부가 누군지 말을 하게 되면 저 우악스럽게 생긴 무진이 사부를 다그칠 것이고, 그럼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 어질지 안 봐도 비디오였다. "사부가 누구냐고 물었다." 당장이라도 곰발바닥 같은 손을 휘둘러 자신을 날려버릴 것 같 은 기세의 무진이 호통을 치자 선주혁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 렸다. 그 순간 강렬하게 머리를 때리는 한 가지 기억. 그것이 생각났다는 이유만으로 선주혁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 다. "송구스럽지만 무진 사숙조(師叔祖)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감히 어른이 묻는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다시금 범이 으르렁 대듯 선주혁을 몰아붙이는 무진진인.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패도적인 기운은 어느덧 잘 벼스린 칼 처럼 날카롭게 변해가고 있었다. 자칫 이와 같은 무형의 기운만으 로도 곤란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는 것을 짐작한 선주혁이었으나 여전히 미소를 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 "소시적 여자 아이에게 두들겨 맞은 기억을 잊지 못해 미친 듯 이 무공을 익힌다고 들었습니다만…… 컥!" 말을 채 마치지도 못한 선주혁. 그는 쇠갈고리처럼 단단히 목을 조여 오는 힘에 순간적으로 눈 앞이 깜깜해졌다. 숨이 막혀오고 기침이 치밀었으나 꽉 막힌 기도 (氣道)를 통해 기침이 새어날 리 없었다. "네 이놈! 대체 누구한테 그 말을 들은 게냐?" '이 단순 곰탱이야! 목을 틀어쥐면 어떻게 대답을 하라는 거냐 고?' 시뻘게진 얼굴, 충혈 된 눈으로 선주혁은 다급하게 손가락으로 목을 조르는 무진진인의 손아귀를 가리켰다. 무진진인은 그제야 손의 힘을 조금 풀었다. "커헉, 캑, 콜록, 콜록!" 숨통이 트인 선주혁은 바튼 기침을 쏟아냈다. 눈물이 절로 흐르는 것을 닦아낸 선주혁은 불똥을 튀어내는 고 리눈을 마주 대해야만 했다. 절간의 입구에 서 있는 사천왕상에 못지않은 무시무시한 얼굴을 가진 무진이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민 것이다. "어서 말해라! 대체 어디서 그 이야기를 들은 게냐?" '젠장, 명색이 도사라는 인간이, 더구나 나이도 처먹을 만큼 처 먹어 수양을 쌓았다는 인간이 다짜고짜 손자뻘 되는 꼬마의 목을 졸라? 당최 개념 없는 작가의 글이라니까! 대체 머릿속에 뭐가 들 었기에 이런 캐릭터를 만들어?' 다시 한 번 엉터리 작가에게 욕을 퍼 부은 선주혁은 간신히 숨 을 돌이키며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어디서 들은 게 중요한 게 아닙죠, 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거든요." 무진진인은 살기를 머금은 눈초리로 선주혁을 노려볼 뿐이었다. "중요한 것은 저만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말씀입죠." 간사한 느낌을 풍부하게 머금은 선주혁의 입매를 확인한 무진진 인이 묵직한 음성을 토해냈다. "네가 이 자리에서 죽을 수 있다는 걸 아느냐?" '살인멸구(殺人滅口)!' 수많은 무협을 보며 들어주운 풍월이 있는 선주혁이 떠올린 네 자였다. 'X됐다. 이 개념 없는 캐릭터가 손에 힘을 주면 난 끝장이군.' 무진진인의 약점을 쥐고 흔들어 보려한 게 실수였다. 대부분의 소설을 보면 주인공이 이 정도의 사악한 짓을 하는 것은 독자들에 게 웃음으로 넘어가곤 한다. 전대의 고수들이 나이 어린 주인공들 에게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쩔쩔 매는 것은 무협에서 발에 채일 정 도로 많다. 그래서 이 정도의 약점이면 무진진인을 손 안에 쥐고 휘두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살인멸구라니! 미처 생각조차 못한 바였다. 만약 자신의 이런 행동을 소설로 읽고 있었다면 당연히 짐작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막상 위험한 상태에 놓이자 생각이 한 방향으로 치닫는 것이다. 어찌 보면 그동안 책을 보며 '말도 안 돼', 혹은 '저런 멍청한'이라고 말 했던 상황 속에서 정말 그럴 수밖에 없을 수도 있다는 말이 되는 셈이기도 했다. "감히 사숙조의 약점을 잡아 무공을 갈취하려 해?" 선주혁의 귀를 파고드는 나직한 음성. 그러나 노한 음성과는 달리 무진진인의 두터운 입술 양끝이 당 겨졌다. 난데없는 표정의 변화에 선주혁은 어쩐지 섬뜩한 느낌이 들었 다. "그러니까……. 가르침을 내려주면 평생 입을 다물겠다 이거냐?" '그러면 그렇지. 푸풋. 역시 멍청한 작가가 만들어낸 멍청한 캐 릭터라니까. 이제 기연을 얻는 일만 남은 건가?' 무진진진이 자신의 수작에 말려드는 기미를 보이자 선주혁의 얼 굴이 환해졌다. "아하핫, 그러믄입죠. 만약 입을 열면 천벌을 받고 지옥에 떨어 지…… 아니,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영겁의 세월을 고통 속에서 지내겠습니다." 선주혁은 빠르게 말했다. 무협을 읽은 풍월대로 읊은 것이다. 그의 말을 들은 무진진인이 이빨을 드러내며 솥뚜껑만한 손을 느릿하게 움직였다. 목을 붙잡힌 선주혁은 마치 슬로우 모션을 보는 것 같은 무진진 인의 손바닥에 가슴을 두들겨 맞았다. "커억!" 무진진인이 내공을 불어넣지 않았음인지 입에서 피가 튀진 않았 지만 지독한 통증에 신음성이 절로 튀어 나갔다. 이어 선주혁의 목을 놓은 무진진인은 다시금 손을 비틀어 선주 혁의 면상을 그대로 내리쳤다. 코에서 피가 뿜어지며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머리가 멍해질 정도의 엄청난 통증이 문제가 아니었다. 무진진인이 자신을 죽이려든다는 생각 때문에 물밀 듯 밀려오는 공포가 진정한 문제였다. 거의 목적에 도달했다고 안심하던 중에 시작된 구타였기에 공포 는 더욱 컸다. 선주혁은 오금이 저려오고 현실을 부정하고자 하는 생각뿐이었 다. 이것은 환상일 뿐이야, 라는 강한 부정은 소용이 없었다. 뼛속까지 저려오는 이 끔찍한 통증을 어찌 환상으로 치부한단 말인가?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살고자 하는 욕망은 그로 하여금 눈을 번쩍 뜨게 했다. 얼마 되지 않는 기간이지만 선주혁이라는 캐릭터의 몸이 익히고 있는 무공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실력차이가 많 이 난다고 해도 살아날 방법이 있을 지도 몰랐다. 그는 눈에 불끈 힘을 주고 무진진인의 손을 바라봤다. 나선을 그리며 느릿하게 날아오는 커다란 손. 선주혁은 손을 마주 뻗었다. 육양수의 초식을 이용해 막아내려는 것이다. 그는 알지 못했다. 그가 방어초식을 펼치는 순간 비록 짧은 찰나였지만 무진진인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사라지는 것을. 자신이 휘둘러낸 팔이 무진진인의 손목을 강타하려는 시점에서 선주혁은 뛸 듯이 기뻤다. 막을 수 있다. 그리고 살 수 있다. 두 가지 생각이 동시에 떠오른 것이다. 불행이도 기쁨은 너무도 빨리 사라졌다. 너무나도 느렸기에 막을 수 없으리라고는 의심치 않았던 무진진 인의 팔은 여전히 느린 채로 나선을 그리며 뻗어졌고, 자신의 손 은 허공을 가르고 만 것이다. 퍼억 오른쪽 가슴 부위에서 전해지는 아찔한 통증. 호흡이 곤란해지고 눈앞이 깜깜해질 정도였다. 이어지는 통증은 없었다. 거친 숨이 터져 나오고 시야가 확보될 그 때. 무진진인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선주혁은 깨달았다. 무진진인이 자신을 괴롭히다 죽이려 한다는 것을. 까마득한 사손(師孫)이 자신의 비밀을 알아내고 우롱하려 했기 때문인가? 무진진인은 소설 속에서는 보지 못했던 잔인한 면모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는 여전히 느릿한 동작으로 선주혁을 향해 일장을 내뻗었고, 선주혁은 살아남기 위해 방어를 시도했다. 그러나 뻔히 눈앞에서 보이는 느린 동작을 선주혁은 한 번도 막 아내지 못했다. '이, 이게 절정 고수라는 건가?' 이제는 방어를 포기한 그였다. 아니 포기했다기보다는 계속되는 구타에 더 이상 방어를 시도할 힘도 없었다. 선주혁은 그렇게 두 팔을 늘어뜨린 채 무진진인의 일장, 일장을 몸을 마주했다. 그냥 땅바닥에 누워버릴까도 생각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무진진인은 이 버릇없는 사손이 땅에 눕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았 다. 무형의 잠력이 끊임없이 그를 떠받들고 있는 것이다. 선주혁에게 있어 다시없을 기나긴 시간이 지나고 구타가 끝났을 때야 그의 무릎이 땅에 닿았다. 구타가 계속되는 동안 온몸에 힘을 줘서인지 전신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흥! 단 일초도 막아내지 못하는 실력으로 내게 가르침을 받겠 다고? 게다가 협박까지?" 후들거리는 양 손으로 땅을 짚고 있는 선주혁의 귓가에 무진진 인의 냉랭한 음성이 들려왔다. "네 놈의 버릇없는 행동을 생각하면 처 죽여야 마땅하나 한 솥 밥을 먹는 처지인지라 이 정도로 용서해주마." 무진진인의 말을 듣는 순간 선주혁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만이 가득했다. '살았다!' 그것뿐이었다. 죽음 가운데서 살아났다는 기쁨. 오직 그것만이 선주혁을 전율케 했다. 세상에 다시없을 통증도 그 기쁨을 억누르는 데는 아무런 장애 가 되지 않았다. 선주혁에 있어 이 빌어먹을 환상 속에서의 죽음 이 보다 현실적으로 다가왔던 순간이기도 했다. "네놈이 진짜 나와 인연이 닿는다면…… 방금 전 내가 펼쳤던 초식 중 하나라도 기억하겠지. 그걸로 평생 네 입을 다물거라 생 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뒷말이 채 들리지도 않았는데 무진진인의 기척이 사라졌다. 아마도 바람처럼 신형을 날려 사라졌으리라. 선주혁은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무진진인의 말 중에 담겨진 의미를 파악치 못할 그가 아니었다. 생각은 나지 않지만 언젠가 무협지에서 이런 내용을 본 적이 있 었다. 무작스레 패면서 초식을 전수하는……. '젠장! 죽도록 두들겨 맞으며 본 초식을 어떻게 기억해내란 말이야?' 어찌 보면 의도한 바대로 절정의 고수에게 가르침을 받는 기연 을 겪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선주혁은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오 히려 뒤통수를 맞았다는 생각만 들었다. 공격을 막기 위해 애를 써 봤지만 자신이 무슨 소설 속의 천재도 아닐 진데 한 번 본 것 을 모두 기억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생색만 내고 자신의 입을 다물게 한 무진진인의 심계 가 소름끼치게 끔만 느껴졌다. '이런 젠장! 그 엉터리 작가가 만들어낸 캐릭터의 머리가 나보다 좋다는 거야?' 선주혁은 얼어붙은 땅바닥에 누운 채 자신의 생각을 전면적으로 수정해야할 필요성을 느꼈다. 미래를 알기 때문에 이 바닥(?)에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으리라 확신하고 장밋빛 미래를 그린 것은 오 산이었다. 소설을 읽을 때 단순, 무식하고 멍청하다고만 여긴 캐릭터의 행 동과 자신이 별반 다르지 않을뿐더러, 그 캐릭터들의 행동이 자신 의 사고범주를 넘어설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차가운 산바람을 맞으며 누워 있는 선주혁의 눈에서 의욕적인 빛이 떠오르기 전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멍청한 글쟁이보다 못하다는 건 말이 안 돼지. 두고 보자, 그 자식이 엉터리로 만든 캐릭터보다 내가 뛰어나다는 것을 반드 시 보여주고 말테니!' 때 아닌 승부욕에 불타오르는 선주혁이었다. Vol 4. 땅바닥에 쓰러져 있던 선주혁을 발견한 것은 종운엽(宗雲燁)이 었다. 처음 선주혁이 이 엉터리 소설 속에서 의식을 차렸을 때 부 산을 떨던 여드름투성이의 소년이었다. 선주혁은 자신의 부상에 대해 그저 산비탈에서 굴렀다고만 했 다. 청풍에게 두들겨 맞은 것보다 극심한 부상이었음에도 다들 시 큰둥하게 넘어갔다. 워낙 존재감이 없는 선주혁이기도 하거니와 원래 멍청한 녀석이 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오직 정우재만이 간간히 갈굴(?) 뿐이었다. 누운 자세에서도 선주혁은 운공조식에 힘을 썼으며 이전보다 심 한 부상임에도 빠르게 회복할 수 있었다. 거동이 가능해지면서부 터 그의 무공 기초 익히기는 계속되었다. 신웅지회가 불과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을 때에 이르러서 선주혁 은 대주천을 행하는 데에 성공했고, 스스로 만족할 만큼 육양수의 전초식을 전개할 수 있게 되었다. "후!" 육양수의 마지막 초식을 전개한 후 입정환원(入定還原)의 자세 로 호흡을 고르는 선주혁. 절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정우재의 목소리가 그의 귀를 파고 들었다. "너, 신웅지연에서 육양수로 버텨볼 생각이냐?" 한심하기 그지없다는 듯한 정우재의 시선에 선주혁은 발끈할 사 이도 없었다. '응? 그게…… 아!' 그제야 선주혁은 자신도 신웅지연에 출전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설 속에서 선주혁은 자신의 실력의 십분의 일도 발휘하지 못한 채 망신을 당하는 것으로 나온다. "널 신웅지연에 출전시킨 것은 정현사백님의 실수야. 괜히 망신 을 자초하신 거지." 정우재는 자신의 할 말만 하고 휙 하니 선주혁을 지나쳐갔다. 선주혁은 주저 없이 그의 등 뒤를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뻗어 올렸다. '그나저나 큰일 났군. 아직 이 몸이 가진 실력을 제대로 다 익히 지도 못했는데……, 정말 이대로 출전했다가는 개망신만 당하겠는 걸.' 이대로 가다간 소설 속의 선주혁과 다를 게 없었다. 대책을 세 우기에 남은 시간은 너무나 촉박했다. 다급한 마음에 그의 발걸음 은 절로 장서고를 향하고 있었다. 육양수 이후에 자신의 몸이 익 힌 무공을 하나라도 더 배우두기 위함이었다. 신웅지연. 곤륜파와 청해파의 후기지수들이 서로의 실력을 겨루고 발전을 도모하는 일종의 비무대회였다. 연무장에 설치된 비무대 주위를 둘러싼 곤륜파의 젊은이들의 얼 굴을 다소 상기되어 있었다. 곤륜산의 차가운 바람이 그들의 얼굴 을 붉게 달아오르게 만든 것은 아니었다. 사문의 명예를 걸고 비 무에 임해야한다는 각오가 역력히 드러난 표정이었다. 이틀 전에 곤륜산에 오른 청해파의 젊은 고수들은 곤륜파의 신 진들에 비해 다소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아직까지 곤륜파가 구파 일방의 일석을 차지하고 있다지만 그 뿐이었다. 최근의 곤륜파는 인재의 부족이 확연했고, 실전 경험의 부족으로 이해 가파른 몰락 의 길을 걷고 있었다. 오늘 이전의 세 번에 걸쳐 청해파의 신진들 이 곤륜파의 후진들을 눌렀다는 사실에 그들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오늘의 승부에서도 승리를 확신하게끔 만들었고, 그들의 표정에서는 자신감과 여유로움이 넘쳐나고 있었다. 강호를 누비며 실전을 닦은 자신들이 산에 틀어박혀 초식만을 익힌 곤륜파의 애 송이들에게 패할 리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곤륜파의 장문인인 정명진인의 간략한 연설과 신웅지연의 비무 규칙에 대한 설명이 끝나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무림의 영웅을 꿈꾸는 젊은 무인들의 함성은 곤륜산의 수많은 봉우리에 메아리쳤다. 신웅지연은 첫 비무를 중시 여겼다. 양측의 사기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선발은 각 파의 후 진 중 가장 실력이 뛰어난 자가 나서기 마련이었다. 곤륜파의 후진을 대표해 비무대에 오른 것은 남지학이었다. 이 비무의 승패를 미리 알고 있는 선주혁이었지만 그는 높이 솟 아 오른 비무대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무림 인가의 실전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징소리가 울리고 청해파의 선발인 주용백(周龍白)과 남지학이 포권을 취해 서로의 예를 갖췄다. 두 사람 다 맨손이었다. 자칫 부상자가 속출해 양파의 화기(和氣)가 상할 것을 염려해 비무에서는 무기를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선공을 취해온 것은 청해파의 주용백이었다. 그는 자신감 넘치 는 동작으로 남지학의 가슴을 향해 강하게 일권을 내질렀다. 일견하기에도 바위를 가루로 만들 수 있을 정도의 위력을 가지 고 있어 보였다. 이른 바 청해파가 자랑하는 만천권(滿天拳)의 일 초였다. 남지학은 경쾌하게 보법을 전개해 주용백의 일권을 흘리려 했 다. 주용백은 그런 남지학의 반응을 예측하고 있었다는 듯 재차 주 먹을 뻗었다. 신속한 공격에는 여전히 패도적인 기운이 담겨져 있 었다. 쉴 새 없이 공격을 쏟아내는 이유는 선기를 잡으려 함이었 다. 실전에 있어 선기를 잡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 잘 알고 있 는 그였기 때문이다. 남지학은 물이 흐르는 것과 같은 동작으로 계속해 보법을 전개 했다. 워낙 신속하고 빠른 움직임이라 보는 이의 시선이 어지러울 정도였다. 경공(輕功)의 조예에 있어 남다른 자부심을 보이는 곤륜파의 특 성이 잘 드러나는 광경이었다. 주용백은 침착하게 일권, 일권을 뻗어냈고 남지학은 화려한 몸 놀림만으로 상대의 공격을 와해시켜가고 있었다. 남지학의 몸놀림이 워낙 화려하고 경쾌한지라 연속적인 공격을 당하고 있음에도 전혀 수세에 몰려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두 사람의 싸움을 눈이 빠져라 구경하는 선주혁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말아 쥐었다. '죽인다! 진짜 죽인다!' 남지학의 멋진 동작과 무시무시한 주용백의 공격은 그가 여태껏 보아온 어떤 싸움보다 멋졌다. 서로 간에 짜고 하는 레슬링 따위 와는 박진감 자체가 비교가 되지 않았고, 늘 뒹굴기만 하는 이종 격투기도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저 억지로 비교해 홍콩 영화의 장면이 떠오르긴 했으나 생생 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현장감 때문에 그 역시도 부족한 바가 많았 다.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게 강 건너 불구경이고 그 다음이 싸움 구경이라더니 과연 그랬다. 선주혁은 넋을 잃고 남지학과 주용백 의 비무를 구경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한 순간 선주혁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내가 지금 웃고 즐길 때가 아니잖아?' 불현 듯 자신이 처한 상황을 깨달은 것이다. 잠시 후면 와이어도 없이 허공을 붕붕 날아다니는 저 인간을 상 대로 싸워야 할 판이었다. 넋 놓고 싸움 구경을 할 때가 아닌 것 이다. 지난 시간, 열심히 원래 이 캐릭터가 가진 실력을 자신의 것으 로 만들려 노력했다. 발을 구르면 3미터는 족히 뛰어오르는 자신 을 보며 놀라기도 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소설 속에서 선주혁의 상대는 청해파에서도 뛰어난 자질을 보이 는 놈으로 되어 있었다. 선주혁이 가진 바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 도 승부를 점칠 수 없는. 소설에서는 선주혁의 여린 마음 때문에 망신을 당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고, 지금은 채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기에 망신을 당할 판이었다. 눈앞에서 휙휙 소리를 내며 주먹을 내지르고 피하는 것을 보니 더욱 자신이 없어졌다. 저런 인간들을 상대로 어떻게 싸운단 말인 가? 자칫 뼈가 부러지고 내상을 입어 몇 달 동안 침상에 누워 천 장만을 바라보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식은땀이 흘렀다. '젠장! 부상이 회복되지 않았다고 말하고 기권해 버릴까?' 남지학이 본격적으로 반격을 시작하면서 비무대 위의 열기가 점 차 고조되어 갈 때 선주혁이 고민하는 바였다. "우와와!" "멋져요, 사형!" 난데없는 함성소리에 선주혁은 화들짝 자신만의 생각에서 깨어났다. 어느새 남지학이 주용백을 눕히고 곤륜파의 첫 승을 따낸 것이다. '좋아들 하지 말라고. 이걸로 끝이니까.' 남지혁이 승리를 거둔 후 곤륜파의 제자들은 줄줄이 패한다. 결 국 이번의 신웅지연 역시 청해파의 승리로 막을 내리는 것이다. 결과를 알고 있는 선주혁이었기에 남지학의 승리를 시큰둥하게 받 아들였다. "아주 벌벌 떨고 있군, 그래. 그렇게 겁나면 사백님께 가서 기권 하겠다고 말씀을 드리라고." 남지학의 승리에 모두가 기쁨에 겨워 환호성을 지르고 있음에도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선주혁을 보고 한 말이었다. 시끄러운 와중에서 선주혁은 그 음성의 주인공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누가 떨고 있다고 그래요?" "누군 누구야, 겁쟁이 선주혁이지. 보기에도 애처로우니까 가서 말씀드려. 도저히 비무대에 올라갈 용기가 없다고 말이야." 기묘한 호선을 그린 입매를 만들어내며 이죽거리는 정우재였다. 선주혁은 발끈해 언성을 높였다.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후회가 물밀 듯 밀려왔다. 안 그래도 어떻게 하면 비무대에 오르는 것을 막아볼까 싶었던 그였는데 정우재의 밉살스런 몇 마디 말에 발끈해 버린 것이다. '젠장! 또 당했다.' 엉터리 소설가가 꾸며놓은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또다시 휘둘려 버렸다고 생각한 선주혁. 당장이라도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시간은 그야말로 쏘아진 화살처럼 빠르게 흘러갔다. 남지학의 승리 이후 두 번에 걸쳐 청해파의 승리가 돌아간 후 선주혁의 이름이 불려졌다. 어느새 그의 차례가 돌아온 것이다. 멋도 모르는 사형제들은 선주혁의 건투를 기원하며 응원의 목소 리를 높였다. 선주혁은 마지못해 비무대에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비무대에 오른 선주혁은 눈을 동그랗게 떠야했다. 마주한 상대의 체구가 엄청나게 장대했던 것이다. 그야말로 타 고난 무골이었다. 철환이라는 캐릭터의 체구도 결코 작은 것이 아 니었는데 마주한 놈은 그보다도 훨씬 컸다. 차갑기 이를 데 없는 곤륜산의 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깨 부터 드러낸 그의 팔에는 우람한 근육이 꿈틀거렸다. 'X됐다.' 선주혁은 당장 울상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매정한 징소리와 함께 상대가 양 손을 모았다. 선주혁도 포권을 취했다. "아하핫! 잘 해봅시다, 형씨. 친목을 도모하는 잔치니까…… 서 로 살살…… 하하하핫!" 애써 친근한 어조로 말을 건네 본 선주혁에게 돌아온 것은 솥뚜 껑만한 주먹이었다. 고양철(高揚鐵)이라는 이름의 상대는 가차 없 이 주먹을 내지른 것이다. 반사적으로 몸이 움직였다. 제대로 익히지 않았던 보법이 절로 펼쳐진 것이다. 어떻게 상대의 공격을 피했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상대의 주먹은 숨 쉴 사이 없이 몰아쳐오고 있었던 것이다. 선주혁은 애써 지난 며칠간 익힌 보법을 펼쳐보려 했다. 손으로는 육양수를 전개하면서. 실전이라는 긴장감 때문인지 꽤나 익숙하게 익혔다고 생각한 육 양수의 초식조차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보법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결국 몇 번 피하지도 못한 채 제 스스로 발이 꼬이며 선주혁은 비무대 위를 뒹굴었다.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심지어는 곤륜파의 제자 중에서도 웃는 사람이 나왔다. '이게 무슨 개망신이냐?'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려 했지만 절로 얼굴이 달아올랐다. 상 대의 공격에 적중 당한 것도 아니고 자기 혼자 생쑈를 하다가 넘 어졌기 때문이다. '이대로는 안 되겠는걸?' 생각보다 실전에서 무공을 쓰는 것이 쉽지 않았다. 초식을 순서 대로 펼쳐내는 것과는 확연히 달랐던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일어나 자세를 갖출 때까지 기다리는 상대. 그를 바라보는 선주혁의 눈이 빛을 발했다. 그리고 선주혁의 몸이 가볍게 뛰기 시작했다. 선주혁의 이상한 행동을 보고 여기저기서 술렁이기 시작했다. 곤륜파가 신법을 장기로 한다지만 저처럼 촐싹 맞게 뛰어다니는 무공이 있을 리 없었다. 선주혁은 지금 스텝을 밟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남자라면 누구나 익힌 태권도. 선주혁 역시 더 이상 맞고 살지 않겠다며 육 개월 간 태권도를 배운 적이 있었다. 어설프게 익힌 육양수보다는 차라리 써먹기 좋 은 태권도로 상대하는 게 낫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그는 경쾌한 스텝을 밟으며 상대의 주변을 돌았다. 내공을 익혔기 때문인지 스텝을 밟는 속도는 빨랐고 몸도 훨씬 가벼웠다. '진즉 이렇게 할 걸.' 비록 몇 달 배우지 않고 때려치운 태권도지만 지금의 몸이라면 뭔가 다를 것 같았다. 상대가 어이없어 하는 표정을 지을 그 때 선주혁의 발이 떠올랐 다. 무릎을 접어들어 올린 후 강하게 뻗어지는 다리. 앞차기였다. 쾌속하고 위맹한 발차기의 위력에 놀랐는지 상대의 표정에 변화 가 생겼다. 빠르게 보법을 펼쳐 발차기를 피해냈지만 꽤나 놀란 듯 했다. 그 표정을 확인한 선주혁의 얼굴에 자신감이 떠올랐다. 원래부터 태권도의 발차기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이 엉터리 소설 속에서도 먹힐지 모른다는 희망이 생 긴 것이다. 선주혁의 발이 다시 한 번 떠올랐다. 고양철의 옆구리를 향해 뻗어지는 발. 그는 손바닥으로 선주혁 의 발을 막으려했다. 동시에 다시 반대편 옆구리를 향해 날아가는 발. 나래차기였다. 고양철는 이번에도 손바닥으로 선주혁의 공격을 막아냈다. 공격을 막아낸 고양철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발차기의 위력이 강력했기 때문이다. 단순하고 변화가 없긴 했지만 그만큼 빠르고 파괴적인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곤륜파에 이런 류의 각법(脚法)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는 그였다. 뛰어난 신법을 바탕으로 한 수공(手功)과 검법(劍法)이 자랑인 곤륜파가 아니던가. 그러나 그게 다였다. 상대의 공격이 의외성이 다분했기에 약간 놀랐을 뿐 무공을 익 힌 그에게 있어서 이처럼 단순한 각법이 먹힐 리 없었다. 그는 침착하게 표정을 바꾸고 만천권의 초식을 전개하기 시작했 다. 두꺼운 팔뚝에서 짐작되듯 그의 일권에는 선주혁이 내지른 발길 질에 못지않은 힘이 담겨져 있었다. 선주혁의 상대의 무지막지한 공격에 연신 스텝을 밟으며 뒤로 물러서야만 했다. 캐릭터 자체가 탄탄한 무공을 익혔기에 빠른 동체시력을 가지고 있어 버티고 있을 뿐, 원래 자신의 몸이었다면 첫 주먹에 피를 토 하고 나뒹굴었으리라. 선기를 잡았다고 확신한 상대가 큰 동작으로 주먹을 날리는 순간. 선주혁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한발을 중심으로 몸을 회전시켰다. 커다란 원을 그리고 상대를 향해 날아가는 발. 이른 바 회전축이었다. 위맹한 기운을 펄펄 날리며 날아가는 발을 고양철은 한 팔을 들 어 막았다. 착실하게 수련해온 내력과 타고난 신력을 믿는 것이다. 그러나 고양철은 두 걸음이나 주춤거리며 물러서야만 했다. 선주혁의 다리에 담겨진 힘이 그만큼 대단했던 것이다. 마치 몸을 띄워 발을 날리는 선풍각(旋風脚)을 마주한 느낌이었 다. 상대가 비틀 거리는 모습을 확인한 선주혁은 쾌재를 부르며 가 위차기를 시도했다. 이참에 승패를 결정지으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양철은 나름대로 풍부한 실전을 경험한 청년이었다. 상대의 갑법이 기묘한 위력을 지녔다는 것을 파악한 그는 힘으 로 마주하지 않고 다리가 뻗어오는 방향으로 손을 움직여 힘을 죽 였다. 그것으로 승패는 정해졌다. 선주혁의 빠른 발차기는 몇 번에 걸쳐 이어졌지만 워낙 단순한 동작의 반복인지라 고양철의 손에 번번이 가로막혔다. 그리고 고양철의 일권이 선주혁의 어깨를 강타했다. 선주혁은 단 한 번의 주먹에 실 끊어진 연처럼 날아가 비무대의 끝부분에서 뒹굴었다. 곤륜파 제자들의 안타까운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아찔한 통증에 하마터면 정신을 잃을 뻔했다. 이대로 그냥 누워버릴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저 덩 치랑 싸우는 것은 무리였다. 쇠망치 같은 주먹질 한 방에 이 모양 인데 만약 급소라도 맞는다면 즉사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생겼 다. 차라리 이 정도에서 패배를 인정하고 끝을 내는 것이 좋을 듯 했다. 마음을 굳힌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한 사람의 얼굴이 그의 눈 에 들어왔다. 입 꼬리를 당겨 웃는 정우재였다. 그는 그것보라는 듯, 한심하기 짝이 없다는 듯한 시선으로 자신 을 보고 있었다. 무엇인가 목구멍을 울컥 치밀어 올라왔다. 'X새끼!' 억지로 욕을 씹어 삼킨 선주혁의 눈이 고철양을 향했다. '내 근성이 뭔지 보여주지.' 선주혁은 정우재에게서 비롯된 모욕감을 강한 투지로 삼아 고철 양쪽으로 신형을 날렸다. 두 발이 땅에서 떨어진 상태로 몸을 옆으로 비트는 선주혁. 기대했던 이상의 완벽하고 빠른 이단옆차기였지만 고철양은 가 볍게 신형을 움직여 공격을 피해냈다. 큰 동작 뒤에 따라오는 치명적인 허점. 그것을 놓칠 고철양이 아니었다. 콰앙 비무대가 무너질 듯 강하게 진각을 밟은 고철양이 패도적인 일 권을 내질렀다. 땅에 착지한 선주혁은 등이 따끔거릴 정도의 패도적인 기운을 느끼고 다급한 마음에 몸을 굴렸다. 의도하지 않은 나려타곤(懶驢打滾)의 전개. 관전하는 양측의 태도가 극명하게 갈라졌다. 곤륜파에서는 눈살을 찌푸렸으며, 청해파에서는 폭소가 터져 나 왔다. 당사자인 선주혁은 뒤늦게 무협에서 땅바닥에 몸을 굴리는 것이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기억해냈다. 하지만 그도 잠시뿐이었다. '내가 원래부터 정도의 무림인이냐? 이기면 장땡인거야!' 스스로를 합리화시키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 는 정색을 하고 다음 일을 우선적으로 고민했다. 태권도의 발차기는 상대에게 약간의 혼란을 야기했을 뿐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한계가 있어 보였다. 아무리 이 캐릭터의 내공을 실어 빠르고 위력적인 발차기를 한다 해도 손 의 움직임보다 빠르긴 쉽지 않았고, 상대는 밥만 먹고 무공만 익 혀온 무림인이다. 몇 달 동안 어쭙잖게 배운 기술로 어찌해 보기 를 바라는 것은 무리였다. 약간의 후회가 남았다. 좀 더 결정적인 계기가 왔을 때 발차기를 했었어야 했다. 아니, 상대가 조금이나마 동요를 했던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여세를 몰아갔어야 했다. 제대로 된 실전의 경험과 뒤를 받쳐줄 실력이 없는 게 한스러웠다. 그렇다고 무작스런 상대의 주먹에 몸을 맡길 수는 없었다. 스치듯 맞은 어깨에 몸이 뒤로 날아가 버리는 주먹이었다. 정통으로 맞는다면 자칫 뼈가 부러지고 내장이 파열될 터.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몸부림을 쳐야할 때였다. 결국 선주혁의 동작은 육양수로 돌아갔다. 그나마 지금까지 전 개할 수 있는 가장 자신 있는 초식이었다. 아까의 경험으로 초식을 처음부터 순서대로 전개하는 멍청한 짓 은 하지 않았다. 거리와 상대의 동작에 맞춰 초식의 순서를 변형 했다. 동작에 따라 자연스럽게 진기가 움직이니 과연 몸이 익히고 있 는 것은 명확했다. 맹렬하고 위력적인 육양수가 전개되자 세 초식 동안 선주혁과 고철양은 팽팽한 국면을 이뤘다. 세 초식이 넘어가면서부터 우세는 결정이 났다. 육양수는 곤륜파의 기초 무공. 다음의 경지로 넘어가는 발판이 될지언정 그 자체만으로 뛰어난 효용을 보기는 어려웠다. 어떤 무공이든 그 성취에 따라 위력이 달라진다고 하지만 얼마 되지 않는 기간 동안 자신의 것으로 만들 겠다고 발버둥 쳤다 해서 높은 성취를 이룰 수는 없었다. 고철양의 권에서 이는 바람소리가 강해질수록 선주혁의 손발은 엉켜들어갔다. 뛰어난 반사 신경인지 이것 역시 몸이 먼저 반응한 것이지 몰라 도 권에 적중 당하는 순간 공격을 간신히 피해낼 뿐 반격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선주혁의 얼굴을 붉게 달아올랐고 이마에서는 땀이 비 오듯 흘 렸다. 땀방울 하나가 눈에 떨어졌다. 쓰라린 감각에 신경이 분산되는 순간. 고철양의 주먹이 공간을 압축해 선주혁의 복부를 강타했다. 퍼억 내장이 목구멍을 밀고 튀어나올 듯한 충격. 아찔한 고통 속에서 와락 치밀어오는 화와 짜증. 어찌된 일인지 이놈의 소설 속에 들어온 이후로 두들겨 맞아 천 정만 보는 신세가 연속된다는 사실이 선주혁을 분노케 했다. 단 한 번도 제대로 저항조차 못해보고 일방적으로 구타를 당할 수는 없었다. 이런 상황에 처하기 전에도 늘 두들겨 맞는 신세가 서러웠던 자신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이런 환상 속에서도 '일방적인 구타'가 자신을 운명처럼 옭아매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눈앞이 깜깜해지는 가운데 선주혁은 손을 내밀었다. 단 한 대라도 상대를 때려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이대로 멍 청한 작가가 만들어낸 되도 않는 캐릭터에게 당하고 주저앉을 수 없다는 오기도 한몫했다. 힘없이 내밀어진 선주혁의 일장은 느릿하게 앞으로 뻗어졌으며 고철양은 나직하게 코웃음을 치며 손을 들어올렸다. 가볍게 선주 혁의 손을 쳐내고 마무리를 지으려는 것이다. 그의 굵은 팔이 선주혁의 손바닥을 쳐내려는 순간. 선주혁의 손이 허공에 나선을 그렸다. 자신의 팔이 선주혁의 손을 쳐올릴 것을 의심치 않았던 고철양 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선주혁의 일장이 자신의 가슴에 와 닿았다. 퍼억 일장에 담겨진 진력이 강맹하지 않았기에 내상을 입지는 않았 다. 그러나 무인이 내지른 일장에 담겨진 힘 자체가 없는 것은 아 니었다. 강한 충격을 받은 고철양은 세 걸음이나 뒤로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우와와와와왓!" 곤륜파의 젊은 제자들은 금방이라도 피를 토해내고 뒤로 날아갈 것 같았던 선주혁이 외려 반격을 가하자 함성을 질러댔다. 평소 너무나 존재감이 없었던 선주혁이었기에 그들의 느끼는 감흥은 더 욱 컸다. 앞서 있었던 승부에서 연달아 패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비무대 위의 상황은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흘러가고 있 었다. 상대가 기묘한 일수를 전개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철양의 임전 태세가 달라졌다. 만천권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마음을 버린 것이다. 순식간에 기도가 바뀌고 눈빛이 달라졌다. 선주혁이 간신히 호흡을 잇고 진기를 바로잡을 그 시점에서 고 철양의 맹공이 시작되었다. 팡 팡 팡 허공에서 울려 퍼지는 위험한 음향. 압축된 공기가 일순 팽창하는 듯한 그 소리는 고철양의 주먹 끝 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전력을 다하는 그의 자세를 그대로 드러내 는 동작은 맺고 끊음이 정확했고 그로 인해 요란한 소리가 발생하 고 있었다. 한편 선주혁은 내심 속이 타오르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아까 지독한 통증 중에 손을 내질렀다. 거의 무의식적이고 발작 적인 동작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현재 자신이 느끼고 있는 격렬한 통증 속에서 본 어떤 손짓을 그대로 따라했다. 무진진인이 자신을 무작스레 패던 그 수법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상상치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 상대의 방어를 피해 정확 히 원하는 부위를 가격한 것이다. 비록 진기의 운용법을 몰랐기에 충분한 파괴력을 내지는 못했 다. 억지로 끓어오르는 진기를 억누르며 선주혁은 다음 동작을 기억 해내려 했다. 진기의 운용을 모르더라도 일단 반격의 실마리를 잡 은 것이다. 하지만 세상일이 다 그렇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환상 속에서조차 선주혁의 뜻대로만 일이 풀리라는 법은 없었다. 방금 전까지 명확히 떠올랐던 무진진인의 동작이 아무것도 생각 나지 않는 것이다. 어설프게 손을 내밀었다가는 사정을 보지 않는 역습에 곤란을 겪을 것은 자명한 일. 공기 중에서 굉음을 터뜨리 는 고철양의 주먹에 정통으로 맞으면 그걸로 끝이었다. 선주혁은 답답한 심정으로 몸을 이리저리 날리며 애만 태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흉험해지는 고철양의 공격을 피하는 데 는 한계가 있었다. 즉흥적이고 단순한 동작으로 간신히 공격을 피 해내는 선주혁의 움직임은 이미 고철양의 머리에서 파악이 끝난 상태였다. 고철양의 주먹이 선주혁의 움직임을 봉쇄해 조여오기 시작했다. 다급해진 선주혁은 아예 등을 돌려버렸다. 엄청난 주먹을 그대로 맞을 수 없다는 생각에 무의식중 취해버 린 행동이었다. 퍼억 산비탈을 구르는 바위덩이에 등을 가격당한 듯한 통증. 선주혁은 땅바닥을 박차 최대한으로 몸을 앞으로 날리며 충격을 줄였음에도 눈앞이 아득해지는 고통을 느껴야만했다. 등 뒤에 더해진 힘을 이기지 못해 다시 한 번 비무대를 데굴데 굴 구르는 선주혁. 그의 예기치 못한 동작은 많은 이들의 조소를 받았지만 의외성 으로 인해 고철양의 후속공격을 막는 효과가 있었다. 그리고 선주 혁은 다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당금 전의 일격을 맞는 순간 무진진인의 동작 하나가 더 생각났다. '젠장! 꼭 맞고 나서 기억이 날 게 뭐람.' 지지리도 재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는 것을 파악한 선주혁이었지 만 그렇다고 꼭 나쁜 것은 아니었다. 이 수법을 쓰면 일단 상대를 한 대라도 때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상이 깊지 않으니 거동에는 지장이 없었다. 슬쩍 고개를 돌렸다. 팔짱을 낀 채 그럴 줄 알았다는 식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정우재 와 눈이 마주쳤다. 뿌드득. 선주혁의 악다문 이빨이 갈리는 소리였다. 그는 애써 들끓는 진기를 가라앉히며 두 눈을 빛냈다. 어릴 때 고아원에서 민철이 놈을 향해 날렸던 박치기가 생각났 다. 늘 자신을 비롯한 약한 아이들을 괴롭히던 덩치 큰 놈. 허구헌 날 맞기만 하다 박치기를 날려 그 자식의 코피를 터뜨렸을 때의 쾌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비록 그 박치기 한 방을 날리고 평소의 세 배 이상을 두들겨 맞았지만 후련했던 그 느낌만 은 억누르지 못했다. 지금도 그런 심정이었다. 정우재라는 놈에게 일장을 날리지 못 할 바에야 눈앞의 상대를 한 대라도 더 때려야 속이 시원할 것 같 았다. 아니 반드시 그러고 싶다는 생각이 전신의 근육을 꿈틀거리 게 했다. 진기를 잘 다스리고 급소만 피한다면 저 우악스런 주먹에도 죽 지 않을 수 있다는 자신감에 용기도 조금 생겼다. 그걸로 충분했다. 고아원을 나와 소매치기로 밑바닥을 살아온 하류인생의 독기가 고개를 처든 것이다. 그것이 선주혁이 생각하는 근성이었다. 더구 나 엉터리 작가가 써 놓은 캐릭터와 자신이 똑같아 질 수는 없었 다. 비록 질 때 지더라도 원래의 선주혁이란 캐릭터처럼 벌벌 떨 다 내려가 X밥 신세가 되고픈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리고 비무대 위에서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선주혁이 기묘한 일장을 뻗어내 고철양을 치고 고양철의 주먹이 선주혁을 강타했다. 예외 없이 선주혁은 비무대의 바닥을 나뒹굴고 다시 발딱 일어 나 일장을 내질렀다. 똑같은 상황이 수차례에 걸쳐서 반복되었다. 고철양은 이상하게도 느릿한 선주혁의 일장을 피해내지 못했고, 선주혁도 고철양의 주먹질을 그대로 몸으로 받았다. 급기야 사람들은 고철양이 상대를 주먹을 일부러 피하지 않는 거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 느릿한 장공을 피하 지 못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어차피 위력이 없는 일장이니 무 시하고 선주혁을 계속 두들겨 패는 거라 생각했다. 그것은 곤륜파 제자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명확히 승패가 가려진 승부를 내지 않고 끝까지 선주혁을 조롱 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상대의 공격을 막을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은 비무의 자세가 아니었다. 그것은 곤륜파를 향한 조롱이 며 모욕이었다. 선주혁의 입에서는 급기야 선혈이 콸콸 넘쳐흐르기 시작했고 눈 동자도 풀렸다. 와중에도 그는 방금 전의 일격에 떠오른 동작을 펼쳐내려 하고 있었다. 서 있을 힘조차 없는 다리에 억지로 힘을 넣어 걸음을 옮기는 그의 모습은 처절하다는 느낌마저 자아냈다. 그를 향해 조소를 보내던 청해파 제자들의 입가에서 미소는 사 라졌다. 고철양을 향해 쏟아지는 선주혁의 독기어린 시선에 압도당한 것 이다. 선주혁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들의 비무대 위의 상 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실력이 한참 떨어지는 사제와의 대련에 서도 맥을 못 추던 선주혁이었다. 그런 선주혁이 지금 보여주는 투지와 호승심은 실로 의외였다. 처음부터 예상된 패배였지만 매번 다시 일어서는 선주혁의 놀라 운 투지는 곤륜파의 제자들을 고무시켰다. 여기저기서 그를 응원하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한 번만 더, 라는 소리가 다수를 이뤘다. 비무대에 올라 곤륜파의 명성에 누를 끼치는 듯한 엉터리 초식, 요상한 발길질,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나려타곤, 그리고 상대에게 등을 보이는 행동 따위는 더 이상 그들의 기억 속에 없었다. 혈기왕성한 곤륜파의 제자들은 상대에게 굴하지 않는 투지를 불 태우는 선주혁의 뜨거운 마음을 전해 받고 있었다. 그것은 도복을 걸쳐 입은 기명제자든 속가제자든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젊은 피 는 선주혁의 처절한 승부욕에 공명했다. 함께 끓어오르는 것이다. 지금의 상황에서 선주혁이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하 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선주혁의 일장이 고철양의 몸에 한 번만 더 적중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응원의 소리는 선주혁이 스스로 되뇌는 그대로였다. 눈앞의 상대를 정우재와 겹쳐보는 선주혁. 그가 되뇌는 한마디. 'X새끼, 한 대만 더 맞아라.' Vol 5 'X발.' 눈을 떠 보이는 것은 천장이었다. 두들겨 맞다가 정신을 잃은 것이 벌써 세 번째다. 거지같은 작가가 만들어낸 상황 속에서 벌써 세 번이나 드러누 운 것이다. 문득 이게 정말 소설이라면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읽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 엉터리 소설을 읽으며 선주혁이라는 캐릭 터의 멍청함을 그 얼마나 욕했던가? 열이 확 치밀었다. 있지도 않을 독자를 생각하며 고함이라도 치고 싶었다. 'X발! 너도 이 안으로 들어와 봐!' 부질없는 짓이다. 자신이 소설 속으로 들어왔을 리도 없을뿐더러 누군가 그걸 읽고 있다는 상상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우습기까지 했다. '얼마동안 정신을 잃고 있었을까?' 청해파의 제자 놈의 면상을 손바닥으로 후려친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통쾌한 그 순간 현기증을 느꼈다. 아찔한 순간과 함께 무엇인가가 자신의 강하게 후려친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통을 느낄 사이도 없었다. 그길로 의식을 잃었으니. 아마도 청해파의 덩치 큰 그 놈이 무식하게 자신을 때렸으리라. 누운 채로 몸을 일으켜 보려 했다. 역시나 전신에서 통증이 밀려왔다. 꽤나 고통스럽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최 소한 뼈는 상하지 않은 것 같았다. "정신을 차린 게냐?" 인자함을 담은 목소리에 선주혁은 고개를 돌렸다. 검은 수염을 길게 기른 청수한 용모의 도사가 보였다. "사…… 부님." 선주혁은 익숙지 않은 호칭을 입에 담았다. 이곳에 들어 온(?) 후로 두 번밖에 보지 못한 사부, 정현진인이 었다. 선주혁은 정현진인이 그다지 좋은 사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 고 있었다. 그렇기에 피하고자 했고, 정현진인 역시 심약한 속가제 자 하나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에 상호 더욱 소원해진 것이다. 그런 정현진인이 속가제자들이 거하는 숙소까지 찾아온 것이다. '대체 무슨 꿍꿍이냐?' 선주혁은 경계하는 마음부터 품었다. "일어날 필요 없다. 내상(內傷)은 거의 다스린 듯하니 이제 곧 거동에 지장이 없을 게다. 어서 빨리 회복해야지." 정현진인의 음성은 자애롭기 그지없었다. 선주혁은 저도 모르게 경각심을 풀어버릴 뻔 했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 자세히 묘사된 정현진인의 성품은 선주혁이 쌓은 마음의 벽을 견고히 했다. 정현진인은 원래 욕심이 많은 사람이다. 현 곤륜파의 장문인인 정명진인과 사사건건 부딪치는 이유 역시 젊은 날 장문의 자리를 놓고 겨뤘던 감정을 잊지 못하기 때문이라 했다. 처음 선주혁을 제자로 거둔 것은 그가 가진 골격이 뛰어난 편이 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천성적으로 유약한 심성을 가져 더딘 성취 를 보이는지라 거의 내치다시피 한 것이다. 사실 그와 같은 성품이라면 도가(道家)와의 인연이 있음을 고려 해 기명제자로 받아들여 수양을 쌓게 하면 될 터였다. 한데도 불 구하고 정현진인은 완전히 관심을 끊다시피 해 방치해둔 것이다. 그런 그가 선주혁은 신웅지회에 출전시킨 것은 자신이 거둔 기 명제자중에 내세울만한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속가제자 중 그 나마 제일 나이가 많고 배운 바가 많은 선주혁이기에 출전이 결정 된 것이다. 명색이 사문의 명예를 짊어지고 비무를 하는 데 자신 의 제자가 한 명도 출전하지 못한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기에. '대체 아저씨가 왜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거야? 사람 헛갈리게.' 자애롭게 자신을 바라보는 정현진인의 시선 속에서는 그런 욕심 을 읽어낼 수가 없었다. 혹여 소설의 캐릭터와 성격이 다른 인물 이 나타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 이상한 초식은 어떻게 된 게냐?" "네?" "각법과 장법 말이다. 내가 너한테 그런 초식을 전해준 적이 없거늘……." 정현진인의 일시 간 매섭게 빛났다. 너무나 찰나여서 선주혁이 눈치 채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게……." 선주혁은 잠시 망설였다. 분명 태권도와 무진진인이 전해준 장 법을 말하는 것이리라. 무진진인의 일이야 그렇다 쳐도 태권도의 발차기를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흠……. 곤륜의 제자가 요사한 무공을 익혔을 리는 없고……." "……!" 정현진인이 말하는 바는 선주혁도 잘 알고 있었다. 소위 말하는 명문대파의 제자가 타파의 무공을 함부로 익혀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는 마음이 다급해졌다. 자칫 엉뚱한 죄를 뒤집어쓰고 치도곤을 당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무진 사숙조를 뵈었습니다." "무진 사숙?" 정현진인의 몸이 앞으로 살짝 기울었다. 얼굴도 다소 상기된 듯 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정현진인은 신색을 회복하고 차분한 어조 로 물었다. "허어! 좀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는 어르신이거늘……. 그렇다면 네가 사용한 기이한 수단들은 결국 무진 사숙께서 가르침을 내려주신 것이구나." 선주혁은 약간의 시간을 두었다가 입을 열었다. "네." "무량수불……! 네 복이 실로 크구나. 무진 사숙께서는 제자도 거두지 아니하시거늘……. 그분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크나 큰 복이라 할 수 있지." 정현진인은 제자가 맞이한 기연을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 이렇게 좋은 양반을 왜 그 엉터리 작가는 욕심 많은 말코도사로 그려 놓은 거야?' 선주혁이 내심 시종일관 엉터리인 작가를 욕하고 있을 때 정현진인이 말했다. "그럼, 몸조리를 잘 하고 있거라. 편히 쉴 수 있도록 내 조치를 취해 놓으마." 정현진인은 아끼는 제자가 충분히 회복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해 주고는 방을 나섰다. 정현진인이 방을 나선 이후 한 소년이 뛰어 들어왔다. 여드름투성이의 종운엽이었다. "사형, 일어나셨군요." 꽤나 반가운 듯한 얼굴. 선주혁은 고개를 갸웃 거렸다. 그가 알기로 종운엽의 저 표정, 선망과 존경을 가득 담은 저와 같은 표정은 늘 남지학을 향해 있었다. 사형제간의 예우를 잃지는 않았지만 자신에게는 거리를 두고 지내온 종운엽이었다. "사흘이나 정신을 잃고 계셨어요." "아…… 그래?" "네." 종운엽은 고개를 끄덕인 후 반짝이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봤다. '이 자식이 왜 이래? 부담스럽게.' 어딘가 선망의 의미를 담은 듯한 시선이 선주혁을 불편하게 했다. "사형, 그날은 정말 멋졌어요!" "응?" "신웅지연 말이에요. 지금도 여러 사형제들은 모두 그 얘기를 하느라 난리에요. 사형을 다시 봐야겠다면서 말이죠." "아…! 그거야 뭐……." "마지막에 사형이 청해파의 그 자식 얼굴에 일장을 날리는 순간 은 정말이지! 캬! 전 눈물을 다 흘렸다니까요." 종운엽의 목소리는 점차 고조되어 가고 있었다. 그제야 선주혁은 대충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이 패하 긴 했지만 그렇다고 소설 속의 캐릭터처럼 완전히 망가진 것은 아 닌 모양이었다. "지금 제 또래들은 사형의 얼굴을 보고 싶다고 난리에요. 제게 사형에게 전해달라고……." 흥분한 종운엽의 수다는 계속 되었다. 선주혁은 그의 수다를 들으며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 다. 어쨌거나 엉터리 작가가 만들어낸 캐릭터보다 한 걸음 나아갔 기 때문이다. '이제 시작일 뿐이야!' 더 이상 작가에게 당할 수 없다는 결심을 불태울 그 때 선주혁 은 가슴이 철렁하는 느낌을 받았다. '정현진인!' 불현 듯 정현진인이 자신에게 베푼 친절에 의심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간 소 닭 보듯 자신을 쳐다보던 정현진인이었다. 갑작스 레 이곳까지 찾아와 자애로운 사부의 면모를 보여준 이면에 뭔가 다른 의도가 있을 수 도 있었다. 그저 제자의 선전이 기꺼워서? 물론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한번쯤 되짚어볼 필요가 있었다. 아무리 엉터리 작가가 마구 날려 쓴 글이라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음모가 깔려있기 마련 이다. 이놈의 글을 쓴 작가가 만들어낸 인물이 욕심 많고 음흉하 다면 한 번쯤 의심을 해야 한다. 덜컥 믿고 헤헤 거리다간 또다시 뒤통수를 맞을 공산이 컸다. 그렇다면 뭘까? 단순히 기대하지 않았던 제자의 선전을 치하하기 위함이라면 소 설 속의 캐릭터와 자신이 방금 전에 본 정현진인과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뭔지는 몰라도 일단은 경계를 해야겠군. 순수하지 않을 수도 있단 말이지…….' "사형, 아직도 많이 아픈 거예요?" 선주혁이 미간을 찌푸리자 종운엽이 물었다. "아! 아니야. 잠시 뭐 좀 생각하느라고." "하핫. 빨리 회복하세요. 사형을 보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을 얼마나 많다고요." "응, 그래. 고맙다." 선주혁은 욱신거리는 팔을 들어 종운엽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종운엽은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싸움 한 판 보고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을 보면 확실히 이 소설 속의 캐릭터들은 단순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녀석들한테 더 이상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더욱 강하게 드는 선주혁이었 다. "후우……." 진기를 단전으로 모은 후 선주혁은 길게 호흡을 내뿜었다. 세 차례에 걸쳐 운기행공을 마치니 한결 몸이 가뿐해지는 것이 확연히 느껴졌다. 어찌 보면 신기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글로 읽을 때와 실제로 몸이 겪는 것에는 꽤 큰 차이가 있었다. 걸음을 옮기기도 버거웠던 몸이 숨을 고르고 진기를 유통시킨다고 해서 이토록 빠르게 회복된다는 것은 일종의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이런 방법을 현대로 가져가서 가르치면 떼 돈 벌겠군.' 문득 허무맹랑한 상상을 하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하긴 그럴 필요도 없지. 지금의 내 몸이라면 어지간한 스포츠에서 아주 날아다닐 테니." 엄청난 동체 시력, 빠른 몸놀림과 점프력, 그리고 무지막지한 힘까지. 지금만으로도 현대인들은 상상할 수 없는 능력을 가진 셈이다. 이 정도라면 올림픽 전 종목을 석권하고도 남을 거다. 프로로 나 설 수 있다면 돈 방석에 앉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쩝!" 아쉬움인지 부질없음을 새삼 깨달은 건지 모를 입 다심이 끝났 을 때 연공실 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곤륜파에서 경험하기 힘든 소란이었다. "저쪽이야!" "잡아!" 어지럽게 뒤섞이는 목소리들. 그 순간 선주혁의 손바닥이 자신의 이마를 강하게 쳤다. "이런!"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어깨와 옆구리 등이 마구 쑤셔왔다. 당장 문을 박차고 튀어나갈 것 같던 선주혁은 더 이상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지금 나가봐야 이미 소용없지. 제길……. 정신을 잃고 있어서 오늘이라는 생각을 못해버렸네." 선주혁은 이 개념 없는 소설 속에서 큰 발단이 되는 하나의 사 건을 기억해냈다. 도난. 지금에서는 곤륜파에 장서고라는 도서관과 같은 곳이 있고, 그 곳이 털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소설 속에서는 그저 도난으로 만 다루고 있었다. 무협에서 가장 흔한 캐릭터라고 볼 수 있는 신투(神偸)가 곤륜 파의 무공비급을 털어간 것이다. 몰락을 해가고는 있다고 하지만 명색이 구파일방의 일좌를 차지 한 곤륜파였다. 사문의 비급이 도둑맞았다는 것을 일대의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소문이라도 날라 치면 무림이 발칵 뒤집힐 것이 다. 수많은 무림인들이 곤륜파를 향해 손가락질을 할 것이고, 그에 못지않은 숫자가 신투가 훔친 비급을 빼앗기 위해 난리를 피울 것 이다. 그렇기에 곤륜파는 긴급히 비급을 회수하기 위한 추적대를 조직 한다. 그 중에는 선주혁과 남지학이 포함되어 있다. 바야흐로 주인 공의 강호출두인 셈이다. "흠…… 어찌 보면 잘 된 일일 수도 있군." 미간을 찌푸리고 상황을 정리하던 신주혁이 툭 내뱉은 말이었 다. 원래는 신투가 비급을 훔치러 올 것을 대비해 그것을 막아보려 했다. 그 일로 공을 세워 천덕꾸러기 대접에서 면해보려 한 것이 다. 그러나 곤륜파에서는 신투가 비급을 훔치러 올 것이라는 것을 자신이 어떻게 알았는지부터 해명을 요구할 것이다. 달리 설명할 방법도 없었다. 그렇다고 홀로 나서서 신투를 막아설 수도 없는 일이었다. 공을 세워보겠다고 무리하게 설치다 죽는, 소설 속의 멍청한 것들은 수 도 없이 보아왔다. 결국 신투가 비급을 훔쳐가는 것을 내버려 두는 것이 좋을 수도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자신이 무림으로 나가게 되는 셈이었다. 어차피 언제 제 정신으로 돌아갈지 모를 상황이라면 이 안에서 최대한 적응해 살아야 한다. 무림에서 적응하는 방법이란 간단하다. 강해지는 것. 주인공에게 닥칠 기연은 넘쳐흘렀다. 신투가 비급을 훔치지 않 는다면 소설의 스토리도 바뀔 거다. 그렇게 되면 기연과도 거리가 멀어진다. 주인공이 겪게 될 기연의 일부라도 자신이 차지한다면 이쪽 바 닥(?)에서 떵떵거리며 사는 데는 지장이 없을 거다. 최소한 두들겨 맞고 사는 인생과는 거리가 멀어질 터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환상인지 꿈인지 몰라도 이 속에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면 그 것 또한 나쁘지 않을 일이었다. 평생 정신을 차리지 않는 채라면 지금의 이 경험 자체가 현실이 될 것이므로. 게다가 자신이 이 소설의 주인공을 대신해 무림의 정의를 세우 고 영웅이 될 이유는 없지 않은가? 기연의 부스러기를 주워 자기 잇속 차릴 만큼 챙겨 먹으면 될 일이었으므로. 그렇다면 반드시 주인공과 함께 곤륜산을 나서야했다. "좋아, 그럼 무림에서 잘 먹고 잘 살기 작전을 시작해 볼까? 엉터리 작가가 만들어 놓은 스토리에 엿을 먹여주지." 허공을 향해 중얼거리며 스스로 만족한 웃음을 짓는 선주혁이었다. 선주혁의 무림에서 잘 먹고 잘 살기 작전은 수립 다음 날부터 틀어지기 시작했다. 곤륜파에서는 비급을 훔친 범인이 신투라는 것을 망설이지 않고 지목했다. 그것은 바로 신투가 범행장소에 남기는 고유의 흔적, 소변 때문이었다. 신투는 자신이 물건을 훔쳐낸 장소에 반드시 소변을 본다. 미리 보아둔 소변을 부어 놓는 것인지 아니면 실제로 소변을 보 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소변이 남아있는 도난사건은 반드시 신투의 소행이었다. 곤륜파에서는 도난 다음날 즉각적으로 추적대를 구성했다. 선주혁이 아픈 몸을 이끌고 자원했음은 물론이다. 무림에서 잘 먹고 잘 살기 계획은 실천에 옮기려는 것이다. 한데 선주혁의 사부인 정현진인이 선주혁이 추적대에 참여하는 것을 말리고 나섰다. "이제 막 부상에서 일어난 녀석이 어딜 간단 말이냐?" 자애로우면서도 지엄한 말이 있을 뿐이었다. 예상치 못했던 태클(?)에 선주혁은 속으로 욕을 바가지로 퍼 부 었지만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 "사문의 보물이 사라진 마당입니다. 이 정도의 부상쯤은 아무것 도 아니니 사부님께서는 허락해 주십시오." 부상에도 불구하고 비급을 찾겠다고 나서는 선주혁의 태도는 다 시금 추적대의 구성을 위해 연무장에 모인 곤륜파 젊은 제자들의 환호를 받았다. 정현진인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젊은 제자들의 이처럼 선주혁이 추적대에 참가하는 것을 반기리라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허헛, 사제. 주혁의 마음씀씀이가 기특하지 않은가? 실로 곤륜 파의 기상을 보여주는 것 같으이." 정명진인이 대견하다는 듯 선주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장문사형, 신투의 신출귀몰(神出鬼沒)함은 천하에 널리 알려진 것입니다. 한시라도 빨리 비급을 회수해야할 이 때, 주혁의 부상은 짐이 될 뿐입니다." 정현진인은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빠른 회수가 이동 속도에 있다고 보지는 않네. 만약 대응하는 속도만이 중요하다면 여태껏 신투가 활보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일 세. 그보다는 포기하지 않고 끈기 있게 신투의 종적을 찾을 수 있 는 투지가 필요하다 싶으이. 그리고 주혁은 며칠 전 그러고도 남 을 만한 투지를 보여주지 않았는가?" 정명진인은 부드럽게 정현진인을 달래고자 했다. 신투를 잡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비급을 회수하기 위해서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출발부터 사기를 드높일 필요가 충분했다. 그리고 그 열쇠가 되는 선주혁의 참가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정현진인의 미간에 세로로 패인 골이 깊어졌다. 사사건건 장문 인의 말에 반대하고 나섰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다른 제자나 사형제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문인의 말씀에 과연 일리가 있군요." 정현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반응에 선주혁의 안색이 밝아졌다. "그렇다면 저도 추적대에 참가해 손을 거들도록 하겠습니다. 장 문인의 말씀을 들으니 제가 너무나 안이하게 대처한 것 같군요." 정현진인의 말은 실로 의외였다. 여태껏 정현진인은 문중의 일 보다는 자신의 무공을 증진시키는 일에 더 주력해 왔다. 정명진인 이 장문직을 수행하는 동안 그의 실력을 넘어서겠다는 의도였다. 그런데 그가 이토록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는 이유까지야 몰랐다. 하지만 그의 가세로 추적대의 힘이 한층 강화되는 것은 자명했다. "오! 그래주겠는가?" 정명진인은 반색을 표했고 정현진인은 단호히 대답했다. "네." '대체 왜 저러는 거지?' 어쩐지 정현진인의 추적대 지원이 자신과 무관하지 않다는 느낌 을 받는 선주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현진인의 추적대 가세는 소설 속에서는 없는 내용이었다. 그 변수가 상황을 어떻게 바꿀지 몰라 한편으로 불안하기까지 했다. 신투를 쫓기 위한 추적대는 네 개의 조로 이뤄졌다. 각 조는 스 무 명으로 구성이 되었으며 선주혁이 알고 있는 바대로의 구성이 었다. 남지학, 선주혁, 정우재 등이 한 조가 된 것까지는. 다만 조를 책임지는 조장이 바뀌었다. 정현진인이 한사코 선주혁 등이 포함되어 있는 조를 맡은 것이 다. '설마 저 인간이 끼어들었다고 스토리가 통째로 바뀌거나 하지 않겠지? 어차피 그 일이 있을 테니 말이야.' 정현진인과의 동행에 내심 불안해하는 선주혁이었다. 정현진인이 이끄는 조는 다른 조에 비해 이동이 더딘 편이었다. 방향도 파악이 안 된 입장에서 무조건 중심부로 이동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아직까지 완 전히 몸이 회복되지 않은 선주혁에 대한 배려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강호초행에 흥분해 있는 젊은 제자들의 맥을 빼놓 는 일이기도 했다. 도난 사건으로 인해 시기가 당겨진 강호출두. 특히 속가제자들의 흥분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한 자루 장검을 손에 쥐고 천하를 오시하는 영웅을 꿈꾸며 고된 수련을 감내해온 그들이 아닌가? 그들의 머릿속에는 비급 자체보다 강호에서 겪을 수많은 모험이 더욱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비급을 찾는 동안 악명 높은 마두를 만나 그들을 베고, 어려움 에 처한 사람을 도아 명성을 드높이는 것. 그와 같은 꿈을 꾸느라 추적대에 속하는 순간부터 상기된 얼굴을 감추지 못했던 그들이었 다. 그런데 시작부터 이처럼 맥 빠진 행보인지라 그 흥분도 시들해 져가고 있었다. "좀 서둘러야 하는 거 아닌가?" 정우재가 마치 유람이라도 나온 마냥 느긋하게 이동하는 일행을 보며 조그맣게 투덜거렸다. "사부님께서 개방(??)에 도움을 요청하신 걸로 알고 있어. 그 들에게서 일단의 실마리라도 얻어낸 후 정확한 방향을 짚어 가는 게 옳은 판단인 거 같아." 남지학이 정현진인이 조를 이끄는 방법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안 그래도 경신술(輕身術)로 이름이 드높은 신투잖아요. 이렇게 꾸물대다 천리 먼 길로 사라져 잠적한다면……?" 정우재는 포기하지 않고 고집을 세웠다. "신투가 명성을 떨친 지 벌써 삼십 년이 넘었다고 들었어. 아무 리 위험한 물건을 훔쳐낸 이후에도 잠적한 적은 없지." "쳇! 그래도 이건 너무 맥 빠지는 일인 걸요. 전 혹여나 정현사 백께서 저 얼간이를 배려하느라 일부터 추적을 늦추는게 아닌가 싶은 겁니다." 정우재는 급기야 본심을 드러냈다. '얼간이'라는 말을 할 때 그 의 시선은 선주혁을 향해 있었다. "사숙께서는 사문의 중사(重事)를 처리하고 계시잖아. 사사로운 감정을 끼워 넣으실 분이 아니니 그런 소리 함부로 하지 마." 남지학이 단호하게 결론을 지었다. 하지만 정우재의 불만스러운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신웅지연 이후 곤륜파에서 선주혁을 대하는 태도는 확연히 변했 다. 여태껏 자신에게 괄시와 구박을 당하던 선주혁이 의외를 쾌거 를 이룬 것이다. 그와 같은 일이 있다고 해서 정우재가 선주혁을 대하는 태도가 변할 리 없었다. 외려 더욱 견고히 선주혁을 무시 하는 마음을 키울 뿐이었다. 걸음을 옮기는 내내 정우재의 못마땅한 시선이 선주혁의 뒤통수 에 꽂혔다. "거 참, 왜 이렇게 뒷머리가 간지러운 거야?" 주변의 경관에 넋을 잃고 두리번거리는 선주혁이 문득 중얼거렸다. 타타탁 마른 나뭇가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타올랐다. 춤추듯 일렁이는 불빛이 여기저기서 어둠을 밝혔다. 보다 빨리 몸을 회복하기 위해 한차례 조식을 마친 선주혁은 자 신의 옆에 앉아 있는 청년을 발견했다. "청일(靑日)사형?" 청운은 정현진인의 기명제자였다. 즉, 선주혁과 한 사부의 밑에 서 수학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도복과 도관을 갖춰 입은 날카로운 눈매에 하관이 길게 빠진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선주혁의 입장에 서 보면 멋들어진 도호와는 달리 썩 좋은 인상이 아니었다. "그래, 몸은 이제 다 회복 된 것이냐?" "네. 이젠 다 나은 것 같습니다." 선주혁은 팔을 한 번 크게 휘두르며 말했다. "흠……, 다행이구나. 이제 사부님께 빨리 이동해도 괜찮다고 말씀을 드려야겠군." 한껏 목소리를 낮춰 말하는 청운이었다. 어찌 생각해보면 혼자 중얼거린 것처럼도 들릴 정도. 그러나 금 세 눈을 옆으로 돌려 선주혁의 눈치를 살피는 청일이었다. 하나 선주혁은 그의 눈동자가 움직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청일의 올해 나이 스물 둘. 도사의 신분으로 자라온 세월을 고 려해보면 이와 같은 수작에 능숙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더구나 선주혁은 밑바닥에서 눈칫밥을 먹으며 스물 두 해를 살 아온 경력이 있지 않은가? '임마, 포커 칠 때 눈 돌아가면 그걸로 끝인 거 모르냐?' 선주혁은 청일의 어설픈 수작을 내심 비웃으며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그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분명했다. 정현진인이 자신을 위해 일부터 추적의 속도를 늦춰왔다는 말이 다. 청일을 통해 그것을 알리고 사부의 극진하기 이를 데 없는 제 자 사랑을 생색내는 것이고. 문제는 대체 왜 정현진인이 이런 어설픈 수작까지 피워가며 자 신을 감동시키려는가에 있었다. 목안에 걸린 가시처럼 정현진인과 의 동행이 신경 쓰이는 선주혁이었다. '젠장, 내게서 뭔가 바라는 게 있다는 건가? 원래 선주혁이라는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보물이 있었나?' 애써 기억을 더듬어봤다. 하나 떠오르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선주혁이라는 캐릭터가 이 소설에서 맡은 역할은 멍청한 짓을 계 속해 주인공을 곤란에 빠뜨리는 것뿐이었다. '조급해할 필요 없겠지. 머지않아 본색을 드러낼 테니까. 뭔지 몰라도 내게 해로운 수작이라면 호락호락 당하진 않겠다.' Vol 6. 청일의 묘한 언질을 들은 다음 날부터 정현진인이 이끄는 조는 강행군을 시작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경신술을 이용해 사천(四 川)에 접어들었다. 사천을 통해 중원의 중심부로 신투의 행적을 쫓는 것이 이들이 맡은 임무였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아직까지 신법(身法)에는 익숙지 않은 선주혁 때문에 그다지 속도를 높일 수는 없었다. 정현진인은 아직까지 선주혁의 몸이 완벽히 회복되지 않았다 여기고 그의 이동 속도에 맞춰 무리 를 이동시켰고, 시간이 지날수록 선주혁의 신법은 발전해 점차 빠 르게 움직일 수 있었다. 사천성 석집(石潗) 부근의 한 마을에 이르렀을 때 정현진인은 객잔을 정해 휴식을 명했다. 이곳에서 개방에서 전해주는 정보를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마을에 하나뿐인 객잔은 곤륜파의 제자 들로 금세 북적였다. 보름을 넘어선 기간 동안의 노숙에 지쳐있던 곤륜파의 제자들은 환호성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차가운 흙바닥이 아닌 침상에 올라 휴식을 취하는 것이 이토록 행복한 일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 것 이다.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과 오랜만에 몸을 씻을 수 있다는 것 역시 그들에게는 기쁨이었다. 강호의 경험이 있는 몇몇 을 제외한 젊은이들의 표정에는 그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 다. 기쁜 표정을 짓기는 선주혁 역시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의 표정에는 다른 의미의 기쁨이 담겨져 있었다. 자신의 더딘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늦지 않았다. 이곳에서 벌어 질 사건을 놓치지 않게 된 것이다. 이제부터가 중요했다. 지금부터는 남지학과 떨어져서는 안 됐다. 자신이 이 상황에서 아는 것은 상당부분 주인공이 위주였다. 결국 여기서 소설의 주인 공과 떨어지면 자신도 알지 못하는 상황을 맞이할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긴장을 늦춰서는 안 되는 것이다. '대략 내일 밤쯤이나 일이 벌어질 테니 오늘은 푹 쉬어 볼까?' 청일과 한 방을 쓰게 된 선주혁은 여장을 풀며 느긋한 표정을 지었다. 당분간은 이렇게 편한 휴식을 취하지 못할 것이기에 그는 서둘러 씻고 쉬려 했다. 하나 이번에도 상황은 그가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더운 물에 몸을 씻고 유명한 사천의 음식을 먹은 후 침상에 누 워 눈을 붙이는 그를 누군가 깨운 것이다. "사부님?" 야심한 밤에 자신을 깨운 것이 정현진인이라는 사실에 선주혁은 순간 당황했다. "깊이 자고 있었느냐?" 부드러운 목소리와 표정으로 묻는 정현진인의 말에 선주혁은 재빨리 잠을 몰아냈다. 긴장을 늦춰서는 안 될 일이 벌어질지도 몰랐다. "아닙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재빨리 몸을 일으켜 앉았다. '이제야 저의를 드러내는 건가?' 선주혁은 정현진인의 의중을 파악할 준비를 했다. "잠도 깰 겸 잠시 바람이나 쐬자꾸나." 정현진인은 조금의 서두름도 보이지 않았다. 선주혁은 내심 감감탄하며 정현진인의 뒤를 쫓았다. '책으로 읽을 때는 멍청해 보이던 것들이 어째 하나같이 만만치가 않냐?' 초봄의 서늘한 바람이 홑옷의 틈새를 헤집고 지나갔다. 책에 쓰 인대로 내공을 익히니 과연 한서(寒暑)에서 자유로운가 보다. 예전 이라면 몸이라도 한 번 부르르 떨었을 터인데 선주혁은 그저 서늘 한 느낌이 들었을 뿐이었다. 저녁하늘은 뿌연 안개로 인해 달빛조차 흐렸다. 곤륜산에서 바라보는 밤하늘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그간 이 사부에게 서운한 마음이 있었더냐?" "네?" "어찌 생각해보면 네가 그런 마음을 품었을 수도 있을 거라 생각이 되더구나." 선주혁을 향해 은은하게 던져진 눈빛. 고아원을 떠난 후 자신보다 연장자에게서는 한 번도 저런 시선을 받아본 적이 없는 선주혁. 그는 무엇인가 심장을 움켜쥐는 느낌이 들었다. 정현진인은 선주혁에게 시선을 고정시키지 않았다. 짧은 순간 주었던 시선을 회수해 하늘로 돌렸다. 선주혁은 어쩐지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가 사부에게 서운한 마음이 있었다 해도 이해한다." "아, 아닙니다. 제자가 어찌……." "후후훗, 인지상정(人之常情)이라. 네가 도문에 들어선 것도 아닐 진데 어찌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겠느냐? 정이란 주고받는 것임을……." "……." 선주혁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소설 속에서도 선주혁은 사부의 냉담한 시선에 괴로워했다. 자신의 부족한 능력 때문에 사부의 체면에 손상을 입힌다고 생각한 것이다. 물론 그 소설 속의 캐릭터와 현재의 선주혁이 같은 이유로 서운한 감정을 느낄 리는 없었다. 지금의 선주혁은 무슨 놈의 사부가 제자를 이따위로 팽개쳐 두는 건지에 대해 화를 낼 뿐이었다. 어찌되었건 정현진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침묵을 지키는 것이다. "하나 이 사부의 의도를 너는 알아야할 것이야. 처음 너를 제자로 거뒀을 때……. 이 사부가 네게 거는 기대가 얼마나 컸는지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선주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경험한 바는 아니지만 알고 있는 것은 분명했으므로. "이후 네 유약한 심성을 보고 사부는 생각했느니라. 내 품에 싸안기만 해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그래서는 평생이 가도록 한 없이 나약한 너인 채로 일 테니까." 선주혁이 생각했던 것과 정현진인의 말은 많은 차이가 있었다. 정현진인의 말은 일견 합당했다. 하지만 딱히 짚을 수는 없어도 분명 무엇인가 모순된 바가 있었다. 그럼에도 정현진인의 부드러운 음성과 자애로운 눈빛은 선주혁 의 마음을 마구 흔들고 있었다. 선주혁에게 있어서 정현진인의 말 은 어쩐지 믿고 싶은 그런 내용이었던 것이다. 정현진인은 선주혁의 얼굴에 떠오른 갈등을 읽어냈다. 그는 여 세를 몰아왔다. "사부란 말 그대로 부모인 셈이다. 열 손가락을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있다더냐? 네가 느낀 서운함은 너를 방치했다 생각 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내게 있어서는 크나큰 아픔이었단다." "……!" 정현진인의 말은 선주혁이 오랜 시간 견고하게 쌓아놓은 마음의 벽을 두들겼다. 아니, 강렬한 충격을 줬다고 말함이 옳았다. 부모……. 선주혁에게 있어서는 가장 멀고 먼 단어이자, 가장 가슴 저린 의미가 아니던가? '젠장! 하필 그런 이야기를……!' 선주혁은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드러내는 데에 익숙지 않기 때 문이다. 정현진인의 입가에 빠르게 미소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이 사부는 신웅지연의 너의 모습을 보고 말아 쥔 주먹을 떨어 야만 했다. 유약하기만 했던 네가 그런 투지를 보여주다니……! 그 간의 아픔을 모두 잊기에 충분할 정도였다. 누가 뭐래도 넌 내 제 자가 아니더냐?" 정현진인의 손의 선주혁의 어깨 위에 올려졌다. 선주혁의 어깨 에서부터 전해져오는 미세한 떨림을 정현진인은 느낄 수 있었다. '이딴 유치한 말에…… 쳇!' 애써 흔들리는 자신을 부정하려는 선주혁이다. 하지만 앞선 정 현진인의 발언은 이미 선주혁의 벽을 심하게 훼손한 상태였다. 지 금에 있어서 선주혁의 저항은 실로 부질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 었다. "그동안 고생이 많았다. 힘들었을 텐데…… 꿋꿋이 잘 참아주었구나." "아…… 닙니다. 부족한 제자가 사부님께 괜한 심려를 끼쳤을 뿐이지요." 선주혁은 저도 모르게 입을 열고 말았다. '하! 내가 이런 낯간지러운 말을……?' 스스로 말을 하고 스스로 쑥스러워하는 그였다. "아니다. 이 모든 게 그간 네가 홀로 부단히 노력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 무진 사숙 역시 그런 너의 노력을 어여삐 여겼음이고." "네?" "무진 사숙께서 네게 무공을 전수하신 것 말이다. 네 노력이 가 상했으니 그와 같은 가르침을 내려주셨을 게다. 어찌 생각해 보면 사숙께서 나보다 네게 더 큰 도움이 되었구나." "그건 아닙니다. 어찌 사부님의 은혜를 다른 분과 비교할 수 있 겠습니까?" 선주혁의 말은 단호했다. 실상 무진진인의 가르침은 가르침이라 여길 수조차 없지 않았던 가? 무식할 정도로 패고 난 후 입막음을 하고 생색만 낸 심계에 치 를 떨었던 선주혁이었다. 무진진인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눈곱만큼 이라도 있을 리 없었다. 그렇기에 강하게 정현진인과는 다르다 결 론지을 수 있었던 것이다. "허헛. 네가 그리 생각해주니 이 사부는 더 이상 바랄게 없구나." 만면에 미소를 가득 지은 정현진인. 선주혁은 어려움 속에서 꿋꿋이 자라 준 아들을 보는 아비의 시 선이 저럴 것이라 생각했다. 평생을 두고 이런 감정을 느껴보지 못할 거라 여겼건만……. 막연하게 상상만 해 왔던 부친상. 선주혁은 시야에서 그동안 그려온 부친상과 정현진인의 모습이 겹쳐졌다. 그 순간 정현진인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한데 이 사부와는 달리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구나." "……?" "신웅지연에서 보여준 네 무공이 무진 사숙께서 전해주신 거라 내 해명을 했건만, 납득치 못하는 사람들이 있더란 말이다." 정현진인의 말에 선주혁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부지불식간에 전개한 장법은 무진진인이 전해준 수법이 분명했다. 하지만 각법이라 펼친 것은 태권도가 아니던가? 곤륜파의 존장들 이 자파의 무공조차 모를 거라 여긴 것은 너무나 안이했던 것이 다. "아무리 생각해도 곤륜파에는 그와 같은 장법이 없다는 것이 여 러 사형제들의 판단이다. 나야 제자인 너를 의심치 않는다만 그들 은 여전히 고개를 갸웃 거리는구나." '응? 장법?' 선주혁은 정현진인이 말하는 바가 태권도의 발차기가 아니라 장 법이라는 사실에 희망을 품었다. 장법이야말로 무진진인이 가르쳐 준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제자가 장법의 이름도 모르지만 무진 사숙조님께서 가르 쳐 주신 무공입니다." 선주혁의 말을 정현진인은 기다렸다는 듯 빠르게 받았다. "알고 있다. 네가 어찌 이 사부에게 거짓을 고하겠느냐?" 정현진인이 자신에게 보이는 신뢰에 선주혁의 입가에 웃음이 맺 혔다. 따지고 보면 정현진인도 의심을 할 수 있을 상황이었다. 무 진진인이 곤륜파의 제자들이라 해도 잘 모르는 절기를 전해줬다면 정현진인이라도 오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무협지에서는 그런 오해가 흔하게 발생한다는 것을 선주혁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선주혁은 정현진인이 더욱 고맙게 생각됐다. "본시 곤륜파의 무학은 그 뿌리가 깊고 방대하기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중원무학의 발원을 소림이라 하지만 곤륜의 역사 역시 그에 못지않음이다. 그러니 천년을 두고 내려온 수많은 절기들을 두루 익히지 못함은 당연한 일. 무진 사숙이 아니라면 그와 같은 절기를 찾아내지 못했을 것이야." 정현진인은 차분하게 자신이 선주혁의 입장을 십분 이해한다는 것을 주지시키고 있었다. "그러니 네가 펼친 현묘(玄妙)한 장법이 곤륜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의심을 할 수밖에……." "그렇군요." 선주혁은 신음하듯 말을 흘렸다. 정현진인의 말은 분명 일리가 있었다. 천년동안 무수한 천재들이 고안해낸 절기들을 모두 안다 는 것은 확실히 무리가 있었다. 곤륜파의 제자라 해도 난생 처음 보는 절기가 수두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 사부는 그 장법이 이름조차 모르고 있구나." 정현진인은 여태 보여준 진지함과는 달리 눈에 띠게 무신경하게 말했다. 지나가는 투로 가볍게 묻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저 역시도 장법의 이름은 모릅니다." 정현진인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스쳤다. 그러나 빠르게 신색을 회복한 그는 외려 선주혁을 위로하듯 말했다. "흠……. 무진 사숙께서는 원래부터 형식이나 절차를 중시 여기 시는 분이 아니다. 어차피 곤륜의 절기이거늘 이름을 알고 모르고 가 무에 중요하겠느냐? 너는 사숙조에 대한 감사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야." "명심하겠습니다, 사부님." 모든 면에서 자신을 위해주는 사부인지라 선주혁의 어조는 신실 함을 담아 공손하기만 했다. "후우……." 정현진인은 문득 고개를 살짝 숙이며 긴 숨을 내뱉었다. "네가 익힌 바와 같은 절기가 본문(本門)에 차고도 넘칠 진데 곤륜파의 위상은 날로 기울어만 가니 실로 안타까운 일이구나. 하 다못해 이 사부만 해도 네가 전개했던 초식에 대한 이해가 전무하 니……." 무공을 익힌 자의 시야는 넓다. 뿌연 안개에 가려진 하늘에 정 현진인이 볼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시선이 하늘로 향해있다 해 정현진인이 선주혁의 모든 것을 보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그 때 일장 이렇게 뻗는 것 같았건만……." 정현진인은 선주혁을 보지 않은 채 허공을 향해 성의 없이 손을 내뻗었다. 분명히 느리기 이를 데 없는 일장이었고 정자배(正字輩) 의 고수들의 안목은 날카롭기 그지없었으나 실제로 선주혁의 일장 을 제대로 따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선주혁이 자신의 어설픈 동작을 보고도 아무런 말이 없자 정현 진인은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이런 식이라면 마치 무당파의 무공과 흡사하구나. 그러니 다들 오해를 하고도 남음이지……." 말꼬리를 길게 늘이며 선주혁의 반응을 보는 정현진인. 선주혁은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은 채 서 있었다. "네 생각은 어떠냐? 이런 식으로 장을 회전시키며 나가는 것이 무당파와 비슷하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아! 그게 저도…… 어렴풋이 밖에 생각이 안 나는 지라……. 지 금 머릿속으로 정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 이해가 잘 안 가는 부분이 있으면 이 사부와 상의토록 해라. 비록 초식 자체에 대한 이해는 없지만 어차피 뿌리가 같은 곤륜파의 무공이 아니더냐?" "네, 그게 그러니까……." 선주혁은 자신이 기억이 나는 만큼 초식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분명 청해파 놈한테 두들겨 맞을 때는 바로 따라할 정도로 선명하 게 기억이 나던 동작이었으나 막상 다시 펼쳐 보려 하니 쉽지가 않았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정신 차리자마자 제대로 익혀 두는 건 데!' 선주혁의 동작을 보고 있는 정현진인은 처음에는 고개를 갸웃거 렸다. 처음 세 초식 정도는 그럴 듯 해 보였다. 그러나 뒤로 갈수 록 동작은 엉성하고 앞뒤가 맞지 않는다. 결국 정현진인의 이마에 잡힌 주름이 점점 깊어져 갔다. "그게 지난번에 펼친 초식이 맞는 게냐……?" "하핫! 이거 참. 그 때는 너무 명확히 기억이 나더니 지금은 또 기억이 흐릿하군요." 겸연쩍은 표정으로 웃음을 터뜨리는 선주혁. "지금 이 사부를 놀리자는 것이냐?" "네?" 갑작스레 방금 전까지의 자애로움이 사라지고 냉기가 풀풀 날리 는 정현진인의 음성에 선주혁은 적잖게 당황했다. "네가 배운 무공에 도움이 되어 주고자 하는 사부가 아니더냐? 그런데 방금 전의 그 성의 없는 태도는 무엇인 게냐?" 가을 서리같이 차가워진 정현진인의 추궁이었다. 선주혁은 오해를 풀고 싶었다. "아니, 그게 아닙니다. 그 때는 경황중이라 저도 모르게 손 이……." "그만 하거라. 네가 사숙께 절기를 하나 배우고 나더니 이제는 사부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게로구나!" "아닙니다, 사부님. 제자는 절대……." "되었다. 보여주고 싶지 않다면 보여주지 않아도 된다. 너도 알 다시피 실전에서 사용되는 초식은 수천, 수만 번의 고련 없이는 전혀 실효를 거두지 못하는 법. 네 일초, 일장은 매번 청해파의 아 이에게 가격되었음이야. 결국 그만큼의 수련이 있었다는 증거인데 이제 와서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핑계를 대고픈 게냐? 마치 이 사부 가 네게 무공을 구걸하는 듯하구나." 정현진인은 홱 하니 선주혁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선주혁은 가슴이 철렁하여 간절한 목소리로 정현진인을 불렀다. "사부님!" 그러자 정현진인의 걸음이 멈췄다. 그가 앞을 본채 선주혁에게 물었다. "혹여…… 무진 사숙께서 아무에게도 초식을 알려주지 말라고 했던 게냐?" 이전에 비해 한결 부드러워진 음성이었다. 그 따스함에 선주혁은 저도 모르게 솔직히 대답을 했다. "그건 아닙니다. 다만……." "흥!" 정현진인의 나직하지만 차갑기 그지없는 코웃음. 선주혁은 뭔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도 네가 사부를 놀리고자 함이더냐? 내 너의 의사를 알았으니 더 이상 할 말 없다. 깊이 반성함이 없이는 앞으로 날 찾지 마라." 무정한 말만을 남기고 정현진인은 객잔으로 들어가 버렸다. 선주혁은 망연히 그의 뒷모습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비록 일시 간이었지만 정현진인에게서 따스한 애정을 느꼈던 선 주혁이었다. 애써 눈물을 억눌러야할 정도로 가슴을 흔드는 순간 이었다. 그런데 채 하루도 되지 않아 그 정을 놓쳐 버린 것이다. 그의 눈에는 진득한 아쉬움과 당혹감이 그대로 드러났다. 정현진인의 급작스런 태도 변화가 잘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 "젠장, 내가 지금 뭐하는 짓이람? 현실도 아닌데 더 이상 뭘 바 라겠다고……. 어차피 지금 이 모든 게 말도 안 되는 소설 속의 상황일 뿐이잖아…… 응?" 홀로 중얼거리던 선주혁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것은 뭔가에 의해 머리를 강하게 두들겨 맞은 것 같은 충격 때문이었다. 정현진인의 따뜻한 말에 곤륜산의 얼음보다 단단히 굳었던 자신 의 마음이 녹아들었다. 하지만 조금 전 스스로 투덜거린 바대로 정현진인은 실제의 인물이 아니라 엉터리작가가 만들어낸 캐릭터 에 불과했다. 그런 캐릭터에 정을 느끼고 감동을 받은 자신이 우 스웠다. 마음이 차갑게 식자 이성의 작용이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까부터 무엇인가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답답함의 정체 가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기만과 탐욕이었다. 이 엉터리 소설 속에서는 정현진인의 성격을 명확히 규정해 놓 았다. 질투와 시기심에 가득 찬 편협한 인물이라고. 그와는 달리 현 곤륜파의 장문인과 장문의 위를 놓고 다퉜다면 범상한 인물이 아닐 것이다. 그런 정현진인이 여태껏 내팽개쳐 두었던 제자에게 극진한 관심 과 애정을 기울인다. 역시 처음부터 느꼈던 경각심을 그대로 가지 고 있었어야만 했다. 단지 신웅지연에서 제법 그럴 듯한 모습을 보여줬다는 사실만으 로는 정현진인의 변화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결국 그의 행동양식에서 찾아볼 수 있는 변화는 분명한 목적의 식 때문일 것이다. 상황에서 한 걸음 떨어져 생각하면 그 목적은 너무도 명확히 찾을 수 있었다. '무진진인의 무공!' 선주혁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X발, 결국 무공 초식을 얻어내기 위한 수작이었단 말이지!" 그의 손이 말려진다. 강하게 불어넣은 힘 때문에 손바닥에 손톱이 파고든다. 짜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정도의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소설 속의 캐릭터 따위가! 고작 엉터리 글쟁이의 머릿속에서 나온 캐릭터 따위가 날 농락한 거란 말이지!' 비릿한 맛이 느껴진다. 악다문 아랫입술에서 핏물이 배어나오는 것이다. 그럼에도 선주혁은 힘을 빼지 않는다. 평생을 두고 마음속 깊이 감춰둔 그것을 건드렸다. 실제의 영악한 인물도 아닌 가상의 캐릭터 따위가. 감히 자신의 상처를 덧나게 했다. 그렇게 전신에 힘을 준 채 서 있던 선주혁. 문득 실소를 터뜨린다. 실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잠시만 머리를 굴렸으면 어렵 지 않게 그 속셈을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만약 그와 같은 상황을 책으로 읽고 있었다면 당하는 놈에게 욕 을 퍼부었을 것이다. 저런 엉터리 수작에 당할 바보가 어딨냐며 괜히 흥분했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자신이 그 상황에 처해지자 스스로도 믿기 힘들만 큼 쉽사리 넘어가 버렸다. 그 멍청한 행동에 얼굴이 붉어질 지경 이다. 무협지를 읽다보면 천재들이 종종 나온다. 처음에는 그런가보다 하고 읽다가 나중에는 짜증이 치민다. 소 위 천재라는 놈이 멍청하기 짝이 없는 행동을 하는 것을 납득하기 도 힘들었다. 따지고 보면 그 놈이 천재가 아니라 그 놈을 제외한 다른 놈들이 멍청할 뿐이다. 그리고 지금에 있어서 자신은 그 멍청한 놈들 중 하나가 되어 버렸다. '아, X라 열 받네! 글로 읽는 것과 몸으로 부딪치는 것과는 다르다 이거지?' 멍청하다 욕했던 작가의 산물에게 당하는 것도 이제 지긋지긋했다. 그는 더 이상 긴장을 늦추지 않기로 했다. "진짜로! 이젠 진짜로 멍청한 작가 놈에게 안 당한다. 두고 봐, 내가 이 소설을 어떻게 바꿔 놓는지 말이야. 절대 네놈 뜻대로는 안 될 거다!" 스스로에 대한 다짐인지, 정녕 이 상황을 만들어낸 작가에게 들으라 한 말인지 모를 소리였다. Vol 7. 여느 때와는 달리 아침나절부터 선주혁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냉랭하기 이를 데 없는 정현진인의 시선도 개의치 않았다. 소설 속의 상황이라 생각하고 보니 그의 저의는 뻔히 보였다. 아마도 자신으로 하여금 사부에 관해 불손했다는 점을 파고들어 무진진인 의 초식을 전해 받고 싶은 것이리라. 기본적으로 알려주고픈 마음이 없기도 했지만 실제로 그가 명확 히 기억해낼 수 있는 초식은 없었다. 정말이지 신기하게도 모든 초식이 마치 안개에 가려진 듯 흐릿하게만 생각날 뿐이었다. 선주혁은 워낙 엉터리로 꾸며진 상황이니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애써 고심해 봤지만 여전히 정확하게 생각 나는 초식은 없었으므로. 그가 새삼 각오를 다지는 이유는 오후에 있을 사단에 대비하기 위함이다. 그 일을 발단으로 모든 상황이 전개될 것이다. 아차 하 는 순간 그 기회를 놓치면 언제까지 이 거지 같은 소설의 내용에 휘말려 헤어 나올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선주혁은 그런 상황을 절 대 원하지 않았다. 그리고 선주혁이 기다리는 상황이 시작되었다. 객잔의 주렴을 헤치고 나타난 세 명의 사내. 그들의 모습을 보는 순간 선주혁은 마른 침을 삼켰다. '지금부터야!' 선주혁은 은연중에 자리를 옮겨 남지학의 곁으로 향했다. 객잔 에 들어선 세 명의 괴이한 행색 탓에 선주혁을 주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서 옵쇼, 손님." 스무 살을 갓 넘겨 보이는 점소이는 재빨리 사내들 쪽으로 달려 왔다. 좀처럼 볼 수 없는 세 사람의 행색에도 그의 표정에는 일말 의 변화도 없었다. 선주혁은 점소이의 투철한 직업의식에 내심 감탄하다가 점소이 는 점소이여야 한다는 식으로 설정을 해 놓은 작가의 단순함을 비 웃었다. 작가란 놈은 개성 있고, 살아 있는 캐릭터에 대한 개념이 없는 인간이었다. "이쪽으로 앉으십시오." 점소이는 곤륜파의 네 명씩 차지하고 앉은 다섯 개의 탁자를 피 해 한적해 보이는 자리를 권했다. 세 사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자리로 향했다. 그들의 손에 들린 기병(奇兵)을 주목하는 곤륜파의 인물들조차 안중에 없는 듯 했다. "범상치 않아 보이는 자들이군요." 세 사내의 모습을 살피던 청연(靑松)이 목소리를 낮춰 사숙인 정현진인에게 말했다. 정현진인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미간을 찌푸리고 저와 같은 용모를 가진 고수에 대한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강호에는 절정에 달한 고수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중 정 도 고수의 대부분은 검(劍)이나 도(刀) 혹은 장(掌)이나 권(拳)을 사용한다. 간혹 기병을 사용하는 절정 고수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손으로 꼽을 만큼이었다. 이는 기병이라는 것이 신체를 갈고 닦아 스스로를 수양하는 것 보다 살상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었다. 즉, 무공을 익혀 자신을 닦고 나아가 세상을 정의롭게 하고자 하는 정도의 무 인들에게는 적합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기병을 사용하는 무림인은 대개 마도나 사파인 경우가 많았다. 사마(邪魔)의 무리가 무공을 익히는 이유는 강해지기 위함 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강함은 곧 자신의 욕구를 채우는 데 에 이용되곤 했다. 이는 정(正)과 마(魔), 혹은 정과 사(邪)가 양립 할 수 없는 근원적인 차이점이기도 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알 수가 없군. 저 정도의 기도라면 명성이 드높을 텐데……. 사마외도의 무리에 저런 인물들이 있었단 말인가?' 입에 머금었던 차를 삼키며 정현진인은 나타난 세 명이 누구인 지 알아내는 것을 포기했다. 곤륜파의 주목을 받는 세 명은 태양혈이 불쑥 솟아올라 내가고 수임을 짐작케 했다. 기병에만 의지한 어설픈 무리와는 차원이 다 르다는 말이었다. 정현진인과는 달리 선주혁은 세 명이 누구인지 한 눈에 알아봤 다. 소설에서 묘사한 그대로였던 것이다. 허리에 구불구불한 기형의 사검(蛇劍)을 차고 있는 자는 상관정 필(上官貞珌)이었다. 두 눈 사이가 지나치게 넓어 선주혁의 눈에는 정박아의 그것처럼 보였다. 사슬이 달린 두 개의 긴 낫, 쇄겸을 등 뒤에 교차해 맨 자는 탁 고등(卓高嶝)이었다. 삐쩍 마른 몸에 번득이는 안광을 마주하면 절 로 뒷걸음질 칠만한 모습이었다. 보통 사람의 두 배는 족히 됨직한 덩치를 가진 거구의 사내는 영호웅(令狐雄)이 분명했다. 몸집에 걸맞는 거대한 철추(鐵鎚)는 한 눈에도 위맹한 위력을 낼 법 했다. '이제부터 시작인가?'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세 사람을 주시하던 선주혁의 시선이 다시 객잔의 입구로 향했다. 오래지않아 구슬을 꿰어 늘어뜨린 주렴의 사이가 벌어졌다. 자색의 장포를 입은 중년인과 그보다 조금 어려 보이는 두 명이 객잔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중년인의 눈살이 눈에 띄게 찌푸려졌다. 객잔을 가득 메운 곤륜파의 제자들을 발견한 것이다. '크크크, 쥐새끼처럼 몰래 만나려 했는데 이런 작은 마을에 곤륜 파 제자들이 떼거리로 몰려와 있을 줄은 몰랐겠지.' 자신이 알고 있고, 또 기대한 바대로 상황이 돌아가자 선주혁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선주혁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질 때 중년인도 재빨리 표정을 풀 며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이럴 수가! 곤륜파의 정현진인께서 이런 외진 곳에 계실 줄이야!" 객잔의 손님 중에 정현진인이 있는 것을 알아보고는 짐짓 과장 된 동작으로 반색을 표하는 중년인이었다. "무량수불, 불패장(不敗掌) 설용범(雪勇氾) 도우야 말로 여기는 무슨 일로……?" 정현진인 역시 잠시 굳어졌던 표정에 웃음을 불어 넣으며 자리 에서 일어났다. 곤륜파가 비급을 찾아 신투의 행적을 쫓는 것은 극비사항이었 다. 가능한 무림인들과 마주치지 않는 것이 좋았다. 개방에 협조를 요청할 때도 신투의 행적만을 의뢰했을 뿐 자세한 사연을 알리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사천에 들어서자마자 최근 급격히 세를 확장하고 있는 사천 설가의 인물을 만나게 된 것은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정현진인은 노련한 모습을 보였다. 조금의 가식도 찾기 힘 든 반가운 표정을 지어 보이는 것이다. '저런 표정으로 날 속여 먹였다, 이거지?' 설주혁은 정현진인의 가증스러운 표정에 내심 이를 갈았다. 이 소설의 인물들이 이런 식이라면 자신도 그에 못지않은 면모를 보 여주리라 새삼 각오를 다졌다. "저는 가문의 일로 잠시 길을 나섰습니다." 설용범은 두 손을 마주 잡은 채 말했다. 집안일임을 강조하여 더 이상 캐묻는 것을 미리 막고자하는 것이다. 그는 짐짓 놀랍다는 표정으로 곤륜파의 여러 제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분들은 모두가 곤륜파의 젊은 영웅들이시겠군요. 과연……!" "허허, 이제 막 강호에 나선 아이들일뿐입니다. 설 도우의 눈에 차려면 아직 멀었지요." 정현진인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겸양을 표했다. '맘에도 없는 인사치례는 그만하고 빨리 일이나 벌이라고.'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선주혁은 투덜거렸다. "이쪽으로 오셔서 차라도 한잔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현진인은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응? 저건 또 무슨 개X랄이래?' 선주혁은 화들짝 놀랐다. 정현진인이 원래의 스토리와 다른 방 향으로 상황을 이끌려하는 것이다. '거절해!' 선주혁은 설용범을 향해 속으로 외쳤다. "그렇군요. 실로 오랜만이니 차라도 함께해야겠지요." 설용범은 정현진인이 눈치 채지 못하게 기병을 든 세 사람 쪽을 일견한 후 걸음을 옮겼다. '야, 이 자식아! 원래 니가 만나려던 사람을 만나야지! 니 역할 에 충실하란 말이야.' 선주혁이 속으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봐야 설용범이 들을 리 없었다. 원래 스토리상으로 선주혁이 속한 조를 이끄는 것은 정의진인이 었다. 그는 설용범과 친분이 전무하다시피 해 상호 간단한 인사만 을 하고 끝을 냈다. 그런데 상황이 바뀐 것이다. 선주혁은 혹시나 변한 상황으로 인해 스토리가 바뀌지 않을까 싶어 초조해졌다. '저 자식이 설마 정현 말코와 깊은 정이라든가 하는 게 있지는 않겠지? 괜히 봐주거나 하면……?' 정현진인과 담소를 나누는 설용범을 보며 선주혁은 바싹 말라가 는 입술에 침을 발랐다. 그의 손에 땀이 맺힐 무렵까지 정현진인과 설용범의 대화는 끝 이 나지 않았다. 아직까지 입에 익숙지 않는 차(茶)만을 연신 축내 야만 했다. 그가 정현진인이 있는 자리와 상관정필 쪽을 번갈아가며 쳐다보 는 모습을 보고 정우재가 입을 열었다. "무림에서는 그렇게 노골적인 시선을 보내는 거 아니야." "……?" "저쪽에 앉아 있는 사람들 말이야." 정우재는 턱을 살짝 움직여 성관정필이 있는 쪽을 가리켰다. 그 리고는 근엄한 체 하며 다시 말을 이었다. "무림인이 분명한데, 자칫 시선만으로도 오해가 생겨 말썽이 일 어나는 곳이 강호야. 그러니까 눈 조심 해." '말썽이 일어나길 기다리는 거다, 임마!' 자신도 강호 초출인 주제에 마치 노고수나 된 듯 선주혁을 가르 치려 드는 정우재가 선주혁은 못 마땅했다. 사사건건이 자신의 행 동에 태클을 걸고 나오는 것이다. '내가 제대로 기연을 얻으면 너부터 혼쭐을 내줄 테니 기다려라, 쨔샤!' 정우재가 눈치 채지 못하게 그를 흘겨보던 선주혁은 꽤나 시간 이 흘렀음에도 조용한 객잔의 상황을 참기 힘들었다. 결국 그가 이를 악물었다. '젠장! 정 그렇다면 상황은 내가 만든다!' 그의 눈에 한 순간 빛이 나타났다. 하지만 그 빛은 밤하늘의 유성보다 빨리 사라졌다. '그런데…… 어떻게?' 막상 상황을 만들고자 마음은 먹었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가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자신은 설용범이 기병을 든 세 명과 만나 음모를 꾸미고자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고 다짜고짜 일어나 오늘 너희가 꾸미는 음모를 알고 있 다, 라고 외칠 수도 없었다. 설용범이 시치미라도 뗄라치면 한순간 미친놈이 되어버릴 게 분명했던 것이다. '젠장, 책으로 읽을 때는 별의 별 기막힌 생각이 다 나더만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무협지나 판타지를 보다보면 등장인물의 기발한 행동이라는 것 들이 한심할 때가 많았다. 나라면 이렇게 했을 텐데……, 라고 생 각하며 작가들의 한계를 비웃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이런 상황이 닥치자 선주혁은 머릿속에서 아무 것도 떠올릴 수가 없었다. 선주혁이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고 있을 때 정우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움직이는 방향은 객잔의 뒷문 쪽. 아마도 용변을 보러 가는 것이리라. 동시에 유성처럼 사라졌던 빛이 다시 선주혁의 두 눈에 맺혔다. 그리고 자신도 일어나 정우재의 뒤쪽으로 향했다. 사람들을 피해 한적한 곳에 앉아 있던 상관정필 일행은 마침 뒷 문의 근처에 있었다. 그리고 뒷간으로 가기 위해서는 필히 근처를 지나가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정우재가 차를 마시고 있는 상관정필의 옆을 지나치는 순간이었 다. 선주혁은 짐짓 다리가 꼬인 체를 하며 정우재를 옆으로 강하 게 밀쳤다. 무공을 익힌 놈이라 순간적으로 중심을 잡을까 두려워 내력까지 사용했다. 정우재는 예기치 못한 강한 힘에 의해 상관정필 등이 앉아 있는 탁자 위로 쓰러져가고 있었다. 터억 정우재의 몸이 허공에 멈춰 섰다. 아니 버둥대며 중심을 잡으려는 그의 몸을 상관정필의 왼손이 떠받들고 있는 것이다. 그도 잠시. 상관정필은 강한 힘으로 정우재를 밀어냈다. 우당탕. 또 다른 강력한 힘에 의해 반대편 탁자위로 나뒹구는 정우재. '나이스!' 평소 정우재에게 감정이 좋지 않았던 선주혁은 내심 쾌재를 부 르고, 상관정필이 오만하기 이를 데 없는 표정으로 으스스한 느낌 이 드는 음성을 내뱉었다. "곤륜파의 제자라더니……, 무공보다는 걸음마부터 배워야 하는 거 아닌가?" '굿! 멋쟁이 아저씨!' 자신의 의도대로 상관정필이 곤륜파를 자극하자 선주혁은 당장 그에게 달려가 악수라도 해 주고 싶었다. 만약 책을 읽는 독자의 입장이었다면 명색이 고수라는 인간이 이런 단순한 도발에 말려드 냐며 코웃음을 쳤을 테지만 말이다. 홀로 기뻐하는 선주혁과는 달리 상관정필의 발언은 객잔의 분위 기를 급속히 냉각시켰다. 성격이 급한 속가제자 몇몇은 벌써부터 검병(劒柄:검의 손잡이) 에 손을 얹기까지 했다. 그에 정현진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미 세 사람의 기도가 범 상치 않음을 알아본지라 그는 신중한 태도로 말했다. "빈도는 곤륜파의 정현이라 하외다. 제 사질이 실수를 했다고는 하나 도우의 방금 전 발언은 도가 지나치군요." 실로 무림의 명숙다운 태도였다. 여유도 있었고, 허세를 부리지 도 않았다. 비록 마음에 드는 바는 조금도 없는 정현진인이었지만 세 사람 에게 말을 건네는 저 태도는 선주혁을 감탄하게끔 만들었다. "큿!" 정현진인은 아직 말을 마친 상태가 아니었다. 잠시 시간을 두어 말을 이으려는 사이에 누군가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곰과 같은 체구를 지닌 영호웅이 비웃 음을 터뜨린 것이다. "마음에 안 들면 덤비면 되지 저런 점잖은 말투는 또 뭐야? 이 래서 정파의 떨거지들은 고리타분하다는 소리를 듣는 거 아니겠 어?" '아잣! 곰탱이 홧팅!' 선주혁은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절로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금 상황에서 웃음을 터뜨리면 대책이 있을 리 없었다. 영호웅의 말을 들은 정현진인의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 아무 리 수양을 쌓는 도인이라 할지라도 참을 수 있는 한계라는 게 있 는 법이었다. 명색이 곤륜파 장문인의 사제가 정현진인이었다. 아 무리 세가 기울었다고는 하나 평생을 경험치 못했던 모욕을 면전 에서 당한 것이다. "원래 앞에서만 점잖은 척하는 놈들이잖아. 뒤가 구린 놈들일 수록 저렇게 얌전을 떨 수밖에 없는 법이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탁고등이 영호웅을 거들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정현진인의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곤 륜파의 제자들은 분연히 자리에서 일어났으며 저마다 검을 뽑아 들었다. 차 창 창 검신(劒身)과 검집 사이의 마찰음만으로도 객잔의 내부는 흉흉 해졌다. "호오!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겠다 이거지? 어차피 이럴 거면서 왜 점잔을 떠나 몰라." 상관정필이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호웅과 탁고등도 애병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난 후 몸을 돌렸 다. 객잔의 내부는 순식간에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으로 돌변했다. "어차피 기다리기도 지루했는데 잘 됐잖아?" 거대한 머리를 좌우로 돌려 목을 풀며 영호웅이 말했다. "그렇지. 대체 얼마동안을 기다려야하는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 었거든. 인내심을 시험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떨거지들에게 시 치미를 떼는 것은 사실 우리 성격에 안 맞는 일이잖아? 차라리 다 치워버리고 용건만 간단히 해결하면 될 일을 가지고 말이야." 탁고등이 입술을 기묘하게 비틀어 웃으며 영호웅의 말을 받았다. "이제 보니 고의적으로 시비를 걸어온 것이구나! 감히 곤륜파를 적으로 돌리겠다는 말이더냐?" 정현진인이 추상같은 위엄을 보였다. 그의 몸에서는 과연 무림의 명숙다운 기세가 넘쳐흘렀다. 숨 막히는 그의 기도에 선주혁은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하! 저게 절정의 고수라는 거구나. 단지 기도만으로 이런 답답 한 느낌이 들게 만들다니. 정말 대단한 걸?' "곤륜파를 적으로 돌리며 안 되는 거야?" 영호웅이 퉁방울만한 눈을 뒤룩뒤룩 굴리며 탁고등에게 물었다. "글쎄. 다 쓰러져 가는 문파의 떨지들 몇 놈 죽이는 게 뭐 대수겠어?" 차앙 상관정필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정현진인의 검도 검집을 빠져나 왔다. 푸르스름한 광채가 나는 검이 한기를 뿌렸다. 동시에 그의 몸에서 풍기는 기도는 더욱 강하고 날카로워졌다. 위기일발의 순간이 다가오자 선주혁은 재빨리 남지학의 옆으로 몸을 움직였다. 정황을 살피다가 그의 곁에서 떨어지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깜빡 한 것이다. 그러나 선주혁의 움직임은 곰 발바닥 같은 거대한 손에 의해 저 지 되었다. "케엑!" 영호웅이 불현 듯 손을 내밀어 그의 목을 움켜쥔 것이다. 거구의 영호웅이 설주혁의 목을 움켜쥐고 들어 올리자 선주혁은 다리를 버둥거려야만 했다. 발끝이 땅에서 떨어진 것이다. 정현진인의 얼굴에 다급함이 떠올랐다. 저렇게 죽어서는 안 되 는 제자였던 것이다. 그에게 바라는 바가 있지 않은가? 그의 어깨가 살짝 앞으로 기울고 곤륜파의 자랑인 신법이 펼쳐 지려는 순간이었다. 옆구리 쪽을 파고드는 강맹한 기운에 정현진 인은 절정고수의 초인적인 감각으로 몸을 비틀었다. 퍼억 가죽 공을 터뜨리는 듯한 소리가 울리며 정현진인의 신형이 비 틀거렸다. 몸을 비틀어 피해 충격을 줄이긴 했지만 완전하게 피해 내질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급습한 자의 얼굴을 확인한 정현진인의 눈에는 경악과 불신이 가득했다. "설용범……? 당신이……?" "죄송합니다, 도장. 저들과 설가와의 회동은 외부로 알려져서는 안 되는 일이라서요." 설용범은 내심 불의의 급습을 피해낸 정현진인에 대해 놀라며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썩어도 준치라더니……, 과연 곤륜파라는 건가?' 설용범과 그를 따르던 두 명은 어느새 상관정필들이 있는 쪽으 로 몸을 움직인 후였다. 정현진인을 향한 일격이 실패로 돌아감과 동시에 몸을 뺀 것이다. "사부님을 보호하고 저들을 쳐라!" 청운의 다급한 외침이 터지고 곤륜파의 기명, 속자제자들의 신 형이 객잔의 탁자위로 떠올랐다. 그 순간 선주혁은 눈이 돌아가고 있었다. 숨통을 조여 오는 영 호웅의 손아귀에는 강철과 같은 힘이 담겨 있어 아무리 버둥거려 봐야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선주혁은 잘 알고 있었다. 영호웅의 타고난 신력(神力)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것을. 손아귀에 조금만 더 힘을 불어 넣으면 자신은 목뼈가 부러져 죽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일이 벌어질 징조가 보였다. 목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순간적으로 극심해진 것이다. 자신을 죽이고 싸움판에 뛰어들려는 것임을 설주혁은 알 수 있었다. 이렇 게 엉뚱한 환상 속에서 이렇게 엉뚱한 죽음을 맞이할 줄은 몰랐 다. 이 환상 속에서 죽음을 겪게 된다면 어떻게 될지가 두려웠다. 지금의 상황에서 겪는 고통 모두가 지나치게 사실인 상황. 이곳 에서의 죽음이 현실과 연동이 된다면 그야말로 생난리가 나는 것 이다. 멀쩡한 사람들이 정신병원 같은 곳에서 자신을 보고 있다면 미쳐 혼자 날뛰다 급살 맞아 죽은 셈이 될 테니. 차 창 창 쇠와 쇠가 맞부딪치는 요란한 금속성이 아득하게 귀에서 멀어져 갔다. 이제 귀에서 우드득하는 자신의 목뼈 부러지는 소리를 마저 듣지도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는 선주혁. 생의 마지막에 미련을 떨치려는 순간 그의 몸은 땅바닥에 떨어 졌고, 채 다리에 힘을 주지 못한 선주혁은 바닥을 나뒹굴어야만 했다. 갑작스레 기도를 타고 밀려오는 산소에 선주혁은 마른기침 을 토해냈다. 죽음 가운데서 의식이 돌아오는 중간에 선주혁은 손발을 놀렸 다. 채 숨을 되돌리기도 전에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던 영호웅에게 서 멀어지려는 것이다. 그야말로 치열한 생존본능의 발현이었다. 콰앙 쾅 창 차차 창 부서진 탁자가 날아다니고 의자 다리가 여기저기 떨어지는 사이 로 용케 선주혁은 객잔의 구석까지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그제 야 사태파악을 위해 실내를 살폈다. 제일 우선적으로 본 것은 누가 영호웅을 공격해 자신을 구해낸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역시 주인공이라 다르군.' 영호웅의 철퇴에 낭패를 겪으면서도 이를 악물고 맞서는 사람은 바로 소설의 주인공인 남지학이었다. 다른 몇 명도 보이긴 했지만 선주혁은 자신을 구해낸 것이 남지학임을 직관적으로 알아차렸다. 납지학을 돕고 있는 사람들은 속가제자들. 아직까지 경험도 부 족하고 나이도 어린 그들이 영호웅과 같은 고수에게서 자신을 구 해내긴 무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엄청난 기세로 남지학을 몰아세우는 영호웅이었지만 남지학은 비좁은 공간에서도 신법을 자유롭게 운용해 무지막지한 철퇴를 피 해내고 있었다. 다른 속가제자들은 이미 검이 부러지거나 철퇴에 실린 막대한 암경을 이기지 못하고 입가에서 피를 흘리며 물러서 기에 바빴다. 한쪽에서는 창백한 안색의 정현진인이 교묘하게 사검을 휘두르 는 상관정필을 마주해 싸우는 중이었다. 가벼운 내상을 입은 듯 해 보였는데 괴이막측한 초식을 사용하는 상관정필에게 밀리는 것 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리고 그 사실은 정현진인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상대가 고수라는 것은 익히 짐작하고 있었지만 자신과 평수를 이루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던 것이다. 미미한 내상 때문 만은 아니었다. 그는 검을 휘두르는 와중에도 이와 같은 고수가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온 것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고심해야만 했 다. 청자배의 기명제자들은 양 손에 쇄겸을 쥐고 거침없이 달려드는 탁고등을 상대하는 중이었다. 쇄겸과 연결된 쇠사슬을 이용해 원 거리 공격에 익숙한 탁고등이었지만 워낙 상대와 실력 차이가 나 는지라 그쪽도 백중지세를 이루고 있었다. 곤륜파의 나머지 인원은 설용범을 비롯한 사천 설가의 두 명을 상대하고 있었는데 한눈에도 가장 힘들어 하는 중임을 알 수 있었 다. 역시나 노련한 고수들을 상대하기엔 실력도, 경험도 부족한 그 들이었다.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 수련해 온 검진이 아니었다면 벌 써 사상자가 속출했을 것이다. 선주혁은 잠시 숨을 고르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방금 전 저승의 문턱을 밟았다는 사실에 심장이 요동을 쳤기 때문이다. 자신의 심 장이 이렇게까지 거칠게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까지 할 정도였다. 그러나 한 없이 놀란 토끼마냥 서 있을 수는 없었다. 애써 호흡 을 고른 그는 남지승 옆으로 신형을 날렸다. "이쪽은 제가! 다른 분들은 저쪽을 도와주세요!" 선주혁이 이쪽을 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일단 남지학과는 떨어 져서는 안 되었고, 그의 무공이 워낙 뛰어나니 오히려 이쪽이 안 전하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신웅지회 때 보여준 선주혁의 투지를 기억하는 세 명의 속가제 자들은 그의 말에 따라 사천설가를 상대하는 사형제를 돕기 위해 나섰다. 숫자가 보충되자 삼원진(三元陳)의 위력이 더욱 보강되었 다. 불패장이라는 별호에 걸맞는 위력적인 장력을 뿌리는 설용범 이었지만 한순간에 상대를 어찌할 수는 없게 되었다. 부우우웅 장내에 뛰어들자마자 벌떼가 지나가는 것과 같은 소리를 내며 코끝을 스쳐 지나가는 철퇴를 보며 선주혁은 등에서 식은땀을 흘 렸다. '이크! 말은 그렇게 했는데 가까이서 보니 이놈의 쇳덩이…… 정 말 위험하잖아?' 공기를 가르며 섬뜩한 소리를 만들어내는 철퇴의 움직임은 빠르 고 위력적이었다. 한 대 맞으면 뼈가 으스러지는 것은 당연한 일 처럼 느껴졌다. 더구나 방금 전 영호웅의 손에 죽을 고비를 넘긴 선주혁이었기 에 선뜻 달려들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선주혁이 주춤거리는 사이 영호웅은 맹렬하게 철퇴를 휘두르며 남지학을 몰아갔다. 귀찮게 구는 떨거지들이 줄은 지라 쥐새끼처 럼 요리조리 피해 다니는 남지학으로 인해 슬슬 치밀어 오르던 화 를 풀려는 것이다. 카앙 계속해 철퇴를 피하기만 하던 남지학이 급기야 검을 휘둘러 철 퇴와 마주해갔다. 제한 된 공간에서 좁은 운신의 폭은 선주혁에게 있어서 불리한 요소였다. "큿!" 철퇴에 담긴 가공할 힘 때문인지 남지학의 잘생긴 얼굴이 일그 러졌다. 안색이 창백해진 것이 기혈이 흔들린 것이 분명했다. '과정이야 어쨌건 상황은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하는데……?' 선주혁은 눈앞의 상황을 보며 기뻐해야할지 말아야할지 고심해 야만 했다. 지금은 자신도 위험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있기 때 문이다. 잠시 남지학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 영호웅의 철퇴가 선주혁의 허리를 노리고 날아왔다. 그는 기겁을 하고 신형을 뒤로 뺐다. 그와 같이 단순한 회피동작을 봐줄 영호웅이 아니었다. 영호웅은 거구를 바람처럼 움직여 선주혁의 뒤를 쫓았다. 순간 선주혁과 영호웅의 사이를 노리고 찔러오는 검. 남지학이었다. '잘한다, 주인공!' 남지학의 방해로 선주혁을 추적하는 것을 포기해야만 하는 상황 이 짜증이 났던 것일까? 영호웅은 주먹코의 코 평수를 넓혀 더운 콧김을 쏟아내며 거칠 게 철퇴를 휘둘렀다. 위맹한 기세로 바람을 가르며 남지학을 향해 날아가는 철퇴. 속도도 위력도 이전의 공격과는 확실히 달라 보였 다. 순간 남지학의 신형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격전 중에 몸을 띄우는 것은 지독히 위험한 행동이었다. 이어지 는 공격을 방비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남지학의 나이가 어린 탓 에 그와 같은 동작을 경험부족으로 치부한 영호웅은 두꺼운 입술 을 당겨 웃으며 철퇴를 쳐 올렸다. 그리고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남지학은 허공에서 몸을 비틀며 발을 박찼고, 마치 벽이라도 찬 것처럼 방향을 바꿔 영호웅을 향해 날아들었다. 눈을 찢어질 듯 부릅뜨며 영호웅은 반사적으로 몸을 틀었다. 거 구에 어울리지 않는 기민한 반응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남지학의 공격은 허를 찌르는 의외의 급습이었 다. 그의 검은 영호웅의 어깨를 뚫었다. 선혈이 솟구치고 분노 때문인지 고통 때문인지 영호웅의 얼굴은 시뻘겋게 물들었다. 두꺼운 입술이 벌어지며 정말 의외라는 듯 중 얼거렸다. "설마 그 나이에 운룡대팔식을 익혔을 줄이야……." 영호웅의 표정을 본 선주혁은 저도 모르게 외쳤다. "나이스!" 물론 의미를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바탕 박수라도 치고 싶었지만 선주혁은 자신의 욕구를 실행으 로 옮기지 못했다. 외침소리를 들은 영호웅의 눈에서 불같은 광망 이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불똥을 튕겨내는 퉁방울만한 눈은 마치 호랑이의 그것과도 같았다. 섬뜩한 느낌에 선주혁은 입가에 떠올린 미소를 지워야만 했다. '젠장! 어디서 뺨 맞고 어디서 화풀이 한다고…… 왜 나한테 저 지X이야?' 선주혁은 애써 육양수의 자세를 취하며 경계를 풀지 않았다. 그 앞을 남지학이 막아섰다. '오! 고마워, 주인공!' 남지학의 행동을 본 영호웅이 통증 속에서 미소를 지었다. "곤륜파가 몰락의 길을 걷고 있다더니 그도 헛소문이었구나. 이 런 녀석이 있을 줄이야……. 나이에 비해 상상을 초월하는 성취를 이룬 네놈의 자질이 아깝기는 하다만 오늘 이 자리를 벗어나긴 힘 들 거다." 어깨를 뚫리는 부상을 입었음에도 영호웅의 기세는 조금도 누그 러들지 않았다. 아니 방심하는 마음을 버렸기 때문인지 그의 몸에 서는 이전에 비해 더욱 지독한 기세가 피어올랐다. "흐음……." 아주 작은 신음성. 그것은 남지학에게서 흘러나온 것이다. 그의 바로 뒤에 있는 선주혁은 들을 수 있었다. 이어 바로 생각 했다. '주인공, 어차피 너는 이 곰탱이와 붙게 되어 있었어. 살 수 있 으니 용기를 가지라고!' 남지학의 어깨 뒤로 목을 움츠리며 응원을 하는 선주혁이었다. "각오해라, 애송이!" 대호(大虎)의 포효와도 같은 영호웅의 일갈과 함께 철퇴가 대각 선을 그리며 날아들었다. "사제, 피햇!" 남지학의 다급한 외침. 선주혁은 잔뜩 긴장하고 있었기에 늦지 않게 몸을 날릴 수 있었다. 콰앙 헛되이 바닥을 내리치는 영호웅의 철퇴가 귀청을 울리는 굉음을 만들어 냈다. 바닥에서 튀어 오른 돌조각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큰 동작 뒤의 허점을 노려 앞으로 신형을 날리던 남지학은 영호 웅이 예상 외로 빠르게 철퇴를 회수해 재차 휘둘러오자 헛바람을 들이켰다. 아슬아슬하게 남지학의 옆구리를 스쳐 지나간 철퇴와 함께 영호 웅의 몸이 함께 회전했다. 회전력을 더해 다시금 대각선으로 내리 쳐 오는 철퇴. 엄청난 무게를 지닌 철퇴임을 감안할 때 실로 놀라 운 연환공격이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발을 놀려 뒤쪽으로 물러서 는 남지학. 일순 거리를 벌린 그는 재빨리 객잔의 상황을 살폈다. 눈앞의 거구만 없다면 곤륜파의 제자들이 곤란을 겪을 일은 없을 듯 했다. 정현진인의 뛰어난 무공과 삼원진을 차분하게 펼치는 곤 륜파의 제자들이 쉽게 당할 리 없다는 결론이었다. 남지학이 빠르게 실내의 정황을 살피는 순간, 선주혁의 눈도 빛 을 발했다. '이거야! 바로 이거라고!' 선주혁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고 진기를 용천혈로 모았다. 동시에 남지학이 낭랑하게 외쳤다. "당신과 진정한 승부를 내기 위해서 이곳은 적당하지 않은 것 같소이다. 장소가 협소하니 본 실력을 발휘하기 어렵구려." "크하하하하핫!" 남지학의 말에 영호웅이 미친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 말인즉 넓은 곳으로 나가면 네가 나를 이길 수도 있단 말이 냐?" 어처구니가 없어 절로 흘러나오는 웃음을 주체하지 못하는 영호 웅이었다.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하지 않겠소?" 남지학은 넘치는 노기에 진득한 살기를 실어 보내는 영호웅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고 말했다. 선주혁은 뻔히 결과를 알고 있음에도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남지학은 지금 영호웅을 끌어내려는 것이다. 사실상 아무리 남지 학이 천고의 기재라 할지라도 지금의 실력으로 영호웅을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태어나자마자 무공을 익혔다 해도 영호웅의 내력 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정해진 패배를 할 경우 영호웅은 남지학을 처리한 후 곧바 로 곤륜파의 제자들을 핍박해 갈 것이다. 간신히 백중지세를 이루 고 있던 균형은 단박에 무너질 것이며, 이 객잔 안에서 살아남을 곤륜파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결국 자신의 경신술을 최대한으로 살려 영호웅과의 대결에 시간 을 끌며 가능하면 객잔과 먼 곳으로 거리를 확보하려는 게 남지학 의 의도였다. 소설 속에서는 이 되도 않는 엉터리 도발에 영호웅이 쉽게 말려 든다. 남지학의 호기어린 행동이 마음에 드는 부분이 있다고 해도 돌대가리가 아닌 이상 그 정도의 계략은 짐작하고도 남아야 했다. "좋다. 어디 마음껏 네 실력을 발휘해 봐라." 영호웅이 코웃음을 치며 남지학의 도발에 넘어가자 선주혁은 다 시금 쾌재를 불렀다. '좋아, 곰탱이! 이대로 Go!" 남지학은 영호웅을 일견한 후 신형을 날려 객잔을 나섰다. 영호 웅도 거구답지 않은 날렵함으로 그 뒤를 쫓았다. 물론 그들을 놓칠 선주혁이 아니었다. Vol 8. 유독 황량해 보이는 공터. 한쪽 끝을 멋들어지게 장식하고 있는 깎아내리는 듯한 절벽. 선주혁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곳이야 말로 무협소설의 전형적인 기연발생의 장소가 아니던가! 이 싸구려 먼치킨 소설에서 툭하면 터져 나와 기연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필연처럼 느껴지는 주인공 강력하게 만들기의 배경이 되는 장소에 도착한 것이다. 물론 여기까지 도착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숨 막히는 남지 학과 영호웅의 아슬아슬한 혈투를 보며 쫓아오기란 선주혁의 간을 콩알만 하게 만들곤 했다. 남지학은 객잔을 나선 후 영호웅을 자극하며 신법을 활용해 싸 우는 척 하며 점차 거리를 벌렸다. 그의 목적대로 객잔과 충분한 거리를 벌린 것이다. 우둔한 영호웅은 그 자체가 남지학의 목적이 라는 것도 모른 채 예까지 쫓아왔다. 결국 막다른 절벽에 도달해 남지학이 더 이상 피할 수 없게 되 자 성난 황소처럼 씩씩대던 영호웅이 웃음을 터뜨렸다. "쥐새끼 같은 놈! 호기롭게 붙어 보자더니 잘도 도망을 다녔겠다!" 영호웅은 혹시나 남지학이 자신의 옆을 돌아 또 도주할 것을 염 려해 웃음을 터뜨리면서도 끊임없이 철퇴로 방위를 점하고 있었 다. 철퇴가 가지는 중병으로서의 의미는 영호웅에게 존재하지 않았 다. 마치 깃털을 흔들 듯 가볍고 신속하게 철퇴를 사용하는 그였 기 때문이다. 남지학의 표정이 더할 나위 없이 신중해졌다.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더 이상 도망만 다니는 것은 한계가 왔다는 것을. "사제, 아쉽지만 우린 여기서 목숨을 걸어야할 것 같군." "네, 사형." 선주혁은 절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기운차게 대답했다. 그런 선주혁의 대답을 들은 남지학도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사제는 참 많이 변했어. 예전과는 정말 다르군." 짧게 말을 마친 남지학이 당당한 음성으로 영호웅에게 외쳤다. "곤륜파의 제자 남지학이외다! 가슴에 웅지를 품고 강호에 나래 를 펼치고자 했고, 오늘 능력을 넘어선 고수를 만났소이다. 하나 장부로 태어나 머리를 숙일 수는 없는 법. 최선을 다해 실력을 겨 뤄보고자 하오!" 결전에 앞서 중얼대는 것은 영호웅이 제일 싫어하는 행동이었 다. 하지만 결정된 것과 다름없는 죽음 앞에서 호기롭게 나서는 남지학의 당당한 기개에 영호웅은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감히 자 신의 어깨에 상처를 낸 건방진 애송이라는 생각은 지웠다. "정파의 떨거지 중에서 너와 같은 녀석이 있을 줄은 몰랐다. 좋 다! 남자대 남자로서 너를 진지하게 상대해주마. 내 평생은 실력을 발휘해 주지." 철퇴를 틀어쥔 영호웅의 팔 근육이 꿈틀거렸다. 드러난 힘줄이 불거지자 패기 넘치는 기세가 폭사되기 시작했다. 남지학은 숨 막히는 기세를 담담한 표정으로 받으며 검을 세워 하늘을 향해 곧추 세웠다. "와라!" 강호의 선배로써 선공을 양보하는 영호웅이었다. 남지학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인 후 땅을 박찼다. 담담한 표정과는 달리 영호웅에 못지않은 패도적인 기세를 뿌리 는 남지학의 검. 곤륜파의 절기인 태허도룡검법(太虛屠龍劍法)이었다. "좋구나!" 자신을 향해 당당히 맞서오는 남지학의 기개가 마음에 든 영호 웅이 호기를 담아 외쳤다. 카앙 검과 철퇴의 사이에서 불꽃이 튀어 오르고 남지학은 재차 일검 을 내질렀다. 이번에도 가볍게 철퇴를 휘둘러 남지학의 검을 막아낸 영호웅. 두 사람의 공방은 열기를 더해가기 시작했다. 앞선 싸움과는 달리 물러서지 않고 달려드는 남지학. 진지한 표정으로 싸움 자체를 즐기는 영호웅. 그러나 채 반 각의 시간이 흐르기도 전에 우열이 드러나고 있었 다. 병기의 무겁고 가벼움을 떠나 두 사람의 내력차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만약 영호웅이 어깨에 상처를 입지 않았다면 승 부는 진즉 결정지어졌을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철퇴와 마주하는 검은 점차 힘을 잃어갔고 남 지학의 이마에서는 땀이 비 오듯 흘렀다. 아직까지 검이 부러지지 않은 것만 해도 탄복할 일이었다. 극한까지 속도를 낸 용형보(龍形步)를 밟아가던 남지학은 다시 한 번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고, 곤륜파의 자랑인 운룡대팔식이 펼 쳐졌다. 허공에서 기묘하게 방향을 틀어 날카로운 검세를 뿌리는 청강장검. "타합!" 검에 실린 기운이 만만치 않음을 깨달은 영호웅은 단발마의 기 합성과 함께 철퇴를 휘둘렀다. 콰앙! 철퇴와 검이 부딪쳐서 만들어진 소리라기보다는 압축되었던 공 기가 순간적으로 팽창하는 듯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과도하게 힘을 주었기 때문일까? 점혈을 통해 출혈을 막았던 영호웅의 어깨에서 선혈이 솟구쳤다. 강한 충돌로 인해 남지학의 신형이 절벽 끝까지 튕겨나가기 했 지만 언뜻 봐서는 영호웅이 손해를 본 듯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남지학이 들고 있는 검의 검극(劒極)이 점차 아래로 늘어지고 있었다. 입술에 가는 선을 만드는 선혈이 비추는가 싶더니 울컥 피를 토해냈다. "훌륭하군." 피가 흐르는 자신의 어깨를 힐끗 쳐다본 후 영호웅이 중얼거렸다. "무인으로서 예우를 갖춰주마. 고통 없이 가라!" 영호웅의 말에 남지학은 피에 젖은 이빨을 드러내며 미소 지었다. 대답할 여력조차 없는 것이다. 떨리는 검극을 억지로 들어 올릴 때까지 기다린 영호웅의 신형이 움직였다. 그와 동시에 눈빛을 빛내는 선주혁 지금이 중요한 순간이었다. 영호웅의 철퇴가 굉음과 함께 날아들고 남지학은 힘없이 검을 내질렀다. 카앙 충돌과 동시에 실 끊어진 연처럼 절벽을 향해 튕겨지는 남지학 의 신형. 선주혁은 그 방향과 거리를 정확히 기억했다. 그리고 자신도 몸을 날리려는 찰나. 난데없이 천길만장의 낭떠러지가 시야에 들어왔다. 'X발, X라 깊잖아?' 갑자기 다리에 힘이 빠지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감히 끝이 보이지 않는 절벽으로 몸을 날릴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이다. 행여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그야말로 납작 오징어가 될 판 이었다. 고개를 돌렸다. 남지학과 같은 젊은 인재를 자신의 손으로 죽였다는 것에 대한 감회에 젖었던 영호웅의 호랑이 같은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썹이 꿈틀하는 순간. 선주혁의 시선이 철퇴로 향했다. 순간 불끈 용기(?)가 솟았다. 철퇴에 맞아 깨진 수박처럼 두개골이 부서지나 일이 잘못되어 납작 오징어가 되나 마찬가지일 터였다. 어쩌다보니 선택의 여지 가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영호웅의 몸이 살짝 움직이는가 싶은 그 순간. 선주혁은 이를 악물고 땅을 박찼다. 정확히 남지학이 날아간 방향이었다. 그가 절벽으로 투신하는 것을 본 영호웅의 눈에는 의문이 떠올랐다. "저 놈은 뭐야?" 사실 남지학의 무공과 기개에 크게 감탄한 영호웅의 눈에는 선 주혁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싸움이 계속 되는 내내 뒤쪽에 숨어 있던 피라미 따위를 신경 쓸 그가 아니었다. 남지학이 절벽으로 떨어진 것을 보고 왠지 모르게 착잡한 심정 이 된 영호웅은 선주혁을 내버려둔 채 객잔으로 돌아갈 생각이었 다. 그런데 멍청한 놈이 지레 겁을 먹고 천 길 낭떠러지로 몸을 날 리는 게 아닌가? "세상엔 별의별 인간이 다 있다지만, 저렇게 겁 많고 멍청한 놈 은 또 난생 처음이군." 영호웅은 어이없어 실소를 터뜨린 후 신형을 날렸다. 객잔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졸지에 멍청한 놈이 되어버린 선주혁이 신형을 날렸던 절벽. 한 줄기 바람이 깊은 절벽과 부딪쳐 깊은 울림의 소리를 만들어 냈다. 그 소리는 마치 방금 전 벌어진 일을 구경하던 누군가가 웃 음을 터뜨린 것만 같았다. 나직하게, 그러나 진정으로 터뜨리는 웃음소리였다. 푸아아아앙 온 몸이 산산조각 나는 것과 같은 충격이었다. 분명 물 위로 떨어졌음에도 충격이 이와 같을 진데, 만약 땅위 로 떨어졌다면 어떻게 되었을 지는 굳이 머리로 그려보지 않아도 자명한 일이었다. '어쨌든 성공이다.' 하마터면 충격에 정신을 잃을 뻔했던 선주혁이었으나 성공했다 는 기쁨에 허둥지둥 손발을 놀렸다. 꽤나 깊이까지 내려왔는지 수면위로 떠오를 때가지 시간이 좀 걸렸다. "푸학!" 머리를 내밀어 주변을 살펴보는 선주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절벽에서 뛰어내렸을 때 한줄기 바람이 몸을 떠받드는 느낌이 들더니 연못의 가장자리에 떨어진 것이다. 만약 바람이 조금만 더 강하기 몸을 밀어냈으면 여지없이 땅바닥에 처박혀 피와 살이 어 우러진 한판의 피자가 될 뻔했던 것이다. 절로 오한이 일었다. "내가 어떻게 그 높이에서 뛰어내릴 생각을 했나 몰라. 다시는 높은 곳에선 안 뛴다!" 투덜대며 물가로 나선 선주혁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매끈한 암벽이 병풍처럼 드리워진 공간. 소설 속에 나온 그대로였다. 한그루 나무조차 자라지 못하는 암 벽은 거울처럼 매끈했으며 그 높이를 짐작키조차 어려웠다. 마치 화산의 분화구처럼 파인 이곳은 축구 경기장보다 넓었으나 사방이 암벽으로 둘러싸여져 있었다. 하늘을 나는 새가 아니라면 절대 빠져나갈 수 없을 것만 같은 지형. 그러나 선주혁의 얼굴은 태연하기만 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곳을 벗어나는 방법이 들어있었던 것이다. 매끈한 암벽을 살피던 선주혁의 눈이 반짝였다. 움푹 패인 동굴 하나를 발견한 것이다. "흐흐흐흐……." 물에 빠진 생쥐 꼴임에도 선주혁은 웃음을 흘렸다. 동굴 안에 있을 무엇 때문이었다. 몸을 일으켜 당장이라도 암혈(巖穴)을 향해 뛰어갈 것 같던 선주혁은 일순 코끝을 찌르는 향기에 고개를 돌렸다. "그렇지! 영과(靈果)를 잊을 뻔 했군!" 향기의 근원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연못가에 서 있는 가늘고 작 은 나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자세히 살피면 나무라기보다는 풀 에 가까웠다. 녹색의 줄기와 잎사귀 위쪽에 맺힌 붉디붉은 열매. 소설 속에서 나온 만년음양과(萬年陰陽果)였다. 자두보다 조금 작은 열매를 바라보는 선주혁의 눈이 탐욕으로 물들었다. 그는 단박에 달려들어 풀인지 나무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줄기 에서 만년음양과를 땄다. 더욱 진한 향이 그의 후각을 자극했다. 절로 입맛을 다시게 하는 묘한 냄새였다. "이게 만년에 하나 열린다는 그 천고의 영약이란 말이지? 이것만 먹으면……!" 군침이 절로 도는 향내음에 그리고 한꺼번에 내공을 왕창 키울 수 있다는 욕심에 입을 쩍 벌린 선주혁. 한입에 만년음양과를 넣으려는 순간. 미약한 신음소리가 그의 귀를 파고들었다. "……!"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누구의 신음성인지 알 수 있었다. 자신보 다 먼저 떨어진 남지학의 것이리라. 아마도 의식을 잃은 채 떨어 졌다가 부력에 의해 떠올라 연못가에 도달한 듯했다. 선주혁은 입을 벌린 채 그대로 굳어졌다. 만년음양과를 먹을 것인지 아니면 남지학을 도울 것인지 갈등하 는 것이다. 그 때 선주혁의 머릿속에 한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남지학은 영호웅과의 일전에서 전신의 경락이 가닥가닥 끊긴 상 태였다. 소설 속에서 남지학은 기이한 향기에 이끌려 무의식중에 만년음양과를 따먹게 된다. 그 때문에 내상을 치유하고 내공이 증 진되는 기연을 얻게 되는 것이다. 만약 남지학을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결론은 무조건 사망이었다. '이 자식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사실 소설 속의 캐릭터 하나가 죽고 사는 거야 별로 중요한 일 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가 죽음으로 인해서 자신에게 닥쳐올 일이 었다. 비록 책을 읽었다고는 하지만 선주혁이 알고 있는 대부분의 일 은 주인공이 중심에 있는 사건이었다. 남지학이 저승으로 가 버린 다면 자신이 알고 있던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될 것이다. 남지학은 만년음양과를 먹고 나서 수차례의 기연을 더 겪은 후 에야 절정의 고수가 되었다. 선주혁 자신이 만년음양과를 먹더라 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영과를 먹는다고 해서 절정고수가 되어 험 난한 무림에서 잘 먹고 잘 살긴 힘들다는 뜻이었다. 더욱이 남지학이 죽어 버리면 기연을 얻을 기회가 어떻게 변해 버릴지 알 수 없게 된다. 그러면 자칫 흉험하기 이를 데 없는 무 림에서 언제 어느 때 칼침 맞고 죽을지 모를 인생으로 변하는 것이다. "천상 이 자식부터 살려 놔야 한단 말인가?" 만년음양과가 선주혁의 입에서 떨어졌다. "그래. 눈앞의 것을 욕심내기보다는 보다 장기적인 전략으로 가는 거야!" 선주혁은 과장되게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남지학이 쓰러져 있는 곳으로 갔다. 행여 만년음양과에 대한 미련이 고개를 쳐들까 싶은 것이다. "넌 운 좋은 줄 알아라. 나처럼 착한 사람이 아니었으면 이 황 량한 곳에서 죽었을 테니 말이야." 파리한 안색의 남지학은 아직도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는 상태 였다. 선주혁은 그의 입을 벌리고 만년음양과를 밀어 넣었다. 소문난 영과니 만큼 침에 닿자마자 녹아내려 그의 목구멍을 타 고 흐르리다. "쩝, 사람을 살린 셈 친다만 영 아깝긴 하네." 선주혁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남지학을 보며 입 맛을 다셨다. "참!" 선주혁의 고개가 빠르게 돌아갔다. 그의 시선에 들어온 것은 만 년음양과를 맺었던 만년음양초(萬年陰陽草)였다. "산삼의 잔뿌리도 효험이 있을 진데…… 저 풀 때기도 몸에 좋을 가능성이 크잖아?" 싱싱한 녹색을 뿜어내며 다시금 만년 후에 열매를 맺길 기다리 는 만년음양초. 그것은 선주혁의 손에 의해 뿌리까지 뽑혔다. 다른 소설 속에서 이런 영과의 줄기나 뿌리의 효험으로 주인공 이 여러 목숨을 구하고 생색내는 것을 본 것을 기억해낸 선주혁. 미약하더라도 효과가 있기를 기도하며 만년음양초를 입으로 쑤 셔 넣었다. 생풀을 뜯어 먹는 맛에 대해 궁금해 본 적은 없지만 자신이 토끼나 사슴으로 태어나지 않은 게 정말 다행스럽다고 새 삼 느끼며. 만년음양초가 지독하게 썼던 것이다. 쓰디쓴 잎사귀, 줄기, 뿌리를 통째로 먹어버린 선주혁은 이게 생 각보다 배가 부르다는 생각을 했다. 또한 입안이 개운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걸로 끝이었다. 영약을 먹으면 나타난다는 열기도 없었고, 진기가 불어나는 느 낌도 없었다. "쳇! 소설에 나오지 않은 내용이라 아무런 효능이 없는 건가? 괜한 짓을 했네." 입안이 개운하다지만 눈물이 날 정도로 쓴 풀을 억지로 먹은 게 후회가 됐다. "그럼 내가 먼저 가서 동굴이나 살펴볼까?" 만년음양초의 효능에 미련을 가져봐야 아무런 소용없음을 아는 선주혁은 또 다른 기연이 안배되어 있는 동굴 쪽으로 향하려고 했다. "응? 근데 왜 이렇게……?" 두 눈이 풀리며 웅얼거리는 그. 갑자기 온몸에 피로가 밀려오며 졸음이 쏟아지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험난하기 이를 데 없는 하루였다. 객잔에서의 흉험 한 싸움, 영호웅의 손아귀에 목을 잡혔던 일, 절벽에서의 끈 없는 번지점프, 뭐 하나 등골이 서늘하지 않은 일이 없었다. 또한 남지학과 영호웅의 뒤를 쫓느라 진땀을 빼기까지 했다. 긴 장이 한꺼번에 풀리면서 피로가 제대로 느껴져 졸음이 오는 것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그래도…… 땅바닥에서 자면 안 되는데……." 말과는 달리 선주혁의 볼은 흙바닥에 고이 닿았다. “푸하하하핫! 저 새X, 뭐야?” “뭐야? 근처에서 영화 촬영이라도 있는 건가?” 남자는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무협소설에서 닳고 닳은 설정인 절벽에서 떨어졌더니 영약이 있더라……, 식의 상황에서 영약의 줄기와 뿌리를 먹고 잠이 든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그런데 지금의 상황은 대체 뭐란 말인가? 감았던 눈을 떴더니 고명필 패거리가 자신의 행색을 비웃고 있 었다. 하긴 홍콩영화의 조연이나 입을 법한 옷을 걸치고 골목길에 서 있으니 자신도 구경하는 입장이었다면 한바탕 웃어줄 판이었다. 더 이상한 건 저 놈들이 자신의 얼굴을 못 알아본다는 것이었다. 설마 옷뿐만 아니라 소설 속 설주혁이란 캐릭터의 모습 그대로 라는 것인가? “뭘 꼴아봐, 새X야!” 스포츠머리가 썰면 한 접시는 족히 될 법한 입술을 불쑥 내밀며 인상을 버럭 썼다. 그제야 남자는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병신, 놀라기는! 크흐흐흐.” 턱에 흉터자국이 선명한 고명필이 놀란 표정을 짓는 남자를 비웃었다. “푸헤헷! 야, 야. 조심해. 영화판 스턴트맨들은 붕붕 날아다닌다 잖아. 괜히 까불다 X나 터진다니까.” “X까는 소리 하네. 참새냐? 날아다니게? X발 왕년에 무술 안 배워 본 사람이 어딨어?” 키가 큰 녀석의 말에 뱁새눈이 괜히 허공에 어설픈 발차기를 한 번 하며 소란을 떨었다. 순간 남자의 시선이 뱁새눈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크리스마스이 브가 되기 얼마 전 자신의 옆구리에 회칼을 쑤셔 넣은 놈이었다. 저도 모르게 눈에서 불똥이 튀었나 보다. 뱁새눈의 입에서 걸쭉한 욕이 쏟아져 나왔다. “뭐야? 이 X발놈이 지금 갈구는 거야? 내 말이 꼽다 이거야? X 만한 새X. 니가 지금 무술 좀 했다 이거지? 내 발차기가 우습게 보인다 이거지?” 남자는 순간 당황했다. 뱁새눈이 당장이라도 덤벼들 기세였다. 녀석이 움직이면 다른 놈들도 한꺼번에 움직일 터. 가만히 있다가는 또다시 구타를 당하 게 될 것이다. 그 순간. 남자는 머릿속에서 번쩍 하는 무엇인가를 느꼈다. 사연이야 어찌되었건 자신은 지금 설주혁 캐릭터인 상태였다. 곤륜파에서 무공을 익힌! 한 번의 도약으로 어지간한 담장은 훌쩍 뛰어 넘고 한 번의 주 먹질로 두꺼운 나무판을 박살낼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깡패 놈들에게 위축될 필요가 없었다. 지난 날 이놈들에게 두들겨 맞은 게 대체 얼마던가? 특히나 뱁새눈에게 맞은 칼침은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였다. 남자는 씨익 웃었다. 복수. 그렇다! 자신에게 복수할 기회가 온 것이다. 신은 정말이지 만인에게 공평무사하시며 권선징악이라는 게 무 엇인지 아시는 분이다. 소설속의 캐릭터를 자신의 몸에 뒤집어 씌어 복수의 기회를 주 시다니! 이전까지만 해도 신이란 신은 모조리 부정했던 남자였다. 신이 있다면 자신을 이렇게 버려둘 리 없다는 게 남자의 생각이 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직접 기적을 겪고 있지 않은가? 이전까지는 미쳐서 보이는 환상인지, 꿈인지 모를 상황이 마음 에 안 들기만 했지만, 지금의 ‘기적’은 실로 남자를 흡족하게 했다. “어쭈? 이 X발 놈이 쪼개네? 내 말이 우습냐? 우스워?” 뱁새눈이 한쪽 눈썹을 크게 휘어 올리며 다가섰다. 선주혁의 몸에 대한 자신감이 넘치는 남자의 눈에서 다시 한 번 빛이 발했다. 그리고 그의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퍽 뱁새눈의 고개가 뒤로 젖혀진다. 정통으로 가격당한 코에서 시뻘건 피가 튀어 오른다. 그래, 이거였다. 평소 남자가 꿈꿔왔던 통쾌한 복수다! 너무나 신이 난 남자는 무공을 익힌 선주혁의 몸이 타인을 때렸 다면 골목 구석까지 날아가 처박혀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 없 었다. 고명필과 두 명이 마구 쌍소리를 내며 몸을 풀었다. 고개를 제 자리로 돌린 뱁새눈이 허리춤에서 뭔가를 꺼내든다. 칼. 자신의 옆구리를 갈랐던 칼과는 모양새가 달랐다. 광택이 번쩍이는 것이 새로 마련한 모양이다. 그것을 본 남자는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더욱 강한 울화가 치밀 었다. 자신이 죽었으리라 여겼을 것이다. 증거가 될까봐 전에 쓰던 칼을 어딘가 버렸을 터.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가놓고 뒷골목에서 히히덕 거리고 있었다 고 생각하니 더욱 화가 치밀었다. 남자는 곤륜파에서 익힌 육양수의 초식을 떠올렸다. 우허보(右虛步)을 내민 상태에서 발끝을 팽이처럼 돌리며 무게 중심을 우측에 실었다. 허리가 맹렬히 회전하고 힘을 뺀 어깨에서 시작된 주먹질은 쏜 살처럼 맹렬이 튀어 나갔다. 푸르르 폭이 넓은 소맷자락이 몸서리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넌 이제 죽었…… 헉!’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무공을 익힌 자의 주먹을 깡패 따위가 피해낸 것이다. 뱁새눈이 몸을 왼쪽으로 틀어 가볍게 자신의 주먹을 피해낸 것 을 보고 남자는 경악했다. ‘우연이겠지, 우연!’ 남자는 애써 상황을 좋게 해석하며 다시 한 번 통쾌한 복수의 시작을 도모했다. 앞으로 내지른 주먹을 접으며 뱁새눈이 피한 방향으로 팔꿈치를 맹렬히 내지른 것이다. 이번에는 우연이 겹칠 수 없었다. 자신의 팔꿈치가 정확히 뱁새눈의 가슴에 적중하는 그 순간을 남자는 또렷하게 보고 있었다. 퍼억 “커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숨넘어가는 소리가 골목을 울렸다. 그리고 남자는 내심 울부짖었다. ‘젠장, 뱁새눈을 신경 쓰느라 다른 놈들을 생각하지 못했군.’ 남자의 팔꿈치가 뱁새눈의 가슴을 때리려는 그 순간 스포츠머리 가 내지를 발에 오히려 가슴을 채여 버린 것이다. '아! 겁나 아프…… 응? 안 아프네?' 그제야 남자는 다시 한 번 자신이 선주혁의 몸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무공을 익혔고, 내공을 지니고 있다. 이딴 놈 들의 발길질에 통증을 느낄 일이 없었던 것이다. 신이 난 그는 맹렬한 기세로 고명필 패거리를 향해 덤벼들었다. 부웅 바람을 가르며 날아가는 주먹. 그런데 빌어먹을 우연이 또 발생했다. 스포츠머리가 남자의 주먹을 가볍게 피하고는 옆구리를 강타 한 것이다. 물론 이번에도 통증은 없었다. '젠장,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남자는 몇 번에 걸쳐 주먹을 날렸고 그 주먹에 맞아주는 놈은 하나도 없었다. 한 번 주먹을 날릴 때마다 스포츠머리, 고명필, 키 큰 놈의 주먹이 여기저기를 두들겼다. "하! 이 새X 맷집 X라 좋네?" "X발 새X. 맷집 하나 믿고 덤벼들었나 본데, 너 어디 한 번 죽 어봐라." 급기야 고명필 패거리의 일방적인 구타가 시작되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음에도 충격에 의한 반 응은 분명히 있었다. 연달아 자신의 몸을 두들기는 고명필 패의 주먹질과 발길질에 남자는 급기야 손을 뻗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개X끼, 아직도 버티네?" "뭐, 이딴 놈이 다 있어?" 스포츠머리와 고명필이 거친 숨을 토해내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비켜봐! X발놈이 칼 맞고도 버티나 보자구." 날카로운 목소리에 남자는 새삼 눈을 부릅떴다. '저 새X가 또?' 이번에는 쉽게 당하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날아오는 칼을 직시했 다. 무공을 익힌 몸이다. 정신만 바짝 차리며 못 피할 이유가 없었다. 과연 스테인리스로 만들어 반짝이는 회칼이 선명하게 보였다. 마치 슬로우 모션으로 뱁새눈의 동작을 보고 있는 듯 했다. 남자는 미소를 지었다. 피할 수 있었다. 이 정도라면 충분히 피하고도 남았다. 보법을 밟아 가볍게 칼을 피해낸 후 녀석의 면상에 주먹을 꽂아 주리라. 아마도 이전까지는 당황하는, 혹은 방심한 터라 녀석들에게 일방 적으로 맞았으리라. 지금처럼 선명하게 상대의 동작이 보이는 한 더 이상 녀석들은 자신의 상대가 아니었다. 흡족한 마음으로 몸을 옆으로 움직이려는 남자. 그의 입가에 흐릿하게 떠올랐던 미소가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모,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느릿하게 자신의 아랫배를 찔러오는 회칼. 한 발짝만 옆으로 비켜서면 가볍게 피해낼 수 있음에도 몸이 말 을 듣지 않았다. 온 몸에 석고를 바르고 그대로 굳혀 버린 듯 꼼 짝 조차 하지 않았다. 오직 목만이 작은 움직임을 보일 뿐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 "커헉!" 메마른 신음성을 내뱉은 남자의 눈은 현재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의문과 절망, 그리고 분노를 드러내고 있었다. 같은 녀석에게 두 번이나 당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자는 새삼스레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손잡이까지 깊숙이 틀어박힌 회칼에 아랫배에 꽂혀 있음에도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지난번에 느꼈던 불로 지지는 것 같은 고통은 전혀 없었 다. 신음성은 칼이 몸에 들어오는 순간에 놀라 내지른 것뿐이었다. "크흐흐흐……." 자신의 아랫배에 회칼을 쑤셔 넣은 뱁새눈이 기이한 웃음을 흘 렸다. 녀석의 눈에서 번득이는 광채가 감돌았다. 남자는 저것이 바로 살기라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미 한 번 살 인을 저질렀기에 저와 같은 광기어린 눈빛을 내는 것이라. 우지지직 난생 처음 듣는 괴이한 소리가 아랫배에서 들렸다. 뱁새눈이 배에 박힌 회칼을 비틀어 옆으로 그어 버린 것이다. 후두두둑 끔찍한 소리와 함께 쏟아지는 내장을 보고 남자는 기겁을 했다. 황급히 손을 들어 쏟아지는 내장을 받아들려 했다. 하지만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는 몸이었다. 비명을 지르고자 입을 열었다.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주변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밤이 찾아온 것만 같았다. 한꺼번에 피를 많이 흘려서인가, 라고 생각했을 때 남자의 눈은 자신의 피를 확인했다. 피. 뱃속에서 쏟아져 나와야 할 것은 피가 분명했다. 그런데 왜 검은색 액체가 줄줄 흘러나온단 말인가? 믿지 못할 상황에 남자는 눈만을 휘둥그레 떴다. 당황해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남자의 모습을 보고 고명필 패거리 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실로 재밌어 죽겠다는 듯한 표정이었고, 웃 음소리였다. 그들의 얼굴. 그들의 입매. 그들의 눈이 하나하나 떠올라 남자의 눈에 선명히 맺혔다. 마치 카메라를 대고 클로즈업을 하는 듯 했다. 그리고 그들이 손가락을 내밀어 자신의 아랫배를 가리켰다. 정 말 웃겨 죽겠다는 듯 눈물까지 쏟아내는 그들이다. 남자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끔찍한 광경을 확인했다. 검은 액체에 물들어 쏟아져 나온 것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내장이었던 그것들이 끔찍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굵직한 줄기를 따라 수없이 잔가지를 펼쳐낸 모습. 애벌레처럼 꿈틀대는 그것. 자세히 보니 하나의 나무뿌리와 같은 형상이었다. 그리고 그 뿌리는 자신의 혈액을 대신해 쏟아져 나오는 검은 액 체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잔뜩 갈증에 시달린 사람이 벌컥대며 물 을 마시는 것처럼 빠르게 흡수하는 중이었다. 검은 액체를 흡수한 뿌리 같은 것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아니 자라난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뿌리는 쭉쭉 뻗어 남자의 몸을 휘 감았다. 굵은 뿌리가 온 몸을 칭칭 동여맸으며 잔뿌리가 얼굴을 뒤덮었다. 억지로 억지로 내지르려는 비명소리는 안으로 잦아들기만 했고, 급기야 뿌리가 완전히 입을 가로 막았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멈출 줄 모르고 자라나는 뿌리는 남자의 목 안으로 밀고 들어왔 다. 이상한 것은 그 와중에도 고명필 패거리의 웃음소리만은 선명하 게 들린다는 것이었다. 남자는 몸부림을 쳐 보려 했다. 어떻게 해서든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리고 한 순간. 모든 것이 사라졌다. 건조한 공기가 코로 밀려들며 매끈한 모습으로 다듬어진 암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뭐, 뭐야? 꿈?" 선주혁은 황급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주위를 둘러보니 보이는 것은 암벽뿐이었다. 동굴 안이다. 선주혁은 그제야 확실하게 자신이 꿈을 꿨다는 사실을 깨달았 다. 고명필 패거리도, 쏟아진 내장이 나무뿌리로 변한 것도, 자신 의 피가 검디검은 액체였던 것도, 모두가 꿈일 뿐이었다. "젠장, 무슨 놈의 꿈이 그렇게 생생했던 거야?" 한편으로는 꿈이었던 게 정말 다행이라 생각이 들면서도 선주혁 은 투덜댔다. 그리고 곧 실소를 터뜨렸다. 꿈에 놀라 쩔쩔 맨 자신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은 지금 미쳐서 환상을 보고 있거나, 병원에 누워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꿈을 꾸고 있을 것이다. 그 안에서 또 이토록 생생 한 꿈을 꾼다는 게 우스웠던 것이다. '하! 그래도 꿈 안의 꿈에서는 감각이 없군. 그러고 보면 이 지 랄 맞은 꿈은 정말 웃긴단 말이야? 별게 다 진짜처럼 느껴지니 말이야." 스스로 미쳤다기 보다는 의식불명의 상태에서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훨씬 낫기에 선주혁은 이 모든 상황을 가급적 꿈이 라 결론 내리고자 했다. "어! 사제 일어났군." 맑고 명랑한 목소리. 그 음성에는 안도와 반가움이 가득했다. 선주혁은 고개를 돌렸다. "아, 사형. 정신을 차리셨군요." 훤칠한 모습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남지학을 보면서 선주혁은 애써 미소를 지었다. 멀쩡해진 그의 얼굴을 보니 다시금 만년음양 과에 대한 미련이 떠오른 것이다. "무슨 소리야? 무려 칠주야(七晝夜) 동안 의식을 잃고 있었던 건 너라고." "네?" 눈꺼풀이 무거워 잠깐 자고 일어난 것 같은데 칠 일 낮, 칠 일 밤이 지났다니? "다행이군. 내력을 불어 넣기도 하고 별 수단을 다 써도 안 일 어나더라고. 크게 걱정하는 중이었어." "하하, 괜한 심려를 끼쳐드렸군요. 참! 영약의 기운은 모두 흡수하셨나요?" "영약? 아! 그렇군." 천재로 설정된 남지학이었다. 선주혁의 말을 듣는 순간 그토록 심각했던 부상이 치유되고, 갑작스레 내력이 증진되었는지에 대해 한 순간에 알아차렸다. "사제가 영약을 내게 먹인 거야?" "네. 마침 만년음양과가 이곳에 있더라고요. 사형의 증세가 심히 위중한지라 입안에 넣어드렸습니다." "만년음양과?" "네. 만년에 한 번 핀다는 그 전설상의 영약이죠." 선주혁은 그토록 귀한 것을 자신이 포기했다는 것을 생색내기 위해 한마디 한마디에 힘을 주어 말했다. "하! 그런 귀한 영약을 내게 양보하다니. 사제에게 큰 은혜를 입 었구나. 정말 고마워, 사제!" 남지학은 선주혁이 바라는 바 그대로 감동한 표정으로 어깨를 잡아왔다. 손에 담겨진 힘은 그가 얼마나 고마워하는지 충분히 짐 작케 했다. "사형의 목숨이 우선이죠." "하하핫, 정말 사제는 욕심이 없군. 단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함 이라면 영약의 절반정도만 먹였어도 충분했을 텐데 말이야. 그걸 내게 모두 양보하다니! 사제는 정말 배포가 큰 인물이야." '커어어어억!' 누군가 망치로 뒤통수를 후려갈긴 것만 같았다. 머릿속이 멍해지며 얼굴이 굳고, 목이 굳고, 어깨가 굳고, 팔다 리가 굳어졌다. 왜? 대체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왜 적당히 쪼개 나눠 먹을 생각을 못했을까? 가슴을 치고 땅을 치면서 후회할 일이었다. 너무나 억울해 눈물이 다 나올 듯 했다. 하지만 이제와 후회하면 무엇하랴. 영약은 애진작에 녹아 남지학의 진기가 되었을 것을. "아하하핫, 제…… 가 그런 영약을 먹어서…… 무엇하겠습니까? 영약이라는 것은…… 인연이 있는 사람만이 먹을 수 있는 것이 아 니겠습니까? 전부 사형의 복이지요." 한마디 한마디에 애간장이 타는 안타까움이 실린 말이었다. 그와 같은 선주혁의 어조에 남지학은 진실로 감탄하고 있었다. 실로 범인은 상상할 수 없는 아량을 보여준 것이며 무욕의 경지 에 오른 사제를 보는 것이다. 최근 이 사제가 보여주는 모습은 실 로 과거와는 다른 모습들이었다. 감탄한 표정을 계속 유지하던 남지학은 갑자기 표정을 바꾸며 선주혁에게 물었다. "그런데…… 사제, 괜찮은 거야?" "네? 아……!" 선주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팔다리를 이리저리 움직여봤다. "괜찮은 거 같은데요?" "아니, 사제의 몸에는 이상이 있을 리가 없어. 내가 내력을 주입 했을 때도 진기의 흐름에는 아무런 장애가 없었거든. 그 모습 말 이야. 괜찮냐고?" "모습이요?" 선주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직 모르나 보군." "……!" 선주혁은 그제야 자신이 만년음양과를 먹고 쓰러지듯 잠들어버 렸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설마! 부작용이?' 약은 약사에게 지어먹어야 한다더니 결국 뭔가 탈이 난 모양이 었다. 걱정스럽기 그지없게 자신을 바라보는 남지학의 표정으로 보아 결코 작은 일은 아니라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선주혁은 후다닥 동굴 밖으로 뛰어 나갔다. 연못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기 위함이다. Vol 9. 사방이 병풍처럼 드리워진 암벽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인지 바 람 한 점 불지 않았다. 자연 그 중심에 자리 잡은 연못은 거울처 럼 맑았다. 무협지에서는 이런 것은 명경지수(明鏡止水)라 하던가? 우물처럼 끝이 보이는 암벽 위로 흐르는 흰 구름. 그 앞을 가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본 선주혁은 입을 떡하니 벌려야만 했다. "뭐, 뭐야? 이게? 왜 내 모습이 이렇게 변한 거야?" 너무나 놀라 두 눈이 찢어질 듯 커진 그는 몇 번이고 눈을 깜빡 이며 연못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을 재확인 했다. 신기하게도 머리카락이 하얗게 새어버렸다. 약 잘못 먹어 흰머 리로 새어버린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이토록 하얗게 된다는 이야기는 또 금시초문이었다. "무슨 슈퍼 사이언인이냐?" 퍼뜩 머리에 떠오른 것은 만화에 나오던 외계인 종족이 변신(?) 했을 때의 이름이었다. 머리가 하얗게 변하면서 본래의 능력보다 훨씬 큰 힘을 내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었다. "응? 그러고 보니……?" 그제야 선주혁의 시선이 우물가를 짚고 있는 자신의 손으로 향했다. 황급히 팔을 걷어붙여 보는 그. "이건 또 뭐야?" 선탠을 한 것도 아닌데 피부가 가무잡잡하게 변해있었다. 아니 선탠을 했다면 이렇게 촌스러운 색깔로 탈 리가 없었다. 선주혁의 피부는 건강한 구릿빛이 아닌 잿빛에 가깝게 변해 버린 것이다. "슈퍼 사이언이 아니라 다크 엘프잖아?" 만화나 온라인 게임 상에서 보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은발에 가까운 흰머리에 잿빛 피부. 자기가 들어온 곳이 무협이 아니라 판타지였지만 단박에 다크 엘프로 오인 받을 모습이었다. "하! 이럴 수가……? 정말이지 엄청난 부작용이군. 진짜 엉터리 작가다운 설정이다!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효과를……." 선주혁은 어느새 진정을 하고 목소리를 가라앉혔다. 생각해보면 선주혁이라는 껍질 자체가 자신이 아니다. 그간 눈에 익었기에 크 게 놀랐을 뿐 어차피 자기 몸도 아닐 진데, 이처럼 변한 게 무슨 상관이 있나싶어 빠르게 진정이 된 것이다. 풀과 뿌리를 먹었다고 머리가 탈색되고 피부색이 변한다는 기사 (奇事)가 사뭇 신기해 몇 번이고 연못에 비춰진 머리카락을 매만 지고 피부색을 확인했다. "대체 왜 그런 현상이 벌어진 거야, 사제?" 어느새 남지학이 옆쪽에 와서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아! 만년음양과의 열매를 사형께 드리고…… 혹시나 무슨 효능 이 있을까 싶어 줄기와 뿌리를 먹었거든요. 그랬더니 이 모양이네요." 말을 하다 보니 남지학과 영과를 나눠먹지 않은 게 또 아쉬워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랬군. 영약의 줄기와 뿌리는 독일 경우가 많다는데……, 그래 도 생명에 지장이 생기거나 다른 탈이 난 것은 없으니 불행 중 다 행으로 생각해, 사제. 남자에게 있어서 외양이란 중요한 게 아니잖아?" 남지학은 선주혁의 씁쓸한 미소를 보고 기괴하게 변한 모습에 슬퍼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선주혁은 영약의 줄기와 뿌리가 독일 가능성이 높았다는 사실에 내심 철렁했다. "하핫, 치명적인 독이 아니라 천만 다행이군요. 뭐…… 모습이 변한 건 괜찮습니다. 어차피 진짜도 아닌……." "……?" "아하하핫! 껍질에 불과하다는 말이죠. 육신이란 말입니다. 하하핫." 스스로의 말에 당황해 뒷머리를 긁적이는 선주혁을 보며 남지학 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흠……. 예전부터 느꼈는데 사제는 역시 도문과 인연이 있는 것 같아. 부드러운 성정하며……." "아하하하핫! 제가 어찌 그런……." '개뿔! 아무리 환상 속이라지만 중이나 도사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이 소설에 등장하는 수많은 미녀들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말 그대로 먼치킨에 하렘물이 아니던가? 환상 속에서라도 그런 미녀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를 왜 포 기하겠는가? '흠…… 설마, 모습이 이렇게 변했다고 여자들의 외면을 받는 건 아니겠지? 하긴 원판이 잘생겼으니 큰 문제는 없겠지. 은발에 가 까운 백발…… 멋있잖아? 멋있을 거야. 아니 멋있어야 해!' 홀로 중얼중얼 거리는 선주혁을 보면서 남지학은 침묵을 지켰 다. 워낙 충격이 컸을 테니 스스로 진정할 시간을 주는 것이다. "참! 사형." 문득 선주혁이 부르자 남지학은 자애로운 표정을 대꾸했다. 어 떻게 생각하면 선주혁은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그를 위해 서는 뭐든 해줘야한다고 마음먹은 남지학이니 표정에서도 드러나 는 것이다. 그에 반해 선주혁은 다급하기 이를 데 없는 표정이었다. 이제야 잊고 있던 게 생각난 것이다. "저 동굴…… 안에서 뭔가 이상한 일 겪지 않으셨나요?" "아! 사제가 그걸 어떻게 아는 거지?" "그게…… 그냥 범상치 않은 기운이 감돌고 있어서요." 선주혁은 대충 얼버무리려 했다. "흠. 그런 것을 느낄 수 있다니. 나는 아무 것도 몰랐었는데. 정 말이지 곤륜파의 제자들은 사제의 진면목을 너무도 모르고 있는 셈이군." '쓰잘때기 없는 소리 하지 말고, 동굴 안에서 일이나 말해!' 잠시 홀로 생각을 정리하던 남지학이 말을 이어갔다. "정신을 차리고 내 몸이 완쾌된 것과 기이할 정도 불어난 내공 에 대한 것은 사제가 더 잘 알겠지." '당연하지. 그 귀한 영약을 먹였는데, 안 그러면 더 이상하지.' "아무리 깨워도 사제가 일어나질 않는 거야. 다급한 김에 명문 혈에 진기를 불어 넣어봤지만 역시나 눈을 뜨지 않았지. 진기의 흐름에는 막힘이 없고, 탁기도 전혀 없는데 정신을 못 차리는 사 제를 동굴 안으로 옮겼어. 사제의 옆에서 상세를 살피며 며칠을 보낸 다음 동굴의 깊은 곳까지 살펴보게 됐지." "그, 그래서요?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을 봤나요?" 선주혁은 조급해진 마음에 해서는 안 될 질문을 했다. "어? 사제는 그걸 어떻게 알아?" '헙! 이런 젠장, 이놈의 정신머리하고는……!' "하! 지금 사형이 말씀하시는 내용이 제가 꿈에서 본 내용과 너 무나 똑같아서요." '브라보! 제대로 해냈어!' 선주혁은 스스로의 임기응변에 스스로 감탄했다. 남지학은 놀란 눈으로 선주혁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 중얼거렸다.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다면 당장 사부님께 말씀드려야겠군. 사 제의 놀라운 능력을 말이야. 반드시 사제가 곤원모(昆元帽: 도사들 이 쓰는 모자)를 받을 수 있도록 하겠어." 선주혁의 말도 안 되는 핑계는 남지학에 손쉽게 먹혔다. 무공을 수련하는 곤륜파라해도 근간은 도문(道門)이다. 원시천존 (元始天尊)을 모시고 파시(派詩: 신성한 시가)를 읊조리기도 하고, 단로(丹爐)에서 선단(仙丹)을 빚기도 하며 제(祭)를 지내고, 탈적지 귀(脫籍之鬼: 명부에 들지 않은 귀신)을 쫓기도 한다. 또한 청정도량에서 선인이 되고자 수양을 쌓는 이들이 넘치는 만큼 선주혁이 보여주는 현상은 신기할지언정 금시초문의 낯선 일 만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남지학은 선주혁이 말하는 기이한 현상을 예상외로 쉽 게 납득하는 것이다. '원치 않는 일을 하면서 생색내려 하지 말라고. 난 도사 나부랭 이가 되고픈 마음은 추호도 없으니까 말이야.' "그 다음은 어떻게 됐나요? 제 꿈에서 본 것처럼 비급도 발견한 건가요?" "하! 진실로 놀라운 일이군. 꿈에서 그것까지 본 거야?" "아, 네." 선주혁은 뒷머리를 긁었다. "사제 말대로 동굴 안쪽에는 두 명의 노인이 있었어. 실로 상반 되는 용모의 두 사람이었지." 선주혁은 원하는 내용이 아니라 처음부터 차근차근 설명하는 남 지학이 답답하기만 했다. 그가 설명하는 내용은 이 엉터리 소설이 아니라도 골백번은 더 본 내용이었다. 수백 년 전의 절정고수 두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싸운다. 승부를 내지 못하고 서로 이기려고 버티다 결국 멍청하게 죽어간 다. 자신들의 뛰어난 무공을 전하지 못함을 안타까이 여겨 비급을 남겨 연자(緣者: 인연이 있는 사람)에게 전한다. 물론 두 고수 중 한 사람은 좋은 사람이고 한 놈은 나쁜 놈이 다. 주인공은 두 사람 모두의 무공을 익히거나 아니면 둘 중 하나 의 무공만을 익히게 된다. 남지학의 경우는 후자에 해당되었다. 동굴에서 죽어 간 멍청한 늙은이들은 누구의 비급을 취하느냐에 자신들의 승부를 걸었다. 다 죽은 다음까지 승부에 집착하는 인간들이 그 당시 최고의 고수 라니, 선주혁은 작가의 엉터리 상상력에 혀를 찰 정도였다. 선주혁이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남지학의 설명도 그 부분까지 도달해 있었다. "그래서 결국 건곤일원문(乾坤一元門)의 문주이신 현천자(玄天 子) 어르신의 비급을 선택하게 된 거야." '하여간…… 꼭 글 못 쓰는 인간들이 이름은 거창하게 지어요. 그럴 듯한 한문만 잔뜩 넣어서 말이지…… 쯧쯧.' 남지학의 말을 들으며 선주혁은 내심 엉터리 작가를 한 번 비웃 어 주고 있었다. "헤헷, 사형. 그 비급은 아직 가지고 계시나요?" 선주혁은 재빨리 간사한 미소를 줄줄 흘리며 남지학에게 물었 다. 비급에 담겨진 심법(心法)과 삼초식(三招式)의 검법은 가히 무 적의 위력을 담고 있었다. 그것만 배워둬도 이 바닥(?)에서 떵떵거리며 사는데 지장이 없 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미쳤다고 절벽에서 다이빙을 하겠는가? "아니. 비급은 없앴어. 건곤일원문은 일인전승(一人傳承)의 문파 라더군. 타인에게 절대 전하면 안 된다고 해서 삼매진화(三昧眞火) 로 태워 버렸어." '커어어억!" 선주혁은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았다. 남지학처럼 어린 나이에 내공만으로 물건을 태우는 삼매진화를 익혔다는 사실에 놀라는 것이 아니었다. 풀뿌리를 집어 먹고 잠들 어 있는 동안 남지학이 비급을 태웠다는 사실이 그를 경악케 하는 것이다. "비, 비급을, 아니 그런 신공절학(神功絶學)이라면…… 익히는데 시간이 걸릴 텐데……." 선주혁은 이마에 송글송글 솟아오르는 땀을 닦으며 애써 태연한 표정으로 물었다. "응. 너무나 현묘한 초식과 심법이라 일시에 익힐 수는 없더라 고. 그래서 비급을 모두 암기한 후 태웠지. 어차피 당장은 이곳을 빠져나갈 방도를 모르니 당분간은 신공을 익힐 예정이야." 한 가지를 간과했다. 남지학은 소위 말하는 천재다. 뭐든 한 번 보면 다 외워버리는. 자신이 잠들어 있는 며칠이면 평생을 두고도 잊지 않을 정도로 외우고도 남았을 시간이다. 그러고 보니 소설 속에서도 세 번인가를 정독한 후 비급을 태웠다. 무조건! 무조건 자신이 먼저 비급을 챙겼어야만 했다. 그래야 줄 없이 번지 점프를 한 보람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선주혁은 하도 어이가 없어 멍하니 남지학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 융통머리 없는 인간이 일인전승의 비전이라고 제 목숨을 구 해준 사제가 있는데 비급을 태워버릴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괜스레 욕심을 내 만년음양초의 줄기와 뿌리를 씹어 먹은 게 가 장 큰 실수였다. 검은 머리를 파뿌리처럼 하얗게 새게 만들고, 멀쩡한 피부색을 잿빛으로 만들기 위해 이 난리를 피운 게 아니었다. 너무나 허탈해 당장이라도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았다. 되는 놈은 되고, 안 되는 놈은 절대 안 되는 진리가 이 엉터리 소설에 통용이 된다면 자신은 안 되는 놈에 속하는 것이다. 그것 이 선주혁을 서럽게 만들었다. '이 융통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응? 융통성이라고는 없는?' 허탈한 마음에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없던 선주혁이 스프 링처럼 몸을 튕겨 일으켜 세웠다. "사제, 어디가?" 난데없는 행동에서 비롯된 남지학의 부름을 뒤로 한 채 선주혁 은 동굴 안으로 달려갔다. 허겁지겁 동굴의 입구를 지나친 그는 어둠을 개의치 않고 안으 로 달렸다. 자신의 정도의 내공으로는 이와 같은 어둠 속에서 훤 히 볼 수 있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하는 중이었다. 끝없이 펼쳐질 듯 했던 암혈은 점차 폭이 좁아지다 한순간에 확 트인 공간을 만들어냈다. 선주혁은 굳이 두리번거릴 필요도 없이 두 명의 노인이 좌정한 채 앉아 있는 것을 봤다. 각각 흑백의 장포를 입은 두 노인. 긴 수염을 가슴까지 기르고 한없이 자비로운 표정을 짓고 반개 한 노인과 강퍅한 인상에 미간 사이 깊은 골을 만들어 눈을 감고 있는 노인이었다. 선주혁은 와중에도 참으로 단순한 작가라는 생각을 했다. 한 눈에 봐도 누가 좋은 편인지 나쁜 편인지 구분이 되는 것이다. 더구나 좋은 놈은 무조건 백의를 입고 나쁜 놈은 흑의를 입는단 말인가? 복잡한 흑백논리가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잘 모르는 자신이라 해도 이처럼 단순한 사고는 안할 것이었다. '내가 지금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지.' 남지학은 그야말로 고지식의 극치를 달리는 인물이다. 현천자와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는 이 악당 노인의 승부가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그는 악당 노인의 비급에는 손조차 대지 않았다. 즉, 좋은 놈은 좋은 놈의 무공만을 익힌다는 되도 않는 논 리로 소설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사자성어에 대해 약한 나도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는 말은 안 다, 이 엉터리 작가야!' 내심 소리를 지른 그는 흑의노인의 앞에 있는 비급을 쥐어 들었 다. 수북하게 쌓여 있던 먼지가 풀풀 날리는 것으로 보아 과연 남지 학은 손조차 대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백의 노인의 비급을 먼 저 집어 들고 그 내용만을 확인한 것이다. 하얀 먼지가 자욱한 가운데서도 선주혁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 했다. 드디어 자신에게도 기연의 차례가 돌아온 것이다. 현학자라는 절대의 고수와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양패구상을 할 정도라면 이 악당 노인의 무공도 절정에 달했을 것이 아닌가? 그 절학을 자신이 익힌다면 남지학 만큼은 못할지언정 어디 가 서 무시당하고 살지는 않게 될 것이 분명했다. "크흐흐흐…… 결국 해내는구나!" 이 비급 하나를 얻기 위해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실로 감격스러 운 순간이었다. 선주혁은 양피지로 만들어진 비급을 입에 가져다 대고 뽀뽀라도 하고 싶었다. "사제." "……!" 뒤쪽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선주혁은 애써 표정을 관리하 며 고개를 돌렸다. "그 비급 때문에 황급히 달려 들어온 거야?" "아, 그냥…… 대체 꿈이랑 얼마나 똑같은 건지 확인을 좀 해 보려고요." 선주혁의 어설픈 변명은 이번에도 통했다. 남지학이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이렇게 단순한 놈이 천재는 무슨 천재? 암기력만 죽이면 천재 소리 듣는 게 아니란 말이지.' 선주혁은 적어도 이 소설의 멍청한 캐릭터들보다 자신이 한수 위라고 생각을 아직도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어때 많이 같아?" "거의 똑같군요. 마치 사진, 아니 그림으로 본 장면을 그대로 본 듯하네요." "정말 신기한 일이군. 어쩌면 이곳과 사제와 깊은 인연이 있는 것은 아닐까?" "아하핫, 그럴 수도 있죠." '인연이야, 니가 있지. 난 꼽사리 낀 거고.' 겉으로 웃으며 속으로 딴 생각을 하는 선주혁은 자신은 양의심 공(兩意心功)을 익힐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속으로 딴 생각을 하면서 겉으로는 이렇게 웃으며 말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 비급을 살펴볼 셈인가?" 남지학의 시선이 선주혁의 손에 들린 비급으로 향했다. "아! 네. 뭐…… 어쨌든 무공비급이 아닐까 싶어서 말이죠." 남지학의 미간에 옅은 주름이 잡혔다. "저 자는 삼백 년 전의 대마두(大魔頭)였던 수라마제(修羅魔帝) 사마횡천(司馬鐄天)이라고 하더군. 절대의 경지에 올랐던 마인이라 니 그의 무공 역시 마공(魔功)일게 틀림없어. 그것을 살펴보는 것 이 자칫 위험할 수도 있을 거 같은데……?" 영약도 자신이 복용하고 비급마저 자신이 취한 것, 즉 연이은 기연을 홀로 차지했던 것이 미안했기 때문인지 남지학은 사뭇 부 드럽고 걱정스런 표정으로 선주혁에게 말했다. 지금의 입장에서 선주혁에게 비급을 버리라 말하는 것은 자칫 자신이 챙길 것은 다 챙겼으니 너는 구경만 하라는 식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편 남지학의 말을 들은 선주혁은 또 한 번 가슴이 철렁했다. 남지학의 말대로였다. 무협지를 보면 뻑하면 나오는 내용이 마성이 골수에 치밀어 이 지를 상실하고 어쩌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한마디로 말하면 미친놈이 된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이 와중에 비급을 포기하기란 선주혁에 있어서는 너무 도 억울한 일이었다. "그냥…… 살펴만 보는 건데요, 뭘." 선주혁은 스스로를 위로하는 의미를 담아 말한 것에 남지학은 정색을 표했다. "마공은 달리 마공이 아니야. 한 번 보면 걷잡을 수 없는 유혹 에 빠져 들기 때문에 마공인 게지." "아하핫……! 그런가요?" 금세 시무룩해지는 선주혁이었다. "이곳에 와서 특별한 것을 얻지 못했다고 해서 너무 실망하지 마. 천장단애에서 떨어져 생명을 구한 것만 해도 큰 행운이잖아?" '내 스스로 뛰어내렸다고. 너하고는 다르다니까.' "그리고 지금은 세가 기울었다고는 하나 본문의 무공 또한 천 년을 갈고 닦아온 절예! 저 마인의 무공에 비해 손색이 없으니 외 려 충실하게 본문의 무공을 수련하는 게 더 좋을 수도 있어." '그러는 넌 왜 저 현천자의 무공을 익히냐?' "너는 여러모로 현기(玄氣)가 넘치니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거라 생각한다." 선주혁은 잠시 침묵했다. 남지학의 태도로 보아 자칫 잘못하면 이 비급마저 뺏길 판이었 다. 그의 성정으로 미루어 자신이 유혹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삼매진화로 비급을 태울 수도 있는 일이었다. 비급의 내용을 보다가 미친놈이 되고픈 마음은 추호도 없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허망하게 비급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스스로 결론을 내리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니 당장 눈에 불을 켜고 비급을 빼앗아 폐기하려는 남지학에게 둘러댈 말이 필 요했다. 일단 폐기만은 미뤄놓고 봐야할 일인 것이다. "사형." "그래. 말해 봐라." 남지학은 최대한 부드럽게 대답해 주었다. "제가 만 길 깊이의 절벽에서 떨어져 이곳에 도착한 것도 인연 이요, 꿈에서 동굴의 광경을 훤히 본 것도 인연일 것입니다. 제가 천지만물의 모든 것을 파악할 능력이 있지도 아니한 바, 그와 같 은 인연이 이곳과 맺어져 있음은 하늘의 뜻이 아닐까 합니다. 그 러니 인연의 끝이 무엇인지를 알기 전에 제 손으로 이 비급을 버 리는 것은 자칫 천의(天意)를 거스르는 것이 아닐까 염려가 되는 군요." 스스로 풀어낸 말에 스스로 놀라는 선주혁이었다. 그간 무협지 꽤나 읽었나 싶더니 어쩐지 그럴 듯한 말을 꾸며낸 듯하여 흡족했 다. "흠……, 사제가 이렇게 많은 말을 하다니……. 곤륜산의 사형제들이 실로 놀랄 일이군." "하하핫." 선주혁은 자신의 주장이 먹힌다 싶어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사제의 말에도 일리가 있어 보이는군. 하지만 말이야……, 그 천의라는 것이 저와 같은 마공이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일 수도 있잖아." '커억!' 역시나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판단을 뒤로 미뤄놓고 차분히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선주혁은 지금이 바로 용단이 필요할 때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렇다면 이런 방법은 어떻습니까?" "……?" "이곳이 저와는 실로 인연이 깊은 듯하니…… 제가 비급을 먼저 살피고, 마성에 젖을 위험이 없다 싶으면 수련을 해 보는 것입니다." "무슨 소리! 명문대파의 제자가 어찌 사마외도의 무공을 익힌단 말이냐?" 한없이 부드러웠던 남지학의 얼굴이 굳어졌다. 음성도 약간 고 조되었음이 느껴졌다. '여기서 물러서면 끝이다.' "사형도 현천자 어르신의 무공을 전해 받지 않으셨습니까?" "그것이 어찌 같은 일이더냐? 현천자 어르신은 강호의 대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분. 저 분의 협의지심은 삼백 년이 지난 지금 에도 회자되는 바, 그분의 절학을 이어받아 강호의 대의를 지키는 것은 검을 들어 의를 행하는 자에게 있어 실로 영광된 일이며 의 무가 아니겠느냐?" '말은 잘한다.' 속으로 한번 투덜거린 선주혁은 그간 읽었던 무협지의 대사를 총동원하기 시작했다. "애꿎은 사람을 죽인 칼이 있으면 그 칼에 죄가 있음입니까?" "……?" "대저 어떤 이의 손에서 이기(利器)로 활용되는 칼이 어떤 이의 손에서 흉기(凶器)로 변하는 것은 칼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누 구의 손에 들려 있었느냐가 문제일 것입니다. 저 사마…… 어쩌고 하는 누군가가 마공을 익혀 악행을 했으니 마공인 것이지, 무공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닐 수도 있을 것입니다. 천하를 어지럽히던 대악인의 무공으로 강호의 정의를 바로 세운다면 그것이야말로 하 늘의 뜻을 좇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줄줄 늘어놓는 선주혁의 말에 남지학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 다. 한 방에서 지내온 선주혁이 이런 달변(達辯)이었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던 것이다. 숨조차 쉬지 않고 쏟아내는 말의 품세로 보 아 그동안 어떻게 얌전히 지내온 것인지조차 의문이 들었다. "사제도 알겠지만 몇몇의 마공은 인간의 품성에까지 영향을 끼 치잖아. 그러니 마공 자체가 악한 것일 수 있지."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제가 익혀봐야 할 것입니다." 선주혁은 단호하게 말했다. "난 사제가 마성에 젖는 것을 보고 있을 수는 없어." 남지학 역시 단호했다. 그러자 선주혁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렇죠. 저는 그것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건 또 무슨 궤변이야?" "저 혼자서 비급의 무공을 익히면 마성에 젖어 돌이킬 수 없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곳에는 사형이 계시지 않습니까? 계속해 서 제 상태를 체크, 아니 확인해 주시면서 마성이 느껴지면 저를 제지하실 수 있을 겁니다." "내가?" "네. 여기 두 노인들은 서로 승부를 낼 수 없을 정도로 비등한 실력을 지고 있다하지 않았습니까? 결국 두 사람이 익힌 절기가 우열을 가릴 수 없다는 뜻인데 사형과 저와는 시작부터 큰 격차가 있지 않습니까? 무학에 대한 이해도 그렇고, 영약으로 인한 내력 만 봐도 큰 차이가 있죠. 사형께서는 저를 충분히 제어해 주실 수 있을 겁니다." "흠……." 남지학은 나직한 신음성을 흘렸다. 사실 따지고 보면 선주학의 말이 아주 틀린 것만은 아니었다. 남지학에게 있어서는 사제가 위험에 빠지는 것이 제일 염려되는 일이었지만, 본인이 감수하겠다고 하니 그도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사제. 본시 마공이란 조화를 이루지 못한 방법이 많아. 음(陰) 과 양(陽), 그리고 정(靜)과 동(動)을 조화시킨 곤륜파의 무학과는 천양지차를 보이지. 조화를 부정하고 양강(陽剛)하거나 음유(陰柔) 한 길만을 선택해 위력을 내는 거야. 그러니 속성으로 무공이 강 해지는 것 같고, 또한 그렇기에 좌도방문이라는 소리를 듣는 거고. 이와 같은 사파의 무공은 자칫 음양의 조화를 거스르거나 오행(五 行) 중 하나라도 어긋나면 주화입마에 빠져 들어. 그렇게 되면……." 장서고에서 무학에 대한 기본을 익힌 선주혁은 남지학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지레 겁을 주어 자신을 막고자 함도 아니었다. 그의 말대로 무공을 익혀보기도 전에 반신불수가 되거 나 미쳐버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선주혁의 머릿속에는 이 비급을 포기하면 지금까지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다는 생각뿐이었다. "감수할 수 있습니다. 사형이 옆에 계시니 그런 일은 생기지 않 을 것입니다." "휴우……. 사제는 이 우형을 너무나 과대평가하고 있군." 남지학은 긴 한 숨을 내쉬었다. 두 눈을 빛내는 사제의 얼굴을 바라보며 더 이상 만류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차라리 이 사제 가 현천자의 비전을 이어가야 했을 거라고 내심 한탄했다. "아뇨. 사형에겐 충분히 그런 능력이 있으니까요!" 선주혁은 기대에 가득한 표정으로 일관했다. 남지학은 강인한 입매를 일자로 다물었다. 그는 생명의 은인과 도 같은 사제를 걱정하는 마음뿐이었다. 비급을 보존하기 위해 큰소리는 뻥뻥 쳤지만 막상 홀로 앉아 비 급을 펼치려니 손이 다 떨려왔다. 진짜 이 책을 읽고 잘못될까 염 려가 되는 것이다. 한 참을 그렇게 망설이던 선주혁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손끝이 두꺼운 양피지 표지를 넘겼다. 서체에 대한 조예가 없는 그가 보기에도 힘이 넘쳐 보이는 필치 로 글자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소설 속에서는 이 사마 어쩌고 하 는 노인의 비급에 대해서는 언급이 되어 있지 않았다. 주인공이 외면한 책을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으리라. 선주혁은 아주 작은 실수 하나가 크나큰 화를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되뇌며 한글자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비급의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비급의 시작을 사마횡천이라는 노인의 일생에 대한 간략한 기술 이었다. 한 쌍의 육장(肉掌)으로 천하를 오시하다, 라는 글귀를 시 작으로 한 노인의 일생은 참으로 파란만장했다. 부모에 대한 기억조차 없던 그는 암천종(暗天宗)이라는 사교(邪 敎)에서 키워졌다고 한다. 무공에 대한 천부적인 자질을 가진 그 는 약관 이전에 암천종의 모든 무공을 섭렵하고 일약 강호 제일의 신진고수로 활약을 하게 되었다. 그를 선두에 둔 암천종은 급격한 세력의 부상과 함께 마도제일 을 자랑하는 마교와 어깨를 견주게 된다. 그와 같이 되기까지 사 마횡천의 손에 죽은 정도의 고수가 천 여 명에 달했고, 암천종에 대항하는 마도의 고수 역시 기백은 죽음을 맞이했다. 그의 나이 쉰에 이르렀을 때는 명실 공히 마도 제일의 고수로 추앙을 받게 된다. 사마횡천의 이와 같은 성장은 세상을 들썩이게 했다. 그것은 사마횡천의 내력이 오랜 수련을 쌓은 정도의 고수들 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보통의 경우 심후한 내공은 유구한 역사를 가진 정종무공(正宗 武功)이 아니고서는 기대하기 힘들다. 단 한순간의 잘못으로 인해 폐인이 되는 것이 심법의 수련이었고, 이와 같은 심법은 오랜 세 월동안 천재들의 손을 거쳐 다듬어져야 완벽성을 갖추기 마련이다. 결국 장구한 역사와 함께 발전해 온 심법이 아닌 것들은 치명적 인 단점을 내포하고 있거나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마도에 있어서는 마교와 같이 몇 되지 않는 뿌리 깊은 곳이 아니라면 내가고수를 배출하기란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 었다. 따라서 생긴 지 얼마 되지도 않는 사교무리인 암천종에서 절대적인 내가고수(內家高手)을 배출해낸 사실이 놀랍기만 했던 것이다.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사마횡천과 암천종이었지만 자중지란(自中 之亂)를 맞이하게 된다. 암천종의 호법으로 활약하던 사마횡천은 우연한 기회에 자신의 유모를 만나게 되고 과거를 알게 된다. 유모는 그가 작은 마을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학 식이 깊은 부친과 후덕한 모친 사이에서 태어난 그가 부모의 사랑 을 받은 날은 길지 않았다고 한다. 이유는 사마횡천이 천살성(天 殺星)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고, 암천종의 교주가 이를 알게 되었 기 때문이다. 암천종은 희대의 자질을 가지고 태어난 사마횡천을 원했으나 사 교의 교도로 자식을 내어줄 부모는 없었다. 이에 암천종의 교주는 사마횡천의 부모를 죽이고 그를 교에서 키운 것이다. 그것은 사마횡천에게 있어 크나큰 충격이었다. 그간 자신의 부 모는 암천종의 독실한 신도였으며, 암천종을 음해하려는 백도의 무리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알아왔던 것이다. 분노와 배신감에 치를 떤 사마횡천은 복수를 감행한다. 설마 교의 호법이 자신을 죽이리라 생각지 못한 암천종의 교도 들은 속절없이 사마횡천에게 죽어갔으며, 뒤늦게 그의 복수행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태반의 고수를 잃은 상태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마횡천의 손에 성장을 거듭해온 암천종이 사 마횡천의 손에 의해 끝장이 난 것이다. 그 후 사마횡천은 무공을 익힌 자들을 향해 자신의 화를 풀기 시작했다. 무공을 익혀 세를 늘리려는 자들을 모두 부모의 원수 취급했던 것이다. 날로 늘어가는 그의 무공을 감당할만한 고수는 강호에 존재하지 않았다. 거침없는 그의 살행(殺行)은 계속되었으며 강호는 공포에 떨어야만 했다. 천살성의 정기를 받은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백도는 백도대로, 마도는 마도대로 사마횡천에게 저항하고자 했으 나 헛된 일이었다. 자칫 무림이 한 사람의 손에 의해 멸망할 위기 에 처한 것이다. 그 때 어디선가 나타난 한 명의 노인이 사마횡천과 경천동지의 승부를 겨루게 된다. 스스로를 현천자라 밝힌 노인은 놀라운 검법 으로 사마횡천을 상대한 것이다. 이후의 스토리는 뻔한 내용이었다. 별 볼일 없는 삼류소설의 흔하디흔한 설정이었으나 선주혁은 꽤 나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무엇보다 사마횡천이라는 노인이 자신과 같은 고아출신이라는 것이 마음을 움직였던 것이다. 고아로 태어나 세상을 호령하는 인물이 된다는 것. 왠지 생각만으로도 가슴 떨리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선주혁이 아는 한 현실세계에서 자신은 절대로 그런 위치에 오 를 수 없었다.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소매치기밖에 없는 그가 아닌가? 하지만 지금 자신이 처해있는 이 묘한 상황에서는 달랐다. 천하를 호령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적어도 남에게 괄시받지 않고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기회가 충분히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은 생각에 선주혁은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서둘러 비급 의 페이지를 넘겼다. 본좌를 천하제일의 고수로 만든 것은 하나의 내공심법이었다. 암천종이 우연한 기회에 이 심법을 얻지 않았으면 나를 탐내지 도 아니했을 것이며 부모님도 억울한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으리 라. 내게 있어 저주를 내린 심법이랄 수 있으나 그 위력만은 가히 천하제일이라, 소림의 땡중이 만든 역근세수경(易筋洗髓經)이나 무 당의 말코 도사가 만든 태청심법(太淸心法)보다 월등하다 자부한 다. 본좌를 망치고 또한 본좌를 천하제일의 위치에 오르게 만들었 으니 실로 감회가 복잡하다 할 것이다. 본좌가 익힌 이 심법의 이름은 흡성대법(吸星大法)이라 한다. "헉! 흡성대법이라고?" 선주혁은 두 눈을 부릅떴다. 요즘에는 잘 안 나오는 마공이지만 예전에 읽었던 무협지에서는 종종 모습을 보였었다. 상대의 내공을 흡수해 자신의 것으로 만든 다는 말도 안 되는 심법이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하나 선주혁이 두 눈을 부릅뜬 것은 노인이 남긴 심법이 너무나 뛰어나서가 아니었다. 그가 기억하기로 흡성대법이라는 심법은 늘 부작용을 동반했다. 이 심법을 익힌 주인공이나 그 외의 캐릭터들 은 늘 죽도록 고생을 하곤 했던 것이다. 그런 부작용은 항상 기연을 통해 간신히 벗어날 정도였으나, 이 소설의 주인공도 아닌 자신에게 그런 기연이 올 것이라고는 기대 하기 어려웠다. 만약 기연을 맞이하지 못하면 고통 속에서 처참하게 죽어갈 것 이 아닌가? 결국 비급이 있어도 익히지 못하는 종류, 아니 익혀서는 안 되 는 종류의 심법인 것이다. "X발, 안 되는 놈은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고……, X뺑이 쳐서 얻어낸 비급이 이런 쓸데없는 것이라니!" 그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비급을 찢어발기려 했다. "아니지! 그런 부작용이 있었으면 이 늙은이도 처참하게 죽었어 야 하잖아? 이 늙은이도 뭔가 기연을 얻었던 것일까?" 선주혁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비급을 좀 더 살피기로 했다. 어차피 개연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엉터리 소설이었다. 흡성 대법에 필연적이랄 수 있는 부작용을 멍청한 작가가 미처 생각지 못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억지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비급을 읽어가는 선주혁의 입매에 미 소가 맺혔다. 흡성대법을 구한 흑암종의 무리가 사마횡천을 원했던 이유가 있 었다. 흡성대법의 심각한 부작용을 극복할만한 방도를 찾지 못했 던 것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천살의 기운을 타고난 사마횡천이지만 무공에 대한 자질만은 천하제일일 터. 그라면 흡성대법의 부작용을 극복 할 방법을 찾아낼 것이라 믿었고, 결국 사마횡천은 암천종의 기대 에 부응했다. 이곳에서의 흡성대법은 흡수한 내력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 해 결국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죽거나 폐인이 되는 부작용이 있 었다. 사마횡천은 그와 같은 부작용을 이겨낼 방안을 창출해낸 것 이다. "우헤헤헤헤헷! 그럼 그렇지. 나라고 꼭 안 되는 일만 계속 생기 라는 법이 있어?" 대안을 만들어 냈으니 자신이라고 못 익히라는 법이 없었다. 천 하제일의 내공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에 선주혁은 절로 웃음이 터 져 나왔다. 마성이 골수에 뻗치는 부작용이 있는 것도 아니니 이 제 이 심법을 익히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이걸로 나도 팔자 한 번 펴 보자고! 푸하하하하핫! 동굴의 암벽은 선주혁의 흡족한 웃음소리를 이리저리 튕겨내고 있었다. Vol 10. "이, 이게 뭐야? 달랑 심법 하나인거야? 개세적인 위력을 가진 무공은?" 마음을 차분히 먹고 비급을 살피던 선주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무리 엄청난 내공을 익히고 있으면 무엇을 한단 말인가? 뛰어난 무공초식이 있어야 그 내공을 써먹을 수 있지 않은가? 그런데 비급에는 아무리 살펴도 내공에 관련된 내용 말고는 아 무 것도 없었다. 그저 권의 말미에 흡성대법의 이치가 천지를 관 통하니 비급을 익힌 자 반드시 천하제일이 되리라고만 되어 있었다. "젠장! 지도 현천자를 누르지 못했으면서 천하제일은 무슨……!" 하여튼 이 소설을 쓴 녀석은 처음부터 끝까지 앞뒤가 맞는 구석 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며 선주혁은 억지로 아쉬움을 달랬다. 천상 남지학에게 곤륜파의 무공을 배워 초식을 대신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흡성대법 자체가 남의 내력을 흡수해 자신 의 것으로 만드는 무공이라는 것이다. 고로 자신의 의지에 따라 진기의 유통이 자유로우니 강호 그 어떤 무공이라 할지라도 무리 없이 펼침이 가능했다. 아쉬운 대로 곤륜파의 초식을 익혀야 한다는 결론인 셈이다. "한 쌍의 육장으로 천하를 오시하네 저쩌네 하기에 대단한 장법 이라도 남겨 놓은 줄 알았더니…… 쩝! 뭐 어쩌겠어, 이게 내 복의 다인걸. 그나마 라도 건졌으니 만족해야지." 남지학은 정기적으로 선주혁이 마성이 깃드는 것은 아닌지 살펴 보고, 짧은 대화를 나누거나 곤륜파의 무공을 가르쳤다. 그 외의 시간에는 현천자가 남긴 비급을 익히느라 여념이 없었 으므로 선주혁은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자신도 흡성대법을 익 혀보겠다고 끙끙댔지만 워낙 익히기가 까다롭고 난해(難解)한 부 분이 많아 진도는 더디기만 했다. 원래부터 혼자였으나 텔레비전도, 컴퓨터도 없는 동굴 안에서의 시간은 실로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선주혁은 혼자 중 얼거리는 시간이 많았고, 남지학과 대화를 할 때면 폭포수처럼 많 은 말을 쏟아내곤 했다. 말하는 것 자체로 지루함을 해소하는 것이다. 그것이 혼잣말이 건 대상이 있건……. 숨이 턱하니 막히는 느낌이었다. 아무 동작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남지학은 그저 검을 곧추세워 들고 있을 뿐이었다. '이, 이게 고수라는 건가?'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이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근본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곤륜파의 초식을 가르쳐 주기 위한 대련(對鍊) 일 뿐이었다. 그런데 선주혁은 뱀 앞에 놓인 개구리마냥 옴짝달싹 못하고 있 는 중이었다. 털끝 하나라도 움직이면 그 방향에 검이 기다리고 있다가 자신 을 갈라올 것 같은 느낌. 그 느낌에 온 몸의 털이 곤두섰다. 찌릿찌릿한 무엇인가가 선주혁의 전신에서 느껴졌다. 물 묻은 손으로 콘센트에 코드를 꽂다가 감전 되어본 경험이 떠올랐다. 짧 은 순간 느꼈던 그 찌릿한 감각이 전신을 훑고 지나는 듯했다. 그것은 고명필 패거리 앞에서 위축되었던 느낌과는 달랐다. 그 때는 맞지만 않으면 다행이라는 생각에 몸을 움츠릴 뿐이었다. 빨 리 고통의 시간만이 지나갔으면 하는 바램뿐이었다. 하나 지금은 무엇이라 딱히 짚어 말을 할 수는 없었지만 분명 다른 느낌이었다. 온 몸이 갈기갈기 찢어질 지도 모를 그 위험에 자신을 내맡기고픈 욕구가 치미는 것이다. 자신의 꼼짝 못하게 하는 그 기운을 넘어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검푸름을 드러낸 깊은 강에 흰 포말을 만들어 소용돌이치는 용소 (龍沼)를 마주했건만 반드시 건너보고자 하는 욕구가 치밀었다. 저 건너에 무엇이 있을지 확인해 보고픈 것이다. "와라!" 남지학의 낭랑한 외침. 선주혁은 자신도 모르게 검을 수평으로 뉘어 찔러갔다. 남지학 의 외침에 놀라 저도 모르게 움직여 버린 것이다. 카앙 날카로운 금속성과 함께 선주혁의 동작이 멈췄다. 아니 멈출 수밖에 없었다. 입을 벌어지고 눈은 휘둥그레졌다. 남지학의 검극이 자신이 내지른 검극의 끝에 맞춰진 것이다. 검을 다루는 데 있어서 한 치의 오차라도 있으면 결코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후훗, 너무 정직해, 사제는." 검을 거두며 뒤로 물어서는 남지학. 선주혁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왜인지는 정확히 몰랐다. 여유롭게, 정말 여유롭게 뒤로 물러서는 남주혁이 천신(天神)처 럼만 보였다. 어쩐지 햇볕이 그만을 따로 비추는 듯 했다. 역시 주인공은 뭔가 달라도 다르구나……, 라는 생각만으로는 지금의 남지학 모습을 다 설명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검병을 말아 쥔 손에 다시 힘을 들어갔다. 분명히 자신의 상대가 되지 않는 실력을 지닌 남지학이었다. 그 런데 왜 이렇게 다시 한 번 그를 공격하고픈 마음이 드는 건지 몰 랐다. 혹시나 흡성대법이라는 마공 때문에 자신의 성정에 변화가 생긴 것은 아닌가 싶었다. 그러기에는 지금의 감정이 너무도 기분이 좋 았다. 마치 압도적인 높이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거대한 산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산을 올라보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가 꿈틀댔다. 올라야 할 산의 높이가 높아 뿌듯해지는 말도 안 되는 감흥이었다. 결코 마공을 익혔기에 치미는 욕구와는 달랐다. 다른 것은 몰라 도 그것만은 확실했다. "다시!" 남지학의 낭랑한 목소리에 선주혁은 몇 차례에 걸쳐 더 찔렀고, 매번 남지학은 여유롭게 선지학의 공격을 막아냈다. 몇 차례 그런 행동이 반복되고 선주혁의 이마에 구슬땀이 흘러 내릴 때게 되어서야 남지학은 대련을 통해 드러난 잘못된 점과 나 아갈 바를 세세히 설명하는 강론을 펼쳤다. 하지만 선주혁은 그저 멍하니 흘려들을 뿐이었다. 남지학과의 대련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간 무수히 검을 겨뤘고, 매번 속절없이 당해왔다. 이곳에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는 무공을 제대로 익혀야 된다 는 생각에 남지학의 가르침을 나름대로 열심히 배우던 그였다. 열 심히 배우다 보면 이곳을 벗어나 행세깨나 하고 살 수 있다고 생 각했다. 남지학이 선주혁에게 시키는 수련은 꽤나 고됐다. 하지만 소매 치기 수법을 배울 때 무수하게 맞았던 기억을 떠 올리면 못 견딜 바도 없었다. 그렇게 조금씩 실력을 늘여가던 선주혁이었다. 그리고 오늘의 대련에서 기묘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평소에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긴장과 떨림. 그리고 승부가 가려진 뒤의 흥분. 검을 거둔 남지학을 바라볼 때의 기묘한 동경. 그 모든 것이 낯설었다. 왜 일까, 하는 생각만이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자신의 열띤 설명에도 불구하고 멍한 표정만을 보이던 선주혁에 게 남지학이 싱긋 미소를 지어줬다. 선주혁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남지학이 말했다. "드디어…… 사제가 즐거워하는 것 같군." "네?" "무공을 익히는 것 말이야. 내가 가르치는 것을 그냥 몸에 익히 고 따라하는 게 아니라 오늘은 즐기고 있어 보이는 걸." "즐긴다고요? 제가?" 안 그래도 지금까지 흥분한 자신의 상태에 의아해하던 선주혁이 었다. 남지학의 말에 귀가 기울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사실 무공을 익히는 것은 마공에 못지않은 매력을 가지 고 있지. 수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경지를 향해 달리는 데는 그 만한 이유가 있는 거 아니겠어?" "그 사람들이야 강해져서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기 때 문이잖아요." "꼭 그런 것만은 아니야. 한 동작, 한 초식을 완벽하게 성취해 냈을 때의 기쁨, 오묘한 무리(武理)를 이해했을 때의 즐거움, 한 단계의 경지를 나아가 밟았을 때의 쾌감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 지. 무공을 닦는 자라면 그 쾌감을 잊지 못하기에 더욱 정진할 수 밖에 없는 거야." 부족했다. 남지학의 설명만으로는 지금 자신의 상태를 납득하기 어려웠다. 특별한 깨달음을 얻은 것도 아니고, 큰 성취를 얻은 순간도 없었 다. 그러니 남지학의 말한 나아가는 기쁨과는 달랐다. 과거 소매치기의 기술을 배울 때도 쾌감을 느낀 적은 있다. 기 술이 늘어나는 것을 느낄 때마다 느껴지는 짜릿함과 성취감을 어 찌 말로 다하랴? 하지만 지금의 느낌과는 명확히 구분이 되었다. "그리고……." 남지학이 얼굴에 미소를 유지한 채 설명을 이어갔다. 선주혁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다 재빨리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무인이란 어쩔 수 없는 호승심을 가지고 있지. 그것 역시 무인 만이 느낄 수 있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야." "호승심이요? 제가 사형을 이기려 들었단 말입니까? 감히?" "하하핫, 감히라니? 검을 든 이상 모두가 다 이겨야할 대상이야. 나라해도 마찬가지지." "제 실력과 사형의 실력은 천양지차라 해도 과언이 아닌 걸요. 제가 어떻게 꿈에서라도 사형을 이겨볼 생각을 하겠습니까?" 선주혁은 고개를 저었다. 백번을 양보해도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꼭 그렇지만은 않아. 상대가 강하기에, 그런 강한 상대와 겨룰 수 있기에 기쁜 것이 무인이야." "상대가 강하면 질 수밖에 없다는 말이잖아요. 누가 지는 것을 즐겨요? 지금이야 대련이니까 그렇다 치지만 실전이라면 팔이 잘 리고 다리가 잘리고, 목이 잘릴 지도 모르는데요?" "꼭 그렇지만은 않아. 자신의 진정한 경지를 알기 위해서는 강 한 상대와 부딪쳐 봐야만 하지. 한 번의 싸움을 통해 배움을 얻는 것이 백일간의 참오보다 나을 때가 많거든. 내가 말한 호승심이란 단지 남을 이기기 위한 호승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야." "남을 이기기 위함이 아니라고요?" "그래. 사제도 수없이 들었겠지만 무공이란 나를 다듬는 거지. 즉, 남과 겨룸으로써 자신의 한계를 명확히 알고, 그 한계를 넘어 서고자 하는 호승심이 바탕이라고 봐야 하는 거야. 단지 싸우고, 이기기 위한 호승심이라면 평생을 두고 무공을 수련할 사람은 없을 거야."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 힘이 있으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지고, 그런 맛에 젖어 무공을 계속 익힐 수도 있는 거잖아요." 사실 남지학이 말하는 그간 무협지에서 꽤나 들었던 내용인 듯 했다. 대개 저런 지루한 이야기가 시작되면 차르륵 페이지를 넘겨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스토리와 전혀 상관없이 이야기를 주절대며 써놓는 것을 읽기가 귀찮았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자신 이 느끼고 있는 기묘한 현상과 관련된 이야기라 나름대로 신중해 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그런 사람들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 사제가 말한 바와 같은 사심의 지배를 받는 한 반드시 한계에 부딪치기 마련이야. 사제도 잘 알다시피 절정의 상승무학이라는 것은 깨달음이 중요한 것이잖아. 남이 아닌 자신을 이겨가는 호승심, 결국 스스로를 닦아 한계를 넘어가는 기쁨을 알지 못한다면 그와 같은 깨달음은 얻을 수 없다고 봐. 사실 절정의 고수가 현문(玄門)이나 불문(佛門)에서 많이 배출되는 이유는 그와 같은 이치에서라고 봐야하지. 깊은 수 양에서 비롯된 깨달음은 도가나 불가에서 이루고자 하는 경지와 유사한 면모가 많으니까." "그렇다면 제가 스스로를 남을 이겨 저의 경지를 깨닫기를 원하 고, 궁극적으로 저 스스로를 이기려하는 호승심을 가지기 시작했 다는 말인가요?" "적어도 우형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는데?" 남지학이 싱긋 웃으며 답했다. 그의 말에 선주혁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숙였다. 남지학의 말은 분명 그럴 듯 했다. 그 말인 즉, 자신이 진정으로 무공에 빠 져들고 있다는 말이었다. 어쩐지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이 느낌. 이것이 무공을 익히는 자의 기본적인 자세라는 말이었다. '내가? 원래 무공을 익히고 싶어 했었다는 건가?' 그럴 수도 있었다. 만약 그것을 동경하지 않았다면 왜 무수한 무협지를 읽으며 세 월을 보냈단 말인가? 비록 자신을 이기려는 마음이나 수양을 쌓고자 하지는 않더라도 검 한 자루를 들고 세상을 굽어보는 꿈을 왜 꿔보지 않았겠는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그것을 잊고 있었을 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갑자기 뭔가 못마땅했다. 남지학이라는 캐릭터는 엉터리 작가가 만들어낸 말도 안 되는 인물이다. 천재라 설정이 되어 있지만 사실 바보들 사이에서 두드 러져 보일 뿐 그다지 남다를 것도 없는 캐릭터에 불과했다. 그런 인물에게 지금 자신이 설득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불현 듯 들자 불쾌해진 것이다. 그야말로 괜한 호승심에 불타오르는 선주혁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절정의 경지에 이른 자는 확실히 어느 정도의 깨달음 을 얻었다고 봐야겠군요." 선주혁의 말에 남지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왜 강호에서는 흑백의 논리만이 가득한 거죠? 마도에 도 분명 절정의 고수가 있을 것이고, 그들 역시 나름대로의 깨달 음을 얻었을 것이 아닌가요? 깨달은 자들끼리 왜 무기를 들고 피 튀기는 싸움을 하는 거죠?" 난데없이 고조되는 선주혁의 질문이었다. "그, 그건…… 아마도 깨달음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이…… 아니 지. 깨달은 바가 다를 수도 있지 않을까?" "잘못된 방향으로 깨달아도 경지에 오를 수 있는 것이군요." 선주혁은 과연 그러냐는 식으로 말했다. "……!" 남지학은 선주혁의 질문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어쩌면 엉터리 작가가 만들어 놓은 흑백논리에 완벽하게 지배받 고 있던 남지학일 수도 있었다.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질문이었거 나, 멍청한 작가가 넣어두지 않은 정보로 인해 극도의 혼란을 겪 는 것일 수도 있었다. 남지학의 심각한 표정을 보며 선주혁이 득의양양한 얼굴로 말했 다. "동굴 안에 있던 대악인도 천하제일을 논할 정도의 고수였잖아 요. 그 사람의 깨달음이 사형이 말한 불문이나 현문의 고수에 비 해 적다면 어찌 그토록 높은 경지에 올랐을까요? 결국 그 사람의 깨달음이 많고 그것을 실천하고자 하는 것을 막는 깨달음이 적은 사람들이 잘못된 것이 아닐까요? 그럼 대체 뭐가 흑이고 뭐가 백 이 되는 건가요?" 선주혁은 이상스러울 만큼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그것이 자신 의 생각인지 아니면 어떤 무협지에서 읽었던 내용인지는 명확히 몰랐다. 그저 엉터리 작가가 만들어낸 캐릭터에 설득당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서 쏟아내는 말이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남지학. 그의 표정으로 미루어 선주혁의 말이 혼란을 초래했음이 분명했 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자가 깨달은 자들의 경지를 이야기 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야. 우리가 이럴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 은 깨달은 사람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생각 해 볼 수는 있을 거 같아. 불가에서도 남을 바른 길로 이끌고 계 도를 함으로써 깨달음을 추구하는 길이 있고, 무엇보다 자신만의 깨달음을 중시여기는 길이 있다고 들었어. 이처럼 깨달음을 추구 하는 길이 다른 것이 아닐까? 흑백도 그렇게 나뉘는 거고. 많은 사람들의 피를 취해 깨달음을 추구한다면 그와 같은 길이 있을 지 라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해." 남지학을 눌렀다는 생각에 의기양양하던 선주혁의 얼굴이 굳어 졌다. 그라고 이런 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있을 리 없었 다. 그저 되는 대로 지껄이고 남지학이 혼란스러워하는 것을 즐겼 을 뿐이다. 그런데 반론이 제기되자 선뜻 되받아칠 마음이 떠오르 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무조건 내 길만이 옳다. 내 길만을 쫓아라. 이런 식은 편협하고, 오만한 게 아닌가요?" 선주혁은 마냥 당할 수만은 없었기에 생각나는 말을 그대로 던 졌다. "사실 사제의 말을 듣고 나도 혼란스럽기는 한데. 지금으로서는 이런 생각이 드네. 깨달음을 향한 길을 가는 선택 자체를 무시하 려는 게 아닌 것 같아. 문제는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 역시도 중요 하다는 거…… 그거 아니겠어? 흑도의 인물들의 궁극적인 목적이 깨달음에 있더라도 그것이 타인의 희생과 피를 요구하는 것이라면 막아야하겠지." 얼핏 그럴 듯 해 보이는 답변이었다. 하지만 못마땅했고, 부족했다. 선주혁은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자신이 조금만 더 배우고 똑똑했다면 남지학의 말에 날카로운 비 평을 했을 것이다. 이 소설을 쓴 엉터리 작가의 설정, 아니 간혹 드러나는 다른 어설픈 소설들이 가지고 있는 흑백논리의 근본적인 오류와 억지, 그것을 명확히 지적했을 것이다. 하지만 선주혁은 아쉽게도 그럴만한 논리적 사고에 익숙지 않았 다. 수긍할 수는 없지만 반박하기도 힘든 묘한 상태에 빠져 버린 것이다. "아무튼 오늘의 논지는 그게 아니었으니까. 일단 난 사제가 드 디어 무공을 익히며 그 안의 즐거움을 찾아가는 게 기쁠 뿐이야." "아…… 네." 엉터리 작가의 캐릭터와의 언쟁에서 확고한 승리를 점하지 못한 게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어쨌건 일방적인 패배는 아니라는 생각 이었다. 더구나 남지학이 자신의 일로 저토록 기뻐하는 모습을 보 며 눈을 부릅뜨고 말싸움을 하고 싶은 마음도 더 이상 들지 않았 다. 선주혁은 그렇게 멋쩍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도 명확히 느끼지 못할 정도로 남지학을 향한 희미한 호승 심을 마음 속에 간직한 채 보이는 웃음이었다. 소매치기 기술을 익히는 것은 지독할 정도의 인내심을 필요로 한다. 섬세한 손의 감각을 기르기 위한 준비훈련만도 반 년은 족 히 걸린다. 단 한 번의 실수로 몇 개월, 몇 년을 감옥에서 썩어야 하는 만큼 기술 하나하나를 익힐 때는 필사적일 수밖에 없다. 물론 그와 같은 인내심은 엄청난 구타 속에서 절로 키워진다. 제대로 하지 않으면 눈에서 눈물이 쏙 빠질 만큼 두들겨 맞아야하 니 기술을 습득하는 데에 이를 악물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와 같은 경험은 선주혁이 비급을 익히는 데에 큰 도움이 되어 주고 있었다. 당최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끊임없이 나열되어 있 었지만 그는 읽고 또 읽었다. 어쩌면 인내라기보다는 오기에 가까운 심정일 수도 있었다. 이 비급을 얻기 위해 목숨을 걸고 천 길 낭떠러지에서 점프한 것을 생각하면 죽어도 포기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지치는 것은 사실이었다. 흡성대법과 같은 기공(奇功)은 익히기가 난해하고, 상식을 벗어난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는 그였다. 그가 읽었던 무협지 중에서는 물구나무를 서서 조식을 한다거나 기를 거꾸로 돌린다는 말도 안 되는 설정도 있었기 때문이다. 물 론 책을 읽을 때야 ‘그럴 수도 있겠거니.’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선주혁의 몸을 통해 운기를 해 본 바에 의하면 그와 같 은 행동은 실로 미친 짓에 불과했다. 어찌 사람이 기를 거꾸로 순환해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겠는가? 그럼 멍청한 짓을 했다가는 특별한 능력을 얻기는커녕 단박에 주화입마에 빠져들 일이었다. 그런 면에서만 본다면 이 엉터리 소설 속의 흡성대법은 이해하 기는 힘들어도 실로 그럴 듯한 면이 있었다. 일반적인 축기는 기해혈(氣海穴)을 중심으로 하는 일정 부위, 즉 하단전(下丹田)에 하는 것이 정상이다. 하단전은 평면상의 한 점 (点)이 아니라 입체적인 구형을 이루고 있는데 선주혁은 이미 곤 륜산에서부터 단전의 위치를 잡고 축기를 해 온 상태였다. 흡성대법에서는 하단전을 정성(淨星)이라 했다. 말 그대로 해석 하자면 별을 깨끗이 하는 것이다. 물론 선주혁은 알지 못했으나 여기서 말하는 별[星]은 하늘에 떠 있는 별을 말함이 아니라 하늘의 기운을 뜻했다. 대개 천기를 읽는다함은 별의 위치와 기운을 알아차리는 것이니 별은 곧 하늘 의 기운을 나타낸다. 무공보다 신선술(神仙術)로 유명했던 소요파(逍遙派)의 북명신공 (北溟神功)에서 비롯된 흡성대법은 이처럼 하늘의 기운을 몸 안에 담는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전체적으로 조화와 순응을 강조하니 강호를 떨게 만든 악당이 익힌 마공이라는 생각 은 눈곱만큼도 들지 않았다. 아니 곤륜산의 장서고에서 읽었던 정도에 속하는 곤륜의 심법보 다 더 순리를 따지고 그를 쫓고자 하니 천하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는 흡성대법이라는 것을 납득하기 힘들었다. “거 참……, 읽으면 읽을수록 이해가 안가네. 이런 신선놀음 같 은 내용을 익히면 진짜 상대방의 진기를 모조리 빨아들여 말라 죽 게 하는 흡성대법을 익힐 수 있는 건가?” 선주혁은 고개를 저었다. 제목만 흡성대법이지 아무리 봐도 상대방의 진기를 빨아들여 내 것으로 만드는 방법은 나와 있지 않았던 것이다. ‘혹시……?’ 순간 선주혁이 눈을 부릅떴다. 충혈 된 눈에서는 살기에 가까운 빛이 쏟아졌다. “이 X떡 같은 작가 놈이……?” 특별히 눈을 둬야할 데가 없어 무조건 고개를 들어 동굴의 천장 을 노려보는 그. 그가 난데없이 화를 내는 이유는 머릿속을 스친 한 가지 가설 때문이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은 분명 엉터리 작가가 쓴 소설과 일치되고 있 었다. 사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정교하고 세세한 면까지 부합되 어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엉터리 작가 주제에 별의별 세세한 면까지 다 신경을 썼다는 생 각에 가끔은 제법이라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만약 그게 아니라면? 이 거지 같은 인간이 제대로 설정하지도 않고 두루 뭉실 넘어간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면 상황은 실로 곤란해진다. 소설에서는 선우횡천이 남긴 비급에 대한 언급이 전무했다. 흡 성대법이 남겨져 있다는 것도 자신이 직접 눈으로 보고서야 알게 된 사실이다. 그렇다면 망할 놈의 작가가 흡성대법에 대해서 제대 로 설정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불현 듯 든 것이다. 제대로 설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나온 비급이라면 익히는 방법도 제대로된 것이 아니고, 그것을 익혀봐야 아무런 쓸 데도 없다는 말이 될 수도 있다. 생각이 거기에까지 미치자 선주혁은 주먹을 불끈 쥐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자신의 가설이 진짜라면 지금까지의 모든 노력이 전부 헛 X랄로 바뀌기 때문이다. “아냐, 그럴 리 없지. 그럴 리 없어!” 선주혁은 애써 자신의 상상을 부정하며 고개를 저었다. 따지고 보면 소설 속에서 언급되지 않은 상당부분이 정교하리만 큼 갖춰진 세상이었다. 일단 자신만 해도 그렇다. 선주혁의 몸에 자신이 씌워진 것은 소설에 언급되지 않는 내용이다. 그런 상황에 서도 소설 속 캐릭터는 능동적으로 자신을 대하고, 그에 따른 상 황을 전개해가고 있었다. 즉, 작가가 미처 설정하지 않았던 부분까지도 이 안에서는 하나 의 완벽성을 갖춰가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이 비급도 진짜일 가능성이 더 높아! 쓸 데 없는 생 각하지 말자. 아자!” 여기서 비급이 가짜라는 결론을 내려버리면 그 허망함에 더 이 상 이 바닥(?)에서 잘 먹고 잘 살아보려는 목표가 사라져버릴 듯 했다. 그렇기에 선주혁은 스스로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었다. “뭔가 있을 거야! 그러니 사마횡천이란 늙은이가 천하제일을 운 운하며 행세하고 다녔겠지. 일단 비급의 내용을 익히고 보는 거야! 익혀서 써 먹어보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결론을 내리지 말자! 그래, 그런 거야!” 선주혁은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문 채 다시 비급에 고개를 파묻었 다. 그의 눈은 신념인지 아집인지 구분이 안 되는 빛으로 가득했다. “만약 이게 설정부족이어서 엉터리로 판명나면 지옥에 가서라도 그 개뼈다귀 같은 글쟁이 놈을 쳐 죽이고 말테다!” 흡성대법이 일반적인 내공과 다른 것은 하단전을 가리키는 이름 뿐만은 아니었다. 보통의 내공은 우주의 기운을 몸 안에 축적한 후 정해진 길을 따라 운기를 한다. 몸을 하나의 소우주(小宇宙)로 삼아 각 심법 별 로 몸 안에서 우주의 움직임을 따라하는 것이다. 하나 흡성대법에는 다른 심법과는 달리 정해진 길이 없었다. 기 본적인 임맥과 독맥을 통한 운기조차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곤륜 산에서 소주천을 행하며 축기를 해 온 선주혁에게는 실로 납득하 기 힘든 이론이었다. 그가 알기로 진기가 제멋대로 움직이게 한다 는 것은 주화입마에 이르는 첩경(捷徑: 지름길)이나 다름없었기 때 문이다. 하지만 비급은 소우주를 형성하는 몸 안의 기운과 대우주를 형 성하는 몸 밖의 기운, 그리고 이것을 조화롭게 하는 것이 사람이 라 주장했다. 자연의 조화에 순응하는 것이 사람의 몸이니만큼 거스르려 해서 는 안 된다는 것이다. 즉, 몸 안의 기운과 몸 밖의 기운이 다른 것 이 아니니 본원적으로 하나요, 애초에 구분됨이 없었으니 자연스 럽고 조화로울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것을 깨달아 자신의 몸을 통해 조화를 만드니 그것이 자연에 순응하는 바, 하늘의 뜻을 품는 기본이란 말이었다. 따라서 억지로 움직이려 하지도 말 것이며, 억지로 길을 정하지 도 말 것이며, 억지로 담아두려 하지도 말라고 비급은 주장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무공의 하단전에 해당하는 정성은 진기를 모으는 곳이 아니었다. 그곳은 몸 안의 탁기를 머금고 온 진기를 깨끗이 하는 곳이며 한 차례 우주를 돌고 돌아온 기운이 쉬어 가는 곳일 뿐이 었다. 이와 같이 정성이 활성화 되어 진기를 정화(淨化)하고 활력을 북돋는 역할을 하게끔 하는 것이 흡성대법의 제 일단계라 했다. 선주혁이 비급의 내용을 이해하고 정성을 만들어 제 역할을 하 는 데까지 무려 일 년여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심법의 초입을 익히는 데 일 년이라니? 진짜 사람 잡을 비급이네.” 일 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비급을 놓고 투덜대는 선주혁이었 으나 그의 눈은 오히려 비급의 다음 단계를 밟기 위한 열망으로 가득했다. 현재 선주혁은 비급에서 말한 정기감성(淨氣感星)의 단계에 있 었다. 애써 모은 내공을 흩뜨리고서야 간신히 오른 단계로 전신의 경락을 진기가 자유롭게 유통할 기반을 다지는 단계다. 비급에서는 이와 같은 기간 동안은 큰 변화를 느낄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다음 단계인 순천운성(順天運星)에 이르면 다르다고 한다. 이때부터는 정성이 아니라 보통의 무공에서 중단전(中丹田) 에 해당하는 해성(解星)을 이용하는 데, 선주혁으로서는 아직 이해 불가의 내용이었다. “근데…… 뭐가 달라지는 거여? 달라진다……라고만 하면 어떻게 아냐고.” 끊임없이 투덜투덜 대면서도 죽자고 비급을 바라보는 선주혁이었다. 땀에 흠뻑 젖은 선주혁을 바라보며 남지학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예전의 사제 모습을 다시 찾는 거 같군.” “예전이라뇨?” “아! 원래 사제는 초식의 정묘함에 있어서는 곤륜산에서 따라올 사람이 없었거든. 그런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뭐랄까…… 마치 초 식을 처음부터 다시 익히는 사람 같아 보인다고나 할까?” 남지학의 예리한 시선에 선주혁은 내심 찔끔했다. “사제가 기초부터 다시 시작하겠다고 해서 처음부터 내가 이해 하는 초식을 전해주긴 했지만, 그렇다고 정묘하기 이를 데 없이 익혔던 초식을 그렇게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했어.” “아하하하핫! 완전히 잊고 새로 시작하려는 거였죠, 뭐.” “대단하군. 머리보다 몸이 먼저 알고 있는 초식이라 다 잊는다 는 것은 쉽지 않은데 말이야.” “아하하핫.” 남지학의 말에 선주혁은 뒤통수만 긁으며 멋쩍게 웃을 뿐이었다. “사제가 몸에 익혔던 정묘한 초식을 보인 것은 아주 간혹이었단 말이야. 그 정도로 잊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인데 말이 지. 어쨌든 최근에 와서는 다시 예전처럼 날카롭게 초식을 전개하 는 거 같아.” “하핫. 사형의 훌륭한 지도 덕분이죠, 뭐.” “그런데…… 왜 내공은 운용하지 않는 거지? 정묘한 초식이라 해도 진기의 운행이 자유롭지 않으면 겉모습만 흉내 내는 것일 뿐 이야.” “그, 그게…….” ‘젠장! 진기가 제멋대로 돌도록 내버려 두라니 따로 모아 움직일 내공이 있어야지.’ 선주혁의 몸 안에 축적되었던 진기는 전신을 자유롭게 돌고 있 었다. 의도하지 않으니 초식을 전개한다고 진기가 실릴 리 없었다. 초식을 전개할 때 사용할 진기가 단전에 남아있지 않는 것이다. 이는 마치 내공을 전혀 익히지 않은 상태와도 비슷했다. 전신을 돌고 있는 진기가 제 힘을 내기에는 선주혁의 내력은 턱없이 부족 했기 때문이다. 선주혁이 말을 더듬자 남주혁의 안색이 갑자기 바뀌었다. “혹시 마공의 부작용 때문인 거야?” “아, 아니에요!” 선주혁은 놀라 고개까지 흔들며 부정했다. “제가 사형께 여쭤보는 것만으로도 사형이 마공은 아닐 거라고 했잖아요.” “흠…….” 남지학은 나직하게 신음했다. 선주혁은 도저히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글귀나 구결의 일부를 질문하곤 했다. 비록 일부였지만 그 어떤 구결에서도 역천(逆天)의 기색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모 든 내용은 하나 같이 우주와 천의에 순응하라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아핫, 제 나름대로의 수련법이에요. 사형과 같은 천재는 이해가 잘 안 될지 몰라도, 범인들은 범인들이 따로 수련하는 방법이 있 거든요.” 남지학의 시선에는 미심쩍다는 의미가 가득 담겨져 있었지만 선 주혁은 웃음과 함께 외면해 버렸다. 이제 와서 흡성대법을 익히는 것을 포기한다는 것은 절대 불가 능이었기 때문이다. “타합!” 남지학의 낭랑한 기합성과 함께 그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카앙 이를 악다문 선주혁이 남지학의 공격을 막아 세웠다. “합!” 남지학의 검을 힘으로 밀어낸 선주혁은 몸을 빙글 돌림과 동시 에 검을 휘둘렀다. 남지학은 여유 있게 검을 거꾸로 세워 선주혁의 어깨를 날카롭 게 찔러갔다. 선주혁은 보법을 밟아 남지학의 공세를 피하고 다시 검을 수평 으로 뉘였다. 두 사람은 일체의 내공을 배제한 초식의 대련 중이었다. 이곳에 들어와 이 년여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선주혁은 남지학 의 가르침 아래 이전에 선주혁이 배웠던 곤륜의 초식들을 거의 모 두 습득할 수 있었다. 몸에 익은 초식을 다시 배우는 것이기에 가 능한 일이었다. 지금 선주혁과 남지학이 펼치는 무공은 곤륜의 대표적인 검법 중의 하나인 진류오행검(眞流五行劍)이었다. 원래의 선주혁은 초식을 홀로 익힐 때에만 완벽한 전개가 가능 했으나 지금의 선주혁은 대련을 함에 있어서도 날카로운 면모를 보이고 있었다. “좋아!” 선주혁의 날카로운 공격에 남지학이 절로 호기가 치미는 듯 소 리를 질렀다. 공기를 가르며 오가는 검속에서 두 사람의 얼굴을 점차 상기되 어 가고 있었다. 특히 선주혁은 더했다. 그것은 매번 검로를 막아내는 남지학의 방어에 화가 났기 때문 이 아니었다. ‘즐겁다! 왜지? 왜 이렇게 즐거운 거지?’ 선주혁과 남지학의 검에서는 마치 장단을 맞추듯 울려대는 경쾌 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속에서 스스로도 만족할 만큼 정확하게 전개되는 자신의 초 식과 그보다 더 정확한 동작으로 방어하는 남지학의 초식. 두 초식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열기가 선주혁의 몸을 달아오르 게 하고 있었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밀려오는 열기가 혈류량을 증가시켰으며 알 수 없는 쾌감이 전신으로 퍼지고 있었다. ‘계속 하고 싶다! 이대로 계속 검법을 전개하고 싶어!’ 선주혁은 어쩌면 남지학의 말대로 자신에게 강한 호승심이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대상이 타인이건 자신이건 상관없었 다. 검과 권이 가는 길을 이해하고, 그 초식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고 펼쳐내는 일련의 과정이 모두 즐거운 것이다. 특히 날카로운 검이 오가는 대련에서의 짜릿한 감흥은 그 어떤 것에도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스릴을 즐긴답시고 돈 내고 목숨 거 는 사람들을 절대 이해하지 못했던 선주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아무리 대련이라지만 진검을 든 상태. 위 험하기로 말하자면 스릴을 즐기는 어떤 놀이보다 더했다. 그런데 불안하고 떨리기는커녕 즐거움만이 가득한 것이다. ‘이거…… 나야말로 진짜 무골(武骨)이었던 건가?’ 스스로의 흥겨움에 겨워 질풍처럼 남지학을 몰아가는 선주혁. 남지학은 여유 있는 동작으로 선주혁의 모든 공세를 막아낸 다 음 뒤로 크게 물러서며 말했다. “하하핫! 오늘은 여기까지.” “허억, 허억…….” 선주혁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순간적으로 너무 흥분해서인지 검을 든 손이 덜덜 떨릴 정도로 힘겨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에는 진한 아쉬움이 남았다. 이처 럼 즐거운 경험을 좀 더 오래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인 것 이다. “이제는 사제의 진류오행검을 당해내지 못하겠는 걸!” 남지학은 입가에 가득 미소를 머금었다. “하악, 하악…… 그런 말씀 마세요. 하악, 사형의 옷깃조차 건드 리지 못했는걸요.” “하하핫. 내말은 진심이라고.” 남지학의 말은 인사치례일 뿐이었다. 자신은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운데 남지학은 약간의 땀을 흘린 것이 고작이었다. 둘 다 내 공을 사용하지 않았으니 두 사람간의 차이가 명확히 드러나는 것 이다. ‘언젠가는 나도 너처럼…….’ 남지학의 태연한 모습을 보며 선주혁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남지학이 현천자가 남긴 심법은 수련하러 동굴의 안쪽에 들어가 고 두 식경 정도가 지났다. 어느 정도 체력이 회복된 선주혁은 다시 초식을 연마하기 시작 했다. 진류오행검은 처음부터 순서대로 느릿하게 펼친 그는 다시 역순으로 초식을 전개했다. 실전에 있어서 초식의 투로를 쫓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남 지학과의 수많은 대련을 통해 깨달은 지 오래였다. 필요에 따라 언제 어느 때건 초식을 변화, 응용해서 사용해야만 하는 것이다. 하나 멋대로 초식의 순서를 바꿀 수는 없었다. 초식은 오랜 세월동안 가다듬어진 가장 자연스럽고 효과적인 투 로임이 분명했다. 하나의 순서를 건너뛰거나 역행하는 것은 그와 같은 흐름을 깨는 것이다. 따라서 연결되지 않은 초식을 배합하는 것은 정해진 순서를 쫓는 것보다 더한 노력이 필요했고, 그 때 상 대가 공격할 허점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더 많은 땀을 필요로 했 다. 각각의 동작이 어느 정도 이상으로 완벽해지자 선주혁은 남지학 이 말한 대로 초식과 초식의 자연스러운 연결을 익히기 위해 수련 을 하는 것이다. “타합!” 화려한 신법을 주로 하는 곤륜파의 절기답게 진류오행검 역시 현란한 움직임을 내포하고 있었다. 힘차게 땅을 박차고 뛰어오른 선주혁은 단수참마(斷水斬魔)에서 강금휘세(剛金暉世)에 이르는 순서를 바꿔 염화출혈(炎火出穴)을 전개하고자 했다. 수(水)에 이어지는 금(金)은 특성을 증대시켜 그 힘을 더욱 강하 게 하는 만큼 단수참마와 강금휘세는 후초식이 전초식의 힘에 탄 력을 받아 더 큰 위력을 내게끔 했다. 하나 오행의 이치상으로도 그러하듯 수와 화(火)는 강한 반발력 이 생겨 힘을 소모하는바 단수참마에 이어 염화출혈은 초식을 연 이어 전개하는 것조차 버거운 일이었다. 한 다리로 착지해 다시 뛰어 올라야하는 연결인지라 선주혁은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더구나 회전까지 동반해야 제대로 된 염화 출혈을 전개하는 것. 무릎과 발목이 시큰거릴 정도의 충격이 느껴 졌지만 선주혁은 애써 몸을 띄웠다. 지나치게 억지를 부린 탓일까? 허공에 뜬 선주혁의 신형은 균형을 잃고 허둥거렸고 그의 몸은 빠르게 땅을 향해 곤두박질을 치고 있었다. 그간 무공을 익혀온 것이 헛되지만은 않은지 그는 거꾸로 처박 히는 와중에 재빨리 오른손을 내밀어 땅을 짚었다. 크게 다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쉬려는 순간 선주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른손을 검을 쥐고 있던 손. 검을 쥔 상태 그대로 땅을 짚은지라 검신이 땅바닥에 강하게 부 딪쳤다가 튕겨 올라온 것이다.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던 상황인지라 선주혁이 그 사실을 알았을 때는 예리한 검인이 그의 미간에 거의 닿아 있었다. ‘컥! 이런 멍청한! 내 검에 내가 죽다니!’ 단숨에 선주혁의 머리를 조각낼 기세의 검. 선주혁이 두 눈을 질끈 감는 순간. ‘크아악! 이렇게 죽고 싶지 않아!’ 다급한 마음에 입 밖으로 튀어나가지도 못하는 비명이 터지고, 이마에서는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카앙 ‘응? 깡이라니?’ 철그렁……. 뒤이어 힘없는 금속성과 함께 눈앞에 누워버리는 철검. 검이 보인다는 것은 아직 살아 있다는 의미였다. 생각보다 검에 실린 힘이 약했던 모양이었다. 선주혁의 손이 빠르게 이마를 짚었다. 어찌되었건 날카롭기 그 지없는 장검이 이마를 가격했으니 뜨뜻한 피가 콸콸 나올 것이라 는 생각에서였다. ‘응?’ 선주혁의 고개가 갸우뚱거렸다. 피부가 갈라져 쓰라린 느낌도, 손을 덥히는 뜨거운 액체도 없었던 것이다. 손바닥으로 이마를 문질러봤지만 아무 이상이 없었다. 선주혁은 기대 반, 놀라움 반의 심정으로 연못을 향해 달려갔다. 연못에 비춰본 이마는 멀쩡했다. 잿빛으로 변해버린 피부는 붉게 달아오른 흔적조차 없었다. “하! 내 머리가 이렇게 단단했던가?” 철검이 머리를 가격했음에도 멀쩡한 이마를 보고 선주혁은 스스 로 놀라 중얼거렸다. “혹시……?” 선주혁은 다시 일어나 장검이 나뒹구는 곳으로 향했다. 철검을 들어 올린 그는 왼쪽 팔의 소매를 걷었다. 조심스레 검인을 팔뚝에 가져다 대는 그. 두 눈을 찔끔 감고 어금니를 악다문 그가 빠르게 검을 잡아 당 겼다. 소위 말하는 손목을 그어 보는 것이다. 스르르릉 서걱하는 느낌과 함께 피부가 갈라지는 것이 아니라 쇠가 갈리 는 음향이 울렸다. 두 눈을 뜨고 자신의 손목을 바라보는 선주혁의 눈에는 놀라움 과 기쁨이 가득했다. “오호!” 혹시나 싶은 마음에 이번에는 검을 들어 자신의 팔을 내리치는 선주혁. 카앙 예상대로 피가 튀는 것이 아니라 금속성 소리가 나며 검이 튕겨 져 나왔다. 피부에서는 일체의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 이게 흡성대법의 효능인건가? 내가 금강불괴가 되어 가는 건가?” 그간 비급의 무공을 연마하면서 대체 뭐가 좋아지는 건지에 대 한 확신이 없어 불안해하던 그였다. 그런 와중에 검이 피부를 베 지 못하자 모든 게 흡성대법을 익힌 효능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선주혁의 생각은 터무니없는 오해였다. 흡성대법의 효능과 검에 베어지지 않는 피부는 전혀 상관이 없 었던 것이다. 더구나 정기감성의 단계는 그야말로 흡성대법의 기 초중의 기초. 그 어떤 효능도 기대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실상 선주혁이 철포삼(鐵布衫)이나 금종조(金鍾?)와 같은 외문 무공(外門武功)을 익힌 바도 아닌데 검이 피부를 뚫지 못하는 것 은 그의 머리카락 색과 피부색이 변한 것과 관련이 있었다. 즉, 만 년음양초의 잎과 줄기, 그리고 뿌리를 먹었기에 나타난 효능이었 다. 제대로 그 기운은 받아들이지 못해 머리색과 피부색이 변하는 부작용이 나타나긴 했지만 만년음양초의 신비한 영험이 그의 뼈와 피부를 단단하게 만든 것이다. 하나 그와 같은 사실을 모르는 선주혁은 모든 게 비급의 효험이 라 생각을 하고 그간의 미심쩍은 부분을 모두 잊고 더욱 열심히 수련을 해야겠다며 희희낙락할 뿐이었다. 카앙 캉 캉 자신이 금강불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선주혁은 검으 로 자신의 머리를 두들기며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잘 먹고 잘 살기에 한걸음 크게 내딛었다는 만족스러 운 미소와 함께……. Vol 11. 우우웅 ‘응?’ 선주혁의 눈이 동그래졌다. 손에 들린 검이 울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 느낀 것은 미약하기 이를 데 없는 진동이었다. 손가락 끝을 간질이던 그것은 점차 크기를 더해갔다. 손바닥에까지 명확 히 느껴지던 느낌은 손목을 타고 팔까지 전해졌다. 그리고는 검에서 기이한 소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하! 사제. 이제야 검에 제대로 내력을 주입하기 시작한 거야?” 한참 초식을 시연하던 남지학이 선주혁을 돌아보며 반색을 표했다. “네? 아……, 네!” 선주혁은 검을 회수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가 머쓱한 표정으로 웃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특별히 내력을 운용하려는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초식을 시연하는 남지학을 보며 자신도 같은 동작을 취하고 있 었을 뿐이다. 그러다보니 몸 안을 돌던 진기가 평소와는 다르게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인식했을 뿐 특별하 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비급에서는 진기의 자유로운 움직임을 중 요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검에서 진동이 느껴지고 결국 기이한 음향을 만들어내기에까지 이르렀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검에 진기가 주입된 모양이었다. “삼 년 동안이나 진기를 운용하지 않다니! 정말이지 사제의 수 련방법을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어.” “하핫, 제가 멍청해서 그런 거죠, 뭐.” 선주혁은 여전히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내부에서 벌어진 일을 다시 한 번 되짚어봤다. 사실 일 년 전에 금강불괴의 조짐을 보인 후 또다시 비급의 심 법을 익혀 느껴지는 발전의 정도가 없었다. 그래도 금강불괴가 어 디냐 싶어 죽자고 매달려봤지만 실제적으로 느껴지는 진척이 없었 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에 와서 또다시 이상한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갑자기 검에 진기가 주입되다니……?’ “하여튼 잘 생각했어, 사제. 아무리 기초를 다진다고 해도 진기 의 운용도 없이 단순히 초식만 수련하는 것은 권하고 싶지 않은 방법이었거든. 자, 그럼 다시 시작해 볼까?” 남지학은 부드럽게 조언을 하고 다시 시연을 했다. 용비십구검(龍飛十九劍). 곤륜파의 평제자가 배울 수 있는 최고의 검법이었다. “타합!” 선주혁이 진기를 운용해 제대로 수련할 마음이 든 것에 절로 신 이 나는지 남지학은 낭랑한 기합성을 터뜨리며 검을 강하게 찔렀 다. 꿈틀대며 앞으로 향하는 검로는 그야말로 신룡의 몸짓과도 같 았다. 상념에서 깨어나 남지학의 동작을 따라하는 선주혁. 수십 차례 보아온 초식임에도 오늘은 느낌이 달랐다. 어쩐지 남 지학의 일식일초가 눈에 와 박히는 듯했다. 너무나 선명하게 와 닿는 동작을 따라하는 동안 몸 안에서 진기가 절로 움직였다. 우우우웅 검에서 다시금 진동이 느껴지고 휘두르는 검에서는 공기를 가르 는 검풍이 날카롭게 피어올랐다. 기이한 현상에 주목하는 선주혁. 그는 머지않아 자신의 진기가 용비십구검의 구결에 따라 운용되 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응? 이런!’ 선주혁은 스스로 인식하지도 못한 사이에 진기를 운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 동작을 멈췄다. 그 사이에도 남지학은 계속해서 용비십구검을 펼쳐내고 있었다. 선주혁을 가르치는 와중에도 그는 검법을 펼치는 데에 몰두하는 것이다. 선주혁은 그런 남지학의 눈치를 보며 의도된 진기운행이 없는지 살피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 자신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럼에도 정성에서 멋대로 꿈틀대며 뻗어 오른 진기가 팔 쪽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타합.” 선주혁이 당황하고 있는 사이 날렵하게 땅을 박차고 허공으로 솟구치는 남지학. 그는 팽이처럼 신형을 회전시킨 후 땅과 수평으 로 몸을 뉘이며 검을 뻗었다. 슈우우웃 푸르스름한 검광(劍光)이 눈부신 빛을 발하며 공기를 가르고 날 카로운 파공성이 공기 중에 물결을 만들어내는 듯했다. 그 순간 선주혁의 눈은 더욱 커지고 있었다. 남지학이 땅을 박 찰 때 용천혈로 향했던 진기. 그 진기는 신형을 안정시키는 듯 하 반신에 머물렀다가 남지학이 강하게 검을 내지를 때 폭발하듯 손 으로 몰려가 검으로 향했다. 그저 서있기만 했음에도 검에서 다시 진동이 느껴졌다. 많은 양 의 내력이 순간적으로 검에 실렸기 때문이다. ‘대, 대체 이게……?’ 선주혁은 자신의 손에서 울고 있는 검을 보며 눈을 부릅떴다.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자신의 진기가 남지학의 진기운용에 공명하고 있었다. 즉, 남지 학이 진기를 운용하는 대로 자신의 진기도 함께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선주혁은 조금 더 의식을 집중했다. 남지학의 동작에 따른 진기 의 움직임을 과연 자신이 느끼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보통 진기를 운용할 때 경락과 혈도를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리 고 눈으로 보듯 한다. 그것을 내관(內觀)이라 한다. 자신의 내부를 보는 것이다. 그런데 선주혁은 지금 남지학의 몸을 내관하는 중이었다. 눈에 맺히는 동작만큼 선명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분명히 보고, 느낄 수 는 있었다. 어느 동작에서 어떻게 진기가 움직이는지, 어느 속도로 어느 정도의 양으로 움직이며, 어떻게 작용하는 지 확연하게 느끼 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동작 하나하나가 눈에 맺히는 것은 이처럼 진기의 운용 이 와 닿고 있었기 때문일는지도 몰랐다. 남지학이 십구 초식의 검로를 마치고 진기를 가라앉히는 데까지 의 일련의 모든 것을 보고 나서도 선주혁은 멍하니 서 있었다. 구 결로만 암기하고 있었던 용비십구검의 진기운행과 남지학이 보여 준 운행을 비교하며 이해를 도모하는 중이었다. 남지학은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선주혁을 보고는 무엇인 가 말을 하려다 이내 그만 두었다. 선주혁이 어딘가에 깊이 몰입 해 있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무공이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면 선주혁과 같은 몰아(沒我)의 상태에 빠지곤 한다. 그 과정에서 종종 큰 깨달음을 얻고, 무공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곤 한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남지학은 선정(禪定)에 든 고승(高僧)과도 같이 무아지경을 노니 는 사제를 내버려둔 채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선주혁은 남지학의 몸을 통해서 느낀 진기운용에 대해 실로 많 은 것을 느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단지 구결을 실제로 접 했을 때 느끼는 감상이 아니었다. 동작과 진기의 연결에 대한 이 해를 도모하는 것이다. 왜 이 초식에 이와 같은 진기의 운용이 필요한 건지, 그런 진기 의 운용이 어떤 효과를 낼 수 있는 건지, 그래서 드러나는 결과는 어떠한지에 대한 사고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자신의 몸을 소우주로 삼고자 노력해왔던 만큼 선주혁은 진기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깊은 이해를 하고 있었다. 그와 같은 자연스러 운 흐름에 인위적인 방향을 잡고 양과 흐름을 조절해 불가해한 파 괴력을 만드는 것이 무공이다. 그것에 대한 명확하고 세밀한 부분 까지 파고들어 이해를 도모하는 동안 선주혁은 용비십구검을 완벽 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있었으며, 무공에 대한 이해도가 한층 성숙해지는 중이었다. 사실 남지학의 동작에서 진기의 움직임을 감응할 수 있는 것은 선주혁이 익힌 흡성대법과 명확한 연관이 있었다. 흡성대법은 천기간의 모든 기운에 순응함을 기초로 한다. 대우 주와 소우주의 합일을 목표로 하는 만큼 수련의 시간이 길수록 기 (氣)에 대한 감각이 예민해지기 마련이다. 즉, 자연 상태의 기의 운행과 다른 이질적인 느낌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무공의 고수가 진기를 운용하는 방법은 다분히 인위적이다. 아 무리 조화로움을 중시하는 무공이라 해도 기본적인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기 위해 인위적인 진기를 사용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남지학이 용비십구검을 전개할 때 역시 마찬가지였다. 곤륜파의 절정검법을 전개하는 동안 그의 진기운행은 자연스러움 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으며, 그와 같이 이질적인 기의 운행은 선주혁의 기에 대한 감각을 자극한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에 순응하는 선주혁의 내기는 주변에서 강하게 운용되는 진기의 흐름에도 반응하기 시작했다. 사실 이와 같은 현상은 아직까지 선주혁이 익힌 흡성대법의 경 지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선주혁은 이제 막 정기감성의 막바지 단계에 올라 있는 상태. 타인이 운행하는 기의 움직임을 명확히 파악하는 것은 적어도 순천운성의 경지에서야 가능한 일이었다. 성격이 규정되지 않은 자연 상의 외기(外氣)를 내 것으로 하는 것은 약간의 노력만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이미 타인의 몸 안에서 그 사람의 것으로 화(化)한 진기를 흡수해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은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 진기의 성격과 특징에 대한 이해가 선행이 되어야 하며 이질적인 진기를 무리 없이 수용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이 바로 순천운성의 단계이며, 본격적으로 타 인의 진기흡수가 가능해지는 경지였다. 그런데 아직 순천운성의 단계에 오르지 못한 선주혁이 남지학의 진기운행을 느끼고 엿볼 수 있었던 것은 오랜 시간 그의 신체가 수련해온 곤륜파의 심법 때문이었다. 너무나 몸에 익은 진기운행 이기에 보다 수월하게 반응을 한 것이다. 초식의 시연을 통해 진기의 운행을 확연히 파악하게 된 선주혁 의 이해는 가히 기연이라 불릴 만큼의 폭이 깊고 넓었다. 지금과 같은 한차례 명상이 끝난 이후 그의 실력이 일취월장하게 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사제.” “네, 사형.” 무극삼검식의 수련을 마치고 돌아온 남지학은 오만가지 인상을 쓰며 이끼를 뜯어 먹고 있는 선주혁을 불렀다. “이제 그만 이곳을 떠나야 하지 않을까? 언제까지 머무를 수는 없는 일이잖아.” 남지학 말에 선주혁의 눈이 반짝였다. ‘드디어!’ 그는 애써 흥분을 가라앉히며 침착하게 질문했다. “사형은 무극삼검식의 이 초식까지는 완벽하게 익히신 거예요?” “응? 아직은…….” 남지학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말끝을 흐렸다. 그 표정을 살핀 선주혁은 약간의 실망스러운 기색을 떠올린 후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최소한 두 번째 초식까지는 완벽하게 익히도록 하세요. 아무리 사형이 기연을 겪어 내공이 불어나고 무극삼검식을 익혔다고 해 도, 강호의 기라성 같은 고수들을 상대하기는 무리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사제가 너무 힘들 것 같아서. 나야 무공을 완성하고픈 욕심이 있지만, 사제는 괜히 나 때문에 이곳에 갇혀 있는 거잖아. 보아하니 사마횡천이 남긴 비급의 성취가 없는 거 같은데 말이 야.” “하핫, 저 나름대로 만족하고 있어요. 그러니 사형은 개의치 말 고 최소한 이 초식까지는 익히도록 하세요. 삼초식이야 어차피 깨 달음의 무공이니까 나중에 익힌다고 해도 말이죠.” 사실 선주혁도 이 답답한 곳을 벗어나고픈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의 남지학은 무극삼검식의 이 초식까지 완성하 고 이곳을 나섰다. 만약 미리 이곳을 나서면 앞으로 남지학에 닥칠 일들이 어떻게 변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가 알기로 남지학은 삼 년하고 조금 더의 시간이 흐르면 이 초식까지를 익히게 된다. 천부의 자질을 가진 남지학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불과 몇 달을 참지 못해 정상적인 타이밍을 놓칠 수는 없었다. 선주혁의 말을 남지학은 자신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을 하고 깊 게 감사했다. 이해심 많은 이 사제는 자신의 성취를 위해 큰 어려 움을 감내하는 것이다. “응? 그런데 사제가 어떻게 무극삼검식에 대해 알고 있는 거지?” “네?” “방금 삼 초식은 깨달음의 무공이라고 말했잖아. 그걸 어떻게 아냐는 거냐고?” “……!” 선주혁은 순간 당황했다. 남지학은 한 번도 무극삼검식에 대해 선주혁에게 말한 적이 없었다. 소설 속에서 본 내용을 저도 모르 게 입 밖으로 꺼내고 만 것이다. "그, 그게…… 아, 사마횡천이 남긴 비급에 무극삼검식에 대해 언급을 했더군요. 둘이 워낙 오랜 세월을 이곳에서 싸워왔잖아요. 그러니까 상대방의 무공에 대해서도 빠삭하게 알고 있었나 봐요." 엉겁결에 대답을 한 선주혁은 스스로에게 만족했다. 자칫 잘못 말했다가는 이곳에서 벗어나자마자 남지학에게 끌려가 도사 나부 랭이가 될 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흠……, 그럴 수도 있겠군. 현천자 어르신께서도 종국에서는 지 기(知己)나 다름없었다는 말씀을 남겼지. 그런데…… 빠삭은 뭐지?" "아하하핫! 상세하게…… 라는 말이에요." "흠……. 그런 말이 있는 줄 몰랐는데." "이곳에 너무 오래 있다 보니까 심심해서 제 스스로 이런 말, 저런 말을 만들어 봤어요." "하하핫! 사제는 정말 특별해.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할 수가 있지?" "뭘요. 사형의 천재적인 자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걸요." "아니야. 나는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는 데에 있어서 소질이 조 금 있을 뿐이야. 하지만 사제는 무엇인가를 새로 만들어가고 있는 거잖아. 독특한 수련방법도 그렇고 말이야. 자신의 길을 세운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남지학은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 곳에서 삼 년여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 간혹 선주혁이 보여주는 기상천외 한 모습과 발언 등은 남지학을 여러모로 놀라게 했던 것이다. "아이고, 왜 갑자기 비행기를 태우고 그러십니까?" "비행기?" '윽! 나도 모르게 또 실수했다.' 선주혁은 절로 튀어 나오는 말을 조심해야겠다며 말도 안 되는 핑계로 비행기에 대해 얼버무렸다. 남지학이 무극삼검식의 이 초식을 능수능란하게 전개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선주혁은 급기야 순천운성 단계의 초입에 들어설 수 있었다. 이에 따라 몸에 익은 곤륜파의 진기운행을 남지학이 실제로 어 떻게 사용하는지 명확히 보여주는 지라 선주혁의 곤륜무공은 일취 월장하고 있었다. 사연을 모르는 남지학은 선주혁의 눈부신 성취에 감탄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선주혁은 내심 이런 식이라면 남지학의 무극삼검식도 익힐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남지학은 선주혁이 보고 있을 때는 절대로 수련을 하지 않았다. 안타까움을 뒤로 한 채 선주혁은 남지학과 함께 이곳을 벗어나 기로 했다. "흠……. 검을 암벽에 박아가면 절벽을 오를 수 있을 것도 같은 데……, 현재 사제의 능력으로는 위험하겠는걸. 안쪽으로 휘어진 저 부분에서는 나조차 벗어날 수 있다고 장담하기 힘들 테니 말이야." 남지학이 깎아지는 듯한 암벽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뇨, 사형. 굳이 절벽을 넘어갈 필요 없어요. 연못을 통해 나 갈 수 있으니까요." "연못?" "네." 선주혁은 미소를 지으며 확신에 찬 대답을 했다. "아! 그렇군. 사실 우리가 식수로 사용할 만큼 깨끗한 연못이지. 만약 고여 있는 물이었다면 진즉 썩었을 거야. 사제는 역시 대단해." "하하핫, 뭘요." 소설 속에서는 남지학이 찾아낸 방법이었다. 그것을 조금 빨리 말했다고 저렇듯 추켜 세워주자 괜히 미안한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럼, 나가볼까?" "네, 사형." 두 사람은 잠시 자신들이 삼 년하고도 육 개월 간을 머물렀던 공간에 시선을 준 다음 연못으로 뛰어 들었다. 선주혁은 이곳을 벗어나자마자 일어날 일에 대해 생각하며, 물 속에서도 입이 찢어져라 웃는 중이었다. '므흐흐흐흐흣!' 남지학과 선주혁은 연못의 바닥과 연결된 기나긴 암혈을 지나 수면으로 떠올랐다. 콰아아아아 귀청을 울리는 굉음. 그것이 물을 잔뜩 먹어 콜록이며 기침을 해 대는 선주혁의 요란 을 지우고 있었다. 동굴의 연못과 연결된 곳은 폭포의 바로 밑이었던 것이다. 그것 도 폭포수가 떨어지는 안쪽. 인연이 닿지 않는다면 폭포수 안쪽으 로 깊이 잠수해 선주혁과 남지학이 있던 공간으로 들어가는 것은 생각조차 못할 일이었다. 심후한 내력을 지닌 남지학은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선주혁에게 다가와 걱정의 말을 하려 했다. 선주혁은 시뻘게진 얼굴로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황급 히 손가락을 세워 입에 가져다 대었다. 남지학의 얼굴에 의문이 떠오를 때 선주혁은 눈짓으로 자신을 따라오라는 시늉을 했다. 잔뜩 이끼가 껴 있는 암벽 위에 올라선 선주혁이 조심스레 걸음 을 옮기기 시작하자, 남지학도 그 뒤를 쫓았다. 맹렬한 기세로 떨어지는 폭포수 옆을 통과해 그 옆으로 무성하 게 자란 나뭇가지들 앞에 도착했을 때 선주혁은 허리를 낮췄다. 이어 무성한 잎사귀 사이로 얼굴을 들이미는 그. 남지학은 선주혁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가 하는 대로 자신도 따라했다. 무성한 나뭇가지들 사이를 확인한 남지학은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늘 침착하기 이를 데 없는 그에게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표정이었다. 그의 눈에 맺힌 영상은 몇몇의 여인이 나신(裸身)을 드러낸 채 몸을 씻고 있는 모습이었다. 한편 요란한 폭포수 소리 때문에 묻혔을 뿐 선주혁에게서는 연 신 침을 삼키는 소리가 계속 울려 퍼지고 있었다. 비록 이쪽 방향에서는 뒷모습만이 보일 뿐이지만 무려 삼년하고 도 반이라는 오랜 시간 동안을 굶어(?)온 선주혁이었다. 여자의 나 신을 보는 순간부터 목이타고 혈류량이 증가하는 것은 당연한 일 이었다. 아랫배에 피가 쏠리고 눈이 충혈 되었으며 마른 침을 꼴깍꼴깍 삼키는 그는 내심 '조금만 더'를 연신 외치는 중이었다. 여자를 접해보지 못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간의 굶주린(?) 기간 과 훔쳐보는 묘미는 예상외의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여 선주혁은 완벽한 몰입의 상태에 접어들게 한 것이다. 남지학이 몇 번에 걸쳐 헛기침을 하는 소리를 듣지 못한 것은 폭포수 소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완전집중을 하고 있는 탓에 못듣 고 있는 것이다. 결국 남지학은 선주혁의 어깨를 흔들었다. "사제." 남지학의 부름에도 선주혁은 잎사귀 사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건성으로 대답했다. 폭포수 소리에도 소리를 잔뜩 낮춘 목소리 였다. "말씀하세요, 사형." "우리는 대곤륜파의 제자들이야. 이런 무례한 짓을 해서는 안 돼." "어차피 저 여자들은 모를 거예요. 조금 훔쳐본다고 닳는 것도 아닌데 어때요?" "사제. 남이 보지 않을수록 더욱 올바른 몸가짐을 가져야 하는 거야. 이런 짓은 비겁하기 짝이 없는 거라고." 남지학의 음성이 점차 고조되는 것을 느낀 선주혁은 재빨리 고개를 돌리며 다시 입에 손을 가져댔다. "쉿!" "사제." 남지학이 답답하다는 표정을 짓자 선주혁은 그의 귀에 입을 가 져다대고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사형. 만약 우리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저 여자들이 알면 어떻 게 생각하겠어요?" "고의가 아니었다고 말을 해야지. 그게 사실이잖아." "그걸 믿어 주겠어요? 삼 년 동안 갇혔다가 나왔더니 너희가 옷 벗고 있었다. 그러니 우리는 아무 잘못도 없다. 이런 식으로 말하 자고요?" "그래야지." 남지학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 안 믿죠. 더구나 사형이 현천자 어르신의 시신을 보존한 다고 암혈까지 무너뜨렸잖아요. 저 여자들을 데려가서 확인을 시 켜줄 수도 없는 일인데 어떻게 증명하려고 그래요?" 선주혁은 말도 되지 않는 소리를 하는 남지학이 답답하기만 했다. '하긴……, 소설 속에서도 이렇게 고지식하기만 해서 날 답답하 게 했었지.' "내 스스로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다. 그러니 나의 진실 을 여인들이라 해서 외면하겠느냐?" "사형! 남녀가 유별하니 알몸을 보는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 남지학은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사형과 제가 저 여자들의 나신을 본 일은 책임을 져야 할 일입니다. 사형과 제가 저 여자들을 모두 책임질 수 있을까요?" "……!" 선주혁의 말에 남지학의 얼굴이 굳어졌다. 잠시 침묵을 유지하 던 남지학이 입을 열었다. "저 여인들이 그걸 원한다면 내 행동에 대해 책임을 져야겠지." '잘났어, 정말!' 속으로는 어이없어하면서도 선주혁은 차분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아니죠.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저 여인들은 대체 무슨 잘못입 니까? 괜히 목욕을 한 번 잘못한 탓에 생전 처음 보는 사람과 평 생을 해야 하는 건가요? 그게 저 여인들의 미래를 망치는 일이라 고는 생각 안 해봤어요?" "……." 남지학이 미간을 모으고 침묵하자 선주혁은 옳다구나 싶어서 말 을 이었다.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 저 여인들의 경우 가 그렇고요." "모르는 게 약이라……." 남지학은 선주혁의 말을 나직하게 따라했다. "그렇죠. 우리가 여기서 잠자코 있기만 하면……." 선주혁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뒤에 알아서 문제가 해결될 것 이라 말할 뻔 했던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남지학이 그걸 어떻게 아 냐고 물어볼 것이고, 자신은 또다시 궁색한 변명을 해야만 했다. 그런 상황을 자꾸 만들다보면 정말로 남지학이 자신을 끌고 가 도 사로 만들어버릴지 모르기 때문에 선주혁은 조심하지 않을 수 없 었다. "적어도 문제가 커지진 않습니다. 저 여자들을 본 것은 사형만 이 아닙니다. 저와 사형이 같이 본 여자들은 어떻게 할까요?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겁니까? 같이 책임져요? 아님 사형과 제가 책임 을 나눠서 집니까?" 선주혁의 말을 들은 남지학은 고개를 숙이고 아랫입술을 깨문 채 몸을 돌려버렸다. 원래 소설 속에서 한 행동을 그대로 하는 것이다. 남지학을 설득하는데 성공했다고 생각한 선주혁은 그 사이 다시 나뭇잎 사이로 눈을 대고 여인들의 모습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어 스름한 저녁이었지만 백옥 같은 피부를 드러낸 여인들의 모습은 훤히 다 보이고 있었다. 그 중 한 명이 손바닥으로 수면을 치자 물이 튀어 올랐다. 몸을 돌리는 한 여인. 선주혁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고 세 번째 다리(?)에 힘이 불끈 솟아올랐다. 물에 젖어 촉촉한 피부가 섹시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몸을 돌리며 여인의 가슴이 훤히 드러났던 것이다. '크오오오옷! 쥑인다, 쥑여! 완전 답 나오는데?' 이어 선주혁의 시선은 가슴을 훤히 드러내 주는 서비스를 해 준 여인에게 향했다. 동그란 얼굴에 큰 눈이 복스러워 보이는 스타일 이었다. 썩 미인이랄 수 없는 용모였지만 선주혁은 이미 삼 년이 넘는 시간을 독수공방(?)해 온 처지였다. 그의 눈에는 여인의 모습이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에 나오는 선 녀 못지않게 예쁘기만 했다. '군대 같다오면 아줌마도 예뻐 보인다더니 그게 사실이구나!' 꼴딱꼴딱 침을 삼키며 선주혁은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여자들 사이에서 까르르 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오더니 또 다른 한 명이 선주혁이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앞선 여자에 비해 조금 말라 보이는 체형이었는데 오밀조밀한 것이 색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흐흐, 얘도 이뿐이, 쟤도 이쁜이……! 이거야 말로 답 나오는 상황이다.' 몸을 낮춰 물밑으로 가려졌다가 몸을 일으켜 다시 뽀얀 가슴을 드러내는 여인들의 목욕 장면은 선주혁의 몸을 후끈 달아오르게 하고 있었다. 이어서 마지막 한 명도 몸을 돌렸다. 고개를 살짝 흔들어 젖은 머리카락의 물방울을 튕겨내며 몸을 돌린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선주혁은 숨이 멎는 듯 했다. '저, 저 얼굴은……?' 선주혁이 두 눈을 부릅뜨고 숨을 멈춰 세운 것은 몸을 돌린 여 인이 너무나 아름답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여인의 얼굴은 선주 혁 자신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긴 생머리를 옆으로 넘긴 여인의 얼굴은 텔레비전에서 보아온 탤런트 전지연과 똑같았다. 선주혁이 자지러지게 놀란 것은 그 때문이었다. 텔레비전에서 보던 여자를 실제로, 그것도 옷을 홀라당 벗고 목 욕하는 장면을 보고 있는 지금이 정말 꿈만 같았던 것이다. '하긴 꿈인지도 모르지만…….' 지금의 상황에서 억지로 꿰맞춰보면 답은 간단했다. 이 소설을 쓴 엉터리 작가 놈이 저 여자를 설정할 때 전지연의 모습을 떠올렸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전지연과 똑같이 생긴 여 자가 여기에 출현했을 것이고. 상황을 대충 짐작한 선주혁은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며 안력을 돋우었다. 평영에서 배영으로 영법을 바꾼 그녀의 모습은 보면 볼수록 전 지연과 너무나 닮았다. 굳이 다른 면을 찾는다면 어쩐지 전지연보다는 좀 더 풍만한 몸 매를 지니고 있었으며, 얼굴도 마치 최대한 카메라빨과 조명빨을 받았을 그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넋을 잃고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던 선주혁은 벌리고 있던 입을 다물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수영을 하고 있는 여자, 사천의 명문인 사천백가(四川白家) 여식 인 백화란(白嬅蘭)이 전지연의 모습이라면 이후에 등장하는 수많 은 주요 캐릭터 역시 유명한 연예인들의 모습일게 분명했기 때문 이다. 평생의 가야 한 번 볼까말까 한 유명 연예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비록 실체가 아니라 하더라도- 생각에 절로 만족스런 모 습을 짓는 그였다. 처음으로 이 엉터리 소설을 쓴 글쟁이 나부랭 이가 마음에 들기까지 했다. '푸흐흐흐, 이거야 말로 진짜 답이다. 정답이야!' 내심 정답과 만세를 번갈아가며 외치는 선주혁은 수영을 하면서 점차 거리를 좁혀오는 전지연, 아니 백화란을 모습을 더욱 세밀하 게 살폈다. 대체 언제 자신이 저런 미인의 알몸을 고스란히 볼 수 있단 말 인가? 더구나 누드집의 사진이나 폭로용 몰카도 아니고 실제로 본다는 것은 행운 중의 행운이었다. '이게 정말 실제였으면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므흐흐흐흐!' 절로 흘러나오는 웃음이 계속 되고 있을 때 백화란이 방향을 틀었다. '오옷! 이게 마지막이다!' 감상(?)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떠올린 선주혁은 주먹을 말 아 쥔 채 조금이라도 더 보기 위해 안달을 했다. 그리고 백화란과 그녀의 시종 둘이 물가에 도착해 막 속옷을 입 었을 때였다. "꺄아아아악!" 세 명의 여인이 지르는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폭포수가 만들어내 는 굉음을 뚫고 선주혁의 귀를 파고들었다. 남지학도 몸을 돌리며 일어섰다. '이제 시작이군! 역시나 너무 식상한 전개란 말이야.' 내심 혀를 차며 선주혁은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야, 사제?" 남지학이 다급하게 물었다. 선주혁이 씨익 웃어주며 말했다. "우리가 등장할 차례죠." "……?" 남지학이 이해하지 못하자 선주혁은 손으로 나뭇잎 사이를 가리 켰다. 남지학은 선주혁의 동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지만 선뜻 움 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옷 입었으니까 빨리 봐 보세요." 선주혁이 안심을 시켜 준 후에야 눈을 가져다 대고 바깥쪽의 상 황을 살피는 남지학. 검을 쥔 그의 손이 불끈 쥐어지는 것을 선주혁은 놓치지 않았 다. 이어 폭포수를 뚫고 날아오르는 남지학. 선주혁은 자신도 모르게 남지학의 뒤를 쫒아 신형을 날리려다가 문득 자신의 처지를 생각했다. 만년음양과를 먹어 내력이 넘치는 남지학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는 자신이었다. 엄청난 압력으로 떨어지고 있을 폭포수 쪽으로 신형을 날리면 뚫고 나가기는커녕 수면으로 처박힐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젠장! 방금 전까지만 해도 답 나오는 상황이었는데, 바로 망가 지는군.' 선주혁은 결국 나뭇가지를 헤치며 기어 나가야했다.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나뭇가지에 의지해 조심스레 폭포를 빠져 나왔을 때 선주혁은 이미 적도와 맞붙어 싸우는 남지학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괴상하게 생긴 사내 둘을 마주해 싸우는 남지학의 모습은 남자 인 선주혁이 보기에도 멋져보였다. 삼 년이나 입어 헤져버린 의복 이었음에도 곤륜파의 화려한 신법을 전개하는 그의 모습은 진정한 초절정꽃미남 자체였다. 선주혁 스스로가 그렇게 생각할진데 여인들은 어떠하겠는가? 하나 안타깝게도-선주혁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세 명 의 여인은 남지학의 멋들어진 모습을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구절편(九折鞭)을 휘두르는 중년인이 그녀들을 공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종들의 무공은 그다지 뛰어나지 않아 간혹 날아드는 구절편의 중간부분을 검으로 쳐내는 데에 여념이 없었고, 백화란은 낭패한 기색을 보이면서도 차분하게 공격을 풀어가고 있었다. 선주혁도 화급하게 검을 뽑아들고 백화란이 있는 쪽으로 달려갔 다. 촤르르르 쇄애애액 구절편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폭포 주변임에도 날카롭게 울리 고 있었다. 구절편에 담긴 힘이 위력적임을 쉽게 짐작한 선주혁은 조심스레 중년인의 뒤쪽으로 다가섰다. 엑스트라인지라 별호나 이름은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이들 세 명 의 무공은 녹록한 게 아니었다. 소설 속에서는 남지학이 만약 만 년음양과를 먹지 않았다면 셋 중 한 명을 감당하기도 쉽지 않았을 거라 말한 게 기억이 난 것이다. '정정당당은 사형이나 개에게 주고, 난 나대로 살 길을 찾아야 지.' 원래대로라면 이 싸움은 남지학이 무극삼검식을 처음으로 사용 하여 셋 모두를 물리치는 상황이다. 다시 말하자면 선주혁은 뒷짐 을 지고 구경을 해도 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선주혁은 눈곱만큼도 뒤에서 강 건너 불 보듯 구경하고 픈 마음이 없었다. 눈앞에 전지연이 있고, 그녀에게 잘 보일 기회 가 있는데 어찌 구경만 할 수 있겠는가? 본시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 선주혁에게는 천부당만부당한 말 씀이었다. 챠르르르 구절편의 마디에서 요란한 소리가 나며 그 끝이 백화란의 요혈 을 노리고 날아가는 순간. "악적! 멈춰라!" 자신의 멋진 등장을 알리기 위해 나름대로 낭랑하게 외치며 선 주혁이 중년인의 등을 향해 검을 날렸다. 그가 알고 있는 검법 중 최강이랄 수 있는 용비십구검 중의 일 초였다. 차르르르 "응?" 앞으로 휘둘러지던 구절편이 거짓말처럼 꺾어지며 뒤쪽으로 날 아드는 것을 본 선주혁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멋지게 등장한다고 소리를 지른 것이 실수였던 것이다. 카앙 중년인은 뒤통수에 눈이 달린 건지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정확 하게 선주혁의 검을 때렸다. 너무나도 강한 힘에 선주혁은 하마터면 검을 놓칠 뻔 했다. 놀랍게도 구절편은 철로 만들어져 있었으며 편에 담겨진 힘은 막대하기만 했다. 만약 만년음양초의 줄기와 뿌리를 먹은 효능이 아니었다면 선주 혁의 손아귀에서는 피가 철철 넘쳐흘렀을 것이다. 간신히 검을 고쳐 쥐고 바로 섰을 때야 중년인이 느릿하게 고개 를 돌렸다. "넌 또 뭐냐?" 상대의 눈을 마주하자 선주혁은 입이 바짝 마르기 시작했다. 중년인의 눈에서 번득이는 저것이 살기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나, 아니 소, 소생은 대곤륜파의 제자인 선주혁이오." '에긍! 더듬으면 안 되는데.' 상대의 눈빛에 압도당해 혀도 굳어버린 것이다. 중년인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선주혁은 자신이 겁을 먹고 말을 더듬어서 그런 것이라 생각하 고 가슴을 내밀었다. "참 나. 곤륜파가 몰락하고 있다더니 이제는 별 이상한 놈들까 지 다 제자로 받는군." 중년인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누, 누가 이상하다는 말이냐?" 듬성듬성한 눈썹과 앞머리에 몇 가닥 남지 않은 머리카락, 매부 리코에 쭉 찢어진 눈을 가진 추악한 중년인의 입에서 이상하다는 소릴 듣자 선주혁이 발끈해서 외쳤다. "여기 네 놈 말고 또 누가 있냐? 피부색을 보아하니 남만인(南 蠻人)인 같으면서도 자세히 살피면 그 색이 다르지. 머리카락 색 을 보아하니 백 살은 족히 먹었을 늙은이 같으면서도 자세히 살피 면 그 또한 아니니 이게 이상한 게 아님 뭐가 이상하다는 말이냐?" "……!" 그제야 선주혁은 자신의 피부색과 머리카락 색이 이상하게 변했 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삼 년을 넘게 연못에 비친 자신의 모습 을 보아온 지라 어느새 익숙해져버려 잊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선탠과 염색이 그에게 있어서는 낯선 일이 아니었기에 더욱 쉽게 익숙해져 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서 자신의 모습은 이상하다 소리를 들어도 과언이 아님은 분명했다. 백화란과 두 시녀 역시 위기 가 운데서도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하! 그러고 보니 곤륜파라 곤륜노(崑崙奴)를 제자로 삼은 건 가? 크헤헤헤헤헷!" 중년인의 말에 선주혁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곤륜노는 흑인을 부르는 말이었다. 물론 좋은 뜻이 아니라는 것 을 알고 있는 선주혁인지라 화가 치밀어 오른 것이다. 가슴을 치 고 올라오는 뜨거운 울화에 어느새 살기를 머금어 희번덕이는 중 년인의 눈빛 따위는 개의치 않는 그였다. "온 몸의 털이란 털은 죄다 쥐가 뜯어먹은 듯해 볼품없는 생김 새라 내 이미 짐작은 했다만, 그 나이 처먹도록 쌓아온 견식이 생 긴 모습 못지않게 볼품없군." 용모에 대해 트집을 잡는 선주혁의 말에 중년인의 얼굴이 한순 간에 일그러졌다. "감히! 어디서 떨어진지 모를 종자가 뚫린 입이라고 말을 함부 로 하는구나!" "하하하핫!" 선주혁은 일부러 백화란에게 들으라고 짐짓 호방하게 웃음을 터 뜨린 다음 두 눈을 부릅떴다. "무식한 놈이 스스로 제 무덤을 파는구나!" "무식?" "그래. 무공이 상상할 수 없을 경지에 오르면 머리가 하얗게 새 고, 피부색이 변한다는 것을 모르니 무식한 게 아니고 뭐냐?" "푸헤헤헷! 열 살배기 꼬마가 검을 휘두르는 것보다 못한 내력 을 지닌 놈이 상상할 수 없는 경지?" "흥! 무식한 네놈이 금강불괴에 대해서 들어나 봤냐?" "금강불괴?" 중년인의 찢어진 눈이 크게 떠졌다. 선주혁은 턱을 치켜들며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다. 금강불괴의 경지에 오르면 머리가 하얗게 새고, 피부가 검어지는 거다, 이 무식한 놈아." 말도 안 되는 거짓말로 우겨보는 선주혁이었다. 그렇다고 약 잘 못 먹은 부작용으로 지금의 모습으로 변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말한다면 백화란이 얼마나 자신을 멍청하게 보겠는가? "푸하하핫! 그렇다면 네 놈이 지금 금강불괴라는 거냐?" "거의…… 그렇다!" "거의? 거의는 또 뭐냐? 닭 잡을 힘 정도만 가진 놈이 금강불괴 를 운운하다니. 공력이 전부 입으로 모인 게냐?" 중년인은 선주혁을 노골적으로 무시했다. 그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무림에 심후하기 이를 데 없는 내력 을 지닌 사람이 무수했건만 진정 금강불괴에 이른 자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런데 자신의 구절편에도 튕겨나가는 검을 휘두른 자 가 금강불괴를 논하니 실로 가소로웠던 것이다. 선주혁은 중년인의 모욕을 되받아치려 했으나 그럴 기회가 없었 다. 중년인이 귀찮다는 듯 철로 된 구절편을 휘둘러 공격해 온 것이 다. 살아 있는 뱀처럼 꿈틀대며 날아오는 적의 공격. 선주혁은 가까스로 검을 휘둘러 구절편을 막았다. 아까와 같은 격렬한 충격은 없었다. 검이 막아 세운 부분이 꺾어지며 구절편의 끝부분이 선주혁을 노리고 다시 날아든 것이다. 예상치 못한 변화에 선주혁은 반사적으로 왼쪽 팔을 들어 구절 편을 막았다. 카앙 철로 만들어진 구절편과 선주혁의 팔뚝이 부딪치는데 요란한 금 속성이 울렸다. 중년인의 눈이 크게 떠졌다. "설마……?" 날카롭게 찢어진 중년인의 눈이 향하는 곳은 선주혁의 소매였 다. 혹시나 옷 안쪽에 특별한 보호대 같은 것을 댄 것이 아닌가 살피는 것이다. 하지만 낡아 헤진 소매사이로 드러난 것은 맨살이 었다. "어디 이것도 막아 봐라." 중년인은 신경질적으로 다시 구절편을 휘둘렀고, 방금 전보다 더 맹렬한 기세로 구절편이 날아들었다. 마디와 마디가 기묘하게 꺾어 눈을 현혹시키는 공격에 선주혁은 다시 검을 휘둘러 막았다. 카앙 선주혁은 맹렬하기 짝이 없는 구절편의 힘을 이번에는 이기지 못했다. 허공에 몇 번에 걸쳐 원을 그리며 검이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도 구절편은 움직임을 멈추지 않고 선주혁의 목을 노렸 다. 헛바람을 들이키며 허리를 낮추는 선주혁. 그의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간 구절편은 허공에서 방향을 선회 하여 다시 아래로 향했다. 구절편의 요사스러운 움직임에 혀를 내두르며 선주혁은 다시금 팔을 휘둘러 구절편을 막아갔다. 카앙 "크읏!" 구절편에 담겨진 위맹한 힘에 옆으로 강하게 튕겨지는 선주혁. 통증은 없었으나 놀라운 힘에 몸 자체가 밀리는지라 절로 신음 을 내뱉은 것이다. 간신히 균형을 잡은 선주혁이 본 것은 중년인의 미소였다. "푸흐흐흐흐. 간교한 혓바닥으로 혼란을 유도하다니. 어린놈이 교활하기 짝이 없구나. 철포삼 따위의 횡련공을 익히고서 금강불 괴를 운운하다니!" 중년인은 흡족한 표정이었다. 자신의 구절편을 맨팔로 막아 세 운 것에서 비롯된 혼란이 해소되었기 때문이다. 절정의 내공으로 금강불괴의 경지에 올랐다면 지금처럼 맥없이 튕겨질 리 없었다. 그렇다면 외공으로 피부와 뼈를 단단히 하는 수련을 했음이 틀림 없는 것이다. 철포삼을 익히는 방법은 다양했다. 개중에는 완벽하게 익히게 되면 피부에 은은한 묵빛이 감돌게 되는 방법이 있으니 머리카락 색깔을 개의치 않으면 눈앞의 애송이는 역시나 뛰어난 외공을 익 힌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크게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일반인들에야 철포삼을 익힌 사람은 공포의 대상일 수도 있으나 내공을 익힌 무림인에게 는 큰 위협이 될 수 없었다. 대개의 무림인들은 내가중수법(內家 重手法)을 익히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중수법은 겉은 멀쩡하게 두고 속만 상하게 할 수 있는 무 공. 철포삼과 같은 횡련공은 뼈와 살을 단단하게 할 수는 있어도 내장까지 단련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내가중수법에는 취약점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금강불괴라는 소리에 당황했던 중년인 이었기에 선주혁에 대한 분노는 컸다. 어린 놈에게 농락을 당했다 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는 허공에서 구절편을 한바퀴 회전시킨 후 더욱 맹렬한 기세 로 선주혁을 공격했다. "악적! 멈춰라!" 중년인의 동작이 커지고 신경이 선주혁에게 집중되는 순간을 놓 치지 않고 백화란이 공격을 했다. "흥!" 중년인은 나직하게 코웃음을 치며 교묘한 보법으로 백화란의 검 을 옆으로 흘려냈다. 선주혁을 향해 날아가는 구절편에 실린 위력은 조금도 감소되지 않았다. 뱀이 몸을 꿈틀거리듯 큰 물결을 만들며 날아오는 구절편. 그것을 본 선주혁은 이를 악물었다. 검이 없는 이상 맨손으로 막아내야만 했던 것이다. 카앙 캉 구절편의 물결모양은 선주혁의 양손 모두를 가볍게 튕겨냈다. 아직까지는 미약하기 그지없는 선주혁의 내력으로는 구절편에 실린 경력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쿠아앙 구절편의 끝이 선주혁의 가슴을 강타했을 때는 여느 때와는 달 리 금속성이 아닌 요란한 폭음이 울려 퍼졌다. 중년인의 진기가 구절편의 끝에서 폭출한 것이다. "소협!" 백화란의 안타까운 외침과 동시에 선주혁의 신형이 실 끊어진 연처럼 뒤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중년인의 내력이 고절함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선주혁이 땅에 곤두박질치는 모습을 보는 백화란의 눈에는 안타 까움이 짙게 서렸다. 그녀 역시 철포삼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 었다. 저 정도의 위맹한 공력에 가슴을 강타 당했으니 즉사하게 될 것임이 분명했다. 자신의 도우려했던 청년이 악랄한 수법에 의 해 죽게 된 것이다. "악적!" 자신을 위해 희생한 청년 때문에 분노했음인가? 백화란의 검에는 이전까지 보이지 않았던 살기가 가득했다. 사천백가의 송죽절검(松竹絶劍)의 후초식이 전개되는 것이다. 백 가의 자랑인 송죽절검의 후초식은 악랄하다 싶을 정도의 살초로만 구성이 되어 있었다. 때문에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하지 않으면 사용을 자제하도록 가법으로 정해놓았다. 애초에 중년인은 백화란을 생포하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손속에 사정을 두고 있었다. 상대가 그리 나오자 백화란 역시 중년인을 상대하면서 송죽절검의 살초를 전개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경우가 다른 것이다. 송죽절검은 오늘 날의 백가가 사천에서 당당히 명성을 날리게끔 해 준 절기 중의 절기였다. 그런 송죽절검의 진수가 모두 담겨진 후초식이 전개되자 중년인 의 안색도 굳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껏 백화란과 두 시녀를 희롱하듯 여유롭게 상대하던 그였으나 지금에 있어서는 방어를 하 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그는 신법을 사용해 백화란과의 거리를 벌리고 구절편을 이용해 밀밀한 막을 형성하여 그녀의 접근을 막았다. 지금과 같은 상태라 면 백화란을 온건히 생포하기 힘들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백화란의 살초가 변화막측하고 위맹하여 중년인의 편법에 비해 우위를 차지하기는 했지만 거리를 좁히지 못해 실제적인 위협은 되지 못하고 있었다. 만약 그녀의 내공수위가 지금보다 높았다면 양상은 크게 달라졌 을 것이나 안타깝게도 그녀의 내력은 동년배에 비해 조금 더 높은 수준에 불과했다. 중년인이 노리는 것도 그것이었다. 지금처럼 맹렬하게 검식을 전개하는 것은 내력의 소모가 클 것이다. 그렇다면 조금만 이대로 버티며 백화란이 제풀에 지칠게 분명했다. "타합!" "얍!" 두 명의 시종도 자신들의 주인을 도와 검을 내뻗었다. 하나 워 낙 무공이 얕아 전세에 큰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 백화란도 이대로 시간을 끌면 자신들에게 불리해 질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의 눈부신 치아가 아랫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결정적인 수를 쓰지 않으면 안 될 시기가 온 것이다. "하압!" 빛살처럼 빠르게 검을 연속으로 쳐낸 다음 백화란의 신형이 허 공으로 솟구쳤다. 중년인과의 거리를 단축하기 위한 무리수를 둔 것이다. "흥!" 중년인의 손목이 회전하자 구절편이 급격하게 꺾이며 허공에 떠 오른 백화란의 다리를 감아갔다. 그 순간. "X팔새X, 죽어봐라." 난데없는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더니 중년인의 눈앞에 무엇인가 가 어른 거렸다. 퍼억 중년인의 목이 구형 텔레비전 채널 돌리듯 옆으로 홱하니 돌아갔다. 선주혁의 주먹이 그의 얼굴을 강타한 것이다. 의외의 급습인지라 미처 대비하지 못한 중년인은 비틀거리며 옆 으로 물러서야만 했다. 미약한 진기를 뽑아 낸 경신술로 달려 들어온 속도 그대로 주먹 을 날렸으니 그 위력이 가볍다고만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중년인을 놀라게 한 것은 주먹자체에 실린 위력이 아니 었다. 구절편을 회수해 백화란의 급습을 방어하며 중년인이 악을 쓰듯 외쳤다. "어, 어떻게?" 어떻게 살아났는가에 대한 의문이 중년인의 얼굴에 가득했다. 내력이 가득실린 공격이 적중했으니 내장이 조각나 죽었어야 정상 이었다. 그런데 나타난 녀석은 입가에 혈흔조차 없었다. 피부색이 잿빛이라 원래의 혈색이야 알 수 없었지만 또렷한 눈동자를 보아 결코 내상을 입은 것 같지 않았다. '설마……? 정말로 금강불괴란 말인가?' 중년인은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등줄기를 서늘한 바 람이 더듬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소협!" 선주혁의 난데없는 등장은 중년인만 놀라게 한 것이 아니었다. 백화란은 땅에 내려서며 반가운 음성으로 선주혁의 등장을 기뻐했다. 백설같이 희었던 머리는 흙먼지가 가득했고, 헤질 대로 헤졌던 옷은 더욱 엉망으로 변해버렸지만 멀쩡해 보이는 모습이어서 더욱 그랬다. "무사하셨군요." 백화란은 반갑기 이를 데 없는 심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선주혁은 괴상망측한 중년인이 자신을 패대기쳐 뚜껑이 열린 상 태였지만 전지연처럼 생긴, 아니 가까이서 보니 그보다 훨씬 예뻐 보이는 백화란의 말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나름대로 가장 멋지다싶을 미소를 지으며 백화란을 향해 고개를 돌려주었다. 그리고 선주혁은 보았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백화란의 얼굴을.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를. 마치 슬로우 모션을 보는 것처럼 서서히 변해가는 표정을. 두 눈이 커지고, 탐스러운 입술이 벌어졌다. 다급함과 경악. 그녀의 얼굴이 왜 그렇게 변했는지는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엄청난 폭음이 다시금 가슴에서 울려 퍼지며 그녀의 얼굴이 멀 어져갔기 때문이다. 곧 백화란의 얼굴은 사라지고 하늘과 땅이 몇 차례에 걸쳐 번갈 아가며 보였다. 멍하니 백화란의 모습을 보는 사이 중년인이 구절편으로 또 다 시 공격한 것이다. 한참을 날아가 땅에 처박힌 선주혁은 아까와는 달리 튕기듯 자 리에서 일어났다. 이전의 공격으로 인해 상대가 자신의 몸에 아무 런 해를 끼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백화란과 중년인의 놀란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선주혁은 다시 신법을 전개했다. 중년인은 도저히 믿지 못할 광경에 경악을 하면서 있는 힘껏 내 력을 구절편에 집중했다. "죽어라, 괴물!" 바위를 으스러뜨릴 경력을 담고 있는 구절편에 두 번이나 적중 당하고도 멀쩡하니 달려오는 선주혁은 중년인에게 있어 괴물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선주혁은 상대가 자신을 해치지 못함을 알고 있기에 두 팔로 몸 을 감싼 채 그대로 달려갔다. 쿠아아앙. 또다시 폭음이 울려 퍼지고 선주혁의 신형은 뒤쪽으로 총알같이 날아갔다. "크윽!" 그러나 비명이 터져 나온 곳은 선주혁이 아니라 중년인에게서였다. 전력을 다해 선주혁을 공격하는 틈을 노려 백화란이 급습을 가한 것이다. 옆구리를 깊게 파고든 검. 중년인은 불에 지진 듯 화끈하게 느껴지는 통증만큼이나 뜨거운 분노에 자제력을 잃고 거칠게 손을 휘둘렀다. 카앙 백화란의 검이 허공으로 날아가 버리고 그녀의 신형이 비틀거렸다. 중년인이 전력을 실은 구절편에는 엄청난 진기가 실려 있었고, 억지로 그 힘을 이겨내려 한 백화란이 내상을 입은 것이다. 비록 여인의 몸이지만 백화란 역시 무공을 익힌 무인. 대전 중에 검을 놓쳤다는 것은 엄청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내상도 내상이지만 손실된 무인의 자긍심에서 비롯된 충격은 잠 시간 그녀를 망연자실하게 만들었고, 분노로 인해 눈이 충혈 된 중년인이 그 순간을 놓칠 리가 없었다. 똬리를 친 뱀처럼 웅크려들었던 구절편이 한순간 마디와 마디를 곧게 폈다. "아가씨!" 시녀의 다급한 경고성에 문득 정신을 차린 백화란이 바라본 것 은 거의 일직선으로 펼쳐진 구절편의 끝. 진탕된 내력을 미처 가라앉히지 못한 백화란은 손가락 하나 까 딱할 수 없는 상태였다. 절망이 그녀의 눈에 드리워진 순간. 그림자 하나가 구절편을 시야에서 가렸다. 쿠아아아앙 요란스런 굉음과 함께 백화란은 자신을 가렸던 그림자와 함께 뒤쪽으로 붕 떠오른 후 땅바닥을 나뒹굴었다. 충격에서 벗어난 백화란은 자신의 밑에 깔려있는 사내의 얼굴을 확인했다. 흰 머리에 잿빛 피부를 가진 청년이 밑에서 게슴츠레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쨌든 그가 자신의 몸을 날려 구절편을 막아낸 것이다. "감사……." 감사의 뜻을 전하기도 전에 백화란은 옆으로 밀려났다. 선주혁이 그녀의 몸을 옆으로 밀친 것이다. 쿠아아아앙 또다시 뒤로 튕겨지는 선주혁. 중년인은 이제 제자리에서 구절편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선주 혁의 신형을 쫓으며 공격을 해 대는 중이었다. 피가 철철 넘쳐흐 르는 옆구리를 왼손으로 감싸 쥔 채였다. 살기 가득한 안광만큼이나 매섭게 이어지는 중년인의 공격. 선주혁은 이리 날아가고 저리 튕기면서도 여전히 재깍재깍 자리 에서 일어나는 중이었다. 그러던 어느 한 순간. 중년인의 구절편이 선수혁의 머리를 강타하지 못하고 허공만을 갈랐다. 연속되는 공격 중에서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라 중년 인의 얼굴에 놀라움이 깃들었다. 그는 다시금 손을 떨쳐냈다. 챠르르르르르 맹렬한 기세로 선주혁을 노리는 구절편. 선주혁은 이번에도 곤륜파의 보법을 이용해 구절편을 피해냈다. 급기야 중년인의 눈에 핏발이 곤두섰다. 몸뚱아리가 금강석처럼 단단한 것만으로도 경악을 금치 못할 일 이거늘 이제는 자신의 초식을 읽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선주혁이 연속적으로 중년인의 구절편에 적중 당하면서 생긴 일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몸이 무사하다는 것만으로 만족했으나 이후 구절 편이 몸의 요혈을 가격할 때마다 중년인의 진기가 느껴졌던 것이 다. 허공을 가르며 묘한 곡선을 그리며 날아오는 구절편의 움직임을 포착하는 것은 현재의 선주혁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계속되는 충격 속이기에 더욱 그랬다. 하지만 몸으로 느껴지는 진기의 흐름 은 달랐다. 맞으면 맞을수록 중년인이 운용하는 진기의 흐름은 명확해졌으 며 구절편을 움직이는 방식이 익숙해져가는 것이다. 과거 남지학이 곤륜파의 초식을 전개할 때 경험했던 현상과 똑 같았다. 진기의 유통을 통해 구절편의 움직임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 게 되자 선주혁은 보법을 운용해 공격을 피해낼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이와 같은 현상은 흡성대법의 효능 때문이지만 그의 신체 가 만년음양초에 의해 기이한 변화를 갖지 않았다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격이라도 제대로 맞는 순간, 진기의 흐름을 알아차리기 전에 즉사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나 이미 변화된 몸을 가진 선 주혁이었기에 구절편에 실린 진기의 움직임을 포착할 수 있었고, 중년인은 본의 아니게 구절편의 운용방법을 선주혁에게 가르치고 있는 셈이었다. 아슬아슬한 차이로 선주혁이 자신의 공격을 피해내자 중년인은 갑작스레 공세를 바꾸기 시작했다. 손목을 이용해 원을 그려나가자 구절편의 마디마디가 요란스런 소리와 함께 꺾이며 변화를 만들어냈다. 당황한 선주혁은 황급히 몸을 뒤쪽으로 빼려 들었으나 중년인의 움직임을 따르지 못했다. "아차!" 선주혁이 놀라는 순간 구절편은 마디를 꺾으며 선주혁의 몸을 감아버렸다. 이어 강하게 팔을 잡아채는 중년인. 선주혁은 버티려는 시도조차 못한 채 중년인에게 끌려가 버렸 다. 선주혁의 몸이 다가오자 중년인은 피가 잔뜩 뭍은 손을 들어 선 주혁의 목을 틀어쥐었다. "네놈이 금강불괴라 한들 호흡을 잇지 못하고도 살 수 있나 보 자!" 강철과 같은 손아귀로 선주혁의 목을 조르는 중년인의 눈에는 살광이 일렁거렸다. 선주혁은 다리를 버둥거려 보았으나 큰 소용이 없었다. 맥없이 중년인의 몸을 때렸을 뿐, 중년인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 손을 놓아라!" 백화란의 시녀 하나가 이를 악물고 달려들었다. 하나 중년인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발로 그녀의 검을 걷어차 버렸다. 그 힘을 이지지 못하고 시녀는 뒤로 나동그라졌다. 다른 시녀 한 명은 백화란을 돌보고 있는지라 도울 여력이 없었다. 선주혁의 발이 땅에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중년인이 목을 틀어쥔 손을 들어 올린 것이다. "크흐흐흐흐흐!" 선주혁의 고통스러운 표정을 보며 중년인이 흡족한 웃음을 흘렸다. 'X팔, 괜히 껴들었나?' 백화란에게 잘 보이기 위해 괜스레 설친 게 아닌가 하는 후회는 이미 늦었다. 목을 틀어쥐기 전에 숨을 들이키지 못했던 선주혁의 폐에는 많은 양의 산소가 들어있지 않았다. 심후한 내력이 있었다 면 오래도록 버틸 수 있었겠지만 그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었 다. 선주혁은 눈앞이 깜깜해지고 온 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 꼈다. 자연 버둥거리던 그의 다리도 축 늘어졌다. 그 순간 음흉한 웃음을 흐리던 중년인의 안색이 굳어졌다. 괴물 같은 놈의 목을 틀어쥔 손에서 조금씩 진기가 빠져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화들짝 놀란 그가 손의 힘을 뺐다. "커억, 쿨럭, 쿨럭!" 갑작스레 기도가 열리자 선주혁은 마른기침을 쏟아냈다. 그러는 순간에도 중년인의 얼굴은 더욱 심각하게 굳어지고 있었 다. 힘을 뺐음에도 괴물 같은 놈의 목에서 손이 떨어지지 않는 것 이다. 그를 더욱 경악하게 하는 것은 손을 통해 빠져나가는 진기의 양 이 점차 불어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놀란 중년인은 진기를 끌어당기려 했다. 빠져나가던 진기가 멈춰 섰다. 그가 안도의 한숨을 쉬려던 순간 더욱 거센 움직임으로 체내의 진기가 괴물 같은 놈의 몸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중년인은 진기를 수습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불가항력이었다. 거세게 빠져나가는 진기를 붙잡기에는 너무나 미력했다. '서, 설마……?' 상대의 진기를 빨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무공. 과거 강호에 그런 엄청난 무공이 있었다는 사실을 중년인은 기 억해냈다. '흡성대법? 사라진지 오래된 그 전설상의 무공이란 말인가?' 급기야 중년인의 눈에 두려운 감정이 실렸다. 한순간 그는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이대로 서 있다간 진기가 고갈되어 죽을 것이다. 오른손이라도 마음대로 움직여준다면 녀석을 가격해서라도 떼 놓고 싶지만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여의치 않았다. 동료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못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그나마 미동이 가능한 것은 놈의 목을 쥐고 있는 손 뿐. 중년인은 다시 선주혁의 목을 쥐고 있는 손에 진기를 불어 넣었 다. 손실된 내력을 포기하더라도 목숨은 건지고 봐야했다. 팔에 진기가 모이자 내력이 빠져나가는 속도는 더해졌지만 괴물 같은 놈의 목을 조르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간신히 호흡을 돌리고 있던 선주혁은 다시 강하게 목이 조여오 자 커억 소리를 내며 괴로워했다. '괴물 같은 놈의 숨이 먼저 끊기는지 나의 내력이 먼저 고갈되 는지에 따라 생사가 갈리겠구나.'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중년인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었다. 한편 곤란한 상황에 처한 것은 선주혁도 마찬가지였다. 호흡의 곤란은 그간 우주의 순리에 따라 몸을 운행하던 진기의 운행을 방해했다. 그러자 수차례 공격을 통해 진기의 움직임에 적 응하기 시작했던 흡성대법이 자연스럽게 중년인의 내력을 흡수하 기 시작했다. 하나 선주혁은 이제 막 순천운성이라는 경지의 초입에 발을 디 딘 상태. 완벽하게 파악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한 진기를 몸 안으로 흡수하는 것은 위험천만이었다. 적은 양 정도는 감당할 수 있다 해도 지금처럼 막대한 진기가 유입되어 오는 것은 무리였던 것이다.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진기가 원래의 성질을 그대로 가진 채 몸 안에서 멋대로 날뛰기 시작하자 선주혁의 이마에서도 혈관이 도드 라졌다. 제어할 수 없는 진기가 날뛰는 것이다. 만약 그가 만년음양초를 복용하지 않았다면 혈맥이 파열되어 죽 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나마 영약의 효능이 기경팔맥과 세맥을 보호하고 있기에 버틸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도 오래 유지할 수 없었다. 선주혁의 신체가 영약의 효능에 보호받고 있다고 해도 주화입마 의 위험이 남아 있는 것이다. 제멋대로 날뛰는 진기는 선주혁의 심기를 어지럽히고 있었으며 흡성대법의 운공은 그와 같은 형상이 치명적으로 작용한다. 주화입마란 다분히 정신적인 폐해를 포함하고 있었고, 선주혁은 그 위기에 내몰려 있는 것이다. 즉, 몸은 건재할지라도 뇌에 이상이 생겨 미쳐버리거나 백치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인 것이다. 하나 시간이 지날수록 중년인의 몸에서 흘러들어오는 진기의 양 은 더욱 많아져만 갔다. 그만큼 선주혁의 신체에서 제멋대로 날뛰는 진기의 움직임도 격 렬해져갔고, 호흡곤란으로 의식을 유지하는 것조차 어려운 선주혁 은 진기를 다스리는 데 더욱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X팔, 잘 먹고 잘 살아보고자 했거늘 나오자마자 이 꼴이라니!' 의식의 끝자락에서도 선주혁은 투덜대는 것을 잊지 않았다. <1권 끝> Vol 1. 악착 같이 목을 조르는 중년인의 손에서 선주혁이 의식을 잃으려는 순간. 중년인의 충혈 된 눈이 있는 대로 부릅떠졌다. 동시에 노도와 같이 흘러들어오던 진기의 유입도 멈췄다. 살기 번득이던 중년인의 눈이 흐릿해지고 그의 신형이 솜 빠진 봉제인형처럼 축 늘어져 버렸다. 그가 쓰러짐과 동시에 선주혁 역시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새파 랗게 질린 안색이었다. 중년인에게서 흡입된 진기가 멋대로 날뛰 기 시작하는 것이다. 격한 기침이 터져 나올 상황이었지만 선주혁은 입을 열지 못했 다. 지금의 상황이 위급하고, 자칫 주화입마에 접어들 것이라는 것 을 깨달은 것이다. 그로서는 남지학이 상대하던 두 사람을 처리하고 중년인을 죽인 지금의 상황을 알아볼 여력조차 없었다. 중년인에게서 진기의 유 입이 멈추자마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기조식에 들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쓰러져 앉는 그를 부축하려 들던 남지학은 선주혁이 가부좌를 틀자 무엇인가 좋지 않은 상황에 접어들었음을 깨닫고 그에게 손 을 대지 않았다.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선주혁이 내상을 입고도 남았을만한 상황 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제에게 묻고픈 것은 많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한편 선주혁의 체내에서는 그야말로 위기일발의 상황이 벌어지 고 있었다. 만년음양초로 인해 금강불괴를 방불케 할 정도로 단단해진 신체 였다. 하지만 자신의 것이 아닌 진기가 몸 안에서 날뛰는 현상에 서 비롯된 고통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부풀어 오른 혈맥의 압박. 무리한 진기의 흐름으로 인해 뒤틀리는 경락. 이 모든 것은 참기 힘든 고통을 수반했다. 억지로 진기를 제어해 보려 했다. 하나 흩어져 있는 선주혁의 진기는 미약하기 짝이 없었다. 작은 힘으로 큰 힘을 제어하기란 불가능이었다. 진기를 스스로의 의지대로 움직이려는 것은 포기해야만 했다. 계속 되는 통증 속에서 멋대로 날뛰는 진기는 주화입마에 접어 드는 지름길이라는 위기감이 선주혁을 지배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벌써 혈맥이 터져 죽었을 것을 생각할 여유 도 없었다. 자칫 백치가 되거나 광인으로 날뛰며 죽음을 맞이해야 할 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그가 의지할 것은 흡성대법의 구결뿐이었다. 우선은 조급한 마음을 가라앉혔다. 가능하면 진기의 흐름을 파악하고 그에 순응하고자 했다. 신체는 소우주다. 대우주가 그렇듯 소우주 역시 대자연의 법칙에 따라 순리대로 운행이 된다. 진기의 흐름 역시 마찬가지다. 하나 새로 유입된 진기는 그와 같은 순리를 따르지 않는다. 진 기가 형성된 그 성질 그대로, 그 흐름 그대로를 고집한다. 거부해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 버텨주는 경락과 혈맥의 튼튼함을 믿고 그 흐름을 파 악해야만 했다. 흡성대법의 구결대로 이 진기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 그것만이 유일한 희망이니 놓칠 수는 없다.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는 선주혁은 내관을 통해 가급적 빨리 진기의 흐름을 파악하고자 했다.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차라리 기 절하는 게 나을 것만 같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한 번 의식을 놓치 며 영원히 정신을 차리지 못할 지로 모른다. 정신을 집중하자 제 멋대로 날뛰는 것만 같은 진기의 흐름이 보 였다. 그리고 선주혁은 진기의 흐름 속에서 희망을 찾았다. 진기의 움직임이 중년인의 구절편에 적중되었을 때 느꼈던 것과 다르지 않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고통을 참으며 억지로 제어하지 않고 진기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내버려두었다. 구절편에 적중되었을 때 반복되게 느끼던 진기의 움직임과의 공통점을 찾고자 했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 은 명확해졌다. 하단전에 해당하는 정성을 통해 걸러진 진기는 중단전에 해당하 는 해성을 거치는 동안 보다 명확하게 선주혁에 진기의 성질을 깨 닫게 해 주었다. 만년음양초의 덕분이었다. 순천운성의 단계를 완벽하게 오르지 못한 선주혁음에서 이처럼 파악되지 않은 진기의 흐름을 견딜 수 있게 해 준 것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해성을 통해 파악된 진기는 점차 선주 혁의 의지를 쫓기 시작했다. 그 양은 몹시 미약했으나 의심의 여 지가 없는 활로가 되어 주었다. 아주 조금씩, 그리고 조심스럽게 진기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가는 동안 통증은 줄어들었다. 행공이 반복되는 동안 거칠게 날뛰 던 진기는 사지백해로 흩어지기 시작했으며, 그것은 원래 선주혁 이 가지고 있던 진기와 다르지 않았다. 중년인의 내공이 가지고 있던 성격과 특성은 선주혁의 몸을 통 해 완벽하게 익혀지고 있었고, 급기야 몸에서 날뛰던 모든 진기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것은 선주혁이 순천운성의 단계에 한 걸음 더 깊숙이 발을 내 딛었음을 의미했다. 선주혁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죽음 속에서 활로를 찾고, 이전보다 뚜렷하게 증가한 내력을 느 끼는 것은 다시없을 기쁨이고 쾌감이었다. 아찔한 위협 속에서의 성장. 바로 이 맛에 무공을 익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단순히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익히는 것이 아니라, 무공 자체를 익히는 쾌감과 기쁨의 맛을 새삼 느끼며 선주혁은 눈을 떴다. 그의 눈에는 근심어린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네 사람의 모 습이 보였다. "사제!" "소협!" 반가이 자신을 부르는 남지학과 백화란. 길게 한 숨을 내쉰 선주혁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까이서 보는 백화란의 미모에 감탄하기도 전에 선주혁은 어느 새 동이 터오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야만 했다. 중년인의 내력을 다스려 자신의 것으로 흡수하는 동안 하룻밤이 지나가 버린 것이다. "괜찮은 거야?" "네, 사형." "정말 다행이에요.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눈물까지 글썽이는 백화란을 보며 선주 혁은 온 몸이 아이스크림처럼 녹는 것 같았다. 아름다운 여인의 말 한 마디에 담긴 위력을 새롭게 느끼는 그였다. "내상은 좀 어때?" 선주혁이 큰 내상을 입었을 거라 단정한 남지학이었다. 열두 시 진에 달하는 요상이 있었다지만, 쉽게 치유되지 않을 것이기에 걱 정을 표하는 것이다. "걱정 안 하셔도 될 정도입니다." "휴……, 정말 다행이군." 힘이 실려 있는 선주혁의 음성을 듣고 나서야 남지학은 안심하 는 표정을 지었다. 극심한 내상을 입은 상태라면 이처럼 생기 넘 치는 음성을 내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렇게 엄청난 공격을 몸으로 다 감당하다니?" 두 사람을 상대하는 격전 중에도 선주혁이 무작스러운 공격을 당하는 것을 본 남지학이었다. 만약 선주혁이 걱정되어 신경을 분 산되지 않았다면 훨씬 더 빨리 승부를 낼 수 있었다. 자신이 상대 하는 두 사람의 무공에 손색이 없어 보이는 자의 맹공 속에서 사 제의 안위를 걱정하느라 몇 번의 위기를 겪었고, 간신히 잡았던 선기를 놓치곤 했던 것이다. 남지학으로서는 엄청난 공력을 맨 몸으로 받아낼 수 있는 선주 혁에게 대해 궁금한 것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 무공 덕분인 것 같습니다." 선주혁은 백화란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수라마제는 전설상의 마두(魔頭). 그가 남긴 무공을 익혔다는 것을 타인에게 말하기는 곤란했다. "아!" 눈치 빠른 남지학은 선주혁이 말하는 무공이 무엇인지 깨닫고 감탄을 했다. "그게 찾기 힘든 기공(奇功)이었군. 사제가 그 무공을 익히길 잘했던 거야! 역시……." 만약 사마횡천이 남긴 비급을 익히지 않았다면 선주혁은 이 자 리에 없었을 것이다. 남지학은 비급을 익히겠다는 사제의 선택이 옳았음을 진심으로 인정하고, 한편으로 비급의 대단한 효능을 사 제가 얻었다는 사실을 마음속으로 축하했다. "뒤늦게 다시 한 번 감사드려요." "당연히 해야 할 도리를 했을 뿐입니다." 선주혁은 그간 읽었던 무협지에서 주인공들이 말하던 투를 기억 해내고 그대로 읊었다. 괜스레 덤벼들었다가 죽을 뻔한 것을 후회 하는 내심을 드러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소녀는 사천백가의 백화란이라고 합니다." "아, 백소저시군요. 저는 선주혁입니다." 사문은 이전에 밝혔고, 자신이 조식을 하는 동안 남지학과 이미 꽤 많은 이야기를 했을 거라 생각한 그는 자신의 이름만을 말했다. 선주혁의 이름을 들은 백화란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아침 햇살을 받은 그녀의 미소는 선주혁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하! 이거야 말로 목숨을 걸고 위기에서 여자를 구해낸 보람이 군. 캬……! 이 기분도 죽이는데.' 방금 전에 사지에서 살아 돌아온 것도 잊은 채 선주혁은 백화란 의 미소에 정신을 못 차리는 중이었다. "두 분의 구명지은(求命之恩)을 갚을 방도가 없으나, 저희 가문 으로 모실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러니 부디 거절하지 말아 주세요." 백화란은 남지학과 선주혁을 번갈아가면서 초대의 의사를 비쳤 다. 본래부터 사천백가로 가는 것이 정해진 바였다. 소설의 내용 그 대로인 것이다. 그런데도 막상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백화란이 초청의 뜻을 밝히자 선주혁은 몽롱해진 눈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크헤헤헷, 이거야 이거! 이거야 말로 답이구나! 앞으로 목숨을 걸어서라도 미녀는 구하고 봐야겠는걸!' "사제의 요상을 위해서라도 잠시 신세를 져야겠습니다." 남지학 역시 정중하게 백화란의 초대를 받아들였다. 삼년이 넘 는 시간 동안 갇혀 살았다. 그간 변화된 세상에 적응할 시간이 필 요했고, 무림의 명문인 사천백가에 머무르는 동안 무림의 정황을 파악할 수도 있으리라는 계산이었다. 백화란은 남지학과 선주혁의 승낙이 몹시 기쁜지 더욱 환하게 웃으며 두 사람을 안내했다. 백화란은 연화사(蓮花寺)에 불공(佛供)을 드리고 사천백가로 돌 아가는 길에 변을 당한 것이었다. 그녀는 가족들이 크게 염려할 것이라 말하고 길을 재촉했다. 그녀를 습격했던 중년인들이 미리 쫓아버린 관계로 도보를 통해 백가가 자리한 금천(金川)까지 가야만 했다. 백화란은 남지학과 선주혁의 동행(同行)이 무척 기쁜 듯 들뜬 모습이었다. 선주혁 역시 전지연을 꼭 빼닮은 여자와 나란히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을 즐겼다. 그녀가 말이라도 걸어올라치면 그의 입은 귀에 가 서 걸렸다. 하지만 남지학의 표정을 그다지 밝지 못했다. 백화란이 말을 건넬 때면 미소와 함께 대꾸를 하긴 했다. 하지 만 그 외에는 심각한 표정으로 묵묵히 걸음만을 옮길 뿐이었다. 선주혁은 그런 남지학의 곁에 다가섰다. 소설을 읽을 때야 고지식하고 답답하기만 한 이 주인공이 그다 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늘 자신을 위해주는 데다가 삼년 반이라는 기간 동안 좁 은 공간에서 함께 뒹굴다보니 알게 모르게 정(情)이 들어버렸다. 가족이 없는 선주혁에게는 정말 이런 형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사형, 너무 깊게 고심하지 마세요." "응?" "그자들을 죽인 것에 대해 생각하고 계신 것이 아닌가요?" 남지학은 선주혁이 자신의 마음을 꿰뚫고 있는 것에 대해 약간 은 놀랐지만 그의 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사형이 죽이지 않았으면 그들이 사형을 죽였을 것입니다." "알아. 하지만 내가 과연 그들을 죽일 자격이 있는 건지에 대해 자꾸만 회의가 들어." 나름대로 위로를 하려던 선주혁이었지만 남지학의 말에 역시나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놈들을 죽이는 건 당연하다. 앉아서 목을 내 놓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죽어 마땅한 놈들이었습니다." "그런가……?" 남지학은 입가에 고소를 머금었다. 남자인 선주혁이 보기에도 멋진 미소였다. 그는 우수에 찬 남자 의 모습이 이리도 아름다운 것인지 처음 알았다. 남지학은 잠시 먼 곳으로 시선을 던진 후 입을 열었다. "그들에게도 가족이 있을 터. 그 가족에게 있어서는 내가 죽어 마땅한 놈이 되는 건 아닐는지……." '거 참 별걸 다 걱정하네.' 내심 투덜거린 선주혁은 애써 염려 가득한 표정을 만들어 내며 입을 열었다. 답답한 곳에서 암벽을 바라보며 말을 해 온 선주혁 이니 만큼 제대로 입을 열기만 하면 꽤 많은 말들이 쏟아져 나왔 다. "사형은 올바른 일을 한 거예요. 만약 사형이 그들을 죽이지 않 았다면 백소저는 큰 봉변을 당했을 것입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 을 돕는 것이야 말로 무인의 길이며 협행의 첫걸음이라고 사형이 말했잖아요." "내가 만약 좀 더 고강한 무공을 지녔더라면……, 그랬다면 그 들을 산 채로 제압할 수 있지 않았을까?" "산 채로 잡으면요?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그들의 심성을 사 형이 바로 잡아주시게요?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선주혁의 목소리가 조금씩 커졌다. 그 소리를 들은 백화란과 두 시녀가 힐끗 두 사람을 쳐다봤지만 이야기에 끼어들지는 않았다. 이 일의 원인은 자신들이라 해도 과 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 식의 합리화를 통해 나의 살행을 정당화시키고 싶지는 않 아." "저는 사형처럼 천재도 아니고, 배운 바도 적어서 말을 잘 할 수는 없습니다만……, 제 얘기를 한 번 들어보세요. 불가에서 말하 길 내가 지옥에 가지 않으면 누가 지옥에 가리오……, 라는 말이 있잖아요?" 선주혁은 애써 무협지에서 읽었던 대사들을 다시금 머릿속에서 조합하기 시작했다. "정의를 행사하는 가운데 살업을 두려워한다면 이 세상이 어찌 되겠어요? 나 혼자 악인이 되지 않고, 죄를 뒤집어쓰지 않기 위해 몸을 사린다면 협(俠)과 의(義)가 이 땅에 남아 있겠습니까? 사형 의 자비로 그들이 살아남았다고 가정해 보세요. 그들이 사형의 앞 에서 개과천선(改過遷善)을 약속하고 추후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피해를 입힌다면 어쩔 겁니까? 사형의 자비로 인해 수십, 아니 수 백 명의 무고한 사람이 죽어간다면 말입니다. 그것이 과연 자비입 니까?" 숨 쉬는 것조차 뒤로 미루고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낸 선주혁을 보며 남지학은 다시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선주혁이 곤륜산에서 보았던 그 나약하기만한 사제가 아니라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뚜렷한 주관을 내세워 외려 자신의 나약함을 지적할 정도라고는 미처 몰랐던 것이다. 선주혁의 말을 모두 공감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마음이 한 결 가벼워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내가 너무 유약하고, 이기적인 생각을 했었군. 정확하게 짚어줘서 고마워, 사제." 자신의 부족함을 서슴없이 인정하고 그것을 반성하는 남지학이 었다. 선주혁은 남지학의 이런 면모는 정말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만에요. 제가 괜스레 주제넘은 말을 한 건 아닌가 싶네요." "아니야. 사제는 정말이지……, 보면 볼수록 사람을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다니까. 하하하핫." 남지학은 어느새 웃음을 지을 정도의 여유를 되찾았다. "하하핫, 제가 재주를 부려봐야 어디 사형에게 비할 수 있겠습 니까? 사형은 의로운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자부심을 가져야 할 상황이지 자책감에 빠질 상황이 아닌 거죠." 선주혁의 말에 남지학의 정기가득한 눈이 다시금 빛을 발했다. 어느새 자신이 가져야할 태도를 정리한 것이다. 그런 남지학을 바라보며 선주혁은 내심 득의양양해졌다. '엉터리 작가가 만들어낸 캐릭터들보다 나은 거야 당연하지. 크흐흐흐!' 어쩐지 자신의 말빨(?)로 남지학과의 승부에서 이겼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한편 선주혁의 협의에 대한 단호한 의지(?)를 보고 감탄하는 것 은 비단 남지학뿐만이 아니었다. 두서없이 장황한 말이었지만 그 의 말을 듣고 있자니 백화란 역시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의 말대로여야 자신과 두 시녀가 지녀야할 마음의 부담이 한결 적어 지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래서일까? 괴상하기 이를 데 없는 용모를 가진 선주혁이었지만 왠지 모르 게 그의 선한 눈과 귀여운 얼굴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실 처음에 남지학을 봤을 때 백화란은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 다. 비록 넝마보다도 못한 의복을 입고 있었으나, 백화란의 눈에 보인 남지학은 그야말로 전설 속의 송옥(宋玉)에 못지않았다. 백화란은 무가(武家)에서 자란 여인이다. 그것도 여느 여인처럼 그저 무가에서 태어나 자라기만 한 것이 아니다. 여인답지 않은 호방한 성격에 두 오라비를 능가하는 무공에 대한 자질을 지닌 것 으로 유명했다. 그녀가 남자로 태어났다면 백가가 사천제일가로 발돋움하는 것 도 꿈만은 아니었을 거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다. 그렇다고는 해도 백화란의 나이에 방심(芳心)마저 없을 리 없었 다. 조각과 같은 얼굴에 무공까지 고절하니 남지학의 등장은 그녀 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반면 선주혁은 평소 백화란이 그려왔던 남성상과는 거리가 멀었 다. 갸름하면서도 부드러운 얼굴선은 본래의 나이보다 어려 보이 게끔 했으며, 커다란 눈은 유약한 성품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보았다. 그녀가 아는 무리(武理)만으로도 선주혁이 금강불괴가 아니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도 중년인의 짐작대로 철포삼이 나 금종조와 같은 횡련공을 익혔을 터. 내가고수에게는 아무런 효 용도 없을 그 신체 하나만을 믿고 중년인에게 덤벼든 것이다. 상대의 강한 무공을 보고도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만은 평 소 백화란이 그려온 이상형에 꼭 부합되었다. 수십 차례 위맹한 구절편에 강타 당하면서도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목숨을 건-백화란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으므로.- 선주혁의 행동은 다분히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그런 그가 지금 또다시 협의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확고히 드러 내고 있었다. 백도(白道)의 명문에서 자라온 백화란이었기에 선주 혁의 의지는 더욱 마음에 와 닿았다. 비록 무공이나 외모에서는 남지학에 비해 한참이나 부족했지만 은연중에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자신을 위해 목숨을 내건 남자이기에 당연한 것일는지도 모른다. 생면부지인 자신에게 목숨을 걸 정도라면, 사랑하는 여인 에게는 어떻게 대할 것인지 깊이 생각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백화란은 문득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에서 선주혁과 남주혁을 비 교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얼굴을 도홧빛으로 물들였다. 누구 도 눈치 챌 리 없었건만 절로 부끄러운 생각이 드는 것이다. 사천의 봄은 그렇게 한 여인의 가슴에도 따뜻한 바람을 불어 넣 고 있었다. 금천의 경계에 이르렀을 때, 선주혁 일행은 세 명의 준미한 청 년이 길에서 서성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화란!" "난아(蘭兒)야!" 세 명의 청년은 백화란의 얼굴을 확인하고 반색을 표했다. 백화란의 오빠인 백태길(白泰佶), 백태준(白泰俊) 형제와 사촌오 빠인 백태민(白泰旻)이었다. 백화란이 도착할 시기가 지나자 마중을 나선 것이다. 물론 이는 백화란을 눈에 넣고도 웃음을 터뜨릴 조부, 백내붕(白?鵬)의 성화 때문이다. 동생의 무사 귀가를 반가워하는 것도 잠시. 백가의 세 청년은 거지꼴을 한 두 청년에게 시선을 돌렸다. 남 루한 행색이 두 사람이 어떻게 백화란과 동행을 하게 된 건지에 대한 의문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특히나 선주혁을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은 노골적인 경멸에 가까 웠다. 중원인 특유의 중화사상이 드러난 것이다. 한눈에도 선주혁의 용모는 중원인의 그것이 아니었다. 평소 천 시해왔던 이족(異族)의 모습을 보고 그들의 표정이 변한 것은 어 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었다. 그들이 시선이 마치 동물원의 원숭이를 바라보는 듯 해 선주혁 은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조연에 불과한 캐릭터들이 감히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자 꽤 화가 나는 것이다. 원래 소설 속에서도 저들이 맡은 역할이 남지학의 남루한 행색 을 보고 무시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기분이 나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 때 백화란은 재빨리 나서서 간밤의 사연을 설명했다. 백태길, 백태준 형제가 동생이 도움을 받았다는 두 청년의 추레 한 행색을 살피는 동안 백태민이 나서며 두 손을 맞잡았다. "난아를 도와주셨으니 백가의 귀빈이시군요." "당연히 해야 할 도리를 했을 뿐입니다." 남지학이 당당한 자세로 손을 마주잡았다. 엉겁결에 선주혁도 포권(抱拳)를 취했다. "소생은 사천백가의 백태민이라고 합니다. 이쪽 분이 백태길 형 님이시고, 태준입니다." 백태민은 손바닥을 펼쳐 백태길, 태준 형제를 가리키며 소개를 했다. 소개를 받은 두 형제는 고개를 살짝 까딱일 뿐이었다. "곤륜파의 남지학입니다. 이쪽은 제 사제인 선주혁입니다." "아! 곤륜파의 영웅이셨군요." 백태민은 반색을 표했고 백태길, 태준 형제는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거지 중에서도 상거지에 해당할 행색을 가진 자들이 구파일방의 하나인 곤륜파의 제자라고는 결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곤륜의 두 영웅께서 저희 가문을 방문해주시니 실로 영광입니다. 어서 이리로……." 백태민은 손수 안내역을 자처했다. 남지학과 선주혁은 그 뒤를 쫓았다. 뒤쪽에서 백태길, 태준 형제가 진짜 곤륜파의 제자일까에 대해 수군거렸다. 처음에는 그렇게 시작했던 두 사람의 화제는 종국에 가서 백발에 잿빛 피부를 가진 선주혁에 대해 모아졌다. 남만인인 지, 곤륜노인지에 대해 말하는 것이 얼핏얼핏 들렸고, 가끔씩 자기 들끼리 키득이는 소리도 들렸다. 하나 남지학도 선주혁도 개의치 않았다. 남지학은 본시 대범한 성격이었으며 현재 자신의 행색이 남루함 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선주혁은 못마땅하긴 했지만 자신을 은인이라 소개하며 백화란 이 슬쩍 던져준 미소에 만족했기에 참고 넘어갔다. '흠, 흠! 아무리 멍청한 인간들이라도 손위 처남이 될 수도 있으 니 내가 참는 게 당연하겠지. 흠, 흠…….' 김칫국을 거하게 마시며 선주혁은 여유 있는 걸음걸이로 백태민 의 뒤를 쫓았다. 그렇게 이 각 정도를 걸은 후에야 선주혁 일행은 금천제일지가 (金川第一之家)이자 구파일방에 자리한 당가(唐家)를 제외하고 사 천의 이대가문으로 꼽히는 사천백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웅장한 규모의 장원은 선주혁에게 새삼스럽게 감탄을 자아내게 끔 했다. 곤륜파의 건축물들을 보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선도를 닦는 도량(道場)과 속세의 건축물은 겉보기에도 확연히 달랐다. 보다 화려하고 멋스러움이 가득했던 것이다. 더구나 삼 년하고도 육 개월 간이나 밀폐된 공간에 갇혀 있던 선주혁이었기에 이처럼 엄청난 규모의 장원을 보게 되자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 이게 장원이라는 거구나. 무림에서 출세하면 이런 대규모 저택을 가질 수 있다는 거지? 이런 일을 겪는 게 꼭 빌어먹을 상 황만은 아닌걸! 잘하면 나도 재벌 못지않게 떵떵거리며 살 수 있 다는 말이잖아?' 장원을 보며 엉뚱한 상상에 젖어든 선주혁을 바라보는 백태길, 태준 형제의 입가에 떠오른 조소가 더욱 짙어졌다. 곤륜파의 촌놈 이 자신들이 살고 있는 장원을 보고 넋을 잃었다고 생각한 것이 다. 누가 형제가 아니랄까봐 자연스럽게 턱을 치켜들며 한껏 오만 한 표정을 짓는 두 사람이었다. 장원내로 들어선 선주혁은 더욱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협지에서 장원은 흔히 등장한다. 스토리와 별 상관이 없는 내용 이라 대개의 경우 흘려 읽곤 했는데 실제로 보게 되자 그 모습이 정말 대단했다. 경복궁이나 덕수궁과 같은 궁궐일지라도 이 정도 는 아닐 것이다. 늘 좁은 방 한구석에서만 지내왔던 선주혁에게 있어서 한 가족 이 사는 저택이 이처럼 거대하다는 것은 일종의 문화적 충격이었다. 특히 선주혁은 연못의 한가운데 있는 가산이 놀라웠다. 어느 산 맥에 있을 법한 산을 그대로 축소해 옮겨놓은 것만 같았던 것이 다. 바위와 암벽, 나무가 생생히 보였으며 심지어는 폭포수까지 만 들어 놓은 가산이었다. 연못의 한쪽에 자리한 운치 있어 뵈는 정자도 좋았다. 저런 곳 에 앉아 연못을 내려다보며 미녀와 함께 술이라도 한 잔 한다면 신선이 부럽지 않을 듯 했다. 얕은 담은 곳곳을 구분해 놓았고, 수많은 정원수와 봄을 맞은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장원을 장식하는 중이었다. '햐! 이거 정말 죽이는데?' 현실세계 남아 있다면 한자리에서 번개 두 번 맞을 확률과 비슷 하다는 로또에 당첨이 되어도 이 같은 저택을 갖는다는 것은 불가 능했다. 하지만 이 말도 안 되는 상황 속에서라면……. 가능하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고 있다는 것은 크나 큰 무기가 될 수 있다. 무림에서 강자가 된다는 것. 그것은 이 모든 것을 소유한다는 뜻이었다. 선주혁의 꿈인 잘 먹고 잘 사는 것의 완벽한 답은 일단 강해지 고 보는 데서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어설프지만 금강불괴에 가까운 신체. 한 시대를 풍미했던 흡성대법이란 기공. 원래 얻고자 했던 기연의 내용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의 소득이 었다. 앞으로의 상황을 잘 이용하기만 하면 엉터리 작가가 만들어 놓은 이 엉터리 상황에서 잘 먹고 잘 사는 데에 지장이 없을 것이다. 사천백가의 장원을 둘러보며 선주혁은 희망찬 미래를 꿈꾸며 주 먹을 말아 쥐었다. 그리고 선주혁의 그런 미미한 행동을 백태민은 놓치지 않고 살 피고 있었다. Vol. 2 선주혁과 남지학은 백화란의 부모에게 환대를 받았다. 물론 선 주혁은 그들의 환대가 백태길, 태준 형제처럼 표리(表裏)가 다른 환대임을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시녀에게 안내를 받아 한 방으로 들어섰다. 시녀는 잠시 나갔다 들어오며 차와 다과, 그리고 두 벌의 무복 (武服)을 들고 들어왔다. 남지학과 선주혁은 넝마와 같은 옷을 벗어던지고 청의무복으로 갈아입었다. 옷을 갈아입은 남지학의 모습을 본 선주혁은 입이 절로 벌어졌 다. 실로 옷이 날개라더니 그 말이 맞는 모양이었다. 딱히 화려한 바는 없는 평범한 무복을 걸쳤을 뿐인데도 남지학 의 용모는 빛을 발했다. 선주혁은 새삼스레 절세미남자(絶世美男子)라는 말뜻을 되새겼 다. 그 말은 전적으로 남지학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선주혁이 처음 그를 보았을 때는 그저 예쁘장하게 생긴 미소년 에 불과할 뿐이었다. 실제 스무 살이 넘도록 살아온 선주혁이었기 에 나중에 여자 꽤나 울릴 귀여운 소년 정도로만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그 후 삼 년 반의 시간이 지나고 남지학은 어엿한 남자 가 되었다. 스물 한 살의 그는 한 번 보면 좀처럼 눈을 떼지 못할 미장부가 된 것이다. 선주혁은 황급히 거울을 찾았다. 자신이 봐도 저리 멋지다면 백화란이 보기에도 그럴 것이다. 좀 더 단정하게 꾸미지 않으면 백화란의 관심이 남지학에게 집중될 것이 분명했다. 몇 번에 걸쳐 세심하게 탈색한 것과 같은 백발. 제대로 태운 것 같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선탠을 한 듯 건강해 보이는 피부. 아직까지 현대인의 감각이 남아 있는 남지학의 눈에는 그다지 이상해 보일게 없는 용모였다. 어쩐지 라이에이지2라는 온라인게임의 다크 엘프 캐릭터가 튀어 나온 것 같은 모습이었다. 다만 게임의 다크 엘프는 눈이 날카롭 게 찢어지고 못돼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자신의 얼굴을 커다란 눈 망울을 가진 귀여운 스타일임이 다를 뿐이었다. '뭐…… 멋지잖아! 다크 엘프!' 스스로의 모습에 나름대로 만족하던 선주혁은 자신을 바라보고 쑤군대던 백태길, 태준 형제를 떠올렸다. '촌스러운 떼놈들, 최첨단 스타일을 몰라보다니!' 문득 이 소설의 배경이 중국이라는 것이 떠오른 그였다. 말이 통하고 글자를 읽을 수 있다 보니 그동안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열심히 다닌 학교는 아니었지만 중국인들이 한족(漢族)을 제외 한 모든 이민족을 오랑캐로 여긴다는 이야기는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이 황당한 상황에 빠지기 전에는 역사왜곡이니 뭐니로 매스 컴에서 한창 떠들었던 것도 기억났다. '까짓 거 내가 여기서도 한류열풍을 만들어주지. 코리안 스타일 로 말이야. 크흐흐흐흐흐!' 한 번도 이런 쪽으로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선주혁이었지만 괜스 레 스스로의 모습에 만족하기 위해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있었다. 스르르륵 부드럽게 미닫이문이 열리고 시녀가 말했다. "가주님께서 기다리십니다. 두 분을 위한 연회를 준비하셨으니 대청으로 향하시지요." "넵!" 선주혁은 한시라도 빨리 백화란을 보겠다는 마음에 시녀의 뒤를 바로 쫓았다. 대청 하나의 크기가 선주혁이 살던 고아원의 크기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날아갈 듯한 처마 밑을 지나 대청 안으로 들어간 선주 혁은 현 사천백가의 가주인 미염검객(美髥劍客) 백내붕과 후손을 들을 볼 수 있었다. 물론 그들에게 시선이 간 것은 순간일 뿐이었다. 선주혁의 시선은 어느새 화사한 옷으로 갈아입은 백화란에게 집 중되었다. 예전에 전지연이 광고모델로 나와 중국식 복장을 입은 것도 본 것도 같았다. 그때도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에 놀랐지만, 훨씬 풍만한 몸매 선을 드러낸 백화란의 용모는 현실에서 봤던 전 지연과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났다. "허허허헛! 어서들 오시게. 곤륜파의 두 영웅이 난아를 구해줬으 니 그 사례를 어찌할꼬?" 백내붕은 노인답지 않게 힘 있는 목소리로 남지학과 선주혁을 반겼다. 그의 옆에 있는 백화란의 부모와 오빠들은 옷을 갈아입은 남지 학의 빼어난 용모에 놀라는 중이었다. 어느 정도 잘생긴 축에 든 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준수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곤륜의 말학 남지학이 무림의 명숙이신 미염검객을 뵈옵니다." "선주혁이 미염검객을 뵈옵니다." 남지학의 당당하고 절도 있는 인사에 맞춰 선주혁도 예를 갖췄다. "허허헛, 실로 보기 드문 인재로고! 어서들 앉게." 백내붕은 손수 남지학과 선주혁에게 자리를 권했다. "과분한 환대를 베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남지학은 두 손을 마주 잡은 채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준비된 자리에 앉았다. 물론 선주혁도 그 뒤를 따랐다. 남지학을 바라보는 백내붕의 호목(虎目)이 순간적으로 빛을 발 했다. 무림 명문의 후예로써 조금의 손색도 없는 남지학이었기 때문이 다. 예의를 갖추고 있으나 조금의 비굴함이나 위축되는 모습을 찾 을 수 없고, 자리까지 오는 동안 바른 자세와 일정한 보폭을 유지 하니 무공의 뛰어남을 짐작케 했다. '호오! 곤륜파가 몰락의 길을 걷고 있다더니……, 구파일방의 저 력이란 실로 대단하구나. 저와 같은 인재를 길러낼 수 있다면 적 어도 한 두 세대를 거쳐 이름이 가벼워질 곤륜이 아니로구나!' 백내붕은 남지학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사실 사천백가가 오늘날의 성세를 누리는 것은 백내붕의 뛰어난 무공 때문이었다. 청성(靑城), 아미(峨嵋), 당문(唐門)이 자리한 사 천에서 열 손가락에 꼽히는 고수가 바로 백내붕이다. 그의 뛰어난 능력은 상승가도에 올랐던 백가를 당당히 설가와 더불어 어깨를 견주게끔 이끌었다. 그런 백내붕에게도 고심은 있었다. 자식 둘의 자질이 기대에 못 미쳤던 것이다. 만약 백내붕의 두 아들이 그의 절반만 되었어도 사천무림의 판도가 달라졌을 것이라는 게 세인들의 평이었다. 그런 백내붕인지라 인재를 탐내는 마음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 고, 남지학의 바라보는 시선 역시 특별했다. 하나 그것은 사천에서 손꼽히는 검객인 백내붕만의 생각이었다. 남지학은 이미 내공을 갈무리할 정도의 경지에 올랐고, 선주혁 은 내력을 흩트린 상태. 두 사람의 밋밋한 태양혈과 평범한 안광은 백내붕과 백화란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수준 이하의 무공을 지닌 것으로 평 가케 했다. 남주학의 용모가 빼어난 것만이 그들의 관심사였으나 그도 오래 가지 않았다. 백화란의 아름다운 용모는 다분히 유전적이었다. 즉, 백가의 다 른 가솔 역시 탁월한 용모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대개 자신의 용 모에 자신감을 가진 사람들은 타인을 인정하는 데에 있어 인색한 법. 더구나 같은 남자의 입장에서 남지학의 준수함은 길게 관심가 질 일이 아니었다. 백내붕을 제외하고 남지학의 뛰어남을 그나마 가장 많이 인정하 는 사람은 백태민이 하나뿐이었다. 백내붕은 자신의 앞에 놓인 옥가(玉?: 다리가 세 개 달린 옥으 로 만들어진 술잔)을 들어 한 입에 비운 후 호방한 목소리로 말했 다. "우리 난아를 구해준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한 잔 권함세." '거참 건배(乾杯)를 하고 마시려면 하고 마실 것이지 마시고 권 하는 건 또 뭐야?' 선주혁은 백내붕의 행동이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당시의 건배 란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비우는 것을 말함이며, 스스로 먼저 술 잔을 비우고 타인에게 권하는 것이 예의임을 몰랐기 때문이다. 하나 코끝을 간질이는 주향(酒香)을 맡은 선주혁은 개의치 않고 술잔을 들이켰다. '크하! 이게 얼마 만에 마셔보는 술이냐?' 술맛을 모르는 바도 아닌 선주혁은 그간 술 생각이 간절했던 적 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단숨에 술잔을 기울여 마신 선주혁은 두 번에 걸쳐 놀라야만 했 다. 첫 번째는 맑은 술이 가진 감미로운 맛에 놀랐으며, 두 번째는 식도를 타고 흐르는 강렬한 자극에 놀랐다. 부드러운 맛과는 달리 알코올 함량이 매우 높았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뒤끝이 깨끗하고 입안에 향이 그윽한 것에 선주혁은 절로 호들갑을 떨었다. "캬아! 쥑인다, 쥑여! 대체 이 술이 뭡니까?" 선주혁의 호들갑은 백가 사람들의 눈총을 받았다. 백내붕과 백 화란만이 개의치 않았을 뿐이다. "허허허헛, 젊은이가 술맛을 아는구먼. 이 술은 오량액(五粮液) 이라는 걸세. 의빈(宜賓)에서 직접 가져온 것이지." 당대(唐代)에 주조에 성공한 이래 사천의 자랑이 된 명주(名酒) 오량액은 의빈 산(産)을 최고로 친다. 하나 그것까지 선주혁이 알리는 없었다. "정말 술맛이 좋군요. 정말 좋습니다!" 선주혁은 엄지손가락을 곧추세워 내밀었다. "허허헛, 사양하지 말고 많이 들게." "넵!" 본시 초대받은 손님이 음식과 술을 칭찬하는 것은 무례한 행동 이랄 수 없었다. 하나 무림의 명숙이랄 수 있는 백내붕의 면전에 서 곤륜파의 어린 제자가 스스럼없이 호들갑을 떠는 것이 마냥 곱 게 보이지만 않는 백가의 후예들이었다. 자신들조차 어려워 말을 건네기조차 힘든 백내붕이 아니던가? 그런 내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선주혁은 사천의 매운 요리와 오 량주의 감미로운 맛을 즐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허구한 날 이끼만 뜯어먹다가 매콤하고 따뜻한 음식을 먹으니 그야말로 사람 사는 거 같구나.' 사천인들은 주식으로 쌀밥을 먹는다. 식탁에 오른 기름진 쌀밥이 곱씹으며 선주혁은 감격에 겨워 눈 물을 흘릴 것만 같았다. 마치 몇 달은 굶은 사람처럼 게걸스레 음식을 먹는 선주혁은 다 시금 백가 식솔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결국 백태길이 입을 열었다. "하하핫, 최근 개방의 성세가 하늘을 찌른다고는 하지만 곤륜파 의 제자들이 개방의 영웅을 배우기 위해 노력하고 계신 줄은 몰랐 소이다." "……!" 수저를 들어 입으로 가져가던 선주혁의 손이 멈춰 섰다. 그 순간 백태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동정하는 듯한 표정으로 형 의 말을 받았다. "곤륜파가 날이 갈수록 힘들어지고 있다는 소문이 있잖아요, 형 님. 생존방식이라면 개방영웅들이 최고가 아니겠어요?" 말은 제 형에게 하는 것이지만 흘깃 거리는 시선은 선주혁에게 향해 있었다. 백태길, 태준 형제가 개방운운하며 하는 말은 선주혁의 행동이 꼭 거지를 연상시킨다는 뜻이었다. "오라버니!" 두 오빠가 자신의 은인을 비아냥거리는 지라 백화란이 나섰다. 그러나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백화란의 부친이자 강호인들 사 이에서 금천검(金川劍)이라 불리는 백여천(白勵天)이 짐짓 근엄한 표정으로 아들들에게 말했다. "흠……. 너희들은 식우지기(食牛之氣)란 말을 들어보지도 못한 게냐? 음식을 먹음에 있어서도 저와 같은 의기를 보이니 실로 영 웅이라 할 수 있거늘 무엇을 말하는 게냐." 얼핏 들으면 마치 두 아들이 선주혁을 경망되이 조롱하는 것을 나무라는 것 같았다. 하지만 본래 식우지기란 호랑이나 표범의 새 끼는 털에 무늬가 없을 정도로 어려도 이미 소를 먹을 만큼의 의 기가 있음을 말하는 뜻이다. 선주혁처럼 마구 음식을 먹어대는 것 을 말하는 바가 아닌 터. 결국 백여천 역시 선주혁을 조롱하고 있 는 중이었다. ‘이것들이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다른 때라면 백화란의 얼굴을 봐서라도 참았을 그였다. 하지만 그녀가 보는 앞에서 자신을 거지새끼라 욕하는 중이 아닌가? 순간 발끈하는 마음에 그 대상이 백화란의 부친이고, 오빠들이 라는 것도 잊고 한마디를 쏘아주려는 찰나였다. “불여생전일준주(不如生前一樽酒)라! 살아 있을 때 마시는 한 통 의 술로 즐거움을 누리는 것보다 나은 게 있겠습니까? 저희 나름 대로의 사정이 있어 그간 의식(衣食)에 곤궁(困窮)을 겪었으나, 즐 거운 주석(酒席: 술자리)인만 그에 관한 건 잊고 한 잔 술을 권해 드릴까 합니다.” 취음선생(醉吟先生) 백거이(白居易)의 권주시(勸酒詩) 한 구절을 통해 자칫 험악해질 분위기를 쇄신하는 남지학이었다. 선주혁은 사형이 끼어든 것이 못마땅했다. 그러나 뭔가 어려운 말을 늘어놓았는데 자신이 설치면 괜히 무식하다는 말을 들을까 싶어 입을 다물었다. 더구나 백화란이 얼굴 가득 민망함을 드러내고 있는지라 자신의 너그러운 면모를 보여주는 것도 괜찮으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허헛, 곤륜파의 젊은 영웅들은 과연 남루한 행색 속에서도 풍 류를 아는구먼. 좋아, 좋아! 내 그러는 의미에서 소협께 술 한 잔 을 권함세.” 백여천이 약간 언성을 높여 말했다. 말인즉, 곤란한 와중에도 술 마시길 즐기는 것을 비꼰 것이다. 그 뜻을 못 알아들을 남지학이 아니었으나 공손하게 옥으로 만 들어진 술잔, 옥가를 들어 내밀었다. 백여천은 입 꼬리를 말아 올려 웃으며 주담자의 주둥이들 남지 학의 옥가에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는 내력을 북돋아 옥가를 눌렀 다. 갑작스레 엄청난 힘이 손에 느껴지자 남지학도 침착하게 내공을 일으켰다. 백여천의 속셈은 뻔했다. 남지학을 술조차 제대로 못 받는다 하여 조롱할 의도인 것이다. 하나 순순히 당할 남지학이 아니었다. 만년음양과를 복용한 후 비약적인 내력의 상승을 이룬 그였다. 일천한 자질의 백여천은 심법을 수련한 세월만을 믿고서 남지학 을 누르려 했으나 그가 내리누르는 잔은 한 치도 밑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백여천은 순간적으로 당혹감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감히! 내게 저항을 해?’ 자신의 힘에 저항하는 곤륜파의 애송이가 더욱 괘씸하게 생각되 어 그는 있는 대로 진력을 끌어올려 팔에 집중했다. 그런 두 사람을 못마땅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선주혁에 이채가 감돌았다. 웃으며 술잔을 주고받는 두 사람의 몸에서 폭풍처럼 일어나는 진기가 느껴졌던 것이다. 먼저 느낀 것은 남직학에게서였다. 몸이 곤륜파의 진기에 익숙 해져 있기에 더 예민하게 반응한 것이다. 그리고 찰나의 순간이 지나자 백여천에게서도 강렬한 진기의 움 직임이 보였다. 시간이 짧아 그가 어떤 식으로 진기를 운용하는지 까지는 살필 사이가 없었다. 순간 신경이 예민하게 세워지고 두 사람의 진기가 교차되는 지 점으로 절로 집중하게 된 선주혁. 누르고 올리는 힘이 격렬해지고 어느 한 순간 알 수 없는 위기감이 그를 휘감았다. 그가 눈을 크게 뜨는 순간. 채앵 옥으로 만들어진 잔인 옥가와 도자기를 구워 만든 주담자가 깨 져나갔다. 두 사람의 진기를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문제는 그 파편이었다. 아직까지 자신의 힘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남지학의 과도한 힘에 밀린 백여천은 억지로 버티며 주담자를 비틀었고, 깨져 튀어 오른 파편은 비틀린 방향 쪽으로 폭사되었다. 두 사람의 엄청난 진기가 합쳐져 쏘아지는 잔과 주담자의 파편 은 다시없이 위험한 암기가 되어 날아갔다. 그 방향에는 백화란이 있었다. 누구도 손을 쓸 수 없는 상황. 비명조차 지를 사이도 없다. 빛살처럼 쏘아진 파편은 백화란의 얼굴과 몸을 덮쳐갔다. 좌중의 모든 이가 걸레처럼 찢어질 백화란의 얼굴을 그리는 순간. 거뭇한 그림자 하나가 백화란과 파편 사이에 끼어들었다. 거짓말 같은 광경이었다. 퍼억 둔탁한 음향과 함께 그림자의 고개가 뒤로 젖혀지며 녹색과 흰 색 가루가 피어올랐다. 내력이 실렸던 파편이 무엇인가에 강하게 부딪치며 가루가 되어 버린 것이다. 미세한 분말이 가라앉으며 드러난 것은 선주혁이었다. 그가 어느새 백화란의 앞에 자신의 얼굴을 디밀어 파편을 막아 낸 것이다. 스윽 젖혔던 고개를 바로 하는 선주혁. 잘 빗어 올렸던 백발이 헝클어지고 가무잡잡한 얼굴에는 녹색과 흰색가루가 잔뜩 묻어 있었다. 하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상처를 찾아볼 수는 없었다. 그 광경에 모두가 놀라 말을 꺼낼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백화란이 무사하다는 안도감, 그리고 엄청난 힘이 실린 파편을 얼굴로 막아낸 것에서 비롯된 경악이 그들의 혀를 얼어붙게 만든 것이다. "대체 이게 무슨 짓인 게냐?" 침묵을 깬 것은 백내붕의 호통이었다. 실상 백여천과 남지학이 내력을 겨룬 것은 빠른 순간이었을 뿐. 선주혁을 제외한 다른 사람은 그와 같은 상황을 알기 힘들었다. 주담자와 잔이 깨진 것을 보고 제일 먼저 상황을 파악한 백내붕은 아들의 못난 짓에 화가 치민 것이다. "괘, 괜찮으세요?" 백내붕의 호통에 백여천이 얼굴을 붉힐 때, 그제야 정신을 차린 백화란이 물었다. 선주혁의 뒤쪽에 있었기에 그의 상세를 살피고 픈 백화란은 저도 모르게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아, 저는 괜찮습니다." 선주혁은 멀쩡한 얼굴을 백화란에게 보여주며 쑥스럽게 웃었다. 사실 손을 잡은 것도 아니고 여자가 소매를 잡은 것이 큰일도 아니었건만 선주혁은 어쩐지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피할 수 없었 다. 사람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고도 당당함을 잃지 않았던 백화란이 었지만 멀쩡한 모습의 선주혁을 확인하는 순간 눈물을 글썽였다. '거 참……, 역시 여자에게 있어서는 얼굴이 제일 중요한 건가?' 눈물까지 글썽이는 백화란을 보며 선주혁이 내심 중얼 거렸다. 하나 실상은 달랐다. 물론 백화란도 엄청난 기세로 날아오는 파 편을 보고 놀라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가 눈물을 글 썽인 것은 벌써 두 번째에 걸쳐 스스로의 몸을 날려 자신을 구해 낸 선주혁의 행동에 감동했기 때문이다. "선 소협, 괜찮은 건가?" 날아가는 파편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백내붕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일부러 파편하나 하나에 경력을 실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 정도의 힘과 속도라면 얼굴이 만신창이가 될 것은 당연한 일이었 다. 그것을 얼굴로 받아냈으니 자연 염려가 되는 것이다. 더구나 금지옥엽(金枝玉葉), 장중보옥(掌中寶玉)으로 귀히 키운 손녀딸이 아닌가? 그 손녀를 위해 자신의 얼굴을 들이민 선주혁은 백내붕에게 있 어 최고의 은인이 아닐 수 없었다. "아, 네. 뭐…… 괜찮습니다." 선주혁도 내심 놀라지 않은 바가 아니어서 이제야 여유를 찾고 웃음을 머금을 수 있었다. 어색하면서도 만족스러운 미소였다. 남지학과 백여천이 벌이는 내력의 다툼을 주목하던 그는 한순간 균형이 틀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남지학, 백여천이 자신의 진기에 집중해있던 것과는 달리 두 사람 모두의 힘을 느꼈던 그였 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진기의 흐름이 향하는 방향을 확인 한 그는 대경(大驚)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백화란이 있었던 것이다. 놀라는 순간 주담자와 잔이 부서지고 머릿속에서 무엇인가 판단 을 내릴 사이도 없이 몸을 날려야만 했다. 다급한 김에 날린 몸은 주체할 수 없을 속도로 날아갔고 엉겁결에 얼굴을 들이밀어 파편 을 막아낸 것이다. "허허허헛! 이것으로 우리 난아가 선 소협에 두 번이나 은혜를 입는구먼. 내 선 소협을 우리 백가 최고의 귀빈으로 예우할 것이네!" 백내붕은 부리부리한 호목에 진심을 담았다. "소녀, 선 소협께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백화란 역시 아지까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선주혁에 게 감사를 표했다. "아하핫, 뭘요. 당연한 일을 한 걸 가지고." 선주혁은 멋쩍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일렁이는 눈망울로 자신을 바라보는 백화란의 눈빛이 흡족하면 서도 어쩐지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제야 진정을 한 백태길이 툭 하니 말을 던졌다. "하! 곤륜파의 절기 중에 철면신공(鐵面神功)이 있는 줄은 오늘에서야 알았네." 백태준에게 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의 말을 듣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킥!" 백화란이 다치지 않음을 보고 이미 안심을 했기 때문일까? 백태준은 형의 말을 듣고 웃음을 참지 못했다. 말이 좋아 철면 신공이지 얼굴 가죽이 두꺼운 철면피(鐵面皮)라 말하는 것이기 때 문이었다. "동생이 큰일을 당할 뻔 했거늘 무슨 경망된 태도들이냐?" 호통을 친 것은 백내붕의 차남이자, 백태민의 부친인 일진검(一 眞劍) 백여진(白璵瑨)이었다. 백태길, 태준 형제는 숙부(叔父)의 호통에 찔끔하여 목을 움츠렸 으나 그다지 반성하는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외려 백여진의 시선 을 피해 입을 삐죽이기까지 하는 두 사람이었다. "선 소협이 익힌 기공이 놀랍기는 하나,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스스로의 몸으로 남을 구하고자 하는 살신성인(殺身成仁)의 태도 구려. 이 백모는 선 소협에게 심히 감탄했소이다." 백여진은 포권까지 취하며 선주혁을 칭찬했다. 그는 선주혁이 철포삼이나 금종조와 같은 외공을 익혔을 거라 단정 지었다. 그와 같은 횡련공을 익혔다고는 해도 내력이 실린 파편을 정면으로 마 주하면 중상을 입을 수도 있는 법. 그와 같은 위험을 무릅쓰고 얼 굴을 내민 선주혁을 높게 산 것이다. 물론 백여진이 선주혁을 추켜세우는 이유는 그게 다가 아니었 다. 선주혁을 칭찬함으로써 백여천의 실태를 은연중에 비웃고자 하는 의도 또한 담겨져 있었다. 이는 사천백가의 가주를 아직까지 백내붕이 지키고 있는 것과 깊은 연관이 있었다. "하핫, 뭘 그리 대단한 일을 했다고 그러십니까." '캬! 이제 나 완전히 뜬 건가? 잘 하면 이걸로 미스 백에게 점수 크게 따겠는걸!' 선주혁은 겸손을 떠는 와중에서 입가에 절로 미소가 가시지 않 았다. 물론 백화란을 힐끔거리며 살피는 것도 잊지 않는 그였다. '오오옷! 비단이불이다, 비단!' 약간은 차가우면서도 매끄러운 감촉. 삼 년이 넘도록 흙바닥에서 잠을 자온 선주혁이었다. 백가에서 제공한 침상에 깔려 있는 비단이불은 그에게 있어 다시없을 행복 이었다. 편안하고 따뜻한 침상 하나가 이런 기쁨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 그였다. 잘 건조되어 사각이는 소리가 나는 이불을 덮은 선주혁. 술김에 마구 날뛰는 생각들을 하나씩 정리해가기 시작했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진 셈이지. 사형, 아니 저 지학이란 녀석과 함께 무림을 휘젓게 될 테니까 말이야. 그리고 잘 먹고 잘 살아 보는 거야. 응? 근데 내가 언제부터……?' 최근 속으로 생각할 때조차 남지학을 사형이라 여기는 자신에 문득문득 놀라는 그였다. 자신이 이토록 정에 굶주려 있었나를 생 각하면 실소가 터져 나오기도 했다. '뭐, 이 몸으로 따지면 사형이니까……. 사형이라 불러줘도 문제 없겠지.' 앞으로 자신에게 있어 인간 표지판이 되어줄 남지학이었다. 사 형이라 불러준다고 해서 자신이 큰 손해를 보는 것 같지는 않았 다. '책으로 볼 때는 속 터지는 놈이었지만 따지고 보면 착한 녀석 이니까, 뭐.' 슬쩍 고개를 돌려 잠을 자고 있는 남지학의 얼굴을 봤다. 자신을 생명의 은인으로 여기는 남지학이었다. 때문에 모든 일에 있어 항상 양보와 배려를 해주지 않았던가? 지금에 와서 새삼스레 선주혁이 남지학에 대해 생각을 정리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백화란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그녀와 남지학은 서로에게 마음을 준다. '하긴……, 사형 정도의 뛰어난 무공, 용모, 성품이라면 여자가 뻑 가는 건 당연한 일이지.' 그렇게 인정을 하면서도 어쩐지 백화란에 대한 미련이 남았다. 세상에서 제일 치사하고 더러운 게 한 여자를 두고 두 남자가 경쟁하는 거라 생각해왔지만 어쩐지 지금은 그렇게라도 하고 싶었 다. 보면 볼수록 전지연이 뛰어와 납작 엎드리고 언니라고 외쳐댈 것 같은 백화란이었다. '이후에 등장하게 될 많은 여자들이 어떨지가 궁금하긴 한데 그 렇다고 눈앞의 음식(?)을 보고, 앞으로 나올 음식만을 바라볼 수도 없는 일이잖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아무리 정이 가는 남지학이라지만 사형은 사형이고 여자는 여자 가 아닌가? 문득 실소가 터져 나왔다. 만약 선주혁 자신이 독자가 되어 이와 같은 상황을 글로 읽는다면? 솔직히 짜증을 냈을 것이다. 주인공을 놓고 여러 여자가 덤벼드는(?) 것은 즐겁게 읽겠지만, 한 여자를 놓고 주인공이 다른 여자와 경쟁을 하는 것은 솔직히 답답하기 때문이다. 만약 자신이 진짜 소설 속에 있는 것이고 자신의 행동에 따라 내용이 변하고 있다면, 안 그래도 엉터리였던 이 소설이 더욱 재 미없어진다고 생각하니 웃음이 터져 나온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던 중 선주혁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소설 생각을 하다 보니 보다 명확하게 이즈음의 남지학 상태가 떠오른 것이다. 소설 속에서 남지학을 좋아하게 된 것은 백화란이다. 남지학은 그저 명가의 여식이며 뛰어난 용모를 가진 그녀에게 약간의 호감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래, 분명히 그랬어! 그저 호감일 뿐이라고!' 선주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호감과 애정은 분명히 다른 감정이다. 적어도 이 순간에는 그렇 게 믿고 싶었다. 그저 호감을 가진 여자를 사제가 좋아한다고 해서, 아니 그 여 자가 사제를 좋아하게 된다고 해서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내가 언제부터 이 사람 저 사람 생각해주며 살아 왔다고. 아무 래도 나도 모르게 사형에게 세뇌되어가고 있었나보군. 기분 나쁜 데 이거?' 늘 의가 어쩌고 협이 어쩌고 노래(?)를 부르는 남지학의 옆에서 삼 년이 넘게 지내왔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지금은 의협을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두 번에 걸쳐 몸을 던져 백화란을 보호했다. 자신 을 바라보는 백화란의 눈빛도 심상치 않았다. 분명히 그녀와 답을 만들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몸을 날렸던 본전을 뽑아야 한다는 기본적인 욕구 이전에 자신 이 언제 백화란과 같은 미녀와 사귀어볼 기회를 가질 수 있겠는 가? 현실 속에서 가진 것이라고는 골방을 얻은 보증금과 소매치기라 는 형편없는 직업뿐이던 그였다. 엄청난 명가에서 태어난 눈이 뒤집어질 정도의 미인, 백화란과 같은 여자는 자신과는 딴 세상의 사람일 뿐이었다. 마치 현실 속의 자신과 텔레비전 드라마의 여주인공 이상의 거 리가 있다. 그런데 지금은? 지금은 다르다. 백화란과 손에 닿을 듯 근접해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 해 보는 거야! 까짓 거 아님 말구!' 비록 자신이 대시를 한다고 백화란이 넘어오리라는 보장은 없었 다. 아무리 자신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도 남지학에게 마음이 기 울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른 건 백 번 양보할 지라도 미인을 양보하는 것만은 쉽지 않 은 일임을 이번 경험을 통해 십분 깨달았다. 현실에 있을 때 여자를 만나보긴 했다. 하지만 사춘기 시절의 첫사랑을 제외하고는 진지하게 여자를 생 각해 본 적이 없는 그였다. 그저 만나서 즐기면 끝이었다. 언제 체포되어 학교(교도소)에 갈지 모를 주제에 사랑은 사치라 고 여겨왔던 것이다. 그러니 사실상 진지하게 여자를 사귀는 것에 있어서는 숙맥이랄 수 있는 그였다. 여자와 놀아나는 것과 연애를 하는 것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으므로. 결국 선주혁은 남지학의 개의치 않고 최선을 다해 백화란을 자 신의 것으로 만드는 작업에 임할 것을 다짐하며 잠에 빠져들었다. @@@@@ 매일 같이 남지학이 기상하는 시간에 맞춰 일어났던 선주혁은 간만에 늦잠을 잘 수 있었다. 간밤에 마신 술 때문인지, 사실상 전 날 날을 새웠기 때문인지, 아니면 오랜만에 편안한 침상에서 잠을 잤기 때문인지 남지학도 늦게까지 잠을 잤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남지학보다 일찍 눈을 뜬 선주혁은 대충 씻고 방문을 나섰다. 뿌연 안개가 끼긴 했지만 그마저도 싱그러운 봄의 느낌을 강조 하는 듯 했다. '흠, 흠! 사랑을 하게 되면 세상이 아름다워 보인다더니. 정말 그런 건가?' 불과 이틀 밤 만에 어느새 사랑을 논하는 선주혁이었다. 괜스레 들뜬 마음으로 마당을 이리저리 거닐던 선주혁은 눈을 번쩍 떴다. 백화란의 음성이 들렸기 때문이다. "일찍 일어나셨군요." '오! 미스 백! 굿 모닝!' 선주혁은 내심 반갑기 그지없었지만 애써 부드러운 미소만을 지어보였다. "아! 백 소저. 잘 잤어요?" 무림의 여인들은 여염집의 규수에 비해 자유롭다. 그렇다고는 해도 예의범절과 거리가 멀다는 뜻은 아니었다. 백화란 역시 마찬 가지였다. 방금 전 선주혁의 어투는 만난 지 며칠 안 된 남녀 간 에 사용하기에는 지나치게 친근했다. 하나 백화란은 개의치 않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선 공자님 덕분에 편히 잤습니다." '옷! 공자님! 기분 죽인다. 더구나 내 덕분이라……? 그럼 밤에 도 내 생각을 했단 말인가? 밤중에 날 생각했다면 무엇을……?' 묘한 생각에 몸을 배배 꼬는 선주혁이었다. "어디 불편하신가요?" "아! 네, 그냥 몸을 좀 푸는 거죠, 뭐. 하하하핫." 선주혁은 괜스레 허리를 이리저리 돌리는 척 했다. "식사 준비를 마친 상태에요. 아침이라 이쪽으로 직접 가져오게 할게요." "그걸 말씀하시려고 직접 오신 거예요?" "그…… 그냥요. 지난 밤 제대로 감사 인사를 드리지 못한 것도 같고……." '오오오오옷! 그럼 날 보러 일부러 왔다는 말? 미쑤 빽! 잘하고 있어, 잘하고 있다고!' 선주혁은 헤벌쭉 미소를 지으면서도 할 말을 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하하, 뭘 그러실 것까지야……. 사실……." "……?" "미스, 아니 백 소저와 같이 아름다운 분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거는 거야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으흐! 느끼하다, 느끼해. 나한테 이런 면이 있을 줄이야.' 잔뜩 목소리를 깔고 멋진 척 해놓고 스스로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약간은 장난스러운 선주혁의 말이었지만 받아들이는 백화란의 입장에서는 달랐다. 사천 무림에 재색(才色)을 겸비한 가인(佳人) 으로 소문난 그녀였다. 수많은 명문의 자제들이 그녀에게 내뱉은 칭찬의 무게만 쌓아도 수천 근은 되고도 남을 것이다. 모두가 칭찬 일색이었으므로. 하나 지금 선주혁이 말하는 것과는 달랐다. 그는 말에 앞서 행 동으로 보여줬기 때문이다.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건다는 뭇 사내 중 실제로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중상입고 요상을 하던 선주혁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남지학 의 표정과 당사자의 태도를 미루어 심각한 중태였음이 틀림없었 다. 그는 정말로 목숨을 걸었던 것이다. 그리고 채 하루가 지나지 않아 또다시 몸을 던진 선주혁. 그의 말인지라 백화란에게는 마음을 움직일 정도의 무게로 다가 서는 것이다. 백화란이 감격스런 표정을 짓자 선주혁은 마음속으로 크게 외쳤 다. '나이쑤!' 어느새 안개가 걷히고 따사한 봄볕이 천지를 온화하게 비추고 있었다. 선주혁과 남지학은 백화란의 뒤를 쫓았다. 백화란의 제안으로 아침 식사를 한 후 장원에 들어올 때 봤던 정자에서 차(茶)를 마 시기로 한 것이다. '분위기 죽이는데서 데이트라……. 사형이 함께라는 게 조금 마 음에 걸리긴 하지만…….' 선주혁은 애써 자신감을 갖기 위해 노력했다. 자신감 없는 남자 는 여자에게 어필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초절정꽃미남이라는 말과 완벽하게 부합되는 남지학이 경쟁상대로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이었다. '뭐, 돼지고기 얼굴보고 먹냐? 남자는 얼굴이 다가 아니라고.' 스스로를 위로해 보는 선주혁. 하지만 남지학은 그저 얼굴만 잘생긴 게 아니었다. 인품이며 무 공, 학식까지……, 나무랄 데가 없는 퍼펙트 맨 자체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인터넷이나 잡지 같은데 나오는 연애론이나 여자를 유혹하는 법 같은 것들 좀 잘 봐둘걸.' 그렇게 생각을 하고 나니 몇 가지 생각이 나는 것도 같았다. 심 심풀이 삼아 봤던 것들이었지만 원래 쓸데없는(?) 것들은 잘 기억 이 나는 법이었다. '좋아, 이래봬도 대한의 건아 아니겠어? 이곳 중국의 여인들에게 대한남아의 기상(?)을 널리 알려주지. 므흐흐흐흐.' 선주혁이 혼자만의 상상으로 히죽이는 동안 일행은 어느새 정자 에 도착했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고 깨끗한 물과 가산이 보이는 정자는 운 치를 즐기기에 최고 수준이었다. 정자의 한 가운데 놓인 팔각형의 탁자에는 여러 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다. 선주혁은 재빨리 백화란의 옆을 가로질러 그녀가 앉으려했던 의 자를 당겨 주었다. '여자는 매너에 약하다면서?' 선주혁이 의자를 당겨주자 백화란은 고개를 갸웃 거렸다. 선주 혁이 그 자리에 앉고 싶어 하는가,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선주혁은 그녀가 이런 종류의 에티켓에 익숙지 않을 것을 깨닫 고는 손바닥으로 의자를 가리켰다. 그녀를 위해 의자를 당겨 준 것이라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백화란은 그의 행동을 알아보고는 얼굴을 살짝 붉혔다. 어쩌면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친절이었다. 하지만 이토록 자신을 위해주 는 행동이 싫은 여자는 없는 법. 그녀를 노리는 남자는 많고도 많 았지만 이토록 섬세한 배려는 쉽게 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선주혁은 백화란이 무릎을 구부릴 때 자연스럽게 의자를 밀어 그녀가 최대한 앉기 편하게 해 줬다. 그녀가 편안히 앉는 것을 확 인한 후에야 자신의 자리에 가서 앉는 그였다. "선 공자님께서는 정말 친절하시군요." 백화란이 웃으며 말하자 선주혁은 쾌재를 불렀다. "하하, 이 정도를 가지고 뭘……." '앗싸! 포인트 획득!' 백화란은 선주혁과 남지학의 잔에 차를 따랐다. 차를 즐기는 선주혁은 아니었으나, 백화란이 주는 차는 뭔가 맛 이 다른 듯 했다. ‘미스 백이 따라주는 차라…… 쥑이는군.’ 속으로 생각을 하고 보니 어쩐지 다방 레지 같은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마냥 좋은 그였다. 그렇게 시작된 다과의 자리는 즐겁기만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선주혁은 이야기의 주도권이 남지학에 게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시(詩), 서(書), 예(藝)에 관해 두루 박식한 남지학은 백화란이 감탄할 정도로 이야기를 풀어갔고, 그 방향에는 문외한인 선주혁은 좀처럼 말을 할 기회를 갖지 못했던 것이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뭔가 나도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조급한 마음이 절로 들었지만 담소를 나누는 두 사람 사이에 끼 어들어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낼 수도 있었다. 입술이 조금씩 말라 가며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드리면 무례하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 만 백 소저와 두 분 오라버니와의 관계가 여느 남매하고는 좀 달 라 보이더군요.” 문득 건넨 남지학의 말에 백화란의 얼굴에 살짝 그림자가 드리 워졌다. “아무래도 할아버님께서 절 지나치게 아껴주시는 터라…….” “아니, 할아버지가 손녀딸을 예뻐라 하는 게 당연한 일이지, 그 게 오빠들하고의 관계에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요?” 골치가 지끈거리는 이야기에서 자신이 알아들을만한 이야기로 화제가 전환되자 선주혁은 기다렸다는 듯 덤벼들었다. “그게……, 저희 할아버님께서 저를 귀여워해주시는 이유가 조 금 다르기 때문이에요. 할아버지께서는 제가 남자로 태어나지 않 은 걸 한처럼 생각하시니까요.” “……!” 총명한 남지학은 백화란의 말을 금세 알아들을 수 있었고, 선주 혁은 그제야 이놈의 집구석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백화란은 백내붕의 핏줄 중 가장 재능이 뛰어났다. 두 아들에게 실망을 한 백내붕은 손자 대에 이르러 사천백가를 더욱 번성하게 할 인재가 태어나길 기다렸다. 하나 계속되는 실망을 안겨줄 뿐이 었다. 백태민의 자질이 비교적 뛰어나긴 하나, 그 정도는 여느 인재와 다를 바가 없었다. 개중 제일 나을 뿐 백내붕 자신처럼 백가를 융 성케할 인재라기에는 손색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백화란이 태어났다. 비록 여아(女兒)였지만 그녀의 자질은 다른 형제들에 비해 발군 의 것이었다. 정말이지 백화란이 남자였다면 다시 한 번 사천에 백가의 이름을 떨치는 것을 도모해볼 정도였다. 스스로가 뛰어나니 좀처럼 다른 후손이 눈에 들어올 리 없는 백 내붕. 그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가르침을 모두 수용할 수 있는 백 화란이 예쁘기만 한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모난 돌이 정을 맞는 셈이군요.” 남지학이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백화란의 오라비들의 마음 씀이 편협하기 그지없었으나 그녀의 면전에서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모두가 제가 여자로 태어난 죄지요.” 백화란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선주혁은 약간은 처량해 보이는 그녀의 미소를 보는 순간 발끈 하고야 말았다. 그녀와 같은 아름다운 여자는 저런 표정을 지어서 는 안 되는 것이다. “아니, 여자로 태어난 게 뭐가 죄란 말인가요?” “……?” 언성을 높여 말하는 선주혁을 쳐다보는 백화란. “여자이기 때문에 백 소저께서 해야할 일을 못하신다는 말입니 까?” “아무래도 남자로 태어나지 못하면…….” “백 소저!” 선주혁은 단호하게 백화란의 말을 잘랐다. “남자니 여자니 하는 것은 그저 구분일 뿐입니다. 백 소저께서 의지만 있다면 할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그분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실 수 있습니다. 미리부터 성별 따위로 단정을 지어 포기할 필 요는 없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하지만 뭔가요? 백 소저께서 아시다시피 무림에는 수많은 여고 수들이 존재합니다. 백 소저의 할아버지께서 기대하시는 바는 백 소저가 그 여고수들 중 하나가 되면 충족될 것입니다. 여자라서 안 된다고요? 무공을 익히는 데에 남녀의 구분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힘이 부족하면 여성 특유의 섬세함으로 메우면 됩니다. 남녀는 평등할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없습니다. 백소저의 뛰어난 자질과 능력이라면 분명 할아버지의 기대를 만족시키고도 남을 것 입니다.” 실로 확신에 찬 어조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백화란을 음식에 비 유해 생각하던 선주혁이 난데없이 열렬한 페미니스트로 변신해버 린 것이다. 그것을 알 길 없는 백화란은 선주혁의 말에 크게 깨닫는 바가 있었다. 본래 무림은 평범한 사람들보다 남녀에 관한 차별이 적었 다. 실력만 있다면 여자라도 얼마든지 행세할 수 있는 곳이 무림 이다. 선주혁의 말처럼 무림에는 시대를 풍미하던 전설적인 여고수들 이 즐비했고, 현재에도 기라성 같은 여류고수들이 분명히 존재했 다. 자신이라고 그와 같은 경지에 오르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조부를 제외하고는 늘 남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우월의식을 가진 백가의 가풍에 휘말려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한계 를 지어버린 그녀였다. 그러다 열띤 선주혁의 논조에 크게 깨달음 을 얻은 것이다. “선 소협의 말씀에 소녀는 다시 한 번 감사드려요. 저를 두 번 씩이나 구해주시고 앞길까지 밝혀주시니 이 은혜는 죽을 때까지 갚지 못하겠군요.” ‘앗싸! 한 포인트 또 획득!’ 진심어린 백화란의 표정을 보며 선주혁은 또다시 쾌재를 불렀다. ‘이 남자는 달라……. 그동안 내가 알던 어떤 남자와도 달라.’ 백화란은 선주혁이 겉모습만 보통 사람과 다른 게 아니라 사고 방식에서 행동에 이르기까지 모든 게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신선한 느낌으로 백화란의 마음을 흔들고 있었다. “저도 사제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백 소저는 분명히 사천을 울 리는 고수가 되실 수 있을 겁니다.” 남지학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백화란을 격려했다. 백화란은 남지학의 칭찬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살짝 숙여 감 사를 표했다. ‘흠……. 뒤늦게 한 마디로 사형도 포인트를 챙기는군. 역시 강 적이야…….’ 남지학을 바라보는 선주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Vol 3. ‘이런 젠장! 그걸 깜빡하고 있었네…….’ 하루 종일 백화란과 붙어 장원의 이곳저곳을 다니며 차를 마시 고 담소를 나누느라 잊었던 사실이 떠오른 선주혁. 그의 미간이 크게 찌푸려졌다. 이곳 백가의 장원에 온지 하룻밤이 지나갔다. 그리고 엉터리 작가가 말도 안 되는 우연으로 꾸며놓은 일이 벌 어지는 것이 바로 오늘이라는 것을 기억해낸 그였다. ‘끄응……. 어떻게 해야 하나?’ 만약 자신이 알고 있는 바대로 대비를 하게 되면 당분간 백화란 과의 이별은 필수였다. 오늘 하루 내내 현대인으로써의 매너를 지 켜 백화란의 얼굴에 감동의 표정을 떠오르게 하지 않았는가. 어쩌면 남지학을 넘어서서 자신이 백화란의 사랑을 받을 수 있 는 가능성을 한껏 높였던 하루였다. 이대로 며칠만 더 지나면 백 화란을 자신의 여자로 만들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별이라니……. 정말이지 속 터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젠장, 쓸데없는 설명은 잔뜩 늘어놔 질질 끌면서 왜 이런 상황 에서는 스피디하게 전개를 하냐고? 이 개념 없는 글쟁이야!’ 선주혁은 애꿎게 원작을 쓴 작가를 향해 화풀이는 했다. 그러나 망설임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차피 소설의 흐름대로 진 행을 맡기면 백화란과의 재회(再會)는 필수였다. 지금 여기서 백화 란에게 집중하기 위해 흐름을 벗어난다면 어차피 그녀와 잘되기도 힘든 일일수도 있었다. 설령 백화란과 잘 지낸다한들 칼 맞아 죽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군.' 선주혁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녀와 헤어지는 것은 분명 아쉬운 일이지만 보다 크고 넓게 봐 야할 시점이었다. 이번의 사건을 건너뛴 다음 감당할 수 없는 현 실(?)을 정면으로 마주할 자신이 아직까지 그에겐 없었다. 마음을 굳힌 그는 조급하게 남지학을 불렀다. "사형……." 막 운공을 끝낸 남지학이 선주혁을 돌아봤다. "아직까지 바깥 세상에 나온 게 실감이 나질 않는군요. "하핫, 그럴 수도 있지. 사실 그곳에서 너무 오래 갇혀 있었나 봐. 나 역시도 모든 게 낯설게 느껴지는걸." "그래서 말인데……. 우리 바깥 공기나 더 쐬다 들어오죠." "바깥 공기?" "하핫, 그러니까 나가서 바람이나 좀 쐬자고요." '너 천재 맞냐? 눈치 좀 있어 봐라.' 선주혁은 천재라고 설정된 남지학이 자신의 말귀조차 제대로 알 아먹지 못하는 게 괜스레 짜증이 났다. "아! 하루 종일 바람을 쐬고도 아직 부족한 거야?" "제대로 된 밤바람도 즐겨봐야죠." "하하하." 남지학은 망설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도 젊지만 아 직은 어린 나이랄 수 있는 사제였다. 답답한 공간을 벗어나 자유 롭게 되었으니 그 기쁨이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마음이면서 도 자신의 무공 성취를 위해 더 오랜 시간을 절지(絶地)에서 버틴 사제의 마음이 고맙기만 했다. 방문을 나서 마당으로 나선 선주혁은 괜스레 호들갑을 떨며 걸 음을 옮겼다. "거 참 달도 밝다." "응? 달이 어딨어?" "……!" 그러고 보니 저녁부터 피어오른 뿌연 안개 탓인지, 아니면 구름 탓인지 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그렇군요. 주변 경관이 훤히 보이기에 달이 밝은 줄만 알았죠." 선주혁은 멋쩍어져 머리를 긁적였다. '왜 이럴 때만 예리하게 구는 거냐고?' "그건 사제의 내력이 증진해서 그럴 거야. 앞으로는 깜깜한 밤 중에 바늘까지도 찾을 수 있게 될 걸." 심후한 내력을 지니면 밝음과 어둠에 구애를 받지 않게 된다는 사실은 선주혁도 이미 많은 무협지를 통해 알고 있었다. 하나 괜스레 달 이야기를 꺼내 멋쩍어진 그는 남지학의 말을 곱 게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눈에 후렛쉬를 달았수, 아님 금속 탐지기를 달았수? 한 밤에 바늘을 찾게…….' "우리…… 저쪽으로 가보죠." 그렇다고 야심한 밤에 나온 목적을 잊을 수는 없는 선주혁이었다. "저쪽……?" 선주혁이 가리키는 곳은 장원의 외진 곳에 있는 전각 주변이었다. "아까 이곳저곳 다 둘러봤는데 저쪽은 안 가봤잖아요." "그럴까?" 남지학은 선주혁의 의도를 모르는 바 순순히 뒤를 쫓았다. 두 사람이 동떨어진 전각으로 향하고 있을 대, 갑작스레 장원의 한쪽이 환해지는 것을 느꼈다. "화재?" 남지학이 얼굴을 굳혔다. 낮에 봤을 때 구경했던 마구간이 있는 방향이었다. 화재를 확인하는 순간 남지학은 신형을 날리려고 했다. 선주혁은 기다렸다는 듯 남지학의 소매를 잡아챘다. "……?" "그쪽이 아닙니다." "무슨 소리야? 가서 불을 끄는 것을 도와야지." 남지학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선주혁은 그런 남지학의 소매를 잡아 당겨 월동문 옆의 낮은 담 쪽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는 정원수 옆쪽으로 몸을 숨겼다. "불이야!" "불이다!" "물, 물!" 장원의 하인들이 질러대는 소리가 요란했다. 조용하기만 하던 사천백가는 난데없는 화재로 인해 일순간 떠들썩해졌다. 남지학은 선주혁의 행동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으나 진지한 표정을 보아하니 단순한 장난은 아니라 여겼다. 현명(?)하기 이를 데 없는 사제니만큼 뭔가 생각하는 바가 있을 거라는 기대감도 함 께했다. 잠시 후 다시 한 번 환한 빛이 장원의 창고가 있는 쪽에서 솟구 쳤다. "불이야!" "이번에는 창고다!" "곡식을 지켜!" 또 다른 불길이 치솟자 그 소리만으로도 장원이 점차 혼란해져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구간에서 불길이 일었을 때는 누군 가의 지시에 따라 나름대로 침착한 움직임을 보이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으나, 창고에서 또 다른 불이 일어나자 상황이 악화된 것 이다. 그 뿐이 아니었다. 기다렸다는 듯 여기저기서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마치 여러 명이 신호를 기다렸다가 불을 놓는 것과 같은 현상이었다. 남지학은 백가에 원한이 있는 누군가의 대대적인 침입이라 예상 했다. 백화란을 습격했던 무리를 떠올리며. 그 때였다. 아무도 없을 듯했던 전각 쪽에서 십여 명의 인영이 몸을 날리는 것이 보였다. "……!" 남지학은 선주혁을 돌아봤다. 그라면 현재의 상황에 해답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이곳에 몸을 숨기고 있어야 하는 상황, 외진 전각에 저와 같은 사람들이 숨어 있던 것, 그리고 치솟는 불길에 대한 의문에 왠지 사제는 답을 해 줄 수 있을 것만 같았던 것이다. 하지만 선주혁은 외진 전각에서 솟구쳐 오른 인영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 했다. 몸을 잔뜩 낮춘 채 신경을 잔뜩 곤두세운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대체 이게 무엇을 하는 중인가 싶어 남지학의 연유를 묻고자 할 때였다. 야음을 틈타 거뭇한 그림자 하나가 전각을 둘러싼 낮은 담을 넘 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동시에 선주혁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건……?' 남지학이 눈을 크게 뜰 때 선주혁은 고갯짓을 했다. 남지학은 어렵지 않게 그 동작에 담겨진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의 신형은 검은 그림자의 뒤를 쫓아 전각으로 향했다. 먼 곳에서 검은 인영이 전각의 문을 살며시 열고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 동작이 너무나 익숙하고 자연스러워 마치 원래부터 이 곳에 자주 드나들던 사람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백가의 식솔이 화재를 틈타 야행복을 입고 담을 넘을 일 은 없었다. 더구나 청의 무복을 입은 몇몇이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모습도 보였다. 아마도 이곳을 지키고 있던 백가의 무사들일 것이다. 일부 는 화재현장으로 갔고, 나머지는 남아 임무를 수행하다 봉변을 당 한 것이다. 남지학은 재빨리 그들에게 다가갔다. 죽지는 않았다. 독특한 수법에 의해 점혈(點穴)이 되어 있을 뿐이었다. 선주혁이 잠시 쓰러진 사람을 구경하는 사이 남지학은 전각 안 으로 신형을 날렸다. '어? 벌써 달려들면 안 되는데? 이거 괜히 미리 준비한 거 아닌가?' 선주혁은 불안한 마음으로 남지학의 뒤를 쫓았다. 남지학이 전각 안에 들어섰을 때 그의 눈은 크게 떠졌다. 어둠 가운데서 야행복을 입은 복면인이 바지춤을 내리고 있는 것을 본 것이다. "넌 대체 누구냐?" 남지학의 낭랑한 호통에 화들짝 놀라 바지를 추켜올리는 복면 인. 두 눈에는 당혹감이 서려 있었지만 입에서는 태연하기 그지없 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거야…… 백가에도 나름대로의 인재가 있다 이건가? 허헛, 물건을 취하는 장면을 들킨 게 얼마만인지……. 나도 이제 늙었구먼." 늙수그레한 음성은 지극히도 여유 있으면서도 어딘가 회한에 찬 듯 했다. 마치 할아버지가 손자들을 앞에 놓고 나이 먹은 자신을 한탄하는 것만 같았다. "흥! 도둑이란 말이구나." 남지학의 음성에 노기가 깃들었다. '당연히 도둑이지. 이 밤중에 먼지 날릴까봐 마스크 대신 복면을 하고 청소하러 이곳에 들어왔겠수?' 선주혁은 자신이 의도한 바와 상황이 조금 엇나간 게 마음에 걸렸다. "허헛. 용케도 내 수단을 간파하고 이곳까지 온 것은 칭찬해 주 겠다만……, 어린 아해 둘이서 날 막아설 수는 없느니라." 말이 끝남과 동시에 복면인의 신형이 흐릿해졌다. 차앙 맑은 쇠울음 소리가 울리고 복면인의 두 눈에 놀라움이 가득했다. "급습을 하다니! 과연 후안무치(厚顔無恥)의 좀도둑이구나." 남지학의 무게 있는 호통이 터져 나왔다. 복면인의 급습을 피하고 어느새 검까지 뽑아든 것이다. 그리고 남지학이 보여 준 그 동작은 복면인을 경악으로 몰고 갔 다. 자신의 공격은 미리 예상을 하고 있다 해도 피하기 쉽지 않은 것이었다. 상대의 나이가 어리기에 가볍게 보았다고는 하나, 역시 나 눈앞의 젊은 청년이 피해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뱃속에서부터 무공을 배워왔다 해도 피하기 쉽지 않았을 것 을……. 만만케 볼 놈이 아니구나.' 사람들이 몰려오기 전에 이곳을 피하려 한 복면인이었다. 체면 을 도외시하고 급습을 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복면인은 다시금 신형을 움직였다. 아니 움직였다 싶었을 때는 이미 남지학의 바로 앞에 다가섰다. 기묘한 각도로 움직이는 손은 남지학의 맥문을 잡아갔다. "흥!" 코웃음을 치긴 했지만 남지학은 상대를 경시할 수 없었다. 환상 적이랄 만큼 빠른 신법을 가졌을 뿐더러 변화막측한 금나수법(擒 拿手法)을 전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무극삼검식의 보법(步法)를 펼쳐 몸을 뒤쪽으로 뺐다. 와중 에도 복면인이 문으로 도주할 것을 막기 위해 방위를 점하는 것을 잊지 않는 그였다. "제법이구나, 애송이!" 복면인은 낮게 말하며 남지학의 신형을 그림자처럼 따라 붙었 다. 말이야 태연하게 했지만 내심으로는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 다. 비록 순간일 뿐이었지만 기묘한 방위로 이동하는 청년의 신형 을 포착하지 못했던 것이다. 복면인은 급기야 양손을 어지러이 놀리기 시작했다. 그의 손은 매우 부드럽고 빠르게 움직였다. 남지학 역시 당황하지 않고 손목을 회전시켜 검으로 상대의 공 격을 와해시키며 역습의 기회를 노렸다. '대체 어디서 이런 녀석이 튀어나온 거지? 검식을 보고 사문을 짐작할 수조차 없구나…….' 복면인의 눈에 초초한 기색이 흘렀다. 일합꺼리도 되지 않을 줄 알았던 애송이가 자신의 금나수법을 철저하게 봉쇄하는 것을 물론 이거니와 호시탐탐 역습까지 엿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상대측에는 아직까지 싸움에 가담하지 않고 있는 녀석까 지 있었다. 다행히 기이한 백발에 까무잡잡한 피부를 하고 있는 녀석은 싸움에 끼어들 생각은 안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두 눈 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과 애송이가 손을 섞는 것만을 뚫어져라 보 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마냥 이렇게 시간을 끌 수는 없었다. 조금만 더 시간을 끌면 연달아 일어난 화재가 단지 주목을 끌기 위한 수 단이었을 뿐이라는 것이 간파당할 것이다. 사람이 없는 곳만을 골 라 불을 질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곳을 지키던 호위들이 돌아오게 되면 일이 골치 아파진다. 만 약 미염검객이라도 들이닥친다면 이곳을 벗어나기란 불가능해질 수도 있었다. "타합!" 갑작스레 기합성을 내지르는 복면인. 마주 오는 검을 피할 생각도 않고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세워 애 송이의 목을 노렸다. 남지학은 순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뛰어난 무재라하 지만 실전의 경험이 풍부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아직까지 첫 살인에 대한 충격에서조차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그가 아닌가. 목 숨을 도외시하고 동패구상(同敗俱傷)을 노리는 복면인의 수법은 그를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대로 검을 날리며 적을 죽이고도 남겠지만 자신의 목숨 역시 장담하기는 힘들었다. 죽지는 않더라도 큰 부상을 입게 될 것은 분명했다. 그가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목을 노리고 날아오던 손이 거짓말 처럼 사라졌다. 복면인에게 필요했던 것은 남지학이 순간적으로 멈칫 거린 그 순간일 뿐이었다. 그의 신형이 흐릿해지는 순간에야 남지학은 자신이 속았다는 것 을 깨달았다. 복면인은 동귀어진(同歸於盡)을 노린 것이 아니라 이 곳을 빠져나갈 틈을 만들려한 것이다. 남지학은 이를 악물고 무극삼검식의 이초식을 전개했다. 순간적으로 그의 검이 한자쯤 늘어났다. 검기(劍氣). 흐릿한 안개와 같은 그것은 검기가 분명했다. 아직까지 형태가 불분명하고 안정되지 않은 모습이기는 했지만 분명 검기였다. "크윽!" 발을 깊게 내딛어 도주하는 자를 베고자 한 검. 그것은 복면인의 허벅지 뒤쪽을 날카롭게 갈랐다. 고통스런 신음과 함께 뒤쪽으로 고개를 돌린 복면인의 눈에는 경악이 그대로 드러났다. '거, 검기……? 마, 말도 안 돼. 저 나이에 어떻게……?' 놀라 뒤로 자빠질 일이었지만 복면인은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 았다. 신법에 있어서는 천하제일을 논할만하다고 자부하는 그였다. 다리의 부상 때문에 신법을 전개하기가 수월치는 않았지만 이대로 붙잡힐 수는 없었다. 천하제일의 도둑임을 자부하는 그가 저깟 애송이 손에 잡혔다면 망신도 그런 망신이 없을 것이다. "쫓아요!" 선주혁은 다급히 외치며 자신도 문밖으로 달려 나갔다. 남지학은 잠시 자신이 만들어낸 검기를 바라보다 선주혁의 다급 한 외침에 정신을 차리고 복면인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사실 남지학은 아직까지 검기를 전개해 본 적이 없었다. 이론상 으로는 충분히 깨닫고 그 가능성을 점쳐봤지만 실제로 검기를 만 들어 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복면인을 제지하기에 검 의 길이가 짧았고, 무리수를 두어봤는데 그게 성공을 거둔 것이다. 복면인을 잡아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하긴 했지만, 한 단계 상승한 자신의 무공 경지에 기쁜 마음까지 드는 남지학이었다. 복면인의 신법은 쾌속하기 이를 데 없었다. 다리의 부상까지 감 안하면 실로 놀랍기만 했다. 하나 구파일방 중 가장 뛰어난 신법을 지녔다고 공인받는 곳이 곤륜파가 아니던가. 남지학과 선주혁의 추적은 그렇게 시작했다. 그리고 선주혁은 알지 못했다. 뒤늦게 복면인의 뒤를 쫓아야 할 것을 미리 막아섰기에 바뀌어 버린 지금의 이 상황. 그것이 앞으로 어떤 일들을 불러올지를……. 복면인은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쫓기 어려울 정도로 빨랐 다. 남지학도, 선주혁도 최대한의 신법을 전개해야 간신히 꼬리를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대체 누군데 이런 신법을……?" 남지학은 복면인의 뒤를 추적하면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신법 을 전개하면서 입을 연다는 것. 그것은 아직까지 그가 전력을 다 하지 않고 있다는 뜻이었다. 선주혁이 반드시 자신과 함께 추격을 해야 한다고 우겨대지 않 았으면 복면인과 보다 가까운 거리를 유지할 수 있다는 의미기도 했다. "바지춤을…… 내리는 거…… 봤잖아요……. 거기다…… 물건을 감추려고…… 내렸겠어요?" 선주혁은 어렵사리 입을 열어 대답했다. 만약 백화란을 습격하 던 중년인의 내력을 흡수하지 않았다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중 년인의 막대한 내력을 흡수함으로써 최소한의 진기를 운용하는 신 법을 전개하면서 약간의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바지춤…… 아!" 도둑질을 하는 자가 놀라운 무공을 지녔다는 사실에 대해 놀라 미처 생각을 정리하지 못했던 남지학이었다. 하지만 선주혁의 말 을 듣자 총명한 그는 모든 상황을 정리할 수 있었다. 물건을 훔치 고 자신의 증표를 남지는 강호 최고의 도둑. 물건을 취한 장소에 소변을 보아 자신의 소행임을 당당히 밝히 는 괴인 신투를 기억해 낸 것이다.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되겠군." 남지학의 눈에서 결의가 흘렀다. 사문의 비급을 되찾겠다는 의 욕을 불태우는 것이다. '당연히 놓치면 안 돼지. 그나저나 생각할수록 이놈의 소설은 엉 터리란 말이야. 우연도 정도껏 겹쳐야지. 어떻게 절지에서 빠져 나 오자마자 신투가 백가를 터냐고…….' 내심 투덜대면서도 선주혁은 이를 악물고 신형을 움직였다. 이 번 기회에 한몫 단단히 벌겠다는 각오와 함께. 한편 신투로서도 죽을 맛이었다. 그가 펼치는 신법의 이름은 암영풍(暗影風). 속도에 있어서 비할 바 없는 경신술이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최소한의 진기만으로도 전개가 가능한 절정의 신법이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나이에 비해 뒤처지는 내력을 가진 신투가 지금까 지 수 백 건에 이르는 도주를 하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다리에 부상이 있다지만 애송이들이 따라올 수 있는 속 도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저 두 녀석을 이를 악물고 쫓아오는 것 이 아닌가. 게다가 한 놈은 아직까지 지친 기색조차 없었다. '저런 신법이……? 설마 곤륜파의 애송이들인 건가?' 신법으로 유명한 문파는 많다. 하나 지금처럼 지속적으로 속도를 유지하며 달릴 수 있는 경공 을 많다고 하기 힘들었다. 화려함 속에 안정된 움직임을 보여주는 신법은 더욱 적었다. '결국 곤륜파 놈들이 내 꼬리를 잡고 대기하고 있었던 건가? 하 지만 고작 애송이 둘에게 나를 맡겨? 하긴…… 무공을 보면 그럴 만도 하다만……. 흥! 왜 신투가 영원히 잡히지 않는 도둑인지 보 여주지.' 복면 아래로 이를 악문 신투가 갑작스레 달리는 속도를 높였다. 점혈을 통해 출혈을 막은 상처에서 다시 피가 솟구쳤으나 개의치 않았다. "사제, 더 이상은 안 되겠어. 흔적을 남기면서 달릴 테니 쫓아오 도록 해." 신투가 갑작스레 달리는 속도를 높이자 남지학이 빠르게 외치고 는 앞으로 쏘아져갔다. 갑작스레 속도를 높이자 그의 신형은 하나 의 선을 만들어내며 길어졌다. 너무나 빠른 속도에 잔상이 남는 것이다. '놓치면 X된다!' 숨이 턱에까지 차오르는 것을 느끼면서도 선주혁은 포기하지 않 고 달렸다. 백화란과의 이별마저 감수했으니 적어도 본전(?)은 뽑 아야 한다는 게 그의 결론이었다. 슈우우웃. 날카로운 파공성. 신투는 헛바람을 들이키며 급격히 신형을 틀었다. 훌륭하다싶을 반응속도였으나 그의 어깨에서는 붉은 피가 솟구쳤다. 적이 애초부터 심장을 노렸다면 지금보다 깊은 상처가 남았을 것이다. 적은 어깨를 노렸고, 신투가 신형을 틀어 피부만을 베고 말았지만 절정의 수법이었다는 것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슈우웃 공격은 계속 되었다. 신투는 정신없이 신형을 움직여야만 했다. 연속된 세 번의 공격을 피해 뒤로 물러선 신투. 그제야 한숨을 돌리고 자신을 공격해 온 자를 살폈다. 이마를 가로지르는 자상(刺傷). 쭉 찢어진 눈에 매부리코. 헐렁한 흑의에 유독 소매만 꽉 조여 묶은 옷차림. 그리고 사슴가죽으로 짐작되는 소재로 만들어진 장갑. "당문……?" 신투의 입에서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재빨리 어깨의 상처를 살폈다. 다행히 출혈은 붉었다. "훗. 안심해도 좋을 거요. 독(毒)은 없으니까." 중년인은 신투의 마음을 짐작한 듯 던지듯 말을 뱉었다. 신투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암기(暗器)와 독술(毒術)로 유명한 당가다. 하지만 두 가지를 혼 용해 사용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실력에 대한 자신감의 표출 이기도 했거니와 그들이 명문정파에 적(籍)을 두기 위함이었다. 무 림의 공적이 아닌 이상 독을 바른 암기는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신투의 행동은 여러 면에서 골칫거리긴 하지만 공적으로 지목될 정도는 아니었다. 탐관오리에게서 훔쳐낸 재물로 어려운 사람을 돕는 행동을 자주 했기에 간간히 그를 의적(義賊)이라 부르는 자 도 볼 수 있는 마당이었다. 그러니 독을 바른 암기를 사용하기는 껄끄러웠으리라. 신투는 생각을 정리하면서 이마에 자상이 난 당가의 인물을 기 억해 냈다. "일수삼비(一手三飛) 당제중(唐齊重)!" "영광스럽구려. 천하의 신투께서 이 몸을 기억해주다니." 중년인은 입 끝을 당겨 웃었다. 어렵지 않게 비아냥거리고 있음 을 짐작할 수 있는 표정이었다. 스스로 당제중임을 인정하는 중년인의 말에 신투의 얼굴에 그림 자가 드리워졌다. 몸이 성할 때라도 까다로운 상대였다. 단거리를 움직이는 당가의 신법은 매우 뛰어났다. 신투가 암행과 도주를 위 해 뛰어난 신법을 필요로 하듯 암기를 던질 거리를 확보하기 위해 서 신법은 필수였던 것이다. 더구나 암기의 특성상 일정한 거리를 뛰어넘으니, 신투에게 있어서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다. 하 물며 다리에 부상을 입은 지금에서야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또한 뒤쪽에는 곤륜파의 제자로 짐작되는 기이할 정도로 강한 애송이까지 쫓아오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고 여기서 두 손을 내놓고 날 잡아가쇼, 라고 포기할 수 는 없었다. "귀하신 몸께서 이 몸을 환영해주러 외진 곳까지 오셨구려." 슬쩍 말을 던지는 신투. "후후훗. 신투의 명성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당연한 수고가 아 니겠소? 어쨌든 본가(本家)를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불문율을 잊 은 것을 후회하게끔 해 주겠소." 당제중은 말을 하면서도 조금도 주의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그가 조금만 방심하면 그 틈을 노려 도주해보려던 신투였다. 하지 만 당제중은 잘 벼린 칼처럼 예기를 쏟아내고 있었다. '역시 지독한 당가구나. 당가를 건드리면 죽을 때까지 쫓긴다더 니……. 하필 여기서 마주칠 줄이야. 오늘 일은 실로 길(吉)보다 흉(凶)이 많겠군.' 신투의 이마에 가득한 주름의 골이 깊어졌다. 당제중은 양손가락을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배분으로는 선배니 선수를 쓰겠소." "후훗, 이미 암습까지 않지 않았소? 새삼스레 무슨……." 신투는 자신이 달려오는 중에 무려 세 개의 암기를 날린 당제중 을 힐난하는 것이었다. 하나 당제중은 태연한 표정을 유지했다. "말로 멈춰 세울 수는 없어서 손을 쓴 것뿐이오. 전력을 다한 공격이 아니었다는 것은 당신이 더 잘 알지 않소?" 당제중의 말에 신투는 등에 한기가 도는 것을 느꼈다. 그저 경 고에 불과한 공격이라는 말은 허풍이 아닐 것이다. 전력을 다하지 않은 공격조차 제대로 피해낼 수 없었다. 당제중이 진짜로 손을 쓰기 시작하면 낭패를 겪을 게 분명했다. 더구나 지금은 깊은 밤. 내공으로 인해 사물의 구분에 어려움이 없다지만 암기를 상대하 기에는 더 없이 나쁜 조건이었다. "각오하시오." 짧은 말과 동시에 당제중의 우수가 신투를 향해 뻗어졌다. 슈웃 앞서와 같은 광한표(光??)였다. 광한표는 탈수표(脫手?: 일본에서는 수리검이라고 함.)의 일종 으로 안정된 탄도를 유지하기 위해 표창의 뒤쪽에 다는 천, 표의 (?衣)가 없는 것을 말한다. 같은 광한표였으나 그 위력과 속도는 앞선 공격과 차원이 달랐 다. 신투는 공간을 압축하듯 날아오는 광한표를 피해내기 위해 신형 을 옆으로 기울였다.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한숨을 쉴 때 당제중의 목소 리가 들렸다. "늙은 몸으로 잘도 피하는구려. 어디 이것도 받아 보시오." 슈웃 이번에는 양손을 휘두르는 당제중. 어둠에 표신(?身)을 감춘 채 날아드는 두 개의 광한표였다. 신투는 황급히 오른쪽으로 몸을 날렸다. 가만히 서서 피할 수 있는 방위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가만히 구경할 당제중이 아니었다. 어느새 그는 두 개의 광한표를 더 뿌렸고, 신투는 다리의 통증을 참으며 몸을 더욱 빨리 움직여야만 했다. 간신히 두 개의 광한표를 피해낸 선주혁이 당제중의 다음 공격 을 준비하려는 순간이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어깨에서 화끈한 통증이 느껴졌다. "내 별호를 잊은 모양이군." 당제중의 느긋한 목소리를 듣고서야 신투는 그가 왜 일수삼비라 불리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두 번째로 날린 광한표는 두 개가 아 니라 세 개였던 것이다. 한 번의 손짓을 통해 다른 각도로 위력과 속도를 유지하며 암기 를 날린다니 실로 놀라운 수법이 아닐 수 없었다. 신투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의 색이 짙어졌다. 아까와는 달 리 이번의 상처는 깊었다. 신투는 깊숙이 틀어박힌 광한표를 뽑아 낼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조금 더 신경을 써야할 거요." 어디서 암기를 꺼내들었는지 모르나 당제중의 손가락 사이에는 각각 네 개씩 여덟 개의 강탄(鋼彈)이 끼워져 있었다. 강탄이란 암 기로 사용되는 철환(鐵丸)을 말한다. 살상보다는 적의 움직임을 봉 쇄하는 목적으로 사용된다. 강탄은 검게 칠이 되어 있어 야간에는 그 효과를 배가시킬 수 있다는 것을 신투는 잘 알고 있었다. '이 당가 녀석이 아주 작정을 하고 왔구나.' 신투의 눈가에 주름이 잡히는 순간 여덟 개의 탄환이 빛살처럼 허공으로 쏘아졌다. 신투는 죽을힘을 다해 신형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문의 암기술은 실로 절기 중의 절기. 신투가 움직일 수 있는 모든 방위를 점하고 날아들었기에 피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희미한 잔영을 만들어내는 절정신법으로도 여섯 개의 강탄밖에 는 피해내지 못했다. 두 개의 강탄이 신투의 요혈에 적중하려는 순간이었다. 신투의 손이 기묘한 각도로 움직이며 강탄을 잡아챘다. "크윽!" 강탄에 실린 위맹한 위력에 신음을 터뜨리는 신투. 손이 으스러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던 것이다. "호오! 이것도 한 번 잡아 보시지." 자신의 공격을 막아냈다는 것이 기분 나빴기 때문일까? 강제중의 손에서는 열두 개의 강탄이 쏘아졌다. 이를 악물고 신형을 날려 보지만 중과부적. 여덟 개를 막기에도 버거운 상황에서 열두 개나 되는 강탄을 모 두 피해낼 수는 없었다. "허윽!" 신투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튀어나왔다. 세 개의 강탄이 그의 양쪽 다리와 복부에 적중된 것이다. 내력이 실린 강탄이었기에 충격은 엄청났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다리가 부러져나가고 내장이 터졌을 정도였다. 신투의 눈에는 절망의 빛이 어렸다. 엄청난 통증으로 인해 두 다리는 한동안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복부에 적중된 강탄으로 인해 내상까지 입었다. 이제 자신의 목숨은 당제중의 손아귀에 놓인 것과 다름없었다. "흥!" 당제중은 코웃음을 침과 동시에 다시 손을 놀렸다. 신투는 아찔한 생각이 들었으나 강탄은 자신을 향하지 않았다. 카앙 캉 캉 캉 요란한 쇳소리. "급습을 하다니!" 강탄을 검과 보법으로 막아낸 청의무복의 청년이 노한 음성으로 외쳤다. 그를 확인한 신투의 얼굴에 놀라움이 떠올랐다. 곤륜파의 그 애송이가 결국 예까지 따라온 것이다. 얼굴에 피로 한 기색조차 보이지 않는데다가 자신조차 방어하지 못한 당제중의 공격을 와해시켰으니 무공의 깊이를 알 수 없는 녀석이었다. 애송이는 당제중이 다짜고짜 암기를 날린 것에 화가 난 표정이 었고, 당제중 역시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가 자신의 공격을 와해시켰다는 사실에 분노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당제중의 손이 앞으로 쭉 뻗어졌다. 손끝에서 무엇인가 반짝임과 동시에 그것은 남지학의 바로 앞에 나타났다. 남지학은 날아온 암기가 정확히 무엇인지 파악하기 힘들었다. 엄청난 속도에 고개를 기울여 피해내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상상 을 초월한 속도에 놀란 그가 신형을 날려 반격을 하려는 순간, 또 다른 암기가 가슴을 파고들려하고 있었다. 상반신을 옆으로 기울이며 검을 휘두르는 남지학. 카앙 날카로운 쇠 울음소리와 동시에 검에서 묵직한 느낌이 전해졌 다. 암기를 날린 상대의 내력이 만만치 않은 것이다. 한숨을 내돌릴 사이도 없이 남지학은 연이은 세 개의 암기를 더 막아내야만 했다. "제법이구나, 애송이!" 당제중은 차가운 음성을 내뱉으면서도 손놀림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손에서는 강탄, 비수(匕首), 광한표, 비침(飛針), 삼릉표(三 稜?), 투골정(投骨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암기들이 쏟아져 나왔 다. 모두가 강호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평범한 암기들이었지만 당 제중의 손에서 쏟아지자 무시무시한 위력을 드러내고 있었다. 남지학은 위력과 속도, 쓰임이 다른 다양한 암기들이 전신의 요 혈을 노리고 날아들자 좀처럼 반격의 기회를 찾지 못했다. 무극삼검식의 쇄자결(鎖字結)을 운용하여 물샐틈없이 보호를 할 수는 있었으나 검이 닿을 수 있는 거리까지 접근하기가 용이치 않 았던 것이다. 남지학과 당제중의 싸움이 달아오르자 신투는 내심 쾌재를 불렀 다. 통증으로 인해 마비되다시피 한 다리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 다. 그는 두 사람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며 조금씩, 조금씩 뒤로 물 러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한순간 그는 몸을 돌려 번개같이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피이이잉 퍼억 신투는 미처 몰랐다. 아직까지 당제중에게는 여유가 있었다는 사실을……. 남지학과의 거리가 충분히 확보되어 있었고, 당가비전 의 암기를 사용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서 그는 당제중의 상황을 파악했어야만 했다. 그것을 간과한 탓에 신투는 등에 수전(手箭)을 맞아야만 했다. 깊숙이 등을 파고든 수전에는 엄청난 위력이 담겨져 있었고 본래 신투 자신이 앞으로 나아가려는 힘과 더해져 그의 신형은 번개처 럼 앞으로 쏘아졌다. "어어?" 마침 사형의 뒤를 쫓아 이를 악물고 달려오던 선주혁이 복면의 신투가 급격한 속도로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것을 보고 놀라 외치 는 소리였다. 퍼억 달려오던 힘을 주체하지 못해 방향을 바꾸지 못한 선주혁은 그 대로 신투와 부딪쳐 뒤로 나뒹굴었다. 재빨리 몸을 일으킨 선주혁의 등 뒤에는 이미 신투가 착 달라붙 어있었다. [꼼작도 하지 마. 입이라도 뻥끗하면 가만두지 않을 테다.] 으르렁대듯 신투가 전음을 보내왔다. 선주혁은 명문혈에 무엇인가 뾰족한 것이 닿아 있는 것을 느꼈 다. 어느새 등 뒤의 수전을 뽑아든 신투가 그것으로 선주혁을 위 협하는 것이다. '이, 이런!' 선주혁이 당황하고 있는 사이에도 신투는 입술을 달싹였다. 동시에 남지학의 표정이 굳어졌다. "크헤헤헷, 이제 어쩔 셈이냐? 우리는 이제 셋인데 네 놈이 감 당할 수 있겠느냐?" 신투가 득의에 찬 목소리로 당제중에게 물었다. '무슨 소리야? 우리가 한패라도 되는 식으로 말하지 말라고.' "신투에게 방수가 있을 줄은 미처 몰랐군. 하지만 아무도 이곳 을 벗어날 수 없다!" 당제중은 날카로운 기세를 일으키며 말했다. 남지학은 힐끗 시선을 돌려 사제의 안전을 확인한 후 검을 고쳐 쥐었다. 그리고 검을 수평으로 뉘여 검극을 당제중에게로 향했다. "……!" 당제중은 느꼈다. 기본이 잘 닦여진 애송이 정도로 볼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검극을 자신으로 향했을 뿐인데도 기파가 느껴진다. 그것은 상 대가 이미 절정고수의 경지를 밟았다는 의미였다. '어떻게…… 저 나이에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현실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당 제중은 허리를 살짝 낮추고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 역시 본격적으 로 싸움에 임할 자세를 갖추는 것이다. "타합!" 남지학의 입에서 낭랑한 기합성이 터지고, 당제중은 신형을 뒤 쪽으로 뽑으며 양손을 어지러이 놀렸다. 붉고 푸른 침이 그의 손에서 쏟아져 나왔다. 자모음양침(子母陰陽針). 당문이 자랑하는 암기 중의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선주혁의 신형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당제중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상대가 뛰어난 실력을 지니 고 있다지만 애송이는 애송이라 생각했다. 허공에 뛰어오르면 연 속되는 공격을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짙은 미소와 함께 당제중의 손길이 다시 한 번 허공에 뿌려지 고, 한 움큼의 자모음양침이 허공에 떠있는 남지학을 향해 쏘아졌 다. 그 순간 허공에서 몸을 비틀어 방향을 바꾸는 남지학. 당제중의 눈이 부릅떠졌다. "운룡대팔식!" 허공에서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신법은 많지 않았다. 특히나 저 처럼 자유로우면서도 화려한 모양새를 만들어내는 신법은 더욱 그 랬다. 하나 당제중은 입을 열어 왜 곤륜파의 제자가 신투를 돕는 건지 물을 여유가 없었다. 신룡처럼 허공에서 방향을 바꾼 남지학의 검 이 자신을 노리고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당제중은 황망히 신형을 다시 뒤로 뽑으며 암비연(暗飛燕)을 던 졌다. 휘이이익 기묘한 소음을 만들어내며 남지학을 향해 날아가는 제비가 날개 를 펼친 것 같은 모양의 암기. 남지학은 제자리에서 팽이처럼 신형을 회전시켜 암기를 옆으로 흘려보냈다. 몸을 바로 세워 역습을 노리려는 순간 그의 귓가에 들려오는 날 카로운 소음. 남지학은 뒤쪽에서 날아드는 정체불명의 무엇을 검으로 쳐냈다. 먼저 처내고 나서야 뒤쪽에서 날아든 것의 정체를 확인한 남지학 의 눈이 커졌다. 그것은 처음 자신이 옆으로 흘려보냈던 암기였던 것이다. 놀랍게도 암비연은 허공에서 자유롭게 방향을 바꿔가며 남지학 의 요혈을 노리고 들었다. 그리고 또다시 울리는 기성(奇聲). 당제중이 하나의 암비연을 또 던진 것이다. 두 마리의 제비가 허공에 기하학적 선을 그려내며 남지학을 노 렸다. 남지학은 수비에 치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단 한 순간이라도 방심하면 암비연이 방향을 바꿔 자신의 요혈 을 파고들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남지학이 문호를 굳건히 하고 암비연을 침착하게 막아내는 모습 을 보며 당제중은 다시 한 번 놀라야만 했다. 두 개의 암비연을 막아낼 정도의 고수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세 개까지 써야 한단 말인가?' 당제중의 턱 근육이 미세하게 떨렸다. 암비연을 조종하는 것은 고도의 집중과 내력이 필요하다. 그로 서도 세 개의 암비연까지가 한계였다. 즉, 상대는 자신이 전력을 다해야 승부를 점칠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는 이를 악물고 마지막 암비연까지 던져냈다. 남지학은 남지학 나름대로 곤란해 하고 있었다. 빨리 이자를 처 리하고 사제를 구해내야 했기 때문이다. 불규칙한 괘도를 그리며 날아드는 기이한 암기는 단 한순간의 방심도 허용치 않았고, 사제 의 안위를 살필 여유조차 갖지 못했다. 언제 어느 때 신투가 변덕을 부려 사제를 해칠지 모른다는 생각 에 남지학은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그 사이 신투는 선주혁에게 전음을 보내고 있었다. [날 업어라.] 선주혁은 순순히 시키는 대로 했다. 어느새 신투의 손에 쥔 수전이 그의 목을 겨누고 있었기 때문이 다. 무엇인가 찜찜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일이 꼬여가기에 마음이 불편하다고 생각했다. 원래 소설에서는 이런 장면이 없다. 신투는 도망을 치고, 백가의 식솔들과 남지학이 함께 추적을 했어야 했다. 신투의 경공이 너무 나 뛰어나기 때문에 남지학이 결국 백가의 추적대와 떨어지게 되 긴 하지만 누군가 신투를 막아서는 장면은 없었던 것이다. 상황이 다르게 전개되자 선주혁의 머릿속에는 온통 원래 스토리 대로 돌아가게 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아마도 남지학과 미리 신투를 막아선 데서부터 틀어졌을 것이 다. 소설에서 신투는 다리에 부상을 입지 않았었고, 달리는 속도도 저하되지 않았다. 그 작은 변수로 인해 상황이 엉뚱하게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젠장! 성급하게 굴지 말았어야 했는데…….'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었다. [뒤로 조금씩 물러서. 기척을 내면 수전의 촉이 네 목을 딸 것이야.] 일이 꼬여가는 것에 침이 바싹 마르는 선주혁. 하나 그로써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우선은 신투가 시키는 대로 했다. 남지학과 당제중이 열전을 벌이고 있는 장소에서 점차 멀어지는 신투와 선주혁. 일정한 거리를 벌리자 신투가 명령했다. [동쪽으로 달려. 전력으로!] 선주혁은 그렇게 신투를 업고 달리기 시작했다. 상대의 공격과 수비에 집중한 남지학과 당제중은 두 사람이 그 렇게 멀어져가고 있다는 것조차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선주혁은 숨이 턱을 넘어올 때까지 달리고 또 달려야만 했다. 빌어먹을 늙은이는 등 뒤에서 오른쪽으로 가라, 왼쪽으로 가라며 계속 잔소리를 해 댔다. 조금이라도 속도가 떨어질라치면 수전을 눈앞에서 흔들어대며 위협을 가했다. 그러니 숨 돌릴 틈조차 못가 지고 한 시진 동안이나 달려온 것이다. 혼을 쏙 빼놓는 늙다리의 변덕에 따르면서도 선주혁은 계속해 지금의 상황을 개선할 방법을 고심하는 중이었다. 이렇게 되어서 는 안 됐다. 원래의 상황대로 남지학이 신투의 은거지를 찾아내야만 했다. 거기서 신투가 훔친 보물과 보검도 얻고, 곤륜파의 비급도 되찾아 야 정상이다. 이대로라면 여러모로 곤란했다. 무엇인가 답답하게 마음을 누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것은 날카로운 화살촉이 목을 겨누고 있기 때문에 생명의 위 협을 느끼고 있어서가 아니었다. '사실 말하자면 이깟 화살촉은…… 응? 이깟 화살촉?' 선주혁은 머리를 망치로 두들겨 맞은 것 같은 느낌을 받음과 동 시에 자리에 우뚝 서버렸다. "뭐야, 이놈아? 죽고 싶냐? 어서 안 달려?" 신투가 등 뒤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못 달려. 아니 안 달려." 신투에 못지않게 버럭 소리를 지르는 선주혁. "이놈이 죽고 싶은 게냐?" 신투는 보다 확실하게 겁을 주기 위해 수전의 촉을 선주혁의 목 에 살짝 밀어 넣었다. 피를 보면 정신을 차리리라 생각한 것이다. "응?" 신투의 복면 밑 입에서 놀란 탄성이 튀어 나왔다. "이, 이 자식이. 익!" 화살촉이 살을 파고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더욱 힘을 주어 수전을 눌러댔지만 한 치도 피부를 파고들지 못했다. 화가 치민 신투는 팔을 들어 선주혁의 어깨에 수전을 내리꽂으 려 들었다. 그러나 선주혁의 동작이 더 빨랐다. 신투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친 것이다. 퍼억 "에구, 나죽는다, 나 죽어……!" 등짝과 다리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신투가 끙끙 앓았다. 복면이 훌러덩 뒤집혀 얼굴이 드러났음에도 바로 할 생각조차 못하는 것 을 보아하니 정말 고통스러운 게 분명했다. 신투를 패대기친 후에도 선주혁은 멍하니 서 있었다. 자신의 어이없는 실수에 망연자실해 하는 것이다. '어, 어떻게 이런 멍청한 짓을 할 수가 있는 거지?' 자신의 신체가 엄청나게 단단해져 수전 따위에 해를 입지 않는 다는 것을 깜빡했던 것이다. 모두가 예기치 못했던 상황이 전개된 탓이었다. 자칫 일이 틀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미 처 몸이 단단해졌다는 사실을 떠올리지 못한 것이다. 피 묻은 수전촉이 눈앞에서 왔다갔다 거리고 한 방에 죽어버릴 요혈과 목에 위협을 받자 본능적으로 위축되었다. 그렇다고는 해 도 자신의 멍청함은 도가 지나쳤다. 아무도 그 속으로 모르건만 선주혁은 얼굴을 붉혔다. 소설을 읽으며 말도 안 되게 멍청하기만 한 캐릭터들을 보며 그 얼마나 욕을 했던가! 저렇게 멍청할 수가 있나 싶어 억지도 그런 억지가 없다고 생각 했다. 그런데 자신의 지금 행동이란……? 그 억지와 같은 상황보다도 더 이해가 안 가는 멍청한 짓을 하 고야 만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주인공이나 조연들은 완전 골통이 라고, 어떻게 저런 바보 같은 생각과 행동을 할 수가 있냐고, 비웃 다 못해 화까지 내곤 했었다. 한데 막상 자신이 직접 일을 당하니 그 캐릭터들보다 더 멍청한 짓을 하고만 것이다. 지난번에 한 번 이런 일을 당하고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결심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래놓고 또다시 아둔함의 극치를 보여준 자신이 스스로 부끄러 워 얼굴이 달아오르는 그였다. 만약 진짜로 이 상황을 누군가 글 로 읽는다면 자신을 행동을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내가 천재는 아니라도 정말 어리버리한 바보도 아니라고! 정말 이라니까……! 나름대로 똑똑하단 소리도 들었거늘…….' 한편 선주혁과는 다른 이유에서 신투 역시 멍한 상태로 잠시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검기를 뽑아내는 애송이 때문 에 놀랐다. 괴상망측한 용모를 하고 있는 멍청해 보이는 애송이가 도검을 두려워하지 않는 절정의 횡련공을 익혔으리라고는 생각조 차 못했다. 신투는 그것이 놀라웠던 것이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다 고수라는 거냐? 언제부터 곤륜파가 이런 놈들로 득실댔던 거야?' 곤륜파의 쇄락은 강호에 널리 소문이 난 것. 그렇기에 타문파와는 달리 상승무공의 비급을 훔쳐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데 보는 놈마다 고수라니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특히나 신투는 하류무공에 박식했다. 철포삼이나 금종조가 내공 을 기반으로 하지 않기에 상승무공으로 대접을 받지는 못하지만 연마하기가 지극히 까다로울뿐더러 성취를 이루기 위해서는 장구 한 세월을 필요로 한다. '제 어미 뱃속에서부터 횡련공을 익혔어도 저 정도는 아닌 것 을…… 응? 그러고 보니 왜 저런 신체를 가지고 내 위협에 따른 거지?' 지독한 통증 가운데서도 고개를 드는 의문이었다. 그리고 해답은 쉽게 찾았다. 녀석의 나이로 미루어 완벽한 성취 를 이룬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 결국 아직 전신의 요혈은 단련하 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가진 신투는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 다. 온 몸이 정상이 아니었다. 내상, 등과 다리의 상처, 어디 하나 가벼운 데는 없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상대는 아직까지 애송이. 신투는 바람처럼 움직여 선주혁의 맥문을 잡아 갔다. 상대가 힘 을 못 쓰게 제압한 다음 수전을 요혈에 대고 위협을 가할 생각이 었다. 멍하니 서 있던 선주혁은 기묘한 각도로 맥문을 잡아채 오는 신 투의 손놀림을 피하지 못했다. 방비를 해 볼 사이도 없이 그냥 맥 문을 내 주고 만 것이다. "크흐흐흐, 애송이 녀석. 감히 이 어르신을 패대기쳐?" 상대의 맥문을 장악했다는 득의감에 신투가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수전을 선주혁의 인후에 가져다 대려는 순간. 퍼억 신투의 고개가 뒤로 확 젖혀지며 양 콧구멍에서 피가 솟구쳤다. 선주혁이 냅다 주먹으로 신투의 면상을 갈겨버린 것이다. "이, 이게……?" 신투는 놀라 두 눈을 부릅뜨며 선주혁의 맥문을 쥔 손에 내력을 북돋았다. 퍼억 또 다시 뒤로 젖혀지는 신투의 고개. 이번에는 그 강도가 더 셌는지 신투는 선주혁의 맥문을 쥐었던 손을 놓치고 뒤로 몇 걸음을 물러서야만 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선주혁은 가차 없이 주먹을 날리기 시작했다. 신투는 황급히 손을 휘둘러 선주혁의 공격을 막기 시작했다. 신 법을 전개할 상처들이 아니었다. "어쭈? 막아?" 신투가 자신의 주먹질을 막는다는 것에 더 화가 치민 선주혁. 그는 자신이 아는 모든 무공초식을 전부 쏟아내기 시작했다. 곤 륜파의 절기들이 마구잡이로 선주혁의 손에서 전개되고 신투의 내 상을 점차 악화되기 시작했다. 퍼억 급기야 선주혁의 주먹이 신투의 복부에 꽂혔다. 이후부터는 속수무책이었다. 내장에 다시 한 번 충격을 받자 신 투의 안색을 파리하게 질렸으나 선주혁의 주먹질은 멈출 줄 몰랐 다. 이어 선주역의 무자비한 구타가 시작되었다. 자신의 멍청한 행동이 모두 신투 때문이라는 생각에 치밀어 오 를 짜증을 풀려는 것이다. 결국 신투가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지 못하고 주저앉을 때 까지 선주혁은 주먹질을 해댔다. "아유! 이걸 그냥……!" 선주혁은 아직까지 화를 다 풀지 못했는지 신투를 향해 주먹을 들었다. 그러나 어느새 날아가 버린 복면 아래로 드러난 주름진 얼굴과 파리한 안색, 그리고 줄줄 흐르는 쌍코피를 보자 조금은 측은한 마음이 들었는지 다시 주먹을 내렸다. 선주혁은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행여 이대로 신투가 죽기라도 하면 큰일이 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더 이상 멍청한 짓을 하면 안 돼지. 이젠 정말 그래선 안 돼!' 선주혁은 한껏 찌푸렸던 인상을 풀며 신투의 옆에 털썩 앉았다. 신투는 또다시 선주혁이 주먹을 날리려는 것으로 알았는지 움찔 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보슈, 노인장." "……." "쓰읍!" 선주혁은 미간을 찌푸리며 입술 사이로 바람을 들이마시는 소리 를 냈다. "왜, 왜 부르는 거냐?" 신투가 황급히 대꾸하는 것을 보고서야 선주혁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늘 이런 식의 협박을 당해오기만 했지 언제 남을 협박해 본 기억이 있겠는가. 나름대로 이런 것도 재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이 아프슈?" 선주혁이 갑자기 태도를 부드럽게 바꿔오자 신투는 정신이 혼란 스러웠다. 맥문을 잡히고도 힘을 쓸 수 있는 외공은 없다. 아무리 요혈을 단련했다 해도 내가고수가 맥문에 진력을 가하면 온 몸의 힘이 빠져야 정상이다. 이론상으로 따지면 눈앞의 애송이는 금강불괴라는 말이었다. 그 러나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됐다. 전설상의 고수들 중에 금강불괴를 이뤘다는 사람이 몇 되긴 했지만, 그들의 나이를 감안해야만 했다. 근 이 갑자 이상을 산 노고수들인 것이다. 눈앞의 애송이는 어딜 봐도 애송이에 불과했다. 설령 반박귀진 (返璞歸眞)의 경지에 이르러 반로환동(反老還童)을 했다손 치더라 도 귀밑머리가 하얘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이 애송이는 머리카락이 아예 백발이 아닌가? '헉! 그러고 보니……백발? 정말 반로환동의 고수라는 말인가?' 생각해보니 머리가 백발인 게 의심쩍었다. 얼굴은 팽팽한데 머리만 백발이라니……? 금강불괴를 이룬 고수들을 실제로 본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금강불괴 정도의 경지에 이르려면 머리카락이 새하얗게 새고도 남을 나이여야 정상인 것이다. "아프…… 죠." "하긴 안색이 파리한 것을 보니…… 곧 죽을 것처럼 보이는구려." "……!" 선주혁은 나름대로 안됐다는 뜻을 비친 것이나 신투의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 눈앞의 애송이, 아니 전전대의 알려지지 않은 곤륜파의 고수일 지도 모를 이 인간은 아무리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금강불괴의 신체를 가지고 고작 수전 하나에 위협을 당해 예까지 끌려오질 않 나, 혼자서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며 얼굴을 붉히질 않나, 갑자기 주먹질을 해대며 무작스럽게 패기까지 했다. 그리고는 돌변한 태도로 친근한 목소리를 흘려내고 있는 것이 다. 내용이라는 것은 곧 자신이 죽을 지도 모른다는 말. 신투의 안색이 더욱 파리해질 수밖에 없었다. 언제 이 미친 인간이 손을 휘둘러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 각에 등에서는 식은땀이 줄줄 흐를 정도였다. 신투는 조심스럽기 그지없는 어조로 선주혁에게 말을 건넸다. "마, 말씀 낮추시죠. 아무래도 전전대의 선배님이신 듯한데……." "엥? 무슨 소리요? 지금 내 머리가 백발이라고 놀리는 거요? 이 제 스물다섯 아니 스무 살인데 선배라니?" 선주혁은 버럭 화를 냈다. 안 그래도 이쪽 바닥(?)에서는 백발을 바라보는 시선이 그다지 좋지 않은 듯 해 신경이 쓰이는데 하필 그 부분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투가 그 내막을 알 리 없었다. '역시 이놈은 미쳤어! 제 나이조차 잘 모르고 있으니…….' 선주혁이 자신의 나이를 스물다섯이라고 했다가 다시 스물로 바 꾸는 것을 보고 신투가 내린 결론이었다. 그렇다고 겉으로 표현할 결론은 아니었다. "아……! 그러셨……군요." "흠흠……." 선주혁은 신투가 한수 접고 나오자 자신이 또 발끈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표정을 추슬렀다. "이런 말하긴 뭐하지만……." 선주혁은 신투에게 몸을 살짝 기울이며 말을 시작했다. '어차피 다들 멍청한 캐릭터니까 잘하면 본전을 뽑을 수 있을 거야.' "노인장이 평생토록 도둑질을 해오지 않았수." "그렇지요." 신투는 선주혁이 언제 다시 발작을 일으킬지 몰라 조심스레 대답했다. "여기서 이렇게 죽어버리면 그동안 모아둔 재물을 어디에 쓰겠수?" "……!" 노련한 신투는 이 미친 인간이 무엇을 말하는지 금세 짐작했다. 자신이 평생토록 모아온 장물을 노리는 것이다. 물론 선주혁이 말한 바와 신투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선주혁은 신투의 파리한 안색, 그리고 입가와 코에서 줄줄 흐르 는 피를 보고 진짜로 그가 곧 죽으리라 생각했다. 그리하여 죽기 전에 잘 구슬려 장물을 감춰둔 곳을 알아내려는 것이었다. 하나 신투의 생각은 달랐다. 내외상이 심하긴 하지만 아직까지 목숨이 경각에 달린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눈앞의 미친놈이 자꾸 만 죽음 운운하니 그것을 협박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즉, 장물이 있는 곳을 안내하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뜻으로 생각하는 것이었다. '미친놈이라 해도 탐욕은 그대로 있다 이 말인가? 아무튼 오늘 의 위기를 잘 벗어나야겠구나. 제 정신이 아닌 만큼 판단력이 희 미할 테니 희망을 가져보자.' "그렇지요…… 죽으면 그뿐이겠지요." 신투는 고개를 끄덕였다. '호오! 역시 어리버리한 캐릭터라니까. 잘 하면 정말 본전은 뽑 겠는 걸.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했겠다?' 선주혁은 신투가 순순히 수긍하는 것을 보며 말을 이어갔다. "본시 재물이란 신외지물에 불과한 게 아니겠수? 죽으면 다 소 용없는 물건이라 이 말이잖수. 그러니 좋은 일 한 번 하는 셈치고 우리 곤륜파의 비급이 있는 곳을 알려주쇼." '흥! 실컷 재물 이야기를 하다가 이제 와서 곤륜파의 비급이냐?' 뻔히 들여다보이는 선주혁의 속셈에 신투는 내심 콧방귀를 꼈 다. 곤륜파의 비급을 되찾는다는 명분하에 자신이 모아온 재물을 강탈(?)하려는 것이라는 게 훤히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지요. 죽으면 모두 필요 없는 것을…… 하! 내 어찌 그걸 모르고 평생을 살아왔는지……." 신투는 짐짓 선주혁의 말에 크게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탄식하 듯 말했다. 선주혁은 속으로 좋아라하며 말을 이어갔다. "죽기 전에 한 가지라도 선행을 하는 게 낫지 않겠수? 또 알우? 곤륜파의 도사들이 노인장을 위해 제(祭)라도 올려 줄지?" '역시 미친놈이야. 지 사문의 사람들을 저딴 식으로 말하다니.' "하……! 역시나 그게 낫겠지요. 곤륜의 진인들께서 제를 올리면 이 늙은 몸의 죄도 한결 가벼워질지도……." '푸하하핫, 이 멍청한 노친네야. 훔쳤던 물건 돌려주는 게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하여튼 무협지에 나오는 늙다리들은 다들 멍청 하다니까. 나이를 X구멍으로 먹었는지……, 쯧쯧.' 선주혁은 겉으로는 진지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내심으로는 희희 낙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참! 어차피 다 토해낼, 아니 돌려줄 거라면 백가의 장원에서 훔 친 것도……." 선주혁은 백화란을 생각해 신투가 백가에서 훔쳐낸 것도 돌려받 을 생각에 손을 내밀었다. 오랜 습관 탓일까? 그는 신투가 스스로 품에서 물건을 꺼내주길 기다리지 않고 습 관대로 직접 손을 넣어 물건을 빼냈다. 오랜만에 소매치기 시절의 실력이 나온 것이다. 그것을 본 신투의 눈이 빛을 발했다. "배수(?手: 소매치기)?" 신투의 놀란 외침에 선주혁이 멋쩍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었다. "아하핫, 이게…… 그러니까 마음이 급해서 그만……." 신투의 주름진 눈이 가늘어졌다. 방금 전 이 미친 인간의 손놀 림은 숙달된 배수의 그것이었다. 단순히 무공을 익혔다고 보여줄 수 있는 손놀림이 아니었다. 배수의 동작은 빠르기만 해서는 안 된다. 손끝의 감각이 예민하 게 살아 있어야한다. 원하는 물건이 손에 닿는 순간 빼내야 하므 로. 그러는 와중에도 상대가 느끼지 못하게 해야 하니 하루이틀간 에 습득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니었다. 방금 전 눈앞의 미친 인간이 보여준 동작은 신투가 보아온 수많 은 배수들의 실력 중에도 발군의 것이었다. 물론 무공을 익힌 탓 이기도 하겠지만,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품안에서는 미세한 감각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수많은 실전의 경험이 있음을 나타 내는 것이었다. "언제부터 익혔소?" 신투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뭐, 뭐를……?" "배수의 수법 말이오. 한두 해 써먹은 수법이 아닌데요?" "아하핫……. 그게…… 무슨 소린지 모르겠수다. 곤륜파의 제자 가 배수라니? 거 참, 밤바람이 시원하기도 해라." 선주혁은 딱하니 시침미를 떼고 괜스레 딴청을 피웠다. 하지만 신투는 달리 신투가 아니었다. 도둑질에 관한 모든 것에는 경지에 이른 인물이 아닌가. 선주혁의 손동작이 숙달된 배수의 실력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못 알아 볼 리가 없었다. '금강불괴에 배수라…….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것만 빼면 가능성 이 있을지도 모른다. 좀 더 살펴봐야 하는 걸까?' 괜스레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딴청을 피우는 선주혁은 신투의 눈 이 빛나는 것을 보지 못했다. Vol 4. 교토삼굴(狡兎三窟)이라 했다. 교활한 토끼는 세 개의 굴을 판다는 것이다. 신투는 어리석기만 한 자가 아니었다. 그의 은신처는 중원의 곳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자신의 장물을 분산해 은닉해 놓은 것이 다. 선주혁은 그와 같은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으나, 내색하지 않았 다. 일단은 신투로 하여금 곤륜파의 비급이 감춰져 있는 사천의 은신처로 안내하게끔 한 다음에 나머지 은신처를 알아낼 생각이었 던 것이다. 은신처로 가면서 그의 호감을 얻어내 죽기 전에 모든 것을 털어놓게 하려는 의도였다. 신투가 곧 죽을 것 같다며 낑낑대는 터라 선주혁은 그를 업고 전력으로 질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행여 중도에 죽어버리기라도 하면 자신이 의도한 바가 말짱 도 루묵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재화(財貨)가 감춰진 나머지 은신처 는커녕 소설에 나왔던 그 은신처를 알아내기도 전에 죽어버리면 정말 큰일이었다. 꼬여버린 스토리 속에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일단 재물을 챙겨두는 것은 필수였다. 행여 무림에서 떵떵거리기 힘들면 신투 의 장물로 호의호식하며 살겠다는 게 그의 계산이었다. 무림의 고 수보다는 뽀대는 덜나겠지만 거부(巨富)가 된다면 이쪽 세상에서 도 잘 먹고 잘 사는 데는 지장이 없을 것이기에. "저쪽……이오, 소협." 신투가 산비탈에 있는 나무덤불을 가리켰다. 지난 삼 일간 선주 혁과 꽤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이상한 일은 첫 날과는 달 리 선주혁이 미친 인간처럼 보이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속이 훤 히 들여다보이는 잔꾀를 부리긴 했지만, 심성이 사악한 놈도 아닌 듯 했다. 물론 은신처에 있는 장물을 감안해 잘 대해주고 있다는 것은 신 투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랜 세월을 살아온 그의 눈에는 간 혹 비치는 선주혁의 진심어린 마음들이 보이곤 했다. 결국 신투는 처음 선주혁이 수투의 수법을 보였을 때 떠올렸던 생각을 실행하기로 했다. '운이 좋다면 녀석에게도 행운이 되어줄 테니. 제복이 아니면 어 쩔 수 없고. 이 신투 어르신을 무작스럽게 두들겨 팬 대가를 받는 다고 생각하면 될 거야.' 선주혁이 신이 난 표정으로 덤불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동안 신 투가 내린 결론이었다. "과연 노인장 말대로군요. 설명만 듣고는 절대 못 찾았겠네요." 선주혁은 교묘하게 위장되어 있는 신투의 은신처를 보고 감탄했다. "덤불 사이…… 손을 넣고…… 더듬…… 볼록한…… 그걸 오른쪽으로 두 바퀴……." 신투는 어제 밤사이 급격히 상세가 악화된 것처럼 보였다. 기침이 잦아지고 말하는 것도 힘겨워했다. 선주혁은 신투의 설명대로 덤불 뒤 암벽의 튀어나온 부분을 오른쪽으로 돌렸다. 기이이잉 묵직한 기계음이 울리며 덤불 뒤로 공간이 드러났다. '오! 이게 기관(機關)이라는 거구나. 이 시대에 자동문이라……, 눈으로 보니 정말 신기하네.' 선주혁은 내심 감탄을 하며 덤불을 헤치고 들어갔다. 암혈(巖穴)의 내부는 두세 사람은 족히 드나들 수 있는 하나의 터널로 되어 있었다. 벽에 박힌 구슬에서 은은한 빛을 내어 사물 을 식별하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호오! 저게 야명주(夜明珠)라는 건가? 저것만 가져다 팔아도 떼 돈 벌겠군.' 선주혁은 벽에 박힌 야명주를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 다. 신투를 업고 오장여를 들어가자 갑자기 확 트인 공간이 나왔다. 인위적으로 동굴을 확장한 듯한 모습이었는데 천정이 둥근 돔형의 공간이었다. '대단하군. 어떻게 이런 걸 만들 생각을 했을까!' 동굴의 규모가 생각보다 크다는 것을 확인한 선주혁은 내심 감 탄을 하면서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어느 한 순간, 그의 눈이 빛을 발했다. 동굴의 탁자위에 놓인 범상치 않은 몇 개의 상자를 발견한 것이 다. 생각보다 크기는 작았다. 하지만 선주혁은 실망하지 않았다. 이곳에 있는 보물들은 다른 은신처에 감춰진 것들과는 차원이 다 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피는 작을지라도 하나하나 의 가치는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을……. '브라보! 과정이 좀 엇나가긴 했지만 일단은 성공한 셈인가?' 선주혁은 입가에 실실 미소를 지으며 신투를 땅에 내려놨다. 신투는 파리한 안색으로 서 있기도 버거운 듯 터널과 같은 연결 로 입구 옆에 몸을 기대어 앉았다. "이거요?" 선주혁의 질문에 신투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선주혁은 순간적으로 신투가 안됐다는 표정을 지었다. 노친네가 죽어가는 것이 나름대로 가련했던 것이다. 지난 삼일 간 친근한 모습으로 대하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정이 들었을 지도 모른다. 또한 신투의 상세가 악화된 것에는 자신의 책임이 있기도 했다. 우악스럽게 두들겨 패지 않았다면 좀 더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안됐긴 하지만……, 뭐 그것도 팔자지. 언제부터 내가 남들을 일일이 다 챙기며 살았냐?' 보물을 확인해야겠다는 마음이 앞선 선주혁은 서둘러 상자를 열 었다. 첫 번째 상자에 가득한 것은 책들이었다. 자세히 살피지 않 아도 무공비급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선주혁은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재빨리 다음 상자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신투가 훔친 무공비급들은 그다지 대단할 것이 없었다. 곤 륜파야 방비가 허술해 상승무공을 훔쳐낼 수 있었지만 구파일방은 녹록한 곳이 아니었다. 신투가 훔쳐낸 것은 각파의 기본적인 심법에 불과하다는 것을 선주혁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차피 곤륜파의 비급을 찾기 위해서라는 것은 이곳에 들기 위한 핑계에 불과했다. 선주혁이 탐 을 내는 것은 실상 보물들이었다. 선주혁은 마른침을 삼키며 손바닥만한 상자를 들어올렸다. 상자의 뚜껑을 열자 영롱한 빛이 보였다. 상자 안에 든 것은 큼직한 세 개의 구슬이었다. 담록색의 반투명한 구슬은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색깔을 내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담록색이고 어떻게 보면 기묘한 청회색으로 도 보였다. 얼핏 보면 고양이의 눈과 같아 보이는 보석. '묘안석(猫眼石)!' 선주혁은 무협지에 자주 등장하는 하나의 이름을 떠올렸다. 그의 생각대로였다. 크기로 보아 한 개로 하나의 성을 통째로 살 수 있을 정도의 가 치를 지닌 엄청난 보물이었다. '수지맞았다. 크하하하핫! 이제 팔자 피는 건 시간문제다.' 선주혁은 큰소리로 웃음이라도 터뜨리고 싶었다. 이제는 부자라 는 생각에 손까지 다 떨려왔다. 그가 막 다음 상자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하려는 찰나였다. "소…… 협." 선주혁의 고개가 빠르게 뒤로 돌아갔다. 보물에 온 신경을 집중해 신투의 상세를 살피지 않았던 것이다. 신투는 입에서 피를 게워내고 있었다. "노인장!" 선주혁은 황급히 신투의 곁으로 다가갔다. 신투는 입가에 피를 줄줄 흘리면서 힘겹게 입을 열었다. "여기…… 비밀장소…… 진정한…… 보물은…… 그곳……." "이 안에 비밀장소가 있다는 소리슈? 그, 그게 어디유?" 소설 속에서도 나오지 않았던 내용이었다. 상자 하나에 담겨진 보석이 저토록 값진 것일 진데 진정한 보물 이라 하면 대체 얼마나 귀한 것이란 말인가? 선주혁은 신투의 입에 귀를 바짝 들이 밀었다. "저쪽…… 야명주…… 밑…… 튀어나온…… 왼쪽 한 바퀴…… 오른쪽 두 바퀴……." 신투는 핏물을 게워내면서도 힘겹게 손을 들어 야명주 하나를 가리켰다. 선주혁은 재빨리 신투가 가리킨 야명주 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튀어나온 동그란 암벽을 신투가 말한 방향으로 돌렸다. 쿠웅 땅이 흔들릴 정도의 엄청난 진동과 함께 선주혁의 눈이 부릅떠졌다. "아, 안 돼!" 거대한 벽 하나 천정에서 떨어져내려 신투와 선주혁이 있던 사 이를 갈라놓은 것이다. 선주혁은 벽으로 달려가 이곳저곳을 더듬었다. 벽 전체가 하나 의 바위로 만들어진 듯 이음새하나 없이 매끈했다. "이런 여우같은 늙다리!" 선주혁의 주먹이 거대한 석벽을 때렸다. 퍽 하는 소리가 속절없이 공간을 울렸다. 금강불괴나 다름없는 주먹이 석벽을 가격했음에도 미동조차 없었다. 그 순간. 기괴한 마찰음이 선주혁의 귀에 들렸다. 선주혁이 돌렸던 기관의 손잡이 부분의 벽이 회전문처럼 열리는 것이다. "뭐, 뭐야? 진짜로 비밀공간이 있었던 거야?" 선주혁은 희망을 갖기 시작했다. 그 때 석벽 너머에서 신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모기 날갯짓소리처럼 작은 것으로 미 루어 석벽의 두께를 짐작할 수 있었다. "크헤헤헷, 녀석아." '녀석아? 저 늙다리가…… 정말!' "비밀문이 보이지? 그 안에는 공공문(空空門)의 보물이 보관되 어 있다. 네놈이 인연이 닿는다면 보물을 얻고 그곳에서도 빠져나 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제야 선주혁은 진짜로 자신이 신투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여실 히 느꼈다. 비밀문이 드러나는 순간 저 문을 보이게끔 하기 위한 과정의 하나가 아닐까하는 일말의 기대가 생겼던 것이다. 하지만 신투의 진짜 목적은 자신을 이곳에 가두는 것임이 분명했다. "이, 이봐……요! 노인장. 만약 보물을 못 얻으면 어떻게 된다는 얘기요?" 불안한 마음에 선주혁이 목청을 높여 소리를 질렀다. "크헤헤헷, 그럼 거기서 죽어야지. 한 달 정도는 버틸 식수와 벽곡단이 있을 게다." "이런 빌어먹을 늙탱이!" "금강불괴니 시체가 썩을 염려도 없고…… 내 나중에 생각나면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마." "X소리 하지 말고 이거 빨리 안 열어? 열란 말이야!" 선주혁이 목에 핏발을 세우고 소리를 질렀으나 대답이 없었다. "이봐요, 노인장. 아니 어르신. 문 좀 열어 줘요." 여전히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것 좀 열어달라고요오오오옷!" 선주혁은 그렇게 한참동안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나 신투는 이미 자리를 떠났는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이런 X같은 경우가 다 있나?" 선주혁은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괴로워했다. 어리버리한 캐릭터라고 만만히 봤건만 또다시 그 멍청한 캐릭터 에게 속고만 것이다. 상대를 우습게 봤던 만큼 그가 느끼는 자괴 감은 더욱 컸다. 그는 석벽에 머리를 박기 시작했다. 쿵 쿵 쿵 별다른 고통이 없기에 연속적으로 머리를 박아댈 수 있었다. 스 스로의 어리석음을 탓하기 위해 머리를 박는 것인데 아무런 통증 이 없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털썩 주저앉았던 그가 발작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안 돼! 여기서 포기하면 안 돼. 안 되고말고." 선주혁은 두 눈을 부릅떴다. 그가 있는 곳에는 보물 상자가 가득했다. 이 엄청난 보물들을 써보지도 못하고 예서 굶어죽을 수는 없었다. 그는 신투가 이곳에 진정한 보물이 있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해 냈다. 보물을 얻을 수 있으면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다는 말 도……. 아직은 절망할 때가 아니었다. 선주혁은 이를 악물고 열려진 문으로 달려갔다. 반드시 살아남아 재벌 못지않은 삶을 살아보겠다는 각오와 신투 에게 복수를 하고야말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며. 한편 신투는 산을 내려가는 중이었다. 내상이 꽤 완화되어 느릿 하지만 신법을 전개할 수 있었다. 그간은 선주혁을 속이기 위해 상세가 악화되는 것처럼 연기를 해왔던 것이다. "클클, 곤륜파의 제자가 배수의 기술을 배웠다는 것 자체가 공 공문과 인연이 닿았다는 말일 수도 있지. 그러니 날 너무 원망하 지 말라고. 만약 진짜 보물을 얻어낼 수 있으면 내게 고마워해야 할 걸. 굶어 죽으면 그냥 운이 다했다고 생각하라고 젊은인지 늙 은인지 모를 친구. 크헤헤헤헤헷!" 계단은 길었다. 놀랍게도 열린 문 뒤에는 길고긴 계단이 있었던 것이다. 무려 한식경을 걸어서야 선주혁은 내리막의 끝에 달했다. 갑작스레 주위가 환해지는 것을 느낀 그. 수십 개는 족히 될 야명주가 널찍한 공간을 밝히고 있었다. 어디선가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과연 공간이 한쪽 벽에서 맑을 물이 흐르고 있었다. 지하공간인데다가 물이 흐르고 있음에도 실내에는 습기나 퀴퀴 한 냄새가 없었다. 무엇인가 습기를 방지하는 장치가 되어 있으리 라. 어쨌건 마실 물이 있다는 사실에 선주혁은 일단 안심했다. 아무 리 내공을 익혔다 해도 물이 없이는 얼마 버티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천천히 안쪽을 둘러봤다. 앞선 공간처럼 천정이 둥글게 된 곳이었는데, 인공의 흔적이 보 다 강하게 드러났다. 공간의 가운데는 팔각형의 탁자가 있었고 그 위에는 양피지로 만들어진 두루마리 두 개와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선주혁은 황급히 탁자로 다가가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대체 어떤 보물이 들어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 이다. 곧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상자 안에는 벽곡단이 빼곡히 차 있었던 것이다. 실망이 밀물처럼 그의 가슴으로 밀려들어왔다. 그는 잠시 벽곡단을 바라보다가 양피지를 펼쳐들었다. 혹여 절 정무공이 적힌 비급이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절정의 무공을 익힌 후 석벽을 부수고 나가는 것. 무협지에 흔 히 나오는 설정이었다. 그의 가슴이 다시금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응?" 낡은 양피지에 적힌 것은 투술(偸術)에 관한 내용이었다. 암행(暗行), 은신(隱身), 경신술(輕身術), 배수법(?手法), 심지어 는 골동품이나 보석의 진위(眞僞)를 감정하는 법 등 도둑질에 필 요한 기술과 무공 등이 빼곡히 적혀있었다. 선주혁은 콧방귀를 뀌며 양피지를 던져버렸다. 이곳으로 넘어오기 전 소매치기로 연명하던 자신이었다. 여기에 서만 당당하게 살아보겠다는 마음으로 목숨을 걸고 기연을 취하려 들었다. 그런데 또다시 도둑질 따위를 배우고픈 마음은 추호도 없 었기 때문이다. "젠장, 보물이 있다더니……?" 하지만 널찍한 공간에는 양피지 이외의 것은 보이지 않았다. "젠장! 기껏 도둑질하는 방법을 적어 놓은 게 보물이란 말이야?" 선주혁은 화를 주체할 수 없었다.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고혈압이 있었다면 혈압으로 쓰러지고도 남 았으리라. 그러나 딱히 화를 풀 방법도 없었다. 또한 화를 낸다고 현재의 난관을 벗어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는 흥분해봐야 좋을 게 없다고 애써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지 금까지 성급하게 굴었기에 실수가 반복되어 바보 꼴이 난 것이라 생각했다. 생명이 위급한 상황이니만큼 더욱 침착해질 필요가 있었다. 그는 마음을 차분히 먹고 다른 하나의 양피지를 집어 들었다. 앞서 본 것에 비해 깨끗한 양피지였기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 다. 원래 보물이라 불릴 정도의 비급이라면 앞서 봤던 것처럼 충 분히 낡아있어야 한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엉터 리 글쟁이의 설정 정도야 뻔하고 뻔했으므로. 선주혁은 호흡을 골라 마음을 진정시키며 양피지에 적힌 글을 읽기 시작했다. 양피지에 적힌 글은 자신을 이곳에 가둔 신투가 남긴 것이었다. 자신이 공공문의 십오 대 문주임을 밝히는 것으로 시작한 신투의 글은 길었다. 신투는 고아였다. 만두 한 개를 훔쳐 먹다 붙잡혀 두들겨 맞고 있는 그를 전대 공 공문의 문주인 무영투객(無影偸客)이 거두었다. 공공문은 대대로 악덕 관리나 고리대금업자, 부정한 방법으로 축재한 부자들의 집을 털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의적임을 자부해왔다. 하나 신투는 그와 같은 상황 속에서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소위 말하는 정도문파에서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악행을 저지르고 있었건만 도둑이라는 이유로 강호에서는 공공문을 지극히 천시했 기 때문이다. 선을 추구하는 데에 올바른 것이 대체 무엇인가에 대해 의문을 가진 신투였다. 정의를 행한다는 명분아래의 살인은 정당한 것이 고, 악인에게서 재물을 훔쳐내는 것은 천한 일로 치부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신투는 그 모든 게 공공문에 특출한 무공이 없기 때문이라 여겼 다. 절정이라 불릴만한 신법이 있다고는 하나 신법만으로는 늘 꽁 지가 빠져라 도망치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배수의 수법을 이용한 실용적인 금나수법도 자랑할 만했다. 하 지만 이렇다 할 내공심법이 없는 이상, 금나수법 손장난에 불과했 다. 결국 공공문에는 강한 힘이 없다는 뜻이었다. 무림은 곧 힘이 지배하는 곳. 공공문에 절정무공이 있다면 저들이 과연 지금처럼 멸시의 눈초리를 보낼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신투는 고심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자신의 대(代)에서 공공문이 천시 받는 것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후대에서라도 바꾸겠다. 그리고 구파일방을 털 기 시작했다. 실로 위험한 일이었다. 알몸으로 와호장룡(臥虎藏龍)의 험지에 뛰어드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은 내공심법이었다. 더 욕심을 내어볼까도 싶었지만 각파의 기본심법을 훔쳐내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후대를 도모하기는커녕 당장 목이 날아갈 판이 었으므로. 운 좋게 곤륜파에서는 상승무공까지 훔쳐낼 수 있었다. 지금부터 심법을 익히기에 신투는 이미 늦었다. 하지만 다음 대 의 공공문주는 구대문파의 심법을 연구하고 익힐 수 있으리라 생 각했다. 반드시 기재 중의 기재를 얻어 각파의 심법 중의 장점만 을 모아 공공문의 절정심법을 만들어 낼 것을 염원했다. 그런 와중에 신투에게 새로운 희망이 생겼다. 대대로 내려오던 은신처에서 사문의 보물을 찾아낸 것이다. 오랜 세월동안 사라졌다고 여겨왔던 기보. 만약 그것만 있었다면 현재와 같이 공공문이 천시 받지 않았을 거라 아쉬워하며 한숨을 쉬어야 했던 그 기보를 발견한 것이다. 그것은 공공문의 조사인 절대수(絶大手) 음자량(陰子良)이 남긴 천고의 기병(奇兵)이었다. 신투는 기쁨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 하나 그는 다시 한 번 좌절해야만 했다. 기병이 감춰진 곳에는 너무나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공공문의 배수법은 금나수법과 깊은 연관이 있었다. 진기를 운 용하는 방법도 그렇고 실제로 전개할 때도 유사한 바가 많았다. 상대가 눈치 채지 못할 정도의 빠르기를 중시 여겼고, 원하는 것 을 잡아채는 방법도 유사했다. 기묘한 각도로 팔을 꺾는 것도, 최 단거리의 움직임을 활용하는 것 또한 흡사했다. 그리고 기병은 그 금나수와 배수법을 극한까지 활용할 수 있는 자만이 꺼낼 수 있도록 안배되어 있었다. 만약 그렇지 못한 자가 기병을 취하려들면 손이 잘게 다져진 고 기처럼 변하게 되는 것이다. 강호인들이 신투라 부를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좌절해야만 했다. 자신의 실력으로는 동시에 날아드는 것과 같은 여러 개의 날카로운 칼날을 피해 기병을 취할 자신이 없었다. 기병이 보관된 곳은 암벽의 한 구멍이었다. 구멍 안쪽에 상자가 있고 상자와 구멍의 입구 사이에는 면이 넓은 칼날이 끊임없이 움 직이고 있었다. 그는 단단한 철로 기병을 보호하고 있는 칼날을 막아보고자 했 다. 칼날을 고정시킨 다음 기병을 꺼내려 한 것이다. 하나 어지간 한 철봉은 무 잘리듯 잘려나갔다. 신투는 만년묵철(萬年墨鐵)을 구했다. 묵철봉은 날아드는 칼날을 고정시킬 수 있었다. 하나 그는 기병을 손에 넣을 수 없었다. 널찍한 칼날과 칼날이 겹쳐진 상태로 고정이 되어 더 이상 앞으로 손을 넣을 수가 없었 던 것이다. 이정도의 수단으로는 기병을 취할 수 없도록 완벽히 계산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번개처럼 움직이는 칼날이 멈춰서는 각도를 모두 계산 해 묵철봉을 구부릴 수도 없었다. 결국 수투법과 금나수법을 완성하는 것만이 기병을 취할 수 있 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신투는 자신이 지금부터 아무리 노력해도 기병을 취할 수 없다 는 것을 알았다. 몇 년 죽자고 수련하면 기병이 있는 근처까지 손을 뻗을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칼날만은 도저히 피할 자신이 없었다. 그 순간, 머릿속에 하나의 이름이 떠올랐다. 묵연수투(墨軟手偸). 오래 전 사천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수많은 비무를 통해 자신의 수공(手功)을 사천 무림에 깊게 각인시켰다. 놀랍게도 그의 손은 도검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가 도검의 예기(銳氣)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를 쉽 게 짐작했다. 그가 매미날개처럼 얇은 검은 수투를 손에 끼고 있 었기 때문이다. 그는 사천에 터를 잡고 가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생각보다 그가 세운 가문은 성세를 누리지 못했다. 수투의 효용에 의지한 그의 후예들이 무공연마를 게을리 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후손 중 하나가 가문의 위기사항이 아닌 경우에는 수투의 사용을 금지 했다. 수투의 존재가 오히려 가문의 쇄락을 불러오고 있다는 것을 파악한 것이다. 그의 후손들은 검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나름대로의 명성도 얻 기 시작했다. 수투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강호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강해져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걸출한 인재 하나가 등장했다. 뛰어난 자질을 지닌 그는 검 한 자루로 사천 무림에 자신의 이 름을 깊게 새겼다. 훗날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미염검객이라 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사천백가는 과거보다 더욱 영화를 누리고 있 었다. 사천백가의 후예들이 검을 익힌 후로, 아니 미염검객 백내붕이 명성을 떨친 이후로 묵연수투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갔 다. 지금의 사천백가는 위대한 검호(劍豪)인 미염검객의 그림자 하 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투는 그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다. 강호의 보물이 어 디에 있는지를 파악해두는 것은 공공문도로서의 기본이었으므로. 신투가 사천백가에서 훔쳐낸 물건은 바로 그 묵연수투였다. 절 치부심 금나수를 수련한 후 수투로 손을 보호하고 기병을 꺼내려 든 것이다. 선주혁은 자신도 모르게 품안에 넣어두었던 비단주머니를 꺼냈 다. 위쪽을 묶은 끈을 풀자 비닐처럼 얇고 은은한 묵광을 띤 장갑 하나가 나왔다. "하! 이게 그렇게 대단한 물건이란 말이야?" 진정한 보물을 품에 넣어두고도 몰랐다는 사실에 어이가 없었다. "하긴 내게는 별로……. 그래도 잘 간직해야지. 이걸 돌려주면 미스 백에게 큰 점수를 딸 수 있을 테니까." 선주혁은 묵연수투를 다시 품속에 넣을까하다가 자신의 손에 끼 기로 했다. 손에 끼고 있는 한 절대 잃어버릴 염려가 없었으므로. 사이즈가 작아 보이던 장갑은 신축성이 매우 뛰어났다. 맞춘 것 처럼 딱 맞을뿐더러 손에 끼었는데 조금도 착용감이 느껴지지 않 았다. 마치 원래 자신의 피부인 듯 밀착되었고 심지어는 공기까지 통하는 것 같았다. "하! 이거 최첨단신소재군!" 그는 장갑을 낀 자신의 손을 이리저리 움직여보며 신기해했다. 그리고는 문득 암벽을 주먹으로 툭하니 쳤다. 후두두둑 "응?" 툭 건드렸을 뿐인데 돌조각이 떨어져 내리는 게 아닌가? 선주혁은 손을 한번 쳐다본 후 좀 더 힘을 줘 암벽을 쳤다. 쿠웅 투툭 툭 좀 더 큰 돌 부스러기가 쏟아져 내렸다. "호오! 타격치를 높여주는 기능이 있다는 건가? 레어 아이템인데?" 선주혁은 묵연수투의 효능에 놀라면서 만족해했다. 그는 장갑을 한 번 빼고 벽을 쳐봤다. 예상했던 대로 묵연수투 를 꼈을 때와는 차이가 많이 났다. 암벽의 재질이 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금강불괴나 다름없는 자신의 주먹질에도 별 손상이 가지 않았다. 그는 다시 묵연수투를 착용한 다음 있는 힘껏 주먹질을 했다. 콰아앙 커다란 울림소리와 함께 파편이 튀어 오르고 벽에 약간의 균열 이 생겼다. 수투의 위력은 대단했지만 선주혁의 얼굴에는 실망의 빛이 스쳤 다. 혹시나 묵연수투를 이용해 벽을 뚫고 나갈 수 있지나 않을까 기대를 했었던 것이다. 하지만 부서지는 암벽의 깊이로 미루어 한 달여 동안 벽을 부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 듯싶었다. "천상…… 기병이라는 것을 꺼내야 한단 말인가?" 맥 빠진 목소리로 나지막이 중얼거린 선주혁은 양피지에 적힌 장소를 찾았다. 야명주 세 개가 삼각형의 꼭짓점 부위에 박혀있는 암벽. 그는 손끝에 신경을 집중해 벽을 더듬었다. 매끈하게 다듬어진 다른 곳과는 달리 오돌오돌한 부위가 매만져 졌다. 미세한 느낌으로 튀어나온 돌기는 총 세 개. 선주혁은 손톱을 이용해 우측 돌기를 누르고 좌측돌기를 누른 다음 마지막으로 가운데의 돌기를 눌렀다. 기이이익 예의 마찰음이 들리고 맞은편 암벽에 한 변이 두 자 정도 되는 타원형의 공간이 생겼다. 완벽한 벽이라 생각했건만 저와 같은 장 치가 되어 있었다는 것이 실로 놀라웠다. 벽에 공간이 드러나자 쉭쉭하는 기묘한 소리가 들렸다. 선주혁은 그것이 시계추처럼 기병이 있는 곳과 입구 사이를 오 가는 칼날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미, 미친……!" 위맹한 기세로 오가는 시퍼런 칼날. 스스로의 몸이 단단한 것을 믿고 손을 집어 넣어보려던 선주혁 은 입안이 마르는 것을 느꼈다. 한눈에도 칼날은 범상치 않았다보 였다. 하긴 묵철도 동강을 냈다는 칼날이 아닌가? 선주혁은 잠시 망설였다. 단단한 몸을 믿고 손을 밀어 넣어 기 병이라는 것을 꺼내볼 것인가 말것인가에 대해서. 그는 조심스럽게 드러난 암벽을 향해 다가갔다. 쉭쉭 소리를 내 며 교차되는 칼날들. 엄청난 속도긴 했지만 건너편의 작은 상자가 보였다. 즉 분명히 틈은 있다는 말이었다. 선주혁은 묵연수투를 빼고 손가락을 내밀었다. 과연 이 칼날이 자신의 신체에 상처를 낼 수 있는가를 확인하려는 것이다. "훕!" 채 손이 칼날에 닿기도 전에 손가락을 빼고 마는 선주혁. 손이 떨려 자칫 깊숙이 들어갔다가 잘리기라도 하면 큰일인지라 잔뜩 긴장했던 것이다. "후아, 후아, 후아!" 기병을 꺼낼 수 있다면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러니 작 은 상처에 연연할 때가 아니었다. 선주혁은 크게 심호흡을 한 후 한 손으로 다른 한손을 감싸 쥐어 보다 조심스럽게 앞으로 내밀었다. 손가락 끝이 칼날에 닫는 순간이었다. "아얏!" 재빨리 빼긴 했지만 찌릿한 통증과 함께 선주혁의 손끝에서 피 가 배어나왔다. 칼날에 닿는 힘이 강했던 것에 비하면 약소한 상 처였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뭐, 뭐야? 베어지잖아!" 아무 생각 없이 손을 넣었다가는 걸레처럼 너덜너덜해졌을 거라 는 생각에 등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이놈의 소설! 절대 방심해서는 안 되겠군. 절대로!" 선주혁은 이딴 말도 안 되는 장치를 생각해낸 작가에게 치를 떨 며 고심하기 시작했다. 일단 이곳을 벗어나는 방법은 기병을 손에 넣는 것뿐이다. 방법은 있었다. 양피지에 적힌 금나수와 소매치기 기술을 배우 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빌어먹을 늙다리는 이곳에 한 달 치의 식량만이 남아 있다고 했다. 한 달 동안 금나수법과 배수법 을 완벽하게 익힐 수 있는가하는 문제였다. 불가능할 것이다. 그게 결론이었다. 화가 치민 선주혁은 수투를 벗지 않은 왼 주먹으로 나타난 입구 의 옆면을 때렸다. 쿠웅 투투투툭 "응?" 생각보다 떨어지는 돌조각의 수가 많았다. 비슷한 힘을 주어 때 렸던 아까보다 더 많이 부서지는 암벽이었던 것이다. 선주혁의 눈에서 빛이 발했다. 그는 남은 한 손에 수투를 끼고 양손으로 암벽을 치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쿵 주먹질이 계속 될 때마다 돌조각이 튀고 먼지가 피어올랐다. 잠시 후 선주혁은 땅에 주저앉을 뻔 했다. 암벽이 부서져나간 곳에 드러난 것은 시커먼 금속이었다. 벽을 뚫어 기관을 망가뜨린 다음 기병이라는 것을 꺼내려 했던 선주혁의 의도는 무산되고 만 것이다. 아마도 금속으로 기관 전체 를 보호하고 있으리라. 혹시나 싶어 주먹을 내질러봤지만 카앙 하는 요란한 소리만 울 려 펴질 뿐이었다. 묵연수투와 부딪친 곳에서 불꽃이 튀어 올랐지 만 금속 벽에는 약간의 흠집만이 생겼을 뿐이었다. "젠장." 선주혁은 힘없이 고개를 돌렸다. 두루마리 양피지가 있는 방향 이었다. 이대로 굶어 죽기로 작정하지 않는 한 천상 금나수법인지 나발 인지를 익혀야만 했다. 잠시간 멍하니 탁자를 바라보던 선주혁이 중얼거렸다. "먹고 죽은 놈은 때깔도 좋다니까…… 일단 뭘 좀 먹어볼까." 어려운 일이 닥칠 때 좌절하거나 그 일에만 매달리는 것은 아무 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어렸을 때부터 익히 깨닫고 있는 삶의 진리였다. 이럴 때일 수록 한 걸음 물러서서 차분히 생각해 야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정신없는 상황에 휘둘려 멍청한 짓을 종종했어도 나름대로 똑똑 하다고 자부하던 자신이었다. 소매치기 기술을 배울 때도 다른 아 이들에 비해 훨씬 습득이 빨라 남들보다 덜 맞곤 했다. 벽곡단을 집으려던 선주혁은 문득 자신이 피가 난 손에 수투를 끼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피가 엉겨 붙기라도 하면 나중에 괜한 고생을 하게 된다. 그는 장갑을 벗었다. "뭐야, 이게?" 선주혁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의 손가락을 살폈다. 코앞까지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어도 결과는 매한가지였다. 놀랍게도 핏자국만이 남아 있을 뿐 상처가 이미 아물어 있는 것 이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선주혁은 손가락에 침을 발라 핏자국을 지웠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았음이 분명한 데 상처가 있던 부분에는 흐릿한 자국만 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뭐, 뭐야? 터미네이터에 나오는 액체 금속이냐? 갈라졌다 금방 붙게?" 말은 투덜대지만 마음에서는 기쁨이 가득했다. 금강불괴나 다름 없는 자신의 신체가 상처를 입을 수 있다는 것에 사실 실망스러운 마음이 들었었다. 완벽하지 않다는 의미기 때문이다. 무림에는 수많은 신병들이 넘쳐날 것이다. 저 칼날에 상처를 입 을 수 있다면 그런 신병들은 말할 것도 없으리라. 이곳을 빠져나 갈지조차 의문이지만 자신의 신체가 약점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그를 실망시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놀라운 회복력을 보자 큰 위로가 되었다. 비록 작은 상 처일 뿐이지만 상처가 아무는 속도는 기적처럼 빨랐다. 더 큰 상 처를 내어 실험해볼 수는 없다는 게 아쉬웠다. 잘 하면 목을 잘라내지 않는 한 죽지 않는다는 불사지체(不死之 體)가 된 것일 수도 있었다. 통증이야 느껴지겠지만 죽지 않고 살아남는 게 어딘가? "오! 그러고 보니……!" 선주혁은 자신의 신체의 특성을 파악하자 하나의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좋아! 금나수인지 나발인지 익혀주지." 선주혁의 표정은 이전에 비해 한결 가벼워졌다. Vol 5. 휘이익. 웃통을 벗어젖힌 선주혁의 손에서는 바람 가르는 소리가 났다. 공공문의 금나수법을 수련하는 것이다. 엄청나게 빠른 손놀림을 내뻗었음에도 선주혁의 미간에는 골 깊 은 주름이 잡혔다. 위맹한 바람소리가 나는 것. 그것부터가 이미 잘못된 것이다. 공공문의 금나수법은 배수법에서 발전해온 무공이다. 암영수(暗 影手)라 불리는 이 무공은 무풍무음(無風無音)이어야 한다. 상대가 눈치 채지 못하게 전낭을 빼내는 것에서 비롯되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공기를 가르는 게 아니라니? 대체 뭘 어쩌란 말이야?" 처음 암영수를 익힐 때는 마냥 쉬웠다. 이미 현대의 소매치기 기술에 달통하다시피 했던 선주혁이 아니던가. 자연 기초부분은 쉽게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어려워졌다. 대체 가장 빠른 속도로 손을 움직이며 어떻게 바람소리를 안낼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니까 손을 이렇게 해서…… 이렇게……." 양피지에 그려진 그림과 구결을 번갈아 떠올리며 선주혁은 천천 히 동작을 반복해봤다. 혹시 자세가 잘못된게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계속해서 같은 동작을 반복하던 어쩐지 이와 같은 손놀림이 익숙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당연히 예전에 배웠던 소매치기 수법이 손에 익어 그런 기분이 드는 거라 여겼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뭔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느낌. 눈을 감고도 타깃의 지갑을 빼낼 수 있는 자신이 소매치기 기술을 낯설게 느낄 리 없었다. "흐음……?" 잠시 손을 멈춘 선주혁은 팔짱을 끼고 골몰히 생각하기 시작했 다. 대체 언제, 어디서 지금과 비슷한 동작을 취하거나 봤는지 기 억해보려는 것이다. 한참을 그렇게 고심하던 선주혁이 손뼉을 마주쳤다. "그래! 그거야! 무치!" 선주혁이 떠올린 것은 무진진인이었다. 그가 선주혁에게 보여주 었던 기이한 손동작. 분명 동작 하나 하나는 달랐지만 어쩐지 두 무공이 흡사한 바가 있었던 것이다. 무진진인이 전수한 이름 모를 무공은 상대의 방어를 피해간다. 암영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옷섶사이를 파고들 듯 상대의 방어 를 피해가는 금나수였다. 선주혁은 자리에 주저앉아 무진진인이 가르쳐준, 그리고 자신이 이미 한 번 펼쳐본 초식들을 기억해내기 위해 애를 썼다. 워낙 오래전 일이라 막막하기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생사를 가늠하는 상황. 기억해내지 못하면 죽는다는 생각이 그의 두뇌활동을 증폭시키 고 있었다. 머릿속으로는 아무리 기억하려고 노력했지만 생각나지 않던 무 진진인의 초식들이 계속해 암영수를 반복하는 동안 상당수가 기억 이 났다. 아니 기억이라기보다는 몸의 반응을 통해 되짚어낼 수 있다는 표현이 맞으리라. 기척 없이 움직이는 방법으로 치자면 암영수가 우위였다. 하지만 속도라든가 변화무쌍함은 무진진인의 초식이 한참 위라 고 볼 수 있었다. 선주혁은 두 가지 무공을 나름대로 제 것으로 만들어가는 중이었다. 그리고 선주혁은 두 가지 무공의 장점을 배합해 하나의 동작을 취하고자 노력했다. 그의 역량으로 두 무공을 하나로 합치는 것은 불가한 일. 하지만 두 무공의 장점을 조합해 하나의 동작을 만들어내는 것 은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었다. 그가 우선시 여긴 것은 최대한 빠른 속도를 내는 방법이었다. 남지학에 들었던 여러 가지 무공이론과 자연스러운 순응을 중시 하는 흡성대법의 요결, 그리고 최단시간 내에 손을 움직이고자 하 는 선주혁의 의지는 한가지의 동작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쐐애애액 선주혁이 손을 뻗어내자 가공할 파공성이 울렸다. 뻗는다 싶은 순간 이미 선주혁의 팔꿈치는 곧게 펴져 있었다. 선주혁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이 답답한 공간에 갇힌 지 얼마가 지났는지 몰랐다. 하나 배고 픔을 억지로 참아가며 아껴온 벽곡단이 바닥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아 한 달은 족히 지나고도 남았을 것이다. 선주혁의 두 눈에 긴장이 스쳐갔다. 이제는 결단을 내려야할 때가 된 것이다. "제발이지…… 완전히 잘려 나가지만 말아다오." 자신의 팔에 대고 간절한 부탁을 하는 선주혁. 그는 어금니를 악물고 공공문의 기병이 보관되어 있는 장소로 움직였다. 두 눈에 힘을 줬다. 정확히 목표가 있는 위치를 잡기 위함이다. 선주혁은 긴장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긴장을 몸의 근육이 굳어진다. 그렇게 되면 빠른 동작은 절대 불가능이다. 특히나 순간 적인 탄력을 이용하는 움직임은 더욱 이완이 필요했다. "후우, 후우, 후우……." 숨을 내쉬며 손을 앞뒤로 살살 흔들었다. 묵연수투의 묵광이 은 은하게 빛을 발했다. 그러던 어느 한 순간. "합!" 짧은 비명소리와 함께 선주혁의 손이 움직였다. 수유의 시간에 손은 교차되는 칼날 사이를 파고들었다. 캉 캉 캉 연속되는 금속성이 울려 퍼졌다. 극도로 예민해진 손끝의 감각은 상자를 쥐었음을 느낄 수 있게 해줬다. 선주혁은 들어간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손을 뽑아들었다. 상자를 꺼낼 수 있었음에 기뻐하기도 전 그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크아아아아악!" 비명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그의 팔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 다. 기병을 꺼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가 익힌 금나수법의 경지로 서는 칼날을 모두 피해낼 수 없었던 것이다. 선주혁의 이마에는 푸르른 혈관이 불끈 솟아올랐다. 팔이 잘려나가는 것과 같은 통증에 온몸은 한순간 땀으로 젖었 다. 선주혁은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땅바닥을 나뒹굴었다. 세상에 태어나 이토록 아파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옆구리에 칼침을 맞았을 때도 이와 같지는 않았다. 교차되는 칼날은 그의 손에 열세 군데나 상처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묵연수투를 낀 손 부분을 제외한 선주혁의 나머지 팔은 잘 다져 진 고기처럼 너덜너덜해졌다. 잘린 피부사이로 붉은 근육이 드러 나고 끊어진 혈관에서는 엄청난 혈액이 쏟아져 나왔다. 지독한 고통 속에서 선주혁은 의식이 흐릿해졌다. 하지만 선주 혁은 이대로 정신을 잃을 수가 없었다. 깊은 상처가 회복된다 해도 과다한 출혈은 생명을 앗아갈 수 있 기 때문이다. 그는 억지로 진기를 북돋아 점혈을 했다. 팔에서 솟 구치는 피의 양이 급격히 주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그는 눈을 감 을 수 있었다. 흐릿한 가운데 은은한 빛들이 보였다. 따사로운 빛을 만들어내 는 것은 야명주들이었다. 선주혁은 눈을 조금 더 크게 떴다. 사물이 보이니 죽은 것은 아니다. 그것으로 충분히 기뻤다. 생각보다 상처가 많아 자칫 출혈과다 로 죽는 것이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왼팔로 바닥을 짚고 몸을 일 으켜 세웠다. 어질어질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못 앉을 정도는 아니었다. 팔을 살폈다. 피가 잔뜩 굳은 팔. 그러나 출혈이 계속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상처를 조금 더 자세히 살피고 싶었다. 선주혁은 힐끗 눈을 돌 려 꺼내든 상자가 무사한 것을 확인하고는 물이 흐르는 암벽으로 갔다. 조심스레 왼손으로 물을 받아 오른쪽 팔에 흘렸다. 굳었던 피가 묽어지고 팔을 따라 흐르기 시작했다. 선주혁이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물에 닿자 상처가 쓰라렸던 것이다. 참을 수 없을 정도는 아닌지라 그는 계속해서 상처를 씻었다. 그러자 굵은 지렁이 같은 여러 개의 자상이 흉측한 모습을 드러 냈다. 정신을 잃기 전까지만 해도 피부 안쪽의 근육까지 훤히 들여다 보였던 상처는 어느새 딱지가 앉아 벌어진 곳은 보이지 않았다. 따갑고 쓰라린 와중에도 선주혁의 입가에는 미소가 맺혔다. 모 든 게 자신이 의도한 바대로 된 것이다. 어찌 생각해보면 이 엉터 리 세상으로 들어와 처음으로 뜻한 바를 이룬 셈이었다. 비록 팔이 엉망진창으로 변했지만 가슴속 깊은 곳에서 뭔가 뿌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쩐지 이제부터는 이쪽 바닥에서 제대로 성공할 수 있을거란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그래…….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으니 그야말로 산전수전 (山戰水戰)에 공중전(空中戰)까지 다 겪은 셈이잖아? 더 이상 날 방해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선주혁은 여기서만은 제대로 팔자를 고쳐보겠다고 다시 한 번 굳게 결의를 한 다음 상자가 있는 쪽으로 갔다. 피범벅인 상자를 집어든 그는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었다. 상자 안에 들어있는 것은 하나의 반지였다. 재질을 알 수 없는 묵빛의 반지. 그것이 신투가 양피지에 적은 공공문의 신물이자 기병인 폭렬지 환(爆裂之環)이었다. 기병이 반지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음에도 선주혁은 조금 실 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반지의 모양이 너무나 밋밋하고 특색이 없었던 것이다. "대체…… 이놈의 반지에 무슨 효능이 있기에 기병이라면서 호 들갑을 떨어 놓은 것일까?" 볼품없는 반지였지만 선주혁은 한 가닥 기대를 품었다. 본래 무협지에서는 볼품없는 것일수록 감춰진 성능이 많기 때문 이었다. 그는 양피지에 남겨진 방법대로 조심스럽게 반지에 진기를 주입 했다. 그러자 반지의 표면에서 조금씩 빛이 나기 시작했다. '오오옷! 이거 죽이는데?' 선주혁은 반지의 기이한 성능에 놀라며 내력을 북돋았다. 그러자 반지의 표면에서는 선명한 금광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 고 허공에 규칙적인 영상을 만들어냈다. '옷! 홀로그램 같은 걸?' 선주혁이 놀라는 사이 허공에 맺힌 영상은 글자를 형성했다. 그것은 반지의 사용법에 대한 구결이었다. 팔 하나와 바꿀 뻔한 반지였다. 또한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열쇠이기도 했다. 선주혁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글자를 읽어갔다. 폭렬지환에는 두 가지 놀라운 기능이 있었다. 첫 번째 기능은 피독효과(避毒效果)였다. 폭렬지환은 인체에 해 로운 그 어떤 독이라도 중화시킬 수 있는 기능이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몸이 거의 불사지체나 다름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독 에는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는 선주혁은 반지의 피독효과가 마음에 들었다. 두 번째 기능은 암기로 사용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천 하게 견줄 바 없는 뛰어난 성능의 암기로써. 구결을 따라 반지에 내력을 주입하면 반지는 엄청난 속도로 목 표물을 가격한다. 주입된 내력의 양에 따라 위력은 달라지지만 주 입된 진기의 수십, 수백 배에 달하는 위력을 나타낼 수 있다고 한 다. 더욱 놀라운 것은 시전자의 의지에 따라 허공에서 반지의 방향 을 바꿀 수도 있었으며 목표물을 가격한 반지는 다시 손으로 돌아 온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반지를 사용하는 구결에는 단계가 있었다. 첫 번째 단계에서는 내공을 지닌 사람이 구결대로 진기만 운용 하면 반지를 사용할 수 있었다. 단, 이 경지에서는 하루에 반지를 한 번밖에 사용하지 못한다. 특이한 진기의 운용 때문이었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하루 두 번 사용이 가능해지며, 세 번째 단 계에서는 네 번, 네 번째 단계에서는 여덟 번, 다섯 번째 단계에서 는 열여섯 번, 그리고 마지막 여섯 번째의 단계에서는 횟수에 제 한을 받지 않는다고 했다. 하나 단계를 오를수록 시전자의 몸에 무리가 생기는 단점이 있 었다. 반지를 남긴 공공문의 조사, 절대수 음자량조차도 삼 단계까 지밖에 익히지 못했다고 한다. 선주혁은 떠오른 글자의 구결을 계속해서 되뇌었다. 그의 머릿속에 완벽하게 암기가 될 때까지 황금빛 글자는 밀실 을 채우고 있었다. 폭렬지환을 사용하는 일 단계의 진기 운용법은 과연 배우기가 쉬웠다. 불과 서너 시진(1시진은 2시간)이 지나는 동안 선주혁은 폭렬지환의 사용법을 익힐 수 있었다. 그는 계단을 올라 거대한 석벽 앞에 섰다. 그리고 진기를 반지에 주입시켰다. 슛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날아가는 폭렬지환. 쿠아아아아앙. 귀청을 찢을 것만 같은 엄청난 굉음이 울려 퍼지고 흙먼지가 자 욱하게 피어올랐다. 먼지가 가라앉자 선주혁은 석벽으로 다가가 폭렬지환의 위력을 확인했다. 석벽은 반경 일장에 이르는 균열이 생겼고 두자 정도는 족히 부 서져 나갔다. 한 방에 부서지지 않은 게 아쉽고 서운하기는 했지만 선주혁의 안색은 눈에 띄게 밝아졌다. 아직까지는 벽곡단이 남아 있는 상태. 물배를 채워서라도 며칠간만 버티면 폭렬지환을 이용해 석벽에 구멍을 뚫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브라보! 이거 진짜 레어 아이템인걸! 쥑인다, 쥑여! 두고보자, 늙다리! 내 반드시 이곳에서 살아나가 주마. 푸하하하하핫!" 한차례 웃음을 터뜨린 선주혁은 묵연수투를 낀 주먹으로 균열이 생긴 석벽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더 깊이 구멍을 만들 기 위함이었다. 사람이 드나들만한 구멍이 생긴 것은 벽곡단이 떨어지고 사흘이 지난 후였다. 처음 폭렬지환을 사용한지 정확히 엿새가 지나서야 구멍을 뚫은 것이다. 구멍을 통해 바깥쪽이 드러나는 순간 선주혁은 감격에 겨워 눈 물을 다 글썽였다. "해냈다. 해냈어어어어!"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는 선주혁. 그는 바람처럼 굴 밖으로 나갔다. 선주혁은 신투의 은신처 근처에서 토끼 몇 마리를 잡아왔다. 가죽은 은신처에 있던 보검을 이용해 벗겼다. 아마도 소설 속에 서 남지학이 취했던 그 보검일 것이다. 엄청난 신검으로 고작 토 끼 가죽을 벗긴다는 게 조금 우습기는 했지만 배가 고픈 게 더 큰 문제였다. 불을 붙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금나수법을 익히느라 빨라진 손놀림을 이용해 나무로 마찰열을 발생시킨 것이다. 스스 로 원시인이 된 것 같아 헛웃음이 나왔다. 이럴 때 남지학이 있었 다면 삼매진화로 금세 불을 붙일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고 보니 사형은 뭘 하고 있을까?' 자신으로 인해 묘하게 변해버린 스토리. 제발이지 변한 정도가 적기만을 바라며 선주혁은 바라고 또 바랬다. 배를 채운 후에도 선주혁은 신투의 은신처를 떠날 생각조차 하 지 않았다. 분명히 신투는 자신이 죽은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이곳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 때를 기다려 확실한 복수를 하 겠다는 마음에서 선주혁은 이곳에서 기다리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두고 보자우, 늙다리 도둑!" 생각보다 신투가 은신처로 돌아오는 데는 오래 걸렸다. 선주혁이 이곳에서 생활한지 벌써 두 달여가 다 되어가는 것이다. '내가 벽곡단을 아끼고 아껴 먹어 오래 버틴다고 생각을 하는 건가?' 혹은 또다시 물건을 훔치러 갔을 수도 있었다. 자신의 신체가 썩지 않을 거라 말했으니 마음 놓고 볼일을 보고 올 가능성도 있었다. 사실 선주혁은 이곳을 벗어나고픈 마음이 굴뚝같았다. 절지에서 빠져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또다시 이런 외진 곳에서 세월을 보 내는 것이 억울했던 것이다. 굴 안의 보물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태어나 처음으로 돈을 물 쓰듯 펑펑 써 볼 수 있는 기회가 눈앞에 있지 않은가. 그러나 선주혁은 이를 악물고 나가고 싶다는 욕구를 억눌렀다. 신출귀몰하다는 신투였다. 여기가 아니라면 평생을 두고 그 늙 다리를 잡지 못할 수도 있었다. 어쩌면 신투가 조금 늦게 오는 게 다행일 수도 있었다. 선주혁 은 동굴에 거하며 공공문의 신법인 암영풍을 익히고 있었던 것이 다. 처음에는 도둑들의 수법이라 생각해 눈도 돌리지 않았었다. 하지만 신투의 신법은 강호에서도 일절로 알아주는 것이 아닌가. 더구나 그가 돌아왔다가 자신을 발견하고 그대로 도주하는 사태 를 막아야만 했다. 자기네 사문의 신법에 의해 잡혔을 때, 그 늙은이의 표정이 어 떻게 변할까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선주혁이었다. 그는 폭렬지환의 사용법도 꾸준히 익혔고, 흡성대법 역시 열심 히 수련했다. 틈이 나는 대로 공공문의 절기를 살폈으며, 구대문파 의 기본 심법도 열심히 읽어뒀다. 뭐든 배워두면 언젠가는 쓸모가 있다는 것을 이번에 여실히 깨 달았던 것이다. 만약 자신이 소매치기 기술을 아예 몰랐다면 폭렬지환을 꺼내는 것은 절대불가능한 일이었다. 기본이 탄탄히 닦여 있었기에 공공 문의 금나수법인 암영수를 쉽게 배울 수 있었던 것이다. "이곳을 나서는 순간부터 더 이상 어리버리 선주혁은 없는 거 야. 진정한 내 모습을 보여주고야 말겠어."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모를 말을 중얼거리는 선주혁이었다. Vol 6. 후덥지근한 여름날이다. 짙은 녹음(綠陰)사이에서 한줄기 서늘한 바람이 불어온다지만 작열하는 햇볕에 달궈진 대지를 위로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콰앙 우지지직 둘레가 성인이 양팔로 휘감기에도 버거워 보이는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부러지고 있었다. 나무를 부러뜨리고 얼굴을 잔뜩 찌푸린 청년의 용모는 실로 괴이했다. 햇살아래 드러난 눈부신 백발도 그랬고, 한 여름 뙤약볕에 하루 종일 태운 듯 가무잡잡한 피부 역시 중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 은 아니었다. 그가 입을 벌려 불평을 토로했다. "젠장! 이 빌어먹을 늙은 도둑. 정말 안 올 생각인거야?" 괴이한 용모의 청년은 신투의 은신처에서 벌써 세 달여를 버티 고 버텨온 선주혁이었다. 이것저것 무공을 익히며 복수의 그날을 꿈꿨건만 늙은 도둑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젠장! 군자의 복수는 십년도 늦지 않다고 했던가? 아니 백년인 가? 아무튼…… 여기서 하세월을 보내고 있을 수만은 없지." 선주혁은 결국 이곳에서 신투를 기다려 복수를 하는 것을 미루 기로 했다. 하루가 가고 또 하루가 가는 동안 밀실 안의 보물들이 눈에 밟혔기 때문이다. 저 보물을 은자로 바꿔 쓸 생각을 하기만 해도 당장 자리를 박 차고 산을 내려가고픈 욕망이 샘솟곤 했다. 그에게 있어서 무려 삼개월여를 이곳에서 버틴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이쪽 세상에 들어와 끔찍할 정도의 곤란한 일들을 겪지 않았다 면 결코 참지 못했으리라. 이는 선주혁 자신에 많은 변화가 있었 음을 나타내는 단면이었다. 처음 이상한 현상을 겪었을 때의 혼란은 컸다. 차원이동도 아니고 소설 속의 세상이라니. 그 이후 겪는 일들은 선주혁의 혼을 빼기에 충분한 것들이었다. 현대에 있을 때도 나름대로 험난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이 곳의 위험은 차원이 달랐다. 도검이 난무하고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판이었다. 선주혁은 자신이 어리버리하고 멍청한 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그렇게 평가했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고. 스스로를 멍청하다고 인정할 그가 아니었다. 남지학의 옆에만 졸졸 따라다니면 모든 게 다 잘될 것이라는 안 일한 생각 역시 문제라고 생각했다. 또한 이 모든 게 그저 꿈이나 환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문제였다. 깨어나면 그뿐인 것을…… 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있는 한 적극적이고 영민한 대응은 불가 능한 것이다. 그런 사고방식이 방심을 부르고, 자신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특히 이번 일을 통해 스스로 노력을 해야만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 것은 큰 수확이었다. 이제는 정말 이쪽 바닥(?)에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으리라 자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더구나 자신에게는 큰 무기가 있었다. 비록 원래의 소설과는 지금 상황이 달라졌다지만 소설을 읽음으 로 얻게 된 전반적인 정보를 고스란히 갖고 있지 않은가? 무림의 주류를 이룰 사건들도 그렇고 다양한 무림인들에 대한 성격과 그들의 내심까지도 알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 모든 정보를 활용하고 자신의 노력까지 더해진다면 얼마든 지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선주혁은 그렇게 자신도 모르게 경험을 통한 성숙의 과정을 걷 고 있는 중이었다. 선주혁은 밀실 안으로 들어갔다. 언제든 떠날 때를 대비해 짐을 꾸려놓은 상태였다. 도자기류나 깨지기 쉬운 것들은 어쩔 수 없이 내버려 두고 가기로 했다. 그가 주로 챙긴 것은 보석류. 현찰이나 다름없고, 운반이 용이했기 때문이다. 중원 각처에 있는 공공문의 은신처는 모두 알아두었다. 지금 챙 긴 것만으로 평생을 놀고먹어도 다 못쓰겠지만 만약의 경우를 대 비해 머릿속에 단단히 기억을 해 뒀다. 신투가 미리 옮겨놓으면 말짱 도루묵이겠지만 보물을 숨길 수 있는 곳이 그렇게 흔한 것만 은 아니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구파일방의 심법들은 곤륜파의 절기만 빼고 머릿속에 억지로 암 기한 후 태워버렸다. 피땀 흘려 구해온 신투에게 복수하기 위함이 었다. 공공문을 위한 그의 노력이 자신의 손에 의해 재가 되어버 렸다는 사실에 그는 통쾌함을 느꼈다. "자, 그럼 새로운 인생을 향해 나아가 볼까?" 동굴의 밖으로 나간 선주혁은 입구를 가린 덤불을 잘 정리한 후 몸을 돌렸다.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쉰 그가 막 산을 내려가려는 순간이었다. "사제! 사제 맞지?" 낯익은 음성이 선주혁의 귀를 파고들었다. 그의 고개가 빠르게 돌아갔다. "사형!" 선주혁은 반가운 마음에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언 제나 말도 안 되는 우연이 겹치는 이쪽 세상인지라, 스토리가 변 해도 역시나 우연이 겹쳐진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딱 자신이 이곳을 떠나려는 순간 사형과 조우할 수 있단 말인가? "사제." 남지학은 선주혁이 어떻게 해 볼 사이도 없이 와락 달려들어 껴 안았다. 숨이 막힐 정도로 꽉. '이, 이 양반이 왜 이래? 낮술이라도 먹었나?' "살아있었구나, 사제. 살아있었어!" 남지학은 감격에 찬 음성으로 말했다. 갑작스레 남자가 자신을 안고 돌아가자 민망했던 선주혁은 남지 학의 말을 듣고 코끝이 찡해지는 것을 느꼈다. 반가움이었다. 그리고 기쁨이었다. 남지학은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에 행복해하는 것이었다. 선주혁은 그게 고마웠다. 천애고아로 태어나 이토록 진한 정을 언제 받아봤겠는가? 그는 남지학의 언행에 감동하고 있는 자신이 쑥스러워 어색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핫, 당연하죠. 제가 왜 죽겠습니까." 선주혁의 밝은 목소리를 듣고서야 남지학은 끌어안았던 손을 풀었다. "그, 그런데…… 어째 사형의 모습이……?" 선주혁은 그제야 남지학의 행색이 엉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늘 단정한 모습을 보이던 남지학이다. 절지에 있을 때도 매일같 이 머리를 빗고 낡은 의복이라 할지라도 깨끗이 빨고 단정함을 갖 췄었다. 그런데 지금의 모습은 대체 뭐란 말인가? 여기저기 헤지고 찢어진 옷하며, 헝클어진 머리. 그리고 군데군 데 보이는 혈흔들. 마치 전쟁터에서 막 빠져나온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아, 이거……. 후훗, 고생 좀 했지." 남지학의 표정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선주혁은 가슴이 철렁하는 것을 느꼈다. 자신으로 인해 뭔가 일이 틀어졌다. 그것도 아주 크게. 불안한 심정 속에서 애써 마음을 추스르며 잘 살펴보니 남지학 은 옷매만 흐트러진 게 아니었다. 활력이 넘치던 얼굴에는 피로가 가득했고, 정명하던 두 눈에서는 어딘지 모를 암울함이 비췄다. 늘 어딘가 달라 보이던 위엄과 올곧던 분위기도 묘하게 틀어져 있었다. 피로한 와중에도 어쩐지 잘 벼린 칼과 같은 날카로움을 뿜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위협적인 느낌은 선주혁이 알던 남지학에게서는 볼 수 없 었던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을 겪었던 거예요?" 선주혁은 긴장된 마음으로 물었다. 남지학은 씨익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지옥을 다녀왔다고나 할까?" "지옥이요?" 선주혁의 눈이 동그래졌다. "사천의 모든 무림인들이 나를 향해 달려들더군. 묵연수투라던 가? 그걸 내놓으라고 말이야. 심지어는 백가까지도 내게 그걸 요 구하더군. 신투의 행방과 함께 말이야." "……!" 선주혁은 한 순간 모든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렵고 복잡 한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과 남지학은 신투를 추적하기 위해 백가를 빠져 나왔다. 하지만 백가에서 봤을 때, 신투와 공모(共謀)했을 것으로 보였을 수도 있다. 자신과 사형을 곱지 않게 바라보던 백가의 식솔들을 생각하면 충분히 그렇게 의심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그 때 당가의 그 사람한테…… 상황 설명을 안 한 거예요?" "쉽지 않았어. 악의를 갖지 않고 싸우는 와중에 입을 벌릴 틈조 차 갖지 못했지. 손을 거두고 자리를 피하는 중에 나름대로 설명 을 했지만 믿지 않더군." 선주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해서 암기가 날아오는 와중에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애썼을 남지학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멍청한 당가 놈은 그런 남지학의 말을 흘려들으며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선주혁은 남지학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100퍼센트 자신의 잘못은 아닐 것이다. 자신이 이쪽 세상에 온 것 자체가 이미 모든 게 달라질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었다. 선주혁 스스로가 원해서 이 곳에 온 게 아니니 전적으로 책임을 질 필요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성급하게 신투를 추적할 계기를 만들어주는 바람 에 남지학이 이 고생을 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래 서 선주혁은 미안한 감정을 갖는 것이다. "큰 고생했군요." 진심 어린 마음이었다. 남지학은 선주혁에게 있어 그만큼의 진심을 받을 자격이 있었으 므로. 남지학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본 선주혁은 왠지 가슴이 아파왔다. 사형에게 느껴지 는 이 날카로운 위압감. 아마도 긴장된 순간과 위기를 넘나들며 절로 형성된 기도일 것이다. 어쩌면 격전 중에 많은 사람을 다치 게하고 죽인 탓에 살기가 감도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나저나 너한테는 별일 없었어? 신투에게서는 어떻게 벗어난 거지?" 남지학의 질문에 선주혁은 신이 난 표정으로 그간 자신이 겪은 모험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물론 자신이 배수법을 이미 알고 있 다는 이야기는 뺐다. 그저 우연치 않은 깨달음과 무진진인이 전수 해준 무공을 통해 석문을 부술 수 있는 것으로 돌려 말했다. "하! 너도 큰 고생을 했구나." 남지학은 선주혁이 겪은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들은 후 감탄을 했다. 따지고 보면 밀실에 갇혀 굶어 죽었어도 전혀 이상할 게 없 는 이야기였던 것이다. "그게 묵연수투인 모양이군." 남지학은 감회가 새롭다는 듯 선주혁이 낀 장갑을 보며 말했다. 묵연수투로 인해 모진 고생을 다 했으니 어찌 남다른 감정이 느 껴지지 않겠는가. "네. 결국 제 손에 들어왔네요." 선주혁은 남지학의 심정을 이해하는지라 쓴 웃음을 지었다. "하여튼 이번 일로 실로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었어." 남지학의 뜬금없는 소리에 선주혁은 의문어린 표정을 지었다. "내 스스로 아무리 정당하고 옳다하더라도 마땅히 증명 할 방법 이 없으면 인정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야. 그리고 그 불 인정은 마치 진실처럼 왜곡되어 버린다는 것을……. 아니. 아예 진 실이 되어 버리더군. 진실을 전하고자 한다면 상대가 불복할 수 없는 조건을 만들어야겠지. 무림에서는 그게 힘일 것이고 말이야." "……!" 선주혁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남지학을 바라보았다. 그가 깨달았 다고 말하는 것. 그 내용이 소설에서 본 남지학과는 너무나 달랐 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매번 앵무새처럼 정의가 어쩌고,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어쩌고 하면서 성인군자의 말만을 되씹던 남지학이 아 닌가. 그런 주인공을 보며 답답해하다가 급기야 열불을 내며 욕까지 했던 선주혁이었다. 그런데 남지학의 입에서 저런 현실적인 말이 나오자 크게 놀라 지 않을 수 없었다. 동시에 선주혁은 묘한 기분이 드는 것을 느꼈다. 책으로 읽을 때야 남지학의 그런 성격이 짜증이 치밀었지만 막상 곁에서 겪어 본 바에 의하면 나름대로 장점이 많았던 것이다. 충직하고 의로운 성격이기에 쉽게 믿을 수 있었고, 의연한 자세는 은연중에 믿고 의지하기에 좋았다. 그랬던 남지학의 성격이 이렇게 변해버린 것이 마냥 달갑지만은 않다는 생각에 기분이 묘해지는 것이다. '뭐…… 일시적일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틀린 말도 아니잖아?' 선주혁은 일말의 불안을 애써 추슬렀다. "참! 사형에게 줄 선물이 있어요." "선물?" "네. 신투…… 아니 그 빌어먹을 늙은 도둑의 은신처에서 가져온 거예요." 선주혁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손에 들고 있던 보검을 내밀었다. 남지학은 말없이 검을 받아 느릿하게 뽑아들었다. 스르르릉 맑고 영롱한 쇳소리와 함께 검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푸르스름한 광택이 도는 매끈한 검신을 본 남지학의 눈에는 놀 라움과 감탄의 감정이 떠올랐다. "영의검(英義劍)! 이게 신투의 손에 있었다니……?" 검신에 음각된 글자를 읽는 남지학의 목소리에는 기쁨이 충만했다. "사형도 잘 아시죠? 천하십대명검 중의 하나라는 거 말이에요." "알지. 당연히 알고말고." 남지학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넋이 나간 것처럼 검을 휘두르며 이리저리 살피는 중이었 다. 천하의 명검이 자신의 손에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은 모양이었다. '소설 속에서는 훔친 물건이라고 자신이 취하는 것조차 망설이던 사람이…….' 선주혁은 남주혁의 기뻐하는 얼굴을 보며 자신도 싱긋 웃었다. 보검을 내어주긴 했지만 그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자신도 기뻤 던 것이다. 원래부터 그에게 돌아갔어야 할 검이라는 생각 때문이 기도 했다. "이렇게 귀한 것은 사제가 쓰는 것이 좋지 않을까?" 남지학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하핫, 아뇨. 전 이미 챙길 건 다 챙겼거든요. 그러니 검은 사형 이 가지세요. 부담 갖지 마시고요. 우리 사이에 뭘…… 하하하핫." "사제는 정말 욕심이 없군. 저들에 비교해보면…… 정말이지. 아 무튼 고마워. 목숨을 구해주더니 이런 큰 선물까지. 대체 사제한테 받은 은혜를 어떻게 다 갚을지 모르겠어." 남지학이 말하는 저들이 누군지 선주혁은 쉽게 알아차렸다. 묵 연수투를 노리고 끊임없이 남지학을 괴롭혀온 무림인들을 지칭하 는 것이리라. 남지학의 입장에서는 묵연수투에 못지않은 귀한 보물을 선뜻 내 주는 선주혁의 행동에 더 큰 감명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하하핫. 은혜는 무슨요. 저희는 형제나 다름없는 사이 아니겠습니까?" "그래. 사제야말로 목숨을 걸어도 좋을 내 진정한 형제지." 남지학은 선주혁의 손을 꽉 잡았다. 달빛이 밝다고 할 수 없는 산길을 두 개의 인형이 바람같이 질주하고 있었다. 신투의 은신처를 떠난 선주혁과 남지학이었다. 남지학은 아직까지 무림인들이 자신을 추적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고, 그들과 괜한 충돌을 일으키는 것을 피해 야 음을 틈타 움직이자고 한 것이다. 남지학과 하루 밤을 이동하며 그가 겪은 상황이 자신의 추측과 약간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림인들이 신투와 공범으 로 지목했을 거라 생각했건만, 남지학의 말에 의하면 아예 두 사 람이 묵연수투를 훔쳐낸 것으로 여긴다는 것이었다. 신투는 범행 장소에 소변을 보아 자신이 다녀갔음을 드러낸다. 하나 사천백가에는 그런 흔적이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백가의 인물들은 남지학과 선주혁이 일부러 백화란에게 접근했고, 귀빈 대우를 받는 것을 이용해 묵연수투를 훔쳐냈다고 여기는 것이다. 당문에서 그들이 신투와 함께 있었음을 널리 알리지 않는 이유 는 뻔했다. 당문의 고수가 신투를 눈앞에서 놓쳤다는 사실, 그리고 남지학과 같은 애송이와 평수를 이뤘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침 묵하고 있을 것이다. '쩝! 그럼 백 소저가 나를 도둑놈으로 생각한다는 건가?' 산길을 달리는 와중에도 선주혁은 못내 아쉬웠다. 그녀에게서 한참 호감을 사고 있었고, 다시 만날 것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 이다. 그 때는 반드시 그녀의 마음을 얻어내겠다고 확신하고 있었건만……. 백화란에 대해 생각하며 아쉬워하던 선주혁은 하마터면 남지학 의 뒤통수에 얼굴을 들이박을 뻔 했다. 남지학이 갑자기 멈춰 섰기 때문이다. 암영풍의 신묘함 덕에 선주혁은 남지학의 뒤통수와 추돌하는 사 태는 막을 수 있었다. 선주혁은 왜라고 물으려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굵직한 나무둥지 옆으로 드러나는 인영들을 발견한 것이다. 한 눈에도 이십여 명은 족히 되어 보이는 인원이었다. 모두가 병장기를 갖춘 무인들이다. 복색이 다양한 것을 보아 한 군데에 소속이 되어 있는 무인들은 아닌 듯싶었다. 그 중 한 중년인이 앞으로 나서며 목소리를 높였다. "훗! 고작 생각해낸 방법이 동료와 함께 도주하는 것이냐? 그렇 게 부정을 하더니 결국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뱁새눈에 입매가 가늘고 광대뼈가 튀어나온 것이 썩 호감 가는 인상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목소리는 꽤나 근엄하고 무게감이 있 어 묘한 부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중년인의 말에 남지학의 눈썹이 하늘로 치켜 올라갔다. "더 이상 당신에게는 말을 하지 않겠소.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 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자와 어찌 대화를 나누겠소?" 노기 어린 남지학의 음성을 들은 선주혁은 두 사람이 이전에도 마주한 적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오라? 그럼 내 눈에 보이는 저 괴상한 행색의 애송이는 허상이 고, 그의 손에 끼어진 묵연수투는 거짓이란 말이냐?" 중년인의 말에 뒤쪽 인원들이 술렁대기 시작했다. 그들의 탐욕 스런 시선은 모두 선주혁의 손에 집중되었다. 남지학은 한 걸음을 옮겨 선주혁의 앞을 가로 막았다. 선주혁을 보호하기 위한 행동이었으나 저들의 눈에는 그저 보물을 지키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호오! 그러고 보니 이제 본색을 드러내기로 했나보군.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마주치자마자 도망을 치더니 이제는 당당히 마주서는 군. 묵연수투가 있다 이건가?" "우리는 백가장으로 가는 길이오. 이 수투를 돌려주기 위해!" "……!" 남지학의 말을 들은 무림인들은 다시 한 번 술렁대기 시작했다. 그러자 중년인이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우릴 모두 바보로 아는 거냐? 네 놈의 간교한 세치 혓바닥으로 어찌 사천무림의 영웅들을 희롱하려는 게냐?" 언성을 높이는 중년인은 말을 하는 와중에도 주변사람들을 힐끗거렸다. 그와 같은 모습을 본 선주혁은 대략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 다. 비루먹은 망아지같이 생긴 중년인은 지금 사람들을 선동하는 것이다. 자신은 뒤로 물러선 상태에서 사람들을 부추기고자 하는 의도라는 게 뻔히 보였다. 아마도 저와 같은 수법으로 사형인 남 지학을 수차례 곤란한 상황으로 몰고 갔음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못미더우면 우리와 함께 백가장으로 가면 될 것이 아니오?" "푸훗! 정말이지 어린놈의 간교함이 이 장모(張某)마저도 탄복할 정도구나. 그따위 수작을 피워 여기 있는 영웅들을 방심케 하고 또 다시 도주할 기회를 만들려 함은 누가 모를 줄 아느냐?" 스스로를 장가라 밝힌 중년인의 말은 즉각적인 효과를 가져왔 다. 무림인들은 새삼 경각심을 곤두세우는지 무기를 고쳐 쥐기 시 작한 것이다. "문제가 된 물건을 돌려주겠다는데 왜 당신이 나서는지 모르겠 소. 이 물건은 원래의 주인이 있는 것이고, 우리에게 죄값을 받겠 다면 그것 역시 주인의 몫이오. 힘겹게 물건을 되찾아 주인에게 돌려주고자 함은 정당한 일! 그것을 막고자 하는 이유가 탐욕이라 면 나 역시 손속에 사정을 둘 필요가 없소. 그간 내가 당신들을 두려워해 피했다고 생각지 마시오." 남지학은 당당한 자세로 말한 후 영의검의 검병에 손을 얹었다. 장씨 성을 가진 중년인은 남지학의 기도가 달라지는 것을 느꼈 는지 조금씩 뒤로 물러서며 외쳤다. "네, 네놈이 지금 여기 있는 영웅들 앞에서 허세를 부리겠다는 게냐?" "허세인지 진정한 실력인지는 손을 나눠보면 알 것이오." 남지학의 말에 키가 칠 척은 족히 되어 보이는 거한이 폭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핫! 정말이지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애송이구나. 이 탕 (湯)어르신께서 네놈이 그간 사정을 보아준 것인지, 동네 어귀 강 아지마냥 꼬리를 말고 도망을 다닌 것인지 알아봐 주마." 어깨에 대부(大斧: 긴 손잡이의 거대한 도끼)를 걸쳐 쥔 거한의 목소리는 종이 울리는 것처럼 우렁찼다. 스르르릉 남지학은 묵묵히 검을 뽑아들었다. 달빛에 비친 검광이 영롱한 색채를 발했다. 그것을 본 무림인들의 눈이 다시 한 번 탐욕으로 물들었다. 남 지학의 검이 예사 것이 아님을 한눈에 알아본 것이다. "말이 통할 상대들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무림인들에게 한 말인지 스스로에게 한 말인지 모를 소리를 중 얼거린 남지학은 왼손으로 검결을 취하고 오른손에 쥔 영의검을 앞으로 내뻗었다. 험상궂은 인상의 중년 거한도 대부를 고쳐 쥐고 앞으로 내밀었다. 한 순간 남지학과 선주혁, 그리고 무림인들이 있는 공간에 침묵 이 감돌았다. 긴장감. 그것이 침묵의 정체였다. 대부를 들고 있는 탕충월(湯?越)은 타고난 신력(神力)과 무거운 병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실력으로 사천무림에 명성이 드높았다. 다시 말하자면 이곳에 모인 무림인들을 대표할만한 실력자라는 뜻 이었다. 남지학은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수개월에 걸친 사천무림인 들의 포위망에도 잡히지 않고 있었다. 이는 단순이 운이 좋아서 될 일이 아니었다. 그와 마주했던 삼십 여명의 무림인들이 이미 고혼(孤魂)이 되거나 불구가 되었다는 사실은 남지학의 무공이 뛰 어나다는 것을 증명했다. 결국 두 사람의 승패에 많은 사람들이 긴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 이었다. 무림인들은 딱히 누구를 응원하는 마음은 없었다. 저마다 묵연수투를 손에 넣기 위해 이곳에 몰려온 것이 아니던가? 어떤 면에서는 남지학을 응원하고픈 마음도 더 강했다. 만약 수 투가 거력대부(巨力大父) 탕충월의 손에 들어간다면 자신들과는 완전히 인연이 없어진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순간. 탕충월의 대부가 하늘 높이 들렸다. 그 때까지도 남지학은 꼼짝 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무림인들은 남지학이 탕충월의 기세에 압도당했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머릿속에 남지학의 전신이 두 쪽으로 갈라지는 것이 선명 하게 그려졌다. 그리고……. 퍼억 끔찍한 소음이 공간을 채웠다. 분수처럼 솟구치는 피가 밤하늘을 물들였다. 소음의 진원은 무림인들이 예상했던 곳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탕충월의 머리가 통째로 날아가 버렸던 것이다. 무림인들은 선혈이 옷에 튀는 것을 피하기 위해 분분히 몸을 움 직여야만 했다. 그 순간 괴소성(怪笑聲)이 중인들의 귀를 때렸다. "크흐흐흐흐흐흐흐흐!" 소름끼치는 웃음소리와 함께 나타난 것은 기괴한 행색의 노인 둘이었다. 거의 흡사한 용모를 가진 홍포(紅袍)의 두 노인. 머리카락은 듬성듬성해 쥐가 뜯어 먹은 듯 하고 칼날 같은 매부 리코에 움퍽 패인 두 눈을 가진 노인들은 주름진 입가를 당겨 흉 측한 표정을 만들어 냈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분명 웃 음일진데 표정은 마치 먹이를 노리는 야수의 그것과 비슷하여 보 는 이로 하여금 섬뜩한 느낌이 들게 했다. "주, 중경쌍흉(重慶雙凶)!" 누군가의 입에서 공포에 질린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두 노인 중 한 명의 고개가 돌아가고 그의 손가락에서는 아무 곳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조약돌 하나가 튕겨져 나갔다. 퍼억 또다시 부서지는 머리통. 그리고 솟구치는 피. 사천의 무림인들은 썰물이 빠지듯 머리가 박살난 자의 주변에서 멀어졌다. "감히 우리 두 신선(神仙) 어르신들을 흉(凶)이라 말하다니. 네 죄를 알겠다?" 이미 머리가 날아가 죽은 자에게 건네는 목소리. 그것은 까마귀가 울부짖는 소리마냥 듣기에 거북했다. 사천의 무림인들의 얼굴은 사색(死色)으로 변했다. 사천에 인근 한 중경이 비좁다 설쳐대는 두 거마(巨魔)가 등장한 것이다. 저들 이 나타난 이상 묵연수투를 얻는 것보다는 우선적으로 자신들의 목숨을 건사해야 할 판이었다. "저, 저 놈은 죽어 마땅한 놈이었습니다. 감히 중경쌍선(重慶雙 仙) 어르신들을 보고 망발을 하다니요. 헤헤헤헷!" 앞서 중인들을 선동했던 장씨 성의 중년인이 손을 비비며 나섰다. "호오! 사천에 제대로 혓바닥이 달린 놈이 있었구나." 중경쌍흉은 쌍둥이 형제였다. 방금 전 손을 써 두 사람을 죽인 자가 형인 풍일(豊一)이었고, 지금 말을 한 자가 동생인 풍이(豊二)였다. "헤헤헷, 이 장제두(張題頭)가 두 분 신선 어르신께 인사를 올립니다요." 장제두는 간교한 표정, 목소리와 함께 포권을 취했다. "크흐흐흐……, 그래. 네놈은 상당히 예의가 바르니, 제일 마지 막에…… 그리고 고통 없이 죽여주도록 하마." "……!" 중경쌍흉 중 풍이의 말에 장제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잠시간 당황한 표정을 짓던 장제두는 재빨리 얼굴에 미소를 만 들어 내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어, 어르신들…… 저희……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죽이시려 드 는 겁니까? 묵연수투를 어르신들께서 거두고자 하신다면 저희는 당연한 일로 여길 것입니다. 그에 대한 불만을 품지도 않을 것이 며 어르신들의 심기를 거스를 행동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안 그 렇습니까, 여러분?" "그, 그렇습니다, 어르신." "당연히 어르신들께서 가져 가셔야죠." "말씀만 하시면 저희는 지금 당장이라도 이 자리에서 사라지겠 습니다." 장제두의 말에 무림인들은 뒤질 새라 입을 열어 동의를 표하고 과장되이 고개를 끄덕였다. "크흐흐흐, 중경과는 달리 사천에는 실로 예의바른 아해들이 많구나." 풍일은 입가를 당기며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말에 무림인들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하지만 너희는 모두 이곳에서 죽어야 한다." 까마귀 소리와 같은 음성이 단호함을 보이는 순간 풍이의 신형 이 바람처럼 움직였다. 퍼억 풍이와 가장 가까이에 서있던 한 명의 머리통이 잘 익은 수박처 럼 깨져나갔다. 풍이의 손가락이 두개골을 파고든 것이다. 풍이의 놀라운 조공(爪功)을 직접 보는 순간 무림인들은 이미 전의를 상실했다. "젠장!" 제일 먼저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한 것은 장제두였다. 그의 움직임과 거의 동시에 사천의 무림인들은 앞 다투어 달리 기 시작했다. "크흐흐흐흐……." 괴소성과 함께 풍일, 풍이 형제가 신형을 날렸다. "크아아아악!" 첫 비명은 풍일의 손에 심장이 잡히는 순간 지른 자에게서 터져 나왔다. 이후 잔혹한 학살이 시작되었다. 간혹 무기를 휘둘러 저항하는 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풍 일, 풍이 형제의 조공은 실로 놀랍기만 했다. 도주하는 자 중 일초 반식조차 버티는 자가 없었던 것이다. 중경쌍흉이 끔찍한 학살을 하는 동안 남지학은 묵묵히 서 있을 뿐이었다. 눈앞에서 사람을 개미 눌러죽이듯 죽여 대는 중경쌍흉을 보며 치를 떨던 선주혁은 문득 그런 사형의 모습에 새삼 놀라고 있었 다. 소설 속의 남지학이라면 이와 같은 장면을 보고 있지 않았을 것 이다. 비록 자신을 괴롭혔던 자들이라 해도 정의를 내세워 돕기 위해 애를 썼을 것이다. 하지만 남지학은 움직이지 않았다. "사, 사형……. 이 틈에 우리라도……." "언제까지?" "……!" "언제까지 저자들에게서 피할 수 있겠어? 반드시 또 다른 무리 가 우리 앞을 막아설 것이고, 조금이라도 지체하게 되면 저 노마 들과 또다시 마주하게 될 거야." 맞는 말이었다. 저 두 괴물 같은 늙은이들은 바람처럼 신형을 움직이고 있었다. 암영풍을 익혀 제법 신법에 자신이 붙었지만 또 다른 무리가 앞을 막아선다면, 그래서 아주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 게 된다면 따라잡힐 게 분명했다. "어차피 마주치게 된다면 체력이 회복되어 있는 지금이 좋겠지. 우리가 옳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주저할 필요도 없고 말이야." 단호한 표정, 그리고 음성이었다. 남지학의 당당한 모습에 선주혁은 저 괴물 같은 노인들과 마주 해야 한다는 불안감마저 사라지는 듯 했다. '역시 영웅이란 이런 건가? 그런데…… 아직은 사형의 이런 모 습이 익숙지만은 않군.' 덧없이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남지 학을 보며 선주혁은 홀로 낯설음을 달랬다. 퍼억 마지막으로 장제두의 머리에 풍이의 손가락에 꽂혔다. 남지학과 선주혁이 도망갈 의사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인지 풍이는 잔 혹하게도 장제두의 다리와 어깨를 분지르고 생 이빨을 뽑아낸 다 음 마지막으로 머리에 손가락을 박아 넣어 죽인 것이다. '고통 없이 죽여준다더니……?' "감히 이 어르신들 앞에서 젠장이라니? 그딴 소리만 내뱉지 않 았어도 고통 없이 죽여줬을 것을……. 크흐흐흐흐." 풍이는 마치 선주혁이 속으로 말한 것을 듣기라도 한 듯 풍이에 게 잔혹한 행위를 한 이유를 중얼거렸다. 스무 명에 달하는 무림인들을 채 한 식경도 되기 전에 죽인 중 경쌍흉은 서서히 걸음을 옮겨 남지학과 선주혁에게 다가왔다. "오호! 이것 봐라?" 풍이의 눈이 남지학을 보고 커졌다. "진짜 애송이들이군. 크흐흐흐흐, 그 나이에 백가 늙은이의 집을 털 생각을 하다니……. 실로 대담하군, 대담해!" "아니, 대담할 뿐만은 아닌데? 저 검을 든 아이를 좀 보라고. 골 격이 상품(上品) 중의 극상품(極上品)이군, 그래. 생긴 것은 괴상하 지만 저 아이의 골격도 나쁘지 않고 말이야." 풍일이 괴이한 목소리를 한층 높이자 절로 인상이 찌푸려질 소 리가 귓가를 울렸다. "정말이네. 흐흐흐흐……, 대담한 성품에 뛰어난 자질을 지녔으 니 내 너희들에게 기회를 주마." 풍이가 음침한 미소를 흘리며 남지학과 선주혁을 번갈아 봤다. "좋게 물건을 우리 중경쌍선께 바치면 너희를 어여삐 여겨 제자 로 삼아주마. 어떠냐? 어차피 우리도 살날이 머지않았으니 수투야 그 후에 물려받으면 될 것이 아니냐?" 풍이는 꽤나 선심을 쓴다는 듯 말했다. 중경쌍흉은 아직까지 제자를 거두지 않고 있었다. 나름대로 안 목이 높아 눈에 드는 자를 찾지 못한 것이다. 그러던 와중에 천고 의 자질을 지닌 남지학을 봤으니 탐이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수투는 백가장으로 돌아갈 것이오." 남지학의 짧은 대꾸에 중경쌍흉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러자 풍일이 제 딴에는 힘껏 자애로운 표정을 만들어내며 남 지학을 달래기 시작했다. "아이야, 네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우리 신선 어르신들께서는 수투를 포기할 마음이 없단다. 어차피 죽어 빼앗길 물건이라면 소 용이 없는 게 아니겠느냐? 그러니 마음을 바꿔 먹고……." "수투를 원한다면 사제와 내 목숨부터 가져가시오!" 남지학은 풍일의 은근한 위협과 회유에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어? 왜 난 거기에 넣고 그래요?' 선주혁은 죽느니보다는 차라리 수투를 넘기는 게 낫다는 주의였 다. 하지만 그것은 최후의 순간에야 결정할 일이었다. "크흐흐흐……, 좋게 말해주니 네 놈의 눈깔에는 우리 어르신들 께서 우습게 보이는구나. 권주(勸酒)를 마다하고 벌주(罰酒)를 자 처하다니!" 풍이의 눈에 살기가 감돌더니 뼈마디가 툭툭 불거진 손을 서서 히 들어올렸다. 앞선 살육으로 젖은 피가 가득한 손은 보기만 해 도 섬뜩한 느낌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풍일은 거만한 표정과 함께 팔짱을 끼고 뒤로 물러섰다. 먼저 움직인 것은 남지학이었다. 우보(右步)로 중궁(中宮)을 밟으며 강하게 내지르는 검. 춤을 추듯 흔들리는 검극은 수십 개의 작은 원을 만들어내며 앞 으로 나아갔다. 풍일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그는 평소처럼 선뜻 상대의 무기를 손으로 낚아채지 못했다. 검 에서 엿보이는 예기가 예사롭지 않았을뿐더러 검극이 만들어내는 변화를 예측하기도 힘들었던 것이다. 빠르게 좌측으로 신형을 이동시켜 검격의 안쪽으로 파고들려하 는 풍일. 하지만 남지학의 검극은 더욱 큰 원을 그려내며 풍일이 접근하 려는 방향을 봉쇄했다. "흥! 어린놈이 믿는 바가 있었구나." 팔짱을 끼고 구경하던 풍일이 소리를 질렀다. 한 눈에도 남지학 의 실력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것을 파악한 것이다. '보면 볼수록 탐나는 놈이군.' 비록 일수에 불과했지만 동생의 공격로를 차단하는 남지학을 보 고 풍일은 내심 중얼거렸다. 공격하고자 하는 방향이 봉쇄되자 풍이는 다시 우측으로 신형을 옮겼다. 그리고 다시 좌측으로 움직이는 풍이. 상대가 방어에 충실한 모습을 보고 현란한 보법으로 교란을 하 려는 것이다. 나름대로 훌륭한 검법을 지니고 있다 해도, 애송이는 애송이라 생각했다. 이렇듯 눈을 현혹시키는 보법을 사용한다면 초식이 흐트러지고 그 순간 빈틈이 드러날 것을 기대한 것이다. 하나 풍이는 모르고 있었다. 지난 몇 달간 남지학의 몇 번의 사선(死線)을 넘어왔는지를. 얼마나 많은 격전을 치러 왔는지를 모른 것이다. 풍이가 변화무쌍한 보법을 밟으며 빈틈을 노리는 사이 남지학은 이미 상대 움직임의 허실을 짚어가고 있었다. "타합!" 남지학의 검극이 그려내는 원의 크기가 급격히 줄어들면서 노도 와 같은 기세가 풍이를 덮쳐갔다. 피할 수 있는 방위는 원을 그리는 검극이 이미 점한 상태. 풍이는 남지학이 이처럼 뛰어난 실력과 안목을 갖추고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했기에 대경해야만 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검에 실린 기세였다. 찰나의 순간 확보한 거 리에서도 느껴지는 검세. 그것은 아직까지 위험한 거리가 아니었 음에도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였다. 자칫 상반신 전체가 걸레처럼 찢어질 수도 있는 상황. 풍이는 다급한 마음에 철판교의 수법으로 허리를 뒤로 젖히고 수직으로 그어지는 검세를 피하기 위해 몸을 땅바닥에 굴려야만 했다. 강호인들이 수치스럽게 여기는 나려타곤(懶驢打滾)이 펼쳐진 것 이다. 남지학의 검이 땅을 데굴데굴 구르는 풍이를 노리고 뱀처럼 영 활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풍일이 끼어들었다. 땅에서 목을 가볍게 띄워 남지학의 오른쪽 어깨를 향해 강철 같 은 손가락을 뻗은 것이다. 남지학은 풍일의 공격에 개의치 않고 풍이를 쫓았다. 어차피 그에게 있어서 두 사람을 한꺼번에 상대하기는 힘든 상 황. 풍이의 방심이 없었다면 이처럼 쉽게 기회를 얻을 수 없다는 것 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어깨를 내주더라도 풍이의 목숨을 끊으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의도는 성사되지 못했다. 자신과 풍일 사이에 하나 의 인영이 끼어든 것이다. 퍼억 둔탁한 타격음에 남지학은 멈칫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라면 개의치 않을 수 있으나, 스스로의 목숨보다 귀하게 생각한다 말했던 사제에게서 들려온 소리였기 때문이다. 사제가 괴공을 익혀 단단한 신체를 지니고 있기는 했으나, 중경쌍흉의 맏 이인 풍일의 공력을 감안하면 염려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때문에 남지학의 검은 풍이의 등에 깊은 상처만을 냈을 뿐 의도 한 바대로 그의 목숨을 취하지는 못했다. "사제!" 남지학의 다급한 외침이 터짐과 동시에 선주혁의 신형은 나무둥 치에 처박히고 있었다. 퍼억 우지끈 풍일의 손에 담겨진 힘이 얼마나 위맹했는지 선주혁과 충돌한 굵직한 나무가 부러져 나갔다. 남지학이 신형을 날려 사제의 상세를 살피려는 순간 선주혁이 벌떡 일어났다. 가슴 부위의 의복이 형편없이 찢어졌으나 그 사이 로 보이는 가무잡잡한 피부에는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어, 어떻게……?" 놀란 것은 풍일이었다. 자신의 조공은 바위에 구멍을 낼 정도다. 그런데 피륙으로 이뤄진 인간의 신체가 어찌 멀쩡할 수가 있단 말인가? "크흑!" 다시금 터져 나온 풍일의 다급한 신음성. 선주혁을 보고 놀라는 사이 남지학의 검의 그의 옆구리를 갈라 놓았던 것이다. "끄응……." 벌떡 일어섰던 선주혁은 풍일의 옆구리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가슴을 부여잡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풍일의 공격 은 실로 매서운 것이어서 통증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던 것이다. "사제, 괜찮아?" 남지학은 풍일과 풍이를 경계하며 선주혁에게 물었다. "네, 하핫……. 뼈밖에 안 나온 늙다리가 친 건데요, 뭐." 선주혁은 가슴이 통증을 억누르며 짐짓 허세를 부렸다. '어지간하면 다시 안 맞았으면 좋겠지만 말이야…….' 다시금 중경쌍흉과 남지학, 선주혁의 대치 상태가 형성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은 중경쌍흉에게 있어서는 실로 어처구니가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리 방심을 했다 해도 자신들은 백전의 노장들이 아닌가. 애송이들을 상대로 방금 전과 같은 피해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 었다. 검을 든 놈의 말도 안 되는 강함도 이해가 가질 않았고, 조공에 적중 당했는데 멀쩡한 놈도 이해가 안 갔다. 상식적으로 어떻게 저런 인간들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중경쌍흉은 억울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해 미치고 팔짝 뛰기 직 전의 상태였다. "사제가 저 자를 맡아!" 저들의 공격이 선주혁에게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남지학 은 풍이를 가리켰다. 그의 상처가 더 깊은 만큼 사제가 상대하기 더 쉬울 거라 생각한 것이다. 선주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지학이 또다시 먼저 신형을 움직였고, 뒤이어 선주혁도 몸을 움직였다. "흥! 애송이들이 득수를 했다고 겁을 상실했구나!" 풍이는 등의 상처에 인상을 쓰면서도 기세를 잃지 않았다. 상대 가 무쇠 같은 몸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상 선기를 빼앗 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선주혁은 서서히 걸음을 옮기다가 갑작스레 암영풍을 전개했다. 백발의 애송이가 이토록 빠른 신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지 못했 던 풍이는 기겁을 하고 손을 내밀었다. 선주혁 역시 물러서지 않고 일수를 펼쳤다. 무진진인과 암영수를 배합한 극쾌의 일수. 퍼억 분명 손을 먼저 내민 것은 풍이였으나 도착한 것은 선주혁의 손이 먼저였다. "커억!" 가슴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충격에 풍이는 뒤로 물러서며 비틀거 렸다. 선주혁 본연의 내력이 아니라 묵연수투의 효능이 작용을 했 기 때문이다. 그의 신음성을 들은 풍일은 대경했다. 고작 일 초식을 나눴을 뿐인데 동생의 신음성이 터져 나온 것이 다. 부상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말이 안 되는 일이다. '검을 든 놈보다 백발의 시커먼 놈이 더 위험한 놈이었단 말인가?' 동생과 상대하는 놈이 상상을 초월하는 무공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그의 심기를 어지럽혔다. 그것은 곧 결과로 드러났다. 남지학이 전개하는 검술의 괴이막측한 변화에 손발이 엉키기 시 작한 것이다. 상황이 안 좋기로는 풍이 쪽이 더했다. 한 번 가슴을 강타해 놓고 선주혁이 교묘한 신법으로 계속 피해 다니기만 하는 것이다. 애송이에게 단 일수에 패색을 보였다는 사실에 풍이는 모든 고 통을 잊을 만큼 분노하고 있었다. 상대의 손이 상상을 초월할 정 도로 빨랐다는 사실도, 무쇠와 같이 단단한 몸을 가졌다는 사실도 까맣게 잊은 채 머리통을 부숴버리겠다는 욕구만 불태우고 있는 것이다. 계속해 도망치듯 피해 다니면서 선주혁은 내심 웃음을 머금었다. '이게 일류 고수라는 놈들의 태도냐고? 고수면 고수일수록 평정 심을 유지해야지. 하여튼 엉터리 작가 놈의 설정이란……!' 엉뚱하게 이런 캐릭터들을 만들어낸 작가를 비웃으면서도 선주 혁은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다. 이런 식이 아니라면 쉽사리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성을 잃고 덤벼드는 풍이가 우수를 크게 당겼다가 앞으로 내 뻗으려는 순간, 선주혁은 방금 전과 동일한 방법으로 손을 내밀었다. 풍이 역시 바보는 아니었다. 아무리 이성을 잃고 덤비고 있다 해도 백전노장의 고수. 이번에는 몸을 크게 비틀어 선주혁의 손을 옆으로 흘리려 했다. 그 순간 허공에서 교묘히 방향을 바꾸는 선주혁의 손. 퍼억 퍽 두 사람의 신형이 거의 동시에 흔들렸다. 풍이의 독수리 발톱 같은 손이 선주혁의 어깨를 잡아챘으나 선 주혁의 손이 방향을 바꿔 풍이의 팔을 쳐버린 것이다. 통증을 이기지 못하고 선주혁의 어깨를 놓친 풍이. 선주혁의 우수가 다시 한 번 풍이를 노리고 날아갔다. 퍼억 두 번째 가슴을 가격당한 풍이의 입에서 짙은 색의 피가 튀어나 왔다. 연이은 공격에 급기야 내상을 입고 만 것이다. "아뵤오오오오오!" 자신의 신체를 믿고 어깨를 내 준 것은 뒤 실초를 날릴 준비했 던 작전이 제대로 먹혀들어가자 선주혁은 기묘한 괴성을 냈다. 욱신거리는 어깨의 통증을 티내지 않기 위한 행동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기쁜 마음에 영화에서 본 브루스 리의 흉내를 낸 것이 었다. 가볍게 스텝을 밟고, 엄지로 코끝까지 튕겨주는 선주혁. 그의 행동은 풍이의 화를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르게 했다. 괴이 한 행동으로 자신을 조롱하는 거라 생각한 것이다. 풍이는 내상을 도외시하고 자신 스스로 상의를 찢어 발겼다. '저 늙은이가 이제는 발작을 하는군.' 풍이의 괴이한 행동을 본 선주혁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는 모르고 있었다. 중경쌍흉의 높은 명성이 단지 그들의 조공에만 있지 않다는 사실을. Vol 7. 중경쌍흉이 본격적으로 무림에 명성을 떨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십여 년 전부터라 할 수 있었다. 이전에도 뛰어난 조공과 신법, 그리고 잔인한 심성으로 유명하긴 했지만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정도(正道)의 유명한 고수가 등장이라도 할라치면 도망다니기 바빴고, 약자들을 골라 괴롭히는 것으로 더 유명했던 것이다. 하지만 십여 년 전 두 사람이 잠원기폭(潛元起爆)이라는 기공(奇 功)을 익힌 후로는 양상이 달라졌다. 이백 여 년 전 무림을 공포 의 도가니로 몰고 갔던 괴이한 무공. 그것인 잠원기폭이었다. 인간이 가진 원정지기(元精之氣)를 끌어내어 실전에 응용하는 괴공 중의 괴공이 바로 잠원기폭이었다. 흑도, 사파에 속하는 고수 들은 대부분 정도에 속하는 고수들의 정순한 내력을 부러워한다. 마공이나 사공이라 불리는 것들은 익히는 속도가 빠르다. 하나 갖가지 부작용과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면 발전 속도가 더뎌져 종 국에 가서는 정도의 고수들에게 뒤처지게 되는 것이다. 이는 심성이 올곧지 않은 사파의 인물들이 단체를 이루고 존속 하기에 쉽지 않기에 더욱 그랬다. 이합집산(離合集散)이 잦기에 하 나의 심법을 오래도록 발전시킬 여건이 성립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유구한 역사를 갖지 못한 사파의 고수들은 정파에 비해 일천한 내력을 갖기 마련이었고, 그와 같은 현상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은 끊임이 없었다. 기병이나 신병을 탐내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런 사파 고수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준 것이 바로 잠원기폭이 었다. 사파에 속하는 몇몇의 고수들만 익혔다고 알려진 잠원기폭 은 원정지기를 이용해 내력을 증강시키는 효능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한 번 사용할 때마다 수명이 격감하는 부작용이 있음 에도 흑도의 고수들은 잠원기폭을 익히고자 애를 썼다. 싸움 중에 죽느니 잠원기폭을 이용해 위험을 벗어나는 것이 그들에게는 이익 이었던 것이다. 중경쌍흉 역시 오랜 노력 끝에 잠원기폭의 심법을 익힐 수 있었 고, 그들의 명성이 급작스레 무림을 진동시키게 된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풍이는 잠원기폭을 운용하여 자신의 원정 기기를 끌어올리고 있는 중이었다. 한 순간 내력이 증강되자 풍이의 눈에서는 형형한 안광이 넘실 거렸다. 선주혁은 승승장구하는 분위기에 쾌재를 부르고 있다가 상대방 에게서 압도적인 기세가 느껴지자 얼굴을 굳혔다. '뭔가 달라졌다! 이놈들도 슈퍼 사이언인처럼 뭔가 달라지는 건가?' 소설에서는 중경쌍흉에 대한 자세한 언급이 없었다. 그렇기에 선주혁은 순간적으로 풍이의 몸에서 일어난 변화를 이해하지 못하 는 것이다. "내 수명이 줄더라도 네놈만은 갈가리 찢어죽이고 말겠다!" 악다문 이빨 사이로 흘러나오는 풍이의 음침한 목소리. 선주혁이 눈을 크게 떴다. "잠원기폭공!" 풍이가 수명 운운하는 것을 듣고서야 소설에서 본 무공 이름이 떠오른 것이다. '젠장, 이 놈이나 저 놈이나 다 익히고 있다는 건가?' 선주혁은 바짝 긴장을 하고 신형을 움직였다. 본래 내력의 배 이상을 발휘하게 만드는 잠원기폭공이었다. 앞서 저들의 손가락에 담겨진 힘을 감안해볼 때 자신의 몸이라 해도 자칫 상하게 될 가 능성이 있었다. 파앗 풍이의 신형도 함께 움직였다. 등에서 흐는 피가 하나의 선을 만들어내며 늘어졌다. '헙!' 선주혁이 헛바람을 들이키는 사이 풍이는 이미 그를 따라잡고 있었다. 슈우우웃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선주혁의 팔목을 잡아오는 풍이 조법. 선주혁은 재빨리 팔을 회전시켜 기묘한 각도로 피해냈다. 무진진인이 전개한 수법을 피하는 데에 사용한 것이다. 풍이는 나직하게 코웃음을 치며 다른 한손으로 선주혁의 가슴팍 을 노렸다. 선주혁은 신형을 뒤로 뽑으며 좌수로 풍이의 손을 마주쳤다. 퍼억 두 사람의 손이 마주치며 강맹한 힘이 선주혁을 덮쳤다. '큭!' 손목이 아려올 정도의 충격이었으나 충돌로 인해 선주혁은 보다 빠르게 뒤로 물러설 수 있었다. "어딜!" 까마귀 울음소리 같은 풍이의 외침이 튀어나오고 그의 손이 풍 차처럼 회전해 선주혁의 전신요혈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상반신에서 하반신에 이르기까지, 풍이의 공격은 다채롭고 위맹 했다. 그의 손끝에서는 이는 경기만으로도 선주혁의 의복이 찢어질 듯 나풀거리고 있었다. 선주혁은 이를 악물고 신형을 움직였다. 그가 전력을 다해 암영 풍을 전개하는 터라 풍이도 쉽사리 따라잡지는 못했다. 거의 다 따라잡았다 싶으면 상상을 초월한 속도의 공격이 튀어 나오고 그 것을 잡을라치면 기기묘묘한 변화를 만들어내 피해내곤 했다. 풍이는 잠원기폭공을 사용했음에도 선주혁을 쉽사리 처리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극도로 분노하고 있었으며 자신이 아는 모 든 절초를 쏟아냈다. 다급한 와중에도 선주혁은 풍이의 진기가 운용되는 흐름을 놓치 지 않고 있었다. 잠원기폭공으로 증폭된 탓인지 풍이의 전신에서 는 패도적인 기세가 넘쳐흘렀고 그것을 느끼기란 어려운 일이 아 니었다. 너무나 확연한 진기의 운용인지라 초식과 흐름이 선주혁의 머릿 속에 각인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선주혁이 눈썹이 빠져라 도주하는 동안 수차례에 걸쳐 혈응조 (血鷹爪)라는 중경쌍흉의 성명절기가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느 한 순간 입에서 괴이한 소리를 쏟아낸 풍이의 신형 이 급속도로 늘어나며 선주혁을 따라잡았고, 그의 날카로운 조법 이 선주혁의 심장부위를 잡아왔다. 선주혁은 다급히 팔을 휘둘러 풍이의 공격을 막아내려 했다. 하나 선주혁의 수비법 역시 계속해서 반복되는 상태. 풍이 역시 매번 같은 수법에 당할 위인이 아니었다. 가슴을 노리던 팔을 급격히 접어 다시 노린 곳은 선주혁의 팔꿈치. 풍이의 손가락은 선주혁의 곡지혈(曲池穴)을 강하게 가격했다. "아!" 절로 비명이 나올 정도의 통증이었다. 팔꿈치에서 마치 전기가 오르는 듯한 느낌이 오며 일순간 팔 전 체가 마비되었다. 그 사이 풍이의 갈고리 같은 손가락이 선주혁의 손목을 낚아챘 고, 다른 한 손이 어깨 바로 아래쪽에 있는 천부혈(天府穴)을 중심 으로 감싸 쥐었다. 풍이는 아예 선주혁의 팔 자체를 분지르려는 것이었다. 선주혁의 얼굴이 고통에 겨워 일그러지는 순간이었다. 풍이의 충혈 된 눈이 있는 대로 크게 떠졌다. 손가락을 타고 상대의 천부혈을 통해 빠져나가는 막대한 진기를 느낀 것이다. 한 순간 놀란 풍이가 재빨리 손을 거두려 들었으나 마치 아교를 잔뜩 발라 붙인 것처럼 그의 손가락은 떨어질 생각을 안했다. 풍이의 머릿속을 강타하는 불길한 기억. 그것은 전설 속의 무공, 흡성대법에 대한 것이었다. '마, 말도 안 돼……! 쇠뭉치 같은 몸에 흡성대법까지라니!' 흡성대법에 대한 갖가지 소문을 들었다. 온몸의 정혈을 다 빨려 목내이(木乃伊)처럼 변해 죽는다는 말도 있었고, 정기가 사라져 먼 지처럼 흩어진다는 말도 있었다. 실상과는 다른 소문이었으나 수백 년간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 지 않아 그저 전설로만 떠도는 무공으로 여긴 것이 흡성대법이었 다. 그런 흡성대법에 자신이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자 풍이는 한순 간 공포에 젖어버린 것이다. 선주혁은 선주혁 나름대로 곤란함을 겪고 있었다. 계속되는 풍 이의 진기운용을 통해 진기의 성격을 파악하고 나름대로 조절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하나 흡입되는 진기의 양이 지나치게 막대했다. 태어나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엄청난 양의 진기가 노도처럼 밀려들어오자 그것 을 주체하기 버거웠던 것이다. 흡성대법의 구결대로 순응하고, 정화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했으나 아직까지 그가 흡수할 수 있는 양에는 한계가 있었고 그 속도는 더디기만 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 꼼짝 조차 하지 못하고 목석(木石)처럼 서 있는 상황에 접어들었다. 한편 남지학과 풍일의 대결도 점차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옆구리의 통증을 억지로 참아내고 대전을 하고 있음에도 한 번 잃은 선기를 되찾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남지학의 검법이 너무나 변화무쌍하게 몰아쳐 왔기 때문이다. 위기감에 잠원기폭공을 끌어 올리려 했으나 그나마도 틈이 없었 다. 질풍처럼 몰아치는 검세를 피해내기에도 바빴던 것이다. "크아아악!" 궁지에 몰린 풍일의 주름진 입이 쩍 벌어지며 괴성이 튀어나왔다. 날카롭게 세운 그의 손가락이 허공을 마구 찢어 발겼다. 그것은 마치 초식을 포기하고 최후의 발악을 하는 것으로 비춰졌다. 남지학은 서슴없이 검을 내찔렀다. 그의 검이 풍일의 어깨를 꿰뚫는 순간 풍일의 쇠갈고리 같은 손 가락이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큿!" 남지학은 검을 회수해 뒤쪽으로 물러서야만 했다. 풍일은 처음부터 어깨를 내줄 각오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지학이 물러선 짧은 순간. 그것이 필요했기에. "타합!" 풍일이 기합을 내뱉으며 잠원기폭공을 끌어올렸다. 남지학은 틈을 주지 않고 무극삼검식 중 제 이 초식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상대의 기도가 크게 변한 것을 감지한 것이다. 무극삼검식의 이 초식은 막대한 진기의 소모를 가져온다. 선주 혁과 함께 자신이 상대해야할 자들이 앞으로 얼마나 많을지 모르 는 일이었다. 가급적 체력의 안배를 해야 할 시점이었기에 일 초 식만으로 승패를 결정지으려 한 것이다. 하지만 패도적인 기세를 한 순간에 뿜어내는 풍일을 보는 순간 남지학은 결단을 내렸다. 지금껏 상대의 상처와 선기를 잡아 대결 을 이끈 것과는 전혀 다른 양상의 싸움이 벌어질 것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그리고 풍일의 입에서 복잡한 감정이 담겨진 외침이 튀어 나왔다. "검기!" 남지학의 검이 희뿌연 안개와 같은 것에 의해 한자는 족히 늘어 났던 것이다. 풍일은 혼이 쏙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설마 이렇게 어린 애송이가 검기를 뽑아낼 줄이야 어찌 상상했 겠는가. 애써 끌어올린 잠원기폭공이었으나 그는 결심을 굳혔다. 아무리 내력이 증폭되었다 하더라도 조공으로 검기를 상대할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차원이 다른 무공을 상대할 만큼 어리석은 그가 아니었다. 그는 최대한 빠르게 몸을 뽑아 도주를 하려 했다. 중경쌍흉이라는 별호로 오랜 세월동안 명성을 쌓아온 풍일이 체 면도 생각지 않고 도주하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한 남지학이었다. 풍일의 의도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삼장여의 거리가 벌어져 있었 고 잠원기폭공에서 비롯된 폭발적인 내력으로 땅을 박차는 풍일을 쫓기란 쉽지 않았다. 풍일은 거리를 확보하자 동생에게 도주할 것을 말하고자 했다. 고개를 돌려 소리를 지르려는 순간 그는 보았다. 기댈 곳 없는 지푸라기처럼 쓰러지는 동생의 모습을……. "이아(二兒)!" 하나뿐인 쌍둥이 동생의 죽음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게 만들 었고 그로 인해 진기는 흐트러졌다. 그 순간을 놓칠 남지학이 아니었다. "케에에엑!" 까마귀의 비명과 같은 괴성이 숲 사이에 메아리쳤다. 남지학의 검기가 그의 허리를 동강낸 것이다. 둘로 갈라진 풍일의 시신을 확인하지도 않고 남지학은 창백한 얼굴을 사제에게로 돌렸다. 온 신경을 싸움에 집중하고 있었기에 선주혁과 풍이의 싸움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살피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제." 남지학의 얼굴이 미소가 떠올랐다. 선주혁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조식을 시작하는 모습을 봤기 때 문이었다. 그는 선주혁이 풍이와의 격전 끝에 또다시 내상을 입었다고 생 각했다. 쓰러져 죽어 있는 풍이의 얼굴이 원래보다 한참 늙어 보 이긴 했지만 잠원기폭의 부작용 정도로 생각한 것이다. 사실 흡성대법에 당해 진기를 뽑힌다 해도 겉으로는 아무런 증 상이 드러나지 않는다. 풍이의 경우는 잠원기폭으로 인해 원정지 기까지 흡수 당했기에 더 늙어 보이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비록 잠시라지만 검기를 사용하는 것은 극심한 내공소모를 불러 온다. 자신 역시 피로하기 그지없었지만 남지학은 감히 조식을 취 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운공 중에 또 다시 묵연수투를 노리는 자들과 만나면 낭패였기 때문이다. 그는 선주혁의 옆에 앉아 묵묵히 호법을 섰다. 한편 선주혁은 풍이의 내력과 실로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었다. 잠원기폭으로 인해 엄청나게 불어난 내력을 한꺼번에 흡수했으니 중단전에 해당하는 해성에서 일시 간 내력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 이다. 만약 선주혁의 신체가 평이한 것이었다면 무리한 내력의 흡수로 인해 혈맥과 경락이 터져나가 죽었을 수도 있는 상황. 하지만 특수하게 변해버린 선주혁의 신체는 이와 같은 상황에서 도 튼튼히 버텨내고 있었다. 이전에 백화란을 습격했던 중년인의 내력을 흡수했을 때의 경험으로 침착하게 대처해 나가는 선주혁. 그 때보다 당황하지 않고 있었기에 선주혁은 풍이의 진기가 자 신의 것으로 화하는 과정을 면면히 살필 수 있었다. 그것은 선주 혁이 순천운성의 단계에 확실히 들어가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 몸 으로 느끼는 것 이상의 수련은 없었던 것이다. 이로서 선주혁은 흡성대법에 대한 이해가 한층 깊어졌고, 그에 따라 조절이 가능해졌다. 즉, 원하는 때에 흡성대법을 펼치고 거둘 수 있는 경지가 된 것이다. 약 한 시진하고 반 정도가 지났을 때 그는 눈을 뜨고 조식을 중 단할 수 있었다. 완벽하게 풍이의 내력을 다 흡수한 것은 아니었 지만 무공을 펼치고, 활동하는 데에는 지장이 없을 정도의 상태로 만든 것이다. 언제 어디서 어떤 놈들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상황에 한없이 시 간을 투자해 내력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 이다. 눈을 뜨자마자 남지학의 반가운 표정이 보였다. "사제, 괜찮은 거야?" "아, 넵. 이 정도야……, 뭐." "하! 다행이군. 사마횡천의 심법이 몸을 단련하고 상세를 치유하 는 데는 특효가 있나보네." 남지학은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게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선주혁 을 보고 큰 내상을 입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얼마 시간이 지나 지 않아 안색이 돌아오고 기식이 안정되니 상세 치유에 특효가 있 는 심법이라 생각한 것이다. "하핫, 네." 남지학을 향해 웃어준 선주혁의 얼굴이 갑자기 딱딱하게 굳어졌다. 풍이의 시신이 그의 망막에 맺힌 것이다. "……!" 선주혁이 눈을 고정시킨 채 움직이지 않는 모습을 본 남지학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첫 번째 살인. 지난번에 선주혁의 위로가 큰 도움이 되긴 했지만 그저 상상 속 의 살인과 실제와는 천양지차가 났다. 자신의 손에 의해 누군가가 죽는다는 것은 처음 경험하는 자에게 있어서는 일종의 충격과도 같은 일이었다.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어. 죽어 마땅한 자였으니까." 남지학은 선주혁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선주혁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까지 자신이 살인을 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곳에 한없이 머물러 있을 수는 없어. 빨리 이동하자고." 남지학의 말에 선주혁은 조금 느린 반응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지학이 앞서 움직이고 선주혁은 풍이의 시신을 한 번 힐끗 본 다음 그 뒤를 쫓았다. 남지학은 일부러 자리를 피하는 것이었다. 스스로도 알고 있었 다. 자신의 손에 죽은 자의 얼굴을 보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 지. 첫 살인을 하고 나면 밤마다 꿈에서 죽은 자의 얼굴을 본다. 원한 가득한 얼굴로 자신의 생명을 돌려달라고 말한다. 그리고 복 수를 하겠다고 울부짖기도 한다. 남지학 역시 그런 악몽에 시달린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더욱 빨리 자리를 피한 것이다. 선주혁의 뇌리에 풍이 의 얼굴이 각인되기 전에……. 남지학은 피로를 무릅쓰고 속도를 높여 달렸고 선주혁은 침울한 표정으로 그 뒤를 쫓았다. 말로는 죽이네 살리네 한 적은 많았다. 하지만 눈을 까뒤집고 죽어간 풍이의 모습은 끔찍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기괴한 웃음을 흘리며 날뛰던 자가 창 백하다 못해 파리한 안색으로 엎어져 있는 모습. 당장이라도 벌떡 일어나 자신에게 덤벼들 것만 같은 표정. 그리고 허공을 향해 부릅뜬 두 눈. 모든 것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주제넘게 사형에게 충고를 했던 자신이 생각났다. 그리고 씁쓸 한 미소를 지어야만 했다. 또 다른 생각도 났다. 소설 속에서 툭하면 자비네 어쩌네 하면서 목숨을 취하지 않던 주인공들을 보며 화를 내던 자신이 말이다. 콱 죽여 버리지 그걸 왜 살려주고 X랄이냐며 책장을 구기곤 했던 자신. 하지만 정작 자신의 손으로 직접 살인을 하고나자 그런 자신이 부끄러웠다.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다는 것이 이토록 심각하고 괴로운 일인지 미처 몰랐던 것이다. '젠장! 어차피 내 손이 아니라도 죽어야할 놈이었어! 그렇다고 내 목숨을 내줄 수는 없었던 거잖아! 안그래, 선주혁?' 그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며 앞으로 쭉쭉 뻗어나갔다. '그리고 제 스스로 무덤을 판 거잖아. 그 순간까지만 해도 난 내 력을 흡수하는 것을 조절할 능력이 없었다고. 어쨌거나 내 잘못이 아냐! 아니고말고!' 이렇게 흔들려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을 잘 아는 그였다. 앞으 로 무수한 무림인들이 묵연수투를 노리고 덤벼들 것이다. 그 때마 다 살인에 대해 고민하고 주저하게 되면 자신의 목숨은 죽은 것과 다름없었다. 신투의 은신처에서 제대로 한탕(?)했는데 써보지도 못하고 죽을 수는 없었다. 스스로 죽음의 고비를 넘겼기 때문인가. 선주혁은 냉철하고 빠르게 살인에 대한 충격에서 벗어나고 있었 다. 본인의 부단한 노력과 함께. "멈춰라!" 또다시 앞을 가로막은 한 무리의 사람들. '또 왔냐?' 풍이를 죽인 다음 날. 이들에 앞서 묵연수투를 노리는 몇몇을 남지학이 가공할 검술로 위협해 돌려보냈다. 그리고 채 반나절이 지나기도 전에 또 다시 무림인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생활을 몇 달 동안 해 온 남지학이 새삼스레 대단해 보였다. "드디어 공범과 합류했구나." 백의장포를 입은 청수해 보이는 중년인이 선주혁의 용모를 힐끗 보더니 말했다. "누가 범인이라는 말이오?" "흥! 저기 공범이 묵연수투를 끼고 있을진데 아직까지도 시치미를 떼겠단 말이냐?" 중년인은 수염을 쓰다듬던 손을 멈추고 버럭 호통을 질렀다. 마 치 말썽을 피우는 아이에게 훈계를 내리는 듯한 태도였다. "우리는 지금 백가장으로 가고 있소이다. 저 장갑을 돌려주기 위해 말이오." 남지학은 담담하게 중년인의 호통을 받아쳤다. "흥! 끝까지 반성을 할 줄 모르는 놈이로고! 대체 뉘 앞이라 거 짓된 망발을 일삼는 게냐?" "누가 앞에 있건 진실만을 말할 뿐이외다." '오! 사형, 많이 컸는데!' 선주혁은 눈썹하나 흩트리지 않고 태연하게 받아치는 남지학이 대견하기까지 했다. 원래의 소설대로라면 구구절절 자신의 사연을 설명하고, 믿어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을 그였다. 한데 저토록 짧고 냉철한 모습을 보이다니. '터프한걸! 역시 내가 잘 교육을 시킨 셈이 되는 건가?' 남지학의 성격에 큰 변화가 생기고 그의 운명이 바뀌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보아하니 지금의 성격이나 태도가 이전에 비해 훨씬 마음에 드는 선주혁이었다. "저, 저 버릇없는 녀석. 이분이 어떤 분이신줄 알고 그렇게 고개 를 빳빳이 세우고 대드는 것이냐?" 중년인의 옆에 있던 쥐꼬리 수염의 사내가 남지학에게 소리를 버럭 질렀다. "누구건 그게 무슨 상관이오? 우리는 수투를 백가장에 돌려주려 갈 뿐,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니니 누구건 방해할 생각은 마시오." "저런 망나니 같은 놈. 저러니 사기행각에 도둑질이나 하고 다니지." "말조심 하시오!" 남지학이 두 눈에 힘을 주고 언성을 높였다. 그 기세에 쥐꼬리 수염은 재빨리 목을 움츠렸다. "이, 이놈아! 이분은 그 유명한 사천의 영웅이신 상관벽우(上官 碧宇) 대협이시다. 어서 도둑질한 물건을 내려놓고 죄를 고하지 못할까?" 쥐꼬리 수염의 말에 중년인은 다시금 턱을 들고 수염을 쓰다듬 기 시작했다. '상관벽우……, 상관벽우라…….' 선주혁은 재빨리 소설 속의 내용을 더듬었다. "아! 정영검(正英劍) 상관 대협이셨군요." 정영검은 사천일대에 유명한 무인이었다. 반듯한 성격과 협의지 도(俠義之道)를 걷는 영웅으로 널리 알려진 자였다. 남지학이 자신을 알아보는 듯하자 상관벽우의 표정에는 더욱 자 부심이 깃들었다. "대협이시라면 저희의 사정을 이해주시리라 생각합니다. 저희는 진정으로 이 물건을 백가장에 돌려줄 목적이니 대협께서 물의를 막아주십시오. 만약 저희가 정히 못미더우시다면 백가장까지 동행 하셔도 됩니다." 남지학의 당당한 표정과 어투를 본 상관벽우의 얼굴에 이채가 감돌았다. 그의 언행에서는 거짓이 조금도 엿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 녀석……! 진심이란 말인가?' 상관벽우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말을 하면서 기세를 돋운 남 지학에서 느껴지는 것은 정명함이었다. 그리고 그 기세는 남달랐다. 어지간한 고수를 넘어서는 기도. 이는 눈앞의 청년이 절정의 경지를 밟은 고수임을 엿볼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찰나의 순간 그의 눈에 번득임이 스쳐지나갔다. 상관벽우는 느린 걸음으로 남지학에게 다가갔다. "대협, 위험한 놈들입니다." 쥐꼬리 수염이 놀란 표정으로 상관벽우에게 소리를 질렀다. 상관벽우는 뒤쪽으로 고개를 돌려 여러 무림인들에게 미소를 지 어줬다. 걱정하지 말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남지학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 모두가 들을 수 있을 정도 의 크기로 말을 시작했다. "흠…… 아무래도 잘못을 뉘우치고 개과천선(改過遷善)을 하려 는 모양이군. 여기 모이신 모든 분께서는 의협의 기치를 가슴에 품고 계신 영웅들일세. 자네가 확고히 반성의 의지를 보이니 모든 분들께서도 이해를 하실 걸세." 상관벽우의 어깨너머로 수군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하! 저런 놈들을 용서해주신단 말인가?" "역시 정영검 대협이시군." "저런 쓰레기들에게까지 관용을 베푸시다니……." 무림인들의 칭송을 들으며 상관벽우의 입가에는 미소가 짙어졌 다. "지금껏 상하게 한 사람들이나 목숨을 잃은 사람들에 대해서 책 임을 져야하겠으나, 너무 염려치 말게. 내가 정영검의 이름을 걸고 자네들을 보호해 주겠네." 상관벽우의 호방한 말에 남지학은 크게 감탄했다. 처음의 거만 한 표정으로 인해 거부감을 느꼈었다. 하지만 표정이 중요한 게 아니지 않은가. 그간 겉으로는 정도인인 척 하며 탐욕스러운 내심을 드러내길 주저하지 않았던 많은 인물을 보아온 남지학이었다. 그렇기에 지 금 상관벽우의 행동은 실로 감탄할만한 것이었다. "실로 대협다운 풍모이십니다. 사제와 저는 대협께 깊이 감사드 립니다." 양손을 마주잡아 포권을 취하는 남지학. 그 순간 선주혁은 상관벽우가 누군지 기억해냈다. 그가 막 입을 열어 남지학을 부르려던 순간. "크흑!" 난데없이 상관벽우가 가슴을 부여 쥐며 뒤쪽으로 물러섰다. 모든 사람들은 영문을 몰라 눈을 크게 떠야만 했다. 멀쩡히 인사를 받던 상관벽우가 괴로운 신음성을 터뜨렸기 때문 이다. 심지어 막 포권을 풀려던 남지학 역시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상관벽우가 힘겨워 보이는 동작으로 손을 들어 남지학을 가리켰다. "네, 네놈이…… 암수를 쓰다니!" 쥐어짜듯 말하는 상관벽우. 그 말을 들은 무림인들은 분노를 금치 못하며 각자의 병기를 뽑 아들었다. "내가 언제 암수를 썼단 말입니까? 뭔가 오해가……." 남지학은 황망히 자신이 손을 쓰지 않았음을 밝히려 했다. "저런 금수(禽獸)만도 못한 놈! 아직까지도 혓바닥을 놀리는구나." "은혜를 베푸시려던 대협께 암수를 쓰다니!" "쳐 죽일 놈들이로구나!" "어서 저 사악한 종자들을 죽입시다!" 순간 당황해하는 남지학. 선주혁이 그의 소매를 잡았다. 고개를 돌린 남지학은 고개를 젓는 사제의 표정을 보았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원작속의 남지학이라면 끝까지 진실을 밝혀내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남지학은 달랐다. 선주혁의 표정을 보고 이 모든 게 위선(僞善)의 탈을 쓴 상관벽 우의 계략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단지 말로서 해명할 수 없는 상 황으로 접어들었다는 것으로 결론을 지은 것이다. 남지학은 서슴없이 검을 뽑아들었다. "위선자의 수작에 놀아나는 것을 탓하지는 않겠소. 하지만 이 남모를 막아서려면 죽음을 각오해야할 것이오!" 남지학은 목소리에 내력을 실어 외쳤다. 묵연수투를 훔친 자들이 한눈에 봐도 애송이인지라 간악한 암습 만을 조심하면 될 거라 생각했던 군중들이었다. 그들은 믿기 힘들 정도로 심후한 내력을 담은 남지학의 음성에 주춤하지 않을 수 없 었다. 그 때 힘겨운 음성이 군웅들의 귀에 생생히 파고들었다. "암습이었다고는 해도…… 저…… 저자는…… 상당한 고수……. 모두…… 피…… 하시오." 상관벽우였다. '저런 개X끼. 실제로 보니까 더 열 받네?' 선주혁은 뒤늦게 상관벽우의 위선적 성격을 기억해내고 그의 간 교한 수작에 분노했다. 그 사이 무림인들은 모두가 무기를 고쳐 쥐고 전의(戰意)를 가 다듬었다. 피하라는 상관벽우의 말이 오히려 그들을 자극했던 것 이다. 스스로의 안위도 생각하지 않고 자신들을 위하는 정영검의 모습 이 아닌가. 그런 대협의 풍모가 몇몇의 가슴속 정의감을 자극했으며, 몇몇 은 정도인으로서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등을 돌릴 수 없다는 체면 으로 인해 전의를 불태울 수밖에 없었다. "저런 놈들에게는 강호의 도의도 필요 없소이다. 모두 저 악랄한 놈들을 죽입시다!" "간적(奸賊)을 죽여라!" "죽여!" 누군가의 외침. 그것이 시발이 되어 사십여 명에 달하는 무림인들이 한 순간 뜨 거운 기운에 휩싸였다. 협의지심의 발로인지, 군중심리인지, 아니 면 모두가 함께 광기(狂氣)에 휩싸인 것인지는 몰랐다. "사제, 조심해!" 남지학은 검을 고쳐 쥐며 짧게 외쳤다. "걱정하지 마세요." 선주혁도 짧게 대답한 후 암영풍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신법과 단단한 신체, 그리고 풍이에게서 흡수한 내력으로 인해 그는 자신감이 넘치는 중이었다. 사실 스스로도 주체하지 못할 힘 에 곤란할 정도였다. 만약 남지학과 계속해서 신법을 전개해 달려 오지 않았다면 갑작스럽게 늘어난 내력에 적응하지 못해 낭패한 상황을 여러 번 겪었어야 할지도 몰랐다. 남지학은 마치 성난 호랑이가 늑대무리를 헤집고 다니듯 군중의 중심으로 파고들었다. 그가 전개하는 것은 곤륜파의 대표적 검법 중 하나이 진류오행검이었다. 오행의 기운에 전개되는 진류오행검은 공수가 안정되어 있어 다 수의 적을 상대하기에 적합했다. "곤륜파의 초식이다." 견식이 넓은 자가 남지학의 검법을 알아보고 크게 외쳤다. "끝까지 가증스러운 모습을 보이는구나!" 또 다른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남지학에게 공격이 쏟아졌다. 남지학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침착하게 검을 휘둘렀다. 아무 리 냉정하고 단호한 성격으로 변화가 있었다 해도 아직까지 천품 은 변하지 않은 듯 그의 검술에는 자비가 담겨져 있었다. 수차례 목숨을 빼앗을 기회가 있었음에도 적당한 부상만을 입혀 물러나게끔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남지학은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 진정한 위기가 닥친다 면 결국 상대의 목숨을 빼앗아야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제 는 결코 망설이지 않을 거라는 것을. 한편 선주혁은 암영풍을 전개해 군중들의 외곽을 돌고 있었다. 실제로 묵연수투를 가진 게 그인지라 무림인들은 그를 잡고자 했 으나 워낙 표홀(飄忽)한 신법인지라 쉽지 않았다. "신투! 신투의 신법이다!" 누군가 선주혁의 신법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내가 어딜 봐서 쭈글탱 늙다리로 보인다는 거냐?' 선주혁은 잊고 있었다. 신투의 얼굴을 자세히 본 사람이 강호에 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선주혁은 목소리를 지른 자 쪽으로 몸을 날렸다. 이름만 들어도 혈압이 오르는 자와 자신을 혼동했다는 사실이 기분 나빴던 것이 다. 단정하게 머리를 빗어 올린 오십대 가량의 중년인에게 질풍처럼 달려가는 선주혁. 중년인은 상대가 신투라 단정 지어 버렸다. 신투의 신법은 강호 상의 절기로 알려져 있으나 정작 그 무공은 형편없다는 것을 잘 아는 그. 물러서지 않고 과감히 검을 내질렀다. 카앙 날카로운 금속성과 함께 튕겨져 나가는 검. 중년인은 검신을 타고 전해지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검병을 놓치고야 말았다. 풍이에게 흡수한 내력과 묵연수투가 만들어낸 현상이었다. 중년인이 망연해하는 사이 선주혁의 손바닥이 가볍게 그의 어깨 를 후려쳤다. "크헉!" 답답한 신음성을 터뜨리며 중년인의 신형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무려 삼장이나 뒤쪽으로 날아가 피를 토하는 그의 모습을 본 군중 들은 경악해야만 했다. "묵연수투의 위력을 조심하시오!" 선주혁의 일장에 얼굴에 공포를 떠올리는 군중들의 귀를 파고드 는 상관벽우의 음성이었다. 군중의 심리란 참으로 묘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선주혁의 일 장이 가진 위력에 움츠려들었던 그들이었다. 한데 묵연수투라는 이름이 들리고, 수투의 엄청난 위력을 보자 다시금 그들의 마음속 에 탐욕의 불길이 치솟는 것이다. "수투를 빼앗아야 하오!" 소리를 지른 자는 검극으로 기묘한 도형을 그려내며 선주혁을 찌르려 했다. 선주혁은 가볍게 손을 내밀어 검신을 잡았다. 공공문의 금나수가 내력의 뒷받침을 받아 그 효능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런……!" 묵연수투의 효능으로 검신을 쥐고도 손이 멀쩡한 것을 보고 당 황하는 순간. 쩌엉 놀랍게도 선주혁의 손에 잡혔던 검신의 가운데 부분이 부러졌다. 선주혁이 풍이에게서 배운 혈응조법을 시험해 본 것이다. 그 위 력은 실로 뛰어나 청강장검(靑鋼長劍)을 부러뜨릴 수 있었다. '브라보! 이거 쓸 만한데?' 선주혁은 처음으로 써 먹은 수법이 직효를 거두자 희희낙락했 다. 그 사이 검으로 선주혁을 공격했던 자는 검을 손에서 놓고 뒤 로 물러섰다. 자신의 상대가 아님을 직감했던 것이다. 뒤늦게 그것을 본 선주혁이 생각했다. '이거 도망 다닐 판이 아니잖아?' 스스로의 실력에 확신이 없었던 선주혁은 예상보다 자신이 훨씬 강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좋아, 다들 죽었다고 복창해라!' 선주혁은 탐욕스런 눈빛을 번득이며 달려드는 군웅들을 마주해 갔다. 이번 기회에 중경쌍흉 중 한 명에게서 배운 이름모를 조법을 확 실히 익혀둘 심산이기도 했다. 쇄애액 공기를 가르며 날아드는 검. 선주혁은 손가락을 곧추세워 이번에도 검을 잡아갔다. 검신에 손이 닿으려는 순간 기묘한 곡선을 그리며 빠져나가는 검신. 선주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며 손을 접었다가 다시 뻗었다. 이번에 전개된 수법은 암영수와 무진진인의 초식을 배합한 극쾌 의 일수. 상대의 검은 여지없이 선주혁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검이 손에 들어오자 불끈 힘을 주는 선주혁. 이번에는 상대가 검에 담겨진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손을 놓치 고 말았다. 졸지에 검을 거꾸로 쥔 선주혁은 아무렇게나 검을 뒤로 던졌다. 퍼억 마침 뒤쪽에서 선주혁을 노리고 달려들던 한 무림인의 허벅지에 꽂히는 검. 그 모양을 본 선주혁이 쾌재를 불렀다. '크하! 되는 놈은 된다더니! 이젠 진정으로 내 팔자가 바뀌나 보다!' 채 기뻐할 사이도 없이 양측 옆구리를 베어오는 두 개의 검. 잠시 방심한 사이 검은 이미 한 치의 거리만을 남겼을 뿐이었다. 카앙 날카로운 금속성이 울린 후에야 두 개의 검을 낚아챈 선주혁. 하지만 정작 공격을 한 자들은 선주혁이 귀신같은 수법으로 검 을 잡아냈다고 생각했다. 맨살로 검을 받아낼 수 있으리라는 개념 자체가 없기 때문이었 다. 두 사람은 황급히 검을 뽑아내려 했다. 하지만 강철처럼 단단히 조여진 선주혁의 손가락에서 검을 빼기 란 쉽지 않았다. 선주혁의 왼편에 있던 사람의 발이 허공에 떠올랐다. 검을 움직이지 못하자 각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선주혁은 재빨리 검을 쥔 손을 놓고 조법을 사용해 상대의 정강 이를 움켜쥐었다. 우드득 잡히자마자 끔찍한 소리가 울렸다. "크아아아악!" 삼십대 후반의 사내는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뼈가 으스러 지는 고통은 끔찍하기 이를 데 없었던 것이다. "무량수불, 잔혹한 놈이로고!" 도사 차림의 한 중년인이 호통을 지르며 불진을 휘둘러왔다. 선주혁은 불진에 담겨진 위력이 가볍지만은 않음을 깨닫고 양손 을 놓으며 뒤로 물러섰다. 바람과 같은 빠르기의 움직임인지라 불 진은 허공만을 갈랐다. 하지만 공격을 끝난 것이 아니었다. 불진은 회오리와 같은 형상을 만들어내며 선주혁의 요혈을 노리 고 날아들었다. 선주혁은 거침없이 손을 내밀었다. 선주혁의 팔을 휘감는 불진. 그러자 중년 도사의 입가에는 미소가 감돌았다. 그리고 진기를 북돋아 선주혁의 팔을 잡아당겼다. 수십 년간 수련해온 내력에 대 한 자신감이었다. '어쭈?' 선주혁은 강하게 팔을 당기는 도사를 보고는 오기가 치밀었다. 팔에 진력을 불어넣어 버티는 선주혁. 불진은 팽팽히 당겨지고 도사는 원하는 바대로 선주혁을 끌어당 기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찌 이런……?' 나이 어린 자가 자신의 내력을 이겨내는 것을 인정하기 힘든 도사였다. "합!" 선주혁의 입에서 기운찬 소리가 터져 나오고, 중년의 도사는 경 악스런 표정과 함께 튕기듯 선주혁에게 끌려갔다. '말도 안 되는……!' "크흑!" 자신 쪽으로 당겨진 도사의 오른쪽 가슴을 선주혁이 주먹으로 후려갈긴 것이다. 입가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쓰러지는 중년의 도사. '설마 이 정도로 죽지는 않겠지?' 선주혁은 자신도 모르는 와중에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않고 있 었다. 아직까지 첫 살인으로 인한 충격에서 완벽하게 벗어나지 못 했던 것이다. 선주혁을 향해 달려들던 무림인 중에서 중년도사만큼의 실력이 되는 자는 거의 없었다. 남지학의 완벽한 검술, 선주혁의 어설픈 조법에 의해 이제 무림 인의 숫자는 채 열 명도 남지 않게 되었다. 그러자 입가에서 피를 흐리고 있던 상관벽우가 소리를 질렀다. "모두 물러서시오!" 그의 외침에 무림인들은 황망히 뒤쪽으로 빠졌다. "더…… 이상의 무의미한…… 희생을 피해야 하오이다." 상관벽우의 손, 가슴을 부여 쥔 그의 손에 푸르스름한 핏줄이 내 비췄다. 그것은 마치 그가 고통을 참아내며 억지로 목청을 돋 우는 듯 보였다. "간악한 자들이긴 하나…… 그 무공이 실로 괴이하구려. 모 두…… 피하도록 하시오. 이 상관모가 여러분들의…… 퇴로를 확 보해 보겠소." "상관대협!" "대협!" 자신의 목숨을 바쳐 도주로를 열겠다는 상관벽우의 말에 무인들 은 실로 감동했다. 협을 숭상하겠다고 소리를 높이는 자는 무수하 지만 실제로 그것을 행하는 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상관 대협의 말씀을 따릅시다. 이렇게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 소이다. 저 흉측한 자들의 악행을 널리 알려야 하지 않겠소?" 머리가 벗겨진 한 사내가 선동을 했다. "어서 서두릅시다. 여기서 개죽음을 당한다면 상관 대협의 숭고 한 희생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오!" '생 쑈를 해요, 아주! 저 X자식 연기도 죽이고, 도망치려면 그냥 도망 칠 것이지 X랄을 떨며 가는 것도 그렇고……. 어떻게 저런 인물들을 정파라고 설정을 해 놓은 건지. 씁!' 선주혁이 투덜대는 사이 무림인들은 황급히 도주하기 시작했다. 대머리가 명분을 세워준 이상 이곳에서 목숨을 내놓을 필요가 없 었던 것이다. "저대로 내버려 두나요? 우리 행적이 발각될 텐데?" 선주혁이 조금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어차피 알려질 행보지. 저들을 모두 죽일 수는 없지, 안 그래?" 남지학의 말에 선주혁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이 대화를 하는 사이 무림인들은 완벽하게 시야에서 사 라졌다. 그리고 어느 한 순간 여기저기서 동시다발 적으로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크아아아악!" "아아악!" "왜……? 왜……?" 고통과 놀라움 가득한 비명이었다. 비명을 내지른 자들은 선주혁과 남지학에게 부상을 입고 땅에 쓰러져있던 무인들. 남지학의 검에 몇몇이 죽긴 했지만 대부분은 부상을 입고 쓰러 져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남지학과 선주혁이 미처 막을 사이도 없이 상관벽우가 독이 발라진 유엽비도(柳葉飛刀)를 날려버린 것이다. "칠보단혼산(七步斷魂散)은 꽤나 효과적이지." 피부가 새까맣게 변해 죽어가는 무림인들을 보며 상관벽우가 웃 음을 머금었다. "살인멸구(殺人滅口)인가?" 남지학이 묵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아니 딱히 질문을 한 것은 아니었다. 홀로 결론을 내린 것이었을 뿐. 상관벽우의 의도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진실로 묵연수투를 사천백가에 돌려주리라는 것을 짐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상관벽우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수투를 취하는 것. 당연히 자신과 사제를 내버려둘 수 없었을 것이다. 상관벽우 정도의 고수라면 자신의 실력을 짐작했을 터. 간악한 그는 계략을 펼쳤고, 자신의 손을 빌려 함께 몰려온 자들을 죽이 려 한 것이다. 훗날을 위해 악역을 만들고자 하는 의도로. 그 와중에 자신이나 사제가 부상을 입으면 더 좋을 것이고, 만 약 그렇지 않더라도 무공의 수준을 명확히 파악할 수 있으니 어떤 결과가 나타나든 상관벽우에게는 손해날 게 없었다. 도주한 자들을 통해 잔혹한 살행과 수투를 소지한 것은 자신과 사제라고 소문이 날 것이므로. 결국 자신이 묵연수투를 취하고 그것을 남들이 알지 못하게 하 려는 게 상관벽우의 진정한 목적이었던 것이다. "후후훗, 역시 영리한 녀석들이군. 네놈들처럼 영악한 놈들이 사 용했다고 하기에 딱 어울리는 독이 칠보단혼산이기도 하지. 안 그래?" "이 개 같은 놈!" 선주혁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훗! 실컷 욕을 해라. 어차피 시신조차 남기지 못할 테니 그 정 도는 들어주지." "후후……. 우리를 지우려 하는군." 남지학이 차갑게 말했다. "역시 똑똑하다니까. 묵연수투를 가지고 사라져 줘야하는 거지." "끝까지 지켜보기만 한 것은 사제와 날 상대할 자신이 있다는 건가?" 남지학은 경멸어린 시선으로 상관벽우를 보며 말했다. "하하핫, 정말 영리하군, 정말 영리해!" "자신이 없었으면 저들과 섞여 싸웠겠지." "그래, 그래. 정말이지 내 속을 꿰뚫어 보는군. 어린 나이에 거 기까지 생각하다니. 솔직히 죽이기 아깝다는 생각까지 드는군." 상관벽우는 뭐가 그리 좋은지 계속해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 순간 선주혁이 생각났다는 듯 외쳤다. "혈마인(血魔印)!" 여태껏 웃음을 짓고 있던 상관벽우의 안색이 급격히 굳어졌다. 그가 놀란 표정 그대로 물었다. "어찌…… 네놈이? 그것을……?" Vol. 8 "흥!" 상관벽우의 당황스런 얼굴을 보고 선주혁이 코웃음을 쳤다. 실 상 선주혁은 상관벽우란 인물 자체를 기억해 낸 것은 아니었다. 쥐뿔도 없어 보이는 소설에 삼국지처럼 많은 인물이 나오고 그 에 대한 세세한 설명이 구구절절한 소설이었다. 그런 지루한 부분은 대충 넘어가 주는 게 그의 스타일. 그렇듯 스쳐지나간 인물들을 지금까지 다 기억하고 있을 리 없었다. 기억에 남지 않을 정도라면 분명 엑스트라일 터. 그런 엑스트라가 남지학의 뛰어난 무공을 보고도 상대할 자신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이유를 기억해 낸 것이다. 그것이 바로 혈마인이었다. 문득 생각나서 던져본 말이었는데 너무나 의외라선지 간악하기 그지없는 상관벽우도 그만 말려든 것이다. "주인 따르는 개새끼들에게 던져주는 뼈다귀 정도는 이미 알고 있지." 선주혁의 말에 상관벽우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도 잠시. 상관벽우는 빠르게 신색을 회복했다. "그렇다면 혈마인에 대해 아는 사람은 필히 죽어야 한다는 사실 도 알겠구나." "영악한 개새끼가 수십 명에게 흩뿌린 혈마인을 보강하기 위해 이 수투를 필요로 한다는 속까지는 알지." "……!" 상관벽우의 미간에 또다시 주름이 잡혔다. 혈마인의 엄청난 위 력을 탐해 그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머지않아 자신과 같은 처지의 인물들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아무리 고강한 무공을 익힌다 해도 타인과 같은 수준이라면 무 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런 차에 묵연수투가 도난당했다는 사실이 널리 소문이 났다. 상관벽우는 쾌재를 불렀다. 혈마인의 가공할 위력을 배가시킬 수 있는 것이 바로 묵연수투 가 아니던가. 묵연수투를 손에 넣어 혈영인의 위력을 극대화시킨다면 그들도 자신을 다르게 볼 것이다.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누가 알아채 는 것을 불쾌해 한다. 상관벽우도 그랬다. 자신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듯한 선주혁의 말에 무럭무럭 살 심이 피어올랐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가 뚫린 입이라고 말은 잘하는구나." 선주혁을 향해 살기어린 안광을 뿜어낸 상관벽우는 공력을 끌어 올렸다. 그러자 그의 순이 핏빛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가공할 위력의 장법, 혈마인이 전개되는 것이다. "사형, 절벽에서의 그놈들 있죠? 이자도 그놈들이랑 한패에요." 선주혁이 다급하게 외쳤다. 그 때까지 대체 선주혁이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이며, 또한 어떻 게 알고 있는 건지 의문을 품고 있던 남지학은 그제야 머리가 밝 아지는 느낌이었다. 사제는 자신보다 늦게 절벽에서 떨어졌다고 했다. 그들에게 무 엇인가를 들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모든 상황을 종합해 상관벽우가 그들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아낸다는 것은 범인으로서는 상상조차 못할 일. 남지학은 새삼스럽게 다시 사제의 신묘한 능력은 자신이 상상하 는 범주를 벗어나 있다는 것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야말로 무 불통지(無不通知: 무엇이든지 환히 통하여 모르는 것이 없음)라는 말은 사제를 위해 있는 것만 같았던 것이다. "죽엇!" 상관벽우는 붉게 달아오른 쌍장을 교차해 내밀며 달려들었다. 남지학은 한 눈에 쌍당에 감겨진 기세가 범상치 않음을 깨달았 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무극삼검식을 펼쳐냈다. 끊임없는 원을 만들어내며 자신의 옆구리를 노리고 날아드는 검 을 보며 상관벽우는 남지학을 상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백발의 괴상한 놈을 쳐 죽이고 싶었지만 자신의 목 숨을 챙기는 것이 먼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대의 검을 마주하자마자 상관벽우는 무엇인가 잘못되 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이 아는 한 곤륜파에는 이런 종류의 검법이 없었던 것이다. 상대가 전개하는 검법은 오히려 무당파의 검법과 흡사해 보였다. "감춰둔 한 수가 있다는 게로구나!" 상관벽우는 차갑게 외치고 전신의 공력을 양손에 집중해 신중을 기했다. 아까 전 싸움을 보았을 때 눈앞의 애송이는 그저 충실히 곤륜파 의 무공을 익힌 것으로만 보였다. 자질이 뛰어나 성취가 컸겠지만 돋보이는 무공실력은 아니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초식이 흔들리는 것을 종종 봤기 때문이다. 백발의 괴상한 놈 역시 마찬가지였다. 신투를 연상시키는 엄청 난 신법을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수족을 놀리는 태가 영 어색했 다. 초식에 점차 익숙해져 가는 것이 눈에 띄게 보였지만 역시나 자신의 상대로는 부족했다. 그저 손에 낀 묵연수투의 가공할만한 위력만 조심하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검을 쥔 놈은 생각 외로 강했다. 면면히 이어지는 검술 은 현묘하기 그지없어 당최 허점을 잡아낼 수가 없었다. 아니 간 간히 파고드는 날카로운 검세에 혈마인은 제대로 사용해보지도 못 한 채 뒤로 밀리기까지 하고 있었다. 그 순간 좌측으로 파고드는 위험한 느낌에 상관벽우는 최대한의 움직임으로 뒤쪽으로 피했다. 마치 독수리 발톱처럼 손을 세운 선주혁의 손가락이 허공을 가 르고 지나갔다. '이젠 저놈까지 설쳐대는군.' 엉터리 무공초식을 펼쳐내는 녀석까지 자신을 공격해오자 무시 를 당했다는 생각에 상관벽우는 노기가 치밀었다. 그는 재빨리 방향을 바꿔 남지학이 아닌 선주혁을 노리고 혈영 인을 뻗어냈다. 스멀거리는 마기와 함께 선주혁을 날아가는 상관벽우의 일장. 선주혁은 자신의 능력을 시험해볼 양으로 피하지 않고 일장을 마주쳐갔다. 퍼억. 두 개의 육장이 마주치는 소리는 압축된 공기가 급격히 팽창하 는 듯한 기괴한 음향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선주혁과 상관벽우는 동시에 튕기듯 뒤로 물러서야만 했 다. 서로가 서로의 힘을 주체하지 못한 탓이었다. 상관벽우는 기함을 했다. 어깨가 으스러지는 것 같은 엄청난 충격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 이것이 묵연수투의 위력이라는 건가! 꼭! 꼭 내손에 넣고야 말겠다.' 고작해야 갓 스물을 넘은 애송이가 수십 년간 고련을 해 온 자 신의 내력을, 그리고 엄청난 위력이 담겨진 혈영인을 견뎌낼 수 있다고 생각지 못하는 상관벽우였다. 따라서 그는 모든 것을 묵연 수투의 위력으로만 여기는 것이다. "개새끼에게 주어진 뼈다귀치곤 괜찮은걸!" 선주혁은 혈영인의 위력을 비꼬며 손가락을 곧추세워 다시 덤벼 들었다. 상관벽우의 팔과 어깨, 그리고 가슴을 움켜쥐어가는 조공. 상관벽우는 감히 마주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어지러이 보법을 펼쳐 뒤로 피했다. 선주혁은 기다리지 않고 폭풍이 휘몰아치듯 상관벽우를 몰아갔다. 묵연수투의 위력을 감안해 선주혁의 조공을 피해 반격을 기하는 상관벽우. 두 사람의 싸움은 점차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선주혁은 신이 나는 것을 느꼈다. 점차로 혈응 조법이 손에 익어가는 기쁨이었다. 하나의 무공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 이토록 쉽다는 사실이 기뻤고, 그로 인해 자신이 한 층 강해진다는 사실도 기뻤다. 또한 상관벽우가 혈마인을 운용하는 진기의 흐름을 훤히 파악하 고 있으니 그 또한 즐거움이었다. 그는 거의 완벽하게 싸움에 몰 입해가고 있었다. 그런 선주혁을 보는 남지학은 검을 든 채 멍하니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까는 무림인들을 가급적 배려하며 싸우느라 몰랐다. 한데 지 금 살펴본 사제의 무공은 중경쌍흉이 쓰던 조법과 똑같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서, 설마……! 타인의 무공을 한 번 보고 배웠다는 말인가?' 세상에 천재는 많다. 남지학 자신 역시 손꼽히는 천재중 하나일 것이다. 집중해서 볼 수만 있다면 반복되는 몇 번의 초식을 통해 그것을 암기하는 것은 남지학도 가능했다. 누가 뭐래도 절세의 기재였으므로. 하지만 무공이란 초식의 동작을 흉내 내거나 따라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초식에 최적화된 진기의 운용법을 모른다 면 춤사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하나의 무공이 완성되는 데는 무수한 세월이 필요하 다. 각 초식의 위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기 위한 진기의 운용에 대해 끊임없이 개선과 발전을 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어지간한 무공 하나를 창안해도 천재소리를 듣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수만 가지 진기의 운용 중에서 가장 조화롭고 위력적인 방법을 찾아내는 것은 범인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으므로. 남지학이 놀라움은 그래서 더욱 컸다. 선주혁이 중경쌍흉의 동작을 암기한 다음 그들의 동작에 맞는 진기의 운용법을 파악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야말로 초인적인 두뇌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 남지학이 선주혁을 바라보는 눈빛에 경악이 가득한 것은 당연하 다고 볼 수 있었다. 그가 어찌 선주혁이 남이 진기를 운용하는 것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상상하겠는가. '역시! 사제는 정말 대단해! 정말 대단해!' 인간을 넘어선 두뇌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평소 늘 자신은 멍청 하다고 주장하는 사제였다. 위급한 상황에서만 능력을 발휘할 뿐 평소에는 자신의 주장처럼 그다지 뛰어난 면모를 보이지 않을 때 가 더 많았다. 그러나 남지학은 그런 인간적인 모습을 갖춘 사제가 더 좋기만 했다. 한편 처음 혈응조를 전개할 때보다 선주혁은 한결 익숙하게 초 식을 풀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초식과 초식의 연결부분에서는 아 직까지 미숙한 상태. 몇 번에 걸쳐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고수들끼리의 싸움에 있 어서 치명적인 일이다. 상관벽우가 그와 같은 허점을 못 포착할 리 없었다. 선주혁이 손바닥을 하늘로 뒤집는 순간. 즉, 하나의 초식에서 다음 초식을 연결하는 그 순간, 상관벽우는 급격히 허리를 낮춰 선주혁이 뻗어낸 팔 쪽으로 접근했다. 순간적 으로 생기는 사각으로 파고든 그는 상대의 복부를 가격하고 빠르 게 신형을 뒤로 뽑았다. "크흐흐흐흐……!"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을 치는 선주혁을 바라보며 미소를 흘리는 상관벽우. 남지학은 걱정스런 얼굴로 사제를 살폈다. 본시 저처럼 공격을 성공한 후라면 연속적으로 공격을 가해 치명적인 피해를 주는 것 이 상리다. 그런데 상관벽우가 단 한 번의 가격 이후 물러나 미소 를 흘리는 것을 보자 불길한 느낌이 든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상관벽우의 말은 남지학의 불길한 예감이 적중 했음을 결정지었다. "혈마인에 대해 아는 녀석이니 이제 네 놈이 죽은 목숨이라는 것을 알겠지?" "……!" 선주혁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있었다. "오호! 다른 것은 여우처럼 잘도 알더니 혈마인의 진정한 효능 은 몰랐단 말이냐? 크흐흐흐……. 지금 내 일장으로 인해 파고든 그 진기가 네 혈맥을 타고 전신으로 퍼지는 순간이 네가 죽는 순 간이다. 왜 혈마인이 저주받은 마공이라 불리는지 알겠느냐? 그것 은 바로 단 일장만 적중해도 죽음에 이르기 때문이다. 크하하하핫!" 장과 장을 마주해도 선주혁이 무사한 것은 모두가 묵연수투라고 생각하는 상관벽우였다. 자신의 혈마인이 선주혁의 복부에 정확히 적중되었으니 그의 죽음을 단언하는 중이었다. "사, 사제." 상관벽우의 말에 다급한 표정을 지으며 선주혁에게 다가가는 남지학. 그의 손이 선주혁의 어깨에 닿으려는 순간, 선주혁의 신형이 꺼지듯 사라졌다. 퍼억 한참 웃음을 터뜨리던 상관벽우의 신형이 허공으로 떠올랐다가 삼장이나 뒤로 날아가 땅바닥을 뒹굴었다. "혈마인이 저주받은 마공인 이유는 익힌 놈들이 이렇게 재수 없 는 꼴을 당하기 때문이다, 이 빌어먹을 놈아!" 한 주먹에 상관벽우를 날려버린 선주혁이 멀쩡한 목소리로 소리 를 질렀다. 입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고개를 드는 상관벽우. 아까와는 달리 이번에는 진짜로 극심한 내상을 입어 흘리는 피였다. 그의 눈에는 믿지 못할 상황을 납득하지 못하는 의문과 놀라움이 가득했다. "어,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혈마인에 적중 당하면 특유의 진기가 파고든다. 제멋대로 날뛰 는 진기로 인해 적중당한 자는 꼼짝조차 못해야 정상이었다. 괴로 움에 몸부림치다가 전신의 혈맥이 터져 죽어야 한다. 혈마인에 적 중당해 죽은 자의 시신이 붉어지는 이유, 즉 혈마인이 혈마인으로 불리는 이유가 거기에 있지 않은가. 그런데 백발의 애송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신형을 날려 자신을 일장에 날려 보낸 것이다. 상관벽우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네 놈 같은 돌 머리는 평생을 두고도 이해할 수 없겠지. 푸핫!" 사실 혈마인이 적중되어 선주혁의 몸에 파고든 것은 사실이었 다. 그러나 선주혁은 이미 상관벽우와의 격전 중에 혈마인에 대한 파악이 끝난 상태. 그의 몸속을 몸을 파고든 진기는 어렵지 않게 해성을 거쳐 흡수해 되어 버린 것이다. "살인을 한다는 게 껄끄러운 일이긴 해도, 네놈만은 내 손으로 죽여주마." 선주혁의 사형선고. 상관벽우는 내상으로 인한 통증을 무릅쓰고 신형을 억지로 일으 켰다. 이어 바람처럼 다가오는 선주혁을 노리고 다시금 혈마인을 전개 하는 상관벽우. 하나 뒤늦게 손을 뻗은 선주혁의 일장이 상관벽우의 가슴에 먼 저 닿았다. 퍼억 묵연수투와 풍이의 내력에 의해 가공할 위력을 보이는 선주혁의 일장. 상관벽우는 실 끊어진 연처럼 뒤로 날아간 후, 잠시간 경련을 보이다 이내 숨이 멎었다. 내장이 모두 파열된 후 살아있을 수 있는 사람은 없기에. "후우……." 또 한사람을 죽였기 때문일까? 아니면 치가 떨리도록 얄미운 놈을 죽였기 때문일까? 선주혁은 길게 한 숨을 내쉰 다음 상관벽우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사제, 괜찮은 거야?" 남지학은 혹시 몰라서인지 우려의 표정을 보였다. "네. 전 아무렇지도 않아요." "이것도…… 그 사마횡천의 심법 덕인 건가?" 선주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 모든 게 사제의 말대로군. 악인의 무공이 정의를 위해 쓰이 니 그 죄가를 갚고도 남음이야. 역시 누가 쓰느냐에 따라 마공이 되고 신공이 되는 거였어." 남지학은 선주혁이 정말 자랑스러웠다. 이런 사제가 있다는 사 실 하나만으로도 크나큰 기쁨이 되는 것이다. "하핫! 그나저나 앞으로 혈마인을 사용하는 자들은 조심하셔야 해요." 선주혁의 말에 남지학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위험해보이더군. 일장만 적중 당해도 죽음에 이르는 장법이라……." "뭐, 사실 사형 정도의 무공이라면 걱정 없어요." "하하하. 사제는 늘 나를 너무 과대평가한다니까." 남지학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에게 있어서도 상관벽우 의 죽음은 통쾌한 일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문제는 혈마인이 아니에요. 그보다 더 무서운 놈들이 넘쳐난다 고요.' 호방한 웃음을 터뜨리는 남지학은 선주혁이 내심 중얼거리는 소 리를 들을 수 없었다. 한바탕 무림인들이 피를 쏟았기 때문일까. 선주혁과 남지학은 상관벽우의 죽음 뒤로 큰 무리 없이 산을 내 려올 수 있었다. 지난 사흘에 걸쳐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았던 것 이다. 선주혁은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금원보를 은자로 교환했다. 이런 작은 마을에서는 신투의 은신처에서 빼돌린(?) 보물을 판다는 것 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과거 소매치기를 할 때부터 현찰이 최우선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던 선주혁이었기에 금원보 몇 개를 챙기는 것을 잊지 않았고, 지금 유용하게 사용하는 중이었다. 두 사람은 은자를 가지고 포목점(布木店)으로 달려갔다. 남루한 행색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때문이었다. 선주혁은 남지학에게 잘 어울리는 백의(白衣) 몇 벌을 골라 주 었고, 자신은 흑의(黑衣)를 구입했다. 흰 옷을 입으면 까무잡잡한 피부가 두드러져 보이기 때문이었 다. 그리고 특이한 머리색을 감추기 위해 소요건(逍遙巾)를 구입해 머리에 썼다. 그러자 얼핏 봐서는 그저 남방지방에서 와 햇볕에 많이 그을린 사람으로만 보일 정도가 되었다. 옷을 구입한 두 사람은 황급히 마을을 떠났다. 남지학이 행적을 드러낸 곳에 오래 머물면 안 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선주혁은 간만에 제대로 된 음식을 먹고 싶었으나 사형의 말이 틀리지 않음을 알고 있기에 고집을 세우지 않았다. 마을을 벗어나 신법을 전개한 두 사람은 오래지 않아 제법 큰 고을인 영우촌(?紆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영우촌에서 가장 큰 객잔인 대화객잔(大華客棧)에 방 을 잡고 짐을 풀었다. 그리고 실로 오랜만에 더운 물로 몸을 씻은 두 사람은 선주혁의 재촉에 의해 일층에 있는 식당으로 서둘러 내려가 음식을 주문했 다. 선주혁은 점소이의 권유에 따라 묵어(墨魚: 원래는 오징어를 뜻 하나, 사천지방에서는 민강에서 나오는 메기모양의 민물고기를 말 한다.) 요리와 삼겹살 볶음요리인 회과육(回鍋肉), 그리고 밥을 주 문했다. 남지학이 만류했지만, 지난 번 사천백가에서 맛을 보고 반해버 린 오량주를 주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천지방의 매운 요리는 선주혁의 취향에 잘 맞았다. 허겁지겁 음식을 먹고 향긋한 술로 입가심을 하는 선주혁과 남지학의 귀에 덩치 좋은 사내들의 대화가 들리기 시작했다. '참나……. 여전하군. 대체 무협지에서는 늘 객잔이 무슨 뉴스 프로그램처럼 나온다니까. 모든 소문은 전부 객잔을 통해 도는 거 냐? 하여튼 객잔이 아니라 아예 라디오야, 라디오. 씁!' 내심 투덜거리면서도 선주혁은 사람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덩치좋은 사람들의 대화가 묵연수투와 관계된 것이었기 때문이 다. 남지학 역시 술을 마시는 척하고 있지만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묵연수투의 위력이 그렇게 대단하다며?" "그래. 주먹을 휘두르면 십장 밖의 바위가 박살날 정도라네." "아니 그건 소림사(少林寺)의 백보신권(百步神拳)과 다름없단 말 인가? 에잉……. 설마? 수투 하나 꼈다고 그렇게 된다면 누가 피 땀 흘려 무공을 수련하겠어?" 얼굴 살이 조금 늘어져 넉넉한 인상을 풍기는 중년 사내가 손사래를 쳤다. "자네 지금 내 말을 안 믿는 건가?" 입술이 두껍고 이빨이 앞으로 돌출된 사내는 침을 튀겨가며 물었다. "과장도 어느 정도껏 해야 믿지. 안 그런가?" "나도 대단하다고 듣긴 했지만 자네 말은 조금 심한 것 같기도 하군. 어찌 장갑을 낀다고 권력(拳力)이 십장을 뻗어나간단 말인가?" 듬성듬성한 수염의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거 참, 이 사람들 답답하네. 이번에 정도의 무림인들이 떼거지 로 죽은 거 알지?" 돌출이빨이 다시 침을 튀기기 시작했다. "그랬다더군." "간신히 돌아온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남은 지 알아?" "어떻게 살아남았는데?" 넉넉한 인상의 중년인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이야기가 나오자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정영검 상관벽우 대협 알지?" "당연히 알지. 이 사천 바닥에서 그분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나?" "그 상관 대협께서 목숨으로 두 악적의 발목을 잡았다는 거야. 죽음으로 활로를 연 거지. 이제 내 말이 허풍이 아니라는 걸 알겠 지? 새파랗게 젊은 놈들을 상대하는데 상관 대협께서 목숨을 잃어 야할 정도니 수투의 위력이 대단한 게 아니고 뭐겠는가?" "허! 실로 놀랄만한 일이군. 정말 무서운 수투일세." 수염은 사내는 몇 가닥 되지도 않는 수염을 매만지며 놀란 표정 을 지었다. "흠……. 여하튼 실로 안타까운 일일세. 결국 상관 대협께서 목 숨을 잃으셨다는 말이 아닌가? 사천 무림의 큰 별이 하나 떨어졌구먼……." 넉넉한 인상의 중년인이 애도의 뜻을 표하자 잠시 세 명의 분위 기가 숙연해졌다. 그 순간 뒷좌석에서 술을 마시던 텁석부리 장한 한 명이 불쑥 끼어들었다. 탁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놓은 도(刀)를 보아 그도 무 림인인 듯 했다. "여보슈. 내 어지간하면 가만히 있으려고 했는데, 도저히 못 참 겠구려. 수투의 위력이 대단한 것은 사실이지만 상관 대협을 어쩔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소이다. 정영검께서 어떤 분이신데 수투를 꼈다고 그런 애송이들에게 목숨을 걸겠소." "그럼 이 친구가 한 말이 틀린 거요?" 넉넉한 인상의 중년인이 물었다. "틀리다는 이야기는 아니외다. 다만 한 가지 빼먹은 사실이 있 소." 텁석부리 장한의 목소리는 꽤나 우렁차서 이제 객잔의 일층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모두가 무림인인 것은 아니었으나 자고로 무림의 일은 늘 신기하고 흥미 로운 법이었다. "……?" "정영검께서는 두 악적에게 이미 암습을 당한 상태였소." "아!" "실로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신 거라 하오. 더구나 정영검께서는 간교한 두 놈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노력하시겠다고 말씀하시던 도중 암습을 당했다고 하니……." "크! 정말 나쁜 놈들이군요." "사악한 놈들." 텁석부리 장한의 말에 여기저기서 욕이 튀어나왔다. 객잔의 일층은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선주혁은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실제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뉴스, 아니 소문이 아닌가. '느그들 허위보도가 얼마나 중죄인지 알고 떠드는 거냐?' 선주혁이 억울한 마음에 주먹을 말아 쥐고 있을 때 중인들의 소 란에 찬물을 끼얹는 목소리가 있었다. "흥! 정영검이 암습을 당하지 않았으면 그들을 감당할 수 있다 고 누가 단정 지을 수 있단 말인가?" 일시 간 객잔을 찾아온 정적. 사람들의 시선은 목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일제히 움직였다. 냉랭한 음성을 내뱉은 사람은 구석자리에 홀로 앉아 술잔을 기 울이고 있는 청년이었다. 눈부시게 하얀 피부를 가진 청년은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미남 이었다. 사람들은 그의 용모에 크게 감탄하였으나, 그가 말한 내용 은 잘생겼다고 해서 참을만한 것이 아니었다. "이것 보쇼, 형장! 지금 고인이 되신 상관 대협을 모욕하겠다는 거요?" 텁석부리 사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질렀다. 어느 새 그의 손에는 자신의 도가 들려 있었다. 유생(儒生)들이 흔히 입는 장포를 걸친 청년은 술잔을 탁자에 내려놓고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 고개를 돌리자 더욱 뛰어난 용모가 드러났다. 하지만 그 얼굴을 보고 누구보다 가장 놀란 것은 선주혁이었다. '저, 저 얼굴은……!' 선주혁은 한눈에 고개를 돌린 자의 얼굴을 알아봤다. '탤런트 한태희잖아!' 청년의 얼굴이 텔레비전에서 늘 보아온 여배우 한태희의 얼굴과 똑같았던 것이다. '이, 이번엔 한태희였냐? 흠…… 그렇다면 남장여인(男裝女人)?' 선주혁은 한 눈에 그저 남자 옷을 입었을 뿐 여자임을 짐작했 다. 하지만 객잔 내의 누구도 그가 남장을 한 여자라는 것을 알아 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젠장, 저 답 나오는 얼굴을 보고도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른다 는 거야? 모두 바보 아냐?' 선주혁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무리 사람들이 멍청하고 순박해 도 그렇지 남자 옷만 입으면 다 남자로 보인다는 게 이해가 안 갔 던 것이다. 그 순간 한태희처럼 생긴 여자(?)가 붉은 입술을 열었다. "정영검의 실력이 그 두 사람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말하면 모욕 을 하는 것이오?" 한태희의 발언에 객잔은 또다시 술렁거렸다. "실로 어처구니없는 놈이로다! 대체 어디서 굴러먹다 온 놈이기 에 찢어진 입이라고 함부로 말을 하는 게냐? 상관 대협의 검술은 뛰어난 바를 사천의 무인 중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이냐?" 당장이라도 도를 뽑아들어 한태희의 목을 쳐낼 듯 으르렁 대는 텁석부리 장한이었다. 하지만 한태희는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고 말했다. "그 대단한 정영검 대협께서는 검조차 뽑지 못한 채 죽었소." "네, 네놈이 그걸 어떻게 아느냐?" 텁석부리 장한은 약간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유명한 검객이 검조차 뽑지 못했다는 것은 상상치 못했던 것이다. "당신이 암습에 대해 아는 것과 같지 않겠소?" "두 악적이 또다시 간교한 꾀를 부렸을 수도 있지. 그게 상관 대협의 실력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냐?" "무림에서 한 번 속고 또 속는다면 그것 역시 실력이나 다른 없 는 것." 한태희는 한쪽 입 꼬리를 당기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말이야 틀린 바는 없었지만 사천 무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정영검을 말하며 묘한 표정을 짓자 텁석부리 장한은 부 아가 치밀었다. "끝까지 정영검 대협의 명예에 흠집을 내겠다는 말이냐?" "정영검의 명성이 대단하다고 해도 중경쌍흉만 하겠소?" "……!" 퉁방울만한 눈을 부릅뜨고 한태희를 위협적으로 쏘아보던 중년 인의 얼굴이 굳어졌다. 사천에 바로 인근한 중경의 유명한 대마두들인 중경쌍흉을 그가 모를 리가 없었다. 정영검이 훌륭한 인품과 덕망, 그리고 뛰어난 무공으로 사천 무인들의 칭송을 받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무공이 중경쌍흉에 비교될 정도는 아니었다. 중경쌍흉의 악랄한 성품과 그보다 더 악랄한 무공은 어지간한 무림인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일 정도였으므로. "가, 갑자기 중경쌍흉의 이야기가 왜 나오는 거냐?" 중경쌍흉이라는 별호만 듣고도 안색이 바뀌는 텁썩 부리 장한을 보고 한태희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술잔을 들었다. 잔에 든 술을 한 번에 비운 그녀(?)가 말했다. "중경쌍흉이 죽었소. 정영검을 죽인 그자들에게." "……!" 객잔은 또다시 침묵에 접어들었다. 아는 사람은 아는 사람대로,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대로 아는 사람의 표정을 보고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하는 중이었다. "그, 그게 사실이오?" 중경쌍흉이 거론되었기 때문일까? 텁석부리 장한은 어느새 말투까지 바뀌어 있었다. 한태희는 텁석부리 장한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원상태로 몸을 돌려 잔에 술을 부었다. 그 모습은 사뭇 오만하고 무례했지만 그의 대답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제야 객잔 안의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수군대기 시작했다. 중 경쌍흉이 얼마나 흉악한 마두들인지에서부터 묵연수투의 위력, 그 리고 수투를 훔친 두 악적의 무공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이야기는 다양했다. "그, 그런데 네놈은 왜 사람 말을 무시하는 게냐? 이 대력도(大 力刀) 강구(姜具)가 우습게 보인다는 말이냐?" 텁석부리 장한, 강구는 뒤늦게 자신의 실태를 깨닫고 버럭 소리 를 질렀다. 하지만 한태희는 그런 강구를 향해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차앙 강구는 큰 동작으로 자신의 도를 뽑아들며 외쳤다. "네 놈이 여러 사람들 앞에서 이말 저말로 상관 대협을 모욕하 더니……, 이제는 끝까지 날 무시하겠다는 거냐?" 얼굴까지 시뻘겋게 달아오른 강구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 후에 야 한태희는 다시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권태로워 보이는 표정 으로. "정영검에 관한 이야기와 당신의 이야기를 동일시하는 것을 보 니…… 당신 스스로가 정영검과 나란하다 생각하는가 보구려?" 한태희의 날카로운 말에 강구가 도를 치켜들었다. 머리 위로 치 켜든 도를 흔들며 버럭 소리를 지르는 강구. "이, 이놈이 실로 혓바닥만 살아있구나." 당장이라도 도를 휘둘러 미청년의 머리를 날려버릴 기세. 객잔의 사람들은 끔찍한 장면을 상상하며 두 눈을 크게 뜨기도 하고 고개를 돌리기도 했다. 하얀 피부에 호리호리한 청년이 강구 를 상대하긴 힘들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순간 한태희의 손이 젓가락을 잡아갔고, 잡았다 싶은 순간 두 개의 나무젓가락은 강구의 도를 향해 쏘아졌다. 캉 막 청년을 향해 도를 휘두르려던 강구는 나무젓가락이 도를 때 리는 느낌에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의 퉁방울만한 눈이 더욱 커졌다. 두 개의 나무젓가락이 쇠로 만든 도신에 박혀있었던 것이다. "……!" 강구는 마치 석상처럼 그대로 굳어버렸다. 나무로 만든 젓가락 을 던져 쇠에 꽂기 위해 얼마나 뛰어난 무공을 지녀야 하는지 그 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한태희는 그런 강구를 개의치 않고 느린 동작으로 희고 긴 손가 락을 뻗어 대나무 통에 담겨진 다른 젓가락 한 쌍을 뽑아 들었다. 강구는 시뻘게진 얼굴로 두 팔을 치켜든 그대로 몸을 돌렸다. 이어 두 발이 보이지도 않게 움직였다. 체면이고 뭐고 일단 살고 봐야겠다는 생각에 객잔 밖으로 도망치는 것이다. 그와 같은 모습에 몇몇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흠…… 저 친구의 무공이 상당하군." 남지학이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흠……. 역시 사형도 저 여자를 남자로 여기는 거군. 그나저나 이놈의 소설에서는 뻑 하면 여자들이 남장을 하고 돌아다니니 저 여자가 누군지를 모르겠네? 탤런트처럼 생긴 걸 보아하니 그냥 엑 스트라는 아닐 거고……, 대체 누굴까?" 선주혁은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느라 심각한 표정이었다. 그가 심각하게 여자가 누군지 알아내려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평소에 한태희의 팬이었던 것이다. 즉, 선주혁에게 있어서 답이 나오는 여자 중의 하나였다. 이쪽 세상에서라면 한태희가 텔레비전 브라운관에만 나오는 머 나먼 여인이 아니었다. 잘만 한다면 저 한태희가 자신의 여자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충분했다. "사제, 이만 방으로 올라가지." 남지학은 조용히 선주혁에게 말했다. 하지만 선주혁은 미간을 찌푸린채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포위망(?)을 좁혀가는 중인지라 남지학의 말을 못들은 것이다. "사제." 남지학은 다시 선주혁을 불렀다. "아! 네?" "이제 그만 올라가자고." "네. 그러죠. 하하핫……." 두 사람은 계단을 올라 방으로 향했다. "뭘 그렇게 골몰히 생각했던 거야?" "아까 저 여…… 아니 저 사람 말이에요." "그 사람이 왜?" "아니…… 뭐, 이런 시골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무공이 아니잖아요." "잊고 있어? 이 근방에는 무림인들이 가득하다고." "아! 그렇죠. 아하하핫." 선주혁은 뒤통수를 긁적이며 재빨리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 선주혁의 뒷모습을 보며 남지학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 다. 저럴 때보면 사제가 인간을 초월할 정도의 두뇌를 지니고 있 다는 것이 납득이 가질 않는 것이다. 방으로 들어간 선주혁과 남지학. 두 사람은 모르고 있었다. 누군가 자신의 뒷모습을 세세히 살펴보고 있다는 사실을……. 연신 방안을 서성이던 선주혁이 결국은 입을 열었다. "사형, 저 바람 좀 쐬고 올게요." "하하, 사제는 정말 밤바람을 좋아하는군." "헤헤, 또 오랜만에 이런 편안한 침상에서 자는 게 기뻐서요." "가급적인 사람들의 눈에 안 띄게……. 알았지?" 남지학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당부를 했다. "뭐…… 객잔의 뜰에 있을 건데요." "후훗, 하긴……." 남지학에게 대충 얼버무리고 방을 나서는 선주혁. 사실 편안한 침상을 보고도 바로 쓰러져 자지 않는 것은 아까 본 한태희를 닮은 여자 때문이었다. 가슴이 벌렁벌렁 거려서 도저 히 잠을 청할 수 없었던 것이다. 조막만한 얼굴에 시원시원한 이목구비(耳目口鼻). 긴 목과 가녀린 체형이 어찌 보면 청순가련형으로 보이기도 하 고, 어찌 보면 요염한 느낌을 자아내니 정말이지 답 나오는 생김 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한태희를 봤으니 선주혁은 좀처럼 진정할 수가 없었다. 괜스레 객잔의 뜰에 나서 하늘의 달을 올려다본다. 그녀의 매혹 적인 얼굴이 달에 겹친다. 몇 번이고 눈을 깜빡여보지만 자꾸만 달과 그녀의 얼굴이 오버 랩 되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난다. 고개를 흔들어봤다. 창백하게 빛나는 달이 원래의 형상을 찾는다. 그리고 한 번 더 눈을 감았다 뜨자 이번에는 다른 얼굴이 달에 겹쳐진다. 전지연, 아니 백화란의 얼굴이다. "하아……." 지금은 여자를 생각할만한 여유 있는 때가 아니었음에도 자꾸만 이런 스스로에게 한숨이 나왔다. "근심이 있는 모양이구려." 누군가의 목소리에 선주혁의 시선이 달에게서 떨어진다. '헉! 그, 그녀다!' 선주혁의 옆에는 언제 왔는지 한태희의 얼굴을 한 그녀가 서 있 었다. 느릿한 손동작으로 섭선(摺扇)을 흔들며. "하늘은 은하수 비어있어 사방에 실구름 돋보이고, 청풍은 허공 에 불어대니 달빛만 물결치며 흩어지네. 물결은 잔잔하고 사막은 평화로워 흔적 소리 끊어지고, 서로 한 잔 술에 그대의 노래 소리 당연하네. 그대의 노래 소리 구슬프고 가사 또한 애절하니 듣던 끝에 눈물은 결국 비와 같지 않을 수 없구나." 난데없이 한유(韓愈)가 쓴 팔월십오야증장공조(八月十五夜贈張功 曹)의 한 구절을 읊은 한태희가 선주혁에게 말했다. "형장의 얼굴을 보니 조용한 가운데 근심이 가득하여 추태를 보 이고 말았소이다. 슬픔의 근원이 여인에 대한 그리움인 겁니까?" "아……, 아니죠. 물론 아니오." 선주혁은 내심을 들켰기에 당황하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은 이 미 눈앞에 있는 사람이 여자라는 것을 알고 있는 상태. 더군다나 자신이 좋아하는 답 나오는 여자의 앞에서 다른 여자를 그리워하 고 있다고 말할 수 없기에 말을 더듬은 것이다. "그렇구려. 무슨 근심이 있어 달을 바라보는 시선이 애틋한지는 모르겠으나 그 마음이 소생에게까지 전해오는구려. 괜히 형장의 감상을 깬 게 아닌가 모르겠소이다." "아니오. 뭐…… 안 그래도 홀로 적적해하던 차였으니까요." 선주혁은 재빨리 부정했다. 행여 그녀가 방해하지 않겠다며 가 버릴까 염려되었던 것이다. 텔레비전 드라마 '러브스토리 인 스탠포드'에 출연했던 그녀를 보며 얼마나 가슴 떨려 했던가. 사실 선주혁은 드라마를 즐겨보지 않는다. 그가 드라마를 보는 이유는 오직 등장하는 여배우의 얼굴을 감상하기 위함이었다. 하여튼 그렇게 좋아하던 여배우의 얼굴을, 아니 그녀의 부족함 마저 완벽하게 보완된 얼굴을 코앞에서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핫, 형장의 성격이 매우 호방하구려. 참, 그러고 보니 인사조 차 못 나눴소이다." 한태희는 두 손을 맞잡으며 정중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소생은 은우(殷雨)라 하오." "……!" 선주혁의 눈이 커졌다. 은우. 은설연(殷雪?)이라는 이름에서 설(雪)의 비 우(雨)만 사용해 만 들어낸 이름이던가. 선주혁은 그녀가 누군지 명확히 알고 있었다. 원래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수많은 여인들 중 비중이 아주 큰 히로인 격이었기에. "소생의 이름이 이상하오? 형장의 표정이……." 은설연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아, 아니오! 내가 아는 어떤 이의 이름이 떠올라서 그랬소. 소 생은 선주혁이라 하오." 선주혁은 재빨리 포권을 취하며 인사를 했다. 그가 놀란 것은 그녀가 메인이랄 수 있는 히로인이어서가 아니 었다. 원인은 그녀의 신분에 있었다. 무림을 크게 나누자면 백도(白道)와 흑도(黑道)로 구분이 될 것 이다. 좀 더 세밀히 따져보면 백도는 구파일방을 중심으로 한 무림맹 (武林盟)이 있고, 오대세가(五大世家)를 중심으로 한 정의련(正義 聯)이 있다. 흑도는 크게 마(魔)와 사(邪)로 나눠진다. 마교(魔敎)를 중심으로 한 천마맹(天魔盟)이 마도(魔道)의 중심을 잡고, 백사회(百邪會)가 사파연합(邪派聯合)을 이끈다. 사파연합을 이끄는 백사회는 사파에 속하는 백명의 절정고수로 구성이 되어있다. 그 백사회의 회주(會主)인 천사지황(天邪之皇) 은적비(殷赤丕)가 바로 은설연의 조부였다. 결국 그녀의 신분은 이곳 세상에서 다섯 손가락 내에 꼽히는 엄 청난 사람의 손녀라는 말. 그것이 선주혁을 더욱 긴장하게 만드는 것이다. 꽤나 무공에 자신이 생겼다지만 지금의 자신 정도는 그녀의 조 부가 손가락 하나만을 까딱해도 목이 날아갈지도 몰랐다. "아, 선 소협이셨구려. 어떻소? 사해가 동도라는데…….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소생과 술이라도 한 잔 하지 않겠소?" "수, 술이요? 하하핫, 좋지요, 술. 좋습니다." 선주혁은 은설연의 제안에 다급하게 대답했다. "하하핫, 선 소협께서는 술을 꽤나 좋아하시는가보구려. 그럼 안 으로 듭시다." 은설연은 짐짓 남자처럼 호방하게 말을 하고는 먼저 몸을 돌렸다. 그녀의 뒤를 따르며 선주혁은 홀로 중얼거렸다. '가만 있어보자. 이게 벌벌 떨 일이 아니지. 그녀가 대단한 배경 을 지니고 있는 만큼, 그녀를 꿀꺽하면 그게 다 내거란 말이잖아?' 은설연의 배경에 대해 압도당했던 선주혁의 허리가 꼿꼿이 펴지 기 시작했다. '좋아! 못 먹어도 고!' 은설연의 뒤를 쫓는 선주혁의 발걸음이 한결 경쾌해졌다. Vol 9. 자시(子時) 무렵 객잔의 일층은 한산했다. 간혹 취객들이 언성을 높였다가도 이내 잦아들었다. 본격적인 술자리는 주루(酒樓)에서 하기 마련이고, 이곳은 투숙객들이 요기 를 하는데 주로 이용되기 때문이었다. 선주혁과 은설연은 객잔의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자 한잔 하시지요." 은설연은 단숨에 술잔을 들이킨 후 선주혁에게 술을 권했다. 안 그래도 저녁을 먹으며 마신 술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선주혁도 역시 한 번에 바닥을 비웠다. 은설연은 선주혁과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달을 보며 정인(情人)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면 고향 생각이라 도 하는 것이오? 보아하니 바닷가가 고향인 듯 하신데……?" 피부색이 가무잡잡하기는 해도 자세히 보면 그 생김이 남만인들 과는 구분이 되었다. 그래서 은설연은 선주혁이 바닷가에서 왔다 고 생각하는 것이다. 해변의 햇살은 강렬하여 피부가 머뭇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아……, 네. 고향을 그리는 것은 맞으나 해변에서 자라지는 않았습니다." "그럼……?" "아! 제 피부색 때문에 그러시군요. 이건 눈에 반사된 햇살 때문 에 그렇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눈에 비춰진 햇살은 강하게 살을 태우지요." 곤륜파의 사형제들은 남지학을 제외하고는 피부가 가무잡잡한 편이었다. 모두가 설광(雪光)에 그을린 것이니 선주혁의 말은 틀리 지 않았다. "아……! 그렇군요. 소생은 미처 몰랐소이다." 은설연은 흥미롭다는 표정이었다. "하하핫,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요." 선주혁이 다시 술을 마시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머릿속에서 는 어떻게 하면 은설연의 호감을 살 수 있는지를 연구하느라 정신 이 없었다. 만약 그녀가 여장을 한 상태라면 자신이 아는 에티켓이나 매너 를 이용해 점수를 딸 텐데, 지금의 그녀는 남장을 한 상태였다. 그 러니 선뜻 여자에게 대하듯 행동해 점수를 따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콱, 그냥 왜 남장을 했냐고 물어봐 버릴까? 그랬다가 괜히 삐지면 어쩌지?' "저 이런 질문이 실례가 안 되는가 모르겠습니다. 선 소협께서는 설경(雪景) 가득한 고향을 떠나 이곳까지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 그게……, 유람(遊覽)이죠, 뭐. 산천을 두루 구경하며 정취를 즐겨볼까 하여 떠도는 중이지요." 선주혁이 답변을 하는 동안 은설연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그것 은 거짓과 진실을 가려내기 위한 예리한 관찰이었다. "은 공자께서는 이곳까지 어인 일이십니까?" "하핫, 소생 역시 유람을 하는 중이었소이다. 늘 책장을 넘기며 답답함을 느끼고 있다가 큰 세상을 구경코자 나서봤지요." '책장은 무슨……. 살벌하게 강한 거 뻔히 알고 있는데.' 선주혁은 속과는 달리 겉으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핫, 시종도 거느리지 않고 홀로 여행을 다니시다니……. 적적하시겠군요." "사실 그렇습니다. 처음에야 호기롭게 길을 나섰죠. 제가 본래 남자다운 면이 부족하여 이 기회에 웅장한 대자연을 보며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키울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외로움만 커지는군요." 은설연의 말과 눈을 보며 선주혁은 재빠르게 머리를 회전시켰다. 본시 소매치기는 감각적이며 눈치가 빨라야 한다. 그는 어렵지 않게 은설연이 의도적으로 자신에게 접근을 한 것이고 무엇인가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묵연수투?' 그럴 것이다. 소설 속에서 은설연은 여자인 것을 제외하면 남지학에 못지않게 뛰어난 인물로 그려지고 있었다. 그런 그녀라면 피부가 가뭇한 자신과 준수한 용모의 사형을 보고 무엇인가 의심할 수도 있었다. 중경쌍흉의 일까지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녀가 가진 정보가 적지 않으리라. 그녀의 성격이라면 묵연수투 자체가 탐이 나는 게 아니라 그와 관련된 일들에 흥미를 느끼고 있을 터. '결국 나와 이야기를 하면서 확증을 얻어 내겠다…… 이거군. 후훗!' 선주혁은 은설연의 의중을 짐작해내고는 스스로 만족해했다. '호오! 나름대로 무협지를 많이 읽어둔 게 도움이 되는 걸! 푸흐 흐흐, 내가 이렇게 똑똑할 줄이야.' "아까 보니 아주 뛰어난 무공을 지니셨던데 어찌 남자다운 면이 없다고 하시는 겁니까? 이제 보니 은 공자는 실로 겸손하시군요." "하하핫, 선비라 해도 자신의 몸은 지킬 수 있어야하지 않겠습 니까? 이 한 몸을 보존하기 위해 몇 수 익혔을 뿐이지요.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몇 수 익힌 걸로 나무젓가락으로 쇠를 뚫냐? 수십 수 익히면 하늘을 뒤엎겠네.' 몇 마디를 했다고 은설연에 대한 두근거림이나 호감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하니만 뻔히 다 알고 있는 사실을 감추고는 외려 자신을 통해 확증을 찾으려는 은설연을 보자 은근히 괘씸한 생각 이 들었다. "참으로 대단하시군요. 보아하니 뛰어난 학식을 지니신 것 같은 데, 대단한 무공까지 겸하셨으니 그야말로 문무(文武)를 겸비한 인 재로군요." 선주혁은 노골적으로 은설연을 띄우기 시작했다. "천만의 말씀. 지나친 과찬입니다. 어찌 제가 감히……!" "하하핫, 지나친 겸손은 오히려 오만이라지요. 은 공자께서는 그 야말로 하늘이 내리신 인재가 분명합니다. 수많은 여인들이 울고 갈 준미한 용모까지 생각하면 그야말로 하늘의 축복을 한 몸에 받 은 거지요." "선 소협께서는 실로 듣는 이의 귀를 달콤하게 하는 말씀을 잘 하시는군요. 하지만 저는 그런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갑작스럽게 선주혁이 자신을 칭찬하고 나서자 은설연은 그 저의 를 알지 못해 답답해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여전 이 미소가 가득한 상태였다. "아니오, 아니오. 은 공자를 보니 문득 생각나는 게 있소이다." "무슨 생각 말이시오." "혹시 사파……." "……!" 선주혁이 '사파'라는 말을 꺼내자 은설연의 안색이 급격히 변했다. '설마 이 자가 내 정체를 파악하고 있단 말인가?' 그녀의 안색이 변하는 것을 확인한 선주혁은 내심 쾌재를 부르 며 능청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리라는 말을 들어 보셨소?" "네? 사파리요?" "하하핫, 우리 고향에서 쓰는 말이지요. 사파리." 선주혁의 말을 듣고서야 은설란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방언(方言)이군요. 그런데 사파리가 무엇이오?" "그게…… 우리 고향 땅은 사시사철 눈이 덮여있지요. 그러니 동물들을 보기도 쉽지가 않답니다. 그래서 진기한 동물을 보게 되 면 반드시 생포해 한 자리에 모아 둔다오. 그곳을 우리 고향에서 는 사파리라 부르지요." "아……!" '아!는 무슨 아! 푸후훗, 아무리 천재로 설정이 되어 있어도 이 선주혁님께는 못 당하는구나.' 선주혁은 일부러 그녀가 속한 사파의 이야기를 던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당황하는 모습을 본 후 아무 이야기나 갖다 붙인 건데 그녀가 납득하는 모습을 보이자 속으로 짜릿한 쾌감을 느꼈 다. "은 공자를 보면 아무래도 그 사파리에 모셔야할 것 같소이다. 인세에서 보기 드문 인재니 말이오. 하하하하핫!" "하하하하핫!" 은 설연은 내심 안도하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선 소협께서는 절 짐승이라 욕하시는 것입니까?" "아이고! 그건 절대 아니오. 하하핫, 그저 은 공자와 같은 인물 도 알게 되어 기쁘고, 오래도록 보고 싶다는 생각에서 한 농담이 었을 뿐입니다." "하하하, 소생도 선 소협을 만나 실로 반갑군요. 이렇게 유쾌하 게 웃어보긴 실로 오랜만이니까요.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 "인연을 이렇게 끝내기는 아쉽군요. 어떻습니까? 저는 딱히 방 향을 정해놓은 것도 아니니 선 소협의 유람에 저를 끼워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홀로 다니기도 적적하니 말벗도 되고 이런 좋은 인연 을 보다 오래도록 유지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은설연의 말에 선주혁은 당장이라도 좋다고 대답하고 싶었다. 사실 그녀와 함께 다니면서 대쉬(?)할 기회를 가질 수 있기를 바 라던 그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냥 철없는 생각을 할 수만은 없었다. 그녀가 동행을 원하는 것은 분명 다른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뻔히 알면 서 마냥 좋다고 실실거릴 수만은 없었다. 그녀의 마음을 얻어 둔 상태라면 모를까, 지금의 그녀는 사파에 서도 알아주는 여고수일 뿐이었다. 더욱이 묵연수투를 노리는……. 선주혁은 재빨리 웃음을 머금고 부드럽게 말했다. "소생도 그러고픈 마음이 간절합니다만……. 이미 소생에게는 일행이 있습니다. 그러니 그 분과 상의를 해 봐야할 듯하군요." "아! 그러십시오. 그분이 허락을 해 주셔서 선 소협과 보다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크! 그럴 수만 있다면 나도 좋지. 보다 많은 시간이라…… 므흐흐흐…… 좋지, 좋아!' "알겠습니다. 일행에게 묻고 내일 말씀을 드리지요." "감사합니다. 일행 분께 선 소협께서 잘 말씀해 주십시오." 은설연은 술을 다시 권하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하핫, 뭘 그렇게까지……." 선주혁은 조금은 과장되게 웃으준 다음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나저나 은 공자는 정말 준미하시군요. 아니, 지나치게 준미하 다 보니 오히려 여자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흠, 흠. 여자 같다니요, 말씀이 좀……." 은설연은 슬쩍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아! 실례가 되는 거였습니까? 죄송합니다." 선주혁은 두 손을 맞잡아 사과를 한 다음 잔뜩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하지만 솔직히 그런 말씀은 많이 들으셨지요?" '크흐흐흐, 이 거 왜 이렇게 재미난 거냐?' 잔뜩 곤란한 표정을 짓는 은설연의 표정을 살피는 것이 즐거운 선주혁이었다. 장난기가 발동되었기도 하고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은설연의 얼굴이 너무나 귀여웠던 것이다. "간혹…… 그러긴 했지만……." "하하하핫! 역시!" 선주혁은 신이 난 듯 박수를 쳤다. "사실 이건 은 공자만 알고 계십시오. 만약 은 공자가 여인이었 다면 소생은 당장에 대쉬, 아니 당장 제 마음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 그게 무슨 말이시오?" 은설연은 정색을 하고 물었다. "은 공자와 같은 용모를 가진 여인이 제 이상형이란 말이지요. 하! 실로 안타까운 일이오. 아무리 찾아도 은 공자와 같은 용모를 지닌 여인을 찾을 수 없으니 말이오." 선주혁의 말에 은설연은 얼굴을 살짝 붉혔다. "어찌 여인을 용모만으로 평가한단 말입니까. 그보다는 착한 여 인이 제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착한 여자가 좋지. 얼굴 착하고, 몸매 착하고, 돈 착하 고, 마음 착한 여자가 최고지. 그게 답이고 말고.' 선주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렇지요. 하지만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훗날 소생이 인 연을 만난다면 은 공자와 같은 생김이었으면 좋겠다는 말입니다." "흠, 흠. 그만하시지요. 자꾸 그러시면 소생을 놀리는 것 같소이다." 은설연은 짐짓 점잖게 선주혁의 말을 막았다. '아고! 귀여운 것. 앙증맞게 시치미를 떼긴……, 크흐흐흐흐.' 선주혁이 은설연을 골려 먹는 것은 단지 장난기 때문만이 아니 었다. 물론 다른 목적으로 접근해 온 것에 대해 복수하기 위함은 더더욱 아니다. 소설 속에선 은설연은 외롭게 표현이 되었었다. 그녀의 조부는 사파의 절대자. 그렇기에 모든 일에 있어 그녀는 은적비라는 그림자 아래에 있 어야만 했다. 그녀에게 농담을 하는 자도 없었으며, 그녀에게 감히 마음을 열 어 보이는 자도 없었다. 모두가 은적비의 손녀로만 대했고 조심스 럽기만 했다. 은설연이 인상을 쓸라치면 벌벌 떨기에 바빴고, 입을 열어 그녀 에게 말을 건넬 때면 아부와 칭송만이 가득했다. 그것이 꽃다운 나이의 은설연을 외롭게 했던 것이다. 선주혁은 거기에 착안점을 두었다. 자신이 이렇게 친근한 모습을 보임으로서 그녀가 편한 마음을 먹게 해 준 것이다. 그녀의 신분만을 고려하면 자칫 무례하다고 느낄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선주혁은 그렇지 않으리라 확신했 다. 이미 그는 소설을 통해 그녀의 심리상태를 훤히 들여다 본 후 였기 때문이다. 빙빙 돌려 은설연과 같은 여인이 있다면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처럼 말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그녀에게 있어서는 그간 들어왔 던 어떤 아부보다 기쁘게 받아들여질 것이기에……. 그렇게 선주혁은 은설연에게 작업(?)을 걸며 술잔을 기울였다. "그러니까…… 아까 그 자가 우리에게 의도적으로 접근을 한다 는 건가?" "네. 제가 생각하기에는 의도적인 접근인 것 같아요." "흠……." 남지학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나무젓가락을 날릴 때의 기억 이 떠오른 것이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동작, 그리고 막강한 내력. 젊은 나이를 감안하면 좀처럼 찾기 힘든 고수였다. 정도 무림에 신웅십팔걸(新雄十八傑)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 만 그들이라 해도 낮의 그자가 보여준 것과 같은 한수는 쉽게 펼 치지 못할 듯 했다. 그런 자가 자신과 사제에게 의도적으로 접근을 해 온다고 하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딱 잘라 거절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지만 그럼 더욱 의심을 받을 겁니다. 반드시 뒤를 쫓겠죠." "어차피 알려질 일이야. 의심을 받건, 밝혀지건 상관없는 일이잖아." "제 말이 그겁니다. 어차피 알려질 일이고, 그 자도 금세 알아챌 것입니다. 똑똑한 자니까요. 그러니까 외려 그 자를 이용하자는 겁 니다. 아예 우리 일에 끌어들이는 거죠." "그게 무슨 말이야?" 남지학은 선주혁이 하는 말을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선주혁 이 더 똑똑해서라기보다는 은설연에 대해 정보가 전무한 남지학이 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세요. 그자 혼자서 우리를 추적했다고 생각하세요?" "조력자들이 있단 말인가?" 남지학이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자는 우리가 중경쌍흉을 죽인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특히 정도입네 하는 인간들은 모르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리고 상관…… 하여튼 그 간사한 놈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는 듯 했죠. 우리와 같이 움직이지 않는 한 몰라야 하는 일들을 다 알고 있다는 말이잖아요. 그런 자가 우리와 같은 시기에 이 객잔 에 있다는 것……. 말이 안 되죠." 선주혁은 단정 짓듯 말했다. "뒷받침하는 세력이 있다는 말이군." "네. 우리라는 확증을 못 얻었을 뿐이겠지만, 우리의 도주로를 예상하고 길목에서 기다릴 정도라면 홀로는 불가능하죠." "하! 사제는 정말 대단하군. 스쳐지나갈 수 있는 일들을 조합해 그 많은 것을 생각해 내다니!" "하핫, 뭘요." 선주혁은 쑥스러운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었다. 은설연에 대한 것을 미리 알고 있기에 살을 붙였을 뿐인데, 남지학은 모든 것을 선주혁이 유추해낸 것으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자에게 세력이 있는 것과 끌어들이는 것이 무슨 상관 이지?"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흉악한 무리를 만났을 때를……. 중경쌍 흉과 상관 악적이 어떻게 했나요? 지들이 수투를 취하기 위해 나 머지 인간들을 처리했잖아요." "아하! 이이제이(以夷制夷)의 계(計)로군!" "그렇죠, 이이제이!" "정말이지 사제는 뛰어난 계략가군. 정말이지 사제를 적으로 삼 는 자가 있다는 그 자야말로 세상에 다시없을 바보일거야." "하하핫, 뭘요." '내가 머리가 좀 좋기는 하지. 푸헤헤헷!' 남지학의 칭찬에 마냥 기분이 좋아지는 선주혁이었다. 그러면서 도 한 편으로는 남지학의 변화를 다시 한 번 느껴야만 했다. 과거라면 이런 계략은 비겁하다하여 결코 순응하지 않았으리라. 그런데 외려 천재적인 작전이라며 기뻐하니 그의 현실감각이 비 약적으로 발전했음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앞으로 내게 많이 배우라고요, 사형.' 사실을 말하자면 선주혁은 은설연과 좀 더 함께 있기로 미리 결 론을 내린 상태였다. 수만 가지 가능성을 놓고 올바른 선택을 하기란 실로 어려운 일 이다. 하지만 하나의 결론을 내려놓고 그것을 합리화 시킬 방법을 찾 는 데에는 천재성이 필요 없다. 선주혁이 겪은 과정은 그와 같았다. 미리 은설연과 동행을 결정했으니 머릿속의 여러 정보를 조합해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는 근거로 활용했을 뿐이다. 하지만 남지학은 그것을 알 리 없으니 그저 선주혁의 모든 것이 감탄스럽고 대단하기만 했던 것이다. 결국 남지학과 선주혁은 은설연과 동행하게 되었다. 선주혁은 남지학에게 마차를 구입해 이동하자는 제안을 했고, 남지학은 그것을 흔쾌히 수락했다. 마차를 이용하면 노출이 덜 되 니 말썽을 피하기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물론 은설연을 의식한 선주혁은 좀 더 편하게 가자는 식으로 말 을 했고, 눈치 빠른 남지학은 사제의 의도를 파악하고는 재빨리 동의한 것이다. 그리하여 세 사람은 마차를 구입하고, 마부를 고용했다. 선주혁은 모든 것의 비용을 자신이 댔으며 은자를 물쓰듯 썼다. 은설연은 그런 선주혁의 행동을 유심히 살피기만 할 뿐 아무런 반응도 나타내지 않았다. 마차의 내부에 함께 하게 된 세 사람. 선주혁은 남지학과 은설연을 번갈아보며 생각했다. '흠……, 이렇게 가까이서 봐도 전혀 눈치 못 채는 건가? 평소 사형의 천재성이 이럴 때는 완전히 사라지는군.' 남지학이 은설연이 여자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 여전히 이해가 안 가는 그였다. 아무리 남자로 봐 주려고 노력을 해도 그의 눈에 는 여전히 여자로만 보였기 때문이다. '하긴……, 무협에서 말이 안 되는 게 한두 가지냐. 그러려니 하 고 봐야지, 아니…… 내 경우는 봐야지가 아니고 살아야지군. 그게 장수의 지름길이다, 그래.' 선주혁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나저나 두 분이 사형제지간이시라고요?" 은설연이 섭선으로 부드러운 바람을 만들어 부치며 물었다. 그녀 정도의 무공이라면 더위를 타지 않음을 뻔히 알고 있는 선 주혁이었지만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그렇소이다." 남지학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가 아무리 현실감각에 비약적 인 발전이 있었다지만, 계략을 실천하는 데에 있어서는 아직까지 초보라는 것이 여실이 드러나는 단면이었다. 선주혁은 그저 쓴 웃음만을 머금을 뿐이었다. "보아하니 명문의 제자분들이신 듯한데…… 사문을 여쭤도 되겠 습니까?" "현재 저희는 사문을 밝힐 입장이 아닙니다." "아, 실례했습니다." 은설연은 정중히 사과를 했다. "아닙니다." 남지학은 짧게 대꾸하고는 창문의 휘장을 살짝 걷어 밖을 내다 봤다. 더 이상 말을 하고 싶지 않다는 의미였다. '하! 원래는 연인이 되었어야할 두 사람인데. 뭐 그 때는 인연이 닿았던 거고, 지금은 인연이 바뀌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더 이상 남지학과 얽힌 여자 문제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고민하 지 않기로 했다. 인연이 닿는다면 자신이 무슨 짓을 해도 사형과 맺어질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사형과 인연이 없다는 뜻이었다. 사형과 인연이 없 는 여자라면 자신이 인연을 맺는 것이 무슨 죄가 되겠냐는 식의 억지 논리로 스스로를 합리화시킨 그였다. 은설연이 갑자기 마주한 선주혁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녀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게 되자 선주혁은 가슴이 두근거리 기 시작했다. '이, 이런 횡재가……!' 은설연은 선주혁의 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소근 거렸다. "선 소협의 사형은 꽤나 냉랭하신 성품이시군요." 귓가에 은설연의 숨결이 닿자 선주혁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 랐다. '흠, 흠! 진정하자, 진정해.' 억지로 마음을 추스른 선주혁은 사형과 은설연을 번갈아가면서 봤다. 마차 안에서 소곤거리는 소리를 남지학이 못 들었을 리 없다. 그런데도 남지학은 시선을 창밖에 고정시킨 채 미동조차 하지 않 고 있었다. 아마도 상대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은설연은 입가에 장난스런 웃음을 머금은 채였다. 어젯밤 선주혁이 재미난 이야기를 잔뜩 늘어놓아서일까? 그녀의 표정에는 친근함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선주혁은 그녀의 표정 모두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 었다. 영리한 그녀라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할지 몰랐으므로. 하지 만 그녀의 얼굴만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캬! 쥑인다. 답 나온다, 답 나와. 어떻게 하면 저렇게 귀여운 표 정을 지을 수 있는 거지?' 이번에는 선주혁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지금은 신경이 좀 날카로워서 그럴 뿐이에요. 원래는 따뜻한 사람이죠." 은설연의 귀에 대고 그녀의 말에 대답을 해줬다. 선주혁의 말에 은설연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 환하고 아름다운 미소를 보게 되자 선주혁은 정신이 다 몽롱 해질 정도였다. 히이이잉 갑자기 울리는 요란한 말울음 소리와 함께 마차가 멈춰 섰다. 나이든 마부(馬夫)가 말을 달래는 소리가 요란했다. 선주혁과 남지학은 서로의 표정을 살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대충 짐작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나리들……, 길을 좀 비켜 주셔야……." 나이든 마부의 목소리는 그들의 예상이 크게 빗나가지 않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바깥쪽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남지학. 선주혁은 힐끗 눈을 돌려 은설연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는 지금의 이 상황이 몹시 흥미롭기만 해 보였다. "우리는 지금 도적들을 찾는 중이다. 마차 안의 사람들에게 모 두 나오라고 전해라." 굵직한 음성이 마차 안까지 들려왔다. 아마도 길을 막은 사람 중 하나이리라. 바깥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불쾌감이 섞였다. 은설연의 고운 이마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그 모습을 본 선주혁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은설연은 사파연합에 속해있다. 무림맹이니 정의련이니 하는 말 을 들으면 당연히 기분이 좋지 않으리라. "흠……. 아마도 정영검의 죽음 이후에 무림맹이 나섰나 보군요." 은설연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무리 무림맹이라 해도 관원(官員)이 아닐 진데 어찌 지나가 는 모든 행인을 다 조사하신단 말씀이십니까?" 겁에 잔뜩 움츠려든 마부이긴 했지만 할 말은 다하고 있었다. 역시나 나이가 많은 만큼 사리를 따지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자 여태껏 오만한 목소리로 윽박을 지르던 자가 아닌 다른 음성이 들렸다. "이 보시오, 노인장. 우리는 지금 무림맹의 명을 받아 곤륜이마 (崑崙二魔)를 쫓는 중이외다. 그들은 물건을 훔칠뿐더러 살인을 밥 먹듯 하는 마두들이니 민초들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잡아야할 터. 마차 안의 분들은 그저 얼굴만 보여주면 될 일이니 협조해 주 시기 바라오." 말은 마부에게 건네는 것이었지만, 결국은 마차 안 사람들에게 들으라 한 말이었다. '곤륜이마? 언제 그런 괴상망측한 별호가 붙은 거야?' 선주혁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거……. 아무래도 우리가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 을 문제 같구려." 은설연이 매우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선주혁은 남지학의 얼굴을 봤다. 그의 의도를 확인하려는 것이 다. 남지학의 표정이 좋지만은 않았다. 곤륜이마. 사문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한 그였다. 마(魔)라는 별호 앞에 곤륜이 언급되는 것이 그를 불쾌하게 만 들고 있었다. 그간 자신과 사제의 모든 행동은 정당한 것이었다. 그런데 어찌 마두로 몰아세운단 말인가? 더구나 사문의 명예에 누가 되는 별호와 함께. "사제, 일단 나가서 이야기를 하도록 하지." "네, 사형." 결국 남지학의 결정에 따라 세 사람은 마차에서 내렸다. 마차의 문이 열리자 무림맹의 인원 스무 명가량은 잔뜩 긴장했 다. 도사차림의 몇몇과 속가(俗家)의 복장을 한 몇 명이었다. 남지학은 어렵지 않게 저들 중에 청성파(靑城派)의 도인들이 섞 여있음을 짐작했다. 무림맹에서 움직이는 것이니 구파일방에 속하 는 청성이 나설 수밖에 없었으리라. "무량수불……. 불편을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우리는 무림맹의 사천지부에서 명을 받고 나선 무림인들로서, 마두들을 쫓는 중이 오니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삼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도사가 앞으로 나서며 양해를 구했다. 자신들의 정보에 의하면 악적은 둘이라 했다. 절세의 미남자와 백발의 사내. 마차에서 내린 자들의 용모는 그들이 들었던 정보와 흡사했다. 눈이 번쩍 뜨일 만큼의 미남과 피부가 가무잡잡한 자가 보였기 때 문이다. 문제는 준미한 용모의 미남이 둘이라는 데에 있었다. 일당이 더 있을 수도 있으니 다분히 의심이 갔으나 모든 행사에 는 신중을 기해야만 했다. 무림맹의 이름을 내세웠으니 자칫 애꿎 은 사람에게 피해를 입혀서는 곤란했기 때문이다. 청수한 용모의 도사, 청성파의 덕양(德暘)의 말에 먼저 반응한 것은 은설연이었다. "안에서 듣자하니 실로 너무하시는구려. 악적을 쫓는다 하여 모 든 행인을 죄인취급하시는 겁니까?" 비록 유생차림이었지만 덕양은 은설연이 범상한 인물이 아니라 는 것을 쉽게 파악했다. 단지 그가 숨 막히는 미공자여서만이 아 니었다. 무림맹이라는 이름에 조금의 위축됨도 찾을 수 없을뿐더 러, 당당한 기개가 여느 호걸에 못지않았기 때문이다. '어디서 저런 인물을 길러낸 걸까?' 저 정도의 인재라면 강호에 소문이 나지 않았을 리 없었다. 적 어도 신웅십팔걸 중 하나에 속하기에 부족함이 없어보였기 때문이 다. 하나 덕양은 신웅십팔걸중 저와 같은 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 은 기억이 없었다. "무량수불……. 사안이 위중(危重)하여 다소 무례를 범했소이 다. 세 분 도우(道友)께서는 부디 노여움을 푸시고 잠시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하! 세상이 어찌된 일인지……. 복숭아나무를 깎아 검을 만들 어 악귀(惡鬼)를 쫓아야할 도사님께서 청강장검을 들고 속세에 나 와 사람을 몰아세우니……." 은설연은 마치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하지만 중인(衆人)들 중 그의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지 못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덕양은 도사의 신분이다. 오랜 수양을 쌓아왔으니 은설연의 말 을 듣고 노기가 치밀기는 했으나 성급히 드러내지는 않았다. 은설연의 말에 반응을 보인 것은 처음 마차를 세우고 무림맹의 이름을 빌려 거들먹거리던 그자였다. "이 놈! 감히 지금 무림맹의 행사에 불만을 토로하는 것이냐?" 큰 키에 창(槍)을 들고 서 있는 자였다. 길쭉한 얼굴이 꼭 말머 리와 같았다. 그가 든 창에는 색깔이 다른 세 개의 술이 달려 있 었다. 그것은 사천 땅에서 고명한 창술로 명성이 높은 진성문(眞 成門)의 독문표식(獨門標式)과도 같았다. "자꾸 무림맹, 무림맹 하는데 그곳이 대단한 곳이라는 이야기는 들었소. 하지만 우리가 천자(天子)의 백성이지 무림맹의 백성이 오? 칼을 들고 흉악을 떠는 무림인들이야 무림맹이라 하면 벌벌 떨겠지만 백주대로(白晝大路)를 다니는 민초(民草)들까지 그래야 한단 말이오?" 은설연은 마두(馬頭) 상(象)의 사내가 으름장을 놓는데도 표정 하나 변치 않고 쏘아붙였다. "이놈이 먹물깨나 먹었다고 찢어진 입으로 망발을 일삼는구나. 어디 글줄로 배때기를 채우면 창도 안 들어가나 보자." 말상의 사내는 창을 꼬나 쥐며 은설연을 협박했다. "하! 이거야 원. 제 맘에 들지 않는 말을 했다고 사람의 목숨을 취하면서 백도(白道)가 어쩌니 협의(俠義)의 어쩌니 하는 곳이 무 림맹이로나! 그러면서도 사악한 무리를 응징하네 마네 하니 그야 말로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격이로다. 허허!" 마치 시구를 읊는 것처럼 묘한 어조로 말하는 은설연이었다. 어 조야 허공을 향해 한탄을 하는 듯했으나 실상 그 내용만은 잘 벼 린 칼보다 날카로웠다. "무량수불! 여(呂) 대협께서는 잠시 진정하시지요." 덕양이 일단 사태를 수습하고 나섰다. 은설연의 말은 덕양의 노 기를 계속 자극하고 있었지만, 묘한 내용으로 인해 함부로 행동키 곤란함이 있었다. 계속 해서 무림맹의 위엄을 내세운다면 그가 언급한대로 감히 황제(皇帝)의 권위와 동일함을 주장케 되는 것이며, 무력(武力)을 사용한다면 평소 무림맹이 천시(賤視) 여기던 사마외도의 무리와 다를 바가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덕양은 은설연에게 반장의 예를 갖추며 다시금 정중하게 말을 건넸다. "공자의 언변(言辯)이 실로 자공(子貢)에 못지않구려." 자공은 공자(孔子)의 제자로 당대 제일가는 설객(說客)으로 꼽 히곤 했다. 제(齊)나라가 노(魯)나라를 공격하려 하자 자공이 세 치 혀만으로 노(吳)나라와 월(越)나라를 설득해 노나라를 구했다. 덕양은 은설연이 교묘한 혀를 놀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하는 상황을 만든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소생이 어찌 공문십철(孔門十哲)중 한 분인 자공께 비할 수 있 겠소이까?" 겸양을 하는 은설연이었으나 그 표정은 도도하기 이를 데 없어 말과는 사뭇 달랐다. "하핫, 겸손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빈도(貧道)가 공자의 뜻은 익히 알아들었으나 현재의 사안은 몹시 위급하기 그지없는 일. 악 적이 활개를 치며 살행을 그치지 않으니 여타의 민초들을 위해서 라도 반드시 잡아야합니다. 그러니 세 분 공자께서는 협조를 해 주시길 바랍니다." "흥! 결국은 힘을 앞세워 당신들의 의지를 관철시키겠다는 뜻이오?" "몇 가지 부탁말씀을 드릴 뿐이고, 죄가 없다면 그에 협조해주 시면 될 일이니 무력을 사용하는 불상사는 없길 바랍니다." 담담히 말하는 덕양. 하나 그의 말에는 반항할 경우 무력행사도 불사하겠다는 의지가 담겨있었다. 또한 반항을 하는 것은 스스로 죄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니 무력을 행사하는 명분을 세우는 말이기도 했다. "청정(淸淨)한 도량(道場)에서 속인(俗人)들과 어찌 말을 섞어 야 하는가만 수련하셨나 보군요." 은설연은 억지로 명분을 세운 덕양에게 쏘아붙였다. 사실 그녀 역시 남지학과 선주혁의 진정한 정체를 밝히고 싶었 다. 원래대로라면 이렇게 나설 이유가 없었다. 두 사람이 무림맹 과 상대하는 것을 보며 그녀가 원하는 답을 찾아낼 수 있을 테니. 하지만 상대가 문제였다. 어릴 때부터 적대시해온 무림맹이 설치는 모습을 서서 구경만하 고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나 그것은 본 공자가 용납할 수 없습니다. 길을 열던가……, 재주가 있다면 직접 우리 일행의 품을 뒤져보도록 하시오!" "……!" 여태껏 글줄 깨나 읽은 선비의 흉내를 내던 자였다. 입만 살아 나불대는 것만 같더니 결국 할 테면 해 보라는 식으로 나오자 무 림맹의 인물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 나불댈 때부터 알아봤다. 결국 뒤가 구린 놈들이라는 말 이구나." 진성문의 여계표(呂界剽)가 기다렸다는 듯이 창을 눕혀 창극(槍 戟)을 겨눴다. 은설연은 여유 있는 동작으로 섭선을 흔들 뿐이었다. "타합!" 맹호(猛虎)와 같은 기세로 은설연을 향해 달려드는 여계표. 현란한 색을 뽐내며 흔들리는 세 개의 술은 창극을 가려 공격이 어디에서 시작될지 짐작키 힘들 게 했다. 피잇 무대의 막을 가르고 뛰어나오는 배우처럼 난데없이 술 사이를 헤치고 모습을 드러낸 창극. 그것은 은설연의 미간을 노리고 정확 히 날아들었다. 은설연은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이는 동작 하나만으로 창극을 피해냈다. 기다렸다는 듯 횡으로 그어지는 창. 은설연의 고개가 아래로 숙여졌다 다시 들렸을 때 어느새 창극 이 회수되었다 다시금 은설연의 미간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연속적인 찌르기 공격은 위력적이고 매서웠다. 하지만 은설연의 표정은 여전히 태연작약(泰然綽約)한 상태. 그는 가볍게 섭선을 접으며 창의 중동을 때렸다. 낭창이며 휘어지는 창대. 창극은 목표를 잃고 옆으로 흘렀고, 은설연의 신형이 질풍처럼 여계표 쪽으로 접근했다. 성격이 폭급하긴 하나 여계표 역시 사천바닥에서 날고 긴다는 무인. 상대의 접근이 거리를 좁히려는 시도임을 모를 리 없었다. 그는 선섭이 가격한 힘을 그대로 이용해 창을 풍차처럼 회전시 켰고 창극의 반대쪽 끝부분인 돌(突)을 이용해 은설연의 관자놀이 를 후려치려 했다. 은설연은 여계표의 진력이 집중된 창의 돌을 섭선으로 때렸다. 타악 쇠로 둘러진 돌과 부딪쳤으니 대나무살로 만들어진 섭선이 부서 지는 것은 당연한 일. 하나 놀랍게도 섭선은 조금의 상함도 없이 여계표의 창을 멈춰 세웠다. 여계표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무기의 우위에도 이와 같은 현상이 벌어졌다는 것은 결국 눈앞 의 계집애처럼 생긴 놈이 자신보다 내력이 뛰어나다는 의미였다. '젠장, 어떻게 이런 애송이가?' 여계표의 이마에 푸르스름한 혈관이 두드러질 때 갑작스레 섭선 이 버티는 힘이 사라졌다. 동시에 은설연의 신형 역시 꺼지듯 여계표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여계표의 창이 허공을 가르고 그가 허겁지겁 상대를 찾을 때 둔 탁한 타격음과 함께 호흡이 턱 막혀왔다. 어느새 옆으로 돌아선 은설연이 섭선으로 그의 옆구리를 가격한 것이다. 마치 철추로 옆구리를 강타당한 듯한 충격에 여계표는 신음소리 조차 내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다리의 힘이 풀려버린 것이다. 은설연은 여세를 몰아 섭선을 하늘로 들어다가 여계표의 뒤통수 를 향해 휘둘렀다. 섭선에 담긴 위력으로 보아 그대로 맞는다면 여계표의 머리는 수박처럼 깨지고 말 것이다. 슈웃 섭선과 여계표의 뒤통수 사이에 하나의 검이 끼어들었다. 덕양이 여계표의 위기를 보고 나선 것이다. "무량수불! 손속이 잔인하시구려." "흥! 소위 정도임을 자처하는 도사님께서 한 사람을 상대로 협 공을 하시겠다는 말이오?" 은설연이 섭선을 거두고 뒤쪽으로 물러서며 높고 날카로운 목소 리로 외쳤다. 사실 타인의 승부에 제 삼자가 끼어든 셈이라 덕양의 얼굴이 살 짝 붉어졌다. "애꿎은 살행을 막고자 함이 아니겠소?" "흥! 저 자가 내 미간을 노리고 창을 찔러오는 것은 참으로 자 비로운 행위였구려!" 은설연의 지적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사실 정도의 길을 걷는 자가 첫수부터 살초(殺招)를 전개하는 것은 비난을 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푸후후, 미스 은, 그게 바로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 륜이라는 거요.' 선주혁은 은설연의 말에 통쾌해하며 내심 키득거렸다. 은설연의 힐난에 반박할 말이 없었기 때문인지 덕양은 검을 회 수해 검집에 도로 넣었다. 그리고는 양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맨손으로 은설연을 대적하겠다는 뜻이었다. "이제 와서 새삼스레 예를 갖춘다는 건가……?" 은설연이 비꼬듯 말하자 덕양은 살짝 얼굴을 붉혔다. "조심하시오!" 경고성을 발한 덕양의 얼굴에는 더 이상 감정이 실리지 않았다. 명문거파의 제자답게 임전에 앞서 평정심을 찾는 것이었다. 차분하게 보법을 밟으며 은설연에게 접근해 가는 덕양. 발을 움직여 은설연에 다가가는 모습은 흡사 범과도 같았다. 진 중하기만 무겁지 않았고, 경쾌하지만 가볍지 않았다. 저 발걸음 중 언제 진각(震脚)이 터져 나올지 언제 신형이 튀어 오를지 짐작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단지 걸음을 옮기는 것만으로도 덕양이 얼마나 고된 수련을 거 쳐 왔는지, 그리고 그의 성취가 얼마나 높은지 짐작할 수 있었다. 남지학의 눈빛에 감탄이 흘렀다. 만약 자신이 현천자가 남긴 비급을 얻지 않고, 영과를 먹어 내 력이 급증되지 않았다면 저 도사와 상대해 이길 수 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곤륜파 제일의 기재라는 칭찬을 들으며 나름대로 자부심 을 가졌던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하지만 여기에는 남지학이 모르는 바가 있었다. 덕양이 비록 삼 십 대의 나이라고는 하나 그의 배분은 남지학에 비해 한 대가 높 았던 것이다. 즉, 덕양은 현 청성파의 장문인과 같은 항렬(行列). 전 청성장문인인 영일진인(寧日眞人)이 노년에 접어들며 마지막 으로 거둔 제자였던 것이다. 덕양이 신웅십팔걸에 이름을 올리지 않은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신웅십팔걸은 후기지수(後起之秀)들을 묶어 부르는 말. 덕양의 항렬로 끼어들기에는 무리가 있었던 것이다. "합!" 덕양의 입에서 낭랑한 기합이 튀어나오며 그의 손바닥이 빛살처 럼 빠르게 은설연을 덮쳐갔다. 직선적이면서도 파괴적인 일장은 은설연의 어깨를 노리고 날아 들었다. 은설연은 상대의 무공이 범상치 않음을 깨닫고 황급히 신형을 뒤로 뽑았다. 그런 은설연에 비해 조금도 떨어지지 않고 따라붙는 덕양. 그가 사용하는 신법은 청성의 비전 세류표(細柳飄)였다. 은설연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아무리 청성파의 제자라 해도 설 마 이 정도로 무공이 뛰어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제 야 은설연은 자신이 생각지 못한 부분을 기억해 냈다. 묵연수투를 훔친 자들은 가공할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의 도주로를 막기 위해 파견된 인원. 당연히 그들의 안전을 책임질 고수가 하나 정도는 섞여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정파의 무리라 해서 무조건 무시하려는 심정이 냉정한 판단을 잃게 했다. 하긴 그것을 미리 알고 있었더라도 고작 서른을 넘긴 이 도사에 게 그런 실력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순식간에 은설연을 따라붙은 덕양의 일장이 다시 은설연의 어깨 를 향해 뻗어갔다. 은설연은 황급히 섭선을 휘둘러 덕양의 일장을 마주해갔다. 퍼엉 손바닥과 섭선이 부딪쳤다고 생각하기 힘든 굉음이 울려 퍼지고 은설연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여계표가 휘두를 창의 돌에도 끄떡하지 않았던 섭선히 형편없이 망가진 상태였다. 한눈에도 그녀가 꽤나 충격을 받았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 다. 안색이 금세 회복되는 것으로 보아 내상을 입은 것 같지는 않 은 듯 했다. "최심장(催心掌)!" 은설연의 입에서 놀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녀가 놀라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최심장은 청성파가 자랑 하는 절기. 하나 그 절기를 익히기 위해서는 일정수준이 되어야 하며, 그 수준이라 함이 높고도 높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눈앞의 젊어 보이는 도사가 최심장을 익혔다는 것은 그 가 청성에서도 손꼽히는 고수라는 뜻인 것이다. "당신이 덕양인가 하는 그 사람이군." "도우의 견식이 실로 뛰어나시구려. 빈도가 덕양이외다." 청성파 장문인의 막내사제. 그와 같은 이름이 가지는 무게는 실로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정도 무림을 대표하는 구파일방에 속하는 대청성파가 아닌가. 그런 곳의 수장인 장문인의 사제니 덕양을 무시할 자는 당금무 림에 아무도 없다고 봐야할 것이었다. 적어도 백도에서는. 하지만 은설연은 백도의 무인이 아니었다. 상대가 청성의 덕양이라는 사실은 오히려 그녀를 달아오르게 했 다. 그녀 역시 정도의 무인들이 자부하는 실력이 궁금했던 것이 다. 거칠게 섭선을 던진 그녀가 양 손을 교차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긴 손가락이 뻗어 나온 하얀 손이 어지러이 움직이자 꽃잎이 휘 날리는 것 같았다. 상대의 기세가 변한 것을 감지한 덕양도 신중한 표정을 짓고 다 시금 임전태세에 들어갔다. 일단 자신의 신분을 알고도 물러서지 않는 것 하나만으로도 상 대는 보통나기가 아닌 것이다. "차합!" 이번에 선공을 해 들어간 것은 은설연이었다. 나긋나긋한 바람을 일으키며 흔들리던 그녀의 손에서 날카로운 바람이 일기 시작했고 천변만화(千變萬化)의 조화를 만들어냈다. 덕양은 상대의 변화에 현혹되지 않고 침착하게 최심장을 전개해 나갔다. 느릿한 손놀림에는 위맹한 위력이 담겨 있었고, 한 수의 전개에 천변을 방비하니 청성무공의 진가가 드러났다. 한편 은설연이 전개하는 무공도 만만치 않았다. 일장 일장에 바 위를 가루로 만들어낼 듯한 장법을 맞이해 빠른 변화와 쾌속한 공 수로 대처해 나가는 것이다. "저 두 사람의 무공은 실로 놀랍구나. 결코 내게 있어 손색이 없을 정도니……. 하! 세상은 진실로 넓구나." 남지학이 탄식하듯 말했다. 덕양을 보고 과거의 자신이라면 상 대하기 힘들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은 지금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 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덕양이 진정한 실력을 드러내자 그것 역시 착각이었을 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지금 덕양이 보여주는 무공은 자신과 비교 해도 부족함이 없었던 것이다. 두 사람의 격전을 보며 감탄하던 남지학은 문득 사제에게서 아 무런 반응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시선이 선주혁에게 향했 다. 선주혁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청성파의 도사를 주목하고 있 었다. 기이한 것은 그의 손이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남지학의 시선이 청성파의 도사에게 향했다. 그리고 다시 선주혁의 손으로 시선을 돌리는 그. '서, 설마……! 지금 저 도인의 무공을 익히고 있다는 말인가?' 남지학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의 짐작이 맞았다. 선주혁은 이미 알고 있었다. 청성파의 심법 구결을. 그것은 청 성파 모든 무공의 기초가 되는 것이 아닌가. 자연 최심장에도 기초가 되는 심법이 되었으며 그 구결을 알고 있는 선주혁이었기에 덕양이 운용하는 진기의 흐름을 아주 쉽게 쫓을 수가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그런가보다 하며 구경을 하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자신도 모르게 몰입해 덕양의 무공을 따라하는 것이었다. 덕양의 진기에 공명하듯 내부의 진기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청 성파 심법이 하나하나 떠오르며 그 묘리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 과정 중에 절로 손이 조금씩 움직인 것이고, 그것을 남지학이 본 것이다. '마, 말도 안 돼. 최심장은 청성파에서도 몇 익히지 못하는 절 정의 무공이 아닌가? 그것을 눈으로만 보고도 따라할 수가 있다고?' 남지학은 잠시 후 고개를 저었다. 사제는 그저 무공을 익히는 것에 흥미를 느껴 초식을 외우고 있 을 뿐이라 결론을 지은 것이다. 최근 들어 사제의 초인적인 능력 을 연달아 봤기 때문에 지레 놀란 것이리라 생각했다. 아직까지는 사파의 무공은 무의식중에 무시하는 남지학이었다. 선주혁이 놀라운 능력으로 중경쌍흉의 무공을 배웠다고는 하나 청 성파의 절정무공까지 그럴 수는 없다고 믿었다. Vol 10. 은설연과 덕양의 싸움은 팽팽한 국면이었다. 힘과 강맹함에 있 어서는 덕양이 우위에 있다 할 수 있었고, 변화와 임기응변에 있 어서는 은설연이 단연 앞섰다. 그러다보니 두 사람은 쉽사리 승부를 낼 수 없었고, 격전은 지 루할 정도로 오래도록 계속 되었다. 그러던 어느 한 순간. 덕양과 은설연의 팔이 한데 엉켜버렸다. 서로가 서로의 팔을 휘감은 채 멈춰버린 것이다. 일순간 감도는 숨 막히는 긴장감. 저 팔이 풀리며 누가 더 빨리 상대를 공격하고 방어를 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은설연과 덕양의 강렬한 시선이 허공에서 얽히고 긴장감이 팽배 되는 그 순간. "후웃!" 은설연이 입을 모아 덕양의 얼굴에 바람을 불었다. 갑자기 코끝을 간질이는 향긋한 내음. 도사의 신분이라 여인을 접하지 못했던 덕양은 그 달콤한 내음 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고, 짧은 순간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그것을 놓칠 은설연이 아니었다. 한 순간 풀러버린 그녀의 희디흰 손이 덕양을 향해 내뻗어졌고, 덕양은 뒤늦게 몸을 비틀어 심장을 보호하는 게 최선일 뿐이었다. 퍼억 뒤쪽으로 튕겨져 나가는 덕양. 그의 입가에는 내상을 입었음을 증명하는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무림맹의 무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철썩 같이 믿고 있었던 덕양이 패배했기 때문이었다. 그들로서는 은설연이 입을 모아 바람을 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덕양은 애써 몸을 바로 세우며 두 손을 맞잡았다. "빈도가 졌소이다." 분명히 상대의 기이한 수작에 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격전 중에 정정당당함만을 주장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덕양은 순박하게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덕양을 이겼기 때문일까? 은설연의 고개가 살짝 들어 올려졌다. 커다란 눈으로 무림맹의 인물들을 쏘아보는 그녀는 도도하기 그 지없었다. "이제 또 누가 나서서 본 공자의 실력을 알아볼 것이오?" 은설연이 던진 질문. 나서는 이가 있을 리 없었다. 청성파의 덕양이 패한 마당에 누가 있어 상대하려 들겠는가? 은설연의 입가에 뿌듯한 미소가 걸렸다. "그럼 이제 우리는 갈 길을 가겠소." 은설연은 그 말을 마친 후 마차에 올라탔다. 만약 그런 모든 모습을 선주혁이 봤다면 분명 귀여워 죽겠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선주혁은 덕양이 전개했던 최심장이라는 무 공에 완전히 빠져들어 있는 상태였다. "사제." 남지학이 그런 선주혁을 불렀으나 그 때까지도 몰입에서 빠져나 오지 못하고 있었다. "사제." 결국 남지학은 사제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아! 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선주혁. 남지학은 그런 사제의 모습에 빙긋이 웃었다. "은 공자가 모두 해결했으니 이제 길을 가자고." 비록 은설연의 배경이 되는 세력이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결국 선주혁이 의도한대로 이이제이의 효과가 나타났다. 남지학은 그런 계책을 생각해낸 사제가 정말 자랑스럽기만 했다. "아, 네." 선주혁은 여전히 덕양진인이 전개했던 초식들을 떠올리며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세 사람이 모두 탄 후에 출발하는 마차. 말과 마차의 바퀴가 만들어내는 흙먼지를 고스란히 맞으면서도 무림맹의 인물들은 피할 생각조차 못했다. 저와 같은 젊은 고수를 만났다는 것이, 그리고 덕양이 패했다는 것이 아직까지 실감이 나 질 않는 것이다. 그 때 덕양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전서구(傳書鳩)를……. 난화무영수(亂花無影手)……." 덕양의 말을 들은 무림맹의 인물들은 안색이 급변했다. 난화무영수. 사파연합을 이끄는 백사회의 일원인 천산노조(天山老祖)의 절기 가 아닌가! 그의 무공을 이어받은 전인(傳人)이 등장했다는 것은 크나큰 변 수가 아닐 수 없었다. 전서(傳書)를 작성하는 무인의 손끝이 떨리는 것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정말 대단한 무공이네요, 은 공자!" 선주혁은 과장된 표정을 지으며 은설연을 칭찬했다. 어쨌거나 여자는 칭찬에 약하다지 않은가. 그것이 용모건 능력이건 일단 띄 워주고보자는 식의 선주혁이었다.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군요." 은설연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고, 저 미소! 그냥 콱 깨물어주고 싶네.' "부끄럽다니요. 청성파 장문인의 사제를 박살냈는데." "……!" 선주혁의 말에 놀란 것은 남지학이었다. 덕양의 무공이 굉장히 뛰어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청성파 장문인의 사제인줄은 몰 랐던 것이다. "어? 사형은 몰랐어요?" 남지학의 표정을 보고 물었다. "응." 남지학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제는 정말이지 모르는 게 없군. 언제 청성파의 계보까지 ……." "강호에서 살아남자면 정보는 필수죠." 선주혁은 씨익 웃었다. 그 말을 들은 남지학과 은설연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한바탕 난리가 나겠는데요? 덕양이라는 말코가 깨졌 으니 무림맹이 발칵 뒤집힐 거예요." "괜히 문제를 일으켜 두 분께 폐를 끼친 게 아닌가 모르겠습니 다. 그냥 조용히 수색에 응했으면 될 일을……." "아니에요, 폐라뇨? 어차피 은공자가 아니었더라도 그들에게 협 조할 마음이 없는 저희였습니다. 그렇죠, 사형?" 남지학은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런 두 사람을 보고 은설연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괜한 호 승심에 나서서 두 사람의 실체를 파악할 기회를 놓쳐버린 것이다. "일단 마차를 버려야하겠군." 남지학이 잠시간의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흠……. 아쉽지만 그래야겠죠?" 선주혁이 입맛을 다셨다. 은설연은 아무 말 없이 두 사형제간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실로 호흡이 잘 맞는 사형제지간이군. 여타의 설명 없이도 저 렇게 뜻이 잘 통하다니.' "마부 노인에게 알릴 필요 없이 몰래 빠져나가죠." 선주혁의 말을 알아들은 남지학이 고개를 끄덕였다. '금선탈각(金蟬脫殼)인가?' 그리고 조용히 달리는 마차의 문을 열어 신형을 날리는 세 사람이었다. 마차를 벗어난 세 사람은 가급적 흔적을 남기지 않고 이동하는 데에 유의했다. 관도를 타고 마차가 달리고 있기에 그들은 우회하 여 금천으로 향했다. 쾌속하게 질주를 하며 은설연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 두 사형제의 신법이 실로 놀라웠던 것이다. 무공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어쩌면 이들이 곤륜이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검을 쓰는 준미한 청년과 백 발에 가무잡잡한 피부를 지닌 자. 소문에 들리는 곤륜이마와 두 사람이 부합되는 바가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남지학과 선주혁에게서는 거마의 분위기가 풍기지 않았다. 은설연은 네발로 기어다닐 때부터 사파의 거마들과 자라왔다. 소위 마두라 불리는 인물들 특유의 분위기를 그녀는 잘 알고 있었 던 것이다. 남지학에게서 언뜻언뜻 진한 혈향(血香)을 느낄 수 있었다. 하 지만 그것은 살기(殺氣)어린 혈향과는 달랐다. 마치 전장을 헤치 고 나온 장수와 같은 분위기일 뿐이었다. 선주혁은 더욱 그랬다. 어떻게 보면 무척 똑똑해 보이고, 어떻 게 보이면 멍청해 보이기까지 하는 남자. 의외로 섬세하게 자신을 배려해주고 친절의 베푸는 모습은 수십 명을 몰살시키고 묵연수투 를 훔쳐낸 자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미 심증을 굳히고 무엇인가 확증을 찾기 위해 이들에게 접근 한 것인데, 알면 알수록 오히려 이들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다면 대체 무림의 어떤 곳에서 이런 고수들을 길러낼 수 있단 말이지? 저 남지학이라는 사람의 무공이 고절하다는 것은 알 고 있었지만…….' 선주혁 마저도 이런 엄청난 신법을 구가할 수 있으리라고는 미 처 생각 못한 은설연이었다. 그의 눈에 선주혁이 새삼스레 보였다. '어디 한 번……?' 은설연은 진기를 북돋아 용천혈로 내뿜기 시작했다. 백사회에서 경공일절(輕功一絶)로 유명한 편복마왕(??魔王)의 신법인 비천편복(飛天??)을 전개한 것이다. 은설연이 속도를 높이자 남지학과 선주혁도 그 뒤를 쫓았다. 남지학은 곤륜파의 신법으로, 선주혁은 신투의 암영풍을 사용했다. 두 사람이 어렵지 않게 자신을 따라오자 은설연의 놀라움은 더욱 커졌다. "은 공자. 금천으로 향하는 길은 알고 가시는 거죠?" 그 순간 선주혁이 물었다. 은설연은 입을 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보통의 경우 신법은 장 거리의 이동에 사용된다. 따라서 가급적 적은 진기의 사용만으로 속도를 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전력으로 질주할 때는 신법이라 해도 막대한 진기를 운용해야만 한다. 따라서 이럴 때는 입을 여는 순간 진기 가 흐트러져 속도가 줄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선주혁은 조금도 속도를 늦추지 않고 자신에게 말을 걸 어오는 것이 아닌가? "다녀간 적이 있는 길이야. 이 방향으로 계속 가면 되겠군." 대답을 한 것은 남지학이었다. 급기야 은설연은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이, 이런 괴물 같은 사형제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도 은설연은 긴장을 해야만 했다. 신법 만 놓고 봤을 때 두 사람 중 누구도 자신보다 하수가 아니었다. 사실 곤륜이마가 중경쌍흉을 죽였을 때도 그녀는 그다지 긴장하 지 않았다. 비록 직접 만나본 것은 아니지만 그녀가 알고 있는 백 사회의 인물들에 비하면 두 사람은 애송이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정영검과 정파의 인물들이 몰살당했을 때는 더욱 그랬다. 곤륜 이마는 독이 바른 비수를 사용했고, 죽은 사람들에게는 많은 상처 가 남아 있었다. 그 정도의 인물들을 상대로 많은 상처를 냈다는 것은 곤륜이마 의 수법이 고명하지 못하다는 뜻이었다. 결국 곤륜이마는 무공자 체보다는 심계가 뛰어난 자들이라 결론지었고, 주의할 것은 묵연 수투만이라 생각했다. 그녀는 스스로 그 어떤 심계에도 당하지 않을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 두 사람이 곤륜이마라면? 답은 간단했다. 그녀 혼자서는 당해내기 힘들었다. '아무래도…… 도움이 필요하겠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지만 고집을 피울 때가 아니었다. 두 사 람은 아직까지 그녀에게 의심을 받는 상태였고, 심계가 뛰어난 곤 륜이마라면 자신들의 흉포함 정도는 쉽게 감출 수 있을 것이다. 은설연은 남지학과 선주혁의 뒤를 쫓으며 손을 뒤로 내밀었다. 이어 튕겨지는 그녀의 손가락. 끝에 매화(梅花)를 연상시키는 모양의 붉은 장식이 달린 작은 침(針)과 같은 것이 나무에 가서 박혔다. 백사회 독문표식을 남겨두는 것이었다. 선주혁 일행이 금천에 거의 다 도달했을 때가 되어서였다. 그들은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이 길을 막고 있는 것을 보고 신형 을 멈춰 세웠다. "아마도 이번이 마지막이겠군." 앞으로 금천까지는 신법을 사용해 질주하면 채 한 시진도 걸리 지 않을 거리였다. 조금만 더 가면 백가장에 수투를 돌려줄 수 있 는데 누군가 앞을 가로막자 아쉬움이 드는 것이었다. 남지학의 중얼거림을 들은 선주혁이 물었다. "저들은 또 어디서 튀어나온 걸까요?" 남지학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로서도 알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나타난 인물들은 셋. 선주혁 못지않게 가뭇한 피부를 가진 사내들이었다. "너희는 더 이상 가지 못한다." 한쪽 눈에 가죽으로 된 안대를 한 사내가 말했다. 넘겨짚는 건 지 아니면 이미 선주혁 등이 정체를 파악했다는 건지 독안의 사내 는 다짜고짜 보내줄 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남지학과 선주혁은 괜한 말싸움으로 시간을 끌 생각이 없었다. 조금만 더 가면 사천백가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고, 이 지긋지긋 한 누명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무림맹은 아닌 거 같죠?" 선주혁은 독안(獨眼)의 사내가 한 말은 들은 체 만 체 하며 남 지학에게 물었다. "응, 하지만 고수들이야." 남지학이 짧게 말했다. 세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칼끝처럼 날카로운 기도. 범인이라면 그 기도만으로도 오금이 저려 똑바로 서 있기 힘들 정도였다. 선주혁은 은설연을 살폈다. 그녀는 여유 있는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한 걸음 뒤로 물러서 있는 상태였다. 이번에야 말로 남지학과 선주혁의 진정한 모습을 관찰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런 은설연의 속셈을 짐작한 선주혁이 고소를 머금었다. '여시야, 여시. 하긴, 뭐 여우 같은 마누라는 데리고 살아도 곰 같은 마누라는 못 데리고 산다는 말도 있으니까.' 은설연이 무엇을 하든 아름다운 얼굴 하나로 뭐든 용서해가는 선주혁이었다. "우리는 백가장으로 돌아가는 중이오. 얼마 되지 않는 거리니 수투를 되돌려 받기 위함이라면 동행토록 하시오." 남지학은 세 사내를 향해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은설연의 얼굴에 변화가 생겼다. '정말 이 둘이 곤륜이마였단 말이야?' 살필수록 막연해지던 의문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은설연은 한 편으로는 의아해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조부와 그 수하들은 그녀에게 세상의 모든 간계를 가르쳤다 해 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토록 태연하게 자신을 속이는 자들 이 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은설연은 이내 냉정을 되찾았다. 곧 남지학의 말을 되짚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까지도 백가장에 돌아갈 것이라 주장하고 있었다. 어쩌면 금천으로 향하 는 이유가 진짜로 수투를 돌려주기 위함일지도 몰랐다. 은설연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남지학이라는 자는 처음 무림인들에게 쫓길 때부터 자신의 무죄 를 주장했다. 그리고 선주혁이라는 자와 동행하면서부터는 백가장 에 수투를 돌려주겠다고 공공연히 떠들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진짜로 백가장에 수투를 돌려줄 생각이란 말인가? 대 체 무슨 사연이 얽인 거지?' 백사회주의 손녀인 자신이 간계에 넘어갔다는 것보다는 이들이 진짜로 수투를 훔친 것이 아니며, 또한 수투를 돌려주려한다고 믿 고 싶은 그녀였다. 한편 선주혁은 은설연의 표정이 복잡하게 변하는 것을 살피며 쓴 웃음을 지었다. 이제부터 그녀가 어떻게 행동을 할지, 그녀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길이 없었던 것이다. 독안의 사내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느릿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그런 것 같더군.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말이야." "……?" 자신들의 의도를 알고 있다면서도 독안의 사내가 말하는 어조는 곱다고 보기 힘들었다. "그저 묵연수투를 탐내는 자들일 뿐이군." 남지학이 미간을 찌푸렸다. "크흐흐흐……, 뭐…… 기보를 얻을 수 있으면 그것도 좋겠지." 독안의 사내가 음침한 미소를 흘렸다. "그럼 묵연수투를 노리는 게 아니라는 말이오?" 남지학이 약간의 짜증 섞인 음성으로 물었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군. 너희는 더 이상 가지 못한다. 그리고 묵연수투도 우리가 가져간다. 알았나?" "미친 놈." 선주혁이 참지 못하고 욕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스스로 놀라 재 빨리 은설연의 반응을 살폈다.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선주혁의 욕 설에 크게 개의치 않는 듯 했다. "크흐흣, 제법 간교한 꾀를 부릴 줄 아는 놈들이라 들었다. 어 떠냐? 만약 우리의 명을 쫓을 생각이 있다면 살려줄 의향도 있다." 독안의 사내가 갑자기 엉뚱한 소리를 했다. "당신들이 누군지 부터 밝히시오." 남지학의 음성은 무거웠다. 이들의 무공은 결코 중경쌍흉에 비 해 떨어져 보이지 않았다. 중경쌍흉을 상대할 때는 그들의 방심으 로 쉽사리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이번에도 요행이 따르리라는 법은 없었다. 목소리가 가라앉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나마 은우라는 사람이 있는 것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사제 와 단 둘이서 이들 셋을 마주했다면 결과는 예측할 수 없었을 것 이다. 그는 내심 사제의 계략대로 은우가 배경이 되는 세력을 이 끌고 나와 주길 기대했다. 하지만 낙관적일 수는 없었다. 외려 자신들과 세 사내가 엉겨 붙어 싸우기를 기다린 다음 어부지리(漁父之利)를 노릴 수도 있었 다. 선주혁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바가 있었던 것이다. 한편 남지학의 질문에 독안의 사내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대 꾸했다. "후후훗, 그걸 알면 죽어야해." 앞뒤가 맞지 않는 소리였다. 자신들을 따르라 해놓고, 자신들이 누구인지 밝힐 수 없다니……. 하나 그들이 말을 못 알아들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무조건 자신들을 따르라는 말이었다. 복종을 결심하면 그 뒤 무엇인가를 알려주리라. "우리는 누구의 명도 쫓을 생각이 없소. 우리가 가는 길을 막으 려면 우리를 먼저 죽여야 할 게요." "크흐흐흐……, 거 참 희한한 놈들이군. 어렵게 훔쳐낸 수투를 왜 그렇게 못 돌려줘서 안달인 거지?" "우리가 훔친 게 아니오." "그래, 그래. 믿어주지. 믿어 줘." 독안의 사내가 실실 웃으며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저 자식은 혓바닥이 반 토막밖에 없나? 왜 자꾸 반말을 찍찍 뱉는 거야?' 선주혁은 독안의 사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음침한 분위기 하 며 반말지거리를 내뱉는 것도 그랬다. "하지만 너희는 백가에 가지도 못할뿐더러……, 가 봐야 소용도 없다. 수투를 돌려받을 자들이 없을 테니 말이야. 크흐흐흐흐……." 독안의 사내가 웃음을 터뜨리자 그의 양쪽에 있는 자들도 함께 음침한 미소를 지었다. "그, 그게 무슨 소리냐?" 불길한 느낌에 선주혁이 물었다. '원래보다 빨리 그들이 움직였단 말인가?' "긴 설명은 필요 없겠지. 마지막으로 묻겠다. 수투를 우리에게 바치고 투항을 할 건지, 아니면 여기서 죽을 건지 결정해라." "설마…… 벌써 백가장을 습격했단 뜻인가?" 선주혁이 흥분된 목소리로 물었다. "벌써?" 독안의 사내가 고개를 갸웃 거렸다. "우리가 백가장을 칠 것을 미리 알았다는 말인가?" "흥! 네놈들이 설가와 공모하여 사천 무림을 장악하려는 수작을 누가 모를 줄 알았느냐?" 선주혁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백가장에는 전지연, 아니 백화란이 있었다. 저들이 백가장을 습 격했다면 그녀의 생사가 불분명해지는 것이다. 비록 옆에 있는 은 설연에게도 이끌리긴 하지만 그녀가 악당들에게 당했다는 생각에 분노가 치밀었다. 한편 선주혁의 말을 들은 독안의 사내는 외 눈으로 소름끼치는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네놈이 그걸 어찌 아는 게냐?"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지언정 이 선주혁 어르신은 못 속인다, 이놈아!" 선주혁이 다시금 소리를 질렀다. 두 사람의 대화가 묘하게 진행이 되자 은설연의 얼굴에 다시금 호기심이 떠올랐다. 사천 땅에서 지금 자신이 모르는 모종의 음모 가 진행되고 있다는 얘기였기 때문이다. "흥! 알지 말아야할 것을 알고 있는 놈들이군. 이제 선택의 여 지는 사라졌다. 너희에게는 죽음만이 있을 뿐!" 독안의 사내가 한 걸음을 나섰다. 그의 몸에서 살기가 폭사(暴射)되어 나와 선주혁에게 집중되었다. 그들만이 알고 있어야할 비밀을 말한 당사자였기 때문이다. 선주혁은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의 살기를 느꼈지만 조금도 물러 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은설연이 지켜보고 있으니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함이었 고, 나름대로 무공에 대한 자신감이 생기기도 했다. 계속해서 실 력을 늘리기 위해서는 실전경험이 중요하다는 계산도 함께였다. "사제, 조심해." 남지학의 말에 선주혁은 고개를 살짝 끄덕여주었다. 독안의 사내는 선주혁이 자신이 보낸 기파(氣波)에 굴하지 않고 꿋꿋이 버티는 것을 보고 이채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소문이 모두 과장된 것만은 아니었군." 선주혁은 품에서 묵연수투를 꺼내 양 손에 꼈다. 중인들의 시선이 집중되긴 했지만, 선주혁과 남지학이 만났던 이전의 인물들과는 사뭇 달랐다. 이전의 인물들이 보여준 것은 맹목적인 탐욕뿐이었으나, 이 자 리에 있는 자들은 호기심과 흥미를 내비친 것에 불과했다. 차앙 독안의 사내가 손을 가볍게 떨구자 그의 양 손등 부근에서 각각 세 개의 날카로운 칼날이 튀어나왔다. 달빛 아래의 칼날은 푸르스름한 빛을 머금었다. 창백하면서도 음산한 느낌을 주는 빛이었다. '닌자(忍者)들이 쓰는 칼 같은 것과 비슷하군.' 독안 사내의 무기를 본 선주혁의 생각이었다. 선주혁은 몸을 가볍게 낮추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맹호(猛 虎)의 걸음걸이를 흉내 내는 듯한 이동. 그 모습을 본 남지학과 은설연의 안색이 변했다. '서, 설마…… 저것은……?' <2권 끝> Vol 1. 남지학과 은설연은 평소의 총기 넘치는 얼굴이 아니었다. 마치 조금은 모자라는 사람과 같은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그것은 선주혁이 먹이를 노리는 맹호와 같은 걸음걸이를 옮긴 후 직선적인, 그리고 강한 일장을 뻗어냈을 때에 절정에 달했다. 파앙 독안의 사내는 가볍게 몸을 뻗어 선주혁의 일장을 피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주혁의 장이 멈춘 곳에서는 압축되었던 공 기가 일시에 팽창하는 듯한 소리가 났다. 일장에 담겨진 위력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의미였다. "마, 말도 안 돼." 연이어 전개되는 선주혁의 초식을 보며 은설연이 중얼거렸다. 그녀는 자신의 말아 쥔 주먹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녀가 놀란 이유는 선주혁이 지금 전개하는 초식 때문이었다. 은설연에게 있어서는 너무나도 눈에 익은 초식. 그것은 덕양이라는 청성파의 도사가 자신과 싸우며 전개했던 그 초식이었다. 물론 초식의 완성도는 덕양이 전개했던 것에 비하면 한참이나 부족했다. 어딘가 엉성했고, 불안정했다. 하지만 일장 일장이 전개될 때마다 느껴지는 강맹한 위력만큼은 덕양에 비해 조금도 부족해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그녀를 떨게 만들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그녀 역시 선주혁처럼 최심장의 초식들을 전개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선주혁보다 훨씬 완벽한 자세로 전개 가 가능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자신이 익힌 심법으로, 그리고 진기의 운행으로는 저와 같은 위 맹한 장법을 전개할 수 없었다. 결국 겉모습만을 흉내 낼 뿐이라 는 말이었다. 그런데 저 자는……? 직접 눈앞에서 자신을 노리고 날아드는 최심장을 마주했던 은설 연이었다. 최심장의 진위여부(眞僞與否)를 파악하는 것은 그녀에 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한데 놀랍게도 선주혁이라는 자의 최심장은 진짜였다. 순간적으로 머리 한쪽에서 떠오르는 생각. 그것은 은설연이 백번을 죽었다 깨어나도 인정할 수 없는 가능 성이었다. 절대로……,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그녀는 다른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만 했고, 입을 열어 남 지학에 물었다. "곤륜파……의 제자라고…… 주장하고 다니지 않았소?"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말이 더듬거리며 나왔다. 심적인 동요가 얼마나 큰지 보여주는 단면이었다. 남지학 역시 넋 나간 표정으로 선주혁을 보다가 은설연의 질문 에도 눈을 떼지 못하고 대답했다. "그렇소. 우리는 곤륜의 제자들이오." "그런데…… 어떻게 저…… 사람이 어떻게 청성파의 절기를 배 울 수 있는 거죠?" 은설연은 선주혁이 이전에 최심장을 배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선주혁이 청성파의 비전을 전개할 수 있는 방 법은 전무했다. 최소한 그녀가 아는 한, 아니 그녀가 아니더라도 무공에 대해 조금이라도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아마도…… 덕양이라는 도인에게서 배웠을…… 거요." 남지학도 지금 한창 놀라고 있는지라 그의 음성도 안정되지 않 았다. "……!" 은설연은 순간적으로 남지학이라는 사람이 농담을 하고 있는 거 라 생각했다. 어쩌면 독안의 사내와 선주혁의 격전에 너무 몰입해 건성으로 대답했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덕양이라는 도사와 이전에 만난 적이 있단 말씀 이십니까? 서로 못 알아보는 것 같던데……." 사람이란 생각이 한쪽으로 고정이 되면 좀처럼 다른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기 마련이다. 그것은 똑똑한 사람일수록 더 했다. 그녀는 이미 맨 처음 떠올린 가능성을 부정해 놓은 상태였다. 그것을 부정할만한 이유와 근거는 넘치고도 흘렀다. 자연 말이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미련을 갖게 되는 것이다. 결국 남지학이 은설연을 향해 눈을 돌렸다. "당신과 덕양이라는 도인이 싸우는 것을 보고 익혔을 거란 뜻이 오." 은설연의 의구심에 확답을 해주듯 단정 지어 말하는 남지학. "……!" 은설연은 다시 입을 벌렸다. 이번에는 놀라 벌어진 입이었다. 뭐라 바로 반박을 하려다 그만두었다.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남지학의 두 눈. 분명히 장난을 치고 있음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역시도 놀라고 있음이 분명했다. '몰랐단 말인가? 저 사람도?' 은설연은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남이 전개하는 무공을 보기만 해서 배울 수 있다는 것이?" "불가능하오." 남지학이 다시 선주혁과 독안의 사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대 답했다. '이 사람이 지금 날 놀리나?' 은설연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런데 어찌 선 소협이 덕양에게 무공을 배웠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불가능한 것은 보통의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사람이오." 남지학은 잠시 쉬었다가 다음 말을 이었다. "사제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재능을 넘어섰소." "……!" 그제야 은설연은 남지학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확연히 이해할 수 있었다. 결국 선주혁이라는 사람은 초인적인 재능으로 남이 전 개하는 무공을 보고 그것을 고스란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 는 말이었다. 처음 그녀가 떠올렸던 말도 안 되는 가능성이 진실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인정할 수 없었다. 스스로를 천재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 자신조차 절대 불가능하다 고 여기는 만큼 남이 그것을 손쉽게 해낼 수 있다는 것은 더더욱 인정하기 힘들었다. "아무리 초인적인 재능이라도 그건 불가능하지 않소? 진기의 운 용할 수 있는 방법은 무궁무진 하오. 그것을 머릿속에서만 계산해 서 똑같은 위력을 낼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는 것은……." 은설연의 말이 점차 빨라졌다. "그것은 당신과 나와의 생각이오! 우리만의 한계일 뿐이란 말이 오. 지금의 상황은 나도 믿기 힘든 일이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사제는 우리가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그것을 해 내고 있소. 결국 우리에게는 불가능해도 사제에게는 가능하다는 뜻이 아니겠소." 은설연은 더 이상 남지학에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그에게 따질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은 일어나지 않았을 때나 해당하는 말이다. 지금 뻔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더 이상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저 자는 괴물이야!' 은설연은 어쩐지 입이 말라오는 것을 느꼈다. 보기만 해도 남의 무공을 배울 수 있다는 것. 꿈에서나 가능한 그것을 실현하는 자.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향후 무림의 판도가 달라질 수도 있다. 몇 년 만 지나면 누가 있어 저 자를 막을 수 있겠는가? '이자들을…… 적으로 돌리면 안 돼. 어떻게 해서든…….' 은설연이 눈부시게 하얀 치아로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한편 독안의 사내의 얼굴이 점점 굳어지고 있었다. 대충 어느 정도는 실력을 갖춘 애송이 정도로 생각했다. 지금껏 제법 간교한 꾀를 부려 위기를 벗어나 왔지만 역시나 조심할 것은 묵연수투 뿐 이라 여긴 것이다. 처음 그가 일장을 뻗을 때 자신의 추측이 맞았음을 알았다. 애 송이의 솜씨라고는 상상키 어려운 위력을 담은 일장이긴 했었다. 묵연수투의 덕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위맹하다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초식은 엉성하고 서툴렀다. 연결동작에는 허점이 그대로 드러났다. 아직까지 손에 익지 않은 무공을 마구 전개하는 것이리라. 애송이들이 흔히 하는 착각이었다. 실전에서는 고절한 무공보다 손에 익은 무공이 더 위력을 발휘한다. 완성되지 않은 무공을 사 용하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 것에 다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독안의 사내는 더욱 여유로웠다. 마음만 먹었다면 벌써 목숨을 취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나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만약 눈앞의 애송이가 자신들의 비 밀을 알지 않았다면 죽일 필요도 없었다. 그저 이들이 백가장에 도착하는 시간만을 늦추고자 했을 뿐이었다. 지금은 죽여야 할 필요가 생겼지만, 독안의 사내에게는 간만에 몸을 풀 기회였다. 마치 고양이가 쥐를 데리고 놀 듯 사내는 충분 히 즐기고자 했다. 한데 분위기가 이상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애송이가 펼쳐내는 초식이 펼치면 펼칠수록 완성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초식의 이름은 몰랐지만 정도문파라는 곳의 절정무공이 분명했 다. 중후하면서도 빠르고, 빠르면서도 무게가 있으니 역시 정도문 파의 상승무공이다. 그런 무공이 완성되어 가고 있는 중이었다. '더 이상 내버려 둬서는 안 되겠군.' 아무리 스스로의 실력에 자부심이 있다 해도 이 정도의 무공이 완성된다면 상대하기 까다롭다. 초식만 완성되어가는 것이 아니었 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손바닥에 실려 나오는 경력도 위맹 해져가고 있었다. 우습게보고 상대하다가는 쥐새끼한테 물리는 수도 있다고 생각 했다. 독안에서 날카로운 살광을 피어 올리며 사내가 본격적으로 살초 를 펼치기 시작했다. 그의 손이 붉게 달아올랐다. 혈마인. 상관벽우의 손에서 펼쳐졌던 희대의 마공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퍼엉 퍼엉 이번에는 독안 사내가 뻗어내는 손바닥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리 기 시작했다. 상관벽우가 사용한 혈마인과 같은 무공이었으나 위력에 있어서 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었다. "저런 장법이……?" 은설연이 독안의 사내가 펼쳐내는 가공할 장법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는 강호정세에 밝을뿐더러 무공에 관해서도 다양 한 지식을 쌓고 있었다. 하지만 독안 사내의 무공을 보고 선뜻 떠오른 것이 없었다. 손 이 붉게 물들었으니, 열양장(熱陽掌)의 일종인가 하고 생각해 봤 지만 딱히 열기를 뿜어내는 것 같지 않았다. "혈마인이라고 하더이다." 남지학이 중얼거리듯 말해 은설연의 의문을 해소해 주었다. 잠시 혈마인에 대해 생각하던 그녀가 목소리를 높였다. "혈마인? 적혈마(赤血魔)의 성명절기였던 혈마인이란 말이오?" 남지학은 적혈마가 누군지 몰랐다. 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실제는 그녀지만-가 놀라는 것으로 보아 제대로 짐작을 했다고 여긴 것이다. "혈마인이라면…… 절대 마주해서는 안 되오. 수투 이외의 부분 에 스치기라도 한다면……." "사제도 알고 있소." 남지학은 짧게 대답했다. 미간을 찌푸리고 관전을 하는 그였지 만 어쩐지 아까에 비해 긴장의 정도가 줄어든 것 같았다. '알고 있다면서 그 표정은 대체 뭐야? 장과 장이 맞부딪치지 않 고 싸우는 게 얼마나 어려운 건지 모르는 거야?' 은설연은 외려 태연한 표정을 지어버리는 남지학이 못마땅했다. 딱히 선주혁을 위하는 것은 아니라할 지라도 지금에 있어서 숫자 가 비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았다. 불만스럽게 남지학을 보던 은설연은 문득 남지학의 손이 검병에 닿아 있는 것을 보았다. "……!" 비록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남지학은 언제든 발검(拔劍) 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고 있던 것이다. 긴장감은 외려 속도를 늦추기 마련. 어쩌면 남지학의 저 태도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위한 예비자세일런지도 모른다. 그런 남지학을 보며 두 사형제의 의리에 새삼 감탄하는 그녀는 남지학의 눈썹에 미세한 움직임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 의 고개가 빠르게 모로 돌아갔다. 선주혁이 연신 뒤쪽으로 밀리는 모습이었다. 압축된 공기가 터지는 듯한 소리가 연신 울리고 독안 사내의 손 이 빠르게 선주혁을 압박해 들어갔다. 하지만 선주혁의 신법은 가히 발군의 것. 요리조리 잘도 피하는 지라 독안 사내의 혈마인은 아직까지 선주혁을 가격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외눈에 떠오르는 살기의 색채가 한없이 짙어지고 있었다. 슈우우웃 독안 사내의 장이 한번 내질러질 때마다 선주혁의 흑의가 펄럭 였다. 장에서 이는 경풍에 휘말려드는 것이다. 그 순간 선주혁은 곧게 펼쳤던 손가락을 구부렸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내질러진 독안 사내의 팔을 날카롭게 잡아 채려했다. 장법에서 조법으로 변화는 시기가 적절하였다. 매의 발톱처럼 구부려진 선주혁의 손가락은 독안 사내의 팔을 할퀴어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독안의 사내는 중경쌍흉에 못지않은 고수. 상대 초식이 변화한 것에 당황할 리 없었다. 그는 팔을 회전시켜 손바닥을 하늘로 향하고 팔을 할퀴어오는 선주혁의 손가락을 마주쳤다. 콰앙 선주혁의 손이 하늘로 튀어 오르고, 독안 사내의 팔은 땅으로 처졌다. 사내의 외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손바닥이 으스러지는 듯한 통증 때문이었다. 혈마인을 운용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손바닥에 구멍이 났을지도 모를 일었다. '이게 묵연수투의 위력인가?' 애송이의 내력이 자신을 능가할 수는 없을 터였다. 그러니 이 엄청난 충격은 묵연수투에서 비롯된 거라 단정 지었다. 갑자기 그 의 독안에 탐욕의 눈빛이 감돌았다. 저 수투만 있으면 자신의 혈마인이 더욱 강해질 수 있기 때문이 었다. 그가 더욱 거칠게 선주혁을 몰아붙였다. 어깨, 복부, 허벅지 등 등 선주혁의 전신을 향해 혈마인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선주혁은 물러서지 않고 혈응조를 전개해 날아오는 팔을 할퀴고 움켜쥐려 했다. 수투의 위력을 이미 맛본 독안의 사내였다. 진기가 집중된 손바 닥에 그 정도의 충격이 느껴진다면 팔이나 어깨에 조법이 적중 당 한다면 걸레처럼 찢겨지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가 살을 내주고 뼈를 깎는 수법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혈 마인이 상대의 몸에 닿기만 하면 결국 살아남는 것은 자신이 될 것이다. 하지만 자존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애송이 하나를 죽이기 위해 큰 부상을 입었다고 하면 동료들의 손가락질을 받을 게 분명했다. 그러다보니 서로가 서로의 손을 피해야하는 상황이 왔다. 눈 깜 짝할 사이에 수초가 교환되는 상황이었지만 좀처럼 두 사람의 손 이 엉키거나 맞부딪치는 일은 없었다. 독안 사내는 서서히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애송이를 데리고 놀아보겠다는 생각은 이미 잊은 지 오래였다. 상대는 지금 자신과 당당히 맞서 싸우는 중이었다. 서서히 이마에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지나치게 혈마인을 오래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러다가는 자칫 내력이 고갈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애송이는 그렇지 않았다. 태연하기 그지없는 표정이었 다. 아니 어떻게 보면 지금의 싸움을 즐기는 것 같았다. 서서히 뭔가 일이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대체…… 어디서 이런 놈이 튀어 나온 거지? 그동안 계략만으 로 무림인들을 죽인 게 아니란 말인가?' 독안 사내가 내심 짜증을 내는 그 순간이었다. 벌어졌던 선주혁의 손가락이 붙으며 가공할 속도로 팔을 움켜쥐었다. 신투의 금나수법인 암영수가 전개된 것이다. 이어 다시 강철과 같은 힘이 손가락에 주입되었다. 짧은 순간 혈응조에서 암영수로, 암영수에서 혈응조로 변환시킨 것이다. 찌이이익 독안사내의 소매가 길게 찢어졌다. 찢어진 것은 소매뿐이 아니었다. 피부가 갈라지고 진한 혈액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사내의 독안에 실핏줄이 돋았다. 부상을 입지 않기 위해 몸을 사려왔건만 결국 이런 상황이 벌어졌다. 이제는 체면을 차릴 때가 아니었다.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어야할 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 어버린 것이다. "크아아악!" 독안 사내의 입에서 괴성이 튀어나왔다. 근육이 상한 듯 잘 움직이지 않는 왼팔. 사내는 어깨의 근육을 이용해 채찍을 휘두르듯 왼팔을 날려 선 주혁의 얼굴을 노렸다. 선주혁이 다시 손을 뻗어 손쉽게 그의 팔을 잡아챘다. 독안 사내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아무리 무공이 고 강해도 상대는 역시 애송이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반응한 것이 다. 선주혁의 손가락이 사내의 근육을 잡아 뜯어내는 순간. 끔찍한 통증 속에서도 독안의 사내는 잔뜩 진기가 주입된 우장을 날렸다. 퍼억 "선 소협!" 은설연이 다급하게 선주혁을 불렀다. '성공했다!' 독안 사내는 기뻤다. 어쩌면 다시는 왼팔을 쓰지 못할 지도 모 른다. 독안에 독비(獨臂)가 된 셈이었다. 하지만 사내는 여전히 기뻤다. 자신은 살아남을 것이고, 상대는 죽을 것이기에. 이미 경시할 상대가 아님을 파악한 후였다. 지금에 있어서는 생사(生死)가 곧 승패(勝敗)였다. 통증과 승리의 기쁨이 어우러져 사내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것도 잠시 뿐. 사내의 표정은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가슴을 가격당하고 뒤쪽으로 튕기듯 물러섰던 애송이가 가슴을 힐끗 한 번 보더니 씨익하고 웃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웃음이라니. 불가능한 일이었다. 지금쯤이면 혈마인이 주는 소름끼치는 고통 에 괴로워해야만 한다. 의지가 굳은 자라면 가부좌를 하고 앉아 운공조식을 취할 정도는 될 것이다. 그래봐야 생명이 조금 더 연 장될 뿐이지만. 그런데 웃음이라니……? 역시나 불가능했다. 아니 한 가지 가능성은 있었다. 저 애송이 가 자신보다 월등하게 내력이 높은 경우라면 혈마인을 일순 해소 해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혈마인이 가지는 한계였으므로. 부정하고 싶지만 떠오르는 가능성은 그것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수투의 위력이 아니라는 말……?' 사내는 오래도록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선주혁이 바람처럼 달 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뒤쪽에 있던 동료들도 함께 움직였다. 혈마인이 먹히지 않 는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있어서도 경악스러운 일이었다. 적어도 구파일방의 장로 격은 되어야 자신들의 혈마인을 무용(無用)으로 돌릴 수 있다고 생각한 그들이었다. 한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가 혈마인을 해소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큰 위협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선주혁을 덮쳐가지 못했다. 백의를 입은 두 미남 자가 사이에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남지학과 은설연이었다. 선주혁의 싸움을 주목하던 그들은 방수가 움직이는 순간 동시에 신형을 날려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남지학과 은설연은 어느새 검을 뽑아 손에 든 상태였다. 남지학은 당연히 영의검을 뽑아들었다. 은설연의 손에 들린 것은 낭창낭창 흔들리는 연검(軟劒)이었다. 허리띠 대신 착용하고 있었던 것을 뽑은 것이다. 혈마인을 직접 마주해서는 안 되기에 검으로 상대하려는 의도였다. 그녀의 연검은 흔히 볼 수 있는 여타의 연검과는 달랐다. 비단 천처럼 얇은 것도 그랬고, 검신이 반투명한 것도 그랬다. 남지학의 영의검은 검에 조예가 깊지 않은 자라면 검신에 새겨 진 이름을 봐야 알아볼 수 있다. 하지만 은설연이 손에 쥐고 있는 검은 무림인이라면 한 눈에 알 아볼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입가에 긴 흉터를 갖고 있는 사내가 그녀의 검을 보고 놀라 외쳤다. "유리검(琉璃劍)!" 유리검이라는 외침에 남지학도 곁눈질로 은설연의 검을 살폈다. 유리검 역시 영의검처럼 천하십대명검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뱃속이 시커먼 놈 주제에 안목은 높구나!" 은설연은 날카롭게 외치고는 손목을 흔들어 검을 앞으로 뻗었다. 마치 채찍처럼 유연하게 휘었다가 앞으로 향해지는 검신. 흉터의 사내는 유리검의 위력을 잘 알고 있는지 감히 마주하지 못하고 신형을 뒤로 뽑았다. 한쪽으로 휘었으면 당연히 반대방향으로 휘어야할 것인데 유리 검은 그렇지 않았다. 은설연이 검에 내력을 주입함에 따라 곧게 펼쳐진 것이다. 파앗 아차 하는 사이에 사내의 얼굴에 깊은 자상(刺傷)이 생겼다. 실 처럼 가는 상처였다. 이로서 얼굴에 두 개의 흉터가 생기는 것이었다. 분노한 사내는 상처를 도외시하고 이미 붉게 물든 손으로 유리 검의 검신을 때렸다. 손바닥이 적중당한 곳이 크게 휘어졌다. 검을 걷어냈다고 생각한 사내가 은설연을 향해 신형을 움직이는 순간, 탄력적인 움직임으로 검신이 다시 곧게 퍼졌다. 그리고 순식간에 사내의 어깨에서 피가 솟구쳤다. "크윽!" 통증을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는 흉터의 사내. 연검의 특징을 파악하고 있지 못한 것이 실수였다. 그는 이를 악물고 다시 혈마인을 전개하려 하였다. 동시에 은설연의 손목이 어지러이 움직였다. 그녀의 손목 움직 임에 따라 유리검이 화려한 빛을 발했다. 하나의 변화가 둘이 되고, 둘이 넷이 되었다. 검신의 유연성과 독특한 반투명함이 만들어내는 유리검만의 조화였다. 반짝임 사이로 오가는 검신을 눈으로 포착하기란 쉬운 일이 아 니었다. 어느새 흉터 사내의 옷은 조각조각 휘날리고 있었다. 전신에 실 처럼 가는 핏자국들이 낭자했다. 무림인들이 기병을 탐내는 이유가 명확히 드러나는 단면이었다. 유리검과 같은 기병에 변화가 많은 검법을 사용한다면 본신의 실 력보다 수배는 강한 자와 상대할 수가 있는 것이다. 하물며 사내는 은설연보다 뛰어난 무공을 가지고 있다 말할 수 없는 상태. 그는 허둥지둥 거리며 유리검의 공세에서 몸을 빼는 데에 정신을 집중해야만 했다. 상황이 안 좋은 것은 그의 동료 역시 마찬가지였다. 처음부터 무극삼검식의 일초를 전개한 남지학이었다. 수차례의 실전 경험을 통해 남지학의 무극삼검식은 이미 완벽해진 상태. 무한에 가까운 원을 만들어내는 검초 속에서 아무런 허점을 찾 지 못한 채 뒤로 물러서기에 바빴다. 아무리 혈마인을 익혔다고는 하나 범상치 않아 보이는 검을 잡 아갈 수는 없는 법. 무극삼검식의 일초는 방어위주였지만 그것이 곧 공격이 되는 이 치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사실 남지학과 은설연이 신병을 지니고 있다지만 이토록 손쉽게 적을 상대할 수 있는 것은 선주혁의 공이 컸다. 그가 독안 사내와 오랜 시간 초식을 교환하는 터라 총명한 남지학과 은설연은 그 대 비책을 세워둔 것이다. 혈영인은 본래부터가 초식의 신묘함보다는 가공할 위력에 중점 을 둔 무공이었다. 그렇기에 은설연과 남지학이 일방적으로 적을 몰아붙일 수 있었다. '이럴 수가…… 이토록 강한 놈들이었을 줄이야……!' 억지로, 억지로 신형을 날려 선주혁의 공격을 피해내고 있는 독 안의 사내는 팔에서 느껴지는 고통조차 느끼지 못했다. 상부에서는 무엇인가 큰 착각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그저 간악한 꾀만 많은, 묵연수투의 특별한 위력에만 의 지하는, 그런 애송이들이 아니었다. 강자(强者). 그랬다. 이들은 무림의 어느 곳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강자들 이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다. 지혈을 할 틈조차 갖지 못한 채 무리하게 공력을 끌어올려 적을 상대하고 있었다. 점차 다리에 힘 이 빠지고 있었다. 더불어 자신이 속한 곳에도 큰 위기가 올 것이라 생각했다. 한 시라도 빨리 이들에 대해 파악하고, 대책을 세우지 않는다면 이들 은 존재만으로도 큰 변수가 될 터였다. 그런 면에서 사천백가를 이용해 일을 도모한 것은 실수였다. 이들에 대해 파악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들을 적으로 돌리는 것은 크나큰 실수였다. 생각이 거기에까지 미치자 그의 독안에 다시 빛이 감돌았다. '살아야한다. 이들에 대해 보고를 해야만 해!' 때로는 생존의 본능보다 목적과 의지가 강한 힘을 발휘할 때가 있었다. 독안의 사내가 지금 그랬다. 여유롭게 동료들의 싸움을 살펴가며 자신을 공격해 오는 애송이 였다. 혈마인을 사용해 요혈을 가격한다면 승산이 있을 수도 있었다. 진기가 잔류해 혈맥을 터뜨리지 않더라도 혈마인 자체가 가지는 파괴력은 무서운 것이었다. 사혈에 적중당한다면 아무래 내력이 심후하다 해도 살아남지 못 하리라. 생각을 굳힌 그는 신형을 멈춰 세웠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인 채 호흡을 조절했다. 그런 독안 사내의 모습은 마치 삶을 포기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숙인 고개 아래로 그의 안광은 매섭게 빛나고 있었다. 자신이 공격할 곳에 집중하는 것이다. 아마도 주어진 기회는 한 번 뿐일 것이다. 저 자의 손에 한번만 제대로 맞는다면 피륙으로 된 몸이 견딜 리 없었다. 그리고 한 순간. 그는 맹렬한 기세로 갈비뼈가 갈라지는 부위인 유문혈(幽門穴) 을 향해 일장을 날렸다. 퍼억 다시 한 번 독안 사내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말 그대로 회 심(回心)의 미소였다. 상대는 양손으로 자신의 손을 움켜쥐고 버티고 있었다. 곧 부여잡은 손의 힘이 풀리리라. 그 때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 동료들 을 몰아붙이는 저 두 사람에 대해 보고를 해야만 한다. 어차피 지금과 같은 부상으로는 동료들을 도울 방법은 없었다. 그는 팔을 거둬들이며 신형을 날리려 했다. 지혈을 할 시간조차 아끼려는 것이다. 달리면서 점혈을 통해 응급조치를 취하면 되리 라. 그러나 애송이의 팔은 여전히 쇠고랑처럼 자신의 손을 조이고 있었다. 팔이 빠지지 않았다. 문제는 그뿐이 아니었다. 유문혈에 가져다댄 장심을 통해 진기 가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혈마인이 상대의 몸에 일정량의 잔류진기를 남긴다지만 이것과 는 달랐다. 지금은 의도하지 않은 진기가 거처 없이 빠져나가는 중이었다. 마치 상대가 자신의 사형을 통해 진기를 흡수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진기를 흡수해? 설마……?' 그의 독안이 찢어질 듯 커질 때 애송이가 고개를 들었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두 번에 걸쳐 혈마인을 상대한 선주혁이었다. 잔류된 혈마인을 해소한 경험도 있었다. 독안 사내의 진기를 자신의 것으로 흡수하 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의 내력은 잠원기폭으로 증진된 풍이의 내공에 비해 강하다 할 수 없었다. 또한 이미 순천운성의 경지에 완전히 올라선 선주혁이었다. 결국 이번에는 무리 없이 해성을 통해 내공을 흡수할 수 있는 것이다. 한 동안 두 사람은 그렇게 석상처럼 서 있었다. "크아아악!" "커억!" 거의 동시에 남지학과 은설연이 상대하던 적을 죽였다. 그제야 선주혁은 흡성대법을 운용하는 것을 중지했다. 흡성대법을 원할 때에 자유롭게 운용한 것. 이것이 바로 진정한 순천운성의 경지였다. 갑작스럽게 수십 년간 쌓아온 내력의 절반 정도를 잃어버린 독 안 사내는 선주혁이 손을 놓자 휘청거렸다. 이어 무진진인의 수법과 암영수가 합쳐진 쾌속무비한 일장이 그 의 가슴을 가격했다. 가슴뼈가 함몰되며 그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죽었다. 선주혁은 살인을 즐기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자신과 잘 될지도 몰랐을 백화란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분노를 이끌어 냈고, 상대를 죽이는 행위를 정당화 시켰다. 더구나 내버려둘 수는 없는 자였다. 자신이 남지학에게 말했던 대로 이 자는 살아있으면 수많은 사 람들에게 피해를 주기만 할 뿐일 것이다. 한편으로 어차피 죽을 녀석인데도 내력을 다 흡수하지 못한 게 아쉬웠다. 하지만 자신이 흡성대법이라는 마공을 익힌 것을 사형이 알면 어떻게 될지 아직 확신이 없었다. 더구나 은설연까지 있는 자리. 아쉽긴 하지만 남은 내력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선 소협, 어서 운공을 해서 혈마인이 잔류되어 있는지 확인을 해 보시오." 은설연이 다급하게 선주혁에게 와서 말했다. 혈마인에 대해 이 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그 증상이 정확히 어떻게 나타나는지 모르는 그녀였다. 혈맥이 터져 죽어 시체가 붉어진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원래 대로라면 지금이 선주혁처럼 움직이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것은 몰랐던 것이다. 그렇기에 아까 적중된 일장이 염려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걱정하지 마세요, 미스…… 아니 은 공자." 선주혁은 여유롭게 미소를 지어 주었다. "하지만…… 혈마인은 체내에 파고 들어가서 혈맥을 터뜨리는 마공이니……, 서둘러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하핫,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전 진짜 괜찮습니다." 선주혁은 팔을 휘휘 저으며 스스로 건재하다는 것을 표현했다. 은설연이 자신을 걱정해주니 절로 미소가 흘러나온 것이다. "서둘러야겠다. 저 자들의 말대로라면 백가장에 변고가 생겼을 테니……." 남지학의 말에 선주혁의 얼굴에 떠올랐던 미소가 싹 지워졌다. 백화란이 생각난 것이다. 그 때 남지학이 시선을 은설연에게 던지며 무거운 음성을 내뱉었다. "귀하는 수투 때문에 우리에게 접근한 것이라 알고 있소. 수투 는 백가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은 변치 않을 것이오." 남지학의 말은 수투를 노리고 왔으면 포기하라는 뜻이었다. 또 한 지금 백가장으로 갈 예정이니 어찌할 것인지 정하라는 말이기 도 했다. 은설연은 잠시 고민을 해야 했다. 이대로 이들을 보낼 것인지, 아니면 함께 백가장으로 가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가를 확인할 것인지를. 그녀가 생각을 굳히고 입을 열었을 때 선주혁이 끼어들었다. "아뇨. 우리는 백가장으로 가지 않습니다." "……?" 남지학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이제 와서 사제가 왜 백가 장행을 거부하는 건지에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호오! 수투에 대해 욕심이 생기기 시작한 건가?' 은설연이 말을 하려다 말고 흥미로운 시선으로 선주혁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저들은 분명히 우리의 길을 가로막았죠? 하지만 우리에게 투항 을 권고했잖아요. 그렇다고 딱히 이 수투에 욕심을 내는 것도 아니고요." 선주혁은 자신의 손에 낀 묵연수투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리고 수투를 돌려받을 자도 없을 거라 말했어요. 그 말인즉 이미 백가장은 저자들에 의해 큰 화(禍)를 입었다고 봐야 해요." "저자들의 말을 그대로 믿자는 이야기인가요?" 은설연이 끼어들었다. 선주혁은 은설연에게 미소를 지어주며 설명을 계속했다. "저와 사형은 예전에 저자들에게 목숨을 잃을 뻔한 적이 있어요." "……!" "그들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저자들 정도는 자신이 속한 무리 중에서 그다지 지위가 높지 않다는 겁니다. 그들 중 고수라는 사 람이 움직였다면 아무리 사천백가라 해도 당해내지 못할 거예요." "설가가 돕는다면 더욱 그렇겠지." 남지학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역시 사형이군.' 선주혁은 남지학의 말에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 역시 이미 사 천백가에 변고가 생겼을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직접 확인을 해봐야하지 않을까요? 강호에서는 직접 겪지 않은 일은 믿기 어려운 법이잖아요." 언제부터인가 은설연은 선주혁에게 친근한 어조를 구사하고 있 었다. 셋 중 누구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 말은 은 공자의 말씀이 맞죠.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할 일이 있어요. 왜 저들이 저희 앞을 가로막았냐는 거 죠. 백가장에 큰일이 났으니 가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친절하게 알 려주러 왔을까요?" 선주혁의 질문에 남지학도 은설연도 침묵했다. 질문의 답을 찾 아내려는 것이다. 선주혁은 답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입을 열었다. 그간 무협지를 읽으며 쌓아온 나름대로의 실력을 드러내려는데 둘 중 하나가 산 통을 깨면 곤란했기 때문이다. "저들은 우리가 백가장으로 향한다는 것을 어느 정도 믿는 상태 였어요. 우리에게서 다시금 확인을 받았고요. 그래도 막았죠. 수 투가 아닌 이유로 우리가 백가장에 가지 말아야할 이유가 뭘까요?" "우리가 있기 때문이겠군." 남지학이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윽! 벌써 눈치 채 버린 건가? 질문하지 말고 그냥 확 설명해 버릴걸.' "두 사람을 가장한 다른 자들이 백가장에 침입한단 말인가요? 왜?" 은설연은 모든 일을 이해하기에는 정황정보가 부족했다. 남지학의 말만 듣고 누군가 자신들을 가장해 백가장을 습격했을 거라는 말을 알아듣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총명을 증명하는 일이었다. "자신들을 드러내지 않고 사천백가를 없앨 수 있기 때문이오." '윽! 또 늦었다.' 선주혁은 입맛을 다셨다. 과연 사형이라는 생각과 함께. 사실 선주혁이 그들에 대해 남지 학에 준 정보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 몇 개의 단서만으로 남지 학은 모든 상황을 추론해내고 있는 것이다. "두 분에게 죄를 뒤집어씌운다는 말인가요?" "그렇소. 우리는 묵연수투로 인해 이미 지나치게 주목을 받은 상태요. 수투를 훔친 자들이 추적에 대해 복수를 하기 위해 백가 를 몰살시킨다……, 어느 정도 납득할만한 이야기겠지." 남지학은 누구에게 이야기하는 것인지 모르게 중얼거렸다. 상당 히 억울한 누명, 그것도 단 번에 강호 공적이 되어버릴 큰 누명을 쓰게 되었음에도 덤덤한 표정이었다. 은설연은 이들 사형제를 납득하기 힘들었다. 자신이라면 길길이 날뛸 일이었고, 억울함을 이기지 못할 일이 아니던가. "우리가 처음 설가와 저자들이 만나는 것을 본 게 벌써 삼년 전 이에요. 지금까지 그것을 비밀에 붙여두고 사천무림을 도모해왔다 면 지독한 자들일 것이고, 그만큼 대단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봐야겠죠." 선주혁은 남지학이 자신을 대신해 모든 것을 설명해 버리자 다 시 나서며 부연을 했다. "하지만 왜 그래야하죠? 그 정도의 힘이라면 일거에 백가를 쓸 어버리면 되잖아요. 강호에서 세력 다툼이 있는 것이 뭐 그리 대 단하다고……." '크! 역시 시원시원한 미스 은이라니까.' 선주혁이 내심 감탄하는 사이 남지학이 설명했다. "사천 땅은 무림에서 복마전(伏魔殿)과 같은 곳이오. 청성, 아 미, 당문……, 중원 그 어느 곳보다 무림맹의 세가 강한 곳이 바 로 사천이외다." "……!" 더 이상의 긴 설명은 필요 없었다. 남지학의 말만으로 은설연은 모든 것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체모를 자들이 왜 사천에 세를 굳히려는 것인지도 충분히 짐 작이 갔다. 하지만 모든 것은 맨 처음의 가정, 그러니까 두 사람을 가장한 누군가가 백가장에 큰 해를 끼쳤을 것이라는 가정이 맞다는 전제 하에서였다. "두 분은 상황을 지나치게 비약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선 소협의 추측이 틀렸다면 지금까지 말한 것은 무의미하잖아요." 은설연은 자신의 생각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소. 맹목적인 고집을 피울 때도 아니 고……. 무엇보다 나는 사제의 말을 믿소." 사실 설명을 한 것도, 결론을 낸 것도 남지학 자신이었다. 하지 만 그 모든 것은 선주혁의 질문, 곧 선주혁이 말하고자 했던 것을 대신했을 뿐이었다. 남지학의 맹목적이다시피 한 신뢰에 선주혁은 적잖이 감동을 받 으며 미소를 지었다. 태어나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이었다. 자신을 믿는다라……. 선주혁은 그 말 한 마디로 이쪽 세상으로 들어온, 혹은 넘어오 게 된 것이 행운이라 생각했다. 늘 가족 속의 일원인 자신을 상상해온 그였다. 그리고 남지학은 이미 자신에게 가족과 같은 존재였다. 그가 있음으로 선주혁이 느낄 수 있는 행복은 태어날 때부터 버 려져 살아온 자가 아니면 결코 느낄 수 없는 것이었다. 더구나 이쪽 세상에서는 앞으로 더 많은 가족을 만들 가능성도 있었다. 그것이 선주혁을 기쁘게 했고, 얼굴에 미소를 만들어 냈다. '잘났군, 정말. 대단한 사형제야.' 은설연은 선주혁과 남지학의 말이 나름대로의 논리는 가지고 있 다지만 어쩐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두 사람이 말한 신비세력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말인즉슨 암중의 세력이 사파연합의 정보망 밖에 있다는 뜻이고, 두 사람이 아는 바가 거대조직을 능가한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능력을 가진 조직이 존재한다면 사대세력이 눈치 채 지 못했을 리가 없어. 강호 경험이 적기에 과대평가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만약 무림맹, 정의련, 천마맹, 사파연합 모두의 눈을 속일 수 있는 암중 세력이 존재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사분되다시피 구성되어 있는 무림이었다. 사분되다시피 한 무림이었다. 끊임없는 분란이 있기도 했지만 묘한 균형 속에 큰 파란 없이 오랜 세월을 지내왔다. 이들의 말에 따르면 그 균형을 깨려는 자들이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니 단지 균형을 깨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니라. "그럼 어떻게 할 셈이죠? 두 분에게 누명이 씌워졌다는 뜻이잖 아요." 일단은 여기서 이들 말의 진위를 파악할 수는 없었다. 은설연에 게는 이들의 새로운 가정이 묵연수투보다 흥미롭게 다가오고 있었 다. "일단은 정황을 둘러볼 생각이오. 아까도 귀하가 말했듯 강호의 일은 직접 보고 듣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니까." 남지학이 대답했다. 은설연은 선주혁에게 눈을 돌렸다. "사형 말대로입니다." 선주혁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줬다. '정말 죽이 잘 맞는군. 흠……, 그나저나 저 어수룩한 미소 속 에 절세의 총명이 감춰져 있단 말이지? 하긴 나조차도 속아 넘어 갈 정도니…… 실로 요주의 인물이야. 만약에…… 정말 이들이 말 한 그런 세력이 존재한다면 그들은 큰 실수를 한 거야. 이 두 사 형제는 절대로 적으로 돌려서는 안 되는 거였다고.' 선주혁을 바라보며 은설연이 생각한 것이었다. 이윽고 그녀의 탐스러운 입매가 미소를 만들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 상태로서는 이들에게는 정도 무림도 적이군. 잘하면…….' 은설연은 두 사람을 보며 눈빛을 빛냈다. 밤하늘의 별보다 초롱초롱한 빛이 그녀의 눈에서 반짝였다. 남지학과 선주혁이 먼저 몸을 움직이고 은설연이 그 뒤를 쫓았 다. 그녀가 있던 부근의 나무에는 붉은 장식이 달린 바늘과 같은 것이 꽂혀있었다. Vol 2. 가늘고 긴 눈을 가진 노인은 편안한 생김새를 가지고 있었다. 검버섯이 피어오른 얼굴에 잘고 가늘게 갈라진 주름은 그가 겪어 온 세월이 편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증명했지만, 전체적으로 편안 한 상인이어 보는 이의 마음을 느긋하게 했다. 아마도 태어나면서부터 그랬다기 보다는 오랜 세월 이야기를 팔 아오면서 사람들에게 지어준 표정이 인상으로 굳어졌을 것이다. 노인은 말 그대로 매담(賣談)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었다. 아쟁을 타 장단을 맞추며 강호를 떠도는 영웅담(英雄譚)이나 흥 미로운 소재를 이야기로 만들어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정말이지 흔하디흔한 설정이 내 앞에서도 전개되는군. 뻑하면 등장해 소문을 전해주는 역할이라니……. 객잔이나 주루가 뉴스 프로그램이면 저 노인이 앵커가 되는 건가? 아니 이곳을 하나의 현실로 여기기로 했으니 가급적 이런 불평은 그만 둬야겠군.' 선주혁은 스스로의 마음을 추슬렀다. 노인은 객잔에 들어와 아쟁을 켜며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몇 가지 간단하고 재미난 이야기로 사람들을 자신에게 주목시킨 그는 본격적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노인의 이야기는 최근 사천 무림을 진동시키고 있는 묵연수투로 시작했고, 객잔에는 무림인이 꽤 있었기에 일순 조용해졌다. 매담자의 정보는 헛된 것이 실로 많았지만 때때로 자신이 몰랐 던 것을 들을 수 있기도 했고, 무엇보다 가장 신속하게 소문을 내 주는 당사자들이기도 했다. 그래서 무림인들은 일단 귀를 기울이 지 않을 수 없었다. "이보슈, 노인장. 거 다 아는 이야기들 아니오? 그래서야 동전 한문이라도 받겠수?" 제법 다부진 체구를 가진 사내 하나가 노인을 향해 말했다. 묵연수투가 사천 백가에서 도난당한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 었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금천 부근 을 배회하는 무림인들이 다수였으므로. "허허헛, 성격도 급하신 영웅이시군요." 노인은 그럭저럭 탐스럽게 자란 수염을 쓰다듬으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무림인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만큼 그들의 거친 성정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그는 조금도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아무튼 그 곤륜이마가 악독한 수를 써서 정영검 대협을 죽음으 로 이끈 것까지 알고 계시니 그럼 다음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이는 실로 놀라운 소식이며 여기 계신 여러분들도 꽤나 충격을 받 으실만한 이야기임을 제가 장담합지요." "뜸 좀 그만 들이고 빨리 얘기해 보쇼. 정말 새로운 소식이라면 동전을 아끼지 않을 테니." 다른 탁자에 있던 장한이 농담하듯 말을 했다. "하핫, 정말 그러신다면야 이 촌로(村老)야 감읍할 따름입죠. 그러니까 그제 밤, 금천에서 굉장한 일이 발생했다는군요. 곤륜이 마가 나타난 것입니다." 무림인들의 눈빛이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하! 실로 대담한 놈들이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을까?" 누군가 탄식하듯 말했다. 그들을 잡아보겠다며 엉뚱한 곳을 뒤 지고 다녔음을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문제는 곤륜이마가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백가장의 가 솔들을 몰살시켰다는 게 이 촌로가 여러분께 말씀드릴 진정한 소 식이지요." "……!" 노인의 말에 객잔 안은 일순 정적에 휩싸였다. 상상조차 못했던 소식이었기 때문이다. 개 중 가장 놀란 것은 한쪽 구석에서 선주혁과 함께 귀를 기울 이고 있던 은설연이었다. 설마, 설마 했는데 마치 짠 것처럼 선주혁의 예상이 고스란히 들어맞게 된 것이 아닌가? '정말 말도 안 되는……! 어찌 그 모든 것을 예상할 수 있단 말 인가?' 은설연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선주혁을 바라봤다. 선주혁은 아직까지 노인의 이야기를 듣느라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깊게 눌러쓴 죽립 아래로 드러난 남지학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 었다. 그가 진실로 사제를 믿고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저와 같은 상황이 사실로 드러났음에도 동요가 없는 것이다. "그 애송이들이 무슨 수로 사천백가를 해할 수 있단 말이오. 아 무리 묵연수투가 위력적이라 해도 미염검객께서 어떤 분이신데?" 충격적인 소식 중에서 누군가 제 정신을 차린 듯 노인에게 물었 다. 그 질문에 남지학처럼 죽립을 깊게 눌러쓴 선주혁의 몸이 노인 쪽으로 미세하게 기우는 것을 은설연은 보았다. 아마도 어떤 방법 으로 상황을 만들어냈는지는 그도 예상치 못하고 있는 듯 했다. 그래서 귀를 기울이는 것이리라. "허헛, 이 촌로가 이야기를 팔아먹고 사는 만큼 여러 영웅들이 계신만큼 허튼 소리를 할 리가 없지요. 그들이 정상적인 방법으로 백 대협을 상대할 수는 없지요. 당연히 없고말고요. 하나 곤륜이 마의 흉성은 이미 사천 땅에 널리 알려진 것. 그들은 과연 그들다 운 방법으로 사천백가에 악랄한 짓을 했답니다." "대체 그게 무슨 방법이란 말이오?" 한 사내의 질문 이후에는 모두 입을 다물었다. 노인이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해 일부러 시간을 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몇몇은 전낭을 꺼내 노인의 앞에 동전을 던졌다. 외려 이쪽이 이야기를 재촉하는 방법임을 알고 있는 것이다. 노인은 발 앞에 쌓이는 동전을 보고 미소를 짓더니 결국 입을 열었다. "칠보단혼산이라고…… 다들 아실 겁니다. 그 악적들은 백가의 우물에 칠보단혼산을 풀었더랍니다." "……!" 칠보단혼산. 중독된 후 일곱 걸음을 옮기기 전에 목숨을 앗아간다는 무서운 독이었다. 진짜로 일곱 걸음을 옮기는 사이에 죽을 정도는 아니겠 지만 그만큼 독성이 치명적이고 악랄하다는 의미였다. 강호에서 오래 전부터 사용이 금지된 독(毒)이었으나, 곤륜이마가 상관벽우 와 함께 있던 무림인들을 살해할 때 사용했다는 것이 이미 알려져 있었다. 노인의 말에 무림인들은 한 편으로는 놀라고, 한 편으로는 고개 를 끄덕였다. 아무리 미염검객과 백가장의 무인들 실력이 뛰어나 다 해도 칠보단혼산에 중독되었다면 손을 쓸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어떻게 우물에 독을 풀 수 있었단 말이오?" 눈빛이 날카로운 한 사내가 물었다. 노인은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여유 있게 답변을 했다. "곤륜이마가 신투의 신법을 사용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 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우물에 독을 푸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 니었겠죠." '갖다 붙이기도 잘하는군.' 선주혁은 결국 고개를 돌렸다. 없는 사실도 세 사람만 떠들면 진실이 된다고 한다. 그런데 누군가 계획적으로 일을 벌이고 저렇 듯 살을 붙이는 사람들이 있으니 자신과 사형이 무림 공적이 되는 것은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었다. "아무튼 뒤늦게 무림맹의 사천지부에서 보고를 받고 사천백가로 달려갔을 때는 백가장의 식솔 대부분이 처참한 죽음을 맞이한 후 였다고 하네요. 실로 안타까운 일이죠, 안타까워……." 노인은 당장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무림맹에서는 막 담을 넘어가는 백발의 사내의 뒷모습을 봤다 고 합니다. 백가장의 식솔들을 도륙하다시피 살해한 자들이 누구 인지 거기에서 밝혀진 것이지요. 손에 검은 수투까지 끼고 있었다 니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요." "백발귀마(白髮鬼魔) 선주혁!" 누군가 언성을 높여 말했다. "그렇습죠. 옥용검마(玉容劍魔) 남지학과 백발귀마 선주혁, 그 러니까 곤륜이마가 아니고서야 누가 그런 간악한 짓을 하겠습니까." 남지학도 선주혁도 노인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거의 동 시에 술잔을 들어 죽립 아래쪽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은설연도 죽립 아래로 술을 마셨다. 두 사람의 심정이 이해가 갔기 때문이다. 이들은 곤륜파의 제자 라고 했다. 아마도 정파 나부랭이들이 흔히 그러듯 의협의 기치를 내세우며 청운의 뜻을 가슴에 품고 강호에 나섰을 것이다. 그런데 돌아온 것은 간악한 악적이라는 누명과 섬뜩한 별호뿐이 었으니 심정이 어떻겠는가? 그녀의 생각은 반만 맞았다. 선주혁은 나름대로 자신의 별호에 만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백발귀마라……, 개성도 있고…… 그럭저럭 괜찮은 걸. 카리스마도 느껴지고 말이야.' 드디어 자신에게 별호가 생겼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왠지 무림 인이 된 것 같고, 대단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것 같아 흐뭇했던 것 이다. 특히 무협소설을 읽을 때, 어쩐지 고리타분한 말을 늘어놓는 소 위 말하는 정파 놈들보다 카리스마 넘치는 악역에 더 매력을 느끼 던 그였다. 그런데 백발귀마라는 별호에서 그런 느낌을 받자 괜스 레 뿌듯해지는 것이었다. 한 사람은 기뻐서, 한 사람은 억울함과 노여움 때문에, 한 사람 은 자신만의 목적을 위해 술잔을 기울이며 깊어져가는 밤을 보내 고 있었다. "어떻게 생각하시오?" 어느새 본연의 말투로 돌아온 은설연이 남지학에게 물었다. 남지학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가 심한 갈등 중이라 는 것을 은설연은 알고 있었다. 그들은 객잔에 며칠간을 더 투숙하며 떠도는 소문에 귀를 기울였다. 곤륜이마가 무림맹에 의해 강호공적으로 지목 되었다. 정의련도 지지성명을 냈다. 당연한 일이었다. 사천 무림의 오랜 명가(名家)인 백가장의 식 솔들을 몰살시킨 악적들이었으므로. 억울함을 추측할 수 없겠지만 그 때까지도 남지학은 감정을 드 러내지 않았다. 묵묵히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들을 뿐이었다. 은설연은 그가 결정적으로 동요하는 것을 보았다. 한 가지 이야기 때문이었다. 곤륜이마가 실제 곤륜파의 출신이며, 곤륜파에서는 두 사람을 파문(破門)조치를 한 것이다. 무림공적을 문중에 둘 수 없다며 장 문인의 명에 의해 두 악적을 파문하며, 그들에 대한 무림맹의 추 살령(追殺令)에 적극 협조할 것을 발표했다는 것이다. 아무런 죄를 짓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문에서 내쫓긴다는 것은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무림인에게 있어서 충격이 아닐 수 없 었다. 특히나 남지학과 같이 사문을 위해 목숨이라도 내놓을 듯한 자는 더욱 그랬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도피처(逃避處)를 제공하겠다는 말이오?" 남지학이 무거운 음성으로 물었다. 파문에 관한 소식을 들은 이 후로 그의 표정과 목소리에서는 한 번도 밝은 모습을 찾기 힘들었다. "그래요. 사실 이번 일은 우리에게 있어서도 크나큰 모험이랄 수 있어요. 자칫 모든 일의 배후가 우리라는 오명을 뒤집어 쓸 수도 있는 문제니까요." 사람들에게 소문을 듣는 동안 은설연의 배경이 되는 세력도 드러났다. 무림맹의 일이라 소문이 늦었지만 결국 알려질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었다. 그녀가 사용한 난화무영수는 천산노조의 성명절기. 그녀가 사파연합 소속이며 곤륜이마와 함께 다니는 것 같다는 소문이 남지학에게까지 들어온 것이다. 선주혁은 시치미를 떼고 남지학과 함께 의외라는 표정을 지어줬어야만 했다. "왜 그런 모험을 감수하려는 거요?" 남지학이 핵심을 찔러왔다. "묵연수투를 탐내서 수작을 피우는 것은 아니니 일단 안심하시오." 은설연 역시 만만치 않았다. 선주혁은 사형과 은설연의 대화를 들으며 쓴 웃음을 머금어야만 했다. 사형에게 있어서 사파연합은 검을 들어 죽여야 할 상대였을 것 이다. 수많은 사마외도를 처단하고 협객으로, 영웅으로 우뚝 서는 꿈을 얼마나 꿔왔는지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자신이 읽은 글에서는 그랬다. 손속에 자비가 넘치기는 했지만 그는 뿌리부터 의인(義人)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마외도, 그 중에서도 대표 격이랄 수 있는 사파연합에 서 보호를 제의받았으니 어찌 마음이 좋으랴. 그래서인지 남지학과 은설연의 사이에서는 묘한 긴장감과 경계 심이 파도를 치고 있었다. "우리를 받아들이면 정도 무림과 전면적인 갈등이 야기될 것이오." "사파연합에 정도 문파와 갈등이 없는 인물이 있소?" 은설연은 남지학의 질문에 외려 반문을 했다. "이번은 사안이 다르지 않소?" 남지학의 질문에 은설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분명 보통의 상황과는 달랐다. 단순히 묵연수투를 훔친 문제가 아닌 것이다. 사천 무림의 한 축을 몰락시킨 사건의 주범으로 몰리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서로간의 반목 끝에 몇 명을 죽인 사건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잠시 시간을 보낸 후 은설연이 입을 열었다. "제게 그런 중대한 사안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가를 물으시는 거구려." 은설연은 그제야 남지학이 던진 질문의 요지를 깨달았다. 이번에는 남지학이 대답하지 않았다. "어차피 밝혀질 일이니 말씀드리지요. 제 조부 되시는 분이 현 재 사파연합을 이끌고 있어요." 스스로의 신분을 밝히는 은설연의 표정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그녀에게는 그럴 자격이 충분했던 것이다. 천사지황 은적비의 손녀라는 신분. 그것은 적어도 무림인에게 있어서는 황실(皇室)의 인물보다 더 욱 대단한 일이었으므로. 두 사람의 깜짝 놀라는 반응을 흥미롭게 지켜보려던 은설연이었 다. 하지만 선주혁에게서도, 남지학에게서도 큰 놀라움을 읽어낼 수 없었다. 선주혁은 이미 은설연의 신분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상태였다. 남지학은 그녀가 사용하는 무공으로 미루어, 또한 이런 제안을 할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있었다. 분명 백사회의 일원 중 한 명의 후손이거나 제자라고 추측해 봤다. 백사회주의 손자-남지학에게 있어서는-라는 것이 의외이긴 했지 만 예상했던 대상 중 한 명이었을 뿐이기에 크게 놀라지는 않았던 것이다. 두 사람의 무덤덤한 표정을 보자 은설연은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그래도 일단 이 자들은 사파연합으로 끌어들어야 해. 선주혁이 라는 사람의 초인적인 능력을 몇 번이나 경험했잖아. 은설연 니가 참아야 해.' "이유를 보다 명확히 밝혀주시오." "솔직히 말하자면 소생은 두 분이 탐이 나오. 사실 오해를 살까 싶어 이런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소만……, 두 사람을 우리 쪽으 로 끌어들이지 못한다면 차라리 죽이는 게 낫다는 게 소생의 생각이오." "……!" 선주혁은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성격에 대해 모 르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막상 눈앞에서, 그것도 꽃처럼 아름 다운 그녀의 입에서 저런 매정한 소리가 나오자 놀라고 만 것이다. "우리를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는 게 아니오?" 어쩐지 조금 더 가라앉은 목소리의 남지학이었다. 은설연은 일부러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이런 이야기는 조금만 잘못 끌어가도 문제가 일어날 소지가 많기 때문이었다. "소생은 사람을 잘 인정하는 편이 아니오. 하지만 당신들은 적 으로 삼기에는 너무나 위험하오." "아군이 아니면…… 적이라……." 남지학이 그녀의 말을 음미하듯 정리했다. 그러다 문득 안광을 형형히 빛내며 물었다. "그대에게 우리를 죽일 능력은 있는 거요?" "혼자서는 안 되죠." 은설연은 남지학의 눈빛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말했다. 남지학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납득은 은설연으로 하여금 또다시 자신을 드러낼 기회를 놓치게 했다. 그가 이해를 하지 못한다면 표식을 보고 쫓아온 자 들을 부르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남지학은 이미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당최 재미없는 인간들이군.' 은설연은 입술을 한 번 삐죽인 다음 말을 이어갔다. "또한 당신들은 무림의 곳에서도 포착하지 못한 암중의 세력에 대해 알고 있소. 그것은 사파연합에 큰 도움을 줄 거라 생각하오." "우리가 아는 것도 그다지 많지는 않소." 남지학이 짧게 대답할 때 선주혁은 마음속으로 말을 해야만 했다. '사형, 전 많이 알아요.' "최소한 우리보다는 많이 알고 있다고 보오." 은설연은 포기하지 않았다. "향후 우리의 인생을 결정하게 될지 모를 문제요. 좀 더 시간을 두고 생각하고 싶소. 사제와 의논도 해야 할 것이고." "그렇게 하시오. 긍정적인 답변을 기다리겠소." 은설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지학의 말이 옳았다. 아마도 이번 에 사파연합행을 결정하게 되면 그들은 평생을 사파연합의 일원으 로 보내야할 것이다. 정도에 속했다가 사파로 전환하는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지만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억 울한 누명까지 쓰고 있음에야……. 천부지국(天府之國). 사천성(四川省)의 성도를 가리키는 다른 말이다. 풍부한 강우량과 기름진 땅으로 농사를 짓기에는 최적의 조건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래서 성도의 다른 이름 그대로 늘 번화하고 늘 부유했다. 사람들의 표정을 밝았고,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은 고급스러웠다. 적어도 성도의 저자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유독 많이 볼 수 있었 다. 이족(彛族), 창족(藏族), 묘족(苗族), 회족(回族)등이 소수민족 들이 많이 살고 있어 낯선 것에 대한 거부감도 적었다. 산으로 둘 러싸인 분지의 지형에서 사람들의 그와 같은 성향은 특이한 것이 랄 수 있었다. 성도인들의 그런 성향 탓일까? 얼굴을 거의 다 가릴 정도의 죽립을 쓴 세 사람이 저자를 걷고 있음에도 큰 주목을 받지 않았다. 세 사람은 무림맹과 정의련의 추살령을 피해 도주 중인 선주혁 일행이었다. 선주혁은 등하불명(燈下不明)의 이치를 내세워 오히려 분주한 곳이 안전하다고 주장했고, 남지학은 사제의 의견을 존중했다. 은설연은 아직까지 그들에게 답을 듣지 못한 관계로 동행하는 중이었다. 이들이라면 반드시 사파연합에 큰 힘이 되어 주리라는 계산은 이제 일종의 오기로 바뀌었다. 반드시 끌어들이고 말겠다 는……. "거기 안 서!" 돼지 멱따는 소리와 함께 저자에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한 남자가 만두피를 펴는 둥근 막대를 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달리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달리기에는 지나치게 뚱뚱해 보였지만 시뻘겋게 물든 그의 험악한 얼굴을 보고 길을 막 을 사람은 없었다. 그가 쫓고 있는 것은 구정물이 줄줄 흐르는 거지소년이었다. 그 의 손에는 두 개의 커다란 만두가 들려 있었다. 선주혁은 대충의 상황을 깨달았다. 무협에서 흔히 등장하는 장 면을 본 것이다. 거지 소년이 만두를 훔치고, 가게 주인이 뒤쫓는 상황이었다. 거지 소년은 제멋대로 기른 머리를 산발하고 있었고, 못 먹어서 인지 삐쩍 마른 몸을 하고 있었지만 용케도 사람들 사이를 잘도 뛰었다. "이 자라X끼! 서라!" 요란한 가게 주인의 호통소리에 고개를 돌린 거지 소년은 혀를 낼름 내밀었고 그것에 더욱 분노한 가게 주인의 콧김이 거세졌다. 선주혁은 그와 같은 장면을 보고는 씁쓸히 웃었다. 어쩐지 자신 이 어렸을 때가 생각이 난 것이다. 가게에서 물건을 훔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장난과는 달랐다. 정말 배가 고파서, 성난 이리가 뱃속을 할퀴 는 것과 같은 굶주림을 이기지 못해 훔쳐야만 했던 것이다. "헙!" 선주혁이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사이 거지소년의 입에서 헛바람을 들이키는 소리가 튀어 나왔다. 백의를 멋들어지게 갖춰 입은 한 귀공자가 그의 손을 낚아챈 것 이다. 단정하게 틀어올려 옥잠(玉簪)으로 고정시킨 머리와 고급스 런 자수(刺繡)가 소매와 옷깃에 놓인 옥빛 장삼을 입은 자였다. 전체적으로 준수한 용모였으나 눈매가 날카롭고 고집스러운 입 매로 인해 편안한 분위기를 주는 인상은 아니었다. 그의 뒤로 비슷한 복장을 한 두 명이 서 있었다. 거지소년은 억지로 잡힌 손을 빼 내려했지만, 사내의 손가락은 강철과도 같아서 꼼짝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허억, 허억! 아이고 공자님, 감사합니다. 도둑놈을 잡아 주셔서……."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귀공자의 앞에 도착한 만두가게 주인이 헉헉대며 고마움을 표했다. 짜악 "어린 녀석이 벌써부터 도둑질이라니!" 귀공자의 손이 거지소년의 뺨을 때렸다. 거지소년의 고개가 빠르게 돌아가고 그의 입에서 피가 줄줄 흐 르기 시작했다. "왜 때려? 배고파서 만두 좀 먹는 게 죄야?" 얼굴이 퉁퉁 부어오를 정도였음에도 거지 소년은 눈에 독기를 품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감히 자신에게 대든 것이 괘씸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귀공자의 손이 한 번 더 빠르게 움직였다. 짜악 이전보다 더 날카롭고 큰 소리가 울렸다. 거지소년은 눈물을 흘렸다. 슬프거나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지독한 통증 때문에 저도 모르 게 흘러나온 눈물이었다. 때가 가득한 얼굴에 눈물이 지나간 자국 이 선명하게 나왔다. 선주혁은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자꾸만 소년이 자신의 어 린 시절을 보는 것만 같았다. 그가 움직이려는 순간 은설연이 소 매를 잡아왔다. 선주혁이 그녀를 보았다. 그녀의 죽립이 좌우로 흔들렸다. 나서지 말라는 뜻이었다. 확실히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 자리에서 자신이 나서 는 것은 전 무림을 향해 내가 여기에 있으니 잡아가 주시오, 라고 떠드는 것과 같았다. 선주혁은 소매가 잡힌 주먹을 말아 쥐었다. 분을 참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 때였다. "퉤에!" 거지소년의 입에서 부러진 이빨 두 개가 튀어나왔다. 피와 뒤섞인 이빨은 공교롭게도 귀공자의 옷 끝에 부딪친 후 바 닥에 떨어졌고, 그것을 본 귀공자의 눈썹 끝이 파르르 떨렸다. 값 비싼 자신의 옷에 더러운 피가 묻은 것을 참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놈이 죽으려고……!" 귀공자의 손이 하늘로 향했다. 저 손바닥이 거지소년의 얼굴에 닿으면 무사치 못하리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귀공자는 거지소년을 때리지 못했다. 갑작스레 자비심이 일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누군가 강하게 손목을 잡아 고정시킨 탓이었다. 귀공자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지며 고개가 돌아갔다. 손을 잡은 자를 확인하려는 것이다. 귀공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것은 상대의 얼굴이 전설상의 송옥이나 반안과도 같이 준미했 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마치 뛰어난 장인(匠人)이 심혈을 기울여 조각한 것과 같은 그 얼굴의 주인이 누군지 알아봤기 때문이었다. "나, 남궁일(南宮日)!" 귀공자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를 들은 중인들에게서 소란이 일었다. 옥기린(玉麒麟) 남궁일. 무림인이 아니더라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이름이었다. 멀리서 그 이름을 들은 선주혁, 남지학, 은설연 역시 죽립 너머 로 남궁일의 얼굴을 잘 살폈다. 현 정의련의 주축이랄 수 있는 남궁세가(南宮世家)의 장손. 그리고 정도문파의 후기지수를 대표하는 신웅십팔걸 중에서도 수좌(首座)를 다투는 남궁일의 모습을 보다 자세히 살피기 위함이 었다. 날카롭게 뻗은 검미(劒眉). 서늘한 느낌을 주는 두 눈. 우뚝 선 코는 높은 기상과도 같았고, 굳게 다부진 입술은 고집 스러움과 남자다움을 보여줬다. '호오! 사형만큼이나 잘 생겼는걸. 뭐랄까…… 같은 꽃미남이긴 하지만 사형이 더 예쁘고, 저 녀석이 좀 더 남자답군.' 남궁일을 본 선주혁의 감상이었다. 그는 남지학을 살폈다. 원래 남궁일과 남지학의 관계가 떠오른 것이다. 귀공자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남궁일은 슬쩍 미소를 지으며 잡았던 손을 놓았다. "오랜만이군요. 천(千) 소협." "그, 그렇구려." 천 소협이라 불린 청년은 남궁일의 인사를 받았다. "아직은 어린 아이에 불과하니 이 정도면 충분히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을 것입니다. 그만 놓아주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남궁일은 거지 소년을 힐끗 본 후 말했다. 천 소협이라 불린 청년은 종남파(終南派)의 천영의(千英義)라는 자였다. 종남 장문인의 차남(次男)으로 오만한 성격과 이기적인 행동으로 유명한 자였다. 그런 천영의에게 있어서 자신의 행사를 방해하는 남궁일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같은 정도문파라 하더라도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에는 엄격한 차이가 있지 않은가? 오랜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구파일방에 비해 오대세가는 신흥 의 세력일 뿐이었다. 두 세력 사이에 존재하는 미묘한 알력은 천 영의에게 그대로 반영되었고, 그의 불쾌한 심사는 하늘을 찔렀다. 하나 상대는 신웅십팔걸의 일원. 후기지수 중 제일로 꼽히는 후보 중의 하나였다. 천영의는 불쾌한 심정을 억누르고 거지소년의 팔을 거칠게 떠밀 었다. 거지소년은 맥없이 한쪽으로 밀렸다가 남궁일의 얼굴을 힐끗 바 라보고는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저 무례한 놈……." 그런 거지소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천영의가 중얼거렸다. 남궁 일에게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한 말이었 다. 어쩌면 저딴 녀석을 감싸기 위해 감히 내 손을 잡은 거냐고 남궁일을 힐난하는 의사가 드러난 것일 수도 있었다. 하나 남궁일은 얼굴에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전낭에서 동전 몇 문을 꺼내 만두가게 주인에게 건넸다. "만두 값이오." "아이고……, 괜찮습니다요." 만두가게 주인은 굽실굽실 거리며 사양했다. 하지만 그의 손은 이미 남궁일이 내민 동전을 집어가고 있었다. "제 체면을 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천 소협!" 몸을 돌린 남궁일은 두 손을 마주 잡으며 천영의에게 감사를 표했다. "하하하, 뭘 이런 것을 가지고……. 이 천 모에게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말씀하시오." 천하의 남궁일이 자신에게 예를 갖췄기 때문일까? 천영의는 방금 전의 불쾌한 일을 모두 잊은 듯 웃음을 터뜨렸 다. 거기에 더해 자신이 남궁일의 사정을 봐 준 것임을 일부러 크 게 말했다. 보는 눈이 많음을 의식해 역시나 구파일방 그리고 종 남파가 정의련 그리고 남궁세가에 비해 우위에 있음을 표내려 한 것이다. 그런 천영의의 웃음에서 시선을 뗀 남궁일이 살짝 고개를 돌려 말했다.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우린 이만 가도록 하죠." 천영의에게 인사를 한 남궁일은 고개를 뒤쪽으로 돌리며 누군가 에게 말을 했다. 그와 동시에 선주혁의 두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있기 때문에 그녀를 보지 못했음이 아니 었다. 남궁일의 존재감이 너무 컸기에 그녀를 보지 못했다. 남궁일의 뒤쪽에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서 있는 여자 는 놀랍게도 남궁일이 말을 건넨 것은 몰살당했다고 알려진 백가 장의 영애, 백화란이었다. '내 그럴 줄 알았어! 저런 미녀가 쉽게 죽을 리가 없지.' 아무리 자신으로 인해 뒤죽박죽이 되었다고 해서, 사람 운명이 라는 게 쉽게 바뀌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몰살을 당했다는 소문 속에서도 선주혁은 왠지 그녀만은…… 이라는 생각을 했고, 희망 을 버리지 않았다. 과연 그녀는 혈겁(血劫)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이다. 선주혁은 당장이라도 그녀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슬픔에 젖은 두 눈을 한 그녀의 가녀린 몸을 안아주고 팠다. 하지만 그에게 허용되는 상황이 아니었다. "아니지요. 이렇게 오랜만에 만났는데 어찌 벌써 헤어질 수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선녀처럼 아름다운 일행까지 계신데……. 어 떻습니까, 남궁 소협. 저희와 함께 술이라도 한 잔 하시지요." 천영의 역시 백화란의 얼굴을 본 모양이었다. 그는 은근한 수작 과 함께 남궁일과의 동행을 제안했다. 남궁일은 천영의의 제안을 사양치 못했고 결국 그들은 함께 움 직였다. 선주혁이 굳은 듯 서 있는 모습을 보던 은설연이 물었다. "선 소협, 저 중에 아는 자가 있었소?" 선주혁은 은설연의 말에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목소리를 한껏 낮춰 대답했다. "남궁일과 함께 한 여인이 사천백가의 백화란 소저요." "호오! 어쩐지……, 보기 드문 미인이라 했더니만……. 용케도 혈겁을 피했나 보구려."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지요." "흐음……. 혹시 지난번에 달을 보며 그리워했던 게 고향땅이 아니라 저 소저가 아니었소?" 은설연은 약간은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아, 아니오. 백 소저는 그저 잠시의 인연이 있었을 뿐이오." 선주혁은 재빨리 부정했다. 은설연은 죽립 너머로 선주혁의 표정을 살피지 못하는 게 아쉬 웠다. 목소리만으로 한껏 재미난 표정을 짓고 있었을 거라 상상만 해야 했다. "우리도 이만 움직이지." 남지학의 말에 세 사람은 발걸음을 옮겼다. 이동을 하며 선주혁은 자신의 감정에 대해 돌아봐야 했다. 왜 은설연이 자신에게 백화란에 관해 물었을 때 당황했었는지를 짚어 보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텔레비전에서나 볼 수 있던 미인들이 눈앞에 나타나는 것이 마냥 신기했다. 그녀들과 대화를 하고 나름대로의 흑심(黑 心)을 품을 수 있다는 것이 꿈만 같았다. 무협나 영화를 보면 주인공들은 삼처사첩을 거느린다. 아니 그 이상도 많다.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혹은 대리만족을 느끼면서 봐 왔다. 때로는 한 여자에게만 매달리는 주인공을 보면 답답하게 여기고, 화를 내기도 했다. 다 네 것으로 만들어 버려, 라고 외친 게 몇 번이던가. 하지만 실제로 자신에게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저쪽 세상에 있을 때 자신은 감히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처지가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스스로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소정의 성과도 있었다. 충분히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기서는 가능하 다고, 해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때 나타난 것이 백화란이었다. 원래는 사형과 정을 나누게 될 사이였으나 욕심이 동했다. 그녀 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했고, 나름대로 점수도 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이 진정으로 그녀를 사랑했는지에 대한 확신은 없었 다. 사랑을 해 보질 않았으니 어떤 감정을 사랑이라 부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그럴 것이다…… 정도가 선주혁에게는 전부였다. 사천백가의 비보(悲報)를 들었을 때 분명 화가 났다. 독안 사내 를 거침없이 죽일 정도로. 하지만 백화란이 죽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더 강했기 때문일까? 그녀가 죽음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슬픔이 유지되지도 않았다. 직접적으로 그녀를 떠올릴 때는 가슴 한쪽을 도려내는 것처럼 아프고 안타까웠지만, 그 외의 시간에는 자신의 일을 걱정하는 시 간이 더 많았다. '난 대체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는 것일까?' 은설연의 뒷모습을 보았다. 평소 그녀의 팬, 아니 그녀의 모습을 한 한태희의 팬이었기 때문일까? 그녀를 보면 가슴이 떨린다.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한데 아직도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가 없다. 때로는 심술 맞은 모습을 보이고, 때로는 표독스럽기도 하며, 때로는 자신을 걱정하는 모습 을 보여주기도 하는 그녀. 그녀의 모든 것이 자신을 흥분시켰다. 그렇다면 자신은 은설연을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이런 감정을 사랑이라 표현할 수 있는 것인가? 백화란처럼 은설연과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 평소 자신이 좋아하 던 또 다른 연예인의 모습을 한 여자를 보면 무덤덤할 수 있을까? 질문은 끊임이 없었다. 또한 그 무엇에도 대답할 수 없었다. 선주혁은 질문이 계속될수록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느 꼈다. 실제는 아니겠지만 한쪽 머리가 지끈 거리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젠장!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하는데……, 나 혼자 김칫국을 마시고 있다는 건가?' 따지고 보면 그랬다. 백화란에게 점수를 땄다. 그것뿐이었다. 그녀가 사형이 아닌 자신을 선택하라는 법은 없었다. 더구나 지금 그녀의 곁에는 꽃미남 남궁일이 있었다. 무림공적으로 몰린, 그리고 가문을 몰락시킨 원수로 여기고 있을 자신에게 그녀가 마음을 줄 리 없었다. 은설연 역시 마찬가지다. 천하를 대표하는 네 개의 힘 중 한 축을 담당하는 사파연합. 그 사파연합 우두머리의 손녀다. 아무리 자신이 이쪽 세상에 와서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갖췄다 해도 그녀의 배경과 신분을 생각하면 달빛 아래의 반딧불과도 같았다. 그런 은설연이 자신을 좋아하고, 마음을 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쳇! 결국은 그거군. 어차피 인연이 있으면 때려 죽여도 안 헤어질 것이고, 인연이 없으면 목숨을 걸어도 안 될 일이잖아. 이쪽 세상에서의 내 인연까지 알 수야 없으니…….' 선주혁은 스스로의 마음에 대한 아무런 답을 찾지 못했지만 결론은 내릴 수 있었다. 사랑은 쟁취하는 거라 하지 않았는가. 마음에 드는 여자를 보면 열심히 노력을 하는 거다. 그리고 최선을 다하면 된다. 그녀의 마음을 얻거나, 그렇지 못하는 것은 후에 드러날 것이다.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자신의 인연을 찾을 수 있으리라. 그가 원하는 건 일방적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게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거였다. 이쪽 세상에서라면 분명히 그런 여자를 만날 수 있으리라며 스스로에게 희망을 심어 주었다. 어차피 일처일부제의 세상에서 살아온 그였다. 꼭 무협지의 주인공처럼 수많은 여자들을 거느릴 필요는 없었다. 여자 경험이 부족한 자신이 그 여자들을 감당할 수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무협지에서는 주인공이 여러 명의 처첩과 함께 은거를 하면서 끝이 나는 상황이 많다. 그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없다. 여자의 질투는 무섭다지 않은가. 서로 싸우고 야단이라도 칠라치면 누구의 편을 들어준단 말인가? 골치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소설이야 거기서 끝이 나면 그뿐이지만 자신에게는 현실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평생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지금의 이 모든 상황들은 선주혁 자신에게 있어서는 전적인 현 실. 멍청한 환상만을 꿈꿀 수는 없었다. 사실 여러 여자를 거느리는 것쯤은 마음만 먹으면 할 수도 있 었다. 신투의 보물을 이용하면 정신 나간 여자들을 수백 거느릴 수도 있었다. 그것은 저쪽 세상이나 여기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선주혁은 그런 여자를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여자. 무엇보다 자신의 가족이 되어 줄 여자가 필요한 것이었다. 지금의 상황에서는 어떤 여자가 자신에게 가족이 되어 줄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내가 언제부터 이런 형이상학(?)적인 고민을 했다고. 젠장!' 골치 아픈 문제는 상황이 벌어지는 그 때가서 생각하면 될 일이 었다. 지금 당장은 공적으로 지목된 상황 속에서 살고 보는 게 우선이었다. '일단 살고 봐야 여자를 꼬시든, 돈을 써보든 할 거 아냐!' 그게 선주혁이 내린 결론이었다. '하렘이든 진실 된 사랑이든……, 진짜로 내 눈앞에 닥쳐야 선 택할 수 있는 거야. 적어도 이건 현실이니까 말이야!' Vol 3. 우지끈. 오랫동안 말리고 몇 번에 걸쳐 옻칠을 한 나무 창틀이 맥없이 부러져 나갔다. "무슨 일이야?" 남지학이 놀라 선주혁의 옆으로 다가왔다. "아! 사형." 자신의 손에 들린 창틀의 조각을 보며 선주혁이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는 턱으로 살짝 창밖을 가리켰다. 남지학은 창밖을 내다봤다. 한 쌍의 남녀가 다정한 모습으로 제법 잘 꾸며진 객잔의 뜰을 거니는 모습이 보였다. 준미하기 이를 데 없는 사내와 월궁(月宮)의 항아(姮娥)와 같은 여인이었다. 사내는 당당한 걸음걸이를 옮기고 있었고, 여인은 어딘가 우울해 보이는 표정으로 사내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 뒤를 쫓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을 본 남지학의 얼굴도 굳어졌다. "하필……." 왜 여기냐는 뒷말이 생략되었다. 생략된 말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우연과 우연이 겹치는 일. 그것은 소설이 아니라 현실에서 더 많이 일어나는 일일지도 몰랐다. 적어도 선주혁은 그것을 몸소 체험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게 말이에요." 선주혁이 한숨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그녀를 만나서 정황을 이야기해 볼까요?" "우리 이야기를 믿어줄까?" "안 믿겠죠?" 남지학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답답한 일이군요. 누명을 쓴다는 게 이렇게 억울한 일일 줄이야……." 소설 속에서 주인공이 억울한 누명을 쓰면 괜히 짜증이 난다. 확 드러내고 밝히면 그뿐인 것을 왜 굳이 누명을 쓰고 오해를 받으며 이야기를 끌어가는 건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막상 자신에게 이런 일이 닥치자 달리 방법을 찾기가 힘들었다. 더구나 분통이 터지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글로 보는 것과 자신이 겪는 것은 여러모로 다르기만 했다. "수투라도 돌려주는 건 어떨까요?" 선주혁이 못내 미련이 남는지 다시 물었다. "아마도 그녀가 감당하기 힘들 거야." 미처 생각하지 못한 문제였다. 묵연수투를 노리고 달려드는 무림인들에 대한 지독함은 남지학이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렇겠군요." 선주혁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수투 자체가 원망스러울 거야. 모든 일의 원인이 수투 때문이라고 여길 테니 말이야." 남지학의 말은 흠잡을 데가 없었다. 선주혁은 경솔한 생각을 한 자신을 인정하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나중에야 어찌될지 몰라도 지금이 때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남지학은 몸을 돌려 다시 침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바로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답답함은 그가 더하리라. 선주혁이야 곤륜파에 큰 애착이 있을 리 없다. 엄청 두들겨 맞고, 구박을 받았으며, 탐욕스러운 사부에게 시달린 경험이 다였으므로. 하지만 남지학에게 있어서는 목숨보다 소중한 사문이 아니던가. 서로 언급을 피하고 있지만 파문당한 고통은 그에게 뼈에 사무치는 아픔을 주고 있을 것이었다. 다시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질투가 날 정도 잘 생긴 남궁인. 수심어린 표정으로 그 옆에 서 있는 백화란. 가슴에서 울컥하고 뭔가 치밀어 오르는 느낌이었다. 질투심이란 이런 것인가 생각해 봤다. 그 때 한 남자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천영의였다. 내공을 따로 운용하지 않아도 부산을 떠는 천영의의 목소리가 창 너머로 들려왔다. 한참 술자리가 계속 되는 데 두 사람이 없어져서 흥이 죽고 있다. 빨리 돌아가자는 이야기였다. 백화란이 피곤해 해서 잠시 쉬고 있다는 말을 남궁일이 대변했다. 선주혁은 그것도 못마땅했다. 왜 그 이야기를 저 녀석이 대신하는 것인지 이해치 못했던 것이다. 천영의는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세 사람의 모습은 뜰에서 사라졌다. 아마도 객잔의 일층에서 다시 술자리를 가지리라. '젠장, 이럴 때가 아니라니까. 사파연합에 의탁을 해야 할지도 못 정했는데 이렇게 한가한 생각을 할 때가 아니라고, 선주혁!' 선주혁은 투덜거리며 침상으로 돌아갔다. 머리가 복잡할 때는 역시 잠이 최고라는 생각으로. 하지만 그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털컥 문이 열리며 은설연이 들이닥친 것이다. '미스 은, 여기는 남자들의 거처라고.'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그녀의 얼굴을 다시 보는 게 나쁘지만은 않은 그였다. "문제가 생겼소." 은설연의 말에 남지학이 진기를 가라앉히며 수공으로 조식을 마무리했다. "무슨 문제요?" "이 근처를 누군가가 포위하고 있소이다." "포위?" "네. 우리 쪽 사람들이 경고를 보내왔소." 어느새 은설연이 사파연합의 인물들을 포진해 놓은 모양이었다. '똑똑한 여자니까…….' "우리를 노리는 것이오?" 남지학이 물었다. "달리 누군가를 노릴 사람이 있단 말이오?" 은설연이 남지학이 그런 질문을 한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곳에 남궁일과 백화란 소저가 투숙하고 있소." "그건 소생도 알고 있소이다. 그들을 노릴 만한 이유가 있소이까?" "백가장의 인물이 살아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을 수도……." "……!" 그제야 은설연은 남지학의 말을 이해했다. 암중의 세력이 노린 것은 백가장 식솔의 몰살이었다. 백화란이 생존해 있다면 또 다른 누군가도 살아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노릴 이유는 수도 없이 많았다. 살육의 현장에 있었으면 선주혁과 남지학을 가장한 자들을 봤을 수도 있다. 두 사람의 진면목을 아는 백화란이라면, 혹은 사천설가의 인물 중 누군가를 그녀가 알아봤다면 반드시 죽여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랬다면 곤륜이마가 누명을 뒤집어쓰지 않았을 것이 아니겠소?" 은설연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살아남아 남궁세가에 의존할 정도라면 실제의 흉수(兇手)가 누군지 그녀가 밝혔을 것이 아니냐는 뜻이었다. "문제는 그녀가 알고 있느냐, 아니냐가 아니오. 그녀가 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문제일 것이오." 그의 말이 옳았다. 저들이 백화란이 자신들의 정체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면 죽이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었다. '정말이지 이 두 인간들의 머릿속을 열어보고 싶군.' 은설연이 남지학과 선주혁을 차례로 보며 생각했다. 한편으로 두 사람이 곤륜파 출신이 아니라 어릴 때부터 전략(戰略)과 귀계(鬼計)만을 배우면서 자란다는 제갈세가(諸葛世家)의 인물들이 아닌가 싶었다. "그렇다고 앉아서 기다릴 수만은 없지 않겠소?" 은설연이 물었다. 애써 세력을 동원해 사파연합의 능력을 보여주고자 했건만 별로 생색이 안 나는 일이 되어 버렸다. 그녀의 음성이 곱지만은 않은 이유는 거기에 있었다. 남지학이 잠시 선주혁을 바라봤다. "그녀를 돕고 싶겠지?" 그는 이곳을 포위해오는 자들이 암중 세력의 인물들이라고 이미 결론을 내린 듯 했다. 선주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사천백가가 큰 환란을 겪게 되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시기가 당겨진 것은 자신의 책임이 컸던 것이다. 자신이 이곳에 나타나지만 않았다면 모든 게 바뀌는 일은 없었을 테니. "나 역시도 그렇다." 남지학이 결론이 무게감 있는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우리가 나서면 일은 더 커질 뿐." 남지학의 시선이 은설연에게 돌아갔다. "사파연합으로 가겠소." 은설연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조건은…… 그녀를 돕는 것이오?" 남지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요구한 것은 은설연이 사파연합의 세력을 동원해주는 것이었다. "좋소. 남아일언(男兒一言)……." "중천금(重千金)이오." 남지학에게 확답을 받는 은설연이 방문을 나섰다. 문이 닫힌 후 휘파람 소리와 같은 고음이 들려왔다. 아마도 사파연합의 인물들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이라. "괜찮겠어?" 남지학이 선주혁에게 물었다. 사파연합행을 묻는 것이다. "달리 대안이 있었던 것도 아니잖습니까?" 선주혁이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사실 그로서는 이미 답은 그것뿐이라 여겨왔다. 다만 남지학이 사문을 고려하는 것을 존중했기에 아무 말을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담담히……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었겠지." 남지학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 원래대로라면 사형은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지.' "사형. 그것은 결백을 증명하는 게 아니라 인정하는 셈입니다. 곤륜파에서 우리를 파문했다 해도 우리 스스로 곤륜파의 제자임을 잊지 않으면 될 일이에요. 어디에 가 있건 그 마음만 변하지 않으면 돼요. 그리고 지난번에 사형이 말했듯 진실을 증명하자면 힘을 기르면 되죠. 우리가 힘을 갖게 되면 우리의 진실을 밝힐 수 있을 거예요." 선주혁의 말에 힘없이 가라앉던 남지학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그가 미소를 지었다. "후후, 사제가 없었으면 이 우매한 사형은 벌써 폐인이 되거나 죽었을 지도 몰라." "아하핫, 그럴 리가요." 선주혁이 멋쩍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순간, 콰앙 하는 소리가 문 밖에서 들려왔다. 아마도 싸움이 시작된 모양이었다. 성도 한복판에서 큰 싸움을 일으키는 것으로 보아 저들이 얼마나 백화란의 일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지 알 수 있었다. "슬쩍 구경해 볼까요?" 선주혁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남지학이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이곳을 빠져나갈 준비를 해야 해. 전 무림의 시선이 이곳으로 쏠릴 테니까." "그렇군요……." 선주혁이 아쉬움을 드러냈다. "사파연합, 아니 백사회는 강해! 은 공자가 저렇듯 자신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야. 남궁일 역시 큰 도움이 될 테니 더욱 안심할 수 있겠지." "네." 선주혁과 남지학은 서둘러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선주혁은 남지학보다도 백사회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사실 강호인들에게 백사회의 인물들이 다 알려진 것은 아니었다. 개중 몇몇이 사파의 무수한 세력을 규합했고, 정도문파에 자신의 실력을 드러냈다. 그리고 백사회의 존재를 만천하에 알렸다. 천산노조니 편복마왕이니 하는 자들은 그렇게 알려진 몇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백사회가 강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했다. 사파의 인물들은 개성이 강하고, 그만큼 제 멋대로의 성정을 가진다. 그들을 규합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힘뿐이었다. 각각 자신을 위하고, 제 욕심을 차리는 것을 최우선적으로 여기는 자들을 규합한다고 해봐야 오합지졸(烏合之卒)일 뿐이다. 그런 오합지졸들을 이끌고 천하를 나누는 네 개의 세력으로 버틸 수 있는 것은 백사회의 개개인이 가진 실력이 가공할 정도이기 때문이었다. 바깥쪽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점차 요란해지고 있었다. "차라리 아예 지금 떠나버리죠." 선주혁의 제안에 남지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다시 방문이 벌컥 열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다급한 표정의 은설연이었다. "적들의 숫자가 생각보다 많소. 실력도 뛰어나고……. 게다가 객잔 안의 사람들을 모두 죽이려는 모양이오." 쏟아내듯 다급히 말한 은설연은 선주혁과 남지학이 이미 짐을 꾸린 채 죽립까지 쓰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어이가 없었다. '뭐야? 귀신이라도 붙은 거야?' 마치 지금의 모든 상황을 예측이라도 하고 미리 짐을 챙겨두고 떠날 준비를 마친 것이 아닌가? 계속 해서 두 사람의 엄청난 능력을 보아온 그녀인지라 이제는 모든 게 다 능력으로만 보이는 것이었다. "아예 흔적을 지으려는 모양이군." 남지학은 서두름 없이 침착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녀는……?" 선주혁이 백화란에 대해 물었다. 은설연이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린 다음 물었다. "백사회의 노야(老爺)께서 와 계세요."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었다. 어찌 보면 천하에서 가장 강하다고 손꼽히는 자 중 하나가 나타난 셈이었다. "그럼 우리도 이만……." 남지학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콰앙 소리와 함께 문짝이 부서져나가며 한 중년인의 시체가 날아든 것이다. 그리고 날카롭게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곳에도 사람이 있다!" "쳇!" 은설연이 재빨리 유리검을 뽑아들었다. 멋도 모르고 방안으로 뛰어 들어온 흑의 복면인 한명의 목이 허공에 떠올랐다. 그녀의 손속에는 일말의 사정도 없었다. 남지학의 영의검도 검집에서 빠져나왔다. 그 사이 선주혁의 신형은 이미 창문을 넘고 있었다. 빠져나가는 게 목적인데 굳이 싸울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사형, 이쪽으로!" 소리를 지른 후 선주혁은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가볍게 착지한 그가 이층을 올려다 볼 때 날카로운 파공성이 들렸다. 객잔의 뜰에서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도륙하던 한 복면인의 박도(朴刀)가 그를 베어오는 것이다. 선주혁은 가볍게 몸을 움직여 박도를 피했다. 그리고 손가락을 세워 기습한 자의 팔을 잡았다. "크윽!" 단박에 복면인의 팔을 파고드는 선주혁의 손가락에 신음이 터졌다. 선주혁은 그대로 복면인의 팔을 잡아 던져버렸다. 객잔의 담에 부딪쳐 혼절해 버리는 복면인. 그 순간 선주혁의 귀를 파고드는 요란한 비명소리들이 있었다. "으아아아악!" "크아!" "살려줘!" 객잔에서는 사람들이 뛰어나오고 있었고, 그 뒤를 쫓는 흑의복면인들은 닥치는 대로 무기를 휘둘러 댔다. 죄 없이 죽어가는 사람들의 비명소리는 처절했다. 한 순간 객잔이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잠시 처참한 현장을 보는 사이 다시금 옆구리를 파고드는 하나의 검. 선주혁은 가볍게 손을 놀려 검신을 잡아갔다. 맨손으로 검을 잡았기 때문일까? 복면 위로 드러난 흑의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선주형은 무진진인의 무공과 암영수의 일초를 합친 수법을 펼쳤다. 머릿속에는 최대한 빨리……, 라는 생각밖에 없었던 것이다. 검이 손에 잡힌 것에 당황한 복면인은 빛살처럼 빠른 선주혁의 손을 피해낼 실력이 없었다. 퍼억 하는 둔탁한 음향과 함께 그의 신형이 뒤쪽으로 날아갔다. "무림인이다!" "고수야!" 복면인들이 서로 소리를 질러대고 선주혁쪽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젠장, 일이 꼬이네.' 한 순간 신형을 날려 이곳을 빠져나갈까도 생각했다. 암영풍을 전개한다면 누구도 쫓아오지 못하리라. 하지만 어쩐 일인지 남지학과 은설연이 아직도 나오지 않고 있었다. '고수라도 만난 건가?' 잠시 위쪽을 돌아보는 사이 세 개의 도가 선주혁을 향해 날아들었다. 한순간의 허점을 보인 결과는 컸다. 선주혁은 혈응조의 수법으로 두 개의 도신을 손가락으로 잡을 수 있었지만 등 쪽으로 날아오는 도까지 피해낼 수는 없었다. 카앙 도와 살이 부딪쳤는데 난데없는 금속성이 울렸다. 도를 휘두른 자가 놀라 외쳤다. "갑주를 두르고 있다!" 맨살로 도를 튕겨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선주혁은 두 손목을 꺾어 도신을 부러뜨렸다. 맨 손으로 쇠를 분지르는 조공의 위력에 복면인들이 놀라 뒤쪽으로 주춤거렸다. 선주혁은 그들을 쫓지 않고 신형을 뒤쪽으로 돌렸다. 자신의 신체가 튼튼하지 않았다면 등에 도를 휘루는 자로 인해 목숨을 잃었을 지도 모를 일었다. 크게 진각을 밟아가며 선주혁의 장이 복면인의 가슴을 가격했다. 청성파의 최심장이 펼쳐진 것이다. 퍼억 뒤쪽으로 날아가 객잔의 벽에 부딪친 복면인. 잠시간 부르르 떨더니 입에서 피를 게워내며 쓰러졌다. 한 눈에도 즉사한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선주혁이 더 놀랐다. 크게 힘을 주어 때린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는 선주혁이 최심장의 위력을 몰랐기 때문이다. 혈마인과 같은 마공은 아니었지만 최심장은 상대의 혈맥에 큰 충격을 주는 장법이다. 제대로 적중당하면 일격즉사는 기본이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혈마인은 자신보다 내력이 강한 상대에게는 효력을 줄 수 없었지만 최심장은 달랐다. 자신보다 내력이 뛰어난 고수에게도 효력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특히 매번 장력에 격중 당하면 혈맥에 가해지는 충격이 누적되고 결국 그 충격이 심장에까지 전해지면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가공할 장법이었다. 익히기도 난해하지만 청성파에서 아무에게나 최심장을 전수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너무나 살상력이 강하기 때문이다. 선주혁은 증폭된 풍이의 내력과 독안인의 내력 일부를 흡수한 상태. 전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해도 그의 최심장은 복면인의 생명을 빼앗기에 충분한 위력이 있었던 것이다. "아, 진짜 왜 안 내려 오는 거야?" 이미 죽어버린 자에게 신경을 쓰고 있을 틈이 없었다. 결국 선주혁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머뭇거리는 흑의인들을 내버려 두고 신형을 날렸다. 이층의 창문으로 다시 들어간 것이다. 난장판이 되어 있는 방안. 그러나 어디에도 은설연과 남지학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선주혁은 방문으로 이동했다. 혹여 객잔의 안쪽에서 싸우고 있나 싶어서였다. 방문을 나서자마자 한 명의 복면인과 마주쳤다. 붉게 달아오른 양 손. 선주혁에게는 이미 익숙한 혈마인이었다. 공력을 북돋았다. 풍이와 독안인에게 흡수한 진기가 거대한 파도처럼 양손으로 몰려갔다. 묵연수투를 끼지 않은 상태였다. 자신의 장법이 혈마인에 맞설 수 있는지 궁금했다. 약간의 기대와 긴장이 뒤섞여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복면인이 경쾌한 움직임으로 선주혁을 향해 다가왔다. 채찍처럼 휘둘러지며 머리를 노리고 날아오는 혈영인. 단박에 죽이려드는 것이리라. 선주혁은 암영풍으로 몸을 뒤쪽으로 뺐다. 무공을 익힌 사실이 의외라는 듯 살짝 눈썹을 찌푸린 복면인. 하나 공격을 뒤로 피하는 것은 경험미숙이라 판단했다. 뒤쪽으로 움직여서는 용케 한두 번까지는 피할 수 있을지 몰라도 앞으로 달려가는 자의 속도를 따를 수는 없는 법이었다. 복면인의 혈영인이 재차 날아왔다. 이번에 노린 것은 선주혁의 가슴. 선주혁도 망설이지 않고 진각을 밟으며 우장을 내질렀다. 재차 발출된 최심장. 퍼엉 선주혁의 어깨가 들썩이고 복면인은 뒤로 세 걸음이나 물어선 후에야 신형을 바로 세울 수 있었다. 선주혁은 자신의 손을 쳐다봤다. 장법의 위력이 생각보다 강했기 때문이다. '나…… 이렇게나 강해진 건가?' 한편 복면인은 눈가에 가는 잔주름을 잡고 있었다. 선주혁은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알고 있었다. 아마도 혈마인과 정면으로 마주했으니 자신의 죽음을 예상하는 것이리라. 자신이 밀려났다는 것이 놀랍기는 해도 승리를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선주혁은 질풍처럼 복면인에게 달려들어 그의 가슴을 후려쳤다. 혈마인을 적중시키고 방심하던 복면인이 당하는 것은 당연했다. 사형과 은설연의 안위가 걱정되는 마음으로 손을 썼으니 복면인은 죽음을 피하지 못하리라. 선주혁은 뒤쪽으로 날아간 복면인에게는 신경조차 쓰지 않고 난간 쪽으로 다가가 내부를 살폈다. 회의(灰衣)의 무사들과 흑의복면인들이 한데 엉켜 싸우고 있었다. 살점이 튀어 오르고 피가 분수처럼 뿜어지고 있었다. 말 그대로 아비규환(阿鼻叫喚)의 장(場)이었다. '없어?' 선주혁의 눈이 흔들렸다. 남지학과 은설연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남궁일과 백화란 역시 보이지 않았다. 천영의와 그의 일행만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싸우는 모습이 보였다. 그 외에는 회의, 흑의의 무사들뿐이었다. "젠장!" 뭔가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했음이 틀림없었다. 그는 남지학을 잘 안다. 자신을 버려두고 도주할 사람이 아니었다. '백 소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저 놈도 빨리 죽엿!" 복면인 중 하나가 소리를 지르고 선주혁을 향해 다섯 명의 복면인들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선주혁은 짧은 갈등 끝에 결론을 내렸다. 방으로 다시 들어간 후 창문 밖으로 뛰어 내렸다. 그리고 객잔의 뜰을 가로지른 후 담을 넘었다. 연이어 전개되는 암영풍. 한 줄기 바람과 같은 그의 신형을 따라올 수 있는 복면인은 없었다. 선주혁은 그렇게 어둠의 장막 속으로 몸을 던졌다. 어느새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완연한 가을이 온 것은 아니지만 뜨거운 여름밤의 기세는 사라진 것이다. 어디 선가 들려오는 밤새 소리. 울고 있음이 아님을 알면서도 서글프게만 들린다. 툭 죽립 하나가 땅에 떨어진다. 아니 던져진다. 이어 밤하늘과 같은 색깔의 의복을 입은 자가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는다. 그의 둔부에 깔려 스슥 거리며 풀잎이 비명을 지른다. '이제…… 어떻게 하지?' 한참을 달려왔다. 바람소리가 커다란 깃발이 귀에서 펄럭이는 것처럼 들린 지 한 시진이 넘어서야 깨달았다. 자신이 어딜 향해 달리고 있는지 모른다는 것을. 그리고 혼자라는 것을. 사형과 헤어진 것은 벌써 두 번째다. 하지만 상황은 달랐다. 첫 번째는 살기 위해 밀실을 빠져나가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오직 살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고 나서 곧바로 말도 안 되는 상황, 아니 기적으로 인해 사형과 재회를 했다. 그걸로 충분했다. 모든 것은 사형과 함께 하면 됐다. 이미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상황이 전개되어 버렸지만 어쩐지 사형과 함께라면 자신이 있었다. 무슨 일이 생겨도 사형이 있으면 해결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무림의 주역이 될 운명이며, 그와 같이 큰 인물에게 시련을 있을지언정 좌절과 절망은 없을 것이다. 자신은 거기에 편승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본의 아닌 오해와 누명을 쓰게 되었지만 결국은 잘 해결될 거라 믿었다. 사형은 누가 뭐래도 주인공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혼자다. 모든 것을 혼자 결정하고 감당을 해야 한다.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자는 수십, 아니 수백, 수천 명은 될 것이다. 사형과 함께가 아니기에 이제는 위험했다. 위대한 인물이 될 운명은 사형의 것이지 자신의 것이 아니다. 불안했다. 무의식중에 선주혁에게는 남지학이 커다란 버팀목이 되어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젠장! 내가 언제부터 남에게 의지하고 살았지? 원래 난 혼자였잖아. 사형이 없어도…… 아니 적어도 사형을 다시 만날 때까지는 버텨야해. 버틸 수 있어. 난 이미 충분히 강해. 강하다고!' 선주혁은 머리를 흔들었다. 주먹을 말아 쥐었다. 더 이상 막연히 꿈이거니, 환상이거니 하는 생각은 버린지 오래되었다. 지금의 모든 상황은 선주혁에게 있어 확고한 현실이었다. 어찌어찌 하다보면 잘 되겠지. 혹은 사형 옆에서 그에게 떨어지는 기연들의 부스러기만을 주워 먹어도 이전 세상에서 살던 것보다는 낫겠지……, 라는 안이한 생각은 버려야만 했다. 이곳은 무림이다. 그 어떤 곳보다 치열한 세상이다. 한 순간에 목숨이 오가는 곳. 그곳이 무림이다. 책에서 읽은 것처럼 주인공이 마냥 승승장구하니 구경만 하면 되는 처지가 아니다. 아무리 선주혁이 강해졌다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책에서 엿본 이쪽 세상에는 무수한 강자가 넘쳐흘렀다. 책의 후반부로 가서 사형이 마주했던 상대는 인간을 초월한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신투의 밀실에서 칼날이 손을 베었듯 자신의 단단한 몸을 무 자르듯 자를 수 있는 사람들은 많고도 많았다. 그렇기에……, 오히려 그렇기에 선주혁은 이곳에서 더 많은 가능성을 가질 수 있었다. 아무리 달려도 끝이 보이지 않는 저쪽과는 다르다. 이곳에도 담은 있다. 하지만 그것이 담인 한 분명 넘을 수 있다. 그것을 넘을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사형을 좋아한다. 그가 고맙다. 하지만 그에게만 기대서는 안 된다. 앞으로 사형이 겪어야할 운명들은 하나같이 험난하다. 그런 사형의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된다. 최소한 짐이 되지는 말아야하지 않겠는가. '그래,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아는 만큼 곧 재회할 수 있어.' 선주혁은 죽립을 집어 들었다. 은설연, 사형과 가기로 한 곳은 백사회가 아니던가. 일반적인 무림인은 그 본거지를 알지 못하지만 자신은 안다. 최소한 지명을 알고 있으니 그 부근에서 찾으면 되리라. 먼 길이었다. 중원을 가로질러야 도착할 수 있는 멀고도 먼 길. 공적으로 지목되고 추살령이 내려진 만큼 험로가 될 것이다. 하지만 살아남을 것이다. 아니 살아남아야 했다. 그리고 실력을 더욱 키워놓으리라. 이제는 사형에게 빌붙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Vol 4. 남아의 기개 "하핫…… 사제. 너무 긴장하지 마." 어깨가 유독 넓어 뵈는 정영기(鄭營期)가 사제인 명주운(明主雲)의 어깨를 툭 쳤다. 꽤나 힘이 들어갔는지 정영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왜소해 보이는 명주운의 신형이 휘청했다. 명주운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긴장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 정영기가 사람 좋은 미소를 보여주며 물었다. 명주운은 대답은 하지 않고 시선을 한쪽으로 돌렸다. 그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는 회색빛 머리와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 한 명이 있었다. 화려한 옥잠으로 머리를 장식하고 금사(金絲)로 수를 놓은 홍의장포(紅衣長袍)를 입은 요란한 행색의 노인이었다. "명유신군(冥幽神君)?" 정영기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어째서 무림맹의 임무에 저런 자가 함께 하는 거예요?" "쉿! 사제. 목소리 낮춰." 정영기가 흘깃 명유신군 옥좌거(玉左去)쪽을 살핀 다음 말했다. "제가 못할 말을 했어요?" 정영기는 난색을 표하며 명주운의 팔을 잡아 당겼다. "이쪽으로 와서 이야기 하자고." 명주운은 못이기는 척하며 정영기에게 끌려갔다. 정영기는 묵묵히, 그리고 한참을 걸어 옥좌거와의 거리를 충분히 벌린 후에야 몸을 돌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뭐가 어쩔 수 없단 말이에요? 명유신군의 평판은 매우 좋지 않잖아요. 저런 자와 무림맹이 함께 한다는 것은 수치입니다." "목소리 낮춰." 정영기가 안색을 어둡게 하며 말했다. "곤륜이마와 난화불영수를 사용하는 자가 동행하고 있다는 정보야. 청성의 덕양진인께서 패하실 정도라고. 명유신군은 전력에 큰 도움이 될 거야." "어째서 무림맹이 저런 파렴치한 악당과 손을 잡는단 말이에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자는 무림맹의 적이었다고요." "어제의 적이 오늘까지 적이란 법은 없어. 명유신군의 성품이 좋지 않다는 것은 모두가 알아. 하지만 그만한 실력자가 드물다는 사실도 모두 알지." "흥! 실력만 있으면 무조건 쌍수를 들고 환영해야 하는 거예요?" 명주운이 인상을 버럭 썼다. "그래. 그게 무림의 법칙이지. 힘이 있는 자에게만 선택권이 있는 거야." "말도 안 돼요. 그간 우리가 배워온 정의란 그런 게 아니잖아요. 무림맹의 사천지부에는 기라성 같은 고수들이 많잖아요. 굳이 저런 자를 받아들이지 않아도……." "사제." 정영기가 명주운의 말을 끊었다. "곤륜이마들은 간교할뿐더러 강해. 무림맹 인사 전역이 투입되어도 사천의 전역을 지킬 수는 없어. 고수의 숫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판이라고. 게다가 그들을 놓치게 되면 무림맹 사천지부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돼." "결국 체면 때문에 저런 자와 손을 잡아야 한단 말이에요?" "하나만 생각하지 마. 사천은 무림맹에 있어서 가장 세력이 확고한 것이야. 안방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공적들이 활개를 치다가 빠져나갔다고 하면 천하가 무림맹을 비웃을 거야. 그렇게 되면 여기저기서 무림맹을 우습게보겠지." "결국 그 말이 그 말이잖아요. 체면 때문에……." "말을 못 알아듣는군. 무림맹의 명성이 유지되는 동안에만 악인들이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는 거야. 그 명성에 틈이 벌어지는 순간 여기저기서 활개 칠 그들을 생각해보라고." "……!" "단순한 감정만을 내세워서는 안 돼. 무림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니까." "그래도…… 저런 자와 연수(聯手)한다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아요. 쳇!" "그게 못마땅하면 실력을 키워. 우리 평창검문(平昌劒門)에 힘이 있다면 굳이 저런 자의 손을 빌리지 않아도 될 테니까 말이야." 명주운은 정영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반짝이는 그의 두 눈에는 한시라도 빨리 고수가 되어 평창검문을 평창 제일이 아니라 사천 제일로 부흥시키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드러냈다. 정영기는 사제의 그런 눈빛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응? 저자가 조사를 거부하는 것 같은데?" 사제의 등 뒤쪽으로 시선을 던진 정영기였다. 달주(達州)인접한 이곳은 사천과 중경의 경계가 되는 지역이었다. 달주를 중심으로 한 무림맹 소속 문파들은 이곳에서 곤륜이마가 사천을 빠져나가는 것을 지키고 있었던 곳이다. 그런데 죽립을 깊게 눌러 쓴 한 사내가 조사에 응하지 않으며 실갱이를 벌이고 있었다. "흠……. 어딜 가나 저런 자들이 꼭 있군요. 어차피 곤륜이마가 아니라면 얼굴 한 번만 보여주면 될 일을……." 문주운이 괜스레 명유신군에게로 향한 짜증을 낯선 자에게 돌렸다. "곤륜이마일지도 모르지." 반농담 삼아 정영기가 말했다. "훗! 그들은 현재 셋이서 뭉쳐 다닌다면서요?" "또 모르지. 간교한 놈들이니 흩어져서 활로를 찾으려 들지." "그럼 바보죠. 어차피 펼쳐진 천라지망(天羅地網)인데……. 단신으로 그 포위망을 뚫으려 하면 바보가 아니겠어요?" "그걸 역으로 노릴 수도 있는 놈들이니까……. 정영검 대협을 간계로 죽일 정도의 간계를 가진 놈들이라 무슨 짓을 할지 모를 일이잖아? 아무튼 우리도 가 보자고." "네. 그 놈들 제발 이쪽으로 왔으면 좋겠어요. 사파연합에서 나온 자는 엄청난 실력자라지만 명유신군이 상대하면 될 터이고, 곤륜이마는 우리 또래라면서요." "훗! 왜 그들을 상대해서 명성을 떨쳐 보려고?" "안 되라는 법 있어요? 실력 대 실력으로 겨룰 수만 있다면 우리 평창검문의 진정한 능력을 보여줄 기회잖아요." "하하핫! 그래, 그래. 평창검문의 검술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뛰어나니까. 머지않아 우리 사문에서도 걸출한 영웅이 탄생하겠군." 그 순간 달주 제일의 문파인 백의검문(白衣劒門)의 문주인 곽준오(郭俊吳)의 놀란 외침이 터져 나왔다. "백발귀마!" 낯선 자가 죽립을 벗어 던진 것이다. 질끈 위로 동여맸지만 흘러내린 백발이 가을을 예고하는 바람에 휘날렸다. 차 창창 각각의 병장기를 뽑아드는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형!" "서둘러." 정영기와 명주운이 신형을 날렸다. 백발귀마와 대치중인 무림인들의 사이에 끼어든 명주운은 깜짝 놀랐다. 흩날리는 백발 사이로 보이는 가무잡잡한 얼굴은 자신보다도 어려 보였다. 커다란 눈망울을 보면 그저 겁 많고 순박하기만 한 청년처럼만 보였다. 저런 나이에, 저런 얼굴을 하고 무림을 경악케 한 일대사건을 벌였다는 게 놀라웠던 것이다. 백발귀마는 품에서 얇아 보이는 검은 수투를 꺼내 손에 끼고 있었다. '저게 묵연수투인가보군.' "백발귀마! 무림의 공적으로 지목된 사실은 알고 있겠지. 어쩌겠느냐? 네 죄를 뉘우쳐 본 맹의 지부로 순순히 압송될 것이냐? 아니면 예서 죽음을 받아들이겠느냐?" 큰 소리로 호통을 친 것은 평창검문의 문주인 소부숙(蕭富淑)이었다. 파견 나온 많은 인사 중에서 자신의 사부가 당당한 모습을 보이자 어쩐지 가슴이 뿌듯해지는 것을 느끼는 명주운이었다. 백발귀마의 커다란 눈이 가늘어졌다. "길을 막으면…… 죽는다!" "……!" 백발귀마의 오만무도한 말에 무림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소문이야 무성했지만 실제로 보니 애송이가 아닌가? 만약 가무잡잡한 피부와 백발의 기괴한 모습만 아니었다면 약관도 채 못 된 소년으로 보일 용모였다. "이런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 네 놈의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여기 모이신 무림의 영웅들이 네 눈에는 안 보인단 말이냐?" 곽준오가 침을 튀어가며 소리를 질렀다. 백발귀마의 태도가 너무나 당당한 게 꺼림직 하긴 했다. 하지만 이 많은 수의 무림인들을 제까짓 게 어쩌겠냐는 생각이 먼저였다. "죽고 싶다면 나서라." 백발귀마는 외려 더욱 큰 소리를 쳤다. 그 당당한 모습은 명주운을 놀라게 했다. '이 많은 고수를 마주하고도 두렵지 않단 말인가?' 어찌된 일인지 명주운에게 있어서 백발귀마는 기개가 당당한 호걸로 보이기까지 했다. '고작 해봐야 내 또래일 뿐이데…….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는 건가?' "크흐흐흐……." 정도인의 웃음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음침한 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명유신군 옥좌거가 나선 것이다. "곤륜이마니 백발귀마니 하고 떠들기에 한 수 하는 놈들인 줄 알았더니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라니. 크흐흐흐, 무림맹도 실로 인물이 없군. 이런 꼬마 놈을 잡기 위해 나를 초빙할 정도라니……." 옥좌거의 말에 중인들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자신들을 싸잡아 모욕하고 무림맹까지 깎아내리는 발언이었기 때문이다. 더더군다나 옥좌거는 스스로 무림맹에 기대온 것이었다. 자세한 바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천마맹과 문제를 일으켰다는 소문이었다. 중인들은 끓어오르는 노기를 억눌렀다. 이 자리에 모인 자중에서 명유신군의 삼초를 받아낼 고수는 없었다. 적어도 실력에 있어서 명유신군은 차원을 달리하는 고수였던 것이다. 명유신군의 오만한 발언에 누구보다 발끈한 것은 명주운이었다. 만약 정영기가 그의 어깨를 누르지 않았다면 당장이라도 소리를 질러 반박했을 것이다. "사부님도 참고 계시다." 정영기의 한 마디. 명주운은 진탕을 치는 분노를 억지로 참아내야만 했다. "애송아. 본좌의 명호는 명유신군이라고 한다. 네 목숨을 받아갈 분이니 그 정도는 알아둬라." 명유신군이 백발귀마의 앞쪽으로 여유로운 걸음을 옮겼다. 선주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본래 그가 이 자리에 나선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계속해 무림인들을 피해 다녔지만 한계가 있었다. 무림맹의 저력은 생각보다 엄청났다. 길목마다 무림인들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피해 다녀서는 목적지인 절강성(絶江省)에 도착하려면 십년은 족히 걸릴 듯 했다. 결국 강수를 선택했다. 직접 마주쳐 어느 정도의 피해만 준다면 암영풍을 이용해 빠져나갈 수 있으리라는 계산에서였다. 한 번 제대로 된 쓴 맛을 보여준다면 산재해 있는 무림인들을 집중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강하게 뭉친 만큼 빠져나갈 틈은 넓어질 것이라 계산한 것이다. 그런데 의외의 고수가 나타났다. 흡성대법을 익힌 후 상대방의 기세에 엄청나게 예민해진 선주혁이었다. 눈앞에 나타난 요란한 늙은이의 기도는 그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중경쌍흉이나 덕양진인, 독안인 등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절정고수라는 건가……?' 일이 꼬였다. 하지만 이제 와서 피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이대로 몰리기 시작하면 눈 속을 달리는 토끼신세가 되고 말 것이다. 추격은 거세지고 조급해진 자신은 어디선가 실수를 하리라. 보통 무협지에서 보면 다들 그러지 않았던가? 어려운 일이긴 했지만 여기서 제대로 한 수를 보여줘야만 했다. "입만 산, 요란 떠는 늙은이군." 어차피 상대할 거라면 기 죽을 필요 없었다. 자신에게는 금강불괴를 연상시키는 신체와 여러 가지 무공, 그리고 묵연수투가 있었다. 일방적으로 당하지만은 않을 거라는 나름대로의 자신감이 있었던 것이다. 선주혁의 말에 중인들이 외려 통쾌해 했다. 특히 명주운은 속이 다 후련해지는 것 같았다. 마음 한쪽에서는 차라리 백발귀마가 저 안하무인(眼下無人)의 옥좌거를 혼쭐 내줬으면 하는 마음까지 들었다. 옥좌거의 한쪽 눈썹 끝이 파르르 떨렸다. 누가 감히 명유신군에게 저와 같은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구파일방의 장로들조차 한수 접어준다는 자신이 아니던가? "곱게…… 죽여주진 않겠다." 옥좌거가 이빨을 갈아 붙였다. "싸울 마음이 있으면 닥치고 덤벼. 나불대지 말고." "킥!" 결국 명주운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이빨사이로 소리를 내고 말았다. 중인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갑자기 시선을 받은 명주운은 당황했다. 다행이 중인들의 시선에는 책망의 빛이 없었다. 다만 옥좌거만이 소름끼치는 시선을 그에게 잠시 던졌을 뿐이었다. "삼초를 양보해주마. 와라." 옥좌거가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어차피 무림맹에 의탁하기로 한 그였다. 정파 나부랭이들의 방식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추후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다. 어차피 겁 없는 애송이를 상대하는 것일 뿐이다. 이 기회에 자신의 실력을 드러내 무림맹에서의 입지를 굳히겠다는 계산도 깔려 있었다. "니가 와라!" 백발귀마의 대답을 듣고 키득이는 소리를 내는 것은 이제 명주운만이 아니었다. 옥좌거의 뒤쪽에 서 있던 대다수가 입을 가리거나 고개를 돌리고 웃음을 억지로 참아야만 했다. 옥좌거는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밀었다. 그야말로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천둥벌거숭이를 본 것이다. 그의 홍의장포 소매부분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진기가 집중되고 있는 것이다. 선주혁도 쌍장에 진기를 주입했다. 섣불리 마주할 상대가 아니었기에 최대한의 긴장상태를 유지했다. 콰아아 옥좌거의 우장이 날아오자 거센 해일과 같은 경력이 밀려왔다. 선주혁은 감히 맞받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암영풍의 보법을 전개해 일장을 옆으로 흘렸다. 앞으로 내질러졌다 옥좌거의 팔이 기묘한 각도로 꺾이며 다시 선주혁을 향해 날아왔다. 갑작스레 방향을 전환시켰기 때문일까? 노도와 같은 기세가 느껴지지 않았다. 선주혁은 조심스레 일장을 내밀어 마주쳐갔다. 콰앙 요란한 폭음과 함께 뒤로 다섯 걸음이나 튕겨져 나가는 선주혁.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옥좌거의 고요한 일장에는 엄청난 위력이 담겨져 있던 것이다. "저게 바로 명유장(冥幽掌)이야. 처음부터 자신의 성명절기를 사용하는 것을 보니 명유신군이 정말 화가 단단히 낫나보군." 백발귀마가 형편없이 뒤로 밀려나는 모습을 보며 정영기가 사제에게 설명했다. "그렇게 위력적이지 않아 보인 일장이었는데…… 저렇게나 밀려나다니?" "훗! 사제가 몰라서 그러는 거야. 명유장은 조용한 가운데 끔찍할 정도의 위력을 가진 것으로 유명하거든. 사부님조차도 저 일장을 정면으로 마주하시지 못하실 거야. 묵연수투가 아니었다면 백발귀마도 이번 일장으로 죽음을 피하지 못했을 거야." "그렇게나 강한가요? 명유신군이……?" "당연하지. 백발귀마가 뒤로 물러선 땅을 보라고." 정영기의 말에 문주운이 바닥을 살폈다. 그리고 그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백발귀마가 땅을 디딜 때마다 생겨난 족흔(足痕)이 깊이 파여 있었던 것이다. 명유장력을 해소하며 생겨난 현상이니 일장에 담겨진 위력이 어떠한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한편 말을 나누는 사이에도 옥좌거는 거칠게 백발귀마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백발귀마의 신법이 정말 뛰어나군요." "그가 가진 간계 이상으로 뛰어난 신법이라고 들었어. 신투의 신법이라더군. 저 정도의 경신술이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도주해 오지도 못했을 걸?" 그 때 누군가 백발귀마의 무공을 보고 놀라 소리를 질렀다. "혈응조다! 중경쌍흉의 혈응조야." 독수리 발톱처럼 손가락을 세워 옥좌거의 팔을 잡아채려는 백발귀마의 모습이 보였다. 계속해서 몸을 피하는 와중에 혈응조로 틈을 노리는 것이었다. "흥!" 옥좌거가 코웃음을 치며 백발귀마의 손가락을 손바닥으로 튕겨냈다. 묵연수투의 가공할 위력조차 이겨내는 명유장력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백발귀마의 열세가 두드려졌다. 하지만 신출귀몰한 신법과 날카로운 조공으로 쉽게 패할 기색도 아니었다. "저 자……. 단지 묵연수투의 위력만으로 버티는 게 아니군요. 조법이……." 명주운이 침울한 음성으로 말했다. 백발귀마는 자신과 비슷한 나이다. 그런데도 명유신군을 상대로 지금껏 버티고 있는 것이다. 그의 입장에서는 실로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중경쌍흉의 혈응조는 실로 살상력이 뛰어난 무공이지. 사제의 말처럼 백발귀마가 확실히 수투의 위력만으로 여태껏 버텨온 것은 아닌 것 같군." 파앙 팡 팡 그 순간 백발귀마 교차해가며 손바닥을 내밀었고 허공에서 요란한 폭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장력이 폭출하는 소리였다. "저, 저건……!" "최심장이다! 청성파의 무공이야." 사천무림인들 중 청성파를 모르는 자가 누가 있겠는가? 백발귀마가 몇 번 손을 내밀지 않았음에도 최심장을 알아보는 사람들은 많았다. "어떻게 백발귀마가 청성파의 무공을……?" "곤륜파에서 파문당했다고 하지 않았나?" 중인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옥좌거 역시 주름진 얼굴을 찌푸렸다. 청성파의 최심장은 함부로 상대할 게 못되었다. 애송이의 실력이 나름대로 뛰어나긴 하지만 어차피 자신의 상대는 안 된다. 그러나 최심장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은 곤란했다. 누적된 충격으로 인해 혈맥이 상하게 될 것이고 그만큼 몸이 축나는 것이다. '괴상한 놈이군. 곤륜파의 제자라는 놈이 청성파의 무공을 쓰다니……!" 결국 옥좌거는 뒤쪽으로 물러섰다. 백발귀마 역시 피곤한 기색으로 옥좌거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마도 전력을 다해 최심장을 펼쳐냈기 때문일 것이다. "잡다하게 무공을 익혔구나. 하지만 재롱도 여기서 끝이다." 옥좌거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허리를 비스듬히 옆으로 틀며 양 손바닥을 마주했다. 일순 주위의 기류가 멋대로 요동을 쳤다. 마치 옥좌거의 주변으로 공기가 한 순간 빨려가는 듯했다. 잠시 후 그의 몸에서 거센 기운이 뿜어져 나오더니 손바닥 사이에 희뿌연 기체가 피어올랐다. 아니 피어오른 것이 아니라 뭉쳐 작은 구체(球體)를 형성했다. "오! 저것이……." "명유지력(冥幽之力)!" 누군가의 놀란 외침이 터지고 옥좌거의 양손이 빠르게 뻗어졌다. 그의 손바닥 사이에 있던 명유지력이 빛살처럼 빠르게 백발귀마를 향해 날아갔다. 쿠아아아아앙 귀청을 찢을 듯한 굉음이 울려 퍼지고 백발귀마의 신형이 하염없이 뒤로 날아갔다. '단숨에 죽일 생각은 없었지만…… 위험한 녀석이라 과하게 손을 써버렸군.' 뒤쪽으로 날아가 땅바닥을 뒹구는 백발귀마를 확인한 옥좌거는 입맛을 다시며 몸을 돌렸다. 일단 명유지력에 당한 이상 죽음은 정해진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몸을 완전히 돌린 후 중인들의 시선을 즐기려했다. 절정고수가 아니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장력(掌力)을 보여줬으니 이들은 오늘 큰 복(福)을 받은 것이다. 안계(眼界)를 넓힐 기회가 주어진 것이기에. 아마도 이곳에 모인 대부분은 실제로 명유지력과 같은 장력을 본 것이 처음이리라. 과연 중인들은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움직일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얼굴은 파랗게 질려 있었으며 입은 헤벌쭉 벌어져 있었다. "크흐흐흐흐흐흐!" 진력의 소모가 극심한 장력을 발출했기에 스스로도 피곤했으나 옥좌거는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의 위용과 무공을 자랑하기 위함이었다. "시, 신군……. 뒤쪽……." 곽준오가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손가락을 들어 옥좌거의 뒤쪽을 가리켰다. "……?" 옥좌거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뒤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그의 눈썹이 하늘을 향해 크게 휘었다. 백발귀마란 애송이가 몸을 일으켜 세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 어떻게 정면으로 명유지력을 맞고도 살아 있을 수 있지?' 백발귀마는 교차시켜 가슴에 모았던 양팔을 풀고 있었다. '설마…… 묵연수투를 낀 부분에 장력이 적중했었단 말인가? 묵연수투란게 그렇게 대단한 건가?' 옥좌거의 표정이 크게 일그러졌다. 그는 다시 몸을 돌려 성큼성큼 백발귀마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한편 선주혁은 정신이 쏙 빠지는 경험을 한 셈이었다. '젠장, 이게 장풍(掌風)이라는 건가? 드래곤볼의 에네르기파 같잖아? 그게 이렇게나 강력할 줄이야…….' 명유지력의 가공할 위력은 선주혁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장력이 팔에 닿는 순간 뼈가 으스러지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몸이 튕겨져 떠올랐을 때는 내장 전체가 뒤흔들린 듯 했다. 조금만 장력이 더 강했다면 심각한 내상을 입었을 수도 있었다. 괴물 같은 늙은이 오만 인상을 다 찌푸리고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봤다. 하지만 쉽사리 몸을 움직이긴 힘들었다. 아직까지 진기가 들끓고 있었던 것이다. 적당한 거리가 되자 명유신군이란 늙은이가 다시 요상한 구체를 만들어냈다. 아까보다 더 큰 구체였다. 선주혁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순간 다시금 명유지력이 선주혁을 강타했다. 쿠아아아아아앙 실 끊어진 연처럼 하염없이 날아 가버리는 선주혁.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옥좌거 역시 거친 숨을 골라야만 했다. 전심전력을 다했다는 의미였다. 살기어린 눈초리로 날아 땅을 구르는 백발귀마를 바라보는 그의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이번에야말로 살아남지 못하리라. 그 순간 옥좌거의 눈썹 끝이 다시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백발귀마의 두 팔이 땅을 밀어내고 있었다. 맥없는 움직이었지만 살아 있었다. 아니 그냥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몸을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입에서는 꾸역꾸역 피를 흘려냈다. 하지만 몸을 움직일 정도라면 목숨이 경각에 달한 중상(重傷)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이,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옥좌거는 달리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머리끝까지 치민 분노가 그의 손끝까지 떨리게끔 만들었다. 명유지력에 당하고도 두 번이나 일어서는 놈이 있다는 것은 한 번도 상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당장이라도 신형을 날려 녀석의 머리통을 날려버리려던 옥좌거가 갑자기 헛웃음을 터뜨렸다. 기가 막히다 못해 웃음이 나오려 하는 것이다. 백발귀마가 상반신을 비스듬히 틀었다. 양손바닥을 위아래로 향해 마주하게 했다. 자신이 명유지력을 사용하는 자세를 취한 것이다. "크하하하하하핫!" 결국 옥좌거는 웃음을 터뜨렸다. "살다 살다 별 미친놈을 다 보겠구나. 벽공장력(劈空掌力)을 사용한다는 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인 줄 아느냐? 크하하핫!" 진기를 모아 허공을 격하여 공격하는 것을 벽공장이라 한다. 소위 장풍이라고도 불리지만 그냥 바람과는 확연히 다르다. 응집된 경력이 폭발적인 파괴력을 만들어내는 것이니 단순히 손바닥에서 바람이 이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벽공장력을 사용할 때 내력 소모가 극심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진기를 형상화 시킬 수 있을 정도라면 심후하기 이를 데 없는 내공이 필요했다. 갓 약관을 넘긴 애송이가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옥좌거가 웃음을 그쳤다. 그의 눈에서는 다시금 소름끼치는 살광(殺光)이 넘실거렸다. 제 정신이 아니긴 해도 기분 나쁜 녀석이었다. 두 번에 걸쳐서 자신의 명유지력을 받아냈다. '이 놈을 때려죽이지 못한다면 내가 어찌 무림맹에서 고개를 들겠는가!' 정색을 한 옥좌거의 양 손 사이에서 다시금 명유지력이 생겨났다. 그리고 몸을 비틀어 벽공장력을 시도하는 백발귀마의 몸을 날려버리는 데는 수유의 시간도 필요치 않았다. 쿠아아아앙 힘없이 날아 가버리는 백발귀마. 옥좌거는 신형을 날렸다. 이어 다시금 명유지력을 끌어올려 백발귀마가 쓰러져 있는 곳을 향해 한 번 더 공격을 했다. 쿠아아아앙 엄청난 폭음과 함께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후투두두둑 튀어 오른 돌멩이와 모래가 땅바닥에 떨어지며 여름한철 소낙비 소리가 났다. 옥좌거는 창백해진 안색으로 깊게 패인 구덩이를 봤다. 삼 장여는 족히 되는 직경에 일장의 깊이는 되는 듯 했다. 그 안쪽에 걸레처럼 너덜너덜해진 흑의의 백발귀마가 쓰러져 있었다. '정말로 단단한 몸뚱이를 가졌군. 전신이 터져나갔어야 정상이거늘…….' 옥좌거는 백발귀마를 일견하고는 몸을 돌렸다. 적당히 자리를 잡고 조식을 취하기 위함이었다. 그에게 있어서도 연속적인 명유지력의 사용은 크나 큰 무리였던 것이다. 무림맹의 얼간이들은 넋이 빠진 표정이었다. 자신의 엄청난 신위(神威)에 감탄하는 것이리라. 그는 탈진직전의 상태였지만 일부러 신형을 날려 하늘로 몸을 띄웠다. 홍의장포가 펄럭이며 멋진 그림을 만들어냈고 옥좌거는 중인들의 머리를 뛰어 넘어서 내려섰다. 몇 번에 걸친 벽공장력을 사용하고도 자신은 아직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그의 짐작처럼 무림인들은 명유신군이라는 거물의 무공에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강하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왜 무림맹에서 저처럼 악명이 높은 자를 받아들인 것인지 이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저런 고수를 적으로 돌린다면 얼마나 많은 희생을 필요로 하겠는가. 그러면서도 마교의 엄청난 힘에 대해 절로 마음이 무거워졌다. 명유신군 정도의 고수가 마교의 힘이 두려워 무림맹에 의탁을 할 정도니 그 힘을 측량키 어려웠던 것이다. "수고하셨습니다. 신군 어르신." 백의검문주 곽준오가 양손을 마주잡았다. 그를 필두로 사천지부의 인사들이 저마다 앞을 다투어 옥좌거의 뛰어난 무공에 찬사를 바쳤다. '이것이 무림의 생리지. 크크큭!' 옥좌거가 내심 만족스러운 웃음을 터뜨렸다. 당분간 사천에 머무를 예정이었다. 그러니 사천지부에 있는 이 자들이 엄청난 자신의 무공을 확인하고 앞을 다퉈 눈에 들려는 것이다. 절정고수 하나와의 인연이 얼마나 큰 힘이 되어줄지 모두 잘 아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러고 보니 백발귀마란 애송이 녀석이 생각보다 강한 것이 외려 도움이 되었군. 내 진정한 실력을 보여줄 기회를 준 셈이니 말이야.' 옥좌거가 흡족해하는 그 순간 아까 백발귀마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던 애송이가 소리를 질렀다. 모두가 듣기에 충분한 크기로. "이, 일어났다. 아직 살아있어요! 살아있다고요." 명주운의 목소리에는 어쩐지 기뻐하는 감정이 실린 것만 같았다. 옥좌거의 인상이 벌레라도 씹은 듯 일그러졌다. 그의 신형이 팽이처럼 돌아갔다. 과연 그랬다. 제멋대로 흩날리는 백발 아래로 타오르는 두 눈을 드러낸 백발귀마는 건재한 모습이었다. 입으로는 끊임없이 붉디붉은 피를 게워내고 있었으나, 그와 같은 모습은 오히려 투지를 불태우는 백발귀마에 대한 인상을 강렬하게 만들고 있을 뿐이었다. “어떻게……?” 저런 괴물 같은 놈이 존재할 수 있는 건가라는 말은 삼켰다. 설마 금강불괴가 아니겠지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으나 자신에게 집중된 중인들의 시선과 그들의 귀를 의식했다. 옥좌거가 저도 모르게 중얼 거릴 때 백발귀마가 신형을 비틀었다. 그리고 양 손바닥을 마주해 또다시 장력을 생성하려는 듯한 자세를 잡았다. “네 놈을 죽이지 않으면 내 성을 간다.” 끓는 목소리를 내는 옥좌거였다. 여기서 백발귀마라는 애송이를 처리하지 못하면 어찌 정파에서 자신이 행세를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누적된 피로에 겨워하면서도 다시금 진력을 끌어 올려야만 했다. 한 편 선주혁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화려한 차림을 한 늙은이의 손속은 다시없을 만큼 매웠다. 내장은 온통 진탕되어 제자리를 잃은 듯 했고 닦아도, 닦아도 흐르는 피는 입가를 적셨다. 늙은이의 장풍은 피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섬광과도 같은 빠르기와 넓은 공격범위는 선주혁이 가진 신법의 위에 있었던 것이다. 결국 정면으로 맞서야만 한다는 것을 몸으로 먼저 느끼고 있었다. 마치 일부러 보여주겠다는 듯 흐름을 명확히 느끼게 해주는 늙은이의 진기운행을 배워야만 했다. 그래서 자신도 장풍을 날려야만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부족했다. 고작 몇 번을 보고 익힐 수 있는 명유지력이 아니었던 것이다. 늙은이가 성난 황소처럼 씩씩 거리며 다가오는 게 보였다. 그가 몸을 비틀었다. 선주혁은 양팔로 가슴을 보호하고 두 눈을 부릅떴다. 늙은이가 어떻게 장력을 사용하는 건지 똑똑히 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전에 비해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진기의 운용이 느껴졌다. 그도 지쳤으리라. 늙은이의 주변으로 한 순간 기운이 몰리는 듯했다. 전신의 진기가 단전으로 모여들었다가 폭발적인 속도로 양손에 집중되었다. 회색빛 구체가 생겨났다. 그리고 한 순간에 두 눈을 가득 채우는 섬광. 팔이 부러지는 것과 같은 통증. 내장을 진동시키는 충격. 공중으로 떠올랐다가 땅바닥을 구르는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억지로 양팔에 힘을 주어 땅을 밀었다. 가슴이 빠개지는 듯 아팠다. 그래도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다리가 풀렸다. 미세하게 떨려오는 게 느껴진다. 제멋대로 날뛰는 진기를 안정시키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두 눈을 부릅떴다. 늙은이가 괴성을 지르며 달려온다. 선주혁은 몰랐다. 옥좌거가 지르는 괴성에 담긴 뜻이 이제 제발 죽어달라는 것임을……. 다시금 옥좌거의 상반신이 비스듬히 틀어지고 섬광이 번쩍였다. 이전과 똑같은 과정이 반복되었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몸을 일으키는 선주혁의 다리는 눈에 띄게 풀려있었다. 이제는 타인이 보기에도 그가 다리를 떨고 있음이 확연히 느껴졌다. 진기가 제멋대로 들끓고 있었다. 통제 불능의 상태였으나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연속된 충격 탓인지 호흡을 이어가기가 곤란했기 때문이다. 가슴에서 무엇인가가 울컥하니 치밀어 올라왔다. 뱉어보니 검붉은 피였다. 아마도 응혈(凝血)이 튀어나온 것이리라. 통증은 여전했지만 호흡을 이어가기가 한결 편했다. 그제야 어느 정도 진기를 조절할 수 있었다. 선주혁은 피를 쏟아내는 입으로 웃는 표정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서서히 팔을 들어 손가락으로 옥좌거를 가리켰다. “늙은이, 이제 죽어라.” 자신감 넘치는 표정의 선주혁이 오른손이 끼었던 묵연수투를 벗었다. “이런 미친……!” 그것이 명유신군 옥좌거가 이승에서 한 마지막 말이었다. 머리가 터져나간 자에게는 침묵 이외의 선택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천지부 무림맹의 인사들은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일방적으로 백발귀마가 밀리고 있었다. 누가 봐도 승패는 자명했다. 한데 갑자기 손가락으로 사람을 가리키고 죽어라, 했더니 죽어버렸다. 그것도 명유신군과 같은 초절정 고수가. 그들에게 무슨 말이 떠오르겠는가? “사, 사술인가……?” 곽준오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대답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탄(彈)…….” 누군가 입을 벌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주목되었다. “……지신통(指神通)!” 그의 말이 끝나자 중인들은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탄지신통! 소림칠십이예(少林七十二藝) 중에서도 상위 열손가락 안에 꼽히는 절기가 아니던가. 이들 중 누구도 실제로 탄지신통을 본 적은 없지만 강호에 전설처럼 떠도는 탄지신통의 막강한 위력을 들었다. 손가락으로 십장 밖에서 바위를 뚫는다는 그 전설적인 신공(神功)을……. 설마 하는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부정하지도 못했다. 청성파의 최심장을 펼쳤으니, 소림사의 탄지신통을 펼치지 못하라는 법이 없지 않은가? 더구나 명유신군이 저항 한 번 못할 정도의 무공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 못하는 그들이었다. “어서…… 저자를 잡읍시다.” 곽준오가 문득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하지만 선뜻 앞으로 나서는 자는 없었다. 명유신군이 죽은 마당이었다. 백발귀마가 지금은 서 있기도 힘들어 보일 정도였지만 그가 또다시 무슨 절초를 쏟아낼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방금 전에도 저처럼 다 죽어가는 모습으로 손가락만을 내뻗어 명유신궁을 죽인 것이 아닌가? 그 때 백발귀마가 입을 열었다. “쫓아오면…… 죽는다.” 어찌 보면 말을 한다는 것이 힘에 겨워 보이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중인들의 귀에는 결연한 의지를 담아 한자, 한자를 씹어 뱉는 것처럼만 들렸다. “……!” 백발귀마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갈 지(之)자로 걸음을 휘적휘적 옮겼다. 누군가 툭 건드리면 쓰러질 것만 같은 위태로운 걸음이었다. 하지만 무림맹의 인물 중 누구도 감히 그의 뒤를 쫓지 못했다. 아예 그럴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이라면 다가가 검을 한 번 휘두르기만 해도 백발귀마를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가 보여준 마지막 한 수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손을 내밀고 죽어라, 라고 했던 그 순간이 각인 되었다. 그게 자신이 될 수도 있었다. 지친 백발귀마는 그 후 다른 사람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제일 먼저 나선 사람은 죽게 될 지도 모른다. 명유지력에 그렇게 당하고도 끈질기게 일어나던 백발귀마였다. 단 한 번에 죽이지 못한다면……. 그래서 그가 동귀어진이라도 하겠다고 나선다면……. 괜스레 나섰던 자의 죽음은 자명했다. 그것이 무림인들의 마음을 억눌렀다. 지금 나가면 꼭 자신만 죽게 되고 공은 다른 사람들이 가져갈 것만 같았다. 그게 억울했다. 결국 무림인들은 고개를 돌려 외면을 했다.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볼 뿐 아무도 나서지 않는 마당이다. 이 자리의 그 누구도 다른 곳에 가서 백발귀마가 저렇듯 힘겹게 운신해 빠져나간 것을 말하지 않으리라. 그것으로 충분했다. 명유신군을 죽인 자를 자신들이 상대치 못한 것으로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 하지만 백발귀마의 모습을 아직까지도 살피는 자가 있었다. 오직 한 명. 명주운만이 선주혁의 뒷모습을 끝까지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말아 쥔 주먹은 끊임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것은 분노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왜 이렇게 몸이 떨려오는지는 그도 정확히 몰랐다. ‘내, 내가…… 그 악당에게 감동하고 있는 건가? 내가?’ 명주운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리 없었다. 상대는 무림맹이 지목한 강호의 공적이다. 명유신군과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불쾌해하던 자신이었다. 한데 어떻게 그보다 더한 악적을 보고 감동을 하고, 이처럼 전율을 느낀단 말인가. 무림맹의 인사들과 명유신군을 향한 백발귀마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떠올랐다. ‘길을 막으면 죽는다.’ ‘니가 와라.’ ‘이제 죽어라.’ 나부끼는 백발 사이로 당당한 눈빛을 드러낸 그의 음성이 명주운의 귓가에 맴돌아 흩어지지 않았다. 마치 깊은 골짜기에서 울려 퍼지는 메아리마냥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실력이 있다 해도 수많은 무림인들 앞에서 그렇게 당당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가 보여준 모습은 한 사람의 영웅으로 꼽히기에 부족함이 없지 않았던가? 엄청나게 쏟아지는 명유신군의 공격을 온 몸으로 감당하면서 결코 굴하지 않는 투지를 보여줬다. 죽음과 직면해 조금도 비굴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단 한 수로 승패를 뒤집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비굴한 모습을 보였던 것은 오히려 자신이 평소 존경해 마지않던 무림맹의 인사들이었다. 그들은 명유신군의 모욕을 받아들였고, 외려 그가 실력을 드러내자 아부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 백발귀마의 엄청난 능력을 확인한 후에는 죽음이 두려워 그를 쫓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명주운은 저도 모르게 평소 자신이 그려오던 영웅상을 떠올렸다. 뛰어난 무공 실력. 그리고 누구에게도 굴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 백발귀마가 만약 무림공적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있지 않았다면 자신은 그를 어떻게 생각했을 것인가. 굳이 따져보자면 평소 자신이 그리던 영웅이라는 단어에 가까운 것은 백발귀마라고 볼 수 있었다. 명주운은 결국 그와 같은 결론을 내리고야 말았다. 그는 떨리는 손을 들어 스스로의 얼굴을 쳤다. 결코 생각해서는 안 될 것들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상대는 비록 자신과 비슷한 또래지만 사악한 마두였다. 만약 자신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 누군가에게 알려진다면 파문은 물론이거니와 죽음을 맞이해야할 지도 몰랐다. 짝 소리와 함께 맑은 정신이 들었다. 손의 떨림도 멎었다. 그의 시선이 백발귀마가 사라진 방향으로 향했다. 백발귀마의 모습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언제인지는 몰라도 신법을 전개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명주운은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의 두 눈에는 흰 머리카락을 나부끼며 꼿꼿이 걸음을 옮기는 백발귀마의 뒷모습이 선명히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무림공적이라는 거대한 오명에도 불구하고 당당한 기개를 한껏 담은 등을 내보이며 걸음을 옮기는 백발귀마의 모습이……. Vol 5. 변검공(變檢功) 내장이 조각조각이 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의 통증이었다.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후들거리는 다리는 한 걸음을 내딛기가 고역이었다. 정말이지 억지로 한 줌 진기를 끌어올려 암영풍을 전개했지만 그도 잠시 뿐이었다. 입에서 흘러나오는 피의 양은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만 갔고, 내상에서 비롯된 통증은 정신을 쏙 빼놓을 정도였다. 앞서 만났던 무림인들이 자신의 허풍에 지레 겁을 먹었을 뿐 아마 누구라도 나서서 한 번만 더 공격을 했다면 이미 죽은 목숨이었으리라. 어렵사리 걸음을 옮기면서 선주혁은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봤다. 공공문의 기보인 폭렬지환이었다. 선주혁이 명유신군의 머리를 날려버릴 수 있었던 것은 무림인들이 짐작한 탄지신통이 아니라 폭렬지환의 덕분이었다. 폭렬지환의 사용으로 인해 내상이 더욱 악화되긴 했지만 그래도 엄청난 강적을 이길 수 있었다. ‘이거…… 진짜 유니크 아이템급이군!’ 고통스러운 와중에서 선주혁은 폭렬지환이 자신에게 있는 것이 기쁘기만 했다. 오늘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폭렬지환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선주혁은 산길을 오르며 주변을 연신 두리번거렸다. 어딘가에 몸을 숨기고 상처를 치료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주혁은 곧 하나의 동굴을 발견했다. 반가운 마음이 와락 들었지만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행여 곰이라도 살고 있으면 지금의 자신으로서는 상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조심스레 굴의 근처에 접근했다. 땅바닥에서 돌맹이 하나를 들어 안으로 집어 던졌다. 동굴은 생각보다 깊지 않은 듯 했다. 바로 탁탁 소리가 나며 돌이 암벽에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그 외의 반응은 없었다. 아마도 임자 없는 빈 굴인 듯 했다. 선주혁은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채 두 번의 숨을 들이쉬기도 전에 구역질을 해 댔다. “우웨웨웨웩!” 지금은 빈 동굴이지만 이전에 짐승이 살던 곳이었나 보다. 무엇인가 역한 냄새가 그의 코를 찔렀고, 가뜩이나 내상으로 인해 좋지 않은 속을 뒤집어 놓은 것이다. 당장이라도 이곳을 나가고픈 생각이 들었다. 지독한 냄새 때문에 숨을 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젠장…… 원래 동물이 살던 동굴은 이런 건가?’ 가끔 무협지를 보면 동물이 살다 버린 동굴 안에서 남녀가 애정을 고백하고 사랑을 키우는 장면을 보곤 했던 기억이 났다. 직접 겪어보니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이 지독한 냄새 속에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사랑하네, 마네 할 수 있는 연인이 있으면 손에 장을 지지겠다고 생각하는 선주혁이었다. 서로의 얼굴을 보며 헛구역질을 해대는데 무슨 놈의 사랑타령 생각이 나겠는가? 그러나 선주혁은 동굴을 나서지 않기로 했다. 움직일 때마자 내장이 찢어지는 것과 같은 통증 때문이기도 했고, 후들거리는 다리로 더 이상 움직이는 것도 힘들었기 때문이다. 후각은 예민한 대신 마비도 빠르다. 선주혁은 가능한 숨을 가늘게 쉬어 구역질이 나는 냄새를 조금씩만 맡아가며 익숙해지려 노력했다. 일각이 넘도록 뒤집히는 속을 억지로 누르고 있어서야 간신히 숨을 쉴 정도가 되었다. 선주혁은 그제야 조식에 들어갔다. 빠른 요상만이 살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그였다. 2 동굴에 들어선지 삼일이 지나서야 선주혁은 조식을 통해 어느 정도의 요상을 끝낼 수 있었다. 아직까지 통증이 완전하게 치료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 없이 이곳에 머무를 수는 없었다. 언제 무림맹의 추적대가 자신을 쫓아올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는 몸을 움직일 수 있다는 판단이 들자마자 곧장 동굴을 나섰다. 일단 사천을 벗어나는 게 최우선 목표였다. 걸레처럼 너덜너덜해진 의복은 버렸다. 갈아입을 의복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산중에서 죽립을 구해 쓸 수는 없었다.누군가 자신의 머리색이라도 보면 단박에 신분이 드러날 터였다. “쳇! 여기는 염색약 같은 거 안파나? 이놈의 머리 색깔 때문에 불편한 걸…….” 연신 투덜대면서도 선주혁은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수십 개의 바늘이 뱃속을 찔러대는 듯했지만 엄살을 피울 때가 아니었다. 지금은 걸음을 옮기기도 힘든 상태. 무림맹은 둘째 치고 묵연수투를 노리는 삼류 무인이라도 감당하기 힘들었다. 일단은 부지런히 도망을 치는 것만이 그에게 있어서 최선이었던 것이다. 스스로도 깜짝 놀랄만한 회복력이니만큼 이동을 하는 와중에 치료가 될 거라 확신했다. 내상만 치료가 된다면 어지간한 고수가 와도 상대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폭렬지환의 위력을 재차 확인했기 때문이다. 사실 엄청난 파괴력이야 밀실을 빠져나올 때도 봤지만 절정고수를 상대로도 폭렬지환이 먹힐지는 미지수였다. 행여 피하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었기 때문이다. 아직 그가 폭렬지환을 사용할 수 있는 횟수는 하루 한번. 상대가 한번이라도 피하면 그 다음은 방법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훌륭했다. 에네르기파를 사용하는 고수에게도 먹혀들어갔던 것이다. 위기의 상황에서 잘만 사용한다면 구사일생의 한 수가 되어 줄 것이라 믿었다. 힘겹게, 힘겹게 걸음을 옮기는 선주혁. 어느 정도 걸음을 옮기는 게 수월해 질 때쯤 그는 엉성한 솜씨로 나뭇잎을 엮어 모자와 비슷한 모양을 만들어냈다. 급한 대로 머리 색깔부터 감추고 보자는 의도였다. 그렇게 걸음을 옮긴지 이틀째가 되었을 때였다. 선주혁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나무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얼마나 걸어야 이 지긋지긋한 산을 넘어갈 수 있을지는 몰랐다. 그저 걷고 또 걷다보면 산이 끝나고 중경에 접어들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산세가 험하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마에서 땀이 송골송골 맺혔을 때가 돼서야 그는 작은 바위에 앉아 숨을 돌렸다. 아직 내력을 운용할 수 없는 만큼 휴식은 필수였다. 아니면 제풀에 지쳐 쓰러질 판이었다. 그는 챙겨온 육포를 뜯었다. 딱딱하게 굳은 육포였지만 지금 이것저것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달주 부근에 도착하기 전에 이나마 미리 챙겨둔 게 다행일 뿐이었다. “앗! 할아버지, 사람이에요.” ‘이런 젠장!’ 내공을 운용할 수 없어 주변을 널리 살피지 못한 탓이었다. 하지만 크게 당황할 필요는 없어보였다. 들려온 목소리가 앳된 것이 어린 아이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고개를 돌리니 과연 어린 계집아이 하나와 노인 한명이 숲을 헤쳐 나오는 게 보였다. 잔뜩 주름진 얼굴의 노인은 선주혁을 보고는 곧바로 경계의 눈빛을 흘렸다. 날카로운 눈과 고집스러워 보이는 입매를 가진 노인이었다. 명유신군과 마주하기 전 선주혁은 산중에서 사냥을 하거나 약초를 캐 먹고사는 몇몇 사람들을 본 적이 있었다. 그들도 처음 자신을 봤을 때 모두 저런 눈빛을 보였다. 외진 곳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게 되면 누구나 경계하는 마음을 가지리라. 특히나 그것이 산 속이라면 더 했다. 사람들의 이목이 없는 만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것이기에. 아마 자신의 눈빛도 노인과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일단 자신을 쫓는 무림인이 아닌가부터 파악을 해야 했으므로. 선주혁은 엉성한 모자 아래로 드러난 입술에 미소를 지어줬다. 적의가 없음을, 그리고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무협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내용을 떠올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강호에서는 어린아이와 노인일수록 조심해야 한다는 내용은 어지간한 무협지에서는 한 번씩 나오는 말이었던 것이다. 꼬마 계집애는 잘 해봐야 열두세 살밖에는 안 되어 보였다. 이렇게 깊은 산중에 들어오기는 아직 어린나이. 선주혁은 행여 그럴까하면서도 경각심을 늦추지 않았다. “보아하니 이 근방에 사는 사람은 아닌 듯한데……, 산을 넘어가슈?” 노인이 먼저 말을 건네 왔다. 적당히 퉁명스러우면서도 적당히 거리를 둔 음성이었다. 아마도 자신이 미소를 건네지 않았다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지나쳐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흐음…… 령아(玲兒)야, 우리도 예서 잠시 쉬어갈까?” 노인은 나무그늘 아래에 앉으며 꼬마아이에게 말했다. 령아라 불린 꼬마는 아직 그다지 힘들지 않은지 노인의 옆에 가서 앉지 않았다. 선주혁은 계집아이가 자신에게 호기심을 느끼는 듯하자 육포를 하나 내밀었다. “먹을래?” 계집아이는 재빨리 할아버지를 바라봤다. 노인은 손바닥을 넓게 펼쳐 부채를 부치듯 흔들 뿐이었다. 그제야 계집아이는 선주혁의 손에서 육포를 받아들었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방긋 웃은 것이 꽤나 귀여워 선주혁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보아하니 상인(商人) 같지도 않은데…….” 손녀에게 친절을 베풀었기 때문일까? 노인은 선주혁에게 먼저 말을 걸어왔다. 선주혁은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곧 대답했다. “만날 사람이 있어서 산을 넘는 겁니다.” “흠……. 그렇구만. 말투를 보아하니 청해에서 온 듯한데……. 먼 길을 가는구려.” “아…… 네.” “뭐. 어차피 이 산을 넘어갈 거라면 함께 가시겠소? 혼자 산을 넘는 것처럼 적적한 일도 없지.” 노인이 선심을 쓴다는 듯 말했다. 역시나 손녀에게 호의를 보이지 않았다면 이런 제안 따위는 하지 않았을 거라는 표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제가 몸이 썩 튼튼하지 못해서요. 저 때문에 괜히 지체하시진 않을까 걱정 되네요.” “뭐……, 어차피 아이도 있고 하니까…….” 노인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할까요? 안 그래도 심심하던 차였는데…….” “와! 그럼 아저씨도 같이 가는 거예요?” 계집아이가 신이 난 표정으로 요란을 떨었다. 할아버지와 단 둘이 산을 넘는 것은 녀석에게도 지루한 일이었나 보다. “흠…… 아저씨 아닌데…….” 선주혁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꼬마계집아이라지만 아저씨 소리를 듣기에는 좀 일렀던 것이다. “훔…… 그럼 이름이 뭐에요?” “내 이름은 선…… 혁이란다.” “그럼 선대가라고 부를게요.” 꼬마아이는 초롱초롱한 두 눈을 빛내며 말했다. 작은 입술로 야무지게 말하는 것이 여간 총명해 보이는 게 아니었다. 그렇게 연(延)노인과 그의 손녀인 연령령(延玲玲)은 선주혁과 동행을 하게 되었다. 연 노인은 변검(變?)의 공연으로 생계를 유지한다고 했다. 변검이란 재빠른 손놀림으로 얼굴에 쓴 가면을 바꿔 쓰는 것을 말한다. 사천지방에서 유명한 천극(川劇)의 일부였으나 그 신묘함으로 인해 인기가 높아 연 노인처럼 변검을 익힌 사람들이 따로 공연을 해 생계를 유지하기도 한다고 했다. 선주혁은 예전에 무슨 영화의 예고편에서 잠깐 그것을 본 적이 있기에 호기심이 생겼다. 그저 손이 한번 스쳐 지나갔을 뿐인데 얼굴이 바뀌는 장면을 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쪽 세상에 넘어오기 전부터 손놀림에는 자신이 있던 선주혁이었으나 당시 본 화면은 특수효과처럼만 보였다. 너무나 순식간에 가면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과연 진짜로 그렇게 할 수 있는지 눈앞에서 확인하고픈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연 노인의 성격은 퉁명스러운 편이라 선뜻 보여 달라는 말을 하기가 어려웠다. 아쉬운 대로 연령령에게 너도 변검을 할 줄 아느냐고 물었으나 변검의 기술은 계집아이에게는 전수하지 않는다고 했다. ‘뭐…… 공연할 때 보면 되겠지.’ 산을 넘어 중경에 접어들면 연 노인이 공연을 할 것이다. 그 때 구경해도 늦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선주혁은 우선은 몸을 회복하는 데에만 주력하기로 했다. 연노인과 동행한지 이틀이 되는 날 연령령이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그런데 선대가. 왜 선대가는 그 이상하게 생긴 모자를 쓰고 있는 거예요? 그 모자가 좋아요?” 선주혁은 일순 당황했다. 재빨리 연노인의 표정을 살폈으나 그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다. 선주혁은 연령령에게 뭐라 핑계를 댈까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맑디맑은 눈으로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는 연령령에게 차마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꾸미고픈 마음이 들지 않았다. “사실은…… 내가 어렸을 때, 약을 잘못 먹었거든. 그래서 머리카락 색깔이 이상하게 변해버렸단다. 그래서 이렇게 모자로 머리를 가리는 거야.” “머리카락 색깔이 어떤데요? 한 번 보여주시면 안 돼요?” “응?” “보여주세요. 무슨 색깔인지…….” 선주혁은 잠시 망설이다가 어설픈 모자를 벗었다. “와아! 하야네. 할아버지, 선대가 좀 보세요. 머리카락이 할아버지보다도 더 하얘요.” 연 노인이 선주혁의 머리를 힐끗 봤다. 그 순간 선주혁은 적잖게 긴장을 했다. 곤륜이마, 그리고 백발귀마라는 별호가 강호를 진동시키고 있었다. 행여 연 노인이 그 소문을 들었다면 자신을 좋게 볼 리 없었다. 연령령과 수다를 떨며 산을 넘는 것을 즐겁게 여기는 선주혁으로는 이렇게 헤어지게 된다면 꽤나 서운할 것 같았다. 다행히 자신의 머리카락 색깔을 바라보는 연 노인의 표정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무림맹의 공적으로 지목된 마두를 봤다면 결코 저렇듯 태연한 표정을 지을 수 없으리라. 선주혁은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그 때 연 노인이 퉁명스럽게 한 마디를 던졌다. “염색하면 되잖나?” 선주혁은 귀가 번쩍 뜨였다. “방법을 아십니까?” “뭐…… 염색하는 게 무슨 대수라고…….” 연 노인은 괜히 말을 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귀찮은 일을 떠안게 생긴 것이다. “알면 제게 좀 가르쳐 주십시오.” 선주혁은 연 노인에게 바짝 다가가 말했다. 가무잡잡한 피부야 어쩔 수 없다손 쳐도 머리 색깔만 바꿀 수 있다면 무림맹의 추적을 피하기가 한결 수월할 듯 했다. “만약 염색하는 방법을 알려주시면 산을 넘을 때까지 어르신의 짐은 제가 들어드리겠습니다.” “됐네. 제 한 몸도 못 가눠 헥헥대는 꼴은 안 본 것도 아니고. 짐까지 걸머지면 대체 산은 언제 넘는단 말인가?” 선주혁은 머쓱한 표정으로 뒤통수만을 긁었다. 아직까지 완치되지 않은 내상으로 인해 비지땀을 흘리며 간신히 연 노인의 뒤를 쫓고 있는 게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천극은 사천에서 유행하는 경극의 일종이다. 연 노인은 여러 가지 분장법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염색도 그가 가지고 있는 지식 중의 하나였다. 연 노인은 대나무를 엮어 만든 커다란 상자와 같은 짐을 뒤적거리더니 몇 개의 그릇을 꺼냈다. 그리고는 종이로 밀봉된 조그만 항아리 같은 것에서 염료를 꺼내 물에 갰다. “이리 앉게. 시간이 좀 걸리니 염료를 바른 채 움직여 보세.” “네, 감사합니다.” 선주혁은 대뜸 연 노인의 앞에 앉았다. 염 노인은 붓을 들어 선주혁의 머리카락에 세심하게 염료를 발랐다. 연령령은 염색을 하는 것이 신기한지 선주혁의 옆에 앉아 턱을 괴고 열심히 구경을 했다. 3 선주혁의 머리를 염색하는 데에 무려 삼일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어찌된 일인지 염료를 바르고 충분한 시간이 지났음에도 좀처럼 머리 색깔이 달라지질 않았기 때문이다. 연 노인은 이럴 리가 없는 데……, 라는 말을 연발하며 나중에는 오기를 가지고 덤벼들었다. 결국 완벽하다 싶을 만큼 검은 색은 아니지만 진한 갈색이 감도는 검은색의 머리카락을 만들 수는 있었다. “후우! 내 살다 살다 자네처럼 염색이 안 되는 사람은 처음이구먼.” 연 노인은 그럴듯하게 검어진 선주혁의 머리카락 색을 보며 그제야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 있게 염색을 하면 된다고 해놓고 괜스레 허풍을 떤 것처럼 보일까봐 저어했던 것이다. “고생하셨습니다. 제 머리카락이 굉장히 억셌던가 보네요. 하하핫.” ‘흠……. 몸이 단단해지니까 머리카락도 튼튼해진 건가?’ 선주혁은 씁쓸하게 웃음을 머금었다. “이건 자네한테 줌세. 나중에 색이 빠지게 될 테니…… 그 때 필요할 게야.” 연 노인은 반쯤 남은 염료를 선주혁에게 건넸다. 선주혁은 재빨리 품에서 전낭을 꺼내들었다. “됐네. 풀만 있으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염료야. 나중에 자네한테도 염료를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지.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말이야.” 연 노인은 선주혁의 전낭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그래도…….” “자네는 내가 그리 야박하다거나 궁핍해 보이나? 이래 뵈도 내가…….” 미간을 찌푸린 연 노인의 말을 이어지지 않았다. 선주혁의 머리카락이 검어지면 꽃으로 만든 관을 만들어 주겠다며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연령령이 자지러지는 비명을 질렀기 때문이다. 선주혁과 연 노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비명소리가 들린 쪽으로 황급히 달리기 시작했다. 연령령의 주변에는 그녀의 품에 한 아름은 족히 담길 듯한 꽃이 흩어져 있었다. 애처로울 정도로 떨고 있는 그녀는 눈앞의 거대한 존재에 질려 연 노인과 선주혁이 왔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령아야!” 연 노인의 다급한 외침에 연령령이 고개를 돌렸다. 커다란 눈에는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얼굴을 타고 흐르기를 반복했다. 크아아아앙 연령영과 불과 일장도 안 되는 거리에는 곰 한 마리가 앞 다리를 들고 서 있었다. 끈끈한 타액을 흘리며 커다란 입을 벌리는 곰은 무엇이 그리 화가 나는지 괴이한 소리를 연신 흘려내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한 순간. 곰의 앞발이 하늘로 치솟았다가 내리꽂히기 시작했다. 곰의 앞발에 담겨진 힘은 성인의 두개골을 한 번에 으스러뜨릴 수 있을 정도. 놀란 연 노인의 알 수 없는 소리를 지를 때 선주혁이 몸을 날렸다. 퍼억 연령령을 끌어안고 나뒹구는 선주혁. 한쪽에 서 있는 나무에 부딪치고서야 멈출 수 있었다. 내상이 도졌는지 그의 입에서는 다시 피가 흘러나왔다. 선주혁은 재빨리 연령령을 살폈다. 크게 놀라 눈을 부릅뜨고 있는 연령령. 다행이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크아아아아앙 곰은 양 발을 땅에 딛고 선주혁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선주혁이 상상했던 것보다는 훨씬 빠른 속도였다. 곰처럼 둔하다는 말은 이치에 안맞는 거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 선주혁. “어르신!” 선주혁은 급한 대로 연령령을 연 노인에게 던졌다. 설령 연 노인이 제대로 받지 않는다 하더라도 곰한테 당하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연 노인은 손녀를 끌어안으려 뒤로 넘어졌다. 그리고 재빨리 고개를 들었다. 선혁이라는 젊은이가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하려는 것이다. 퍼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선혁이 날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연 노인은 그 광경에 고개를 돌려버렸다. 날카로운 곰의 발톱이 그의 몸을 헤집었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곰의 앞발에 두 번이나 맞았으니 살아있기를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연 노인은 재빨리 몸을 일으켜 손녀를 안아들었다. 선혁의 죽음이 안타깝기는 해도 일단 손녀부터 살리고 봐야할 판이었다. 크르르르릉 적개심 가득한 곰의 목울림 소리가 들렸다. 연 노인은 고개를 돌려야만 했다. 당장 자신과 손녀를 노리고 쫓아올 줄만 알았던 곰이 제 자리에서 으르렁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노안(老眼)이 부릅떠졌다. 놀랍게도 한쪽으로 튕겨졌던 선주혁이 다시 몸을 일으켜 세운 것이다. 가무잡잡한 피부가 창백해질 정도로 안색이 좋지 않았고, 입에서 많은 양을 피를 게워내고 있기는 했지만 죽지 않은 것만은 확실했다. 그의 눈은 곰을 보고 있지 않았다. 연 노인의 품에 안겨 오들오들 떨고 있는 연령령을 보고 있었다. “도, 도망치게! 도망 쳐!” 연 노인이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크르르릉 연 노인이 소리를 질렀기 때문일까? 곰이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선주혁이 땅바닥에서 주먹만 한 돌덩이를 들어 곰의 얼굴을 향해 집어 던졌다. 크아아아앙 얼굴에 돌멩이를 맞는 곰이 분노에 찬 포효를 했다. 그리고는 다시 선주혁을 향해 달려가 이번에는 날카로운 이빨로 선주혁의 어깨를 물었다. 고개를 이리저리 흔드는 곰. 연 노인은 재빨리 손녀의 눈을 가렸다. 살점이 뜯기고 피가 튀는 장면을 보여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선주혁은 맥없이 곰이 고개를 움직이는 방향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터억 어금니에 그렇게 힘을 줬음에도 살점이 뜯기지 않아선지 곰은 선주혁을 한쪽으로 던져버렸다.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어깨를 움켜쥔 채 움직이지도 못하는 선주혁. 곰은 그런 선주혁에게 다시 달려들어 이번에는 그의 머리를 물어버렸다. “흑!” 끔직한 광경에 연 노인은 헛바람을 들이켰다. 선주혁의 몸이 바람에 흩날리는 깃발처럼 나부끼기 시작했다. 그의 머리를 문 곰이 거세게 흔들어댔던 것이다. 한 참이나 그러길 반복하던 곰은 입을 벌려 선주혁을 떨어뜨렸다. 그렇게 잠시 선주혁을 보던 곰은 앞발로 선주혁을 툭 쳤다. 축 늘어진 선주혁은 움직이지 않았다. 곰은 주둥이를 내밀어 다시 선주혁의 팔을 씹어봤다. 뜻대로 되지 않는지 이번에는 허벅지를 물어뜯었다. 그렇게 이리저리 선주혁을 물던 곰은 낮게 울부짖은 다음 거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무리 물어뜯어도 소용이 없자 먹을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하고는 포기하고 가는 것일는지도 몰랐다. 곰은 고개를 돌려 연 노인과 연령령을 쳐다보긴 했지만 이내 관심을 끊고 가던 길을 재촉할 뿐이었다. 긴장된 마음으로 한참 동안이나 멍하니 서서 곰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던 연 노인이 화들짝 놀라 선주혁에게 달려갔다. 선주혁은 이미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연 노인은 재빨리 선혁이라는 젊은이의 코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살았어? 어떻게 이런 일이……?’ 호흡이 이어지고 있었다. 불규칙적이고 미약하긴 했지만 아직 살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곰의 이빨에 물린 머리도 멀쩡했다. 연 노인은 선혁이라는 젊은이가 살아있다는 사실에, 그리고 너무나도 멀쩡하다는 것에 놀라 한 동안 멍하니 서 있어야만 했다. “이제 좀 정신이 드나……?” 연 노인의 음성이었다. 몸을 움직여 보려 했으나 어깨, 가슴, 등, 머리까지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움직이지 말게. 곰에게 무작스러울 정도로 당했으니 말이야.” 연노인은 이전에 비해 한 결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깨어있으면 괴로울 테니 좀 더 자두는 게 좋을 걸세. 곰에게 머리를 물리고도 살아남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허허.” 뒷말은 혼잣말인 듯 했다. 선주혁은 멀리서 들려오는 것과 같은 연 노인의 목소리를 놓치며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번에 눈을 떴을 때는 선주혁은 몸을 일으켜 앉을 수 있었다. 곰의 강력한 앞발에 맞아 내상이 도진 것이 문제였을 뿐 강철과 같은 뼈와 피부는 크게 다친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 자네 몸은 무쇠로 만들어진 것 같구먼.” 연 노인이 불과 이틀 만에 선주혁이 몸을 일으켜 앉는 것을 보고 말했다. ‘하핫…… 제가 마징가 제트입니까?’ 선주혁은 실없는 농담이 떠올라 홀로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시체를 지워야 할 줄 알았거늘……. 어쨌든 고맙네. 자네 덕에 우리 령아가 살았어.” 연 노인은 주름진 손으로 선주혁의 양손을 꼬옥 잡으며 말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손녀를 불렀다. “령아야, 이리 와서 인사를 해야지.” 연령령은 손을 뒤로해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그리고 고개를 깊숙이 숙이며 인사를 했다. “선 대가,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연령령은 몸 뒤로 감췄던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갖은 꽃들이 얽혀있는 화관(花冠)이었다. 그것을 만들다가 곰을 만나 크게 놀랐을 것인데 선주혁을 위해 또다시 꽃을 따다가 화관을 만든 모양이었다. 선주혁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연령령이 내미는 화관을 받아들었다. 선령령은 커다란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선주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제야 선주혁은 그녀가 자신이 화관을 쓰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화관을 머리에 썼다. “와아! 예쁘다. 선 대가, 너무 예뻐요.” 연령령은 작은 손바닥을 마주치며 좋아했다. “령아야, 고마워.” 선주혁은 진심으로 감사의 표시를 했고, 그와 같은 광경을 연 노인은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5 “이 산에는 곰과 같은 맹수가 잘 나타나지 않는다네. 산을 넘어 다닌 지 십 년이 넘었건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지.” 선주혁이 의식을 잃고 있는 동안 연 노인은 동굴을 찾아냈다. 동굴에 그냥 들어와 코를 움켜쥐고 웩웩거리던 선주혁과는 달리 연 노인은 우선 쑥을 태워 냄새를 옅게 만들었다. 거기에 향까지 피워 올렸으니 짐승이 사는 동안 남긴 고약한 냄새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의식을 차린 선주혁이 지독한 냄새에 인상을 찌푸리지 않았던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그래서 안심을 하고 넘나들던 산이건만……, 이제는 령아와 둘이서 산을 넘는 것은 꿈도 꾸지 말아야겠구먼.” 연 노인은 동굴 안에 피운 모닥불을 가는 나뭇가지로 뒤적이며 말했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타 탁 탁 마른 나뭇가지가 불에 타며 비틀어지는 소리를 냈다. “처음 자네 머리카락을 봤을 때…… 누군가가 생각이 나더군.” “……!” “백발…… 어쩌고 하는……, 칼을 든 무림인들이 흉흉한 표정을 지으며 그 자를 찾는다는 소문이 무성했지.” “제가 무림인들이 찾는 악인이라고 생각하셨으면 왜 도망가지 않으셨어요?” “허허헛. 생각해 보게. 무림인들이 그 난리를 칠 정도의 인물이라면 보통 사람이 아니겠지. 그런 자가 나나 령아를 죽이겠다고 나선다면 부산을 떨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설령 자네가 그 악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해도 나로서는 태연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네.” 연 노인의 말에 선주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과연 나이는 허투루 먹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연륜이 아니었다면 그처럼 태연한 모습을 보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어쩌면 경극을 통해 다져진 연기력일 수도 있었다. “그러다가 령아를 바라보는 자네의 눈을 봤다네. 그건 정말로 아이를 예뻐하지 않으면 보일 수 없는 눈빛이었지.” 선주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곤히 잠들어 있는 연령령의 얼굴을 봤다. 새록새록 숨을 쉬며 잠든 연령령의 모습은 천사처럼 귀엽기만 했다. “그래, 그런 눈빛이었어. 적어도 난 자네가 우리 령아를 해치지 않을 거라 확신할 수는 있었다네.” 연 노인의 말에 선주혁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잠시 시간을 보낸 다음 입을 열었다. “어르신 사실 제가 무림인들이…….” 선주혁의 말은 계속될 수 없었다. 연 노인이 손을 들어 말을 막았기 때문이다. “자네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상관없네. 내게 있어서 자네는 령아를 구해주고, 또 나를 구해준 생명의 은인일 뿐이야. 그 외에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겠는가? 남들이 자네를 뭐라 하건 그건 그 사람들의 사정일세. 적어도 령아와 나는 자네를 평생토록 은인으로 기억할 게야.” “어르신……!” “후훗. 설령 자네가 천하에서 가장 나쁜 사람이라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그저 영웅일세. 자네는 몸을 던져 령아를 구하지 않았는가? 무공을 익혀서 그런 몸을 갖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봤을 때는 자네도 위험했다네. 결국 자신의 생명을 던져 령아를 구해낸 거지. 그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네.” 선주혁은 묵묵히 연 노인의 말을 들을 뿐이었다. 사실 영웅 행세를 하기 위해 몸을 던진 것은 아니었다. 만약 곰 앞에 놓인 것이 연령령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어떻게 행동했을 지는 자신도 모른다. 그저 귀엽고 예쁜 연령령이 곰의 앞발에 처참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볼 수 없었을 뿐이었다. “내 어찌 자네한테 은혜를 갚아야 할지를 모르겠네. 혹여 이 늙은이에게 바라는 것이 있으면 말해보게. 평생 자네 종노릇을 하라면 할 테니 말일세.” “무슨 말씀을……. 전 그저 령아가 귀엽고 사랑스러웠을 뿐입니다. 저런 동생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여겼으니까요.” “흠……, 그래. 정말 밝고 착한 아이지. 저 아이가 아니었으면 이 늙은이도 폐인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거야.” 연 노인은 아련한 눈빛으로 연령령을 바라보며 말했다. 원래 연 노인은 사천지방에서 유명한 경극 배우였다고 했다. 연기도 뛰어나고 분장도 잘했다. 특히나 변검은 천부적인 자질을 지녔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그의 공연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밀려들어오고, 어딜 가나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자 연 노인은 자만에 빠졌다. 주색(酒色)에 빠져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 부작용은 즉각적으로 드러났다. 공연 중에 실수를 하기도 하고, 아예 약속된 공연에 출연하지 않기도 했다. 그래도 연 노인은 여전히 인기 배우였고, 그 사실을 즐겼다. 아내를 얻고 자식을 나은 후에도 그와 같은 생활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연 노인은 문득 깨달았다. 이제 더 이상 자신은 인기 있는 경극 배우가 아니라는 것을. 나이 들고 술에 쪄든 그를 받아주는 경극단은 없었다. 젊은 시절 화려했던 날을 생각했기에 더욱 술을 찾게 되었다. 그러던 중 아들내외가 불의의 사고로 죽게 되었다. 오래전 아내를 잃은 연 노인에게 손녀가 맡겨진 것이다. 연 노인은 정신을 차려야 했다. 자신이야 그렇게 술로 세월을 보내다 죽으면 될 일이지만 강보(襁褓)에 싸인 손녀는 그래서는 안 됐다. 그는 술을 끊었다. 오래 전의 기억을 더듬어 변검을 연습했다. 술에 적은 손이 말을 듣지 않았지만 수천 번을 반복하는 고련 끝에 사람들에게 내보일 정도가 되었다. “젊은 시절 일보삼변(一步三變)의 경지를 엿보던 실력이었다네. 하지만 지금은 한 걸음에 한 번 바꾸기도 쉽지 않지. 여보게. 성공이란 안주함과 동시에 흔적을 감추는 것이라네. 손을 내밀어 잡으려 노력하는 자에게만 보이는 것이지.” 선주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참! 그러고 보니 어르신께 부탁드릴 게 있어요.” “뭔가? 자네의 부탁이라면 이 늙은이가 뭔들 못하겠는가?” “변검! 그걸 제게도 보여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늘 한 번 보고 싶었거든요.” 연 노인은 의외라는 표정으로 선주혁의 얼굴을 봤다. 그리고 선주혁이 농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그가 환하게 웃었다. “변검? 허허허허헛! 보여주지, 보여주고말고. 내 자네만을 위해 최고의 공연을 해 줌세.” 연 노인은 공연 준비를 했다. 마치 의식을 치르는 것과 같이 시종일관 엄숙한 자세와 동작이었다. 그리고 선주혁의 앞에 선 공연이 시작되었다. 변검이란 얇은 천으로 만든 가면을 수십 겹으로 쓰고 그 가면을 바꾸는 것이다. 손이 한번 움직이고 소매 자락이 스쳐 지나가면 눈 깜짝할 사이에 가면이 바뀌는 것이다. 연 노인의 공연을 보며 선주혁은 진실로 감탄했다. 무공을 익힌 그에게도 연 노인의 손동작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언제 어떻게 했는지도 모를 사이에 원숭이 가면이 드러났다가 어느새 사천왕의 얼굴로 바뀌었다. 무림인들의 못지않은 속도로 팔을 움직이는 것은 선명히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교묘한 손가락의 움직임은 그저 안력이 뛰어난 것만으로는 구분이 안 되는 종류의 것이었다. 무려 스물다섯 번의 가면이 바뀌고서야 연 노인의 공연은 끝이었다. 선주혁은 공연이 끝나고 한참 후에야 문득 정신을 차린 다음 박수를 쳤다. 연 노인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정말 오랜 만에 한 사람을 위한 공연을 해 보는군. 정말 오랜 만이야…….” 공연을 마친 연 노인은 흐뭇한 표정으로 연신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마도 오래 전, 그가 젊었던 시절의 어느 때를 회고하는 것이리라. 선주혁은 어쩌면 그의 아내를 위해 연 노인이 공연을 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르신. 혹시 내공을 익힌 적이 있으십니까?” 선주혁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응? 내공?” “네. 어르신께서 가면을 바꾸실 때 진기의 흐름이 느껴지던데요.” “원래 경극을 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무술(武術)을 익혀야만 한다네.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서 토납법도 익히곤 하지. 하지만 무림인들과는 사뭇 다르지. 그저 정신을 집중하고 호흡을 잘 이용하는 수준이랄까……?” 선주혁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흠……, 정말 죄송하지만 손동작을 몇 번만 더 보여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손동작? 변검공 말인가?” “아, 그걸 변검공이라고 하나요? 네. 가면을 바꾸지 않으셔도 되니까 손동작만 좀 보여주십시오.” “허헛, 그러지. 원래 변검공은 후계자가 아니면 그 누구에게도 알려줄 수 없지만 자네가 원한다면 변검공을 전해줄 수도 있다네.” 연 노인은 선주혁의 앞에서 몇 번 가면을 바꿔 쓰는 손 모양을 취했다. “아뇨. 제게 보여주기 위해서 서서히 하실 필요 없습니다. 아까처럼 빨리요.” 연 노인은 대체 이 청년이 무엇 때문에 이런 것을 요구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워낙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을 바라보는 지라 연유를 묻지 않고 최선을 다해 변검공을 펼쳤다. “흠…….” 연 노인이 몇 번에 걸쳐서 변검의 시범을 보이자 선주혁은 턱을 괴고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런 선주혁을 보며 연 노인은 미소를 지었다. 변검은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마술이나 다름없다. 눈 한번 깜짝일 시간에 가면을 바꿔 쓰는 손놀림이란 몇 번 자세히 본다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Vol 6. 북두폭렬장(北斗爆裂掌) 선주혁과 연 노인, 그리고 령령은 동굴에서 나흘을 보내고서야 움직일 수 있었다. 이미 내상을 가지고 있던 선주혁이었기에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로도 연 노인이 경악하기에는 충분했다. 입에서 피를 사발로 쏟아내던 사람이 나흘 만에 벌떡 일어났으니 사람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산길을 걸으며 선주혁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간혹 살짝살짝 손을 움직이기도 했지만 워낙 작은 동작이라 무엇을 하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때로는 하늘을, 때로는 땅을 보며 정신없이 뭔가를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간혹 연령령이 말을 걸때만 환한 미소와 함께 대답을 하는 게 다였다. 처음에는 너무 큰 충격을 받은 탓에 정신이 이상해진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으나 연령령과 대화할 때는 멀쩡한 지라 연 노인은 안심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하루를 더 보내고 나자 선주혁은 길을 걸으며 좀 더 크게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연 노인은 그제야 선주혁이 자신이 공연했던 변검공을 흉내 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허허헛!” 연 노인은 그저 웃기만 할 뿐이었다. 변검공을 익히기가 얼마나 힘든지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기 때문이다. 몇 번에 걸쳐 공연한 것을 봤다고 따라할 수 있는 거라면 어찌 비밀로 감춰 대대로 내려오는 비법이 될 수 있겠는가. 저러다 도저히 안 되면 자신에게 물어올 것이라 생각했다. 손녀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니 그 때에 가서 성심껏 비법을 전해주리라 생각하며 발걸음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연 노인의 생각과는 달리 선주혁은 변검공 자체를 익히려는 게 아니었다. 처음 연 노인이 변검 공연을 했을 때 선주혁은 연 노인에게서 진기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미약하긴 했지만 코앞에서 움직이는 진기의 흐름을 놓칠 선주혁이 아니었다. 아마도 경극에 필요한 무술과 토납법을 익히며 미약하게나마 내력을 쌓을 수 있었고, 변검을 공연할 때 호흡 조절을 통해 무의식중에 진기를 운용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연 노인에게 부탁을 해 재차 변검공의 손놀림을 보면서 그는 진기의 움직임을 확연히 파악할 수 있었다. 단순한 동작의 반복이었기에 그것을 파악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가 연 노인의 손놀림을 주목한 이유는 간단했다. 무림인에 비해 손색이 없는 빠른 움직임. 미약하기 이를 데 없는 진기만을 가지고 어떻게 저런 움직임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를 파악하고자 한 것이다. 계속 해 연 노인을 살피던 선주혁은 그의 손놀림이 자신이 알고 있는 어떤 것과 매우 흡사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경신술이었다. 공공문의 암영풍이나 곤륜파의 추운신법(追雲身法)을 관통하는 무엇인가가 분명히 연 노인의 손놀림에 있었다. 선주혁은 거기에서 영감을 받아 연구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경공 역시 최소한의 진기를 사용해 가장 빠르게 신형을 움직일 수 있어야만 한다. 경신법의 요체는 교묘한 진기의 운용으로 용천혈을 통해 땅을 밀어내는 것. 즉, 한 번에 얼마나 많은 거리를 이동할 수 있는가에 따라 그 속도가 달려있다. 하지만 단지 그것만 가지고는 경신술이라 할 수 없었다. 길을 달리다 보면 각양각색의 지형지물(地形地物)을 마주할 수밖에 없고 그에 따라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기 위해서는 빠른 발놀림이 필수였다. 멀리멀리 뛰어 달리는 것이 아니라 짧은 보폭으로 몸을 움직여야할 경우가 많다는 말이었다. 그럴 때 발놀림의 쾌속함은 그 어떤 수공(手功)에 못지않았다. 선주혁의 착안점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왜 그런 쾌속한 수법을 이용해 공격에 사용하지 않는가? 왜 꼭 발로만 그런 진기의 흐름을 사용해야만 하는 것일까? 아마도 경신술이라는 개념이 확고히 머리에 자리 잡아 다른 곳에 응용할 생각을 못했을 것이라 결론지었다. 최소의 진기만을 운용해 엄청난 속도를 낼 수 있다는 점은 엄청난 가능성이었다. 경신술과 변검공이 펼쳐질 때의 묘리를 잘 접목시킨다면 적은 진기로도 얼마든지 빠르게 손을 움직일 수 있을 것이고, 더욱 나아가서는 진기의 양에 따라 더 빠른 행동을 취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결국 선주혁은 경공술을 손으로 펼쳐내는 것과 같은 방법을 구상하는 중이었다. 이미 무진진인의 기묘한 장법과 암영수를 이용해 엄청나게 빠른 손놀림을 전개할 수 있는 그였다. 결국 그가 시도코자 하는 바는 경신술을 펼칠 때 발을 번갈아 움직여야 하는 것처럼 연속적으로 극쾌(極快)의 속도를 내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자신은 또 하나의 강력한 무기를 갖게 되리라 의심치 않으면서……. 어느덧 선주혁과 연 노인, 그리고 연령령은 몇 개의 산봉우리를 넘어 중경 땅에 접어들었다. 선주혁의 내상은 거의 완치수준에 이르고 있었다. 그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을 정도로 빠른 회복력이었다. 마지막 산을 넘어 내리막길에 이르렀을 때 연 노인은 선주혁을 불렀다. “이리 앉아 보게.” 말을 하고 연 노인은 자신이 먼저 나무그늘 아래에 앉았다. 선주혁은 연 노인이 무엇을 하고픈 건지 몰랐으나 잠자코 시키는 대로 했다. “사람이 사람에게 인상을 전달하는 방법은 참으로 오묘한 이치를 담고 있네.” 연 노인은 등에 매고 온 대나무 상자에서 또다시 뭔가를 꺼내기 시작했다. 어떤 것은 물에 풀기도 했고 어떤 것은 손으로 매만지기도 했다. 정성스럽기 이를 데 없는 손놀림이었다. “실상 어떤 사람을 기억할 때 그 사람의 눈, 코, 입, 눈썹, 귀 모양 등을 다하는 법은 없다네. 전체적인 인상을 보고, 그 다음은 특징적인 모양새를 기억하는 게지. 가령 눈이 날카로웠다거나, 아니면 코가 크다거나…… 이런 식으로 말이야.” 연 노인의 말에 선주혁은 자신도 그런가하고 잠시 생각을 해 봤다. “그래서 그 사람의 특징적인 부분이 약간만 달라지면 사람 자체가 달라져 보인다네. 그게 분장의 기본이지. 역용(易容)이라 할 수까지야 없겠지만 약간의 분장만으로 그 사람의 인상을 바꾸는 것은 어렵지 않다네.” 연 노인은 아교와 밀가루 같은 것을 잘 섞어서 선주혁의 얼굴에 붙이기 시작했다. “조금 따가울지도 모르네.” 연 노인의 말과는 달리 선주혁은 따갑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이래 뵈도 내가 천극을 할 당시 분장에 있어서 대가 소리를 듣기도 했다네. 그놈의 술 때문에 손이 떨리기 전까지만 해도 몰이야.” 양쪽 광대뼈에 세심한 손놀림으로 뭔가를 붙인 연 노인은 선주혁이 몸을 돌리게 했다. “조금 아파도 참게.” 연 노인은 갈색을 띠는 선주혁의 머리카락을 위쪽으로 강하게 잡아 당겼다. 머리카락이 당기고 얼굴이 당기는 느낌이 썩 좋지 않았지만 선주혁은 묵묵히 참았다. 연 노인이 자신을 위해 이런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장의 기본은 인간의 얼굴을 얼마나 잘 파악하고 있냐에 따라 달려있지. 자네와 아주 가까운 사람이 아니라면 얼핏 봐서는 못 알아보게 하는 것 정도는 이 늙은이도 할 수 있다네.” 연 노인은 말을 하면서 강하게 잡아당긴 선주혁의 머리카락을 단단히 묶었다. 가능하면 머리카락을 놓치지 않기 위해, 그리고 강하게 당겨 올린 힘이 풀리지 않게 하기 위해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그러다보니 머리를 묶는데 일각도 넘는 시간이 걸렸다. 연 노인은 다시 앞으로 돌아와 선주혁의 얼굴을 보더니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붓을 들어 선주혁의 얼굴에 무엇인가를 칠하기 시작했다. 특히 광대뼈에 무엇인가를 붙인 곳에는 세심한 주의를 해서 칠을 했다. 그렇게 또 일각여가 지났다. 연 노인은 몸 자체를 이리저리 움직여 다양한 각도에서 선주혁을 보더니 몇 번의 붓질을 더했다. 다시 살피고, 또 붓질을 하고. 그런 행동을 몇 번에 걸쳐 반복하고 난 후에야 연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연 노인은 선주혁에게 손잡이가 달린 명경(明鏡)을 내밀었다. 거울 속의 자신 모습을 본 선주혁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낯선 사내가 자신을 보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허허헛, 그럴듯하지?” “하! 신기하군요.” “우와! 선 대가, 정말 딴 사람 같아요.” 연령령도 신기한 듯 선주혁의 얼굴을 이리저리 보며 소리를 질렀다. 선주혁은 원래 순박하고 겁이 많아 보이는 커다란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거울 속에 비춰진 모습은 그렇지 않았다. 눈 꼬리가 약간 치켜 올라간 것이 순박하다기보다는 날카로운 느낌을 주고 있었다. 물론 아주 큰 차이는 아니었다. 머리카락을 당겨 올려 눈매가 약간 변한 것뿐이었다. 그런데도 전체적인 인상이 확연히 달라보였다. 아교를 섞어 만든 것으로 광대뼈를 부풀린 것도 큰 효과가 있었다. 작아진 눈매에 광대뼈가 돌출되어 보이자 완전 다른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사실은 선주혁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는 연 노인의 섬세한 솜씨가 훨씬 더 많이 가미되어 있는 분장이었다. 눈가를 날카롭게 하기 위해 약간의 그림자를 만들어 더욱 강조를 했고, 콧날도 강조했다. 특히 광대뼈 부위는 더욱 두드러져 보일 수 있도록 밝고 어두움을 줘서 전체적으로 강퍅한 인상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 색의 변화가 매우 섬세해 마치 자연스럽게 그림자가 지는 것 같아 선주혁이 알아채지 못했을 뿐이었다. “사실 머리모양만 바뀌어도 사람의 인상은 확연히 달라지지. 거기에 염색을 하고, 눈매를 바꾸고, 얼굴형을 바꾸면 어진간한 눈썰미로는 쉽게 알아보기 힘들어지는 걸세.” ‘하! 이래서 여자를 볼 때 화장빨에 속지 말라는 말이 나왔군. 이렇게까지 달라 보일 줄이야…….’ 선주혁은 저쪽 세상에 있을 때 진하고 두꺼웠던 여자들을 생각하며 어이없어 했다. 그쪽은 색깔까지 넣어 칠을 해대니 맨 얼굴과는 완전 다른 얼굴을 보이고 다니는 것과 다름없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완전 사기군. 저쪽 세상에서 내가 본 여자들의 얼굴은 모두 사기였어!’ 연 노인은 선주혁의 얼굴을 보며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오랜만에 자신의 솜씨를 한껏 발휘했기 때문이리라. 선주혁은 거울을 보며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흠……. 너무 자주 만지지는 말게. 아교부분과 피부는 색이 달라 분으로 칠해 놓을 걸세. 자꾸 만지거나 물에 닿으면 얼룩이 생길 수도 있다네.” “네, 어르신.” “오래는 못가지만 그래도 산을 내려가 며칠이 지날 때까지는 괜찮을 걸세.” “그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됩니다.” 선주혁은 미소를 지었다. 3 선주혁 일행은 완벽하게 산을 내려와 관도로 접어들었다. 이제는 완쾌된 선주혁은 때로는 연령령을 업기도 하고, 연 노인의 짐을 대신 들어주기도 하며 활기찬 걸음을 옮겼다. 사실 관도로 이동하는 것은 피하고 싶었으나 어쩐지 연 노인의 분장 실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 같아 모험을 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선주혁은 결국 영창(榮昌)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한 무리의 무림인들과 만나고야 말았다. 관도 양쪽을 지키는 무림인은 얼추 백여 명. 하나 같이 기도가 출중해 보이는 무림인들이었다. “긴장할 필요 없네. 고작해야 용모파기 정도로는 자네를 알아볼 수 없을 테니.” 연 노인이 선주혁의 귀에 대고 나직하게 말했다. 과연 연 노인의 말대로 무림인들은 지나가는 사람들과 손에 든 종이를 대조해보는 중이었다. ‘뭐…… 시치미를 떼는 거야 내 장기니까.’ 소매치기를 한 다음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으면 내가 지갑을 훔쳤소, 라고 소리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태연하고 아무 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짓는 것 역시 뛰어난 소매치기가 가져야할 소양이었다. 무림인들은 지나가는 사람들 하나하나를 세심히 살폈고, 급기야 석주혁과 연 노인의 차례가 되었다. 코 아래 양쪽과 턱에 하나씩 수염이 난 중년 무인이 연 노인을 보고 물었다. “무림맹의 공적이 중경으로 도주했다고 하오. 악적을 잡으려 하니 협조를 해 주시오.” “그러십쇼.” 연 노인은 공손하게 말했다. 중년 무인의 날카로운 눈빛은 선주혁을 세밀하게 살폈다. 손에 든 용모파기와 비교를 하는 것이다. 우선 머리카락 색깔이 달랐고 눈매가 현저히 차이가 났다. 백발귀마라는 악적은 괴이한 용모긴 해도 순진한 얼굴을 하고 사람을 속인다는 소문이었다. 하지만 청년의 얼굴은 순박하다기보다는 날카로운 쪽에 가까웠다. “영창에는 무슨 용무로 가는 거요?” 연 노인은 대답을 하지 않고 재빨리 얼굴에 가면을 썼다. 그리고 몇 번의 손짓에 의해 그의 얼굴이 바뀌었다. “변검이군.” 중년 무인은 변검 공연을 많이 봐 왔는지 별로 신기해하지 않았다. “그럼 조심해 가도록 하시오.” “수고하십시오. 그 공적이라는 자는 꼭 잡으시길 바라오.” 연 노인은 넉살 좋게 말을 건넨 다음 발걸음을 옮겼다. 선주혁과 연령령이 그 뒤를 쫓았다. “다음!” 중년 무인이 다음 행인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선주혁은 한참을 걸은 후에야 입을 열었다. “하! 꽤나 긴장했습니다.” “왜? 들킬까봐?” 연 노인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저야 들키면 도망가면 그 뿐이죠. 하지만 어르신과 령아는 큰 곤욕을 치르게 될 것입니다.” “어차피 산에서 곰에게 죽었을 목숨일세. 은인과 함께 있다가 봉변을 치른다고 그게 뭐 대수겠나?” “령아를 생각하셔야죠.” “흠…….” 선주혁은 영아를 안아 올리며 연 노인에게 말을 계속했다. “아무래도 이쯤에서 헤어지는 게 좋겠어요.” “앗! 선 대가, 왜요?” 연령령이 불쑥 끼어들었다. “하핫, 령아야. 지금은 내가 어딜 급히 가야 한단다. 나중에 령아를 보러 꼭 다시 올게.” “히잉! 령아는 선 대가랑 같이 있고 싶단 말이에요. 할아버지, 우리도 선 대가랑 같이 가요.” 연령령은 커다란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훌쩍였다. 그러자 선주혁이 연령령의 귀에 대고 뭔가를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연령령은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점차 눈물을 그쳤다. “서두를 필요 없다니까.” 연 노인이 선주혁을 만류했다. “아뇨. 아무래도 제 마음이 불편해서 안되겠습니다. 서둘러야할 필요도 있고요.” 자신의 분장술에 확신을 가진 연 노인이었다. 선주혁의 옆에 있으면 계속해서 분장 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고, 관리만 잘 해준다면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선주혁이 길을 재촉해야 한다는 데에는 더 이상 말릴 도리가 없었다. “그럼 용무를 본 다음 사천에 꼭 한 번 들르게. 령아가 자넬 몹시 좋아하는 것 알지 않나.” “하하핫, 그렇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연 노인은 품에서 은자를 꺼내 선주혁의 손에 쥐어줬다. 한 냥은 족히 되어 보이는 은자였다. 지금의 선주혁에게 있어서는 아무것도 아닌 액수였으나 연 노인에게는 엄청나게 큰 금액일 터였다. 선주혁은 사양하지 않고 은자를 받아들었다. “감사합니다. 다음에 꼭 찾아뵙겠습니다.” “그러게. 꼭 와야 하네.” “령아야, 할아버지 말씀 잘 듣고 있어야 해. 몇 밤만 자면 다시 올 테니까.” “정말로? 몇 밤만 자면 와요?” “그럼.” 선주혁은 연령령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관도니만큼 경신술을 전개할 수는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미련을 버리기 위해 그저 달릴 뿐이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연 노인과 령령을 두고 헤어질 수 없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선주혁이 한참을 달려 사라질 때까지 연 노인과 연령령은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 연 노인은 아직까지 선주혁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손녀의 손을 잡았다. “어쩌다 저런 젊은이가 악당 취급을 받는 건지. 세상 참…….” 혀를 끌끌 차던 연 노인이 손녀에게 말했다. “자. 령아야, 우리도 이제 가야지.” 할아버지의 말에 연령령이 발걸음을 옮기자 툭하는 소리와 함께 뭐가 떨어졌다. 연령령이 재빨리 떨어진 물건을 주워들었다. “엥? 이게 뭐냐?” “선 대가가 준 선물이에요. 다시 돌아온다는 약속으로 준 거예요.” 아마도 아까 전 손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던 얘기일 것이다. 연령령은 손을 내밀어 할아버지에게 선물을 내밀었다. 연 노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재빨리 령아의 손에 있는 물건을 잡은 다음 품속에 넣었다. 주변을 살핀 연 노인은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한 후에야 손녀에게 작게 말했다. “령아야, 이건 할아버지가 맡아두고 있으마.” “네.” 자신에게 준 선물을 할아버지가 대신 가지고 있겠다는 데도 연령령은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연 노인은 그런 손녀를 안았다. 그리고 노안을 돌려 다시 한 번 선주혁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봤다. ‘묘안석이라니……. 이 사람아. 목숨을 구해주고 이런 큰 선물을 주고 가면 어쩌나? 내 이건 자네가 돌아올 때까지 맡아 둠세.’ 영창은 제법 번화한 도시였다. 사천을 오가는 길 중 하나여서 상인들이 휴식을 취하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영창은 상인들보다는 각종 병장기를 든 무림인들이 더 많은 듯 했다. 무림맹의 공적 추살령은 전 중원에 내려진 것이었고, 곤륜이마 중 백발귀마가 중경으로 향했다는 소문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무림공적을 죽여 명성을 날리겠다는 의욕으로, 어떤 이는 소유주가 사라진 묵연수투를 탐내서, 어떤 이는 악적을 죽여야 한다는 정의감에 중경으로 몰려든 것이다. 움직이는 곳곳에 보이는 게 무림인인지라 선주혁은 아무래도 불편함을 느꼈다. 아직까지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래도 불안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정보가 생명이라며?' 선주혁은 자신이 산속에 틀어박혀 있는 동안 무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기 위해 뉴스 프로그램, 아니 객잔을 찾았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고 간만에 편안한 침상에서 잠을 좀 자려는 것이다. 객잔 안 역시 무림인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사천과는 분위기가 영 달랐다. 사천의 무림인들은 체격이 좋고 건강해도 얼굴에서 그다지 흉악함이 흐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곳 객잔 안의 무림인들은 전체적으로 인상이 좋지 않았다. '중경에 이렇다 할 문파가 없어서 그런가?' 선주혁은 탁자에 앉아 음식을 주문하며 생각했다. 여지없이 무림인들의 이야기는 곤륜이마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하! 완전히 떴군. 이 정도면 무림 최고의 유명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겠는 걸?' 선주혁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소를 머금었다. 무림공적으로 유명해진 셈이니 과연 좋아해야할지 슬퍼해야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 때 선주혁은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내용의 이야기를 들었다. "속이다 후련 하다고." 주먹코를 가진 한 사내가 취기로 인해 벌개 진 얼굴로 언성을 높였다. "목소리 낮춰. 중경에도 무림맹도가 잔뜩 깔려 있다고." 체구가 작고 이빨이 툭 튀어나온 사내가 재빨리 말했다. "언제부터 이 중경 바닥에서 할 말도 못하고 살았냐? 솔직히 중경 무림을 우습게보던 사천 놈들이잖아. 특히 떵떵거리는 무림맹은 더하지. 그런 녀석들이 제 앞마당에서 곤륜이마를 놓쳤으니 그게 무슨 망신이냐고. 푸헤헤헤헷!" 주먹코 사내는 외려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발음이 흐릿한 것이 꽤나 취했음이 분명했다. "거 참 말 한 번 시원하게 잘 했수다." 더벅머리에 어깨가 유독 넓은 한 중년인이 다른 탁자에서 주먹코의 말을 받았다. "사실 곤륜이마란 놈들이 백가장을 몰살시킨 것은 지나치지만 무림맹 녀석들에게 개망신을 준 건 속 시원한 일이지. 안 그래?" 더벅머리는 옆 자리에 앉은 독두(禿頭: 대머리)에게 물었다. "그럼. 지난 번 사천에 잠시 들렀을 때 보니까 그쪽은 죄다 정파 놈들 판이더만. 우리 같은 놈들은 숨도 못 쉰다니까." 독두의 사내 역시 더벅머리의 편을 들었다. "그 동안 무림이 너무 잠잠했지. 천마맹이건 사파연합이건 소 닭 보듯 경원시하기만 했지 최근 들어 화끈한 일이 없었잖아. 솔직히 서로 눈치 보며 슬슬 피하는 게 무림인이 할 짓이냐고? 마음에 안 드는 놈 있으면 그냥…… 팍!" 더벅머리가 손을 곧게 세워 칼처럼 휘둘렀다. "이게 영웅이고, 호걸이 아니겠어?" 한 번 불이 붙었기 때문일까? 객잔 내부는 그간 무림맹에 쌓였던 불만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대부분 정도문파의 인물들이 아닌데다가 특정한 소속이 없어 소외받던 낭인들인 듯 할 말도 많은 듯 했다. "사실…… 내가 여기 온 건 곤륜이마가 대체 어떤 사람인지 얼굴이라도 보려고 했다니까. 개인적으로 만나면 응원이라도 해 주고 싶더군." 아까까지만 해도 놈이라 부르더니 분위기 탓인지 한결 순화된 호칭으로 바뀌었다. "백발귀마의 무공이 그렇게 대단하다면서요?" "그럼요. 명유신군을 손가락 하나로 죽였다던 걸요." "명유신군을 손가락 하나로? 허허헛! 그게 말이 됩니까?" "탄지신통이었다네요. 탄지신통!" "소림사의 탄지신통 말이오?" "그렇다오. 손가락으로 명유신군의 머리를 가리키며 죽어라, 그러니까 머리가 터져 죽더랍디다." "우와! 정말 대단하군요." 객잔의 일층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분위기가 한참 달아올라 저마다 열을 내며 언성을 높이는지라 나중에는 벌들이 웅웅대는 소리처럼 들렸다. 옆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커서 말을 하는 사람은 더욱 언성을 높여야했고, 그게 누적되다 보니 급기야는 소리를 지르지 않으면 옆 사람의 이야기를 알아듣기도 힘들었다. 결국 무림인이 아닌 사람들은 이상하게 과열된 분위기에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이건…… 완전 혼선이군.' 선주혁은 라디오 주파수 혼선을 생각하고 고개를 저으면서도 미소를 지었다. 어쩐지 이쪽 중경에서는 자신과 사형을 영웅으로 여기는 듯했기 때문이다. '확 내가 백발귀마라고 밝혀버려?' 순간적으로 치기어린 생각까지 들기까지 했다. 아쉬운 건 자신이 모르는 소식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혹시나 사형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을까 기대했건만 온통 자신이 명유신군을 죽인 사실만 떠들고 있었다. "사실 내 친구 중 하나가 무림맹에 있어서 들은 이야기인데……." 누군가의 목소리에 한 순간 객잔 안이 조용해졌다. 그리고 살기어린 시선이 말을 꺼낸 자에게 쏟아졌다. 사실 술기운에 목소리를 높여 무림맹을 성토했다지만 강호의 거대세력을 모욕하는 것은 크나큰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 자칫 이 일로 인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객잔의 인원 전원을 일깨운 것이다. 말을 꺼낸 자는 부리부리한 눈과 큼직큼직한 이목구비를 가져 대범해 보였지만 수십 명의 무림인들이 쏟아내는 살기에는 위축되지 않을 수 없었나 보다. 그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황급히 뒷말을 이었다. 물론 옆자리에 앉은 일행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모든 사람의 귀가 쏠려 있음을 감안해 목청을 돋우었다. "백, 백발귀마가 청성파의 최심장과 소림사의 탄지신통을 사용해 명유신군을 죽였다더군. 청성파나 소림사나 무림맹의 주축인 구파일방이 아닌가 말일세. 그, 그러니까 자신들의 무공으로 자신들이 물을 먹은 셈이니 그 얼마나 통쾌한 일이냐고." 부리부리한 눈의 사내는 말을 끝내고 재빨리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살폈다. 말이 끝났음에도 조용한 객잔의 분위기가 그를 억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푸하핫! 그거 정말 멋지구려. 구파일방의 무공으로 무림맹을 엿 먹이다!" "그렇군! 정말 멋져!" "백발귀마를 위해 건배!" "건배!" 한 순간 객잔은 이전의 분위기로 돌아갔다. 아니 사람들은 앞서보다 더 큰 목소리로, 그리고 더 노골적으로 무림맹을 성토하고 백발귀마를 추켜세웠다. 선주혁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이층의 방으로 향했다. '떴다! 난 완전히 뜬 거야. 푸헤헤헤헤헷!' 선주혁은 사형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는 아쉬움조차 잠시 잊고 속으로 웃음을 터뜨리며 계단을 올랐다. 비록 세수를 하지 못했지만 간만에 목욕을 할 수 있었기에 선주혁은 기분이 날아갈 듯 했다. 그는 상쾌한 기분으로 조식을 한 번 마친 후에 자신의 무공에 대해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현재 선주혁에게 있어서 모든 무공의 근간이 되는 심법은 흡성대법이었다. 순천운성의 경지에 올라 진기의 성격과 운행을 파악하면 어떤 무공이면 펼쳐낼 수 있으니 가히 만족하기에 충분했다. 그 외에는 실로 잡다하다고 말할 만큼 많은 무공을 익혔다. 곤륜파의 무공은 기본이거니와 진기의 운행을 파악해 배운 무공이 꽤 되었던 것이다. 개중에는 이름조차 제대로 모르는 거나 자신이 만들어내 이름이 없는 것도 있었다. "훔…… 그럴 듯한 이름부터 지어야 하는데……? 어쩐지 이름이 없는 초식은 이상하잖아?" 우선 생각해보는 것은 혈응조였다. 중경쌍흉에게서 도둑질하다시피 배운 무공이었는데 선주혁은 그 정확한 이름을 모르고 있었다. "조법, 조법이라……." 선주혁은 미간을 찌푸렸다. 한 번도 이런 쪽으로는 고민을 해 본 적이 없는 그였다. "천상천하제일조법……. 젠장, 유치하잖아!" 미간을 더욱 찌푸리는 선주혁. 그간 읽었던 무협지에서 그럴듯한 이름이 떠오르는 게 없나 싶어 애써 기억을 해봤지만 대충 훑어본 글 속의 초식 이름이 떠오를 리가 없었다. 더구나 조법을 주 무공으로 사용하는 주인공은 거의 없다. 주인공은 늘 도검이나 장법, 혹은 권법을 주로 사용하기 마련이었다. 읽을 때조차 주인공이 사용하는 무공 외에는 관심이 없거늘 지금에 와서 악역들이나 조연이 사용하는 초식의 이름이 기억날 리 만무했다. "젠장, 이래서 책은 차근차근 제대로 읽으라는 말을 하는 거군. 끙!" 흔히 무협지의 절기에는 뒤쪽에 무슨 무슨 신공이 붙거나, 혹은 앞에 거창하기 이를 데 없는 말들을 갖다 붙인다. 천지(天地), 건곤(乾坤), 무극(無極), 음양(陰陽), 혼원(混元), 무적(無敵) 등등……. 되도 않는 말을 그럴듯하게만 들릴 것 같으면 아무거나 갖다 쓴다. 누군가 앞에서 써먹은 초식을 또 쓰면 안 되는데다가 적게 쓰면 약해보여서인지 어지간한 무공 이름은 일곱 글자나 여덟 글자까지 늘어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다보니 책을 덮고 나서 초식의 이름이 기억나기 더욱 힘들었다. "젠장, 나는 그딴 식으로 이름을 지을 수는 없지." 책을 읽을 때 실컷 욕을 해 놓고 자신도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하지만 초식이름 하나를 짓는 게 그다지 쉽지만은 않았다. "하! 이거 생각보다 어렵네." 골치가 다 지끈 거릴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글 좀 봤다고 엉터리 작가들이라고 욕을 퍼부운 게 약간은 미안했다. 무공 이름 하나 짓는 게 이렇게 어려운데 그 긴 글을 쓰는 게 쉽지만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뭐…… 그래도 그 인간들은 전문가잖아, 전문가. 그걸로 밥 벌어 먹고 사니까 나랑은 다른 거지. 쳇!" 괜스레 한번 투덜거려 자신이 했던 말들을 합리화시켜 버렸다. 그리고 다시 시작해 보는 고민. 미간을 찌푸리고 골똘히 생각을 하던 선주혁이 버럭 화를 냈다. "젠장. 돼지고기 얼굴보고 먹냐? 이름 멋지다고 무공이 강해지는 것도 아니잖아!" 선주혁은 결국 멋진 무공명에 대한 집착을 버렸다. 그리고 선택한 이름은 귀영조(鬼影爪)였다. 영 어색하고 촌스러워보였지만 선주혁의 한계였다. 그나마 암영수를 염두에 두고 이 정도의 이름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 고민에 들어갔다. 아직 구상하는 중일뿐이지만 연 노인의 공연을 보며 영감을 받아 만들고자 하는 무공의 이름을 정하려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무슨 무슨 장이 낫겠지?" 자신이 만들고자 하는 무공이 전개되었을 때를 상상해 봤다. 자꾸만 예전에 본 만화생각이 났다. 브루스 리를 닮은 캐릭터가 요상한 소리를 내며 번개처럼 주먹을 뻗는 만화였다. '그게 북두(北斗)의 권(拳)이었나? 북두칠성권(北斗七星拳)? 북두성권(北斗星拳)? 북두칠권(北斗七拳)?' 선주혁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구상하는 장법 역시 한 번에 일곱 번 가량은 족히 뻗어낼 수 있을 것 같았기에 자꾸만 그 만화가 연상이 되는 것이다. 만화에서도 북두칠성(北斗七星) 모양으로 일곱 번의 주먹질을 해댔던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손가락으로 턱을 긁으며 고민하던 선주혁은 귀영조보다 훨씬 빠른 시간 내에 이름을 정할 수 있었다. 멋져야 한다는 집착을 버렸기 때문이다. 그가 정한 이름은 북두폭렬장(北斗爆裂掌)이었다. 만화를 보고 억지로 짜 맞췄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지만 이번에도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선주혁에게는 이름을 짓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흡족하지는 않아도 일단 이름을 짓는데 성공한 선주혁은 북두폭렬장에 대해 더 깊이 파고들었다. 변검과 경신술의 진기 운용법을 이용해 연속적으로 공격을 뻗어내는 것은 거의 감을 잡았다. 무진진인의 장법과 암영수를 익힌 경험이 있기에 합일점을 찾는 것은 더욱 빨랐다. 내상이 치료되면서 꾸준히 연습을 해 온 결과 대체로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문제는 변검도 경신술도 공격을 위한 동작이 아니었기에 결정적인 파괴력을 내는 방법을 포함하지 않고 있다는 데 있었다. 선주혁이 원하는 것은 최심장의 위력이었다. 번개처럼 빠른 연속 공격에 최심장이 가지고 있는 파괴력을 낼 수만 있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가 되리라는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훔…… 마지막에 폭발적인 파괴력을 내기 위해서는 운기법에 급격한 변화를 줘야한다는 말인데……." 골치가 아픈 부분은 거기에 있었다. 변검과 경신술의 진기 운행을 쫓아 빠르게 손을 뻗은 이후 급격하게 진기의 흐름을 바꿔 최심장을 전개하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던 것이다. 최소한의 진기를 이용하다가 갑작스럽게 폭발적인 힘을 내는 방식의 전환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나 급격한 진기의 유통을 버틸 수 있을까?' 결국 선주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리로 해결한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가볍게 호흡을 고르며 손바닥을 번갈아 내밀었다. 푸르륵 흐릿한 손의 잔상이 남으며 소맷자락이 날리는 소리만 들렸다. 너무나 빠른 속도로 손이 오가는지라 그가 몇 번에 걸쳐 손을 내밀었는지 눈으로 확인하기가 곤란할 정도였다. 세 번. 현재는 무진진인의 장법과 암영수를 배합한 초식의 속도를 연달아 세 번까지는 전개할 수 있었다. 이나마 할 수 있는 것도 큰 발전이었다. 처음에는 최소한의 진기로 속도를 내는 것조차 힘들었던 것이다. 소매치기 기술을 연습할 때의 오기를 되살려 선주혁은 이를 악물고 연습을 했다. 틈이 날 때마다 손을 뻗기를 반복해 왔고 지금의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점차 익숙해질수록 더 많은 횟수를 뻗어낼 수 있으리라. 다시 한 번 북두폭렬장을 전개해 보는 선주혁. 이전보다 훨씬 느린 속도였다. 그리고 또 한 번. 서서히 속도를 줄여가며 최심장으로 전환할 포인트를 찾고자 했다. 그리고 어느 한순간 연달아 세 번에 걸쳐 압축된 공기가 터져 나오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크으……." 선주혁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양팔에 찌릿찌릿한 통증이 왔기 때문이다. 진기를 유통하는 방식을 급격히 전환하는 것이 무리라는 것은 예상대로였다. 통증은 생각보다 컸다. 조금만 더 빠르게 북두폭렬장을 전개하며 최심장의 운기법을 사용했다면 일시 간 팔을 못 쓰게 될 정도였다. 만약 선주혁의 신체가 특별하지 않았다면 한 순간 양팔의 경락이 터져나갈 정도로 위험한 방법이었다. 선주혁은 북두폭렬장을 전개하는 속도를 조금 늦추고 다시 한 번 시도를 했다. 펑 펑 펑 이번에는 세 번의 소리가 명확히 구분되어 들렸다. 각 일 장마다의 간격이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통증은 훨씬 덜했다. "쳇! 이래서야 그냥 최심장을 펼치는 것과 다름없잖아." 아직까지 목숨을 건 실전 경험이 부족하다 할 수 있는 선주혁이었다. 미세한 속도의 차이가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와 같은 무지가 그로 하여금 오히려 북두폭렬장을 더욱 빠르고 강하게 만들고자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오랜만에 침상에 누워 푹 쉬어보고자 했던 생각은 새로운 무공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집념에 의해 잊혀진지 오래였다. 그는 양손을 번갈아 내밀며 밤을 지새워가고 있었다. Vol 7. 소제목 미정 "크흐흐흐, 혹시 내가 천재가 아닐까? 어쩌면 내 재능을 여태껏 내가 잘 모르고 있었을 지도 몰라!" 선주혁은 자화자찬에 입이 벌어졌다. 스스로의 생각에 기가 막힌 도주방법을 떠올린 것이다. 사실 머리색깔이 바뀌었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안전할 수 없다는 것은 선주혁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똑똑한 인간들이 잔뜩 모인 무림맹이고, 쉽사리 걸려들지 않는 이유에 대해 조금만 생각해보면 역용이나 변장에 대해 생각해낼 수 있을 것이다. 구파일방의 저력이란 엄청난 것이어서 생각 한 번 제대로 먹고 추적하기 시작해온다면 죽지는 않을 자신이 있다 쳐도 어지간히 골치 아플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 걱정 중에 하나의 방문을 본 것이다. 처음에는 왁자지껄 사람들이 모여 있어 구경해본 것인데, 사해표국(四海?局)의 중경지부에서 쟁자수(爭子手)를 구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순간 번쩍이는 아이디어가 떠오른 것이다. 사해표국은 이쪽 세상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거대 표국이었다. 그 표국의 쟁자수로 취직(?)을 해서 표물(?物)과 함께 이동을 한다면 무리맹의 포위망에서 손쉽게 벗어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선주혁은 망설이지 않고 결정을 내렸고 표국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자신의 수완이라면 절강 쪽으로 향하는 표행(?行)에 끼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 생각한 것이다. 사해표국 중경지부의 앞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체구가 좋고 건강해 보이는 것이 힘깨나 쓰는 사람인 듯 했다. 유명한 표국이니 만큼 표행에서 안전할뿐더러 보수가 좋아 많은 사람들이 지원을 하는 것이다. '흠…… 생각보다 경쟁률이 치열한 걸? 뭐, 쟁자수야 힘만 잘 쓰면 되는 거 아니겠어?' 내공을 이용해 힘을 좀 쓰는 모습을 보여주면 쟁자수로 채용되는 것은 그다지 힘든 일이 아니라 생각하고 바로 지원을 했다. 쟁자수 자체가 그다지 요직이 아니어선지 출신과 이름만 적으면 되는 간단한 절차로 지원이 끝났다. 사문이 있는 경우는 사문을 적으라 했지만 선주혁은 공백으로 비워뒀다. 이름을 적고나서 한 시진 정도를 보내자 남색 옷을 입은 몇 사람이 나와 사람들을 안내했다. 표국 안쪽의 넓은 뜰이었다. 남색 옷을 입은 자들 중 근엄하게 생긴 중년인이 사람들을 향했다. "사해표국 중경지부의 책임자인 용대명(庸大明)이오." 용대명이 자신을 소개하자 여러 사람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주로 그가 중경에서 가장 유명한 표두(?頭)며 무공이 매우 뛰어나다는 내용이었다. "최근 강호의 정세가 어지러운 만큼 표물의 안전을 위해 쟁자수를 긴급 채용하기로 했소. 모두가 열심히 시험에 응해 사해표국의 한 가족으로 지낼 수 있었으면 하오." '응? 표물의 안전을 위하는데 왜 쟁자수가 필요해? 쟁자수는 짐꾼 아냐?' 선주혁은 갑자기 혼란을 겪었다. 용대명의 연설이 끝나자 표사로 보이는 자들이 시험을 위한 장소로 안내했다. 표국의 연무장이었는데 이런저런 것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선주혁은 옆에 있는 젊은 사내의 소매를 잡아 당겼다. 눈썹이 짙고 각진 얼굴이 사내답게 생긴 청년이었는데 어쩐지 표국의 짐꾼 노릇을 하기에는 당당해 보이는 체구와 생김새였다. "잠깐 말 좀 물읍시다. 아니, 쟁자수…… 그러니까 짐꾼을 뽑는데 저런 시험이 왜 필요한 거요?' 선주혁은 턱으로 연무장을 가리키며 물었다. "짐꾼?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여기는 표국의 쟁자수를 뽑는 중이오." 청년은 선주혁을 보며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는 선주혁이 그간 읽었던 무협소설에서 얻은 잘못된 정보 때문에 오는 혼란이었다. 보통의 경우 무협소설에서는 쟁자수가 말을 끌거나 짐을 옮기는 잡부로 나온다. 하나 실제로 쟁자수란 표물을 지키는 호위무사를 가리키는 말이다. 쟁자수를 이끄는 자가 표사, 그 표사들의 우두머리를 표두라 한다. 작은 표국에서는 쟁자수가 표물을 나르기도 하고 말을 끌기도 하지만 큰 표국의 쟁자수는 엄연히 표물을 호위하는 무사인 것이다. 즉, 큰 표국에서는 짐꾼은 따로 고용을 한다는 말이었다. '젠장! 엉터리 글쟁이 놈들 때문에 또 헛갈렸잖아. 뭐…… 쟁자수건 짐꾼이건 일단 들어가고 봐야지.' 선주혁은 뭐가 되었건 큰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사해표국의 쟁자수라면 일일이 무림맹의 검문은 받지 않아도 될 터였고, 그것이 목적이었으므로. "사해표국의 쟁자수를 뽑는 심사는 까다롭소. 짐꾼을 뽑는 걸로 착각하고 왔다면 지금이라도 돌아가는 게 좋을 거요." 각진 얼굴의 청년이 선주혁을 위해 충고했다. "아하핫, 이래봬도 힘깨나 쓰니 한 번 해보죠, 뭐." 청년은 선주혁에게 뭐라 말을 더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호리호리한 체형이 얼핏 봐서는 힘을 쓸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하나 치켜 올라간 눈매와 햇볕에 그을린 피부를 보아 녹록해 보이는 인상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 앞 사람부터 나오시오. 저 앞에 놓은 바위를 들면 첫 시험은 통과요." 표사 한 명이 연무장 한쪽에 놓인 바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의 말에 여기저기서 웅성이는 소리가 들렸다. 실제로 돌을 들어본 사람은 그 무게에 대해서 잘 안다. 보기에는 가뿐해 보여도 막상 들어보면 생각보다 엄청나게 힘이 드는 게 돌인 것이다. 시험용으로 사용되는 돌은 양팔로 감아야 할 만큼이나 컸다. "거……. 너무 한 거 아니요? 대체 쟁자수를 뽑는 거요, 아니면 표사를 고용하는 거요?" 누군가 볼멘소리를 냈다. 그 소리를 들은 표사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 자신이 바위 쪽으로 갔다. 그리고는 발끝을 바위와 땅 사이로 밀어 넣은 다음 기합소리를 냈다. "합!" 표사의 기합성과 함께 큼직한 바위 덩어리가 붕 떠올랐다. 그리고는 양팔로 바위를 잡았다가 위로 던졌고, 떨어지는 바위를 가볍게 받았다가 땅에 내려놨다. 볼멘소리를 냈던 자는 고개를 숙였다. 표사가 되려면 최소한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기 때문이다. 이후로는 불평을 하는 자는 없었다. 그저 사해표국은 쟁자수가 되는 것조차 어렵다는 소문을 확인하고 그쳤을 뿐이었다. 첫 시험에서 절반이나 탈락했다. 바위를 허리 위까지 들어 올려야 통과하는 시험이 생각보다 어려웠던 것이다. 선주혁은 물론 가볍게 시험을 통과할 수 있었다. 그가 지닌 내력을 따지면 동년배 중에서는 견줄 사람이 없을 정도니 바위를 드는 것 정도는 별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각진 얼굴의 청년은 선주혁이 너무나 쉽게 바위를 드는 것을 보고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별다른 말은 없었다. 이후 시험이라는 것은 별게 아니었다. 사실 선주혁은 이런 유의 시험이라는 것이 너무나 익숙했다. 자신이 직접 겪어본 적은 없었으나 허구한 날 무협지에서 나오던 내용이었던 것이다. 무협지에서 뻑 하면 나오는 것이 무림대회다. 문파를 개파 해도 무림대회, 무림에 위기가 닥쳐도 무림대회, 경사가 있어도 무림대회, 하다못해 신랑감을 구하기 위한 비무초친(比武招親)까지……. 하여튼 아무 때나 이야기 거리 떨어지면 무림대회였다. 무림대회를 하면서 다치거나 죽어나가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그럴 듯한 설정은 거의 없다. 그런 무림대회의 예선이라는 것이 늘 바위를 들거나 나무말뚝 사이를 건너 뛰어다니는 등이다. 그렇기에 선주혁은 이런 시험이 낯설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익숙한 듯 시험을 치루고 나자 자신을 비롯한 통과자는 스무 명 가량이었다. 통과자들은 대부분 감격스럽고 기쁜 표정이었다. "허! 형장도 통과했구려. 축하하오." 선주혁을 향해 환한 미소와 함께 말을 걸어오는 사내. 각진 얼굴의 청년이었다. "아, 간신히 뭐……. 형장도 축하하오." "이제 한솥밥을 먹을 사이니 인사나 합시다. 난 서영욱(徐永旭)이라고 하오." 서영욱이 손을 내밀며 자신을 소개했다. "선혁이오." 선주혁도 스스럼없이 손을 내밀었다. 남자답고 시원시원한 성격의 서영욱에게 호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역시 되는 놈은 된다니까!' 늘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해오던 선주혁은 어느새 자신의 운이 매우 좋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사해표국에 입사(?)한지 일주일 만에 표행에 나서게 됐고, 목적지는 호남성(湖南省)이었다. 일단 절강성 인근으로 가는 방향이니 선주혁으로서는 원하는 목적을 제대로 달성한 것이다. 표국에서 지내는 며칠 간 분장을 다 지워버린 선주혁. 서영욱이 계속해서 사람 인상이 바뀌었다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을 무마시키느라 고생한 것을 제외하고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쉽게 도주로를 확보한 셈이었다. 중경은 대체로 산악지형이랄 수 있었다. 사해표국의 깃발을 높이 세우고 가는 이상 별다른 걱정은 없었지만 신입 쟁자수들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중경의 산적은 하나의 명물이랄 만큼 많고도 많았기 때문이다. "푸헐……, 이보게. 뭘 그렇게 눈에 힘을 주고 다니나? 그렇게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으면 제풀에 쓰러지는 법일세." 큼직한 눈을 부릅뜨고 사위를 살피는데 여념이 없는 서영욱을 보고 공(孔) 노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표국은 아직까지 일가를 이루지 못한 표사와 쟁자수들을 위해 숙소를 제공한다. 선주혁과 서영욱, 그리고 공 노인은 한 방을 같이 쓰게 되었고 이번 표행에도 함께 나선 것이다. 공 노인은 사해표국 중경지부의 최고참이자 최고 연령자였다. 올해로 쉰여덟 살인 공 노인은 표행에서 쬔 햇볕 탓인지 선주혁 못지않게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지고 있었고, 얼굴 가득 주름도 많았다. 벌써 삼십 년 가량을 쟁자수로 있었기에 중경지부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았고, 표행에 있어서도 도가 텄다고 인정을 받고 있었다. 오랜 경력과 표행으로 인해 비록 보잘 것 없는 무공이나 진즉 표사로 승진했어야 함에도 공 노인 스스로가 자격이 없음을 내세워 쟁자수에 머물러 있었다. 선주혁이 들은 바에 의하며 중경지부의 수장인 표두인 용대명조차 공 노인에게는 예우를 한다고 했다. 실제로도 그랬다. 금번 표행은 급작스럽게 이뤄졌다. 그래서 표사와 쟁자수의 배치가 원활치 못했고 결국 용대명까지 표행에 나서게 됐다. 지금까지 십 여 일간 표행을 해 오는 동안 용대명은 공 노인과 마주하면 살짝 고개를 숙여주는 등 여러모로 예우를 해 주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었다. "표행을 지켜야 하는 것이 저희 의무가 아닙니까?" 서영욱의 목소리는 늘 우렁찼다. 그 소리를 들은 고참 쟁자수 몇이 피식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자신이 신참인 시절을 생각하는 것이리라. "후훗. 이보게. 하루 종일 긴장을 해 있으면 피로만 누적될 뿐이네. 그리되면 정작 필요할 때는 집중력을 발휘하지 못하지. 그러니 표물에 위험이 닥쳤을 때만 긴장을 하란 말일세." "언제 어느 때 위험한 상황이 생길지 모르는 일 아닙니까?" 서영욱은 지지 않고 자기 의견을 피력했다. "후훗……." 공 노인은 얼굴의 주름살에 깊이를 더하며 웃음을 흘렸다. "자네도 무공을 배웠겠지?" "네. 영학문(英鶴門) 출신입니다." "영학문의 권각술(拳脚術)은 훌륭하지. 그럼 더 잘 알겠군. 축경여개궁(畜勁如開弓), 발경여방전(發勁如放箭)이란 말 들어봤나?" "활을 당기듯 경을 축적하고 화살을 쏘듯 발경을 한다. 이런 뜻이지요." "그래, 이 늙은이는 무공 쪽으로는 소질이 없어 아직까지 발경이 뭔지 축경이 뭔지는 잘 모르지만 그래도 이치는 알지. 권을 내지를 때 팔에 있는 대로 힘을 주면 오히려 파괴력이 떨어지지 않나?" "그렇습니다. 오히려 권을 내밀고 나면 이후에는 힘을 뺐다가 가격 순간에 집중된 힘을 폭발시켜야 제대로 위력을 낼 수 있지요." "그것 보게나. 긴장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일세. 자네가 그처럼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으면 권을 내밀며 온 몸이 바들바들 떨릴 정도로 힘을 주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는 말이지." 공 노인과 서영욱의 대화를 듣는 중 선주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두 사람이 말하는 바는 축경과 발경에 관한 것이다. 어찌 보면 내공을 익혀 무공을 전개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기초 중의 기초인 내용이었다. 하지만 선주혁은 그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경신술도 변검공도 최소한의 진기를 이용해 최대한의 속도를 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손에 비해 느릴 수밖에 없는 다리의 움직임을 극대화 시킨 경신술이 변검공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아낸 것까지는 좋았다. 다리를 그토록 빨리 움직이는 방법이 있다면 그 방법으로 손을 움직이면 훨씬 더 빠르게 공격을 펼쳐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이렇듯 최소한의 진기를 이용하는 것과 속도에만 집착을 하느라 실제 파괴력을 낼 때의 요체를 잊은 것이다. 즉, 장을 뻗는 순간에는 진기의 흐름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이미 장법이 전개되고 있는 동안에는 계속해 진기를 흘려보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화살이 날아가는 것은 활시위의 탄성만이 필요할 뿐 화살을 쫓아가 밀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결국 장을 내민 후 다른 운용법으로 전환할 시간이 주어질 수 있고 파괴력을 최대한으로 낼 최심장으로의 변환이 가능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물론 그 시간이라는 것조차도 찰나에 불과하지만 흘려보내던 진기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클 것이다. "좋았어!" 실마리를 잡았다고 생각한 선주혁은 저도 모르게 주먹으로 자신이 손바닥을 쳤다. 멍하니 무엇인가를 고심하다가 혼자 좋다고 소리를 지르는 선주혁을 보며 공 노인이 혀를 찼다. "쯧쯧……. 이번에 들어온 쟁자수들은 어째 극과 극을 달리는군. 저 친구는 지나치게 긴장감이 없어서 탈이야. 쯧쯧.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모든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거늘……." 공 노인은 머리를 흔들며 행렬의 앞쪽으로 잰 걸음을 옮겼다. 3 가을이 오고 있음을 노래하는 풀벌레 소리가 숲 안을 가득 채웠다. 선주혁은 야영지를 벗어나 숲 가운데에 서서 열심히 북두폭렬장을 연습하는 중이었다. 공 노인의 말을 듣고는 방법을 찾았다고 생각했고 당장이라도 북두폭렬장을 펼쳐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실제로 전개를 하려들자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손을 내민다고 생각함과 동시에 이미 끝까지 뻗어지기 때문에 그 짧은 순간에 진기의 운행을 바꾸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선주혁은 벌써 한 시진하고 반 동안 팔을 뻗어내는 것을 연습하는 중이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최후의 순간 최심장을 제대로 펼쳐본 적은 없었다. 계속해서 진기를 흘려보낼 경우가 많았고 진기를 전환하기 이전에 일장이 다 전개되거나 다음 장이 나와 버릴 때도 많았다. 그래도 선주혁은 포기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사형의 옆에서 기연을 가로채거나 그 부스러기만 주워 먹어도 이 바닥(?)에서 성공할 수 있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단지 사형과 헤어졌기에, 상황이 다르게 전개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전에 가졌던 생각은 남의 지갑을 털어 내 것으로 만드는 것과 다름없다는 생각을 한 것이 더 큰 이유였다. 그래서야 이전 세상에서 자신이 살던 방식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기연이란 말 그대로 인연이 있어야 얻을 수 있는 것. 인연이 없음을 한탄하고 남의 것을 가로채려는 것은 소매치기와 다를 바가 없었다. 없는 인연이라면 스스로의 힘으로 다른 방법을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꼭 절벽에서 떨어져 영약을 먹고 비급을 얻거나, 은거한 노고수에게 개정대법(開頂大法)을 받아야만 고수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흡성대법을 얻은 것만 해도 엄청난 기연이랄 수 있지 않은가. 한번 로또에 맞았다고 당첨금액 전부로 다시 로또를 사는 어리석은 짓을 할 멍청이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선주혁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최대한으로 활용해 자신만의 기연을 만들고 이 바닥(?)에서 원하는 것을 얻고자 노력하는 중이었다. 그렇게 수십, 수백차례에 걸쳐 북두폭렬장을 연습하던 어느 순간. 파아앙 선주혁의 손바닥 끝에서 약간의 여운을 남기는 폭음이 발생했다. "돼, 됐다!" 선주혁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중얼거렸다. 오랫동안 기다렸던 성공에 스스로 놀라버린 것이다. 아직은 비록 세 번에 불과했다. 팔이 저려올 정도의 통증도 느껴졌다. 그렇지만 이전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아주 잠깐의 여유를 가질 수만 있다면 재차 북두폭렬장을 전개할 수 있을 정도의 통증이었던 것이다. 신이 난 선주혁은 계속해서 장력을 뻗어냈다. 이마에서는 땀이 비 오듯 흘렀지만 그는 연습을 멈출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멈춰라!" 청색의 장포를 입은 한 청년이 표국 행렬의 선두를 향해 외쳤다. 하얀 얼굴에 쭉 뻗은 검미. 날카로운 콧날이 어우러져 그럭저럭 준수한 느낌을 주는 용모의 청년이었다. 다만 눈 끝이 올라가 성질이 사나와 보이고, 가늘고 붉은 입술이 전체적인 조화를 망치고 있었다. 웬 청년이 행렬을 가로막자 금번 표행의 책임자인 용대명이 말을 앞으로 몰았다. "누군지는 모르나 이 깃발이 안 보이는가?" 선두에 선 자가 들고 있는 거대한 깃발을 가리키며 용대명이 노한 음성으로 외쳤다. 가을을 맞이한 산바람에 사해표국이라는 글자를 수놓은 깃발이 하늘거렸다. "흥! 깃발이 어쨌다는 거냐?" 청년은 오연한 표정을 지으며 용대명의 말에 되려 반문을 해왔다. 그 말을 들은 용대명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귀하는 사해표국의 앞길을 막아서겠다는 건가?" 사해표국의 명성은 중원 전역에 널리 알려진 것이었다. 쓸데없는 분쟁을 피하기 위해 용대명은 일부러 사해표국이란 네 글자에 힘을 주어 말했다. "후훗." 청년은 한 손으로 머리를 슬쩍 쓸어 올리며 입가에 조소를 머금었다. "사해표국의 이름을 내세워봤자 소용없어." 청년의 오연한 발언에 용대명의 안색이 변했다. 기존의 녹림도(綠林徒)는 절대 아니었다. 녹림도와 표국은 공생의 관계다. 일정 금액의 통행료를 내는 한 표국을 건드리는 일은 절대 없다. 표국에서 표물을 잃는 경우 대대적인 녹림도 토벌이 있게 되고, 이는 양측 모두의 손해가 된다. 표국은 신용에 차질이 생기며 토벌 중 생기는 사상자에게 막대한 위로금을 지불해야 한다. 녹림은 존속자체의 위협을 받게 되니 두말할 나위도 없다. 한 번 대대적인 토벌을 하는 것이 표국 측에 이익이 되는가하면 그렇지도 않다. 표물을 노리는 자가 없다면 굳이 표국을 이용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결국 표국과 녹림도는 적대적 관계와 공생의 관계를 함께 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해표국은 중원 전역에 지부가 있는 만큼 녹림도와의 관계도 원만하다. 그러니 녹림도가 이 자리에서 표행을 멈춰 세울 이유는 없었다.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기존의 세력이 아닌 신진 세력이 영역을 차지하기 위해 무력시위를 하는 경우다. 하지만 중경 바닥에서 그런 신진 세력이 등장했다면 용대명이 모를 리가 없었다. 대체 사해표국을 우습게 여길 자가 누구일까 하는 의문이 끊임없이 들었다. 해답은 곧 나왔다. "나와 내 사제는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으니까 말이야." 턱을 치켜든 채 한쪽으로 시선을 던지는 청년. 청년이 시선이 머무는 숲에서 다른 한 명이 걸어 나왔다. 가무잡잡한 피부. 그리고 눈처럼 하얀 백발을 한 기이한 생김의 사내였다. 사해표국의 쟁자수 중 하나가 놀라 외쳤다. "배, 백발귀마다!" 외침소리와 더불어 사해표국의 표사들과 쟁자수 오십여 명은 일순간에 무기를 뽑아들었다. '엥? 백발귀마라니?' 누구보다 제일 놀란 것은 선주혁이었다. 백발귀마는 자신의 별호가 아니던가? 자신이 이곳에 있는 데 백발귀마가 나타났다는 것이 이해가 안 가는 것이다. 그는 발끝을 세워 고개를 내밀었다. '윽! 저렇게 못생긴 놈을 나라고 착각하는 거야?' "우하하하핫!" 청색장포를 입은 청년이 과장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목청을 돋우어 소리쳤다. "사해표국에도 안목이 있는 놈은 있군. 그렇다. 내가 옥용검마고 이쪽이 백발귀마다." '컥! 야, 이 자식아! 사형이 얼마나 잘생겼는데 네깟 놈이……!' 선주혁은 부글부글 끓는 속을 억지로 가라앉혀야만 했다. 자신이 나서서 내가 백발귀마입네 하고 나설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고, 곤륜이마가 이곳에 나타나다니……." "명유신군을 죽였다는 백발귀마야." 쟁자수들 사이에서 작은 소요가 일기 시작했다. 곤륜이마의 명성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는 의미기도 했다. "모두 조용히!" 용대명이 마상에서 손을 들었다. 이어 말에서 내려온 그가 두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두 분이 요즘 명성이 자자하신 곤륜이마시구려. 한데 어찌하여 본 표행을 가로 막으신 것이오?" 사해표국을 중원을 대표하는 표국. 그 중 한 지역을 대표하는 표두가 저와 같은 예의를 갖춘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일처럼 보인다. "저, 저건……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검병을 쥔 손에 힘을 불끈 쥐며 서영욱이 공 노인에게 물었다. "뭐가?" 공 노인은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용 표두님은 중경에서도 소문난 무인이 아닙니까? 곤륜이마의 명성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저건 지나친 게 아니냐는 말입니다. 더구나 표사님들을 포함해 저희 인원이……." "지나친 거 없다." 공 노인은 여전히 심드렁한 표정을 지은 채 서영욱의 말을 잘랐다. "네?" "표국은 표물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면 될 뿐이야. 무인으로서의 자긍심은 그 뒤다." "아무리 그래도 용 표두님처럼 대단하신……. " "표두이기 때문에 더 그래야 하는 거야. 표행 중에 다치는 사람이나 죽는 사람이 나오면 위로금이 얼마나 많이 드는 줄 알아? 표국에 엄청난 손해를 끼친다고." "하지만 저런 악인을 상대로……." "표국은 저런 악인이 없으면 운영이 안 되는 거야. 저런 자들과 타협을 할 줄 모른다면 표사가 될 자격이 없지." 공 노인은 딱 잘라 말했다. 서영욱은 납득하지 못한 표정이었지만 더 이상 의견을 말하지도 않았다. 그 때 뒷짐까지 지고 옥용검마를 가장한 청년이 아예 뒷짐을 진 채 걸음을 옮겨 용대명 앞에 마주섰다. 이와 같은 행동은 용대명에 대한 명백한 모욕이었다. 상대할 가치조차 없다는 식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곤륜이마께서 이 산을 접수하시기로 결정하셨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알겠지?" 비릿한 미소와 함께 얼굴을 들이 미는 가짜 옥용신마. 용대명의 눈썹이 꿈틀하고 요동을 쳤다. "산주(山主)가 따로 있는 것으로 알고 있소만." "철주산채(澈朱山寨)를 말하는 건가?" "그렇소." 용대명의 대답에 가짜 옥용신마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가 고개를 돌려 길 양쪽의 언덕을 번갈아 보더니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언덕 위로 수많은 사람들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용대명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들을 살폈다. 족히 이백여 명은 되어 보이는 숫자였다. 갑자기 용대명이 한쪽을 바라보며 소리를 질렀다. 내력이 실린 음성이기에 모두의 귀에 선명히 전달되었다. "경(慶) 채주. 이 일이 어떻게 된 일이오?" 용대명의 질문에 언덕 위에 있는 자들 중 한명이 우물쭈물 거리다가 마주 소리를 질렀다. "용 표두, 미안 하외다. 우리로서는 곤륜이……, 아니 신임 채주님들의 명령을 쫓을 수밖에 없었소." 더벅머리에 고슴도치 등에 난 바늘과 같은 수염이 삐죽삐죽한 거한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울상을 지으며 대답했다. "우리 사해표국은 철주산채에 충분한 예우를 갖추지 않았소? 그런데 갑자기 이런 행동은 곤란하지 않겠소?" 용대명의 추궁에 경 채주라는 자가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사이 가짜 옥용신마가 끼어들었다. "곤륜이마께서 계시는 산채에 걸맞은 예우가 아니지." "설마하니 두 분께서 철주산채에 자리하실 줄은 몰랐소이다. 이와 같은 일은 본인이 결정할 내용이 아니니 표행을 마치고 보고를 올리겠소." 용대명은 불쾌하기 이를 데 없는 상황 속에서도 침착하게 설명했다. "푸훗! 아니, 아니지. 우릴 바보로 아나?" 가짜 옥용신마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손가락을 흔들었다. "나중이란 건 없어. 당신 말은 돌아가서 무림맹에 알리겠다는 말과 다름없잖아?"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오?" "표물을 놓고 가라. 통째로! 그럼 되는 거야." "녹림의 영웅들에게도 도의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소이다. 아무리 곤륜이마라 해도 이건 지나친 처사가 아니오?" 급기야 용대명의 목소리가 변했다. 그 순간 가짜 백발귀마가 손가락을 들어 용대명을 가리켰다. "너……." 최근 천하를 울리는 백발귀마였다. 많은 사람들은 숨을 죽여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죽고 싶냐?" 가짜 백발귀마는 투터운 입술을 벌려 이빨을 드러냈다. "표두님께 너무 언사가 지나치오!" 사해표국을 나타내는 청건(靑巾)을 두른 삼십 대의 사내가 소리를 질렀다. 청건의 중앙에 작은 백옥(白玉)이 달려 있으니 그가 표사임을 짐작케 했다. "조(曺) 표사!" 용대명이 만류하고자 했다. 하지만 조 표사는 물러서지 않았다. "사해표국은 그간 녹림칠십이채(綠林七十二寨)와 그 예하 수많은 산채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왔소. 그 관계가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소?" 백발귀마를 향한 질문이었다. "크흐흐흐……. 무림맹도 적으로 돌린 마당이다." 그 한 마디로 모든 것의 답이 나왔다. 무림맹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사해표국이나 녹림칠십이채를 두려워할 리가 없다는 말이었다. 조 표사가 버럭 화를 내려 들 때 용대명이 손을 들어 막았다. 용대명은 몸을 뒤로 돌려 일곱 명의 표사와 서른 명의 쟁자수, 그리고 일곱 명의 짐꾼들을 향해 말했다. "사해표국의 신용은 이십 년이 넘도록 지켜지고 있다. 그것은 사해표국의 명예이자 모든 표사, 쟁자수들의 자부심이다. 우리는 그 자부심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다!" "우와와와와왓!" "표물을 지켜라!" 용대명의 말 한 마디에 표사들은 재빨리 쟁자수들을 지휘했다. 각각 무리를 지어 표물을 실은 수레를 등지고 섰다. "크흐흐흐, 고작 그 인원으로 우리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가짜 옥용검마가 용대명과 표사 및 쟁자수들을 비웃었다.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자청하다니!" 백발귀마도 한마디 던지는 것을 잊지 않았다. 언덕 위의 산적들은 병장기를 꼬나 쥔 채 서서히 내려오는 중이었다. 네 배에 해당하는 수적 열세임은 용대명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결연한 표정이 맺혔다. 일곱 명의 표사와 자신이 있는 한 이 정도의 산적들에게 밀리지는 않는다. 피해야 크겠지만 표물은 지킬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곤륜이마였다. 명유신군은 소문난 절정고수. 그를 상대로 승리를 거뒀다면 상상을 벗어난 경지에 이른 자라는 말이었다. 결국 용대명은 자신과 표국 식구들의 죽음을 예견했다. 하지만 물러서고픈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오늘날의 사해표국이 있기까지의 공로자 중 한 명으로 추대되는 용대명이었다. 아직까지 성혼(成婚)하여 일가를 차리지 못한 이유가 표국의 일에 바빴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있을 정도다. 그런 용대명이었기에 사해표국의 신용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던지는 각오를 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랄 수 있었다. 사해표국은 그에게 있어서 청춘이며 인생 자체였으므로. 용대명이 검을 앞쪽으로 겨누자 표사 셋이 그의 뒤에 시립하듯 섰다. 경험이 풍부한 그들은 이 싸움 승패의 관건이 곤륜이마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킁! 하루살이 같은 것들이 곤륜이마를 향해 덤벼들다니!" 가짜 옥용검마가 손을 높이 들었다가 앞으로 쭉 뻗었다. "우와와와와와!" "쳐라!" "죽여!" 산적들이 언덕의 경사를 달리기 시작했다. '젠장! 어디서 짝퉁이 나타나서 일을 귀찮게 만드는 거야?' 각양각색의 복장을 한 험상궂은 산적들이 거칠게 언덕을 내려오는 것을 보고 선주혁은 내심 투덜거렸다. '쳇! 여기서도 팔자가 사나운 축에 드는 건가? 당최 편할 날이 없네.' "여보게, 혁! 도(刀)를 뽑아!" 서영욱이 맨손으로 입술만 삐죽이고 있는 선주혁에게 다급히 외쳤다. 쟁자수라면 의당 병장기가 있어야 한다는 말에 선주혁은 선불로 받은 공자로 박도(朴刀)를 하나 구입했다. 검을 살까 하다가 혹여 곤륜파의 검술이 튀어나올까 싶어 도를 산 것이다. "아! 난 됐슈. 서 형이나 조심하슈!" 선주혁은 자신을 챙기는 서영욱에게 미소를 지어줬다. 이 백에 달하는 산적, 그리고 중원을 위진하는 곤륜이마를 만나고서 저와 같이 여유로운 표정을 짓는 선주혁을 보고 서영욱은 고개를 흔들었다. 대범한 건지 아무 생각이 없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죽어라앗!" 때 아닌 털가죽 옷을 입은 산적 하나가 경사에서 몸을 날려 뛰어올랐다. 요란한 쇳소리. 산적의 손에 들린 구환도(九環刀)의 고리들이 만들어 내는 소리였다. 수직으로 내려쳐지는 구환도는 서영욱을 반으로 가를 기세였다. 서영욱은 재빨리 몸을 우측으로 이동시켰다. 이어 왼손으로 수결(手結)을 맺으며 오른손에 든 검을 날카로운 기세로 뻗어냈다. 뛰어올랐다 착지하는 자세에서는 체중이 많이 실리기 마련. 구환도를 휘두른 산적은 몸을 추스르기도 전에 서영욱의 검에 어깨를 꿰뚫리고 말았다. 상대가 일개 쟁자수임을 감안해 기세로 누르려는 시도가 빗나가며 생긴 현상이었다. "크아아악!" 커다란 체구만큼이나 큰 목소리로 비명을 지르는 산적. '호! 서 형도 제법 하는데?' 서영욱의 검술이 신속하고 날카로운 것을 보며 선주혁은 미소를 지었다. 선주혁이 서영욱을 구경하는 사이 겸(鎌: 낫)을 든 산적 하나가 머리를 찍어왔다. 상대의 어깨를 꿰뚫었던 검을 회수하던 서영욱이 그 모습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 "혁! 위험햇!" 선주혁이 눈을 돌렸다. 잔뜩 인상을 쓰고 덤벼드는 산적의 얼굴이 보였다. 선주혁이 가볍게 손을 뻗었다. 최심장의 파괴력을 뺀 북두폭렬장을 펼친 것이다. 퍼억 산적의 고개가 뒤로 젖혀지며 머리와 다리의 위치가 바뀌었다. 몸이 반 바퀴를 돌아 뒤로 곤두박질 친 것이다. "……!" 서영욱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 안 보인다?' 아마도 선주혁이 주먹이나 장을 뻗어 산적을 가격했을 것이다. 하나 서영욱의 안력으로는 그 움직임을 포착하지 못한 것이다. 한편 선주혁도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자신의 손을 살폈다. 자신도 모르게 묵연수투를 끼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확인하는 것이다. 아무리 살펴봐도 맨손이 분명했다. '뭐…… 이렇게 허약한 놈이 산적질을 하는 거야?' 가볍게 손을 쓴다고 썼는데 상대가 너무나 과장되게 날아가 버린 것이다. 선주혁은 스스로 얼마나 강해졌는가에 대해 실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자신이 가진 어마어마한 내력은 물론이거니와 북두폭렬장의 속도가 가지는 위력을 모르는 것이다. 경신술과 변검공을 이용해 극소의 진기만을 운용했다지만 워낙 막대한 내력을 가진데다가 북두폭렬장의 가공할 속도에서 비롯된 파괴력은 범인이 감당할 수준이 아니다. 그 사실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선주혁은 그저 산적이 너무 허약해빠졌다고만 생각하는 것이다. "크아아악! 죽어라!" 동료가 나자빠지는 것을 보고 다른 산적 하나가 철추를 휘둘러왔다. 선주혁은 미간을 찌푸렸다. 소리를 질렀으면 달려와 덤벼들 것이지 왜 꾸물럭 대는지 이해가 안 가는 것이다. 저렇게 느리게 철추를 휘둘러서 뭘 어쩌겠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것 역시 산적이 느리기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의 북두폭렬장에 익숙해져버린 선주혁. 그 엄청난 속도에 감각이 적응해 버리자 산적의 동작은 슬로우모션을 보는 것보다 느리기만 했던 것이다. 선주혁은 일부러 철추가 코앞까지 날아오는 것을 기다렸다 가볍게 목을 젖혀 피했다. 그리고 다시 최심장을 배제한 북두폭렬장을 날렸다. 퍼억 또다시 붕 떠올라 반 바퀴를 돌아 땅에 처박히는 산적. '이것들이 지금 스턴트를 하나?' 쿵푸영화를 보면 괜스레 자기 혼자 몸을 날려 뒤집어지는 스턴트맨들을 보고 피식거릴 때가 많았다. 선주혁의 눈에는 지금 산적들의 행동이 그들과 똑같아 보였다. 툭 건드렸는데 저렇게 날아가니 오버액션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잠시 어처구니 없어하는 사이 사해표국과 철주산채의 싸움은 격렬해지고 있었다. 하나둘씩 부상자들도 나오기 시작했다. 선주혁은 이 틈을 이용해 자신과 사형 흉내를 내는 녀석들을 좀 더 살피기로 했다. 그는 마치 산책을 나선 사람처럼 유유히 걸음을 옮겼다. 수적 우위에 있는 산적들인 만큼 자신들을 통과하려는 선주혁을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퍼억 퍽 선주혁에게 덤벼든 산적들이 붕 떠올라 뒤집어지기 전에 들리는 타격음 소리였다. "사, 사술이다!" 산적 중 하나가 선주혁을 무기로 가리키며 외쳤다. 그의 눈에는 선주혁이 한가롭게 걸음을 옮기는 것만으로 보였다. 그런데 그에게 달려든 동료들이 마치 무형의 무엇인가에 얼굴을 가격당한 듯 뒤쪽으로 날아가 뒤집히는 것이다.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고 동료들을 날려버리는 모양을 보고 사술을 떠올리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일순 주목을 받게 되자 거친 산적들이 선주혁에게 몰려들었다. 살벌한 기세를 흘려내며 달려든 결과는 이전과 똑같았다. 묵묵히 걸음을 옮기는 선주혁의 근처까지 갔다가 튕겨나가는 것이다. 쟁자수, 혹은 표사들과 싸우느라 선주혁의 접근을 몰랐던 산적들도 마찬가지였다. 선주혁이 근처에 가기만하면 모두가 튕겨나가 버린 것이다. 표물의 주변으로 잔뜩 몰려들었던 산적들은 선주혁이 지나간 자리만 휑하니 비어버리는 기묘한 현상을 만들어냈다. 결국 선주혁은 가짜 곤륜이마가 격전을 벌이는 곳에 손쉽게 도착할 수 있었다. 가짜 곤륜이마는 그저 이름만 빌린 허풍선이들은 아니었다. 옥용검마를 가장한 청년의 검술은 실로 대단하여 사해표국의 표두인 용대명과 맞서 조금도 밀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의 젊은 나이를 고려했을 때 놀라운 실력이 아닐 수 없었다. 뛰어난 면모를 보이는 것은 가짜 백발귀마도 마찬가지였다. 어디서 났는지 모를 검은색 장갑을 낀 그는 표사 셋을 상대할 정도였다. 하지만 선주혁의 눈에는 달랐다. '저딴 실력으로 감히 사형과 내 흉내를 내는 거야?' 그의 눈에는 흐느적거리며 느릿하게 검을 전개하고 장력을 펼쳐내는 것으로만 보였던 것이다. 눈을 부릅뜨고 곤륜이마의 싸움을 지켜보던 선주혁은 뭔가 분위기가 요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뒤를 돌아봤다. 어느새 산적과 사해표국과의 싸움이 끝나 있었다. 아니 멈춰 있었다. 그들 모두의 시선은 선주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응? 왜 다들 날 보고 있는 거야?' 선주혁은 부담스러운 시선에 얼굴을 매만졌다. 혹시나 얼굴에 뭐가 묻었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설마 내가 오리지널 백발귀마라는 것을 알아본 것은 아니겠지?' 슬슬 걸어오며 허약(?)하기 이를 데 없는 산적들을 날려버렸고 구경을 하느라 여념이 없던 선주혁. 그는 이들의 싸움이 자신이 보여준 압도적인 신위로 인해 멈췄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카앙 쇳소리가 요란하게 한 번 울리더니 가짜 옥용검마가 뒤쪽으로 물러섰다. 그를 확인한 가짜 백발귀마도 강하게 일장을 내질러 표사들을 떨쳐낸 후 가짜 옥용검마의 뒤를 쫓았다. "뭣들 하는 거야?" 가짜 옥용검마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자신과 사제가 용대명을 맡고 있으면 수적 우위를 통해 쉽사리 표국의 호위들을 쓸어버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모두 멍하니 서 있는 것을 보고서는 화를 내는 것이다. "어서 안 싸워?" 옥용검마가 다시 한 번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산적들은 저마다 눈치를 볼 뿐 선뜻 나서는 자는 없었다. 상대편에 요상한 사술을 부리는 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주위에 다가가면 튕겨져 날아가는 판에 저 자가 제대로 날뛰면 자신들이 온전치 못하리라 생각하는 것이다. "이, 이쪽에 고수가 있습니다." 결국 철주산채의 전 주인인 경 채주가 나섰다. 그 말을 들은 선주혁은 자신도 주변을 살폈다. 어디에 고수가 나타난 건지 찾으려는 것이다. 가짜 옥용검마가 두 눈을 부릅떴다. "이런 쓸모없는 것들! 이백 명이 넘는 놈들이 아무리 고수가 나타났다 해도 그렇지……!" 용대명과의 싸움에 집중하느라 상황을 모르는 가짜 옥용검마가 더욱 노기를 불태웠다. 그 때 가짜 백발귀마가 나서며 위협했다. "말 안 들으면 내 손에 먼저 죽는다." 검은색 장갑을 낀 손을 들어 올려 손가락을 움직이는 가짜 백발귀마. 묵연수투의 위력을 안다면 말을 들으라는 협박이었다. "절대로 저희 상대가 아닙니다." 경 채주가 다급히 말했다. "대체 어떤 놈이란 말이냐?" 버럭 화를 내는 가짜 백발귀마는 쉽게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한 몸에 쏠리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중인들의 시선에 가장 놀란 것은 선주혁이었다. '뭐, 뭐야? 내 얘기를 하는 거였어?' "저딴 애송이 때문에 내 명령을 거역한다는 거냐? 이 백발귀마님의 말씀을?" 가짜 백발귀마가 펄펄 뛰는 사이 선주혁은 당황하는 표정을 지으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 쟁자수들 사이에 섰다. 신분을 감추고 도주를 위해 표국에 들어온 것이다. 튀는 행동은 절대금물이라 생각했다. 그저 달려드는 놈들을 가볍게 손봐줬을 뿐인데 언제 자신이 실력을 드러냈다고 고수 운운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괜히 주목을 받게 되자 선주혁은 이 일에서 빠지려는 것이었다. '젠장! 지들이 약한 것을 가지고 왜 날보고 고수네 마네하고 X랄들이야.' 선주혁의 얼굴을 확인한 가짜 백발귀마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한 눈에도 자신보다 어린 애송이임을 알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해표국에도 제법 뼈가 굵은 놈이 있었나 보군." "사제, 사제가 손을 좀 봐 주지." 가짜 옥용검마가 여유롭게 말했다. 어차피 멈춰진 싸움이었다. 여기서 실력을 보여준다면 사기를 높이는 데도 유리하다고 판단을 한 것이다. "네, 사형." 가짜 백발귀마가 손가락에서 우두둑하는 소리를 내며 앞으로 나섰다. 선주혁의 앞쪽에 선 그가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이 백발귀마님께서 상대해 주마. 나서라!" '어디서 가리지널이 오리지널한테 오라가라야?' 선주혁은 발끈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애써 노기를 억누르며 사람들 사이에 묵묵히 서 있었다. "뭐냐? 이제 와서 꼬리를 말겠다는 거냐?" 가짜 백발귀마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선주혁은 속으로 참아야 하느니라를 연신 되뇌기 시작했다. 그러나 상황은 선주혁이 원하는 대로만 돌아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옆에 나란히 서 있던 쟁자수들이 주춤주춤 뒤로 물어서버린 것이다. 결국 가만히 서 있던 선주혁은 저절로 앞으로 나선 모양새가 되었다. 주변을 살핀 선주혁이 인상을 썼다. '이것들이 치사하게……?' "덤벼라. 애송이!" '별수 없는 건가?' 선주혁은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엉성한 자세로 박도를 뽑아 들었다. 이왕 주목을 받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더 튀는 행동을 해서는 곤란했다. 더군다나 검법이라면 몰라도 도법에는 조예가 없기에 그의 엉성한 자세는 완벽에 가까웠다. "타합!" 가짜 백발귀마가 먼저 움직였다. 허리를 낮추고 빠른 속도로 달려드는 가짜 백발귀마. 손끝을 세워 아래에서 위쪽으로 훑어 올라가는 그의 우수(右手). 선주혁은 그저 상반신을 뒤쪽으로 살짝 젖혀 공격을 피해냈다. 가짜 백발귀마의 손끝은 아슬아슬하게 선주혁의 옷 위를 스쳐지나갔다. 선주혁의 얼굴 높이까지 올라온 가짜 백발귀마의 손이 뒤집어지며 그대로 얼굴을 잡아갔다. 선주혁은 상대의 느릿한 동작을 보며 가볍게 박도를 휘둘렀다. 특별한 초식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휘둘러 막는 것에 불과했다. 상대의 얼굴을 잡으면 팔이 잘릴 상황. 가짜 백발귀마는 빠르게 팔꿈치를 접으며 다시 왼손을 아래쪽으로 뻗었다. 이번에 노리는 목표는 선주혁의 낭심. 선주혁은 뒤쪽으로 세 걸음을 물러서며 큰 차이로 피해냈다. "이 자식이 미쳤나?" 아직 장가도 못간 총각의 그곳을 망가뜨리려 했다는 사실은 선주혁을 분노케 했다. 선주혁은 치미는 노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마구잡이로 박도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도법에는 문외한이나 다름없는 선주혁은 그저 엑스자 형태로 도를 휘두를 뿐이었다. 하나 북두폭렬장의 진기 운행을 응용한 그의 손놀림은 엄청나게 빠를 수밖에 없었다. 부우우우우웅 선주혁이 휘두르는 박도에서 수만 마리의 벌떼가 우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달리 진기를 주입한 것도 아닌데 엄청난 속도에 흙먼지가 피어오르고 바람이 일었다. '뭐, 뭐 저런 도법이 다 있어?' 가짜 백발귀마의 쭉 째진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실 가짜 백발귀마는 철포삼을 극도로 연성한 상태. 어지간한 도검은 무서워하지 않을 정도였다. 하나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휘둘러지는 박도의 위세에 가짜 백발귀마는 주춤주춤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선주혁이 위맹하게 휘두르는 박도가 하나의 벽을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번천십자도(飜天十字刀)!" 용대명이 선주혁의 도법을 보고 놀라 외쳤다. 용대명이 선주혁의 도법을 보고 놀라 외쳤다. '응? 번…… 머시기?' 선주혁은 용대명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자신이 휘두른 도를 보고 말한 것은 알겠지만 박도가 공기를 가르는 소리에 잘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이어지는 용대명의 외침. 선주혁은 용대명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도신(刀神) 독고전륜(獨孤全侖)의 후예란 말인가?" "앗?" "크흑!" 용대명의 말을 듣느라 잠시 신경을 분산시키는 사이 선주혁의 손에서 박도가 미끄러져 버렸다. 아니 미끄러졌다고 느끼는 순간 박도는 공간을 압축하듯 날아가 가짜 옥용검마의 복부에 깊숙이 박혀있었다. 가짜 옥용검마는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은 채 박도의 도병을 움켜쥐었다. 날아오는 속도가 말 그대로 전광석화(電光石火)여서 미처 방어할 틈조차 갖지 못했던 것이다. 이어 입에서 피를 게워내며 쓰러지는 가짜 옥용검마. '아? 미안……! 고의가 아니었다고.' 선주혁은 가짜 옥용검마를 힐끗 보고 내심 중얼거렸다. 혼쭐을 내줄 생각이야 있었지만 죽이기까지 하려는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을 알지 못하는 용대명은 선주혁이 일부러 도를 내던졌다고 생각하며 백여 년 전의 절대고수였던 도신 독고전륜의 또 다른 절기를 떠올렸다. "뇌전격(雷電擊)! 비도무적(飛刀無敵)!" 도신의 성명절기인 뇌전도법(雷電刀法) 중에서 도를 날려 적을 죽였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소위 말하는 이기어도술(以氣御刀術)의 일종이었다. 설마하니 저 나이에 이기어도술을 사용할 경지에 올랐겠냐만은 그 원리를 응용한 수법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니라면 암기도 아닌 도를 저처럼 빠르고 강력한 힘으로 던질 수 없었기에. 한편 가짜 백발귀마는 사색이 되었다. 그의 진정한 신분은 유귀동(流鬼洞) 동주인 구천상(具千祥)의 둘째 제자인 지단덕(地緞德)이었다. 방금 전 선주혁의 도에 맞아 죽은 자는 그의 사형이자 유귀동의 대제자인 위전청(偉田靑)이었다. 지단덕은 사형의 무공이 자신에 비해 뛰어남을 날고 있었다. 그런데 손 한 번 제대로 못써보고 저렇듯 죽어가자 자신의 상대가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더구나 백 년 전의 절대고수인 도신에 대해서는 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도신 독고전륜의 도법을 익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일이었다. 독고전륜이 어떤 인물이란 말인가? 단신으로 전 무림을 상대하겠다던 절대의 고수였다. 그런 자의 무학을 이어받았다고 하니 덜컥 겁부터 나는 것이다. 잠시 주춤 거리던 그는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결국 도주하는 것이다. 이곳에 있다가 도신의 후예에게 개죽음을 당하느니 도망을 치는 게 낫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어차피 신분을 위장한 상태니 망신이랄 것도 없었다. 앞서 그와 싸움을 벌이던 표사 셋이 신형을 날리려 했다. "추적할 필요 없네." 용대명이 그들을 말렸다. 표국의 임무는 표물을 지키는 것이지 악인을 처벌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용대명이 싸늘한 시선으로 경 채주를 바라봤다. 경 채주는 식은땀을 흘리며 변명을 시작했다. "용 표두……. 용 표두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저희로서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저희 같은 놈들이 어떻게 곤륜이마를 상대하겠습니까?" 용대명은 일자로 입술을 굳힌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번 일은 그저 사고였습니다, 사고. 그래도 천만다행 아니겠습니까? 도신의 후예께서 여기에 계시니 저 나쁜 놈들을 물리치고 말입니다. 아! 한 놈은 직접 죽이셨으니 실로 큰 공을 세우신 셈입니다요, 헤헤헤헤." 경 채주는 덩치에 걸맞지 않게 양 손바닥을 비비며 아양을 떨었다. 용대명은 여전히 냉랭한 시선을 던질 뿐이었다. "용 표두. 이건 어떻습니까? 앞으로 일 년 동안 저희에게 주실 통행료를 없던 걸로 하는 겁니다. 그걸로 오늘의 실수를 만회할 수 있겠습니까?" "……." 용대명의 침묵에 경 채주는 울상으로 변했다. "삼, 삼년으로 하죠. 제발 마음 좀 푸십시오, 용 표두." "흠……." 용대명은 슬쩍 안광을 죽이며 신음성을 흘렸다. 그 때 공 노인이 용대명의 옆으로 바짝 붙으며 끼어들었다. "용 표두님. 보아하니 경 채주님도 어쩔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저렇게 성의를 표하는데 너무 고집을 세우지지 않는 게 더 좋으실 듯합니다요." "아이고, 공 표사님. 고맙습니다요." 경 채주는 공 노인이 쟁자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나 십 수 년 간 얼굴을 보아온 사이였다. 좋은 일, 좋지 않은 일을 함께 겪어왔기에 예우를 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지금은 자신의 입장을 도와주고 있는 입장이 아닌가? '크! 노래하고 장단 맞추고……. 콤비플레이 죽이는 걸! 용 표두라는 사람. 겉보기엔 근엄하기만 해 보이는 데 완전 너구리구나. 공 노인도 만만치 않은 걸? 타이밍 기가 막히게 맞춰 뻐꾸기를 날리다니.' 현대 사회에서 갖은 꼴을 다 겪어본 선주혁에게 있어서 한 명이 튕기고 옆에서 부추기는 저런 수작은 익숙한 것이었다. 동네 깡패들조차 한 명은 윽박지르고 한 명은 살살 달래는 것이 기본 아닌가? '이제 슬슬 풀어줄 때가 됐는데?' 선주혁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용대명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흠……. 공 노인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역시나 선주혁의 예상대로였다. 용대명은 마지못해 마음을 푸는 척 하며 경 채주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용 표두. 정말 감사하오. 내 이 일은 절대 잊지 않겠소." 경 채주는 두 손을 맞잡아 연신 고개를 숙였다. 겉으로야 웃음을 짓고 있지만 그 속이 얼마나 쓰릴 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졸지에 삼 년 간의 막대한 수입을 포기해야할 처지가 된 것이다. 경 채주를 비롯한 철주산채의 산적들을 사상자를 등에 업고 산채로 돌아갔다. 그들의 어깨가 축 늘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산적들이 뒷수습을 마치고 돌아간 후 용대명이 선주혁에게 다가왔다. "선 소협이라고 하셨소?" "아니…… 소협은 무슨…… 그냥 선혁입니다." 선주혁은 여러 쟁자수와 표사들이 표물을 정리하고 부상자를 치료하는 와중에도 연신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 부담스러웠는데 용대명까지 이렇게 나서자 부담스럽기 짝이 없었다. 가능하면 조용히 묻혀가려했건만 일이 꼬여버린 것이다. "도신의 진전(眞傳)을 이어받은 분이 어찌 저희 표국의 쟁자수로 계신 겁니까? 진즉 도신의 문하임을 밝히셨으면 좋았을 것을……." 질문을 하는 용대명의 어조는 극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선주혁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신이 누군지 그는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을 때 역시 등장하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아니 엄청나게 많은 인물들이 줄줄 쏟아져 나왔던 책이니만큼 자신이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어쨌거나 도신이라는 사람의 후예로 자신을 착각하는 상황에 대처할 방법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오호! 차라리 그런 방법이……!' 자신은 이미 주목을 받을 만큼 받은 상태다. 어차피 이렇게 된 바에야 차라리 도신의 후예인 척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법은 잘 모르지만 아까처럼 휘둘러대면 번…… 어쩌고 하는 초식으로 착각을 할 것이고, 표행 중에 만나는 약해빠진 산적들 정도는 그 마구잡이 휘두르기로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이들은 아까 도망친 놈이 가짜라는 것을 모르는 상태. 자신이 백발귀마임을 완벽하게 감출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된 것일 수도 있었다. '푸흐흐흐……. 난 역시 천재야.' 결정을 내린 선주혁은 애써 표정을 추스르며 말했다. "사부님의 발끝조차 따르지 못하는 재주입니다. 어깨 너머로 배운 수준이라 감히 밝히지 못했습니다." "……!" 선주혁의 말에 용대명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응? 내가 말을 실수한 건가?' 선주혁은 용대명의 표정을 보고 긴장했다. "이럴 수가……. 도신께서 후예를 남기셨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라운 사실이거늘……! 도신께 직접 사사(師事)를 받으셨다니……! 선 대협께서 이리 모습을 드러내신 것은 실로 무림의 홍복입니다." 용대명은 선 소협에서 선 대협으로 호칭을 바꿔 불렀다. 그는 선주혁이 도신의 문하리라 확신하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도신의 적전제자(嫡傳弟子)라고는 상상치 못했던 것이다. 도신의 배분을 생각하면 아무리 나이가 어릴 지라도 선주혁을 소홀히 대할 수 없었기에 용대명은 더욱 극진한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도신께서는 아직도 무강하신지요?" "아……? 그게…… 안타깝게도……." 선주혁이 얼버무리자 용대명은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진심으로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 괜한 질문을 드렸습니다." "아, 아닙니다. 뭐…… 늙으면 죽어야…… 가 아니고 세상 이치란 게 다 그런 것이지요. 사부님께서는 세상의 이치에 순응하시는 분이시니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선주혁의 말에 용대명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듣자하면 도신의 성격은 그야말로 광오하기 이를 데 없을뿐더러 괴팍함의 극치라 했다. 전설과 같은 이야기에 의하면 옥황상제가 눈앞에 있어도 도를 뽑아들고 싸움을 걸 성격이라 했는데 세상의 이치에 순응한다하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하지만 소문이라는 것은 와전되기 마련이고 나이를 먹는 동안 성격이 부드러워질 수도 있는 지라 곧 선주혁의 말을 수긍했다. "무슨 고견(高見)이 있으셔서 저희 표국에 오신 것인지는 모르지만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핫……. 부탁은 제가 드려야죠. 표두님이신데요." 선주혁은 자신이 사기를 치고 있다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으로 한 말이나 용대명은 그가 고작 쟁자수의 신분으로 있는 것에 대해 못마땅히 여긴다고 생각했다. "아, 미처 말씀을 못 드렸군요. 선 대협을 표두로 모시는 것은 저희 사해표국의 본점의 허가를 득해야 합니다. 선 대협이시라면 당연히 표두의 예우를 해 드릴 것이나 이 자리에서 제가 그것을 정할 수는 없으니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일단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 표사의 임명이고 표두가 되시는 정식 절차는 다음 지부에 가서 밟도록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부족함은 없을 것이니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아, 아니…… 뭐 그럴 것까지야……." 선주혁은 자신이 상상한바 이상으로 상황이 전개되어 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Vol 8. 소제목 미정 호남성(湖南省). 작금에 있어서 호남성 하면 떠오르는 것은 동정호(洞庭湖)의 수려함도, 장가계(張家界)의 절경도, 남악(南嶽) 형산(衡山)의 장중함도 아니다. 호남성 하면 바로 떠오르는 것. 그것은 바로 무림을 사분하고 있는 거대 세력 중 유구한 역사와 전통의 구성원을 가진 무림맹이라 말할 수 있다. 구파일방을 주축으로 한 무림맹의 총단인 십전성(十全城)이 자리하고 있기에 호남성 장사(長沙)는 그야말로 정도 무림인들로 가득한 곳이랄 수 있었다. 그런 호남성이 들썩이고 있었다. 도신의 후예가 나타났다! 그와 같은 소문이 호남성을 뒤흔들었다. 나타난 후예가 도신의 절예로 곤륜이마 중 옥용검마를 죽이고 압도적인 무위를 선보여 백발귀마를 겁에 질려 도망가게 했다. 그와 같은 소문은 전 무림에 파다하게 퍼진 상태였고, 그가 향하는 목적지가 호남성이라는 것도 널리 알려졌다. 호남성이 들썩이는 이유는 거기에 있었다. 2 선주혁은 좌불안석(坐不安席)의 심정으로 표행을 마쳐야 했다. 목표한대로 호남성까지 온 것은 좋았다. 등하불명(燈下不明)이라. 설마하니 무림맹에 의해 공적으로 낙인찍힌 자가 무림맹의 총단 십전성이 있는 호남성으로 들어올 것이라는 것을 예상치 못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와중에 도신의 제자를 사칭한 것도 그럴 듯 했다. 사실 무협지를 읽으며 화를 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닌 선주혁이었다. 툭하면 나오는 내용이 '아니 저것은 오백 년 전에 사라진 절기!'라고 외쳐대는 것인데, 오백 년 전에 사라진 절기를 어떻게 한 눈에 보고 알아차린단 말인가? 그런 엉터리 사건 전개를 봐오며 비웃던 그였기에 용대명이 어설프게 자신의 무공을 착각하는 것을 보고는 상황을 즐기려는 마음이 들었다. 대접을 받으며 표행을 마칠 수 있다는 치기어린 욕심이 포함된 것도 물론이었다. 한데 도신이라는 자가 누군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그 제자를 사칭한 게 실수였다. 호남성에 들어오면서부터 소문이 퍼져나가고 있음을 확인한 선주혁이 설마설마 했던 것이 사실로 드러나고 있었다. 말하자면 전 무림의 이목이 자신에게 주목되고 있는 것이다. 날이 갈수록 사해표국의 대우는 극진해졌고 길수(吉首), 원릉(沅陵)을 지나는 동안 수많은 소문들을 들을 수 있었다. '도신이라는 사람이 그렇게 대단한 거였나? 괜히 내 손으로 무덤을 판 건 아닐까?' 불안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는 선주혁이다. "자, 선 대협. 안으로 드시지요. 국주(局主)님과 총표두(總　頭)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용대명이 선주혁을 안내했다. 선주혁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용대명의 뒤를 쫓았다. 사해표국의 위용은 대단했다. 중원전역을 하나로 잇는 표국이니만큼 표사와 쟁자수의 숫자도 많았고 표물의 운송 역시 방대하기 이를 데 없으니 일하는 사람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본전(本殿)까지 걸어가는 동안 선주혁은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훔……. 표국이라는 게 따지고 보면 택배회사나 다름없는 거 아닌가? 뭐가 이렇게 거창해?' 저쪽 세상에 있을 때도 물류회사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는 그는 표국의 엄청난 규모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중경에 있는 지부만 해도 대단하다 여겼거늘 이곳은 그보다 수배는 달하는 규모였기 때문이다. 선주혁과 용대명이 본전에 들어서자 국주인 임자순(林子順)이 양 손을 벌리고 환영을 했다. 선주혁은 생각보다 많은 인원이 대전에서 기다리고 있음에 놀라야만 했다. 표국의 주요인물들이 총동원된 것이다. '이거…… 환대가 지나친 걸?' 선주혁은 준비된 좌석에 앉으며 또다시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대낮부터 주연을 준비한 이유가 단지 도신의 후예라는 것 때문은 아닐 것이란 생각 때문이었다. 그의 짐작대로였다. 사실상 표국은 재력으로 무인을 고용해 운영을 한다. 돈이면 귀신도 부린다지만 무인을 다루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진정한 실력자들을 표국에 고용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그렇기에 표국에서는 단 한 명의 절정고수를 초빙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모든 지부에 배치할 수는 없다손 쳐도 그 고수의 명성 하나로 인해 표행에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절정고수가 뒤에서 받쳐주는 표국의 표물을 건드릴 자들은 흔치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신의 후예가, 그것도 전 무림을 경악케 한 곤륜이마를 일패도지(一敗塗地)시킬 정도의 고수가 제 발로 표국에 찾아들었다. 표국의 입장에서는 쌍수를 들어 환영하는 한 편 그가 다른 마음을 먹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국주 임자순은 선주혁에게 연신 술과 음식을 권하며 총표두를 위시한 각 표두들과 표국의 임원들을 소개했다. 선주혁은 어정쩡한 분위기에서 인사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었다. 계속해서 사해표국에 대한 안내와 자랑, 그리고 향후의 발전 가능성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임자순. 그제야 선주혁은 임자순의 내심을 파악할 수 있었다. '오라! 날 여기에 묶어 두겠다 이거지?' 선주혁은 불안한 마음을 떨쳐낼 수 있었다. 상대의 저의를 파악한 이상 어떻게 해서든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밤이 길면 꿈도 많은 법. 언제까지 도신의 가짜 제자노릇을 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자신은 지금 사형을 찾아가는 길. 안전한 도주로 확보를 위해 표국을 선택했을 뿐, 이곳에서 공자를 받아가며 살고픈 마음은 없었다. 그 때 문사차림의 한 중년인이 임자순에게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임자순은 처음에는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가, 선주혁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신중한 표정으로 바꿨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혹시 자신의 정체가 발각된 건가 싶어 조심스레 물었다. "아, 아닙니다. 무림맹에서 선 표두를 뵙고자 방문을 하셨다는군요." 갑작스런 무림맹의 방문에 표국의 임원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선 표두? 내가 언제부터 니들 표두였냐?' 선주혁은 발각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심을 하면서도 임자순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 아직 정식 절차를 거쳐 표두에 임명된 것도 아니고, 자신이 표두의 직을 수행하겠다고 말한 적도 없건만 미리 표두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무림맹이 지목한 공적을 처리하셨으니 그에 대한 감사의 뜻을 표하기 위한 방문인 듯싶구려." 선주혁에게 하는 설명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에게 하는 설명인지 모를 어조였다. "안쪽으로 모시도록 하게." 임자순은 문사차림의 중년인에게 명했고 머지않아 문이 열리며 일단의 무리가 들어왔다. 한 눈에도 헌앙하기 이를 데 없는 청년과 범상치 않은 기도의 중년인, 그리고 한 여인의 입장이었다. "쿨럭!" 다른 사람은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본전으로 입장하는 여인을 보는 순간 선주혁의 동공이 또다시 극도로 확대되었다. '저, 저 여자는……?' 분명 저쪽 세상에서 본 연예인과 똑같이, 아니 그보다 보완된 더 아름다운 모습을 보게 될 것이라는 것을 기대했던 그였다. 하지만 또다시 두 눈으로 평소 미치고 환장할 정도로 좋아하던 얼굴을 보자 선주혁은 숨이 넘어가는 것만 같았다. 나타난 여인은 백옥 같은 피부에 시원스러운 이마. 아름다운 호선을 그려내는 눈과 오똑한 코. 부드러운 얼굴선을 가진 단아한 생김새가 돋보이는 용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평소 선주혁이 볼 때마다 열광했던 탤런트 이가인(李佳?)의 얼굴과 똑같았던 것이다. 절로 입이 벌어지고 침이 흐르려 했지만 선주혁은 마음을 다잡았다. 이제는 이쪽 세상에서 연예인의 얼굴을 보는 게 낯선 일만도 아닐뿐더러 보는 여자마다 정신 못 차릴 처지도 아니었다. 자신이 읽었던 소설의 내용으로 미루어 앞으로 등장할 여자는 많고도 많았다. 그들을 만날 때마다 정신 못 차리고 헬렐레하는 모습을 보일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선주혁이 갑작스런 이가인의 출연으로 갈팡질팡 하는 사이 임자순이 자리에서 일어나 무림맹 인사들을 영접했다. "어서 오십시오. " 임자순이 포권을 취하자 잘생긴 청년은 밝고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도 두 손을 마주 잡았다. "갑작스레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행여 무례가 되었다면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정중하기 이를 데 없는 사과였다. 그러면서도 당당함과 기품을 잃지 않으니 행동 하나하나가 범상치 않은 청년이었다. 청년의 사과에 당황스런 표정을 지은 것은 임자순이었다. 비록 이제 이십대 중반의 청년이었지만 그에게는 사해표국 정도는 우습게 볼 정도의 지위와 권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림맹 순찰당주(巡察堂主)께서 방문해 주심은 영광이니 그런 것은 괘념치 마십시오." 임자순은 맞잡은 두 손을 더 높이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선주혁의 눈이 빛났다. 무림맹 순찰당주가 누군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를 기억해낸 순간 선주혁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구주신룡(九州新龍)이라는 거창한 별호를 갖고 있는 자. 현 무림맹주의 세 번째 제자이자 신웅십팔걸의 수좌(首座)를 넘보는 후기지수(後起之秀)의 선봉이 바로 눈앞의 청년이었다. 불과 스물다섯 살밖에 안 되는 그가 무림맹의 순찰당주의 지위에 오른 것은 비단 맹주의 제자라는 배경 때문이 아닌 것이다. 하나 선주혁이 눈살을 찌푸린 것은 구주신룡 서문도옥(西門燾玉)이 비슷한 또래에서 소위 말해 잘 나가는 처지에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물론 그가 절로 질투심이 치솟게 만드는 꽃미남이기 때문만도 아니었다. 그가 알고 있는 서문도옥은 겉보기와는 달리 음흉하기 짝이 없는 위험인물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무림을 뒤흔들 정도의 엄청난 간웅(奸雄)이 서문도옥이다. 방금 전의 사과 역시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른 이중성을 띄고 있을 것이다. 하나 미리 알고 봤다 해도 이 사과만은 진심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 결국 서문도옥의 연기가 얼마나 완벽한지를 알려주는 단면이었고, 선주혁으로서는 감탄을 하면서도 치를 떨지 않을 수 없는 행동이었다. "불청객을 나무라지 않아 주시니 실로 감사합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자, 안으로 드시지요." 임자순은 꽤나 황공한 표정을 지으며 서문도옥과 그의 일행을 안내했다. 자리에 앉은 서문도옥은 일행을 소개했다. "이쪽은 제 사매(師妹)인 한희윤(漢熙玧)입니다." 서문도옥의 소개에 한희윤은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 "오! 역시! 들어오실 때부터 범상치 않은 용모를 지니셨다 했더니 무림칠화(武林七花)중 첫째로 꼽히신다는 한 소저셨구려." 임자순은 그럴 줄 알았다는 말투였다. 한희윤은 싱긋 미소만을 지었다. 무림칠화란 정도 무림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여인 일곱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누구 할 것 없이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인 바, 임자순의 말을 다분히 한희윤을 추켜세우는 말이었던 것이다. 입에 발린 칭찬 정도에 우쭐한 모습을 그녀가 아니었다. '호오! 이가인이 한희윤이었을 줄이야……!' 선주혁은 내심으로 한희윤에게 계속 시선을 던지지 않았던 것을 오히려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사실 완벽하게 가다듬어진 연예인의 얼굴을 코앞에서 보는 것이 즐겁지 않을 리 없다. 억지로 자제를 하고 있기가 쉽지만은 않았건만 외려 그게 복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선주혁은 그녀의 성격을 대충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쪽은 무림맹의 순찰당 부당주인 중손정(仲孫貞)입니다." 중손정은 안은 채로 두 손을 포개 잡았다. "아! 중손 대협이셨군요.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임자순은 실로 기쁜 표정을 지었다. 사해표국이 표국으로서의 명성과 재력(財力)은 실로 막강하다 할 수 있다. 하지만 표국은 표국일 뿐. 전 무림을 아우르는 무림맹과는 어깨를 견줄 수가 없는 입장이다. 따라서 무림맹의 순찰당 당주와 부당주, 그리고 무엇보다 맹주의 손녀인 한희윤의 방문은 사해표국의 간판에 금칠을 해 줄 일이었던 것이다. 임자순의 입장에서는 절로 입이 벌어질 상황이었다. "알고 계시겠지만 오늘 저희의 방문은 도신의 후예께서 귀 표국에 계시다는 소문 때문입니다. 고인(高人)께서 무림에 나오셨으니 맹주님을 대신해 인사를 여쭙고 환영의 인사를 전하고하 합니다." "허허헛! 그러셨군요. 저희 표국으로서도 크나큰 경사를 맞은 셈이지요. 설마하니 도신의 후예께서 저희 표국 표두의 직을 맡아주실 거라 누가 생각했겠습니까?" '어이, 아저씨. 누가 맡는다고 했어?' 선주혁이 어이 없어할 때 서문도옥이 잔잔한 미소와 함께 물었다. "그런데…… 고인께서는 어느 분이신지?" "아! 여기 선 표두께서 바로 도신의 후예이십니다." 임자순이 바로 옆에 앉은 선주혁을 손바닥으로 가리키며 소개했다. "……!" 서문도옥과 한희윤, 그리고 중손정의 눈이 커졌다. 그들 정도라면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무림맹에서도 중책을 맞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지금처럼 놀라운 감정을 드러낸다는 것은 임자순이 선주혁을 도신의 후예라 소개한 것이 얼마나 충격적인 사실인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임자순에게는 선주혁 또래의 아들이 있다. 무림맹의 순찰당주인 서문도옥을 그것을 이미 알고 있는 상태. 그는 선주혁을 부친을 닮지 않은 아들 정도로만 생각했던 것이다. 설마하니 곤륜이마를 패퇴시킨 도신의 후예가 자신보다도 어려보이는 청년이라고는 생각조차 못했기 때문이다. 밋밋한 태양혈과 두드러지지 않는 기도. 고수로서의 풍모는 조금도 엿보이지 않았다. 겁 많아 보이는 큰 눈에 가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청년이 무림을 발칵 뒤집어엎다시피 했던 도신의 후예라는 것이 놀라웠다. 가장 먼저 감정을 추스른 것은 서문도옥이었다. 그는 젊은이답지 않은 노련함으로 다시 만면에 미소를 가득 채우며 선주혁을 향해 두 손을 마주 잡았다. "고인께서 이토록 젊은 분이라 미처 생각지 못해 실태를 보이고 말았습니다. 실례를 용서하십시오. 소생은 서문도옥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실수를 감추려 들지 않고 인정하는 것. 얼핏 보면 사형인 남지학을 연상시킬 만한 행동이었다. 하나 그가 만들어 보여준 표정 안에 감춰진 생각을 짐작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선주혁은 그 모든 것이 가증스럽게만 여겨졌다. "선혁이오." 선주혁은 두 손을 잡는 둥 마는 둥 대충 인사를 했다. 임자순을 비롯한 사해표국 임원들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선주혁의 행동은 실로 무례하다 싶을 정도였다. 자칫 무림맹 순찰당주의 분노를 사는 것이 아닌가 싶어 걱정이 되는 것이다. 하나 서문도옥은 얼굴의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더욱 환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외려 안색을 딱딱하게 굳힌 것은 중손정이었다. 나이는 어려도 서문도옥은 자신의 상관. 강호초출의 애송이에게 무시를 당하는 것이 좋을 리 없었다. 그가 막 입을 열어 한 마디를 쏘아붙이려는 순간. 한희윤의 꽃잎과 같은 입술이 벌어졌다. "과연 도신의 후예다우시군요. 사부님의 성정을 그대로 물려받으셨나봅니다. 저는 한희연이라고 합니다. 도신의 후예를 뵙게 되어 실로 기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희연을 말을 들은 중손정은 입을 다물었다. 선혁이라는 자의 말에 발끈하는 마음이 들었으나 한희연의 말에 전설로 회자되는 도신의 괴팍한 성격을 기억해낸 것이다.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이라는 말과 가장 잘 어울리다던 도신이 아니던가? 그의 제자라면 저와 같이 행동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되고도 남을 일이었다. 더구나 이 자리는 도신의 후예가 무림맹에서 지목한 공적을 처리해 준 것에 대해 감사의 뜻을 표하고, 그와의 친분을 만들어 놓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일시적인 감정을 참지 못해 맹에서 의도하는 일을 망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한 편 선주혁은 한희연이 화사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말을 건네 왔음에도 굳은 얼굴을 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내심이야 한희연이 저와 같은 얼굴로 말을 걸어오는 것이 기쁘기 한량없지만 지금은 그것을 드러낼 때가 아니었다. "반갑소." 이번에도 선주혁은 가볍게 손만을 맞자고 아예 고개까지 돌려버렸다. 그런 선주혁을 보는 한희윤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스스로의 용모에 대한 자신감으로 오만해본 적은 없다. 하지만 소위 말하는 남자라는 자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아는 그녀였다. 무림맹주의 손녀라는 엄청난 신분과 남들보다 못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용모가 남자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오래도록 겪어왔던 것이다. 입을 열면 자신의 용모에 대한 찬사요, 건네 오는 말마다 애정표현이며, 일거수일투족이 구애(求愛)였다. 그것은 자신을 본 모든 남자가 일체의 예외도 없이 동일하게 보이는 태도였다. 심지어 모든 여인의 우상이나 다름없는 서문도옥조차도 자신에게는 은근한 감정을 실어 보내는 중이 아닌가? 마치 길가에 난 풀을 본 것처럼 고개를 돌려버리는 선주혁의 태도는 한희연에게 있어서는 색다른 경험이었다. 선주혁의 무성의한 답변으로 인해 다시금 실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당장이라도 서문도옥이나 한희연이 선주혁의 무례를 탓하고 한 바탕 난리를 쳐도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는 상황이었다. "아하하핫! 자, 자. 인사들을 나누셨으니 술이나 한 잔 합시다. 오늘은 선 표두의 임용을 축하하는 날이잖소?" 임자순이 중재에 나섰다. 싸늘한 분위기가 지속되어서 좋을 일이 없었다. 그가 술이 채워진 잔을 들자 표국의 임원들도 재빨리 술잔을 들 었다. 임자순이 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를 그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선 표두, 축하합니다." "축하합니다." 모두가 자신을 위해 축배를 들자 선주혁은 일단 잔을 들었다. 표두의 지위를 사양하는 것은 추후에 해도 될 일이었다. 따지고 보면 무림맹은 자신을 무림공적으로 지목한 상태. 이곳은 무림맹의 본거지나 다름없는 호남이었다. 자칫 정체가 발각이라도 나는 날에는 한 순간 끝장날 신세인지라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려는 것이다. "감사합니다." 선주혁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잔을 들어 술을 마셨고, 그와 같은 행동은 중인들에게 오만하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외려 역시 도신의 후예답다는 확신을 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몇 차례 순배가 돌자 한희윤이 다시금 선주혁에게 말을 건넸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선 대협께서는 도신의 진전을 어느 정도나 이으셨는지 궁금하군요." 한희윤의 질문은 모두의 의문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했다. 무림맹을 곤란하게 할 정도의 곤륜이마였다. 그들을 상대로 압도적인 무위를 선보였다고 하니 대충 짐작할만한 경지였지만 여전히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도신의 나이를 고려했을 때 말년에 가서야 제자를 얻었을 것이고 과연 선혁이라는 자가 어느 정도나 배울 수 있었는지 알고자 하는 것이다. 무인이기에 가지는 호기심이랄 수 있었다. 선주혁은 예기치 못한 질문에 당황했지만 겉으로는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지갑을 훔치고 태연함을 유지하는 것과 같았다. "사부님께는 몇 초식을 배웠을 뿐이오." "……!" 중인들은 혼란스러워했다. 선주혁이 앞서 보여준 일련의 행동은 겸손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기에 선주혁의 말은 해석하기 나름이었던 것이다. 스승인 도신의 무공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기 위해 몇 초식을 배웠다는 말을 하는 것일 수도 있고, 실제로 몇 초식만을 전수 받았는데 워낙 막강한 도신의 무공인지라 곤륜이마 정도를 상대할 수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즉, 선주혁의 말만으로는 그가 도신의 진전을 얼마나 이어받았는지 짐작키 어려웠다. "도신의 무공이라면 곤륜이마 정도는 몇 초식이면 충분하겠지요." 한희윤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선주혁의 말을 수긍해버렸다. 그러나 모두가 한희윤의 심정 같을 수는 없었다. "평소 흠모해마지 않던 도신 어르신이오. 같은 도(刀)의 길을 걷고 있는 만큼 무림사(武林史)에 도를 무기로 일획을 그으신 만큼 도신 어르신을 흠모하는 자는 차고도 넘칠 것이오. 하나 불과 몇 초식만으로 도신 어르신의 진전을 이었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지 않소?" 불쾌한 심사를 드러낸 것은 중손정이었다. 강호에서 그를 부르는 별호가 비천도객(飛天刀客)이다. 비천삽십육도법(飛天三十六刀法)이 그의 성명절기인데서 비롯된 별호이며 그가 도의 길을 추구하는 무인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도법에 있어 절정의 경지를 추구하는 그에게 있어 아무렇지도 않게 몇 초식만으로 도신의 진전을 이어받았다고 말하는 선주혁이 못마땅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더구나 무림맹에서 나온 자신들을 시종일관 무시하던 그가 아닌가? "어쩌겠소? 몇 초식밖에 배우지 못한 것을?" 선주혁은 퉁명스럽게 중손정의 말을 받았다. 뭘 따지고 드냐는 식의 말투였다. 중손정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 중손 모가 비록 일천한 무공으로 무림맹에서 과분한 직책을 떠맏고 있으나 도법을 추구하는 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였소이다. 고명하신 도신의 제자 분께서 과연 도에 대해 얼마나 깨달음을 얻었는지 궁금하구려." 중손정의 말에 중인들의 안색이 변했다. 그의 말은 명백한 도발이었다. 과연 도신의 제자가 어떤 실력을 가지고 있는지 눈으로 확인하겠다는 말이었던 것이다. "중손 대협." "부당주!" 한희연과 서문도옥이 거의 동시에 중손정을 만류했다. 중손정은 엄숙한 표정으로 한희연과 서문도옥에게 설명했다. "그저 도신의 후예께서 가진 실력만을 견식(見識)하고자 함일 뿐입니다. 제가 감히 위대한 도신의 후예께 도전을 함이 아니지요." 힐끗 선주혁을 보는 그의 시선과 말투에서 명백히 조롱조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중인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중손정이 비무를 통해 실력을 가려보고자 덤벼든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무림맹의 사절이나 다름없는 세 사람의 체면을 위해서라도 선주혁이 실력을 보여줄 것이라 생각했다. 오만한 자일 수록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즐기기 마련이었으므로. 선주혁이 커다란 눈을 반쯤 뜬 채 입을 열어 나른한 어조로 말했다. "내 도는……." 잠시간 뒷말을 끔으로 인해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는 순간 선주혁이 말을 이었다. "뽑히면 반드시 피를 봐야하오!" "……!" 노골적인 시위. 그리고 협박이었다. 달리 생각하면 가장 무인다운 말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광오하기 이를 데 없는 발언임에도 몇몇 표두들은 고 개를 끄덕였고, 한희윤도 눈빛을 빛냈다. 하나 선주혁에게 재주를 보여 볼 것을 권했던 당사자는 그럴 수 없었다. 중손정의 얼굴은 돼지 간 색깔처럼 변했다. 이 자리에 온 목적을 생각해 나름대로 양보를 한 그였다. 아무리 도신의 제자라 해도 새파란 애송이에 불과한 자였다. 곤 륜이마 정도는 자신이라 해도 어렵지 않게 물리칠 자신이 있는 중 손정이었다. 곤륜이마를 패퇴시켰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우습게 볼 무림맹이 아니다. 중손정은 그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당장이라도 도를 뽑아들고 실력을 겨뤄 보고픈 마음뿐이었다.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애송이에게 쓴 맛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 다. 하나 지금은 자신의 행동이 곧 무림맹의 뜻을 전하게 되는 자리 였다. 도신의 후예를 자극하면 무림맹과의 사이는 완전히 틀어질 것이 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애초에 이곳을 방문한 목적과도 달 랐다. 더욱이 순찰당주와 한희연이 지켜보고 있는 데서 경거망동(輕擧 妄動)하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그는 결국 푸들거리는 얼굴에 힘을 준 다음 고개를 돌려버렸다. 중손정이 포기하는 모습을 보이자 선주혁은 내심 안도했다. 그가 죽자고 덤벼들면 어떻게 하나 하고 걱정하는 중이었기 때 문이다. 이미 나름대로 자신의 무공에 대해 자신감을 갖고 있는 선주혁 이다. 중손정과 싸워 패하는 것이 두려운 게 아니었다. 서문도옥을 비롯한 이 자리의 몇몇은 분명한 고수다. 용대명처럼 자신의 도법을 도신의 것이라 착각하는 것이 아니라 한 눈에 가짜임을 가려낼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그야말로 답 안 나오는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그래서 결국 포커 칠 때의 블러핑, 즉 뻥카를 쳐 본 것인데 제 대로 먹힌 것이다. 선주혁은 안도의 마음에 절로 미소를 지었고, 타인의 눈에 그의 미소는 중손정에 대한 조소와 경멸로 받아들여졌다. "선 대협께서는 진정 무인으로서의 자부심이 가득하시군요. 이 서문 모는 크게 감명했소이다!" 서문도옥은 중손정이 노기를 억누르는 것을 보면서도 선주혁의 얼굴에 금칠을 했다. 사해표국의 임원들은 하해(河海)와 같은 그의 아량에 또 한 번 감탄을 해야만 했다. "무례하게 선 대협의 경지를 엿보고자 했음을 사죄드리는 의미 에서 이 서문 모가 술 한 잔을 올리리다." 서문도옥은 빙글빙글 미소를 지으며 술이 담겨진 주담자를 들었 다. 서문도옥과 선주혁은 표국주인 임자순의 사이에 두고 있는 상 황.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이지 않으면 술을 따르기가 곤란한 거리였다. 그런데도 서문도옥은 자리에서 일어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의아해 하는 그 순간. 서문도옥이 든 주담자의 주둥이에서 투명한 술이 솟구쳐 올라오 는 것이 아닌가. 중인들의 의아함은 경악으로 바뀌었다. 내력을 이용해 주담자 안의 술을 뿜어내어 선주혁의 술잔으로 보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한 방울의 술도 튀기지 않고 느릿하게 뻗어져 나가는 술. 그것은 이십 대에 불과한 서문도옥의 내력이 자신들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경지에 올랐음을 시사하는 단면이었다. '어쭈? 내 앞에서 재롱을 떨어보겠다는 거지?' 선주혁은 잔이 채워지는 것을 보고 발끈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쯤 되면 잠자코 있을 수만은 없었다. 다행이 지금은 도법을 펼쳐 보일 필요가 없는 상황. 머뭇거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선주혁도 주담자를 들었다. "사죄를 받아들이겠소." 선주혁의 말에 서문도옥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형식적인 사죄였을 뿐인데 그것을 받아들이겠다는 말은 아무리 심기가 깊은 서문도옥이라 해도 참기 힘든 모욕이었다. 보란 듯 실력을 드러낸 직후이기에 더욱 그랬다. 그의 얼굴이 붉어질 그 순간 선주혁의 주담자에서도 술 줄기가 뻗어 나왔다. 아니 뻗어 나왔다고 생각하는 순간 자취를 감췄다. 너무나 순간적인 일이라 별빛이 한번 반짝이고 마는 것과 같았 다. 여기저기서 웃음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숨을 죽이거나 표정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숙이는 현상이 벌어졌다. 도신의 후예가 서문도옥을 흉내 내려다 내력이 부족하여 중도에 실패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문도옥만은 그럴 수가 없었다. 자신의 잔에 가득 채워진 술을 확인한 것이다. 주담자를 빠져나온 술 줄기가 잔에 채워지는 것조차 제대로 확 인할 수 없었다. 투명한 술이 빛에 반사되어 반짝였다고 느낀 순 간 어느새 잔은 채워져 있는 것이다. 사술이라 해도 믿어질 정도의 속도로 술 줄기가 날아와 잔을 채 우고 사라진 것이다. "자, 잔을 채웠으니 한 잔 합시다." 선주혁이 자신의 잔을 들어 서문도옥에게 술을 권하자 사람들은 애써 표정을 추스르다가 어리둥절해졌다. 방금 전 술을 따르려다가 실패를 해 놓고 잔을 채웠다고 하는 선주혁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순찰당주?" 멍하니 술잔만을 바라보는 서문도옥을 선주혁이 다시 불렀다. "아! 네." 평소의 서문도옥을 아는 자라면 이와 같은 상황을 절대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타인이 보는 자리에서 실태를 보이는 자 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서문도옥 스스로도 그와 같은 사실을 상기하고 재빨리 잔을 들 었다. "……!" 그가 잔을 드는 순간 중인들의 표정에는 경악의 감정이 떠올랐 다. 서문도옥이 다급히 잔을 드는 바람에 잔이 약간 흔들렸고 가득 채워진 술이 살짝 넘치는 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결국 도신의 후예는 서문도옥을 흉내 내다가 실패한 것이 아니 라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할 귀신같은 수법으로 그의 잔을 채웠다 는 뜻이었다. 그들은 애써 웃음을 억누르는 티를 냈던 자신들의 부주의함을 떠올리고는 정색을 했다. 무림맹 순찰당주인 서문도옥은 이미 강호에 정평이 난 고수. 표 정이 편치 않은 것으로 보아 그 역시도 당황할 정도의 실력을 가 진 선주혁이란 말일 진데 행여나 노여움을 살까 저어하는 것이다. '쨔사, 맛이 어떠냐? 네놈의 음흉한 속셈을 나는 알고 있다! 그 러니 어설프게 엉겨볼 생각을 치우라고.' 선주혁은 당황하는 서문도옥의 표정을 즐기는 중이었다. 이후 서문도옥은 시종일관 사무적인 태도를 유지하며 대화를 이 끌어갔다. 무림맹을 대신하여 옥용검마를 처단해 준 것에 대한 감 사와 향후 돈독한 친분관계 형성을 위해 함께 노력하자는 내용이 었다. 선주혁은 그런 서문도옥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도 가급적 한희윤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자신이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않을수록 답이 나올 확률이 높아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Vol 9. 소제목 미정 사해표국은 갑자기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날아드는 배첩 때문이었다. 모두가 사해표국 총단의 방문을 예고하는 배첩으로 평소라면 감 히 쳐다보지도 못할 거대문파의 요인들이 친히 사해표국을 방문하 겠다는 통보였다. 표국주인 임자순은 연신 희희낙락이었다. 본래 하나의 문파가 운영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 다. 그렇기에 무림의 각대문파는 강호에서 여러 사업을 하기 마련 이며 개중 대표적인 것이 각 지역의 무관(武館)과 표국이랄 수 있 었다. 각 파의 속가제자들이 강호에 나가 무관을 차리고 표국을 운영 하며 일정금액을 본산(本山)으로 보냄으로서 문파의 운영자금을 마련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사해표국은 불리한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임자순이 거대문파의 제자가 아닌 탓에 그 후광의 혜택을 받지 못해왔던 것이다. 타고난 수완으로 여러 거대문파와 돈독한 유대관계를 맺어 옴으 로서 사해표국의 명성을 드날려왔지만 늘 아쉬운 바가 있었다. 막 대한 은자로 성의를 보여야 했기 때문이다. 한데 도신의 후예가 사해표국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외려 저들이 친분을 맺어보고자 덤벼드는 형국이니 임자순의 입이 벌어지는 것 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마냥 웃음만 나올 일이 아니었다. 도신의 후예. 선혁이라는 복덩어리가 총단에서 해야 할 일은 산더미 같이 많 았다. 중원 전역의 각대문파에서 지금 그를 만나기 위해 호남으로 몰려온다고 봐야했다. 그런데 그 복덩어리가 지금 말도 안 되는 고집을 피우고 있었 다. 당장이라도 표행에 나서겠다는 것이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만류를 하고 만류를 하는 데도 소용이 없었 다. 나중에는 표행에 나설 수 없다면 당장 표국을 그만 두겠다는 말까지 나왔다. 중경지부의 공 노인과 쟁자수인 서영욱이라는 신참이 아니었으 면 벌써 그만두고도 남았을 일이었다.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것 같 은 기세의 그를 공 노인과 서영욱이 달래고 얼러 붙잡아 두고 있 었던 것이다. 임자순으로서는 골치가 아닐 수 없었다. 각지에서 온 배첩을 돌려보내 만날 수 없다고 말할 처지가 못 됐다. 자칫 예의를 갖춰온 그들의 심기를 불쾌하게 만들 수도 있는 일 이었다. 대체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해야할지 모르는 그는 손가락으로 관좌놀이를 누르는 게 다였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달래고자 하는 것이다. "국주님!" 총표두인 함탁오(咸卓吾)였다. 평소 서두름이 없고 침착한 그의 음성이 한껏 고조되어 있었다. 임자순은 심상치 않은 그의 표정을 보고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무슨 일인가?" 당연히 뭔가 문제가 생겼다고 단정짓는 임자순이었다. "골치 아픈 일이 생겼습니다." "그게 무어냐고 묻고 있지 않은가?" 선혁이라는 자로 인해 골치를 썩고 있던 임자순이었기에 그의 음성에는 다분히 짜증이 섞여 있었다. "선 표두를 만나야겠다고 강짜를 부리는 자가 나타났습니다." 함탁오의 말에 임자순의 미간이 크게 찌푸려졌다. 물론 도신의 제자에 관한 일은 표국의 중흥과 관련된 막대한 사 안이긴 하다. 하지만 이런 시시콜콜한 일까지 굳이 보고를 해야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대충 쫓아 보내게." 임자순은 가볍게 답하고 아까의 고민을 이어가려 했다. 하지만 함탁오가 물러서지 않았다. 그가 머뭇거리는 것을 본 임자순은 왜 안가냐고 물으려다 말았다. 평소 자신이 알고 있는 함탁오답지 않은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자네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사람이란 말인가?" 임자순이 불안한 음성으로 물었다. "찾아온 자가 분광도(分光刀)입니다." "도절(刀絶) 주백광(周伯光)이?" 임자순은 벌떡 일어났다. 분광도 주백광. 분광삼십육절(分光三十六絶)이라 불리는 희대(稀代)의 도법으로 명성을 떨치는 절정의 고수. 강호사절(江湖四絶)중 도절이라 불리는 주백광이 찾아온 것이다. "그, 그가 왜 여길 왔단 말인가?" 임자순의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도신의 후예를 만나야겠다고 고집입니다. 배첩을 전하고 기다려 줄 것을 요구했지만 막무가내입니다." 함탁오는 난감한 표정이었다. 말로 타일러 보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것은 임자순도 잘 알고 있었다. "설마…… 선 표두와 겨뤄보겠다는 것은 아니겠지?" "저로서는 저의를 짐작할 수가 없습니다." 함탁오는 고개를 저었다. 임자순은 그런 함탁오의 말을 쉽게 수긍했다. 분광도 주백광의 속내를 짐작할 자가 어디에 있겠는가? 엄청난 무위만큼이나 유명한 것이 그의 제멋대로인 성격이었다. 오죽하면 소독고(小獨孤)라 불리겠는가. 소독고란 천하에서 묶어둘 게 하나도 없다던 도신 독고전륜과 비교하는 말이었다. "그가 고집을 피우면 돌려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알려져 있지 않은가?" "네. 결국 선 표두를 만나지 않으면 꼼짝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표국을 발칵 뒤집고도 남을 자지요." "끄응……." 급기야 임자순의 입에서 신음성이 나왔다. 안 그래도 골치가 지끈거리는 판에 자타가 공인하는 골칫덩이가 표국에 찾아든 것이다. "달리 방법이 없으니……." 임자순은 한숨을 쉬듯 작은 목소리를 흘렸다. 2 단풍으로 물들어가는 정원수들이 가득한 중심에 서 있는 운치 있는 정자. 그 안에 있는 세 명은 주변의 풍광을 즐길 마음이 전혀 없는 듯 했다. 질 좋은 비단 장포를 입은 머리가 희끗한 초로의 사내는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이었고, 위맹한 인상을 주는 중년인의 얼굴에서도 초조함이 역력히 드러났다. 두 사람은 연신 정자 안에 삐딱하게 앉아 있는 사내의 눈치를 살피는 중이었다. 사내는 한 눈에도 나머지 두 사람과 구분될 외양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로 틀어 올려 묶은 머리는 굵은 올 탓인지 삐죽이며 솟아 올라있었고, 짧은 수염이 얼굴을 거뭇하게 덮고 있었다. 송충이 같은 눈썹 아래로 두 개의 호목(虎目)이 빛나고 있었으며 선 굵은 코가 우뚝 솟아 얼굴의 중심을 잡고 있었다. 두꺼우면서도 다부져 보이는 입술이 일자(一字)로 굳게 닫혀 있었고 각진 턱이 사내다움을 물씬 풍겨냈다. 유난히 넓은 어깨와 범처럼 날렵한 허리는 중년의 나이임을 짐작치 못할 정도였다. 본래는 검은색이었을 흑의는 오랜 풍상으로 인해 그 색마저 바랬지만 어쩐지 사내가 입고 있으니 자연스럽기 그지없었다. 그의 앞 탁자 위에는 끝이 뭉툭 잘려나가 직각을 이루고 유독 도신(刀身)이 넓어 보이는 도 하나가 놓여 있었다. 얼핏 봐서는 팽조(烹調: 요리사)들이 주로 사용하는 주방용 칼을 길게 늘여 놓은 모습이었다. 그 도는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것처럼 보였지만 조금만 눈썰미가 있는 자라면 언제든 가장 빨리 도병(刀柄: 도의 손잡이)을 잡아 발도(拔刀)하기에 가장 적합한 위치에 놓여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주 대협……, 차라도 한 잔 하시면서 기다리시지요." 임자순은 마치 석상처럼 고요히 앉아 있는 주백광을 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이곳 사해표국의 후원은 임자순의 명에 의해 폐쇄되다시피 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주백광의 성정을 고려해야만 했다. 행여나 도신의 후예와 도의 경지를 겨뤄보겠다고 설쳐댈 수도 있다. 아무리 도신의 후예라지만 이미 십여 년 전부터 도절로 강호가 비좁다 여기던 주백광을 상대하기엔 무리라 생각한 임자순이었다. 만약 선주혁이 도절에게 패했다는 소문이 돈다면 앞으로 사해표국이 얻게 될 많은 것에 손해가 생길 것은 자명한 일. 임자순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것이다. 주백광이 느릿하게 고개를 놀려 임자순을 바라봤다. 그의 형형한 안광에 임자순은 저도 모르게 목이 움츠려드는 것만 같았다. '무슨 눈빛이……?' "대체…… 도신의 후예는 언제 오는 것이오?" 묵직한 저음의 목소리에는 힘이 넘쳐흘렀다. 임자순은 애써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 하하핫, 선 표두는 곧 올 것입니다. 그러니 천천히 차라도 드시는 게……." 임자순의 말이 계속되고 있는 와중에 주백광은 고개를 돌려 버렸다.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다는 식이었으나 임자순은 감히 노여움을 표출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행여나 주백광의 성격을 자극했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라서였다. 주백광의 행동에 안색이 변한 것은 총표두인 함탁오였다. 그는 무인보다는 상인에 가까운 임자순과는 달리 전형적인 무골(武骨)이다. 주백광과 자신의 실력 차이가 명확함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모시는 상관을 모욕하는 것을 보고 미소를 짓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함탁오의 안색이 굳어가는 것을 본 임자순이 재빨리 눈짓을 했다. 참으라는 말이었다. 잠시 후 선주혁이 공 노인의 안내를 받아 후원의 정자에 도착했다. 그의 얼굴에는 못 마땅한 기색과 어딘가 불안한 표정이 역력히 드러났다. 선주혁의 등장으로 인해 표정이 변한 것은 주백광 역시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날카로운 안광을 뿌려대며 나타난 청년을 살폈다. 생김새, 걸음걸이, 그리고 박도를 쥐고 있는 자세까지. 그리고 주백광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실망이었다. 도신의 후예가 젊다는 것은 들었지만 이는 완전히 애송이가 아닌가? 그가 나타났다는 소문에 흥분에 겨워 한 달음에 달려왔건만 도를 들고 있는 자세조차 갖추지 못한 모습에 허탈한 심정까지 들 정도였다. 선주혁은 대충 하는 둥 마는 둥 임자순과 함탁오에게 인사를 건네고 주백광의 맞은편에 앉았다. "하하하! 어서 오시오, 선 표두. 이분은 분광도 주백광 대협, 강호에 도절로 널리 알려지신 분이시오. 선 표두께서 본 표국에 있다는 소문을 들으시고 멀리서 찾아오셨지요." "선 혁입니다." 선주혁은 앉은 자세에서 포권을 취했다. 순간 주백광의 눈이 반짝였다. 그의 눈이 바라보는 것은 선주혁의 손이었다. 길고 가느다란 손. 도를 연마하기에는 적합한 손모양이 아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도를 연마한 손모양이 아니었다. 검과는 달리 도는 베기가 위주였다. 어릴 때부터 수련을 쌓아 내력을 사용하는 도법을 익혔다고는 해도 강맹한 힘을 실어 베기 위해서는 손이 저래서는 안 됐다. 유약해 뵈는 긴 손가락은 변화무쌍한 환검(幻劍)에는 유리할지언정 위맹한 위력을 내는 도법에는 외려 불리하다. 오랜 세월 전심으로 도를 수련해왔다면 손가락의 마디가 굵어져 한 눈에 봐도 드러나기 마련. 도신의 후예라는 자의 손에서는 결코 그것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대가…… 도신의 후예인가?" 마치 뇌전이 쏘아지는 듯한 눈빛을 마구 뿌리며 주백광이 물었다. 선주혁은 난데없는 질문에 내심 뜨끔했지만 시치미를 뚝 떼고 말했다. "먼저 인사부터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선주혁의 반문에 주백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새파란 애송이가 도절에게 반말을 건네고 있는 것이다. 임자순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가 공 노인의 소매를 끌어당기며 귓속말로 물었다. "선 표두에게 도절에 대해 설명한 거요?" 공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는 중에 분광도 주백광의 성격에 대해 선주혁에게 자세히 설명했기 때문이다. 주백광의 눈썹 끝이 작은 움직임을 보였다. 실룩실룩 끝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다. "평소…… 내가 가장 존경해왔던 분이 도신 어르신이다." 주백광이 난데없는 말을 꺼냈다. "한 자루 도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알려지신 분. 검은 계집 따위나 쓰는 거라 공공연히 말씀하셨던 분. 그분의 무공, 그분의 호쾌한 성품은 나를 감동시켰다. 그분의 발자취를 뒤쫓고자 했다." "……?" "그렇기에 세상 그 누구도 내 앞에서는 그분에 대해 함부로 언급할 수 없다!" 말을 마친 주백광의 몸에서 패도적인 기세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주변의 공기가 일그러지는 것과 같은 느낌. 함탁오는 저도 모르게 내력을 돋우었고, 임자순을 보호하려 들었다. 하나 전백광의 몸에서 일어난 기세는 선주혁 한 명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 그 외의 사람들에게는 약간의 긴장만을 유발시킬 뿐 그 어떤 위험한 느낌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선주혁은 달랐다. 마치 날카로운 하나의 도가 자신을 노리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거칠고 패도적인 기운이 주백광에게서 폭사되어 나와 피부가 따갑게 느껴질 정도였다. 선주혁이 자신이 쏘아 보낸 무형의 기운을 감당해내자 주백광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완전 엉터리는 아니란 말인가? 그렇다면…….' 주백광은 선주혁을 향해 쏘아 보내는 무형지기를 북돋았다. 선주혁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기운이 변화하는 것을 느꼈다. 조금 전까지의 폭압적인 기운과는 달랐다. 아까는 마치 거대한 도끼가 정수리 끝에 올려진 듯한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예리한 도인(刀刃)이 목 위에 얹어진 듯 했다. 손가락 하나라도 잘못 움직인다면 탁자위에 놓인 도가 번개처럼 자신의 목을 벨 것만 같았다. 그리고 숨 쉬기조차 곤란한 압박으로 짓눌러왔다. 고조된 긴장감이 그의 이마에 식은땀을 만들어냈다. 선주혁은 황급히 흡성대법을 운공 했다. 상대의 기운에 맞서 버티는 것이 아니라 순응하려는 것이다. 과연 그의 선택은 옳았다. 당장이라도 목이 잘려나갈 듯한 환상과 숨쉬기조차 버거운 압력이 한결 가벼워졌다. 일단 위기에서 벗어나자 선주혁은 주백광의 눈치를 살폈다. 다짜고짜 무형지기를 쏟아내는 것 하며, 그가 읊은 말이 아무래도 자신이 가짜라는 것을 눈치 챈 것 같았다. '하지만 어떻게……?' 선주혁은 공 노인의 설명이 없어도 주백광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읽었던 책의 내용 중에서는 주요 캐릭터였던 것이다. 무협지에서는 툭 하면 나오는 캐릭터들이 있다. 무공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하지만 아예 뇌가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캐릭터 들이다. 아니, 꼭 어느 한 순간에만 바보가 되는 캐릭터라는 것이 옳을 것이다. 평소에는 멀쩡한 모습이므로.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주인공의 수하가 되거나 형, 동생을 관계를 맺는 자들이 바로 대표적인 사례다. 읽을 때는 그럭저럭 봐 줄만하지만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런 면에서 주백광은 그런 덜떨어진 캐릭터들과 유사하면서도 다른 면이 있었다. 지나치게 극단적인 성격이 정말이지 소설 속에나 나올 법한 인물이긴 하지만, 무뇌아처럼 주인님, 형님하고 주인공에게 달려들지는 않았던 것이다. 사형과 돈독한 우애를 나누기는 하지만 말이다. 사실 말하자면 선주혁이 소설에서는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캐릭터 중 하나이기도 했다. 선주혁이 주백광을 마음에 들어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단순하고 과격한 그의 성품 탓이었다. 평소 주백광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그의 신조가 좋았다. 친구 아니면 개새X! 약간은 유약한 듯한 자신의 성격이 마음에 들지 않는 선주혁이기에 그런 극명한 구분을 통해 삶을 살아가는 주백광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그런 주백광이 지금 자신을 의심하고 있는 중이었다. 다시 말하면 개새X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려는 것이다. 선주혁은 더욱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주백광은 계속해서 놀라는 중이었다. 한낱 애송이에 불과해 과연 도신의 후예가 맞을까 의심했었다. 그런데 자신의 무형지기에 꿋꿋이 버티는 것이 아닌가! 내공이 높은 것은 물론 무공이 일정경지 이상이라는 의미였다. '정말 도신의 후예란 말인가?' 주백광은 더욱 내력을 북돋았다. 이번에야말로 진짜 도신의 진전을 이은 자인지 확인해 보려는 것이다. 선주혁은 주백광의 몸에서 뻗어 나오는 올올의 기운이 거세고 날카로워지는 것을 느꼈다. 무형의 힘이 팔과 다리를 옭아매고 숨쉬기 버거운 압력으로 조여오기 시작했다. 선주혁은 그 모든 기운에 순응하기 위해 노력했다. 주백광의 눈에 의혹이 떠올랐다. 단지 선주혁이 자신의 무형지기를 감당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도신의 제자라면 압도적인 힘으로 되처 오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마치 무당 무공마냥 부드럽게 자신의 무형지기를 부드럽게 받아 넘기고 있는 것이다. '어디?' 한쪽 눈썹을 살짝 꿈틀거린 주백광의 손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상대는 어린 나이를 한참이나 극복한 내력을 가지고 있었다. 단순히 무형지기로 억압하는 것은 무리라 결론지었다. 도신의 후예임을 확인하는 가장 빠른 방법. 그것은 직접 도를 마주해 보는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주백광의 손이 탁자 위의 도병을 잡아가는 순간, 선주혁의 손도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백광은 그 모습에 어이없어했다. 분광도법은 천하에 비교할 바가 없는 쾌도술의 절정이었다. 몸을 뒤로해 발도(拔刀)에서 비롯된 공격을 피해내기도 바빠야 하거늘 마주 뽑으려 하다니. 애송이의 건방진 행동에 코웃음을 터뜨리려는 찰나. 주백광의 부리부리한 눈이 있는 대로 크게 떠졌다. 애송이의 손은 자기가 도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녀석은 손을 앞으로 뻗어왔다. 그것도 전광석화(電光石火)와 같은 움직임으로. 그리고……. 터억. "이, 이럴 수가……!" 주백광의 입에서 신음성과 같은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막 도를 뽑아 앞으로 내밀려는 자신의 손. 그것을 애송이의 손이 막아서고 있었던 것이다. 주백광은 천하제일의 쾌도술이라 일컬어지는 분광삼십육절로 명성을 떨쳐왔다. 그런데 채 도를 뽑기도 전에 상대에게 움직임을 봉쇄당한 것이다. 그것으로 주백광은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뽑아가던 팔에 힘을 주어 상대의 손을 밀쳐내고 도를 휘두를 수는 있다. 하나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급작스럽게 도를 뽑아가던 손을 미리 봉쇄할 정도라면 상대의 쾌도술은 이미 자신을 넘어섰다고 봐야했다. 도신과 상대해도 쾌도술에 있어서만은 자신이 아래가 아닐 것이라 자부하던 주백광이었다. 한데 아예 도를 뽑아들지조차 못하다니! 도를 뽑고자 한 것은 자신이었으니 움직임의 시작도 자신이 빨랐을 것이다. 결국 상대는 자신보다 늦게 출발해 먼저 도착했다는 말이었다. 주백광이 받은 충격은 실로 작은 것이 아니었다. 이는 그가 선주혁에 대해 아는 바가 없기 때문이었다. 선주혁은 폭출되다시피 하는 주백광의 진기를 그대로 느낄 수 있었고, 발도 이전의 진기흐름을 감지하고 있었다. 그러니 주백광에 비해 손을 늦게 움직인 것이 아니었다. 또한 선주혁이 손을 내민 방법은 쾌속함에 있어 비할 데가 없는 북두폭렬장의 수법. 단지 움직임만으로 따졌을 때는 주백광에 뒤질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경악을 그대로 드러낸 주백광의 시선 속에서 선주혁이 씨익 하고 미소를 지었다. "내겐 도신을 언급할 자격이 있지. 안 그래?" "……." 선주혁의 오만한 어조에도 주백광은 아무 말 하지 못했다. "아직도…… 날 시험하고픈 마음이 있어?" 선주혁은 주백광의 손을 놓으며 물었다. 주백광은 여전히 놀란 표정 그대로 머리를 저었다. 사실 도를 뽑아 승부를 내보고픈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승부를 낸다면 결코 진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눈앞의 애송이, 아니 도신의 제자가 제 어미 뱃속에서부터 무공을 익혔다 할지라도 자신의 상대는 아닐 것이다. 하나 주백광이 원했던 것은 생사를 결하는 승부가 아니었다. 진정 도신의 제자인가를 확인하고픈 것뿐이었다. 그리고 상대는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 보였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알고자 하던 것을 알았으면 그뿐. 임자순이나 함탁오가 이 승부를 보고 무엇을 생각하든, 강호에 소문이 어떻게 나든, 그 따위 것에 신경을 쓸 주백광이 아니었다. "좋군, 좋아! 역시 도절 주백광다워." 선주혁은 일부러 목소리에 힘을 주어 과장되게 감탄하는 표정을 지었다. 내심으로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행여 그가 도로 실력을 가늠해 도신의 후예인지를 따지고 들까 염려했던 것이다. 도절 정도의 실력이라면 단박에 자신이 가짜임을 알아챘을 것이니 도를 뽑는 것을 막은 것은 실로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스스로 만족해했다. "사…… 부님을 존경해왔다고?" "그래." 선주혁의 반말이 못마땅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방금 전 선주혁의 움직임 때문에 받은 충격이 가시지 않았기 때문일까? 주백광의 말투는 그다지 곱다고 볼 수는 없었다. "그렇군. 그렇다면 내 친구가 될 자격이 있지. 어때? 이참에 나와 친구가 되는 건?" "친구?" 주백광의 한쪽 눈썹 끝이 올라갔다. 인정할 만큼의 무공을 지닌 애송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자신과의 나이차이가 적지 않은데 친구 운운하는 것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내가 손해지." "……?" "배분으로 따지자면 내가 더 높지 않겠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도신의 배분을 고려한다면 이 애송이는 강호 최고의 어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니까. "정해라! 내 앞에서 도를 뽑고도 살아 있는 것은 내 친구뿐이니까." "……!" 주백광의 눈썹이 다시 움직였다. 아까와는 다른 의미에서 놀라는 것이다. "그게 무슨 말이냐?" "간단하지! 내게 있어서 사람들이란 친구이거나 적이거나 둘 중 하나일 뿐! 같은 도를 쓰는 입장에서 네게 선택할 기회를 준다는 말이다." 스스로 생각해봐도 어딘가 억지스러운 대사였다. 하지만 선주혁은 놓치지 않았다. 주백광의 표정에 반가움이 서리는 것을. 그리고……. "푸하하하하하핫!" 주백광은 난데없이 대소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좋아, 좋아!" 좋다는 말을 연신 반복하며 웃던 주백광이 갑자기 정색을 했다. 그리고는 언성을 높여 소리를 질렀다. "점잖은 체 속내를 감추는 정파 놈들!" '응? 이 인간이 갑자기 미쳤나? 왜 허공에 대고 소리를 빽빽 질러대는 거야?' "흉심을 가슴에 품은 사파 놈들! 모두가 마음에 안 들기에 나 주백광은 홀로 천하를 주유했다!" 그는 안광을 빛내며 선주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불혹을 넘겨 처음으로 친구가 될 만한 자를 만났으니 그 아니 기쁠쏘냐? 친구가 아니면 적이라……! 친구가 아님 개새X라고 생각하는 나와 뜻이 통하고, 발군의 무공까지 갖췄으니 이 주백광이 어찌 망년지교(忘年之交)를 마다하겠는가?" '역시! 단순, 과격의 극치였어! 제대로 먹혔는걸!' 선주혁은 자신의 시도가 성공했음에 내심 크게 기뻐했다. 책을 읽으며 유일하게 호감을 가졌던 주백광이 아니던가? 시원스럽다 못해 호쾌한 그의 거침없는 성격을 흉내 내어 본 것이 적중한 셈이었다. "하하하핫, 좋아! 그럼 이제 친구로 여기지." 선주혁은 짐짓 호탕한 척 한 마디를 던지고 손을 내밀었다. 주백광도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선주혁의 손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나 주백광은 자네 선……, 선……." "선혁!" "아, 미안! 나 주백광은 자네 선혁을 친구로 맞이하겠네. 천지신명께 맹세코 자네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니 그 신뢰는 금강석보다 단단할 것이며, 자네를 내 목숨보다 소중히 여길 것이니 우리의 우정은 청산(靑山)보다 푸르른 채 지속될 것이네. 내 맹세는 저 두 사람이 증인이 되어 줄 걸세." 선주혁을 똑바로 쳐다보던 주백광이 임자순과 함탁오에게 시선을 던졌다. 두 사람은 너나할 것 없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증인이 될 것을 수락하는 것이다. 선주혁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주백광의 성격을 잘 아는 그였다. 이렇게 맹세를 한 이상 자신이 도신의 제자가 아닌 것을 안다 해도, 또한 자신이 전 무림이 공적으로 여기는 백발귀마임을 알아도 자신을 친구로 여길 것이었다. 과정이야 어쨌건 진실 된 친구가 생겼다는 사실이 선주혁을 기쁘게 했다. "하하핫, 친구가 되기로 했으면 그걸로 끝이지. 새삼 증인은 무엇이고, 맹세는 또 뭐란 말인가!" "푸하하하핫! 자네 말이 옳아. 이 주백광이 오늘에서야 진짜 남자를 만났으니 실로 감탄할 뿐이네." 주백광은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며 기쁜 표정을 지었다. "자, 그럼…… 새 친구가 생겼으니 축배를 들어야지. 안 그래?" "당연히 들어야지. 내 자네와의 우정을 위해 오늘 술 열 단지를 비우지 않으면 주백광이 아닐세. 푸하하하핫!" 한바탕 난리가 일어날 것을 염려해 벌벌 떨던 임자순과 함탁오였다. 그러데 난데없이 사내간의 진한 우정을 나누는 자리로 변해버리자 어리둥절하면서도 기쁘기만 했다. '선 표두가 도절과 우정을 맺었으니 그야말로 호랑이가 날개를 단 셈이구나. 이제 사해표국의 앞날에는 축복만이 가득한 거다.' 임자순은 두 손을 맞잡고 기뻐하는 주백광과 선주혁을 위해 술을 시키고 안주를 만들라 부산을 떨기 시작했다. Vol 10. 소제목 미정. 주백광과의 술자리는 길고도 길었다. 선주혁의 요구에 의해 함께 했던 공 노인, 서 영욱, 임자순까지 모두가 지쳐 숙소로 돌아간 후에도 술자리는 계속 되었다. 주백광과 함탁오는 본래부터 엄청난 주량을 자랑했었고, 선주혁은 오기와 객기, 그리고 괜한 승부욕에 억지로 버티는 중이었다. 동이 터오는 것을 보면서도 주백광은 도무지 술자리를 파할 생각을 하질 않았다. '이거야…… 밑 빠진 독이군.' 선주혁은 친구가 생겼다는 기쁨에 주백광을 상대하긴 했지만 점차 지쳐가고 있음을 느꼈다. 심후한 내력으로 버티지 않았다면 벌써 탁자에 머리를 박았을 터였다. "이보게, 친구. 오늘은 여기까지만 함세." 결국 선주혁은 자리를 파할 것을 제안했다. "무슨 소리야? 이제 막 시작인데." '커억! 차라리 날 죽여라! 이거 괜히 친구하자고 한 거 아냐?' 주변이 훤히 밝아오는 데도 술잔을 채우는 주백광을 보며 선주혁은 은근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매일 같이 이렇게 술을 먹다간 몸이 남아나질 않을 것이기에. "자, 자! 한 잔 더 따라보게." 주백광이 잔을 내밀자 선주혁은 주담자를 들었다. 그가 술을 따르려는 순간.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함탁오가 탁자에 얼굴을 들이 박았다. 드디어 뻗어버린 것이다. "흠…냐. 수, 술 더……."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다 코를 골아버리는 함탁오. 평소 끝없는 주량을 자랑하던 그였으나 계속 되는 폭음을 이기지는 못했던 것이다. 쓰러진 함탁오를 바라보는 주백광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실내에는 주향이 가득했다. 선주혁의 눈에서 이채가 발했다. 주백광이 진기를 운용함과 동시에 주향이 짙어진 것이다. '호오! 저런 신기한…!' 무협지에서 가끔 보던 장면을 실제로 본 선주혁은 호기심에 눈빛을 반짝였다. 주백광은 내공을 이용해 술 기운을 몸 밖으로 배출하는 것이다. 잠시 후 선주혁은 주백광이 했던 방법으로 자신도 주기를 배출했다. 머리 꼭대기까지 치밀었던 취기가 한 순간에 사라졌다. '브라보! 이거 죽이는데?' 재미난 수법을 알게 됐다고 기뻐하는 중 주백광이 무거운 어조로 말을 시작했다. "자, 친구! 이제 솔직하게 대화를 해 보세." "……?" "아까는 자네 손의 쾌속함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네만……. 내 아무리 생각해도 자네의 손은 도를 익힌 자의 것이 아닐세." '이런! 도를 익힌 자는 손 모양도 다른 거야? 그런 거야?' "이제 듣는 사람도 없으니 솔직히 말해주게. 친구의 진정한 신분도 몰라서야 되겠는가?" 주백광은 선주혁의 눈을 정면으로 직시한 채 질문을 던졌다. 선주혁은 짧은 시간 갈등했다. 주백광의 성격에 대해 확신을 갖고 있기는 했지만, 그가 정말로 자신의 정체를 알고도 친구로 남을 것인지 알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잠시 뿐이었다. 소설 속에서 읽었던 주백광의 시원한 성격이 마음에 들었을 뿐이다. 그와 인연이 없는데 자신만 좋다고 친구가 될 수는 없는 법. 또한 진실을 알게 된다 해도 그것을 소문내고 떠들어댈 주백광이 아니라는 것만은 명확히 알고 있었다. 결국 선주혁은 모든 것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하…! 정말이지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군. 무림을 떠들썩하게 만든 백발귀마가 내 친구가 되다니…. 허헛!" 주백광은 실로 기가 막히다는 표정이었다. "물러도 좋네." 이번에는 선주혁이 주백광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물었다. "물러? 뭘?" "내 친구가 되기로 한 것 말일세. 자넨 도신의 제자와 친구가 된 것이지 무림공적과 친구가 되겠다고 맹세한 게 아니니 말일세." "푸하하하하하핫!" 주백광은 고개까지 젖히고는 큰 소리로 웃었다. 2 "정말 인간들이 아니군." 임자순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함탁오의 보고를 들었다. 선주혁과 주백광에 관한 내용이었다. 아직도 취기가 않은 듯한 얼굴의 함탁오는 두 사람이 지금까지도 술을 마시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말 그대로 하룻밤을 꼬박 새우고 다음 날 저녁까지 술을 마시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렇습니다. 정말 인간들이 아닙니다. 저는 아직까지도 속이 풀리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두 사람이 표국에 있는 동안 술값을 대는 것만도 엄청나겠군요. 저런 식으로 마셔댄다면…." 함탁오는 싱긋 웃으며 농담처럼 말했다. 두 사람이 표국에 있음으로서 얻는 이득이 그깟 술값에 비할 바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두 사람이 원하는 만큼 술을 대주도록 하게. 두 사람 다 주량만큼 성격이 대단하니 사람을 찾기 전에는 가급적 접근하지 말라고도 이르게. 괜스레 문제를 만들지 않게…." "알겠습니다. 시녀 한 명으로 하여금 시중을 들게 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일체 근접치 못하게 하겠습니다." 함탁오의 대답에 임자순은 입가를 당겨 웃었다. 그야말로 전화위복(轉禍爲福)이요, 일거양득(一擧兩得)이었다. 도신의 제자가 표두로 들어온 것만으로도 경사일진데 더불어 도절까지 얻게 된 셈이었다. 하룻밤 새 저토록 의기투합을 했으니 선혁이 표두로 있는 한 도절 역시 함께하리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두 사람이 우애를 나눴고, 서로 돕고 있다는 것에 대한 소문이 돈다면 그 누가 있어 사해표국을 우습게 보겠는가? 이래저래 선 표두가 넝쿨째 들어온 호박이라 생각하는 임자순이었다. 3 "이러다간 끝이 나질 않겠군." 선주혁이 약간은 풀린 눈과 혀에 억지로 힘을 주어 말했다. "푸하하핫! 남자가 술을 마시면 적어도 삼일은 내리 마셔야지." 주백광은 다시 술잔을 채우며 말했다. '정말이지 대단하다는 말밖에는 안 나오는군.' 주백광은 내공을 이용해 술기운을 한 번 배출한 이후로 지금껏 계속해서 술을 마시는 중이었다. 그런데 얼굴에 약간의 홍조가 도는 것을 제외하고는 술을 마신 것 같지도 않았다. 즉, 순수한 주량 자체가 가공할 정도라는 말이었다. '응? 그러고 보니 난 왜 이렇게 술을 잘 마신대?' 그제야 선주혁은 자신도 그다지 취하지 않고 있음을 새삼 깨달았다.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이야기를 하느라 생각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쪽 세상에 있을 때, 비디오를 보거나 책을 읽으며 캔 맥주를 즐겨 마시긴 했다. 하지만 오늘과 같은 폭음을 해본 적은 거의 없었다. 이 정도 마시기 전에 인사불성이 되어 뻗었기 때문이다. 위스키에 필적하고도 남을 독주를 거의 퍼마시다시피 했음에도 약간 기분이 좋을 뿐, 조금의 취기도 엿보이지 않으니 스스로도 놀라운 것이다. '이것이 무공을 익힌 효능인가?' 왜 이렇게 주량이 늘었는지 선주혁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하나 주백광과의 술자리는 즐거웠고, 그가 원하는 한 계속 같이 마셔주고 싶었다. "주 형이 원한다면 당연히 더 마셔 줘야지. 칠 주야를 마셔도 좋고, 한 달을 마셔도 좋다고." "푸하하하핫! 역시! 역시 자넨 내 친구라니까!" 주백광이 고개를 젖히며 웃음을 크게 터뜨리다가 표정을 굳혔다. 그의 눈이 날카롭게 빛나며 안광이 창문을 향해 폭사되었다. "함께 자리해 술잔을 받던가, 아니면 저리 꺼지도록 해라! 이 주백광이 친구에게 건네는 말을 쥐새끼가 함께 듣는 영광을 허용한 적이 없으니!" 그다지 크지 않은 소리였으나 목소리에 담겨진 위압감은 대단한 것이었다. 주백광의 호통 아닌 호통에 날이 저물어 어둑해진 창가에 하나의 인영이 나타났다. 방 안의 빛에 드러난 얼굴을 확인한 선주혁이 놀라 외쳤다. "한 소저?" "두 분의 대화를 엿듣고자 함은 아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이곳까지 오느라 기척을 죽였을 뿐이지요." 아리따운 목소리로 상황을 설명하는 여인은 한희윤이었다. "아는 여자야?" 주백광이 미간을 찌푸리고 선주혁에게 물었다. "아! 한 소저는…무림맹 맹주님의 손녀 되시는 분이야. 얼마 전 뵌 적이 있지." "무림맹주의 손녀?" 주백광은 기척을 죽이고 창밖에 접근해 온 것이 여자라는 사실에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 한데 그녀의 신분을 알고 나니 놀라울 정도였다. 대체 무림맹주의 손녀 정도나 되는 신분으로 왜 쥐새끼처럼 이곳에 잠입해 온다는 말인가? "선 대협, 잠시 실례를 해도 될까요?" 한희윤의 질문에 선주혁은 재빨리 표정을 정리했다. 난데없는 그녀의 방문이 놀랍기도 했고, 그녀를 다시 보고 있다는 사실이 기쁘기는 했다. 하지만 그녀의 미모에 홀려 넋을 잃는 표정은 금물이었다. "들어오시오." 선주혁은 애써 무뚝뚝한 표정과 어조를 유지했다. "무례를 용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희윤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창문을 넘어 실내로 들어왔다. 그녀가 방 안으로 들어오자 선주혁은 한쪽에 비어 있는 의자를 눈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쪽에 앉으시오." 한희윤은 선주혁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 후 의자에 앉았다. "세상에나…두 분이 저 술을 다 마신 건가요?" 한희윤은 탁자 옆에 쌓여있는 빈 술 단지들을 보며 놀라야만 했다. 그녀로서는 이 두 사람이 지난밤부터 술을 마시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없었다. 날이 저물었다고는 하나 깊은 밤도 아니거늘 두 사람이 마셨다기에는 술 단지들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몇 명 더 있었소." 주백광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는 자부심 가득한 무림맹의 인물들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게다가 미인은 늘 골치 아픈 문제를 일으킨다는 선입관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지라 불쑥 찾아온 한희윤이 달갑지 않았던 것이다. "이 분은…?" "내 친구인 분광도 주백광이오." "도절!" 한희윤은 비어있는 술 단지들을 봤을 때보다 훨씬 더 놀라야만 했다. 그렇게나 조심스럽게 방에 접근했음에도 단박에 알아채는 것을 보고 보통이 아닌 인물임은 짐작했다. 하지만 강호사절 중의 도절이라고는 상상치 못했던 것이 그녀가 놀란 첫 번째 이유였다. 두 번째로 그녀를 놀라게 하는 것은 선주혁이 중년의 주백광을 보고 친구라 말했기 때문이었다. 주백광의 오만한 성품은 그의 도법만큼이나 유명한 것이었다. 아무리 도신의 제자라 해도 친구라 칭하는 것을 허용할 리 없건만 선혁이라는 자는 당당히 주백광이 자신의 친구라 소개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의 커다란 눈이 더욱 커지는 것만으로도 그녀가 얼마나 놀라고 있는지 쉽게 짐작이 갔다. 한희윤은 잠시간 정신을 못 차리는 표정을 짓다가 나름대로 애를 써서 표정을 수습했다. "늦은 시간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해가 진 저녁이오. 어째서 귀하신 분께서 이곳에 찾아온 겁니까? 게다가 남의 이목을 피해서라니요?" 선주혁의 퉁명스러운 질문에 한희윤은 또다시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총명하기 이를 데 없는 그녀였다. 또한 선혁이라는 자의 성품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판단을 내린 상태였다. 하지만 늘 대접만을 받고 살아온 그녀였기에 선혁이라는 자의 무뚝뚝한 태도가 익숙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을 새삼 상기하며 다시 태도를 수습했다. "사정이 있어 무례를 범했습니다. 다시 한 번 두 분게 양해를 구합니다." "……." 선주혁과 주백광은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명색이 무림맹주의 손녀인 한희윤이었다. 그녀가 원한다면 황궁이라 해도 당당히 방문할 수 있을 정도다. 한데 야음을 틈타 이곳에 왔다는 것은 분명히 큰 사연이 있을 터였고, 저토록 공손한 자세를 보이는 터라 질책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사과의 뜻으로 두 분께 한 잔 술을 권하겠습니다." 한희윤의 말에 선주혁과 주백광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행동은 사실 파격에 가까운 것이었다. 젊은 아녀자, 더구나 무림맹주의 손녀라는 신분으로서의 태도라기엔 말이다. 두 사람의 표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한희윤은 주백광과 선주혁의 술잔을 채웠고, 자신도 빈 잔에 술을 따랐다. 잔을 높이 들어 올린 후, 소매를 입을 가려 술을 마시는 한희윤. "푸하하핫! 소저의 행동은 영웅인 체 하는 녀석들보다 낫구려. 좋소이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몰라도 나와 내 친구는 소저와 즐겁게 술을 마실 용의가 있소이다." 주백광의 말에 선주혁도 살짝 미소를 지어 동의를 표했다. 애써 퉁명스러운 태도를 보이는 그였지만 한희윤과 같은 미녀와 술자리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설마…그 얘기를 하려고 온 것은 아니겠지?' 주백광의 동작과 맞춰 술을 들이키며 선주혁은 한희윤의 얼굴을 힐끔 쳐다봤다. 그녀와는 단 한번을 만났을 뿐이다. 자신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도신의 제자라는 사실밖에 없었다. '혹시…나의 뛰어난 무공을 보고 한 눈에?' 일말의 가능성은 있었다. 일단 그녀의 사형이자 신웅십팔걸의 하나인 서문도옥의 코를 납작하게 해 준 경험이 있지 않은가? 더구나 시종일관 답 나오는 그녀의 미모에도 초연한 모습을 보여줬다. 선주혁은 은근한 기대를 가지고 한희윤이 무슨 말을 할지 기다렸다. 하나 그의 기대와는 달리 한희윤은 오래 전부터 도절의 명성을 들어왔다느니 지난 번 선 대협이 보여준 신기(神技)에 놀랐다느니 하는 이야기만 계속 했다. 주백광은 한희윤이 여자답지 않은 호방함을 지녔다며 흥이 돋아 술을 마셔댔고, 선주혁도 그에 호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 대협의 무공이 그 내공만큼이나 뛰어났으면 좋겠군요." 몇 차례 순배가 돌고 난 후 한희윤이 불쑥 꺼낸 말이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저희 사형…. 지난번에 보셨죠?" "서문 소협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네. 사형이 그러더군요. 무공이란 단지 내력만으로 고하를 가늠할 수는 없는 거라고." '그 자식이…! 뒤에서 또 궁시렁거렸군. 치사한 놈. 한 소저 앞에서의 망신을 만회해 보겠다는 거잖아?' 선주혁이 내심 못마땅해 할 때 주백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맞는 말이오. 내공이 심후한 것이 큰 도움은 되긴 하지만, 실전에 있어서 승패를 결정짓는 것은 아니니까." '이봐요, 주 형. 지금 누굴 돕는 거요?' "익히고 있는 무공에 의해 차이가 많이 나겠죠?" 주백광의 말에 한희윤이 눈을 반짝였다. "초식의 능숙함이나 이해, 그리고 경험 등 모든 것에 따라 결과는 달라질 수 있소." 주백광이 단정 지어 말하자 한희윤이 선주혁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눈은 과연 선주혁에게 내공을 뒷받침할 정도의 무공이 있는가를 묻고 있었다. "왜 한 소저께서 소생의 무공이 뛰어난 것을 바라는지 궁금하구려." 선주혁은 눈으로 던지는 한희윤의 질문에 대한 답변 대신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그런 분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 "푸하하핫! 이거, 이거! 신랑감이라도 찾고 있던 거였소?" 주백광이 대소를 터뜨리며 농담을 건넸다. 자칫 모욕이 될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한희윤은 외려 환한 미소를 지었다. "제가 기대하는 정도의 능력을 가진 분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요." "푸하하핫! 멋지군, 정말이지 여걸이야, 여걸!" 주백광은 마냥 신이 난 모양이었다. 평소 생각했던 소위 말하는 미인들의 행동과 한희윤이 너무나도 확연히 구별되기 때문이었다. 선주혁은 주백광의 호들갑에도 동요하지 않고 한희윤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는 직감적으로 희희낙락할 때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역시나 그녀는 자신에게 호감 따위를 느껴서 이 자리를 찾은 게 아닌 것이다. 만약 진정으로 그런 뜻이 있었다면 주백광의 말에 조금이라도 얼굴을 붉혔어야 했다. 내심을 들켜놓고 태연한 사람은 깊은 심계를 지녔거나 얼굴이 두껍다는 말이다. 하지만 선주혁이 아는 한 한희윤은 그런 류의 여자가 아니었다. 선주혁은 더 이상 시간을 끌지 않기로 했다. "무림맹에 변고가 있는 모양이구려." "……!" 선주혁의 한 마디에 주백광은 어리둥절한 모습을 보였다. 욱일승천, 날로 기세를 더해가는 무림맹이었다. 구파일방의 성세가 절정에 달한 만큼 근래에 있어서 천하사강(天下四强)중 최고로 인정을 받는 무림맹이 아니던가? 그런데 변고라니…? 주백광으로서는 당최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었다. 그는 재빨리 한희윤의 얼굴을 살폈다.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대한 조소나 어이없다는 식의 감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놀라움이었다. "대체…무슨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죠?" 갑자기 한희윤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그녀의 얼굴에서는 여태껏 보여준 호방함도, 친근함도 순식간에 다 사라졌다. "근거가 뭐가 필요 있겠소? 한 소저가 남의 이목을 피해 이곳에 왔다는 것에 대해 달리 해석할 여지가 있소이까? 설마 정말로 남편감을 찾아 이곳에 왔단 말이오?" 선주혁은 태연히 대답할 수 있었다. '이 짓도 자주하니까 익숙해지는 걸!' 한희윤은 잠시간 날카롭게 선주혁의 얼굴을 바라보다 곧 시선을 거뒀다. 무림맹의 변고를 짐작했다 해서 의심할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의 말대로 무슨 일이 없다면 자신이 왜 여기에 왔겠는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으니 괜스레 신경을 날카롭게 곤두세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선 대협의 말씀대로에요. 현재 무림맹은 실로 곤란한 지경에 처해있습니다." 한희윤은 잠시간 망설임을 보이다 솔직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니 대체 무슨 곤란한 일이 생길 수 있단 말이오?" 쉽사리 인정할 수 없다는 듯 주백광이 물었다. "그건……." "잠깐!" 선주혁이 한희윤의 말을 잘랐다. "……?" "한 소저와 저는 이제 한 번을 봤을 뿐이오. 여기 주 형과는 이번에 처음 봤을 터이고. 한데 무림맹에 문제가 생긴 것을 우리와 논하는 이유가 뭐요?" 선주혁의 질문에 한희윤의 얼굴이 다부지게 변했다. "선 대협은……." 한희윤이 다부진 표정과는 달리 흐릿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무림맹을 두려워하지 않는 분이라 생각했으니까요." 쾅 한희윤의 말에 화답한 것은 주백광이 탁자를 손바닥으로 내리친 소리였다. "당연하오! 세력이 크다 해서 두려움을 가질 정도라면 이 주백광의 친구가 아니니까." '이봐요, 주씨 아저씨. 이 바닥에서 무림맹이 안 두려우면 어디가 두렵단 말이우?' "무엇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한 거요?" 선주혁의 무뚝뚝한 질문에 한희윤이 재빨리 대답했다. "그날 사형과 전 무림맹을 대표해서 온 거예요. 다시 말하자면 우리를 대하는 것이 곧 무림맹을 대하는 태도인거죠. 한데 선 대협께서는 사형을 상대로 맘껏 실력 발휘를 했죠.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평소 무림맹에 두려움을 가진 자라면 절대 하지 못했을 행동이었죠. 설사 실력이 있더라도 적당히 체면을 세워주는 선에서 그쳤을 거예요. 적어도 무림인이라면 당연하게 여길 행동이죠." "소저의 사형이라면 아까 말한……?" 주백광이 불쑥 끼어들었다. "서문도옥, 구주신룡이죠." "오옷! 역시 자넨 내 친구야. 신웅십팔걸에서도 손꼽히는 녀석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줬다, 이거지? 푸하하핫!" 주백광이 호들갑을 떠는 사이 선주혁은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자신이 서문도옥을 이기고자 한 것은 순간적인 호승심일 뿐이었다. 표리부동(表裏不同)한 서문도옥인지라 못마땅한 마음이 절로 일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자신의 행동에 그런 의미가 주어지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즉, 한희윤의 말대로 그가 무림맹을 두려워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처럼 해석될 수도, 더 나아가 무림맹을 적대시하고자 하는 의사라도 해석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경솔하게 행동하지 않겠다고 했거늘……, 아직도 멀었단 말인가?' "그래서 선 대협을 찾아온 거예요." 선주혁이 자신의 친구인게 마냥 기쁘다는 듯 웃음을 짓고 있던 주백광이 갑자기 정색을 했다. "무리맹에 곤란한 일이 생겼는데 외려 무림맹을 우습게 보는 사람을 찾아왔단 말이오? 그럼 내 친구와 그 곤란하다는 일과 연관이 있다고 의심한단 말이오?" 주백광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안광이 강력해지자 한희윤은 얇은 입술을 벌려 미소를 지었다. "아뇨. 그 반대에요." 한희윤은 미소를 머금은 채 서서히 고개를 저었다. "저는 무림맹을 두려워하지 않는 분을 찾고 있었으니까요. 오직 그런 사람만이 현재 무림맹이 겪고 있는 위기를 타파할 수 있어요." "……?" "솔직히 말씀드리죠. 지금 무림맹에선……!" 한희윤의 말은 또다시 선주혁에 의해서 가로막혔다. 그가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 앞에 내민 것이다. "딱한 사정은 익히 짐작이 가나 소생은 한 소저를 도울 수 없소." "무슨 이야기인지 들어보지도……." "듣고 싶지 않소. 아니,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이야기니까……." 한희윤의 눈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무림맹에 변고가 생겼다고 하지 않았소? 한 소저의 주변에 믿을 만한 사람이 있었다면 굳이 소생을 찾아오지 않았을 게 아니오?" "……!" "한 소저의 친인에게조차 말을 못할 리는 없고, 한 소저의 유일한 혈육은 지금의 맹주뿐이니…… 결국 변고란 맹주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의미가 아니겠소?" "그런 말도 안 되는? 당금 천하에 누가 있어 감히 철혈신검에 위해를 가한단 말인가?" 주백광이 부리부리한 눈을 더욱 크게 뜨고 물었다. 그는 선주혁의 말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한희윤 역시 커다란 눈을 크게 뜨고 있다가 가늘게 한숨을 쉬었다. "선 대협께서는 지닌바 내력보다 더 무서운 면모를 가지고 계시는군요." "별로……. 조금만 읽어보면 알 수 있는 일이 아니겠소?" "뭘 읽는다는 말이죠?" '이크!' "그러…… 니까, 몇 가지 행동을 근거로 한 소저의 생각이나, 현 재의 상황을 읽는단 말이오." 한희윤은 잠시 하얀 치아로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다가 선주혁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런 상황을 읽고서도 제가 부탁할 일을 거절하시겠다는 말씀 이신가요?" "그렇소." 선주혁은 단호하게 말했다. "어째서죠? 상황은 선 대협이 짐작하시는 것보다 훨씬 심각해 요. 자칫 무림에 대혼란이 일어날 수도 있어요. 그런데 왜 절 돕지 않으시겠다는 거죠?" "사람에겐……." 한희윤의 음성이 고조되자 선주혁도 약간은 높은 어조로 그녀의 말을 받았다가 길게 숨을 들이쉰 후 천천히 말했다. "각자의 사정이 있는 법이오. 소생은 무림맹의 일에 관여할 수 없소." "각자의 사정……. 전 무림의 위기보다 개인의 사정이 더 중요 하단 말인가요?" 한희윤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스쳐지나갔다. 선주혁은 안타까웠다. 그녀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로서는 그녀를 도울 수 없는 입장이었다. 자신은 지금 무림맹에서 지목한 공적이 되어 쫓기는 입장이 아 닌가? 한희윤을 돕자면 무림맹에 들어가야 하고, 그 안에서 해결을 봐 야한다. 그야말로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한희윤과 같은 미인의 부탁을 왜 선주혁이 거절 하겠는가? 더구나 아직까지 무림맹의 일은 급박하다 말할 수 없었다. 정작 일이 터지려면 충분한 시간이 남아있는 것이다. 예전이라면 한희윤 정도의 답 나오는 여자가 부탁을 하면 헤벌 쭉해서 달려들었겠지만 지금의 선주혁은 그럴 수 없었다. 지금 그에게 있어서 최대의 급선무는 사형과 다시 만나는 것이 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뭐라 말씀하셔도 지금은 한 소저를 도울 수 없는 입장이오." 선주혁의 말에 한희윤은 다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선주혁을 잠시 직시했다. 안타까움과 원망스러움, 그리고 실망이 담겨진 눈빛임을 선주혁 은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사람을 잘못 본 듯하군요." "……." 한희윤은 몸을 돌려 창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창문 앞으로 향하던 그녀가 잠시 멈춰 섰다. "이 일은 비밀로 해주세요. 그 정도는 들어주실 수 있겠죠?" "물론이오." 선주혁의 대답에 한희윤은 잠시 고개를 떨궜다가 다시 들은 후 창틀에 손을 짚었다. "한 소저." 선주혁의 부름에 한희윤은 몸을 날리는 것을 늦췄다. "하실 말씀이 더 남아 있나요?" 어느새 냉기가 날리는 그녀의 음성. 선주혁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돌아오지 않는 계절은 없는 법이오. 시간이 흐르면 소저가 원 하는 바가 이뤄질 것이오. 그리고……." "……." "가장 가깝다고 생각되는 자를 조심하시오!" "후! 고맙군요. 충고는 감사히 받아들이겠어요." 진심인지 아닌지 모를 말을 남긴 채 한희윤은 창을 넘어 사라졌 다. 그녀가 사라진 창문을 아련히 바라보는 선주혁에게 주백광이 물 었다. "정말 무림맹주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선주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맹 녀석들이 골탕을 먹는 거야 상관없는 일이지만……. 저 소저……, 꽤나 괜찮아 보이던데. 도와주는 것도 괜찮지 않았을 까?" 주백광은 제법 한희윤이 마음에 들은 듯 했다. 선주혁이 창문에서 주백광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내 상황이 그렇지 못하지 않은가." "아! 그렇지." 주백광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자기 손바닥으로 이마를 탁 쳤 다. "게다가 아직 위험한 상태는 아니라네." "자네가 그걸 어떻게 아는가?" "하하핫, 자네 친구는 말일세. 천기를 읽는다네." "오오옷! 그래?" '이봐,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라고.' "그럼, 내 운수도 한 번 봐주게. 이 주백광의 팔자는 어떠한가?" 방금 전까지 무림맹의 위기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조 차 잊은 듯한 주백광의 말에 선주혁은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 다. 자신을 위해 일부러 화제를 돌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 이다. 선주혁은 호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천기를 누설하는 대가는 비싸네." "하! 이 친구 쪼잔하기는……! 친구끼린데 복채를 받겠다는 말인 가?" "쪼잔하다니? 복채를 안 받으면 아무 효력이 없다는 사실도 모 르는가?" "그래?" "당연하지. 게다가 천기를 누설하는 것은 크나큰 죄에 해당하는 일일세. 친구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면서 그 정도 보상조차 안 해주 겠단 말인가?" "푸하하핫! 내가 졌네, 졌어! 그래 얼마면 되겠는가?" 주백광과 선주혁은 다시금 웃음을 터뜨리며 술잔을 기울이기 시 작했다. "푸하하핫! 잘 된 일이잖아? 자네가 빠져나올 기회가 되었으니 말이야. 게다가 점잔빼는 늙은이들을 안 만나도 되고 말이야." 짙은 눈썹, 강인 한 턱 선을 가진 중년인이 마상에서 호탕한 웃 음을 터뜨렸다. 그의 뒤쪽으로 기나긴 행렬이 있었음에도 조금도 신경 쓰지 않 는 듯한 태도였다. 그의 뒤쪽으로 이어지는 수레에는 푸른 깃발들이 펄럭이고 있었 다. "뭔가…… 심상치 않네." 엉거주춤한 자세로 말 위에 올라있는 가무잡잡한 청년이 자신보 다 나이가 배는 많아 보이는 중년인에게 반말을 건넸다. 두 사람은 표행을 나선 주백광과 선주혁이었다. "뭐가 심상치 않아? 아무리 대단한 표물이라 해도……." "아니! 그게 아닐세." "……?" 주백광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선주혁이 어설프게 고 삐를 움직여 그의 옆으로 말을 몰았다. "냄새가 난다네." 선주혁의 말에 주백광이 코를 벌름거렸다. "무슨 냄새?" "아니, 그게 아니고……. 이번 표행 말일세. 갑작스레 무림맹에 서 사해표국에 표물을 맡긴 이유가 뭐냐는 거지." "표국에 표물을 맡기는 게 뭐가 이상하다는 건가?" 주백광은 여전히 선주혁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소설에서 봤을 때는 그다지 멍청하지 않았는데……? 흠……, 이 거 내가 너무 똑똑해서 그런 건가?' 선주혁은 주백광을 보며 예전에 어디선가 봤던 글이 기억났다. 인터넷에서 본 듯한데, 현대인이 과거로 가게 되면 당대 제일의 천재가 된다는 것이다. 현대인이 접하는 정보량은 과거의 사람들에 비해 수백, 수천 배 에 달하고 그 많은 정보처리 능력과 습득된 정보량만으로도 당대 의 석학(碩學)이 되고도 남는다는 글이었다. 남지학과 같은 천재를 보며 은근히 주눅이 들었던 선주혁은 이 곳에서의 자신이 생각보다 뛰어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은근히 기 분이 좋아졌다. 혹시 자신이 지나치게 예민해져 있는 듯한 생각이 사라지며 보 다 확신을 가지고 대화를 이끌어 가기 시작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주 형도 이상하다는 걸 알 수 있지. 사실 임 국주는 내가 표행에 나서는 것을 적극 반대했었지 않은가? 그 런 그가 왜 표행을 나에게 맡겼겠는가부터 시작해 보세." "그거야 간단하지. 표물의 가치가 엄청나다지 않은가? 사해표국 의 운명이 달려 있다니 자네가 나서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주백광은 자신 있게 선주혁의 의문에 답을 내놓았다. "그렇지. 그러니까 이 표행은 내가 사해표국에 있기 때문에 가 능한 일일세.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의뢰가 들어온 거지." "무림맹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절강성은 사파연합의 세력권이지 않은가? 쓸모없는 분쟁을 일으키기 보다는 표국이 물건을 맡기는 게 당연한 일일 수도 있 지." "난 그게 의심스러운 걸세. 무림맹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의뢰를 해 온 것에 다른 속셈이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 말일세. 더구나 너무나 떠들썩한 의뢰가 아니었는가?" "사해표국이 생긴 이래로 가장 큰 규모의 표행이니 당연히 떠들 썩할 수밖에." "그렇지. 사해표국에서는 이 일로 인해 그 위상이 한없이 높아 질 수 있으니 더 떠들어 댈 거야." 선주혁의 말에 주백광은 당연한 일을 뭘 그리 심각하게 말하냐 는 식의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런 대단한 표물일 수록 비밀스럽게 호송하는 것이 더 안전하지 않겠나?" "꼭 그렇지만은 않을 수도 있지. 당금 천하에서 누가 감히 무림 맹의 물건에 손을 대겠는가? 더구나 도신의 후예가 표사로 나선 바에야……. 외려 널리 알려질수록 안전하다고 볼 수도 있지." 선주혁은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 든 의문이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할 것만은 아니지. 세상의 이목을 이쪽으로 끌어들 인 다음 일이 터질 것도 고려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일이 터져?" 주백광이 고개를 갸웃 거렸다. "누군가 나를 견제하고자 한다고 생각했을 때의 이야길세." "자네를 견제해? 무림맹에서? 왜?" 주백광은 미간을 찌푸리며 연달아 질문을 던졌다. 선주혁은 더욱 목소리를 낮췄다. "한 소저를 생각해보게. 지금 무림맹에 변고가 있지 않은가? 그 에 대한 원흉이 있을 것이고, 그들은 자신들이 목적한 바를 이루 는 데에 있어서 변수가 생기는 것을 허용하고 싶지 않을 걸세." "그러니까, 그 흉수들이 자네를 변수로 여긴다는 말인가?" "뿐만 아니라……, 사파연합의 세력권 내에서 문제가 생기면 무 림에 큰 혼란을 가져올 수도 있겠지." "……!" 주백광은 잠시 말을 멈추고 선주혁을 바라봤다. 그의 말에는 근거라 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었다. 그렇지만 말 을 듣고 보니 일견 타당한 면도 있는 게 사실이었다. "거 참……! 지나친 상상이 아닌가 싶네. 만약 정말로 그런 악의 적인 의도가 있고, 자네가 그것을 짚어낸 것이라면 자네야말로 제 갈공명의 화신이나 다름없을 걸세." 주백광의 말에 선주혁은 그저 미소만을 지었다. 그리고 내심 생각했다. '만약 이 일이 그놈 머릿속에서 나왔다면 내 생각이 틀릴 리 없 을 걸세.' 선주혁의 머릿속에서는 한 인물의 얼굴이 선명히 그려지고 있었 다. 겉으로는 다시없을 정인군자나 속으로는 더할 나위없는 음흉한 속셈을 지닌 그의 얼굴을……. "뭐가 되었든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봐야 소용없는 일이 아닌가? 표물을 노리는 놈들이 있으면 단칼에 베어버리면 그뿐이니까. 안 그래?" 주백광이 한쪽 눈썹을 꿈틀거리며 당당하게 말했다. '흠……, 그러고 보니 녀석도 주 형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겠군. 그거 좋은데……!' 한희윤은 분명 주백광이 사해표국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 다. 하면 그 역시도 모른다는 말일 것이다. "주 형 말이 맞군. 사실 이리저리 머리 쓰는 것은 나한테 어울 리지도 않는 일이니까. 어차피 피할 수 없다면 부딪쳐 봐야겠지." "푸하하하핫! 그래, 바로 그거야! 이제야 내 친구다운 말을 하는 군. 이리저리 머리 쓰는 것을 할 놈들이 따로 있다니까!" 주백광은 선주혁이 태도를 바꾸자 기분이 좋은 듯 언성을 크게 높였다. '그래. 일단 절강으로 가는 것만 생각하자. 사형과 더욱 가까워 지는 거니까. 나쁠 게 없지. 공적으로 쫓기나 음모를 꾸미는 놈들 과 마주치나 별반 다를 것도 없잖아?' 선주혁 역시 한결 편한 표정으로 말을 모는데 집중했다. 아직까 지 말안장에 앉아 버티는 것이 익숙지 않은 그였다. 2 선주혁의 우려와는 달리 사해표국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순조로운 표행을 이어갔다. 강서성(江西省)에 들어서 의춘(宜春), 상고(上高), 고안(高安)을 거처 성도(省都)인 남창(南昌)에 이를 때까지 표행을 가로막는 것 은 아무것도 없었다. 주백광은 선주혁이 헛된 기우를 한 것에 대해 단 한 번도 언급 하지 않았다. 그저 표행을 유람삼아 선주혁과 함께 있는 시간을 즐길 뿐이었다. 남창에 들어서자마자 강남의 삼대 누각(樓閣) 중 하나인 등왕각 (藤王閣)에 올라 술을 마셔야 한다면서 호들갑을 떠는 주백광이었 다. 꽤나 긴 여정, 더구나 잔뜩 긴장한 상태의 표행은 선주혁 역시 도 지치게 했다. 사해표국의 남창지부에 도착하자마자 나머지 두 표두에게 모든 일을 맡기고 선주혁과 주백광은 등왕각으로 향했다. 표사와 쟁자수, 그리고 짐꾼들도 휴식이 필요했고, 말을 교체하 고 수레를 보수하자면 적어도 남창에서 삼일은 보내야할 터였다. 선주혁은 이 기회에 푹 쉬어두려는 것이다. 황학루, 악양루와 더불어 강남의 삼대누각으로 꼽히는 등왕각에 는 수많은 관광객으로 득실거렸다. 쌍쌍을 이뤄 멋진 풍경 속에서 애정을 가꾸는 연인들을 물론이 거니와 황혼에 접어들어 아름다운 세상을 눈에 담아들려는 노인 들, 그리고 소문난 명소라면 예외 없이 찾아볼 수 있는 수많은 시 인묵객들까지. 쌀쌀한 바람이 부는 날씨건만 등왕각 주변은 가히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등왕각을 본 선주혁은 그 웅장한 규모와 높이에 넋을 잃었다. 이 시대에 저런 건축물이 존재한다는 것이 마냥 신기했던 것이 다. 청옥색 기와, 붉은 기둥, 그리고 금빛 찬란한 이중의 처마와 현 판들. 휘황찬란(輝煌燦爛)하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 건물이었다. '이거야, 원! 누각이라더니 완전 빌딩이잖아?' 한눈에도 오십 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높이의 등왕각을 보며 선주혁은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수중에 이 정도의 건물을 수백 개는 족히 사고도 남을 보물을 잔뜩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등왕각은 겉보기에는 삼층의 구조로 되어 있으나 실제 내부는 칠층으로 되어 있었다. 주백광과 선주혁은 나란히 꼭대기 층까지 올라갔다. 높은 곳에 올라 풍광을 살피니 호기가 절로 치밀었다. '캬! 사형과 함께 구경 왔으면 좋았을 걸.' 똑똑한 사형이라면 이런 경치에 어울리는 멋진 시라도 한 수 읊 었을 것이다. "낙하여고목제비(落霞與孤鶩齊飛), 추수공장천일색(秋水共長天一 色)라." 선주혁의 마음을 누가 듣기라도 했던 걸까? 옆에서 한 사람이 왕발(王勃)이 열네 살에 지었다는 등왕각서(? 王閣序)의 일부를 암송했다. "저녁노을은 짝 잃은 기러기와 나란히 날고 가을 물빛은 높은 하늘과 같은 색이로구나." 시에 대한 것은 잘 모르나 선주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색과 하늘색이 같다는 말은 정말이지 공감이 갔던 것이다. "자, 자……. 멋진 경치를 봤으니 이제 술이나 마시러 가자고." 주백광이 선주혁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선주혁은 그가 이끄는 대로 계단 쪽으로 향하다 문득 옆에서 등 용각서를 읊조린 사람을 쳐다봤다. 그저 사형을 떠올렸던 자신의 마음을 조금이나 위로해줬다는 생각에서였다. 가냘프고 작은 체형의 청의장삼 청년의 뒷모습은 왠지 고독해 보였다. 어쩌면 짝 잃은 기러기 운운한 것이 실연이라도 당했기 때문일 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선주혁은 주백광의 뒤를 쫓아 계단을 내려 갔다. 타타타탁 계단 아래쪽에서부터 요란한 발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리는 하나인데 나타난 자는 모두 넷이었다. 땀인지 개기름인지 모를 것이 번득이는 얼굴을 한 채 비대한 체 구의 중년인이 더운 콧김을 내뿜으며 발걸음을 옮겼고, 그 뒤를 쫓아 가볍고 경쾌한 움직임으로 세 명의 승려가 뒤따랐다. 그들이 스쳐지나가자 주백광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소림승(少林僧)?" 주백광의 말을 듣고서야 선주혁은 건강해 보이는 얼굴의 세 승 려가 무협지에서 말하는 전형적인 소림승의 차림새를 했었다는 것 을 깨달았다. 이마에 찍힌 선명한 계인(契印), 왼쪽 어깨에서 허리를 가로지르 는 붉은 가사(袈裟), 그리고 키를 넘어서는 긴 선장(禪杖)은 소림 사에 속한 승려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것이 아니던가. 그 유명한 소림승들을 보게 되자 선주혁은 자신이 정말 무협지 에서 말하는 세상에 들어온 것임을 새삼 실감했다. "이보게, 친구. 아무래도 술자리는 조금 미루는 게 어떻겠나?" "……?" 그 좋아하는 술을 미루자고 나서는 주백광의 저의를 알 리 없는 선주혁이었다. "소림 땡중들의 표정이 영 심상치 않단 말이지. 위쪽에 뭔가 일 이 있을 거 같은데 구경부터 하자고." 주백광의 말에 선주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심상치 않은 표정이라면 보나마나 싸움이 벌어질 것이란 말이 다. 강 건너 불구경과 남의 싸움구경은 자다가도 일어나서 한다지 않은가? 주백광이 몸을 돌려 계단을 오르고 선주혁이 그 뒤를 쫓았다. 계단을 다 오르기도 전에 돼지 멱따는 소리와 같은 목소리가 꽥 꽥대는 것이 들려왔다. 비대한 중년인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것이다. 최상층에서 장강을 바라보던 관광객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저 놈이 맞습니다. 저 뺀질뺀질한 낯짝을 제가 명확히 기억하 고 있습죠. 그럼요!" 체구에 걸맞지 않는 빠르고 경박한 음성이었다. "이 놈아, 넌 이제 죽었다. 이분들이 뉘신줄 아느냐? 그 유명한 소림사의 대사님들이시다!" 호가호위(狐假虎威)라. 뚱뚱한 중년인은 소림승의 위세를 믿고 당당하기 그지없는 모습 을 보였다. 선주혁과 주백광은 다른 관광객과 뒤섞여 앞쪽에서 벌어지고 있 는 사단을 살폈다. 난간 밖을 내다보다 어느새 몸을 돌렸던 가냘픈 체형의 청년이 고개를 들었다. "어라?" 그 얼굴을 본 선주혁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얼굴을 확인한 것이다. "왜 아는 사람인가?" 주백광이 소림승과 뚱보 중년인 사이로 보이는 청년의 얼굴과 선주혁을 번갈아보며 물었다. '이번엔 대체 어떤 역할이지? 소림승과 적대시 한다면……?' 얼굴을 확인한 가냘픈 체형의 청년, 아니 또 다른 남장여인은 선주혁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너무도 청순하고 깨끗한 얼굴. 그 얼굴을 어찌 잊겠는가? 그녀가 출연한 영화를 보며 내용보다 그녀의 눈물이 더 가슴 아 팠던 기억이 생생하기만 했다. 선주혁은 저도 모르게 자신이 알고 있는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 렸다. 저쪽 세상에서의 이름이었다. <3권 끝> Chapt. 1 소제목 미정 "응?" 주백광이 선주혁에게 귀를 가져다대며 물었다. 선주혁이 사람 이름 같은 것을 웅얼거렸기 때문이다. "아, 아닐세." 선주혁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기세등등한 중년인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데도 여유 를 잃지 않는 그녀의 얼굴을 다시 살폈다. 역시나 분명 그녀다! 이번에도 가슴이 뛴다. 이제는 그러려니 하며 익숙해질 때도 되었건만 매번 이렇게 가 슴이 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았다. 하긴 저쪽 세상에 살면 서 몇 번에 걸쳐 연예인을 봤다고 해도 무감각해지진 않았을 것이 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였다. '내 머릿속을 비워줘…… 였던가? 참 예쁘게도 울더니 여기서는 다부진 표정을 짓는군.' 실제야 어떤지 몰라도 스크린 상에서는 한없이 청순하게만 보이 는 그녀였다. 하지만 지금 선주혁이 바라보는 송예진(宋睿眞)은 여유 있고 도 도함을 지나쳐 오만하기까지 해 보였다. "아미타불, 시주께서는 어찌 무고한 사람들을 해(害)하신 것이 오?" 결국 소림승 하나가 입을 열었다. 송예진의 얼굴을 한 여인은 한쪽 입술을 당겨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이거야 원……! 역시 소림고승의 신통력을 하늘에 닿아 있구려. 소생이 손을 봐준 자가 무고하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시니 말이오." 짙은 눈썹을 가진 강직한 인상의 승려는 시선을 뚱보 중년인에 게 돌렸다. 어찌된 일인가를 물어보는 것이다. "저 간악한 놈이 수작을 피우는 겁니다! 글쎄 저 놈이 멀쩡한 사람의 팔다리를 모두 분질렀다니까요." 뚱보 중년인은 손사래를 치며 황급히 말했다. 그의 말에 강직한 인상의 승려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분 동(東)시주의 말씀에 따르자면 시주께서 일을 하고 있는 동가장의 시주들의 팔과 다리를 부러뜨렸다는데……, 사실이오?" "사실과 다르외다." "이, 이놈! 어디서 거짓을 고하는 게냐? 네놈 손에 팔다리가 부 러진 내 수하들을 대사님들께서 직접 보셨거늘……!" 동가 성의 중년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냥 부러뜨린 게 아니니까. 부러진 부위가 으스러졌으니 아마 평생토록 수족을 놀리지 못할 거외다." "아미타불……!" 송예진의 말에 세 명의 승려는 동시에 반장을 취하며 불호를 외 웠다. "시주의 손속이 실로 잔인하구려. 보아하니 무공을 익힌 듯 한 데 어찌 그리 잔혹한 행사를 하신단 말이오?" 눈 끝이 아래쪽을 향하고 귓불이 큰 중년 승려가 안타까움 가득 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기 위해서 무공을 배웠으니까." 송예진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흥! 멀쩡한 용모를 갖추고 소문난 마두처럼 행동을 하는구려!" 짙은 눈썹의 승려가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하! 이거야 원. 명색이 소림사의 고승께서 사람의 용모를 염두 에 두다니……! 소림에서 말하는 자비의 시작은 그 사람이 어떻게 생겼나에서부터였구려?" "아미타불! 뭔가 사연이 있는 것 같은데 빈승(貧僧)들에게 설명 을 해 주시지요." 송예진이 날카롭게 힐난하자 짙은 눈썹을 역팔자로 꺾는 옆의 승려를 만류하며 눈이 처진 승려가 부드럽게 말했다. "왜 내가 당신들에게 사연을 설명해야한단 말이오? 소림사면 소 림사지 천하만인의 행동에 일일이 간섭을 하겠다는 뜻이오?" "하! 저 친구, 성격 한 번 시원시원해서 좋구나! 천하의 소림사 를 상대로 저렇게 큰 소리를 칠 수 있는 자가 몇이나 될꼬?" 주백광은 송예진이 시종일관 당당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보고 감탄했다. '이 양반도 어지간히 삐딱하다니까!' 선주혁이 씁쓸히 웃을 때 뒤쪽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동가장 놈들이 또 행패를 부렸나본데?" "그러게. 저 공자가 그 놈들을 손봤나본데…… 쯧쯧. 괜한 일에 나서서 곤욕을 치르겠군." "소림도 헛거군. 동가장 놈들의 실체를 모르고 저렇게 나서다 니." "매년 수만 냥이나 되는 은자를 소림사에 시주한다잖아. 소림사 에서 볼 때는 착하디착한 중생이겠지." 사람들이 목소리를 낮춰 수군대는 것을 들으며 선주혁은 대충 감을 잡았다. 척하면 착이라고 대략 어떤 스토리인지 보이는 것이다. "사형, 더 이상 무엇을 듣는단 말이오. 이 자는 사마외도가 분명하오!" 짙은 눈썹의 승려가 소리를 버럭 지르자 송예진이 한쪽 눈썹을 상큼 들어올렸다. "소림승을 보고 무조건 잘못을 빌어야 사마외도가 아닌 것이라면 당연히 이 몸은 사마외도의 길을 가겠다!" "호호호호홋!" 송예진의 낭랑한 음성이 누각을 울릴 때 사람의 기분을 묘하게 만드는 교소(嬌笑)가 중인들의 귀를 파고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위험천만인 난간에 한 여인이 걸터앉아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여인의 피부는 백설처럼 하얀 것이 미인의 조건으로 여겨진다. 한데 난간에 걸터앉은 여인은 가무잡잡한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눈이 휘둥그레질만한 미모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초승달처럼 휘어진 두 눈이 만들어내는 눈웃음은 뭇 사내의 가슴을 떨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하늘하늘한 천 밖으로 드러나는 농염한 몸매는 더욱 그랬다. 잘록한 세류요(細柳腰)는 풍만한 가슴을 더욱 강조했고 탄력 있는 둔부가 만들어내는 곡선은 절로 침을 삼키게 했다. 그녀를 발견하고 누구보다 놀란 것은 이번에도 선주혁이었다. '이, 이번에는 박효리(朴孝梨)냣! 한꺼번에 두 명이라니! 후아, 어쨌든 오늘 눈이 호강을 하는구나. 이번에는 박효리의 섹시 강화버젼이군. 쩝!' "어찌하여 소림사의 고승들께서 젊은 사람을 핍박하고 계신 건가요?" 몽환적이고 나긋나긋한 음성으로 박효리가 물었다. "시주는……?" 짙은 눈썹을 찌푸리며 중년의 승려가 물을 때 여태껏 아무 말도 않고 있던 왜소한 체격의 승려가 입을 열었다. "옥소선자(玉簫仙子) 몽세화(蒙細花)!" 승려의 말을 듣고 보니 과연 여인의 손에는 옥으로 만들어진 피리 하나가 들려있었다. "호오……, 소림의 고승께서 천녀(賤女)를 알아봐 주시다니요. 실로 영광이네요." 고혹적인 음성과 함께 몽세화는 난간에 걸쳤던 다리를 내렸다. 옆으로 길게 트임이 있는 치마 사이로 갈색의 건강미 넘치는 다리가 드러났다. 선주혁의 귀에서는 여기저기서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아얏!" 한 남자의 낮은 신음소리. 아마도 함께 한 연인이 팔이라도 꼬집은 모양이었다. 옥소선자의 섹시한 자태에 넋을 잃고 있었던 게 틀림없을 것이다. 몽세화는 둔부가 묘하게 움직이도록 일자로 걸음을 옮겨 송예진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제가 보기에는 이분 공자의 이야기가 틀리지 않은 것 같은데요, 대사님들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아미타불! 힘을 가진 자가 그 힘을 함부로 남용하는 것은 결코 올바른 일이 아니오." 짙은 눈썹의 승려가 미간에 깊은 골을 만들며 말했다. "글쎄요. 그게 남용이 아니었을 수도 있지 않나요? 저 돼지 같은 중늙은이의 수하가 무엇인가를 잘못했을 수도 있잖아요." 몽세화는 가늘고 긴 손가락을 들어 뚱보 중년인을 가리켰다. 뚱보 중년인은 색욕이 넘실대는 눈으로 그녀의 몸매를 훑어보다가 자신을 모욕하는 이야기에 발끈했다. "아니, 누가 돼지라는 거요? 아녀자가…… 말이야." 옥소선자의 위명은 사해에 차고도 넘쳤다. 하지만 동가 성의 중년인은 소림승과 함께 있다는 사실은 그의 용기를 부추겼다. 그러자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져 묘한 눈웃음을 만들었던 몽세화의 표정은 매혹적인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아녀자는 입을 다물고 있어라……, 이런 뜻인가요?" 몽세화의 웃음은 남정네의 가슴을 뒤흔들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소림승들은 그 안에 담겨진 위험한 살기를 감지했다. 눈 끝이 아래로 처진 승려는 동가 중년인의 옆쪽으로 한 걸음을 옮겼다. 몽세화의 갑작스런 출수(出手)에 대비하는 것이다. 하나 소림승의 방비가 무색하게 몽세화는 환한 미소의 방향을 돌렸다. 그것은 송예진을 향해서였다. "천녀가 봤을 때 공자께서는 합당한 이유가 있어서 저 돼지의 수하들을 손보신 듯한데……. 그들이 대체 공자께 무슨 잘못을 했었나요?" 살짝 몸을 앞으로 내밀며 묘한 콧소리를 섞어 묻는 몽세화. 정심으로 수양을 닦아온 소림승 조차 그 묘한 운율과 목소리에 가슴이 철렁하는 느낌이 들건만 송예진은 외려 미간을 찌푸렸다. 같은 여자의 입장이기에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당신이 참견할 일이 아니오." "……!" 몽세화의 얼굴에 미미하지만 노기가 스쳐지나갔다. 누가 듣더라도 자신이 호의로 청년에게 질문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청년은 오만하기 짝이 없는 태도로 나온 것이다. 옥소선자의 명성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청년이 오늘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하나 옥소선자는 예상을 깨고 외려 청년에게 더 접근하며 꽃잎 같은 입술을 나풀거리며 말했다. "호옹……. 군자는 스스로 옳다고 믿는 바를 행한다지요? 제가 괜한 것을 물어봤군요." 어쩌면 뻔뻔스럽다고도, 혹은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청년에게 다가서는 옥소선자였다. "몽 시주. 지금 그분 시주의 잔혹한 행사에 대해 빈승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소이다." 짙은 눈썹의 승려가 노기 어린 음성으로 몽세화에게 말했다. 말인즉 자신들이 먼저 볼 일이 있으니 끼어들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래서요?" 몽세화는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이냐는 듯 외려 반문을 했다. "몽 시주의 신공절학이 강호를 위진 한다는 것은 산문(山門) 너머에까지 소문이 자자하나……." 눈썹 짙은 승려의 말은 몽세화의 차가운 음성에 가로막혔다. "그딴 소문은 천하의 소림 고승께는 아무런 소용도 없다…… 이 말씀이시군요?" 그녀의 말에 소림승이 채 답변하기도 전에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누각의 최상층을 가득 채웠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계단을 올라오며 만들어낸 소리였다. "저 자이옵니다!" 올라온 무리 중 한 사람이 손을 뻗어 송예진 쪽을 가리켰다. 송예진의 아미가 상큼 위쪽으로 치켜 올라갔다. 나타난 사람들을 일견한 그녀는 갑작스레 신형을 움직였다. "앗! 도주한다. 잡아라!" 송예진이 몸을 날린 곳은 난간 쪽. 그녀는 망설임 없이 난간 밖으로 뛰어내린 것이다. 우루루 몰려가는 사람들. 삼 층으로 구분되어 있는 누각 중 이층에서 뻗어진 기와를 밟고 가볍게 내려선 송예진. 그는 다시 몸을 날려 어느새 지상으로 내려서고 있었다. 몽세화 역시 난간 밖으로 몸을 날렸다. 단숨에 누각에서 내려서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저처럼 중간에 내려설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녀의 뒤를 이어 소림승들이. 그리고 나중에 누각에 오른 몇몇의 무림인들이 신형을 날렸고, 나머지 사람들을 황급히 계단을 통해 등왕각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주백광이 힐끗 선주혁을 쳐다봤다. 선주혁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두 사람의 신형도 난간 쪽을 향해 움직였다. 썰물 빠지듯 빠져버린 무림인들. 등왕각 최상층에 남아 있는 관광객들은 방금 전의 상황에 대해 저마다의 의견을 내느라 목소리를 높였다. 2 송예진과 비슷한, 그러나 그보다 훨씬 아름다워 보이는 여인은 강변으로 향했다. 그녀의 뒤를 쫓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포함한 질주 집단은 유람객들의 시선을 끌었으나 잠시 뿐이었다. 워낙 빠른 속도로 달리는 지라 순식간에 스쳐지나갔기 때문이다. 순간 확 트인 공간이 나오고 유람객들을 볼 수 없는 장소에 이르자 그는 제자리에 멈춰 섰다. 도주로를 차단하기 위해 전력으로 달리던 무림인들 역시 의외의 행동에 주춤하는 모습을 보였다. 몸을 돌린 그녀가 입을 열었다. "누각에 있으면…… 여러 사람들이 다치잖아." 그 말을 들은 옥소선자가 대소를 터뜨렸다. "오호호호호홋!" 이어 한쪽 입 꼬리를 당겨 웃으며 무림인들을 향해 말했다. "사마외도라 몰리는 이분 공자는 선량한 민초들을 배려하는데 소위 말하는 정의의 영웅들은 제 볼일에만 급급하니 과연 무엇이 정의란 말인가?" 몽세화의 힐난에 소림승들을 비롯한 많은 무림인들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 때 뒤늦게 계단을 올라 누각에 오른 자중 검은 수염을 길게 기른 중년인 하나가 나섰다. "앞에 계신 대사님들께서 소림에서 나오신 듯하군요. 불초는 창천문(蒼天門)의 담벽남(覃碧藍)입니다. 대사님들께서도 저 사악한 놈의 죄를 묻고자 하심인지요." 몽세화의 조소는 담벽남의 인사에 의해 쉽사리 무마 되었다. 힐난의 대상이 본인들인지라 그들의 주의가 빠르게 옮겨진 것이다. "아미타불……! 파양검(?陽劍) 담 대협이셨구려. 빈승은 소림에서 온 영각(影覺)이외다. 이쪽은 사제인 영무(影無)와 영진(影眞)이오." 눈 끝이 처진 승려, 영각은 한 손만을 들어 예를 갖추는 반장을 취하며 눈썹이 짙은 승려를 영무라, 체격이 왜소한 승려를 영진이라 소개했다. 영각의 말을 들은 담벽남은 크게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나한전(羅漢殿)의 고승들이셨군요." 나한전이라는 말에 몽세화와 송예진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특히 송예진처럼 생긴 여인의 얼굴을 더욱 그랬다. 처음 등왕각에서 소림승을 만났을 때부터 오늘은 길보다 흉이 많은 날이라 직감했다. 정파의 무공은 수련초기에는 두각을 나타내기가 쉽지 않다. 그 중 구파일방은 대표적이랄 수 있었다. 정도무림을 대표하는 후기지수 중 외려 구파일방의 제자들이 적은 것도 이 때문이다. 무공의 기초만을 거듭해 수련하기 때문에 젊은 나이에 높은 성취를 이루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반대로 사파나 마도에는 젊은 고수들이 즐비하다. 속성으로 무공을 높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정한 나이를 넘어서면 상황이 바뀐다. 구파일방의 무공은 시간이 지날수록 성취의 속도가 빨라지는 반면 사파와 마도는 더뎌지는 것이다. 구파일방의 장로급 인물이 적은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무공이 완성될 때까지 협행을 미룰 수는 없는 터. 장로의 지위에 오를 만큼의 나이가 되기 전에 많은 수의 젊은 협객이 죽어가는 것이다. 젊은 층의 성취는 사파와 마도에 비해 더디다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혹의 나이를 넘겨 살아 있는 구파일방의 명숙이라면 실력에 있어서는 의심할 바가 없었다. 불혹을 기점으로 무공이 하루가 다르게 증가하기 때문이다. 박심정대한 정파의 무학은 심후한 내력을 기초로 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불혹의 나이에 접어든 무인이라면 큰 깨달음이 없이도 고강한 내력을 지니기 마련. 초식이 본연의 위력을 발휘할 내력이 쌓이며 그 위력은 이전에 비할 바가 없어지는 것이다. 한데 세 명의 소림승은 모두 나이가 들어 있었다. 소림의 불목하니(절에서 밥 짓고 물 긷는 일을 맡아서 하는 사람)도 강호에 나서면 고수 소리를 듣는다는데 세 고승의 무공은 눈으로 보지 않아도 대단할 것임은 쉽게 짐작이 가능했다. 그런데 그 세 명이 나한전의 소속이라는 것이다. 소림사의 나한전이란 천하무학을 연구하고 소림의 절예(絶藝)를 발전시키는 역할을 담당하는 곳. 무려 칠십이 종에 달하는 소림의 절예 중 두 가지 이상은 기본으로 익히고 있다고 알려진 나한전이다. 불혹을 넘긴 나한전 세 승려의 무공은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답답한 마음이 드는 것은 몽세화 역시 마찬가지다. 누구에게도 양보를 하지 않을 무공을 소유한 그녀였다. 하지만 나한전의 세 승려를 홀로 감당하는 것은 자신하기 힘들었다. 마음에 드는 남자를 만나 그를 돕고자 했다. 범상치 않은 경신술로 미루어 꽤나 실력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로서는 파양검 담벽남과 창천문도를 감당하기도 힘들 것이다. 몽세화의 매혹적인 눈매가 찌푸려짐은 당연한 일이었다. "공자. 어인 이유로 창천문도와 돼지 놈의 수하를 벌했는지 저 들에게 설명하는 것이 좋겠군요." 몽세화는 오늘의 일을 무공으로 해결할 수 없을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저많은 강적을 두고 무공의 고하를 가늠하고자 한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 없었다. 그녀의 말을 들은 송예진은 매끈한 이마에 주름을 잡았다. "흥! 소생은 소림이건 나한전이건 두렵지 않소이다. 또한 한 번 내 뱉은 말을 뒤집고 싶은 생각도 없소." 여린 인상과는 달리 고집스럽고 단호한 태도였다. 그런 남자다움은 몽세화의 마음을 더욱 흡족케 했지만 지금은 만용을 부릴 때가 아니었다. "상황에 걸맞지 않게 고집만을 세우는 것은 군자의 도리가 아니지요. 굴욕은 잠시 뿐. 훗날을 기약할 수도 있습니다." 몽세화는 마치 나이 어린 동생을 타이르듯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의 호의에는 감사드리오. 하나 더 이상 소생의 일에 간섭하지 마시오!" 송예진의 매몰찬 말에 몽세화의 얼굴에 싸늘한 빛이 스쳐지나갔다. 아무리 호감을 가진 자라지만 그녀로서는 이와 같은 대접을 받아본 경험이 없었던 것이다. 그녀가 한 마디를 쏘아붙이려 할 때 송예진이 앞으로 성큼 걸음을 내딛으며 중인들에게 외쳤다. "나 단목민(端木珉)에게 볼 일이 있는 자는 앞으로 나서시오! 사양하지 않겠소." 그녀의 본래 이름은 단목지민(端木智珉). 특별히 여성스러운 이름은 아니었으나 본명을 감추기 위해 '지'자를 빼고 말한 것이다. "흥! 실로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놈이로구나." 파양검 단벽남이 노갈을 터뜨렸다. 단목민이라는 애송이가 마치 소림의 세 고승들과 자신들을 모두 상대하겠다는 식이었기 때문이다. "푸하하하하하핫!" 단목민의 노갈을 일시에 누르는 대소가 울려 퍼졌다. 웃음소리에 담긴 내력은 실로 엄청난 것이어서 내력이 약한 창천문도들은 귀를 틀어막고도 인상을 찌푸려야할 정도였다. "저 친구야말로 진정한 남자라 할 수 있군. 안 그런가?" 부리부리한 눈에 구렛나루, 그리고 끝이 직각으로 꺾여 뭉툭한 도를 든 장한이 옆에 서 있는 가무잡잡한 피부의 사내에게 질문을 던졌다. 웃음을 터뜨린 것도 그였다. "그렇군. 남자라면 저 정도 배포는 있어야지." 흔히 볼 수 있는 싸구려 박도를 든 가뭇한 피부의 사내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중인들은 언제 이들이 자신의 뒤를 쫓았는지 알지 못했다. 온통 신경이 단목민에게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소림의 영진 대사가 한 사람의 별호를 떠올렸다. "분광도!" 영진대사의 말에 중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도절 주백광?" "도절이 이곳에?" 사람들의 수군거릴 속에서 주백광의 옆에 있는 청년이 짐짓 과장된 태도로 말했다. "오! 주 형, 생각보다 유명인사였잖아?" "푸하하하핫! 유명하달 것까지야." "……!" 강변에 모인 무림인들은 주백광이 이 자리에 나타났다는 사실보다 청년의 말에 더 놀라야만 했다. 주백광이 어떤 인물인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구파일방과도 일전을 불사하겠다고 떠드는 인간이다. 스스로의 성격이 오만무도함에도 타인의 오만함은 추호도 용납지 않는 그였다. 그런데 이제 막 약관을 넘어선 새파란 애송이가 '주 형'이라는 호칭을 하질 않나, 유명하다고 놀리질 않나 하는 것을 두 눈으로 본 것이다.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런 청년의 말에도 불구하고 주백광이 웃음을 터뜨리며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여하튼……. 이 주백광은 저기 서 있는 젊은이가 마음에 들었소이다." 주백광은 들고 있는 도를 도집째 들어 한쪽을 가리켰다. "……!" 중인들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주백광이 자신들과 해결해야할 문제가 있는 청년이 마음에 든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의 성격으로 미루어 만약 자신들이 청년에게 위해를 가할 경우는 이곳에 모인 전원을 상대로 일전을 불사할 주백광이었다. "이런 곳에서 주 대협을 뵙게 되어 이 탁벽남은 실로 영광이외다. 주 대협께서 말씀하신 저 자는 잔혹한 수법으로 창천문도를……." "넌 또 뭐냐?" 극도로 공손한 어조로 정황을 설명하는 탁벽남에게 날아온 주백광의 시큰둥한 질문. 그 질문은 파양호 일대에서 명성을 날리는 탁벽남에게 있어선 큰 모욕이었다. 탁벽남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그의 턱 근육이 씰룩이는 것으로 보아 내심으로 분노를 억누르고 있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도절의 명성은 순간적인 노기를 가라앉히는 데에 충분한 효력이 있었다. "주 대협! 앞뒤의 정황조차 모른 채 무조건 주 대협의 마음에 들었다고 해서 강호의 은원을 그냥 넘긴다는 것은 이치에……." 주백광의 한쪽 눈썹이 들렸다. "넌 뭐냐고 물었잖아! 말 못 알아들어? 넌 뭐냐고 묻는데 뭐가 정황이고 뭐가 은원이라는 거야?" "……!" 탁벽남이 치욕스러운 상황에 주먹을 말아 쥘 때 영무 대사가 나섰다. "아미타불……! 주 시주의 말씀이 과하시구려. 탁 시주께서는 이곳 강서를 대표하시는 무림의 명숙이시오. 어찌 그리 무례한……." "아, 아! 이봐요, 스님. 설법은 절에 가서나 하시오." 주백광은 귀찮다는 표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손사래를 쳤다. 영무 대사의 짙은 두 눈썹이 역팔자로 꺾이며 하늘로 치솟았다. "주 대협. 겸손은 인간에게 있어 당연한 미덕이외다. 스스로의 무공만을 믿고 천하를 오시하려는 것이오? 소림사의 고승들께 그런 무례한 말씀을 하시다니요?" 탁벽남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주백광이 한 말이 소림사를 모욕한 셈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의 말을 들은 영무 대사의 눈썹이 만들어내는 각이 날카로워졌다. 짝 짝 짝. 난데없는 박수소리. 그것은 단목지민이 손뼉을 마주치는 소리였다. "과연……! 정사를 가리지 않고 자신이 내키는 일만 한다……. 도절의 명성은 헛되지 않았구려. 소생 단목민은 주 대협의 후의에 실로 감사드리외다. 하지만 소생으로 인해 곤란한 일을 겪으실 듯……." "아, 아! 천하에 누가 이 주백광을 곤란하게 한단 말인가? 소형제, 자네는 걱정할 필요가 없네. 이 주백광이 이곳의 누구도 자네를 핍박하지 못하게 할 테니 말일세." "……!" 주백광의 말은 이 자리의 모든 무림인들을 모욕하는 말이자, 명백한 도발이었다. 쿠웅 이번에는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영무 대사의 선장이 강하게 땅을 찍은 것이다. "소림의 명성은 개인이 좌지우지할 것이 못 되는 것이외다. 더구나 악행을 저지른 자를 비호하기 위해 소림을 모욕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주 시주께서 계속 막무가내로 악인의 편에 서신다면 빈승들도 참고만 있을 수는 없소이다." "호오! 천하 무학의 근본이라는 소림 무공이 아니오? 이 주백광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 손을 쓰면 될 일이오. 그렇게 입으로 떠들어 합당한 이유를 댈 필요 없소이다." "갈(喝)!" Chap. 2 소제목 미정 두 명의 절정고수가 내뿜는 기도는 막대했다. 그것은 마치 형상화된 거력처럼 드넓은 공간을 메워갔다. 영각 대사는 사제의 성급한 행동을 제지하고 팠으나 손을 쓰기엔 이미 늦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자신이 끼어들어 신경을 분산시킨다면 사제가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움직인 것은 영무 대사였다. 상대가 쾌도의 달인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 본격적으로 분광도법이 전개된다면 선기를 되찾기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선공을 취한 것이다. 상호가 비슷한 연배니 영무 대사의 선공에는 비난의 여지가 없었다. 더구나 소림의 명성을 모욕한 자를 징계하려는 것이니 그에게는 명분까지 있었다. 콰아아아 자신의 키를 넘어선 길이의 선장이 휘둘러지니 마치 파도가 밀려드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소림이 자랑하는 장법(杖法: 선장을 이용한 무공)중 하나인 십팔로항마장법(十八路降魔杖法)이 펼쳐지는 것이다. 주백광은 엄청난 기세로 날아오는 선장을 보면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마치 얼어붙은 사람처럼 굳은 채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그의 손이 움직인 것은 선장이 머리에서 채 한 자도 떨어지지 않았을 때였다. 오른손이 번개처럼 도병을 잡아가는가 싶더니 어느새 넓은 도신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것은 곧 날아오는 선장을 막아섰다. 카앙 나무로 만들어진 선장과 중도(重刀)가 부딪쳤는데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영무 대사와 주백광의 얼굴에는 동시에 놀라운 표정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영무 대사는 지독할 정도로 빠른 주백광의 발검에, 주백광은 자신의 도가 나무로 만들어진 선장을 잘라내지 못한 것에 놀라는 것이었다. 서로에 대한 감탄도 잠시. "타합!" 우렁찬 영무 대사의 기합성과 함께 선장은 허공에서 한바퀴를 돌아 다시 주백광의 허리어림을 쓸어갔다. 캉 카앙 연이은 두 번의 소리. 어느새 허리를 굳건히 방어한 주백광은 맹렬한 선장의 힘을 고스란히 담아 역습을 기도한 것이다. 말 그대로 전광석화와 같은 동작이었으나 영무 대사는 당황하지 않고 선장의 중단으로 도를 막아냈다. "제법이군!" 한쪽 눈썹 끝을 더욱 크게 들어 올린 주백광의 손이 신속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카앙 캉 캉 캉 자세히 뒤를 기울이면 금속성과 금속성 사이의 약간의 단절이 있으나 워낙에 짧은 순간일 뿐이지라 중인들의 귀에는 마치 하나의 긴 음향이 울리는 것만 같았다. 주백광과 영무 대사의 공수가 엄청난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는 말이었다. 선장의 양쪽을 교묘하게 사용하는 영무 대사는 마치 두 개의 무기를 들고 있는 듯 해 주백광의 쾌도술을 막아낼 수 있었다. "푸하하핫!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 과연 소림이구나!" 주백광은 자신의 공격을 침착하게 막아내는 영무 대사의 수비를 보며 크게 감탄했다. 이정제동(以靜璪)!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자신의 도법이 동(動)이오 한자리에 서서 굳건히 방어를 하는 선장이 정(靜)이니 그야말로 정으로 동을 제압하는 이치에 합당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무거운 중도를 손목만을 움직여 날카롭게 공격해가던 주백광의 동작이 커지기 시작했다. 수직, 대각선, 수평을 오가는 강렬한 베기 동작들이 이어지고 선장과 주백광의 도가 부딪치는 소리는 점차 격렬해졌다. 놀랍게도 주백광의 동작이 비할 바 없이 커졌음에도 그 속도는 전혀 줄지 않았다. 날카로운 금속성들의 연속과 더불어 폭풍이라도 부는 듯한 도풍(刀風)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기세에 기세를 더하고 맹렬함이 점차로 증강됨은 햇살아래 번득이는 청광이 아니라 소리를 통해 더 명확히 구분되었다. 워낙에 빠른 쾌도술인지라 눈으로 그 모습을 쫓기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영무 대사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패이고, 그의 신형은 점차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한 순간. 콰앙. 도와 선장의 충돌이 지나치게 큰 폭음을 만들어냈고, 동시에 영무 대사의 선장이 반으로 잘려나갔다. "타합!" 영무 대사는 잘린 선장에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고 버리며, 두 주먹을 굳건히 말아 쥐며 내뻗었다. 선장을 잘라낸 기세를 타고 영무 대사를 궁지로 몰아갈 생각이던 주백광은 주먹에 담겨진 경력이 심상치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내지른 일 권의 주위를 휘몰아치는 기류만으로도 심각한 타격을 받으리라는 것을 느낀 것이다. 주백광은 재빨리 몸을 비틀며 도신을 지면과 수평으로 뉘였다. 비틀었던 몸이 제 자리로 돌아가며 팔이 함께 회전했다. 팔의 움직임보다 큰 반경으로 대기를 가르는 도! 영무 대사의 허리가 숙여지며 주백광의 도가 붉은 가사를 자르고 지나갔다. 간신히 주백광의 도를 피해낸 영무 대사의 주먹이 다시 앞으로 뻗어지며 은은한 뇌성과 같은 음향을 만들어냈다. 주백광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는 옆구리를 파고드는 위맹하기 이를 데 없는 권력(拳力)을 느낀 것이다. 그는 도를 회전시켜 널찍한 도신으로 영무 대사의 주먹을 받아냈다. 쿠아아앙 귀청을 울리는 폭음. 주백광은 짧은 보폭으로 네 걸음이나 물어선 후에야 영무 대사의 일 권에 담긴 힘을 해소시킬 수 있었다. "백보신권?" 주백광이 놀라 외치는 사이 영무 대사의 양 다리가 벌어졌다. "하합!" 기합과 함께 압축된 공기가 폭발하는 소리가 그의 주먹에서 터져 나왔다. 주백광은 전력으로 도를 휘둘러야만 했다. 그의 도의 궤적 중간부분에서 굉음이 터지고, 희뿌연 안개와 같은 것이 흩어졌다. 허공을 격하고 권력이 날아왔던 것이다. 주백광이 백보신권의 공세를 막아내는 것을 보고, 이번에는 영무 대사가 놀라 외쳤다. "도기(刀氣)!" 영무 대사의 두 눈은 한 자 반은 족히 늘어난 주백광의 도에 머물러 있었다. 백보신권의 강맹한 위력을 막기 위해 주백광이 도기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좋구나, 좋아! 그럼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놀아볼까?" 주백광은 호기롭게 외친 다음 갈지자로 보법을 밟아가며 영무 대사에게 접근해갔다. 영무 대사는 연달아 세 번에 걸쳐 백보신권을 재차 전개했다. 콰앙 쾅 쾅 뇌성과도 같은 울림과 함께 맹렬한 권력이 주백광을 향해 쏘아졌고 주백광은 몸을 틀며 도기로 백보신권을 흘려보냈다. 주백광이 방어를 하는 동안 영무 대사는 직선 방향으로 물러섰고 거리를 확보하자 다시 백보신권을 날렸다. 주백광의 절기인 분광삼십육절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것을 막는 것이다. "칫!" 도기가 닿는 거리를 쉽사리 확보할 수 없는 주백광은 불평어린 소리를 내뱉었다. 그리고는 자신도 다리를 벌리고 제자리에 섰다. 어깨와 나란히 다리를 벌린 영무 대사와는 달리 비스듬히 앞쪽으로 내밀어 벌린 것이다. "와라!" 주백광은 형형한 안광을 빛내며 소리쳤고, 마치 명을 받듯 영무 대사의 주먹이 앞으로 뻗어졌다. 쿠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백보신권이 폭출 되었다. 주백광의 어금니가 꽉 다물어지고 그의 도가 중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쿠아아앙 다시금 울려 퍼지는 굉음. 주백광의 앞에서 피어오르는 희뿌연 먼지. 그는 단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정면으로 백보신권을 받아냈다. "저, 저럴 수가?" 주백광이 백보신권을 어떻게 막아내는지 확인한 영무 대사는 대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방금의 일격은 영무 대사의 전신공력이 실려 있었고, 아무래 도기를 사용한다 해도 제 자리에 서서 막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한데 주백광은 놀랍게도 하나의 권력을 엄청난 쾌도로 세 번에 걸쳐 나눠해소해 버린 것이다. "아미타불……. 과연 궁극의 쾌도술이로구나……." 탄식인지 감탄인지 모르게 영무 대사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이어 그는 자세를 더욱 낮췄다. 무릎이 직각으로 꺾일 정도로 낮아진 영무 대사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심상치 않은 기도에 주백광은 방금 전 떠올랐던 미소를 지워야만 했다.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공격이 전개되리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어 그는 보았다. 영무 대사의 주먹에 맺혀지는 희끄무레한 빛을. "에네르기파를 주먹으로!" 영무 대사의 주먹을 보고 선주혁의 눈이 크게 떠졌다. 지난 번 명유신군 옥좌거가 보여줬던 놀라운 광경이 아닌가? 선주혁은 눈을 크게 뜨고 영무 대사의 모든 것에 빨려 들어갔다. 느릿하게, 아니 느릿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그저 느낌일 뿐. 영무 대사의 팔이 마치 환상처럼 펴지고,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의 거대한 기운이 느껴졌다. 하얀 담배 연기가 모인 것과 같은 기류가 주백광을 향해 쏘아지고 주백광에게서도 거대한 힘의 제멋대로 날뛰기 시작했다. 쿠우우우아앙 땅이 흔들리는 것과 같은 진동과 폭음. 하늘 높이 솟구치는 작은 돌과 흙먼지. 그것이 가라앉았을 때 주백광은 형편없는 모습을 드러냈다. 제멋대로 헝클어진 머리카락에는 흙먼지가 가득했고 자신감 넘치는 얼굴에는 낭패함이 가득했다. '과연 소림이군. 일개 땡중이 이 정도의 권법을 구사하다니!' 소림의 나한전이 어떤 곳인지 깊이 생각하지 않아 본 주백광이기에 생각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아미타불……, 과연 천하제일의 쾌도술이로다!" 놀라움은 영무 대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보았다. 주백광을 향해 쇄도해 들어가는 백보신권의 권력을 무산시키는 주백광의 도기를. 수유의 시간 동안 일곱 번에 걸쳐 도가 휘둘러지며 도기의 벽이 형성되었다. 그 벽이 백보신권을 막아낸 것이다. 영무 대사는 이를 악물었다. 방금 전의 일 권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상의 공격이었다. 진기의 소모가 극심했던 만큼 이어질 공격의 위력이 약해질 것은 자명했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소림의 명예를 제 손으로 실추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영무 대사는 이를 악물고 다시금 권력을 쳐냈다. 쿠앙 쾅 쾅 삼권연환(三拳連環). 백보신권이 절정에 달했을 때 펼쳐낼 수 있는 궁극의 오의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지금의 영무 대사에게 있어서는 무리가 아닐 수 없었다. 권력은 앞의 일 권에 비해 떨어졌으며 연환으로 권을 펼친 영무 대사의 얼굴은 밀랍처럼 창백해졌다. 무리한 진기의 운행 때문이었다. 주백광은 영무 대사의 손이 움직이는 순간 신형을 앞으로 날렸다. 세 개의 권력이 날아오는 정면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쿠아아앙 쿠웅 쿠앙 대체 몇 번의 도가 휘둘러지는지조차 가늠하기 힘든 주백광의 쾌도가 전개되고 그의 신형은 어느새 영무 대사의 앞에 도달하고 있었다. 주백광의 도가 영무 대사의 몸통을 갈라가는 순간. 퍼엉. 영무 대사가 펼쳐냈던 것과 비슷한, 그보다는 조금 약한 느낌의 폭음이 울렸다. 주백광은 휘두르던 도를 멈추고 고개를 모로 돌리며 외쳤다. "이 치사한……!" 소리가 울린 방향은 선주혁이 있던 곳이다. 그쪽에서 굉음이 울렸으니 소림승 중 하나가 나이어린 주혁을 공격하는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고개를 돌린 주백광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신을 향해 휘몰아쳐 오는 권력을 발견한 것이다. 그의 도가 빠르게 움직이고 연속되는 폭음과 함께 위맹한 권력이 해소되었다. 이어 주백광은 잠시 넋을 잃었다. 자신을 향해 주먹을 내뻗은 선주혁의 모습을 본 것이다. "뭐, 뭐야?" 주백광이 휘둥그레 뜬 눈을 그대로 유지한 채 소리를 질렀다. "앗! 실수!" 선주혁은 재빨리 주먹을 거둬들이며 머리를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흉내를 내본다는 것이……. 설마 그게 날아갈 줄이야……. 주 형, 미안. 아하하하하핫!" 가무잡잡한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선주혁이었다. 영무 대사의 무공은 소림무공의 기초 심법인 반야신공(般若神功)을 근간으로 하고 있었다. 그 반야신공은 선주혁이 이미 신투의 은신처에서 달달 외워두었던 것. 자연 백보신권을 사용하기 위해 무리하게 진기를 운공하는 영무 대사의 모든 것이 선주혁의 눈에 훤히 들어왔다. 근간이 되는 심법의 운용은 날로 익숙해져만 가는 흡성대법을 통해 너무나도 명확히 파악이 되는 것이다. 영무 대사가 백보신권을 연속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본 선주혁은 무엇인가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명유신군 옥좌거의 장법을 흉내 낼 때는 미처 알지 못했던 부분이 확 풀려버린 것이다. 잘하면 자신도 에네르기파를 쓸 수 있다는 생각에 어설프게 영무 대사의 동작을 따라해 봤다. 스스로 확신이 없었을 뿐더러 진기의 운용에만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먹을 내지르는 방향에는 신경을 쓰지 못했다. 한데 예상외로 권력이 주먹 끝에서 뻗어나가버린 것이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공교롭게도 그 권력이 주백광을 향해 날아가 버린 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선주혁의 어색한 웃음소리가 강변에 울리고 있을 때, 주백광은 석상처럼 굳어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이크! 주 형이 화가 많이 났나본데?' 그에 대해 워낙 미안한 감정이 가득해 선주혁은 지금 굳은 듯 서서 눈을 휘둥그레 뜬 것이 주백광 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미처 모르고 있었다. 강변의 모든 무림인들이 입을 쩍 벌리고 선주혁을 보고 있는 것이다. 선주혁이 날린 권력이 백보신권이라는 것을 그들은 모른다. 엄청난 신위를 선보이는 주백광과 영무 대사의 싸움에 집중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주혁이 오 장도 넘는 거리에서 주백광을 향해 권력을 쏟아냈다는 사실만은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이제 약관을 막 넘어선 청년이 허공을 격해 권력을 날린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일종의 충격이었다. 설령 저 나이에 큰 깨달음을 얻었다 해도 허공을 격해 장력이나 권력을 날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벽공의 장과 권은 막대하기 이를 데 없는 내력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또한 크나큰 기연을 얻어 내력의 증진이 있었다 해도 권력을 쳐냈으면 당연히 진기의 무리한 소모로 인한 증상이 나타나야 한다. 한데 청년은 지금 태연하게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무림인들은 아연실색하는 것이다. 허공을 격해 권력을 쳐낸 것이 전력을 기울인 게 아니라는 뜻이었으므로……. "주 형, 정말 고의가 아니었다니까. 화 풀어. 남자가 쪼잔하게 그런 걸 가지고……, 평소답지 않게 말이야. 아하하하하핫!" 주백광은 선주혁의 무공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두 눈으로 쾌속한 손동작을 봤을 뿐더러 강호에 널리 알려진 백발귀마의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꿈에도 상상치 못했다. 내공이란 올바른 방법으로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돼야만 하는 것이다. 어찌 약관에 불과한 선주혁이 권력을 쳐낼 정도의 내력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자네……, 이 정도까지 고수였던 거야?" "응?" 화가 잔뜩 나있을 줄만 알았던 주백광의 입에서 난데없는 질문이 나오자 선주혁은 어리둥절해졌다. "어떻게 그 나이에 권력을 쳐낼 수가 있는 거냐고? 아무리 내 친구라지만 그게 말이 돼?" 주백광이 언성을 높였다. 그의 안중에는 강변에 모인 무림인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는 듯 했다. 하나 아무도 주백광의 행동에 불만을 갖지 않았다. 그들의 머릿속은 뒤죽박죽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일단 주백광의 질문은 자신들의 마음을 고스란히 대변하는 것이었다. 그들 역시 어떻게 저렇게 새파란 젊은이가 권력을 쳐내는 건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또한 방금 전 주백광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도 그들의 머리를 혼란스럽게 했다. 주백광의 친구라니? 고작 약관에 불과한 저 청년이 주백광의 친구라는 말인가? 오만무도의 절정을 달리는 주백광이 애송이를 친구로 삼았다는 말을 두 귀로 직접 들으니 그들의 혼란 역시 절정으로 치닫는 것이다. 한 편 선주혁은 주백광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을 보고는 자시 때문에 화가 난 것이라 생각하고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차근차근 설명을 했다. "그러니까…… 고의가 아니었다니까. 그냥 자세를 이렇게 잡고……." 양쪽 다리를 크게 벌리고 무릎을 굽히는 선주혁. "내공을 정성, 아니 하단전에 집중했다가 팔까지 전해지는 동안 그 힘을 증폭시키는 거야. 그럼 이렇게 흰 연기 같은 게 생기잖아?" 선주혁의 주먹 끝에 생겨난 작은 기체. "여기까지는 그럭저럭 쉬운데…… 그동안 이것을 어떻게 날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고. 마침 그걸 저 스님이 하기에 따라해 봤는데 그냥 날아가더라니까." 쿠아앙 선주혁의 주먹이 강물을 가리키자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물보라가 튀어 올랐다. 그의 권력이 수면을 강타한 것이다. "절대로 고의가 아니었다고." 선주혁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설명을 마쳤다. 한데 주백광의 얼굴은 더욱 기괴하게 틀어져 있었다. 아무리 그 위력이 미약하다고는 해도 허공을 격해 권력을 쳐내는 일이다. 집중에 집중을 거듭해 전력을 기울여도 시원치 않을 판에 입을 열어 말을 하다니! '이 녀석! 내공이 나와 견줄 정도란 말인가?' 시간이 흐르는 동안 선주혁은 잠원기폭을 통해 배가된 풍이의 내력과 독안 사내의 내력을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흡수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의 체내에는 범인으로서는 상상키 힘든 내공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사실을 짐작할 리 없는 주백광은 실로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그가 받은 충격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진정한 경악은 소림 나한전의 세 고승들의 몫이었던 것이다. 영진 대사의 떨리는 목소리가 그의 놀라움을 증명했다. "배, 배…… 백보…… 신권!" "저런…… 말도 안 되는……!" 한쪽에 비켜 서 있던 영각 대사 역시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소림의 비전이 타인의 손에서 펼쳐질 수 있단 말인가! 명망 높은 소림의 고승이 헛소리를 할 리는 없었다. 두 고승의 말을 들은 단목지민, 옥소선자, 그리고 담벽남을 비롯한 창천문도들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백보신권이 어떤 무공인가? 소림 칠십이 종 절예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졌으며, 가장 전설적인 위력을 가진 권법이었다. 그런 백보신권이 소림제자가 아닌 자의 손에서 펼쳐진 것이니 실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기사 중의 기사가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아미타불……. 시주는 대체 어디서 소림의 무공을 훔쳐 배운 것이오?" 세 명 중 가장 수양이 깊다 할 수 있는 영각 대사가 깊이 가라앉은 음성으로 선주혁에게 질문을 던졌다. "에?" "방금 전 시주가 펼쳐낸 것은 본문의 비전 중의 비전인 백보신권이 틀림없지 않소?" 선주혁이 무슨 소리를 하냐는 식의 표정을 짓자 영진 대사가 재차 추궁을 해 왔다. "아니, 눈앞에서 펼쳐 보여줘 놓고 뭘 훔쳐 배웠다는 거예요? 방금 전 저 스님이 한 걸 따라했을 뿐이거늘……." "……." 선주혁의 말에 강변의 무림인들 사이의 공기가 차갑게 식었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가 일정 수준 이상의 무공을 가지고 있었다. 그 말인즉슨 하나의 무공을 익히기가 얼마나 고되고 힘든 일인지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눈앞에서 무공을 펼쳤다고 해서 그것을 따라한다는 것은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한 일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더구나 공간의 제약을 뛰어 넘는 권격(拳擊)을 몇 번 보고 따라한다는 건 그 누구에게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시주는 지금 소림의 무공이 그토록 허술하다 놀리는 것이오?" 영무 진인의 음성에 노기가 실렸다. 그는 이미 주백광에게 패한 상태였다. 선주혁의 덕에 큰 부상이나 목숨을 잃는 사태를 면했다지만 감사의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선주혁의 언사는 자신의 패배를 빌미로 삼아 소림의 무공이란 누구나 보고 따라할 수 있을 정도라 폄하하며 조롱하는 것 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 선주혁은 그제야 자신의 행동들이 자칫 큰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저 소림의 무공을 허술하다 말한 것 으로 오해를 받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무림의 각 문파들은 자파의 무공이 유출되는 것을 지독히도 꺼려하기 마련이다. 그것은 긴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당연한 일이다. 구파일방은 더욱 그러할 것이다. 오늘날 그들의 성세는 그들 이 가진 무공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므로. 해서 무공을 훔쳐 배운 자는 반드시 무공의 폐지나 죽음으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선주혁이 읽었던 대부분의 무협에서는 그렇게 표현이 되어왔고, 여기도 다를 것이 없었다. 더군다나 남이 펼치는 무공을 몇 번 보고 따라한다는 것 자체가 납득이 가질 않는 일일 것이다. 주백광이 화가 났다고 생각해 변 명하는 것에 급급한 데다 신투가 훔친 비급을 봤다는 것이 들킬까봐 발끈해서 한 말이지만, 저들로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할 수 없는 문제인 것이다. 선주혁에게 있어서는 주백광이라는 친구가 가지는 의미가 그만큼 크다는 말이기도 했다. '젠장! 흡성대법을 익혔다고 말할 수도 없고! 이런 실수를 하다니…….' 사실상 일취월장하는 스스로의 무공에 최근 모든 사고가 안이해진 것도 사실이었다. 소설 속의 주인공들이야 모든 것이 짜 맞춘 듯 잘 되는 방향으로만 흘러가지만 그 법칙이 자신에게 적용될 리 없었다. 즉, 긴장을 풀 때가 아니었음에도 벌써 나태한 마음을 먹어 버린 것이다. 그는 아차하면 죽어버릴 수도 있는 냉엄한 현실에 대한 감각을 다시 곤두세웠다. "푸하하하하핫!" 선주혁은 과장된 웃음을 터뜨렸다. "소림의 무공의 깊이를 그 누가 있어 깎아내릴 수가 있겠습니까? 소생이 말한 것은 그저 저분 스님의 동작을 흉내 낸 것뿐이라 는 것입니다. 실제로 소생이 전개한 것은 백보신권이 아니니까요." 선주혁의 변명에 소림승들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의 말에 의하면 겉보기에만 백보신권인 듯 할 뿐 실제로는 다른 무공이었다 는 것이다. 고로 자신들의 안목이 일천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선주혁 역시 그들의 심정을 이해치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소림의 무공을 훔쳐 배우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그럼 시주께서 방금 전 보여주신 무공은 대체 뭐란 말이오?" 영각 대사가 아직까지 의혹이 풀리지 않은 표정으로 물었다. 선주혁의 말이 아예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백보신권의 동 작을 따라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허공을 격해 공격을 하는 것은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진기의 운용이 필요하고 그것을 한 눈에 보고 배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다른 무공에서 비롯된 운용법으로 동작만을 살짝 바꾸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제가 대사님을 향해 일 장을 전개하겠습니다. 스님께서 직접 제 일장을 받아 보시면 백보신권인지 아닌지 쉽게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선주혁은 자신의 총명함에 스스로 만족해하며 영각대사에게 직접 시험해 볼 것을 제안했다. 타인이 진기를 어떻게 운용하는지 볼 수 있는 것은 흡성대법을 익히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결국 몸으로 직접 받아보면 그게 백보 신권인지 아닌지를 확연히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아미타불……! 좋소이다. 소승이 시주의 일장을 받겠소." 선주혁은 미소를 짓고 말했다. "조심 하십시오." 선주혁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사실 지금 하려는 시도가 반드시 성공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지난번의 실패가 있기에 더욱 그랬다. 방금 전 백보신권을 전개하며 얻은 깨달음만을 믿고 해보는 수 밖에 없었다. 그는 허리를 살짝 비틀어 양 손바닥을 마주했다. 진기가 쌍장에 주입되자 희뿌연 공과 같은 것이 떠올랐다. 전력을 기울인 것은 아니었기에 공의 크기는 작았다. 선주혁은 쌍장을 내밀며 영각대사를 향해 공을 쏘아 보냈다. '브라보!" 쏜살같이 발출되는 구체를 보고 선주혁은 쾌재를 불렀다. 자신의 의도대로 자유롭게 장력이 격출된 것이다. 퍼어어엉. 영각대사의 쌍장이 선주혁의 장력을 정면으로 막아내며 폭음이 일었다. 꽤나 큰 충격을 받은 듯 했지만 감당하지 못할 정도는 아닌 듯 했다. 영각대사가 손을 거둬들이며 입을 열었다. "확실히 백보신권이 아니구려. 빈승이 큰 오해를 했소이다." '푸헤헤헷, 역시 이쪽 사람들은 멍청하기 짝이 없다니까. 이런 간단한 속임수에도 넘어가다니. 내가 안 해서 그렇지 한 번 하기 로 하면 뭐든 제대로 해내는 스타일이지. 암 그렇고말고.' 선주혁이 자신의 의도가 제대로 먹힌 것에 대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 그 순간 누군가가 큰소리로 외쳤다. "명유신군의 무공이다. 분명 명유지력이야!" 이 자리에 모인 무림인 중 명유신군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뛰어난 무공과 악독함으로 천하에 이름을 드날렸기 때문이다. 한 순간 강변은 웅성거리는 소리가 가득했다. 다른 누군가 의혹을 제기했다. "명유신군은 제자가 없잖아?" "어떻게 저 자가 명유신군의 무공을 아는 거지?" 선주혁은 난감한 상황에 처했다. 누군가 명유신공의 무공을 어떻게 아냐고 물어오면 어찌 대답해야할지 생각해두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명유신군의 무공을 흡성대법을 이용해 배웠다고 말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쿠아아앙 귀청을 울리는 난데없는 굉음이 중인들의 소란을 잠재웠다. Chap. 3 소제목 미정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될 그 때 진각을 밟아 요란한 소리를 낸 주백광이 땅에 깊숙이 들어간 발을 뽑아내며 말했다. "내 친구가 사용한 무공이 백보신권이 아니면 그뿐이지 않은가? 그게 명유 머시기던 유명 머시기던 무슨 상관인가? 지금 내 친구 의 무공을 구경하러 이 자리에 모인 건가?" 주백광은 친구라는 말에 힘을 주어 말하며 사람들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의 말은 오만하기 짝이 없는 어투였으나, 따지고 보면 맞는 말인지라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도 나왔다. '주 형, 고마워!' 선주혁은 주백광이 나섬으로서 다시금 사람들의 시선이 단목지민에게 쏠리는 것을 보고 쾌재를 불렀다. 자칫 난감하기 이를 데 없는 상황이 벌어질 뻔한 것이다. '젠장, 앞으로는 조심해야겠군.'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재차 상기하며 선주혁은 내심 다짐을 굳혔다. "아미타불! 주 시주의 말씀대로요. 제 사제의 무공이 주 시주에 미치지 못하나 그렇다고 해서 사람을 마구해하는 단목 시주를 방 관할 수는 없는 입장이오. 이번에는 빈승이 주 시주와 몇 수를 교환해볼까 하오." 영각 대사의 말이었다. "푸하하핫! 일일이 이유를 댈 필요 없소. 생각 있으면 덤비시오." 주백광의 말에 영각 대사는 자신의 선장을 영무 대사에게 건넸다. 그리고 서서히 다리를 벌려 영무 대사와 같은 자세를 취했다. 주백광은 도병을 움켜쥔 손에 힘을 더했다. 자신에 의해 파해 당한 백보신권을 다시 펼쳐낸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말이었다. 천하에 있어 두려울 것이 없다는 주 백광이지만 소림사 땡중들의 저력은 마냥 무시할 것이 못됐다. 구파일방 중에서도 태두를 자처하는 곳이니만큼 일반적인 무림인들과는 괘를 달리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인자하기만 하던 영각 대사의 표정이 진중하기 이를 데 없게 변하고 부드러운 눈빛이 날카로운 빛을 뻗어낼 그 때 단목지민의 낭 랑한 음성이 들렸다. "잠깐!" 영각 대사도 주백광도, 강변의 무인들도 모두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우선 소생을 위해 저들을 막아주신 주 대협께 가슴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단목지민의 말에 주백광은 살짝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몽세화는 단목지민이 자신에게는 감사의 뜻을 표하지 않는 것에 서운해 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나 단목지민은 그런 몽세화를 외면 하고 당당하기 이를 데 없는 표정으로 중인들을 향해 외쳤다. "주 대협은 이미 소림승과 겨뤄 무공의 고하를 입증했소이다. 한데 또다시 다른 사람이 나서는 것은 차륜전(車輪戰)을 통해 주 대협을 상대하겠다는 의미가 아니오? 그것이 천하무학의 태두를 자부하는 소림의 방법이오?" 시선은 중인들을 돌아보지만 내용은 소림사를 힐난하는 것이었다. 그의 말에 영각 대사의 안색이 굳어졌다. 달리 생각해 보면 단목민이라는 청년의 말이 맞았기 때문이다. 차례차례 싸워 주백광 의 힘을 뺀 후 승리를 얻는 것은 자칫 소림의 명예를 실추시킬 수도 있는 일이었다. "네 놈과 같은 악적, 그리고 그 악적을 비호하는 무리를 상대함에 있어 강호의 도의가 무에 필요하단 말이냐? 간교한 혀로 소림 의 대사님들을 현혹할 생각이었다면 포기하도록 해라!" 탁벽남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나섰다. 악적의 무공이 꽤 뛰어나다는 보고를 들었다. 난데없이 옥소선자가 끼어들더니, 도절,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청년고수까지 가담한 상태. 이 상황에서 나한전의 고승들이 빠지면 승산이 없어질 것은 분명했다. "흥! 명색이 정파라는 것들이……." 단목지민의 조소를 머금을 때 이제야 도착한 동가장의 장주 동영상(東英常)이 널따란 콧구멍으로 더운 김을 쏟아내며 소리를 질 렀다. "대사님들 저 악적을 그냥 보내시면 안 됩니다. 제 체면을 고려해 주셔야지요." 얼굴에 잘잘 흐르는 개기름과 땀이 뒤섞여 번질거리는 동영상의 외침에 영각 대사는 미간을 찌푸려야만 했다. 매년 동가장에서 소 림에 보내오는 은자의 액수는 막대하달 수 있다. 지금에 와서 동가장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영각 대사의 난감한 심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해답은 엉뚱한 데서 나왔던 것이다. "어이, 친구. 이 주백광은 말이야. 싸움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네. 상대가 많건 적건 상관없는 일이지 않겠나?" 주백광이 선주혁에게 던진 말이었다. 그의 호기로운 말에 선주혁은 절로 자신감이 치밀었다. 과거 사형과 함께 무림인들 사이를 헤집고 다닌 경험이 있는 그 역시도 잔뜩 몰려든 무림인의 숫자는 크게 부담이 되지 않았다. "하하핫, 주 형과 내가 있는데 숫자가 무슨 상관이야? 한 판 벌여볼까?" "좋아! 역시 자넨 내 친구야!" 주백광의 화가 완전히 풀렸다는 생각에 선주혁은 절로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강변에 모인 모든 무림인들의 분노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자신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였기 때문이다. 도절의 명성과 청년의 무공이 상상을 초월한 것을 알고 있다지만 이런 모욕을 듣고도 참는다면 이후 강서성에는 감히 행세를 하 고 다니지 못할 것이다. "모두 저 오만한 자들을 쳐라! 창천문도의 기상을 보여줘라!" 탁벽남의 외침에 용기백배한 창천문도들의 함성이 수면을 흔들었다. 선주혁과 주백광의 대화에 단목지민과 몽세화는 질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무공에 자신이 있다 해도 지금의 형국에서 두 사람의 행동은 너무나 무모했기 때문이다. "와라!" 검을 곧추 세우고 달려드는 무림인들을 보며 소리를 지르는 선주혁. 소리를 지른 그는 외려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군중 쪽으로 신형을 날렸다. 창천문의 젊은 제자 중 발군의 실력을 지닌 삼십대 초반의 한 청년이 검극에 변화를 만들어 선주혁을 공격해 왔다. 선주혁은 과감히 검격 내로 뛰어들며 손바닥으로 검신을 옆으로 밀어냈다. 청년의 공격은 훌륭하다할 수 있었지만 선주혁의 눈에는 한 없이 느리게만 보였던 것. 청년은 어떻게 된 일인지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검이 옆으로 밀려나고 눈앞에 얼굴 가무잡잡한 자가 다가오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달리 손을 쓸 사이가 없었던 것이다. 청년의 가슴 안쪽으로 파고든 선주혁의 손이 재빨리 뻗어졌다. 퍽 하는 첫 번째의 타격음이 들림과 동시에 청년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선주혁 나름대로 적당히 힘을 조절한 것이나 몇 번의 부상과 치유의 과정에서 그간 흡수했던 여러 고수의 내공을 이미 자신의 것 으로 완벽하게 만든 선주혁의 일장이었다. 그 안에 담겨진 위력은 청년이 감당하기에는 지나치게 대단했다. 청년의 몸이 허공으로 떠오르고 있는 그 순간 선주혁의 다음 장이 또 한 번 가슴 부위를 때렸다. 청년의 몸이 떠오르는 것이 가속화 되는 그 시점. 선주혁의 다음 장이 다시 청년의 복부를 가격했다. 북두폭렬장의 가공할 속도였다. 연달은 삼 장의 작열하는 것은 눈 한번 깜짝할 사이도 필요치 않았다. 몸이 지면과 수평이 되다시피 해 허공으로 높이 치솟는 청년. 안목이 뛰어난 고수라면 그가 대각선으로 떠올라 수평으로 눕는 허공에서의 기묘한 변화를 보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창천문도들에게는 그만한 안목이 없었으며 그들 중 다수는 선주혁이 공격을 하는 것조차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저 다가섰다 싶은 순간 자신들의 사형이 수평으로 허공에 솟구쳤다가 사지를 펼치고 땅에 처박히는 것만 본 것이다. 땅에 떨어진 청년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입에서 피를 꾸역꾸역 토해냈다. 한눈에도 기식이 엄연한 것이 생사를 오가는 상태 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선주혁이 인상을 썼다. '어떻게 무공을 배웠다는 자가 산적 떼보다 허약한 거야?' 자신의 내력과 무공이 한층 성장한 것을 체감하지 못한 선주혁은 창천문의 무공이 엉터리라는 생각만을 할 뿐이었다. "사술이다! 악적이 사술을 쓴다!" 선주혁이 손조차 제대로 움직이지 않고 동문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것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 예상되었던 한차례 혼전은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선주혁이 만들어낸 기이한 현상에 모두가 주목하고 있었던 것이다. 막 손속을 겨루려던 소림승들과 주백광, 단목지민, 옥소선자도 선주혁의 모습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세상에 저런 무공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도 없었다. 자신들의 눈에조차 흐릿하게 밖에 보이지 않는 엄청난 연속타에 놀란 것이다. '이 자식들? 니네 거는 무공이고 내 거는 사술이냐?' 선주혁은 자기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불후의 명언(?)을 이용해 투덜거렸다. "악적! 내 검을 받아라!" 파양검 탁벽남이 노성과 함께 날카롭게 검을 찔러왔다. 자신의 제자들이 악적의 사술에 흔들리는 모습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벽공장을 쓸 정도로 뛰어난 무공을 지닌 상대였지만 창천문이 단 하나의 젊은이를 두려워했다는 소문이 나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선주혁과의 거리가 좁혀졌을 때 탁벽남은 재차 소리를 질렀다. "창천문의 기상을 보여라! 사술 따위에 현혹되어선 안 된다." 문주의 외침에 고무된 창천문도들이 검을 고쳐 잡을 그 때, 선주혁의 신형이 흐릿해졌다. 이미 익을 대로 익은 암영풍의 전개가 중인의 안력을 극복한 것이다. 탁벽남의 검이 허공을 찔렀을 때 선주혁은 이미 그의 등 뒤에 도달해 있었다. 이어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창천문도들의 중심부분으로 신형을 날리는 선주혁. 그리고 소림승과 단목지민, 옥소선자, 주백광은 경이로운 장면을 눈으로 봐야만했다. 엄청난 속도로 이동하는 선주혁의 신형이 잠시 멈췄다 싶은 그 순간마다 창천문도 한 명이 지면과 수평을 이룬 채 허공으로 떠오 르는 것이다. 무려 삼 장여의 높이로 솟구쳤다가 나래를 펼치듯 사지를 뻗고 땅에 처박히는 창천문도들. 단 한 번의 저항조차 못한 채, 아니 영문조차 파악치 못한 표정 그대로 혼절하는 창천문도들을 보는 장면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 다. "세상에…… 저런 무공이……?" 옥소선자의 꽃잎과 같은 입술이 벌어지며 감탄이 흘러나왔다. "아미타불……." 선주혁의 경이적인 무공을 보는 영무 대사의 입에서는 불호가 튀어 나왔다. 아무리 무공의 수준이 낮은 창천문도라지만 선주혁 이 보여주는 활약상은 세상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는 한 명 당 최소한 삼 장 이상을 가격해 중상을 입히는 중이 었다. 그의 장법에 쓰러진 자가 벌써 수십. 폭발적인 속도를 내기 위해서는 극심한 내공 소모는 필수다. 따라서 무한의 내공을 지닌 인간이 아니라면 지쳐도 벌써 지쳐야할 터였다. 한데 선주혁은 조금도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신이 난 표정으로 창천문도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그는 외려 처음보다 활력이 넘쳐 보였다. 장법의 위력은 조금도 줄지 않 았다. 최소한의 내력을 이용해 전개되는 북두폭렬장의 이치를 몰랐기 때문에 생긴 오해였다ㅏ. "가히 장절(掌絶)이라기에 손색이 없구나……." 상황을 떠나 나한전의 승려로서 엄청난 무공을 본 영각 대사 역시 감탄을 토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오십 여 명이 넘는 창천문도가 모두 땅바닥에 눕는 데는 반각의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탁벽남만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서서 선주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지막 제자가 땅에 떨어지며 낸 둔탁한 소리에 그는 문득 정신을 차리고 검을 고쳐 쥐었다. 오십여 제자를 상대하기 위해 상대가 소진했을 내력을 떠올린 그는 내심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아무리 뛰어난 무공을 지녔다 해 도 상대는 애송이 청년에 불과했다. 천신(天神)이 아닐 진데 내력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 애써 태연한 신색을 유지하고 있지만 내심은 다를 것이다. 폭발적인 속도와 위력의 장법을 최소 백회 이상 쳐냈다는 계산이 아닌 가? 조금 전이라면 몰라도 지금이라면 자신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타합!" 계산을 마친 그는 낭랑한 기합과 함께 검을 찔러갔다. 선주혁은 멍한 표정으로 자신의 심장을 향해 날아오는 검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탁벽남의 얼굴에 흐릿한 미소가 스쳤다. 자신의 예상대로였다. 지친 상대는 날카로운 검공을 피해낼 여력조차 없는 것이다. 하나 그의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선주혁의 신형이 좌측으로 이동해 검극을 피해낸 것이다. 이어 손가락을 꼿꼿이 세워 탁벽남의 우측 어깨를 잡아채오는 조수(爪 手). 탁벽남은 어깨를 낮추며 좌측으로 신형을 회전시켰다. 회전력을 더해 강한 힘으로 상대의 허리를 베려는 시도. 하나 선주혁의 손속을 탁벽남이 예상할 수 있는 속도를 넘어섰다. 그대로 그의 일장이 탁벽남의 등을 친 것이다. 회전 중에 일장에 적중당한 탁벽남은 중심을 잃고 앞쪽으로 신형을 움직였다. 그가 신형을 바로 세울 그 때 두 눈은 찢어질 듯 커졌다. 어느새 선주혁이 눈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숫자만 믿고 덤비면 이렇게 되는 거야." 짧은 말에 이어지는 북두폭렬장의 삼연타. 탁벽남은 상대가 지쳤을 것이라는 잘못된 단정으로 인해 제대로 손을 써보지도 못하고 수평으로 떠올랐다가 땅에 곤두박질을 쳐야 만 했다. 내장을 울리는 지독한 충격에 의식을 잃은 것은 물론이었다. 선주혁은 양손을 탁탁 친 다음 신형을 돌렸다. 그의 모습에 현재까지 올곧게 서 있을 수 있는 소림승 셋과 주백광을 포함한 세 명은 그저 넋이 나간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 다. 방금 전까지 흉험한 상황에서 손속을 나누려던 분위기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이론적으로 실현이 불가능한 선주혁의 무공을 나름대로 이해하느라 여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주 형?" 모두가 멍한 표정만으로 자신을 쳐다보기만 하자 민망해진 선주혁이 주백광을 불렀다. "아!" 주백광은 그제야 제 정신을 차린 듯 표정을 바로잡으며 도병을 쥔 채로 박수를 쳤다. "멋져! 정말 멋져! 자네의 무공은 이 주백광을 놀라게 하고도 남는구먼. 친구의 실력조차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니……. 천하에서 감히 자네와 무공을 겨룰 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하핫, 무슨 그런 칭찬을……!" 주백광이 칭찬하고 선주혁이 겸양을 떠는 사이 영각 대사가 침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미타불……. 그토록 고절한 무공을 지니고서 악적의 편에 서다니 실로 안타까운 일이로소이다. 소림의 제자로서 시비를 외면 할 수는 없으나, 빈승들 중 그 누구도 젊은 시주와 주 시주의 무위를 감당할 수 없는바 훗날을 기약해야겠소이다." "사형!" 영무 대사의 안타까운 외침은 영각 대가가 들어 올린 손에 의해 가로막혔다. 영무대사는 입을 다물지 않을 수 없었다. 쉽지 않는 판단이었을 것이다. 소림이 타인의 무위에 눌려 자리를 피하다니! 하나 영각 대사의 판단은 실로 옳다할 수 있었다. 이 자리에는 주백광, 선주혁 이외에도 강호를 위진하는 무공의 소유자인 옥소 선자도 있었기 때문이다. 모르긴 해도 단목민이라는 젊은이의 무공 또한 범상치 않을 터. 수적우세로 힘을 더해줄 것이라 기대했던 창천문이 단 한 사람에 의해 저 지경이 된 마당이었다. 여기서 무리하게 무력을 사용 코자할 경우 사제들의 생명까지 걸어야만했고 이는 영각 대사로서는 피해야할 상황이었다. 주백광은 잔뜩 신이 났다가 실망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한바탕 해 볼 생각이 없다면 가보시오." 천하에 명성이 드높은 소림승들과의 일전은 주백광에게 충분히 매력적인 일이었다. 하나 이미 한 번의 승부를 겨룬 바가 있고 억 지로 소림과 원한을 살 필요는 없기에 순순히 대응한 것이다. "아미타불……. 부디 젊은 시주께서는 선악을 올바르게 구분해 주시길 바라오. 시주 한 사람으로 인해 고통을 받을 수많은 중생 들을 기억해 주시길……." 영각 대사는 선주혁을 보고 진실 된 말을 던진 후 곧바로 신형을 날렸다. 영진 대사는 썩은 돼지 간과 같이 변해버린 동영상에게 무겁게 말을 건넸다. "동 시주. 실로 죄송하오. 소림은 이번 일로 동시주께 큰 도움을 드리지 못하겠구려." "대, 대사님……!" 처음 등왕각을 찾았을 때의 기세등등한 표정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던 동영상이었다. 행여 자신 혼자 이 자리에 남게 된다면 단목민이라는 청년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를 상황. 그는 황망히 영진 대사에게 말했다. "저, 저를 동가장에라도……!" "아미타불……." 불호를 외운 영진 대사는 재빨리 동가장의 겨드랑이에 팔을 끼우고 영각 대사가 사라진 방향으로 신형을 날렸다. 동영상이 걱정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영무 대사는 주백광과 선주혁을 향해 날카로운 시선을 한 번 던진 뒤 곧 몸을 움직였다. "푸하하하핫! 이보게, 친구! 천하의 소림 고승 셋이 자네의 위세에 꼬리를 말았네 그려." 주백광은 속이 시원하다는 듯 대소를 터뜨렸다. "하핫, 그럴 리가……." "호호호, 주 대협의 말씀에 다소 과장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정말이지 대단한 무공이군요. 저 몽세화는 오늘 소협으로 인해 안계 를 크게 넓혔네요." 선주혁이 어색한 미소를 지을 때 몽세화가 끼어들었다. 이전까지 단목지민을 향해 보내던 매혹적인 시선이 이번에는 선주혁을 향하고 있었다. 몽세화가 뇌쇄적인 시선을 노골적으로 보내오자 선주혁은 절로 얼굴을 붉혔다. 서 있는 자세만으로도 섹시함의 극치를 달리는 그 녀의 유혹 담긴 시선 때문이었다. 그 때 단목지민이 냉랭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두 분의 도움에 큰 소생은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하나 한 가지 명확히 밝혀야할 일이 있군요." 단목지민의 입장에서는 선주혁과 주백광에게 감사의 표시를 해 야 하는 것이 명백했다. 한데 정색을 하고 나서는 모습에 모두 의 아한 표정을 지었다. 단목지민의 날카로운 시선이 선주혁에게 향했다. "명유신군은 소생이 속한 곳에 큰 죄를 지은 자요. 명유신군과 의 관계를 밝혀 주셔야겠소이다." 마치 추궁을 해오는 듯한 단목지민이었다. 그의 말에 선주혁은 여유 있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그였기 때문이다. '미스 단목은 자신을 압도하는 능력의 남자를 좋아하는 스타일 이었지, 아마? 그렇다면…… 푸흐흐흐흐.' 내심 기회다 싶어 만족스러운 웃음을 터뜨리며 그는 능청맞은 표정으로 되물었다. "에? 명유신군이 천마맹에 죄를 지었었소?" 그의 말을 들은 주백광과 몽세화는 크게 놀라 단목지민을 바라 보았으며 단목지민은 당황스런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소생이 천마맹 소속이라는 것을 어찌 알았소?" 이전에 비해 더욱 날카로워진 목소리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 능숙해질 대로 능숙해진 선주혁이었다. 그는 여유 넘치는 표정으로 단목지민의 시선을 외면했다. "그거까지는 알 필요 없지 않소. 중요한 것은 난 명유신군과 일 체의 친분이 없소이다. 명유신군을 죽인 것은 나 자신이니까 말이 오……." 자신의 질문에 대답할 필요가 없다는 말에 발끈하려던 단목지민 이었으나 그럴 기회를 갖지 못했다. 뒤이어진 선주혁의 말이 더욱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명유신군을 죽인 자가 누군지에 대한 소문은 강호를 발칵 뒤집 었다. 단목지민이 그와 같은 큰 사건에 대해 모를 리 없었던 것이 다. "그, 그렇다면 당신이 백발귀마란 말이오?" 선주혁은 외면했던 시선을 다시 단목지민에게 돌리며 하얀 치아 를 드러내며 웃었다. "명유신군이 천마맹에 죄를 지었고, 소생이 천마맹을 대신해 그 자를 처단했다면 감사를 표하는 게 우선이 아니겠소?" 자신의 진정한 신분을 알고 크게 놀라는 단목지민을 보며 선주 혁은 의기양양한 표정이었다. 사실 무림맹의 공적이라는 것이 정파의 인물들에게는 적개심을 불타게 할 요인일지 몰라도 천마맹이나 사파연합에게 있어서는 친 근함을 불러일으킬 이유가 된다. 거기에 죄를 지었다는 명유신군까지 처단해 주었으니 선주혁으 로서는 신분을 감출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잘하면 송예진을 닮은 단목지민에게 포인트를 왕창 딸 수 있는 기회였으므로……. "흐음……. 백발귀마가 어째서 머리색이……?" 선주혁의 신분에 의문을 표한 것은 몽세화였다. "머리색을 바꾸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외다. 적어도 소생의 능력으로는 말이오." 선주혁은 턱을 약간 치켜들고 오만한 표정을 지어 보여줬다. 그의 표정과 말에 즉각적인 반응을 하는 것은 몽세화였다. 그녀 의 눈과 입에 걸린 고혹적인 미소가 짙어졌다. “그래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소.” 단목지민은 영민한 두 눈을 빛내며 아직도 얼굴에 의심을 지우 지 않았다. “백발귀마가 명유신군을 죽였다는 사실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 이나 어찌 명유신군의 무공을 익히고 있다는 것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 않소?” 말인즉 어찌 선주혁이 명유신군의 무공을 사용하냐는 뜻이었다. 선주혁은 여전히 여유로운 표정 그대로였다. 한 순간에 단목지민을 경악으로 몰고 갈 방도를 알고 있기 때문 이었다. 그리고 선주혁의 신형이 꺼지듯 사라졌다. 어느새 단목지민의 눈앞에 나타난 선주혁. 그는 다짜고짜 독수리의 발톱처럼 세운 손가락으로 단목지민의 목을 잡아갔다. 귀영조였다. “무슨 짓이오?” 노성을 터뜨리며 옆으로 피해내는 단목지민. 선주혁은 아무런 말도 없이 묵묵히 손목을 돌려 다시금 단목지 민의 완맥을 잡아갔다. 갑작스런 공격의 연유를 물으려는 단목지민이었으나 쾌속하기 이를 데 없는 선주혁의 공격을 피해내는 데에 집중해야만 했다. 미처 입을 열 틈이 없는 것이다. 그녀는 애써 분노를 가라앉히며 일월신교(日月神敎)의 절기를 펼치기 시작했다. 단목지민의 소수(素手: 하얀 손)가 두 개의 장영(掌影)를 피워냈 다. 꽃잎처럼 하늘거리며 허공을 하얀 그림자로 수놓으며 그녀의 장영이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곧추 세운 선주혁의 손을 마주해갔 다. 선주혁의 손가락이 단목지민의 장심(掌心)과 충돌하는 순간 마 치 애초부터 함께 움직였던 것 마냥 그녀의 장은 뒤로 밀려갔다. 한 눈에도 위맹한 경력을 내포한 선주혁의 장과 부딪쳤음에도 일체의 폭음이 일지 않았다. 그것은 주백광의 고개를 갸웃거리게 했다. 그는 저와 같은 장법 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장법은 스스로를 단목민이라 밝힌 자가 속한 곳과는 연관이 없었다. 아니 세불양립(勢不兩立)이라 할 수 있는 곳이었 다. 그는 안력을 돋우어 단목민이라는 자의 무공을 더욱 세심하게 살폈다. 선주혁의 팔꿈치가 쭉 펴져 끝까지 뻗어졌을 때, 단목지민의 장 은 회수되는 선주혁의 손가락과 딱 붙은 채로 다시 앞으로 뻗어진 다. “진짜…… 무당파(武當派)의 면장(綿掌)이란 말인가?” 어찌 마교의 인물이 무당파의 절기 중의 정기라는 무당면장을 사용할 수 있단 말인가? 납득할 수 없는 사실에 주백광의 인상이 찌푸려질 때, 어느새 그의 옆에 다가선 몽세화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극유(極柔)의 오의를 보여주는 무공이라면 과연 무당의 면장 이 가장 유명하지요. 하지만 마교에도 그에 못지않은 절세의 무공 이 있답니다.” 묘한 콧소리가 섞인 몽세화의 몽환적인 음성에 주백광이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것이다. 주백광은 떠오르는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화무난천장(火舞亂天掌).” 몽세화가 자신의 식견에 대한 자부심이 은근히 드러나는 표정으 로 말했다. “……!” 주백광은 너무나 오랫동안 듣지 않아 잊혀졌던 화무난천장의 이 름을 기억해 냈다. 마교의 호교무공(護敎武功)중에서도 위험하기가 천하에 비할 데 가 없다는 장법. 하지만 익히기가 지극히 까다로워 한동안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었다. 대개 마교의 인물들이 패도(覇道)를 추구하는지라 부드러움[柔] 으로 강함[强]을 제압하는 화무난천장을 익히는 자가 드물어 더욱 그 모습이 오랫동안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일견 춤을 추는 것과도 같은 부드러운 손놀림. 그 손놀림에는 바위를 으스러뜨리고도 남을 위력이 담겨져 있을 것이다. 단목지민의 공격을 보며 선주혁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북두폭 렬장을 익히는 동안 엄청난 속도에 익숙해진 안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목지민을 상대하기란 까다롭기 그지없었 다. 진력을 담아 내민 귀영조는 부드러운 비단 천에 손을 가져다 댄 듯 헛되이 힘이 흩어지고, 날카로운 공격에 신경을 곤두세우면 허초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초식의 완성도가 높은 만큼 공수의 조화가 뛰어났고, 수많은 변 화가 피어오르는 장영 속에서 허와 실을 구분하기가 힘들었다. 부드러움 속에서 강맹하게 피어오르는 기운을 발견한 선주혁이 귀영조를 내밀어 방어하려는 찰나. 강맹한 기운이 난데없이 사라지고 눈부신 소수가 그의 가슴을 가격했다. 콰앙. 피륙으로 이뤄진 인간의 육장과 가슴이 부딪쳐 말들어낸 소리라 믿기 힘든 폭음이 울려 퍼지며 선주혁의 신형이 뒤로 튕겨져 나간 다. “주혁!” 화무난천장의 숨겨진 위력을 알고 있는 주백광이 놀란 외침을 터뜨렸다. 단목지민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맺혔다. 화무난천장의 진가가 발휘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삼 장여를 날아간 뒤 벌떡 일어나는 선주혁. “조식을! 어서!” 주백광은 다급한 외침과 동시에 선주혁의 앞을 가로막았다. 단목지민이 계속해서 공격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단목지민은 다소 오만해 보이는 표정으로 여유 있게 서 있을 뿐이었다. “흠…….” 나직하게 목을 울리는 소리를 낸 선주혁에게 주백광이 물었다. “뭐하고 있는 건가? 서둘러 조식을 취해야한다니까……!” “그의 말이 옳아요. 화무난천장에 적중당하면 온 몸의 혈맥이 다 뒤틀린다고요!” 어느새 다가온 몽세화의 목소리도 다급해졌다. 그리고 요염함을 머금은 그녀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선주혁이 자신의 앞을 가로 막은 주백광의 머리를 넘어 허공으로 솟구쳐 오른 것이다. “주혁!” 주백광의 외침을 뒤로하고 선주혁이 날아간 곳은 단목지민이 있는 방향. 화무난천장에 적중 당하면 혈맥이 뒤틀려 지독한 고통 속에서 죽어가기 마련이다. 그런데 선주혁이 요상조차 하지 않고 날아오 른다는 것은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내력을 지니고 있다는 뜻. 단목지민의 얼굴에 순간적인 당황스러움이 스쳐갔다. “흥!” 하지만 그도 잠시. 아무리 내력이 뛰어나다 해도 화무난천장의 위력을 계속해서 버틸 수는 없었다. 상대의 조법이 패도적인 위력이 있음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하나 호교 무공의 절정이랄 수 있는 화무난천장의 변화를 쫓 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무공이란 단순히 내력만 뛰어나다고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력의 깊이와 무공의 역학관계는 단순한 방법으로 설명될 수 없는 부분이라지만 반드시 내력이 약한 자가 내력이 강한 자에게 패하라는 법은 분명히 없다. 특히나 화무난천장은 무당파의 면장과도 같이 부드러움으로 강을 제압하는[以柔制剛] 신묘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무공. 단목지민의 얼굴에 스쳤던 당황함은 미소로 바뀐 지 오래였다. 그녀는 허공에 커다란 원을 그리듯 양손을 휘두른 후 선주혁을 양해 내밀었다. 꽃잎이 나풀거리듯 회전하는 그녀의 손에 따라 바람이 일고, 소용돌이를 치던 그 바람은 선주혁을 향해 몰려갔다. 벽공장과 같은 위력은 없을 지라도 힘을 줄 곳이 없는 허공에서 균형을 잃기에는 충분한 힘이었다. 어릴 때부터 풍부한 실전 경험을 가져온 단목지민. 허공에서 이런 상황에 처해진다면 고수의 반응이 어떨지는 이미 그녀의 머릿속에 훤히 그려졌다. 온몸을 휘감는 바람의 힘에 저항해 균형을 잡으려 들며 천근추(千斤墜)의 수법으로 최단 시간 내에 땅에 착지할 것이다. 단목지민은 어느새 선주혁이 착지할 그 지점을 향해 신형을 날리고 있었다. “……!” 착지점을 향해 달리던 단목지민의 입가에 미소가 사라졌다. 허공에서 균형을 잃었던 백발귀마가 허공을 박차듯 발을 뻗자 놀랍게도 그의 신형이 강렬한 회전과 함께 앞으로 튀어 나가는 것 이 아닌가? 마치 용이 몸을 비틀며 공중에서 약진을 하는 것과 같은 형상. 그것을 본 주백광과 몽세화의 입에서 탄성이 절로 튀어나왔다. “좋구나!” “운룡대팔식!” 단발마의 탄성이 튀어나오는 사이 선주혁의 신형은 이미 단목지민을 넘어서 땅에 내려섰다. 단목지민은 아차 싶은 마음에 양손에 있는 대로 진력을 끌어 올리며 뒤쪽으로 신형을 날렸다. 명유지력이 쇄도해 들어올 것을 예상해 충격을 줄이려는 것이다. “……?” 오 장여나 뒤로 훌쩍 물러선 단목지민의 눈에 역력히 맺힌 의문. 선주혁은 흐릿한 미소만을 짓고 있을 뿐, 명유지력을 내뻗을 기색조차 비추지 않고 있었다. ‘이런 호기를 놓치다니……?’ 단목지민은 당황스러운 와중에 떠오른 의문을 해소할 여유를 갖지 못했다. 명유지력을 쏟아내지는 않았지만 백발귀마가 손가락을 구부리고 달려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금 시작된 접전. 강철 같은 선주혁의 손가락은 단목지민의 요혈 곳곳을 잡아갔다. 단목지민은 신묘한 신법을 바탕으로 선주혁의 귀영조를 요리조리 피해내며 다시금 화무난천장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정도 무림인들과 수많은 혈전을 치룬 사람치고는 호기를 너무나 쉽게 놓치는군요.” 선주혁을 바라보며 몽세화가 중얼거렸다. “글세……. 놓친 것처럼 보이오?” 주백광은 선주혁이 절호의 기회를 놓친 것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하면서도 의문을 던졌다. “일부러 봐주고 있다기엔 너무나 불리한 상황이 아닌가요? 내력의 차이로 화무난천장을 버티는 데는 한계가 있어요.” 몽세화의 말이 맞았다. 조식을 취하지 않은 상태에서 계속해 혈맥이 비틀리는 충격을 받는다면 천하제일의 내력이 있다 해도 소용이 없는 법. 초식에 있어서 명백한 약세를 보이고 있는 선주혁은 지금 상대를 봐줄 만큼의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주백광의 의문을 품은 데 역시도 이유가 있었다. 곤륜파의 신법은 강호 일절로 여겨진다. 아무리 벽공장력(劈空掌力)을 날리지 않았다 해도 전신을 방비하며 뒤로 물러서기에 바빴던 단목지민이다. 곤륜파의 절정신법으 로 그 뒤를 쫓아가 일장을 날린다면 승부는 진즉 났을 것이다. 쾌검의 절정에 도달했다는 자신의 발도를 막아서던 선주혁의 손놀림을 주백광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 속도로 조법을 사용한다 면 아무리 화무난천장을 전개한다 해도 지금과 같은 양상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주백광의 얼굴에서 긴장이 사라졌다. 그간 자신이 보아온 선주혁은 이유 없이 남을 공격하는 성품은 절대 아니다. 그런 그가 다짜고짜 단목지민에게 공격을 퍼붓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지금과 같은 행동을 하는 이유를 알 때까지는 그저 관망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무림맹의 추살령을 빠져나온 친구야. 영리한 그가 무모한 싸움을 할 리 없지.’ 주백광이 내린 결론이었다. 그렇게 안도의 한 숨을 쉬려던 주백광의 한쪽 눈썹이 꿈틀 거렸다. 초식의 허와 실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 탓에 선주혁이 연달아 단목지민에게 이 장을 허용한 것이다. 뒤쪽으로 튕겨져 나갔던 선주혁은 아까와는 달리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다시금 단목지민에게 달려들었다. “막아야 해요. 저러다가는…….” 몽세화의 안색이 굳어졌다. “아니!” “……?” “그가 원하는 바가 있을 것이오.” 갑작스레 단호한 표정을 짓는 주백광을 향해 몽세화가 답답한 심정을 담아 입을 열었다. “화무난천장은 아무리 내력이 강해도…….” “알고 있소. 그는 어리석지 않소이다. 객기를 부려가면서 쓸데없는 승부욕을 낼 성품이 아니오.” 퍼엉. 주백광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선주혁의 신형이 뒤로 튕겨졌다. 단목지민은 그림자처럼 선주혁을 따라붙었다. 나선형으로 뻗어지는 그녀의 손바닥. 선주혁의 옷이 비틀려 찢어지며 그는 또다시 뒤로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와 같은 과정은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간간히 손을 내밀며 맞서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는 선주혁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창백한 안색 가운데에 초식 을 전개해 맞서는 횟수조차 줄어들고 있었다. “친구라면서 그를 죽일 작정인가요?” 몽세화가 주백광을 다그치듯 말했다. “견디지 못할 정도면 그가 막을 것이오.” “흥! 당신이라면 맨손으로 화무난천장의 초식을 막아낼 수 있을 것 같아요?” 몽세화는 이제 노골적으로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냈다. “못하오.” 주백광이 고개를 저었다. 솔직한 심정이었다. 본래 관전하는 자에게 초식의 허실이 더욱 잘 보이는 법이다. 한 순간에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격전 중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하지만 화무난천장의 변화는 지난(至難) 자체라 말할 수 있을 정도. 안력을 돋우며 초식의 허실을 찾아 방어를 하려 해도 쉽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도법을 전개해 밀밀한 방어막을 쳐낸다면 몰라도 화려한 변화 속에 부드럽기 그지없는 기운만으로 채워진 화무난천장의 허실을 파악해 방어하기란 불가능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막을 수 있소. 마음만 먹는다면……!” “……?” 몽세화는 당최 주백광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주백광이 반대하고 나서는 이상 그녀도 백발귀마를 돕기 위해 나설 수는 없는 입장. 절세준미한 청년과 백발귀마 선주혁 모두가 다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질 뿐 몽세화가 이 일에 참견할 명분이 없었던 것이 다. 그녀는 안타까운 심정에 살짝 아랫입술을 깨물 뿐이었다. ‘막을 수 있다면서 왜 안 막고 저렇게 두들겨 맞고 있는 거야? 저러다 죽기라도 하면……?’ 백발귀마에 대한 염려 속에서도 몽세화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스스로를 단목민이라 밝힌 청년의 무공을 경시할 수 없는 수준이 분명했다. 저와 같은 경지에 오른 단목민의 내력이 허술할 리는 없을 터. 단목민의 장에 저토록 많이 적중하고도 버틸 수 있 다는 것은 몽세화로 하여금 하나의 결론을 유추하게끔 만들었다. 단목민이란 청년을 압도하는 가공할 내력. 오직 백발귀마가 그와 같이 엄청난 내공을 지니고 있어야만 지금의 현상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선주혁의 안색이 하얗다 못해 새파래질 때쯤이었다. 주백광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차츰 선주혁이 단목지민의 화무난천장을 막아내는 횟수가 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막, 막고 있는 건가? 저 변화를……?” 몽세화가 요염함이 흐르는 큰 눈을 깜빡였다. 마치 믿기 힘들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냥 막는 것은 저 친구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 하지 않았소.” 주백광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선주혁과 단목지민의 격전을 지켜보며 말했다. “그럼 지금은 그냥 막는 게 아니란 말인가요?” “잘 보시오. 저 청년이 공격해 올 방향에 미리 손이 가 있다는 것을 못 느끼겠소?” “서, 설마……?” 몽세화는 입을 벌렸다. “여태 두들겨 맞기만 했는데 초식의 변화를 파악할 여유가 있었단 말인가요?” 주백광의 말을 믿기 힘든 몽세화였다.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고 있던 자신조차도 현란한 움직임 속의 연관성을 찾기 힘들 정도였다. 아무리 상대의 장력을 몸으로 버텨 낼 수 있다고 해도 저 상황 속에서 초식의 연관성을 찾고 미리 방비를 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분명하오!” 주백광은 아예 도를 집어넣고 팔짱을 꼈다. “설마……! 저 상황을 만들어 낼 양으로 일방적으로 몰리고 있는 것을 참아냈단 말인가요?” 주백광은 몽세화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아니 답할 수 없었다. 그라고 해서 선주혁의 내심까지 알 리는 없었던 것이다. 일방적이던 전세는 그 양상이 달라진 것이 분명했다. 이제는 단목지민의 안색이 파리하게 변해가는 것이다. 진즉 혈맥이 뒤틀려 죽었어야할 상대가 멀쩡히 버티는 것을 본 단목지민.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백발귀마의 내력이 자신에 비해 월등하다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승부를 내기위해서는 있는 대로 공력을 끌어올려야만 했다. 자부심 가득한 호교무공을 사용하고도 상대를 어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더욱 조급하게 만들었고, 무리한 공력의 운용은 외려 그녀로 하여금 지치게 만든 것이다. 아까와는 달리 상대의 방어가 면밀해져 이제는 공격을 성공시키는 것조차 어려워졌으니 곤란한 것은 단목지민인 셈이었다. 그러던 어느 한 순간. 선주혁과 마주한 단목지민은 물론 주백광과 몽세화의 얼굴에는 경악이 떠올랐다. 갈고리처럼 구부렸던 손가락을 펴고 느릿하게 내미는 선주혁의 일장. 손바닥을 기묘하게 비틀며 내미는 그의 일장은 분명 화무난천장이었다. “저런 어리석은……!” 몽세화의 고운 미간이 찌푸려졌다. 상대의 초식을 외울 수 있다 해서 목숨을 내놓은 격전 중에 그것을 따라하는 자가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저런 자가 어찌 사천에서 내려진 무림맹의 추살령을 피해 예까지 도주해 올 수 있었던 것인지조차 이해가 가질 않은 몽세화였 다. 선주혁과 단목지민의 손이 엉켜들어갔다. 서로가 같은 초식을 사용하니 이번에는 단목지민도 쉽사리 공격을 성공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초식의 이해에서나 정확도, 그리고 내공의 운용에 있어서 단목지민과 선주혁은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하지만 후발선착(後發先着)이라. 뒤늦은 선주혁의 전개에도 불구하고 막상 초식이 전개되면 그의 손이 먼저 도달해 있었다. 화무난천장 특유의 변화로 허공에 장영을 만들어내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름답고 완벽한 동작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선주혁이 만들어내는 변화가 오히려 더 다양해 보였다. 선주혁을 한심하게 보던 몽세화의 얼굴에 경악 그 자체의 감정이 드러나고, 단목지민은 그야말로 충격에 빠져든 표정이었다. 채 반각의 시간이 지다기 전에 전력을 다해 선주혁과 초식을 교환하던 단목지민이 뒤쪽으로 신형을 뽑았다. 그녀는 양손을 늘어뜨린 후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선주혁 역시 그녀의 뒤를 쫓아 공격을 할 생각이 없어보였다. 손등으로 입술을 스윽 닦은 뒤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마치 괴물을 바라보는 듯 백발귀마를 보며 단목지민이 중얼거렸다. 방금 전 백발귀마가 보여준 초식은 분명 화무난천장이었다. 처음 그가 자신의 초식을 흉내 낸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녀는 어이가 없었다. 무공을 익혔다는 자의 행동이라고는 생각하기 힘 들었다. 어이없는 심정은 곧 분노로 바뀌었다. 화무난천장이 어떤 무공인가? 극유(極柔)의 묘리를 익히기가 지난하여 일월신교 내에서도 성 취를 얻은 이가 희박한 최고의 호교 무공 중 하나였다. 자신의 내력이 부족하여 지금 당장 상대를 쓰러뜨리지 못하고 있을지언정 눈으로 본 초식을 흉내내내어 원시전자를 상대하려드 는 오만을 용납할 무공이 아니었던 것이다. 단목지민은 어금니를 사납게 악물었다. 백발귀마가 명유신군을 죽여 명성을 날리고, 무림맹의 포위망을 빠져나왔다고 한없이 오만해져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녀는 화무난천장의 진정한 위력을 보이겠다고 결심했다. 감히 일월신교의 호교 무공을 우습게 본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하겠다 고 마음먹은 것이다. 하나 그와 같은 분노는 채 얼마의 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경악으 로, 그리고 충격으로 바뀌었다. 부정하고 싶었다. 백발귀마가 어설픈 손짓으로 펼쳐내는 무공은 화무난천장의 껍 데기에 불과한 것이라 말하고 싶었다. 단박에 그를 제압해 방금 전의 엉뚱한 행동이 주제넘은 만용에 불과했음을 증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단목지민은 그것이 소용없음을 깨달았 다. 오히려 어설픈 것은 동작일 뿐. 백발귀마가 펼치는 것은 분명한 화무난천장이었다. 화무난천장의 화려한 초식과 변화는 분명 무림의 일절로 여겨질 만큼 대단한 것이 분명했다. 무당파의 면장에 비해 상대하기 더욱 까다롭다 말하는 것도 분명히 시야를 어지럽히는 엄청난 변화 때 문이다. 하지만 화무난천장의 오의는 그와 같은 화려한 변초에 있는 것 이 아니었다. 이유제강(以柔制剛), 즉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제압하는 것과 사 량발천근(四倆撥千斤), 다시 말해 넉 냥의 힘으로 천 근의 힘을 발 휘하는 묘리야 말로 진정한 화무난천장의 오의라 말할 수 있었다. 초식이 이와 같은 효용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내공의 운용법을 정확히 알아야만 한다. 상대의 공력을 와해시키고 더불어 자신의 힘까지 얹어 되돌려 공격하는 묘용은 동작만을 따라 해서는 나타 낼 수 없기 때문이다. 백발귀마와 자신은 몇 번에 걸쳐 공격을 나눴다. 그가 공격하면 일 장에 담겨진 힘에 자신의 공력을 더해 되돌려 보냈다. 놀라움은 거기에서 시작되었다. 백발귀마는 서슴없이 자신의 공력을 받아들인 후 또 다른 힘을 얹어 되돌려 보내는 것이 아닌가? 처음은 그저 우연이 아닌가 싶었다. 상대의 힘을 되돌려 보내는 무공은 꼭 화무난천장만이 존재한다 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공방이 계속될수록 단목지민은 백발귀마의 장법이 화무 난천장임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백발귀마의 일 장에 담겨진 경력이 그려내는 나선의 움직임. 적의 혈맥을 뒤틀어버리는 그 힘만은 화무난천장의 것이 분명했 기 때문이다. 만약 백발귀마가 조금만 더 모질게 공격을 펼쳤다면 혈맥이 비 틀려 죽게 되는 것은 자신일 것이다. 고집스럽게 버티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더구나 단목지민은 어리석은 인물이 아니었다. 백발귀마가 원하는 것은 자신을 해하려함이 아님을 이제는 분명 히 알 수 있었다. 내상을 입어 가면서까지 자신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뜻이 무엇인지 명확했던 것이다. “정녕…… 소생이 전개하는 것을 보고 익혔단 말이오, 이 화무 난천장을……?” 아직도 인정하고 싶지 않음일까? 어렵사리 입을 여는 단목지민의 음성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선주혁의 입매에 미소가 걸렸다. 내상까지 입어가면서 그녀를 압도하는 무엇을 보여 주려한 자신 의 시도가 성공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살짝 턱을 치켜들고 도도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눈으로 보고 느낀 그대로요.” 선주혁의 대답에 입이 벌어진 것은 주백광과 몽세화였다. 선주혁과 단목민이라는 청년의 대화는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기 에 충분한 것이었다. 격전 중에 상대의 무공을 보는 것만으로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는 것. 그거야말로 무림인들이 꿈에서도 바라마지 않는 놀라운 능력이 아닌가?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꿈에서나 가능한 것이었다. 제대로 된 초식을 하나 만들어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던 가? 매 초식은 가장 뛰어난 위력을 낼 수 있는 내공의 운용을 찾아 내야 한다. 위력만을 강조해서는 좋은 무공이라 할 수 없다. 다음 초식과의 매끄러운 연결을 위한 여지를 반드시 남겨 놔야 한다. 그와 같은 조화를 만들어 내기 위해 하나의 무공이 완성되기까지 는 수 십, 수 백 년의 세월을 필요로 하는 게 보통이다. 끊임없이 수정, 보완을 해 무공을 완성시켜가는 것이다. 한데 선주혁은 그와 같은 과정을 생략한 채 겉으로 드러난 초식 만으로 보고 모든 것을 파악했다는 말이다. 무공을 전개한 당사자인 단목민이라는 청년이 인정을 하는 마당 이니 사실이 아님을 부정할 수 없는 상황. 그렇다면 백발귀마 선주혁은 단순히 천재라는 단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의 능력이 가지는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주백광과 몽 세화였기에 표정은 점점 무거워져갔다. Chap. 4 소제목 미정 지나치게 외진 곳에 자리한 허름한 주루였다. 장소가 장소이니 만큼 주루는 하나의 일행만이 자리하고 있었 다. 나른한 표정의 점소이는 간만에 들어온 손님 앞에서 조는 모습 을 보이지 않기에 눈에 힘을 불어 넣고 있었고, 계산대 앞의 주인 장은 횡재에 가까운 매상에 산반(算槃)의 알을 튀기느라 정신없었 다. 단일 세력으로는 무림 최강이라 일컬어지는 마교의 인물, 한 자 루 도를 들면 적수를 찾기 힘들다는 도절, 정사의 중간에서 최강 의 여류고수 중 하나로 손꼽히는 옥소선자, 그리고 정도 무림을 발칵 뒤집은 곤륜이마 중 하나인 백발귀마의 회동임을 생각하면 너무도 초라한 주루였다. 하나 아무도 그와 같은 사실에 불평을 꺼내는 사람은 없었다. “일월신교의 무공은 무슨 일이 있어도 외부로 누출이 되어선 아 니 됩니다. 소생의 안계를 넓혀주고자 하신 뜻은 알겠으나 무슨 일이 있어도 화무난천장을 다른 곳에서 펼치시면 안 됩니다.” 단목지민은 엄중한 표정으로 경고했다. 백발귀마가 명유신군의 무공을 어떻게 배웠는지 자신에게 알려 주려 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그가 명유신군의 무공을 눈으로 보고 배웠다고 말했다면 누가 믿었겠는가? 백발귀마의 친구임을 자처하는 도절 주백광이라 할지라도 선뜻 그의 편에서 사실임을 주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백발귀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몸으로 직접 느끼게 하는 것. 결국 자신이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그와 같은 방법이 효과 적이었음을 증명하는 바였다. “염려치 마시오. 소생은 화무난천장을 사용할 생각이 없으니 까…….” 선주혁은 화무난천장이라는 말에 약간의 힘을 주어 말했다. 단목지민만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을 뿐, 주백광과 몽세화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선주혁이 그저 화무난청장을 눈으 로 보고만 익힌 자부심을 조금 드러낸 것 정도로만 받아들인 것이 다. 결국 선주혁의 입 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간 것을 알아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추살령을 벗어난 자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무림맹의 어리석음 을 비웃었건만…….” 단목지민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뒤에 생략한 말이 무엇인지 좌중의 인물들은 어렵지 않게 짐 작할 수 있었다. 설령 천마맹이라 할지라도 선주혁과 같은 인물을 잡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미였던 것이다. 단목지민은 비어있는 선주혁의 술 잔에 술을 채우며 물었다. “그렇다면 선 대협께서 아까 전개하신 무공 역시 소림의 백보신 권이 맞겠군요?” 단목지민의 질문에 주백광과 몽세화의 시선이 선주혁에게 집중 되었다. “그렇소. 일이 자칫 크게 불거질까 염려되었을 뿐, 백보신권이 맞소이다.” “……!” 선주혁을 제외한 좌중의 셋은 안색이 창백해질 정도로 충격을 받고 있었다. 무공에 대해 잘 알면 알수록 선주혁이 지금 말하는 바가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절감하기 때문이다. “선 공자의 악마적인 재능으로 인해 무림이 발칵 뒤집힐 날도 머지않았군요.” 한숨 섞인 몽세화의 말이었다. “이미 주혁으로 인해 무림맹이 발칵 뒤집혔으니 새삼스러울 일 도 없지 않소?” 주백광이 약간은 농담조로 말했다. “무림맹뿐만이 아니지요. 만약 이 일이 널리 알려진다고 생각을 해 보세요. 한 번만 보여주면 자파의 비전이 누출된다는 사실! 각 대 문파들이 어떻게 생각할 것 같아요?” “……!” 농담을 던졌던 주백광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졌다. 자신의 친구가 세상을 놀라게 할 엄청난 재능을 가졌다는 사실이 충격이기도 했지만, 한 편으로는 크나큰 기쁨이었다. 그래서 사태의 심각성을 깊이 있게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둘 중 하나겠군요. 선 대협을 자신 측으로 끌어들이던가, 아니면 제거하던가! 이런 재능을 가진 자가 적측에 있다는 사실은 상 상만으로도 끔찍할 테니까요.” 단목지민이 몽세화의 말에 결론을 내렸다. 그녀는 약간은 답답한 표정으로 술잔을 잡아갔다. 몽세화 역시 마찬가지였다. 수십 년을 고련해 익히는 게 무공이다. 일정한 경지에 이르기까지 수련을 하는 동안 겪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 그런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인물을 만났으니 복잡한 감회에 사로잡인 것이다. 순간 탁자 위에 섬광과도 같은 번쩍임이 일었다. “……?” 무인 특유의 본능으로 멈칫한 몽세화와 단목지민. 두 여인의 시선이 주백광에게 향했다. 고개를 돌려 몸이 약간 움직이자 그들의 술잔 윗부분이 갈라져 떨어졌다. 쨍그랑. 탁자에 떨어진 술잔의 윗부분이 맑은 소리를 냈다. 놀랍게도 주백광은 어느새 도를 휘둘러 두 여인의 술잔을 잘라낸 것이다. “주혁의 능력에 대해서 일언반구라도 벙긋한다면 나 주백광이 가만히 있지 않겠소.” 몽세화와 단목지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현재 백발귀마의 이 엄청난 능력을 알고 있는 사람은 자신들 둘뿐인 셈이다. 주백광과의 거리는 불과 한 자 반 가량. 천하제일의 쾌도술을 자랑하는 그라지만 몽세화와 단목지민 둘을 동시에 베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미 도 를 뽑아든 그이기에 누구든 단 한 명은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결국 주백광은 살인멸구(殺人滅口)를 암시하며 몽세화와 단목지 민이 입을 봉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저는 선 공자의 안위에 위협이 될 일을 하고픈 생각이 없어요.” 농염한 미소와 함께 몽세화가 먼저 입을 열었다. 주백광의 형형한 안광이 단목지민에게 쏟아졌다. 옥소선자가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질 수 있다는 사실은 강호에 널리 알려진 사실 이었다. 이제는 단목지민의 입만을 함구시키면 될 일인 셈이다. 단목지민은 얇은 입매가 가볍게 비틀어졌다. “주 대협께서는 지금 소생을 협박하는 것이오?” 주백광의 한쪽 눈썹이 살짝 들렸다. “위협에 굴하지 않는 자네의 의지는 이미 보았네. 앞서 자네를 보호하겠다고 나선 것도 사내다운 그 태도가 마음에 들어서지. 하 지만 지금은 사안이 다르지 않나?” 단목지민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주백광의 태도를 협박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은 너무나 속 좁은 행동이었다. 생면부지인 자신을 위해 도를 뽑아들었던 그와 백발귀마가 아닌가? 어찌 보면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었다고 볼 수 있는 두 사람이었다. 그에 대해 생색을 내며 입을 다물라 요구할 수도 있었을 터. 외려 지금과 같은 주백광의 태도가 장부의 행동에 걸맞는 것일지도 몰랐다. “일월신교의 교도들은 은원(恩怨)이 분명합니다. 소생이 두 분께 구명(求命)의 은혜를 입은 것은 명확한 사실. 선 대협의 능력이 제 입을 통해 퍼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남아일언은……?” “중천금!” 주백광의 말을 단목지민은 서슴없이 받았다. 그녀의 대답에 선주혁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남아일언 중천금……, 여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달 리 맹세를 시킬 마음은 없었다. 단목지민이 얼마나 고집스럽게 자신이 한 말을 지키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목지민이 확고히 대답을 하는 것을 보고서야 주백광은 뽑았던 도를 도집에 넣었다. 한순간 고조되었던 긴장이 잦아들었다. 몽세화의 표정이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 단목지민이 한 마디 말이라도 잘못한다면 도절의 도가 그의 목을 가를 것이 분명했던 것이다. 그런 일에 망설임을 보일 도절이 아니었다. “정말이지 오늘은 제게 있어 영광스러운 날이 아닐 수 없군요.” 도를 거둬들였다지만 아직까지는 어색한 분위기. 몽세화는 그런 분위기를 편안하게 하기에 충분할 만큼 부드러운 목소리를 말을 꺼냈다. “강호에 명성이 자자한 분광도 주 대협을 뵈질 않나, 향후 천하제일인이 될 분을 뵈었으니 말이에요.” ‘천하제일인?’ 내심 자신을 생각해주는 주백광의 순수한 의리에 감탄하고 있던 선주혁의 눈이 커졌다. 몽세화가 단목지민의 정체를 파악한 것인 가 싶어서였다. 마교. 교도들 자신은 일월마교라 칭하는 단체가 중심이 된 천마맹이다. 일월마교 자체의 힘만으로 본다면 단일 세력으로는 무림 최강이라 일컬어지지 않던가? 결국 마교주의 손녀인 단목지민은 추후 천하제일인이라 일컬어져도 손색이 없는 것이다. “과연 이대로라면 무공에 있어서 선 대협이 천하제일인이 되리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겠군요.” 단목지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내 얘기였어? 아하핫! 이거 쑥스럽게…… 가만!’ 선주혁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두 여인의 칭찬이 자신으로 향한다는 사실에 기뻐하려는 순간. 지금껏 생각지 못했던 한 가지 사실이 머릿속을 확 밝히고 지나갔다. 천하제일인! 무협소설을 읽다보면 모든 자들이 목숨을 걸고 탐하는 자리가 아니던가? 그 엄청난 이름을 텔레비전 스타의 단점을 보완한 꽃 같은 두 미녀가 자신에게 투영하고 있는 중이다. 그것도 한껏 진심을 담은 표정으로……! 소매치기로 살며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아온 인생이다. 내일이라는 것을 기약할 여유가 자신에게는 없다 생각했다. 그렇기에 비록 무림맹이라는 엄청난 세력에 쫓기고, 칼 끝에 목숨을 걸어야할 지금의 상황임에도 이곳으로 오기 전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이곳에서는 능력에 따라 잘 먹고 잘 살 수있다는 가능성이 엿보였기 때문이다. 한데 지나치게 하루하루 버텨가며 살아온 인생에 젖은 탓일까? 자신이 가진 야망이란 것은 고작 사천 백가와 같은 넓고 잘 꾸며진 집을 구하고, 예쁜 마누라와 자식들을 키워 이 세상에 살다 간 흔적을 남기는 것이 다였다. 거기에 더해 친형제와도 같은 사형인 남지학이 생기고, 친구인 주백광이 생겼으니 점점 더 안일한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사형과 합류해 사파연합의 보호 하에 들어가면 무림맹의 위협에서 자유로워질 것이고, 그것으로 모든 게 해결된다고만 생 각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생각지 못했다. 더욱이 선주혁은 아직까지 만년음양초의 줄기와 뿌리를 먹은 것이 자신의 신체에 얼마나 큰 변화를 만들어낸 지 모른다. 모든 것 을 흡성대법의 효능으로만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효능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금강불괴가 부럽지 않은 신체를 바탕으로 누구의 무공이든 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갖 게 되었다. 그 능력을 가지고 고작 집과 마누라, 자식과 친인들을 얻는 것만으로 만족하다니! 어찌 보면 어리석다 싶을 정도의 소박함이었다. 소설 속의 주인공들이 기연에 기연을 거듭 얻으며 천하제일인의 자리를 찾아다는 것에도 열광하던 자신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그런 주인공을 보며 스스로 천하제일인이 된 것 마냥 기뻐했던 것이 아닐까? 소위 말하는 대리만족을 느낀다는 것은 그 욕구가 있기 때문은 아닐까? 한데 지금 선주혁에게 주어진 것은 대리만족의 기회가 아니었다. 실제로 천하제일인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누구보다 강한 무공으로 원하는 것은 뭐든 할 수 있는 자. 그것이 바로 천하제일인일 것이다. 절대자의 고독이니, 어쩌니 하는 말이 책에서 나오긴 하지만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언제 짭새에게 달려 들어갈지 몰라 전전긍긍하며 명필이 패거리에게 쫓겨 다니던 소매치기가 천하제일인의 자리를 넘볼 수 있는 것이다.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던가? 책 몇 권을 남기고 죽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엉터리 글을 썼던 작가마저 부러워하던 자신이었다. 한데 그저 자신이 세상에 있었다는 흔적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영원토록 이름 석 자를 남길 기회가 온 것이다. 무림사에 길이 남을 이름을……. 가슴이 두근거렸다. 선주혁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천하를 호령하는 자신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그 순간 주백광이 고개를 저었다. “남의 무공을 그대로 따라할 수 있다는 것은 조금 더 유리할 뿐, 그것만으로 천하제일인이 될 수는 없지.” “천하제일인으로서 갖춰야 할 인품이나 덕성이 선 공자에게는 부족하다는 이야기인가요?” 몽세화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주백광이 지금껏 보여준 행동은 친구를 위해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우정의 표본과 도 같았다. 한데 이제 와서 선주혁을 폄하하려는 것이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니오. 이곳은 무림. 진정한 강자라면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것이 진리가 아니겠소?” 주백광은 이미 완숙한 노련미를 물씬 드러내는 강호의 고수였다. 갓 강호에 출두해 순진한 마음으로 영웅의 풍모를 꿈꾸는 풋 내기가 아니란 뜻이었다. 몽세화는 주백광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강호에서 통용되는 힘의 논리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타인의 무공을 보는 것만으로 익힌다 해서 천하제일인이 될 수 없다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소. 첫 째는 수많은 무공을 전부 익 히고 있다고 해서 강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오.” “……!” 주백광의 말이 옳았다. 선주혁의 엄청난 능력에 놀랐기에 단목지민도, 몽세화도 지극히 간단한 이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수 백, 수 천 가지의 무공 을 알고 있는 자보다 하나의 무공을 깊이 있게 익히는 것이 실전에서는 더 유용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둘째는 단지 초식을 외우고 내공의 운용법을 안다고 해서 그 무공이 가지는 본연의 위력을 낼 수 없다는 사실이오.” 영민한 단목지민은 주백광이 말하는 바를 재빨리 깨달았다. “충분한 내공과 무공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말이군요.” “자네 말이 맞네. 내 친구, 주혁의 나이를 감안하면 이해불가의 내공을 쌓긴 했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초절정의 고수들에 비해 내 력이 뛰어나다 말하기는 힘든 상태지. 어떤 무공은 내력이 부족하면 방법을 알아도 펼칠 수 없는 것도 있지.” “무공의 오의에 관한 깨달음이 없으면 펼칠 수 없는 무공이 본교에도 많습니다.” 단목지민의 말에 주백광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말을 들으며 선주혁은 사형인 남지학이 익힌 무극삼검식을 떠올렸다. 소위 말하는 천재인 사형조차 무극삼검식의 최 후 초식을 아직까지 익히지 못했다. 이는 깨달음을 필요로 하는 경지의 무공이기 때문이다. 결국 주백광의 말이 옳다는 것을 느끼면서 선주혁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깨달음이 필요한 무공이 아니고, 충분한 내력이 뒷받 침이 되어야하는 무공이라면 얼마든지 익힐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며 천하제일인에 대한 미련이 생기는 것이다. 흡성대법을 이용해 닥치는 대로 내공을 흡수한다면 천하에 견줄 자가 있겠는가 하는 미련이었다. ‘이, 이것이 천하제일인이라는 이름의 마력(魔力)인가?’ 선주혁은 의식적으로 얼굴에 떠오른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웠다. 무협소설에서 악역은 모두가 쓸데없는 허명을 탐하는 자들의 몫이다. 주인공들이 천하제일인이 되는 것은 스스로 원해서가 아니 라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만약 지금 자신 천하제일인의 자리를 탐하고, 미련을 가진다면 소설 속의 악역들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흡성대법이 마공으로 여겨지는 이유에 대해서 모르는 자신이 아니었다. 단순히 내공을 불리기 위해 닥치는 대로 남이 수십 년 간 고련해온 내력을 흡수한다면 그보다 잔인한 일이 없을 것이다. 무인에게 있어서 내공이 가지는 의미는 충분히 알고도 남는 그였다. 그런 행동을 한다면 진정한 악당은 바로 자신이 될 것이다. ‘더구나 이곳에서 천하제일인이 될 사람은 사형이잖아!’ 퍼뜩 머릿속을 스친 생각에 선주혁은 금세 헛된 야망을 품었던 자신을 반성했다. 자칫 사형이 올라야할 자리를 탐낸 셈이 될 뻔 한 것이다. ‘그래! 천하제일인 따위가 뭐냐? 지금 이 순간 내게 주어진 기회만으로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혜택이 아니더냐?’ 선주혁은 스스로의 탐욕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며 생각을 정리했다. ‘적어도 내 인생에 있어서 주인공은 나잖아! 적어도 이쪽 세상에서는 내가 주체로서 인생을 살 수 있어! 꼭 천하제일인이 아니어 도 말이야!’ 그것으로 충분했다. 저쪽 세상에서는 감히 상상치 못했던 일을 얻은 셈이었다. 더 이상의 과욕을 부릴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자 한결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또한 이쪽 세상에 와서 처음 생각했던 것을 잊는 것이 이토록 쉽다는 사실이 조금은 충격이었다. 초심을 유지한다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인지 미처 몰랐던 그였던 것이다. 문득 사형이 그리워졌다. 사형은 눈곱만큼도 탐욕을 내지 않는다. 자신과는 달랐다. 말 한 마디에 흔들리는 어리석은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천하제일인에 가장 어울리는 것일지도 몰랐다. ‘천하제이인자는 어떨까? 어차피 사형 뒤를 졸졸 쫓아다니면서 부스러기라도 얻으려던 게 초심이었으니까……, 그 정도는 되지 않을까?’ 못내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자신을 돌아보며 선주혁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천하제이인자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지 잘 알고 있 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남자니까……, 그 정도의 야망을 품어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라는 격언도 있잖아. 뭐, 이룰 수 있던 없던 목표가 없는 것보다는 나을 거야. 아하하하핫!’ 혼자 생각하고 혼자 쑥스러워하는 선주혁은 주백광, 단목지민, 몽세화가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것을 알고 어색한 웃음을 터 뜨리며 술을 권했다.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술자리는 본격적으로 시작을 알렸다. <2> “저 사람들…… 무공보다 주량이 더 무섭군요.” 하룻밤을 지새워 함께 술을 마셨기 때문일까? 단목지민은 다소 과장된 표정이긴 했지만 전날에 비해 한결 편한 어조로 몽세화에게 말했다. “그렇군요. 설마 아직까지 마시고 있을 줄이야……!” 몽세화 역시 요염한 눈을 크게 뜨며 놀라는 중이었다. 새벽까지 함께 술을 마시다 취기를 이기지 못해 먼저 들어가 잠을 청했던 단목지민과 몽세화였다. 절대로 내력으로 취기를 몰아 내면 안 된다는 주백광의 규칙 때문이었다. 덕분에 두 사람 모두 오후 늦게 잠에서 깨어날 수밖에 없었고, 일층으로 내려오던 중 아직까지 술을 마시는 주백광과 선주혁을 보게 된 것이다. 말 그대로 주야장창 술을 마셔대는 두 사람을 보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두 명의 주절(酒絶)이 탄생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요.” “호호호호, 단목 공자의 말이 맞네요. 주절, 주절이 함께 술을 마시고 있네요.” 둘은 여인네들처럼 가벼운 수다와 웃음을 함께하며 선주혁과 주백광이 있는 자리로 갔다. “정말이지 두 분의 호방함에 소생은 감탄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푸하하핫, 적어도 삼 일은 내리 마셔야 사내라 할 수 있지 않겠나?” 주백광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눈을 빛내며 웃음을 터뜨렸다. “흠……. 사내가 아니면 삼 일 동안 술을 마시지 못한다는 말씀이신가요? 괜히 제가 오기가 솟네요.” 몽세화가 풍만한 몸을 살짝 비틀며 짐짓 토라진 표정을 지었다. “푸하하핫, 무슨 말씀. 지난 밤, 몽 여협께서 보여주신 호방함에는 이 주 모도 심히 감탄했소이다. 여중호걸(女中豪傑)라 함은 필 히 몽 여협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오.” “호오……! 도절께서 여자의 기분을 맞춰주실 줄 안다니……? 강호의 소문은 역시나 헛되기만 하군요.” 주백광의 칭찬에 싱긋 미소를 지으면서도 몽세화는 농담을 던져 반격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대체 어떤 녀석이 이 주 모에 대해 함부로 혀를 놀렸는지 모르겠지만, 이래봬도 풍류가 무엇인지는 아는 사람이오.” 주백광은 여유 있는 웃음으로 몽세화의 농을 받아 넘겼다. 함께 모여 웃고 즐기는 시간. 선주혁으로서는 간만에 맞이하는 여유였다. 이 순간만큼의 자신이 쫓기는 입장이라는 것도, 엄청난 위험에 노출이 되어 있다는 것도 잊을 수 있었다. 사람들과 함께 하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다. 하지만 행복한 시간은 잠시뿐이었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주루의 문을 부술 듯 밀치고 들어오는 한 명의 중년인. 온 몸에 피갑 칠을 한 그의 얼굴에는 다급한 기색이 역력했다. “도 표두님!” 선주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순간. 어느새 그의 신형은 금번 표행에 함께한 두 명의 표두 중 하나인 도충수(塗忠秀)의 앞에 도착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선주혁이 처음부터 그 자리에서 도충수의 옆에 서 있는 듯했기에 주백광 등은 크게 놀라야만 했다. 선주혁의 신법이 저토록 뛰어나다는 사실은 미처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선……표두, 쿨럭!” 창백한 안색의 도충수는 급기야 입에서 피를 게워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스, 습격이……! 복면인……, 대단한 무공……. 어서…… 서둘러야…….” 끊임없이 선혈을 쏟아내는 도충수는 어렵사리 말을 이어갔다. 선주혁이 있는 곳을 찾기 위해 남창 전체를 뒤졌으리라. 지치고 힘에 겨운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그의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듣기에는 충분했다. 선주혁이 주백광의 얼굴을 바라봤다. 주백광의 얼굴에 떠오른 놀라움. 그것은 비단 선주혁이 보여준 놀라운 신법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번 표행에 나서며 선주혁이 의심했던 바를 떠올린 것이다. 만약 그의 생각대로 금번 표행에 무림맹의 수작이 개입된 것이라면 선주혁이야말로 제갈공명의 화신이라 말하지 않았던가? “어서 저분을 방으로 모셔라!” 주백광이 재빨리 점소이에게 지시했다. 점소이는 커다란 도를 어깨에 걸쳐 메고 소리를 버럭 지르는 주백광의 서슬에 화들짝 놀라 도충수를 부축했다. 옷자락에 뭍는 피 에 연연하기에는 주백광의 눈빛이 너무 무서웠다. “도 표두, 이곳에서 요상을 하고 계시오.” 주백광이 도충수의 어깨에 손을 짚으며 안심을 시켰다. 도충수는 그제야 편안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 형, 어서……!” 선주혁은 마음이 급했다. 아예 예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면 몰라도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지 않았던가? 다만 표행 중에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설마하니 남창지부 자체를 노리고 습격해 들어올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선주혁은 이 사건의 원흉을 구주신룡 서문도옥이라 단정 짓고 있었고, 뻔히 짐작되는 그의 수작에 당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조 바심을 내는 것이다. “몽 여협께서는 도 표두를 좀 지켜주시길 바라오!” 선주혁의 다급함 속에서도 주백광은 침착하게 상황을 처리했다. 도충수는 적의 습격을 피해 이곳으로 도주해왔을 것이다. 위중한 내상으로 미루어 강적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 추적자가 있다면 홀로 감당하기 힘들 것을 염려한 것이다. “하지만……!” 몽세화는 이곳에 남아야 한다는 사실이 못마땅한 듯 했다. “부탁드립니다, 몽 소저!” 선주혁까지 나서서 부탁을 하자 몽세화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럼……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마지못해 수긍하는 몽세화. 그녀의 대답을 듣자마자 주백광이 몸을 움직였다. 단목지민도 재빨리 그 뒤를 쫓았고, 선주혁은 몽세화와 한 번 눈을 마주친 후에야 앞선 두 사람을 쫓기 시작했다. 눈부신 속도를 자랑하는 암영풍이 전개되자 그는 어렵지 않게 주백광과 단목지민의 뒤를 쫓을 수 있었다. “정말 자네 말대로 저들의 수작일까?” 주백광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달리는 선주혁에게 물었다. “글세……. 아닐 수도 있겠지만 지금 생각으로는 당연히 그들이라고 생각하네.” 단목지민은 두 사람의 대화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저들이네, 그들이네, 하는 말이 누구를 지칭하는 바인지 궁금해 하면서도 그녀는 선주혁과 주백광이 가진 무공에 또다시 탄복을 해야만 했다. 경신술은 기본적으로 최소의 진기만으로 운용된다. 하지만 지금처럼 엄청난 속도로 움직일 때는 가진 바 모든 내력을 운용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 그럼에도 태연하게 입을 열어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두 사람의 내력이 자신에 비할 바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백발귀마라는 사람…… 대체 어떤 방법으로 내공을 익힌 걸까? 어릴 때부터 영약을 밥 먹듯 먹고 자라온 나보다 내력이 높을 수 있다니……!’ 그녀는 흡성대법에 대해서 모른다. 그래서 앞서 서로의 무공을 겨룰 때 선주혁이 자신의 장력에 적중당하고도 무사할 수 있던 이 유를 내공의 차이로만 생각했다. 더불어 암영풍의 묘용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지금 선주혁이 보여주는 여유로운 모습도 그의 내공이 자신에 비해 월 등히 뛰어나다고만 여겼다. 자신이 익힌 경신공부 자체가 타인의 것에 못하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기에 내력의 차이로 단정 지은 것 이다. ‘어떻게 해서든 천마맹의 사람으로 끌어 들어야 해! 이런 자를 적으로 둔다는 것은 최악이니까 말이야…….’ 어금니를 악물고 선주혁과 주백광의 뒤를 쫓는 단목지민의 내심이었다. 백발귀마는 어차피 무림맹에 의해 공적으로 지목을 받은 상황. 홀로 무림맹 전체를 상대할 수는 없다. 무림맹에 견줄 세력에 의탁을 하는 것만이 백발귀마에 있어서는 유일한 활로가 되어 줄 것이다. 결국 남은 것은 천마맹과 사파연합, 둘 뿐. 단목지민은 반드시 천마맹쪽으로 끌어들이겠다고 결심을 거듭하는 중이었다. 천하제일인이 될 자는 아니라도 상관없었다. 현재 그가 가진 무공과 재능만으로도 그를 포섭하는 쪽이 앞으로 천하를 지배하리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으므로……. Chap. 5 소제목 미정 “크아아악!” 생명의 마지막 심지를 태우는 비명소리는 처절하기만 했다. 살아온 시간보다 남은 시간이 더 많은 인생을 아쉬워하는 안타 까움과 지독한 통증에 젖은 비명은 하나가 아니었다. 거칠 것 없이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던 사해표국의 남창지부의 넓은 공간 전체가 비명소리로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그나마 비명을 지를 수 있는 사람은 생의 마지막 순간에 여유를 갖는 것이었다. 죽어가는 대개의 사람들은 비명조차 내지를 수 없 었다. 한 순간 두개골이 깨져 붉은 피와 허연 뇌수가 튀어 오르는 지라 비명을 지를 여유조차 갖지 못하는 것이다. 남창지부를 맡고 있는 표두, 엄정식(嚴整識)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무림맹에서 의뢰한 엄청난 표물 때문에 신경을 곤두세우 고는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표물을 노리는 녹림도들이 들끓는 산중이 아니다. 여기는 강서성의 성도인 남창이었다. 한 성의 성도라 함은 무림의 법칙보다는 황법(皇法)의 힘이 더 강하다는 의미였다. 사해표국과 관(官)의 돈독한 관계는 다를 표국에서조차 부러워할 정도. 대담하게도 성도 내에서 표국의 지부를 습격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한 엄정식이었다. 하나 그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이유는 단지 예상치 못했던 습격 탓만은 아니었다. 습격을 감행한 회의복면인들은 미리 방비를 하고 있었다고 해서 막을 수 없을 무공을 소유하고 있었다. 쟁자수들을 물론이고 표사조차도 번번이 손 한 번 휘둘러보지 못하고 죽어가는 중이었다. 복면인들은 양떼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늑대와도 같았다. 표사나 쟁자수는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았다. 그들은 마치 산보를 나 온 듯 여유롭게 걸음걸이를 옮기며 심장을 꺼내고 뇌수를 뿜게 했다. 그들의 신형이 빠르게 움직일 때는 오직 하나. 누군가 표국의 밖으로 도주를 하려 할 때뿐이었다. 본시 남창지부 소속의 표사와 쟁자수는 이백여 명에 달한다. 표행에 나선 인원이 백여 명에 달했지만 지금도 표사와 쟁자수는 이 백여 명이었다. 무림맹이 의뢰한 표행에 동원된 인원이 백여 명이었고 그 인원이 남창지부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외 잡무를 보는 일꾼들과 시녀들을 포함하면 현재 남창지부에 있는 총인원은 삼백여 명이 넘는다고 봐야한다. 한데 고작 스무 명의 복면인이 이 많은 인원을 포위해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고 있었다. 소수의 인원으로 다수의 적을 포위하다니? 엄정식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실 그는 이들 회의복면인만큼 출중한 무공을 지닌 고수들을 이처럼 한꺼번에 본 경험이 없었다. 강호에는 모래알처럼 많은 고 수들이 존재한다고 한다. 하지만 절정의 고수들은 하늘이 내린다고 할 정도. 그 중 한 명을 만나 무공을 견식 해 안계를 넓히는 것은 기연이라 할 정도가 아닌가? 한 데 스무 명에 달하는 엄청난 고수가 무리를 이뤄 표국을 습격했으니 엄정식의 사고체계를 흔들기에 충분했다. “으아아아…… 커억!” 또 다른 처절한 비명이 엄정식으로 하여금 두 눈을 부릅뜨게 했다. 망연자실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나마 복면인들이 서두르고 있지 않은 것을 천행으로 여겨야할 판이었다. 저들의 실력으로 미루어 남창지부를 쓸어버리는 데는 한 시진도 필요치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저들의 행동에는 여유가 넘쳤다. 복면으로 가린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마치 한 명, 한 명을 죽이는 쾌감을 만끽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청난 고수들이 진한 혈향(血香) 속에서 살육의 쾌락을 즐기고 있다고 생각하니 모골이 송연해졌다. 표국의 운명을 결정지을지도 모를 무림맹의 표물 따위는 이미 의식의 범주에서 사라진지 오래였다. 한 때 수많은 표행에 나서 혁혁한 성과를 거뒀던 엄정식이 었지만 남창지부를 맡은 후 십 년……. 맹호와 같던 그의 기세가 누그러진 지 오래된 것이다. 그에게는 오직 자신과 수하들의 생명을 구할 방도를 떠올려야한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선 표두가 올 것이다. 모두 그 때까지만 버텨!” 누군가의 외침에 고개를 돌렸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소리를 질려 표사와 쟁자수를 독려하는 한 노인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도신의 제자인 선 표두와 가깝다는 이유로 중경지부로 돌아가지 않고 이번 표행에 동참했다. 오랜 표국 생활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쟁자수로 남아 있는 그. 하지만 표국의 그 누구도 무시를 하지 않는다는 공 노인이었다. ‘과연……!’ 엄정식은 그제야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복면인들의 대단한 무공을 확인하자마자 표두인 도충수로 하여금 도신 의 제자를 찾게 했다. 삼십 여 표사와 쟁사수들의 목숨을 희생해 혈로(血路)를 뚫은 도충수는 표국의 담을 넘을 수 있었다. 도주로를 뚫으려던 쟁자수 한 명을 다그친 복면인들은 무슨 생각인지 도충수를 쫓지 않았다. ‘아직 희망은 있어!’ 도충수가 찾으러 간 사람의 도신의 후예인 선 표두였다. 선 표두는 무림맹을 곤혹스럽게 했던 곤륜이마 중 옥용검마를 일 도에 죽이고, 백발귀마를 혼비백산해 도주하게 만들었다는 초 절정의 고수가 아니던가! 회의복면인들의 무공을 생각하면 아무리 도신의 제자라 하더라도 지금의 상황에 도움이 되지 못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좌절할 수만은 없었다. 엄정식은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상황. 도신의 엄청난 무공에 관한 이야기를 떠올리며 선주혁이 돌아오면 지금의 절망적인 상황을 벗어날 수 있을 거라 믿어야만 했다. “맞서 싸우지 말고 버텨라! 선 표두가 돌아올 시간을 벌어라!” 급기야 내력을 실은 엄정식의 목청이 터졌다. 그도 수하들을 독려하기 시작한 것이다. 엄정식의 외침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회의복면인들은 서두르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엄정식은 저들이 신속하게 표물을 탈취해 이 자리를 벗어날 생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들이 원하는 것은 이곳 남 창지부의 말살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선 표두가 돌아오기를 기다려 일부러 여유를 부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다시 온 몸을 엄습해오는 절망감. 도충수의 탈출을 허용한 것이 선 표두를 끌어들이기 위함이라면 실낱같은 희망마저 사라지는 것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적을 끌어 들이는 바보는 없기 때문이다. 엄정식의 어금니를 악물었다. 절망의 끝에 서자 풍요로운 삶의 그늘에 숨겨두었던 젊은 날의 투지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무려 백 오십 회에 달하는 표행을 나섰던 그였다. 수많은 위기의 상황을 겪어 오늘의 이 자리에 선 것이 아니던가! 지금보다 더 절망적인 상황이 있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목을 내놓고 있던 기억은 없다. 오늘날 중원 전역에 명성을 떨치는 사해표국을 만든 공로자 중의 하나 인 자신이었다. 검병을 쥔 손아귀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실전에서 검을 휘둘러 본지 벌써 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표국의 지부를 책임진다는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격무에 시 달리다보면 무공수련은 뒷전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엄정식의 얼굴에서는 더 이상 절망감에 사로잡힌 그림자도, 두려움도 찾아볼 수 없었다. 짙은 혈향 속에서 잠재되어 있 던 무인의 투지가 피어오른 것이다. 지난 삼십오 년간을 함께 해 온 애검과의 일체감에서 비롯된 자신감일는지도 몰랐다. 검 한 자루에 몸을 의지에 오늘 날까지 버 텨왔다. 중원 최대의 표국 중 하나로 부상한 사해표국의 남창지부를 책임질 정도의 위치에 올랐으니 후회도 없었다. 짧은 시간동안 인생을 정리한 엄정식의 신형이 움직였다. 낯익은 쟁자수 한 명의 왼쪽 가슴에 우수를 깊숙이 박아 넣은 복면인 의 등 뒤를 향해서였다. 엄정식의 성명절기랄 수 있는 추풍검법(秋風劍法)이 펼쳐진다. 그 어느 때보다 빠르고 위력적인 일 검이었다. 엄정식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썩어도 준치라더니……. 자신이 펼쳐낸 일 식에 스스로 만족하는 것이다. 그는 여전히 무인이었던 것이다. 날카로운 파공성이 울리기도 전에 엄정식의 검은 복면인의 명문혈에 근접해 있었다. 엄정식의 애병이 적의 명문혈을 파고들려는 그 순간. 복면인의 신형이 촛불이 꺼지듯 사라졌다. 엄정식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고개가 돌아간다. 한순간 적의 움직임을 놓친 것이다. 오랜만의 실전으로 인한 실수였다. 완벽하게 적의 숨통을 끊기 전까지는 결코 방심해서는 안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실전에서의 생존법칙이다. 그것을 놓쳤다. 등줄기를 서늘하게 만드는 긴장감. 그는 본능적으로 좌수를 들어 올려 안면으로 향하는 공격에 대비하고, 검신으로 원을 그려 문호를 굳건히 방비했다. 적의 급습에 대비하는 것이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복면인은 일 장여의 거리를 벌린 채 서 있을 뿐이었다. 한 순간의 빈틈을 노려 공격을 할 상대가 아니라는 듯. 그런 복면인의 태도에 엄정식은 심한 모멸감을 느꼈다. 복면 위로 드러난 눈은 자신을 멸시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엄정식은 활시위처럼 팽팽해 당겨진 신경 속에서 잃었던 실전의 감각을 찾아갔다. 어느새 모멸감에서 비롯된 분노도 잦아들었다. 격전 중일 수록 평정심을 유지해야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타합!” 몇 번에 걸쳐 호흡을 고른 후 엄정식이 다시금 검초를 펼쳐 냈다. 고목에서 떨어지는 마지막 낙엽이 허공에서 유영을 한다. 일정한 초식이 없는 듯 자유로운 선을 그리는 검극. 추풍검법의 묘리가 진가를 발하는 순간이었다. 복면인은 손가락을 구부려 외려 엄정식의 검신을 잡아왔다. 엄정식은 일순 검신에 주입된 내력에 변화를 가했다. 검은 기묘한 곡선을 그려내며 독수리 발톱처럼 구부린 상대의 손가락을 베어갔다. 복면인의 손도 허공에 알 수 없는 문양을 만들어내며 엄정식의 검을 피해냈다. 내력이 충천한 검인에 손을 상할 것을 염려한 터 였다. 엄정식은 여세를 몰아 복면인의 심장을 날카롭게 찔러갔다. 좌측 어깨를 뒤로 젖힌 후 상체를 낮춰 엄정식의 가슴 안쪽으로 파고드는 복면인. 엄정식은 헛바람을 들이키며 뒤쪽으로 물러서며 검을 휘둘러 적의 목을 베려했다. 하나 복면인의 움직임은 엄정식의 상상을 초월했다. 검신이 복면인의 목 근처에 이르기도 전에 그의 일장이 복부에 닿았다. 단지 가볍게 손을 댄 듯했다. 하지만 엄정식은 알 수 있었다. 지금의 일 장으로 인해 자신의 생명이 다하리라는 것을……. 최후의 순간 뒤늦게 본 딸아이의 맑은 눈이 떠올랐다. 해맑은 미소를 지은 얼굴이 보였다. 아이의 장래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리 라. 표국에서 책임을 져 줄 테니……. 사해표국 남창지부를 책임지고 있는 표두 엄정식은 그렇게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다. 내장이 터지고 혈맥이 갈가리 찢어 지는 고통 속에서 맞이하는 죽음이었음에도 그의 얼굴은 평온하기만 했다. 그런 엄정식의 얼굴을 보며 회의 복면인은 패배자의 자족이라 생각하며 조소를 머금었다. 힘을 가진 자는 결코 저런 표정을 짓지 않는다. 강자에게는 운명을 선택할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강자에게 필요한 것은 성취와 만족일 뿐이었다. 애써 스스로를 위로하며 평안을 찾는 것이 아니었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적의 죽음을 보지 못했기 때문일까? 복면인은 알 수 없는 불쾌감에 사로잡히며 여태와는 달리 몸을 움직이는 속도를 높였다. 한시라도 빨리 다른 상대를 찾아 지독한 통증과 절망 속에서 피를 토하며 죽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순간 그의 눈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이리 저리 뛰어다니는 한 늙은이가 보였다. 도신의 제자라는 어린 놈이 올 것이라 외쳐대는 늙은이였다. 복면인의 양 손에 공력이 집중되었다. 그의 신형이 순식간에 늙은이를 향해 움직였다. 구부려 내미는 손가락이 늙은이의 심장을 향해 움직였다. 경악으로 물드는 늙은이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바로 이거였다. 이거야말로 약자가 죽음을 맞이할 때의 표정이었다. 자신의 손가락이 늙은이의 심장을 움켜쥘 때면 경악은 상상키 힘든 통증으로, 그리고 잠시 후에는 절망으로 바뀌리라. 복면 안쪽의 입매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이제야 힘없는 자에게 죽음을 내리는 강자의 특권을 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심!” 날카로운 외침. 복면인은 알 수 있었다. 방금 전의 외침은 너무도 익숙한 동료의 외침이었다. 하지만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동료는 자신에 못지않은 강자였다. 나약하기 짝이 없는 이 무리들 사이에서 자신이 조심해야할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크흑!” 해답을 찾기도 전이 지독한 통증이 그의 입에서 신음성을 자아내게 했다. 화끈한 느낌. 발꿈치를 불로 지지는 듯한 고통과 함께 피가 뿜어진다. 선혈의 원천은 늙은이가 아니었다. 그의 심장을 뽑아가던 자신의 팔이었다. 한순간 팔을 잃어버린 복면인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지며 자신의 팔을 잘라낸 원흉을 찾았다. 강인한 턱에 구레나룻을 기른 한 중년인의 모습이 보인다. 끝이 네모진 대도를 들고 있는 그의 얼굴은 오만해보였다. 통증을 넘어선 분노가 복면인을 불태웠다. 저 표정은 자신이 지어야할 것이었다. 저 표정을 본다는 것은 스스로가 약자의 자리에 선다는 뜻이 아니던가. 분노가 이성을 지배하자 그의 좌수가 맹렬히 허공을 갈랐다. 빛살이 무색할 정도의 속도였다. 하지만 복면인은 보았다. 대도를 든 중년인의 입매가 비틀리는 것을. 그것이 조소임을 깨닫는 순간 나머지 팔 하나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상상키 힘든 쾌도술에 감탄할 여력은 없었다. 양 팔이 잘린 통증이 감당키 어려웠던 것이다. “크아아아아악!” 폐부를 쥐어짜는 비명. 이런 비명은 결코 자신이 질러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로 인한 억울함을 채 떠올리기도 전에 복면인의 비명은 끊겼다. 끝이 뭉툭한 대도가 그의 목을 몸과 분리시켰던 것이다. 이와 같은 과정은 실로 한 순간의 일이라 그 누구도 끼어들 사이가 없었다. 방금 전 심장을 파일 뻔했던 공 노인의 노안에 기쁨과 반가움이 가득 찼다. 그리고 주름진 입은 기다리고 기다리던 두 사람을 불렀다. “주 대협, 선 표두!” 복면인의 팔을 자르고 목을 자른 것은 주백광이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두 사람의 출현. 그것은 죽음만을 기다리던 오십여 명의 표국인들에게는 희망이 었다. “선 표두께서 오셨다!” 누군가의 외침에 복면인들의 시선이 한쪽으로 쏠렸다. “이거…… 쉽지 않겠는 걸?” 방금 전 복면인을 손쉽게 죽인 것은 그가 지나치게 방심한 채로 기습을 당했기 때문이다. 주백광은 복면인들의 뿜어내는 기도가 범상치 않음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고, 작금의 상황을 해결하기가 쉽지 않으리라는 생각했다. 선주혁도 신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복면인들에게서 느껴지는 내력. 한 명, 한 명으로 치자면 명유신군에 비해 손색이 있었지만 스 물에 가까운 복면인들인지라 상당히 위험할 것임을 짐작할 수 있 었다. ‘젠장, 그냥 튀면 안 되나?’ 얄미운 서문도옥의 의도대로 표물을 탈취 당한다는 것은 기분이 나쁜 일임에 틀림이 없었다. 하지만 남의 물건을 지키기 위해 거 의 스물에 달하는 강적을 상대하며 목숨을 걸어야할 이유는 없었 던 것이다. 예전에 무협을 소설로 볼 때 뻔히 안 되는 줄 알면서 덤벼드는 주인공들을 보며 그 얼마나 욕을 했던가? “그래도 적을 눈앞에 두고 등을 돌릴 수는 없지. 안 그래, 친 구?” 주백광은 호방한 목소리로 선주혁의 어깨를 툭 쳤다. “어? 그, 그렇지. 아하하하핫!” “아무리 두 분이라도 해도 저들 전원을 상대하는 것은 무리겠는 데요.” 단목지민이 아미를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선주혁은 단목지민의 말에 재빨리 동의하려 했다. 하지만 주백광의 걸걸한 음성이 더 빨랐다. “후훗! 저들이 내 친구일리는 없고, 결국 개새끼들이라는 말인 데……. 이 주백광은 개새끼가 떼를 지어 몰려있다고 해서 도망칠 수는 없어.” ‘이봐요, 주씨 아저씨! 개새끼도 개새끼 나름이지. 저 놈들이 정 말 그곳에서 온 거라면 도망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라고…….’ 선주혁이 울상을 지으려는 순간 회의복면인 중 머리가 희끗한 한 명이 노성을 터뜨렸다. 아마도 동료를 잃었다는 사실에 분노하 는 것이리라. “도신의 후예가 어린놈이라 들었거늘 생각보다 나이가 많구나!” 회의복면인의 시선은 주백광으로 향해 있었다. 그가 대도를 들고 있는데다가 범상치 않은 도법을 선보여 도신 의 후예라 착각을 하는 것이다. “풋! 이제 보니 썩은 동태눈깔을 가진 개새끼잖아?” “저, 저……! 뭣들 하는 건가? 어서 저 놈의 혀를 뽑지 않고?” 머리가 희끗한 복면인의 외침에 바로 곁에 있던 한 명이 신형을 움직였다. “좋아! 누가 더 많이 죽이는가 내기하는 걸세, 친구!” 주백광은 선주혁의 어깨를 다시 한 번 툭 치고는 앞으로 달려 나갔다. 선주혁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울며 겨자 먹기로라 도 한바탕 붙지 않을 수 없었다. 어렵사리 얻은 친구를 버려두고 도망을 갈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주백광은 벌써부터 회의복면인과 도를 휘두르며 엉켜들어가고 있었다. ‘어쩐지 이 상황을 즐기는 것 같군.’ 주백광의 표정을 본 선주혁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한 없이 그의 표정을 감상할 시간이 없었다. 또 하나의 회의복면인이 자신을 향해 덮쳐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주혁은 암영풍을 전개했다. 오히려 자신을 향해 덮쳐오는 복면인의 왼쪽을 파고드는 선주 혁. 그의 손이 옆구리 부근을 떠났다. 아니, 떠났다 싶은 순간 그의 일장은 어느새 복면인의 가슴부위에 닿고 있었다. 복면 위로 드러난 눈에 경악이 어리며 상반신이 틀어졌다. 미세 한 차이로 선주혁의 일장은 복면인의 옷자락만을 스쳐 지나갔다. ‘젠장!’ 북두폭렬장의 엄청난 속도에 스스로도 자부심을 가졌던 선주혁 이다. 쾌도술의 달인이라는 주백광조차 감탄한 속도가 아니던가? 한데 복면인이 그 일장을 피해냈다. “보통 놈이 아니구나!” 선주혁의 나이만을 보고 우습게 생각하던 복면인은 탄성을 내질 렀다. “당연히 보통 분이 아니시지.” 선주혁은 단목지민을 의식해 여유 있는 척 말했다. 그리고는 한 손에 들었던 싸구려 박도를 버렸다. 도신의 후예인척 하기 위해 구입했던 도였다. 단발의 장으로 상대할 수 있는 적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다. 복면인도 선주혁을 경시하는 마음을 버렸다. 그의 일 장을 피해 낸 것은 천운이랄 정도였다. 무인 특유의 본능이 먼저 위험을 감 지했기에 피할 수 있었을 뿐, 제대로 손이 움직이는 것조차 보지 못했던 것이다. 상반신을 웅크리며 양손을 비스듬히 내밀어 가슴 높이로 들었 다. 그 모습은 선주혁이 예전에 오락실에서 봤던 스모 선수가 취했 던 자세와 비슷했다. 이어 빠르게 갈지(之)자를 그리듯 삼보(三步)를 밟으며 선주혁에 게 달려드는 복면인. 상대의 손속이 재빠르니 선기를 잡아 일전을 이끌려는 속셈이었 다. 복면인이 비스듬히 걸음을 옮겨오는 것을 보고 선주혁은 물러서 지 않고 양손을 움직였다. 상대의 공격 범주를 예상하고 문호를 보호하던 복면인의 양 손 이 선주혁의 첫 번째 장을 막았다. 생각보다 엄청난 힘이 담겨진 일장에 놀라려는 그 순간. 가슴부위를 보호하던 뒤쪽의 다른 손에 또다시 충격이 가해지 고, 동시에 갈비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충격과 함께 몸이 뒤로 튕 겨졌다. 이른바 선주혁의 북두폭렬장이 작렬한 것이다. 한 번에 삼 장을 연속으로 쳐내는 가공할 장법. 실전에 사용된 연환공격은 기대 이상의 효과를 입증하고 있었 다. 선주혁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복면인들의 실력이 만만치 않았음을 알고 있기에 만족감은 더욱 높았다. 소위 말하는 절정고 수를 단 한 번에 날려 버린 것이다. 반면 선주혁과 같은 애송이 따위에는 신경도 안 쓰고 도신의 후 예라 착각한 주백광의 싸움에만 집중하고 있던 복면인들은 경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들의 동료가 싸움이 시작되자마자 입에서 피 화살을 쏘아내 며 뒤로 날아가 버린 것이다. “고수다!” 복면인 중 하나의 외침에 아직까지도 몇몇 남지 않은 표국인들 을 도살하던 나머지들이 손을 멈췄다. 도신의 후예든 그의 일행이 든 어차피 죽게 될 운명임을 의심치 않았던 그들은 아예 이쪽으로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머리가 희끗한 복면인의 고리눈이 일그러졌다. 예상치 못한 상 황의 전개가 못마땅했던 것이다. 수하들은 자신이 속한 곳에서도 내놓으라 하는 고수들이었다. 스물에 달하는 이들이라면 어지간한 방파 하나는 가뿐하게 쓸어버 릴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한 명, 한 명의 무공이 그만 큼 고강했던 것이다. 한데 방금 전 담을 넘어 들어온 세 명의 무공은 어처구니가 없 었다. 도신의 후예라 여겨지는 중년의 도객(刀客)은 가공할 쾌도를 구 사하는 중이었다. 단순히 쾌도를 구가하는 것이라면 수하들의 무 공 수준으로 보아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도객은 달랐다. 일 도, 일 도에 담겨진 위력은 중도(重 刀)을 이용하는 자의 묘리를 그대로 담고 있었던 것이다. 쾌속한 도법에 담겨진 무거움은 상대하는 자를 곤혹스럽게 만들기에 충분 한 것. 이대로라면 수하의 패배는 명약관화(明若觀火)했다. 복면인들의 수장인 그는 결국 고리눈을 빛냈다. “회(會)의 무공을 펼쳐라!” 지금껏 복면인들은 자신이 속한 곳의 무공을 감춰왔다. 강호에 떠도는 삼류조법을 멋대로 펼치는 것만으로 사해표국의 표사와 쟁 자수를 죽이는데 충분했던 것이다. 우두머리의 명을 들고 주백광을 상대하며 쩔쩔매던 복면인의 기 세가 한 순간 변했다. “오호라! 개새끼들이 얼굴에 복면만 한 것이 아니라 이빨에도 색칠을 하고 있었구나!” 주백광은 적의 기세가 강해진 것이 외려 신이난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멋대로 지껄이는 것도 지금까지다!” ccccccccccccccccccccccccccccccccccccccccccccccccccccccccccccccccccccccccccccccccccccccccccccccccccccc fffffffffffffffffffffffffffffffffffffffffffffffffffffffffffffffffffffffffffffffffffffffffffffffffff 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 복면인은 호통을 지르며 주백광 쪽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동시에 그의 장에서 짙은 자광(紫光)이 번득였다. 그 모습을 본 단목지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손에서 자광을 낼 수 있는 무공을 떠올랐기 때문이다. 화산의 장로급 이상의 인물들에게만 전해진다는 절정의 무공. 정도가 자랑하는 최강의 무공 중 하나인 그것은 바로 자하신공 (紫霞神功)이었다. 하지만 조금은 달랐다. 자하신공은 무공의 이름 그대로 저녁노 을처럼 희뿌연 빛을 낸다고 들었다. 복면인의 손에서 빛나는 자광 은 희뿌옇다기보다 선명하고 명확했다. 더구나 화산파의 고수들이 무림맹의 표물을 노리고 사해표국을 습격할 리는 없는 터. 단목지민의 총명한 머리가 맹렬히 회전했다. 그리고 오랜 기록에서 읽었던 하나의 무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천하를 두려움으로 몰고 갔던 오래 전 그 고수의 무공을……. 무림사 최고의 천재 중 하나로 일컬어진다는 그는 태어날 때부 터 장애를 가졌다. 등에 커다란 혹이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 얼굴 까지도 추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부모를 알 수 없었다. 어릴 때 버려진 것이다. 험난한 세상에 곱추 소년이 겪어야하는 모든 것은 끔찍한 고통 뿐이었다. 떠도는 그에게는 매일 같이 동네 아이들의 돌 세례가 쏟아졌고, 제대로 된 음식은 입에 대기조차 힘들었다. 가진 것 없 고 보호자도 없는 그에게는 하루하루가 살기 위한 투쟁이었다. 사고의 기초가 닦여졌을 때, 그는 사람들이 있는 곳을 피해 산 으로 들어갔다. 산에서 작은 짐승과 과실로 연명하는 것이 쉽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산중을 떠돌던 그는 인생에 있어 획기적인 전환을 맞이하게 된다. 자신처럼 등에 커다란 불행을 지고 살아온 한 노인을 만나게 된 것이다. 곱추 노인은 그를 제자로 거두고 가진 무공이라는 것을 전수해줬다. 더불어 그에게 자신의 성을 물려주고 불고(不孤)라는 이름까지 지어줬다. 어느새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던 늑대도, 곰도, 호랑이도 무섭지 않게 성장한 함불고(咸不孤). 타고난 총명을 바탕으로 곱추 노인에게 전수받은 무공을 발전시 켜 하나의 절기를 창안한다. 이후 세상에 나선 함불고는 여태껏 자신을 천시 여기던 자들을 향해 복수를 시작한다. 상상을 초월하는 기괴한 장법을 사용하는 그를 막을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억눌렸던 울분을 풀 때까지 살행을 멈추지 않았다. 부모에게조차 버림을 받았던 그였기에, 철모르는 어린 아이의 돌에 머리가 깨져 피를 흘리던 그였기에, 그에게 있어 살아 움직 이는 인간은 모두가 적이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세상에는 갖가지 풍 문이 떠돌았다. 은거하던 고수가 혈겁을 해소하기 위해 검을 들고 나서 그를 제거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했다. 그가 사라진 후 수십, 수백 년이 흘러도 강호는 당시의 혈겁을 쉽사리 잊을 수 없었다. 특히나 그가 사용하던 무적의 장법은 더 욱 잊을 수 없었다. 후세의 사람들이 혈마(血魔)라 부르던 함불고의 성명절기였던 혈마자광기(血魔紫光氣)는 그렇게 전설이 되어 회자되어 왔다. “서, 설마 그 저주받은 무공이……?” 단목지민은 아닐 거라 믿고 싶었다. 수백 년 전, 단 한 번의 패배조차 허용치 않았던 무적의 기공 (奇功)이 지금에 와서 다시 그 모습을 드러내다니. 혈마자광기가 출현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무림을 발칵 뒤집어 놓고도 남을만 한 사건이었다. 단목지민은 아닐 거라 믿고 싶었다. 수백 년 전, 단 한 번의 패배조차 허용치 않았던 무적의 기공 (奇功)이 지금에 와서 다시 그 모습을 드러내다니. 혈마자광기가 출현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무림을 발칵 뒤집어 놓고도 남을만 한 사건이었다. 복면인의 손에서 번득이는 자광을 본 주백광은 호방한 목소리와 는 달리 신중을 기해 도법을 전개했다. 단숨에 변한 기세만으로도 범상치 않은 무공임을 짐작한 것이다. “조심해요, 혈마의 무공이에요!” 단목지민이 주백광의 예감이 맞았음을 확인시켜줬다. ‘아! 저게 바로 혈마의 무공이었군.’ 단목지민의 말을 듣고서야 선주혁도 책에서 봤던 혈마자광기를 기억해냈다. 제대로 익히면 적수를 찾기 힘들다던 무적의 무공 중 하나였다. ‘그러고 보니 적혈마의 혈마인, 혈마의 혈마자광기…… 무공이나 별호가 다 비슷비슷하잖아? 하여튼 작가 녀석. 글 쓸 때 성의라고 는 찾아볼 수가 없다니까……!’ 선주혁이 오랜만에 이글을 썼던 작가에게 투덜거리는 사이 주백 광과 복면인이 본격적으로 손속을 겨루기 시작했다. 콰앙 쾅 쾅 “호오?” 세 번에 걸쳐 연달아 터지는 폭음에 주백광의 입에서 탄성이 튀 어 나왔다. 복면인은 쾌속무비하게 자신을 베어오는 주백광의 대도를 맨손 으로 막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좋아, 어디까지 버티나 볼까?” 주백광이 이를 악물었다. 그의 손목과 팔이 허공에 수많은 선을 그려대고 대도는 풍차처 럼 회전하며 복면인을 몰아갔다. 일대는 주백광의 대도와 복면인의 혈마자광기가 충돌하는 폭음 으로 가득해졌다. ‘과연 도절이구나!’ 단목지민은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주백광의 실상 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혈마자광기는 보통의 사람이 라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난해한 초식과 그 무엇으로 상하게 할 수 없다는 자광수(紫光手)로 무적이라 여겨지던 무공이 었다. 하지만 전신을 혈마자광기로 보호할 수는 없는 법. 저처럼 정신없이 몰아붙인다면 수비에 급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혈마자광기를 사용하고도 복면인이 쩔쩔매는 모습을 보이자 다 른 한 명의 복면인이 신형을 움직였다. 협공을 하려는 것이다. “어딜!” 낭랑한 음성과 함께 선주혁이 그 앞을 막아섰다. 은은한 자광이 깃든 복면인의 손이 재빨리 선주혁의 가슴을 향 해 날아들었다. 정면으로 그 손을 마주하는 선주혁. 쾌속무비한 그의 북두폭렬장은 뒤늦게 출수 되었음에도 복면인 의 팔꿈치가 채 펴지기도 전해 상대의 장에 닿았다. 콰아아앙. “크으윽!” 귀청을 울리는 폭음과 복면인의 신음성이 튀어나왔다. 축 늘어진 자신의 어깨를 다른 한 손으로 움켜쥔 채. 선주혁은 상대의 장심을 향해 연달아 세 번의 장력을 쏟아 부었 다. 그래서 혈마자광기가 몰린 손은 멀쩡했으나, 어깨가 연속된 충 격을 이기지 못하고 빠져버린 것이다. 복면인은 어깨의 통증보다 선주혁이 전개한 장법의 놀라운 속도 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자신이 한 번의 장력을 쳐내는 동안 무려 세 번이나 쳐냈다는 사실이 언뜻 실감이 나지 않았다. 우드드득. 복면인의 이마에서 고통을 증명이라도 하듯 식은땀이 진득하니 배어 나왔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탈구된 어깨를 맞춘 것이다. 턱 근육에 미세한 경련이 일었다. 앞서 애송이와 마주했던 동료는 방심한 상태에서 혈마자광기를 운용하지 못하고 애송이의 급습에 당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손속을 겨뤄본 복면인은 그것이 착각이었음을 깨달 았다. 눈앞의 애송이는 자신이 속한 회에서도 쉽게 찾기 힘든 고 수였던 것이다. 그는 다시금 공력을 이끌어 혈마자광기를 펼쳐내려 했다. 순간 복면인의 두 눈에 혈관이 있는 대로 모습을 드러냈다. “크흑!” 악다문 어금니 사이로 새어나온 신음. 전신의 혈맥 사이를 바늘이 헤집고 다니는 듯한 통증 때문이었 다. “이, 이럴…… 수가…….” 믿을 수 없는 현상에 중얼거리는 복면인은 한사발이 넘는 선혈 을 토해내고 있었다. 잠시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내 창백해 지며 복면인은 앞으로 쓰러져야만 했다. 그의 우수는 심장 언저리의 옷자락을 움켜쥐고 있었다. 선주혁이 전개하는 북두폭렬장은 최심장의 운공 방법을 빌려온 것. 혈맥에 충격을 주고, 누적된 충격이 심장에 도달하면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최강의 장법이 바로 최심장이었다. 복면인은 탈구된 어깨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요상에 들 어가 충격을 받은 혈맥을 달래고 심장을 보호했어야만 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알지 못했던 복면인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두 눈을 부릅뜨고 죽어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죽음은 복면인들을 경악으로 몰고 갔다. 예기치 못했던 고수의 출현이었기 때문이다. 놀라는 것은 선주혁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한 눈에도 범상치 않 게 보이는 복면인들이었기에 잔뜩 힘을 끌어올려 북두폭렬장을 전 개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저들과 같은 고수가 저토록 맥없이 죽어 버릴 줄은 몰랐던 것이다. ‘내가…… 이런 천재였을 줄이야!’ 자신이 창안한 무공이 엄청난 고수들을 상대로도 그 위력을 제 대로 드러내자 선주혁은 스스로의 능력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 었다. 그가 헤벌쭉 미소를 짓는 사이 머리가 희끗한 복면인이 손짓을 했고, 그에 맞춰 두 명의 복면인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좋아! 다 덤벼!” 북두폭렬장의 위력을 확인한 선주혁은 신이 나서 외쳤다. 그 모습이 주백광과 사뭇 비슷하여 단목지민은 살짝 고개를 저 었다. ‘정말이지 잘 어울리는 친구군.’ 파아앙 팡 팡 단목지민이 어이없어하는 순간 선주혁과 두 명의 복면인들은 빠 르게 공격을 교환했다. 두 명이 동시에 공격을 함에도 선주혁은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한순간에 세 번의 공격을 쏟아 부을 수 있는 그인지라 열세를 보 이는 것은 외려 복면인들이었다. 복면인들의 우두머리는 결국 손을 한 번 더 들어야만 했고, 선 주혁에게 세 명의 복면인이 달라붙게 되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선주혁이 밀리는 모습을 보였다. 속도에 있어 서는 유리했으나 사위를 포위하고 날아드는 장들을 일일이 방어하 기가 수월치 않았던 것이다. “흥! 과연 개새끼들이군. 떼를 지어 공격을 하다니!” 주백광이 노기가 충천한 고함을 지르며 자신이 상대하는 복면인 을 더욱 거칠게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빨리 상대를 처리하고 선주 혁을 돕고자 함이었다. 하지만 뜻을 이루기가 쉽지 않았다. 우두머리의 명을 받은 다른 두 명의 복면인이 그에게도 달라 붙 었던 것이다. 일 대 삼의 싸움이 벌어지자 전세는 일순간에 역전 되었다. 선주혁도 주백광도 뒷걸음질 치기에 바빴던 것이다. 대도를 휘둘러 물샐 틈 없는 도막을 형성해 수비에 급급한 주백 광.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의 속도로 양손을 움직이며 귀신같은 신법으로 용케 부상을 피하는 선주혁. 곤란한 상황을 확인한 단목지민이었으나 그녀 역시 편한 입장은 아니었다. 한 명의 복면인이 손에서 자광을 빛내며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크아아아악!” 다시금 표국을 울리는 처절한 비명. 세 사람을 상대로 무려 일곱이나 되는 고수들이 덤벼드는 것을 확인한 나머지 복면인들이 학살을 재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선주혁은 마음이 급해졌다. 공 노인이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를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악물고 세 명의 복면인을 물리치려 했으나, 그들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혈마자광기를 운용한 자광수의 초식이 정교해지기 시작했다. 셋의 연수합격이 점차 익 어가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한 순간. 퍼억. 둔탁한 음향과 함께 좌측 후방에 있던 복면인이 선주혁의 어깨 를 가격했다. 어깨가 으스러지는 듯한 통증과 함께 우측으로 튕겨지는 선주 혁. 맞은편에 있던 복면인의 눈가에 미소가 맺혔다. 혈마자광기를 운용한 장에는 기본적으로 금강석도 으스러뜨릴 위력을 담고 있다. 하지만 혈마자광기의 무서움은 그저 손이 단단해지는 데에만 있 는 것이 아니었다. 장이 목표물에 닿는 순간 생성되는 폭발력은 벽력탄(霹靂彈)이라 해도 흉내 낼 수 없을 정도의 위력을 낸다. 과거 혈마의 일장을 제대로 받아낸 자가 없다는 사실이 그와 같 은 혈마자광기의 위력을 증명했다. 방금 전의 일 장은 제대로 적중했다. 맞은편에 서 있던 복면인은 그 일 장으로 인해 선주혁의 죽음을 의심치 않았다.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신형은 이미 혈맥이 파열된 고깃덩이에 불과했던 것이다. 퍼어어엉. 눈가에 떠오른 미소가 제대로 모양을 갖추기도 전에 울리는 폭 음. 복면인은 미소를 경악으로 바꾸지도 못한 채 즉사했다. 이미 시체라 생각했던 상대가 연달아 손을 움직여 가슴에 삼 장 을 고스란히 맞았기 때문이다. “어, 어떻게……?” 혈마자광기에 제대로 적중 당하고도 죽지 않는 자가 있다는 사 실을 받아들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선주혁을 가격했던 복면 인의 놀란 외침은 현실을 부정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금강불괴?” 다른 한 명의 복면인이 외치는 소리에 표국의 나머지 사람들을 학살하던 자들도 고개를 돌렸다. 그들의 눈에는 왼쪽 어깨를 움켜쥐고 인상을 쓰고 있는 선주혁 의 모습이 보였다. “살려둬서는 안 될 놈이다! 저놈부터 죽여!” 복면인들의 수장이 고함을 질렀다. 혈마자광기에 당하고도 살아 있을 수 있는 인물. 그것은 자신들에게 있어서의 직접적인 위협이었다. 상부에서는 도신의 후예를 반드시 처단해야한다는 명령이 떨어졌다. 회에 위 협이 된다는 이유였다. 상부의 판단은 정확했다. 도신의 후예로 짐작되는 자는 회에서 도 엄선한 고수 셋을 상대로도 패색을 보이지 않는 엄청난 고수였 다. 하지만 그의 생각에는 듣도 보도 못한 쾌속한 장법과 신법을 구 사하는 저 애송이가 더 위험했다. 혈마자광기를 맞고도 무사할 수 있다는 것은 내공이 신화경(神化境)에 이르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 그런 자가 적이 된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다. 어떻게 저 나이에 그와 같은 경지에 오른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품을 상황이 아니었다. 일체 보고된 바가 없는 강적. 그것이 회가 이루고자 하는 위대한 업적에 얼마나 큰 걸림돌이 될 지는 자명한 사실. 복면인의 우두머리는 내공을 끌어올렸다. 여차하면 자신도 출수(出手)하리라 각오하는 것이다. 선주혁은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아무리 금강불괴가 부럽지 않은 신체를 소유하고 있다지만 자광 수에 적중당한 어깨에서 느껴지는 통증은 극심했다. 팔을 들어 움 직일 때마다 쑤시고 아파오는 것이 단단히 충격을 받은게 분명했 다. 한데 복면인들이 자신을 향해 떼거리로 덤벼드는 것이다. 하나 를 죽였다는 생각에 안도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는 재빨리 신형을 뒤로 뽑아 표국 내를 이리저리 달리기 시작 했다. 암영풍의 엄청난 속도였지만 곧 한계를 맞았다. 계속해서 달 리는 것이라면 암영풍을 쫓아올 신법은 드물겠지만 아무리 표국이 넓다 해도 한정된 공간이었다. 복면인들 정도의 고수라면 내력을 폭발적으로 운용해 신법을 전 개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속도는 결코 암영풍에 뒤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결국 선주혁은 다시 세 명의 복면인들에게 포위를 당했다. 한 사람을 공격하는 데 있어 가장 적절한 숫자가 바로 셋. 세 명 이상이 되면 서로가 서로를 방해하기 마련이었다. 공격을 하는 숫자는 셋에 불과했지만, 선주혁에게는 이전과는 비할 수 없이 나쁜 상황이었다. 직접 손을 쓰는 세 명의 밖으로 일곱 명의 복면인이 한 겹의 포위를 더 한 채 호시탐탐 그를 노리 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악물고 어깨의 통증을 참아내며 다시금 북두폭력장을 전개 하는 선주혁. 퍼어엉 퍼엉 펑 선주혁의 장이 복면인들의 자광수와 충돌하며 귀청을 찢는 폭음 이 연달아 울렸다. 한 순간 수십 초의 장이 허공에서 얽혔다. 세 명이 동시에 쏟아 내는 장법을 선주혁이 일일이 해소해가는 것이다. 퍼억. 또다시 울리는 둔탁한 음향. 선주혁의 우측 가슴에 자광수가 작렬한 것이다. 단박에 갈비뼈가 함몰되고 혈맥이 찢어져 죽어야할 상황. 그러나 선주혁은 뒤로 날아가는 신형을 빙글 돌려 기다렸다는 듯이 덤벼드는 복면인을 향해 북두폭렬장을 전개했다. 콰아아아앙. 크게 일그러지는 복면인의 인상. 귀청을 찢는 폭음 탓이 아니었다. 상대의 연이은 삼 장에 어깨 가 탈구된 것이다. 더불어 혈맥에 전해지는 엄청난 충격. 끔찍한 통증을 수반한 그 충격은 빠른 속도로 심장을 향해 몰려 가고 있었다. 복면인은 그제야 앞선 동료가 왜 죽어갔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자신의 곁을 스쳐가는 선주혁을 공격할 생각조 차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가부좌를 틀었다. 한시라도 빨리 혈맥 에 가해진 충격을 달래고 심장을 보호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퍼억. 선주혁을 공격한 것은 바깥 쪽 포위를 맡았던 다른 복면인이었 다. 그는 북두폭렬장을 펼치느라 균형을 잃은 선주혁이 비틀거리 며 자신 쪽으로 다가오자 서슴없이 혈마자광기를 운용한 자광수로 선주혁의 복부를 가격했다. 급기야 선주혁의 입에서 선혈이 솟구쳤다. 하지만 두 눈을 부릅뜨고 다시금 날아오는 자광수들을 막아내는 선주혁. 그 모습을 본 복면인들은 치를 떨었다. 누구보다 혈마자광기의 위력을 잘 알고 있는 자신들이었다. 연 이은 자광수의 적중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생명을 이어가는 선주 혁의 모습에 그들이 피어 올리는 살기의 색채가 짙어졌다. “비켜라!” 급기야 복면인들의 우두머리가 신형을 달렸다. 하늘을 나는 매처럼 뛰어오른 복면인들의 우두머리는 허공에서 부터 쌍 장을 교환하며 앞으로 내밀었다. 그의 쌍수에서 빛나는 자광은 다른 복면인들에 비할 바가 아니 었다. 훨씬 강하고 선명한 빛이 나는 것이다. 콰앙. 인간의 육장과 육장이 마주치는데 천둥과 같은 소리가 울렸다. 연이어 세 걸음을 뒤로 물러서는 선주혁. 그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이, 이런……!’ 복면인이 내민 일 장에는 가히 산을 무너뜨릴 정도의 위력이 담 겨져 있었다. 그로 인한 충격은 과거 명유신군의 명유지력을 받을 때에 비해 조금도 부족하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 더 대단하다고 봐야할 것이다. 하지만 선주혁의 안색이 새파래진 것은 가공할 복면인의 무공 때문도, 입가에 흐르는 피의 양이 많아졌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가 충격을 받은 이유는 이전에는 미처 몰랐던 북두폭력장의 치명적인 단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북두폭렬장은 가공할 속도로 상대를 가격하는 방법이다. 일정 수준의 고수라면 선주혁의 손놀림을 눈으로 잡아내는 것조 차 힘이 들 것이다. 하지만 눈앞의 복면인과 같은 초절정의 고수라면 상황이 다르 다. 생각보다 자신의 공격을 방어하기가 쉬울 수도 있었다. 속도에 치중한 북두폭렬장은 장법이 전개되어 최단거리에 목표에 이르러 야 한다. 결국 시작점의 방향만 제대로 잡으면 도착점을 예상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공격을 하는 데에 필요한 거리와 방어에 필요한 거리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난다. 즉 후발선착은 마주 공격을 할 때에 나 적용될 뿐, 북두폭렬장의 속도가 아무리 빨라도 예상되는 방향 으로 날아오는 공격을 막아내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다는 뜻이었 다. 그것을 보완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연속적인 공격이었다. 엄청난 속도로 날아오는 세 번의 장을 모두 방어하기란 아무리 안력이 좋 고 동체시력이 뛰어나도 어려운 일이었으므로. 하지만 첫 번째의 공격을 방어하는 방법이 막아내는 데에 그치 는 것이 아니라 방금 전처럼 마주쳐 오는 것이라면 문제가 생긴 다. 더구나 마주쳐온 장력이 최심장을 넘어설 때야말로 치명적인 단점이 드러나는 것이다. 충돌 시의 충격을 삽시간 해소하지 못해 타격을 받거나 몸이 뒤 로 튕겨진다면 연이어 뻗어내는 장에 의미가 없었다. 연환이기에 가질 수 있는 북두폭렬장의 위력이 무용해지는 것이다. 그것이 무조건 빠르기만 하면 ‘답’이라 생각했던 선주혁의 발상 이 가지는 치명적인 오류였다. 어차피 빠른 속도로 장력을 쳐낼 수 있다면 상대가 방어하기 어 렵다고만 생각했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부분이었다. 자신이 읽었던 글에는 뒤쪽으로 갈수록 어이없는 고수들이 출연 한다. 말도 안 될 정도의 고수들을 보며 ‘뻥을 쳐도 정도껏 쳐야 지’라며 투덜거렸던 게 바로 본인이었다. 그런 고수들, 그리고 무공의 세계를 너무나 우습게 봤다. 자신의 실수였다. 복면인이 혈마자광기를 운용하는 것은 선주혁에게 더욱 치명적 이었다. 상대의 내공이 뛰어나다 해도 혈맥에 충격을 줄 수 있는 것이 최심장의 묘용이다. 계속해서 충격을 누적시키다 보면 승산 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혈마자광기는 철저하게 손을 보호한다. 따라서 시전자의 공력이 충실한 경우 외부의 충격이 혈맥에까지 전해지지 않게 되 는 것이다. 결국 선주혁은 눈앞의 복면인이 자신에게 있어서 최악의 적이 될 것임을 직감했다. 더구나 상대는 하나가 아니었다. 상대가 이들의 우두머리라고는 하지만 이 자와 같은 수준에 오른 자가 얼마나 더 있을지는 모르 는 상황. 함부로 폭렬지환을 사용할 수도 없었다. 아직까지 자신이 폭렬지환을 사용할 수 있는 횟수는 단 한 번. 그 한 번의 기회를 사용하고 나면 일시 간 탈진상태에 이르고 그 순간을 놓칠 복면인들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상황. 한없이 망설이고 있을 시간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자신을 튕겨낸 복면인이 다시금 보랏빛으로 물든 쌍 수를 번갈 아 내밀며 다가오는 중이었다. 선주혁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장법을 전환했다. 무진진인의 기묘한 수법과 암영수의 쾌속함을 조합했던 장법으 로. 선주혁의 손이 허공에 기묘한 곡선을 그려내며 복면인의 가슴을 향해 날아갔다. 복면인은 가볍게 손을 휘둘러 선주혁의 일 장을 걷어내려 했다. 하지만 그는 허공을 휘저었을 뿐. 선주혁의 장력은 그의 가슴을 향해 여전히 쇄도해 들어가고 있 었다. 복면인의 눈에 놀라움이 맺히는 순간, 그의 허리가 활처럼 휘어 졌다. 그 사이 허공을 가르고 마는 선주혁의 손. 복면인은 튕기듯 허리를 바로 세우며 자광수를 휘둘러 선주혁의 어깨를 공격해 갔다. 혈마자광기의 엄청난 위력을 알고 있는 선주혁은 감히 마주할 생각을 못하고 신형을 움직여 상대의 공격을 흘려냈다. 기다렸다는 듯 날아오는 복면인의 다른 일 장. 싸움을 할 때 승기를 빼앗기는 것은 치명적이라는 남지학의 가 르침을 기억하고 있는 선주혁은 자신도 마주 장을 뻗었다. 암영수와 무진진인의 장법을 조합한 이 수법에도 후발선착의 묘 리가 담겨져 있는 바. 선주혁의 일 장을 복면인의 그것에 비해 늦지 않게 마주 공격을 할 수 있었다. 복면인은 기척 없이 날아드는 상대의 장법을 보며 인상을 찌푸 렸다. 단순하기 이를 데 없이 빨리만 내뻗는 장법만을 고집하던 자가 기묘한 변화가 가미된 쾌속무비한 초식을 전개하기 때문이었 다. 이번에도 자신의 방어를 피해내고 가슴을 향해 쇄도해 들어오는 상대의 장력. 앞서의 경험으로 복면인은 당황하지 않고 허리를 옆으로 비틀어 장력을 흘리며 역습을 해 갔다. 그렇게 순식간에 수십 초식이 오고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수세에 몰리는 것은 선주혁이었다. 무진진인의 초식이 현묘하기 이를 데 없다지만 복면인은 초절정 의 고수. 하나의 초식만을 반복해 전개하자 그 기묘한 변화가 눈에 익기 시작하는 것이다. 점차로 선주혁의 장공을 손으로 막아내는 횟수가 늘어났다. 자광수에 의해 팔에 충격이 가는 횟수가 늘어나자 선주혁의 초 식 전개가 점점 둔해졌다. 역력한 수세에 몰리던 한 순간 선주혁이 눈빛을 빛내며 뒤쪽으 로 신형을 뽑았다. 자신의 포위해 뒤쪽에 서 있는 복면인과의 적 절한 거리에서 멈춰선 것이다. “후훗! 가진 재주가 많은 놈이었군. 또 다른 밑천이 있으면 마음 껏 쏟아내 봐라.” 이제는 완벽하게 선주혁을 제압할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탓일 까? 복면인의 우두머리는 상대를 뒤쫓지 않고 여유롭게 조롱했다. 선주혁은 재빨리 품을 뒤져 손에 무엇인가를 끼웠다. “묵연수투? 어떻게 그것을 네 놈이……?” 백발귀마가 가지고 있다던 묵연수투였다. 복면인은 아직까지 수하 셋과 겨루고 있는 주백광을 힐끗 쳐다 봤다. 도신의 후예가 옥용검마를 죽였다더니 묵연수투를 빼앗아 눈앞의 애송이에게 줬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선주혁은 복면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신중한 표정을 지을 뿐 이었다. 무진진인과 암영수의 배합조차 무용해진 지금. 그에게 남은 것은 묵연수투가 증폭시켜주는 북두폭렬장의 위력 뿐이었다. 만약 묵연수투로 증가된 장력마저 먹히지 않는다면 자칫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는 상황. 그는 진지한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선주혁의 표정을 본 복면인의 표정도 무거워졌다. 묵연수투의 위력에 대한 소문은 그 역시 익히 들었다. 그는 숨 을 깊이 고르며 혈마자광기를 있는 대로 끌어올렸다. 그러자 복면인의 눈에서 은은한 자광이 감돌았다. 그의 혈마자광기에 대한 성취가 얼마나 뛰어난지 알려주는 단면 이었다. “타합!” 기합성과 함께 복면인을 향해 돌진하는 선주혁. 복면인은 물러서지 않고 선주혁을 향해 마주쳐갔다. 콰아아아앙. 내력이 약한 표국의 인원들이 귀를 막고 비틀거릴 정도의 굉음 이 울려 퍼졌다. 선주혁과 복면인을 중심으로 한 반경 삼 장여에 뿌연 먼지가 피 어올랐다. 엄청난 충격파에서 비롯된 현상이었다. 잠시 후 먼지가 걷히며 드러난 현상은 충격적이었다. 선주혁은 한없이 피를 게워내고 있었고, 복면인은 망연자실한 눈으로 탈구된 자신의 팔을 부여 쥐고 있었다. 묵연수투로 인해 증폭된 파괴력으로 인해 선주혁은 연이어 삼 장을 날릴 수 있었고 결국 복면인의 팔을 어깨에서 뽑아낸 것이 다. 앞서의 무림인들과는 달리 혈맥에 큰 타격을 받지는 않았지만 제멋대로 들끓는 진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잠시간 움직임을 멈춘 상태였다. 상황이 파악되자 선주혁의 주변에 있던 복면인들이 움직이기 시 작했다. 한눈에도 자신들의 수장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묵연수투의 위력이 두렵기는 하지만 이미 선주혁은 서 있는 것 조차 버거워 보이는 상태. 저 정도의 부상을 당한 상대라면 협공을 통해 얼마든지 죽일 수 있을 거라 확신한 그들이었다. 과연 좌측에서 파고드는 복면인의 자광수를 향해 선주혁은 힘겹 게 팔을 드는 것이 다였다. 복면인의 가려진 얼굴에 미소가 맺혔다. 아무리 묵연수투라 해도 없는 파괴력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 있게 선주혁이 내민 손을 향해 자광수를 뻗어냈다. 퍼억. 둔탁한 음향과 함께 맞붙은 두 손. ‘흥! 그 상태로 내력싸움을?’ 상대는 물러서지 않고 손을 마주해 장을 붙여왔다. 복면인은 애송이가 극심한 내상을 입은 상태에서 자신에게 내력 싸움을 걸어온다고 생각했다. 내심 코웃음을 친 그는 혈마자광기 를 있는 대로 끌어올렸다. 그 순간. 복면인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막대한 내력을 동원해 상대의 장으로 밀어 넣었건만 상대는 아 무런 충격도 받지 않은 듯 했다.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기는 했 지만 쓰러질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그런 부상을 입고도……? 아직까지 버틸 여력이 남아있다는 건 가?’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애송이를 상대로 내력 싸움에서 밀린 다면 회에서 자신의 위치가 우습게 된다. 복면인은 이를 악물고 내력을 더 끌어올렸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망망대해에 조약돌을 던진 듯 자신의 내력이 흔적도 없이 소멸 되는 것만을 느낄 뿐이었다. 그는 오기가 치밀었다. 자신을 주목하고 있을 동료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결국 이를 악물고 극단의 조치를 취했다. 생명을 갉아먹을지언정 어렵게 쌓은 회에서의 지위에 손상을 줄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바로 금단의 무공이었다. 주어진 수명을 포기하고 전개해야하는 잠원기폭공. 전개하는 순간 수명이 줄어들면서 내력을 두 배 이상으로 발휘 하게끔 해주는 괴공 중의 괴공이 복면인에게서 펼쳐진 것이다. 한순간 복면인의 내력이 배가 되었다. 그가 가진 원정지기가 폭 출되며 나타난 현상이었다. 복면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다 쓰러져가는 애송이를 죽이기 위해 수명을 줄여야하는 상황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로서 승부는 결정이 나리라. 흔들거리는 다리에 억지로 힘을 주고 서 있던 애송이가 두 배 이상으로 증폭된 자신과의 내력 싸움에서 버틸 수 있으리라 생각 할 수는 없었으므로. 그는 잠시의 시간이 흐른 후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깨달 았다. 스스로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혈마자광기를 쏟아 부었음에 도 상대는 아직도 쓰러지지 않았다. 뿐만 아니었다. 상대의 장을 통해 쏟아져 들어간 내력 흔적도 없이 소멸되는 현상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제야 복면인은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것을 깨달았 다. 이대로 가다간 잠원기폭공으로 끌어올린 원정지기까지 고갈되어 죽음에 이를 것이 분명했던 것이다. 죽음에 생각이 이르자 얼굴이 창백해지고 이마에서 땀이 흘렀 다. 이제 자신이 속한 회가 본격적으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 날을 위해 수십 년간을 음지(陰地)에 웅크려 살아왔다. 이제 남은 것은 뜻을 이루는 것 뿐! 그 후에 자신에게 돌아올 보상과 영화(榮華)만을 꿈꾸며 버텨왔 건만……. ‘어디서 이런 괴물 같은 놈이 나타나서……!’ 선주혁을 바라보는 복면인의 눈빛에는 원망과 한탄이 뒤섞였다.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은 것을 파악한 다른 복면인들. 그들은 상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들의 우두머리와 겨룬 후 당장이라도 죽어가던 애송이었다. 장을 마주대하고 내력을 겨룰 여력이 있다는 사실조차 놀라웠건 만, 외려 동료의 표정이 절망으로 물들어갔다. 그렇다고 함부로 손을 써서 애송이를 죽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 었다. 내력을 겨루는 데에 있어 제삼 자의 개입은 치명적이다. 자 칫 두 사람 모두를 폐인으로 만들거나 죽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결국 복면인 중 한 명이 고개를 저으며 앞으로 나섰다. 이런 애 송이를 상대하는 데에 있어 합공이란 가당치 않은 일이었으나, 이 미 세 명 이상이 달려들어 공격을 하던 중이었다. 내력을 겨루는 일에는 초식을 겨루는 것과는 다른 특별한 느낌이 있지만 동료의 곤란을 내버려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내력을 끌어올려 우수를 동료의 명문혈에 가져 다 대었다. 자신의 내력으로 동료를 도우려는 것이었다. 설마하니 죽음을 목전에 둔 애송이가 두 사람의 고수가 힘을 합 친 것보다 강한 내력을 가졌으리라는 상상은 할 수 없었다. 손쉽 게 애송이를 죽일 수 있으리라……. 그것이 복면인의 생각이었다. 과연 갑작스럽게 불어난 진기가 쇄도해 들어가자 충격을 받았는 지 애송이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고통에 겨워 얼굴이 달아오 르고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하지만 애송이는 쓰러지지 않았다. 그가 눈에 띄게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동료의 얼굴이 한결 편안해 지긴 했지만 승부가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복면인들은 충격을 받았다. 자신들의 실력은 당금 무림이 상상 할 수 있는 바를 넘어선지 오래였다. 오랫동안 축적된 힘은 단박 에 세상을 뒤집고도 남을 것이라 확신했다. 한데 단 한 명의 애송이를 상대로 이처럼 곤란한 상황을 맞고 있는 것이다. 도신의 제자를 처리한다 해서 자신들이 스물이나 동원되는 것에 불만을 품었었다. 지나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과연 도신의 제자 는 엄청난 도법을 전개하는 중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자신들 네 다섯이 차륜전(車輪戰)을 펼치게 되면 승리는 확정적이리라. 아무 리 엄청난 도법을 지녔다 해도 그것을 전개할 수 있는 인간의 한 계란 분명히 존재하는 법이었으므로. 그렇지만 이 괴물 같은 애송이는 뭔가 달랐다. 벌써 그의 손에 두 명의 동료가 죽고 한 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러고도 아직까지 죽지 않고 두 명의 동료를 상대로 내력을 겨루는 중이었다. 알 수 없는 불길함이 그들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한 명이 참지 못하고 동료의 등 뒤로 향한 후 자신의 장을 내밀 었다. 급기야 일 대 삼의 내력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애송이를 상대로 내력싸움을 벌이는 숫자가 다섯이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진기를 가라앉히고 혈맥에 전해졌던 미세한 충격까지 해소한 복 면인들의 수장은 상황을 파악하고는 두 눈을 부릅떠야만 했다. 자신과 겨뤘던 애송이를 상대로 수하 다섯이 내력을 겨루고 있 었던 것이다. 아무리 묵연수투를 꼈다 해도 저건 불가능했다. 수하 하나하나의 내력은 평균을 잡아도 일 갑자에 달한다. 결국 다섯이 힘을 합쳤으니 손실되는 진기를 감안해서 근 이백 년 이상 의 내력을 쌓지 않는다면 저와 같은 상태에 이르지 못한다는 뜻이 었다. ‘겉모습만 어린 반로환동의 고수였단 말인가?’ 아무리 영약이나 신공의 힘을 빌린다 해도 내력을 증진시키는 데는 일정한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이에 비해 출중한 내력을 지니는 것은 가능해도 나이를 초월한 내력은 존재할 수가 없다. 복면인들의 수장이 선주혁을 반로환동의 고수라 가정하는 이유 는 거기에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선주혁의 외모가 드러내는 나이에 이백 년에 달하는 내력을 쌓는 것은 불가능했으므로. 그는 결국 소리를 질러야만 했다. “저 자를 꼭 죽여야 한다, 반드시!” 복면인의 외침에 복면인 둘이 더 움직였다. 그들은 차례로 동료 의 명문혈에 장을 가져다 대고 진기를 밀어 넣기 시작했다. 선주혁의 이마와 목에 짙푸른 혈관이 도드라졌다. 가뜩이나 가 무잡잡했던 얼굴은 썩은 돼지 간처럼 새카맣게 변했다. 손을 통해 전해들어오는 막대한 진기의 양을 견뎌내기가 어려웠 던 것이다. 아무리 흡성대법을 익히고 있다 해도 만년음양초의 신 묘한 효력이 아니었다면 전신의 경락과 혈맥이 걸레처럼 찢긴지 오래였을 것이다. 엄청난 통증 속에서도 그는 의식을 잃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 는 중이었다. 해성을 통해 상대의 진기를 풀어내지 못하는 순간,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은 죽음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 문이다. 한편 선주혁에게 내력을 쏟아 붓는 복면인들은 그야말로 혼비백 산한 상태였다. 무려 일곱 명이 한꺼번에 내력을 밀어내고 있는 데도 상대를 쓰러뜨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괴물 같은 상대가 흡성대법을 익히고 있으리라고는 상상 치 못했다. 워낙 압도적인 내력을 밀어내고 있기에 흡수되고 있다 는 것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상상할 수 있는 범주 에서는 애송기가 엄청난 내공과 기묘한 심법으로 자신들의 내공에 맞서 싸우면서 진기를 해소하고 있다고만 생각하는 것이다. 일곱 명 중 총 세 명은 잠원기폭공을 끌어올렸다. 말도 안 되는 이 상황을 한시라도 빨리 종결짓기 위해서였다. 그 사이 복면인들의 수장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도신의 제자를 상대하는 셋과 그 셋을 포위한 또 다른 세 명. 예쁘장하게 생긴 또 다른 애송이에게도 두 명이나 달라붙어 있 었다. 이제 적을 맞이하지 않고 있는 인원을 자신을 포함해 셋뿐이었 다. 수하 둘은 사해표국의 인원들이 표국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 동분서주(東奔西走)하는 중이었다. 오십여 명에 달했던 생존 자는 이제 채 이십 명도 남지 않은 상태였다. 고작 세 명을 상대로 이와 같은 상황에 내몰리다는 것을 믿기 힘들었지만 지금은 한없이 상황 탓만을 할 때가 아니었다. 적당히 수작을 피워 관의 개입을 늦추긴 했지만 밤을 지새울 수 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조심!” “크흑!” 놀란 경고성과 동시에 울려 퍼지는 신음성. 그것은 복면인들이 도신의 제자라 착각하는 주백광의 도에 적중 당한 한 명이 내지른 것이었다. 복면인의 우두머리는 빠르게 고개를 모로 돌렸다. 놀랍게도 도신의 제자의 대도는 희뿌연 안개에 휘감겨 있었다. “도기(刀氣)?” 혈마자광기로 보호를 받는 자광수라 해도 도기를 마주했을 때는 충격을 받기 마련. 아마도 수하는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해 움직임 이 더뎌졌을 것이고, 팔이 잘리는 상태에까지 이르렀을 것이다. “큭!” 또 한 명의 수하가 신음성을 내지른다. 움켜쥔 옆구리에서는 피를 철철 흘리면서……. 바깥쪽에서 포위하고 있던 나머지 두 명의 수하가 빈자리를 메 웠다. 복면인의 우두머리는 마른 침을 삼켰다. 엄청난 속도로 도를 휘둘러대는 도신의 제자는 자신에 비해 손 색이 없는 무공을 지녔음이 분명했다. 아니 어쩌면 자신을 넘어설 지도 몰랐다. 한동안 수세에 몰리던 그였으나 도기를 운용한 이후에의 상황은 완전히 뒤집혔다. 함부로 도를 막아내기 힘들어지자 직접 겨루는 수하들이 외려 주춤거리고 있는 것이다. 복면인의 수장의 눈에 복잡한 심사가 그대로 드러났다. 억지로 탈구된 어깨뼈를 맞추긴 했다. 하지만 지금의 상태로는 기세등등한 도신의 제자를 상대하는 것 은 무리였다. 그것은 죽음을 각오해야하는 일이었다. 무림제패를 목전에 둔 상황이다. 남은 것은 부귀와 영화뿐. 맡은 임무를 수행치 못할 경우 회의 처벌은 엄중하다. 그렇다고 해도 목숨을 잃어 수많은 영화를 누리지 못하는 것보다는 낫다. 설사 지금의 지위를 상실한다 해도 천하를 제패한 회에서 떵떵 거리며 살 수 있지 않은가? 어차피 표물은 진즉 빼돌려진 상태. 이들이 목숨을 걸고 지켰던 표물은 쓸모없는 잡물(雜物)에 불과 하다. 무림맹을 출발할 때부터 막대한 가치를 지닌 표물은 바꿔치 기가 되어 있었다. 물론 공조자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오늘의 임무는 무림맹과 이 지역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는 사파 연합의 분란을 조장하기 위한 것일 뿐. 자신의 실패는 도신의 제 자를 제거하지 못한 것과 많은 수하를 잃은 것에 국한될 것이다. 저기서 내력을 겨루고 있는 괴물 같은 자의 개입을 증언할 수하 는 많았다. 불가항력(不可抗力)의 상황이었음을 증명하면 된다. 그 러므로 굳이 지금 이 자리에서 목숨을 걸어야할 이유는 없었다. 결론을 내린 그의 눈에 독한 기운이 어렸다.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어 꺼지듯 사라진 그의 신형이 건물로 숨어들던 쟁자수의 등 뒤에 나타났다. 그리고 진력이 집중된 그의 멀쩡한 한 손이 쟁자수의 혈도를 짚 었다. 혈도를 제압당한 쟁자수는 석상처럼 굳었다. 복면인들의 수장은 팔을 휘둘러 빛살처럼 빠르게 쟁자수를 집어 던졌다. 쟁자수가 날아가는 방향은 선주혁과 복면인 일곱이 장을 마주 댄 그곳. 내력을 겨루는 양측에게 외부에서의 충격은 치명적이다. 그저 주먹으로 툭 치기만 해도 양측 모두가 즉사하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충격을 가하는 쪽 역시 무사하지 못하게 된다. 양측의 내력이 한꺼번에 반발하는 힘을 견뎌낼 능력이 없다면 말이다. 결국 복면인들의 수장은 일곱의 수하와 선주혁의 목숨을 맞바꾸 려 드는 것이다. 그만큼 저 괴물 같은 자는 위험했기에. 회에서는 자신의 결단을 치하할 것이다. 퍼억. 둔탁하기 이를 데 없는 음향과 함께 내력을 겨루던 수하들 주위 에 붉은 안개가 피어올랐다. 날아간 쟁자수가 괴물 같은 자와 수하 일곱 명의 내력을 이겨내 지 못하고 산산조각이 나며 피 안개를 만들어낸 것이다. 입에서 혈전(血箭: 피 화살)을 뿜어내며 줄줄이 쓰러지는 일곱 명의 수하. 맞은편에 서 있던 괴물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그 역시 쓰러지고 말았다.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튕 겨진 그. 젖혀진 고개. 입에서 뿜어진 피는 허공에 호선을 그려냈다. 그리고 기댈 곳 없는 짚단 인형마냥 힘없이 뒤로 쓰러졌다. “주혁!” 터질 듯한 분노를 고스란히 담아 도신의 제자가 노성을 터뜨린 다. 설마하니 자신이 수하들의 목숨을 모두 잃는 것을 각오하고 이와 같은 용단을 내릴 것이라 생각지 못했을 것이리라. 엄청난 희생과 피해를 감수했음에도 복면인의 눈가에 미소가 잡 혔다. 도신의 제자가 분노하는 만큼의 승리감을 만끽하는 것이다. 이로서 자신의 선택이 옳았던 것이라는 합리화가 더욱 견고해졌 다. 도신의 후예가 쥔 도를 둘러싼 도기가 한 자를 넘어서며 눈부신 빛을 내기 시작했다. 복면인의 수장이 다급히 외쳤다. 저 자까지 처리하려면 수하를 모두 잃을지도 모른다. 피해는 지금으로도 충분했다. “철수한다!” 그의 명령을 쫓아 주백광과 단목지민을 공격하던 복면인들이 재 빨리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주백광은 재빨리 선주혁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안타까움과 슬픔이 가득한 시선이었다. 쫓아가 친구의 안위를 살피고 싶었다. 하나 무의미한 행동이었 다. 내력을 겨루는 중 타격을 받고 무사할 가능성은 전무 했다. 주백광의 두 눈이 형형한 빛을 쏟아냈다. 복수심에 불타는 살기였다. 그리고 분노였다. 충혈 된 두 눈이 뿌옇게 젖어들었다. 정말이지 마음에 드는 친구를 만났다고 생각했다. 자신과 흡사 할 정도로 호불호(好不好)가 분명했던 선주혁이다. 그리고 그에게 는 자격이 있었다. 명유신군을 죽일 정도의 엄청난 무공과 무림맹 과 맞설 정도의 배짱이 있었다. 쫓기는 와중에도 자신과 술을 마 시며 호방한 웃음을 터뜨리던 친구다. 결정지어진 죽음을 목전에 두었다고 생각해도 무방한 상황 속에서 말이다. 그렇다고 둔하거나 멍청한 것도 아니었다. 범인이라면 짐작조차 못할 상황에서 오늘의 일을 예측해낼 정도 가 아니던가? 주백광은 그런 선주혁이 좋았다. 이 사람이라면 정말 자신의 친 구가 되기에 손색이 없다고 생각했다. “내 친구를 죽이고 도주할 수 있을 성 싶더냐?” 노호(怒虎)가 울부짖는 것과 같은 소리. 단목지민이 미처 말릴 사이도 없이 주백광의 신형이 앞으로 쏘 아졌다. 복면인들의 뒤를 쫓는 것이다. 그는 생각했다. 지금은 친구의 죽음에 애도를 표할 때가 아니라 복수를 해야 할 때라고. 결론을 내린 그에게는 일체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의 시야에는 오직 한 가지만 보였다. 친구를 죽음으로 몰고 간 원수만이. 단목지민은 주백광이 무모한 행동을 하는 거라 생각했다. 아무 리 노기가 치민다 해도 홀로 복면인들을 모두 상대한다는 것은 불 가한 일이었다. 그러면서도 주백광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를 본 것은 잠깐 뿐이지만, 친구의 복수를 위해서 목숨을 거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질 정도였으므로. 그녀는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복잡한 감회가 뒤섞인 한숨. 눈빛으로 선주혁을 일견한 그녀는 신형을 움직였다. 선주혁과 같은 인재를 저렇게 보내는 것에 미련이 남았다. 하지만 남은 주 백광이라도 끌어 들이는 게 교를 위해서 도움이 되리라. 단목지민의 신형을 빠른 속도로 주백광의 뒤를 쫓았다. 선주혁이 쓰러진 후 일련의 과정이 진행되는 것은 순식간의 일 이었다. 복면인들과 주백광, 단목지민이 표국을 벗어나자 일순 정적이 찾아들었다. 그 정적을 깬 것은 공 노인의 늙수그레한 외침이었다. “선 표두!” 공 노인의 노구가 선주혁을 향해 빠르게 달려갔다. Chap. 7 소제목 미정 <1> 침상에 누워있는 청년을 바라보는 노안(老眼)에는 짙은 수심이 가득했다. 미약하게 이어지는 숨결. 눈으로 감지하기 힘든 가슴의 기복만이 살아있음을 증명하고 있 는 청년이었다. 가무잡잡한 피부임에도 파리함이 느껴질 정도. 그가 지금 죽음과 싸우고 있음은 의도(醫道)의 문외한이라 해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병상을 지키는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살아남은 사해표 국 남창지부의 인원들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난데없이 들이닥친 정체불명의 복면인들. 그들이 죽인 동료의 시신을 치우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상태였기 때문이다. 관부에서 나온 자들은 형식적인 조사에만 그치고 있었다. 남창 이 발칵 뒤집힐 정도의 인원이 죽어 나갔음에도 무림인들의 일이 라 깊숙한 개입을 꺼려하는 것이다. 본래 관과 무림은 일정한 거 리를 두는 것이 오랜 관례였으므로 새삼스러울 일도 없었다. 공 노인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의원의 말에 의하면 선 표두가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기적이라 했다. 기경팔맥(奇經八脈)이 파열되고 혈맥이 갈가리 찢겨 있다 했 다. 내부에 가해진 엄청난 힘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란다. 당연한 일이었다. 단신으로 가공할 무공을 가진 일곱 명의 복면인들과 내력을 겨 루지 않았던가? 의원은 선 표두의 죽음을 선고했다. 확고했고, 단정적이었다. 숨을 쉬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으며, 그렇다 해도 한계가 있을 거라 했다. 워낙 많은 사람이 죽어나간 표국이었기에 선 표두의 죽음을 선 고하는 의원의 표정도 어두웠다. 한 마을에 몹쓸 전염병이 돌지 않는 한 한꺼번에 이처럼 많은 시신을 대하는 것은 흔한 일이 아 니었기 때문이었다. 의원으로서 한 생명이 잦아들어가는 데에 자 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데에서 느끼는 자괴감 때문일는지도 몰랐다. “선 표두……. 자네라 불러도 되겠지?” 공 노인은 힘없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자네와 알게 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두 번이나 생명 을 구해줬구먼. 지난 번 산중(山中)에서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 고 말일세…….” 선주혁이 의식을 잃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공 노인이었 다. 하지만 그는 마치 선주혁이 자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듣 고 있는 것처럼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차라리…… 늙은 내가 자네, 이름이 선혁이라고 했던가? 여하 튼 자네 대신 이 자리에 누워 있어야하는 것을……. 그랬어야 하 는 것을…….” 공 노인은 아직까지 자신의 분수를 넘어선 행동을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무리한 짓을 하면 누군가에게 신 세를 지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주제넘은 자리에 서면 수하들의 능력에 기대야 한다. 무능한 상 관으로 인해 자칫 크게 다치거나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것이 표 국의 일이었다. 그래서 공 노인은 많은 사람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표두는커녕 표사의 위에도 오르지 않고 쟁자수로 남아 있는 것이다. 자신이 아닌 누군가의 능력에 기대 자리를 지키고 싶은 욕심을 부리고 싶지 않았다. 표행에서 쟁자수에게 기대할 수 있는 역할이라는 것은 분명한 한계가 있다. 공 노인은 오랜 경험을 통해 일개 쟁자수가 할 수 있는 역할 이상을 해내왔고, 그것이야말로 인생에 있어서의 보람 이 되어 주었다. 신세를 지는 것이 아니라 베푸는 입장이 되기 때문이다. 한데 선혁이라는 이 청년을 만나 벌써 두 번이나 신세를 지게 되었다. 다른 것도 아닌 목숨의 빚이었다. 그리고 맞이한 지금의 상황. 은인이 사경을 헤매고 있는데 공 노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미미한 숨결이 언제 멈출지 바라보는 것이 최 선이었다. 공 노인은 그것이 안타까웠다. 이대로 선혁을 보내고 나면 죽을 때까지 짐이 될 것이다. 그것은 중천의 뜬 태양처럼 명확한 사실 이었다. 굳이 겪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오랜 삶을 살아오는 동안 하나의 가치관을 일관해온 노인에게 있어서 그것은 작은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공 노인이 선주혁을 대신해 목숨을 내놓고 싶다고 말 한 것은 진심이었다. 살날보다 살아온 날이 많은 그에게 있어 앞 으로 짊어지게 될 가슴 속의 짐은 지금까지의 인생만큼이나 무겁 게 느껴질 것이기에……. <2> “허억, 허억!” 나이를 속일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불과 이 각 여를 달렸을 뿐 인데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소낙비를 흠뻑 맞은 양 온 몸은 땀으로 젖고 그 땀의 무게까지 여실히 느껴졌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천 근이요, 땀 한 방울, 한 방울이 백 근이 었다. 당장이라도 등 뒤에 업은 이를 내려놓고 주저앉고 싶었다. 삐이이익. 날카로운 호각소리는 생각보다 가까운데서 들려왔다. 그에 호응하듯 여기저기서 울리는 소리. 소리의 방향으로 미루어 포위된 것이 분명했다. ‘과연…… 무림맹이라는 건가?’ 공 노인은 감탄을 했다. 표국의 주위에는 수많은 발자국이 있을 터였다. 표국의 참화는 수많은 구경꾼을 불러 모았고, 시신을 치우 고 제를 올리기에 바쁜 남창지부의 표국인들은 그런 표국 주변을 정리할 여력이 없었다. 그런 흔적 위를 달려 이곳까지 왔다. 한데도 무림맹의 추적자들 은 정확히 방향을 잡아 근방에까지 쫓아온 것이다. 공 노인의 눈이 재빨리 움직였다. 낙심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일단은 최선을 다해봐야 한다. 그것으로 선혁이라는 청년에게 진 신세를 갚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죽음을 맞이해도 후회는 없으리라. 자신이 살아 오며 고수해온 철칙을 훌륭하게 지켰으므로. 남창의 거리를 살피던 공 노인의 두 눈이 빛을 냈다. 등에 축 늘어진 청년을 업은 공 노인의 노구가 야음 속으로 모 습을 감췄다. 방금까지의 지쳤던 몸을 생각해보면 믿기 힘든 속도 였다. <3> 골목은 어두침침했다. 붉은 빛을 내는 홍등(紅燈)이 군데군데 달려 있다지만 가까이 있는 얼굴의 윤곽 이상을 보기에는 힘들었다. 이곳에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에게는 이와 같은 어둠이 삶을 이어가는데 유리했다. 밝은 곳에서 봤을 때는 확연이 드러날 주름, 기미와 주근깨, 부스럼 등을 진한 화장으로 가릴 수 있을 정도의 밝기였기 때문이다. “이거 안 놔? 내가 먼저 잡았다고!” 홍등가(紅燈街) 골목의 공기를 날카롭게 찢어발기는 고성(高聲). 연이어 비단을 찢는 듯 날카로운 소리가 응대를 한다. “순서가 어딨어? 대인께서 내가 마음에 든다잖아!” 그다지 부유해보이지 않는 한 사내를 붙잡고 실랑이를 벌이는 두 여인. 공 노인은 한숨을 쉬었다. 안도의 한숨이었다. 창기(娼妓)들과 그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빌붙어 사는 불한 당들의 시선이 두 여인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선 표두를 등에 업고 포위망을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린 공 노인이었다. 오랜 경험을 가진 그는 골목 한쪽에 서 빛을 내는 붉은 등을 발견했다. 그리고는 홍등가가 정도인들이 본능적으로 출입을 꺼리는 장소라는 것을 기억해냈다. 망설임 없이 골목으로 들어간 그는 호객을 하던 두 여인의 싸움 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 사이 골목의 가장 끝까지 들어가 있었 다. 등에 업은 선주혁은 시체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계속해 이렇게 돌아다니는 것 자체가 무리일 것이다. 침상에 누워서도 죽을 시간만을 기다리던 그가 아니던가? ‘자네가 누구라도 상관없네. 조금만……, 조금만 더 견뎌보게. 이 늙은이가 만용을 부리는 것을 생각해서라도 말일세.’ 공 노인은 마음속으로 죽음과 싸우는 선주혁을 응원했다. 불과 한 시진 전이었다. 선혁이라는 이름이 등 뒤에 업인 청년의 본명이 아니라는 것을 공 노인이 알게 된 것은 말이다. 시신을 수습하고 제를 올릴 준비를 하고, 보고서를 작성하느라 살아남은 인원 이십 여 명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한데 표국의 본단에서 전서구가 도착했다. 공 노인 등은 의아해했다. 아무리 전서구를 이용했다 해도 남창 지부의 상황을 벌써 알고 조치를 취했을 리 없었던 것이다. 과연 전서의 내용은 작금의 남창지부 사태와는 관련이 없는 문제였다. 남창지부의 생존자 중 가장 고참이며, 고령인 공 노인이 전서를 펼쳤다. 그것은 선혁이라는 표두, 아니 선주혁이라는 사내의 정체에 관 한 내용이었다. 문제의 발단은 도신의 후예를 자처한 자가 죽였다는 옥용검마의 재출현에서부터였다. 죽었다던 그가 안휘(安徽)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사파연합을 이끄는 백인회의 두 명, 그리고 난화불영수를 사용 하는 준미한 청년과 함께 나타난 그로 인해 무림맹의 안휘지부는 발칵 뒤집어졌다. 보고는 신속하게 무림맹의 총단인 십전성에 전달되었다. 옥옥검마의 죽음과 관련된 사건부터 되짚어보기 시작한 그들은 손쉽게 도신의 후예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머리색을 의식하 지 않는다면 선혁이라는 자의 인상착의는 백발귀마와 완전히 일치 했던 것이다. 설마하니 도신의 후예를 자처하며 무림맹의 앞마당이나 다름없 는 호남성에 모습을 드러내리라 상상할 수 없었기에 둔감하게 받 아들였을 뿐이었다. 더구나 본래의 이름인 선주혁에서 한 글자만 뺀 채 자신의 이름 을 드러낸 것이 아니던가? 정체를 알아채지 못한 자신들이 어리석다 느껴질 정도였다. 상 식을 초월하는 대담함에 치를 떨면서 무림맹은 즉각적인 조치를 취했다. 간악하기 이를 데 없는 백발귀마의 척살령이 재발동된 것이다. 전서에는 이와 같은 내용이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또한 자칫 사 해표국이 무림공적인 백발귀마를 도왔다는 오해를 받아서는 안 된 다고 설명하고 있었다. 그래서 백발귀마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유의하면서 무림맹의 추 살대(追殺隊)에 적극 협조하라는 것이다. 공 노인은 충격을 받았다. 자신의 목숨을 두 번이나 구해준 선혁, 아니 선주혁이 아니던 가? 한데 그의 진정한 정체가 무림맹이 지목한 공적인 백발귀마라 니! 믿을 수가 없었다.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 아무리 간악한 자라해도 함께 생활하며 지켜본 자신의 눈까지 속일 수는 없는 법이었다. 공 노인은 결론을 내렸다. 선주혁을 무림공적으로 지목한 것은 무림맹의 실수라고. 그리고 직감할 수 있었다. 이번이야말로 두 번이나 진 생명의 빚을 갚을 때라는 것을. 공 노인이 결론을 내렸을 때 전갈이 왔다. 무림맹의 인물들이 벌써 도착을 한 것이다. 아마도 표국에서 이와 같은 사실을 알게 된 것이 늦었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전서와 추살대가 비슷하게 도착한단 말인가? 공 노인은 표국의 동료에게 이와 같은 사실을 털어놓았다. 표국 의 생존자 전원은 선주혁에게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것에 동의했 다. 공 노인은 그들의 도움을 받아 선주혁을 표국 밖으로 빼돌릴 수 있었고, 지금 이 골목에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다. 한데 채 이각 여가 지나기도 전에 꼬리를 잡히고 말았다. 이런 대단한 자들의 포위망을 뚫고 사천에서 이곳까지 무사히 온 선주 혁의 능력이 더욱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공 노인은 골목의 끝에 있는 허름한 문을 떠밀고 들어갔다. 진한 약냄새가 코를 찔렀다. 흔한 일이었다. 이런 곳에서 일을 하다보면 몹쓸 병에 걸리는 것은 다반사다. 약을 먹어가면서도 살 기위해서는 몸을 팔아야하는 것이 이들의 신세. 공 노인은 다급한 목소리로 방 안의 여인에게 말했다. “이 친구가 살아 있는 동안 보살펴 주게.” 여인이 뭐라 답하기도 전에 공 노인은 품에서 전낭을 꺼냈다. “은자 스무 냥일세.” 은자 두 냥이면 네 식구가 한 달을 먹고 살 정도. 스무 냥에 달 하는 은자는 홍등가의 싸구려 창기라면 평생을 두고도 만져보기 힘든 거금일 터였다. “넉넉하게 챙겼으니 부디 잘 부탁하네.” 그는 알고 있었다. 이것이 선주혁과의 마지막이라는 것을……. 이제 다시는 그를 보지 못하리라. “이 친구가 죽으면 사해표국으로 찾아가 그 사실을 알리면 되 네.” 공 노인은 자신이 할 말만을 재빨리 쏟아내고는 밖으로 나섰다. 그는 일부러 사해표국을 들먹였다. 아무리 더러움에 익숙한 바닥 이라지만 시체를 치워야할 일이 달갑지는 않을 터. 행여나 은자만 을 챙기고 선주혁을 방치하거나 버릴까 염려스러웠던 것이다. 사해표국의 이름만으로도 홍등가의 싸구려 창기는 최선을 다해 선주혁을 보살피리라. “그럼…… 늙은 가죽에서 땀 좀 빼볼까?” 공 노인은 한쪽에 버려진 짚으로 만든 푸대를 들었다. 대충 뭉 쳐 등에 걸쳐 맸다. 마치 사람을 업듯이…… 쉽사리 속아줄 추적자들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어 둠에 조금은 의지하고 싶었다. 그는 한결 가벼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죽음을 향한 발걸음이었다. 저들에게 잡힐 경우에 벌어질 일을 잘 알고 있었다. 백발귀마를 잡아야한다는 일념 하에 저들은 모진 고문을 감행하리라.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은 그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리라는 것을. 어차피 죽어가는 선주혁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자신의 죽음은 헛되지 않으리라. 목숨을 구해준 은혜니 목숨으로 갚으리라. 공 노인은 그렇게 수십 번을 되뇌었다.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만큼 스스로의 행동에 확신을 더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의 질주는 시간이 지날수록 견고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밤공기를 찢는 호각소리가 더욱 요란해지기 시작했다. <4> “정신이 드시나요?” 기나긴 통로 저 편에서 들리는 것 같은 음성이었다. 흐릿한 시야에 하나의 그림자가 보였다. 호롱불을 등져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체형만으로도 여인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상황을 파악하기 힘들었다. 복면인들과 내력을 겨루는 중,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이어 온 몸을 엄습해오는 끔찍스러운 통증. 기경팔맥이 뒤틀리고 혈맥이 찢어지는 고통을 어찌 형언할 수 있으랴. 그렇게 의식을 잃었다. 한데 이곳은 어디란 말인가? 모든 게 흐릿하기만 했지만 코를 찌르는 약향, 지저분하고, 음습 한 방안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최소한 사해표국은 아니리라. “움직이려 들지 마세요.” 여인은 약간 엄하게 말했다. “의식을 차릴 수 있을 거라고는 짐작치 못했어요.” 그녀의 마지막 말이 아득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잠시간 들었던 의식의 끈을 놓쳐가고 있는 것이다. “침이 들어가지 않아서……, 약만 흘려 넣어……, 기이한 체질 이…….” 침상에 누운 선주혁이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이 정도였다. 그 는 다시금 의식을 잃었다. 여인은 무거운 추를 단 듯 감기는 선주혁의 눈을 보고는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한 노인이 찾아들었다. 이십 냥이나 되는 은자를 내려놓고 이 사내를 내려놓고 갔다. 자신이 할 말만을 남긴 채. 한눈에도 쫓기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노인이 황망히 나간 후 여인은 사내의 맥을 짚었다. 그리고 놀 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내의 체내는 엉망진창이었다.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갈가리 찢긴 혈맥하며 엄청난 힘에 뒤틀려버린 경맥. 말 그대로 살아있는 시체였다. 어차피 죽음이 예정된 자였으나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여인은 사내를 침상으로 옮기고 자신이 가진 바 능력을 다해 치료를 시작 했다. 침이라도 놓아 진기의 운행을 도우면 불과 몇 시진이라도 생명 을 연장할 수 있으리라. 하나 그것조차 불가능했다. 사내는 절정의 외문기공이라도 익힌 듯 침이 들어가질 않는 것이다. 여인은 방법을 바꿨다. 약제를 다려 입에 흘려 넣는 것만이 그 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을 지켜봐주기로 했다. 홀로 죽음을 맞이하 는 것만큼 슬픈 것도 없으리라 생각하면서. 한데 기적이 일어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내의 몸이 회복되는 징조를 보이는 것이다. 그 속도는 점차 빨라졌다. 처음에는 미약한 진기의 운행만을 관 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점차 명확해지며 혈맥이 회복되고 기경팔 맥이 제 자리를 잡아갔다. 대라신선(大羅神仙)이 와도 소생이 불가능하리라 여겨졌던 자가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믿기 힘든 현상에 놀라면서도 여인은 부지런을 떨어야 했다. 생 면부지의 낯선 이였으나, 그의 회복이 여인을 기쁘게 했다. 그리고 칠 주야 만에 사내는 눈을 떴다. 죽음 가운데서 살아난 것이다. 여인은 기쁨에 겨워했다. 단 하나의 생명이라도 되살려야 하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었다. 오직 그것만이 운명이 떠맡긴 업보를 가벼이 하는 것이라 믿었 기 때문이다. <5> “찬 공기는 가급적 피하세요. 안 그러면 다시 병이 도질 지도 몰라요.” 어두침침한 방에 어울리지 않는 고운 음성이었다. “콜록! 아가씨도 잘 아시면서……. 우리 같은 년들이 아프다고 누워 있으면 끼니라도 이을 수 있겠어요?” 바튼 기침을 한 늙수레한 여인의 음성이었다. “그래도 병을 키워서야…….” “더러운 팔자를 타고 나서 그런 것을 어쩌겠어요.” 신세 한탄이라도 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나저나 저 천 뒤에 있는 건 누구래요?” “상태가 위중한 환자에요. 행여 돌림병이 아닌가 싶어서 저렇게 격리를 시켜 놓았어요.” “에구! 천하의 명의(名醫)도 울고 갈 우리 선우(鮮于) 아가씨가 모를 정도의 병이면 고약한 병이겠군요. 참…… 어떤 년인지 그년 팔자도 더럽네요. 쯥! 죽으려면 빨리 죽어버릴 것이지 괜스레 우리 아가씨만 힘들게 만들기는…….” “그런 말씀 마세요. 지금 회복 중이니까요.” “하……! 아가씨도 잘 아시잖아요. 다 죽어가는 년들은 회복되어 봐야 얼마 못 간다는 것을……. 선우 아가씨야 죽은 사람도 소생 시킬 수 있으시지만 죽을 병 걸렸다 살아남은 년이 이 바닥에서 입에 풀칠이나 할 수 있게요?” 선우라는 성을 가진 아가씨는 침묵했다. 홍등가의 생리에 대해서 그녀 역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곳까지 흘러들어온 창기 중 사람답게 살 여유가 있는 경우는 드물었다. 저마다 젊고 꽃다운 시절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흘러간 세월일 뿐이며, 이리저리 포장된 과거사였다. 그녀들의 말처럼 좋았던 시 절이 있었다면 부유한 상인의 첩실로 자리를 꿰차고 들어앉았을 것이기에……. 떠밀리다시피 홍등가에 들어온 창기는 동전 몇 문에 낯선 사내 를 향해 다리를 벌려야 한다. 하루에 몇 명의 사내를 받아들이고 나면 생활에 지장은 없을 터지만, 그나마도 다 손에 쥘 수는 없었 다. 퀴퀴한 냄새가 풍기는 방세는 상식을 초월할 정도로 비쌌고, 골 목을 주름잡는 불한당들에게 상납해야할 금액도 만만치 않았다. 결국 차 떼고, 포 떼고 남는 것은 간신히 입에 풀칠을 할 정도에 불과했다. 그것이 짙은 화장으로도 가릴 수 없는 그림자가 이 골목의 여인 들에게 드리워진 이유였다. 잠시간의 수다가 더 지속된 후 기침을 하던 여인이 방을 나섰 다. 이어 무엇인가 정리를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선우 성의 여 인이 천을 들췄다. 선주혁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태연한 표정으로 살짝 그녀에게 고개를 숙이는 일조차 쉬운 일 이 아니었다. 그것은 회복되지 않은 몸에 무리가 왔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선주혁이 제대로 의식을 차렸을 때는 이미 방 한쪽을 천으로 나 눠놓은 상태. 그는 천 바깥쪽에서 들려오는 소리로 여인에 관한 것을 알았다. 선우라는 성을 가진 그녀는 홍등가에 자리를 잡고 의술을 베풀 고 있었다. 온갖 질병의 집합소라 할 만큼 홍등가의 여인들은 다 양한 병에 걸렸고, 여인은 그 모든 질병을 가리지 않고 치료했다. 여인의 의술은 꽤나 고명한 듯 많은 창기들이 입을 모아 칭찬했 다. 그것은 비단 그녀가 치료비를 요구하지 않기 때문만은 아니었 다. 간혹 동전 몇 문이라도 내놓는 창기가 있을 때도 그녀는 사양치 않고 받았다. 그렇게라도 하는 게 마음이 편하다는 것을 알고 있 기 때문이라 했다. 그런 선우라는 여인에게 선주혁은 크게 감명을 받았다. 저쪽 세상에 있을 때, 의사라는 작자들에 대한 감정이 그다지 좋지 않았던 그였다. 히포크…… 어쩌고 하는 선언을 했다는 그들 의 행동은 인술(仁術)을 베푸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과연 그들 중 몇 명이 고통 받는 환자들을 질병에서 해방시켜 주기 위해 의사라는 직업을 택했겠는가? 돈 좀 벌고, 사회에서 대접해 준다니까 죽자고 공부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정말 병을 치료하는 공부를 했겠지, 돈 넘치는 여자들 코 세우고, 턱 깎아 주는 분야로 몰려들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 선주혁이 인터넷이나 뉴스에 부각된 나쁜 소식만을 듣고 의사라 는 직업군 전체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이유는 비교적 간단 했다. 저쪽 세상에 있을 때, 그는 소위 말하는 ‘가진 놈’, ‘배운 놈’ 은 다 싫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우라는 성의 여인을 본 선주혁의 그런 생각이 변했다. 홍등가의 창기들을 상대로 인술을 베푸는 그녀와 같은 의사가 저쪽 세상이라고 없겠는가? 늘 그렇듯 선행(善行)을 베푸는 사람들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을 뿐. 분명히 저쪽 세상에도 어려운 사람을 돕고 진심으로 환자를 대하는 의사가 있을 거라 자신의 생각을 고쳤다. 이제는 뭐든 삐딱하고, 부정적으로만 받아들이던 선주혁이 아니 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이쪽 세상 판 슈바이처이자 나이팅게일인 선우라는 여 인의 얼굴을 처음 봤을 때 선주혁은 표정관리를 하기 힘들었다. 그것은 일종의 충격이었다. 시야가 흐릿할 때 그는 여인의 얼굴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 그녀에 관해 이것저것을 알게 될수록 나름대로의 환상을 키웠다. 멀쩡한 귀로 들려오는 그녀에 대한 모든 것은 아름답기만 했던 것 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또렷이 볼만큼 시력을 회복했을 때, 환상은 무참히 부서지고 말았다. 여인의 용모는 가히 끔찍하다 말할 수 있을 정도였던 것이다. 거무칙칙하고 얼룩진 피부는 울퉁불퉁해 마치 두꺼비의 등을 보 는 것 같았고, 있는 듯 없는 듯 뭉개진 코는 하늘을 향해 들려 있 어 얼굴에 그저 구멍 두 개를 뚫어 놓는 것만 같았다. 두꺼운 입술은 메기의 그것과 비슷했으며, 드문드문 솟은 눈썹 은 흐릿해 그저 눈썹이 있었다는 흔적만을 짐작케 할 뿐이었다. 여인은 나병(癩病)에 걸려 문드러진 환자의 얼굴과도 비견되지 않을 만큼 흉측했던 것이다. 며칠에 걸쳐 그녀의 얼굴을 보는 동안 나름대로 익숙해졌다고는 하지만 매번 볼 때마다 충격적인지라 선주혁은 지금도 애써 표정 관리를 하는 중이었다. 성심성의껏 자신을 치료하기 위해 노력하 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실망스런 표정을 지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 다. 선주혁은 애써 그녀의 장점만을 생각하려 노력했다. 사실 얼굴 만 떼어 놓고 보면 그녀의 장점은 많았다. 길고 가는 목선과 동그란 어깨. 적당히 부풀어 오른 가슴과 잘록한 허리. 치마로 가려졌지만 한 눈에도 길어 보이는 다리는 늘씬할 것이 분명했고 흰 손가락은 흠집하나 없이 매끄러웠다. 어찌 생각해보면 얼굴과 몸의 이런 부조화가 그녀의 모습을 더 욱 흉측하게 만들고 있는지도 몰랐다. 마치 남의 몸에 얼굴을 얹 어 놓은 듯한 분위기였기에……. ‘아니, 얼굴에서도 예쁜 곳은 있잖아?’ 선주혁은 애써 시선을 그곳으로 집중했다. 그가 바라보는 곳의 여인의 눈이었다. 흑백이 선명하게 구분된 여인의 눈만큼은 유독 아름다웠다. 흰자위에는 가는 실핏줄조차 보이지 않았고 흑진주처럼 검은 눈동자는 별처럼 반짝였다. 커다란 그녀의 눈은 고결한 성녀(聖女)의 그것 자체였으며, 괜스 레 자신이 지은 죄를 되돌아보게끔 만드는 힘이 있는 것만 같았 다. 그녀의 눈에 집중을 하고서야 선주혁은 끔찍한 용모에 대한 생 각을 지울 수 있었다. 여인은 조심스럽게 선주혁에게 다가와 그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 다. 그러자 선주혁은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여인은 상의를 벗긴 후 선주혁의 상반신을 젖은 수건으로 닦기 시작했다. 거동이 불편한 그인지라 몸을 씻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 인은 손수 수건을 적셔 이렇게 그의 몸을 매일같이 닦아 주고 있 었다. 고운 손길이었다. 낯선 사내의 몸을 닦는 데에서 비롯된 주저함 따위는 느낄 수 없었다. 정성을 가득 담아 구석구석을 깨끗이 닦는 그녀였다. 그 세심함에 선주혁은 놀랐고, 감동해야만 했다. 설령 스스로 몸을 씻는다 해도 그녀처럼 깨끗이 닦지는 못하리 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몸을 닦을 때마다 처음 그녀의 얼굴을 보고 놀랐던 자신 을 탓하는 선주혁이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절대로 이 여자만큼 은 용모에 대해 함부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계속해 되뇌었다. Chap. 8 소제목 미정 <1> “참 대단한 사제분이시군요.” 작은 체형과 가녀린 몸매가 흠이라면 흠일까? 옥으로 깎아 만든 조각상처럼 생긴 청년이 쾌속하게 질주하며 말했다. 그에 못지않게 준미한 청년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란히 달리는 중이었다. “정말이지 어떤 녀석인지 한번 꼭 보고 싶군 그래.” 준미한 청년들 바로 뒤를 달리면서 긴 백발(白髮)에 탐스러운 백염(白髥: 흰 수염)을 가진 노인이 말했다. 노인답지 않은 당당한 체구가 유독 돋보이는 그는 어이가 없다 는 표정을 짓는 중이었다. “그러게.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미친 녀석이거나 연……, 아니 우 아 말대로는 아닐지라도 정말 잔머리 하나는 끝내주는 녀석일게 분명할 거야. 호북성에 들어가 도신의 제자임을 자처해 무림맹 녀 석을 엿 먹이다니 말이야. 클클클……!”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의 노인은 살아온 세월을 짐작케 하는 주 름과 흑발(黑髮), 흑염(黑髥)을 기른 그는 상하의까지 흑의를 입었 으며, 흑색의 피풍의(披風衣)까지 걸쳐 마치 먹물을 뒤집어 쓴 듯 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리는 준미한 청년들의 속도는 놀라울 정도 였음에도 두 노인은 전혀 힘든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그 표정은 너무나 여유 만만해 그들이 최선을 다해 달리는 것이 아님을 짐작 케 했다. 특히 온통 검은색으로 몸을 휘감은 노인은 더욱 그랬다. 그는 마치 산보라도 나온 듯 한가롭게 신형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럼에 도 그가 움직이는 속도는 비조(飛鳥)에 비견될 정도였다. “좀 더 빨리 달리면 안 되겠습니까?” 절정이랄 수 있을 정도의 미남, 이제는 강호에서 옥용검마라 불 리는 남지학이 사제의 안위를 걱정하는 마음에 사람들을 재촉했 다. “빨리 달리는 것쯤이야 얼마든지…….” 흑색으로 온 몸을 휘감은 노인은 경공에 있어 천하제일을 다투 는 인물이었다. 편복마왕(??魔王) 남백연(南白衍)은 그런 자신 앞에서 달리는 속도를 논한다는 것이 가소롭다는 듯 입 끝을 당겨 웃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 자네 사제가 있는 곳이 호북성이라면 몰 라도 강서성이라면 무림맹 놈들이 제 안방처럼 날뛰지는 못할 테 니 말일세.” 온통 검정 일색인 남백연과 정반대의 행색을 한 노인은 천산노 조(天山老祖) 서동주(舒??)였다. 지금은 은우라는 가명을 쓰는 은설연이 덕양진인을 상대할 때 사용했던 무공인 난화무영수가 바로 천산노조의 성명절기였다. 남지학과 은설연은 사파연합을 지배하는 백사회의 일원 두 명과 함께 선주혁을 돕기 위해 남창을 향해 달려가는 중인 것이다. 도신의 제자가 사해표국을 몸을 담았다는 소문은 무림을 들썩이 게 했었다. 그가 옥용검마를 죽였다는 사실은 소문이 퍼지는 속도 를 가속시켰다. 한데 알고 보니 도신의 제자가 백발귀마의 화신이었다니, 그 얼 마나 놀라운 소식이던가? 소문은 날개를 달고 퍼져나갔다. 그리고 안휘성에 있던 남지학 일행도 선주혁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다. 남지학은 남창 행을 고집했다. 은설연은 보다 명확한 사실을 확인하고 움직이자고 했다. 이미 안휘에서 모습을 드러낸 만큼 남지학을 유인하기 위한 간계일 수 도 있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었다. 사파연합의 역량이면 며칠 사 이에 자세한 상황을 보고 받을 수 있었고, 그 후에 움직여도 늦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남지학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것저것을 따 지다 늦어서 사제를 도울 수 없는 입장에 처하고 싶지 않다는 것 이다. 은설연은 한숨을 쉬었다. 함께 지내는 동안 남지학이라는 자의 능력이 자신이 짐작했던 것 이상임을 절실히 느꼈다. 그 정도의 인재가 사제의 이야기만 나오면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것이다. 결국 쇠심줄보다 질기게 고집을 세우는 남지학인지라 은설연과 천산노조, 편복마왕은 방향을 틀어야만 했다. “천응(天鷹)을 보내놨으니 남창에서도 조치를 취하고 있을 겁니 다. 그러니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시오.” 은설연은 짐짓 굵고 점잔은 목소리로 남지학에게 말했다. 천응이란 백사회에서 전서구(傳書鳩)를 대신해 소식을 전하는 매를 말한다. 전서구에 비해 속도가 빠른 것은 물론이거니와 용맹 하여 중도에 전서가 유실될 염려가 적었다. 백사회의 일원들은 중원각지에 흩어져 있을 때가 많아 특수한 방법으로 교배되고 훈련을 받은 천응을 이용하는 것이다. “부상을 입고 도움을 받아 간신히 도피했다는 소문이니…….” 남지학은 사제의 안위를 걱정하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선 소협의 능력은 남 소협께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소? 너무 심려치 마시오.” 은설연의 말에 남지학은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사제에게 무 슨 일이 생겼다고 믿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달리는 속도는 조금도 늦춰지지 않았다. 은설연은 쓴웃음을 지으며 편복마왕 남백연의 경공인 비천편복 을 최대로 전개했다. <2> “천 뒤로 넘어가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평소와는 달리 여인의 목소리는 한기를 머금고 있었다. 등골이 오싹할 정도의 차가움이었다. “흥! 천한 것 주제에 감히 누구에게 하는 말이더냐?” 남자의 목소리가 고조되었다. “아니, 지금 누구더러 천한 것이래? 당신 지금 우리 선우 아가 씨에게 한 말이야?” 걸걸한 여인의 음성. 아마도 치료를 받으러 왔던 창기 중 하나일 것이다. “당신?” “그래, 당신! 왜? 천하를 벌벌 떨게 하는 무림맹이면 다야? 그 잘난 양반들이 왜 천한 것들이 득실대는 이곳까지 찾아와서 지랄 이야, 지랄은?” 잠시간의 침묵. 무림맹의 무사는 어처구니가 없는 모양이었다. 홍등가에서 몸을 파는 창기 따위가 감히 무림맹을 상대로 이와 같은 망발을 하리라 고는 상상치 못했기 때문이리라. “이 년이 아주 죽으려고 작정을 했구나!” 침묵은 잠시뿐이었다. 곧 방안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의 노성이 터져 나왔다. 가뜩이나 이런 더러운 곳을 수색해야하는 자신의 처지가 못마땅 했었다. 골목 전체에 끈적끈적한 공기가 감돌았다. 싸구려 지분의 향내 와 기분 나쁜 비린내가 감도는 방을 일일이 뒤지며 돌아다니는 동 안 그의 기분은 한 없이 불쾌해져만 가고 있었다. 그래도 한 때 곤륜파의 제자였다는 백발귀마가 설마 이런 지저 분한 곳에 몸을 숨기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자신이라면 차라 리 죽음을 당할지언정 이따위 추잡한 곳에는 숨어들지 않으리라. 이래저래 못마땅한 심사를 늙은 창기가 건드려 무사는 참을 수 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 죽으려고 작정을 했다, 왜?” 여인이 빽하고 소리를 지르자 잠시 옷자락이 부스럭거리는 소리 가 들렸다. “참아. 저런 계집들하고 실랑이를 벌이겠다는 건가?” 수색에 나선 다른 동료가 팔이라도 잡으며 말리는 모양이었다. “저게 참을 소리야? 더러운 몸뚱이 팔아먹고 사는 것들이 감히 무림맹을 모욕하는데?” “더러운 몸뚱이? 그래, 내 몸뚱이는 더럽다! 왜? 고자인 네놈은 이 더러운 몸뚱이도 만져볼 수 없어 심술이 나는 거…… 커억.”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대던 여인의 외침은 다급한 신음성과 함께 끊겼다. 동시에 우당탕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사의 발길질에 여인이 나뒹군 것이리라. “아이고! 사람 죽네, 사람 죽어! 이 고자인 자라 새끼가 사람을 죽이네…….” 온 골목이 떠나갈 듯 소리를 질러대는 여인이었다. 누운 채로 버둥거리는지 찢어진 목소리에 간간히 발을 거칠게 딛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무슨 일이야?” 바깥쪽에서 들려오는 굵직한 음성. 이 거리를 주름 잡는다고 알려진 도룡방(屠龍?)의 사내들이 달 려온 것이다. 홍등가 주변에는 유독 방(?)이니, 회(會)니 하는 단체들이 많다. 그렇다고 무림에서 인정을 받는 방이나 회는 아니었다. 주먹깨나 쓴다는 불한당들이 모여 자기들을 방이나 회를 자칭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나이든 창기가 모여 만들어진 사창가에 큰 이문이 남을 리 없을 뿐더러, 그네들의 돈을 갈취하는 것은 무림의 방파로서 체면이 서 지 않기 때문에 직접 나서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끊임없이 은자가 회전되는 곳을 노리는 승냥이들은 넘치 고 넘친다. 그들에게서 이권을 온건히 보전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진정한 무림 방파와 줄을 대는 것이다. 정도 문파에서 더러운 돈을 받아 줄 리는 없을 터. 대개의 경우 홍등가에 자리한 방과 회들은 흑도문파(黑道門派)에 정기적으로 은자를 상납함으로 끈을 대고 있었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무림맹의 무사였다. 해서 지금 눈앞에 있 는 사내들이 더욱 못마땅했다. “꺼져라. 네깟 것들이 나설 일이 아니다.” 거침없는 명령조의 음성이었다. “거 참……! 아무리 무림맹의 나리들이라지만 너무한 거 아뇨? 한참 장사해야할 시간대에 칼 들고 골목을 발칵 뒤집는 것도 모자 라 장사 밑천인 애들을 때리다니 말이오?” 노골적으로 삐딱함을 드러낸 음성이었다. “감히!” 실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삼류급에도 들지 못하는 뒷골목의 불한당이 무림맹 무사를 상대 로 대들고 나서다니! “감히? 감히라니요? 높으신 무림맹의 나리께서 기본적인 도의는 지켜주셔야 할 것이 아니겠소이까? 어찌 남의 집 안방이나 다름없 는 곳에서 사람을 치고 행패를 부리시면서 감히 운운하시는 게요? 자꾸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껄렁대는 듯 말하는 사내의 말을 들은 무림맹의 무사들은 노기 충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는 항의수준이 아니라 명백한 도발 을 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녀석들의 배경이 되어 줄 어떤 이름 없는 흑도의 무리를 믿고 행하는 것이라 생각하니 더욱 화가 치밀었다. 차앙. 검이 뽑히는 소리였다. “쓰레기 같은 놈들이 도의를 논해? 내 진정한 도의가 뭔지 가르 침을 내려주마!” “오호라! 이제는 검까지? 그래, 천하의 무림맹 나리께서 휘두르 는 검에 맞은 흉터 한 번 만들어 보자. 이 바닥에서는 무림맹 나 리께서 만들어 주신 흉터가 있다는 것만으로 행세깨나 할 수 있을 테니 말이야.” “푸하하하핫.” “킬킬……. 노삼(魯三) 자네 말이 맞네. 죽지만 않는다면 행세하 고도 남지!” 점차로 패거리들이 몰려들어 선우라는 성의 여인 방 밖에는 이 미 스물에 달하는 도룡방도가 있었다. 그들은 동료의 말에 반죽을 맞추며 키득댔다. 검을 뽑았던 무림맹의 무사는 얼굴을 붉혔다. 치미는 분노를 이 기지 못해 습관적으로 검을 뽑았을 뿐이다. 하나 저자의 불한당을 상대하는데 검까지 뽑아들었다는 것은 외려 자신을 수치스럽게 하 는 일이었던 것이다. “뭐야? 당장이라도 죽일 기세더니 왜 저래?” “크큭, 그러게 말이야. 설마하니 우리 쪽수를 보고 겁을 먹은 것 은 아니실 테고.” 도룡방 패거리들이 노골적으로 조롱하는 태도를 보이자 무림맹 소속의 무사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방을 나가 도룡방 패거리들 사이에 뛰어들었다. 키득대던 도룡방 패거리들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졌다. 퍼억. “크흑” 퍽. “아악!” 장단을 맞추듯 둔탁한 소리와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무림맹의 무사가 검신으로 도룡방 패거리들을 두들겨 패기 시작 한 것이다. 숫자의 힘을 믿고 주먹을 휘둘러보는 자도 있었다. 하지만 상대 는 정식으로 무공을 수련한 무림맹의 무사. 저자의 주먹패가 어찌 해볼 상대가 아니었다. 불과 반 식경이 지나기도 전에 스물에 달하는 도룡방 패거리들 을 땅바닥에 길게 누웠다. 다들 뼈라도 부러졌는지 고통스러운 신음성만을 흘릴 뿐, 다시 일어서 덤벼들지 못하는 중이었다. “쓰레기 같은 것들이! 이제는 함부로 입을 놀리지 못하겠지.” 도룡방 패거리들을 작살내다시피 한 무림맹 무사는 검을 검집에 넣고 손을 탁탁 털며 다시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고개를 젓는 동료의 얼굴을 일견하고서는 곧 방 한쪽 면을 가린 천을 젖혔다. “……!” 방 한구석에 누워있는 자를 본 순간 그는 거칠게 천을 젖혔던 것보다 빠르게 뒤로 물러섰다. 코를 찌르는 고약한 냄새 때문만은 아니었다. 환자로 보이는 자의 몰골이 끔찍했기 때문이다. 피부를 뒤덮다시피 한 화농(化膿: 고름). 샛노란 진물이 잘라낸 송진처럼 질질 흘러내리고 언뜻언뜻 피까 지 섞여 있는 모습은 마치 피부가 녹아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가세.” 방 안에 있으면 행여 병이라도 옮을까 싶었던지 천을 젖혔던 무 사는 황급히 방을 나서 밖으로 나섰다. 자신들이 추적하는 자는 부상을 입은 백발귀마지 돌림병에 걸린 환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무림맹의 무사 둘은 쓰러져 끙끙 앓고 있는 도룡방 패거리를 거 들떠보지도 않고 황급히 걸음을 옮겨 골목을 벗어났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는 도룡방패 중 하나가 투덜댔다. “젠장! 무조건 터지고 오라니……! 이 짓도 못해먹겠군.” “그래도 어디라도 잘려 병신 되지 않은 게 어디야? 어쨌든 임무 는 완수했으니 다행이잖아.” 도룡방 패거리들은 그렇게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 거리 며 서로가 서로를 부축해 돌아갔다. “괜찮아요?” “뭐, 이 정도야……. 빌어먹을 자라 새끼들.” 무림맹의 무사가 밀쳐 나뒹굴었던 여인은 치마를 툭툭 털며 자 리에서 일어섰다. 허리가 좀 뻐근하긴 했지만 모진 세파를 거쳐 살아온 그녀에게는 실제로도 대수로운 일은 아니었다. “괜스레 선우 아가씨만 욕보셨네요.” “아뇨, 저야…… 뭐.” 여인은 선우라는 성의 여인에게 함부로 행동한 무림맹의 무사들 을 향해 한바탕 욕설을 쏟아 부은 후에야 돌아갔다. 선우 성의 여인은 곧 어질러진 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한편 선주혁은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었다. ‘정말이지 선우 아가씨가 아니었으면 낭패를 볼 뻔 했군.’ 아직까지 움직이는 것조차 무리인 몸 상태였다. 무림맹의 무사 가 자신을 알아봤다면 그의 목숨은 이 자리에서 끝이 날 수도 있 었다. “어떻게…… 미리 준비를……?” 선주혁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천 바깥쪽의 여인에게 물었다. 어 찌 무림맹의 무사들이 수색하리라는 것을 알고 약재를 섞어 온 몸 에 발라 피고름처럼 보이게 할 생각을 했나 묻는 것이다. “긴장을 하는 것은 회복에 좋지 않습니다. 설명은 나중에 해 드 릴 테니 눈 좀 붙이도록 하십시오.” 방을 치우던 여인은 침착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선주혁에게 말했 다. 선주혁은 궁금함이 치미는 것을 참기 힘들었으나 어린아이마냥 조를 수도 없는 일이었다. 다시 입을 열어 말을 하는 것조차 힘 겨운 상황. 그는 여인의 말대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3> “후훗!” 천응의 다리에 묶여있는 전통(傳統)에서 전서를 꺼내 읽는 은설 연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사제에 관한 소식이라도 전해진 것이오?” 평소답지 않게 조급함을 보이는 남지학의 질문이었다. “무관하지는 않지만 선 소협의 향방이 밝혀진 것은 아니오.” “……?” “사해표국의 참사와 무림맹이 맡긴 표물 탈취는 저희 사파연합 과는 상관없는 일이오.” 짐짓 근엄한 표정을 짓는 은설연의 말에 남지학이 고개를 끄덕 였다. 처음 무림맹의 표물이 탈취되었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은설 연이 남지학에게 곧바로 해명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남 형(兄)도 아시겠지만 강서는 호북의 무림맹과 절강의 사파 연합 사이의 완충지대라 할 수 있소.” “무림맹에서 표물의 유실을 사파연합의 소행으로 떠넘길 계기가 되겠군요.” 남지학의 말에 이번에는 은설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남 지학과의 대화는 수월했다. 이야기의 골자만 짚어주면 나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으므로. “말도 안 되는 일이오. 사파연합이 그깟 표물을 탐하는 도둑의 무리 정도라 여긴 놈들의 짓이라는 뻔히 보이지 않소?” 은설연은 콧방귀를 뀌며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표 물의 도난을 무림맹의 자작극으로 단정지은 것이다. “가만히 앉아서 무림맹 놈들이 떠드는 것을 볼 수만은 없는 일 이오. 제 놈들이 꾸미고 제 놈들이 날뛰다니……! 마침 선소협이 이 일에 관계 되었으니 놈들이 남창을 중심으로 해서 강서성 전역 을 안방처럼 휘젓고 다닐게 분명하오. 그런 꼴을 볼 수는 없으니 작은 수작으로 놈들을 도발했고, 걸려들은 것 같소.” “그 사건을 부풀려 무림맹의 행동범위를 축소시키겠다는 말이 오?” ‘역시……!’ 은설연은 또 한 번 남지학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말대로였다. 무림맹이 강서를 휘젓고 다닐 수 없다면 분명 선주혁이 발각될 확률이 현저히 낮아지는 것이다. 자신이 선주혁 과 무관하지 않다고 말한 이유는 거기에 있었고, 남지학은 말 몇 마디를 듣고 그 내용을 명확히 파악한 것이다. “부풀리는 것에 끝나서는 안 되겠지요. 역으로 치고 나갈 생각 이외다. 표물의 탈취를 핑계 삼아 외려 우리를 도발하는 것으로 몰고 가는 것으로 말이오.” 이번에는 남지학이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난 가치를 지닌 표물 이 도난당한 사건은 단순한 심증만으로 범인을 지목해서는 안 된 다. 사파연합을 의심한다 해도 명백한 증거를 찾아내야 명분이 서 는 것이다. 증거를 찾기 전에 무력을 사용한다면 은설연의 말대로 이쪽에서 명분을 세울 수도 있다. 표물의 도난 자체가 자작극이라 주장하는 사파연합의 주장에 무게를 실을 수도 있고, 도난 사건을 빌미로 무림맹이 강서성을 도모한다고 외려 목소리를 높일 수도 있는 것 이다. 물론 이런 일로 표물의 도난사건 자체를 무마할 수는 없다. 하 나 정도의 무림인들은 목숨처럼 명분을 중시 여긴다. 그런 그들인 만큼 강서를 뒤지는데 필요한 명분을 보다 확실히 세우고자 할 것 이다. 와중에 선주혁에 대한 추적이 느슨해지는 것은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적어도 강서가 무림맹의 세력권 내인 것처럼 드러 내놓고 수색을 하는 것은 당분간 자제할 터였으므로. “세심한 배려에 실로 감사드리오.” 남지학이 두 손을 마주잡아 은설연에게 예를 갖췄다. “무슨 말씀. 어차피 표물의 일로 책을 잡혀선 안 될 처지였으니 당연한 조치였소이다.” 은설연은 손을 휘저으며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은 공자께서는 금번 일을 무림맹의 자작극이라 단정을 지으셨 구려.” 잠시 침묵을 지키던 남지학이 문득 물었다. “자작극이 아니라면? 남 형께서는 아직도 사파연합이 표물과 관 련이 있다는 의심을 지우지 못하는 것이오?” 은설연이 사뭇 불쾌하다는 심중을 드러냈다. 남지학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오. 소생과 사제는 현재 무림의 거대세력들이 모르는 부분에 대해 알고 있소. 은 공자께서도 함께 겪지 않았소이까?” “……!” 은설연이 갑자기 눈을 크게 떴다. 긴 설명은 필요 없었다. 그녀는 어리석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키워온 무림맹에 대한 적개심이 체질처럼 굳어져 사고의 범주가 좁아졌을 뿐이었다. “백 소저를 노리던 자들이 이번 일에도 개입이 되었다 말하고픈 것이오?” 은설연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고려해봐야 할 문제라 생각하오.” 남지학의 말에 잠시 눈을 가늘게 떴던 은설연이 말했다. “금번 사태를 무림맹의 자작극이라 단정 지은 데는 표행의 시작 에서부터요. 절강에 있는 무림맹의 세력이란 미미하기 이를 데 없 소이다. 그들을 위해 갑자기 대규모 표행을 단행하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질 않는 일이외다.” 남지학이 말한 가능성이 분명 자신의 사고 범주 밖에 있었던 것 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도 선뜻 남지학의 추론을 인정할 수 없 는 부분이 있었다. “아무리 선 소협을 도신의 제자로 착각하고 있었고, 도신의 명 성을 빌어 물건을 맡길 자격이 된다 해도 표행 자체가 불필요했다 는 것이오.” 남지학에게 설명을 하면서 스스로의 주장에 좀 더 확신을 갖는 은설연이었다. 아무래도 무림맹이 아닌 타 세력에서 이와 같은 일 을 도모하기에는 전후가 맞지 않는 게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백 소저를 돕기 위해 우리가 상대했던 자들을 돌아볼 필요가 있소이다.” “그들이 놀라운 무공을 지녔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소이다.” 백화란을 돕기 위해 백인회의 일원이 둘이나 나섰다. 천산노조 서동주와 편복마왕 남백연. 어지간한 방파라면 채 한 시진이 지나기도 전에 쓸어버릴 정도 의 초절정 고수 둘이었다. 한데도 곤란을 겪었다. 복면인들의 무공은 상상을 초월했다. 남궁일과 백화란이 도주할 시간을 확보하고자 객잔에 뛰어든 두 고수였다. 그런데도 복면인 들은 천산노조와 편복마왕의 발목을 잡고 추격에 나선 것이다. 그것을 확인한 남지학이 다시 복면인들의 뒤를 쫓아 신형을 날 렸다. 이대로 복면인들에게 잡힌다면 천하의 남궁일이라 해도 감 당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충 객잔을 정리한 서동주와 남백연도 가세했다. 천하제일의 신법을 가졌다는 명성 그대로 남백연은 복면인들의 덜미를 잡을 수 있었고, 결국 복면인들과의 한바탕 격전이 벌어졌다. 놀랍게도 복면인들은 백인회의 두 명에 맞서 밀리지 않는 모습 을 보였다. 남지학과 은설연이 돕지 않았다면 서동주와 남백연도 승패를 장담할 수 없었으리라. “그 정도의 고수들을 세상의 이목을 가린 채 키울 수 있는 곳이 라면 무림맹의 행사에 관여할 능력을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고 보 오.” “……!” 남지학의 말에 은설연이 두 눈을 부릅떴다. “지……나친 가설이 아니오? 아무리 멍청한 무림맹 놈들이라지 만 그 정도도 파악하지 못할 리가…….”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 했지만 은설연은 말을 더듬어야 했다. 남지학의 가설은 그 정도로 끔찍했다. “기밀을 유지해온 것은 둘째치고라도 몇몇이 모여 두 분 어르신 과 맞설 정도의 고수를 키우는 데 얼마의 시간이 걸리리라 생각하 오?” 남지학이 말하는 두 분 어르신이란 남백연과 서동주를 말함이 다. 두 사람 모두 중원 어느 곳에 가도 한 지역의 패자(覇者)로서 당당히 군림할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을 소수의 인 원으로 상대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려면 일이십 년의 세월로는 불 가능한 일이다. 결국 정체불명의 그 단체는 수십 년, 혹은 그 이상 동안 음모를 키워왔다는 말이다. 비밀유지라는 치밀함 하나만을 생각해 봐도 무림맹에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시킬 방법을 마련했다는 것은 불가 능이 아닐 수도 있었다. “사제가 도신의 제자라 자처했다면 일석이조를 도모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오. 도신이라는 거대한 이름이 출현했고, 그로인해 그 들이 세웠던 어떤 계획에 변수가 생길 수도 있는 터. 용의주도기 이를 데 없는 자들이라면 그와 같은 변수는 용납할 수 없을 거 요.” “이번 일로 인해 무림맹과 사파연합의 갈등을 야기시키고, 도신 의 후예마저도 제거하려 했다……, 이런 뜻인 거요?” 남지학은 일자로 다문 입술을 벌리지 않았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가능성은 이미 은우에게 전달이 되었다. 나머지는 그의 판단 에 달린 것이다. “사실이라면 정말 소름끼치는 놈들이 아닐 수 없군요. 남 형의 말이 조금은 과하다고 생각되지만, 간과할 문제도 아닐 듯싶소.” 남지학의 침묵 속에서 은설연은 스스로 결론을 내렸다. 그는 황급히 남백연과 서동주가 쉬고 있는 곳으로 달려가 그들 과 이야기를 나눴다. 잠시 후 전통을 다리에 맨 천응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Chap. 9 소제목 미정 <1> 진기가 이어졌다는 사실을 알아채자마자 조식을 취했다. 한가로 이 누워 지낼 처지가 아니었다. 임시변통으로 위기를 벗어났다지 만 언제까지 이곳이 안전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비록 움직일 수는 없는 상태나 누워서라도 행공(行功)을 해야만 했다. 전신에 진기를 흩어두는 것이 흡성대법의 특징. 선주혁은 조심스레 흩어진 진기의 움직임을 도모했다. 사지백해에 퍼져있는 잠력의 양은 선주혁 스스로도 놀랄 정도였 다. 중간에 끊기긴 했지만 무려 일곱 명에 달하는 복면인들의 내 력을 한꺼번에 흡수한 결과였다. 사실 당시에 복면인들의 우두머리가 흡성대법을 방해하지 않았 다면 선주혁의 죽음은 기정된 사실이었다. 그는 선택의 여지가 없 이 복면인들의 내력을 흡수해야만 했다. 물론 흡성대법의 전개 자체는 자유로웠다. 언제는 내력의 흡수 를 멈출 수 있으므로. 하지만 그에게 밀려드는 내력은 노도와도 같아서 감히 흡수를 멈출 수가 없었다. 해성을 통해 내력을 흡수하지 않으려면 거대한 기운을 마주쳐 내야 했기 때문이다. 확신이 설 리가 없었다. 체내로 밀려드는 내력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의 거력(巨力)이었다. 그 엄청난 힘과 맞서야 한다는 것은 금강불괴를 버금간다 여겨 지는 자신의 신체로도 자신하기 힘들었다. 잠시간 갈등하는 사이 복면인의 숫자가 늘어났다. 체내로 밀려 들어오는 힘은 더욱 커졌다. 체내 거센 기운은 통제를 벗어났고 일촉즉발의 상황까지 내몰렸 다. 이대로라면 무지막지한 내력을 이기지 못해 경락이 터져 죽을 것이 분명했다. 더 늦기 전에 선택을 해야만 했다. 이대로 죽어갈 것인지, 아니면 흡수를 멈추고 일곱 명을 상대로 내력을 겨뤄볼 것이지. 결국 선주혁은 모험을 단행하기로 결심했다. 일순간 내력을 흡수하는 것을 멈추고 일곱 명의 복면인들과 겨 루기로 한 것이다.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속절없이 죽는 것보다 는 낫다는 생각에서였다. 선주혁이 흡수하던 내력을 역으로 밀어내려는 순간. 복면인의 우두머리가 표국의 쟁자수를 던졌고 복면인들의 진기 가 다른 방향으로 터져 나갔다. 그 짧은 분산의 순간이 선주혁을 죽음 가운데서 건져냈다. 물론 보통의 인간이었다면 당시의 엄청난 충격을 감당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만년음양초로 인해 특수해진 선주혁의 신체였기에 가공할 충격을 버텨냈다. 그런 면에서 생각하면 복면인들 수장의 행동은 외려 목숨을 구 해준 셈이 되었다. 분산된 힘만으로도 죽음의 문턱을 밟았다. 따라 서 당시 선주혁이 흡성대법의 운공을 멈추고 맞서 싸웠다면 아무 리 금강불괴에 필적하는 신체라 해도 필히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야말로 위험천만의 순간이었던 것이다. 누운 채로 운공을 시작한 선주혁은 극히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 다. 경락이 이어졌다지만 아직까지 완전하지 않은 상태. 자칫 체내의 거력을 감당하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잠원기폭공까지 사용했던 복면인들이 선주혁의 체내에 쏟아 부 은 양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이 모든 내력을 완벽하게 자신의 것 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선주혁은 조만간 내공에 있어서 가히 천하 제일을 노려볼 수도 있을 것이다. 목숨을 담보로 해야 했던 위기 상황은 선주혁에게 예기치 못한 기연을 가져다준 셈이었다. 그가 읽었던 소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자신만의 기연이었다. <2> “선 공자의 몸은 불가사의 그 자체군요.” 진맥을 마친 여인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시체나 다름없는 상태였던 선주혁의 몸이 놀라운 속도로 회복되 는 중인 것이다. 지독하리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던 내상이었건만 기경팔맥이 제자리를 찾고 혈맥이 이어졌다. 선주혁이 조식을 취할 수 있게 된 이후 회복되는 속도는 배가되 었다. “선우 아가씨의 의술이 신묘한 탓이지요.” 선주혁이 씨익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말에 여인은 고개를 저었다. “제가 한 일은 없습니다. 탕약 몇 첩으로 다스릴 상세가 아니었 으니까요.” 선주혁은 여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나직하면서도 편안한 음성. 듣는 사람의 마음까지 정갈해지는 느낌이었다. 새들의 노랫 소리처럼 아름다운 음성이 저처럼 추한 용모에서 흘러나오다 니……. 저도 모르게 여인의 용모에 대해 아쉬움을 갖던 선주혁은 화들 짝 놀랐다. 다시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기로 했던 것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도 신은 공평하다는 건가? 십전십미(十全十美)라는 말 이 어울릴 선우 아가씨에게 추악한 용모를 내려 공평하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걸까?’ 가급적 여인의 용모에 대해 생각자체를 회피하려 했지만 못내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선주혁이었다. 진맥을 마친 여인은 빙어처럼 매끄러운 손가락으로 선주혁의 이 부자리를 손 본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손가락마저도 아름답기 그지없는 여인을 보는 선주혁의 시선에 아쉬움이 담겼다. 여인은 현숙(賢淑)하고 선량(善良)했다. 홍등가에서 보수도 없이 인술을 베풀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이다. 또한 여인은 총명했다. 자신이 쫓기는 몸임을 짐작해 미리 준비 를 해 놓을 정도로……. 그야말로 얼굴만 생각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마음을 가져가기에 충분한 것이다. 의식의 깊은 곳에서부터 갈등이 시작되었다. 사실 저쪽 세상에 있을 때는 여자란 과분함 그 자체였다. 기껏 남의 지갑이나 슬쩍하며 감방이나 들락거리는 주제였기에. 하지만 이곳에서는 달랐다. 비록 지금이야 무림맹에 쫓기는 신세라지만 저쪽 세상과는 비할 바 없는 처지인 것이다. 추후 오해야 밝히면 될 일이다. 이곳에서의 자신은 절세의 신공을 체득했고, 그에서 비롯된 무 공을 소유했으며, 신투의 은신처에서 가져온 엄청난 보화(寶貨)까 지도 가지고 있었다. 약 잘못 먹고 생긴 부작용이 있긴 했지만, 이곳은 돈과 무공이 면 귀신도 부릴 수 있지 않은가? 결국 선주혁은 소위 말해 잘 나갈 수 있는 여건을 충족해가는 중이었던 것이다. 그에 따라 욕심이 생겼다. 저쪽 세상의 연예인들을 보완한 것 같은 미녀들이 넘쳐나는 이 곳이다. 운 좋게 그 중 몇과는 인연도 맺어뒀다. 노력 여하에 따라 서는 그녀들과 함께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한데 인생의 막바지에 몰린 창기들이 모여 사는 골목에서 만난 여인에게 자꾸만 마음이 끌리는 것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함께하 면 할수록 선우라는 성의 여인은 선주혁의 마음을 잡아 당겼다. 그녀와 함께라면 마냥 행복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특히 저녁 시간에 그녀를 접할 때면 더욱 그랬다. 불을 등진 그녀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선주혁이 소설 속에서 읽었던 절세미인들의 실제 모습을 보지 않았더라면 이 여인에게 진즉 마음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아 니, 백팔십도로 뒤바뀐 자신의 처지만 아니라도 그랬을 것이다. 스스로의 간사함에 쓴웃음이 지어졌다. 상황이 조금 바뀌었다고 해서 못생긴 여자를 마다하는 것이다. 예전에는 반려가 생기는 것 만으로 과분하다던 자신이 아니던가. ‘젠장! 저쪽 세상이라면 성형수술이라도 시켜서 어찌 해 보겠건 만…… 응?’ 성형수술에 생각이 미치자 선주혁은 갑자기 두 눈을 크게 떠야 만 했다. 얼굴을 바꾸는 방법이 꼭 성형수술에만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자신의 전신에 피고름을 덮어 무림맹의 무사를 속였듯 본래의 모 습을 가리는 방법은 많고도 많았다. 연 노인이 했던 것처럼 티 안 나게 분장을 할 수도 있을 것이 며, 역용술을 사용할 수도 있다. 구하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인피면 구(人皮面具)를 사용하는 방법도 있다. 어쩐지 강한 확신이 들었다. 선우 아가씨의 지금 얼굴이 진짜가 아니라는 확신이었다. 한번 그런 생각을 하니 앞뒤가 들어맞았다. 이곳은 홍등가. 연약한 여인으로서 반반한 생김새라면 몸을 버리기 십상일 터. 저처럼 추한 얼굴이야말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방 법일 것이다. 얼굴 이외의 부분만으로도 자신의 마음을 끌 정도이니 미인은 아닐지라도 남자의 성욕을 자극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기에. ‘내가 왜 진작 그 생각을 못했을까?’ 그토록 많은 무협 소설을 읽고서 이렇게 간단한 이치조차 생각 지 못했던 것은 몸이 좋지 않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선주혁이 미리 읽었던 소설 속에서는 인피면구를 쓰거나 역용을 한 여인이 등장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선우 아가씨가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는 가정이 사고의 영역 밖에 있었던 것이다. ‘저 정도의 여자라면 가벼운 비중의 캐릭터는 아니었을 텐 데……. 과연 누굴까?’ 물론 소설 속에서는 홍등가에서 인술을 베푸는 여인에 관한 내 용이 없었다. 있었다면 이렇게 어렵게 이야기를 짜 맞출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결국 소설의 내용 중 중반 이후에 등장하는 여인 중 하나일 것 이다. 그가 이곳으로 온 후 겪고 있는 상황은 소설에서 언급되지 않은 부분까지도 짜 맞추어져 있었다. 그러므로 자신이 보고 있는 선우 아가씨는 소설 속에 등장하기 이전의 모습일 수도 있는 것이다. 머리를 부여잡다시피 하고 생각을 해내려 했지만 선우라는 성의 여인은 떠오르지 않았다. 읽었던 소설 속에 저처럼 고운 심성과 현숙한 자태를 가진 듯 묘사된 여자는 있긴 했다. 그 여인을 떠올리는 순간 선주혁은 고개를 저어야 했다. 소설의 초반이 아니라 중반에서 등장하는 것이 맞는다고는 해도 전혀 연관성이 없는 것이다. 또한 그녀가 있어야할 곳은 여기가 아니었다. ‘뭐……. 소설에는 나오지 않는 여인일 수도 있지. 그 소설과 현 재의 상황이 기가 막히게 들어맞는다고 해도 이쪽 세상의 모든 인 물을 다 담아낸 것은 아니잖아?’ 결국 선주혁은 그렇게 단정을 지었다. 소설 속에 등장하지 않은 미지의 여인이라고. 그러면서도 선주혁은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선우 아가씨가 소 름끼치는 추물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당장이라도 그녀의 진면목을 보고팠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웠다. 자신의 추측이 그럴듯하긴 해 도 틀릴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인이 아니어도 좋다. 평범하기만 해도, 아니 그냥 이목구비만 제대로 있으면 만족할 수 있을 거야. 선우 아가씨라면 말이지.’ <3> 시간이 지날수록 선주혁의 회복은 가속화되는 중이었다. 운공조 식을 통해 그의 내상을 빠르게 치유되어 갔다. 회복이 진행되자 선주혁은 조금씩 몸을 움직여 굳어진 근육과 관절을 풀었다. 진기의 흐름이 원활해질수록 신체도 빠른 속도로 제 기능을 회 복해갔다. 스스로 생각해도 기특할 정도의 회복력이었다. 그런 선주혁을 선우라는 성의 여인은 마치 신기한 현상을 관찰 하듯 바라봤다. 죽음이 예정되었던 신체가 완치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이 너무나 짧았으니 자신이 알고 있던 의학적인 지식과 너무 나 상이했던 것이다. 그렇게 회복기를 보내는 사이 선주혁은 여인을 향한 자신의 환 상을 키워갔다. 보면 볼수록 그녀에게 마음이 기우는 만큼 여인의 진면목이 궁금해졌으며, 필시 못생긴 추녀는 아닐 거라 멋대로 단 정을 짓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던 중 여인이 조용히 선주혁의 옆에 앉았다. “……?” 선주혁은 여인의 분위기가 평소와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 다. 늘 정숙한 태도를 유지하는 그녀였으나 지금처럼 가라앉은 듯 한 느낌을 주지는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선 공자의 완쾌를 보지 못하고 떠나야할지도 모르겠군 요.” 요 며칠 사이 말을 섞는 동안 한결 친근한 어투를 사용하는 여 인이었다. 그럼에도 선주혁은 갑작스레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만 같았 다. 여인이 언급한 내용 때문이었다. “여기를 떠난다는 말인가요? 언제요?” 한참 여인에 대한 환상을 키워가는 지금이었다. 아직까지 그녀 에게 자신의 속내조차 비춰본 적이 없다. 결국 여인과의 관계는 환자와 의원 이상의 진척이 없었다는 말 이다. 한데 그녀와 헤어져야하는 상황이 닥치자 마음이 조급해진 것이다. “언제라고는 딱히 말씀드리기 힘들어요. 선 공자의 완치를 볼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을 거예요.” 여인은 나직한 음성으로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물론, 저로서도 원치 않는 일이에요.” “어디로 가신다는 거죠?” 선주혁은 마치 여인이 지금 당장 떠나는 것처럼 다급하게 물었 다. “그건 말씀드리기가 곤란하군요.” 여인은 말끝을 흐렸다. “이곳에서 할 일이 다 끝났다는 겁니까?” 선주혁은 여인이 무례하다 생각할 수도 있는 질문을 던졌다. 아 직까지 그녀의 진짜 모습조차 보지 못했다고 생각하니 더욱 조급 한 마음이 드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서 떠나는 것은 아니에요.” 여인은 단호히 부정했다. 그 순간 선주혁은 읽을 수 있었다. 여인의 눈빛에 떠오른 안타 까운 감정을. “이곳을 떠나야 하는 것이 본인의 의사가 아니라는 말입니까?” “…….” “원치 않는다면 떠나지 마세요. 제가 선우 아가씨를 돕겠습니 다.” 이 말을 하는 데에 꽤나 용기가 필요했다. 어쩐지 그녀에게 호 감을 느끼는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선주혁 은 말을 하며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마치 이성을 처음 대하는 사춘기 소년과도 같은 자신의 모습이 어이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싫은 것만은 아니었다. 환상만으 로도 행복할 수 있는, 외모가 아니라 사람 자체에 마음이 기우는 자신의 순수함에서 오는 만족 때문일 수도 있었다. 저쪽 세상에 있을 때부터 스스로는 이미 닳고 닳았다고 생각해왔기에 더욱 그 랬다. “사람들마다 원치 않아도 해야 할 일이 있을 거예요. 제 경우는 이번 일이 그렇군요.” 어렵게 말한 자신의 말을 사양하는 여인에게서 선주혁은 약간의 서운함을 느꼈다. 하지만 아이처럼 칭얼거릴 수도 없는 일. 그는 여인과의 만남이 이것으로 끝이 아니기를 바랐고, 계속해 인연의 끈을 이어갈 수 있는 방법을 고심하는 게 낫다고 결론지었 다. 여인은 복잡한 심사를 드러낸 선주혁의 표정을 잠시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서글픈 듯 했던 방금 전보다 훨씬 심각한 어조로. “해서…… 그간 선 공자의 회복에 방해가 될까 염려되어 말하지 않았던 사실에 대해 말씀을 드리려고 해요.” “……?” “선 공자가 이곳에 왔을 때, 죽음이 확정지어진 것 같은 상태였 어요. 그런 선 공자를 업어 이곳에 왔던 분은 노인이셨어요. 키가 작고 다부진 모습이었죠.” 선주혁은 여인의 말에 공 노인을 떠올렸다. “이것을 제게 주며 선 공자를 부탁했어요.” 여인은 공 노인의 전낭을 내밀었다. 두둑한 은자가 담긴 전낭이 었다. “어르신은 어디로 가셨습니까?” 선주혁은 알 수 없는 불길함에 휩싸였다. 갑자기 입 안이 말라왔다. 당시 분명 사해표국 내에서 쓰러졌다. 한데 눈을 떠보니 이곳이었다. 그리고 무림맹의 무사들이 수색에 나섰다. 조금만 더 주의 깊게 생각을 해봤다면 일련의 정황으로 미루어 모든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사해표국을 거론하며 선 공자를 부탁했습니다만……. 이곳을 나설 때 선 공자를 바라보는 눈길은…… 미래를 기약하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 선주혁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마치 누군가 머리를 뒤통수로 후려 친 듯 했다. 이곳에 누워 몸을 치료하는 데에 급급했다. 간간히 여인에 대해 철없는 환상을 키우는데도 넋을 잃었다. 그러느라 자신의 상황에 대해 깊이 생각지 못했다. 정말이지 까맣게 모든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어떻게 그런 것을 잊을 수가 있지? 그렇게 단순한 것을 어떻게……?’ 스스로의 어리석음, 그리고 유아적인 상황판단이 어처구니가 없 었다. “당시…… 위급한 상황이었습니까?”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위급하지 않았다면 홍등가에 자신을 맡겼 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선주혁은 지금 떠오르는 모든 상상을 부정하고픈 마음이 들었다. 최근 며칠간 자신이 보냈던 나태한 시간이 모두가 죄스러 웠다. 그래서 여인에게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급해 보이는 표정이었어요. 아마도 누군가에게 쫓기는 상황 이었겠죠. 선 공자가 백발귀마라는 별호로 불린다면 그 때 들렸던 호각소리는 무림맹의 무사들이었을 거예요.” 선주혁은 자신이 지금의 상황을 얼마나 나태하게 받아들이고 있 었는지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최소한의 위기의식조차 없었던 것이 다. 여인은 백발귀마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하긴 이 정도로 총명한 여인이 남창을 발칵 뒤집었을 백발귀마의 출현에 대해 모 를 리 없었다. 그럼에도 여인은 자신을 보호해줬다. 만약 그녀가 평범한 의원에 불과했던가, 조금이라도 다른 마음 을 먹었다면……? 자신은 이미 죽은 목숨일 것이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실로 어처구니없는 방심인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조차 큰 문제는 아니었다. 정작 중요한 것은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표정으로 자신을 맡기 고 떠났다는 공 노인의 안위였다. 공 노인이라면 스스로만을 챙기 기 위해 자신을 이곳에 맡겼을 리 없었다. 평소 꼬장꼬장한 성격을 보이긴 했지만 자신을 마치 손자 대하 듯 챙겨주던 그가 아니던가? 또한 입버릇처럼 산중에서 자신이 아니었으면 죽었을 거라며 고 마워하던 공 노인이었다. 그렇기에 표국에서 자신을 빼돌렸을 것이다. 그 이후의 일은 훤히 짐작이 되었다. 자신을 업고 도주하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이곳에 맡겼으리라. 결국 붙잡히게 될 것이라는 것은 알았을 터. 자신을 찾기 위해 무 림인들이 어떤 수단을 사용할지 아는 그의 선택은 많지 않았을 것 이다. 결국 자신은 공 노인의 희생을 통해 이렇게 살아남은 셈이다. 결론이 거기에까지 이르자 죽을 것을 뻔히 알고 사지(死地)로 달려 나갔을 공 노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마치 눈으로 보는 것처 럼 선명했다. 손자를 바라보는 듯 애정을 담아 자신을 봤을 것이다.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억지로 미소를 지었으리라. 자신의 무사(無事)를 기원하는 노안(老眼)이 보였다. 주름 가득한 얼굴을 돌려 방을 벗어나 달렸을 것이다. 시퍼렇게 날이 서있는 무림맹의 칼날을 향해 달려가다니……. 선주혁은 저도 모르게 어금니를 악물었다. 그런 선주혁을 바라보던 여인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숭고한 희생(犧牲)이라 생각했습니다. 살신성인(殺身成仁)은 말 하기란 쉬워도 실천하기란 어려운 법이죠. 목숨을 걸고 누군가를 살려야겠다는 그분의 의지가 아니었다면, 저도 그날 모험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이 백발귀마임을 알고도 보호를 해 준 것은 공 노인의 희생 을 생각해서라는 말이었다. 선주혁은 고개를 돌렸다. 억지로 숨을 죽였다. 그래도 어깨가 낮게 들먹였다. 어깨의 흔들림이 작아들 때 그가 갈라지는 목소리를 냈다. “저는…… 희생을 통해 살려낼 만큼의 인간이 아닙니다.” 진심이었다. 이곳에 와서 잘 먹고, 잘 살아보겠다고 설레발을 치 고 다녔다. 하지만 자신은 보잘 것 없는 소매치기에 불과했다. 공 노인을 살린 것도, 그만을 위해서라도 볼 수 없는 일. 은혜를 갚아야한다는 공식은 성립될 수 없었다. “인간을 가치로 측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선 공자의 말씀 은 그분의 희생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그래서는 안 됩니 다. 자신을 더욱 아껴 그분의 숭고한 희생을 무의미하게 만들지 않도록 노력해야죠.” 여인은 부드럽게 선주혁을 위로했다. 아무리 마음이 기운 여인의 위로였지만 지금의 선주혁에게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마음을 가다듬어 절대로 방심하지 않기로, 이제는 더 이상 어리 석은 짓에서 비롯된 후회는 안하기로, 몇 번이나 결심했던 그였다. 한데 죽음의 위기를 맞았다 벗어났다고 해서 이토록 철없이 지 내고 있었다는 것에 대한 자책감은 아무리 줄여보려 해도 줄지 않 았다. 저쪽 세상에 있을 때부터 세상을 다 살아온 것처럼 굴었다. 물 론 그때도 나이가 많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부모님 슬하(膝下)에서 곱게 자라 대학에 다니는 철없는 또래를 보면 우습기까지 했다. 자신이야말로 산전수전(山戰水戰)을 다 겪었으니 그들을 눈 아래로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여기서의 자신은 뭐란 말인가? 모든 게 현실 이상이라는 것을 깨달았음에도 장난처럼 살아왔 다. 자신의 그런 태도가 지금의 상황에 적응하는 데는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 다시 말해 죽음을 담보로 생명을 얻게 된 지금도 그럴 수는 없었다. 그런 희생을 받고도 철없이 여인의 용모에 관한 고민이나 했던 자신에 대해 심각히 돌아봐야만 했다. 고개를 숙인 선주혁을 바라보던 여인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 다. 지금 자신이 하는 말이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의 시간이 필요한지는 그녀도 몰랐다. 하지만 필요한 것이 해답이던, 극복해야할 무엇이던 스스로 찾아야할 것이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4> “그만 출발하자.” 다소 명령조로 말하는 청년은 짙은 눈썹이 산을 이루고 그 아래 형형한 안광(眼光)이 빛을 냈다. 부스럭. 해가 중천에 떴음에도 침상에서 뒹굴던 청년이 부스스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칼처럼 뻗은 눈썹. 준령(峻嶺)처럼 우뚝 솟은 코와 붉은 입술이 매력적인 청년이었 으나 반쯤 감은 눈과 헝클어진 머리가 그 매력을 반감시키고 있었 다. “조금만…… 더 자고 갑시다, 사형.” 자리에서 일어난 청년이 입을 열자 고약한 술 냄새가 났다. 사형이라 불린 청년은 살짝 인상을 찌푸린 후 말했다. “지급을 요하는 일이라는 것을 모르는 게냐?” “거의 다 왔잖아요. 어차피 오늘 내로 도착할 텐데…….” 침상 위의 청년은 손가락을 구부려 머리를 벅벅 긁으며 사형을 올려다봤다. 그리고는 사형의 눈썹이 하늘을 향해 치켜 올라가는 것을 확인했다. “알았어요. 일어나면 될 거 아녀요.” 청년은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나 물을 받아놓은 대야로 향했 다. 세안을 하기 위함이었다. “서둘러라.” 그의 뒷모습에 대고 사형인 청년이 말했다. 사제의 굼뜬 동작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거 참……. 왜 그렇게 서두르는지 모르겠네.” 손가락 끝에 물을 살짝 묻혀 고양이가 얼굴을 씻듯 깔짝대던 청 년이 동작을 멈추며 말했다. “사태의 중요성을 몰라서 하는 말이더냐?” 사형은 딱딱한 어조로 물었다. 이제는 음성에 노기까지 담겨 있 었다. “그렇게 중요한 일을 우리와 상의도 없이 제 멋대로 처리를 한 건 누군데……, 우리가 그 일을 해결하겠다고 이렇게 달려가야 하 는 겁니까?” “누구의 책임인가를 따져야할 때가 아니지 않느냐?” “하! 그간 사형의 아량이 바다만큼 넓어졌다는 사실을 소제가 미처 몰랐군요. 도옥 사제가 무리해서 친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사형이 둘이나 나서서 해결을 해야 한다는 것을 당연히 여길 정도 로 말이죠.” 사제의 말에 청년의 한쪽 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자존심이 강하 기로 무림맹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청년이었기 때문이다. “맹에서 내린 임무다. 도옥의 뒤치다꺼리를 하기 위함이 아니 고!” 청년이 말하는 도옥이란 무림맹의 순찰당주자 무림맹주 한조백 의 셋째 제자인 서문도옥을 말함이다. 결국 방금 말을 한 청년은 한조백의 대제자이자 서문도옥의 대 사형인 풍초양(豊超陽)이란 말이었다. 질풍검룡(疾風劍龍) 풍초양. 올해로 서른을 맞은 그는 신웅십팔걸 이전 정도의 후지기수중 제일로 꼽히던 신진십이수(新進十二秀) 중 가장 어린 나이에 수좌 로 꼽혔었다. 무림맹주인 한조백의 진전을 전부 이었다고 알려진 그였으나 사 람을 모으고 세력을 만드는 일에는 소양이 부족했다. 자신의 능력 이 뛰어난 만큼 타인에게 일을 맡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투덜거리며 세안을 마친 청년은 풍초양의 사제이자 무림맹주의 둘째 제자인 혁련기(赫連基)였다. 맹주의 둘째 제자라는 엄청난 배경을 가졌음에도 변변한 별호조 차 없는 혁련기. 매일 같이 계속되는 방탕한 생활 때문이었다. 무 공 연마는 뒷전일뿐더러 주색(酒色)을 밝히고, 온갖 말썽은 도맡아 피웠다. 맹 내의 혹자는 그를 개망나니라 일컫기를 서슴치 않았다. 특이한 것은 엄하기로 소문난 맹주 한조백이 유독 혁력기만을 감싸고돈다는 것이었다. 맹주의 제자로 지켜야할 기본적인 행동조 차 않는 그였지만 한 번도 제대로 된 징계를 받아본 적이 없다는 것은 구설수에 오르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한조백은 모 든 비난을 외면한 채 혁련기의 방만한 생활을 허용했다. “흐음……! 맹에서 내린 임무라……,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편 하신가보군요. 그 맹이라는 조직이 지금 어떻게 움직여지는지 외 면하실 수 있다 이 말씀인가요?” 혁련기는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풍초양의 얼굴이 점차 상기되기 시작했다. “이제 와서 대체 뭘 말하고 싶은 게냐? 도옥 사제가 맹 내에서 굳건한 지위를 형성한 것이 불만이라는 말을 하고픈 것이더냐?” 풍초양의 음성에 가득담긴 노기. 아직 의기상인(意氣傷人)의 경지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그의 몸 에서는 강압적인 기운이 뻗어져 나왔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그 압 박감만으로도 호흡을 잇기 어려울 정도의 기운이었다. 하지만 혁련기는 위압적인 기운 안에서도 태연함을 유지했다. 그는 말아 올린 입 꼬리를 유지한 채 대답했다. “소제가 그딴 것에 관심이 없다는 것은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 까?” 무림맹 내에 도는 소문으로 혁련기는 일류에도 들지 못하는 무 공의 소유자였다. 그것은 명백히 잘못된 소문이었다. 풍초양의 압 도적인 기세는 절정의 고수가 아니면 태연함을 유지할 수 없는 것 이었으므로. “한데 왜 자꾸만 정해진 일을 들추는 것이냐? 이 사형을 자극하 고 싶은 게냐?” “대사형!” 혁련기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이어 술에 절어 흐릿했던 그의 두 눈에서 정광이 빛나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진중해진 혁련기의 표정에 풍초양은 마구잡이로 내뿜 던 기운을 회수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사제인 혁련기가 그저 주색만을 밝히는 망나니가 아니라는 것 을. 그가 저렇게 정색을 하고 나설 때면 조만간 천하제일인이 될 것 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자신이라 해도 위축되는 느낌이 든다는 것 을. 그런 자신을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어쨌건 사제는 적어도 남 들이 생각하는 수준의 인물은 절대 아니었다. “맹 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 정도는 알고 계시죠?” “도옥 사제가 무공이 아니라 인맥으로서 차기 맹주의 위를 노린 다는 것은 알고 있다.” 풍초양의 말에 혁련기가 고개를 흔들었다. “어찌 매일 같이 계집을 옆에 끼고 술에 헤롱 거리는 소제에게 보이는 것이 사형께는 안 보인다는 말씀입니까?” “무슨 말이 하고픈 게냐?” “소제가 보기에는 지금의 무림맹을 움직이는 것은 사부님이 아 닌 것 같다는 거죠.” “지나친 피해 아니냐? 도옥 사제가 꽤나 많은 인사들을 포섭했 다는 것은 나도 안다만…….” 풍초양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혁련기가 손을 들어 올렸기 때문이다. “표물의 가치가 꽤나 크다고는 들었지만 사형과 제가 동시에 나 서야할 정도라 생각하십니까?” “표물 때문만은 아니다. 백발귀마가 표물을 맡고 있었고, 사해표 국에 혈겁이 있었다지 않느냐?” “그렇다고 해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고작해야 이십대 초반의 애 송이라 들었습니다.” “명유신군을 죽이고, 도옥을 곤란케 한 자다.” “명유신군이 아니라 백사회의 일원을 죽였다 해도 사형과 제가 나설 정도입니까?” “…….” 풍초양은 혁련기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원래대로라면 그의 말이 옳았다. 백발귀마가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맹주의 적전제자가 둘이나 나선다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 다. 적이 약하다면 둘씩이나 동원될 일이 없고, 강하다면 후계를 위해서라도 둘이 함께 가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사형과 제가 복귀했을 때는 그간 알던 무림맹이 아닌 다른 무 림맹이 우리를 기다릴 수도 있습니다.” 혁련기의 말에 풍초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도옥이 그 정도로 맹을 장악하고 있단 말이냐?” “말도 안 되는 표행을 진행시키고, 예정된 것처럼 사고가 일어 났다는 점을 생각해볼 필요는 있겠지요.” 풍초양의 눈이 흔들렸다. 혁련기는 사형의 주먹이 쥐어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정 색했던 표정을 풀고 느긋이 사형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확실히 사제의 말에 일리가 있군.” 혁련기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맺혔다. 예정된 수순이었다. 사형 은 이제 최선을 다해 무림맹으로 돌아가는 데에 힘을 쏟을 것이 다. “하지만 지금 당장 돌아갈 수는 없어.” “……?” 이번에 눈을 휘둥그레 뜬 것은 혁련기였다. 예상을 벗어난 사형 의 반응 때문이었다. “도옥의 야심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이번 일을 녀석이 꾸몄다 고 단정지을 수는 없는 것 같다.” “제가 모르는 뭔가가 있습니까?” 혁련기가 물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그의 태도에서는 여유가 사라졌다. “소림 나한전의 세 분이 남창에서 고수를 만났다는 보고가 들어 왔다.” “소림승들이……? 그들이 백발귀마와 접촉한 것입니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더군. 정황으로 미루어 백발귀마와 손속을 겨뤘던 것 같아.” “나한전의 고승(高僧)들이 백발귀마와 손속을 나눠요? 행여 그 들이 패하기라도 했다는 말입니까?” 매사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던 혁련기였다. 하지만 지금도 그 런 태도를 유지할 수는 없었다. 나한전의 고승들. 그들을 곤란하게 할 수 있는 자는 세상에 많지 않았다. 나한전의 고수 셋을 홀로 감당할 수 있는 자가 당금 천지에 몇 이나 되겠는가? “백발귀마에게 조력자가 있는 것 같다.” “조력자?” 혁련기 안도 속에 실망스러운 표정이 섞여 나왔다. 어쩐지 그는 백발귀마가 자신이 상상했던 이상의 고수가 아닌 것이 아쉬운 듯 했다. “소림의 고승들은 도절과 옥소선자를 거론했다. 특히 도절은 백 발귀마로 추측되는 자를 친구라 말했다더군.” “분광도 주백광이?” 혁련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정중한 무림맹의 초빙조차 거 절했던 주백광이다. 천하에 무서울 것이 없고, 오만이 하늘을 찌르 는 자가 그였다. 그런 주백광이 이십대 초반의 애송이를 친구로 여긴다는 것. 그것은 결코 경시할 문제가 아니었다. “알다시피…… 도절이라면 사제나 나나 승부를 장담할 수 없지. 그가 백발귀마를 돕고 나선 게 사실이라면…….” 도절의 명성을 고려해보면 풍초양이 자신과 사제가 그와 겨룰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지나친 자신감이랄 수 있었다. 하지만 풍 초양은 그와 같은 말을 자연스럽게 했고, 혁련기도 그에 대해 부 정하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암암리에 도신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고 생 각한다는 의미였다. “무림맹의 표물을 탈취하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겠군요.” 마치 신음성을 내뱉듯 혁력기가 중얼거렸다. “확실히 이번 일은 조사해볼 필요가 있겠군요.” “응.” 풍초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설사 도옥이 이번 일을 꾸몄다 해도, 예상치 못한 변수에 당황 했을 겁니다. 어쩌면 오히려 우리에게 시간을 벌어줄 수도 있는 사건이 되겠군요.” 약간은 상기된 표정의 혁련기였다. 그에게 있어서는 도신과 옥 소선자의 도움을 받는 백발귀마가 훨씬 더 흥미로웠던 것이다. Chap. 10 소제목 미정 <1> “후! 후! 훗!” 입을 동그랗게 모으고 최대한 빠르게 호흡을 내쉬었다. 한 호흡 에 한 번의 주먹이 뻗어진다. 처음 선우 아가씨는 선주혁의 무리한 연공을 만류했다. 아직 거 동조차 불편한 그가 앉은 채로 초식을 가다듬고 있었기 때문이다. 평소라면 당연히 그녀의 말을 존중했을 것이다. 자꾸만 그녀를 향해 기우는 마음만을 고려 해봐도 그랬다. 하나 선주혁은 모질게 자신을 몰아붙였다. 만약 자신이 오만한 생각을 품지 않았다면……. 이 정도라면 이 바닥(?)에서 떵떵거릴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공 노인의 희생은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나름대로의 무공과 운, 그리고 특수한 신체적 능력만으로 어찌 어찌하다보면 잘 되겠지, 라는 막연한 생각이 공 노인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선주혁은 이를 악물어야 했다. 팔자 좋게 드러누워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마냥 운이 좋기만을 바랄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그가 최근 읽었던 소설 속의 무림맹이 방심을 부추겼다. 소위 말하는 정도의 무림맹은 늘 엉망진창이었다. 무림의 명숙이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한 늙은이들이 맹을 이끄는 것이다. 머리는 텅 비었고, 성질은 더럽다. 명색이 한 문파를 대표한다는 노친네들인데 생각하는 거나 하는 짓을 보면 초등학생도 웃을 정 도다. 그런 멍청하기 짝이 없는 자들이 강호에 산재한 수많은 위 험을 헤쳐 나와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 후기지수라는 놈들도 마찬가지다. 젊은 무인 중에서 손에 꼽힌 다는 녀석들은 한결같다. 제 잘난 맛에 살거나 오만하기 짝이 없 어 늘 주인공한테 밟히는(?) 역할에만 치중한다. 물론 주인공을 부각시키기 위한 엉터리 글쟁이들의 설정이겠지 만, 그들을 보다보면 강호가 위험한 곳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누가 멍청이들의 집합소에서 위협을 느끼겠는가? 그래서인지 무림맹의 공적으로 지목되었을 때도 큰 감흥이 없었 다. 오해야 풀면 그만이라 생각이 들기도 했다. 명유신군을 만나 위험한 고비를 넘기긴 했다지만 그때뿐이었다. 위기에서 살아남았던 것이 경각심을 부추기기는커녕 외려 이렇게 죽지는 않는다는 막연한 착각만을 키웠다. 마치 스스로가 소설 속 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공 노인의 죽음은 그런 선주혁을 바꿔놓기에 충분했다. 가깝게 느껴지던 사람의 죽음은 현실로서 다가섰고, 일종의 충격 이었다. 그리고 선주혁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계기였다. “합!” 기합성과 함께 내뻗어지는 일 장. 한 번의 기합에 두 번의 장이 날아갔다. 선주혁의 인상이 크게 찌푸려진다. 완치 이전의 무리한 운공에 서 비롯된 통증이었다. 팔이 분해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끔찍할 만큼의 통증만은 아무 리 많이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듯 했다. 이마에 흐르던 식은땀이 턱을 타고 흐른 후에야 선주혁은 간신 히 통증이 완화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다시 팔을 뻗어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등까지 땀에 흠뻑 젖을 정도의 통증이었다. 시뻘겋게 충혈 된 눈을 빛내며 팔을 들어 올렸다. 공 노인이 뿜 어냈을 선혈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갈라진 가슴 사이로 공 노인의 심장이 벌떡인다. 차가운 검극이 심장을 꿰뚫었을 때, 공 노인은 어떤 통증을 느 꼈을까?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 자신이 느끼는 통증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리라. 선주혁의 주먹이 허공을 가른다. 파아앙. 미약하지만 폭발음을 내며 연달아 세 번의 장력이 폭출된다. “크윽!” 악다문 이빨 사이로 저도 모르게 신음성이 새어 나갔다. 너무나 지독한 통증에 차라리 정신을 놓고 싶을 정도였다. 팔에서 시작된 고통이 전신으로 확산되었다. 이제는 고통의 발원이 어디인지조차 짐작하기 힘들었다. 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내기(內氣)가 제멋대로 들끓기 시작한 것이다. 고통 속에서 간신히 호흡을 이었다. 이대로라면 제풀에 내상을 입게 될 것이기에. 거친 숨결이 입을 빠져나간다.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워 절로 몸이 오그라들었다. 끊임없는 경 련을 일으키는 팔. 불끈 치미는 분노는 그런 팔조차 못마땅했다. 그렇게 엄살을 피 울 때가 아니거늘……. 구부렸던 상체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피가 배여 나올 정도로 아랫입술을 깨물고 다시 팔을 들어올렸 다. 어느 정도 진기가 가라앉는다 싶은 순간 호흡을 들이쉬었다. 다시금 북두폭렬장을 전개하려는 것이다. 그 순간 천이 들렸다. 선우 아가씨였다. 여전히 추하지만, 또한 여전히 아름다운 눈을 빛내는 모습 그대로였다. 선주혁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지금은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것조차 사치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녀로 인해 흩어졌던 호흡을 다시 가다듬었다. “때론…….” 선우 아가씨가 입을 열었다. 선주혁은 동작을 멈췄다.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으나,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 이다. 여자에게 헛된 마음을 품는 것을 포기했다. 하지만 여전히 선주 혁의 마음 일부를 가져간 그녀였다. 또한 그녀의 보살핌이 없었다면 이미 죽었을 지도 모를 일. 거리를 두려 노력할지언정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자신의 은인이라는 사실을 부정해선 안 되는 일이기에. 선주혁은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자신을 그렇게 합리화시키 고 있었다. “길을 돌아가는 방법이 가장 빨리 목적지에 도착할 수도 있는 거예요.” 조심스레 충고를 하는 여인. 선주혁은 저도 모르게 반박을 하려 했다. 자신을 그럴 수 없다고. 미루거나 돌아갈 일이 아니라고. 하지만 생명의 은인과도 다름없는 그녀에게 함부로 굴 수는 없 었다. 억지로 숨을 들이켜 말을 삼키는 선주혁. 순간 번쩍하며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것은 복면인의 우두머리와 손을 겨루던 중 깨달았던 북두폭렬 장의 치명적인 결함이었다. 북두폭렬장이 보다 강력한 힘에 의해 반격을 받았을 때 후속 공 격이 불가능하다는 것. 그것이 일체의 변화를 배제한 채 직선적이 고 속도에만 의지한 공격이기 때문이라는 것. 선주혁이 격전 중 깨달았던 북두폭렬장의 맹점이었다. 한데 선우 아가씨의 말이 북두폭렬장의 치명적인 단점을 그대로 지적하고 있었다. 공격을 전개함에 있어 목적지란 상대를 가격하는 것에 다르지 않았다. 아무리 빨리 장을 전개한다 해도 상대가 방어하거나 마주쳐 오 면 결국 무용한 것이 아닌가! 선주혁의 머리가 맹렬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가장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는 초식. 그것은 속도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복면인의 수장과 싸울 때 외려 무진진인의 초식과 암영수를 혼 합한 초식에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었다. 이는 변화를 내포한 부드러운 초식이 방어를 피해갔기 때문이 다. 속도와 강맹한 위력에 집중된 북두폭렬장보다 더 실효를 본 것이다. 북두폭렬장이 변화를 내포한다면? 강맹함 속에 부드러움을 담을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북두폭렬장이 정말로 일세를 풍미할 절정의 무공이 될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선주혁은 재빨리 자신이 알고 있는 초식을 전부 더듬어봤다. 곤 륜파의 무공에서부터 그간 타인에게서 훔쳐낸 초식들에 이르기까 지. 최근에 단목지민에게서 훔쳐 배운 화무난천장이 가장 빨리 떠올 랐다. 부드러움의 극치를 보이면서도 수많은 변화를 내포한 장법 이었다. 그녀에게 화무난천장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도 기억났 다. 그 때 미소를 지으며 그대로는 사용하지 않겠다고 했던 것 도……. 하지만 초식을 고쳐 달리 사용하는 것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무진진인의 초식과 암영수를 섞어 사용했듯 언젠가 화무난천장 의 부드러움과 다변의 초식이 필요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 다. 그리고 지금이 그 순간이었다. 선주혁의 머릿속에서 북두폭렬장의 운공법과 화무난천장의 초식 과 운기법이 마구 뒤엉켜들어갔다. 순간적인 몰입에 빠져든 것이다. 선우 아가씨는 선주혁이 한순간 넋을 잃는 모습을 보고서는 조 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뭔가 영감을 받아 몰아(沒我)의 상 태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짐작했기 때문이다. 몸에 무리를 주는 것을 막기 위한 조언이었고, 선주혁이 거친 동작을 멈췄으니 그녀로서도 원하는 바를 이룬 셈. 행여나 선주혁에게 방해가 될까 염려된다는 듯 그녀는 아무런 소리조차 내지 않고 방을 벗어났다. <2> 비 오듯 흐는 땀이 눈앞을 가렸다. 격렬한 동작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간신히 상체만 일으켜 세워 손으로만 초식을 전개하는 만큼 움직임에 한계가 있었음에도 땀은 계속해서 흘렀다. 이는 선주혁이 얼마나 집중을 해 한 동작, 한 동작을 전개하는 가를 보여주는 단면이었다. 선우 아가씨의 말에서 비롯된 착안은 좋았다. 하지만 서로 성격이 다른 무공 중 장점만을 취합해 하나로 만드 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대에 걸쳐 각각의 완성도를 극대화시킨 초식이다. 선주혁이 의도한 것과는 달리 초식에 변형을 주거나 운기의 방 법을 달리하면 위력이 증가하기는커녕 외려 취약한 면모만을 드러 냈다. ‘젠장! 이럴 때 사형이 있었으면 더 좋은 방법을 생각해낼 수도 있었을 텐데…….’ 긴 한 숨과 함께 남지학을 떠올리는 선주혁이었다. ‘주 형은 어떻게 된 거지?’ 남지학을 떠올리자 주백광의 안위도 걱정되기 시작했다. 이쪽 세상으로 넘어와 자신에 가장 큰 의미가 되어 준 두 사람이었다. 서로 성격이 다르고, 가치관도 다른 두 사람이었으나 선주혁에게 는 둘 다 소중하기만 했다. 이번 일을 통해 선주혁이 깨달은 것은 많았다. 그 중 하나는 바로 내가 힘을 가져야 소중한 사람들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이다. ‘방법을 찾아야해. 지금의 실력 따위에 만족해서는 앞으로 또 무 슨 일을 당할지 모르니까.’ 선주혁은 아랫입술을 악물고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몇 번에 걸쳐 심호흡을 한 뒤 다시 손을 내렸다. 선우 아가씨의 말을 다시 상기한 것이다. 때론 돌아가는 방법이 목적지에 가장 빨리 도착할 수 있다는 것. 맞는 말이다. 이렇게 무작정 섞어보려 한다고 절로 성과를 얻어낼 수는 없다. 마교에서 배출한 천재들이 만들어 놓은 무공이 오죽 고절하겠는 가? 스스로 멍청하다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딱히 사형과 같은 천재 도 아닌 자신이 이렇듯 마구잡이로 덤벼서 해결할 문제가 아니었 다. 그는 손을 내린 채 그간 읽었던 무협소설에서 나온 모든 내용을 되짚어 보기 시작했다. 최근 나오는 소설은 그냥 영약 한 번 먹고 몇 십 갑자의 내공을 갖고 무적이 되거나 무공초식 하나로 천하제일이 되곤 하지만 과 거 그가 읽었던 소설 중 몇몇은 달랐다. 주인공이 무학의 새로운 이론을 창출하거나 특별한 깨달음을 얻는 경우가 있었던 것이다. 선주혁은 거기에 집중했다. 비록 직접 무공을 배워보니 소설 속의 내용은 대개 헛소리에 불 과했지만 몇몇은 그럴 듯해 보이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발전이 필요했고 무학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은 낮았기 때 문이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 바로 이런 것이라 생각했다. 우연이라도 반드시 북두폭렬장을 발전시킬 방법을 찾고야 말겠 다며 다짐하고, 또 다짐하는 그였다. 선주혁은 손을 들어 화무난천장을 서서히 전개하기 시작했다. 무협소설에서 흔히 나오는 말을 시험해보기로 한 것이다. 어지 간한 무협에서 볼 수 있는 말이 바로 형식에 구애를 받으면 안 된 다는 내용이다. 즉 초식에 얽매여서는 고수가 될 수 없다는 뜻인데, 이는 초식 의 완벽한 이해를 전제로 한다. 그 경지를 엿보고자 하는 것이 선주혁의 목표였다. 오랜 세월을 거쳐 다듬고 보완되어진 초식이다. 완벽한 이해란 평생을 가도 불가능할지 모른다. 그래도 선주혁은 시도해야 했다. 소매치기 시절부터 하나의 기술을 익히고자 미친 듯 달려드는 것은 익숙했던 일. 수련에 수련을 거듭하다보면 언젠가는 완벽하게 되리라. 그리고 초식에 구애받지 않는 경지에 오른다면, 충분히 북두폭 렬장과 배합해 새로운 무공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선주혁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아니 믿어야만 했다. 그가 지금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기에. 결코 멈춰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기에. 선주혁의 손에서 초식이 한없이 느리게 펼쳐졌다. 한 초식, 한 초식, 계속해서 반복되는 화무난천장이었다. <3> “뭐, 뭐야, 이거?” 방립 아래로 검은 수염을 드러낸 노인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놀란 어투로 말했다. 그는 의복을 갈아입고 얼굴을 가린 편복마왕 남백연이었다. 그 는 절대로 흑색이 아닌 옷을 입고 싶지 않다고 했다. 하지만 은설연의 매서운 눈초리를 감당할 수는 없었다. 편복마 왕과 천산노조가 곤륜이마 중 하나인 옥용검마와 동행중이라는 것 이 널리 알려진 만큼 무조건 얼굴을 가리고 복장을 바꿔야 한다는 게 그녀의 주장이었다. “이거 칼 좀 쓴다는 놈들이 죄 남창으로 몰려온 거야?” 남백연은 남창의 거리를 가득 메운 인파를 보며 말했다. 행인의 절반가량은 무림인들로 보였던 것이다. “자네 사제 때문인 듯싶군.” 흰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 천산노조 서동주가 방립 아래로 멋 진 턱 선을 드러낸 청년을 향해 말했다. “사제가 아니라 묵연수투 때문일 겁니다.” 나직하지만 그 안에 담겨진 분노가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묵연수투로 인해 생사의 고비를 그 얼마나 겪었던가? 거기에 파문과 공적으로의 지목까지 얽혀있으니 남지학의 심정 이 좋을 리 없었다. “흥! 분수를 모르는 것들이……, 감히!” 남백연이 입매를 일그러뜨렸다. 그는 당장이라도 지나가는 무림인들 몇을 쥐어 팰 기세였다. 그런 남백연을 보던 은설연이 남지학에게 말했다. “일단은 숙소를 정한 후 정보를 수집하는 게 좋을 것이오.” 남지학은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이라도 남창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지고픈 마음이었다. 하지 만 그런다고 사제를 찾을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렇게 쉽게 찾을 수 있다면 무림맹에서 사제를 내버려두지 않았을 테니. 은설연이 남창에서 무림맹과의 사단을 일으켰다는 것은 이곳에 서도 인원을 동원할 수 있다는 말. 결국 사파연합의 힘을 빌리는 것이 사제를 더 빨리 찾는데 유리 하다는 결론이었다. 남지학의 동의를 얻은 은설연은 발걸음을 옮기려했다. 무림인이 이렇게 남창으로 몰려든 만큼 숙소를 정하기도 쉬운 일이 아닐 터. 그녀는 조금이라도 더 서두르고자 하는 것이다. “주제를 모르는 놈들만 온 것은 아니군.” 은설연의 발길을 잡는 서동주의 한마디였다. 그녀는 살짝 고개를 들어 서동주가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바라 보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수많은 행인들 중 그녀의 시선을 잡아끄는 자는 딱히 보이지 않 았다. “누굴 말씀하시는 거예요?” 천산노조는 좀처럼 남을 인정하는 성격이 아니다. 그에게는 그 럴만한 자격이 있었다. 현재 백사회를 이끄는 천사지황 은적비에 게 불과 반초 차이를 패한 경험이 있을 뿐, 단 한 번도 패배를 해 본적이 없다는 절대의 고수가 바로 서동주였기 때문이다. 한데 그런 서동주의 입에서 묵연수투를 노릴 자격이 된다는 소 리가 나왔으니 필히 범상치 않는 내력을 지닌 자이리라. 아니, 저 렇듯 인상까지 찌푸리며 그의 출현을 달가워하지 않을 정도라면 아주 특별한 인물임에 분명했다. “불을 숭배하는 사이비 종교의 놈들 중 가장 지랄 맞은 놈이 지.” 서동주의 말을 들은 은설연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호기심에 가득한 눈이었다. 서동주가 말하는 사이비 종교란 다름 아닌 마교를 뜻함이다. 성 화(聖火)를 숭배하는 마교였기 때문이다. 지금에 와서는 종교적 색 채가 옅어지고 무림의 한 세력으로 여겨지지만 그 시작은 분명 종 교였으며, 지금도 독실한 신도들을 거느리며 스스로를 일월신교 (日月新敎)라 칭하는 그들이었다. “누굴 말하는지 모르겠어요.” 아무리 훑어봐도 딱히 눈에 띄는 자를 찾지 못한 은설연이 고개 를 저었다. 그 때 남지학이 턱으로 한 방향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저쪽의 노인을 말하는 것 같군요.” 은설연은 다시 시선을 돌렸다. 빠른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들 틈에서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는 잿빛 머리의 노인이 보였다. 노인답지 않는 당당한 체구를 지니긴 했지만 서동주가 인상을 찌푸릴 만큼의 풍모는 보이지 않았다. 적 어도 마교의 고수라면 숨이 막힐 정도의 마기를 은연중에 흘려낼 것이고 자신 정도라면 그런 기운을 느끼고도 남음이 있었다. 하지만 노인에서는 마기는커녕 무공을 익힌 흔적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남 소협이 아직 서 할아버지를 파악하지 못한 걸까? 저런 평범 한 노인을 보고 인상을 찌푸릴 서 할아버지가 아니거늘…….’ 은설연은 체구만 큰 노인을 가리키는 남지학을 보며 생각했다. 그 때 마치 은설연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마냥 남지학이 자신이 큰 체구의 노인을 지목한 이유를 설명했다. “마교에는 지독한 마기(魔氣)마저도 가릴 수 있는 절대고수들이 있다고 들었소.” 은설연은 그제야 자신이 간과한 사실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썰미가 좋군.” 남백연이 남지학을 향해 한마디를 던지고 곧 신음하듯 중얼거렸 다. “설마하니 이런 곳에 종극(鍾極), 저 늙은이가 나타날 줄이야.” 남백연의 말을 들은 은설연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것은 서동주가 말하는 자가 누구임을 알아챘던 남지학 역시 마찬가지였다. 염마(炎魔) 종극. 높고도 높은 그의 명성을 강호인 중 모르는 자가 없을 것이다. 마교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하나였으므로. 그만큼 유명한 염마였지만 실제로 그의 얼굴을 아는 자는 많지 않았다. 대개의 경우 그의 얼굴을 본 이후에는 더 이상 숨을 쉴 수 없었기 때문이다. 흔히 마교에서 손꼽히는 고수 아홉을 일컬어 강호인들은 구대마 존(九大魔尊)이라 한다. 오직 마교의 교주에게만 고개를 숙인다는 그들. 구대마존은 강호에서 절대강자(絶對强者)의 다른 표현으로 여겨 질 정도였으니 그들의 무서움은 더 이상의 부연이 필요 없었다. 그 구대마존 중 하나가 이곳 남창에 모습을 나타냈다. 은설연과 남지학이 놀라는 것도, 서동주가 인상을 찌푸리는 것 도 당연한 일이었다. 염마의 출현이 의미하는 바는 매우 컸다. 구대마존 정도나 되는 인물이 이유 없이 떠도는 경우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무림맹의 표물이 탈취되고 사해표국의 식솔이 몰살당하다시피 한 상태. 구대마존 중 일인의 출현은 자칫 무림맹의 의심을 살 수 도 있었다. 염마라면 단독으로라도 그런 엄청난 짓을 하고도 남음 이 있었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마 종극이 남창에 출현했다는 것은 마교에 서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뜻이었다. 다름 아닌 이곳 남창에서 말이다. “선 공자가 마교와도 인연이 있었나요?” 은설연이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키며 질문을 던졌다. “내가 아는 한은 없소.” 남지학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대답을 본 은설연이 서동주에게 물었다. “그럼 염마도 묵연수투를 노리는 걸까요?” 질문의 대답은 서동주가 아닌 남백연에게서 나왔다. “염마가 그딴 수투 따위에 의지할 일이 있으리라 생각하는 게 냐?” 뭔가 심통인 난 것 같은 목소리. 아마도 구대마존의 출현에 긴 장하는 자신이 스스로 못마땅한 것이리라. “만약……. 저 늙은이마저도 자네 사제 때문에 이곳에 온 거라 면…….” 서동주가 평소와는 달리 말을 길게 늘였다. “곤륜이마는 이제 강호의 중심에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걸세.” 서동주의 말을 들은 남지학이 다시 고개를 돌려 염마를 보는 사 이 은설연이 서동주의 말을 받았다. “만약 마교의 교도 중 누군가가 선 소협의 능력을 알아차렸다면 염마가 이곳에 나타난 것도 설명이 될 거예요.” “흠……, 정말 어떤 녀석인지 궁금하군. 니가 그렇게 말을 할 정 도라니…….” 남백연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간 남지학과 동행하며 내심 깊이 감탄을 해왔다. 사파연합 내에도 소위 말하는 기재라는 녀석들은 차고도 넘쳤 다. 하지만 남지학은 가히 그중에서도 발군이랄 수 있었다. 모든 면에서 완벽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는 그였던 것이다. 구파일방 중 하나인 곤륜파의 출신이라는 게 마음에 걸릴 뿐, 은설연의 짝으로 맺어주고픈 생각이 절로 들게 하는 녀석이었다. 한데 은설연은 은연중에 백발귀마를 옥용검마 위에 두고 있었 다. 그렇다면 백발귀마라는 녀석은 눈앞의 옥용검마보다 더 대단 하다는 뜻이었다. 그런 은설연 때문에 남백연은 백발귀마라는 애송이가 더욱 궁금 했다. 대체 얼마나 대단하기에 좀처럼 남을 인정할 줄 모르는 그 녀가 저토록 입에 침을 튀겨대는 건지 알고 팠던 것이다. 만약 선주혁이 상대의 무공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능력이 있 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남백연 역시 침을 흘릴 것이 분명했다. 그 런 기재가 있다면 하나의 문파, 아니 세력이 무림을 장악하는 것 은 시간문제일 테니까. 하지만 남백연은 그와 같은 사실을 알지 못했다. 남지학이 은설연에게 사제의 능력을 감춰달라고 요청했기 때문 이다. 만약 그 요구를 관철하지 않는다면 당장이라도 사파연합을 떠날 남지학이었다. 그래서 은설연은 아직 사파연합의 누구에게도 선주혁의 무공 복제 능력을 언급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조만간 무림의 패권(覇權)은…….” 은설연은 확신에 찬 음성으로 말을 시작했다. “곤륜이마가 어디에 속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거예요.” “그 정도냐? 하면 저 성질 더러운 늙은이에게 뺏겨서는 안 돼 지. 어서 서두르자.” 남백연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갑작스레 서두르기 시작했다. 황급 히 발걸음을 재촉하는 그의 뒤쪽에서 남지학은 염마의 뒷모습을 쫓았다. ‘정말 사제를 찾아 이곳에 온 것이란 말인가?’ 마교에서까지 사제를 찾고 있다는 생각의 그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Chap. 11 소제목 미정 <1> 선우 아가씨가 약재를 구입하러 나가면 선주혁은 북두폭렬장의 수련에 박차를 가했다. 화무난천장을 깊이 있게 파고드는 만큼 북 두폭렬장 역시 좀 더 수련이 필요했다. 북두폭렬장은 최심장을 운용한 장법이어서 허공을 가격해도 폭 음이 발생한다. 해서 선주혁은 선우 아가씨가 외출할 때에 맞춰 북두폭렬장을 수련하는 것이다. ‘어쩌면 가능할지도…….’ 이곳에 온지 보름이 한참 넘은 지금. 선주혁은 경이적인 회복력으로 완치의 상태에 접어들어 가고 있 었다. 상태가 좋아질수록 그는 스스로도 놀라야만 했다. 충만감 때문이었다. 흡성대법의 특징 상 내공을 단전에 모으는 것이 아니라 전신에 흩어 놓는다. 해서 어지간한 내공만으로는 이렇듯 충만한 기운을 느낄 수 없었다. 한데 복면인들의 내력을 흡수한 지금에서는 마치 처음 곤륜산에 서 단전에 모이는 진기를 느끼듯 뿌듯한 충만감이 전신에서 느껴 지는 것이다. 그것은 색다른 감흥이었으며 보다 강해지고자 하는 선주혁의 열 망에 한줄기 빛이 되어 주었다. 화무난천장과 더불어 북두폭렬장을 보완하던 선주혁은 내력의 증가와 더불어 장을 내뻗는 횟수를 늘려보기로 했다. 애초 북두라 는 이름을 붙인 것도 한 번에 일곱 번의 장을 펼쳐내기 위했던 것. 고작 세 번에 불과한 지금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한 것이다. 부상에서 회복된 지 얼마 안 되는 시점이었으나 스스로도 깜짝 놀랄 만큼 불어난 내공의 힘을 믿어보기로 했다. “합!” 짧은 기합성과 함께 선주혁의 손이 빛살처럼 움직였다. 파아아앙. 번갈아 세 번의 장력이 터져나갔음에도 폭음은 한 번밖에 울리 지 않았다. 그간 가능했던 속도로 북두폭렬장을 전개했던 선주혁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전까지는 지금의 속도에도 팔에 무리가 오는 것을 느꼈었다. 한데 충만한 내력이 팔을 보호해주는 듯 지금은 아무런 무리가 없었던 것이다. 신이 난 그는 속도를 더 내보기로 했다. 파아아앙. 파아아앙. 몇 번에 걸쳐 시도를 해 보지만 기분처럼 쉽게 되지는 않았다. 그렇게 반 각 여에 걸쳐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선주혁. 이를 악물고 장력을 내치는 어느 한 순간. 파아아앙. 일 장을 쳐내는 시간에 네 번이나 손을 뻗어낼 수 있었다. “되, 되잖아?” 스스로도 놀라버린 선주혁. 그는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과거 남지학과 함께 무공을 수련 하던 그 때의 기분이 다시 살아났다. 한 초식을 배우고 한 단계를 넘어서면서 느꼈던 성취감. 그것이 자신을 기쁘게 한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는 중이었다. 그는 다시 한 번 북두폭렬장을 전개했다. 이번에도 네 번에 걸친 연환장은 성공이었다. 한 번 밟았던 길 이라 다시 가는 것이 어렵지 않았던 것이다. 팔에 통증도 없었다. “좋아! 이대로 일곱 번까지 가보는 거야!” 신이 난 선주혁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며 다시 장력을 펼치 기 시작했다. 방안은 선주혁의 장에서 비롯된 폭음으로 가득 차올랐다. <2> “그가 분명합니까?” “착각할 인물이 따로 있지 않소?” 질풍검룡 풍초양의 형형한 안광을 받아내며 반문을 던지는 초로 의 노인. 그는 풍초양, 혁련기 사형제와 함께 남창으로 파견된 무림맹의 외원주(外院主) 포일장(包日掌) 정택의(鄭澤義)였다. 무림맹의 대소 사(大小事)를 전담하는 그는 견문이 넓고 인맥이 두터웠다. 심지어 는 사마외도와도 호형호제(呼兄呼弟)를 한다고까지 소문이 날정도. 풍초양이 다시 한 번 확인을 한 것은 정택의가 못 미더워서가 아니라 그만큼 믿기 힘든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한데도 정택의 는 곧바로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냈다. 이는 맹주의 대제자인 풍초양과 그의 관계가 편치 않다는 것을 짐작케 하는 단면이었다. “호오. 천마맹의 염마 나리께서도 이곳 남창에 볼 일이 있으시 다니…….” 얼큰한 주향을 입에서 풀풀 날리며 혁련기가 과장되게 연신 감 탄을 거듭했다. “가급적 그와의 충돌을 피하도록 합시다. 가뜩이나 사파연합과 껄끄러운 만큼 저들까지 개입시킬 필요는 없을 테니까요.” “일단 감시를 해야 하지 않겠소이까? 천마맹의 사악한 마두가 거리를 횡행하는 것을 보고서 외면해서야 무림맹의 체면이 서질 않을 텐데…….” 정택의는 풍초양의 말에 본격적으로 반박을 하고 나섰다. 최근 맹 내에서는 서문도옥을 중심으로 한 강경파가 주류를 이루는 상 태. 풍초양이 딱히 온건파를 대변한다고 할 수는 없었으나 마교의 인물을 보고 움츠려드는 것이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지금 이 시점에서 한 바탕 전쟁이라도 하고픈 생각이십니까?” 풍초양은 정택의가 이렇게 반발하고 나설 줄은 몰랐던 듯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명색이 정도문파를 대표하는 무림맹이 상대가 거마라고 해서 꼬리를 만 강아지 꼴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말씀드리는 거외다.” 정택의가 정색을 하고 나서자 풍초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 다. “그렇게 정의감에 불타고 계신다면 당장 염마를 찾아가시는 것 은 어떠시오?” 정택의를 향해 차갑게 내뱉는 풍초양의 말을 들은 혁련기가 고 개를 흔들었다. 그 모습은 마치 대사형은 저래서 안 돼, 라고 말하 는 것만 같았다. 한편 정택의는 순간적으로 소태를 씹은 표정이 되었다. 혈마를 대적하고 한다면 현재 남창에 파견되어 있는 무림맹의 추적대 전원을 이끌고 가야한다. 아니 그런다고 해도 혈마를 잡을 가능성은 전무하다고 볼 수 있었다. 혈마가 도주하고자 마음을 먹는다면 절대 잡을 수 없기 때문이 다. 막대한 피해만을 입은 채 망연자실 혈마의 뒷모습만을 바라보 게 될 게 뻔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실컷 큰소리를 치고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안 그래도…… 적풍조(赤風組)가 도착하면 혈마를 상대할 생각 이었소.” “적풍조? 적풍조도 남창으로 오는 겁니까?” 놀란 표정을 지으며 재빨리 묻는 것은 혁련기였다. 시큰둥한 표정으로 일관하던 혁련기가 이처럼 호들갑을 떠는 데 는 이유가 있었다. 무림맹이란 원래 흑도와 마도에 대항하기 위해 구파일방이 힘을 모은 단체다. 천하의 안정을 위해서는 힘을 합쳐야 한다는 취지였 다. 초기의 무림맹은 허울뿐인 구파일방의 집합체였다. 맹주는 임기 를 두어 각파의 수장이 돌아가면서 맡았으며, 무림에 특별한 사건 이 발생하지 않는 한 무림맹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것은 거의 없었 다. 그런 무림맹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역사는 삼백 년 정도 에 불과했다. 삼백 년 전의 무림은 가히 암흑의 시대였다. 단 한 명. 그 한 명의 절대고수가 전 무림을 적으로 돌렸다. 무공을 익힌 자. 죽어라! 전 무림을 공포로 몰고 간 절대고수가 강호를 향해 내뱉은 말이 었다. 그리고 그 고수는 자신의 말을 철저히 지켰다. 수많은 무림인들은 제대로 저항조차 해보지 못한 채 그의 손에 죽어가야 했다. 내로라하는 고수들조차 그의 십초를 받아내지 못했다. 더욱 무서운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무공이 고절해진다는 점이었다. 처음에는 백여 초를 겨루던 고수들과의 싸움을 겪고 나 면, 비슷한 수준의 다른 고수는 채 오십 초를 넘기지 못했다. 피에 굶주린 악마와도 같은 그. 강호인들은 그를 수라마제라 칭했다. 수라마제 사마횡천의 광기(狂氣)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자신 이 속해있던 암천종마저 피로 물들인 그였기에 흑백의 구분은 필 요 없었다. 정의수호를 외치는 백도의 수많은 고수들이 그의 손에 죽어갔 고,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흑도의 거마들 역시 그의 손을 벗어나 지 못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단일 세력으로 무림 최강이라 꼽히는 마교마 저도 수라마제의 앞에서는 숨을 죽여야만 했다. 구파일방의 피해는 특히 막심했다. 그저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흑도와는 달리 정의수호를 위해 웅크리고 외면할 수만은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당시 현천자라는 절대고수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무림에서 구파일방이라는 이름은 사라졌을 지도 모를 정도였다. 경천동지(驚天動地)의 일전을 벌이던 현천자와 사마횡천이 동시 에 사라지고 난 후 구파일방은 우선적으로 무림맹을 재정비했다. 수라마제의 등장 초기에 구파일방이 단합된 힘을 구가할 수 있 었으면 상황이 그토록 악화될 리 없다는 것을 모두가 인정한 것이 다. 무림맹이라는 이름하에 모이긴 했어도 저마다 자파의 이익만 을 추구한 결과였다. 구파일방의 수장들은 무림맹의 체질부터 개선하기로 했다. 맹주 를 구파일방이 아닌 외부에서 선출하는 것이 그 첫째였다. 구파일 방 중 어느 한 곳에도 편중되지 않는 공평무사함을 추구하기 위함 이었다. 두 번째는 맹주의 권한 강화였다. 정도 무림에 위기사항이 닥쳤 을 경우 구파일방의 전폭적인 지지기반을 확립한 것이다. 구파일 방의 장문인들이 위기사항을 인정한 경우 무림맹주는 각 파에서 고수를 소집할 수 있는 동원권을 갖게 된다. 환란이 지난 후 자파 의 세력 약화를 염려한 구파일방이 몸을 사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 함이었다. 이와 같은 조치 이후에도 무림맹은 여전히 강력한 권한을 행사 하지 못했다. 맹 자체가 가지는 힘의 근간이 구파일방에 있었고 맹의 유지에 필요한 재원 역시 구파일방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 다. 그렇게 명맥만을 유지해오던 무림맹이 본격적인 힘을 갖게 된 것은 당금 맹주인 한조백의 대(代)에 이르러서였다. 한조백은 불과 불혹(不惑)의 나이에 무림맹주의 위에 오른 후 혁신적인 맹의 개혁안을 수립, 이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흑도를 상대함에 있어 구파일방에 의지함이 없이 자력으로 정의 수호에 나선 것이다. 그와 같은 시도의 중심에 바로 적풍조가 있었다. 젊은 시절의 한조백은 무림맹의 입지를 가장 빨리 굳히는 방법 으로 적풍조의 결성을 택했다. 불혹의 나이에 정도를 대표하는 고수로 손꼽히던 한조백. 그는 자신이 만든 적풍조의 조원들에게 직접 무공을 전수하기 시작했 다. 허울뿐인 무림맹을 실질적인 정도의 구심점이 되도록 하기 위한 투자이자 장기적인 안목을 바탕으로 한 안배였다. 한조백의 진전을 이어받은 적풍조의 기재들의 무공은 일취월장 했으며 십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들은 누구도 무시할 수 없 는 무력을 소유하게 되었다. 이후 적풍조의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되었다. 그들이 맡은 임무는 흑도 고수의 척살. 고도로 훈련된 적풍조는 이름만 들어도 산천초목이 떤다는 흑도 의 거마들을 하나씩 처치하기 시작했다. 그 숫자는 점차로 늘어 어느 시점에서는 구파일방의 영웅들보다 많아졌다. 그와 같은 업적은 무림맹의 성장을 가속화시켰다. 구파일방에 속하지 않았던 고수들이 정의의 기치 아래 무림맹으로 속속들이 몰려들었다. 적풍조의 활약을 기반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무림맹은 곧 한조백의 염원대로 정도 무림의 구심점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이와 같은 적풍조의 활약은 오늘 날 사파연합의 결성에도 큰 영 향을 끼쳤다. 모래알처럼 흩어져 뭉치지 않는 게 사파 고수들의 특징. 백사회가 압도적인 무위로 그들을 규합한다 해도 한계가 있 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적풍조가 노리는 대상은 거대세력과의 마찰을 피하는 쪽 위주였다. 자칫 정사 간의 큰 분란을 초래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 다. 결국 사파의 고수들은 적풍조의 위협에 노출되지 않기 위해 사 파연합의 그늘로 숨어들었고, 이는 사파연합의 결성에 지대한 영 향을 끼쳤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사파의 고수들이 규합하는 계기가 되어 주었음에도 무림맹의 업 적은 폄하되지 않았다. 사파의 고수들이 특정 세력의 통제 하에 들어가면서 무림의 잦은 분란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상호 팽팽한 균형 속에서 바야흐로 무림의 평화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그때로부터 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적풍조의 명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그 명성은 더욱 커졌다. 당시의 수 많은 고수들을 척살했던 그들이 세월이 흐른 지금에 있어서 얼마 나 거대한 힘을 가졌을 지에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혹자는 덩치만 큰 무림맹이 정도의 힘을 대변할 수 있 는 것은 적풍조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한데 그와 같은 적풍조가 남창으로 향하고 있다고 하니 혁련기 로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풍초양은 혁련기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정택의의 눈만을 직시 한 채 냉랭하게 말했다. “이제는 외원주께서 적풍조의 지휘권마저 갖게 되신 것입니까?” “그, 그게…….” 정택의는 다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적풍조는 맹주의 직할 조직으로 맹 내에서 오직 한 사람만이 명 령을 내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무림맹주 한조백이었다. “만약…… 적풍조의 협조를 구할 수 없다면 남창으로 오고 계신 구파일방의 명숙과 함께 염마를 처단하면 될 일이 아니오!” 적풍조의 동원에 대해 풍초양이 따지고 들자 정택의는 궁여지책 으로 구파일방의 고수들을 거론했다. 구파일방의 고수들은 마교라면 치를 떨기에 혈마를 제거하겠다 고 나서면 충분히 도울 것이기에. 말을 해 놓고 보니 충분한 답변 이 되는 지라 정택의는 재빨리 표정을 수습해 당당함을 되찾았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풍초양의 냉랭한 안광뿐이었다. “무림맹이 이곳에 온 본연의 임무를 수행치 못하게 되는 책임은 외원주께서 전부 지실 것입니까?” “……!” “소생과 사제는 금번 일을 최대한 빨리 처리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외원주의 적극적인 협조를 기대하고 있고 요.” 풍초양으로서는 최대한 정택의의 체면을 배려한 발언이었다. 평소 풍초양의 성품을 잘 아는 정택의였기에 그 배려를 받아들 일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체면을 세워줄 때 멈추는 것이 나았던 것이다. ‘그나저나 언제부터 이 두 녀석이 뜻을 같이한 거야? 소 닭보듯 할 때는 언제고…….’ 정택의는 사형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혁련기를 보며 괜스레 심통어린 생각으로 수치심을 만회하려 했다. 잠시 후 정택의는 그간의 정보를 정리하고 구파일방의 인사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겠다며 방을 나섰다. 그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쯤에서야 혁련기가 낮은 목 소리로 풍초양에게 말했다. “적풍조 중 얼마나 이곳으로 향한 겁니까?” “그것까지는 나도 모르겠다.” “도옥 사제가 적풍조를 움직일 정도라는 말입니까?” “그럴 리는 없다! 적풍조는 철저히 사부님의 명만을 쫓으니 …….” 풍초양이 상상만으로도 불쾌하다는 식으로 혁련기의 질문을 부 정했다. “정말 만에 하나라도 도옥이 녀석이 적풍조를 움직인 거라면, 그리고 적풍조의 대다수가 이곳으로 향하고 있다면……. 무림맹은 그야말로 무주공산(無主空山)이군요.” “사부님이 계시지 않느냐?” 풍초양이 혁련기의 추측을 단호히 일축했다. 혁련기는 씁쓸한 미소만을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가정에 가정 을 거듭해 최악의 상황을 도출할 필요는 없었다. 또한 설령 사제 인 서문도옥이 주인 없는 무림맹을 접수한다 해도 상관은 없었다. 가정에 불과했다지만 그럴 수 있다는 것은 적풍조의 대다수가 무림맹에 없다는 뜻이고, 그런 무림맹은 접수해봐야 껍데기일 뿐 이기 때문이다. ‘대체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는 거냐, 도옥아…….’ 혁련기는 창밖을 향해 그렇게 묻고 있었다. <3> “젠장……!” 선주혁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가득한 실망과 지독한 통증에서 비롯된 욕설이었다. 그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을 바라봐야 했다. 갈가리 찢어져 원래의 형체를 찾아볼 수 없는 소매 사이로 드러난 두 손. 금강불괴에 버금가는 그의 손은 형편없이 망가져 있었다. 피부는 너덜너덜해지고 벗겨진 피부 아래서 핏물이 배어나왔다. 시뻘겋게 물든 팔은 푸줏간에 매달린 고깃덩이처럼 보였다. 정확히 말하면 팔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하박, 상박은 물론 어깨 어림까지 온통 허물이 벗겨져 붉게 물들어 있었다. 더 이상 팔을 움직인다는 것 자체가 무리인 상태. 북두폭렬장을 연속으로 다섯 번까지 뻗어낼 수 있게 되면서 나 타난 현상이었다. 그이 손과 팔이 가공할 속도에서 비롯된 공기의 저항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보검, 보도가 아니면 상처조차 낼 수 없던 신체라 미처 이런 현 상이 일어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었다. 생각지 못했던 벽에 부딪쳤기에 선주혁의 실망은 컸다. 애초부 터 한계를 가진 장법을 가지고 뭔가 대단한 것을 만들어냈다고 홀 로 좋아했다 생각하니 부끄럽기까지 했다. 온통 불에 덴 듯 화끈거리는 팔을 늘어뜨린 채 인상을 찌푸리는 선주혁. “손바닥만이라면 묵연수투를 끼면 그만인 것을…….” 다섯 번을 뻗어낼 때 이 정도라면 여섯, 일곱 번의 연환장을 펼 쳤을 때는 생각하기조차 싫었다. 어쩌면 팔이 녹아버릴 지도 모른 다는 상상까지 되는 것이다. “금강불괴에 버금가는…… 정도로는 안 된단 말인가?” 한숨과 섞어 나오는 탄식. 그의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비약적인 내력의 증진으로 내력의 전환에서 비롯된 충격을 감당할 수는 있었으나 피부와 근육에 이 르는 부분까지 보호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마도 진정한 금강불괴의 경지에 이르지 않고서는 북두폭렬장 의 완성은 꿈도 못 꿀 일일 터였다. 천상 불완전한 상태의 북두폭렬장과 화무난천장을 조합해야 하 는 상황. 그것은 선주혁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지난번처럼 격전 중에 치 명적 결함을 드러낼 경우 또다시 목숨을 부지하리라는 확신이 없 었던 것이다. 공 노인의 선주혁에게 죽음이라는 개념에 대해 지독할 정도의 현실감을 안겨줬다. 미리 철저한 준비를 하지 않고선 잘 먹고 잘 살자는 목표를 달성하기는커녕 누구의 손에 개 패듯 쥐어 터져 죽 을지 모를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포기할 수는 없지. 뭔가 방법이 있을 거야…… 분명히!’ 그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더 이상 안 되면 말지, 식의 사고는 용납할 수 없었다. 그렇게 안주해버리는 순간 자신의 저쪽 세상에서처럼 인생의 패배자가 될 것만 같았다. 천금을 가지고, 나름대로의 무공을 지녔다고 해도 말 이다. 좀 더 치열하게 인생을 꾸려가야 했다. 철저한 준비를 통해 스 스로를 가다듬어야만 했다.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이제는 너무나 큰 의미가 되어버린 지인(知人)들을 위해 서. <4>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자신의 몸을 혹사시키다니…….” 선주혁의 손과 팔에 세심하게 금창약(金瘡藥)을 바른 후 붕대를 감으며 선우 아가씨가 말했다. 가지런히 붕대를 감으며 말하는 선우 아가씨의 음성이 선주혁의 귀에는 그 어떤 노래보다 아름답고 감미로웠다. 누군가에게 이처 럼 따뜻한 관심과 우려를 받아본 경험이 적은 그였기에 감정은 극 적으로 치달았다. 그녀의 시선에 담긴 진심어린 우려가 그를 감동시키는 것이다. 저도 모르게 선우 아가씨를 향하고 있는 감정의 동요를 깨달은 그는 화들짝 놀라고야 말았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저 같은 놈에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조금은 퉁명스러운 어조. 이렇게 말하지 않고서는 감정을 추스르기 힘들 것 같았기 때문 이었다. “저 같은 놈이라뇨? 무림맹에 의해 공적으로 지목된 일을 말씀 하시는 건가요?” 선우 아가씨는 선주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한없이 편하기만 하던 그녀의 눈에 약간의 노기가 서린 듯해 선 주혁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는 나름대로 모질게 마음을 가다 듬고 대답했다. “그뿐이 아닙니다. 사실 저는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 살아갈 정 도로 대단한 놈이 아니란 뜻이죠.” 선주혁의 말이 계속될수록 선우 아가씨의 표정은 딱딱해져 갔 다. 그럴수록 선주혁의 목소리는 잦아들어가 말끝은 주의를 기울 이지 않으면 들리지 정도로 작았다. 선우 아가씨는 평소 볼 수 없는 단호한 목소리를 냈다. “삶에는 귀천(貴賤)이 없습니다. 그 가치는 측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요.” 선우 아가씨는 고조된 자신의 어조를 가라앉힌 후 곧 차분한 목 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선 공자께서는 홍등가의 여인들의 삶은 천하다 여기고 계십니 까?”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진심이었다. 저쪽 세상에서 소매치기로 연명하던 시절. 선주혁은 젊은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소위 말하는 사창가를 찾아갔던 적이 있었다. 붉은 색 조명에 가슴이 깊이 파이고, 흰 다리를 드러낸 복장으 로 호객행위를 하는 수많은 여자들을 보며 그는 흥분했다. 쇼 윈 도우 안의 그녀들은 움직이는 마네킹과도 같았다. 그는 골목을 이리저리 다니며 가장 마음에 드는 여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가 몇 번 찾았던 다른 사창가와는 달리 어둑한 조명의 방안에 는 텔레비전, 오디오, 소형 냉장고등이 갖춰져 있었다. 여자가 옷을 벗는 동안 침대에 앉아 방안을 구경하던 선주혁은 짧은 시간동안의 민망함을 이기지 못해 물었다. 이곳에서 생활을 하는 거냐고. 여자는 그렇다고 했다. 순간 선주혁은 생각했다. 여자가 사는 곳에 돈 몇 푼을 지불한 남자들이 들어와 잠자리를 같이한다는 것에 대해서. 어찌 생각해보면 꽤나 불쾌한 일이었지만 그보다는 여인의 매일 같이 그런 일을 반복해야하는 여인의 처지가 안타깝게 느껴졌다. 동정을 해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하나 옷을 벗고 뒷물을 하는 여자의 어깨가 가냘프게만 보였다. 여자는 선주혁에게도 옷을 벗으라고 했다. 일을 치르러 왔으면 서두를 것이지 지금 뭘 하는 거냐고. 선주혁은 물었다. 보통 손님을 받으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느냐 는 질문이었다. 여자는 그의 질문에 어이없다는 식의 웃음을 터뜨렸다. 선주혁은 얼굴을 붉히며 다시 질문했다. 하룻밤을 함께 하려면 얼마가 드느냐고. 여자의 대답을 들은 선주혁은 지갑을 열었다. 하룻밤을 함께 하는 대가를 지불한 것이다. 그리고 그가 말했다. 함께 이야기를 해 줄 수 있냐고. 여자는 잠시 선주혁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가끔 그와 같은 손님이 있었단다. 어설픈 설교 따위를 늘어놓을 양이면 그냥 돌아가라 했다. 돈은 필요 없다면서. 선주혁은 해명했다. 그런 게 아니라고. 그저 이야기를 들어줄 상대가 필요할 뿐이라며 침대에 누웠다. 여자는 별 희한한 사람을 다 보겠다고 투덜거리면서도 그의 품 안으로 파고들어와 누웠다. 알몸인 채로. 선주혁은 두서없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린 시절 겪었던 이야기부터 지금은 소매치기라는 이야기까지. 여자는 믿지 않는 눈치였다. 누가 자신이 소매치기라고 스스로 의 입으로 말하겠냐는 식이었다. 그는 개의치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후에 생각해보면 왜 그랬는지는 잘 몰랐다. 어쩌면 그녀나 자신이나 사회의 최하류에 속해있다는 동질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는 무엇인가에 홀린 사람처럼 많은 이야기를 했다. 처 음에는 어이없는 웃음만을 흘리며 듣던 여자는 점차 그의 말에 귀 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만약 이게 모두 ‘뻥’이라면 정말 사기꾼을 해도 될 거라 말하고는 크게 웃었다. 하지만 그녀는 매우 주의 깊게, 그리고 시종일관 관심을 갖고 선주혁의 이야기를 들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여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조금씩 하기 시작 했다. 꽤 많은 이야기를 들었지만 기억나는 것은 많지 않았다. 그렇게 하룻밤이 지나갔다. 여자는 선주혁에게 언제든 다시 오라고 했다. 돈을 받지 않고 한 번쯤은 서비스를 해 주겠노라고. 하지만 선주혁은 다시 그 여자를 찾아가지 않았다. 여자가 싫어서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녀를 찾아가고픈 마음이 굴뚝같았다. 어쩐지 그 녀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이해 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욱 그녀를 찾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를 사랑하게 될 지도 몰랐기에. 그녀가 사창가에 있기에 사랑함을 두려워한 것은 아니었다. 성매매(性賣買)나 매춘(賣春)의 도덕성 따위는 고려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다. 도둑질로 밥을 벌어먹고 사는 자신이 아니던가? 문제는 선주혁 자신에게 있었다. 스스로 누군가를 책임질 수 없 는 상황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듯 선주혁은 이곳 홍등가의 여인을 무시하거나 그녀들을 천 하다 생각하지 않았다. 이것이 자신 있게 선우 아가씨의 질문에 고개를 저을 수 있는 이유였다. “누구도…… 이곳의 여인들을 천시여길 수는 없을 겁니다.” 선주혁은 그렇게 부연을 했다. 강한 어조로. 선주혁의 그런 모습이 선우 아가씨는 약간은 의외인 듯 했다. 어쩌면 백발귀마라는 무림공적의 태도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일는 지도 몰랐다. 그녀는 이전에 비해 한결 부드러운 시선으로 선주혁 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요. 누구도 그럴 자격은 없어요. 그리고…… 선 공자도 마 찬가지에요. 타인을 천시여길 수 없는 것처럼 스스로가 스스로를 천시 여겨선 안 되는 거예요. 아니, 반드시 자신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 거죠.” 선우 아가씨는 마치 어린 아이를 타이르듯 말했다. 하지만 선주혁은 그것이 조금도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모정 (母情)과도 같은 따스함에 젖어들었다. “그러니 다시는! 이렇게 자신의 몸을 망가뜨리지 마세요. 선 공 자는 두 사람의 삶을 짊어졌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해요.” “……!” 선우 아가씨는 공 노인을 말하는 것이다. 미처 그것을 생각지 못했었다. 자신을 위해 목숨을 버린 공 노인. 그렇기에 공 노인의 남은 인생까지도 대신해야할 의무가 있다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선주혁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선우 아가씨를 바라봤다. 그녀는 선주혁을 향해 웃어줬다. 보고 있으면 절로 인상이 찌푸려질 정도의 추한 얼굴이었으나 이 순간만큼은 그 어떤 미녀보다 아름다워 보였다. Chap. 12 소제목 미정 <1> 채 이틀이 지나기도 전에 선주혁은 붕대를 풀었다. 과거 신투의 은신처에서 걸레처럼 찢어졌던 팔도 순식간에 회복이 되었던 것처 럼 이번에도 치유 속도는 기적처럼 빨랐다. 선주혁은 모두가 선우 아가씨의 금창약이 신묘한 덕이라고 말했 다. 팔을 움직일 수 없는 동안 그는 계속해서 고민했다. 강해질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북두폭렬장의 한계를 극복하는 해법에 대해……. 선우 아가씨에게서 공 노인의 인생까지 대신해야한다는 말을 듣 고 스스로 강해져야 할 이유가 보다 확고해졌기 때문이다. 완쾌된 이후 선주혁은 더 이상 무리한 연공은 하지 않았다. 부 상과 회복을 반복하다보면 혹시나 단련이 되어 좀 더 버틸 수 있 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역시 무리였다. 굳은살이 박이듯 피부가 좀 더 단단해진다고 버틸 수 있는 충격이 아니었던 것이다. ‘후……. 진짜 금강불괴처럼 팔이 단단해진다면 해볼 만한데 말 이야. 멍청하기 짝이 없는 내 머리로는 이게 한계라는 건가?’ 머리가 나쁘다는 결론을 내리자 문득 초식을 연습하다 넘어질 때 검인(劍刃: 검의 날)이 머리를 때렸던 기억이 났다. “쳇! 검에 맞아도 끄떡없는 석두(石頭)니 당연한 것일지도…….” 그러면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의 힘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 졌다. “검기(劍氣)나 검강(劍?)이라면 또 모를까……. 고작 공기의 마 찰을 이기지 못해…… 응?” 쉽사리 해법을 찾지 못해 투덜거리던 선주혁이 말을 멈췄다. 무엇이든 못 자르는 것이 없다는 검기나 도기(刀氣)였다. 한데 그런 도기도 못 잘라내는 것이 있다는 사실이 불현 듯 떠오른 것 이다. 자신이 복면인들과 겨룰 때, 주백광은 도기를 뽑아냈다. 그런데 도 복면인들은 맨손으로 주백광의 도기를 받아냈다. 그들의 손에서는 자색의 광채가 났었다. 자광수라는 수법이었다. 그리고 자광수를 떠올린 선주혁은 곧바 로 혈마자광기를 연상해냈다. 혈마의 성명절기였던 혈마자광기를 극성으로 익히면 그 무엇으 로도 자광수를 상하게 할 수 없다는 소설 속의 내용까지도. “그거야! 혈마자광기!” 선주혁의 손뼉이 마주쳐졌다. 입가에는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문득 떠오른 영감이 어쩌면 북두폭렬장을 완성시킬 수 있는 열 쇠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자광수는 엄청난 내력을 필요로 한다. 혈마자광기를 양손에 집 중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만약 보다 큰 내력으로 혈마자광기를 운용할 수만 있다면 양손 뿐 아니라 팔까지도 강해지지 않을까 하는 것이 선주혁의 가설이 었다. 생각이 거기에까지 미치자 그는 상의를 벗어젖혔다. 혈마자광기가 운용되는 상태를 살피기 위함이다. 이어서 그는 복면인들에게서 훔쳐 배운 혈마자광기를 운용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혈마자광기의 운용이 능숙해지자 그는 진기를 양손으로 집중했다. 복면인들의 손이 그러했듯 선주혁의 손에서도 자광이 번득이기 시작했다. ‘이거 꼭 꼭 네온사인 같은 걸?’ 손에서 빛이 난다는 것이 신기한 듯 손을 이리저리 뒤집어보던 선주혁은 공력을 더욱 끌어올렸다. 복면인들에게서 흡수한 내력이 축적되어 있던 만큼 진기는 막힘 없이 솟구쳐 올랐다. 양손의 자광이 더욱 짙은 색을 발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주위 를 밝힐 정도의 빛을 냈다. 그의 생각대로 간판에 달린 네온사인처럼 밝은 빛을 내는 것이 다. 더불어 두 눈에 은은한 자색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선주혁 이 혈마자광기를 운용하는 것이 복면인들의 우두머리에 못지않은 경지에 올랐다는 뜻이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선주혁의 내력에는 여유가 있었다. 선주혁은 내친김에 공력을 더 끌어올려 양쪽 팔로 보냈다. 주체 할 수 없는 충만감에 마치 팔이 팽창하는 듯 했다. 이어 선주혁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자광을 내는 부위가 손목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가능성이 있어!’ 그는 계속해서 내력을 양팔에 모았다. 이대로 자광을 내는 범위 가 넓어진다면 어깨까지 혈마자광기로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다. 자색을 머금은 기운은 하박부위를 지나 상박에 이르고 있었다. 대체 얼마만큼의 내공을 흡수한 건지는 몰라도 아직까지 진기의 부족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내공을 끌어올리는 속도에 박차를 가했다. 두 눈에서 어른거리던 자광의 색채가 짙어졌다. 더불어 어깨 어림에까지 이른 자색의 번짐. 신이 난 선주혁은 가진 바 내력을 있는 대로 끌어올렸다. 그러자 묘지 위를 떠도는 귀화(鬼火)처럼 빛을 내던 두 눈의 자 광이 오히려 침잠되더니 나중에는 빛을 갈무리하듯 동공에서만 자 색의 기운을 찾을 수 있었다. 누군가 그 모습을 봤다면 기이한 피부색을 가진 색목인(色目人) 이라 여겼을 것이다. “돼, 됐다! 해냈어!” 기쁨에 겨운 목소리. 결국 자광이 어깨에까지 이른 것을 확인한 선주혁의 환성이었 다. 그는 저자로 뛰어나가 미친 듯 소리를 지르고 싶은 욕구를 억지 로 눌렀다. 심장이 벌컥 거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의 흥분이 느껴졌다. 정말이지 기쁨에 겨운 눈물이라는 게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것은 아니었다. 혈마자광기가 과연 북두폭렬장의 속도를 버텨줄 것인지 확인하 는 과정이 남은 것이다. 그는 애써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조심스레 남은 진기를 운용해 북두폭렬장을 펼칠 준비를 했다. “차근차근 시험을 해 봐야지.” 선우 아가씨의 충고를 되새기며 선주혁은 우선 손과 팔이 속도 를 견뎌낼 수 있는지 시험해보기로 했다. 다섯 번의 장법을 펼칠 때의 속도를 유지하며 우선 일 장을 전개해보기로 한 것이다. 그의 눈에 갈무리된 자광이 반짝이는 순간. 퍼억. 둔탁한 음향과 방을 가린 천이 폭풍 속의 깃발처럼 흔들렸다. 벽공장력을 펼쳐낸 것은 아니었다. 선주혁의 일장에 담긴 위맹한 경력과 가공할 속도로 인해 주변의 기류가 요동을 쳤던 것이다. 한편 팔을 쭉 뻗은 채 석상처럼 굳어버린 선주혁. 자광을 머금은 팔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그가 의도한 대로 혈마자광기가 팔과 장을 보호해낸 것이다. 방금 전의 속도라면 능히 일순간 여섯 번, 어쩌면 일곱 번의 장 력을 쳐내는 것도 가능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일장을 전개한 후 그대로 굳어버린 선주혁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문제를 해결했다 싶은 순간 또 하나의 벽에 부딪치고 만 것이 다. 본래 북두폭렬장을 전개했을 때 들리는 소리는 압축된 공기가 일시에 확산되는 듯한 폭음이다. 한데 방금 전에 들렸던 소리는 베개를 친 것처럼 둔탁하기만 했 다. 이유는 간단했다. 장을 뻗어내는 최후의 순간에 최심장으로 전환이 불가능했던 것 이다. 경공술과 변검의 원리를 이용해 최소한의 진기로 극한에 가까운 속도를 내는 것이 북두폭렬장이다. 이어 진기를 변환해야 최심장 본연의 위력을 낼 수 있다. 한데 있는 대로 진기를 끌어올려 혈마자광기를 운용하고 있으니 최심장으로 전환할 여력이 없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최심장으로의 전환이 불가능해도 큰 문제는 아니었 다. 자광수의 위력이 최심장의 아래에 있다고 볼 수는 없었기 때 문이다. 복면인의 자광수와의 충돌로 인해 북두폭렬장을 제대로 전개하 지 못했던 경험이 이를 증명했다. 물론 상대방의 심맥에 타격을 주는 최심장의 살상력이 탐이 나 긴 했다. 하나 엄청난 내력이 집중된 자광수의 직접적인 파괴력도 강적을 상대하는 데 부족함이 없으리라는 것이 선주혁의 판단이었 다. 그럼에도 선주혁은 찌푸린 인상을 풀 수가 없었다. 혈마자광기로 팔 전체를 보호하며 펼치는 일 장이 너무나 힘에 겨웠던 것이다. 그렇게나 많은 내력을 흡수했음에도 자신이 원하는 장법을 펼치 기엔 부족하다는 뜻이었다. 지금의 수준에서는 잘해야 연이어 두 번의 장을 쳐내는 것이 고 작일 듯했다. 잠시 후 선주혁의 표정은 눈에 띄게 밝아졌다. 어차피 하나의 무공을 제대로 완성하는 것이 쉬울 리 없는 일이 었다. 지금처럼 하나하나 난관을 극복해가다보면 언젠가는 완성할 수 있으리라. 다시 생각해보면 실망하고만 있을 일도 아니었다. 비록 일곱 번 의 장을 내뻗을 수는 없지만, 한 순간에 일곱 번의 장력을 펼칠 정도의 속도를 달성한 게 아니던가! 비록 두 번에 불과한 연환장일 지라도 지금처럼 빠른 속도라면 아무리 고수라 해도 쉽사리 방어하지는 못하리라. 물론 화무난천 장의 변화가 가미되어야 하는 일이었지만. 그렇게 스스로를 격려했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으니 다음 단계를 위해 매진하면 될 일이 라고……. 긍정적으로 생각을 바꾸자 마음이 한 결 가벼워졌다. ‘그래! 잔 펀치 수십 대보다 크로스 카운터 한 방이 더 나을 수 도 있는 거잖아. 헛된 일곱 번보다 제대로 된 두 번이 낫다고 생 각하자고. 일단은 그렇게!’ 그는 다시 혈마자광기를 운용했다. 비록 두 번에 불과하지만 이 전에 비해 압도적으로 빨라진 북두폭렬장을 전개해 보려는 것이 다. 절반의 성공에 불과했지만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기뻐할 수 도 있는 일이었다. “타합!” 자신의 팔과 어깨가 자색 빛을 내는 것을 확인한 선주혁이 속도 가 배가된 북두폭렬장을 전개했다. 그야말로 회수와 전개가 동시에 이뤄지는 듯 했다. 퍼억. 한 번의 장을 뻗었을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둔탁한 음향. 너무나 빠른 장의 교차였기에 소리만을 듣고서는 몇 번을 전개 했는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비록 두 번에 불과했지만 확연히 증가된 속도였다. ‘오늘은 이 정도에서 만족을…… 응?’ 북두폭렬장의 보완에 이어 화무난천장을 보다 심도 있게 수련하 려던 선주혁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시선은 미친 듯 펄럭이는 천을 향해 있었다. 요동을 치는 기류의 움직임에 따라 아직까지도 물결을 만들어 내는 천. 그 천의 가운데 부분이 길게 찢겨 있었다. 언뜻 북두폭렬장에서 비롯된 풍압을 이기지 못해 펄럭이다 찢어 진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었으나 분명히 달랐다. 천은 마치 예리 한 검을 가져다 대고 그은 것처럼 매끄럽게 잘려 있었던 것이다. 선주혁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절반의 성공이라 생각했던 북두폭렬장의 보완이 의외의 성과를 만들어냈을 수도 있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천의 단면을 매만지다가 미친 사람처럼 밖으로 뛰어나갔다. 이어 야음(夜陰)을 가르는 비조(飛鳥)처럼 막다른 골목을 뛰어넘 은 그의 신형은 바람처럼 질주하기 시작했다. 선주혁이 멈춰 선 것은 야산의 끝자락에서였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선주혁은 다시금 호흡을 골라 진기를 끌어올렸다. 손과 팔에서부터 쏟아져 나오는 자광으로 인해 주위가 붉게 물 들었다. 그의 두 눈에서 자광이 번뜩임과 동시에 양손이 번개처럼 움직 였다. 퍼억. 둔탁한 음향의 끝을 쫓아 선주혁의 시선이 움직였다. 그가 바라보는 곳은 약 반 장 정도의 거리를 두고 서 있는 나무 였다. 힘깨나 쓰는 장정의 종아리 두께는 됨직한 나무는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다. 털썩. 한 번 균형을 잃자 맥없이 쓰러지는 나무. 그것을 본 선주혁의 입이 찢어질 듯 벌어졌다. 명유지력이나 백보신권 등을 이용해 딱히 벽공장력을 펼쳐낸 것 이 아니었다. 최대한의 속도로 북두폭렬장을 전개했을 뿐이다. 그런데 굵은 나무가 쓰러졌다. 정말이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예상외의 성과였다. 흥분을 간직한 채 선주혁은 나무의 단면을 살폈다. 마치 원래부 터 예리하게 잘려 있던 것처럼 단면은 매끄럽기만 했다. 선주혁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걸음을 옮겨 사람의 허리 높이는 됨직한 바위의 앞에 섰 다. 선주혁의 몸에서 자광이 번쩍이고 허공에서 둔탁한 음향이 울려 퍼졌다. 몇 번에 걸쳐 펼쳐낸 북두폭렬장이 무리가 되었는지 그의 안색 이 약간 창백해졌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은 그는 바위로 다가갔다. 그리고 위쪽을 슬쩍 미는 선주혁의 손. 놀랍게도 바위의 위와 아래가 분리되었다. 앞서와 마찬가지로 예리하게 잘린 단면을 드러낸 것이다. “푸하핫! 이거 답 나오는데?”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른 그는 제풀에 놀라 황급히 자신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는 재빨리 신형을 날려 선우 아가씨의 거처로 향했 다. 남창 전역에는 자신을 찾는 무림맹의 무사들이 즐비할 터. 한 없이 나돌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2> 처음 북두폭렬장의 연환 이 장을 성공한 이후 이틀이 지나는 동 안 선주혁은 연신 웃음을 참지 못했다. 예상치 못했던 북두폭렬장의 부수적인 성과가 가진 위력 때문이 었다. 힘이 달리면 조식을 취하고 다시 몇 번에 걸쳐 장력을 펼쳐내며 그는 기대 이상의 효과를 나타내는 현상에 대해 연구했다. 아직까지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지 까지는 알 수 없었다. 하 지만 이 효과를 늘이는 방법은 알아냈다. 양 장을 교차시킬 때 그 폭이 좁을수록 절삭력이 증가되었다. 거의 맞부딪치기 직전까지 근접해 쌍장을 교차시키니 쇠를 두부 자르듯 하는 것을 확인했다. 쇠가 잘릴 때 일체의 소음조차 발생 하지 않았다. 그것은 선주혁의 수법이 쇠를 수월히 자르고도 남을 절삭력을 가졌다는 뜻이었다. 그 후로 며칠이 지나는 동안 선주혁은 새로운 수법을 활용하기 위한 다음 단계를 연구했다. 이 수법이 유효한 거리를 늘리는 것에 대한 연구였다. 밤이면 밤마다 야산으로 달려가 쌍장을 교차하고, 지치면 앉아서 조식을 취하고, 다시 쌍장을 휘둘러댔다. 그러는 사이 새로운 수법의 유효거리는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처음에는 일 장(丈)도 안 되던 유효거리는 오 장, 육 장을 넘어 서 십 장여에 이르렀다. 장이 끝까지 뻗어졌을 때 집중되는 힘을 팔을 내뻗는 과정 쪽으 로 변화를 준 이후 거둔 성과였다. 그래서인지 장이 허공을 가격할 때의 둔탁한 음향이 사라졌다. 과정의 끝에서 내력이 폭출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지금과 같이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은 것은 처음 수법 을 발견(?)한 이후 칠 주야가 지난 후의 일이었다. 그 사이 선주혁은 제멋대로 이와 같은 현상을 양손이 교차할 때 빠른 속도로 인해 진공(眞空)이 생기고 그로 인해 목표를 자를 수 있는 거라 결론을 지었다. 과학적인 근거 따위에 대해서는 깊이 고민하지 않았다. 예전에 읽었던 소설인지 만화인지 모를 것에서 한 손을 휘두르면 진공이 생겨 원거리의 적을 살상한다는 것을 본 기억 때문에 내린 결론이 었으므로. 그렇게 결론을 내린 선주혁은 새로운 수법에도 이름을 붙였다. 북두진공참(北斗眞空斬). 선주혁이 지은 이름이었다. 앞서의 경험이 있던 탓인지, 아니면 어디선가 주워들었던 이름 이 기억이 나서인지는 몰라도 이전에 비해 훨씬 수월하기 지은 이 름이었다. “제법 그럴듯하군. 북두진공참이라……!” 스스로 지은 이름에 만족해 고개를 끄덕이는 선주혁. 그는 북두진공참으로 벤 아름드리 소나무를 뿌듯한 심정으로 일 견(一見)한 후 다시 선우 아가씨의 집으로 향했다. 암영풍의 눈부신 속도 덕에 반다경도 지나기 전에 선우 아가씨 의 거처 앞에 도착한 선주혁의 얼굴이 굳어졌다. 생과 사의 고비를 몇 번이나 넘나들며 예민해진 무인의 감각을 무엇인가가 자극했기 때문이다. 그는 주위를 살폈다. 혹여 무림맹의 무사들이 잠복해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서였다. 내공을 끌어올려 이목을 예민하게 했음에도 별다른 이상은 느껴지지 않았다. 너무 민감해져 있는 건가 싶어 실소를 터뜨린 그는 선우 아가씨 의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나서야 선주혁은 왜 자신이 골목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망설였는지에 대해 깨달았다. 곧이어……. “선우 아가씨!” 놀란 선주혁의 외침이 방안을 가득 채워 울렸다. 5권 "선 공자." 어둑한 방 안의 중심에 선우 아가씨였다. 선주혁이 놀라 소리를 지른 것은 그녀를 둘러싼 세 명의 사내 때문이었다. 어딘가 모를 위험한 분위기를 흘리는 세 명의 사내. 자신을 추적하는 무림맹의 무사들이 선우 아가씨를 위협하는 거라 짐작한 선우혁이었기에 그녀의 안전이 염려되었던 것이다. 다행히 선우 아가씨는 멀쩡해보이는 모습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쉼과 더불어 은연 중에 진기를 끌어올리는 순간. "아시는 분입니까?" 세 명의 남자 중 눈썹 끝에 검상인 듯한 흉터가 있는 남자가 물었다. 지극히 공손한 태도였다. 진기를 끌어 모으던 선주혁은 멈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네." 선우 아가씨의 대답. "저희 얼굴을 봐서는 곤란……" "저 분에게 해를 끼치면 전 돌아가지 않겠어요." 흉터 사내의 말은 선우 아가씨의 단호한 음성에 가로막혔다. "아가씨." 흉터 사내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두 번 말하지 않겠어요." 평소의 선우 아가씨와는 다른 모습에 놀라면서도 선주혁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이들은 원래부터 선우 아가씨와 잘 아는 사이인 듯싶었다. 또한 공손한 것으로 미루어 상전을 모시는 태도. 염려할 상황은 아니었던 것이다. 선우 아가씨는 한 걸음 나서 선주혁에게 다가섰다. "선 공자님, 저는 그만 이곳을 떠나야 한답니다. 그간…… 아니에요." 뭔가를 더 말하려던 선우 아가씨는 고개를 숙인 채 선주혁의 곁을 스쳐지나갔다. 선주혁은 고개를 돌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어딘지 모르게 서글퍼 보이는 선우 아가씨의 뒷모습. 선주혁은 가슴 속에서 뭔가가 울컥 치미는 것을 느꼈다. 억울한 것 같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했다. 아릿한 느낌으로 미루어 아픈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정체 모를 그 감정은 선주혁의 입술을 벌렸다. "선우 아가씨!" 선주혁의 부름에 잠시 멈칫한 선우 아가씨. 그녀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문 채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제야 선주혁은 날카로운 송곳이 심장을 찌르는 듯한 통증을 명확히 느꼈다. 원인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선우 아가씨와의 이별. 그것이 아픔이 되어 절실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떠난다는 말을 들었을 때만해도 이렇게까지 가슴이 저려올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이곳을 떠나야만 하는 것이 원치 않는 것이라면 돕겠다고 말할 때도 지금처럼 아플 것을 예상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렇게 예기치 못했던 감정의 동요였기에 선주혁은 당황했다. 선우 아가씨가 저렇게 가버리고 있는 것을 보며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닳고 닳은 인생이라 생각했건만 지금처럼 무력한 모습을 보일 줄은 정말 몰랐다. 선주혁이 다시금 선우 아가씨를 부르려 할 때였다. 그녀를 뒤쫓는 세 명의 사내 중 하나가 선주혁의 어깨를 짚었다. "잠자코 있는 게 좋아. 조금이라도 더 살고 싶으면 말이야." 앞서가는 선우 아가씨의 귀에는 들리지 않을 만큼 충분히 낮은 소리. 하지만 그 목소리에 담겨진 무게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만약 선주혁이 이쪽 세상에 와서 특별한 재능을 지니기 전이라면 절로 목을 움츠리고 간사한 웃음을 머금을 정도의 위협이었다. 하지만 저쪽 세상과는 전혀 다른 스스로가 아닌가? 선주혁의 눈썹이 씰룩였다. 선우 아가씨의 수하가 아니라면 벌써 손을 썼어도 썼을 상황이었다. "선우 아가씨!" 선주혁이 다시 그녀를 불렀다. 그의 어깨를 짚은 사내의 손아귀에 강한 힘이 들어갔다. 범인이라면 어깨가 으스러지는 통증이 느껴졌으리라. 하지만 선주혁은 일말의 통증도 느끼지 않고 당당히 어깨를 편 채 선우 아가씨의 모습을 확인했다. 사내의 눈에는 이채가 감돌고 선우 아가씨는 결국 제 자리에 멈춰섰다. 그녀의 반응 때문이었을까? 선주혁의 어깨를 조이던 사내가 재빨리 손을 내렸다. "지난번에 말씀드렸죠? 가고 싶지 않다면 가지 말라고. 제가 돕겠다고요." 선주혁의 목소리에 가득 담긴 진심. 선우 아가씨라고 선주혁의 그런 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 "선 공자님. 저를 곤란하게 만들지 마세요." 낮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사람은……!" 선주혁의 말은 선우 아가씨의 고조된 음성에 의해 가로막혔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도 해야만 할 때가 있답니다. 제게 있어서는 지금이 그 순간이고요. 만약 선 공자님이 방해를 한다면 저만 더 괴로워질 뿐이에요." "…………!" 그녀의 말을 납특할 수 없는 선주혁이었다. 가슴 속에서 뭔가가 치밀어 올라 혀를 움직이고 입술을 달싹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선주혁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자칫 그녀의 말대로 그녀를 괴롭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저도 모르게 주먹이 쥐어졌다. 예전에는 생각했다. 영화나 소설을 보면 떠나는 여주인공을 잡지 못하는 남주인공이 너무나 답답했다. 쫓아가 잡으면 될 일이 아닌가? 왜 멍청하게 보내놓고 나서 후회를 하는가, 하고 말이다. 그런 상황이 지금에서야 이해가 되었다. 지금 자신 역시 선우 아가씨를 잡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또 뵐 수 있게 되길……" 그다지 긍정적이랄 수 없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선우 아가씨는 걸음을 다시 옮기기 시작했다. 방금 전에 비해 그녀의 걸음걸이가 훨씬 빨라졌다. 선주혁은 고함이라도 쳐서 그녀에게 말하고 싶었다. 제발 떠나지 말라고. 무엇인지 모를 불길한 예감이 자꾸만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 지도 모른다는 예감이라기에는 너무나 어두웠다. 몸 속 한 구석에서 시작된 밀도 높은 검은 안개가 전신을 가득 채우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결국 선주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고개를 떨궜다. 날카로운 갈고리들이 심장을 파고들어 양쪽으로 잡아당기는 기분이었다. 시야는 무채색으로 변하고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과 그 무엇도 할 수 없다는 무리력함에서 갈등해야만 했다. 그러는 사이 선우 아가씨의 신형이 날아올랐다. 그녀는 무공을 익히고 있었던 것이다. 그다지 뛰어난 신법은 아니었지만 선우 아가씨의 신형이 앞으로 쭉쭉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아!" 안타까운 탄성이 절로 터져 나오는 순간, 선주혁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어스름한 공기의 장막을 은밀히 찢어발기며 밀려오는 암경. 음유하기 이를 데 없는 암경은 일체의 발출음이나 파공음조차 만들지 않고 선주혁을 향해 쇄도해 들어오는 것이다. 선주혁은 진기를 끌어 모아 밀려오는 암경을 마주했다. 퍽. 미약한 음향과 함께 암경이 흩어졌다. 선주혁의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선우 아가씨와 함께한 세 놈 중 하나가 장력을 발출한 것이리라. 아까의 대화로 미루어 자신들이 노출된 것을 꺼렸을 터. 선우 아가씨가 눈치 채지 못하게 음유한 암경을 발출해 자신을 죽이려 한 것이다. 범인이라면, 아니 어느 정도 무공을 익힌 자라면 암경이 밀려오는 것을 눈치채지도 못하고 전신의 경맥이 찢어져 죽었으리라. 밀려온 장력에 담긴 위력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기에. '어떻게 천사 같은 그녀의 수하가 이런 음흉한 수작을……!'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사실보다 선우 아가씨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수하의 행동에 기가 막혀하는 그 순간이었다. 불길하기 이를 데 없는 생각, 아니 기억이 선주혁의 머리를 강타했다. 그가 읽었던 소설에 등장했던 음유하기 이를데 없는 하나의 장법이 떠오른 것이다. 그 장법을 사용하는 무리에까지 기억이 닿았을 때, 선주혁은 신형을 비틀거릴 만큼의 충격을 받아야만 했다. '설마……?' 선주혁은 곧 고개를 흔들었다. 천하에 음유한 장법은 널리고 널렸다. 선우 아가씨와 함께 한 자가 음유한 장법을 한 번 날렸다고 해서 그녀를 그들과 묶어 생각하는 것은 억측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억지로 부정을 하려들면 들수록 자꾸만 사고가 한쪽 방향으로 몰렸다. 거대한 둑에 뚫린 구멍을 손으로 막는 것만 같았다. 엄청난 수압이 선주혁의 부정을 날려 버렸다. 봇물 터진 둑에서 밀려오는 사고의 흐름은 거침이 없었다. 선주혁이 읽었던 소설의 속. 사형 남지학과 염문을 뿌리는 수많은 여인이 등장한다. 여느 소설이 그렇듯 많은 여자 중에서도 중심이 되는 히로인이 있다. 마구 치닫는 선주혁의 사고는 그 중에서도 가장 메인이랄 수 있는 히로인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그녀는 절세의 미……' 소설 속 히로인은 보는 이의 숨이 막힐 정도의 미녀였다. 추물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선우 아가씨와는 전혀 연관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선주혁은 자신의 부정을 스스로에게조차 관철시킬 수 없었다. 선우 아가씨의 얼굴이 본모습이 아닐 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잊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용법을 썼거나 인피면구를 사용했을 거라 스스로 결론을 내리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용모만으로 선우 아가씨가 소설 속의 그녀가 아니라 부정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었다. 특히 그녀의 성이 문제였다. 소설 속 그녀의 이름은 선우유미. 선우 아가씨의 본명을 모르는 선주혁이었기에 정말로 선우 아가씨가 선우유미일 거라는 가정에 무게가 실리는 것이다. 소설 속에서의 그녀도 선량하고 현숙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었다. 표현력 부족한 작가가 진부하기 이를 데 없는 표현인 '진흙 속에 핀 연꽃과 같은 그녀'라고 말했던 선우유미가 아니던가! 선우유미는 부친의 죄를 자신이 감당하듯 괴로워했다. 부친의 손에 죽어간 자를 위해 가슴 아파하고 눈물을 흘리던 그녀였다. 선우유미의 그런 모습에 사형, 남지학이 그녀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녀로 인해 '그 일'을 겪게 된 것이고. 책을 읽으며 여자 때문에 멍청하기 이를 데 없는 선택을 한다며 얼마나 욕을 퍼 부었던가? 선주혁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리고는 신형을 날려 선우 아가씨의 뒤를 쫓았다. 확인을 해야만 했다. 만약 선우 아가씨가 정말 선우유미라면 그녀에게 기울었던 마음을 버려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멍청하기 이를 데 없는 선택을 하는 것은 사형이 아니라 자신이 될 수도 있었다. 최소한 그녀의 이름이라도 확인을 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린 그의 발걸음은 더없이 빨랐다. 봄날 피어올랐던 아지랑이가 사라지듯 선우 아가씨와 그녀의 수하들은 완벽하게 모습을 감췄다. 아마도 자신이 죽었을 거라 생각하고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해 서둘러 자리를 떠났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젠장!" 가슴을 무겁게 누르는 의문을 해소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절로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었다. "선 공자?" 누군가 자신의 성을 부르는 것을 듣고서야 선주혁은 깨달았다. 자신이 지금 무림맹의 추적을 받고 있는 중이며 이렇게 함부로 나다닐 때가 아니라는 것을…… 선우 아가씨에게 모든 신경을 집중하느라 자신의 처지를 잊고 말았다. 그러다 지금 누군가 자신을 알아보고 있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라버린 것이다. 재빨리 고개를 돌리는 선주혁. 그의 눈앞에는 가무잡잡한 피부에 요염한 자태를 뽐내는 한 여인이 서 있었다. "옥소선자?" "선 공자가 맞군요." 옥소선자 몽세화의 입매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사해표국 도 표주의 호위를 맡아주느라 복면인들과 겨루지 않았고, 선주혁 일행과 헤어지게 되었다. 도 표두가 어느 정도 회복되었을 때 몽세화는 들을 수 있었다. 사해표국에 혈겁이 닥쳤으며 도절 주백광과 자신까지 무림맹의 추격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여인의 몸으로 거침없이 세상을 살아온 그녀였지만 무림맹과 정면충돌을 할 만큼 무모하지는 않았다. 자신을 돌봐준 은혜를 갚겠다는 도 표두의 도움으로 그간 은신해 있다가 남창으로 무림인들이 몰려든다는 소문에 도주를 결심했다. 야음을 틈타 남창을 벗어나는 중 우연치 않게 선주혁을 만난 것이다. "큰 부상을 입었다고 들었는데 괜찮은 거예요?" 몽세화가 사람의 기분을 묘하게 자극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진지한 염려가 담긴 표정으로 보아 일부러 이런 목소리를 내는 것 같지는 않았다. "네, 전 이게 괜찮습니다. 몽 여협께서는 무고하신지요?" 선주혁은 자신으로 인해 몽세화가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흐응…… 한 순간에 정도 무림의 공적이 되어버렸지 뭐예요." 몽세화는 어딘가 처량해 보이는, 남자라면 누구나 끌어안아 위로해 주고픈 표정을 지으며 몸을 살짝 비틀었다. 실로 말 한마디, 동작 하나에 섹시함이 절절이 묻어나는 그녀였다. "죄송합니다. 괜히 저 때문에……" "호호호. 선 공자는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몽세화는 선주혁에게 바짝 다가붙으며 말했다. "그리고 몽 여협이 뭐에요? 우리 사이에……" 선주혁의 어깨에 살짝 자신의 흰 손을 얹으며 귓속말을 하듯 소곤거리는 몽세화. 선주혁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귀에서 그녀의 숨결이 느껴지자 간지럽기도 하고 묘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방금 전까지 안타까운 심정으로 선우 아가씨를 찾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평정심을 회복한 그가 물었다. "그럼 제가 어떻게 호칭을 해야 하는건지……?" "그냥 누나라고 부르면 어때요?" 몽세화가 얼굴을 붉힌 선주혁이 귀엽다는 듯 코를 살짝 찡긋거리며 제안했다. "그럼 몽 누님이라 부르겠습니다." 선주혁은 의식적으로 예의를 갖춰 말했다. 방금 전까지 선우 아가씨를 찾다가 몽세화를 보고서 바로 헤벌레 하는 모습을 스스로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흐음……" 선주혁이 의도적으로 거리감을 준다는 사실을 느낀 몽세화는 만족스럽지 않은 표정으로 콧소리를 냈다. 하지만 몽세화는 더 이상 채근하지 않았다. 남녀간의 관계는 서두르는 것이 되려 독이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이렇게 서 있어서는 곤란할 것 같습니다." "아! 그렇군요. 선 공자나 저나 그럴만한 입장은 아니죠." 몽세화는 의도적으로 선주혁과 자신을 묶어서 말했다. 지금의 상황은 고의가 아니었어도 선주혁으로 인한 것이었고, 이렇게 한데 묶어 이야기하는 것이 여러모로 그와 가까워지는 데에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그럼……" 선주혁인 먼저 움직였다. 몽세화는 선주혁의 뒷모습을 잠깐 바라보다 곧 그의 뒤를 쫓았다. 일체의 광택조차 찾을 수 없는 소재의 욕의를 입은 세 명의 사내가 남창의 초입에 서 있었다. 차가운 바람을 견디기에는 얇아보이는 흑의였건만 세 사내는 조금의 한기도 느끼지 않는 듯 했다. "남창을 벗어났을 가능성은?" 세 명중 중심에 서 있는 자가 무겁게 물었다. "없어 보입니다. 사망 직전에 이른 중상이었습니다. 장거리의 이동은 불가능할 뿐더러 그런 자를 데리고 남창을 벗어나려 들었다면 맹의 눈을 벗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측의 사내가 빠르게 보고했다. 특징적으로 높낮이가 없는 어조로 말하는 기계적인 보고였다. 중앙의 사내가 눈살을 찌푸렸다. "남창에 있는 자를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했다는 건가?" "흑도의 패거리와 말썽을 일으킨 다음부터 대대적인 수색을 자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들에게 명분을 주지 않겠다는 것 같습니다." "흥!" 중앙의 사내는 코웃음을 쳤다. 가당치 않다는 표정이었다. 무능한 자는 핑계가 많다. 그것이 적풍칠조의 조장 필용경의 생각이었다. 대부분의 적풍조원들은 적풍조로 키워진다. 즉, 어릴 때부터 모진 훈련을 받으며 적풍조원으로 자라는 것이다. 치가 떨릴 정도의 고련을 마친 후 당당한 적풍조원이 된 이후에는 실패는 용납되지 않는다. 임무에는 변수가 존재한다. 세상에 다시 없을 완벽한 계획이라 할지라도 예기치 못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었다. 그런 변수로 인해 실패한다는 것은 적풍조원에게 용납되지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 두 번의 기회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임무를 완수하던가 아니면 죽던가. 그것이 적풍조원에게 허용되는 유일한 선택이었다. "칠조 전원에게 전한다. 삼 일! 삼일내로 그를 찾아라." 수많은 무림맹의 무사들이 동원되어서도 찾지 못했던 백발귀마였다. 한데 필용경은 그를 삼 일 내로 찾으라고 한다. 필경 우리일 것이다. 하지만 그의 우측에 서 있는 사내는 조금도 지체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복명!" 고개를 짧게 숙이며 단호한 대답을 할 뿐이었다. 우측의 사내는 몸을 돌렸다. 나머지 조원들에게 명령을 전하기 위함이었다. 신형을 날리는 사내. 그가 박찬 땅에서는 먼지 한 톨 날리지 않았다. 군더더기 없는 동작에 깔끔하기 이를 데 없는 신법. 적풍조원의 무공 수위를 엿볼 수 있는 단면이었다. "백발귀마라…… 적풍조가 움직여야만 하는 이유를 보여주지 못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해 주마!" 필용경의 굳건한 턱 근육이 실룩였다. 1. 동이 트기 전의 홍등가는 활기를 잃는다. 호객을 위해 떠들어대는 창기가 없기 때문이다. 이 시각이 될 즈음이면 원초적 욕망의 해소만이 홍등가를 찾는 이유였고, 호객은 필요치 않았다. 어쩌다 한 번씩 거리를 지나는 취객을 잡기 위해 찬이슬을 맞는 것은 기녀들에게도 피곤한 일이었다. 이부자리에 누워 기다리면 싸구려 술의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손님이 찾아들었다. 이전의 시간에 비해 적막한 느낌마저 자아내는 홍등가를 찾아든 두 남녀가 있었다. 선주혁과 몽세화였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정하기 위해 길에서 서성일 여유가 두 사람에는 없었다. 선주혁은 일단 선우 아가씨의 처소로 돌아가 향후 두 사람이 어떻게 해야할 지를 정하고자 했다. 하지만 선우 아가씨의 집 앞에 도착한 선주혁과 몽세화는 발걸음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야심한 밤이건만 웬 노인 하나가 선우 아가씨의 집 문 앞에 서 있는 것이다. 몽세화의 얼굴을 힐끗 본 선주혁이 노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노인장, 이 집에는 홍기가 없는데요." 집 쪽을 바라보던 노인은 느릿하게 몸을 돌려 자신에게 말을 건넨 청년을 바라봤다. 돌아선 노인을 본 선주혁은 흠칫했다.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 그야말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노인의 모습이었건만 가슴을 스쳐 지나가는 서늘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말로서는 규정지을 수 없는 그 느낌은 본능에서 비롯된 경종을 울렸다. 노인이 피식 미소를 지었다. "이 시각에 홍등가를 찾아들 정도로 보인다니…… 그래도 내가 아직까지는 정정해 보이는가 보구먼." 농 섞인 노인의 답변. 결국 사창가의 기녀를 찾아 이곳에 찾아온 게 아니라는 말이었다. 선주혁은 과연 자신의 직감이 옳았음을 느끼며 은연중에 공력을 끌어올렸다. 언제 어느 때 본색을 드러낸 노인이 급습을 해올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는 시치미를 떼며 태연하게 재차 질문했다. "그럼 어디가 편찮으셔서 선우 아가씨를 찾아오신 겁니까?" "허허허, 방금 전까지는 혈기 넘치는 노인 취급을 하더니, 이제는 병든 노친네 취급을 하겠다는 말인가?" 노인의 헛웃음에 선주혁이 안색을 굳혔다. "그럼 소생에게 볼 일이 있으신 것이군요." 딱딱하게 굳은 선주혁의 얼굴을 확인하고도 노인은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자네가 백발귀마가 맞다면 말이지." "…………!" 과연 짐작대로였다. 무협을 읽다보면 흔히 나오는 말이 있다. 선자불래요, 내자불선이라. 선한자는 오지 않고 온 자는 선하지 않다는 뜻으로 기억했다. 선주혁은 평범해 보이는 노인에게 느껴지는 알 수 없는 위압감에 전신의 신경을 팽팽히 긴장시켰다. "흠…… 그렇게 적개심을 드러낼 필요는 없네. 일단은 자네를 해치려고 온 것이 아니니까." "일단은……?" "그렇지. 일단은 그렇다네." "선 공자를 해치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어떻게 믿죠?" 경험이 풍부한 몽세화가 노련한 모습을 보였다. 노인이 몽세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옥소선자인가……하는 아이로군." 노인은 몽세화의 손에 쥐어진 옥소를 힐끗 보며 말했다. 그의 말을 들은 몽세화의 아미가 상큼 치켜 올라갔다. 노인이 나이가 든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자신을 어린아이 취급하는 것은 참기 힘들었다. 겉으로야 이십대 중반의 용모를 유지하는 그녀지만 실제 나이는 서른을 훌쩍 넘겼기 때문이다. "귀하의 신분부터 밝혀주는 게 도리일 것 같군요." 몽세화는 못마땅한 심기를 드러냈지만 그렇다고 당장 폭발하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 사방이 적인 지금의 상황에서 아직까지 적의를 드러내지 않는 자까지 새롭게 적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후후훗. 그래야겠군. 이야기를 편하게 하려면 말이지." 마치 아이를 달래야겠다는 식의 어투. 몽세화도 선주혁도 노인의 태도가 썩 달갑지 않았다. "노부는 종극이라 하네." "염마?" 몽세화의 입술이 벌어지며 놀란 탄성이 튀어나왔다. 더불어 그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선주혁도 눈을 크게 떴다. 염마 종극의 이름은 그 역시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통 무협을 읽다보면 정도문파의 고수들은 대게 허접하기 마련이다. 주인공이 활약을 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악당이 강해야 주인공이 돋보이는 것이 당연지사니까. 선주혁이 저쪽 세상에서 읽었던 소설 역시 그랬다. 마교나 사파연합의 인물들은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자가 많았던 것이다. 염마 종극은 그 중 한 명이었다. 마교를 대표하는 절대의 고수 아홉. 강호인들에게 구대마존이라 불리는 그들 중 일 인인 염마 종극의 무공은 소설 속에서 필적할 상대를 찾기 힘든 것이다.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할 능력을 가진 인물이자, 선주혁이 이쪽 세상에 와서 만나는 최고 거물인 셈이었다. 복면인들의 내공을 흡수하고 북두진공참이라는 새로운 절기를 익혀 나름대로 자신감이 넘치는 중이었으나, 워낙 대단한 인물로 그려졌던 종극을 마주하게 되자 선주혁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책으로 읽을 때야 그러려니 할 수 있지만 막상 눈앞에서 엄청난 인물을 만나자 느낌이 확연히 오는 것이다. "종 어르신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몽세화가 나긋나긋해진 음성으로 말했다. 염마 종극은 세수 백세를 훌쩍 넘긴 전전대의 고수. 이제 서른을 넘긴 몽세화를 어린아이 취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뭐…… 다들 그러니까. 평범한 늙은이를 보고 누가 마교라 부르는 곳의 장로라고 생각하겠나?" 마교인들은 스스로를 마교라 칭하지 않는다. 분명 무림의 한 세력으로서의 정체성이 확연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종교적인 색채를 많이 가지고 있다. 어느 누가 자신이 믿는 종교에 '마'자를 붙이고 싶겠는가? 종극이 저리 말하는 것은 강호인들의 잘못된 시각을 은연중에 비꼬는 것이었으며, 평소 가져왔던 못마땅한 생각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것이다. "어쨌건 간에 이제는 본론을 이야기해야겠군. 늙은이에게는 새벽이슬이 해롭거든." 종극은 너스레를 한번 떨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걸 좀 보겠나?" 종극은 품에서 작은 종이 한 장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손을 내밀자 접힌 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종이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종이는 느릿느릿한 움직임으로 선주혁의 앞까지 움직여왔다. 능공섭물을 응용한 한 수. 내력으로 종이의 움직임을 제어하는 것으로 보기에는 쉽지만 보통의 고수라면 꿈도 꾸기 힘든 장면이어싸. 종이에 내력을 실어 빠르게 던지는 것은 쉽지만 지금처럼 느린 움직임으로 사물을 제어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선주혁은 마술처럼 자신에게 다가오는 종이를 신기해하며 받아 들였다. "지급. 백발귀마 현재 동행 중. 필 포섭 대상. 성화령 하달 요망……?" 선주혁이 중얼거리며 종이에 적힌 내용을 읽었다. "그렇다네. 그 전서를 누가 보냈는지 알고 있나?" "단목 공자가 보낸 것이군요." 선주혁의 옆에서 곁눈질로 살피던 몽세화가 대답했다. 종이의 하단에 적힌 민이라는 이름을 보지 않고서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단목지민은 선주혁이 한 번 본 무공을 습득하는 능력이 있음을 알고 있다. 주백광의 협박 아닌 협박으로 그 사실을 함구하기로 했지만 인재를 끌어들이려는 의도는 충분히 이해할만한 것이었다. 선주혁과 같은 인물이라면 강호의 판도를 바꿀 수도 있을 정도였으므로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다네. 민아가 말한 내용 중에서 성화령에 관한 언급이 있지? 성화령이란 장로라 할지라도 이견을 제시할 수 없는 본교 최고 권위의 명을 말한다네. 즉, 교의 최고령을 동원해달라는 말인데…… 민아의 평소 성품으로 미루어 성화령을 함부로 언급할 아이가 아니란 말일세. 결국 자네가 그만큼 본교에 필요하다는 뜻인데……" 종극이 눈을 가늘게 뜨며 선주혁을 훑어봤다. 마치 대체 뭘 보고 성화령까지 동원해 포섭하라는 것인지 알아보겠다는 듯한 시선이었다. "뭐…… 그거야 지켜보면 알 일이고. 그걸 알아내기 위해 이 늙은이가 노구를 이끌고 여기까지 왔으니까." 종극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성화령이 가지는 권위에 대한 강조와는 어울리지 않는 태도였으나 백수를 넘긴 노고수다운 태도이기도 했다. "문제는 이 전서를 보낸 민아의 소식이 두절되었다는 걸세. 당연히 자네와 함께 있으리라 생각했건만 그렇지 않은가 보군." "단목 공자는 제가 의식을 잃고 있는 동안 제 친우와 함께 사라졌습니다. 그 이후의 소식은 저도 잘……" 소설 속에서 워낙 거창하게 다뤄졌던 염마였다. 선주혁은 저도 모르게 위축이 되어 공손한 어조로 대답했다. "친우?" "네. 주백광이라고……" "호오. 도절! 그 아이가 자네와 망년지교를 나눴다는 건가?" 종극 역시 도절에 관해 들은 소문이 있는 듯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네." "흠…… 그럼 민아와는 어떻게 알게 된 사인가?" 종극의 질문에 대답을 한 것은 몽세화였다. 그녀는 등왕각에서 단목민-몽세화는 단목지민이라는 이름을 모르므로-을 처음 만난 것에서 시작해 선주혁과 함께 하게 된 이후까지 침착하고 상세히 설명했다. 설명 중에는 그녀의 사견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선주혁과 단목민의 관계에 관한 내용은 지극히 주관적이었다. 몽세화는 마치 단목민의 속을 들여다 본 것처럼 그가 선주혁에게 깊은 우애를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다분히 염마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그렇군. 하면 두 사람이 노부를 좀 도와줘야겠네." "…………?" "민아를 찾는 일말일세. 번거로운 것이 싫어 수하들을 데려오지 않았더니 이런 불편이 있구먼." 종극은 선주혁과 몽세화를 만난 이후 처음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수하들을 데려오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는 표정이었다. "보아하니 무림맹의 떨거지들이 남창으로 잔뜩 몰려온 모양인데 민아가 곤란한 상황을 겪을 수도 있지 않겠나? 우정이란 말을 했으니 민아를 외면하지는 않겠지?" "하지만 선 공자는 지금 무림맹의 주적이나 다름없는 상태입니다. 저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는 대상이죠. 어르신께서 단목 공자를 찾으시는 데는 오히려 방해가 되지 않겠습니까?" 일단 선주혁과 상의를 해 도주로를 결정한 뒤 남창을 벗어나려 했던 몽세화였다. 단목 공자의 안위가 걱정되긴 했지만 지금의 남창은 선주혁에게 있어 너무나 위험했기 때문이다. 한데 염마가 저리 나오니 은근슬쩍 회피하려는 것이다. "훗!" 종극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누가 있어 내 앞에서 감히 이 친구를 위협할 수 있겠는가?" 갑작스럽게 종극의 기도가 변했다. 그는 더 이상 지나치다싶을 정도의 평범한 노인이 아니었다. 살짝 굽어 있던 허리를 꼿꼿이 세우자 보통 사람보다 큰 키가 확연히 드러났다. 고수 특유의 기세가 살아나자 몽세화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칠 뻔했다. 그녀는 종극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자신이 있는 한 그 누구도 선주혁을 위협할 수 없을 거란 뜻이었다. 확실히 염마에게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었다. 몽세화는 선주혁을 돌아봤다. 그의 뜻을 묻는 것이다. 전서의 내용으로 미루어 종극은 선주혁을 마교로 포섭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것이다. 단목민을 찾는 것에도 목적이 있겠지만 백발귀마를 끌어들이기 위한 동행을 원하는 것이다. 단목민을 찾은 후, 백발귀마를 포섭하기 위해 다시 찾기란 귀찮은 일이 될게 뻔했으므로. 몽세화의 시선을 받은 선주혁이 종극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단목 공자가 지금 곤란한 상황을 겪게 된다면 저로 인한 것입니다. 종 선배께서 원하신다면 그를 찾는 일을 돕겠습니다." "선 공자!" 선주혁이 너무 쉽게 결정을 해버리자 몽세화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몽 누님. 누님은 일단 남창을 벗어나계시는 게 좋겠습니다. 이곳은 가히 용담호혈이라 부를 수 있는 터. 훗날 다시 만나는 것을 기약하지요." 선주혁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선우 아가씨와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에서 섹시미의 극치를 달리는 몽세화와 헤어지는 것 또한 그다지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안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는 공 노인과 같은 희생을 지켜볼 엄두가 안 나는 것이다. "무슨 소리에요. 선 공자가 이곳에 남겠다면 저도……" "이 친구의 말이 옳은 것 같군." 몽세화의 말은 종극에 의해 가로막혔다. "날파리 같은 놈들일지라도 숫자가 꽤 많아 보이니 두 명을 돌보기란 쉽지 않을 테니 말이야." 종극은 그녀가 남기를 원치 않는 듯했다. 노련한 그녀가 있으면 선주혁을 마교로 끌어들이는 일에 방해가 될 수도 있는 일이리라. 하나 종극의 말에는 정도 무림 인사들에게서 선주혁을 보호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몽세화는 그가 우격다짐으로 선주혁을 끌고 가는 상황을 막아보고자 했으나 지금의 상황에서는 고집을 부릴 수만은 없었다. 누군가를 두려워할 그녀가 아니었지만 염마의 무공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선주혁과 직접 손을 섞어본 것은 아니지만 그의 무공도 자신의 아래라 생각하긴 힘들었다. 결국 염마가 선주혁을 돕는다면 자신은 괜한 짐이 될 수도 있었다. 어렵게 다시 만난 선주혁과 곧바로 이별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아쉬움을 금할 수 없었으나 철없이 마냥 고집을 피울 나이가 아니었다. 무릇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알아야만 하는 것이 강호의 생존 법칙이었다. "제가 짐이 될 수도 있겠군요." 몽세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짐이라뇨?" 선주혁이 고개를 저었다. "전 누님께서 다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약속을 정해주시면 반드시 그곳으로 가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보중하십시오." 선주혁은 몽세화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말했다. 그와 같은 선주혁의 행동은 몽세화로 하여금 크게 감동하게 만들었다. 뭇 사내들이 자신에게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는 그녀였다. 눈을 풀리게 하고 신체의 특정부위에 혈액이 집중되게 하는 자신의 육체만이 그들의 관심사였다. 진심으로 자신의 안위를 위해주는 사람을 여태껏 만나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성품이 호방하고 자유로운 생활을 즐기는 그녀인지라 그간의 상황에 불만을 가졌던 적은 없다. 뛰어난 무공을 가진만큼 홀로 세상을 헤쳐 나가는 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여인으로서의 감성이 모두 메마른 것은 아닌 터. 선주혁의 진심어린 염려에 감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몽세화는 선주혁의 진심을 받아들였고 추후 만날 장소와 약속을 정하고 야음에 몸을 묻었다. 선주혁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무사를 기원했다. 그녀에게 탈이 난다면 공 노인에 이어 또 다른 부담을 갖게 될 것을 염려하면서. "너무 걱정하지 말게. 옥소선자 정도라면 충분히 남창을 벗어날 수 있을 테니. 저들이 찾고자 하는 것은 자네가 아닌가?" 종극의 말에 선주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몽세화를 통해 자신을 찾으려는 시도야 있겠지만, 분명 저들의 목적은 자신이었다. 여인 혼자서의 움직임에 저들이 주목할 가능성은 적었다. 몽세화가 소설 속에서 보여준 노련한 면모와 무공을 발휘한다면 그녀에게 특별한 위험이 닥칠 가능성은 적었다. "그럼 단목 공자를 찾으러 가볼까요?" "후후훗, 성격 하나는 민아가 추천 할만하군." 종극이 다시 미소를 지었다. "단목 공자를 찾는 데까지만 동행하겠습니다. 저 역시 사형을 급히 찾아야하는 입장이라……" "옥용검마를 말하는 건가?" "네." "후훗. 우리 아이들을 시켜서 찾으면 될 일이 아닌가?" "사형이 숨고자하면 아무리 마교…… 아니 일월신교라 해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선주혁이 신뢰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본교의 힘을 너무 우습게 보는 게 아닌가?" "아닙니다. 사형에게는 그럴 능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호오! 곤륜이마의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는군." 종극은 짐짓 감탄을 하듯 말했다. "종 선배님께서 일월신교의 교주님을 생각하시듯, 저 역시 사형을 생각하지요." 선주혁의 말에 종극의 눈에서 이채가 발했다. "내가 교주님을 어찌 생각하는지 알고 있단 말인가?" '아차! 한동안 또 생각을 안 하고 있었더니……!' 마교 내에서도 종극과 마교주는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은 것으로 소문이 나있다. 하지만 종극이 교주에게 가지는 충성심이야말로 지극한 것이라 소설속에서는 묘사되어 있었다. 그와 교주가 반목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면에는 타인은 모를 의도가 있었고 그것을 아는 사람은 당사자에 한했다. 한데 선주혁이 마치 뭔가를 아는 것처럼 말했던 것이다. "이, 일월신교의 교도라면 교주님께 가지는 마음이 다 같은 것이 아닙니까?" 선주혁은 재빨리 말을 돌렸다. 내가 네 속을 훤히 알고 있다는 식으로 말을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종극은 노인답지 않은 날카로운 눈으로 선주혁을 다시 훑어봤다. 마치 그의 속마음까지 꿰뚫을 듯한 눈빛이었다. "자, 이제 빨리 가시지요. 저희가 지체하는 동안 단목 공자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곤란한 이링 아니겠습니까?" 선주혁은 종극의 시선을 모른 척하고 먼저 몸을 움직였다. "대체 놈의 정체가 뭐란 건지……?" 차가운 밤의 대기를 가르는 적풍칠조의 부조장 좌충백이 어금니를 악물었다. 백발귀마의 종적을 찾으라는 명령을 내린지 하루 만에 그의 종적이 밝혀졌다. 정도의 무림인들은 추적을 하는데도 선입견을 버리지 못한다. 수치를 아는 무사라면 결코 숨지 않을 곳이라 여겨버리면 수색이 헐거워지는 것이다. 추적이란 도주하는 자의 사고를 기본으로 해야 한다. 추적하는 자의 여유로움 따위를 도주자에게 찾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명분이나 체면 따위를 생각할 틈이 그들에게는 없는 것이다. 백발귀마의 경우도 그랬다. 그가 은신했을 것이라 짐작되는 것은 홍등가였다. 정도의 무인이라면 차라리 목숨을 내놓을지언정 창기의 치마폭에 몸을 숨기지 않았을 거라 여겨졌을 게 분명했다. 결국 백발귀마는 그와 같은 허점을 이용했고, 효과는 분명히 드러냤다. 지금껏 무림맹의 추살대에게 종적을 드러내지 않은 것이다. 선주혁의 행방을 종극이 무림맹보다 쉽게 찾아낸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노회한 종극은 도주자의 입장을 명확히 이해하고 있었고, 정도의 무림인들이 기피하는 사고의 범주 또한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백발귀마가 극심한 부상을 입고 은신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정보 또한 잘못된 것이었다. 보고에 의하면 그는 멀쩡한 모습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놈과 함께 있는 자. 그가 문제였다. 그와의 동행이 자충백으로 하여금 절로 불평이 튀어나오게끔 만든 것이다. "염마와의 동행이면 저희만으로는 무리가 아니겠습니까?" 벌써 십여 년이 넘게 적풍칠조의 부조장으로서 필용경과 함께 해온 좌충백이었다. 그럼에도 조장인 필용경을 대하는 태도는 극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적풍조의 기강이 엿보이는 단면이었다. "삼 조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자는 말인가?" 필용경이 미간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백발귀마가 염마와 활보를 하고 다니는 이상, 그 사실이 알려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좌충백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의 말뜻은 간단했다. 비록 흑도의 이목을 염려해 대대적인 수색은 불가했지만 남창에는 무림맹의 눈과 귀가 깔려있다고 볼 수 있었다. 염마와 백발귀마의 동행 소식은 곧 무림맹의 인사들과 맹주의 두 제자들에게 전해질 것이다. 따라서 지금 염마와 마주하지 않고 조금만 시간을 지연하자는 것이 좌충백의 제안이었다. "염마가 종적을 감추려고 마음을 먹는 순간을 짐작할 수 있겠는가?" 필용경은 다소 사무적인 어조로 재차 질문했다. 좌충백은 침묵해야만 했다. 염마가 백발귀마를 데리고 도주를 결심한다면 그의 행방을 쫓기란 수월한 일이 아니었다. 그가 언제든 남창을 벗어나 마교의 소굴로 돌아갈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결국 조장의 선택은 간단했다. 적풍칠조 전원이 염마와 백발귀마의 발을 묶는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다. 머지 않아 적풍삼조가 도착하게 될 것이고, 그들로 인해 염마와 백발귀마는 또다시 발이 묶이게 될 터였다. 아무리 염마라 해도 적풍조의 두 개조 전원을 일거에 몰살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리라는 것이 필용경의 가설이었다. 그렇게 시간을 끌어준다면 무림맹의 인사들과 맹주의 두 제자도 현장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적풍조의 피해는 막대하겠지만 마교의 거두 염마와 공적 백발귀마를 처단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전적으로 흑도의 고수들만을 상대하기 위해 훈련받아온 적풍조이므로 그 때가 되면 아무리 염마라한들 멀쩡한 상태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필연적으로 부상을 입을 것이고 추후 도착한 고수들이 염마를 처단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대체 이번 척살의 계획은 누가 세운 것입니까?" 좌충백의 음성에는 억울한 감정이 담겨져 있었다. 그간 적풍조는 철처하게 상대를 분석한 다음에만 척살의 실행에 나섰다. 상대의 실력에 맞춰 충분한 인원이 파견되었던 것이다. 적풍조가 흑도의 절정고수들에게 공포심을 자아내게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적풍조는 생환할 수는 없을지언정 목표한 대상을 제거하는 데에 실패하는 경우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금번에는 달랐다. 실패의 여자를 남겨두고 있는 것이다. "계획에는 이상이 없다. 백발귀마라는 녀석이 특별한 것일 뿐." 필용경이 짤막하게 답했다. 그의 말대로였다. 사실 백발귀마라는 애송이 하나를 처리하기 위해 무려 두 개조가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에 누구보다 불만을 가졌던 것이 적풍조원 스스로였다. 일 개조면 백사회의 일원이라도 척살이 가능하다고 자부하던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한데 이제 와서 인원이 부족하다 불평할 수는 없었다. "변수는……" "주군의 명일세. 우리는 맡은 임무에 최선을 다하면 그 뿐이야." 필용경의 단호한 말에 좌충백은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더 이상 불평을 토로하는 것은 주군에 대한 불경이었다. 또한 죽음이 두려워 이런저런 핑계를 대는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적풍조원에게는 수치로 여겨지는 행동이었다. 잠시 후 필용경이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조원들에게 무리한 공격은 자제하라고 이르게. 당장의 목표는 척살이 아니라 지연에 있음을 주지해야겠지." 죽음을 두려워할 필용경이 아니었다. 또한 그는 어리석은 자도 아니었다. 염마를 상대하고자 한다면 목숨을 걸 각오는 필요하지만 수하들의 헛된 죽음을 장려할 이유는 없었다. 금번 임무의 근원적 목적은 백발귀마의 척살. 그 임무를 달성하기 위해서 질풍칠조가 당장 해야 할 역할은 지원이 도착하기 전까지 백발귀마와 염마의 발을 묶어두는 것이었다. 필용경은 그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알겠습니다." 좌충백의 안색이 한결 밝아졌다. 그는 달리는 속도를 조금 늦췄다. 필용경과 거리가 벌어진 좌충백은 뒤를 따르는 나머지 적풍조원들과 합류했다. 필용경의 명을 하달하는 것이다. 염마의 자신감은 대단했다. 남창의 대로를 활보하며 당당히 단목지민을 찾았던 것이다. 선주혁은 사뭇 긴장한 상태로 그 뒤를 쫓았다. 행여 자신을 알아보는 자가 있을까 염려하는 것이다. 하지만 누가 선주혁의 입장에서 남창의 대로를 나다니리라 생각했겠는가? 염마가 이를 의도한 것인지는 몰라도 날이 저물어 객잔으로 향하기까지 선주혁과 종극의 앞을 가로막는 자는 없었다. 외려 이런 방법이 허를 찌른 효과를 낸 것이다. 그것은 날이 저물 때까지의 일일 뿐이었다. 번잡한 것이 싫다며 한적한 장소에 위치한 동래객잔으로 향하던 종극과 선주혁은 길을 가로막고 서 있는 한 흑의인과 만나게 되었다. 종극은 담담한 표정으로 흑의인을 살폈다. 강인한 인상을 한 삼십 대의 후반 가량의 흑의인이 입을 열었다. "단 한 명의 수하도 거느리지 않는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자신감이 조금 지나친 바가 없지 않구려." 흑의인은 종극의 정체를 명확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위축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종극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한데 종극의 배분을 전혀 고려치 않는 무례한 언사까지 내뱉는 흑의 사내였다. "어린 놈이 버릇이 없군. 강호의 선배를 알현할 때는 스스로부터 밝혀야 한다고 배운 적이 없는게냐?" 호통을 치는 듯한 말의 내용이었으나 종극의 어조는 여전히 담담하기만 했다. "훗!" 입을 모아 가볍게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는 흑의 사내. "마교의 개에게 지켜야할 예의를 배운 적이 없어서 그렇소." 흑의 사내는 빈정거리는 표정으로 종극을 도발했다. 종극의 신분이나 강호상의 배분으로 결코 해서는 안 되는 말. 아무리 흑백도가 서로를 경원시 할 지라도 흑의사내의 언사는 크게 지나친 것이었다. 보통의 경우라면 이럴 때 이마에 푸르스름한 혈관을 드러내며 노기를 드러내기 마련이었다. 본시 흑도의 인물이란 대개 성격이 폭급하기 때문에 예의를 찾기는 힘들었다. 적어도 흑의 사내가 적풍조의 이름으로 척살한 서른네 명의 흑도 고수에게는 통하던 수법이었다. 하지만 거물은 역시 거물. 염마 종극은 이제껏 필용경이 만나왔던 마도의 거물과는 차원이 다른 자였다. 종극은 분노키는 커녕 오히려 입 꼬리를 말아 올려 미소를 지었다. 마치 어디까지 재롱을 떠는지 지켜보겠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런 종극의 반응은 필용경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가급적 종극과 백발귀마의 발의 묶어야 했다. 적풍칠조만으로 종극을 척살할 수 있는 가능성은 일할도 되지 않았다. 삼조의 지원을 받는다 해도 그 가능성은 오 할이 채 안 될 터. 필용경으로서의 최선은 지원이 도착하기 전까지 시간을 끌며 종극을 곤란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그를 위해 종극의 심기를 뒤흔들며 도발하려 했지만 담담하기만 하니 오늘의 일이 과연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무게가 실렸다. "스스로도 인정을 하고 있나 보군. 개라는 것을 말이지." 필용경은 다시 한 번 종극을 몰아세웠다. 종극은 아예 팔짱을 끼고 고개를 약간 옆으로 기울였다. "한조백이 그렇게 가르친 건가, 아니면 자네들이 모자란 건가?" "…………!" 필용경의 눈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종극이 단숨에 자신들의 정체를 파악할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아마도 적풍조가 이곳에 온 것은 이 친구 때문이겠지." 종극의 시선이 잠시 선주혁에게 머물렀다. "나와 동행을 한다는 사실에 놀랐을 것이고, 무리를 해서라도 길을 막았을 터! 나를 도발하기 이전에 이 친구와 나와의 관계부터 확인했어야할 일이 아닌가? 나와 이 친구가 적대관계일 수 있다는 생각은 없었던 건가?" 종극의 추궁에 필용경의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그의 말대로였다. 만약 종극과 백발귀마가 한 패가 아니라면 무림맹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희대의 마두를 제거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한 셈이었다. 종극의 발길을 잡기는커녕 암암리에 지원을 해주는 것이 옳았을 지도 모른다. 종극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정도의 놈들이란…… 자기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모두가 한 패거리라 단정지어 버리지." 종극의 말에 필용경은 미간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수많은 흑도, 사파 고수들을 상대하며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경직된 사고로는 그들을 상대하기 힘들다는 것을 말이다. 한데 저도 모르게 뿌리 깊이 내재된 편견이 발현된 것이다. 무림맹에서 공적으로 지목한 백발귀마이니 당연히 염마 종극과 야합했을 거라 생각했다. 일말의 재고도 없었던 것이다. 자신이 좀더 신중했다면 다짜고짜 염마를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백발귀마와 마교의 관계부터 규명했을 것이다. 그렇지 못한 자신을 내신으로 탓하는 필용경이었다. "어찌되었건 나는 피바람이나 쫓는 아해들에게 이 친구를 내어줄 생각이 없네." 적풍조를 비아냥 거려 휘파람을 쫓는 아이들이라 표현하는 종극. "무림맹의 공적인 백발귀마입니다. ㅜ기교과 본맹의 관계를 염두에 두시고 판단을 하신 것입니까?"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정중한 질문이엇다. 종극은 그런 필용경의 반응에 얼굴에 떠올린 미소의 색채를 더했다. '과연 적풍조로구나!' 보통의 백도 무인들이라면 이토록 유연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흑도 무림인들에게 적풍조라는 이름이 왜 공포의 대상이 되었는지 조금은 이해가 가는 종극이었다. "허허헛, 다 늙어 죽을 날만 기다리는 이 늙은이가 그렇게 방대한 사고의 범주를 가졌을 리 없지. 자네는 잊었는가? 날 처음보자 쏟아낸 말을……?" "…………!" 필용경의 안색이 이제는 시커멓게 변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선주혁도 새삼스러운 눈으로 종극을 다시 봤다. '이제 봤더니 노친네가 정말 대단한 걸? 늙은 너구리가 따로 없군.' 종극은 자신이 적풍조를 상대하는 이유를 필용경의 무례를 징계하는 것에 한정짓고 있었다. 염마 정도 되는 자가 무림맹이라는 배경 때문에 까마득한 후배의 무례를 한없이 참을 수는 없을 터. 심기를 흐트러뜨리려 했던 필용경의 도발은 외려 염마에게 명분과 당위성을 부여한 셈이 된 것이다. 필용경의 눈빛이 깊게 침잠되기 시작했다. 말을 할수록 손해를 보는 것은 자신이었다. 염마는 노회한 강호인으로서의 면모를 언변에서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이제는 마음을 다잡고 최선을 다해 맞서는 수밖에 없었다. 종극은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허리를 곧추 세우고 팔짱을 풀었다. 적풍조라는 아이들이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의 명성이 헛된 것만은 아닐 터. 방심으로 만들어진 작은 틈이야말로 저들이 노리는 것이고 그와 같은 모습을 보이는 순간 적풍의 이름하에 죽어간 노마의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올라가게 될 것임을 종극은 잘 알고 있었다. "염마라는 명호와 마주했으니 홀로 상대하지 못함을 이해하시오!" 소리없이 검을 뽑으며 필용경이 나직하게 말했다. 깊이 가라앉은 그의 눈은 침착했으며 결의에 가득 찼다. 죽음을 도외시한 시선. 종극은 참으로 오랜만에 저런 시선을 본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하시오!" 중단을 향해 검극을 쭉 내밀며 외치는 필용경. 하지만 공격이 날아든 곳은 종극의 좌측에서였다. 놀랍게도 멀쩡하던 땅바닥이 벌컥 열리며 황의를 입은 자가 튀어나온 것이다. 앞쪽에서 시선을 끌고 정작 공격이 날아온 것은 좌측. 그것도 땅바닥이라니! 여태껏 마주보고 싸우는 것에만 익숙해져 있던 선주혁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가운데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땅에서 튀어나오는 것까지는 좋았다. 의외의 상황에서 튀어나온 공격이라면 상대를 당황하게 만들고, 이는 곧 허점이 생긴다는 것이므로. 하지만 기껏 그런 상황을 형성해놓고 정작 공격을 하는 것은 어찌 저리 허술하단 말인가? 선주혁의 눈에는 마치 의외의 상황이니 준비할 시간을 주겠다는 것처럼 느릿느릿 몸을 날려 공격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선주혁은 아직까지 제대로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복면인들의 엄청난 내공을 흡수한 이후, 그의 내력은 이전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비약적으로 증진된 내력은 그의 오감을 극도로 예민하게 만들었으며 사물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동체시력 역시 극한까지 발전시켰다. 또한 그는 자신이 전개하는 북두폭렬장에 익숙해진 상태. 가공하다고밖에 표현하기 힘든 자신의 장법에 익숙해진 그에게 있어서 적풍조원들의 공격은 일말의 위험함조차 느끼지 못하게 했다. 결국 적풍조원의 공격은 여느 때보다 빠르고 날카로웠다. 다만 스스로도 제감하지 못할 정도로 발전한 선주혁의 능력에는 그 공격이 느릿느릿한 움직임으로 보일 뿐이었다. 그것은 백전의 노장 종극에게도 해당되는 상황이었다. 꽤나 고심한 암습이랄 수 있었으나 종극을 당황하게 만들 정도는 아니었다. 종극은 맹렬한 속도로 자신의 옆구리를 향해 찔러오는 비수를 가볍게 옆으로 밀어냈다. 암습자의 손목을 쳐낸 것이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자연스럽기 그지없는 동작. 전력을 다해 비수를 찔러가던 황의인은 종극의 일 장에 담겨진 잠력을 이기지 못하고 균형을 잃었다. 균형을 잃은 그의 등에 종극의 일장이 더해졌다. 황의인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즉사했다. "조……" 선주혁의 조심하라는 경고성이 미처 튀어나갈 틈도 없는 시간 동안 목표를 잃고 옆으로 튕겨진 황의인의 뒤쪽에서 또 하나의 비수가 튀어 나왔다.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연환공격이었다. 땅에서 튀어나온 자의 공격을 방어하는 순간, 인간이라면 누구나 안도의 한숨을 쉬거나 앞쪽에서 시선을 끌었던 자의 움직임에 주의를 기울이기 마련이다. 필용경 역시 앞으로 내민 발에 중심을 이동하는 모습을 보였었기 때문이다. 한데 땅에서 튀어나온 자가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다. 앞서 공격한 자보다 체형이 작은 자가 뒤에 서 있다가 공격이 실패할 경우 상대의 빈틈을 노려 재차 공격을 감행하는 것이다. 교묘하기 이를 데 없는 이 공격은 언뜻 성공하는 듯 보였다. 예기를 머금은 비수의 끝이 종극의 심장부위에 거의 도달했기 때문이다. 비수가 종극의 심장을 꿰뚫으려는 순간. 바람맞은 촛불처럼 종극의 신형이 제자리에서 꺼져버렸다. 순간적으로 사라진 것이다. 황의 사내의 눈이 휘둥그레지기도 전, 그의 우측에 나타난 종극이 먼지를 털어내듯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특별히 내력을 모은 것 같지도 않고, 따로 절기를 사용한 것 같지도 않은 동작이었다. 그야말로 아무렇게나 휘두른 것 같은 모습. 하지만 그 위력은 범상치 않았다. 둔탁한 음향을 만들어냄과 동시에 황의 사내는 신형을 옆으로 날려버리는 엄청난 힘. 화살처럼 쏘아지는 사내의 입에서는 으스러진 내장 조각과 함께 피가 솟구쳤다. 공교로운 우연인지 아니면 죽음 가운데서도 의도한 바가 솟구치는 피가 향하는 방향은 종극의 안면. 말 그대로 혈전을 쏘아낸 것이다. 종극이 신형을 움직여 얼굴에 피가 튀는 것을 피함과 동시에 필용경의 신형이 움직였다. 또한 세 곳에서 땅이 들리며 황의 사내 셋이 튀어나왔다. 그들은 종극의 위치와 상관없이 일정한 방향으로 신형을 날려 비수를 찔러갔다. 종극이 혈전을 피할 방향을 미리 점하고 공격을 감행하는 것이다. 이는 적풍조가 철저히 고수들을 척살하는 임무를 수행해 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면이었다. 필용경을 비롯한 네 명이 공격하는 방위는 고수의 움직임을 철저히 계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종극이 피한 방향을 점한 곳은 필용경과 한 명의 황의 사내. 필용경의 검은 종극의 유문혈을 노리고 날아들었고, 황의 사내의 비수는 옆구리에 위치한 경문혈을 향해 찔러갔다. 종극은 이들의 지독함에 놀란 것인지, 아니면 못마땅한 것인지 모를 표정을 지었다. 적풍조를 마주한 후 처음으로 인상을 찌푸린 것이다. 동시에 그의 양손이 민활하게 움직였다. 지금까지 여유롭기만 한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최단거리를 확보하는 직선적인 암습과 금번의 공격이 달랐기 때문이다. 필용경과 황의 사내가 만들어내는 기묘한 조화. 미묘한 시간차를 만들어내는 양쪽의 공격은 하나도 경시할 수 없었다. 더구나 필용경의 검극이 만들어내는 흔들림은 천변만화를 암시하고 있는 상황. 두 사람이 감행하는 공격이었으나 실제로는 수십, 아니 수백의 암습자를 상대하는 듯한 상황을 예견케 하고 있었다. 비수를 든 황의인이 지척에 달하는 순간, 종극의 발이 땅을 강하게 밟았다. 그러자 마치 땅에 벽력탄이라도 심어 놓은 듯 흙과 돌들이 튀어 올랐다. 단순히 튀어 오른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했다. 흙과 돌멩이들의 입자 하나하나에 위맹한 경력이 실린 채로 솟구쳐 오른 것이다. 솟아오른 흙과 돌멩이들은 거대한 벽을 만들어 황의 사내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 속으로 팔을 내민다는 것은 무모한 행동. 특수한 기공으로 팔을 보호하지 않는다면 만신창이가 될 것이 분명했다. 황의 사내는 이를 악물며 비수를 회수해야만 했다. 그 짧은 순간은 종극에게 무한한 여유를 만들어줬다. 자신의 요혈을 노리고 만들어지는 검의 변화도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았다. 종극은 가볍게 손을 들어 올려 손가락을 이용해 검신을 튕겨냈다. 카앙. 귀청을 찢는 듯한 날카로운 금속성과 함께 검신이 부러져 나갔다. 검을 쥐고 있던 필용경은 연달아 뒷걸음질을 치며 입에서 피를 게워냈다. '이, 이것이 염마란 말인가……!' 가슴을 묵직하게 짓누르는 것은 검을 따라 흘러온 암경으로 인한 내상뿐만이 아니었다. 염마는 그간 필용경이 상대해 왔던 마두와는 궤를 달리하고 있었다. 필용경이 염마의 가공할 무위에 감탄할 사이도 없이 또다시 둔탁한 소음이 들렸다. 흙벽에 가로 막혔던 황의 사내의 두개골이 무참하게 으스러지는 소리였다. 필용경의 입을 타고 흐르는 혈선 하나가 늘었다. 저도 모르게 깨문 아랫입술이 터진 것이다. 순식간에 셋이나 되는 수하를 잃었다. 그럼에도 목표한 대상에게 찰과상조차 입히지 못했다. 여태껏 수많은 임무를 수행한 필용경으로서는 상상치 못했던 결과였다. 이대로라면 무림맹 인사들의 지원은 커녕 적풍삼조가 도착하기도 전에 전멸할 판이었다. 아랫입술을 누르고 있던 이빨이 들리며 필용경의 입술이 달싹였다. 수하들에게 전음을 보내는 것이다. [목표를 바꾼다. 백발귀마를 노렷!] 필용경이 전음을 발하자마자 세 개의 나무뿌리가 들쳐졌다. 굳건하게 뿌리를 박고 있었으니 설마 은신자가 있으리라 생각지 못했던 곳이었다. 나무 둥치에서 튀어나온 황의인 세 명은 종극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백발귀마를 공격하기에 앞서 그를 묶어 두려는 것이다.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두껍게 쌓인 낙엽 밑에서 또 다른 세 명의 황의인이 튀어 올랐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본래의 척살대상인 백발귀마였다. 염마의 가공할 무위를 잘 알고 있는 그들의 공격은 날카롭기만 했다. 그야말로 생명을 도외시한 필살의 일격이랄 수 있었다. 자신의 죽음을 방패로 시간을 만들고 있는 동료를 염두에 둔 공격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은 애석하게도 선주혁에게 조금도 전달되지 않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목표의 전환으로 인한 놀라움조차 선사하지 못했다. 느릿하게 튀어 나와 태평하게 비수를 찔러오는 행태는 선주혁에게 의아한 느낌만을 전해왔을 뿐이다. '이것들이 단체로 퍼포…… 머시기를 하나?' 예전에 대학로 등지를 다니다보면 행위예술을 한다면서 혼자 느릿느릿 움직이는 것을 본 적이 있는 선주혁이었다. 마치 물속을 거니는 듯하기도 하고 슬로우 모션 흉내를 내는 것 같기도 했다. 적풍칠조원들의 움직임은 선주혁에게 있더 딱 퍼포먼스를 연상케 했다. 다급하기 이를 데 없는 표정. 결연한 의지가 확연히 엿보이는 시선에도 불구하고 정작 동작은 느리기 한량없었던 것이다. 표정과 행동이 완벽하게 따로 노는 꼴을 보자니 웃음이 터져나올 정도였다. 선주혁은 가볍게 땅을 굴러 신형을 움직였다. 무림의 일절이랄 수 있는 신투의 신법이 전개되고 그의 신형은 너무나도 쉽게 세 개의 비수를 피해냈다. 급습을 가했던 세 명의 적풍조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세 명이란 협공에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숫자다. 다시 말해 적풍조원으로서는 전력을 기울였던 한수라는 것이다. 한데 백발귀마는 입가에 미소를 띄운 채 여유롭기 그지없게 자신들의 공격을 피했다. 완벽을 자부하는 합격술이라지만 인간이 전개하는 만큼 각각의 공격과 공격 사이에 미세한 간극이 존재하기 마련. 백발귀마는 그 간극이 마치 영원이나 되는 시간처럼 유유자적하게 벗어나 버린 것이다. '고수!' 세 명의 적풍조원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일격에 죽일 수는 없더라도 치명적인 부상을 입힐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아니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이제 채 반 호흡도 지나기 전에 염마를 향해 달려든 동료들은 모두 죽음을 맞이할 것이기에. 한데 백발귀마의 무공이 예상했던 것을 넘어섰다. 정확히 말하자면 한참을 상회하는 무위였다. 세 명은 동시에 하나의 결론을 내렸다. 오랜 세월을 함께 해온 그들 사이에는 전음조차 필요치 않았다. 찰나의 순간 허공에 얽힌 시선이 모든 것을 설명했다. 동귀어진. 선주혁을 급습한 세 명의 적풍조원이 내린 결론이었다. 결의를 다진 세 명이 몸을 돌리는 사이 선주혁은 약간의 혼란을 느꼈다. 아무리 봐도 눈앞의 사람들이 자신에게 예술적 감흥을 전달하기 위한 공연을 한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던 것이다.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진득한 살기가 송곳처럼 날카로운 예기를 머금은 상태. 결국 저들은 진심으로 자신의 죽음을 원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내가…… 그만큼 빨라졌다는 이야긴가?' 선주혁은 그제야 자신의 무공이 이전에 비해 월등히 향상되었음을 체감하기 시작했다. 비약적인 내력의 증가, 그리고 북두폭렬장의 가공할 속도에 익숙해져 타인의 동작에서 속도감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에 이른 것이다. 서로간의 결의를 확인한 세 명의 적풍조원이 다시금 필살의 절기를 사용해 백발귀마의 목숨을 노렸다. 상중하, 셋으로 나눠 공격해 들어오는 적풍조원들. 이미 자신의 능력에 대해 막연하지만 자신감을 가진 선주혁에게는 필살의 각오를 다진 적풍조원들의 공격은 무력하게만 느껴졌다. 선주혁은 앞서와 달리 암영풍을 전개하지 않고 세 명의 공격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이른바 북두폭렬장의 수법을 이용해 자신의 요혈을 노리고 날아드는 비수 하나하나의 공세를 해소하는 것이다. 퍼어억. 여운을 남기는 듯한 둔탁한 음향 끝에 세 명의 적풍조는 얼굴을 경악으로 채우며 뒤쪽으로 분분히 물러섰다. 놀랍게도 백발귀마는 동귀어진을 노리며 달려든 자신들 셋의 공세를 가공할 속도의 수법을 통해 일순 해소해버린 것이다. 퍼억, 퍽, 퍽! 연속되는 소음 끝에 필용경의 동공이 있는대로 확장되었다. 뒤이어 들렸던 음향은 염마가 수하 셋을 고기덩어리로 만드는 음향이었다. 결국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 채 애꿎은 수하 셋만을 잃은 셈이었다. 필용경은 중압감과 함께 또 다른 선택을 해야만 했다. 백발귀마는 예측한 바를 한참이나 웃도는 절정의 고수였다. 이미 염마를 상대로 시간을 지연해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내려진 상태. 예상을 뛰어넘는 실력을 지녔다 해도 필용경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주어지지 않았다. "전원 공격!" 다급함을 고스란히 드러낸 필용경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딱히 대상을 언급한 것은 아니었지만 적풍조원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전원공격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염마를 상대로 총공격을 감행하는 것은 자멸, 그것도 몰살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적풍조원은 없었다. 결국 조장, 필용경의 명령은 백발귀마를 향한 것이리라. 나무의 위, 흙바닥, 낙엽 밑 등의 각지에서 나머지 적풍조원 모두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드러냈다 싶은 그 순간 아홉 명에 달하는 적풍조원의 나머지 모두가 선주혁을 향해 총공세를 퍼부었다. 명령을 내린 필용경은 염마의 앞을 가로막았다. 염마가 백발귀마를 돕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적풍조에게 필요한 것은 찰나의 시간. 스스로 분사하는 한이 있더라도 시긴을 벌 작정이었다. 하짐나 필용경의 우려와는 달리 염마는 백발귀마의 방수를 자처하지 않았다. 그는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백발귀마 쪽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저, 정말 염마와 백발귀마는 한 편이 아니었단 말인가? 내 실수로 수하들의 애꿎은 목숨만 잃게 한 것이란 말인가?' 필용경의 혼란은 현실과 달랐다. 염마는 적풍조를 상대하는 백발귀마의 실력을 보고 싶었을 분이었다. 무림맹의 적풍조는 흑도의 거마들만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 혁혁하다 할 만큼 낳은 수의 흑도 고수들이 적풍조의 이름으로 행해진 암살에 죽어갔다. 단목지민은 성화령을 동원해서까지 백발귀마를 포섭하라고 했다. 나이에 비해 범상치 않은 무공을 지니고 있음은 짐작할 수 있었으나 과연 그 정도까지나 되는지 종극으로서는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다짜고짜 선주혁을 돕고자 나서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실력을 확인하고자 했다. 도우려 든다면 눈앞의 흑의사내가 자신을 방해할 수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박하고, 깊이는 없지만, 효율적이고 쾌속한 신법이로고. 저것이 신투의 운신술인 건가?' 상하좌우를 모두 점하고 달려드는 적풍조원들 사이를 무인지경으로 헤치고 다니는 선주혁의 신법을 보고 종극이 떠올린 생각이었다. 주법으로만 따진다면 효용성과 속도에 있어서 가히 따를 자가 없을 듯했다. 하지만 절정고수 앞에서 보법 만으로 큰 효용을 나타내기는 어려워 보였다. 적풍조원들이 자신을 의식해 속전속결로 밀어붙이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은 여유는 없었으리라. 진중한 공격으로 방위를 점하고 운신의 폭을 좁히는 공격을 감행한다면 신투의 보법은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종극의 생각이었다. 결국 단목지민이 백발귀마를 천거한 것은 신투의 보법을 익혔기 때문은 아닐 터. 종극은 눈앞의 흑의사내, 필용경을 무시한 채 선주혁이 적풍조를 상대하는 것에 더욱 집중했다. 몇 번에 걸쳐 백바루기마를 공격하던 적풍조원들은 우려와던 바와는 달리 염마가 나서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재빠른 눈빛의 교환을 통해 그들은 작전을 바꿨다. 종극의 머릿속에 떠올렸던 것처럼 기이한 신법으로 자신들의 공세를 피해내는 선주혁을 한 방향으로 몰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종극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적풍조의 명성은 헛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들은 자신보다 뛰어난 고수를 어떻게 합공해야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제 죽는 것을 도외시하고 달려들던 아홉이 체계적인 진형을 갖추고 공격해 들어오는 모습에 선주혁도 더 이상 여유를 부릴 수만은 없었다. 한 명씩 따로 봤을 때는 여전히 느린 모습이었지만 하나의 손으로 아홉의 손을 막아야 하는 형편이었다. 암영풍의 전개를 멈춘 선주혁. 그는 굳건히 땅에 발을 디딘 채 날아오는 비수를 향해 분주히 손을 놀렸다. 다수의 적을 상대할 때 북두폭렬장의 효율에 대해 익히 알고 있는 선주혁. 그는 한순간 네 번에 걸쳐 장을 뻗어냈다. 퍼어억. 무엇인가 번쩍한다고 느끼는 순간 적풍조원 넷이 거대한 벽에 부딪친 것처럼 뒤쪽으로 튕겨졌다. 연이어 세 걸음을 뒷걸음질 쳐 거리를 확보한 선주혁의 장력이 다시 한 번 발출되었다. 또다시 동시에 뒤로 튕겨지는 적풍조원 넷. 나머지 한 명은 넋을 잃고 서서 감히 공격할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사, 사술인가……?" 스스로 알 수 없는 현상은 무조건 사술로 치부해버리는 정도문파 특유의 반응은 선주혁에게 이제 낯선 것이 아니었다. "저, 저럴 수가……!" 염마의 움직임을 경계하며 수하들의 상황을 살피던 필용경 역시 떨리는 목소리를 내야만 했다. 눈 깜짝할 사이 나뒹군 수하 여덟의 안색은 창백했다. 가볍지 않은 내상을 입었으리라. 필용경은 몰랐다. 그나마 선주혁이 최심장을 사용하지 않았기에 이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럼에도 필용경은 경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작해야 약관을 막 넘어선 애송이에 불과했다. 제 어미 뱃속에서부터 무공을 익혔다 해도 이런 가공할 무위를 선보일 수는 없었다. 다 쓰러져 가는 곤륜의 제자라고 했거늘 곤륜에 어찌 저런 무공이 있단 말인가? 방금 전 백발귀마가 사용한 쾌속한 장법은 필용경의 안력을 벗어나 있었다. 처음 한두 번 까지는 그나마 포착해볼 수 있었으나 나머지는 그의 동체시력이 가지는 한계를 벗어난 것이다. 염마가 백발귀마를 돕지 않는다는 사실에 혼란과 후회를 느끼면서도 크게 고무되었던 필용경이었다. 염마가 방수로 나서지 않는다면 적풍조의 능력으로 백발귀마를 척살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데 필용경의 확신은 무참히 무너졌다. 백발귀마는 염마에 뒤지지 않을 가공할 무위를 선보이고 있는 것이다. 한 없이 백발귀마에 놀라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소문에 따른 백발귀마의 잔혹함을 듣자면 부상을 입은 수하들 목숨은 이제 끝이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눈꼽만큼의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적풍칠조가 이렇게 몰살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었다. 필용경은 이를 악물었다. 검병을 쥔 그의 손에 푸르스름한 힘줄이 불끈 솟구쳤다. "타합!" 낭랑한 기합성과 함께 땅을 박차는 필용경. 빛살을 가를 듯한 쾌검이 전개되었다. 선주혁은 우보를 뒤쪽으로 당겨 몸을 비틀었다. 그 정도의 가벼운 움직임만으로 필용경의 검은 헛되이 허공을 찔렀다. 순간 지면과 수평으로 그어지는 검. 목표를 상실한 검극이 커다란 호를 그려냈다. 선주혁은 곧추세운 손가락을 내밀어 필용경의 검신을 잡아챘다. 자칫 손가락 모두가 잘릴지 모를 위험천만의 수법. 이는 필용경이 휘두르는 검의 속도가 별반 빠르지 않다고 느끼는 선주혁이었기에 가능했던 한 수였다. 필용경의 안색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백발귀마의 손가락에 잡힌 검이 꼼짝도 안 하는 것이다. "익!" 치욕을 느낀 필용경은 이를 악물고 검을 비틀었다. 하지만 요지부통이었다. 필용경의 눈에서 진득한 살기가 쏟아졌다. 수세에 몰린 자의 억울한 눈빛과는 사뭇 달랐다. 카앙. 뇌속을 파고들 정도의 날카로운 금속성과 함께 필용경의 검이 산산조각이 났다. 허공으로 흩어지는 날카로운 쇳조각들. 그것은 놀랍게도 군집을 형성해 선주혁을 향해 날아갔다. 상대의 검을 잡은 후 완전히 마음을 놓고 있던 선주혁은 상대가 미처 이런 수법을 쓰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지나친 안도감에 피할 여유를 갖지 못한 그는 신형을 뒤쪽으로 날렸다. 하지만 검의 파편은 선주혁이 움직이는 속도를 능가했다. 여태껏 느리기만 했던 공격과는 차원이 달랐던 것이다. 한 순간 넝마가 되어 찢어지는 선주혁의 의복. 수많은 검의 파편이 그의 몸에 틀어박혔던 것이다. "파검산!" 시종일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종극의 입에서 터져나온 외침이었다. 그는 어느새 선주혁의 옆에 나타나 있었다. 마치 원래부터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것처럼. "괜찮은가?" 선주혁의 안위를 살피는 종극의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잡혔다. 설마하니 적풍조원이 파검산을 전개하리라고는 경험이 풍부한 종극조차 예상하지 못했다. 파검산은 오랜 세월 이전 흑살이라 불리던 살수들이 자신보다 무공이 높은 고수에게 사용하던 악랄한 수법이었다. 전신의 내력을 집중해 부서지는 검의 파편에 실어 공격하는 것이다. 공격의 범위가 넓고 파편의 수가 많았고 무엇보다 빛살을 무색케 하는 가공할 속도로 인해 방어가 불가능하다고 전해진다. 검의 파편은 상당수가 요혈에 박히기 마련. 파검산의 수법에 설사 목숨을 건진다해도 폐인이 되거나 더 이상 무인으로서 살아가기 힘들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만큼 지독하고 악질적인 수법이었던 것이다. 보통의 정도 무인들은 승패가 결정지어지면 더 이상 잔혹한 공격을 감행하지 않는다. 자신이 패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깨끗이 패배를 인정하고 상대의 처우에 모든 것을 맡긴다. 그렇기에 적풍조원이 이토록 지독한 수법을 사용할 것이라 종극이 예상치 못했고, 결국 자신의 목하에서 선주혁을 잃는 결과를 만들었다. 파검산의 속도는 소문 이상이어서 종극이 미처 손을 쓸 틈이 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지 못했다는 자괴감은 종극을 분노케 했다. 일순 종극의 노구가 꼿꼿이 바로 서며 보통보다 큰 키가 확연히 드러났다. 더불어 패도적인 기운이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자 방금 전까지의 노인과는 완연히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파검산을 전개하고 탈진해버린 필용경은 그런 종극을 확인하고는 두 눈을 감았다. 염마가 분노한 이상 저와 같은 무형지기만으로도 지금의 자신은 죽일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죽음을 맞이하는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맺혀있었다. 파검산이라는 금지된 수법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목표한 바를 이뤘다. 이는 곧 수하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오늘로서 적풍칠조는 사라질 테지만 실패를 모르는 적풍조의 명성은 계속되리라. 그 위대한 업적으로 무림맹의 지위는 굳건히 이어지리라. "괜찮을리가 있어요?" "…………!" 감겼던 필용경의 눈이 번쩍 떠졌다. 음성. 백여 세를 훌쩍 넘긴 염마의 음성은 결코 아니었다. 그렇다면 백발귀마의 것임에 틀림없는 그 음성에는 약간의 짜증이 묻어 있을 뿐 죽음의 냄새가 나질 않았다. 수많은 검의 파편이 요혈을 파고 들어간 자의 음성이 아니었던 것이다. 필용경은 눈을 떠야만 했다. 반드시 확인을 해야만 했다. 이윽고 그의 눈동자에 짙은 절망의 색채가 드리워졌다. "이 옷 좀 보십쇼. 걸레로도 못 쓰겠잖아요." 사실상 파검산의 놀라운 위력은 금강불괴를 연상시키는 선주혁이라 해도 완벽하게 멀쩡하기는 힘들었다. 초절정 고수들의 호신강기를 뚫고 치명상을 입히는 파검산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주혁은 있는 힘을 다해 신형을 뒤로 뽑았고 검의 파편이 피부를 뚫으려는 순간 같은 방향으로 몸이 움직여 그 위력이 반감되어 버린 것이다. 이에 증진된 내력으로 비할 데 없이 강해져가는 선주혁은 의복만 버렸을 뿐 눈 눈곱만치도 다친 곳 없이 멀쩡할 수 있었다. "몸은……? 몸은 괜찮은가?" 종극 역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선주혁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파검산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멀쩡하다는 사실이 더욱 이상한 것이다. "옷 좀 보라니까요. 이게 얼마나 비싼 건데……" 선주혁이 투덜대고 있을 때, 필용경이 넋 나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자신이 아니면 듣지 못할 정도의 음성이었다. "금강불괴……? 맹에 알려야 해. 저자로 인해 무림맹은……" 필용경은 마른 침을 삼켰다. 어떻게 해서든 이 자리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무림맹은 큰 오산을 하고 있었다. 백발귀마는 염마와 동급이나 그 이상으로 위험한 인물이었다. 고작 적풍조 두 조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위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을 모르고 있는 한 무림맹은 큰 위험에 처할 것이다. 적을 모르고 적을 상대하는 것은 무림에서는 자멸을 위한 지금길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몸이 따라주질 않았다. 파검산을 전개한 후유증 탓이었다. 극도로 소모된 진기로 인해 탈진상태에 접어든 것이었다. '하늘은 과연 무림맹을 버리시는 건가……?' 멀쩡한 몸으로도 염마의 손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부상당한 채 누워 있는 아홉 명의 수하들 역시 몰살당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자네…… 정말 괜찮은 건가? 파검산에 당하고도 멀쩡한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네." 종극은 선주혁의 말짱한 모습을 눈으로 확인해놓고도 좀처럼 믿지 못하는 중이었다. "파검산?" 선주혁이 고개르르 갸웃거리자 종극은 파검산에 대해 간략히 설명했다. 설명을 다 들은 선주혁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무림맹의 인물들, 결국 나쁜 놈들은 아니라기에 자신은 나름대로 손속에 사정을 봐줬다. 상대하는 자들의 무공수위가 자신보다 한참 낮기에 무공의 차이만 보여주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진짜 살인마나 마두도 아닌데 괜스레 많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을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한데 소위 말하는 정도의 무인이라는 자가 마교에서 손꼽히는 인사인 염마 종극조차 인상을 찌푸릴 만한 지독한 수법으로 자신의 목숨을 노렸다. 선주혁은 다시 한 번 무림의 생리를 깨달으며 내심 치를 떨었다. 실력이 조금 늘었다고 해서 여유를 부리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에 대해서도 돌아봤다. 정도문파라는 곳에서는 자신을 공적으로 몰아세우고 목숨을 빼앗기 위해서 안달이 나있는 상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긴장감을 상실한 상태였다. 사고가 거기에까지 이르자 선주혁은 공 노인을 떠올릴 수 있었다. 자신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의 목숨을 버린 공 노인. 공 노인을 무참히 죽인 것은 바로 무림맹의 무사들이 아니던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진득한 살심이 피어올랐다. 소설을 읽으며 답답하게만 여겼던 사형조차 적을 상대할 때는 가차없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가. 한데 자신이 너그러움을 빙자한 어리석음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자식들이……! 날 물로 봤다는 거지?"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갑작스럽게 기도가 변한 선주혁을 보며 종극은 흠칫 놀랐다. 처음에는 그저 빠르기만 한 신법만을 보여준 선주혁이었다. 연이어 엄청난 속도의 장법을 펼쳐 보이더니, 파검산에 적중되고도 멀쩡한 기이한 현상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지금은 자신조차 위협을 느낄만한 기도를 뿜어내는 것이다. 이는 눈앞의 청년이 가진 내력이 최소한 자신에게 필적한다는 뜻이었다. '이, 이것인가! 민아가 성화령을 동원해서까지 이 녀석을 포섭해야한다는 이유가?' 종극은 작은 충격을 받아야만 했다. 어찌 갓 약관을 넘긴 애송이가 자신에게 필적하는 내공을 소유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어릴 때부터 영약을 밥 먹듯이 먹고 천하의 신공을 익혔다고 해도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눈앞에 벌어지는 일을 마냥 부정할 수는 없었다. 결국 단목지민이 성화령을 동원하라는 근원적인 이유도 모른 채 종극 역시 반드시 선주혁을 교로 포섭해야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향후의 발전 가능성을 고려할 때, 그와 같은 인물이 적으로 있다는 것은 일월신교에 있어 크나큰 위협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선주혁이 진득한 살기를 뿜어내며 필용경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몸에서 피어오른 막대한 기운은 종극조차 답답함을 느낄 정도였다. 탈진한 상태의 필용경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기운. "쿨럭!" 결국 필용경은 한 사발은 족히 됨직한 피를 토해내고서야 간신히 기혈이 순환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이 정도까지였단 말인가?' 무형지기로 사람에게 해를 끼칠 정도라면 소름끼치는 내력을 지녔다는 증거였다. '분명 명유신군에게 죽음 직전까지 몰렸다는 보고를 들었건만……' 명유신군 정도라면 적풍조의 한 개조라면 척살이 가능했다. 한데 그에게 밀리다가 최후의 한 수로 간신히 목숨을 부지했다던 백발귀마가 더 뛰어난 무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명유신군을 죽인 후 지금까지의 짧은 기간 동안 무공이 발전해 지금에 이르렀다는 가설은 더욱 말이 안 되는 일. 유일한 가능성이라면 그가 중인들 앞에서 자신의 실력을 감추고 있었다는 것 뿐이었다. 대담하기 이를 데 없게도 도신의 후예를 가장해 무림맹 총단인 십전성이 있는 호남성을 활보했을 정도의 인물이니 그러고도 남을 법했다. 필용경은 무공도 무공이거니와 백발귀마의 음흉함에 치를 떨어야만 했다. 더불어 이와 같은 사실을 무림맹에 알려 경고하지 못하는 게 천추의 한이 되었다. 필용경이 좌절하는 그 순간,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한 자루의 청강장검이 선주혁의 미간을 향해 날아들었다. "흥!" 가벼운 코웃음 소리를 내며 선주혁이 가볍게 검을 피해냈다. "아직도 남은 암수가 있었던 거냐?" 뒤쪽으로 물러나 상대를 확인하며 호통을 지르는 선주혁. 사고가 공 노인에게까지 이르자 더없이 분노를 느끼는 그였다. 이제야말로 공격이 끝났다고 생각한 그 순간, 또 다른 암습이 다가오니 말로만 정이니 협이니를 내세우는 자들이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 사형!" 필용경의 반가운 외침. "허억…… 허억…… 목소리를 들으니…… 허억…… 죽을 정도는 아닌가보군." 선주혁과의 거리를 확보한 필용경의 사형. 적풍삼조의 조장을 맡고 있는 함재의가 짧은 미소를 던지며 말했다. 그의 뒤쪽으로 스물에 달하는 적풍삼조원들이 도열해 서 있었다. 모두가 먼지를 가득 뒤집어 쓴 채였다. 땀과 먼지로 뒤범벅이 된 그들 모두가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필용경은 느낄 수 있었다. 이곳에 최단시간 내에 도착하기 위해 무리를 했을 것이다. 진기의 극심한 소모도 마다하지 않고 달렸으리라.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빨리 도착할 수 있을리가 없었다. 필용경은 사형이 고마웠다. 목숨을 건져서가 아니었다. 이제는 백발귀마의 위험성을 알릴 방편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한편 사제인 필용경의 위태로운 상황을 보고 우선적으로 뛰어들긴 했지만 함재의는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한눈에 파악했다. 여덟 명의 적풍조원이 신음성을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필용경 역시 창백한 안색으로 간신히 서 있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함재의의 시선은 백발귀마의 뒤쪽에 서 있는 염마를 경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 모든 게 염마의 소행이라 단정지은 것이다. 그는 애써 호흡을 고르며 진기를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이제는 사제를 대신해 자신과 자신의 수하들이 염마를 상대할 순간이었다. 함재의가 내공을 있는대로 끌어올리는 순간, 요란한 소리가 그의 귀를 파고들었다. "호오……! 역시 적풍조군요. 벌써 도착해 한바탕 벌이다니……" 과장되고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함재의의 긴장을 흔들었다. 좌중의 인원들은 한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공자! 대공자까지……?" 함재의는 의아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무림맹주의 대제자와 이제자인 풍초양과 혁력기가 도착한 것이다. 자신이 이끄는 적풍삼조가 지금 도착했음을 감안하면 무림맹이 예상을 뛰어넘는 기민한 반응을 보인 것이다. "제 말이 맞죠? 적풍조만으로는 천마맹의 염 나으리를 상대하기 버겁다니까요." 눈을 반개한 채 졸린 듯 말하는 혁련기로 인해 함재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 발언이라 해도 적풍조의 자부심에 흠집을 내는 발언이었기 때문이다. 적풍조의 훈련은 맹주의 직접적인 지시에 의해 이뤄졌다. 따라서 적풍조 전원은 비록 호칭을 할 수 없다고는 해도 내심 무림맹주 한조백을 사부로 여기고 있었다. 이 때문에 맹주의 직전제자들을 보면 아렉 모르게 자격지심을 갖기 마련이었고, 혁련기의 말은 비수가 되어 틀어박힐 수밖에 없었다. "너희도……" 일순간 오십여 명의 인원으로 불어난 무림맹측을 향해 선주혁이 손가락을 들어 가리켰다. "무림맹의 떨거지들이지?" 일순의 정적. 새파랗게 젊은 애송이가 망발을 한다고 생각했던 무림맹의 인사들은 곧 청년, 아마도 백발귀마일 그를 다시 봐야 했다. 드넓은 공간을 가득 채운 엄청난 무형지기의 발원이 염마가 아니라 백발귀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기운만으로도 백발귀마가 소문 이상의 고수라는 것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흥! 어린 놈이 하늘 높은 줄 모르는군." 자존심이 높기로 명성이 자자한 질풍검룡 풍초양이 응수했다. "인정한 거겠지? 무림맹 떨거지들이라는 거?" 선주혁이 눈썹 끝을 하늘로 치켜세우며 물었다. "하아! 이거야 원! 백발귀마의 무공은 소문보다 높은 것이 확실한데, 머리는 소문과 달리 멍청하기 짝이 없구나. 적풍조와 함께 하는 일행이 무림맹의 영웅이 아니라면 또 누구겠나?" 혁련기가 피식 미소를 지으며 선주혁을 비웃었다. "공 노인의 죽음에 대한 대가를 치러라!" 노기를 가득 머금은 선주혁의 음성이었다. "공 노인?" 혁련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놈을 표국에서 빼돌린 늙은 쟁자수 놈을 말하는 거냐?" "그 분을 모욕하지 마라!" 선주혁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흥! 무림공적을 돕는 자를 처단하는 일은 당연지사! 그 늙은 놈의 목을 저자에 내다걸지 않은 것을 고맙게 여겨라." 풍초양이 호통을 치듯 말했다. 순간 분노한 선주혁의 두 눈이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그것을 본 함재의가 놀라 외쳤다. "자하신공?" 함재의의 외침을 들은 적풍삼조 뒤쪽의 구파일방의 명숙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럴 리가?" "어찌 곤륜의 반도가 화산파의 무공을……?" 그들이 술렁이는 사이 선주혁의 두 눈의 자광은 동공에 갈무리되었고 소매 밖으로 드러난 손은 자색으로 빛을 내기 시작했다. 혈마 자광기가 운용되어 어깨까지 보호를 하는 것이다. "이제…… 죽어라!" 선주혁이 한 걸음을 성큼 내딛었다. 이어 극한에 다다른 속도로 쌍장이 교차되어 뻗어졌다. 얼마 전 체득한 북두진공참이 전개된 것이다. 밤하늘을 가르는 섬전을 무색케 하는 속도로 선주혁의 양손이 교차되는 순간이었다. 촤아아아아! 소나기가 쏟아지는 듯한 소리와 더불어 적풍삼조원들이 가장 빨리 반응했다. "종후!" 놀라움과 안타까운 음성의 외침. 종후라 불린 자의 몸이 반으로 갈라지고 있었다. 두 눈을 부릅뜨고 반은 좌측으로, 반은 우측으로 갈라지는 동료의 죽음은 적풍조원들에게 있어서 충격이었다. 언제 어느 때 장력이 다가와 동료의 몸을 갈랐는지조차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양강한 장력이든 음유한 장력이든 속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발출과 동시에 목표에 도착하는 동시성이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즉 장에서 장력이 발출되어 대상에 도착해 가격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한데 방금전 백발귀마의 장력은 그와 같은 상식을 완전히 무시했다. 발출과 동시에 그 어떤 장력을 보지도, 느끼지도 못했건만 종후의 몸을 반으로 갈라버린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백발귀마의 연속된 공격이 경력을 실어 상대를 가격하는 게 아니라 마치 날카로운 예기를 머금은 무기를 사용하는 것 마냥 잘라내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마냥 놀라움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탁진!" 백발귀마가 다시 한 번 쌍장을 교차하자 이번에는 탁진이라 불리는 적풍조원 하나가 다시 반으로 갈라졌던 것이다. 하나의 신체가 수직으로 갈라지자 엄청난 양의 피가 뿜어졌다. 붉디붉은 선혈이 솟구치는 광경은 수많은 격전을 치룬 무인들에게도 끔찍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했다. 상대가 기괴한 수법을 사용하고 있다지만 두려움을 느낄 그들이 아니었다. 백발귀마의 추호의 망설임도 없는 잔인한 수법에 적풍삼조원들은 이를 갈아붙였다. 그들의 동료의 죽음에 외려 분노하는 것이다. 동작이 빠른 세 명이 검을 뽑아들고 신형을 날렸다. 백발귀마의 쌍수가 다시 날카롭게 교차되었다. 이번에는 장의 교차가 비스듬했다. "크아아아악!" "아악!" "크허헉!" 동시에 신형을 박찼던 세 명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 소리가 터져나왔다. 상반신과 하반신이 분리되었으니 처절한 비명이 터져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일장으로 동시에 세 명의 허리를 양단낸 백발귀마의 무공은 비단 적풍조원들에게만 충격을 주는 것이 아니었다. 무림맹의 인사들은 물론 염마 종극까지도 두 눈을 휘둥그레 떠야만 했다. 종극은 무림맹 인사들과는 달리 선주혁이 끌어올린 내공이 혈마의 것임을 유추했고, 그가 과거 무림을 공포로 몰고갔던 자광수로 적풍조원을 상대하리라 예측했다. 한데 난데없는 동작을 취하더니 보지도, 듣지도 못한 장력을 발출, 적풍조원들을 참살하고 있었다. 그가 발출한 장력은 자신이 상대한다 해도 까다롭기 그지없어 보였다. '저놈! 진짜 물건이로구나!' 선주혁의 등뒤를 바라보는 종극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한편 선주혁은 다시 한 번 북두진공참을 전개했다. 이번에는 무려 여섯 명의 적풍조원들의 허리가 잘렸다. 반항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적풍조원들을 무참히 죽이면서도 선주혁은 조금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지금 행동은 공 노인에 대한 복수라는 의식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종극이 선주혁을 더욱 탐내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독하지 않으면 장부가 아니라는 것이 종극의 신조였기 때문이다. "흩어져! 흩어지라고!" 함재의의 다급한 외침 속에서 남아있는 적풍조원들은 반으로 갈라진 동료들의 시신에서 멀어지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그들의 움직임보다 선주혁의 북두진공참이 더욱 빨랐다. 선주혁의 쌍장이 교차되고 소리도 없이 발출된 기이한 장력은 남은 적풍조원을 모두 반으로 갈라버렸다. 개중 몇몇은 선주혁이 손을 내밀기 전 검을 수직으로 세워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운에 대처해보고자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애꿎은 청강장검은 주인된 자와 함께 반으로 잘리는 운명을 맞았을 뿐이었다. "마, 말도 안돼! 이럴 수는 없어!" 함재의도 필용경도 눈앞의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아무리 정면승부보다 암습에 능한 적풍조원이라지만 개개인의 능력이 떨어지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따라서 적풍조원의 능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두 사람은 상대방의 수법을 간파하기도 전에 전멸을 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자신들의 손에 죽어간 흑도 거마들의 명성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충격을 받은 것은 두 명의 적풍조 조장들만이 아니었다. 사부를 통해 적풍조원들의 능력의 비범함을 익히 들어 알고 있는 함조백의 두 제자, 풍초양과 혁련기 또한 놀라는 중이었다. 특히 자신과 비슷한 나이 또래에서 무공을 비할 자가 없다고 자신해왔던 풍초양의 충격은 더했다. 설령 직접 적풍조를 상대한다 해도 이토록 짧은 시간에 전멸시킬 자신이 없었다. 한데 자신보다 한참이나 어린 애송이가 아무렇지도 않게 휘두른 손짓 몇 번에 적풍조원이 몰살당하는 장면을 보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도 잠시뿐. 백발귀마에게 일말의 두려움을 느꼈다는 사실에 풍초양은 스스로 분노했다. 천하제일의 위를 넘보는 자신이 어찌 애송이에게 두려움을 느낀단 말인가? 사제와 힘을 합친다면 염마도 상대할 수 있으리라 확신하고 이 자리에 달려오지 않았던가? 수치심은 곧 분노로 분노는 곧 호승심으로 이어졌다. 풍초양의 손이 빠르게 검병을 잡아갔다. 하지만 그의 손은 검을 뽑아들 수가 없었다. 사제인 혁련기가 손을 잡아 누르는 것이다. "…………?" "우린 염마를 견제해야죠."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표정으로 사형을 만류하는 혁련기였다. 풍초양이 검미를 하늘로 치켜세우며 혁련기를 뿌리치려 할 때였다. 파아앙. 압축된 공기가 일시 간 터져 나오는 굉음과 더불어 하나의 벽공장력이 백발귀마를 향해 쇄도해 들어갔다. 점창파의 옥영진인이 펼쳐낸 일 장이었다. 장력의 주변으로 흩날리는 메마른 풀잎과 흙먼지가 가득한 것으로 미루어 얼마만큼의 위력이 담겨져 있는지 익히 짐작이 갔다. 백발귀마의 기괴한 수법에 잠시 넋을 잃고 있었기에 적풍조의 몰살을 가져왔다고 생각한 옥영진인. 그는 자신의 실태를 만회하려는 듯 위맹한 장력으로 백발귀마를 격살할 기세였다. 가볍고 표홀함을 특징으로 하는 여타의 점창파 무공과는 달리 쾌속하고 강맹한 오라경연장은 간파하기 힘든 난해한 경력을 담아 선주혁을 향했다. 선주혁은 망설이지 않고 장력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쿠아아아앙. 자욱한 흙먼지가 피어오름과 동시에 옥영진인의 신형이 흔들렸다. 뻗어낸 장력의 반탄력 때문이었다. 창백하게 질린 옥영진인이 한걸음 물러서 반탄력을 해소하자 무림맹의 인사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백발귀마가 괴이한 수법을 사용할 뿐만 아니라 내공까지도 심후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들의 놀라움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피어오른 흙먼지를 헤치고 백발귀마의 신형이 튀어나온 것이다. 시야를 확보한 선주혁의 양 손바닥 사이에 작은 구체가 형성이 되고 그의 손바닥을 떠나 크기를 확대하며 옥영진인을 향해 날아들었다. "명유지력!" 누군가의 놀란 외침에 청수한 용모의 한 중년 도사가 옥영진인의 앞을 가로 막았다. 진기를 수습하는 옥영진인이 가공할 위력을 담은 명유지력을 감당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콰아아아앙. 명유지력과 중년 도사의 손에서 막 뻗어 나온 장력이 충돌을 하자 선주혁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상대의 공격을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나 익숙한 기운에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였다. 옥영진인의 앞을 가로막은 도사는 청성파의 덕운 진인. 그가 전개한 수법은 선주혁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최심장이었던 것이다. '이것도 에네르기파처럼 펼칠 수 있는 거였어?' 선주혁이 고개를 갸웃거린 이유였다. 그동안 최심장은 상대를 직접 가격해야한다고 생각해온 것이다. 너무나 경직된 사고로 무공을 접해왔다고 생각한 선주혁은 스스로의 어리석음에 인상을 썼다. 그것은 덕운 진인으로 하여금 중대한 실수를 하게끔 만들었다. 최심장의 위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덕운 진인이었다. 최심장은 상대의 내공 고하에 상관없이 혈맥에 충격을 가한다. 내공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 충격을 쉽게 완화하겠지만 설마하니 갓 약관을 벗어난 자가 자신을 압도하는 내력을 지녔을 것이라 짐작키는 힘들었다. 따라서 덕운 진인은 선주혁이 인상을 찌푸리는 이유를 최심장에서 비롯된 충격을 해소하기 위함이라 생각했고 명유지력의 충격에 비틀거리면서도 언성을 높여 소리를 지르게끔 만들었다. "지……금이요! 어서 저 자를!: 들끓는 진기를 가라앉히기에 급급한 덕운 진인의 외침에 옥영 진인의 사형인 옥무 진인이 신형을 날렸다. 단숨에 백발귀마의 목숨을 빼앗을 작정인 듯 그의 손에서 전개되는 것은 점창 최고의 비전인 사일검법이었다. 해를 쏘아 떨어뜨릴 기세로 선주혁의 심장을 향해 날아드는 옥무진인의 검. 가벼움 속에서 쾌속함이 절로 살아나고 표홀함 속에서 강맹함이 발현되니 가히 점창 최고의 검공이라기에 손색이 없었다. 뿌옇게 피어오른 검기가 사일검법에 담겨진 위력을 짐작케 하니 최심장의 효용을 잘 알고 있는 구파일방의 명숙들은 백발귀마의 죽음을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믿음은 단발의 폭음과 함께 여지없이 무너졌다. 맹렬한 기세로 백발귀마를 찔러가던 옥무 진인이 입에서 혈전을 쏘아 내며 나아가던 기세 그대로 뒤로 튕겨져 나온 것이다. 체구가 큰 옥무 진인의 등이 가려 백발귀마가 무슨 수법으로 옥무 진인을 튕겨보낸 것인지 파악하지 못한 무림맹의 명숙들. 그들은 백발귀마가 청성파의 자랑인 최심장을 무력화시키고 옥무 진인의 사일검법을 파훼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선주혁 쪽에서 모든 광경을 확인한 종극은 달랐다. 그는 무림맹의 명숙들과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두 눈을 크게 떠야만 했다. '이럴 수가!' 종극은 분명히 봤다. 아니, 느낄 수 있었다. 조금은 어설픈 동작. 그 동작은 방금 전 청성의 애송이가 전개했던 최심장이 분명했다. 푸르스름한 청광을 머금고 선주혁의 장을 벗어난 구체는 방심하고 달려들던 점창의 도사 놈에게 정확히 적중했다. 하지만 어떻게? 곤륜의 반도라 알려진 백발귀마가 청성의 비전을 전개한단 말인가? 종극의 시선이 빠르게 옥무진인에게 돌아갔다. 만약 그가 심장부위를 부여잡고 죽어간다면 자신의 안목이 정확한 것이리라. "크으으으윽!" 옥무 진인은 심장으로 파고드는 최심장의 기운에 저항할 여력이 없었다. 심맥을 파고든 선주혁의 내력이 그보다 월등했기 때문이다. 결국 옥무진인은 설마하며 확인하던 종극의 예상대로 푸른 혈관이 드러난 손으로 자신의 가슴부위를 움켜쥐며 생을 마감했다. "…………!" 종극의 시선이 다시 한 번 선주혁에게 옮겨갔다. 극도로 혼란스러운 그의 심경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였다. 선주혁은 꽤나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희희낙락하는 중이었다. 이른바 최심장의 에네르기파 버전이 제대로 성공했기 때문이다. 사실 실전 중에, 그것도 점창의 비전 사일검법을 마주해 새로운 시도를 해본다는 것은 위험천만이었다. 요행히 성공을 거뒀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다면 금강불괴에 버금가는 선주혁이라 해도 엄청난 타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와 같은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신의 성장 그리고 무공의 성취가 마얀 좋아 헤벌쭉 미소를 짓던 선주혁은 얼굴 한쪽이 뜨끈뜨끈한 느낌을 받았다. 곧 그것이 종극의 시선임을 깨달았다. '아차차!' 선주혁은 종극이 방금 전 자신이 전개한 최심장 에네르기파 버전을 알아봤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타인의 무공을 즉각적으로 복제할 수 있는 능력은 가급적 알리지 않는 게 좋았다. 지난 번 주백광은 몽세화와 단목지민의 목숨까지 위협하며 입을 막으려 들지 않았던가? 하물며 종극이 의심을 했다면 쉽사리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좀 더 신중하지 못했던 자신의 행동이 후회스럽기는 했지만 되돌리기에는 이미 늦은 상태였다. '그렇다면……!' 선주혁이 내린 결론은 물러서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는 것이었다. 과거 소매치기를 하다 낌새가 이상하면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고 말로만 잡아떼는 것은 무의미했다. 일단 튀거나 상대의 신경을 다른 곳으로 분산시킨 다음 훔쳐낸 지갑을 없애버리는 것이 훨씬 유익한 행동 양식이었다. '저 도사와 같은 증상을 나타내는 무공이 꼭 최심장만 있으리란 법은 없잖아? 그렇게 한 번 우겨보면……!' 생각을 정리한 선주혁은 있는 대로 진기를 끌어올렸다. 그간 타인에게서 흡수했던 엄청난 내력이 그의 의지에 순응했다. 전신에 흩어져 있던 진기가 하나의 기운으로 움직이자 터질 듯한 충만감이 느껴졌다. 선주혁은 그 충만한 내력을 다리에 실으며 크게 진각을 밟았다. 쿠아아아앙. 선주혁이 크게 밟은 땅은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뒤흔들렸다. 앞서 종극이 땅바닥의 흙과 모래에 경력을 실어 솟아오르게 한 방법을 흉내내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동작을 보여준 이유는 꼭 같은 수법이 아니라도 비슷하거나, 혹은 그보다 나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종극에게 웅변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종극이 어떻게 진기를 운용했는지 자세히 살피지 못했던 선주혁이었다. 강한 충격과 함께 땅으로 전해지는 경력을 위쪽으로 끌어올리는 이미지를 형상화하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진기의 운용법을 명확히 보고 따라하는 것과 대충의 짐작으로 흉내를 내는 것에는 천양지차가 있었다. '어…… 어, 어……?' 놀라는 사이 강맹한 경력을 실은 채 돌멩이와 모래가 솟구쳐 오르던 종극의 수법과는 달리 선주혁이 밟은 진각은 상상외의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리저리 뒤틀린 땅이 갈라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흙과 먼지가 피어올랐으며, 선주혁의 진력이 향하는 방향으로 밀려버린 땅거죽이 불룩하니 솟구쳐 올랐다. 아니 불룩한 것이 아니라 거대한 파도 모양으로 굴곡 되어 치솟아 올랐다고 말함이 옳으리라. 선주혁의 발 앞에서는 작은 주름에 불과했던 땅거죽의 모양새는 무림맹 인사들 인근에 이르러서는 근 삼 장의 높이를 넘어서는 흙벽을 만들었다. 땅바닥이 일렁여 거대한 파도를, 그 파도가 하나의 벽이 되어 공간을 구분짓는 모습은 가히 장관인지라 종극조차 입을 떡하니 벌려야만 했다. 그 역시도 저토록 우악스러운 내공의 운기법이 있다는 사실은 금시초문이었다. 적어도 운용이 가능한 내공의 양이 자신 못지않다는 것은 자명해 보였고, 그와 같은 사실은 종극으로 하여금 새삼스레 놀라움을 주기에 충분했다. 반면 선주혁은 뜻대로 종극의 흉내를 내지 못한 것이 아쉬웠고 곤혹스러웠다. 그렇다고 의미없이 땅만 발칵 뒤집어 놓고 있기도 우스웠다. 결국 그는 자신이 만든 거대한 지표의 파도를 향해 몇 차례에 걸쳐 북두진공참을 전개했다. 자신이 펼친 수법에 자신이 놀라 멍하니 서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마구잡이로 날려대는 북두진공참이었다. 하지만 선주혁의 그 의미없는 동작들은 상상치 못했던 결과를 가져왔다. 무림앵의 인사들이 있는 위치까지 도달한 거대한 흙벽은 그 힘을 다해 우박이 쏟아내지는 소리를 내며 땅으로 가라앉았다. 선주혁을 중심으로 한 인근의 지표면은 말 그대로 엉망이었으나, 흙먼지가 가라앉자 그보다 더 처참한 광경이 보였다. 몇몇의 무림인들만이 극심한 부상과 함께 인상을 찌푸리고 있을 뿐, 삼십여 명의 무림인들이 참혹한 모습으로 죽어 있었던 것이다. 상황인즉 이랬다. 스스로 민망함을 없애기 위해 북두진공참을 전개한 선주혁. 흙벽 너머의 무림인들은 백발귀마의 가공할 내공수위에 질려버려 있었다. 대체 인간의 힘으로 이런 현상을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한가 싶어 불신 가득한 시선으로 흙벽만을 바라봤다. 한데 어느 순간 거대한 흑볅에 미세한 틈이 생긴다 싶더니 자신의 몸이 분리되었다. 선주혁의 북두진공참이 흙벽을 가르고 무림맹 인사들의 몸도 가른 것이다. 흙벽이 만들어내는 굉음 속에 묻혀버린 무림인들의 비명. 흙벽 너머의 상황을 알 수 없는 무림인들은 극도로 당황하기 시작했고, 안절부절 못하는 사이 선주혁은 그와 같은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수차례에 걸쳐 북두진공참을 남발하는 중이었다. 난도질이 되다시피 한 흙벽 너머의 공간. 대부분의 무림인들은 차가운 시신이 되어 땅에 누워야만 했고, 살아남은 몇몇은 경악이라는 하나의 심정으로 입을 벌리고 있어야만 했다. 상처에서 비롯된 통증 따위는 그들의 뇌를 자극하기에는 한참이나 부족한 면이 있었다. 세상에 있어 그 어떤 절정의 고수라해도 이와 같은 상황을 만들어낼 수는 없을 것이다. 삼십여 명의 무림 명숙들을 일순간에 전멸에 가깝게 몰고 가다니! '괴물!' 팔다리가 잘린 채 두 눈을 부릅뜬 무림맹의 명숙들이 백발귀마를 바라보며 내심 절규하듯 외치는 소리였다. "세상에 알려야 해! 반드시……!" 적풍칠조의 조장 필용경은 거의 혼이 빠진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고 삼조의 조장인 함재의는 예정된 죽음을 겸허히 준비하고자 했다. 자신들의 능력으로는 염마와 백발귀마라는 희대의 두 거마를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질없는 미련보다는 무인다운 당당한 죽음을 맞이하겠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저, 저…… 저게 가능한 일입니까, 사형?" 한편 염마 종극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무림맹 측의 인사들과 거리를 두고 있던 혁련기와 풍초양은 북두진공참의 피해를 조금도 보지 않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어마어마한 결과를 보며 놀라지 않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아마도 무림사에게 가장 많은 고수를 가장 빨리 죽인 기록이 세워진 것이리라. "간교한 수작에 불과해! 내 저 놈을……!" 이를 갈아 붙이며 당장이라도 백발귀마를 향해 달려 나가려는 풍초양은 이번에도 혁련기에 의해 제제를 당했다. "염마와 저 녀석…… 우리 둘이서는 무리입니다, 사형!" "이익!" 사제를 향해 뭐라 한 마디를 쏘아 붙이려던 풍초양이었다. 그는 도저히 백발귀마가 자신보다 뛰어난 무공ㅇ르 지녔을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거대한 흙벽을 일으킨 내력은 외면한 채 그 흙벽으로 인해 무림맹의 인사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만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어금니를 악문 채 말을 삼겨야만 했다. 사제의 말대로는 아니라도 지금은 참는 것이 옳으리라. 아무리 스스로의 무공에 자신이 있다 해도 염마 하나를 상대하기에도 버거운 지금, 적어도 예상 했던 것보다는 훨씬 강한 백발귀마까지 합세한다면 승부는 자명했다. 애초 기세등등하게, 그리고 여유있게 백발귀마를 몰아붙이려던 풍초양의 계획이 여지없이 무너진 것이다. 풍초양은 사제와 자신이라면 염마의 손을 묶을 수 있을 거라 계산했다. 그 사이 무림맹의 인사들이 백발귀마를 처리한다는 게 그의 계획이었다. 그렇기에 무림맹의 인사 중 진정한 고수들이 모이기도 전에 이곳으로 출발했고, 적풍조의 필용경과 함재의가 놀랄 만큼 빨리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백발귀마의 무공은 예상을 뛰어넘었고, 간교한 수작은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물론 간교하다고 여기는 것은 지금의 풍초양이 받는 느낌이었을 뿐이다. 선주혁이 종극의 흉내를 내 흙벽을 만들어낸 것은 자신의 무공이 가진 장점을 극대화시킨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본래의 위력에 비해 수십 배에 해당하는 효과를 만들어낸 것이다. 풍초양이 간교한 수작이라 여기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만약 흙벽이 없었다면 빠르긴 해도 손이 교차하는 방향을 보고 공격을 피해내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그 파훼법을 알려주기도 전에 믿기 힘든 내력으로 엄청난 흙의 파도를 일게 하더니 무림맹의 인사들을 전멸의 길로 몰고 가버렸던 것이다. 결과를 보고 놀란 것은 선주혁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된 일인지 짐작을 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자신의 수법이 이 정도로 대단한 위력을 낸다는 것 자체가 믿기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아무리 공 노인의 복수를 다짐했던 그였지만 내장을 쏟아내고 죽은 수십 여 명의 시체는 절로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더 할 생각이냐?" 눈살을 찌푸린 채 무림인들의 시신을 바라보는 선주혁에게 종극이 물었다. 지금까지 이 애송이 아닌 애송이가 벌인 일만 해도 수백 년에 걸쳐 강호에 회자될 것이다. 어쩌면 수라마제나 혈마와 비견될 거마로 여겨질 지도 모른다. 적풍조를 앞세워 몰려왔던 무림맹의 떨거지들은 이제 자신들의 처분만을 기다리는 신세였다. 무림맹주의 제자가 분명한 두 애송이들조차 어쩔 줄 몰라 하는 상황. 선주혁의 말 한마디나 자신의 결정으로 저들 모두의 목숨을 뺏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겨룰만한 상대가 되지 않는 자들을 도살하는 것은 종극의 취향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종극은 선주혁에게 이들을 더 죽일 생각이냐고 물었던 것이다. "제 앞길을 막지 않는다면 내버려 둘 생각입니다." 공 노인의 복수라 생각하고 망설임 없이 살수를 전개했다. 하지만 피를 즐기는 성품은 아닌 그였다. 지금껏 적지 않은 자를 살상했으니 공 노인도 만족하리라. 굳이 남아 있는 모든 자를 죽이고픈 마음은 없었다. 선주혁의 말에 종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고개를 돌려 풍초양을 바라봤다. "네 놈이 풍가 애송이…… 그러니까 한조백의 대제자가 맞지?" "…………" 사부의 함자를 함부로 입에 담는 것에 발끈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풍초양은 재차 어금니를 악물었다. 이대로 염마에게 당하면 십전성이 완벽하게 서문도옥의 손에 넘어갈 것이라는 혁련기의 전음 때문이었다. "보다시피 이 꼬마는 네놈들이 어떻게 해 볼 상대가 아니구나. 원래는 내가 이 녀석을 도와서 안전을 확보해주려 했지만 그것도 주제넘었던 생각일 뿐……! 지금 보니 이 녀석은 내 아래가 아니거든……" "…………!" 염마의 말에 풍초양과 혁련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필용경이나 함재의, 그리고 살아남은 무림맹의 인사 전원도 마찬가지였다. 구대마존의 무위를 인정하지 않는 무림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그들의 무공은 정사를 떠나 존중받아 마땅하다 생각하는 것이 무림인들이었다. 한데 이제 막 약관을 벗어난 청년이 그 구대마존과 비견될 무공을 지녔단 말인가? "그러니 이 꼬마를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은 포기하고 이만 돌아가거라. 내가 있는 자리에서 행여 무림맹의 대제자가 다치거나 죽는다면 가볍게 끝날 일이 아니겠지." 종극이 자신의 속셈을 은연중에 드러냈다. 천마맹의 요직에 있는 그이니만큼 과연 행사에 있어 신중하기 그지없었다. 자신이 가담한 자리에서 맹주의 제자들이 죽는다면 그 책임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세인들은 흉수로 자신을 지목할 것이고 무림맹과 천마맹의 충돌이 필연적으로 발생할 터. 종극은 그와 같은 자신의 사정을 은근히 드러내 풍초양에게 이 자리를 피할 명분을 주는 것이다. 자존심과 승부욕이 하늘을 찌르는 풍초양이었지만 앞뒤를 못 가리는 바보는 아니었다. 사실 무재만을 놓고 봤을 때는 천재의 범주에 속하는 그가 아니던가. 그는 사태를 냉정히 파악하고 종극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표정을 풀고 나름대로의 체면을 세우기 위해 그가 막 입을 열려는 순간. "더 할 생각 없으면 가자. 계집애들이나 엉덩이가 무겁지." 선주혁을 향해 한 마디를 던진 종극. 그의 신형이 밤하늘을 가르며 솟구쳤다. 종극은 무림맹의 애송이들이 자신들이 체면을 세울 때까지 기다려주는 친절한 노인은 절대 아니었던 것이다. 선주혁 역시 황급히 종극의 뒤를 쫓았다. 두 사람이 떠난 자리에는 진득한 혈향과 함께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무림맹의 생존자들이 남아 있었다. 그 누구도 쉽게 입을 벌리지 못했다. 생존자들은 머릿속으로 방금 전 자신들이 겪었던, 훗날 세인들에게 진곤혈사라 칭해지는, 백발귀마의 전설 중 하나를 정리하느라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곤륜이마라 하더니…… 자네와 그 사형이라는 친구는 혈마의 진전을 얻은 후 정파에게 쫓기게 된 건가?" 선주혁 정도의 무공을 지닌 자가 묵연수투를 탐내어 설가를 몰살시켰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 종극은 다른 방향에서 선주혁이 정도 무림의 공적이 된 이유를 찾았다. 선주혁은 종극의 고명한 안목에 탄복을 하면서 대답을 머뭇거렸다. 종극의 저의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소매치기를 하며 눈치로 버텨온 세월. 종극의 질문이 여기서 그치지 않으리라는 것을 예상하는 선주혁이었다. 즉, 지금의 질문은 이어질 질문을 유도하기 위한 것임에 불과했다. 선주혁의 예상에 종극이 알고자 하는 것은 자신이 청성파의 최심장을 사용할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절정의 고수일수록 무공을 몇 번 보는 것만으로 익힐 수 없다고 믿는다. 스스로의 성취가 높을수록 더욱 그렇다. 따라서 종극 역시 자신이 최심장의 에네르기파 버전을 사용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설마하니 상대가 무공을 전개하는 것을 보고 배웠다고는 의심치 못하는 것이리라. 생각이 예까지 미친 선주혁은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외려 질러대기로 했다. "혈마의 무공을 얻은 것은 도주 중입니다." "호오! 자네들이 쫓기기 시작한 게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도주 중에 그와 같은 성취를 이뤘단 말인가?" 종극이 조금은 과장된 표정으로 물었다. "훗!" 입술을 모아 가볍게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낸 선주혁. 그는 종극의 노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어르신께서 저와 사형을 귀교 일월신교로 데려가셔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지 않겠습니까?" "…………!" 선주혁의 말은 정확했다. 혈마의 혈마자광기는 익히기가 지극히 까다로운 무공이다. 그와 같은 무공을 도주 중에 배워 저토록 수월하게 전개할 수 있다면 가히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천재라는 이야기다. 단목지민이 성화령 동원을 원할 충분한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렇군.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노부가 이해할 수 없는 게 있어서 말일세." "청성파의 무공 말이십니까?" 어차피 종극이 눈치 챈 부분은 인정을 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 선주혁은 자신이 미리 나서서 문제의 핵심을 짚었다. "그렇지. 어찌 곤륜의 제자였던 자네가 청성파의 비전을 알고 있단 말인가?" "그건 어르신의 생각과는 조금 다릅니다. 제가 신투, 그 늙은이의 은신처에서 청성파의 무공비급을 찾아냈습니다." "신투가 최심장의 비급을 훔쳐냈단 말인가?" "아니죠. 신투가 훔쳐낸 것은 청성파의 기초적인 무공 비급이었습니다. 어차피 모든 무공의 정수는 그 근간이 되는 기초 무공에 담겨져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선주혁은 다년간 무협지를 읽어온 경험을 살려 뜬구름 잡기 식의 엉터리 이론을 전개했다. 초식이나 형식을 벗어난다던가, 평범한 가운데에 특이한 것이 있다던가, 하는 이론은 각 무협지마다 수도 없이 나오는 이야기였던 것이다. 선주혁의 뜬끔없는 무협 이론의 이야기에 종극은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무공의 정수는 그 근간이 되는 기초 무공에 담겨 있다는 말에 꽤나 감탄한 표정이었다. 표정 그대로였다. 말로는 들었을지언정 저와 같은 진리를 깨달은 고수가 과연 몇이나 될지 의심스러운 종극이었던 것이다. "그 비급으로 인해 청성의 무공에 대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는데 와중에 덕양 진인이라는 사람이 최심장을 전개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막상막하의 승부가 펼쳐진지라 꽤 오랜 시간동안 최심장을 관찰할 수 있었지요." "그 관찰을 통해 최심장을 운용할 수 있게 되었단 말인가?" "하하하핫!" 선주혁은 일단 조금은 과장된 웃음을 터뜨렸다. "세상에 그와 같은 사람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자네가 아까 전개한 것은 뭐란 말인가? 그것은 분명……" "분명! 최심장과 비슷한 동작이었지요." "비슷한……?" 종극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렇지요. 겉으로 드러난 현상을 흉내내기란 꼭 어렵지만은 않습니다. 더구나 청성파의 경우는 무공의 근간을 훤히 알고 있는지라 더 쉬웠고 말이죠." "흠……" 종극의 이마 주름이 깊이를 더했다. 선주혁의 설명이 석연치 않는 바는 있었다. 하나 종극에게 있어서는 선주혁 정도의 나이에 자신도 상대하기 곤란할 만큼의 무공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 하나도 인정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기에 지금에 있어서 그보다 더 충격적인 사실, 즉 남이 전개하는 무공을 보는 것만으로도 따라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란 힘들었다. 결국 이미 상식을 벗어나버린 선주혁이라는 인물이었지만, 종극은 자신이 수용할 수 있는 범위를 무의식적으로 규정지어버렸다. 단숨에 남의 무공을 훔쳐 배울 수 있다는 것은 종극으로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인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고, 그렇기에 선주혁의 말을 납득하기 위해 무의식중에 노력을 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 도사는 분명 심장을 부여잡고……" "심맥에 충격을 주는 방법을 저는 수십가지도 넘게 알고 있습니다." 선주혁은 종극의 말을 잘라가면서 단호히 말했다. 물론, 그가 심맥에 충격을 주는 방법을 수십 가지도 넘게 알고 있다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원래 포커를 칠 때도 블러핑, 다시 말해 뻥카를 칠 때는 한순간이 가장 중요한 법이다. 상대방이 믿기 바로 직전, 그 순간이 가장 조심해야 할 때다. 그러니까 블러핑을 할 때는 상대가 믿는 그 순간에 가장 확고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만약 그 순간만을 넘기면 의심스러운 모습을 보여도 오히려 일부러 거짓말인 것처럼 보이기 위해 수를 쓴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와 같은 이야기를 어디서 주워들은 적이 있는 선주혁이었기에 종극의 말을 자르고, 큰소리를 치면서 센 척을 하고, 두 눈을 똑바로 직시한 채 확고부동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었다. 종극이 인상을 찌푸릴 뿐, 더 이상 추궁해 들어오는 모습을 보이지 않자 선주혁은 암암리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도 핑계를 대는 데에 있어서만큼은 사형에 못지않은 기재가 아닐까?' 매번 위기를 벗어날 때마다 스스로가 기특하고 대견스럽기 만한 선주혁이었다. 당당히 백주를 활보하고 다니던 종극이었으나, 선주혁이 적풍조와 무림맹의 인사들을 상대로 한바탕을 한 이후로는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옷을 바꿔입고, 선주혁에게도 방립을 써 얼굴을 가리게 했다. 이는 처음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선주혁이 자신에 비견될 만큼의 엄청난 무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선주혁이 약할 때는 당당히 활보하고 다니다가 외려 선주혁이 강하다는 결론을 내린 후 숨어 다니는 것은 얼핏 모순이었다. 하지만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종극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마교를 대표하는 신분을 가진 그다. 정도 무림인들의 대량 살상에 더 이상 자신의 모습을 보이게 되면 이는 정도 무림과 천마맹의 대규모 분란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어쩌면 지난 번 그 일만으로도 충분할 수도 있기에 종극은 더욱 조심스럽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강하기에 더 숨어 다녀야한다는 모순에 헛웃음을 지으며…… 행동에 제약이 생기다보니 단목지민의 행방을 쫓는 것은 더욱 어려워졌다. 드러내놓고 찾아다닐 때도 종적이 묘연한 단목지민과 주백광이었던 것이다. 정도 무림맹 측의 움직임도 두드러짐이 없었다. 선주혁으로 인한 충격 때문일 거라 짐작했다. 저들의 움직임이 거의 사라지자 남창은 마치 텅비어버려 공동화된 것만 같았다. 그만큼 최근의 남창은 무림인들의 존재감이 컸었다는 뜻이었다. 하루 종일을 돌아다니고도 성과를 거두지 못한 선주혁과 종극은 객잔으로 돌아왔다. 오랜 도주생활을 토앻 인적이 드문 곳보다는 복잡하고 사람이 많은 곳일수록, 또한 감히 이곳에는 나타나지 못할 거라 생각하는 곳일수록 안전한 장소임을 체득한 선주혁이었다. 그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종극과 선주혁은 아예 남창의 최중심지로 들어와 버렸다. "뭐 하나? 어서 안 들고?" 젓가락을 든 채 객잔의 일층 한 쪽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선주혁을 종극이 재촉했다. 아무리 적의 허를 찌르는 장소에 와 있다고 하지만 사람들의 눈이 많은 곳에 오래 머물러 좋을 일은 없었다. 혹시 무슨 소문이라도 들을까 싶지 않았다면 아예 방에서 음식을 시켜 먹었을 것이다. "거 참 희안하군요. 무슨 무공을 익혀야 저런 현상이 나타나는 겁니까?" 선주혁의 말에 종극은 살짝 시선을 돌렸다. 선주혁이 바라보고 있는 방향이었다. 그 쪽에는 육순을 조금 넘긴 듯한 노인이 편안한 동작으로 잘 차려진 요리를 먹고 있었다. 남창 최고급을 자랑하는 이곳 팔복루에서 저 정도의 양을 시킨다는 것은 은자에 별 구애를 받지 않는 부유한 자라는 뜻이었다. "무슨 현상을 말하는 건가?" 종극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네? 저 주변으로 일렁이는 파란 빛이 안보여요?" 선주혁은 턱으로 살짝 노인을 가리키며 물었다. 머리가 희끗한 노인은 전신에서 푸르스름한 빛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마치 파란 불꽃이 그의 몸을 태우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무슨 소리? 저자는 무공을 익히지 않았네." "네?" 선주혁이 두 눈을 크게 뜨고 종극을 바라봤다. 쓸데없는 거짓말을 할 종극이 아니었다. "무공을 감출 수 있는 경지에 오른 자가 아니야. 날 속일 정도의 무공을 지닌 자 중에서 저런 자가 있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거니와 무인 특유의 기도조차 느껴지지 않으니 저자는 절대 무인이 아닐세." 만약 노인이 선주혁의 생각대로 무공을 익힌 자라면 종극의 안목을 넘어서 무공을 감출 정도라는 이야기다. 선주혁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저토록 선명한 푸른빛을 몸에서 만들어내는 기이한 무공을 가진 자가 종극에게 발각되지 않는다는 것. 이 사실은 선주혁으로 하여금 단 하나의 결론을 떠올리게 했다. '그들인가……?' 무림인들은 저들에 대해 모른다. 저들 중에서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자들이 부지기수였고 개중에는 종극보다 고수도 있었다. 따라서 선주혁은 곧바로 그들을 떠올린 것이다. '누굴까?' 그들 중에서도 종극을 넘어설 정도라면 소설 속에서 중요한 인물로 다뤄졌을 것이다. 선주혁은 기억을 더듬어 음식을 먹고 있는 노인과 매치가 되는 자가 없는지 연신 살피는 중이었다. 그의 시선을 느꼈기 때문인가? 음식을 먹는 데에 열중하고 있던 노인은 선주혁을 쳐다봤다. 선주혁은 재빨리 시선을 돌렸지만 노인으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로 선주혁을 계속 바라봤다. 그것은 선주혁이 음식을 먹다 말고 넋을 잃은 채 노인을 바라보던 것과 흡사한 모습이었다. "저 자도 자네를 뚫어져라 쳐다보는군, 그래." 종극이 낮게 중얼거렸다. 선주혁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붉은색 비단으로 된 화복을 입은 노인은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여유있게, 또 한편으로는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겨 선주혁과 종극의 자리 쪽으로 다가왔다. 노인은 잠시 종극의 눈치를 살피는 듯 했다. 종극은 자신이 의도하지 않는 한 지나칠 정도로 평범해 보이는 용모였다. 노인은 종극에게서 그다지 경계해야 할 느낌을 받지 못했는지 주금진 입술을 열었다. "저 혹시……" "…………?" 노인은 잠시 머뭇거리다 문득 생각이 났다는 식으로 물었다. "혹시…… 소협은 자신의 몸에서 일렁이는 푸른빛에 대해 알고 있소?" 선주혁은 노인의 질문과 더불어 애초 자신의 짐작과 뭔과 다르다는 결론을 내려가는 중이었다. 일단 소설에 나왔던 그들 중 노인의 복장과 용모를 통해 연상되는 자는 없었다. 흡성대법으로 인해 진기의 흐름에는 누구보다 민감한 사람이 선주혁 자신이었다. 그러므로 종극이 눈치채지 못한 진기의 흐름을 자신은 알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한데 좀 더 자세히 살피다 보니 일렁이는 푸른빛은 진기의 움직임과는 확연히 달랐다. 푸른빛은 노인의 체내에서 흐른다기보다는 피부 밖을 감싸고돈다고 봐야했다. 결국 종극의 말대로 노인은 무공을 익히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푸른빛? 노인장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푸른빛과 같은 것 말입니까?" 선주혁의 말에 노인이 눈을 크게 떴다. "노부의 몸에서 푸른빛이 피어오르고 있단 말이오?" 노인은 전혀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노부의 눈에는 소협의 몸에서 불꽃처럼 피어오르는 푸른빛이 보이는구려." "제 몸에요?" 선주혁은 고개를 숙여 자신의 몸 여기저기를 살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노인의 몸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푸른빛은 찾아볼 수 없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선주혁은 노인의 몸 주변에서 일렁이는 푸른빛을 볼 수 있으나, 자신의 몸을 감싼 빛은 볼 수 없었고, 노인은 그 반대라는 말이었다. "그렇군!" 선주혁이 자신의 몸에 피어오르는 푸른빛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에 노인은 손뼉을 마주쳤다. 그가 뭔가 알았다는 듯한 표정을 짓자 선주혁은 노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소협은 혹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알고 계시오?" "…………!" 선주혁은 떡하니 입을 벌렸다. 그리고 순간적인 혼란에 빠져들었다. 대한민국이라니! 그는 재빨리 고개를 흔들어봤다. 혹시 지난 번처럼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서였다. 하지만 이는 분명한 생시였다. 선주혁의 표정을 살핀 노인이 주름진 입술을 다시 열었다. "자동차나 인공위성, 혹은 휴대 전화 따위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소?" "어, 어떻게 노인장은 그런 것들을……?" 선주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질렀다. "역시! 알고 있었구려." 노인의 두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는 한없이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선주혁의 어깨를 잡고 물었다. "혹시 읽은 것이오? 내 책을?" "노인장의 책이라니……?" 혼란스러운 가운데 선주혁이 잠시 머뭇거렸다. "내 책 '종횡무진'말이오. 그 책을 읽다가 이곳으로 넘어온 것이 아니냔 말이오." "그…… 그 책을 노인장이 썼단 말이오?" 팔복루의 특실에는 가무잡잡한 피부의 청년과 육순을 갓 넘긴 노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선주혁과 '종횡무진'이라는 책을 썼다는 노인이었다. 선주혁은 영문을 몰라하는 종극에게 고향 사람을 만났다고 말하고 특실로 들어와 노인과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이곳에 온지 벌써 삼십 년이 지났단 말인가요?" 아까와는 달리 선주혁은 많이 침착해진 상태였다. "그렇다네. 내가 서른두 살이 되던 해에 이곳으로 넘어오게 되었으니 정확히는 이십구 년이 지난 셈이지." "내가 읽은 책에는 유작이라고 되어 있었는데……" 선주혁은 약간 조심스럽게 말했다.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에게 유작 운운하는 것도 웃기지만, 처음 이곳에 넘어왔을 때 엉터리 작가라면서 한참을 욕을 했던 기억이 나서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이다. "저쪽 세상의 나는 죽었을지도 모르네. 교통사고를 당했었거든. 그 이후 정신을 차려보니 이쪽 세상이었지. 처음에는 정말이지 어처구니가 없었다네." "죽었을지도 모른다고요?" 선주혁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글쎄. 저쪽의 일은 나도 잘 모르겠네. 어쩌면 내가 쓰고 있느느 지금 이 몸의 주인이 저쪽으로 건너간 것일지도……" 이쪽에서의 이름은 마중영이라 밝힌 노인은 확신 없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흠…… 영혼이 뒤바뀐 것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군요." 선주혁이 마중영의 말을 정리할 때, 마중영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참! 자네도 주문을 외웠나? 의식을 잃어가는 그 때에 말일세." "주문을 외웠다기보다는 읽었다고 봐야겠죠. 피를 너무 많이 흘려 눈앞이 흐려지는 그 때에 마침 노인장의 책이 펼쳐져 있었거든요. 그 페이지의 주문을 저도 모르게 읽고 말았죠." "흠…… 삶에 대한 간절한 염원, 그리고 우연치 않게 들어맞은 주문이 차원이동을 만들어낸 건가?" 마중영은 습관적으로 수염을 쓰다듬으며 미간을 좁혔다. "전 반지 때문인 줄만 알았는데……" "반지?" 마중영이 눈을 크게 떴다. "네. 어떤 꼬마 아이를 도와주고 반지를 받았거든요. 그 꼬마 녀석이 저보고 소원을 들어주는 반지라고……" "혹시…… 그 반지가 플라스틱으로 된 조잡한 모양을 가지고 있는 건가?" "어? 그걸 어떻게 알아요?" "흠…… 그런 건가?" 마중영은 다시 수염을 쓰다듬었다. 깊이 가라앉은 눈빛으로 보아 뭔가의 생각에 심취하는 듯했다. "자네와 내가 이곳으로 올 수 있었던 데에는 세 가지의 공통점이 있네. 하나는 죽음을 앞둔 위기 상황이라는 것, 둘은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고 별가치 없는 플라스틱 액세서리를 받았다는 것." "노인장도 받았어요?" "내 경우는 팔찌였다네. 시장에서 천원만 내면 살법한 그런 싸구려 팔찌였지." 마중영의 말에 선주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원을 들어주는 액세서리 세트가 있었단 말인가?' "그리고 마지막은 내가 적었던 그 주문이지." "정확히는 어떤 것인지 모를만한 상황이네요." 선주혁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 그리고는 실소를 터뜨렸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겪는 사람이 또 있었을 줄이야…… 소설 속으로 들어와 버리다니!" 선주혁의 말에 마중영은 눈을 크게 떴다. "자네는 이 상황이 소설로 보이나?" "에?" 마중영이 정색을 하고 질문하자 선주혁에 되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마중영이 말하고자하는 바를 정확히 알지 못해 가슴을 두들기면서 말을 시작했다. "이 몸. 그러니까 제 영혼이 담겨진 이 몸의 원래 주인이 선주혁이라니까요. 이쪽 세상에 넘어 온지 너무 오래되어서 기억이 안 나는 거에요? 선주혁이라고…… 주인공 옆에서 늘 말썽만 피우던 소심한 놈 있잖아요." 선주혁이 언성을 높였음에도 마중영은 침착함을 잃지 않고 차분히 말을 이었다. "그건 이미 알고 있네." "그러니까요. 노인장이 쓴 소설이잖아요. 사형…… 그러니까 여기는 남지학도 있고…… 그 신비의 세력도 있고, 전부 당신이 쓴 내용 그대로라고요!" "바로 그걸세!" "…………?" "노부가 쓴 그대로!" "그러니까요. 노인장이 쓴 그대로요!" "노부가 쓴 그대로! 하지만 이 현상을 어찌 소설로 여길 수 있겠나? 자네는 모르고 있는 건가? 이곳에는 모든것이 완벽하게 구성되어 돌아가고 있다네. 심지어는 내가 쓰지 않았던 모든 것까지 말일세." "그거야……" 선주혁이 자신의 의견을 말하려 하자 마중영이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간단히 생각해보세. 내가 썼던 글에는 마중영이라는 인물은 등장하지 않았다네. 즉, 지금의 나는 소설 속 등장인물이 아니라는 걸세. 이건 어떻게 생각하나?" "그, 글쎄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저도 잠시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생각해보니 어떻던가?" "노인장, 그러니까 작가가 직접 쓰지는 않아도…… 머릿속에서 잠시라도 연상된 모든 것이 갖춰진 것이라 생각했죠." "후훗! 인간의 두뇌란 한계가 있는 법이네. 하나의 책을 쓰면서 세계관을 짜고, 등장인물을 비롯한 모든 것에 고심하긴 하네만…… 그렇다고 매 장면마다 완벽할 수는 없네. 총체적인 이미지를 연상하긴 하지만 매번 하늘의 구름, 별, 풍향, 냄새, 흙, 모레, 메뚜기, 개미, 풍뎅이, 기온 등을 개별적으로 일일이 구분해서 떠올린 다음 소설을 쓸 수는 없다네. 장면 하나에 그러할 진데 소설에 등장하는 세계란 더 말할 나위도 없지. 소설의 스토리에 중요한 부분이 아닌 경우는 상당부분 배제된 채 전개되는 걸세." "그러니까…… 노인장께서 이 모든 상황을 생각하신 게 아니란 말씀이죠?" "그렇지. 내가 처음에 이곳에 왔을 그 당시에는 이곳의 상황이 내가 썼던 그 글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었다네. 자네와는 달리 나는 무림인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의 신분이었으니까 말일세." 선주혁은 마중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소설에서 다뤄지는 것보다 훨씬 드넓은 세상이다. 주요한 등장인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면 자신이 썼던 소설 속의 내용대로 돌아가는 세상이라는 것을 모를 수도 있는 일이었다. 더구나 마중영은 이곳에 도착한 시점도 달랐다. 자신보다 근 삼십여 년을 먼저 오게 되었으니 말이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야 이곳의 상황, 더 정확히 말하면 이곳의 무림 상황이 내가 썼던 글과 비슷하다는 것을…… 아니 똑같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지. 그리고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네. 이와 같은 상황이 어떻게 벌어진 것인지 말일세." "결론을 내렸습니까?" "자네를 보고서야 확신이 서는군." 마중영은 주름진 입매에 살짝 미소를 만들었다. "역시나 이곳은 원래 존재하던 하나의 세상, 어쩌면 과거에 존재했던 지구상의 중국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그러니까 도 하나의 차원이라고 봐야겠지." "그럼 노인장의 소설은 어떻게 설명이 되죠? 너무 정확하다고요. 제가 나타나기 전에는 완벽했단 말입니다." "자네 혹시 글을 써 본적이 있나?" 마중영은 선주혁에게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아주 어렸을 때 일기는 써 본적이 있지요." "그렇군. 일기는 내가 경험했던 일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지. 내가 겪었던 어떤 일을 고스란히 옮기는 것조차 사실은 쉬운 일이 아닐세." "그렇죠." 숙제인 일기쓰기 때문에 어릴 적 골치가 아팠던 기억이 선명한 선주혁은 주저 없이 동의했다. "하물며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은 더욱 힘이 드는 일일세." 마중영은 '만들어'라는 말에 유독 힘을 주어 말했다. "한데 말일세. 글을 쓰다보면 종종 이 글을 내가 쓰고 있는 것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네. 그러니까 말이야, 소설 속의 등장인물이 멋대로 살아서 움직이는 것과 같은 경험을 한다는 거지. 심각하게 고심하지 않아도 캐릭터의 입아에서 말을 하고 행동을 하는 거네. 나는 그저 키보드를 두드려 그들을 대변할 뿐이고 말일세." "그렇게 느껴지는 것뿐이잖아요." 선주혁은 이 노인의 글을 읽을 때, 주인공들의 대사나 행동이 캐릭터 스스로가 전재하는 것처럼 생동감이 있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처음 글을 읽었을 때나 이곳으로 왔을 때, 엉터리 작가라고 얼마나 욕을 했던가? 그러나 막상 눈앞에 노인을 앞두고 당신 글을 그렇게까지 생생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네. 그렇게 느꼈을 뿐이라고 말일세. 하지만 이곳에 오게 되고, 내가 썼던 글과 모든 상황이 일치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한 가지 가설을 세웠네." 마중영은 검지를 곧추 세워 내밀었다. '그러니까 그 가설이 뭐냐고요?' 선주혁은 길고 긴 서론을 계속 끌고 가는 마중영을 향해 속으로 외쳤다. 더불어 말은 그럭저럭 잘하지만 이토록 말을 돌리는 습관이 글에서도 그대로 반영이 되었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니 책이 재미없지.' "세상에는 진정한 창작과 정신적 공명의 기술이 있다는 가설이지." 선주혁에게 있어서는 뭔가 조금은 복잡한 이야기였다. "조금 쉽게 설명해주시면 안될까요?" 선주혁의 말에 마중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부연설명을 할 예정이었으므로. "그러니까, 내 경우 말고도 지금과 같은 경우가 많을 수도 있다는 가정하에서 말을 하는 건데…… 그리고 우리가 살던 곳과 지금의 이곳이 다른 차원이고 더 많은 차원이 존재한다는 전제로 말이지. 여하튼 소설이나 영화 같은 것, 다시 말하자면 일정한 스토리를 전개하는 창작 중에서는 진짜 작가의 머릿속에서 허구로 그려진 창작이 있을 수도 있네. 반면 내가 그랬던 것처럼 어떤 특정한 차원의 현실 중 일부를 고스란히 반영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는 걸세. 마치 특정 차원에 공명하듯 말일세. 이 경우 작가는 그저 기술하는, 그러니까 쓰는 역할만 한다는 거지." "그런 일이 가능할까요?" "자네가 지금 직접 겪고 있지 않나?" "…………" 뭔가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상황에 선주혁은 미간을 찌푸릴 뿐이었다. "잘하면 저쪽 세상에 존재하는 영화나 소설 수만큼의 차원이 존재할 수도 있겠군요." "모두가 다 매치가 된다고는 할 수 없겠지. 하지만 꼭 나만 이런 식으로 한 차원의 기술을 했다고 볼 수도 없을 걸세." 마중영은 이제 거의 단정 짓듯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창작을 하다보면 기존에 취득했던 정보의 재조합이 있을 수도 있거든. 그러니까 내가 미리 봤거나 읽었던 무엇이 무의식중에 머릿속에서 재조합되면서 변형되는 거지. 이런 경우라면 타차원과의 연결은 없다고 봐야겠지." "그러니까 창작활동을 하는 작가들이란 다른 세상에 관한 정보를 전달하는 연결자들이란 말인가요?" "그런 일면이 있다는 거야. 우리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정보를 끊임없이 전하고 있는 거지. 어쩌면 차원간의 교류라고 볼 수도 있을 걸세." 선주혁은 이제 조금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만약 마중영의 말이 맞다면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지구의 창작자 중 상당수가 다른 차원과 무의식중에 교신하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그야말로 작가라는 자들의 존재야말로 세상에 기적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결국 우리가 겪은 일 중에서 특별한 기적이 있었을 뿐, 지금의 모든 것은 완벽한 현실이라는 거죠?" "그렇지! 단언컨대 이곳의 모든 일은 완벽한 현실일세. 내가 기술했던 하나의 완벽한 세계지!" 마중영은 그렇게 이곳이야말로 완전한 하나의 세계이며 저쪽 세상에서 자신의 역할은 창조가 아니라 기술이나 보고에 불과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래, 그동안 자네는 어떻게 지냈나? 선주혁으로서 살아온 건가?" 마중영의 질문에 선주혁은 자신이 겪었던 일을 가급적 간략하게 줄어서 설명을 했다. 어차피 다시 사는 인생. 이곳에서만은 사람답게 제대로 살아보겠다며 결심하고 미래에 대해 알고 있다는 이점을 활용, 성공을 향해 달려왔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중간에 오해가 생겨 무림 공적으로 쫓기고 있다는 이야기도 했다. 마중영은 매우 흥미진진하게 선주혁의 이야기를 들었다. "결국 자네로 인해 이곳의 역사가 바뀌고 있다는 이야기구먼." "전 소설의 내용이 변경되고 있다고 생각했죠." 선주혁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네에 비하면 난 매우 소박하게 살아온 셈이로군 그래. 나름대로 파란만장하다고 여겼거늘……!" "노인장께서는 어떻게 지내신 것입니까? 오히려 저보다 이곳에 대해 잘 알고 계셨을텐데……" 선주혁의 질문에 마중영은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그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 그의 몸은 이미 서른을 넘긴 상태였다고 했다. 이미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는 한 사람의 가장이었다. 마중영은 이후 이곳의 생활에 적응하는 데에만 전념해야 했다. 지구와는 모든 것이 달랐다. 무협을 써온 그였던지라 기본적인 상식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알고 있는 것과 겪는 것은 사뭇 달랐다. 결국 그가 완벽하게 이쪽 세상에 적응을 하는 데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나부터 열까지 마중영에게는 어렵기만 했다. 지구에 남겨둔 가족을 잊는 것도, 이쪽 세상의 가족을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그에게는 쉽지 않았다. 그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처음 이쪽 세상으로 넘어와 모든 것을 너무나 쉽게 받아들여버린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선주혁이었다. 마중영은 그렇게 이쪽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만 했고,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자신이 쓴 소설의 내용과 이쪽 세상이 일치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무림에 발을 디디지 않은 그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마중영의 나이는 불혹을 넘긴 후였고, 이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가정을 가진 몸이었다. 그는 현대에서 익힌 지식을 활용해 꽤 큰돈을 벌었다. 인터넷과 매스미디어를 통해 무차별적으로 정보를 받아들여 왔던 그의 능력ㅇ느 이곳에서는 특출난 것이었다. 정보를 취득, 분류, 활용하는 능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지라 그는 나름대로의 성공을 거뒀다. 그리고 현재에는 자신의 인생에 만족하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어쩌면 저쪽 세상에서는 얻지 못했을 안정과 행복을 이뤘다는 말도 했다. "자네도 이쪽 세상에서 뜻한 바를 이루길 바라네. 인생을 다시 살 수 있는 기회,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행운이니까 말일세." 마중영이 선주혁의 방을 나서며 한 말이었다. 선주혁은 마중영을 배웅하며 꼭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다. 자신의 진정한 처지를 아는 사람을 만난 것에 대한 반가움 때문이었다. 마중영과 선주혁은 서로 아쉬움을 남긴 채 헤어졌다. 마중영을 보낸 선주혁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폐부 깊숙이 들어오는 공기가 색다르게 느껴졌다. 마중영을 만나기 전에도 이곳의 모든 것을 현실로 받아들여야한다고 몇 번에 걸쳐 다짐했다. 하지만 자신이 말도 안되는 상황에 처해있다는 것, 언젠가 제 정신을 차리며 션실에서 깨어날 수도 있다는 것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었다. 인정하고자 했고 나름대로 열심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심적은 부분을 떨구지 못했던 선주혁이었다. 한데 오늘에서야 의문이 확연히 해소된 것이다. 마중영의 말에 따르자면 이 곳에서 자신이 겪고 있는 모든 것은 진정한 현실이다. 반투명한 비닐처럼 드리워져 있던 현실과 공상과의 경계가 걷힌 셈이었다. 이에 선주혁은 지금의 현실을 헤쳐나가는데 있어서 보다 치열해야만 하는 당위성을 느꼈다. 생명의 위협을 받는 위기의 상황에서 또 다른 기적이 벌어져 다른 차원으로 날아갈 수 있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또한 위기의 순간에 깨어나 보니 모든 것이 꿈이었더라, 하는 허망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결국 선주혁은 이곳에서 스스로를 소중히 여겨야 하며, 잘 먹고 잘 살자는 목표를 반드시 달성해야만 하는 것이다. 마중영의 말대로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축보깅랄 수 있는 이 기회마저 놓친다면 선주혁은 다차원을 통틀어 가장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 그렇게 결론을 내리며 선주혁은 주먹에 불끈 힘을 주었다. 선주혁의 팔뚝에 푸르스름한 힘줄이 솟아오르는 순간이었다. "아무리 대담해도 설마 이 근처는 힘들지 않겠소?" 방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선주혁의 청각을 자극했다. 남자의 목소리가 분명하지만 어딘지 모를 가벼움을 내포한 음성, 선주혁은 어렵지 않게 이 소설, 아니 이제는 확연히 이 쪽 세상인 이곳에서 종종 볼수 있는 남장여인의 그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라면 오히려 이런 곳을 선호할 것이오. 어쩌면 이 객잔에 머물고 있을 지도 모르지요." "설마요!"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선주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남장여인의 질문에 대답한 자의 목소리는 그가 꿈에서도 잊지 못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다급한 마음에 문이 거칠게 열렸다. 왈칵 열리는 문소리에 무인 특유의 반사신경으로 두 사람의 신형이 빠르게 돌아간다. 적의 급습에 대비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문을 열어젖힌 상대를 확인한 두 사람의 표정이 급격하게 변한다. 경계심과 긴장 가득했던 표정이 다시 없을 반가움으로 바뀌는 것이다. "사제?" 관옥 같은 준수함이 여전한 남지학이 물었다. "사형!" 선주혁의 음성이 떨린다. 남자치고는 커다란 그의 두 눈도 떨린다. "사제!" 머리 색깔이 바뀌기는 했지만 사제가 분명하다는 것을 확인한 남지학이 반가움을 고스란히 표현하며 선주혁을 끌어안는다. 도대체가 말도 안되는 우연의 연속. 사형과의 재회는 늘 이렇게 지독한 우연이었다. 남지학의 품에서 선주혁은 마중영이 했던 말을 떠올린다. 오직 현실에서만 지독한 우연과 기적이 가능하다던 말이었다. 지금 이곳에서 남지학과 선주혁이 재회를 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인정하기 힘든 것은 은우라는 가명을 사용하고 있는 은설연이었다. 한태희를 닮아 유독 눈이 큰 그녀는 그 큰 눈을 커다랗게 치켜뜬 채 선주혁과 남지학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사제는 오히려 적지의 한가운데를 선택할 것이라며 이 근방에서 선주혁을 찾는 남지학을 조금은 답답하다고 생각하는 은설연이었다. 등하불명이라는 단순한 이치를 생각하기는 쉽다. 하지만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에서 적진이나 다름없는 곳의 한가운데에서 버틴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무모할 만큼의 용기가 필요한 일이고 탁월한 결단력이 있어야하는 것이다. 더구나 선주혁은 이미 무림맹의 총단이 십전성이 있는 호북성에 당당히 나타나 저들의 허를 찌른 적이 있다. 전례가 있는 만큼 저들도 등불 아래쪽에 대해 세심하게 신경을 쓸 것이며 결국 이곳은 용담호혈 자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그야말로 은설연에게 있어서는 예측할 수 없는 사제지간이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남창에 와 큰 어려움 없이 백발귀마를 찾을 수 있었다는 사실에 은설연이 안도의 한숨을 쉬는 그 순간이었다. 그녀의 커다란 두 눈이 더욱 커졌다. 객실의 문을 열고 나와 선주혁고 남지학을 바라보는 한 노인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여, 염마……?" 은설연이 본 것은 틀림없는 종극이었다. "자네는 여러모로 운이 좋군. 결국 사형을 찾은 건가?" 평범하게 생긴 노인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선주혁을 향해 말했다. '저, 정말 염마가 남창에 나타난 이유가 백발귀마 때문이었던 거야?' 지난 번 저자에서 염마를 발견하고 나눴던 이야기가 생각난 은설연이었다. 당시 천산노조 서동주는 만약 염마가 선주혁 때문에 이 곳 남창에 온 것이라면 백발귀마야말로 강호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이라 말했었다. 결국 서동주의 말대로 저 선주혁은 강호의 중심에 선 남자라는 뜻이었다. "아! 어르신. 그렇습니다. 제 사형입니다." 선주혁은 종극에게 남지학을 소개했다. "사형, 이 분은……" "후배 남지학이 염마 어르신을 뵙습니다." 남지학은 지극히 형식적으로 종극에게 예를 갖췄다. 비록 무림 공적으로 지목되어 정도 무림에 쫓기고 있고, 백사회의 일원들과 동행 중이라 해도 그는 뿌리부터 정도인이었던 것이다. "어? 이미 알고 있었어요?" 남지학이 염마를 알고 있으리라 생각치 못했던 선주혁이었다. "예전에 먼발치에서 뵌 적이 있어." 남지학은 경계심 가득한 시선으로 염마를 보며 말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적개심을 간신히 감추고 있는 시선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들어온 구대마존의 흉명을 생각하면 남지학의 입장에서는 이 정도로 표정과 시선을 관리하는 것도 대단하다 여겨질 정도였다. "듣던대로 헌양한 청년이로군." 종극은 강호의 거마답지 않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남지학에게 예를 거두라는 동작이었다. 순간 남지학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종극의 손짓에서 비롯된 어떤 힘이 그의 몸을 뒤쪽으로 미는 것이다. 공격적이진 않으나 거부할 수 없는 거대한 암경이었다. 천마맹, 그 중에서도 마교의 인사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남지학. 그는 신속히 내력을 끌어올려 포권의 자세를 그대로 유지하려 했다. 종극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선주혁이 입이 닳도록 칭찬하던 사형이란 자의 실력을 가볍게 시험해보고자 했던 것이고 자신의 암경을 어렵지 않게 펼쳐내는 능력에 감탄하는 것이다. 많은 힘을 준 것은 아니나 남지학의 나이를 감안하면 그 심후한 내력 하나만으로도 범상치 않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진정 새로운 시대가 오고 있다는 것인가……?' 일월신교 내에서도 무수한 인재를 봐온 종극이었다. 하지만 남지학 정도의 인재는 마교 내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 꽤 오랜 시간 강호의 일에 흥미를 잃고 있었던 종극에게 있어서 계속되는 인재의 출현은 격세지감과 더불어 강호에의 새로운 열의를 만들고 있었다. 이어 그의 시선이 은설연에게로 향했다. 남자로 봤을 때, 남지학을 능가할 정도의 용모를 가진 그녀였다. 하지만 노련한 종극의 시선을 속이는 것은 불가능한 일. 그녀가 여자임을 파악한 종극은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뛰어난 자질과 총기를 보이는 용모였으나 여자는 여자일 뿐이라는 것이 종극의 지론이었다. 그것을 알지 못하는 은설연. 그녀는 종극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자신을 보자 지레 찔려 재빨리 포권을 취하고 고개를 숙였다. "은우라고 합니다." 종극에게 건성으로 예를 갖춘 그녀는 황망히 선주혁에게 말했다. "서너 소협, 소생도 아는 척 좀 해 주시구려, 하하핫!" "아하하핫! 은…… 공자, 그간 잘 지냈죠?" 부지불식간에 은 소저라 말할 뻔했던 선주혁은 재빨리 은설연을 공자라 칭하며 답례했다. 은설연은 한 손을 펼치며 선주혁의 말을 곧바로 받았다. "절친한 사형제지간이 오랜만에 회포를 푸는 장소가 복도이어서 되겠소? 일단 남 공자의 방으로 들어가셔서 그간 못 다한 말씀을 나누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종극을 의식한 은설연은 그렇게 두 사람과 종극의 사이를 떼어놓고자 했다. "아! 그러는 게 좋겠군요." 종극이 사형을 시험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선주혁은 행여 사형의 강직했던 그 성품이 되살아날까 염려되어 은설연의 말에 동의하고 나섰다. 괜스레 종극과 일전을 벌이겠다고 나서면 사뭇 곤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지학은 선주혁이 소설로 접했던 그 당시의 모습과 달라진지 이미 오래였다. 그는 냉철한 현실감각을 유지하며 종극을 향해 일체의 적개심조차 표출하지 않고 있었다. "어르신, 그럼 전 이만……!" 선주혁은 종극에게 양해를 구했다. 종극과 남지학 사이를 염려하는 가운데서도 그의 얼굴에는 기쁨과 반가움이 가득했다. 사형제간의 우애가 아무리 깊다지만 저렇게 좋을까싶을 정도였다. 그렇게 남지학의 뒤를 쫓는 선주혁을 바라보며 종극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앞서 정도 적풍조와 정도 무림의 인사들을 향해 거침없이 손을 휘두르는 선주혁의 위용은 자신에 못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두려워하지 않을 자는 천하에 몇 명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한데 사형 앞에서 선주혁의 모습을 그야말로 순박하기 짝이 없는 청년의 모습 그대로였다. 사형을 만났다는 기쁨 외에도 일방적으로 사형을 믿고 의지하는 마음이 여실히 느껴졌다. '옥용검마…… 저 아이가 선주혁이라는 아이를 움직이는 열쇠라는 이야기라는 건가……?' 수많은 교도를 이끌어온 자답게 종극은 일순간에 많은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이어 두 사람만의 시간을 보내라며 남지학과 선주혁의 옆방으로 들어가는 은설연의 뒤를 바라보던 종극이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보니 저 계집아이의 이목구비가 낯이 익은걸?' 선주혁과 남지학은 탁자를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뜨겁게 얽혔다. 오가는 눈빛은 수만 마디의 말보다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입을 열어 말을 한든 지금의 반가움과 기쁨을 어찌 표현하겠는가? 가족과 다름없는, 그래서 의지가 되고 믿음이 가는, 그런 남지학이었기에 선주혁은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았다. "용케 머리색을 감췄군, 그래." 그간 얼마나 고생이 많았는지는 따로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새삼스레 고난으로 점철되었을 이별의 시간들을 떠올려 지금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은 남지학이었다. "하핫, 어떤 친절한 어르신에게 염색하는 법을 배웠어요." "이제 피부색만 돌아오면 예전의 사제 그대로인걸." "헤…… 이제는 더 이상 염색하지 않으려고요." 선주혁은 혀를 한번 낼름 내밀었다 집어넣으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왜? 염색하기가 어려운 거야?" "아뇨……" 선주혁은 고개를 저었다. "무림맹에서 이미 사제의 염색을 알았기 때문에?" 남지학의 추측은 반만 맞았다. 그럼에도 선주혁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남지학의 말대로 이미 무림맹에서 자신이 머리색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상 더 이상의 염색은 의미가 없다. 하지만 이상한 시선을 받는 백발보다는 지금의 머리색이 나은 것은 사실. 그럼에도 선주혁이 더 이상 염색을 하지 않으려는 이유는 마중영과의 만남에서 비롯되었다. 그와의 만남으로 선주혁은 이곳이 자신이 살던 세계와는 엄격히 구분되는 또 하나의 현실임을 명확히 알게 되었다. 더불어 선주혁이라는 인물과 자신이 바뀌었다는 것도 인지하게 된 것이다. 그 사실이 중요했다. 바뀌기 이전의 선주혁과 이후의 선주혁은 분명 다른 사람이다. 따라서 선주혁은 그와 같은 사실을 구분하고 싶은 욕구가 있었고, 변한 외모로나마 위안을 삼고 싶어 했던 것이다. 선주혁이 더 이상 염색을 하지 않기로 결심한데에는 이와 같은 이유가 반쯤은 차지하고 있었다. "이왕에 백발귀마라는 별호가 생긴 마당에 백발로 달려 봐야죠!" 선주혁의 농담에 남지학이 미소를 지을 때 방문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남지학은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편복마왕 남백연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남창에 생난리가 났다." "무슨 난리요?" "일단 안으로……" 남백연은 안으로 들어가자 말해놓고도 채 문을 닫기도 전에 걸음을 옮기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남지학과 선주혁은 내력을 돋우어 어렵지 않게 남백연의 나머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지학, 그 녀석의 사제 말이야. 백발귀마라는 그 녀석이 염마와 함께 무림맹 떨거지들을 쓸어버린 모양이야!" "저……" 은설연은 남백연이 말하는 그 백발귀마와 염마가 이 객잔에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려 했다. 하지만 황급히 쏟아내는 남백연의 말이 그녀의 말을 외려 가로막았다. "놈들이 쉬쉬하는 모양이어서 아직까지 소문이 널리 퍼지진 않은 모양인데 아주 박살이 났나보더라고. 적풍조까지 박살냈다는 걸!" 남백연의 음성은 다소 고조되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파연합에서 가장 큰 골칫덩어리인 게 바로 적풍조였다. 그런 적풍조가 박살이 났다고 하니 신이 난 것이다. 흥분한 남백연의 음성 사이에 은설연이 끼어들었다. "흠. 적풍조라…… 그런 식으로 무림맹을 도발하다니! 염마가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인가요?" 최근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지내는 염마였다. 하지만 구대마존 중 정도 무림인을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로 그! 염마 종극이다. 과거에는 정도 무림인이 염마와 마주하는 것은 명부에 이름을 올리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정도 무림인이라면 가차 없이 손을 썼고 일체의 자비도 베풀지 않았던 것이 염마였던 것이다. 그 잔혹한 행사는 전설이 되어 지금도 정도 무림인들 사이에서 암암리에 회자 되며 공포로 남아 있었다. "아니. 염마가 함께 있기는 했었는데…… 정작 손을 쓴 것은 염마, 그 늙은이가 아니라는 걸." "에? 그럼 선 소협이 적풍조와 무림맹의 인사들을 단신으로 상대했다는 말인가요?" 은설연은 물론 선주혁의 대단한 능력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또한 그의 능력을 잘 알고 있기에 한계도 명확히 알았다. 선주혁의 능력이 범인의 상상을 뛰어넘고, 그 무공이 나이를 초월해 엄청나다는 것 또한 알지만 상대가 적풍조일 때는 이야기가 달랐다. 적풍조는 전문적으로 절정의 고수만을 암살하기 위해 키워진 조직. 사파연합을 이끄는 백사회의 고수라 할지라도 골치를 썩어가며 상대해야하는 적풍조였다. 한데 무림맹의 다른 고수들과 함께한 적풍조를 선주혁 홀로 감당했다는 것이 은설연으로서는 쉽사리 납득하기 힘들었다. 자신의 눈앞에서 선주혁이 무공을 전개하는 것을 봤었기 때문이다. 엄청난 고수라 해도 적풍조와 무림맹 인사들을 한꺼번에 상대한다는 것은 그녀가 본 선주혁의 무공으로는 무리가 있었다. "적풍조가 한 개가 아니었다는 걸. 두 개의 적풍조에 무림맹 인사들도 근 삼십 여 명이 되었다는군. 그 인원을 혼자 해치웠다는데? 무림맹 측에서는 난리가 난 모양이야." "호, 혼자서 두 개의 적풍조를요?" "무림맹 떨거지 오십여 명하고! 물론 생존자들도 꽤 되나 본데…… 하여튼 절반 이상이 떼죽음을 당했나 보더라고." "그게…… 가능한가요? 단신으로 적풍조와 오십여 무림인을 상대한다는 것이?" 은설연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녀의 질문에 답한 것은 지금껏 침묵하고 있던 천산노조 서동주였다. "무공이 일정 이상이라면 오십 명 정도의 무림맹 떨거지를 상대하는 것은 별 일 아니지. 합격술을 연마하지 않은 이상 자기들끼리 거치적거릴 테니 말이야. 더구나 무슨 일로 그렇게 서둘렀는지는 몰라도 이름 깨나 알려졌다 할 놈은 거의 없었던 모양이야." "그렇지. 시시껄렁한 놈들이 서로 뒤섞여 있는 상황이라면 오십이건 백이건 별 문제가 안 되는 거지." 남백연이 서동주의 말에 동의하고 나섰다. "그러니 금번 사건의 요는 백발귀마라는 꼬마 녀석이 단신으로 두 개조의 적풍조를 상대해 완파했다는 거야. 합격술에 있어 천하제일을 자부하는 적풍조 놈들을 홀로 상대했다는 것은 녀석의 무공이 결코 우리 아래에 있지 않다는 뜻이니까!" 남백연은 사뭇 고조된 어조로 선주혁의 무공을 추켜세웠다. 새파란 애송이의 무공이 자신과 비견될 정도임을 인정하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설마요?" 은설연의 놀란 음성이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무림맹 떨거지들의 숫자가 별로 중요한 게 아니라 할지라도…… 적풍조 두 개조를 상대하는 와중에 그놈들까지 처리하려면 분명 곤란한 일이 생길거야. 그러니까……" 말끝을 흐리는 남백연. 그의 뒷말은 서동주가 받았다. "복잡하게 말할 필요 없지. 이 정보가 사실이라면 백발귀마라는 아이의 무공이 우리보다 뛰어나단 뜻이다." "말도 안 돼요!" 은설연은 옆방에 선주혁이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한 채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가공할 오성으로 한 번 본 무공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다지만 자신이 확인한 선주혁의 무공이 백사회 일원을 넘어설 정도는 아니었다. 무공이란 초식만 빨리 습득할 수 있다고 한없이 발전하는 게 아니다. 무공에 대한 깨달음은 물론이거니와 내공의 뒷받침이 반드시 필요했다. 따라서 아무리 영약을 밥처럼 복용하고, 마공이나 사공을 익혀 내공의 증진 속도를 높인다 해도 넘을 수 없는 벽은 존재 했다. 결국 은설연의 사고 영역 내에서는 선주혁이 자신과 헤어져 있는 기간 동안 비약적인 무공의 발전이 있었다 해도 천산노조나 편복마왕에 비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외려 두 사람을 뛰어넘는다고 하니 스스로도 인재임을 자처하는 그녀로서는 인정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뭐…… 염마가 옆에 있었으니 달리 생각해볼 여지도 있지. 무림맹 떨거지들이 알아채지 못하게 종 늙은이가 도왔을 가능성이 충분하거든." 백발귀마라는 애송이가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이번 일은 너무하단 생각이 들었다. 금번의 정보가 사실이라면 향후 십 년 후의 강호는 백발귀마라는 녀석 앞에서 목을 세울 수 있는 무림인은 아무도 없을 것이란 말이었다. 고작 삼십 여 세의 나이에 천하제일의 고수에 오르다니! 무림사를 통틀어 단 한 번도 없던 기적이 발생할 가능성을 인정하기는 남백연에게 큰 무리였다. 한편, 저도 모르게 지른 소리에 스스로 화들짝 놀란 은설연. 그녀는 곧 자신의 실태를 깨닫고 재빨리 남백연과 서동주 두 사람에게 말했다. "그를 찾았어요." "찾다니? 누굴?" "누구겠어요! 선 소협 말이에요." 놀라운 소식의 연속 속에 객잔의 벽 따위가 고수들의 명민한 청력을 방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잠시 망각했던 그녀였다. 하지만 정신을 차린 지금에서는 옆방에 있을 선주혁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백발귀마? 그, 그 괴물을 찾았다고?" 남백연이 놀라 외치는 소리 이후, 옆 방은 잠잠해졌다. 아마도 선주혁이 옆방에 있음을 의식해 전음을 나누는 것이리라. 그들의 이야기가 끝나자 남지학의 시선이 선주혁에게 항했다. "진짜 사제가 단신으로 무림맹의 고수들 오십여 명을 상대한 거야?" 남지학 역시 사제의 무공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사제의 능력을 인정하면서도 흡성대법에 대해 모르고 있으니 의아한 바가 없지 않았던 것이다. "그, 그게……!" 선주혁은 잠시 말머리를 끌다가 입을 열었다. "사실과는 좀 다르게 소문이 났나보네요. 옆방에서 들려온 이야기 대로에요. 염마 어르신이 도와주신 거죠, 하핫. 역시 소문이란…… 아하하핫!" 선주혁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염마의 핑계를 대는 순간이었다. 방문이 벌컥 열리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남백연과 서동주, 그리고 은설연이었다. "죄송하오! 남 소협, 그리고 선 소협. 두 분께서 선 소협을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다고 해서……" 남백연과 서동주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날카롭게 안목을 빛내며 선주혁을 뜯어봤다. 선주혁은 두 사람 중 남백연은 한 눈에 그 신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검은 색 피풍의를 두른 모습이 딱 박쥐와 똑같았던 것이다. "후배 선주혁이 백사회의 두 분께 인사 올립니다." 선주혁은 미안해하는 은설연의 마음을 풀어주려는 듯 재빨리 두 손을 맞잡고 예를 갖췄다. "노부는 남백연이라고 하네. 강호에서는 편복마왕이라고 하지." "대명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이쪽은 서동주…… 강호인들은 그를 천산노조라고 부른다네." 남백연의 소개에 선주혁은 서동주를 봤다. 과연 책에서 본대로 눈부시게 하얀 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노인이었다. 언뜻 보기에는 신선과도 같은 풍모라 그가 왜 정파인들이 덜덜 떠는 사파의 거두인지 알기 힘들 정도였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서동주의 멋들어진 용모에 감탄한 선주혁이 머리를 살짝 숙이며 예를 갖췄다. 선주혁의 예의바른 태도가 흡족한 듯 서동주와 남백연은 미소로 그의 예를 받아들였다. 현 강호는 그야말로 백발귀마의 명성으로 들썩이는 중이었다. 어린 나이에 그 정도의 명성을 떨치면 짐짓 거만해지기 마련이거늘 선주혁에게서는 그런 모습을 찾기 힘들었다. 그간 보아온 남지학처럼 겸손하고 예의바른 태도를 갖춘 것이다. 그것이 두 사람의 마음에 들었다. "이곳 남창에서 무림맹 놈들과 한판 제대로 벌려야할 줄 알았건만 이렇게 쉽게 찾을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네. 자네 사형이 얼마나 자네를 걱정했는지 아는가……?" 서동주가 근엄한 표정을 유지하며 사뭇 자애롭게 말했다. 그의 말에 선주혁이 남지학을 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설마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이야!" 남백연은 정말로 이런 곳에서 백발귀마를 찾을 수 있을지는 상상도 못했던지라 고개를 저었다. "하여튼 잘 된 일이지 뭔가! 여하튼 오늘은 이곳에 묵고 내일 바로 남창을 떠나도록 하세. 무림맹 떨거지들은 제 놈들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자네를 가만두려하지 않을 걸세." "그게…… 좀 곤란합니다." "무슨 이유가 있는가?" 남백연이 미간을 좁히며 묻자 은설연이 선주혁을 대신해 대답했다. "선 소협은 지금 염마와 동행중이에요." "그 늙은이도 이곳에?" "그렇네. 이 늙은이도 이곳에 있다네." 남백연의 뒤쪽에서 들려온 목소리. 창노한 음성이었지만 남백연과 서동주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것은 비단 염마가 자신들의 뒤에 서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가 뒤쪽까지 접근하는 동안 두 사람은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염마가 마음먹고 암습을 하려했다면 자신들은 이미 죽은 목숨. 구대마존의 반열에 왜 염마의 이름이 당당히 들어있는지 알 수 있는 순간이었다. "오랜만이오, 종 장로." 서동주가 재빨리 신색을 회복하며 종극에게 인사를 건넸다. "풍채는 여전하구려, 서 형." 이전에 일견식이 있었던 두 사람이 딱딱한 분위기에서 수인사를 주고받았다. "남 형도……" "그간 무고하셨소, 종 장로?" 종극은 남백연과 예를 갖추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방금 전 자신을 늙은이라 칭했던 것을 전혀 개의치 않는 투였다. 한 눈에도 범상치 않은 용모를 지닌 서동주와 남백연이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노인을 상대로 제대로 된 격식을 차리는 것은 일견 어색하기까지 했다. 종극의 등장으로 객실의 분위기는 한순간 무거워졌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외모에 고수로서의 일체의 기운도 발하지 않았건만 염마라는 이름의 무게가 공기를 짓누르는 것이다. "오랜 칩거 중이신 것으로 알았건만 어쩐 일로 이곳 남창까지 오셨는지요?" 서동주가 기품 있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종극은 서동주의 질문에 사람 좋은 미소로 답했다. "성화령이 동원되었으니 노구를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소이다." "…………!" 성화령 동원! 천마맹 최고의 권위를 지닌 특명이 발동했다는 의미였다. 말을 마친 종극의 시선이 선주혁을 향했으니 성화령 발동의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서동주와 남백연은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선주혁을 봐야했다. 은설연의 요청으로 백사회의 두 명의 움직여야한다는 사실을 다른 이유에서 찾았던 두 사람이었다. 사천백가의 여식을 구하는 과정에서 만난 의문의 무리는 실로 범상치 않은 무공을 지녔다. 자신들이 나서지 않았다면 큰 피해를 입고 뜻한 바를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두 사람이 동원된 이유가 의문의 무리를 상대하기 위함이라 생각했지 백발귀마라는 애송이를 사파연합으로 끌어들이는 데에 있다고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한데 천마맹, 즉 마교에서 노골적으로 성화령을 동원해 백발귀마를 탐낸다고 하니 두 사람으로서는 선주혁을 새삼스레 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종 장로께서 어쩐 일로 무림맹의 개들에게 신위를 보이셨나 했더니 귀교의 최고령이 동원되었던 것이군요." "다 늙어 묏자리를 찾아다니는 늙은이가 무엇을 보였단 말입니까?" "무림맹의 개들이 천마맹의 위업을 새삼 알게 되었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만……" 종극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짓자 남백연은 약간은 능글맞은 표정으로 말했다. "흐음…… 얼마 전 적풍조와 무림맹의 떨거지들이 당한 일에 대한 말씀이시구려." 남백연은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것 말고는 새삼 언급할 일이 없지 않은가? "그 일이 있을 당시 노부는 뒷짐을 지고 구경을 했을 뿐이외다. 적풍조와 무림맹의 개들을 혼쭐을 낸 것은 저 친구지요." "에?" 남백연이 입을 크게 벌렸다. 동시에 종극을 제외한 이들의 시선이 모두 선주혁에게 집중되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느낀 선주혁이 얼굴을 살짝 붉히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아하핫, 종 어르신이 먼저 손을 쓰신 후에 제가 좀 거든 것 뿐입니다." 선주혁은 재빨리 종극의 말을 수습하려 들었다. 처음 적풍조의 습격을 받았을 때, 종극이 손을 썼던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종극에게 떠넘기는 것이다. 종극은 굳이 선주혁의 말에 자세한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곤란한 표정을 짓는 선주혁의 심리를 꿰뚫은 것이다. 더불어 지금의 이 자리에서 굳이 선주혁의 가치를 올릴 필요가 없다는 계산도 함께 했다. 백사회의 두 인물과 그를 닮은 계집아이가 이곳에 와 있는 이유를 그가 모를 리 없었던 것이다. 한편 선주혁의 말을 들은 중인들은 저마다 다른 생각에 빠져들었다. 남지학은 종극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중이었다. 사제가 발전하는 속도는 가히 경이적이었다. 그러니 자신과 헤어져 있는 동안 얼마나 더 발전이 있었을지 짐작조차 못하는 것ㅅ이다. 은설연은 생각이 조금 달랐다. 선주혁의 말 그대로 종극이 앞서 무림인들에게 큰 부상을 입혀놓거나 곤란한 상태로 몰아넣은 후 선주혁이 그들을 처리했을 거라 생각했다. 그녀의 사고 영역 내에서는 달리 해석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서동주와 남백연은 남지학과 은설연의 중간 정도에서 이해하는 중이었다. 선주혁의 나이를 고려한다면 적풍조를 상대했다는 것만으로도 탐이나는 인재임이 틀림없었다. 마교에서 성화령까지 동원해 포섭하려 한다니 그것만으로도 선주혁을 반드시 사파연합으로 끌어들일 이유가 된다. 따라서 두 사람은 염마를 의식하며 선주혁을 포섭할 방안에 더욱 몰두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두 분께서는 어인 일로 이곳까지 행차를 하셨소?" 종극이 느긋한 표정으로 묻자 은설연이 재빨리 나섰다. "남창이 저희 연합의 근거라 할 수는 없지만 앞마당이나 다름 없습니다만……" 사실상 염마 종극과 백사회의 두 명이 대화를 하는 데에 있어서 은설연 정도의 어린 후배가 끼어드는 것은 사뭇 무례한 일이었다. 하지만 종극은 눈살 하나 찌푸리지 않았다. 은설연에 대해 내심 짐작하는 바가 있었던 것이다. "자네는……" 염마가 입가를 살짝 당겨 웃자 은설연은 내심 긴장하며 괜스레 나선 것을 후회했다. 염마 종극이 자신의 남장을 알아보고 선주혁과 남지학 앞에서 이야기를 할 것을 염려한 것이다. "은 회주와 무슨 관계인가?" 종극은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물었다. 은설연은 종극의 미소에 담겨진 뜻이 혹여 자신의 남장을 알아챈 것이 아닌가 싶어 재빨리 대답했다. "과연 종 장로님의 안목은 탁월하시군요. 저희 조부께서 현재 백사회를 이끌고 계십니다." 은설연의 말에 종극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짐작한 바대로였던 것이다. "은 회주가 늦게 본 여식의 미모가 출중하다 들었다. 그 아이가 네 모친이 되겠구나." "그렇습니다." 여전히 계속되는 종극의 미소와 굳이 자신의 모친을 거론하는 것으로 미루어 은설연은 그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단정지었다. 종극은 은설연의 대답에 살짝 고개를 끄덕인 후 앞서의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두 분께서는 새삼스레 사파연합의 앞마당을 시찰하러 나선 것이라 말하는 건가?" "그것만은 아닙니다. 남 소협과 선 소협이 무림맹과의 분란을 피해 저희 연합에 머물고자 하는 뜻을 밝히셨습니다. 사정이 있어 선 소협과 헤어졌던 바, 남창에 있다는 소문을 접하고 마중을 나온 것입니다." 은설연은 종극이 명성에 걸맞은 인물이라 결론을 지었다. 그리하여 빙빙 돌아가는 화법 대신 직설적으로 남창 행의 취지를 밝혔다. 직접적인 은설연의 말에 조금은 당황할 법도 하건만 종극은 시종일관 여유를 잃지 않았다. "호오……! 그런 사연이 있었구나. 이를 어쩐다……?" "무슨 문제가 있으신지요?" 은설연 역시 나이를 뛰어넘는 노련함으로 대응했다. 종극의 말에 담겨진 의미를 모르는 바 아니나 시치미를 뚝 떼고 질문을 한 것이다. "이 늙은이가 말라비틀어진 뼈를 움직여 남창에 온 이유 때문일세. 교주께서 성화령을 동원하시어 저 아이를 대산으로 데려오라 하셨으니……" 대산이라 함은 일월신교의 본거지가 있는 십만대산을 뜻함이었다. 은설연이 막 대꾸를 하려는 찰나 종극이 자신의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저 아이가 사파연합에 의탁하려 했던 바를 재고할 필요가 생긴 듯하네. 노부로서는 성화령이 지시한 바를 지키지 않을 수 없으니 말일세." 종극 역시 은설연 못지않게 단도직입적으로 나섰다. 이에 은설연은 남지학의 얼굴을 잠시 살핀 후 자신있는 표정으로 나섰다. "죄송하지만…… 남 소협과 선 소협은 저희 사파연합과 거래를 하신 것입니다. 제가 아는 남 소협은 일구이언을 하실 분이 아니니 종 장로님께서는 사정을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은설연의 말에 종극은 선주혁을 바라봤다. 그에게 설명을 요구하는 것이다. 선주혁은 종극의 시선에 살짝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천하를 사분한 세력 중 두 곳에서 자신과 사형을 스카웃하려 드는 상황이 쑥스러운 것이다. "은 공자의 말이 맞습니다. 저희가 부탁을 드린 바가 있거든요." 선주혁의 말에 종극의 미간에 깊게 골이 파였다. 방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인상을 쓴 것이다. "민아를 찾겠다는 약속을 어기겠다는 뜻인가?" "아니오. 어르신과 단목 공자를 찾겠다는 약속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선주혁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이번에는 은설연 등의 의문의 표정을 지었다. 선주혁은 앞서보다 더 어색한 표정으로 설명을 했다. 단목지민이 자신을 돕다가 행방불명 상태이며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도 그를 찾는 데에 나설 수밖에 없다고. "남자는 은원이 분명해야지. 나도 도우마." 남지학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 나섰다. 그러자 남백연의 검은 눈썹이 씰룩였다. "본 연합으로 가겠다는 약조를 어기겠단 말인가?" "사제를 도운 분을 찾고 가면 될 일입니다." 남지학은 다소 위협적인 남백연의 표정에 위축되지 않고 당당히 말했다. 남백연이 뭐라 한 마디를 하려하자 서동주가 눈짓으로 말렸다. 그간 남지학을 지켜봤기에 그의 성품에 대해 잘 아는 것이다. 무림맹에 마두로 몰려 쫓기는 상황이지만 남지학의 성격은 올곧고, 또 완고했다.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며 내린 결론에는 물러서는 법이 없는 그였다. 서동주는 외려 엄지를 치켜세웠다. "암! 장부라면 은혜를 갚아야지." 서동주의 말에 은설연은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었다. 서동주의 말에 담긴 중의적 의미를 파악한 것이다. 선주혁이 은혜를 갚기 위해 누군가를 찾는다면 백가의 여식을 도왔던 자신들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사파연합으로 가야한다는 뜻인 셈이었다. 종극 역시 서동주의 말뜻을 헤아렸다. 그러나 당장 그의 말을 반박하거나 성화령을 받들기 위해 선주혁을 일월신교로 데려갈 것을 주장하지 않았다. 힘으로 해결할 수도 있겠지만 역효과가 날 가능성이 더 컸다. 일단 단목지민을 찾을 때까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둔 것으로 만족하며 차근차근 대안을 세우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더불어 남지학이 선주혁의 향방을 결정짓는 열쇠라는 것을 파악한 이상 종국에 가서는 뜻한 바를 이룰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종극이었다. 선주혁을 놓고 객실의 안쪽은 저마다 안배와 계획을 세우느라 암중으로 달아오르고 있었다. "흠…… 역시나 그런 사연이 있었군." 남지학은 미간을 찌푸린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맹이 자신들을 쫓는 이상 생존을 위해 그들을 상대하는 것은 불가피했다. 하지만 여유가 되는 상황에서 불필요한 살생을 할 필요는 없다. 그와 같은 행동은 언젠가 곤륜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희망을 사라지게 하기 때문이었다. 이에 남지학은 무림맹을 상대하며 그토록 심하게 손을 썼어야하는 이유가 있는지 물었다. 저들을 죽이지 않으면 선주혁이 위험했던가를 확인한 것이다. 선주혁은 표국에서의 인연과 공 노인의 희생에 대해 사형에게 설명했다. "복수가 전부는 아니겠지만……! 누구도 사제를 탓할 수는 없을거야." 남지학은 선주혁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선주혁 역시 사형이 우려하는 바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이번 일로 인해 사형과 자신이 곤륜파로 돌아갈 가능성이 거의 사라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그럼에도 사형은 자신을 탓하지 않고 외려 편을 들어주자 가슴에서 묵직한 무엇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사형이야말로 그에게 있어서는 진정한 가족이었던 것이다. "사형,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아니야. 내가 사제의 입장이라 해도 같은 결과였을 거야. 목숨의 빚을 갚는데 무슨 논리가 필요하겠어." "…………" 선주혁은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사실 마중영을 만나기 전에 선주혁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것이 사형에 대한 생각이었다. 이곳에서의 모든 것이 자신의 정신착란이거나 환상이라면 남지학이라는 존재 역시 허상이 된다. 태어나 처음으로 가족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허구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선주혁을 괴롭혔던 것이다. 허나 이제는 달랐다. 남지학은 분명 실재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있어 둘도 없는 가족인 것이다. 남지학 자체가 너무나 고맙기만한 선주혁이었다. 뭉클한 무엇이 치밀어 올라 눈시울을 붉히던 선주혁의 표정이 굳어졌다. 사제를 향해 미소를 지어주던 남지학의 눈에 의문이 떠올랐다. 선주혁은 시선을 옆으로 하며 검지를 세워 입에 가져다 대었다. 사제가 무엇인가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남지학은 호기심을 억눌렀다. 잠시 후 선주혁의 입술이 달싹였다. [누군가 기척을 죽이고 객잔으로 접근하고 있어요.] 선주혁의 전음에 남지학도 내력을 운용해 청력을 극대화시켰다. 잠시 후 남지학도 객잔의 기와를 밟는 소리와 처마끝 쪽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무림맹에서 또……?] 남지학의 말에 선주혁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기척을 죽일 수 있다면 적풍조원들일 수도 있겠군.] 대개의 정도 고수들은 잠입술이나 은신술에 능하지 않다. 절정의 경공을 지니면 자연스레 자신을 드러내지 않을 수 있겠지만 이렇게 많은 인원의 절정고수라면 당당히 정문으로 들이닥쳤을 것이다. 두 사람이 신경을 팽팽히 당기며 고조된 긴장을 유지할 때 소리를 낮춰 방문이 열렸다. 종극이었다. 두 사람이 이미 접근하는 무리의 기척을 느꼈음을 파악한 종극은 묵묵히 의자에 가서 앉았다. 잠시 후 서동주, 남백연, 은설연이 선주혁의 방으로 들어왔다. 정체모를 침입자들이 노리는 인물이 누구인지 그들은 이미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선주혁은 작금의 상황이 과거 백화란을 노리던 적을 상대할 때와 유사하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남지학의 전음이 그의 귀를 파고들었다. [객잔의 투숙객들이 애꿎은 피해를 입을 수도 있겠어. 차라리 우리가 밖으로 나가는 것은 어떨까?] 남지학 역시 지난 일을 기억해낸 것이 분명했다. 선주혁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공에 자신감도 생겼고 좁은 공간에서는 자신의 장점을 발휘하기가 외려 힘들었기 때문이다. 선주혁은 종극과 은설연 등에게 손짓을 했다. 이어 그의 신형이 빠르게 창문을 부수고 튀어 나갔다. 지난 번과는 달리 남지학 등이 선주혁의 뒤를 쫓아 객잔 밖으로 나왔다. 사형이 뒤따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선주혁은 암영풍을 전개해 앞으로 내달렸다. 높은 음의 호각소리 같은 것이 뒤쪽에서 들려왔다. 자신들의 도주를 알리는 것이리라. 앞서 달리는 선주혁의 곁으로 남백연이 금세 따라붙었다. 경공에 있어 신투와 그 명성을 나란히 하는 그였다. 장거리에서는 신투의 경공이 더 뛰어난 효용을 발휘할지 몰라도 중단거리에서는 편복마왕의 경공은 가히 무림 최고봉에 서 있었던 것이다. 선주혁은 애써 속도를 끌어올리지 않았다. 은설연과 사형이 달릴 수 있는 속도를 생각한 것이다. 또한 지금은 도주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한적한 장소일 뿐이었다. 이각을 조금 못미쳐 선주혁 등은 넓은 장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 선주혁은 제자리에 멈춰섰다. 세 호흡을 잇기 전 추적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얼핏 헤아려보니 스물은 족히 되어보였다. "적풍조는 아닌 거 같은데……?" 엄청난 속도로 달려왔음에도 남백연은 호흡 하나 흐트리지 않고 중얼거렸다. 그가 적풍조가 아니라 짐작한 이유는 추적자들의 복장 때문이었다. 적풍조는 암습을 전문으로 한다. 자연 그들의 복장은 야행복이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모습을 드러낸 추적자들은 질 좋은 옷감으로 만들어진 홍의를 입고 있었다. 이는 저들이 기척을 줄이고 접근했을 뿐 암습을 노렸던 것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다. "다른 놈들은 볼일이 없다. 백발귀마가 누구냐?" 나타난 홍의인들은 대부분 오순을 족히 넘겨보였다. 개중 머리가 희끗해 가장 나이가 들어 보이는 한 명이 지독할 정도로 거만한 투로 물었다. 선주혁의 일행 중 홍의인들의 등장을 두려워하는 이는 없었다. 저들의 경신 공부가 뛰어난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쪽의 구성원을 생각하면 두려움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구대마존의 일인인 염마 종극과 백사회의 두 명이 있는 자리였다. 한 지역을 좌지우지하는 문파가 몰려와도 코웃음을 칠 판에 고작 스무 명 정도의 인원일 뿐이었다. 그런 마당에 수적인 우세를 믿고 거만한 태도를 보이는 홍의 노인은 실소를 자아내게 했다. "그야말로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 강아지들이군." 남백연이 길게 기른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다른 이들의 심경을 대변한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유독 선주혁의 표정만이 어두웠다. 그는 확연히 느끼고 있었다. 이들이 무림맹 소속이 아니라는 것을. 몸 안에서 꿈틀대는 진기. 그것은 혈마자광기에 대한 반응이었다. 혈마자광기를 익혔다는 것은 그들이라는 말이다. 그들 중 최하수라해도 강호에서 소위 고수라는 이들을 너끈히 상대함을 잘 알고 있는 선주혁이었다. 사해표국의 일로 자신을 찾은 거라면 만반의 준비를 해 왔을 터. 복면을 하지 않고 얼굴을 드러낸다는 것은 오늘에야말로 자신을 죽이겠다는 저들의 의지일 것이다. 결국 종극, 서동주, 남백연이 있다 해도 오늘은 쉽지 않은 밤이 될 것이라는 것을 선주혁은 본능적으로 느끼는 중이었다. 홍의 노인은 남백연의 말을 무시한 채 선주혁만을 향해 말했다. "살아남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적에 가깝거늘 꽤나 쓸만한 조력자들을 구했구나. 하지만 오늘도 천행을 바랄 수는 없을 게야." 홍의 노인이 자신을 무시했다는 사실에 남백연의 검은 눈썹이 하늘을 향해 크게 치켜 올라갔다. 백사회의 일원인 그가 언제 이런 대우를 받아봤겠는가? "오만방자한 놈!" "흥! 백발귀마라는 놈만 조심하면 될 터. 나머지는 모두 쓸어버렷!" 홍의 노인의 명령이었다. 보고에 의하면 백발귀마라는 놈은 금강불괴지신을 이뤘다고 했다. 극성에 달하지 않는 자광수로는 어찌해볼 상대가 아니라는 말이었다. 죽었다던 그가 살아 있다는 것은 홍의 노인이 속한 곳에서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혈마인과 혈마자광수가 통하지 않는 상대는 위대한 과업에 큰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는 이야기. 더불어 수하들의 희생을 감내한 공격 속에서 살아남았다는 것은 이미 가공할 무공의 소유자라는 뜻이었다. 홍의 노인이 속한 단체의 수장은 백발귀마의 처단을 최우선의 과제로 정했다. 원대한 뜻을 달성하는 데에 있어서 변수는 용납될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홍의인들이 이곳에 방문한 목적은 전적으로 선주혁에게 있었고 그외의 일행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더불어 진실을 외면한 채 스스로 대단하다 여기는 무림인들에 대한 경멸이 뼛속 깊이 박혀있는 홍의 노인이었기에 종극 등은 안중에도 없는 것이다. "미친 놈들!" 백발귀마라는 애송이가 사뭇 대단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스스로가 그보다 낮다는 것을 선뜻 납득하기 힘든 남백연이었다. 이제 막 강호에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애송이보다 못한 취급을 받았다고 느끼자 그의 입에서 단발마의 노성이 터져 나왔다. 그와 함께 남백연의 신형이 흐릿해졌다. "조심……!" 남백연을 향한 선주혁의 경고성이 채 나오기도 전에 그의 신형은 홍의 노인의 앞에 도달해 있었다. 강호에 떠도는 비천편복이라는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홍포 노인의 눈에도 놀라움이 떠올랐다. 백발귀마의 일행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범상치 않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빠른 경신술은 그로서도 처음 접했던 것이다. 곧추세운 남백연의 손가락은 그의 경신술에 못지않은 속도로 홍포 노인의 목을 잡아갔다. 홍포 노인은 찰나의 순간에 평정심을 회복하며 몸을 기울여 남백연의 손을 피해갔다. 백전노장인 남백연이 선기를 놓칠 리 없었다. 그의 손은 부드럽게 호선을 그려 방향을 바꾸며 홍의 노인의 목을 계속해 잡아갔다. 예상을 넘어선 움직임으로인해 곤란을 겪는 홍의 노인이었으나 그의 무공 역시 일반의 강호인들로서는 상상키 힘든 경지. 바람처럼 신형을 뒤로 뽑아 남백연의 손아귀가 다시금 허공을 움켜쥐게 했다. 더불어 노인의 손에서 자광이 발하기 시작했다. "피해요!" 이번에는 늦지 않은 선주혁의 외침. 상대의 손에서 빛나는 자광에 담겨진 기운을 고수 본연의 직감으로 파악한 남백연은 황망히 뒤쪽으로 신형을 뽑았다. 자광수가 허공을 가르자 홍의 노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혈마자광기?" 섬뜩한 느낌에 뒤쪽으로 피했던 남백연이 홍의 노인의 무공을 알아보고 놀라 외쳤다. 자하신공이라기에는 옷섶앞을 스친 장력의 기운이 너무나 패도적이었던 것이다. "혈마의 무공이?" 은설연이 역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동안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혈마의 무공이 강호에 재출현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라기에는 충분했다. "흐흐…… 몰라도 될 것을 알아버렸구나. 이로서 너희들의 죽음에 대한 이유가 늘었다." 홍의 노인은 음침한 미소를 흘렸다. 남백연의 경공이 놀랍기는 해도 어차피 자신들의 상대는 아니라 여기는 그들이었다. 그만큼 홍의인들이 가지는 무공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했다. 홍의인들은 노인의 말과 더불어 한순간 간격을 벌렸다. 이어 걸음을 옮기는 홍의인들. 반원을 그리며 다가오는 그들의 목적은 선주혁 일행의 포위에 있었다. 일단 상대가 혈마의 무공을 사용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종극 등은 경각심을 있는대로 끌어올렸다. 설사 자신보다 무공이 낮다 해도 자광수 자체는 상대하기가 지극히 까다로울 것임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조심스레 상대의 무공을 가늠하려는 그 때. 선주혁이 앞으로 나섰다. 종극은 그의 능력을 이미 견식 한 바가 있었으며, 남지학은 사제가 경솔한 행동을 할 리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남백연은 혈마자광기에 대해 알지 못하는 애송이가 겁 모르고 나선다고 생각했고 은설연은 선주혁의 안위에 대해 걱정하느라 미간을 찌푸려야했다. "사해표국에서의 빛을 갚겠다." 선주혁의 한 마디에는 원한이 가득했다. 따지고 보면 이들과 한패에게 사경을 헤멜 정도의 부상을 입었다. 그 부상이 결국 공 노인의 희생을 필요케 만들었으며, 선주혁에게 갚을 수 없는 빚을 만든 것이다. 선주혁의 말을 들은 나머지 일행들은 홍의인들이 사해표국 남창지부 사건의 주범임을 알 수 있었다. 더불어 남지학과 서동주 등은 이들이 사천백가의 여식을 노리던 그들과 한패임을 짐작했다. 앞서 만났던 자들이 혈마인을 사용했다면 이들은 자광수를 사용한다는 것만이 다를 뿐이었다. 반대로 홍의 노인과 그의 수하들은 세 명의 청년 중 누가 백발귀마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네놈이로군!" 홍의 노인의 두 눈이 빛을 발하는 순간 지축이 터져나가는 폭음이 울려 퍼졌다. 선주혁이 앞서의 경험을 살리기 위해 크게 진각을 밟은 것이다.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과 같은 느낌에 홍의인들은 물론 종극을 제회한 선주혁 일행들의 안색도 변했다. 마치 거꾸로 세운 폭포에서 물이 떨어지듯 거대한 흙이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흙의 양과 높이가 엄청나니 선주혁의 내공이 상상을 초월함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어, 어떻게 저 나이에 저런 내공을……?' 이것이 중인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절로 거대한 흙벽에 집중되는 순간. 선주혁의 두 눈이 자광을 발했다. 그가 혈마자광기를 운용한 것이다. 연이어 측정불가의 속도로 교차되는 선주혁의 쌍장. "크아아아악!" 흙벽 너머로 들려오는 처절한 비명소리. 일행들은 선주혁의 뒤쪽에 서 있었기에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비명의 원인을 알지 못했다. 그들이 어찌 알겠는가? 선주혁의 북두진공참이 작렬하여 홍의인 두 명의 신형을 반으로 갈랐다는 것을…… 후투투투투툭. 흙벽이 쏟아져 내려온 후 자욱한 흙먼지가 걷히고서야 선주혁의 일생들도 홍의인들의 시신을 확인했다. 하지만 종극을 제외한 그 누구도 시신을 저리 만든 제대로 된 연유를 알지 못했다. 그저 막연히 선주혁이 손을 썼거니 하고 짐작할 뿐이었다. 뿌드드득. 홍의 노인이 이를 가는 소리였다. 자신이 이끌고 온 수하들은 최고수들은 아니라도 정예라 할 수 있었다. 한데 그 중 둘이 손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금강불괴지신이라는 보고를 받긴 했지만 실제로 확인한 백발귀마는 갓 약관을 넘긴 듯한 애송이에 불과했다. 저도 모르게 방심하는 마음이 든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두 수하의 죽음은 방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백발귀마는 실로 회의 과업에 변수로 작용할 만큼 위험한 자가 틀림없다는 것이 홍의 노인의 결론이었다. "간격을 벌려! 위치를 수시로 바꿔라!" 한꺼번에 두 명의 수하가 죽었다. 이는 적의 이해할 수 없는 예기를 지닌 장력이 일정 범위를 공격한다는 뜻. 간격을 벌려야 하는 이유는 충분했다. 또한 시야를 가리는 흙벽은 공격을 하는 입장에서도 장애가 되긴 마찬가지다. 위치를 수시로 바꾼다면 장력을 날려야 할 방향을 잡지 못할 터. 노련한 홍의 노인은 재빨리 대처 방안을 세운 것이다. 연이어 홍의 노인과 그의 수하들의 눈과 자광으로 번득였다. 모두가 혈마자광기를 극도로 끌어올린 탓이다. 홍의인들이 위치를 상호 간격을 넓힌 채 계속 움직이자 선주혁은 미간을 찌푸렸다. 흙벽을 만들어 북두진공참으로 공격하는 방법의 한계가 드러난 것이다. 그는 흙벽을 포기하고 곧바로 북두진공참을 재차 전개했다. 자광으로 물든 그의 양 손이 교차되는 장면이 모두의 시선에 잡혔다. "자광수!" 홍의 노인의 외침이 터지고, 동시에 처절한 비명이 함께 울려 퍼졌다. "크아아아악!" 허리가 동강난 홍의인 하나가 진득한 피와 함께 토해낸 비명이었다. '세상에! 발출과 동시에 적을 자르는 장법이라니?' 은설염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본시 벽공장력이 발출되어 목표에 도달하는 속도는 쾌속하기 이를 데 없다. 상대가 피할 여유를 주는 장력이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발출과 동시에 목표에 도달하는 장력이 있다는 것은 금시초문이었다. 은설연은 그제야 자신이 보지 못하는 사이 선주혁의 무공이 일취월장했음을 확연히 깨달았다. 예전에 자신이 알던 선주혁과 지금의 선주혁은 적어도 무공에 있어서만은 완연히 다른 인물이었던 것이다. "장력의 방향만을 확인하고 피해!" 홍의 노인은 또다시 목에 핏대를 세우고 고함을 질렀다. 선주혁의 북두폭렬장이 다시금 발출되었다. 북두폭렬잘을 발출하기 위한 쌍장의 움직임은 가공할 속도. 하지만 미루어 짐작한 방향을 피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었다. 회의 정예인 홍의인들에게는 더욱 그랬다. 일반적인 강호인과는 차원이 다른 무공을 지닌 그들이었기에 선주혁의 북두진공참은 허공만을 갈랐다. 일단 홍의인들이 신형을 움직여 피하지 장력이 도달하는 거리의 한계를 가진 북두진공참은 그 무엇도 자르지 못한 채 허망하게 흩어졌다. 선주혁은 침착하게 몸을 피한 홍의인을 향해 재차 북두진공참을 날리려 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기회가 없었다. 자색의 안개와 같은 구체가 빛살처럼 빠르게 쇄도해 들어온 것이다. '이런!' 헛바람을 들이킨 선주혁은 재빨리 암영풍을 전개해 구체를 피했다. 쿠아아아앙. 목표에 닿으면 폭발적인 위력을 발하는 자광수의 특성은 허공을 격한 장력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선주혁의 뒤쪽에 있던 거대한 바위에 작열한 자색의 구체는 벽력탄 마냥 폭발했다. 바위는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홍의인의 장력을 확인한 서동주 등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자신들이 발줄하는 장력에 비견될 정도의 위력을 보인 것이다. "조심해!" 남지학의 경고성. 그것은 선주혁을 향해 날아오는 또 하나의 자색구체로 인한 것이다. 선주혁의 신법을 고려함인지 이번의 자색구체는 그 크기가 거대했다. 크기와는 달리 움직임의 방향을 봉쇄하고 들어오는 장력의 속도는 쾌속 무비해 피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선주혁은 침착하게 진기를 쌍수에 집중한 후 자색구체를 향해 내밀었다. 콰아아아앙. 고막을 찢을 듯한 굉음이 터지고 땅이 은은히 흔들렸다. 장력의 충돌에 의한 충격파가 막강해 은설연은 본능적으로 양팔을 모아 가슴 부위를 보호해야만 했다. 장력을 발출한 결과를 확인한 홍의인의 안색이 변했다. 백발귀마라는 애송이가 멀쩡하니 서 있었던 것이다. 들은 대로 혈마자광기의 폭발력에 영향을 받지 않는 모습이었다. 설명은 길었으나 홍의 노인이 선주혁의 쌍장을 물들인 자광을 발견한 이후의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긴박한 상황의 연속 속에서 미처 말을 할 기회를 갖지 못했던 홍의 노인이 노기충전해 외쳤다. "어떻게 네 놈이 혈마자광기를 운용할 수 있는 것이냐?" "혈마자광기를 익히려면 네놈들의 허락을 받아야하는 거냐? 지난 날 이 몸이 혈마를 때려눕히고 비급을 빼앗았다." 삐딱한 대답은 선주혁에게 있어 익숙한 터. 소매치기 시절의 어조를 그대로 살려 되도 않는 말로 홍의 노인의 질문을 회피했다. 그의 대답을 들은 은설연이 '풉'하는 소리를 냈다. 선주혁의 말도 안 되는 대답 때문이었으나 긴박한 상황인지라 웃음을 참는 것이다. 은설연과는 달리 홍의 노인의 안색은 시커멓게 물들었다. 자신의 질문을 희롱하기 위한 답변을 들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더불어 보고받은 바에 대해 달리 생각하기 시작했다. 약관을 넘어선 자의 금강불괴지신 연성은 무리가 있었다. 자광수의 공격을 받고도 아무렇지도 않았으니 금강불괴지신을 떠올렸을 거이다. 상대 역시 혈마자광기를 익혔을 것이라고는 결코 상상치 못했을 터이므로. 그렇다면 생각보다 오늘 일이 수월할 수도 있었다. 애송이의 내공이 경세적이라는 것은 흙벽의 규모를 보고 알 수 있었지만 금강불괴가 아니라 혈마자광기를 익힌 것뿐이라면 외려 쉽게 상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무림 최강의 내력을 가졌다고 해서 자신과 수하들이 합공으로 펼쳐내는 혈마자광기를 감당할 수는 없었다. 새삼 자신감을 회복한 홍의 노인이 호기롭게 외쳤다. "진짜 혈마자광기가 무엇인지 보여주마!" 홍의 노인의 말에 홍의인들의 옷이 일제히 펄럭이기 시작했다. 더불어 한껏 자광으로 빛나던 그들의 안광도 깊게 가라앉았다. 평생을 두고 수련해온 혈마자광기가 애송이보다 못하다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 상황. 홍의인들은 극도로 공력을 끌어올리는 것이다. 그러자 말 그대로 자하가 피어오르는 듯했다. 홍의 노인과 열일곱 명의 홍의인들이 한꺼번에 혈마자광기를 운용했기 때문이었다. 순간 뇌성이 울리는 소리가 공간을 뒤흔들었다. "크아아아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뒤쪽으로 튕겨져 나간 한 명의 홍의인. 간신히 신형을 바로잡은 홍의인의 양팔은 탈골이 되어 건들거렸고 입에서는 검은 피를 끊임없이 게워내고 있었다. 홍의 노인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 향했다. 지독할 정도로 평범해 보이는 노인에게로였다. 앞서 일견했던 모습과 달라진 점은 허리를 곧추세웠다는 것뿐인데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평범한 용모와는 달리 숨 막힐 정도의 패도적인 기운을 전신에서 뿜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너, 넌 누구냐?" 생각지도 않았던 고수의 출현에 홍의 노인은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단 일장에 수하를 저 정도로 만들 정도의 고수를 알아보지 못하다니! 처음에는 금강불괴지신이라는 말에, 나중에는 혈마자광기를 운용한다는 것에 놀라 지나치게 백발귀마에게 신경을 집중한 탓이었다. "어디서 혈마의 무공을 주워 배웠는지는 모르지만…… 네깟 것들은 노부의 이름을 알 자격이 없다." 여유 넘치는 종극의 답변에 홍의인들의 안색이 더욱 침중해졌다. 강적이 하나에서 둘로 늘어난 것이다. 홍의 노인의 눈은 다시 한번 커졌다. 종극의 양손에서 빛이 일렁이는 모습을 본 것이다. 더불어 그에게서부터 후끈한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일견하기에도 그가 지독한 위력을 가진 양강지력을 운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타오르는 듯 붉은빛을 내는 양강지력. 그것을 본 홍의 노인은 강호에 종종 공포의 대명사로 회자되는 한 명의 별호를 떠올렸다. "설마……? 염마가?" 염마 종극이 백발귀마와 한 편을 이뤘다는 보고를 받지 못했던 것였다. 뭔가 일이 잘못되어간다는 느낌을 받은 그 순간 종극의 우수가 앞으로 내뻗어졌다. 불꽃의 꼬리와 같은 긴 잔상을 남기며 종극의 손에서 만들어진 붉은 구체가 또 한 명의 수하를 향했다. 정면으로 마주하지 말라 외치고픈 홍의 노인이었으나 종극이 발출한 장력의 속도는 너무나 빨랐다. 쿠아아아앙. "크허억!" 홍의인은 놀라 비명을 질렀다. 혈마자광기를 운용한 손은 멀쩡했으나 의복은 물론이거니와 팔꿈치 위쪽의 피부가 시커멓게 타들어가는 것이다. 그 범위는 빠르게 번져 어깨를 타고 곧 전신이 불타올랐다. 종국에는 자광으로 물든 손 부위만 멀쩡한 채 불에 탄 시신만 남게 되었다. 앞서 단순한 장력으로 홍의인에게 부상을 입혔던 것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장면. 이는 염마 종극에 관한 강호의 전설이 외려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게 했다. 구대마존 중의 일원이 가진 역량을 단 한 수로 보여준 것이다. "염화마장!" 각 파의 무공에 조예가 깊은 은설연이 한눈에 종극의 장법을 알아봤다. 오늘 날의 종극이 있게 한 그의 성명절기니 알아보는 데에 어려움이 없었던 것이다. 종극의 한 수는 선주혁에게도 놀라움을 줬다. 저와 같은 장력을 자신이 받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더불어 과연 종극이라는 감탄도 함께 했다. 종극의 엄청난 무위에 홍의인들이 당황하는 사이 서동주도 성큼 한 걸음을 내딛었다. 어쩐지 종극의 압도적인 무공을 보자니 백사회의 체면 때문에라도 한수를 내보여야할 듯한 것이다. 신선과 같은 풍모의 서동주의 장이 안개와 같은 기류에 휩싸이더니 허공에 기하학적 도형을 그려냈다. 동시에 빠르게 쏘아지는 회색의 구체. 목표가 된 홍의인은 장력을 쏘아 보내 서동주의 장력을 마주했다. 벽공장력은 진기의 소모가 극진했지만 앞서 종극의 장력에 불탄 동료를 염두에 둔 것이다. 중인들의 예상과는 달리 서동주의 장력과 홍의인의 장력이 충돌하자 요란한 폭발음은 없었다. 퍽, 하는 둔탁한 음향과 함께 홍의인의 혈마자광기는 방향을 바꿔 허공을 향해 쏘아질 뿐이었다. 그리고 홍의인의 얼굴에 떠오른 경악. 자신의 장력을 틀어 방향을 바꾼 회색의 구체에 연이어 또다른 구체가 엄습해 들어온 것이다. 홍의인은 황망히 손을 들어 장력을 마주했다. 홍의인의 손에 적중한 회색의 구체는 이번에도 요란한 소음을 만들어내지 않았다. 손바닥에 닿는 순간 흩어지는 듯했던 회색의 기운은 홍의인의 팔을 감싸고 올라갔다. "크윽!" 악다문 이 사이로 흘러나오는 신음성. 나선으로 타고 올라간 서동주의 장력이 홍의인의 팔꿈치 위쪽에서부터 어깨까지의 피부와 근육을 뒤틀어버린 것이다. 갈라진 의복 사이로 피가 제멋대로 튀어오를 정도니 고통이 극심해 절로 신음성을 흘린 것이다.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의 부상은 아니었으나 단 한 수에 짙은 패색을 드러낸 셈이었다. 변화무쌍함을 자랑하는 천산노조의 장력이 노련함과 더불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저런 식으로 에네르기파를 사용할 수도 있구나!' 서동주의 한 수는 선주혁으로 하여금 또다시 무공에 대한 안계를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동안 선주혁은 예전에 본 만화에서처럼 집약된 내력을 발출하는 것이 다라고 생각해온 것이다. 선주혁이 서동주의 무공에 감탄하며 내력의 발출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홍의 노인은 경악에 경악을 거듭하는 중이었다. 그가 속한 곳의 하수라 할지라도 강호를 횡행하는 데는 무리가 없다고 들었다. 어지간한 명성을 날리는 자라 할지라도 회의 구성원들에 비하면 한참을 못미쳤던 것이다. '나름대로 유명하다는 자들조차 회에서는 기초에 불과한 혈마인의 위력을 탐해 투신하기를 주저치 않았거늘……' 그간의 모든 정보가 잘못되었을 리는 없다. 따라서 오늘 자신들이 상대하는 자들이 여느 고수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뜻이었다. '백발귀마라는 놈! 이런 초절정의 고수들과 연을 맺어 두었다는 말인가?' 이로서 회의 대업을 위해 백발귀마를 제거해야할 이유는 더욱 분명해졌다. 하지만 홍의 노인은 재빠른 판단을 내려야 했다. 자신과 수하는 백발귀마 하나를 상대하기 위해 편성되었다. 자신과 스물에 달하는 수하라면 승산은 충분했다. 한데 자신을 놀라게 할 정도의 경공술을 가진 자와 염마, 그리고 예측불허의 장법을 사용하는 자까지 합세했으니 이제는 외려 열세에 몰린 것이다. 종극 하나의 출현만으로도 승패에 큰 지장이 생긴 마당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두 명의 고수까지 있으니 정확히 말하면 필패의 승부가 될 것이다. 수하들은 회에서도 정예로 꼽힌다. 가히 수십 년의 세월을 투자해 배출한 인재들이었다. 백발귀마를 죽일 수 없는 상황이라면 수하의 희생은 무의미해진다. 홍의 노인은 결국 입을 열었다. "퇴각!" 홍의 노인의 명에 홍의인들은 일사분란하게 부상자를 부축해 물러섰다. 자신을 죽이겠다고 나타난 자들이 이토록 쉽게 물러나리라 생각지 못했던 선주혁은 아차 싶었다. 천산노조가 발출했던 장력의 이치를 생각하느라 그들의 행동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 탓도 있었다. 뒤늦게 신형을 날려 홍의인들의 뒤를 쫓는 선주혁. 극도로 전개되는 암영풍의 속도가 그 효용을 드러내는 순간. "산!" 맨 앞을 달려 나가던 홍의 노인이 흩어질 것을 명령했다. 아무리 경공이 뛰어나다 해도 흩어져 도주하는 전원을 잡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적이 흩어지자 선주혁은 이를 악물었다. 공 노인의 죽음은 이들의 탓이 크다고 생각한 이상 한 명이라도 더 죽여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는 달리는 신형을 멈춰 세우고 가장 근거리의 홍의인을 향해 북두진공참을 전개했다. "크허어어억!" 지독한 통증에서 비롯된 비명과 함께 도주하던 홍의인의 몸이 반으로 갈라졌다. 워낙 빠르게 달리던 중인지라 떨어진 상반신을 뒤로하고 하반신은 몇 걸음이나 더 달려나간 뒤 쓰러졌다. "칫!" 몸을 세우고 북두진공참을 전개한 사이 거리가 크게 벌어져 더 이상의 추적이 불가능함을 깨달은 선주혁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잠깐의 방심이 적의 도주를 도운 것이다. 공 노인에게 미안한 마음이 절로 들었다. 공 노인에 대한 죄책감은 분노로 바뀌었고, 분노는 선주혁의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겨울철 차가운 바람만이 그의 분노를 식히고 있었다. "저 녀석…… 대체 정체가 뭐야?" 모닥불 옆에 앉아 턱짓으로 선주혁을 가리키며 남백연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를 끌어들이느냐에 따라 향후 무림의 판도가 바뀔 거라 말했잖아요." 은설연의 대답이었다. "네 말대로겠구나." 서동주가 은설연의 말에 동조했다. "저 실력이라면 염마의 도움 없이 적풍조를 해치웠고, 무림맹의 떨거지들도 쓸어버렸을 테지." "그럼 녀석이 우리보다 강하다는 이야기잖아?" 이어진 서동주의 말에 남백연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인정해야겠지. 설마하니 무림에 저런 아이가 나타날 줄이야. 무림사를 통틀어 저 나이에 그토록 높은 무공을 성취한 이가 누가 있었을꼬?" 서동주가 약간의 한숨을 섞어 홀로 중얼거렸다. "이제 제가 왜 두 분을 모셨는지 이해하시겠죠?" 은설연의 말에 서동주가 얼굴을 굳혔다. "회주께 기별을 해야겠다. 마교에서 저리 나오는 이상 우리도 두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지!" 성화령까지 동원해 포섭하려 드는 백발귀마였다. 비록 남지학과 선주혁이 사파연합으로 가겠다는 약속을 지키려하고 한다지만 염마가 있는 한 방심할 상황이 아니었다. 서동주는 백사회 전원을 이끌고 와서라도 선주혁을 끌어들여야겠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은설연 등이 쬐는 모닥불과는 좀 더 거리를 두고 종극과 선주혁, 남지학이 있었다. "그놈들은 대체 누구냐?" 종극의 질문. 앞서 선주혁을 노리던 홍의인들에 대해 묻는 것이었다. "강호 정복을 꿈꾸는 자들입니다. 무림의 일통을 원하는 것이지요." "무림일통? 그런 허황된 꿈을……!" 종극이 인상을 찌푸렸다. 무림의 생리를 조금이라도 아는 자라면 결코 언급하지 않는 것이 무림일통이다. 강호란 넓고도 넓다. 해변의 모래와도 같은 고수들과 밤하늘의 별과 같은 기인이사들이 넘쳐나는 곳. 그들 모두를 일거에 제압해 무릎을 꿇리지 않는 한 무림일통은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존중을 받는 영웅은 존재해도 군림하는 패자는 존재할 수 없는 곳이라 여겨지는 강호였다. 유구한 역사를 통해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한 무림일통이다. 어느 한 세력이 압도적인 힘으로 타 세력을 억누르는 것은 가능할지라도 강호를 하나로 관통해 지배한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허황되긴 하지만…… 그것을 노릴만한 역량을 갖춘 것도 사실입니다." "무슨 소리! 무림재패라는 것은 그리 쉽게 거론할 이야기가 아니거늘……!" 종극이 단호히 말했다. 당금의 천마맹은 가히 역대 최고의 성세를 자랑하는 중이었다. 일월신교만 놓고 본다 해도 단일 세력으로는 천하제일을 자부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무림을 제패한다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무림이란 곳 자체가 유기적인 생명체의 군집과도 같아. 어느 한쪽이 지나치게 강한 모습을 보이면 나머지는 생명을 위해 결속을 단행한다. 다시 말해 만약 천마맹이 무림을 제패하겠다고 나서고 그 위세가 범상치 않다면, 나머지 천하를 삼분한 무림맹, 정의련, 사파연합이 연수를 한다는 뜻이다. 결국 무림을 제패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를 압도적인 힘으로 눌러야한다는 의미였다. 아무리 천마맹의 힘이 막강하다 해도 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데 그 천마맹까지를 포함해 제압할 힘이 있는 세력이 있다는 것을 종극이 어찌 납득할 수 있겠는가? "아까 본 자들은 그들 중에서도 실력이 없는 것은 아니나…… 진정 고수로 여겨지는 자들은 아닙니다." 선주혁은 그들이 혈마자광기를 사용했다는 것을 근거로 말했다. 그들이 속한 회에서 진정한 고수는 다른 무공을 사용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놈들 정도의 무공을 가진 자는 본교에도 많다." 일월신교에 고수라 칭함을 받을 자격을 가진 자는 많고도 많았다. 홍의인들의 무공이 종극조차 의외로 여길 만큼 높긴 했다. 하지만 일월신교의 장로들이라면 그 정도의 무공은 갖추고 있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선주혁은 이제 저들의 위험성을 보다 적극적으로 알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전까지야 그저 이쪽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그의 모든 목표였다. 그들이 무림을 제패하건 그렇지 않건 자신이 세운 목표와는 큰 관계가 없다 생각한 것이다. 어차피 저들을 막아 영웅이 되어야할 것은 사형의 몫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저들의 만행이 공 노인의 죽음을 불러 일으켰다. 그 사실은 선주혁으로 하여금 극단적인 적대감을 느끼게 했다. 대의명분이나 정의가 아닌 자신을 살리기 위해 죽어간 공 노인의 죽음을 위해서라도 저들을 막아야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어르신 정도의 무공을 지닌 고수가 약 백여 명이나 된다면 어떻겠습니까?" "…………!" 선주혁의 말에 좀처럼 변화가 없는 종극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잠시 후, 표정을 추스르며 종극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자네 무공이 나이를 뛰어넘었음은 물론 강호에 적수를 찾기 힘들 정도임은 알고 있네. 아마도 노부에 비해 한두 수 모자라는 정도일 테니 드넓은 강호에서 평생을 두고 적수를 만나지 못할지도 모르지." "그 정도까지는 아닙니다만……?" "내 얘기를 끝까지 들어보게. 자네 정도의 고수라면 실전에 있어서 한두 수의 차이가 얼마나 큰 것인지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하네. 즉, 노부보다 단 한수의 하수라면 두 명도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네. 그것이 경지에 오른 자의 세계지." 그제야 선주혁은 종극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그는 선주혁이 자신보다 위의 경지를 논할 자격이 부족하다 생각하는 것이며, 고수의 세계에 대해 알지 못해 홍의인들이 속한 단체를 지나치게 과대평가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종극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최강의 단일 세력인 마교에서도 손꼽히는 고수가 구대마존이다. 모래알 같은 고수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종극과 같은 무공을 지닌 자가 백명이나 된다는 사실을 누가 있어 믿겠는가? 선주혁은 자신이 말한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납득시키고 싶었다. 저쪽 세상에서 읽었던 책에 분명 그렇게 나와 있었다. 구대마존에 필적하는 고수가 일백이라고!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종극에게 설명하겠는가? 더구나 종극은 스스로의 무공에 절대적인 자부심을 갖고 있을 터. 혈마가 현신한다 해도 굽히지 않을 그의 성정으로 미루어 직접 저들의 무공을 견식하지 않고서는 의미가 없다고 판단을 내렸다. 그렇다고 저들의 모든 것을 방치할 수는 없는 일. "그렇군요. 제가 어르신께 무례를 범했습니다. 하나 적어도 저 정도는 일수에 죽을 수 있는 자들이 넘쳐나는 곳입니다.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을 암중에서 도모했으니 그 위험성을 이루 말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어르신과 일월신교에서도 저들에 대한 대비를 하심이 옳을 줄 압니다." 선주혁은 스스로를 낮추며 우회적인 방법으로 종극에게 저들에 대한 대비를 권유했다. 그의 발언은 유효적절했다. 종극은 백발귀마의 무공을 직접 견식했고, 크게 탄복한 바가 있었다. 그런 백발귀마를 한 수에 죽일 정도의 능력자가 백여 명에 달한다는 것 자체도 엄청난 힘이었다. 또한 선주혁의 말대로 그런 고수들을 아무도 모르게 길러낼 수 있다는 것은 더욱 대단한 일. 절대로 간과할 문제는 아니었다. "그렇군. 대체 어떤 자들이기에 그런 힘을 비축해 무림을 도모할 수 있단 말인가?" "패종회. 그들이 자신들을 칭하는 이름입니다." "패종회?" 종극의 미간이 찌푸렸다. 백여 년의 인생을 되짚어 봐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다. 강호에 단 한번도 이름을 드러낸 적이 없는 집단이 저와 같은 역량을 구축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모름지기 큰 나무는 깊은 뿌리를 가진 법. 종극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어조로 말을 꺼냈다. "근간을 갖지 못한 곳에서 걸출한 인재 하나가 배출될 수는 있네. 그러 인한 세력의 부흥 역시도 가능하지. 하지만 수십, 수백에 이르는 고수를 한꺼번에 배출한다는 가능성은 거의 전무하네." 종극의 말은 이치에 합당했다. "아! 그러고 보니…… 패종회라는 이름은 새롭게 지은 것입니다. 예전에는 꽤나 유명한 세력이었던 모양입니다만……" 저들이 무림재패를 노렸던 역사는 유구했던 것으로 책에서는 나왔다. "어떤 집단인가?" 종극은 그제야 납득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게……" 생각이 나질 않았다. 패종회의 배경을 언뜻 읽기는 했지만 스치듯 지나간 이름이 지금까지 기억이 날 리 없었다. "굉장한 과거를 가졌던 곳인 듯합니다. 내분으로 자멸하다시피 해 강호에서 모습을 감춘 것 같던데……" "자멸이라……" 종극은 한손을 들어 수염을 쓰다듬으며 기억을 더듬어봤다. 자멸의 역사를 가진 문파는 한둘이 아니었다. 선주혁의 설명만으로는 특정한 세력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았다. "아! 그러고 보니 일월신교에 크게 피해를 준 역사가 있는 것 같더군요." "본교에?" "네. 적어도 수천은……" 선주혁은 내용 상 기억에 나는 부분을 그대로 읆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을 하다 보니 뭔가 기억에 날 듯 말 듯 했던 것이다. "누가 감히 본교의 형제를 수천이나…… 아!" 말도 안 되는 식으로 인상을 찌푸리던 종극이 탄성을 내질렀다. 그리고는 잠시 시간을 두었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암천종! 그 악적들이 본교의 형제들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네." 당금 무림의 패자 중 하나인 천마맹, 그 중에서도 중심이랄 수 있는 일월신교였다. 그런 일월신교의 교도가 타 세력으로 인해 천여 명에 달하는 인명피해를 입었다는 것을 말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종극은 큰 피해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거 같네요. 암천종……!" 긴가만기하여 약간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는 선주혁이었다. 암천종이라는 이름이 아득하게 기억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쩐지 이곳에 넘어온 이후 들어본 듯한 이름이었다. 하지만 어디서 들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았다. "과거의 야망을 버리지 못하고 삼백 년을 숨 죽여 기다렸다면 무시 못 할 힘을 쌓을 수도 있겠지." 아직까지 단일 세력이 무림을 도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전제를 버리지 않는 종극이었다. "삼백 년이요?" 종극의 말 중 유독 삼백 년이라는 말에 귀를 쫑긋거리며 선주혁이 재차 확인했다. "그렇다네. 놀랄만한 속도로 본교와 자웅을 겨룰 정도의 성장을 했던 암천종이었지 그러나 사실 암천종이라는 무리 그 자체는 별 위협이 되지 않았다네." "예? 일월신교와 자웅을 겨루는 단체가 무림제패를 노리는데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요?" 선주혁의 질문에 종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암천종은 정사를 막론하고 닥치는 대로 살업을 자행했다네. 그리고 그럴 수 있는 피됴적인 힘은 단 한 사람에게 집중되었을 분. 암천종은 그저 사교의 무리에 불과했던 것이야. 사실 암천종 자체도 그 한사람에게 괴멸이 된 거지. 자업자득이라고나 할까?" "단 한 사람……" "그렇지, 단 한 사람! 전 무림사를 통틀어 단 한 명의 이름으로 무림 전체를 공포로 몰고 갔던 그 자! 수치스럽지만 그를 상대해 물리친 것은 백도의 인물리랄 수 있는 자였네. 당시 본교에는 그를 대적할 능력이 없었지." "혹시…… 그 한 사람이라는 게……?" "자네도 삼백 년 전의 일을 들은 적이 있나보군. 그렇다네. 무림사에서 무림인들에게 가장 큰 두려움을 준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일걸세. 수라마제 사마횡천!" "…………!" 역시 그랬다. 암천종. 분명히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이름이었다. 그것은 사마횡천의 비급에 담긴 그의 과거사에서 등장한 이름이었다. 천살성을 타고난 자질을 탐내 부모를 죽이고 사마횡천을 키웠던 사교집단. 훗날 진실을 알게 된 사마횡천이 스스로의 손으로 괴멸시켰던 무리. 그곳이 바로 암천종이었다. 애초에 사마횡천이 남긴 비급을 읽으며 왜 패종회와 연관을 시키지 못했던 것인지, 스스로의 멍청함을 탓하는 선주혁이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건 대충 넘어가지 않아야겠다는 다짐과 함께…… 종극의 설명을 들은 남지학은 약간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선주혁을 봤다. 자신의 사제가 수라마제의 진전을 이었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잔뜩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선주혁은 사형의 시선을 느끼고는 곧바로 미소를 지어주었다. 걱정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선주혁의 미소에 남지학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그렇게 표정과 눈빛만으로도 서로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과거 한 사람에 의존했다 실패했다고 생각한 그들이 고수를 대거 양성한 것일 수도 있겠군요." 선주혁의 표정에 안도를 한 남지학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그랬을 수도 있지. 워낙 지독한 놈들이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을 것이야." "외람된 말씀이지만 이 이야기는 저분들과 함께 진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남지학의 시선은 서동주, 남백연, 은설연을 향해 있었다. 종극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선주혁이 암천종이라 외친 이후부터 그들이 이목은 이쪽에 집중되어 있었다. 난데없이 삼백 년 저의 세력과 수라마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굳이 자신만이 들어야할 이야기가 아니었기에 종극은 내력으로 음파를 차단하지 않았고, 서동주 등은 지금까지의 모든 대화 내용을 귀기울여 듣고 있었다. "이쪽으로 오셔서 함께 상의를 하시지요." 남지학이 정중하게 말하자 서동주 등은 사양하지 않고 자리를 옮겼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대략 이해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남지학의 말에 서동주, 남백연 등은 살짝 얼굴을 붉혔다. 어찌되었건 타인의 대화를 엿들은 셈이 되었기 때문이다. "저희와도 무관하지 않은 내용인지라 우연치 않게 듣게 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은설연은 유연하게 남지학의 말을 받았다. 종극은 무표정한 채로 세 사람을 맞이할 뿐이었다. 남지학은 서로가 납득하는 범위 내에서 자리를 정리했다고 결론을 내리고 말을 이어갔다. "사제의 말처럼 저들을 주목해 대응책을 세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고수의 숫자에만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와 같은 힘을 비축하는 동안 완벽하게 강호의 이목을 가렸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흠……" 남지학의 침착한 말에 종극이 침음성을 흘렸다. 남백연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드러난 칼은 막을 수 있어도 감춰진 칼을 막기는 어려운 법이지요. 그러니 패종회라는 곳은 자신들이 가진 이상의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은설연이 남지학의 말을 거들고 나섰다.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은설연이 동조하고 나서고 종극이 수긍하는 얼굴을 보이자, 남지학은 여세를 몰아 대화를 이끌어갔다. "사제와 제가 곤륜에서 파문을 당한 이유가 사천백가의 식솔들이 몰살당한 사고 때문임을 아실 것입니다." 남백연 등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고 종극은 고개를 끄덕였다. 곤륜이마가 묵연수투를 탐내 독을 풀어 백가의 가솔을 몰살시키고, 그로 인해 무림공적으로 지목을 받아 쫓긴다는 사실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 "그와 같은 누명을 쓰는 과정 중 사제와 저는 패종회와 마주칠 기회가 많았습니다." "백가의 몰살도 그들의 소행이라는 말인가?" "당연하죠." 선주혁이 끼어들어 자신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남지학은 사제의 억울한 심정을 백분 이해하고도 남는지라 그가 끼어든 것을 개의치 않고 자신이 할 말을 이어갔다. "뿐만이 아닙니다. 지역에서 명숙이라고 일컬어지는 자가 패종회의 일원과 같은 무공을 사용하고, 그들이 백가를 멸문시킬 때와 같은 독을 사용하더군요." "그들이 전수시켜준 무공입니다. 무림의 인사 중 상당수가 그들에게 포섭을 당한 상태지요." 선주혁이 남지학의 말을 부연했다. 자신이 예상했던대로인지라 남지학은 좀 더 자신감을 가지고 말을 이었다. "암중에 세력을 구축하고 광범위한 포섭이 있덨다면 여러분들이 소속된 곳도 안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 사파연합에도 배신자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남백연은 가당치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있습니다, 분명!" 선주혁이 남백연의 질문에 대답했다. 이미 소설을 읽은 터라 그의 대답에는 확신이 가득했다. 선주혁이 워낙 자신있게 대답을 하자, 남백연의 미간이 역팔자로 크게 휘었다. "대체 어떤 놈이!" 이빨을 악다문 남백연. 자신의 손에 걸리기만 하면 당장이라도 멱을 비틀겠다는 표정이었다. "흠…… 그래서였던가?" "종 장로님께서는 뭔가 짐작이 가는 바가 있으십니까?" "그저…… 조금 짚이는 바가 있긴 하네." 배신자의 존재는 일월신교의 치부일 뿐이다. 종극은 대수롭지 않게 말을 돌렸다. "그렇게 신중한 행사를 하는 자들이 왜 사해표국을 들쑤셨을까요? 자금난을 겪고 있다면 전장을 털거나 상인을 위협하는 게 효과적이지 않았겠습니까?" 은설연은 커다란 두 눈에 총기를 담아 질문했다. 남지학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대신 여러가지 정보와 무림맹의 속사정을 알고 있는 선주혁이 입을 열었다. "복합적인 이유에서였을 것입니다." "복합적인 이유?" 성격이 조금 급한 남백연의 질문에 선주혁은 자신이 겪었던 일을 설명했다. 자신이 도신의 제자임을 자처해 그들의 심기를 건드린 것과 무림맹주의 손녀인 한희윤이 도움을 청했던 사실에 관한 설명이었다. "그러니까 자신들의 목적에 방해가 될 수도 있는 자네를 제거하기 위함이었다는 거로군." 선주혁의 설명을 들은 남백연의 말이었다. "선 소협을 제거하는 것뿐만이 아니겠군요. 무림맹에 배신자가 있다면 이를 빌미로 저희 사파연합과의 분쟁을 조장하려 했다는 이야기가 되지요." 은설연이었다. "제 생각이 바로 은 공자의 말씀대로 입니다." 선주혁은 은설연의 총명함에 감탄하며 말했다. "그런 간교한 수작을!" 남백연이 수염을 파르르 떨며 노기를 드러냈다. "한데 선 소협과 친우들의 활약으로 사해표국의 몰살기도가 실패하자 저들도 주춤한 것이군요. 어떻게 보면 선 공자로 인해 본 연합과 무림맹의 큰 분쟁이 방지된 셈입니다." "그런 사실도 모르고 무림맹에서는 자네를 공적이라 몰아붙이는 셈이군." 서동주의 말에 선주혁이 고소를 머금었다. "모른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이와 같은 일은 무림맹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자가 꾸민 것이니까요." "누군가 이목을 가리고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이군." 서동주의 말에 선주혁이 고개를 끄덕이고 연이어 종극이 입을 열었다. "패종회 놈들이 자네를 제거하기 위해 서두르는 이유를 충분히 알겠군." "문제는 이후부터입니다. 사파연합과 천마맹이라도 작금의 현실을 명확히 파악하고 저들의 음모에 대비를 해야할 것입니다." 남지학이 서동주 등과 함께 의논을 하자고 한 이유가 드러났다. "자네는 지금 사파연합과 천마맹의 연수를 제안하는 건가?" 종극이 갑작스레 형형한 안광을 빛내며 남지학을 향해 물었다. 자신의 의도를 정확히 짚어낸 종극에게 감탄하며 남지학이 정중함을 잃지 않고 말했다. "사해표국의 예를 봐서도 알 수 있듯이 저들이 노리는 것은 무림 각 세력간의 분열입니다. 상호 반목하는 틈을 노려 일거에 자신들의 목표를 이루려고 함이겠지요." 남지학의 말에 종극도, 서동주 등도 미간을 찌푸렸다. 현 무림은 각각의 세력이 나름대로의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냉철한 힘의 크기를 보자면 천마맹의 우월하다고 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사파연합과의 반목이 정파인들에 비해 적지 않았고, 천마맹이 힘의 우위를 드러내는 순간 무림매오가 정의련이 일치단결된 모습을 보일 것이 분명한 터. 어느 한쪽이라도 세를 과시할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팽팽한 세력이 균형을 잡고 있다는 것은 어느 한쪽의 손을 약간만 들어줘도 틀어질 수 있다는 반론이기도 했다. 즉, 패종회는 그다지 어렵지 않은 방법으로도 무림의 균형을 깨트려 큰 분란을 일으킬 수 있는 여건인 것이다. 종극은 긴 침묵을 깨뜨렸다. "이 일을 고려해볼만한 가치가 있겠군." 서동주와 남백연이 생각하기에 종극의 발언은 의외였다. 힘에 대한 자부심의 집약과도 같은 마교의 인물이 타세력과의 연수를 고려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희도 회주님께 건의를 드리겠습니다." 은설연도 커다란 두 눈을 빛내며 말했다. "무림맹이나 정의련 놈들이 문제군. 우리가 설명을 한들 믿을 놈들이 아니지." 남백연이 혀를 찼다. "일단 천마맹과 사파연합의 연수가 확정되어진 후 그들과 함께 대응책을 마련할 방도를 찾는 것이 순서일 것입니다." 남지학이 상황을 정리하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가 진행될수록 종극과 남백연, 서동주 등은 내심으로 선주혁, 남지학 사형제에 대한 욕심이 더욱 처져만 갔다. 넓은 시야로 무림의 정세를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은 아무에게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또한 자신이 가진 정보를 통한 추론으로 이 정도까지 결론을 만드는 것은 더욱 어려웠다.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곤륜이마가 보여준 능력은 그들이 지닌 무공의 자질보다 더욱 탐이나는 것이었다. "일단은 본 맹과 사파연합이 함께 움직이는 것조차 쉬운 일은 아닐테지." 종극의 발언은 좌중의 누구도 부정하지 못했다. 오랜 세월을 반목해온 두 집단이 연수를 한다는 것은 진정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공동의 적이 있으면 한시적으로 연합하는 것은 큰 무리가 아니지 않겠습니까?" 잘 진행되던 분위기에 약간은 찬물을 끼얹는 듯한 종극에게 선주혁이 물었다. "이론적으로야 합당하지. 하지만 강호에서 가장 멍청한 것이 바로 등에 꽂히는 칼을 막지 못하는 일일세." "상호신뢰의 문제가 선결되어야겠군요." 남지학이 종극이 말하는 핵심을 짚어냈다. 종극은 그런 남지학에게도 점차 욕심을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파의 피해를 줄이고자 움츠려들지 말라는 법이 없겠지. 적을 물리친 이후의 세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 종극의 말은 정확했다. 천마맹과 사파연합이 힘을 합쳐 패종회를 상대할 경우, 서로가 자신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소극적인 모습을 보일 수도 있다. 패종회를 패퇴시킨 후 힘의 균형이 틀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전심을 다해 적을 상대하겠다는 전제로 연수가 결성되겠지만 귀계와 음모가 난무하는 강호에서 내가 아닌 그 누구를 믿을 수 있겠는가? "종 장로님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남지학이 정중하게 종극에게 부탁했다. 어느 정도 납득이 갈 상황으로 진행되던 이야기를 종극이 갑작스레 틀고 나왔다. 남지학은 거기에 합당한 이유가 있을 거라 짐작한 것이다. 즉, 종극이 원하는 바가 있다고 추측을 하고 그 내용을 듣고자 하는 것이다. '호오! 이놈! 볼수록 탐이 나는군.' 이제는 정말 백발귀마라는 아이를 움직일 수 있는 열쇠로서의 욕심이 아니었다. 남지학이라는 아이의 자질과 총명이 탐이 나는 종극이었다. 그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척을 했다. 남지학의 질문에 즉각적으로 대답을 하는 것은 자신의 속셈을 너무 쉽게 드러내는 상황이 되기 때문이었다. "흠…… 서로를 믿기 위한 계기가 필요치 않을까 싶네. 노부가 교주께 이번의 사안을 건의한다 해도 신뢰에 대한 증거까지 제시할 수는 없지 않겠나?" "증거라 하심은……?" "금번의 사안은 시일을 두고 절차를 따져가며 진행할 일이 아니라고 보네. 저들의 발호가 언제 있을지도 모르고 시일을 끄는 사이 또 무슨 간계를 부릴지 모르니 말일세." 종극의 말에 선주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은 아직까지 패종회의 역량에 대해 모른다. 막연하게 위험하다는 느낌만을 받고 있을 뿐인 셈이다. 그렇기에 선주혁은 마음이 더욱 급했다. 공 노인의 복수를 위해서라도 저들이 강호를 횡행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더욱이 일이 더욱 위험해진 것에는 선주혁 자신의 책임도 있었다. 본시 세상 모든 기연이 한사람에게 집중된 것처럼 남지학에게 기연의 연속이 펼쳐진다. 수많은 기연을 통해 그는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능력을 갖게 되고, 그 능력으로 패종회의 음모를 분쇄하는 것이 원래의 진행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이쪽 세상에 넘어오게 되면서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이쪽 세상으로 온 것이야 선주혁의 선택이 아니었으므로 책임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본래의 선주혁이 하지 않았던 행동을 함으로서 모든 게 바뀐 것이다. 공 노인의 일을 계기로 모종의 책임감을 느끼는 선주혁은 보다 적극적으로 저들이 멋대로 구는 것을 막고 싶었다. "한시가 급한 일입니다. 빠르면 빠를수록! 서두를수록 좋은 일이라 생각합니다." 선주혁의 말에 종극은 입가에 미미한 웃음을 지었다. "해서…… 노부의 발언으로 본교에서 의심 없는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고려해 보았네." "어떤 방법이 있겠습니까?" 남지학이 물었다. 총명하기 이를 데 없는 그로서도 종극의 내심을 짐작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오로지 패종회의 발호를 막는 방법에 대한 의문뿐인 남지학과는 달리 은설연은 긴장을 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사파연합과의 연수를 위한 방안, 한데 이토록 말을 돌리며 시간을 끄는 것은 무엇인가 요구를 하려함이라 짐작한 것이다. 염마 정도의 인물이 마교를 대표하여 요구하는 것이 작을 리는 없을 터. 은설연은 저도 모르게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로고 세력 간의 연수는 중재가 있을 때 가장 빠른 법이네. 믿고 신뢰할만한 자가 있어 그 사람을 보고 일을 진행하는 것이지." "귀 교와 본 연합의 신뢰를 동시에 받을 만한, 그리고 이 일에 책임을 질 만한 인물이 있겠습니까?" 서동주 역시 은설연과 같은 이유에서 긴장을 한 상태였다. 그는 종극의 뜬금없는 발언을 쉽사리 이해하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다. 당금 무림에 누가 있어 마교와 사파연합의 연수에 대한 중재를 할 것이며, 그 신뢰를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 "미흡한 바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현 무림의 이목이 한 사람에게 쏠려 있는 만큼 그가 나선다면 시도해 볼만하지 않겠소?" "…………!" "더구나 성화령까지 동원되어 본교로 모시고자 하는 자라면 노부의 제안을 교에서도 가볍게 여기지 못할 것이외다." 내심을 드러낸 종극의 발언에 중`인들은 과연 염마라는 생각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만사를 진행함에 있어 자신이 의도한 바를 관철시키는 강호의 늙은 생강 맛을 제대로 본 것이다. 서동주와 남백연은 속이 탔다. 이대로라면 눈 뜨고 선주혁을 마교로 보내야 할 판이었다. 남지학은 자신이 말한 바를 지키는 지라 신용을 위해서라도 사파연합으로 돌아오려 하겠지만 종극의 수단을 생각하면 안심할 일이 아니었다. 또다시 어떤 이유를 만들어 선주혁을 붙들어 놓을지 모르는 일이었던 것이다. 두 사람이 마른 침을 삼키는 사이 은설연이 말했다. "연수를 위한 방법으로 꼭 중재만이 있는 것은 아니지요. 상호 신뢰의 증표로 사람이 오고가는 방법도 있지 않겠습니까?" 선뜻 알아듣기 힘든 말이었다. 잠시 내용을 곱씹어본 서동주가 입을 열어 그녀의 발언을 막으려 했으나 은설연이 더 빨랐다. "비록 자격이 부족할지라도 제 조부께서 사파연합을 이끌고 계시는 바, 상호 신뢰의 증표로서 제가 귀 교에 머무는 방법도 있을 듯 합니다." 은설연의 말인즉 자신이 볼모가 되어 마교에 가 있겠다는 뜻이었다. 선주혁을 사파연합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은설연의 각오를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종극은 은설연의 말에 미소지었다. 그리고는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그것도 좋은 방법이 되겠군. 자네도 본교에 와 준다면 좀 더 확실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게야." 그의 말에 은설연의 안색이 굳어졌다. 종극은 분명 '자네가'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자네도'라고 말했다. 이는 '선주혁을 대신해'가 아니라 '선주혁과 함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늙은 너구리가?' 종극의 수단을 너무 쉽게 봤다. 그것이 은설연의 실수였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종 장로님의 말씀인 즉 제가 귀교에 볼모로 가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까?" 다소 공격적인 질문이었다. 그녀 스스로 볼모라는 단어를 언급한 것이다. 종극은 여유만만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사파연합의 대를 이을 자가 본교에 머문다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뒷말을 흐려버리는 종극이었다. 은설연의 안색은 이제 창백하게 질려버렸다. 종극은 자신이 여자임을 정면으로 짚고 나온 것이다. 분명 대를 이을 손이 아니라면 큰 목적을 위해 희생을 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닌 터. 종극의 말뜻은 부연이 없어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은설연은 이제 빼도 박도 못하고 마교행을 감행해야 하는 상황이 온 것이다. 스스로 제안했으니 이제와 말을 바꿀 수는 없었다. 종극이 신뢰 운운하며 덤벼들 것이 뻔했다. 뻔뻔하다싶을 정도로 많을 것을 요구해오는 종극으로 인해 남백연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하지만 그는 노성을 터뜨리지 못했다. 서동주의 만류가 전음으로 들려왔던 것이다. 남백연을 진정시킨 서동주가 침착하게 말했다. "공동의 적을 위해 연수를 함에 있어 지나치게 한쪽으로 치우칠 수는 없는 일이라 생각하오. 이 아이가 본 연합의 뜻을 전하는 것으로 성의를 받아주시면 아니 되겠소?" 서동주는 마른 침을 삼켰다. 당사자가 제안한 내용이니 종극이 밀어붙이면 곤란한 상황이 되기 때문이었다. 종극은 이제 여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유리한 위치에서 선택을 할 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본교에서 이 친구를 억류할 의도는 전혀 없소이다." 은설연을 바라보며 한 걸음 물러서주는 종극. 그 답변만으로도 서동주의 안색이 한결 좋아졌다. 적지나 다름없는 곳에 회주의 손녀를 보내 머무르게 한다는 것은 바늘방석 위에 앉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하나 패종회의 악적들을 상대하는 동안 이 친구는 우리와 함께 행동을 해줘야하지 않겠소?" 아까와 달리 종극이 거론한 것은 선주혁이었다. 이번에는 종극이 선주혁에 대한 의지를 확연히 드러냈다. 은설연의 발언을 빌미로 완벽하게 쐐기를 박으려 드는 것이다. "막강한 적을 상대해야 하는 일입니다. 모두가 힘을 합쳐야 하는 마당이니 몸이 어디에 가 있든 중요한 일은 아니겠지요. 저도 선 소협과 계속 함께 본 연합의 진심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결코 포기하지 않는 은설연의 집념과 적지에 들어가길 두려워하지 않는 대범함은 종극조차 감탄하게 만들었다. '이 아이가 남자였다면……?' 종극은 은설연을 새삼스럽게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의 뜻이 그렇다니 본교로서는 기뻐해야할 일일세. 다만 당사자의 뜻은 어떤지 알아야할 것이 아닌가 싶네." 종극의 시선이 선주혁에게 향했다.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는 알고 있었으나 선주혁은 무의식중에 사형을 쳐다봤다. 어쩐지 중요한 일을 결정해야하는 순간에 온 것 같아 저도 모르게 사형에게 의지해버린 것이다. 선주혁의 시선을 받은 남지학이 말했다. "무림을 위협하는 세력을 막고자 하는 일에 어찌 한 몸을 사리겠습니까? 사제는 귀교로 가서 패종회의 위험을 알리는 데에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물론 자네도 동행하겠지?" 종극은 그야말로 일거삼득의 성과를 거뒀다고 확신했다. "그렇습니다." 남지학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사파연합이건 마교건 그의 입장에서는 위험천만한 곳이었다. 자신보다 아끼는 자세를 단신으로 험지에 보낸다는 것은 그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종극에게 확답을 한 그는 은설연과 남백연, 서동주에게 시선을 나눠주며 또 한번 확고한 음성으로 말했다. "무림의 위기를 외면할 수 없는 사정을 이해해 주십시오. 일이 마무리되면 반드시 귀 연합으로 돌아가 약조를 지키겠습니다." 사파연합에서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이라지만 남지학과 선주혁 개개인으로서는 거래에 대한 대가를 연기하는 셈이었다. 남지학은 그에 대한 사과를 함과 동시에 결국 사파연합으로 돌아가 약조를 지킬 것을 다시 한번 약속했다. 그의 말에 서동주, 남백연 등은 고소를 머금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말이었던 것이다. 은설연은 자신의 노력이 헛되지 않게 될 것이라 기대했다. 종극은 내심을 알 수 없는 시선으로 그들 모두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내력을 돋우어 체온을 유지하고는 있지만 이런 바람을 맞으며 달려본 적이 없기에 백설처럼 고운 피부는 붉게 달아올랐다. "두 분 공자님께서 무사하실지 염려됩니다." 뒤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는 염려가 가득했다. 충심으로 가득한 그가 두려움을 느낄 리 없다. 그의 염려는 순수하게 자신을 향한 것이리라. "천운에 맞길 수밖에 없지요. 만약 남창에서 사형들을 만나지 못한다면 하늘이 십전성을 버렸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십전성! 당금 무림맹의 총단을 이르는 말이었다. 겨울 바람을 가르며 십전성의 운명을 거론하는 여인. 그녀는 바로 현 무림맹주의 손녀인 한희윤이었다. 한희윤은 평소라면 결코 다니지 않았을 험한 산길을 질주하는 중이었다. 다급한 표정의 그녀 뒤로는 십여 명의 무인이 신법을 전개하고 있었다. 모두가 결연한 표정이었다. "일단은 남창에 도착하기만 해도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조력자가 되어주실 분들 중 상당수가 남창으로 가시는 중이라 들었습니다." 한희윤의 곁에 바짝 붙어서 달리는 노인이었다. 강직한 용모를 가진 노인의 허리춤에는 쇠사슬로 연결된 세 개의 단봉이 매달려 있었다. 일견하기에도 하나 합쳐지는 효용을 가진 단봉 중 하나에는 날카로운 날이 달려 있어 단봉은 창간이요, 날은 창두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한희윤의 측근에서 그녀를 보호하는 임무를 천직으로 생각하는 무림맹의 고수는 한 명 뿐이었다. 회류창 추도영. 만약 무림맹에 투신해 스스로 한조백의 가신임을 자처하지 않았다면 신창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는 그가 가졌을 거라 공공연히 말해지는 고수였다. "하필이면 이런 일이 벌어졌을 때……!" 한희윤의 표정에 안타까움이 서렸다. "도신의 제자를 사칭했던 백발귀마라는 자의 무공이 그토록 고절했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나마 대공자와 이공자께서 무사하신 것이 다행입니다." "백발귀마……!" 한희윤은 자신이 사해표국으로 찾아가 만났던 선주혁을 떠올렸다. 염색을 해 머리색을 감췄던 그는 백발이 아니었다. 가무잡잡해 이국적인 느낌이 들긴 했지만 순박해 보이는 외모였다. 약관은 넘겼음에도 소년처럼 보이는 맑은 인상이었다. 그의 인상과 단편적인 행동을 믿고 야심한 시각에 도움을 청했던 그녀였다. 한데 그가 정도 무림의 고수들을 몰살시켰다는 사실이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 '뭔가 다른 사연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에게 냉정하게 거절을 당했던 실망이 적지 않았건만 어쩐지 한 가닥 기대를 놓지 않는 그녀였다. 한두 송이씩 날리던 진눈깨비가 점차 굵어지더니 이제는 시야를 어지럽힐 정도가 되었다. 앞서 내렸던 눈송이와는 달리 한 층, 한 층 겹을 이뤄 대지를 희게 물들일 무렵이었다. "네 놈은 누구냐?" 추도영의 노성이 터지자 땅에 가라앉았던 눈송이가 피어올랐다. 그의 정순한 내력에 앞길을 가로막아선 중년인의 눈에 감탄의 빛이 떠올랐다. 감탄을 하기는 추동영도 마찬가지였다. 앞쪽으로 집중된 노성에는 진신내력이 담겨 있었건만 중년인은 조금도 타격을 입지 않은 듯 보였던 것이다. "적풍일조의 조장, 양만극이 추 선배를 뵙습니다. 추 선배와 이런 용무로 뵙게 될 것이라고는 짐작도 못했습니다." 양만극은 진실로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것이 추도영은 얼마 전까지 한솥밥을 먹던 식구였다. 임무가 아니었으면 이렇게 만날 리 없었던 것이다. "흥! 언제부터 적풍조가 삼공자, 아니 서문도옥 그 잡종의 개가 되었던 말이냐?" 추도영의 노갈이 다시 한 번 산을 진동시켰다. 이번에는 양만극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와 같은 모습에 추도영은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력을 기울인 일갈이었건만 조금의 영향도 미칠 수 없다니! 그렇다면 양만극의 내력이 자신에 비해 손색이 없다는 뜻이 아닌가? 추도영이 놀라고 감탄하는 사이 양만극은 묵묵히 말했다. "적풍조는 오직 맹주령만을 받들 뿐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이 자리에 아기씨께서 계시는 것이 안 보인단 말이냐?" 노한 추도영은 이번에는 내력을 담지 않은 채 고함을 질렀다. 더 이상 내력을 실어 보내는 것은 불필요한 진기의 소모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저희가 이곳에 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희는 아가씨를 모셔오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허! 대체 언제부터 적풍조가 살업이 아닌 호송의 임무를 띄고 움직였단 말인가?" 추도영은 양만극이 숨 돌릴 틈조차 주지 않고 몰아붙였다. 양만극은 추도영의 추궁에 잠시 머뭇거렸다. "저희로서도 낯선 임무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맹주님께서 하달하신 명이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뿐입니다." "날조된 임무라는 사실을 모른다 주장하는 겐가?" 추도영의 말에 양만극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누가 있어 감히 맹주님의 명을 위조한단 말입니까?" 추도영이 다시금 노성을 터뜨리려하자 한희윤이 나섰다. 양만극이 무조건 손을 쓰려자히 않고 대화에 임하려하는데 계속되는 추궁과 노갈은 외려 일을 악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무림맹의 명령체계가 정상이지 않은 것은 분명합니다. 양 조장께서는 그와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셨으면 합니다." 한희윤이 직접 나서서 해명하자 양만극은 송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희는 무림맹의 체계를 바로잡기 위해 길러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맹주께서는 아가씨께서 십전성으로 돌아오길 바라십니다." "할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게 아니에요!" 답답한 심정 탓인지 한희윤의 언성도 높아졌다. "불편한 심경이신 것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맹주님의 뜻을 어기실 수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양만극은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듯, 그리고 마치 자신의 딸을 달래는 듯 한희윤에게 말했다. "답답한 사람 같으니! 자네들이 무엇을 이해한단 말인가? 무림맹이 누군가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나 한단 말인가?" 추도영이 분통을 터뜨렸다. "그런 사정이 있으면 더욱 돌아가셔야 합니다. 아가씨께서 나서서 사정을 밝히고 상황을 바로 잡으셔야죠." "그럴 수 있다면 우리가 예까지 왔겠는가?" 양만극은 추도영의 질문에 한희윤을 직시하며 말했다. "그 나이에 애정에 관해 갖는 환상은 저 역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맹주님의 판단을 믿고 따르셔야할 것입니다. 혼인이란 젊은 날의 감성으로 결정하는 것보다 어른이 정하는 바를 따르는 것이 결국 옳으니까요." 양만극이 한희윤에게 시선을 고정시키는 이유는 추도영의 경솔한 행동을 탓하기 위함이었다. 이미 노회한 그가 철없는 아이의 가출을 도왔다는 사실을 질책하는 것이다. "도무지 제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지 않는군요. 제가 지금 삼사형과의 혼인 발표에 대한 불만만으로 십전성을 나섰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한희윤의 커다란 눈망울이 일렁거렸다. 십전성의 이상한 기류를 느끼고 홀로 해결할 방안을 찾아보고자 했었다. 누굴 믿어야할지 모를 상황 속에서 그 답답함은 이루 형언하기 힘들 정도였다. 오죽하면 백발귀마를 다 찾아갔겠는가? "그렇게까지 답답하게 군다면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을 듯하네. 아가씨는 지금 십전성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으시니 그리 알게." 추도영이 단호하게 결론을 내렸다. 양만극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아가씨를 십전성으로 모셔오는 데에 저희가 파견된 이유를 모르겠습니까?" "알지. 어찌 모르겠나? 서문도옥, 그 잡종이 걸리적거리는 놈들은 모조리 죽이라 명했겠지!" "맹주님의 명입니다." 양만극은 다시 한 번 적풍조 행사의 당위성을 세웠다. 추도영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느릿하게 허리춤에 손을 가져가 삼단으로 분리된 자신의 창을 빼들 뿐이었다. 이어 살짝 손을 비틀자 철그렁 맑은 소리와 함께 하나의 창이 완성되었다. 낭창이는 유연함과 그 어떤 보검으로도 잘라내지 못할 질긴 창간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의 뒤쪽에 서 있던 십여 명의 무인들도 모두가 자신의 애병을 꺼내들었다. 결사항전에 임하는 표정들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적풍일조는 여타의 적풍조와는 차원을 달리한다. 조원 개개인이 타적풍조의 조장보다 뛰어나다는 소문이 있었다. 무림맹주 한조백이 심혈을 기울여 배출한 인재들인 것이다. 양만극은 추동영이 자신의 창을 완성할 때까지 묵묵히 기다렸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 바로 전까지 동료였다는 사실에 대한 배려였다. 추도영이 창의 중단과 하단을 잡아 창두를 앞으로 향하여 자세를 갖추자 양만극이 입을 열었다. "적풍조로서의 사명은 추 선배께 국한하겠습니다." 양만극의 말에 추도영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한희윤을 호위하는 다른 무사들의 생명을 보존시켜 주겠다는 뜻이었다. 어찌 생각하면 지나치게 오만한 말일수도 있었다. 하지만 추도영은 알고 있었다. 적풍일조에게는 그런 자신감을 가질만한 자격이 있다는 것을…… 과거 한조백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풍초양, 혁련기, 서문도옥이 양지에 드러난 제자들이라면 적풍일조원들은 음지에 머무는 제자들이라고. 만약 무림에 상상을 초월할 거마가 출현한다면, 그래서 그 누구도 감당할 수 없다면, 적풍일조가 해결을 해 줄 것이라고. 당시에는 맹주의 발언이 다소 과장되었다고 생각했다. 풍초양 등이 발군의 자질을 지녔음을 추도영도 알고 있었다. 다른 두 명은 몰라도 풍초양이라면 자신과 버금가는 무공을 지녔을지도 모를 정도였다. 맹주의 제자라는 것은 그토록 대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드넓은 강호에서도 풍초양과 같은 자질을 지닌 자를 구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 스물에 해당하는 적풍일조 전원이 그와 같은 능력을 가진다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할 터였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 양만극을 본 추도영은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알 수 있었다. 자신과 정면으로 겨뤄도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정도의 고수. 험난한 강호를 몸으로 부딪치며 헤쳐온 직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런 개개인이 무리를 이뤄 암습을 감행한다면 그 어떤 고수가 있어 목숨을 보전하겠는가? 자신이 주군으로 모시는 한철조의 말에는 조금도 과장이 없었던 것이다. "후배된 도리로 선공을 감행하겠습니다." 양만극이 검병에 손을 얹으면 말했다. 추도영은 양만극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 대답할 여유를 갖지 못하고 고개만을 끄덕였다. 뛰어난 자질에 고명한 사부. 두 요건이 합쳐져 살인을 전문으로 하는 기계와 같은 전사를 배출했다. 방심할 상황이 아닌 것이다. 살업을 주로 하는 만큼 쾌속한 첫 공격이 있으리라 예상한 추도영은 전신의 신경을 팽팽히 긴장시켰다. 슈웃. 검신이 검집을 빠져나오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양만극의 쾌검이 추도영의 인후를 찔러갔다. 일체의 파공음도, 군더더기 동작도 없는 깔끔한 한 수였다. 쾌검에 의한 공격에 대비를 하고 있던 추도영의 손목이 가볍게 움직였다. 창두가 허공에 원을 그려내며 양만극의 검로를 방해했다. 장병기를 사용하는 기본은 거리의 확보에 있었다. 적에게는 공격 범위를 주지 않으며, 스스로가 공격을 펼칠 거리를 만드는 것이다. 추도영의 기민한 반응에 양만극은 검을 회수해야만 했다. 계속해 찔러간다면 검로는 틀어지고 열린 가슴으로 추도영의 창이 찔러올 것이 분명했던 것이다. 양만극이 검을 회수해 뒤로 물러서는 것을 보며 추도영은 또 한번 감탄을 했다. 지독할 정도의 쾌검이었던 만큼 찔러가는 데에 열중하지 않을 수 없을 터. 검의 회수가 저토록 자유롭다는 것은 양만극의 검예가 경지에 올랐음을 짐작케 하는 것이다. 이미 살수의 그것을 뛰어넘은지 오래된 듯 했다. 양만극은 두 다리를 굳건히 하며 검병을 고쳐 쥐었다. 이어 그의 들고 있는 검의 검신이 뿌옇게 흐려졌다. 아니 뿌연 안개와 같은 것이 검신을 감쌌다고 봐야했다. "검기……" 추도영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방금 전의 한 수는 그저 선공을 취하는 예를 갖췄을 뿐이었던 것이다. 진정한 공격은 이제부터 시작이리라. 양만극은 자신의 창에 진기를 가득 주입했다. 곧이어 폭풍처럼 몰아치는 공세에 대비해 창간을 보호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추도영의 예상은 빗나갔다. 양만극은 엄중한 표정으로 묵묵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의 검에 또 다른 변화가 있었다. 길게 뻗었던 검기가 응축되기 시작하더니 푸른빛을 발하며 뚜렷한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것은 검신 밖에 또 하나의 검신을 만들며 선명한 모습을 드러냈다. "검강! 그 정도란 말인가?" 추도영이 탄성을 질렀다. 이제는 그도 자신의 모든 밑천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다. 닿는 것은 무엇이든 잘라낸다는 검강이었다. 창이 가지는 길이로 얻는 이점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 된 것이다. 추도영의 얼굴에서 놀란 기색이 사라졌다. 강적을 맞이할수록 평정심을 찾는 것이 필수. 노회한 고수 추도영은 충실하게 기본을 갖추며 최선을 다할 준비를 했다. 그의 창두가 회전을 시작했다. 회전의 범위가 점차 커지며 허공에 나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원이 커져갈수록 속도 또한 올라갔다. 맹렬하기 이를 데 없는 회전은 바람을 일으켰고 눈송이가 창두를 따라 허공을 맴돌았다. 거칠게 휘몰아치는 눈보라가 시야에 방해가 될 정도였다. 회전은 더욱 강해졌고, 더불어 창두에 흰빛이 맺혔다. 추도영의 내력이 형상화된 것이다. 그가 왜 신창을 능가하는 창술의 대가로 회자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추도영이 완벽한 임전의 태세를 갖췄다고 확신한 양만극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니 움직였다 싶은 순간 푸른 도강이 허공을 갈랐다. 추도영과는 반대로 그에게 있어서 우선 과제는 창두가 벌려놓은 간격 이내로의 진입. 거친 동작으로 창간을 잘라가는 일수였다. 카앙. 맑은 쇳소리와 함께 두 사람 사이에 쌓였던 눈이 피어올랐다. 추도영의 창두와 양만극의 검인이 충돌한 탓이었다. 피어오른 눈송이가 양만극의 검이 그리는 궤적을 쫓았다. 다시금 거칠게 휘둘러지는 검. 병기만의 효용을 봤을 때 검을 상대하기에 가장 좋은 것 중 하나가 바로 창. 이에 양만극은 마치 도법을 운용하듯 거친 동작으로 추도영의 창을 걷어내려는 것이다. 검강의 위력과 자신의 내력을 믿는 한수, 한수였다. 카앙, 캉, 캉. 추도영이 만들어내는 창두의 나선은 좀처럼 양만극의 진입을 허용하지 않았다. 양만극은 침착하게 변초를 사용해 창간을 베려들었다. 검강을 운용한 만큼 나무로 만들어진 창간을 쉽게 벨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의 의도를 알고 있는 추도영은 철저하게 창두를 이용해 양만극의 검을 상대했다. 스스로도 강기를 만들 내 창두를 보호하는 만큼 양만극의 검이 자신의 창두를 상하게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실상 양만극이 간격을 좁히기 위해 무리수를 두는 만큼 추도영은 몇 번에 걸쳐 그를 공격할 틈을 찾아냈었다. 허나 그는 선뜻 공격을 감행하지 못했다. 자신이 상대해야하는 것은 적풍일조지 양만극 한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를 공격하는 사이, 어디에서 튀어나올지 모를 적풍조원이 한희윤을 제압한다면 만사는 끝이었다. 그렇기에 추도영은 방위를 굳건히 지키는 것에 치중하고 있는 것이다. 한희윤을 향한 급습에 대비해 한수를 아껴두며…… 추도영의 처지를 잘 알고 있기에 양만극도 허점을 내보이는 것에 주저함을 보이지 않고 적극적인 공세를 펼쳤다. 일견 추도영이 형편없이 밀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었다. 한희윤과 그녀를 호위하는 무사들은 그와 같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조차 없었다. 경기에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꿰뚫어볼 안력이 없었던 것이다. 또한 귀청이 떨어질 듯한 쇠와 쇠의 부딪침 소리에 들끓는 진기를 가라앉히는 것만으로 벅차기도 했다. 일각 여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수백번의 충돌이 있었으나 추도영과 양만극 두 사람은 한 치도 물러섬이 없었다. 서로가 서로의 무공에 경외심을 갖게 될 정도였다. 순간 콰앙, 하는 이전과는 다른 폭음이 터지고 양만극의 신형이 삼 장이나 뒤로 물러났다. 힘의 차이에 밀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추도영은 내력을 창두에 더욱 집중했다. 양만극의 검에 발한 청광이 짙어지고 지면과 수평으로 뉘인 검신이 앞으로 내뻗어졌다. 그러자 검극에서 발하던 청광이 빛살처럼 앞으로 쏘아졌다. 추도영의 창두 역시 선명한 백광을 발하며 허공에 원을 그렸고 원의 범주는 쟁반처럼 빛이 맺혔다. 쿠아아아앙. 요란한 폭음과 함께 막대한 충격파가 사위로 퍼져나갔다. 한희윤 등은 양팔로 몸을 보호해 충격파를 버텨냈다. "검파를 발현할 정도라니! 적풍일조의 이름이 왜 무림을 진동하는지 알겠구나……!" 두 걸음이나 뒤쪽으로 물러서며 양만극의 검파를 막아낸 추도영이 탄식을 하듯 말했다. 본시 창이란 공격에 적합하도록 고안된 병장기다. 공격력이 구에 방어력이 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무기를 가지고 방어에만 치중하고 있으니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과연 회류창의 위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군요. 제 실력으로는 선배님을 어찌해볼 방도가 없습니다. 하나 제가 맡은 임무는 무공을 겨루는 것이 아닌지라……" 양만극은 홀로 추도영을 제압할 방도가 없음을 솔직히 토로했다. 그러나 받은 명령을 수행해야하는 입장인지라 이제는 다수로 우위를 점해야하는 것이다. "알고 있네. 내 어찌 자네를 탓하겠는가? 자네의 고지식함이 한이 된다 해도 모든 게 충정에서 비롯된 것임을 내 왜 모르겠는가?" 긴 장탄성과 같은 추도영의 말이었다. 양만극이 자신과 필적하는 실력을 지녔으니 단 한명이라도 방수가 더해지면 승패는 뻔했다. 이제 남은 것은 자신의 죽음으로 소주를 보호하는 일뿐이었다. 그렇게 주군에게 받은 은혜를 갚으려는 것이다. 추도영은 창두를 아래로 향했다. 죽음을 각오한 만큼 적풍조원 하나에게 중상을 입히거나 동귀어진까지 도모해볼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이들은 생사를 결해야할 적이 아니었다. 언제든 진실이 밝혀지면 자신의 소주인 한희윤에게 힘이 되어줄 수도 있는 이들이었다. 이에 소주를 보호하지 못한 죄에 스스로 책임을 물어 죽음을 맞이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추도영이 죽음을 맞이하려는 순간 냉랭하기 짝이 없는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래서 정파의 떨거지들은 안된다니까! 죽기를 각오했으면 끝장을 봐야지, 자포자기를 하다니? 굳이 저런 떨거지들을 돕겠다고 나서야할 이유가 있는건가?" 명예롭게 죽음을 각오한 자신을 비아냥거리는 말에 추도영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평범해 보이는 한 노인이 가지만 남아 앙상한 관목을 헤치고 숲의 공터로 들어왔다. "저 소저와 인연이 있다니까요. 지난 날에는 사정이 있어 도움을 거절했지만, 이번에도 그럴 수야 없지요." 노인의 옆으로 한 청년이 뒤따랐다. 가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순박하게 생긴 청년은 머리 색깔이 매우 특이했다. 마치 백순을 넘어선 노인인 듯, 대지를 뒤덮은 눈인 듯 새하앴던 것이다. 그를 알아본 한희윤의 눈이 동그래졌다. "선…… 공자!" 지난번에 만났을 때에는 선 대협이라 호칭했다. 하지만 무림맹의 공적임을 알고 있고, 얼마 전 큰 혈사를 일으킨 그에게 대협이라는 칭호는 어울리지 않은 듯 해 공자로 칭호를 바꾼 것이다. "오랜만이오, 한 소저!" 선주혁은 느긋한 걸음걸이로 공터에 나선 후 두 손을 모아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그렇군요." 한희윤은 그와의 만남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는 중이었다. 와중에도 선주혁이 만약 진짜 도신의 제자였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바람을 떠올리는 그녀였다. 그때 선주혁의 곁에 남지학과 은설연이 나란히 섰다. "백발귀마……?" 양만극이 선주혁의 흰 머리카락을 보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흠…… 이렇게 눈에 띄니까 그냥 염색한 채 내버려두자고 하지 않았소?" 은설연이 귀찮다는 식의 표정으로 선주혁에게 말했다. 백발귀마가 염색을 하고 다닌다는 소문이 파다한데 굳이 염색을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냐며 선주혁이 염색을 풀어버린 것이다. 은설연의 말에 선주혁이 백발귀마라는 사실은 인정한 셈이었다. "흥! 만약 우리가 받들어야하는 명이 없었다면 네놈을 반드시 죽였을 것이다." 양만극이 검을 들어 선주혁을 가리키며 노한 표정을 터뜨렸다.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살기는 추도영을 상대할 때와는 사뭇 달랐다. "훗! 같은 적풍조라 이건가?" 동료의 죽음에 대한 분노는 당연한 것이리라. 하지만 선주혁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양만극이 뿜어낸 살기를 정면을 마주했다. "하찮은 목숨을 조금이라도 더 부지하고 싶다면 꺼져라." 적풍일조에게 주어진 지상과제는 한희윤을 안전하게 십전성으로 호송하는 것이었다. 백발귀마의 척살에 대한 명이 내려오지 않은 이상 그와 상대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오직 명령에만 충실해야 하는 것. 그것이 적풍조가 움직이는 방식이었다. "적풍조의 명성이 하늘을 찌르더니 그 오연함도 명성에 못지않군요." 은설연이 비아냥거리는 투로 말했다. 양만극의 눈썹이 하늘로 치켜올라갔다. 약관을 넘은지 얼마되지 않아보이는 애송이가 가밓 적풍조의 명성을 놓고 말장난을 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꺼져야할 것은 너희들이야. 한 소저는 원하는 길을 가실 것이다." 선주혁의 단호한 말. 그 말에 한희윤의 커다란 눈망울리 흔들렸다. "흥! 또 무슨 간교한 수작을 부리려는 게냐?" 무림맹의 인사와 적풍조를 몰살시키다시피 했던 백발귀마였다. 그가 호의로 무림맹주의 손녀를 돕는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양만극이었다. "수작이 아니라…… 두 번이나 여인의 곤란함을 외면할 수 있는 성격이 못된단 말이지." 선주혁의 말을 들은 추도영은 약간의 의아한 표정으로 한희윤을 바라봤다. 그리고 선주혁을 바라보는 한희윤의 눈을 보며 무슨 사연이 있음을 짐작했다. "감히! 적풍조의 행사를 막겠다는 말인가?" "적풍조가 만사형통의 조화를 부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지. 더구나 지금은 주인을 물려드는 개에 불과한 적풍조가 아닌가?" 선주혁의 말에 양만극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주군의 손녀를 공격하는 셈이니 선주혁의 비난은 타당함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한 소저를 안전하게 십전성으로 모시려는 것뿐이다." 무림의 마두에게 일일이 설명할 일은 아니었지만 양만극은 스스로 부끄러운 바를 이기지 못하고 말을 꺼냈다. "한 소저는 그것을 원치 않는 것 같은데?" "적풍조는 맹주님의 명만을 받을 뿐이다." 양만극은 가슴을 활짝 펴며 당당히 말했다. 사마외도에게 주인을 무는 개 취급을 받을 수 없다는 의지가 확연했다. "범의 탈을 쓴 개새끼의 명을 받은 거겠지." "…………!" 선주혁의 한마디에 양만극, 추도영 등이 놀라움을 표했다. 추도영은 그와 같은 사실을 백발귀마가 어찌 아냐는 것에 놀라는 중이었고, 양만극은 앞서 한희윤이 말한 바와 백발귀마의 말이 일치하기에 놀라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놀라는 표정에 선주혁은 여유만만한 미소와 함께 한희윤에게 시선을 돌렸다. "가출, 아니 성출이라고 해야 하나? 하여튼 성을 나선 것을 보니 한 소저의 결혼에 대한 발표가 있었던 모양이구려." "그걸 어떻게……?" 한희윤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직까지 대외적으로는 공표된 사실이 아니었다. 한조백은 갑작스레 한희윤과 서문도옥이 결혼하게 될 것임을 알려왔다. 한희윤은 조부를 만나 거부의사를 표할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그제야 십전성을 둘러싼 음모와 삼사형인 서문도옥이 깊은 관계를 맺고 있음을 깨달은 한희윤은 추도영의 도움을 받아 십전성을 탈출한 것이다. 그와 같은 십전성 내부의 일을 남창에 머물고 있는 선주혁이 어찌 알고 있단 말인가? 선주혁은 한희윤의 의문에 대답을 하지 않고 이번에는 양만극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공 노인의 죽음을 생각하면 무림맹을 피로 씻어도 시원치 않을 터이나 한 소저와의 인연을 보아 경고하겠다. 조작된 명을 받들어 억울한 죽음을 당하지 말고 이대로 돌아가라!" 선주혁의 자신감 넘치는 발언이었다. 양만극은 순간 갈등에 휩싸였다. 백발귀마라는 자는 십전성내의 사정에 정통한 듯했다. 더불어 소주인 한희윤까지 같은 주장을 하는 바, 진정 자신에게 하달된 명령에 다른 수작이 들어갔던가 고민하는 것이다. 하지만 갈등의 순간은 짧았다. 적풍조는 맹주의 명을 받들 때에만 적풍조이다. 이와 같은 맹종의 전제에는 자신들의 스승이자, 주군인 한철조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있어야만 했다. 명령체계에 이상이 있다는 것은 한철조의 능력에 대한 회의. 그것은 곧 주군을 의심하는 것에 다르지 않았다. "한 소저를 모셔가는 것을 방해하면 죽는다!" 양만극이 눈빛을 가라앉히며 단호한 모습을 보이자 종극이 감탄을 했다. '적풍조는 적풍조구나!' 그러면서도 양만극이 내뿜는 기도가 범상치않음에 놀랐다. "저 녀석과 숨어 있는 놈들은 앞서 상대했던 적풍조와는 다르군." 일부러 언성을 높이는 종극. 이는 선주혁을 향한 경고였다. 앞서 상대했던 적풍조만을 기억하며 방심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흡성대법을 익힌 후, 상대의 내력을 파악하는 것은 천하제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선주혁이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의미 없는 맹종!" 선주혁은 양만극의 행동을 비난한 다음 두 다리 사이를 살짝 넓히며 말했다. "공 노인의 혈채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무림맹의 맹주가 무릎을 꿇고 공 노인의 넋을 위로하기 전까지 무림맹은 그 분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져야할 것이다!" "광오하기 짝이 없는 놈이로구나!" 맹주가 무릎을 꿇어야 한다니! 혈채가 어쩌고 하는 소리가 무슨 뜻인지는 몰랐으나, 백발귀마의 한 마디는 그의 죽음을 결정짓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양만극의 노한 외침과 더불어 그의 검극에서 다시 한 번 청광이 빛을 발했다. 다시 한번 검파를 날릴 준비를 하는 것이다. 내력이 극도로 소모되는 수법이었으나 주군이 모욕을 받은 터에 망설임이 있을 리 없었다. 푸른빛을 내는 검파가 선주혁을 향해 쇄도해 들어가자 선주혁의 손이 자광으로 물들었다. "무슨 짓을?" 검파가 날아오는 마당에 맨손으로 마주하려 들다니! 추도영의 놀란 외침을 터지고, 귀청을 찢는듯한 폭음이 울렸다. 쿠아아앙. 방원 십장 여의 눈들이 하늘을 향해 거꾸로 내리기 시작했다. 한희윤과 그녀의 호위무사들은 분분히 뒤로 물러서야만 했고, 종극 등은 안력을 돋우어 선주혁의 상태를 살폈다. 머리 매무새가 약간 흩어졌을 분, 그는 양팔을 교차한 채 멀쩡한 모습이었다. "어, 어떻게……?" 양만극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혹여 그의 팔에 무엇인가 장치가 되있나 살폈지만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맨손으로 검파를 막아냈다는 뜻이었다. "혈마자광기? 백발귀마가 혈마의 후예였나?" 추도영이 혈마자광기를 알아보고는 중얼거렸다. 종극의 표정도 미미하게 변했다. 한눈에도 선주혁의 혈마자광기가 이전에 비해 발전했음을 알 수 있었다. '어디서 혈마자광기를 배웠는지는 모르지만 무공이 진보하는 속도가 경이적이구나!' 종극이 어떻게 알겠는가? 선주혁이 앞서 만난 홍의인들의 혈마자광기를 운용하는 방법을 보며 자신의 수법을 더욱 발전시켰다는 사실을. "과연! 어째서 두 조원들이 네놈에게 당했는지 알 수 있겠구나. 하지만 혈마의 무공이 무적이 아니었음을 알려주마!" 양만극은 호기롭게 외친 후 신형을 움직였다. 검강에 둘러싸인 그의 검이 춤을 추며 앞으로 쏘아졌다. 선주혁도 망설임 없이 양만극을 향해 마주해 달려갔다. "해천무극검!" 양만극의 검술을 알아본 추도영이었다. 오늘날 한조백을 무림맹주의 위에 있게 한 무적의 검법. 그것이 해천무극검이었다. 한조백은 남해검문에서 갈라져 나온 한 지파에서 무공을 익혔다. 스스로 남해검문의 선배임을 자처하는 어떤 노인에게 가르침을 받은 후, 무공이 일취월장한 한조백은 지파의 출신임에도 본파의 고수들을 능가하는 실력을 갖추게 됐다. 하찮게 여기던 지파의 애송이가 자신들을 능가하는 것을 용납하기 힘들었던 남해검문은 갖가지 이유를 대어 한조백을 핍박했다. 이에 한조백은 남해검문을 떠나 강호로 향하게 된다. 이후의 일은 널리 알려진대로였다. 뛰어난 무공과 광명정대한 한조백의 명성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고, 오래지 않아 무림맹주의 지위에 오르게 된다. 한조백이 강호에서 명성을 날리던 당시 그의 성명절기가 바로 해천무극검이었다. 남해검문 최광의 초식이기도 했지만 한조백의 해천무극검은 현재 남아있는 남해검문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남해검문의 해천무극검에 비해 기세가 장중하고 변화의 폭도 훨씬 컸다. 변덕스러운 바다의 하늘과 한번 진노한 하늘이 해상에서 발휘하는 막대한 힘을 고스란히 옮겨놓았던 것이다. 노천광풍세. 양만극이 펼치는 초식명 그대로 노한 하늘에 미친 바람처럼 그의 검이 선주혁을 압박해 들어갔다. 검신을 감싼 푸른 청광이 사위를 가득메우는 듯했다. 자광을 발하는 선주혁의 손이 허공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미풍에 나부끼던 자색의 꽃잎과 같은 움직임을 보이던 손이 그의 날카로운 경기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의 장법을 본 은설연은 이 자리에 천산노조 서동주가 없음을 다행이라 생각했다. 평생을 두고 갈고 닦은 자신의 절기가 허락도 없이 선주혁에게 통째로 베껴지고 있음을 안다면 그가 얼마나 억울해하겠는가? 선주혁이 전개하는 장법은 천산노조의 성명절기인 난화무영수였던 것이다. 선주혁이 만들어낸 장영은 허와 실을 구분할 수 없는 공세였으며 거칠게 몰아붙이는 양만극의 검로를 끊임없이 방해했다. 간혹 검광과 자광수가 부딪칠 때는 충격파만으로도 눈송이들이 흩어지는 현상을 만들어냈다. 맨손으로 검강을 막아내는 기사를 보며 추도영은 혈마의 무공이 얼마나 대단한가에 대해 끊임없이 감탄을 했다. 계속해서 해천무극검을 풀어내는 양만극의 이마에 땀방우링 맺혔다. 검과 장이 부딪칠 때마다 손에 전해오는 충격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눈앞의 어린 청년이 지닌 내력이 자신보다 훨씬 높다는 것을 깨달은 양만극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동료의 복수는 물론이거니와 그 나이에 저 정도의 무공을 지닌 자가 훗날 얼마나 고절한 무공을 지니게 될 지는 자명한 터. 향후 무림에 크나큰 해악을 끼칠 악적을 반드시 죽여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오르는 것이다. 콰앙. 검과 장이 다시 한 번 허공에서 충돌을 하고 막대한 경력을 이기지 못한 양만극의 검이 튕겨지듯 뒤쪽으로 밀렸다. 선주혁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허리를 살짝 낮춘 채, 좌장을 양만극의 옆구리 쪽으로 밀어 넣었다. 그 순간, 땅이 뒤집히며 하나의 인영이 번개같이 튀어나왔다. 선주혁의 좌측면을 노리는 비수. 비수를 둘렀나 푸르스름한 기운은 나타난 인영 역시 검강을 운용할 정도의 고수라는 뜻이었다. 이대로 양만극을 공격하면 고스란히 새로운 인영이 내뻗는 비수를 맞아야 할 판이었다. 적풍조의 암습은 이미 견식한 바가 있는 선주혁. 그 속도와 위력이 이전에 비할 바가 아니라지만 선주혁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좌수를 회수했다. 북두폭렬권을 응용한 손의 움직임은 전광석화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 대응이 늦었다 싶었건만 선주혁의 손은 미리 비수의 앞쪽에서 기다리는 형국이 되었다. 선주혁은 자광수로 비수를 쳐내는 것이 아니라 비수가 향하는 방향에 순응해 손을 거두며 짧은 검신을 옆으로 밀어냈다. 그러자 방향을 바꾼 비수는 선주혁이 아닌 양만극을 노리고 날아가게 되었다. 모든 게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 "헙!" 적풍조원의 입에서 놀란 탄성이 터지고 양만극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패였다. 적풍조원이 애써 팔을 거둬들이려 했지만 선주혁이 더한 기이한 힘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양만극의 늑골을 찌른 것이다. 양만극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설 때야 모든 것을 파악한 중인들은 선주혁의 놀라운 무공과 기지에 크게 감탄했다. 종극만이 고개를 갸웃거렸던 것이다. '무당의 면장? 곤륜파의 제자가 명유지력, 혈마자광기에 이어 무당의 면장까지라……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녀석이군.' 설마하니 선주혁이 자파의 비전인 화무난천장을 익혔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한 종극이었다. 그는 선주혁이 신투의 비고에서 청성파의 기초무공을 읽은 후 최심장 흉내를 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설마하니 무당파에서 무당면장의 비급을 도난당했을 리는 없으니 선주혁은 무당의 기초무공을 바탕으로 저와 같은 흉내를 냈을 것이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놀라운 일이고, 보면 볼수록 탐이 나는 인재가 바로 선주혁이라는 결론과 함께였다. 자신의 비수로 양만극을 찌른 후 적풍조원이 당황하는 사이, 선주혁은 공격 대상을 그로 바꿨다. 적풍조원을 향해 선주혁이 일보를 내딛는 순간. 발이 지면에 닿음과 동시에 땅이 뒤집혔다. 체중을 실으려는 순간 땅이 튀어 오르자, 선주혁의 신형이 비틀거렸다. 그 순간을 놓칠 리 없는 적풍조원들. 두 명의 적풍조원이 또 땅에서 튀어나와 선주혁을 노리고 들었다. 총 세 명의 적풍조원이 한꺼번에 방위를 점하고 선주혁을 노리고 드는 것이다. 종극, 남지학, 은설연, 그리고 한희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 명, 한 명이 만만치 않은 고수로 구성된 적풍조원 세 명의 합격을 선주혁이 받아낼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남지학이 번개 같이 발검하고 땅을 굴렀고, 종극이 신형은 이미 선주혁의 인근에 도탁해 있었다. 퍼어어억. 둔탁한 음향과 함께 중인들은 입을 떡하니 벌려야 했다. 선주혁을 향해 달려들던 세 명의 적풍조원이 무형의 벽에 부딪친 듯 뒤쪽으로 튕겨져 나간 것이다. 아니 튕겨진 것뿐이 아니었다. 한 명은 어깨가 탈구되어 비틀거렸고, 다른 한 명은 어깨에 벽력탄이라도 맞은 듯 피 곤죽이 되었으며, 마지막 한 명은 가슴이 뭉개진 채 즉사했다. 혈마자광기를 운용한 상태에서 북두폭렬장을 사용한 결과였다. 균형을 잃은 틈을 타 급습을 받은 선주혁은 본능적으로 북두폭렬장을 전개했고 확실한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던 적풍조원들은 예상치 못한 반격을 막아내지 못한 것이다. 방금 전의 급습은 선주혁 역시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방심하는 그 순간을 예리하게 파고드는 적풍조원들에게 치가 떨리기도 했다. 세 명의 적풍조원을 튕겨낸 선주혁은 균형을 잡음과 동시에 본래 노렸던 적풍조원을 향해 다시금 북두폭렬장을 전개했다. 동료의 죽음을 확인한 적풍조원은 가공할 속도로 날아드는 북두폭렬장의 첫 일장을 막아냈다. 그러자 폭발적인 경력이 그의 신형을 뒤흔들었다. 선주혁의 장이 가진 위력이 막대했던 것이다. 몸을 바로잡으려는 그 순간 연이은 선주혁의 장력이 그의 가슴을 함몰시켰다. 양만극의 옆구리를 찔렀던 그 적풍조원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숲 속의 공터는 잠시간 정적에 빠져들었다. 불규칙한 궤적을 그리며 하강하는 눈송이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모두가 선주혁의 가공할 무위에 놀라고 있는 중이었다. 철저하게 초절정 고수만을 상대하기 위해 길러진 적풍조원들이었다. 그들을 저리도 손쉽게 상대할 수 있는 고수가 있으리라 누가 상상했겠는가? 특히 회류창 추도영의 놀라움은 극에 달했다. 백발귀마가 남창에서 혈사를 일으켰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한데 그 장소에는 염마 종극이 함께 했다고 했다. 결국 추도영도 서동주나 남백연처럼 종극의 도움으로 선주혁이 엄청난 살겁을 일으켰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한데 지금 확인한 선주혁의 무공은 당시의 상황을 충분히 유추해내고도 남게 만들었다. 그에게 염마의 도움은 필요없었을 것이다. 양만극은 백발귀마에 대한 분노로 고통마저 잊었다. 한 순간 두 명의 수하를 잃은 것이다. 철저하게 초절정 고수를 상대하기 위해 훈련을 쌓아온 그들이었다. 선주혁의 무공이 예상했던 것을 훨씬 뛰어넘기는 했지만 적풍조에게 두려움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당대의 혈마가 살아 돌아온다 해도 자신이 있는 적풍조원들이었다. 그가 막 입을 열어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리려는 순간이었다. 마치 화산의 근방에라도 온 듯한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여태껏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던 한 노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였다. 그제야 양만극은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해냈다. 백발귀마와 염마가 동행한다는 것을……! 너무도 평범한 용모였기에 설마 그가 구대마존 중의 일인인 종극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더불어 검을 뽑아들고 백발귀마의 바로 옆에선 준수한 청년도 눈에 들어왔다. 그의 검을 감싸고 있는 푸른빛도. 이십대 중반에 불과한 청년이 만들어낸 검강이었다. 완벽한 형태를 갖춘 검강의 색이 선명하기 이를 데 없고, 길이가 한 자가 넘어서니 자신의 검강보다 뛰어나다 할 수 있었다. 양만극은 준수한 청년의 별호를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백발귀마와 함께 곤륜이마로 불리는 옥용검마가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더 이상은 무의미하오. 사제 혼자라면 몰라도 여기 종 장로님과 소생이 있는 한 아무리 적풍조라 해도 무리가 될 것이오. 이쯤하고 물러가는 것이 현명하지 않겠소?" 남지학이 점잖은 어조로 양만극에게 말했다. 이에 양만극은 더욱 놀라야만 했다. 검강을 발현한다는 것은 내력의 소모가 극심하기 마련이다. 한데 이십 대 중반에 불과한 젊은이가 검강을 발현한 채로 말을 하고 있지 않은가? 이는 아직까지 옥용검마의 내력에 여유가 있다는 뜻이었다. 만년음양과를 복용한 남지학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양만극이 놀라는 사이, 선주혁은 사형의 무공이 또다시 일취월장했음을 깨닫고 크게 기뻐했다. 양만극이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있다가 두 눈을 빛내며 입을 열려는 그 순간. 종극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에 살기가 그득 담기기 시작했다.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의 강렬한 살기. 숨이 막혀오는 막대한 압력. 구대마존 중 일인이 뿜어내는 무형지기의 위력은 가공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염마의 몸에서 뻗어나온 살기의 가닥들은 남은 열여섯 명의 수하들이 은신한 곳을 향하고 있었다. 염마는 수하들이 은신한 장소를 명확히 파악한 것이다. 아마도 백발귀마로 인한 동료의 예기치 못한 죽음에 수하들이 미미한 동요를 보였을 것이다. 그 작은 기척을 염마가 놓칠 리 없어싸. 적풍조원 개개인의 무공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그들은 암습을 전문으로 훈련을 받아왔다. 그러나 이미 은신이 드러난 암습은 무의미했다. 더구나 감당하기 힘든 무공을 가진 적은 무려 셋. 추도영을 염두에 두면 오늘의 승부는 필패로 귀결될 것이다. "제발……!" 양만극의 시선이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향했다. 숲 속 공터의 유일한 여성이 누군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대로 돌아가주세요. 지금 할아버지는 도움이 필요합니다. 두 사형과 함께 십전성으로 돌아갈 거에요. 그러니 양 조장님께서는 저를 믿고 돌아가 주세요."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을 머금고 간절히 말하는 한희윤의 말에 양만극은 또한번 흔들렸다. 만약 지금의 상황이 아니었다면 한희윤의 말을 그저 결혼을 피해 도망가는 철없는 소주의 치기정도로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저토록 막강한 무공을 지니고 엄청난 조력자를 옆에 둔 상황에서 백발귀마가 싸움을 피하기 위해 허언을 할 리는 없을 터. 앞서 그가 제기한 명령체계에 대한 문제는 진정일 가능성이 컸다. 선혈이 꾸역꾸역 나오는 옆구리를 움켜쥔 채 서 있는 양만극에게 결정적인 한마디가 날아들었다. "정파 놈들은 당최 이해가 안 간단 말이야. 여기서 죽으면 위험에 처한 주인은 누가 있어 도와줄까?" 종극의 한 마디였다. 비아냥거리는 내용 속에 중요한 요점이 담겨 있었다. 명령체계에 이상이 있다는 것은 자신들의 주군의 신상에 문제가 있다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장렬하게 죽는 것만이 주군에 대한 충성이 아님을 양만극이 어찌 모르겠는가? "꼭 돌아와주시겠습니까?" 양만극은 고통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고 한희윤에게 물었다. "할아버지께서 위험한 상황이에요! 제가 어찌 돌아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한희윤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양만극은 피 묻은 손을 눈앞으로 들어 맞잡았다. "십전성으로 돌아가 주군의 신상에 대해 조사하겠습니다." 한희윤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고마워요, 양 조장님!" 양만극은 수하 둘의 시신을 잠시 바라보다 선주혁을 정면으로 돌아보며 말했다. "오늘의 빚은 잊지 않겠다." "상호 받아야할 빚이 있으니까……" 선주혁도 물러저시 않고 대답했다. 양만극은 남지학을 향해서도 시선을 잠시 두었다. 차마 입을 열 수는 없었지만 오늘 적풍조의 사정을 봐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양만극은 몸을 돌렸다. 깊은 상처에 거동이 불편할진데 조금도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신형을 날렸다. 그의 뒤로 적풍일조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백발귀마의 얼굴을 잊지 않겠다는 듯 선주혁의 얼굴을 한 번씩 쳐다본 그들은 조장의 뒤를 쫓았다. "이거야 원…… 내가 이런 자리에 껴야할 이유가 어디에 있다는 건지." 종극이 못마땅하다는 듯 투덜거렸다. "선 공자의 도움에 마땅히 사의를 표해야하나 상황의 여의치 않아서……" 한희윤이 말끝을 늘였다. "갈 길이 얼마나 바쁜지 알고 있소. 이걸로 지난 번의 냉대를 갚은 걸로 합시다." 선주혁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한희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달리기 시작했다. 선주혁과 이렇게 헤어지는 것이 뭔가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은 그런 사사로운 감정을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추도영은 백발귀마와 염마에 대한 경계를 풀지 않고 한희윤을 호위하며 뒤쫓았다. 선주혁은 뭔가 아쉽다는 듯 한희윤의 뒷모습을 보며 입맛을 쩝쩝 다셨고 그 모습을 보는 은설연의 두 눈썹이 상큼치켜 올라갔다. "무림맹의 공적이 맹주의 손녀를 돕다니…… 정말이지 모순 중의 모순이구려." 은설연의 말에 선주혁이 씨익 하며 미소를 지었다. "남자는 아름다운 여인을 보면 반드시 돕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오. 만약 은 공자와 꼭 닮은 여인이 있다면 소생은 또 다시 사연을 따지지 않고 돕겠다며 나설 것이오." 선주혁의 농담에 은설연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러나 은설연은 괜스레 미간을 찌푸리며 언성을 높였다. "흥! 소생의 용모를 농으로 삼지 말라고 하지 않았소?" "하하핫! 알았소. 그렇게 화내지 마시오. 그라저나 우리도 한가로운 상황은 아닌 듯하니 서두릅시다." 선주혁의 말에 종극이 먼저 신형을 날렸다. 일월신교의 본단이 있는 십만대산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선주혁이 고집을 부리며 나서지 않았다면 무림맹의 일 따위에 나서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단목지민을 찾는 일조차 수하들에게 맡기고 본단으로 향하는 길이거늘 그가 어찌 잠시라도 지체하길 원하겠는가? 종극의 뒤를 선주혁 등이 쫓았다. "한데 어떻게 무림맹 내의 일을 그렇게 훤히 알 수 있는 것이오?" 은설연이 선주혁과 나란히 달리며 물었다. 아까 한희윤에 관한 이야기에 대해 묻는 것이었다. 선주혁은 매번 자신이 책을 읽어 미리 아는 바에 대해 핑계를 대는 상황이 곤란하기 짝이 없어싸. 이에 미리 생각해 둔 바대로 설명을 시작했다. "소생이 천기를 조금 볼 줄 아는 것뿐이오." "천기?" "그렇소." "아무리 천기를 본다한들 결혼발표를 하는 것까지 알 수 있단 말이오?" 은설연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선주혁은 약간 당황했다. 천기를 본다는 것을 그저 무속인이 점을 보는 것처럼 생각했던 것이다. "흠, 흠! 소생이 천기를 보는 것은 타인들과는 조금 다르오. 뭐랄까…… 찰나의 순간에 스치듯 영감을 떠올리는 것이오. 불규칙한 순간이지만 정작 보이는 것은 매우 세세하다오." "선 소협은 원래 무격이 되었어야 하는 거 아니오?" 은설연이 농담조로 말을 건넸다. 선주혁은 그저 웃음으로 넘겼다. 이렇게 말을 해 둔 이상, 앞으로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말을 하는 데에 있어 훨씬 편한 환경을 조성하게 된 것이다. 한편 뒤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를 듣던 종극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뛰어난 무공에, 넓은 시야, 그리고 엄청난 발전 가능성. 거기에 천기를 읽는 능력까지 있다고 한다. 유비가 공명을 얻어 천하를 도모했듯 천마맹이 그를 얻게 된다면 무림을 도모하는 것도 불가능은 아니리라. 더불어 패종회라는 곳은 저 아이를 적으로 둔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면서 무림맹주 한조백이 선주혁의 앞에 무릎을 꿇는 장면까지 떠올라 실소를 터뜨렸다. 그렇게까지야 아니겠지만 어쨌든 저 녀석이라면 공이라는 성의 노인의 죽음에 대해 진짜로 한조백의 사과를 받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종극이었다. 암동 특유의 음습함이 없는 공간은 기이한 형상의 부조로 가득했다. 동물도 사람도 아닌 존재가 수많은 군웅을 참살하는 장면을 표현한 부조는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섬뜩한 느낌을 받게 했다. 거대한 동굴의 안쪽에는 백여 명의 사람들이 엄숙한 표정을 유지한 채 한 방향을 향해 서 있었다. 그들이 서 있는 방향에는 높은 좌대가 있었으며 황제의 그것에 못지 않은 태사의가 보였다. 태사의의 좌측으로 나 있는 통로에서 두 명의 소동을 거느리고 한 중년인이 걸어왔다. 느릿한 걸음에는 위엄과 자신감이 가득했다. 중년인의 등장과 더불어 근 천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무릎을 꿇었다. 이어 천정을 향해 양팔을 치켜들은 그들의 허리가 깊숙이 숙여졌다. 땅에 머리를 댄 그들의 입술이 하나인 듯 움직였다. "패종천하 무림앙복!" 백여 명의 외침이었건만 완벽한 일치로 마치 한 사람의 목소리와도 같았다. 그들의 외침이 암동의 은은한 울림을 만들때쯤 중년인이 태사의에 앉았다. 부리부리한 호안의 중년인은 자신의 발 아래로 엎드린 군중을 향해 나직하게 말했다. "고개를 들라. 편안하게 말하는 듯 했으나 중년인의 음성은 천여 명 모두에게 선명하게 들렸다. 중인들은 동작을 맞춰 몸을 일으켰다. 경건하면서도 조심스러운 동작이었다. "시기가 도래했음에 천음을 불러들였다." 중년인의 말에 중인들의 표정이 모두 감격으로 물들었다. 삼백여 년의 세월을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던 그들이었다. 천음이 돌아왔다는 것은 숙원인 의식을 진행하겠다는 뜻. 의식의 성공은 곧 패종회의 권토중래를 확정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보름에 맞춰 의식을 거행할 것이니 전 교도는 경건한 마음가짐을 잃지 않도록 해라. 이제 곧 암천의 시대가 도래하리라!" 패종회의 회주이자 교도들의 정신적인 지배자인 교주인 선우단천의 말에 중인들은 우레와 같은 함성을 내질렀다. "우와아아아아!" 두 손을 높이 치켜든 그들의 함성에는 기쁨이 충만했다. 삼백 년을 숨죽여 기다려온 과업의 달성이 눈앞에 있는 것이다. 드넓은 중원에서 어깨를 당당히 펴고 무림을 지배하는 것만이 남은 일. 그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선우단천은 자신의 수하이자 충실한 교도들의 반응이 만족스러웠다. 그는 충분히 시간을 두고 함성이 잦아들길 기다렸다. 이윽고 선우단천은 손을 살짝 들어올렸다. 그것을 신호로 기쁨에 찬 교도들의 함성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선우단천은 가볍게 손바닥을 쳤다. 그러자 그가 대전에 나왔던 반대방향의 출구를 통해 한 여인이 걸어 나왔다. 얼굴에 면사를 쓴 여인이었다. 얇은 천을 겹쳐 만든 옷은 묘하게도 여인의 몸매를 은연중에 드러냈고, 드러난 여인의 몸매는 뇌쇄적인 매력을 물씬 뿜어냈다. 한걸음, 한걸음이 사내의 가슴을 들끓게 하는 달콤한 유혹과도 같았다. 교도들은 그녀의 등장에 넋을 잃었다. 신성하기 이를 데 없는 여인임을 알고 있었건만, 아름다운 자태에 걷잡을 수 없는 충동까지 일었다. 교도 중 비교적 나이가 적은 이들은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치솟는 성적충동을 억누르는 데에 치중해야 했다. 선우단천은 그녀가 다가오자 손을 내밀었다. 여인은 우아한 동작으로 자신의 흰 손을 내밀어 선우단천의 손을 잡았다. "경배하라! 그리고 축복하라! 너희의 대에 이르러 천음의 현신을 확인케 되었음을 감사하라!" 매혹적인 여인을 바라보던 교도들의 달뜬 표정이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그들의 표정은 엄숙하게 바뀌었고 허리는 깊숙이 숙여졌다. 이어 일제히 그들의 성전에 기록된 기도문을 읊기 시작했다. 일정한 운율과 함께 하는 낮은 음성이 드넓은 공간을 가득 메웠다. 교도들의 찬양 속에 서 있는 여인이었건만, 면사 뒤 그녀의 표정은 결코 밝지 않았다. 자신을 향해 엎드린 교도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는 외려 슬픔만이 가득했다. 그 눈은 암동의 벽면 가득한 부조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째서 저와 같은 살업을 위해 삼백여 년의 세월동안 한을 키워 왔어야 했는지 그녀는 묻고 싶었다. 끊임없는 죽음의 선봉에 자신을 내몰아 세우는 교도들의 잔혹함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을 향한 숭배와 찬양에서 비릿한 혈향을 맡은 그녀는 현기증을 느꼈다. 그 순간,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하겠다는 한 사람이 떠올랐다. '그를 다시 볼 수 있을까……?' 지금의 심정에서 그와 헤어지던 순간으로 돌아간다면 다른 선택을 했을 것이다. 원치 않으면 가지 않게 해주겠다던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생각보다 소박하군요." 마교의 본단에 들어온 은설연의 감상이었다. 첩첩산중에 자리한 마교의 본단은 갖가지 진법으로 철저하게 그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설령 본단이 있는 위치를 알고 있다 해도 진법에 조예가 깊은 자가 아니라면 눈앞에 두고도 찾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엄중하게 위치를 가리고 있는 진법을 통과한 후 선주혁과 은설연, 남지학이 본 것은 즐비하게 늘어선 검박한 건물들이었다. 당연히 높은 성벽과 당당한 위용을 드러내는 건물들을 기대했던 은설연으로서는 의아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지나친 화려함은 인간의 눈을 현혹시킬 뿐이다." 일월신교의 가르침을 말하는 종극이었다. "살인의 미학을 추구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만……" 마교에 대해 들었던 바를 솔직하게 말하는 은설연이었다. 그녀의 말에 종극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본교의 가르침 상 죽음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죽어가는 것 역시 본교의 가르침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 또한 악을 응징함에 있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지만 죽음을 내릴 때는 최대한 고통을 주지 않는 것이 우리의 교리. 네가 말하는 것은 그와 같은 본교의 가르침을 정파의 개들이 폄하하기 위해 퍼뜨린 것 뿐이다." 종극의 말에 남지학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은설연이 말한 내용은 자신도 오랫동안 알아왔던 것이다. 문중의 어른들에게 수도 없이 들었던 이야기였으므로. 한데 종극의 설명을 듣고 나니 그간 마교에 대한 자신의 적대감이 편견과 모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남지학은 사제의 표정을 살폈다. 선주혁은 그런 남지학을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종극의 말이 사실이라는 뜻이었다. 선주혁이 읽었던 책에서 나온 마교는 이전에 그가 읽었던 소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악을 숭배하고, 살인을 밥 먹듯 하는 사악한 무림의 단체가 아니었다. 교단이 처음 설립될 당시에 비해 종교적인 색채가 옅어지긴 했어도 자신들만의 선을 규정하고, 그를 실행하기 위해 애를 쓰는 모습이었다. 정도 무림인들에게 혹세무민하는 이교도로 낙인찍혀 지독한 탄압을 받은 역사를 가진 무림의 단체로 묘사되었다. 이에 정도 무림에 큰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무공을 모르는 양민을 핍박하거나 그들의 목숨을 가벼이 여기는 행동은 없었다. 정도 무림에 맞서기 위해 천마맹에 흡수된 마도 방파와 함께 묶어 천마맹이라 칭해지지만 일월신교의 교도로서 그들과 명확히 구분하는 것도 그와 같은 사연 때문이었다. 공동의 적을 둔 일월신교였기에 어쩔 수 없이 마도방파를 받아들이고 그들의 악행을 묵시할 뿐, 그들과 같은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천마맹의 이름을 빌어 자행된 모든 악행은 일월신교 자체와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었던 것이다. 종극과 선주혁의 일행은 마중 나온 교도의 안내를 받아 한 건물로 향했다. 본단의 외곽에 위치한 크지도 작지도 않은 소박한 건물이었다. 남지학과 은설연은 종극이 먼저 숙소를 정해주려는 거라 생각했다. 시간에 쫓겨 강행군을 감행했으니 휴식을 제공하려는 의도로 여긴 것이다. "전반적인 상황이 보고된 이상, 가급적 빨리 교주님께 보고를 드리는 게 낫겠지." 건물 앞에서 종극의 말에 은설연은 커다란 눈을 더욱 크게 떴다. "여기가 귀교의 교주께서 기거하시는 곳이란 말입니까?" "교주께서 집무를 보는 곳이다." 종극이 짧게 대답했다. 은설연은 어이가 없었다. 검소한 것도 좋고, 교의 가르침도 중요하겠지만 눈앞의 건물은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외적인 면모를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이처럼 허름한 건물을 보고 어떻게 마교의 교주로서 위용을 세울 수 있겠는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건물 내로 들어선 은설연은 밖에서보다 더욱 놀라야만 했다. 벽에 몇 폭의 서화가 걸려있는 것이 치장의 다였다. 값비싼 도자기나 고상함을 자아내는 난조차 없었다. 벽 한쪽을 차지한 서가에 빼곡이 책이 꽂혀 있었다. 그 옆 책상 위에는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손님을 맞이할 팔선탁이 입구 쪽에 자리했다. 그것이 다였다. 가구도 장식도 없다보니 외려 실내가 더욱 넓어 보이는 효과를 만들기는 했다. 은설연은 강호의 누구라도 미리 알지 못한 채 이곳에 들어왔다면 마교 교주의 집무실이라 생각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선주혁 등이 들어선 문 반대편에 작은 미닫이문이 열리며 한 명의 중년인이 들어섰다. 단정하게 틀어 올린 머리에 잘 정돈된 수염을 기른 수려한 인상의 중년인이었다. 떡 벌어진 어깨에 잘록한 허리, 그리ㅗㄱ 안정적인 걸음걸이가 아니라면 문사가 아닐까 싶을 정도의 용모를 지닌 그를 보며 은설연은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설마…… 저 사람이 마교의 교주?' 평소 상상했던 마교 교주와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었다. 적어도 염라대왕에 못지 않은 외모를 지녔을 거라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중년인에게는 무림 최강의 단체를 이끄는 위맹한 면모를 찾기 힘들었다. 학식이 풍부한 학자로서의 인상이 훨씬 강했던 것이다. 은설연의 의혹을 해소해주기라도 하듯 종극이 양손을 마주잡고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집법장로 종극이 교주님을 알현합니다." "원로에 고생이 많으셨소, 종 장로." 마교의 교주, 단목하진은 사람 좋은 미소로 종극을 맞았다. "성화령을 받든 몸이 어찌 고생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종극의 말에 단목하진은 고개를 살짝 끄덕인 다음 시선을 선주혁 등에게 돌렸다. "귀한 손님을 맞이했거늘 환대한 주연을 준비하지 못했음을 이해하게." 단목하진은 마치 오래 전부터 남지학 등을 알아왔던 것처럼 친근하게 말을 했고, 그의 하대 역시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남지학은 당당하면서도 예의바르게 대답했다. "자, 자…… 저쪽으로 앉지. 비록 술과 음식은 대접하지 못하나 차라도 한잔 대접해야겠지." 단목하진은 손으로 팔선탁을 가리켰고 남지학 등은 자리에 앉았다. 단목하진이 마지막으로 자리를 하자 종극이 손수 주담자를 들어 사람들에게 차를 따랐다. 은설연은 당최 이 사람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구대마존의 일인이자 마교도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종극이 직접 차를 따르다니. 대마교에 그 흔한 시녀조차 없단 말인가? 이쯤 되면 검소한 것이 아니라 궁핍하다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거대한 단체의 수장격인 사람들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손가락질을 받고도 남을 일이었다. '체면이라는 것을 모르는 건가?' 은설연이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단목하진이 입을 열었다. "본인이 일월신교의 교주를 맡고 있는 단목하진일세." 마교의 교주가 먼저 소개를 하니 정마를 떠나서 지나친 과례인지라 남지학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맞잡고 스스로를 소개했다. 연이어 선주혁과 은설연도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췄다. 은은한 미소로 세 명의 인사를 받은 단목하진이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꺼냈다. "대강의 소식은 종 장로가 보낸 서신을 통해 알고 있네.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네만……" 이와 같은 단목하진의 솔직한 태도는 은설연을 또 한 번 의아하게 했다. 마교의 교주 정도 되는 자라면 교섭과 협상에 있어서 능수능란하기 마련이다. 지금처럼 조급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스스로 유리한 위치를 포기하는 것에 다름이 없거늘, 그와 같은 기본적인 협상론조차 모른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 것이다. 단목하진의 요청에 남지학이 나섰다. 그는 선주혁의 말을 기준으로 패종회에 대해 설명했다. 간결하면서도 요점을 잃지 않은 설명이었다. 묵묵히 긴 이야기를 듣던 단목하진은 깍지 낀 손가락을 풀었다.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줘서 고맙네." "천만의 말씀입니다." "종 장로에 버금가는 고수가 백여 명이나 된다는 사실이 쉽게 믿어지지 않는군, 그래." 단목하진의 말에 선주혁이 나섰다. "문제는 그 뿐이 아닙니다." "종 장로와 같은 고수가 백여 명이나 되는 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는 건가?" 단목하진은 눈앞의 젊은이가 지나치게 과장하기를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의사를 표정에 담아 물었다. "그렇습니다." 선주혁은 자신있게 대답했다. 단목하진은 침착하게 선주혁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대체 무엇이 종극의 수준에 이른 고수 백여 명보다 중요하다는 건지 들어보겠다는 식이었다. "교주님께서는 천음지체에 대해 알고 계실 것입니다." "천음지체? 강호에 회자되는 전설의 천음마체를 말하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하핫. 이거야 원! 설마 패종회라는 무리가 천음마체를 찾아내어 천음마후를 육성하고 있다는 말은 아니겠지?" "짐작하신 대로입니다." "후후후훗! 이보게. 목적이 뚜렷한 것은 실로 좋은 일이며, 자네 나이라면 의당 그래야 하네. 하지만 이곳이 어디인지 잠시 잊은 건 아닌가?" 사람 좋은 미소를 보이던 단목하진의 표정이 굳어졌다. 단지 표정을 굳혔을 뿐인데 방금 전까지 보았던 단목하진의 모습이 완연히 달라졌다. 동시에 그의 분위기도 달라졌다. 그와 같은 변화는 평범한 노인의 모습인 종극이 허리를 곧추 세우고 기도를 바꾸는 것과는 사뭇 달랐다. 문사에 더 어울리는 모습이었던 단목하진에게서 느껴지는 압도적인 위압감. 그것은 가공할 무형지기를 뿜어내는데서 오는 것이 아니었다. 단목하진의 몸에서는 일체의 기운도 방출되지 않고 있었다. 그저 위엄이 넘치는 표정을 지었을 뿐이었으나, 은설연과 남지학 등은 숨이 막혀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이게…… 무림의 패자로 추앙받는 마교 교주의 진정한 모습인가?' 내공을 실어 형형한 안광을 빛내는 것이 아니었음에도 그의 눈에 담겨진 것은 천하 그 자체였다. 아니, 천하를 발 아래로 내려다보는 제왕의 눈빛이었다. 태어나 한 번도 자신의 조부에 필적하는 분위기를 느껴본 적이 없는 은설연이었다. 한데 조부보다 한참이나 나이가 어린 단목하진에게서 조부를 능가하는 어떤 것을 느끼는 중이었다. 더불어 그녀는 마교 교주의 집무실에 일체의 장식도, 화려함도 없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그 누구도 이와 같은 검소함에 손가락질 할 수 없는 상황도 이해되었다. 마교 교주에게는 높은 단상도, 화려한 복장도, 위압적인 그 어떤 장치도 필요치 않았다. 교주 자체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이다. 절대강자로서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그가 있는데 다른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현 무림의 최강자 앞에 있음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선주혁의 당당한 대답이었다. 평소라면 선주혁의 말에 필히 반박을 했을 은설연조차 지금은 입을 열지 못했다. 반드시라고는 말할 수 없어도 방금 전 보여준 단목하진의 진면모는 분명 무림최강자로 거론될 자격이 충분했던 것이다. "현 무림이라…… 앞으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건가?" "모습을 드러낼 자들 중에 교주님과 만여 초를 겨룰 자가 셋이 있으며……" "흥! 종 장로에 필적하는 자가 일백이나 되며, 또 본 교주와 겨룰 자가 셋이나 말이군. 자네는 지금 본 교주와 본교를 무시해 모욕을 가할 셈인가? 그럴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 보겠네." 순간적으로 단목하진의 몸에서 폭풍과 같은 기운이 쏟아져 나왔다. 그 기운의 대부분이 선주혁에게 집중되어 있음에도 은설연은 안색이 창백해졌다. 가공할 기도에 진기가 들끓는 것이다. 남지학은 저도 모르게 검병에 손을 얹었다. 이제는 분신과도 같은 애병인 영의검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 만큼의 패도적인 기운이었던 것이다. 이번에는 선주혁도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을 수 없었다. 막대하기 이를 데 없는 기운이 자신에게 집중이 되자 걷잡을 수 없이 진기가 들끓었다. 만약 사해표국에서 복면인들의 내력을 한꺼번에 흡수하지 않았다면 당장 피를 토하고 쓰러졌을 것이다. 선주혁은 전신을 옭죄어 오는 기운에 맞서지 않고 순응하기 위해 노력했다. 강한 힘은 맞서 부딪치는 것보다 흘려 보내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은 화무난천장을 익히며 깨달은 것이다. 일월신교의 무공에서 얻은 깨달음으로 일월신교의 교주의 압박에 대항하는 셈이었다. 선주혁의 노력은 즉각적인 효과를 드러냈다. 단목하진의 압박이 고통스럽기는 해도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게 느껴졌던 것이다. 단목하진이 뿜어내는 기운은 일월신교의 비전 중의 비전이자 오직 교주만이 익힐 수 있는 건곤대나이심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건곤대나이심법은 심법 그 자체일 뿐 아니라 무공으로 사용이 된다. 축기의 속도에 있어 천하에 비할 심법이 없으며, 사용의 광범위함 역시도 타의추종을 불허했다. 세인들은 이 건곤대나이심법을 천하에서 가장 패도적인 무공이라 여기지만 실상은 달랐다. 건곤대나이심법은 화무난천장의 묘용을 기본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상대의 힘을 역이용하는 합기의 극에 달한 무공이었고, 근간에 화무난천장의 묘가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기에 선주혁이 화무난천장에서 얻은 깨달음으로 건곤대나이심법에서 비롯된 무형지기를 받아들이는 것은 본래 의도 이상의 효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백발귀마가 자신의 무형지기를 받고도 신색을 회복하는 모습을 보이자 단목하진의 눈에 미미하게 놀라움이 떠올랐다. 그는 내력을 한층 더 끌어올렸다. 칠 단계로 이뤄진 건곤대나이심법을 극한까지 연성해 역대 교주중 최강의 무공을 지녔다고 추앙받는 단목하진이었다. 그가 내력을 끌어올리자 태산이라도 무너뜨릴 듯한 거력이 선주혁을 향해 쏟아졌다. 감당키 힘든 기운이 다가옴에 선주혁은 더더욱 순응에 집중했다. 이처럼 외부의 기운에 순응하는 것은 흡성대법의 요결과 일치했다. 막대하기 짝이 없는 단목하진의 기운을 흘려보내며 흡성대법에 대한 선주혁의 깨달음은 깊고 넓어져갔다. 단목하진의 무형지기가 오히려 선주혁에게 있어서는 기연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극한의 상태에 이르러야 얻을 수 있는 깨달음. 그 소중한 기회가 선주혁에게 주어진 셈이었다. 외력에 순응하는 방법에 대한 깨달음이 깊어질수록 선주혁의 표정은 편안해져갔다. 단목하진은 그런 선주혁의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약관을 갓 넘은 애송이가 자신의 무형지기를 정면으로 마주해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사실이 못마땅한 것이다. 그는 결국 건곤대나이심법의 칠 단계에 해당하는 내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미증유의 거력이 선주혁에게 쏟아져 들어가는 것이다. 그의 모든 힘이 선주혁에게 집중되자 남지학과 은설연은 거대한 압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새파랗게 질렸던 은설연은 순간적으로 단목하진이 무형지기를 거둬들였다고 생각했다가 종극, 남지학의 긴장된 표정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자신에게 흘러들었던 그 기운까지 선주혁에게 집중되고 있다는 사실을…… 해일과도 같은 거대한 기운이 밀어닥치자 선주혁은 화무난천장의 묘리와 흡성대법의 요결에 더욱 집중을 했다. 최대한으로 단목하진의 기운에 순응하려 했다. 그러자 혈맥이 터져나갈 듯한 통증이 그를 엄습했다. 무형지기에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이려 노력한다는 것은 가히 목숨을 건 모험. 거력을 몸으로 받아들여야 했기 때문이다. 단목하진이 뿜어내는 기운은 순응하고자 하는 노력만으로 감당할 수 있는 기운이 아니었다. 만약 선주혁이 만년음양초를 복용하지 않았다면 진즉 혈맥이 터져 중상을 입거나 죽음에 이르렀을 것이다. 금강불괴에 못지않은 선주혁의 신체였기에 단목하진의 무형지기에 순응해보고자 하는 시도가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한 순간 선주혁은 눈을 감았다. 모든 것이 정지하는 느낌이었다. 온 몸을 납작하게 만들 것만 같았던 기운도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의 체내로 흘러들어왔다. 무형의 기운은 전신에 흩어졌던 내력과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뤄 하나가 되었다. 그 기운은 거침없이 그의 체내를 돌며 미간에 확연한 팽창감을 만들었다. 이는 선주혁이 흡성대법 성취의 삼 단계, 즉 정기감성과 순천운성의 단계를 지나 마지막 단계인 천인합일이라는 광오한 이름의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뜻했다. 순천운행의 단계에서 중단전을 사용했다면 천인합일의 단계에서는 상단전을 이용한다. 천인합일의 경지에서는 천지의 모든 기운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 다시 말해 천지의 모든 기운이 곧 자신의 것이 된다는 의미. 그것이 흡성대법이 추구하는 궁극의 경지인 것이다. 선주혁이 막 천인합일의 경지에 오르는 순간, 단목하진이 쏟아내던 기운을 거둬들였다. 선주혁의 표정은 잠이든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편안하기만 했다. 이는 무형지기만으로 그를 상하게 할 수 없다는 뜻. 놀랍게도 이 젊은 청년이 자신과 손속을 겨룰 정도의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과연……! 본 교주의 무공을 거론할 자격이 있는 친구군." 단목하진의 한 마디가 그가 무형지기를 거둬들인 이유를 설명했다. 자신을 향해 몰아치던 미증유의 거력이 사라지자 선주혁은 오히려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천인합인의 경지를 막 밟았을 뿐인데 단목하진의 말과 더불어 몰아의 상태에서 깨어나게 된 것이다. 조금만 더 버텼다면 자신의 무공이 얼마나 발전할 수 있을지는 짐작조차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의 깨달음과 성취가 어디란 말인가? 선주혁은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직면한 상황부터 대처하기로 했다. "과찬이십니다. 교주님의 관대함에 감사드릴 뿐입니다." 선주혁이 감았던 눈을 뜨고 태연하게 말을 하자, 남지학도 은설연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행여 그가 지독한 내상이라도 입지 않을까 염려했던 것이다. 다행히 선주혁의 안색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가 내상을 입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중인들 중 그 누구도 방금 전 선주혁이 큰 성취를 얻었다는 것을 알아챈 사람은 없었다.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거력에 휩싸인 채로 무공수련을 했다는 사실을 그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그 정도의 무공을 지닌 자네의 말이니 믿도록 하겠네." 강자만이 진실을 관철시킬 수 있다! 그것이 곧 무림의 법칙. 과거 무림맹의 추적을 피해 도주하며 남지학이 말했던 무림의 법칙이 통용되는 순간이었다. 단목하진의 말에 선주혁은 다시 한번 강조했다. "아마도 이달 보름을 기해 천음지체를 타고난 여인이 천음마후가 되는 의식을 진행할 것입니다. 이후 사십사 일이 지나면 천음마후가 탄생할 터. 교주님께서 용단을 내리셔서 패종회의 발호와 천음마후의 탄생을 막아야할 것입니다." "사파연합과의 연수를 통해서 말인가?" "전 무립과 손을 잡아야 할 시기입니다만, 정도 무림에서 이와 같은 사실을 인정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선주혁의 말에 단목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마교와 사파연합에서 이와 같은 사실을 전하면 혼란을 이용해 다른 음모를 꾸미는 것이라 치부할 것이 분명했다. "또한 무림맹의 수뇌부는 이미 저들에게 장악되다시피 한 상태. 결국 사파연합과 천마맹의 단합된 힘만이 유일한 희망일 것입니다." 말을 마친 선주혁은 고소를 머금어야 했다. 본래 유일한 희망은 남지학이어야 했다. 남지학이 검강을 만드는 것을 보긴 했지만 그의 성취가 얼마만큼인지 선주혁으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내력이야 만년음양과로 인해 충분하겠지만 문제는 깨달음이었다. 남지학이 수차례의 기연을 통해 큰 깨달음을 얻고 무극삼검식의 마지막 초식을 익혀야만 무림의 구성이 될 터였다. 한데 자신으로 인해 그가 얻어야할 기연이 사라졌으니 과연 누가 무림의 희망이 되어줄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깨달음의 계기가 꼭 기연에 의거한다는 고정관념이 만드는 착각에서 비롯된 씁쓸함이었다. 또한 방금 전 자신이 얻은 깨달음과 천인합인의 경지가 의미하는 바를 모르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기도 했다. "그와 같은 제안을 하기 위해 예까지 오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으니…… 자네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그에 상응하는 대답을 들어야하겠지." 단목하진의 말에 종극과 남지학, 은설연의 표정이 다시 한 번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천하를 사분해 그 한쪽을 군림하는 패자인 단목하진이었다. 그가 일개 무인에 불과하며 까마득한 후배에 불과한 선주혁의 체면 운운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 일이었던 것이다. 더불어 그의 발언은 사파연합과의 연수에 대한 공을 모두 선주혁에게 돌리는 것이기도 했다. "훌륭한 판단입니다. 교주님의 결정으로 패종회의 악적들은 감히 함부로 행동치 못하리라 믿습니다." 선주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맞잡아 감사의 뜻을 표했다. 해가 일찌감치 저문 산중. 선주혁은 홀로 나와 하늘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하늘을 바라보는 그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하는 중이었다. 그 모습은 저자에 처음 나온 어린아이와도 같았다. 신이 난 것 같기도 하고 호기심에 가득한 것도 같았다. 단목하진의 집무실을 나선 이후, 선주혁은 자신의 몸이 이전과 확연히 달라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몸이 한결 가벼워진 것은 물론이거니와 거대한 강물처럼 전신을 흐르는 내력이 느껴지는 것이다. 놀라움은 그뿐이 아니었다. 체외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힘들이 느껴지는 것이다. 이제 막 천인합일의 경지를 밟았기에 그 힘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힘의 정체가 조금씩 드러났다. 드높은 하늘과 대지 사이를 가득 메운 기운. 예전에 심법을 통해 축기를 하던 기운이 체내로 들어오기도 전에 느껴지는 것이다. 기운은 허공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나무에서도, 돌에서도, 심지어는 땅에서도 느껴졌다. 삼라만상, 모든 것에서 느껴지는 기운. 이전까지 왜 이런 기운을 느끼지 못했었는지가 이상할 정도였다. 그 기운은 너무도 확연하고 충만해 신기하기까지 했다. 만물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각기 달랐으며, 크기도 달랐다. 각각의 기운에 대해 보다 명확히 느껴보고자 했던 선주혁은 저도 모르게 깊은 산중까지 들어오게 된 것이다. 이름 모를 산새가 날갯짓을 할 때의 기운. 머나먼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에서 느껴지는 기운. 처음에는 마구 뒤섞여 구분할 수 없던 수만가지 기운들을 느끼느라 선주혁은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는 밀밀한 숲 한가운데에 들어와 있었다. "이런! 언제 이런 곳까지 오게 된 거야?" 신비한 체험에 넋을 잃었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며 선주혁은 발길을 돌리려 했다. 그 순간 선주혁의 신경이 곤두섰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미약한 기감. 천인합일의 경지에 오르지 못했다면 도저히 느낄 수 없었을 기감이었다. 선주혁은 재빨리 신형을 돌려 기감이 흘러나오는 곳을 응시했다. "호오?" 어둠의 저편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이어 체구가 작은 한 노인이 걸어나왔다. 선주혁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력이 크게 증진된 이후로 그의 시야는 어둠에 구애를 받지 않았다. 몇 걸음 만에 저 정도의 거리에 도달할 정도라면 눈에 보이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한데 선주혁은 노인이 탄성을 흘린 후에도 그 모습을 정확히 보지 못했던 것이다. 드러난 노인의 모습은 기이하기 짝이 없었다. 주름 가득한 얼굴이었건만 볼에는 어린 아이와 같은 홍조가 가득했다. 호호 백발이다 못해 머리카락이 다 빠져도 부족할 나이가 되었음을 짐작케하는 그 용모임에도 머리카락은 삼단처럼 검었으며, 기분 나쁜 미소를 흘리는 이빨은 눈처럼 새햐앟기만 했다. 얼굴을 제외한 나머지의 모든 부분이 부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내가 너를 보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아챈 거냐?" 노인은 다짜고짜 반말을 했다. 조금은 기분이 나빠질 법도 했지만 선주혁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볼품없는 노인에게서 어쩐지 공 노인을 떠올렸던 것이다. 그는 최대한 예의바르게 말을 했다. "미약한 기척을 느꼈을 뿐입니다." "기척을 느꼈다? 클클클…… 이제 나도 다 되었군.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꼬맹이가 기척을 느낄 정도라니……!" 노인이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릴 때 선주혁의 두뇌는 맹렬히 회전하는 중이었다. 책에서 읽었던 인물들을 떠올리는 것이었다. 이 정도의 기이한 용모를 지닌 자라면 기억이 나지 않을리 없었다. 하지만 선주혁은 노인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다. 이와 같은 용모로 묘사된 인물은 없었던 것이다. '소설에 등장하지 않았던 인물이라는 건가?' "그나저나 이 야심한 밤에 교의 금지나 다름없는 조사전에 오른 이유가 뭐냐?" "아! 소생이 미처 이곳이 금지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뭐라고?" 노인이 눈알을 뒤룩뒤룩 굴리며 한껏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깨까지 들썩이며 과장된 동작을 취하던 노인이 탄식을 했다. "교리는 뒷전으로 하고 무공에만 빠져 들더니 결국 이 모양이 되어버렸구나! 이제 일월신교도 다 되었어……" "그게 아니라……" 선주혁은 자신이 일월신교의 교도가 아니며, 그렇기에 이곳이 금지임을 몰랐다고 설명하려 했다. "시끄럽다! 어느 안전이라고 변명을 하려드는 게냐?" 잔뜩 노한 노인의 고함에 선주혁은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허락없이 금지에 든 자에 대한 처벌이 무엇인지 알고 있겠지?" 노인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선주혁을 노려봤다. 그 순간, 선주혁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월신교의 조사전이 금역임은 소설에도 나온다. 더불어 금지에는 교주의 허가를 받지 않은 자는 아무도 들어가서는 안 되며, 천여 년을 내려온 이와 같은 사항은 교도 중 누구도 모르는 이가 없었다. 이에 조사전 인근에는 그 누구도 출입이 없었다. "어르신께서는 교주님께 출입을 허락받으신 것입니까?" 선주혁이 조심스럽게 묻자 노인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라? 노부가 꼬마 교주의 허가를 받아야만 이곳을 들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냐?" 노인의 말투로 보아하니 마교에서 꽤나 지위가 높았던 전대의 인물인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교내에서 권위의 상징과도 같은 교주를 어찌 꼬마라 부를 수 있겠는가? 하나 선주혁이 알고 있는 한, 마교의 성지나 다름없는 조사전의 출입 제한에는 그 누구도 예외가 없었다. "교주님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이곳에 드나들 수 없다…… 이게 교칙인줄 알고 있습니다." "클클클…… 네놈이 자라새끼마냥 내 발을 물고 늘어질 셈이구나!" 사람을 일컬어 자라라 표현하는 것은 이곳 중원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욕이었다. 무협을 읽으며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선주혁이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자란 그에게는 욕설이라는 감흥이 전혀 일지 않았다. 그보다는 목을 베기 전에는 한번 물었던 것을 놓지 않는다는 자라의 특성을 빗댄 표현으로만 들리는 것이다. "그런 것이 아니라……" 선주혁의 말은 이번에도 노인에게 가로막혔다. "옛끼, 이놈! 아주 변명이 몸에 밴 녀석이구나." 노인의 일갈에 선주혁은 또다시 입을 다물어야 했다. 자꾸만 가로막히는 말에 슬슬 짜증이 치밀어 올랐건만 공 노인을 생각하며 다시 한 번 성질을 억눌렀다. 그가 알아채지 못하는 찰나에 노인의 눈이 반짝였다. 선주혁의 그런 표정의 변화를 노인은 놓치지 않고 읽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간에 노부의 기척을 눈치 챌 정도라니 가진 바 재주가 있는 녀석이렸다?" "…………?" "네놈이 노부의 일초를 받아낸다면 금지에 발을 들였던 죄를 묻지 않으마." "예? 그게 아니라니까요." "흥! 진짜로 말이 많은 놈이로구나! 새파랗게 젊은 놈이 이 늙은 뼈다귀의 일초가 무서워 벌벌 떠는 게냐?" 간단하기 이를 데 없는 도발임에도 선주혁은 이상하리만큼 쉽게 넘어갔다. 자신이 두려워 이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고픈 욕망이 울컥 치미는 것이다. 거기에 새롭게 얻은 깨달음을 시험해 보고픈 욕심도 있었다. "좋습니다." 외모만 보아도 평범치 않은 노인이었다. 무협 소설을 보다보면 각 파에는 의례 칩거, 혹은 은거에 들어간 고수들이 하나씩 있는 법. 그와 같은 사실을 수많은 책에서 본 선주혁이었기에 노인을 마교의 전대고수라 단정 지었다. 풀잎의 기운까지 느껴지는 와중에 자신의 기척을 거의 완벽하게 감추던 노인이 아닌가? 선주혁은 진지하게 표정을 바꾸며 노인의 일초에 대비했다. 일 초만을 거론했다함은 단 한 수에 끝장을 보겠다는 뜻. 결국 엄청난 거력에 대한 만반의 준비를 하는 것으로 대비책을 세웠다. 화무난천장의 모용과 흡성대법으로 단목하진의 무형지기를 해소한 경험이 있는 만큼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다. 노인은 선주혁인 정말로 진지한 태도를 갖추자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볼품없는 자신의 외모와 억지만을 본다면 노망난 노인 정도로 취급해도 충분한 상황이었다. 꽤나 실력 있어 보이는 꼬맹이가 저토록 진지한 태도로 임하자 기특했던 것이다. "간다, 애송아!" "오십시오." 선주혁의 대답 후 한 호흡이 지난 다음 노인의 신형이 꺼지듯 사라졌다 선주혁의 앞에 나타났다. 만약 선주혁이 스스로 창안한 북두폭렬장의 속도에 익숙해져 있지 않았다면 노인의 움직임조차 포착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선주혁의 얼굴에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히 떠올랐다. 단 한수에 승부를 걸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며, 호호백발의 노인이 이처럼 기민한 동작을 보여주리라고는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무의식중에 신형을 뒤로 뽑았다. 암영풍을 전개한 것이다. 선주혁이 엄청난 속도로 뒤로 물러서자 노인은 나직하게 코웃음을 치며 바짝 따라붙었다. 뒷걸음질로는 노인의 쾌속무비한 움직임을 떨쳐내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 선주혁은 노인과의 거리를 벌리기 위해 선공을 감행했다. 무지막지한 일장에 대한 대비책으로 화무난천장을 떠올리고 있던 선주혁. 무의식중에 뻗어낸 일장은 자연스럽게 화무난천장의 투로를 쫓고 있었다. "호오!" 수많은 변화를 만들어내며 허공에 장영을 만들어내는 화무난천장을 보며 노인의 입에서 탄성이 튀어나왔다. 패도일색의 무공만을 익히는 최근의 일월신교였다. 혈기왕성한 젊은 남자교도가 화무난천장을 익히고 있다는 사실일 노인으로서는 의외였던 것이다. 일초를 전개하겠다는 노인은 공격을 하지 않고 선주혁의 장법을 요리조리 피하기만 했다. 선주혁의 성취를 살피는 것이었다. 수십 초가 전개될 때까지 지켜본 노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실상 선주혁의 화무난천장은 내력의 운용에만 치중해 배운 것이기에 초식의 완성도는 현저히 떨어졌던 것이다. 더불어 노인의 얼굴에는 의혹도 함께 했다. 이 애송이의 초식은 그 형은 형편이 없으나 세는 부족함이 없다못해 넘치고, 몸에 익지는 않았으나 그 묘용에 대한 이해는 충분히 반영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조금만 더 수련해 초식을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화무난천장의 완성을 볼 수 있을 법 했다. "클클…… 그야말로 머리와 마음은 따르되 몸은 따르지 못하는구나." 선주혁의 동작을 살피던 노인이 결국 실소를 터뜨렸다. 이상하리만큼 감정을 상하게 하느 노인의 웃음소리에 선주혁의 눈썹이 하늘로 치솟았다. 화무난천장 자체가 적은 힘으로 큰 힘을 제압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장법. 내력의 여유가 있는 선주혁은 화무난천장의 전개에 북두폭렬장의 묘를 접목시키기 시작했다. 과거 무진진인의 수법과 신투의 암영수를 배합해본 경험이 있기에 그와 같은 시도는 비교적 수월했다. 그러자 초식의 정교함은 더욱 떨어졌으나 그 속도만은 비할 수 없이 빨라졌다. 만변의 묘를 담은 화무난천장과 극쾌의 북두폭렬장이 더해지자 노인의 시야에는 온통 선주혁의 장영만이 가득했다. "호오! 제법 재주를 부리는구나." 눈 깜짝할 사이에 수십 초를 전개해 노인을 몰아세웠건만 노인은 여유만만이었다. 어지간한 고수라 해도 극쾌와 다변의 장법에 곤란함을 느끼기에 충분했건만 노인에게는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 노인이 서서히 손을 내밀었다. 특별한 형식조차 갖추지 않은 것처럼 아무렇게나 내미는 손이었다. 자신의 내력에 나름대로 자신감을 갖고 있는 선주혁은 노인의 손을 향해 자신의 장을 마주해나갔다. 양측이 내민 장이 허공에서 부딪치려는 순간. 노인의 손이 사라졌다. 북두폭렬장으로 단련된 선주혁의 안력으로도 노인의 손을 놓친 것이다. 그가 의아해하는 짧은 시간에 사라졌던 노인의 손이 다시 나타났다. 거짓말처럼 나타난 노인의 장은 이미 선주혁의 가슴 앞에 있었다. "헙!" 선주혁이 헛바람을 들이키는 순간, 노인의 손이 가슴에 닿았다. 이것이야말로 사술이 아닐까 싶은 선주혁이었다. 하나 곧 지난 날 자신이 전개한 무공을 사술로 몰아붙이던 자들을 기억해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모든 것을 사술로 몰아붙이는 자들과 같아질 수는 없었다. 그는 노인의 수법이 대단하다 느끼며 두 눈을 질끈 감고, 지독한 고통의 엄습을 준비했다. 그러나 잠시 후 그는 눈을 떠야했다. 노인은 그저 선주혁의 가슴에 손을 대었다 떼기만 했던 것이다. 선주혁이 눈을 떴을 때 노인은 이미 멀찌감치 떨어져 널찍한 바위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똑똑히 봤느냐?" 눈을 뜬 선주혁에게 노인이 물었다. 선주혁은 그제야 노인이 자신에게 뭔가 가르침을 내리기 위해 도발을 하고 손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른바 무협소설의 전형적인 기연이 자신에게 다가온 것이다. "보지 못했습니다." 선주혁은 솔직히 답변했다. "클클…… 나이에 비할 바 없는 무공을 지녀 기특하다 생각했거늘…… 처음에는 몸이 머리를 따르지 못하더니, 이제는 머리가 몸을 따르지 못하는구나." 화무난천장에 대한 이해에 비해 초식의 허술함을 지목한 후, 자신이 보여준 바를 이해하지 못함을 탓하는 것이다. 선주혁은 얼굴을 살짝 붉혔다. "사실 제가 그다지 머리가 좋은 인물은 못 됩니다." 솔직한 심경이었다. "쯧쯧. 머리와 몸이 모두가 자신이거늘 어찌 따로 떼어놓고 생각을 할꼬?" 노인은 혀를 찼다. "내가 보낸 미약한 기를 느꼈기에 혹여 대자연의 만상을 가진 기감을 느끼나 싶었거늘…… 이 늙은이가 노망이 들어 잘못 봤다는 건가?" 선주혁은 노인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참을 경이롭게 만물의 기를 느끼던 자신의 상황을 노인이 정확하게 짚어냈던 것이다. "불과 몇 시진 전에 모든 사물에서 느껴지는 기운을 느꼈을 뿐입니다. 이전까지는 경험해보지 못했던 터라 너무도 신기해하고 있던 중이었지요." 선주혁의 대답에 노인의 입매에 미소가 맺혔다. 과연 자신이 생각했던대로였다. 일월신교 본단을 떠나 천하를 주유한지 어언 이십 년이 다 되어가는 노인이었다. 죽음을 가장하고 떠났으나 교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성화에 몸을 불살랐으리라 생각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자신의 천수가 다했음을 느끼고 성화에 몸을 맡기기 전 조사전에 향이라도 피울까 싶어 이곳 십만대산으로 돌아왔다. 조사전은 출입이 자유롭지 않은 곳이라 누군가를 만날 것이라 생각지도 못했거늘 웬 젊은 교도 하나가 묘한 표정을 지으며 서성이는 것을 봤다. 가만히 보고 있자하니 하늘을 보고 땅을 보고 바위와 나무에 손을 내밀며 시시각각 표정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닌가? 이는 자신조차 말년이 되어서야 성취했던 만물의 기운을 감지하는 경지에 이르렀음이 분명했다. 완벽하게 사물과 동화되어 몸을 감추고 있던 그는 젊은 교도의 나이에서는 오를 수 없는 경지임을 다시 상기하고 미약하기 이를 데 없는 기를 발출했다. 만약 그가 느낀다면 진정 경지에 오른 자가 분명할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젊은 교도는 자신의 기를 감지해 시선을 돌렸다. 그 나이에 저 정도의 경지에 올랐다면 향후의 발전은 말할 필요도 없는 터였다. 이제 세속의 모든 욕심은 버렸다지만 낳고 자라, 평생을 몸바쳐온 교에 작은 도움이 되어보고자 하는 욕심마저 없을 수는 없는 노인. 그는 죽음을 맞이하기에 앞서 만나게 된 것도 인연이라 생각하여 그에게 몇 마디 말을 던져주고자 했던 것이다. 노인은 지금까지의 익살스러운 표정을 얼굴에서 지웠다. 이윽고 노인이 물었다. "겨울바람에 갈라진 흙의 기운을 느껴봤느냐?" "네." 선주혁이 대답했다. 그러자 노인이 눈을 감았다. 동시에 선주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바위에 걸터앉은 노인으로부터 비롯된 기감. 그 기감은 아까 전 선주혁이 느꼈던 흙의 느낌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어떻게 사람이 흙이 발하는 기를 뿜어낼 수 있는 거지?' 선주혁이 의아해하는 동안 노인이 다시 물었다. "모진 바람에 풍화되어 둥글어진 바위의 기운을 느껴봤느냐?" 선주혁은 놀라움을 이기지 못해 입을 열어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을 끄덕였다. 노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변화했다. 그것은 완벽하게 바위의 기운이었다. 선주혁은 혼란을 느꼈다. 마치 눈앞에 두 개의 바위가 포개져 놓여있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드높은 하늘을 느꼈느냐?" 노인은 다시금 질문을 던진 후, 이번에는 선주혁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자신이 발하는 기운을 변화시켰다. 그리고 선주혁은 봤다. 바위 위에 펼쳐진 드넓은 하늘을. 노인은 그저 선주혁이 하늘에서 느꼈던 기운을 발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하늘 그 자체였다. 지상에 펼쳐진 하늘. 깊이를 알 수 없는 하늘을 눈앞에서 바라보는 선주혁의 신형이 가늘게 떨려왔다. 그것은 감동이었으며 충격이었던 것이다. "앞서 네게 말했듯 네 몸과 머리는 너에게 귀속된 것이니 따로 있지 않다. 천지만물 역시 마찬가지다. 눈으로 보고 기로 느껴서는 얼핏 구분이 되어 각각의 개체로 보이나, 이 모든 것은 우주를 이루는 전체의 일부일 뿐. 자신이 우주에 속해있고, 그에 순응할 수 있으며, 또한 전부임을 깨닫는다면 만물이 곧 나이며, 내가 곧 만물일 수 있는 것이다. 내 말을 알아듣겠느냐?" 선주혁은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이 곧 우주가 된다는 것을 도저히 납득하지 못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 읽었던 수많은 무협소설에서 봤을 법한 이야기들이었다. 그저 글을 쓰는 작가들이 지면을 채우기 위해 애매모호한 소리를 지껄인다고 생각했던 그런 류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하늘이 된 노인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다가오는 느낌은 완전히 달랐다. 무엇인가 명확히 떠오를 듯 말듯 느낌으로 선주혁을 자극하는 것이다. 지금 이순간, 이것을 깨닫는다면 자신은 지금까지와 차원이 다른 경지에 오를 수 있음을 그는 알았다. 그렇기에 간절한 마음으로 노인의 말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이놈! 또 머리를 굴리는 게냐? 내가 너에게 있어 하늘이 되었음을 보여줬고, 그것을 체험하지 않았느냐? 머리가 아닌 네 전부가 그것을 받아들이면 될 것을 어찌 조악한 지식으로 이해를 도모하는 것이더냐?" 노인의 호통에 선주혁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다. 노인은 지금 하늘인 채로 자신의 앞에 있었다. 의구심을 버리고 그 자체를 느끼면 될 터였다. 그는 애초부터 지금의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보다 보이지 않는 것, 느낄 수 없는 것의 존재에 대해 받아들이기가 쉬웠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이 있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생을 유지하는 데에 없어서 안되는 산소의 존재도 알았다. 이처럼 머나먼 훗날 과학을 통해 증명된 명확한 존재를 알고 있었기에 외려 노인의 말을 이해하기가 쉬웠다. 확신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린 선주혁은 곧 노인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자신은 우주의 일부이며, 또 전체가 될 수 있으리라. 그와 같은 사실을 추호의 의심을 갖지 않은 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고자 했다. 선주혁의 눈이 감기고 노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가 가닥을 잡았음을 깨달은 것이다. 노인은 이제 자신이 할 일은 다했음을 알 수 있었다. 깨달음이란 말로 전할 수 없는 법. 바른 길을 잡아 주었으니 이제 모든 것은 이 젊은 교도에게 달린 일이었다. 노인의 몸이 바위 위로 둥실 떠올랐다. 불어오는 한줄기 미풍에 몸을 맡긴 것이다. 조사저에 향을 올리러 왔다가 평생을 몸담았던 곳에 작은 기여를 했다고 생각한 노인의 마음은 가볍기만 했다. 이제 아무런 미련도 없이 이승을 떠날 수 있으리라. 바람이 부는 방향대로 흔들리며 노인의 작은 체구가 움직였다. 노인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선주혁에게 향했다. 그가 얼마나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가 눈을 뜰 무렵이면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으리라. 중천의 태양과도 같이 떠오를 일월신교의 미래가 노인의 눈에 그려졌다. 해맑은 미소와 함께 그는 바람이 되었다. <6권에서 계속> (제 6권) =간세= <<1>> 온몸에 회칠을 한 것 같은 노인이었다. 눈처럼 하얀 백발은 물론이거니와 드러난 피부 모두가 창백하기만 했다. 마치 온몸에서 색소(色素)가 다 빠져나간 듯했다. 노인의 특징적인 잿빛 눈동자가 산을 오는 한 사람에게 고정되 어 있었다. 자신만큼이나 하얀 머리카락이 유독 눈에 띄는 청년이었다. 그 는 일월신교의 귀빈들이 머무는 숙소를 향해 빠르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내버려 두실 작정이시오?" 가래가 들끓는 듯한 음성이 백의노인의 귓가에 울렸다. 감정을 잔뜩 억눌렀음을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곳에는 타오르는 듯한 붉은색으로 온몸을 휘감은 노인이 있었 다. 적발(赤髮)에 적염(赤髥), 그리고 얼굴에까지 붉은 기운이 가득 한 기이한 용모의 노인이었다. "잘된 일이지 않소? 이 사실 들으면 종 장로가 꽤나 좋아할 듯하 니 말이오." 백의노인은 무미건조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그게 무슨 말이오? 교의 금기를 어긴 자가 교내를 활보하고 다 니는 것을 집법장로가 좋아한단 뜻이오?" 악구윤이 붉은 눈껍을 꿈틀거리며 물었다. "후후후훗!" 입술 사이로 바람이 빠지는 듯한 소리. 웃음소리가 분명하건만 백의노인의 표정에서는 미소를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가면을 쓴 것처럼 노인의 얼굴에는 표정이 드러나 지 않는 것이다. "이 일을 계시로 종 장로가 바라는 바대로 될 조건이 하나 늘었 으니까요."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구려. 조사전에 출입한 죄로 당장 목을 쳐도 시원치 않거늘......!" "그저 종 장로에게 알려만 주면 될 일이오. 나머지는 그가 알아 서 할 테니." 시종일관 냉혹한 어조를 유지하던 백의노인은 홀로 결론을 내리 고는 신형을 움직였다. 아니, 움직이는가 싶은 순간 그의 모습은 이 미 홍의노인의 곁에서 사라졌다. "흥! 언제부터 본교에서 죄를 지은 자를 이토록 너그럽게 대했단 말인 건지. 본단에서 이렇게 해이한 모습을 보이니 정도 놈들마저 우리를 우습게 보는 게 아니냐고!" 노인은 붉은 수염을 파르르 떨며 홀로 노기를 억눌렀다. <<2>> 은설연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하는 중이었다. 조식 (朝食)을 마친 후, 종극과 기이한 용모만으로도 신분을 익히 짐작할 수 있는 두 명이 들이닥쳤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붉은색으로 휘감은 노인. 누구라도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을 그 용모는 마교의 절대고수 아홉 중 일인을 연상시키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혈마(血魔) 악구윤(岳九尹). 과거 종극과 더불어 정도 무인들에게 있어서 기피해야 할 대상 일 순위를 다투던 거마 중의 거마였다. 악구윤과 함께 있는 백의노인 역시 알아보기는 어렵지 않았다. 보기만 해도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냉랭한 기운. 종극, 악구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는 것은 그가 마교의 절대고 수인 구대마존 중의 일인임을 입증했다. 구대마존 중 냉기를 풀풀 날리는 자라면 당연히 빙마(氷魔) 수조문(壽調雯)일 터였다. 구대마존 중 삼인이 아침나절부터 선주혁을 찾아왔다. 그것도 좋지 않은 표정으로. 밤사이 뭔가 심각한 일이 발생했음이 틀림없었다. 상황을 알지 못하는 은설연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선주혁을 바 라봤다. 아침부터 뭔가 기분이 좋아 보이던 그였다. 그는 지금까지 여유롭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계속해 그런 모 습을 보이는 선주혁이었기에 은설연은 더욱 지금의 상황을 파악하 기 힘들었다. "밤새 안녕하셨습니까,종 장로님." 뭔가 상황이 좋지 않음을 파악한 남지학이 종극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숙소가 불편하진 않았소, 남 소협." 종극은 악구윤과는 달리 별다른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인사를 받았다. "신경을 써 주신 덕에 편안히 쉴 수 있었습니다." "허허, 천하에 명성을 떨치는 곤륜이마를 이런 초라한 숙소레 머 물게 한 것을 나무라지나 마시구려." 은설연은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치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 같은 인사가 오가는 것이다. 그녀는 원래부터 악구윤의 기세가 저런 것이 아닌가 싶었다. 성격이 급하고 포악하기로 소문난 악구윤이 아니던가. 은설연이 괜한 걱정을 했나 싶어 하는 순간 종극이 심상치 않은 말을 꺼내들었다. "그러고 보니 자네는 지난밤을 여기서 보내지 않았더군." 선주혁을 향한 말이었다. 은설연은 다시 얼굴을 굳혔다. 그리고 긴장된 표정으로 선주혁 의 반응을 살폈다. 분명 지난밤 뭔가 일이 있었으리라. 무슨 일인지 아직은 파악할 수 없었으나 그가 당황하지 않기만 을 바랐다. 이들은 어떻게 해서든 선주혁을 이곳에 얽매어 두기 위해 노력 할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뭔가의 빌미를 제공했다. 꼬투리 잡힐 일 을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었으나 이미 벌어진 일이라면 최대한 상 황을 축소해야만 했다. "산책을 나섰었습니다." 은설연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선주혁은 태연한 표정으로 종 극의 말에 답변했다. 일단 그의 반응이 여유로운 것에 은설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 었다. "밤을 새워서 말인가.......?" 종극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재차 물었다. 길게 몰아쉬던 은설연의 호흡이 멈췄다. 지난밤 내내라면 생각 보다 일이 더 클 수도 있었다. 그 내용을 모르는 것이 안타까웠다. "산책을 하면서 빠져들었던 생각이 깊었는지 동이 트는 것조차 몰랐습니다." "그랬군." 종극이 그제야 납득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종극의 반응은 은설연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당최 지금의 상황을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저렇게 쉽게 납득해 버릴 일 때문에 구대마존 중 삼인이 아침나 절부터 몰려왔단 말인가? "자네가 간밤에 산책을 했던 곳이 어딘지 혹시 알고 있는가?" 종극은 부드럽게까지 느껴지는 음성으로 물었다. "뒤쪽에 있는 산이었습니다." 선주혁의 대답. 은설연의 시선이 빠르게 종극을 향했다. 종극은 마치 은설연에게 보라는 듯 미소의 색채를 짙게 하며 말 했다. "그냥 산이 아닐세. 본교로서는 아주 의마가 깊은 곳이지." "선 소협이 가서는 안 될 곳에 간 것입니까?" 은설연이 종극과 선주혁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제야 그녀는 대충의 상황을 파악한 것이다. 지난밤 선주혁이 마교의 금역(禁域)이나 비처(秘處)에 들었음이 틀림없었다. 호시탐탐 선주혁을 이곳에 묶어 두고자 하는 저들에게 충분한 빌미를 제공할 만한 일일 터였다. 정도의 무인들은 자신의 실수가 드러난 경우 걷잡을 수 없이 무 너지는 모습을 보인다. 선악에 대한 고지식한 사고방식 때문이다. 꽤 많은 시간 남지학과 함께 했던 은설연이었다. 비록 지금은 곤 륜이마 중 일인으로 정도 무림의 공적이 되었다지만 그녀가 보기에 남지학은 뼛속부터 정파의 무인이었다. 동문(同門)인 선주혁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터. 이런 일에는 자신이 더 능숙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비록 선주혁이 상상을 초월하는 천재라지만 심기이 깊고 얕음은 자질과는 무관했다. 이런 일은 경험이 우선할 때가 많았고, 유연한 사고방식이 필요했다. 그녀는 선주혁이 지난밤 실수를 했다고 단정하고 그에 관한 책 임을 축소시키기 위해 나선 것이다. 종극의 표정에 미미한 변화가 있었다. 선주혁과의 대화에 은설 연이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원하던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여유로운 태도로 은설연에게 답했다. "그렇다고 볼 수 있네." 종극의 느릿한 답변에 비해 빠른 어조로 은설연이 말했다. "그렇게 중요한 곳이라면 어째서 선 소협이 들어가기 전에 막지 않은 겁니까?" 은설연은 단호한 표정이었다. 종극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은설연이 지금 책임을 떠넘기는 중 임을 아는 것이다. 선주혁이 금역에 침범하려들 때, 제지하지 않았 으니 책임이 외려 자신들에게 있다는 주장이었다. "지난밤 자네가 다녀온 곳은......" 종극이 선주혁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을 꺼내기 시작하자 은설연 이 그의 말을 가로챘다. "선 소협이 어는 곳을 다녀왔는지는 중요치 않을 것 같습니다. 그에 앞서 선 소협은 사전에 일체의 경고나 주의를 듣지 않았다는 것을 명확히 해야 할 것입니다. 방금 전 말씀 드렸듯 그 장소에 들 어갈 때도 아무런 조치도 없었고 말입니다." 은설연은 선주혁의 면책에 관해 명확히 해 두고 이야기를 진행 코자 하는 것이다. "딱히 주의가 필요한 것이던가?" 차갑기 이를 데 없는 음성이 은설연의 말을 받았다. 빙마 수조문 이었다. "타 문파를 방문하였을 시에는 스스로 조신해야 하는 것이 예의 인 것으로 알고 있네. 더구나 야심한 시각에는 말할 것도 없지 않는 가?" 감정이 배재된 듯한 어조였으나 내용은 신랄하기 이를 데 없었 다. 은설연은 답변할 말을 찾지 못해따. 수소문의 말이 옳았다. 따로 주의를 주지 않아도 남의 문파에 방문해 아무 곳이나 드나 들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사색이 깊어 자각하지 못한 상패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충분한 이유가 된다고 생각하는가?" 이번에는 종극이 은설연의 말을 받았다. 드디어 그도 본연의 목 적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제가 지난밤에 갔던 곳이 어디입니까?" 불쑥 선주혁이 나섰다. 은설연은 재빨리 선주혁에게 눈짓을 했다. 지금은 나설 때가 아 님을 말하려는 것이다. 그녀는 이미 선주혁보다 자신이 이 일을 수 습하는 것이 낫다는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자네가 지난밤에 올랐던 곳은 본교의 조사전일세. 교주 외에는 허가 없이 아무도 출입할 수 없는 곳이지." ".......!" 종극의 말에 당황한 것은 은설연이었다. 조사전은 어는 문파건 중대한 의미를 지니는 장소다. 종교적 색 채가 짙은 마교의 경우는 말할 나위도 없었다. 전대의 교주는 마교 도에게 있어서 성인(聖人)으로 추앙받기 마련이다.그들을 모시는 위패가 있는 곳이니, 조사전의 무단침입은 마교 자체를 모욕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은설연의 미간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말로서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대안을 수립하지 못해 그녀가 머뭇거리는 때였다. "허락 없이 출입한 자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선주혁이 다시 물었다. "당연히 죽음뿐이지!" 여태껏 노기를 억누르고 있던 악구윤이 나섰다. 그는 당장이라 도 일장을 뿌려 선주혁을 때려죽일 기세였다. "저를 죽이기 위해서 세 분이 몰려오신 것은 아니실 테죠?" 선주혁이 여유 있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너무나 직설적인 그의 말에 악구윤이 발끈하며 붉은 얼굴에 짙 은 색채를 더했다. "네깟 놈을 죽이는 데 우리 세 명이 몰려올........" 악구윤의 말은 종극이 손짓에 의해 막혔다. 악구윤은 더운 콧김 을 쏟아내며 씩씩거렸다. 잠시의 시간을 두었다가 종극이 입을 열었다. "여정을 함께 하는 동안 자네에 대해 꽤 많이 알았다고 생각했건 만...... 내가 자네를 과소평가했을지도 모르겠군, 그래." 종극의 말에 은설연도 공감하는 중이었다. 지금과 같은 선주혁 의 반응은 은설연에게도 의외였다. 선주혁을 옭아매기 위해 찾아든 종극과 두 마존들이다. 죽이는 것이 목적이 아닌 것이다. 생명의 위협이 없는 한 좀 더 여유 있게 대응할 필요가 있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선주혁이 상기시키고 있 는 중이었다. 선주혁이 여타의 정도무인들처럼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는 모습 을 보일 것을 염려했던 자신이었건만, 실제로는 선주혁이 자신보다 더 능숙하게 종극을 상대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찌 보면 선주혁의 태도는 사뭇 뻔뻔하기까지 했다. 명분을 잃 은 정도인들이 보여 주는 모습과는 완연히 달랐다. '어쩐지 저 사람이 더 사파인 같잖아!' 은설연이 놀라는 것은 선주혁이 보통의 정도무인과는 다름을 모 르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어찌 알겠는가! 선주혁은 남지학처럼 뿌리 깊은 정파인이 아닌 것이다. 저쪽 세상에 있을 때, 선주혁은 소매치기였다. 죄를 짓고 경찰서에 들락거린 것만 해도 부지기수. 지은 죄를 추궁 받는 것에는 이골이 나 있었다. 기세등등한 형사들을 앞에 두고 농담을 건넬 경지에 이른 지 오 랜니 이런 상황에 능수능란한 것도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어쨌든 자네 말대로일쎄. 귀한 손님의 실수를 극단적인 방법으 로 몰아붙일 수야 없는 법이지." 종극이 거래를 원한다는 것은 이제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 되 었다. 이에 남지학이 나섰다. "사제가 귀교에 큰 무례를 범했음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그 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겠습니다만......도의에 어긋나는 행동에 는 부응할 수는 없습니다." 남지학의 말에 악구윤이 다시금 수염을 파르르 떨었다. 당장 쳐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들이 이래저래 조건을 다는 것이 못마땅한 것이다. "물론일세. 본교는 자네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패악한 무리가 아 니니 염려 말게." 종극은 남지학이 선주혁을 움직이는 열쇠임을 오래 전에 간파하 고 있었다. 원만한 진행을 위해 그에게 말을 할애하는 것을 주저하 지 않았다. 남지학을 달랜 종극이 선주혁에게 시선을 돌리자 은설연이 한숨 을 쉬었다. 결국 이렇게 된 이상 선주혁은 당분간 마교에서 발을 빼 기 힘들게 된 것이다. "교주님을 비롯해 나와 몇몇은 자네의 실수에 대해 별다른 문책 을 하고픈 마음이 추호도 없다네. 앞뒤 정황을 알고 있으니 말일세. 다만 수많은 교도를 이끌어야 하는 입장에서 어떤 일에 예외를 두 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님을 알아주게. 한번 흐트러진 기강이라는 것 은 걷잡을 수 없는 법이니까......" 종극의 사설에 은설연은 내심 콧방귀를 뀌었다. 선주혁의 실수 에 환호성을 터뜨렸을 것이 분명하건만 저렇게 말을 하는 것이 우 스웠던 것이다. "이렇듯 우리가 자네를 비호하는 데도 한계가 있는 만큼, 자네가 교의 여러 형제들이 모욕감을 느끼지 않을 정도의 성의를 표해 주 는 것이 필요하네." 이어지는 결론은 뻔했다. 당분간 선주혁과 남지학은 사파연합으 로 돌아가는 시기를 늦추고 마교의 행사에 동원되어야 할 것이다. 그석이 은설연이 생각하는 결론이다. "잘 알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선주혁은 너무나 순순히 종극의 요구에 응하고 있었다. 그런 태도가 은설연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애초부터 문제가 있었다. 소위 천재라 불릴 만한 자가 너무나 어 처구니없는 실수로 상대에게 빌미를 제공했다. 이후 정파인답지 않은 태연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사태를 축소할 노력을 조금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의 천연덕스러운 모습을 보며 일말의 기대를 품었던 자신이 어리석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긴 능숙한 태도만으로 벗어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조사 전 침입이 말 몇 마디로 축소될 수는 없었으므로. 그럼에도 백발귀마라면 혹시 방법을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은설연은 스스로에게도 놀라는 중이었다. 종극이 조사전 침입에 대한 대가를 언급하고자 할 때였다. "어제의 결정사항이 아직 공표되지 않은 것 같더군요." 선주혁이 불쑥 엉뚱한 말을 꺼내들었다. 종극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막 조건을 제시하려는 찰나에 선 주혁이 지금의 상황과 무관한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뜻한 바를 이루게 될 것이 분명한 만큼 이제 그의 입장에 서는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타초경사(打草驚蛇)의 우를 범할 턱이 없으니 말일세." "올바른 판단이었습니다. 패종회라는 이름이 언급된 것만으로도 저들을 경동시킬 수 있는 일이니까요." 선주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도 뻔한 일에 감탄을 하는 선주혁을 보며 종극이나 은설연 은 어이가 없었다. "설령 우리가 사파연합과의 연수를 공표한다 해도 패종회에 대 한 대비임을 밝히리라 생각했던 건가? 자네는 본교를 너무 무시하 고 있군, 그래." 종극이 미간에 잡힌 주름을 더욱 깊게 하며 말했다. "그럴 리는 없겠지요, 그런데......." ".......?" "최소한 여기 계신 두 분은 그와 같은 사실에 대해 알고 계신다 는 말이군요." "당연하지 않은가? 이 두 사람은 본교의 장로들일세." "대체 무슨 수작을 피우는 게냐? 이리저리 말을 빙빙 돌려보겠 다는 거냐?" 악구윤이 다시금 노갈을 터뜨렸다. 그에 반해 종극은 훨씬 더 신중한 표정을 지으며 음성을 가라앉 혔다. "자네는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세 분은 귀교의 교주님과 반목 중인 것으로 세상에 알려져 있습 니다. 그런 세 분께서 알고 계실 정도의 상황이라면 다른 장로님들 은 당연히 알아야 하는 일이 아닌가 여쭙는 것입니다." 선주혁의 말에 은설연은 그제야 이 세 사람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었다. 종극, 악구윤, 수조문. 세 사람 모두 마교를 대표하는 절정 고수이자 누구보다 많은 강 호활동을 보였었다. 과거 정도무인들을 공포로 몰고 갔던 주역들인 것이다. 허나 최근 교주와의 반목으로 강호 활동을 접고 거의 은거와 다 름없이 지낸다고 들었다. 공교롭게도 그 세 사람이 조사전 침입의 건으로 선주혁을 찾아 온 것이다. 종극은 잠시 수조문과 눈짓을 교환하다가 입을 열었다. "사파연합과의 연수는 우리 셋과 교주님만이 알고 있네. 패종회 라는 이름 역시 마찬가지일세." "호오? 그것 참 기이한 일이군요." 선주혁이 빙글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종극이 안색을 굳혔다. "더 이상 말을 돌릴 필요는 없네." 종극의 말에 선주혁도 입가에 미소를 지웠다. "어떻겠습니까? 조사전에 함부로 든 대가로 패종회에 대한 문제 를 함께 의논할 분들이 누군지 구분해 보는 것은......? "네놈이 본교에 있는 간세......! 악구윤은 황급히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스스로의 치부를 드 러낸 셈이기 때문이다.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일전에 말씀드렸듯 무림맹은 이미 수뇌부가 장악된 상황이고, 각 세력의 고위층에 패종회의 줄기가 깊숙히 뻗어 있으니까요, 사파연합 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정의련 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선주혁은 은설연을 힐끗 쳐다보며 마지막 말을 마쳤다. 은설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사파연합에 대한 언급이 귀 에 거슬린 건 사실이었다. 그럴 리 없다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반론이나 의문을 제시할 때가 아닌 것이다. 종극이 묵직한 침음성을 흘렸다. "자네는 본교 장로들의 명예를 훼손하고 있네, 그것을 알고 있는 가?" "필요치 않다면 원래의 이야기를 진행하셔도 됩니다." 종극이 잠시 생각을 하다가 질문을 던졌다. "증거는 가지고 있는가?" "없습니다." 선주혁이 고개를 저었다. "근거도 없는 추측을 믿으라는 건가?" "믿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제가 알고 있는 사실을 말씀드릴 뿐이고, 판단은 귀교에서 해야 하겠지요." 선주혁은 종극의 다그침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답변했다. 종극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한참이나 계속된 침묵 끝에 결국 입을 열었다. "나 혼자 결정할 일이 아닐 듯하네." 교주와 의논을 하겠다는 뜻이었다. 선주혁은 고개를 끄덕였고, 세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 섰다. 은설연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교에 간세가 있다고 강력히 주장하는 선주혁이었다. 비록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와 같은 발언은 위험천만이었다. 자칫 조사전 침입보다 더 큰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선 소협! 진정 패종회의 간세에 대해 파악하고 있는 것이오?" 은설연이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행여 조사전 일을 회피 하기 위해 임기응변의 수를 쓴 것이라면 큰 실수가 아닐 수 없었다. 여우를 피해 범을 향해 달린 셈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패종회의 음모를 상대하려면 간세를 솎아낼 필요가 있 습니다. 미룰 이유가 없지요." "그러니까...... 선 소협이 그 간세들을 알고 있냐는 말입니다." 은설연이 따지듯 물었다. 그의 능력이 하늘과 땅을 놀라게 하는 것임은 알고 있다지만, 어제 처음 마교을 방문한 그였다. 마교 자체 에서도 밝혀내지 못한 간세를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쩌면 알고 있냐고 묻는 자신이 어리석은 것일지도 몰랐다. "이미 말했지 않소? 소생이 천기를 조금 읽어낼 줄 안다고 말이 오." 선주혁이 여유 만만한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농담할 때가 아니오. 적당한 짐작만으로 넘어갈 일이 아니잖 소? 확신이 없다면 어서 이곳을 빠져나갈 방도를 찾아야 할 것이 오." 천기를 읽는다고 해서 간세가 누구인지까지 알 수는 없는 법이 었다. "은 공자, 소생이 조사전에 들어가 저들에게 실수를 한 것이 사 실입니다. 남자라면 자신의 실수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 소?" 다소 농담조로 말하는 선주혁을 보며 은설연은 다시금 어이가 없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노회한 사파인이 무색할 정도의 모습을 보 이던 선주혁이 지금은 또 고리타분한 정파인의 답답한 모습을 보이 는 것이다. "사제의 말이 맞소, 더구나 마교를 적으로 돌린 이후, 패종회를 달리 상대할 방법이 있단 말이오?" "......!" 위급한 상황에 몰려 미처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세 사람은 지금 사파연합과 마교의 연수를 위해 이 자리에 와 있는 중이었다. 도주를 한다면 연수는 수포로 돌아갈 것이며, 이는 패종회를 돕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은설연은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이곳에 남아 마교를 돕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오." 선주혁이 괜한 일을 벌인 것에 대한 한탄이었다. 사파연합으로 돌아가는 것이 조금 늦어지더라도 종극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이 더 나았다는 이야기였다. "소생은 사제의 말대로 잘 된 일이라 생각하오, 간세를 곁에 두 고 패종회를 어찌 상대하겠소?" "그거야.....!" 간세가 누군지 명확히 알고 있을 때의 이야기라고 말하려던 은 설연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말을 삼켰다. 선주혁은 여전히 여유 있는 표정이었고, 남지학의 얼굴에도 어 느덧 걱정이 사라졌다. 그는 사제가 저러는 데는 반드시 이유가 있 다는 심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대체 이들 사형제는 어떻게 된 건지.....' 은설연은 그저 이들이 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서로 에 관한 신뢰가 무모하다 싶을 정도였지만, 그것을 들춰낸다고 다 른 대안이 나올 리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선주혁이 다시 한 번 기적을 만들어 내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종극이 돌아오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교주님과 함께 이야기하도록 하세." 선주혁은 미소를 지었다. =철무백= "평생을 함께 해 온 본교의 장로들일세, 자네의 말 한마디에 그 들의 생사를 결정짓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고 보네." "제 말 한마디는 아닐 것입니다." 선주혁이 단목하진의 말을 받았다. 은설연은 손에서 땀이 배어나오는 것을 느꼈다. "교주님께서나 저 세 어르신들도 경계를 해 오신 일이 아닙니 까?" "무슨 근거로 그런 소리를 하는가?" 단목하진의 얼굴에 못마땅한 기색이 떠올랐다. 선주혁이 마치 교내의 일을, 아니 자신의 내심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중이었다. 강호 최강의 세력을 이끄는 절대자의 입장에서는 그다지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제가 여러 사실을 어떻게 알았냐가 아니라, 제가 말씀드 린 내용을 교주님께서 어떻게 처리하실까에 있는 것 같습니다." 당돌할 정도인 선주혁의 발언이었다. 즉각적인 악구윤의 반응이 있을 법도 했지만 그는 눈썹만을 치 켜세울 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교주를 얼마나 어려워하는지 짐작케 하는 단명이었 다.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그가 교주와 반목하는 중이 아님을 짐작 할 수 있는 것이다. 은설연은 눈을 가늘게 떴다. 어쩌면 선주혁이 제대로 핵심을 찌 르고 나갔을 수도 있었다. 이들이 교주와 반목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 것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이기에. "일단 자네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지." 단목하진이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제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실지 모르겠습니다만..... 패종회는 이곳 깊숙한 곳에까지 손을 뻗은 상태입니다. 저 역시도 그 전체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 못합니다." "아는 바라도 말해 보게." 단 한 명이면 충분했다. 일월신교의 행사는 과감하기 이를 데가 없다. 한 명만 밝혀진다 해도 그를 고문해 전체를 파악하는 것은 어 려운 일이 아니라 생각하는 단목하진인 것이다. "금마(金魔), 귀마(鬼魔), 환마(幻魔)......이렇게 세 분이 패종회 와 연을 맺고 있습니다." 선주혁은 여유 있는 표정를 버리고 진중하게 말했다. 그가 별호 만을 말한 것은 그들의 정확한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기 때문이었 다. 하지만 좌중의 누구도 그가 지목한 자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문제는 선주혁이 구대마존을 직접적으로 거론했다는 데에 있었 다. 구대마존은 일월신교를 대표하는 절대의 고수다. 일월신교를 대 표한다는 것은 단지 무공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 중 하나도 아니고 셋이나 포섭이 되어 있다니..... 선주혁 의 발언이 가져오는 파장은 아무리 작게 보려 해도 엄청나기만 한 것이었다. "믿기 힘든 이야길세." 단목하진이 탄식 섞인 목소리로 말해다. "알고 있습니다. 금마.....라는 분의 경우는 특히 그렇겠지요." 금마 양위평(梁位坪)은 교주에 대한 충성심이 뛰어난 것으로 유 명했다. 그런 양위평이 일월신교를 배신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이 쉬운 일은 아닌 것이다. "자네의 지목에는 약간의 문제가 있어 보이는군." 수조문이 냉랭한 음성으로 선주혁에게 말했다. ".....?" "세 사람 모두 강호에서 활동을 하다가 본교에 귀의했다는 사실 말일세. 그들이 본교에 귀의한 지 벌써 육십여 년이 다 되어 가네. 자네 같은 젊은 사람이 그들의 과거사에 대해 어떻게 알았는지 모 르겠으나, 단지 원래부터 본교의 출신이 아니었다는 사실만으로 그 들을 반도로 지목하는 것에은 무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이봐여, 얼음 할배. 난 그것까지는 몰랐다고요.' 선주혁은 예상치 못한 수조문의 지적에 내심 당황하는 중이었 다. 수조문의 말대로라면 선주혁이 아니더라도 세 사람의 과거만 알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사실 그가 지금껏 여유 있는 모습을 보였던 것은 자신이 읽었던 책의 내용을 믿기 때문이었다. 은설연이 생각하는 천재나 대범하기 이를 데 없는 성품과는 거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어떤 일에도 흔 들리지 않는 소설 속의 영웅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으므로. 수조문의 한마디는 장내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 는 여세를 몰아붙여 말을 이었다. "따지고 보자면 본교를 위해 오랜 세월 충성해 온 그들보다는 자 네가 더 의심스러울 수도 있는 상황일세, 자네들은 지나치게 갑작 스럽게 유명세를 떨치고 있고, 그것만으로 이 자리에서 본교의 주 요 인사들을 간세로 몰아붙이고 있지 않은가?" 간세를 행해 겨눴던 활촉이 기묘하게 방향을 틀어 선주혁을 향 하는 중이었다. 수조문의 말은 분명 합당했다. 곤륜파의 제자 둘이 갑자기 강호에 등장했다. 정도 무림의 공적 으로 지목당한 그들을 채 몇 달이 지나지도 않아 강호를 대표할 정 도의 거마가 되었다. 이와 같은 과정 속에서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은 한두 가지가 아니 었다. 가장 이해가 안 되는 바는 쇠락해 가는 곤륜파의 평제자들의 무공이었다. 천고의 기재라는 것만으로는 그들의 무공수위를 납득 키 힘들었다. "저희를 의심하시는 겁니까?" 상황을 파악한 남지학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좀 더 명확한 해명이 필요할 뿐일세." 단목하진의 답변음 명료했지만 의미하는 바는 단순하지 않았다. 선주혁과 남지학을 의심하는가에 대한 답변이 되지는 못하는 것이 다. 더불어 많은 가능성을 내포한 답변이기도 했다. 만약 명확한 근거를 밝히지 못한다면 선주혁과 남지학이 역으로 패종회의 간세로 몰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만한 추론의 근거 는 흘러넘칠 정도였으므로. 은설연조차 흔들리는 모습이었다. 지금껏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가능성의 제시였다. 어쩌면 당연히 오래 전에 이와 같은 의문 을 떠올렸어야만 했다. 그러지 못한 것은 남지학과 선주혁의 놀라운 능력 때문이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기적과 같은 일들이 그녀의 판단력을 흐렸던 것 이다. 더불어 그들을 포섭하는 것에 대한 욕심이 다른 사고를 지배했 던 원인도 있었다. 문제는 은설연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의 판단을 흐렸던 그들의 놀라운 능력조차 패종회와 연관을 지으면 납득할 만하다는 것이다. 패종회에 속해 그들의 음모를 알고 있다는 전제라면 그중 일부를 흘려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가정하면 선주혁의 가공할 무재(武才)까지도 납득이 갈 수 있다. 오랜 세월 각 세력에 간세를 심어 놓은 패종회일 터. 무공 몇 개를 훔쳐 배우는 것은 일도 아닐 것이다. 그와 같은 조 건 하에서라면 마치 한 번 보고 무공을 익힐 수 있는 것처럼 꾸미는 일도 충분히 가능했다. 어찌 생각하면 선주혁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는 것보다는 이쪽이 훨씬 납득하기 쉬었다. 한편 선주혁은 입 안이 마르는 것을 느꼈다. 남지학이나 은설연 이 생각하는 것 같은 천재는 아니었지만 지금의 분위기를 모를 정 도의 바보도 아니었다. 사태를 수습할 방도를 찾지 못하면 곤란해질 것은 뻔했다. 자칫 무림맹에 이어 마교나 사파연합에서까지 쫒기는 상황이 될 수도 있었다. 애초 모든 일을 너무 쉽게 여긴 것이 실수였다. 다시 한 번 자신은 소설 속의 주인공들과 다르다는 것을 절실하 게 느끼는 순간이기도 했다. 소설이나 영화 속의 주인공들이 의도한 바는 여지없이 들어맞아 그대로 진행된다. 하지만 선주혁이 마주한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일월신교 내에서도 간세에 대한 의심을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종극 등이 교주와 적대하는 것처럼 행세를 해 그들을 파악하고자 하는 노력 중이다. 간세를 밝히고자 하는 의욕과 필요성은 저들 역 시 간절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자신이 말하는 바를 의심하고 나설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이는 오랜 세월을 함께 했던 동료애를 감안치 못한 탓이었 다. 얼마 전 알게 된 낯선 자의 몇 마디 말에 아무리 큰 가능성이 있 더라도 인간과 인간 사이의 정을 한순간 무너뜨리기에는 무리가 있 는 것이다. 이렇듯 작가가 정한 대로 스토리를 끌고 가기 위해 억지로 끼워 맞춰 흘러가는 소설과는 다는 상황임을 선주혁은 다시 한 번 뼈저 리게 통감해야만 했다. 그렇다고 이대로 모든 의심을 뒤집어쓸 수는 없는 상황. 선주혁은 재빨리 머리를 굴려 자신의 발언에 신빙성을 더해야만 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자신이 이곳에 온 지 하루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굴 처지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내용은 단목하진이나 종극의 의심을 더할 뿐일 터 였다. 간세를 심어 놓은 패종회의 일원이기에 알 수 있는 내용일 수 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차원이동을 설명할 수도 없는 상황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저들이 믿어줄 리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순간 머리를 번쩍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이 방법이 먹히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최선을 다해야만 할 처지였다. 선주혁은 살짝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이야기는 절대 하지 않기로 약속을 했건만..... 상황이 이리 되었은 어쩔 수 없군요." 일단 말을 꺼내든 선주혁은 단목하진 등의 표정을 살폈다. 그들 의 표정에서는 아무런 감정을 읽어낼 수 없었다. 닳고 닳은 선주혁 이라지만 노회한 이들이 자신의 말에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까지 알 아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밀어붙여야만 했다. "어제 산에 올랐다가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악구윤이 탁자를 치고 나섰다. 교주에게 허가를 득하지 않은 자 는 절대출입이 불가능한 조사전이다. 선주혁이 그곳에서 누군가를 만났을 리가 없는 것이다. 교주가 있는 자리였음을 상기한 악구윤이 재빨리 단목하진의 눈 치를 봤다. 단목하진이 책망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자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선주혁은 악구윤의 호통에도 당황하지 않았다. 지난 세월 경찰 서 취조실에서 단련될 만큼 단련된 그였던 것이다. 그의 태도는 사뭇 담담하기까지 해 보여 좌중의 인물들이 내심 감탄할 정도였다. "체구가 왜소하고 온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노인이었습니다." "노인?" 단목하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습니다. 기이한 것은 그토록 나이가 들어 보이는 얼굴임에 도 머리는 심단처럼 검었고, 치아는 눈처럼 하얗다는 것입니다." "설마.....?" 종극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얼음을 한 겹 뒤덮은 것 같은 수조문의 표정에도 변화가 있었다. 선주혁의 시선이 악구윤에게로 향했다. 그 누구보다 극단적인 반응을 보일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과연 그가 놀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분께서 아직...... 생존해 계시다는 건가?" 도저히 믿기 힘들다는 듯한 말쿠였으나 선주혁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노인에 대한 간단한 인상착의만으로도 악구윤은 노인이 누 군지 짐작해낸 것이다. 저토록 놀라는 것으로 보아 범상치 않은 신분을 지녔을 터. 선주혁으로서는 절호의 기회를 잡은 셈이었다. 마지막으로 살핀 것은 단목하진의 반응이었다. 그는 다른 사람 과는 달리 아무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아직은 부족하다는 말이지.....?' 선주혁은 단목하진의 반응을 보며 나름대로의 판단을 내렸다. 만약 노인이 일월신교에서 대단한 신분이었다면 그에 관한 인상착 의를 알고 있는 것은 별일이 아닐 수 있었다. 패종회와 연관이 있다 면 그 정도는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는 일이었으므로. 단목하진이 두 눈에서 신광을 쏟아내며 물었다. "선 소협이 진정 그분을 만났단 말이오?" "교주님께서 말씀하신 그분이 누군지 저는 잘 모릅니다. 그 노인 께서는 제게 신분을 밝히시진 않았으니까요. 다만....." 좌중의 시선이 선주혁에게 집중되었다. "그 노인께서는...... 교주님을 마치 어린아이처럼 대하시더군요. 그래서 범상치 않은 신분을 가지셧으리라 짐작했을 뿐입니다." 이번에는 단목하진에게서도 반응이 있었다. 드러내놓고 표정을 바꾼 것은 아니었으나 미미하게 눈썹이 움직 이는 것을 선주혁은 놓치지 않았다. 그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 면서 계속해 말을 이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송구스럽긴 하지만..... 그 노인께선 교주님을 꼬맹이라고 칭하시더군요." "......!" 다분히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선주혁을 살피던 단목하진의 호목 (虎目)이 크게 흔들렸다. 반면 선주혁의 발언은 악구윤을 폭발 직전까지 몰고 갔다. 콰앙 하는 소리와 함께 악구윤의 손바닥이 팔선탁을 강하게 내 리쳤다. 실내를 가득 채울 정도의 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탁자는 조 금의 손상도 없었다. "감히! 네놈이 감히 교주님을 모욕하겠다는 거냐?" 악구윤의 노갈과 함께 그의 전신에서 소름끼지는 살기가 폭사되 었다. 남지학은 검병에 손을 얹으며 언제든 발검할 준비를 했다. 악구 윤의 기세로 미루어 당장이라도 살수를 쏟아낼 것만 같았기 때문이 다. 선주혁은 마른침을 삼키며 단목하진을 바라보았다. 그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분이라면.....!" 드디어 단목하진의 입이 열렸다. "본좌를 그렇게 칭하실 만도 하오." "......!" 악구윤이 안 그래도 부리부리한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디선가 그분에 관한 이야기를 접했다 하더라도 그런 사실까 지는 알 수 없는 법이지." 마치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리는 단목하진의 말이었다. 그러나 실내의 모두는 그 이야기를 들었고 단목하진의 결론을 내린 셈이었다. 말인즉 실제로 단목하진을 꼬맹이라 부르던 자가 존재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분은 어떠시오?" 단목하진은 선주혁의 말을 인정하는 견지에서 질문을 던졌다. "정정하시더군요. 아니, 소생은 정말이지 놀랐습니다. 세상에 그 런 분이 계실 거라고는 상상치 못했으니까요." 단목하진의 질문에 선주혁이 진심으로 감탄하는 표정을 감추지 않고 대답했다. 단목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은...... 본교의 전전대 교주시오." "......!" 보통 노인은 아닐 거라 여겼건만 설마하니 전전대의 교주씩이나 되라라 생각지 못했던 선주혁이었다. "구주신마(九州神魔) 철무백(鐵珷伯)......!" 은설연이 낮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비록 마교에 대해 일말의 호감도 갖고 있지 않았으나 철무백의 이름을 말하는 그녀의 음성에 는 다소의 경외심이 엿보였다. 구주신마라는 이름을 언급할 때 무림에 몸을 담은 자라면 누구 나 그럴 만했다. 심지어 정파의 무인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논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철무백이었던 것이다. 삼백여 년 전 수라마제 사마횡천에 의해 무림에서 가장 큰 타격 을 받은 세력이 바로 일월신교였다. 천여 명에 달하는 절정고수를 잃은 일월신교였기에 과거의 성세를 회복하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런 일월신교를 다시금 강호 최강의 단일 집단으로 키운 것이 바 로 구주신마 철무백이었다. 철무백이 찬한한 일월신교의 영화를 재구축하는 데는 당연히 막 강 무비한 무력이 뒷받침 되었다. 그의 무공은 모순 되겠도 마교을 몰락으로 이끌었던 수라마제의 그것과 종종 비견되었다. 다시 말해 무림사에 손을 꼽힐 정도의 절대고수로 여겨지는 것 이다. 특이한 것은 그런 가공할 무공을 소유한 철무백이 마교가 입었 던 피해를 복구하는 일에만 집중했다는 것이다. 그가 무림의 최고수임을 누구나 인정하는 상황 속에서도 무림제 패와 같은 야망을 드러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철무백은 그가 가진 무공의 용도가 철저하게 교를 수호하는 데에 있음을 밝혔다. 이에 교에 위협이 되지 않는 그 어떤 일에도 가진 바 무공을 드 러내지 않았던 것이다. 정도의 무인조차 구주신마에 대해 함부로 언급할 수 없는 이유 도 여기에 있었다. 절대의 강자에 대한 예우와 헛된 야욕에 휩싸이 지 않았던 그의 절제력에 존경을 표하는 것이다. 이제는 전설처럼 회자되는 것에 불과한 구주신마가 아직까지 살 아 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철무백이 회복한 일월신교 의 막강함은 아직까지 계속되는 중이었다. 단일 세력으로는 무림최 강의 지위를 고수하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미 백여 년 전에 무림최강자였던 철무백이 생 존해 있다면 누가 있어 감히 일월신교의 아성에 도전하겠는가. "그분께서 자네에게 본교의 간세에 대해 언급하시던가?" 종극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선주혁은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자 지난밤 만났던 노인을 통해 자신의 발언에 근거를 대고자 했다. 한데 종극이 저렇게 물어오자 그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이번에 야말로 뜻한 바대로 이야기가 흘러가는 것이다. "제가 일 갑자 이전의 무림사에 정통하기는 힘들다고 생각합니 다." 앞서 언급했던 세 사람이 원래부터 일월신교 출신이 아님을 스 스로는 몰랐다는 이야기였다. 결국 철무백에게 들은 이야기가 아니 면 알 수 없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선주혁이 종극의 질문에 당장 그렇다, 라고 말하지 않고 이처럼 말을 돌린 데는 이유가 있었다. 단목하진이나 종극이나 확실히 보 통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의 날카로움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 이미 앞서 곤란한 지경에 몰렸던 선주혁이었기에 조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 치의 거짓이 있더라도 눈치 챌 것만 같았기에 진실 된 부분만을 말했다. 그럼에도 답변으로서는 부족함이 없었던 것이 다. "짚고 가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일이 제대로 풀린다고 생각해 쾌재를 부르던 선주혁의 내심에 찬물을 끼얹은 발언이 또 다시 나왔다. 이번에도 발언자는 수조문 이었다. '뭘 또 짚고 넘어가?' 선주혁이 미간을 찌푸리며 수조문을 바라봤다. 수조문은 선주혁을 향해서가 아니라 단목하진을 보며 말해다. "그분께서 조사전에 든 외인을 탓하시기는커녕 간세에 대한 말 씀만을 하셨다는 것을 이해하기 힘듭니다." 수조문이 제기한 의문에 종극과 악구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급해진 선주혁이 재빨리 해명했다. "그 노인께서는 소생을 귀교의 교도로 여기셨던 것 같습니다." "조사전에는 본교의 교도라 해도 출입할 수 없소." 수조문이 다시 한 번 문제를 들춰냈다. "그 노인분과 저는 내기를 했습니다." 선주혁은 숨도 쉬지 않고 수조문의 말에 답변했다. "내기?" 종극이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물어왔다. "네, 그분께서 자신의 일 초만 받을수 있다면 죄를 묻지 않겠다 고 하시더군요." 은설연은 선주혁의 말이 납득키 힘들었다. 철무백은 종교로서의 마교의 충실하고자 했던 대표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런 그가 금지에 출입한 자에게 내기를 제안하고 용서할 방도를 찾았다는 것 은 억지 중의 억지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선주혁이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댄다고 생각하며 그녀가 고개를 저을 때, 단목하진이 입을 열었다. "그 내기에서 이겼소?" 과연 단목하진의 표정에서는 진하기 이를 데 없는 의심이 넘쳐 흘렀다. 은설연은 선주혁이 더 이상 빠져나갈 방도를 찾기 힘들 거라 생 각했다. 어떻게 해서 철무백과 단목하진의 호칭에 대해 알아냈는지 는 몰라도 저런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이들에게 통용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졌습니다. 소생은 그분의 단 일 초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선주혁은 솔직하게 이야기를 했다. 노련한 형사 앞에서는 거짓 말만 늘어놓아서는 먹히질 않는다. 진실과 거짓을 적절하게 썩어야 만 날카로운 의심의 시선을 피해갈 수 있는 법이었다. 저쪽 세상에 있을 때의 그와 같은 경험이 선주혁으로 하여금 능수능란한 대응이 가능케끔 하고 있었다. 선주혁이 자신이 일 초조차 받아내지 못했음을 인정하자 과연 단목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금 천하에 있어 누가 구주신마의 일 초를 받아낼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인께서는 죄를 물으시기는커녕 제게 가르 침을 베풀어 주시더군요." 선주혁의 한마디에 일월신교에 속한 이들은 한꺼번에 두 눈을 빛냈다. "무슨 가르침을 베풀었다는 것이오?" 수조문이 물어왔다. 지금껏 차갑기만 했던 시선과는 달리 그의 눈에는 어떤 열망이 가득했다. 철무백의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은 평생에 다시없을 기연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만물이 나이며, 내가 곧 만물이라 하셨습니다." 구름을 잡는 것과 같은 선주혁의 말에 수조문이나 악구윤의 얼 굴에 실망의 기색이 가득했다. 저와 같은 구절은 적당한 수준의 무 공비급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와 함께 노인께서는 스스로 하늘이 되시는 것을 제게 보여 주 셨습니다." "하늘이 된다라.......?" 종극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로서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였 던 것이다 "그렇습니다. 흙이 되셨다가, 바위가 되시더니, 종국에는 하늘로 화(化)하시더군요. 정말이지 기적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창공이 제 눈앞에 펼쳐진 듯했으니까요. 소생은 평생을 두고 다시없을 감동을 느꼈습니다." "도대체가 지금 무슨 소리를......?" 미간을 찌푸린 악구윤이 투덜거릴 때였다. 종극이 검지를 세워 입 앞에 가져다 댔다. 그제야 중인들은 보았다. 단목하진이 진중ㅎ기 이를 데 없는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시선은 다시금 선주혁에게로 향했다. 그의 발언은 수많 은 무공비급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몇 마디였을 뿐이다. 한데 그와 같은 말을 듣고 교주가 몰아의 상태에 빠져들었다. 불 가(佛家)에서 말하는 돈오(頓悟, 별안간 깨달음)의 순간이 왔음을 익 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이는 선주혁의 말이 뜬구름을 잡는 허망한 소리가 아님을 입증 하는 것이었다. 중인들의 시선을 받고 있는 선주혁은 선주혁 나름대로 놀란 표 정을 짓고 있었다. 그의 시선을 쫒은 중인들은 다시 한 번 놀라야만 했다. 남지학 역시 단목하진처럼 두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겨 있는 것이다. 그 역시도 선주혁의 말에 무엇인가 영감을 얻었음이 분명했다. 종극은 눈짓으로 자리를 피할 것을 표했고, 단목하진과 남지학 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최대한 기척을 죽여 집무실을 빠져나왔 다. '그런 말 몇 마디에 또 다른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는 건가? 단 목 교주는 그렇다고 쳐도 남 소협은 어떻게......?" 은설연은 선주혁이 엉뚱한 말을 꺼내들어 자충수를 둔다고 생각 했건만 그의 말이 진실이라는 데에 약간의 충격을 받았다. 도 대체가 이 사람과 얽히는 일 중에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놀라움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단목하진은 일월신교의 무공을 익혔으니 철무백의 몇 마디에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었다. 현현의 순간은 부지불식간에 찾아오는 것이었으므로. 한데 남지학의 경우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가 일월신교 의 무공을 알 리 없었기 때문이다. 종극 등 조차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한 상태가 아니던가. 모든 무공의 근간은 하나라고 하지만 남지학이 깨달음을 얻는 상태에 접어들었다는 사실은 은설연에게 놀랍기만 했다. '그러고 보니 선 소협 역시 밤을 새운 후에야 숙소로 돌아왔다고 했지? 그렇다면 이 사람도 밤새 또 다른 경지를 밟았다는 건가?' 뒤늦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은설연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선주혁을 바라봤다. 선주혁은 그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집무실 쪽을 바라볼 뿐이 었다. 아마도 사형의 건승을 기대하고 있으리라. '대체 이들 사형제는 인간이긴 한 걸까?' 태어나 지금까지 한 번도 자신감을 잃어본 적이 없었건만 곤륜 이마 앞에서는 어쩐지 초라해지는 느낌이 드는 은설연이었다. =명확한 한계= <<1>> 바람처럼 달려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은설열은 안도 의 한숨을 쉬었다. 둘은 남지학, 선주혁 사형제였다. 그들은 이제 막 마교의 절진에서 벗어나는 중이었다. 마교에서의 일은 예상보다 훨씬 수월하게 풀렸다. 그녀의 우려 와는 달리 마교에서 선주혁과 남지학을 얽어매는 데에 주력하지 않 았다. 선주혁이 뜬금없이 꺼내든 말이 전화위복(轉禍爲輻)의 결과를 가 져왔기 때문이다. 단목하진과 남지학은 무려 삼일밤낮을 보내고서야 눈을 떳다. 단목하진은 오랜 화두(話頭)의 해답을 선주혁의 몇 마디에서 찾 았고 무공의 진척을 막고 있던 벽을 넘었다고 한다. 철무백의 가르침을 전했다는 것은 과정을 떠나 크나큰 은혜가 아닐 수 없었고, 단목하진은 그 이유만으로 선주혁의 죄가를 요구 하지 않았다. 오히려 선주혁에 대한 예우가 극진해지기까지 했다. 자연 간세에 대한 선주혁의 언급은 신뢰를 받기에 이르렀고, 남 지학과 선주혁이 다시금 단목민과 주백광을 찾는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은설연은 아직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자신의 뒤쪽에서 달리는 세 사람 때문이었다. 종극, 수조문, 악구윤이 금번의 여정에 동행하는 중이었다. 그들 은 사파연합과의 연수에 대한 예를 갖추기 위함이라는 명분과 단목 민이라는 자를 찾아야 한다는 분명한 목적으로 동행을 하는 중이었 다. 이에 은설연은 마교에서 아직도 선주혁과 남지학을 포기하지 않 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어찌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에 와서 누가 곤륜이마를 탐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선주혁은 물론이거니와 남지학의 가치도 한없이 높아져만 갔다. 그날 이후 남지학은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무엇인 가 범접치 못할 기운이 그의 몸에서 은은히 피어오르는 것이다. 같은 말을 듣고 동시에 참오의 시간을 보냈지만 단목하진과 남 지학은 완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단목하진은 이전에 비해 오히려 평범해진 듯한 모습이었다. 원 래부터 문사에 더 가까웠던 용모인 단목하진이었다. 다만 전신에서 뿜어지는 위압감만큼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한데 돈오의 순간 이후의 단목하진에게서는 그런 위압감조차 찾 을 수 없었다. 아예 무공조차 익히지 않은 평범한 문사위 모습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이에 반해 남지학은 참오 이전의 단목하진을 연상케 했다. 무공 이외의 기세가 전신을 휘감아 주변 사람들을 절로 위축시키는 것이 다. 종극 등 조차 남지학의 그런 기도를 보며 감탄을 금치 못하니 그의 성취가 얼마나 되는 것인지 은설연으로서는 짐작조차 하기 힘 들었다. 분명히 유사한 바가 있으니 남지학이 깨달음 이전의 단목하진과 비슷한 경지에 오르지 않았을까 추측을 해 봤지만 여전히 납득하기 는 힘들었다. 고작 이십대 중반의 그가 지금껏 마교를 이끌어 온 단 목하진과 비슷한 경지에 올랐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어려웠던 것이 다. 어찌되었건 짐작할 수 없는 경지에 오른 남지학과 이미 자신의 가치를 입증한 선주혁을 마교에서 포기할 리가 없었다. 은설연은 달리는 속도를 높여 남지학의 옆으로 향했다. "괜찮을까요? 그들을 내버려 둬도?" 그들이라 함은 패종회의 간세 역활을 해온 세 사람을 말하는 것 이었다. 마교에서는 그들의 처리를 뒤로 미룬 것이다. "소생은 단목 교주의 말씀이 옳다고 보오. 지금 그들에게 손을 대는 것보다는 역으로 이용하는 편이 유리할 것이오." 남지학의 말에 선주혁도 고개를 끄덕였다. 소설이나 영화 속에 서 첩자를 역으로 이용하는 방법을 수도 없이 보아 왔기 때문이었 다. 그런 선주혁의 반응을 보고 그 역시 남지학과 단목하진과 같은 생각이라 여긴 은설연은 입을 다물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세 사람 모두 자신보다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사형......" 선주혁이 여유 있는 표정으로 달리며 남지학을 불렀다. "사실 제가 한 말이 단목 교주를 깨달음에 이르게 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거든요, 저는 그 노인을 만나 직접 눈으로 본 게 있어 서 나름대로 성취가 있었지만 말 몇 마디에 어떤 경지에 오를 수 있 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단목 교주도 아마 무공의 진척에 있어서 어떤 벽을 느끼고 있었 을 거야. 우연치 않게 사제가 한 말이 그 벽을 깨는 열쇠가 된 것이 겠지." "단목 교주도 ........라고 하면 사형도?" "그래, 정말이지 공교럽게도 사제가 해 준 말이 내게 있어서도 모종의 해답이 되어 준 거야." "그렇군요. 사실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단목 교주야 일월신 교의 무공을 익혔으니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사형이 갑자기 명상에 빠져든 것은 의외였거든요." "우연의 일치였을 뿐이지. 마침 나 역시도 사제의 한마디로 해답 을 찾을 수 있었으니까. 사제가 내게 기연을 베푼 거나 다름없어." 남지학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사형도 단목 교주만큼 강해진 건가요?" 선주혁이 기뻐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이어지는 남지학의 답변에 은설연도 귀를 기울였다. "그렇지는 않아. 하나의 원인이 꼭 하나의 결과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니까. 나 역시 사제의 말을 듣고 큰 성취를 이루긴 했지만 내가 걸어온 길과 벽은 단목 교주의 그것과는 다르다고 봐야겠지. 만류 귀종(萬流歸宗)이라....., 결국 단목 교주나 내가 걷는 기도 어느 지 점에서 맞닿겠지. 하지만 아직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그래도 이전에 비해 엄청 강해진 건 사실이죠?" "응, 무극삼검식 중 삼 초를 완벽하게 얻을 수 있었으니까." "완벽하게? 그저 전개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요?" 선주혁의 음성이 약가 떨렸다. "그래, 모두 사제 덕이야." "오오오옷! 사형! 축하해요, 정말로 축하해요!" '역시 주인공은 뭔가 달라도 다르구나, 어떻게 해서든 되는 사람 은 된다니까!' 선주혁은 남지학이 무극삼검식의 마지막 초식을 완벽하게 얻었다 는 사실에 크게 기뻐했다. 무극삼검식의 마지막 초식은 그야말로 무림최강의 절초. 그것을 익혔다는 것은 남지학이 무림최강이 될 요건을 갖췄다는 뜻이었다. 최강이 아니라 최강이 될 수 있는 요건이라 한정지은 이 유는 남지학이 진정한 무림최강이 되기 위해서는 무극삼검식을 넘 어서야 했기 때문이다. 선주혁이 읽었던 책의 내용상으로는 그랬다. 무극삼검식의 진정 한 위력은 초식 자체를 넘어서야만 나올 수 있다고 했다. 그 정도가 되어야만 당시 수라마제와 평수를 이뤘던 현천자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또한 패종회 놈들과 당당히 상대할 수 있는 실력을 갖게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남지학의 성장을 선주혁이 이토록 기뻐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 다. 본래 패종회의 음모를 분쇄하고 무림의 평화를 이루는 것은 사 형의 몫이었다. 한데 자신이 이곳으로 온 이후 사형이 겪어야 할 여러 가지 일들 에 변화가 생겼다. 무엇보다 사형이 겪어야 할 여러 기연들을 놓치 게 된 것이 문제였다. 선주혁은 그게 항상 사형에게 미안했다. 자신으로 인해 사형이 손해를 본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책에 적힌 내용대로라면 사형의 모든 일은 술술 풀려야만 했다. 나름대로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어차피 기연을 맞이하기 위한 약가의 통과의례 정도에 불과했다. 자신이 아니었으면 자연스레 무림 최고수가 되고 패종회를 막을 수 있는 남지학이었던 것이다. 이전에 선주혁은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 결론을 내렸었 다. 자신 역시 원해서 이쪽 세상에 오게 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 다. 문제는 그런 결론을 내릴 때만해도 패종회가 무림을 장악하건 그렇지 않건 상관이 없다고 여겼었다. 스스로 적당히 잘 먹고 잘 살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친형제와 같은 남지학의 양양한 전도에 재를 뿌린 죄책감은 물론이거니와 공 노인의 죽음에 대한 복수도 고려해야만 했다. 이에 선주혁은 책에서 읽은 바와 달리 마교와 사파연합의 연수 를 만들어냈다. 적극적으로 패종회를 막기 위함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극강에 이른 절대고수가 필요한 것이다. 선주혁은 당연히 사형을 생각했다. 그것이 원래 사형이 해야 할 역할이었으므로. 문제는 바뀌어 버린 사형의 운명이었다. 계속되는 기연을 통해 순탄한 발전을 해야 하건만 자신이라는 변수로 인해 사형이 책에서 읽은 것처럼 강해지리라는 보장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형이 무극삼검식의 최후 초식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 다고 하는 것이다.그저 초식을 전개할 수 있는 것과는 달랐다. 선주혁의 추측에 따르면 사형은 아마 초식을 전개할 정도의 경 지는 이미 오래전에 올랐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완벽하게 마지 막 삼 초를 자신의 것으로 할 수는 없었을 테니. 어쩌면 무림맹의 인사들에게 쫒기는 동안, 혹은 패종회의 무리 와 상대를 하는 동안 남지학의 무공을 계속해서 발전해 온 것일 수 도 있었다. 소설 속에서 봤던 기연 없이도 그는 계속 성장해 온 것 이다. 그리고 결국 현천자의 유학을 완벽하게 성취했다. 이는 선주혁이 책에서 남지학이 최후초식을 자신의 것으로 한 것보다 훨씬 빨랐다. 선주혁이 기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사형에 대한 죄 책감을 덜 수 있을 뿐더러 패종회의 야욕을 분쇄할 수 있기 때문이 었다. 한편 은설연은 남지학이 초식 하나를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소화했다는 말에 저토록 소란을 떠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무공이란 초식 하나를 익힌다고 해서 확연히 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는 은설연이 무극삼검식에 대한 일말의 지식조차 갖 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무슨 말씀을요! 사형이 아니면 그 누구도 해낼 수 없었을 거예 요." 선주혁은 엄지를 곧추세우며 사형을 칭찬했다. 사실이 그랬다. 무극삼검식의 마지막 절초는 초식이라기보다는 검법의 총람이나 다름없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검법을 관통하 는 무엇을 찾아내야만 완벽하게 익힐 수 있는 것이다. 책으로 읽었 을 때야 그러려니 할 수 있지만 직접 검법을 배워 본 선주혁으로서 는 그와 같은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행여 자신이 무극삼검식을 얻었다면 평생을 두고도 그 오의를 깨닫지 못했을 것이 분명해따. 선주혁이 남지학과 희희낙락하고 있는 사이 종극이 그의 곁에 다가섰다. "교내에서는 보는 눈이 있어 제대로 말을 못했네만......." 냉막하기 이를 데 없는 수조문 정도는 아니지만 종극 역시 감정 을 잘 드러내는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의 종극은 심각하기 이 를 데 없는 표정이었다. 종극의 표정을 살핀 선주혁과 남지학, 은설연은 종극의 말에 귀 를 기울였다. "내가 자네들과 함께 본단으로 돌아온 후에도 민아와 자네의 친 우라는 주백광을 찾는 일은 계속 되고 있었네." 선주혁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사실상 주백광의 안위는 계속해 그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자네들과 내가 본단으로 돌아온 이후 민아를 찾는 작업을 인수받은 사람일세." "그 세 명 중 하나입니까?" 은설연의 질문에 종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내작이 그들의 뒤를 쫒고 있네." "환마......!" 은설연이 침중한 표정으로 중얼거린 다음 질문했다. "그는 아직 본색을 드러내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가 단목 공자나 도귀를 찾는다 해도 큰 문제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가 찾았을 때는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만......,찾을 수 있는데 찾지 않으면 문제가 생길 것이오." 남지학의 말을 듣고서야 은설연은 상황이 좋지 않음을 깨달았 다. "소재를 파악한 그가 패종회에 소식을 흘릴 가능성이 있군요." 선주혁은 은설연의 말을 들은 후에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 다. 암중에 주백광을 찾는 패종회보다 드러내놓고 단목지민을 찾는 마교가 유리한 입장일 터. 주백광이 세인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고수임에 약간은 안 심하고 있었지만 상대는 패종회였다. 그들이 마음먹고 달려든다면 주백광이 상대하긴 힘든 상황. 그야말로 주백광에게 위가가 닥친 셈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우리가 먼저 그들의 소재를 파악해야 하네." "그곳에 도착한다 해도 합류는 힘들겠군요." 남지학의 마레 종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선주혁이 남지학에게 말했다. "사형, 제가 먼저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사제!" "단목 공자와 함께 있는 이상 그들은 환마를 원군이라 여길 겁니 다." "하지만 사제까지 위험한 상황에......" "제게는 하나밖에 없는 친구예요." 선주혁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남지학은 잠시 선주혁의 얼굴을 바라보다 살짝 고개를 끄덕였 다. "무리하지는 말아야 해. 패종회의 음모를 막을 수 있는 건 사제 밖에 없으니까." '그건 사형의 몫이라고요.' 선주혁이 씨익 웃으며 내심 중얼거렸다. 한편 종극이나 은설연은 이들 사형제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친구로 인해 선주혁의 마음이 급한 것은 이해할 수 있으나 무슨 수로 먼저 가겠다는 이야기인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들에게 선주혁이 말했다. "그럼 남창에서 뵙겠습니다." 말을 마친 선주혁의 신형이 흐릿해졋다. 신투의 암영풍이 전개된 것이다. "저럴 수가......? 뒤쪽에서 종극을 따르던 악구윤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적어도 신법에 있어서는 자네의 사제가 천하제일임을 아무도 부정할 수 없을 걸세." 종극도 감탄을 하며 남지학에게 말했다. "저런 움직임이라면 내력의 소모가 극심할 텐데.......,얼마 달리 지 않고 탈진하지 않을까 염려되는군요." 은설연이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방금 전 선주혁이 보여준 신법은 놀랍기 그지없을 정도다. 하지만 저 정도의 움직임은 종극 정도의 고수라면 언제든 펼칠 수가 있다. 격전 중 상대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 저런 속도는 필수 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런 움직임은 한시적일 뿐이라는 것이다. 폭 발적으로 내력을 운용해야 하는 만큼 그만큼 빠르게 내력이 소진된 다. 따라서 은설연은 선주혁이 급한 마음에 무리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선주혁의 신법이 특출한 경지에 이르렀음은 알고 있었다. 주법(走法)에 있어서는 천하제일을 다투는 신투의 경신공부를 이었 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방금 전 보여준 속도는 설령 신투 본인이라도 무리임에 틀림없었다. "사제의 움직임은 전에 없이 표홀했소." 남지학이 은설연의 말에 반박해따. "어쩌면 철 노선배를 만난 이후 그가 깨달은 부분을 보여 주는 것일지도......." "그럼 남 소협은 선 소협이 저런 상태로 계속 달릴 수 있다고 보 는 건가요?" 은설연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제에게는 불가능이 없으니까요." 남지학이 싱긋 웃으며 답했다. "그가 말하지 않았소? 철 노선배께서 바람이 되는 것을 봤다고, 어쩌면 사제는 이미 바람이 되는 법을 깨달았을지도 모르오." 남지학의 설명에 종극의 시선이 이미 사라진 선주혁의 뒤를 쫓 았다. 가늘게 떠진 그의 눈이 무엇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 은설연은 익 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살짝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2>> '이거 굉장하군.' 선주혁은 철무백을 만난 이후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머리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느낀 것이다. 처음에는 사형과는 달리 어떤 경지에 명확히 오른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진척의 정도가 명확한 것은 오히려 단목하진을 만난 이후가 컸 다. 확연한 발전이 있었음을 알고 있었고, 곧 그것이 비급에 남겨진 천인합일의 경지에 오른 것임을 깨달았다. 사형처럼 자신도 흡성대법의 마지막 단계에 오른 것이다. 물론 초입을 밟은 것이기에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는 지까지는 잘 모르는 상태였다. 비급에는 우주의 모든 기운이 자신의 것이 되 리라고 했고, 선주혁 스스로도 삼라만상의 기운을 느끼는 중이었 다. 존재하는 모든 것의 기운을 느낀다는 것은 일종의 감동이었다. 돌이나 흙과 같은 사물에서 살아 있는 듯 생명력이 느껴졌기 때문 이다. 평생을 두고 흘려보았던 모든 것이 새롭게 다가오는 경이감 에 빠져 있을 때 철무백을 만났다. 그를 통해 선주혁은 무학의 새로운 경지를 보았다. 실로 많은 것 을 얻었다는 느낌이었으나, 역시 막연한 느낌일 뿐이었다. 자신이 얻은 것은 손에 잡히지 않는 연기와도 같았다. 분명히 무엇인가를 얻었으나 확연하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는 상태였던 것이다. 선주혁은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북두폭렬장이나 북두진공참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때처럼 끈기를 가지고 접근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난 후 자신이 얻은 바를 처음으로 적용해 본 것이 바로 신법인 암영풍이었다. 철무백은 스스로 바람이 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에 선주혁은 암영풍을 전개하며 스스로 바람이고자 했 다. 무리가 있었다. 철무백을 직접 보았기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지만 단 한 번의 시 연과 명상을 통해 모든 것이 달라질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자신은 사형과 같은 소설 속의 천재들과 다르기 때문인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소설 속의 주인공들은 한 번 보고 깨달으 면 모든 것을 습득한다. 단 하나의 깨달음만으로 자신보다 수배는 족히 강했던 적들을 단숨에 물리친다. 그러나 선주혁은 그와 같은 전개가 자신에게는 적용되지 않음을 여실히 깨달았다. 많은 것을 얻었고, 분명한 진보가 있었지만, 세상 이 뒤집어질 정도의 변화가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스스로의 한계를 깨달은 선주혁은 현재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에 순응하기로 했다. 철무백이 보여 준 경지에 대한 욕심을 일단 접어 두었다. 그러나 철무백의 경지는 목표가 되어 자신이 나아갈 방향을 잡아 줄 것이 다. 그것만으로도 큰 소득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선주혁은 스스로의 능력 내에서 할 수 있는 바를 찾았다. 천지간의 모든 것에 기운이 존재하는 것을 알았고 바람에도 그것은 분명 존재했다. 이에 암영풍을 전개하며 바람의 기운에 순응코자 했다. 진기의 흐름에 바람의 기운을 담고자 노력했으며 그 가벼움과 부드러움을 닮아 보고자 했다. 단순히 그것뿐이었다. 표홀함을 강조하는 신법인 만큼, 또한 신법의 이름에 바람이 들 어간 만큼, 바람의 기운의 순응하면 낫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던 것 이다. 어찌 보면 지독할 정도의 단순한 사고에서 비롯된 시도일 뿐이 었다. 한데 그 효과는 선주혁을 감탄케 했다. 가공할 속도는 물론이거니와 내력의 소모가 격감했다. 즉, 이전 보다 훨씬 적은 내력으로, 훨신 빠른 속도를 내는 것이다. 혹시나 싶어 도입해 본 방법이 기대 이상의 효과를 나타내자 선 주혁은 신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에게 있어서도 의외의 성과였 던 것이다. 비록 소설 속의 주인공들처럼 천재는 아닐지라도 한 번의 깨달 음이 가져다 주는 것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그것만으로도 선 주혁은 기뻤다. 언젠가 자신이 완벽하게 바람이 될 수 있을 때를 상상해 봤다. 어쩌면 눈곱만큼의 진기, 아니 아예 진기를 사용하지 않고도 이와 같은 속도로 달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상상망으로도 선주혁은 행복해졌다. 마치 로또를 구입해 당첨 된 이후 무엇을 할까 상상하는 것처럼....... 미미하게 떠올랐던 선주혁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쾌속무비하게 질주하는 자신을 향해 폭사되는 누군가의 살기 때 문이었다. 그 소름끼치는 기운에 선주혁은 저도 모르게 양손으로 문호를 방비하며 달리는 것을 멈췄다. 살기의 진원지를 향해 고개를 돌린 선주혁. 그곳에 서 있는 한 명의 노인을 볼 수 있었다. 일견 평범해 보이는 노인이었다. 선주혁은 문득 얼마 전 헤어진 종극을 떠올렸다. 지나칠 정도로 평범해 보이는 종극이지만 그는 이 시대를 대표하는 고수 중의 하 나였다. 그런 종극을 연상케 한다면 노인 또한 범상치 않을 터. 막강한 살기를 내뿜으면서 외려 평범한 느끼믕 주기에 선주혁은 긴장해야만 했던 것이다. "알아보기 쉬워서 좋군." 노인이 피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선주혁의 백발과 피부색을 말하는 것이리라. "누구시오?"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선주혁이 물었다. 자신이 흘려보낸 살기를 온몸으로 받아내는 선주혁을 보며 노인 이 다시 한 번 피식 웃음을 지었다. "과연 노부에게 힘겨운 발걸음을 하게 할 만한 놈이군. 어린 나 이에 그 정도의 경지에 오른 것이 기특하다만.......스스로 너무 많 은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을 원망해야 할 게야." 마치 어린아이에게 말하는 듯한 말투였으나 선주혁은 개의치 않 았다. 아니 노인이 패종회에서 나왔음을 짐작했기에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패종회에서 나왔군." 선주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하는 모습에 노인은 그보다 더 크 게 인상을 찌푸렸다. "진정, 살려둬서는 안 될 놈이로고!" "한 가지만 물읍시다." 패종회라면 공 노인을 죽음으로 몰고 간 원흉이다. 선주혁의 어 조는 곱지 않았다. ".......?" "혹시 패종회에서 서열 백 위 안에 드시오?" "크흐흐흐....... 네깟 놈을 상대하는데 백존(百尊)이 움직일 성 싶 으냐?" 노인의 말에 선주혁은 조금이나마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백존이라는 명칭은 잊고 있었지만 소설에서 읽었던 그들의 무위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종극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고수라는 것 을 말이다. 과거 종극이 선주혁에게 한두 수 아래임을 말했지만, 그것은 당 시의 선주혁을 고려하면 과장된 칭찬일 뿐이었다. 다양한 무공을 알고 있고 내력의 양만 많다고 해서 초절정의 고수가 될 수는 없는 법이다. 선주혁의 내력이 종극에 필적하고 많은 절기를 알고 있다지만 그것뿐이었다. 같은 힘도 어떻게 운용하느냐에 따라 위력에 있어서는 큰 차이 가 나며, 같은 절기를 전개해도 얼마나 깊이 이해했는가에 따라 결 과는 크게 다른 법. 그런 미ㅕㄴ에서 선주혁은 종극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할 수도 있었 다. 이는 선주혁도 잘 알고 있었다. 일월신교로 향하는 동안 선주혁 의 자만을 염려한 사형이 설명해 줬기 때문이었다. 북두진공참이나 북두폭렬장 역시 너무나 의외의 수법이기에 상대가 대응에 곤란을 격을 뿐, 진정한 고수들이라면 수월하게 파훼할 수 있다고 했다. 심혈을 기울려 만드렁 낸 북두 시리즈가 진정한 고수들에게는 별 효용이 없다는 것이 실망스럽기는 했지만, 천재인 사형의 지적 이니 분명 정확할 것이었다. 그러던 중 일월신교의 본단에서 큰 발전이 있었다. 흡성대법 또 한 천인합일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이제야말로 진짜 종극의 한두 수 아래 소리를 들을 만하다고 막역히 기대해 보는 선주혁이었다. 나타난 노인이 백존에 들지 않는다는 것에 안도한 것도 이 때문 이었다. 백존의 일원이라면 자신보다 한두 수 우위의 고수라는 뜻 이다. 종극이 말하길 한 수의 차이가 나는 하수라면 두 명도 가뿐이 상 대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노인이 백존이 아니라는 것에안도할 수밖에 없는 선주 혁이었다. "지금 네놈이 노부를 무시하는 것이냐?" 자신이 한 말에 안도의 한숨을 쉬는 선주혁을 보며 노인이 호통 을 쳤다. "백존이 아니니까." 선주혁은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노인의 정확한 신분을 몰 랐가에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만약 백존의 바로 아래에 해당하 는 서열의 노인이라면 자신과 평수이거나 한 수 위일 가능성도 있 었기 때문이다. "건방진!" 노인의 눈썹 끝이 파르르 떨렸다. 안 그래도 이번의 임무가 못마땅했던 그였다. 선주혁의 짐작대 로 노인은 패종회에서 백존의 바로 아래에 해당하는 백웅에 속해 있었다. 백웅은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조차 우습게 여기는 절정 의 고수들이었다. 헌데 고작 일월신교로 향한 백발귀마 일해을 감시하라는 명을 받은 것이다. 그것도 십만대산에서 남창으로 향하는 길목을 지키는 역활이었다. 자신의 무공과 지위를 고려하면 터무니없는 명령이었다. 지엄한 회주의 명임을 계속 상기하며 노기를 억누르고 임무 수행 중 선 주혁이 나타난 것이다. 염마와 동행하리라는 예상과 달리 단신이었다. 노인은 재빨리 판단을 내렸다. 회에서 감시만을 요구한 것은 염마를 염두해 둔 것이리라. 이미 백발귀마라의 무공이 범상치 않다는 것은 보고를 받긴 했 다. 내용을 면밀히 검토해 봤지만 아직 자신의 상대는 아니었다. 이 에 회에 위협이 될 존재로 여겨지는 백발귀마를 자신이 없애기로 한 것이다. 큰 공을 세울 기회를 놓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노인이었는데 마치 백존이 아니면 이길 수 있다는 듯한 선 주혁의 말을 들었으니 더욱 노기가 치밀어 오른 것이다. "곱게 죽이진 않겠다." 누런 치아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노인을 보며 선주혁은 진지 한 표정을 지었다. 노인은 분명 고수였다.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이 정도의 고수와 겨루는 중이라면 단 한순간의 실수로 인해 이 번에는 제대로 목숨을 잃을 가능성도 있다. 긴장의 끈을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다. 선주혁이 눈빛을 빛내는 모습을 보고 노인의 표정도 가라앉았 다. 노인 역시 선주혁이 만만하기만한 상대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고수와의 싸움에서 감정이 앞서서 안 된다는 것은 기본적인 무 리(武理). 노인은 오직 승부에만 모든 정신을 집중하는 것이다. 빛을 내던 선주혁의 눈이 자광으로 물들었다. 노인은 백발귀마가 혈마자광기를 알고 있다는 보고는 이미 받았 다. 더불어 극쾌의 장력을 사용한다는 것도. 예상대로 백발귀마의 자광수가 교차했다. 노인의 신형이 우측으로 움직였다. 선주혁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노인이 너무나 수월하게 북두 진공참을 피해냈기 때문이다. '뭐야? 이렇게 쉽게.....?' 선주혁은 다시 북두진공참을 펼쳤다. 세 번에 걸친 연환공격이 었다. 하지만 기기묘묘한 보법을 밟아 움직이는 노인의 옷깃조차 잘라 내지 못했다. 눈앞이 어른거릴 정도의 움직임을 보면서 펼쳐낸 선주혁의 북두 진공참은 계속해 노인이 있었던 장소만을 헛되이 가를 뿐이었다. 나름대로 노인이 움직일 방향을 예측해 북두진공참을 날려 봤지 만 소용없었다. 보법이란 애초 움직임에 상대의 공격을 피해내기 위한 묘용을 담고 있는 것. 선주혁의 예측 따위가 맞을 리 없었던 것이다. '역시 사형 말대로 진정한 고수에게는 소용이 없다는 건가?' 심혈을 기울였던 무공이니만큼 실망이 컸지만, 그런 생각을 하 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노인은 자신을 향해 쏘아 보냈던 살기만큼 의 실력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 고수인 것이다. 현란한 보법을 밟으며 여유 있게 선주혁의 북두진공참을 피해내 던 노인의 주름진 손 위에 자색이 확연한 구체가 떠올랐다. '에네르기파를?' 선주혁은 내심 긴장의 끈을 한층 조이며 양손에 공력을 모았다. 그의 양 손 가운데에도 자색의 구체가 만들어졌다. 같은 에네르기파로 적의 공격을 막아내려는 것이다. "흥!" 노인의 구체가 허공을 가르고, 선주혁의 에네르기파 역시 쏘아 졌다. 허공에서 격돌한 두 개의 구체는 일대를 울리는 강력한 폭음을 만들어 내며 산산이 흩어졌다. 내력을 발출한 이후의 반탄력 탓에 선주혁과 노인은 동시에 어 깨를 들썩거렸다. 노인과 선주혁은 각각의 이유에서 인상을 찌푸렸다. 천인합일의 경지에 오른 이후 기감이 극도로 민감해진 선주혁이 었다. 방금 전의 겨룸에서 자신의 에네르기파가 노인의 그것에 비 해 뭔가 부족함을 느낀 것이다. 두 장력은 동시에 소멸되기는 했지만 그 과정에 차이가 있었다. 노인의 장력은 집중된 상태에서 폭발하듯 사라졌고, 자신의 에네르 기파는 우격다짐식으로 노인의 장력을 막아내다 소멸된 것이다. 그 는 예민해진 기감으로 장력을 운용하는 방법에 있어 자신이 뒤지고 있음을 파악한 것이다. 노인이 미간을 찌푸린 이유는 자신의 혈마자광기가 백발귀마의 그것에 비해 훨씬 뛰어난 운용 하에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한데도 상대에게 일말의 피해도 주지 못했다. 내력의 차이 때문 이었다. 놀랍게도 백발귀마라는 애송이가 자신보다 뛰어난 내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소문보다 더한 놈이군!' 노인은 어금니를 악물며 이번에는 쌍 장을 모았다. 그의 양 손바 닥 사이에서 주먹 두 개만 한 구체가 만들어졌다. 구체의 주변으로 휘몰아치는 경력만으로도 그 위력이 짐작이 갔다. 선주혁 역시 다시 혈마자광기를 운용했다. 이어 거위 동시에 발출된 두 개의 장력. 콰아아앙. 압축된 공기가 한꺼번에 팽창하는 듯한 폭음이 울려 퍼졌다. 충돌의 여력을 이기지 못한 선주혁이 두 걸음이나 뒤로 물러선 것이다. 내력의 우위에도 불구하고 숙련된 혈마자광기의 위력을 그 복하지 못한 것이다. 내기가 들끓는 것을 느낀 선주혁은 재빨리 호흡을 가다듬었다. 선기를 잡은 노인은 여세를 몰아 다시 한 번 진기를 양손에 모았 다. 노인의 자연스럽기 그지없는 진기의 흐름에 선주혁은 감탄을 해 야만 했다. 마구잡이로 진기를 쏟아붓는 식의 자신과는 확연히 다 른 것이다. 이대로라면 자신의 패배는 필연적일 터. 선주혁의 두뇌가 맹렬한 회전을 시작했다.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전력을 다한 도주였다. 빈틈을 노려 바람 의 기운을 응용한 암영풍이라면 노인에게서 도망칠 수 있을지 모른 다. 내키지 않았다. 공 노인을 죽게 한 패종회의 주구를 눈앞에 두고 도망을 치고 싶 지는 않았다. 아직은 해볼만 하다는 생각이 들기에 더욱 그랬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 보기도 전에 꽁지를 마는 건 이전 세상에서 충분히 했다. 공 노인의 복수를 하기 위해 맞서야 할 상대는 눈앞의 노인보다 수배는 강했다. 지금 도주한다면 패종회와 싸운다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마중영이 이야기한 대로 인생을 새롭게 시작할 기회를 얻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행운이었다. 평생에 다시없을 행운의 기회 를 갖게 되었는데 이전과 같이 살 수는 없었다. 그는 고개를 흔들며 마음을 다 잡았다. 도주를 포기함과 동시에 선주혁의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 다. 바람의 기운을 응용하는 것만으로도 암영풍이 비약적으로 발전 했다. 그렇다면 다른 쪽으로도 응용이 가능할 터. 노인의 에네르기파가 막 발출되려는 순간인 만큼 이것저것 생 각할 여력은 없었다. 선주혁은 우선 뒤로 밀리지 않는 것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노인의 몸 주변에 자색의 노을이 피어올랐다. 내력을 극도로 끌 어올렸음을 짐작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 이전에 봤던 홍의노인에 비해 노인의 몸 주변에 피어오른 자하(紫霞)의 색은 선명하고 짙었 다. 곧이러 노인의 혈마자광기와 선주혁의 에네르기파가 다시 한 번 허공에서 굉음을 만들어 냈다. 본래 폭발하는 성격을 가진 혈마자광기였다. 그런 혈마자광기끼 리의 충돌은 강한 여파를 남겼고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먼지가 가라앉았을 때 선주혁의 입매에는 흐릿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의도했던 대로 그의 두 다리가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 기 때문이다. 강맹한 공격과 견고한 방어를 위해서는 하체의 안정이 필수다. 충돌에 의해 뒤쪽으로 밀려나는 꼴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는 더욱 그랬다. 이에 선주혁은 두 다리를 지탱하기 위해 내력을 운용하며 거대 한 산악의 기세를 응용했다. 그런 결과가 선주혁의 입매에 떠오른 미소였던 것이다. 땅에 뿌리를 박은 듯 밀리지 않고 서 있는 선주혁의 모습에 노인 의 미간이 크게 찌푸려졌다. 앞서에 비해 더욱 강맹한 장력을 날렸건만 상대가 오히려 여유 있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벽공장력은 진기의 소모가 극심했다. 상개가 더 이상 충격을 받 지 않는 것을 확인한 이상 장력을 발출하는 것은 무의미했다. 자신 보다 뛰어난 내력을 가지고 있는 만큼 지치는 것은 자신이 먼저일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노인의 자광수가 보다 짙은 빛을 발하고 그의 신형이 앞으로 쏘 아졋다. 단거리의 이동인 만큼 노인의 보법은 폭발적인 내력의 운 용을 기반으로 했고 그 속도는 선주혁의 암영풍에 못지않았다. 선주혁은 물러서지 않고 노인을 향해 마주 움직였다. 조금의 주 저함도 없는 전진이었다. 이전보다 확연히 철무용에게서 얻은 깨달 음의 활용법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아직까지 사용하지 않은 자신만의 비장의 수가 있기 때문 이기도 했다. 혈마자광기를 운용해 어깨까지 자색으로 물들은 선주혁. 그는 비장의 수법인 북두폭렬장을 펼쳤다. 극도의 쾌를 추구하는 연환삼장이 작렬과 동시에 선주혁은 승리 를 예감했다. 이전에도 북두진공참을 피해내는 자들은 있었다. 하지만 북두폭렬장만은 자신의 기대를 저버린 적이 없었던 것이 다. 콰아아아아앙! 조금은 긴 여운을 만들어내는 폭음. 노인은 형편없는 몰골로 뒤로 물러섰다. 낭패한 기색이 역력했 다. 선주혁의 표정 역시 좋지 못했다. 승기를 잡은 것은 분명했지만 자신을 압박해 오던 노인의 손이 번개와 같은 세 번의 공격을 정확히 막아냈기 때문이었다. 북두폭렬장이 파훼된 셈이었다. '어, 어떻게.....? 역시 사형 말대로인 건가......' 선주혁은 미간을 찌푸리며 사형의 말을 다시 한 번 상기했다. 그는 애써 실망의 기색을 감추며 노인의 움직임을 쫓았다. 지금 은 격전 중이었고 비록 큰 효과를 거두진 못했지만 선기를 잡은 상 태였다.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다시금 선주혁은 북두폭렬장을 전개했다. 요란한 폭음과 함께 노인의 신형이 뒤쪽으로 밀렸다. 앞전 선주혁이 더 강한 노인의 공격에 오히려 멀쩡한 모습을 보 였던 것처럼 노인 역시 이전에 비해 훨씬 수월하게 선주혁의 북두 폭렬장을 막아냈다. 뒤쪽으로 신형을 뽑으며 충격을 줄인 것이다. 다시 한 번 노인의 공격이 전개되고 이번에는 선주혁이 방어에 나섰다. 많은 변화를 내포한 노인의 공격이었다. 하지만 선주혁은 장법에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화려한 변화 의 화문난천장과 변화의 극을 추구하는 난화무영수를 직접 익히고 있는 그였기 때문이다. 이에 그는 북두폭렬장 특유의 속도를 이용해 변화 중의 한 점을 잡아냈고 노인의 공세를 수월하게 막아낼 수 있었다. 결국 노인의 변화와 선주혁으 속도가 서로에게 일순의 우위도 허용하지 않고 팽팽하게 맞서게 되었다. 이번에도 의도한 바대로 되지 않자 노인의 얼굴에 당황하는 기 색이 역력했다. 한눈에 봐도 선주혁은 대전경험이 적었다. 따라서 많은 변화를 준 공격이라면 그를 몰아붙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백발귀마는 이전에 비해 훨씬 노련하게 대처하는 중이었 다. '그렇다면......!' 노인은 애초 생각했던 속전속결의 의지를 버렸다. 그리고는 선 주혁의 공격을 흘려보내기에 주력했다. 그러자 다시금 승기는 선주혁에게 넘어오는 듯했다. 노인의 공 격에 비해 선주혁의 공격이 훨씬 많아진 것이다. 와중에도 선주혁은 북두폭렬장이 왜 이토록 무용해진 것인가에 대해 고심하는 중이었다. 방어를 하면서 느낀 것이지만 분명 자신 의 손이 노인의 손보다 훨씬 빨랐다. 그런데도 공격을 할 때마다 노 인에게 번번히 가로막히는 것이다. 근 이 각여에 이르는 동안 폭발적인 공격을 쏟아내고서야 선주 혁은 적어도 한 가지의 이유는 깨달을 수 있었다. 공격을 위해 자신 의 몸에서 출발해 노인의 몸에 닿기까지의 거리보다 방어를 위해 노인이 몸 주변으로 손을 움직이는 거리가 훨씬 짧았던 것이다. 즉, 속도의 우위가 거리의 차이에 의해서 무용해지는 것이다. 패종회의 인물들로 인해 북두폭렬장의 맹점이 속속들이 드러나 고 있었다. '아차차!' 계속해 북두폭렬장을 쏟아내던 선주혁의 얼굴에 당황스러운 기 색이 떠올랐다. 북두폭렬장의 문제점만을 생각하던 그였기에 혈마 자광기의 내력 소모 정도를 고려치 않았던 것이다. 쌍수뿐 아니라 어깨에 이르기까지 혈마자광기를 주입했깅 내력의 소진은 더욱 컸다. 그제야 선주혁은 알 수 있었다. 노인이 일방적으로 수세에 몰리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런 식 으로 자신이 지치길 기다렸다는 것을. '늙은 너구리 같으니!' 이제는 자신이 운용하는 자광수와 노인의 그것이 내력에 있어는 큰 차이가 없었다. 혼신의 힘을 쏟아 부어 장세(掌勢)를 펼치던 선 주혁이었기에 내력의 소진이 금세 찾아든 것이다. '그렇게 나왔단 말이지?' 선주혁은 무턱대고 내력을 쏟아 붓는 것 대신 다른 방법을 찾아 야만 했다. 지금껏 원초적일 만큼 단순한 응용을 통해 기대 이상의 효과를 찾은 그였다. 이 상황에서 다시금 철무백의 가르침을 떠올 리는 것은 당연했다. 장세의 위력을 강화시킬 수 있는 무엇을 찾아야만 했다. 처 음 떠오른 것은 강철의 기운이었다. 하지만 극도로 발휘된 자광수는 검강도 막아낼 정도였다. 딱히 강철의 기운을 응용한다 해서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금강석(金 剛石), 즉 다이아몬드도 생각해 봤지만 역시 도움이 될 리 없었다. 검강이라면 금강석도 무처럼 잘라낼 것이 뻔했다. 현대인으로서의 자각을 통해 티타늄 같은 합금에까지 생각이 미 쳤지만 역시나 별반 도움은 안 될 듯했다. 기본적으로 티타늄의 경 우는 막연한 이름만 알고 있을 뿐이기에 그 기운을 운용하는 것 자 체가 불가능했다. 좀 더 직관적인 경험이 있어야 그 기운을 응용하는 것이 가능했 던 것이다. '강도를 높이는 방법은 소용이 없고..... 색다른 뭔가가 없을 까?' 초조하게 머리를 굴리던 선주혁은 저쪽 세상에서의 경험 하나를 기억해냈다. 똑바로 살아 보겠다며 여기저기서 일용잡부로 일하던 중 채석장(採石場)에서 일했던 경험이었다. '혹시 그거라면.....!' 선주혁의 두 눈에서 빛나는 자광이 물결을 쳤다. 동시에 그의 자광수가 번득였다. 이전과 다름없는 속도에 단조로운 공격이었다. 노인은 비릿한 미소와 함께 다시금 선주혁의 일 장의 기운을 해 소하려 들었다. 퍼엉! 귀청을 찢을 듯한 폭음과 함께 노인의 신형이 튕기듯 뒤로 밀렸 다. 노인의 얼굴에 떠오른 경악. 그것은 흘려보내기 위해 손바닥을 가져다 대었을 뿐임에도 이전 과 비할 수 없는 폭발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먹혔어!' 선주혁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그가 떠올렸던 것은 다이너마이 트였다. 채석장에서는 아주 가끔씩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할 때가 있 었고 선주혁은 호기심에 가득 차 그 광경을 봤다. 텔레비젼이나 영화와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폭발음과 바위를 산산조각 내는 강렬한 위력에 혀를 내둘렀던 기억은 너무나 생생했 다. 그와 같은 연상을 통해 기운의 응용이 가능했던 것이다. 내친 김에 핵폭탕의 기운을 응용하면 어떨까 싶었지만 텔레비젼 화면을 통해 폭발 장면을 본 것만 가지고는 그 기운을 실을 수 없을 듯 했다. 또한 다이너마이트의 폭발력을 응용한 것만으로도 점점 약해져 가던 위력이 급격히 증가했으니 일단은 노인을 패퇴시키는 데에 주 력해야만 했다. 선주혁은 다시금 일 장을 뻗어냈고 이번에도 노인은 강렬한 폭 발 때문에 분분히 뒤로 물러서기에 바빴다. 더불어 노인의 입가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내상을 입은 것 이다. 그 장면에 신이 난 선주혁은 계속해서 노인을 몰아붙였다. 순식간에 노인의 옷은 넝마처럼 너덜너덜해지고 입가에 흐르는 선혈의 양도 크게 증가했다. 순간 노인의 표정에서 갈등이 읽어졌다. 뭔가를 고심하는 듯한 시간을 오래가지 않았다. 노인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두 눈에서의 자광이 짙어져 마치 등불을 밝힌 듯하고 전신을 휘 감은 자하의 색과 양도 짙어졌다. 한순간 폭발하듯 증가하는 기도를 선주혁은 선명히 느낄 수 있 었다. 잠원기폭. 노인은 수명을 담보로 일시 간 내력을 증진시키는 비기를 사용 한 것이다. '젠장!' 노인 정도의 고수가 잠원기폭공을 사용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고수는 내력의 운용이 크기 때문에 원정지기의 손상도 클 수밖에 없다. 노인 정도의 고수라면 잠원기폭공의 사용은 가히 치명적인 손상 을 가져올 것이다. 아마도 이제 노인의 수명은 몇 년, 혹은 몇 개월 밖에 남지 않았을 것이다. 하긴 당장 죽을지도 모르는데 여생의 길이를 계산할 이유는 없 을 터였다. 잠원기폭의 성공에 노인은 안도의 한숨을 지었다. 자신 정도의 내력을 가진 상태에서 잠원기폭공을 끌어올린다면 자칫 즉사할 수 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전신을 휘도는 충만한 진기에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지었 다. "곱게 죽을 생각은 버려라!" 자신의 수명을 손상시켰기 때문일까? 노인은 선주혁을 고통 속에 죽이리라 호언했다. 더불어 자광수가 한 자도 넘는 수강을 만들어 냈다. 선주혁은 노인이 직접 자신의 사지를 잘라내어 죽이고자 함을 알아차렸다. 장력을 날리지 않고 수강을 만들어냈기때문이다. '다이너마이트보다 강력한 무엇은 없을까?' 선주혁이 다시금 맹렬히 머리를 굴렸지만 노인은 그에게 시간을 허용하지 않았다. 자색의 수강이 그의 어깨를 향해 날아들었다. 선주혁은 우수가 정면으로 노인의 수강을 마주했다. 퍼엉! 폭음과 함께 뒤쪽으로 밀리는 신형. 이번에는 선주혁이었다. 거의 배로 증폭된 노인의 내력을 이겨내기에는 무리가 있었던 것이다. 단 한 번의 충격임에도 기혈이 뒤틀리는 느낌이었다. 또 한 번만 이런 충격을 받는다면 치명적인 내상을 입을 것이 분명했다. 노인의 공격이 다시 한 번 펼쳐지고, 선주혁은 방어책을 바꿨다. 강맹한 공격은 직접 마주하는 것보다 흘려보내는 것이 유리함을 이미 경험한 적이 있는 그였다. 그는 무당의 면장에 비유되는 극유의 장법인 마교의 화무난천장 을 사용, 노인의 공세를 해소해 보고자 했다. 과연 화무난천장은 이유제강(以柔制剛)의 극의(極意)를 보였다. 노인의 엄청난 내력을 뒤로 흘려보내는 것이다. 만약 선주혁이 화무난천장이 보다 숙달이 되었다면 극에 달한 변화를 이용해 노인의 공게를 역으로 되돌려 보낼 수도 있었을 것 이다. 바로 이점이 선주혁의 한계였다. 내력의 운용에 있어서 그의 깨 달음은 가히 무림에서 손을 꼽힐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은 반쪽에 불과했다. 상승의 무공은 내력만으로 이룰 수 없는 것이다. 상대와 압도적 인 내력의 차이가 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겠지만 엇비슷한 상 태라면 초식 자체의 위력과 정묘한 활용이 더 중요한 법이다. 많은 무공를 알고 있지만 스스로 창안한 몇몇의 무공 이외는 깊 은 깨달음이 없는 선주혁이었다. 물론 그가 만든 무공은 범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기이함이 있었 다. 하지만 사형이 지적한 대로 진정한 고수에게는 한계가 명확히 드러나는 수법이기도 했다. 오랜 세월 다듬어온 깊이나 현묘함이 전혀 없기 때문이었다. 결국 선주혁은 노인의 압도적인 내력의 우위에 연신 뒤로 물러 서기 바빴다. 화무난천장의 묘용으로 공격을 흘려보냈기에 바빴던 것이다. 노인은 선주혁이 갑작스레 기이한 장법으로 자신의 공세를 흘려 보내자 내력을 한층 끌어올렸다. 그러자 수가의 길이가 길어지고 혈마자광기의 특성인 폭발력이 조금씩 효과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토록 부드럽게 노인의 공세를 받아넘기고 있음에도 장과 장이 맞닿을 때마다 작은 폭발이 일어나는 것이다. 만약 선주혁이 자광 수를 운용하고 있지 않았다면 그의 손은 진즉 날아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계속해 수세에 몰리던 선주혁은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노인의 공세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고갈되어 가던 내력이 보충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처음에는 미약하기 짝이 없었기에 제대로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한 번 감각을 곤두세우기 시작하자 그와 같은 느낌은 보 다 명확해졌다. '흘러 들어오고 있어? 수강을 통해? ' 그제야 선주혁은 명확히 알 수 있었다. 노인의 수강과 접촉할 때 마다 노인의 내력이 흘러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선주혁은 하나의 경지를 떠올렸다. 천인합일. 흡성대법 최후의 단계인 천인합일이었다. 하단전인 정성, 중단 전인 해성, 그리고 상단전인 진성(眞星)이 열리는 이 단계에서는 상 대와 직접 피부가 닿지 않은 상태에서도 내력의 흡수가 가능한 것 이었다. 우주의 모든 기운이 내 것이 되리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 조금은 이해가 되는 선주혁이었다. 그는 내친김에 흡성대법을 있는 대로 끌어올렸다. 그러자 노인의 수강에 응축된 엄청난 내력이 본격적으로 선주혁 의 신체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흡수된 내력은 정성, 해성, 진성을 거쳐 빠르게 선주혁의 내력으로 변환되었다. 흡입되는 속도와 흡수한 내력을 자신의 것으로 하는 속도 자체 가 이전과는 비할 수 없이 빨랐다. 이에 선주혁의 표정이 환해져 갔다. 반면 노인의 안색이 급격히 창백해졌다. 한 번 공세를 펼칠 때마 다 내력의 고갈이 심한 것을 처음에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잠 원기폭공을 운용했다하더라도 이 정도의 위력을 내기 위해서는 내 력의 소모가 극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뭔가 이상했다. 같은 수법을 사용하고 있음에도 내력의 소비가 점점 커지는 것이다. 무리하게 잠원기폭공을 운용했기에 생기는 부작용인가 싶었지 만 그것도 아니었다. 경맥을 타고 도는 진기의 흐름은 원활하기만 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진기의 소모가 극심해지는 것이 느껴지며 노인은 어 처구니없는 상상을 했다. '설마?' 노인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급급히 수강을 거둬들였다. 순간적으로 진기의 소진이 멈췄다. '진정 흡성대법이었단 말인가? 하지만 놈의 손이 내 몸에 닿아 있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였다. 흡성대법이란 괴공(怪功)이 있다 는 전설은 많이 들었다. 애초부터 남의 진기를 자신의 것으로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기이하기 짝이 없는지라 전설로만 치부할 수밖에 없는 무공이다. 만약 그런 괴공이 존재한다고 쳐도 살상을 위해 운용한 강기를 통해 진력을 흡수한다는 것은 정말로 말이 안 되는 일이다. 노인이 당황해 하는 사이 선주혁은 다시금 장법을 전환해 북두 폭렬장을 펼쳤다. 쾌속무비한 장력이 가슴을 쪼갤 듯 날아오자 노인은 다른 선택 을 할 여유를 갖지 못하고 막아야만 했다. 상대가 흡성대법을 사용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었지만 저처럼 무작스럽게 빠른 공격 을 몸을 움직여 피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퍼억! 둔탁한 음향과 함게 장과 장이 부딪치자 진기가 급속도로 빨려 나가기 시작했다. 대경한 노인은 황급히 장을 거둬들이고자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마치 초강력 아교라도 바른 듯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은 것 이다. 노인은 황망히 남은 손을 휘둘렀다. 백발귀마는 번개와 같이 손을 움직여 공격을 막았다. 놀랍게도 나머지 한 손마저 백발귀마의 손바닥에 붙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이럴 수가.....!' 단전의 진기가 제멋대로 움직이더니 상대의 장심을 통해 빠져나 가고 있었다.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몸부림을 쳐 봤지만 소용 없었다. 내력이 우위에 있는 만큼 상대의 신형이 크게 흔들릴 정도로 움 직이긴 했지만 손바닥은 떨어질 생각도 안 했던 것이다. 노인은 이를 악물고 몸을 돌렸다. 그러자 백발귀마는 맥없이 휘둘러졌다. 원심력에 의해 두 발이 떨어져 몸 전체가 노인이 휘두르는 대로 돌아간 것이다. 그럼에도 노인과 선주혁의 양 손바닥은 찰싹 붙어 움직이지 않 았다. 그렇게 수차례 백발귀마를 떼어 놓으려던 노인이었으나 모든 시 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이와 같은 현상 자체도 노인의 내력이 선주 혁을 완벽하게 압도하기에 벌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흡성대법을 당하는 도중의 움직임이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에. 하지만 어는 한순간부터는 그나마 시도조차 불가능했다. 백발귀마가 버티는 힘이 자신을 넘어선 것이다. 급격히 내력을 흡수당해 더 이상 백발귀마를 휘두를 수 없게 된 노인,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잡아먹을 듯 백발귀마를 노려보는 것뿐 이었다. 잠시 후 노인은 짚단처럼 쓰러졌다. 잠원기폭공으로 끌어올린 원정지기마저 흡수당해 생명을 잃은 것 이다. 한편 선주혁 역시 내심 당황하는 중이었다. 처음에는 마냥 신나기만 했다. 강기를 통해 내력을 흡수할 수 있 다는 사실이 만족스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도 잠시. 직접 손을 맞닿은 후에도 기쁨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급속도로 상대의 내력을 흡수했다. 이전에 비해 훨씬 빨라진 진기의 흡수 속 도를 만끽했던 것이다. 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이미 체내의 진기를 감당키 힘든 상태. 당장이라도 주저앉아 과도하게 체내를 휘도는 노인의 진기를 자 신의 것으로 만들어야만 했다. 그러나 눈앞의 노인이 당장이라도 자신을 쳐 죽일 표정을 하고 있는 마당에 흡성대법을 멈출 수는 없는 터. 전신혈맥이 터질 듯했지만 선주혁은 이를 악물고 노인의 내력을 흡수해야만 했다. 노인의 목숨을 먼저 끝내는 것이 우선이었던 것 이다. 과거에도 자신의 특이한 신체가 효용을 발휘했듯 이번에도 모험을 할 수밖에 없었다. 노인이 급기야 쓰러지고 선주혁은 황급히 좌정하고 앉아 조식을 시작했다. 전신혈맥에서 극한의 고통이 느껴졌지만 이대로 정신을 잃어서는 안 되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최대한 골고루 노인의 내력을 전신으로 퍼뜨리고 정성, 진성, 해 성으로의 순환을 통해 자신의 내력으로 변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예전에 비해 엄청나게 빨라진 변환의 속도였으나 선주혁은 답답 하기만 했다. 워낙 엄청난 노인의 진기에 온몸이 터져나갈 것만 같 았던 것이다. 이를 악물고 흡성대법을 운용하는 선주혁은 알지 못했다. 자신의 머리 위로 하얀 연기와 같은 것이 피어올라 기이한 형태 를 만들어 가고 있다는 것을....... =탈피(脫皮)는 없다= <<1>> 간신히 노인의 내력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 선주혁은 전신을 휘 감는 충만한 느낌과 함께 눈을 떴다. 안도의 한숨이 먼저 튀어 나왔다. 자신의 특이한 신체가 아니었으면 이미 죽었을 것임을 알고 있 었던 것이다. 흡성대법을 사용할 때는 정말이지 조심하지 않으면 큰일 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준 노인과의 일전이었다. 선주혁은 몸을 일으키려 했다. 두 눈을 부릅뜬 노인의 시체가 있 는 곳에서 빨리 벗어나고팠던 것이다. 순간 선주혁은 주변의 경물이 발아래로 향하는 것을 느꼈다. 그의 몸이 허공으로 솟구친 것이다. 하늘 높이 떠올랐다가 땅에 내려선 선주혁은 잠시 어리둥절하다 곧 이유를 깨달았다. 노인의 막대한 진기를 흡수한 터라 자신의 힘 을 주체하지 못했던 것이다. "호오!" 온몸을 가득채운 충만한 기운에 선주혁은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이제는 전 무림에서 내공만큼은 자신이 제일일지도 모를 것이다. 천하제일내공. 소매치기에 불과했던 자신이 무엇인가에 있어 제일을 자부할 수 있게 될 줄이야.....! 선주혁은 그것만으로도 왠지 가슴이 뿌듯해졌다. 그는 신형을 움직여 달리기 시작했다. 내공의 진척은 진척이고, 일단은 주백광과 단목지민을 구하는 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가볍게 땅을 박찼음에도 엄청난 속도로 앞으로 튀어나가는 것에 선주혁은 절로 호기가 일어 입을 모아 긴 휘파람 소리를 냈다. 휘이이익. 휘파람소리는 순식간에 저 먼 곳으로 사라져 갔다. <<2>> 남창 부근에 도착한 선주혁은 냇가를 찾았다. 자신이 염색을 통 해 머리색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적들이 알고 있는 상황이 다. 하지만 주백광과 단목지민의 행방을 수소문하는 데에 있어서 백 발은 지나치게 눈에 띄는 것이 사실이었다. 이에 다시 염색을 해 조 금이라도 편하게 주백광의 향방을 찾으려는 것이었다. 염색약을 꺼내들고 냇가에 쭈그리고 앉았던 선주혁은 두 눈을 둥그랗게 떴다. '머리색이 검어?' 염색을 한 듯 하얗기만 하던 머리카락이었다. 한데 어찌된 일인 지 삼단처럼 검어진 것이다. 물론 전체가 다 검은 것은 아니었다. 귀밑머리와 옆쪽의 머리만은 여전히 하얀 색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개울물에 비친 탓이라 정확치는 않지만 얼굴색도 이전과는 뭔가 달라보였다. 선주혁은 재빨리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가무잡잡하던 피부가 이전에 비해 확연히 밝아졌다. 그는 재빨리 소매를 걷었다. 달랐다. 여전히 하얗다고는 할 수 없지만 가무잡잡한 정도가 달랐던 것 이다. "뭐야?" 잠시 어리둥절하던 선주혁은 지난날 무협소설에서 읽었던 한 가 지를 떠올렸다. 탈태환골(奪胎換骨)! 노인의 내력을 흡수하면서 자신이 그 전설 속의 현상을 겪은 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듯 갑작스런 용 모의 변화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식을 마치고 눈을 떴을 때, 자신의 주변에는 껍질(?)이 없었다. 보통 소설을 읽으면 탈태환골을 마치고 나서 자신이 벗어 버린 허물을 본다. 그러고 나서야 자신이 탈태환골했음을 깨닫는 주인공 들이다. 한데 선주혁이 눈을 떴을 때 주변에 그런 허물이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고심했음에도 탈태환골 이외의 해답을 찾지 못한 선주혁은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그럼 그렇지! 뱀이냐? 허물을 벗게?' 엉터리 무협소설가들이 탈태환골에 대해 잘못 표현한 것이라 생 각한 것이다. '그리고 허물을 벗으면 그게 탈피환골(脫皮換骨)이지 탈태환골이 냐?' 스스로 결론을 내린 선주혁은 기분이 한껏 좋아졌다. 탈태환골은 자신이 삼화취정(三華聚頂)이나 오기조원(五氣朝元)과 같은 지고무상한 경지에 올랐다는 증거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환한 표정으로 귀밑머리와 옆쪽의 머리의 흰 부분만을 염 색했다. 나름대로의 멋이 풍기긴 했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눈길을 끌 요소였기 때문이다. 염색을 마친 선주혁은 냇가에 비친 자신을 다시 확인했다. 이제 는 자신에 대한 소문만으로는 알아보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예전이라면 백발이 아니더라도 눈에 띄는 검은 피부로 인해 쉽 게 구분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햇볕에 약간 그을린 정도의 피부색이라 햇볕 아 래에서 일하는 농부보다도 그 색이 밝았다. 이 정도라면 가까이서 얼굴을 확인하지 않고서는 자신을 알아볼 방법이 없을 터였다. '게다가 이 녀석 꽤 미소년이라니까!' 냇물에 비친 자신을 향해 한마디를 던진 후 선주혁은 그제야 자 신의 얼굴도 이전과는 뭔가 다를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본래는 지나치게 클 정도의 눈이 늘 거슬렸었다. 한데 냇물에 비친 자신의 눈은 이전에 비해 작아져 있었다. 반면 오똑하지만 귀여운 느낌의 코는 좀 더 높게 솟았고, 선이 굵어졌다. 가늘기만 했던 입술 또한 약간 두툼해져 보다 강인해 보였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여전히 미소년 축에 들었지만, 이전에 비해 훨씬 남자답고 성숙한 모습으로 변한 것이다. 여전히 사형에 비하면 부족해 보였지만 그래도 꽤 준수한 청년 의 모습 자체였다. '돈 안 들이고 성형 수술한 셈인가?' 변한 자신의 모습에 만족해 하던 선주혁의 모습이 곧 꺼지듯 사 라졌다. 이제 남은 것은 주백광과 단목지민을 찾는 일뿐이었던 것 이다. <<3>> 남창의 중심가를 활보하고 다녀도 자신을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 보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선주혁에게 색다른 즐거움이었다. 염색을 하고 다녔을 때도 마음속 깊은 곳에는 불안한 심정이 있었던 게 사 실이다. 이제야말로 자신이 백발마귀임을 알아볼 사람이 전무할 것임을 확신했기에 그는 실로 오랜만에 편안한 마음으로 저자를 활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좀처럼 주백광과 단목지민의 행적을 찾을 수 없자 그는 다시금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미 패종회에 당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이 자꾸만 떠오르는 것이다. 막연히 먼저 달려온 것이 조금은 후회되는 선주혁이었다. 두 사 람을 찾기 위해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다. 그는 가장 떠올리기 쉬운 방법대로 주백광의 소식을 듣고자 했 다. 한눈에도 무림인들이 자주 드나드는 것으로 보이는 주루에 앉 아 떠도는 소문에 귀를 기울이려는 것이다. 주백광은 그 명성이 강호에 널리 알려진 유명인사다. 그에 관한 소식이 있다면 주루에서 충분히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선 주혁이 아는 한 이쪽 세상의 주루는 라디오나 텔레비전과 같은 대 중매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어지간히 유명한 사건들은 모두 주루 에서 회자되고 있으니 선주혁에게는 최고의 정보원이었다. 그는 제법 그럴 듯해 보이는 주루 한 곳을 정해 들어갔다. 바깥 쪽에서 확인한 대로 무림인처럼 보이는 자들로 주루는 북적였다. 1층에는 체격이 우람하고 험상궂어 보이는 무인들이 가득했다. 주백광이나 단목지민의 행적에 관한 것을 언급할 만한 사람들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선주혁은 잠시 머리를 굴렸다. 모름지기 고급정보는 고위층의 입에서 나오는 법. 보통 고위층이라 함은 술 한 잔을 기울여도 전망 좋은 곳을 찾기 마련이다. 고위층은 고층을 선호하는 것이다. 결론을 내린 선주혁은 2층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과연 2층에는 한눈에도 몸에 걸친 옷가지가 다른 자들이 많았 다. 일단 소지한 검과 도가 번쩍번쩍하는 것이, 있어 보이는 자들로 가득찬 2층이었다. 아마도 1층과 2층은 주대 자체가 다를 것이다. 그렇기에 어지간 한 재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1층에서 술을 마시는 것이고, 2층 에는 이처럼 부유해 보이는 자들이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선주혁은 자신의 판단이 옳았음에 만족하며 구석진 자리를 찾았 다. 그리고 좀 더 편한 마음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주루의 2층을 살피던 선주혁의 눈이 동그래졌다. 창가쪽, 아마도 2층의 자리 중 가장 전망이 좋을 듯한, 그곳에 앉아 있는 일단의 무리 때문이었다. 아니 그중 두 사람이 선주혁의 시선을 확 잡아 끈 것이다. "백 소저......, 남궁일?" 사천백가의 유일한 생존자인 백화란과 남궁세가가 자랑하는 옥 기린 남궁일이 이곳 남창에 있었던 것이다. "백 소저, 미안하오." 남궁일은 진정어린 사과를 하는 중이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제가 억지를 부려 이곳까지 향한 것만으로 도 죄송할 뿐입니다." 백화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녀의 말은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던 귀엽게 생긴 여자가 받았 다. "언니, 이 일은 오라버니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그의 행 적을 쫓아 십만대산까지 가는 것은 너무 위험하거든요." 커다란 눈이 맑게 빛나는 그녀는 남궁일의 사과를 거드는 중이 었다. 귀염성이 넘치는 용모인 그녀는 해맑게 웃고 있었다. 대화의 내용 상 아마도 남궁일의 동생이리라. 문제는 그녀가 소설 속에는 등장하지 않았었다는 것이었다. 선 주혁이 읽었던 소설에서 무림은 사분된 세력이 지배했다. 무림맹, 정의련, 사파연합, 그리고 천마맹의 거대 세력이 무림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대세가가 주축이 된 정의련은 소설 속에서 거의 등장 하지 않았다. 물론 남궁일을 비롯한 몇 명이야 소설 속에서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패종회와 최후의 일전을 벌일 때도 정의련이란 이름은 거의 볼 수가 없었다. 남궁일의 동생을 소설에서 보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리라. 놀라운 것은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의 천진난만한 미소가 선주혁이 아는 누군가를 확연히 떠오르게 했다. '그....., 이름이 뭐지?' 이제는 이쪽 세상으로 넘어와 몇 년이 지난 탓일까? 연예인의 이름까지도 가물 거렸다. '아! 맞다. 문근연!' 동그랗게 눈을 뜨고 생글생글 미소를 짓던 소녀의 이름이 선뜻 기억이 나지 않았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유명한 배우였다. 문근연과 닮긴 했지만 이번에는 앞서 본 닮은꼴의 미인들과는 달리 업그레이드가 심했다. 어찌 생각하면 흡사한 것은 이미지뿐일지도 모른다. 눈썹은 가늘고 짙었으며 눈은 더욱 커다랬다. 해맑은 느낌은 그 커다란 눈과 선명한 눈동자에서 비롯되는 것 같았다. 또한 약간은 둥근 듯한 코를 가진 문근연과는 달리 그녀의 코는 보다 날카로운 선을 가져 오똑한 느낌이 강했다. 문근연이라는 배우가 꼬마로서 귀엽다는 느낌분인데 반해 이쪽의 그녀는 맑은 느낌과 여성적인 면모가 좀 더 부각되어 있는 것이다. 그녀에 대해 잠시 생각하던 선주혁은 불련 듯 떠오른 의문이 고 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랬을까?' 백화란을 이런 곳에서 다시 보게 된 반가움보다 왜 자신이 본 소 설에서 정의련이 거의 보이지 않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더 강하게 다가왔다. 워낙 엉터리라고 생각을 하며 소설을 읽었기에 읽는 중 에는 느끼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혹시.....?' 소설 속의 주인공인 남지학, 즉 지금의 사형이 차원이동을 하는 순간에 자신은 책을 던져 버렸다. 당최 말이 안 되는 전개에 짜증이 났었기 때문이다. 그가 책을 던지기 바로 직전, 밑에 몇 줄이 더 보였던 것이 기억 이 났다. 사형이 사라진 것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던 자들에 대한 이야기 였다. 선주혁으로서는 그들이 누군지는 알 수 없었다. 뒤쪽을 읽지 않 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차원이동 후 말도 안 되는 활약을 한 사형이 무림에 돌아 와 또 다른 사건에 휘말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사건이 무엇이든 그 간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았던 정의련과 깊은 연관이 있을 가능성 이 높았다. 물론 이와 같은 추측의 근거는 없었다. 다만 오랜 세월 무협 소설을 읽어온 바에 의한 추측일 뿐이었다. 어쩌면 차원이동한 상태에서 소설이 끝이 났을 수도 있을 것이고, 돌아와서 잘 먹고 잘 살았다는 식으로 싱겁게 끝날 수도 있는 일이 었다. 하지만 정말로 또 다른 악의 무리가 등장한다면 패종회와의 싸 움에서 피해가 적었던 정의련이 사형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어쩌면 정의련 자체가 사건을 일으키는 무리일 수도 있었다. 거기에까지 생각이 이르자 선주혁은 크게 후회가 되었다. 만약 인내심을 갖고 책을 끝가지 읽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기에. 백화란에 대한 관심은 물론이거니와 자신이 모르는 인물들의 등 장에 선주혁은 더욱 촉각을 곤두세웠다. "백 소저께서는 어찌 그와 같은 악적을 보고자 하시는 것인지 소 생은 이해가 되지 않는구려." 백화란의 옆쪽에 앉아 있는 청년이었다. 구릿빛 피부를 가진 건 장한 청년은 짙은 두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불평을 한다기보다 는 뭔가 안타까운 듯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백 소저에게는 불구대천의 원수가 아니겠소? 복수를 하고자 하 는 뜻은 당연한 것이지요." 보름달 같은 얼굴에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의 청년이 백화란을 대신해 대답을 하고 나섰다. "복수를 위함은.....아닙니다." 백화란은 나직하지만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사람에게 직접 듣고 싶은게 있을 뿐이지요." "그런 흉적에게 무슨 말을 듣고 싶단 말이오?" "백가의 혈사가 진정 그의 소행인지 확인 받고 싶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오, 백 소저, 흉적이 다른 자일 수도 있다는 말이 오?" 구리빛 피부의 청년이 부리부리한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 다. "그럴 리가! 곤륜이마의 소행임이 자명한 일이오. 목격자가 있는 마당이거늘.....!"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의 청년이 말했다. "백 소저께서는 그 일에 대해 의문을 품고 계신 듯하오, 목격자 가 있다지만 뒷모습밖에는 보지 못한 것이 사실이니까요. 사실 백 발귀마의 백발을 가장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지않소?" 남궁일이 부드럽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자 여태 침묵하고 있던 서생차림의 청년이 창백한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정황이 확실한 일이오. 그들이 사용했던 독은 물론이거니와 도 난당했던 수투 역시 백발귀마가 소유한 게 밝혀지지 않았소. 그러 니 달리 생각할 연유가 없거늘......"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오." 남궁일이 창백한 안색의 청년 말을 자르고 나섰다. "백가의 참사 이후 백 소저와 소생은 정체 모를 고수들의 습격을 받았소. 놀라운 정도의 무공을 소유한 자들인지라 소생이 감당하기 에은 무리가 있었소." 남궁일의 말에 중인들은 크게 놀라는 표정이었다. 옥기린 남궁일의 무위는 천하를 놀라게 하는 중이었다. 남궁세 가가 배출한 최고의 기재라 칭해지는 그가 적의 숫자가 아니라 무 공을 이유로 감당키 힘들다는 말을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옥용검마와 백사회의 두 명이 소생을 도왔기에 간신히 도 주할 수 있었소. 만약 곤륜이마가 백가의 혈사를 일으킨 장본인들 이라면 왜 백 소저와 소생을 도왔겠소? 더구나 악착같이 백 소저를 죽이려들던 정체 모를 무리들은 또 무엇이란 말이오?" 남궁일이 제기한 의문에 선뜻 대답할 사람은 없었다. "누군가 곤륜이마에게 누명을 씌웠을 수도 있다는 뜻이구려." 서생차림의 청년이 침음성을 흘리듯 중얼거렸다. "정체 모를 무리가 백가의 유일한 생존자를 노리는 것에는 분명 의미가 있을 것이오. 그들로서는 백 소저가 당시 무엇을 목격했는 지 모르고 있을 테니 말이오." 남궁일의 설명을 들은 청년들은 그데야 백화란이 곤륜이마를 다 시 만나고자 하는 이유를 납득할 수 있었다. "확실히 음모의 냄새가 짙구려, 지금껏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남 궁 형을 위협할 정도의 무공을 지닌 고수들을 배출할 정도의 세력 이라....., 그렇다면 단순히 곤륜이마와 얽힌 일로 끝이 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오." "제갈 형의 말대로요. 그런 자들이 사건을 일으킨다는 것은 분명 감춰진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뜻. 이번 일은 확실히 짚고 넘 어갈 필요가 있을 것이오." 둥근 얼굴에 사람 좋게만 보이던 청년의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눈 꼬리가 치켜세우자 부드럽던 인상이 다시없을 만큼 날카롭게 변 한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곤륜이마를 직접 만나 확인할 필요가 있을까 요?" 청년들의 굵은 음성 사이에 끼어든 가녀린 목소리. 그것은 남궁일의 여동생 옆에 자리한 다른 한 여자의 것이었다. 갸름한 얼굴형에 옆으로 앉은 서생차림의 청년처럼 얼핏 병을 앓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자신과 관련된 이야기인데다가 백화란이 혈사의 주범이 사형과 자신이 아닐 거라 추측하는지라 크게 고무되어 이야기를 듣던 선주 혁은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남궁일의 여동생이나 방금 전 입을 연 여자는 범상치 않은 신분 이랄 수 있다. 오대세가와 연관이 있음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한데 그간 선주혁이 본 연예인과 비슷한 점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그 여인이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엇다. 선우 아가 씨에 대한 기억만 없다면 두 눈이 휘둥그레지고 입을 헤벌쭉 벌릴 만큼 미녀임은 틀림없었다. 다만 특정 연예인을 연상시키는 외모를 갖고 있지 않은 것이다. "곤륜이마가 백가의 혈사를 주도했건 그렇지 않건 그들이 곤륜 의 반도임은 확연한 사실이니까요." "그게 그렇게 생각할 일만도 아닌 듯하오. 사실 그들이 무림맹의 공적으로 지목된 원인이 바로 백 소저의 가문에서 있었던 혈사가 아니겠소?" 남궁일이 부정하자 선이 가는 여인이 싱긋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일을 계기로 두 악적의 본색이 드러난 것으로 봐야겠죠. 그 들이 만약 진정 곤륜의 제자들이라면 어찌 마공과 사술을 자유자재 로 사용하겠어요? 설마하니 그와 같은 무공을 곤륜에서 내려온 이 후에 익혀서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은 아니겠죠?" 여인의 말에 남궁일은 입을 다물었다.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라 말하고 싶었다. 그 두 사람은 삼 년여의 세월동안 실종되어 있었다. 그 정도의 시간이면 충분했다. 자신만 해도 삼 년여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비약적인 발전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게 맞아, 이 여자야!' 선주혁이 속으로 외친 말이었다. 그녀의 추측대로 자신과 사형 은 곤륜에서 내려와 절기를 익힌 것이었다. 하지만 일반적인 상식으로 고작 삼 년여 만에 무공이 그처럼 급 진전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야말로 천고의 기재들에게나 통용되는 상식을 벗어난 일이었으므로. "그렇다면 그 사람들의 진정한 정체가 무엇일까요?" 백화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교에서 곤륜에 파견했던 간세가 아닐까요? 염마와의 동행을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지요. 실종되었던 경력이 있다고 하니 그 사이에 포섭된 것일 수도 있고요." "하지만 저와 남궁 소협을 돕던 옥용....검마는 사파연합의 고 수들과 함께였어요." 백화란의 말에 중인들은 다시금 침묵을 지켰다. "그들이 어디에서 무슨 목적으로 왔는지보다는 그들이 일으킨 혈사를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진곤혈사라 불리는 그 일만 해도 정도 무림과 척을 지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고 봐야겠죠." "만약 그들이 무고한데......., 목숨을 위협받고 있었다면? 그랬다 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살수를 전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 었을까요?" 백화란의 조심스러운 말에 창백한 안색에 얼굴선이 가는 여인이 눈썹을 상큼 치켜 올렸다. 곱게만 보이던 그녀가 표정을 바꾸자 상 당히 신경질적인 인상을 강하게 풍겼다. "백 소저께서는 자꾸만 곤륜이마를 응호하시려드는군요. 만약 저들이 무고했다면 순순히 체포에 응한 후, 결백을 밝히면 될 일이 지요." 여인의 말에 남궁일은 씁쓸하게 웃었다. 말이야 그럴 수 있겠지 만 정작 곤륜이마가 순순히 무림맹의 인사들에게 잡혀왔다면 그들 에게 남은 것은 죽음뿐이었을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묵연수투를 소지한 채로 체포된 마당에 그 어떤 변명이 먹히겠 는가? "우리만이라도 미리 결론을 내릴 필요은 없을 것 같소. 어쩌면 그들 두 사람을 통해 우리가 전혀 모르고 있는 사실을 알 수도 있는 일이 아니겠소? 그러니 이번의 여행이 무의미하다 말할 수는 없을 것이오." 남궁일이 대충의 상황을 정리하려 들었다. "그래요. 덕분에 남창도 구경하고 잘 된 일이잖아요." 남궁일의 동생이 눈웃음을 지으며 밝게 말하자 무거웠던 분위기 가 한층 가벼워졌다. "그..... 백발귀마라는 자, 악인이건 그렇지 않건 대단한 인물임 것만은 사실인듯 싶소." 구리빛 피부의 건장한 청년이었다. "하긴.....! 잘해야 우리 또래 정도밖에 안 되는 듯한데, 그 정도 의 무공이라니!" 어느새 사람 좋은 얼굴로 바뀐 둥근 얼굴의 청년이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염색을 하고 십전성이 있는 곳으로 숨어들었으니 그 배포도 보 통은 아니지요." 서생차림의 청년도 동의하고 나섰다. "그 도귀.....라는 사람과 망년지교(忘年之交)를 맺었다면서요? 옥소선자도 백발귀마를 돕고 나섰고 말이에요." 남궁일의 여동생이 한마디 거들었다. "흠....., 소문에 의하면 그렇다는구려. 도귀와 또 다른 한 명이 광동(廣東)으로 향했다고 하오. 아마도 백발귀마의 뒤를 쫓아 마교 로 향한 것이 아닌가 싶소." 서생차림인 청년의 말에 선주혁의 귀가 번쩍 뜨였다. 주백광과 단목지민에 관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더불어 선주혁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이 두 사람이 자신 이 살아 았다는 소문을 들은 것이 분명했다. 그들이 십만대산으로 향했다함은 일단 환마의 수작에 당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 이다. 결국 주백광이 무사하다는 소식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도귀의 성품이 제멋대로라고는 하지만 그 성품이 호방하여 장 부의 풍모를 갖추고 있다고 들었거늘....., 그와 같은 이를 친우로 둘 수 있다는 것은 백발귀마에게 우리가 모르는 일면이 있다는 의 미일 수도 있겠구려." "간교한 수작에 속은 것일 수도 있고 말이죠." 남궁일의 말에 창백한 안색의 여자가 입 끝을 말아 올리며 응대 했다. '저 여자는 대체 왜 저렇게 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야?' 계속해 자신을 안 좋은 쪽으로 몰아가는여인을 보며 선주혁은 내심 투덜거렸다. "이제 그런 얘기는 그만하죠. 이왕 남창에 왔으니 실컷 즐기다 가야죠." 남궁일의 여동생이 다시금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그녀는 특정적으로 밝은 용모와 목소리, 그리고 재치 있는 입담 으로 금세 좌중의 분위기를 바꿨다. 그런 쪽으로 탁월하다 할 만큼 의 재능을 보이는 여자인 듯했다. 그녀가 일행들의 표정을 환하게 만들고 있을 그때쯤이었다. 여성 특유의 직감으로 누군가 자신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음을 느낀 것일까? 백화란은 선주혁이 있는 방향으로 갑작스레 시선을 돌렸다. 선주혁은 저도 모르게 흠칫 놀라 그녀를 외면했다. 하지만 백화란이 이미 그의 얼굴을 확인한 후였다. 백화란은 큰 충격을 받은 사람처럼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얼어 붙었다. 그녀의 표정이 기이한 것을 눈치 챈 일행들의 시선이 모두 선주 혁에게로 쏠렸다. '알아본 걸까?' 애써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렸던 선주혁은 자신의 용모가 변했 음을 상기했다. 그는 오히려 자신이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백화란과 남궁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는 사람이오?" 남궁일은 경계심 가득한 표정으로 백화란에게 물었다. 그녀를 노리는 암중의 세력이 있음을 잊지 않은 그였던 것이다. "아, 아니에요. 하지만..... 저렇게 닮은 사람이 있을 줄이 야.....!" "누구와 닮았다는 거예요, 언니?" 남궁일의 여동생이 백화란에게 물었다. "아니, 아니야. 연매(娟妹). 내가 사람을 잘못 본 모양이야." 백화란은 살짝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자신의 실수로 인해 일행 모두가 낯선 사람을 뚫어져라 쳐다보게 되었다. 시선을 받는 쪽에 서 생각하면 큰 무례였던 것이다. 백화란이 자신의 실수였다고 말하자 남궁일은 자리에서 일어났 다. 그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선주혁 쪽으로 향했다. 선주혁은 조금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은 채 공력을 끌어올렸다. 옥기린 남궁일에 대해 그는 이 자리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읽었던 부분까지 사형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걸 출한 인물이 바로 남궁일이었다. 사형이 기연과 기연을 통해 절대의 무공을 지녔다면 남궁일은 철저하게 가문의 후광을 등에 업고 강자의 위에 올랐다. 태어나자마자 그가 무림사에 다시없을 무골(武骨)임을 알아본 남 궁세가는 그를 위해 총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가문의 원로들이 한 데 모여 벌모세수(伐毛洗髓)를 하고 영약을 밥 먹듯 먹여 키워낸 인 재가 바로 남궁일이었다. 표면적으로야 신웅십팔걸의 수위를 다툴 정도로만 알려져 있었 으나 당금 무림에서 그의 적수가 몇 되지 않음을 선주혁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사형조차 최후의 심득을 얻기 전까지는 눈앞의 이자보다 하수였 음을 알기에 선주혁으로서는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소생은 남궁일이라고 하오. 황산(黃山)에 자리한 남궁세가 출신 이외다." 남궁일은 포권을 취한 채 정중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이어 그는 재빨리 자신이 다가선 이유를 설명햇다. "소생의 일행이 귀하를 누군가와 착각을 해 무례를 범했으니 양 해를 부탁드립니다." "괘, 괜찮소." 선주혁은 서서 인사를 받아야 할지 앉아서 인사를 받아야 할지 몰라 엉거주춤한 자세로 두 손을 맞잡았다. "갑작스레 적대어린 시선을 받았으니 얼마나 당황스러우셨겠 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희와 잠시 동석을 하는 것은 어떠시 오? 한 잔 술로 형장께 사과의 뜻을 표하겠소이." 남궁일의 말에 그의 일행 중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의 청년과 서 생차림의 청년, 그리고 선이 가냘픈 여인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남궁일은 이미 자신의 가문을 밝힌 상태였다. 그 정도나 되는 인물 이 저토록 정중한 사과를 했으면 그것으로 충분할 터였다. 굳이 저 와 같은 저자세를 취할 필요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물론 저런 모습이기에 남궁일이 높이 평가를 받고 있음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비슷한 연배에 모든 찬사가 남궁일에게 쏠리고 있 음을 알고 있는 그들이었다. 조금만 달리 생각하면 경쟁의 관계에 있는 그들로서는 남궁일의 지나친 예절이 좋게만 보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아, 아니오. 굳이 그럴 필요까지야......" "큰 무례를 범한 것이 사실이니 사양치 마시오. 이렇게 넘어간다 면 소생이 더욱 불편하니까 말이오." 남궁일이 간곡한 표정으로 말하자 선주혁은 더 이상 사양키 힘 들었다. 일단 백화란이 자신을 못 알아보는 이상 곤란한 일은 없을 터였다. 더구나 이번을 기회로 백화란에게 자신의 결백을 밝힐 수 도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궁일은 선주혁이 자리에 앉자 각각의 일행을 소개했다. 구리빛 피부의 청년이 하북팽가(河北彭家)의 후예인 팽손겸(彭巽 兼)이라 했다. 사람 좋은 미소를 가진 청년은 산동(山東)의 명가(名家)인 황보세 가(皇甫世家) 출신인 황보조학(皇甫調學)이었다. 서생차림의 창백한 청년은 역시 호북(湖北)에 자리한 제갈세가 (諸葛世家)의 후손인 제갈중양(諸葛仲陽)이었고, 선이 고운 여인은 그의 동생인 제갈중화(諸葛仲華)였다. 남궁일은 백화란과 더불어 자신의 여동생이라며 남궁연(南宮娟) 을 소개했다. 팽가와 함께 하북의 패자(覇者)로 칭해지는 진주언가(珍州彦家)를 제외한 오대세가의 후손들이 한데 모여 있는 것이었다. 선주혁은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인물들인지라 호기심을 가지고 일일이 기억하기 위해 애를 썼다. "소생은 한진우(漢眞禑)라고 합니다." 선주혁은 약간의 감회를 느끼며 자신을 소개했다. 한진우는 저 쪽 세상에서 쓰던 자신의 진짜 이름이었던 것이다. "반갑소이다. 한 공자." 남궁일은 다시 한 번 두 손을 맞잡으며 선주혁에게 예를 갖췄다. "조금 전에는 실례를 했소. 이렇게 만나게 된 것도 인연인데 한 잔 합시다." 황보조악이 예의 사람 좋은 미소와 함께 술을 권했다. 한 차례 순배가 돌고 날 때 제갈중량이 넌지시 물었다. "한 공자는 이곳 남창에 살고 계시오?" "아닙니다. 잠시 볼 일이 있어 이곳에 들르게 된 것이지요." "보아하니 무공을 익힌 것 같지는 않은데...... 볼일이라 함 은......?" 제갈중양이 이렇게 물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보통 내공을 익히 게 되면 두 눈에 정광이 번득이고 태양혈이 솟아오르기 마련이었 다. 하지만 선주혁은 이미 내력을 안으로 갈무리할 수 있는 반박귀 진(返璞歸眞)의 경지에 오른 상태. 이들 중 가장 무공이 뛰어난 남궁일조차 선주혁이 뭔가 범상치 않음만을 감으로 느낄 뿐 그의 내력 유무를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러니 제갈중양으로서는 선주혁이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고 생 각한 것이다. "제 몸 하나 건사할 정도의 무공은 익혔습니다만......" 선주혁이 자존심이 상했다는 듯한 표정을 짓자 제갈중양 등의 실소를 터뜨렸다. 제법 사내다운 용모로 변했다고는 하지만 선주혁은 여전히 곱상 하기만 했다. 제갈중양 등의 그가 동네의 무관(武館) 같은 곳에서 몇 수 주워 배우고 무공을 익혔다고 스스로를 뽐낸다고 생각한 것이다. 기실 진정한 무림인이라면 정의련의 주축인 오대세가를 모를 리 없었고, 특히나 신웅팔걸의 수좌를 다투는 옥기린 남궁일의 앞에 서 스스로를 지킬 무공을 익혔음을 자부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 다. 따라서 선주혁이 정색을 하고나선 것이 외려 그가 무림과는 거 리가 먼 인물이라 단정 짓는 반증이 된 셈이었다. 이에 제갈중양 등은 약간이나마 가졌던 무인 특유의 경계심마저 버리게 되었다. "하핫, 한 형이 워낙 곱게 생겨서 무공을 익혔으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소이다." 어느새 한 형이라 칭하는 제갈중양이었다. 다분히 무시하는 듯 한 어조였으나 선주혁은 애써 외면했다. 그의 관심사는 백화란이지 제갈중양이 아니었다. 더구나 선주혁은 이들과 가급적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만 했다. 그래야 백화란에게 자신의 무고함을 알릴 기회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한 공자님은 상업에 종사하시나 봐요?" 맑은 목소리의 주인공은 남궁연이었다. 그녀는 호기심을 고스란 히 드러내는 시선으로 선주혁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중이었다. 강호 경험이 거의 없다시피 한 그녀로서는 오대세가의 인물이 아닌 자를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아......! 네, 그렇습니다." 남궁연이 투명한 눈으로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자 선주혁은 얼굴 을 살짝 붉히며 엉겁결에 그렇다고 대답했다. "헤에! 그럴 줄 알았어요." 남궁연은 자신의 어림짐작이 맞았다는 것이 꽤나 흐믓한 모양이 었다. "상인이셨구려. 그래, 한 형은 무엇을 취급하시오?" 제갈중양이 다시금 질문을 해 왔다. 선주혁은 찰나의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사실....., 소생은 이번이 첫 상행(商行)입니다. 작은 보석 따위 를 취급하고 있긴 한데....." "허! 보석을 취급하시는 분이 호위(護衛)도 없이 상행에 나섰단 말이오?" "아까도 말했든 제 한 몸은 지킬수 있으니 호위는 별로....." 선주혁의 어수룩한 대답에 제갈중양은 고개를 흔들었다. "한 형은 아직까지 세상의 흉험함을 모르는구려. 하긴 첫 상행이 라니 그럴 만도....." 제갈중양은 이해한다는 식으로 말을 하는 중이었으나 그의 표정 은 선주혁을 한심하다 여기고 있음을 여실히 드러냈다. '이 자식아, 네놈이 좋은 집구석에서 등 따숩고, 배부르게 살고 있는 동안 세상 험한 꼴 다 겪은 형님이시다.' 선주혁은 내심 제갈중양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그거..... 보여 주시면 안 돼요?" 눈빛을 빛내는 남궁연의 갑작스런 말이었다. 선주혁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남궁연이 설명했다. "보석을 취급하신다면서요. 제게 보여 주세여. 혹시 또 알아요? 제 마음에 들면 제가 구입할지도 모르잖아요." 제갈중양을 향한 노기마저 잊게 만드는 남궁연의 친근한 말투에 선주혁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었다. "남궁 소저, 소생이 취급하는 물건은 아주, 아주 비싼 거랍니 다." 선주혁의 말에 제갈중양이나 황보조학 등은 은연중에 비릿한 미 소를 지었다. 남궁세가의 영애인 남궁연이 마음에 들어 한다면 천 하에 갖지 못할 보석이 없을 터였다. 한데 저 시골뜨기의 제 잘난 체를 하느라 보석을 제값 이상에 처 분할 기회를 마다하고 있는 것이다. "헤에, 혹시 또 모르잖아요. 그리고 구경한다고 닳는 것도 아닐 텐데 한 번 보여 주세여." 선주혁이 자신을 무시한다고 화를 낼 법도 할 만한데 남궁연은 조금도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고 천진난만한 얼굴로 부탁을 할 뿐 이었다. 그러자 선주혁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 다. "이런 물건은 함부로 꺼내들면 안 된다고 했는데....." 웅얼거리듯 말하며 품속을 뒤지는 선주혁이었다. 이에 중인들의 반응은 극명하게 갈렸다. 남자들은 선주혁의 어수룩함에 그가 꺼내드는 물건에 대해 조금 도 기대를 하지 않았다. 반면 여자들은 보석 자체만으로도 흥미를 느끼는 듯 선주혁의 손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선주혁은 품 안에서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신투의 비처에서 가 져온 물건들을 담은 주머니였다. 그는 행여 누가 볼 새라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주머니의 안에서 진주 한 알을 꺼내들었다. 크기가 엄지 손톱만 한 흑진주였다. 고작해야 세공된 금이나 은을 꺼내들 거라 여겼기에 남자들조차 선주혁이 꺼내든 물건에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은은한 광택과 흠집 없는 동그란 모양이 한눈에도 최상등품의 진주임을 알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와아! 너무 예뻐요. 이렇게 큰 흑진주라니.....!" 남궁연의 감탄을 들으며 선주혁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서는 주머니 안에서 가장 싼 물건을 골라야 했던 것이다. 신투 의 물건들은 워낙에 고가인지라 그런 물건을 소지하는 것만으로도 괜한 의심을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광택과 색, 크기 모두가 상품 중의 상품이군요." 제갈중화도 긴 눈을 가늘게 뜨며 선주혁이 꺼내든 흑진주를 감 상했다. 그녀도 여자인지라 탐이 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오라버니, 이거 우리가 사요." 남궁연이 갑작스레 남궁일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연아, 이 정도의 물건을 구입하는 것은......" "다음 달이면 어머니 생신이잖아요. 이 정도의 진주라면 어머니 도 틀림없이 마음에 들어 하실 거에요." 자기가 가지려는 게 아니라 어머니께 선물한다는 말에 남궁일은 흔들리는 모습이었다. 한편 제갈중화는 자신이 구입할 수 있는 기회를 한 발 늦어 놓치 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저 정도의 진주 는 돈이 있다고 구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내 심 남궁일이 남궁연의 청을 거절하기를 바랐다. 그 순간이었다. 선주혁이 난데없이 살짝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 "남궁 소저의 효심이 정말 대단하구려. 좋습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고, 술까지 얻어 마셨으니 이 진주는 소생이 남궁 소저 에게 선물하는 것으로 합시다." "네? 정말이요?" 남궁연은 뛸 듯이 기뻐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어처구니가 없었다. 대체 저게 얼마나 하 는 물건인지나 알고 선물을 하겠다는 건지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특히 보석류의 가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제갈중양, 제갈중화 남 매는 선주혁이 제정신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저 정도의 진주하면 한 사람의 팔자를 바꿀 수도 있는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 공자의 성의는 대단히 감사하나 아무런 대가 없이 이렇게 큰 선물을 받을 수는 없소." 남궁일의 단호한 음성이었다. '둘 다 제정신이 아니군.' 남궁일에게 큰 호감을 가지고 있던 제갈중화였지만 이 순간만은 그조차 제정신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물건이라면 체면을 뒤로 하고서라도 일단은 받아둬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이건 남궁 공자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동생 분께 드리는 선물이 오." 선주혁은 흑진주를 남궁연에게 내밀며 말했다. 남궁연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당장이라도 흑진주를 받아들고자 했다. 하지만 뜨거운 오라버니의 시선을 외면키는 힘들었다. 남궁연이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자 선주혁이 별수 없다는 듯 한 숨을 쉬며 말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떻겠소?" ".....?" "사실 앞서 말했듯 소생은 이번이 첫 상행이오. 사실 어디에 어 떻게 팔아야 소생이 가진 물건을 제값에 처분할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랄 수 있소. 보아하니 남궁 공자나 여기 계신 분들 모두는 명 문가의 후손이신 듯하니 소생을 속일 리 없을 것 같구려, 그러니 소 생의 이 물건들을 어디에서 처분해야 할지를 알려 주시오. 이 진주 는 소개에 대한 수고비로 생각하면 될 일이 아니오?" "대체 한 형이 가진 물건들이 어떤 것이기에 이토록 귀한 물건을 소개비 정도로 생각한단 말이오?" 제갈중양이 끼어들어 물었다. 그의 어조는 앞서 와는 확연히 달 랐다. 흑진주 하나만으로도 대단한데 그것을 소개료 정도로 여길라 치면 엄청난 재력가라는 의미였다. 자고로 한 문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엄청난 자금이 필요한 법. 이에 각 문파나 세력은 상인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구축하거나 직접 많은 사업을 벌이기 마련이다. 보석의 거래는 이문이 많이 남는 장사임을 제갈중양은 이 자리 의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이 앞서 무시했던 이 시골뜨기를 다시 봐야 할 이유가 되었다. 제갈중양의 질문에 선주혁은 말없이 주머니를 뒤적여 하나의 구 슬을 꺼내들었다. 그것은 이전에 연 노인에게 선물했던 것과 같은 크기의 묘안석 이었다. 선주혁이 흑진주와 비슷한 크기의 묘안석을 꺼내들자 중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정도의 묘안석이라면 작은 성을 통째로 살 수 있을 가치를 지녔음을 모두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재, 재신(재신)이다!' 제갈중양은 선주혁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손에 들린 주 머니는 아직도 두툼했다. 모르긴 해도 이 묘안석에 버금가는 보석이 가득할 터. 저 물건을 처분하는 과정 중의 이문만으로도 제갈세가의 몇 년 치 수입을 대신할수 있음을 그는 계산할 수 있었다. '이 자를 잡아야 한다!' 제갈중양이 선주혁에게 욕심을 내는 그 순간이었다. "좋소!" 남궁일의 한마디에 제갈중양의 얼굴이 순식간에 소태를 씹은 듯 변했다. "이처럼 귀한 물건은 소생의 본가로 돌아가야만 처분할 수 있을 것이오. 한 공자의 선물은 거래의 과정 중에서 생기는 이익에 대한 선수금조로 생각하겠소." 남궁일이 한순간 모든 것을 계산하고 선주혁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제갈중양을 비롯한 황보조학, 팽손겸은 못내 아쉬움이 남았으나 이미 결론은 내려진 상태였다. 한진우라는 청년은 남궁일에게 부탁을 했고, 남궁일이 이를 수 락했으니 자신들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다만..... 한 공자께서 소유하신 물건들은 가치를 측량키 어려 운 것들이 분명하오. 소생의 가문에서 일시에 처리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이오. 그러니 여기의 황보 형이나 제갈 형, 팽 형의 가문의 도움을 받아 처분하는 것으로 하겠소." 남궁일의 말에 중인들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더불어 이 순간만큼 남궁일의 인품과 덕망에 크게 감복하는 그들이었다. 이와 같이 큰 이문이 남는 건수를 들고 돌아가면 가문 에서도 그 공로를 크게 치하할 것이 분명했던 것이다. "뭐..... 그거야 알아서 해 주시오." 선주혁은 씨익 미소를 지으며 선뜩 승낙했다. 그의 목적은 어떻 게 해서든 백화란과 함께 하는 시간을 확보하는 데에 있었다. 남궁 세가로 동행하는 동안 둘만의 시간을 만들 기회가 있을 것이고, 그 시간이 선주혁이 바라는 바였던 것이다. "하하핫, 한 형은 정말 운이 좋은 거요. 이곳에 계신 분들의 가문 이야말로 천하에서 가장 믿을 만한 곳들! 한 형은 조금도 손해를 보 지 않고 모든 물건을 제값에 처분할 수 있을 것이오." 제갈중양은 이제 노골적으로 친근해지고자 하는 표정을 지으며 선주혁에게 말했다. "제갈 형의 말대로요, 소생의 가문에게 일임되어질 물건의 처분 은 조금의 걱정도 하실 필요가 없을 것이오." 황보조학은 다시없을 만큼의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제갈중양 을 거들었다. "오늘 소생의 운이 정말 좋은가 보구려. 이런 귀인들을 만나게 되 다니 말이오." 선주혁은 내심을 감추고 호들갑을 떨었다. "하하핫, 우리가 귀인을 만난 셈이지요." 팽손겸이 우렁찬 웃음을 터뜨리며 선주혁에게 술을 권했다. 선주혁이 잔을 들자 모두가 함께 술잔을 들어 올리며 오늘의 만 남을 서로에게 축하했다. 이전과는 달리 선주혁과 친해지기 위한 노력이 다분히 보였다. 거래 자체의 이익만으로도 엄청나니 실제로 물건을 처분한 선주혁 은 상상키 힘든 거부가 될 인물이었다. 그와 친분을 맺어 두는 것은 백 번을 재고해도 손해날 일이 없었던 것이다. '돈이면 귀신도 부린다더니....., 이쪽 세상도 별반 다를 것이 없 군.' 한순간 태도를 바꾸는 삼대세가의 후예들을 보며 선주혁이 내심 중얼거렸다. 더불어 신투의 보석들에 대한 가치에 대해 스스로도 놀라는 중이었다. 꽤나 값어치가 나갈 물건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까지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긴! 예전에는 금도 정말 귀했었으니까.' 아직도 잔뜩 쌓여 있는 공공문의 보물들을 생각하면서 선주혁은 자신이 천하제일의 부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로또하고는 비 교조차 안 될 행운을 맞이해 놓고 지금까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 다는 것이 억울하기까지 했다. =청성문하= <<1>> 선주혁은 점차 초조해지는 자신을 느꼈다. 백화란에게 자신의 무고함을 밝히기 위한 동행이었다. 한데 좀처럼 그녀와 시간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 전음을 통해 말을 걸어볼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여러모로 전음으로 대화는 쉽지 않았다. 자신이 선주혁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백화란은 크게 동요할 것 이고 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주변의 제지를 받게 될 것이 분명했 다. 자칫 일이 꼬이면 오해를 풀기가 더욱 힘들어질 수도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남궁일의 실력은 자신에 못지않을 것이다. 어쩌 면 자신보다 강할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소설에서의 그는 본래 완성되어 있는 고수였으며 자신과 사형은 발전해 가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 완성의 시점은 선주혁도 잘 모 르고 있으니 지금의 그가 얼마나 대단한 성취를 이뤘는지 알 수 없 는 것이다. 남궁일은 평소 절대로 자신의 모든 무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 의 탁월한 무공은 정의련과 남궁세가가 전 무림의 경계를 받게 만 들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이에 문중의 원로는 그에게 지엄한 명으로 무공을 함부로 드러 내기 않을 것을 명했고, 남궁일은 그에 충실하게 따랐다. 그가 고작 신웅십팔걸의 수좌를 다투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이와 같은 사정 때문이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천하제일의 고수자리를 다툴 실력을 가지고 있 다는 것이 소설 속의 그였다. 이처럼 평소에는 지닌 실력의 칠 할을 감추고 지내고 있는 남궁일이니 선주혁으로서는 그의 진정한 실력 을 짐작키 더욱 어려웠던 것이다. 어쨌건 그런 남궁일의 검을 피하며 백화란에게 사정을 설명하기 란 요원한 일이었다. 더구나 나머지 삼대세가의 후예들이 손을 거들고 나선다면 목숨 을 건져 바져나가시도 힘들 상황이 벌어질 게 분명했다. 따라서 선주혁은 단 둘이 있는 시간만을 고대하고 있었으나 좀 처럼 기회가 오지 않고 있는 것이다. 계속해 남궁연과 한 방을 쓰는 탓에 야심한 밤을 이용하는 것도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사형과 은설연, 그리고 주백광이 이제는 자신의 안위를 염려하 고 있을지도 모른다. 갑작스레 종적을 감춘 것과 마찬가지였으니 까. 또한 천음마후가 완성될 시기도 머지 않았다. 좀 더 구체적인 연 합전선의 구축과 패종회의 본격적인 발호에 대한 대비책을 수립해 야만 했다. 결국 더 이상 이곳에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던 것 이다. 그렇게 초조해 하던 선주혁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안휘로 향하던 남궁일이 다시금 남창으로 돌아간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한 무인이 그와 일행들을 찾아와 한 말 때문이다. 스스로 를 남창지부에 소속되어 있다고 밝힌 자였다. "염마를 비롯한 구대마존 중 두 명이 남창에 나타났다고 하오. 거 기에 옥용검마까지 함께 한다니 직접 조사를 해야 할 것 같소이다." 제갈중양은 선주혁을 의식하며 말했다. 지금의 그로서는 구대마 존의 움직임보다 엄청난 부를 움켜쥐고 있는 선주혁에게 신경이 더 쓰이는 것이다. "남창으로는 소생 혼자 다녀올 것이오. 나머지 분들은 이분 한 공자를 안전하게 본가에까지 모셔다 주셨으면 하오." 남궁일의 말에 제갈중양 등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남궁세가에 도착하기 전가지 선주혁의 환심을 조금이라도 더 사둘 기회가 생겼 다고 여기는 것이다. 선주혁 역시도 내심 미소를 지었다. 다들 내노라하는 고수이며 스스로의 무공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했건만, 실제로 자신을 위협할 만한 인물은 없었다. 정 뭐하면 모두를 제압한 채로 백화란에게 설 명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진곤혈사 이후의 그 정도의 자신감은 있는 선주혁이었다. "남궁 형은 염려치 마시오. 한 공자는 우리가 필히 남궁세가까지 안전하게 모시리다." 팽손겸이 우렁찬 목소리로 자신감을 표했다. 남궁일은 그렇게 선주혁과 백화란, 동생인 남궁연의 안위를 부 탁하고는 남창으로 돌아갔다. 선주혁은 이제 백화란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다가왔음을 느꼈 다. 아무리 저들을 제압할 자신이 있더라도 무턱대고 손을 쓰고 나 설 수는 없었다. 백화란에게 있어서는 저들이 동행이었기 때문이 다. 그리고 저녁이 되었을 때였다. 백화란과 남궁연이 머무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던 선주혁은 이 상한 기척을 느꼈다. 꽤 많은 수의 고수들이 기세를 억누르며 객잔 의 주변으로 몰려들고 있는 것이다. '이런! 아직도 놈들이 그녀를 노리는 건가?' 자신을 쫓아왔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알아보기 쉽지 않은 상태인 만큼 백화란을 노리는 패종회의 주구들이 분명할 것이라 단정 짓는 선주혁이었다. 어쩌면 저들도 남궁일의 무공이 범상치 않음을 짐작하고 기회만 을 노리고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기척을 감추는 정도가 그 랬다. 저 정도의 공력이라면 좀 더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수도 있건 만 어는 정도 이상의 고수라면 충분히 느낄 정도의 기세를 내뿜으 며 객잔을 포위해 오는 것이다. 잠시 후 제갈중양, 황보조학, 팽손겸이 복도를 나서싸. 그들 역 시 객잔의 외부에서 고수들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 것이다. 곧이어 제갈중화와 백화란, 남궁연이 연이어 방문을 나섰다. "대체 어떤 자들이 이런 흉흉한 기세를 뿜으며 접근하는 것일 까?" 팽손겸이 허리춤에 찬 거도의 도병을 만지작거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백 소저를 노렸다는 그놈들이 아니겠소?" 제갈중양은 익히 짐작이 간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의 말에 백화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녀만이 패종회의 무 서움에 대해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안색이 변하는 것을 본 황보조학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해싸. "걱정 마시오, 백 소저. 우리가 있는 한 놈들은 백 소저의 옷깃조 차 건들지 못할 것이오." 백화란의 아름다운 용모에 관심을 가져온 그였기에 그녀의 환심 을 살 기회를 놓치지 않은 것이다. "저놈들이 노리는 것이 백 소저라면 이렇게 앉아서 기다릴 일이 아니오. 내 당장 놈들을 쫓아내고 오겠소." 백화란에 관심을 가진 것은 황보조학뿐이 아니었다. 팽손겸은 커다란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두드린 후 신형을 움직였다. 객잔 밖으로 나서는 것이다. 황보조학이 뒤질세라 그 뒤를 쫓았다. "아직......!" 제갈중양이 그들을 만류하려 들었으나 이미 두 사람의 신형은 객잔의 문을 나서고 있었다. 백화란에게 멋진 활약상을 보여주기 위해 앞서거니 뒤서거니 신형을 움직이는 두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제갈중양은 그들의 성급한 행동에 한숨을 내쉬며 그 뒤를 쫓았 다. 신형을 날려 1층으로 향하는 그는 선주혁을 힐끗 쳐다봤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무공을 익히지도 않은 그가 고수들의 기세를 느끼고 방을 나섰다는 사실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뒷간이라도 가려고 방을 나섰던 것이겠지.' 제갈중양은 그렇게 우연으로 치부하고 객잔의 문 쪽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언니, 우리도 나가서 봐요." 남궁연이 백화란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백화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화들짝 표정을 바꿨다. 창백하 게 질렸던 그녀의 표정에서는 결연한 빛이 넘쳐흘렀다. 그녀로서는 저들이 진정한 가문의 원수일 것이라 짐작하는 상태. 불구대천의 원수를 맞이하는 자세를 갖추는 것이다. 제갈중화가 먼저 계단을 내려가고 백화란이 그 뒤를 쫓자, 남궁 연이 선주혁을 향해 말했다. "선 공자, 지금 바깥은 위험하니 방으로 들어가 계세요. 무슨 일 이 있어도 나오시면 안 돼요." 그녀는 스스로도 상기된 표정임에도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선 주혁을 챙겼다. 그런 그녀의 마음 씀씀이가 싫지 않은 선주혁이었다. 아주 짧은 순간 동안 만약 선우 아가씨를 먼저 만나지 않았다면 저 귀여운 아 가씨에게 마음이 쏠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객잔 밖으로 향하는 것을 확인하고 난 후 선주혁은 느릿 하게 걸음을 옮겼다. 저들만으로 패종회의 고수들을 상대할 수 없 음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제발이지 지난번 만났던 노인을 능가하는, 그러니까 백존에 속 하는 고수가 오지 않았기를 바라며 걸음을 옮기는 그였다. 더불어 지난번 노인과의 격전 이후 생각했던 많은 것들을 다시 한 번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그가 막 객잔을 나섰을 때 황보조학 등은 이미 적과 대치를 하는 중이었다. 홍의를 입은 자들은 흉흉한 기세를 뿌리며 서 있었으나 그 숫자 는 많지 않았다. 이를 확인한 선주혁은 미간을 찌푸렸다. 패종회라는 곳은 고수 들이 넘쳐난다. 따라서 숫자가 적을수록 오히려 위험하다고 봐야 했던 것이다. "아마도 백 소저를 찾아온 듯하오만......?" 황보조학의 말에 홍의를 입은 노인 한 명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 었다. "우리가 방문한 이유를 알고 있다니 제법이로구나." 마치 어린아이를 대하는 듯한 홍의노인의 어조에 황보조학의 사 람 좋아 보이는 미소가 살짝 찌푸려졌다. "우리가 있는 한 백 소저에게 해를 끼치진 못할 것이오. 야심한 밤에 흉한 꼴을 보이고 싶지 않으면 이만 돌아가도록 하시오." "크크크큭." 황보조학의 위엄에 찬 음성은 곧바로 홍의노인의 조소로 돌아왔 다. 홍의를 입은 나머지 네 명 역시도 노인을 따라 큭큭대며 웃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것은 이와 같은 상황을 두고 말하는 것이겠지." 홍의노인은 날카로운 안광을 뿌리며 말했다. "흥! 대관절 어떤 무리이기에 황보세가의 혈통을 이어받은 본인 을 하룻강아지라 칭하는지 모르겠구려!" 홍의노인의 안광과 은연중에 피어오르는 살기가 범상치 않음을 느낀 황보조학은 일부러 자신의 가문을 언급했다. 가문의 위세를 빌어 저들을 위협하려드는 것이다. "황보세가?" 홍의노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황보조학은 자신의 의도가 효과를 보고 있다는 생각에 재빨리 노인의 말을 받았다. "그렇소. 이곳에는 남궁세가, 하북팽가, 제갈세가의 후예들이 모 두 모여 있소이다. 방금 전의 무례는 없던 일로 해 줄 테니 어서 물 러가는 것이 좋을 것이오." 노인의 반응에 용기를 얻은 탓인지 황보조학의 음성에는 다시금 자신감이 넘쳤다. "크흐흐흐....., 네놈의 할애비가 이 자리에 있으면 모를까, 배경 좋은 하룻강아지들이 떼거지로 모여 있다 한들 노부의 행사를 막을 수 있을 성 싶더냐?" 노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홍의인들의 손이 자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와 같은 현상을 본 제갈중양이 놀란 음성을 터뜨렸다. "자광수? 혈마의 무공이 어찌.......?" "흐흐, 강아지들 중에서도 제법 안목이 있는 놈이 있었구나." 제갈중양의 말을 들은 황보조학 등은 긴장의 정도를 더욱 높여 야 했다. 그들 역시 혈마의 전설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팽손겸은 대도를 뽑아 공력을 집중하고, 황보조학의 소맷자락이 바람도 없는데 펄럭이기 시작했다. 한편 뒤쪽에서 사태를 파악하는 선주혁은 안도의 한숨을 쉬는 중이었다. 이번에 찾아든 자들은 전체적으로 무공이 높았으나 지난번에 자 신과 격전을 벌였던 노인 정도의 고수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물 론 이들 전원이 잠원기폭공을 사용한다면 쉽지만은 않겠지만 두려 워할 정도는 아님을 그는 알고 있었다. 선주혁의 짐작은 정확했다. 이들은 모두가 백웅에 속하긴 했지 만 말석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지난번 선주혁이 상대했던 노 인은 백웅의 수좌를 다투던 인물이었으니 이들과는 수준이 달랐던 것이다. "쳐라!" 노인의 명령과 더불어 네 명의 홍의인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 다. 황보조학, 팽손겸, 제갈중양, 제갈중화가 앞으로 나서며 네 명을 막아섰다. 황보조학은 상대가 자광수를 운용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만큼 처음부터 가문의 비기(秘技)인 벽력신장(霹靂神掌)을 펼쳤다. 폭발적 인 위력에 있어서 무림 최강을 자랑하는 절초 중 하나인 만큼 자광 수의 기이한 폭발력을 감당할 수 있으리라 여긴 것이다. 홍의인과 황보조학이 쌍수가 마주하자 귀청을 찢는 폭음이 연이 어졌다. 강맹하기 그지없는 두 개의 장력이 마주쳤으니 당연한 일 이었다. 팽손겸은 황보조학에 비해 마음이 가벼웠다. 팽가의 자랑이자 상징인 대도를 사용하는지라 자광수를 직접 마주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이에 그는 황보조학보다는 훨신 수월하게 홍의인을 상대 하는 중이었다. 문제는 제갈중양과 중화 남매였다. 본래 제갈세가는 병법(兵法) 과 귀계(歸計)가 무공보다 더 큰 명성을 떨치는 가문이다. 나머지 사대세가에 비해 가전무공에 손색이 있는데다가, 태생 자체가 무재 (武才)보다 문재(文才)가 더 뛰어나니 앞선 두 사람에 비해 무공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섬세한 초식의 활용과 시의적절한 한 수, 한 수로 홍의인을 어렵 사리 막아내고 있었지만 버티기에는 버거워 보였다. 이에 남궁연이 몸을 움직여 제갈중화를 돕기 시작했다. 백화란 역시 아랫입술을 깨물며 제갈중양을 도왔다. 서로가 쉽사리 우위를 점하지 못하는 것을 본 선주혁은 내심 감 탄했다. 홍의인들의 무공이라면 무림맹의 인사들조차 쩔쩔 맬 정도다. 한데 고작 이십대에 불과한 이들이 각각 하나를 맡아 평수를 이 루고 있는 중이었다. 구파일방에 비해 지나치게 마교와 사파연합의 고수들만이 강하 게 그려졌던 소설이라고 생각했건만, 제대로 설명되지 않았던 오대 세가에 인재가 많았던 것이다. 이는 선주혁의 생각처럼 단지 황보조학 등의 자질이 뛰어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구파일방의 경우 대부분 제자를 거둬 문중의 무공을 잇게 한다. 반면 오대세가의 직계후손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체계적이면서도 엄중한 계획 하에 교육을 받는다. 자질이 특출한 경우 남궁일처럼 벌모세수를 받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렇지 않더라도 영약을 밥 먹 듯 먹으며 자라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젊은 시절 오대세가의 후손들의 성취는 사마외도의 그것 에 비해 부족함이 없었다. 속성으로 무공을 익힌 것과 비등한, 혹은 그 이상의 성취를 보이는 것이다. 다만 아무리 오대세가라 하더라도 직계후손이 아닌 경우 이와 같은 특별한 양육법이 상용되기는 힘들었고 그렇기에 특출한 모습 을 보이는 숫자가 많지 않았다. 그렇지 않다면 이미 오래 전에 정의련이 무림맹의 우위에 섰을 터였다. 아직까지도 무림맹에 속한 구파일방이 정의련보다 높이 여겨지 는 것은 세력의 크기와 문도의 숫자 등에 대한 선입견이었다. 외형 적인 덩치는 아직도 무림맹이 컸던 것이다. 유구한 무림사로 볼 때 절대적인 고수의 경지에 오르는 가능성 역시 구파일방의 제자들이 더 많았다. 특정한 경지가지 오르는 것 은 오대세가의 후손들이 더 빨랐으나 깨달음을 필요로 하는 경지에 오르는 것은 구파일방이 유리했기 때문이다. 이는 구파일방의 태생적 배경 때문이었다. 구파일방 중 다수가 불문(佛門)이나 현문(玄門)을 모태로 했고, 속세와 연을 끊고 수양으 로 평생을 보내온 그들이기에 궁극적인 깨달음의 길에 오르기가 쉬 웠던 것이다. 선주혁은 이와 같은 제반적인 사실을 모르는 상태였기에 단순히 자신이 보았던 무림맹의 인사들보다 훨씬 나이가 어린 이들의 무공 이 더 뛰어난 것에 감탄하는 중이었다. 저들이 가문의 전폭적인 지 원 하에 배출된 인재 중의 인재임을 그는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선주혁이 감탄을 하고 있는 그때 홍의노인의 입매에 떠오른 미 소가 짙어졌다. 승패는 이미 결정 난 것과 다름없었다. 아직까지 본인은 손을 쓰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쪽 편에 입을 헤벌쭉 벌리고 있는 애송이 하나가 남긴 했지만 그가 자신의 상대가 될 리는 없었다. 홍의노인은 결과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혈마자광기를 운용하기 시작했다. 그가 막 자광수를 전개하려는 순간이었다. 뭔가 희끗한 것이 자신의 수화와 황보세가의 애송이 사이에 끼 어드는 것이 보였다. 연이어 울려 퍼지는 둔탁한 음향. 홍의인은 의외의 기습에 변변한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뒤쪽으 로 튕겨지듯 날아갔다. 거칠게 땅에 떨어진 홍의인은 두눈을 부릅뜬 채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심장 부위를 잡아갔다. 이마에 푸른 혈관이 도드라지고 얼 굴은 새빩갛게 물들었다. 그리고 목에서 가래 끓는 소리를 잠시 내는가 싶더니 이내 두 눈 을 까집고는 호흡을 멈췄다. 가공할 장력이 심장에 직접 충격을 주었던 것이다. "최심장이다! 청성파의 최심장이야!" 누군가의 탄성이 절로 튀어나왔다. 객잔의 입구에서 다수 대 다수의 격전이 벌어지니 그 소동이 안 에까지 전해지지 않을 리 없었다. 요란한 폭음들을 확인한 무림인 들이 어느새 구경에 나섰던 것이다. 홍의노인은 놀란 눈으로 장력을 전개한 자를 확인했다. 그 역시 수하를 해친 것이 최심장임을 알아봤다. 놀라운 한 수를 사용한 것은 어수룩한 표정으로 관전을 하던 애 송이었다. "청성파의 제자였던가?" 예상치 못하는 광경에 홍의노인이 멈칫하는 사이 또 한 명의 수 하가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최심장을 사용하는 애송이의 솜씨였다. 홍의노인은 아까에 비해 더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전에야 의외의 급습을 통해 이득을 볼 수도 잇는 일이었다. 연이어 두 번의 요행이란 무인에게 있기 힘든 법. 이번에도 단 일장에 수하를 요절낼 수 있다는 것은 그의 실력이 막강하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정작 최심장을 전개하는 자는 이십대 청년에 불과했다. 청성이 배출한 기재 중의 기재라는 덕양지인이라 할지라도 자신 의 수하를 저렇게 쉽게 상대할 수 없음을 그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 다. 그는 짧게 명령하여 수하들을 뒤로 물렀다. 그들의 상대가 아님 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성파의 고인게서 이 자리에 계셨음을 미처 몰랐소이다." 홍의노인은 이전에 보였던 오연함과는 달리 정중하기 이를 데 없는 태도로 선주혁을 대했다. 그러자 황보조학 등은 그재야 자신들이 한진우라 알고 있는 청 년을 새삼스레 보며 이해하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었다. 홍의노인의 극명한 태도 변화 때문이었다. 더구나 그것이 한진우라 알고 있는 자를 향해서이기 때문에 더 욱 그랬다. 자신들이 한진우에 대해 욕심을 냈던 것은 그가 지닌 막대한 재 력 때문일 뿐, 그 이상에 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제 한 몸 건사할 무공을 익히고 있다는 말을 했을 때 속으로 노골적으로 비 웃을 정도니 무가에서 욕심을 낼 인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방금 전 꽤나 빠른 신법으로 다가와 청성파의 최심장으 로 자신들을 도왔다. 한진우가 진짜로 자신이 말한 바대로 제법 쓸 만한 무공을 익혔 다는 것은 의외였으나 그뿐이었다. 그들 스스로는 상대와 백중지세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와 같은 힘의 균형은 아주 작은 요소에 의해서도 깨지기 마련이다. 심지어 어린아이의 주먹질에도 승패가 갈릴 수 있는 것이다. 이에 황보조학 등은 선주혁의 무공을 높이 사질 않았던 것이다. 그들이 이처럼 생각하는 것은 스스로의 무공에 대한 자부심 때 문이었다. 무림에서 손꼽히는 기재들임을 자부하는 만큼 비슷한 연 배에서 자신들보다 무공이 뛰어난 누군가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홍의노인이 한진우라는 자에 대해 태도를 바꾼 이유를 다른 곳에서 찾는 그들이었다. 한진우가 청성파의 무공을 사용했기 에 홍의노인이 정중한 모습을 보이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상당수의 무림인들은 전통의 구파일방을 오대세가의 우위에 놓 기을 주저하지 않는다. 외형적으로 정의련이 무림맹에 비해 열세인 것은 사실이기에 은연중에 그와 같은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은 더욱 많았다. 따라서 홍보조학이나 제갈중양은 홍의노인이 당대의 정의련이 가진 힘을 모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앞서 오대세가의 후손임을 밝 혔음에도 위축되지 않았던 그가 단지 청성의 무공을 익혔다는 것만 으로도 저처럼 태도를 바꾼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그들이 가진 가문에 대한 자부심에 흠집을 내 는 일이었고, 그들은 엉뚱한 이유에서 분노가 치미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은 진정 엉뚱하기만 한 것이었다. 홍의노인은 그들보다 훨씬 정확한 안목으로 선주혁의 실력을 파 악했다. 선주혁이 자신보다 강할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적어 도 자신과 비등하게 실력을 겨룰 수 있으리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 다. 문제는 거기에 있었다. 이제는 자신들이 수의 열세에 놓인 것이다. 자신이 청성파의 제 자를 상대하는 동안 오대세가의 후예들이 수하들을 제압할 수 있음 은 분명했다. 그 후에은 자신의 차례가 돌아올 것이다. 패배 자체가 두려운 것은 아니나 자칫 생포되는 인원이라도 생 기면 큰 문제였다. 아직까지는 모든 것을 드러낼 시기가 되지 않았 기 때문이다. "고인게서 저희의 행사를 못 마땅히 여기심을 알았으니 이만 물 러가고자 합니다." ".......!" 황보조학, 제갈중양, 중화 남매, 그리고 팽손겸의 얼굴이 찌푸려 졌다. 모든 게 오대세가가 구파일방에 비해 무시를 당하고 있기 때문 이라 여긴 것이다. 홍의노인은 선주혁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신형을 날렸다. 그 의 뒤를 쫓아 홍의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동료의 시체를 챙겨 든 그들의 움직임은 신속하기 그지없어 고수다운 풍모가 여실히 풍 겼다. 한편 선주혁은 순간 갈등해야만 했다. 그러나 백화란의 얼굴을 힐끗 보고 이내 이곳에 머물기로 결정 했다. 공 노인의 복수를 위해서라지만 의미 없는 살생은 취향에 맞 지 않았다. 더구나 저 정도의 인물들이 죽는다 해도 패종회은 눈 하 나 깜짝하지 않을 것이다. 홍의인들이 꽁지가 빠져라 도주하는 것을 확인한 남궁연이 호들 갑을 떨었다. "와아! 한 공자께서 이토록 뛰어난 무공을 지니셨는지는 몰랐어 요." 백화란 역시 감탄한 표정으로 선주혁에게 말했다.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 뭘요." 선주혁은 두 여자가 자신을 대단한 듯 바라보자 조금은 쑥쓰러 운지 뒤통수를 긁었다. 그와 같은 모습을 바라보는 황보조학이나 팽손겸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백화란이 한진우라는 자를 바라보는 시선 때문이었다. "한 형께서 이토록 고강한 무공을 지녔음을 미처 몰랐구려. 소생 역시 한 형께 큰 신세를 졌소이다." 선주혁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받았던 제갈중양도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그의 인사는 선주혁의 무공에 감탄했기 때문이 아니었 다. 계산이 빠른 그였기에 아직도 선주혁이 가진 가치를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재력이 자신과 가문에게 가져다 줄 이익을 생 각하면 이 정도의 아부는 아무것도 아니라 생각하는 그였다. <<2>> "한 형께서 청성문하였음을 미처 몰랐소이다." 홍의인들이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물러갔지만 이미 잠이 올 리 없는 선주혁과 백화란 일행이었다. 그들은 구경꾼들의 시선 속에서 객잔 1층의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황보조학은 의외라는 듯 선주혁에게 말을 건넸으나, 선주혁은 그에 반응하지 않았다. 오늘의 일을 심각하게 정리하는 중이었기에 미처 그의 말을 듣 지 못한 것이다. 그가 정리하는 것은 소설에서 자신이 읽었던 내용이었다. 자신이 처음 이쪽 세상에 왔을 때만 해도 패종회는 치밀하게 자 신들을 감추기에 급급했다. 그들의 행사는 은밀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복면을 했고, 인적이 없는 곳에서만, 그것도 상대를 죽일 확신이 있을 때만 얼굴을 드러냈다. 한데 오늘은 자신들을 이끌고 한적한 곳으로 간 것도 아니고 수 많은 구경꾼들이 얼굴을 확인했음에도 수월하게 물러갔다. 이는 저 들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할 준비를 마쳤다는 뜻이었다. 소설 속에서도 천음마후의 완성 이후 패종회는 본격적으로 마각 을 드러낸다. 그야말로 진정한 무림의 환란이 시작되는 것이다. 선주혁은 이후 일어날 일들에 대한 대략적인 정리를 하느라 황 보조학의 말에 미처 반응하지 못한 것이다. 선주혁이 뭔가 골똘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을 익히 짐작할 수는 있었으나 어쩐지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이 들며 황보조학은 인상 을 찌푸렸다. 자신이 대단한 일을 했다는 생각에, 혹은 구파일방의 제자이기에 오대세가의 후손을 무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까지 들어 기분이 좋지 않은 황보조학이었다. "한 공자?" 선주혁의 묵묵부답에 황보조학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확인 한 남궁연이 선주혁을 불렀다. "아! 네?" 그제야 상념에서 깨어난 선주혁이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조학 오라버니가 한 공자께서 청성파의 제자이신 걸 몰랐다고 말씀하셨거든요." "아.......!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무엇을 생각하느라......" 선주혁은 황보조학에게 사과를 건넸다. 황보조학은 살짝 고개를 끄덕여 그 사과를 받아들였으나 마음가 지 편할 리는 없었다. "그리고......, 전 청성파의 제자가 아닙니다." ".......?" 선주혁의 한마디에 모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최심장은 청성 파가 자랑하는 절기 중의 절기였다. 검을 사용하지 않는 무공 중에 서는 청성최강으로 알려진 장법인 것이다. 그런 장법이기에 적전제 자가 아니면 익히기조차 힘들었다. 선주혁은 도관(도관)을 쓰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잘해야 속가제 자에 불과한 그가 청성의 진산절기를 익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의 아한 일일진대 아예 청성의 제자가 아니라 하니 그들로서는 당최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제가 익힌 무공이 청성파의 최심장이라는 무공과 아주 흡사한 모양이더군요.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저 비슷한 무공일 뿐입니다." "아! 그렇군요." 남궁연이 그제야 납득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황보조학 등은 선주혁의 그 말에 내심 웃음을 터뜨렸다. 그 가 홍의노인에게 청성의 제자로 착각할 만한 무공을 사용해 지레 겁먹고 도망가게 했기 때문이다. 그의 소심함은 두고두고 강호에 웃음거리가 될 정도라 생각하는 것이다. 한진우만을 봤을 때, 어찌 생각하면 그의 심계가 뛰어난 것이라 인정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심기가 불편한 그들로서는 좋게만 받아들여지지 않 았다. 그들은 한진우라는 자가 얄팍한 수법으로 호가호위(狐假虎威) 한 것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더불어 그들은 한진우라는 자의 무공이 얕다고 더욱 확신했다. 만약 그가 청성의 제자이고 진정한 고수라면 분명 절정의 내공을 익힌 흔적이 드러나야 한다. 아무리 봐도 그런 모습을 찾기 힘든 한진우였으니 결론은 둘 중 의 하나였다. 그의 내공이 턱없이 부족하던가 아니면 반박귀진의 경지에 올라 반노환동(返老還童)한 절대의 고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반노환동의 고수일 리가 없었다. 설령 반노환동의 경지에 이르는 고수라 할지라도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이는 현상일 뿐이었다. 즉, 백세가 넘은 노고수가 중년의 용모를 유지하는 정도 다. 지금의 선주혁처럼 약관을 막 넘어선 용모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젊어서부터 주안술(駐顔術)을 익혀야 했고, 주안술은 필연적으로 내 력의 소모를 불러온다. 따라서 주안술을 익힌 자가 반노환동의 경지에 오를 가능성은 거의 없을뿐더러, 설령 기적적으로 그와 같은 경지에 올랐다 하더 라도 계속해 내력의 손실을 감수하며 어린 용모를 필요로 할 이유 가 없기 때문이다. 절대의 고수가 고작 어려 보이기 위해 더 높은 경지를 향할 기회를 버릴 리가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아무리 반노환동한 고수라 해도 그 나이를 익히 짐작할 수 있는 요소가 있었다. 특징적으로 귀밑에 하얀 머리가 생기는 것 이다. 설령 특수한 방법으로 하얀 머리를 감춘다 해도 치아의 색만은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반박귀진의 경지에 올랐다 해도 오랜 세월 을 살아온 치아의 변색만은 감출 수가 없는 것이다. 한진우라는 자의 치아는 하얗고 깨끗하니 그 나이 때 젊은이임 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고작해야 약관을 넘어선 나이에 내력을 익힌 것을 감추는 반박 귀진의 경지에 오르는 것은 그들의 상식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일. 결국 황보조학 등은 선주혁이 조약한 무공을 익혔을 뿐이라 답 을 낸 것이다. 자신들이 가진 특별한 자부심에 따른 결론이기도 했 다. "하여튼 한 공자님의 그 일장은 정말 대단했어요. 일격에 상대를 격살할 정도라니......!" 남궁연이 연신 감탄을 했다. 그녀로서는 선주혁이 새삼스럽게 보이고 있었다. 전형적인 무가의 여식인 남궁연이었다. 준수한 선주혁의 용모와 막대한 재력보다는 그의 무공이 뛰어나다는 것에 호감이 느껴지는 것이다. 이중에서 순수한 마음으로 선주혁의 실력에 감탄하는 것은 그녀 와 백화란, 두 사람뿐이었다. "그나저나 대체 어떤 자들인 것 같소? 저들이 백 소저 가문의 참 사에 깊이 연결된 것은 알겠으나 당최 어떤 자들인지 짐작이 가지 않는구려." 황보조학은 남궁연과 백화란이 한진우에게 보내는 시선이 못마 땅해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태도를 보아하니 우리 정의련를 무시하는 것으로 보이오. 결국 저들이 가진 바 힘이 적지 않을 거라 짐작이 되는구려." 제갈중양의 말에 팽손겸이 코웃음을 쳤다. "흥! 감히 천하를 사분한 세력이랄 수 있는 정의련을 무시하다 니!" "근간에 축적된 오대세가의 힘을 저들이 알지 못하기 때문일 것 이오. 그저 정도 무림에는 무림맹만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지요." 황보조학이 내심을 꺼내들며 인상을 찌푸렸다. "어찌되었건 문중의 어르신께 한시라도 빨리 알려야하지 않겠 소? 저와 같은 암중세력이 있다는 것은 무림에 큰 환란이 생길 수 도 있다는 뜻이니까요." "청성파의 이름만으로도 꽁지가 빠져라 달아나는 자들인데 크게 신경 쓸 일이 있겠소?" 팽손겸이 팔짱을 끼며 다시 한 번 콧방귀를 뀌었다. "에? 아까 그자들이 도망친 것이 청성파라는 이름 때문이라고 요?" 남궁연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팽손겸의 말을 짚고 나왔다. "연 매(妹)도 확인했잖아. 이분 한 형이 사용한 무공이 청성의 최 심장이라고 여기고 달아나는 것을......!" 팽손겸이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황보조학이나 제갈중양도 그의 말에 수긍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제야 선주혁은 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 었다. 뛰어난 머리를 가진 것은 아니지만 눈치 하나는 자신 있는 그 였던 것이다. "전 한 공자의 뛰어난 무공에 두 사람이 죽게 되고, 자신들이 불 리하게 되자 도주한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남궁연은 아직까지 수긍할 수 없다는 기색이었다. 비등한 격전에 한 명이 끼어들어 치명적인 손상을 입히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라 말하고 싶은 황보조학 등은 억지로 말 을 삼켜싸. 한진우라는 자가 자신의 가문에 가져다 줄 수많은 혜택 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말을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들의 표정은 남궁연이 몰 라도 한참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음이 훤히 들여다 보였다. 선주혁은 이들 역시 자신이 읽었던 많은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 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며 내심 씁쓸히 웃었다. 오래 전 읽었던 무협소설과는 달리 선주혁이 이쪽으로 넘어오기 전 시절의 무협소 설들 중 다수는 정도의 인물들이 그다지 올곧지 않았다. 특히 젊은 기재들은 대개 옹졸하고 편협했던 것이다. 그들의 질 투와 아집을 생각하면 오히려 여자로 등장했어야 하는 게 맞지 않 나 싶을 때가 많았다. 한데 직접 그런 인물들을 보게 되자 감회가 새로웠던 것이다. "여하튼 문중의 어른신께 알리는 것은 반드시 해야 할 것 같소. 어떤 사정으로 그들이 도주했건, 그들은 범상치 않은 무공을 지녔 음을 직접 확인했으니 말이오." 제갈중양이 자연스럽게 다시 화제를 홍의인들에게 돌리며 말을 이었다. "사실 황보 형이나, 팽 형의 무공은 젊은 무인들 중 발군의 것이 잖소? 신웅십팔걸이라 묶여 무림맹의 젊은 고수들과 이름을 나란 히 하고 있지만 두 분의 진정한 실력은 그들과 비할 바가 아니지요. 그런 두 분과 평수를 이를 정도의 고수들이 속해 있는 집단이오. 결 코 좌시할 문제는 아닌 듯싶소." 제갈중양의 말에 황보조학과 팽손겸은 수긍하는 표정이었다. 스 스로 자신의 무공이 구파일방의 각파의 장문인에 비할 바는 아니겠 지만 소위 명숙이라 불리는 선배들에 비해 못지않다고 자부하는 그 들이었다, 그런 자신들을 몰아세울 정도면 가볍게 볼 일은 확실히 아닌 것이다. "제갈 형의 말을 듣고 보니 그렇구려." 팽손겸은 자신의 얼굴에 금칠을 해 주는 제갈중량의 말에 못 이 기는 척 고개를 끄떡였다. "하면 어찌하는 게 좋겠소?" 황보조학의 질문에 제갈중양은 이미 결론을 내려놓은 듯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남창에 있는 지부를 이용합시다. 그곳으로 돌아가 전서구를 이 용하는 게 가장 빠르지 않나 싶소." "흠....., 하지만 한 형의 일은.....?" 황보조학이었다. "전서를 이용해 한 형에 대해서도 함게 말하면 될 일이오. 어르 신들께서 조치를 취해 주실 것이니 염려할 필요 없을 것요." 제갈중양은 이번에도 망설임 없이 답했다. "한 형, 괜찮으시겠소? 시간은 약간 지연이 되겠지만 한 형의 물 건들은 우리가 책임지고처리를 해 주겠소." 황보조학은 예의 사람 좋은 미소를 다시 만들어 내며 선주혁에 게 부드럽게 말했다. 선주혁이 잠시 망설이는 사이 남궁연이 나섰다. "아까 그자들은 필시 란 언니를 다시 노릴 거예요, 원로에 나서 기보다는 정의련의 지부에 있는 것이 훨씬 안전할 테니 사정을 좀 이해해 주셧으면 해요. 거기에는 저희 오라버니도 계시고......" 남궁연의 말에 선주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도 백화란의 안전을 고려해야만 했다. 이들의 실력으로 패종회에게서 그녀을 보 호하는 것은 터무니 없는 일이다. 하지만 남궁일은 달랐다. 자신이 계속해 백화란을 보호할 입장 이 아닌 상태니 백화란은 남궁일의 곁에 있는 것이 가장 안전할 것 이다. "알겠습니다. 아름다운 소저를 노리는 악당들이 있는데 제 급한 일만 챙길 수는 없는 일이지요." 백화란은 선주혁이 노골적으로 칭찬을 하고 나서자 살짝 얼굴을 붉혔고, 남궁연은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는 말에 환한 미소를 지었 다. "감사해요, 한 공자." "천만의 말씀입니다." 해맑은 미소와 함께 건넨 남궁연의 인사말에 선주혁은 저도 모 르게 미소를 지었다. =결백= <<1>> 백화란 일행은 관도를 이용해 가기로 했다. 저들도 무림인인 만 큼 백주 대로에 그것도 관도 위에서의 습격은 힘들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선주혁은 그와 같은 가정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미 객 잔에서 수많으 사람들에게 모습을 보일 정도의 그들이었다. 행인이 많은 관도를 이용하면 보다 안전하리라는 것은 헛된 기대일 뿐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럼에도 선주혁은 제갈중양 등의 결정에 내심 쾌재를 불렀다. 그들이 말과 마차를 구입한 것이다. 관도 위에서 경공술을 전개 할 수 없는 만큼 말을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이에 선주혁은 말을 타본 적이 없음을 말했다. 황보조학 등이 자신을 비웃는 것을 느꼈으나 개의치 않았다. 마 차의 구입은 여자들을 배려한 것이었기에 백화란에게 전음을 사용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이들과의 동행 자체가 백화란과 시간을 갖고자 함이었으니 선주 혁으로서는 그와 같은 결정이 만족스럽기만 했다. 제갈중화는 말을 타고 갈 것을 고집했다. 마차 안은 답답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결국 선주혁, 백화란, 남궁연 세 사람만이 마차에 탑승해 남창으 로 향했다. 마차가 관도 위를 달리고 조금의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남궁연 이 마차 밖으로 풍광을 구경하기 시작하자 선주혁이 입술을 달싹였 다. [백 소저, 놀라지 말고 제 얘기를 들으세요.] 선주혁의 갑작스런 전음에 백화란은 의아한 표정이었지만 놀 라지 말라는 부탁 때문인지 곧 표정을 추슬렸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제가 드리는 말 씀은 절대적인 진실임을 먼저 밝혀야 겠군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 거죠?] [백 소저의 가문 이야기입니다.] [.....!] [그 일과 곤륜이마라 불리는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이 없 습니다.] 갑작스레 곤륜이마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백화란은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당신은 누구시죠?] 선주혁은 잠시 갈등했다.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해 밝혀야 할지 고민하는 것이다. [일단 제 얘기부터 들어 주십시오.] 자신이 누군가에 대해 알게 되면 대화가 오히려 힘들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선주혁은 설명부터 하기로 했다. 신투에 관한 설명에서부터 패종회에 대한 이야기까지. 남궁연을 의식해 그는 최대한 빠르고 간결하게 설명을 했다. 설명을 마친 선주혁은 백화란의 반응을 살폈다. 쉽사리 속내를 짐작할 수없는 표정이었다. 얼핏 아직도 신뢰할 수 없다는 것 같기도 했고, 어찌 보면 예상 했던 대로임을 확신하는 것 같기도 했다. 선주혁의 바람일 뿐인지 는 몰라도 자신과 사형이 흉수가 아니라는 것에 안도하는 듯해 보 이는 표정 같기도했다. [무엇보다 주혁과 사......., 남 소협은 패종회 최대의 적입니다. 두 사람은 현재 패종회의 음모를 막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중입니 다. 그러니 제 말을 믿어 주십시오.] 선주혁의 간절한 표정에 백화란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전음을 펼쳤다. [어떻게 한 공자께서 이와 같은 사실을 알고 있는지부터 알아야 할 것 같군요.] 백화란의 말에 선주혁은 엉겹결에 입을 열어 버렸다. [전 주혁의 형 되는 사람입니다.] [아! 그래서......!] 백화란의 생략된 뒷말은 선주혁도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환골 탈태를 통해 모습이 변했다지만 얼핏 봤을 때는 거의 흡사한 용모 였다. 백화란의 경우 매우 가까이서 선주혁을 봤기에 그 차이를 알 수 있지만 머리색만을 빼면 구분이 힘들 정도의 변화이기도 했던 것이다. [처음 봤을 때는 선 공자, 당사자라고 생각했어요.] [네, 쌍둥이 동생이니까요.] [그렇군요. 그런 이야기는 듣지 못했었는데.....] 백화란이 고개를 끄덕엿다. 이제야 모든 게 납득이 간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 순간 남궁연이 몸을 살짝 움직여 창밖에서 마차 안쪽으로 시 선을 돌리려 했다. [오해가 풀려서 다행이에요.] 백화란의 마지막 전음에 선주혁은 미소를 지었다. 가슴 한편을 무겁게 짓누르던 무엇이 사라지는 듯했다. "차라리 말을 타고 갈 걸 그랬나?" 남궁연은 마차 안이 답답한 듯 고운 이마를 살짝 찌푸렸다. 그 표정마저도 귀여워 선주혁은 미소를 머금었다. 백화란에게 해명할 기회를 가졌기에 더욱 마음 편한 미소였다. <<2>> 남궁연과 백화란은 여자들 특유의 수다를 계속하는 중이었다. 주로 남궁연이 말하고 백화란이 들었다. 두 사람이 편하게 대화를 할 수 있도록 선주혁은 눈을 살짝 감았 다. 아마도 두 사람은 그가 자고 있을 거라 생각할 것이다. 눈을 감은 선주혁은 그 날 노인과의 일전을 겨룬 후부터 계속 되 어온 고미네 빠져든 상태였다. 심혈에 심혈을 기울여온 북두폭렬장이 일정 이상의 고수에게는 효용이 없다는 것은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앞으로 백 존과 그보다 실력이 더 뛰어난 고수들과 싸우게 될 수도 있었다. 그러니 대비책을 모색해야만 했던 것이다. 지금의 실력으로 패 종회와 맞서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 선주혁은 좀 더 냉철한 상태로 자신의 무공에 대해 하나하나 생 각해봤다. 사형에게 들었던 무리(무리)와 그간 읽었던 수많은 무협 소설들 중 그럴 듯한 이야기들만을 골라 기준으로 삼았다. 곤륜파의 검술은 제법 숙련이 되었다. 그러나 완벽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상태. 흡성대법을 통해 익히 나머지 무공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기본 적인 심법의 운용과 초식을 흉내 낼 수는 있지만 오의를 깨달았다 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신이 가진 기본적이 문제라고 선주혁은 결론을 지었다. 무협소설에는 종종 하나의 초식만을 죽자고 파고들어 고수가 되 는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사형 역시 그와 같은 무리에 대해 설명한 적이 있었다. 아무리 기본적인 무공이라 할지라도 진정한 의미를 알아낸다면 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선주혁에게는 그처럼 참오에 참오를 거듭한 초식이 없었 다. 수만 번의 고련을 통해 완벽하게 몸에 익히고, 종극에서는 그 초식마저 초월할 만큼의 무공이 없는 것이다. 본래 초식은 그저 연결되는 동작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익 힌 내공의 위력을 최대한 끌어내는 역활도 내포하고 있었다. 즉 동 작의 흐름을 통해 내력의 운행을 자연스럽게 이끌고 종국에는 집중 된 힘으로 최대의 효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 무공초식이다. 선주혁과 같은 어설픈 상태에서는 그와 같은 위력을 내는 것이 불가능했다. 홍의노인과의 대결에서 내력의 우위에도 불구하고 승패를 결정 짓지 못한 것 또한 이와 같은 이유에서였다. 내력의 운용에 있어서 너무나 차이가 났고, 그 내력을 최대한으로 활요하는 초식의 숙련 도 역시 부족했던 것이다. 익히고 익혀 초식을 초월한 경지에 이른 고수들을 상대하면 그 차이는 더욱 명확해질 것이다. 그들은 한 줌의 진기로 작은 산을 날 려 버릴 정도일 테니 직접 손을 섞지 않아도 익히 짐작할 수 있었] 다. 흡성대법의 진보는 선주혁에게 있어서 철무백의 가르침만큼이 나 행운이었다. 진기를 이용해 만들어진 강기를 통해서도 내력을 흡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었다. 흡성대법이 가지는 효용만큼이나 한계도 분명했다. 일단 누군가 관전하는 자가 있으면 결코 시전할 수 없는 것이 흡 성대법이었다. 일단 흡성대법을 익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정사를 막론하고 자신을 죽이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 이다. 관전자가 없더라도 문제는 있었다. 상대의 내력을 흡수하기 위 해서는 먼저 진기의 명확한 흐름을 파악해야만 했다. 하지만 패종회의 진정한 고수랄 수 있는 백존의 주된 무공은 선 주혁이 익히 알고 있는 혈마자광기가 아니었다. 각각 다른 무공을 사용하는 백존이나 그 위의 고수들을 상대하며 진기의 흐름을 관찰 할 여유를 갖는다는건 결토 쉽지 않았다. 전력을 다해 공격과 방어를 하기에도 바쁠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한계로 인해 흡성대법만으로는 패종회를 상대할 수 없었다. 물론 선주혁 나름대로 믿는 구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에만 의지할 수는 없었다. 자신이 상대해야 할 패종 회는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상황을 정리한 선주혁은 이제 선택을 해야만 했다. 화무난천장이나 난화무영수, 최심장 등은 일문의 비전으로 여겨 지기에 충분할 만큼의 절기였다. 지금부터라도 그 초식을 익히고, 또 익혀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 선주혁이 취할 수 있 는 하나의 방편이었다. 다른 하나는 개중 가장 익숙한 북두폭렬장을 계속해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비록 스스로 만들어 낸 엉터리 절기이긴 했지만 익히고 또 익히다 보면 무엇인가를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그간의 쏟아 부은 공이 아깝기도 했다. 마음은 북두폭렬장으로 기울지만 오랜 세월 간 보완, 수정을 거 쳐 온 절기와 비교할 수 없기에 선뜻 선택하기 힘들었다. '젠장! 북두폭렬장을 쓴 다음....., 너는 이미 죽어 있다! 이 말 한마디를 꼭 해 보고 싶었는데......' 만화에서 봤던 멋진 장면을 재연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내심 투 덜거리면서도 선주혁은 사형이 이 자리에 없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 했다. 한눈에 북두폭렬장이 가지는 단점을 파악한 사형이었다. 그러니 이 자리에 있었다면 자신이 가지는 의문을 해소해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하긴 책에서 보니 깨달음은 말로 전할 수 없다고는 하더 만......' 그런면서도 어서 남창에 도착해 사형을 찾고 싶다고 생각하는 선주혁이었다. 명확한 해답은 아닐지라도 사형이라면 큰 도움이 될 조언을 해 줄 수 있을 거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사형을 떠올린 선주혁은 다시금 명상에 들어갔다. 사형만을 믿 고 기다릴 수만은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은 지금 패종회와 정면으 로 맞서고 있는 상황이다. 언제 어느 때 백존이나 그 이상의 고수들 을 만날지 모를 일이었기에 한시라도 빨리 해답을 찾아내야만 했 다. 앞으로 몇 년이 걸릴지 모를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무엇보다 그 들의 손에 죽지 않고 잘 먹고, 잘 살아 보겠다는 목적을 이루기 위 해서였다. <<2>> 선주혁이 예상했던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밖으로 요 란한 말의 울음소리가 들리더니 급작스럽게 마차가 섰다. 남창으로 방향을 돌린 지 고작 이틀 만의 일이었다. 백화란과 남궁연의 표정이 굳어졌다. 선주혁은 눈을 뜨고 백화란에게 전음을 보냈다. [동생이 백 소저를 반드시 지켜달라고 하더군요. 제가 있으니 걱 정하지 마십시오.] 선주혁의 전음을 들은 백화란은 남궁연이 알아채지 못할 만큼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강호를 위진하는 백발귀마의 무공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그의 형 역시 범상치 않을 터. 앞서 홍의인들을 일 장에 쳐 죽인 것만 봐도 고강한 무공을 지녔 음이 분명했다. 그런 그가 자신을 보호하겠다고 나서니 조금 안심 이 되는 것이다. 이때 마차 밖에서 음침한 괴소성이 들렸다. "그흐흐흐......, 새삼스럽게 물을 필요가 있겠는가?"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마차안의 세 사람은 목소리의 주인공이 앞서 객잔을 찾아들었던 홍의노인임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선주혁을 비롯한 세 사람은 마차에서 내렸다. 과연 일단의 무리가 마차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이틀 전 본 세 명과 한 명의 흑의노인이었다. 황보조학 등은 이미 말에서 내려 홍의인들과 대치 중이었다. 선주혁의 시선은 홍의노인 옆에 서 있는 다른 노인에게 머물렀 다. 흑색의 무복을 입은 노인은 안광부터가 남달랐다. 앞서 북두폭 렬장을 막아냈던 노인과 비슷한 수준일 것임을 선주혁은 짐작했다. '다행히 백존에 드는 자는 오지 않은 것 같군. 책에서 본 것처럼 천음마후의 완성 이후가 아니면 나오지 않는 건가?' 선주혁은 일단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홍의노인과는 달리 백웅 중에서도 최상위에 있는 자임이 틀림없었지만 이미 그와 같은 고수 를 한 번 상대해 본 경험이 있는 그였다. 잠원기폭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럭저럭 수월하게 이겨낼 수 있 을 것이고, 설령 사용한다 해도 패배하지 않을 자신은 있었다. 앞선 노인처럼 수강을 이용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이미 그때의 자 신과 지금의 자신은 완전히 다른 상태였던 것이다. "천(千) 단주(團主), 저놈이외다." 홍의노인은 선주혁을 가리켰다. 단주라 불린 노인은 세모꼴로 찢어진 눈을 가늘게 떴다. 두 눈에 서 번득이는 자광이 쏟아져 나왔다. 시각이 야심한지라 그와 같은 장면은 괴이하기 짝이 없었다. "정녕 당신들은 정의련을 적으로 삼겠다는 말이오?" 황보조학이 언성을 높여 호통을 쳤다. 그 역시도 단주라 불린 노 인이 막강한 고수임을 짐작했다. 떨리는 마음을 감추기 위해 일부 러 더 언성을 높인 것이다. '오늘은 정말이지 길(吉)보다 흉(凶)이 많겠구나.' 제갈중양 역시 미간을 찌푸렸다. "네놈들은 필요 없으니 꺼져라. 계집과 저놈만을 두고 사라지면 될 일이야." 단주라 불린 천 노인은 더할 수 없이 거만한 표정으로 선주혁과 백화란을 가리키며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우리를 죽이기 전에는 백 소저의 옷깃 하나 건드릴 수 없을 것이다." 황보조학의 결연한 외침이었다. 이번에는 정의련을 내세운 자신 의 말이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정의련과 문제를 만들지 않기 위해 물러가라 말한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자신들을 죽여 야만 한다고 말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백화란에게 해를 끼치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죽음이 앞서야 하는 만큼 정의련과 필연적인 적 대관계가 성립된다. 따라서 백화란에게 점수도 딸 겸, 저들이 실리를 고려해 물러서 길 바랄 겸해서 외쳐본 것이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천 노인의 조소였다. "크흐흐흐, 그렇다면 모두 죽여주지!" 천 노인의 말에 황보조학의 안색이 굳어졌다. 이미 홍의인들의 무공을 견식한 만큼 이번에는 승산이 없음을 알 수 있었다. 홍의노인이 가세하는 상황만으로도 버거운데 새로운 조력자까지 등장한 것이다. 이쪽에서 가지는 수적 우세는 승패에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막상 이런 상황이 벌어지자 한진우라는 자가 정말 고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누구 마음대로!" 황보조학의 내심을 알아채기라도 한 것처럼 선주혁이 천 노인의 말을 받아쳤다. 그가 일찌감치 나선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간 선주혁이 봤던 영 화나 소설을 보면 악당이건 주인공이건 제일 강한 사람은 꼭 나중 에 나선다. 부하나 동료가 죽거나 다친 후에야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물론 상대를 지치게 하거나 전력을 파악하기 위한 목적이 분명하다면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그런 목적이라기보다는 별다른 이유 없이 그저 나중에 나서는 것이다. 이에 선주혁은 그런 바보 같은 행동을 따라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여 미리 자신이 나선 것이다. 다른 이유도 있었다. 지난 몇일간 계속해 온 명상을 통해 소정의 성과를 거뒀다. 비록 한순간의 생각일 뿐이었지만 하나의 깨달음의 결과가 결코 작지 않 음을 이미 알고 있는 그였다. 이에 선주혁은 자신의 깨달음을 한시 라도 빨리 시험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의 행동은 황보조학 등의 비웃음을 샀다. 그가 주제도 모르고 설쳐댄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마도 남궁연이나 백화란을 의식하고 나섰다고 짐작하는 황보조학 등이었다. 그들은 선주혁의 재력에 욕심을 내는 중이었으나 지금은 모두가 죽을 수도 있는 상황. 따로 그만을 보호해야 할 여유가 없었기에 황보조학 등은 선주 혁을 말리고 나서지 않았다. 백화란은 선주혁의 형이라 생각하기에 그의 실력에 기대를 했 고, 남궁연 역시 그가 범상치 않은 고수라 생각하기에 멋진 활약만 을 기대햇다. 이들의 주변으로 몇몇의 구경꾼들 무리가 형성되었다. 평범한 사람들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서둘러 걸음을 옮기거나 말을 재촉 했고, 병장기를 든 무림인들만이 멀찌감치 서서 구경을 하는 것이 다. "정파의 애송이들이란......!" 선주혁을 하룻강아지 정도로 취급하는 천 노인은 코웃음을 치며 서서히 걸음을 옮겼다. 원래 남창인근에서 곤륜이마와 염마가 타지 로 이동하는 것에 대한 감시역을 맡고 있던 그였다. 그러던 중 홍의 노인의 지원요청에 이 자리에 온 것이다. 직접 선주혁을 확인하니 고작 약관을 넘어선 애송이에 불과했 다. 이런 자에게 수하를 둘이나 잃고 도주한 홍의노인이 한심하게 여겨졌지만 책망할 생각은 없었다. 명색이 단주의 지위에 있으며 고작해야 감시역을 맡고 있음이 내심 불만이었다. 그런 임무에서 벗어나게 해 준 것이 오히려 고마웠던 것이다. 이미 천 노인이 혈마자광기를 운용하고 있음을 알고 있지만 선 주혁은 혈마자광기를 끌어올리지 않았다. 이는 어제 떠오른 하나의 기발한 생각 때문이었다. 스스로를 선주혁의 형이라 밝혔기에 그는 다른 사람의 눈을 피 해 백화란에게 묵연수투를 돌려주려 했다. 그녀에게 전할 방법을 찾던 중 문득 떠오른 생각에 선주혁은 무릎을 쳤다. 묵연수투를 끼면 도검불침은 물론이거니와 공격 시 파괴력이 비 약적으로 향상된다. 이에 선주혁은 자연의 모든 기운을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다면 묵연수투의 기운을 응용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 본 것이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묵연수투의 기운을 운용하는 것이 가능했 던 것이다. 이것이 그가 혈마자광기를 운용하지 않은 이유였다. 상대가 특별한 공력을 끌어올리지도 않고 서 있는 모습에 천 노 인은 뭔가 좋지 않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는 다시 선주혁을 자세히 살펴봤다. 날은 저물어 어두웠지만 그의 안력은 선주혁의 외양을 살피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밋밋한 태양혈. 정광이 빛나지 않는 두 눈. 무공을 익힌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설마?' 자신보다 서열이 낮다지만 홍의노인 역시 백웅 중 한 명이다. 그 가 겁이 많고 소심할지라도 전혀 무공조차 모르는 자가 최심장을 사용했다 해서 지원을 요청할 리는 없었다. 따라서 천 노인은 반박귀진의 경지를 연상했고, 이는 곧 부정으 로 이어졌다. 황보조학 등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무공을 익힌 흔적이 드러나지 않는 기이한 심법이라도 익힌 것 이겠지.' 천하에는 별의별 무공이 다 존재한다. 태양혈이 도드라지지 않 는 무공이 없으리라는 법도 없었던 것이다. 천 노인은 순간이나마 자신이 위축되었다는 사실이 못마땅했다. 이에 기합성과 함께 우수를 휘둘렀다. 동시에 어두운 밤의 장막을 붉은색의 구체가 찢어발겼다. 형체화한 장력을 저토록 쉽게 날린다는 사실에 황보조학 등이 경악할 때 선주혁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손을 휘둘렀다. 콰아아앙! 혈마자광기 특유의 폭발음이 터졌다. '막아? 그것도 맨손으로?' 천 노인은 자신의 장력을 보고 놀란 황보조학 등보다 더욱 크게 놀랐다. 딱히 수공을 운용한 것도 아닌 듯 보이건만 혈마자광기를 막아낸 것이다. 더구나 상대는 아무런 충격도 받지 않은 듯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선주혁은 이미 천 노인에 비해 압도적인 내공을 지닌 상태다. 아 무리 천 노인의 내력운용이 뛰어나다 해도 배 이상에 달하는 내공 의 차를 쉽게 극복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선주혁의 손은 묵연수투의 기운을 응용하고 있는 상태. 혈마자광기라 해도 그의 손을 상하게 하거나 내상을 입힐 수는 없었던 것이다. 대경(大驚)한 천 노인은 다시금 장력을 끌어올렸다. 전력을 다해 야 한다는 것을 무인 특유의 본능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의 손 위에서 자색의 구슬이 선명한 빛을 발했다. 이전에 비해 훨씬 강력한 위력을 내포한 혈마자광기였다. 선주혁은 여유 있는 표정으로 노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미친!' 별다른 방어 자세조차 취하지 않고 다가서는 선주혁을 향해 외 치고픈 말이었다. 하지만 전력을 기울여 공력을 끌어올린 천 노인은 입을 열지 못 했다. 다시금 그의 장력이 허공을 갈랐다. 선주혁은 자색의 구체가 지척에 이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또다시 손을 휘둘렀다. 북두폭렬장의 속도이기에 가능한 여유였다. 이전과 비할 수 없는 굉음이 터졌다. 장력의 여파가 적지 않아 백화란은 뒤쪽으로 물러서야만 했다. 하지만 선주혁은 여전히 걸음을 옮기는 중이었다. 그저 파리를 쫓듯 손을 한 번 휘두른 것이 다였다. '이런....... 괴물 같은......!' 천 노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리고 생각했다. 눈앞의 상대가 진짜로 반노환동의 노고수일지도 모른다고, 더불어 그가 백존에 비해 손색이 없는 고수임을 확신했다. "뭐하고들 있는 거냐? 어서 저넘을 공격하지 않고!" 천 노인은 신경질적으로 고함을 질렀다. 홍의노인과 그의 수하 두 명이 선주혁 쪽으로 신형을 날렸다. 그 장면을 확인한 천 노인은 뒤쪽으로 몸을 돌렸다. 상대는 자신 이 감당할 수 없는 고수다. 더구나 인원 또한 저쪽이 많았다. 오늘 일에 길보다 흉이 많음은 확실한 터. 일단은 목숨을 건지는 것이 우선이었다. 천 노인은 수하들이 시간을 버는 사이 도주하려 드는 것이다. 그가 신형을 날려 얼마 달리지 않았을 때였다. 천 노인은 달리는 것을 멈추고 세모진 눈을 동그랗게 떠야만 했 다. 어느새 선주혁이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실로 놀 랍기 그지없는 신법이었다. 선주혁이 천 노인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이유가 있었다. 보다 명 확히 자신의 수준을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더불어 묵연수두의 기운 을 응용함으로써 변화시켜 본 북두폭렬장을 시험해 보고 싶기도 했 다. 그러니 천 노인의 도주를 막아 세운 것이다. 선주혁이 천 노인을 막아 세우자 홍의노인과 수하들은 멀뚱하니 바라볼 뿐 다시금 선주혁에게 덤벼들지 않았다. "어서 이놈을 공격하라니까 무엇을 구경하고 있는 것이냐?" 단주의 호통이었으나 홍의노인과 수하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저희는 이 녀석들의 가세를 막겠습니다." 홍의노인은 능글맞은 표정으로 황보조학 등을 막겠다고 단주에 게 말했다. 천 노인이 눈썹 끝을 높이 치켜 올렸다. 치밀어 오른 노기에 수 염 끝이 파르르 떨릴 정도였다. 하지만 더 이상 홍의노인을 채근하지 않았다. 자신은 이미 그들 의 목숨을 대가로 도주하려던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사실을 알고 있는 자들이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걸지 않을 것임을 알 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자신과 이 애송이와의 싸움을 관전하다 가 분위가가 좋지 않으면 도망을 칠 것이 분명했다. 그들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던 천 노인은 짧은 한숨 끝에 최후의 방법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천 노인은 곧 이를 악물었다. 그의 독기어린 표정을 본 선주혁은 기대에 찬 표정을 내보였다. 천 노인이 잠원기폭공을 끌어올리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기 다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한순간 천 노인의 몸에서 폭풍 같은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잠원기폭공에 노인의 내력이 배로 증가한 것이다. "크흐흐흐흐......" 남은 생의 대부분을 잃게 된 천 노인의 입에서 흉측한 괴소가 흘 러나왔다. "잠원기폭공?" 선주혁과 천 단주라는 자의 대치에 한껏 긴장하고 있던 제갈중 양이 눈을 크게 뜨며 중얼거렸다. 그를 비롯해 황보조학, 팽손겸, 제갈중화는 선주혁의 가공할 무 공에 한참을 놀라는 중이었다. 여태 그의 무공을 경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유형화된 장력을 날리는 자를 저토록 쉽게 상 대하는 것 자체가 충격이었다. 그와 같은 능력을 지닌 한진우가 자 신들과 비슷한 나이라 더욱 그랬다. 한진우가 자신들과는 비견될 수 없을 고수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를 응원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가 버텨야만 자신들 이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천 단주라는 자가 잠원기폭공을 끌어올리는 것을 보니 다시금 절망에 빠져들었다. 구파일방의 장문에 못지않아 보이는 무공의 소유자가 잠원기폭공을 했으니 그 무위가 얼마나 대단 할지는 직접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홍의노인과 수하 둘이 지키고 서 있는 상황. 쉽사리 한진우라는 자와 합공을 펼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은 긴장된 마음으로 선주혁이 이겨 주기만을 바랄 뿐이었 다. 그것만이 오늘의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방금 전까 지 그가 주제넘게 나선 것을 비웃고 있었음조차 망각한 채 그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한진우라는 자의 무공이 고강하기만을 바라는 중 이었다. 천 노인은 전신에 주체하기 힘들 만큼의 내력을 느끼며 양손에 진기를 모았다. 이번에는 선주혁도 두 손에 진기를 주입했다. 상대가 잠원기폭 공을 끌어올린 만큼 방심할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천 노인이 이전 에 비해 두 배는 족히 커진 자색의 구체를 날렸다. 쾌속무비하게 날아드는 자색의 구체. 그 속도에 선주혁은 감히 태만하지 못하고 장력을 향해 손을 뻗 었다. 쿠아아아앙! 긴 여운을 남기는 폭음과 함께 선주혁의 어깨가 흔들렸다. 이번 에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충격파에 옷자락이 심하게 펄럭이고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로 선주혁은 꿋꿋이 서 있었다. 미간을 찌푸린 것은 긴장했던 마음가 짐이 표정으로 드러난 것일 뿐이다. 묵연수투의 기운을 응용하자 일말의 충격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충격을 받은 것은 천 노인이었다. 이를 악물고 버티고 서 있었지만 장력을 쏟아낸 뒤의 반탄력이 지독했던 것이다. '저런 고수라니? 단지 내력을 집중하는 것만으로 혈마자광기를 막아내다니! 백발귀마라는 자에 이어 또 다른 고수의 출현이란 말 인가?' 천 노인은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회에서 파악하 지 못한 또 하나의 절대고수가 무림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본래 잠원기폭공을 끌어올린 만큼 필승을 자신했었다. 하지만 단 일 장의 교환만으로도 그런 기대가 쉽게 이뤄지지 않 을 것임을 느낄 수 있었다. 잠원기폭공을 끌어올렸음에도 자신보다 고강한 내력을 지녔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가히 천하제일의 내공을 가진 자임을 짐작한 천 노인은 방법을 바꾸기로 했다. 그는 팔을 벌려 양 손을 들어올렸다. 그 위에 각각 혈마자광기가 떠올랐다. 선주혁은 노인의 행동을 흥미 있게 바라봤다. 고수와의 일전 속 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많고도 많았다. 경험이 부족한 자신에게 이 번의 격전은 큰 도움이 되리라 믿고 잇는 그였기에 노인의 행동을 깊이 있게 관찰하는 것이다. 천 노인의 좌수를 뻗어 혈마자광기를 날렸다. 선주혁은 다시금 한 걸음을 내딛으며 천 노인의 혈마자광기를 막아냈다. 폭음이 울려 퍼짐과 동시에 다시금 날아드는 혈마자광기. 천 노인의 우수에 떠올랐던 그것이다. 선주혁은 또다시 혈마자광기를 막아냈다. 노인을 향해 한 걸음을 더 옮기려는 선주혁의 발걸음은 새롭게 발출된 혈마자광기에 의해 가로막혔다. 천 노인이 연속적으로 혈마 자광기를 날리고 있는 것이다. 콰아앙, 콰앙, 쾅! 연속 세 번에 걸쳐 혈마자광기를 막아낸 선주혁은 묵연수투의 기운을 빌린 것이 엄청난 효과가 있음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이 에 그는 좀 더 자신감을 가지고 색다른 실험을 해 보기로 했다. 천 노인의 혈마자광기는 그칠 줄 모르고 쏟아지는 상태. 선주혁은 휘두르며 막아내던 손을 멈춰 세웠다. 콰아아앙, 쾅, 쾅, 쾅, 쾅! "아!" 남궁연의 입에서 안타까운 탄성이 튀어나왔다. 지독할 정도로 쏟아지던 장력이었다. 그녀로서는 대체 몇 개의 장력이 발출된 것 조차 헤아리기 힘들 정도였다. 그저 끊임없이 자광이 번득임을 보 았을 뿐이다. 그리고 결국 한진우가 장력에 적중된 것이다. 남궁연은 검병을 쥔 손에 힘을 주며 한시라도 빨리 관도 위를 가 득 채운 먼지가 걷히길 기다렸다. 그러기 힘들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제발이지 한진우가 살아 있 기를 염원하는 그녀였다. =금강불괴(金剛不壞)= <<1>> "그, 금강불괴?" 먼지가 걷히자 여태껏 미소를 짓고 서 있던 천 노인의 입에서 경 악성이 터져 나왔다. 설령 전신을 호신강기(護身剛氣)로 둘러쌌다 하더라도 이 정도의 혈마자광기에 멀쩡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절대 불가능 했다. 폭발적인 장력이 연속적으로 작열하는 마당에 호신강 기가 유지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상의는 넝마가 되어 찢어졌으나 곱상한 얼굴과는 달리 다부져 보이는 몸에는 작은 상처조차 남지 않았다. 안색 또한 태연하기 이를 데 없으니 내상을 입지도 않았다는 뜻. 천 노인은 그가 전설상의 금강불괴를 완성했다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는 만년음양초로 기이하게 변한 신체와 묵연수투의 기운을 응 용한 기상천외한 결과였다. 선주혁은 혈마자광기를 이용해 손뿐이 아니라 어깨까지 보호해 북두폭렬장을 펼친 경험을 떠올렸다. 물론 비약적으로 증가한 내력 으로 몸의 상당부분을 보호할 수도 있었지만 선주혁은 다른 방법을 택한 것이다. 내력의 소모가 극히 적으면서도 혈마자광기 이상의 효과를 낼 수 있는 방법. 그것이 바로 전신에 묵연수투의 기운을 입히는 것이었다. 과연 효과는 확실히 드러났다. 엄청난 장력을 맨몸으로 받아냈 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피해를 보지 않은 것이다. 선주혁은 천 노인의 외침에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이 있다. 비록 진정한 금강불괴의 경지에 오른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비 슷한 효과를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의 내력 중에서 이 정도의 진 기를 소모해 전신을 보호할 여유는 충분했다. 좀더 사물의 기운을 응용하는 데에 익숙해진다면 하루 종일이라도 이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말 그대로 금강불괴의 경지나 다름없는 것이다. 한편 천 노인의 경악에 찬 외침은 황보조학을 비롯한 사대세가 의 후손들과 저 멀리의 구경꾼들에게까지 들렸다. 어마어마한 장력 을 확인한 중인들로서는 천 노인의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저와 같이 폭사되는 장력을 맨몸으로 받아낼 수 있는 것은 그들로서도 금강불괴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전설 속에서나 회자될 법한 금강불괴의 경지에 오른 인물을 실 제로 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은 흥분했다. 무인으로서 절대 의 강자를 직접 두 눈으로 보는 것은 다시없을 영광이다. 또한 그런 경험은 평생을 두고 이야기할 소재가 되어 줄 것이다. "이 옷을 어떻게 변상 받을까나.....?" 선주혁이 미소 중에 내뱉은 말이었다. 그는 다시금 서서히 걸음을 옮겨 천 노인에게 다가갔다. 천 노인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상대는 의심할 나위 없이 금강불괴의 경지에 오른 자. 설령 백존이 이 자리에 있더라도 어찌하기 힘들 게 분명했으니 자신으로서는 그를 상대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상대가 경이적인 신법을 지녔으니 도주조차 불가능할 터. 그는 아랫입술을 터져라 깨물며 쌍수에 진기를 모았다. 진득한 자광을 뿌리는 수강이 한 자도 넘게 뻗어 나왔다. 아무리 도검불침(刀劍不侵)의 신체라지만 내장가지 강해질 수는 었는 터.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그토록 많은 혈마자광기에 적 중 당하고도 아무런 충격이 없다곤 믿을 수 없었다. 이에 초식의 우위를 점할 수 있다면 계속해 그의 신체를 가격할 수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내상을 입히는 것도 가능할 수도 있었다. 장력의 발출은 폭발적인 위력만큼이나 내공의 소모가 큰 법. 아무리 잠원기폭공으로 내력을 배가 시켰다 해도 결국은 내력이 고갈되고 말 것이다. 장력을 발출하지 않고 수강을 이용하는 것은 단숨에 승부를 낼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이에 수강을 통해 지 속적인 충격을 가하기로 천 노인은 결정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승리가 아니었다. 잠시라도 운기에 지장이 생기길 바라는 것이다. 그 잠시 동안의 시간이 자신에게는 이 자리를 빠져나갈 여유가 되어 줄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멍하니 서서 목숨을 내어줄 수 없는 천 노인의 입장에서는 최후 의 희망이었다. 천 노인은 비장한 태도로 선주혁이 다가서길 기다렸다. 자색의 수강이 닿을 거리에 이르자 그의 자광수가 춤을 췄다. 지독할 정도로 빠르고 정확한 초식의 전개였다. 자신의 신체가 자광수를 버텨낼 수 있음을 알고 있는 선주혁은 보다 여유를 가지고 천 노인의 초식을 관찰할 수 있었다. 자신과는 비할 바 없는 노인의 혈마자광기에 그는 내심 감탄하기까지 했다. 천 노인의 공격을 막아내는 동안 그는 확연히 느꼈다. 단전에서 출발한 진기는 천 노인의 동작을 따라 손으로 방출되는 중이었다. 그 흐름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마치 원래부터 그렇게 되어 있기도 한 것만 같았다. 다시 말해 천 노인의 내력과 초식이 완벽하게 호응해 절대적인 상승효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한동안 공격을 쏟아 부었음에도 상대를 가격하지 못하자 천 노 인은 입술이 바싹바싹 말랐다. 연환장력을 전개할 때는 미처 막아 내지 못했건만 어찌된 일인지 그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쾌속무비하 게 펼쳐지는 수강은 수월하게 막아내고 있는 것이다. 북두폭렬장을 운용하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직선적인 공격 과 거리에서 한계가 명확히 드러났을 뿐, 북두폭렬장의 속도는 여 전히 빠른 것이다. 더구나 이번에는 자신이 짧은 거리를 움직여 방어를 하는 입장 이다. 선주혁은 수월한 모습을 보일 수 밖에 없었다. '설마하니 아까는 일부러 장력에 당한 것이란 말인가?' 천 노인은 머릿속에서 떠오른 불길한 생각을 부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계속 되는 장세 속에서 태연하기만 한 상대의 얼굴은 그 런 불길한 예측이 맞았음을 증명하는 중이었다. 그러던 어느 한순간. 천 노인의 안색이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선주혁이 손을 은은한 청광이 반짝이기 시작한 후부터 비롯된 현상이었다. 그가 북두폭렬장에 최심장 운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과거 혈마자광기로 손과 팔을 보호할 때는 최후의 순간 최심장 으로의 변환이 불가능했다. 하나 지금은 묵연수투의 기운으로 신체를 보호하며 북두폭렬장 을 전개하는 상태. 최후의 순간 최심장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천 노인의 안색이 창백해진 것은 이 때문이었다. 혈맥에 전해지 는 충격이 느껴진 것이다. 최심장 특유의 효용이었다. 혈맥에 충격 이 누적되다가 종국에는 심장에까지 충격이 전달되어 죽게 되는 것 이다. 천 노인은 극한까지 자광수를 운용해 최심장의 충격을 줄여 보 고자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선주혁은 지금 최선을 다해 최심장을 전개하고 있지 않았고, 장 력을 발출하는 데에 여유가 있었다. 상대가 강한 힘을 끌어올리면 보다 강한 힘을 쏟아낼 여력이 충분했던 것이다. 선주혁이 이처럼 천 노인에게 계속해서 기회를 주는 데는 이유 가 있었다. 최심장을 운용하면서부터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른 것이 다. 이전에 만났던 노인이나 눈앞의 천 노인이나 모두가 북두폭렬장 에 준하는 속도로 양손을 움직이는 중이었다. 그들이 자신과 같은 특이한 신체를 가졌을 리 만무하건만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손과 팔에 아무런 이상이 생기질 않는 것이다. 선주혁이 의문을 가진 것은 그 부분이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두 가지 가정을 떠올려싿. 두 사람은 자신처럼 급격하게 빠른 속도로 장력을 펼칠 수 있게 된 것이 아닐 터였다. 오랜 세월 수련에 수련을 거듭해 오늘날의 경 지에 이르렀을 것이고 그만큼 손과 팔이 단련될 수 있다는 가정이 첫 번째였다. 다른 하나의 가정은 역시나 자신이 모르는 심오한 이치가 있다 는 것이다. 수만 번에 걸친 수련 끝에 완성된 두 노인의 초식이다. 그들의 움직임 하나, 하나에는 고련에서 비롯된 깨달음이 담겨져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저와 같은 움직임 속에서도 신체가 상하지 않을 수 있다는 가정이었다. 무게는 두 번때 쪽에 실렸다. 아무리 단련을 한다 해도 한계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런 것이 가능하다면 저 정도의 경 지에 오른 고수는 모두가 금강불괴가 되었을 것이다. 이에 선주혁은 좀 오랜 시간 노인의 수법을 관찰하고 싶었다. 그 가 상대를 몰아붙이지 않는 데는 이와 같으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초조한 마음에 쫓기는 천 노인은 더욱 거세게 선주혁을 몰아세 웠다. 선주혁의 주변에는 자색의 막이 쳐진 듯했다. 천 노인의 수강이 그의 몸을 휘감은 것이다. 그러던 중 선주혁은 앞서 노인의 진기의 흐름을 느꼈던 것과 같 은 맥락에서 하나의 결론을 도출해 냈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흐름을 가진 진기의 운행. 그 운행을 쫓는 천 노인의 양 손. 일련의 과정에는 그 어떤 무리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손과 팔에 상처가 생겼던 것은 공기와의 마찰 때문임을 선주혁 은 알고 있었다. 한데 노인의 손은 마치 진공의 상태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마찰 에서 자유로웠다. 마치 노인의 손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길이 나 있 는 듯 편안한 움직임이었다. 비할 바 없는 강한 경력을 실을 손의 움직임이 저토록 잔잔하고 부드럽게 움직일 수 있다는 것. 그것은 보는 이로 하여금 신기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아마도 저것이야말로 오랜 고련을 통해 얻은 천 노인만의 길이 리라. 하나를 알았다고 해서 하나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 다. 지난번 천용백의 말을 전했음에도 단목하진과 남지학만에 깨달 음에 도달했을 뿐, 종극 등은 아무런 성취도 일구지 못했다. 천 노인의 동작을 관찰한 선주혁은 즉각적인 깨달음을 얻지 못 했지만 추후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럼 이제 슬슬 끝을 내볼까?' 선주혁은 팔에 주입한 공력을 한순간 늘였다. 천 노인, 선주혁 양자 사이에 공간에서 울리던 폭음의 크기가 급 격히 커졌다. 동시에 천 노인의 신형이 뒤쪽으로 튕겨져 날아갔다. 단 일 장에 승패가 결정이 난 것이다. 창백한 안색으로 혈맥을 타고 밀려오는 충격을 줄여 보려 노력 하는 천 노인이었다. 이미 예정된 죽음이었지만 생에 대한 미련을 그렇게 쉽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선주혁은 노인이 즉사하지 않은 것에 대해 약간은 감탄했다. 잠원기폭공으로 증가된 내력의 크기란 역시 무시할 수 있는 것 이 아니었다. 선주혁의 손이 허공에서 기하학적인 도양을 그려내며 움직였다. 이어 그이 손에 떠오른 회색의 구체. 그것이 천 노인을 향해 날아갔다. 그다지 빠르지 않은 속도. 하지만 억지로 버티고 서 있는 천 노인에게 피할 여력이 있을 리 없었다. 순간 천 노인의 단전을 향해 날아가던 구체가 회색의 호선을 그 리면 꺾였다. 그리고 는 천 노인의 심장 부위에 작열하는 장력. "크아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뒤로 날아간 천 노인. 그것으로 끝이었다. 즉사한 것이다. 선주혁은 살짝 고개를 끄덕여 만족스러움을 표했다. 상대를 죽 였기 때문이 아니었다. 공 노인의 복수라지만 사람을 죽여 놓고 즐 거워하는 성품은 되지 못했다. 그저 자신이 시도해 본 또 하나의 방법이 성공한 것에 만족하는 것이다. 마지막에 날린 장력은 지난번 천산노조 서동주가 보여준 것을 흉내 내본 것이다. 즉 난화무영수를 이용해 에네르기파의 궤 적을 바꾸는 연습을 한 셈이었다. 천 노인을 잠시 바라보던 선주혁은 몸을 돌렸다. 그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어느새 홍의노인과 그의 수하들이 모습을 감춘 것이다. 모두가 격전에 집중해 있는 사이 몸을 뺐으리라. "세상에......? 저런 고수가 있었다니!" "금강불괴가 실존할 줄이야!"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대체 저 사람, 아니 저분은 누구신지?" 저 멀리 구경꾼들의 웅성거림이 선주혁의 귀에 생생이 들려왔 다. 어쩐지 쑥스러운 느낌이 들어 그는 빠르게 백화란이 있는 쪽으 로 돌아왔다. 그녀를 비롯해 황보조학 등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선주혁을 바 라보고 있었다. 살아남았다는 기쁨보다 금강불괴의 경지에 오른 절 대고수를 이렇게 가까이서 보고 있다는 사실이 더 큰 감정의 기복 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우와! 한 공자!"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남궁연이었다. 백화란과 그녀는 선주혁 을 이미 고수로 인정하고 있었기에 방금 전의 광경을 받아들이기 더 쉬웠던 것이다. "고수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정말 몰랐어 요!" 조금은 소란스러울 정도로 선주혁을 맞이하는 남궁연이었다. 그녀의 밝은 목소리에 나머지도 복잡한 상념에서 깨어났다. "대단한 무공이었....소, 진심으로 감복했소이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제갈중양이었다. 말끝을 약간 흐린 것은 한진 우라는 자에게 건네는 말투에 대해 재고해 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 었다. 어설픈 무공을 주워 배운, 그저 막강하달 정도의 재력만을 지 닌 상인이 아닌 것이다. "금강불괴라니.....!" 황보조학은 두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하겠다는 듯한 표정과 탄 식 썩인 한마디를 내뱉을 뿐이었다. "정말 놀라운 무공이었소." 억지로 이어붙인 한마디였다. 한진우라는 자에 대한 생각을 확 연히 정리하지 못한 만큼 황보조학으로서는 이것이 최선이었다. "대단합니다. 정말 대단한 무공이었소." 팽손겸이 선주혁을 향해 엄지를 곧추세웠다. 선주혁은 쑥스러운 미소로 화답을 한 후 재빨리 마차 안으로 들 어가 버렸다. 이들의 칭찬보다는 저쪽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의 시선 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연예인이 아닌 이상 한 몸에 많은 사람 들의 요상한 시선을 받는 것에 익숙해지긴 힘들었다. "저 사람..... 믿기 힘들 정도의 고수였군요." 제갈중화가 감탄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 정도의 고수라면 오히려 알아보지 못한 것이 당연한 거겠 지." 한진우라는 자의 엄청난 무위를 알아보지 못했던 자신을 위로하 듯 황보조학이 낮게 중얼거렸다. "혹시.....!" 제갈중양이 진지하기 이를 데 없는 표정을 만들었다. "한 대협은....." 어느새 한 형에서 한 대협으로 호칭을 바꿔 부르는 그였다. "반노환동의 고수가 아닐까 싶소." "제 생각도 그래요. 저 나이에 금강불괴의 경지라니.....!" 당최 말이 안 된다는 표정으로 제갈중화가 오빠의 말을 거들고 나섰다. "그의 치아색은 절대로 노인의 것이 아니었소만.....?" 황보조학은 이전에 생각했던 바를 말했다. "한 대협을 그저 반박귀진의 경지에서 판단하려는 것은 곤란하 지 않겠소?" 제갈중양이 잛게 반문했다. 담겨진 뜻은 명확했다. 전설 속에서나 등장하는 금강불괴에 이 른 고수다. 다시 말해 그 정도의 경지에 오른 자에게 어떤 일이 벌 어지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다는 뜻이다. 즉, 치아의 색만으로는 그 의 연배를 짐작할 수 없다고 제갈중양은 주장하고 있었다. "역시나 그랬구려." 일말의 의문이 해소되자 황보조학은 외려 적극적으로 수긍하고 나섰다. 치아의 색이 달라질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 자신보다 어 려 보이는 자가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높은 경지에 올라 있다고 인 정하는 것보다 쉬웠던 것이다. "크....., 그간 우리가 함부로 대한 것에 노 선배께서 불쾌하셨을 지도 모르겠구려." 커다란 덩치와는 달리 소심한 표정으로 황손겸이 말했다. 그 역 시도 황보조학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이유에서 이미 선주혁이 연배를 알기 힘들 정도의 노고수임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런 기색은 없었다고 봐야 할 것이오. 본인 스스로도 밝히지 않았으니 우리를 책망하지도 않을 것이고....." 황보조학의 대답에 팽손겸은 꽤나 안심이 된다는 듯한 표정이었 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는 백화란은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가 곧 체념하는 표정을 지었다. 저 사람은 백발귀마의 쌍둥이 형이라고 밝힐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에..... 그럼 할아버지라는 얘기네요." 남궁연은 무엇인가 실망스럽다는 표정이었다. "어찌되었건 앞으로 노선배님을 모시는 데에 한 치의 소홀함도 없어야 할 것이오. 저분이라면 정의련에 큰 힘이 되어 주실 것이 분 명할 테니....." 제갈중양의 결론에 각각은 저마다의 생각 속에서 머리를 끄덕였 다. <<2>> 발 없는 말은 하룻밤에 천리를 간다고 했다. 선주혁은 그 속담이 하나도 틀리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일이 있은 첫날에는 몰랐다. 다음 날 저녁. 선주혁 일행이 객잔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있을 때 무림인들로 보이는 자들의 화제는 온통 금강불괴지신의 출현에 관한 것뿐이었 다. 남창으로 향하는 행보를 서두르고 있는 만큼 어떻게 저와 같은 소문이 자신들의 이동속도와 함께 퍼져가고 있는지 선주혁으로서 는 쉽게 납득키 힘들었다. 아무리 그가 이곳 세상에 대한 책과 다른 여러 무협소설을 읽었 다지만 이와 같은 세부적 상황을 파악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아니 계속해 자신의 무공을 발전하는 데에만 온 정신을 쏟아 붓고 있기 에 소문의 속도 따위를 곰곰히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저 직관에 가까운 판단 속에서 현대적인 미디어가 없는 세상임에도 이처럼 빠 르게 확산된다는 사실만이 놀라울 뿐이었다. 하지만 황보조학 등은 별로 놀라는 기색이 아니었다. 저와 같은 소문이 퍼지는 속도는 가히 경이적이기 마련이다. 사 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는 어는 곳에건 무림세력의 눈과 귀가 있기 마련이다. 개방으로 대표되는 정보수집에 있어 발군인 단체가 무림 에는 널려 있었다. 당시의 상황을 목격한 자라면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마치 자신 의 무용담인 양 떠들어 댔을 것이고 이는 곧 무림의 각 정보망에 걸 리게 된다. 딱히 기밀로 유지해야 할 상황이 아닌지라 정보가 상부로 보고 되는 속도만큼이나 소문이 널리 퍼지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라 할 수 있었다. 따라서 황보조학 등이 놀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발 빠른 대담 꾼이 한진우에 대한 이야기를 팔지 않고 있는 것이 의외라면 의외 일 뿐이었다. "거참....!" "뭔가 불편하십니까, 한 대협?" 그 일 이후부터 극진하게 변해 버린 이들의 대접을 선주혁은 일 부러 사양하지 않았다. 착각이 깊을수록 자신의 정체가 무림공적 중 하나인 백발귀마라는 사실을 감추기 쉬웠기 때문이다. 백화란이 입을 열지 않는 한 이들은 자신을 백 세 정도로 훌쩍 넘은 노고수로 여길 터였다. "아니오. 그저 소문의 빠르기에 놀라는 중이었소." "한 대협의 신위는 그만큼 돋보였습니다. 아마도 며칠이 지나지 않아 중원 전체가 한 대협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할 것입니다." 제갈중양이 은연 중 아부를 썪어 말했다. "별말씀을...... 여하튼 말을 타고 달려온 우리보다 소문이 먼저 퍼지다니 신기한 일이구려." 선주혁의 말에 제갈중양 남매와 황보조학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 다. 이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 포섭해야 할 대상이었다. 무공은 측량 키 힘들만큼 높으나 무림에 대한 제반지식은 부족한 것처럼 보이는 단면을 확인했다. 아마도 심산유곡(深山幽谷)에서 무공만을 익히다 나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진우라는 자가 무림 정세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는 사실. 두 남매와 황보조학이 미소를 짓는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지난 이틀간 선주혁과 함께 하며 그들은 내심 불안한 마음이 없 지 않았다. 애초에 그가 자신들에게 일부러 접근해온 것이 아닌가 염려했던 것이다. 우연히 자신들이 먼저 다가서게 되었을 뿐, 계속 해 주변을 맴돌며 어떻게 해서든 계기를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이는 선주혁이 엄청난 무공을 가졌음에도 상인을 자처했고, 자 신의 무공과 연배를 갖춰 왔기에 생기는 의문이었다. 갑작스레 튀 어나온 극강의 고수라면 당연히 그 신분이 궁금한 법이기도 했다. 선주혁이 계속해 자신은 상인일 뿐이며, 무공은 우연히 만난 한 노 인에게 배웠다고 말했다. 제자도 뭣도 아니며 그저 몇 가지의 무공 을 전해 받았을 뿐이라고 했다. 황보조학 등을 더욱 미심쩍게 만드 는 부분이었다. 명사의 가르침 하에서도 오르기 힘든 절대고수의 경지다. 정식 사사도 아닌 그에게 이와 같은 무공을 전해 줄 이가 천하에 과연 존 재하는 가부터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그럼에도 분명 선주혁은 무림정세에 어두운 바가 많았다. 물론 그가 모른척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가정은 아직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포섭하는 데에 대한 그들의 기대 또한 계속 자라는 중이었다. <<3>> "그런 일이 가능할까요? 금강불괴라니......?" 은설연이 물었다. 시끌벅적한 남창의 한 객잔. 본래의 목적과는 달리 이제는 선주혁을 기다리는 그들은 무림인 들의 흥분해 떠드는 소문을 자연스럽게 들을 수 있었다. 남창의 인근 에 나타난 절대고수에 관한 소문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악구윤이 짧게 부정했다. 그는 세인들의 헛된 소리에 화가 난다 는 듯한 표정이었다. "금강불괴! 그거야 말로 전설에 불과한 이야기지. 현실 속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야." "단순한 호신강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들은 자색 빛 을 내는 장력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유형화된 장력을 사용한 것 이 분명하지요. 유형화된 장력은 강기의 발출이지 않습니까. 호신 강기 정도로 강기의 위력을...... 그것도 수십, 수백 차례의 연속적 인 강기를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까?" "흥! 소문이란 원래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법일세. 천하에 연속적 으로 그렇게 많은 강기를 쏘아낼 수 있는 고수가 몇이나 되겠는가? 제법 내력이 뛰어난 고수가 하나 등장했을 뿐이겠지." 당시 제갈중양만이 잠원기폭공을 알아봤고, 그가 중얼거리는 소 리는 그 일행들만 들었을 뿐이었다. 중인들은 천 노인의 전신내력 이 막강했던 것이고 후반에 들어서야 진정한 실력을 드러낸 정도로 만 생각했다. 따라서 애초 한계라는 것을 지닌 인간의 내력인 이상 그 정도의 장력발출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고, 소문은 과장된 것이라 여기는 악구윤이었다. "강기의 수준이 아닌 단순한 내기를 쏟아냈던 장력을 상대한 것 이라 여기시는 것입니까?" 은설연의 질문에 악구윤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장 풍(掌風) 수준의 장력이라면 호신강기 정도로도 충분히 막아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죽임을 당했다는 자가 패종회의 일원이라면 그 정도의 무위를 보일 수 있습니다." 남지학이 끼어들었다. "자색의 빛이라면 혈마자광기일 가능성이 높고, 그렇다면 유형 화된 장력임이 틀림없죠." 패종회의 실력을 익히 알고 있는 남지학이었다. 그는 악구윤이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 결론을 내리는 시작점이 틀려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그런 장력 발출 자체가 과장된 소문이니 금강불괴도 과장 이라는 식의 오류를 짚은 것이다. "역시 우리 정도의 고수들이 넘쳐난다는 건가? 패종회라는 곳에 는......?" 선주혁이 자신들, 즉 구대마존과 필적하는 고수가 백여 명에 달 한다는 이야기를 했던 것을 기억하는 종극이 끼어들었다. "사제의 말에 과장이나 거짓이 있을 이유가 없지요." 남지학은 단호하게 말했다. 은설연은 그가 여전하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소문은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크네. 설령 우리 정도의 실력이라 해도 그와 같은 무작스런 장력 발출은 힘들기 마 련이지." "패종회의 일원인 자가 애초 종 장로님 정도의 내력을 지니지 않 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우리도 힘들다고 말했잖아!" 남지학의 말에 악구윤이 발끈했다. 자신들조차 무리인 장력 난 사를 자신들보다 낮은 수준의 경지에서 해낼 수 있다는 게 말이 안 되었던 것이다. "일시적으로 내력을 끌어올리는 방법이 있습니다." "잠원기폭공!" 냉랭한 표정으로 침묵을 유지하던 수조문이 입을 열었다. "아무리 잠원기폭공이라 해도 일정 수준 이상의 경지에 오른 자 라면....." "어차피 죽게 될 상황이라면 목숨을 걸고 시도해 볼 만한 일일 것입니다." 잠원기폭공은 시전자의 내력이 높을수록 위험하다. 하지만 남지학의 말대로 위급한 상황이라면 앉아서 죽기보다는 잠원기폭공을 사용하는 게 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정리를 하자면 잠원기폭공이 성공했고 결국 우리 수준, 혹은 그 이상의 내력을 일시적으로 가지게 된 자가 강기를 난사할 수 있었 다......, 이렇게 되는 건가?" "가정일 뿐입니다." 종극의 정리에 남지학은 침착하게 답했다. "그렇다 해도!" 수조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소문은 역시 과장된 것일세. 그 정도의 강기 난사라면 잠원기폭 공을 사용한 자보다 두 배의 내력을 지녔다하더라도 맨몸으로는 막 아낼 수는 없는 일일세." "호신강기로 보호할 수 없는 수준이 되는 것입니까?" 은설연이 끼어들어 물었다. "호신강기라는 것은 압도적인 내력의 차이라 해도 충격을 줄이 는 수준에 불과한 걸세. 집중되지 않은 진기의 운용으로는 공격을 막아내는 데에 한계가 있으니까." "공격만큼의 강기로 온몸을 둘러싸려면 공격자보다 수십, 아니 수백 배의 내력을 지녀야 한다는 말씀이시군요." 은설연은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호신강기란 급박한 상황에서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신체의 특정부위에 내력을 집중해야 그 효력이 있는 것일세." "종 장로님 정도의 고수라면 그것도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진기 의 수발에 거의 장애가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니...., 장력이 적중당 하는 부위에 내력을 집중하는 것 말입니다." 은설연은 또 다른 의문에 질문을 던졌다. "진기의 수발이라는 것은 정해진 길을 오갈 때에만 자유로운 것 일세. 그 속도 또한 마찬가지지. 오랜 세월 닦아온 길을 다닐 때만 거침없는 운행을 내고 거두는 것이 자유로운 것일세. 만약 정말로 강기가 난사되었고 무작위로 신체에 적중되고 있다고 가정한다 면..... 그렇게나 빠른 속도로 적중부위에 진기를 모으는 것만으로 도 큰 무리가 생기기 마련이지." "그런 식이라면 적의 장력보다 제 몸 진기의 힘에 의해 죽어 버릴 거야. 무리한 진기의 유통에 혈맥이 터져 버릴껄." 수조문이 종극의 말을 거들고 나섰다. "결국 금강불괴라는 것은 불가능한 경지라는 것입니까?" 가만히 듣고 있던 남지학도 종극과 수조문의 결론에는 이견을 내지 못했다. 두 사람의 설명이 자신이 알고 있는 무리와 다르지 않 았기 때문이다. "천외천(천외천)이라..... 세상에 어떤 경지에 오른 자가 있을 줄 누가 알겠는가? 그렇다고는 해도 금강불괴라는 것이 전설이 아닌 현실에서 드러나기에는 너무나 무리가 많다는 생각일세. 한 인간이 우리 정도의 실력을 가진 사람의 수백 배에 달하는 내력을 모은다 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는가?" "특수한 기공을 익힘으로써 극복할 가능성은 없겠습니까?" 은설연의 질문에 악구윤이 코웃음을 쳤다. "노부가 익힌 무공은 절기가 아니라고 생각하느냐?" "그렇군요. 공격자의 무공도 절기인 만큼 역시나 압도적인 내력 의 차이가 아니면 방어하기란 불가능인 일이겠군요." "희대의 사기극일 수도 있겠지. 패종회라는 곳....., 자네들의 말 처럼 대단하다면 이 정도야 일이야 간단히 꾸밀 수 있지 않겠나?" 수조문이 두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말했다. "이번에 등장한 고수가 패종회와 한패일 가능성도 있단 말입 니까?" 은설연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화려한 장력을 발출하고 소리만 요란할 뿐 별다른 위력을 내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안목이 뛰어난 자가 없었다면 속 이기는 쉬웠겠지." 종극 역시 수조문과 같은 결론을 내린 모양이었다. "역시 지독한 놈들이군요. 수하의 목숨을 바쳐 음모를 꾸미다 니....." 남지학이 약간은 분개한 듯 이를 갈았다. 그 모습에 은설연은 쓴 웃음을 머금었다. 사파연합에서 자라온 그녀에게 있어서 수하 하나의 목숨을 통해 거사를 도모하는 것은 별로 지독한 일이랄 수 없었던 것이다. 아직까지도 이 사람은 정의 감에 넘쳐나는 중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들의 획책하는 음모가 무엇일가요?" "함께 있던 아이들이 오대세가의 후예들이라며?" "역시 정의련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요?" 은설연의 추측에 남지학이 나섰다. "오대세가는 혈족이 아니면 중심에 설 수 없소. 아무리 패종회라 할지라도 그와 같은 상황이라면 손을 쓰기가 곤란할 것이오." "흐음......." 은설연은 살짝 콧소리를 냈다. "결국 오대세가에까지 마수를 뻗치기 위해 수작이라는 거군요. 과연 이쪽이 훨씬 납득하기 쉽네요." "남창으로 오고 있다니 그 뻔뻔한 낯짝을 조만간 볼 수 있겠군." 악구윤은 여전히 화난 기색으로 말을 했다. 간세를 파견하고 음 모를 꾸미는 놈들 따위란 체질적으로 싫어하는 그였던 것이다. "그나저나 환마는 언제 오는 겁니까? 자칫 그자가 단목 공자와 도귀를 먼저 만나기라도 하면 일이 곤란해지는 데요." "연락을 넣어 두었으니 곧 도착할 걸세. 그런 면에서 보면 금강 불괴라는 사기꾼의 등장이 좋은 핑계거리가 되어 주는군. 적당히 속아주는 척하며 그자에 대한 조사를 위해 진내작을 불렀다고 하면 될 테니까." 종극의 말을 듣고 있는 은설연은 다시 한 번 그에 대해 감탄했 다. 딱히 책사라 불릴 직책을 가진 것도 아니지만 늙은 너구리답게 끊임없는 계책이 쏟아져 나왔다. '하긴 저 정도의 인물이니 구대마존이라 불리며 추앙을 받는 것 이겠지.' 은설연은 새삼 자신의 대에서만큼은 사파연합의 위세가 마교의 그것보다 높아지게 만들겠다고 결심하며 남지학을 바라봤다. 그와 백발귀마만 가세한다면 마교를 넘어서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생 각에서였다. =벽(壁)= 남창에 이르러 마차에서 내린 선주혁은 사태가 지나치게 커졌음 을 알 수 있었다. 이쯤 되면 전 무림의 주목을 받고 있음에 다르지 않았다. 예전 도신 독고전륜의 제자를 사칭했을 때보다 경우가 심 한 것 같았다. 남창에 들어서자마자 곳곳에서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시선이 느 껴졌다. 평범해 보이는 상인은 물론이거니와 한가로이 뒹구는 거지 들조차 예사롭지 않은 시선을 자신에게 던지는 중이었다. '이제 목적은 달성했으니 슬슬 몸을 빼야 하는 걸까?' 남창에 이르면 지난번 사형을 만났던 객잔에서 합류하기로 했 다. 황보조학 등을 이끌고 그곳으로 향할 수는 없을 터. 백화란에게 자신의 결백을 밝힌 만큼 더 이상 이들과 함께 해야 할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아!" 선주혁은 불현 듯 생각이 났다는 듯 탄성을 질렀다. ".......?" "깜빡 잊고 있는 일이 있었소이다. 남창에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거늘......!" "누구를 찾으시는 건지요? 정의련의 지부가 이곳에 있는 만큼 그쪽으로 모셔오도록 하겠습니다." 제갈중양이 재빨리 나섰다. 비롯 정의련의 남창지부가 큰 것은 아니었으나 사람 하나를 찾은 것 정도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오. 사정이 있어 찾아뵈어야 하는 것을 어찌 오라 가라 할 수 있겠소." 선주혁 정도의 고수가 '뵙다' 라는 표현을 할 정도의 인물이 누군 지 중인들은 궁금했다. 남창에 그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 있다는 것에 대해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 대협, 지금의 남창은 그야말로 용담호혈과 같은 곳입 니다. 앞서 남궁 형께서 남창으로 향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지요. 한 대협께서는 지금 전 무림의 주목을 받고 있는 만큼 가급적 안전에 유의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다지......, 두려운 마음이 들지 않는구려. 더구나 본인은 그저 상인일뿐이외다. 무림인들이 왜 소생을 주목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관계없는 일이 아니겠소?" "하지만.....!" 제갈중양의 말은 선주혁의 손사래에 의해 가로막혔다. "어디에 머무실 것인지만 알려 주시오. 어차피 거래는 마쳐야 하 니 내 그쪽으로 찾아가겠소." 선주혁의 단호한 표정에 제갈중양은 더 이상 만류하지 못했다. 하긴 전설상의 금강불괴에 이른 자다. 누군가를 두려워할 입장이 아닌 것이다. "알겠습니다. 저희는 정의련 남창지부에 있을 것이오 그리로 오 시면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위치를 알고 있으니 찾으시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반드시 오셔야 합니다." 제갈중양의 말에 황보조학이 재차 다짐을 받았다. "상인에게 있어 신용은 더 없이 중요한 것이 아니겠소? 염려할 필요 없으니 먼저 가 있으시오. 곧 뒤다라가리다. 그럼 이만!" 선주혁은 두 손을 맞잡았고, 황보조학 등도 분분히 예를 갖췄다. 선주혁이 몸을 돌리려는 순간 남궁연이 입을 열었다. "한 대협, 빨리 오세요!" "아......? 하핫! 알겠소, 남궁 소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기분이 좋아지게 만들던 남궁연이었 다. 저런 여동생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이 들 정도였 다. 어쩐지 이렇게 백화란, 남궁연과 헤어지는 것이 아쉽다는 생각 도 들긴 했다. 그러나 지금은 사사로운 감정에 주저할 때가 아니었다. 선주혁은 남궁연에게 환한 웃음을 보인 후, 다시금 사람들이 눈 치 채지 못하게 백화란을 일견한 다음 걸음을 옮겼다. 사형과 약속했던 객잔으로 향하던 선주혁은 생각을 바꿔야만 했 다. 자신의 주위을 맴도는 자들의 시선을 의식해야만 했다. 전 무림 의 주목을 받는 지금에서 자신과 사형, 그리고 염마와의 접촉은 마 교와 사파연합의 연수 이상의 경계심을 심어 줄 가능성이 있었다.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있는 것인지는 몰라도 일단은 주의하고 볼 일 이었다. 그는 감시의 시선을 의식하며 일단은 인적이 한적한 곳을 찾았 다. 감시자들의 시선이 멀어질 수밖에 없는 위체에 있다고 생각한 그는 갑작스럽게 암영풍을 전개했다. 전력을 다해 전개한 신법이었 다. 아마도 잠시 동안은 자신의 흔적을 찾기 힘들 것이다. 너무 빨리 달리다 보니 어느새 한적한 야산에 들어선 선주혁. 비록 천리지청술(千里地聽術)과 같은 수법은 모르지만 사물의 기 감까지 느낄 수 있는 그의 감각은 극도로 예민해진 상태. 주벽을 살폈으나 가까운 곳에서 별다른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 다. 수많은 감시자들을 따돌린 것이다. 안도의 한숨을 쉬려는 찰나.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무엇인가 대단한 기운이 자신 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빠른 속도로, 결코 암영풍에 뒤지지 않을 것 같은 속도였다. 잠시 후 미풍을 일으키며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푸른 도포를 입은 중년 정도의 도인이었다. 고슴도치처럼 뻣뻣해 보이는 수염, 탈태환골 이전 자신의 피부 색보다 검어 보이는 피부색. 선주혁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나타난 자의 기세와 신법도 신법이지만 무엇보다 나타난 사람을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무, 무진 사숙조?' 어찌 그 얼굴을 잊을 수 있겠는가? 곤륜산에서 그야말로 개 패듯 자신을 두들겨 팬 장본인이자 기 이하기 작이 없는 장법을 보여줬던 인물이 바로 곤륜일검이라 추앙 받는 무공광 무진 진인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무진 사숙조가 이곳에.....?' 무진 진인은 선주혁이 읽었던 후반부에서나 다시금 재등장해 그 의 진정한 실력을 선보인다. 애초 그가 나섰으면 소설이 진행되지 않았을 정도의 고수가 바로 무진 진인이었다. 소설 속에 등장했던 무림맹의 고수들 중에서는 그가 최강일 것 이다. "무량수불....." 나직한 도호. 그와 동시에 형형하다는 말로는 부족한 안광이 폭사되어 나왔 다. 선주혁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곤륜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뭔가 말을 해야 했다. 자신은 선주혁이 아니다, 자세히 봐라.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소용없을 터였다. 무진 진인은 자신을 단 한 번 봤을 뿐이다. 그것도 피부색이나 머리카락 색이 변하기 전이다. 인상에 약간 변화가 있는 지금의 얼 굴과 그때의 얼굴을 구분하지 못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나이가 들 어 조금 더 성숙해졌을 뿐이라 여길 수도 있다. 쓸데없는 노력을 하는 것보다는 마음 깊은 곳에서 절로 이는 두 려움을 몰아내는 것이 더 중요했다. 무진 진인은 진정한 강자다. 그의 무공 수위는 책에서조차 자세 히 기술되지 않았다. 하지만 후반부의 엄청난 활약으로 미루어 백존의 아래라 볼 수 없음만은 분명했다. 몇 번에 걸쳐 호흡을 골랐다. 심장을 조여 오던 긴장감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과연..... 천하에 흉명을 떨칠 정도의 무공을 지니게 되었구나. 무슨 사이한 수법으로 그와 같은 경지에 올랐는지 밝혀 주마." '응? 이게 뭔 소리야?' 곤륜의 반도를 처치하기 위해서 산을 내려왔다고 생각했다. 한데 어쩐지 자신의 무공이 어찌 비약적인 속도로 발전했는지를 밝히기 위한 게 주된 목적인 듯한 무진 진인의 말이었다. 하긴 그럴 가능성도 충분했다. 오죽하면 곤륜산 내에서 그를 무치라 부르겠는가? 그에게 있어 세상사 관심이란 오직 하나. 무공뿐이었다. 그 외의 일로 무진 진인이 산을 내려올 이유는 없었을지도 모른 다. 무진 진인의 몸에서 산과 같은 기세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선주혁은 마른 침을 삼켰다. 장엄하기 짝이 없는 무진 진인의 기도는 그에게 있어 낯선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만물의 기운을 느낄 수 있게 된 그였기에 보다 명확히 무 진진인의 기도를 살필 수 있었다. '저건.....?' 무진 진인의 기도를 알아 본 선주혁은 어쩐지 소름이 돋는 느낌 이었다. 대곤륜(大崑崙). 무진 진인에게서 느겨지는 기세는 곤륜산의 그것과 흡사했다. 아니 짧은 시간이 흐른 후, 완전히 무진 진인은 곤륜 자체가 되 었다. 선주혁의 눈앞에 거산(巨山)이 펼쳐졌다. 지난번 철무백이 자신에게 하늘을 펼쳐 보인 것처럼 무진 진인 이 웅장한 산맥이 된 것이다. "곤륜이라......!" 온몸에 흐르는 전율에 선주혁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 소리를 들은 무진 진인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고작 사 년여의 시간에 그 정도까지?" 그리고는 더욱 흠미가 돋는 듯한 표정이었다. 자신의 기세가 어 디에서 온 것인지 한눈에 파악할 정도의 안목이라면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반면 선주혁은 어깨 위의 공기가 무거워졌음을 느낄 뿐이었다. 드디어 이쪽 세상을 대표하는 진정한 고수와 맞석 된 것이다. 어쩌면 오늘에야말로 죽음에 이를지도 모른다. 얄팍한 수단이 통하지 않은 상대다. "후우!" 긴 호흡과 함께 전신을 묵연수투의 기운으로 휘감았다. 지금에 있어서 믿을 것은 특이한 신체와 묵연수투의 기운뿐이었다. 선주혁의 기세가 변한 것을 확인한 무진 진인은 느린 동작으로 검을 뽑아들었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군. 설마 너를 상대하며 검을 뽑아 들리라 고는 생각지 못했다." 어찌 생각하면 칭찬이었다. 선주혁은 씁쓸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영광입니다, 사숙조!" "흥! 아직 나를 사문의 존장으로 여긴단 말이더냐?" 비틀리는 무진 진인의 입매. "사숙조시라면..... 지금 말씀드려도 소용이 없겠지요. 하지만 대전이 끝난 후 제가 살아남는다면 꼭 제 이야기를 들어 주시기 바 랍니다." 무진 진인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선주혁이라는 녀석은 이상하게도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놈 이었다. 분명 자신이라면 대전이 끝나도 녀석이 살아 있다면 그의 이야기를 들어줄 것이다. 살아남는다면 이야기를 할 자격이 충분했다. 무인은 실력으로 말을 하는 법이고, 뛰어난 실력을 존중 받아야 마땅하기에. 우우우웅. 벌떼가 몰려오는 듯한 소리. 그것은 무진 진인의 고검(古劍)이 만들어 내는 검명(劍鳴)이었다. 장중한 기세 속에서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오른 하나의 검. 무진 진인의 기수식(起手式)은 숭고한 느낌마저 들었다. 곤륜을 흐르는 구름이 그의 검을 감싸는 듯하더니 이내 구름 사 이를 헤치고 찬란한 태양이 떠올랐다. 보통 사람이라면 똑바로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빛을 내는 무진 진이늬 검강이었다. 그것은 선주혁이 알고 있던 검광과는 달랐다. 검극을 넘어서 길 게 뻗어 나오지 않았다. 어찌 보면 검 자체가 빛을 내는 듯했다. 불안했다.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의 위험함이 느껴졌다. 저런 검이라면 자신의 몸을 걸레처럼 찢어발길 수도 있다는 생 각이 들었다. 선주혁은 혈마자광기마저 끌어올렸다. 그의 양손이 자색으로 물들었다. "오너라." 준비가 되었음을 알고 있는 듯 무진 진인이 입을 열었다. 무림의 선배로서 삼 초식을 양보하는 것이다. 선주혁은 사양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위험해 보이는 무진 진인의 검을 맨손으로 상대 하고 싶지는 않았다. 선주혁의 양 손 사이에 자색의 구체를 만들어졌다. 콩알만 했던 구체는 점차 크기를 더하더니 나중에는 사람의 머리만 한 크기로 커졌다. "하압!" 기합성과 함께 선주혁의 손을 떠나는 혈마자광기. 빛살과 같은 속도로 내질러진 그이 쌍 장에 힘입은 듯 혈마자광 기 역시 공간을 격하듯 무진 진인을 향해 날아갔다. '제발!' 간절한 선주혁의 염원이 혈마자광기의 뒤을 쫓았다. 무진 진인의 검이 움직였다. 큰 동작은 수반되지 않았다. 너무도 부드럽고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가공할 정도인 혈마자광기의 속도에 비하면 과연 저 검이 무진 진인의 몸에 도착하기 전에 막아낼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었다. 하지만 그처럼 느린 움직임 속에서도 검은 정확히 혈마자광기의 앞에 도달했다. 마치 혈마자광기가 검의 움직임을 쫓아 방향을 바꾼 것처럼 보 였다. 쿠아아아아앙! 폭발력을 자랑하는 혈마자광기답게 굉장한 폭음이 울려 퍼졌다. 자광이 사방으로 퍼지는 모습은 흡사 폭죽과도 같았다. 무진 진인의 표정이 변했다. 그의 두 발이 땅에 묻혔던 것이다. "호오! 정말이지 대단한 내력이군. 나를 넘어설 정도라니!" 무진 진인이 감탄하는 표정이었다. 내공은 세월을 넘어설 수 없 다는 자신의 생각을 수정하는 중이었다. 고작 사 년여에 불과한 시 간 동안 이와 같은 내력을 쌓을 수 있음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눈앞의 현힐을 부정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선주혁은 미간을 찌푸렸다. 무진 진인이 인정할 정도의 내공이 분명 자신에게 있었다. 그런데도 단 한 걸음조차 무진 진인을 밀어 내지 못했다. 이는 아직도 자신이 가진 내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 한다는 뜻이었다. 다시 한 번 그의 손에 에네르기파가 만들어지고 허공을 갈랐다. 이번에는 무진 진인이 검극을 앞으로 내밀었다. 동시에 그의 신 형이 움직였다. 검극과 혈마자광기가 맞닿는 순간, 무진 진인의 신형이 좌측으 로 이동을 했다. 검은 물처럼 흘러 수평으로 휘들어졌고, 혈마자광 기는 검극에 달라붙어 그 궤적을 쫓았다. 쿠아아아아아! 혈마자광기의 폭발. 그것은 무진 진인을 지나 저 멀리의 지면을 강타했다. 땅에는 커다란 웅덩이가 파였다. 반경이 십 장에 달하는 엄청난 구덩이였다. 무진 진인은 또 한 번 놀라는 모습이었다. 이전과는 비할 바 없는 폭발력을 실은 장력이었던 것이다. 선주 혁이 다이너마이트의 기운을 담아 보냈기 때문이다. 선주혁은 난감했다. 회심의 일격을 날렸건만 무진 진인이 자신 의 장력을 흘려보내 버린 것이다. 압도적인 내력의 우위을 점하고 있음에도 조금의 이익도 챙기지 못하고 있자니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무진 진인은 곧 담담한 표정으로 선주혁을 응시했다. 양보할 수 있는 마지막 한 초식을 기다리는 것이다. '다이너마이트 따위로는 안 되는 건가?' 선주혁은 미간을 찌푸리며 방법을 떠올리려 애썼다. 무작스러운 힘만으로는 무진 진인을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없이 시간을 끌 수는 없는 일. 결국 선주혁이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그의 손에서 회색의 에네르기파가 떠올랐다. 천산노조의 난화무영수였다. 이번에는 무진 진인도 가만히 기다리고 있지만은 않았다. 청아 한 느낌의 검명이 울리더니 그의 검극에 빛무리가 맺혔다. 곤륜의 정상에 눈이 내린 듯했다. '저것이 검환(劍丸)이라는 건가?' 검극에 맺힌 구체를 바라보며 선주혁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그의 손에서 에네르기파가 발출되고, 무진 진인의 검환도 검극 을 떠났다. 에네르기파를 발출한 선주혁의 손이 기이한 도형을 그려내고, 그에 맞춰 회색의 구체가 방향을 틀었다. 무진 진인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그의 손목이 움직임을 보이고 검환도 방향을 바꿨다. 선주혁의 에네르기파 앞을 가로막으려는 것이다. 다시 선주혁이 손을 흔들자 에네르기파는 허공에 무수한 도형을 그려냈다. "좋구나!" 무진 진인이 탄성을 질렀다. 더불어 그의 검극이 춤을 추듯 흔들렸다. 두 개의 구체는 허공에서 수많은 변화를 만들어 내며 뒤엉켰다. 앞으로 나서려는 구체와 그것을 막아내려는 구체. 두 빛 덩어리의 움직임은 화려함을 넘어서 하나의 장관을 연출 하고 있었다. 그런던 한순간 허공의 한 점에서 두 구체가 충돌했다. 폭음 속에서 선주혁의 신형이 움직였다. 아니 움직였다 싶은 동 시에 그는 무진 진인의 앞쪽에 도달해 있었다. 난화무영수로 무진 진인을 어찌 해보려던 것은 아니었다. 아직 까지는 에네르기파를 날려 적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근접적에 익숙 한 자신이었다. 난화무영수는 무진 진인의 주의를 끌기 위한 유인 책일 뿐이었다. 무진 진인의 검이 겨누는 안쪽으로 파고드는 것이 본연의 목적, 하지만 암영풍의 폭발적인 속도에도 불구하고 간격을 좁히는 것 은 불가능했다. 무진 진인의 검극은 어느새 자신의 심장을 겨누고 있었다. 이대로 달려가면 검에 의해 심장이 꿰뚫릴 상황. 선주혁은 용기를 내어 손을 내질렀다. 자광수와 묵연수투, 그리고 북두폭렬장이 한꺼번에 운용된 일장 이었다. 카앙! 날카로운 금속성과 함께 무진 진인의 검이 옆으로 흔들렸다. '됐다!' 선주혁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적어도 무진 진인의 검에 손이 잘 리는 일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검을 쳐내고 무진 진인의 품 안으로 파고드는 것 역시 불 가능했다. 옆으로 비켜섰던 무진 진인의 검이 어느새 다시금 자신의 심장 을 겨누고 있었던 것이다. 선주혁은 다시 한 번 북두폭렬장을 내질렀다. 손이 멀쩡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는 만큼 이번에는 좀 더 강력 한 힘을 실었다. 카앙! 또 한 번의 금속성. 하지만 이전에 비해 외려 소리는 작았다. 무진 진인이 손목에 힘을 풀었기 때문이다. 더 강한 힘으로 쳐냈 음에도 검이 재자리로 돌아오는 속도는 외려 빨랐다. 아니 이번에는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선주혁의 심장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꿈틀거리며 날아드는 한 마리의 용과 같은 움직임이었다. 언뜻 봤을 때는 선주혁 자신도 잘 알고 있는 길을 따라 심장을 노리고 들어오는 검이었다. 용비십구검. 곤륜의 평제자가 배울 수 있는 최고의 검초. 분명 무진 진인의 검로는 용비십구검의 그것을 쫓고 있었다. 하지만 뭔가 달랐다. 비단 검에 실린 막강한 경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진 진인의 검은 용비십구검이의 투로를 쫓되 좀 더 부드럽고 자 유로운 바가 있었다. 용비십구검이되 용비십구검이 아닌, 그렇게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움빅임이었다. 초식을 알고 있는 만큼 선주혁은 투로에서 벗어난 방향으로 몸 을 움직여 검극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용이 나는 방향에 제한은 없었다. 초식의 전환이 있었던 것도 아니건만 무진 진인의 검은 여전히 선주혁의 심장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달려들었던 것만큼이나 빠르게 뒤로 분분히 물러서는 선주혁. 검극이 집요하게 그의 심장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선주혁의 북두폭렬장이 다시 작열했다. 이번에는 연환발출. 튕겨진 검신이 다시금 제자리를 찾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의 의도는 제대로 성공하지 못했다. 앞선 장력의 속도만큼이 나 빠르게 튕겨졌기 때문인지 동시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인 후속장 은 무진 진인의 검신을 때리지 못한 것이다. 아차, 하는 순간 무진 진인의 검극은 그의 안쪽을 점하고 있었 다. 황급히 가슴 쪽의 진기를 강화했다. 카아앙! 긴 여운을 남기는 금속성과 함께 선주혁의 신형이 뒤쪽으로 튕 겨졌다. 가슴이 뻐근하고 눈앞이 샛노래졌다. 하지만 다행이 가슴에 구멍이 뚫리는 불상사만은 면했다. 묵연수투의 기운이 다행이도 무진 진인의 검극을 막아낸 것이 다. "금강불괴?" 무진 진인의 퉁방울만한 눙이 더욱 휘둥그레졌다. 수강을 통해 자신의 검을 막아냈다는 사실만으로 놀라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놀 라운 일이라고는 해도 전혀 불가능한 일만은 아닌지라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검을 튕겨낸 것은 가슴 부위였다. 어찌 맨몸으로 강기를 막아낼 수 있다 말인가? 선주혁은 가슴을 매만지며 씁쓸하게 웃었다. 무진 진인의 감탄에 뿌듯한 마음이 들기보다는 저승 문턱을 밟 고 돌아왔다는 생각에 간담이 서늘했던 것이다. "당최 이해할 수 없는 녀석이군. 터무니 없을 만큼의 내력에 어설 프지만 한 공격, 그리고 금강불괴지신이라......" 무진 진인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그저 이해할 수 없다는 정도가 아니었다. 마치 평생을 두고 풀 수 없는 난제(難題)에 부딪쳐 혼란스러운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선주혁의 경지 자체가 완벽한 모순이었던 것이 다. 무진 진인이 알고 있는 한 무공이란 조화 속에서 발전하는 것이 다. 막강한 내공을 지녔으나 제대로 활용하고 있지 못하는 선주혁이 어찌 금강불괴지신을 만들 수 있단 말인가? 물론 말이야 금강불괴라 했지만 선주혁이 진정한 금강불괴지신 을 이뤘다고는 믿지 않는 무진 진인이었다. 그만한 내력을 소유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으므로. 그 정도의 내력이 뒷받침 되지 않는 상태에서 금강불괴와 흡사 한 장면을 연출한다는 것은 지닌바 내력을 극도로 활용해 일시적인 방어가 가능했다는 뜻이다. 그것이 무진 진인을 혼란스럽게 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가진 내력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헛 된 내력 운용을 남발하던 선주혁이었다. 한데 또 어떻게 극도로 내공을 활용해 자신의 검을 막아낸단 말 인가? 보고도 믿지 못할 현상이니 무진 진인으로서는 혼란스럽기만 했 다. "계속 하실 것입니까?" 무진 진인이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에 선주혁은 혹시나 싶어 물어봤다. 무진 진인이 짧게 답했다. "당연히!" 선주혁은 다시 고소를 머금었다. 어중간하게 끝날 상황은 분명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뻐근한 가슴의 통증을 점검한다는 듯 왼쪽 팔을 빙빙 돌렸 다. 다행히 큰 부상은 없는 듯했다. 선주혁이 자세를 다시 잡는 것을 확인한 무진 진인은 고개를 살 짝 끄덕이고 다시 기수식을 취했다. 이전에 비해 한결 진중해진 표 정. 그것만으로도 선주혁은 무진 진인이 이번에야말로 진짜로 할 생각임을 파악할 수 있었다. 무진 진인은 느릿하게 검을 앞으로 뻗으며 좌수를 검결(劍結)를 맺었다. 그러자 위압적인 기세가 절로 일어 보통 사람이라면 검극 이 향하는 방향에서는 곧바로 질식할 정도였다. 무진 진인은 검병을 쥐고 있던 손을 놓았다. 놀랍게도 검은 지면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제자리에 떠 있 었다. "이기어검(以氣馭劍)?" 선주혁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외쳤다. 기로써 검을 조종해 싸 운다는 검도 최고의 경지가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조심해라!" 무진 진인은 의미를 알 수 없는 경고성과 함께 우수마저도 검결 을 맺고 앞으로 내밀었다. 동시에 그의 고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없이 느린 듯한 움직임. 그러나 중간 이상을 다가온 후 그것은 잔상조차 남기지 않고 선 주혁을 향해 쏘아졌다. "흡!" 이기어검의 엄청난 속도는 북두폭렬장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마치 공간을 초월한 것처럼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검. 선주혁은 우측으로 신형을 날리며 고개도 틀었다. 다행이 한 치의 차이로 선주혁의 얼굴을 비켜가는 검. 하지만 그것으로 안심할 여유 따위는 주어지지 않았다. 검은 너무나 유연하게 방향을 틀어 다시금 선주혁의 가슴을 향 해 쏘아졌다. 선주혁은 극한에 달한 북두폭렬장으로 검을 튕겨내려 했다. 콰아아앙. 이번에는 금속성이 아닌 폭음이 터졌다. 더불어 튕겨진 것은 검이 아니라 선주혁의 손이었다. 혈마자광기의 폭발력만으로는 이기어검의 무시무시한 힘을 이 겨내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검은 잠시 멈칫하는 순간이 보였고 이번에도 선주혁은 가까스로 몸을 빼낼 수 있었다. 길게 갈라진 옷섶에서 서늘한 바람이 들어왔다. 어쩐지 무진 진 인의 놀라운 무공에 간담이 서늘해진 느낌일지도 몰랐다. 무진 진인의 검은 다시 선주혁을 덮쳐오지 않았다. 마치 그가 자 세를 고쳐 잡기를 기다려주는 듯했다. 선주혁은 가볍게 목례를 하고 몸을 뒤로 뽑아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푸른빛을 내는 에네르기파를 만들어 냈다. 최심장이었다. "별의별 무공을 다 익히고 있구나!" 무진 진인은 곱지 않은 음성을 내뱉은 후 다시금 검결을 선주혁 쪽으로 뻗었다. 이번에는 처음부터 제 속도를 내며 날아가는 검이었다. 선주혁은 쌍장이 검을 향해 뻗어졌다. 그의 에네르기파와 무진 진인의 이기어검이 허공에서 정면으로 마주했다. 콰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선주혁의 장력이 허공에서 산산히 흩어졌 다. 무진 진인의 검은 선주혁의 에네르기파를 뚫고 그의 가슴에 다 시 한 번 적중했다. "커억!" 단발마의 신음성과 함께 뒤쪽으로 날아오르는 선주혁. 공중에 떠올랐던 선주혁은 거칠게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쿨럭!" 꽉 막혔던 호흡이 간신히 이어지며 기침이 튀어나왔다. 선혈과 함께였다. 거의 금강불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건만 이기어검에 내상을 입 는 것만큼은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죽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는 일. 이것이야말로 개죽음이라는 생각에 선주혁은 튕기듯 몸을 일으 켜 세웠다. 내상에 의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생각했던 것보 다는 몸이 수월하게 움직였다. 그가 탄력 있는 동장으로 몸을 일으켜 세우는 모습을 확인하고 무진 진인은 고통 속의 선주혁보다 더 크게 인상을 찌푸렸다. '진정 금강불괴라는 말인가?' 이기어검술을 맨몸으로 받아냈다. 금강불괴가 아니고선 설명이 안 되는 현상이었다. 이론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지만 이제는 무진 진인으로서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내 생전에 금강불괴지신을 보게 될 줄이야. 이번 하산은 정말이 지 의미가 있군, 그래." 무진 진인은 곧 표정을 정리하며 말했다. "그럼....... 이제 승부를 내볼까?" 말을 마친 무진 진인의 전신에서 폭풍처럼 기세가 쏟아져 나왔 다. 단지 기세일 뿐임에도 그를 중심으로 바람이 부는 것처럼 미세 한 먼지가 흩날렸다. '지금까지도 전력을 다한 것이 아니었단 말인가?' 선주혁의 상황은 그야말로 절망적이었다. 방금 전의 한 수만으로도 살아남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한데 그것조차 전력을 다한 것이 아니었다면 목숨을 건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쩌다보니 패종회에 맞서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지만 선주혁은 뿌리 깊은 무인이 아니었다. 이길 수 없는 상대하면 피하면 될 일이 다. 더구나 무진 진인은 사문의 존장이랄 수 있는 자. 여기서 도망치는 것은 조금도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마음 같아서야 어떻게 해서든 버틴 후 그에게 자신과 사형의 결백을 주 장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전에 목숨을 잃게 될 것이 분명한 상황. 무조선 도주하는 것만이 유일한 활로였다. 문제는 과연 어떻게 도망 가냐는 것이었다. 암영풍이 제 아무리 빨라도 이기어검술을 피할 수는 없었다. 문제는 역시 틈이었다. 무진 진인을 주춤하게 만들 어떤 방법을 세워야만 했다. 선주혁의 눈이 재빠르게 굴러가는 것을 본 무진 진인은 그가 다 른 생각을 품고 있음을 눈치 챘다. 승부를 내기로 결정한 그인 만큼 여유를 줄 리 없었다. 산을 부술 듯 쏘아지는 무진 진인의 고검. 찬란한 광채는 긴 꼬리만을 남기고 유성처럼 선주혁을 향해 날 아갔다. 선주혁은 이를 악다물었다. 공력이 집중된 것은 그의 양팔. 격렬한 폭음과 함께 그의 입에서 긴 혈선이 그려졌다. 충격을 고스란히 받아 뒤쪽으로 날아가는 신형을 따라 그려진 혈선이었다. 내장이 진탕되어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지만 의식의 끈은 놓치지 않았다. 땅에 내려선 선주혁은 곧바로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한 줌 의 진기만으로 충분한 속도를 내는 지금의 암영풍은 그가 내상을 입었다는 것을 무색하게 했다. 바람의 기운을 가득 응용한 만큼 속 도의 저하는 없었다. "어딜 감히!" 무진 진인의 노갈과 함께 선주혁은 뒤통수가 따가운 것을 느꼈 다. 자신의 뒤를 쫓아오는 검 때문임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하압!" 고개를 돌려 검의 위치를 확인함과 동시에 손을 내뻗는 선주혁. 그가 자신하는 비장의 한 수를 꺼내든 것이다. 내뻗어진 검지에 서 찬란한 광채를 내는 작은 무엇인가가 쏟아졌다. 그것은 곧바로 무진 진인의 검과 충돌했다. 콰아아앙! 거대한 해일이라도 우습게 뚫어 버릴 듯했던 무진 진인의 검이 멈췄다. 작은 빛에는 상상키 힘든 거력이 담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 사이 선주혁의 신형은 더욱 멀어져 있었다. "저건 또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무진 진인은 다시 한 번 혼란을 느꼈다. 소림의 탄지신통 정도의 수준이 아니면 어검술을 저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도 깊은 오의를 깨달아야만 가능할 터. "결국 진정한 무공을 지법일 뿐이란 말인가? 장력이 터무니없을 정도로 형편없었던 것은 그 때문이고?" 무진 진인은 이미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 선주혁의 간교함에 치 를 떨었다. 녀석은 자신의 진정한 장기를 감춘 채 도주할 방법만을 모색하 고 있었던 것이다. 정정당당해야 할 무인으로서의 자세가 눈꼽만큼 도 없다는 사실에 그는 분노하고 있었다. 처음 보였던 제법 당당한 모습조차 도주를 위한 포석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그를 더욱 화나게 했다. "흥! 다음에는 절대 사정을 봐줄 이유가 없는 녀석이군!" 무진 진인은 한마디를 내뱉은 후 신형을 움직였다. 선주혁이 사 라진 방향이었다. =초식의 운용= <<1>>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으며 선주혁은 달리고 또 달렸다. 당장이 라도 무진 진인의 고검이 자신의 눈앞을 가로막을 것만 같았기에 통증 따위는 완전히 무시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괴물 같은 회복력을 지닌 자신의 신체를 믿는 탓이었다. 목이 잘려 죽지만 않는다면 어떻게 해서든 나을 것이 분 명하기에 내상이 악화되는 것에는 개의치 않았다. 그저 최선을 다해 무진 진인에게서 멀어지려 노력할 뿐이었다. 남창에 접어든 후에도 선주혁은 달리는 속도를 멈추지 않았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그저 한 줄기 바람이 스쳐 지났다고 생각할 뿐 선주혁의 모습조차 보지 못할 정도의 속도를 유지했다. 이렇게 달린다면 자신을 주목하고 있던 자들이라도 발견하기 힘 들 것이라 여겼다. 아니 지금과 같은 상태라면 그들이 자신을 발견 하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사형과 종극이 있는 곳에 도착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들과 함께라면 무진 진인이라도 어쩔 수 없으리라. 마침내 사형과 약속한 장소에 도착한 선주혁은 기이함을 느꼈 다. 객잔의 곳곳에 배치된 무인들의 기척이 느껴진 것이다. 불길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는 누군가 제지할 틈을 주지 않고 곧장 객잔 안으로 뛰어들었 다. 텅빈 객잔의 1층. 중심부에 자리한 한 무리의 사람들만이 다였다. 사형과 종극 등이었다. 처음 보는 노인의 모습도 보였다. 그제야 선주혁은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별다른 일은 없는 듯했 으며 다행히 무진 진인이 곧바로 뒤를 쫓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뒤 를 돌아볼 틈조차 갖지 못했으니 그가 얼마나 조급했는지 알 수 있 었다. "사제, 대체 이게.....?" 옷은 넝마처럼 찢어지고 입가에 혈흔이 가득한 모습의 사제를 확인한 남지학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형.....!" 선주혁은 너무나 반가운 마음에 싱긋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한순간 긴장이 풀린 탓이었다. "조심해요!" 선주혁을 부축하기 위해 다가서는 남지학을 제지하는 은설연의 날카로운 외침. "......?" "그는 선 소협이 아니에요." 그제야 남지학은 나타난 자가 사제와는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피부색이 밝아진 것은 물론이거니와 미묘하게 이목구비도 달랐 다. 선주혁은 난감함을 느꼈다. 변해 버린 자신의 용모가 이럴 때는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는 낯선 노인을 의식했다. 아마도 환마 가 아닐까 싶었다. 이에 선주혁은 남지학에게 전음을 보냈다. 간략한 설명. 탈태환골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래도 미심쩍어 하는 남지학에게 둘만이 알고 있는 사실을 언 급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무극삼검식과 현천자, 그리고 수라 마제를 언급하는 것으로 충분했으니. 남지학은 상황을 재빨리 파악했다. 눈앞의 사내가 사제임을 믿 어 의심치 않게 된 것이다. 그는 재빨리 선주혁을 부축했다. "남 소협!" 은설연이 놀라 외쳤다. 남지학은 재빠르게 대답했다. "일단 그를 치료해야 하오.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하겠소." 남지학은 선주혁을 부축해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선주혁은 침상에 좌정하고 앉아 곧바로 요상에 들어갔다. 무진 진인의 어검술에 당한 만큼 그의 내상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 다. 남지학은 요상에 들어간 사제를 한편으로는 걱정스러운 듯, 다 른 한편으로는 감탄하는 듯 바라봤다. "탈태환골이라니..... 사제는 정말이지 한계를 모르고 성장하는 구나" 남지학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2>> 남지학의 요청에 따라 종극은 환마에게 새롭게 등장한 금강불괴 지신의 고수를 조사할 것을 명령했다. 같은 장로의 신분이라지만 종극과는 엄연히 서열이 다른 진내작은 곧 맡은 임무에 착수했다. 그리고 나머지 악구윤, 수조문, 은설연은 남지학의 방에 모였다. 여섯 시진에 걸쳐 요상을 끝낸 선주혁은 한결 좋아진 안색이었 다. "그러니까..... 탈태환골을 했단 말인가요?" 은설연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어쩌다보니....., 아무래도 철 어르신의 가르침 덕분인 듯합니 다." 악구윤이나 수조문 등은 아직도 의심스러운 표정이었다. 탈태환 골은 금강불괴와 마찬가지로 전설 속에서나 회자될 뿐이었기 때문 이다. 그런데 철무백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선주혁을 본인이 아니라 여길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가 일월신교의 조사전에서 철무백을 만났다는 사실은 이 자리에 모인 사람이 아니면 알 리가 없는 일이 었기 때문이다. "탈태환골의 경지에 올랐다면서 그 내상은 또 무엇이란 말인 가?" 수조문이 냉랭한 음성으로 물었다. 이에 남지학은 무진 진인을 만났던 사연에 대해 설명했다. "무진 사숙조가........!" 남지학이 침음한 음성을 흘렸다. 곤륜의 제자였던 시절 무진 진 인은 그에게 있어서 우상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무진 진인이 자신 과 사제를 죽이기 위해 하산한 것이다. "무진? 곤륜파에 그 정도의 고수가 있었단 말인가?" 종극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곤륜오선 중 무진이란 도호를 가진 자, 아니 분이 계시지요. 설 마하니 그 정도의 고수인 줄은 생각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강호 정세에 해박한 은설연이 설명을 했다. "강호에 나서지 않으셨으니까요. 그분께서 활약을 하셨다면 곤 륜이 쇄락했다는 소문 따위는 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 자 리에 계신 그 어떤 분이라도 무진 사숙조와 일전을 벌인다면 승부 를 장담하실 수 없을 것이니까요." "과거 자네가 있었던 곳이라 해서 지나치게 관대한 평가를 하는 것은 아닌가?" 곤륜파 따위에 구대마존과 필적하는 고수가 있다는 것을 믿기 힘들다는 듯 악구윤이 물었다. "탈태환골을 한 자를 일방적으로 몰아붙일 정도라면 그 정도의 실력은 되겠지." 악구윤의 질문에 답한 것은 종극이었다. 그의 말에 악구윤은 선뜻 반박하지 못했다. 딱히 틀린 말이 아니 었기 때문이다. "금강불괴를 사칭하는 자에 이어, 곤륜의 대검호까지 등장하다 니..... 과연 난세가 오긴 오려는 모양이군요." "금강불괴를 사칭해요?" 선주혁이 끼어들어 물었다. 그러자 은설연이 새롭게 등장한 고수에 관한 소문을 설명했다. 더불어 그자가 패종회의 간세일 것이라 짐작하고 있다는 사실까 지. "하하하.....윽, 가슴이야." 선주혁은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는 말을 이었다. "그건 아닙니다. 그 소문에서 말하는 금강불괴라는 건 저를 말하 는 것이니까요." "네? 선 소협이 금강불괴지신을 연성했다고요?" 은설연이 놀라 외치고 다른 사람들 역시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쳐다봤다. "아뇨. 금강불괴까지는 아니예요. 그저 내력을 버텼을 뿐이 죠." 선주혁은 자세한 설명을 하기가 곤란했다. 묵연수투의 기운을 이용해 전신을 보호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정도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모든 게 백화란에게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였다는 설명까 지 덧붙였다. "그렇게 된 일이군." 그제야 중인들은 납득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자네 정도라면 금강불괴로 오인 받을 수도 있지." 선주혁이 기공을 많이 익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종극 역시 이 제야 납득이 간다는 식이었다. 이야기가 무공에 이르자 선주혁은 새삼 자신이 무공에 대해 많 은 의문을 품고 있다는 것을 상기해내고 곧바로 질문하기 시작했 다. 사형은 물론이거니와 절대의 고수들이랄 수 있는 종극, 수조문, 악구윤이 있는 자리였다. 그에게 있어서는 여러 가지 의문을 해소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번에 나름대로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했는데, 그에 못지 않게 많은 벽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원래 무학의 길에는 끝이 없는 법이니까....." 종극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이에 선주혁은 자신이 가졌던 의문에 대해 꺼내들었다. "그러니까....., 내력은 자네가 월등한데도 불구하고 상대를 압 도할 수 없었다.... 이 말인가?" "네, 심지어는 무진 사숙조마저 저보다 내력이 부족하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다가 간신히 도주 했을 뿐입니다. 아마도 제가 내력을 제대로 운용할 줄 모르는 게 문 제가 아닌가 싶습니다만....." "흥! 내력을 제대로 운용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탈태환고의 경 지에 오른단 말인가?" 악구윤이 코웃음을 쳤다. "그래요. 선 소협이 내력을 제대로 운용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 거에요." 은설연도 악구윤의 말에 호응했다. "하지만....., 저도 의식적으로 내력을 집중하기 위해 노력을 햇 습니다. 아무래도 힘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러나 전력을 기울였음에도 내력이 부족한 상대의 장력조차 압도 하지 못했습니다." "의도적으로 내력을 집중했다고?" 종극이 약간은 이해가 안 간다는 식으로 물었다. "네, 최선을 다했죠." "어떤 무공을 사용했던 것인가?" "그게......" 선주혁은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결코 위력이 약한 초식은 아니었습니다." 선주혁이 무엇인가를 감춘다는 것을 느꼈지만 종극은 애써 추긍 하지 않았다. "자네는 그 초식을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고 자신하 는가?" "아뇨, 수련이 부족한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초식에 극 도의 내력을 실었었고, 그만하면 충분한 위력을 낼 수 있지 않겠습 니까? 평범한 초식이라 해도 강한 내력을 쏟아 부으면 그 위력에서 엄청난 차이를 보이는 거 아닙니까?" 선주혁의 말에 실내의 모든 사람은 실소를 터뜨렸다. 선주혁은 자신이 뭔가를 크게 착각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천하제일의 내공을 가진 자가 천하제일의 고수라고 생각하나 보군." 악구윤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을 하고 종극이 조금 더 부드러 운 음성으로 설명을 시작했다. "자네 말대로 같은 초식이라도 내력의 차이에 따라 그 위력도 엄 청나게 달라지는 것은 사실일세. 하지만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보게. 같은 내공 수위를 가진 자가 둘이 있다고 가정하세. 두 사람 중 하 나는 삼류무공의 초식을 사용하고, 다른 한 사람은 일류에 해당하 는 초식을 사용해 겨룬다면 누가 이기겠는가?" "그것은 초식의 효용일 뿐이지 않겠습니까? 초식의 기묘함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것이죠." 선주혁의 대답에 방 안에서 다시금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정말이지 자네가 지난번 내게 보여줬던 신위가 어떻게 나온 것 인조차 의문이군, 그래." 종극은 실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접근을 해 봄세. 삼류무공을 전개하는 자 와 일류무공을 전개하는 자가 초식의 우위로 공격 자체에 성공한 게 아니라 서로의 장력이 서로 마주했을 때를 가정해 보면 좀 더 쉽 게 이해하겠군, 자네의 생각대로라면 두 사람이 비등하겠지만 실제 는 그렇지 않네." "일류무공을 사용하는 사람이 이긴단 말입니까?" "당연하지!" 종극은 고개를 끄덕였다. "초식이란 그저 형(形)만을 칭하는 것이 아닐세. 그뿐이라면 각 초식별로 익힐 수 있는 내공이 따로 존재할 이유가 없는 것이지." "아!" "이제 조금은 이해가 가는 모양이군. 좀 더 자세히 설명을 해 보 자면, 초식을 운용하다 보면 진기의 유통 역기 자연스럽게 초식이 최대한의 위력을 낼 수 있도록 함께 하는 걸세. 즉 초식의 오의를 깨닫는다는 것은 그 초식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하지." "그렇다면 하나의 초식이 가진 위력이란 한계가 있는 법이겠군 요. 아무리 내력을 쏟아 부어도 그 초식 자체의 위력이라는 게 있으 니까요." "그건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네." ".......?" "삼류의 무공이야 물론 그런 제약이 있을 수 있네만......, 소위 말해 절정무공이라는 것은 그런 식의 제약이라는 게 의미가 없단 말일세, 그 한계가 명확하다면 무학의 길에 끝이 없다는 말은 나오 지 않았겠지." "그럼 또 말이 안 되잖습니까? 같은 수준의 무공으로 상대보다 강한 내력을 쏟아 부었는데 별다른 이득을 취하지 못했다니까요." '사실은 같은 수준의 무공이 아니라 아예 같은 무공이었지 만.....' 선주혁은 혈마자광기르 사용했을 때 홍의노인을 압도하지 못했 던 것을 떠올리며 물었다. "설령 같은 수준의 무공이 아니라 똑같은 무공을 사용했다 하더 라도 그와 같은 결과는 나올 수 있네." "에?" "그 무공에 대해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있냐에 따른 결과지. 같 은 초식이라도 이해와 깨달음의 정도에 따라 그 위력은 천차만별이 니까. 단지 내력만으로 위력이 결정 나는 것은 아닐세. 물론 자네가 말한 내력의 집중 역시 하나의 방법일 수 있겠지만....., 하나의 초 식에는 멈추고, 흐르고, 집중되고. 또 흩어지는 다양한 내공의 변화 가 존재하네. 그것이 소위 말하는 절정 무공일수록 더하지. 그런 초 식이 제대로 된 위력을 내기 위해서는 정말이지 깊은 이해가 필요 한 법일세. 그러니 그 이해를 깨달음이라고 부르는 것이지." "아.....!" 선주혁은 이제야 납득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막연하게 는 생각하고 있는 문제긴 했다. 이에 종극의 명확한 설명을 듣자 정 확하게 와 닿는 것이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면 초식에 구애를 받지 말라는 건 또 뭡니까? 사실 투로를 쫓아 싸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잖습니까?" "허허허헛! 물론 그때, 그때 상황에 맞는 초식을 전개해야 하는 건 맞네, 그러나 지금의 자네라면 구애받는 것에 대한 말이 아니라 초식을 버린다는 것을 말해야겠지." "......?" 아리송한 말에 선주혁은 이해를 할 수 없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 다. "처음 무공을 익히는 사람에게 말하는 초식에 구애받지 말라는 것은 자네 말대로 순차적으로 초식을 펼치는 것이 아님을 뜻하네. 그리고 지금 말하는 것은 초식 자체를 넘어서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 "네, 그 차이는 이해하겠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초식을 펼쳐야 제대로 위력을 낼 수 있다면서요? 초식을 버린다는 것은 그만한 위 력을 못 낸다는 뜻이 아닙니까?" "초식을 버린다는 것은 다른 표현으로 극복한다고 하기도 하네." 조금은 알아들을 것 같은 표정이던 선주혁이 다시금 어리둥절해 졌다. "그러니까 초식을 버린다는 것은 아무렇게나 무공을 펼쳐도 된 다는 뜻이 아니란 말일세, 초식에는 형(形)와 의(意)가 있네. 대부분 무공을 익히는 동안 형을 동작으로, 의는 내공의 운행으로만 생각 을 하기마련이지. 하지만 좀 더 짚어 보면 비단 그런 뜻만이 아니 야. 굳이 말하자면 초식의 의를 깨닫는 순간이야말로 초식을 극복 할 수 있는거지." "의를 깨달으면 형을 버릴 수 있다는 말인가요?" "그렇지. 형을 버린다는 것은 정해진 투로를 쫓지 않고, 즉 아무 렇게나 휘두르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그 초식의 의를 표하고 있다는 말일세." "아! 그렇군요." 선주혁은 이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어떤 자세에서건, 어떤 조건에서건, 어떤 움직임에서건 그 초식 이 가진 의를 쫓을 수 있다면 본연의 위력을 잃지 않는 게 바로 초 식을 버린다는 말일세." "모든 동작이 전부 그 초식의 의를 내포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 가 되는군요." "그렇지! 이제야 말을 좀 알아듣는군. 그래서 고수들이 아무렇게 나 휘두르는 손에서 막강한 장력이 발출이 되는 거고 그 위력이 보 통 사람과 큰 차이가 나는 걸세." "제 경우는 그 초식의 의라는 것을 알지 못해 위력의 차이가 난 다는 것, 결국은 수련만이 방법이 될 수 있는 건가요?" 선주혁은 조금은 실망한 표정이었다. 아무리 자신의 재능이 부족하다지만 오랜 세월 동안 갈고 닦는 다면 분명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원하는 것은 지금 당장 패종회와 맞설 실력을 키우 는 것이다. 수련에 수련만이 방법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그간 고민 해 온 것이 전부 무용하다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무공에 있어서 왕도가 없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는가? 아무리 좋은 스승이라 해도 나아갈 방향을 잡아 줄 뿐 이와 같은 오의는 전 할 방도가 없다네. 초식의 의라는 것은 미묘학 이를 데 없는 내력 의 운용에서 비롯되는 것일세. 그것은 말로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 니 그 오의를 말로 전할 수는 없다는 것이지." "미묘한 내력의 운용에서 차이가 난다고요?" 종극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 다음 다시 설명했다. "언제 어느 때, 어떻게 내력을 운용하는가가 바로 초식의 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야. 형을 취하지 않았음에도 그 위력을 발휘할 정도 라면 정말이지 완벽 이상으로 그와 같은 내력의 운행을 알아야 하 는 걸세." 종극의 마지막 말을 듣고 선주혁은 번쩍하는 뭔가가 떠올랐다. 그가 심각하기 이를 데 없는 표정을 짓자 종극이 다시 입을 열었 다. "자네의 무공은 지금으로서도 아주 훌륭하네. 지금으로서는 패 배조차 훌륭한 경험이랄 수 있는 걸세. 그러니 조급하게 생각할 필 요 없네. 자네 나이를 고려해 보면 지금의 성취는 기적이라 말해 도 과언이 아니지. 그러니 욕심 부리지 말고 차근차근 정진하다 보 면 언젠가는 ....... 될 걸세." 종극은 말끝을 흐리며 본래 하려던 말을 삼켰다. 언젠가는 무적이 될 것이다. 그것이 원래 종극이 하려던 말이었다. 만약 그가 자신의 나이가 될 때까지 살아남는다면, 지금처럼 진 보한다면, 분명 그는 무적이 될 것이다. 무림사 최강의 고수가 될 것임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깨달음이란 때론 넘을 수 없는 벽이 되기도 한다. 지끔껏 선주혁이 너무나 쉽게 발전해온 만큼 그 이상의 어려움 으로 그가 발전할 수 없을 가능성도 있다. 절정고수의 문턱에서 좌 절하는 자는 부지기수다. 선주혁이 다음 단계로 넘어설 수 있으리 라 자신할 근거는 하나도 없었다. 그것은 머리만 좋다고, 노력만 한 다고, 기연을 얻는다고만 되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지금처럼 무공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도 모르는 선주혁이 니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어떻게 그가 지금의 경지에 올랐는지조 차 이해가 갈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 순간 선주혁이 씨익하고 미소를 지었다. 머릿속에 흐릿하게 떠오른 무엇인가가 명확해졌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종 어르신.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의 환한 표정을 보며 종극은 내심 또 한 번 놀랐다. 방금 전까 지 조급한 표정으로 안달을 하던 모습이었다. 하나의 초식이 가지 는 오의를 깨닫기 위해서는 십 년도 부족하다. 절정의 무공일수록 그것은 더 길어질 수 있는 일이다. 헌데 조금 전가지 애가 타던 모습을 보이던 그가 자신의 설명을 듣고 곧바로 웃고 있었다. 이런 자세라면 발전 가능성는 무긍하다 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말이지 이 녀석......, 내버려 두면 진짜 무적의 고수가 되는 건 아닌가?' 한편 종극과 선주혁이 질답을 하는 동안 은설연은 남지학과 전 음으로 대화를 하는 중이었다. 처음에는 선주혁의 질문과 종극의 대화에 온 신경을 기울였다. 고수들 간의 대화 속에서는 무한한 무리가 담겨 있기 마련이고, 그 대화를 듣는 것만으로도 기연이랄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한데 오가는 이야기가 어처구니 없었다. 기초적이다. 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어는 정도 무공을 익힌 고수 라면 누구라도 알 법한 이야기들이 오가는 것이다. 이에 실망을 한 은설연은 불현 듯 떠오른 생각에 전음을 보내는 것이다. [저 사람, 정말 선 소협이 맞는 거예요?] [어째서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이오?] 남지학이 반문했다. [선 소협....., 한 번 보는 것만으로도 남의 무공을 익힐 수 있을 정도의 기재잖아요. 그런데 지금의 대화를 들어 보면.....] [기재 같지 않다는 말이오?] [평범함도 지나친 거 같은데요?] [그러니 사제가 맞소.] 남지학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네?] 은설연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선주혁이 맞다니....., 그녀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는 것 이다. [곤륜에 있을 때 사제는 평범하기 이를 데 없었소. 뭐 재능이 없 는 것은 아니었으나 지나치게 소심하다고나 할까? 여하튼 딱히 기 재랄 수 있는 특징은 전혀 없었소. 그러다가 위기의 상황이 오면 자 신의 능력을 발휘하곤 하는 거요. 저런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기에 사제가 맞다는 거요.] [지난번 말씀하신 것처럼 선 소협을 이해하려들지 말라....., 이 건가요?] [그렇소. 그렇듯 이해가 안 되면 안 될수록 사제가 확실한 것이 오.] 남지학은 그렇게 말을 마치고 다시금 선주혁과 종극의 대화를 경청했다. 마치 그런 이야기를 처음 듣는 사람처럼 신중하게 귀를 기울이며 때로는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뭐야? 저런 이야기에 저런 표정이란? 이해가 안 가기는 두 사람 다 마찬가지군.' 은설연은 내심 투덜거리다가 갑자기 두 눈썹을 상큼 치켜 올렸 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두 사람에 비해 뭔가 부족한 것 같잖아? 두 사람은 천재고 난 아니라 이건가? 흥!' 은설연은 저 혼자 든 생각에 입술을 삐죽이며 자신도 대화에 귀 를 기울였다. 그리고 종극과 선주혁의 대화가 끝이 난 후 그녀가 말했다. "선 소협이 저들에게 금강불괴의 고수로 오인을 받는 거 말인데 요." "......?" "원래 패종회 놈들이 써 먹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거 우리가 사 용하면 안 될까요?" "그게 무슨 말인가?" 종극의 물음에 은설연이 생긋 웃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정황으로 미루어 정의련에서 선 소협을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 고 끌어들이기 위해 안달이 난 게 분명하죠. 지금까지 봐온 바에 의하면 패종회의 힘은 선 소협이 말한 이상인 게 분명하고, 그렇다 면 일월신교와 사파연합의 연수만으로는 부족한 감이 없지 않죠. 총원이야 어떻지 모르지만 절대고수의 수에서는 밀린다고 해야 할 테니까요." "그러니 오대세가를 끌어들이자?" "네! 바로 그거에요. 선 소협이 노고수로 가장해 오대세가에 중 요한 역활을 하게 되면 패종회의 음모를 그쪽에서도 좀 더 쉽게 파 악하게 될 거 아니겠어요?" "너무 위험한 일이오." 남지학이 약간은 높아진 어조로 말했다. 말이 좋아 위장이지 무 림공적으로 지목된 선주혁이 정의련으로 향한다는 것은 사지에 발 을 들이미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위험한 것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선 소협은 가까운 우리조차 못 알아볼 정도잖아요. 그가 백발귀마임을 알아채기란 쉬운 일이 아닐 거예요." "무진 사숙조는 사제를 알아봤소. 사제를 알아볼 사람이 더 있을 지도 모를 일이오." "아니죠. 무진 진인이라는 분은 선 소협을 못 알아본 거예요. 선 소협에게 일어난 변화를 못 알아챈 것이죠." 은설연은 딱 부러지게 말하고는 또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무림맹과 정의련은 서로가 서로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어요. 겉으로야 같은 정도라며 예의를 차리지만 두 세력의 알력 은 하루 이틀 된 것이 아니죠. 다시 말하자면 선 소협이 정의련에 있는 이상 무진 진인과 마주칠 일이 없다는 거예요." "단언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소?" "설령 그런 일이 벌어지더라도 선 소협에게 그 정도의 일은 별거 아닐 거예요. 선 소협 정도라면 쉽게 해결할 수 있을 테니까요." 지난날 마교에서 보통의 정도 무인과는 달리 뻔뻔스러울 정도의 모습을 보이던 선주혁을 확인한 은설연이었다. 그라면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시치미를 뗄 수 있을 것이라 여기는 것이다. '남 소협, 당신이라면 절대 안 되겠지만 말이야.' 은설연은 내심 중얼거린 자신의 말에 왠지 통쾌해지는 느낌이었 다. "흥미를 가질 만한 제안이간 하군. 그러나 역시 위험한 것은 사 실이니까..... 본인의 의견을 들어보도록 하지." 종극이 결론을 내렷다. 중인들의 시선이 선주혁에게 쏠렸다. 하지만 선주혁은 그 시선조차 느기지 못하고 뭔가를 골똘히 생 각하는 중이었다. "선 소협?" "......" "선 소협!" "아? 네?" 화들짝 놀라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선주혁. "지금 저희가 한 이야기 못 들었어요?" "무슨 이야기요?" 은설연은 한숨을 내쉬고 다시 설명하기 시작했다. =남궁연= <<1>> 선주혁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객잔에서 머문 것은 고작 3일. 과연 믿던 바대로 자신의 신체는 가볍지 않은 내상을 가뿐히 회 복했다. 이 정도면 가히 회복이라기보다는 재생의 수준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 만화에서 나오는 캐릭터처럼 팔이 잘려도 쑤욱하고 다시 나 오는 건 아닌가 몰라?' 그 정도까지는 아니겠지만 잘라진 팔을 동여매고 있으면 붙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들었다. 이 재생력이라는 게 내력하고도 연관이 있는 듯 내공 수위가 오른 후 더 막강해지는 듯했다. 스스로의 몸에 대해 스스로 놀라면서도 선주혁은 주변을 둘러보 는 것을 잊지 않았다. 행여 무진 진인과 마주칠까봐서였다. 그는 은설연의 제안을 받아들여 정의련의 남창지부로 향하는 중 이었다. 위험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 다. 곧 있으면 천음마후가 완성된다. 패종회의 본격적인 활동이 시 작된다는 이야기다. 소설에서 대로라면 무림은 그야말로 패종회에 게 휩쓸리고 만다. 사형의 진보가 빠르긴 하다지만 이미 예정과는 달라져 버린 상 황. 이것저것 뒤바뀐 지금 무엇 하나 장담하긴 힘들었다. 잘못하면 사 형이 제대로 된 능력을 갖추기 전에 무림은 끝장이 날 수도 있었다. 선주혁은 준비될 때까지 어떻게 해서든 자신이 버티야 했다. 자신을 살리기 위해 죽음을 택한 공 노인을 봐서라도 목숨을 걸 고 해내야 할 일이었다. 따라서 위험하다고 피할 수는 없었다. 모르긴 해도 오대세가를 끌어들인다면 패종회 역시 주춤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아우! 패종회 놈들만 아니면 신투 늙은이의 재물만 가지고도 평 생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을 건데....., 쯧!" 못내 아쉬운 듯 투덜거리는 선주혁. 이미 잘 먹고 잘 살 준비는 끝이 났건만..... 아니, 한 가지 부족 한게 있었다. 그것은 함께 잘 먹고, 잘 살 사람이었다. '그거야 당연히 선우 아가...... 흠!' 자연스럽게 선우 아가씨를 떠올리던 선주혁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동안 외면해 왔던 사실이 다시금 머리속에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아냐! 절대로 그럴 리는 없어. 세상에 아무리 우연이라는 게 흔 하다지만 어떻게 그렇게 공교로울 수가 있겠어? 선우 아가씨는 소 설에 나오지도 않았었다고!' 선주혁은 지나가는 사람이 보면 정신이 이상한 것처럼 보이기에 충분할 만큼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렇다면 정말 난감해질 뿐이다. 정말이지 생각하고 싶지도 않 았다. "절대로 그런 우연은 존재할 수 없어!" 허공을 향해 외치고는 그 소리에 스스로가 놀라 버린 선주혁이 었다. 그런 그의 귀에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와아! 한 대협!" 낯익은 음성에 선주혁은 고개를 돌렸다. 앙증맞은 표정으로 달려오는 꽃다운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그 녀는 막강한 업그레이드 작업을 거친 문근연, 아니 남궁연이었다. "아! 남궁 소저?" "헤에...... 여기서 만나는군요. 지금 남창지부로 가시던 중인 건 가요?" 남궁연은 홍조를 띤 얼굴로 환하게 웃으며 선주혁에게 물었다. "아, 네 지금 그쪽으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오라버니를 비롯해 다들 걱정하는 중이었어요.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싶어서 말이죠." '하마터면 죽을 뻔하긴 했지.' 무진 진인을 생각하며 선주혁은 내심 고소를 머금었다. "저는 한 대협에게 해를 끼칠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지만요." 남궁연은 조금은 수줍어하며 말했다. '뭐, 뭐지? 저 표정은.....?' 깨물어 주고 싶을 만큼 귀여운 표정에 선주혁은 가슴이 철렁했 다. 방금 전까지 선우 아가씨를 생각하다가 눈앞의 다른 여자에게 마음이 흔들리는 자신을 용납하기 힘든 그였다. 선주혁은 애써 철렁하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노력했다. '그녀는 나를 백 세도 훌쩍 넘은 노고수라 생각하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저건 할아버지한테 응석을 부리는 손녀 같은.... 뭐, 그런 거라고! 정신 차리자, 선주혁!' "노...... 부는 남궁 소저가 생각하시는 만큼 대단한 무공을 지니 지 않았소이다. 그저 상인일뿐이니까요." "헤에?" 남궁연은 바싹 다가붙어선 상태에서 커다란 두 눈을 끔뻑끔뻑거 리며 선주혁을 올려다봤다. "뭐, 뭐가 잘못되었소이까. 남궁 소저?" "처음으로 노부라는 표현을 쓰시네요." "아! 그거야....." "한 대협이 반박귀진의 경지를 넘으신 고수라는 건 알지만 전 아 무리 봐도 모르겠어요. 고작해야 저보다 한두 살 더 연배인 것처럼 만 보이는 걸요." "그렇다고는 해도......." 선주혁은 좀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일단 남궁연과의 거리가 너 무 가까웠다. 그녀가 입을 열면 달콤한 향내가 나는지라 도무지 정 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결코 순박하다고 할 수만은 없는 선주혁이 었지만 이렇게 귀여운 여자가 이렇게 가까이서 종알종알 떠들자 당 황해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안 어울려요." "네?" "한 대협 말이에요, 노부라고 하시는 거.... 저언혀! 안 어울린 다고요." 남궁연은 잠시 커다란 눈동자를 이리저리 움직이는가 싶더니 말 을 했다. "뭐...... 그렇다고 한 대협이 다른 사람들이 있는 데서도 그럴 수 는 없을 테고....., 저 하고 있을 때만 노부라는 표현을 안 쓰면 되 겠네요. 그럼 됐죠?" '뭐가 됐다는 거야?' 선주혁이 난처한 표정을 짓자 남궁연은 금세 울상을 지었다. 당 장 두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질 듯했다. "싫으신 거예요?" '이 여자......! 원래 이랬었던 거야? 그저 밝은 성격이라고만 생 각했건만.....' "제가 너무 무례한 건가요? 그럼 사죄할게요." 급기야 남궁연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아, 아니오. 그렇게 하겠소이다, 뭐..... 어려운 일도 아닌 걸요. 그러니까 사과할 필요는 없어요." "하아! 정말요?" 언제 울먹였냐는 듯 눈부시게 환한 미소를 짓는 남궁연. '이 여자...... 완전 요물일세?' 선주혁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깜찍한 행동을 하는 남궁연이었 지만 어쩐지 싫지만은 않았다. 활짝 웃으면 신난다고 연신 좋아하 는 남궁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을 정도였다. '뭐...... 이건 그냥 동생처럼 귀여워하는 거라고. 결코 선우 아가 씨를 두고 마음이 흔들린다거나 그런 건 아니야.'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소리를 속으로 중얼거리는 선주혁이 었다. <<2>>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이람?" 선주혁은 자신이 이토록 남에게 휘둘리는 성격이라는 것을 오늘 에서야 알게 되었다. 정의련 남창지부를 향하던 중 남궁연을 만나게 된 그는 지금 남 창의 저자를 헤매는 중이었다. 행여 무진 진인을 만나게 될까 염려되어 한시라도 빨리 남장지 부에 도착해야 한다는 조급한 마음과 완전히 동떨어진 상황인 것이 다. "한 대협, 이쪽이요." 이 모든 게 저쪽에서 손을 흔드는 남궁연이라는 처자 때문이었 다. 그녀는 오빠인 남궁일의 금족령(禁足令)에도 불구하고 혼자서 몰래 남창지부를 빠져나왔다고 한다. 남창지부는 갇혀 있기에는 너무 심심하다나? 그리고는 선주혁을 만나서 반갑다며 함께 남창의 여기저기를 구 경하자는 것이었다. 선주혁은 당연히 난색을 표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기 시작하 자 그녀가 예의 울먹이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그런 표정을 지어 도 이번만큼은 양보하지 못한다고 다짐하는 선주혁. 하지만 그녀는 정말로 강적이었다. 이번에는 울먹이며 조르는 것이 아니라 순순히 혼자 돌아나니겠다고 나서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현재의 남창은 그야말로 위험지대란다. 지난번 사해표국에 혈사가 있었고, 무림맹과 사파연합이 서로가 칼을 겨누고 있을 뿐더러 곤륜이마의 출현, 그리고 염마를 비롯한 마교의 거마들까지 모두가 남창에 모여 있다는 것을 숨도 쉬지 않 고 쏟아냈다. 그걸 알면서 왜 나돌아다니냐는 말을 삼키는 선주혁에게 남궁연 은 말했다. 그런 위험한 곳을 혼자 돌아다니겠다고, 만약 저녁이 되 어도 자신이 돌아가지 않으면 화를 당했거니 하고 생각하라고. 한탄을 하듯 말하는 그녀에게 저도 모르게 동행하겠다고 말해 버린 선주혁이었다. 그리고 지금 여기 남창의 저잣거리에서 남궁연과 장신구와 옷감 따위를 구경하고 다니는 것이다. 어디에서 무진 진인이 나타날지 몰라 노심초사 하면서. "이거 참 예쁘죠?" 남궁연은 그다지 고급스러워 보이지 않은 비녀 하나를 손에 들 고는 물었다. 아마도 소박한 성품이기에 저런 물건에도 만족하나 보가 싶었다. "마음에 들면 하나 사세요." 선주혁이 말하자 남궁연은 생긋 웃으며 사양했다. "이미 큰 선물을 하셨잖아요." "네?" "지난번 진주 말이에요. 그게...... 제가 반드시 오라버니께 받아 낼 거예요. 원래 한 대협이 제게 주시려던 선물이었으니까요." "아하하핫! 그거야..... 뭐, 남궁 소저가 원하신다면 더 나은 것 이라도 얼마든지...." "에?" 남궁연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도대체 한 대협은 얼마나 부자이신 거예요?" "뭐.... 글쎄요." 선주혁이 머리를 긁적이자 남궁연이 말했다. "전부 물려받으신 거죠?" "아! 네."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한 대협께서 직접 이번이 첫 상 행이라고 하셨으니까요. 물려받은 재력이 엄청날 것이고 그 가치를 모르기에 대부분 헛되이 쓰셨을 거래요. 이에 은자가 떨어져 보석 과 패물을 팔러 나오셨을 거라고....." '이봐, 아가씨. 그거...... 듣는 사람에게는 충분히 실례가 되는 이야기라고.' 선주혁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역시 사형이라고 생각했다. 사제를 험지에 보내야 하는 입장인 만큼 남지학은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은설연에게 부탁해 선주혁의 신분을 새롭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선주혁이 행세해야 할 가장 비슷한 자를 물색한 것이다. 그 기로는 그의 과거를 샅샅이 조사해 알려 줬다. 정의련에서 선주혁에 대해 치밀하게 조사할 것을 대비함이었다. 은설연은 그와 같은 일을 문제없이 처리했다. 조상 덕에 평생을 놀 고먹은 독거(獨居)노인을 찾았다. 특이한 성품의 그는 평생을 두고 거의 외출을 하지 않았다. 그의 진면모를 아는 것은 두 명의 하인들 뿐이었다. 부부인 두 하인은 환갑을 넘겼고 슬하에 자식도 없었다. 노인의 실제 이름은 독고건(獨孤建). 나이는 팔십여섯이었다. 그리고 대략의 나머지 상황은 남궁연이 말한 대로였다. 오대세 가의 후예들이 나름대로 짐작한 상황과 독고건의 처지는 비슷했던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독고건은 재산을 거의 탕진했고 선주혁 처럼 팔아치울 패물이 없다는 것이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선주혁이 그의 대역을 하기에는 딱이었다. 이름이야 중요치 않았다. 한진우라는 이름을 가명으로 사용한 것이 라 하면 될 일이었다. 신분을 정확히 밝히지 않기 위해 가명을 사용하는 것은 그다지 특이한 일이 아니었으므로. "흠, 흠......!" "어머! 기분 상하신 거예요?" "뭐..... 그게......." "괜찮으신 거죠? 사실 세상 물정을 모른다는 게 나쁜 일만은 아 니잖아요. 저는 약삭빠르게 계산이 앞서는 사람보다는 순수한 사람 이 더 좋거든요. 한 대협이 나이에 비해 훨씬 젊어 보이는 것은 비 단 정순한 내공 때문만은 아닐 거예요. 그런 순박한 마음이 있으니 까 젊음을 유지할 수 있는 거겠죠." "아하핫, 그런 걸까요?" '이 녀석! 뭐가 그런 걸가요...... 냐?' 어느새 남궁연에게 말려들어 버린 선주혁이었다. 뭔가 이 아가씨에게는 당해낼 수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 렇다고는 해도 당하는 입장에서 하나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마도 그것이 남궁연의 진정한 무서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 며 선주혁은 조심, 또 조심할 것을 다짐했다. "저 남궁 소저." "네?" "이제 날도 저물어 가니..... 그만 돌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다들 걱정하실 텐데......" "걱정을 했다면 찾으러 나섰겠죠. 아직까지 찾지 않는다는 건 괜 찮다는 뜻이에요. 어쩌면 어디선가 우리를 보고 있을지도 모르고 요." 맞는 말이었다. 남궁연이 자신을 부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 을 감시하는 눈이 급격히 불어났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개중 에 정의련의 시선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혹시.....?" "......?" "저랑 둘이 있는 게 싫으신 거예요?" "아뇨. 그럴 리가!" "그럼 됐어요. 우리 이제 술 마시러 가요." "네? 술이요?" "싫으신 거예요?" "그런 건 아니고요." 선주혁이 그렇게 말하자 남궁연은 재빨리 선주혁의 소맷자락을 붙잡아 당겼다. 그러고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천향루(天香樓) 라는 간판을 단 주루를 향해서였다. '나 언제부터 이렇게 어리버리해진 거냐?' 이런 꼬마 여자애한테 질질 끌려다니는 자신이 어이없기만 한 선 주혁이었다. <<3>> 주루는 북적였다. 여기저기 무림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무림맹, 사파연합의 긴장 고조와 더불어 마교와 정의련의 주요 인물들이 속속들이 모여드는 남창이었다. 호사가(好事家)의 기질이 다분한 무림인들이 좋은 구경 거리가 있을 가능성이 높은 남창으로 속속들이 모여드는 것은 당연 한 일이었다. "전망 좋네요. 주대가 비싸겠지만 한 대협이 계시니까 걱정할 필 요 없겠죠? 한 대협은 엄청난 부자잖아요." 워낙 사람이 북적이다보니 2층에서도 전망 좋은 자리는 찾기 힘 들었다. 남궁연은 서슴없이 삼층에 자리를 잡았다 당연히 이런 자 리는 주대가 비싸기 마련이었다. "하핫, 걱정하지 말고 마음껏 드세요." 선주혁은 부자라는 말을 듣자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그야말로 자신이 바라는 삶이 이런 것이었다. 물론 그런 삶을 즐기기엔 아직 이르지만 잠깐 맛을 보는 것쯤은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한 시진 이내로 오라버니하고 다른 사람들이 몰려올 거예 요. 그러니 지금 시간을 최대한 즐겨야 해요." 남궁연 뭔가 못마땅하다는 듯 입술을 삐죽였다. "즐기다니.....?" "아! 술 말이에요. 사람들이 와서 왁자지껄하면 술맛도 제대로 안 난다고요." 재빨리 대답하는 남궁연이었다. 그렇게까지 서둘러 대답할 일이 아니었건만 선주혁은 그런 남궁연의 행동에서 다른 이유를 찾지 않 았다. "남궁 소저는 술을 꽤나 좋아하시는 모양이군요." "그, 그럼요. 오라버니가 계시면 많이 못 마시니까 오기 전에 빨 리빨리 마셔야 해요." 그렇게 말한 남궁연은 독한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이윽고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그녀의 얼굴. '어째 불안한데? 그다지 술을 잘 마시는 것 같아 보이지 않는 데.....?' "한 대협은 정확하게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갑작스런 남궁연의 질문이었지만 선주혁은 당황하지 않고 침착 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독고건의 나이가 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 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나이가 많지요. 여든여섯입니다." "우와와와! 저언혀! 그렇게 안 보여요. 정말 신기하네." 남궁연은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여 선주혁의 얼굴을 뜯어봤다. "아무리 봐도 스물한두 살 정도밖에는 안 보인다니까요." "하하, 제가 좀 동안이긴 하죠." 선주혁이 뒤통수를 긁으며 멋쩍은 웃음을 지을 그때였다. "한 대협, 이곳에 계시다는 소리를 듣고 단걸음에 달려왔소이 다." 황보조학의 목소리가 뒤쪽에서 들려왔다. 남궁연의 예상보다 한참이나 빨리 나타난 것이다. "다시 뵙게 되었군요, 한 대협." 남궁일이 예의바르게 인사를 했다. 선주혁도 자리에서 일어나 남궁일 일행을 맞이했다. 저마다 한 참을 기다렸느니, 걱정을 했느니 하며 소란을 떨며 선주혁에게 인 사를 건넸다. "그런데..... 이분은.....?" 나타난 남궁일 일행 중에는 백화란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선주 혁이 익히 알고 있는 누군가와 닮은 여인이 있었다. "아! 이분은 진주언가(晋州彦家)의 언은진(彦殷珍)소저입니다. 이 번에 뒤늦게 저희와 합류하셨지요." "반갑습니다, 언 소저." "대협의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정 말 영광입니다." 언은진은 공손하면서도 약간은 딱딱하게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 았다. 선주혁은 그녀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 얼굴 역시 저쪽 세상의 연예인과 매우 흡사했던 것이다. 물 론 언제나처럼 완전히 똑같은 얼굴은 아니었다. 그가 알고 있는 손 혜교라는 연예인은 약간 통통하고 귀여운 느낌의 얼굴이다. 하지만 언은진은 그보다 갸름하고 좀 더 도발적인 색채가 강했 다. '뭐랄까..... 손혜교를 조금 더 길게 늘려 놓은 상태에서 성숙한 느낌이 강하게 바꾼 것 같은 모습이군.' "에? 한 대협. 여자 얼굴을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은 실례 라구요." 남궁연은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선주혁에게 말했다. "아!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제가 아는 누군가와 너무 닮으셔서 그만....." 선주혁은 얼굴을 붉히며 사과했다. "흐응? 한 대협 주변에는 미인이 많은가 보네요. 언 언니와 같은 미모의 소유자는 그렇게 쉽게 볼 수 있는 게 아닌데?" 남궁연은 뾰족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말에 언은진은 살짝 얼굴을 붉혔다. "연아, 한 대협께 무례하게 굴지 마라." 남궁일이 남궁연을 나무라자 남궁연은 찔끔해 고개를 숙여 버렸 다. 아무래도 오라버니를 지극히 어려워하는 듯했다. "그나저나...., 어딜 그렇게 오랫동안 머물다 오신 것인지요?" 남궁일의 정중한 질문이었다. 선주혁은 가볍게 술로 입술을 축이고 막 대답을 하려 했다. 미리 준비한 것이니만큼 어려움은 없을 터였다. 그 순간이었다. "어머! 독고 대가, 이곳에 계셨군요." 난데없이 간드러진 음성이 등 뒤에서 들려왔다. 한진우를 가명으로 하고 독고건이 진명이어야 하는 복잡한 상황 임을 선주혁은 알고 있었다. 지금의 성을 등 뒤에서 부르자 그는 기 이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쿨럭!" 고개를 돌린 선주혁은 입에 머금었던 술을 내뱉지 않을 수 없었 다. 등 뒤에 서 있는 여인. 호리호리하고 가냘파 보이는 몸매에 요염함과 청순함이 묘한 조 화를 이루고 있는 미녀. 그녀의 얼굴은 너무나 익숙한 그것이었다. "마침 잠시 남창을 떠났던 사이에 오라버니께 들르셧다는 이야 기를 들었어요. 절강으로 벌써 돌아가셨을까봐 염려했는데 마침 이 곳에 계셨네요." 요란스럽게 수다를 떨며 선뜻 자리에 앉아 버리는 여인. 그녀는 남장을 벗은 은설연이었다. 선주혁이 어리둥절해 하는 사이 그녀가 전음을 보내왔다. '선 소협이시죠? 전 은설연이라고 해요. 은우 오라버니의 동생 이죠. 오라버니께서 선 소협을 도우라고 보내셧어요.' 그녀의 말을 들은 선주혁은 더욱 더 어리둥절해 졌다. 그녀가 원 래 은우였고 남장을 한 것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왠지 진 짜 은우라는 자가 따로 있고 동생인 것처럼만 느껴지는 것이다. 물론 못 알아볼 정도의 변신은 아니었다. 하지만 여장을 한 은설연의 용모는 그야말로 눈이 부실 정도. 한태희를 닮은 그녀이기에 남장을 해도 예쁘다고 생각했건만 정 작 제대로 차려입고 나타나자 두 눈이 번쩍 뜨일 정도였던 것이다. 더구나 그녀는 옅게 화장까지 한 상태. 그야말로 그녀의 얼굴에서는 빛이 나는 듯했다. '본판이 예쁘니 화장발은 아닌 거고......, 여하튼 이러니 허구한 날 무협소설에서 그런 엉터리 설정이 먹히는 건가?' 남장여인이 다시 여장을 했다고 해서 못 알아보는 소설들을 보 면 실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다른 모습이라면 미리 알지 못하면 속을 수도 있 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물론 자신이라면 그렇게 어벙한 모습 을 보이지는 않을 거라 믿으면서 말이다. "소저, 사람 잘못 보신 게 아닌가요? 이분은......" 팽손겸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양해도 없이 자리에 털썩 앉는 태도를 본 평소의 그라면 벌컥 화를 냈겠지만 상 대는 두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의 미인이었다. 그도 남자인지라 이 정도의 미녀에게 노기를 표할 수는 없었다. "그럴 리가요? 자신의 약혼자도 몰라보는 사람이 있나요?" "야, 약혼자요?" 남궁연은 안 그래도 큰 눈을 있는 대로 크게 떴다. "그래요. 여기 계신 이분은 오래전 저와 약혼한 사이에요. 안 그 래요, 독고 대가?" 은설연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다정하게 선주혁에게 말했다. "아하하, 그, 그렇소." 선주혁은 등 뒤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억지로 대답 했다. 뻔뻔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그였지만 이 경우는 달랐다. "하지만..... 한 대협은......." 남궁연은 아직도 수긍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한 대협이라뇨? 이분의 성함은 독고건이예요." 은설연은 무슨 소리냐는 듯 살짝 남궁연을 흘겨보고는 말했다. 그러자 나머지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진우라는 이름이 본명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짐작한 터 였다. 남창지부에 돌아오자마자 조사에 착수했던 그들이다. 상인 중에 한 씨 성을 쓰는 자는 많았지만 딱히 부합되는 인물은 없었다. 만약 한진우라는 게 본명이라면 그는 가짜인 셈이었다. "원래 독고 대협이셧군요." 남궁일이 말하자 선주혁은 어색한 웃음을 연기하며 대답했다.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하게 되었구려. 사실 노부로서도 불안한 마음이 있었던지라....." "충분히 그 심정을 이해합니다. 흉흉한 세상이니까요." "양해해 주셔서 고맙소이다." 선주혁이 두 손을 맞잡아 인사를 했다. "한데 이분은......?" 남궁일이 은설연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전 모용수란(慕容秀蘭)이라고 합니다. 여기 계신 독고 대가의 정 혼녀이기도 하지요."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모용 소저." "반갑습니다." 은설연은 선주혁에게 말할 때와는 달리 고상하고 품위 있게 인 사를 주고받았다. "모용이라면..... 과거 무림의 그 모용세가와 연관이......?" 한때 무림에서 모용세가라는 명가가 존재했다. 이를 기억해 낸 제갈중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의 질문에 은설연은 어딘가 처량해 보이기까지 한 고소를 머 금고 꽃잎 같은 입술을 열었다. "아직까지 저희 가문을 기억해 주시는 분이 계시다니..... 의외 로군요." "아! 그럼 진정 모용세가의 후손이신 것입니까?" "세가라는 말은 이제 어울리지 않습니다. 남아 있는 가족이라고 해봤자 오라버니 한 분과 저뿐인 걸요." '당장 텔레비전에 출연해도 되겠군.' 가슴이 떨릴 정도로 처연한 표정으로 연기를 하는 은설연의 모 습에 선주혁이 떠올린 생각이었다. 여자는 요물이라는 말은 정말이 라 여기면서...... "그럼 한, 아니 독고 대협께서는 모용 소저 댁에 다녀오신 거로 군요." 원래 준비했던 대답은 아니지만 은설연이 자리에 앉으며 한 말 이 있기에 선주혁은 긍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습니다. 이왕 여기까지 온 김에 란매를 만나고 가려고 기다 렸지만..... 여러분들이 많이 기다리실 것 같아서......" "이렇게라도 만나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독고 대가." 은설연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선주혁에게 다정한 미소를 보냈 다. 그야말로 가슴 떨리는 미소였기에 선주혁은 애써 마음을 다잡 아야만 했다. 노고수로 짐작되는 선주혁이 이렇게 젊은 여인과 약혼을 했다는 사실이 조금은 어색하긴 했다. 하지만 받아들이지 못할 사실은 아니었다. 독고건이라는 자의 젊은 용모는 물론이거니와 막강한 재력과 무공을 고려하면 젊은 여 인을 맞이하는 것은 이상할 것도 없었던 것이다. 다만 주책이라는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그것은 모용수란의 엄 청난 미모 때문에 더욱 그랬다. 백화란에게 마음을 주고 있는 황보 조학 등조차 어쩐지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모용수란의 미모 였던 것이다. 더구나 삼백여 년 전 수하마제에게 멸문 당했다고 알려졌던 모 용세가다. 지금에야 그녀의 말처럼 남매만이 간신히 살아남았을지 모르지만 뿌리 깊은 명문의 출신이었다. 돈 많은 노친네에게 꽃다 운 그녀의 청춘을 바쳐야 한다는 것은 왠지 부아가 치미는 일이었 다. "독고 대협께서는 당분간 저희 정의련 지부에 머무실 예정입니 다. 기회가 된다면 모용 소저도 한 번 방분을 해 주시지요." "어머나? 그래도 되는 건가요?" "물론이지요. 모용 소저 같은 분이시라면 언제든 환영입니다." 황보조학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비록 남의 떡임은 알고 있지만 저도 모르게 나서게 된 것이다. "정말 친절한 분들이시군요. 독고 대가, 오라버니께 말씀하신 거 래....., 이분들과 하시는 건가요?" "그, 그렇소. 란매" 아직까지는 은설연의 변신에 익숙치 않은 그였다. "정의련이라면 오대세가를 주축으로 한 그곳인 거지요?" "그렇습니다. 여기 있는 저희 모두가 오대세가의 후손들이지요." 제갈중양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설명했다. "어머나! 좀처럼 뵙기 힘든 귀한 분들이시군요. 이런 분들과 거 래를 하게 되다니..... 독고 대가는 아무래도 복을 타고 나신 것 같 네요." "하핫, 란매의 말대로인 것 같소. 나도 이분들이 그렇게 대단한 신분이라는 것을 란매의 오라버니한테 듣고서야 알았지 뭐요." 이제는 조금 익숙해진 선주혁은 은설연에게 장단을 맞추기 시작 했다. "좋은 결과가 있을 거예요. 이렇게 현양하고 준수하신 분들이라 면 분명 공정한 거래를 하실 테니까요." 각각의 면면을 훑어보는 은설연의 말에 남궁일을 제외한 세 청 년은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중원을 통틀어 보기 힘든 미인의 칭찬 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은설연의 다소 요란하지만 사근사근하고 매력적인 화술에 분위 기는 금세 화기애애해졌다. 저마다 만면에 미수롤 짓고 대화를 나 누는 것이다. 단 한 사람. 남궁연만은 뭐가 불만인지 입을 툭하니 내밀고 있는 중이었다. 남궁일의 제지가 아니었다면 진즉 술을 들이켜 자리에 누웠을지도 모를 그녀였다. <<4>> "절강성에 자리한 그의 고향에는 독고건이라는 자가 살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조상으로 물려받은 재산으로 살아왔으며 평 생을 두고 외출을 삼가온 것 같습니다." "흐음..... 아이들이 예측한 것처럼 은자가 다 떨어여 패물을 팔 러 나온 것이더냐?" "자세한 내용까지야 알 수는 없지만 그럴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 지만......" "하지만?" "소자가 확인한 그의 패물은 가치를 측량키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렇겠지. 그러니 단순하게 거간 역할만 해도 큰 이문이 남을 것이라 알려오지 않았더냐." 남궁백연이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 정도의 재력을 가진 가문치고는 외려 초라하다 할 정도의 규 모의 집이라고 합니다. 고작 두 명의 노인을 하인으로 두고 살아왔 다는 보고입니다. 최근에는 그들에게 적당한 은자를 주어 고향으로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곳 남창으로 오기 직전의 일인 듯 합니다." "흠......, 교묘한 우연이 있다? 그게 네게 의심을 품게 하는 것이 냐?"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는 부분입니다. 연아의 말에 의하자면 그 의 무공은 진짜입니다. 그렇게 대단한 자치고는 지난날이 너무 조 용하다고나 할까요..... 마치 없던 사람이 불쑥 튀어나온 것만 같 습니다. "은거한 기인이야 넘치는 것이 강호니까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지. 그리고 약혼녀가 있다고 들었는데......?" "모용세가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조금은 경박해 보이지만 언행 은 분명 명문가의 그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모용세가의 후손 이라는 것 또한 역시 입증이 쉽지 않은 일입니다. 사실 지금에 와서 자신이 모용세가의 후손이라 주장한다 해서 그것을 부정할 방 도는 찾기 힘드니까요."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 너는 역시 그녀를 통해 그의 진정 한 신분을 검증하고 싶은 것이냐?" 남궁백연이 피식하고 웃었다. 아들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익 히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모용가의 후손이라면 여러 가지 정황이 들어맞을 수도 있습니다. 모용가가 무림의 명문이라지만 그들의 과거는 항상 어두 웠습니다. 연(燕)의 몰락 이후 끊임없이 국가의 재건을 노려오던 그 들이었으니까요. 명맥만 유지하던 그들이 독고건이라는 자의 가치 를 알게 되었다면.....!" "흐음..... 결국 독고건이라는 자를 강호로 끌어들인 것은 그녀 와 그녀의 오라비가 되는 자라는 것이냐?" "그녀가 정말 모용가의 후손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독 고건의 재력과 무공이라면 연의 재건은 몰라도 모용세가의 영화를 되찾는 것은 어려운 일만은 아닐 것입니다." "결국 열쇠는 그녀라는 거군." 남궁백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알아봐야겠지. 서로에게 이득을 줄 수 있는 일이라면 모용세가를 돕는 것도 가능할 터이니까." "정확한 신분이 밝혀진다면 이야기는 오히려 그녀와 나누는 것 이 나을 듯합니다. 보통 여인이 아니니까요." "호오! 네가 인정할 정도면 정말이지 대단한 처자이겠구나?" "경박해 보이는 태도조차 자신을 감추기 위한 수단으로 보일 정 도니까요." "흐음..... 모용세가의 재건은 필연적일 수도 있겠군. 하여튼 잘 알아보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남궁일은 공손히 대답했다. "그리고....." "........?" "최근 여러모로 바쁘게 보내는 것은 알고 있다만 무공에 소홀함 은 없는 것이더냐?" "명상의 시간은 줄이지 않았습니다." 남궁일의 짧은 대답. 그것으로 남궁백연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 정 도의 경지라면 굳이 몸을 험하게 다뤄 수련을 할 필요가 없었다. 이 제는 깨달음 하나하나가 발전을 주도할 시기였기 때문이다. "늘 최선을 다해 수련에 정진해야 하느니라!" "명심하겠습니다." "남궁세가..... 아니 정의련의 미래가 너에게 달려 있다는 사실 을 잊지 말거라." 남궁백연은 엄한 어조로 아들에게 말하면서도 만면에 떠오른 미 소만은 감추지 못했다. 그만큼 남궁일은 자랑스럽기만 한 아들이었 다. 세인들의 경계가 지나칠 것을 염려하여 본연의 능력을 감추고 있을 뿐이었다. 아들의 무공은 후지기수들이 아니라 전 무림에서 상대할 자를 찾기 힘들 정도였던 것이다. 이대로 몇 년 만 지나다면 천하는 자신의 아들로 인해 남궁세가 와 정의련을 우러러보게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남궁백연이었 다. =유성(流星)= 정의련의 남창비부에서는 선주혁에게 귀빈실을 내주었다. 당연 한 일이었다. 그의 신분에 이상이 없다는 것만 확실해진다면 복덩 이나 다름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단지 보석 몇 개를 거래하는 것 으로 끝이 아닐 터였으므로. 혼자 쓰기에는 지나치게 넓고 화려한 방. 선주혁은 며칠째 그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 중이었다. 남궁세 가의 가주인 남궁백연이 남창지부에 도착했을 때와 은설연이 찾아 올 때를 빼놓고는 식사조차 방에서 했다. 그런 선주혁의 모습은 오히려 정의련 인물들의 의심을 덜었다. 수십 년 간 외출을 하지 않았다는 정보를 입수한 그들이었기에 방 안에서 꼼짝조차 하지 않는 모습이 오히려 자연스러웠던 것이다. 선주혁은 독고건의 연기를 하기 위해 방 안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눈을 뜨자마자 명상을 시작했고 그것은 새벽 동이 터올 때 까지 계속 되었다. 그가 매달려 고심하는 것은 종극이 설명했던 부 분이었다. 종극은 수련만이 답이 되어 줄 거라 강조했을 뿐이다. 한데 선주혁은 그의 말에서 하나의 실마리를 찾아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방법이 실제로 자신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지 알아내려 는 것이다. 종극은 말했다. 내력의 미묘한 변화와 움직임 등을 알지 못하고 서는 결코 초식의 의를 깨우칠 수 없다고, 그런 것은 결코 말로 전 해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종극이 그리 말했다면 필시 맞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보통의 무인들에게 해당하는 말이었다. 흡성대법을 익힌 선주혁은 자신을 내관(內觀)하듯 타인의 진기 유통을 훤히 볼 수 있었다. 어떤 동작에, 어떻게 진기가 일어나고, 어떤 식으로 유통되어, 어는 순간 집중이 되고, 언제 발출이 되는 것까지 두 눈으로 보는 것보다 선명히 볼 수가 있었다. 이에 그는 가능성을 찾으려는 것이다. 어찌 보면 선주혁답게 지 독할 정도로 단순한 방법이었고, 그만큼 무모한 시도라고 말할 수 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로서는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빨리 강해져야 한다는 목적이 너무나 분명했다. 다소의 무리가 있더라도 반드시 목적을 이루리라는 것이 그의 각오였다. 패종회의 백존과 같은 고수들과 맞서기 전 하나의 초식이 가진 오의라도 깨닫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지금의 상태보다 훨씬 사형에게 큰 도움이 되어줄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 었다. 선주혁은 우선적으로 홍의노인과 천 노인이 혈마자광기를 일으 키던 당시를 기억해 내기 위해 애를 썼다. 홍의노인과의 대전 때는 정신을 바짝 차린 상태였고, 천 노인과의 대전 때는 저항을 극복하 는 비밀을 찾아내기 위해 세밀리 관찰할 시간을 가겼었다. 그리하여 약간의 노력만으로 선주혁은 두 사람이 어떻게 진기를 운용했는지 명확히 기억할 수 있어다. 그는 두 노인이 혈마자광기를 전개하며 보여준 진기의 운용 중 에서 서로의 공통점을 찾았다. 이어 자신이 진기를 사용하는 방법과의 차이점을 비교했다. 거 기에는 분명 명확한 차이가 있었다. 두 사람의 진기운용은 자신처럼 무작스럽게 진기만을 쏟아 붓는 것과는 달랐던 것이다. 남이 보기에는 그저 좌정하고 앉아 명상만을 하는 것처럼 보였 지만 기실 선주혁의 신체 내부에서는 끊임없는 진기의 움직임이 있 었다. 계속해 두 노인이 사용했던 방식으로 진기를 운용해 보는 중이 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방법은 사실 보통 사람이라면 엄두조차 못 낼 일이었다. 익숙지 않는 방법으로 진기를 운용한다는 것은 자살 행위와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주혁은 자신의 특수한 신체를 믿었고, 그의 신체는 믿 음을 충실히 이행햇다. 상당한 무리가 있더라도 버텨내는 것이다. 그렇게 선주혁은 하루 종일 방 안에 앉아 진기의 운행만을 반복 했다. 덜컥! 방문이 열리는 소리. 선주혁은 양손을 향해 치달리던 진기를 다시금 전신에 흩어두었 다. 흡성대법은 내력을 단전에 모아두는 방식이 아닌지라 진기의 수발에 있어 훨씬 신속한 면이 있었다. 막 눈을 뜨려던 선주혁의 머릿속을 강타하는 하나의 생각. 그것은 바로 방금 전 자신의 진기가 신속하게 전신으로 흩어진 다는 것을 새삼스레 의식하는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와 같은 단순한 재의식이 선주혁에게는 또 다른 가능 성으로 다가왔다. 당장 그와 같은 가능성이 현실적으로 유용한가에 대해 알아보고 싶었다. 그러나 방에 들어온 사람이 누군지 아는 이상 당장은 힘들었다. 사물의 기감에 대해 예민해진 이유로 선주혁은 그 사람의 기운만으 로도 누군지 식별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는 눈을 떴다. 다짜고짜 방 안으로 들어선 것은 역시 남궁연이었다. "독고 대협." "남궁 소저." 선주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남궁연을 맞이했다. "대체 하루 종일 방 안에서 무얼 하시는 거예요?" "생각할 게 좀 있어서." "아무리 생각을 하실 게 있어도 그렇지! 이틀 동안 방에서 꼼짝 도 안 하혔다고요." "하하핫, 뭐 이 정도야...... 고향에 있을 때는 몇 달 동안 방에서 안 나가기도 했는데....." 선주혁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자 남궁연이 아미를 상큼 치 켜 올렸다. "못써요, 그럼! 바깥 공기를 쐬어 주지 않으면 건강에 해롭다고 요." 남궁연은 짐짓 화난다는 표정과 함께 허리에 양손을 짚었다. '쩝! 역시나 귀여운 걸로는 이 아가씨를 당할 자가 없겠군.' "이리 와보세요." 남궁연은 선주혁을 잡아끌었다. "어? 어딜 가시려는 겁니까?" "일단 나와 보세요." 방을 나서자 서늘한 밤바람이 불었다. "어때요? 공기 좋죠?" "그렇군요. 하늘에 별도 많고......!" 도시에서만 살아온 선주혁이었기에 이쪽 세상의 밤하늘은 언제 봐도 질리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쏟아질 듯 하늘을 가득 메운 별들 때문이었다. "독고 대협." 나란히 서서 별을 바라보던 남궁연이 선주혁을 불렀다. "네?" "그분은 어떻게 만나신 거예요?" "그분이라면......?" "모용 소저말이에요. 나이 차가 많이 나는데 어떻게 약혼을 하게 되신 거냐고요." 남궁연이 이와 같은 질문을 해올 줄 미처 예상치 못했던 선주혁 이었기에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하긴 은설연이 저런 식으로 나오리 라는 것을 몰랐으니 대답이 궁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뭐, 이 나이쯤 되면 매파(媒婆)가 끼어들지 않는 한 약혼을 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지요." 가까스로 대답을 지어낸 선주혁이었다. "역시..... 그랬군요." 남궁연은 예상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선주혁은 내심 안도 의 한숨을 쉬었다. "매파를 통해 만나셨는데도..... 모용 소저를 사랑하세요?" "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선주혁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매파를 통한다는 거...... 서로의 얼굴도 모른 채 결혼을 정해 버리는 거잖아요. 그런데도 모용 소저를 사랑하시냥고요." "그, 그게....... 그녀가 대단한 미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또 실제로도 미인이고......." "하긴......! 모용 소저는 정말이지 대단한 미인이긴 하죠." 남궁연은 뭔가 분하다는 듯 말했다. '이 아가씨..... 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거야?' 선주혁은 어쩐지 긴장이 되었다. 자칫 말 한마디라도 실수를 한다면 자신의 정체가 드러날 수도 있는 상황. 안 그래도 긴장된 심정이건만 엉뚱한 이야기들이 불쑥불쑥 튀어 나오니 가슴이 콩닥거리며 뛸 정도였다. "그럼 모용 소저는 어떻다고 생각하세요? 그분도 독고 대협을 사랑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선주혁은 남궁연이 묻는 바의 요지는 파악하지 못했지만 살아온 세월이 있는 만큼 어렵지 않게 답을 할 수 있었다. 결혼이란 사랑만 으로 되는 게 아니다. 사랑보다 무서운 게 정이라는 거다. 함께 살 다보면 자연히 정이 들 것이고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식의 대답을 떠올리고 있을 때 남궁연이 말했다. "독고 대협께서는 남녀가 그저 정만으로 평생을 살 수 있다고 생 각하나요? 아니, 살 수는 있겠죠. 하지만 그 안에서 서로 행복할 수 있는 걸까요?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그러니까 가문이나 여러 가지 배경 따위가 아닌 그 사람 자체에 대해서는 모르는 상태에서 한 방을 쓰고, 한 이부자리에서 자면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걸까 요?" 자신이 대답하려는 바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듯한 질문이었기에 선주혁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이 아가씨! 마음에 들지 않는 혼담(婚談)이 오고가는 건가?' 남궁세가 정도면 이쪽 세상에서 정말이지 대단한 가문이랄 수 있었다. 소설에서 흔히 보듯 그쯤 되면 정략결혼이라는 게 있을 수 있다. 선주혁은 남궁연이 그런 정략결혼의 희생양이 되는가 싶어 그녀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밝고 명랑하기만 한 그녀의 모습을 본 지라 이런 슬픔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는 원래 하려던 말을 삼켰다. 그리고 남궁연에게 말했다. "남궁 소저! 남궁 소저의 말대로 결혼은 반드시 사랑하는 사람과 해야 하는 겁니다. 두 사람이 가족이 되어 평생 사랑을 나누는 것보 다 행복한 일은 없는 일이니까요. 사랑 이외의 다른 목적이 있는 결 혼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건 스스로 무덤을 파는 거니까 요. 그런 결혼 따위는 물리쳐야만 사랑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겁니다." 남궁연이 가문의 어른들과 당당히 맞서 스스로 선택한 사랑과 결혼하기를 바라는 마음인지라 그는 진정을 담아 말했다. 특히나 결혼을 통해 가족이 된다는 것에 크나큰 의미를 두고 살아온 선주 혁이었기에 그의 말에는 확신을 넘어서 신념이 느껴졌다. "역시! 독고 대협이라면 그렇게 생각하실 줄 알았어요." 선주혁의 말을 들은 남궁연의 표정이 다시금 환하게 밝아졌다. 그녀가 자신의 말에 위안을 얻고 조금이나마 용기를 얻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선주혁은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 생각에 선주혁이 흐뭇하게 웃고 있을 때 남궁연이 작은 목 소리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반드시 밝혀내고 말 거야." "네?" 뭔가를 밝힌다는 말에 지레 찔끔한 선주혁이 물었다. 행여 자신 의 정체를 밝힌다는 것은 아닐까 싶은 것이다. "그런 게 있어요! 하여튼...... 독고 대협의 생각을 알게 되어서 다행이에요. 저는 혹시나 독고 대협이 그저 함께 살면 다인 게 부부 이고, 사랑이라고 여기시는 건 아닌가 싶어 염려했거든요." 남궁연의 말에 선주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이 어떤 결혼 관이나 사랑관을 가졌든 남궁연이 그것을 왜 염려하는지 이해가 잘 가지 않았던 것이다. '설마......? 에이, 그럴 리가! 이럴 때 김칫국을 마시고 혼자 좋 다고 히죽거리는 건 엑스트라나 할 짓이라고.' 잠시 머릿속을 스쳐 가는 생각을 가볍게 부인하는 선주혁이었 다. "남아일언은 중천금이라 했으니 남궁 대협도 오늘 하신 말씀을 잊으시면 안 돼요!" "무슨 말을......?" "사랑에는 다른 조건이 끼어들면 안 된다는 거 말이에요. 그런 결혼은 절대로 뿌리쳐야 한다는 말씀이요." '흠..... 내게 들었다고 하고 부모님께 맞서 보려는 건가? 설마 내가 그랬다고까지야 말하진 않겠지.' 선주혁은 그렇게 짐작을 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저는 제가 한 말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귀엽기만 한 이 아가씨가 평생을 눈물로 살아가는 것보다는 자 신이 해 준 말을 통해 용기를 얻어 행복을 찾아가길 바랐던 것이다. 선주혁의 확신에 찬 말에 남궁연은 더없이 밝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주변이 환해지는 것 같은 미소였다. "앗!" 남궁연의 단발마 외침에 선주혁이 화들짝 놀라 그녀의 얼굴을 쳐다봤다. "절 보지 말고 하늘을......!" "에?" 그제야 선주혁은 남궁연의 손가락을 쫓아 하늘을 봤다. "에이! 늦었잖아요. 유성이 있었는데." 남궁연이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투덜거렸다. "하하하! 소원을 빌 기회를 놓쳐 버렸군요." "헤에? 독고 대협도 그런 말을 믿으세요?" "믿는다기보다는..... 사실 유성은 너무나 빨라서 소원을 빌기에 는 무리가 있잖아요. 그 어떤 사람도 성공할 수 없으니 믿기도, 안 믿기도 힘들죠." "흐음, 듣고 보니까 그러네요. 그래도 전 유성을 보면 꼭 소원을 빌곤 해요. 독고 대협 말씀처럼 늘 늦어 버리고 말지만요." "하하하." 볼을 살짝 부풀려 심통이 난다는 듯한 표정의 남궁연이었다. 정 말이지 다양하기 이를 데 없는 그녀의 표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하 룻밤이 심심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남궁연의 얼굴만을 바라보고 있을 수는 없는 일. 선주혁은 시선을 돌려 밤하늘을 바라봤다. 그리고 남궁연의 환호성이 들렸다. "우와와! 저것 좀 보세요. 유성우(流星雨)에요." 수십 개의 유성이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긴 꼬리를 달고 잠시간 하늘을 가로질렀던 유성우는 순식간에 그 모습을 감췄다. 극도로 짧은 순간이었지만 정말이지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와아! 이번에는 성공했어요." "......?" "소원을 비는 거 말이에요. 맨 처음 유성이 보일 때 시작해서 마 지막 유성이 사라질 때까지! 소원을 빌 수 있었어요." "하하핫! 그런 식으로 소원을 비는 것도 효력이 있을까요?" "당연하죠! 꼭 있어야 해요!" 남궁연은 만약 효력이 없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표정이었다. 누구를 향해 어찌 화풀이를 할지 모를 일이지만 꽤나 진지한 그녀 의 표정은 여전히 귀엽기만 했다. "그나저나 정말 굉장하군요. 유성우라는 거......" 선주혁은 한 번에 저렇게 많은 유성이 쏟아지는 것을 처음 본다. 그렇기에 감흥이 클 수밖에 없었다. "처음 보시는 거예요?" "아, 네." "그렇게 방에만 갇혀서 지내시니까 그렇죠." "하하, 앞으로는 자주 나와서 바람도 쐬고 별 구경도 하고 그래 야겠습니다." "꼭 그러세요. 참! 그럼 독고 대협께서는 유성이 떨어진 자리도 본 적이 없으시겠네요." "대충 어떻게 되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엄청나게 큰 구덩이가 파 인다죠. 유성 자체는 별로 크지도 않은데 말이죠." "흠....., 유성이 얼마만한지는 잘 모르겠어요. 저도 유성이 떨어 졌다는 자리만 본 거니까요. 그래도 정말 굉장했어요. 대지에 커다 란 구멍이 생겨 버린 것 같다니까요." 영화에서 봐서 선주혁도 알고 있었다. 조금만 큰 유성이 지구와 충돌하면 핵폭발보다 위력이 강하다고 했던가? '가만! 핵폭발보다 충격이 강해?' 선주혁은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숨이 멎는 듯했다. 잠시간 밤하 늘을 가득 메웠던 유성 때문이었다. <종횡무진 7권에서 계속>-FEELJ2 = Chap.1 - 바뀌는 역사 = <<1>> 둥근 달은 음기(除諸)를 머금은 세상에 창백한 빛을 뿌리고 있었 다. 높은 천정에 난 구멍 사이의 월광(月光)은 기이하게도 를어지지 않고 단(壇)을 향해 달리는 중이었다. 수십에 달하는, 작은 크기의 아수라(阿修羅) 부조가 떠받들고 있 는 단상 위. 그 위에는 절대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나신(裸身)이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혼백(魂魄)을 앗아갈 것만 같은 나신. 그 절대(絶對)의 미(美)는 천박한 음심(淫心) 따위를 허용치 않았 다.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은 고대의 신화에나 등장하는 여신(女神)의 그것과 견주기에 부족함이 없어 외려 경건한 마음을 자아내는 것이 다. 봉긋하게 솟아오른 가슴은 작은 기복을 만들고 있었다. 꼼짝도 하지 많는 여체가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유일한 움직임이었다. 고월(孤月)의 취광(輝光)이 옅어지기 시작할 무렵. 여인의 삼단 같은 머릿결이 아래로 향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어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는 머리카락. 놀랍게도 아무런 동작도 취하지 않은 여인의 몸이 허공으로 떠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나직한 탄성이 공간을 잠식했다. 흔들리지 않은 경건함 속에서도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한 부상은 상식의 경계를 허무는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없을 만큼 부드러운 완만함과 숨 막힐 정도의 가파름은 기 이할 정도의 조화(調和) 속에서 빛을 발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확신에 찬 조화 속에서 변화가 일었다. 누운 채로 떠올랐던 여체가 지면과 수직으로 바로서기 시작한 것이다. 이어 떠지는 여 인의 눈. 흩어져 사라지는 하늘의 달이 그녀의 두 눈으로 옮겨 온 듯했다. 삼라만상(森羅萬象)에 음기를 제공하는 근원(根源)이 옮겨 온 것이 다. 여인의 개안(開眼). 그것은 삼백여 년을 숨죽여 온 군중의 감격을 불러일으켰다. "패종천하!" "무림앙복!" 백여 명의 거마들의 입이 하나가 되었다. 그들의 눈에는 뿌연 습막이 드리워지고 어깨가 미미하게 떨렀 다. 이는 회의 숙원(制脚이 해소되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단을 근원으로 하여 전해져 오는 막대한 양의 음기. 한 호흡에 단전을 채우는 순도 높은 그 기운이 오랜 세월 익혀 온 구음대법(九隆大法)을 극한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 발판이 되어 주고 있음을 체감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구음대법이란 패종회의 수뇌만이 익히고 있는 절정의 음공(陰功) 을 말한다. 소림(少林)을 근원으로 두는 구양(九陽), 구음진경牆諦은 그 엄청난 효용에도 불구하고 절정무인들의 외면을 받아 왔다. 무공이란 기본적으로 음양의 조화 속에서 완성되기 마련이다. 어느 한쪽에 편중하면 그 기이함과 극한의 속성으로 인해 효용을 만들 수는 있다. 하지만 이는 일반적으로 고수라 불리는 자들에 한해서일 뿐, 특정한 경지를 넘어선 무인들에게는 완성되지 않은 무공에 불과 했다. 그럼에도 구양, 구음진경에 수록된 무공은 초절정의 고수들에게 조차 진정한 위력을 발현했다. 구양, 구음진경에 수록된 무공은 각각 양공과 음공을 극한까지 구현한 것. 한쪽을 향한 지나친 궁구(窮究, 속속들이 깊이 연구함)는 결정적 인 폐단을 만들어 냈다. 구양진경은 양기가충천한 낮에만,구음진 경은 음기가 충만한 밤에만 제대로 된 위력을 낼 수 있는 것이다. 반대의 상황 속에서 무리하게 심법을 사용할 경우 외려 시전자 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일으키는 심법. 그것이 바로 구양, 구음진경의 내용이었다. 이와 같은 폐단이 드러나자 소림은 구양, 구음진경을 불문에 적 합하지 않다고 규정, 장경각館瀉潤) 깊은 곳에 봉해 두었다. 그리고 이백여 년 전. 수라마제로 인한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무림에 또 하나의 대 살성(大熟星)이 등장했다. 혈마 함불고. 불구의 몸으로 태어나 세상에 대한 증오만으로 가득했던 그가 또다시 무림에 혈풍(血風)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자광수를 휘둘러 닥치는 대로 살업을 자행하던 그를 제지하기 위해 당시 무림맹은 총력을 기울였다. 수많은 고수가 파견되고 혈마의 손에 죽어가기를 반복했다. 오늘날 구파일방의 무위(武纖)가 예친만 못한 것은 수라마제와 혈마의 손에 각 파를 대표하는 절정고수들이 속절없이 죽어 갔기 때문이랄 수 있을 정도였다. 무림을 휩쓸다시피 한 혈마는 스스로 광오함을 이기지 못하고 단신으로 소림을 찾았다. 소림은 절정고수들만으로 구성된 백팔나한진(盲八羅漢陳)을 발동 하기로 결정했다. 혈마로 인한 혈겁을 종식시 킬 특단이었다. 함불고는 물러서지 않고 백팔나한진에 맞섰다. 하나 아무리 천하를 뒤흔드는 혈마라 할지라도 혼자의 힘으로 백팔나한진을 상대하는 것을 불가능한 일이었다. 함불고는 큰 부상을 입고 패주(賠走)했다. 혈마가 무림에서 모습을 감춘 것은 그 이후였다. 소림은 무림의 환란을 제거하는 큰 공을 세운 셈이었다. 그러나 소림은 이와 같은 사실을 함구하기에 이르렸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한 사람을 상대하기 위해 백팔나한진을 동원했다는 사실을 감추 기 위함이 첫째였다. 다른 이유는 함불고가 백팔나한진과 격전을 벌이던 그 시각에벌 어진 사건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고수가 백팔나한진에 동원되었 기에 소림의 경계는 허술할 수밖에 없었다. 그사이를 틈타 누군가 장경각에 침입, 구음진경을 훔쳐간 것이다. 이는 소림이 입을 함구하게 된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장경각 에서 발생한 도난은 곧 소림의 수치인 셈이었다. 함불고를 상대하기 위해서였으나, 그 사실을 설명하자면 결국 대부분의 절정고수가 동원되었던 백팔나한진을 거론할 수밖에 없 게 된다. 그러면 혈마를 두려워한 소림이 그 한 명을 상대하기 위해 백팔 나한진을 동원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소립은 두 사건 모두를 기억 속에 묻어 버린 것이다. 당시 도난당했던 구음진경을 입수한 패종회. 그들은 구음진경을 기이한 방법으로 변화시렀다. 기본이 되는 심법을 따로 두고 특별한 환경 속에서만 제 위력을 발현할 수 있는 무공으로 전환한 것이다. 즉, 밤에만 특유의 위력을 발춰할 수 있는 구음진경의 심법을 보 조로 하여 만년한옥상(萬年寒玉床)과 같이 충만한 음기를 제공할 수 있는 기물(奇物)과 접해 있을 때만 사용이 가능하도록 했다. 하나 만년한옥만으로 만들어진 침상은 재질의 희귀함으로 인해 만들기도 힘들 뿐더러 설령 제작한다 해도 문제가 있었다. 만년한옥의 특징상 반드시 피부에 닿아 있어야 음기가 전해지니 수백 근이나 되는 한옥상을 매번 들고 다녀야 한다는 말이었다. 또한 격전 중에도 반드시 침상 위에 있어야만하니 실전(寶戰)에 서는 무용한 무공이 된 셈.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종회의 수뇌가 구음대법을 익힌 이유가 있 었다. 바로 천음마후라는 존재가 구현될 수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천음마후는 천성적으로 강한 음기를 타고난 여인이 그 음기를 발산(發散), 전이(轉移)할 수 있게 된 신체를 말한다. 즉, 천음마후는 막대한 선천지기를 타인에게 나눠 줄 수 있는 것 이다. 그렇기에 천음마후의 완성은 음공을 익힌 고수들에게는 꿈과 같은 일이었다. 특히 음공의 극단으로 치달은 구음대법을 익힌 고수들에게는 이 동할 수 있는 음기의 원친은 그 어떤 보물 이상의 가치를 지니게 된 다. 천음마후에게서 전해지는 음기는 밤의 그것에 비할 바가 아니 기 때문이었다. 막대한 양의 음기가 끝없이 보충되는 한 구음대법 을 익힌 고수들은 무적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패종회가 백존이라는 막강한 고수진을 구축한 이후에도 구음대 법의 완성에 심혈을 기울인 데는 이유가 있었다. 무림의 패권을 넘보고자 하는 시도는 무수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그와 같은 위업이 달성될 수 없었던 것을 이 들은 알고 있었다. 심지어 무적의 고수라는 수라마제 사마횡천조차 무림제패를 달 성하지 못했다. 이는단지 세력 간의 균형 문제뿐만이 아니었다. 근본적인 원인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수많은 기인이사(奇 人異士)들에게 있었다. 산이나 계곡에서 홀로 수양을 쌓던 이들은 세상이 어지러울 때에만 그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속세의 모든 것 을 떠나 수련에만 정진해 온 그들의 무위는 알려친 고수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무림사 최강의 내공을 지녔다던 수라마제조차 은거 중이던 현천 자와 양패구상(兩敗俱經)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니 두말할 나위가 없 었다. 따라서 진정한 무림제패를 꿈꾼다면 은거해 드러나지 않은 고수 들을 염두에 둬야만 했다. 그들은 단순한 변수가 아니라 위업 달성의 결정적인 장애 요소 였다. 패종회는 이와 같은 요인에 대비하고자 천음마후가 실재할 수 있게끔 총력을 기울였다. 구음대법을 익히고 친음마후에게 음기를 제공받을 수만 있다면 그 어떤 고수라 할지라도 상대할 수 있으리 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더구나 백존 이상의 패종회 고수는 모두가 구음대법을 익현 상 태. 천음마후만 있다면 설령 무신(武神)이 강림한다 할지라도 승리를 장담할 수 있는 그들이었다. 백존들은 지금 느끼고 있었다. 천음마후로부터 제공되는 음기로 인한 충만함을‥‥. 수십 딘간 고련해 온 구음대템이 자신에게 어떤 힘을 주는지 체 감하는 중인 것이다. 그들의 눈에 환희가 차오르는 것은 이와 같은 이유에서였다. 감동에 몸을 가늘게 떨고 있던 백존을 향해 한 명의 중년인이 입 을 열었다. 나직하지만 공간 내의 누구에게나 선명하게 울리는 음 성이 었다. "이제 시작이다. " 백존의 머리가 더욱 깊숙이 숙여졌다. 패종회를 이끄는 수장 선우단천의 시선, 타오르는 불과 같은 그 것이 아직까지 허공에 떠 있는 여인을 향했다. "천음마후가 함께하는 우리는 천하무적(天下無脚이다!" "패종천하!" "가자! 친하를 발 아래로 둘 행보의 시작이다!" "무림앙복!" 떠오르는 태양 속에서 이들의 밤은 계속되었다. <<2>> 시대를 풍미하는 거마들의 집약. 그것은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에 대한 명백한 예고임에 틀림없 다. 한데 무림 전체의 주목 속에서 남창 일대는 고요하기만 했다. 혹자는 폭풍 전야의 고요함을 논했다. 잠시만 기다리면 바야흐 로 무림의 대란이 시작될 것이라는 예상이었다. 반면 몇몇은 남창의 고조된 위기가 생각보다 쉽게 대혈사로 이 어지지 않을 거라는 예측을 조심스레 내놓았다. 남창에서의 위기 고조 원인 대부분은 백발귀마와 무림맹 사이에서 일어난 사건 때문 이다. 백발귀마를 향한 무림맹의 원한이야 하늘을 찌를 일이지만 현재 의 백발귀마는 사파연합, 그리고 천마맹을 오가는 중으로 알려져 있었다. 자칫 백발귀마 하나를 상대하기 위해 정도 무림 전체를 위기로 몰고 가야 할지도 모를 일이라는 뜻이었다. 이에 무림맹이 무력이 아닌 다른 방도를 취할 것이라는 것이 이 들의 예측이었다. 천마맹, 사파연합과 백발귀마의 명확한 관계를 확인하고 관계가 있는 쪽과 협상에 들어가리라는 것이다. 천마맹 이나 사파연합에 충분한 대가를 치르고 백발귀마를 인도받는 정치적 인 해결책을 택할 것이라는 게 이들의 주장이었다. 군중들은 크게 실망했지만, 이와 같은주장이 훨핀 더 현실성이 있다는사실을 받아들이는중이었다. 벼룩 한 마리를 잡기 위해 초 가삼간을 다 태울 수는 없는 법이었으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림인들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남창 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무인 특유의 뜨거운 피가 그들을 남창으로 내모는 것이다. <<3>> "흐음‥‥‥." 희끗한 머리, 골 깊은 주름의 도인은 깊은 신음성을 흘렸다. 노도인의 도명은 덕청(德淸). 무림민들에게 청운신검(靑雲神劍)이라 불리는 그는 아미와 더불 어 사천무림의 지주랄 수 있는 청성의 장문직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의 사부 영일 진인은 덕청이 장문의 직을 맡게 된 것을 심히 유감스러워 했다고 알려져 있다. 일문의 장문인이 되는 명예는 이루 말할 수 없지만 문중의 대소 사(大小事)를 관장한다는 것은 수행에 있어 방해가 되기 마련이었 다. 덕청의 뛰어난 자질을 아낀 영일 진인은 장문의 직을수행차느 라 그가 대성치 못하게 될 것을 안타까워한 것이다. 덕청이 장문의 위를 맡지 않았으면 청성의 역사가 다시 쓰였을 거라 입버릇처럼 말하던 영일 진인이었으니 그가 덕청의 자질을 얼 마나 높이 샀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냥 간과할 일이 아닌 듯싶어 이렇게 사형께 말씀드리는 것입 니다. " 삼십 대에 불과한, 청수한 용모의 도인이 덕청 진인을 향해 진중 한 표정으로 말했다. 청성 장문의 사제 중 이처럼 젊은 도인이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 진 사실. 그는 청성의 희망이라 일컬어지는 덕양 진인이었다. 늘 덕청 진인을 안타까이 여기던 영일 진인은 말년에 덕양을 거 둬 그 아쉬움을 달랬다고 했다. 덕양이라면 덕청을 대신해 청성의 이름을 드높일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백가의 혈사 이후 설가의 성세가 커지리라는 것은 이미 예견된 사실이지 않은가? 그들이 토목공사를 마치고 현판(感板)을 바꿔 단 일이 사제에게 어찌 심려를 끼치는고?" "설가의 증측은 상식을 벗어나 있습니다. 그 규모가 무림맹의 총 단인 십전성에 못지않습니다. 설가의 인원을 고려하면 터무니없을 정도의 크기 입니다. " "사제가 속인(俗人)의 과시욕에 대해 이해가 부족한 것은 아닌 가? 명실상부한 사천제일가로서의 자부심을 뽐내려는 것일 수도 있지 않는가?" 덕청 진인의 질문은 덕양 진인의 발언에 대해 회의적인 내용이 었으나, 그 어조만은 반대였다. 마치 덕양 진인의 발언에 더욱 무게 가 실리게끔 부연을 자연스럽게 이끌어 내는 듯한 어조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기엔 지나쳐도 너무 지나칩니다. 더구나 저들이 대대적인 공사를 벌인 시기도 마음에 걸립니다. 처음 공사를 시작 했을 당시만 해도 백가는 건재했습니다. 스스로를 사천제일이라 뽐 낼 수 있는 때가 아니었던 것이지요." "무량수불 ‥‥." 다소 창백한 안색의 중년 도인이 나직이 도호를 외웠다. 그는 백 발귀마가 일으킨 진곤혈사의 장소에 있었으면서도 생존한 몇 안 되 는 사람의 중의 하나였다. 모순되게도 생존만으로도 무공의 고강함 을 인정받고 있는 그는 당시의 부상을 치유하기 위해 돌아와 요양 중인 덕운 진인이 었다. "사제의 말인 즉, 백가의 혈사와 설가가 개입되어 있다는 뜻인가?" "확증이 없으니 이렇다 단정을 지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저와 같은 대규모의 공사라면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모습이 정해져 있었을 터. 백가의 혈사 이후 지금과 같은 엄청난 규모의 공사로 바 꾸지 않았을 것입니다. " "저들이 개입이 되었건 그렇지 많건, 최소한 백가의 혈사를 예견 했을 정도는 되었을 거라는 추측이군." 덕청 진인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엄청난 증측 외에도 이상한 점은 많습니다. 전 무림의 무인들이 남창으로 향하는 이 시점에도 꽤 많은 인원이 사천으로 모여들고 있습니다. 각 지역에서 나름대로 명성을 떨치는 인물들이 설가로 향하는 중입니다. " "현판을 교체하며 개파연(開派宴)이라도 열 수 있는 일이 아니겠 는가?" 덕명(德明) 진인이 사제인 덕양 진인에게 물었다. "저들이 개파연을 준비한다면 본문에 배첩이 오지 않았을 리가 없을 것입니다. " 덕양 진인의 단호한 결론에 좌중의 도인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 였다. 사천은 명실상부한 정도무림의 중심이랄 수 있었다. 무림맹 의 소속의 청성과 아미, 그리고 당문이 당당히 자리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사천무림에서 개파연을 벌이며 청성에 예를 갖추지 않는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랄 수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사천무림을 넘어서는 실질적인 세력 구축에 힘을 쓰는 것으로 보입니다. " "실질적인 세력 구축?" "사천무림을 넘어선다라‥‥‥?" 청성파의 장로들은 저마다 심각한 표정으로 막내 사제의 말을 되뇌었다. "또한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들도 대거 등장하는 중입니다. "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들이라‥‥‥?" "한 명, 한 명이 고수로 보입니다. 지금껏 본문의 제자들에게 모 습을 보였던 자들의 숫자만도 열 명이 넘습니다. 그들의 무위가 제 아래가 아닐 거라는 보고니‥‥‥." "무량수불! 그 정도나?" "암중에 움직이는 저들입니다. 따라서 그 수가 얼마가 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과연 사천이 비좁다 여길 만하군." 덕청 진인은 탐스러운 수염을 쓰다듬었다. "결국 패종회라는 거창한 현판만큼이나 설가가 응지를 키워 가 고 있다고 봐야겠습니다, 장문인." 진중한 성품의 덕일(德日) 진인이 과묵한 입을 열었다. 덕청 진인은 수염을 매만지던 손을 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맹에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덕양 사제의 말대로라면 단 순히 사천 내의 일로만 치부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 덕운 진인의 말에 덕양 진인이 다시 나셨다. "무림맹에 보고는 하되 실질적인 조치를 취하는 것은 십룡(十龍) 스스로가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 덕양 진인이 말하는 십룡이란 구파일방을 뜻한다. 무림맹이 수 많은 정도 문판의 연함체로 중심을 잡고 있다지만 역시나 그 기반 은 구파일방이랄 수 있었다. 이에 구파일방은 스스로를 십룡이라 칭해 타문파에 비한 우월한 입지를 표명하는 것이다. "그건 또 어째서인가?" 덕명 진인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최근 십전성의 행사는 납득하기 힘든 것이 너무 많습니다. 영민 하기 이를 데 없는 한 맹주의 판단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지요." "음‥‥‥ 그러고 보니 한 맹주가 최근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 낸 적이 없다지, 아마?" 덕청 진인의 질문에 덕양 진인이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렇습니다. 저는 한 맹주의 신변에 이상이 생긴 것은 아닐까 의심스럽습니다. " "누가 있어 한 맹주의 신변에 위협을 가할 수 있겠는가?" 덕명 진인이 회의적으로 물었다. "속단할 문제는 아니니 아직은 뭐라 단언할 수가 없습니다. 일단 은 한 맹주께서 무고하다 할지라도 무림맹은 지금 남창의 긴장 고 조만으로도 버거워 보이는 상태입니다. 백발귀마 한 명을 처리하는 데도 그런 실정이니 이곳 사천에 돌릴 여력은 없다고 봐야했지요." 덕양 진인은 침착하게 자신의 주장을 설명했다. 최근 들어 다소 변모한 덕양 진인이었다. 뛰어난 자질을 인정받 아 청성에서 극진한 대우를 받으며 살아온 그는 온화한 성품 중에 도 다소 자만이 배어 있었다. 동년배에 비해 탁월하다 알려진 실력 에 의한 자부심이었다. 하지만 속속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신진고수들로 인해 덕양 진인 의 데도가 변한 것이다. 자신보다 훨씬 어린 곤륜이마가 맹위를 떨치고, 정당하지는 못 했다고는 하나 일대일의 승부에서 패배하기까지 했다. 이에 스스로를 낮추고 배움에 충실한 본연의 자세로 돌아온 것이다. "설가의 동태에 대해 보다 주의를 기울이며 십룡과 기민한 연락 을 취할 방도를 찾도록 하세. 개방에 도움을 청하면 될 것일세." "알겠습니다, 장문 사형." <<4>> 때 아닌 나들이에 나서는 선주혁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날짜는 이미 보름이 넘었다. 다시 말해 천음마후가완성되고 이른바 패종 회의 본격적인 발호가 시작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상했던 대혼란은 벌어지지 않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사천설가를 근거로 삼은 패종회의 발호에 무림의 관심이 집중되어야만 했다. 패종회의 현판을 건 설가가 무림 최대 세력으로 발돋움할 것을 공식적으로 선언하기 때문이었다. 무림의 유명인사 중 다수가 그런 설가에 투신할 것을 선언하고 정체모를 고수들이 잇달아 등장, 패종회의 발호는 화려하기 이를 데 없게 시작된다. 그리고 무협 소설에서 지겹고 또 지겹게 써먹은 비무대회가 열 리며 패종회의 고수들이 정사양도의 고수들을 무참히 뭉개는과정 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그런 기미는조금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어느곳에서도 패종회의 이름이 떠들썩하게 들려오지 않고 있는 중이었다. 그것이 선주혁을 외려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원래의 진행과는 다르게 가고 있는 것이다. 눈이 번적 뜨일 두 미녀와 함께 다시 등왕각을 찾는 선주혁의 얼 굴에 그늘이 드리워진 것은 가까이 있으면 불안함을 느끼게 하는 남궁일이 옆에 있기 때문이 아닌 것이었다. "지난번에 등왕각에 오르지 못했던 게 얼마나 아쉬웠던지‥‥‥!" 남궁연은 여전히 밝기만 한 표정으로 선주혁의 옆에 찰싹 달라 붙어 있었다. "모용 소저는 남창에 사시니 등왕각에 자주 가 보시지 않으썼나 요?" 은설연을 향한 남궁연의 질문은 다소 뾰족한 바가 있었다. 단순 한 질문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미 여러 차례 방문했을 등왕각에 가 는 데 왜 따라나섰냐는 질책의 의미가 강했다. "그렇긴 하지만‥‥‥, 독고 대가와 함께 올라 본 적은 없으니까 요. 자고로 좋은 풍광은 연인이 함께 해야 제 맛을 느끼는 게 아닐 까요?" 남궁연이 던진 질문의 의미를모를 리 없는 은설연이 여유 있게 받아쳤다. 늘 미소로 가득한 남궁연의 해밝은 얼굴이 굳어쳤다. 은설연의 말 중에 뼈가 있음(言中有骨)을 파악한 것이다. 좋게 듣자면 자신이 새삼 등왕각을 찾는 이유를 설병한 것에 불과했지만, 남궁연의 귀 에는 연인이 없는 자신은 지금 등왕각에 올라봐야 소용이 없다는 뜻으로 들리는 것이다. 평생을 눈칫밥으로 살아온 선주혁이었으나 지금은 두 여인의 설 전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머릿속에 온통 패종회의 발호와 스 스로의 발전시켜 가는 무공에 대한 생각만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맞는 말씀이네요. 좋은 풍광은 진정으로 사, 랑, 하, 는 사람과 함께 해야 그 느낌을 충만하게 누릴 수 있는 것이겠죠." 남궁연은 지지 않고 은설연의 말을 맞받아쳤다. 그녀는 선주혁 과 은설연이 진정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라 믿고 있는 것이다. 남궁연의 말을 들은 은설연의 눈셉 끝이 미미하게 꿈틀거렸다. 실제로 선주혁과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다. 단순히 독고건이라는 가 상 인물의 정혼자 역할을 연기할 뿐이었다. 하지만 남궁연은 여인 특유의 자존심을 자극하는 중이었다. 특히 그 화살은 사파제일의 미녀로 자라온 은설연을 향해 있었 다. 실제로 사랑을 해 본 적이 없는 그녀. 하지만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 생졌을 때, 그 남자를 다른 여자 에게 빼앗긴다는 것은 상상조차 해 보지 못했다. 그런 자부심은 단순한 연기에 불과한 지금에조차 발휘되었다. '깜찍한 것이‥‥‥?' 은설연이 은근히 끊어오르는 부아를 억누르는 그때, 동행했던 남궁일이 선주혁에게 말했다. "독고 대협, 잠시 소생에게 시간을 좀 내주시지 않겠습니까?' "아‥‥‥!" 패종회에 대한 염려에 이어 그간 발전시켜 온 자신의 무공을 되 짚던 중인 선주혁은 은설연이 살짝 소매를 잡아당기고서야 남궁일 이 자신을 부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번 생각에 집중하면 좀처럼 외부의 자극에 반응을 하지 않는 그였다. 최근 들어 선주혁의 그런 모습을 자주 보아온 은설연은 부 드러운 미소로 남궁일이 말한 바를 다시 설명했다. "남궁 소협께서 긴히 하실 말쓸이 있으시다는군요." "당연히‥‥‥! 들어야죠." 선주혁은 살짝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럼 잠시 저쪽으로‥‥‥." 남궁일은 한 손을 들어 올려 등왕각에서 강변으로 향하는 방향 을 가리졌다. 선주혁은 살짝 고개를 끄덕인 후, 남궁일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은설연이 자연스럽게 그 뒤를 따르려 하자 남궁일이 입을 열었다. "가급적이면 독고 대협과 단 둘이 있고 싶습니다만‥‥‥." 남궁일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 그가 마음먹고 파고들기 시작한 다면 선주혁의 가짜 신분이 들통 날 가능성이 컸다. 그에 대한 불안 감에 선주혁을 뒤따르려던 은설연의 시도는 정중한 부탁에 의해 제 지되었다. 은설연은 다소 걱정스러운표정을 지었으나, 선주혁이 안심하라 는 듯 웃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뭐‥‥‥ 보통 사람이 아닌 건 저 사람 쪽이 더 심하니까‥‥.' 선주혁의 미소를 확인한 은설연은 무러한 동행을 단념했다. 그녀는 남궁연과 함께 등왕각을 오르기 시작했다. = Chap.2 - 의외의 방문자 = <<1>> 강변의 시원한 바람 속에서도 선주혁은 일말의 상쾌함을 느끼지 못했다. 남궁일은 사형에 못지않은 인재. 한순간의 방심이라도 있다면 그에게 정체를 발각당할 우려는 은 설연뿐만 아니라 그에게도 부담으로 다가왔다. "제가 이렇듯 독고 대협께 독대(獨對)를 청한 것은 어려운 부탁을 위해서 입니다 " 남궁일의 태도는 정중함 자체였다. 선주혁을 노고수로 여기고 있는 만큼 존장으로서의 예우를 갖추는 것이다. "노부가 지금껏 신세를 지고 있는데 무슨 부탁이든 마다하쳤소. 남궁 소협께서는 편히 말씀하시지요." 선주혁의 말에 남궁일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말로는 장사치를 표방하면서도 독고건이라는 사람의 순박함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 이다. 자신 또래의 젊은 사람보다는 닳고 닳은 모습이 분명히 있지만, 팔순을 훌쩍 넘긴 노강호라기엔 연륜도 경험도 부족해 보이는 모습 이었다. 남궁일은 그것을 독고건의 순박한 천성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 이다. "독고 대협께서 그간 초야(草野)에 몸을 맡기시고 조용한 생활을 누려 오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독고 대협께서 세상을 놀라 게 할 무공을 지닌 것이 이미 널리 알려진 만큼, 그간의 평화로운 삶은 계속되기 힘들 것입니다. 무림이란 드러난 절대강자를 내버려 두는 곳이 아니니까요." "허허, 절대강자라니요. 남궁 소협께서는 노부를 지나치게 높게 평가하고 계시는구려." 선주혁의 겸양에 남궁일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닙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쓸을 드러자 면‥‥‥ 정혼자이신 모용 소저께서는 분명 모용세가의 영화(榮華)를 재현하기를 원할 것입니다. 무림의 세가가 확고한 지위를 구축한다 는 것은 조용한 삶 속에서는 구현되기 힘든 일이지요." 션주혁은 남궁일의 말을 신중히 생각하는 듯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했딘 것보다 훨씬 빠르긴 했지만, 독고건이 란 신분으로 정의련에 들어온 목적을 달성할 기미가 보이는지라 내 심은 쾌재를 부르는 중이었다. "노부도 그와 같은 사실은 짐작을 하고 있소. 사실 란 매가 노부 에게 바라는 것은 단순히 금전적인 것만은 아닐 테니 말이오." 선주혁의 말에 남궁일은 동의한다는 듯 드러내어 고개를 끄덕였 다. 아무리 독고건이 순박하고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 해도 이십 대 초반의 절세미녀가, 또한 무가의 피를 이어받은 여인이 순수한 의 미에서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믿을 수 없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 이다. "이에 저희 정의련에서는 독고 대협과의 관계 구축에 깊이를 더 할까 합니다. " "관계 구축에 깊이를 더한다‥‥‥?" "그렇습니다. 무림이 몇몇의 인물들로 인해 시끄럽다고는 하지 만 전체적인 판도로 보아 아직은 조용하다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폭풍 전야의 고요함일 뿐, 머지않아 지독할 정도의 혈풍이 불 어 닥칠 것입니다. " "흐음, 혈풍이라‥‥‥." "이는 모용세가의 입장에서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신진 세력은 난세 속에서 자리매김을 하기가 수월하니까 말입니다. " "아무래도 그렇겠군요. 꽉 짜인 틀 속에서 비집고 나오는 것보다 는 편할 테지요." "그렇습니다. 거기에다가 후원하는 세력이 있다면 더욱 손쉬운 일이 될 것입니다. " "호오? 지금 정의련에서 노부와 란 매의 후원을 해 주시겠다는 말이시오?" 선주혁이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작전대로 되어 가는 것에 대한 반색이었으나 남궁일로서는 자신의 제안에 대한 반응으로 여겨진 표정이었다.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 남궁일은 확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정의련에서 그런 호의(好意)를 제안하는 대가가 있겠 구려." 선주혁의 말에 남궁일은 고소(普笑)를 머금었다. 누가 뭐라 해도 세월이란 거저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다. 독고건은 나름대로의 노련 한 면모를 보이는 중이었다. "딱히 대가를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난세 속에서 모용세가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금력(金力)뿐만 아니라 무력(武力)의 사용은 필 수입니다. 독고 대협의 무력을 저희 정의련과 함께 사용하셨으면 할 뿐입니다. " "허헛! 란 매에게 듣기로 정의련은 천하를 사분한 거대한 단체라 던데‥‥‥. 그런 곳에서 노부의 힘이 필요하단 말이오?" "한 치 앞을 예측할수 없는무림입니다. 독고 대협 정도의 무위 라면 정의련에 큰 힘이 되어 줄 것입니다. 아니, 대단한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 남궁일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독고건은 금강불괴나 최소한 그 에 준하는 정도의 경지에 오른 절대의 고수다. 그런 고수 한 명의 가세가 얼마나 큰 힘이 되어 주는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허허헛! 그렇게까지 노부를 평가해 주니 고마운 일이오. 거래를 주선해 주는 것은 물론이고, 란 매의 가문을 일으켜 세우는 데 조력 (助力)을 더해 주신다니, 어찌 노부가 그와 같은 제안을 거절할 수 있겠소이까! 노부는 남궁 소협의 제안이 그저 감사할 따름이오." 선주혁은 환한 미소와 함께 두 손을 맞잡았다. 남궁일 역시 기쁜표정으로 포권(抱拳)의 차세를 취해 예를갖췄 다. 그 순간 요란한 소음이 들려왔다. 바람이 갈라지고, 병장기가 부딪치고, 기합성이 터지는 소리였 다. "응?" 선주혁의 미간에 주름이 잡했다. 소리의 진원이 등왕각 쪽이었기 때문이다. "대체 누가‥‥‥?" 짧게 노성을 터뜨린 그의 신형이 날아올랐다. 마치 바람을 타고 날아오르는 것과 같은 선주혁의 경신공부를 보며 남궁일은 절로 감탄성을 터뜨렸다. '저와 같은 경공술 하나만으로도 그는 본련에 큰 힘이 되어 주겠 구나!'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을 정리한 남궁일 역시 등왕각 쪽으 로 신형을 움직였다. 하지만 그의 움직임에는 일말의 조급함도 엿보이지 않았다. 마 치 산책을 나온 사람처럼 한가롭기만 한 걸음걸이였다. <<2>> 많은 사람들은 창백한 얼굴로 구석에 모여 있었다. 등왕각에 올 라 멋들어진 풍광을 감상하려던 유람객들이었다. 그들의 시선은 부서진 난간 옆의 두 여인에게 향해 있었다. 하늘 에서 내려온 선녀와 같은 두 명의 여인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감히 음심을 품지 못했다. 그녀들이 날이 시퍼렇게 선 검을 들고 달려든 복면인을 순식간 에 격퇴했던 탓이었다. "란 매, 남궁 소저! 괜찮소?" 선주혁은 절정의 경신공부로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순식간에 나타나며 물었다. "독고 대협!" 남궁연은 그제야 안심이라는 표정으로 뽑았던 검을 검집에 회수 하며 환하게 웃었다. "별일 아니에요." 은설연은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오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대체 어떤 놈들이 !" 대충의 상황을 짐작한 선주혁이 미간을 찌푸리며 역정을 줬다. 당장 난간을 넘어 복면인들의 뒤를 쫓아갈 기세였다. [쫓지 말아요. 그들에 대해서는 저기 올라오는 남궁 소협에게 물 어보면 될 일이에요.] 은설연의 전음이었다. 선주혁은 그제야 방금 전 일어난 습격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었 다. 무협 소설을 읽어 온 지 어언 몇 년이던가? 대략 앞뒤의 정황을 추측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선주혁의 표정을 보고 그 역시도 사정을 짐작했음을 알게 된 은 설연이 여유 있게 등왕각에 오른 남궁일에게 뾰족한 목소리를 냈 다. "정의련의 무인이 제게 칼을 겨눈 이유를 묻고 싶군요." 서슬이 시퍼런 은설연의 질문에 남궁일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 다. 그는 만면에 미소를 지은 채 두손을 맞잡고 깊이 머리를숙였 다. "우선 모용 소저께 무례를 진심으로 사과합니다. " "무례인 것을 알면서 왜 이런 행동을 하신 것이죠?" 카랑카랑하게 느껴질 정도의 음성이었다. 그녀의 음성에 선주혁은 내심 웃음을 머금었다. 지금 그녀의 분 노 역시 연기임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남궁연은 당최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난데없는 복면인들의 습격, 그리고 오라버니의 사과 사이에서 연관성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남궁일은 은설연의 다그침에도 여유를 잃지 않고 이번에는 선주 혁을 향해 두 손을 맞잡았다. "독고 대협께도 양해를 구해야겠군요." 정중한 사과를 마치고 나서야 남궁일이 상황에 대한 해명을 시 작했다. "저희 정의련은 독고 대협과 함께 대사를 논할 준비 중입니다. 하지만 독고 대협의 등장이 너무나 급작스러운지라 만전을 기할 수 밖에는 없는 입장이지요. 이에 모용세가의 혈통을 이으신 모용소저 를 통해서라면 모든 의문에 대한 해답을 주실 수 있을 거라 생각했 습니다. " "가전무공(家傳武功)을 시험해 보신 건가요?"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을 이제야 알아차렸다는 듯 은설연이 말했 다. "부득이한 상황이었으니 모용 소저의 너그러운 아량을 부탁드립 니다. " 하늘 높이 치솟았던 은설연의 눈썹 끝이 정상을 회복하기 시작 했다. "하긴 말로만으로는 신분을 증명할 수 없는 터이니 정의련으로 서도 부득이했겠군요. 하지만 좀 더 정중한 방법을 택하실 수도 있 었다고 생각해요." "불의의 상황일 때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일도 있지요." 남궁일의 설명이었다. 다시 말해 생명이 경각에 처했을 때 어떤 무공을 사용하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었다. 보통 그 같은 상황에서는 오랜 세월 동안 익혀 온 무공이 자연스 럽게 발현되는 법. 그녀가 진짜 모용세가의 후예라면 당연히 가전무공을 전개할 것 이라는 뜻이었다. 남궁일이 선주혁과 자신을 떼놓는 순간부터 마음을 다잡았던 은 설연이었다. 남궁일 정도의 인물이라면 야심을 가진 것으로 표방한 자신이 대화에 용이하다는 것을 알고 있을 터. 대화의 상대로 선주혁을 선택할 이유가 없었다. 따라서 그녀는 정확하지는 않아도 뭔가가 있을 것임을 예상하고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결국 복면을 한 정의련의 무인이 나타났고, 그녀는 모용세가의 무공 중 하나인 월광검법(f光劍法)을 펼쳤다. 월광검법은 기이한 변화를 내포한 모용세가의 대표적인 검법이 다. 내력의 소모가 적고 실전에서의 위력이 탁월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 변화의 정도가 지나치고 일반적인 정도 무공과는 사뭇 다른지라 모용세가는 종종 사이(邪異)한 무공을 사용한다는 비난을 받곤 했다. 은설연은 이와 같은 월광검법을 천산노조 서동주에게 배웠다. 변화의 극을 추구하는 난화무영수를 가르칠 때, 변화의 폭을 이해 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며 월광검법을 함께 전수한 것이다. 은설연 이 자신 있게 모용세가의 후예를 자처한 데는 이와 같은 이유가 있 었다. "그래서 이제는 만족하셨나요?" "모용 소저께서 사용하신 무공이 월광검법이 맞는지요?" "그래요." "역시 ‥‥‥!" 고개를 끄덕인 남궁일은 조금은 과장해 감탄하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월광검법과 같은 훌륭한 절기가 아직까지 보전되어 왔음이 다 행스럽군요." "나라가 무너졌을 때도 굴하지 않았던 가문입니다. 앞으로도 모 용가는 계속 이어져 갈 것입니다. " 은설연의 결연한 표정에 남궁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여자‥‥‥. 생각보다 무서운데? 저런 표정으로 이야기하면 누구라도 믿지 않을수가 없잖아! 내가살던 곳에서 태어났으면 아 카데미 여우주연상은 따놓은 당상일 정도군.' 전후 사정을 아는 선주혁만이 내심 은설연의 연기에 소름이 돋 는 것을 느끼는 중이었다. <<3>> "무림맹의?" 선주혁은 하마터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 남궁연이 전 해 온 소식 때문이었다. 등왕각에서의 신분 확인 이후, 그는 정의련 남창 지부에서 최고 의 예우를 받는 중이었다. 단지 그 하나의 이유 때문은 아니라지만, 그에 대한 환영을 위해 오대세가의 가주들이 직접 움직이는 중이었다. 남궁백연에게는 지 나칠 만큼의 예우를 이미 받은 바 있고, 나머지 사대세가의 가주 역 시 그와 은설연을 만나기 위해 남창으로 오고 있는 것이다. 선주혁은 이번 상견례를 마치면 의도한 바대로 정의련을 움직여 패종회와 맞설 준비를 하려 했다. 그러던 중 남궁연에게 깜짝 놀랄 소식을 전해 듣게 된 것이다. "네, 아버님을 비롯해 오라버니까지 예상치 못했던 저들의 방문 에 놀라시더 라고요." "흠‥‥‥." 난감한 상황에 선주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나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자신의 용모가 백발귀마와 흡사하다는 사실은 어차피 이쪽에도 알려질 일이었다. 미리 겁을 집어 먹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더구나 한희윤의 경우에는 정확히 자신의 예전 모습을 기억할 터. 가까이서 보게 되면 지금 용모와의 차이를 분명히 구분할 수 있 을 것이었다. 그렇게 스스로를 안정시키고 있을 때, 남궁일이 그의 거처를 찾 았다. "어서 오시오, 남궁 소협." 여유를 되찾은 선주혁이 태연하게 남궁일을 맞았다. 남궁일은 남궁연을 힐끗 쳐다본 후 선주혁에게 예를 갖췄다. "연아에게 이미 이야기를 들으셨겠군요." "무림맹주의 손녀가 이곳을 방문하였다더군요." "그렇습니다. 독고 대협께서 알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본련과 무 림맹의 관계는 썩 친밀하다 할 수는 없습니다. " "모두가 협의의 길을 걷는동도들이 아니오?그런데 어찌 ‥‥?" 선주혁은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물른 그렇습니다만‥‥‥, 같은 길을 걷더라도 여러모로 생각이 다를 수 있습니다. 특히 본련과 무림맹은 서로가 서로를 존중할 상 황이 아님 니다. " "흥!우리야 존중하죠. 그 사람들이 전통이니 뭐니 해서 정의련 을 무시하는 거죠." 남궁연이 입술을 삐죽이 내밀며 끼어들었다. "흠! 무림맹이 다소 오만한 모양이구려." "오만한 정도가 아니에요.마치 정도 무림에는 자신들밖에 없는 것처럼‥‥‥." "연아!" 쌓였던 불만이 많은 듯 쏟아 내려는 남궁연을 남궁일이 저지했 다. "서로 경원하고 있기는 하지만 독고 대협께서 말씀하였듯 무림 의 정의 수호를 위해 서로 노력하는 중입니다. 그런 사정인지라 무 림맹주의 제자와 손녀의 방문에는 최선을 다해 예우를 갖출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인데‥‥‥." "‥‥‥?" "독고 대협은 이제 정의련을 대표하시는 한 분입니다. " "허허, 노부 정도로 그런 입장이 될 수 있겠습니까?" 선주혁은 일부러 무게를 잡으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자신이 노인의 연기를 하고 있음을 잊지 않은 것이다. "충분하죠. 독고 대협은 정말 대단한 무공을 지니셨잖아요." 남궁연이 또다시 끼어들었다가 남궁일의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 을 보고 재빨리 입을 닫았다. "여하튼 무림맹의 인사들을 맞이할 때, 노부도 얼굴을 비치는 게 모양새가 좋다는 말이구려." "하하‥‥‥. 설마 모양새를 갖추겠습니까? 최근 독고 대협의 위 명이 천하를 진동하고 있습니다. 독고 대협께서는 저희의 자부심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 "허허허, 남궁 소협은 늘 노부를 추켜세우시는구려. 한데 괜찮겠 소?" 선주혁의 걱정스러운 표정에 남궁일은 그의 의중을 파악하고 미 소를 지었다. "아!용모 문제라면 염려치 마십시오. 세상에 닮은 사람이 한둘 이겠습니까?" "거참! 하필이면 그런 마두와 닮은꼴이라니‥‥‥ 쯧!" '이거‥‥‥ 내 입으로 할 소린지‥‥‥?' 본의와는 다른 말을 하며 선주혁은 내심 고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백발귀마라는 자. 세상에 알려진 바와는 다른 인물 일 수도 있습니다. " "그게 무슨 소리요?" 선주혁은 지난 번 객잔에서 남궁일이 어느 정도 자신과 사형의 입장을 이해하는 태도를 견지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했다. "백 소저의 설명도 그렇고 소생이 생각하기에도 상황이 곤륜이 마를 그렇게 내몬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살기 위한 방편을 취 했을 뿐인데, 그것이 교묘한 상황과 맞아 떨어져 악인으로 몰렸을 수도 있지요. 다만 그 과정 속에서 손속이 지나치게 잔인했다는 것 이 문제일 수는 있겠지만 말입니다." '호오? 역시 이 사람은 보통 인물이 아니라니까.' "어찌 되었건 그렇게 닮은 사람이 있다니‥‥‥ 쯧쯧." 내심과는 달리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선주혁은 혀를 찼다. "제가 먼저 가서 미리 이해를 시키겠습니다. " 선주혁은 세심한 배려에 감사한다는 말을 하고선 느린 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4>> 선주혁의 우려와는 달리 풍초양과 혁련기 등은 선주혁을 백발귀 마와 연관을 시키지 않았다. 이목구비의 변화는 적었지만 무엇보다 피부색부터가 확연히 달랐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심 굉장히 흡사한 용모에 놀랐을 뿐, 독고건과 선주혁을 완벽히 다른 사람으로 이해 하는 중이었다. 무엇보다 정의련에서 백발귀마를 귀빈으로 모실 리가 없었기 때 문이기도 했고, 금강불괴의 경지에 오른 고수에 대한소 문 역시 익 히 들어온 그들이었다. "그래서‥‥‥ 당분간 이곳에 머무르시겠다는 게요?" 독고건과의 상견례가 끝나자 남궁세가의 가주인 남궁백연이 물 었다. "실로 죄송한 부탁을 드러게 되었습니다. " "아니오. 풍 소협과 혁 소협, 그러고 한 소저를 정의련에 모실 수 있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지 않겠소?" 남궁백연은 만면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는 진심으로 말하는 것 이다. 무림맹주의 제자와 손녀가 의탁해 온 탓이다. 이는 곧 무림맹에 변고가 있다는 뜻이고, 이들은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는 것이다. 이들을 도울 필요는 분명히 있었다. 향후 무림맹과의 관계에서 우월적 지위를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정의련으로서는 호박이 넝쿨째로 굴러 들어온 터. 웃음이 절로 나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순간 정의련의 남창지부장인 언무의(彦武義)에게 총관이 다가 와 귓속말을 전했다. 남궁백연의 표정이 심각해지더니 좌중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무림맹이 사천백가의 후신이랄 수 있는 패종회와 연수를 통해 곤륜이마를 상대할 것을 공표했다고 합니다. " 모든 이의 표정이 변했다. 아무리 곤륜이마가 대단하다고 한들 그둘을 상대하기 위해 무 림맹이 타 세력과 연수를 공표한다는 것은 실로 의외기 때문이었 다. 이는 무림맹이 고작 두 사람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음을 스스로 시인하는 것과 다릉없는 일인 셈이었다. 자연 풍초양, 혁련기 등은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누구보다 크게 놀란 것은 선주혁이었다. 자신이 알고 있던 상황 과 변해도 너무 변해 버린 것이다. 패종회가 무림맹과의 연수를 통 해 거사를 도모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젠장! 이렇게 되면 뭐가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잖아!' 선주혁이 내심 투덜거리는 중에 남궁백연의 지시를 받은 언무의 의 설명이 이어졌다. "이에 구파일방에서는 달갑지 않은 반응을 보이고 있다더군요. 특히 사천의 청성과 아미, 당문의 경우는 반발의 정도가 심하다는 보고입니다." 당연한 일이었다. 자부심으로 가득한 구파일방이다. 자신들이 소속된 무림맹이 스스로의 약세를 드러내고 일에 찬동할 리가 없었 다. 더구나 이번의 연수 공표는 무림맹에서 패종회를 제대로 인정해 주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다. 패종회가 사천을 거점으로 활개를 칠 기반을 만들어 주는 셈이니, 오랜 세월 사천의 패자로 군림해 온 세 문파로서는 환영할 일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아마도 사파연합이나 천마맹이 곤륜이마의 배후에 있을 것을 염두해 둔 게 아닐까요?" 남궁일이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사실상 곤륜이마가 아무리 대 단하다 하더라도 무림의 두 거대 세력이 연합을 하는 당위성이 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사천설가의 역량이 그 정도나 되었던가‥‥‥?" 남궁백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돌렸다. 아무래도 무림맹에 관한 일이다. 풍초양 등이 있는 자리인지라 직접적으로 무림맹에 관한 일을 언급하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선주혁은 단순히 사천설가가 아니라 패종회임을 상기시켜 주고 싶었다. 더불어 그들이 가진 힘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도. 하지만 여태 무림 정세에 어두운 척을 하다가 패종회니 설가의 배후니 하며 떠드는 것은 불가능한 터. 일단은 남궁백연이 그와 같은 사실에 의문을 갖는 것으로 만족 해하기로 하며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최근 설가의 동향은 뭔가 석연치 않는 바가 있습니다. 그들의 행보를 돌아보며 마치 사천백가의 혈사가 일어날 것을 예상이라도 한 듯합니다." "지난번에 말했던 것처럼 백가가 겪은 참사의 원흉이 곤륜이마 가 아니라는 뜻이냐?" "곤륜이마가 범인이라 지목한 것이 무림맹입니다. 그리고 이번 에는 곤륜이마를 상대하기 위해 무림맹과 패종회라는 곳이 손을 잡 겠다고 공표를 했습니다. 우연치고는 공교롭다고 생각합니다." "흐음‥‥‥." 남궁백연은 깊은 신음성과 함께 미간을 찌푸렀다. 말인즉 백가 의 혈사에 무림맹이 무관하지 않다는 뜻이다. 풍초양 등에게는 모 욕이 될 수도 있는 말이었다. 과연 풍초양이 자세를 바로 잡으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예상했던 것처럼 의심에 대한 강력한 항의가 아니 었다. "가능성이 아예 없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사실 저희가 이렇듯 신 세를 지고 있는 이유랄 수도 있을 것입니다. " "한 맹주께서 백가의 혈사를 주도하셨단 말이오?" 제자로서 언급할 말이 아니기에 남궁백연은 크게 놀란 표정이었 다. "저희 사부님께서는 절대 그러실 리가 없습니다. 다만‥‥‥." 풍초양은 말을 길게 늘였다. 스스로의 입으로 꺼내들기가 쉽지 만은 않은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러자 다소 비장한 표정으로 혁련기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사부님께 변고가 있는 것 같습니다. " "‥‥‥!" "저희도 사매가 이곳까지 찾아오고서야 그와 같은 사실을 짐작 할 수 있었습니다. 사매는 미리 알고 있던 모양이었지만 말입니 다." 풍초양 등이 한희윤을 사매라 칭하는 것은 이미 무림에 널리 알려 진 일이었다. 한희윤이 부모도 없이 홀로 자라는 것을 가여히 여긴 한조백이 자신의 제자들과 함께 어울릴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이에 한희윤은 풍초양, 혁련기 등을 사숙이 아닌 사형으로 대해 왔고, 당연히 풍초양 등은 한희윤을 사매라 칭하는 것이다. "어허! 그런 일이 있을 수가?" 남궁백연이 크게 놀라는 그때, 남궁일이 나서며 물었다. "한 소저께서는 그와 같은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패 진즉 알리 지 않으신 것입니까?"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묵묵히 이야기를 듣던 한희윤이 침통한 표 정으로 입술을 열었다. "누구에게 이야기를 해야 할지 판단할 수 없었습니다. 현계 조부 님을 대신해 무림맹을 장악한 자는 적풍조마저 자신의 뜻대로 움직 이고 있습니다. 그러니 대체 누구에게 이와 같은 상황을 털어놓아 야 할지 몰랐던 것이지요." "이제는 원흥을 알고 있다는 말입니까?" 남궁일이 다시 물었다. "저희는 셋째 사제를 의심하고 있습니다 " 질문에 답한 것은 혁련기였다. "그렇다면 최근 공표된 결혼 역시도 그자의 수작에 불과한 것이 겠구려." 남궁백연은 모든 정황을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어떻게 이와 같은 말씀을 꺼낼 것인가에 대해 고심해 왔습 니다. " 한희윤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는 중이었 다. "다행히 계기가주어진 셈이군요. 저와두 사형은 정의련이 십전 성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구파일방에 제대로 전해 주시길 기대하 고 있습니다. 십전성에서 모든 지휘 계통을 장악한 간적인지라 저 희가 구파일방으로 향하는 모든 길목을 차단했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습니다. " 한희윤은 서문도옥을 아예 간적이라 칭하고 있었다. 사부를 해 하고 동문을 배신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어떤 수작을 부릴지도 모를 일입니다. 어느 날 저희가 무 림맹의 반도가 되어 척살령이 떨어질 수도 있겠지요. 저희로서는 가주님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 혁련기가 한희윤의 말을 부연하고 나섰다. "협의를 숭상하는 무인으로서 당연한 일이외다. " 남궁백연의 답변에 풍초양 등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맞잡 아 감사의 예를 갖췄다. 지금의 그들은 정의련을 제외하고 고립무 원(孤立無援)의 상태였다. 혁련기의 말처럼 서문도옥이 수작을 부린 다면 구파일방에 사실을 전하기는커녕 적풍조에게서 도주하기에도 급급할 것이 분명했다. "결국 설가가 서문도옥, 그자와 손을 잡고 오래 전부터 이런 일 을 꾸며 왔다고 봐야겠군요 " 남궁일의 말에 여태껏 침묵하던 선주혁이 입을 열었다. "노부야 이런 일에 아는 바가 없지만‥‥‥ 한마디 하겠소이다. " "독고 대협의 의견을 경청하겠습니다. " 남궁백연의 이 한마디는 선주혁의 정의련에서의 위치를 짐작케 했다. 풍초양 등은 강호의 소문에 다소 과장이 있을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남궁백연이 저리 나오는 이상 독고건이라는 사람을 다시 볼 수밖에 없었다. "상황으로 미루어 현재 무림맹을 장악하고 있는 간적의 배경이 설가라는 곳이 겠구려 ." "그렇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그 간적의 담량이 클지라도 저 혼자 이와 같은 일을 꾸밀 수는 없었을 테니까요." 풍초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당연한 이야기를 새삼스레 꺼내 드는 독고건이라는 인물에 대해 쉽 게 이해하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그렇구려. 확실히 이런 일은 막대한 지원이 필요할 것이오." 선주혁은 마치 대단한 사실을 알아낸 것과 같은 표정이었다. "하면 그런 지원을 사천 구석에 자리한 작은 가문 하나가 할 수 있는 것이오? 또한 패종회라는 거창한 이름을 내걸고 무림맹과 평등 한 연수를 할 정도의 세력을 감추고 있다가 갑자기 드러낼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나 되오?" "독고 대협께서는 설가의 배후에도 또 다른 세력이 있을 것이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누구보다도 선주혁의 말을 빨리 이해한 남궁일이 물었다. 선주혁은 과연 남궁일이라고 생각하며 시치미를 떼었다. "뭐‥‥ 노부의 짧은 식견으로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아 물어본 것 이오. 이 정도의 거창한 일을 해내는 것이 그토록 쉽다면 란 매가 가문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저토록 고심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말이오." "과연 그렇군요. 확실히 그와 같은 가능성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설가가 사천에서 제법 이름을 떨치고 있다지만 무 림맹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는 아니지요." 남궁백연은 조금은 과장된 표정으로 독고전륜에게 탄복하는 모 습을 보였다. 그의 상황분석 능력이 의외라는 생각이 든 건 사실이 었으므로 좀 더 과장된 표정을 지어 기분을 북돋아 주려는 것이다. 선주혁은 남궁백연의 반응에 크게 기뻐했다. 의외로 패종회의 위험성을 쉽게 이들에게 전할 수 있는 계기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정의련에의 투신은 실로 모험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런데 일이 이 토록 쉽게 풀리자 그는 쾌재를 부르는 것이다. 남궁백연은 그런 선주혁의 반응을 자신이 내보인 표정 때문이라 생각하고는 독고건이라는 자의 순박함에 미소를 지었다. 그는 이런 자를 다루기가 얼마나 쉬운지 알고 있는 것이다. "사천설가‥‥, 아니 이제는 패종회라 불리는 곳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겠군요. 그들이 도모하는 게 무엇인지, 어 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 말입니다. " 남궁일의 말에 선주혁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섰다. "노부가 직접 가 보겠소." "독고 대협께서 수고를 해 주신다면야‥‥‥." 남궁백연의 입장에서는 사양할 일이 아니었기에 즉각적으로 수 락했다. "일아, 네가 독고 대협을 모시고 사천으로 가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아버님." = Chap.3 - 종사(宗師)의 자질 = <<1>> [사형이 ‥‥?] [네, 마교의 장로들도 함께요.] 은설연이 전음으로 답했다. 금번 사천행에 남지학과 종극 등이 암중에 뒤따르기로 했음을 선주혁에게 전하는 것이다. [모두가 당신에게 감탄하는 중이에요. 어떻게 그 빠른 시간에 정 의련의 관심을 패종회 쪽으로 돌릴 수 있었는지 말이에요.] [운이 좋았을 뿐이오. 마침 무림맹주의 제자들이 정의련을 찾아 와 됐으니까‥‥‥.] 선주혁은 사실대로 대답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은설연은 여전히 감탄을 금치 못하는 표정이었다. '역시 남 소협의 말대로인가? 평소에는 보통 이상의 모습을 보 이지 않다가 결정적인 순간에만 진실 된 능력을 드러내는‥‥‥? 이 사람 적으로 돌리기엔 정말 무섭구나!' "독고 대협은 사천에 가 보신 적이 있나요?" 은설연이 선주혁에 대해 감탄하는 사이 남궁연이 평소의 맑은 웃음 그대로를 지어 보이며 선주혁에게 물었다. 그녀는 남궁백연과 남궁일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득바득 우걱서 동행을 하고야 만 것이 다. "이번이 처음이오." "헤? 저도 처음이에요. 빨리 일을 끝내고 여기저기 돌아볼 수 있 었으면 좋겠네요." "남궁 소저." 은설연의 음성이 가라앉았다 "네, 모용 소저." "우리는 지금 놀러 가는 게 아니에요. 급박하게 변동하는 무림 정세를 명확히 파악하기 위한 여정일 뿐이니까요." 마치 어린아이를 타이르는 듯한 은설연의 어조에 남궁연의 표정 이 살짝 변했다. "그 정도는 저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용무를 마치고 잠시 여유 를 낼 수 있는 거 아닌가요?" '또 시작이군.' 최근 이 두 여자는 붙어 있기만 하면 언쟁을 벌이곤 했다. 견원 지간(犬猿之間)이라는 말은 두 여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선주혁은 두 여자의 대화에 신경을 끊고 명상에 들어가기 위해 노 력했다. 사천으로 향하는 여정 내내 마차에 있어야 할 것이고, 그 사이 뭔가 더 확실한 것을 이룰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패종회는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자신이 읽었던 책의 내용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일이 생각보다 힘들어질 것은 자명한 터. 그로서는 스스로 준비를 마치는 것밖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더불어 사형이 한시라도 빨리 본연의 능력을 갖추길 바라 는 마음도 가득했다. <<2>> "이럴 수가‥‥‥!" 커다란 눈망울에는 맑은 이슬이 맺혀 있었고, 꽉 쥔 주먹 역시 그녀의 음성만큼이나 떨렸다. 투명한 그녀의 눈에 맺힌 광경 때문이었다. 참상(慘狀)이라는 말 외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무가의 여식이라지만 장중(掌中)의 보옥(寶玉)으로 평생을 살아온 그녀였 다. 짧은 인생이라지만 지금껏 이와 같은 참혹한 광경을 접해 본 적 이 없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흔들리는 것은 비단 남궁연뿐이 아니었 다. 사파연합에서 태어나 자라온 은설연조차 상기된 얼굴이었다. 잔 인하고 비열하다 여겨지는 사파인들 사이에서 자라 온 그녀조차 이 런 종류의 끔찍한 광경을 접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들이 바라보는 것은 하나의 작은 촌락(材落)이었다. 많아야 서른을 넘지 않았을 법한 화전민촌(火圖民村)이다. 중경(重慶)은 평원보다 산악 지형이 많다. 대부분이 돌산이라지 만 화전민으로서는 중경을 포기하기 힘들었다. 겨울철에도 온난한 기후가 계속되기 때문이다. 하루하루를 걱정해야 할 화전민들에게 있어서 매서운 추위가 없다는 것은 크나큰 매력이 아닐 수 없었다. 따라서 중경 곳곳에는 수많은 화전민촌이 있었고, 선주혁의 일행 이 사천으로 향하던 여정 중에 그들 중 하나를 거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보고 있는 화전민촌은 여느 촌락과는 확연히 달 랐다. 그들의 시야에 보이는 것은 정확히 말하자면 촌락이 형성 되었던 흔적뿐이랄 수 있었다. "산적들일까요?" 언은진이 어금니를 악문 채 물었다. 그녀의 시선은 무너져 내린 모옥과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시신 들을 향해 있었다. "산적은 아니에요." 은설연이 단언하듯 말했다. "하지만‥‥‥." 중경에 녹림도(綠林徒)가 많은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그들과 화 전민에게는 공존(共存)의 이유가 있어요. 악어가 악어새를 필요로 하듯‥‥‥‥ 은설연의 설명에 제갈중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산적들이라 해도 모든 것을 자급자족(自給自足)하며 살 수는 없 습니다. 그들에게도 필요로 하는 물자가 있기 마련이고, 화전민들 은 그와 같은 물자를 제공하는 공급책의 역할을 하게 되죠. 아무리 중경이라 해도 산적들이 공공연히 산 아래를 활보하고 다닐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산채 주변의 화전민촌은 외려 번영하기 마련이죠. 산적들이 화전민을 상대로 이토록 잔인한 짓을 한다면 아무리 담량 이 큰 사람이라 해도 산채 주변에서 화전을 일굴 생각을 하지 못할 거예요." 제갈중양과 은설연의 설명에 언은진 역시 납득하는 표정이었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이런‥‥‥?" 남궁연이 다시 의문을 제기하자 남궁일이 나섰다. "화전을 짓밟은 것은 기병(騎兵)인 듯싶구나. 자국이 깊으니 하중 이 많이 나간다는 것이고‥‥‥ 결국 중갑주를 입었다는 뜻인 데‥‥‥?" "그렇다면 관군(官軍)이 이런 만행을 저질렸다는 뜻인가요?" 언은진은 중갑주를 장착한 기병이라는 말에 당연한 듯 관군을 떠올렸다. 무림의 각 세력은 기병을 양성하지 않는다. 아무리 관과 무림이 상호 간섭불가의 묵약(默約)을 지켜 왔다지만, 서로에게 치명적인 위협이 될 만한 소지를 묵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무림은 개인적인 능력의 극대화에 치중한다. 각 세력간의 우위 역시도 얼마나 많은 고수를 보유했는가에 따라 갈린다. 다시 말해 대규모의 집단전은 배제하는 것이다. 황실에서 위협을 느낄 수준의 집단전이 발생한다면 관군이 나설 수밖에 없게 되고 이는 무림의 존폐까지 결정할 사안이 된다. 기병은 전쟁 수준의 집단전에서 그 효용을 극대로 활용할 수 있 다. 중갑주를 입은 기병이라면 더욱 그했다. 결국 이와 같은 흔적을 남길 수 있는 기병이란 무림의 각 세력에 서는 양성할 필요도 없고, 양성해서도 안 되는 전투 집단인 것이다. "산적들을 도왔다고 해서 토벌을 감행했단 말인가요?" 남궁연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표정으로 물었다. "중경은 변방(邊方)이 아닙니다 아무리 관이라 해도 중갑주를 갖 춘 삼백여기의 병마(兵馬)를 중경에 배치할 턱이 없습니다. 더구나 산채의 토벌에 기병이 나선다는 것은 말이 안 되죠." 제갈중양의 설명이 었다. 기병의 효용은 평원 지대에서 극대화 된다. 험준한 산악 지형에 기병을 동원한다는 것은 병법의 기초를 모른다 해도 고개를 저을 일이 었다. 남궁일의 준미한 얼굴에 골 깊은 주름이 잡했다. 제갈중양의 말대로 관군이 이런 짓을 저질렀다고 볼 수는 없었 다. 이곳 화전민촌의 규모는 실로 작았다. 삼십여 명 정도였을 것으 로 추정되는 촌락민은 어찌면 한 가족일 수도 있었고, 잘해야 열 가 구를 넘지 않을 터였다. 그런 화전민촌을 없애기 위해 삼백여 기의 기병이 동원되었고, 더구나 중갑주를 갖춰 있었다. 흔적으로 미루어 화전민촌은 단 한순간에 사라졌다. 중갑주를 갖춘 기병은 거침없이 이곳을 짓밟았다. 마치 폭풍이 이곳만을 휩쓸고 지나간 듯했다. 심지어는 건물조차 말을 몰아 허물어버렀다. 그만큼 위력적인 공격력을 갖춘 기병이라는 뜻이었다. 무너진 건물과 짓밟힌 시신은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곳을 공격한 기병은 상식을 벗어날 굵기의 거창(巨槍)을 사용 하는 게 분명했다. 험준한 지형에서도 자유자계로 움직일 정도라면 훈련 정도는 말 할 것도 없었고, 엄청난 갑주의 무게를 감안하면 관군이 사용하는 군마(軍馬)보다도 월등한 말이라고 봐야 했다. 남궁일로서는 이런 기병이 대체 어디에서 뛰어나온 것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한편 갑주를 입은 기병, 어린 아이조차 짓밟는 잔혹성, 그리고 여기저기에 남은 창흔(瘡痕)을 보고 선주혁은 아차 하는 심정이었 다. '철갑묵린단(鐵甲墨鱗團)!' 이곳 세상에 넘어오기 전 읽었던 소설에서 나름대로 비중 있게 다뤄졌던 철갑묵린단에 대해 완전히 잊고 있었던 것이다. 스스로 힘을 키워 패종회를 상대하게 된 입장이라 존재감이 너무나 큰 백 존에 대해 집중한 탓이었다. 철갑묵린단을 기억해 낼 선주혁은 입 안이 바짝 말라 오는 것을 느꼈다. 소설이야 주요 등장인물들만을 따라가는 이야기 전개인지 라 그들을 제외한 이들의 피해는 그다지 중요치 않게 여걱지기 마 련이다. 주인공과 조연을 제외한 사람들이라면 수백, 수천이 죽는 다 해도 별 감흥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현실로 받아들여야 할 상황이 되자 그와 같은 피해는 쉽게 넘길 일이 아니었다. 철갑묵린단은 무림의 각 세력에게 수적으로 가장 치명적인 피해 를 입힐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앞서의 설명처럼 무림의 각 문파들은 개개인의 능력을 최고조로 이끌기에 주력한다. 각 문파를 대표하는 절진(絶陣)이 있다지만 가장 규모가 크다는 소림의 나한진이라 해도 백팔 명의 나한승이 동원될 뿐이었다. 그 외의 다른 진법들 역시 모두가 소규모의 싸움에서 최고의 효 용을 발휘할 수 있게 고안된 것들이었다. 반면 철갑묵린단은 애초부터 대규모 집단전을 염두에 두고 양성 되었다. 수많은 문파들을 일거에 쓸어버리기 위한 패종회의 도구인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집단전 위주의 공격을 받은 적이 없는 무림문 파들은 철갑묵린단의 공격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 철갑묵린단원 개개인의 능력은 백존, 아니 백웅에도 비할 바는 못 되었다. 그러나 만년흑오철(萬年黑烏鐵)로 만들어진 그들의 중갑주가 개 인의 능력차를 무용케 만들었다. 같은 무게의 금보다 열 배는 더 귀하다는 만년흑오철은 검기 수 준의 공격이 아니면 상할 수 없을 정도의 강도를 가지고 있다. 즉, 이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검기를 발현할 정도의 고수 수십 이 필요한 것이다. 그와 같은 고수진을 갖춘 무림 세력은 흔치 않은 것이 현실이었 다. 따라서 무림의 군소방파는 철갑묵린단의 공격에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에 대응해 수십의 고수가 한데 모여 이들을 막고자 한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식사조차도 말 위에서 해결한다는 이들의 기동력은 탁월하기 이를 데 없다. 청총마를 타고 무림의 각지를 이동하는 철 갑묵린단을 추격하는 것조차 수월치 않으니 소설 속에서 이들의 활 약은 대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반드시 이곳 중경에서 그들을 막아야 해' 뒤늦게야 철갑묵린단을 떠올린 선주혁의 결론이었다. 아무리 청 총마를 이용한 기병들이라지만 중경에서만큼은 그들의 기동성에도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다. 평원과 험지의 차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 정도의 숫자만으로 철갑묵린단 전체를 와해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큰 피해를 줄 수는 있을 터. 그들의 피해가 클 수록 향후 죽어 갈 무림인들의 숫자가 줄어들 것이다. 화전민촌의 어린아이조차 말발굽으로 짓밟을 정도니 저들이 본격 적으로 활약할 경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갈지는 자명했다. 패종회의 음모에 맞서고자 하는 선주혁에게는 철갑묵린단을 저 지해야하는 당연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필요하다면 일행을 뒤따를 사형과 염마위 도움을 받아서라도 반드시 중경 내에서 저들을 처리 하겠다고 결심하는 선주혁이었다. "남궁 소협, 패종회에 대한 조사를 마치는 것이 촉박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나‥‥‥, 협의의 도를 배운 우리가 이런 잔혹한 참상 을 외면할 수는 없지 않겠소?" "독고 대협게서는 저희가 이 일을 조사하길 원하시는 것입니 까?" 남궁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노부로서는 당연한 일이 아닐까 싶소. 어린아이마저 무참하게 죽음을 당했으니 사연을 알아봐야 하지 않겠소? 인근에 산적의 무 리가 없으니 이들의 무고함은 자명할 터. 양민의 피해가 속출할 것 이 예견되는 상황에서 어찌 우리가 외면할 수 있겠소?" "독고 대협 말씀이 옳아요! 이런 상황을 외면한다면 저희가 무공 을 배울 이유가 없죠." 남궁연은 선주혁의 의협심에 감탄하는 표정을 지으며 재빨리 그 를 지지하고 나섰다. "저도 독고 대협의 말씀을 따르고 싶군요." 언은진은 어린아이의 것이 분명한 시신을 바라보며 선주혁의 발 언을 지지했다. 형체조차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참혹하게 짓밟힌 아이의 시체가 무가의 여식으로 깊숙이 감춰 둔 그녀의 여심을 자 극한 것이리라. "제한적인 시한을 두고 이런 짓을 저지른 자들에 대해 조사를 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제갈중양이 냉정한 판단을 했다. 패종회에 관한 조사가 주목적 인 만큼 한 없이 다른 일에 시간을 소비할 수는 없는 입장임을 밝힌 것이다. "모두의 뜻이 그러하니 독고 대협의 말씀대로 이와 같은 만행을 저지른 자들에 대해 알아보기로 합시다." 남궁일은 은연중에 선주혁을 존중하고 있음을 암시하며 결론을 내렸다. 은설연을 제외한 일행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에 펼쳐진 참상에 그녀 역시 화가 치밀었지만 일의 전후에 대해 고려하는 것이다. 이곳에서 죽어 간 화전민들이나 중경에 여 러 화전민들에게 동정심이 일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는 더 큰 화를 막는 것이 자신들의 책무라 생각하는 것이다. '정파인들이란‥‥‥," 씁쓸한 표정의 그녀가 내린 결론이었다. 아무리 선주혁이 여느 정도인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지만 그 역시도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은설연과 같은 생각을 하는 자들이 또 있었다. 기병의 흔적 을 쫓아 이동을 하는 일행을 바라보는 자들이었다. "자네 사제는 정말이지 알 수가 없군 그래." 지나칠 정도로 평범한 모습의 노인이 준미하기 이를 데 없는 청 년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선주혁의 뒤를 를아온 종극이 남지학에게 한 말이었다. "아직 어려서 그렇지. 정의를 수호해야 한다는 혈기가 넘치는 게 야." 온몸을 붉은색으로 휘감은 노인, 악구윤이 한심하다는 듯 고개 를 저었다. "사제의 행동을 겉으로 보이는 대로만 봐서는 안 될 것입니다. "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악구윤이 양쪽 눈법의 높이를 달리하며 물었다. "저 녀석의 행동에 다른 이유가 있다는 건가?" 종극 역시도 남지학에게 질문을 던졌다. "단순히 화전민들이 입을 피해를 막기 위해 일을 그르칠 사제가 아니라는 것만을 알 뿐입니다. " 남지학의 모호한 답변에 수조문이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는 창백한 입술을 열었다. "이런 짓을 한 놈들이 패종회와 연관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 는 게로군." "‥‥‥!" 종극과 악구윤의 시선이 수조문에게서 남지학 쪽으로 옮겨 갔 다. 과연 그런 것인가 하고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이다. "저로서도 사제의 의중을 알 도리가 없습니다. 다만, 사제의 행 동에는 반드시 합당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지요." "흐음‥‥‥." 종극이 나직한 신음성을 냈다. "우리만이라도 패종회를 조사하러 가는 것보다 저 녀석의 뒤를 쫓는 게 낫다는 이야기로군." "‥‥‥." 남지학은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어차피 결론은 종극이 내 릴 것이기에. "좋아, 일단 자네 사제를 믿어 보기로 하지." 종극은 짧은 시간 내에 결른을 내렸다. 악구윤은 인상을 쓰긴 했지만 반론을 제기하지는 않았다. 절대 적일만큼의 신뢰가 고스란히 드러난 남지학의 표정을 확인한 후였 기 때문이다. 네 사람은 다시 선주혁 일행의 뒤를 를기 시작했다. <<3>> 선주혁, 남궁일 등은 어렵지 않게 철갑묵린단의 행적을 뒤쫓을 수 있었다. 선명한 말굽의 뒤를쫓기만 하면 될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쪽은‥‥‥." 말발굽이 향하는 방항을 확인한 은설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뭔가 짚이는 게 있소?" 남궁일이 그녀의 작은 목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은설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곧 대답했다. "노룡채(老龍寨)가 있는 방향이네요 " "노룡채라 함은‥‥‥?" "짐작하신 대로 산적들의 본거지가 있는 곳이죠." "‥‥‥, 모용 소저께서는 생각보다 견문이 넓으시군요. 중경에 자리한 산채의 위치까지 파악하고 계시다니‥‥‥." 남궁일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중경의 산채 중 녹림칠십이채(緣林七十二業)에 속하지 않고서 거 대한 세력을 일군 곳이니까요." 은설연은 잠깐 망설이는 사이 준비한 대답을 했다. "신흥 산채로서는 꽤 명성을 날리는 곳이죠. 기존에 자리를 잡은 산채들 사이에서 힘을 기르기 위해 사파연합 밑으로 들어간 곳으로 널리 알려진 노룡채입니다. " 제갈증양 역시 견문이라면 빠지지 않았다. 그는 은설연의 설명 에 자세한 부연을 달았다. "노룡채에 대해 파악하기보다는 서둘러야 할 때일 거 같군요. 노 룡채의 주변에도 꽤 규모가 큰 화전민 촌락이 있을 테니까요." "서두릅시다. " 선주혁의 재촉에 일행은 다시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4>> 선주혁 일행이 노룡채에 도착했을 때, 그들이 볼 수 있는 것은 태풍이 할퀴고 간 듯한 흔적뿐이었다. 산채의 방책(防縮)은 형편없 이 무너져 내려 있었고, 보이는 것은 시신과 붉은 피가 가득 고인 말발굽 자국뿐이었다. "늦었군." 남궁일이 무심하게 중얼거렀다. 어찌 되었건 노룡채는 사파연합 소속의 산적들일 뿐이다. 그들 의 죽음에 대해 정의련에 속한 남궁일이 안타까워할 이유가 없었 다. 하지만 은설연은 입장이 달랐다. 사파연합 소속이라는 것은 그 녀에게 있어서 가족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피가 식지 않았으니 얼마 되지 않은 시각입니다. 서두르면 곧 이들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 제갈중양이 땅에 고인 피에 손가락을 담갔다 빼며 말했다. "우리가 온 길에는 촌락이 없었어요. 근방에 있는 화전민촌이 당 하기 전에 서둘러야 할 거예요." 노기가 서린 은설연의 발언은 그녀가 무고한 양민을 염려하는 마음으로 이해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은설연은 다소 사람들이 이 상하게 여길 것을 염려하면서도 감정을 숨기지 않고 말쳤다. "이 정도 규모의 산채 인근이라면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살고 있을 것이오. 서들러야겠소." 다행히 제갈중양이 재빠르게 은설연의 말을 거들고 나섰다. 선주혁을 필두로 일행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전력을 다한 질주가 약 이 각여에 걸쳐 계속된 후 이들은 은은하 게 땅이 울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진행 방향의 연결선상에서 몇 개의 연기가 솟는 것이 보 였다. 아마도 화전민촌에서 음식을 하고 있을 것이라. "다행이군 " 산적을 돕고 있으니 완전히 무고하다할 수는 없겠지만, 무공조 차 익히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에 불과한 화전민들이다. 그들의 죽 음을 막을 수 있다는 생각에 남궁일은 짧게 중얼거린 후 신형에 속 도를 더했다. 그러자 일행과의 거리가 순식간에 벌어졌다. 애초 그의 경신공 부는 다른 이들과 확연한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오직 선주혁만이 그와 나란히 달리는 중이었다. <<5>> "멈추시오." 낭랑한 호통과 함께 멋들어진 신법을 전개한 남궁일이 내려섰 다. 삼백여의 철갑묵린단은 산중의 소로를 벗어나 앞이 탁 트인 공 간으로 접어들면서 부채를 펼치듯 진형을 갖추는 중이었다. "호오! 이게 누구신가?옥기린께서 이런 산중에까지 행차를 하 시다니 ‥‥‥?" 범인이라면 보는 것만으로 엄청난 위압감을 느낄 법한 철갑묵린 단이었다. 흑색 일색의 철갑주를 갖춰 입은 그들 중 단 한 명만이 청색경장을 입고 있었는데, 그가 말을 몰아 앞으로 나서며 남궁일 에게 말을 건넸다. 자신을 알아보는 중년인을 확인한 남궁일이 의아해하는 그 때, 중년인이 스스로를 소개하고 나섰다. "신웅십팔걸의 수좌를 다투는 옥기린께서야 이 몸에 대해 아는 바가 없을 것이오. 본인은 사천에서 조그만 이름을 얻고 있는 상관 정필이라고 하오." 선주혁은 미간을 찌푸렀다. 그가 누군지 명확히 알고 있었기 때 문이다. 곤륜을 내려와 신투를 추격하던 시절 곤륜파에 공공연히 시비를 걸어 왔던 자 중 하나로 당연히 패종회를 추종하는 무러였 다. "아! 상관 대협이셨군요. 소생의 일천한 안목을 양해해 주십시 오." 남궁일은 포권의 자세를 취했다. 상관정필이라는 자의 이름을 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무림에 자주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었 으나 사검을 이용한 기이한 검술로 높은 성취를 이뤘다는 소문을 들었던 것이다. "본인과 같은 무명소졸을 옥기린께서 어찌 알아보시했소?" 상관정필은 입 끝을 말아 올리며 마음에 없는 겸양을 했다. 이어 그가 유난히 번득이는 안광을 더욱 빛내며 물어왔다. "한데 남궁 소협께서는 어찌하여 우리의 행차를 막아서신 것이 오?" 남궁일은 잠시 시간을 두었다가 조금은 조심스럽게 상관정필에 게 물었다. "실례가 되는 질문인지는 압니다만‥‥‥ 뒤쪽 일행은 상관 대협 께서 이끄시는 것입니까?" "허허헛!" 상관정필은 표정과는 달리 웃음을 터뜨린 후 대답했다. "어찌 나 정도의 인물이 철갑묵린단을 이끌겠소?본인은 그저 이분들의 길잡이 노릇을 하고 있을 뿐이외다 " "단도직입적인 대화를 위해서 상관 대협 일행을 대표하실 분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 "그와 이야기를 해라." 다른 이와는 달리 붉은색 술이 달려 있는 투구를 쓴 자가 상관정 필을 지칭하며 명령을 하듯 말했다. 흑색 복면 때문에 얼굴을 알아 볼 수는 없었으나, 음성으로 미루어 적어도 중년에 이르렸음만은 짐작할 수 있었다. 이들의 우두머리인 자가 대화의 권한을 상관정필에게 넘긴 이 상, 남궁일도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귀 일행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에서 화전민촌의 참화를 확인했 습니다. " "호오? 남궁 소협께서 철갑묵린단의 뒤를 밟아 오신 게로군요. 그렇다면 철갑묵린단이 노호산(老龍山)의 산적을 토벌한 것도 알겠 구려?" "노호채를 들러 이곳으로 향했습니다. 산적을 토벌하는 것이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만‥‥‥." 남궁일이 여기까지 말을 했을 때 상관정필이 그의 말을 자르고 나셨다. "여기 계신 철갑묵린단은 금번 무림맹과 연수를 한 패종회 소속 이외다. 사파연합이 곤륜이마라는 악적을 감싸고도는 것에 대한 경 고를 위해 노호채를 토벌한 것이오. 무림의 악적을 없애고자 하는 행사에 남궁 소협께서는 다른 고견이 있으신 게요?" 패종회라는 이름이 거론되자 남궁일은 살짝 미간을 찌푸렀다. 그들이 이와 같은 대규모의 기병을 양성할 정도라면 결코 경시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무림에서 그 존제조차 알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이들을 양성 했다는 것 또한 문제였고, 이렇게 드러내놓고 활동을 하는 것도 문 제였다. 기병 양성은 황실과 관에 위협이 될 일이었고 당연히 금지된 일 이다. 한데도 이렇게 백주에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황실과 관 에 손을 써 두었다는 뜻. 패종회의 저력이 그간 짐작해 온 정도를 훨씬 넘어섰다는 뜻이 었다. "산적을 토벌하여 양민을 보호하는 일에 무슨 이견이 있겠습니 까! 하지만 화전민들은 무고하거늘 어찌 그토록 잔혹한 행사를 하 실 수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 "허허헛!" 상관정필은 다시금 안광을 빛내며 표정과 다른 웃음을 터뜨렀다. "남궁 소협께서는 아직 세상 물정을 잘 모르시는구려. 산채의 도 적놈들이 화전민들의 도움 없이 어찌 살아가겠소? 삭초제근(削草除 根, 풀을 베면 뿌리까지 없애야 한다는 뜻)이라 하지 않았소? 한 산 의 산적이 사라지면 어느 탐욕스러운 놈들이 산채를 차지해 그들에 게 생필품을 구할지 모를 일이요, 또 인근의 화전민들이 언제 또 산 주(山主) 노릇을 할지 모를 일이 아니겠소? 하여 본보기 삼아 그놈 들까지도 처벌한 게요." "있을지도 모를 일을 염려하여 무고한 생명을 빼앗았다는 이야 기 입니까?" "앞서 설명하지 않았소? 삭초제근이라고! 더구나 이미 산적을 도왔던 죄가 있는 자들‥‥‥. 죽음이라는 처벌이 그다지 무겁지만은 않을 것이오." 빙글빙글 웃으며 말을 하는 상관정필이었다. 앞서 옥기린이니 신웅십팔걸의 수좌니 하며 한껏 자신을 띄웠으 나 실제로는 자신을 어린아이 취급하고 있음을 모를 리 없는 남궁 일이었다. 그는 노기를 억누르며 진중하게 말했다. "산적들의 협박에 의해 그저 물자를 교환했을지도 모를 일입니 다. 더구나 노룡채에 앞섰던 촌락의 경우는 근방에 산채조차 있지 않았던 터. 그야말로 무고한 양민에 불과했습니다. " "언제든 산적들과 거래를 할지 모를 자들이 아니겠소?" "그런 추측 때문에 고귀한 생명을 빼앗을 자격이 누구에게 있겠 습니까?" 계속되는 상관정필의 억지에 결국 남궁일도 노성을 터뜨렀다. 그즈음 되어 제갈중양과 언은진 등이 도착했다. 그들의 압도적 인 위압감을 뿜어내는 철갑묵린단을 경계하며 남궁일과 선주혁 뒤 쪽으로 셨다. "그래서‥‥‥? 남궁 소협과 일행들께서 우리의 행사를 저지하겠 다는 뜻이오?" "상관 대협께서 말 머리를 바꾸지 않으신다면 그리 해야겠지요." "크하하하하핫!" 상관정필은 앞서와 달리 진심어린 웃음을 터뜨렸다. "고작 그 인원으로 철갑묵린단을 막아서했다는 말인가? 그것도 산적을 도와 연명해 온 화전민 따위를 위해서 목숨을 걸어 보겠다 고?" 이제는 말까지 하대로 변했다. 남궁일의 두 눈에서 정광이 번득였다. 삼백여 기의 기병이라지 만 마음만 먹는다면, 그리하여 본신무공을 감추지 않고 드러낸다 면, 상대하지 못할 일도 없었다. 물론 철갑묵린단의 진정한 힘에 대 해 모르기 때문에 내린 결론이 었다. "힘이 없다는 이유로 부당하게 목숨을 잃는 자가 있다면 당연히 검을 뽑아들 것이오." 남궁일은 당당하게 가슴을 졌다. "크흐흐흐! 옥기린, 옥기린 하기에 후기지수 중에서는 꽤나 걸출 하다 여겼건만 오늘 보니 세상 물정 모르는 천둥벌거숭이에 불과하 군. 철갑묵린단이 그저 갑주를 두르고 말을 탄 기병에 불과하다 여 기는 것이더냐?" 상관정필은 마음껏 남궁일을 비웃었다. 그는 철갑묵린단의 진정 한 힘을 알고 있었다. 설익은 의협심에 사로잡혀 불나방처럼 뛰어 드는 남궁일 정도는 눈 깜짝할 사이에 거창에 꿰뚫리라 여기는 것 이다. 남궁일은 상관정필의 조롱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묵묵히 자신의 애검을 뽑아들었다. "모두 조심해야 할 거에요. 믿기 힘들겠지만 저들의 갑주가 만년 흑오철로 만들어진 듯하군요." 은설연의 경고였다. "만년흑오철로 사람과 말에 갑주를 두른단 말이오?" 제갈중양이 놀라 외쳤다. 만년흑오철의 가격은 둘째 치고 저와 같은 엄청난 양을 구하는 것이 가능한지부터가 의심스러웠던 것이 다. "크하하핫! 제법 안목이 있는 계집이로구나! 이제 상황을 알았으 니 꼬리를 감추고 개처럼 도주하는 것이 어떠냐? 정의련으로 돌아 가 패종회의 위용에 대해 짖어 대는 것이 분수에 맞을 게야." 상관정필의 웃음과 더불어 철갑묵린단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 로를 벗어나 넓은 지형으로 나서며 펼쳐지듯 진형을 갖추기 시작했 던 철갑묵린단이었다. 하나 적의 출현과 동시에 그들은 기존에 형성되어 있던 길을 무 시했다. 우지끈 하는 소리와 함께 나무들을 쓰러뜨리며 앞으로 나 선 것이다. 그 광경에 남궁일 일행은 크게 놀라야만 했다. 코끼리를 탔다 해 도 단박에 저 정도 굵기의 나무를 쓰러뜨리긴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제야 화전민촌과 노룡채의 건물과 목책이 왜 그토록 형편없이 무너져 내린 것인지 알 수 있기도 했다. 거창을 이용해 그대로 짓밟 아 버린 것이다. 소설에서 본 적은 있지만 실제로 저와 같은 광경을 보게 되자 선 주혁도 은근히 질리는 느낌이었다. '마, 말이 무슨 탱크냐? 저 정도의 나무를 그대로 밀어 버리게?' 그는 당최 이해할 수 없는 놈의 세상이라고 내심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저들이 밀려오면 정면으로 마주해서는 안 될 것이오. 거창을 피 해 저들의 사이를 파고들어야만 하오. 창의 길이 때문에 사이를 파 고들 수만 있다면 상대하기 용이할 것이오." 책략의 가문에서 자라온 제갈중양이 재빨리 적을 상대할 방도를 찾아냈다. 순간 선주혁의 머리를 스치는 기억이 있었다. "안 되오!" "‥‥‥‥?" 제갈중양의 제안은 누가 봐도 합리적이었다. 한데 선주혁이 반대를 하고 나서자 모두 의아한 표정이었다. "저들은 변방의 관군이 아니오. 무림에서 양성한 기병인 만큼 고 수를 상대하기 위한 훈련 또한 철저했을 것이오. 저들의 사이를 파 고든다는 것은 외려 수세를 자처하는 것일 수도 있소." 짐작처럼 말을 했지만 선주혁은 이미 그와 같은 사실을 알고 있 었다. 철저하게 무림의 문파를 상대할 것을 대비해 훈련된 철갑묵린단 이었다. 거창만을 보고 어설프게 파고들었다간 순식간에 날도질을 당할 위험이 컸다. 철갑묵린단의 무서움은 어쩌면 포위된 적을 짓밟은 준비를 마쳤 기에 더욱 큰 것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와 같은 사실을 알지 못하는 다른 이들은 선주혁의 우 려가 지나친 것은 아닌가 하는 표정들이었다. 이에 선주혁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모두 흩어져 뒤쪽으로 물러나시오." "어쩌시려고요?" 남궁연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나를 지나쳐 통과하는 자들을 맡으시오. 저들의 힘은 밀집되어 있을 때 극한에 오를 터. 각각의 거리가 벌어졌을 때를 노리시오!" "하지만‥‥‥." 은설연조차 창백하게 질린 안색으로 선주혁의 안위를 염려했다. 만년흑오철과 방금 전 나무를 쓰러뜨리는 모습을 떠나서도 무림 특 유의 본능으로 철갑묵린단의 위험성을 느끼는 그녀였던 것이다. "어서 내 말대로 하시오! 우리가 저들을 막아내지 못하면 화전민 들은 몰살을 당한다는 것을 명심하시오." 선주혁의 마지막 말에 남궁일 등은 분분히 뒤로 물러섰다. 금강 불괴지신을 연성한 것으로 알려진 독고건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그 어떤 일이 벌어진다 해도 독고건만은 무사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은설연만이 선주혁의 등을 바라보다 마지못해 신형을 뒤로 뽑았 다. 선주혁 스스로 자신은 진정한 금강불괴가 아니라고 말했던 것 을 그녀는 기 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크하하하핫! 이건 또 어디서 튀어나온 개뼈다귀냐? 단신으로 철갑묵린단의 진형을 흐트러뜨리겠다는 것이더냐?" 상관정필은 대소를 터뜨러며 붉은 수술의 기병에게 말했다. "단주, 어서 저놈들을 죽이고 하던 일을 마저 하시죠." 단주라 불린 자는 살짝 고개를 끄덕인 후, 좌수를 들어올렸다. 그의 말이 가볍게 투레질을 하고 삼백여 기의 청총마들이 코로 더운 숨을 내뿜었다. 이미 오래전 말과 하나가 된 철갑묵린단이었 다. 인마(人馬)를 합쳐 총 육백이 발산하는 적의(敵意)는 상상을 초월 했다. 제갈중양과 언은진은 호흡을 잇는 것조차 버겁게 느껴질 정도였 다. 수천수만의 바늘이 전신을 찔러오는 것과 같은 느낌. 그것의 막강한 살의(殺意)였고, 불패(不敗)의 확신이었다. 또한 금강불괴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릴 정도의 위용임에 틀림 없 었다. 독고건이라는 인물에 대한 염려가 싹트는 순간, 압도적인 기세 가 가일층 배가되었다. 철갑묵런단이 거창을 치켜든 것이다. 손잡이를 제외하고 지름만 다섯 치에 달할 정도의 굵기를 가진 거창이었다. 만년흑오철을 염두에 두면 검기로도 일 합에 저와 같 은 거창을 잘라 내지 못하리라. 삼백 개의 거창 앞에 홀로선 선주혁의 모습은 초라하기까지 했 다. 은설연은 입 안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꼈다. 상상을 초월하는 선 주혁의 능력을 알고 있었지만 철갑묵린단은 너무도 위험해 보였다. 저 정도라면 자신의 조부가 나선다 해도 감당할 수 있을 거라는 생 각이 들지 않았다. 해서 은설연은 선주혁이 패종회를 염두에 두고 철갑묵린단에 복 구 불가의 피해를 입히는 것을 목표로 잡았으리라 짐작했다. 아무 리 무공에 자신이 있다 해도 이 인원으로 저들을 궤멸한다는 것은 불가능임이기 때문이었다. 선주혁 역시 이와같은사실을 알고 있으리라 여기며 그녀는 애 써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천하제일이라기에 부족함이 없는그 의 경신공부를 상기하며 나름대로 위안을 삼는 그 순간이었다. 선주혁이 갑자기 하늘을 향해 손을 뻗어 올렸다. 그리고는 끝이었다. 치켜 을린 선주혁의 손에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단신으로 철갑묵린단의 앞에 서서 비장한 표정으로 팔을 치켜들 자 나름대로 긴장을 했던 상관정필은 실소를 터뜨렀다. "크흐흐‥‥‥ 뭐하는 놈인 건지." 상관정필이 어이없어 하는 그 순간. 남궁연이 하늘을 보며 외쳤다. "저, 저기 ‥‥‥ !" 모든 이의 시선이 그녀의 손가락을 좇아 하늘로 향했다. 그리고는 보았다. 높은 하늘 위에 떠오른 자색의 구체를‥‥‥. 형형한 빛을 발하는 자색의 구체는 꿈틀거리며 크기를 더하고 있었다. 중인들의 시선이 도달했을 때는 수박만 하던 것이 이제는 거의 사람 크기만 해져 있었다. "저, 저게 뭐야?" 상관정필이 놀라 외칠 때 철갑묵린단의 단주가 외쳤다. "쳐라!" 그의 좌수가 황급히 앞을 향해 뻗어졌다. 공격 명령이었다. 하늘에 떠오른 자색의 구체가 심상치 않음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속전속결을 내지 않으면 뭔가 불길한 일이 생길 것만 같았 다. 그의 명이 떨어지자 열기의 철갑묵린단원이 말의 얼구리를 찼 다. 육중한 발굽 소러와 함께 번개처럼 튀어 나가는 철갑묵린단. 그 속도는 경이적일 정도로 빨라 고수의 경신공부에 부족함이 없었다. 거창이 교묘한 방위를 점하며 서로 읽히고 밀밀한 그물이 되어 선주혁이 피할 곳을 차단했다. 선주혁의 표정이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해졌다. 하늘을 향했던 장 심이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다. 호선을 그리며 아래로 내리 그어지는 선주혁의 손.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던 자색의 구체는 선주혁의 움직 임에 반응하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작은 느릿한 하강(下降). 그러나 자색의 구체가 만들어 내는 궤적의 길이가 더해질수록 속도는 빨라졌다. 느렷했던 하강은 거칠 것이 없는 질주의 시작을 알릴뿐이었다. "유성(流星)이 ‥‥‥?" 남궁연은 혈마자광기의 낙하를 보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랬다. 그것은 유성의 재현(再現)이었다. 지난날 밤하늘을 가르며 한 순간에 사라져 버린 유성이 한 낮에 나타난 것이다. 별의 파편은 가속에 가속을 더했다. 자색의 긴 선이 허공에 떠올랐다. 반짝이는 빛은 나타났다 사라 지길 반복하며 위대한 자연 현상을 고스란히 그려 냈다. 유성을 재연하는 주역인 자색의 구체는 이미 가시(可視)의 영역 을 벗어난 속도로 철갑묵린단을 향하는 중이었다. 질주하던 철갑묵린단의 말이 주춤거렀다. 훈련받은 말은 전화(戰火)조차 두려워하지 않건만 거대한 유성이 눈앞으로 달려드는 것에 절로 위축된 것이다. 그 한순간 하늘에서 떨어진 선주혁의 장력이 열 기의 철갑묵린 단을 휘감았다. 거대한 압력에 일그러지는 만년흑오철. 유성에 밀려 형체를 잃어 가는 갑주. 피륙으로 만들어진 인마는 그 안에서 견뎌 낼 수 없었다. 붉은 액체가 자광과 섞여 흩어진다. 거침없는 힘은 철갑묵린단의 존재를 무시하듯 지면으로 향했다. 귀찮은 듯 방해되는 모든 것을 지우고서‥‥‥. 모든 것은 한순간에 이루어진 일. 인지될 수 있는 감각은 귀청을 찢을 듯한 굉음뿐이었다. 쿠아아아아앙. 땅이 흔들렸다. 철갑묵린단원들은 고삐를 채고 허벅지 안쪽에 힘을 주어 말을 진정시켜야 했다. 그러면서도 가공할 위력의 일 장 이후의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두 눈을 부릅떴다. "저, 저런 말도 안 되는‥‥‥!" 상관정필의 입에서 흘러나온 음성은 한없이 떨리고 있었다. 땅을 뒤흔들며 파인 구덩이 안쪽. 가득한 흙먼지와 더불어 자색의 안개가 걷히는 그 안에서의 광 경은 실로 참혹했다. 구덩이의 안쪽에는 종이처럼 납작해져 둥글게 휜 만년흑오철만 이 붉게 젖어 있었다. 철갑묵린단원과 청총마는 그렇게 피로서만 자신이 존재했음을 증명할 뿐이었다. 유성을 연상시키는 엄청난 장력이 만년흑오철로 만들어진 갑주 에 상상을 초월할 압력을 가하고, 그 안쪽의 인마는 형체조차 남기 지 못한 채 혈무(血霧)로 화한 것이다. "세상에‥‥! 저런 장력이 존재한다니 ‥‥‥?" 진주언가의 권법은 천하제일의 위맹(威猛)을 자랑한다. 막대한 내력을 극강의 권법으로 배가시켜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는 것이다. 언은진은 그런 진주언가에도 저와 같은 위력을 내는 권법이 존재한 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었다. 언은진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저와 같은 장력을 마 주했을 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수유의 순간 허공으로 흩어지는 자신의 육신을 바라보는 것이 다일 것이 라는 결론뿐이었다. '또다시 진보한 건가? 대체 저 사람은‥‥‥?' 은설연 역시 놀란 심정을 다잡으며 선주혁의 됫모습을 응시했 다. 이미 선주혁에 대한 모든 것을 머리로 이해하지 않기로 정한 지 오래였다. 그렇다고 해도 그의 경우는 해도 너무하기만 했다. 아무리 구주 신마 철용백을 만나 가르침을 전해 받았다고 할지라도 저건 너무했 다. 선주혁이 만들어 낸 일 장은 은설연에게 있어서 경이(驚異), 그 자체였던 것이다. "제삼략(第三略), 재공(再攻)!" 철갑기마단주의 다급한 명령이 떨어졌다. 철갑묵린단은 전문적 으로 집단전 훈련을 받아왔지만 고수를 상대할 방안 역시 훈련 내 용에 포함되어 있었다. 최하 열 기 단위로 조를 구성,절정고수들을 효을적으로 상대하는 훈련을 받아 온 것이다. 그가 언급한 제삼략은 패종회의 절정에 달한 고수를 상대하는 방법이었다. 설마하니 이곳 노룡산에서 그 정도의 고수를 만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지만 상대의 무지막지한 장력을 확인했으 니 더 이상의 방심은 있을 수 없었다. 패종회가 천하를 지배하기 위해 철갑묵린단의 역할이 얼마나 중 요한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외진 곳에서 무의미한 손실은 최 대한으로 줄여야 하는 것이다. 그의 명령과 더불어 각 열 기씩의 철갑묵린단이 삼 개 조로 나뉘 어 세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선주혁의 사위를 봉하려는 것 이다. 철갑묵린단이 이와 같이 움직인 후, 어떤 방법을 사용하는지 선 주혁은 잘 알고 있었다. 만년흑오철로 만들어진 사슬을 이용, 상대 의 움직임을 봉쇄한 후 무지막지한 공격으로 끝장을 내는 장면을 이미 소설에서 봤기 때문이었다. '흥! 뜻대로는 안 될 것이다.' 철갑묵린단의 청총마들이 채 몇 걸음을 움직이지도 않았을 때, 선주혁의 손이 다시금 하늘을 향했다. 아까와는 달리 순식간에 구체가 허공에 떠올랐다. 그간 스스로 의 무공에 대한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 얻어 낸 성과였다. 선주혁은 다른 이들과달리 단전에 내력을 축적하지 않는다. 전 신에 내력이 흩어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특정한 양의 내력을 모으는 데는 보통 사람들과 속도에 서 큰 차이를 보일 수 있었다. 즉, 팔에 있는 내력만을 장심에 집중하는 속도는 당연히 단전에 서 출발한 내력이 장심에 이르는 속도보다 훨씬 빠른 것이다. 북두 폭렬장을 보완하기 위한 고심 끝에 얻은 결론이었다. 그는 이와 같은 이치를 이용 순식간에 공중에 혈마자광기를 만 들어 낼 수 있었다. 난데없이 나타난 자색구체에 철갑묵린단은 잠시간 주춤했고, 그 짧은 틈만으로도 선주혁이 내력을 혈마자광기에 집중하기에 충분 한 시간을 제공했다. 전에 비해 족히 두 배는 커 보이는 거대한 자색의 구체. 철갑묵린단은 뼈가 시릴 정도의 위압감을 느끼면서도 말의 옆구 리를 걷어찼다. 어차피 제삼략의 진형은 다수의 희생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쇠 사슬에 의해 움직임이 봉쇄되었다 해도 절대의 고수를 상대할 경우 최전방의 인원 중 대부분은 몰살되는 것이 자명했다. 생명이 경각 에 달한 절대고수의 공세는 만년흑오철로 만들어진 갑주라 해도 감 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알고도 내려진 명령이고, 명을 받은 이상 공격 은 감행되어야만 했다. 삼 개 조에 해당하는 철갑묵린단이 망설임 없이 말을 모는 것은 이와 같은 이유 뿐만은 아니었다. 단 한 수에 철갑묵런단 삼십여 기를 몰살 시킬 방법은 천하의 어 디에도 없다. 그것이 철갑묵린단원들의 믿음이었다. 단 몇 명이라도 살아남아 적에게 타격을 주거나 움직임을 봉쇄 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후발대가 알아서 할 것이다. 비록 운이 좋지 않아 먼저 죽게 되는 것이 자신이라 할지라도 전우들의 복수가 보 장되어 있는 것이다. 강력한 발길질에 놀란 말이 쏘아지듯 앞쪽으로 달려 나갔다. 그들이 세 방향으로 흩어지려는 그 순간. 공간을 질주하던 별의 파편이 그들을 휘감듯 다가왔다. 섬뜩한 자광이 눈앞을 가득 채우고, 불가항력의 거력(巨力)이 전 신을 짓누르는 것을 느꼈다. 너무도 짧은 순간임에도 전신 혈맥에서 지독한 통증이 느껴지 고, 고통의 인지와 더불어 세상이 불게 변했다. 그렇게 삼십여 기 철갑묵린단의 인마가 이승과의 연을 끊었다. 쿠아아아아앙. 거칠게 솟구치는 흙먼지와 자색의 잔광(殘光). 그리고 비위를 자극하는 진한 혈향(血香)과 혈무. 중인들의 시선은 그 모든 것을 머금고 있는 직경 십오 장의 거대 한 구덩이를 향해 있었다. 다가가 내려다보지 않으면 바닥이 보이 지 않을 정도의 깊이를 가진 구덩이였다. 하지만 아무도 몸을 움직여 구덩이 안쪽을 살피려는 시도는 하 지 않았다. 발밑에서, 말을 통해 전해져 온 충격만으로도 그 안의 모습을 익히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인들이 구덩이 안쪽을 확인하지 않는 것은 비단 상황을 알 수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한 인간이 만들어 냈음을 믿기 힘든 거력을 마주했기에 일시 간 마비되어 버린 것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공포와 인식의 한계를 벗어난 충격이 그들의 사고를 마비시켰다. 심지어는 말들조차 숨을 죽인 채 꼼짝을 못하고 있었다. 오직 한 명. 유성의 기운을 담아 장력을 발출한 선주혁만이 눈에 보이지 않 을 정도로 몸을 떨고 있었다. 상관정필은 상궤를 벗어난 엄청난 장력의 공포에 젖어 있는 와 중에도 그와 같은 장면을 놓치지 않았다. "노, 놈이 내상을 입은 듯하오!" 짧은 말이었지만 철갑묵린단주는 상관정필의 말을 알아들었다. 무리한 내력의 운용은 치명적인 내상이나 주화입마를 불러온다. 아 무리 절대의 고수라 하더라도 방금 전과 같은 장력을 연이어 두 번 이나 전개했으니 필시 무리가 왔을 터였다. "제삼략! 출(出)!" 다시 한 번 대(對)절정고수용 진형을 갖추는 제삼략의 가동을 외 치고 삼십 기의 철갑묵린단이 출전할 채비를 갖춘다. 하지만 이들은 보지 못했다. 끊임없이 떨고 있는 선주혁의 입가에 몇힌 미소를‥‥‥. 선주혁의 떨림은 일종의 전을이었다. 남궁연과 유성을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던 중 유성의 기운을 담아 장력을 전개하면 어떨까 하 는 발상을 하게 되었다. 큼직한 유성 하나가 핵폭발을 능가할 정도의 위력을 가겼음을 알기에 제대로만 전개할 수 있다면 막강한 장력이 되리라 생각한 것이다. 이른바 북두폭렬장법 중 첫 번째인 북두연환장, 두 번째의 북두 진공참에 이은 세 번째 자신만의 무공으로 더할 나위가 없다고 생 각한 선주혁. 그는 이후부터 유성의 기운을 장력에 담는 방법의 연구에 들어 갔다. 매일 밤하늘을 바라보며 유성의 기운을 느끼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쉬운 일만은 아니 었다. 저쪽 세상과는 달리 공기가 맑아 별은 무수하고 유성 역시 심심 치 않게 볼수 있었지만, 워낙 짧은 순간에 불과해 그 기운을느끼 고 응용하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선주혁은 포기하지 않았다. 백존을 상대할 수 있는 실마리가 주 어진 이상 포기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매일 방을 하늘만 바라보며 지낸 끝에 장력에 응용할 수 있을 정도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 처음으로 북두폭렬장의 제이식인 북두유성폭(北斗流星暴)을 전개 했다.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만년흑오철을 두부처럼 뭉개 버릴 정도의 엄청난 장법이 탄생한 것이다. 아직은 수발이 자유롭지 못했지만, 그 위력만큼은 선주혁 을 만족시키고도 남았다. 무엇보다 선주혁을 만족케 하는 것은 진력의 사용이었다. 타인이 생각하는 것처럼 선주혁은 무리해서까지 내력을 끌어올려 장력 을 발출한 것이 아니었다. 유성의 기운이 만들어 낸 가공할 위력일 뿐, 이미 천하제일을 자 부할 정도의 선주혁의 내력에는 부족함이 없었던 것이다. 선주혁이 몸을 떤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이 정도면 백존이 나 무진진인에게 쉽게 패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에 희열을 느꼈딘 것 이다. 그것도 모르고 박차를 가하는 철갑묵린단원들. 거대한 구덩이를 돌아 가공할 장력의 소유자를 향해 달려 나가 려는 그 순간. 새로운 유성이 하늘에 긴 궤적을 그렸다. 이번에 떨어진 유성과 같은 장력은 철갑묵린단원이 밀집해 있는 장소를 강타했다. 요란한 말의 울부친음. 공포와 고통을 담아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짤막한 비명. 그 모든 것을 삼켜 버린 굉음. 철옹성을 방불케 했던 철갑묵린단의 진형이 흐트러지고 저마다 상황을 파악키 위해 최선을 다했다. "‥‥‥." 한 차례의 굉음 이후 다시금 찾아온 정적. 누가 입을 열 수 있으랴. 무리한 내력의 운행으로 내상을 입었으리라 여겼던 상대가 이전 에 비해 더욱 맹렬한 장력을 발출한 것이다. 두려움을 모르는 철갑 묵린단원조차 떨리는 손에 억지로 힘을 줘야만 했다. 아직도 거칠게 숨을 내쉬는 말의 옆구리를 조이는 허벅지에는 당최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다, 단주‥‥‥." 누군가 복면 아래의 입술을 달싹여 철갑묵린단주를 불렀다. 철갑묵린단주는 왜 수하가 자신을 부르는지 알고 있었다. 상대 는 인간이 아니다. 인간을 초월한 적을 정면으로 마주해 승산은 없 는 것이다. 수하는 감히 말을 꺼낼 수는 없었으나, 간절한 마음으로 퇴각을 요청하는 것이다. 철혈(鐵血)의 심장을 지녔음을 자부하던 철갑묵린단주 역시 이 순간만큼은 갈등하지 않을수 없었다. 벌써 칠십여 기에 달하는단 원들을 잃었다. 무림을 휩쓸어야 할 철갑묵린단의 역할을 생각하면 치명적인 피해였다. 더구나 전 인원을 희생시킨다 해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었다. 설 마하니 철갑묵린단이 단 한 명에게 몰살당할 리는 없했지만, 단원 대부분과 단 한 명의 목숨과 맞바꾼다는 것은 손해일 수밖에 없는 일이 었다. 수하의 부름에 순간적인 갈등에 휩싸여 있는 철갑묵린단주의 눈 에 기이한 현상이 잡혔다. 가공할 장력을 쏟아 웃던 괴인이 난데없이 신형을 날려 구덩이 주변으로 흩어진 철갑묵린단의 진형 안으로 뛰어든 것이다. 실로 귀신같은 신법이었다. 신법은 놀랍기 그지없었으나 외려 붉은 술의 투구를 쓴 단주의 입매에 미소가 떠올랐다. 적은 거창을 든 철갑묵린단원이기에 근접전을 노리고 나섰으리 라. 앞선 세 번의 공격과 같이 어마어마한 장력을 날리는 데는 내력 의 한계가 있을 터. 무림의 고수답게 철갑묵린단의 진형을 흐트러뜨린 후 각개격파 를 노리고 있을 터였다. "쇄(鎖)!" 상황을 극적으로 역전시킬 호기였다. 그 순간을 놓치면 남는 것 은 후회뿐임을 알고 있는 철갑묵린단주는 다급히 외쳤다. 휘이이익. 촤르르르. 허공을 가르고, 쇠와 쇠가 맞부딪치며 펼쳐지는 소리가 요란했 다. 만년흑오철로 만들어진 쇠사슬이 얽혀들며 선주혁의 주위를 포 위하듯 감싼 것이다. "회(回)!" 철갑묵린단주의 명에 따라 각 단원들의 말이 달리기 시작했다. 선주혁의 주변으로 철갑묵린단으로 구성된 수 겹의 원형의 벽이 쳐 지고, 그 벽이 회전에 회전을 거듭했다. 그러자 벽과 같은 철갑묵린단의 움직임에 따라 사슬 역시도 위 맹한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쇠사슬을 쥔 철갑묵린단원들의 손목이 교묘히 움직였다. 그에 맞춰 회전 중인 쇠사슬이 뱀처럼 꿈틀거렸다. 두 가지의 움직임은 쇠사슬 전체를 거대한 둔기로 변화시렸다. 어지간한 고수라면 쇠사슬에 몸이 닿는 순간 내장이 파열될 것이 분명했다. "파(破)!" 쇠사슬을 들고 있는 철갑묵린단원들과 나란히 달리던 단원들의 창이 지면과수평을 이루며 들려졌다. 선주혁을 중심으로 한 철갑 묵린단원들의 회전 폭이 좁혀졌다. 이대로라면 선주혁은 만년흑오철로 만들어진 거창에 걸레처럼 찢겨 나갈 터. 신형을 날려 몸을 피하려 들면 가공할 움직임을 보이는 쇠사슬 이 그를 가격할 것이다. 설령 내상에서 무사할지라도 움직임에 장애가 발생하는 순간, 거창의 날카로운 창극이 그를 산적처럼 꿰뚫을 게 분명했다. 남궁일이 검을 고쳐 쥐고, 은설연이 신형을 날리려 했다. 위험을 느낀 그들이 선주혁을 돕기 위해 나서려는 것이다. 하지만 선주혁은 산보를 나선 한량처럼 여유롭기만 했다. 이미 자신의 실력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기에 그간 고심해 왔던 또 하나 의 장력을 시험하고자 할 뿐이었다. 어느새 하늘을향해 들려 있던 그의 손이 수직으로 하강하기 시 작했다.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동작이었다. 앞서는 하늘로 치켜 올렸던 손을 적을 향해 뻗었고, 이번에 선주 혁의 장심이 가리키는 방향은 자신이 서 있는 지면이었다. 아예 한 쪽 무릎까지 굽혀 손을 아래로 향하는 모습은 마치 지면을 때리는 듯했다. 그 동작의 의미는 결코 저자의 약장수들이 돌멩이를 격파하는 것과 비교할 수 없었다. 선주혁의 손짓과 더불어 하늘에 떠 있던 자광이 수십, 수백으로 흩어졌다. 흩어진 자광들은 선주혁의 주변으로 원을 그리듯 쏟아져 내렸 다. 마치 작은 유성의 비가 내리는 듯했다. 선주혁의 네 번째 장법인 북두유성우(北斗流星雨)가 전개된 것이 다. 이와 같은 장력에 대한 발상은 그가 저쪽 세상에서 읽었던 판타 지 소설에서 기인했다. 판타지 소설에 종종 등장하는 마법 중에 메테오라는 것이 있다. 메테오를 무협식 표현을 빌려 표현하자면 유성소환술(流星召嗚術) 정도가 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우주에 떠도는 유성을 소환해 특정한 지역을 초 토화시키는 마법이다. 적어도 성 하나, 크게는 한 나라를 멸망시킬 정도의 위력을 가진 마법으로, 극강한 마법의 대명사나 다름 없는 것이 바로 메테오였다. 물른 메테오란 정말이지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겠지만, 백존을 상대하기 위해 무공의 증진에만 고심해왔던 선주혁에게 있 어서는 매력적인 위력이 아널 수 없었다. 기왕 유성의 기운을 이용 해 장법을 창안코자 한 만큼 선주혁은 자신의 장력으로 유성우를 재현코자 노력했다. 그리고 예상치 못했던 장소, 시간에 찾아온 실전의 기회. 선주혁은 망설임 없이 자신이 만들어 낸 북두유성우를 전개했 고, 그 결과는 스스로도 놀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물론 소설 속에서 묘사되던 메테오 본연의 위력에는 턱없이 모 자랐다. 하지만 무려 오십 여에 달하는 철갑묵린단을 단 한 번의 공격으 로 쓸어버린 북두유성우는 가히 최고의 결과랄 수 있었다. 거대한 행성의 조각처럼 구체에서 분열된 빛은 자우(紫雨)가 되 어 땅을 향해 치달았다. 무작위로 쏟아진 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철갑묵린단원은 없었 다. 빛의 화살은 다시없을 이기(利氣)를 뽐내듯 만년흑오철로 된 갑 주를 뚫었다. 갑주를 관통한 빛은 청총마의 갑주마저 용납지 않았 고 결국은 지면에까지 이르렸다. 남은 것은 점성을 상실한 듯한 혈류뿐. 선주혁의 주위는 말 그대로 초토화되었다. 북두유성우의 위력에 자족하며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선주혁. 목숨을 유지하고 있는 모두는 눈앞에서 거대한 산맥이 솟구치는 느낌을 받아야만 했다. 선주혁의 존재감이 그토록 강렬했던 것이다. "퇴, 퇴각(退却)!" 철갑묵린단주는 더 이상 망설일 이유도, 여유도 찾지 못했다. 말의 고삐를 거칠게 잡아끌며 퇴각령을 내리는 것만이 그의 최 선이었다. 히히히잉. 말들은 울부짖고 이미 흐트러진 진형은 더욱 엉망으로 변했다. 퇴각령이 떨어진 이상 살아남는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어딜!" 선주혁은 다시금 장력을 모았다. 이번에는 가슴 높이 정도에 떠오른 자색의 구체. 그것은 선주혁의 손을 쫓아 지면과 수평을 이뤄 날아갔다. 앞쪽 열에 밀려 아직까지 출발하지 못한 채 뭉쳐 있던 철갑묵린 단에게 있어 션주혁의 일 장은 재앙 그 자체였다. 사오십 여에 달하는 철갑묵린단이 선주혁의 장력에 휘말려 든 것이다. 거대한 압력, 위맹한 충격. 인마는 거침없는 힘에 의해 낙엽처럼 쓸려 갔다. 선주혁에 인접했던 철갑묵린단원들은 혈무가 되어 허공으로 흩 어졌고, 거리를 확보했던 단원들은 가공할 충격에 혈맥이 찢어져 쓰러졌다. 선주혁의 손짓 몇 번에 철갑묵린단의 절반이 죽음을 맞이한 것 이다. 살아남은 자들의 말굽 소리가 잔향(殘響)을 만들어 됐다. 그들은 동료의 죽음에 애도도, 분노도 느낄 수 없었다. 이미 하나의 몸이랄 수 있는 자신의 애마를 재촉하는 것만이 그들의 최선이었다. 무거운 흙먼지를 일으키며 도주하는 철갑묵린단. 선주혁은 그들의 뒤를 쫓지는 않았다. 살육을 즐기는 취미가 없 는 한 오늘은 이 정도로 충분하다 여기는 것이다. "후우‥‥‥!" 그가 긴 호흡을 내쉰 후 몸을 돌렀다.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던 그의 얼굴 표정이 변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일행의 시선을 느낀 탓이었다. 정기충천의 평소 그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얼굴에 부담스러운 그 들의 시선이었다. 독고건이라는 자가 금강불괴의 경지에 이른 엄청난 고수라는 것 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천하제일을 논할 수 있을 정도란것 역시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금강불괴의 경지나 천하제일을 다투는 것 역시 체감하기 에는 상당히 추상적인 개념이었다. 막연하게 대단한, 혹은 굉장하 다는 수식이 붙은 고수 이상으로 다가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조금 전 선주혁이 보여 준 엄청난 장력은 그들에게 있어 서 독고건이 어떤 인물인지 확연히 각인시켜 주었다. 아무리 금강불괴의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고는 하나, 복건의 촌 구석에 틀어박혀 있던 노인에 불과하다는 마음이 은연중에 있었다. 더구나 외모 또한 자신들과 비슷한 데다 억지로 점잖은 척하는 말투가 약간은 우습게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가 선보인 말 그대로 경천동지(驚天動地)의 한 수, 한 수를 본 이상 그런 마음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기적과 같은 위력의 장력을 확인했으니 절대의 고수라는 개념이 그 들의 머릿속에 확고히 자리 잡은 것이다. 한 시진 전에 보았던 독고건과 지금의 독고건은 그들에게 있어 서 다른 인물이었다. 사람은 같되 그 역량이 다른 바를 깨달았으니 감히 말을 붙이기 조차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다. "대‥‥‥ 체 방금 전의 무공은 무엇이었습니까?" 남궁일 역시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겉으로 드러내 본 적은 없지 만, 내심 천하제일을 넘보던 그가 볼 때도 선주혁이 전개한 무공은 확실히 충격적이었다. 이에 평소의 당당함과는 달리 머웃거리는 음성으로 질문을 한 것이다. "아‥‥‥‥ 북두유성폭과 북두유성우라는 무공이오. 노부가 시간 날 때마다 만들어 본 변변치 않은 무공일 뿐이라오. 사실 실제로는 처음 사용해 본 무공이라 힘 조절을 제대로 못한 것 같소이다. " 선주혁은 조금은 멋쩍게 웃으며 답변했다. 그는 일행의 표정이 싹 바뀐 것을 보고 자신의 손속이 지나쳤기 때문이라 여겼다. 어찌 되었건 이들은 뿌리 깊은 정도 문파의 후예들이었다. 망설임 없이 일 장에 수십 명을 뭉개 버리는 잔인한 수법을 용납 키 힘들었을 것이라 염려하는 것이다. "지, 직접 창안하신 것이라는‥‥ 말씀이십니까?" 제갈중양이 극히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그렇소만‥‥‥ 뭐가 잘못되었소?" "아, 아닙니다. " 제갈중양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소생 남궁일은 독고 대협으로 인해 새롭게 안계를 넓했습니다. 과연 초식명 그대로 유성의 힘을 고스란히 담아낸 듯한 장법이더군 요." 남궁일은 감탄하는 심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새삼스럽게 선주 혁에게 두 손을 맞잡아 보였다. 선주혁은 그제야 남궁일 등이 자신의 잔인한 수법에 경계심을 품은 것이 아님을 깨닫고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천만의 말씀이시오." "감히 독고 대협께 가르침을 구하고자 합니다. 부족한 제 눈에는 독고 대협의 장력은 유성 그 자체의 느낌이 강했습니다. 아니 마치 진짜 유성 자체인 듯 느껴지더군요. 어찌하면 장력에 그와 같은 기 운을 담을 수 있는 것입니까?" 진지하기 이를 데 없는 남궁일의 질문과그 공손한 태도에 선주 혁은 저도 모르게 우쭐하여 답했다. "내가 곧 우주요, 우주가 곧 나일진대 그것이 무에 어렵단 말입 니까? 내가유성을봤고, 그 유성을 닮고자 하니 내 몸에서 비롯된 장력도 곧 유성을 닮는 것이 아니겠소?" "‥‥‥!" 선주혁의 말을들은 남궁일의 표정이 크게 변했다. 동시에 그는 털씩 자리에 랄아 두 눈을 감아 버렸다. "하아!" 그 모습을 본 제갈중양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독고건의 대답에 남궁일이 뭔가의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제갈중양은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독고건의 말에 대체 무엇이 담겨 있는 건지 궁금하기도 했고, 그 가운데 깨달음을 얻은 남궁일 이 부럽기도 해 절로 한숨을 쉬게 되었다. 철갑묵린단과 같은 단체를 키워낸 패종회에 대한 조사는 서둘러 야할 일이지만, 그렇다고 남궁일의 깨달음을 방해할 수는 없었다. 일행들은 남궁일이 한시라도 빨리 눈을 뜨기만을 기다려야만 했다. <<6>> "대체 저 장력은 무엇인가?" 악구윤이 흥분을 감추지 못한 표정으로 물었다. "사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북두유성폭과 북두유성우라고 말 입니다. " 남지학의 대답이었다. "자네는 저와 같은 장법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투로군." 수조문은 여전히 미심쩍은 모양이었다. "사제의 말대로 자신이 창안한 무공입니다. 제가 알 리가 없지 요." "저런 장법은 본인이 직접 창안했다고?" 주위의 음파를 내력으로 차단했다고는 하나, 행여 밖으로 들릴 까 염려될 정도의 높은 소리로 악구윤이 외쳤다. "바로 얼마 전에 내게 초식에 대해 묻던 자네 사제일세. 만약 그 때 초식의 모든 것에 대해 알아들었다고 해도, 자네 사제는 정의련 에서 보낸 시간이 주어졌을 뿐이네. 그 짧은 시간에 저런 무공을 창 안할 수 있다고 보는가?" 종극 역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불가능하다고 여겨질수록 사제가 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 제의 재능은 둑에 갇혀 있는 물과 같지요. 작은 구멍 하나면 둑을 허물고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기에 충분합니다. " "아무리 천고의 자질을 지녔다고 해도 자네의 사제는 지나친 감 이 있네. 저와 같은 수법은 절정고수에게는 큰 위협이 안 될지 몰라 도 적어도 다수의 적을 상대하는 데에 있어 무림에서 최고라 말해 도 부족함이 없을 걸세. 그 정도의 무공이 고작 한 달로 채 안 되는 시간에 창안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종극은 남지학이라는 한 명이 이토록 불합리한 상황을 납득하는 것 자체가 억을하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 역시도 말이 안 된다고 외 쳐야 속이 시원할 것만 같아 보였다. "종 장로님을 비롯해 여기 계신 분들과 저는 큰 행운을 안고 태 어난 것입나다. " 난데없는 남지학의 말에 종극, 악구윤, 수조문은 어리둥절한 표 정을 지 었다. "사제는 종사(宗師)의 자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도 달마 조사 나 삼봉 진인에 못지많을 것입니다. 소림과 무당을 세운 분들에 못 지않은 대종사(大宗師)의 탄생을 함께 할 수 있을 터이니 저희 모두 가 살아 있는 신화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 무인으로서 그보다 큰 행 운이 어디 있겠습니까?" "‥‥‥‥!" 종극 등은 할 말을 잃었다. 선주혁이 달마나 장삼봉과 비견되는 터이니 더 이상의 의문도 필요 없었다. 그가 하룻밤 새 천하제일의 지법이나 금나수법을 창안했다고 해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악구윤은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비록 달마나 장삼봉이 정 도를 대표하는 고수라지만 무인으로서 그들에 대한 존경심은 적지 않았다. 그런 대단한 자들과 갓 약관을 넘어선 애송이가 비견되는 것 자체가 불만인 것이다. 하지만눈앞에서 필쳐진 엄청난 장력을 확인했다. 그 대단한 무 공이 고작 보름여의 기간 동안 창안된 것이란다. 바로 얼마 전에 초식의 의를 깨달은 녀석이 만든‥‥‥. 따라서 불만을 토로할 수는 없었다. 그 정도의 능력이라면 정말 이지 달마나 장삼봉 정도의 인물이 되지 말라는 법도 없었기 때문 이다. 마음은 부정하고 싶어도 현실은 남지학의 말처럼 대종사의 탄생 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인 셈이었다. = Chap.4 - 스승 대우 = <<1>> "소생 남궁일, 향후 독고 대협을 대하는 데에 있어 스승으로서의 예를 갖출 것을 맹세합니다. " 선주혁은 감당치 못할 상황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무려 반나절에 걸친 명상 끝에 남궁일은 눈을 떴다. 사형이나 단 목하진처럼 며칠에 걸친 명상이 아니어서 천만다행이라 여길 때, 남궁일이 입을 열었다. 그간 커다란 벽에 부딪힌 듯 무공의 진보가 없었다고 했다. 무수 한 명상을 통해서도 깨달음을 얻을 방도가 없어 좌절 직전의 심정 이 었다고 말했다. 한데 선주혁의 말 한마디에 떠오른 영감을 통해 단숨에 벽을 넘 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감사에 감사를 거듭하던 남궁일이 갑작스럽게 선주혁을 향 해 절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무려 아홉 번에 걸친 절. 그것은 스승을 향한 구배지례(九拜之禮)였다. "가, 감당할 수 없소이다. " 이런 상황은 선주혁으로서는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아무리 나이 먹은 노고수 헹세를 한다지만 천하제일의 기계 중 한 명이자, 남궁세가의 소가주인 남궁일의 사부가 된다는 것을 어 찌 상상할 수 있겠는가? "의발(衣鍊)을 전수받을 수 있는 기명제자라고 생각하지 않했습 니다. 감히 사부라 호칭하지도 않겠습니다. 그저 제게 베푸신 가르 침에 대한 큰 은혜만을 잊지 않겠음을 약속드릴 뿐입니다. 미덥지 못한 바가 크나 저 혼자만의 생각일 뿐이니 독고 대협께서는 편히 생각해 주시면 됩니다. " "그, 그게‥‥‥." 선주혁으로서는 더 이상할 말이 없었다. 자신이 뭐라 여기던 남 궁일은 스승의 예로 선주혁을 대하겠다는 말이었다. 자기가 그렇게 행동하겠다는데 더 이상 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축하 드려요, 독고 대가! 남궁 소협과 같은 기재에게 스승의 예 를 받는다는 것은 크나큰 복이 아닐 수 없죠. 안 그래요?" 선주혁은 은설연을 향해 난감한 표정을 지있다. 왜 은설연까지 나서서 이러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 향후 남궁 소협이 독고 대가를 부친과 같이 모실 터이니 독고 대가의 노후는 보장된 것과 다름없 네요. 설마하니 남궁 소협이 이런저런 이유를 대어 말을 바꿀 리는 없을 테니 말이에요." 한술 더 뜨고 나오는 은설연의 말에 남궁일이 입을 열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 남궁일의 답변에 은설연의 입매가 위로 향했다. 그녀가 원했던 것은 남궁일이 훗날 선주혁의 진정한 정체를 알았을 때, 그를 속박 할 만한 답변이었다. 그리고 말을 바꾸지 않겠다는 확답을 얻어 낸 것이다. [좋게 생각해요. 여러모로 쓸모가 많을 데니까!] 은설연의 전음에 선주혁은 남궁일에게 사양하는 것을 멈쳤다. 그러면서도 선주혁이 마땅치 않은 표정을 짓자 은설연의 전음이 잇 따랐다. [물른 그가 단순히 당신의 가르침에 감사했기 때문에 제자 노릇 을 하겠다고 자처하는 게 아닌 건 알고 있죠? 당신이 아까 보여 준‥‥‥, 그 엄청난 무위를 정의련에 묶어 두려는 거죠. 제자는 사부 를 극진히 모셔야 하지만, 사부는 제자를 아끼고 보호해야 하잖아 요? 남궁일이라는 사람, 보통 인물이 아니니 선 소협께서는 조심하 셔야 할 거예요.] 당연히 그 정도는 짐작하고 있으리라 생각하면서도 은설연은 선 주혁에게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천계와 범인 사이를 오락가락하 는 인물인지라 어쩐지 안심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저 사람 자신은 딱히 조심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군. 할아버지라 해도 저 사람과 맞서면 승부를 장담하기 힘들지도 모르 니 누굴 두려워할 필요가 있을까?' 전음을 보낸 후, 은설연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가 철갑묵린단을 상대할 때 보여 준 무위는 같은 편에 선 그녀조차 소름이 돋을 정도 였다. 설마하니 천사지황이라 불리는 조부와 맞서 이길 리야 없겠지 만, 그것도 지금의 결론일 뿐이었다. 선주혁의 무공이 발전하는 속 도는 그의 무공 자체보다 놀라울 정도였다. 내일의 그는 또 어떻게 변해 있을지 모르는 것이다. <<2>> 무산삼협(巫山三峽) 중 세 번째인 서릉협(西陵峽)에 접어들자 물 의 성질이 변했다. 황갈색의 물은 하얀 포말을 토해 내며 보고 있노 라면 현기증이 일만큼 거칠게 굽이쳐 흐르는 것이다. 남궁일 등은 선두(船頭)쪽에서 제갈공명(諸葛孔明)이 병서와 보검 을 보관했다는 병서보검협(兵書寶劍峽)에 관한 이야기가 한창이었 다. 절벽의 곳곳에 걸려 있는 현관(縣棺: 벼랑이나 나무에 매달려 있 는 관)들의 기이함과 제갈무후(諸葛武候)에 관한 이야기는 끝이 날 줄을 몰랐다. 제갈세가가 제갈량의 후손임을 자처하는 지라 제갈중양의 이야 기는 끝이 날 줄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들의 모습 중에서 선주혁은 보이지 않았다. 선주혁은 남궁일 등이 있는 곳과는 반대편이랄 수 있는 선미(船 尾) 한쪽에 쭈그려 앉아 있었던 것이다. 병서보검협은 기나긴 서릉협 중에서도 수심이 깊고 물살이 빠른 것으로 유명했다. 강의 양쪽이 깎아진 듯한 절벽이어서 사공이 조 금만 방심해도 편주(片舟)는 박살이 날 터였다. 한데 늙은 사공의 노질은 여유롭기만 했다. 처음에는 이 거친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것을 염려해 사 공에게로 온 선주혁이었다. 늙은 사공이 힘에 부쳐 하면 옆에서 도 와줄 작정이었다. 사공의 모습에서 공 노인과 연 노인을 연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공에게 선주혁의 도움은 전혀 없었다. 덩치 큰 장한이라 해도 서릉협에서만은 잔뜩 긴장을 하건만, 늙 은 사공은 금방이라도 눈을 감고 잠을 청할 듯한 표정으로 노를 젓 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쪽에 쭈그려 앉아 늙은 사공이 노를 젓는 모습에 집중한 채, 한참을 바라보던 선주혁이 결국 입을 열어 물었다. "노인장, 이렇게 물살이 거센데 힘들지 않으십니까?" "허허, 노질을 한 지 벌써 사십 년이 넘었으니 이골이 나도 한참 전에 났지요. 비가 온 뒤도 아니라 별달리 힘들 것도 없다오." "그래도 이렇게 깊고 빠른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데‥‥‥?" "허허헛, 이 촌로(材老)도 처음에는 공자처럼 생각을 했었다오. 아니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지요." "‥‥‥?" "배가 물살을 거슬러 오른다고 여겼던 거라 생각했다는 게지요." "에? 지금 이 배가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게 아니란 말입니 까?" "물론 강이 흐르는 방향과 반대로 움직이는 건 사실이지요. 하지 만 결코 물의 흐름에 거스르는 건 아니외다. " 알쏭달쏭한 노인의 말에 선주혁은 여전히 의문에 가득 찬 표정 이 었다. 그 표정을 살핀 늙은 사공이 주름진 입을 열었다. "사실 이 늙은이가 무식하여 공자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소이다. 뭐랄까‥‥‥, 노를 저으며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건데, 뭐라 설명하나‥‥‥?" 늙은 사공은 잠시 골 깊은 주름의 깊이를 더해 보았지만, 딱히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잠시 고심을 하다가 짧은 한숨 끝에 입을 열었다. "이쪽으로 와서 이 늙은이의 노질을 한번 살펴보시겠수?" 늙은 사공의 말에 선주혁은 몸을 일으켰다. 사공은 손과 물에 달고 닳아 매끌매끌해진 긴 노를 계속해 젓기 를 멈추지 않고서 입을 열었다. "꽤 긴 이야기가 될 게요." 선주혁이 들을 준비가 되었는지에 대해 짧게 살피는 투였다. 낯 선 젊은이가 진중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확인 하고서야 늙은 사 공의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이 늙은이가 처음 노를 젓기 시작할 때, 주변에서는 손가락질을 했다오. 보시다시피 체구는 작고 삐쩍 말랐으니 노를 젓기에는 무 리라는 것이지요. 해서 물길이 잔잔한 곳에서 죽자고 노를 저어 완 력(腕力)을 키우기 위해 꽤 애를 썼다오. 남들보다 힘이 없으니 팔 힘을 키워 보충하려 했던 것이지요." 늙은 사공의 시선이 허공에 머물렀다. 아마도 젊었던 그 시절을 회고하는 것이리라. "그렇게 힘을 키워 노를 젓자 제법 노질을 한다고 인정을 받기 시작했소. 조그마한 체구에 삐쩍 마른 놈이 꽤 거친 물살을 가르는 모습이 기특했던 것이었겠지요. 허허헛." 늙은 사공은 당시의 자신이 스스로도 기특한 듯 너털웃음을 터 뜨렀다. "주변의 사공들이 저마다 칭찬을 하자, 젊은 혈기에 배를 몰고 이곳 서릉협에 도전을 했다오. 완력도 제법 붙었겠다, 나름대로 자 신감을 가지고 물길을 트려 한 것이지요. 하지만 서릉협의 초입에 서 배를 돌려야만 했소. 힘겹게, 힘겹게 노를 저었지만, 뒤로 밀리 지 않는 것만이 다였으니까 말이오." 선주혁은 노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 정도의 거친 물살을 거스르는 일은 범인에게는 힘이 들 수밖 에 없었다. "이 늙은이는 크게 실망을 했소. 사람마다 타고난 힘이란 게 다 르니 아무리 단련을 한다 해도 이 늙은이가 서릉협을 거스르는 물 길을 트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 것만 같았던 게지요." "세상에 불가능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노력을 해서 안 되는 일은 없지요." "허허헛, 젊은 공자께서는 자신감이 넘치시는구려, 당시 이 늙은 이는 그렇게 생각을 하지 못했소이다. 그저 분수에 맞게 살아가기 로 했지요. 한데‥‥‥, 그렇게 편한마음으로 근 십여 년 동안 노질 을 하는 동안 나름대로의 요령이 생기는 게 아니겠소?" "어떤 요령 말씀이십니까?" 선주혁은 노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하나의 길을 오랫동안 걸어온 사람에게는 분명히 특별한 것이 있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연 노인과 공 노인을 접해 본 경험 때문 이었다. "단순히 팔뚝의 힘만으로 노를 젓는 게 아님을 알게 된 것이지 요. 자, 이걸 보시오." 노인은 선주혁이 알기 쉽게 몸을 꼿꼿이 세운 채로 팔만을 움직 여 노를 젓는 흉내를 냈다. 노인의 노질이 어설퍼지자 배는 당장이 라도 뒤로 물러날 듯했다. 사공은 재빨리 노질을 바꾸며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온몸을 이용한 노질을 익히게 되었다다오. 같은 노질 이라도 이렇게 다리와 허리, 그리고 온몸의 무게를 실으면 한결 수 월하게 배를 앞으로 몰 수 있었던 것이지요." 늙은 사공은 이전과는 달리 동작을 크게 해 노질을 했다. 노에 몸을 실어 앞으로 밀고 뒤로 당기는 식이었다. 과연 완력만으로 배 를 모는 것에 비해 훨씬 수월해 보였다. 노인의 그와 같은 시연에 선주혁은 내심 고소를 머금었다. 저 정 도의 요령은 십여 년이 아니라 한 시간만 해도 익힐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창 흥이 나 설명을 하는 노인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 은 마음에 묵묵히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젊은 공자께서는 참으로 너그러우시구려. 보통 사람이라면 겨 우 그 정도의 요령을 익히는 데 무슨 십 년씩이나 필요하냐며 이 늙 은이를 비웃었을 텐데‥‥‥." "하하, 어르신께서 말씀하시는데 비웃다니요." 내심을 들킨 것 같아 선주혁을 살짝 얼굴을 붉히며 어색한 웃음 을 터뜨렸다. "허허허, 젊은 공자의 이름이 어찌 되시오?" "저는 선‥‥‥, 독고건이라고 합니다. 이름은 어찌 하여‥‥‥?" 친근한 표정을 짓는 늙은 사공의 질문에 하마터면 선주혁이라는 이름을 말할 뻔했다. 노인을 속이는 것이 탐탁지 않았지만 재빨리 독고건이라는 가명을 댔다. "요즘 세상에 늙은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젊은이를 보기가 쉽 지 않은 일이지요. 그래서 공자의 성명이라도 기억해 두고 싶었소. 허허허허‥‥‥, 늙으면 사소한 일에도 감정이 크게 움직이곤 한다 오." 늙은 사공의 말에 선주혁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버릇없는 젊은 이에 대한 노인의 한탄은 시대를 초월해 존재한다는 것을 새삼 깨 달았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야기를 이어 가자면‥‥‥ 사실 온몸을 이용해 노를 젓 는다는 것은 공자께서 짐작하듯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오. 노질 은 단순하기 이를 데 없고도 그렇지 않으니까 말이오."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시지 않으면 알아듣기가 힘들 것 같습니 다. 사실 노를 제대로 저어 본 적이 없으니까요." 선주혁은 솔직한 심정으로 말했다. "허허, 노를 저어 본 경험이 있는사람이 몇이나 되겠소?그래도 이 이야기는 알아듣기에 어렵지 않을 것이오. 배를 움직이기 위해 서 노를 물에 담그는 것 하나만을 봐도 마냥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오. 노를 물에 얼마나 깊이 담그는가, 어느 정도로 기울 여야 하며, 또 어느 정도의 폭으로 움직여야 하는 가에 따라 배의 움직임이 달라지기 때문이오. 그런 모든 것을 알아내고 매번 같은 움직임으로 노질을 할 수 있을 때까지 걸린 시간이 꼬박 십 년이었 소." "아‥‥‥!" 선주혁은 그제야 늙은 사공이 말한 십 년 세월을 이해할 수 있었 다. 노인은 이 배를 움직이는 노질의 최적화된 조건을 몸으로 익혔 던 것이다. 그것은무공의 초식을 몸에 배일 때까지 익히는 것과 같 은 이치 였으리라. "그 정도 노질을 할 수 있게 되자, 이 늙은이의 호기가 또다시 고 개를 들었다오. 다시금 이 서릉협에 도전할 마음이 생긴 것이지 요." "이번에는 성공했겠군요. 완벽하게 노를 젓는 법을 익히셨을 테 니까요." 선주혁의 말에 늙은 사공은 고소를 머금었다. "나 역시도 그렇게 생각했다오. 이전에 비해 훨씬 적은 힘으로 배를 수월하게 움직일 방법을 알고 있었으니 자신이 넘쳤지요. 중 간에 지친다는 것은 생각도 못할 일이었고 말이오. 한데 결과는 참 담했소." "참담이라니요?" "그래요, 참담이었지요. 이전과 달리 배는 서릉협을 거슬러 오르 기 시작했소. 그때는 신이 났지요. 확실히 훨씬 수월하게 배가 움직 였으니까요. 하지만 그도 잠시뿐이었소. 굽이쳐 흐르는 강인지라 예측할 수 없는 물의 움직임이 문제였소. 배가 방향을 잃기 일쑤였 던 것이지요. 하마터면 배를 부술 뻔했던 것을 가까스로 면하고 다 시 내려와야 했다오. 허허허헛!" "그렇군요. 노를 저어 배를 똑바로 모는 것과는 완전히 달랐겠군 요." "그렇지요! 이제 공자도 이 늙은이의 말을 알아듣나 보구려. 서 릉협을 오르기 위해서는 그저 앞으로 나갈 줄만 알아서는 안 되는 거였소. 그래서 이 늙은이는 시간이 날 때마다 다른 사공의 배를 타 고 서릉협을 오르내렸다오. 물길이 어디서 굽는지, 능숙한 사공들 은 어떤 길을 따라 서릉협을 오가는지 배우려 한 것이오. 그렇게 반 년여를 보내고 나서 다시금 서릉협에 도전을 했다오. 완전히 물길 을 튼다기보다는 거친 물결에서 방향을 잡는 것을 연습했던 거라 오. 결국은 오 년이 지나서야물길을 틀 수 있었지요. 그러니까 손 님을 태우고 오갈 수 있는 시간까지는 그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소 이다." "결국 해내셨군요!" 선주혁은마치 자신의 일처럼 노인의 이야기에 기뻐했다. "허허헛! 그때는 정말 눈물이 날 정도로 감개무량했지요. 빠른 사람들은 오 년이면 되는 것을 무려 십오 년에 걸쳐 물길을 텄으니 말이오. 워낙 아둔한데다가 몸이 약한 탓이었소." "그래도 결국은 해내셨잖습니까!" "서릉협을 정복했다고 생각했지요. 이제는 나도 제법 노질을 할 줄 안다는 생각에 어깨에 힘도 들어가고요. 하지만 그저 서릉협을 오를 줄 아는 것이라 해서 노질을 한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소." 늙은 사공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 었다. "그걸 깨닫는 데 또다시 십여 년의 세월을 흘러 보낸 것 같구려. 이 늙은이는 너무나 아둔하여 정말이지 단순한 것을 모른 채 노질 을 해 왔던 것이 지요." "단순한 것을 모르셨다고요?" "그렇소이다. 물의 성질조차 모르고서 노질을 해 댄 것이지요." "‥‥‥!" "흠‥‥ 여기서 설명하기가 좀 쉽지만은 않은데‥‥‥, 서릉협의 물살이 거칠고 빠르다지만 그것이 계속되는 것은 아니라오. 저기 물을 보시면 알겠지만 밀고 당김이 있고, 높고 낮음이 있으니 곧 파 도가 생기는 것이 보일 것이오." 선주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보기만 해도 위험하게 느껴지는 서 릉협의 파도는 바다의 그것에 못지않았다. "결국 서릉협의 물은 밀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는 것이 란 말인데‥‥‥ 알아들을 수 있겠소?" "어떤 말씀인지 대략은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허허, 다행이구려. 그러니까 이 물이 밀 때는 배가 뒤로 가지 않 게 하고 멈춰 서 있을 때는 앞으로 나가는 거요.그러니 이 배는 굳 이 서릉협을 거슬러 올라가는 게 아니라 말씀드린 것이고요." "아‥‥‥! 물의 흐름을 잘 파악하여 물살이 거칠지 않을 때에만 오르는 것이군요." "그렇지요. 처음에는 그와 같은 요령을 익히고자 무수히 노력했 지요. 그렇게 또 몇 년을 보내고 나니 그 느낌이 달라지더구려. 물 이란 게 한 덩어리로 보이지만 이 늙은이가 느끼기에는 그 사이와 사이가 느껴졌다오. 미친 소리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분명히 그렇 게 느껴졌소. 지금도 그렇고‥‥‥." "물과 물의 사이요?" "그래요. 그 사이란 것이 있다고 확신하는 순간부터 이 배는 물 과 물의 흐름 사이를 오가게 되었다오. 억지로 힘을 주려 노력할 필 요가 없어진 것이지요. 물을 거스를 필요도 없어지고요. 그러니 까‥‥‥, 물을 달래며 그 사이를 지나치는 게 이 늙은이의 노질이라 오. 잘 이해가 안 가겠지만 그것이야말로 사십여 년의 노질 끝에 늙 으이가 체득한 요령이라우." "물과 물의 사이를 오가는 것이다‥‥‥." 선주혁은 음미하듯 노인의 말을 되뇌었다. 어찌 보면 정신 나간 늙은이의 이야기 같은 자신의 말을 깊이 생 각하는 선주혁을 보며 늙은 사공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생 각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듯 더 이상 말도 걸지 않았다. 선주혁은 그렇게 병풍처럼 드리워진 절벽과 서릉협의 수많은 절 경들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물을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물을 달래며 그 사이를 오간다는 말 에서 비롯된 영감 때문이었다. 늙은 사공의 이와 같은 말을 깨달을 수 있다면 북두폭렬장 중 아직까지도 미완으로 남아 있는 북두연환 장을 완성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내력을 단전에서 끌어 모을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고, 고수들이 그들만의 길을 통해 자신처럼 공기의 극렬한 마찰을 겪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그 길이라는 것이 바로 공기와 공기 사이의 흐름을 타는 것이라 면 일곱 번에 이르는 연환장력의 발출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이끌어 내는 것도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주혁은 무아의 상태에서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공기의 흐름 을 느끼는 것이었다. 흡성대법을 통해 삼라만상의 기운을 느끼는 지금이었다. 그는 그 누구보다 대기가 머금은 기를 예민하게 느낄 수 있었고, 기의 움직임을 좇을 수 있었다. 선주혁의 손짓은 점점 더 영활해지고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찌 보면 미친 사람이 아무렇게나 허공에 팔을 휘두르 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난화무영수나 화무난천장의 초식을 쫓는 것도 같았으며, 과거 무진 진인이 보여준 기기막측했던 장력을 다 시금 흥내 내는 것과도 같았다. 서릉협의 뱃길은 그렇게 계속되었다. = Chap.5 - 첫 대전 = "독고 대협, 왜 계속 그렇게 손을 흔드시는 거예요?" 선주혁을 일행은 무산삼협(巫山三峻)을 지난 후 배에서 내려 육 로로 자양(資陽)에 이르렀다. 여전히 기마술을 익히지 못한 선주혁 은 남궁연, 은설연과 함께 마차에 탑승했다. 그런데 계속해 창밖으로 손을 내밀어 연신 흔들어 대는 선주혁 의 모습을 보고 남궁연이 의아해 하는 것이다. "아!그게‥‥ 뭔가 좀 생각할것이 있어서요." "호호, 생각하실 때 습관이신가 봐요. 손을 그렇게 흔드시는 게." "그건 아닙니다. 그저 공기가 어떻게 흐르는지 느끼고자 하는 거 지요." 선주혁의 대답에 은설연이 끼어들었다. "공기가 흘러요? 바람이 부는 것을 느낀다는 말씀이신가요?" "그게‥‥‥ 바람이 부는 것과는 조금 느낌이 다른데‥‥‥. 바람 정 도는 아니더라도 공기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고 그 움직임의 사이 를 찾아보려는 거지요." 선주혁의 설명에 은설연과 남궁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하는 말이 선명히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기에 대한 개념 자 체가 수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잘 이해는 안 가지만, 그걸 왜 느끼려고 하는 건가요?" 남궁연이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하핫, 노부가 만든 무공에 도움이 될까 해서지요." "또 무공을 만들어요?" 남궁연이 언성을 높였다. 하나의 무공을 창안하는 데에는 수십 년도 부족하다. 스스로 창안했다던 두 가지의 무공, 그것도 엄청난 위력의 무공에 감탄하는 중이거늘 또 다른 무공을 창안한다고 하니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뭐, 별로 대단한 건 아니오. 그냥 엉터리 손짓에 불과하니까 요." "엉터리 손짓이라뇨? 얼마 전 보여주신 그 무공만 해도 강호의 일절로 남을 거예요." "허허‥‥‥ 남궁 소저께서는 항상 노부를 지나치게 추켜세우시는 구려 별다른 신묘할 바도 없는 무공이니 절기라 불리기에는 무리 가 있지요. 그저 알고 있던 여러 가지 무공의 장점을 뽑아내고 나름 대로 얻은 깨달음과 합쳐 만들어 낸 것이니까요." "아니에요. 독고 대협, 정말 대단해요! 독고 대가께서는 벌써 종 사의 반열에 오르셨군요." 남궁연이 호들갑을 떠는 사이 은설연이 진지한 표정으로 질문을 했다. "독고 대가께서는 언제 그런 무공을 창안하신 건가요?" 은설연이 북두유성폭과 북두유성우에 대해 새삼스럽게 물어왔 다. 그녀가 알기에 선주혁은 얼마 전까지 초식에 대한 이해조차 부 족한 상태였다. 그러니 언제부터 무공을 창안하기 시작한 것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정의련 지부에 있을 때라 말할 수 있을 것이오." "에? 그렇게 짧은 시간 동안 만드신 무공이었단 말이에요?" 남궁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설 듯 놀라며 외쳤다. 은설연도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찌 생각해 보면 남궁 소저에게 감사해야 할 일이랄 수도 있겠 군요. 그날 유성을 구경하다가 떠오른 아이디어, 아니 영감을 가지 고 만들어 본 무공이니까요." "그, 그러니까‥‥‥ 그때 저랑 밤하늘을 구경하다 만드신 무공이 었다는 거예요? 그 무시무시한 장법이? 아! 그러고 보니 며칠 내내 밤하늘을 바라보고만 계시더니‥‥‥, 그게 모두 무공을 창안하시기 위함이 었군요." 남궁연이 기뻐하면서도 정말이지 감탄했다는 식인데 반해, 은설 연은 그저 석상처럼 굳은 채 내심 경악을 하는 증이었다. '마, 말도 안 돼!' 자연에 존재하는 동물이나 현상 자체를 담은 무공은 수도 없이 존재한다. 무공의 시발 자체가 강한 동물의 움직임을 흉내 내는 데 서부터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후 높은 차원의 무공들은 바람이나, 물, 불, 번개 등을 묘리를 담기도 했다. 하지만 그와 같은 무공들은 단순한 영감에 의한 것은 분명 아니 었다 하나의 무공에 자연의 묘리를 담는 것은 무수한 관찰과 탐구, 그리고 끊임없는 시행착오의 과정을 필요로 한다. 선주혁의 장법은 이름 그대로 유성의 재연과도 같았다. 은설연 의 눈에는 거의 완벽하게 유성의 묘리를 담아 낸 장력이었딘 것이 다. 그런 무공을 며칠 동안 밤하늘을 바라본 후 만들었다는 사실을 납득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선주혁이 이미 삼라만상의 기운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고, 또 그 기운을 무공에 응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음을 은설연은 모르 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은설연은 괴물을 바라보듯 선주혁을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은설연이 막 입을 열어 또 다른 질문을 하려는 순간 선주혁의 안 색이 변했다. "고수들이 다가오고 있소. 엄청난 속도군요." "네?" 남궁연이 놀라 마차 밖으로 고개를 내밀 때였다. 과연 마차가 멈추고 말의 발굽 소리도 그쳤다. 선주혁은 미간을 찌푸린 채 마차에서 내렸다. 일행을 막아선 자들이 누군지는 뻔했다. 향후 엄청난 활약을 할 철갑묵린단을 박살냈다. 패종회에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던 것이 다. 더구나 저 정도의 기도를 내뿜는 고수들이 한꺼번에 움직인다면 더 생각할 일도 없었다. '드디어 백존이 나서는 것인가?' 시간상 이미 천음마후가 완성되었을 터. 바야흐로 백존의 본격적인 활약이 시작되는 데에 아무런 제약이 없는 것이다. 선주혁은 스스로의 무공에 나름대로 자신감을 갖긴 했지만, 백존이라는 이름을 떠올리자 긴장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 었다. "갑작스레 길을 막아서다니, 대체 이게 무슨 짓이오?" 제갈중양이 마상에서 호통을 쳤다. 상대의 숫자가 적지 않았으 나, 그 정도에 위축될 제갈중양이 아니 었다. 더구나 정의련의 이름을 어깨에 지고 있는 터라 그 체면을 고려 해야만 했다. "귀 일행에 요즘 위명이 자자한 금강신협(金剛神條)이 계시오?" 나타난 자들 중 한 증년의 사내가 오연한 어조로 물었다. 금강신협이란 지난 번 무창 인근의 관도에서 금강불괴의 위용을 선보인 독고건에게 붙은 별호임을 제갈중양은 알고 있었다. "그렇소만‥‥? 귀하는 누구시기에 이토록 무례히 길을 막아선 단 말이시오?" "흥!" 묵의의 노인은 나직하게 코웃음을 친 후 말을 이었다. "노부는 패종회의 우상균(字相均)이라고 하오. 얼마 전 노룡산 인 근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귀 일행에게 묻고자 하는 바가 있어 이렇 게 길을 나섰소이다. " 노인의 말이 마쳐질 무렵 선주혁은 마차에서 내려 언은진과 제 갈중양이 탄 말 사이에 섰다. 드디어 만나게 된 백존이었기에 한껏 긴장의 끈을 당긴 상태였 다. 나타난 자들 중 백존이라 짐작되는 이는 모두 다섯. 나머지 스물에 달하는 무인의 무공 역시 경시할 수는 없지만, 선 주혁의 의식은 그 다섯에게만 집중되었다. 종극에 필적하는 고수 다섯이 한 자리에 모여 있다는 것만으로 선주혁은 마른 침을 삼켜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멀지 않은 곳에 사형과 종극 등이 있다는 사 실이었다. 위험한 상황에 처할지언정 최소 목숨을 잃을 위협은 없을 것이 다. 그와 같은 예상의 근거는 저들이 천음마후와 동행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저들이 천음마후와 동행하지 않는 이상, 대부분의 백 존은 구대마존과 비슷한 무위를 지닌다고 봐야 했다. 구대마존 중 세 명이 인근에 있고, 자신과 남궁일, 그리고 사형 이 있으므로 생명의 위협을 느껴야할 상황까지는 벌어지지 않으리 라는 것이 션주혁의 예상이었다. "소생은 정의련에 속한 남궁일이라고 합니다. 노룡산 인근의 일 중 어떤 부분에 대해 가르침을 주시려는 것인지요?" 남궁일이 말에서 내리며 두 손을 맞잡았다. 우상균이라는 이름은 처음 들었다. 하지만 패종회가 무림맹과 연수를 발표했고, 사천설가 역시도 오래된 정도 문파였다. 그런 곳에 속한 연장자를 마주했으니 후배 로서의 예를 갖추는 것이다. "허헛! 후기지수 중 옥기린이 제일이라더니 그것은 인품과 무공 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얼굴의 두께를 논하는 것이었구나." 우상균의 옆에 있는 날카로운 눈매의 노인이 코웃음을 치며 말 했다. "그것이 패종회에서 본 련에 전하는 가르침인 것입니까?" 남궁일은 이미 나타난 노인들에게서 쉬이 접해보지 못한 절대고 수의 기도를 읽었다. 만약 이들과 일전이 벌어진다면 길(吉)보다 흉(幽)이 많을 것이라 는 것이 남궁일의 예상이었다. 비록 독고건의 무공을 직접 확인한 바가 있었다 하더라도 집단 전 위주의 기병을 상대하는 것과 절정고수들의 합격(合擊)을 받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다시 말해 독고건이 철갑묵린단을 수월하게 물러쳤다고 해서 이 들과 일전이 수월하리라는 보장은 없었던 것이다. 이에 남궁일은 정의련의 이름을 들고 나섰다. 시비를 가림에 있 어 패종회가 정의련을 적으로 돌릴 수 있게될 것임을 암시한 것이 다. "패종회는 무림맹과의 연수를 통해 곤륜이마와 그들을 보호하는 세력을 응징할 것을 세상에 알렸네. 한데 무슨 이유에선지 자네들 이 산적을 토벌하는 우리 패종회의 철갑묵린단을 방해하지 않았는 가? 같은 정도 문파에 속한 존장으로서 자네들에게 옳고 그름을 구 분하는 약간의 충고를 한 것뿐이니 정의련을 들먹일 필요는 없네." 우상균이 한껏 점잔을 빼며 말했다. 무인들이 잔뜩 모여 있는 모습에 오가는 행인들은 이미 멀찌감 치 물러난 상태였다. 하지만 호기심 가득한 무림인들과 호사가들은 이미 심상치 않은 기대감으로 이들을 주목하고 있는 터. 우상균으로서는 그들을 의식하지 않을수 없었다. 이에 산적 토 벌의 명분을 내세웠고, 또다시 정의련과의 무관함을 주장한 것이 다. "귀 회의 무인들은 산적을 토벌하는 과정에 무고한 양민을 학살 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저희는 그것을 막았을 뿐이니 딱히 충 고를 받을 일은 없는 듯하군요." "무고한 양민이 아니라 산적에게 기생하며 보급책을 맡아온 자 들일세. 일벌백계(一罰百戒)라‥‥‥, 사파연합의 주구를 처리하며 산 적을 돕는 자들에 대한 경고를 했던 것이거늘‥‥‥! 어찌 의협을 추 구한다며 검을 든 자네들이 죄인들을 감싸기 위해 패종회의 무인들 을 방해한단 말인가?" 우상균이 노성을 터뜨렀다. 그는 계속해 남궁일 등이 일을 방해 했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패종회의 무인들이 고작 몇 되지 않는 오 대세가의 후손들과 금강신협이라는 자에게 백여 명 이상이나 목숨 을 잃었다는 사실을 굳이 자신의 입으로 떠들 필요가 없었기 때문 이다. 그의 노갈에도 불구하고 남궁일은 전혀 위촉되지 많은 모습이었 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귀 회에 속한 무인들은 무고한 양민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이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는 정의련 에서 정식으로 해명할 것입니다. " "쳇! 할 말 없으면 정의련을 들먹이는군. 정의련이라는 이름만 등에 업으면 뭐든 해도 된다는 이야긴가?" 우상균의 뒤쪽에 서 있던 무인 중 한 명이 투덜거렸다. 혼잣말과 같은 내용이었다. 하나 그 목소리는 멀리서 구경하는 사람에게까지 들리기에 부족함이 없을 크기였다. 제갈중양의 눈썹이 하늘로 치켜 올라갔고, 노기를 억지로 누르 고 있는 언은진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남궁연은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달려들 기세였다. 그러나 남궁일은 표정조차 바꾸지 않고 담담히 말했다. "일을 순리적으로 해결하는 데에 이의는 없으실 거라 생각합니 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 "흥! 정말이지 방자하기가 이를 데 없는 자로고!" 아까 전 코웃음을 쳤던 날카로운 인상의 노인이 노갈을 터뜨렀다. "사람을 상하게 해놓고 이제 와서 순리를 논한단 말인가? 자네 야 그렇다고 처도 금강‥‥‥ 뭐라 하는 그자만큼은 이대로 보낼 수 없네. 잘못이 없다면 본회를 방문하여 당당히 결백을 밝히도록 하 게." "먼저 무력(武力)을 사용해 온 것은 귀 회의 무인들입니다. 그렇 다면 저희가 가만히 앉아 죽음을 당했어야 마땅하다는 말씀이십니 까? 또한 독고 대협께서는 저희 정의련의 귀빈이십니다. 저희를 보 호하시기 위해 부득이 무력을 사용하신 분이니, 문제가 있으면 정 의련을 통해 해결하십시오." 남궁일은 단호하게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그건 곤란하네. 체면이라는 것은 정의련에서만 차려야 하는 게 아니거든, 사람이 상할 정도의 분탕질을 쳐놓았네. 한데 정의련의 체면만 차려 주겠다며 고이 보낸다면 강호 동도들이 패종회를 어찌 보겠는가?" "그럼 힘으로 저희를 억압하시겠다는 뜻입니까?" 남궁일의 미간이 좁혀졌다. "필요하다면 그래야겠지. 자네들도 그랬던 것이 아닌가?" 우상균은 미미한 미소를 떠올리며 답했다. 이 정도의 압박을 가 하면 충분하리라 여기는 그였다. 한눈에도 남궁일의 기도는 범상치 않았다. 여느 신진기수와는 차원이 다른 고수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저 나이에 오르기 힘든 경 지에 올랐으니만큼 솔직히 탐이 날 정도의 인재였다. 그 정도의 인물이라면 어렵지 않게 자신을 비롯한 백존의 무위 를 알아봤을 것이다. 오늘의 사단에 승산이 없음은 애진즉 파악했을 터. 이좀 되면 보는 사람들에게 체면도 세우고 금강신협이라는 자에 게도 할 도리를 다했으니 은근히 물러날 것이라 예상하는 것이다. 무림맹과 연수한 패종회와 정의련 사이에 본격적인 분란을 피해야 하는 것은 그에게도 해당하는 말이기에 더욱 그했다. "그렇다면 더 이상 할 말은 없겠군요." 남궁일은 검병에 자신의 손을 없으며 말했다. 우상균의 얼굴이 굳어졌다. 설마하니 남궁일이 이 정도의 고수 와 인원을 앞에 놓고 일전을 불사하겠다는 결론을 내리리라고는 예 상치 못했던 것이다.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마시겠다는 뜻인가? 제법 그럴 듯한 무공을 익혔다만 오늘은 세상 높은 줄을 알게 될 것이야." 우상균의 으름장에도 남궁일은 굳건한 표정이었다. 이미 독고건 이라는 인물을 스승의 예로 대하기로 한 입장이었다. 그러니 사지(死地)가 될 것이 분명할 저들과의 패종회행을 수락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제갈중양, 언은진 등이 말에서 내리고 남궁연과 은설연도 마차 에서 내려 선주혁의 옆에 섰다. "남궁 소협, 뒤로 물러서시오." 선주혁은 이번에도 스스로가 먼저 나섰다. "하지만‥‥‥!" "일단은 노부가 먼저 저들을 상대하겠소. 필요하면 지원을 해 주 시오." 선주혁의 말에 남궁일은 반박하지 않았다. 첫째는 스승으로 대해야할 말이기에 그랬고, 둘째는 그가 말하 는 바대로가 더 좋은 결과를 만들 가능성이 높았다. 저들의 무공이 고강함을 짐작할 수는 있으나, 일대일의 승부에 서는 독고건이라는 인물이 밀릴 이유가 없었다. 자신들까지 나서서 저들이 한꺼번에 달려드는 상황을 피하는 것이 더 나았던 것이다. 선주혁이 앞으로 나서자 구경꾼들 사이에서 작은 소요가 일었 다. 금강신협에 대한 소문은 그들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금강불 괴에 이른 절대고수를 직접 보게 된 것과 그의 진면모가 상상보다 훨씬 어려보이는 터라 입을 다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금강신협에 대한 위명은 익히 들어 알고 있소이다. 하지만 패종 회를 너무 쉬이 보신 게 아닌가 싶소." 우상균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말했다. 단신으로 철갑묵린단의 절반에 해당하는 숫자를 죽인 인물이었다. 스스로의 무공에 자신감 이 넘치는 자신이었지만, 금강불괴지신이라는 소문과 철갑묵린단 을 상대할 때의 신위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옳지 않은 일을 막았을 뿐이오." 선주혁은 짧고 냉랭하게 대답했다. "흥! 제법 이름을 날렀다고 기고만장했군." 날카로운 인상의 노인이 또다시 혼잣말을 빙자해 선주혁을 비웃 었다. "귀하가 노부를 끌고 패종회로 가시겠소?" 선주혁이 최선을 다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나서지 않 았으면 모르되 나섰으면 위축된 모습을 보여선 안 되는 일이다. 뒷골목에서 주워들은 이야기로는 다수를 상대할수록 더 당당해 져야 한다고 했다. 그와 같은 이야기를 기억해 낸 선주혁은 최선을 다해 당당한 모습을 보이는 중이었다. "노부는 패종회에 몸을 담고 있는 전목양(全木場)이오." 전목양은 일단 기본적인 예는 갖췄다. 성격에 부합되는 일은 아 니 었으나 명분을 세워야 할 상황임을 잊지 않은 것이다. 그의 귀에 우상균의 전음이 들려왔다. [전력을 다하되 그를 지치게 하는 데에 주력하시오. 위험한 상황 을 초래해서는 안 될 것이오.] 전목양은 보일 듯 말듯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는 철갑묵린단 절반은 단신으로 몰살시킬 정도의 고수였다. 솔직히 전목양 스스로는 그 정도의 무위를 발할 자신이 없었다. 들었던 장력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내력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전개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결국 상대의 내공이 자신보다 한수 위임을 인정해야만 하는 상 황이므로 차륜전(車輪戰)을 통해 그를 패종회로 압송하는 것이 최선 이었던 것이다. 우상균이 재차 강조한 것은 그와 같은 작전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전목양은 순순히 물러날 마음은 추호도 없었 다. 수십 년 동안 자신이 익힌 무공의 진정한 위력을 시험해 볼 좋 은 기회라 여겼기 때문이다. 호신강기를 전문적으로 파훼하는 무공이라 자신하는 만큼 금강 불괴지신에 대한 두려움도 없었다. 승부란 내공만 가지고 결정되는 게 아님을 알고 있기에 더욱 그 랬다. 경세적인 내공을 지녔다고 해서 자신이 꼭 패하리라는 법은 없는 것이다. "독고건이오." 선주혁 역시 짧게 이름을 밝혔다. "흐흐‥‥‥,강호를 떠도는 낭민도 아니거늘 사문(師門) 정도는 밝 히는 게 도리가 아니겠소?" "현재 정의련에 의탁해 있는 늙은이일 뿐이오. 노부의 사문에 대 해서는 당신 따위가 알 자격이 없소." "감히 !" 눈썹을 하늘로 치켜세운 전목양이 양 손가락을 꼿꼿이 세웠다. 그러자 손끝에 회색의 기류가 맺히며 빛을 내기 시작했다. 선주혁은 아무런 준비 동작도 취하지 많은 채 서 있을 뿐이었다. 그 역시도 절정고수를 상대할 때는 북두유성폭이나 북두유성우가 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함을 알고 있었다. 범위공격은 집중도가 현 저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력을 허공에 띄우지 않고 적이 공격해 오기를 기다리 는 것이다. 전목양의 양손이 기울어진 십자(十字)로 휘둘러졌다. 날카로운 경력이 빛살처럼 빠르게 쇄도해 왔다. 선주혁은 절정의 암영풍으로 전목양의 장력을 피했다. 빠르고 위맹하긴 했지만 못 피할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사이 전목양이 접근해 왔다. 이는 애초부터의 목적이었다. 금 강불괴지신을 파훼하기 위한 근접전이 그가 바라는 바였던 것이다. 선주혁 역시 사양하지 않고 전목양을 마주해 신형을 움직였다. 그 짧은 순간, 전목양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적이 자신의 의 도대로 움직여 주었기 때문이다. 비록 백존 중에서는 서열이 아래 쪽에 치중한 입장이라지만 근접전만큼은 자신이 있는 그였던 것이 다. "하압!" 카랑카랑한 기합성이 터지고 회색의 빛을 발하는 그의 수강이 선주혁의 가승을 향해 날아들었다. 극쾌의 표리를 담은 일 수인지라 남궁일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 들은 그의 손이 움직이는 것조차 제대로 파악키 힘들었다. "좋아!" 상대의 공격이 엄청나게 빠른 것을 느낀 션주혁은 긴장 속에서 도 쾌재를 불렀다. 마침 시험해 보고 싶은 게 있는 터였다. 그 진정한 위력을 알아보기에는 이처럼 빠른 공격이 적격이었던 것이다. 선주혁의 손이 움직였다. 북두폭렬장의 묘를 담은 만큼 그 속도 는 달리 말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과거와는 그 움직임이 명확히 달랐다. 이전까지의 북두연환장은 극한의 속도만을 추구하며 직선적인 공격 일변도였다. 그러나 지금 선주혁의 일 장은그 속도의 저하가 없음에도 어딘지 모르게 부드러운 움직임을 내포하고 있었다. 쿠웅. 둔탁하기 이를 데 없는 음향과 함께 선주혁과 전목양의 손이 첫 번째로 부딪쳤다. 보통의 고수라면 자신의 일 장을 정면으로 마주하면 손이 으스 러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독고건이라는 자는 아무런 충격도 받지 않은 듯했다. 전목양은 감탄을 했다. '과연 금강불괴지신에 오른 자라는 건가?' 전목양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재차 공격을 가했다. 두 번째로 뻗어 내는 그의 장법은 처음과는 차이가 있었다. 장심을 내밀어 뻗어 내는 것이 아니라 검극처럼 손끝을 세워 공 격을 감행한 것이다. 중지 끝에 맺힌 수강(手료)은 끝이 뾰족할 수 밖에 없었고 그 기세는 한눈에 봐도 위험해 보였다. 선주혁 역시도 다시 일장을 뻗었다. 후발선착(後發先着)의 묘에 있어서는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북두 연환장이었다. 만약 그가 제대로 마음을 먹었다면 방어하는 것은 전목양이 되 었을 것이다. 북두연환장의 특징은 한순간에 수차례의 장력을 펼쳐 내는 것이 었으므로. 의도한 바가 있어 상대의 공격을 기다린 선주혁이었기에 이번에 도 방어하는 입장에서 뒤늦게 장력을 펼친 것이다. 연이은 깨달음이 있었고, 마침 기다려 왔던 상황이 아니었다면 백존을 상대로 이와 같이 여유를 부리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 었다. 선주혁의 일 장은 이전과는 달리 자연스럽기 그지없는 움직임으 로 전목양의 공격과 마주했다. 퍽. 짧고 둔탁한 소러가 울리며 선주혁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묵연 수투의 기운을 응용했음에도 장심에서 찌릿한 통증이 느껴진 것이 다. 뼛속까지 파고들 정도의 고통은 아니었다 해도 한순간 그를 주 춤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그 모습에 전목양은 과연 자신의 생각이 옳았음을 확신했다. 상 대는 내공만 무작스럽게 뛰어난 자에 불과했던 것이다. 당연한 일이었다. 한계를 가진 인간의 수명 중 어찌 보고 받은 바와 같은 내공을 지닐 수 있단 말인가? 다른 모든 것을 젖히고 오직 내공의 수련에만 집중해도 부족할 시간이 었을 터. 전목양은 금강신협이라는 자가 조화를 이루지 못한 반쪽의 고수 일 것이라 추측했고, 손속을 나눈 결과 자신의 예측이 맞았음을 확 신했다. 이에 검환조차 쪼게는 암조첨수(暗照尖手)에 극한의 내력을 주입 했다. 전목양의 손에 맺힌 회색의 광채가 마치 주변의 빛을 빨아들일 듯 일렁이기 시작했다. 등골이 오싹할 정도의 한기가 느껴지고 그의 손은 한 자루의 창 이 되어 공기를 갈랐다. 회색의 섬광이 연속적으로 선주혁을 향해 쏘아진다. 실로 폭풍과 같은 연격(連擊). 어찌 생각하면 단순하기 이를 데 없는 동작이다. 하지만 시야를 혼란케 하는 회광(灰光)속에서의 가공할 속도로 날아오는 연격이었기에 방어가 수월치 않았다. 그나마 수월치 많다는 것은 선주혁에게만 해당하는 말이다. 보 통이라면 암조첨수의 속도와 날카로움에 벌써 몸을 꿰뚫리고도 남 았을 것이다. 이미 쾌에는 일가견을 이룬 선주혁은 침착하게 적의 한 수, 한 수를 막아냈다. 가히 북두연환장에 못지않은 속도로 날아오는 수강이었기에 그 는 호기가 치밀었다. 누가 더 빠른지 비교해 보고픈 욕심까지 치밀 었다. 그러면서도 장심이 마비될 듯한 느낌에 인상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워낙에 날카롭게 찔러 오는 공격인지라 통증이 느껴지 는 것이다. 전목양의 얼굴이 조금 굳어겼다. 벌써 몇 번이나 적에게 적중되 었어야 할 암조첨수였건만 적은 수월하게 자신의 공격을 막아 내고 있는 것이다. "타하!" 그의 입에서 투기(鬪氣) 넘치는 기합성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다시금 쏟아지는 연속된 공격. 일체의 완급도 없이 그저 가공할 속도를 수반한 찌르기가 선주 혁의 몸통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선주혁의 방어에도 변화가 생졌다. 창이 무색할 정도로 날카롭게 찔러 들어오는 전목양의 찌르기를 장심으로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손을 뒤로 빼 받아넘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 모습에 전목양의 안색이 하얘졌다. 자신의 암조첨수는 흘려 넘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뒤 로 빼려들고자 하는 손마저 꿰뚫는 것이 암조첨수다. 한데 상대는 손을 앞으로 내밀어 암조첨수에 마주했다가 다시 뒤로 손을 움직여 자연스럽게 경력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이는 상 대의 손이 섬전(開電)과 같이 빠르게 나왔다 들어가기를 반복하고 있다는 뜻이 었다. '뭐, 이런 괴물 같은 놈이?' 전목양은 자신의 장기를 무용하게 만드는 선주혁의 무위에 질려 가고 있었다. 그저 내공만 뛰어난 반쪽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 다. 한편 선주혁은 거의 무아의 상태에서 백존에 속한 전목양과의 싸움을 즐기는 중이 었다. 처음에는 흐름을 느끼고 그에 따라움직이는 방법에 대해 집중 한 것뿐이었다. 공격을 펼칠 때도 공기의 흐름에 역행하지 않고 움 직임의 사이를 헤치고 나가고자 노력했다. 그러는 사이 상대의 움직임도 보다 명확히 눈에 들어오기 시작 했다. 거의 완벽할 만큼의 집중 상태에 이르자 모든 것이 선명해졌 다. 마치 전신이 감각세포로 변한 듯했다. 가공할 속도로 날아오는 전목양의 찌르기 속에서도 모든 것이 느껴졌다. 단전에서 손끝으로 향하는 내력의 움직임. 그 흐름을 좇아 공기를 가르며 날아드는 수강. 섬전과 같은 공격 속에서 그와 같은 일련의 흐름이 보이자, 선주 혁은 자신의 손을 그 흐름에 맡겨 버렸다. 그러자 션주혁의 손은 전목양의 수강을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난화무영수의 묘(妙)를 익히고 있기에 그와 같은 일은 어렵지 않았 다. 특히나 수강이 채 닿기도 전에 흐름에 맞춰 뒤로 흘리는 터라 이 제는 수강의 날카로움도 두렵지 않았다. "무당 면장?" 우상균이 미간을 크게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검박한 움직임으로 전목양의 장력을 흘려보내는 방법은 무당이 자랑하는 면강과 흡사 했던 것이다. 변화를 배제한 화무난천장의 응용과도 같은 선주혁의 움직임이 기에 더욱 그랬다. 하지만 우상균은 곧 고개를 저었다. 무당의 고수가 어찌 정의련에 의탁한단 말인가? 그사이 전목양과 선주혁이 손속을 겨루는 양상이 또 변했다. 계속해 전목양의 수강을 뒤로 흘려보내던 선주혁이 반격을 시작 한 것이다. 기이한 것은 반격이 중도에 멈춰진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주혁의 표정 속에서 실망한 기색이나 난처 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눈은 빛나고 입매에는 미소까지 걸려 있었 다. 그 모습을 본 전목양이 차마 입을 벌릴 틈도 갖지 못한 채, 내심 부르짖었다. '서, 설마! 이자가 나를 상대로‥‥‥?' 오랜 기다림 끝에 무림에 나섰다. 사실상 패종회 내에서가 아니 면 자신을 상대할 고수를 만나기란 어려울 것이라는 자부심에 가득 찬 상태였다. 한데 지금상대하는 자는 자신을 연습 상대 정도로 여기고 있음 이 틀림없었다. 적에게서 일말의 초조함이나 긴장감은 찾아볼 수 없었다. 탐구의 열정이 느껴지는 눈빛은 분명 자신을 상대로 무엇 인가를 연습하는 중임을 짐작케 했다. 전목양에게 있어서는 다시없는 수치였다. "치 잇!" 꽉 다문 어금니 사이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전목양의 두 눈 에서 강렬한 살기가 쏟아져 나왔다. 우상균은 적을 지치게 하는 데 에 주력할 것을 명했다. 하지만 솟구치는 분노는 그런 명령 따위를 까맣게 잊게 하기에 충분했다. "암조잠세(暗照潛世)!" 극한으로 끌어올린 내력의 발출은 절로 호기로운 외침을 만들어 냈고, 초식은 암조첨수의 최강의 위력을 예고했다. 그리고 폭풍처럼 쏟아지는 수강. 가히 공간을 메웠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수강이 날카로 운 창이 되어 선주혁에게 몰아쳐왔다. '대단하군!' 암조잠세를 마주한 선주혁이 탄성을 질렸다. 그간 가져 봤던 백존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을 때, 이 정도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음을 느꼈다. 또한 믿는 바가 있기에 그는 여유롭게 자신이 시험해 보고자 하 는 무공을 마음껏 사용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암조잠세를 마주하고서는 감히 그런 여유를 가질 수 없 었다. 왜 소설 속에서 백존이 그토록 대단하게 여겨겼는지 그 이유를 확연히 알 수 있을 정도의 공격이었다. 비록 한 수, 한 수의 속도는 북두연환장에 미치지 못했으나, 가 히 폭발적이랄 수 있는 연격만은 기가 질릴 정도였다. 선주혁은 암영풍을 전개해 뒤로 물러서며 상대의 공격을 피해 냈다. 한순간 쏟아지는 공격에 미처 대응할 방도를 찾지 못했기 때 문이다. 당황하는 순간도 잠시 . 이내 평정심을 되찾은 선주혁은 두 눈을 예리하게 빛냈다. 가히 하나의 벽처럼 쏟아지는 전목양의 공격 속에서도 흐름을 찾아내려 는 것이다. 어찌 보면 무모한 시도였지만 선주혁은 자신의 신체를 믿었다 저처럼 많은 연속적으로 내뿜는다는 것은 힘의 분산이 있다는 뜻. 설령 한두 번 정도 공격을 당한다 해도 묵연수투의 기운까지 응 용한 상태였으니 목숨을 잃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그렇게 마음을 가라않히자 과연 전목양의 공격 속에서도 내력과 경력, 그리고 대기의 흐름이 보이고, 느껴졌다. 선주혁의 손도 부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마치 당황하여 막무가내로 손을 뻗어 보는 것처럼만 보였다. 하지만 선주혁은 흐름과 흐름의 사이를 거스르지 않고 오르는 것을 연습하는 증이었다. 처음에는 난잡하기만 하던 그의 손동작이 부드러워지고 종국에 는 연어가 물살을 헤집고 오르듯 자연스럽게 변했다. 선주혁의 장법이 본격적으로 흐름을 타고 움직이자, 도저히 틈 을 찾을 수 없을 것 같던 전목양의 암조잠세가 흐트러지기 시작했 다. 선주혁의 장이 전목양의 몸에까지 도달한 것이다. 황망히 어깨를 젖혀 선주혁의 장력을 피해 낸 전목양은 곧바로 뒤쪽으로 물러서려 했다. 하지만 암조잠세를 타고 오른 것은 일 장뿐만이 아니었다. 선주혁의 다른 손이 이미 전목양의 어깨에 닿는 중이었다. 다시 어깨를 비틀어보지만 선주혁의 손은 전광석화(電光石火)가 무색해지는 속도. 어깨뼈가 으스러지는 고통과 함께 비명이 목구멍을 밀고 올라왔 다. 그러나 전목양은 그 비명을 내지르지 못했다. 선주혁의 또 다른 손이 어느새 복부를 가격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고통에 의식을 잃어 가는 동안 전목양은 무 려 다섯 번의 공격을 더 몸으로 받아야만 했다. '됐어 !' 선주혁이 쾌재를 부르는 그 순간, 전목양의 신형이 뒤쪽으로 튕 겨져 나갔다. "목양!" 전목양은 우상균의 안타까운 외침과 함께 솜 빠진 봉제 인형처 럼 축 늘어지며 쓰러졌다. 전신혈맥이 모두 터진 후라 즉사를 하고 만 것이다. "이 지독한!" 우상균의 관자놀이에 푸르스름한 혈관이 비쳤다. 패종회에서 백 존 한 명, 한 명의 의미는 지대했다. 무림 석권의 근원이 되는 힘이 바로 백존이었던 것이다. 그만큼의 능력은 충분했다. 비록 백존의 말석을 차지하고 있던 전목양이라지만 그가 이토록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하리라고는 패종회의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우상균이 느낀 놀라움은 곧 충격으로, 충격은 곧바로 분노가 되 어 그를 타오르게 했다. "저놈을 죽여라! 형제의 복수를 위해!" 우상균의 명령에 태진성(泰珍聖)이 한 걸음을 나섰다. 그는 절대 의 반열에 오른 고수답지 않은 외양을 지니고 있었다. 희멀건 한 피 부에 잘 찐 만두처럼 피둥피둥 살이 찐 체형이었던 것이다. 그의 양 볼은 커다란 당과를 머금고 있는 것처럼 부풀어 올라 있 었다. 날카롭게 찢어진 눈은 살에 묻혀 잘 보이지도 않았고 뚱뚱한 체 형 탓에 뒤뚱거리는 걸음걸이는 우스꽝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태진성은 백존 중 서열 팔십이 위의 고수. 우상균을 제외하면 이 자리의 백존 중 가장 서열이 높은 고수였 다. "태진성이외다. 그대에게서 형제의 목숨 값을 받아 내야겠소." "그럴 만한 능력이 있다면!" 선주혁이 말을 받아치자 태진성의 두툼한 입술이 비틀렸다. 사실 전목양이 죽었다고 해서 금강신협이라는 자와 사생결단(死 生決斷)을 내야겠다는 각오는 없었다. 백존의 일원이 죽었다는 것은 패종회에 큰 손실이었으나, 위험 한 상황은 피하라는 우상균의 명을 어긴 전목양의 잘못이 크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따라서 목숨 값을 언급한 것은 구경꾼들의 이목을 의식해 차륜 전을 노린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일 뿐이었다. 그런데 독고건이라는 자가 저토록 오만한 모습을 보이자 발끈하 는 마음이 든 것이다. '지금의 순간을 한껏 누리도록 해라. 네놈이 아무리 절대의 고수 라 해도 그 힘을 빼놓는 것만큼은 노부 하나로도 충분하니까!' 단추 구멍처럼 가늘고 긴 태진성의 두 눈에서 살광(殺廣)이 쏟아 져 나왔다. 동시에 그에게서 엄엄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각오해라!" 굵직한 호통과 함께 두툼한 태진성의 쌍장이 그의 가슴 앞에 모 였다. 이어 하얀 빛의 구체가 만들어지고 크기를 더해 갔다. 육중한 체구인 태진성의 상반신만 한 구체가 완성되자 쌍장이 앞으로 뻗어졌다. 마치 거대한 산악을 미는 것처럼 힘겨워 보이는 동작이었다. 그 기세가 범상치 않음을 깨달은 선주혁은 암영풍을 전개해 공 격을 피한 후 적의 장세를 파악코자 했었다. 하지만 그는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자신의 뒤쪽에 서 있는 일행을 고려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남궁 일이야 걱정할 필요가 없겠지만, 은설연이나 남궁연 등은 감당치 못할 것이 분명했다. 선주혁은 두 다리를 벌린 채 굳건히 자리를 잡고 양손에 내력을 집중했다. 태진성의 장력은 마치 거북이처럼 느릿하게 선주혁을 향해 다가 가는 중이었다. 그 시간이 너무나 오래 걸려 선주혁은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저렇게 느린 장력에 누가 맞아 준단 말인가? 얼마나 느린 전진이었으면 남궁일의 외침에 뒤쪽의 일행들이 자 리를 피할 정도였다. 그와 같은 움직임을 확인한 선주혁은 마음 놓고 암영풍을 전개 했다. 선주혁이 우측으로 움직여 장력을 피하려는 순간. 날아오던 장력 역시 방향을 틀었다. 여전히 느리기만 한 장력이었다. 선주혁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장력을 우회해 태진성 쪽으로 접근 하려 했다. 그 순간 태진성의 장력에서 빛의 선 하나가 길게 뻗어 나왔다.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서는 선주혁. 빛의 선은 그의 옆구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러자 마치 칼에 베인 것처럼 선주혁의 옷이 길게 찢어졌다. '뭐, 뭐야, 이건?' 섬뜩한 느낌에 선주혁이 놀라는 사이. 은설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원기참옥공(圖氣新玉功)! 어째서 저 무공이?" 원기참옥공. 그것은 중원의 무공이 아니었다. 약 오백여 년 전. 서장(西藏)의 홍교(紅敎)는 무림일통의 기치를 앞세워 대대적인 공세를 펼쳐 왔다. 서장과 중원 모두를 지배하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중원의 무인들은 홍교 라마들의 기이한 무공에 크게 당황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원에도 무구한 절대고수들이 존재했다. 그들에게는 일관성이 존재했다. 정사를 가리지 않고 종국에는 일정한 도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이에 정순한 초식의 운용이라든가 무공에 대한 극의의 발현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것이 중원 고수들이 었다. 그에 반해 서장의 라마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괴이함을 중심으로 무공의 성장을 도모했다. 이에 설명 무공의 경지가 약간 떨어진다 해도 기기막측한 무공 으로 인해 중원 무림인들을 제압하는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중원 무림인들은 큰 혼란에 빠졌다. 중원 무림의 위기 상황 때문만은 아니었다. 처음 무공을 익힐 때는 기병(奇兵)을 사용하는 자의 발전이 빠르 다. 병기의 이점이 무공의 부족한 부분을 메워 주는 것이다. 하나 종국에 가서는 검, 도, 창 등의 전통적인 병기나 권각술로 도를 추구하는 자만이 절대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이 중원 무 림의 통념이었다. 무공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사이한 무공은 그 한계가 분명히 존 재하기 마련이고 그 예는 수많은 흑도와 사파고수들이 증명했다. 당시에는 마교만이 절대의 고수들을 속속들이 배출하고 있어 오직 그들만이 마도를 추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서장의 라마들이 사이한 무공을 통해 절대의 반열에 오 른 것이다. 이는 그간 증원의 무인들이 믿어 왔던 통념을 뒤흔들기에 부족 함이 없었다. 그런 홍교 라마들이 사용해 중원 무인들을 당혹케 만들었던 무 공 중의 하나가 바로 원기참옥공이었다. 이에 은설연은 어째서 패종회의 일원이 서장의 무공을 사용하는 가에 대해 의문을 품은 것이다. 한편 은설연의 외침과 더불어 태진성이 만든 거대한 구체에서 이번에는 두 줄기의 선이 뻗어 나와 선주혁을 향해 쏘아졌다. 선주혁은 이번에는 물러서지 않고 손을 휘둘렸다. 콰앙, 쾅! 요란한 폭음과 함께 원기참옥공의 공세가 흩어졌다. 연이어 다시금 원기참옥공에서 쏘아지는 두 개의 빛. 앞서와 다른 것은 빛의 선이 쏘아지는 것이 아니라 마치 분열한 세포처럼 주먹만 한 강기가 구체에서 떨어져 나와 날아가는 중이었 다. 선주혁은 이번에도 손쉽게 장력을 막아 내며 다시금 태진성을 향해 움직이려 했다. 그러자 또다시 날아드는 주먹만 한 장력들. 선주혁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자광수를 운용하고 묵연수투의 기운을 사용하는 한, 이 정도의 강기는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계속해 날아드는 장력을 무시할 수는 없는 터. 좀처럼 태진성에게 접근할 방도를 찾지 못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날아드는 장력을 와해시킨 선주혁은 급속하게 혈마 자광기를 만들어 태진성을 향해 날렸다. 태진성은 비대한 몸을 움직여 원기참옥공 뒤쪽으로 이동했고 원 기참공 역시도 살짝 각도를 틀었다. 원기참옥공이 태진성의 향하는 길목을 차단하게 된 것이다. 그러자 선주혁의 혈마자광기는 원기참옥공에 명중했다. 쿠우우웅. 땅을 울리는 은은한 진동과 함께 흔들리는 원기참옥공. 잠시 그 형체가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이내 멀쩡한 모습으로 다 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 모양은 마치 원기참옥공이 선주혁의 장력을 삼킨 듯했다. 선주혁이 다시 기를 모아 좀 더 강력한 혈마자광기를 만들려는 순간, 원기참옥공에서 갑자기 일곱 개의 강기가 쓸아져 나왔다. "칫!" 선주혁이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어 그의 손에서 북두연환장이 발출되었다. 동시에 발출되는 일곱 번의 연환장력. 단 한 번처럼 들리는 굉음. 선주혁의 몸주변에서 폭죽이 터지듯 빛이 번쩍이고 원기창옥공 의 강기는 일거에 해소되었다. 마치 선주혁이 날아오는모든 강기를 양손으로 단 한 번에 없앤 것처럼 보였다. 가히 신기(神技)에 가까운 그의 장법에 관친 중인 모든 이가 절로 탄성을 내질렀다. 세상에 저토록 빠른 장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오늘에야 깨달았으니 그들로서는 실로 안계를 넓힌 셈이었다. 원기참옥공의 공격을 막아 낸 선주혁은 그사이 다시 몇 걸음을 이동했고 원기참옥공에서는 다시금 열넷의 강기가 발출되었다. 선주혁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북두연환장의 발출로 일곱 개의 강기를 해소한 그는 살짝 몸을 뒤로 뽑아 다시 나머지 일곱 개의 강기를 없애야만 했다. 북두연환 장을 한 번 발출하고 난 후, 재발출을 하기에는 시간이 필요했기 때 문이다. 그사이 태진성은 선주혁이 다가선 만큼 뒤로 물러서 있었다. '저 치사한 뚱뗑이가?' 계속해 원기참옥공 뒤쪽으로 몸을 숨겨 시간을 끄는 태진성이 못마땅한 선주혁이었다. 태진성은 그와 같은 적의 표정을 즐기듯 토실토실 살이 오른 볼 을 당겨 웃는 중이었다. 이대로라면 적을 지치게 하려는 자신의 의 도를 충분히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금강신협이라는 자는 이와 같은 장력의 운용을 처음 접 할 것이다. 그가 백존이 되어 패종회가 보유한 절기를 선택할 자격 이 주어졌을 때, 원기참옥공을 선택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거대한 장력을 띄워 그 힘을 분할하여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기 이함. 그 앞에서는 아무리 절대의 고수라 할지라도 당황할 수밖에 없 었으며 결국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게 태진성 의 계산이 었던 것이다. 하지만 선주혁의 표정에는 짜증과 의아함, 그리고 실망감이 담 겨 있을 뿐이었다. 짜증은 비겁하게 원기참옥공 뒤로 숨기만 하는 태진성을 향한 것이었으며, 의아함은 원기참옥공의 운용 원리가 자신이 창안한 북 두유성우와 유사했기 때문이었다. 북두유성우 역시 거대한 장력을 허공에 띄운 후 그 장력을 분산 시켜 광범위한 공격이 가능하도록 만든 것이니 실로 유사한 바가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가 실망한 이유는 자신의 독창적인 발상이 세상에 유일무이한 장법을 만들어 낸 것이라고 여겼던 기대가 무너졌기 때 문이다. 유성의 기운을 응용해 장력의 위력을 더한 것만이 다를 뿐, 기본적인 발상 자체는 원기참옥공과 북두유성우가 흡사했던 것이 다. '역시 세상에 새로운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건가?' 내심 투덜거리던 선주혁의 입에서 경고성이 터져 나왔다. "모두 자리를 피하시오!" 내력이 실린 그의 음성은 구경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명확히 전달되었다. 잠시 우왕좌왕하던 그들은 절대 고수들이 격전을 벌일 때, 그 여 파가 대단한 것을 기억해 내고는 분분히 몸을 빼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확인한 남궁일이 다시 내력을 실어 외쳤다. "화경에 이른 고수들의 격전입니다. 더 물러서지 않으면 위험합 니다. " 남궁일의 말을 듣고서야 구경꾼들은 황망히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스스로의 무공에 자신감을 가진 몇몇이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남궁일을 비롯한 정의련의 인물들조차 뒤쪽으로 몸을 피 하는 모습에 결국 몸을 돌려야만 했다. 그사이에도 몇 번에 걸친 원기참옥공의 공격을 와해시킨 선주혁 은 자신도 신형을 뒤로 뽑아냈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들려지는 손. "오!" 남궁연이 입을 동그랗게 오므려 감탄성을 터뜨렀다. 그녀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는 거대한 자색의 구체가 떠올라 있 었다. 그 크기는 태진성이 만들어낸 원기참옥공에 못지않았다. "훗!" 태진성이 비웃음을 흘렸다. 적이 만들어 낸 거대한 장력이 마치 자신의 원기참옥공을 흉내 낸 듯했기 때문이다. 저 정도의 거대한 장력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대단하다 인정할 만했다. 하지만 그저 장력의 크기만 부풀린다고 해서 원기참옥공의 진정 한 위력을 흥내 낼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높은 하늘에서 찍어 내려올 공세에 대비해 원기참옥공을 떠올리며 자신을 향할 각도를 막아설 뿐이었다. 그리고 가슴을 편 채 적의 공격을 기다렸다. 어떤 장력이라 해도 원기참옥공을 뚫고 자신에게 해를 끼칠 수 는 없으리라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원기참옥공의 뒤쪽에 서 있는 한 그는 완벽하게 안전하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가라!" 선주혁의 외침에 반응하듯 자광의 구체가 쏘아져 내렸다. 기나긴 빛의 잔상을 남기는 유성이 재현되는 것이다. 그 막대한 위압감에 태진성의 낮빛이 변했다. 설마 그럴 리는 없을 거라며 부정하면서도 원기참옥공에 쏟아 붓는 내력의 크기를 더했다. 거대한 두 빛의 충돌 이전. 주변의 공기가 일그러지고 형언키 힘든 압력이 사방으로 뻗어졌 다. 동시에 원기참옥공의 형태가 기이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구체가 일그러지는 것이다. 반면 원형을 유지하는 북두유성폭의 장력은 허공에 잠시 멈춰 섰다. 일견하기에는 원기참옥공이 북두유성폭의 거침없는 진격을 막 아선 듯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뿐. 태진성의 안색이 시커멓게 변하고, 그의 입이 크게 벌어겼다. 원 기참옥공 너머의 장력에서 느껴지는 막대한 압력 때문이었다. "크아아아아!" 처절하기 이를 데 없는 비명이 울리고 수백 발의 폭죽을 일시에 터뜨린 듯한 폭음이 울려 퍼졌다. 지면이 크게 흔들리고 엄청난 양의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중인들이 정황을 파악할 정도의 시야가 확보되었을 때, 남은 것 은 거대한 구덩이와 그 안에 흩어진 몇몇의 살점뿐이었다. 비대했 던 태진성의 육신이 형체조차 남기지 못했던 것이다. 만년흑오철을 종이장처럼 납작하게 만드는 북두유성폭의 위력 이었으니 피륙으로 된 육체가 견디는 것은 불가능했다. 잠시간의 침묵. 그것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듯한 위력을 발한 금강신협의 장력 때문이었다. 특히 우상균의 충격은 더욱 컸다. 백존 중 두 명이 속절없이 죽음을 당한 것이다. 적과 사생결단을 내려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적이 지칠 정도만의 공격만을 시도했 을 뿐이거늘 미처 몸을 뺄 사이도 없이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이는 전목양과 태진성 모두가 선주혁에게 있어서는 거의 상극에 해당하는 무공을 사용했기 때문임을 그는 알지 못했다. 극쾌와 파괴력을 중시하는 전목양의 무공은 북두연환장과 선주 혁의 기이한 신체, 그리고 묵연수투의 기운에는 무용(無用), 그 자 체였다. 태진성의 장력 역시 마찬가지였다. 선주혁의 북두유성폭은 엄청 난 위력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나, 집중된 바가 적어 절대의 고수들 에게는 큰 효용을 내기 쉽지 않았다. 이는 태진성의 원기참옥공 역시 마찬가지였다. 허공에 띄운 거 대한 장력 역시 힘의 집중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비교될 바는 오직 장력 전체에 해당하는 힘과 힘뿐. 천하제일의 내공에 유성의 기운을 담은 선주혁의 북두유성폭이 압도적인 힘을 가졌음을 당연한 일이었다. 지나치게 원기참옥공을 믿고 있던 태진성이 허망하다 싶을 정도 로 쉽게 죽음을 맞이한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알지 못하는 우상균은 선주혁이 백존과는 비 교가 되지 않는 고수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상균으로서는 갈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이대로라면 이 인원 전체의 목숨을 걸어야만 할 것이다. 한 명, 한 명이 패종회의 기둥인 백존을 벌써 둘이나 잃은 상태. 지금 생사를 건 일전에 의미가 있는가에 대해 고심을 해야만 했 다. 형제와 같은 두 명의 백존을 잃은 데 대한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하지만 일단의 무리를 이끌고 있는 만큼 냉정한 판단을 해야만 했다. 감성은 복수를 주장한다 해도 패종회가 달성해야 할 위업을 위해 가장 효과적인 결론을 내려야 하는 것이다. 우상균은 이를 갈아붙이며 결를을 내렀다. "그대의 무공이 그토록 고강하니 우리는 이만 물러가겠소. 하지 만 명심하시오! 패종회는 형제의 피를 소중히 생각한다는 것을 말 이오. 청산이 푸르른 한 오늘의 일은 반드시 되갚아 주겠소." "마음대로!" 선주혁은 턱을 살짝 치켜든 오연한 자세로 대꾸했다. 비록 교묘하다 싶을 정도의 우연으로 인해 손쉽게 둘을 상대했 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동안 백존에 가졌던 막연한 두려움을 극복 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남아 있는 백존은 셋. 함께 온 스물의 무사들의 무공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과 남궁일이 백존 중 셋을 감당한다 해도, 남궁연 등이 패종 회에서 백웅 정도의 서열에 해당하는 스물을 맞서 싸우는 것은 불 가능할 터였다. 아무리 빠르게 승부를 낸다 해도 일행 중 몇몇은 크 게 다치거나 죽을 가능성이 높았다. 선주혁이 재빨리 우상균의 말을 받으며 자신이 넘친다는 표정을 지은 것에는 이 같은 이유가 있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저들이 순순 히 물러나 주는 것을 반겨야 했던 것이다. 그의 대답을 듣자 우상균은 수하들을 지휘해 축 처진 전목양의 시신을 수습해 물러났다. 그런 후에도 남궁일 등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들 역시 상극에 해당하는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선주혁의 무공이 저들에 비해 압도적이었던 것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이다. 특히 남궁일은 더욱충격이 컸다. 한눈에도 다섯 명의 노인들은 일찍이 접할 수조차 없던 엄청난 고수였다. 한데 독고건이 순식간에 그들 중 둘을 간단히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다. 가히 무신(武神)이라 칭하기에도 부족함이 없을 위용에 할 말을 잊을 수밖에 없었다. "우와와와! 독고 대협, 정말 대단해요!"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남궁연이었다. 그녀는 아이처럼 팔짝팔 짝 뛰며 선주혁의 무공에 대해 감탄사를 늘어놓았다. 다른 사람들은 아직까지 경외심에 가득한 눈으로 선주혁을 바라 보고 있을 뿐이었다. 저기 멀리서 누군가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 정도면 금강신협이 아니라 금강무신이라 해야 하는 거 아닌 가?" "그러게 내 평생 저런 장력은 처음 봄세." "패종회의 고수들 역시 대단한 무공을 구사하더만‥‥‥, 손 한 번 제대로 못 써 보고 당하다니‥‥‥, 금강무신이 아니라 천하제일의 고수라 불러야 할 걸세." 저와 같은 소리들에도 불구하고 정작 션주혁의 얼굴에는 그림자 가 드리워졌다. 이제는 분명 자신의 무공이 백존의 우위에 서 있음 을 확신할 수 있었다. 굳이 상극 관계의 무공을 구사하는 게 아니더라도 상대할 자신 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패종회주와 세 명의 고수, 그리고 천음마후를 염두에 둬야만 했다. 만약 이 자리에 천음마후가 있었다면 죽음은 전목양과 태친성이 아니라 자신의 몫이었을 것이다. 지금의 승리야 가슴이 벅차오를 정도로 기쁘지만 그 생각이 떠 오르자 마냥 웃고 있을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근데‥‥‥ 독고 대협, 표정이 왜 그러세요?" 남궁연이 선주혁의 바로 옆에 찰싹 달라붙은 상태로 물었다. "아! 그저 지나치게 과히 손속을 쓴 게 아닌가 싶어서‥‥‥. 사람 을 죽인다는 것이 그다지 유쾌한 일은 아니니까 말이오." 선주혁은 재빨리 자신의 마음을 감췄다. "역시 대협의 풍모에 걸맞은 말씀입니다. 하지만 저들과 같은 고 수를 상대하는 데에 있어서 힘을 조절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피치 못할 상황이었으니 독고 대협께서는 크게 개 의치 마십시오." 제갈중양이 나서며 말했다. 그 역시 무의 길을 걷는 한 명의 무인 으로서 독고건이라는 자의 무공은 선망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그와 같은 성취를 이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자신의 존경을 받을 자격은 충분한 것이다. 이에 새삼스레 독고건을 흠모하는 마 음이 치밀어 오르는지라 이처럼 위안의 말을 한 것이다. "감사하오, 제갈 소협." 선주혁이 두 손을 맞잡아 예를 표하자 제갈중양은 감당하기 힘 들다는 표정으로 황망히 포권을 취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 제갈중양의 그런 모습을 확인한 후 선주혁은 살짝 미간을 찌푸 리며 말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패종회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는 것은 힘들 지 않겠소? 노부의 생각으로는 저자들은 하수인에 불과하니 패종 회에 대체 얼마나 많은 고수들이 존재하는지 짐작할 수가 없구려. 그들 중 상당수가 몰려온다면 노부로서도 감당키 힘들 것 같소이 다. " "그렇군요. 양측의 공식적인 회합이 없는 한, 적대적인 관계에 놓인 셈이라고 봐야겠지요." 남궁일이 공손함을 유지하며 선주혁의 말에 동의했다. "제 생각에는 최대한 빨리 사천을 벗어나는 게 좋을 것 같습니 다. 설마하니 저런 엄청난 고수들이 수십 명이야 되겠냐마는, 저들 도 다음번에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올 테니까요." '수십 명은 아니지. 백 명이나 된다니까!' 선주혁은 아직까지 상황을 모르는 제갈중양의 말에 내심으로 투 덜거렸다. 이번 기회에 패종회의 악의와 그들의 저력을 충분히 알 리고 싶었건만 일이 틀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럼 돌아가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저들이 노호산에서 저지른 만행만으로도 패종회의 행사에 대한 근거가 될 것입니다. 그 정도 만으로도 련에 보고할 내용으로 충분할 테니까요." 남궁일의 말을 듣고서야 선주혁은 조금 마음이 풀어졌다. 최소한 정의련이 패종회의 위험성과 힘을 인정하고 그들과 공조 하는 것만큼은 막을 소지가 충분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꼭 일이 틀어진 것만 같지 않았다. 자신으로 인해 정의련과 패종회가 서로 원한을 갖게 되었으니 어찌 보면 기대 이상의 성과를 냈다고 볼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제야 선주혁은 미미하나마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 Chap.6 - 전개 양상의 변화 = <<1>> "아무래도 자네 사제의 말이 맞는 듯하군. 딱히 우리에게 큰 위 협이 될 정도는 아닐지라도 거의 동등한 수준의 무공을 지닌 자들 이었어. 저런 자들이 백여 명이 된다면 정말 큰 문제가 아닐 수 없 군 그래." 백존을 처음으로 확인한 종극이 남지학에게 말했다. "사제가 쓸데없이 일을 부풀렸을 리는 없으니까요." 남지학은 당연하다는 표정이었다. "뭐, 뭐요? 그렇다면 그 녀석이 우리 수준의 무공을 지닌 자들을 단숨에 때려 죽였다는 이야기요?" 악구윤이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적어도 그 꼬마 녀석의 무공이 우리 아래가 아니라는 것만큼은 확실하오." 수조문이 냉랭한 표정을 유지한 채 대답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게 무슨 뜻인지 제대로 몰라서 하는 말이 오? 나만 해도 냄새나는 정파놈들 중 무공깨나 한답시고 거들먹거 리는 백여 명이 몰려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자신이 있거늘, 저 녀석도 그 정도나 된단 말이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녀석의 무공이 어땠는지 두 분도 보지 않았소?" 악구윤은 좀처림 인정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얼마 전까지는분명 그랬소. 하지만 이 친구 말대로 저 꼬마는 이미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범주를 벗어난 모양이오." 종극의 말에 다시금 악구윤이 토를 달고 나왔다. "아니, 아무리 사고의 범주를 벗어나도 그렇지요. 지난 번 태태 상교주님께 깨달음을 얻었다는 이후에도 그 정도는 아니었잖소? 그사이 전설상의 영약을 밥처럼 처먹었다고 해도 순식간에 그렇게 강해질 수는 없는 법이거늘‥‥‥." "그만 하시오 부정하고 싶다 한들 어찌겠소?저 녀석이 순식간 에 강해졌으니 인정할 수밖에." 수조문이 딱 잘라 말했다. "그간의 고련이 허무하게 느껴질 정도군. 저 녀석은 원래부터 인 간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소." 종극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탄식했다. "장강의 앞물이 뒷물을 치는 법이 아니겠소? 정작 옆에 있는 이 친구의 무공만 해도 결코 우리의 아래라고 볼 수 없으니‥‥‥." 수조문이 남지학을 힐끗 보며 종극의 탄식에 동조했다. 그러자 악구윤이 두 눈을 부릅뜨며 남지학을 새삼스럽게 살피기 시작했다. 정말 이 녀석의 무공이 자신의 아래가 아닌가 확인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저는 아직 그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겸손할 필요 없네. 자네가 스스로의 경지를 드러내지 않았다고 해서 모를 우리가 아니야. 아까 자네 사제가 싸울 때, 저도 모르게 기세를 일으키더군. 아마도 언제든 사제를 도우려 나가기 위함이었 겠지. 그때의 기도만 봐도 우리의 아래가 아님을 확인했네." "‥‥‥." 남지학은 어색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딱히 그렇다, 아니다 를 말할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뭐, 뭐야?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야?" 뜻을 알 수 없는 시선으로 남지학을 바라보던 악구윤도 결국 한 숨을 내쉬었다. "거참! 이제는 정말이지 강호에서 물러날 때가 된 모양이군. 이 런 꼬맹이가 우리와 맞먹을 정도라니‥‥‥? 악구윤아, 악구윤아! 그 야말로 좋은 시절 다 갔구나!" 이어 종극이 무거운 음성으로 남지학에게 물었다. "자네도 느꼈는가? 자네 사제가 처음의 그자를 상대할 때의 초 식에 대해?" 남지학은 잠시의 시간을 두었다가 대답했다. "아마도 사제가 또 다른 성취를 향해 나아가는 것으로 보이더군 요. 아직은 정립되지 않은 무공을 시험하는 듯 보였습니다만‥‥‥." "흠‥‥‥, 역시 자네도 그렇게 보였나 보군. 허!" 종극은 결국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 "엥? 뭐라는 거요? 그럼 우리랑 어깨를 나란히 하는 상대를 두고 무공을 시험했다는 이야기요?" 거의 자포자기의 기색을 보이던 악구윤이 또다시 화들짝 놀라는 모습이었다. "정확히는 모르겠소. 아무튼 녀석의 손놀림이 범상치 않았소. 처 음에는 그저 화무난천장이나 무당의 면장과 비슷한 류의 장법을 사 용하나 싶었는데‥‥‥. 뭔가 달라! 일정한 형(形)이 없는 초식이랄 까? 그 엄청난 속도와 신묘할 정도의 움직임이란‥‥‥. 이 친구 말 대로 저 녀석이 종사의 자질을 지니고 있다면, 또다시 새로운 무공 을 창안하고 있는 거겠지요." "그럴 것입니다. " 남지학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격전 중에도 사제의 움직임에는 끊임없는 진보가 있었다. 처음 에는 제대로 내뻗지도 못하는 손이 종국에는 자연스럽기 그지없게 변했다. 그 모양새가 배웠던 초식을 익혀 가는 것과는 사뭇 달랐다. 이에 남지학은 사제가 새로운 무공을 창안하는 중임을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 "허허! 자네 말대로 우리는 대종사 탄생의 증인이 되겠군." 종극이 시야를 밀리 두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에는 수많 은 감정이 담겨져 있어 딱히 하나의 의미로 완결할 수 없는 바가 많 았다. 저런 인재가 마교에 없음에 안타까웠고, 상상을 초월할 고수의 탄생에 대한 흥분이 있었으며, 같은 무인으로서의 경외심, 부러움 이 있었으며, 지나치게 빠르게 성장하는 것에 대한 놀라움까지 내 포된 웃음이었다. 순간 뾰족한 고음이 그의 귀를 파고들었다. 이어 넓게 날개를 펼치고 하강하는 한 마리의 매. 전서응(傳書腐) 이었다. 종극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전통에서 돌돌 말린 전서를 꺼내들었 다. 그의 미간에 세로로 그려지는 깊은 주름. "무슨 일이오?" 성격이 급한 악구윤이 제일 먼저 내용을 묻고 나섰다. "교주께서 패종회에 대한 조사를 마치신 모양이오." "결과는?" "최대한 빨리 교로 복귀하라는 명이오. 저들의 힘이 선 가 꼬마 놈이 말한 바에 부족하지 않은가 보오." "저, 정말로 천음마후가 실재하고, 우리 정도의 고수가 백여 명 이나 된단 말이오?" "교에서 파악한 내용은 그런 것 같구려." 종극의 말에 중인들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정보를 취급함에 있어서 정도 무림과 천마맹은 큰 차이가 있었 다. 정도 무림에서 정보통이라 알려진 개방은 드러난 소문에 밝았 다. 천하에 널린 거지들을 이용한 정보망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와 같은 정보는 다방면에 걸친 정보를 수집하기에는 용이하나 깊이 있는 정보를 취하는 데는 무리가 있었다. 게다가 정도 무인들의 특성상 염탐이라는 것 자체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이에 반해 천마맹은 정보의 중요성에 대해 명확히 파악하고 있 었다. 신도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그들에게 있어서 밀정이나 간세의 파견은 일도 아닌 것이다. 사파연합의 경우는 백사회를 제외하고는 오합지졸이 많은지라 제대로 된 정보망을 구축하는 데 한계가 있는 반면, 천마맹은 교도 를 중심으로 한 체계적인 정보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천마맹은 드러난 세력을 조사하는 데에 있어서 그 어떤 곳보다 빠르게 정보를 취합,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패종회 역시 이미 발호를 한 상태. 그들에 대한 조사가 신속하게 진행되었던 것이고, 그 결과가 종 극에게 전해진 것이다. "패종회는 사제를 내버려두지 않을 것입니다. " 복귀하라는 명을 받았다 말하는 종극을 향해 남지학이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걱정하지 말게. 자네 사제를 버려두고 우리끼리 돌아가자는 이 야기는 아니니," 종극의 말에 남지학의 표정이 풀렸다. "일단 자네 사제와 접촉하도록 하세. 상황에 대해 함께 논해 볼 필요가 있겠네." "알됐습니다." <<2>> 이틀 동안의 여정에 선주혁 일행은 한 눈에도 처져 있었다. 전력 을 다한 질주였으니 지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선주혁과 남궁일만이 태연한 신색을 유지할 뿐이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소, 남궁 소협," "무슨 말씀이십니까?" 남궁일이 공손한 어조로 물었다. "저들이 마음먹고 추격해 온다면 지금의 상태로는 따라잡힐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요."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다른 방법을 강구해 낼 수는 있을 것이오." "고견이 있으시다면 경청하겠습니다." 시종일관 정중하기 이를 데 없는 남궁일의 태도가 부담스럽기만 한 선주혁이었으나 빠르게 본론에 들어갔다. "노부가 이곳에서 길을 막했소." "‥‥‥!" 남궁일의 어깨가 흔들렸다. 잠시 호흡을 고른 후 그가 입을 열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저희만 살자고 독고 대협을 이곳에 남겨 둘 수는 없는 일입니다." 약간은 격앙되었으나 그 단호한 감정만은 여실히 드러나는 말이 었다. '어이, 이봐. 형씨가 자꾸 그렇게 나오면 나도 정든다고!' 무슨 계산이 깔려 있건 간에 남궁일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는 극 진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런 남궁일에게 자꾸만 호감이 생기는 게 어쩐지 불편한 선주혁이었다. 현재, 자신은 남궁일을 속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른 식으로 만나 친분을 나눴으면 참 좋았을 친군데‥‥‥ 쩝.' 속으로 입맛을 다시며 선주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노부는 이미 살 만큼 산 몸이오. 무림의 미래는 그대들 젊은이 의 몫이 아니겠소?" 짐짓 근엄한 체하는 선주혁의 말에 남궁일의 언성이 높아졌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독고 대협께서는 이미 무림의 큰 기둥과도 같은 몸이십니다. 만약 남아서 저들을 저지해야 할 사람들이 있다 면 그것은 저희여야 할 것입니다." '니들이 가 줘야 마교 할배들이나 사형이 날 돕지.' 선주혁은 자신의 내심조차 모른 채, 고집을 굽히지 않는 남궁일 이 답답하기만 했다. 그는 잠시 할 말에 대해 고민을 하다가 작전을 바꾸기로 했다. "남궁 소협께서는 노부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무공이 무엇인지 알고 계시오?" "제 식견으로 어찌 감히 독고 대협의 무공을 측량할 수 있겠습니 까?" 한결같이 정중하기만한 남궁일의 일거수일투족에 선주혁은 쓴웃 음을 지으며 말했다. "사실상 노부가 스스로 자부심을 갖는 무공은 단 한 가지뿐이오. 그것은‥‥‥ 바로 경공술이라오." "독고 대협의 무공은 하나하나가 신공절기(神功絶技)가 아닌 것 이 없으니 모든 무공에 자부심을 가지셔도 될 것입니다." "허허, 남궁 소협께선 노부의 얼굴에 금칠을 하시는구려. 여하튼 갑작스레 이와 같은 제 자랑을 하는 이유가 있소. 노부가 이 자리에 남는다 하여 남궁 소협께서 크게 염려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함이오." "아‥‥‥!" 남궁일은 그제야 대략의 상황을 짐작한 듯 나직한 탄성을 발했 다. "이 자리에서 적이 오길 기다렸다가 그들의 시선을 끌어 도주하 기 시작한다면 누가 있어 노부를 따라잡을 수 있겠소? 그러니 남궁 소협께서 한시라도 빨리 정의련으로 돌아가 주는 것이 노부를 돕는 일이 될 것이오." "그렇다고는 해도 장담할 수 없는 위험이‥‥‥." "남궁 소협께서는 노부의 경신공부에 대해 믿지 못하신다는 뜻 이시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남궁일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결코 그런 의미가 아니었 기 때문이다. "허허헛, 남궁 소협의 마음이야 잘 알고 있소이다. 모든 게 이 늙 은 몸을 염려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렇다고는 해도 모두가 안전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 아니했소? 정작 저들이 몰려왔을 경 우, 남궁 소협이야 그렇다 쳐도 나머지 분들로 인해 노부는 외려 곤 란한 지경에 이를 것이외다." 다시 말하자면 저들을 보호하기 위해 신경을 쓰다보면 격전을 벌이는 데도 지장이 있을 것이고, 마음 놓고 도주도 못한다는 뜻이 었다. "제가 미처 생각이 거기에까지 미치지 못했습니다." 남궁일은 빠른 시간 내에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한 후, 선주혁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럼 더 이상 주저하지 말고 어서 이곳을 벗어나도록 하시오. 멀리 떨어질수록 노부를 돕는 것임을 명심해 주시길 바라오." "알겠습니다. 부디 보중하십시오, 독고 대협!" "남궁 소협도 보중하시오." "남창에서 뵙겠습니다." "그럽시다." 두 사람이 포권을 주고받은 후에도 남궁일 일행이 먼저 출발을 하기까지에는 꽤 시간이 필요했다. 은설연과 남궁연이 함께 남겠다고 고집을 부렸던 것이다. 결국 남궁일의 설득에 두 사람 모두 경신술을 전개하기 시작했 고 선주혁은 홀로 남게 되었다. 그는 여유롭게 경공을 전개하며 이동하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남지학과 종극 등이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가 자네와 따로 할 이야기가 있는 걸 어찌 알고 저들을 보 냈는가?" 악구윤이 참으로 신기한 일이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지금으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 않소? 저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차라리 우리와 합류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겠지요." 수조문의 말에 선주혁이 멋쩍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었다. "헤헤, 들켰군요." "어쨌든 올바른 결정이었네만‥‥‥, 우리라 해도 큰 도움은 안 될 듯하군." "네?" 선주혁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종극이 씁쓸히 웃었다. "자네가 교주님께 말씀드린 게 사실인 것으로 드러났네. 교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막강한 고수들이 패종회에 대거 포진해 있다더 군" "그걸 어떻게‥‥‥?" "저들이 웅크리고 있을 때라 해도 본교에서 파악치 못했다는 사 실이 놀라운 일일세. 현판을 내걸고 사천 땅에 거대한 건물을 세운 지금까지도 우리의 눈과 귀를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7" "그렇군요." 마교의 정보력에 선주혁은 새삼 감탄하면서 제법 일이 잘 풀려 간다고 생각했다. 정의련파 패종회가 양립하기 힘든 상황은 이미 시작되었다. 마교도 패종회의 위험성을 파악했으니 이제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단은 이 자리를 피하도록 하세. 저들 중 상당수가 몰려온다면 정말로 우리만으로는 도움이 안 될 수도 있으니 말이야." 종극의 말에 다섯 사람 모두가 신형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선주 혁은 일부러 흔적을 남기며 달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행여 패종회 가 남궁일 일행을 쫓아가서는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빠르게 신형을 움직이는 중 종극이 입을 열었다. "제일 큰 문제는 천음마후가 실존한다는 사실일세." "제가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전설이 아니라고요." 선주혁이 조금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리 자네 말이라도 직접 확인하기 전에는 믿기 힘든 일이 있 는 법일세. 더구나 본교의 미래를 결정짓게 될지도 모를 일을 단순 히 듣게 된 말만으로 결정할 수는 없지 않겠나?" 종극의 말에 선주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저들 중 얼마나 많은 인원이 음공(陰功)을 익혔는지 짐작 가는 바가 있는가?" "저들 중 무공이 고강한 백 명이 자신들을 백존이라 칭하더군요. 제가 알기로는 그 백 명 모두가 구음대법이라는 것을 익히고 있습 니다." "구음대법?" 수조문이 고개를 갸웃 거렸다. "과거 소림사에서 유실된 구음진경의 특색을 더욱 강화시킨 심 법이지요. 아마도 천음마후의 음기에 특화된 심법이 아닌가 싶습니 다." 선주혁의 말에 종극의 눈살이 크게 찌푸려졌다. "그렇다면 우리 수준의 무공을 익힌 자 전원이 극에 달한 음공을 익혔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선주혁의 대답에 잠시간의 침묵이 이어졌다. 서로 귓가를 스쳐가는 바람 소리만을 들을 뿐이었다. "암운(暗雲)의 두께가 심히 두텁군. 교주님이라면 모를까? 누가 있어 천음마후에게서 음기를 제공받는 그 백존이라는 자들을 상대 할 수 있을꼬‥‥‥." 거친 바람 소리에 흘려보내는 수조문의 한탄이었다. 빙마의 입 에서 이와 같이 나약한 발언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랄 일 이었다. "아직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백여 명에 달하는 고수의 수 가 엄청나다고는 해도, 그 숫자만으로 중원 전역을 감당하기에는 부족하지요." "사제의 말이 옳습니다. 천음마후 역시 하나에 불과하니 해결책 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선주혁의 말에 남지학이 동조하고 나섰다. 당연한 일이었다. 선주혁이 읽은 소설 속에서 남지학이 제대로 힘을 키우기 전에 사용했던 방법을 말했던 것이다. 그러니 기본적 으로 둘의 생각이 같을 가능성이 높았던 것이다. '그 뭣이냐, 게릴라전! 그걸 쓰는 거지.' 선주혁이 내심 중얼거릴 때, 종극이 눈빛을 빛냈다. "좋은 의견이군. 확실히 중원은 넓지! 그리고 이와 같은 사실을 몰랐다면 모를까, 미리 알게 된 이상 대응할 방법이 없는 것만도 아 니지." "네? 대응할 방법이요?" "일월신교의 역사가 근 천 년에 달하고 있네. 그 세월의 무게란 측량키 힘든 것일세." 종극이 묘한 여운을 남기며 미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순간 선주혁의 머리가 맹렬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소설 속에서 패종회의 일에 마교가 개입되는 시기는 매우 늦었 다. 무림맹을 뒤흔든 패종회는 사천에 근거를 마련하며 청성, 아미, 당문에 직접적인 공격을 단행했다. 당연히 구파일방이 제일 먼저 패종회의 희생양이 되는 전개였고, 마교의 입장에서는 정도 문파의 몰락에 슬퍼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후일 패종회의 야심찬 무림정벌까지 용납할 수 없을 때가 되어 서야 마교가 개입했다. 그들이 패종회의 가공할 힘의 실체를 깨달 았을 때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던 것이다. 한데 미리 저들의 힘을 알게 된 지금이기에 방안이 있다고 한다. 이곳 일의 진행양상이 달라졌기에 또 다른 무엇인가가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선주혁은 점점 상황이 오리무중(五里霧中) 속으로 접어들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책으로 읽어 알고 있는 정보가 언제 까지 유용할 수 있을지, 이제는 확신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3>> 사천의 경계를 넘어설 때까지 이렇다 할 추적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백존 중 상당수를 소집하는 것도, 그렇다고 추 격전에 천음마후를 대동하는 것도 쉽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라 선주 혁 등은 짐작했다. "이쯤에서 저는 정의련으로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직은 그 곳에서 할 일이 더 많을 테니까요." "전서응의 사용법을 알려 줬으니 계속 연락을 유지하도록 하세." "네." "사제, 항상 조심하도록 해. 무모한 일이라 여겨지면 굳이 나서 지 말고." 긴 말은 아니었지만 언제나 남지학이 자신을 위하는 말을 할 때 면 가슴이 뭉클해지는 선주혁이었다. 그 한 마디, 한 마디에 담겨 있는 진심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알겠어요, 사형. 사형이야말로 보증하세요!" 남지학이 대견한 표정으로 선주혁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사제라기보다는 제자를 바라보는 사부의 시선이었다. 삼 년 간 직접 선주혁을 가르쳤으니 실질적인 사부라 해도 과언을 아니었 다. "그럼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다시 보도록 함세." 종극의 마지막 말과 함께 선주혁은 일행과 떨어졌다. 한동안 홀로 다닌 적이 없어선지 가슴 속에 휑한 바람이 부는 것 만 같았다. "쳇! 어느새 이렇게 나약해져 버린 거냐, 선주혁!" 저쪽 세상에서는 혼자 있지 않으면 외려 불안한 느낌이 들 정도 였다. 그런데 잠시 홀로 있게 된 지금 외롭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 자 인간이란 참으로 간사한 동물이구나 하는 생각에 헛웃음이 날 정도였다. 그러면서도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기회라는 것은 대단한 행운이 라는 마중영의 말을 떠올렸다. 지금과 같은 외로움을 느낀다는 것 은 이곳에서의 대부분에 해당하는 시간이 외롭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는 저쪽 세상에서는 경험하지 못했딘 풍요에 젖어 있음을 증명했 다. '비록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를 위태로운 상황이라 할지라도, 역 시 내게는 이번의 삶이 정말이지 행운이랄 수 있겠군' 잠시 하늘을 바라본 선주혁은 남창과는 엇나가는 방향으로 달리 기 시작했다. 현재까지는 추격이 없다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다. 행 여 추격이 남궁일 등이 향한 방향과 겹쳐질까 저어해 일부러 돌아 가는 길을 택한 것이다. = Chap.7 - 비기(秘技) = 선주혁은 가는 곳곳마다 금강신협이니 독고건이니 하는 말을 들 을 수 있었다. 멀리 돌아가는 중이긴 했지만 경공을 전개한 자신이 다. 그럼에도 자신보다 빠른 소문에는 역시나 감탄하지 않을 수 없 었다. 구전(口傳)의 무서움이었다. '텔레비전도 라디오도 없거늘‥‥‥ 초고속 인터넷 통신망이 아니 라 초고속구전통신망(超高速口傳通信綱)이라도 깔려 있다는 거냐?' 선주혁은 무림의 소문이 경이적일 정도로 빠른 것에 대해 이렇 게 감탄을 했다. 이곳에서의 수많은 경험이 그를 보다 성숙하고 진 지하게 변모 시켰다. 그렇다고는 해도 천성이 사라지지는 많는 모 양이었다. 그는 복잡한 상황 가운데서도 이렇게 실없는 농담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을 즐겼다. 어쩌면 그가 이곳에 빠르게 적응 하고, 자신의 삶을 개척할 수 있는 원동력은 이와 같은 낙천적인 면 모에 있는 것일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소문 중에서는 백발귀마와 금강신협 두 사람이 결전을 벌일 경 우에 대한 짐작도 있었다. 심지어는 주루에서 그에 관한 언쟁이 주먹다짐으로 발전하는 경 도 있었다. 서로의 주장에 대한 근거가 자신의 실력으로 이어지 는 것이다. 자신의 무공이 뛰어나니 안목 또한 높음을 증명하려는 듯 설전(舌戰)이 실전(實戰)으로 변했다. 그런 어처구니없는 싸움에 정작 당사자인 선주혁은 쓴 웃음만을 지을 뿐이다. 그리고 사람이 얼마나 하찮은 일에 목숨을 거는 지에 대해서도 생각할 기회를 가지곤 했다. 금강신협이 강하든 백발귀마가 강하든 그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이다. 한데 그 일이 주먹다짐으로 변하고 무공까지 꺼내들게 되면 결 국은 목숨을 걸어야 했다. 따지고 보면 둘 중 누가 강한가보다는 자신이 말한 바에 대한 자 존심에 관한 문제였고, 스스로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 주객이 전도 되어 버린 것이다. 금강신협이나 백발귀마의 우열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발언이 더 중요한 문제로 된 셈이었다. 그와 같은 일련의 과정을 웃으면서 지켜보다보니 사람에 대해 더 깊은 생각을 하게 되는 선주혁이었다. 그렇게 조금은 관조적인 시선으로 사람들을 구경하며 강서성 수 수(修水)에 이른 선주혁은 객잔에서 묘한 기류가 흐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묘한 기류의 정체는 무리를 지어 앉은 무림민들의 사이에서 느 껴지는 적대감이었다. 한 공간 안에 있는 그들 사이의 적대감은 보이지 많는 벽을 만들 어내고 있었다. 가운데가 비어 아래충을 내려다볼 수 있는 이 층 좌석에 앉아 있 던 선주혁은 그 벽을 흔드는 한마디를 들을 수 있었다. "흥! 당최 냄새가 나서 술을 마실 수가 없군 그래." "그동안 꼬리를 말고 있다가 생판 알지도 못하는 세력에 빌붙고 나서 제 세상 만날 듯 짖어 대는 개들 냄새 때문이지 뭐." "크하하하핫!" "푸하하하!" 무림인처럼 보이는 자들의 대화와 웃음소리에 객잔 내의가 분위기 가 싸늘하게 식었다. 그러자 맞은편에 있던 통일된 복장을 한 무리의 사내 중 하나가 들으라는 듯 언성을 높여 말했다. "배경만 믿고 거들먹거리던 놈들이 이제는 간이 오그라들어 술 도 못 처마시나 본데?" "그러게. 여기저기 줄 대기 바쁘다가 꼬리를 말 때가 된 거지. 이 제는 지금까지 비벼대던 언덕이 작아 보여서 불안한 모양이야." "우하하핫, 그러게 말이야." 반대쪽에서도 웃음이 터져 나오자 처음 언성을 높였던 사내가 스윽 몸을 일으켰다. "지금 이 자리에 오호검문(五虎劒門)이 있는 것을 알고 짖어 대는 소리냐?" "정의련의 다섯 마리 호랑이는 오대세가를 말하는 게 아니었나? 그 이름에 빌붙은 수수의 개 다섯 마리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 데 말이야." 오호(五虎)라는 문파명을 이용해 외려 조롱의 거리로 삼아 버리 는 장한이었다. 그의 일행은 탁자를 두들기며 요란하게 폭소를 터뜨렀다. "막되 먹은 소금을 처먹더니 간이 부었나 보군" 스릉 하는 맑은 소리와 함계 검을 뽑아들며 사내가 노골적으로 투기를 드러냈다. 검을 뽑아든 사내는 오호검문 문하의 서작(徐作)이었다. 그간 이곳 수수를 대표하는 문파는 당연 오호검문이었다. 공식 적으로 정의련에 이름을 올린 문파로서 그들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한데 바로 얼마 전 적부문(赤副門)이 무림맹과 연수한 패종회에 가입, 마치 제 세상을 만난듯 활개를 치고 다니기 시작을 한 것이 다. 적부문은 사실상 무림의 문파라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암상(暗 商) 즉, 몰래 소금을 취급하는 집단으로 무의 추구보다는 축재(蓄財) 에 더 관심이 많은 염방이랄 수 있었다. 그런 무리가 패종회의 가입 이후 오호검문과 어깨를 나란히 하 는 것처럼 거들먹거리는 모습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서작이 급기야 일을 만든 것이다. "흥! 무관의 도장에서 목검을 들고 비무만 하던 도련님들께서 진 짜 칼질이 뭔지나 아는지 모르겠어 " 대놓고 오호검문을 강아지에 비유하던 사내, 적부문의 여진생(呂 蒸生)이 자신의 도를 뽑아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이 여기까지 진행된 이상 서로 간에 물러설 방도는 없었다. 이 제는 검과 도를 부딪쳐야만 하는 상황인 것이다. 객잔의 일 층은 한순간 어수선해졌다. 이들의 분쟁과 무관한 자 들이 저마다 자리를 피하기에 바쁜 것이다. 그 순간 객잔 주인이 두 무리 사이에 끼어들었다. "이곳은 여러 사람들이 이용하는 객잔입니다. 수수에서 명성이 높은 두 곳의 무사님들께서 서로의 힘을 겨루기에는 적합한 장소가 아니지요." 검과 도를 뽑아들고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의 두 무인 사이에 서 저토록 침착하게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보통의 담량을 가지고 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선주혁은 대치 상태의 두 무인보다 외려 객잔의 주인에게 더 관 심이 갔다. 그에게서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던 것이다. 기감을 느끼는 데 있어서만큼은 자신이 있어 하는 그가 전혀 노 인에 대해 의식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따라서 선주혁은 노인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잠시간 노인을 살핀 그는 고개를 갸웃거려야만 했다. 분명 잘 벼 린 검처럼 날카로운 기도가 느껴지는 노인이었다. 순간적으로 자신 이 의아함을 느끼기에 충분할 정도였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노인에게서는 종극을 비롯한 마교의 장로나 백존과는 비교되지 않는 내력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인에게서는 알 수 없는 위험이 느껴지고 있었다. 노인을 적이라 상상하는 순간 전신을 팽팽히 당겨오는 긴 장감은 결코 앞서 거론한 절대 고수들에 못지많을 듯했다. 그 이유를 알지 못하는 선주혁이었기에 더욱 관심을 두고 노인 을 살피기 시작했다. "이 노대(老大)는 빠져 있으시오. 파손으로 인한 변상은 할 테니 말이오." 서작은 객잔의 주인과 안면이 있는 듯 물러나 있을 것을 권유했 다. "그러지 말고 장소를 옮겨 주시면 될 일이 아닙니까? 장소도 협 소하거늘 꼭 여기서 이러실 필요는 없지요." 이 노대라 불린 객잔 주인은 순순히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한창 달아오른 서로의 노여움이 객잔 주인의 권유로 인 해 가라앉을 리가 없었다. "이봐, 늙은이! 빠져 있으란 말 못 들었어?" 여진생이 얼굴의 흉터를 일그러뜨리며 으르렁댔다. 최근 한창 기세가 오른 적부문인지라 객잔 주인 따위가 눈에 들어을 리가 없 었다. 그러자 이 노대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렀다. "여기는 이 늙은이가 평생을 일궈 온 곳이오. 탁자 하나, 의자 하 나에 이 늙은이의 손때가 묻지 않는 게 없거늘 어찌 그것들이 부셔 져 나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가 있겠소?" "저 자식들이 변상한다잖아." 끝까지 고집을 피우는 이 노대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는 여진생 이었다. 그리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는 식으로 말을 덧붙였다. "아! 저놈들이 죽게 될 것을 걱정하나 보군 염려치 말라고! 우리 적부문에서 모든 걸 배상해 줄 테니 말이야." 패종회가 무림맹과 연수를 해 사마외도 척결의 기치를 높인 이 상 적부문 역시 민심에 대한 고려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여진생은 한 차례 자신의 성질을 죽인 것이다. 더불어 상대를 조롱하는 말까지 되니 그로서는 일석이조였다. "개소리!" 서작이 노여움 속에서 콧방귀를 꼈다. 객잔 내의 사람들은 이제야말로 이 노대가 물러설 수밖에 없으 리라 여겼다. 저렇게까지 나온 이상 더 고집을 피우는 것은 목숨을 내놓겠다는 뜻밖에는 되지 않음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중인들의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여 대협, 말씀드리지 않았소이까? 돈이 문제가 아니올시다. 이 늙은이에게 있어서 이 객잔은 전부나 다름없다 하지 않았소?" 이 노대의 쇠심줄 같은 고집에 많은 사람들은 혀를 찼다. 그간 이 한야루(閑夜樓)는 청결하고, 친절한 것으로 수수에서 이 름이 높았다. 누가 수수에 찾아와 좋은 객잔을 물어오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한야루로 갈 것을 권할 정도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음식의 맛이 좋고, 가격도 적당했으며, 술이 향기로워 객잔의 일 층 역시 늘 분주했다. 이 모든 것은 이 노대의 성실함에 기인한 것 이었음을 수수 사람들은 대부분 알고 있었다. 한데 자신이 일군 기업에 너무나 충실하고 애정을 기울 탓에 오 늘에 와서 화를 당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너무도 자명한 사실처럼만 보였다. "젠장! 이 늙은이가 정말이지 주제를 모르는군. 무인들이 명예를 다투는 데 끼어드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알고 싶은 게냐?" 여진생이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그로서는 이 노대가 서작과 안면이 있다하여 이처럼 나댈 수 있 는 것이라 여겨지는 것이다. 수수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치고 오흐검문과 친밀한 교분을 나누 지 않은곳이 없었고, 이와 같은 사실은 적부문도로서 그다지 달가 운 일이 아니었기에 더욱 그랬다. "별것도 아닌 일에 칼질을 해 대는 것이 명예를 다투는 일이오?" "‥‥‥!" 이 노대의 한마디에 객잔에는 난데없는 북풍이 불어 닥친 분위 기 였다. 저와 같은 발언은 지극히 위험하기 짝이 없는지라 서작이 듣기 에도 좋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이 개 같은 늙다리가! 찢어진 주둥아리라고 함부로 놀리는구 나!" 결국 여진생의 도가 이 노대를 향했다. 당장이라도 그의 도가 이 노대의 가음을 가르고 쏟아지는 내장 과 피가 객잔의 바닥을 적시는 광경이 보일 듯했다. "단 한 개의 기물이라도 파손될 경우,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르 게 해 주겠소!" 날이 시피렇게 선 도가 자신을 겨누고 있음에도 이 노대는 눈 하 나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 그 기세가 너무도 당당하여 여진생은 조금은 찜찜한 마음이 들 었다. 뭔가 믿는 구석이 없다면 저리도 당당할 수가 있는가 하는 것이 다. 강호에 은거한 고수가 많다고 하니 혹시나 그들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하지만 이 노대의 두눈에서 정광이 피어오르는 것도 아니고 태 양혈도 밋밋했다. 무공을 익힌 흔적 따위는 찾기 힘들었다. 더구나 자신이 수수에 정착을 한 게 벌써 십 년, 이 노대가 이곳에서 기업을 일군 것은 그보다 십여 년 전이라는 뜻이었다. 아무리 봐도 오십 대 초반에 불과해 보이는 이 노대였으니, 삼십 대에 무림에서 물러난 자라면 은거한 고수라 불리기에는 무리가 있 으리라는 데에까지 생각이 이르렀다. 결국 여진생이 내린 결론은 이 노대가 관에 댄 줄 때문에 저리도 당당할 것이라는 짐작이었다. 주루나 객잔은 물론 장사를 하는 자라면 관과 친밀한 관계를 유 지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관과의 친밀한 관계라면 적부문이 무엇보다 자신하는 바 였다. 소금의 암거래를 하는 그들인 만큼 막대한 금액의 뇌물을 관 에 정기적으로 가져다주는 바, 객잔 주인 하나가 이곳에서 죽는다 해서 사단이 일어날 가능성은 없었다.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치자 잠시나마 이 노대의 당당함에 위축된 모습을 보인 스스로에 대한 노기까지 더해져 여진생의 분노가 폭발 했다. 콰앙. 자신이 앉았던 의자를 걷어차는 여진생. 의자는 맥없이 부셔져 나갔고 담이 작은 구경꾼들은 그 소리에 놀라 목을 움츠렸다. "자! 기물을 부셨다! 어쩔 건데, 늙은이?" 이제는 아예 서작의 존재 자체를 잊은 듯 여진생의 초점은 이 노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허허, 고작해야 그딴 성품을 가지고 도를 들고 다닌다면 추후에 도 무수한 양민이 해를 입을 터!" "크흐! 그래서? 당장 관에 달려가서 고발이라도 하겠다는 거냐? 이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해 보시지?" 여진생은 이미 이 노대의 죽음을 결정짓고 있었다. "이 노대." 서작이 이 노대를 불렀다. 아까 전 이 노대의 발언이 다소 불쾌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이렇게 죽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는 없었다. 하지만 이 노대는 그런 서작의 마음을 짐작치도 못하는지 고개 를 돌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와중에 모두의 예상을 벗어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갑작스레 이 노대의 몸에서 폭풍과 같은 살기가 일어난 것이다. 두 눈에서 쏟아지는 살광은 보기만 해도 섬뜩할 정도. 한순간 사람 자체가 바뀌어 버린 듯했다. "대가를 치러라, 애송이!" 나직한 이 노대의 한마디와 함께 그의 손이 환영처럼 움직였다. 잔상조차 불허하는 극쾌 영역에서 이뤄진 한 수. 그가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명확히 볼 수 있었던 것은 객잔에서 오직 한 사람. 선주혁 이 유일했다. 이 노대가 손을 휘두르는 속도야 엄청나게 빨랐지만 마치 결과 적으로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손끝이 가리키는 방향에 서 있던 여진생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객잔의 주인 따위가 저토록 빠른 손놀림을 보 인다는 것에 놀랐을 때는 이미 모든 상황이 끝나 있었다. 한데 자신의 몸에는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았다. 그저 이 노대가 스스로의 빠른 손놀림만을 자랑하고 말았다는 생각에 여진생의 입가가 실룩거렸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 하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객잔의 대다수가 어리둥절할 그때, 가래가 들끊 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중인들은 볼 수 있었다. 여진생의 목 한 가운데서 실처럼 가는 핏줄기가 솟구치고 있음을‥‥‥. 역류하는 피로 인한 괴이한 소리가 가래 끊는 소리의 정체였던 것이다. 여진생은 핏발 선 두 눈을 부릅뜨고 무엇인가를 말하려는 듯 입 을 벙긋거렀으나, 나오는 소리 속에서 의미를 알아차릴 방도는 전 혀 없었다. 잠시 후 피를 막고 있던 여진생의 손이 늘어지고 그의 장대한 체 구 역시 땅을 향했다. 둔탁한 음향과 도가 바닥에 부딪히며 내는 요 란한 쇳소리만이 객잔의 정적을 깼다. "이 늙은이가!" "비겁하게 암수를?" 한가로이 이 노대의 죽음만을 기다리던 적부문도들은 그제야 동 료의 죽음을 인지했다. 저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무기를 꺼내드는 그들을 보며 이 노대는 입 끝을 말아 올려 웃었다. 그와 같은 일련의 과정을 바라보며 선주혁의 두 눈이 빛났다. 방금 전 이 노대가 사용한 한 수에 흥미가 생긴 것이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이 노대는 하나의 강기를 만들어 냈다. 허공 을 격해 장력을 날리는 에네르기파의 경우, 이제는 션주혁 자신도 능숙하게 사용하고 있었기에 별다른 신기할 것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노대가 만들어 낸 강기는 여타의 그것과는 확연히 달 랐다. 그가 낸 강기는 마치 바늘과 같았다. 여태껏 선주혁이 봐 왔던 원형(圓形) 일색이었던 강기가 아닌 것이다. '뭐야? 저렇게 모양을 바꿀 수도 있는 것이었어?' 미처 강기의 모양에까지 신경을 쓰지 못했던 선주혁이었다. 이 노대가 만들어낸 쇠털처럼 가는 강기가 적의 피부를 꿰뚫는 모습이 그에게 수많은 영감을 떠올리게 하고 있었다. 사실상 만물의 기운을 이용하는 것은 선주혁 자신만이 아니었 다. 검을 추구하는 자는 검강을 사용하고, 도를 추구하는 자는 도강 을 사용한다. 아무리 강기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수준이라 해도 검도를 걷는 자는 도강을 뽑아내지 못한다고 사형에게 들었다. 이는 검강의 발현이 신검합일(身劒合一), 즉 검과 몸이 하나가 되 는 경지에 이르러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검과 몸이 하나가 된다는 것. 혹은 도와 몸이 하나가 되는 것. 이는 바로 검과 도의 기운을 제대로 느끼고, 궁극의 기운을 뽑아 낸다는 뜻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게 선주혁의 판단이었다. 그러 므로 검도를 걷는 자는 궁극의 기운을 알지 못하는 도를 쥐면 검강 을 발현할 수 없는 것이고, 이는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그 경지마저 넘어선다면 검을 들지 않고도 검강을 만들어 내는 이른 바 심검(心劍)의 경지가 있다고 했다. 선주혁에게 떠오른 영감이 바로 이 심검과 유사한 바가 있었다. 자신은 사물의 기운을 느낄 수만 있으면 곧 이를 응용해 무공에 사 용할 수가 있다. 다시 말하자면 평생을 고련해 검과 자신이 하나가 되고, 종국에서는 자신이 곧 검이 되는 단계라는 심검의 경지를 손 쉽게 넘나들어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유성의 기운을 담아 장력을 만들어 냈으니 검의 기운을 느낀 후, 그것을 장력으로 변화시키는 것에도 무리가 없을 게 분명했다. 그 장력을 검 모양으로 만들면 심검일 것이고, 도 모양으로 만들 면 심도가 될 것이다. 검과 도의 날카로움과 파괴력을 고스란히 담아 낼 수 있으니 이 는 그냥 장력을 발출하는 것에 비해 훨씬 효과적일 게 분명했다. 더불어 다양한 성질과 모양을 이용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끝이 뾰족하고 가늘다는 것은 힘의 집중만 가능하다면 훨씬 더 큰 파괴 력을 낼 수 있다. 같은 내력을 실었다 해도 집중된 힘이 분산된 힘 보다 개개인에게는 훨씬 큰 효력을 발휘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 는 사실이었다. 아마도 처음 이 노대를 봤을 때, 자신이 느꼈던 긴장감은 이 노 대가 이와 같은 절기를 사용할 수 있는데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이 노대는 절대의 고수들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내력을 가졌음에도 그 에 못지않은 효용을 내는 내력의 운용법을 깨달았음이 분명했다. 결국 선주혁에게 무인 특유의 직감이 발동한 셈이었다. 연속적 으로 당대 최고의 실력을 자부하는 고수들을 상대로 목숨을 걸어 온 그였다. 그렇기에 직감이 더할 나위 없이 예민해져 있었고, 그와 같은 사실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이런 식으로 사고가 이어지자 선주혁은 더욱 세밀히 이 노대의 모든 면면을 살피기 시작했다. "모두 죽기 싫으면 그놈의 시체를 끌고 이 객잔을 떠나라! 나중 에 노부의 손속이 잔인하다 원망치 말고!" 이 노대는 적부문의 무인들이 단체로 들고 일어난 상황 속에서 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그가 무엇을 어찌 했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그저 암수(暗 手)를 사용해 동료를 죽였다고 생각하는 적부문의 무인들이 그와 같은 경고를 신중히 들을 리 없었다. 몰랐다면 모르되 상대가 암수를 사용하는 자라는 것을 아는 한 더 이상 두려울 것도 없었다. "늙은이! 명년에 제사상이나 받을 준비나 하시지!" 이마에 긴 자상이 있는 장한이 호통을 지르며 신형을 날렸다. 머 리 위로 치켜든 양손에는 날카로운 송곳을 드러낸 남아추(狼牙維)가 들려있었다. 그와 거의 동시에 셋이나 되는 적부문의 무인들이 동시에 이 노 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무슨 암수를 썼는지 몰라도 그의 손속이 신속하기 이를 데 없다 는 사실만큼은 분명했다. 이에 다른 수작을 부릴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 동시에 달려드는 것이다. "흥!" 이 노대는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양손을 좌우로 교차시켰다. 그것 은 마치 암기(暗器), 우모침(牛毛針)을 뿌려 대는 모양과도 비슷했다. 낭아추를 들고 높이 솟구쳐 단숨에 머리통을 박살내려던 자, 박 도를 거머쥐고 이 노대의 허리를 베어 가던 자, 기형의 검을 들고 심장을 찔러 가던 자, 도신이 손바닥보다 넓은 대도를 들고 다리를 베어가던 자들 모두가 한순간 두 눈을 부릅떴다. 신체의 각 부위에서 따끔한 통증을 느낀 후로 더 이상 몸이 뜻대 로 음직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는 것을 보아서는 죽어 마땅하나 더 이상 이곳에서 피를 흘리 는꼴이 보기 싫어 목숨만은 살려 둔다. 어서 저 꼴 보기 싫은 놈의 시신을 끌고 사라져라." 네 명의 장한들은 식은땀을 흘리며 난색을 표할 뿐이였다. 구경 꾼들이 너무나 많은 상황이었다. 한데 상대가 어떤 수단을 부렸는 지 파악조차 못한 채 물러나기가 곤란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혈도에 바늘과 같은 것이 박힌 마당에 더 이상 이 노대를 향해 달려들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서로가 눈치를 교환하며 물러날 뜻을 결정짓고 있을 때, 서작이 나섰다. "흥! 그 정도의 실력으로 감히 우리 오호검문을 모욕하고 나섰단 말인가?" 이마에서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적부문도를 보며 호통을 친 서 작이 이 노대를 향해 말했다. "이 노대께서 실력을 감춘 고수이심을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진 즉 알았다면 예를 갖췄을 것인데‥‥‥." "이 늙은이는 그저 객잔을 운영하는 장사치일 뿐이외다. 서 대협 의 예는 감당키 힘드니 그런 말씀은 하지 마시구려." 포권을 취해 나름대로 예를 갖춘 서작을 대하는 이 노대의 어조 는그다지 좋지 않았다. 손을 쓰게 된 것은 적부문도를 향해서이지 만 서작 역시 오늘의 일이 생기게 한 원인 제공자임을 기억하고 있 는 것이다. "이 노대, 아니 이 대협께서 저희 오호검문을 대신해 건방진 자 부문의 떨거지들에게 큰 교훈을 내려 주셨으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저들이 오호검문을 모욕한 이상, 이 대협의 가르침은 지나 치게 관대한 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에 소생이 좀 더 명확히 알 아들을 수 있도록 교훈을 더할까 합니다." 서작의 말인즉 이대로는 수수의 패자로 군림하는 오호검문의 체 면이 살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남의 손을 빌린 셈이기 때문이었다. "서 대협, 노부가 강호를 떠난 것은 이와 같은 피비린내가 싫었 기 때문이오." 이제는 스스로를 노부라 부르는 이 노대였다. 이와 같은 언사는 거만함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작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그간 운이 좋아 조용한 여생을 즐기고 있었건만 오늘 결국 불미 스러운 일이 일어나고 말았소. 내 손으로 사람의 목숨을 빼앗은 것 만으로도 충분하니 서 대협께서 양보를 좀 해 주시면 안 되겠소?" 이 노대는 무인으로서, 강호의 선배로서 서작에게 양보를 부탁 하는 것이다. 서작은 그와 같은 뜻을 알아들었지만 곤란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저들을 이렇게 보내서야 어찌 저희 오호검문이 수수에 서 고개를 들고 다닐 수가 있겠습니까? 이 대협께서도 아시다시피 강호란 고개를 돌리면 부풀려진 말이 도는 곳입니다. 저들이 멀쩡 히 살아 돌아가면 필시 오호검문에서 고수를 초빙하여 오늘의 일을 해결했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그러니 저희로서는 수많은 증인들이 보는 앞에서 모든 일을 해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꼭 오늘이어야만 하는 것이오?" 이 노대의 목소리가 차가워지고 있었다. 서작은 내심 불안한 감정을 느끼면서도 물러설 수가 없었다. "이 대협께서 원하시면 저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겠습니다. 적 어도 대협께서 경영하시는 이 객잔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말입니 다." "흥! 말로는 노부를 추켜세우면서 실제로는 스스로의 체면밖에 는 고려치 않는구려. 비록 강호를 떠났다고는 하나 노부가 살려 주 기로 결정한 자들을 다른 자가 손대는 것을 내버려 두리라 여기는 것이오?" 이 노대의 어조가 날카로워졌다. "오호검문은 정의련의 일원으로서 그 자격을 잃어 본 적이 없습 니다. 이 대협의 무공이 뛰어나다 해서 이렇듯 물러선다면 저희가 어찌 정의련의 일원으로서 당당히 행세를 할 수 있겠습니까?" 이 노대가 행여나 자신들에게까지 손을 쓸까 저어하며 서작은 일부러 정의련을 내세웠다. 아무리 그가 고수라 할지라도 정의련을 건드리지는 못하리라 여기는 것이다. 한데 오히려 이 노대는 눈썹을 역팔자로 꺾으며 노여운 기색을 보였다. 정의련의 이름을 빌려 자신을 위협하는 서작의 뜻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의 주름진 입이 벌어지고 당장이라도 호통이 터져 나오려는 그 순간이었다. "정의련의 련주께서 수수에는 오호검문이 있어 그 마음이 든든 함을 말씀하시더니‥‥. 과연 련의 일원으로서 그자부심을 지키는 모습이 훌륭하구려." 날데없는 목소리가 끼어들자 이 노대는 저도 모르게 호통을 삼 키고 말았다. 전혀 의식하지도 못한 사이 한 청년이 나타난 것이다. 다시 말하 자면 이 청년의 무공이 자신을 넘어서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한편 서작은 약관을 조금 넘었을 청년이 저렇듯 무게를 잡고 말 하자 발끈하는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가 언급한 것이 정의련의 련주인지라 조심스레 물었 다. "소생의 안목이 일천하여 소협께서 누구신지 알지 못하고 있습 니다. 어떤 분이시기에 정의련의 련주님을 거론하시는지요?" "허허, 노부는 독고건이라고 하외다. 얼마 전 정의련에 의탁하여 신세를 지고 있는 몸이지요." "독고건‥‥‥."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 같다는 생각에 미간을 찌푸려 기억을 더 듬던 서작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서, 설마‥‥‥? 그, 금강신협이시란 말씀이십니까?" "허허헛." 짐짓 노숙한 척 헛웃음을 터뜨린 후 선주혁이 대답했다. "강호의 동도들이 노부를 그와 같이 부담스러운 별호로 부르곤 하더이다." 스스로 자신이 금강신협임을 인정하는 말에 서작의 안색이 하얘 지다 못해 파리해졌다. 전설상에나 회자될 법한 금강불괴지신의 경지에 달하고, 사천 땅에서 가히 무신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신위를 보인 어마어 마한 거물이 눈앞에 있는 것이다. 소문으로 들었던 것보다 훨씬 젊은 모습이 놀랍기는 하지만 감 히 누가 있어 금강신협 정도의 고수를 사칭할 수 있겠는가! 서작은 애써 당황하는 기색을 감추며 허리를 깊숙이 숙여 두 손 을 맞잡았다. 그의 귀에는 객잔 내의 사람들이 술렁대는 소리가 들렸다. 당연 한 일이었다. 최근 무림을 뜨겁게 달구는 소문의 주인공이 눈앞에 직접 나타났으니 입을 다물고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오호검문의 말학(末學) 서작이 독고 대협을 뵙습니다. 대협의 명 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으나, 안목이 미천하여 미리 알아 뵙지 못 했으니 그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평생을 두고도 직접 보기 힘든 거물인 데다가 정의련에서도 귀 빈 중의 귀빈으로 모시는 독고건이니 서작의 태도는 공손의 극치를 보여 주고 있었다. "허허, 지나친 예우는 노부가 감당키 힘들구려."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노부가 갑자기 이렇게 나선 것은 이분 이 대협께 여쭙고 싶은 게 있어서요. 그러니 서 소협은 노부의 체면을 봐서라도 저자들을 그냥 보내 주는 게 어떻겠소?" 누구의 명인데 감히 거절할 수 있겠는가? "독고 대협께서 원하신다면 저희로서는 당연히 그 말씀을 따르 겠습니다." "허허헛, 고맙소이다." 선주혁이 웃음을 터뜨리자 서작은 재빨리 뒷말을 이었다. "미리 연락을 주셨으면 저희 오호검문에서 대협을 모셨을 것입 니다. 미처 대협의 행차를 알지 못하여 이와 같은 일이‥‥‥." "서 소협." "네, 말씀하십시오." 선주혁이 자신의 말을 자르고 나섰음에도 서작은 조금의 불편한 기색도 없이 곧바로 공손한 태도를 취했다. "노부는 초야에 묻혀 평생을 살아왔다오. 번거로운 것을 지극히 싫어하니 노부를 좀 편하게 해 줬으면 좋겠소." "알겠습니다. 독고 대협." "그럼 이 대협과 긴히 할 이야기가 있으니 이만‥‥‥." 선주혁이 그렇게 말을 끝내고 객잔 주인인 이 노대에게 시선을 돌릴 때까지 서작의 고개는 들리지 않았다. 그에게는 금강신협과 대화를 나눴다는 사실 자체가 감동이었던 것이다.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소이까?' "천하의 금강신협께서 청하시는 바를 한낱 객잔에서 주인 노릇 이나하는 늙은이가 어찌 거절할 수 있겠소?" 어쩐지 조금은 뻣뻣한 태도이긴 했지만 선주혁을 대하는 이 노 대의 어조에는 악의가 없었다. 이 독고건이라는 사람으로 인해 오호검문과의 일이 수월하게 해 결된 셈이니 외려 고마워해야 할 입장이었던 것이다. "허허허, 고맙소이다." "그럼 조용한 방으로 드시지요. 노부가 차를 한 잔 올리겠소이 다." 이 노대가 팔로 계단을 가리키며 안내를 했고, 선주혁이 그 뒤를 쫓았다. 그가 계단을 오른 후 구석진 방으로 모습을 감추자 중인들의 웅 성거리는 소리가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금강신협을 눈앞에 두었기에 절로 들었던 긴장감이 해소되면서 낮췄던 목소리가 커진 것이다. 서작은 동료들을 이끌고 황급히 오호검문으로 향했다. 련의 귀빈이 수수에 왔으니 문주에게 보고하는 것은 당연한 일 이었기 때문이다. = Chap.8 - 사지를 향해 = <<1>> 이 노대라 불리던 객잔 주인의 이름은 이자벽(李子碧)이라 했다. 선주혁이 곤란한 상황을 해결해 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한 그는 자신에 관한 모든 것을 솔직하게 말했다. 그는 강호에서 사라진 무봉문(武鳳門)의 후예였다. 무봉문은 여느 문파와는 크게 달랐다. 선주혁이 읽었던 무협 소 설에서 종종 등장하는 이화궁(梨花宮)과 유사한 바가 있었던 것이 다. 소설 속 이화궁과 다른 점은 이화궁은 전원이 여성으로 구성된 반면 무봉문은 중심 되는 역할을 맡은 것이 여인이라는 점이었다. 이는 무봉문이 자랑하는 무공의 특징 때문이었다. 무봉문의 절 기들은 여인들의 생활에서 발전되어 온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아까 적부문도를 상대할 때, 이자벽이 사용했던 상예금침공(尙藝 金針功)이라는 무공 역시 여인들의 바느질에 기원을 둔 무공이었다. 근원이 여인네들의 소소한 생활에서 비롯되었다고는 하나 무봉 문의 명성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섬세한 초식과 무인으로서는 상상키 힘든 기발한 면모가 많아 극히 상대하기 까다로운 무공을 지닌 세력으로 인정받고 있었던 것 이다. 그런 무봉문이었으나 결국은 자멸(自滅)의 길을 걷고 말았다. 여인 특유의 질시를 억제하지 못하고 파벌을 나눠 반목을 되풀 이한 끝에 결국은 무너지고만 것이다. 내분으로 인한 자멸의 여파 는 컸다. 둘로 나뉘었던 파벌 중 하나의 패색이 짙어지자 상상키 힘 든 독을 이용, 공멸(共滅)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무봉문의 무공을 이은 자들은 모두가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 었고 천행으로 목숨을 건진 것이 바로 이자벽이었다. 남자에게는 진산절기를 전하지 않는 무봉문이었으나, 이자벽은 기연에 다름없는 과정을 통해 무봉문이 자랑하는 절기 중 하나인 상예금침공이 수록된 비급을 얻게 되었다. 하나 자멸의 길을 걸은 문파의 문도인 이자벽은 지독할 정도의 환멸을 느끼고 무림에서 물러나 이곳 수수에서 평범한 생활을 영위 해 온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평생을 무인으로 살아온 그가 상예금침공을 외 면할 수는 없었다. 수백 번 이상을 망설인 끝에 그는 결국 비급을 펼쳐들었고 수록된 절기를 익히고 만 것이다. 상예금침공은 그가 알고 있는 유일한 상승의 절기.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지만 비급을 통해 무공을 완성시키기란 실로 어렵고, 또 어려운 일이었다. 상예금침공을 익히는 노력을 포기하려 들던 어느 순간. 그는 오기가 치밀었다. 하찮은 자존심과 투기(妬忌)로 인해 무봉문을 망친 여인들보다 자신이 못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다시 금 상예금침공에 매진했고 얼마 전에 이르러 깨달음을 얻었다. 상예금침공은 강력함을 추구하기보다는 섬세한 운용의 묘를 살 려야 하며, 빠르기보다는 정확해야 했고, 압도적인 기세보다는 집 중을 요구하는 무공임을 파악한 것이다. 이에 절대의 영역에 도달했다 보기에는 부족한 바가 있는 내력 에도 불구하고 이자벽은 상예금침공 특유의 강기를 만들어 낼 수 있었고, 그 위력은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무공을 지닌 고수들에 비 해 부족함이 없었다. "간단히 생각하시면 될 일이오. 천을 주먹으로 쳐서 찢는 것은 범인들에게 쉬운 일이 아닐 것이지요. 하나 바늘로 찌르는 것은 어 렵지 않은 것과 같은 이치외다." "통나무를 쪼갤 때 쐐기를 이용하는 것과 같다는 말씀이구려." "그렇소. 허허허헛." 천하제일의 무공을 지녔을 지도 모를 독고건이라는 자가 무공에 대한 자신의 의견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고개를 끄덕이는 장면 을 보자 이자벽은 뿌듯한 마음에 기쁜 심정이었다. 흥에 겨운 그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나무못[木鈴]이 같은 나무에 박히는 것과 같은 이치지요." 이자벽의 이 한마디는 아까부터 계속해 선주혁의 머릿속을 맴돌 던 어떤 생각을 확고하게 결정짓는 계기가 되었다. 몇 가지의 가정이 머리에 떠올랐다. 한시라도 빨리 머릿속에 떠 오른 그 생각을 시험해 보고픈 마음이 들 정도였다. 그럼에도 왠지 부족한 생각이 들었다. 이자벽이 만들어 낸 강기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연상된 무엇을 놓치는 기분이었다. 그 미진했던 부분이 이자벽의 마지막 한마디 말로 인해 확연해진 것이다. '못! 그래, 못이란 말이지!' "이 대협과의 대화를 통해 실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소이다. 이 독고 모는 그와 같은 감사의 사례를 어찌 해야 할지 모를 정도입 니다." "허허헛, 이 늙은이가 주제넘게 드린 말씀을 독고 대협께서 그리 평가해 주시니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귀를 기울여 주신 것에도 감사할 따름이지요. 이 늙은이는 독고 대협의 그런 겸손한 모습에 크게 탄복했소이다." 이자벽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이 정도의 거물이 이제는 잊힌 문 파의 생존자에 불과한 자신에게 배움을 구하는 자세만으로도 절로 호감이 들었다. 이 정도의 겸손함이 있기에 오늘날의 경지를 이를 수 있었다는 생각과 함께 독고건이라는 자의 인품에 크게 감명을 받은 것이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남선 사람에게 이와 같은 무리(武理)를 전해 주시니 그 너그러운 아량에 제가 감복을 했습니다." "허허, 말년에 무슨 복이 많아 독고 대협과 같은 분을 만나게 된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행여나 이 늙은이의 부 족한 손이라도 필요하다 싶으면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 독고 대협 의 일이라면 만사를 젖히고 달려가겠소이다." "감사합니다, 이 대협!" 비록 나이를 속일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게 아쉽긴 했다. 하지만 선주혁은 이자벽의 허물없는 태도에 마음을 열고 망년지교(忘年之 交)의 연을 맺어 갔다. 두 사람의 대화는 그렇게 밤이 깊어 가는 줄 모르고 계속되없다. <<2>> 선주혁의 신형이 바람을 갈랐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전력으로 질주하는 그의 얼굴에는 다급함이 엿보였다. 이자벽과 대화를 나눈 다음 날, 아침나절부터 오호정문주가 찾 아와 수선을 떨어야만 했다. 예를 갖추고 받아들이는 일련의 과정 이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딘 것이다. 편치 않은 자리라 해도 정의련에서 해야할 일이 있는 이상, 상 대의 체면을 배려해야 하는 법. 선주혁은 오호검문주와 식사를 같이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던 중 하나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패종회에서 본격적으로 백발귀마와의 일전을 준비한다는 것이 다. 무슨 준비를 하냐고 묻는 선주혁의 질문에 오호검문주가 답했 다. 백발귀마와 친분이 깊은 것으로 알려진 옥소선자를 패종회가 억 류하고 있음을 공표했다는 것이다. 장소는 효남성 익양(益陽). 남자라면 당당히 익양으로 찾아와 옥소선자를 직접 데려가라는 것이 패종회가 공표한 내용이라고 했다. 물론 조건이 있었다. 반드시 단신으로 와야 한다는 것이다. 무리 를 이끌고 올 경우, 옥소선자의 목숨을 보장할 수 없다고 했다. 그와 같은 말을 하며 오호검문주는 코웃음을 쳤다. 말이야 데려 가라는 것이지 결국은 찾아와 목숨을 바치라는 뜻이 분명하다는 것 이다. 오효검문주는 비웃음에 가까운 표정을 지으며 한 여인을 구해 자신의 목숨을 걸면, 그것이 무슨 마두냐고 했다. 더불어 백발귀마가 그 자리에 나타나면 자신의 손에 장을 지진 다는 말을 할 때, 선주혁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는 급한 용무를 잊고 있었다고 양해를 구하고 곧바로 한야루 를 나섰다. 이자벽과의 이별이 아쉽기는 했지만 지금은 늑장을 부 릴 때가 아니 었다. 오호검문주가 노자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귓등으로 흘린 그는 전력을 다해 암영풍을 전개했다. 옥소선자가 있다는 익양으로 향하는 것이다. 처음 한야루를 뛰쳐나왔을 때는 잠시의 망설임이 생겼다. 대놓 고 오라는 것은 충분한 자신이 있다는 뜻일 것이다. 결국 이렇게 달 려가는 것은 호랑이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미는 셈이 된다. 그렇다고 이런 저런 준비를 하며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다. 옥소 선자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이쪽 세상에서 마음먹고 잘살자면 지금이라도 가능했 다. 신투의 은신처에서 가져 온 보석만 가지고도 평생을 떵떵거리 며 살 수 있을 것이기에. 하지만 공 노인이 죽음으로 가져다 준 계기는 그로 하여금 막대 한 사명감을 주었다. 패종회를 막는 것만이 공 노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길이었다. 몽세화 역시 마찬가지었다. 그녀가 그런 곤란한 상황에 빠져든 것은 자신 때문이었다. 그녀 는 자신을 위해 정도 무림을 적으로 돌러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마교의 장로를 눈앞에 두고도 자신을 보호하려 했었다. 선주혁은 그런 몽세화를 외면할 수 없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스스로에게 필요했다. 그가 이를 악물고 경신술을 전개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스 멀스멀 피어오르는 두려운 마음을 잊기 위해서다. 이대로 모든 것 을 외면한 채, 유유자적 살아갈 방도를 찾고자 하는 유혹을 떨치려 는 것이다. 오직 몽세화의 안전만을 생각해야만 했다. 설령 죽음을 향한 길 이라 할지라도 잠시의 망설임을 보여선 안 됐다. 그것이 몽세화에게 보답하는 길이라 여기는 것이다. '제발! 내가 도착할 때까지만이라도 무사했으면‥‥‥!' 오직 그 한 가지만을 생각했다. 질풍같이 달려가는 그의 얼굴에는 비장함이 가득했다. 공 노인 에 이어 몽세화를 죽음으로 몰고 갈 수는 없다는 각오의 표정이었 다. 설령 이 길이 마지막을 향한 것이라 할지라노‥‥‥. <<3>> "옥소선자를 이용해 백발귀마를 잡으려든다고요?" 은설연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언성을 낮춰 주세요." 백화란의 말에 은설연은 자신의 실태를 깨달으며 저도 모르게 입을 가렸다. 좀처럼 동요치 않는 성격 인데 그만 흥분해 버린 것이 다. 난데없이 찾아든 백화란이었다. 정의련을 방문한 은설연에게 백화란이 독대를 청해왔다. 그것만 으로도 충분히 의외였다. 하지만 그녀가 전해온 소식은 가히 청천 벽력(靑天霧靈)과도 같았다. "독고 대협, 아니 제가 아는 선 소협의 형님이라시더군요. 그분 의 무공이 대단하시니 가급적 빨리 알려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설 마 선 소협이 단신으로 익양으로 향하지는 않됐지만 말이에요." "백 소저께서는 아직도 선 소협에 대한 의심을 가지고 계신 모양 이군요." 은설연은 촉박한 마음 중에서도 왠지 이것만은 꼭 짚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백화란의 마지막 말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선 소협은 아마도 분명히 옥소선자를 구하러 갈 것입니다. 설령 그것이 죽으러 가는 길임을 알지라도 말이죠. 제가 아는 선 소협은 놀라울 정도로 영리하지만 비겁하지는 않기 때문이죠." "그걸 모용 소저가 어떻게‥‥‥?" "선 소협이 백 소저를 염려하는 모습을 봐 왔기 때문이죠! 선 소 협과 그의 사형인 남 소협이 왜 사파연합에 의탁을 하게 된 건지 백 소저는 아시나요? 예전에 객잔에서 남궁 소협과 함께 위험한 상황 을 겪으신 적이 있죠? 당시 사파연합에서 왜 백 소저를 도왔다고 생각하시나요? 선 소협과 남 소협이 사파연합으로 가는 조건이 바 로 백 소저를 돕는 것이었죠." "‥‥‥!" 백화란은 놀란 표정이었다. 선주혁과 남지학이 자신과 맺었던 인연을 짧고, 짧았다. 그런 인연만을 가지고 자신을 그렇게까지 위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더구나 자신의 가문으로 인해 두 사람은 무림 공적으로 몰려 사 문에서까지 버림을 받지 않았던가. 선주혁을 믿는다고는 했지만 마음 한 구석에 작은 의심까지 버 렸다면 그것은 거짓말일 터였다. "제가‥‥‥ 선 소협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백화란의 말에 은설연은 표정을 풀었다. 생각해보면 백화란은 벌써 두 번째나 곤륜이마에게 도움을 받은 것이다. "지금은 독고 대협, 아니 선 소협의 형에 관한 비밀을 지켜 주시 걸로 충분해요." 백화란은 확고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 꼬옥 다무는 모습이 그 속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은설연은 그런 백화란의 모습에 내심 고소를 머금었다. 어쩐지 그녀를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하는 남지학과 선주혁의 모습에 심통이 나는 은설연 이었다. 한데 이런 순수한 모습을 보니 과연 그럴 자격이 있긴 하다는 생 각이 드는 것이다. '쳇!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스스로의 생각에 화들짝 놀란 은설연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 다. 선주혁은 분명 사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을 것이다. 그의 경신공 부를 생각하면 익양에까지 도달하는 것은 순식간일 터. 사단이 생기기 전에 대책을 마련해야만 했다. '평소에는 기함을 할 정도로 똑똑하다가, 이럴 때는 왜 바보가 되냐고! 정말이지 이해할 수가 없는 사람이라니까!' <<4>>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어떤가?" "연락을 할 경황이 없을 것입니다. 당장 익양으로 향하기에도 바 쁠 데니까요. 아니, 연락을 취해오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전서응을 날릴 시간조차 없단 말인가?" "사제라면 그 시간조차 아낄 것입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단신 으로 찾아오라는 조건을 지키려 들 것입니다." 종극과 남지학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악구윤이 혀를 참다. "아무리 천재여도 젊은 사람이라 어쩔 수 없는 게로군. 미치지 않고서야 단신으로 그곳을 어찌 향한다는 건지‥‥‥, 쯧쯧!" "패종회에서 단신으로 올 것을 요구했으니, 옥소선자를 위해서 겠죠. 아마도 자신을 대신해 잡혀 있는 사람을 위해서는 반드시 그 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음이 틀림없습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렇지‥‥! 이건 스스로 목숨을 바치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 아닌가? 사실상 그의 존재는 무림의 한 축이나 마찬가질세. 패종회의 음모를 분쇄하기 위해서라도 저렇게 경망된 행동을 해서는 안 되지." 수조문도 선주혁이 익양으로 달려갔을 것에 동의하면서 이와같 이 말했다. "사제는 사제만의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희가 너무나 당연 히 여기는 것에 대해 많은 의문을 품고 있었죠.예를 들자면 전체를 위한 소수의 희생과 같은 일말입니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거늘 사제에게는 그렇지 많은 모양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게 왜 당연하지 않다 는 건가?" "예전에 사제와 단 둘이 있을때, 이런 말을 하더군요. 커다란 바 위가 내리막길을 구르고 있는 상황을 가정했습니다. 바위는 사람들 이 많이 다니는 저자 거리를 향해 구르고 있었죠. 일찌감치 달려 내 려가 경고를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다치는 것을 피할 수 있는 상황 입니다. 한데 바위가 굴러가는 길목에 어린 아이가 놓여 있습니다. 그 아이를 구하자면 저자까지 달려가 사람들을 구할 수 없게 됩니 다. 이 경우 누구를 구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냐고 묻더군요." "당연히 저자의 사람들을 구해야 하는 게 아닌가?" 악구윤이 대뜸 말했다. "허겁지겁 달려가 구하면 세상에 갓 태어난 아이들은 어찌 합니까?"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 희생을 해야겠지!" "흔히 생각하는 바로는 장로님의 의견이 맞을 것입니다. 한데 막 상 구하고 보니 악 장로님께서 죽도록 미워하시는 원수의 자녀들이 라든가 가족이었다면 어떨까요?" "‥‥‥!" "아이의 얼굴을 살피지 못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악 장로님 친척에 해당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연관이 있는 아이였으면 어쩌셨 겠습니까?" 악구윤은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지 못했다. 자신과 어떻게 해 서든 인연이 있는 아이를 희생시켜 원수의 인척들을 구할 판단은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교묘한 말장난에 불과하지만 확실히 생각해 볼 여지는 있는 문 제로군." 수조문이 가볍게 정리했다. "그렇습니다. 억측과 가정 자체가 아니라 본의에 주목하면 확실 히 고려해 볼 필요가 있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사제가 이런 말을 꺼내 들었을 때, 저도 많은 것을 생각할 계기가 되었습니다. 더불어 사제의 정신세계는 실로 오묘하여 범인으로서는 그 깊이를 알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지요." 현대에 있어서는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는 사고였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 반드시 옳지 않다는 것은 이미 오래 전에 제기되어온 문제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선주혁이 제기한 의문은 전혀 의외의 것이었다. 선주혁은 여러 판타지, 무협 소설들을 읽는 동안 머릿속에 남았 던 풍월을 읊었던 것이었으나, 정작 듣는 남지학에게는 그를 더 대 단하게 여기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한시가 급한 이때, 자네가 이처럼 장황하니 말을 꺼낸 이유는 잘 알겠네." 여태껏 침묵하고 있던 종극이 입을 열었다. "종 장로님께서 짐작하신 이유대로일 것입니다." 남지학이 순순히 시인하고 나오자 종극이 악구윤과 수조문 두 사람에게 일렀다. "교주님께 사안을 보고해 드리시오. 노부는 남 소협과 함께 그 녀석을 살피러 가야만 하겠소." "오라! 그러고 보니‥‥‥? 허, 어린놈이 이토록 음흥해서야‥‥‥!" 그제야 남지학이 사제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든 이유를 짐작하는 악구윤이었다. 그는 밉지 않은 시선으로 남지학을 보며 내심 감탄을 했다. 대의(大義)와 명분을 중요시 여긴다 해도 각각의 인연이 얽히면 한 명을 위한 행동 역시도 경시할 수는 없다는 것을 저렇듯 돌려 말 한 것이다. 일월신교 교주의 소집령은 지엄하기 짝이 없어 불복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하지만 선주혁에게 그 같은 사정이 생기고 그것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남지학이 주장한 것이었고, 종극이 이를 수락한 것 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교주께 잘 설명해 주시길 바라오." "그건 염려치 마시오. 놈들의 힘이 예상을 넘어서는 것 같으니 종 장로께서는 부디 보증하시오." 이제 결론이 내려졌으니 서둘러야 할 때였다. 자칫 선주혁이 패 종회를 찾아가 변고라도 당한다면 큰일이었기 때문이다. 수조문을 짧게 상황을 정리했다. "그럼 이만‥‥‥!" 종극이 먼저 신형을 날리기 시작했고, 남지학은 수조문과 악구 윤두 사람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여느 때와 비할바 없이 정중한 자세였다. 이는 사제를 위해 흔쾌히 양보를 하고 결정을 내려준 것에 대한 감사였기 때문이다. 그런 남지학을 향해 악구윤이 말했다. "나이답지 않게 음총한 녀석아. 너도 몸조심해라!" 남지학은 그저 빙긋 웃으며 몸을 돌렀다. 마교의 장로에게 이런 미소를 지어 보일 줄은 스스로도 미처 생각지 못했다는 것을 되짚 으며‥‥‥. <<5>> 익양은 옛날 강릉(江陵)이라고도 불리었으며 동정호(洞庭湖)의 남 쪽, 자수(資水)의 하구 부근에 위치해 있다. 자사(長沙)와 상덕(常德) 를 연결하는 수륙 교통의 요지로서 발달한 도시였다. 악록산(岳麗 山)과 동정호가 인근해 있으니 수많은 시인묵객과 유람객들을 유치 하는 것만으로도 풍요로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익양에 고조된 것은 풍광에서 비롯된 흥이 아니라 긴장감 이었다. 삼국시대에 오(吳)나라의 노숙(魯肅)과 촉(獨)나라의 관우 (鬪羽)가 한판 싸움을 벌였다는 이곳 익양에서 다시금 일전의 전조 가 드리워진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설마하니 백발귀마가 의리와 정을 중시 여기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단신으로 옥소선자를 되찾으러 익양에 모습을 드러낼 리 없는 것이다. 만약 그가 정말로 나타난다면 삼국의 그 시절 이야기와 흡사한 바도 있었다. 노숙은 함정을 잘 파는 것으로 유명했고 관우 운장은 일기당천의 용맹한 장수였다. 현재 패종회는 옥소선자를 위협해 백발귀마를 끌어들이고 있었 으니 이는 함정을 잘 파는 노숙에 비견될 것이오, 단신으로 백발귀 마가 나타난다면 적을 두려워하지 않는 관우에 다름이 없었기 때문 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익양을 중심으로 한 무인들은 옳고 그름을 떠나 은근히 백발귀마가 나타나 당당히 맞서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 었다. 더불어 인질을 잡은 패종회보다는 백발귀마에게 마음이 기울기 도 했다. 그런 마음은 특히 흑도의 무인들에게는 더했다. 마음이야 사도 외도의 척결을 외치는 패종회의 비겁한 인질극을 처단하기 위해 익 양으로 쳐들어가고 싶은 그들이었다. 늘 흑도의 비겁함을 손가락질 하며 스스로를 정의라 외치던 자들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하지만 패종회가 단신의 백발귀마를 요구한 상황. 자칫 경거망동으로 인해 옥소선자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백 발귀마의 분노는 외려 자신들에게 쏟아질 것이다. 진곤혈사의 주역인 백발귀마를 적으로 돌리는 것은 상상만으로 도 끔찍한 일. 그들은 익양 주변으로 모여들며 마음속으로만 영웅의 탄생을 염 원해야만 했다. 최근 정도무림에서 금강신협이라는 엄청난 거물이 나타났다. 이에 흑도에서도 그에 못지않은 영웅이 나타나 주기만을 바라는 것이다. 백발귀마는 그 적임자로 손색이 없었다. 어느새 곤륜이마라는 이름, 특히 백발귀마는 흑도를 대표하는 자부심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외쳤다. "백발귀마가 나타났다." 눈부신 은발을 휘날리며 익양 부근에 나타난 선주혁의 모습을 본 것이다 아직까지는 금강신협과 백발귀마가 동일인임을 알려서 는 안 되는 상황인지라 선주혁은 다시금 머리카락을 다시 흰색으로 되돌렸다. 그의 상징과도 같은 백발이 흩날리는 모습에 흑도의 무인들은 격앙된 감정으로 그의 이름을 외쳤다. 설마, 설마 했건만 정말 단신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 사실 하나 만으로도 흑도의 무인들에게는 감동이 되고, 흠모의 이유가 되기에 충분했다. 비록 약관을 넘어선 젊은이에 불과하지만 단신으로 이곳에 나타 난 것만으로도 흑도 무인들의 감성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정도 무인들이 손가락질 하는 흑도의 고수 중에 이만한 기상을 지 닌 인물이 존재한다는 살아 있는 증거이기 때문이었다. 익양 인근에서 백발귀마가 나타났다는 소문을 들은 흑도의 무인 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그를 볼 수 있는 장소로 모여 들었다. 이에 선주혁의 뒤를 쫓는 인원은 기백을 넘어선 지 오래였다. "선 대협! 우리는 선 대협을 끝까지 응원할 것입니다!" "선 대협은 우리 사파인들의 자랑입니다!" 누군가 시작을 한 선주혁에 대한 성원. 그것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되었다. '뭐, 뭐야? 이거 부담스럽게.' 선주혁은 자신의 뒤를 따르며 감동에 찬 목소리를 외쳐 대는 사 람들을 보며 내심 곤혹스러워 했다. 몽세화를 구하기 위해 한 달음에 달려왔다지만 무턱대고 패종회 가 기다리는 함정으로 뛰어들 생각은 없었다. 수많은 무협 소설로 단련된 자신이 그런 어벙한 짓을 할 리는 없는 것이다. 일단은 적의 근거를 찾고 치밀한 조사를 해 어떤 준비를 해 둔 건지 파악하려는 게 본래의 계획이었다. 최소한 고수의 숫자가 몇 인지라도 알아야 대응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익양에 들어서면 방갓이라도 쓰고 정체를 감추려 했었다. 한데 익양 주변에 이리도 많은 무인들이 진을 치고 있을 줄은 생 각조차 못했던 것이다. 더구나 그 숫자는 계속해서 불어나는 중이었다. 이 상태로는 패종회와 정면충돌을 하는 것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게 된 것이다. '당신들‥‥‥ 지금 날 대책 없이 죽음으로 몰고 가고 있는 거 알 아?' 내심 울상을 짓는 선주혁의 귀에 한 사람의 목소리가 파고들었 다. "선 대협 ! 당신의 이름은 우리 흑도인들 사이에서 영원히 기 억될 것입니다. 우러의 자부심이 되어서 말입니다." 그 외침이 선주혁의 가슴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를 끓게 했다. 뜨 거운 감정이 목구멍을 치밀고 올라왔고 절로 코끝이 찡해졌다. 저쪽 세상에서 칼을 맞고 죽음에 이르렀을 그 때. 선주혁은 생각했다. 비록 당시에는 엉터리 소설이라고 생각했지만 책을 쓴 작가가 부럽다고 말이다. 태어나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하는 자신과는 달리 작가는 책을 남김으로서 자신이 존재했음을 증거했기 때문이 다. 한데 사람들이 외치고 있었다. 자신을 기억하겠다고. 마음속의 영웅으로! 평생을 기억하며 자랑으로 삼겠다고 외친다. 그것이 선주혁의 감정을 움직였다. 이렇게 죽는 것은 확실히 저쪽 세상에서 죽음을 맞이하던 그 때 와는 달랐다. 수많은 사람들의 머리와 가슴에 선주혁이라는 사람이 존재했음 을 명확히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자신에게 온정을 베푼 옥소선자와 함께 하는 죽음이니 더욱 억울할 일이 없었다. 선주혁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춰 세웠다. 그리고 몸을 돌려 중인들을 향했다. 무인들은 일순 입을 다물고 선주혁을 주목했다. "무림 말학 선 모는 여러분의 성원에 지극히 감사를 드립니다. 패종회는 정도 문파의 탈을 썼을 뿐, 실제는 무림 장악을 노리는 패 도의 무리에 불과합니다. 비록 소생의 능력이 부족하여 이렇게 죽 음을 향해 걸음을 옮기지만 옳고 그름을 명확히 구분하시는 여러분 들의 마음만은 간직하겠습니다. 비겁한 협박 따위에 굴하지 않는 무인들이 있기에 저들의 야욕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반 드시 증명하겠습니다!" 죽음을 향한 길이니 그 어떤 말을 해도 신뢰를 줄 수 있을 것이 다. 패종회에 대해 노골적으로 언급한 만큼 이와 같은 소문은 일파 만파로 퍼져 나갈 터. 진위의 여부를 떠나 천하 무인들은 한 번쯤 패종회를 의심의 시 선으로 대할 것이다. 지금 선주혁이 할 수 있는 일은 그것이 최선 이었다. 그의 발언에 흑도의 무인들은 숙연한 표정을 지은 채 침묵을 유 지하고 있었다. "선 대협께서 무인의 기상을 보여 주셨으니 저희도 그 뒤를 따르 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션 대협! 저희는 반드시 패종회의 야욕을 저지하겠 습니다." "우와아아아아앗! 선 대협, 만세!" "백발귀마, 만세!" 황제도 아니거늘 만세를 외치는 흑도의 무인들. 그들의 면면에는 진심만이 가득했다. 무인으로서 선주혁의 모습 은 그야말로 존경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선주혁은 열화와 같은 환호 속에서 몸을 돌렸다. 이제 남은 것은 옥소선자를 향해 가는 길뿐이었다. '가슴을 펴고! 당당히!' 그게 남자답게 사는 길이라고 큰소리치던 주백광의 말을 기억하 며 넓은 보폭으로 익양을 향하는 선주혁이었다. = Chap.9 - 나선 = 옥소선자를 납치한 패종회의 무리가 어디에 있는지 찾는 건 어 렵지 않았다. 익양 부근에서 이미 그의 출현이 파다하게 알려진 지 라 패종회 측에서 안내를 붙인 것이다. 적개심과 두려움에 가득한 안내인을 쫓아 선주혁이 도착한 곳은 익양이라기보다는 동정호 부근이었다. 그의 출현에 준비를 한 듯 꽤 많은 수의 무인들이 진을 치고 있 었다. 그들은 패종회뿐만이 아니었다. 정도무림이 공표한 공적을 처단 하는 자리기에 정도의 무인들 다수가 모여 있는 것이다. 패종회와 무림맹의 연수 자체는 못마땅한 상태일지라도 진곤혈사로 인해 선 주혁에게 죽음을 당한 구파일방의 인사들도 구경꾼들 중에 끼어 있 었다. 비록 그의 죽음을 바라는 심정이야 같지만 어떻게 봐도 지금의 상황은 인질극에 불과했다. 정당하다 할 수 없는 방법이니 패종회 의 무리에 직접 몸을 섞고 싶지는 않았다. 그들이 패종회와 합류하 지 않고 구경꾼 사이에 섞여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노부는 무림맹의 집법당주 포저(包儲)라하네. 이곳에 나타나다 니 제법 영웅의 흉내를 낼 줄 아는 자로군." 아마도 패종회에서 인질극에 대한 합리성을 세우기 위해 내세웠 을 무림맹의 인사 하나가 근엄한 척 스스로를 드러냈다. 이 일에는 정도 문파의 중심이랄 수 있는 무림맹이 확실히 개입 되었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구경꾼들 사이에 섞여 있는 구파일방의 인물들은 미간을 찌푸렸 다. 이 일은 두고두고 강호의 손가락질을 받을 일이 될 것이기 때문 이었다. "옥소선자께서는 어디에 계시오?" 선주혁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크흐흐흐, 과연 예의라고는 눈곱만치도 모르는 놈이로다." 포저의 우측에 서 있는 중년인은 웃음을 흘리며 선주혁이 스스 로의 명호를 밝히지 않을 것에 대해 비웃었다. 포저가 자신을 먼저 소개한 이상 선주혁도 스스로를 밝히는 게 순서였던 것이다. 하지만 선주혁은 그와 같은 자도, 그가 한 말도 안중에 두지 않 았다. 잘해봐야 백웅 정도에 속하는 인물일 터. 선주혁이 관심을 갖는 것은 과연 이 자리에 몇 명의 백존이 나섰 냐는 것뿐이었다. 선주혁이 아랫입술을 깨문 채 묵묵히 대답만을 기다리자 포저가 손을 들어 올렀다. 그의 지시에 따라 두 명의 패종회 무인들이 옥소선자를 데리고 나왔다. "몽 누님!" "선 소협?" 몽세화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놀람이었다. 비록 거리가 먼 관계 로 선주혁을 자세히 살필 수는 없었으나, 자신이 알고 있던 그의 모 습과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이목구비의 구분보다도 일단 피부색 자체가 확연히 달랐기에 몽세화는 의아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 다. 선주혁은 패빨리 그녀에게 전음을 보냈다. 사정이 있어 피부색과 얼굴이 조금 달라보일 것이라 설명을 한 것이다. 몽세화는 그의 음성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자신이 기억하는 선 주혁이 틀림없었다. 그녀로서는 선주혁이 이 자리에 오지 않기를 바라는 만큼이나, 그가 자신을 구하러 오길 바라는 마음이 가득했 다. 실로 모순된 일이나, 그것이야 말로 몽세화의 진심이었다. 따라서 선주혁의 용모가 지금보다 훨씬 다른 모습이었어도 그녀 로서는 그가 이 자리에 왔다는 사실을 믿고자 했을 것이다. 선주혁 의 변모를 그녀가 쉽게 수긍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이어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수많은 감정의 교차였다. 선주혁이 씁쓸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저 때문에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선 소협은‥‥‥, 이 자리에 오지 마셨어야 했어요." "그런 말씀하지 마십시오." 한 말이야 더 없겠냐마는 더 이상 대화는 불필요했다. 선주혁으로서는 그녀가 무사한 것을 확인한 것으로 충분했고, 몽세화는 선주혁이 자신을 위해 이 자리에 와 준 것으로 족했다. "여인을 납치해 위협을 하는 것이 패종회가 행사하는 방법이 오?" 선주혁은 곧 노성을 터뜨렸다. 눈물이 글썽이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몽세화를 보자 감정이 격해진 것이다. "흥! 네놈이 쥐새끼처럼 도망을 다니기에 벌어진 일이 아니더 냐? 그녀는 극진한 대우를 받아왔으니 패종회와 무림맹의 명성에 흠을 잡을 생각은 하지도 마라." 선주혁은 패종회만을 지칭했으나 포저는 다시 한 번 무림맹과 패종회를 묶었다. "정녕 몽 여협을 위협하여 본인을 핍박하려는 게 아니란 말이 오?" "비열한 마두라 생각하는 게 꼭 저 같기만 하군. 네놈 따위를 처 벌하는 데에 있어 그런 위협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게냐?" 포저는 일부러 언성을 높여 외치듯 말했다. 이 자리에 모인 군중 들에게 무림맹과 패종회의 행사에 대한 해명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몽 여협을 놓아 주시오. 내가 이 자리에 있지 않 소?" "그, 그게‥‥‥." 포저는 잠시 당황스러운 표정이었다. 선주혁이 저토록 단도직입 적으로 요청을 하고 나설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가 머뭇거리자 옆 에 서 있던 초로의 사내가 나섰다. "어린 나이에 마두로서의 명성이 드높은 것이 이해가 가는구나, 네 놈의 경신공부가 제법이라 들었다. 옥소선자를 놓아 줌과 동시 에 도주를 할 작정임을 모를 성 싶더냐?" 포저가 대답하지 못하고 노인이 나선다는 것은 결국 결정권자는 패종회의 인물이라는 뜻이었다. 선주혁이 노기를 억누르며 입을 열려할 때였다. "옥소선자의 안전은 빈도가 보장하겠소이다. 그대는 패종회와 오늘의 사연을 해결하는 데만 집중하시오." 난데없이 들려온 청수한 음성. 그다지 크지 않았음에도 음성은 군중들의 귀에 속속들이 들어왔다. 말한 자의 내공이 범상치 않음 을 짐작할 수 있는 단면이었다. 누군가 그의 얼굴을 알아보고 소리를 질렀다. "매화검선(梅花劍仙)이시다!" "오오! 화산파의 고수께서 오셨다!" 매화검선은 연운 진인(然雲眞人)의 별호였다. 연운 진인은 전대 에 해당하는 화산파의 고수로 현 화산 장문인의 사숙이었다. 사형 제인 연풍(然鳳), 연선(然善) 진인과 더불어 화산삼검(華山三劍)이라 칭해지는 그는 검에 대한 깨달음이 깊고 더할 나위 없는 인자한 성 품으로 무림에 덕망이 높았다. 청성파에서 전해 온 기별과 난데없는 무림맹과 패종회의 연수 발표를 논하기 위해 무림맹주 한조백을 찾아왔다가 이 일을 듣게 되어 자리한 그였다. 애초부터 이와 같은 행사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그였던 지라 지 금과 같이 나서게 되었다. 그가 이렇게 나섬으로서 구파일방 본연의 명예에 손상이 가지 않을 것임에 구파일방에 소속된 무인들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 다. 매화검선의 저 한마디로 인해 조금이나마 체면을 유지할 수 있 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감사합니다!" 션주혁은 두 손을 맞잡아 매화검선에게 예를 갖췄다. 정중함 속에 절로 당당함이 드러나는 선주혁의 포권을 보며 매 화검선의 눈에 안타까운 빛이 스쳐 지나갔다. 저와 같은 인재가 어 찌 사마외도의 물이 들었는가에 대한 아쉬움이었다. 연운 진인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선주혁이 다시 패종회 무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림맹의 명숙이 저리 나온 이상 몽세화의 안전은 이제 확실해 졌다. 화산파의 체면을 봐서라도 그녀에게 해를 끼칠 수 없는 상황 이 되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 자리에 모인 수많은 군중들까지 고려하면 마음을 편 히 먹어도 될 정도였다. 이제 남은 것은 목숨을 걸 결전뿐 "이제 본인에게 용무가 있는 사람은 나서도록 하시오!" 가음을 내밀고, 당당하게. 선주혁은 그렇게 마음을 먹으며 낭랑히 외쳤다. 패종회의 무인들은 삼십여 명에 달했다. 하나같이 고수가 아닌 자들이 없건만 그 앞에서 저토록 대범한 모습을 보이는 백발귀마를 보며 정도의 무인조차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저기서 탄성이 들려을 때, 패종회의 무인들 사이에서 일곱 명이 걸어 나왔다. 순간 선주혁의 눈에 좌절이 스쳐 지나갔다. 한두 명이 아닌 일곱의 백존이 이 자리에 나선 것이다. 거기에 적어도 열 명은 되어 보이는 백웅까지. 그야말로 오늘 이 자리에서 살아 돌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 이 아닐 수 없었다. 기실 패종회에서는 백발귀마의 무공을 백웅과 엇비슷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가 떠들고 다니는 말이 염려될 뿐, 그 정도의 실력은 별다른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게 그들의 결론이었다. 백존 이 본격적으로 무림에 나선 이상, 선주혁이 가진 무위는 별다를 게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선주혁과 동행하는 종극과 사파연합의 고수들을 염두에 둬야만 했다. 설마하니 선주혁이 이 자리에 정말 단신으로 찾아올 것을 예상치 못했다. 그렇기에 무림맹에 파견되어 있던 백존 일곱 명이 모두 이 자리에 나섰던 것이다. 선주혁은 무거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일곱 명 모두가 나설 것이오?" "크흐! 네놈 따위를 상대라는 데 그럴 렬요가 있겠는가?" 세모꼴의 독사눈을 한 노인이 코웃음을 쳤다. 백웅 중 상위 서열 을 다투는 자가 백발귀마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이야기는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독사눈의 노인은 백존 중 서열 팔십 위에 해당하는 인물. 백웅에 속하는 수하와 접전 끝에 간신히 승리를 챙긴 백발귀마 따위가 눈에 찰 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대가 본인을 상대하겠다는 것이오?" "크흐흐흐! 버르장머리 없는 놈. 노부는 패종회 백존의 일원인 구양수(九陽秀)라고 한다. 네놈의 목숨을 취하실 분이니 이름 정도 는 알아두도록 해라, 그래야 저승에 가서 고할 수 있을 것이 니‥‥‥!" 필승을 자신하며 웃음을 흘리는 구양수였다. 선주혁은 더 이상 백존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 만 구양수의 무공이 앞서 겨뤘던 자들보다 상위에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전신의 신경을 팽팽히 긴장시키며 격전을 준비했다. "그럼 시작합시다!" 선주혁의 한마디. 이는 그가 진정으로 옥소선자를 구하기 위해 섰음을 입증하고 있었다. 애초부터 도주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고 이 자리에 나섰던 것임을 누구나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정도의 무인들이 늘 경원시 여기던 흑도의 인물들이다. 한데 저 정도의 기상이라면 정도의 여느 영웅에 못지않아 보였 다. 백발귀마의 나이를 감안하면 더욱 그랬다. 그가 일으킨 무수한 패악을 생각하면 당장 죽는 모습을 보고 싶 지만, 어쩐지 마음 한구석에서 안타까운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 었다. 그야말로 짧은 시간 동안 무림을 종횡무진했던 일대의 효웅(梟 雄)이 사라지는 순간인 것이다. 스르르릉. 맑은 소리와 함께 구양수가 검을 뽑아 들었다. 시리도록 차가운 한광(寒光)을 뿌리는 검. 여느 검과 다른 예기를 머금고 있음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사실 구양수 자신은 선주혁 정도를 상대하며 검까지 뽑아들 필 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백웅과 자신의 무공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 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수많은 군중이 지켜보는 자리였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보이는 것이 패종회의 이름을 드높이는 길. 그는 한순간 승패를 가르고자 하는 것이다. 애초 이와 같은 자리를 마련한 이유도 패종회가 가진 거력 중 일 부를 드러내는 데에 목적이 있었으므로. 다소 오연한 표정을 지은 채, 선주혁의 앞으로 나서는 구양수. 그는 검을 쥔 손가락을 풀었다. 한데도 검은 땅에 떨어지지 않고 허공에 둥실 떠 있었다. "이기 어검!" 구양수가 전개한 이기어검을 알아본 자의 외침에 군중들 사이가 소란스러워졌다. 마치 간단한 권각술을 전개하듯 너무나 쉽게 이기 어검술을 펼치는 구양수의 무공에 대한 감탄이었다. 선주혁의 미간이 찌푸려쳤다. 지난 날 무진 진인의 이기어검에 호되게 당했던 기억이 되살아난 것이다. 그도 내력을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전신에 분산되어 있던 내기 가 집중이 되며 허공에 진력의 형상이 갖춰지기 시작했다. 선주혁이 빌려 온 것은 바로 사형에게 선물했던 영의검의 기운. 그러자 그의 손에는 검의 형상을 갖춘 강기가 맺혔다. "저, 저럴 수가!" "설마 심검을‥‥?" 구경꾼들의 놀란 외침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이 자리에 모 인 군중들의 대부분은 심검의 경지를 처음 보는 것이었다. 금강불 괴와 마찬가지로 심검지도 역시 말로만 들어온 전설 속의 무공이었 던 것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선주혁이 만들어 낸 강기는 진정한 심검과는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허공에 떠오른 검 모양의 강기는 심검지도에 이른 경지 로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와 같은 모습을 본 구양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분명 백웅과 호각을 이를 정도의 무공을 지녔다고 보고받았건만 심검을 전개할 정도의 엄청난 고수였던 것이다. '뭐, 뭐야? 저런 엄청난 놈이었어?' 심검을 만들어 낼 정도의 고수라면 적어도 무시할 수준의 무공 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의 나이를 고려하면 저와 같은 경지에 올랐 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놀랄 일이었다. 심검 자체만을 놓고 보자면 이기어집술에 비해 높은 경지라 말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구양수는 잠시 놀랐을 뿐이었다. 심검을 보고 겁을 집어 먹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비틀린 그의 입매는 외려 선주혁을 비웃고 있었다. 저렇듯 심검을 만들어내는 것은 구양수 자신도 충분히 해내 보 일 수가 있다. 하나 심검은 자신이 검도에 있어 도달한 경지를 드러낼 때이거 나 비장의 한 수로 감추고 있다가 단 한 번에 승부를 낼 때 사용하 는 법이다. 이는 심검의 발현 자체가 막대한 내력의 소모를 수반하기 때문 이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일이니 가지고 있는 검에 강기를 두 르거나, 심검합일을 기반으로 한 이기어검에 비해 내력 소모가 막 심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더구나 심검 자체가 이기어검술에 비해 위력적이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단지 검이 없이도 검술을 전개할수 있을 정도의 고수임을 나타낼 뿐이라는 뜻이다. 아마도 저 애송이는 군중이 시선을 생각해 자신의 경지를 내보 인 것이리라. 하지만 스스로를 망치는 길을 선택한 셈이었다. 결국 구양수는 선주혁의 심검을 보며 이 승부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자신은 얼마 동안 시간을 끌기만 하면 될 일이기 때문이다. 최선을 다해 문호만을 굳건히 지키면 상대는 스스로 지쳐 내력이 고갈될 것이고, 어린 나이로 미루어 그 시간을 오래지 않을 것이다. 단숨에 승부를 내려는 처음의 계획은 실행키 힘들게 되었지만 승패의 여부에는 변함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확신을 가진 구양수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상대가 심검을 내보인 이상, 연장자나 선배로서의 앙보 따위는 필요 없었다. 빛살처럼 빠른 속도로 선주혁을 향해 쏘아지는 구양수의 보검. 선주혁은 양손으로 강기로 만들어진 심검을 쥐고 대각선으로 휘 둘렀다. 콰앙.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라 믿기 힘든 폭발음이 울려 피지며 구 양수의 검이 튕겨져 나갔다. 구양수의 세모꼴 눈이 가늘어졌다. 단 일 합의 교환이었지만 선주혁의 심검에서 느껴진 반탄력이 엄청났던 것이다. 긴장을 유지하고 있지 않은 상태였으면 기혈이 뒤틀렸을지도 모를 정도였다. '어떻게 저 나이에 이런 내공을‥‥‥?' 놀라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저 정도의 내력이라면 예상했던 것 처럼 수월한 승부가 되지 않을 수 있었다. 구양수의 손목이 회전하고 검결을 맺은 손가락이 허공에 원을 그렸다. 그의 보검 역시 회전을 하며 검극의 방향을 바꿨다. 다시금 막강한 경력을 흘리며 선주혁을 향해 날아가는 검. 선주혁은 이자벽의 상예금침공을 보며 착안한 이 방법이 생각보 다 효력이 크다는 것을 확신한 후였다. 사형의 영의검의 기운을 주 입한 강기가 효과적으로 적의 어검술을 봉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사형에게서 배운 검로를 쫓았다. 곤륜파의 무공으로 구양 수의 검을 막아낸 것이다. 다시 튕겨져 나가는 구양수의 검. 이번에는 막강한 반탄력을 이기지 못한 이자벽의 어깨가 흔들렸 다. 선주혁의 내력은 이미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지 오래였던 것이 다. 뿌드득. 구양수는 동료들이나 군중이 자신을 보고 있음을 기억하자 분노 가 치밀어 올랐다. 저런 애송이를 상대로 이런 상황을 겪게 되리라 고는 상상치도 못했기에 더욱 그랬다. 안 그래도 독사의 그것을 연상시키는 구양수의 세모꼴 눈에서 소름끼치는 살광이 뿜어져 나왔다. 강호에서는 진신 실력 중 삼 할은 감추는 법이다. 그 삼 할이 위 기의 상황 속에서 목숨을 보전할 유일한 방책이기 때문이었다. 구양수는 더 이상 그 삼 할을 감출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목숨을 지키기 위헤서가 아니라 망신을 피하기 위함이었 다. 이를 악문 구양수의 검결이 지면과 수평을 이뤄 앞으로 뻗어지 고, 그의 검은 빛살처럼 빠른 속도로 선주혁을 향해 나아갔다. 이번에는 선주혁도 자신의 심점을 앞으로 보아 보됐다. 평소 장 력을 날리는 것과 같은 방법이니 크게 어려울 것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관전자들에게 그와 같은 한 수는 가히 신기(神技), 자체였 다. 말하자면 심검을 사용해 이기어검술을 전개하는 것이었기 때문 이다. 어검술과 심검의 충돌 직전. 그 수유의 시간에 구양수의 왼손이 움직였다. 동시에 백광을 발하던 구양수의 이기어검이 둘로 갈라졌다. 그중 하나는 선주혁의 심검을 마주했으며 다른 하나는 그 곁을 스쳐 선주혁을 향해 날아갔다. 보통의 고수에게는 안력의 한계를 벗어난 찰나의 순간에 벌어진 일. 그것은 마치 구양수의 이기어점이 선주혁의 심검을관통해 전진 을 계속하는 듯 보였다. 이어 구양수의 신형이 우측으로 이동했다. 힘을 분산시켰으니 반쪽의 이기어검이 상대의 심검을 이겨 내지 못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신형을 움직이는 구양수의 입매가 호선을 그려냈다. 승리를 확정짓는 한 수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선주혁이 기의 흐름을 그 어떤 고수보다 훨씬 명확하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날아오던 이기어검에 주입되는 기가 두 개로 나뉘는 것을 선주 혁은 이미 느낄 수 있었다. 구양수가 뭔가 수작을 부린다는 것을 직 감한 그. 선주혁은 과감히 자신의 강기 역시도 둘로 나눌 준비를 마쳤다. 이어 구양수의 이기어검이 반으로 갈라지는 그때, 선주혁도 나 눠진 심검을 쏘아 보냈다. 물론 구앙수가 신형을 날린 방향이었다. 관전을 하는 군중들이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비틀거릴 정도의 굉음 속에서도 빛을 머금은 두 개의 검은 서로를 향한 질주를 계속 하는 중이었다. 하나 그저 심정이 만들어 낸 여파만을 염두에 두었던 구양수와 미리부터 준비를 하고 있던 션주혁과의 차이는 컸다. 천하에서 속도만큼은 비할 바 없도록 발전시켜 놓은 선주혁의 암영풍은 구양수의 이기어검을 옆으로 흘려보냈다. 하지만 구양수는 그러지 못했다. 푸욱 하는 둔탁한 음향과 함께 두 눈을 부릅뜬 그는 신형을 멈춰 세워야만 했다. 그리고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선주혁을 바라봤다. "어‥‥‥떻게‥‥‥ 심검을‥‥둘‥‥‥로?" 입 안을 가득 메운 피를 흘려보내며 한 말은 구양수에게 있어서 유언이 되어 버렸다. 의문만으로 가득한 심정으로 세상을 하직한 것이다. 통나무처럼 넘어지는 구양수. 선주혁의 곁을 스쳐 지나가던 구양수의 이기어검도 힘을 잃고 땅바닥에 떨어졌다. 구양수의 보검은 애초부터 둘로 나눠지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특별한 기능을 가진 검을 내력으로 조절해 분리해 쏘아 보내는 것. 그것이 구양수가 감춰 둔 비장의 한 수였다. 그러나 이미 장력을 수십 개로 나누는 데 익숙해져 있던 선주혁 에게 있어서는 별다른 효력을 내지 못했던 것이다. "감히 !" 당연히 승리를 확신했던 승부에서 패종회의 백존이 쓰러지는 모 습에 나머지 백존들은 크게 흥분했다. 안 그래도 금강신협으로 인해 백존의 구성원에 손실이 있었거 늘, 손바닥 뒤집기보다 쉽게 여겼던 애송이를 처치하는 과정에서 또다시 인명이 상한 것이다. 이에 백존 중 서열 육십팔 위에 해당하는 양강위(楊姜威)가 나섰 다. 그는 스스로를 소개할 생각도 하지 않았고, 한 사람을 상대로 차 륜전을 펼치는 데 대한 명분을 세우지도 않았다. 방금 전 죽음을 당한 구양수와 죽마고우로 자라 온 그였기에 오 직 선주혁을 향한 복수심만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던 것이다. 선주혁을 향해 달려드는 양강위의 손가락 끝에는 긴 흑선(黑線) 이 연장되어 있었다. "수라오조(修羅烏爪)?" 마치 묵철(墨鐵)의 갈고리와 같은 모양의 흑선을 본 연운 진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손가락 끝에서 이는 흑색의 강기는 과연 그가 알고 있던 수라오조와 비슷했다. 하지만 서장에 기원을 둔 무공으로 알려진 수라오조의 묵강(墨畺) 은 세 개에 불과했다. 반면 나선 자의 손에는 각 손가락마다 하나 씩, 즉 다섯 개의 강기가 무려 두 자에 달하는 길이로 뻗어 나와 있 었다. 연운 진인이 의혹을 품은 대로 양강위의 조공(爪功)은 수라오조 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수라오조의 근원이 되는 무공이 바 로 양강위의 조공이었다. 탁달오조신공(卓達五汎神功). 서장 홍교의 비전으로 전해지는 이 탁달오조신공이 중원에 전해 져 변형된 것이 바로 수라오조였던 것이다. 탁달오조신공의 오(五)자는 운용 시 발현되는 묵강으로 인해 중 원에서는 오(烏)자로 바뀌었고, 다섯 개의 강기는 세 개로 줄어들어 수라오조라 불리게 되었다. 같은 기원을 가진 무공이라지만 그 위력은 천양지차였다. 손가락 끝에서 뻗어 나온 다섯 개의 묵강은 효신강기는 물론이 거니와 검강까지 갈기갈기 찢을 수 있는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천 하에 산재한 수많은 조공 중 강력한 위력을 자랑하는 수라오조였으 나 그에 비할 바 없이 강력한 무공이 바로 탁달오조신공이었다. 상대가 한눈에도 위험해 보이는 강기를 길게 뽑아 달려들고 있 음에도 선주혁은 물러서지 않고 마주해 나갔다. 애초 남들이 생각했던 심검이 아닌 영의검의 기운을 빌린 강기 를 만들어 사용한 터라 그는 지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선주혁의 손이 자광으로 물들고 이번에는 묵연수투의 기운이 더 해졌다. 이제는 단순한 혈마자광기와는 그 기운부터가 확연히 다른 선주혁만의 장법이 펼쳐진 것이다. 두 사람의 거 리가 좁아드는 그 때. 양강위의 벌어진 손가락이 아래에서 위쪽으로 그어 올려졌다. 그러자 땅 위에 다섯 개의 긴 선이 그려지며 선주혁을 향해 날아 들었다. 단지 경력만으로도 이와 같은 위력을 보이는 것에 군중들의 탄 성이 터져 나왔다. 그럼에도 선주혁은 달려 나가는 기세를 늦추지 않았다. 단지 손 으로 큰 호선을 그려 내며 아래쪽으로 한번 휘저을 뿐이었다. 그의 손에서 뻗어나간 장력이 땅을 치자 양강위의 경력이 멈춰 섰다. 동시에 피어오르는 흙먼지. 아무리 안력이 뛰어나도 입자를 가진 흙먼지가 자욱한 가운데서 는 상대를 보기가 쉽지 않은 법이다. "크흐흐흐‥‥‥!" 양강위의 입에서 웃음이 흘렀다. 애초부터 자신이 노리던 바는 바로 이것 이었던 것이다. 양강위의 양손이 기울어진 십자(十字)를 그리며 허공에서 교차되 었다. 아무런 소음조차 만들지 않고 날아가는 탁달오조신공의 경력. 강기가 날아가는 것이 아니기에 소음을 제외하고는 그 실체를 눈으로 볼 수는 없었다. 흙먼지로 인해 시야 확보가 어려운 상태에서 자신의 공격을 피 해 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 양강위는 앞서 구양수가 그랬던 것처럼 승리를 확신했기에 웃음 을 흘린 것이다. 그러나 선주혁은 시야에 의지하지 않고도 양강위의 모든 움직임 을 명확히 파악하는 중이었다. 막강한 기가 움직이는 것을 확연히 느낄 수 있으니 비록 무음(無音), 무형(無形)의 경력이라 할지라도 손쉽게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선주혁은 절정의 암영풍을 전개해 날아오는 경력의 범위에서 벗 어났다. 가볍게 양강위의 공격을 피해 낸 것이다. 흙먼지가 가라앉고 네 쪽으로 갈라진 선주혁의 시신을 기대하던 양강위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선주혁은 자신이 경력을 날린 방향과 다른 쪽에 서 있는 것이 보 였던 것이다. '운이 좋은 놈이군. 하지만 요행은 한 번으로 족하다!' 양강위의 탁달오조가 다시 한 번 땅을 훑었다. 거칠게 튀어 오르는 먼지. 선주혁은 이번에는 앞에 비해 훨씬 강하게 팔을 휘둘렀다. 일대 의 시야를 완벽히 가리기에 충분한 양의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양강위의 탁달오조가 허공에 수 개의 호선을 그려 내고 무수한 경력이 선주혁이 있는 방향을 향해 날아갔다. 흙먼지 속에서 선주혁은 마치 눈으로 보는 것처럼 경력과 경력 사이를 여유 있게 헤집고 다니며 양강위와의 거리를 좁혀 갔다. 이어 일정한 거리에 도달한 선주혁이 격렬할 정도의 속도로 양 손을 교차해 뻗었다. 북두진공참이 발출된 것이다. 끊임없이 탁달오조를 휘두르던 양강위는 본능적으로 무엇인가 에 대한 위협을 느끼며 가슴을 보호했다. 카아앙. 날카로운 굉음이 울리며 손끝에 은은한 충격이 전해졌다. '뭐지?' 뭔가 묘한 기운이 자신을 공격해 왔다는 것을 깨달은 그가 놀라 는 사이 다시금 그의 신경이 예민해졌다. 탁달오조를 교차해 다시금 가슴을 보호하는 양강위. 과연 예감대로 쇳소리와 같은 거북한 소리가 또 다시 울리며 손 에서 충격이 느껴겼다. 이제 보니 상대도 자신처럼 보이지 않는 경력을 발출해 공격하 고 있는 것이다. '여우같은 놈!' 자신이 사용한 것과 유사한 방법임을 자각하지 못하는 듯, 양강 위는 선주혁에게 내심 욕을 쏟아 부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열 개의 손가락을 끊임없이 놀려야만 했다. 파도처림 밀려오는 날카로운 경력의 물결 때문이었다. 양강위는 아예 분주히 탁달오조를 휘둘러 몸 앞쪽에 검은 막을 만들어 버렸다. 그 와중에 흙먼지가 가라앉았고 그제야 양강위는 선주혁이 어떤 방법으로 자신을 공격하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양손을 교차해 내뻗는 중이었다. 놀라운 것은 그와 같은 교차로 인한 경력의 발출이 실로 전광석 화와 같아서 경력이 발출과 동시에 자신에게 도착하고 있다는 사실 이었다. 이에 양강위는 흙먼지를 이용한 승부가 외려 자신에게 불리함을 깨달았다. 언제까지 강기의 막을 만들어 수세에 몰릴 수 없었던 것 이다. 양강위는 땅을 훑어 먼지를 피어오르게 하는 것을 포기한 채 선 주혁 쪽으로 다가섰다. 애초에 그랬던 것처럼 선주혁도 정면으로 다시 달려갔다. 두 사람의 서로를 향해 각각 조공과 장공을 전개했다. 카아앙, 장, 캉. 무엇이든 자른다는 탁달오조였으나 묵연수투의 기운과 혈마자 광기의 보호를 받는 선주혁의 손을 상하게 할 수 없었다. 외려 손가락 끝에서 전헤져 오는 충격에 통증만이 가득 느껴질 뿐이었다. 양강위는 인상을 쓰면서도 자신만의 독특한 무공을 펼치기 시작 했다. 보통의 조공은 독수리의 발톱처럼 손가락을 구부려 상대를 공격한다. 손끝에 기운을 집중해 파괴력을 높이는 것이다. 하지만 손가락 하나하나에서 두 자에 달하는 강기를 뽑아 낼 정 도의 양강위가 펼치는 탁탈오조신공은 여느 조공과는 비할 바가 아 니었다. 그는손을 휘두르면서 교묘히 손가락을 놀려 댔다. 강기를 잘라 낼 정도의 날카로움을 간직한 탁달오조였으니 그 위험성은 대단했 다. 마치 열 개의 칼날을 자유롭게 휘두르는 듯했던 것이다. 변화를 머금은 열 개의 강기가 선주혁의 눈앞에서 그물처럼 엉 켜들었다. 밀밀한막이 되어 선주혁을 몰아붙이는 양강위의 공격에는 도저 히 빠져 나갈 틈이 보이지 않는 듯했다. 그러나 선주혁의 손놀림은 범인의 상상할 수 있는 한계를 완벽 하게 무너뜨리고 있었다. 빛살처럼 빠르게 움직이는 두 손이 양강위의 강기를 하나하나 막아 내고 있는 것이다. 그 쾌속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선주혁의 두 손 은 물이 흐르듯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내포하고 있었다. '어떻게 두 손이 열 개의 조강(爪强)을 막아 낼 수 있단 말인가?' 적의 손이 자신보다 적어도 다섯 배는 빨리 움직이고 있다는 것 을 도저히 믿기 힘든 양강위였다. 부지런히 손가락을 놀리며 상대의 명줄을 끊으려는 그의 시도는 성사될 가망이 보이지 않았다. 겉으로 봐서는 일방적으로 몰아불이는 자신이 유리한 듯했으나 실상은 달랐던 것이다. 매번의 층격이 있을 때마다 손가락이 부러 질 듯한 통증이 느껴지니 시간이 지날수록 불러한 것은 양강위였 다. 그는 마른침을 삼켜야만 했다. 도저히 극복하기 힘든 속도의 차이를 체감했기 때문이었다. 기실 선주혁이 북두연환장을 단 번에 전개할 수 있는 한계는 일 곱 번이었다. 그러니 양강위의 생각처럼 그가 다섯 배나 딸리 손을 움직이는 것은 아니었다. 비록 열 개의 조강이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고 있다지만 그 범 주는 손을 중심으로 한 일정 각을 넘어서지 못했다. 길게 벨어 연장 이 되어 있다 해도 손가락과 손가락이 만들어 내는 각도는 한계가 있기 마련인 것이다. 열 개의 조공은 약간의 시간차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그 시간 차는 극히 적어 보통의 적에게는 충분한 위협이 된다. 하지만 선주 혁에게는 예외일 수밖에 없었다. 손가락이 만들어 내는 각도의 한계를 인지한 선주혁으로서는 단 한 번의 손짓으로 날아오는 두세 개의 조강을 막아 낼 수 있는 상황. 따라서 실제로 그의 북두연환장이 양강위가 발출하는 조공의 다 섯 배에 해당하는 속도를 내는 것은 아니 었던 것이다. 선주혁은 보완된 북두연환장을 침착하게 전개하며 계속해 양강 위의 공격을 막아 낼 뿐이었다. 소름끼칠 정도의 예기를 번득이는 양강위의 조공이었으나 선주혁의 수강을 가를 수는 없었으므로 공 방은 계속해 반복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동안. 점차 선주혁이 방어하는 조강의 개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두 세 개의 조강을 한꺼번에 쳐내던 그가 조강 하나하나를 막아 내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는 선주혁이 한 번 발출한 후, 약간의 여유를 필요로 하면 북 두연환장을 연이어 두 번 이상에 걸쳐 전개하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것이다. 즉, 일곱 번의 장력을 일순간에 펼친 후 다시금 연이어 일곱 번 의 장력을 연환으로 펼치는 방법을 몸에 익혀 가는 것이다. 무려 이 각여에 달하는 반복되는 공방. 그러나 관전하는 그 누구도 지루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들 중 대 부분에게는 두 사람의 공격과 방어의 속도가 안력의 한계를 벗어나 있었다. 극쾌의 영역에서의 공방에 그들이 확인할수 있는 것은 두 개의 강기가 충돌할 시 생기는 빛의 퍼짐과 폭음뿐. 대낮임에도 눈을 시리게 하는 화려한 빛의 향연과 끊임없이 이 어지는폭음의 장단에 넋을 잃어 지루함을 느낄 여유가 없었던 것 이다. 그와 같았던 팽팽한 균형은 선주혁의 손에 맺힌 강기의 길이가 변화했음에도 한동안 이어졌다. 선주혁이 만들어 낸 수강의 길이가 점점 길어지더니 종국에는 하나의 검과 같은 형상을 갖췄다. 마치 손이 길어져 하나의 검이 된 듯한 모양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선주혁이 두 개의 심검을 만들어 낸 것이라 생각 할 정도였다. 두 사람이 만들어 낸 균형은 방어 일색이던 선주혁이 강기가 양 강위의 조강 사이를 파고들기 시작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흔들렸 다. 그 미세한 변화를 파악한 것은 오늘 이 자리에 모인 백존 중 최 고수인 한 명의 노인이었다. "양 형제! 물러서게!" 다급한 그의 외침. 하지만 불행이도 양강위에게는 그럴 기회가 없었다. 양강위와의 대결을 통해 원하는 바를 이룬 선주혁이 백존의 목 숨을 취할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 없었던 것이다. 흐름을 쫓아 조강의 틈새를 파고들려는 시도는 자신의 발전을 위한 것이었으나, 양강위를 죽이고자 한다면 꼭 그와 같은 방법을 선택할 필요는 없었다. 무려 열 개의 조강을 만들어 내 끊임없는 공세를 펼치다가 이제 는 수비에 급급한 양강위였다. 상대의 엄청난 내력을 감당하기 위 해 그는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곧 내력의 소진을 가져오 고 있었다. 열 개로 나뉘어 형성된 조강은 이미 처음의 강도를 잃어 가기 시 작한 상태. 선주혁에게 부족한 내력이 실린 강기는 유리와도 같은 것. 영의검의 기운을 담은 선주혁의 수강은 사정없이 양강위의 조강 을 잘라 갔다. 천하에서 십대명검 중 하나인 영의검의 날카로움 앞 에서 약히진 강기는 맥을 못 추는 것이다. 길게 늘어난 선주혁의 강기는 마치 제 자리를 찾듯 양강위의 심 장에서 멈춰 섰다. "크윽!" 목구멍을 밀고 올라오는 신음성이 절로 튀어 나오고, 양강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선주혁의 입가에 맺히는 극히 미미한 미소. 그것은 이제 백존은 자신의 상대가 될 수 없으리라는 자신감이 었다. 군중들 중 몇몇은 선주혁의 승리에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지르 다 화들짝 놀라 입을 가리기에 바빴다. 백발귀마에게 원한을 가진 무인들 사이에서 그의 승리에 환호성을 보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나무라는 시선을 던지는 사람들조차도 젊은 나이 에 저 정도의 무공을 연마한 백발귀마에 대해 인정하는 마음만큼은 같았다. 무인으로서 꿈에서도 그리던 경지에 올라있으니 당연한 일 이었다. 한편 수많은 정도 무인들 앞에서 그들이 여태 속수무책으로 당 해 왔던 백발귀마를 단숨에 제압해, 지닌바 저력을 보여 주려 했던 패종회로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벌써 두 명의 패종회 무인이 외려 백발귀마에게 죽임을 당하고 만 것이다. 이대로라면 백발귀마를 처단해도 패증회의 행사에 감탄하는 사 람은 없을 것이다. 고작해야 차륜전을 통해 상대의 기운을 뺀 다음 억지로 승리를 갈취한 정도로 인정받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이대로 백발귀마를 돌려보낸다는 것은 불가한 일이었 다. 아예 패종회의 무능함을 인정하는 셈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 자리의 백존 중 최고수인 임한용(林滯珞)이 나섰다. 사실 이곳의 백존을 이끄는 것은 고척(高涉)이라는 자였다. 무공 은 임한용에 비해 아래이나 업무의 처리 능력이 뛰어나 실질적인 수장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선주혁의 가공할 무위를 확인한 고척은 임한용에게 부탁의 눈짓 을 보냈고, 결국 그가 나선 것이다. "대단하군. 강호에 알려진 백발귀마라는 이름이 허명(虛名)이 아 니었음을 인정하네." 방금 전 양강위에게 경고성을 발한 자가 걸어 나오며 말을 하자 선주혁은 호흡을 가라앉혔다. 이 자리에 모인 나머지 모든 백존의 우위에 서 있는 임한용의 기 도를 느낀 것이다. 아무리 백존에 대해 자신감을 가진 지금이라 해 도 임한용은 선주혁이 상대해 본 자 중 최고수랄 수 있기에 마음을 편히 가질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특히 수하의 죽음에도 동요하지 않고 저렇듯 침착한 모습을 보 이는 자니 더욱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부는 임한용이라고 하네. 자네가 이룬 높은 성취는 가히 칭송 의 대상이 될 일이나, 잘못된 길을 걷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일세. 이곳에서 자네를 제지하지 않는다면 뛰어난 실력만큼이나 많은 협 의지사들이 원통한 일을 당할 터. 순서를 이어 공격을 한다고 해서 우리를 나무라지 말게나." 결국은 군중들에게 명분을 세우는 발언이었다. 이는 꽤 큰 효과 를 불러 일으켰다. 그의 말대로 백발귀마의 무공이 높을수록 반드 시 이 자리에서 죽여야 할 필요가 있었다. 저 정도의 무공을 지닌 마두가 강호에서 활보한다면 자신들에게 피해가 올 수도 있는 일이 기 때문이었다. "흥! 긴 소리 필요 있겠소? 무인은 보보(步步)에 생명을 거는 것 이 당연한 일. 능력이 부족해 죽는다면 누굴 탓하겠소?" 선주혁의 말에 군중들 중 몇몇이 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 다. 백발귀마로 인한 위기에 대해 재인식을 하긴 했지만 그 말만큼 은 무인으로서 백번을 옳다 여길 것이기 떼문이다. 그런 반응을 보며 임한용은 쓴 웃음을 지었다. 지금의 상태가 계 속 된다면 이 자리가 백발귀마를 한 명의 무인으로 인정해 주기 위 한 판이 되어 버릴 것을 짐작한 것이다. 그는 선주혁의 말대로 입을 다물고 진지한 표정으로 내력을 끌 어올러기 시작했다. 그러고 외쳤다. "주변의 무인들께서는 모두 물러서시오!" 군중들이 의아해 하는 표정을 지을 때. 임한웅의 주변에 한줄기 미풍이 불었다. 군중들이 모여 있는 그곳에는 바람 한 점 없건만 그의 주변에만 이는 바람이었다. 봄날의 훈훈한 온풍과도 같았던 그 바람의 크기가 더해지고 급 기야 범인이라면 몸이 휘청거릴 정도의 강풍이 불어 닥쳤다. 단지 임한용이 내력을 끌어올렸음에 일어난 현상이었다. 가히 절대의 경지에 오른 내공의 소유자가 필살의 격전을 준비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군중들은 분분히 뒤로 물러서기에 바빴다. 자칫 고수들의 싸움을 구경한답시고 어디가 부러지거나 목숨을 잃는다면 그것보다 어리석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무인 하나가 군중들 사이에서 이탈했다. 이탈자는 달리고 또 달려 이제는 익양에서 동정호로 향하는 길 목에 몰려와 있는 흑도의 무인들을 향했다. 그리고 외쳤다. "백발귀마 선 대협께서 상상을 초월할 격전 끝에 패종회의 고수 둘을 해치우셨소! 그분은‥‥‥, 그분은 아직까지 건재하시오!" 턱밑까지 차오른 숨 속에서 외쳤음에도 그의 음성은 널리 전해 졌다. 한데 모여 있던 흑도의 군웅들이 일시에 함성을 질렀다. "우와아아아아아!" 몇몇은 눈물을 흘렸다. 이미 죽었을지도 모를 것이라 생각했던 백발귀마였다. 달려온 자가 그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전해 온 것이라 생각했다. 그랬건만 놀랍게도 만반의 준비를 했을 패종회의 무인 둘을 외 려 해치우고 아직까지 건재하다는 것이다. 이에 벅찬 감동이 치밀어 올라 저마다 눈물을 글썽이지 않을 수 없었다. 무리를 지어 다니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한다 손가락질을 받는 흑도의 무인들이었다. 속성으로 치닫는 사마도의 무공이 가지는 한계로 결정 고수들이 부족해 그런 비난의 근거가 되었다. 한데 백발귀마가 그런 모든 한을 풀어 주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정도 고수를 상대로 단신으로 맞서는 그의 무위야말로 흑도 무인들의 자긍심이 되는 중이었다. "선 대협은 우리의 희망이십니다!" "부디 우리들의 기상을 드높여 주십시오!" 그들의 함성이 익양 전역을 채울 듯 울려 퍼지는 사이,임한웅과 선주혁의 치열한 격전은 이미 시작되었다. 임한웅은 백존 중 서열 사십삼 위. 이미 앞선 자들과 내력의 크기부터가 다른 임한용이었다. 그는 무겁기 이를 데 없는 동작으로 장력을 밀어 했다. 허공에 떠오른 원형의 적색 강기에서 흘러나오는 경력은 군중들 이 물러나 생긴 공간을 가득 메울 정도. 장력에 담긴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두가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선주혁은 상대의 장력에 가히 작은 산을 무너뜨릴 기세가 담겨 있음을 느겼다. 비록 느릿한 듯 다가오는 장력이지만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위 험한 상황이 다가을 수 있다고 결론을 내린 그는 혈마자광기를 만 들어 앞으로 밀어 냈다. 두 개의 장력이 허공에서 맞닿았을 때였다. 군중들은 내력을 끌어올려 충격의 여파와 폭음에 대비했지만 어 처구니 없게도 아무런 현상도 발생하지 않았다. 청광을 발하는 임한용의 장력이 자광을 발하는 선주혁의 장력을 부드럽게 마주해 폭발을 만들어 내지 않고 허공에서 얽혀 있는 것 이다. 그리고는 서서히 임한용의 장력이 선주혁의 장력을 밀고 들어가 기 시작했다. 포강천력장(砲陵天力掌). 오직 압도적인 힘만을 추구하는 홍교 특유의 장세였다. 장력은 상대를 가격할 때 충격을 가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 살상력을 높여 승리를 쟁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포강천력장은 여느 장법과는 달랐다. 쉽게 말하자면 힘 만으로 밀어붙이는 식이었다. 체내에 막강한 내력을 쌓은 후, 혼신의 힘을 다해 장력을 밀어내 는 것. 그것이 포강천력장의 요체였다. 구시대의 화포(火砲)는 무거운 철구(鐵球)를 날리는 것에 불과하 다. 포탄인 철구가 폭발하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엄청난 살상력을 자랑했다. 육중한 철구가 굴러다니며 사람의 팔다리를 찢고 몸통을 으깨기 때문이었다. 포강천력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파괴력을 위주로 하지 않았음에 도 그 막강한 힘만으로도 적을 상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그 힘은 적이 뿜어내는 장력을 무력화시키기에 충분했 다. 어찌 보면 공격이 곧 방어가 되는 묘용이 최고에 달했다 말할 수 있는 장법이 바로 포강천력장이었다. 임한용의 서열이 사십 위대의 말에 위치하는 이유는 그가 이 포 강천력장에 집중하는 터에 구음대법의 연마를 소홀히 했기 때문이 다. 포강천력장 자체가 상상을 초월하는 내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므 로 구음대법까지 제대로 익힐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오직 포강천력장에 모든 것을 쏟아 부은 임한용이었기에 그의 내력은 백존 중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였고 지금 그 위력이 드러나 는 중이었다. 사실상 내력에 있어서 자신보다 위에 있는 선주혁의 장력을 밀 어내고 있는 것이다. 선주혁은 상대의 무식하기 이를 데 없는 장법에 흥미를 가지며 손을 펼쳤다. 그러자 혈마자광기가 폭발을 했고, 그 여파로 포강천력장이 뒤 쪽으로 튕겨졌다. 그걸로 끝은 아니었다. 임한용의 미간이 찌푸려지고 어깨가 들씩거리긴 했지만 그는 다 시금 손을 뻗었다. 포강천력장은 다시 전진을 시작했다. 선주혁은 북두연환장을 응용 일곱 개의 장력을 거의 동시에 발 출했다. 몰랐다면 모르되 상대의 장력이 충돌을 만들어 내지 않음을 알 고 있는 상태. 이를 의식하고 발출된 선주혁의 장력은 포강천력장에 부딪침과 동시에 폭발을 만들어 냈다. 선주혁이 순간적으로 내력을 주입해 만들어 낸 의도적인 폭발이었다. 하지만 분산되어 발출된 장력은 포강천력장을 채 한 자도 밀어 내지 못했다. 임한용은 진중한 표정으로 장력에 집중한 상태였고 포강천력장 은 다시 앞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젠장! 뭐 이런 무식한 무공이 있어?' 위협적인 기세를 뿜어내며 자신을 향해 접근해 오는 장력에 선 주혁은 기가 질릴 정도였다. 아무리 친하제일을 자부하는 내공이라지만 앞서 두 명의 백존을 상대하면서 선주혁의 내력도 손실이 있었다. 약간의 여유만 주어진 다 해도 보충할 수 있겠지만 패종회는 숨 돌릴 틈도 허용치 않고 있 었다. 그렇다고 해도 막상 힘으로 임한용을 밀어붙이자면 불가능한 일 만도 아니었다. 전력을 다한 내공이라면 충분히 적의 장력을 밀어낼 자신이 있 었다. 하지만 패종회의 백존은 임한용이 마지막이 아니었다. 아직도 네 명의 백존들이 건재했으며 백웅들도 버터고 서 있었 다. 임한용을 패퇴시킨 후, 지쳐 버린다면 가만히 앉아 목을 내밀어 야 할 형편이었다. 이에 선주혁은 무작스럽게 힘으로 밀어붙이는 승부를 피하려는 것이다. 그의 두 눈에 결의가 맺혔다. 어차피 이래 죽나, 저래 죽나 다를 것이 없는 상황. 이자벽과의 대화중에 떠올랐던 발상을 시험해 보기로 한 것이 다. 한 번 더 북두연환장을 응용한 연속적인 장력을 전개해 틈을 만 든 선주혁이 허공에 새로운 장력을 만들어 냈다. 그 모습을 본 백존들의 입매에 미소가 걸렀다. 이제는 지쳐 버린 백발귀마가 제대로 된 장력을 형성할 여력도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앞서 심검을 만들어 낸 모습을 봤던 그들의 눈에는 검의 반 토막 정도밖에 안 되는 길이에 쇠꼬챙이와 같은 모앙을 가진 선주혁의 장력을 그렇게 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전까지만 해도 선명하기 이를 데 없는 형체를 갖췄던 심검이 지금은 모양마저도 이지러져 있었다. 쇠꼬챙이와 같은 강기 의 외곽선이 울퉁불통한 모양으로 흔들리고 있있던 것이다. 저 정도로는 자신들 중 제일 무공이 고강한 임한용을 막아 낼 수 없다고 확신하는 백존들이었다. 백발귀마가 짓고 있는 미소마저도 이제는 죽음을 받아들일 때임 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실제는 달랐다. 선주혁이 만들어 낸 것은 긴 대못 형태의 강기였다. 당연히 이자 벽의 상예금침공을 보고 만들어 내긴 했지만, 그의 강기는 비단 대 못의 형상에 그친 것이 아니 었다. 선주혁은 명색이 과학의 시대를 살아온 현대인. 틈을 만들어 파고드는 못의 발전 형태가 무엇인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이자벽이 대못을 거른할 때 떠올렀던 것은 바로 나사못. 강기 자체에 나선(螺線) 돌출 부위를 만들어 회전을 시킬 수 있다 면 훨씬 더 큰 파괴력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을 기대했다. 그런 발상을 통해 만들어진 강기의 모양이 이지러져 보이는 것 은 당연했다. 선주혁의 강기가 그저 나사못의 형태를 갖추고 멈춰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 없이 회전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군중들이나 백존이 이와 같은 현상을 알아채지 못한 것은 나사 못에 대해 모르기 때문이었다. 선주혁이 살던 시대에서 사용된 나사못이 당시의 형태를 제대로 갖춘 것은 서구의 16세기 때 일. 그나마 나무로 만들어진 나사못이었다. 이곳의 사람들이 나사못에 대해 알고 있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 이었다. 더구나 저렇듯 맹렬한 속도로 회전하는 강기는 상상조차 못했던 일. 따라서 관전자들의 눈에는 선주혁이 지쳐 강기의 형태가 일그러 지는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자신들에게는 시전조차 힘든 강기라지만 저렇듯 맥없이 흔들리는 강기가 무슨 소용이 있을 까 하는 걱정이 절로 들 정도였다. 그럼에도 백발귀마는 포기하지 않았다. 낭랑한 기합성이 터지고 그의 강기가 거대한 장력을 향해 쏘아 졌다. 그 속도만큼은 눈부셔 선주혁이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짐작 할 뿐이었다. 퍼억. 이전과는 달리 백발귀마의 장력은 앞선 몇 번과는 달리 폭발을 만들어 내지 않았다. 관전자들은 선주혁이 폭발을 만들어낼 여력조차 갖지 못하고 있 다고 생각했다. 형태조차 불분명한 강기를 만들어낼 정도니 어쩌면 당연한 현상일 수도 있었다. 게다가 선주혁의 강기는 임한용의 장력에 부딪쳐 잠시 멈춰 서 는가 싶더니 점점 길이가짧아지는중이었다. 이번에는 단 한 치도 밀어내지 못하고 임한용의 장력에 묻혀 버리는 것이다. 맥없이 를어지는 장력을 보며 금중들은 백발귀마의 최후를 떠올 렸다. 한 시대를 풍미한 효웅의 결말을 이제야 보게 된 것이다. 모두가 피 떡이 되어 뭉개지는 선주혁을 떠올릴 그 때.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 벌어졌다. 임한용의 장력이 거칠게 흩어지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여전히 흔들리는 모습 그대로를 간직한 선주혁의 강기가 보였다. 선주혁이 만든 강기는 두더지가 땅을 뒤로 파내는 것처럼 튕켜 지는 임한용의 장력과는 사못 다르게 어떤 영향도 받지 않은 듯한 모습이었다. 나선을 갖춘 강기는 임한용의 장력에 묻혀 소멸되고 있었던 것 이 아니라 그 안을 파고 들어갔던 것이다. 그리고 맹렬한 회전력으로 임한용의 장력을 흩어뜨리는 중이었 다. 선주혁의 강기가 상대의 장력을 완전히 관통하는 순간. 임한용의 가슴에 구멍이 났다. 놀라운 것은 그의 앞쪽에 난 구멍은 고작해야 손가락 굵기 정도 에 불과했지만 등은 커다란 원형을 그리며 뚫렸다는 사실이다. 단발마의 비병조차 지르지 못하고 앞으로 쓰러지는 임한용의 등 뒤로 보이는 신체의 내부. 본래의 장기는 형체조차 남기지 못한 채 혈수(血水)로 화해 있었 다. 이는 선주혁의 강기가 회전을 수반한 채 그의 신체 내부를 헤집 었기 때문이었다. "저, 저럴 수가!" "저것이 백발귀마의 무공이란 말인가?" "저 정도면 귀마 정도가 아니라 마신(魔神)이라 칭하기에도 부족 함이 없지 않은가?" 이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정도 무인들이 입을 열기 시작 했다. 백발귀마의 무공이 가히 입신지경에 이르렀으니 무인으로서 치미는 감정을 통제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웅성거림 속에 또 하나의 무인이 익양의 중심을 향해 달 렸고, 그가 외쳤다. "선 대협께서 또 다시 패종회의 주구를 처단하셨습니다. 이번에 도, 이번에도‥‥‥ 선 대협께서 승리하셨습니다!" 이번에야말로 선주혁의 죽음을 애도할 준비를 하고 있던 흑도의 무인들이었다. 한데 믿기 힘든 외침이 귀에 들려온다. 백발귀마가 또다시 적을 물리쳤다는 것이다.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울컥 치미는 무엇인가가 목을 울린다. 그것은 함성이 되었다. 누군가에게서 그렇게 시작된 함성의 하늘을 울릴 정도였다. "우와아아아앗! 역시 선 대협이다!" 개중 몇몇은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백발귀마의 승리 소식이 감 격스러웠고 흥에 겨웠다. 자신이 백발귀마와 함께하는 흑도의 무인이라는 것이 자랑스러 웠다. 그 감동은 눈물이 되어 외부로 표출되고 있었다. 우레와 같은 함성중에 소식을 전해 온 자가 손을 들어 을렸다. 군중은 흥분을 억누르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누군가 강제한 것 도 아니거늘 그들은 하나의 마음이 되어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정도의 개들마저도 선 대협을 마신(魔神)이라 부르더이다. 그놈 들조차 선 대협께 존경을 표할 정도니 어찌 대단한 일이 아니겠습 니까!" "우와아아아아! 선 대협, 만세!" "백발마신, 만세!" 흑도 무인들의 함성과 함께 선주혁의 별호는 백발귀마에서 백발 마신으로 바뀌고 있었다. = Chap.10 - 백발마신 = 선주혁의 가공할 무위에 백존들은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누군가 말했듯 저 정도면 마신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 다. 그들은 이제야 왜 회주인 선우단패가 천음마후의 완성에 심혈 을 기울였는지 이해가 갔다. 백존의 무위만으로도 강호를 평정하기에 충분하다 여겼건만 벌 써부터 이런 고수가 튀어 나온 것이다. 기인이사가 모래알처럼 많 은 무림이니 천음마후의 완성만이 가장 확실한 안전장치가 되어 줄 것임을 회주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남은 백존에게 있어서는 이 자리에 천음마후가 없는 것이 한스 러울 뿐이었다. 구음대법을 운용할 수만 있다면 진짜 마신이 눈앞 에 있다 해도 두려워할 자신들 아닌 것이다. 그렇다고 천음마후가 없다 해서 한없이 선주혁의 위용에 눌려 있을 수는 없는 상황. 백존들의 실질적인 수장 역활을 하는 고척이 언성을 높였다. "악귀 같은 놈! 그 알량한 무공을 믿고 천하를 어지럽히니 더더 욱 네놈을 살려 둘 수는 없구나! 강호의 우환을 없애는 데 있어 도 의를 따질 필요는 없을 터. 세인들이 우리 넷에게 손가락질 할지 라도 네놈의 악행으로 더 이상의 피해가 생기지 않도록 하겠다." 고척의 한마디에 선주혁은 씁쓸히 웃었다. 그의 대사는 무협 소설을 읽다 보면 흔하고도 흔했던 것. 실력이 달리면 수로 밀어붙이는 자들이 스스로흘 변명하는 말이 었고, 이와 같은 상황은 예정된 수순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최선을 다하는 일뿐. 단 한 놈이라도 더 저승행의 동반으로 삼아야 사형이 패종회를 상대하기에 수월할 것이다. 선주혁은 아직까지 패종회의 수중에 있는 몽세화를 향해 한번 웃어 준 후 담담한 표정을 지웠다. 이제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승부에만 집중하려는 것이다. "죽어라!" 고척의 외침과 동시에 장벽호(張壁護)와 지진후(池進厚)가 동시에 앞을 향해 달려 나갔다. 벌써 백존 중 셋을 죽인 적이니 만큼 그들 의 출수(出手)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장벽호는 협봉검(狹鋒劍)을 흔들며 신검합일의 상태로 앞으로 쏘 아져 갔고, 지진후는 대도(對倒)를 휘두르며 선주혁의 하반신을 쓸 어 갔다. 강기에 휩싸인 도검이 만들어 내는 경력은 압도적인 기세를 발 출했고 선주혁의 운신 폭을 좁혔다. 하나 선주혁의 암영풍은 이미 무림의 일절. 긴 잔상을 남기며 신형을 뒤로 뽑은 선주혁의 손바닥 위에 수십 개의 바늘과 같은 강기가 생성되었다. 세모(세모)와 같은 강기를 허공에 뿌리는 선주혁. 두 사람이 각각 도검을 휘둘러 물샐 틈 없는 강기막을 형성해 방 어할 때, 선주혁은 역습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그 순간 귀를 파고드는 날카로운 파공성. 번쩍이는 빛을 내는 부채가 예측불가의 궤적을 쫓아 자신을 향 해 날아드는 것이 보였다. 뒤쪽에 물러 서 있던 죽영표(죽영표)의 선강(선강)이었다. 강기 다발을 암기처럼 뿌려 빈틈을 만들려 했던 선주혁의 시도 는 죽영표의 섭선(섭선)으로 인해 무산되었다. 어디로 날아들지 모를 부채를 막아 내는 사이 두 사람은 이미 재 격돌의 준비를 마친 것이다. 계획이 틀어졌음을 확인한 선주혁은 발을 들어 강하게 진각을 밟았다. 이른 바 진곤혈사의 재현과도 같이 엄청난 양의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두터운 흙먼지가 적의 시야를 가리는 것이 그에게는 훨씬 유리 하리라는 판단에서였다. 이어 몇 번에 걸쳐 북두진공참을 날리는 선주혁. 쾌속의 진공참이었으나 백존들 역시 공격에 대한 기감을 느끼고 도 남을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기감에 의지해 선주혁의 공 격을 막아 냈다. 살기를 머금은 공격이라면 백존들 역시 충분히 방 어할 능력이 되는 것이다. 선주혁은 기척을 죽여 그들을 향한 접근을 시도했다. 근접한 위치에서의 공격이라면 방어할 시간이 줄어들 터. 시야가 좋지 않은 환경을 최대한 이용해 조금이나마 유리한 상 황을 만들어보려는 것이다. 그때 불어오는 엄청날 광풍(狂風). 공간을 가득 메웠던 흙먼지가 일시 간 걷히고 청명한 시야가 확 보 되었다. 고척이 막강한 장력을 쏟아 부어 먼지를 걷어 낸 것이다. '쳇! 잔머리는 통하지 않는다는 건가?' 먼지가 걷힘과 동시에 극한의 암영풍을 전개하며 투덜거리는 선 주혁이었다. 가만히 서 있다가 네 명의 백존에게 공격을당하면 꼼 짝도 못하고 죽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빠르게 신형을 날려 뒤로 물러서는 선주혁이었으나, 어느새 장 벽호의 협봉검이 그의 뒤를 쫓았다. 손가락 한 개 반 정도 굵기밖에 되지 않는 장벽호의 협봉검은 낭 창낭창 휘며 눈을 현혹시키는 빛을 발하는 중이었다. 발광(發光)하는 뱀처럼 꿈틀거리며 요혈(要亮)을 노리고 날아오는 협봉검을 향해 선주혁의 손이 뻗어졌다. 선주혁의 손과 장벽호의 검이 부딪치는 찰나의 간극을 노리고 지진후의 대도가 및구리를 파고들었다. 선주혁의 남은 한 손이 지진후의 도신을 때리는 그 순간. 어느새 부채를 회수한 접은 채로 죽영표가 천돌혈을 찔러 왔다. 도저히 막을 수 없을 것 같은 동시다발적인 공격. 그럼에도 어느새 협봉검을 튕겨 낸 선주혁의 좌수가 죽영표의 부채를 막아 냈다. 선주혁의 북두연환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갑작스레 피부를 따갑게 할 정도의 경력이 밀려오는 게 느껴지 더니 고척의 무지막지한 장력이 전신을 휩쓸어 오는 것이다. 세 명의 백존들이 쏟아 붓는 공격을 방어하느라 분주한 선주혁 은 미처 장력을 발출할 여유를 갖지 못했다. 그는 다급한 마음에 양 팔을 교차해 방어를 시도했다. 그러나 장력이 내포하고 있는 거력을 이기지 못하고 뒤쪽으로 튕겨졌다. 백존과의 교전 이후 선주혁이 처음으로 낭패를 당한 상황. 그와 같은 호기를 놓칠 백존이 아니었다. 아릿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 순간을 노리고 장벽호의 협봉검이 다시 심장을 향해 날아든 것이다. 황망히 팔을 휘둘러 위쪽으로 협봉검을 쳐내는 선주혁. 하나 장벽호의 협봉검은 특유의 탄력을 이용해 선주혁의 힘을 흘려보냈다. 부드럽게 휘어지는 특성을 이용해 크게 튕겨지지 않고 재차 그의 하복부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선주혁이 놀라는 사이. 지친후의 대도가 대각선으로 베어 왔다. 선주혁의 양손이 다급히 움직이려 하자 죽영표의 부채가 펼쳐지 며 그의 시야를 가렸다. 아무리 기감을 통해 모든 것을 느낄 수 있 다 해도 이와 같은 상황은 순간적인 심적 동요를 만들기에 충분했 다. 특히나 백존 정도의 고수들에게 협공을 받아 본 적이 없는 선주 혁이기에 더욱 그랬다. 그 짧은 동요의 순간. 선주혁은 방어할 면적이 넓은 지진후의 대도는 쉽게 쳐냈으나 점에 해당하는 장벽호의 협봉검을 놓치고 말았다. 콰앙. 검이 몸을 찔렀음인데 기이한 폭음이 터지며 선주혁의 뒤쪽으로 밀려났다. 그리고 백존도 선주혁도 언제 치열한 교전 중에 있었냐는 듯 잠 시간의 소강상태에 빠져들었다. 선주혁이 움직임을 멈춘 것은 단전의 인근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통증과 들끓는 혈맥으로 인한 내상 때문이었다. 하지만 백존이 지금과 같이 공격을 멈춘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 었다. 검강을 맨 몸으로 마주했음에도 멀쩡한 선주혁에 대한 놀라움이 그들의 후속 공격을 멈춰 세운 것이다. "금‥‥‥ 강불괴?" 자신이 직접 찔렀으니 누구보다 명확히 사태를 파악한 장벽호가 넋이 나간 듯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금강불괴지신이다!" "마도에도 저런 고수가 있었다니?" 장벽호의 말을 들은 군중들이 크게 술렁이기 시작했다. 금강신 협이 등장해 정도 무인들을 흥분시키고 있는 작금의 상황에서 흑도 의 대마두가 그와 같은 경지를 보여 준 것이다. 연이어 등장하는 막강한 고수들을 확인하는 그들로서는 입을 다 물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정말이지 살려 둘 수 없는 놈이구나." 고척이 이를 갈아 붙였다. 이놈은 비단 패종회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런 녀석이 존재하는 것 자체 가 패종회의 위업 달성에 장애가 될 것이 분명했다. 고척의 말에 나머지 셋도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내기를 극한까 지 끌어올렸다. 네 명의 백존이 소름끼칠 정도의 살기를 뿜어내자 선주혁이 기 침을 하며 피를 뿜어됐다. 억지로 가라앉히던 내기가 네 명의 백존 이 쏘아 보낸 살기에 반응했던 것이다. 절호의 기회를 맞이했다고 생각한 죽영표가 제일 먼저 움직였 다. 그가 자랑하는 무공이 칠십이로 무영회선법(無影回麗法)과 암류 수상표(暗流氷上票)였다. 이 중 암류수상표는 서장 최고를 자랑하는 경공술로서 궁신탄영(弓身彈影)을 전개했을 때와 같은 속도로 이동 이 가능하다고 알려질 정도였다. 따라서 경신공부에 자신이 있는 죽영표가 제일 먼저 선주혁이 내보인 틈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었다. 그것이 죽영표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그의 섭선이 선주혁의 어깨를 찌르는 순간 눈앞이 번쩍 하는 것 을 느꼈다. 동시에 죽영표의 미간에는 작은 구멍이 생겼다. 선주혁이 위기의 순간에 신투의 비처에서 발견한 폭렬지환을 사 용한 것이다. 죽영표가 쓰러지고 선주혁은 섭선에 강타당한 충격을 이기지 못 해 뒤쪽으로 밀리며 비틀거렸다. 내상이 깊어진 그의 안색은 창백하다 못해 파리해졌다. 이제는 서 있는 것조차 위태로워 보일 지경이었다. "비열한 놈이 내상을 가장하였구나!" 선주혁이 지독히도 위력적인 지공을 익혔다고 생각한 고척이 노 기에 찬 호통을 내질렀다. 방심하고 달려들었던 죽영표가 죽음을 당했으니 이로써 벌써 네 명의 백존을 잃게 된 것이다. 그 와중에도 선주혁은 힘겹게 팔을 뻗어 손가락을 내밀었다. 다시금 발출되는 폭렬지환. 하나 과거 무진 진인이 그랬던 것처럼 대비를 하고 있는 절대의 고수라면 폭렬지환이라 해도 단번에 죽음으로 몰고 갈 수는 없었 다. 쿠아아아앙. 지진후는 대도를 휘둘러 날아오는 폭렬지환을 쳐냈다. 그러고는 식은땀을 흘렸다. 손에서 전해져 오는 충격 때문이 었다. 팔이 저려올 정도의 강력한 힘이었다. '저자‥‥‥ 정말로 내상을 가장한 것은 아닐까?' 폭렬지환의 정체를 모르는 지진후였기에 엄청난 위력의 지공을 보자 선주혁이 내상을 입은 척하여 방심을 유도하는 것이라는 의구 심이 드는 것이다. 동료들에게 그에 대한 경고를 하기도 전 다시금 백발귀마의 손 끝에서 다시금 한줄기 빛이 쏘아진다. 장벽호의 협봉검이 세로로 서고, 백발귀마의 지공이 그 중심을 맞힌다. 콰아아앙. 놀라운 폭발음과 함께 장벽호의 신형이 뒤로 밀리고, 그의 안색 이 창백해진다. 지진후에 비해 내력이 부족한 장벽호가 가벼운 내 상을 입은 것이다. "어, 어떻게 저럴 수가‥‥‥?" 백발귀마는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였다. 끊임없는 떨림을 만들 어 내는 그의 다리가 그것을 입증했다. 서 있는 것조차 힘이 든다는 뜻이었다. 계속해서 입을 타고 흐르는 피 역시 진짜였다. 아무리 연기를 하는 중이라도 저 정도의 피를 게워 내고도 멀쩡 할 수는 없었다. 한데 연이어 보여 주는 세 번의 지공은 대체 뭐란 말인가? 들고 있는 손은 힘겹게 버틸 뿐이며, 이미 풀려 버린 두 눈은 초 점조차 불분명했다. 한데 단박에 백존에게 내상을 입힐 정도의 지법을 전개하니 세 명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가볍게 툭 건드려도 쓰러질 것만 같은 백발귀마였음에도 이제는 선뜻 나서기도 힘들어졌다. 괜스레 달려들었다가 전광석화를 무색 케 하는 그의 지공에 적중당한다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잠시의 대치 상황이 이어지는 사이. 익양의 중심부에서는 이들의 격전에 대한 중계가 계속되고 있었 다. 저들이 비겁하게 협공을 펼치고 있다는 말을 들었기에 그들의 안색은 어두웠다. 하나의 영웅이 탄생과 동시에 사라져야 하기에 안타깝기만 했 다. 그런 와중에 또다시 새로운 소식이 전해진다. 백발마신이 적이 검에 적중당했음에도 쓰러지지 않았다고 했다. 그가 금강불괴지신을 연성했다는 것이다.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백발마신이 저들 모두를 상대로 이 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비록 먼지 한 톨보다 적은 가능성에 불과했지만 그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기적을 염원했다. 그저 흑도의 영웅이 저들의 손에서 살아남을 수 있기만을 바랬 다. 또 한 명이 격전장으로부터 달려왔다. 백발마신이 네 고수의 협공에 밀려 결국은 중상을 입었다는 것 이였다. 이번에는 아무리 금강불괴지신이라 해도 어쩔 수 없을 것 이라 전해 왔다. 벌써부터 눈물을 줄줄 흘리는 자들이 속출했다. 또 한 명이 달려온다. 이번에야말로 선주혁의 죽음에 관한 소식인가 싶었더니 그가 외 쳤다. "백발마신께서 불굴의 투혼을 발휘하시어 또 한 명을 처치하셨 습니다만‥‥‥ 지금은 서 계시기도 힘들어 보입니다." 군중들은 이제 목을 놓아 울기 시작쳤다. 그 와중에도 또 한 명을 죽였단다. 포기하고도 남을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중이란 다. 한데 자신들은 여기서 소식만을 전해 들어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것이 억울하고 슬프기에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패종회가 파놓은 함정으로 향하며 선주혁은 자신들에게 당부했 다. 무슨 일이 있어도, 설령 자신이 죽는다 해도, 절대 움직이지 말 아달라던 선주혁의 그 당부가 아니었다면 애진즉 격전지를 향해 달 려갔을 것이다. 그곳이 설령 자신의 무덤이라 해도 망설이지 않았 을 것이다. 하지만 감히 백발마신의 유언과도 같은 당부를 어길 수 없었다. 그렇기에 이곳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 다였다. "울고만 있을 게 아니라 선 대협을 응원합시다. 이미 그분께서는 몇 번에 걸쳐 기적을 행하셨소! 정해진 결과라 낙심하지 말고 한 마 음으로 선 대협을 성원합시다." "옳소! 우리가 할 수 있는 바가 고작 그것뿐이라지만 넋 놓고 있 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소?" 흐느낌 속에서 선주혁을 응원하자는 발언이 계속되었다. "선 대협, 포기하지 마십시오!" "선 대협, 힘을 내십시오!" "저희의 마음을 받아 조금 더 기운을 내 주세요!" 마치 자신들의 음성이 선주혁에게 들리길 바라는 것처럼 그들은 목을 놓아 외쳤다. 그렇게 익양의 경계에서 흑도 무인들이 한 마음으로 외치는 그 때의 격전기에서는 본격적인 재격돌의 서막이 오르고 있었다. 서로 눈짓을 교환하던 세 명의 백존이 동시에 선주혁을 향해 달 려들었다. 지독한 협공에 이미 비웃음을 머금은 군중들에게 생명이 경각에 달한 부상자에게 겁을 집어 먹은모습을보여 줄수는 없는 일이었 다. 이번에는 선주혁이 감히 손을 내밀어 지공을 뻗어 낼 생각조차 못했다. 그는 조금 전 힘없이 늘어뜨린 손을 들어 올리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고척, 지진후, 장벽호의 공격이 선주혁의 몸에 그대로 적 중했다. 쿠아아아아아앙. 고막을 상하게 할 정도의 폭음과 함께 선주혁을 비롯한 네 명의 신형이 각각의 방향으로 튕겨졌다. 놀랍게도 세 백존의 공격이 선주혁의 몸에 공격이 닿자 가공할 폭발이 일어난 것이다. 이는 선주혁이 마지막 진기를 쥐어짜 자신의 전신에 폭렬지환의 기운을 담았기 때문이다. 작은 먼지가 만들어 내는 가공할 폭발력. 그것을 선주혁의 전신에 감쌌다. 동귀어진을 노린 것이다. 하지만 동귀어진의 결과를 만들어 낼 정도의 내력이 선주혁에게 는 남아 있지 않았다. 뒤쪽으로 튕겨나간 세 명의 백존은 확실히 낭패한 모습이었다. 입가에 두꺼운 혈선이 그려졌으니 내상도 입었을 것이다. 하나 그들의 목숨을 빼앗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반면 이미 땅바박에 길게 누워 있는 선주혁은 시체나 다름없는 형상이었다. 가슴의 미미한 기복이 있는 것으로 보아 숨이 끊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세 고수의 협공을 몸으로 받아냈으니 겉보기와 달리 속 은 엉망일게 분명했다. 이제는 세 명 증 누군가 다가가 그의 사혈(四六)을 가볍게 짚는 것만으로도 생명은 끝이 날 터였다. "대단하다. 저 지경이 되어서도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니‥‥‥!" "후우‥‥‥! 흑도에 정말이지 걸출한 인물이 나왔구나!" 정도의 무인들조차 선주혁의 무혼(武魂)에 감탄하는 모습이었다. 그들 중 몇몇은 아예 후학에게 저와 같은 자세를 배우라 교훈을 내 리기도 했다. "선악을 떠나 이 일은 무림사에 영원히 남을 일전으로 기록되겠 구나‥‥‥!" 매화검선마저 한탄을 하듯 중얼거렸다. 군중들의 동요 속에서 고척이 한 사발은 족히 됨직한 피를 토해 낸 후 걸음을 옮겼다. 다 죽어 가던 놈에게 이와 같은 내상을 입었다는 사실이 동료들 의 죽음보다 더한 분노를 일으키게 했다. 그의 일 보, 일 보에 담겨진 살기는 먼 거리에서 바라보는 군중 들의 등에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그렇게 백발귀마 선주혁의 일생이 마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순간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오직 몽세화만이 눈물 속에서 안 된다는 울부짖음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슬프고, 처량하기 그지없어 괜스레 눈시 울이 붉히는 무인들도 있었다. 이윽고 넝마와 같은 꼴인 선주혁의 옆에 선 고척. 횃불과 같은 살기가 그의 눈에 일렁이고, 내력이 잔뜩 모인 그의 손이 하늘을 향해 치켜 올라갔다. 이대로 그의 손이 휘둘러진다면 선주혁의 시신은 형상조차 남기 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고척의 손이 낙하되기 시작했다. 그의 장심에서 막대한 장력이 쏟아지려는 그 순간이었다. (종횡무진 8권에서 계속)..feelj2 종횡무진(縱橫無盡) - 8권 - Chap. 1 추모의 여정. < 1 > 모두가 숨을 죽인 그 순간. 눈부신 휘광(輝光)의 질주가 대기를 갈랐다. 쾌속함 속에 담겨진 엄청난 경력. 광채를 머금은 검의 비상. 분명 이기어검의 발출이건만 그 패도적인 기운만은 산을 허물 듯했다. 거침없는 이기어검의 질주는 고척을 향하고 있었다. 들어 올렸던 손에서 뿜어지는 장력이 선주혁을 향한다면 자신은 막강한 경력에 휘말려 전신이 분해 될 상황. 고척은 일단 장력의 방향을 틀어야만 했다. 가공할 기세의 이기 어검을 막아내야만 했던 것이다. 쿠아아앙! 맹렬한 정도의 폭음. 고척의 신형이 튕기듯 열 걸음이나 밀렸다. 숨이 막히고 기혈이 들끓었다. 깊어진 내상에서 비롯된 통증이 전신의 신경을 강하게 자극했 다. 그것은 마치 온몸이 수십 조각으로 찢어지는 듯한 느낌. 고척은 그 와중에도 빠르게 상황을 판단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 무리 인간 같지 않은 무공을 지닌 선주혁과의 일전에서 내상을 입 었다지만, 자신을 이렇게 일방적으로 몰아세울 고수를 접하기란 쉬 운 일이 아니었다. 아마도 어검술을 전개한 자 역시 급작스러운 출수였을 것이 분 명했다. 여력을 담고 있는 검세(劍勢)만으로도 그와 같은 사실은 충 분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만약 제대로 내력을 끌어올린 후, 어검술을 전개했다면......? 자신은 이미 죽은 목숨이리라는 것을 고척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식도를 거슬러 올라오는 진득한 피를 간신히 집어 삼켰다. 이어 흔들리는 다리에 억지로 힘을 불어 넣으며 이기어검은 전 개한 자를 확인했다. 검결을 맺어 검을 조종하고 있는 자. 그는 놀랍게도 새파란 애송이에 불과했다. 아직 서른도 안 되어 보이는 청년. 눈이 번쩍 뜨일 준미한 용모인 그가 자신에게 어검술을 전개한 것이다. '이것이 회주님께서 말씀하신 무림의 저력이라는 건가? 저 나이 에 어검술을 전개하다니......?' 고척이 경악을 하는 사이, 누군가가 관옥과 같은 용모의 청년과 동 행한 노인을 보고는 소리를 질렀다. 아직까지 들끓는 진기를 가라앉히지 못한 고척이 자신을 공격한 청년의 신분을 묻기도 전이었다. "여, 염마다!" "마교의 장로가 나타났다!" "저가는 옥용검마가 아닌가?" 고척의 눈살이 크게 찌푸려지는 것은 내상으로 인한 통증 때문 만은 아니었다. 어검술을 전개하는 옥용검마. 그리고 구주팔황(九州八荒)에 명성을 드날리는 염마. 두 사람의 출현이 고척에게는 달가울 리 없었던 것이다. 그들의 출연에 동요하는 것은 고척뿐만이 아니었다. 이미 결정 된 백발마신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던 수많은 정도의 무인들 역시 둘의 출현에 놀라는 중이었다. 특히 염마의 출현은 정도 무인들을 공포라는 감정에 휘말려들게 하는 데 큰 역활을 했다. 염마 종극. 정도 무인들에게 있어서는 인간의 죽음을 관장한다는 사신(死 神), 그 자체랄 수 있었다. 옥용검마가 이기어검술을 전개했다는 사실마저도 염마의 엄청 난 존재감으로 인해 부각되지 못하고 있었다. 구대마존이 나타났다 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수많은 정도 무인들은 저마다의 병장기를 움 켜쥐고, 몸을 뒤로 물리기에 바빴던 것이다. 그것이 구대마신을 대표하는 염마의 이름이 가지는 무게였다. 종극이 가담한 것으로 알려진 진곤혈사가 바로 얼마 전의 일이 다. 백발귀마와 함께 정도에 속한는 명숙 수십을 죽인 것으로 알려 져 있었다. 그러니 오늘 이 자리에서 무슨 참가가 벌어질지 모른다 고 생각하는 것이다. "죽인다! 반드시 죽여 버리고 말겠다!" 시체와 다름없는 사제를 확인한 남지학이 이를 갈아붙였다. 두 눈에 거미줄처럼 혈관이 드러났다. 팔에서 불거진 푸른 힘둘은 검 결을 취한 손까지 이어져 꿈틀대고 있었다. 진득한 살기가 그의 전 신에서 실타래처럼 풀려 나왔다. 평소의 너그럽고 인자한 그의 모습을 알고 있다면 상상하기 힘 단, 노골적인 살기가 패종회의 무리를 향해 쏘아지고 있었다. 특히 선주혁에게 장력을 쏟아 부으려던 자를 향한 살기는 종극 마저도 놀랄 정도였다. 남지학의 검결이 그자를 향해 뻗어지려는 순간이었다. 종극이 남지학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남지학이 종극의 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것은 마치 방해 하면 당신이라도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침묵의 웅변인 듯했다. 하지만 염마 종극이 그 정도의 위협에 흔들릴 리는 없었다. "자네 사제의 죽음을 모욕할 셈인가?" 긴 이야기는 필요 없었다. 지금은 분노로 이성을 상실했을 뿐, 남지학은 본시 총명한 자, 종극은 남지학이 자신의 말을 충분히 이 해하리라 여겼다. 과연 남지학은 소름이 끼칠 정도의 강렬한 눈빛을 거둬들였다. 사제가 단신으로 이곳을 향한 이유에 대해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패 종회, 무림맹이 내세운 조건을 지켜 옥소선자를 구하기 위함이었다. 한데 사제의 죽음이 결정된 지금, 자신이 복수를 단행한다면 사 제가 이곳에 홀로 온 의미에 먹칠을 하는 셈이 된다. 종극이 만류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이다. 남지학의 핏발선 눈에 뿌연 습막이 맺혔다. 깨문 아랫입술에서 는 피가 배어 나오고, 이기어검은 맥없이 빛을 잃고 그의 손에 회수 되었다. 이어 검이 땅에 꽂힌다. 남지학이 노기를 억누르지 못하고 던지듯 영의검을 지면에 내리 꽂은 것이다. 분신과도 같은 애검을 이토록 함부로 대하는 것만 봐 도 그가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사제!" 남지학은 나직하게 선주혁을 부르며 그의 곁으로 향했다. 그는 깨지기 쉬운 자기를 다루듯 조심스럽게 선주혁을 안아들었다. 창백한 안색. 흐릿한 눈동자. 한눈에도 회생의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안색만 보아도 전신의 혈맥이 걸레처럼 찢기고, 내장도 조각이 났음을 익히 짐작할 수 있 었다. 죽음의 강에 이미 발을 담근 사제의 모습을 보며, 남지학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선주혁의 입이 달싹거린다. 그의 작은 움직임 속에서 남지학은 사 제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자신을 부르는 거다. 사제의 눈이 말한다. 사형을 볼 수 있어서 좋다고...... 이제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 다고, 분명히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곳은 본회와 무림맹이 악적 백발귀마를 처단하는 자리외다." 이제야 들끓던 내기를 진정시킨 고척이 종극을 향해 말했다. 이 는 염마가 이 일에 끼어들면 그 여파가 적지 않을 것을 경고하고자 함이었다. 고척이 패종회와 무림맹의 이름을 빌려 염마의 간섭을 방비하고 자 하는 데는 복잡한 계산이 깔려 있었다. 염마 종극은 지금처럼 부 상을 입기 전이라 해도 상대하기 까다로운 인물이다. 패종회에서 파악한 바에 의하면 현 무림에서 백존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몇 안 되는 절대 고수였던 것이다. 또한 그간 백발귀마에 관한 풍문을 염두에 둬야만 했다. 소문에 의하면 백발귀마는 세명의 구대마존과 동행중이라 했다. 다시 말해 종극 이외에도 두 명의 구대마존이 근방에 있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마교의 세 장로가 이 자리에 있다는 가정을 염두에 둬야만 했다. 자신과 나머지 백존들이 모두 부상을 입고 있는 이상, 십여 명의 백 웅이 있다 해도 오늘의 승부를 장담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생사를 건 일던을 벌여 봐야 득실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체면만 중시여기는 정도 무림의 떨거지들은 계산에 포함시키지 도 않는 고척이었다. 오늘의 행사를 인질극으로 규정짓고 있는 저 들은 격전이 벌어진다면 저마다 이 자리를 벗어나기 바쁠 것이기에. 따라서 종극의 행동으로 인해 마교, 그리고 패종회와 무림맹 연 합이 척을 질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한 것이다. 종극은 그런 고척의 말에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그는 허 리를 꼿꼿히 세우고 마치 명령을 하듯 고척에게 말했다. "저 아이를 풀어줘라!" 종극의 시선이 머무는 곳. 거기에는 눈물을 흘리며 선주혁만을 바라보고 있는 옥소선자가 있었다. 이에 고척이 미간을 찌푸렸다. 머릿속으로 상황을 정리하는 것 이다. 오늘의 사단은 백발귀마의 목숨을 취하는 것에 목적이 있었다. 아직 그의 숨이 붙어 있다지만, 이미 죽은 것과 다름없는 상태였다. 끔찍할 정도로 고강한 내력을 지녔으니 꽤나 오래 버틸 뿐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한 시진을 넘기진 못할 것이다. 아무리 금강불 괴지신이라 해도 저렇게까지 망가져 버린 신체로 생명을 부지할 방 도는 없었다. 결국 백발귀마의 목숨은 이미 취한 바와 마찬가지의 상황이다. 앞서 백발귀마의 목숨을 원할 뿐, 옥소선자를 위협하지 않겠다고 공언을 했다. 본연의 목적을 달성한 이상 그녀를 풀어주는 것이 옳 았다. 옥용검가가 마음에 걸렸다. 백발귀마가 지금 죽어버린다면 이성 을 잃은 그가 일전을 불사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방금 전 자유자재로 이기어검술을 전개하는 확인했다. 그의 무 공 역시 백존의 아래가 아님을 고척이 누구보다 잘 았았다. 직접 몸 으로 그의 실력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척은 세 명일 수도 있는 구대마존과 더불어 옥용검마 도 염두에 둬야만 했다. 결국 고척은 옥소선자를 무사히 풀어준 후, 저들이 백발귀마의 복수를 하겠다고 나서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특히 그로서는 자신의 안위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염 마와 옥용검마가 확인한 장면은 자신이 백발귀마의 목숨을 취하려 는 순간이었다. 따라서 복수를 위한 일전이 벌어진다면 저들이 제 일 먼저 노릴 것은 자신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행여 정도 무림의 떨거지들이 전부 가세를 한다 해도 자신의 목숨은 위태롭다고 봐야만 했다. 승패의 여부를 떠나 고척 자신만큼은 죽음에 이를 것이 분명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옥소선자에 대한 미련이 생기는 것이다. 어쩌면 그녀만이 유일한 구명줄이 되어 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백발귀마가 단신으로 이 자리에 나타나 스스로 죽음의 길을 선 택한 이유를 저들도 알고 있을 터. 옥소선자를 위험에 처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만약 옥소선자가 죽거나 다친다면 백발귀마의 죽음을 헛되이 만드 는 셈이기 때문이다. 고척의 눈이 재빨리 굴러가는 모습에 염마가 다시 명령하듯 말 했다. "오늘 고이 보내주는 것만으로 감사히 여겨라." 아무리 생각해도 염마, 옥용검마와 무력을 겨루는 것은 길보다 흉이 많을 상황. 고척은 종극이 저렇듯 말한 이상, 자신이 무사히 패종회로 돌아 가는 데는 문제가 없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일단 안전을 확보한 셈이니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염가가 두려워 그가 시키는 대로 하 는 것처럼 보여선 안 될 것을 염두에 둔 말이었다. "그 말인즉슨, 오늘이 아니면 패종회를 적으로 돌리기라도 하겠 다는 듯한 말씀이시구려. 그것이 귀교의 뜻이외까?" 말 한마디로 인해서도 패종회와 일월신교가 적대관계로 규정될 수도 있다는 뜻. 함부로 자신과 수하들을 핍박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그다지 유리할 것도 없는 상황에서 위축되지 않는 모습을 보였 으니 패종회의 위상에 누가 될 것이 없으리라 생각한 고척이다. 그 의 입가에 스스로에 대해 만족한 미소가 맺히려는 순간이었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네놈들 따위를 적으로 돌리는 것에 대 해 본교가 두려워하리라 생각하는가?" "......!" "착각이 지나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그러니 어서 저 아이 나 풀어주고 꺼지도록 해라. 그게 너희가 살아서 돌아갈 유일한 방 법이니까!" 거침없는 염마의 발언. 고척은 역시 어디선가 구대마존 중 둘이 더 있을 것을 확신했다. 그렇지 않다면 저와 같은 자신감의 근거는 없기 때문이다. "말씀이 지나치시오!" 고척은 내심 내린 결론을 얼굴에 드러낸 노기로 감췄다. 연이어 그가 호통을 질렀다. "패종회와 무림맹이 연수를 통해 백발귀마와 사파연합을 상대하 고 있다고 하여, 귀교의 도발을 두려워한다고 생각하시오?" 고척으로서는 있는 그래로 발언한 셈이었다. 일을 조금 수월하 게 풀어갈 뿐, 패종회가 마교 따위를 두려워할 이유는 없었다. 천하 를 적으로 돌린다 해도 패종회가 무림을 석권하는 것은 기정사실과 다름없다는 확신이 있는 그였다. "흥! 도발은 패종회 쪽에서 해온 것! 저 젋은 청년은 일월신교의 귀빈이며 본교에 큰 은혜를 베풀었다.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으니 그 죗값을 치르게 될 것이다. 긴 말은 필요 없다, 향후 본교와 패종 회는 한 하늘을 지고 살 수 없다는 사실만 가서 전하라!" "......!" 어차피 마교는 패종회와 양립할 수 없는 세력이다. 시기만 앞당 겨졌을 뿐, 달라진 것도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다른 정도의 무림인들은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설 마하니 마교가 백발귀마 한 명의 복수를 위해 무림맹, 패종회 연합 을 적으로 돌리 것을 선언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지금의 발언......! 반드시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소." 고척이 이를 갈아붙이며 종극에게 말했다. 그리고는 수하에게 눈짓을 했다. 옥소선자를 풀어주는 것이다. 일단 안전이 확보된 상황이니 더 이상 위험을 자처할 필요는 없 었다. 염마가 변덕을 부리기 전에 신속히 물러나는 것이 좋다는 결 론을 내린 것이다. 몽세화는 방울방울 눈물을 흩날리며 선주혁을 향해 달려갔다. "오늘 패종회와 무림맹이 나선 것은 백발귀마를 없애 강호의 우 환을 없애고자 함이었소. 뜻한 바를 이루었으니 이렇게 돌아가도록 하겠으나, 종 장로께서는 오늘의 발언에 반드시 책임을 지셔야 할 것이외다." 무림맹, 패종회 측의 한마디는 무림맹의 집법당주인 포저의 입 에서 나왔다 하지만 물러나면서 외치는 말에 그다지 큰 무게가 실릴 리 없었 고, 포저는 종극의 싸늘하고 냉담한 반응에 얼굴을 붉히며 몸을 돌 려야만 했다. 걸음을 옮기는 패종회 무리의 귀에 날카로운 음성이 파고들었다. "패종회는 똑똑히 기억하시오! 나 남지학은 패종회의 씨가 마르 는 순간을 확인하고 말 것이로, 반드시!" 원한에 가득한 남지학의 음성을 들은 고척은 두 눈을 가늘게 떳 다. 회에 돌아가는 즉시 앞으로의 모든 생사에 앞서 옥용검마를 처 치해야할 것을 주장하고 하는 각오였다. 분명히 옥용검마는 백발 귀마에 못지않은 위협이 될 것이 분명했다. "더 이상 이 자리에 볼 일이 남아 있는 자가 있는가?" 패종회가 순순히 물러나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던 정도의 무 인들은 염마의 호통에 서로의 눈치를 보기에 바빠졌다. 진곤혈사로 인해 당장이라도 복수의 칼을 뽑아들어야 할 처지의 인물도 많았으나, 선뜻 복수를 실행에 옮기기가 쉽지 않았다. 패종 회마저 저렇게 물러난 이상, 자신들만으로 두 거마를 상대할 수 있 을까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는 것이다. 혼란스러운 그들 사이에서 창노한 음성이 들려왔다. "비록 정도와 양립할 수 없다지만, 저 청년의 기개와 투지는 이 자리에 모인 모두를 감동시켰소이다. 누가 뭐래건 저 젊은이의 무 공은 존경을 받아 마땅하며, 오늘의 기상은 찬사를 받기에 충분한 것. 이에 화산파는 무림의 큰 별이 졌음에 애도를 표하는 마음으로 물러갈까 하외다." 매화검선이 정도 무림의 명숙답게 당당한 모습으로 종극에게 순 순히 물러날 의사를 비쳣다. 종극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일에 앞서 명분을 세우는 정도 무인들을 평소 좋아하지 않던 그였다. 매화검선의 발언 역시 평소의 그라면 등을 보이기 위한 핑계에 불과하다 여겼을 것이다. 허나 지금만큼은 말 그대로를 받아 들었다. 선주혁에게 애도를 표한다기에 그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화산파의 문인들이 자리를 떠나기 시작하자, 저마다 나름대로의 애도를 표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매화검선이 부끄럽지 않게 몸을 뺄 명분을 세워준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일대는 순식간에 정적 속 에 잠겼다. 오직 몽세화의 흐느낌만이 간간히 들릴 뿐이었다. 종극은 서서히 걸음을 옮겨 선주혁에게 향했다. 눈이 시릴 정도의 하얀 백발 아래로 드러난 선주혁의 안색은 창 백하기만 했다. 최근 피부색이 변했다고는 해도 눈에 익었던 것이 가무잡잡했던 그의 얼굴인지라 창백한 지금의 모습이 더욱 눈에 밟 혔다. 종극은 나직히 한숨을 쉬었다. 한눈에도 선주혁의 상세는 엄중했다. 굳이 맥을 짚어볼 필요도 없었다. 회생(回生)의 가능성이 전무(全無)함을 선주혁의 모든 상세 가 입증하고 있었으므로. 모질게 호흡을 잇는 것 상식을 넘어선 내력 때문이었다. 지금은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고통뿐일 터. 차라리 한시라도 빨리 죽음을 받아들이는 게 좋을 상황이었다. 종극이 한숨을 쉬는 것은 이 때문이었다. 사혈을 짚어 고통 없이 보내자는 말을 해야 하건만, 남지학이 온 몸으로 거부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을 안듯 가늘게 몸을 떨며 사제를 안고 있는 남지학이었다. 지금의 그에게서는 누구도 사제를 떠어놓을 수 없을 듯했다. 시간은 그렇게 하염없이 흘러갔다. 동정호가 붉게 물들 무렵이 되었다. 선주혁은 진실로 모질게 목 숨을 이어가고 있었다. 결국 종극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제...... 보내주는 게 좋을 것 같네." 이제 준비가 되었는지 남지학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고개를 끄 덕였다. 그리고는 손을 들었다. 남지학은 조용히 손가락에 내력을 집중했다. 그의 검지가 선주 혁의 사혈에 닿았다. 남지학은 사제를 안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옥소선가가 흐느껴 울고, 남지학의 소리 없는 오열이 동정호변 을 적셨다. < 2 > 하늘과 강이 동색(同色)이 되는 무렵. 오랫동안 지녀왔을 한 자루 청강 장검을 든 청년 한 명이 호변(湖 邊)을 따라 걸었다. 여정 길었던 탓인지 남루해 보이는 행색이다. 슬픔인지, 갈등인지 모를 표정탓에 초라함이 더욱 부각되었다. "후우......" 청년의 한숨 소리는 깊었다. '사형은 화가 좀 풀렸을까?' 청년은 자신이 이곳에 오는 것을 한사코 만류했던 정영기에 대 해 염려하는 중이었다. 그가 이곳르로 향하겠다는 뜻을 밝힌 후, 한 차례 언쟁을 벌였기 때문이다. 난세 중의 난세라 말할 수 있는 작금의 무림이었다. 정영기는 언 제 어디서 화를 당할지 모를 상황 중에 고작 무덤을 찾아 추모의 뜻 을 표하겠다고 원로(遠路)에 오르는 것을 찬성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명주운은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사형은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발대발하는 사형 을 뒤로 하고 길을 나섰다. 명주운은 지난날 달주에서의 일을 명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명유신군 옥좌거를 받아들인 무림맹의 일처리에 대해 명주 운은 강력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명유신군의 과거 행적은 마두 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데 무림맹이 쌍수를 벌리고 그를 맞이했다. 사형의 설명대로 라면 그가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무림맹이 힘을 가지고 있어 야만 사마외도가 숨을 죽일 수 있으니 옥좌거의 과거는 큰 문제가 될 수 없다고 했다. 명유신군은 그렇게 대단한 인물이었다. 명주운의 사부이자 평창검문주인 소부숙도, 달주 제일의 문파라 는 백의검문주 곽준오도, 명유신군의 눈밖에 벗어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할 정도였다. 적어도 명주운의 눈에는 당시 달주의 모든 인물들은 명유신군에게 고개를 숙이기에 바빴다. 한데 자신의 또래에 불과한 한 젊은이가 그 대단한 명유신군에 게 당당히 맞섰다. 아니, 그저 고개를 세워 똑바로 서 있던 것뿐이 아니었다. 처절할 정도의 혈투를 벌였다. 죽음이 결정된 것 같은 상황속에서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불굴 의 의지를 보이며 맞선 끝에 극적인 연전을 만들어 냈었다. 당시 명주운은 온몸을 떨어야만 했다. 무림맹조차 팔을 벌려야 하는 압도적인 무공의 고수를 보고도 그 젊은이는 도주하지 않았다. 당장 죽어도 마땅할 만큼의 공세를 온몸으로 받고도 쓰러지지 않았다. 명유신군조차 당황하게 만들 기백을 보여줬다. 수많은 무림인들을 압도하던 일기당천(一驥當千)의 기개를 펼쳤 다. 그것은 평소 명주운이 동경해 오던 영웅의 모습 자체였다. 뛰어난 무공, 불굴의 의지, 당당한 기백......, 그와 같은 모습은 평소 명주운이 그려 온 영웅상과 그대로 일치했던 것이다. 하지만 백발의 그 청년은 무림 공적이었다. 묵연수투를 훔치고, 백가장의 식솔을 독살했으며, 추후에도 수많은 정도 무인들을 죽 음에 이르게 했다. 그렇기에 명주운은 스스로의 감정을 부정해야만 했다. 절대로 백발의 청년을 동경해서도, 존경심을 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차칫 자신마저도 무림 공적으로 몰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후 진곤혈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서야 명주운은 가까스로 마 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진곤혈사는 염마와 백박귀마의 일방적인 학살이라고 들었다. 그 것은 명주운이 감동을 받았던 치열한 생존의 투쟁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었다. 이에 명주운은 백발귀마를 단지 피에 굶주린 악귀 정도로 치부 할 수 있었다. 단지 백발귀마를 마두로 여길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명 주운은 마음의 안식을 얻었다. 이제는 더 이상 백발귀마를 존경함 으로써 남모르게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한데 최근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다. 백발귀마를 상대로 벌인 무림맹과 패종회의 인질극이 바로 그것 이었다. 무림공적을 처단하기 위함이라지만, 무림맹과 패종회는 무 인으로서 지탄을 받을 만한 비겁한 행동을 서슴없이 자행했다. 명주운은 이 사건에 대해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때나마 흠 모의 감정을 품었던 백발귀마였다. 그가 과연 인질을 구하기 위해 단신으로 나타날 것인지가 명주운에게 있어서는 초유의 관심사일 수밖에 없었다. 만약 백발귀마가 인질을 외면한다면 명주운은 한결 가벼운 마음 으로 그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백발귀마는 기어코 익양에 모습을 드러냈다. 패종회, 무림맹이 요구하는 대로 단신으로 말이다. 그리고 전 무림을 놀라게 했다. 그를 칭하는 별로 자체가 바뀔 정도였다. 백발마신. 무림인들은 그렇게 칭했다. 무림사를 통틀어 그 나이에 그 정도의 경기에 오늘 사람은 아무 도 없었을 것이라 말했다. 당일 동전호에서 죽음을 당하지 않았다면 훗날 천하제일의 고수 가 되었을 것이라 서슴없이 말했다. 혹자는 이미 백발마신은 천하 최강의 무공을 지녔었다고 말하기 도 했다. 정의련의 절대고수인 금강신협만이 백발마신과 비견될 고 수로 꼽힐 뿐이라 했다. 금강신협을 자랑으로 여기는 정도의 무인들조차 이와 같은 추측 에 이견을 달지 않았다. 아니, 금강신협을 금강무신으로 칭하며 백 발마신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는 것에 자랑스러워 할 정도였 다. 패종회, 무림맹을 제외한 무림인들 모두가 백발마신을 향해 엄 지를 치켜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죽음에 애도를 표했다. 무공을 익힌 자라면 정사(正邪), 흑백(黑白)의 구분 없이 모두가 백발마신에 대해 흠모와 존경심을 드러내는 것에 주저함이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그로 인해 직접적인 인명의 손실을 입은 문파조차도 백 발마신만큼은 인정했다. 모순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무인은 고수의 손에 죽음을 당하면 영광으로 생각한다. 절대의 고수와 맞서 당당 히 싸웠다면 명예로운 죽음이 되는 것이다. 이에 진곤혈사에서 목 숨을 잃은 자들의 위상자체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고, 희생이 많았 던 문파에서도 백발마신을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당시 동정호변에 있었던 매화검선조차 염마와 옥용검마에게 백 발마신을 추모할 시간을 주기 위해 자리를 피해 주었다 할 정도니 더 이상의 부연은 필요 없었다. 이와 같은 백발마신에 대한 소문은 거대한 해일(海溢)이 되어 중 원 전역을 덮었다. 그의 활약으로 인해 가슴 천테를 자부심으로 채 운 흑도 무인들이 입을 하나로 모아 떠들고 다녔으니 소문의 속도 는 경이적일 정도였다. 백발마신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들은 명주운은 온몸에 소름이 돋 는 것을 느꼈다. 비록 동정호변에 있지는 않았지만 당시의 상황이 선명이 그려졌던 것이다. 패종회의 고수들은 단신으로 상대하는 백발마신의 모습. 결정된 죽음 속에서도 최선을 다해 투지를 불태우는 그의 모습 은 명주운에게 낯설지 않았다. 쓰러지고, 일어서고, 또 쓰러지면, 다시 일어서는...... 깊은 내상을 입고,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두 눈을 빛내며 상대를 내려다보던 백발마신이었다. 명주운은 그 어떤 상황이라 해도 스스로를 굽히는 법이 없는 백 발마신의 모습을 이미 두 눈으로 똑똑히 봤기 떄문이다. 드높은 기 개와 위압, 그 자페로 존재하는 백발마신의 한마디를 잊을 수가 없 었다. '이제...... 죽어라!'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명유신군은 거짓말처럼 죽음을 맞이했다. 이어 백발마신은 말했다. 쫒아오면 죽는다고...... 당시 달주에서 감히 백발마신의 뒤를 쫓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 모두 알고 있었던 것이다. 쫓아가면 백발마신의 손에 죽게 되리라는 것을...... 그와 같은 압도적인 모습이 이곳 동정호에서 재현되었을 뿐이다. 무림을 뒤흔드는 백발마신에 관한 전설과 같은 소문에 명주운은 자신의 생각을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다. 백발마신은 역시나 피에 굶주린 마두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에 관한 모든 소문은 오해일 수도 있었다. 억울하게 쫓기고, 살아남기 위해 싸웠을 뿐일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히 그럴 것이다. 지난 시절 백발마신을 흠모했기에 괴로워했던 자신이 외려 부끄 러워졌다. 백발마신은 당연히 존경을 받아야 할 인물이었던 것이다. 명주운이 평창검문을 나서 이곳 동정호에 온 이유는 그 때문이 었다. 그런 인물에 대해 의심하고, 존경심을 품었던 것을 감추려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것을 만회하고 싶었다. 명주운이 바라는 바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안타깝게도 한참이나 늦었다. 백발마신은 이미 시신이 되어 동 정호변에 묻혀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명주운은 자신이 직접 그를, 아니 그의 무덤을 찾아가 애도의 뜻을 표하고 싶었다. 그의 묘에 고개를 숙이고 말하고 싶었다. 당신은 영원히 내 마음속에 우상이 되어 남아 있을 것이라 고...... 비록 당신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지만, 당신의 뒤를 쫓기 위해 최 선을 다해 살아가겠노라고! 누구에게도 머리를 숙이지 않고 당당하게...... 그렇게 살겠노라 말하고 싶었다. 어느덧 해가 저무는 시간임에도 굳이 호변을 걷는 것은 한시라 도 빨리 백발마신에게 이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이었 다. 명주운은 백발마신의 묘에 고개를 숙이는 것만이 유일한 면죄의 방도인 양 그렇게 서두르고 있었다. 오랜 여정에 지친 몸을 이끌고 천애흑묘를 향하는 것이다. 천애흑묘(天哀黑墓). 백발마신이 누워 있는 무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백발마신은 동정호변의 숲 한가운데에 매장되었다. 당시 염마는 백발마신의 묘에 햇볕이 잘 들어야 한다며 가공할 일양장력을 쏟아 붓다시피 해 숲에 거대한 공터를 만들었다. 반경 만 삼십여 장에 달하는 공터는 당시의 흔적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 었다. 나무나 풀은 검은 재가 되어 일대를 덮고 있었고, 심지어는 흙까지 불에 그슬려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백발마신이 안치된 검은 묘로 인해 하늘마저 슬퍼한다는 뜻으로 중인들은 이곳을 천애흑묘라 불렀다. 공터 한가운데는 작은 동산이 솟아올라와 있었다. 바로 천애흑묘라 불리는 백발마신의 무덤이었다. 명주운은 마침 내 그곳에 도착한 것이다. 그는 검은 공터에 들어서면서부터 경건한 마음을 유지하며 걸음 을 옮겼다. 명주운이 멈춰선 곳은 매끄러운 단면을 드러낸 거대한 바위 앞 이었다. 백발마산의 사형인 옥용검마가 비문(碑文)을 새기기 위해 바위를 잘라냈다고 한다. 선주공혁지묘(善公主奕之墓). 그 매끈한 면 위로 용사비등(龍蛇飛騰)한 필체가 새겨저 백발마 신의 묘임을 알리고 있었다. 명주운은 두 손을 마주 잡으며 고개를 숙였다. 희대의 영웅, 백발마신에 대한 추모의 시작을 알리는 동작이었 다. 하지만 백발마신에 대한 명주운의 애도는 순탄하게 진행되지 못 했다. 주변이 온통 흑색인지라 밤의 무게가 더한 이 장소에서 뭔가 꿈 틀거리는 모습이 명주운의 시야게 들어온 것이다. 애벌레같이 버둥 거리는 그것은 막 백발마신의 묘 한쪽에서 기어 나오는 중이었다. 순간, 명주운의 검미가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무덤에서 나오고 있는 검은 그림자는 분명 사람의 것. 야심한 밤, 유명한 인물의 묘에서 기어 나오는 자의 정체가 무엇 인지는 자명했다. "이노오오옴!" 명주운의 입에서 한밤의 정막을 깨는 노성이 튀어 나오고, 그의 손에는 어느새 푸른빛을 내는 청강 장검이 들려 있었다. "감히 백발마신의 묘를 도굴하려 들다니!" 노기충천한 명주운은 검을 수평으로 뉘인 채 신형을 날렸다. 검 극은 도굴꾼의 목을 노리고 날아갔다. 생명을 경시해 본 적은 없으 나, 지금의 분노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전 무인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특히 자신이 그렇게 흠모해 마지않는 백발마신을 모욕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검이 도굴꾼의 목을 파고들려는 순간이었다. Chap. 2 도 굴. < 1 > "오해요!" 분기탱천한 명주운의 귀에도 명확히 들리는 한마디였다. 삶에 대한 간절한 의지가 엿보이는 사내의 외침은 명주운의 검을 멈취 세웠다. 치미는 노기로는 당장이라도 멱을 따내야 할 일이지만, 뿌리 깊 은 정도 문하인 명주운에게 있어서는 무고한 살인은 절대금물. 뭔가 다른 사연이 있다면 검을 멈춰 세우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명주운의 시선은 여전히 의심을 가득 머금은 채였다. "무엇이 오해란 말이냐?" 여전히 검극을 상대의 턱 아래 피부에 댄 상태로 명주운이 사납 게 물었다. 쓸데없는 변명에 불과하다면 그대로 검을 목 안쪽에 밀 어 넣겠다는 의지가 명확히 보였다. "도굴을 하려던 게 아니란 말이오." 처음의 외침은 쾌속하게 날아가던 검을 멈춰 세울 정도로 삶에 대한 의지가 간절했었다. 한데 지금의 어조는 사뭇 달랐다. 당당하고 여유가 있는 것이 여 전히 검이 자신의 목을 겨누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한 듯했다. 도굴꾼이라기엔 실도 대범한 태도였다. 그제야 명주운은 무덤에서 기어 나온 사내의 얼굴을 살폈으나,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온통 흙투성인지라 제대로 된 용모를 파악 키 힘들었던 것이다. "하면, 어찌하여 이 야심한 밤에 그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소?" 명주운은 여전히 곱지 않은 감정을 드러내며 질문했다. "그건......" 아직까지 하반신을 땅에 묻고 있는 사내가 잠시 망설이는 모습 을 보였다. 조금 전에 보여준 당당함은 어디로 갔는지, 마치 변명거 리를 생각하기 위해 애쓰는 것처럼만 보였다. 명주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역시나 백발마신의 유품을 노리고 무덤을 파고든 도굴범에 불과 하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미 한 번 살심(殺心)을 억누른 터라 다 시금 눈앞의 도굴범을 죽여야겠다는 결론에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정도 특유의 자시심이 발동한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큰 죄를 지은 만큼 단단히 훈곙을 내려야겠다 는 생각이었다. 다시는 이딴 짓을 벌일 생각을 못할 만큼의 교훈을 내리겠다고 생각한 명주운이 지엄한 어조로 호통을 쳤다. "흥! 변명거리가 딱히 떠오르지 않는가 보군. 네 놈은 대체 이곳 에 어떤 분께서 안식을 취하고 계신지 알고는 있는 것이더냐? 전 무림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계신 백발마신의 묘가 바로 이곳이다. 나와 같은 사람에게 있어서 이곳은 성지(聖地)나 다름없다는 말이 다. 한더 더러운 탐심(貪心)으로 고인의 영면(永眠)을 방해하다니! 네놈이 그러고도 살기를 바란단 말이냐?" 이쯤 되면 도굴꾼은 땅에 머리를 처박을 것이다. 양손을 머리 위 로 치켜들고 두 손을 비비기에 바쁜 그런 상황을 명주운은 예상했 다. 적어도 그 정도는 되어야 다시는 도굴 같은 행동을 하지 않을 것 이라 생각했다. 반응 여하에 따라 약간의 폭력도 더할 생각이었다. 반성의 여지가 명확하지 않다면 '악'하는 소리가 날 만큼 패 줄 요 량이었던 것이다. 한데 도굴꾼의 반응은 완벽히 명주운의 예측에서 벗어났다. 그는 두 눈을 똑바로 치켜뜬 채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온 것이다. "성지? 당신은 그 백발마신을 본 적이 있소?" 난데없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명주운으로서는 대답하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이기도 했 다. 백발마신을 직접 보고, 감명을 받았다는 사실은 그에게 있어 평 생을 두고 자랑할 만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소. 백발마신께서 달주에서 명유신군과 일전을 벌이는 모 습을 직접 뵈었소. 그때의 당당함과 기백이란......" 새삼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는 듯 감개무량한 표정을 짓던 명주 운의 눈썹이 다시 하늘로 치켜 올라갔다. "큰 죄를 지었음에도 반성할 생각은 하지 않고 이리저리 말을 돌 려보겠다는 게냐?" "내 얼굴을 자세히 보시오. 당신이 보았다던 그 백발귀마, 아니 백발마신과 비교해서 어떤지 말이오." "......?" 계속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해 대는 도굴꾼인지라 명주운도 의 아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새삼 안력을 돋우어 도굴꾼 의 얼굴을 살폈다. 도굴꾼은 자신의 얼굴을 자세히 보라는 듯 손을 들어 얼굴의 흙 을 닦아냈다. 워낙 지저분해 닦는다 해도 큰 소용은 없었으나 얼굴 의 윤곽이 드러날 정도는 되었다. "이럴 수가......?" 도굴꾼의 얼굴을 자세히 살피던 명주운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당신은......?" 도굴꾼의 얼굴에 미소가 맺혔다. "백발마신님과 정말 흡사하게 생겼구려. 먼 데서 본다면 그분이 라고 착각을 하고도 남을 정도요." 명주운의 말을 듣고 다시금 인상을 찌푸리는 도굴꾼. 실고 변화무쌍한 표정이었다. 도굴꾼은 잠시 그렇게 인상을 쓰고 있다가 보이지 않게 한숨을 내쉰 다음 입을 열었다. "당신은 정말이지 백발마신이라는 자를 자세히 본 모양이구려. 내 얼굴과 그의 얼굴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볼 정도니 말이오." "그렇소. 내가 어찌 그분의 얼굴을 잊을 수 있겠소? 다른 사람이 라면 몰라도 나만큼은 당신의 어디가 그분과 다른지 하나하나 짚어 낼 수 있을 거요." 명주운은 자랑스럽게 턱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도굴꾼이 이번에는 충분히 보일 만큼 한숨을 쉬었 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모종의 결론을 내린 듯 입을 열었다. "휴우! 당신이 말했던 것처럼 내가 그 백발 뭐라는 사람과 닮았 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런 꼴이 되었소." "그게 무슨 소리요? 그분을 닮았다고 해서 이런 꼴이 되다니 말 이오?" "말하지 않았소. 나는 도굴을 하려던 것이 아니라고." "그럼 어째서 무덤에 구멍을 파고, 거기서 나온느 것이오?" "일단은 나머지 몸을 빼도 되겠소? 방금 전 검을 휘두르는 모습 을 보아 하니 무공이 높은 모양인데, 내가 도망을 쳐 봐야 어딜 가 겠소?" 도굴꾼의 말에 명주운은 은근히 기분이 좋아졌다. 순박하기 그 지없는 성품이라 남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도굴꾼은 황급히 구멍을 나섰다. < 2 >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당신을 죽이려 들었단 말이오?" "그렇다니까요. 정말이지 제대로 알아볼 생각도 않고 덤벼들다 니......!" 도굴꾼은 억을하기 그지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도망을 치다가 땅을 파고 몸을 묻었다? 한데 마치 그곳 이 오해를 받게 한 당사자의 묘였고?" "아하하핫! 실로 공교롭기 이를 데가 없는 일이 아니겠소?" 도굴꾼이 먼저 선수를 치고 나섰다. 명주운의 얼굴을 가득 채운 의심을 읽었기 때문이다. "정작 당사자인 나는 얼마나 황당했겠소? 그 사람 때문에 죽을 뻔하고, 그 사람의 묘에서 생로를 찾았으니 말이오." 지나치리만큼 공교로운 상황인지라 의심을 접을 수는 없었지만 아예 불가능한 일만도 아니었다. 실제로 눈앞의 사내는 정말로 백 발마신과 흡사하게 생겼던 것이다. 기이하게 위쪽 머리카락은 흑발이고, 아래쪽 머리카락은 백발인 것이 특징적으로 다를 뿐, 이목구비만을 보자면 정말 흡사한 바가 많았다. 사실 백발마신은 과거 그가 가졌던 엄청난 흉명과 어울리 지 않게 눈이 크고 어려 보여 순박한 느낌을 주는 용모였다. 눈앞의 사내는 백발마신보다 성숙한 용모를 가진 차이밖에 없어 스스로 백 발마신의 형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그러니 오해를 사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것이다. "거참...... 어릴 적 약을 잘못 먹은 탓에 백발이었다가, 최근에야 다시 검은 머리카락이 자라기 시작했건만...... 남은 백발로 인해 그런 오해를 사게 될 줄이야 어찌 알았겠소?" "백발로 인해? 단지 그것뿐이오?" 명주운의 시선이 갑자기 날카로워졌다. "단지 그것뿐이라니......?" "형장이 뭔가 오해를 살 만한 행동을 한 게 아니라는 뜻이오. 단 지 백발만으로 형장을 그분으로 오해했다는 건가 명확히 짚고 넘어 가야할 것 같소." "흠......" 사내는 잠시 미간을 찌푸리다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어쩌면 그자들이 내 이름을 들었을지도 모르겠소." "이름?" "사실 그 백발마신이라는 분과 소생의 이름이 같소." "형장 이름이 그분과 같다는 말이오?" "내 이름이 한주혁이니......" "아! 그렇구려. 이름만 따로 들었다면 과연 형장이 그분을 사칭 하고 다닌다고 여길 법하구려." "아니, 이미 죽은 사람을 사칭하는 자들이 있겠소? 어찌 그런 오 해를 한단 말이오?" 사내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예전에도 백발마신을 사칭한 놈들이 활개를 치고 다닌 적이 있 소. 게다가 위낙에 대단하신 분이셨으니, 다시 살아 돌아오셨다고 주 장하면 속을 사람들이 꽤 될 것이오. 시골 한 구석에서 사기를 칠 법은 하지요." "킁! 죽은 사람인 척하는 바보로 보였다는 말이구려." 도굴꾼, 아니 도굴꾼으로 오해를 받았던 자는 꽤나 억울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런 그의 표정에 명주운도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얼굴 을 닦고 보니 꽤나 준수한 용모였다. 눈빛도 맑고, 악의도 엿보이지 않는다. 무엇보다 자신이 존경해 마지않는 백발마신과 흡사한 용모 인지라 은근히 호감이 싹트는 것이다. "형장의 이름은 뭐요?" "소생은 명주운이라고 하외다. 평창에 자리한 평창검문의 문하 지요." 명주운이 자신을 소개하자, 이제 막 오해가 풀리기 시작한 사내 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창검문이라면 명성이 자자한 정도 문파가 아니오? 무림맹에 속한......?" "그렇소." 명주운은 가슴을 펴고 당당히 말했다. 사내가 말한 것처럼 명성 이 자자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사문에 대한 자부심만큼은 어느 대 문파의 제자에 못지않은 그였던 것이다. "한데 어째서 백발마신을 그리도 좋게 보시는 거요? 그 양반은 무림맹에서 지목한 공적이 아니었소?" "거참, 온 천하에 소문이 자자하거늘 그 이유도 모른단 말씀이시 오?" 명주운이 외려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자 사내는 뒤통수를 살짝 긁으며 멋쩍게 웃었다. "사실 소생은 저 산 구석에서 살다 내려왔다오. 어릴 때 뭔지 모 르고 산삼(山蔘)을 주워 먹었다가 머리카락도 이렇게 백발로 변한 거지요. 그래서 그 양반에 대한 소문을 얼추 듣기는 했지만 자세한 내용은 모른다오." 사내의 말에 명주운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백발마 신의 명성이 천화를 뒤덮고 있다지만, 무림의 일에 별 관심이 없거 나 산 구석에 사는 사람들은 그에 관한 일을 모를 수도 있기 때문이 었다. "아마도 소생이 백도의 무인인데 흑도인이신 그분을 존경하는 것에 대해 의문이 든다는 이야기지요?" "그렇소. 원래 정사는 물과 기름처럼 서로 경원시하는 것이 상리 아니오? 근데 어찌 명 형께서는 흑도의 마두를 존경한다고 당당히 말씀하시는 것이오? 자칫 명 형까지도 공적을 지목되면 어쩌시 려고......?" 어느새 명주운을 명 형이라 친근하게 부르는 사내였다. 명주운 은 사내의 호칭을 크게 개의치 않았다. "하하하, 그분께 경의를 표한다고 해서 어찌 공적으로 지목을 하 겠소이까?" "......?" "이미 화산의 매화검선께서도 애도를 표하고, 흠모의 뜻을 밝히 셨소. 당시 동정호 주변에 있던 수많은 정도 무인 모두가 마찬가지 였소이다. 그분의 당당한 기백과 출중한 무공에 대해 존경의 뜻을 밝히고 물러갔지요. 고인이 되신 그분께 애도를 표하고 존경의 뜻 을 밝히는 것은 정사를 구분치 않는 일이된 것이오." 명주운의 이야기를 듣는 사내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의 빛이 스 쳐 지나갔다. 명주운은 정사를 막론하고 존경을 받는 인물이 있었다는 것에 그가 놀라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더구나 그런 인물과 흡사한 용모 를 지니고 있다고 하니 감회가 남다를 것이 분명했다. 이에 명주운은 선주혁에 대해 보다 자세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 했다. 달주에서 자신이 직접 봤던 명유신군과의 일전에 대한 이야 기였다. 처음에는 잔잔한 심정으로 꺼내든 이야기였지만, 이야기가 진행 될수록 명주운은 흥분을 했다. 그는 마치 자신이 백발마신이라도 된 것처럼 세세히 당시의 정황을 묘사했다. 그렇게 한참을 떠들고서야 명주운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한 형에게 제대로 사과조차 못했구려. 아까의 무례 를 이해해 주십시오. 정황으로 미루어 도굴꾼이라고밖에......" 명주운은 두 손을 맞잡아 사과를 했다. "저라도 그렇게 오해를 했을 것이오. 아니, 누구라도 그랬겠지요." 사내는 손을 휘휘 저으며 웃을까지 머금었다. "하핫, 한 형은 실로 대범하시군요.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 음에도 그렇게 웃음으로 이해해 주시다니......! 역시 그분처럼 생기 신 분들은 뭐가 달라도 다른가 봅니다." 명주운을 크게 웃으며 선주혁을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리고 말했다. "사죄의 뜻으로 소생이 술을 한 잔 사리다." 이에 사내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에게 있어 지금 가장 필요한 것 은 바로 배로 채우는 일이었던 것이다. 뱃속의 회충이 아사할 정도 의 허기에 시달리는 그였기 때문이다. 사내는 말 그대로 이제야 살 았다는 표정이었다. 명주운에게 도굴꾼이 아님을 증명해야만 살 수 있는 지금의 상황이 아니었다면 풀뿌리라도 집어 먹고 싶은 그였 다. 당연한 일이었다. 무려 두 달에 가까운 시간 동안 아무것도 먹 지 못했으니 말이다. 사실 도굴꾼으로 몰린 이 사내는 세상에서 이미 죽었다고 알려져 있는 선주혁이었다. 남지학이 사혈을 짚을 그 당시. 선주혁은 이미 죽은 것과 다름없는 상태였다. 그 와중에 남지학 이 사혈을 짚었으니 그의 죽음에 대해 의심을 가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선주혁의 기이한 체질과 흡성대법은 말 그대로 기적을 만들어냈다. 남지학이 짚은 사혈을 통해 전해진 미약한 진기가 원인이었다. 이미 오래 전 의식을 잃은 선주혁이다. 하지만 그의 내력은 달랐다. 흡성대법이 스스로 작용, 내력을 움 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내상을 입어 흩어진 내력은 실낱같은 생명을 유지하기도 급급 했다. 한데 외부에서 정순하기 이를 데 없는 진기가 흘러든 것이다. 흡 성대법은 스스로의 위기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했다. 사혈을 통해 전해들어온 적은 양의 진기를 이용해 엉망인 신체의 재생(再生)을 시도한 것이다. 실로 죽음 가운데서 활로를 찾게 된 것이다. 남지학 등이 선주혁의 시신을 매장한 이후 신체 회복을 위한 진 기의 노력은 탄력을 받았다. 선주혁은 이미 흡성대법의 단계 중 천인합일의 경지에 오른 터. 비록 초입에 불과했지만 이전과는 비할 바 없는 효용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무의식중에도 끊임없이 기를 흡수해 망가진 신체의 각 기관을 복구하려는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은 선주혁이 완벽한 무아의 상태에 접어든 중에 이 루어졌다. 저쪽 세상에서와 비할 바 없는 상황이기에 그는 죽음을 받아들 일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기억해 줄 것이다. 명홗히 가 족이라 말할 수 있는 사형이 곁에서 자신의 죽음을 지켜봐 주고 있 었다. 더 이상의 미련도, 후회도 없었다. 그렇게 편안한 마음으로 죽음을 받아들인 이후, 찾아든 무아지 경이었다. 무념무상(無念無想)의 상태에서 운용되고 있는 흡성대법. 그 흡성대법 과 만년음양초의 특별한 효능이 기적을 만들었다. 끊겼던 혈관이 이어지고, 죽었던 세포 대신 새로운 세포가 자라 났다. 걸레처럼 찢겼던 장기가 원래의 형태를 갖추고 혈맥이 이어 져 진기가 유통되기 시작했다. 상상초월의 재생력이 발동된 것이다. 오십여 일을 그렇게 보낸 선주혁은 의식을 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쉽사리 자신이 처한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사형은 자 신이 죽었다고 생각하고는 장례를 치러 버린 것이다. 숨을 쉬는 데 큰 지장은 없었다. 가사상태였던 탓인지 관(棺)내에 충분한 산소가 남아있었던 것이다. 몸이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 선주혁은 관을 빠져나오기 위해 최 선을 다했다. 미약하나마 진기를 끌어올려 관을 부수고, 땅을 팠다. 위쪽으로 땅을 파는 경우 자칫 흙더니에 묻힐 수 있다는 생각에 구 멍의 각도를 기울였다. 본래 지녔던 내력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라 땅을 파는 속도는 더 디기만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맨손으로 흙을 파는 데 큰 무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보통의 손이라면 손톱이 빠지고 손끝이 닳았을 것이나 그의 손에는 작은 상처조차 남지 않았다. 만년음양초의 효 용에 새삼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며 땅을 파고 또 팠다. 얼마의 시간 동안 팠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짧은 기간이 아님은 분명했다. 대체 무덤의 크기가 얼마나 크기에 파도, 파도 끝 이 없냐고 투덜거릴 그 순간 맑은 공기가 폐부를 채워 왔다. 드디어 무덤 밖으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손놀림이 빨라지고 마음이 급해졌다. 생매장을 당했다는 기분이 좋을 리 없었던 것이다. 상쾌한 공기 는 죽음의 직전에서 다시 살아났다는 기쁨을 보다 명확히 인지시켰 다. 정말이지 이번에야말고 죽었다고 생각했던 가운데서 다시금 살 아남은 것이다. 상반신이 무덤 밖으로 나오는 순간, 커다란 호통소리와 함께 검이 날아들었다. 그것이 바로 자신을 존경해 마지않는다는 명주운의 검이었던 것 이다. 하마터면 자신을 흠모한다는 청년의 검에 죽을 뻔했다는 사실에 혀를 내두르며 선주혁은 명주운의 뒤를 쫓았다. < 3 > "어찌 보면 한 형이 그분 때문에 곤경을 치르긴 했지만, 그분으 로 인해 목숨을 구함 받은 게 아니겠소? 우리 그분을 위해 건배합 시다." 오리 다리를 거의 통째로 입에 밀어 넣고 있던 선주혁을 보며 명 주운이 잔을 들어 올렸다. 선주혁은 배어 물었던 오리고기를 우걱우걱 씹으며 잔을 들었 다. 오랜 굶주림으로 인한 허기를 채우는 데 급했던 것이다. 잔을 비운 명주운이 싱긋 웃었다. "무덤에서 꽤 오랬동안 숨어 계셨던 모양이구려. 며칠은 굶은 사람 같소이다." "행여 그들이 아직도 주변을 맴돌까 두려워 며칠을 버텼지요. 이 렇게 허기를 면하게 해 주시니 명 형께 그저 감사할 뿐이외다." 입에 음식을 가득 불고 말하는 선주혁의 발음은 부정확했다. 하지만 와중에도 예의를 갖추는 모습에 명주운이 과연 이 사람 은 도굴꾼이 아니라고 더욱 믿는 계기가 되었다. 오해를 받아 죽음 을 당했을지도 모를 상황이었건만 그에 개의치 않고 외려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니 실로 대범한 마음씀씀이였던 것이다. 선주혁의 음식을 먹는 속도가 느려질 즈음에 명주운이 물었다. "보아하니 한 형도 보통 사람은 아닌 듯하구려." "보통 사람이 아니라니요?" "아까 전 소생이 한 형에게 검을...... 겨눴을 때 말이오. 처음 그 런 일을 접하는 사람이라면 두려운에 이성을 상실하고도 남을 상황 이 아니겠소? 한데 한 형은 외려 소생에게 질문을 던져가며 상황을 진정시키지 않았소? 그러니 최소한 검을 마주해 본 경험이 있다고 보오." 선주혁은 눈앞의 명주운이라는 청년을 새삼 다시 봤다. 처음에 는 그저 자신을 흠모한다기에 괜찮은 사람인가보다, 라고만 생각했 다. 자신의 얼토당토않은 거짓말에 속는 것을 보고 조금 멍청하다 는 느낌도 받았다. 한데 이렇듯 정황을 정리하는 것을 보니 마냥 어리바리한 것만 은 아닌 듯했다. 그저 세상의 험한 경험이 적고, 마음이 순박할 뿐 이었다. "그저 산골에서 몇 수의 무공을 배웠을 뿐이오. 명 형처럼 명문 대파에서 가르침을 배운 게 아니어서...... 동네 주먹패에게 쫓기긴 하지만 말이오." "역시 무공을 익힌 경험이 있구려." 명주운은 자신의 생각이 들어맞았다는 사실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표정이 좋지만은 않았다. 어느 정도 허기를 면한 선주혁이 순박하기만 한 명주운의 표정 을 놓칠 리 없었다. "소생이 무공을 익힌 것이 뭔가 잘못되었소?" 선주혁의 질문에 명주운이 재빨리 자신의 표정을 수습하며 부정 했다. "아, 아니오. 개의치 마시오." '이 친구야. 그런 표정으로는 아니라고 해 봐야 설득력이 없다고.' 선주혁은 내심 그렇게 말하며 겉으로는 부드러운 어조를 유지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개의치 말고 하시오. 명 형과 내가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말이오." 선주혁의 촉구에 명주운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한 형께 사과하는 지금인지라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소." "편하게 말씀하시오. 사과는 이미 받아들였으니 말이오." 선주혁은 지나칠 정도로 예의를 갖추는 명주운의 모습에서 사형 의 모습을 엿보는 중이었다. 더구나 자신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먼 길을 달려왔다는 명주운이었다. 선주혁이 명주운을 향해 부드럽 기 이를 데 없는 표정을 짓는 것은 당연한 일이랄 수 있었다. "내 말을 듣고 기분 상해하지 말았으면 좋겠소." "아, 걱정하지 말라니까요." 다시 한 번 선주혁에게 확인을 받고서야 명주운은 입을 열었다. "사실 한 형과의 인연은 실로 기이하다 할 수 있을 것이오. 오해 에서 비롯된 상황이었으나 좋은 감정을 갖기란 쉽지 않은 상황이 아니겠소? 한데 사연을 들어 오해를 풀게 되고 한 형이 백발마신, 그분과 비슷한 용모를 지닌 것에 나도 모르게 그만 큰 기대를 하고 말았나 보오." "기대? 무슨 기대를 한단 말이오?" "하하, 뭐랄까......? 왠지 한 형에게서 그분의 모습을 찾으려는 기대였을지도 모르겠소. 사실 아무리 무공을 익혔다고 해도 검이 목에 닿아 있는 상황에서 그렇게 침착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쉽지 않은 일 아니겠소? 그래서 한 형이 이름과 용모만 그분과 비슷한 것이 아니라 그 성품까지도 닮은 바가 있지 않나 기대를 하고 말았 다오." 명주운은 그렇게 자신의 속내를 감춤 없이 털어놓고 있었다. "한데 생각을 해 보니, 사실 한 형은 목숨을 구하고자 그분의 무 덤에 숨어 있었던 것이 아니오? 애초 그분이라면 절대 그럴 리 없 을 거다, 라는 생각을 하니 역시 한 형과 그분이 다를 수밖에는 없 다는 생각이 드는구려." "아하! 그거군요. 백발마신이라는 분이 그렇게 대단하다는데 어 찌 소생이 비견될 수 있겠소?" "괜한 말을 해서 미안하오. 홀로 기대를 하고, 홀로 실망을 했으 니...... 이건 참!" "괜찮으니 명 형은 마음 쓰지 마시오." 말을 하면서 선주혁은 내심 웃음을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 이지 이 청년은 자신을 감추는 방법에 대해 전혀 모른다고 밖에는 생가깅 들지 않았다. 저런 이야기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된다. 마음속 에 간직하고 있으면 서로의 기분을 상하지 않아도 될 일이기 때문 이다. 하지만 명주운은 그것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겉과 다른 속내를 가지는 것을 스스로 참지 못함이다. 그만큼 올곧게만 살아 왔다는 뜻이기도 했다. 소위 말하는 닳고 닳은 인생의 표본처럼 살아온 선주혁은 이런 순박한 보습의 명주운이 싫지만은 않았다. 예전, 그러니깐 소설로 이런 인물을 접했다면 짜증이 치밀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책으로 읽을 때, 답답한 성품을 가진 캐릭터는 딱 질색이었으므로. 하지만 이쪽 세상으로 넘어온 이후의 선주혁은 변할 수밖에 없 었다. 저쪽에서도 이미 경험이 적다할 수 없는 그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곳에서 겪은 수많은 사건에 비한 바가 아니었다. 적어도 이 곳에서는 매사에 목숨을 걸어야 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생사의 갈림길에 선 것만 해도 수차례. 이번에는 완벽하게 죽음을 맞이할 준비까지 했던 그였다. 따라서 그의 사고는 또래의 젊은이들에 비해 남다를 수밖에는 없었 다. 그렇기에 명주운의 순박함이 오히려 마음에 드는 것일지도 몰랐 다. 마치 순진한 어린아이를 바라보는 어른의 심정처럼 말이다. "다른 건 몰라도 마음이 너그러운 것만큼은 한 형이 그분이 못지 않을 것 같소이다." 나름대로 자신을 배려하는 명주운을 보며 선주혁은 내심 고소를 머금었다. '이 친구는 나라는 사람을 지나치게 과대평과하고 있군. 내가 언 제 너그러운 모습을 보여준 적이 있었던가......?' 그러면서도 명주운과 같은 팬이 있다는 사실이 싫지만은 않은 그였다. Chap. 3 죽은 자의 이름. < 1 > 명주운과 따로 방을 잡은 선주혁은 간만에 차분히 자리에 앉아 운기조식에 들어갈 수 있었다. 무덤에서 정신을 차린 후, 지금까지 제대로 스스로의 상태를 점검해 볼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호흡을 가볍게 고르며 그는 우선 내관(內觀)에 들어갔다. 미약하 나마 흐르는 진기의 움직임을 따라 몸 구석구석을 살폈다. 놀랍게 도 죽음까지 몰고 갔던 상세는 거의 완벽하게 치유된 상태였다. 과 연 짐작한 대로 이 정도면 회복이 아니라 재생의 수분에 달한 신체 능력이었던 것이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터무니없는 내력의 상실감이었다. 천하제일의 내공이라 불리기에도 부족함이 없던 그였다. 한데 지금 그가 가진 내력은 범인을 조금 웃도는 수준. 예전과의 엄청난 격차로 인해 마치 몸 안이 텅 비어 버린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는 내력을 빠르게 회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명주운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현재의 무림은 혼돈 그 자체의 양 상이었다. 무림맹은 현재 거의 유명무실한 상태라고 했다. 구파일방이 무 림맹과의 일정한 거리를 두기 때문이었다. 이런 현상에는 복잡한 사연이 있음을 명주운에게 들을 수 있었다. 무림맹주의 손녀와 제자들이 정의련에 의탁을 하고, 한 맹주의 신상에 변고가 생겼음을 정의련에서 구파일방에 통보를 한 것이다. 이에 무림맹과 패종회 연합은 그에 대한 반론을 구파일방에 전 해왔다. 무림맹주의 신변에 이상이 생긴 것은 사실이나, 그 원흉이 바로 풍초양과 혁련기라는 것이었다. 서문도옥과 한희윤의 결혼이 공표되자 후계 문제에 대한 욕심으로 두 사람이 한조백의 살해를 기도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두 사람은 순진한 한희윤을 속여 뻔뻔한 주장을 내새워 정의련에 의탁한 것이라 알령온 것이 다. 패종회, 무림맹의 주장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최근 정의련 이 금강신협이라는 자와 함께 하며 크게 변질된 모습을 보인다고 성토했다. 금강신협의 음모에 속은 건지, 뜻을 함께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사마외도 척결의 기치를 세워 움직인 패종회, 무림맹의 행사를 방해했다는 것이다. 중경, 사천에서의 사건에 대한 그들의 해석이었다. 구파일방으로서는 양측의 주장이 이렇게 갈리자, 확실을 가질 수가 없었다. 한조백이 중태인 관계로 그에게서 진실을 파악할 수 는 없었다. 최근 무림맹의 여러 행사가 못마땅한지라 심증은 가지 만 그것만으로 무림맹과 결별을 고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게다가 음모의 배후로 지목된 금강신협조차 자취를 감춘 상태. 구파일방은 어느 쪽의 주장이 옳은지 명백히 파악될 때까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것으로 결론을 내린 것이다. 한편 백도의 혼란스러운 상황과 흑도는 사뭇 다른 양상을 보이 고 있었다. 마교와 사파연합이 백발마신의 복수의 기치를 세웠다. 이에 천하의 흑도 무인들의 그들의 깃발 아래로 몰려들었다. 백발 마신의 사형인 옥용검마가 그 중심에 서서 타도 패종회를 위한 세 력을 규합하고 있었다. 즉, 전례 없는 사마외도의 단합이 이뤄지도 있는 중이었다. 의외의 상황이 전개되자 패종회 역시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자 신들이 가진 신공절기와 막대한 은자를 내새워 각지의 세력을 규합 하겠다며 나선 것이다. 패종회에 가입만 하면 개인이든, 문파든 구 분치 않고 절기를 전수하고, 은자를 지급한다는 것이다. 무림인들에게 있어서는 다시없는 유혹이 아닐 수 없었다. 그간 어는 세력에 소속되지 않았던 무인, 문파들이 패종회에 몰려드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배를 갈아타는 모습도 종종 보일 정도였다. 그렇게 양측은 대규모의 일전을 준비하느라 분주하기 이를 데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진정한 난세의 초읽기에 들어간 것이다. 상황이 이런지라 선주혁은 무공을 최대한 빨리 회복해야만 했 다. 다시금 패종회를 저지하가 위해서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 이다. 자신을 죽음까지 몰고 갔던 그들이기에, 공 노인을 죽음에 이 르게 했기에, 몽세화를 인질로 삼았기에, 선주혁은 그들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다행이 내력이 회복되는 속도는 빨랐다. 그는 느낄 수 있었다. 이전과는 뭔가 확연히 다른 것이다. 운기를 시작하자 마치 전신의 모공이 한꺼번에 열리며 진기를 빨아드리는 느낌이었다. 마치 솜이 물을 흡수하는 것 같았다. 뿐만이 아니었다. 대기에 떠도는, 땅에 머문, 하늘에 맺힌...... 그래서 느껴지는 모든 기운과 자신이 무엇인가에 의해 연결이 되어 있는 듯했다. 아직은 모호하지만 우주를 구성하는 기운과 자신이 하나가 되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토록 막연한 일체감일 뿐임에도 진기가 체내에 유입되는 속도 가 과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단 하룻밤의 운기조식에도 불구하 고 마치 수일 동안의 효력을 본 듯했다. 이는 비단 새롭게 축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 지녔던 내력을 회복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해도 지나질 정도로 빠른 것이다. 선주혁은 알 수 있었다. 이 속도가 더욱 빨라질 것임을...... < 2 > 선주혁은 빠른 회복에 신이 나서 조식을 취하다 보니 날이 훌쩍 새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식사를 위해 방을 나설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뜬 지 오래였다. 명주운에게 식사를 제안하려고 그의 방문을 섰을 때였다. "한 형." "아? 명 형. 어디 다녀오셨나 보군요." "천애흑묘에 다녀왔습니다. 이곳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인사를 드리고 가려고요." 천애흑묘가 자신이 매장되어 있던 장소를 가리킴을 선주혁은 알 고 있었다. 그는 명주운의 정성에 또 한 번 감동을 해야만 했다. "한데 어쩐 일로 제 방에......?" "점심때가 다 된 것 같은데 식사를 해야 하지 않겠소?" "아! 그러고 보니 배가 출출하네요. 그럼 내려가서 식사를 하도 록 합시다." "오늘을 소생이 쏘겠소." "쏴요?" 명주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어제 명 형에게 푸짐하게 얻어먹었으니 오늘은 소생이 대접을 하겠다는 말이오." "하핫......" 명주운을 그제서야 선주혁의 말을 알아듣고는 환하게 웃었다. 두사람은 객잔의 일 층으로 내려가 음식을 주문했다. 막 점소이가 음식을 내왔을 때 선주혁이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 었다. "뭔가 문제 있소?" "거 참...... 신기한 일이 아니오?" "뭐가 말이오?" "동정호 부근에는 어릴 때 삼을 잘못 먹은 친구들이 많은가 보구 려." 선주혁은 주변을 둘러보며 기이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명주운은 선주혁의 시선을 쫓아 객잔의 내부를 살피다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왜 그가 이상한 표정을 짓는지 연유를 파악한 것이 다. "저들은 한 형처럼 산삼을 잘못 먹어 머리가 샌 것이 아니라오." "에? 그럼 이쪽 지방 사람들은 젊을 때부터 머리가 하얗게 샌다 는 거요?" "하하하핫!" 선주혁의 질문에 명주운은 가볍게 웃은 후, 설명을 시작했다. "요즘 무림인들 사이에는 머리를 하얗게 물들이는 것이 유행이 라고. 모두 백발마신, 그분을 흠모해서지요." "유행이요?" "그렇소. 어제 저녁에도 꽤 보시지 않았소?" "흠...... 어제는 너무 배가 고파서." 허기를 채우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최근의 무림 정세에 대한 이 야기를 듣느라 주변에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다. 그리고 오늘에서 야 백발을 한 무인들이 심심치 않게 보이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 이유가 자신의 머리색 때문이라니 웃음이 다 나왔다. 저쪽 세상에 있을 때, 연예인들의 머리 모양이나 복장이 유행하 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은 이곳에서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내가 패션 리더...... 정도 되는 건가?' 스스로에 대해 가볍게 웃음을 짓는 선주혁이었다. 나쁘게 생각 할 일이 아니었다. 자신을 기억해 주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기도 했 고, 앞으로는 백발을 하더라도 그다지 눈에 띄지 않을 거라는 뜻이 기도 했으므로. "뭐라고?" 누군가의 거친 외침이 막 오후에 접어든 객잔의 일 층에 울려 퍼 졌다. 한눈에도 힘깨나 쓸 것 같은 장대한 체구의 사내가 외친 소리 였다. 떡 벌어진 어깨, 곰처럼 굵은 허리, 고슴도치처럼 뻣뻣한 수 염과 송충이 같은 눈썹은 완고하고 고집스러워 보였다. "왜 내가 목소리를 낮춰야 하나? 이곳은 그분께서 쉬고 계시는 금방일세. 한데 내가 그분에 대해 이야기하며 눈치를 봐야 한다는 말인가?" 낮술을 먹어선지, 화가 났기 때문인지 가무잡잡한 장한의 얼굴 이 더욱 검게 변했다. 얼굴에 몰린 피로 인해 색이 더욱 짙어진 것 이다. "이사람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장한의 옆에 앉아 있던 사내가 주변을 돌아보며 다시 만류하기 시작했다. "자네는 부끄럽지도 않나? 대체 그 머리는 왜 백발로 물들인 건 가? 그분의 기상을 쫓고 싶어서가 아닌가? 한데...... 패종회 놈들 이 무서워 목소리를 낮춰?" "어허! 무종(武琮), 취했나?" 장한의 이름은 철무종(鐵武琮)이었다. 품을 팔 듯 타고난 신력(神 力)을 팔아 연명하는 낭인무사인 그는 친우인 진상(眞上)과 함께 천 애흑묘에 참배를 하기 위해 이곳을 방문했다. 백발마신의 묘를 찾아 애도를 표하고 괜스레 울적해진 기분을 달리기 위해 술을 한잔 하던 중, 진상이 목소리를 낮추라고 하자 이 렇듯 울컥 화를 내고 있는 것이다. 그가 패종회를 함부로 표현하는 것에 진상은 잔뜩 목을 움츠리 며 겁을 집어 먹은 표정이었다. "이 사람아! 패종회가 어떤 곳인데 그렇게 입을 함부로 놀리나? 더구나 이곳은......" 진상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철무종이 말을 가로챈 것이다. "그래, 이곳은 그분을 돌아가시게 한 패종회 놈들이 장학한 거나 다름없지. 그놈들이 무공 주고, 돈 준다니까, 눈이 벌개져서 기어들 어간 자들이 행세하는 곳이니 말이야!" 철무종의 말에 진상이 한숨을 쉬는 순간이었다. 콰앙, 하는 둔탁한 소리가 객잔의 일 층을 가득 매웠다. 안 그래도 장한의 발언이 위험 수위를 넘어섰다고 생각하던 객 잔의 손님들은 난데없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야만 했다. 요란한 소리는 청의무복(靑衣武服)의 한 사내가 식탁을 내리쳤기 때문이었다. 객잔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식탁을 내리쳤건만 상판 과 다리는 멀쩡했고, 그릇과 음식물 또한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하지만 관찰력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알 수 있을 변화 가 있었다. 식탁의 높이가 낮아졌다. 놀랍게도 식탁의 네 다리가 땅 을 파고든 것이다. 청의무복의 사내가 내공을 익힌 고수라는 것을 짐작케 하는 단 면이었다. "무공 주고, 돈 준다니까......, 눈이 벌개져? 대체 어떤 곳을 가 리켜 그딴 말을 하는 건가?" 서른 중반으로 보이는 청의무복의 사내는 날카로운 눈매를 빛내 며 장한에게 호통을 쳤다. 그의 노갈에 진상의 얼굴이 머리색과 같이 새하얘졌다. 결국 우 려하던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이, 이 친구가 술에 취해 헛소리를 지껄인 겁니다요. 보잘것 없 는 낭인의 취중망언(醉中妄言)이니 대협께서는 노여움을 거두십시 오." 당황한 와중에도 진상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노력했다. 한눈 에도 청의무복의 사내가 어느 문하인지 훤히 짐작할 수 있는 상황 이었기 때문이다. 최근 패종회에 합류했음을 공표한 곳. 철무종이 방금 전 비난했던 그 문파의 소속이 분명했다. 그곳은 낭인에 불과한 철무종, 진상에게 있어서는 결코 가벼울 수 없는 이름의 무게를 갖고 있었다. 학청문(鶴靑門). 세인들은 호남성 제일의 문파로 형산파(衡山派)를 꼽는다. 아무 리 예전의 성세를 구가하지 못하고 있다지만 전통과 명성은 하루아 침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거기에 구파일방에 들지 못했던 형 산파가 정의련의 지지를 받게 되며 그와 같은 지위는 더욱 확고해 졌다. 학청문은 그런 형산파의 뒤를 이어 호남의 재이문파로 여겨지는 곳이었다. 악록산에 근거를 두고 있는 학청문은 동정호 주변의 수많은 기 루, 객잔, 주루 등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어는 문파에 비해 막 강한 재력을 자랑하는 학청문이었으나, 무림에서의 자리매김에서 는 늘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무공보다는 은자를 중시 여긴다며 천 시를 받아온 것이다. 학청문이 무림맹에 가맹하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콧대 높은 그들이 자신들을 어찌 대할지 뻔히 알기 때문이다. 만약 정의련만 아니라면 형산파를 젖히고 호남제일의 문파로 설 수 있음을 자부하던 학청문은 패종회라는 막강한 신진세력의 등장 을 반길 수밖에 없었다. 무림맹과 동등한 지위에서 연수를 공표했을 뿐더러 이름만 들어 도 눈이 휘둥그레질 신공절기를 나눠주고 있는 패종회였다. 더구나 무림 최강이라고 말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백발마신까지 처치한 곳이 바로 패종회다. 학청문에 있어서는 든든한 배경이 되어 줄 것이 틀림없었다. 이에 학청문은 숙고 끝에 패종회를 선택, 그들의 일원이 되었다. 그 후 학청문이 대놓고 스스로가 호남제일을 외치고 다니고 있 음에도 형산파에서 이렇다 할 대응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니 일개 낭인에게 있어서 학청문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무게는 버거울 수밖 에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객잔 내에 사내와 동일한 복장을 한 자들의 수는 열 명이 넘었다. 둘이 합쳐도 저 사내 하나를 감당치 못할 것이 분명한데, 열 명이나 되는 학청문도들이 있는 자리니 감히 다른 생각을 할 수 가 없는 진상이었다. 그가 이렇듯 고개를 숙이고 나서자 학청문하의 사내는 나직한 코웃음과 함께 날카로운 시선을 거뒀다. 상대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동료는 아직 노기가 가라앉지 않은 모양이었다. 코 옆에 점이 있는 무인이 철무종과 진상에게 들으라는 듯 언성 을 높여 말했다. "별 시덥지 않은 놈들이 다 설쳐 대는군. 하여튼 그 백발마신인 지 백발귀마인지 하는 자가 문제군. 그자 하나로 인해 다들 간들이 부어서 설쳐 대잖아." "크크크, 맞아. 머리카락 색만 물들이면 고수가 되는 줄 아는 놈 들도 있고 말이야. 숭어가 뛰면 망둥이도 뛴다더니......" "쓰레기 같은 놈들이지. 분수도 모르고 감히!" 코에 점이 있는 무인의 말에 학청문도들은 저마다 한마다씩을 하며 비릿하게 웃어 댔다. 왁자지껄 두 낭인과 백발마신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던 그들의 귀에 또 다른 큰 소리가 끼어들었다. 앞서 몇 번에 걸쳐 들었던 철 무종의 음성이었다. "누가 취했다고 그래? 난 맨 정신일세. 자네는 쓰레기라는 소리 를 듣고도 화가 나지 않는단 말인가? 고작 패종회에 빌붙어 행세하 는 놈들에게 겁을 먹어서? 지하에 계신 백발마신님께서 통곡을 하 실 걸세. 저들이 믿는 패종회에 당당히 맞섰던 그분이 아닌가?" "이 사람아, 자네 미쳤나?" 진상의 외침에도 불고하고 학청문의 무인들이 하나둘씩 자리에 서 일어서기 시작했다. 철무종의 발언을 용납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미친놈이 죽으려고 환장했군." 코에 점이 있는 사내가 흰 치아를 드러냈다. 두 눈에 비치는 살 기로 미루어 가벼운 훈계 정도로 끝을 내려는 심산은 아닌 듯했다. 한편 가들이 몸을 일으키는 모습을 보던 명주운이 검병에 손을 얹었다. "뭐하려고요?" 선주혁이 명주운의 귀에 대고 물었다. "아까 저 두 사람을 만났소. 천애흑묘에서...... 상황이 좋지 않 으면 도와야하지 않겠소?" 명주운이 짧게 대답했다. 한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던 천애흑묘였다. 참배객이 줄 을 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곧 참배객은 현저히 줄었다. 이는 백발마신에 대한 존경 심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백발마신의 명성은 시간이 지날수록 커져만 가고 있었다. 참배객이 줄어든 이유는 그에 대한 흠모의 감정이 외려 커졌기 때문이라 말할 수 있었다. 수많은 흑도무인들은 백발마신의 복수를 위해 마교로, 그리고 사파연합으로 투신을 한 것이다. 반드시 패종 회와 무림맹에게 죗값을 치르겠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천애 흑묘에 찾아와 애도를 표하기보다 백발마신의 복수가 우선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최근의 천애흑묘는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명주운은 그런 한산한 천애흑묘를 다녀오던 중, 저 두 사람을 만 났던 것이다. "흠...... 저들도 백발마신의 팬인가 보구려." "팬?" "반했나 보다...... 라는 뜻이오." 선주혁은 멋쩍게 웃으며 말을 돌렸다. "정상적으로 무공을 익힌 자라면 누구나 그분께 반할 것이오." 명주운은 당연한 일이라는 듯 말을 하고는 다시금 두 사내와 청 의무인들에게 집중하려 들었다. 상왕이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백발마신에게 반했다는 이유 하나로 저들을 도우려는 거요?" 선주혁은 다시 명주운에게 물었다. "그분을 기리려는 의지가 명확한 사람이오." "저 숫자를 모두 감당할 자신 있소?" "......" "만용과 용기를 구분하시오. 명 형이 무작정 뛰어든다고 해서 바 뀌는 것은 없소. 괜스레 한 명이 더 죽어나갈 뿐이 아니겠소? 헛되 이 목숨을 버리는 것은 백발마신을 따르는 것이 아닐 것이오." 선주혁의 말에 명주운의 얼굴에 갈등이 맺혔다. 분명 그의 말이 합당했다. 자신의 무공은 그다지 뛰어나다고 할 바가 못 되었다. 잘 해야 학청문도 중 하나를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결국은 선주혁의 말대로 목숨만 잃게 될 것이 분명했다. 명주운이 어금니를 악물 때였다. "감히 네놈이 학청문을 업신여길 실력이 있는지 확인해 주마." 코 옆에 점이 있는 무인의 외침. 동시에 그의 옷깃이 펄럭이기 시작했다. 내력을 끌어 모으고 있 는 것이다. 그 순간.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퍼억,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철무종의 고개가 모로 돌아간 것 이다. 너무나도 의외의 상황에 누구보다 놀란 것은 철무종이었다. 갑 작스럽게 안면을 가격 당한 충격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가 놀라는 이유는 자신의 얼굴을 때린 것이 바로 친우인 진상 이라는 사실이었다. 철무종의 퉁방울만 한 눈을 더욱 크게 뜨고 의아한 표정을 지을 때, 진상이 일부러 언성을 높였다. "자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알고나 이러는 건가? 저 무사님들이 어떤 분들인지는 아는 거고?" 진상이 친구의 얼굴을 때리고 나서자 학청문의 무인들은 당장 출수할 분위기에서 한 발작 물러났다.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채, 두 사람의 대화를 즐기려는 것이다. "자네야말로 내가 지금 무슨 말은 하는지 몰라서 그러는 건가?" 철무종은 아직까지 친구가 자신을 때렸다는 것을 믿기 힘든 모 양이었다. 마디가 굵은 손으로 얼굴을 매만지는 그의 음성은 살짝 떨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곧 철무종은 친구인 진상의 본의를 확인할 수 있었다. 스르릉. 도집을 빠져나오는 쇠의 무건운 진동음. 철무종에게 있어서는 천둥과 같은 도명(刀鳴)이었다. 도가 겨누 고 있는 것이 자신이기 때문이었다. 철무종의 가무잡잡한 얼굴은 검붉게 물들고, 흰자위에는 거미줄 같은 핏발이 곤두섰다. "그 도......! 설마 나를 향해 겨누고 있는 건가?" "당연하지. 자네가 낮술을 먹고 제정신이 아닌 모양인데...... 죽 으려면 혼자 죽게. 괜히 나까지 끌어들이지 말고!" 진상은 울상을 지으면서도 목소리를 높였다. 학청문의 무사들에 게 사신의 목소리가 들리길 바라는 의도가 훤히 보였다. "이보게..... 진상. 어째서 이러는 건가? 백발마신님을 조금이 라도 닮고 싶다며 머리색마저 바꾼 자네가 아닌가......? 한데......" "시끄럽네. 자네가 진정 내 친구라면 어서 저쪽에 계신 학청문의 무사님들께 죽을죄를 지었다고 사죄부터 하게."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를 지르는 진상이었다. "후......" 진산의 말에 철무종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목숨을 위협받는 상 황이니 친구의 행동을 이해치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와중에 자신 에게 빌고, 용서받기를 권하니 원할을 가질 일도 아니었다. 자신을 위한 행동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가슴이 찢어지는 실망감은 어찌할 수가 없었 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백발마신에 대해 침을 튀어가며 칭찬을 하 던 진상이었다. 한데 상황이 바뀌자 저렇듯 태도를 바꾸고, 친구마저 저버리니 한숨이 절로 나오는 것이다. 실망감은 분노를 자아내고, 살아오며 지금껏 지켜온 남자로서의 자부심을 자극했다. 수염의 장한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그는 퉁방울만 한 두 눈을 부릅뜨고 나직하게 물었다. "자네 백발마신님께서 익양의 경계에서 수많은 무인들과 헤어지 며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이 무엇인지 아는가?"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게. 그 양반이 무슨 말을 했던 우리 목숨 보다 중요할 리 없지 않은가?" "그분의 친우께서 말씀하셨다는군. 남자라면 가슴을 펴고, 당당 히......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일세! 그 말을 반드시 지키시겠다 고 하시며 패종회의 개들을 향해 걸어가셨다고 했네. 마치 산책을 나선 것처럼 여유 있게 말일세. 그리고 그분은 끝까지 당신의 말씀 을 지치셨네. 목숨을 잃는 그 순간까지 말일세!" 수염의 장한은 마지막 말에 유독 힘을 주었다. 그리고 숙였던 허리를 바로 세우고, 넓은 가슴을 폈다. "나 철무종(鐵武宗) 역시도 남아일세. 가슴을 펴고, 당당히......! 그렇게 살고 싶은 남자란 말일세." 철무종의 말을 들은 명주운의 어깨가 부르르 떨렀다. 그의 손이 다시금 검병을 쥐어갔다. 선주혁이 명주운의 어깨를 짚었다. 일단 진정하라는 뜻이었다. 사실 철무종이라는 남자의 말에 자신도 감정이 격해졌다. 당일 익양에서 스스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되뇌던 주백광의 말을 군 중에게 던졌다. 자신이 죽는다 해도 절대 몰려와 패종회와 싸우지 말 것을 권유하며 한 말이었다. 한데 그 말을 가슴에 품고, 그대로 따르고자 하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감정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선주혁은 재빨리 머리를 굴리기 시작 했다. 어떻게 해서든 철무종이라는 장한을 돕고 싶었다. 죽은 것으로 알려진 자신을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한 사람이 니 어찌 외면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선주혁은 알고 있었다. 현재 자신의 상태로는 저 장한에 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미 수차례 죽음과 삶의 경계를 오갔기에 냉철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그였다. 뭔가 다른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애가 탔지만 아직까지 뚜렷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마름침만을 삼켜야 했다. 선주혁의 속이 타들어 가는 그 사이, 명주운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넓게 가슴을 펴고 당당히 고개를 들었다. 그 태도만으로도 마음 가짐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도 그로서는 도저히 혈기를 억누를 수가 없었으리라. 그런 명주운의 모습에 선주혁은 더 애가 닳았다. 명주운이 앞뒤 안 가리고 나서기로 결심을 내렸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제 철무종, 한 사람에 이어 명주운까지 더해졌다. 자신의 이름 에 두 명이 목숨을 내놓은 것이다. 답답한 마음에 지금껏 읽어온 무협, 판타지 소설들을 떠올려 보 려 노력했다. 그 안에서 어떤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 다. 하지만 딱히 떠오르는 장면은 없었고, 그 사이에도 상황은 계속 악화 일로를 걷고 있었다. "크흐흐......! 눈물 나는 우정이군, 그래. 제 혼자 살겠다고 친구 를 배신하고 말이야." 코 옆 점의 사내는 치아를 드러내고 웃었다. "근본 없는 놈들의 특징이지." 옆에 있던 다른 학청문의 무사가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진상은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수모는 잠시뿐이다. 잠시만 참고 넘기면 목숨을 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있는 진상에게 철무종이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도를 치우게. 죽어도 저놈들에게 죽을 테니." 철무종은 아예 진상을 외면하고 학청문도를 향해 한 걸음을 성 큼 나섰다. "이봐! 백발, 저놈을 죽이면, 네놈은 살려주도록 하지." 코 옆 점의 무인이 진상을 향해 던진 말이었다. "이놈!" 철무종이 노갈을 터뜨렸다. 그리고 시선을 다시 친우에게로 돌렸다. 진상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도를 든 그의 손이 끊임없이 떨렸다. 도를 뽑아든 것은 자신이 살 방도를 찾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 렇다고는 해도 실제로 도를 휘둘러 철무종을 상하게 할 생각은 전 무했다. 한데 지금은 자신이 살기 위해서 친우를 죽여야 할 상황이었다. 참혹할 정도의 갈등이 그의 얼굴을 짙게 물들였다. "정도의 무인을 자처하면서 지나치게 잔인한 요구를 하시는구려." 진상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 이미 몸을 일으켰던 명주운 이 결국 나서고야 말았다. "당신은 누군데 학청문의 행사에 관여하시는 것이오?" 점이 난 사내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소생은 평창검문의 명주운이라고 하외다." "평창검문?" 코 옆에 점이 난 사내가 명주운의 말을 되뇌었다. 그리고 곧 생 각이 났다는 듯 표정을 풀었다. "아! 무림맹 산하의 평창검문! 흠...... 패종회와 무림맹이 연수 를 한 이상, 귀문과 학청문은 한 가족이라 할 수 있소. 한데 어찌하 여 모욕을 당해 그에 합당한 대가를 요구하는 학청문의 행사에 불 만을 표하시는 게요?" 명주운은 자신이 나설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강경하게 주장을 전개하려 했다. 백발마신을 욕보이고, 그를 흠모하는 이들을 핍박 하는 모습에 스스로 분노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한데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선주혁이 끼어들었다. 특별한 방법 이랄 수는 없었으나 일단은 명주운이 상황을 악화시키는 것만큼은 막아야했다. 그래서 뭔가 결론을 내리기도 전에 나선 것이다. "하하, 그 이유에 대해서는 소생이 한 말씀 올리겠소이다. 백발 마신은...... 논란의 여지는 있다 해도 사실 현재 수많은 무림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대상이 아니오? 자신이 존경하는 분에 대한 언급 을 했다는 이유 하나로 이처럼 핍박을 한다면 자칫 학청문의 행사 가 편협하다 손가락질을 받을 것이 염려되었소이다. 자리가 아님에 도 나선 이유는 여기에 있지요." 코 옆 점의 사내는 명주운과 반백발의 청녕이 나선 이유가 학청 문을 염려하기 위함이라 하니, 선뜻 답변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가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옆에 있던 다른 무사 하나가 나섰다. "백발마신과 같은 자를 존경하는 것이 못마땅하다고는 해도, 그 일만으로 저들을 핍박할 만큼 옹졸한 우리가 아니외다. 그러나 저 들이 패종회를 모욕하고, 더불어 학청문을 모욕했으니 그 죄를 묻 는 것은 당연지사라 할 것이오. 한데 누가 있어 학청문을 편협하다 손가락질할 수 있겠소?" "술자리에서 친우 간에 나눈 이야기였을 뿐이오. 낭인에 불과한 저들이 아니겠소? 앞서 말씀드렸듯 최근 백발마신에 대해서 무인 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고개를 끄덕이는 바, 저들의 눈에는 대단하 기 이를 데 없는 사람으로 여겨졌을 것이 분명하오. 저들의 좁은 식 견으로 전후사정을 살피지 못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러다 보니 패종회와 귀문에 대해 실언을 한 것이 아니겠소? 이런 일에 학청문 에서 좀 더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야만 세인들이 패종회와 학청문의 아량에 크게 감탄하지 않을까 싶소이다." 사실상 아무런 관계도 없는 낭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평창검문의 제자가 저렇듯 나서자 학청문도들로서는 난감한 상황이 되었다. 계 속해 고집을 부리고 철무종과 진상을 핍박한다면 진짜로 편협하다 여겨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선주혁은 스스로 나름대로 그럴듯하게 들릴 만한 기지를 발휘했 다며 내심 만족하는 중이었다. 묘책은 아니었다지만 이 정도면 학 청문도를 꼼짝 못하게 엮었다 여기는 거이다. 더불어 자신을 위해 나섰던 철무종과 명주운 모두의 목숨만큼은 구할 수 있을 가능성이 커졌으니 그 기쁨은 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쪽 세상에 와서 수십, 수백 번에 걸쳐 느낀 대로 현실 의 일들은 소설처럼 술술 풀리는 법이 드물었다. 자신이 소설 속의 조인공이었다면 대략 이 정도 대사를 날려 대면 무난히 해결되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는 좀 더 다양하고 복잡한 변수가 있기 마련 이었다. Chap. 4 회복의 실마리. "좁은 식견으로 앞뒤를 못 살핀다고? 내 비록 당신이 말하는 바 대로 삼류 무졸(武卒)에 불과하다고는 해도 백발마신님께서 어떤 분 이신지는 명확히 알고 있소이다. 전후 사정을 알면 알수록 패종회 와 무림맹의 개종자들이 비열한 수를 써서 백발마신님을 해친 거라 생각하오. 내 오늘 이 자리에서 목숨을 구하기 위해 백발마신님의 위명에 누를 끼칠 생각은 조금도 없으니 당신은 참견하지 마시오." 철무종이 선주혁의 말에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선 것이다. 이전 에 비해 더욱 심한 표현으로 감정을 분출하는 철무종이었다. 패종 회, 무림맹을 개종자라며 욕을 하고 나서니 그야말로 제대로 질러 버린 것이다. 타오르는 화염에 기름을 붓는 것은 철무종뿐만이 아니었다. "한 형은 뒤로 물러서시오. 소생 역시 저 형장과 같은 생각이외 다. 백발마신님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패종회, 무림맹 연합의 명 백한 과오일 뿐이오. 분명히 인정해야 할 사실을 근거로 외려 남을 핍박하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소이다." 명주운 역시 상기된 표정으로 언성을 높였다. 선주혁은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이로서 말로 해결할 범주는 벗어 나 버린 것이다. "패종회, 무림맹 개종자? 개다가 그와 같은 사실을 지지하는 놈 까지?" 코 옆 점의 사내의 몸에서 다시금 진득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그 것은 마치 전염이라도 되듯 학청문도 전원의 살기를 불러 일으켰 다. 명주운은 이를 악다물고 검을 뽑아들었다. 그의 결연한 표정에 철무종은 엄지를 곧추세웠다. "좋소, 참으로 좋소! 이십 년을 같이 해 온 친구마저도 돌아서는 마당에 정도의 무인 중에서 그대와 같은 영웅을 만나게 되니 진실 로 좋소!" 명주운은 결연한 표정 가운데 미소를 지었다. "진즉 그대와 같은 사람을 만났다면 좋았을 것을......! 우리 저승 에서라도 술 한 잔을 기울이며 백발마신미에 관해 밤을 새워 이야 기해 보도록 합시다." "좋지요!" 두 사람은 이미 결정되어진 죽음 가운데서 마주 보며 함께 웃었 다. 다시없을 만큼 통쾌하고 시원한 웃음이었다. "과연 백발마신이 거마 중의 거마로구나. 저런 쓰레기 같은 놈들 은 물론이고, 소위 정도에 속한다는 자조차 현혹되어 제정신을 못 차리니, 일벌백계라! 사악한 마두에게 속아 또다시 헛소리를 지껄 이는 놈들이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네놈들 둘은 반드시 죽 여주마!" 말을 마침과 동시에 코 옆에 점이 있는 사내의 신형이 날아올랐 다. 공중에 떠오른 그의 신형을 쾌속하게 철무종을 향했다. 깔끔한 신법만으로도 그가 충실히 무공을 익혀 왔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타하압!" 철무종은 물러서지 않고 외려 한 걸음을 성큼 내딛으며 근욕이 꿈틀거리는 팔을 내밀었다. 터억. 둔탁한 음향과 함께 두 사람이 주먹을 부딪쳤다. 점이 난 사내의 입 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내가중수법(內家重手法)을 익힌 자신에게 타고난 힘만 믿고 정면 으로 덤벼온 것 자체가 실수임은 그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철무종의 신력은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위에 있었 다. 송충이 같은 눈썹을 크게 찌푸리며 인상을 썼지만 큰 타격을 입 지 않은 듯 연이어 다른 일 권을 내지른 것이다. 점이난 무인은 예상치 못했던 일격에 헛바람을 들이키며 재빨 리 허리를 낮췄다. 부웅, 하는 소리와 함께 철무종의 우악스러운 주먹이 그의 머리 를 스쳐 지나갔다. 제대로 맞았다면 아무리 내공을 익혔다 하더라 도 적지 않은 부상을 입었을 역도(力度)가 담겨진 주먹이었다. 가까스로 철무종의 공격을 파해낸 무인은 부아가 치밀어 올랐 다. 지나치게 방심한 탓에 하마터면 크나큰 망신을 당할 뻔했던 것 이다. 그는 이를 갈아붙이며 한층 더 내력을 실은 일 권을 내뻗었다. 권에서는 이는 풍압만으로도 인상이 절로 찌푸려질 정도의 공격 이었다. 철무종은 범상치 않은 상대의 일격에 이번에는 감히 마주 주먹 을 부딪칠 생각을 하지 못하고 팔을 휘둘러 막아내려 했다. 하지만 철무종이 익힌 권각술은 삼류에 불과한 것. 다향한 변화를 내포한 무사의 일 권을 쉽게 막아내기란 애초부 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점이 난 무인의 일 권은 허공에서 원을 그리듯 변화를 만들어내 철무종의 방어를 한쪽으로 흘려보냈다. 그리고 정확히 목표했던 가슴을 가격했다. 퍼억! 가죽 북을 맨손으로 때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철무종의 거구가 뒤쪽으로 튕기듯 밀려났다. 안 그래도 가무잡잡했던 그의 안색이 시커멓게 죽었다. "쿨럭!" 가슴을 부여잡은 채, 비틀거리는 철무종. 그의 입에서는 한 사발은 족히 됨직한 피가 기침과 함께 튀어나 왔다. 무인의 권력에 내상을 입은 것이다. 압도적인 실력 차는 명확히 드러났다. 하지만 철무종의 두 눈만큼은 여전히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크크크, 그런 솜뭉치 같은 주먹을 가지고 큰소리 쳐 댔던 것이 더냐? 주먹질이 그 모양이니 패종회에 빌붙어 구걸하지 않으면 대 낮에도 나다기기 쉽지 않겠지." 피를 줄줄 게워내면서도 철무종은 상대를 비웃었다. 이미 죽음 을 각오한 마당이었기에 이 정도의 부상은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었 던 것이다. "자라 같은 놈이 어딜 감히!" 점이 난 무인은 수치에 얼굴을 무들이며 다시금 신형을 날렸다. 잔뜩 끌어 모은 내력이 그의 우수에 집중이 됨에 따라 웅웅거리는 바람 소리가 일 정도였다. 가히 아름드리 나무를 산산조각을 내고도 남을 법한 경력이 모였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점이 난 무인은 그와 같은 일 권을 내뻗어 철무종을 죽이 고자 하는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옆구리를 파고드는 검극을 피해내야만 했기 때문이다. 쾌속하고 깨끗한 일 검. 평창 일대에서 이름깨나 알려졌다는 검문의 제자다운 솜씨였다. "흥! 머두에 눈이 뒤집힌 놈 아니랄까봐 비겁한 수작을 피우는 구나!" 격전에 끼어든 명주운을 힐난하는 말이었다. "수적 우세는 당신들 쪽이 더한 게 아니던가?" 명주운은 조금도 굴하지 않고 당당히 맞섰다. "이 천욱동(千旭同) 어르신께서 네깟 놈들을 죽이는 데 다른 사람 손을 빌릴쏘냐?" 스스로를 천욱동이라 밝힌 무사는 명주운의 말을 맞받아 외쳤다. 사실 평창검문이 평창 일대에서 제법 알아준다고는 해도 학청문 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형산파와 자웅을 겨루며 호남제일을 주장 하는 학청문이었다. 이는 단순히 상권을 장악한데서 비롯한 금력(金力)만을 내세운 것이 아니었다. 호시탐탐 동정호 일대의 상권을 노리는 수많은 세 력들을 물리쳐온 학청문이었기에 그 실력에도 자신감이 있었던 것 이다. 따라서 천욱동에게 있어 평창검문의 제자 따위가 안중에 들어올 리 없었다. 그는 단발마의 기합성과 함께 양 주먹을 번갈아 내뻗으며 명주 운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기세가 사나운 것을 확인한 명주운은 욕심을 부리지 않고 침 착하게 검으로 문호를 지켰다. 천욱동이 자세를 잔뜩 낮춘 채, 좌권을 뻗었다. 명주운은 신형을 뒤로 뽑아 거리를 확보했다. 동시에 검신을 지 면과 수평으로 유지하며 날카롭게 천욱동의 복부를 찔러갔다. 요혈을 목표로 하지 않고 넓은 부위를 노리는 것은 실력의 열세 를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위험을 동반한 공격은 역습의 계기를 주 기 때문이다. 고수라면 이와 같은 한 수만으로도 명주운의 성품과 기초의 충 실함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천욱동은 날카롭게 뻗어오는 검극을 침착하게 바라보며 내뻗은 주먹을 펼쳤다. 이어 펼펴진 그의 장이 명주운의 검신을 강하게 때렸다. 나아가는 힘과 수직으로 때려진 힘을 이기지 못하고 튕겨지는 검신. 검신을 때린 힘은 사뭇 대단하여 명주운의 검은 긴 호를 그리며 밀렸다. 천욱동은 상대의 내력이 일천함에 저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명주운은 애초부터 이와 같은 상황을 노리고 있었다. 검이 회전하는 방향과 함께 그의 신형이 같이 돌고, 한쪽 다리를 축으로 삼아 다른 쪽 다리가 들렸다. 들린 다리의 무릎이 펴지며 천욱동을 향해 강하게 뻗어졌다. 평창검문이 자랑하는 선풍회류각(旋風回流脚)의 한 수였다. 평창검문은 예로부터 체술과 검술의 조화로 이름이 높았다. 그 렇기에 일정 경지를 벗어나 검도의 극에 도달하는 고수의 숫자는 적 었지만 검이 가지는 한계를 보안, 극복하는 체술의 효용만큼은 여 러 고수들에게 인정을 받아왔던 것이다. 방금 전 명주운의 한 수는 그와 같은 특유의 평창검문 무공을 극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천욱동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예기치 못한 공격의 날카로움에 놀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을 그가 아니었다. 상대의 다리에 실린 역도를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허리 를 깊이 숙였다. 그리고는 자세를 낮춘 그대로 명주운의 다리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천욱동은 어깨로 명주운의 다리를 밀어 올리려 들었고, 명주운 은 무릎을 접으며 재차 검을 앞으로 찔렀다. 기민한 명주운의 임기응변은 칭찬을 받아 마땅하나 천욱동의 무 공 싶력은 또래의 젊은이들 중에서는 결코 낮은 것이 아니었다. 한쪽 다리를 든 채 무리한 동작을 속에서 찌른 일 검에 힘이 실 리기는 힘든 법. 천욱동은 가볍게 검신을 때려 튕겨낸 후, 기세를 몰아 명주운의 가슴을 향해 일 권을 내질렀다. 퍼억! 둔탁한 음향과 함께 뒤로 튕겨지는 명주운. 그는 두 개의 탁자를 뒤집어 엎고서야 걸음을 멈춰 세울 수 있었 다. "크흐흐흐, 이제야 주제를 알겠느냐?" 단 몇 식을 교환하자마자 승기를 확고히 굳힌 천욱동의 입에서 득의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 정도로 우리의 의기를 꺾기에는 어림도 없다." 명주운 역시 철무종같이 천욱동의 공격을 비웃었다. 입가에 흐 르는 피를 가볍게 닦는 그의 내상은 가볍지 않아 보였으나 얼굴은 웃고 있었던 것이다. "이 쳐 죽일 놈들이 정말이지 백발마신의 흉내를 내는 데 여념이 없구나!" "크흐흐흐, 강호에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짐작이 나 하겠느냐? 너희 패종회는 정말이지 건드리지 말아야 할 분을 건 드린 거다. 조만간 뼈저리게 후회할 날이 올 거야!" 철무종이 고통 중에도 명주운의 웃음에 호응하듯 웃음을 터뜨리 며 말했다. "흥! 옥용검마...... 그 계집애처럼 생겼다는 놈을 믿고서 하는 말이더냐?" "백발마신님의 사형이시다! 말조심해라!" 명주운이 입가에서 미소를 지우고는 호통을 쳤다. "흥! 그놈의 사형제가 뭐가 대단하다고 없는 자리에서 말까지 조 심해야 한단 말이더냐? 반반한 용모로 사파연합과 마교의 마인들 에게 엉덩이를 흔들어 대며 복수를 부탁하는 그놈 따위를 무서워하 리라 생각한 것이냐?" "......!" 명주운이 위험한 상황에 빠진 것을 보며 어쩔 줄을 몰라 하던 선 주혁의 뒤통수를 때리는 한마디였다. 천욱동이 지독한 소리로 사형 을 모욕한 것이다. 원래 소매치기에 불과했던 선주혁이다. 사회의 밑바닥을 기었고 범죄자들 사이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잡범에 불과했던 만큼 자신 을 모욕하는 것에는 사실 별다른 화도 나지 않았다. 죽음에 가까운 경험을 자주해 인간적으로 조금은 성숙한 뒤, 자 제력이 증가된 이후로는 더욱 유연하게 대처할 자신까지 있었다. 하지만 사형에 관한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선주혁에게 있 어서는 유일한 가족이랄 수 있는 남지학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다른 모든 것은 어떻게 해서라도 참을 수 있으나, 사형을 모욕하는 것만큼은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비록 이 자리에서 다시 죽어야 한다 해도 그것만큼은 참을 수 없는 문제였다. 적어도 선주혁에게 있어서는 그랬다. "별...... 개 같은 자식이 감히 남 대협을 모욕하다니!" 선주혁의 입에서 노갈이 터져 나오자 일순간 학청문의 무인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방금 전까지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살살거 리던 자가 갑작스레 욕설을 퍼붓고 나선 것에 대해 쉽게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네놈들 모두를 죽여 남 대협을 모욕하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 겠다!" 비록 내력을 거의 상실한 상태라지만 이미 수많은 절대의 고수 들을 상대해 온 경험이 있는 선주혁이었다. 따라서 그가 내뿜는 위 압감만큼은 범상한 것이 아니었다. 천욱동을 비롯한 학청문도들은 저도 모르게 움찔해 선주혁을 새 삼스러운 눈으로 살폈다. 밋밋한 태양혈, 정광이 엿보이지 않는 두 눈. 아무리 봐도 자신들이 위축되어야 할 고수처럼은 보이지 않았 다. 아니, 곱상한 얼굴에 여린 체형을 보아서는 명주운보다 못해 보 이는 자였다 "오늘 무슨 날인가? 이것들이 단체로 미쳐 날뛰다니......!" 천욱동이 인상을 팍 구기며 선주혁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너!" 선주혁이 손가락으로 천욱동을 가리켰다. "너부터 죽여주마!" "별 미친!" 천욱동은 두 눈에서 살광을 쏟아내며 선주혁을 향해 신형을 날 렸다. 쾌속한 신법으로 다가온 천욱동은 일 권에 선주혁을 때려죽 일 기세였다. 비록 내력이 부족해 제대로 신법을 전개하기조차 힘든 선주혁이 었으나, 북두연환장에 익어 있는 그의 동체시력만큼은 여전했다. 선주혁은 명확하게 천욱동의 공격을 살피며 침착하게 손을 내밀 었다. 그가 운용하는 초식은 화무난천장. 힘이 부족한 지금의 선주혁에게 있어서는 최상의 선택이었다. 경력을 잔뜩 실은 줌ㄱ이 상대의 손에 닿자 묘하게 방향을 틀어 허공을 치게 되자, 천욱동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이 지나치게 흥분한 나머지 제대로 주먹을 뻗지 못한 게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그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며 다시 일 권을 발출했다. 눈앞에 상대의 손바닥이 어른거리더니 또 다시 주먹은 목표를 잃고 허공만을 때릴 뿐이었다. "놈이 사술을 쓴다!" 천욱동의 외침에 학청문의 무인들이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그럼, 그렇지! 간교한 수작을 부린다 싶었더니 역시 흑도의 놈 이었구나!" "흥! 평창검문의 제자가 흑도의 무리와 어울리다니!" 학청문의 무인들은 각각 양손에 내력을 집중했다. 상대가 사술 을 쓰는 이상, 합공을 한다 해도 비난을 받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 다. 선주혁은 마음이 급해였다. 사실상 지금의 몸 상태로는 천욱동 의 공격을 흘려보내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진기의 유통이 원할하 지 않고, 미약한지라 무공을 펼치기에는 무리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좋지 않은 상황 속에서도 그의 두 눈만은 활활 타올랐다. 다른 자들이 방해하기 전에 이 천욱동이라는 자만은 반드시 죽이고 말겠다는 의지 때문이었다. 터무니없는 말로 사형을 모욕한 이상, 그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하고픈 그였다. 만약 학청문의 다른 무인들이 끼어들 틈을 준다면 대가를 치르 게 하기는커녕 외려 자신이 죽음을 맞이하는 게 우선이 될 것이 분 명했다. 다급한 마음에 선주혁은 초식을 전환, 최선을 다해 북두연환장 을 전개하고자 했다. 천욱동의 일 권을 흘려보냄과 공시에 최대의 속도로 반격을 시 도한 것이다. 북두연환장의 기원은 변검공에 있었다. 연 노인이 미미한 진기를 운용, 변검의 신묘한 기술을 사용하는 것에 착안한 것이 바로 북두연환장. 그 후,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다지만 지금은 외려 초기로 역행 해 최소한의 진기를 이용한 초식의 전개를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 선주혁의 일 장은 범인의 안력을 벗어날 정도로 쾌속하게 천욱 동을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천욱동은 범인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 무공을 익혀온 무 인인 것이다. 그는 팔꿈치를 중심으로 하박을 회전시켜 선주혁의 장공(掌功)을 손쉽게 차단했다. 연이어지는 공격 역시 같은 방식으로 봉쇄되었다. 진기의 흐름이 이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선주혁에게 더 이상의 연환장은 무리였다. 선주혁이 머뭇거리는 사이, 이번에는 천욱동의 역습이 이어졌다. 바위라도 깨부술 듯한 위력이 담긴 천욱동의 권격이 선주혁의 가슴을 가격했다. 타격의 순간. 한 모금의 호흡, 그리고 작은 진기가 선주혁의 가슴에 모였다. 내상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그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었다. 퍼억, 하는 둔탁한 음향이 객잔에 울려 퍼졌다. 선주혁의 허리가 굽어지고 그의 신형이 부웅 떠올랐다. 이어 형편없는 몰골로 나뒹구는 선주혁. 호흡이 턱하니 멎는 듯한 아찔한 통증에 하마터면 몰골사납게 비명이라도 지를 뻔했다. 하지만 땅바닥에 널브러진 선주혁의 표정은 어둡지만은 않았다. 통증보다 강렬한 어떤 느낌이 그를 사로잡은 것이다. 만년음양초로 인해 변화를 겪은 자신의 신체는 미약한 진기만으 로도 훌륭한 효용을 드러냈다. 지독한 통증과 혈맥의 충격 속에서 도 중산은 모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상대의 경력이 주먹을 타고 신체로 들어오는 과정 속에서 극히 미약하지만 진기를 흡수된 것이다. 지금의 선주혁에게는 천욱동이 버겁기만 한 상대였으나, 과거 그가 겨뤄온 절대의 영역에 속하는 고수들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그 압도적인 격차는 결과에서 큰 차이를 가져왔다. 선주혁은 지금과 같이 내력이 부족한 와중에도 충격으로 인해 내부에 타격을 입는 게 아니라 그 힘의 일부를 흡수할 수 있다는 사 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물론 이전에도 이런 현상을 경험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의미가 크게 달랐다. 상대가 어떻게 진기를 운용하는지 제대로 파악조차 못했음에도 진기의 미미한 흡수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 문이다. 진기의 운용을 파악했을 때와 흡수하는 양은 크게 달랐지 만, 지금의 선주혁에게 있어서는 가뭄의 단비와 같이 반갑기만 한 깨달음이었다. 이는 선주혁 자신이 가졌던 막대한 내력에 비해 천욱동의 공격 에 담긴 경력은 미미할 따름이었고, 너무나도 거대한 흡성대법이라 는 그릇이기에 그 효력이 발휘된 것이다. 사실 천욱동의 내력이 진정한 고수급에 이르렀다면 이와 같은 흡수는 치명적인 충격이 되어 선주혁을 즉사하게 했을 것이다. '잘 하면......!' 두 팔에 힘을 주어 몸을 일으키는 선주혁의 두 눈이 빛났다. 절 망에 가까운 상황에서 활로를 찾았기 때문이다. 한편 사술이라는 말에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던 학청문도들은 다시금 한 걸음 물러섰다. 천욱동의 일 권에 상대가 나뒁구는 모습 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가 여유 있게 상대할 수 있다면 굳이 합공 이라는 볼썽사나운 꼴을 보일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약간의 탈진이 느껴질 정도로 전력을 다한 일 권에 적중 당하고 도 상대가 몸을 일으키자 천욱동은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제법 뼈대가 굵은 놈이로구나!" 이어 코웃음을 친 그는 다시금 빠르게 선주혁을 향해 다가서며 진각을 밟았다. 팽이처럼 회전하는 허리의 반동.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쏘아지는 일 권. 내력이 가득 실린 천욱동의 주먹이 다시금 선주혁의 복부에 깊 숙이 꽂혔다. "큭!" 이번에는 신음성을 참을 수 없는 선주혁이었다. 앞에 비해 더욱 위맹한 권력은 그의 신형을 다시 한 번 허공에 띄웠다. 무려 일 장을 날아가 뒤로 구르는 선주혁. 충격이 더한 탓인지 고개를 드는 그의 입가에는 실낱같은 혈선 이 흐르고 있었다. '좋아! 해볼 만해!' 선주혁은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의 통증을 참으며 다시 몸을 일 으켰다. "크흐...... 그런 솜 주먹을 가지고 감히 남 대협을 욕보였단 말 이지?" 이것으로 벌써 세 번째. 천욱동은 오늘 연이어 공격에 성공을 하고도 외려 무시당하는 중이었다. "뚫린 입이라고 말은 잘 하는구나!" 천욱동은 선주혁이 채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주먹을 날렸다. 노 기충천한 그의 주먹이 연달아 허공을 갈랐다. 퍼억, 퍽, 퍽! 연충삼권(連衝三拳). 평소 천욱동이 자랑하는 절기가 펼쳐졌다. 그는 평소 자신의 연 충삼권에 적중당한다면 코끼리라 해도 즉사할 것이라 떠들 정도였 다. 주먹 끝에서 전해지는 짜릿한 타격감에 천욱동은 만족스러운 표 정을 지었다. 피륙으로 만들어진 인간이라면 이런 공격을 맨몸으로 받아낸다 는 것은 불가능한 일. 이번에야말로 이 반백발의 미친놈을 황천으로 보냈다고 생각한 것이다. 과연 상대는 객잔의 바닥에 길게 누운 채로 꼼짝도 못했다. "한 형!" 명주운이 안타깝게 선주혁을 부르고, 철무종도 긴 한숨을 쉬었 다. 일은 자신이 벌렸건만 애꿎은 젊은이가 먼저 죽게 된 것이다. 명주운이 이를 악물고 검을 고쳐 쥐는 순간이었다. 이번에야말로 완전히 죽었다고 생각했던 선주혁의 몸이 꿈틀거 렸다. "한 형!" 이전과는 달리 반가운 마음에 터져 나온 명주운의 외침이었다. 선주혁이 다시 일어서기 시작했다. 충혈 된 두 눈은 부릅뜬 채였고, 피가 철철 넘쳐흐르는 입가에는 기묘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그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섬뜩한 느낌이 들기에 충분했다. "어, 어떻게......?" 천욱동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자신의 주먹과 선주혁을 번 갈아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의 공격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내 력을 충실히 했고, 초식도 정확했다. 공격은 빠르고 위맹했으며, 정권에서 전해져 온 충격은 그 효과 를 짐작케 했다.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내력을 지닌 자라 해도 그와 같은 연격에 당하면 즉사를 면치 못할 것이 분명했다. 한데 내공을 익힌 흔적조차 없는 자가 제대로 전개된 연충삼격 에 적중되고도 멀쩡히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도 입가에 웃음을 머 금고 말이다 '철포삼? 그럴 리가......?' 철포삼은 외문기공에 속한다. 자신이 전개한 연충삼격은 내가중수법. 피부와 뼈를 단련해 외부의 충격을 차단할 수는 있어도 내장에 전해지는 강렬한 힘을 견딜 수는 없었다. '설마, 지닌 내공을 감출 정도의 고수라는 말인가? 말도 안 돼!' 익힌 내공을 감출 정도의 경지에 오른 고수가 자신의 공격에 저 렇듯 속수무책일 리는 없었다. "크크, 이거야 원! 어린아이 주먹이라 해도 이거보다는 낫겠다. 자, 좀 더 제대로 해보는 게 어때? 혹시 내심으로는 남 대협을 두려 워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그래서 나중에 봐달라는 식으로 손속 에 사정을 두고 말이야." 천욱동이 혼란스러워 하는 동안, 선주혁이 내뱉은 말이었다. "무, 무슨 소리?" 천욱동이 얼구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절대 그런 게 아니야." 천욱동은 고개를 돌려 동문들에게 해명했다. 하지만 그는 느낄 수 있었다. 동문들 중 몇몇의 시선에 담겨진 의심을...... 그들의 시선은 마치 문책을 해오는 듯했다. 설마하니 후환이 두 려원 겉으로만 요란하게 굴며 상대를 배려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듯했다. 늘 무공에 자부심을 보이던 천욱동이었다. 한데 연이어 세 번이나 그의 공격을 맞고도 벌떡벌떡 일어서고 있으니 충분히 의심을 살 만도 했던 것이다. "그럼 이번에는 제대로 해볼 텐가?" 선주혁은 더 해보라는 식으로 아예 양팔을 늘어뜨려 방어 자세 조차 취하지 않았다. 천욱동은 동료들의 시선을 따갑게 느끼며 다시금 공격을 감행했다. 체중을 실어 몸을 앞쪽으로 기울였다. 진각이라기에는 보폭이 극단적으로 잛았다. 그럼에도 강렬한 힘 이 실렸기에 내딛은 발밑의 청석이 비명을 지를 정도였다. 청석판 과 청석판 사이에서 먼지가 피어오르고, 그 발을 중심으로 천욱동 의 신형이 팽이처럼 회전했다. 앞서 명주운이 보여준 선풍회류각을 재연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맹렬한 회전 이후 채찍처럼 휘둘러지는 것은 다리가 아 니라 천욱동의 장이었다. "피하시오!" 장력의 위세를 보기만 해도 흉험해 명주운은 저도 모르게 경고 성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선주혁의 신형은 객잔의 한 쪽 벽면에 처박히고 있었다. 쿠웅, 하는 소리와 함께 창틀의 먼지가 피어올랐다. 이미 내상을 입은 사람이 저런 충격을 버텨낼 리 없었다. "지독한!" 분노한 명주운이 억지로 진기를 끌어올리는 그 순간이었다. "명 형은...... 잠시 기다리시오. 저...... 놈은 소생의 몫이니까." 힘에 겨운, 하지만 차가운 음성이 검은 곧추세운 명주운을 멈추 게 만들었다. 명주운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즉사했음을 확신했던 선주혁이 다시금 일어서 있었던 것이다. "한 형?" "이, 이럴 수가......!" 누구보다 놀란 것은 천욱동이었다. 방금 전의 일 장에는 필생의 공력이 실려 있었다. 팔에 힘이 빠져 일순 회복이 안 될 정도였던 것이다. 한데 그와 같은 장력에 적중을 당하고 또 일어선 것이다. 더구나 상대는 붉게 물든 치아를 드러내고 웃는 중이었다. 두 눈 에서는 여전히 진득한 살기를 쏟아내는 채로 상대가 말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넌 오늘 죽는다!" 천욱동은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분명히 자신의 상대 가 될 리 없는 자였다. 그럼에도 두려운 감정이 피어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소름끼치는 살기 때문인지, 자신의 공격이 무용하기 때문인지는 명확히는 몰랐 다. 하지만 정말 자신이 오늘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잠시나마 그의 정서를 지배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익......!" 그는 애써 불길한 감정을 몰아내기 위해 어금니를 악물었다. 이어 다시금 상대를 향해 달려갔다. 약간의 탈진증세를 보이고 있건만 내력을 억지로 끌어 모으고, 묵직한 일 권을 상대의 복부에 꽂았다. 선죽혁의 신형이 뒤로 튕겨저 다시금 벽을 흔들고, 반탄력에 의 해 튕겨져 나왔다. 천욱동은 튕겨져 나오는 선주혁의 가슴을 다시금 가격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선주혁의 우측으로 돌아 순식간에 그의 뒤에 이른 천욱동의 일 권이 또다시 등을 맹타한 것이다. 짚으로 만들어진 허수아비처럼 맥없이 튕겨진 선주혁의 신형이 학청문도들의 앞에 떨어졌다. 그러나 다시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일어서는 선주혁. 그 모습은 마치 충격이 심하면 심할수록 더 멀쩡해지는 것 같아, 보는 이로 하여금 기이한 느낌이 들게 했다. "크흐흐흐......! 다 죽여주마!" 몸을 일으킨 선주혁은 학청문도들의 면면을 훑어보며 나직히 말 했다. 학청문도들은 저마다 움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주혁의 모습 이 평소 상상해 오던 악귀의 그것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담이 작은 한 명은 저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서기까지 했다. 그만큼 선주혁에게서 위험한 기세가 흘렀던 것이다. "천사제! 지금 장난하자는 건가?" 위축된 학청문도 중, 코끝이 화살촉처럼 뻗은 한 무인이 선주혁 의 등 뒤에 서 있는 천욱동에게 호통을 질렀다. "증(曾) 사형, 그게 아니라......" 천욱동은 잔뜩 억울한 표정이었다. 사형인 증배량(曾陪良)이 왜 저리 말하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일부러 손속에 사정 을 두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평소 사이가 좋다 말할 수 없는 증배량이었다. 자신이 조만간 증 배량을 능가하게 될 것이라고 떠들고 다녔기 때문이다. 그 말을 전 해 들어 앙심을 품고 이 기회에 자신을 망신주려는 것이 분명했다. "됐네, 세인들이 학청문을 어찌 여기겠는가? 사제는 물러나 있게!" 증배량이 선주혁을 향해 성큼 나서면 말했다. 마침 천욱동을 향해 돌아서던 선주혁이 몸을 멈춰 세웠다. 그는 느릿하게 고개를 돌리며 증배량을 향해 다시 입을 당겨 웃 었다. "크흐흐흐, 좋아! 어차피 오늘 다 죽여줄 테니 누구든 덤벼라." 이제는 그의 눈빛에서 광기(狂氣)마저 엿보이는 듯했다. 증배량은 그제야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사제가 일부러 손속에 사정을 둔 것이 아님을...... '이놈, 위험하다!' 무인 특유의 직감과 경험이 위험에 대한 경종을 울렸다. 증배량은 빠르게 양손에 공력을 집중했다. 소맷자락이 거칠게 펄럭이고 그의 양손에는 흐릿하지만 안개와 같은 기운이 맺혔다. 비록 그 성취가 얕기는 해도 증배량이 진길르 형상화시키는 초보적 경지에 올랐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는 단면이었다. 증배량은 강하게 진각을 밟아갔다. 선주혁와 벌어져 있던 일 장여의 공간을 순식간에 압축해 들어 간 증배량. 천욱동과는 비할 바 없는 속도와 위력으로 연충삼권이 전개되었다. 퍼억, 퍽, 퍽! 미처 몸을 뒤쪽으로 튕기기도 전에 삼 권을 고스란히 받아들인 선주혁. 마지막 일 권이 몸에 적중되고서야 그의 신형이 뒤쪽으로 튕겨 졌고, 그곳에는 천욱동이 기다리고 있었다. 천욱동은 이데로 사형에게 모든 공로를 넘길 수는 없다고 생각 했다. 그는 날아오는 선주혁의 명문혈을 노리고 필살의 일 장을 뻗 었다. 퍼억! 정확한 가격. 앞과는 달리 요혈(要穴)에 가해진 일 장이니 즉사는 필연적인 결 과일 터. 허리를 뒤로 꺾고 앞으로 튕겨지는 선주혁의 입에서 뿜어진 선 혈이 일순간 붉은 안개를 만들어 낼 정도였다. 그의 신형은 맥없이 다시 증배량을 향해 날아가는 중이었다. 선주혁의 상태가 저러함에도 증배량은 가슴 갚은 곳에서 느껴지 는 묵직한 불안감을 지울 수 없었다. 죽을 기색을 보이는 상대에게 외려 공포심이 느껴지기에 그는 움직여야만 했다. 주먹을 내뻗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임전 중에서 평점심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아는 그였다. 그러나 척추를 타고 흐르는 강렬한 긴박감은 그를 사정없이 한 방향으로 내몰고 있었다. 막 쓰러지기 전의 선주혁을 향해 증배량은 미친 듯 주먹을 날렸다. 마치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장 자신이 죽을 것처럼, 주먹을 뻗 고, 또 뻗었다. 이성을 상실한 채, 공격을 감행하는 것은 증배량뿐만이 아니었 다. 어느새 다가온 천욱동 역시 선주혁을 향해 무차별적인 공세를 펼쳤다. 평소 견원지간이던 사형제가 마치 한 마음이라도 된 듯 호흡을 맞추는 모습에 다른 학청문도들은 기이하다는 생각까지 했다. 두 사람의 연이은 합공에 선주혁은 쓰러질 틈조차 갖지 못하고 있었다. "타합!" "이런 치사한 놈들!" 분노에 찬 기합성과 불같은 호통은 각각 명주운과 철무종의 입 에서 터져 나왔다. 이미 큰 부상을 입은 상대에게의 협공이었기에 그들은 분노치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선주혁을 돕기 위해 그들이 달려들려는 순간, 미친 듯 주먹을 날 려대던 두 사람 사이에서 선주혁이 튕겨져 나왔다. 천욱동, 증배량 의 힘 사이에서 균형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명주운과 철무종은 재빨리 선주혁을 받아들었다. 어쩌면 이미 죽었을 것이라 여기면서도 더 이상 땅바닥을 나뒹구는 그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허억, 허억!" "후우......!" 천욱동과 증배량이 거친 숨을 토해내야만 했다. 천욱동의 경우는 더욱 심했다. 그는 더 이상 내력을 끌어 모으기 조차 힘든 지경인 것이다. 증배량은 호흡을 고르며 잠시 잃었던 이성을 되찾아가는 중이었 다. 안정이 되어 갈수록 증배량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제대로 된 저 항조차 못하는 상대에 대해 왜 자신이 그렇게 불안해한 것인지 스 스로 납득치 못했던 것이다. 그 순간이었다. 가뜩이나 좋지 않았던 증배량의 표정이 소태를 씹은 듯 확 하니 우르러졌다. 명주운과 철무중의 부축에 잠시 늘어져 있던 선주혁이 고개를 들고 자력(自力)으로 바로 선 것이다. 그리고 두 눈에서 푸르스름한 살광이 쏟아냈다. 이전과는 뭔가 달라진 분위기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저 독 기 만에 불과했던 그의 눈빛이었다. 서슬이 시퍼렇다고는 해도 안 광(眼光)을 내뿜지는 못했었다. 한데 지금은 분명이 살광을 뿌려대로 있었다. "두 분은 나서지 마시오. 저들을 죽이는 것은 내 몫이니!" 선주혁이 철무종과 명주운의 부축에서 벗어나며 한 말이었다. 두 사람은 그저 놀랍기만 한 시선으로 선주혁을 바라보고만 있 을 뿐이었다. 둘은 그를 말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스스로도 목숨을 걸었다지 만 선주혁의 상태는 최악으로만 보였다. 차라리 이제 그만 포기하 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도 단호한, 그리고 결연한 그의 어조에 침묵할 수밖 에 없었다. 형언키 힘든 위엄이 느껴졌던 것이다. 철무종에게 있어서는 함참이나 어렸고, 명주운에게는 또래에 불 과한 청년일 뿐이었다. 한데도 지금껏 보아온 어떤 사람보다 강렬한 무게감이 느껴져 감히 입을 열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철무종과 명주운의 침묵에 선주혁이 재차 확인을 했다. "알겠소? 무슨 일이 있어도 두 분은 이 자리를 지키시오!" 철무종은 넋이 빠진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명주운도 엉겁결에 철무종과 같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내심 묘한 생각이 들었다. 어쩐지 이와 같은 광경이 낯설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시선에 선주혁의 뒷모습이 새삼스럽게 보였다. 방금 전까 지 부툭을 받았던 그 사내의 등이 한없이 커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무거운 걸음을 옮겨 학청문의 두 무인을 향했다. "이런 괴물 같은 놈이......?" 천욱동은 지나친 탈진에 이제는 목소리마저 떨렸다. 너무나 공 력을 소진한 탓인지 내공이 이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모, 모두 다 덤벼! 천 사제의 말대로 이놈이 사술을 쓴다!" 목소리가 떨리는 것은 증배량도 마찬가지였다. 붉게 젖은 머리 카락을 늘어뜨린 채 다가오는 선주혁의 모습은 이전에 느꼈던 위험 에 대한 직감을 확신으로 바꿨던 것이다. 증배량의 말에 학청문도들이 밀물처럼 선주혁을 향했다. 그들의 손과 발에서 무차별적인 공격이 쏟아져 나왔다. 일절 반 항도 못하는 상대를 가격하며 그들은 의아했다. 이토록 무력한 자 를 상대하는데 왜 협공을 가해야 하는지 의문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그도 잠시뿐이었다. 죽을힘을 다해 공격을 퍼붓고 있음에도 상대는 쓰러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호흡이 거칠어지고, 진기의 소통이 원활하지 않을 정 도로 때려 댔건만 상대의 눈에 떠오른 살광은 짙어져만 갔다. 그리고 어느 한순간. 학청문도들은 뒤로 슬슬 물러섰다. 자신들의 공격이 망망대해에 던져진 조약돌과 같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괴물......?" 증배량, 천욱동에게 전염이라도 된 듯 공포에 젓은 작은 목소리 였다. 그 목소리에 선주혁은 다시 미소를 머금었다. "이런 실력으로 감히 남 대협을 모욕하다니......!" 시덥지 않다는 듯 말한 선주혁은 고개를 옆으로 돌려 침을 한 번 뱉었다. 피가 섞인 침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하지만 이전과는 달리 붉은색이 옅었다. 뭇매에 가까운 구타를 당했음에도 내상의 진행이 악화되지 않은 것이다. 그것에 만족했기 때문일까? 선주혁의 입가에 맺힌 미소의 색은 상대적으로 짙어졌다. 그가 입을 열었다. "이제 모두 죽어라!"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친 학청문도들 이 잔뜩 모여 있는 곳을 향한 움직임이었다. 산책 나온 듯한 걸음걸이. 하지만 그 일 보, 일 보는 천근의 무게를 담고 있었고, 위협적인 기세는 학청문도 전원을 압도했다. 그의 말. '이제 모두 죽어라' 라는 한마디에 명주운은 한 줄기 뇌전이 몸을 관통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의 머릿속에 너무나도 강렬히 남아 있는 하난의 문장이었기 때문이다. "이 미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발악처럼 학청문도 한 명이 선주력을 향해 달려 나왔다. 빠악! 소름끼치는 파열음. 그것은 두개골이 박살날 때 나는 소리였다. 그저 선주혁의 앞에 다가서기만 했을 뿐인데 머리통은 수박처럼 쪼개지고 붉은 선혈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 가운데 선주혁은 계속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정말이지 학청 문도의 눈에는 그가 사술을 부린 것만 같았다. 어찌 걸음을 옮길 뿐인데 사람의 머리가 터져 나간단 말인가. 이 는 선주혁이 수많은 구타를 당하는 동안 흡수한 내력 덕이었다. 비록 예전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진기였지만 지닌 무공을 전 개할 정도면 충분했다. 애초부터 최소의 진기를 이용해 최대의 속도를 내는 묘용을 지 닌 북두연환장이었다. 거기에 묵연수투의 기운을 더하니 그 파괴력 이 내력을 잔뜩 실은 일 장에 못지 않았다. 선주혁이 펼치는 북두연환장의 속도를 미처 쫓지 못하는 학청문 도들의 안력. 그가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는 알 수 없기에 그들은 입만을 벌리고 있었다. 아무리 공격을 퍼부어도 죽지 않는 괴이한 사술에 이어 이 제는 손도 대지 않고 머리를 날려 버리는 사술을 전개하니 죽음의 공포가 그들을 사로잡아 버린 것이다. 충혈 된 두 눈은 소리 없이 삶에 대한 갈구를 외쳤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몸을 돌려 달아나야 한다는 판단조차 쉽사 리 내리지 못하는 상태였다. 새파란 귀광을 쏟아내는 선주혁의 두 눈에 홀린 듯 머리와 몸이 마비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옭아매고 있었다. 분명이 사술에 당하고 있다 고 여겼다. 이제 모두 죽으라는 말은 주박(呪縛)이 되어 그들의 다 리를 옭아맸다. 마치 땅의 악령이 검은손을 내밀어 다리를 잡고 있 는 것만 같았다. 뒤늦게 피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을 내린 자도 있었으나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지독할 정도의 공포심은 그렇게 마력을 가진 주문이 되어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게 만들고 있었다. 빠악! 학청문도들이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은 또 다른 동문의 머리가 박 살 나는 소리를 들었을 때였다. "으...... 으아아아악!" 황망히 몸을 돌려 달아나려는 자. 그가 채 일 보를 내딛기도 전에 도주의 시도는 좌절을 맞이했다. 어느새 선주혁이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귀, 귀신......?" 마지막 한마디는 완연한 음성이 될 기회조차 없었다. 머리가 터 져나가는 소리에 묻혀 버린 것이다. 선주혁의 신형이 다시 움직인다. 그리고 객잔 내에서 폭죽이 연이어 터진다. 눈이 시릴 듯 붉은 폭죽은 화려함 속에서 객잔의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열 명에 달하는 무인들의 머리는 저절로 폭발하는 것처럼 보였 다. 선주혁의 손이 범인의 가시한계(可視限界)를 벗어나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붉은 폭죽이 화려하게 공간을 장식하자 살아남은 자는 남지학을 모욕했던 천욱동뿐이었다. "으아...... 아......!" 벌어진 입 사이로 나오는, 두려움을 담은 그만의 언어. 사형제들의 처절한 죽음은 그로 하여금 공포 이외의 감정를 허 락지 않았다. 결국 그의 몸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다리에 힘이 풀려 똑바로 서 있질 못하는 것이다. "커헉!" 숨 막히는 신음성. 밑으로 내려앉던 천욱동의 신형이 멈췄다. 이어 그의 몸이 바로 서고, 다시 위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선주혁이 그의 목을 한 손으로 틀어쥐고 위로 들어 올린 것이다. "네 입을 말헀지? 일벌백계라고? 감히 남 대협을 모욕하면 어 떻게 되는지 내 직접 보여주마." "끄어...... 어억!" 오만상을 찌푸린 채, 발버둥을 쳐 보지만 천욱동은 선주혁의 손 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한순간. 천욱동은 충혈 된 두 눈을 부릅떴다. 온몸의 진가가 한꺼번에 빠져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단전과 틀 어 쥐인 목 사이에 새로운 경락이 형성되어 외부로 분출되는 느낌 이었다. 무인이 내력을 잃는 것은 죽음 그 자체보다 두려운 바. 천욱동은 공포에 완연히 의식을 잃었다. 차라리 그에게는 편한 일이었다. 천욱동이 가진 모든 내력을 흡수한 이후 선주혁이 손을 가볍게 휘둘렀다. 마지막 피의 폭죽이 터지고, 상황은 종결되었다. 객잔 내는 어느새 텅 비어 잇었다. 어느새 손님들은 다 빠져나가 고 명주운과 철무종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피를 뒤집어쓰고 사람의 머리통을 깨부수는 선주혁과 함께 있는 것조차 범인들에게는 견디기 힘든 두려움이었던 것이다. 아무렇게난 천욱동의 시신을 던져 버린 선주혁이 붉게 젖은 몸 을 돌렸다. 철무종과 명주운 쪽으로 향하는 그. 명주운이 떨리는 음성으로 그를 불렀다. "한...... 형?" 끈적한 피가 온몸을 적시고 있기에 미간을 찌푸렸던 선주혁이 명주운을 향해 웃음 짓는다. 붉은 얼굴에 하얀 치아가 떠오른다. "내 성은 선이오, 명 형." "......!" 명주운은 두 눈을 부릅뜨고, 입을 벌린 채 그대로 서 있었다. 석 상처럼 굳은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선주혁이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간 후에야 화들짝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명주운이 철무종을 향해 다급히 외쳤다. "어, 어서...... 갑시다! 그분이오, 그분! 그분이 다시 돌아 오셨습 니다." "그분......?" 철무종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단 소생을 따라오시오, 철 대협!" 명주운은 철무종의 소맷자락을 잡아끌어 선주혁의 뒤를 쫓았다. 명주운에게 끌려가면서 철무종은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이미 도를 손에서 놓아 버린 진산이 망연자실한 표정 으로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은 철무종의 뒤를 쫓고 있었으나 감히 뒤 따를 생각은 하지 못하는 듯했다. 철무종은 그에서서 시선을 거뒀다. Chap. 5 부 활. < 1 > 명주운은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그가, 아니 그분이 돌아오신 것이다. 마음 깊은 곳에서 감동한 그분이었다. 설마...... 하는 마음은 있었다. 그럼에도 믿기 힘들었다. 분명히 그분의 사형이 장례를 치렀기 때문이다. 죽음은 기정사실이었으며 부정과 의심을 갖기에는 정황이 너무나 명확했다. 한데 한주혁이라는 사람에서 자꾸만 그분의 그림자가 보였다. 학청문의 무인들과 겨루는 과정 모두가 그분을 연상시켰다. 그것은 비슷한 용모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무리 맞아도, 온몸이 망신창이 가 되어도, 일어서고 또 일어서는 한주혁이라는 사람을 보며 백발 마신을 떠올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상대의 강함에 굴하지 않는 기개. 다수의 적을 압도하는 기백이 과거 그가 보고 들었던 백발마신 과 완벽히 일치했던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무공뿐. 천하의 절정고수들을 상대로 당당히 맞섰던 백발마신이 고작 학 청문하의 무인 몇에게 저토록 일방적으로 당할 리는 없었다. 하지만 최후의 순간. 무슨 수법을 사용했는지도 모르는 사이 적에게 죽음으로써 응징 하는 그 모습 속에서 명주운을 백발마신의 재현을 확인했다. 그랬기에 한마리로 충분했다. 자신의 성이 한이 아니라 선이라 는 말을 헀을 뿐임에도 그는 백발마신의 부활을 인정해 버린 것이 다. 의문이 나는 점은 무수했다. 그러나 명주운은 감히 묻지 못했다. 그저 백발마신이 죽음 속에 서 살아나 자신의 눈앞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감개무량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무 말도 못하고 백발마신의 뒤를 쫓았다. 그와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가슴이 뛰었다. 더없이 감격스러웠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곳은 더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철무종이 주변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들은 아직 제가 누군지에 대해 모릅니다. 또한 저희에 대해서 도 잘 모르지요. 그저 백발마신과 옥용검마를 추종하는 사람들로 여길 것이고, 그렇기에 이곳이 더 안전할 것입니다. 설마 하니 백발 마신의 묘가 있는 곳에 숨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할 테니까요." 객잔을 나와 그들이 찾아온 곳은 동정호변 천애흑묘였다. 선주 혁은 아무런 말없이 이곳으로 향했고, 명주운과 철무종이 그 뒤를 쫓아 이곳에 이른 것이다. "하긴...... 제일 쉽게 노출이 될 수 있는 장소로 여겨질 것입니다." 병주운은 공손한 태도를 유지하며 선주혁의 말에 동의를 표했 다. 등하불명의 이치기에 쉽게 납득한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안심할 상황은 아니오. 제 몸이 아직 회복되지 않은 관계로 강적이 찾아온다면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입장이니까 요." "무사하신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입니다. 게다가 이렇게 직접 뵐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니......" 철무종은 진정 감개무량한 표정이었다. 그 명서이 천화를 위진 하는 백발마신이다. 그를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도 철무종에게는 영광 그 차체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었다. 천하의 백발마신이 자신을 구하기 위해 나선 것이다. 사실 백발마신이 손을 쓴 직접적인 이유는 옥용검마 남 대협을 위 해서랄 수 있었다. 하지만 발단은 자신이었다. 자신과 친구인 진상 이 말썽을 피우지 않았다면 백발마신이 나설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죄스러웠고 또한 감사했다. 무명소졸에 불과한 자신을 위해 백발마신이 나서서 고개를 숙인 것이기에. 그 대단하다는 고수들 앞에서도 당당한 모습으로, 죽음을 불사 했던 백발마신이 아닌가? 한테 자신을 위해서 스스로를 꺾었다고 여겨지니 송구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자신이 아니었다면 천하의 백발마신이 허섭스레기 같은 학창문 도의 잡것들에게 고개를 숙일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비록 옥용검마에 대한 모욕이 빌미가 되었다고는 해도, 철무종 은 결국 자신 때문이라 여기는 것이다. 보기만 해도 끔직할 정도의 중상 속에서 백발마신은 전설처럼 회자되던 그 모습을 직접 보여줬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 포기하고도 남을 상황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유지되는 투지. 종국에는 기백만으로 상대를 압도하는 모습까지. 백발마신에 관한 수많은 소문들이 사실임을 철무종은 깊이 깨달 았다. 만약 그가 스스로의 신분을 밝히지 않았을지라도 철무종은 이 젊은이를 존경하는 마음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한지라 방금 전 철무종의 발언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 나오는 진심이랄 수 있었다. 이런 사람의 명예를 위해 목숨을 걸었 던 스스로가 자랑스러웠고, 앞으로도 이 사람을 위해서라면 무엇이 든 할 수 있을 정도의 감동을 받은 것이다. "철 대협께서 저를 높이 평가해 주시는 마음에 감사할 따름입니 다." 선주혁은 쑥스러운 듯 웃으며 철무종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했다. "대협이라니요? 가당히 않습니다, 선 대협!" 철무종은 황급히 머리를 숙이며 겸양의 모습을 보였다. 백발마 신이 삼류 낭인에 불과한 자신에게 대협이라는 호칭을 사용한다는 것 자체가 감당키 힘들었던 것이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는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 속에서도 의지 를 굽히지 않는 모습에 크게 감동받았습니다." 선주혁은 진심을 가득 담아 말했다. "그저 백발마신님의 흉내를 내 본 것에 불과합니다요." 선주혁의 칭찬에 철무종은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부끄러워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자랑스러웠다. 백발마신의 명예를 위해 목숨을 걸었고 그 장면을 본인이 직접 지켜봐 주었기 때문이다. 커다란 덩치에 걸맞지 않은 그 순박한 모습에 선주혁은 다시금 웃음을 머금었다. "아닙니다. 철 대협과 여기 명 형이야말로 저하고는 비교도 되지 않을 당당한 기백을 가지고 계신 겁니다. 하지만 저로 인해 두 분께 서 곤란한 상황에 처하셨군요."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이렇게 선 대협을 모실 수 있는 것만으로 도 저희는 만족합니다." 명주운이 손사래를 치며 나섰다. "패종회는 생각보다 훨씬 위험한 곳입니다. 제 생각에는 두 분께 서는 이만 자리를 피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신분을 모른다 해 도 저들이 노리는 것은 분명 저일 테니까요." 선주혁은 한껏 조심스레 권유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절대로 그럴 수는 없습니다." 철무종이 펄쩍 뛰며 언성을 높이다가 가슴을 부여잡았다. 내상 으로 인한 통증 탓이었다. "선 대협이 나서 주시지 않았다면 저희는 이미 죽은 목숨입니 다. 저희를 위해 선 대협께서 당하신 고충을 생각해서라도 저희는 떠날 수 없습니다." 명주운 역시 단호하게 말했다. 결연한 그의 표정은 굳고도 굳었다. 이에 선주혁은 고개를 저었다. "애초 제가 아니었으면 일어나지도 않았을 일입니다. 저로 인해 두 분께 해가 생기는 일은 바라지 않습니다." "저희 스스로 원한 일이었습니다. 저희를 비겁자로 만들지 말아 주십시오." 확고한 고집을 세우는 명주운의 말에 선주혁은 한숨을 쉬었다. "두 분께서는 마치 제가 대단한 사람인 듯 여기시고 계시지만 사 실 저는 그런 인물이 못 됩니다. 지금만 해도 그렇지 않습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지금 저들을 피해 몸을 숨기고 있는 상태입니다. 두 분의 기대대로라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히 맞서야 하지 않겠습 니까?" 선주혁의 말에 명주운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선 대협께선 아까 제게 말씀해 주셨지 않습니까? 용기와 만용 은 분명이 다른 것이라고! 지금의 상황에서 스스로의 안위를 살피 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저희가 부나방처럼 무조건 죽음만을 찾아드는 행동에 감동한 것이 아님을 아시지 않습니까? 실로 부족 한 저희지만 그 정도의 분별력은 있습니다. 선주혁이 씁쓸히 미소를 지었다. 사람이 순박하여 속기도 잘 하 더니 이럴 때는 영락없이 영민한 인물이었다. 뜻을 세우고 그것을 지키는 모습은 사형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그렇습니다. 무식한 제가 생각하기에도 이렇다 할 명분이 있고, 지켜야 할 것이 있을 때, 목숨을 거는 것이 중요한 거라고 생각됩니 다요. 무조건 죽겠다고 나서는 것은 멍청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요." 철무종까지 명주운의 역성을 들고 나서자 선주혁도 달리 방도가 없었다. "두 분께서 정히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제가 제안하는 부끄 러운 방편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해라니요? 그딴 놈들에게 무릎을 꿇고 비는 것만 아니라면 뭐 든 하겠습니다." "편하게 하명하십시오. 저희는 그저 선 대협의 분부에 따르겠습 니다." 철무종과 명주운이 이구동성으로 답하자 선주혁은 갑자기 두 손 을 맞잡아 포권의 자세를 취했다. "저를 용서하십시오." "......?" 명주운과 철무종이 선주혁의 갑작스러운 사과에 의아한 표정을 짓는 순간이었다. 선주혁의 손이 번개처럼 움직이더니 두 사람의 혼혈을 짚었다. 순식간에 쓰러지는 명주운과 철무종. 선주혁은 두사람을 잠시 내려다본 후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 2 > 옴짝달싹 못하는 상황 속에서 선주혁은 내력을 최대한 빨리 되찾 는데 주력했다. 간심히 무덤에서 빠져나와 다시 땅에 뭍히는 신세 가 즐거울 리 없건만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외려 이편이 안전한 상태에서 무공을 빠르게 회복할 수 있는 방 편이라 마음을 먹고 조식에 충실하고자 노력했다. 명주운과 철무종이 고집을 피우는 그때. 선주혁은 자신의 묘였던 천애흑묘를 봤다. 그리고 명주운에게 써먹었던 거짓말을 기억해 냈다. 그리고 선주혁은 자신이 했던 거짓말에서 비롯된 방법을 실제로 써먹는 중이었다. 명주운과 철무종의 혼혈을 짚은 후, 몇 개의 대혈(大穴)을 점해 그들을 가사 상태와 동일하게 만들었다. 이어 공간을 충분히 감안해 땅을 판 후 두 사람을 묻었다. 온통 검은 재투성이라 땅을 파고 덮은 흔적을 쉽게 감출 수 있었다. 가사의 상태니 산소의 소모량은 적을 터. 며칠은 너끈히 버틸 것 이었다. 넉넉한 공간을 확보해 두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염려가 되 어 속이 동정호변에서 꺾은 속이 빈 갈대 몇 개도 꽂아 두었다. 갈 대 끝의 높이를 흙과 맞쳐 두었으니 주의 깊게 살피지 않는 한 벌레 들이 들락거리는 구멍 정도로만 보일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도 땅을 파 몸을 숨겼다. 두 사람에 비해 깊이가 얕은지라 언제든 귀식대법(龜息大法)을 펼칠 준비를 했다. 고수의 기척만 느껴지면 바로 호흠을 멈춰야 했 기 때문이다. 거기에 땅의 기운을 최대한 느낀 후, 그 기운으로 몸을 감싸면 백존이 온다 해도 자신의 기척을 감출 수 있을 거라는 계산이었다. 이로써 여유를 갖고 무공을 회복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학청문도들의 권장에 담겼던 진기를 흡수하고, 특히 천욱동의 내력을 모두 자신의 것으로 만든 상황이라 진도는 더 빨랐다. 일 각 전과 일 각 후가 다를 정도였다. 선주혁은 그렇게 최선을 다해 무공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모두가 사형을 위해서였다. 사형이라면 걱정할 바가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패종회의 목 표가 된 상황이니 안심할 상황은 아니었다. 아무리 사형의 능력이 출중하다고 해도 무극삼검식을 넘어서는 경지에 이르지 않은 상태 라면 위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칫 자신의 복수를 위해 사형이 무리수라도 둔다면 큰 낭패. 그 전에 사형을 도울 방도를 찾아야만 했다. < 3 > 땅속에 스스로 묻은 지 사흘여가 지났다. 비록 땅속에 있었지 만 흙을 건너 전해지는 양기와 음기의 교차로 선주혁은 시간의 흐 름을 명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내력의 회복 속도는 눈부실 정도였다. 학청문도와 천욱동에게서 흡수한 내공이 큰 도움이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커다란 공동 (空洞)과 같던 전신 혈맥에 내력이 차오르기 시작하자 그는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이 상태로 회복이 된다면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는 데 오랜 시간 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아니, 이런 식이라면 이전의 경지를 뛰어넘는 것도 가능해 보였 다. 그것은 지하에 몸을 묻고 있는 동안 얻은 새로운 깨달음 때문이 었다. 흙에 묻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는 스스로의 내력을 회복하 는 데만 집중할 수 있었다. 모든 신경이 내공을 되찾고 몸의 상태를 살피는 것에만 몰려 있는 것이다. 내관(內觀)이 지속되는 동안 그는 기이한 점을 발견했다. 양이 많 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내력의 회복 과정 중 색다른 기운이 채내에 축적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공의 축적이란 대기를 채운 기운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 이다. 한데 그가 지금 느끼는 기운은 대기의 그것돠는 확연히 구분 되는 것이었다. 선주혁은 이 현상에 주목했다. 그리고 축기의 과정 중에 흘러들 어오는 이질적인 기운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땅의 기운, 즉 지기(地氣)였다. 온몸에 밀착된 흙을 통해 지기가 체내로 유입되고 있었던 것이다. 우주의 모든 기운이 곧 나의 기운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마교에서 구주시만 철용백을 만난 이후, 선주혁에게 확신에 가까운 깨달음이 되었다. 사물의 기운을 응용할 수 있게 되었고, 그 결과 스스로의 능력 이상을 발휘해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지금껏 선주혁은 사물의 기운을 파악, 기억해 낸 후 자신이 지닌 내공을 재구성해 그 기운을 사용해 왔다. 한데 흙에 몸을 묻고 있는 동안 지기를 체내에 흡수, 스스로의 내공으로 바꿀 수 있음을 명확히 깨달은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대기에 떠도는 기운을 흡수할 수 있다면 흙, 나무, 물 등에서도 그 기운을 담을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민간의 기공에서는 나무의 기운을 흡수하는 건강요법이 있었다. 너무나 당연하기에 따로 지각되지 않았던 부분. 하지만 그 당연한 바가 내포하는 의미는 선주혁에게 적지 않았다. 흡성대법이 천인합일의 경지에 이른 지금의 그는 전신이 기를 흡수하는 창(窓)과도 같았다. 일반의 심법이 호흡만을 통해 내공을 축척하는데 반해 흡성대법은 온몸을 축기의 창으로 사용하는 것이 다. 상대의 내공을 흡수할 수 있는 것도 이와 같은 이치에서였다. 그 이치에 따라 선주혁은 축기의 방법 자체를 달리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체감하게 된 것이다. 호흡을 통해 내력을 축적하는데 집중 하는 것이 아니라 전신을 통해 느껴지는 모든 기운을 흡수,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가장 우선한 것은 호흡을 통한 축기와 전신을 이용해 지기를 흡 수하는 것을 동시에 실행하는 것이었다. 혹시나 해서 시도해 본 바였지만 결과는 예상 외로 좋았다. 땅이 가진 기운은 결코 대기 중에 머무는 기운에 뭇지않았다. 그 기운 자체의 양은 적지 않았으나 밀도는 외려 높다 말할 수 있었다. 대기의 기는 흩어져 산제해 있었지만 대지의 기는 오랜 새월 땅이 머금고 있었으며 흙과 돌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선주혁은 쾌재를 불렀다. 지기를 흡수한 후 자신의 내공으로 바꾸는 과정이 확실한 효과 를 내는 것이다. 그동안 이상할 정도로 내공의 회복 속도가 빨라진 바에 대한 명확한 이유를 찾았다. 자신이 의식하지도 못하는바 중에서 흡성대법은 삼라만산의 기 운을 흡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죽음 가운데서 자신이 되살아날 수 있었던 것에도 이와 같은 이치는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무의식중에 행해진 심법 중에도 이 정도의 효용을 낼 진데 의식 적으로 삼라만상의 기운을 흡수하기 위해 노력을 한다면 그 결과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그렇게 가능성을 점친 선주혁은 의식을 확장시키기 시작했다. 하나가 가능하면 그와 연관된 수많은 일들이 가능해질 수 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위험성 때문에라도 그 가능성을 시험해 보기 힘 들다. 자칫 주화입마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은 달랐다. 만년음양초의 복용으로 인해 주화입마에 들 가능성이 크게 저하되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몸을 묻고 있는 흙은 지구의 일부다. 과학적으로 자세한 내용을 알지는 모하지만 지구라는 행성이 가진 에너지, 즉 자신이 체감할 수 있는 기운은 무한할 것이다. 우주까지도 필요 없었다. 지구가 가진 힘만을 흡수해서 자신의 것으로 할 수 있다면 그야말 로 무적이 될 것이다. 그렇게 희망을 안고 호흡을 통한 축기와 전신을 이용해 지기를 흡수하길 계속했다. 그러자 종국에는 마치 전신 모공이 모두 열려 기를 빨아들이는 것만 같은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체내에서 회복되는 내공의 속도는 가히 경의적이었다. 흔한 말로 솜이 물을 빨아들이는 것만 같았다. 선주혁은 몸을 회복하는 중에도 그는 끊임없이 흙의 기운을 응 용해야만 했다. 무공의 발전에 대해 고심하는 동안 백존 정도의 고 수가 인근에 온다면 자신의 기척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순간의 방심이 다시없는 화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는 계속 해 흙의 기운으로 몸을 감쌌다. '자, 잠깐!' 계속해 내기를 축적하던 선주혁은 스스로에게 놀라 외쳤다. 지 기를 흡수해 자신의 내공을 회복한 후, 그 내공을 이용해 다시 몸을 흙의 기운으로 감추는 과정이 어리석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는 불현듯 떠오른 색다른 발상을 직접 시험에 옮겼다. 지금껏 해 온 방식과 달리 대지의 기운을 체내에 흡수함과 동시 에 그 기운 그대로를 이용, 자신의 기척을 숨기는 방법을 사용 한 것이다. 그 결과가 크게 만족스럽다고 볼 수는 없었다. 아무리 밀집도가 높은 지기라지만 전신을 가릴 정도의 기를 한순간에 모아 이용하기에 는 흡수할 수 있는 양이 너무 적었다. 하지만 선주혁은 실망하지 않았다. 가능성을 찾았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계속 노력을 하고 발전시킨다면 삼라만상의 기운을 빠르게 흡수 해 이용하는 것이 가능해질 수도 있었다. 그와 같은 경지에 이른다면 말 그대로 마르지 않는 내력을 지닌 것과 다름없어질 것이다. 소진된 내력을 삼라만상에 내재된 기운으 로 신속히 보총할 수 있을 것이기에. 또한 체내의 내력을 한참이나 넘어서는 기운을 사용할 수도 있 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축적되어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게 된 내공 이 아니어도 빌려 쓸 수 있다면 말 그대로 삼라만상의 기운 자체가 자신의 것과 다름없다는 뜻이었다. 혹시 이것이 흡성대법이 말하는 진정한 천인합일의 경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선주혁을 다시금 지하에서 미소 지을 수 있 었다. Chap. 6 천 명. "거참!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야?" 짜증이 잔뜩 섞인 목소리였다. "아무리 찾기 힘든 상황이라 해도, 이 야심한 시각에 여기에 가 보라고 한 건 좀 심한 거 아닌가요?" 작은 체형에 광대뼈가 툭 튀어나온 무인은 학청문 소속임을 알 리는 무복을 입고 있었다. "장(張) 사형이 원래 좀 엉뚱한 데가 있잖아." 건장한 체격에 사각턱을 가진 학청문도 하나가 무덤덤하게 대꾸 했다. 서른 중반의 그의 표정은 말과는 다릴 귀찮은 기색이 역력했 다. "그래도 그렇지. 그놈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백발마신 때문에 쫓기는 상황인데, 그의 무덤에 오겠어요?" "꼭 그렇게 생각할 만한 일도 아니지! 사실 그렇게 생각했기 때 문에 지난 사흘간 이곳에 안 온 거잖아. 인근을 이 잡듯 뒤졌는데 놈들의 행적을 쫓을 방도가 없으니 당연히 이곳을 의심해야 할 상 황이 아니겠어?" 처진 눈에 주먹코를 한 무인 하나가 광대뼈가 튀어나오 사제에 게 말했다. "하긴, 여태 이곳에 숨어 있다가 자리를 옮겼을지도 누가 알겠 어." 무리를 이끄는 사각턱의 무인도 그제야 표정을 풀고 고개를 끄 덕였다. "그럴 리가요." "등하불명이라는 말이 있잖아. 여길 조사해서 바쁠 것도 없지." "제 생각에는 차라리 동정호를 샅샅이 뒤져보는 게 낮지 않나 싶 은데요. 워낙에 넓으니 숨을 곳도 많고......" "어허! 장 사형이 그런 생각을 못해서 여기에 가보라고 한 게 아 니잖아. 입 다물고 무슨 흔적이라도 없는지 잘 찾아봐!" 사각턱 무인의 명령에 나머지 학청문도들은 천애흑묘 인근을 둘 러보기 시작했다. 그들이 살피는 것은 천애흑묘 외곽의 숲들이었 다. 어차피 천애흑묘는 커다란 공터였다. 몸을 감출 만한 장소가 있을 리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이 각 여를 보낸 후, 학청문도들은 천애흑묘에서 물러났 다. 인기척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광대뼈가 튀어나온 작은 체구의 무인은 돌아가는 길에 그럴 줄 알았다며 계속 투덜댔다. 그의 투덜거림이 잦아들 무렵. 천애흑묘에 세 개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월광(月光) 아래의 희 미한 그림자는 명확한 인간의 형상을 갖추고 있었다. 그림자의 주인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이곳이군요." 차분함 속에 범상치 않은 위엄을 가진 여인의 음성이었다. 여인은 백의를 입고 있었다. 월광 하(下)의 백의는 다소 창백한 빛을 발했다. 재로 뒤덮인 천애흑묘 일대와 극명한 대비를 이루는 백의 위로 여인은 같은 색의 모자를 쓰고 있었다. 둥근 챙이 달린 모자 아래로 는 목까지 내려오는 면사가 드리워졌다. 면사 위로는 그녀의 작은 얼굴 윤곽만을 짐작할 수 있을 뿐, 그 용모를 알아보는 것은 불가능했다. "바닥이 더럽군요. 아가씨께서 밟으실 만한 땅이 아닌 듯합니다." 백의 여인의 옆에 서 있던 노인이 주름진 입술을 열었다. 그의 용 모는 기이하기 짝이 없어 누구라도 한 번 보면 잊기 힘들 정도였다. 기본적으로 그것은 노인이 긴 청미(靑眉)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었다. 눈꼬리까지 늘어진 푸른색의 눈썹만으로도 그에 관한 인상을 지울 수 없을 정도였던 것이다. 노인이 특이한 점은 비단 눈썹에만 있지 않았다. 당장 시선으 빼 앗는 것은 그의 청미였으나, 조금만 시간을 두고 그를 볼 수 있다면 눈썹 아래의 두 눈이 더욱 인상적인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검은 눈. 눈동자가 검은 것이 무에 특이할까냐마는 노인의 두 눈은 온통 검은색뿐이었다. 즉, 흰자위가 보이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눈을 가득 채운 검은색은 유리알처럼 번득이고 있어, 흡사 그 눈 에 비쳐지면 저주라도 걸릴 법한 불길함을 자아내고 있다. "그의 영령을 기리기 위한 흔적입니다. 더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 는군요." "하지만......!" "공손(公孫) 노(老). 더 이상은 말씀하지 말아 주세요. 이미 저는 여기에 와 있습니다." "......" 여인의 말에 공손이라는 성을 가진 흑안(黑眼)의 노인은 고개를 조아렸다. 그토록 사양을 했음에도 자신에게 존대를 하는 여인의 어조가 황공한 탓이다. 그는 감히 반박할 생각조차 못하고 그저 송 구한 마음으로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옆에 서 있는 또 다른 노인을 힐끗 봤다. 뼈다귀에 얇은 가죽을 뒤집어 씌워 놓은 것 같은 용모의 노인이 었다. 지나치게 말랐음은 물론 피부색 또한 거무죽죽해 마치 시체 가 일어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의 노인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알리는 몸짓이었다. 그제야 공손 노인은 표정을 풀며 여인에게 말했다. "그럼...... 가시죠, 아가씨." 공손 노인은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연인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얀 비단을 덧씌워 만든 신이 재로 인해 더렵혀지고 있었으나, 그녀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거대한 묘 앞에 선 그녀는 길고 고운 손가락으로 모자 아래의 면 사를 잡아 들어올렸다. 어두운 밤인지라 면사 너머로 묘의 모습을 확인해 보는 데 불편 함이 있었던 것이다. "아가씨, 이런 곳에서......" 공손 노인은 대경하여 여인을 만류하려 했다. 그녀의 용모가 세 상에 알려지는 것을 저어한 탓이다. "그 사람...... 한 번도 제 얼굴을 본 적이 없어요." "아가씨 얼굴을 봤다면 그 전에 죽었을 겁니다." 걸어 다니는 시체와 같은 노인이 그 용모와 너무나도 잘 어울리 는 음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단(檀) 노!" "......" 여인의 음성이 높아졌음에 단 씨 성을 가진 노인은 앞서 공손 노 인이 그랬던 것처럼 고개를 조아렸다. 여인은 가늘게 한숨을 쉬고는 무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사람...... 제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해 준다고 했어요." 면사를 걷어 꽃잎 같은 입술을 드러내 여인의 말은 누구를 향한 건지 알기 어려웠다. 기이한 용모의 두 노인에게인지, 허공을 향한 혼잣말인지 명확치 않았던 것이다. 모호한 대상을 향한 그녀의 말은 계속되었다. "제가 원하는 것이 그가 이토록 허망하게 죽지 않아주었으면 하 는 거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요?" 처연한 음성을 들은 두 노인의 입매가 실룩였다. 무엇인가 말을 하고픈 것을 억지로 참는 듯한 표정이었다. 특히 단 노인의 표정은 더욱 일그러진 상태였다. 여간해서는 가 슴 속에 품은 말을 참지 못하는 그인지라 말을 삼키는 것이 곤혹스 러웠던 것이다. 그러던 중 단 노인의 누런 두 눈에서 소름끼치는 살광이 쏟아져 나왔다. 그의 몸에서 폭사되어 나오는 살기에 공손 노인은 재빨리 여인 의 앞을 가로막았다. 판단 이전의 반사적인 움직임으로 여인을 보 호하는 것이다. "감히!" 단 노인의 신형이 노갈과 함께 움직였다. 땅을 박찬 것도 아니요, 무릎을 굽혔다 뛰어오른 것도 아니었다. 한데 단 노인의 신형은 유령의 움직임처럼 땅 위를 미끄러지듯 가로지르고 있었다. 비실거리는 몸은 거동조차 쉽지 않아 보였건만 단 노인이 움직이는 속도는 질풍을 무색케 했다. 묘의 뒤쪽으로 향한 단 노인은 허리를 굽힘과 동시에 마른 나뭇 가지 같은 손가락을 세워 따을 향해 뻗었다. 가느다란 손가락뼈가 모두 부러져나갈 것이 염려스러운 상황. 하지만 단 노인의 손가락은 너무도 쉽게 땅을 파고 들었다. 팔꿈치 깊이에 이르기까지 팔을 밀어 넣었던 단 노인은 허리를 세우며 팔을 뽑아냈다. 그러자 물에서 고기를 건져 올리듯 땅에서 사람의 형태를 갖춘 그림자가 튀어 올라왔다. 단 노인은 그의 멱줄을 잡아 땅에서 뽑아낸 것이다. 여인은 무의식중에 면사를 다시 드리웠고,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단 노!" 그녀의 외침은 단 노인이 땅에서 잡아 올린 자의 목을 당장 부러 뜨리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단 노인이 땅 자체를 가격해 몸을 숨긴 자를 죽이지 않은 것은 신원을 확인하기 위함일 터, 그가 상대를 알아보기 전에 이어지는 행동을 멈춰야만 했던 것이다. 사납게 살광을 쏟아내던 단 노인은 여인의 음성에 손가락을 옥 죄지 못했다. 살인을 끔찍이도 싫어하는 여인의 성품에 대해 그 역 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그를 내려주세요." 목을 분지르지 않는다고 해도 단 노인의 손아귀에 숨통을 졸리 고 있는 이상, 땅속에 숨어 있던 자는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여인은 그가 질식해 죽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특히나 여기는 그 사람의 무덤이다. 애도를 표하기 위해 온 자리 에서 새로운 죽음을 만든다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단 노인이 머뭇거리는 모습에 여인은 은은한 노기를 표출했다. 아무 미세하고 짧은 순간이었으나, 그녀의 감정 변화는 쉽사리 느낄 수 있었다. 뇌전처럼 스쳐 지나가 뼈를 시리게 하는 가공할 한기(寒氣). 현세에는 존재할 수 없는 지독할 정도의 음기(陰氣)가 그녀의 몸 에서 일순간 발출된 것이다. 단 노인은 그녀의 신분을 새삼스럽게 재인식하며 서둘러 손가락 의 힘을 풀었다. 그제야 땅속에서 잡혀 올라온 자는 땅에 내려설 수 있었다. 단 노 인이 목을 옥죄고 있었음에도 그다지 괴로워하는 모양은 아니었다. 바튼 기침도 없고, 거칠게 호흡을 이어가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그저 재빨리 손을 놀려 자신의 얼굴에 가득 묻은 흙을 털어 내는 데 집중할 뿐이었다. 창백한 달빛 아래 맨얼굴이 드러날 때, 그가 떨리는 음성으로 말 했다. "선우 아가씨!" "......!" 여인은 면사 아래의 커다란 눈을 더욱 크게 떴고, 두 명의 괴이 한 노인들 역시 크게 놀란 표정이었다. 흙 속에서 튀어나온 반백발 의 젊은 사내는 여인의 성을 정확히 불렀기 때문이다. "이럴 수가......?" 여인의 입에서 떨리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 사이 사내의 입술이 달싹였다. 선우 성의 여인에게 전음을 보 내는 것이었다. 자신의 용모가 이전과 약간 달라진 것에 대한 짧은 설명이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설명은 필요치 않았다. 선우 서으이 여인은 그의 용모가 지금보다 더 많이 변했다 해도 그를 명확히 알아볼 수 있었 다. 매일 진맥하고 그를 살펴온 그녀였다. 용모에 우선하는 그의 모든 것에 대해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가씨?" 공손 노인이 선우 성을 가진 여인에게 물었다. 여인은 함부로 진 실 된 모습을 드러낼 신분이 아니었다. 공손 노인은 그녀를 부름으 로써 그와 같은 상황을 재인식시키려는 것이었다. 선우 성의 여인은 공손 노인의 부름에 황급히 제정신을 차렸다. 지금 당장 스스로가 취해야 할 행동을 깨달은 것이다. "남창에 있을 때, 제가 치료해 줬던 환자에요. 그에게 손 댈 생각 은 하지도 마세요." 일침에 가까운 여인의 말에 공손, 단 노인의 미간에 골 깊은 주 름이 잡혔다. "하지만 이자가 흙 속에서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그게 무슨 상관이 있나요? 저분은 제 환자였어요. 죽어가는 그 를 제 손으로 살렸는데, 이제 와서 저를 만났다는 이유만으로 다시 그의 생명을 빼앗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여인은 다급함이 절실히 묻어날 정도로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아가씨께서 여기에 오신 것이 알려지면 곤란 합니다. 저희로서도 목숨을 걸고 예까지 아가씨를 모시고 온 것이 거늘......" "공손 노! 저로 하여금 극단적인 선택을 강요하지 마세요. 그의 신변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생긴다면 저는 더 이상......" 방금 전까지의 빠는 어조와는 달리 여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힘을 주었다. 결연한 그 말투만으로도 그녀의 모든 말이 진심에서 비롯된 바를 두 노인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 말씀을 하지 마십시오, 아가씨." "그렇다면 두 분도 더 이상 아무 말씀하지 말아 주세요. 오늘 제 가 이곳에 온 것 자체가 비밀이듯, 이분을 만난 사실도 비밀로 유지 하면 될 것이니까요." "이자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에요. 그는......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저를 배신하지 않을 거에요." "......" 두 노인은 침묵했다. 사람이란 그렇게 쉽게 믿을 수 없다는 사실 을 오랜 인생 경험으로 알고 있는 그들이었다. 하지만 저토록 단호한 모습을 보이는 지라 더 이상 자신들의 주 장을 펼치긴 힘들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보아온 여인이다. 여리고, 선하기만 한 모습의 그녀지만 한번 고집을 세우면 죽는 한이 있어도 그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지난날 그녀가 남창에 머문 것 역시 그와 같은 고집 때문이었다. 절대의 위엄을 가진 회주조차 그녀의 고집을 이길 수 없었던 것이다. "두 분은 잠시 자리를 피해 주세요." "그건 안 됩니다, 아가씨." "그렇습니다. 행여 이자가......" 두 노인이 발끈하듯 항변하는 것을 선우 성의 여인은 손을 들어 가로 막았다. "말씀드렸잖아요. 저분은 믿을 수 있다고!" "......" 두 노인은 또다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여인의 말대로 자리를 비켜줄 마음도 없는 듯했다. 그녀 는 자신들이 소속된 회의 미래나 다름없었다. 사소한 실수 하나로 삼백 년의 염원을 수포로 만들 수는 없는 터. 이번 일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는 의지였다. "두 분은 제 말을 존중하지 않으시는군요." 여인이 한숨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그게 아닙니다." "두 분께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저분과 단 둘이서 할 이야기가 있어요." "아가씨!" "제가 두 분께 드리는 부탁입니다." 공손 노인과 단 노인은 결국 그녀의 뜻대로 하지 않을 수 없었 다. 애포 그녀가 이곳에 왔다는 것만으로도 그녀가 한번 뜻을 세우 면 결코 양보하지 않는다는 단명이었다. 이로 인해 자신들이 회주 에게 큰 질책을 받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히에 소속된 자라면 누가 있어 그녀의 뜻을 존중하지 않 겠는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두 사람은 자리를 피했다. 그들이 공터 끝에 다다를 때까지를 기다린 후, 여인은 주변에 내 력의 막을 쳤다. 소리를 차단하는 것이다. 그녀가 끌어올린 내공의 소름끼치는 한기에 사내는 저도 모르게 몸서리쳤다. "선 공자, 살아 계셨군요." 따뜻한 음성에 사내는 그녀의 몸에서 느껴지는 막대한 음기의 정체에 대한 의문을 이어가지 못했다. 땅 속에서 그녕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그 얼마나 놀랐던가! 자신이 살아 있는 것이 그녀가 월하는 바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는 저도 모르게 몸을 감춘 기운을 흩어뜨리고 말았다. 그만큼 감정의 동요가 컸다는 뜻이었다. 자신을 죽음 가운데서 구해낸 여인의 음성이었다. 그녀가 자신 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다는 사실에 어쩌면 스스로 기척을 낸 것일 수도 있었다. 어찌되었건 그녀가 자신의 생환에 기뻐하고 있음을 알기에 사내 의 머릿속은 하얗게 비었다. 자신은 살아 있고, 그것을 여인이 기뻐해 준다. 그것으로 충분했 다. 다른 일체의 사고가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선우 아가씨께서 말씀하셨잖습니까. 제 몸을 망가뜨리지 말라 고요. 두 사람의 삶을 짊어졌다고 말입니다." "그래요. 정말이지...... 정말이지....." 목이 메는지 그녀는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사내는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픈 것인 지...... 역시 기뻤다. 사실 사내는 그녀가 자신을 이토록 염려해 줄까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또한 그녀를 애정의 대상으로 취급하기에는 다소의 부담이 있었다. 모두가 천시여기는 홍등가의 기녀들을 위해 인술을 베풀던 그녀 였다. 다시없는 박색이었으나 행동 하나, 말 한마디에 담겨진 기품 은 고결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그녀에게는 성(聖)스러움마저 느껴지는 터라 감히 애정을 논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쓰레기와 다름없던 자신의 과거를 생각하 면 더욱 그랬다. 따라서 막연한 동경이나 존경의 심정이 그녀를 향한 마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알게 되었다. 그녀와의 이별이 가져다 준 아픔 때문 이었다. 어쩌면 다시는 그녀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스스로를 얼마나 절 박하게 몰고 갔었는지 명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리움이었다. 그녀를 다시 보고 싶다는 열망이었다. 추상적인 감정의 동요는 진한 아픔이 되어 실제로 그의 가슴을 저리게 했다. 그녀를 떠올릴 때마다, 혹여 있을지 모를 끔찍한 가정 이 생각날 때마다, 그는 절절한 통증을 실제로 느낄 수 있었다. 막연한 의문이 들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사랑이라는 단어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었다. 그 의문이 확신으로 결정되어질 때쯤 사내는 알 수 있었다. 진실 된 감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눈앞의 여인이 되 리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랬기에 지금 그녀의 울먹이는 목소 리만으로도 충분히 기뻐할 수 있었다. 충만한 행복이 머리를 채우고, 가슴을 채워 온몸을 휘돌았다. 지 금의 이 순간에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선 공자." 어느새 평소의 고아하고 차분한 음성을 회복한 그녀가 사내를 불렀다. 흙에서 나온 사내, 선주혁은 아직 몽환적인 분위기에 젖어 있는 상태였다. "사실 저는 선 공자와 이렇게 마주하면 안 되는 사람이에요." 선우 아가씨의 한마디에 선주혁은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그제 야 스스로 거대한 벽을 쌓아 외면하던 사고의 연속이 이어지기 시 작했다. 부정하고 싶었지만, 절대로 그런 일이 있지 않기를 바라기에 외 면했던 사실이다. 선우 아가씨와 연결 고리를 가진 소설 속의 그녀. 방금 전 선주혁은 누구보다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만들 어 낸 지독한 한기. 세상 그 누구도 감히 만들지 못할, 절대의 영역 에 달한 그 순수한 음기를 외면하기는 힘들었다. 그가 알기로 소설 속 선우유미라는 여인만이 그런 음기를 만들 능력을 가졌다. 오직 천음지체를 타고난 그녀만이 정순하기 이를 데 없는 음기 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토록 부정하고팠건만 자신이 알고 있는 선우 아가씨가 소설 속 선우유미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이제는 인정해야만 하는 것 이다. 그럼에도 그녀의 입을 통해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더불어 삼류 소설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말도 안 되는 우연이라고 내심 외쳤다. 억지로 인연을 만들고 비비꼬는...... 그런 작위적인 상황 설정 이 아니고서야 어찌 현실에서 이런 공교로움이 만들어질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의 다른 노력은 지나친 현실성 때문데 수포로 돌아가면서 이런 악의적인 인연의 교차는 삼류소설같이 정확히 들어맞으며 상 청를 만든단 말이냐고 외쳐댔다. 선주혁은 결국 입을 열었다. "어째서...... 어째서 선우 아가씨께서는 저를 만나면 안 된다는 겁 니까?" 선우 아가씨는 즉각적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짧은 망설임을 통해 선주혁은 그녀가 쉽게 말을 하지 못하는 이 유가 대해 더욱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스멀거리는 무엇인가가 전 신을 매만지는 듯했다. 기분 나쁜 불길함을 떨쳐내는 그녀의 한마 디만을 간절히 기다렸다. "전 선 공자를 위험으로 몰고 간 그곳, 패종회에 속한 사람이에 요." "......!"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아니 분명히 알고 있는 사실일 수도 있었다. 한데 불쑥 입을 연 선우 아가씨의 말은 왠지 모르게 갑작스럽게 만 느껴졌다. 거의 덤덤한 수준으로 던져진 말이기에 더욱 그랬다. 그 말 한마디를 하기가 그녀에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충분히 짐 작할 수 있었지만 선주혁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하소연할 곳은 존재하지 않았다. 부정하고 싶은 내용 그 대로였다지만 현실은 현실이었다. 누구에게 한탄을 한단 말인가. "유미...... 아가씨의 이름인 건가요?" "......!" 선우 아가씨의 신형이 흔들렸다. 그만큼 놀란 것이리라. "그걸...... 선 공자가 어떻게......?" 그녀의 의문은 자신이 던진 질문에 대한 확답이었다. 선주혁은 당장이라도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절대로 당신이 선 우유미여서는 안 된다고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자신의 그런 행도잉 그녀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될 것인지 그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사람들이 당신을 그토록 두려워했는지 이해가 되는군요." 침착한 목소리를 회복한 선우유미의 말에 선주혁은 맥없이 대답 했다. "그들의 두려움 따위...... 전 상관하지 않습니다. 지금 제게 있어 서는 아가씨께서 선우유미라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건 없는 것 같 군요." 선주혁이 세상을 다 산 사람 같은 표저을 짓자 선우유미는 희고 긴 손을 내밀었다. 당장이라도 흰 가루가 묻어날 것 같은 그녀의 손이 선주혁의 손 을 잡았다. "......?" 선주혁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뜰 때, 그녀가 말을 이었다. "제게 있어서는 선 공자가 무사하다는 사실이 더 중요해요." "......!" 선주혁은 자신의 심장이 확대되는 느낌이었다. 거대한 심장의 박동이 그의 귀를 멍하게 만들었다. 크나큰 실망도 지독할 정도로 잔인한 인연에 대한 원망도 잊힐 정도였다. "제가 원하는 일은 무엇이든 들어 주신다고 했죠?" 선우유미는 단내가 나는 숨결이 느껴질 정도의 거리에서 물었다. "네, 아가씨께서 원하시는 일은 무엇이든......!" 넋이 빠진 것 같은 상태에서 선주혁은 대답했다. "그럼 꼭 살아남아 주세요! 무슨 일이 있어도, 아무리 위험한 일 이 닥쳐도, 지금처럼 제게 무사한 모습을 보여주세요. 그게 선 공자 께 바라는 제 소원이랍니다." "하지만......!" "저와 선 공자의 인연이 이토록 잔인하게 얽힌 것은 안타까운 일 입니다. 하지만 저 역시 제 삶이 감당해야만 하는 숙명을 거부할 수 는 없어요." "아가씨의 운명은 아가씨께서 결정하실 수 있는 겁니다. 누구도 아가씨에게 원치 않는 삶을 강요할 수는 없어요!" 선주혁은 마치 당과(糖菓)를 조르는 어린아이처럼 선우유미에게 말했다. 선우유미의 면사가 가볍게 흔들렸다. 아마도 한숨을 내쉰 것이 리라. "인녕의 끈은 하나로만 이어지는 게 아니죠. 수많은 교차롸 연결 속에 제 삶이 있습니다. 선 공자께서 원수처럼 미워하시는 적들이 제게는 한 분, 한 분 소중한 사람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아가씨의...... 아가씨의 부친이 패종회의 회주 임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부모라 해도 자식의 인생을 결 정지을 권리는 없습니다. 아가씨께서 원치 않는다면 자신의 인생을 주장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버지 때문에 제가 숙명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에요. 그분의 야 망만이 이유였다면 저는 이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거예요." 이 또한 선주혁은 알고 있었다. 선우유미는 천음지체로 태어나 세상의 혼란을 주도해야 할 자신 의 숙명을 원망하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힘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 들이 죽음을 맞이해야 함은 그녀에게 다시없을 슬픔이었다. 그럼에도 선우유미는 지금의 길을 가야만 했다. 선주혁에세 있어서는 다시없을 원수가 되어 버린 패종회였다. 무림을 혼란으로 치닫게 하고,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게 만든 패악 의 무리였다. 하지만 그녀에게 있어 패종회의 구성원은 가족이었다. 한결 같 은 염원으로 삼백여 년 동안 그녀의 가족들은 그녀의 탄생을, 그녀 의 능력을 기다려 왔다. 그들의 열망을, 그녀는 외면할 수 없었다. 태어나 자라오며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해 온 사람들이었기 에, 그녀는 그들에게 보답해야만 했다. 그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하고픈 것은 그녀만의 이기심이었 다.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쳐온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배신이었 다. 그렇기에 선우유미는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스스로 원치 않는다 해도, 평생을 두고 슬퍼하며 상처를 받 아야 할 일이라 해도, 절대로 거부할 수 없는 숙명임을 수긍하는 것 이다. "저...... 저는...... 패종회가 걷고자 하는 길을...... 지금 선우 아 가씨께서 돕고자 하는 그들을 방관할 수 없습니다." 선주혁은 어렵게, 정말로 어렵게 말했다. 잠시의 침묵. 선주혁은 느낄 수 있었다. 선우유미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그 따뜻한 시선이 느껴지는 것이다. "알고 있어요." 부드러운 음성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저는...... 선 공자께서 그 길을 계속 가 주시길 바랍니 다." "네? 그게 무슨......?" "물론 선 공자와 제가 정반대의 길을 간다는 것은 더없이 안타까 운 일입니다. 허나, 이 길을 걷는 것이 저의 숙명이라면 선 공자는 천명(天命)을 받아 수행하시는 거라고 생각해요." "천명...... 이라고요?" "그래요. 선 공자를 처음 봤던 그때, 저는 사실 별달리 한 게 없 답니다. 선 공자는 이미 스스로 회복하고 있었으니까요. 저는 그저 회복의 속도를 조금 높이는 정도의 보조만을 했을 뿐이에요. 죽음 가운데서 살아난 것은 선 공자 스스로의 능력이죠. 범인이라면 수 백 번 죽었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그 상황에서 선 공자가 다시 살아 난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시나요?" "......" "그리고 지금...... 천하가 선 공자의 죽음을 확신하고 있어요. 제 가 듣기로 선 공자의 장례를 치른 것은 선 공자의 사형이죠. 따라서 선 공자는 이번에도 완벽에 가까운 죽음의 길에서 되돌아온 거예 요. 보통의 사람이라면 그런 일이 가능할까요?" '그거야...... 제가 만년음양초를 먹고, 흡성대법을 익혀서......' 선주혁은 내심 선우유미의 가정에 대한 대답을 하고 있었다. 자 신에게 거창한 천명이니 하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 문이었다. "이처럼 선 공자의 생명력은 범인이 가질 수 있는 사고의 영역을 벗어나 있어요. 하면 왜 선 공자에게만 그런 기적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날까요? 말로는 감히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위험 속에서 왜 선 공자만 되살아날까요?" 선우유미는 선주혁이 잠시 생각하는 것을 기다렸다가 말을 이었다. "아마도 하늘이 선 공자에게 바라는 것이 있어서가 아닐까요? 선 공자가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 있고, 그 일을 행할 때까지 죽 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는 건 아닐까요? 그렇다면 그 일을 선 공자 는 천명으로 받아들이고 반드시 수행해야 할 거예요." "......!" 이쪽 세상에 넘어와 이름 깨나 날리고 있는 중이다. 남들에게 무시당하지 않을 무공을 익혔다. 상상키 힘든 부도 거머쥐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우쭐하는 심경을 잠시 느꼈을 뿐, 선주혁은 아 직까지 스스로 대단한 인물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자신이 소설이나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인 양 대단한 뜻을 세 우고 그 뜻에 매진한다고 여겨본 적도 없었다. 처음에는 그저 잘 먹고 잘 살아보겠다는 것이었다. 이어서는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지금에 와서 패종회와 정면으로 맞서는 것 역시 대의(大義)를 위 한다기보다는 공 노인의 복수가 위주일 뿐이었다. 그렇게 자신은 평범한 인물로서, 소설의 캐릭터가 차지했던 비 중을 벗어나지 않는 정도로만 생각해 왔다. 다만 조금이라도 사형 에게 도움이 될 방법을 찾고자 조금 노력해 왔을 뿐이다. 한데 선우 아가씨는 자신이 패종회의 음모를 막아야 할 천명을 가졌다고 말하는 것이다. '나 같은 놈에게 그런 막중한 임무가 주어졌다고......?' 믿기 힘든 일이었다. 원래의 선주혁이라는 인물은 주인공을 곤 경으로 몰고 가는 엑스트라에 불과했다. 지금의 자신은 그런 어리 버리한 캐릭터가 아닌 것으로 충분했다. 자신으로 인해 뒤바뀐 역 사를 조금이라도 바로 잡기 위한 노력만이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 이라 생각했다. 그 모든 것을 뒤집는 가정을 선우 아가씨가 말한 것이다. 생각해 보면 선주혁이 죽음 가운데서 살아난 것은 선우 아가씨 가 짐작조차 못하는 일 또한 포함해야만 했다. 저쪽 세상에서 한진 우라는 인간은 칼에 맞아 죽어가는 중이었다. 비록 119에 전화를 했다지만 살아날 가능성은 적다고 봐야 했다. 따라서 이쪽 세상에 넘어온 그 순간이 벌써 죽음 속에서 되살아 난 것이라 볼 수 있었다. 새로운 생의 시작 자체가 선주혁에게는 기 적이었던 것이다. 영혼이 차원을 넘어 다른 곳으로 넘어왔으니 실 로 기적이라 표현되기 충분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기적을 경험했다는 것만으로 자신이 대단한 사명을 짊 어졌다는 사실을 쉽게만 수긍하기는 힘들었다. 하늘이 따로 임무를 무여할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 자신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에는 스 스로에 대한 열등감이 너무나 컸다. 고작 해봐야 사회 밑바닥을 기 던 소매치기에 불과한 자신이었으므로. '그 모든 게...... 천명이라는 건가? 패종회를 막는 게? 그게 하늘 이 내게 준 사명이라고......?'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 뿐, 납득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인간 으로서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의 일을 겪고 또 겪었으니 천의(天意) 가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할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수차례에 걸친 기 적을 직접 체험했으니 하늘에 뜻이 있고, 그 뜻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도 믿을 수 있을 만큼은 충분히 유연한 사고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천명이라 받아들이면 선우 아가씨와는 동시에 한 하늘을 짊어질 수 없는 운명까지도 수긍해야만 하는 셈이었다. 선주혁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가장 힘든 문제였다. 그가 심히 괴로운 표정으로 일관하는 것을 보고만 있던 선우유 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선 공자께서 저희 아버지의 뜻을, 패종회가 가고자 하는 길을 막아주시길 바라고 있어요." "......!" "스스로 상세를 치유해 가는 선 공자를 보며 그렇게 기대했어요. 이 사람이라면, 이 정도의 생명력과 기이한 능력이라면...... 혹시 패종회가 걷고자 하는 패도(覇道)를 막아설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죠." "아가씨, 스스로 그들을 돕지만 않으셔도......" "아뇨. 몇 번이나 말씀드리지만 제겐 주어진 숙명을 거절할 명분 이 없어요. 누군가에게 받은 은혜란 얼마나 많은 사람이 관련되어 있는가와는 무관한 겁니다. 무림인 전체가 선 공자의 사형을 죽이 고자 덤벼든다면 선 공자께서는 무림을 위해 사형을 향해 검을 내 밀 수 있을까요?" 선우유미의 질문에 선주혁은 저도 모르게 해답에 대해 고심했다. 만약 사형이 누명을 썼다면, 사실을 밝히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 이다. 문제는 진정으로 사형이 무림인들에게 지극히 해로운 일을 했을 때였다. 그때에도 자신은 사형을 죽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를 설득하고, 악행을 저지하기 위해 노력을 할지언정 사형을 죽음으로 내몰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선주혁 자신은 이야기 속의 어떤 영웅처럼 정의를 위해 친인을 죽일 수 있는, 그런 인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가 자신의 말에 수긍하는 눈치를 보이자 선우유미는 부드럽게 말을 이어갔다. "저는 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회에 속한 분들을 도울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멈출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의 길밖에 없을 것입니 다. 그분들이 충분히 만족해 할 만큼 은혜를 갚았을 때와 불가항력 의 상황이 닥쳐 제가 도울 수 없을 때겠지요. 이는 제가 돕는다 해 도 그분들이 감당할 수 없는 상대가 나타나는 상황을 포함한 것입 니다. "구음대법을 익힌 상태에서 천음마후의 지원을 받는 백존들을 제가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선주혁의 음성에는 진한 회의가 담겨 있었다. 아직도 백존의 대다수는 멀쩡했다. 그들 중 일부만으로도 자신 은 죽음의 벼랑에 내몰렸다.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지만 부족했 다. 그들이 구음대법을 사용한다면 단 한 명의 백존을 감당하기도 힘들지도 몰랐다. 선주혁이 자신 없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당장은 어려운 일인지도 몰라요. 하지만 제가 처음 선 공 자를 뵈었을 때는 백존 중 단 한 명을 감당하지도 못했잖아요? 그 런데 지금은 어떤가요? 구음대법을 전개하지 않은 한 선 공자를 위 험에 빠뜨릴 백존은 많지 않을 거예요. 선 공자는 계속 진보하고 있 습니다. 그와 같은 진보만이 무림에 있어서는 희망이 되겠죠." "저는 사형을 도울 뿐입니다. 패종회를 막을 수 있는 실력은 오 직 사형에게만 있을 겁니다." 선주혁의 말에 선우유미는 잠시 침묵을 유지했다. 이어 그녀가 말했다. "그렇다면 최선을 다해 사형에게 도움을 주세요. 그것 또한 큰 의미를 가지는 일일 것입니다. 선 공자가 최선을 다해 주신다면, 그 래서 패종회가 무림을 향해 가진 야망을 포기할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제게 주어진 숙명 또한 진행을 멈출 수 있을 테니까요." 다소 극단적인 결론이었으며 어린아이를 달래는 듯 희망적이기 만 한 바람일 수도 있었다. 설령 자신이 사형을 도와 패종회를 저지한다 해도 그녀는 구원 받기 쉽지 않을 것임을 선주혁은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천음마후 로서 패종회를 지원하는 이상, 패종회가 몰락한다 해도 그녕에게 원한을 가진 무림인들이 그녀를 내버려둘 리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선주혁은 반박하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이 걸어야 할 길 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이상, 그녀가 제안한 방법 외에 다른 길은 없었기 때문이다. "하늘이 선 공자에게 특별한 의무를 부과했다면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겁니다. 선 공자께서는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시고 천명을 수 행하는 데에 최선을 다하시면 되지요. 그게 저를 위한 길임을 기억 해 주신다면 저로서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이번에는 선주혁이 잠시 침묵을 지키다 말을 이었다. "알겠습니다, 선우 아가씨. 제 모든 것을 걸고 아가씨께서 그곳 을 벗어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선주혁의 말에 선우유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의 간절한 염원이 느껴지는 듯했다. 그리고 그녀가 잡았던 손을 놓았다. 선주혁은 진한 아쉬움과 서 운한 감정에 아무런 반응조차 보이지 못했다.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를 기약은 없었다. 다음번에 만났을 때 는 상대방으로 인해 서로 목숨을 잃을 가능성도 있었다. 지독할 정도로 잔인한 서로의 숙명과 천명. 그것이 두 사람을 갈라놓는 순간이 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선 주혁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 어떤 장애가 있을지언정 선우 아 가씨만은 반드시 구해내고 싶었다. 간절한 열망은 굳은 결심이 되었기에 그는 두 주먹을 말아 쥐었다. 이제 패종회를 상대해야 할 이유는 차고도 넘쳤다. 그 충분한 이 유만으로도 그의 결심과 각오는 금강석보다 단단해졌다. 그 사이 선우유미는 선주혁의 손을 잡았던 고운 손을 움직여 자 신의 면사를 살짝 들어올렸다. "선우 아가씨!" 선주혁은 두 눈을 크게 뜨고 그녀의 진실 된 용모를 살폈다. 과거 남창에서 그가 보았던 선우 아가씨의 용모와는 확연히 달 랐다. 추물에 가까웠던 그녀는 간데없고 화용월태(花容月態), 경국 지색(傾國之色)이 무엇을 말하는지 증명하는 듯한 여인이 모습을 드 러낸 것이다. 선이 짙은 아미(蛾眉)는 초승달처럼 둥글고 길게 뻗어 대가(大家) 의 반열에 접어든 화공이 그려낸 듯 선명하고 아름다웠다. 보통의 사람보다 약간은 숱이 많은 두 눈썹이었으나 섬세함을 담은 미(美) 가 절로 느껴질 곡선을 만들어 내어 부드러운 느낌이었다. 두껍지도, 얇지도 않은 쌍꺼풀. 그 밑으로 드러난 서늘한 두 눈. 그것은 맑고 투명하기 이를 데 없어 세상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보석을 발견한 듯한 느낌을 줄 정도였다. 밤새 별빛을 머금었다가 무한대로 빛을 발하는 두 눈만큼은 변용(變容) 이전과 다를 바 없었 다. 하지만 지금처럼 달라진 모습과 조화를 이루니 그 아름다움만은 확연히 다른 느낌을 만들어 냈다. 단아하면서도 곧은 선을 그려 내는 코는 높지도 낮지도 않은 채 로 얼굴의 중심을 잡고 있었다. 작은 원형을 그리는 둥근 코끝이 앙 증맞으면서도 부드러운 느낌을 만들었다. 이는 코가 지나칠 정도로 바른 선을 그려 내었기에 마치 만들어진 것처럼 느껴지는 어색함을 없앴다. 다시없을 자연스러움과 확고한 중심으로 자리를 굳힌 그녀 의 코로 인해 그녀의 아름다움은 배가 되고 있었다. 선홍의 붉음을 머금은 입술은 보는 이의 숨을 막히게 할 정도였 다. 분화구를 솟구쳐 나온 용암처럼 정열적으로 붉게 물든 두 개의 꽃잎. 두 장의 잎이 포개진 모습은 폭발적인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 는 것이다. 특히 적당히 부풀어 오른 입체감은 남자에게 있어서는 도발이었다. 만약 전체적인 용모가 만들어 내는 기품과 단아함이 없었다면 당장 달려들어 입을 맞추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그녀의 입술을 성적 충동을 부추기는 역활을 했다. 곤륜산 정상의 만년설을 연상시키는 그녀의 하얀 피부는 또 어 떠한가! 일체의 흠집도 없이 그저 하얗기만 한 그녀의 피부는 매끈함과 탄력이 특출하여 보통의 인간과는 다른 구성을 가지고 있는 게 아 닌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촉촉히 젖은 듯한 느낌과 뽀송뽀송 부 드러운 듯한 느낌이 동시에 느껴지니 신비롭기까지 했다. 이처럼 완벽에 가까운 각각의 생김새는 기묘한 곡선을 그려 내 어 가슴을 설레게 하는 얼굴선과 조화를 만들어 냈다. 보통 얼굴의 특정 부위가 유달리 아름다운 경우, 다른 부위와의 부조화로 인해 어색함을 자아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선우유미는 달랐다. 모든 것이 제 위치를 지켜내며 신비 로울 정도의 조화를 이루고 있었고, 각 부분을 떠나 전체적인 용모 를 더욱 빛내는 역활에 충실한 상태였다. 가히 숨이 막힐 정도의 아름다움은 그렇게 만들어지고 있었다. 사실 그녀의 아름다움은 비현실적이었다. 그랬기에 저쪽 세상에 서 이름을 날리던 그 어떤 연예인과도 비견될 바가 아니었다. 선주혁은 할 말을 잊었다. 소설 속에서 이미 아름답다 묘사되었던 그녀의 얼굴이다. 하지만 선우유미의 실제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가히 폭력에 가까울 정도의 아름다움이었다. 이와 같은 아름다움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기적이라 는 생각뿐이었다. 경이적인 선우유미의 아름다움에 취해 있던 그의 눈에 환상처럼 벌어지는 그녀의 입술. 새하얀 치아가 고르게 드러나며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은 추악한 제 용모를 보고도 제게 크나큰 호의를 베푸셨죠. 용모 따위가 중요치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지만, 당신에게만큼 은 제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이게 제 진실 된 모습이에요. 부디...... 저를 잊지 말아 주세요." "잊지 않겠습니다. 아니, 잊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아름다운 여인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이쪽 세상에 넘어와 수많은 미인들을 봐 왔지만 선우유미에게 비할 바는 아니었다. 아름다움을 보고 충격을 느낄 정도라는 사실 을 오늘 처음 깨달은 선주혁이었기에, 그에 앞서 선우유미에 대해 진실한 마음을 고이 간직해 왔기에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죽음보 다 더한 무엇이 그를 핍박할지라도 그녀만큼은 잊을 수 없다는 사 실을...... 선주혁의 확신에 찬 대답에 선우유미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웃자, 마치 그녀의 얼굴에서 빛이 나는 듯했다. 달빛이 숨죽이고, 미태를 뽐내던 꽃들이 고개를 숙인다. 세상이 그녀의 아 름다움으로 채워지고, 바람과 풀잎, 벌레들이 찬양을 시작하는 듯 했다. 하지만 그 순간은 너무나 짧았다. 선우유미는 긴 손가락으로 잡고 있던 면사를 놓았고, 그녀의 얼 굴은 가리어졌다. "하아......!" 선주혁은 진한 아쉬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절로 한숨을 쉬었다. 그의 한숨과 동시에 두 노인이 거짓말처럼 선우유미의 곁에 나 타났다. 암영풍으로 경신공부에 있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 이 있는 선주혁조차 감탄할 정도의 신법이었다. "선 공자, 보중하세요." 선우유미는 몸을 돌렸다. "저분이 아무런 탈 없이 이곳을 벗어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어 요. 두 분께서는 제 바람을 존중해 주시길 바랍니다." 두 노인에게 선우유미가 말했다. 공손, 단 노인은 살짝 고개를 숙여 그녀를 안심시켰다. 하미잔 그대로 물러나지만은 않았다. 공손 노인의 몸에서 막강한 기세가 일었다. 범인이라면 폭압적 인 기도에 질식해 죽는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오늘 이 자리에서의 일을 발설하면 넌 죽는다!" 선주혁을 향한 강압적인 경고였다. 선주혁은 묵묵히 공손 노인의 기도를 받아냈다. 표정은 담담했 으나 그가 느끼는 압박감은 형언키조차 힘들 정도였다. 자신의 무 공이 녹록치 아니하거늘 이대로 잠시의 시간이 유지된다면 기도의 차이만으로도 내상을 입을 정도였다. "선우 아가씨! 아까의 말씀, 이 가슴에 깊이 새겨 두겠습니다." 선주혁은 악다물었던 어금니를 때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공손 노인은 자신이 쏟아낸 기세를 감당하며 말까지 하는 애송 이에게 크게 놀라는 눈치였다. 직감적으로 위험한 녀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자는 존재 자체만으로 회에 위협이 될지도 모른다. 당장 손을 써 후환을 없애 는 것이 낫다는 판단이 들었으나 선우유미의 지엄한 당부를 어길 수는 없었다. "가시죠." 선우유미는 먼저 신형을 움직였다. 공손 노인은 잠시 선주혁과 선우유미를 번갈아보며 갈등하다 결 국 그녀의 뒤를 쫓았다. 그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전음을 남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오늘 이후가 네 두 번째 삶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라, 애송이!] 지금은 그저 살려준 것에 불과하다는 뜻이었다. 선주혁은 방금 전 기세만으로도 두 노인의 신분을 짐작할 수 있 었다. 고로 노인이 허세를 부린 것이 아님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 금의 그라면, 아니 이전의 무공을 완벽하게 회복한 상태라 해도 두 노인을 감당할 수는 없음을 알고 있는 것이다. 두 노인은 과거 선주혁이 종극에게 거론한 적이 있는, 구대마존 을 확실히 뛰어넘는 세 명에 속한 막강한 고수였기 때문이다. 삼패(三覇). 패종회의 호법(護法)으로 회주인 선우단패조차 함부로 대하지 못 하는 세 명의 고수. 그들 중 공손상량(公孫祥亮)과 단무수(檀武秀)가 두 노인임을 선 주혁은 알 수 있었다. 천하제일의 내력을 지녔다고 자부했던 그조차 숨을 쉬는 게 버 거울 정도의 막강한 기세. 한 번 보면 다시 잊기 힘든 기이한 용모. 모든 정황이 삼패 중 두 명인 공손상량과 단무수를 지목하고 있 었다. 소설 속에서도 만약 이들 삼패 중 단 한 명이라도 선우단패와 한 자리에 있었다면 사형조차 패종회를 저지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여하한 사정으로 인해 사형은 선우단패와 단독으로 겨루게 되고 간 신히 승리한 것이다. 그런 삼패 중 이 인이 이 자리에 있으니 저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자신을 죽이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 어떤 기적이라 해도 이들의 손에서 벗어날 능력이 지금의 선주혁에게는 없었다. '저런 괴물들과 맞서 싸워야 한다고......?' 선우유미와의 이별을 아쉬워할 여유조차 누리지 못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고수들과의 승부가 자신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 승부에서 승리하는 것만이 선우 아가씨를 되찾아올 유일한 길이었다. 그녀가 말했다. 주어진 천명을 수행하라고. 천명의 수행만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고. 더 이상 구음대법에 대해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공손상량이나 단무수와 같은 고수가 버티는 것 역시 개의치 않 아야만 한다. 공 노인의 복수에 더해 선우 아가씨를 되찾기 위한 유일한 길이 라는 사실만이 선주혁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반드시...... 해내고야 만다!' 굳은 결의를 담은 두 주먹이 굳게 쥐어졌다. 바위를 녹이는 용암과 같은 열기를 담고 두 눈이 빛을 발했다. '혹시 아까 선우 아가씨께서 발한 음기라면...... 가능성이 있 을지도 몰라!' 선주혁은 이미 새로운 가능성을 찾은 상태. 남은 것은 후회 없이 천명을 수행하는 일 뿐. 어쩌면 다시 한 번 죽음으로 향하는 길을 걷게 될 자의 확고한 각오와 결의가 담겨진 안광은 그렇게 밤하늘을 밝히고 있었다. Chap. 7 몰 이. < 1 > "아이고, 배고파라." "그렇군요. 대체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땅에서 막 꺼내진 명주운과 철무종은 영문을 모른 채, 그저 축 처지는 몸을 가누기에 바빴다. 오랜 기간 가사 상태에서 아무것도 먹지 못한 탓이었다. 선주혁은 간략히 상황을 설명했다. 자신이 무공을 회복할 때까 지 가장 안전한 방법으로 은신했던 것임을 알려준 것이다. "그럼 이제는 예전의 무공을 회복하신 것입니까?" "거동에 불편이 없을 정도는 된 것 같소." 선주혁이 씁쓸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자신이 올라야 할 곳까지 는 아직도 멀고도 험한 여정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철무종과 명주운을 그의 표정을 보고 선주혁의 상태를 제멋대로 짐작했다. 아무리 땅 밑에서 요양을 했다지만 막강했던 과거의 무공을 되찾기에는 시간이 너무나 부족했다. 어지간한 내상 을 입었다 해도 수개월의 요상이 필요할진데 죽을 고비를 넘기고 간신히 살아남은 그가 고작 며칠을 보냈다고 해서 무공을 회복키는 어렵다고 단정한 것이다. "일단 이곳을 벗어나야 할 것 같소. 한없이 머무를 수는 없으니 말이오." 선주혁이 두 사람에게 말했다. "우선 배부터 좀 채우면 안 될까요?" 철무종이 울상을 지었다. 허기 타령을 할 때가 아니긴 했다. 하 지만 뱃속의 식충이 요동을 치는지라 도적히 참을 수가 없었던 것 이다. "그렇긴 해야겠군요." 아무리 상황이 좋지 않다고 해도 계속 굶은 채로 지낼 수는 없었 다. 선주혁 자신이야 큰 문제가 없을지라도 철무종이나 명주운에게 는 죽으라는 말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식량을 구해야 할 필요는 분명했다. 이후로도 학청문도의 추격 을 계속 피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학청문에 몇 명의 백존이 파견 되어 있는지 모르기에 필연적인 것이다. 사실 선죽혁은 또 한 차례의 깨달음과 진보로 과거의 무공을 거 의 회복한 상태였다. 하지만 다수의 백존을 상대하게 된다면 역시 승부를 장담할 수 는 없었다. 지난날의 재연 이상은 그에게 아직 무리였던 것이다. 무덤에서 조금 더 머물며 내력의 증진을 도모해 볼 생각도 해 봤 다. 그러나 한계가 드러났다. 본연의 내공을 회복하는 속도는 경이 적일 정도였다. 반명 과거 이상의 내력 증진에는 충분한 시간이 필 요했던 것이다. 예전에 비해 빠르다고는 해도 한순간 막대한 효과 를 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선주혁이 다시 무덤으로 돌아가지 않고 동정호를 벗어나기로 한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내력 증진을 한 순간에 도모할 수 없는 만큼 조금이라도 빨리 사형을 도와야 했던 것이다. 어째든 이동을 위해서 식량은 반드시 필요했고, 세 사람은 마을 로 향했다. 마을 인근에 들에서 선주혁과 철무종은 몸을 숨겼다. 마을에는 명주운 혼자 들어가기로 한 것이다. 철무종과 선주혁 두 사람 보두가 지나치게 눈에 띄는 외양를 가 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학청문도가 누에 불을 켜고 두 사람을 찾고 있으니 타인과 확연히 구분되는 두 사람이 마을에 들어서면 단박에 추격을 받게 될 것이 분명했던 것이다. 이에 명주운은 홀로 마을에 들어가 음식을 구해 돌아왔다. 아직까지 학청문도들이 흉흉한 기세를 풍기며 마을을 돌아다니 고 있었다. 하지만 검조차 들지 않은 채, 식량을 구해가는 명주운을 주목해 보는 자는 없었다. 명주운은 긴장한 가운데서도 내심 쾌재를 부르며 음식과 건량, 육포 등을 잔뜩 구입했다. 언제 다시 마을에서 식량을 구하게 될지 모를 상황이라 여유있게 준비해 놓은 것이다. 그렇게 명주운이 무사히 음식을 구해온 후, 세 사람은 개바의 거 지들이 기함을 할 정도로 열심히 배를 채웠다. 그리고 서둘러 동정호 인근을 벗어나려 길을 재촉했다. 이쪽 세상에 온 후에 상당시간 도주만을 해 온 선주혁이다. 자연 스럽게 체득한 그만의 요령으로 세 사람은 동정호변에서 꽤 먼 거 리를 무사히 올 수 있었다. 경신공부가 턱없이 부족한 철무종에 맞춰진 속도라지만, 그들에 게 대한 수색이 동정호변에만 국한되어 있을 경우를 가정하면 안심 을 해도 좋을 법한 거리를 무사히 이동해 온 것이다. 이 모든 게 무림맹과 패종회는 추적의 방법 자체가 다르다는 사 실을 선주혁은 알지 못했기에 가진 착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기 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2 > 삐이이익! 고음의 날카로운 소리가 하늘에서 들려왔다. 매의 울부짓음이었 다. 선주혁은 재촉하던 걸음을 멈춰 세우고 하늘을 바라봤다. "무슨 일이십니까, 선 대협?" 명주운이 피곤한 얼굴로 물었다. 경신 공부가 뒤떨어지는 철무 종을 배려해 천천히 달리고 있다지만, 좀처럼 쉴 틈을 갖지 못한 터 라 피로가 몸에 쌓인 것이다. 철무종은 숨을 헐떡이는데 바빠 선주혁이 멈춰 선 것에 대해 의 문을 가질 여유조차 갖지 못했다. "이 지역에 원래 매들이 저토록 많이 서식하오?" "글쎄요?" 그제야 명주운도 하늘을 바라봤다. 고성을 발했던 매는 이미 사 라져 하늘은 명주솜 같은 구름만 둥둥 떠 있을 뿐이었다. "흠......" 선주혁이 미간을 찌푸리자 명주운이 물었다. "무슨 문제가 있는 것입니까?" "매를 이용해 서로 소식을 전하는 방법이 있어서 그러오." "전서구(傳書鳩)가 아니라 전서응(傳書鷹)을 사용한다고요?" "그렇소. 흑도의 무인들은 주로 전서응을 하더군요. 자꾸만 우리 의 인근에 여러 방향으로 매가 나는 것을 보아 하니 우리의 행적이 노출된 것은 아닌가 싶소." "하지만 어떻게......?" 명주운을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덤에 숨어 있던 방법은 거의 완 벽했고, 마을에서 음식을 구해올 때도 주목을 받은 적이 없었다. 이 후 관도나 사람들이 낸 길을 피해 왔으니 누군가에게 들킬 일이 없 었던 것이다. "헉헉, 몰이 중이군요." 거친 숨결에 실린 음성의 주인은 철무종이었다. 선주혁과 명주운이 그를 바라봤다. 철무종은 허리를 숙이고 양손을 무릎에 짚은 채로 말했다. "아마도 명 동생이 마을에 들어갔을 때...... 헉헉, 저들에게 발각 된 것이 틀림...... 없을 겁니다. 우리가 몸을 숨긴 사이...... 선 대협 께서...... 헉헉, 객잔에서 보이신 신위에 대해 조사를 끝내낸 것...... 휴......" 철무종의 숨결이 점차 잦아들었다. 긴 한숨과 함께 호흡을 되돌 린 그가 조금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입니다. 범상치 않은 무공을 지닌 자를 추격할 때...... 종종 사용하는 방법으로 소재를 파악해 두고는 계속 쫓기고 있다는 사실 만을 인지시키는 겁니다. 도망가는 사람으로서는 다급해질 수밖에 없고 판단력이 저하되거나 지치게 되는 거죠. 여유 있게 추격의 대 상을 몰아 놓고 난 후에 처리를 하는 방법입니다. 원래 흑도문파에 서 자주 사용하는 추적방법이죠." 삼류무인으로서 무림을 떠돈 경험이 풍부한 철무종이었다. 이리 저리 손이 딸릴 때만 고용되는 낭인에 불과하다지만 풍부한 견문을 쌓을 수밖에 없었다. 그 경험을 통해 작금의 정세를 명확히 짚어낸 것이다. "제 실수군요.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고 확신했건만......" 명주운이 고개를 숙였다. "명 형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냥감처럼 몰리고 있 는 것도 아니고요." 선주혁이 여유 있게 미소를 지었다. "달리 생각해 두신 방책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철무종이 염려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학청문 정도 되는 거대 방파가 이와 같은 방책을 사용한다는 것은 일개 무인을 상대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둔다는 뜻이었다. 아마도 객잔의 목격자들을 통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수법으로 학청문도의 머리를 날려 버린 소문에 대해 분석했을 터, 문파의 총 력을 기울여 자신들을 척살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것이다. 당연한 일이었다. 학청문의 앞마당과 다름없는 곳에서 문도들을 도살하고 멀쩡히 살아남는다면 학청문으로서는 다시없는 망신이었기 때문이다. 철무종에게 있어서 학청문은 감히 넘보기 힘든 거대방파. 그와 같은 곳에서 총력을 기울인다는 것이 염려되지 않을 수 없 었던 것이다. 하지만 선주혁은 달랐다. 행적이 발각되는 즉시 공세를 퍼붓지 않고 지치길 기다린다는 것. 그것은 백존의 부재를 알려오는 것에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백존 중 단 한 명이라도 학청문에 남아 있다면 이런 복잡한 수단을 사용할 이유가 없었다. 저들이 생각하기에 구대마존 정도의 고수가 아니라면 그들을 감당할 고수는 거의 없을 것이기에. 결국 지금의 학청문에는 백존 수준의 고수가 없다는 뜻이었다. 이는 곧 선주혁, 자신을 위협할 만한 인물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바였다. "다른 방책이 있는 건 아닙니다." 선주혁의 무책임한 발언에 철무종의 안색에 그림자가 드리워졌 다. 아무리 백발마신이라지만 학청문이 이와 같은 방책을 사용해 위협해오는 것을 너무 가볍게 여기는 것이 우려된 탓이었다. "다만 저들이 우리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다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아니라 선 대협, 당신에 대해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하 지만 학청문은 아무리 대단한 고수일지라도 홀로 상대하기에는 너 무나 거대한 문파입니다.' 철무종은 자신감 넘치는 표정의 선주혁을 보며 내심 우려를 가 졌다. 감히 백발마신 앞에서 그의 능력에 회의를 보일 수 없었기에 속으로 삼킨 말이었다. "저들의 속셈을 알았으니 서두르지 맙시다. 더 이상 숨어 다닐 필요도 없을 것 같습니다. 선주혁의 말에 철무종과 명주운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들과 정명으로 맞서자는 말씀이십니까?" "개들에게 쫓기는 사냥감이 될 수는 없으니까요." "선 대협!" 명주운은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아무리 백발마신이라지만 학 청문도 전원과 정면으로 마주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 었던 것이다. "어차피 죽음을 각오했던 우리가 아닙니까?" 선주혁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 "우리를 짐승 다루듯 하려는 시도를 안 이상, 저들의 의도대로 움직일 수는 없지요." 선주혁의 말에 명주운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백발마신이라는 인물의 속을 짐작하는 일은 내게 있어서 정녕 무리구나......" 언제는 무덤에 땅굴을 파고 몸을 숨기더니, 이제는 짐승 취급을 당할 수 없다며 무모하게 맞서려 한다. 어찌 보면 변덕스럽다 여겨질 극단적이 양상의 행동변화였다. 하나 명주운은 그 모든 게 자신과 애초부터 그릇이 다른 인물이 기에 스스로 납득치 못하는 것이라 여겼다. 명주운이 인정한 것과는 조금 차이가 있었다. 선주혁은 나름대 로 머리를 굴리는 중인 것뿐이다. 학청문이라는 곳에 백존이 없 다면 굳이 피해 다닐 이유가 없었다. 지금의 상태라면 백존 한두 명 을 상대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한 과거의 도주 경험을 살려 저들의 포위망을 벗어나고자 한 다면 그것 또한 딱히 불가능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한데 일부러 모습을 드러내고자 함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는 비 단 행적은 노출시키고자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진정한 신분을 드 러내려는 것이다. 전적으로 사형을 위함이다. 아마도 사형이라면 복수심에 젖어 무모한 행도을 취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믿었다. 하지만 그가 타도 패종회의 기치를 걸고 그 중심에 서 있는 한 패종회의 표적이 될 것임은 자명한 사실. 선주혁은 자신이 재등장한으로써 표적을 향한 화살의 방향을 돌 리려는 것이다. 더불어 이쪽 세상에서 소문이 도는 속도를 미루어 사형에게 자 신의 생존소식을 가장 빨리 전할 방법이라는 계산도 깔려 있었다. 물론 백존의 부재를 확신하자마자 내린 결론은 아니었다. 나름 대로 고심을 한 결과였다. 패종회에 자신이 살아 있음을 감춘 상태 에서 그들을 방해하는 게 더 효율적일 수도 있음을 염두에 두고 잠 시 갈등했던 것이다. 그와 같은 고심은 길게 가지 않았다. 선주혁은 타고난 계략가가 아니었다. 지금 당장 사형을 도울 방법이 있는데 생각나지도 않는 그 어떤 방편을 위해 사형을 외면할 수는 없다는 게 짧은 갈등 끝에 그가 내린 결론이었다. 자신의 생환에 사형이 얼마나 기뻐할지를 생각하니 벌써부터 미 소가 지어지는 선주혁이었다. < 3 > 당당히 걸음을 옮기는 선주혁. 그는 검게 자랐던 머리를 다시 백발로 물들였다. 자신을 드러내 기로 한 이상 확실히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뒤를 쫓는 철무종, 명주운의 얼굴에는 긴장이 가득했다. 그 두 사람의 우려가 형신로 나타난 것은 일행이 망성(望城) 인근 에 도달했을 때였다. 본래 그들은 형산 이남을 거쳐 호남성을 벗어나려 했었다. 철무 종이 제안한 방법이었다. 최근 호남 제일을 자부한다는 학청문이지 만 형산파 인근에서까지 활개를 치고 다닐 수 없으리라는 계산에서 비롯된 행로인 것이다. 하지만 쫓기는 마당에 당당히 백주를 활보하니 저지를 당하는 것은 당연했다. 저들이 목표로 했던, 자신들을 이리저리 몰아 지치게 하려는 의 도는 뜻대로 이행되지 않고 있었다. 선주혁이 더 이상의 도주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이에 더 이상 기다릴 필요를 느끼지 못한 학청문이 선주혁 일행 을 저지하고 나선 것이다. 얼추 가늠해도 백 명은 족히 넘어서는 수. 백발마신에 대해 절대적인 신뢰를 가진 철무종과 명주운이었으 나 마른 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의 숫자라면 백발마신이 예전의 무공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해도 감당키 힘들어 보였던 것이다. 며칠간의 회복기를 가진 것만으로 선주혁이 얼마나 많이 회복했는지 전혀 모르는 두 사람이었다. "마, 많이도 몰려왔군." 체구에 걸맞지 않게 철무종의 목소리가 떨리는 중이었다. 저들은 선주혁의 진정한 신분을 모르는 상태다. 따라서 이들과 직접 마주하기 전까지 철무종은 희망은 가질 수 있었다. 도주를 가로막는 자들이 있을지라도 소수에 불과할 것이라 예상한 것이다. 그랬다면 뛰어난 무공을 지닌 백발마신과 함께이기 에 큰 위협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한테 그의 희망과 기대가 여지없이 무너진 것이다. 고작 세 명을 상대하기 위해 이처럼 많은 인원을 동원되리라고 는 상상조차 못했다. 철무종으로서는 저들의 대응이 납득하기 힘들었다. 정예로 보이는 백여 명이 동원되었다는 것은 학청문의 총력을 기울인 것과 다름없었다. 제자 몇 명을 죽인 자를 상대하기에는 그 인원이 지나치게 많은 것이다. 백발마신은 채 회복되지 않은 상채에서 학청문의 제자를 상대 했다. 조사를 마쳤다면 그의 무위에 대해 분석을 했다는 것, 한데로 이 처럼 많은 인원이 동원되었다는 것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철무종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철무종의 눈만큼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자신은 지금 백발 마신과 함께 패종회의 종자들과 맞서려는 것이다. 비록 삼류에 불 과하다 하더라도 그는 뼛속부터 무인이었다. 백발마신과 같은 영웅과 어깨를 나란히 해 적을 맞이한다는 것 은 꿈에서나 가능한 일. 그 꿈이 실현되는 오늘이니 만큼 절망이 눈 빛에 끼어들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명주운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검병에 손을 얹을 뿐이었다. 애 초 객잔의 사건에 끼어들 때부터 목숨에 미련을 버린 그였다. 지금 은 존경해 마지않는 백발마신의 뜻을 쫓아가는 길에 서 있다. 가슴을 펴고, 당당히...... 라는 백발마신의 말을 가슴 깊이 되새 기며 이 자리에 서 있는 자신을 영광스럽게 여기는 중이다. 무인의 길에서 죽을 수 있다는 것은 그에게 가슴 벅찬 자부심을 가져다주 고 있었다. 남은 것은 부끄럽지 않은 자신을 증명하는 것뿐이다. 선주혁은 두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길을 가로막은 대규모의 무 인들 사이에서 고수를 가려냈다. 범상치 않은 기도를 내뿜는 고수는 모두 다섯. 학청문이 제법 명성이 높다지만 저 정도의 고수를 배출할 능력 이 있다면 형산파에게 눌려 지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선주 혁은 저들 다섯이 패종회에서 파견된 고수라 단정 지었다. '백웅 다섯이라, 역시 백존은 없는 건가?' 어떤 이유에선지 모르겠지만, 앞서 예상했던 대로 백존이 없다 는 사실은 선주혁을 만족시켰다. "크흐흐...... 실로 대담하기 이를 데 없는 놈들이로고! 호남성에 서 감히 학청문의 제자들에게 해를 끼치고 백주를 활보하다니!" 매의 그것처럼 날카로운 눈매를 지닌 노인이 비웃음을 흘렸다. 화려한 수가 놓인 장포(長袍)를 입은 노인을 보고 철무종이 나직이 말했다. "저자가 천장지권(天掌之拳)이란 불리는 온추곤(溫推昆)입니다. 학청문의 문주죠." 선주혁은 미미한 미소로 철무종의 설명에 반응하며 앞으로 한 걸음을 나섰다. "개들을 패는데 낮밤이 있을 리 없거늘...... 패던 개가 죽었다고 숨어 다닐 이유가 있나?" "흥! 어린놈이 제법 실력이 있다고 하더니,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에 불과하군." 온추곤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거만한 어조로 답했다.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쉬워 보이는 상대였기 대문이다. 역시 소문은 믿을 게 못 됐다.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수법으로 제자들을 격살했다고 들었다. 범상치 않은 고수라 여겼건만 밋밋한 태양혈하며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기도를 가진 애송이었다. 척 보아 하니 고수의 풍모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괜스레 패종회에서 파견되어 나온 고수들까지 이 자리에 나서게 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자신이 나설 필요도 없이 제자들만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렇게난 많은 인원을 동원한 게 패종회의 고수들의 지시였다는 사실이다. 자신이 호들갑을 떤 게 아니기에 크게 민망할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하룻강아지를 잡기 위해 이 정도의 인원을 동원하다니......! 학 청문이 어떤 곳인지 안 봐도 훤하군." 선주혁은 피식 코웃음을 치며 온추곤의 말을 받아쳤다. 온추곤의 이마에 푸른 핏줄이 돋았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흘러 나오는 것은 웃음소리였다. "크흐흐흐흐......! 그딴 수작으로 중원 전역에서 활약하고 있음 은 이미 간파되었다. 마교와 사파연합 뒤에 숨어 헛된 소문만을 퍼 뜨리던 옥용검마의 수작은 간파되었다는 이야기다.!" 온추곤의 말에 선주혁은 대략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사형이 자신의 복수를 시작한 것이다. 과거 자신과 의논한 대로 넓은 지역에 흩어진 상태에서 패종회 를 상대하는 방법이 사용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이른다 게릴라전이 시작된 것이다. 그제야 자신과 일행을 상대 하기 위해 이처럼 많은 인원이 동원되 이유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자신을 사형의 지휘 하에 패종회에 맞서 싸우는 자들 중 하나로 오 해한 것이리라. 선주혁의 입매가 호선을 그려냈다. 기왕 자신의 부활을 알리기로 한 마당이었다. 한 문파를 정면으 로 상대해야 하는 것도 다소 부담스럽긴 했지만, 지금의 자신에게 는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외려 이보다 더 극적이고 화려한 부활의 장 또한 없을 거라 생각 했기에 미소를 지은 것이다. "욕먹을 짓을 한 놈들을 욕하고, 칭찬한 자를 칭찬하는데 무에 잘못이 있겠느냐? 찔리는 게 있으니 이렇듯 우르르 몰려와 입막음 을 하려한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나?" 선주혁의 계속되는 무례한 언사에 온추곤의 얼굴이 울그락불그 락 해졌다. 아무리 천화를 위린하는 곤륜이마 중 하나인 옥용검마 의 명을 받은 자들이라지만 호남성 제일을 자부하는 학청문주를 대 하는 자세가 아니었던 것이다. "저, 저런 괘씸한 놈! 뭣들 하는 게냐? 저놈이 뚫린 주둥이라고 함부로 나불대는 것을 부고 볼 참이냐?" 온추곤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노갈을 터뜨렸다. 그의 뒤쪽에 서 있던 삼십대 초반의 무인 한 명이 득달같이 앞쪽 으로 나섰다. 무인은 선주혁 일행의 인근까지의 짧은 거리를 깔끔한 경신술로 달려온 후, 적당한 거리에서 멈춰 섰다. "학청문하의 엄동환이라고 한다. 본문의 제자를 상하게 하고 무 림 공적을 칭송한 죄를 묻겠다!" 엄동환은 자신감 넘치는 어조로 선주혁을 직시했다. 선주혁은 적을 눈앞에 두고 팔짱을 꼈다. 엄동환의 짙은 눈썹이 크게 일그러 졌다. 자신을 무시하는 행동 때문이었다. "날 상대하고자 한다면 저쪽 뒤에서 무게를 잡고 있는 패종회의 개들부터 내세우는 것이 좋을 텐데......?" 턱짓으로 선주혁이 가리키는 방향. 그곳에는 백응에 속하는 다 섯 명의 고수가 서 있었다. 잠시 고개를 돌려 그들의 모습을 확인한 엄동환이 목에 핏대를 세웠다. "시건방진 놈! 죽은 놈에게 매달려 목숨을 걸다 보니 사리판단조 차 제대로 못하는 모양이군나! 네깟 놈을 상대하는 데 저분들이 나 서실 필요가 있다더냐?" 선주혁은 피시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서......? 네놈이 날 상대하겠다는 거냐?" "학청문의 이름이 얼마나 무거운지 뼈저리게 느끼도록 해 주겠 다!" 엄동환이 이를 갈아붙였다. 이에 선주혁은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파면 귀찮은 듯 말했다. "아, 아! 내가 감정이 있는 건 패종회의 개들뿐이라서 말이야. 그 개들에게 붙어먹는 빈대들에게는 별 관심이 없다고." "미친놈!" 더 이상 말을 해봐야 얻을 게 없는 상황. 자고로 입심이 센 놈치고 제대로 된 실력을 갖춘 자를 본 적이 없는 엄동환이었다. 그는 날카롭게 호통을 치며 신형을 움직였다. 단 두 번의 도약으로 사 장여의 공간을 한순간 압축하는 그의 경 신공부는 과연 범상치 않았다. 하지만 학청문도들이 저만다 감탄을 하는 그의 움직임의 끝에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퍼억! 수박이 깨어지는 듯한 둔탁한 음향. 소리가 퍼지는 방향을 그려내듯 허공을 채우는 붉은 선혈. 엄동환의 머리가 부서져 버린 것이다. "저, 저......?" 온추곤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신의 제자 중 두각을 드러내 던 엄동환이었다. 아끼던 제가가 너무도 허망하게 죽어가는 모습에 그는 뒷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아무리 엄동환이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지만 백발의 사내가 무엇 을 어찌했는지 제대로 파악조차 못했다. 분명한 것은 자신의 제자 가 단 일 초에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이었다. 분노와 놀라움이 겹쳐 그가 숨을 몰아쉬는 사이, 좌측에 서 있던 사내가 신형을 움직였다. 온추곤의 사제인 진천장(眞天掌) 목준길이었다. 패종회에서 파견 나온 고수들이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고 있는 중이다. 이름도 없는 낭인에게 맥없이 당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학청문의 위신이 말이 아닐 터, 호날성 일대에 명성이 드높은 진천장이 직접 나선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노부는 학청문의 목준길이라고 하네. 강호의 동도들이 진천장 이라는 과분한 명호을 붙여 주었지." 선주혁은 목준길이 사설을 늘어놓고 있는 틈을 주지 않고 끼어 들어 말했다. "확실히 과분하군." "......!" 목준길의 두 눈에 붉은 핏발이 섰다. "애송이가 제법 쓸 만한 수법을 지녔다고 해서 무례함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내 오늘 네놈에게 하늘이 높음을 알려주겠노라!" "크흐흐흐...... 감히 학청문의 개들 중에 내게 가르침을 내려줄 자가 있을까?"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 노갈과 함께 땅을 박하는 목준길. 그의 신형은 쏘아진 화살처럼 선주혁을 향했다. 짧은 순간 선주혁의 양손에 진기가 모였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차를 두고 교차되는 쌍 장. 무음, 무형의 기운이 공간을 열어젖힌다. 가로막는 무엇도 버틸 수 없는 대기의 개방. 북두진공참의 발출이었다. 그것은 선주혁을 향해 날아드는 신형마저 반으로 갈랐다. "크아아아악!" 지옥의 저편에서나 들려올 처참한 비명. 분리된 하반신을 확인한 목준길이 비명은 오래가지 못했다. 반 토막 난 몸에서 허용된 생명의 시간이 길지 않은 탓이었다. "저, 저럴 수가......?" 온추곤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기묘한 수법 하나를 가진 애송이가 아니었다. 자신에 비해 별다 른 손색이 없는 무공을 지닌 사제를 한 수에 죽음으로 몰고 간 자를 어찌 무시할 수 있겠는가. 두려웠다. 패종회의 절대적인 고수들이 배후를 지켜주지 않았다 면 당장 몸을 돌려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정도였다. "네놈은 누구냐?" 내공이 가득 실린 음성이 일대를 쩌렁쩌렁 울렸다. 선주혁이 보 인 가공할 신위에 드디어 패종회의 고수들이 나선 것이다. "크흐흐흐...... 백웅에 정도의 조무래기라지만 무지해도 너무 무지하군." "......!" 호통을 지른 노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백발귀마를 따라 머리 를 희게 물들인 놈치고는 제대로 된 녀석을 보지 못했다. 남의 명성을 빌려 괜스레 상대방에게 위압감을 주려는 게 놈들의 내심이라 그는 생각했던 것이다. 학청문주의 사제인 목준길을 한 수에 죽일 때도 별다른 감정은 없었다. 저 정도의 무공을 지닌 자라면 일초반식도 필요치 않은 것 은 자신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지막의 한마디가 가지는 의미는 작은 것이 아니었다. 백웅이라는 말은 패종회 내부에서만 통용된다. 패종회에 복속한 문 파라 해도 삼패나 백존, 백웅이라는 서열과 체계에 대해 대부분 잘 모른다. 한데 자신과 동료들이 백웅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알고 있는 자가 나타난 것이다. 역시 옥용검마의 수하임이 틀림없었다. 긴장감을 고취시킬 필요가 있었다. 상대는 최소한 한눈에 자신 과 동료들의 무공 수위를 짚어낼 정도의 고수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 현혹되어 상대를 얕볼 노인이 아니었다. "노부가 강호 경험이 일천하여 고인을 알아 뵙지 못했구려." 패종회에서 파견 나와 시종일관 오만한 태도를 유지했던 노인과 일행들이다. 한데 그가 상대를 예우하는 모습을 보이니 온추곤으로 서는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 그냥 애송이는 아니라는 뜻이군.' 와중에 제자와 사제가 먼저 나선 것이 다행이라 생각하는 온추 곤이었다. 패종회의 인사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자신이 직접 손을 썼다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저 정도나 되는 고수들의 중원 각지에서 패종회에 입회한 문파를 괴롭히고 있으니 사단이 일어날 법도 하다고 생각했다. "노부는 패종회의 노대림(盧大臨)이라고 하오. 스스로를 감추고 자 하심이 아니라면 귀하의 존성대명을 알려주실 수 있겠소이까?" 노인의 말에 선주혁이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그가 바라는 방향 으로 일이 전개되로 있었던 것이다. '이런 걸 보면 딱히 내가 재수가 없는 것도 아닌 거 같단 말이지.' 상황에 대해 만족해하며 그는 스스로의 기세를 바꿨다. 내재된 내력을 고스란히 드러낸 것이다. 폭발적으로 분출되는 압도적인 기세. 처음 이쪽 세상으로 넘어와 곤륜의 절경과 산세에 큰 감명을 받 았던 선주혁. 그는 대곤륜이 기운을 포함해 자신을 최대한 드러내 는 중이었다. 그 엄청난 기세에 백여 명에 달하는 학청문도들은 숨이 막힐 지 경이었다. 그들은 단 한 명이 뿜어내는 기도를 이기지 못하고 하얗 게 질린 얼굴로 분분히 뒷걸음질을 쳐야만 했다. 백웅에 속하는 다섯 고수만이 자리를 꿋꿋히 지킬 수 있었다. "백존 중 다섯이 이 자리에 왔다면 모를까......? 당신 정도가 내 신분으 물을 자격은 없다고 보는데......" 턱끝을 살짝 치켜든 선주혁은 최대한의 오연한 태도를 취했다. 이 자리에서 강한 인상을 남길수록 향후 패종회는 자신에게 집중하 게 될 것이다. 이는 곧 사형에게 닥칠 위험이 줄어드는 것을 뜻했다. 선주혁의 도발에도 노대림은 당장 노기를 터뜨리지 않았다. 지 금 선주혁의 기도만으로도 저와 같은 발언을 할 충분한 자격이 있 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화를 분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백발의 사 내가 말한 다섯의 백존에 대한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다. '다섯의 백존...... 그리고 백발의 젊은 사내.' 잠시 미간을 찌푸린 채 골똘히 생각을 하던 노대림의 두 눈에 경 악의 감정이 드러났다. '설마? 아니, 그럴 리 없어!" 하마터면 저도 모르게 고개를 흔들어 그간 자신이 가져왔던 생 각을 부정할 뻔한 노대림이 실소를 터뜨렸다. "흥! 귀하는 고절한 무공을 빌어 패종회에서 처단한 악적의 흉내 를 내고자 함이시오?" "풋!" 선주혁이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 개(犬)로구먼. 늘 거짓말만을 하다 보니 진실을 바라보는 눈을 잃었을 뿐이야." 시종일관 무례한 태도를 견지하는 선주혁을 향해 노대림이 처음 으로 노기를 드러냈다. "간교한 혀로 사람을 농락하려 들다니! 그자를 사칭한다 해서 위 축될 패종회가 아님을 모르겠는가?" 더 이상 노대림 역시 공대를 하지 않았다. "믿고 안 믿고는 당신 자유지. 하지만 분명히 알아둘 것은, 나 선 주혁이 패종회에게 진 빚을 갚아야 한다는 사실이야." Chap. 8 죽음에 대한 재고(再考). 선주혁의 방금 전 발언에 온추곤을 비롯한 학청문도들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선주혁.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었다. 난데없는 이름이었기에,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이름이었기에, 그와 같은 이름을 가진 유명한 인물 을 떠올리지 못하는 자가 대부분이었다. 선주혁의 패도적인 기세에 덜 위축이 된 자들 중에서는 그 이름 이 백발마신의 것임을 빠르게 기억해 내기도 했다. 그렇다고는 해 도 눈앞의 고수가 백발마신이라는 생각은 할 수 없었다. 백발마신 선주혁이 죽었다는 사실은 이미 천하가 알고 있었다. 더구나 그의 묘가 자신들의 세력권 내에 자리하고 있지 않은가! '설마, 자신이 부활한 백발마신이라는 건 아니겠지?' 온추곤의 생각이었다. 그것은 학청문도 대부분의 의문을 대변하 고 있었다. 노대림 역시 혼란스러웠다. 최근 패종회는 발칵 뒤집힌 상태였다. 옥용검마 남지학과 도귀 주백광을 중심으로 한 반패종회의 무리 때문이었다. 이들은 사파연 합, 마교를 등에 없고 본격적으로 패종회와 맞서기 시작했다. 그들이 활동을 시작한 지 불과 며칠밖에 되지 않았건만 벌써 열 명에 가까운 백웅이 죽임을 당했으며, 패종회에 입회한 세 개의 문 파가 무너졌다. 비록 세가 작은 곳들이라고는 하나 그 파장은 결코 작지 않았다. 무림의 각 세력을 규합하려는 패종회의 의도에 큰 장애가 되는 것 이다. 패종회에 입회를 하면 백발마신의 복수를 감당해야 한다는 위험요소가 생겼기 때문이다. 더불어 백웅들이 속절없이 죽음으로 해서 패종회에서 파견한 고 수들조차 저들의 복수를 막아줄 수 없다는 결론이 도출되는 상황이 었던 것이다. 현재 흑도무인의 대다수는 백발마신을 신격화시켜 추앙하는 중 이다. 백도에 속하는 무인들조차 그와 같은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 다. 자신감을 얻은 백발마신의 추종자들이 중원 각지에서 패종회에 입회한 문파들을 공격하기 시작한다면 패종회를 찾아드는 문파나 무인들은 줄어들 것이 분명했다. 백발마신을 칭송하고 패종회에 가입한 학청문도를 죽인 자들이 동정호 인근에 출현했다는 사실만으로 이 정도의 인원이 동원된 데 에는 이와 같은 이유가 있었다. 사냥감을 몰 듯 세 명을 추격하는 동안 백웅들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백발마신의 추종자는 세 명이 전부라는 사실이었다. 그것이 이들에게 있어서 옥용검마와 도뒤의 수작이 헛되다는 것 을 입증할 기회가 되어줄만한 조건을 형성했다. 이곳에서 백발마신 의 복수를 하겠다는 시도를 무산시킨다면 기세등등한 저들의 분위 기를 일단 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완벽한 일의 처리를 위해 학청문의 정예를 모두 이끌고 나섰다. 이 일이 널리 알려지면 다시금 패종회에 입회하는 자들이 크게 늘 어날 것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한데 상대가 엉뚱한 말을 꺼내들고 있었다. 백발마신의 복수를 원함이 아니라 스스로가 백발마신임을 주장하는 것이다. 되도 않는 주장이라 확신하면서도 그가 보인 가공할 무위가 근거가 되는 터라 노대림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흥! 대체 무슨 수작을 부리고픈 게냐?" 자신이 머뭇거리는 사이, 학청문도들이 동요하는 모습을 확인한 노대림이 더욱 언성을 높였다. "눈이 있어도 보질 못하니 더 할 말은 없다. 난 그저 빚만을 받아 내면 될 일이니까!" 선주혁은 여유 만만한 태도였다. 그 여유와 막강한 기도에 상황 은 완전히 역전되었다. 처음과 달리 백여 명의 무인들이 선주혁 한 명에게 위축된 것이 명백히 드러나고 있었다. 철무종과 명주운에게 있어서는 결과에 상관없이 지금의 모습 자 체가 감동이었다. 호남성 제일을 자부하는 학청문의 정예와 패종회의 고수들을 마 주해 누가 이토록 당당할 수 있겠는가! "흉악한 놈이로고!" 선주혁이 끝까지 자신이 백발마신임을 주장하자 노대림은 손을 들어올렸다. 상대가 백발마신이건 그렇지 않건 거대한 산맥과 같은 존재감을 드러낸 고수임은 분명했다. 기도만으로 무공을 가늠할 수는 없다지만 만만치 않은 상대임은 이미 확인된 터, 괜히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었다. 그의 손짓에 맞춰 나머지 네 명의 백웅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각 각 유리한 방위를 점해 협공을 감행하려는 것이다. "흥!" 수많은 격전의 경험만큼은 여느 노고수에 못지않은 선주혁이 그 들이 노리는 바를 모를 리 없었다. 먼지 한 톨 일지 않는 발 구름과 함께 선주혁의 신형이 소리 없이 움직였다. 한 줄기 바람처럼 우측으로 향하는 선주혁. 그의 신법은 너무나 표홀하여 학청문도들은 그가 아예 사라진 것처럼 느꼈다. 어느새 선주혁은 좌측의 맨 끝에서 자신을 향해 접근하던 백웅 에게 다가섰다. 상대의 신법에 경학하며 좌측의 노인은 황망히 일 장을 뻗었다. 자색의 강렬한 빛이 번쩍이고 구체는 쏜살처럼 선주혁을 향해 날아들었다. 선주혁은 한 호흡에 묵연수투의 기운을 담아 장력이 날아드는 가슴을 보호했다. 쿠아앙. 요란한 폭발음과 함께 혈마자광기가 선주혁의 가슴에 적중했다. 너무나 쉽게 자신의 공격이 상대를 가격하자 노인은 외려 어리 둥절해 했다. 그것이 실수였다. 옷자락은 가루가 되어 흩어졌지만 정작 목표로 했던 선주혁은 멀쩡했던 것. 선주혁은 입가에 미소까지 머금은 채, 노인의 코앞까지 접근했 다. 대경한 노인이 미처 신형을 뒤로 뽑기도 전에 선주혁의 양손이 움직였다. 북두연환장의 발출. 퍼어억! 여운을 남기는 타격음. 한순간 일곱 번의 장력이 발출된 것이다. 북부연환장은 고스란히 노인의 몸에 작렬했고, 이는 곧 즉사(卽 死)을 의미했다. 노인은 제대로 된 시신조차 보존할 수 없었다. 맹령하기 이를 데 없는 경력을 담은 연환장에 적중 당했으니 전 신이 터져나간 것이다. 노대림을 포함한 네 명의 백웅이 도울 틈조차 없었다. 모든 것이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터지듯 솟구쳐 올랐던 피와 조각난 육신은 비(雨)가 되어 하강했 다. 투투 투투투툭. 혈우(血雨)는 섬뜩한 소리를 내며 땅을 향해 내달렸고, 선주혁은 그 가운데 서 있었다. 백여 명의 무인들을 압도하는 기백. 일말의 사정도 보지 않는 잔인한 손속. 상식을 초월한 무위. 붉게 물들어가는 백발...... 그 모든 것은 부정하고픈, 아니 부정할 수밖에 없는 하나의 결론 을 강요했다. 중인들은 저도 모르게 진짜 백발마신이 부활한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게 된 것이다. 하나하나가 고수가 아닌 자가 없는 패종회의 일원을 단숨에 제 압, 죽음으로 몰고 갈 수 있는 능력자가 강호에 몇이나 되겠는가? 죽은 자가 되살아날 수 없다는 만고의 진리를 부정할 정도로 방 금 전의 장면을 충격적이었다. 선주혁을 향해 포위망을 형성하려던 백웅들도, 기세에 눌려 뒤 로 물러섰던 학청문도들도 모두 행도을 정지했다. 무거운 침묵만이 들판을 가득 채웠다. 마치 시간이 정지된 듯한 상황이었다. "오늘......" 혈우를 고스란히 뒤집어쓴 선주혁이 느릿한 어조로 입을 열었 다. "너희를 제물 삼아 나...... 선주혁의 부활을 무림에 알리겠다!" 두 눈에서 소름끼치는 귀광을 뿜어내는 선주혁의 말에 학청문도 들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수적으로 우 위에 서 있다는 사살은 이미 망각해버렸다. 방금 전의 장면이 그들 에게 백발마신의 부활을 확신시킨 것이다. 흑도라면 몸서리를 치는 정도의 무림의 명숙조차 고개를 숙이게끔 만든 백발마신. 그가 살아 돌아왔다. 놀라움을 느낄 여유 따위는 없었다. 이미 신화의 영역에서 회자되는 백발마신이 자신들의 죽음을 선 언했기 때문이다. 머릿속은 하얗게 비워지고 떨리는 다리에는 힘조 차 들어가지 않았다. 공포만이 학청문도를 휘감을 그때, 노대림은 앞서와는 달리 뒤 쪽으로 물러섰다. 그가 멈춰선 곳은 학청문주 온추곤의 옆이었다. "아무리 무공이 고강하다고 해도 학청문 전체를 상대할 수는 없 소, 문주." 풀린 두 눈으로 선주혁을 바라보던 온추곤은 노대림의 낮은 음 성에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제자들에게 공격 명령을 내리시오." 다소 존중의 형식을 갖추긴 했지만 온추곤은 노대림이 명령을 하달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온추곤의 미간이 크게 찌푸려졌다. "저희 제자들의 상대가 아닌 듯......" 애꿎게 제자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고 싶지는 않은 온추곤의 말 은 험악하게 구겨지는 노대림의 표정으로 인해 계속될 수 없었다. "백발귀마 한 명 때문에 패종회를 적으로 돌리겠다는 말이오?" 낮고도 낮은 음성은 전음이 아님에도 온추곤 외에는 듣지 못할 정도였다. 그 작은 음성에 담겨진 뜻은 명확했다. 만약 지금 명을 따르지 않으면 패종회 차원에서 학청문을 응징하겠다는 것이다. 온추곤은 더 이상 망설일 수 없었다. 아무리 백발마신이 대단하 다고 해도 패종회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패종회가 가진 막대한 힘 의 일부만 확인했을 뿐임에도 이들이 무림을 지배할 것이라는 확신 을 가질 정도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노대림의 분위기는 쉽게 생각할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조금이라도 주저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당장이라도 죽이려 들 것이 뻔했다. 온추곤으로서는 그의 일 장조차 제대로 감당할 자신이 없 었다. "허, 헛소리를 지껄여 대는 저놈을 내벼려 둘 참이냐? 놈들은 고 작 세 명에 불과하다. 제아무리 무공이 고강할지언정 어찌 우리 학 청문의 정예 모두를 감당할 수 있겠느냐? 어서 놈을 죽여라! 나서 지 않는 놈은 당장 내 손으로 죽여주마!" 제자들을 죽음으로 내몰아야 하는 상황이 온추곤으로서는 좋을 리 없었다. 하지만 저들의 목숨이 자신보다 중요할 수는 없었기에 그는 언 성을 높였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죄책감을 이기기 위해 그의 외침은 과장되어 있었다. 학청문도가 가지고 있는 두려움은 형언키 힘들 정도로 컸다. 패 종회의 고수조차 일 장에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고깃덩이로 변하는 것을 두 눈으로 봤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허나 문주의 명은 지엄하기 이를 데 없었다. 더구나 저토록 강경 한 명령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나마 문주의 말로 상기한 작금의 상황만이 작은 희망이 되었다. 자신들은 백에 달하는 인원이다. 제 아무리 백발마신이라 해도 단신으로 학청문 전체를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할 터. 이와 같은 결론은 학청문도들에게 실낱같은 희망이 되어 주었 고, 작은 희망은 곧 무인 특유의 기질을 자극하고 있었다. 학청문도들이 전의를 불태우는 그 시점에서 온추곤의 또 다른 사제인 지전영(池詮英)이 외쳤다. "저자가 제아무리 명성을 날려 왔다 해도 무림에 해약을 끼치는 악적에 불과하다. 그 악적이 패도한 힘만을 믿고 우리의 형제를 죽 였으며, 또 이 자리에서 우리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다." 안 그래도 고조되고 있던 분위기는 지전영의 선동으로 한껏 달 아올랐다. 객잔에서 죽은 이들은 각각의 사형이고 사제였다. 또 방금 전 다 른 한 명의 형제와 사문의 존장이 목숨을 잃었다. 학청문도로서는 당연히 두려움에 앞서 그들의 죽음을 생각해야 만 했다. 그것이 무인으로서의 자세였다. 학청문도들의 두 눈이 분노로 물들어 가고 있음을 확인한 지전 영의 외침이 계속되었다. "우리의 손으로 복수를 하지 않는다면 지하의 형제들이 어찌 눈 을 감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학청문의 정예다! 악적 백발귀마를 죽여 호남에 학청문이 있고, 무림에 아직까지 정의가 있음을 알려 야 하지 않겠는가?" 지전영의 외침은 기폭제가 되어 학청문도들을 내몰았다. "우와아아아! 우리 손으로 백발마신을 죽이는 거다!" "문주님의 명을 따르자!" "형제들의 복수를 하자!" "사숙의 원수를 갚는 거다!" 천둥과 같은 함성과 함께 학청문도들이 해일처럼 몰려들었다. 상황을 지켜본 노대림은 학청문주의 적임자는 따로 있다고 생각 했다. 속이 시커멓고 탐욕스럽기만 한 온추곤보다는 지전영이 훨씬 뛰어난 인재임을 간파한 것이다. 그 사이 백여 명에 달하는 학청문도들은 선주혁을 향해 쇄도해 들어가고 있었다. 백발마신은 여유 있게 한 손을 높이 들어 올린 채, 학청문도들을 오시(傲視)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장면을 확인한 노대림은 번개처럼 등줄기를 관통하는 불길한 기억을 떠올렸다. 분명 저와 같은 장명에 대해 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뭐였지?' 짧은 순간의 자문. '중경! 철갑묵린단!' 오늘날 패종회가 무림의 각 세력을 끌어들이기에 급급해진 원인 이 있다. 그것은 바로 철갑묵린단의 손실이었다. 금강신협이라는 빌어먹을 놈 하나로 인해 패종회가 무림을 지배하기 위한 전술을 전면적으로 수정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 아픈 기억을 노대림은 떠올렸다. 동료들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금강신협이 패종회를 상대할 때 저와 같은 동작을 취했다고 했다. 단 일 장에 철갑묵린단을 뭉개 버린 가공할 장력의 예비동작. 그것을 기억해 낸 노대림은 설마 하는 심정으로 선주혁의 손을 쫓아 하늘을 바라봤다. 노대림의 동공이 급속도로 확장된다. 선주혁과 수직선사에 떠 있는 하나의 별을 본 것이다. 자색을 발하는 별. 그것은 노대림에게 있어 흉성(凶星), 그 자체였다. 소름끼치는 불길함이 그의 입을 벌린다. 다급한 외침이 절로 터 져 나왔다. "위, 위험해!" 노대림의 경고성은 아무런 도움이 되질 못했다. 누군가 그의 경고성을 진지하기도 전, 선주혁이 움직였다. 한쪽 무릎이 굽어지고 신형이 아래로 향한다. 하늘 높이 들어 올려졌던 손은 수직으로 떨어지고, 마치 땅바닥 을 향해 장력을 발출하는 듯한 동작이 이어졌다. 하늘 높이 솟아 있던 별이 갈라져 분열한다. 수많은 조각으로 변한 별들은 유성이 되어 지면을 향해 달리기 시작한다. 북두유성우! 선주혁이 창안한 네 번째 장법이 다시금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공간을 메우려는 듯 쏟아지는 자우(紫雨). 개개의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유성우의 거침없는 질주. 만년흑오철을 꿰뚫었던 그 자색의 탄환(彈丸)은 피륙으로 된 학 청문도를 유린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백발마신을 향해 쇄도해 들어갔던 학청문도들은 자신들의 무모 함을 깨달을 여유조차 갖지 못했다. 하늘에 떠올랐던 흉성의 저주는 즉사의 결과 외에는 허용치 않 았기 때문이다. 거대했던 함성은 처절한 비명으로 이어졌다. 자적(紫赤)의 끔찍 한 색(色)이 일대를 물들이는가 싶더니, 이미 생기를 잃은 참혹한 시체들만이 정적을 노래했다. 정적이 의미하는 바는 단순, 그 자체였다. 전멸(全滅). 백여 명에 달했던 학청문의 정예들이 몰살당한 것이다. 단 한 번의 장력 발출이 가져온 결과하기에는 너무나 끔찍했다. 대저 무림에 수많은 강자들이 존재해 왔지만 일 장에 백여 명을 죽일 수 있는 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전설 속에나 등장할 법한 장면을 직접 목도한 생존자들은 충격 에 휩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이것이 백발마신님의 힘이라는 건가......?" 한껏 긴장한 상태에서 전의를 불태우던 철무종의 떨리는 음성이 명주운의 귀에 들렸다. "세상에 저런 무공이 존재할 줄이야......!" 철무종의 음성에 반응하듯 명주운도 벌리고만 있던 입을 움직여 말했다. 그의 음성은 넋두리를 하듯 흐릿하기만 했다. 백여 구에 달하는 참혹한 시건조차 아무런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지나친 놀라움 때문이었다. 단신으로, 그것도 일 장에 호남 성 제일을 자랑하는 문파의 정예를 몰살시킬 수 있다는 것을 납득 해야 하는 것이 너무도 어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너무나 명백히 그와 같은 일이 가능함을 증거하 고 있었다. 혈해(血海)를 만들어 낸 정황이 두 눈에 펼쳐져 있지 않은가? "저분이 왜 마신으로 불리는지 이제야 납득이 가는구나......!" 자신만 들을 수 있을 정도의 혼잣말이었다. 백발마신의 무공은 전율을 불러 일으켰고, 그 떨림 속에서 제대 로 된 음성을 만들어 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저건 금강신협이 보였다던......?'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노대인이 내심 중얼거렸다. 지금에야 옥용검마가 최우선적으로 처리해야할 대상이지만 과 거 백발마신과 더불어 패종회에 있어 양대 주적(主敵)이라 일컬어지 던 금강신협이었다. 그와 흡사한 무공을 백발마신을 자칭하는 자가 사용한다는 것은 의미하는 바가 컸다. 노대림의 두뇌가 맹렬히 회전했다. 소문에 의하면 백발마신과 금강신협의 용모는 크게 흡사하다고 했다. 머리카락의 색만이 확연 히 다를 뿐, 용모는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백발마신도 동정호변에서 금강불괴에 가까운 모습 을 보인적이 있다고 했다. '마, 말도 안 돼! 설마 금강신협과 백발마신이 동일인......? 그럴 리 없을 텐데?' 불가능한 일이었다. 금강신협은 정의련의 귀빈으로 중추적인 위치에 접근해 있었다. 정도 무림의 공적으로 지목된 백발마신이 그와 같은 대우를 받을 수는 없었다. 역용(易容)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같은 생활을 하 다시피 하며 안력이 뛰어난 고수들을 속일 정도의 역용술은 존재하 지 않았다. 더구나 눈앞의 사내는 자신이 백발마신이라 주장하는 중이었다. 금강신협 정도의 인물이 타인을 사칭한다는 것은 생각하기 힘들었 다. '그렇다면 어떻게 두 사람이 비슷한 무공을 사용한단 말인 가......?' 사고가 진행됨에 따라 두 인물이 동일할 수 있는 가능성은 줄어 들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비슷한 용모와 비슷한 무공을 지닌 두 사람을 따로 떼어 보기에는 공교로운 일치가 너무나 많았다. 안개 속을 헤매는 듯 딱히 결론을 내릴 수는 없지만 모종의 연관 이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적어도 금강신협이 용모가 흡사함을 이용해 백발마신을 사칭하고 있을 가능성은 충분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회에 보고해야 해!' 노대림이 마른침을 삼키며 내린 결론이었다. 결론이 내려진 이상, 실행은 과감하고 신속할 필요가 있었다. 노 대림은 나머지 세 명의 백웅에게 전음을 보냈다. [놈에게 일시에 장력을 쏘아 보낸다. 이후 산개(散開), 방위를 달 리하여 회로 복귀해라, 생존자는 백발마신과 금강신협의 연관관계 를 밝혀야 할 이유를 보고하도록! 금강신협이 백발마신을 사칭하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아무리 백발마신이라 해도, 금강신협이라 해도, 네 명의 백웅이 발출한 장력을 손쉽게 막아서진 못할 것이다. 그가 주춤하는 사이, 사방으로 도주를 시도한다면 최소한 한 명이라도 살아남아 회에 보 고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노대림이 자색의 구체를 띄워내고 나머지 세 명의 백웅도 자색 의 구체를 만들어 냈다. 노대림의 신호에 맞쳐 장력이 일시에 발출되었다. 네 명의 백웅이 쏟아낸 장력은 폭풍처럼 선주혁을 향해 휘몰아 쳤다. 가공할 경력이 실린 장력이 그 무엇도 저지할 수 없을 듯했다. 충분한 거리를 두고 있음에 명주운과 철무종은 풍압에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할 정도였다. 인간을 초월한 한 수를 보여준 백발마신의 능력을 의심하는 바 는 아니지만 네 고수의 협공만은 피해야 할 듯싶었다. 하지만 백발마신은 오직 전진밖에는 모르는 사람 같았다. 미증 유의 영역에 들어선 거력을 향해 외려 달려 나가는 것이다. 쿠아아아아아앙! 대지가 비명을 지르고 몸부림을 쳤다. 철무종은 균형을 잃어 쓰러지고, 명주운은 몇 번에 걸쳐 발을 내 딛고서야 간신히 버틸 수 있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먼지로 인해 두 사람은 선주혁의 상 태를 살필 수 없었다. 철무종과 명주운은 주먹을 말아 쥐며 백발마신의 안전만을 염원 했다. 그때 들려오는 처절한 비명. 지독한 괴로움을 호소하는 비명은 한 번에 그치지 않았다.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또 하나의 비명이 이어졌다. 두 번째의 비명은 철무종과 명주운에게 희망이 되었다. 두 비명 이 각각 다르니 적어도 현재까지 백발마신은 무사하다는 뜻이기 때 문이었다. 두 사람의 염원대로 백발마신은 네 명의 엄청난 고수들이 쏟아 낸 장력을 정면으로 막아냈다. 선주혁이 노대림을 비롯한 백웅 넷의 공격을 막아낸 것은 북두 연환장을 전개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호흡을 맞춰 공격을 쏟아 부었다지만 선주혁에게는 너무도 선명하게 파악되는 간격을 가지 고 있었다. 그는 북두연환장을 전개, 네 개의 장력을 하나하나 무위로 돌린 것이다. 묵연수투의 기운을 운용하면 백웅 수준의 장력은 이미 맨몸으로 도 감당할 수 있는 선주혁이었다. 잠원기폭공을 운용한 백웅의 장 력을 맨몸으로 받아냈던 그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북두연환장을 전개한 것은 나아가던 속도를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앞서 노대림이 백웅들에게 전음을 보내는 바를 확인했다. 몇 차례 백웅을 상대해 본 선주혁이다. 그들이 수작을 부릴 것을 직 감했다. 저들이 도죽할 가능성을 염두에 둔 선주혁은 그럴 만한 시간 자 체를 허용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짙은 구름을 형성한 먼지를 헤집고 달려가는 선주혁의 손에 긴 연장성이 그려졌다. 연장선의 정체는 강기. 영의검을 기운을 머금은 강기는 선명한 검의 형태를 갖춘 채로 큰 호선을 그려냈다. 막강한 경력이 몰아쳐 오는 것을 느낀 백웅 중 하나는 재빨리 자 광수를 운용했다. 날아오는 공격이 검강이라 할지라도 자광수를 베 지 못하리라 확신하면서...... 하지만 심검은 연상시키는 선주혁의 강기 앞에서의 자광수는 큰 효력을 내지 못했다. 압도적인 내력의 차가 있는데다가 보검(寶劍) '영의'의 예기(銳 氣)를 머금은 선주혁의 강기는 거침없는 상대의 팔을 자르고 몸통 을 갈랐던 것이다. 첫 번째 비명이 터지는 순간이었다. 상대를 가른 순간, 선주혁은 이미 두 번째 백웅의 인근에 도달해 있었다. 이형환위(移形換位)가 무색할 정도의 눈부신 속도. 이는 선주혁이 북두연환장을 완성시키며 깨달은 바를 암영풍에 도 적용했기 때문이었다. 북두연환장 자체가 애초 신법에서 착안한 무공이다. 따라서 역으로 북두연환장을 신법에 응용하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흐름과 흐름의 사이를 자연스럽게 쫓는 선주혁의 신법은 전광석 화 자체였다, 도주를 시도하는 백웅으로서는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 는지 파악할 시간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그가 느낄 수 있는 것은 등이 따끔거릴 정도의 예기뿐. 본능적으로 진기를 모아 자광수를 뒤쪽으로 휘둘렀다. 동료가 같은 이유로 죽음을 맞이한 것을 그는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순간적인 판단의 실수는 참혹한 결과를 가져왔다. 고통을 가득 실은 단말마의 비명. 그가 세상에 남긴 최후의 음성이었다. 처절한 비명을 연이어 들은 노대림은 심장이 터질 듯했다. 비명 은 거의 동시에 들렸다. 백웅들이 백발마신의 단 일격조차 감당하 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는 마른 침을 삼키며 스스로 가능한 최대의 속도로 신번을 전개했다. 곧 시야가 확보되었다. 전력을 다해 신법을 펼친 결과 흙먼지가 피어오른 범위를 벗어난 것이다. "아아악! 아악!" 뒤쪽에서 수하의 비명 하나가 또 다시 들려왔다. 백발마신에게 죽음을 당한 것이 분명했다. 노대림은 불행 중 다행이라 생각했다. 사방으로 도주를 시도하는 만큼 누가 먼저 당할지는 아무도 모 르는 상황. 자신의 차례가 제일 마지막인 것은 천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상했던 것보다 수하들이 죽은 시간이 너무도 짧았지만, 그것 으로도 충분했다. 그가 필요했던 것은 아주 약간의 시간이었다. 적 어도 경신공부에 있어서만은 백존의 아래가 아님을 자신하는 노대 림이었기 때문이다. 세 명의 희생을 근거로 한 도주에 대해 노대림을 확신을 가졌다. 이 정도의 시간 차이를 둔다면 그 누구도 자신을 쫓을 수 없음을 알 고 있었다. 무공의 초식과 달리 신법은 속도의 절대치를 넘어설 수 없다. 그리고 자신은 그 절대치에 도달해 있다고 자부했다. 한데 목적의 달성과 활로(活路)를 찾은 데 대한 기쁨이 그의 표정 을 바꿀 여유도 없이 그는 신형을 멈춰 세워야만 했다. 긴 백발을 휘날리는 한 사내 때문이었다. "어, 어떻게......?" 절망 이전의 경악이 노대림을 절규하게 했다. 경신공부만큼은 천리마영(千里瑪影)이라 불리는 백존의 일원에게도 뒤떨어지지 않 는다고 자신했던 노대림이었다. 한데 세 명의 백웅을 죽인 자가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다. 평 생을 지켜온 자부심이 무너진 충격이 노대림을 뒤흔드는 것이다. "모두 죽으라고 했으니...... 죽어 줘야지!" 강렬한 불길함. 노대림은 전력을 다해 땅을 박찼다. 그러나 튀어 나가는 것은 하반신뿐. 번쩍하는 섬광과 함께 이미 상하체가 분리되어 버린 것이다. "크아아아아아악!" 고통과 좌절의 비명은 선명했다. 무조건적인 반사로 신체의 기능이 저하되어 의식을 잃는 그 순 간까지 노대림은 현실을 부정하기만 했다. 의식을 잃은 그가 죽음 에 이르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후투투투툭. 흙먼지와 돌맹이들이 가라앉으며 일대의 시야가 확보되었다. 숨을 쉬고 있는 자들의 눈에 우선적으로 보이는 것은 뿌연 먼지 에 뒤덮인 네 구의 시신. 그 짧은 시간에 절대고수 넷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이 모두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온추곤의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떨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있었 다. 백발마신, 백발마신하고 떠들어 대는 소리를 충분히 들었지만 이 정도의 괴물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자신과는 비교조차 허용되지 않는 패종회의 다섯 고수가 제대로 된 반항조차 못하고 비명을 달리했다. 그리고 이제 자신의 순서가 돌아온 것이다. "아이고, 선 대협!" 온추곤은 무릎을 꿇었다. 고개를 땅에 처박았다. 양손을 머리 위로 올려 손바닥을 비비기 시작했다. "소인의 안목이 일천하여 위대하신 백발마신님께 무례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부디 너그러운 아량으로 이 천한 목숨 하나 부지할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사형!" 지전형이 노기충천한 표정으로 외쳤다. "저자는 학청문의 제자를 참혹히 죽였소이다! 사형의 제자고, 저 의 제자들이오! 아이들의 원혼이 아직까지 이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을진대, 일문의 문주가 어찌 무릎을 꿇고 목숨을 구걸한단 말이 외까!" "사제, 자고로 영웅은 때와 시를 알아야 한다지 않은가? 우리가 한때 미숙한 판단으로 패종회라는 악적들에게 속았다지만, 이제 진 정한 영웅을 뵈었으니 속죄를 하는 게 당연한 일이지 않은가?" 온추곤은 비굴한 사형의 빠른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는 아예 온추곤에게서 시건을 거둬들인 후, 선추혁을 향해 당 당히 외쳤다. "과연 백발마신의 무공은 명불허전(名不虛傳)이구려. 선악(善惡) 과 시비(是非)를 떠나 귀하는 본문의 제자를 무참히 죽였소. 자신의 제자와 사질의 죽음을 외면한다면 어찌 무인을 자처할 수 있겠소? 내 비록 가진 무공은 일천하지만, 귀하와의 일전을 청하겠소." 검고 긴 수염을 휘날리며 선주혁을 똑바로 응시하는 지전영의 태도는 당당하기 이를 데 없었다. 선주혁은 그가 마음에 들었다. 주백과의 말처럼 가슴을 펴고, 당당히 설 수 있다면 그것이 사내 대장부요, 영웅이 아니겠는가? "지 대협과 이렇듯 악연으로 맺어진 사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패종회는 무림을 전복시킨 후, 지배하려는 악의 무리, 지 대협이 그 와 같은 사실을 먼저 알 수 있었더라면...... 이런 사단을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선주혁이 자신의 목숨을 빠았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 쉬운 일임을 알고 있다. 한데 갑자기 저렇듯 자세를 바꿔 예를 갖추자 지전영은 조금 어 리둥절해졌다. 그렇다고는 해도 상황이 달라질 것은 없었다. "이미 말했듯 시비를 가릴 처지가 못 되오." "알고 있습니다. 그저 안타까운 마음에 한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흥! 그런 마음은 본문의 제자들을 도살하기 전에 고려했어야 할 것이오." 지전영의 날카로운 호통에 선주혁은 씁쓸히 웃었다. 패종회와 맞서 싸우고 있다. 그 과정에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죽은 자나 죽을 자, 모두가 다 중죄를 지은 것은 아닐 터. 개중에는 눈앞의 지전영처럼 영웅의 풍모를 지닌 자도 있을 것 이고, 여하한 사정으로 인해 억지로 나선 자도 있을 것이다. 그들 모두에게 죽음이라는 일관된 결과를 부여하는 것은 큰 죄일 수도 있었다. 다소 감성적인 사고가 그의 표정을 변화시켰을 뿐, 패종회와 맞 서는 과정에 대한 회의는 없었다. 확신이 없다면 패종회와의 힘든 싸움에 임할 수 없음을 알고 있 기 때문이다. 전쟁이 벌어지면 죽는 이의 대부분은 무고하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장수를 잘못 만난 것이 무슨 죄란 말인 가? 그럼에도 수많은 사람은 필연적으로 죽음을 맞이하고, 승자만이 정의를 논한다. 죽은 자의 억울함이야 이루 말할 수 없겠지만, 정의는 언제나 승 자의 몫이다. 스스로 패자가 되어 억울함을 토로하고픈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패배자로서 살아가는 건 저쪽 세상에서 충분히 경험했다. 선우 아가씨의 말처럼 천명을 받은 것은 아닐지라도 사형을 도 와 패종회를 저지하는 승부만큼은 반드시 이기고픈 그였다. 무리수 를 둬야만 할 상황은 앞으로 많고 많았다. 안타까운 마음을 간직하 고, 무고한 자들의 죽음에 대해 애도하는 마음만큼은 유지한다고 해도 할 일은 해야 했다. 거창하게 대의를 논함도 아니요, 훗날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하는 것도 아니었다. 자신을 위해 목숨을 버린 분을 위해, 가족애를 느끼게 해 준 이 를 위해, 사랑의 의미를 알려준 사람을 위해, 그는 스스스로 지옥 불 에 뛰어들어야만 했다. 선주혁이 아는 바는 그것이 다였다. 그렇게 다시 한 번 결론을 내린 선주혁이 입을 열었다. "스스로의 선택을 통한 죽음입니다. 무인의 길을 걷는 자의 숙명 이니까요. 저들 역시 무인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무인으로서 걸어 야 할 길에 대해 선택권을 갖지 못했다면 그 죗값은 그들에게 바르 지 않은 길을 제시한 자가 치려야 할 것입니다." 노한 눈을 선주혁을 응시하던 지전영은 잠시 자신의 사형을 돌 아봤다. 사형, 온추곤은 아직까지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있었다. 지전영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귀하의 말씀이 옳소! 무인의 길을 선택한 이상, 고수에게 목숨 을 잃는 것은 영광일 뿐! 억울함이 무엇이겠고, 원통함이 무엇이겠 소? 내가 저들을 잘못 인도했으니 그 대가를 치르겠소." 원한을 가슴에 품고도 상대의 말을 인정하는 것은 결단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억지를 써서라도 원통함만을 부르짖는 것이 인지상정일 터. 지전영의 한마디는 다시 한 번 선주혁을 감탄하게 했다. '무공의 고하를 떠나...... 과연 세상에는 대단한 사람들이 많구 나!' "학청문의 제8대 제자 지전영이오. 주제넘은 바는 알고 있으나 한 명의 무인으로서 백발마신과 무공을 논해 보고자 하오." 지전영은 두 손을 맞잡고 선주혁에게 예를 갖춰 결투를 신청했 다. 선주혁 역시 포권의 자세를 취했다. "곤륜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세상을 떠도는 선주혁입니다. 지 대협과 무공을 논할 수 있음을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원한과 적대적 관계에 있는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 얽혔다. 지전영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선주혁은 그 의미를 명확히 파악했다 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조금은, 정말이지 조금은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 역시 이제는 도검(刀劍), 권장(拳掌)에 몸과 마음을 실 은 무인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선주혁은 마주 웃었다. "백발마신께서 소생의 명예를 조금이라도 생각해 주신다면 최선 을 다해 주시길 바라오." 어느새 미소를 지우고 결연한 표정을 갖춘 지전영이 말했다. 선주혁 역시 입가에 미소를 지웠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으며 악연이라 할지라도 지 대협의 풍모를 흠모하기에는 부족함이 없군요. 소새은 지 대협과 무공을 논함에 조금도 소홀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지전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생과의 겨룸이 조금의 가치라도 지닌다면 학청문의 명백을 끊는 일은 한 번만 재고해 주시오." 선주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전영은 선주혁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지전영의 발이 땅을 박찼다. 일체의 군더더기조차 없는 깔끔한 신법이 전개되고 위맹한 경력 을 실은 일 권이 선주혁을 향해 날아든다. 쾌(快)와 중(重)이 잘 조화된 일 권. 선주혁은 진중한 표정으로 쌍 장에 내력을 모았다. 다가오는 지전영을 향해 느릿하게 내밀어지는 쌍 장. 그 느릿한 속도에 호응하듯 천둥 같은 소리가 은은히 울려 퍼진 다. 더불어 눈부신 빛을 발하는 거대한 구체가 지전영을 향해 쏘아 진다. 지전영은 피하지 않고 그 빛을 정면으로 맞받아쳤다. 한순간 빛 무리가 지전영의 전신을 감싼다. 비명도 없고, 피도 튀기지 않았다. 지전영은 선주혁의 일 장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아무런 고통조차 느끼지 않고 보내는 것. 선주혁은 그것이 지전영을 위한 최선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지전영이 사라진 공간 쪽에서 선주혁은 시선을 거두질 못했다. 만약 그가 무인으로서의 죽음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선주혁은 그 를 죽이려들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의 자비가 훗날 어떤 독이 되어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갈지도 모를 일임을 잘 알고 있음에도 지전 영을 죽이고픈 마음은 없었다. 그의 당당함이, 그의 용기가, 그의 기백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전영은 자신이 걸어야 할 길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 었다. 자신이 패종회에 맞서듯 그 역시 오늘 자신과 맞서야 함을 선 주혁은 이해할 수 있었다.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정말이지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지전영 과는 망년지교를 맺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선주혁은 내밀었던 손을 거둬들인 후, 두 손을 마주했다. 고개를 숙였다. 한 명의 무인으로서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이다. 선주혁의 그와 같은 행동에 철무종과 명주운은 크게 감동을 받 았다. 그들 역시 무인으로서 선주혁이 보여준 일련의 행동을 이해 하는 것이다. 강자 앞에 굴복하지 않고, 약자를 무시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두 사람이 평소 그려 왔던 진정한 무인이 아니던가? 동경해 왔던 무인의 표상 그대로의 모습을 백발마신은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선주혁을 따라 지전영이 사라진 그곳 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화려한 겨룸은 없었다. 번천지복의 위력을 가진 장력이 발출된 것도 아니었다. 기기묘묘한 초식이 전개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백발마신과 지전영은 다시 보기 힘든 명승부를 보여줬 다. 그와 같은 승부를 보여줬다는 사실만으로도, 아니 승부에 임하 는 자세만으로도 지전영은 애도를 받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선주혁은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온추곤을 바라봤다. 사제가 증발하듯 사라진 것을 확인한 그는 손이 발이 되도록 비 는 중이었다. 입으로는 끊임없이 자비를 구하는 말만은 반복하고 있었다. 선주혁은 싸늘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사실 자신의 부활을 널리 알리는 것이 목적이다. 모두 죽어 버려서야 불가능한 일. 누군가 하나 살아남아야 오늘의 일을 전할 것이다. 패종회가 사 형을 상대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살아 있음을 최대한 빨리 소문내야만 했다. '지 대협이 그 일을 맡아줬으면 좋았을 텐데......' 다시금 진한 안타까운 심정이 가슴 한쪽을 채웠다. 하지만 지전영은 스스로 목숨을 끊을지언정 그런 역활을 위해 이 자리에서 목숨을 구걸 받지 않았을 것이다. 선주혁은 나직이 코웃음을 친 뒤, 온추곤을 향해 말했다. "지 대협의 기개에 크게 감명을 받은 바, 학청문의 명맥을 이어 주겠다." 온추곤의 고개가 확 들렸다. 눈물, 콧물로 뒤범벅이 된 그의 얼 굴에는 환희가 엿보였다. 선주혁은 심술이 났다. 죽음을 앞에 두고도 그래도 사형이라고 그의 목숨을 살리려 한 지전영이 떠오른 것이다. 사제의 죽음에 대 해 분노하고 복수만을 생각해야 할 온추곤이 그저 살아남을 수 있 다는 사실에 저토록 기뻐하는 것이 못마땅했다. 하지만 지전영의 마지막 부탁을 기억하기에 선주혁은 몸을 돌렸다. "대협, 감사합니다. 소생은 그저 백발마신님의 너그러우심을 죽 을 때까지 찬양하겠습니다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귓등으로 들려오는 온추곤의 말에 선주혁은 더욱 표정을 굳힐 뿐이었다. Chap. 9 천애백의단. < 1 > 처음에는 눈부신 백의였을 것이다. 그를 기리기 위한 색으로 옷 을 맞춰 입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도 원래의 복색(服色)을 짐작키 힘들었다. 신 선한 염료(染料)를 사용해 계속해 염색을 하는 양, 반 시진에 걸쳐 선혈을 뒤집어썼기 때문이다. 같은 복장의 무인들 중에서 전장(戰場)을 헤집는 두 명의 사내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한 명은 범상치 않는 예기를 발하는 검으로 단 한 치의 군더더기 도 허용치 않는 기계적인 동작으로 상대를 베어가는 중이었다. 청 광을 발하는 검기는 상대의 방어조차 허용치 않았다. 막아서는 것 은 무기건 신체건 가리지 않고 두 동강이 났던 것이다. 일체의 망설임도, 용서도 없는 동작의 반복. 늘어가는 시신들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는 일말의 동정심도 찾 을 수 없었다. 준미하기 이를 데 없는 용모였건만 적들에게는 이미 흉신악살의 그것으로만 보일 뿐이었다. 이런 무정함이 적어도 그에게 있어서만큼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제를 죽음으로 몰고 자들에게 복수를 함에 있어서 일말의 자비도 필요치 않았다. 사제가 제안했던 방식으로 저들의 야욕을 분쇄하겠 다는 일념만이 그의 머리를 채우고 있었다. 이에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은 그저 베어 넘길 뿐이었다. 다른 한 명의 손속 역시 사정을 봐 주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체구가 작고 가냘프나 흠뻑 뒤집어쓴 선혈 속에서도 준미함이 빛나는 사내. 그의 주변에는 수많은 장영(掌影)이 피어올랐고, 하나의 장영이 사라짐은 곧 하나의 적이 사라짐은 의미했다. 죽음을 부르는 화려함. 그것이야말로 이 절세 준미한 청년의 무공을 표현하기에 적합한 말이었다. 그들의 뒤를 따르는 자들 역시 망설임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전설로 남아 자신들의 자부심이 된 백발마신을 위한 복수에 그들은 전념하는 중이었다. 패종회를 겨눈 도검에는 복수의 염원만 이 담겨 있었다. 두 사내와 그들의 뒤를 쫓는 백여 명의 무리는 그렇게 백영문(白 英門)의 무인들을 도륙하는 중이었다. 카아앙! 긴 공명음. 처음으로 강기를 막아내는 자가 나타났다. 안 그대로 보석처럼 빛나던 그의 눈이 더욱 빛을 발했다. 이전에도 이와 같은 경험이 몇 번 있었다. 자신의 일격을 막아낸 자들은 모두 패종회의 주구였다. 백웅이라고 했던가? 무림의 각지에 파견되어 군소방파를 지휘하 는 자들이었다. 사제의 죽음에 대한 직접적인 원한을 풀 수 있는 대상. 그의 두 눈 에서 진득한 살광이 일렁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악귀 같은 놈!" 매부리코의 노인이 이를 갈아붙였다. 상대의 일격을 감당해 내 긴 했지만 그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가득했다. 최근 이자로 인해 회 가 큰 피해를 입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피를 흠뻑 뒤집어썼음에도 본연의 준미함을 감출 수 없는 사내, 남지학이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사제의 복수를 위해서라면 그보다 더한 소리를 들을 짓도 해 주 지." "네놈에게 회의 특급 척살령이 내려졌음을 알고 있느냐? 크흐흐 흐, 방자하게 설쳐댈 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매부리코의 노인은 애써 여유로운 표정으로 남지학을 협박했다. 남지학의 답변은 간결했다. "얼마든지!" 짧은 대답 이후 남지학은 검을 거둬들였다. 아니 거둬들임과 동 시에 다시 앞으로 향하는 검이었다. 매부리코의 노인은 검이 날아드는 방향을 가늠했다. 명성에 비 해 그다지 빠르다 말할 수 없는 공세였기에 또 한차례 옥용검마의 검을 막아낼 수 있을 것을 확신했다. 이 정도라면 오늘 활로를 찾는 것도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막연 한 기대감도 생겼다. 그만큼 남지학의 검에는 특별한 바가 없었던 것이다. 하나 그의 기대가 곧 무너져 내렸다. 그 어떤 초식이라 해도 취 둘러지는 궤적이 가지는 변화에는 한계가 있다. 아무리 검감을 운용하고 있다고 해도 맞선 상대 역시 강기를 운 용한다면 그저 닿는 것만으로는 목표에 큰 타력을 줄 수 없는 터. 충분한 힘이 실릴 정도의 움직임 없이 억지로 만들어 낸 변초에 는 큰 위력이 실지리 않는 법이다. 다라서 이미 발출된 초신은 어떤 식으로건 최대한의 위력을 내는 궤적을 쫓을 수밖에 없었고, 옥용검마의 공격은 그다지 빠르지 않 아 그 검로를 익히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데 옥용검마의 공격은 달랐다. 변화의 한계를 충분히 감안한 방어였건만 옥용검마의 검이 상상 불허의 경계에서 날아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검으로 두 개의 초식을 동시에 전개하는 것 만 같았다. 무극삼검식의 마지막 초식이 가진 특징이었다. 현천자의 무극삼검식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초식을 하나로 펼 쳐내는 듯한 모용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매부리코의 노인은 두 눈을 부릅떴다. 옥용검마가 정식으로 펼 쳐내는 공격은 단 일 초도 막아낼 수 없다는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 그의 머리는 땅바닥을 뒹굴었다. 몸과 목이 분리된 것이다. 무리의 우두머리가 단 일 초에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사기에 큰 영향을 끼친다. 백의를 갖춰 입은 무인들의 입에서는 거센 함성이 터져 나오고 그들의 병장기에 묻어나는 선혈의 양이 늘었다. "아아아악!" 최우의 비명이 터졌고 무인들은 지친 몸을 추슬렀다. 사상자는 경미했다. 좋다고많는 볼 수 없었다. 그만큼 패종회에 입히는 직접적인 피해도 적었기 때문이다. 국지전 초기에는 꽤 많 은 수의 패종회 무리를 죽일 수 있었다. 열 명에 다하는 백웅을 처 단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단 한 명의 백웅만이 진정 한 소득이랄 수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오늘의 승리가 가지는 가치가 펌하될 이유는 없었다. 패종회에 가입하게 되면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천하에 고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오늘의 승리는 값지기 때문이다. "우와와와와와와! 천애백의단(天哀白依團) 만세!" 피를 흠뻑 뒤집어쓴 한 명이 검병과 검신을 잡고 두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만세!" 위로 황제를 둔 백성이 언급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지만 이들의 함성에는 주저함이 없었다. 백발마신에 대한 이들의 존경심은 황제 와 비할 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백발마신의 복수를 위해 결성된 천애백의단은 사파연합과 일월 신표의 정예, 그리고 백발마신을 흠모해 자원한 흑도 고수 천여 명 으로로 구성되었다. "백룡조 만세!" 백룡조는 천애백의단의 세 개조 중 하나로 옥용검마 남지학이 끌고 있었다. 다시 말해 복수의 선봉에 선 결사대나 다름없는 조였 다. "천세!" 남지학은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자신의 검을 잠시 내려다봤다. 은설연이 그의 옆으로 다가섰다. 선주혁이 죽은 이상, 그녀는 한 없이 정의련에 머물 수 없었다. 이에 독고건을 찾아야겠다며 정의 련을 나선 후, 남지학과 합류한 것이다. "남 소협의 무공은 또 한 걸음 나아간 것 같군요." 작은 목소리였으나 그 속의 감탄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아직 멀었소." 남지학은 짧게 대답했다. 사제인 선주혁의 말을 듣고 그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그럼에도 패종회를 상대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사제의 말을 빌리자면 종 극과 어깨를 나란히 하거나 그 이상의 고수들로 구성된 백존이었 다. 자신으로서는 그들 중 하나 이상을 감당하는 것은 무리라는 뜻 이었다. 대종사로서의 자질을 빛내던 사제조차 저들 다섯의 합공에 의해 결국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에 복수를 향한 염원이야 하늘을 찌르지만 그는 선뜻 사제의 복수행에 나서지 않았다. 천애백의단을 결성한 이후에도 한동안 두 문불출한 것이다. 혹자는 옥용검마가 패종회가 두려워 몸을 사리는 것이 아니냐며 떠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남지학은 함부로 움직이지 않았다. 진정한 사제의 복수는 패종회를 완벽히 없애는 것이지, 저들 중 몇몇의 목숨을 빼았는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었다.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이 지나도 늦은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그가 결국 복수행에 나선 것은 세인들의 입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그가 백룡조를 이끌고 본격적으로 패종회를 상대하기 시작한 것 은 일월신교의 강력한 요구 때문이었다. 일월신교는 시간만 주어진 다면 패종회의 음모를 저지할 방책이 있음을 자신했다. 하지만 본격적인 적대관계를 표방한 지금, 패종회가 전면전을 전개해 온다면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에 남지학은 천애백의 단 중 백룡단을 이끌고 패종회의 자기를 치게 된 것이다. 세인이 손가락질을 절치부심(切齒腐心)해 온 기간이 충 분치 않았다고 해도 남지학의 무공은 이전과는 다른 성취를 보이고 있었다. 적어도 무공의 자질에 있어서만은 천하제일을 논하기에 충 분한 그였던 것이다. 발전의 원동력은 무엇보다 사제의 복수에 대한 열망이었다. 그 열망이 남지학을 극한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사제의 복수를 하고픈 욕구를 억누르는 것은 한때 그를 주화입마의 위험까지 몰고 갈 정도였다. 그 위기를 넘기 는 과정에서 남지학은 스스로를 다스릴 능력을 굳건히 하게 된다. 이는 감정의 조절 정도에 그치지 않았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원한을 제어하는 과정 속에서 그는 신체와 정신 모두를 제어할 수 있는 그만의 방식을 만들어 낸 것이다. 자신의 대한 완벽한 통제는 곧 무공의 비약적인 발전의 계기를 가져왔다. 완벽에 완벽을 더한 무극삼검식에 아직도 더 보충해야할 것이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무림에 존재하는 모든 초식을 하나로 귀일(歸一)시키는 무극삼검 식이었다. 그것을 가장 완벽히 소화해 냈다고 생가한 것은 착각에 불과 했다. 상황에 가장 적합한 한 지류를 완벽에 가깝도록 전개할 수 있 었을 뿐, 진정한 완성은 아님을 남지학은 발견할 수 있었다. 이에 끝없는 수련과 명상을 통해 자신의 검초에서 진정한 만류 귀종(萬流歸宗)을 이루고자 했다. 그리고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 진정한 무극삼검식의 완성에 성 큼 다가선 것이다. 하나 천음마후가 무한대의 음기를 제공해 주는 백존을 상대할 때, 얼마나 효력을 나타낼지는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이 맞서야 할 적은 한계를 가진 초식으로 상대할 수 없기 때 문에 남지학은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해 자신을 가다듬어가야만 했 다. '사제, 조금만 더 기다려! 내 반드시 복수를 하고야 말 테니.' 금일에 있었던 작은 승리에 만족하지 못하는 남지학의 두 눈은 선주혁에 대한 복수심으로 강렬히 빛나고 있었다. 그런 남지학을 보며 은설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었다. 그가 얼마나 사제의 복수를 원하 는지 그녀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 나이에 저 정도의 성취를 보이고도 만족하 지 못하고 애가 닳아 하는 모습을 받아들이기에 자산이 너무나 초라해지는 것이다. '선 소협이 비명을 달리했으니, 이번 패종회와의 싸움에서 살아 만 남는다면 이 사람이 천하제일의 고수가 되는 것은 당연지사겠구 나......' 은설연이 내실 결론을 내릴 때, 남지학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는 내공을 실어 백룡조 전원을 향해 외쳤다. "전원 주위를 늦추지 마시오!" 백발마신의 사형인 옥용검마의 명이다. 방금 전의 격전에 휴식 에 대한 열망이 간절하건만 백룡조는 일사불란한 곙계태세을 갖췄 다. "무슨 일이에요?" 백룡조원 하나가 도를 움켜지며 남지학에게 물었다. "많은 수의 인원이 접근하고 있소." 은설연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이전의 싸움에 비해 오늘은 수월 했다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한 차례 격전을 치룬 후였다. 또 다른 적의 공격을 받는다면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우리의 공격을 저들이 짐작하고 있었을까요?" 은설연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남지학은 무거운 침묵을 지킬 뿐이다. 천애백의단의 공격 목 표는 기밀 중의 기밀이다. 소속된 단원조차 어디를 공격하는지 알 수 없게끔 되어 있는 것이다. 간혹 구대마존 중 간세인 세 명을 이용, 역정보를 흘릴 때는 있 었다. 하지만 그 시기를 조정하고, 범위를 넓혔기에 지금껏 천애백의 단의 공격이 미리 노출된 적은 없었다. 따라서 오늘 이 자리에 패종회의 지원이 있다면 정보체계에 구 멍이 났다는 뜻이었다. 강적을 상대함에 있어서 그와 같은 상황은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남지학과 은설연의 표정이 무거워진 데는 이와 같은 이유가 있 었다. 잠시 후, 백룡조와 비슷한 숫자의 무인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먼지를 뒤집어 쓴 모습이긴 했지만 그들 역시 백의를 갖춰 입고 있었다. 안력을 돋워 접근해 오는 무인을 확인한 남지학의 얼굴에 의아 한 표정이 떠올랐다. 백의의 무인들을 이끌고 달려오는 자는 도귀 주백광이었다. 망 년지우의 선주혁의 복수를 위해 백호조를 이끄는 그였다. "남 소협!" "주 대협!" 주백광은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남지학의 앞에 도착했다. 그는 은설연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할 뿐이었다. 잠시 후 삼백여 백호조원들 역시 도착했고, 아군임을 확인한 백 룡조원들은 그제서야 경각심을 풀며 안도하는 얼굴들이었다. "주 대협께서는 혈웅방(血熊幇)을 공격하시기로 하지 않았습니 까? 한데 어째서 이곳에......?" 은설연이 안 그래도 큰 눈을 둥그랗게 뜨며 물었다. "혈웅방으로 향하던 중, 기이한 소식을 전해 들었소. 이에 혈웅 방은 포기하고 곧바로 남 소협에게 달려온 것이외다." 주백광의 말은 빠르고 급했다. 전체적으로 크게 격앙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 비록 가지에 불과하다 해도 패종회의 세력을 쳐내는 일은 가벼 운 사안이 아니었다. 무슨 소식을 들었는지 몰라도 임무까지 포기 하며 이곳에 달려온 주백광의 행동에 남지학은 눈을 크게 떠야만 했다. 주백광이 단순하고 과격하기는 해도 결코 경솔한 인물은 아니었 다. 또한 누구보다 사제의 죽음에 대해 원통해 했다. 그런 주백광이니 적어도 혈웅방을 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소식 을 접했기에 이곳으로 달려 왔을 터. 그 정도로 대단한 일이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재촉 해 묻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나 남지학은 참을성 있게 주백광의 말 을 기다렸다. 하지만 은설연에게는 남지학과 같은 자제력이 없었다. "아니, 대체 무슨 소식을 전해 들었기에......?" "도저히 믿기지 않을 소문이 돌고 있소이다." "소문이요? 아니, 소문 때문에 혈웅방을 공격하는 것도 미루고 예까지 달려오신 겁니까?" 은설연의 언성이 다소 높아졌다. 주백광은 공격적인 은설연의 질책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렇소." 너무나 당당한 대답에 은설연은 어이가 없어져 말조차 잇지 못 했다. "내 친구...... 그러니까 주혁이 살아 있다는구려!" 주백광의 음성은 우렁차기 이를 데 없어 백룡조원들의 귀에 들 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백룡조원들은 모두 두 눈을 부릅뜬 채,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애써 정황을 파악키 위해 진정하려 노력했지만 그들의 표정에는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백발마신이 살아 있다면 그 기쁨을 어찌 형언할 수 있겠는가? 남지학은 미간을 찌푸렸다. "주 대협, 그럴 가능성은 전무하다는 것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 까?" 그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당시의 순간이 다시 생 생히 떠올랐기 때문이다. "제 손으로 사제의 사혈을 짚었습니다. 비석까지도...... 제 손으 로 만들었지요." 남지학은 다소 힘이 빠진 음성으로 말했다. 사제를 위해 아무것 도 하지 못했던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사실은 나도 알고 있소. 그래서 처음엔 코웃음을 쳤소 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들어보면 남 소협도 생각해 볼 바가 있을 게요." "어떤 이야기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은설연은 입을 내밀며 뽀족하게 물었다.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소문을 믿고 중요한 일에 차질을 빚은 주백광이 못마땅했던 것이 다. "스스로를 백발마신이라 자처한 그자는...... 단신으로 패종회의 개새끼 다섯을 손짓 하나에 쳐 죽이고, 일 장에 학청문도 백여 명을 몰살시켰다고 하오. 그런 무공을 지닌 백발의 젊은이가 주혁 말고 또 있을 수 있겠소?" "주 대협 정도면 무림의 소문이 얼마나 헛되이 부풀려지는지 잘 아시지 않나요? 그 정도의 선위를 보이는 것은 일월신교의 단 교주 나 저희 조부님 정도가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것쯤음 생각하실 수 있잖아요! 무공을 제대로 모르는 자에게는 장풍을 쏘아내는 것조차 대단하게 보인다는 걸 모르세요?" 은설연이 답답하다는 듯 따지고 들었다. "증언을 한 자는 호남성에서 형산파와 어깨를 나란히 하던 학청 문의 문주라 하오." "네?" 흔설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학청문은 그녀도 알고 있는 문파였다. 동정호 인근의 상권을 장 악, 유지할 정도의 힘을 존속해 왔을 정도니 결코 무시할 만한 곳이 아니었다. 학청문의 문주 정도 되는 자가 헛소리를 해댈 리는 없었 다. 선주혁을 가장한 자가 있다손 치더라도 그의 무공이 발군이라 는 것만큼은 기정사실이라 볼 수 있었다. "정예랄 수 있는 문도를 잃고, 그의 두 사제 역시 죽음을 당했 다는구려. 학청문주는 패종회의 탈퇴와 더불어 봉문(封門)을 선언했 소." "패종회를 탈퇴했다고요?" 은설연의 태도가 앞에 비해 많이 부드러워졌다. 이제는 주백광 이 혈웅방에 공격을 포기하고 이곳으로 달려온 이유가 조금씩 납득 되기 시작한 것이다. 패종회에 입회를 했다면 그들의 엄청난 힘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 힘을 직접 경험하고도 탈회(脫會)를 결정할 정도면 스 스를 백발마신이라 주장하는 자의 역량에 대해 집작을 볼 수 있었 다. 적어도 학청문주에게 있어서 그자는 패종회에 못지않은 두려움 을 주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소. 정황이 이러하니 주혁의 생환에 대해 우리가 직접 조사 해야 하지 않은가 싶어 이렇게 달려온 거요." "흠......" 여태껏 주백광과 은설연의 대화에 귀를 기울리고 있던 남지학이 신음성을 흘리며 두 사람의 주의를 자연스럽게 집중시켰다. "간단한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과거에도 사제를 사칭하 는 자가 있었습니다. 제가 사제의 죽음을 확인한 이상, 사실 가짜일 가능성이 높지요." "패종회에서 우리를 혼란시키기 위해 수작을 부리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은설연이 끼어들며 물었다.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복수의 기치를 든 천애백의단의 주목적을 흔들어 보겠다는 계략일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렇게 뻔히 들여다보이는 수작을 부릴까요? 더구나 저와 종 장로께서 사제의 죽음을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사제가 부활했다 고 주장한들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했을까요?" "말도 안 되는 주장이기에 외려 믿을 만한 데가 있다고 생각하시 는 건가요?" 은설연은 여전히 부정적인 의미로 되물었다. "누군가를 속이고자 한다면 그럴 듯한 방향을 찾기 마련일 것입 니다. 이처럼 터무니없는 방법은 상대를 속일 계략이 되기에는 무 리가 있지요." 남지학은 차분히 설명을 마쳤다. "하지만 지금 우리부터가 흔들리고 있잖아요. 주 대협께서 계획 을 변경해 혈웅방을 공격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저들의 계략은 주효 하고 있다고 봐야 하지 않나요?" "이런 가능성까지 고려한 심계(心計)일 가능성도 물론 있을 것입 니다. 하지만 주 대협의 말씀대로 명확한 사실 확인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당연한 이야기요! 지금 이 소문은 날개를 달고 중원 전역에 퍼 지고 있소. 즉. 소문은 패종회의 개들도 들었을 것이란 말이오. 만 약 주혁 그 친구가 다시 살아 돌아온 것이라면 지극히 위험한 상황 일 터. 우리가 돕지 않는다면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를 일이오!" 주백광은 이미 결정을 내리고 이곳으로 달려온 듯 단호히 말했다. "그게 바로 저들의 계략이라면 어떻게 해요? 이미 유명을 달리 한 선 소협을 내세워 저희 천애백의단을 끌어들이는 함정이라면 어 떻게 하냐고요?" 추궁에 가까운 은설연의 질문에 주백광이 표정을 굳혔다. "설령 그것이 함정이라 해도 난 가서 확인해야겠소. 백에 하나, 아니 만에 하나라도 주혁, 이 친구가 살아 있을 때의 가능성의 가능 성을 고려해야 하오. 그것이 적의 함정을 두려워해 벌벌 떨고 있는 것보다 나으니 말이오!" "지금 무서워서 피하자는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은설연이 발끈하는 심정으로 말했다. "은 소...... 협이 그렇다는 이야기가 아니오. 여하튼 나와 우리 백호조원들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주혁의 생사를 확인해야만 하겠 소이다. 만약 그가 생환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들 도와야 할 상황임 이 분명하니까 말이오." 주백광이 한 번 고집을 세우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생각를 바꾸 지 않는다. 그것을 이미 파악한 은설연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남지학만이 제대로 된 결론을 내려줄 것이라 생각했다. 아무리 주백광이라 해도 남지학의 의견만은 존중하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남지학은 미간을 찌푸린 채, 꽤 오랜 침묵을 유지했다. 그가 결국 입을 열었다. "주 대협의 말씀이 옳습니다. 아주 작은 가능성일 뿐이라도 우리 가 주혁을 외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만에 하나라도 천추의 한을 남길 일을 만들어서는 안 되겠지요." '정말이지 평소의 영민함, 아니 천재성마저도 선 소협만 연관되 어지면 모두 사라지고 마는구나!' 은설연이 남지학을 보며 떠올린 생각이었다. 그토록 뛰어난 판 단력을 가진 남지학이었지만 선주혁과 관련된 문제에서는 상식선 에서도 납득키 힘든 선택을 하곤 하는 것이다. "남 소협, 사혈을 직접 짚으셨잖아요.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떠 들어 대도 남 소협만큼은 그런 허망한 소문에 휘둘려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요?" 당장이라도 소문의 근원지를 향해 달려가고픈 심정이 역력한 주 백광을 살피며 은설연이 다급한 심정으로 말했다. "설마하니 그 사람이 진짜 살아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 죠?" 자신의 사제에게만큼은 세상사 중에서 불가능이 없다고 생각하 는 남지학이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지금만큼은 태도를 분명히 해야 했기에 은설연은 질문을 던졌다. 설마 백룡, 백호조를 이끌고 함정일지도 모를 곳에 함께 가자는 의사가 아니라 믿고픈 것이다. "솔직히...... 모르겠소. 사제라면 그 상황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 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부정할 수 없소이다." "......!" 은설연은 남지학의 발언에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이 사람은 사제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높았다. 치명적인 중상을 입은 자가 사혈을 짚이고도 살아남을 수 있다 는 것. 그것도 이미 장례를 치른 후 오랜 시간 동안 땅에 묻혀 있는 자가 살아 돌아왔다는 것. 그와 같은 사실이 현실 가능성이 있다고 어찌 말할 수 있을까? 평범한 사람이다 해도 부정할 이야기였다. 똑똑한 사람일수록 자신이 직접 경험하거나 확고히 알고 있는 사실에 어긋나는 것은 용납키 힘든 법이다. 한데 천재라는 말로도 표현이 부족한 이 남자가 자신이 알고 있 는 절대적인 기준을 넘어선 사실을 납득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 다. 단지 사제이기 때문에! '선 소협이 지옥에서 염라대왕의 목에 쇠줄을 걸고 끌고 왔다고 해도 믿겠다는 건가?' "역시 남 소협이라면 이해할 줄 알았소! 역시 주혁의 사형이오. 하하하하핫!" 은설연의 긴 한숨은 주백광의 대소에 묻혔다. < 2 > "후......! 이봐, 명 제. 선 대협께서 대체 무엇을 하고 계신 건지 자네는 아나?" 백발마신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철무종과 명주운은 의형제를 맺 고 호형호제하기에 이르렀다. 정통 있는 정도 문파에 소속되 명주 운과 근본 없는 낭인에 불과한 철무종이었으나, 두 사람 모두 서로 의 신분에 개의치 않았다. "글쎄요......?" 명주운이 백발마신이 있는 쪽을 힐끗 쳐다본 후 고개를 갸웃거 렸다. "무공을 연마한다거나...... 그런 거 아닌가?" "저런 수련번이 있다는 이야기를 소제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만...... 선 대협의 표정이나 자세를 보아서는 형님 말씀처럼 뭔가 를 연구하고 계신 것 같기도 합니다." "거참......! 신기하긴 하네만 영 정신없군 그래." 철무종은 다시 백발마신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한동안 멍하니 시선을 빼앗겼다. 선주혁은 양손을 내민 채 모닥불 앞에 앉아 있었다. 언뜻 보아선 언 손을 녹이는 듯했으나, 그와 같은 고수가 추위를 탄다는 것은 어 불성설, 말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단지 그렇게 불을 쬐고 있었다면 철무종이 신기하다 여기지 않 았을 것이다. 기이한 바는 선주혁이 내민 손 사이의 불길이 사그라졌다가 피 어오르길 반복한다는 것이다. 타탁 소리를 내며 활활 타오르던 불길이 주기적으로 잦아든다. 그리고 어느 한순간 원래의 모습대로 맹렬히 타길 반복하니 그 조화에 철무종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기는 것이다. "내력을 발출해 불길을 억누를 수는 있겠지만, 소재의 부족한 안 목으로 보기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마치 불길이 힘을 다했기 에 줄어드는 것처럼 보이지 내력으로 주변을 억누르는 것 같지는 않거든요." 명주운의 설명에 철무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도 그래. 한데 꺼질 듯 잦아들었던 불길이 왜 멀쩡히 되 살아나냐고? 그것도 아주 자연스럽기 그지없잖아?" "제가 궁금한 것도 바로 그겁니다. 불길이 주는 것도, 느는 것 도...... 너무나 자연스러워 마치 원래 그런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인 게 신기할 따름이죠." "애초 선 대협 같은 분이 추위를 느끼실 리도 없고. 추격을 당하 는 마당에 불을 피우시는 데는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우형의 생각 으로는 선 대협이 뭔가 기이한 무공을 수련 중인 게 분명한 것 같 네." "흠......" 명주운은 나직한 신음성만을 흘릴 뿐이다. 모닥불을 살렸다, 죽였다 하는 게 무공에 무슨 도움이 되는지 그로서는 알 수가 없었 던 것이다. 장풍 한 번으로 모닥불을 끄기는 어렵지 않다. 백발마신 정도의 무공이라면 삼매진화를 일으켜 불을 피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게 쉽게 처리할 수 있는 일을 며칠에 걸쳐 저렇게 몰두해야 하는 이유를 그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더구나 패종회의 무리가 호시탐탐 노리고 있을 지금 이 상황에 서 보란 듯 불을 피우는 것도 그는 납득치 못했다. 그 순간, 철무종이 퉁방울만 한 눈을 부릅떴다. "어? 완전히 꺼졌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소리쳤다. "호오! 다시 붙네?" "이번에는 선 대협께서 삼매진화로 불을 피우신 겁니다." 환전히 사라졌던 불이 다시 붙을 뿐더러 이전에 비해 훨씬 맹렬 하게 타오르는 것을 보고 명주운이 나섰다. "다시 꺼지는데?" 이전까지는 더 이상 태울 물건이 없어 잦아드는 듯했던 불길이 이제는 거의 한순간 사그라졌다. 그렇게 불길이 꺼지면 선주혁은 다시금 삼매진화를 펼쳐 불을 되살렸다. 그와 같은 반복의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앞서와는 달리 이제는 명주운도 넋을 잃고 불길이 피고 지는 모 습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의 입장에서도 저토록 쉽고 자연스럽게 삼매진화를 전개하는 것만으로도 시선을 빼앗기기에 충분했다. 와중에도 불이 꺼지고, 다시 타오르고 하는 속도는 가속이 붙어 갔다. 종국에서는 연속으로 깜빡인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저자에서 눈속임으로 보여주는 마술을 보듯 구경을 하던 철무종 과 명주운이 기이한 현상에 감탄을 금치 못할 즈음. 갑작스레 불길의 크기가 커졌다. 주변의 환히 밝힐 정도의 크기에서 꺼졌다 반복하길 계속하는 동안 그 크기는 더욱 커져만 갔다. 나중에는 폭발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롤 불길이 치솟았다. 신기한 것은 불기이 치솟는 방향이 정확히 제어되고 있다는 것 이다. 즉, 선주혁의 앉아 있는 방향으로는 작은 불똥조차 튀지 않 고, 오직 하늘을 향해 솟구치기만 했다. 어느 한순간. 철무종과 명주운은 거대한 불기둥이 하늘을 떠받치는 것을 봤다. 떠하니 벌어진 두 사람의 입은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Chap. 10 멸세강마대법. < 1 > 언뜻 보아서는 선비처럼만 보이는 중년의 사내. 부드러운 인상 에 깊이 있는 눈빛을 가진 사내는 미간을 찌푸린 채 미동조차 않고 서 있었다. "아직도 후회하고 계십니까?" 염마 종극의 공손한 태도. 천하에서 종극에게 이와 같은 예우를 받을 자는 단 한 명뿐이었다. 단일한 세력으로 무림 최강임을 자부하는 일월신교를 이끄는 자 가 아니고서야 누가 종극의 고개를 조아리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지금이라도 중단할 수 있는 일이니...... 정녕 지금이 이 방법을 써야 할 때라고 보시오?" 단목하진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어조로 물었다. "그 아이의 말에는 지금껏 한 치의 어긋남이 없었습니다. 결국 천음마후와 구음대법이라는 것도 존재한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천 음의 지원을 받는 고수들은 무림에 있어서 재앙(災殃)이 될 것입니 다. 이 방법이 아니면 천하는 패종회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 분명합 니다." 종극은 자신의 소신을 드러냈다. 직접 패종회의 고수를 확인 한 이상, 누구보다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패종회가 무림을 지배하는 것이 세상을 멸망시킬 정도의 위험 아라 보시오?" "무림을 지배하고자 하는 저들이라면...... 당연히 일월신교를 짓 밟고자 할 것입니다. 이는 과거와 같이 성화(聖火)를 모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수많은 형제를 죽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신앙을 가슴 에 품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공을 알든, 모르든 악적들의 도검 에 처참히 죽어야 할 것입니다. 놈들은 아예 씨를 말리려 들 것이 고, 이는 저희 형제들에게 있어 종말(終末)의 그날과 다르지 않습니 다." 종극의 열변에 단목하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본교가 생긴 이래 단 한 번도 사용되지 않은 비방(秘方)이오." "전멸을 가정할 수 있을 상황입니다." "위기의 상황은 많았소. 한데 이 비방의 봉인(封印)이 왜 천 년 동안이나 풀리지 않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할 것이오." 단목하진의 음성이 점차 무거워졌다. "해석할 수 없는 문구에 대해 걱정하고 계신 것입니까?" "멸세강마대법(滅世降魔大法) 자체가 역천(逆天)의 비방임을 염려 하는 것이오. 하늘이 정한 이치를 거스름을 경고하는 바가 명확하 지 않소?" "십만을 헤아리는 교도들이 받아야 할 핍박을 생각하셔야 합니 다. 대다수가 무공조차 모르거늘, 단지 신앙을 가슴에 품었다는 이 유 하나만으로 죽어갈 것입니다. 부모를 잃고, 형제를 잃고, 자식을 잃을 것입니다." "......" 단목하진은 침묵했다. 종극의 말은 옳았다. 스스로도 측량할 수 없는 무공을 익혔다지 만 홀로 십만 교도를 보살피는 것은 불가능했다. 일월신교는 역사는 피로 점철되어 있다 언제나 배척의 대상이 었다. 중원인들은 자신과 다른 것을 용납하지 않아 왔다. 스스로 납득할 수 없는 일은 허용치 않는다. 일월신교 그래서 탄압을 받았다. 지금처럼 힘을 갖고 성세를 누리고 있지 않는 한, 일월신교의 역 사는 다시금 피에 잠길 것은 분명했다. 악마를 추앙하는 무리로 규 정지어지고, 죽음만이 속죄의 길로 정해질 것이다. 성화를 가슴에 품은 형제들의 눈물, 그리고 절규가 생생히 눈에 보였다. 결국 멸세강마대법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교를 위해, 형제 를 위해, 자신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가슴 깊은 곳에 묵직한 돌맹이를 매달아 놓은 느낌이었다. 멸세 강마대법의 봉인의 이유에 대한 문구들이 해석되지 않는다. 지나치 게 오래된 세월이 가져운 손상으로 인해 고문(古文) 자체가 보이질 않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멸세강마대법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른다는 것이다. 세상의 균형을 깨고 순리를 어기니 존재 자체가 저주며 재앙인 멸 세강마대법이다. 일월신교의 보전(寶典)은 말한다. 세상이 악의에 차고, 만물이 저주에 몸부림치는 그날. 하늘에서 불덩이가 떨어지고, 땅에서 불기둥이 솟는 그날. 그날에 멸세강마대법이 함께하리라고. 교리(敎理)를 연구하는 자들은 종말의 날, 멸세강마대법만이 방 책(防柵)이 되리라 해석했다. 다시 말해 종말의 그날이 왔을 때, 멸 세강마대법을 시전 해 최악의 상황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오랜 세월의 봉인은 그렇게 해서 풀렸다. 패종회가 무링을 제패 한다는 사실이 일월신교에 있어서는 종말의 그날에 다르지 않다는 의견에 따라서였다. 봉인을 뜯었을 때, 제일 먼저 보인 것은 경고의 문구였다. 멸세 강마대법이 하늘에 정한 이치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단목하진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이 바로 그 문구였다. 종말의 순간이 왔을 때,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어 찌 해법(解法)이 될 수 있는지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교리를 연구하는 자들도, 종극을 비롯한 장로들도 모두 한결 같은 주장을 펼쳤다. 멸세강마대법을 완성시키는 과정의 문제 를 지적한 문구라는 것이다. 천여 명의 목숨을 희생해야 완성시킬 수 있는 대법이다. 따라서 그들의 말이 맞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 저주받은 대법은 지독한 희생을 담보로 하기 때문이다. 하늘 의 이치에 부합치 않는다고 지적당함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단목하진의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다. 천에 달하는 형제 들의 희생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직 성화만이 강마(降魔)의 술(術)과 법(法)을 다스릴 수 있다는 문구만이 단목하진의 희망이 될 뿐이었다. '모든 일이 성화의 뜻에 부합하기를......' 교를 이끄는 자가 아니라 한 명의 신도로서 단목하진은 염원했 다. < 2 > 중원의 하늘을 나는 매와 비둘기의 숫자가 유독 많아졌다. 다리 에는 작은 대나무 통을 매달고 있으니 모두가 전서의 역활을 담당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개방의 거지들의 발걸음은 분주하고, 각 세력에서 정보를 담당 하는 인원들은 눈코 뜰 사이가 없었다. 이제는 전설로 확고한 자리를 굳힌 한 사람. 정사를 막론하고 무림인의 표상으로서 역사에 기록된 그가 돌아 왔다는 소문 탓이었다. 소문의 진위를 맑혀야 했다. 허나 누가 있어 감히 그 이름의 진위를 밝힐 수 있단 말인가? 단 한 번의 손짓에 백여 명에 달하는 학청문도를 몰살시켰다고 한다. 학청문주 스스로가 그렇게 밝히고, 봉문을 선언했으니, 백발 마신의 부활에 대한 진위를 떠나 그자의 무위만은 사실임이 분명했 다. 그런 막강한 무공을 지닌 자의 인근에는 접근조차 힘들었다. 자칫 분쟁이라도 생긴다면 문파의 멸문을 각오해야 할 처지. 그 정도의 각오가 쉽게 생길 리 없었다. 거기에 문제가 더해졌다. 스스로의 행적을 밝히듯 당당히 움직 이던 그자가 모습을 감춘 것이다. 그것은 달빛조차 숨죽인 밤에 발생한 기이하기 짝이 없는 현 상과 관련이 있는 듯했다. 당시 백발마신의 부활의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 모여든 인원들은 적어도 십 리에 달하는 거리를 유지한 채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스스로를 백발마신이라 칭하는 자가 당당히 활보를 하고 있어 그 정도의 거리를 유지해도 충분한 위치를 확보할 수 있었다. 더 이상 의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한데 그 십 리 밖의 거리에서도 보일 정도의 거대한 불기둥이 하 늘을 향해 치솟았다. 칠흑 같던 어둠이 걷히고 주위의 사물이 훤히 보일 정도였다. 하늘에 닿을 듯 솟구쳤던 불기둥이 사라진 다음 날. 백발마신을 자칭하던 자와 그를 따르던 두 명이 감쪽같이 사라 진 것이다. 마치 전날 치솟았던 불기둥을 타고 올라 하늘로 사라진 것만 같았다. 다시금 비둘기와 매들이 하늘로 날아오고 소문은 걷잡을 수 없 이 많은 이야기로 화애 천하로 퍼졌다. 백발마신이 패종회에 대한 원한을 갚기 위해 하늘에서 불기둥을 타고 내려왔다가 돌아갔다는 소문도 그중에 하나였다. 생전에 수많은 전설은 남긴 절대의 고수인지라 이런 종류의 소문이 막연한 신뢰를 만들었다. 백발마신이라면 기적을 행하는 것도 가능하다 여겨 버리는 것이다. 이야기는 그가 불기둥을 타고 돌아간 것에 그치지 않았다. 학청 문주인 온추곤은 백발마신이 패종회를 향한 복수를 예고했다고 했 다. 세인들은 이를 근거로 과연 백발마신이 언제 불기둥을 타고 하 늘에서 내려와 또 다시 패종회와 맞설지도 모른다고 숙덕이느라 여 념이 없었다. < 3 > "최종 결정을 내려야 하겠네. 저들이 정한 시한이 이미 넘었으 니......" 희끗한 머리에 골 깊은 주름이 얼굴에 가득한 도인. 대청성의 장문직을 수행하고 잇는 청운신검 덕청진인이 무거운 음성을 흘렸다. "대체 이런 억지에 저희가 따라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입니 까?" 덕양 진인이 사형인 덕청 진인의 말에 언성을 높여 반문했다. 장 문인을 향한 노성이 아님을 모두가 알기에 그를 나무라는 사람은 좌중에 아무도 없었다. 그가 언성을 높인 이유는 그만큼 청성을 사 랑하고, 청성에 대한 자부심이 높기 때문임을 모두가 알기 때문이 다. 청성의 희망으로 여겨지며 자라온 마큼, 스스로도 청성을 아끼 는 바가 누고보다 컸던 것이다. "저들도 다급했겠지. 백발마신의 죽음으로 우환을 제거했다 여 겼건만...... 외려 그 일이 기회가 되어 수많은 무인들을 하나로 묶 어 자신들과 상대하게끔 되었으니 말이야." 덕명 진인이 답답한 심정이 묻어나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거야 패종회의 일이 아닙니까? 한데 왜 무림맹이 저들의 사 정에 따라 십룡을 채근하는 건지 소제는 당최 이해할 수가 없습니 다." 덕양 진인이 분총을 터뜨리자 이제는 진곤혈사에 입었던 부상 에서 완전히 치유된 덕운 진인이 입을 열었다. "패종회와 연수를 한 상태니까......" 늘 과묵한 덕일 진인이 평소처럼 짧게 말했다. "십룡을 이미 진상에 대한 명확한 판단을 내리기 전까지는 무림 맹의 행사에 동참하지 않을 것을 밝히지 않았습니까?" "공식적으로 저들은 진상을 밝혔다고 주장하고 있어." "모든게 금강신협과 정의련의 음모였다고 주장하는 게 진상이 될 수 있겠습니까? 소제는 차라리 정의련과 금강신협이 무고함을 믿겠습니다." 덕양 진인의 언성이 점차 높아졌다. "게다가 대가라니요? 무림맹의 근간이 저희 십룡입니다. 구파일 방이 아니었다면 무림맹이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대체 언제부터 무림맹이 구파일방에 일방적인 명령을 하달했습니까? 시한을 정하 고 복귀하지 않으면 대가를 치르게 될 거라니요? 이는 명백한 협박 입니다." 덕양 진인의 열변에 청성파의 장문인과 장로들은 침묵했다. 막 내 사제의 흥분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패종회가 중원 전역에서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고 있으니 무 림맹에 협조를 구했다고 하네. 연수를 한 입장에서 돕는 건 당연한 일이고, 무림맹으로는 도울 만한 여력이 없는 것이겠지." "결국 저희 십룡을 천애백의단을 막기 위한 방패막이로 쓰겠다 는 이야기군요." 장로들이 배려해 준 시간을 소비했음에도 덕양 진인의 흥분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복귀가 아니면 탈맹(脫盟)이라 했으니...... 확고히 결정해야 할 일이야. 감정에 치우쳐 판단을 할 대는 아니지." 장문인인 덕청 진인의 정리에 덕양 진인을 곧바로 말을 받지 않 았다. 아무리 자신을 아껴주는 장문 사형이라지만 지금의 상황에서 맞받아치는 것은 자칫 무례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백발마신이 대단한 인물이라 해도, 그의 이름을 빌어 사 마외도가 득세하는 것을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덕운 진인의 의견이었다. 덕청 진인은 그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였다. 비단 청성이 무림맹 을 등지는 것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현 무림에서 사마외도를 견제 할 수 있는 힘은 무림맹, 패종회 연합과 정의련밖에 없었다. 백발마신의 죽음을 구심점으로 사파연합과 마교가 연합을 한 이 상, 저들의 세가 얼마나 커질지는 자명한 일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구파일방이 무림맹에 빠질 경우, 정도 무림에게 있어서는 치명적인 손실이 될 것이다. 결국 구파일방의 탈맹이 자칫 무림을 사마외도의 손에 넘기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필요하다면 정의련과 연수를 해서라도 사마외도의 득세를 막으 면 될 일입니다. 또한 사마외도와 많은 무인들은 백발마신의 복수 를 기치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결국 패종회와 맹의 실수를 메우기 위해 십룡이 피를 흘릴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덕양 진인은 이미 결론을 내린 듯 확고한 반대의사를 비췄다. "다른 십룡이 어떻게 하고 있답니까?" 덕일 진인이 덕청 진인에게 물었다. "현재 점창과 종남이 복귀의 뜻을 밝혔다네. 기한 내에 말이야." "흥! 그럴 줄 알았습니다. 언제나 발 빠르게 몸 사리기에 바쁘군 요." "무량수불......! 말 한마디가 얼마나 큰 사단을 불러오는지 몰라 서 그리 경솔히 말하는 건가?" 덕운 진인이 사제의 발언에 일침을 가했다. 덕양 진인은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장로들끼리 모인 자리 에서조차 해야 할 말을 못하는 이유에 대해 납득할 수 없었기 때문 이다. "저들이 말하는 대가에 대해 지금처럼 외면한 채로는 결론이 나 지 않을 것 같군요." 잠시의 침묵을 깨는 덕일 진인이었다. 평소 성품대로 핵심을 명 확히 짚고 가는 것이다. "저들이 말하는 바가 정녕 저희가 복귀하지 않으면 무력이라도 행사하겠다는 것이란 말씀이십니까?"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는 일이지." 덕청 진인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렇다면 더욱 복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청성이 패종회가 두 려워 고개를 숙였다는 소리를 들어야겠습니까?" "무림맹으로 복귀하는 것일 뿐이야. 명분이 있는 만큼 우리를 비 웃을 자는 아무도 없어." 덕운 진인의 말이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겠습니까?" 다시금 덕양 진인의 언서잉 고조되는 것을 확인한 덕청 진인이 나섰다. "좀 더 현실적인 판단들을 내려야 할 걸세. 내부의 분란으로 애 꿎은 피를 흘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배제할 수는 없을 테니까 말 이야." "현실적으로 봐서도 그렇습니다. 백발마신이 부활했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천애백의단의 공세돌 만만치 않고 말입니다. 한데 저 들이 십룡에게 대가를 요구할 여력이 있을까요?" 덕양 진인은 행여 발언할 기회를 놓칠까 재빨리 말했다. "패종회가 가진 힘은 우리의 예측보다 훨씬 대단하다고 봐야 할 거야. 백발마신을 죽인 자들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그런 고수들이 꽤 있는 모양이니 흩어져 있는 십룡을 상대할 정도는 충분히 될 거 라고 가정하는 게 옳아." 수염을 매만지며 덕명 진인이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덕양 진인 과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는 것은 덕운 진인이었으나, 은근슬쩍 분 위기를 유도하는 것은 덕명 진인이었다. "하지마......" 덕양 진인의 말은 밖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의해 중단되었다. "제가 명현(明玄)이 사부님께 아룁니다." 문밖에서 조심스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들어오너라." 덕청 진인은 장문인답게 상기된 표정을 바로잡으며 제자를 불러 들였다. 문중의 대소사를 처리하는 늘 소홀할 수밖에 없는 제자 명현이 었다. 자질리 출중하고 성실한 태도를 가졌기에 다음 세대의 청성 을 책임질 인재 중 하나로 여겨지는 제자였다. 만약 덕양이라는 걸출한 인재가 없었다면 사부인 영일 진인은 명현을 제자로 받아들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예을 갖추는 것은 미루도록 하자꾸나. 그래, 무슨 일이더냐?" 긴박한 표정으로 들어오는 제자를 향해 덕청 진인이 말했다. 사숙들에게 일일이 예를 갖출 필요가 없다고 말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장로회 중에 보고를 해야 할 상황이라면 명현의 표정이 아 니라도 중대한 사안이 발생했음을 익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에 덕청 진인은 예를 생략하라 말한 것이다. 덕청 진인의 말에 명현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리고는 몇 걸음 옮겨 사부의 곁에 선 다음 입을 열었다. "급전이 왔습니다. 패종회의 무인들이 아미파를 공격했다고 합 니다." "패종회가?" 덕청 진인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무리 기한이 정해진 복귀 의 권유였다지만 불과 며칠리 늦어졌다고 정면적인 공세를 펼치리 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던 것이다. 패종회가 겪고 있는 현재의 상황을 염두에 두면 더욱 그러했다. 덕자배의 나머지 장로들도 크게 놀란 표정이었다. "불과 열두 명이 아미산에 올랐을 뿐이라는 보고입니다." "열두 명이 아미산을 공격했다고?" 아무리 고수라 해도 그 정도의 숫자가 아미파를 공격한다는 것 은 큰 의미가 없었다. "네, 한데도 아미파가 풍비박산 났다고 합니다. 삼백에 이르는 제자가 죽고, 나머지 인원도 대부분 중상을 입엇다고 전해 왔습니 다. 패종회의 고수들의 무공은...... 가히 악마의 그것과 같답니다." "고작 열둘이서 아미파를 그렇게까지......?" 덕청 진인은 좀처럼 믿기 힘든 표정이었다. 패종회의 고수들이 대단하다는 것은 익히 짐작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아미파가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전언에 의하면 전설상의 천음마후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뭐라고?" 덕청 진인이 자리에 벌떡 일어섰다. 천음마후가 실재한다는 사실은 놀라움을 넘어선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그것은 오랜 수양을 쌓아온 덕청 진인의 평정심을 뒤흔들기에도 부족함이 없었다. 덕청 진인의 무릎이 완전히 펴지는 순간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명현의 두 눈이 날카롭게 빛을 내며 그의 손 이 덕청 진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자광을 발하는 우수였다. 파아앙! 짧은 여운을 남기는 폭음. 덕청 진인은 입에서 피 화살을 쏟아내며 뒤쪽으로 튕겨졌다. 장 력이 얼마나 위맹했는지 즉사르 면치 못한 덕청 진인의 시신은 벽 에 부딪혀 튕겨진 후에야 땅바닥에 떨어졌다. "무, 무슨 짓이냐?" 평소 과묵하기만 하던 덕일 진인의 노갈이 누구보다 먼저 터져 나왔다. 그것은 덕일 진인이 이승에서 남긴 마지막 말이기도 했다. 명형을 향해 발출되려던 덕일 진인의 최심자은 그의 우수에서 허망하게 흩어졌다. 부릅뜬 덕일 진인의 눈은 자신의 심장을 파고든 덕명 진인의 손 과 얼구를 번갈아 보다가 생기를 잃었다. "사형!" 덕양 진인의 신형이 탁자를 넘었다. 그는 맹호와 같은 기세로 덕명 진인을 덮쳐갔다. 덕명 진인은 신형을 튕기듯 뒤로 물러나며 덕양 진인의 공세를 피했다. 덕양 진인은 확인했다. 덕명 진인의 쌍수가 자광을 발하고 있다 는 것을...... 청성의 무공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모반(謨叛). 두 사람의 행동에 대한 규정은 쉽게 내려졌다. 명문의 제자가 독 문절기가 아닌 무공을 익히고, 사문의 존장을 해한 것에 대해 다른 정의가 있을 리 없었다. 덕양 진인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부르짖었다. 사형들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울부짖음이었다. "덕명, 명헌!" "이럴 수가......? 네놈들이 감히......!" 덕운 진인이 뒤늦게 노성을 터뜨렸다. 그만틈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기도 했으며, 충격적인 일이라는 뜻이었다. "두 분도 고이 가시는 게 편할 것입니다." 명현이 평소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말 을 흘렸다. "이 반도! 네 놈을 죽여 사형들의 원수를 갚지 않고서 어딜 갈 수 있단 말이냐?" 덕양 진인은 방 안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의 호통과 함께 다시 한 번 신형을 날렸다. 덕운 진인 역시 쌍수에 내력을 있는 대로 집중시키며 쏘아지듯 앞으로 향했다. 사제였으나 지금은 반도에 불과한 덕명 진인을 향 해서였다. 콰아아앙! 갑작스러운 폭음. 맹렬하기 이를 데 없는 장력이 문을 부수고 두 사람을 향해 날아 드는 소리였다. 장력에 실린 경력이 위맹함에 기겁을 한 덕운, 덕양 진인은 재빨 리 나아가던 신형을 물리며 장력에 대항했다. 쿠아아앙! 동시에 뒤로 튕겨지는 사형제. 두 사람은 벽에 등을 부딪치고서야 거친 힘을 죽이며 신형을 멈 춰 세울 수 있었다. "외인(外人)이......?" 들끓는 기혈을 억지로 가라앉히는 와중에도 덕운 진인은 노기를 감추지 못했다. 청성의 중지(重地)에 외부인이 들어왔다는 사실이 그를 분노케 하는 것이다. "크흐흐흐흐흐......" 괴소성(怪笑聲)을 흘리며 실내에 들어선 노인의 용모는 추악하기 그지없었다. 쥐를 잡아먹은 듯 붉은 입술은 귀밑까지 쭉 찢어져 있었고, 눈밑 에는 짙은 그림자가 져 중병을 앓는 환자 같았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드러난 치아는 뾰족뾰족 날카롭게 뻗어 있 어 마치 두 개의 톱날을 마주해 놓은 듯했다. 곱실거리는 잿빛 머리카락을 산발해 늘어뜨린 노인의 외양은 산 해경(山海經)에나 등장할 기물(奇物)의 현신인 것처럼 괴이하기만 했다. "문도를 관리하지 못한 책임을 져야지. 그러게 경고했잖아! 시한 내에 복귀하라고 말이야." 졸린 듯, 권태로운 듯한 괴노인의 말. 덕양 진인은 절규에 가까운 음성으 터뜨렸다. "패종회의 개였구나!" "흠...... 그 한마디만으로도 네놈이 죽어야 할 이유는 충분하 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노인의 신형이 꺼지듯 사라졌다. 아니 순간 적으로 덕양 진인의 앞쪽으로 이동한 것이다. 그 속도가 너무 빨라 애초에 있던 자리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덕양 진인이 손에 청광이 맺혔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상대의 공격에 반응한 것이니 그가 왜 청성의 희망으로 여겨지는지 충분히 알 수 있는 단면이었다. 하지만 덕양 진인은 최심자를 발출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애초 노인의 공격을 예상하고 진기를 모았던 덕운 진인이 끼어 들었기 때문이다. 혼신의 힘을 다한 덕운 진인의 공격. 그것은 노인의 가벼운 손짓 한 번에 허망하게 파훼되었다. 노인의 입매에 비웃음이 맺힐 그때. 파앙, 하는 폭음과 함께 노인의 가슴에서 폭음이 울려 퍼졌다. "절영수(絶影手)!" 청성의 반도 덕명 진인이 놀란 외침이었다. 그리자를 자르는 쾌 속의 장법이 바로 절영수다. 하나 이는 청성의 무공에 대해 수박 곁핥기로 살폈을 때나 할 수 있는 절영수의 관한 표현이었다. 절영수의 진정한 무서움은 앞선 공격에 감춰 전개된다는 사실이 었다. 공격을 막았다고 생각한 방심의 순간, 소리도 없이 날아드는 쾌속무비한 장역에 속수무책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절영수의 진정 한 묘용이었다. "사제, 어서 피해!" 절영수가 정확히 상대를 가격했음에도 덕운 진인의 입에서 튀어 나온 말은 도죽하라는 것이었다. 덕양 진인이 주춤하는 사이, 덕운 진인이 다급한 노성을 터뜨렸 다. "사형의 명령이야! 어서 피해!" 그제야 덕양 진인은 마지못해 신형을 움직였다. 하지만 덕운 진인의 외침을 들은 덕명 진인과 명현이 이미 출입 구를 가로막았다. 그 순간, 덕운 진인의 끊어질 듯한 신음성이 들렸다. "커헉!" 절영수에 가격을 당하고도 노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덕운 진 인의 목을 틀어 줜 것이다. "사형!" 덕양 진인의 안타까운 외침. "피하...... 커어어억!" 덕운 진인의 숨넘어가는 소리에 덕양 진인의 아랫입술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사형은 목숨이 경각에 달한 지금에도 자신에게 피하 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드득. 끔직한 소리와 함께 덕운 진인의 고개가 신체의 한계를 벗어난 각도로 꺾였다. "감히 이 어르신의 몸에 손을 대다니!" 괘씸하다는 듯 시선을 향해 말한 노인. 그는 아무렇게나 덕운 진인의 시신을 내팽개쳤다. 그 광격을 본 덕양 진인의 두 눈에서 처절한 살광이 뿜어져 나왔 다. 입가를 타고 흐르는 선혈의 줄기는 더욱 굵어졌다. "크크흐흐...... 좋은 눈빛이야!" 노인의 말은 다분히 조롱조였다. "하지만 나약한 놈에게는 어울리지 않는군." 말이 끝남과 동시에 노인의 신형이 다시금 사라졌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덕양 진인의 앞에 갑작스레 나타나는 노인. 덕운 진인의 목을 꺾엇던 손이 이번에는 덕양 진인의 목을 노리 고 날아갓다. 노인은 자신의 손이 애송이의 멱줄기를 틀어쥘 것을 의심치 않 았다. 한테 젊은 말코 도사의 신혀잉 흐릿해지는가 싶더니 자신의 손 은 허공을 움켜쥐고 말았다. "흥!" 코웃음과 함께 노인의 좌수가 다시 덕양 진인의 목을 잡아갔다. 하지만 이번에도 덕양 진인은 노인의 손을 피해 출입구를 향해 갔다. "환환미종보(幻環迷踪步)!" 덕명 진인이 두 눈을 부릅뜨며 경악에 찬 외침을 터뜨렸다. 청성이 자랑하는 신번인 세류표(細柳飄)를 십이 성 대성한 이후 에야 전개가 가능하다는 최고의 보법. 그것이 바로 환환미종보였다. 천하의 그 어떤 무공도 피해 낼 수 있다는 극상승의 신법. 위기의 상황에서 발휘할 수 있는 구명(救命)의 비기 중의 비기였 다. 덕명 진인은 자신조차 아직 전개하지 못하는 보법을 막내 사제 인 덕양이 펼쳐낸 것에 크게 놀란 것이다.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는 사이, 덕양 진인은 어느새 옆쪽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이렇게 덕양 진인을 빠져 나가게 둘 수는 없는 터. 덕명 진인의 우수가 청광을 발하며 덕양 진인을 향해 날아갔다. 명현 역시 자광수로 덕양 진인을 공격했다. 하지만 괴노인의 공격조차 피해 낼 환환미종보를 두 사람이 파 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차 싶은 사이 덕양 진인은 이미 방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잡아!" 괴노인의 노갈이 터져 나오고 덕명 진인과 명현이 덕양 진인의 뒤를 좇기 시작했다. "내력의 소모가 극심한 환환미종보다! 멀리 가진 못할 거야." 덕명 진인은 바람을 가르며 외쳤다. 괴노인 역시 노기 가득한 표정으로 방으로 사라졌다. 그도 덕양 진인의 뒤를 쫓기 시작한 것이다. "쥐새끼 한 마리가 대사(大事)를 그르치게 내버려둘 수는 없지. 어차피 오늘로서 구파일방은 우리 패종회가 완벽히 장악한다는 사 실은 변동이 없을 테지만 말이야. 그 분이 직접 나서신 마당이거 늘......!" 바람을 타고 흩어지는 노인의 음성에는 자신감이 넘쳣다. 이는 같은 시각 구파일방의 비처에서 이곳 청성이 겪은 일이 동 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었다. Chap. 11 삼패(三覇). < 1 > "정말 이곳이 외려 안전할 수 있을까요?" 명주운은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아무리 등하불명이라지만 적 의 본거지나 다름없는 사천인 것이다. "백발마신께서 정하신 일이니 그냥 따르면 되지 않을까? 게다가 무산(巫山)은 여간해서 종적이 드러나지 않을 조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으니 말일세." 철무종의 말에 명주운은 주변을 둘러봤다. 과연 깎아지는 듯한 절벽이 가득해 험준한 산세였다. 인적이 드무니 누군가에게 발각될 염려는 적어 보였다. 명주운은 조금은 안심하는 그때. 선주혁이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명주운이 무슨 일인지 물어보기 전에 선주혁은 검지를 세워 입 에 가져다 대었다. 눈동자가 옆으로 향한 것을 보니 무엇인가에 귀를 기울이는 듯 해 명주운과 철무종은 숨 쉬는 것조차 멈췄다. "기이한 일이군요." "......?" "꽤 많은 인원이 근방으로 몰려들고 있소이다." "결국 발각된 거군요!" 명주운이 안타까운 심정으로 말했다. 아무리 산세가 험하다 해 도, 등잔 밑이 어둡다 해도, 적지로 찾아드는 것은 무리였던 것이 다. "행적이 노출될 가능성은 적다 여겼는데......" 명주운과 달리 선주혁의 표정은 그다지 심가해 보이지 않았다. 천음마후, 아니 선우 아가씨와 함께하는 백존이나 삼패가 나선 게 아니라면 큰 위협이 되지 않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허나 만약의 가능성을 고려치 않을 수는 없었다. 선우 아가씨나 삼패가 동원되지 말라는 법도 없었기 때문이다. "산 아래쪽으로 가시죠." "에? 포위가 좁혀오는 것 아닙니까?" 철무종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포위망이 더 좁아지기 전에 뚫고 나가야죠. 한 군데 모이면 상 대하기 더 까따롭지 않겠습니까?" "아!" 철무종은 짧은 감탄사를 터뜨린 후, 두 말 없이 선주혁의 뒤를 쫓았다. 선주혁을 뒤따르는 명주운과 철무종의 움직임이 이전에 비할 바 없이 표홀했다. 이는 선주혁이 두 사람에게 암영풍을 전수했기 대 문이었다. 본래 암영풍은 적은 내력으로 최대의 효력을 발휘하는 신법. 내공이 부족한 두 사람이었지만 익히기에 무리가 없었다. 두 사람은 백발마신의 경신술을 전수받았다는 것을 큰 영광으로 여겼으며 평생에 다시없을 기연이라 생각했다. 패종회의 추격을 피하는 동안 자신들이 짐이 될 것을 우려해 절 박한 심정으로 암영풍을 수련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꽤 많은 성취가 있었다. 특히 기초가 탄탄한 명주운의 진보는 두드러졌다. 적어도 경신 공부만은 어지간한 고수에 못지않은 수준에까지 오른 것이다. 방향을 바꿔 짧은 시간 이동하던 선주혁이 다시 신형을 멈춰 세 웠다. 그는 덤불이 가득한 한쪽을 향해 나직이 말했다. "그 정도의 은신으로 암습이 가능하리라 여겼는가?" 차갑기 그지없는 선주혁의 음성에 명주운과 철무종은 적의 등장 을 알아쳤다. "흥! 덤불 뒤에서 기척을 죽인다 해서 인간의 기운이 가려진다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지." 그저 한번 떠 본 것으로 생각한 채, 덤불 뒤에서 버티는 상대에 게 선주혁은 날카롭게 한마디 더 했다. 그제야 선주혁이 정말로 자신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믿는지 상대 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무덤불이 흔들리더니 도사 차림의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당신은......?" "아니......?" 두 사람은 동시에 놀라는 표정이었다. 잠시 말을 멈췄던 둘 중 먼저 입을 연 것은 도사 차림의 사내였다. "흠...... 당신은 내가 알고 있는 어던 이와 매우 흡사하게 생겼구 려." "하핫! 사정이 있어 용모에 약간의 변화가 있었을 뿐이외다, 덕 양 진인." 덤불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사내는 청성산을 빠져 나온 덕양 진 인이었다. 선주혁은 과거 은설연과 함께 만난 적이 있기에 덕양 진인을 한 눈에 알아본 것이다. 반면 총명한 덕양 진인은 과거 선주혁의 용모를 명확히 기억하 고 있었고, 이목구비에 변화가 생긴 그를 다른 사람이라 여겼던 것 이다. "흥! 당신이 백발마신을 사칭한다는 그자로군! 나를 한눈에 알아 보는 것을 보니 패종회의 주구였더냐?" 추적자들을 의식해서인지 언성을 높이진 않았으나 한 음절, 한 음절에 원한을 가득 실어 말하는 덕양 진인이었다. "이런? 소새잉 그 개놈들에게 진 원한을 천하가 다 알거늘, 도장 께서만 모르고 계신단 말입니까?" 선주혁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덕양 진인은 경계의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러나 표정은 많이 부드러워졌다. 패종회의 주구라면 저와 같은 발언을 할 수 없기 때 문이다. "어찌 사람의 용모가 그 짧은 시간 동안 변할 수 있단 말이오? 아니, 그럴 수 있다손 치더라도 죽었다던 이가 어떻게 살아 돌아다 닐 수 있겠소?" 선주혁의 입장에서는 대략의 상황은 이미 파악이 끝난 상태였 다. 패종회 놈들이 청성파에서 뭔가 사단을 일으킨 것이 분명했다. 어차피 소설 속에서는 그렇게 진행되었던 과정이었다. 포위망을 좁혀오는 것은 패종회가 분명했다. 하지만 저들이 쫓는 것은 선주혁 자신과 일행이 아니라 덕양 진 인이라. 패종회가 쫓은 대상이 누구건 지금의 상황에서 추격하는 인원들을 한 곳에 집중시켜서 좋을 건 없었다. 이에 선주혁은 덕양 진인에게 자신이 백발마신이라 불리며, 과 거 만났던 그 사람임을 빠르게 전하기로 했다. 상황이 상황이니 만 큼 이야기가 길어져서 좋을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이해를 도모하 는 말보다 빠른 방법은 이미 오래 전에 터득한 그였다. 선주혁의 신형이 빛살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유령처럼 홀연히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선주혁을 보며 덕양 진 인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청성산에서 만난 패종회의 고수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신법이기에 대처할 방도를 찾지 못한 것이다. 비겁한 수작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기도 전에 백발의 사내의 손이 수많은 장영을 만들어 냈다. 마치 춤을 추는 나긋나긋 움직이는 손에서 이는 막강한 경력이 덕양을 압박했다. 천변만화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의 변초를 배포한 백발 사내의 공격에 덕양 진인의 두 눈은 절망으로 젖어갔다. 급습이 아니라 할지라도 이자의 공격을 막을 수 없었음을 깨달 은 것이다. 그로서는 내력조차 제대로 모으지 않은 손을 엉거주춤 내미는 것이 최선이었다. 순가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단숨에 자신의 목숨을 빼앗으리라 여겼던 상대였다. 한데 어설픈 자신의 손짓에 말려들기라도 한 것처럼 백발사내의 파링 엉켜들었다. 두 사람의 팔이 휘감긴 것이다. 덕양 진인이 두 눈을 크게 뜨는 순간. 선주혁이 재빨리 그의 얼굴을 향해 입김을 불었다. 어리둘절한 표정의 덕양 진인에게서 선주혁이 떨어져 나왔다. "이제 소생이 누군지 아시겠소?" "......!" 그제야 덕양 진인은 방금 전 공격의 의미를 깨달았다. "당, 당신이 진정 백발마신이란 말이오?" 덕양 진인의 떨리는 목소리를 확인한 선주혁이 흰 치아를 드러 내며 웃었다. "실로 오랜만입니다, 덕양 진인." "무량수불......!" 덕양 진인은 저도 모르게 도호를 외웠다. 선주혁이 방금 전 보여 준 한 수는 덕양 진인이 결코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천산노조의 난화무영수를 사용하는 젊은 무인에게 일생에 있어 첫 패배를 당했으니 그가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 장면을 재연할 수 있다는 것은 당시에 있던 사람이 아니면 불 가능한 일. 덕양 진인은 그제야 선주혁이 진짜라 확신했던 것이다. 백발마 신이 진짜로 살아 있다는 사실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렇기에 얼마 전 죽음을 당한 덕운 진인이 선주혁에게 입었던 부상에 대한 기억조차 떠올릴 수 없는 덕양 진인이었다. 설사 그 사실을 기억했다 해도 지금의 덕양 진인으로서는 백발 마신에게 적대감을 표할 이유가 없었다. 사형인 덕운을 완쾌되었었 고, 적의 적은 동지라는 이치가 적용돼야만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 이다. "화포는 나중에 풀도록 하고, 일단은 저들의 포위망에서 벗어나 야할 것 같소, 도장." "무량수불...... 미안합니다, 선 시주." "......?" "빈도는 이레 동안 이리저리 쫓겨 왔소. 저들과 맞서 싸우기에는 너무나 지쳐 있소이다." "아!" 선주혁은 그제야 덕양 진인의 내력이 심각할 정도로 고갈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선주혁은 다시 덕양 진인에게 다가섰다. 이어 우수를 들어 그의 명문혈에 올렸다. 급작스러운 선주혁의 행동에 덕양 진인은 미처 피할 틈조차 갖 지 못했다. 만약 이 백발마신이라는 자가 마음만 먹었다면 자신은 이미 죽 은 목숨임을 깨달은 덕양 진인은 무공의 큰 격차에 다소 의기소침 해졌다. 그간 지난번의 패배에 대해 반성하며 절치부심 무공수련에 매진 해 왔다. 그럼에도 백발마신에 비하면 자신의 부공은 밝은 달 아래의 반 딧불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그를 낙심하게 만드는 것이다. "저항하지 말고 진기를 받아들이도록 하십시오." '무, 무슨......?' 덕양 진인은 대경하여 하마터면 입을 열어 소리칠 뻔했다. 선주혁이 명문혈을 통해 진기를 주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사실 상 덕양 진인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것에 다르지 않았다. 서로 성질이 다른 진기가 체내로 유입되는 것은 내부에서의 충동을 유발 한다. 그리되면 적게는 주화입마요, 크게는 죽음에 이르는 것이 상 례였다. 덕양 진인이 그토록 놀라는 데는 이와 같은 이유가 있었다. 한데 선주혁의 장심을 타고 전해져 오는 진기는 기이하게도 덕 양 진인이 원래 가지고 있던 내력과 충동하지 않았다. 부드럽게 밀 려들어오는 진기가 자연스럽게 본연의 내공과 융합되고 있는 것이 다. 이에 내력의 고갈이 빠르게 보충되는 중이었다. 그제야 덕양 진인은 느낄 수 있었다. 선주혁의 장심에서 전해들 어오는 진기의 성질이 평소 자신이 축기를 할 때의 기운과 다르지 않음을...... 호흡을 통해 받아들이는 우주의 기운보다 그 양이 많을 뿐, 자연 에서 얻는 기운과 성격이 똑같았던 것이다. 이는 선주혁이 대자연의 기를 자신의 신체에 모은 후, 성질의 변 화 없이 덕양 진인의 명문혈에 주입했기 때문이다. 일시에 내력을 회복시킬 수 있을 정도의 양을 전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선주혁이 신 투의 비처에서 청성파의 심법을 익힌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덕양 진인으로서는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의문을 가질 여 유가 없었다. 최대한 빨리 내력의 일부라도 회복하는 것이 급선문 였기에 진기의 도인(導引)에 집중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렇게 일 다경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선주혁은 덕양 진인의 명 문혈에서 손을 뗐다. 덕양 진인은 몇 번에 걸쳐 긴 호흡을 더한 후 양손을 맞잡았다. "무량수불...... 선 소셥의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별말씀을......" "아닙니다. 타인에게 내력을 주입하는 것은 진원지기에 손상이 가는 일이거늘......" "오해입니다, 도장. 제 진원지기를 주입했다면 도장께서는 주화 입마에 걸리셨겠지요." "하면......?" 덕양 진인으로서도 어째서 자신이 선주혁의 내력을 받아들일 수 있었는지 궁금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었다. "긴 설명을 할 여유는 없으니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전 그저 삼라만상의 기운을 제 몸을 통해 집중한 다음, 도장께 전해드렸을 뿐입니다. 제가 손해 본 일은 조금도 없으니 도장께서는 괘념치 마 십시오." 설명이 짧아서가 아니라 선주혁의 말은 덕양 진인으로서는 도저 히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선주혁이 최근 깨달은 바와 흡성대 법의 묘가 담겨진 내용을 덕양 진인이 이해하는 데는 무리가 있었 던 것이다. 더구나 선주혁이 청성파의 기본이 되는 심법을 익히고 있다는 것을 설명할 수 없기에 더욱 그랬다. 덕양 진인이 당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자, 선주혁이 한마디 덧붙였다. "일단은 포위망부터 벗어납시다." 덕양 진인은 그제야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다시 선주혁이 앞장을 서고 명주운과 철무종이 그 뒤를 쫓았다. 덕양 진인은 지친 몸을 다시 이끌어야만 했다. < 2 > "젠장!" 앞서 달리던 선주혁이 욕설을 뱉으며 멈춰 섰다. "무슨 일입니까?" 명주운의 질문에 선주혁은 미간을 찌푸렸다. "오늘 일은 정말이지 길보다 흉이 많을 것 같소."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진 선주혁의 얼굴을 보면 명주운이 조심스 럽게 물었다. "적의 숫자가 그렇게 많습니까?" 백여 명의 학청문도를 일 장에 몰살시키는 선주혁의 엄청난 무 위를 직접 확인한 명주운이었다. 그로서는 수천에 달하는 적이 아 니라면 감히 백발마신을 위협할 상황은 벌어지지 않을 거라 생각하 는 것이다. 명주운의 질문에 선주혁은 고소를 머금었다. "제 판단력이 부족하여 두 분을 위험함 상황으로 몰고 말았군요." "그런 말씀하지 마십시오, 선 대협! 저희 목숨은 이미 선 대협께 드린 것임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충직하기 그지없는 철무종의 답변이었다. "대체 얼마나 많은 인원이 동원되었기에......?" "숫자가 문제가 아니오. 저쪽에 저를 넘어서는 절대고수가 있을 뿐이지요." "세상에 선 대협보다 강한 자가 있단 말입니까?" 명주운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선 주혁은 천하제일의 고수였던 것이다. 선주혁은 다시금 씁쓸히 웃었다. "당금 무림에서 저보다 강한 자는 아무 많소. 특히 천음마후가 나 선다면 더 그렇고 말이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대략적인 설명을 들은 명주운과 철무종이었 다. "저들이 천음마후를 동원했단 말입니까?" "그렇진 않은 것 같소. 천음마후가 없어도 저를 누를 만한 실력 자가 때마침 근방에 있었던 것 같구려." 선주혁은 힘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덕양 진잉이 결연한 표정으로 나섰다. "저들이 쫓는 것은 빈도입니다. 그러니 빈도가 나서겠소. 여러분 은 빈도가 저들의 이목을 끄는 동안 파하도록 하시오." "그럴 상황조차 안 됩니다. 그자라면 이곳에 있는 분들의 기운을 이미 감지했을 테니 말입니다." "무량수불...... 미안하오." 애써 스스로 희생의 길을 선택했건만 그마저 무용한 상황이라는 말에 덕양 진인은 사과를 했다. 패종회의 무리가 이곳으로 향한 이 유가 바로 자신이었다. 결국 자신이 이들을 위험으로 내몬 셈이기 때문이었다. "대체 어떤 자이기에 선 대협께서 이토록 자신 없는 모습을 보이 는 건지......?" 철무종의 말에 선주혁이 답했다. "아마도 삼패 중 한 명이 이곳에 있는 것 같소." "삼패? 삼패라는 자들이 그렇게 대단합니까?" 명주운은 계속해 선주혁보다 강한 인물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 을 믿기 힘들다는 태도였다. 이는 선주혁이 느끼고 심적 부담에 큰 위안이 되었다. 자신을 이토록 믿어 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는 것이다. 선주혁은 짓고 잇는 씁쓸한 미소를 지우고 무겁게 말했다. "지금부터 하는 말을 잘 들으시오. 시간이 없으니 반론도 허용치 않겠소!" "......?" "저들의 이목을 끄는 역활은 내가 하겠소. 그러니 세 분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곳을 빠져 나가시오." "하지만......!" 명주운이 끼어들려 했으나, 선주혁의 시선을 받고는 곧바로 입 을 다물었다. 선주혁이 다시금 백발마신으로서의 위엄이 살아 있는 모습을 모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저 도주하라는 이야기가 아니오. 반드시 살아남아 소생의 사 형에게 지금부터 말을 전해 주시오." 선주혁은 세 사람의 면면을 일일히 훑어보며 말했다. 자신이 지 금 하는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곤륜의 금강(金剛)이 홀로[獨] 외로이[孤] 전하고자 하는 말이 있 다고 말하면 여러분의 말을 믿어 줄 것이오. 전언의 내용은 이렇소. 무극삼검식의 마지막 초식을 넘어서기 전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천음마후와 마주치지 말 것. 패종회주와의 일전은 받드시 일대일의 결전상황을 우선할 것. 모두 외웠소?" 긴 내용이 아니니 못 외울 이유가 없었다. 하나 점차 내재된 기운을 뿜어내는 선주혁인지라 그 기도만으로 도 세 사람은 절로 위축이 되어가는 중이었다. 덕양 진인을 포함한 세 명은 선주혁의 질문에 감히 입을 열 생각도 하지 못하고 고개만 을 끄덕일 뿐이었다. "이 전언에 무림의 존폐가, 미래가 달려 있소이다. 받드시 사형에게 전해 주시오!" "선 대협의 명! 목숨을 걸고 수행하겠습니다." 철무종의 말에 선주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오고 있소. 어서 가시오." "선 대협, 보중하십시오." 명주운은 아무래도 미련이 남는다는 듯했다. "예을 차릴 시간이 없소이다!" 선주혁의 채근에 세 명이 황급히 몸을 움직였다. 덕양 진인은 달리는 중에도 고개를 돌려 선주혁을 한 번 돌아봤 다. 많은 말을 하고픈 표전이었다. 선주혁은 그런 덕양 진인에게서 시건을 거뒀다. 자신을 향해 오는 거대한 기운. 그 기세를 내뿜는 자를 맞이해야 했기 때문이다. 두세 번 숨을 들이쉬었다 내뿜을 시가닝 흐른 후, 한 중년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선주혁보다 머리통 두 개는 더 놓은 듯한 큰 키에 장대한 체구를 지닌 중년인이었다. 털을 세운 고슴도치같이 삐죽삐죽 솟은 수염에 피부 전체가 구 릿빛을 띄고 있어 마치 거대한 동상(銅像)이 움직이는 듯안 모습이 다. 그 특이한 용모만으로도 선주혁은 나타난 자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겉모습만 중년으로 보일 뿐, 실제로는 이백 여의 나이를 헤아리 는 노고수. 그의 이름은 적철항(赤鐵沆)이었다. 패종회의 호법이자 절대강자 삼 인 중 하나인 철마금신(鐵魔金身). 이 시대의 최고수 중 하나가 선주혁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호오? 대단한 기세가 느껴져 어떤 고수가 나타나셨나 했더니 애송이뿐이네?" 금강역사(金剛力士)와 같은 생김에 어울리지 않는 가는 음성. 소리가 날카롭고 음이 높아서 마치 여인의 그것처럼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그 부조화에 선주혁은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뿐이었다. 글로 잃었을 때는 그러려니 했지만 실제로 들으니 외모와 안 어울려도 너무 안 어울렸던 것이다. 그는 억지로 웃음을 삼기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물 나이가 어려도 백발마신으로 불리는 만큼 예우해 주시 는 게 좋겠소이다." 조금 더 성취에 대한 확신이 들기까지 가급적 만나고 싶지 않은 삼패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미리부터 기가 죽어 들어갈 수는 없기에 선주 혁은 처음부터 강하게 나갔다. "백발마신?" 적철항의 송충이 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동정회에서 부활했다는 그 애송이가 너란 말이냐?" "애송이는 아니지만 죽었다 살아 돌아온 백발마신이 소생인 건 맞소이다." "쿄호호호홋! 이거야 원......! 심심풀이 삼아 청성의 꼬맹이 하나 를 거두러 왔다가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게 생겼구나." 적철항은 고개를 젖히며 대소했다. 내력이 약한 자라면 특유의 고음의 의해 고막이 터져나갈 정도 의 웃음이었다. "글쎄...... 성과를 거두게 될지, 아니면 천추의 한이 될지는 두 고 봐야 아는 일일 겁니다." "쿄호호호, 백발마신이라 불리는 꼬마야. 네가 본회의 아해 몇을 손봤다고 해서 꽤나 기고만장해 있구나. 하자민 노부는 그 아해들 과는 차원이 다르단다." "그 아해들에게 죽을 뻔한 위기를 겪었던 당시의 소생과 지금의 소생 또한 다를 것입니다, 적 노선배!" "......!" 적철항의 가늘고 긴 눈이 치켜떠졌다. "네, 네놈이 어찌 노부를 안단 말이냐?" "적 노선배가 아낙네의 속곳을 즐겨 입는다는 것도 알고 있소이 다. 후후훗!" "이, 이놈이......?" 적철항의 구릿빛 얼굴이 새카맣게 변했다. 치미는 노기를 주체 못하는 적철항의 얼굴 살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 정도의 정보를 접하는게 뭐 대단한 일이겟습니까? 어떤 곳 은 수하들을 무림의 각 세력의 요직에 올려놓기도 하는데 말입니 다." 패종회가 무림에 파견한 간세를 일컫는 말이었다. 이는 역으로 패종회에도 간세가 있을 수 있고, 그 간세를 통해 자신이 정보를 얻 었을 가능서을 암시하는 말이기도 했다. 선주혁이 다른 세상에서 소설을 통해 패종회를 손바닥 보듯 보 고 있음을 알지 못하는 적철항이다. 따라서 선주혁의 발언은 그를 혼란스럽게 하기에 충분했다. 적철항은 잠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괴소를 흘렸다. "쿄호호홋. 과연 간악하기 그지없는 놈이로고! 그 따위 수작으로 노부를 현혹할 수 잇다고 생각한 게냐?" 선주혁은 표정 하나 변치 않고 태연히 적철항의 말을 받았다. "뭐...... 믿건 안 믿건 그건 적 노선배의 선택이니 더 할 말은 없 소이다." 당당하기 이를 데 없는 선주혁을 적철항은 뚫어져라 노려봤다. 마치 선주혁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겠다는 듯한 시선이었다. "회주께서 꼬마 놈 하나를 두고 어찌하여 그리도 신경을 쓰시나 했더니 과연 위험하기 짝이 없는 놈이었구나!" "지은 죄가 많은 놈들에게는 제가 두려움을 불러일으킬 만한 사 람이긴 합니다." "네 이놈! 그놈의 찢어진 주둥이가 화를 될 운명임을 다시 한 번 알려 주겠다!" 적철항의 날카로운 호통에 수풀이 땅으로 눕고 나뭇잎이 떨어져 내렸다. 그의 주변의 나뭇가지들은 몸서리까지 쳤다. 더불어 심즉살(心卽殺)의 경지에 오른 막강한 살기를 사정없이 뿜어냈다. "패종회가 소생을 건드린 것이 얼마나 큰 실수인지를 알려줘야 하니 피차 잘 된 일이군요." 선주혁은 내력을 있는 대로 끌어올려 적철항의 살인적인 기세를 담담히 받아 넘겼다. 이어 전신의 신경을 팽팽히 당겨 긴장을 유지했다. 말은 많이 해 시간을 끈 것은 자리를 피한 세 사람을 위해서일 뿐이다. 아무리 점수를 후하게 준다 해도 자신이 삼패와 맞서기에는 무 리가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선주혁은 도주의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극한의 속도를 자 부하는 암영풍이라면 적철항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몸을 돌려 달아난다면 등 뒤에서 날아오는 적철항의 공격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결국 도주를 위해서는 찰나의 틈이 필요했다. 그 틈을 만들 수 있느냐가 자신의 생사를 결정할 것이다. 물론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소설을 통해 봤던 삼패의 능력은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범주 밖 에 있었기에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쿄호호호...... 노부의 살기를 받아낸 것만큼은 칭찬해 주마. 하 지만 그걸로 끝이다." 선주혁은 느꼈다. 폭발적으로 짙어지는 살기를...... 이제 남은 것은 최선을 다해 기회를 만드는 것 뿐이었다. "각오해라, 애송이!" 적철항의 거구가 하늘로 솟아올랐다. 그의 그림자가 선주혁을 덮었다. "카아아앗!" 뾰족한 고음의 기합. 그 속에서 선주혁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Chap1 와류붕산권 먼지 한 톨 일지 않는 극쾌의 신법이 펼쳐진다. 쿠아아아앙. 지축을 울리는 가공할 일 권은 선주혁의 어깨를 스쳐 지나가 땅 을 내치쳤다. 적철항의 일 권은 패도, 그 자체였다. 대지를 강타한 충격의 여파는 끝을 모르고 달려 인근에 지진이 라도 발생한 듯했다. 가라앉은 지면의 넓이는 삼십 장은 족히 되는 듯했으면 중심의 깊이 역시 측량키 어려울 정도였다. 순간이동에 가까운 속도로 권력의 범주를 벗어난 선주혁의 안색 이 창백해졌다. 그는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적철항은 지면을 강타하기 직전 힘을 회수했다. 쓸데없는 힘의 낭비를 막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나마 이정도의 위력을 보여준 것은 자신의 기세를 꺾기 위함 일 뿐. 진정한 적철항의 힘은 아직 발현되지도 않은 것이다. "제, 젠장! 이게 정말 사람의 힘이냐? 힘을 뺐는데 이 정도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면 선주혁이 내심 투덜거렸다. "교호호호홋....제법 빠른 발을 가졌구나, 꼬마야." 깊게 파인 구덩이 안쪽에서 들려오기 시작하던 고음의 목소리는 말이 끝날 무렵에는 지면 위쪽에서 들려왔다. 그 소리에 선주혁의 미간에 골 깊은 주름이 잡혔다. 도약을 해 위로 솟구쳤다고 하기에는 올라오는 속도가 너무 느렸다. 짙은 먼지로 인해 상대의 모습이 보이진 않았으나 선주혁은 느낄 수 있었다. 적철항은 지름 허공에 떠오르고 있다는 것을.... "느,능공허도(凌空虛道)란 말인가?" 분위기가 자신에게 좋지 않았다. 공기를 거스르지 않는 신법으로 극쾌의 한계를 넘어섰다고 자부하고 있다지만, 상대는 능공허도에 이른 경신공부를 자유자제로 펼치는 자였다. 저런 적철항의 손에서 도주가 가능할 것인지 이제는 자신할 수 없는 선주혁이다. "오랜만에 재미나게 놀아보겠군. 정말 오랜만이야.... 교호호호홋!" 마치 재미있는 장난감을 얻은 아이처럼 적철항은 즐겁게 웃어댔다. 그 모습에 울컥해 뭐라 한마디 쏘아붙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입을 열지는 못했다. 적철항은 상상초월의 고수. 한 마디 말을 하는 것조차 생사를 가르는 허점이 될 수 있기 때문 이었다. 먼지가 가라앉고 시야가 확보되기 시작하자 선주혁은 기감으로만 느꼈던 현상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발밑에 아무 것도 존재 하지 않음에도 자연스럽게 서 있는 적철항의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꼬마야, 노부의 다음 공격을 받을 준비는 된 게냐?" 폭발적인 살기를 뿜어내며 노기를 서슴없이 드러내던 적철항의 모습 은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뾰적한 고음의 음성은 부드러움마저 묻어나는 중이었다. 조롱을 내포한 부드러움이었다. 선주혁은 알고 있었다. 적철항읜 비정상적이고 잔인한 성품이 발동한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살인은 유희(遊戱)에 불과하다. 타인의 목숨을 빼앗는 순간을, 자신을 향한 절망의 시선을, 생기를 잃은자의 얼굴을, 즐기는 것이다. 그런 적철항이 자신을 제대로 된 유희의 대상으로 여기기 시작했음을 선주혁은 느꼈다. 좀처럼 만나기 힘든, 무공으로 상대해볼만한 장난감 을 얻은 것이다. 마른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천둥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신경이 그만큼 예민해진 것이었다. 침을 넘긴 선주혁은 대답대신 호흡을 고르기 시작했다. 긴장이 지나치면 오히려 반응이 늦어지기 때문이다. 적철항과 마주했다는 것만으로도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그는 이미 수차례 죽음의 위기를 경험했다. 특히 최근에는 완벽하게 죽음을 받아들이기까지 했었다. 평생을 두고도 쉽게 가질 수 없는 이런 경험들은 선주혁에게 많은 것을 느낄 수 있게 해 주었고, 그 효력은 생각보다 컸다. 절망적인 상황 속 에서 그의 안색이 정상으로 돌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호흡은 점점 차분 해졌고, 흔들리던 기도도 안정을 찾았다. 그런 선주혁의 모습에 적철항의 두 눈이 더욱 빛을 발했다. 비정상적으로 긴 그의 혀가 입술을 핥아대기 시작했다. 꿈틀러기면 입술을 골고루 적신 그가 혀를 집어넣었다. 이때, 선주혁의 두 눈이 부름떠진다. 적철항의 진기가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니 진기의 이동이 느껴 지는 그 순간, 적철항의 신형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허공에 떠 있었으나 땅을 박차는 모습도, 신형을 날리기 위한 예비동작도 없었다. 적찰항은 얼음 위를 달리는 썰매처럼 미끄러지듯이 다가온 것이다. 다만 그 속도는 썰매 따위와는 견줄 수 없었기에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싶은 순간, 이미 목적지에 도착에 있었다. 대경한 선주혁의 용천혈에서 진기가 발출된다. 암영풍을 전개해 거리를 확보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선주혁의 속도만큼이나 다가오는 적철항 역시 빨랐다. 선주혁은 조금도 거리를 벌리지 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스스로 한계를 벗어났다고 자부하던 그의 신법이 조금도 진가를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다. 적철항의 입가에 미소가 맺히고 그의 손가락이 갈고리처럼 굽은채 선주혁 의 가슴 섶을 잡아왔다. 몸을 움직여 피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 선주혁은 마지못해 팔을 휘둘러 적철항의 조공(爪功)을 막아갔다. 콰아아앙. 장력을 발출한 것도 아니건만 적철항의 하박을 가격하자 기이한 폭음이 일었다. 선주혁의 미간이 크게 찌푸려졌다. 묵연수투의 기운을 운용한 팔이다. 한데 적철항의 팔과 부딪치자 은은한 통증이 느껴진 것이다. 자신의 체질 까지 감안하면 충격적인 만큼의 현상이었다. 선주혁은 젖 먹던 힘까지 끌어올려 신형을 뒤쪽으로 날렸다. 한 호읍이나마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다행이 적철항은 조금도 급한 마음이 없어보였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선주혁을 따라올 뿐 몰아치듯 공격을 해 오진 않았다. 그 잠시의 시간동안 선주혁은 적철항의 별호와 그의 능력을 새삼 떠올렸다. 철마금신 적철항. 그는 진정한 금강불괴지신을 연성한 절대의, 아니 그 이상의 고수였던 것 이다. "쿄호호호, 제법 단단한 손을 지녔구나, 애송이!" 적철항은 그림자 같이 선주혁을 따라붙으면 웃음을 터뜨렸다. 전력으로 자신을 가격하고도 멀쩡한 모습이 사뭇 대견하다는 식이었다. 선주혁은 잃었던 평정심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지금 당황해서는 죽도 밥도 안 된다. 이대로라면 적철항의 노리개가 되어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시달리게 될 것이 분명했다. 짧은 시간, 평정심을 회복한 선주혁의 손에서 검의 형상을 갖춘 강기가 생성되었다. 영의검의 기운을 응용한 강기였다. 일반적인 강기로 적철항의 금강불괴지신에 상처를 내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영의검의 기운을 빌린 것이다. 천하십대명검 중의 하나인 영의검이라면 적철항을 상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심검에 가까운 강기가 형상을 갖춤과 동시에 선주혁은 그것을 앞으로 쏘아냈다. 조금이라도 거리를 벌리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강력한 빛을 발하는 강기가 짧은 공간을 갈랐다. "흥!" 적철항은 나직이 코웃음을 치며 길고 커다란 손을 휘둘렸다. 어느새 그의 손은 금광(金光)을 발하고 있었다. 카아아앙. 강기와 강기의 충돌이 날카로운 금속성을 만들어냈다. 선주혁이 발출한 검강은 맥없이 옆으로 튕겨졌다. 하지만 방어하기에 급급했던 앞서 와는 차이가 있었다. 적철항이 인상을 찌푸린 것이다. 검강에 실린 역도 때문이었다. 강호에서 제법 명성을 날리는 애송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회주가 유독 주의를 기울이고, 백존들이 술렁일 때도 적철항은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애송이는 애송이의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기기묘묘한 초식을 익히고, 온갖 영약을 밥처럼 먹었다 해도 나이를 초월 할 수 없는 내력의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이미 백여 년 전에 초식의 한계를 극복했고, 그를 넘어서는 세월간 축적 해온 내공이 있는 적철항이었다. 달마대사가 살아 돌아온다해도 고작 약관 을 벗어난 나이라면 자신의 상대가 될 수 없음을 그는 잘 알고 있었던 것 이다. 한데 방금 전 심검지강에 실린 역도에서 엿볼 수 있는 내력은 그가 생각 했던 것과 크게 달랐다. 순수한 내력만으로 비교해 봤을 때, 결코 자신의 아래가 아닌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는 거지?" 적철항이 인상을 찌푸린 것은 불가능한 일이 실현되었고, 그것을 자신이 직접 확인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가 익힌 심법은 금강삼음공(金鋼三陰功)이다. 젊은 날의 적철항은 흔한 삼류무인의 하나에 불과했다. 불흑의 나이에 이를 때까지 그는 무명일 정도 였다. 체내의 음기가 지나치게 많아 아무리 노력을 해도 무공에 그리 큰 성 취를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패종회의 절학 중 음기가 충만한 사내를 위한 심법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 이 바로 금강삼음공이었다. 이 특수한 심법은 체내의 음기를 소진시켜 내력의 급증을 도모하는 방법으 로 여타의 내공심법에 비해 축기의 속도가 탁월했다. 말 그대로 내공의 급증을 이룰 수 있는 심법인 것이다. 가공할 정도의 내력 증진이 가능함에도 금강삼음공이 널리 익혀지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음기가 충만한, 다시 말해 특수한 체질을 가진 자만이 익힐 수 있다는 제약 외에도 치명적인 단점이있기 때문이었다. 금강삼음공의 치명적인 단점은 일정 수준 이상의 수련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다. 대개의 마공이나 사공이 그러하듯 막연히 벽에 부딪치기 때문이 아니 었다. 일정 수준을 넘어간 금강삼음공은 체내의 모든 음기를 소진시켜버린다. 아 무리 충만한 음기를 가지고 태어났다고 해도 버틸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 해 적정 수준 이상을 익히면 외려 심법으로 인해 죽음을 맞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적철항은 그런 금강삼음공의 한계를 극복한 유일한 인물이있다. 금강삼음공을 극성까지 익히고도 살아남았으며, 그 한계를 넘어 더 많은 내력를 모은 것이다. 비록 혈맥이 굳어버린 나이에 새로운 심법을 익히기 시작했지만, 축기의 속도가 빠른 터라 적철항은 스스로 자신의 내공이 타인에 비해 부족하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한데 고작 눈앞의 애송이가 금강삼음공으로 지난 백오십여 년을 수련해온 자신의 내력에 필적하는 내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가 쉽사리 상황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어찌되었건 정녕 내버려 둘 수 없는 놈이로다. 지금에도 이러할진데 앞으로 수십 년이 흐르면 누가 이런 괴물 같은 놈을 감당할 수 있겠단 말인가?" 이백에 달하는 나이는 허투루 먹은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 부정하고픈 현상 속에서도 적철항은 냉정하게 상황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의 눈에서 일렁이는 살기의 색채가 조금은 짙어졌다. 넓게 펼쳤던 손가락의 간격이 줄어들더니 주먹을 쥐었다. "카핫!" 적철항의 입술에서 튀어나왔다기에는 믿기 힘든 뾰족한 기합성, 큰 키만큼 이나 긴 팔이 쾌속하게 앞으로 향한다. 일순간 공간이 일그러지는 느낌에 선주혁 역시 한계치의 내력을 양손에 집 중한다. 그의 심검지강이 맹력한 빛을 발하며 마치 진검처럼 검명을 토해낸다. 패도의 극을 달리는 권강이 폭풍처럼 휘몰아쳐 오자 선주혁은 수직으로 심 검을 그어 권강을 베어간다. 귀청을 찢을 듯한 폭음이 울려 퍼지기 직전의 순간. 선주혁의 안색이 창백해진다. 적철항의 권강과 충돌하는 자신의 강기가 이 지러지는 모습을 확인한 것이다. 아차 하는 심정을 제대로 머릿속에 떠올리기도 전에 그의 신형이 폭충에 휘말린 낙엽처럼 날아간다. 선주혁은 뒤늦게 귀청을 때리는 폭음을 인식했다. 쿠아아아앙. 실 끊긴 연처럼 한없이 날아가는 선주혁의 신형. 그는 곡선을 그리면 떠오른 것도 아니고 낮은 높이에서, 수평으로 무려 삼 십여 장에 달하는 거리를 튕겨지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날아가는 선주혁의 신형이 바람개비처럼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소용돌이에 휘말린 무엇처럼.... 와류붕산권(渦流崩山券). 가공할 경력의 회전력을 이용, 일 권에 산마저 무너뜨린다는 적철항의 독문 절기가 발출된 것이다. 맥없이 튕겨져 땅바닥에 나뒹구는 선주혁. 그는 마치 용수철처럼 튀어 일어났다. 적철항의 후속공력을 염려한 것이다. 하지만 적철항은 입매를 일그러뜨려 특유의 잔혹한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 었다. 그것은 만족한 만한 상황에서 비롯된 웃음이 아니었다. 선주혁이 두 다리로 설 수 있다는 사실이 그의 자손심에 상처를 낸 것이다. 이는 그가 와류붕산권의 극의를 깨달은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애송이의 심검이 와류붕산권 특유의 흐름에 장애를 만들기는 했지만, 그렇 다고는 해도 지나치게 멀쩡한 모습이었다. '소문처럼 저놈도 금강불괴지신을 연성했다는 건가?' 애초 단 일 권에 죽일 마음은 없었다. 그렇다고 저렇듯 멀쩡히 서 있는 모 습을 기대한 것은 더욱 아니었다. 자신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적철항의 자존심을 자극하 고 있었지만, 그는 애써 조급한 마음을 버렸다. 원하는 결과는 아니었다 해도 애송이가 이미 와류붕산권에 적중당한 것만큼은 사실이었다. 이는 자신이 원 하는 유희를 최대로 즐길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되었음을 다르지 않았다. 그가 미소를 짓고 당장 공세를 쏟아 붓지 않는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쿨럭!" 상대가 급박히 몰아올 의사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선주혁은 기침과 함 께 피를 게워냈다. 내상을 입었다. 만년음양초에서 비롯된 특이한 체질도, 묵연수투의 기운을 응용한 보호도 무력하기만 했다. 나사못의 원리를 이용해 스스로 창안한 북두회류장(北斗回流掌)처럼 적철항의 일 권에도 특수한 회전력이 담겨져 있 었기 때문이다. '젠장! 세상에 새로운 것은 없다더니.... 나사못의 원리는 몰라도 회전에 의 한 파괴력 증가를 이용한 무공은 있었다는 말이군.' 적철항의 무공에 대한 설명이 자신이 읽었던 소설 속에 아주 없어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조연의 무공들까지 세심히 살피며 소설을 읽어본 적이없는 그였기에 이와 같은 곤란을 겪고 있는 중이었다. 내장이 자리를 이탈한 듯 지독한 통증이 몰려왔다. 전신 혈맥이 뒤엉키지는 않았지만 진기의 유통이 원활하지도 않았다. 선주혁은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해야할지 쉽사리 답을 찾지 못했다. 정말이 지 이대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방법이없는 듯했다. "아직까지 살아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칭찬을 해 주마, 애송이!" 적철항이 비릿한 미소와 함께 한 마디를 던지고 신형을 움직였다. 지금까지 와는 달리 느릿하게 허공을 부유(浮游)해 선주혁 쪽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선주혁은 창백해진 안색 속에서 당황해했다. 아직까지 진기가 원활히 이어 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금 더 시간을 끌 필요가 있었다. 이대로 아무 대책 없이 적철항의 공격을 마주하면 그야말로 끝장이기 때문이다. 선주혁은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비장의 구명절초(求命絶招)한 수가 있음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적철항이 적정 거리까지 다가왔을 때였다. 선주혁의 손가락이 앞으로 펴지고, 그의 손에서 작은 빛 하나가 쏘아졌다. 폭렬지환이 허공을 가른 것이다. 진기가 제대로 이어지지 않는다 해도 선주혁의 내력은 가히 천하제일을 논 하는 바, 폭렬지환은 기대이상의 위력을 내포한 채 적철항을 향해 날아갔다. 콩알보다 조금 큰 빛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것을 확인한 적철항. 무공을 닦아온 지 이백여 년에 달하는 무인으로서의 본능이 맹렬히 위험을 경고했다. 목숨을 위협할 정도는 아닐지라도 자신의 본능을 자극하는 무엇이 있었다. 금강불괴지신을 믿고 밀어붙일 수도 있었으나, 적철항은 선택을 달리했다. 아무리 부상을 입은 애송이의 공격이라지만, 한순간의 방심이 큰 위험을 초 래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는 와류붕산권을 전개했다. 미중유의 거력이 강렬한 빛과 함께 적철항의 주먹에서 쏟아졌고,폭력지환은 회전력에 휘말려 맥없이 옆으로 뜅겨졌다. 폭렬지환의 평소 위력을 생각해보면 적철항의 권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었다. 선주혁은 실망할 틈을 갖지 못했다. 폭렬지환을 튕겨내고 노도처럼 밀려오는 와류붕산권의 권력 밖으로 피하는 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땅을 박차는 선주혁. 몸을 날려 옆으로 피했음에도 선주혁은 와류붕산권의 경력 밖으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숨 막히는 압력 속에서 그는 비틀거리며 뒤로 연신 물러 났다. 특유의 경신 공부가 아니었다면 또다시 땅바닥에 나뒹굴었을 것이다. 그는 무려 십여 장을 물러서면 비틀거린 끝에 간신히 몸을 바로 세울 수 있었다. 그때가 되어서야 지축을 울리는 굉음과 함께 땅이 심하게 흔들렸다.선주혁 을 비켜간 적철항의 권강이 산비탈을 강타한 것이다. 한눈을 팔 여유가 없음을 알고 있지만 선주혁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다. 적철항의 권력이 가진 힘이 대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하고자 함이었다. 그리고 입을 벌렸다. 무공초식명은 본래 거창하기 마련이다. 천지가 어쩌고 태산이 저쩌고 해도 실제로 인간이 육신을 통해 펼치는 무공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는 법이다. 다시 말해 번천이라는 이름이 들어간다고 실제로 하늘이 뒤집히는 일 따위 는 없는 것이다. 한데 적철항의 와류붕산권은 달랐다. 선주혁의 뒤쪽에 있던 비탈의 작은 언덕 하나가 그대로 무너져내렸다. 초식 의 이름에 걸맞은 위력을 발휘한 것이다. 만약 폭렬지환이 방해를 하지 않았고, 적철항이 전심전력을 기울였다면? 정말로 적철항의 와류붕산권은 이름 그대로 산을 무너뜨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선주혁은 아연질색할 수밖에 없었다. '젠장. 이게 정말 현실이냐?' 한 사람의 주먹질 한 번에 동산 하나가 통째로 날아간다는 사실이 선주혁 에게는 지독히도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마치 허무맹랑한 만화책의 한 장면이 눈앞에서 펼쳐진 것만 같았다. 자신의 북두유성우가 단 일 격에 백여 명의 무인들을 몰살시키는 것 또한 무림인들에게는 지독할 정도로 비현실적임을 그는 느끼지 못해왔던 것이다. 남이 전개하는 엄청난 무공을 보고서야 그는 무공이란 정말이지 실재하는 현실 속에서 가장 비현실적인 현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비현실적 현상의 명백한 체감. 그 이후 선주혁에게 휘몰아쳐 오는 것은 거대한 절망감이었다. 일 권에 산을 무너뜨리는 삼패의 일인을 마주해 자신이 살아남을 가능성은 전무했기 때문이다. 절망은 무기력을 부르고 선주혁은 이대로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이고 싶다는 마음까지 들었다. 지금까지 해온 것만으로도 최선을 다했다고 스스로를 위안 하면서..... 덕양 진인이 자신의 말을 전할 수만 있다면 어차피 패종회는 무너질 것이다. 무림에는 평화가 올 것이고 원래의 운명 그대로 사형은 영웅으로 무림사에 길이 남게 될 것이다. 원래 이쪽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자신은 이제 죽움을 맞이할때가 된 것 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선주혁이 어깨를 늘어뜨릴 때였다. 문득 한 가지 불길한 가정이 머리를 스쳤다. 이 근방에는 덕양진인을 뒤 쫏는 패종회의 무리가 가득했다. 자신이 이곳에서 시선을 끌고 있다지만 덕양 진인과 철무종, 명주운이 탈출하지 못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는 없었다. '정말 그렇게 된다면....? 모든 것이 틀어진다. 사형이 무극삼검식을 넘어시기 전에 패종회와 맞서 게 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사형의 필패는 기정사실이었다. 또 다른 악재도 있었다. 설령 사형이 무극삼검식을 넘어서서 자신만의 무공을 완성했다 하더라도 자신의 전언을 듣지 못한다면 패종회의 회주인 선우단천과 일대일이 아닌 상황에서 마자하게 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사형은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사형의 위기. 그것은 선주혁의 두 눈을 다시 빛나게 했다. 온몸이 걸레처럼 찢기고, 생명의 원천을 다 소진하더라도 사형에게 닦칠 위험만은 막아야만 했다. 공 노인의 억울한 죽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패종회가 무림에서 군림하는 것을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선우 아가씨의 말대로 그것이 자신의 천명임을 스스로에거 다시 상기시 켰다. 자포지기(자포지기)의 심정이 겉으로 드러날 정도로 패색이 짙어 보였던 선주혁이었다. 한데 선주혁이 다시 두 눈을 빛내며 투기를 불태우자 적철항은 짙은 미소 를 지었다.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는 상대는 그에게 별다른 흥미를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선주혁의 기도가 변한 것을 확인한 적철항이 한 마디를 던졌다. "이제 좀 해볼 마음이 들었나보군." 시종일관 적철할만이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자, 선주혁은 이렇게 한없이 끌려 다닐 수 만은 없다고 생각에 말을 받았다. "조심하는 게 좋을 거요. 정말이지 이제 본격적으로 해볼 마음이 들었으 니까.....!" "쿄호호홋! 좋아, 좋아!" 무엇이 좋은지는 몰라도 적철항은 고개까지 젖히면 웃음을 터뜨렸다. 선주혁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진기가 훨씬 자유롭게 운행되는 지금 그의 손가락이 적철항을 가리키고 폭렬지환이 다시금 빛으로 화해 허공을 갈랐다. "흥! 뻔한 수작을.....!" 적철항은 이전보다 더 많은 내력을 끌어 올려 와류붕산권을 전개했다.권강 의 크기가 앞에 비해 훨씬 크고 권격의 범위가 큰 이유는 애송이가 또다시 피해내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폭렬지환은 첫 번째와는 달리 굉음과 함께 와유붕산권의 강기를 강타했다. 그럼에도 권강은 노도와 같이 선주혁을 향해 밀려들었다. 하나 권강을 기다리는 것은 선주혁이 아니었다. 폭렬지환을 발출한 선주혁이 허공에 또 하나의 강기를 만들었던것이다. 나선의 묘가 담긴 북두회류장이 만들어낸 선주혁만의 강기. 그것은 특유의 이지러지는 듯한 모양으로 와유붕산권을 항해 쏘아지는 중이었다. '제발!' 둘 다 회전한다지만 자신의 강기는 나선의 묘에 첨예한 집중의 위력이 추가된 상황. 자신의 북두회류장이 폭렬지환으로 인해 타격을 받은 적철항의 강기를 뚫어주길 바라는 선주혁이었다. 회전력이 더해진 와류중산권의 강기와 나선의 묘가 추가된 북두회류장의 강기가 만났다. 요란한 폭발음은 일어나지 않았다. 동정호에서 백존의 일원인 임한용의 강기를 마주했을 때처럼 선주혁의 강기는 마치 상대의 강기에 흡수된 듯한 모습만을 보일 뿐이었다. 관통의 여부는 수유의 시간 내게 결정이 난다. 콰아아아아아. 난데없이 폭포수에나 들릴 법한 굉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선주혁의 얼굴이 일그려졌다. 외려 자신의 강기가 흩어지고 상태의 권강이 엄습해왔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북두회류장이 아예 무용했던 것은 아니었다. 권강에 담 겨진 권력이 눈에 띄게 약화된 것이다. 선주혁은 신형을 뒤로 물리며 북두연환장을 전개했다. 쿠아아아아앙. 긴 여음을 남기는 폭음. 연이은 일곱 번의 장력발출이 만들어낸 굉음이었다. 십여 장을 물러선 선주혁의 모습은 형편없었다. 하지만 그의 두 눈에 맺힌 정광만은 이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폭렬지환, 북두회류장, 그리고 북두연환장을 연이어 전개한 끝에 적철항 의 공격을 당당히 막아낸 것이다. 안 될 것이라 스스로의 한계을 결정짓고, 도망칠 궁리만 하며 소극적으로 대처했기에 낭패를 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처럼 적극적으로 나선다면 꼭 죽으라는 법은 없을 것도 같았다. 한 차례 방어에 성공했기에 자신감이 붙은 그는 더욱 투지를 붙태우기 시작 했다. "쿄오오오홋! 과연 제법이구나, 애송이. 큰소리를 칠만도 해!" 적철항은 다시 한 번 괴소를 터뜨렸다. 더불어 그의 키가 작아졌다. 아니, 키가 작아진 것이 아니라 지금껏 허 허공에 떠있던 그가 땅에 내려온 것이다. 상대의 공격을 무위로 돌리면 잠시 희망에 부풀었던 선주혁의 미간이 찌 푸려졌다. 지금껏 의식하지 못했으나 적철항은 지금까지 내력의 소모가 극 심한 능공허도의 수법으로 허공에 있었던 것이다. 결굴 자신이 막아낸 적철항의 일격은 그가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는 뜻. 선주혁이 실망한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그렇게 많은 깨달음을 얻고 이제는 자신이 가진 바의 내력을 충분히 활용 하고 있다고 생각했건만, 삼패의 존재는 여전히 자신에게 벽이었던 것이다. '젠장! 역시나 괴물이라는 건가?' 마른 침을 삼킨 선주혁은 크게 실망을 하긴 했지만, 이전처럼 절망에 사로 잡히지는 않았다. 어차피 스스로가 삼패의 아래임을 인정하고 있던 사실이었다. 새삼 좌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음을 스스로 되뇌며 적철항을 상대 할 방법을 찾고자 노력했다. '천명을 받은 내가 이대로 죽어선 절대 안되지! 분명 뭔가 방법이 있을 거야.' 수없이 많은 기적을 자신의 것으로 하며 살아온 선주혁이었다. 이번에도 그런 기적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그간 의도하지 않은 기적이 오늘날의 자신을 만들어 왔다. 하지만 이제는 스스로 기적을 만들 때가 온 것이다. 그녀, 선우유미의 자유로운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사형을 지키기 위해서는, 공 노인의 복수를 위해서는 받드시 그래야만 했다. "하얍!" 낭랑한 기합성과 함께 선주혁의 강기가 허공을 가른다. 다시 한 번 전개되는 북두회류장. 나선의 묘를 살린 맹렬한 회전과 함께 그의 강기가 적철항을 향해 날아갔다. Chap2 그녀의 외침 <1> 적철항은 두 다리를 넓게 벌려 굳건히 몸을 지탱했다. 자세를 낮추고 여태껏 볼 수 없던 진중한 표정으로 일 권을 차분히 펼쳐낸다. 우르르릉. 권풍이 일고, 강기가 발출되었을 뿐인데 우레가 이는 소리가 울려 펴졌다. 막대한 내력이 담김 와류붕산권이 북두회류장을 마주한다. 강기와 강기의 충돌. 이른바 전력을 다한 승부가 펼쳐지는 순간. 적철항의 눈살이 찌푸려진다. 좌측에서 느껴지는 맹렬한 살기 때문이었다. "흥!" 코웃음 소리와 함께 적철항이 좌수를 크게 휘두른다. 콰아아앙. 다급하게 휘두른 손에 큰 내력이 실려간 힘들었던 듯 폭음과 함계 적철항 이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선주혁이 북두회류장을 발출함과 동시에 암중에 폭력지환을 발사했다. 맹령한 두 강기의 충돌에 신경을 집중하는 사이, 빙 돌아 날아간 폭렬지환 이 적철항의 요혈을 노리고 날아들었던 것이다. 가공할 위력을 내포한 폭렬지환이었으나 완벽한 금강불괴지신을 연성한 적철항에게 큰 타격을 입히진 못했다. 선주혁이 아쉬워하는 사이 북두회류장을 와해시킨 적철항의 와유붕산권이 그의 지척에 이르렀다. 헛바람을 들이기면 북두연환장을 펼쳐내는 선주혁. 맹렬한 기세로 날아드는 강기를 뒤로 물러서며 연타해보지만 앞서 와는 다른 위력인지라 쉽사리 해소되지 않았다. 선주혁은 계속해 몸을 뒤로 날리며 다시 한 번 북두연환장을 전개했다. 두 번에 걸쳐 북두연환장을 펼친 후에야 선주혁은 적철항의 장력을 완 전히 해소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연이은 충격으로 인해 그이 내상은 더욱 악화된 상태였다. 입에서 흘러나오는 피의 양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 "쿄호호호홋! 좋아, 좋아! 계속 그렇게 버텨 보는거야." 적철항이 괴성을 터뜨릴 무렵, 인근에 수많은 무인들이 나타났다. 적철항과 선주혁의 격전이 덕양 진인을 쫒던 패종회의 무인들을 몰려들린 것이다. 엄청난 폭음에 작은 동산 하나가 무너질 정도의 소란이 일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적철항은 오연한 태도로 턱을 치켜든 채 패종회의 무인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놈은 노부가 맡는다. 절대 손을 쓰지 말....." 절철항이 선주혁은 자신의 먹이임을 선언하는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연신 피를 게워내던 선주혁의 신형이 막 도착한 패종회의 무인 들을 향해 움직이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무슨?" 적철항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뜨는 사이, 선주혁은 기묘한 수법을 발출해 패종회 무인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패종회의 무인에게는 선주혁의 쾌속한 수법을 알아차릴 여력조차 없었다. 그저 뭔가 번쩍핸다 싶었건만 어느새 숨 막히는 바람이 얼굴로 밀려오는 것만을 느낄 뿐이었다. 선주혁이 멱살을 쥔 채로 그를 집어 던진 것이다. 적철항이 서 있는 방 향이었다. 적철항은 부드러운 암경을 발휘해 수하가 날아오는 힘을 죽였다. 그리고 가볍게 몸을 받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 사이, 선주혁은 또 한 명의 무인을 잡아 적철항에게 던졌다. "이익!" 적철항의 악다문 이 사이올 노기치민 숨결이 새어 나왔다. 그제야 선주 혁의 의도를 깨달은 것이다. 패종회의 무인을 던지는 선주혁과 자신의 거리가 벌어지고 있었다. 수하를 받아드는 사이 선주혁은 또 다른 수하를 잡아 던지면 점점 거리를 벌리는 것이다. "이 요악스러운 놈!" 적철항은 암경을 발휘해, 수하가 날아오는 속도를 줄이긴 했지만 이전처 럼 직접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이대로라면 애송이를 놓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수하는 부상을 입긴 하겠지만 죽을 정도는 아닐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번에 날아오른 패종회 무인은 둘. 뒤를 이어 또 다른 패종회의 무인 둘이 또 날아올랐다. 그야말로 선주혁은 양떼를 헤집는 늑대처럼 패종회 무인들 사이를 누비며 닥치는 대로 적철항에게 던져대는 중이었다. "모두 흩어져라!놈에게 잡히지 마라!" 적철항에게 터져 나온 특유의 고음. 그의 목에 굵은 핏줄이 도드라졌다. 패종회 무인들은 분분히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그들로서는 선주혁이 전력을 다하는 움직음을 넘어설 수 없었다. 패종회의 무인들은 분분히 하늘로 떠올랐다. 몇몇은 직선을 그리며 적철 항에게 날아갔고, 몇몇은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적철항의 신경을 최대한 분산시키기 위한 선주혁의 의도대로였다. 그러던 어느 한순간. 적철항의 두 눈이 매섭게 빛났다. 이대로는 끝이 없을 터였다. 애송이는 벌써 자신과의 거리를 이십여 장 이상이나 벌리고 있었다. 조금만 더 거리가 벌어진다면 아무리 자신이라 해도 놈을 놓칠 가능성이 있었다. 애송이의 경신공부는 인정을 받기에 충분할 정도로 빠르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였다. 일곱여 명의 패종회 무인이 적철항을 향해 날아가고 다시 다섯명이 허공에 떠올라 있는 상태. 적철항의 양 주먹에서 벌떼가 우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의 양손에 가공할 진기가 응집되고 있는 것이다. 약간의 여유를 찾았던 선주혁의 안색에서 핏기가 가셨다. 거대한 진기의 움직임을 느낀 것이다. '쳇! 역시 악당은 악당아란 말인가!' 그는 적철항의 의도를 미리 알아챘다. 적철항은 수하들의 죽음을 아랑곳하 지 않고 자신에게 권력을 뿌리려는 것이다. 선주혁은 숨도 쉬지 않고 땅을 박찼다. 그야말로 전광석화가 무색한 속도로 그의 신형이 쏘아졌다. 그가 서 있던 자리에 도착한 것은 태산을 무너뜨릴 기세의 권강. 엄청난 권풍과 경력에 휘말린 패종회의 무인들은 시신조차 남기지 못했다. 적철항의 권강이 모든 것을 쓸어버린 것이다. 등판 전체가 따끔거려오는 것을 느끼며 선주혁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뒤로 손을 내밀었다. 폭렬지환 발출. 조금이라도 권강의 속도를 늦춰보고자 함이었으나, 수포로 돌아 갔다. 막 강한 폭렬지환의 위력이었으나 적철항의 권력을 상대하기는 무리가 있었던 것이다. 더 강력한 내력을 쏟아 붓는다면 다소 효과를 볼 수 있을 테지만, 그랬다 가는 전력을 다해 달리는 현재의 속도에 지장을 줄 터였다. 선주혁은 이를 악물었다.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대로라면 생존의 가능성이 전무한 상태. 적철항의 권강에서 활로를 찾아내야만 했다. 다시 한 번 땅을 강하게 박찬 선주혁의 두 눈이 결의에 찼다. 허공에서 그의 신형이 빙글 돌았다. 양손이 무겁게 내밀어진다. 적철항의 권강을 마주하는 선주혁의 손. 귀청을 찢는 굉음의 발출.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적철항의 양 주먹에서 발출된 권강이다. 선주혁이 막아낸 것은 하나의 강기. 나머지 하나가 맹렬한 기세 그대로 선주혁의 하복부를 강타했다. 산이 무너져 내리듯한 굉음. 선주혁의 입가에서 뿜어지는 피. 입에서 튀어 나온 선혈로 이루어진 붉은 안개는 그의 몸을 휘감올 여유 조차 갖지 못했다. 선주혁의 신형이 쏜살보다 빠르게 뒤로 날아갔기 때문이다. 적철항의 입가에 미소가 맺힌다. 와유붕산권이 애송이에게 적중하는 순 간, 그는 분명히 느꼈다. 거칠다 싶을 정도의 저항이 있었다. 아무리 금강불괴지신을 연성했다 해 도 지나칠 정도의 저항이었다. 하지만 와류붕산권을 맨몸으로 막아낸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일. 하복부에 적중한 와류붕산권이 상대의 내기를 완벽히 흩어버리는 것을 느 낀 것이다. 애꿎은 수하들의 희생이 동반되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놈이 살아남을 경우 패종회에 입힐 손해를 생각하면 당연한 선택이었다. 선주혁의 죽음에 대한 확신이 있음에도 적철항은 바람개비처럼 회전하며 날아가는 선주혁의 뒤를 쫒았다. 내기가 흩어진 이상, 전신이 갈가리 찢겨나가야 하건만 애송이의 몸이 온건한 형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에 만의 하나를 염두에 둔 추격일 뿐, 큰 의미는 없었다. 아니 내심으로는 애송이가 실날같은 호흡이라도 잇고 있기를 바라는 마음 도 있었다. 자신의 유희가 이대로 끝나길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선주혁의 신형을 뒤쫒던 적철항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끝을 모르고 날아 가던 애송이가 그만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벼랑 끝에 선 적철항이 아래를 내려다 봤다. 삼협 특유의 거칠물살이 굽 이쳐 흐르고 있었다. 암벽에 부딪쳐 흰 포말을 만들어내며 거칠게 흐르는 물만이 눈을 어지렵혔다. 적철항은 만의 하나를 대비해 기감을 극도로 예민하게 가다듬었다. 혹시나 살아있다면 애송이의 기가 느껴질 것이다. 곧 그의 입매에 미소가 짙어졌다. 미약한 호흡이나 기감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이 느꼈던 대로 사망한 게 분명했다. 애송이는 분명히 즉사했고, 만의 하나 살아남는다 해도 별문제는 없었다. 하복부에 권강이 적중되어 내기가 흩어졌다함은 단전이 파과된것을 의미 한다. 단전이 파괴된 것은 무인에게 있어서 죽음 이상의 의미. 어쩌면 적철항은 애송이가 살아남기를 바라고 있을 지도 모른다. 자신에 필적할 만큼의 내공을 지녔던 애송이가 내력을 모두 잃은 후의 상실감에 사로잡혀 평생을 사는 고통을 즐기기 위해.... <2> 전신의 혈맥이 터져나가는 고통 속에서 의식을 잃는 것은 당연했다. 선주 혁에게 있어서는 그쪽이 더 편할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약간의 안식조차 허용이 되지 않았다. 삼협의 거친 물살 이 그를 받아들이는 순간, 차가운 물살이 그를 깨웠다. 상황를 파악하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물에 동화 시켰다. 그리고 물살의 흐름에 몰을 내맡겼다. 아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손끝 하나 까닥할 수 없는 상태였으므로 물 살이 이끄는 데로 흘러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적철항의 마지막 공격을 받아들인 것은 실로 위험천만의 모험이었다. 존 재하는 모든 기운을 체내로 받아들이기 위한 수련을 계속해왔다. 더 나아가 그 기운 그대로를 체내에서 증폭시켜 되돌리는게 목표였다. 이와 같은 노력 이 결과를 찾을 수만 있다면 효용은 무궁무진 했다. 삼패를 상대할 때도 밀 리지 않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삼패를 맞이한 시기가 너무도 빨랐다. 스스로 완성을 논하기 전에 적철항을 만난 것이다. 그의 와류붕산권은 지독할 정도로 무서 웠다. 그래서 최후의 방법으로 북두회류장의 묘리를 체내에 응용해 힘을 분산시 켜보고자 했다. 분산된 힘들 체내로 받아들이려 한 것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흡성대법 특유의 효용으로 와류붕산권에 실린 경력을 전신으로 흩어뜨리는 데까지는 성공할 수 있었다. 적철항이 선주혁의 단전이 파괴되었다고 믿는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단전 에 아닌 전신에 축기를 하는 흡성대법의 묘를 그가 알 리없었기 때문이다. 적철항의 권강에 담긴 경력의 크기가 너무나 거대했기에 선주혁은 극심한 타격을 받아야만 했다. 충격이 너무나 커, 전신 경락과 혈맥이 터져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 상태 에서 공격을 되돌리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저 의식을 잃고 힘없이 날아갈 뿐이었다. 겉으로하도 멀쩡한 상태를 보 존하면 숨을 부지하는 것만도 다행인 일이었다. 게다가 삼협의 거친 물살에 빠진 것도 천만다행인 일이었다. 적철항이 의 식을 잃은 자신을 어떻게 할지는 불을 보듯 훤했다. 현재는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기적을 항하는 자 신의 신체가 있는 한, 후일을 도모할 수 있음을 선주혁은 알고 있었다. 살아남았다. 그것이 선주혁에게 있어서는 최대의 의미였다. 실패는 있었지만 적철항의 공격을 온몸으로 받아들었다. 죽지않았으니 그 것으로 충분했다. 시간을 두고 수련을 한다면 되돌려보내지는 못할지라도 버텨낼 정도까지는 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은 사실은 희망이 되었다. 선우 아가씨를 패종회에서 구해낼 가능 성이 한흥 높아진 것이다. 전신을 가득 채운 고통 속에서 그의 입에서 미소 가 그려진 것은 이 때문이었다.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선주혁은 다시 의식을 잃어갔다. <3> 무림이 들썩이는 중이었다. 갑작스럽게 구파일방이 무림맹으로의 복귀를 선언했다. 하늘의 뜻을 받다 부활한 듯 보였던 백발마신이 재차 죽임을 당했다. 그 것도 일대일의 승부에서 패한 것으로 알려졌다. 패종회의 호법이 상상키 힘든 고수여서 단신으로 백발마신을 패퇴시킨 것이다. 이는 천애백의단의 활약으로 인해 움츠려 들었던 패종회의 기세을 단번 에 드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껏 망설이던 수많은 무인들이 패종회로 몰려들었다. 군소방파들은 주저 없이 패종회에 입회했다. 그래선지 천애백의단의 활약 역시 자쥐를 감줬다. 어느 날인가부터 사라 져버린 것이다. 패종회 무림맹 연합에 정면으로 맞서 대대적인 일전을 준비하는듯 보였던 천마맹과 사파연합도 숨을 죽였다. 국지적인 싸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단 한 번도 주력이 나서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간 은연중에 강호 최강의 무력을 소유했던 것으로 인정받던 천마맹은 강호의 모진 비난을 자처했다. 계속되는 패종회의 도발을 외면한 채 세력 권 내에서도 물러서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금강신협이 사라진 정이련 역시 침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잔뜩 웅크린 그들은 아예 무림에서의 존재감이 사라진 듯했다. 강호의 패권을 다투는 무게 중심은 급격히 패종회와 무림맹 연합 쪽으로 기울었다. 지금 이 상태로라면 속칭 패무 연합이 강호를 지배하는 날이오는 것은 사 시간문제였다. 아니, 무림의 성급한 몇몇은 이미 그런 시절이 왔음을 떠들어 댔다.백말 마신이 없는 한, 감히 패무 연합에 대항할 자는 아무도 없다고 여기는 것 이다. <4> 사람들은 넑이 나간 듯 모여들었다. 동정호변에서 들려오는 애달픈 음률 탓이다. 가슴을 적시는 곡조에 마치 무엇에 흘린 사람다냥 하나둘씩 모여 든 인원은 얼추 봐도 이삼백 이상은 족히 되어 보였다. 강변에 덩그러니 놓인 커다란 바위. 그 위에는 한 여인이 앉아 옥으로 만들어진 피리를 불고 있었다. 애간장을 녹이는 듯한 곡조에 몇몇 여인들은 수건을 꺼내 젖은 눈신울을 훔쳤고, 철석간감을 자부하던 뭇 사내들조차 숙연한 분위기였다. 옥소(玉簫)를 부는 여인은 요염하기 이를 데 없는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를 향해 음심을 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절절히 눈물을 자극 하는 그녀의 피리소리가 워낙 압도적인 탓이었다. 그녀가 긴 연주를 마치자 주변에 몰려들었던 사람들은 너나할것 없이 탄 성을 터뜨렸다. 중원 어디에서도 이와 같은 연주를 듣지 못할 것이라고, 세상에서 가장 슬픈 선율을 들었다고,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곡조였다 고 언성을 높였다. 옥소를 들고 여인이 일어섰다. 처연한 표정의 그녀가 발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은 넋이 나간 채로 그녀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얼마지 않아 그녀의 연주가 다시 시작되었다. 걸음을 옮기며 옥소를 들고 있건만 단 한 번의 흔들림도 없었다. 외려 감정의 폭이 훨씬 커져 소성은 사람들의 감정을 더욱 자극했다. 그녀를 쫓는 무리의 숫자가 불었다. 피리 소리를 듣는 사람마다 넋이 빠 진 표정으로 그녀의 뒤를 쫓기 시작한 것이다. 여인의 발걸음이 멈춰 섰을 때, 그녀의 뒤를 쫓는 사람은 물경 천여 명에 달했다. 여인이 멈춰선 곳은 최근 봉문을 푼 학청문의 앞이었다. 백발마신을 두려 워해 봉문을 했던 학청문은 최근 그의 죽음과 더불어 봉문을 해체했다. 주 력이 되는 문도를 잃은 학청문은 패종회에 새로 가입한 무인들과 패종회에 서 직파된 무인들오 대체되어 있었다. 여인이 몸을 돌렸다.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세상을 속이고, 패약을 추구하는 무리를 저저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던 사람이었습니다. 모두가 그를 욕하고 비난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세인의 손가락질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지가 무엇인지 증명 했습니다. 스스로의 몸을 던져 무엇이 옳고 그른지 밝혔습니다. 죽음을 넘어선 그의 의지는 세상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용기 있는 자는 검과 도를 뽑아들고 그의 뜻을 쫓아 강호의 정의를 위해 스스로의 목숨을 걸었습니다." 여인의 음성은 처음에는 조용했다. 하지만 한 구절, 한 문장이 지날수록 그녀의 음성은 격해졌다. 격앙된 어조였지만 소리를 지르는 것은 아니였고, 언성을 높이는 것 또한 아니었다. 한데도 묘한 음율에 실린 그녀의 음성은 가이하리만큼 천여 명의 귀에 명확히 들어왔다. 마치 그녀가 모두의 옆에서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한데 그의 부활이 알려졌습니다. 아직까지 강호에 해약을 끼치는 무리가 건재한 만큼 그는 눈을 감을 수 없었나 봅니다. 죽음조차 그의 의지를 막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외면한채, 다시 한 번 악의 무리를 향해 달려갔습니다. 두 번째 생에 대해 미련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세상 누 구도 돕지 않는 상황에서도 그는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는 두 번째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여인의 두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녀가 무슨 말은 하는지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조차 그녀를 쫒아 소매 를 적셨다. 몇몇 사람들은 슬픔 가운데서도 안절부절 하지 못했다. 그녀가 노래하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챈 사람들이었다. 학청문의 무인들이 사슬이 시퍼런 기색을 드러낸 이곳에서 저와같은 노래를 한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행여 불똥이 자신에게 튈까 염려되는 마음이 가득했지만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발길을 돌릴 수 없었다. 조금난 더 여인의 노래와 같은 목소리를 들어야만 할 것 같았다. 이대로 몸을 돌린다면 평생을 후회할 거라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너무나 강한 힘을 가진 그가 죽음을 맞이하자 세상이 움츠려 듭니다.그가 죽 음을 선책했던 이유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그가 무인의 표상이었음을 외치면 서도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그의 두 번째 죽음이 무엇을 촉구하는지 모를 리 없건만, 그의 죽음에 외려 몸을 사리고 있습니다. 아니, 옳지 않음을 알면 서도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자들에게 고개를 숙이는 중입니다. 저 하나의 영 달을 위해 비겁함을 자처하고 있습니다." 여인의 음성에 강한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중인들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말 아 쥐고 어금니를 악물었다. 이즈음에는 그녀가 누구를 논하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몇몇은 여인의 정체까지도 알아챘다. "그의 두 번째 죽음을 슬퍼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세상을 오시할 능력 을 지니고도 그는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자신의 죽음으로 강호를 일캐우려 한 그의 뜻이 외면당하는 것을 이제는 참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곳에 왔습니다. 남자라면, 아니 강호에 뜻을 둔 자라면, 그의 숭고한 뜻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여인인 제가 다시 한 번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여인은 옥소를 높이 들었다가 학청문 쪽을 내밀었다. "패종회의 악도들에세 백발마신을 죽음으로 몰고 간 대가를 받아내야 하는 것은 우리의 몫임을 선언하고자 합니다. 보잘 것 없는 계집이지만, 그의 뜻만은 명 확히 알기에 이렇게 목을 놓아 외칩니다. 강호의 동도께 머리 숙여 말씀을 드리 고자 합니다. 백발마신이 세운 무인의 기개는 여러분 모두의 가슴에 있습니다 그것을 알려 드리기 위해 그는 두 번의 생을 희생했습니다. 제발이지...그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아주십시오!" 여인의 애절한 마지막 말은 눈물과 함께였다. 그리고 여인은 신형을 날렸다. 마치 선녀가 천상으로 돌아가듯 땅을 박차고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중인들은 입에서 감탄성이 터지고 그녀의 신형은 눈 깜짝할 사이 패종회의 무인들 앞에 내려섰다. 사람들의 혼을 사로잡았던 옥소가 빛을 발하고 앞으로 향해졌다. 퍼어엉. 모두의 어깨을 움츠리게 하는 폭음성. 군중들은 분분히 뒤로 물러서면서도 여인의 안위를 걱정했다. 여인은 가녀린 몸를 비틀거리는 중이었다. 독사의 눈처럼 잔흑해 보이는 눈매를 한 노인인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한 눈에도 패종회에서 파견된 고수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군중들이 알고 있는 학청문주의 얼굴이 아니었던 것이다. "요악한 계집니 세치 혀로 천하를 속이려 드는구나!" 노인에 호통에 여인의 꽃잎 같은 입술이 벌어졌다. 검게 죽은피가 한 사발은 토해졌다. 여인의 목소리가 맥없이 울려 퍼졌다. "그의 뜻이 진실 된 것임을 천하가 모를 소냐? 미천한 이 계집의 진심이 그 에게 비할 바는 아닐 지라도 천하는 오늘의 일오 그의 의지를 되새길 것이다!" "요망한 것!" 노인의 눈썹이 역팔자로 크게 휘어졌다. 더불어 그의 손에서 섬특한 느낌을 내는 빛이 뿜어졌다. 빛의 구체는 허공을 갈랐다. 여인의 가슴에서 폭발했다. 여인의 신형이 맥없이 튕겨졌다. 애처로운 신형이 땅바닥에 나뒹군다. 군중들의 입에서 안타까운 탄성이 절로 튀어 나왔다. 모두가 숨을 죽인 그 순간. 여인이 고개를 들었다. 코와 입에서 피를 게워내면서도 그녀가 소리를 쳤다. "백발마신이 일깨워준 무인의 혼이 있는 한, 네놈들의 야욕은 절대로 이뤄질 수 없을 것이다." 여인의 외침과 동시에 노인의 신형이 움직였다. 아니, 움직였다 싶음과 동 시에 노인은 번쩍하고 여인의 앞에 나타났다. 그의 발의 여인의 복부를 가격한다. 여인의 가녀린 몸이 붕 떠올랐다가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진다. 행언할 수 없는 고통에 여인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그러나 여인은 죽지 않았다. 지독한 통증을 억누르고 꿈틀대고 있었다. 벌 레처럼 처량한 모습이지만 군중들은 비웃지 못했다. 그녀의 몸짓 하나하나가 주장하는 바를 느끼는 것이다. 그녀가 이대로 죽음을 맞이하지도, 의식을 잃지도 못하는 이유를 알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외침을 눈으로 듣고 있는 것이다. "뭣들 하는 게냐? 저 더러운 계집년을 끌어다 가둬라! 감히 패종회를 모욕하 고, 무림공적을 칭송한 죄를 물어라, 오늘의 일을 후회하게끔 만들어라!" 노인의 명령에 패종회 무인들이 신속하게 움직였다. 축 처진 여인, 옥소선자 몽세화는 일체의 저항도 하지 못하고 팔을 이끌렸다. 질질 끌려가는 그녀의 모습에 군중들은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네놈들은 또 뭐냐? 저 계집의 세치 혀에 놀아나 목숨을 내놓고 싶다는 게냐?" 노인은 섬뜩한 안광을 뿜으면 군중을 향해 외쳤다. 내력이 실린 그의 음성은 또렷하게 모두의 귓에 들렸다. 분분히 흩어져 도망갈 것을 예상한 외침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아무도 덤벼드는 이는 없었지만 모두가 노한 표정을 지은 채, 제자리를 지켰다. 노인은 울컥 화가 치밀었다. 다른 이들보다 더한 노기를 담은 눈빛을 흘리는 자들이 보인다. 무림인이다. 계집의 선동에 휘말려든게 분명하다. 멍청한 놈들의 사고가 어떻게 흘러갔을지 불을 보듯 훤했다. 반반한 계집이 눈물로 호소를 하자 앞뒤 분간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당장 쌍수에 내력을 주입해 눈을 부릅뜬 놈들을 쳐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일천에 달하는 군중들이 보는 앞이다. 그저 사납게 눈을 떴다는 사실 만으로 학살을 한다면 지금껏 민심을 수습하고자 노력해온 패종회의 노력을 수포로 돌리는 셈이다. 노인은 결국 노화를 억누르고 몸을 돌렸다. "버러지 같은 놈들!" 주름진 입술 사이로 한 마디를 내뱉지 않고서는 성이 풀리지 않을 듯한 노인 이었다. 패종회의 무인들이 학청문으로 돌아간 후에도 군중들은 그대로서 있었다. 무 엇인가를 갈등하는 듯한 그들의 표정. 누군가 하나 나서기만 한다면 옥소선자를 내놓으라고 달려들 기세였다. 하지만 누구도 나서는 이는 없었다. 자살행위에 다름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 다. 어쩐지 스스로 비겁하기 이르 데 없는 것만 같았다. 딱히 규정되지 않는 수치심에 군중은 고개를 숙이고 하나 둘씩 흩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을 통해 옥소선자의 기개와 백발마신의 의지에 관한 소문이 다시 금 천하를 향해 외쳐지기 시작했다. 다욱 언성을 높여 외치는 것만이 학청문으로 쳐들어가 옥소선자를 구해내지 못한 부끄러움을 씻는 유일한 방법이라도 되는 양, 그들은 외치고 또 외쳐댔다. Chap3 남자로서의 길 <1> 구파일방의 복귀, 그리고 패종회와의 연수로 무림맹은 유래 없는 위세를 떨치는 중이었다. 맹주인 한조백이 부재하는 것은 이제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의 제자이나 한희윤의 정혼자로 공표된 서문도옥은 이제 차기 맹주로서의 지 위를 굳건희 했다. 목숨이 경각에 달한 한조백이 숨을 거두기만 하면 그가 맹주가 될 것이라는 사실은 이제 거의 기정 사실이 되어 있었다. 천마맹, 사파연합, 정의련이 숨을 죽인 현재, 무림맹의 총단인 십전성은 연일 축 제의 나날이었다. 옥소선자의 기묘한 선동으로 인해 무림이 크게 동요하고 있다 지만 감히 패무 연합을 상대코자 하는 자는 있을 수 없었다. 천하를 사분했던 세 력 중 세 개의 세력이 고개를 숙인 현재였기 때문이다. 십전성 내(內) 창룡전(蒼龍殿). 철혈신검 한조백이 집무를 보던 이곳은 농염하고 밀도 높은 열기로 가득했다. 드 넓은 태사의에서 뒹구는 세 명의 남녀로 인한 열기였다. 놀랍게도 그들은 모두 나신(裸身)이었다. 그들이 입고 있던 옷은 태사의 아래쪽과 책상 위에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천하의 정의를 주관하던 장소가 음탕한 신음성과 교소(僑笑)로 가득했다. "맹주님." 여인의 가슴을 희롱하던 서문도옥의 손가락이 멈췄다. 이어 그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이는 잘못된 호칭 탓이 아니다. 벌써 오래 전부터 서문도옥은 측근에게 자신을 맹주라 칭하게 했다. 그가 인상을 찌푸린 것은 흥겨운 시간을 방해받은 탓이다. 오랜 세월 탐을 내왔던 자리. 그 자리를 음탕한 행위로 모욕하는 것은 서문도욱에게 있어 끔찍할 정도로 만족스 러운 쾌감을 주곤 했다. 그가 침실이 아닌 창룡전에서 정사를 치누는 까닭은 여기에 있었다. 그 열락의 시간을 방해받았기에 그는 지독한 불만을 느끼는 것이다. "들어와라." 서문도옥은 마지못해 입을 벌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당장이라도 보고자의 멱을 따겠다는 의지가 담겨져 있었다. 여인들은 분분히 옷을 들어 몸을 가렸지만, 서문도옥은 나신 그대로 팔을 넓게 벌 려 등받이에 걸칠 뿐이었다. 안으로 들어선 자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서문도옥이 창룡전에서 무엇을 하는지 익 히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급히 보고 드려야 할 사항이 있어 이렇게 무례를 범했습니다." "......" 서문도옥은 재촉해 묻지 않았다. 보고자는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서문도옥이 앉아있는 쪽에서 느껴지느 살기 때문이다. 아무리 맹주의 제자라지만 정면으로 맞선다면 적어도 백초 이내에 죽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그가 내뿜는 살기 자체에 대해 두려움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태사의 뒤쪽에 드러워진 그림자는 두러워해야만 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간 서문도옥에게 두 개의 그림자 더 생겼다는 것을.... 명 내부의 모든 일을 관장하는 보고자가 두러워하는 것을 살기를 돋은 서문도옥의 한 마디였다. 명이 떨어지자마자 두 개의 그림자는 끔찍할 정도로 빠르게 자신의 목숨을 앗아갈 것이다. 보고를 하는 항동만(抗同滿)은 깊이 숨을 들이 쉬었다. 자신은 서문도옥의 흥취를 충분할 사유로 이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나 두러워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전 맹주.....아니, 한조백 그자가 사라졌습니다." ".....!" 치미는 살기를 억누르기 위해 자신에게 몸을 기댄 여인의 어깨를 쓰다듬던 서문도옥 의 손이 멈췄다. 여인의 얼굴이 새하애진다. 자신의 살을 파고드는 서문도옥의 손가락 때문이다. 지 독한 통증에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퍼억 하는 소리에 함께 여인의 어깨에서 피가 솟구쳤다. "꺄아아악!" 비명은 난데없이 피를 본 다른 여인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지, 지금 뭐라 한 게냐?" 여유 만만하던 서문도옥은 이미 찾을 수 없었다. "한조백이....사라졌습니다." 항동만의 얼굴도 창백해졌다. 여인의 비명소리 때문이다. 자신의 정당성은 확보했지 만 괜한 불똥이 뛸까 염려하는 것이다. 노기가 치민 서문도옥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 지 이미 수차례 경험한 그였다. 그가 재빨리 말이 이었다. "지금 추적 중입니다. 무공을 잃은 상태니 그다지 멀리 도주하지 못했을 것입니...큭!" 항동만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책상 위의 문진이 날아와 이마를 때렸기 때문이다. 다행히 내력이 실리진 않았다. 이마에 앉은 손에서 피가 철철 흘러나왔지만 항동만은 내심 안도하는 중이었다. 목숨 을 잃는 것에 비하면 이 같은 상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무공을 잃은 자가 감금된 장소에서 사라지는 것을 어떻게 설명 할 테냐?" 서문도옥의 노갈이 터져 나왔다. "그게........" 항동만은 쩔쩔매는 와중에서 내심 이를 갈았다. 감히 서문도옥에게 앙심을 품는 것이 아니었다. 한조백을 감시하는 수하들을 향한 분노였다. 놈들이 제대로 한조백을 감시했다면 지금 같은 일을 겪지 않았을 터였다. "흥! 하긴....네놈 같은 머저리들이 그 늙은 너구리를 감당하기는 애초부터 무리였을 지도 모르지." "으흐흐흐흑" 참을 수 없는 통증에 잠시 의식을 잃었던 여인이 이제야 깨어났다. 고통에 겨워 저도 모르게 흐느끼는 여인이었다. 퍼억. 둔탁한 음향. 여인의 머리가 수박처럼 깨졌다. 허연 뇌수가 흐르고 피가 사방으로 튀였다. "시끄러워." 죽은 여인을 향한 서문도옥의 한 마디였다. 나머지 한 여인은 전신을 사시나무 떨 듯 떨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어깨가 풀렸던 것이 자신이 아님을 다행이라 생각하며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참고 또 참았다. 아랫 입술을 악문 윗니가 힘을 잃는 순간 자신의 머리도 깨질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혹시....? 그 늙은이, 아직까지 무공을 남기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그럴 리가 없습니다. 부상은 차치하고서라도 오늘 점심때까지도 그가 먹는 음식 에는 산공독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산공독은 단전을 패하는 효능이 있어 천하의 그 누구라도 무공을 유지할 수는 없습니다." 항동만은 스스로를 납득시킬 정도로 강력하게 말했다. 그를 바라보는 서문도옥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그건 당신이 그 늙은이를 몰라서 하는 소이야. 지독하기 이를데 없는 그 늙은이라면 뭔가 수작을 부렸을 수도 있단 말이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서문도옥이 날카롭게 두 눈을 빛냈다. "십전성의 총력을 기울려 그 늙은이를 찾는다!" "네?" "내 말 못 알아들어? 총력을 기울인다고?" "하지만 이미 추적대가......" 항동만은 입을 다물었다. 다시금 섬뜩한 살기가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음을 느낀 것 이다. "늙은 너구리를 잡으라고!알았어? 모든 일에 앞서서 말이야." "알겠습니다. 맹주!" 항동만은 '맹주' 라는 단어에 유독 힘들 주어 대답했다. <2> 험산준령(驗山峻嶺)을 넘는 발걸음은 더디기만 하다. 아니, 보통 사람의 시선에서는 평지를 달리는 듯 빠르지만, 정작 몸을 움직이는 이의 마음은 친근같이 무거웠다. 예 전의 자신이 가졌던 능력에 너무도 못 미치는 속도였기 때문이다. '여기만 지나면.....' 산줄기를 따라 흐르는 물을 밟는 노인이 눈을 빛낸다. 물의 중심부는 허리까지 빠져드는 깊이. 달리는 속도는 한참이나 늦어지고, 힘은 수배나 더 들었다. 하지만 노인은 계곡의 물 로 움직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완벽하게 자신의 흔적을 지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임을 알기 때문이다. 한 걸음, 한 걸음을 힘겹게 옮기던 노인이 물을 나섰다. 자갈이 가득한 곳이었다. 이어 풀이 자라지 않는 곳을 골라 조심스레 걸음을 옮긴다. 속도에 대한 염려는 완전히 배재한 듯 보였다. 한 발, 한 발에 신경을 쓰다 보니 보통 사람이 걷는 것보다 느렸다. 온 신경을 집중한 듯 물에서 나온 노인의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이 각여에 걸쳐 움직인 노인은 병풍처럼 드리워진 절벽 앞에 섰다. 주변을 한 번 돌아본 그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는 절벽으로 쭉 들어가 버 렸다. 누가 봤다면 마치 절벽으러 빨려 들어가는 듯한 모습이었다. 물론 노인이 절벽을 뚫고 들어가는 것은 아니었다. 암벽에는 교묘한 틈이 존재했고, 틈은 구불구불한 길로 이어져 겉에서 보기에는 발견하기가 어려울 뿐이었다. 절벽은 기묘한 암벽의 골로 인해 손으로 훑으며 찾지 않으면 틈을 찾기 힘들게끔 이 루어져 있었다. '이곳이라면 누고도 찾지 못할 테니가.....' 노인인 확신했다. 세상에 이 장소를 알고 있는 사람은 자신과 아들 내외밖에 없었다. 혹시나 있을 변고에 대비해 유약한 아들과 며느리가 피신할 장소로 정해둔 곳이었다. 아들 내외는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떴다. 그들을 위했던 장소에 자신이 몸을 감추려 하고 있으니 절로 한숨이 나올 상황이었다. 하지만 노인의 눈은 뜨겁게 불타고 있었다. 그것은 포기를 모르는 자의 눈이었다. 어떠한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의지가 명백히 보였다. 결코 흔들림이 없을 것 같은 노인의 두 눈이었다. 하지만 절벽의 틈새를 통과해 널찍한 평지에 이른 노인의 두 눈은 크게 흔들렸다. 세상에서 자신만 알고 있다고 여겼던 은신쳐였다. 한데 그곳에서 사람을 본 것이다. 약관을 넘긴 듯 보이는 청년이다. 비록 지녔던 무공의 태반을 잃은 노인이라지만 눈썰미는 여젼했다. 청년은 한눈에도 범상치 않아 보였다. 설령 자신이 무공을 잃기 전이라 해도 쉽게 상대할 수 없을 듯한 분위기다. 천하제일인에 가장 근접했던 노인이 청년을 이토록 높이 인정하는 데는 이유가 있 었다. 약간의 경계심을 보이는 청년의 기도는 자연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아마도 청년 이 아닐 것이다. 반노환동의 고수가 분명하다. 노인이 알고 있는 한, 무림의 역사상 누구라도 저 나이에 자연을 담은 기도를 낼 수 는 없었다. "하아! 하늘은 진정 패종회를 선택했단 말인가?" 노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나직한 목소리였다. 노인은 청년의 모습을 한 고수가 패종 회의 인물일 것이라 단정 지었다. 탄식은 거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패종회?" 청년의 모습을 한 고수의 기도가 크게 변했다. 갑작스럽게 숨 막히는 살기가 뿜어져 나온 것이다. 노인의 입에서 긴 탄식이 흘러 나왔다. 지금의 자신으로서는 저항해봐야 무의미한 일이었다. 저 정도의 고수하면 단 일초도 감당 할수 없음을 알고 있는 것이다. "어찌하여 하늘은 패악한 무리에게 저와 같은 힘을 주셨단 말인가?" 자신만이 알고 있던 은신처에서 외려 자신을 기다리는 저들의 능력은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더구나 저와 같은 고수라니! 좌절은 모르는 노인이었으나 이 순간만큼은 절망의 기색이 가득 했다. "패악?" 반노환동의 고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수작을 부리는 게냐? 이곳까지 찾아온 능력만큼은 인정을 해주겠다만...내가 그런 수작에 넘어갈 성 싶더냐?" 반노환동 고수의 호통이었다. 이에 노인은 감았던 눈을 떴다. '십전성을 탈출한 걸 인정해주겠다는 말인가? 수작이라니....대체 저자는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자신을 추적해 온 패종회의 고수라여겼건만 난데없는 호통에 노인은 외려 당황하는 중이었다. "내 비록 본신의 무공을 완벽히 회복하지는 못했지만 호락호락하게 당하지는 않을 터! 수작은 집어 치워라. 너희 패종회의 간고함은 익히 알고 있음을 아직도 모르겠는가?" 계속되는 반노환동의 고수의 호통 속에서 노인의 눈이 빛났다. "귀하는 패종회에서 노부를 쫓아 온것이 아니오?" "수작은 그만하라니....." 청년의 용모를 한 고수의 외침은 계속되지 못했다. 노인의 한마디 때문있어다. "노부는 한조백이라고 하오! 노부를 아시오?" "......!" 살기가 흔들리는 것을 노인은 느꼈다. 청년의 용모를 한 고수의 두 눈이 휘둥그짐과 동시에 살기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하지만 그도 잠시 막강한 고수가 뿜어내는 살기가 더욱 짙어졌다. 살기와 더불어 느껴지는 위압감은 실로 대단하여 노인, 무림맹주 한조백이 천하를 호령하던 시절에 비해 부족함이 없었다. "한....맹주는 이미 죽었을 터! 아니, 살아 있다 해도 무공이 전폐되었음을 알고 있 는 데 어딜 감히!" ".....!" 이번에 놀라는 것은 한조백이었다. 자신의 상황을 제대로 알고 있는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여겨왔다. 그렇지 않다면 십전성이 온건할 리 없었을 테니... 최소한 적풍조만이이도 움직였을 터였다. 그런데 이자는 데체 누구이게에 자신에 대해 명확히 파악하고 있는 건지 한조백은 궁금했던 것이다. 한조백의 주름진 눈이 가늘어졌다. "귀하는 데체 누구기에 노부의 상황을 알고 있는 것이오?" "흥! 끝까지 개종자들이 한 맹주에게 교묘한 수작으로 산공독을 복용시켜온 사실을 명확이 알고 있다. 그러니 쓸데없는 수작을 부리기보다는 동료들어 부르는게 좋을 거다" 완강한 태도였다. 가늘게 떠있던 한조백의 눈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노부가 십 수 년에 걸쳐 산공독을 복용해온 것은 사실이오. 하나 일말의 내력을 회 복하여 간신히 십전성을 빠져나왔소. 노부를 믿건 믿지 않건 귀하를 상하게 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은 아니니 오해를 푸시오." 한조백은 다소 여유를 찾은 모습이었다. 눈앞의 고수는 패종회의 주구가 아닐 확률이 높았다. 저와 같은 고수가 자신을 상대 하기 위해 수작을 부릴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자신을 죽이고 싶다면 죽이면 될 것이오, 제압해 십전성으로 돌아가고 싶다면 실행에 옮기면 될 일이었다. 그 정도의 무위가 있음을 알고 있다. 따라서 스스로 패종회의 일원임을 부정하고 있는 상대의 말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다 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훗, 말도 안 되는 소리!" 반면 반노환동의 고수는 여전히 한조백을 부정하는 중이었다. 한조백의 탈출을 납득하기 힘든 듯 보였다. "말하지 않았소? 믿건 말건 노부에겐 중요치 않다고, 다만 이곳의 모옥은 노부가 손수 지은 것이고, 벽곡단과 생활에 필요한 물품 역시 손수 준비한 것이니 그것들으 노부가 사용해야겠소. 최소한 귀하와 나눠 쓸 권리는 있지 않겠소?" "당신이 모옥을 지었다고?" "그렇소. 본래는 노부의 아들 내외를 위한 것이었소. 이런 장소에 모옥이 홀로 섰을 리 는 없지 않겠소?" 반노환동의 고수는 연신 두 눈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어찌된 상황인지 생각을 하고 있음을 한조백은 알 수 있어다. 꽤나 혼란스러운 모앙 이었다. "대체 무엇을 두러워하는 것이오? 노부는 이제 보잘 것 없는 늙은이에 불과하외다. 설령 한조백이 아니더라도 한줌의 진기를 간신히 끌어올리는 것만으로 귀하를 어쩔 수 있을 성 싶소?" 한조백은 자신의 마지막 말이 상대방에게 수용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저 정도의 무위의 고수라면 자신의 체내에 진기가 미약함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 이고, 그 정도의 내력으로는 털끝 하나 해칠 수 없음도 알 것이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여전히 냉랭했다. 두 눈에는 여전히 의심이 가득했다. 반노환동을 할 정도의 고수라면 오랜 세월을 살아왔을 터. 당연한 일이라 여겼다. 더구나 패종회와 그다지 관계가 좋지 않아 보이는 그였다. 그들이 부리는 기묘한 수작을 알고 있다면 말 몇 마디에 자신을 무림맹주였던 한조백 으로 인정하기는 쉽지 않으리라. "어찌하면 노부의 신분을 믿을 수 있겠소?" 이제는 완연히 여유를 찾은 한조백의 질문에 청년의 용모를 가진 고수는 미간을 찌푸 렸다. "당신이 진정 한...맹주하면......,아들의 유언을 말해보시오." 표정이 서로 바뀌였다. 이번에는 한조백의 미간이 찌푸려진 것이다. "노부의 아들이 남긴 유언을 당신이 안단 말이오?" "일단 말해보기나 하시오. 판단은 내가 할 테니." 한조백은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 잠시 망설이는 모습이었다. 그리고는 결국 주름진 입술을 열었다. "윤아를 부탁한다고 했소. 윤아는....노부의 손녀요." "......!" 청년의 용모를 한 고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녕.... 당신이 한 맹주....님이시라는 겁니까?" 한조백은 순간 혼란에 빠졌다. 자신은 진짜로 아들의 유언을 말했다. 그리고 아들의 유언을 들은 것은 자신뿐이었다. 한데 이 말 한다마에 지독할 정도의 의심을 단숨에 푸는 것을 그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생은 곤륜의 파문제자이자 무림맹의 공적이 선죽혁이라고 합니다." 한조백은 또다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곤륜오선 중 곤륜일검 무진 진인에 대해 서는 알고 있다. 한데 눈앞에 고수는 무진과는 비할 바 없는 고수여싿 그런 자에 대해서는 일절 들어본 적이 없는 한조백이었다. 더거나 파문제자라니! 무진 진인보다 고수라는 것은 그보다 윗 항렬이라는 뜻. 데체 누가 있어 무진 진인보다 높은 항렬의 고수를 파문한단 말인가? "아마도 한 맹주님께서는 계속 억류당한 상태이셨으니 저에 대해 모르실 것입니다. 저는 패종회의 악적들에게 누명을 쓰고 무림맹의 공적이 되었습니다." "아.....!" 한조백의 나직한 탄성이었다. "한데 노부의 식견이 일천하여 곤륜에 귀하와 같은 고수가 있음을 알지 못했소이다. 곤륜일검과는 어떤 관계이신지....?" "무진 사숙조를 말씀하시는 것이군요." "사숙조?" "네. 일단은 모옥 안으로 들어가시죠. 한 맹주님의 내기가 상당히 불안정해 보이는데.." 선주혁은 벌써 두 달여를 머물고 있던 모옥으로 한조백을 안내 했다. 한조백의 머릿속은 뒤죽박죽있었다. 당최 이해 못할 상황의 연속이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패종회의 추격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임을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3> "비켜서시오." 노기가 일렁이는 음성이었다. "조금 더 기다리세요." 맞서는 목소리는 단호했다. 절대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가 강렬했다. "데체 은 소저까지 왜 이러시는 거요? 주혁이 죽었소! 그것도 두번이나! 한데 언제까지 이 암굴에서 웅크리고 있겠다는 말이오?" "웅크리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렇게 목숨이 아깝다는 게요? 자신의 사제가 죽었는데 굴속에 쳐박혀 무공이나 닦으며 세월을 보내는 게 당연하다는 말이오?" 주백광의 언성은 점점 높아지는 중이었다. 은설연은 살짝 뒤을 돌아봤다. 행여 주백광의 음성이 그에게 들릴까 싶어서였다. "선 소협의 유언이었습니다." "핑계일 뿐 아니겠소? 무공이 떨어진다 해도, 하는 데까지는 해봐야할 것이 아니오! 안 되면 천마맹과 사파연합의 총력을 기울려 서라도 패종회와 일전을 벌어야 하면 될 일 이오." "무의미한 일입니다." "무엇이 무의미하단 말이오. 나나 은 소저, 그리고 남 소협보다 훨씬 부족한 무공을 지 닌 자들도 도검을 뽑아들고 주혁의 복수를 원하고 있소이다." "남 소협도 복수를 위해 노력 중이에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몽 소저의 소문을 못 들으셨소? 그녀는 주혁의 뜻을 기리기 위해 스스로 사지로 뛰어들었단 말이오. 하다못해 아녀자도 그와 같은 기개를 보이거늘 장부 가되어 어찌 목숨을 아끼고자 굴속에 웅크리고 있단 말이오?" "말씀 드렸잖아요. 남 소협은 선 소협의 유지를 받드는 중이라고요 결코 두려워서 숨어 있는 것 아니란 말이에요." 은설연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어느 천 년에 무공을 완성하여 복수를 도모한단 말이오? 패종회가 무림을 장악한 후에? 그게 말이 될 성 싶소?" "패종회를 와해시키는 것이 중요한 거 아닌가요?" "그럼 홀로 그 세월을 기디리라고 하시오. 나와 여기 단목 소저가 이끄는 천애백의단까지 묶어놓지 말고 말이오. 아니, 내가 남 소협에게 직접 이야기하겠소!" "들어가실 수 없어요. 지금 남 소협은......!" 은설연으니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어느새 주백광으 대도가 그녀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그야말로 눈부신 발도술이었다. 도귀 주백광의 쾌도술은 이미 극에 이른 상황. 미리 알았다고 해도 막기 힘든 일초였다. "날 막을 생각하지 마시오!" "주 대협!" 은설연이 안타갑게 외쳤으나 주백광은 이미 은설연의 옆을 지나치고 있었다. 그는 빠 르게 걸음을 옮겨 동굴 안으로 향했다. 주백광과 함께 온 단목지민은 은설연을 일견하고 주백광의 뒤를 쫓았다. 그녀 역시 지 금처럼 패종회의 득세를 두고 보기만 있기는 힘들었던 것이다. 은설연은 깊은 한숨을 쉬고는 허겁지겁 두 사람의 뒤를 쫓았다. 선두에 선 주백광은 광장처럼 넓어지는 굴의 안쪽에서 걸음을 멈췄다. 노기에 일렁이던 그의 두 눈은 착 가라앉고 있었다. 동굴이 원래부터 이렇게 넗었던 것은 아니리라. 그것은 벽면에 가득한 검흔이 입증하고 있었다. 끊임없는 수련속에서 동굴의 넗이가 점차 넗어져 이처럼 거대한 굴이 형성된 것이다. 하나 주백광이 눈빛이 가라앉은 것은 동굴의 넗이 때문이 아니었다. 검을 들어 앞을 겨누고 서 있는 남지학의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그는 거대한 산과 같은 기세를 은은히 내뿜으며 석상처럼 서 있었다. 앞으로 내민 검극은 미미한 흔들림조차 없어 남지학의 호흡이 맺은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런 남지학의 모습 중에서 주백광으 노기를 억누른 이유가 있었다. 걸레러첨 찢겨나 간 남지학의 팔 때문이었다. 엉겨 붙은 피의 양만으로도 상처를 얼마나 험하게 다뤘는지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세상에.....?" 천마맹에서 갖은 흉한 꼴을 다 본 단목지민었으나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저란 팔을 하고서 검을 들고 것 자체가 무리였기 때문이다. "남 소협은......" 뒤늦게 주백광과 단목지민이 있는 장소에 도착한 은설연이 입을 열었다. "선 소협이 남긴 유언을 이루기 위해 목숨을 걸었어요. 주화입마의 위험도, 무리한 초식의 시험으로 팔이 찢겨나가는 고통도, 뼈가 조각나는 끔찍한 아픔도...남 소협을 멈추게 하지는 못합니다. 그는....,그는 죽음이 두려워서 웅크리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남지학을 바라보는 은설연의 어조가 점차 격앙되어 가고 있었다.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옥용이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던 용모는 크게 훼손되어 있었다. 창백한 안색은 내상을 입고 있음을 짐작케 했고, 까칠한 피부와 제 멋대로 기른 수염은 평소의 남지학을 상상조차 할 수 없게끔 했다. "지금의 남 소협에게 있어서 두려운 것은 오직 하나! 자신이 사제의 복수를 하지 못할 것뿐이에요. 누구보다 선 소협의 복수를 원하는 건 남소협일 거에요." "......." 당장이라도 대도를 남지학의 목에 겨누도 천애백의단을 움직일것을 주장하려던 주백광 이었다. 하지만 그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라 해도 저 지경이 된다면 도를 들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제가 두 번의 죽음을 맞이하는 동안, 자신은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남 소협은......" "그,그건 그의 책임이 아니지 않소?" 노기 충천해 있던 주백광은 어느새 남지학의 편을 들고 있었다. "네. 그래요. 하지만 남 소협의 생각은 다른 것 같아요. 사제를 보호하지 못한 책임을 스스로 지려는 거에요." 은설연의 시선이 남지학에게로 향했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패종회가 상대하지 않는다 해도 남 소협은 이미 목숨을 걸고 있어요." 주백광은 몸을 돌렸다. 선주혁의 죽음에 대한 분노가 가라앉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은설연의 설득 때문도 아니였다. 남직한은 그 자체로 느낄 수 있었다. 사제의 복수에 대한 남지학의 열망이 자신에 못지않다는 것을. 주백광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남지학은 남자로서의 길을 제대로 걷고 있었기에...... Chap4 절대십가 <1> 예전의 신광(神光)이야 찾을 수 없다지만 그의 두 눈은 여전히 빛 나고 있었다. 좌절을 모르는 그였기에 탈출할 수 있었고, 삶을 도모 했다. 하지만 저들이 가진 막강한 힘에 대해 알게 된 이상, 당분간 중 원의 패권이 저들에게 넘어가는 것만큼은 포기를 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한조백이 탈출을 감행한 것은 후사를 도모하기 위함이 다. 어떻게 해서든 손녀와 제자들을 데리고 중원을 떠날 작정이었 다. 이후 백 년이 걸리건 이백 년이 걸리건 자신의 후학들이 패종회 의 손에서 무림을 구해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적어도 자신의 대해서는 무림이 패종회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막을 수 없다고 이미 단정했다. 천마맹, 사파연합, 정의련 모두가 힘을 합친다 해도 패종회를 막을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와 같은 결로 역시 포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현실에 대 한 직시였다. 현 무림의 힘에 대해 누구보다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한조백이었기에 내릴 수 있는 냉정한 평가였다. 간계한 수작으로 자신을 망치고, 평생을 공들인 무림맹을 엉망 으로 만든 저들이었다. 그에 대한 복수심이야 하늘을 찌르건만 한 조백은 순간의 감정으로 대세를 그르치는 인물이 아니었다. 오늘의 수모를 참아내는 것만이 먼 훗날 저들의 손에서 무림을 구해낼 유일한 방법임을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한데 지난 한 달여, 선주혁을 보는 동안 그의 생각이 바뀌었다. 이 젊은이는 그야말로 존재 자체가 기적이었다. 보리달마가 생 환한다 해도 이 젊은이의 나이에 이와 같은 무공을 닦을 수 없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패종회 때문에 무림 공적으로 지목되었다는 이 젊은이이 무공은 이미 자신의 건재했던 시절을 한참 넘어서 있었다. 그것은 젊은이 가 경이적인 속도로 본연의 무공을 회복할수록 확실해졌다. 그렇기에 한조백은 새로운 희망을 꿈꿨다. 곤륜의 파문제자라는 이 청년을 통해 패종회의 야욕을 막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었다. 이미 존재 자체가 기적인 이 청년이라면 저 대단한 패종회를 멈춰 세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하나의 무공을 완성하는 방도가 무엇입니까?" 선주혁의 질문이었다. 한조백은 무림맹의 대소사를 주관하느라 스스로 수련하 시간을 좀처럼 갖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 있는 방대한 무학은 어느 대종사에 못지 않을 터. 선주혁과 함께 하는 동안 한조백은 자신이 알고 있는 무리(武理) 를 어김없이 전수하는 중이었다. 그 가르침의 과정 중에서 한조백은 다시없는 기쁨을 느끼는 중 이었다. 상승무학을 전수하는데도 발전의 속도가 눈부셨기 때문이 다. 사실 오성으로만 따지자면 자신의 세 제자나 손녀인 한희윤에 비해 부족해 보이는 선주혁이었다. 하지만 상승의 무리는 그저 머리로 이해하는 것만으로 터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배우고 익혀야 납득할 수 있는 것이 더 많다. 이런 면에서 선주혁의 습득 속도가 남다른 것이다. 아무리 고 차원적인 상승의 무리를 설명해도 그는 몸으로 이해를 하는 것이 다. 자신도 모르게 그 경지에 해당하는 무공을 익히고 있었기 때문 이다. 이미 오른 경지에 대해 무학적인 이해를 도모하는 것이니 습 득의 속도가 빠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실 여태껏 그 정도의 내용도 모르고 지금과 같이 놀라운 경지에 올랐다는 것이 더 신기한 일이긴 했지만 한조백은 개의치 않았다. 대략의 사연은 들음으로서 선주혁이 체계적인 무학을 익힐 기회 를 갖지 못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한조백은 선주혁 스스로가 지닌 무공에 체계를 잡고 틀을 만들어 주고자 노력했다. 그와 같은 과정이 다음의 경지로 나아가 기 위해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한조백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 기 때문이다. "수많은 정의가 있을 것이네만..., 오랜 세월 간 내가 내린 결 론은 말해보겠네." "경청하겠습니다." 선주혁은 진지하기 이를 데 없는 자세로 한조백의 가르침에 귀 를 기울렸다. 그에게 있어서 한조백은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다. 무공을 익힘에 있어서 명사(名師)의 가르침은 천금과도 바꿀 수 없는 법이다. 십 년의 고행보다 명사의 한 마디에 더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 선주혁이 마교의 조사전에서 철용백의 한 마디에 새로운 경지에 올랐던 것도 그와 같은 이치였다. 하나의 벽을 깨거나 넘어 서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정통한 이치에 근거한 한 마디의 말 이 절실한 법이었다. "노부는 무공의 완성이 상상력에 있다고 보네." "상상력?" "달리 말하자면 자유로운 의지나 사고의 방식이라고나 할까?" 지금까지 한조백은 선주혁이 현재 가지고 있는 무공에 대해 체 계적인 이론을 확립해줬다. 그러기 위해 막연하기보다는 상세하고 알기 쉬운 설명이 위주였다. 한데 지금의 설명은 마치 뜬구름을 잡는 듯했다. 이는 선주혁이 한 질물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한 것임을 알아챘기 때문이었 다. "무릇 어떤 초식이건 한계를 갖기 마련이라는 이야기는 전에 나 누었던 걸로 아네." "네. 전에도 그와 같은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한조백은 선주혁의 대답에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염마 종극에게 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선주혁이 말한 것 을 떠올리는 것이다. 무림맹과 적대적인 마교의 대표적 인물 중 하나인 염마라는 존 재가 한조백에게 있어서 달가울 리는 없었다. 하지만 한조백은 그와 같은 굳이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 현재 에 있어서 마교는 패종회를 함께 상대할 아군임을 알고 있기 때문 이었다. "무공을 완성시키기 위한 노력의 대부분은 초식의 극의(極意)를 깨닫는 데에 있어왔네. 즉, 그 초식이 가지는 최대의 위력을 내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무공의 완성이랄 수 있을 걸세. 그리고 완성된 무공의 부족함을 찾아 보완하고, 다 나은 방법 을 찾아내는 것이 목표가 되어왔던 게 현실이랄 수 있을 걸세." 한조백의 말에 선주혁은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였다. 그런 선주혁을 잠시 응시하던 한조백이 앞서 설명한 바와는 다 소 거리가 있는 말을 꺼내들었다. "자네는 하나의 초식을 완성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하 다고 생각하나?" "꽤 오랜 시간이..." 선주혁의 답변에 한조백의 씁쓸히 웃었다. "그래. 자네에게는 꽤 오랜 시간 정도겠지. 그렇지 않다면 지금 의 나이에 그와 같은 성취를 이룰 수 없었을 테니, 하지만 보통 사 람들이 경우에는 대부분 평생이 걸리는 일이네. 형의 완성에만도 수십 년이요, 완벽한 진기의 운용과 응용까지 고려하면 하나의 초 식을 완성하는 데까지 평생이 걸려도 부족한 경우가 많네." 선주혁은 다시 한 분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흡성대법을 통해 타인의 진기 운용을 명확히 느낄 수 없었다면, 자신 또한 평생에 걸쳐 하나의 초식을 익히는 것조차 쉽지 않았을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이런 생각을 한 것은 사실 무공을 잃고 난 이후라네 어떻게 해서든 그놈들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실로 많은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고, 그 와중에 내린 결론일세. 흠흠, 잠시 말이 딴 데 로 샜구먼, 여하튼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하나의 무공을 완성시키 는 것에 몰두하다보면 그 무공이 거의 자신의 일부나 다름없게 될 정도지. 그 정도의 노력이 없다면 무공의 완성은 요원한 일이니 말 일세." 너무도 당연한 말이었으나 선주혁은 지루해하지 않고 끈기 있게 들었다. 그간 한조백은 최대한 짧고 이해하기 쉽게 무공에 대해 설명을 해왔다. 지금처럼 장황한 설명을 한 적이 없는 것이다. 이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임을 익히 짐작할 수 있기에 진지 한 태로로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하지만!그 처럼 오랜 세월동안 그 무공에 몰두한다는 것은 자신 도 모르는 사이에 무공 자체에 집착을 하게 된다는 말이고, 그 무공 이 내포한 한계를 스스로 용인해 버리는 걸세." 한조백의 어조가 점점 고조되어갔다. "하나의 초식에는 그 초식이 가질 수 있는 최대한의 위력이 결정 되어져 있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보완의 여지가 있는 한계가 정해진 것이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한계치까지 초식의 위력을 발휘하기 위해 평생을 바치고, 그 과정 중에서 자신도 모르게 한계 를 수십 년에 걸쳐 납득하게 된다는 말일세." "한계를 아는 게 잘못된 것입니까?" "아니, 그렇지 않네. 무공에 대한 이해를 하다보면 그 한계도 명 확히 보이기 마련이니까 말일세. 하지만 오랜 세월은 그 한계를 절 대치로 만들어 버리기 마련인 거야. 하나의 무공을 넘어서기 위한 시도는 쉬운 일이 아닐세. 미미한 진기의 변용이 가지는 위험이 얼 마나 큰지 알고 있지 않나?" "자칫 주화입마에 걸릴 수도 있는 일이지요." 선주혁은 좀 더 객관적인 입장에서 답변했다. 정작 본인은 주화 입마의 위험에서 휠씬 자유로운 상황이었다. 만년음양초의 복용으 로 인해 어지간한 충격은 쉽게 감당할 수 있는 체질이 되었기 때문 이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엄두도 못 낼 다양한 시도를 하며, 자신만의 무공을 창안할 수 있었던 것도 그와 같은 체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 이었다. "그렇네. 그 상황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무공을 조금 넘어서는 데에 만족하기 마련일세. 무공이 정하고, 수십 년 에 걸쳐 납득하고, 그 부분을 넘어서는 데에 그치게 된다는 거지." "그것만으로는 무공의 완성이라 말하기에 부족하다는 말씀이십 니까?" "적어도 노부의 생각으로는 그렇다네." "한계를 안다는 것이 외려 해약이 될 수도 있다는 말씀이시군 요." "한계를 규정짓고, 규정된 한계를 받아들이면 스스로 벽을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는 하는 걸세." "벽이라......" "그렇지. 자네 정도의 고수가 흔치 않지만 천하는 넓으니 그와 같은 고수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걸세." "적오도 패종회에는 여럿이 됩니다." 선주혁의 씁쓸한 미소에 한조백 역시 같은 표정으로 화답했다. 그리고는 말이 이었다. "그 정도의 고수들은 대부분 자연을 닮은 기도를 내뿜는다네.알 고 있었는가?" "어느 정도는......" 한조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걸세. 하지만 거기에도 문제가 있다네. 자연을 담아 그 기 운을 뿜지만 그것 역시 자신이 가진 한계 내에서일 뿐일세." "네?" "노부가 익힌 해천무극검법은 궁극적으로 성난 바다의 기운을 담고자 한다네. 실제로 절정에 달한 해천무극검법이 전개되면 거대 한 해일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느낌일세. 하지만 실제의 해일은 아 니지. 내 내공이 허락하는, 그리고 초식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해 일은 흉내 내고 있을 뿐이라네." "흉내요......?" "그렇지. 진정한 자연의 힘을 펼쳐보이지는 못하는 걸세. 자연의 힘을 흉내 내는 데에 불과한 거야." "......!" 선주혁은 가슴이 철렁하는 느낌이었다. 지난 날 철용백의 말을 듣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에 비해 삼라만상의 기운을 예민하게 느낄 수 있고, 그 기운 을 무공에 담을 수 있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 기운을 빌려오가나 응용한 것에 불과했 다. 단 한번도 자연 그 자체가 된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던 것이 다. "사실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자부심을 가질만한 일이지. 늘 입 을 열면 자연을 담았다고 말을 하고 말일세. 하지만 스스로의 한계 를 인정해버린 것이 과연 진정으로 완성된 무공이라 말할 수 있을 까 싶네. 가장 많이 흉내 낼 수 있다고 해서 완성을 논하기는 힘들 다는 게 내 생각일세." 잠시 고조된 음성을 가라앉힌 한조백이 말을 이었다. "무공은 애초부터 인간을 보다 자유롭게 해왔네. 맹수와 싸워 이 길 힘도 주고, 공간을 단축시키고, 보다 많은 것을 할 수 있게 해 주 었지. 그것이 작은 만족을 만들어내고 어느 순간 그 한계가 생겨버 렸다네. 이는 무공에 길들어진 것이며 사유의 한계가 생긴 것이기 도 하다고 보네. 자유로운 의지를 가지고 그 의지를 실행하는 것만 이 진정한 무공의 완성이라는 이야기일세." 한조백의 말에 선주혁은 크게 공감했다. 일 장의 높이를 뛰는 사 람이 이 장을 뛰어오르면 만족한다. 그리고 이 장 만의 높이를 한계 로 규정짓기 마련이다. 하지만 진정한 한계가 이 장 반이라는 법은 없다. 무공의 완성은 그런 것일수 있다. 선주현 자신도 한계를 지었다. 스스로 일순간 흡수하거나 분산 할 수 있는 양을 저도 모르게 구정지은 것이다. 불가능하다고 여기지 않았다면 적철항의 일 장에 그토록 심각한 부상을 입지 않았을지 모른다. 자신이 지닌 바보다 큰 힘을 감달할 수 없다고 규정짓는 순간 이미 넘지 못할 벽을 만들어버린 것이다. 스스로가 냇물이라면 폭우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가 바다라면 그 어떤 강이 범람해 넘칠 지라도 수 용할 수 있다. 선주혁은 저도 모르게 자신을 하나의 강으로 위축시 키고 있었던 것이다. 스스로 바다가 되면 될 일을 가지고 말이다. 한계를 넘어선 완벽한 자유. 진정 무공이 그와 같으 것이라면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 규정지 은 한계를 없애야만 했다. 게다가 자신은 타인에 비해 훨씬 유리한 상황이다. 이쪽 세상의 사람들이 사고할 수 있는 세계의 범주는 중원에 불 과하다. 멀리 내다봐야 서역의 일부만을 알 뿐이다. 많은 배움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선주혁은 이전의 세상에서 더 많은 것을 봐왔다. 추상이 아니라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지구를 인지하고, 태양계의 행성을 봤고, 우주를 엿봤다. 인정하고, 납득할 수 있는 사유의 범주 자체가 이쪽 세상의 사람 들에 비해 훨씬 넓은 것이다. 거기에 상상력까지 더해지면 분명 더 큰 성과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서이 높았다. 또한 나름대로 무공을 익혔다지만 수십 년을 고련해 오지 않았다. 이에 무공의 한계를 완벽하게 납득하기 전이라 말할 수 있었다. 한조백이 말한 것처럼 오랜 세월이 그 자신의 한계를 절로 규정짓 지는 않았던 것이다. 불타오르던 선주혁의 두 눈이 감겼다. 그 못습에 한조백이 미소를 지었다. 이 젊이이가 눈을 뜨는 순 간, 진일보한 그의 모습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순간의 깨 달음을 통해 그가 얼마나 많은 성취를 얻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성취가 낮아 당장 패종회를 상대할 수 없을지라도 언제가는 이 젊이가 패종회를 무너뜨릴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드는 것이다. 후대와 그 후대를 염두에 두고 있던 한조백에게는 선주혁이라는 존재가 더없이 소중할 수밖에 없었다. <2> "교주!" 종극의 간절한 음성이었다. "이제 무림은 저들의 손에 떨어진 것과 다름없습니다. 언제까지 세인들의 손가락질을 감내하시렵니다?" "확신이 서질 않는구려." 종극은 잠시 침묵했다. 지금까지 단목하진이 교의 대소사를 처리하는 과정을 지겨본 종 극이다. 그간 단 한 번의 흔들림도, 망설임도 없는 그였다. 한 번 결 정된 일을 추진함에 있어서 주저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교주는 분명히 망설이는 중이었다. 그의 재가가 없어 벌써 수개월째 그것의 완성이 늦어지고 있었다. 일정은 늦어 지고 무림은 패종회의 수중에 들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일월신교가 웅크리고 있는 만큼 큰 피해가 없었을 뿐이다. "저들이 장악한 일대가 완벽히 정비된다면 절대로 본교를 내버 려 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되면 형제들의 피해는 이루 말할 수가 없게 될 것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종 장로계서는 진정 그것들을 제어할 수 있다고 믿으시오?" 단목하진은 멸세강마대법을 통해 완성될 마물(魔物)에 대해 말하 는 중이었다. "만드는 과정 중에 이미 알게 된 사실이 아닙니까? 그것들은 성 화를 두려워합니다. 보전에도 기록되지 않았습니까? 오직 성화만 이 그것들을 다스릴 수 있다고 말입니다. 경전의 해석은 정확했습 니다 그러니 성화가 있는 한 안심할 수 있습니다." "자꾸만....." 단목하진이 말끝을 늘였다. "설화를 통한 제어가 완성 이전까지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드는 구려 지금의 그것들만으로도 끔찍할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소. 만 약 본인의 힘을 다 가지게 된다면 천하의 그 누가 그것들을 막을 수 있겠소?" "패종회를 없앨 때까지만 입니다. 그 후에 모두 없애버리면 될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 무엇으로도 상하지 않는 그것들이지만 성 화로는 불태울 수 있음을 알고 있으니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 단목하진은 침묵했다. 종극은 재촉하지 않았다. 이 침묵 이후에 그가 결론을 내릴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패종회가 세를 정비하느라 큰 피해를 입지 않았을 뿐, 천마맹과 일월신교를 내버려둘 저들이 아 니다. 교의 막대한 피해가 훤히 보이는 지금, 교주가 내릴 결론은 하나 였다. 남지학이 사제의 복수를 위해 불출주야 수련을 감행한다지만 패종회의 고수들은 한두 명으로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천음마후의 지원을 받는 패종회의 고수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지금의 교주에게 있어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다만 그 끔찍한 것들의 힘이 예상보다 거대하니 망설일 뿐이다. 그것들을 제어할 수 없다면 교주는 천고의 죄인이 될 수도 있다. 그 것들이 제멋대로 날뛴다면 막을 수 있는 방도는 아예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세의 종말이 올지도 모를 일이니 교주의 선택이 신중할 수밖 에 없음을 종극도 알고 있었다. "결국은 방도가 없구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무슨 선택의 여지가 있겠소?"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럼 즉시 시작하도록 하시지요." 종극의 말에 단목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의 완성을 위해서는 극한에 달한 건곤대나이심법이 필요했 다. 건곤대나이심법에서 비롯된 기운을 주입해야하는 것이다. 교주 의 망설임으로 인해 대법이 늦어진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그가 직 접 움직이지 않는 한 그것의 완성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단목하진이 먼저 집무실을 나섰다. 종극이 그 뒤를 쫓았다. '그 녀석을 생각해서라도 반드시 대법을 완성하여 복수를 해야 겠지....." 집무실을 나서면 선주혁을 떠올리는 종극이었다. <3> "도데체 언제까지 이렇게 기다리고 있을 겁니까?" 독안(獨眼)의 노인이 눈썹을 치켜 올리며 말했다. 하나밖에 없는 눈은 기이한 광채로 일렁이고 있었다. 그는 패종회 백존 중 서열 육 위에 해당하는 절대고수 행초랑(幸草量)이었다. "회주의 명이니 별수 없지 않소?" 얼굴에 흉터가 가득한 노인이었다. 종횡으로 가득한 흉터로 인 해 노인의 표정을 좀처럼 알아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흉물스러울 느낌의 노인이 하는 말을 무시하는 좌중의 인물은 아무도 없었다. 흉축한 노인이 바로 백존의 수장인 서문전 (西門全)이었기 때문이다. "삼백 년의 숙원이 달성되려는 시점에서 왜 시간을 끌고 계시는 겁니까?" 흑염(黑髥)을 길게 기른 노인이 묵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서열 삼 위에 해당하는 순우종명(淳于琮明)이었다. "글세...., 노부의 생각으로는 지금의 과장을 즐기시는 것은 아 닌가 싶소." 서문전은 마치 자신과 무관한 일을 말하는 듯한 태도였다. "과정을 즐겨요?" 좌중에서 가장 체중이 많이 나갈 듯 보이는 서열 사 위의 황풍(黃 楓)이 물었다. "그렇소. 오랜 시간을 기다려온 만큼 과정을 최대한 즐기시려는 것이겠지." "그게 데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그마치 삼백여 년의 세월입니 다. 절대십가(絶代十家)의 염원이 하늘을 찌르거늘 한가로이 과정을 즐긴다는 것입니까?" 절대십가. 과거 암천종이 몰락할 당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인 물 중 칠 인이 생존했다. 이들은 수라마제 사마횡천을 두려워하여 서역을 몸을 피했다. 권토중래(捲土重來)를 꿈꾸는 이들은 서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세 인물과 함께 중원을 도모하기로 합의한다. 그리하여 암천종의 일곱과 삼인의 홍교 라마가 함께하여 패종회 가 결성되었다. 이들의 후손들은 스스로를 절대십가라 칭하며 패종 회의 중심이 된다. 당대에 가장 뛰어난 인물이 회주가 되어 중원무 림 재패의 야심을 키워온 것이다. "허헛....! 달리 생각해볼 수도 있는 일이 아니겠소!" 서문전의 좌측에 앉아 있는 라마 차림의 노인이 웃음을 터뜨렸 다. 벽안(碧眼) 서열 이 위인 탑달존자(塔達尊者)였다. "달리 무엇을 생각한단 말씀이십니까?" 행초량이 다소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오랜 염원이었던 중원 무림의 패권이오. 너무나 손쉽게 뜻을 이 루어 버린다면 그간의 세월이 너무나 허망하지 않겠소? 무엇하러 그토록 오랜 세월을 숨죽여 기다려왔는지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일 이 될 수도 있을 것이오." "정의련이나 사파연합은 그렇다 쳐도 천마맹, 아니 마교의 경우 는 그리 쉽게 볼 상대가 아니지 않습니가? 우리가 천음의 힘을 얻 지 않았다면 중원 정복을 장담할 수 없었을 정도니까요." "그러니까 말하는 것이오. 우리는 결국 천음의 힘을 가졌고, 그 사실 하나만으로 천하는 이미 우리 손에 들어온 것과 다름없소. 그 러니 달리 서둘러야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오." "다소 궤변으로 들리는군요." 황풍이었다. 탑달존자가 자신에게 시선을 돌리자 그가 말을 이 었다. "오랜 세월을 기다린 만큼 한시라도 빨리 중원을 손에 넣고 지배 하는 시간을 향유하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니겠습니다?" "허허헛,삶의 이치라는 것이 어찌 그렇게 쉽게만 생각할 일이겠 소? 회주의 심정에서 생각을 한 번 해 보시오." "회주의 심정?" "사실상 우리의 오랜 숙원이 풀리게 된 것은 회주의 지대한 공이 아니겠소? 그가 천음을 완성하지 않았다면 아무리 우리가 백존을 육 성했다고 해도 중원의 도모는 큰 위험을 내포하는 일이었소." "그 공으로 인해 단목 가에서 회주의 직을 가져간 것이지 않습니까?" 다소 불만스러운 기색의 황풍이었다. "그거야 당연한 일이 아니겠소. 중원 무림 정복의 절대적인 공을 세운 것이니까요. 여하튼 회주의 입장에서는 손쉽게 중원 무림을 손에 넣은 뒤를 고려하고 있음이 틀림없소." "중원 정복 이후를 고려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순우종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릇 오랜 열망이 한꺼번에 해소된 이후에는 허탈한 심정이 되 기 마련이오. 그 과정마저 손쉽다면 대단한 상실감에 접어들곤 하 오. 더 이상 겨룰 자도 없고, 아무런 위협도 없으니 남은 생에 무엇 을 바란다 말이오?" "데체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깟 감상에 젖어 회의 숙원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게 말이 된다는 것입니까?" 황풍이 기어코 언성을 높였다. 회주의 심정을 '그깟 감상'이라 표현하는 것이 도리가 지나쳤다. 하지만 좌중의 누구도 그를 탓하지 않았다. 탑달존자와 서열 오 위의 달명랑(達明郞)만이 살짝 미간을 찌푸릴 뿐이었다. "옳고 그름을 떠나 탑달의 짐작이 맞는 것 같구려." 입을 다물고 있던 서문전이 달아오른 분위기를 살짝 가라앉혔다. "그 백발마신인가 하는 애송이가 등장했을 때.... 회주계서 상 당히 흥미로워하시는 모습을 보였소." "흥미로워요?놈으로 인해 본교의 행사가 얼마나 큰 타격을 받 았는데 흥미롭다니요?" 황풍의 처진 볼 살이 흔들거렸다. 그가 이제는 본격적으로 노기 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 말씀에는 실로 무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철갑무린단이 본연 의 기능을 상실하고, 백존의 손실도 있었소. 더구나 패종회에 대한 민심까지 흔들었으니 회주께서 그와 같은 흥미를 느끼신다는 것은....." 순우종명이 다소 완곡한 표현으로 황풍의 발언을 지지하고 나섰 다. 흉터로 가득한 서문전의 표정의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표정이 라고 해봐야 얼굴이 살짝 일그러지는 것에 불과하지만 좌중의 인물 들은 그가 노기를 표출하는 것은 아님을 익히 알고 있었다. 오랜 세 월 그와 함께 해왔기 때문이다. "아마도 중원 무림의 저력 같은 것을 느끼신 것이겠지이요. 최소한 이 정도의 저항은 있어야 무림을 정복하는 재미가 있다고 생각한 것일 수도 있을 것이고 말이오." 타앙. 황풍의 투툼한 손이 탁자를 거칠게 내리쳤다. 요란한 소리와는 달리 찻잔에는 미동도 없었고, 탁자 역시 무사했다. 내력의 조절에 의한 기현상이었다. "언제 회의 중원 정복이 회주의 유홍거리가 됬단 말입니까? 우 리 조상님들의 염원, 그리고 우리의 일생이 회주의 흥미보다 못하 다는 말씀이십니까?" "말이 지나치시군요." 백족 서열 칠 위 나충적(羅忠積)이었다. 그의 지적에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황풍의 늘어진 볼 살이 가늘게 떨렸다. 하지만 더 이상의 발언은 삼겼다. 지금의 상황에서 한 마디라도 실수를 하게 된다면 자칫 회주에 대한 반역이 될 수도 있음을 잘 알 고 있기 때문이다. "자, 자. 흥분할 일이 아니오." 서문전이 냉랭한 침묵을 깨고 나섰다. "어차피 각 지역을 완벽히 장악하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을 것이오. 사파연합과 천마맹이 침묵하고 있다지만 그 역시 일시간일 뿐. 중원의 패주임을 자처하던 저들이 언제까지 저런 수모를 감내 하겠소? 회의 역사는 조마간 완성이 될 터이니 잠시 더 기다려봅시 다. 더더군다나 회주의 명이 내려진 상황이니 감히 거역할 수 없는 우리가 아니겠고." 서문전이 상황를 정리했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 말은 실로 의미심장했다. 마치 중인들의 불만에 대한 해답을 주는 듯 말을 이끌다가 결국 은 모든 게 회주의 마음대로 진행되는 것이니 입을 다물라는 식으 로 정리를 한 것이다. <4> 절대십가는 아홉 가문을 이끄는 자들이 방을 벗어난 후에도 서 문선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잠시 후 방문이 열리며 한 중년의 사내가 들어섰다. 짧게 기른 수염은 잘 다듬어져 있었고 얇고 붉은 입술이 눈에 띄 는 중년인이었다. "모두 들었느냐?" "네. 아버님." 중년인은 서문전의 아들이면 백존 중 서열 이십육 위에 해당하 는 서문탁(西門卓)이었다. "어떤 것 같더냐?" "몇몇을 제외하고는 예상했던 그대로입니다." "그렇더군." 부자 사이에 잠시의 침묵이 흘렸다. "도욱은?" 서문전이 물었다. "일단은 불러들였습니다. 남들 시선도 있고 해서...." "한긴. 한조백을 놓친 것은 간과할 수 없는 실수긴 하지. 회주는 도옥의 처분에 대해 다른 말이 없더냐?" "특별한 언급은 없었습니다. 크게 신경 쓰지 않은 것도 같 고......." "회주에게 있어서 한조백의 탈출은 별다른 문제가 아닐 테니까. 외려 그의 탈출이 뭔가를 만들어내길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를 일 이지." "스스로 무덤을 파는군요." 서문탁이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입 조심 해라." 서문탁의 음성이 무거워졌다. 부친의 말에 서문탁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도옥이 돌아오면 당분간 자중하고 있게 해라. 다른 가주들의 시 선도 있고 하니 말이야." "알겠습니다. 한데....." "......?" "녀석이 소환에 꽤나 불만이 많은 듯합니다. 그간의 공이 있는데 폐인이 된 늙인이 하나를 놓쳤다고 해서 무림맹에서 물러나야할 정 도냐고 말입니다." "후훗, 다소 가혹하기는 한 처사지. 사실 도욱의 공로가 적은 것 은 아니니까 말이야. 하지만 지금은 다른 가문의 시선을 신경 쓸 때 야." "다른 가주들도 도옥의 공로는 충분히 인정하고 있는 것 아닙니 까? 사실 상 무림맹을 거져랄 수 있을 정도로 손쉽게 장악한 것 은....." 서문탁의 말은 서문전의 손짓에 의해 가로 막혔다. "지금은 무림맹에서 호사를 누릴 때가 아니다. 이상할 정도로 웅 크리고 있다지만 마교의 교주인 단목하진이나 찬사지황 은적미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거든." "지나치게 그들을 높이 평가하고 계신 것은 아닙니까? 단일 세 력으로는 무림 최강임을 자랑하던 마교조차 충돌을 피하기에 급급 한 상황이거늘...." "그게 이상한 거야. 염마는 세인들이 듣는 앞에서 우이와 맞설 것을 공연했다. 한데 천하의 비난을 감내하며 저토록 피해 다니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하기 힘들지." "금마의 보고에 의하면 그 교주라는 자가 잔뜩 겁을 집어 먹고 있다지 않습니까? 밤마다 한숨을 쉬고 있는 것만이 다라고 하더군 요. 외려 백발마신의 사형인 옥용검마가 이끄는 천애백의단이 더 문제라고 들었습니다." 서문전의 두 눈이 흉터 사이에서 빛났다. 부친의 강렬한 시선에 서문탁의 표정이 굳어졌다. "네가 회주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 이유가 비단 천음 때문만이라 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네?" "회주와 너와의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이런 부분이다. 회주는 적 을 경시하는 법이 없고, 보이는 대로만 보는 법이 없지. 그것을 네 가 깨닫게 되기 전까지는 절대로 회주를 넘어설 수 없을 게야." "......" 서문탁이 미간에 골 깊은 주름이 잡혔다. 선우단천과 비교되며 살아온 세월이 벌써 수십 년이다. 서문탁에게 있어서는 어린 시절 부터 계속되어온 잊고 싶은 기억이었다. 경쟁에서 회주의 자리를 놓친 것은 비단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서문전 역시 전대의 회주 자리를 선우 가(家)에 빼앗겼다. 한데도 늘 자신만 못난 인물이 되어 수십 년에 걸쳐 부친에 수 모를 겪고 있는 것이다. 서문탁에게 이와 같은 상황이 좋을 리 없었 다. "마교가 필요 이상으로 웅크리는 모습을 보이고, 금마, 환마,귀 마는 마치 저들의 핑계를 대는 듯한 보고만을 올리고 있어.그렇다 면 진즉 의심을 해 봤어야지." "그 세 놈이 배신을 했단 말입니까?" 서문탁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부친의 말에 의해 치밀어 오른 노 기를 당장이라도 그들 세 명에게 터뜨릴 듯한 기세였다. "쯧쯧쯧.....!" 서문전이 흉터 가득한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그렇게 말해도 모르겠는냐? 적을 가벼이 보지 말라는 말뜻을 이해치 못하겠는냔 말이다." 서문전의 호통에 서문탁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노화를 터뜨리는 부친을 이해키 힘들기 때문이었다. "쯧쯧, 도옥이라 해도 지금의 말은 알아들었을 텐데. 비록 사분 되었다 해도 무림의 패주로 군림하던 그들이다. 간세에 대해 전혀 짐작치 못하고 있다면 그럴 자격이 있겠느냐?" 서문전은 한심하다는 어투로 아들을 나무랐다. "아! 그럼 저들이 알아챘단 말입니까?" 그제야 납득이 간다는 듯 탄성을 터뜨리는 서문탁이었다. 서문전은 좌우로 고개을 흔들었다. "그거야 아직 단정 지을 문제는 아니지. 하지만 가능성은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들이라면 역정보를 흘릴 수도 있으 니 말이야." 서문전의 말에 서문탁은 다소 불만스러운 기색을 드러냈다. "제 놈들이 그딴 수작을 부린다고 해서 달라질 게 뭐가 있습니 까?어차피 회주가 지체를 하고 있을 뿐, 역정보가 아니라 역으로 이쪽에 간세를 보낸다 해도 놈들에게는 죽음만이 남아있을 분 아닙 니까?" "에이! 적을 경시여기지 말라하지 않았더냐?" "적을 경시 여기는 것이 아니라 패종회의 힘, 아니 저희의 힘을 믿는 것입니다. 그 누구보다 아버님께서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 까? 당금 전차에서 저희를 막을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말입니 다. 언제부터 아버님께서 단천처럼, 아니 회주처럼 그렇게 염려에 염려만을 거듭하고 계신 겁니까?" 이미 장성한 아들을 둔 서문탁이었다. 부친의 노골적인 무시를 견디기 힘들었던 듯 반론을 제기하는 언성은 거칠었다. 오늘과 같 은 일을 겪는 게 하루 이틀이 아니었던 것이다. "쯪쯪.....,어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게냐. 마교는 애초부 터 희생을 염두에 두지 않고는 처리할 수 없었다. 도옥이 무림맹에 있어 전면에 서 있을 때, 그 희생 중의 하나가 되지 말라는 법이 있 더냐?" "아......!" 서문탁은 그제야 부친의 말을 알아들었다. 확실히 마쿄에 비해 패종회가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는 있었다. 하지만 마교를 처리함에 있어 일정한 희생은 필수였고, 그 희생 의 대상이 자신의 아들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에 차라리 회로 돌아와 조부와 부친의 보호 하에 있는 것이 외려 안전하다는 뜻이 었다. "천음으로 인해 회가 무림을 지배할 수 있어도 천음 자체가 무 림을 지배할 수는 없지. 그런 상황에서 도옥의 존재란 너머지 아홉 가문에 그다지 고울 턱이 없는 상황이야. 아비란 놈이 그렇듯 눈앞 에 보이는 대로만 생각하니 내가 없었다면 우리 도옥이 어떤 위험 에 빠져들었을지 ....쯧쯧." 서문전의 노골적인 헐난이었지만 사문탁은 인상조차 찌푸리지 못했다. 지금 부친이 지적하는 바를 미처 생각지 못하고 있었던 것 이다. 그것으로 인해 아들이 위험한 상황에 빠질 수도 있었다는 것 역시 사실이었다. 서문탁으로서는 그와 같은 실수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이에 고개를 숙여야만 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도옥을 소중히 여겨야할 때야." 서문전이 두 눈을 가늘게 뜨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작은 목 소리와는 달리 안광만큼은 요란할 정도로 번득였다. 서문전의 야심 은 그의 눈빛을 통해 외쳐지고 있었다. Chap5 저력 <1> 거칠게 수염을 기른 사내가 암동을 나선다. 너덜너덜한 의복은 상거지에 다름없었다. "야수처럼 두 눈을 번득이면 나설 줄 알았건만 너무 차분해 뵈는 군." 거도를 어깨에 걸쳐든 사내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동안 남지 학의 출관만을 목을 놓고 기다려온 주백광이었다. 한데 막상 그가 암동을 나서는 장면이 약간은 싱겁게 느껴지는 중이었다. 마치 오랜만에 햇볕을 쬐러 잠시 바깥으로 나선 것 같은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그의 안광이 아니라 그가 동굴을 나선다는 거죠." 은설연이 은은한 미소로 답했다. "그가 원하는 경지에 오른 건가요?" 단목지민이 은설연에게 물었다. "그가 원하는 경지가 어떤 건지는 잘 모르죠. 하지만 그가 동굴 을 나선 이유가 있지 않겠어요." 은설연의 태도는 시종일관 여유가 있었다. "그를 상당히 신뢰하는군요." 단목지민이 은설연을 힐끗 보며 말했다. 은서령은 단목지민의 묘한 시선을 담담히 받으면 짧게 대답했 다. "선 소협의 사형이니까요." 그녀의 말에 주백광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혁의 사형인 걸로 충분하지." 세 사람이 말을 주고받는 동안 남지학이 그들의 앞에 도착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꽤 오래 기다리긴 했지." 주백광이 혼잣말인지 들으라는 말인지 모를 정도의 어투로 중얼 거렸다. 은설연이 그런 주백광을 가볍게 흘겨본 후 남지학에게 말했다. "고생 많으셨어요." "고생일게 있겠습니까? 두 번이나 모진 고통을 겪은 사제에 비 하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남지학의 음성은 차분하다 못해 담담하기까지 했다. 사제의 복 수를 가슴에 품었다고 믿기 힘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남지학을 제외한 세 사람은 사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피부가 터지고, 근육이 상하고, 힘줄이 끊기는 고 통을 이겨가며 사제의 복수를 위해 수련을 해온 그였기 때문이다. "이제 놈들에게 복수할 일만 남은 건가요?" 단목지민이 남지학에게 물었다. 동굴을 나선 것에는 이유가 있 다지만 그녀로서는 남지학의 성취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키 어려웠 기 때문이다. "사제의 유언은 지켰습니다. 남은 건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지 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하늘이 누구의 편에 설 것인가만 남은거군." 주백광의 두 눈이 활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우선은 옥소선자부터 구해내야겠습니다." 남지학의 말에 주백광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말씀! 그녀가 보여준 의기야말로 장부의 그것을 능가하 는 거니까 말이야." 주백광이 주먹을 말아 쥐며 흥분하는 모습을 확인한 은설연이 남지학을 곁눈질로 살폈다. 그녀 역시 남지학의 성취가 얼마 만큼 인지 궁금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무극삼검식이라는 무공을 넘어서야한다는 선주혁의 유언은 그 녀도 들었다. 하지만 진정한 무극삼검식의 마지막 초식을 본 적이 없는 그녀 로서는 무극삼검식을 넘어선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하나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선주혁은 패종회의 회주와 남 지학이 일대일의 승부를 가릴 수만 있다면 필승할 것이라 했다. 그것으로 족했다. 이제 남은 일은 남지학이 패종회의 회주와 단독으로 승부를 가 릴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것뿐이었다. 쉽지는 않겠지만, 거기에 무림의 미래가 달려 있음을 확신하는 그녀였다. "현재 옥소선자는 무림맹으로 이송된 후, 감금되어 있다고 하더 군요." 은설연은 다소의 기대를 품고 말했다. <2> "마교로 인해 무림의 상황이 절망적이지만은 않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종 장노님께서 방법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약간의 시간만 주어진다면 패종회를 막을 방도가 있다고....." "흠....., 확실힌 그들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방도를 찾아낼 수도 있겠지." 한조백이 나직이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주혁은 그런 한조백을 보며 감탄했다. 그가 읽어온 무협 소설 등에 등장하는 정사 양도의 인물들은 서로에 대한 적대감이 지나칠 만큼 크다. 오랜 세월 동안 키워온 감정이니 당연할 수도 있다. 특히 상대로 인해 측근의 누군가가 목숨을 잃었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상당수의 무협 소설은 평화로운 시기에서 출발한다. 적 어도 주인공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그렇다. 서로의 충돌이 없는 상 황에서 무림을 지배하려는 야심만으로 인한 적대감치고는 지나칠 때가 있다. 몇몇 다혈질의 인물들이야 그럴 수도 있다지만 대개의 경우가 그런 것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었다. 별다른 이유없이 정사 로 양분되었다는 사실만으로 불공대천의 원수로 지내는 것이다. 이 는 그간 선주혁이 읽어왔던 소설 속에서의 일반적이 현상이었다. 한데 직접 무림이라는 곳에서 경험해온 바에 의하면 상호의 적 대감이 그렇게까지 대단한 것 같이 않았다. 물론 선주혁이 만날 수 있는 인물들이 지극히 제한적이긴 했지 만 적어도 무림을 이끄는 인물들의 경우는 무조건적인 적대감을 가 지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싫어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상대에 대해 인정할 것은 분명히 인정하는 것이 그들의 특징이었다. 한조백이 경우도 그랬다. 그간의 어떤 무림맹주보다 확고히 맹 주로서의 권위를 세운 그였다. 적풍조를 결성, 수많은 마두를 척살 해 만든 권위였다. 사마외도에 대한 그으 감정이 어떠한지 익히 짐 작할 수 있는 대목어거늘, 작금의 상황에서 선주혁의 말을 너무도 쉽게 인정하는 것이다. 사실 선주혁은 이와 같은 말을 하며 꽤나 조심스러웠다. 한조백 이 펄펄 뛸 것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무림맹이 이토록 손쉽게 패종 회의 손에 넘어간 상황에 마교라 해서 다를 것이 없다며 노기를 표 출할 것을 예상했다. 종극의 말을 괜한 허연으로 받아들이며 펌하 하려는 것을 선주혁은 당연시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한조백은 잠시의 신음성 이후, 곧장 마교 가 패종회와 맞설 대안을 세울 가능성을 인정했다. 삼백여 년을 준비해온 패종회의 절대적인 고수들을 불과 몇 달 만에 상대할 수 있는 방안을 세운다는 것은 쉽사리 납득이 갈 일이 아니었다. 한데도 저토록 쉽게 수긍한다는 것은 평소 한조백이 냉철하게 마교의 힘을 평가하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선주혁이 감탄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하지만....그것 역시 맹주님께는 절망적인 상황이겠죠?" 선주혁이 조심스레 물었다. "허헛, 마교가 패종회를 물리치고 무림을 장악하게 되는 상황을 말하는 건가?" 한조백이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래도 정도의 시선에서 본다면 마도천하가 되는 셈이니까 요." "허허헛, 글세. 진전 마교가 패종회의 손에서 무림을 구해낸다면 그들은 무림에 대해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겠지." "무림이 패종회에 장악되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여기시는 겁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한조백은 패종회로 인해 오랜 세월을 수련해 온 무공을 잃었다. 또한 평생을 바친 무림맹까지도 잃었다. 그에 대 한 원한은 하늘을 찌르고도 남을 것이다. 적의 적은 동지가 되는 것이 이치. 따라서 한조백의 입장에서는 마교라 하더라도 패종회를 막아낸 다면 기뻐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아니, 단순히 그런 것만은 아닐세. 무림이란 말이야....." 한조백은 말을 길게 늘어뜨렸다. "살아있는 생명체와 같네. 스스로를 조절할 줄 알지. 누군가의 지배가 있을지라도 그것이 조화롭지 못하다면 반드시 그 지배에서 벗어나기 마련이야." "하나의 세력이 결코 무림을 지배할 수는 없다는 뜻인가요." "그렇게 단정 짓는 것은 아닐세. 그저 조화를 유지하고자 한다는 거지. 패종회건 마교건 서로가 맞설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면 서로 가 서로를 누르는 과정 속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될 걸세. 그리 된다면 사파연합이든, 정의련이든 가만히 있지 않겠지." "아!그렇군요. 하지만 패종회에서 정의련과 사파연합을 먼저 정 리하려 들면 상황이 덜라지지 않을까요?" 선주혁의 질문에 한조백이 미소를 지었다. 여유로운 미소였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그래서 무림이 자네를 선택한 게 아닐까?" "네?" "무림사에 자네 나이에 자네 정도의 성취를 이룬 인물은 아무도 없었네. 패종회라는 엄청난 세력이 등장하고, 마교가 극단적인 수 단을 강구한 이때에 말일세. 자네처럼 존재 자체가 불가능한 절대 의 고수가 등장하는 것..... 이거야 말로 무림의 선택이 아닌가 싶 다는 말일세." "......!" 자신을 추켜세우는 말에 불과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선주혁은 한조백의 말을 가볍게 흘려듣지 못했다. 그것 은 한조백이 한 때 무림맹주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가 한조백 의 말에 귀를 기울인 이유는 선우유미의 말을 명확히 기억하고 있 기 때문이었다. '천명....! 진정 내게 그와 같은 천명이 주어진 것이란 말인가?" 다른 세상에서 이곳으로 넘어왔다. 소설이라 생각했던 상황 속 에서 사형에게 주어진 기연의 부스러기라도 주워 먹으며 저쪽 세상 에서 이루지 못한, 잘 먹고 잘 사는 꿈을 이루고자 했다. 그 과정 속에서 자신은 예기치 못한 고수가 되었다. 사형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기에 즐겼지만 스스로가 무림의 운명을 짊 어질 만한 인물이라 생각하긴 힘들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말하고 있었다. 선우유미가 그랬고, 지금 한조 백이 또 그랬다. 무림을 위기에서 구해낼 천명이 자신에게 있음을 말하는 것이 다. 하잘 것 없다 여겼던 자신의 인생에 중대한 의미가 부여 되었다. 지금껏 패종회와 맞서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라도 피하지 않으리 라는 각오로 지내왔다. 선우유미가 말한 천명의 의미는 그렇게 쉽게 납득 가능했다. 한데 한조백은 그보다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중이었다. 자신이 무림에 의해 선택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조화로운 무림을 위 해 무림이 선택해 자신을 만들었다는 주장이었다. "한 사람의 힘으로 무림이 조화롭게 되는 것이 가능하다고 여기 십니까?" "자네라면 가능하지." 한조백은 단호하고, 짧게 대답했다. "저를 과대평가하시는군요." "무림의 선택을 믿는 것뿐일세. 자네는 최선을 다해 정진해, 원 하고자 하는 경지에 이르면 될 일이야." 한조백의 입가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걸렸다. 그의 미소가 선주혁도 마주 웃었다. 한조백이 말이 옳았다. 지금 은 패종회와 당당히 맞설 힘들 키우는 것이 우선이었다. 희미했던 실마리는 확신이 되어 자리 잡았고, 스스로 결정지은 한계를 이미 벗어나는 중이었다. 지금의 선주혁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리고.....무림을 지배하던 세력들은 그렇게 녹록하지만은 않 다네." 한조백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무림맹이 손쉽게 저들에게 장악 되었다지만, 구파일방의 수뇌 가 당했다지만.....수많은 겁난을 겪고도 아직까지 정도무림이 견 재해온 데는 이유가 있는 걸세. 정의련 역시 마찬가지지. 한 번도 구파일방의 앞에 나선 적이 없는 그들일세. 그렇기에 정의련의 저 력은 더욱 무시할 수 없는 법이지. 수백 년간을 축적해온 힘을 고스 란히 간직하고 있다는 말이니까." "그렇군요." 패종회의 엄청난 힘을 알고 있기에 선주혁은 선뜻 한조백의 말 을 납득하기 힘들었다. 표면적으러 드러난 패종회의 힘만으로도 무 림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읽었던 소설에서도 무림의 각 세력은 패종회에게 속 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다. 그래서 겉으로만 한조백의 말에 동조하는 척을 한 것이다. 평생 을 정도 무림에서 몸 바쳐온 한조백에게 있어서 무림맹이나 정의련이 패종회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반박을 할 수는 없었 기 때문이다. "이제는 정의련도 스스로의 힘들 드러낼 때가 왔다고 봐야할 게 야. 적오도 수백 년간 쌓아온 명성에 걸맞는 인물을 배출할 때가 온 것은 분명하지." 정의련이 패종회와 맞설 정도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지만, 한조백이 지금 말한 것은 납득할 수 있는 선주혁이었다. 정의련에는 남궁일이 있었다. 사형과 비견되어도 손색이 없을 천고의 기재. 과연 그가 있는 한, 정의련에서 대단한 영웅이 배출될 것만은 분 명했다. "사파연합 역시도 그렇게 쉽게만 볼 수 없지. 사파연합의 개개인 이야 보잘 것 없지만 단 한 명만큼은 다르네." "백사회의 은 회주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한조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래알 같은 사파의 고수들을 힘으로 제압한 그일세. 천사지황 은적비! 그라면 적어도 이 시대가 배출한 최고의 인물임을 자부할 자격이 있을 걸세." "흐음...." 한조백의 말에 선주혁은 나직한 신음성을 흘렸다. 그리고 보니 자신이 읽은 소설에서 은적비의 비중은 매우 작았 다. 그의 손녀인 은설연은 자주 등장했지만 정작 백사회를 이끄는 은적비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사파연합이 패종회에 궁지에 몰리게 되고 무림이 패종회의 손아귀에 넘어가는 그 순간까 지 은적지는 표면에 나서지 않았다. "생각보다 상황이 더 복잡할 수도 있다는 말인가?" 다행이 이계로 넘어가계 된 이후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해 의 문을 품었던 적이 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선주혁의 머릿속이 또다시 복잡해지기 시 작했다. 자신이 읽지 못했던 소설의 나머지 부분에 대한 의문 때문이었 다. '우선 마 노인을 한 번 뵈어야겠군.' 선주혁은 마중영을 떠오렸다. 비록 이쪽 세상에 공명하여 글을 썼을 뿐이라도 마중영이라면 원래의 내용에 대해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그 내용에 대해 알게 된다면 복잡해질 수도 있는 이후의 상황에 대처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는 선주혁이었다. <3> "드디어...." 종극의 음성이 떨리고 있었다. 구대마존을 대표하는 그가 이처 럼 격앙된 모습을 보이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이었다. "지독하군요." 온몸의 털이 곤두설 정도의 마기에 악구윤도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놈들의 마기만으로도 숨이 막히거나 미쳐버 리겠군요." 역천의 마물을 확인한 수조문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크흐흐...., 이것으로 패종회인지 패종자인지 하는 놈들은 끝 장이 나겠군. 나아가 이제 무림도 우리 일월신교의 지배하에 들어 오게 되는 건가?" 악구윤의 득의한 웃음에 종극이 무겁게 말했다. "그렇게는 아니 될 거요." ".....?" "교주께서는 이 마물들에 대한 우려가 크시오." "우려라니요?대법에 무슨 이상이라도 있다는 말씀이시오?" 악구윤의 붉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사실 멸세강마대법의 시행에 누구보다 큰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이 그였다. 이번 기회에 아예 일월 신교가 무림을 지배하는 것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한데 본격적인 활약이 시작되기도 전에 뭔가 문제가 있는 듯하 니 실망이 앞서는 것이다. "대법에 이상이 있는 것 아니오." 종극의 한마디에 악구윤의 표정이 거짓말처럼 밝아졌다. 그야말로 일월신교의 장로라는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극단적인 단순함이었다. "다만 교주께서는 우리가 제대로 이 마물들을 제어할 수 있을 지 를 염려하고 계시오." "성화를 통한 저들의 제어에 문제가 있는 것이군요."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수조문이 미간을 찌푸렸다. 구대 마존인 자신조차 버거울 정도의 마기를 뿜어내는 마물들이었다. 저 들을 제대로 제어할 수 없을 때는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 벌어 질 것임을 그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어직 딱히 문제가 있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을 것이오. 보전에 기록된 대로 저들이 성화를 무서워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니까. 또한 대법을 시행하는 과정 중, 그 무엇으로도 상할 수 없는 저것들 이지만 성화에만큼은 불탄다는 사실 또한 밝혀졌소." "그럼 걱정할 일이 없는 것 아니오?" 악구윤이 못마땅한 기색으로 물었다. 이제야말로 일월신교가 무 림을 제패할 기회가 왔거늘 시작 전부터 벌벌 떠는 모습이 그로서 는 못마땅했던 것이다. "문제는...." 종극의 힘을 주어 말이 시작했다. "대법이 완성되어 갈수록 저것들이 성화를 두려워하는 정도가 줄었다는 것이오. 교주가 우려한 바도 거기에 있다고 생각이오." "문제가 될 소지가 있기는 하겠군요." 수조문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여전히 성화가 놈들을 통제하고 있지 않소? 그거면 충 분한 일이 아니오?" 악구윤이 연이은 질문에 종극이 대답했다. "녀셕들의 힘은 시간이 지날수록 강성해지고 있소. 심지어는 대 법이 끝난 지금에도 계속 힘이 커지고 있다오. 하니 어느 순간 놈들 이 성화를 거역하게 될지 모를 일이오." "흠......" 수조문이 신음성을 흘렸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확실히 패종회 문제만 해결되면 녀석들을 없애는 게 좋겠군요. 인세에 다시없을 재앙을 우리 손으로 불러일으킬 수 없으니 말이 오." "에잉! 뭐가 그리 염려들이 많으시오. 계속해서 녀석들의 상태를 관찰하다가 문제가 될 성 싶으면 그때 가서 처리를 하면 될 일이 아 니오?" 악구윤이 언성이 높아졌다. "아니, 대체 언제부터 일월신교의 장로들께서 매사에 이리도 소 심한 모습을 보이신단 말이오? 그렇게 담이 작으니 본교가 그처럼 강대한 힘들 가지고도 정도 놈들에게 무시를 당하는 것이 아니겠 소?" 악구윤의 열변에 종극과 수조문은 반박하지 않았다. 사실 멸세 강마대법으로 완성된 이 마둘들의 힘이라면 빠르게 무림을 제패하 는 것도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었다. 힘겨운 결정 끝에 만들어진 마물들이니만큼 이들을 활용해 무림 을 지배하고자 하는 욕구가 없을 수는 없었다. 일월신교의 형제들이 더 이상 핍박받지 않는 세상을 만들 수 있 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뜻 악구윤의 말에 동의할 수도 없었다. 지금의 상태로 도 끔찍한 이것들의 힘이 더욱 강해질 그때가 너무도 선명하게 그 려지기 때문이었다. <4> "젠장! 무슨 놈의 팔자가 이 모양인지.... 이놈이고,저놈이 고........쯪쯪!" 맹주의 집무실인 창룡전을 나서며 항동만은 투덜대지 않을 수 없었다. 사갈(蛇蝎)이 무색한 성품을 지녔던 서문도옥이 얼마 전 무림맹 을 떠났다. 항동만으로서는 뛸 듯이 기뻣다. 직위와 재화에 욕심을 내어 그 에게 충성을 바쳤던 입장이지만 변덕스럽고, 색탐(色貪)이 지독한 서문도옥의 수발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난잡하기 이를 데 없는 서문도옥의 사생활을 감추는 것은 더욱 그랬다. 어렵사리 구해온 미색(美色)의 여인들의 입을 다물게 해야 만 했기 때문이다. 여인의 입을 믿을 수 없는 터. 서문도옥의 싫증을 낸 여인들은 모두 죽여야만 했다. 오직 죽은 자만이 비밀을 간직할 수 있다다 서문도옥의 지론 때문이었다. 이러네 저러네 해도 항동문 역시 정도의 무인. 명령 때문이라지만 무공조차 모르는 젊은 처자를 제 손으로 죽 여야 하는 일이 달가울 턱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서문도옥을 대신할 자가 온다 했을 때 항동만은 뛸 뜻 이 기뻤다. 더 이상 자신의 손에 애꿎은 피를 묻히지 않아도 될 것 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맹주의 직을 수행하기 위해 파견되어 나온 자는 서역인이었다. 패종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고위층의 양자라고 한다. 서역인에게 명령을 받는 것이 기분 나쁘긴 했지만 그 정도에 함부 로 불만을 터뜨릴 항동만이 아니었다. 함부로 입을 놀렸다간 어떻게 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의 경우는 좀 심했다. 새로 온 서역의 애송이가 욕심 을 내는 것은 바로 남색(男色)이었기 때문이다. 처음 부임해온 그날 이후 하루가 멀다 하고 제대로 된 미남자를 구해오라고 성화였다. 항동만이 지금껏 수십에 달하는 남자들을 구해다 바쳤지만 서역 애송이는 한 번도 만족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에 항동만은 만사를 젖히고 눈이 번쩍 뜨일 미남자를 찾기 위 해 동분서주해야만 했다. 이대로 며칠이 더 지나면 애송이의 눈 밖 에 날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쳇! 오늘 갖다 바친 그놈마저 취향이 아니라면 더 이상은 나도 포기다." 빠르게 창룡젼 주변을 벗아나면 항동만이 중얼거렸다. 운이 좋은 건지 오늘에야말로 항동만은 자신이 바친 남자가 서 역의 애송이를 만족시킬 수 있으리라 자신했다. 오늘의 그자는 항 동만이 보기에도 정말이지 대단한, 그야말로 중원제일의 준미한 남 자라고 확신할 수 있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5> "호오!" 푸른 눈에 감탄이 맺혔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중늙이라 여겼건만 이번에야 말로 제대 로 일을 하는군." 창백할 정도의 흰 피부를 가진 청년이었다. 짙은 갈색의 머리카 락, 오만한 느낌이 들 정도의 높은 코가 인상적이었다. 전체적으로 준미한 그는 능숙하기 이를 데 없는 중원어를 구사했다. "중원에 이토록 아름다운 자가 있었을 줄이야!" 백존 서열 이 위인 탑달존자의 양자인 나락문(羅樂文)은 눈앞의 준미한 사내를 보며 끊임없는 감탄을 쏟아냈다. 서역에서도 보지 못한 미남자였기 때문이다. "크흐....도옥, 이런 자리에서 그토록 미련을 못 버리고 있었던 게로군." 나락문은 붉은 입술을 당겨 웃었다. 인수인계를 하는 내내 못마 땅한 표정을 짓고 있던 서문도옥이 떠오른 것이다. 절대십가의 후예들은 어린 시절을 해온 친우이기도 하지 만, 차기 회주의 자리를 놓고 경합을 벌이는 치열한 경쟁자들이기 도 하다. 그리고 나락문과 서문도옥의 관계는 후자에 더 가까웠다. 나락문은 탁월한 무공의 자질로 인해 양부인 탑달존자와 회주인 선우단천의 총애를 받아왔다. 하지만 탑달존자의 친 혈육이 아니라는 점은 그에에 치명적인 한계가 되고 있었다. 전통성이 중시하는 중원인 특유의 고집에 따 라 서문가의 피를 잇고 있는 서문도옥의 더 높은 평가를 받곤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서문도옥이 어린 나이에 무림맹에 투신, 맹을 장악하는데 성공하자 더욱 두르러졌다. 나락문에 비해 무공이 떨어지는 것은 자질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무림맹을 장악하기 위한 노력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락문은 억울했다. 애초에 서문도옥은 무공의 자질에 있어서 자신과는 비할 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기회가 왔다. 서문도옥을 대신해 무림맹을 맡게 된 것이다. 무공조차 상실한 것으로 알려진 한조백을 놓친 서문도옥의 멍청한 실수 때문이었다. 인수인계를 받는 동안 나락문은 충만한 만족감을 느꼈다. 서문 도옥이 아쉬워할수록 자신이 무림맹의 대소사를 관장하게 된 것이 기뻣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 원하는바 이상의 흥취를 느끼는 중이었다. 서문도 옥에게서 이 자리를 빼앗지 못했다면 결코 느낄 수 없는 쾌락이 기 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리 오너라." 나락문은 무림맹을 떠나는 서문도옥의 표정을 떠올리며 깊은 만 족에 젖은 음성으로 준미한 사내에게 손짓을 했다. 몽환적으로 풀려있던 나락문의 눈이 찌푸러졌다. 준미하기 이를 데 없는 남자가 꼿꼿이 선 채로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흐음..... 아직 상황이 잘 파악이 되지 않은 건가?" 나락문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사내를 달래려 들었다. "지금 여기서 내 말을 듣지 않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어. 너 처럼 아름다운 얼굴을 한 사내의 피를 내 손에 묻히고 싶지는 않으 니까 어서 말을 듣는 게 좋을 게다." 나락문의 나긋나긋한 음성에도 사내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점차 참을성의 한계를 느끼는 나락문이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자신을 거역하는 자에 대한 살심이 절로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그는 살기를 뿜어내지 않았다. 이 정도의 용모를 갖춘 사 내를 찾기란 쉽기 않은 일이다. 아니,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 수도 있다. 순간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 진한 아쉬움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원래 말귀를 잘 못 알아듣나? 아니면 스스로의 사내다움에 대 한 미련을 못 버린 건가?" 억지로 감정을 추스렸다지만 나락문의 음성에는 이미 진득한 살 기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움직이지 않는 사내를 보며 한 마디를 쏘아붙이려던 나락문의 미간의 깊은 골이 파였다. 보기 힘든 미남자를 찾은 것과 서문도옥의 자리를 빼앗았다는 기쁨에 미처 느끼지 못했던 무엇을 느낀 것이다. 항동만이 자신에게 바치는 사내들은 모두 강제로 끌려온다. 당연히 이곳이 어딘지, 또한 자신이 누군지 모르는 상태. 보통의 사람이 그와 같은 상황에 처해진다면 어떤 행동을 취하 게 되는지 나락문은 잘 알고 있었다. 두려움. 그들의 느끼는 감정은 그 이상의 것도 이하의 것도 있을 수 없었 다. 자신 정도는 손가락 하나라도 죽일 수 있는 무림인들에 의해 납 치되어 낯선 장소, 낯선 인물의 앞에 선 그들은 두려움 외의 감정을 느낄 수 없는 것이다. 한데 눈앞의 사내에게서는 그런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불 확실한 자신의 미래에 대한 염려조차 보이지 않는다. 마치 친우의 방을 찾은 사람처럼 담담하고 여유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나락문의 신경이 첨예하게 곤두섰다. 그저 배짱만으로는 저런 여유를 가질 수 없다. 무엇인가 믿는 구석이 있다는 뜻이었다. "네놈은 누구냐....? 무슨 목적으로 이곳에 온 것이더냐?" 나락문의 호통에 준미한 사내는 그제야 반응을 보였다. 느릿하게 나락문에게 시선을 던진 그가 입을 열었다. "아주 바보는 아니군." 준미한 사내의 입가에 걸린 것은 조소였다. "크흐흐...., 과연 네놈은 이곳에 끌려온 것이 아니구나." 준미한 사내의 조소를 확인한 나락문은 긴장을 하는 것이 아니 라 되려 웃음을 터뜨렸다. 나락문은 몸을 일으켰다. "네놈이 무슨 생각으로 이곳을 찾아온 것인지 모르나 크나큰 실 수였음을 절감하게 될 것이다. 나는 도옥과 다르거든." 나락문의 얼굴에 가득한 것은 자신감 그 자체였다. 준미한 사내 는 자신과 비슷한 또래에 불과했다. 동년배 중에 스스로를 능가할 고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나락문의 생각이었다. 그러니 수작을 피워 이곳에 왔다 해서 그가 벌벌 떨 이유는 없었 던 것이다. 더구나 뒤쪽에는 그림자들이 있었다. 전에는 서문도옥을 지켰 고, 지금은 자신을 지키는 그림자였다. 그들이 전면에 나서지 않고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기고 있는 한, 자신은 어떠한 경우에도 안심할 수 있었다. 이는 양부도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두 사람이 암중에 있는 한은 양부라 할지라도 쉽게 상대할 수 없다고까지 말할 정도였다. 따라서 나락문은 예기치 못한 상황에 약간의 신경을 곤두세웠을 뿐이었다. "살려줄 수도 있다." "뭐라고?" 나락문이 인상을 와락 찌푸리면 물었다. "옥소선자가 이곳으로 이송되어 감금되었다는 사시을 알고 있 다. 그녀를 고이 풀어준다면 네놈을 살펴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준미한 사내의 건조한 음성은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음을 말하고 있었다. "큭, 크하하하하핫!" 나락문은 대소를 터뜨렸다. 자신으 앞에서 이토록 오연한 모습 을 보일 자가 있으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그였다. 하지만 나락문의 대소는 길게 가지 못했다. 준미한 사내의 무뚝 뚝한 한다디 때문이었다. "뒤쪽에 웅크리고 있는 자들의 목숨도 건질 수 있겠지." ".......!" 나락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눈앞의 사내는 그들의 존 재에 대해 알고 있었다. 기척을 죽인 그들은 나락문 자신조차 느끼 지 못한다. 저들 스스로가 모습을 드러내고자 하지 않는다면 자신 은 결코 찾지 못했을 것이다. 한데 이자는 그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었다. '만만히 볼 놈이 아니다.' 갑작스레 불길한 느낌이 전신을 휘감았다. 온몸의 솜털이 곤두 서는 느낌이었다. "제법 빠른 눈치를 가지고 있다만....나에 대해 잘 알지 못한 채로 이곳에 온 것은 역시나 큰 실수다." 나락문은 새삼 가슴을 펴며 말했다. "네놈이 누구건 중요치 않다. 옥소선자를 순순히 풀어줄 의사가 없다면 여기서 죽으면 그뿐이니까." "미친놈!" 나락문의 짧은 노갈. 이어 그의 손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미라대수인(迷羅大手印). 오늘날 탑달존자를 백존의 서열 이 위에 올려놓은 절세의 무공 이 전개된 것이다. 처음부터 이와 같은 절기를 펼친다는 것은 나락 문이 더 이상 상대를 경시하지 않고 있음을 증명하는 단면이었다. "크크크큭!" 양 손바닥이 자신의 상반신을 가릴 만큼 부풀어 오르자 나락문 의 입에서 여유로운 웃음이 흘러 나왔다. "내 목숨은 거론하기엔 이제 늦은 것 같군." 나락문의 손바닥이 확대된 것은 실제가 아니다. 완벽하게 손의 모양을 갖춘 강기로 인해 마치 손이 커진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확대된 손 모양의 강기가 가진 위력은 끔찍할 정도. 여타의 강기를 사기조각처럼 깨부수는 묘용을 가지고 있었다. 미라대수인을 익힌 자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강기가 완벽한 형태를 갖추기 전에 승부를 내는 수밖에 없다고 알려져 있었다. 달리 말하자면 완벽한 미라대수인이 전개된 이후에는 그 무엇으 로도 상대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나락문의 태도가 다시금 여유로워진 데는 이와 같은 이유가 있 었다. 자신의 미라대수인이 이미 제 형태를 갖춘 것이다. "아니, 별로 늦은 것은 아니야." 절세 준미한 사내는 살짝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나락문의 장심에 서 이미 막대한 기운이 쏟아져 나오고 있음에도 일말의 동요조차 보이지 않는 그였다. 그 여유로움이 나락문의 신경을 자극했다. 나락문의 기합을 수반한 외침을 터뜨렸다. "죽엇!" 거대한 두 개의 손바닥이 앞으로 향했다. 중원에는 접하기 힘든 기묘한 내력이 실린 강기는 형태와는 달리 쾌속하게 준미한 사내를 덮쳐갔다. 장력이 코앞까지 쇄도해 들어갔음에도 준미한 사내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마치 삶을 포기한 듯한 모습이었다. 나락문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자신의 장력에 상대가 위축되어 꼼짝도 못한다고 여겼기 때문만은 아니였다. 그는 봤다. 아니 느꼈다. 준미한 상대의 양쪽에서 몰아치는 두 개의 장력 음유하기 이를 데 없는 장력이 소리 없이 준미한 사내를 노리고 날아든 것이다. 자신을 보호하는 두 개의 그림자. 구유이영(九幽二影)이 사내를 노리고 공격을 해간 것이다. 사내의 죽음은 이제 결정된 사실이었다. 나락문의 미소가 확연한 형태를 갖추는 그 순간. 순간적으로 나락문의 동공이 확대되었다. 사내의 어깨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와 동시에 시선이 하나의 빛으로 가득 차올랐다. 무엇이 어떻게 된 것인지 제대로 확인할 수는 없었다. 번쩍 하는 빛으로 인해 자신이 날린 장력과 구유이영의 음유한 경력이 사내에 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잠시 후 나락문의 고개가 아래로 향했다. 눈부신 빛이 시야를 가득 채운 이후, 전신에서 원인을 알 수 없 는 열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섬뜩한 기분이 드는 지라 고개를 숙 여 자신의 상태를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동공이 확대된 것처럼 급작스럽게 입을 크게 벌려야만 했다. 몸에서 솟구치는 진득한 액체를 봤기 때문이다. 더 없이 붉은 그것들이 창룡전 곳곳을 향해 뿜어지고 있었다. 적혈(赤血)은 비단 자신의 것만이 아니었다. 어느새 그림자 속에 서 모습을 드러낸 구유이영의 몸에서도 붉디붉은 선혈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어.....어떻게 단 일초에.....?" 나락문의 떨리는 음성이 찾아들었다. 크게 떠졌던 나락문의 두 눈은 불신과 절망으로 가득했다. 그는 봤다. 자신조차 처음 보는 구유이영의 전신에 아로새겨진 수많은 혈선 들을..... 대체 언제 저토록 많은 혈선을 그려냈단 말인가? 그와 같은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을 여유는 주어지지 않았다. 기하학적 도형을 그리듯 수없이 교차된 혈선을 따라 구유이영의 신형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명조차 지를 여유를 갖지 못한 채 구유이영은 전신이 조각난 채 죽음을 맞이했다. 그 순서는 나락문에게도 찾아왔다. "넌 누구.......?" 경악과 의문을 가득 내포한 마지막 음성. 그와 함께 나락문의 전신이 조각나며 무너져 내렸다. 패종회 차기 회주를 노리고 경합을 벌이던 절대십가의 후예가 맞이한 최후라기에는 믿기 힘들 정도로 허무한 죽음이었다. "난 백발마신의 못난 사형일세." 차가운 시선으로 조각난 나락문을 바라보던 준미한 사내. 이제는 들을 수 없는 나락문의 시신조각을 향해 남지학이 무심 하게 던진 말이었다. 그의 손에 쥐어졌던 심검의 빛이 잦아들었다. 더불어 무림맹의 타락한 생명의 빛 역시도 잦아들고 있었다. 십전성의 몰락은 단발마의 비명과 함께 시작되었다. 하나의 비명은 잔잔한 호수에 던져진 돌멩이가 만들어내는 파문 처럼 십전성 전체로 번져가고 있었다. 천애백의단이 다시금 복수의 나래를 펼쳐든 것이다. Chap6 각오 <1> "이상하군." 손목을 가볍게 돌리자 대로를 홍건히 적신 피기 땅에 뿌려졌다. "뭐가요?" 은설연이 거친 숨을 가라앉히며 물었다. 오늘의 그녀는 누구보 다 두르러진 활약을 했다. 그녀는 누구를 맞이하던 일체의 사정도 봐 주지 않았다. 밤을 맞이한 그녀의 유리검은 최대의 효용을 발휘 했다. 원래도 잘 보이지 않는 유리검은 어둠에 검신을 감추고 수많 은 피를 뿌려댔다. 한 시진에 걸쳐 그녀의 손에 근 삼십여 명에 달 하는 무림맹의 무인이 목숨을 잃었다. "저항이 약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이렇게 쉽게 당할 무림맹이 아 닌데 말이야." "제대로 된 무리맹도들은 지금 감금에서 풀려나는 중이니까요." 단목지민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맹이 이상하게 돌아가 고 있다는 사실에 의문을 품은 자들은 대부분 옥에 갇혀 있었다. 적 풍조원들도 수감된 상태였다. 그러니 무림맹이 이토록 쉽게 당하는 게 이상할 게 없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좀 이상하군요." 주백광의 말을 듣고 뭔가를 잠시 골똘히 생각하고 있던 은설연 이 입을 열었다. "아무리 무림맹의 고수들의 수감되어 있다 해도 확실히 너무 쉬 워요. 고수들의 빈자리를 패종회에서 이렇게까지 고려치 않다 니........" "수뇌랄 수 있는 자들을 남 소협이 모두 처리해서 그런 건 아닐 까여?" 단목지민이 말에 주백광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너무 지나친 걸. 우리 측을 봐. 대부분 지치긴 했지만 손실이 너무 적어." "급습이었으니까요. 설마하니 천애백의단이 무림맹의 본단을 치 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을 거에요. 이번에는 본교의 간세들에 게조차 정보를 일체 흘리지 않았으니까요." "그런 걸까요?" 은설연은 여전히 지금의 상황을 쉽게 납득하지 못하는 표정이었 다. 그녀는 패종회에서 말석을 차지하고 있는 자들의 무공을 확인한 경험이 있었다. 선주혁의 말에 의하면 패종회에서 몇 가지 무공을 주워 배운 자들이라고 했다. 그런 자들이라 할지라도 그 무위만은 가공할 정도였다. 한데 십전성이 이토록 쉽게 천애백의단의 수중에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을 그녀로서는 납득키 힘들었던 것이다. "데체 이놈들은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당하고도 찜찜함을 남겨 주겠다는 건가?" 주백광이 못마땅하다는 듯 투덜거릴 때, 천애백의단원 하나가 신속하게 세 사람 쪽으로 달려왔다. 남지학이 이끄는 백룡조에 소속된 조원이었다. "잠시 확인해주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남 소협은?" 백룡조원이라면 남지학에게 보고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조장은 지금 옥소선자의 상세를 살피고 계십니다. 옥소선자께 서 워낙 기력이 쇠하신지라 내력을......" "그렇군. 무슨 일인가?" 긴 설명은 필요 없었다. 남지학이 옥소선자에게 내력을 주입하 는 중이라면 보고를 받을 만한 상황이 못 되는 것이다. "상당수의 시시을 발견했습니다." "시신?" 주백광은 다소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지금의 십전성에는 널린 게 시체였기 때문이다. 그 표정에 담긴 의미를 파악한 백룡조원이 재빨리 부연을 했다. "저희와는 무관한 시신입니다. 아무래도 생각해도 기이하기 짝 이 없어 보고를 드리는 것입니다." ".....!" 은설연과 주백광이 느끼던 의구심과 연관이 있는 시신임에 틀림 없었다. 서로 시선을 교환한 세 사람은 곧 백룡조원의 뒤를 쫓았다. <2> "흠!" 백룡주원이 안내한 곳은 중간 정도 규모의 회의실처럼 보이는 공간이었다. 그곳에는 얼추 오십여 구는 되어 보이는 시신이 있었 다. 하지만 시신을 제대로 확인하기 전에 세 사람은 호흡을 멈춰야 만 했다. 지독한 악취가 코를 찔렀기 때문이다. "냄새 때문에 이곳을 살폈습니다." 백룡주원은 어는 정도 냄새에 익숙해졌는지 실내에 들어선 후에 도 호흡을 이어가고 있었다. "지독하군." 어느새 주백광도 서서히 숨을 들이쉬며 시신들을 살폈다. "몇 시진만 지나면 흔적이라고는 냄새밖에 남지 않았겠는걸!" 은설연도 코를 막고 있던 손을 움직여 시신의 상태를 확인한다. 단목지민은 수건으로 코를 막은 채 문 뒤로 물러섰다. "무림맹에서 왜 이런 곳에 시체를 내버려 둔 거죠?" 썩어가는 시신을 그제야 확인한 단목지민이 물었다. "이곳에 방치되어 있던 시신은 아닌 것 같군요. 이자들이 목숨을 잃은 건 얼마 되지 않았어요." 시신을 살피던 은설연이 말했다. "무슨 소리에요? 이 냄새......시체가 썩는 냄새잖아요. 적어도 이삼 일은 지나야....." 단목지민의 말에 은설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정도 부패가 진행되려면 시간은 원래의 형상을 알아보기도 힘들어야 해요." "부패한 부분을 빼놓고는 변색도 없고 형태도 온건하군." 은설연의 설명에 주백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시반도 거의 없고, 심지어는 경추의 경직조차 없어요." 은설연은 아무렇지도 않게 시체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말했다. "시간이 경과하여 경직이 풀어진 게 아니라면....?" "죽은 지 반 시긴 정도밖에 안 된다는 거죠." 은설연이 망설임 없이 결론을 내렸다. "말도 안 되요. 반 시진 전이라면 천애백의단이 무림맹에 습격한 그 시간이잖아요." "그보다 약간 이른 시간일 수도 있죠." 은설연이 단목지민에게 말했다. "누군가 우리보다 앞서 손을 썼단 말인가?" "독인가요?" 특별한 독을 사용할 경우 부패가 빨리 일어날 수도 있었다. 단목 지민이 독을 떠올린 것은 그 때문이었다. "두개골이 터지고, 뼈가 으스러진 시체가 많아요. 독살은 아니 죠." 은설연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했다. 담목지민은 살짝 얼굴을 붉혔다. 지독한 냄새와 끔찍한 시신들 로 인해 상식 외의 발언을 한 것이다. "독기를 머금은 장력도 아니야. 변색의 원인이 독 때문은 아닌 듯하니까. 그저 썩도 있을 뿐이라고.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주백광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죽자마자 시체를 썩게 만드는 수법이 있나요?" 은설연도 당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수법보다는 누가 이들을 죽였는지가 더 중요한 것 같군. 우리가 무림맹을 습격하는 시각에 맟춰 이들을 죽였다는 게 지니치게 공교 로우니까 말이야." 은설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이들이 패종회에서 파견 나온 고수들이겠군요. 우리가 손쉽게 무림맹을 장악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거고요." "있어요?" 문 밖에 서 있던 단목지민이 난데없는 한 마디였다. "뭐가 있다는 거야?" 주백광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 방 안에 들어선 이후 그녀의 말들 은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죽자마자 시체를 썩게 하는 수법 말이에요." "......?" "예전에 들은 적이 있는데 강시술로 만들어진 강시의 시독(屍毒) 이 빠른 부패를 일으킨다고 하더군요." "강시?" 주백광이 눈을 휘둥그레 떳다. 반면 은설연은 한숨을 쉬었다. "특별한 시독을 만들어낼 수는 있지만 부패의 속도가 이처럼 빠 를 수는 없어요. 게다가 강시 따위로 무림의 고수를 상대한다는 것 은 어불성설이에요." 은설연의 말에 단목지민은 다시 얼굴을 붉히며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말이 옳았다. 시신을 옴직인다는 것은 보통 사람에게 있어 기함을 할 일이다. 더구나 이미 죽어 있는 상태라 팔다리가 잘려도 끊임없이 덤벼드니 실로 두려운 존재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특별한 과정을 거쳐 제조된 강시들은 도검에도 잘 상하지 않는 다. 이 경우라면 검기를 운용할 정도의 고수라면 이야기가 다르 다. 아무리 단단한 몸뚱이를 지녔다 해도 검기의 날카로움을 이켜 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관절이 굳어 뻣뻣한 강시의 몸으로 무림고수들의 동작을 따라가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따라서 일정 수준을 넘어선 고수에게 있어서 강시란 작은 위협 조차 되지 못하는 것이다. 패종회에서 파견을 나올 정도의 고수들이 강시에게 당했다는 것 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파연합에는 기기묘묘한 사술을 익힌 자가 많았고, 그런 자들 사이에서 자라온 은설연이었다. 그녀는 이 자리의 누구보다 강시에 대해 잘 알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한 거죠?" 단목지민이 힘 빠진 음성으로 물었다. 계속해 엉뚱한 말만을 남 발한 셈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걸 알아내야겠지. 지금부터 말이야." 주백광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우리와 함께 무림맹에 공격한 것이 우연이 아니라면....?" "호의견 그렇지 않건 간과할 수 없는 일임은 틀림없을 거야." 은설연이 제시한 의문에 주백광이 단정적으로 결론을 지었다. "일단 남 소협과 함께 의논을 하는 게 좋겠네요." 단목지민이 마지막 말에는 은설연도 주백광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3> "후훗.....,탑달존자까지 저리 나서니 이제는 움직이지 않을 도 리가 없겠구려." 탑달존자를 비롯한 절대십가의 대표자들이 몰려와 한바탕 언성을 높이고 돌아갔다. 대를 이를 양자가 살해당했으니 탑달존자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어차피 이제는 움직일 때가 되었습니다. 언제까지 기다리고 있 을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푸른 눈썹을 늘어뜨린 공손상량이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어느 쪽이건 준비가 되었다니 움직여줘야겠지요." "천애백의단의 애송이들의 행사가 그것을 입증한다고 여기시는 것입니가?" "최소한 옥용검마라는 아이는 준비가 된 것이 아니겠소? 그간 나이에 걸맞지 않는 신중함을 보이던 아이니만큼 어느 정도 자신을 가지고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라 보이는구려." "흐음.....그래봐야 애송이일 뿐입니다." "그 애송이 뒤에 마교가 버티고 있으니 아주 재미없지는 않을 것 이오. 역정보를 흘려보낼 정도의 능력은 갖추고 있으니 말이오." 선우단천의 말에 공손상량은 나직히 코웃음 쳤다. "제깟 것들이 수작을 피운들 별다른 수가 있겠습니까?" "과연 그럴까요?" "회주께서 저들에게 기대를 가지시면 가지실수록 십가의 가주들 이 동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설마하니 서문전이 회주께 진정 호의 를 품고 변론을 펼친 거라 여기시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선우단천은 공손상량의 말에 얼굴에 미소를 더욱 짙게 할 뿐이 었다. 그가 느릿하게 공손상량을 향해 시선을 움직였다. "호법께서 조금만 부추겨 주셔야할 것 같네요." "부추기다니요?" "마교를 상대하는 일말입니다. 회에 있어서는 더할 나위 없는 중 대사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흐음....." "내가 마교를 어려워할수록 누군가의 활약이 더욱 두드러져 보 이지 않겠습니까?" "......!" "도옥은 야심이 큰 아이지요. 한조백을 놓쳐 본단에 머물려 있는 것이 못내 불만일 것입니다." "도옥..... 그 아이를 자극하란 말씀이십니까?" " 그 아이가 움직이면 탁, 그 친구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겠지요. 물론 서문 가조도 마찬가지일 테고요. 가문의 미래를 걸고 있을 테 니 말입니다. 많은 말씀을 하실 필요는 없을 겁니다. 그저 내가 마 교를 지나치게 높게 평가해 망설이는 중임을 알려주기만 해도 충분 할 테니까..... 지금 호법께서 느끼신 그대로를 전하시기만 하면 됩니다. 더할 필요도, 뺄 필요도 없는 일이지요." 공손상량은 무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회주가 마교를 지나 치게 과대평가하고 있다는 것은 그의 본심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회주라고는 해도 한참이나 어린 그에게 속내를 훤히 들 어내보이고 있었으니 무렴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 공손상량은 신속하게 표정을 수습했다. 자신의 내심에 관 한 별다른 변명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기를 바란 것 이 바로 회주 자신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와 같은 사실을 꿰뚫어봤다면 외려 회주가 자신을 경계 하려들 수도 있는 일이었다. 회주에게 신뢰를 잃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공손상량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십가에서 아가씨의 힘을 빌리고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유미를 대신할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우려되는 바에 대한 답변은 즉각적이었다. 역시나 선우단천은 모든 상황를 염두에 두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공손상량은 잠시 생각을 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적 호법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내가 공손 호법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적 호법에게는 달 가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전대에 이루지 못한 야망이 있다면 후대 를 노리는 것이 당연한 일이 터. 적 호법 스스로 수립한 계획이 있 을 테니까요." 회의 중대한 일에 대한 상담역은 늘 공손상량의 몫이었다. 이에 대해 적철항은 늘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무공으로 보나 지 략으로 보나 공손상량에 비해 스스로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는 그 였다. 단지 입회가 늦었다는 사실만으로 차별을 받고 있다 여기는 적 철항이이게 경쟁자로 여기는 공손상량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적철항으로서는 회의 다음 대를 노리는 게 최선이었다. 만 약 서문가에서 패종회의 다음 대 회주를 배출할 가능성이 높다면 그들을 위해 움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공손상량은 선우단천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회주는 단지 유흥거리를 찾기 위해 중원이 제패를 미루로 있는 것이 아니었다. 회주가 원하는 것은 무림의 완벽한 지배이리라. 그 완벽함의 범주에는 패종회 내부의 문제까지도 포함이 되어 있었다. 회주는 무림의 진정한 지배를 원하는 것이다. 누구도 넘보 지 못할 완벽한 지위 하에서만이 가능한..... 진정한 자신만의 왕 국을 세우고자 함이었다. 이미 힘을 가진 만큼 필요한 것은 구분이었다. 충성을 다할 자와 그렇지 않은 자. 그것을 구분하기 위해 회주는 충분한 시간을 필요로 했고, 스스 로는 낮추는 것 정도는 쉽게 감내한 것이다. 모든 것은 그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적어도 공손상량이 인지하고 있는 범주 내에서는 분명히 그랬다. 더욱 분명한 것은 천애백의단이 무림맹을 점거한 것에 대해 회 주는 조금도 미련을 두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조만간 유미와 함께 서역에 잠시 다녀와야 할 것 같소. 유희의 기회를 찾는 것이 아니라 회피하고 있음을 입증할 수 있는 계기가 필요할 테니 말입니다. 내가 돌아올 때쯤이면 많은 것이 정리되어 있기를 바랍니다." 공손상량은 회주의 뜻을 즉각 알아챌 수 있었다. 회주는 일부러 자리를 피하려는 것이다. 이는 회의 내외부에 기회가 되어 줄 것이다. 그들이 기회라 여기 고 활용하는 동안 회주는 원하는 바를 이루게 될 것이다. 무림을 지배하는데 있어 현재 회의 구성원 모두가 필요한 것이 아니였기에. "반드시 그리될 것입니다." 공손상량은 더욱 깊숙이 머리를 숙였다. <4> "안타가운 일이군." "네." 선주혁은 조금 일찍 이곳을 방문하지 못한 것이 크게 안타까 웠다. 지난 시절에 가졌던 무공의 회복만으로는 선뜻 은신처를 나 서지 못했다. 자칫 또 다른 강자를 만나게 된다면 이번에도 살아남 으리라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해서 약간이라도 이전의 성취를 넘어서고자 했고, 소정의 결과 를 얻었다. 한조백의 가르침이 큰 도움이 되었다. 더 많은 시간이 주어진다면 스스로 만족할 만한 경지에 오를 수 도 있을 테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언제 사형이 패종회와 맞서 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그를 떠밀었기 때문이다. 결국 선주혁은 이전에 비해 진보가 있음을 확인한 후, 곧바로 한 조백이 만든 은신처를 나섰다. 자신의 발전이 얼마나 큰 효용을 발 휘하게 될 것인가는 실전을 통해서만 증명될 수 있을 터였다. 은선처를 나선 선주혁은 곧바로 마중영의 장원을 찾았다. 그가 읽지 못했던 나머지 내용에 대해 알기 위함이었다. 장원을 찾은 선주혁을 맞이한 것은 마중영의 아들이었다. 마중 영이 이 개월 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이곳 세상에서 엄청난 부를 쌓고, 행복한 삶은 일구며 살아왔다 고 했다. 다시없음 만큼 평안한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스스로 말 했든 새로운 삶을 행운으로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 살다 돌아간 것 이다. 이는 지쪽 세상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세상 을 떳다는 것은 선주혁에게 있어 꽤나 큰 상실감을 주었다. 자진과 비슷한 처지의 인물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알게 모르게 위안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마중영의 죽음 자체에 대한 슬픔과는 별개의 감정이었 다. 주어진 기회를 행운으로 여기고 스스로 행복하다 여기는 삶을 살아간 만큼 그의 죽음에 대해 애도는 할지언정 슬퍼 울 이유는 없 었던 것이다. 선주혁의 옆을 나란히 걸으며 한조백이 입을 열었다. "꽤 많은 사람의 죽음을 보며 살아왔지만 고인이 된 분은 정말 행복하게 살아온 것 같군. 고인에 대해 말하는 가족의 표정에서 느 껴질 정도니 말이야.' "아마도 최선을 다해 행복을 추구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분에 게 있어서는 인생이 행운 그 자체였으니까요." "하하핫!" 한조백이 웃음을 터뜨렸다. 복잡한 감회가 튀섞인 웃음이었다. "세상사 수많은 풍파를 겪는 동안 어째서 나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네?" "삶 자체가 행운이라는 것 말일세." "마 노인은 죽기 직전에 다시 살아난 경험이 있거든요. 그 후 전 에 다른 인생을 살았으니 그와 같은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거겠죠." "하핫. 생존하는 무림인 중에서 죽음의 위기를 경험하지 않은 자 가 몇이나 되겠는가? 그들 모두가 새로운 인생을 행운이라고 생각 하고 살 것 같은가?" "하긴 그렇군요." 자신이 말한 것과 조금 다른 의미긴 하지만 한조백의 말도 옳았 다. 마중영은 자신과 달리 이쪽 세상에 넘어와 적응하는 데만도 오 랜 시간이 걸렸다. 무림인으로 온 게 아니고, 자신이 썻던 글의 내용과 시차도 있었 다. 한데도 그는 자신의 능력을 십분 활용, 성공을 거두고 행복을 추 구하여 살았다. 어쩌면 그것 자체만으로도 대한단 일이라 볼 수 있 을 것이다. "한데 고인에게 자네가 묻고자 했던 게 대체 무엇인가?" "아! 미래에 관한 것입니다. 그분은 무림의 미래에 대해 알고 계 셨거든요." "호오? 천기를 헤아리시는 분이셨군." "아, 네. 뭐.....그런 거죠." 선주혁은 그냥 수긍하고 말았다. 마중영과 자신이 이계에서 이 곳으로 넘어왔고 이쪽 세상의 일이 소설과 일치해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한조백에게 설명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과연......! 풍진 세상에서 인생의 가치를 알기란 쉽지 않으 니......, 역시나 범상한 분이 아니셨군, 그래." 한조백은 마중영의 삶을 엿본 이후 감회가 큰 모양이었다. 무림맹의 맹주였던 그가 무공을 거의 상실하고 선주혁과 함께 떠도는 입장이었다. 스스로의 인생에 대해 생각하는 바가 많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분께 미래의 이야기를 들었다면 저나 무림에 있어서 큰 도움 이 되었을 텐데...." 선주혁은 마중영에거 자신이 읽지 못한 부분을 듣지 못한 것이 못내 안타까웠다. "너무 상심하지 말게. 천기를 엿본 이후라도 세상은 꼭 이치대로 돌아가는 것만이 아니니까." 한조백의 말에 선주혁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어르신계서는 무림이 선택한 운명 같은 것을 믿고 계시 지 않습니까?" 한조백은 무림이 살아있는 생명체와 같이 자신을 선택했다고 말 한 바가 있었다. 무림의 선택은 하나의 운명이며 그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던 그가 하늘이 정한 이치를 부정하는 것을 선주혁은 쉽 게 납득하지 못하는 것이다. "허헛, 맞네. 노부는 그와 같은 사실을 믿네. 하지만 무림 역시 스스로의 선택을 통해 노력하고 있을 뿐이야. 천의(天意)의 역시 마 찬가지라고 보네. 정한 바 그대로 돌아가도 있다면 세상이 어찌 이 토록 혼잡할 수가 있는가?" "그러니까.... 하늘도, 무림도 뜻을 세우고 그 방향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노력을 한다는 말인가요?" "그렇지. 그 안에는 예기치 못한 변수도 있을 것이이고 반대되는 의지도 있을 걸세. 때로는 천의와 반대되는 힘이 더욱 클 때가 있어 세상이 어지럽고, 때로는 천의와 부합되어 평온한 세상이 오기도 한다고 보네." "결국 하늘의 뜻이라 할지라도 고스란히 이행되는 것은 아니라 는 말씀이시군요." "그래. 순천(順天)은 천의에 부합하니 탄력을 받겠지만, 그렇다 고 해서 역천(逆天)이 현세에서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라는 뜻일세. 그러니 천기를 엿본다고 해서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지. 천의만을 믿고 조금이라도 나태해진다면 결과는 크게 달라질 테니 말이야." 선주혁은 한조백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이 정해진 수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였다. 이쪽 세상의 무림이 원래는 어떻게 돌아갔었고, 지금은 또 어떻 게 변했는지 양자를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하늘은 때로 자신의 정한 뜻을 바꾸기도 하지. 누군가의 강한 의지와 염원이 있다면 말일세. 따라서 천기를 엿봐 정해진 길 과 다른 길을 걷는다고 미리 좌절할 이유도 없는 일일세. 강한 의지 를 가졌다면 정해진 바를 뒤집을 수도 있으니 말이야. 그렇기에 천 기를 미리 아는 것이 좋지만은 않다는 걸세. 좌절을 모르고 의지를 바로 세운다면 운명은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으니, 무슨 이유에서 하늘의 뜻을 엿보기 위해 노력을 기울인단 말인가?" "......!" 저쪽 세상에서 수많은 무협, 판타지 소설을 읽으며 한 번쯤 보았 을 법한 말이이었다. 하지만 한조백을 통해 다시 듣게 된 방금 전의 말은 선주혁에게 세삼스러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선주혁이라는 인물의 운명은 이미 크게 변해 있었다. 사형인 남 지학에게 짐만 되는 어벙한 인물이 이제는 무림의 선택을 받았다고 여겨질 만큼의 비중을 갖고 있는 것이다. 과장이야 어쨌건 이쪽 세상에서 자신은 스스로 자부할만한 성취 를 거두는 중이었다. 이 역시 운명이 바뀔 수 있음을 강하게 입증했다. "그래.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겠지만.... 뒤의 내용은 모른다 고 해서 실망할 필요는 없지!" 선주혁의 두 눈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아직까지 자신의 성취만으로 패종회와 맞서기 힘들지도 모른다. 한조백으로 인해 무공에 대한 한계를 벗어던지고자 하는 깨달음 을 얻었다지만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황급히 마중영을 찾은 이유도 거기에 있을지 몰랐다. 미 래의 결과를 이용해 조금이나마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려 한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달리 생각해도 지금까지 알고 있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것보다 훨씬 유리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계속해서 유리한 상황을 노리는 것보다 스스로의 노력과 의지로 상황을 바꿔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더 이상을 바라는 것은 부질없는 욕심일 뿐이었다. 선주혁은 스스로의 안일한 생각을 버리기 시작했다. 그간 패종회라는 존재 자체가 선주혁에게 있어서는 한계가 되었 다. 오랜 세월 무공을 수련하며 스스로의 한계를 결정짓는 무림인처 럼 이쪽 세상의 모든 것을 밝힌 소설의 내용을 알기에 패종회의 힘 을 너무나 쉽게 인정해버린 것이다. 천음, 패종회의 회주, 삼패의 능력이 절대의 영역에 있는 것으로 묘사된 글이었고, 그렇기에 스스로는 한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었 다. 과연 자신이 그런 자들과 맞서 싸울 수 있는가에 대해 끊임없이 회의를 갖게 되기 때문이었다. 이느 한조백이 말한 대로 천기를 알기에 미리부터 좌절하는 것 과 다르지 않았다. 또한 스스로 정한 한계에 얽매여 더 높은 곳을 향하지 못하는 것 과 같았다. 패종회를 막아 세우겠다는 강렬한 염원과 의지에도 불구하고 스 스로 벽을 세운 것이다. 선주혁은 그 벽을 허물고 있었다. 자신의 의지가 자유로운만큼 벽을 쉽게 넘어설 수 있음을 이미 알고 있는 그였다. 더 이상 패종 회의 회주도, 삼패도, 넘을 수 없는 산이 아니었다. 이처럼 강렬한 의지가 있는 한, 그들은 자신을 막지 못할 것이 다. 선주혁은 스스로에게 그렇게 되뇌고 또 되뇌였다. 더없는 자신 감이 그를 충만히 채웠고, 그렇게 선주혁이 가진 또 하나의 한계가 사라지고 있었다. 남은 것은 자신의 의지를 실현하는 것만이 있을 뿐이다. Chap7 복귀 <1> 천애백의단이 무림맹을 급습하여 옥소선자를 구출했다는 소문 이 무림을 다시 들끓게 했다. 드디어 백발마신의 기상을 잇고자 하 는 의지가 드러났다는 것이다. 무림맹의 상징인 십전성. 백말마신의 기개를 잇는 상징이랄 술 있는 옥소선자. 천애백의단은 동시에 두 마리의 토끼를 거머쥔 셈이었다. 무림은 흥분과 동시에 긴장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다시금 백 발마신이 거론된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을 흥분할 수밖에 없었고, 이미 무림의 패권을 장악한 패종회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이게 긴장이 되었던 것이다. 천애백의단의 배후에 사파연합과 천마맹이 있다는 것은 널리 알 려진 사실. 한껏 웅크리고 있던 그들이 활동을 재개했다는 것은 패종회를 향한 본격적인 선전포고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바야흐로 본격적인 혈풍이 예견되는 상황인 셈이었다. 구파일방은 즉각적으로 십전성의 수복에 나섰다. 무림맹의 본단 인만큼 일차적인 책임은 그들에게 있었던 것이다. 패종회 역시 적극적인 지원을 공표했다. 무림맹과 연수한 관계 인 패종회였기에 십전성에 대한 공격은 곧 패종회에 대한 도전이며 이를 방관할 수 없음을 널리 알린 것이다. 이에 구파일방의 고수들과 패종회에서 파견된 고수들이 십전성 으로 향했다. 하나 그들을 맞이한 건, 텅 빈 공간뿐이었다. 옥에 수감된 무림 맹의 인사들과 옥소선자만을 빼돌린 채, 천애백의단원들은 즉각적 으로 무림맹에서 벗어나 버린 것이다. 십전성을 되찾음으로써 일단의 체면을 차릴 수 있었지만, 무림 맹과 패종회의 사정은 편치 않았다. 패종회의 음모에 의해 무림맹이 변질되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던 것이다. 소문의 근원 중 상당수가 무림맹주의 직속인 적풍조원의 증언이니만큼 그 무게는 가볍지 않았다. 그와 같은 소문에 휩싸인 십전성의 분위기 역시 무겁기만 했다. 창룡전에서 토론을 벌이는 이들 역시 소문에서 자유로울 수만은 없었다. "그따위 소문에 신경 쓸 필요는 없습니다. 이왕 이렇게 된 이상, 무림을 휩쓸어 버리면 될 일입니다." 무림맹 창룡전에서 서문탁이 호기롭게 말했다. 구파일방의 지원이라는 명목으로 나선 그는 아들, 부친과 함께 창룡전을 차지하고 앉은 것이다. "아니야, 신경을 써야할 일이지." 서문전은 일그러진 입매를 당겨 웃으며 말했다. 또다시 자신의 의견의 묵살 당하는 터라 서문탁의 표정이 굳어 졌다. 더구나 지금은 아들인 서문도옥이 함께 있는 상황. 스스로의 체면을 돌봐야할 처지였다. "어차피 무림맹과 연수를 통해 명분을 확보하는 것 또한 과정 에 불과했던 일 아닙니까? 아니, 회주의 되지도 않는 유흥을 위한 것일 수도 있지요. 한데 그 장단에 아직까지 놀아야야할 필요가 있 겠습니다?" 나름대로 그간의 상황을 꿰뚫는 발언이라 생각하는 서문탁이었 다. "그건 아버님의 말씀대로인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세간의 이목 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요." 서문도옥은 부친의 편에 섰다. 무림맹이 다시 자신의 손에 돌아 온 것은 기꺼워할 일이나 진작 패종회의 손아래에 놓였어야 할 무 림이 아직도 제멋대로 돌아가고 있는 것은 그에게도 불만이었던 것 이다. "너희 둘은 진정 회주가 마교를 두려워하여 서역으로 몸을 뺀 것 이라 여기는 게냐? 그가 소심하기에 천음을 더 보완한다는 핑계를 댄 것이라 생각하느냔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이와 같은 중대한 시기에 서역행이 가당키나 한 일이겠습니까? 더더군다나 이 시기에 천음을 서역으로 데려가나 니!" 서문탁이 즉각적으로 대답했다. "흐음....., 과연 그럴까?" "아버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까? 회주는 적을 경시하는 법이 없다고 그 말씀 그대롭니다. 단천은 예로부터 늘 상대를 과대평가 해왔지요. 회주의 직을 맡게 될 때도 저와 직접 겨루기보다는 공적 을 세우는데 급급했던 것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해서..... 회의 비전을 모두 익힌 지금에까지도 벌벌 떠는 중이 다?" "천성이 어디 가겠습니까?" 서문탁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그래, 네 말이 맞다고 치자. 그래서 회주가 없는 지금 마교와 정 면으로 붙는 게 당연한 일이라 생각하는 게냐? 천음마저 없는 이때 에?" "천음은 만약 있을지 모를 상황의 대비책이 아닙니까? 저희만으 로도 마교를 치는 데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서문탁은 단호하게 말했다. 무림의 각 세력에 대한 파악은 이미 오랜 전에 끝이 났다. 백존 중 절반만 있어도 천마맹을 무너뜨리는 것은 부족함이 없음을 그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수뇌부만 을 고려한다면 상위에 속하는 백존 스물이면 충분하고도 남을 일이 었다. "저희가 마교를 무너뜨린 공로는 오랫동안 기억될 것입니다. 더 구나 적 호법까지 저희와 함께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분께서 나 서주신다면 필승은 기정사실과 다름없을 것입니다." 조부의 발언이 계속해 회의적인 것을 눈치 챈 서문도옥은 조심 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내보였다. 못마땅한 시선으로 아들을 보는 것과는 달리 서문전은 부드럽게 눈빛을 바꾸며 서문도옥에게 말했다. "네 말대로 우리가 움직이면 마교를 이 땅에서 지우는 것이 가능 할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 중에서 우리의 손실이 얼마나 클까에 대 해 생각을 해야 하지 않겠는냐?" 조부의 말에 잠시 눈을 굴리던 서문도옥이 물었다. "할아버님께서는 이와 같은 상황까지도 회주께서 염두에 둔 거 라 생각하고 계신 것입니까?" 서문도옥의 질문에 서문전은 크게 만족해했다. "후후훗, 이 할애비가 늙어서 오만가지 염려를 하는 것만은 아니 란다. 일의 선후를 구분하는 데에 있어 누구보다 영악한 모습을 보 였던 것이 회주니라. 네 애비의 말대로 무공 수련보다 천음의 가능 성에 모든 것을 던졌고, 결과적으로 그는 무공과 지위 모든 것을 손 에 쥐었지. 그런 회주가 나머지 십가의 비난을 자처하며 서역으로 피신을 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지." "단천이 설령 이 상황을 의도했다 하더라도 눈앞의 기회를 외면 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서문탁이 서문전과 서문도옥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까의 발언 에 이어 그는 회주라는 칭호대신 선우단천의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었다. "그가 무엇을 노렸건 이번의 행동으로 인해 십가의 대부분의 불 만을 표출하고 있습니다. 특히 락문을 잃은 탑달존자의 불만은 하 늘을 찌르지요. 그러니 이번 기회에 그간 회주 측에 붙어있던 십가 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게 더 이롭지 않겠습니까?" 서문전의 얼굴을 가득채운 흉터가 꿈뜰거리기 시작했다. 당장이 라도 호통이 터져 나올 기세였지만 의외로 서문전의 음성은 담담하 게 흘러나왔다. "이번에는 제법 그럴듯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있구나." 잔뜩 긴장을 하던 서문탁은 고개를 숙인 채 슬쩍 아들을 살폈다. 방금 전 자신의 발언은 아들이 자신에게 주장했던 바, 그대로였 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역시도 멀리 내다봤다 말할 수는 없는 식견이다. 만 약 우리가 회주를 내몰아 회를 장악하려 드는 것이라면 네 말대로 하는 것이 옳겠지. 하지만 도옥을 위한 왕국을 건설하자면 정통성 은 물론이거니와 회주에게만 전수되는 무공을 익히게 해줘야할 터! 회가 타격을 입게 되는 것은 곧 도옥이 가지게 될 힘을 약화시키는 것에 다름이 없는 게야. 그러니 마교를 치는 것은 천음의 힘들 빌리 는 것이 필수라는 말이다." "그럼 회주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마냥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겁 니까? 그렇게 된다면 저희 역시 나머지 십가의 마음을 잃게 될 것 입니다. 회주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할 테니까요." 서문도옥이 입을 다물어 버린 부친을 대신해 말했다. "그래서.....! 소문을 마냥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거다." 난데없이 다시 화제가 소문 쪽으로 돌아가자 서문탁과 서문도옥 모두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그런 두 사람의 표정을 즐기듯 서문전은 느긋한 어조로 설명을 시작했다. "한조백에게 이상이 생겼고,무림맹이 패종회의 음모에 희생당 하고 있다는 소문에 무게가 실리는 것은 적풍조라는 아이들 때문이 다!" "그렇습니다. 옥용검마가 놈들을 풀어주는 바람에 근거가 생겨 버린 것이지요." 누구보다 무림맹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서문도옥이었 기에 조부의 질문에 즉각적으로 대답했다 "소문을 내며 돌아다닌다는 것은 그 아이들이 비밀스럽게 움직 이는 옥용검마와 함께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더냐?" "아무래도....., 놈들은 스스로를 정도무림의 혼이라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척살의 대상이던 마교와 사파연합의 인물들로 구성된 천애백의단과 함께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맹주의 명을 따르던 녀석들이 그럼 어디로 갔겠느냐?" 서문도옥은 이번에도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희윤이 있는 곳일 것입니다. 스스로를 한조백의 제자라 여기는 그들이니만큼 사매나 다름없는 희윤의 안위를 우선으로 생각할 테 니까요." "더더군다나 그들로서는 정의련이 무림맹을 제자리로 돌릴 수 있는데 가장 큰 힘이 되어 주리라 생각하겠지." "하면.....?" " 무림매의 반도를 감싸고도는 정의련을 무림맹으로서는 가만히 둘 수 없는 문제야. 우리로서는 명의 반도를 처리하려는 무림맹을 도울 명분이 충분하지." "현재 나도는 소문으로 인해 회의 대업에 지장이 있는 만큼 , 회 를 위해 직접적인 행동을 취할 수도 있는 것이군요." 서문도옥의 말에 서문전은 미소를 지었다. "가만히 앉아서 두려움에 떨고 있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십가의 몇몇은 움직이게 될 거야. 대업의 수순을 설명할 수만 있다면 더 많 이 움직이게 될 거고." "역시 할아버님이십니다!" 서문도옥은 무릎을 치며 감탄했다. 하지만 서문탁은 아직까지 부친의 의견에 완전히 수긍키 힘든 모양이었다. "정의련을 상대하는 사이 마교가 본격적으로 손을 써오면 어떻 게 되는 겁니까?" 서문탁의 질문에 서문전은 혀를 찼다. "그런 의문을 이제야 떠올리는 게냐? 반대의 경우는? 마교를 상 대하는 사이 정의련이 손을 쓰는 것은 왜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이더 냐?" 부친에 헐난에 서문탁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정이니 마니하며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을 놈들이다. 외려 우 리 손에 당하는 것을 기뻐할 자들이지. 그러니 놈들끼리 뭉치는 것 은 염두에 두지 않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니더냐?" "정의련을 칠 때도 총력을 기울여야겠군요." 서문도옥의 말에 서문전은 다시금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 그리고 자애롭기 그지없는 음성으로 물었다. "어찌하여 그리 생각하는 것이냐?"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 마교를 상대햘 때 유리할 것이라 생각 합니다. 실상 할어버님께서 마교를 상대한 후 정의련을 상대하는 것은 극심한 피해을 본 이후에 정의련에게 또다시 전력을 잃게 되 는 것을 우려하신 게 아닙니까?" "그렇지!" 서문전이 손자의 말에 무릎을 쳤다. "압도적인 전력으로 쉬운 상대를 손실 없이 처리하고자 함이야. 정의련이라면 천음이 없이도 쉽게 해결할 수 있으니까. 마교나 사 파연합이 손을 거들지 않는 한, 우리는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을게 야." "놈들이 연합할 가능성은 눈곱만큼도 없을 겁니다." 서문도옥이 확신에 차 말을 했다. 오랜 세월 무림맹에서 지내온 그였기에 정도 무인들의 특성을 잘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문전은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이에서 서문탁만이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2> "무림맹의 뜻은 이미 뜻을 들어 알고 있소이다. 지금 련주께 다 시 한 번 보고를 올렸으니 거처에서 쉬고 계심이 어떻겠소?회신이 오는 대로 그 내용을 알려드리겠소이다." 정의련 남창지부장 언무의는 가급적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며 말 했다. 무림맹과 패종회 연합은 한조백의 손녀와 제자들, 그리고 적풍 조원들을 넘길 것을 통보해왔다. 그리고 채 삼 일이 지나기도 전에 삼십여 명의 인원이 이렇게 남 창지부에 찾아든 것이다. 정의련이 공식적인 회다미 있기 전이니 상식 밖의 무례였다. 하지만 언무의는 함부로 노기를 드러낼 수 없었다. 방문한 자 중 여덣 명은 한 눈에도 자신 따위는 일장에 쳐 죽일 수 있는 절대의 고수임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오대세가의 가주들이라 할지라도 저 정도의 고수라면 상 대가 되지 않으리라는 것이 언무의가 내린 결론이었다. 따라서 지부의 식속들을 생각해서라도 언무의로서는 행동을 조 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흉흉한 기세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만큼. 사소한 실수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만들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정의련의 행사는 실로 여유롭기 그지없구려. 무림맹의 상징인 십전성이 악적들에게 급습을 당해 피해을 입고, 반도들이 탈주했 소. 이 와중에도 여유를 부리다니 정녕 무림맹과 패종회의 체면 따 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말이오?" 언무의는 치미는 노기를 억지로 눌렀다. 상대의 체면을 고려치 않는 것은 외려 무림맹과 패종회였다. 하지만 지금은 시시비비를 가릴 때가 아니었다. 자칫 큰 화를 부를 수 있는 상황임을 다시 한 번 상기하면 그는 최대한 완곡한 어조를 유지했다. "공식적인 통보가 전해진지 채 며칠이 지나지 않았습니다." 언무의로서는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전서구를 나려 현재의 상황을 보고한 만큼 각 세가에서 고수들을 파견할 시간을 벌어야했던 것이다. 이대로 이들을 돌려보내 며칠간만이라도 시간 을 확보할 수 있다면 일단은 한숨을 돌릴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사 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파악하여 각 세가의 가주들이 직접 와 주기 만을 바라는 그였다. "흥! 본 연합은 한없이 정의련의 느긋함들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소이다." 무림맹,패종회 연합에서 파견되어온 고수의 말에 언무의는 사 뭇 불길한 느낌에 휘감겨 들었다. 억지를 쓰는 저의가 짐작이 가지 않는 것이 아니었으나, 이토록 강경한 태로로 일관하는 것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기 마련이었다. "기다릴 수 없다는 뜻은.....?" "후훗, 아직도 모르겠나? 당신네가 결정을 서둘러야할 동기를 제공하고자 하는 거지." ".......!" 언무의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상대의 몸에서 물씬 뿜어져 나오는 살기를 감지한 것이다. '이.이놈들!남창비부를 희생양 삼아 정의련에 선전포고를 하려 는 게로구나!' 그제야 방문한 자들의 불순한 저의를 명백히 파악한 연무의 였 다. "가, 감히 그런 일을.....? 향후 정의련과의 관계가 어찌 될 것인 가에 대해 염두에 두고 하시는 말씀이시오?" "크크크큭! 왜 우리가 정의련 따위와의 관계에 대해 염두에 둬야 하는 건데?" 불청객들은 이제 노골적인 살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언무의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오늘의 일에 길보다 흉이 많을 것은 이미 정해진 사실. 더 이상 고개를 숙이는 것은 그야말로 정의련의 체면에 먹칠을 하는 셈이었다. 이미 대대적인 삼행을 각오하고 방문한 자들이다. 목숨을 구결하는 행위 자체가 무의미한 터. 비록 실력 차가 분명하더라도 맞서 싸울 수밖에 없었다. "흥! 패종회의 무도함이 이렇게 드러나는구나! 역시 음모로 무림 맹을 장악한 악적들에 불과한 것임을 스스로 드러내는군." "후훗, 그것으로 충분해!정의련 남창지부장의 발언은 우리가 이 곳을 쓸어버릴 이유가 되어줄 테니 말이야." 중앙에 서 있던 노인의 한 마디에 다른 일곱 명의 신형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니 움직였다 싶은 그 순간, 그들의 신형은 잔뜩 경계심을 머금 고 있는 남창지부원들의 앞에 도달해 있었다. "아아악!" "커억!" 우후죽순 터져 나오는 비명과 신음성. 일곱 노인들의 일방적인 도살이 시작된 것이다. "멈춰라!" 언무의는 노갈을 터뜨리며 신형을 날렸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백련정강으로 만들어진 애검이 뽑혀져 있었다. 수십 년의 세월 간 익혀온 검로를 쫒는 언무의의 검. 남창지부장의 중책을 맡은 만큼 그의 검은 쾌속했다. 남창비부를 방문하여 스스로를 포영후(包英厚)라 밝힌 노인의 입 매에 비웃음이 맺혔다 동시에 그의 손이 먼지를 털어내듯 슬쩍 움직였다. "크억!" 번쩍이는 빛이 발하고 언무의는 날아가는 속도보다 빨리 뒤쪽으 로 튕겨졌다. 땅바닥에 나뒹구는 언무의의 입에서는 한 사발은 족히 됨직한 피가 쏟아져 나왔다. 포영후는 백존 중 서열 십칠 위의 절대고수. 애초에 언무의가 상대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였던 것이다. "크흐흣. 그래도 움직이지 않는 게 좋아. 오늘 이곳에서 일어난 일을 똑똑히 보고 세상에 전하는 게 네놈의 역활이니까, 감히 패종 회의 뜻을 거스르면 어떻게 되는지 알리는 역활 말이야." 포영후의 비웃음에 언무의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내장이 끊어지는 고통 때문만은 아니었다. 노인들으 손짓에 이 어지는 비명성이 그를 괴롭히는 것이다. 십 수 년을 함께한 수하들 의 비명이다. 그들의 뇌수가 하늘로 튀고, 붉은 피가 남창지부를 적 시는 중이었다. 그 와중에 언무의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포영후의 장력에 적중당한 그로서는 호흡을 잇는 것조차 버거웠던 것이다. 분노와 절망의 감정을 이기지 못해 언무의의 눈가가 젖어들었다. 억울함을 이기지 못한 혈루(血淚)였다.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장으로 변한 남창지부. 몰살의 과장은 내력이 주입된 한 외침과 더불어 멈춰 섰다. "감히!" 탁한 비명성과 함께 양때를 휘젓고 다니는 늑대처럼 남창지부원 들을 학살하던 일곱 노인 중 한명의 외침이었다. 누군가 자신의 일 장을 막아낸 것이다. 이곳 지부에서 제일고수랄 수 있는 언무의라 해도 자신의 일장을 막아내지 못할 것인데 웬 애송이 하나가 튀어 나와 장력을 해소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장내에는 여태 보니 못한 두 명이 등장해 있었다. 큰 눈을 가진 청년과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다. "네놈은 누구냐?" 포영후의 노갈에 언무의는 그의 시선을 쫓았다. 혹시나 하는 기대를 담았던 그의 눈이 크게 떠졌다. 창자가 끊어 지는 고통과 절망적인 상황에 일그러졌던 그의 표정도 밝아졌다. 나타난 두 사람 중 한 명의 얼굴이 눈에 익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순간, 그 누구보다 반가운 얼굴이었다. 입에 머금은 피가 튀는 것을 개의치 않고 언무의가 소리쳤다. "독고 대협!" 그가 외치는 곳에는 갑작스레 자취를 감춰 정의련이 모든 이를 안타갑게 했던 독고건이 서 있었다. 한데, 백발마신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정도 무림인들의 자부심 이 되어 주었던 그였다. 남창지부의 몰살이 기정사실화 된 작금의 상황에서 언무의에게 독고건 이상의 반가운 인물이 있을 리 없었다. 언무의가 고통을 잊은 채 반색을 하는 모습에 포영후가 중얼거 렸다. "금강신협?" 지난 날 무림을 위진하던 독거건의 이름과 별호를 포영후라 해 서 모를 리 없었다. 패종회에 있어 백말마신과 더불어 우선적 제거 대상에 올랐던 인물이라 더욱 그랬다. "후후훗, 이거야 원! 쓰레기를 치우려다 제법 값나가는 물건을 발견했구나." 잔인한 미소를 그려내는 포영후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사실 상 정의련의 남창지부 따위를 몰살시키는 일은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백존 서열 십칠 위인 자신의 첫 활약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여 기던 포영후였다. 한데 이곳에서 제법 거물랄 수 있는 자를 만나게 되었으니 그 를 처리한 공로를 인정받을 것에 벌써부터 웃음이 지어졌다. 물론 금강불괴지신을 연성했다는 금강신협의 무공을 마냥 무시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알려진 바에 의하면 금강신협의 무공은 백발마신의 아랫 이거나 그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백존 서열 중하위의 다섯 명에게 죽음 직전까지 몰렸던 백발마 신이다. 그보다 무공이 약한 금강마신이 서열 십칠 위의 자신을 포함한 배족 여덟을 감당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임을 자신하는 포영후였다. 아니 현존하는 무림의 그 누구라도 자신과 일곱 명의 백존을 단 신으로 이길 수는 없다는 것이 포영후의 생각이었다. 그의 입에서 미소가 걸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포영후가 외쳤다. "초벽충(楚碧充),제목한(濟穆瀚). 놈을 죽여라!" 각각 서열 삼십육 위와 삼십구 위인 초벽충과 제목한은 포영후 의 외침에 잠시 멈칫 거렸다. 아무리 금강신협이라지만 자신들이 협공을 해야 할 정도라고까지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포영후의 표정으니 확고했다. 그는 이미 금강신협이 처단 을 자신의 공으로 세우고자 하는 중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소 한의 피해만으로 금강신협을 제압해야만 했다. 이곳은 수하들이 백발마신을 상대했던 동정호변과는 달랐다. 세 인들의 눈이 없는 것이다. 체면을 따질 이유도 없었고,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금강신협의 죽음 이후, 이곳에는 살아 숨 쉬는 것은 존재 하지 않게 될 것이기에. 잠시 망설이던 두 노이었으나, 상급자인 포영후의 명을 무시 할 수는 없었다. 둘은 잠시 눈짓을 교환한 후 양손에 장력을 끌어 모았다. 적색과 청색의 강기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순간, 금강신협의 신형이 제자리에서 꺼지듯 사라졌다. "조심!" 포영후의 경고성이 채 끝나기도 전 금강신협의 모습이 제목한의 앞에 나타났다. 가히 상상을 초월한 신법에 제목한은 기겁을 했다. 소문이란 과장되기 마련이기에 협공을 지시한 포영후의 명에 내 심 불만을 가지고 있던 그였다. 불만은 그로 하여금 잠시나마 머뭇 거리게끔 했고, 내력이 강기에 주입되는 속도도 한가로웠다. 한데 소문에 비해 부족하지 않은, 아니 소문으로는 결코 표현할 수 없는 경이적인 신법으로 상대가 눈앞에 나타나니 제목한으로서 는 온 신경이 곤두설 일이었다. 그는 체 내력이 다 주입되지도 않은 강기를 앞으로 쏘아 보냈다. 동시에 신형을 뒤로 뽑는 제목한. 상대가 자신의 장력을 해소하는 사이 스스로를 재정비할 시간을 벌려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금강신협은 제목한의 청색강기를 가벼운 손짓으로 옆으로 흘려 보내고, 눈부신 속도를 발하는 신법으로 바짝 거리를 좁혀온 것이 다. 그와 같은 광겨에 포영후를 비롯한 장내에 있던 백존 전원은 경 악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놀라움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제목한의 입가에서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오고 그의 어깨에서 붉 은 선혈이 솟구치는 장면이 이어진 것이다. "저럴 수가?" 금강신협의 손에서 뻗어 나온 수강이 제목한의 어깨 아래를 잘 라낸 것이다. 그 단면은 너무나도 예리해 마치 보검을 사용한 것처 럼 보였다. 심검을 운용한 것이 아닌 단순한 수강으로 어찌 저런 예 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놈!" 금강신협의 가공할 신법에 잠시 넋을 놓았던 초벽충의 장력이 그제야 그의 손에서 떠났다. 한껏 내력이 집중된 초벽충의 강기는 가공할 기세를 뿜어내며 날아가기 시작했다. 대기를 가른 적광(赤光)은 긴 잔상을 남기는가 싶더니 어느새 금 강신협에게 도달해 있었다. 제목한에게서 이제 막 시선을 돌린 금강신협이 피하기란 불가능 해 보이는 상황. 과연 금강신협은 어찌해볼 도리를 찾지 못하고 초벽충의 장력에 고스란히 가슴을 내주고 말았다. 쿠아아앙. 귀청을 찢을 듯한 폭음성이 터지고 금강신협의 신형이 뒤쪽으로 밀려났다. 무려 일곱 걸음이나 물러선 후에야 몸을 멈춰 세운 금강신협. 그를 바라보며 초벽충이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크흐흐흐.....금강신협이라더니 과연 튼튼한 몸을 지녔구나." 초벽충의 웃음소리에 포영후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도 다시금 여유를 찾았다. 상상을 초월하는 경신공부에 놀라 제목한이 팔을 잃은 것은 안 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금강신협이 제목한에게 전력을 기울인 탓에 외려 쉽게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이다. 포영후가 이토록 안심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초벽충이 날린 강기는 적성연격장(赤星蓮擊掌)의 한 수였다. 적성 연격장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첫 번째 특징은 일단 강기를 한 번 생성한 이후에는 눈부신 속도 로 강기의 제발출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는 양 손 사이에 형성된 강기 중 일부가 쏘아지고 나머지의 강기에 내력을 보충해 연속으로 발사하는 적성연격장의 묘용 때문이었다. 두 번째 특징은 일부의 분활된 강기가 만들어내는 위력에 있었 다. 전력이 담겼다고 볼 수 없는 강기의 파괴력을 보충하기 위해 적 성연격장은 기묘한 파장을 내포하고 있었다. 진동과도 같은 적성연 격장의 파장은 적중된 상태의 내부를 송두리째 휘저어 놓는다. 적중 당시에는 일순 멀쩡한 듯하나 파장이 내부에 전해지며 내 장이 걸레처럼 찢겨 나가는 것이다. 이는 호신강기를 익힌 고수들 에게 주효하면 금강불괴지신이라 해도 멀쩡하기는 힘든 효과를 만 들어 내다. 맞부딪치는 힘에 쉽게 와해되는 단점이 있는 대신, 일단 몸에 적중하게 되면 치명적인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금강신협은 그런 적성연격장을 가슴에 고스란히 맞았다. 적게는 중상이요. 제대로 효용을 말한다면 곧 숨이 끊어질 수도 있는 상태 라는 뜻이었다. 포영후나 초벽충의 웃음에는 그와 같은 결과에 대한 기대가 남 겨져 있었던 것이다. 한데 그들의 기대와는 다른 결과가 펼쳐지고 있었다. 억지로 버티며 뒤쪽으로 물러섰던 금강신협이 고개를 끄덕이며 뭔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짓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금강신협에게서는 파리한 안색이나 각혈은 물론이 거니와 고통스러운 표정조차 찾을 수 없었다. 마치 누군가 강하게 밀어 몇 걸음을 물러난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역시......기운을 담아 흉내 내는 것과 묵연수투 자체가 되는 것 에는 큰 차이가 있는 거군." 멀쩡한 모습으로 중얼거리는 금강신협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한조백 뿐이었다. 선죽혁이 하나의 깨달음을 실전에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그만이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네. 이놈!" 자신의 적성연격장에 적중당하고도 멀쩡한 듯 서 있는 금강신협 의 모습에 초벽충은 극노했다. 그 어떤 자라 해도 연환되는 공격에 몸에 적중하기만 하면 승리할 수 있다고 믿어온 자부심에 금이 갔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남아 있던 그의 양손 사이의 강기가 재차 강렬한 빛을 발했다. 다시 한 번 대기를 가르는 붉은 강기. 죽음을 머금은 불긴한 잔상이 허공에 긴 흔적을 남긴다. 거의 발출과 동시에 금강신협의 가슴에 도착한 적성연격장. 산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다시금 금강신협의 신형이 뒤 로 밀렸다. 여섯 걸음. 더욱 맹렬한 기세로 쏘아졌던 장력이건만 금강신협은 이전보다 한 걸음을 줄여 몸을 멈춰 세웠다. "이, 이럴 수가?" 이번에도 멀쩡한 모습의 금강신협을 확인한 초벽충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나머지 백존들의 안색도 변했다. 금강신협이라는 자는 빠른 경신 무공을 이용한 급습으로 제목한 에게 부상을 입힌 게 아니었다. 진정한 금강불괴지신을 연성한 절대 고수임을 확인한 것이다. 당금 무림에서 적수를 찾을 수 없을 거라 여겼던 백존들어었기 에 막강한 적의 등장에 대한 충격은 컸다. 백존 서열의 상위를 차지 하고 있는 그들로서는 이런 곳에서 생명의 위협을 받을만한 적을 마주하게 될 것을 상상치 못했지 때문이다. "모,모두 놈을 죽여!" 이대로라면 공을 세우기커녕 상상키 힘든 피해를 입게 될 수 도 있었다. 협공을 명령하는 포영후의 다급한 외침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 이었다. Chap8 분신 <1> 포영후가 아니더라도 제목한을 제외한 여섯 명의 백존들은 이미 협공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초벽충의 장력을 맨몸으로 받아내 는 고수에 대한 위기감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빠른 움직임으로 거대한 원을 그리듯 금강신협을 포위했다. 명령을 내린 포영후 스스로도 양 손 사이에서 강기를 만들어냈 다. 맹렬한 기세를 담은 백색의 구체가 그의 손에서 빛을 발했다. 일곱 개의 구체가 빛을 발하자 장내의 긴장감은 극에 달했다. 남창지부원들의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켜 세운 언무의는 마른 침을 삼켰다. 무시무시한 고수들의 협공을 받게 될 금강신협의 안 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손에 남창지부의 운명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아무리 금강불괴의 독고건이라지만 이 정도나 되는 고수 일곱의 협공을 단신으로 받아내는 데는 무리가 있었다. 이들 일곱의 장력 이라면 태산을 허물 수도 있을 것만 같았던 것이다. 언무의는 땀이 배어나오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금강신협과 백존들의 대치를 바라보는 남창지부원들 역시 마찬 가지였다. 간절한 염원을 담아 금강신협을 응원하는 것이다. 순간, 금강신협이 있는 곳에서 강렬한 폭발음이 터졌다. 더불어 엄청난 양의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백존들이 장력을 발 출하기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금강신협이 강하게 땅을 밟아 일부러 흙먼지를 만들어낸 것이 다. 한순간 시야가 가려졌지만 백존 중 누구도 당황하는 이는 없었 다. 이미 눈에 의지해 사물을 보는 경지를 넘어선지 오래었기 때 문이다. 백존들은 무의미한 상대의 행동을 비웃였다. 초벽충의 장력을 맨 몸으로 받아낸 것은 실로 놀라웠지만 지금의 행동은 아무런 소 용이 없는 시도였던 것이다. 백존들은 기감을 통해 느껴지는 방향을 향해 장력을 날릴 준지 를 마쳤다. 그 순간, 일곱 명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강기를 발출하려는 찰나 금강신협의 몸에서 느껴지던 기감이 사 라진 것이다. 마치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듯 먼지 구름 안쪽에서 아무 것 도 느낄 수 없었다. 포영후를 포함한 백존들은 신경을 최대한 예민한 상태로 만들었 다. 아마리 기를 감추려 든다 해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자신들 정도의 고수라면 당연히 주변 환경과 구분되는 기감을 느낄 수 있 기 마련이고, 금강신협은 발각이 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다. 먼지 구름 내에서는 전혀 이절적인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야말로 금강신협이 사라 져 버린 것이다. 한껏 끌어 모은 장력을 발출할 곳을 잦지 못하던 백존들은 서서 히 당황하기 시작했다. 장력의 적중범위를 넓혀 그대로 날려 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 지만 상대는 적성연격장에 적중당하고도 끄떡없는 인물. 집중되니 않은 장력에 당할 리 없었다. "먼지를 걷어내!" 포영후가 수장답게 묘안을 냈다. 부드러운 장력을 발해 먼지를 걷어내면 될 일이었다. 명령이 누구를 향간 것인지는 명확했다. 일곱 중 가장 부르더운 장력을 구가하는 월문택(越文澤)이 강기 의 기운을 변환했다. 넓은 범위로 퍼져가는 흙먼지를 걷어내기 위 한 장력을 준비하는 것이다. 그 순간. 포영후의 다급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놈이다!" 먼지의 안쪽에서 기의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막강하기 이를 데 없는 기도를 한껏 드러낸 움직임이었다. 두말 할 것 없는 금강신협 이었다. 포영후의 외침이 아니어도 그와 같이 선명한 기감을 놓칠 백존 들이 아니었다. 백존들의 손 사이에서 강기가 쏘아졌다. 아마루 빠른 신법을 전개한다 해도 빠져나갈 구멍은 없었다. 일 곱 명의 백존들의 날린 장력은 인간이 움직일 수 있는 모든 방위를 점하며 금강신협을 옭죄어 들어가는 중이었다. 쿠아아앙. 한 수레의 벽력탄이 터지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동시에 흙 먼지의 중심 쪽에서 일진광풍이 불었다. 완벽하게 집중되 장력의 적중이었으나 너무나도 거대한 힘인지라 장력의 여파가 생긴 것이 다. 엄청난 굉음과 여파에 내력이 약한 남창지부원들은 내상을 입고 비틀거려야만 했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이 어두워진 것은 내상 때문이 아니었다. 저 와 같은 장력에 적중당하고도 무사할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리 라는 생각이 그들을 절망으로 몰고 갔다. 아무리 완벽한 금강불괴지신을 연성한 독고건이라지만 이번의 공격에는 무사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이다. 백 존들이 쏟아낸 장력은 그와 같이 절대적인 위력이 있었다. 하지만 관전자들은 아직까지 완전히 미련을 버리진 못했다. 절 대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독고건이야말로 유일한 희망이 였기 때문이다. 백존들의 장력으로 인해 땅에서는 더 많은 양의 흙먼지가 피어 올랐다. 또한 장력의 여파는 먼지 구름의 범위를 더욱 확장시켰다. 장내의 상황은 더욱 구분이 어렵게 변해버렸다. 이런 탓에 장력에 적중당한 금강신협의 상태는 아직 알 수가 없 었다. 그래서 남창지부원들은 최후의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포영후의 웃음이 그들의 희망을 짓밟았다. "크하하하핫!" 그것으로 결과는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제법 오랜 동안 우리의 이목을 속였다만 부질없는 짓이었어." 자신과 수하들의 장력으니 정확히 금강신협에게 적중했다. 막강한 장력에 타격을 받은 금강신협은 갈가리 찢겨 나갔다. 당연한 일이었다. 천하에서 가장 강한 백 명이라 자부하는 백존들이다. 그 중 상위에 속하는 일곱의 장력을 단신으로 감당하기란 불가 능한 일. 아무리 금강불괴지신이라 해도 이번에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결과는 눈으로 불 수는 없지만 그와 같은 현상은 너무도 선명히 느껴졌다. 금강신협에게서 느껴졌던 기감이 허고에 흩어지는 것을 분명히 확인한 것이다. "케헤헷! 튼튼한 몸뚱이 하나만을 믿더니 형체조차 남기지 못하 고 흩어져버리다니....." 흙먼지가 자신을 삼키고 있음에도 개의치 않고 월문택은 통쾌하 기 이를 데 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예상치 못했던 위협으로 인해 한껏 긴장한 상태였다. 한데 이토록 수월하게 적을 처치하자 주제 못할 기쁨이 느껴지 는 것이다. 괜스레 위축되었던 자신에 대한 부끄러운 마음을 떨쳐 내기 위해 그는 더욱 과장 되게 웃음을 터뜨렸다. "저따위 놈이 정도 무림을 대표하는....응?" 한껏 승리에 대한 기쁨을 만끽하려던 포영후의 오만한 발언은 중단되었다. 분명히 찢겨나갔던 금강신협의 기감이 다시 느껴지는 것이다. "어,어떻게 저런 일이......?" 지금껏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지 못하던 월문택의 안색도 창백해 졌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자가 어떻게 완전한 기감을 뽐내듯 나타날 수 있단 말인가? 그저 나타난 것만이 아니었다. 금강신협은 막강한 기도를 내뿜으며 자신을 향해 달여오는 중이 였다. "어,어....?" 월문택이 당황하는 사이. 나머지 백존들은 황급히 내력을 끌어 모았다. 금강신협의 죽음 을 확신하고 있던 그들이었다. 막가한 장력을 발출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한 상태. 하지만 금강신협은 그런 여유를 허용하지 않았다. 황망히 쳐낸 월문택의 장력은 무위로 돌아가고 금강신협의 일 장이 그를 튕겨냈다. 자욱한 흙먼지 바깥쪽으로 날아간 월문택. 그는 입에서 끊임없이 검붉은 피를 쏟아냈다. 희생불능의 내상 을 입은 것이다. 먼지루름 바깥쪽의 남창지부원들은 그 모습에 다시금 희망을 찾 았다 금강신협이 벌써 두 명의 적을 해치운 것이다. 흙먼지 안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다시금 금강신협 의 선전을 기원하는 그들이었다. "또?" 포영후의 이마에서는 서서히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미 그가 서 있는 곳까지 먼지가 덮친 상태였다. 한데 월문택이 중상을 입은 것을 느끼자마자 금강신협의 기감이 다시 사라져버렸다. 따라서 잔뜩 내력을 주입한 강기를 어디로 날 려야할지 갈피를 못 잡는 것이다.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는 건지 그들은 알지 못했다. 죽었던 자가 살아나고, 또다시 우령처럼 모습을 감춘다. 고작 흙먼 지에 시야가 가로막힌 것뿐인데 당황스럽기 그지없는 결과를 만들 고 있었다. 기감을 완벽히 지우는 것은 션주혁에게 있어 어려운 일이 아니 었다. 스스로의 기운을 완벽히 주변과 동화시키면 될 일이었다. 몸 주위를 맴도는 미약한 기운을 흡수하고 그 기운을 고스란히 발산하 기만 하면 되었다. 그렇게 흙먼지 속에서 완벽히 자신을 지운 선주혁은 그간의 깨 달음을 통해 얻은 성과를 하나씩 시험하는 중이었다. 백존들의 장력을 받아낸 것은 실상 선주혁 자신이 아니었다. 아무리 전신을 묵연수투 자체의 기운으로 보호한다 해도 백존 일곱의 공격을 감당해 내는 것은 무리였다. 따라서 선주혁은 다른 방법으로 백존을 생대하고자 했다. 선죽혁은 스스로 자유롭게 강기의 형상을 바꿀 수 있고, 그 강기 에 기운을 담아낼 수 있다 .그와 같은 이점을 자유로운 사고 속에서 응용해보기로 했다. 한조백이 말한 것처럼 자유로운 상상력, 그리 고 의지로 무공을 구사하는 것이다. 이데 자신의 형상으로 강기를 만들고, 그 강기에 본인의 기운을 담았다. 즉, 백존들의 금강신협이라 생각하고 장력을 쏟아 부은 대상은 실제의 선주혁이 아니라, 선주혁이 만들어낸 강이였던 것이다. 엄청난 공세에 흩어져버러렸다고 여긴 그들의 생각은 실상 틀린 것이 아니었다. 선주혁과 같은 기운을 담고 있던 강기는 실제로 백 존들의 장력에 의해 허공에 흩어졌기 때문이다. 시각이 차단된 흙먼지 안쪽에서 선주혁의 이와 같은 방법은 상 대에게 극도의 혼란을 야기 시켰다. 기감에 의지하는 그들로서는 선주혁이 만들어낸 강기를 선주혁 자체로 여길 수밖에 없는 것이 다. "누가 먼지 좀 걷어내!" 노기 어린 포영후의 외침. 하지만 월문택의 중상을 입은 지금. 누구도 포영후의 명에 앞으 로 나서지 않았다. 기척을 지운 금강신협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상황. 함부로 힘을 분산시켰다가 그의 급습을 받게 될지 모른다는 불 안에 장력을 발출하지 못하는 것이다. 단 일 수에 제목한의 팔이 잘리고 월문택이 죽음 직전에 몰랐다. 아니, 저와 같은 내상을 입었으니 이미 죽은 것과 다름 없었다. 물론 먼지를 걷어내면 금강신협을 찾을 수 있고, 협공으로 그를 죽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틈을 노려 공격을 당하게 되면 자신 역시 무사하지 못 할 것이 염려됐다. 희생을 통해서만이 적을 처리할 수 있는 상황. 그러나 희생을 당하는 대상이 자신이길 바라는 이는 아무도 없 었던 것이다. 자신의 명령에 나서는 이가 없자 포영후는 직접 수하의 이름을 호명했다. "윤세경(尹世境)! 먼지를 없애라고!" 이름이 불리자 한 노인이 인상이 찌푸려졌다. 하필 자신이 희생 양으로 결정된 것이다. 욕시 튀어나올 정도로 불만스러운 상황이었 지만 명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윤세경은 땅을 박찼다. 신형을 뒤로 뽑는 것이다. 금강신협이 자 신을 공격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상황이다. 이게 거리를 벌려 놈의 급습에 대비할 시간을 벌려는 것이다. 하지만 적은 바보가 아니었다. 명령 이후의 움직음은 정확히 포 착되었고 먼지의 중심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는 너무나도 분명했다. "온다!" 금강신협의 기감이 자신을 향해 쇄도해 들어오는 것을 느낀 윤 세경은 장력을 쳐내 먼지를 걷어내는 것보다 자신의 위급한 상황을 알리는 데 급급했다. 먼지가 걷히길 기다려 금강신협을 향해 장력을 쏟아낼 준비를 하던 백존들은 윤세경에게 접근하는 기의 형체를 향해 강기를 날렸 다. 막강무비한 장력은 다시금 폭풍처럼 몰려갔다. 쿠아아아앙! 강기의 작렬은 필연적인 굉음을 만들어내고 일대는 다시 엉망이 되었다. 적지 않은 여파와 더욱 자욱해진 흙먼지로 가득해진 것이 다. 그제야 넓은 범위를 향해 장력을 뿜어내는 윤세경. 이번에야말로 금강신협의 죽음을 확인하려는 것이다. 윤세경의 장력이 광범위하게 펼쳐진 흙먼지를 몰아내려는 찰나. 지축이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걷혀가던 먼지가 다시 피어올랐 다. "놈이다! 놈이 아직 살아 있다!" 놀란 윤세겨의 외침. 하나 그 소리는 곧 처절한 비명성으로 이어졌다. 허공에서 솟구치듯 흙먼지 속에서 금강신협이 나타나 그의 가슴 을 후려친 것이다. 흙먼지 바깥쪽으로 튕겨나간 윤세겡의 가슴에는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다. 마치 거대한 창이 그의 가슴을 꿰뚫고 지나간 것만 같았 다. 오른손을 들어 가슴에서 솟구치는 선혈을 막아보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은 상태였다. 창백하게 질린 윤세경은 무엇인가를 말하려 안간힘을 썼지만 그 에게서 들려오는 것은 피가 들끓는 소리뿐이었다. 곧 밑동이 잘린 거목처럼 윤세경이 쓰러졌다. "우아아아아!" 환희에 찬 함성. 그것은 간절한 심정으로 금강신협을 응원하고 있던 남창지부원 들의 것이었다. "금강신협께서 또 한 명을 처리하셨다." 남창지부원들에게 있어 금강신협은 구명의 빛이다. 독고건이 벌써 세 명이나 되는 패종회의 고수들을 죽음으로 몰 고 가자 희망의 색은 더욱 짙어졌다. 남은 것은 죽음뿐이라 여겼던 상황이 역전된 것이다. 이제 그들은 생의 도모가 아니라 승리를 꿈꾸기 시작했다. 역시나 무리하고 여겼던 상황이건만 금강신협이 압도적인 무위 로 패종회의 고수들에게 승기를 잡아가는 중이었다. 이대로라면 비 단 목숨을 건지는 것뿐 아니라 패종회의 악적 모두를 죽일 수도 있 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두, 둘! 아니, 놈이 셋이다!" 자욱한 먼지구름 안에서 포영후의 놀란 외침이 들렸다. 금강신 협이라 여겨지는 기감이 셋으로 불어난 것이다. 백존들은 절망어른 혼돈에 빠졌다. 어찌하여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그들은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술이라 여길 수도 없었다. 눈의 혼란을 야기해 분신술을 사용하는 사술에 대가들이 있다. 하지만 그와 같은 방법은 이류에나 해당하는 무인들에게나 통용 되는 방법. 분신술로 만들어진 환영에는 실체와 같은 기감이 느껴지지 않는 다. 백존 정도의 고수들을 속일 수는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먼지 안쪽에서 일어나는 기이한 현상을 그들은 당최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유일한 납득의 방법은 금강신협이 원래 셋이라는 것뿐. 이해불 가의 특수한 방법으로 기감을 감추고 있다고 이제야 모습을 드러낼 경우라면 지금의 현상도 가능할 법했다. "장력을 날리지 말고 근접전을 통해 놈을 죽여!" 아마리 흙먼지가 짙다 해도 근접해 박투를 벌이다보면 실체가 드러나기 마련이다. 초식의 교환 중에서 발생하는 경풍이 먼지를 걷 어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다면 상대가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 파 악할 수 있을 거라는 게 포영후의 계산이었다. 그의 목적을 알아챈 백존들은 안쪽에서 느껴지는 기감을 쫓아 각각 신형을 움직였다. 아직까지 수적 우세를 점하고 있는 만큼 불리한 상황은 아니었 다. 그들이 세 명의 금강신협을 향해 각각 신형을 날리자 또다시 기 감이 사라졌다. 박투를 벌이기 위해 목적한 방향에 도착했을 때는 텅 빈 공간뿐이었다. "여우같은 놈!" 백존 서열 삼십오 위의 안독(安獨)이 분을 누르지 못해 투덜거렸 다. 그런 안독이 순간적으로 옆쪽을 향해 장력을 발출하려 했다. 누 군가의 접근을 느낀 것이다. 하지만 안독은 곧 접근한 기감을 구분해냈다. 접근해온 인영의 손 주위에서 느껴지는 것은 초벽충의 적성연격장에서 비롯된 기감 이었다. 초벽충이 자신보다 조금 늦게 금강신협을 노리고 달려든 것이라 생각하고 공격해가던 손을 멈춘 그 때였다. 무엇인가 이상한 변화가 느껴졌고, 곧 초벽충이라 여겼던 자의 몸에서 낯선 기감이 뿜어져 나왔다. "헙!" 안독의 미처 대비를 하기도 전, 바로 옆에 서 있던 자는 맹렬한 장력을 뿜어냈다. 무방에 상태였던 안독은 고스란히 장력에 적중당하고 말았다. 그의 신형은 팽이처럼 회전하며 십여 장을 날아올랐다. 북두회류장이 그의 몸에 작력한 결과였다. 이는 선주혁이 두 번에 걸쳐 초벽충의 장력에 적중당하는 동안 적성연격장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고, 그 기운은 흉내 냈기 때문에 벌어진 현상이었다. 백존들이 냉철한 상태였다면 구분이 가능할 정도의 흉내에 불과 했다. 하지만 지금의 백존들은 크게 흔들리고 있는 상태. 극한의 혼돈 속에서 초벽충과 선주혁의 흉내 사이의 차이를 느 끼기라나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게다가 워낙 순각적으로 일어난 일이라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 기 어려웠던 것이다. 초벽충의 기감을 느꼈던 것은 안독뿐이이 아니었다. 예민하게 기감을 곤두세우고 있던 백존들이다. 안독과 달리 거 리를 두고 상황을 판달할 여유를 가지고 있던 그들은 놀라운 사실 을 깨달을 수 있었다. "초벽충이 두 명?" 포영후의 놀란 외침에 초병충이 재빨리 반응했다. "전 이쪽에 있습니다." 다급한 초벽충의 외침. 자칫 자신을 향해 백존들의 공세가 쏟아질 것을 염려한 탓이었 다. 초백충의 다급한 음성을 들은 포영후의 머릿속에 번쩍하고 하나 의 생각이 떠올랐다. 포영후가 내력을 실어 외쳤다. "진(陣)이다! 이 안에 진법(陣法)이 펼쳐져 있다. 모두 뒤로 물러 서." 지금과 같은 불가해한 현상의 해답은 오직 하나였다. 기기묘묘한 진법은 때때로 진위를 구분할 수 없는 환상을 불러 일으킨다. 사술과는 달리 진내의 환영은 물리적인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물론 진이 직접 공격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공격이 방향 을 바꿔 되돌아오거나 진 내에 숨어 있는 자가 혼란에 빠진 적을 공 격하는 것이다. 포영후가 애초에 진을 염두에 두지 않았던 데는 이유가 있었다. 자신들 정도나 되는 고수의 이목을 이토록 완벽히 속일만한 진을 구축하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정확한 방위를 따라 진을 구축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천시(天時) 를 따져 진의 기운을 운용해야만 한다. 자신들의 습격 이후 나타 난 금강신협아니 그와 같은 진을 구축할 수 있으리라고는 도저히 생각치 못했던 것이다. 진각으로 먼지를 피워 올리고 그 짧은 순간 진법을 구축했다는 사실은 믿기 힘들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것만이 유일한 해답이었 다. 그러고 보면 초벽충의 적성연격장을 맨몸으로 막아냈던 현상 역 시 진이 만들어낸 것일 가능성이 높았다. 진이라는 포영후의 말에 지금껏 무사한 다섯의 백존들은 분분히 먼지 구름 바깥쪽으로 신형을 날렸다. 적이 설치한 진 안에서 싸우는 것음 금물. 삼류의 무인이라 해도 절진(絶陣)안에서는 초절정의 고수들을 상대할 수 있기 마련이었다. 백존들이 몸을 뺀 잠시 후. 언제까지고 시야를 가릴 것만 같았던 흙먼지가 가라앉았다. 금강신협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백존들은 느낄 수 있었다. 금강신협은 시야를 벗어난 속 도로 포영후를 향해 달려가는 중이었다. 먼지가 걷힘과 동시에 자신을 향해 쇄도해 들어오는 금강신협을 확인한 포영후는 애써 진정하면 침착하게 적을 맞이하고자 했다. 일단 시야가 확보되었다. 이는 진의 범위 밖에 나와 있다는 뜻이다. 아무리 금강신협이라지만 이제는 더 이상 수작을 부릴 수 없을 것 임을 자신했던 것이다. 하진만 금강신협의 행동은 포영후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포영후가 기다리고 있는 근처까지 다가온 금강신협이 신형을 멈 춰 세우며 다시 한 번 직각을 밟은 것이다. 흙먼지로 인해 재차 자욱해지는 일대. "흥! 그깟 간교한 수작에 넘어갈 성 싶더냐!" 포영후는 아무리 대단한 진법의 대가라 할지라도 바로 직전에 발동시켰던 진을 한 순간 재구축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미 천 시를 놓쳤기 때문이다. 따라서 포영후는 자신이 진의 우험에 겁을 먹고 위축될 것을 노 리는 수작으로 단정 지었다. 그리고 침착하게 금강신협의 접근을 기다렸다가 일 장을 날릴 준비를 했다. 한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진각을 밝은 금강신협의 기감이 또다시 사라져버린 것이다. '진이 재발동 돼?그럴 수는 없는데!' 당최 말이 안 되는 상황인지라 포영후는 내심으로 울부짖다시피 외쳤다. 자욱한 머지 안에서 금강신협은 또다시 셋으로 불어났다. "피, 피해!" 이런 상황에서 포영후가 선택할 길은 많지 않았다. 흙먼지가 시야를 가지고 적을 구분할 수 없는 상황. 적을 상대할 방도를 찾지 못하는 것이다. 백존들은 다시금 분분히 뒤로 몸을 뺐다. "그대로 퇴각한다." 어쩔 수 없는 포영후의 외침이었다. 별다은 방도가 없는 상황에 서 적을 상대하는 것은 무모한 것이다. 지독할 정도의 수치심과 모멸감에 몸이 떨릴 지경이었으나, 지 금은 목숨을 건지는 것이 더 중요한 상황이었다. 포영후의 외침을 들은 패종회, 무림맹의 무인들은 꽁지가 빠져 라 달리기 시작했다. 백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혈도를 눌러 지혈을 한 제목한도 잘려나간 자신의 팔을 들고 뛰 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무사하지 못했다. 어느새 뒤를 쫓아온 선주혁이 심검이 그의 허리 어림를 가른 것 이다. 단 한 명의 백존이라도 줄이는 것이 향후를 위해 얼마나 큰 도움 이 될지 명확히 알고 있는 선주혁이었다. 이에 부상을 입은 제목한 을 제거한 것이다. 제목한을 죽인 선주혁은 손을 하늘로 치켜 올렸다. 허공에 거대한 구체가 떠올라 빛을 발했다. 이어 선주혁의 손이 아래로 향해지고 거대한 구체는 수많이 조 각이 되어 퇴주하는 패종회의 무인들을 향해 날아갔다. 북두유성우. 다수의 적을 상대하는데 있어 최대의 효용을 내는 선주혁의 독 문절기가 펼쳐진 것이다. 도주하는 무인들에게 있어서 선주혁의 일장은 재앙이었다. 단 한 명도 무사하지 못하고 모두가 즉사를 해 버린 것이다. 포영후를 비롯한 네 명의 백존만이 치를 떨며 도주의 속도를 박 차를 가할 뿐이다. 선주혁은 그들의 뒤를 쫓지 않았다. 무리를 해서 저들을 쫓을 때 가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우와와와왓!" "독고 대협이 적들을 모두 물리쳤다.!" "금강신협, 만세!" 예의 없이 모두가 부상을 입은 상태지만 남창지부원들은 환호성 을 질렀다. 금강신협의 신위에 힘입어 결국 목숨을 구원받은 것이 다. 그 기쁨을 비할 데는 없었다. 몇몇은 눈물까지 글썽이며 금강신 협을 향해 환호했다. 한동안 모습을 감춰 정도 무인들을 안타깝게 했던 금강신협이 돌아왔다. 그것도 이전에 비해 훨씬 강해진 무위로 말이다. 패종회,무림맹 연합에 잔뜩 위축되어 있던 정의련이었기에 목 숨을 건진 것을 넘어서는 기쁨이 느껴지는 현재였다. 금강신협이 있는 한 정이련의 더 이상 패종회, 무림맹 연합에 숨 죽일 필요가 없다고 믿는 그들이었기에 환호성은 더욱 커져만 갔다. <2> 종남산(終南山)밑자락. 한 무리의 백의인들이 숨을 죽인 채 어둠을 기다리고 있었다. 백 의인들은 십전성을 떠나온 천애백의단원들이었다. "무량수불......, 일단은 적아(敵我)를 구분할 기회를 주시오." 도복을 벗은 채은 덕양 진인이었으나, 습관적으로 도호를 읋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선죽혁의 희생으로 목숨을 구한 덕양 진인은 패종회로부터 청정 을 되찾는 그날까지 한시적으로 천애백의단에 투신한 상태였다. 정 도 무림인으로서는 상상키 힘든 일이었으나, 이미 백발마신에게 크 게 감명을 받은 그였다. 선주혀과 같은 인물을 위해, 그리고 패종회로부터 무림을 구해 내기 위해서는 정사의 구분 따위는 무의미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게 가능하겠어요?" 은설연의 표정은 회의적이었다. "구분은 생각보다 쉬울 것입니다. 장문인이나 장로 중 대부분은 죽었을 테니까요. 살아있는 자가 있다면 그자가 바로 변질자입니 다. 원로의 죽음을 감춘 채, 대신 명령을 내리고 있는 자가 있다면 역시 그가 범인일 것이고요. 그런 자와 패종회에서 파견 나온 자만 을 처리하면 애꿏은 살생을 막을 수 있을 겁니다." 청성에서 당했던 일을 근거로 덕양 진인은 자신의 생각을 말했 다. "옳은지 그른지 구별 못하고 패종회에 휩쓸린 것만으로도 응징 을 받아 마땅한 일. 굳이 어려운 방법을 택할 필요가 있겠소?" 친구 아니면 개새끼! 그것이 주백광의 단순명료한 지론이었다. 패종회와의 연수를 통해 이미 친구이길 포기한 구파일방은 주백 광에게 있어서 개새끼에 다름없었다. 따라서 그는 일말의 동정조차 느끼지 않고 종남파를 쓸어버리기를 원하는 것이다. 친우인 선주혁의 죽음과 연관이 있는 자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책임을 묻고자 하는 그로서는 당연한 발언이었다. 하지만 남지학은 경우가 달랐다. 비록 지금은 파문당했다지만 그는 곤륜파 출신이었다. 구파일방 전원을 몰살하고자 한다면 스스로의 손으로 동문형제 들을 죽여야 한다는 뜻. 이는 남지학에게 있어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제에 이어 사부마 저도 패종회에게 죽임을 당한 입장이었으나, 사리판단이 분명한 그 는 복수할 대상이 누구인지 명확히 알아고 있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채 이용당하는 구파일방의 제자들이 아니라 패종회의 악적들만이 복수의 대상임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음모가 밝혀지면 외려 아군이 되어줄 이들입니다. 덕양 진인의 말씀이 옳습니다." 주백광은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지는 않 았다. 이미 남지학의 탁월한 능력에 대해 인정한 지라 그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이다. 더구나 남지학은 현재 개인적인 감정을 철처히 배제하는 중이었 다. 그의 입장에서는 당장에 곤륜산으로 달려가 패종회의 음모에서 사문부터 구해내고 싶을 것이다. 한데도 대세를 위해 개인적 열망을 억누르고 수순을 밝아 일을 처리하는 중이었다. 그런 남지학의 심정을 알기에 주백광은 제 고 집만을 세울 수는 없었다. "저도 덕양 진인의 말씀대로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 아무리 원로들이 부재하는 종남파이고 우리에게 남 소협이 있다지만, 구파 일방의 저력을 무시할 수는 없어요. 종남파 전면전을 벌인다면 천 애백의단의 손해도 적지 않을 것예요.그러니 소수의 인원을 처리 하는 방법이 나을 것 같아요." 적아를 구분하는 것에 대해 회의적이던 은설연까지 이렇게 나오 자 덕양 진인의 안색이 밝아졌다. 이제 천마맹에서 보내온 정보를 검토하러 간 단목지민이 돌아온 다음, 그녀의 동의를 얻어내기만 하면 됐다. 백응조를 이끄는 단목지민까지 동의하면 종남파의 제자들은 무 고한 죽음을 피해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잠시 후. 전서를 손에 쥐고 단목지민이 돌아왔다. 그녀의 표정이 평소와 다른 것을 모두 느낄 수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은설연이 물었다. 단목지민은 지나칠 만큼 음성을 낮추며 말을 시작했다. "정의현 남창지부에서 변고가 있었던 모양이에요." "변고?" 주백광이 호기심에 눈을 빛냈다. 종남파 전체를 뒤집어엎는 게 아니라 패종회의 몇몇만을 처단하는 것으로 이번 일이 끝날지도 모 른다는 생각에 이쪽에 관심을 더 갖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호사가 적인 기질이 드러나는 것이다. "남창지부에 무슨 일이죠?" 은설연은 선주혁이 독고건의 행세를 하는 동안 남창지부의 출입 이 잦았다. 그렇기에 주백광과는 다른 이유에서 관심을 가질 수밖 에 없었다. "패종회, 무림맹 연합에서 철혈신검의 손녀와 제자들을 내놓으 라며 남창지부에서 행패를 부린 모양이에요." 단목지민의 말에 은설연은 두 눈을 더욱 빛냈다. "패종회에서 본격적인 실력행사를 개시한 거로군요." "그쪽도 이제 준비가 끝났다는 건가?" 주백광 역시 기대에 가득한 표정이었다. 그간 무림의 상황은 답 답하기 짝이 없었다. 계속 긴장감만을 고취기킬 뿐, 이렇다 할 격전 은 벌어지지 않아왔다. 그의 성격과는 결코 부합되지 않는 현실이 였던 것이다. "그런 것 같아요. 남창지부를 쓸어버림으로써 정의련에 선전포 고를 시도했던 모양이에요." "시도?" 주백돵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패종회에서 마음만 먹는다면 정의련의 남창지부 따위는 순식간 에 쓸어버릴 수 있어다. 과거 선주혁이 사해표국에 있을 때, 나타났 던 고수 정도만 투입이 되어도 남창지부 정도는 손쉽게 처리할 수 있는 것이다. 한데 시도라니! 주백광으로는 납득할 수가 없는 말이었다. "백존을 투입하지 않았던 것입니까?" 남지학의 질문이었다. 단목지민의 말에는 부정적인 결과가 내포되어 있었다. 백존 정 도의 고수가 투입되었다면 남창지부 몰살 이외의 결과가 있을 리 없었다. 한데도 시도라는 말이 사용된 것이다. "아뇨. 백존 수준의 고수 여덟이 포함되어 있던 시도였답니다." "여덟? 배존 여덟이 남창지부를 공격했는데 시도에 그쳤단 말이 에요?" 은설연이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남지학이 시기적절하게 내공으로 음파를 차단하지 않았다면 기 껏 몸을 숨기고 있던 게 수포로 돌아갈 정도였다. "그럴 리가! 오대세가의 가주 전원이 그 자리에 있다 해도 백존 여덟을 막아낼 수는 없거늘!" 주백광이 코웃음을 쳤다. 쾌도술 하나만으로도 일문을 일으켜 세우고자 남을 그. 오대세가의 가주에 비해 스스로의 무공이 낮다고 생각해 본 적 이 없었다. 선주혁의 죽음 이후, 남지학이 무공에 매진할 때 그 역 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절치부심 무공을 연마해왔지만 아직도 백존과의 승부에서는 자신 있게 우위를 점칠 수 없었다. 한데 여덟이나 되는 백존을 정의련의 한 지부 따위에서 막았다 고 하니 그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방법이 없는 것만도 아닐 것이오." 남지학이 불쑥 입을 열었다. "오대세가게 그럴 만한 인물이 있다고 생각하고?" "사제는 옥기린을 지극히 높히 평가했고. 그가 패종회의 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닐 것이오." "아무리 주혁이 그 친구를 높이 평가해도 단신으로 백존 여덟은 무리가 아니겠소?" "그렇지만도 않죠. 선 소협은 남궁일, 그 사람을 종종 남 소협과 비교할 수 있는 유일한 인재라 말하곤 했어요. 그가 남 소협처럼 부단히 깨달음을 추구했다면 ...., 그래서 남 소협과 같은 성취를 얻었다면 백존들을 막아낼 수도 있었을지 모르죠." 은설연 역시 선주혁이 남궁일을 대단한 인물로 여겨온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남 소협이 백존 여덣을 단신으로 감당할 수 있다는 말이오?" 주백광의 말에 남지학은 침묵했다. 백존의 무공에도 서열별로 고하가 분명했다. 하위 서열의 백존 이라면 승부를 장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위 서열의 백 존이 섞여 있다면 승부를 자신하기 힘들었다. "우리가 도우면 가능하죠." 은설연이 남지학의 침묵을 대신했다. "흐음...." 주백광이 신음성을 흘렸다. 하긴 남창지부에 남궁일 혼자만 있 을 리 없었다. 다른 지부원이나 오대세가의 가주 몇이 있어 그를 도 왔다면 백존을 패퇴시킬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오대세가 중에는 제갈세가가 있어요." 은설연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들이라면 지부에 절진을 펼쳐 놓았을 수도 있지요. 제갈세가 가 자랑하는 기관진식이라면 옥기린과 더불어 백존을 막아낼 수도 있을 거예요." 강호정세에 밝은 은설연답게 다양한 각도에서 상황을 분석했다. "제갈세가가 아무리 대단해다 해도 그렇지. 어찌 정의련의 각 지 부마다 절진을 설치할 수 있단 말이오?" 주백광의 한 마디는 정곡을 찌르는 바가 있어 은설연은 선뜻 대 답하지 못했다. 하나의 절진을 설치하는 데는 적개는 수일이 걸리고, 길게는 몇 년씩 걸리기도 한다. 패종회에서 어느 지부를 공격할지 모르는 상 황이니 전 지부에 절진을 설치해야 은설연의 설명에 타당성이 생긴 다. 천시를 맞추고 건물의 구조마저 변경해야 하는 절진의 설치니만 큼 정의련의 전 지부에 진법을 구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쪽에 무 게가 기울기 마련이었다. 은설연이 침묵하는 데는 이와 같은 이유 가 있었다. 그때 단목지민이 나섰다. "여러분의 추측은 일부만 맞아요." "....?" "전서에 의하면 백존을 막는 데 진의 힘을 빌린 것이 분명한 듯 하더군요." 단목지민의 말에 애초 가정을 수립했던 은설연이 더욱 놀랐다. 사실 전에 대한 의견은 주백광의 말이 옳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백존을 상대한 것은 옥기린이 아니고, 절진을 펼친 것 역시 제갈세가가 아니에요." "다른 조력자 있다는 거군요." 현재의 오대세가에서는 달리 떠오르는 인물이 없었다. 이에 남 지학은 확정적으로 새로운 인물의 등장을 추론했다. "그래요. 놀랍게도 그 조력자는 우리도 잘 아는 사람이에요." "......?" 단목지민을 제외한 세 사람은 도저히 짐작이 가지 않는다는 표 정이었다. 자신들이 아는 인물 중에서 백존을 상대할 만한 고수는 손에 꼽는다. 개중 진법에까지 정통한 인물은 전무했다. "믿기 힘들지만 정의련에서는 패종회,무림맹 연합의 고수들을 물리친 인물이 금강신협이라고 주장하고 있어요." ".....!" 남지학, 주백광, 은설연은 단목지민의 충격적이 발언에 그대로 굳어벼렸다. Chap9 불사신 <1>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오?" 주백광답지 않게 목소리가 떨렸다. 그만큼 단목지민의 발언에 심적 동요가 크다는 뜻이었다. "단목 소저에게 따질 일이 아니지요. 그저 전서를 받은 것뿐이니 까요." 은설연은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는 기색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음성 역시 주백광 뭇지않은 동요를 고스란히 드 러내고 있었다. 금강신협 독고건의 약혼녀로 위장했던 그녀였다. 단목지민의 발언에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전서에 사실 여부에 대한 내용은 없었습니까?" 좌중에서 누구보다 흔들릴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지만 남지학은 일말의 동요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담담하기 짝이 없는 음성으 로 질문을 던질 뿐이었다. "진위(眞僞)를 조사 중인 것 같아요. 아직 결론을 내리긴 이르니 천애백의단의 활약에만 집중할 것을 요청해왔어요." 단목지민의 설명에 은설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무림맹, 패종회 연합이 오대세가에 강한 압박을 가하고 있 으니 금강신협을 내세울 수도 있어요. 계략에 능한 제갈세가라면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지요." "흥! 아무리 상황이 다급하다 해도 주혁의 명성을 이용하다니!" "은 소저는 제갈세가와 옥기린이 합작으로 백존을 막아낸 후,금 강신협의 위명을 빌리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오?" 남지학이 차분히 물었다. "어떻게 정의현에서 패종회가 남창지부를 습격하리라는 것을 알 았는지 모르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밖에 결론이 없는 것 아닌가요?" 은설연의 말에는 다소 억지스러운 바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한 바대로 다른 가능성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다른 가능성도 있소." 남지학의 한 마디에 은설연 등은 순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들로서는 여타의 가능성은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왜 사제가 다시 돌아왔다는 가능성은 염두에 두지 않소?" ".....!" 선죽혁의 죽음은 기정사실이다. 아무리 대단한 그라지만 매번 죽었다 살아올 수는 없다. 기적에 가까운 생환의 경험이 있었지만 또다시 그런 일이 벌어질 가능성은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 다. 현실은 냉정한 법이기에 더욱 그랬다. 남지학이 사제의 죽음을 부정하도픈 심정으로 가득하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절대로 있을 수 없는 부활에 대한 가능성마저 납득하기 는 힘들었다. "남 소협, 자네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현실은 현실 속에서 이해를 해야 하는 걸세." 주백광은 스스로도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선주혁의 부활 가 능성을 부정하는 자신에 대한 표정이었다. "현실과 동떨어진 일은 저도 고려의 대상에 두지 않습니다. 하지 만 현실과 동떨어진 일이 사제와 연관이 있다면 이는 현실이 될 가 능성이 더 높은 겁니다." 더할 나위 없는 모순적인 발언을 하는 남지학이었다. 그가 이렇게 나서자 노골적이 반록을 제기하기가 힘들었다. 강 하게 반론할수록 선주혁의 부활에 대한 일말의 가능성조차 부정하 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 대해 은설연은 답답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녀 역시 선주혁이라는 존재 자체가 비현실적임을 잘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 는 경우가 달랐다. '대체 왜 이 사람은 사제 얘기만 나오면 바보가 되는 거야? 사람 이 죽는 게 장난이야? 죽음 때마다 되살아 나오게? 선 소협이 무슨 불사신(不死身)이라도 되냐고? 어떻게 그런 가능성을 인정할 수가 있지?' 늘 그랬듯이 사제와 관련된 모든 일에는 이성을 상실하는 남지 학이었다. 이제는 정말이지 변할 때도 됐건만 아직까지도 저러는 남지학이 은설연은 답답하기만 했다. 답답하기는 단목지민도 마찬가지인 듯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선 소협의 죽음을 선언한 것은 패종회의 호법으로 알려져 있어 요. 백존을 훨씬 뚸어넘느 고수라는데....,여하는 그 자의 발언 중 에는 자신이 선 소협의 단전을 파괴했다는 내용이 있어요. 설령 선 소협이 또 한 번 죽음의 위기를 넘겼다 하더라도 단전이 파괴된 이 상, 백존을 상대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게 아닌가요?" 단목지민의 말에 은설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번을 양보해도 선죽혁이 부활에 여덟 명의 백존을 패퇴기켰다는 것은 납득이 안 되었다. 선주혁의 단전이 파괴된 상태니 더욱 그랬다. "단전이 파괴되고 심장이 멈췄어도, 사제라면 말이 된다고 생각 하오." 남지학의 단오한 말에 은설연은 남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 는 이미 남지학의 발언 예측하고 있었던 것이다. 평소라면 그의 생각을 엿보는 것은 대단히 힘든 것이다. 하지만 선주혁과 관련된 일에 있어서 남지학의 생각을 알아채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 쉬웠다. 사제의 일이라면 모조건 남 득하고, 믿어버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금강신협이 부활했다고 해서 그대로 물러날 패종회 가 아니오. 다시 말해 사제가 기적적으로 희생을 했다면 또 다시 위험에 치하게 될 것이오. 소생은 죽는 한이 있어도 또 하나의 후회 를 남기고 싶은 마음이 없소." "맹에서 사실을 확인할 거예요. 그러니 진위가 가려지기를 기다 리는 것이 어때요?" 단목지민의 말에 남지학은 고개를 저었다. "소생은 남창으로 가겠소." "종남파는 어쩌고요?" 은설연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남지학이 선주혁의 죽음보다는 기사회생을 믿을 거라는 사실은 예측할 수 있었지만, 종남파를 목전에 두고 돌아갈 생각을 하리라 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의 내 모든 것은 사제에게서 비롯된 것이오. 그는 내게 새 로운 생명을 주었소." 남지학은 선주혁이 자신에게 만년음양과를 먹였기에 지금껏 살 수 있었던 거라 생각했다. 그러인해 막대한 내력을 얻었고, 현천자 의 무극삼검식까지 익혔다. 남지학에게 있어서 선주혁은 사제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그런 소생이기에 사제를 외면 할 수는 없소." "아직 선 소협이라는 게 확인이 안 되었잖아요." "이전에도 지금과 같은 논의가 있었던 거 같구려.최소한의 가능 성이라도 사제가 연관되어 있다면 소생은 뒤로 미뤄둘 수 없소." "그건 남 소협의 말이 맞는 것 같군. 종남을 치는 거야 나중에라 도 할 수 있으니까 말이야." "주 대협!" 난데없이 주백광이 남지학의 편을 들고 나서자 은설연이 답답한 심정으로 그를 불렀다. "아무리 불러도 소용없어. 남 소협의 말을 듣고 보니 주혁이라면 정말 다시 살아 돌아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말이야. 그 런 생각이 든 이상, 주혁의 위기를 외면하고 딴 짓을 할 수는 없지. 그는 내 친구하고!" 주백광마저 이리 나오자 은설연으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남은 인원만으로도 종남파를 공격할 수 있다면 몰라도 남지학과 주 백광이 빠진 상태에서 구파일방 중의 하나를 공격한다는 것은 무리 가 있었던 것이다. "그럼 모두 남창으로 향하는 건가요?" 은설연이 맥 빠진 음성으로 물었다. "단원들에게 먼저 물어보는 게 나을 것 같소. 만약 사제가 아닐 경우, 지도부에 대한 신뢰가 줄고 사기가 저하될 수도 있으니까,지 원자만 남창으로 향하고 나머지는 인근에서 대기를 하는 게 좋겠 소." 남지학의 대답을 들은 은설연이 다시금 내심으로 투덜거렸다. "이럴 때보면 정신이 이상한 건 아닌데 말이야." 냉철하게 상황을 판단해 일을 추진하는 남지학의 모습에도 불고 하고 계속되는 은설연의 투정이었다. <2> 포양호(포양호)북단에 위치한 구강(九江)인근의 야산. 많은 수의 인원이 먼지를 가득 뒤집어 쓴 백의를 입고 나무둥치 에 몸을 기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이들은 종남산을 떠나온 천애백의단원들이 었다. 남지학은 천애백의단에게 물었다. 금강신협이라는 인물은 백발마신 선주혁이 만든 가상의 인물이 다.근데 그가 정의련에 모습에 드러냈다고 한다. 지극히 낮은 가능 성이자만 선주혁이 또 다시 살아 돌아왔을 수도 있다. 그리고 패종회는 다시 그를 노린다. 이에 정의련으로 직접 가서 선주혁의 생환을 직접 확인하려 한다. 함께 갈 것인지 대기할 것인 지는 스스로의 선택에 맡기겠다. 이와 같은 요지의 질문이었다. 천애백의단의 선택은 만장일치였다.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패종회와 당당히 맞서는 이유는 오직 하 나. 백발마신을 추앙하기 때문이다. 그가 살아있을 가능성이 있다는데 남아있겠다는 자는 아무도 없 었다. 설령 정보의 내용이 거짓이라 해도 무관하다고 한다. 백발마신 이 살아 있을 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안고 그를 직접 만나기 위해 가 는 과정조차 감격이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종남산에서 발을 돌린 천애백의단은 구강 인근에까지 이르게 되 었다. 그리고 천애백의단을 이끄는 남지학 등은 또 한 번 놀라운 소식 을 전해 듣게 된다. 이번에는 사파연합에서 은설연에게 보낸 전서 에 담긴 내용이었다. "몰살?" 주백광이 두 눈을 부릅떴다. 함께 있던 덕양 진인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우리 말고도 누군가 종남파를 노리고 있었다는 건가?" 주백광의 질문에 답한것은 남지학이었다. "무림맹에서 우리에 앞서 패종회의 요인들을 처리한...., 그들 이 아닐까요?" "역시 그렇겠죠?" 은설연도 남지학의 말에 동의하는 듯 모였다. "이번에도 우리의 계획을 알고 있었다는 거군!" 주백광의 어조는 심각했다. 천마맹과 백사회의 수뇌 이외의 천애백의단의 행적에 대해 정확 히 아는 자는 없었다. 한데 누군가 있어 천애백의단의 계획을 미리 알고 손을 쓴다는 이야기였다. 지금까지는 천애백의단에 도움이 되고 있으니 큰 문제는 없었 다. 무림맹의 일을 보고 받은 남지학이 내린 결론이었다. 도움이 되 고 있는 동안은 천애백의단의 활동을 멈출 수 없다는 것이다. 계속 해 망설이는 동안 패종회를 상대할 시기를 놓칠 수도 있기 때문이 다.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상황이니 만큼 계속 활동을 하면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자는 것이 남지학의 의견이었다. 그리고 정체모를 자들의 활약이 또 한 번 드러났다. 이번에도 천 애백의단과 겹치는 움직임이었디. 더 이상 우연이라 생각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계속 여부를 떠나 종남파를 멸문시킬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 다는 것 자체가 더 큰 문제 같군요." 은설연도 한껏 우려가 되는 표정이었다. 사망과 동시에 시체를 부패시키는 기이한 수법을 가진 자들이었 다. 그들에게 일문을 하룻밤 새에 멸문시킬 힘이 있다는 것은 은설 연의 말대로 주의를 요할 만한 일이었다. "은 소저와 단목 소저께 부탁을 드릴 일이 있습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남지학이 입을 열었다. "천마맹과 사파연합에서 패종회와 맞서기 위해 준비한 바를 보 고 받아 주십시오." 남지학의 말에 은설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 일이 사파연합니나 천마맹과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건 가요?" 남지학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침묵은 분명한 연관성이 있음을 웅변하고 있었다. 은설연은 뭐라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사망과 동시에 시체를 부패시키는 기이한 수법. 그것은 정도의 무공과는 거리가 멀었다. 결구 사파연합과 천마 맹이 일순위로 용의선상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천애백의단의 움직음을 휜히 알고 있다고 봐야하는 상황. 남지학의 초론이 맞을 가능성은 분명히 존재했다. "알겠어요." 대답을 먼저 한 것은 단목지민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하나 의 가정이 이미 떠오른 상태였다. 보전에 기록된 일월신교의 엄청 난 힘에 대해 기억해낸 것이다. 세상이 멸명한 그 날. 일월신교가 드러낼 수 있는 가공할 힘. 어쩌면 봉인된 그것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염려할 바 없는 일이었다. 그 힘을 가지게 된다면 더 이상 패종회는 일월신교에 위협을 가할 수 없을 것이기에. <3> 포권을 취한 채, 머리를 숙인 남궁일. 그는 한동안 몸을 일으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음속의 사부로 여기기로 한 독고건. 금강신협이 돌아왔다. 그리고 위기의 순간, 남창지부를 구해냈다. 독고건을 다시 마주하게 된 남궁일로서는 실로 감개무량한 순간 이 아닐 수 없었다. 선주혁 역시 남궁일을 보고 크게 놀라는 중이었다. 못 보는 사이 남궁일의 무공이 크게 진보했음을 느낀 것이다. 과연 천재들은 하 루가 다르구나 하는 것을 새삼 느끼는 중이었다. "계속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미안하오, 남 소협." "천만의 말씀입니다. 이렇게 무사히 돌아와 주신 것만으로도 기 쁠 따름입니다." 남궁일은 한 치의 부족함도 없이 예의를 갖춰 선주혁을 대하는 중이었다. 그 모습을 한조백은 기이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자신이 감금된 어 있던 사이 금강신협의 명성이 정도 무림을 대표할 정도였고,정 의련에서 호법의 중책을 맡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옥기린, 남궁일의 행동 하나 하나에는 존경과 흠모가 가 득했다. 이는 단순한 예우의 차원을 넘어서 있어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쪽은...." 선주혁이 한조백을 소개하려 하자 남궁일은 다시금 두 손을 맞 잡으며 고개를 숙였다. "남궁세가의 후학이 한 맹주님을 뵙습니다." 남궁일은 정도 무림 후기지수의 대표 격인 신웅십팔걸의 일인으 로 한조백을 만난 적이 있었다. 꽤 오랜 전, 한조백이 스스로의 몸 에서 일어나는 증상을 자각하기 이전의 일이었다. "과연 장강의 뒷물이 앞물을 치는구먼. 자네가 벌써 이 정도의 경지에 오를 줄이아...!" 비록 무공의 대부분을 상실한 한조백이지만 그 예리한 안목만큼 은 여전했다. 넘궁일의 화후가 이미 자신이 무림맹주의 직을 수행 할 때의 무공을 넘어서 있음을 알아챈 그였다. 선주혁에 이어 또 다른 젊은 기재를 확인한 한조백은 진실로 새 로운 세상이 도래했음을 절실히 느끼는 중이었다. "모두가 독고 대협의 가르침 덕입니다." 겸손어린 한 마디에 한조백은 선죽혁을 대하는 남궁일의 태도가 다시 없이 극진한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몰라 도 남궁일이 오늘의 경지에 오르는 데에 있어서 선주혁이 큰 도움 을 준 것이 분명했다. "별 말씀을...." 선주혁은 가당치 않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그런 선주혁을 다시 한 번 존경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본 남궁일 은 한조백을 향해 말했다. "지금 한 소저를 비롯한 무림맹의 형제들이 이곳으로 향하는 중 입니다." 금강신협이 나타났다는 소리에 최대한의 속도로 남창지부를 찾 은 남궁일이었다. 누구보다 서둘렀던 동생, 남궁연조차 뒤로하고 달려온 만큼 나머지 일행들과 도착 시기에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남궁일의 말에 한조백의 표정이 밝아졌다. 어쩌면 다시는 못 볼 수도 있다고 여겼던 손녀를 재회하게 된 것 이다. 더불어 직전제자들와 제자와 다름없는 적풍조원들과 다시 만 날 수 있다는 사실은 그에게 감격적인 일 일 수밖에 없었다. "또한 정의련의 주요 인사분들 역시 모두 이쪽으로 오고 계십니 다. 모두가 독고 대협계서 돌아오신 것에 크게 기뻐하고 계십니다." 남궁일의 음성은 잔뜩 고조되어 있었다. 그간 패종회, 무림맹 연합에 숨죽이고 있던 상황이 못마땅한 그 였다. 어르신들의 명에 따라 무공에만 매진해왔지만 혈기 넘치는 젊은이답게 정의련이 패무 연합과 당당히 일전을 겨루길 바랐던 것 이다. 간악한 수단으로 무림맹과 구파일방을 장악한 그들을 외면하 는 것은 정도의 길을 걷는 협사가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죽음의 위기에서 간신히 살아났다가 자신과 무관한 청성파의 덕 양 진인을 구해 진실을 알리려 스스스 희생을 택한 백발마신을 생 각하면 더욱 그랬다. 백발마신의 의기는 이제 남궁일에게 있어서도 존경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또한 백발마신의 죽음을 상기시키며 단신으로 패종회를 향했던 옥소선자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남궁일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여인조차 저라한 기개를 펼쳐 보이니 장부인 스스로가 부끄러웠던 것이다. 한데 패무 연합이 정의련의 지부를 습격하려 했으니 이제야말로 정의련은 일전을 각오해야할 상황이었다. 더욱이 존경해 마지않는 독고건까지 돌아왔으니 남궁일로서는 흥분이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남궁일를 보며 선주혁이 진중하기 이들 데 없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남궁 소협. 긴히 할 말이 있고." 독고건의 표정을 확인한 남궁일은 사뭇 고조된 스스로를 가라앉 혔다. "말씀하십시오. 독고 대협. 경청하겠습니다." "우선은 남궁 소협에게 사과를 할 일이 있소. 그간 본의 아니게 남궁 소협을 속여온 셈이니 말이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소생은 독고건이 아니오." "......!" 남궁일의 두 눈이 크게 확대되었다. <4> "제갈세가를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이 실수였습니다." 포영후는 의기소심한 상태였다. 고작 남창지부를 처리하지 못하 고 네 명이나 되는 백존을 잃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자네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나." 상흔이 가득한 얼굴과는 달리 서문전은 부드러운 음색으로 말했 다. 아들인 서문탁을 대할 때와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하지만 제가 좀 더 침착하게 판단을 했다면 놈과 제갈세가 미 리 절진을 설치했을 가능성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 무슨 핑계라도 결과를 바꾸지는 못한다. 이럴 경우 차라리 자 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나가는 것이 유리함을 포영후는 알고 있었다. 포영후는 남창지에서 빠져나와 본진에 돌아온 후에야 금강신협이 제갈세가와 손을 잡고 일을 준비했을 가능성을 떠올릴 수 있었다. 한순간 먼지 구덩이 속에서 절진을 설치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니 그들로서 내릴 수 있는 유일한 결론이었던 것이다. 그와 같은 가정은 모두가 수긍할만한 것이어서 정의련을 치기 위해 나선 백존 모두도 인정하고 있었다. "놈들이 그토록 치밀한 준비를 했으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네. 금강신협이라는 놈이 그렇게 급작스레 나타라리라는 것도 말일세. 그러니 자네가 책임을 질 일이 아니야." "가주이 믿을 져버려 죄송할 따름입니다." 포영후는 서문전의 앞에 깊숙이 머리를 숙였다. "놈들이 진법으로 우리를 상대하려 든다면 상대하기가 쉽지만은 않겠군요. 자칫 대규모의 손실도....." 서문전의 우측에 서 있던 서문탁이 말했다. "놈들이 언제까지 그곳에 웅크리고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냐?" "네?" 서문탁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서문도옥이 나섰다. "하나의 절진을 설치하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입니다. 아무리 제 갈세가라 할지라도 정의련 각 지부에 진법을 전개할 수는 없었을 테이니 다른 지부를 공격해 놈들을 끌어내면 될 것입니다. 아니, 이 예 오대세가 중 하나를 치는 것도 괜찮을 법 하군요." 서문도옥의 말에 서문전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늘 못다땅한 아들놈과는 달리 손자는 영특하기 이를 데 없었던 것이다. "남창지부에도 펼쳐져 있는 절진이 오대세가에 없겠느냐?" 서문탁의 말에 서문도옥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회에도 기문진에 능숙한 자들이 많습니다. 제갈세가의 진법을 파훼할 수는 없을 지라도 진의 설치유무 정도는 알아낼 수 있지요. 그러니 그들을 보내 진이 설치되지 않은 곳을 노리면 될 일입니다. 이번에야말로 쓴 맛을 보여줘야겠지요." 서문전은 다시금 고개를 끄덕여 손자의 의견에 만족을 표했다. 조부의 흡족한 표정을 확인한 서문도옥이 다시 나섰다. "그보다는 천애백의단 놈들이 신경이 쓰입니다. 놈들으 어떻게 할지 정하셨습니다?" 종남파 멸문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는 십전성을 점 거했던 것과 비슷한 무게의 사건이었다. "옥용검마라는 놈의 무공이 생각 이상인 모양이야. 하긴 락문과 구유이영을 죽일 정도니....." 서문전이 인상을 찌푸렸다. "탑달존자께서는 정의련보다 놈들을 먼저 처리해야한다고 목소 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포영후가 조심스럽게 나섰다. "그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겠지. 놈들의 손에 락문이 죽었으 니 말이야. 하지만 일에는 수순이 있는 법이야. 어차피 구파일방이 야 명분을 위한 것일 뿐, 쓸어버려도 상관없는 것들이니까 지금은 정의련과 금강신협이란 놈이 더 중요하지." "하면 놈들은 내버려두실 생각이십니까?" "서문도옥의 질문에 서문전이 말했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정의련을 처리하는 게 우선이야. 지금 방향을 돌린다면 웃음거리가 될 뿐일 테니까." 조부의 말에 서문도옥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런 성과도 없이 회의 손실만을 가져온 채, 정의련을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금강신협으로 인해 회에 타격이 생길 일은 없을까요? 적을 경 시하지 말라고 말쓴하신 건...." 서문탁의 발언에 서문전은 다시 인상을 썼다. "흥! 숙고는 행동 이전에 필요할 뿐이다. 이미 정의련을 치기로 한 마당에 쓸데없이 적을 과대평가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냐!" 서문전의 호통에 서문탁은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아무리 금강신협의 무공이 예상 외로 높다 해도 회가 입을 피해 는 많지 않습니다. 놈은 하나뿐이니까요." 서문도옥이 미소를 지으며 부친인 서문탁에게 말했다. "그래! 정의련이 마교, 사파연합과 손을 잡고 연합전선을 펼친다 면 몰라도.... 그들만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지. 크크, 못난 놈들! 제 죽을 줄 모르고 체면만을 따지다니 하다못해 천애백의단 놈들하고만 손을 잡아도 큰 도움이 될 것을....." "그런 놈들이니 저희가 수월히 공을 세울 수 있는 게 아니겠습니 까?" 제갈세가의 절진으로 인해 이외의 손실을 입은 자신들이었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저들의 입장에서는 진 하나에 모든 것을 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백존 셋을 잃는 것은 큰 손실이 아닐 수 없 지만 이미 적의 수작을 알아낸 만큼 정의련을 무너뜨리는 데에 더 이상의 피해는 없을 것을 자신할 수 있었다. 스스로의 자부심을 위 해서라도 이제 남은 것은 큰 공을 세우고 인정을 받는 것뿐이라 믿 는 서문 가의 조손(祖孫)이었다. Chap.10 행운의 삶 <1> 정의련 남창지부가 발칵 뒤집혔다. 지난 번 패종회, 무림맹 연합 에서 무인들이 습격해 왔을 때보다 더 소란스러웠다. 당연한 일이었다. 남창지부원 모두는 금강신협으로 인해 지금껏 살아있는 셈이었다. 그런데 금강신협에 이어 그의 정혼자인 모용수란이 남창지부를 찾아왔다. 남창지부 전체가 들썩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호오! 이거 정말 극진한데?" 주백광이 과장된 표정으로 감탄을 했다. "저를 모용수란으로 알고 있으니까요." 은설연은 다소 못마땅한 표정으로 주백광의 말을 받았다. 사실 그녀는 홀로 남창지부를 방문해 금강신협의 실체를 확인하 겠다고 했다. 남창지부에는 백존 여덟을 물리칠 정도의 절진이 펼쳐진 상황. 눈에 띄는 주백광이나 남지학으로 인해 자신들의 신분이 탄로 날 경우를 염려한 것이다. 아무리 천애백의단이 패종회와 맞서고 있다지만 종남파의 멸문 이 천애백의단의 소행으로 알려져 있는 현실이다. 그런 천애백의단 을 이끄는 자들이 정의련의 지부를 방문한 것은 분란의 소지가 있 었다. 지금의 상황에서 쓸데없는 문제를 만드는 것은 단연코 옳지 않았다. 하지만 선주혁의 생환을 직접 확인하겠다는 주백광의 고집을 꺾 을 수는 없었다. 더구나 남지학 마저도 위험을 피하기보다 사제의 생사를 확인하 길 원하니 은설연으로서도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일의 해결을 원만히 하기 위해 단원들에게는 대기령을 내 니고 네 사람 모두 남창지부를 찾아온 것이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대도를 든 주백광, 절세미남인 남지하, 가인으로서 부족함이 없 는 단목지민이 함께 하는 일행. 눈에 띄어도 너무 띄는 것이 당연한 일이건만 남창지부원 모두 가 극진한 태도만을 보이는 중이었다. 팔각이 져있는 집객실의 문이 열리며 한 사내가 들어왔다. "언 대협!" 은설연이 나타난 자를 먼저 알아봤다. "모용 소저!" 언무의는 은설연을 확인하고는 반갑기 그지없는 표정을 지었다. 가볍게 안부를 주고받는 두 사람. 본론을 먼저 꺼내든 것은 은설연이었다. "독고 대가가 돌아왔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그녀의 말에 남지학과 주백광, 그리고 단목지민의 눈이 빛을 발 했다. 언무의의 반응을 기민하게 살피고자 하려는 것이다. 금강신협의 재출현에 어떤 음모가 있는 것이라면 언무의의 표정 에 조금이라도 저연스럽지 못한 바가 있을 터, 그것을 잡아내려 함 이었다. 언무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용 소저, 아니 은 소저께서도 역시 소식을 들으셨군요." 파앗! 언무의가 은설연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짐과 동시에 주백광의 대도가 어느새 도집을 빠져 나왔다. 대도는 언무의의 목 을 겨누고 있었다. 언무의는 새파랗게 질린 안색으로 황급히 말했다. "주,주 대협. 이러실 일이 아닙니다." 언무의는 이미 주백광의 정체까지 알고 있었던 듯했다. "어떻게 당신이 우리에 대해 그리 소상히 알고 있는 것인가?" 물씬한 살기를 뿜어내며 주백광이 사납게 굴었다. "도을 목에 얹고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소?" 언무의는 이마에서 식은땀을 흘렸다. 은설연의 눈짓에 주백광은 대도를 거둬들였다. 하지만 그의 도는 도집으로 되돌아가지 않았다. 이는 수작을 피 우면 언제든 언무의의 목을 베겠다는 무언의 협박과 다름없었다. "언 대협, 솔직히 말씀해 주세요. 무엇을 알고 계신 것이며, 또 금강신협이 다시 나타난 데에는 무슨 사연이 있는 거죠?" 언무의는 소매로 이마의 땀을 닦아내며 은설연의 말에 대답했 다. "사연은 없습니다. 은 소조. 소문 그대로 금강신협께서 돌아오신 것뿐입니다." "그게 사실이오?" 남지학이 평소답지 않게 조급함을 드러냈다. 언무의는 남지학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남 대협! 남 대협은 금강신협의 사형이십니다. 소생이 어찌 감 히 금강신협의 사형이 계신 자리에서 허언을 아뢸 수 있단 말입니 까?" 언무의는 공손하면서도 진심어린 감정을 담아 말했다. "금강신협이 백발마신이라는 거..... 그러니까 선 소협의 정체를 알고 계신 건가요?" 은설연이 놀라 물었다. "금번에 선 대협께서 남궁일 공자께 모든 것을 밝히셨습니다. 아 직은 대외적으로 공표를 하지 않았을 뿐이죠." "지,진짜로 선 소협이 돌아왔다는 말인가요?" 단목지민 역시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몇 번을 물어보셔도 대답은 같습니다. 분명히!금강신협이시자 백발마신인 선 대협께서 돌아오셨습니다." 당최 어디까지 믿어야할지 모를 상황이었다. 언무의의 말대로라면 선주혁이 또다시 죽음의 위기에서 살아났 다는 이야기였다. 믿고자 하는 마음에 이곳까지 단걸음에 달려오긴 했지만. 말로만 그가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실감이 나지 않 았다. 저마다 복잡한 생각에 휩싸여 있는 그 순간, 주백광이 갑작스레 호통을 혔다. "그를 어찌했소?" 정도 무림의 공적인 선주혁이다. 그가 신분을 가장하여 금강신 협의 행세를 해온 것은 크나큰 문제였다. 한데 정체가 밝혀졌으니 정의련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진정 선주혁이 살아 돌아온 것이라면 당연히 그의 안위를 염 려해야만 할 상황이었던 것이다. "어찌 하다뇨?" 언무의의 당최 이해할 수 없다는 식으로 반문을 하고는 말일 이 었다. "선 대협께서 금강신협이든 백발마신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 있 습니까? 선 대협께 저희가 입은 은혜가 헤아릴 수 없는 만큼 정의 련에서는 극진의 예우하는 중입니다. 그거야말로 당연한 일이 아니 겠습니까?" "그가 당신들을 속였는데도?" 주백광은 여전히 미심쩍다는 듯 물었다. 언무의가 씁쓸히 웃었다. "한차례 련이 발칵 뒤집히긴 했었죠. 하지만 남궁 공자께서 강경 한 태도로 선 대협을 옹호하고 나섰고, 저희 남창지부원 전원도 선 대협의 편에 섰습니다. 물론 무림맹의 한 맹주께서 선 대협을 지지 하셔서 오해가 더욱 수월하게 풀린 바도 있습니다만...,정의련에 서 선 대협을 극진히 예우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무림맹의 한 맹주? 철혈신검이 선 소협과 함께 있단 말인가여?" 단목지민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언무의가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사제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남지학의 질문이었다. 백문이 불여인견이라, 모든 의문은 선주 혁을 직접 만나면 해소될 일이었다. "선 대협께서는 남궁 공자와 함께 천마맹과 사파연합을 방문하 기 위해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네?" 은설연과 단목지민이 동시에 외쳤다. "선 대협의 강력한 주장에 의해 정의련은 천마맹,사파연합과 공 동 전선을 구축, 패종회와 대항하고자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의련의 마도와 연합을?" 주백광이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존심 하나에 목숨을 건 정도 무인들이다. 사마외도라 천시하는 자들을 향해 정 의련이 먼저 손을 내민다는 것은 상상키 힘든 현상이었다. 주백광이 그와 같은 표정을 짓는 이유를 익히 아는 언무의는 살 짝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곧 신색을 회복하고는 설명했다. "남궁 공자께서 스스로의 목숨을 걸고 선 대협의 의견을 지지했 습니다." 언무의의 설명에도 주백광은 충분히 납득키 힘들었다. "남궁일이 왜 그처럼 주혁을 지지하고 나선단 말이오?" 그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언무의가 아닌 은설연에게서 나왔다. "남궁 공자는...., 선 소협을 마음속의 스승으로 생각하고 있으 니까요." 은설연의 설명에 좌중은 잠시 침묵했다. 이어 남지학이 그 침묵을 깼다. "일다 두 분 소조께서는 다시 한 번 천마맹과 사파연합과 기별을 넣어주도록 하시오. 방문한 자가 사제가 분명한지 확인을 부탁드린 다고 말이오." "알겠어요." 은설연과 단목지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상 언무의가 저리 나오는 이상, 선주혁이 살아있을 가능성 은 휠씬 높아졌다. 좌중 모두는 흥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백광은 흥분한 기핵이 역력했고, 남지학은 초조한 듯 매마른 입술을 혀로 적시는 중이었다. 만약 정말로 선주혁이 생환한 것이라면 한시라도 빨리 그를 만 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던 것이다. <2> "사제!" "사형!" 두 남자는 뜨거운 음성으로 서로를 불렀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끌어안았다. 진한 포옹 이외의 말은 없었다. 하지만 둘은 서로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강하게 옭죄는 팔 에 담겨진 힘 속에 둘의 감정이 담겨져 있었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사제가 돌아왔고, 이 세상의 유일한 가족을 다시 만났다. 그 감정을 표현할 말을 두 사람은 찾지 못했다. 벌써 몇 번째에 걸친 이별과 재회지만 감격의 크기는 전혀 줄지 않았던 것이다. 반가운 마음만을 말하자면 누구에게도 부족함이 없는 주백광조 차 사형제 간의 재회를 방해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는 만면에 미소 를 머금고 두 사람의 포옹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단목지민은 흐뭇한 표정으로 두 사내를 바라봤다. 부활에 가까 운 선주혁의 생환은 두 사내의 포옹 전까지도 제대로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의 감정이 교차되는 것이 전해져오자 그녀 는 알 수 있었다. 백발마신 선주혁이 돌아왔다는 것을..... 은설연은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괜스레 눈시울이 붉어 졌기 때문이다. 사제의 죽음을 막지 못해 괴로워했던 남지학의 모 든 것을 옆에서 지켜본 그녀였다. 스스로의 몸을 망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사제의 복수 만을 염워했던 남지학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했던 그녀.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 남지학이 어떤 마음으로 사제를 맞이하 는지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소맷자락을 적시는 눈물을 지금 이 순간 은설연이 공감할 수 있는 남지학의 감정 중 일부였다. 사형과의 뜨겁고 긴 포옹이 끝나자 선주혁은 주백광과 다시 끌 어안았다. 사내끼리의 포옹이 연속되는 것이 민망할 법도 하건먼 주백광도 선주혁도 개의치 않았다. 두 사람 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성품이 아니었던 것이다. 지금 더없는 반가움을 느꼈으니 그것을 솔직히 표현하면 그뿐이 다. 이후 선주혁은 은설연, 단목지민과도 인사를 나눴다. 그의 표정에는 웃음만이 가득했다. 예전이라면 이렇게 자신이 돌아온 것을 반겨줄 이가 없었을 것 이다. 이곳에 와서 살아온 새로운 삶이 자신에게 준 가장 큰 축북 중의 하나가 이처럼 자신이 살아 있음을 기뻐해주는 사람들이 생겼 다는 것이라는 생각에 그는 더욱 기뻤다. 선주혁에게도 이쪽 세상에서의 삶은 행운이었던 것이다. "해내셨군요." 한차례 떠들썩한 재회의 시간이 지나자 선주혁이 남지학에게 말 했다. "사제의 기대에는 못 미치겠지만.... 무극삼검식을 넘어서는 데 까진 성공한 것 같아." 그 어느 때보다 밝은 남지학의 표정이었다. "무슨 말씀이에요. 이제 당금 천하에서 누가 있어 사형을 이길 수 있겠어요?" 겸손한 사형의 말에 선주혁이 웃음을 터뜨렸다. 두 사형제의 말에 은설연은 또 한 번 놀라야만 했다. 선주혁의 방금 전 발언 때문이었다. 천하에 이길 자가 없다는 것. 이는 곳 남지학이 현재 천하제일의 고수라는 뜻이지 않은가? 남지학이 지독한 수련과정을 통해 엄청난 성취를 거뒀다는 사실 은 익히 짐작할 수 있었지만, 설마하니 천하제일의 경지에 올랐으 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와 같은 평가를 했다면 코웃음을 쳤을 것 이다. 무공에 있어 천하제일을 논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도 광오 한 것인지 그녀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주혁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선주혁은 가히 천하제일을 겨룰 만한 실력을 입증한 상태. 그보다 강한 자가 무림에 열이 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그가 저토록 자신 있게 말하고 있으니 남지학의 무공 성취 가 진실로 천하제일을 논할 법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이지 내 평생에 이들 사형제를 이해할 수 있을 날이 올까?" 걸핏하면 죽었다가 되살아 돌아오는 사제. 그 사제의 한 마디에 목숨을 걸고 수련에 수련을 거듭해 20대의 나이에 천하제일의 무공을 익힌 사형. 은설연으로서는 두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 영원히 불가능할 것만 같았다. "사제는 여전히 이 우형을 너무 높이 평가하는군." 남지학이 겸손에 선주혁이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핫. 지금에 있어 사형과 무공을 논할 수 있는 사람이 정말 몇 이나 되는지 꼽아볼까요?" 선주혁의 말에 좌중의 인물들은 시선을 집중했다. 그가 평가하 는 무림의 최고수들을 들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우선은 패종회의 회주가 있을 것이고, 호법인 삼패 역시 사형과 무공을 논할 만하죠." 패종회의 고수들 중에 천하제일을 논할 자격이 되는 자가 많다 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일월신교의 단목 교주님과 은 회주님 역시 사형과 무공 을 겨뤄볼 수 있을 겁니다." 단목지민과 은설연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겨 뤄볼 수 있을 뿐이라 표현한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다. 선주혁의 말 에는 남지학의 무공이 자신들의 주부와 부친을 넘어서 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한 명 있읍니다. 사형과 천 초를 겨룰 만한 고수가!" "그게 누구죠?" 은설연이 호기심에 가득 찬 음성으로 물었다. "여기 계신 남궁 공자죠." "....!" 중원들의 시선이 남궁일에게 쏠렸다. 평소 선주혁이 남궁일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아 직까지 신웅십팔걸, 다시 말해 후기지수의 수좌를 차지하고 있는 정도로만 여겨왔다. 그런 남궁일이 천하제일을 논하는 이와 자웅을 겨룰 정도의 고수라고는 생각치 못했던 것이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남궁인은 살짝 얼굴을 붉혔다. "제 말은 사실이니 남궁 소협은 너무 부끄러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선주혁은 다시 한 번 남궁일이 절대의 영역을 넘어선 고수임을 확인하고서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패종회가 천음마후의 힘을 빌리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지금껏 밝았던 좌중의 분위기가 한순간 가라앉기 시작했다. "천음마후의 힘을 빌린 백존들이라면 아무리 사형이라 해도 둘 이상을 감당하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선주혁의 말에 의심을 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가 말 하면 그것이 곧 진신이었던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하죠?" 단목지민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선주혁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천음마후는 한 명 뿐이니까요. 우리 쪽에 이처럼 많은 고수가 확보된 이상, 무림재패를 노리는 저들의 야욕을 막을 수 있을 것입 니다." 매번 사단이 일어날 때마다 천음마후가 동원될 수는 없는 법. 천음마후를 앞세워 무림의 각지를 정복할 수는 있어도 그곳을 지배할 수는 없게 된다는 뜻이었다. "천음마후가 없는 곳만을 공략하면 된다는 건가요?" 이미 남지학이 세웠던 계획과 별다를 것 없는 내용이지만 은설 연은 또 한 번 감탄을 해야만 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이 두 사형제는 서로가 얼마나 떨어져 있건 같 은 결론을 도출해내기 때문이다. 그녀로서는 애초 남지학의 활약상 을 선주혁이 미리 소설로 읽어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 리 없었던 것 이다. "사제의 말이 옳습니다. 사제의 복수가 아니라 무림을 지켜내는 것이라면 더욱 서두를 필요가 없지요." 남지학이 선주혁의 말에 동의하고 나섰다. "정의련, 천마맹, 사파연합이 연합전선을 구축했으니 더욱 상황 을 좋아졌습니다. 이제야말로 패종회와 맞설 준비가 된 셈이지요." 남궁일은 긍정적인 상황에 대해 말하고서는 선주혁을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무엇보다 선 대협께서 계시니 안심입니다." 갑작스레 자신을 추켜세우자 선주혁은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그를 제외한 모두의 생각은 남궁일과 같았다. 선주혁이 있는 한, 패종회는 자신들의 뜻을 이루지 못할 것이라 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 것이다. "하하핫. 하간! 죽여도 죽여도 또 살아나는 불사신인 주혁이 우 리 편인데..... 누가 뭘 어쩔 수 있겠어?" 주백광의 말을 들고서야 선주혁은 고개를 들었다. "어째 내가 되살아 돌아온 게 못마땅한 것 같네?" 친구를 향한 농담 한마디를 위해서였다. "크하하핫! 그럴 리가 있나, 친구! 난 그저 지금 자네와 예전처럼 제대로 술을 마시지 못하는 상황이 조금 서운할 뿐이야." "하하하핫." 선주혁은 주백광을 따라 웃었고, 좌중은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최근 한 번도 이렇듯 편히 웃어본 적이 없는 그들이었다. 선주혁 이 있기에 지금처럼 웃을 수 있다는 생각에 그들의 웃음은 더욱 짙 어지고 있었다. <3> "뭔가 자신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느냐?" 동호(東湖)를 향해 이동하는 중에도 서문탁은 불길한 예감을 지 을 수 없었다. "진법이라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미 확인이 끝난 것 아니 겠습니까?" 서문도옥이 부친에게 고했다. 최근 부친은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이는 중이였다. 늘 적을 쉬이 여기던 그였건만 남창지부에서 백 존이 패퇴한 이후 지나친 조심성을 보이는 것이다. 서문도옥으로서는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중이었다. 지난 며칠 사이 패종회는 몇 번에 걸쳐 진이 설치되지 않은 정의 련의 지부를 공격했다. 천한 정의련 놈들은 자존심마저 버린 듯 이 미 지부를 비워둔 채였다. 한곳에 모여 제갈세가에서 설치한 절진 의 힘을 빌리려는 것이 분명했다. 아에 탑달존자 등의 회주파는 교주와 천음이 돌아오기를 기다리 자고 했다. 천음의 힘을 빌리면 제갈무후가 살아나 절진을 설치했 을 지라도 전혀 피해 없이 진을 파훼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그들의 주장이었다. 아니면 차라리 천애백의단부터 처리를 하자고 했다. 괜한 피해 를 자처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서문전으로서는 실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제갈세가의 절진이 상 상 이상의 위력을 낼 수 있음이 입증된 상황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절진이 승패를 좌우할 수는 없겠지만, 진을 파 괴하는 동안 백존의 피해가 적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만만하게만 여겼던 정의련에 예기치 못한 저력이 있었던 것이다.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인 채, 회에 큰 공로를 세우려 했던 애초의 계획이 완전히 틀어졌다. 그렇다고 이 상태로 회군을 한다는 것은 서문전에서 있어서 말 이 안 되는 일이었다. 결국은 회주가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였던 것 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해 준 것밖에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는 애초 에 목적한 바와는 지극히 상반되는 결과였다. 결국 탑달존자 등의 회주파는 사천으로 돌아가고 서문전은 피해 를 감수하고서라도 정의련을 치기로 했다. 그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서문전에게 희소식이 전해져왔다. 정의련이 정면승부를 제 안해 온 것이다. 더 이상의 소모전이 무의미한 만큼 호북성의 동호 인근에 자리한 악주(鄂州)에서 결전을 벌이자는 것이었다. 서문전은 당장 수하들을 파견하여 진의 설치여부를 살폈다. 제 갈세가의 간교한 수작을 염려한 탓이였다. 하지만 악주 인근의 평원에 진이 설치된 흔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서문탁은 계속해 악주에서의 결전을 반대했다. 저들이 뭔가를 꾸미지 않고서는 유리한 상황을 버리고 이렇듯 나설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서문전에게는 정의련이 제안한 결전을 마다할 이유가 없 었다. 이대로 시간을 끈다면 회 내에서의 인망이 무너질 것이기 때 문이었다. 저들이 무슨 수작을 부리건 절진 내에서 싸워 백존의 피 해를 입는 것보다는 낫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다. 평원지대에서의 싸움이라면 하급에 속하는 수하들의 피해는 커 질 수 있다. 하지만 회의 핵심이랄 수 있는 백존의 피해는 적을 가능성이 더 높았고, 이는 서문전이 바라는 바였다. 나머지 수하들이야 언제든 보충할 수 있지만 백존 정도의 고수를 배출하는 것은 실로 오랜 세 월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애초 패종회의 진정한 힘은 백존에 있었다. 정이련의 실수는 바 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하는 서문전과 서문도옥이었다. 저들은 그저 많은 수의 적에게 최대한의 피해를 입히는 것을 최선으로 여기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결론을 내린 서문전은 정의련의 제안을 받아 들였다. 그리하여 패종회는 정의련과 일전을 위해 악주 인근에 이른 것이다. "뭔가 불길한 예감을 지울 수가 없구나." 서문탁은 수염을 매만지며 심각한 표정을 유지했다. "예상 외로 중원 무림의 저항이 강력해 아버님의 마음이 약해지 신 듯싶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할아버님과 적 호법님, 그리고 절 반에 가까운 백존이 출전하지 않았습니까? 천하의 그 무엇이라도 저희를 막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악주 인근에 이를 때까지 계속해 회의를 품고 있는 부친을 서문 도옥은 달래는 중이었다. 그는 현재의 부친을 이해했다. 본래 회 내의 누구보다 자신감이 넘치던 부친이었다. 비록 회주 직을 두고 벌인 경쟁에서 선우단천에게 밀리긴 했지만 그는 위축되 지 않았다. 회주만이 익힐 수 있는 무공을 배우기 전의 선우단천보 다 스스로가 더 뛰어난 무공을 지녔음을 자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친은 한 번도 조부에게 인정을 받디 못했다. 부친의 의 견은 늘 무시당하기 일쑤였고, 돌아오는 것은 힐난뿐이었다. 당당 하기 이를 데 없던 자신감조차 조부에기는 꾸지람의 대상이었다. 중원에 온 이후로 그와 같은 현상은 더욱 심해졌다. 조부는 무림 의 패권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다음 대를 도모하는 기반을 확고히 하길 원했고, 그만큼 날카로워져 있었다. 그런 조부에게 있어서는 부친의 언행 하나하나가 못마땅하기만 했던 것이다. 수년에 걸쳐 이런 현상이 반복되었으니 의기소침해지 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얼마 전까지도 자신감을 잃지 않았던 부친이었다. 하필 정의련 의 수많은 지부 중에 남창지부를 고른 것이 부친이었던 게 문제였다. 제갈세가 놈들이 수작을 부렸음을 아무도 짐작치 못했다. 결국 부친의 잘못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조부 역시 그것을 탓하지 않 았으며 남창지부를 책임졌던 포영후도 문책을 당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이후 부친은 변했다. 눈에 띄게 의기소침한 모습을 보였으며, 지난날의 자신감을 찾기 힘들었다. 그리고는 계속해 상 황에 대한 염려에 염려만을 거듭하는 것이다. 서문도옥은 그 모든 것이 조부가 지나치게 부친을 대했기 때문 이라 생각했다. 잠시 애처로운 눈으로 부친을 바라보던 서문도옥은 문득 정신을 차리고 걸음을 재촉했다. 조부와 호법 적철항이 있는 선두 쪽으로 나서는 것이다. 부친을 대하는 조부의 태도가 지나치다지만, 그 모든 결과는 자 신에게 이득이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회의 차기 패권을 노리는 혜택을 보는 것은 자신이었으므로. 이에 서문도옥은 조부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 최선을 다하는 중 이었다. 조부는 적철항과 함께 당당한 걸음을 옮기는 중이었다. 손가가 옆으로 다가서는 것을 확인한 서문전이 입을 열었다. "우리가 먼저 장소에 도착할 듯하구나." 만면에 득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서문전이었다. 조금 전 평원에 아무도 없다는 보고를 받았던 것이다. "놈들의 수작은 확인 된 바 없습니까?" 서문도옥은 조심스레 물었다. 계속해 부친의 불길한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로서도 조금은 염려가 되었던 것이다. "흥! 최후의 발악을 하는 놈들에게 무슨 여유가 있어 그런 수작 을 피운단 말이더냐? 설령 놈들이 수작을 부린다 해도 여기 적 호 법께서 계시는 데 무슨 걱정이냐?" 서문적은 노골적으로 적철항을 추켜세웠다. 적철항은 사양치 않고 서문전의 아부를 즐겼다. 서문도옥은 더 이상 염려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수백 번을 생각하도 정의련은 오늘을 버티지 못한다. 이런 싸움에서 수적 우 세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천 마리의 양떼가 있어도 호랑이 한 마 리를 감당할 수 없는 법이기 때문이다. 이쪽에는 그런 비유조차 부 족하게 느껴지는 절대의 고수 오십여 명이 있다. 더구나 수작을 피우기에는 적합지 않은 평원지대에서의 결전. 하등의 염려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괜스레 부친이 더욱 측은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서문도옥은 곧 표정을 바꾸며 말했다. "괜스레 적 호법님께 수고를 끼칠까 염려되어 여쭌 것입니다. 놈 들이 별다른 수작을 피우지 않는다면 적 호법님까지 나서실 필요조 차 없으니까요." "크흐흐흐흐! 그래, 네 말이 옳구나. 적 호법까지 나서실 필요조 차 없는 일이지. 당당하기 이를 데 없는 손자의 말이 마냥 흡족한 서문적이었다. 아무리 봐도 못난 자식과는 사뭇 다른 손자였다. "무슨 소리요?" 적철항이 특유의 가늘고 높은 음성을 가진 목소리로 조손간의 대 화에 끼어들었다. "금강신협이라는 놈이 노부와 비견될 만한 금강불괴지신을 연성 했다고 들었소. 놈과 놀아보겠다는 기대에 가득해 있거늘 노부가 나설 필요가 없다니....!" "이런! 제가 미처 적 호법님의 흥취를 생각지 못했습니다." 적철항은 먹잇감을 눈앞에 둔 야수처럼 두 눈을 잔인하게 빛냈다. "지난 번 백발마신인가 하는 놈도 제법 튼튼한 몸뚱이를 가졌었 건만......" 백발마신이 난데없는 수작을 피우는 터에 제대로 놀아보지 못하 고 죽이고 말았다. 그것이 못내 아쉬었던 듯 적철항은 긴 혀로 입술 을 축인 후, 입맛을 다셨다. "제 아무리 금강불괴를 흉내 낸다 한들 적 호법님과 비견될 리 있겠습니까? 진의 힘을 빌리지 않는 한, 적 호법님께서 흥미를 느 끼실 거리도 못 될 것입니다." 서문도옥은 조부의 이어 적철항의 입매에 미소를 만들어 냈다. 눈치 빠른 손자의 한 마디 역시 서문전의 기대에 걸맞았다. "쿄호호호홋! 정말이지 네 혀는 기름을 바른 듯 매끄럽기만 하구 나." 적철항은 서문도옥이 자신에게 아부를 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지 만 싫지 않은 기색이었다. "아닙니다. 태산을 무너뜨릴 위력을 가진 적 호법님의 와유븅산 권이 아닙니까? 금강신협이라는 놈의 호신강기가 제 아무리 대단 하다 한들 호법님의 일 권을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쿄호호호홋!" 급기야 적철항은 기묘한 소성을 터뜨리면 목을 뒤로 젖혔다. 기 분이 한껏 고취된 것이다. 서문전 역시 은근한 표정으로 웃음을 함께 했다. 오늘의 확정된 승리를 벌써부터 만끽하는 것이다. 무림을 사분하던 한 축을 백존의 손실 없이 무너뜨릴 수 있다면 회 내에서 서문가의 입지는 다시 한 번 확고해질 것이다. 예기치 못했던 난항이 중간에 끼어들었었기에 더욱 값진 공로가 될 터였다. 그것이 서문전으로 하여금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게 하 는 중이었다. Chap.11 연합 서문전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패였다. 대대적인 일전을 각오한 정의련에서 오대세가와 각 파의 무인 전원을 이끌고 나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동호변에 도착한 자의 수는 채 백여 명도 되어 보이 지 않았단 것이다. 수적 우위만을 믿고 대대적인 일전을 벌이려는 것이 저들의 의 도라 짐작했건만 여지없이 빗나간 셈이었다. 오십여 명의 백존과 비슷한 숫자의 백응만이 나온 자신들과 큰 차이가 없는 숫자였다. 이에 서문전은 혼란을 느꼈다. 저들의 저의를 파악할 수가 없었 던 것이다. "주변을 살핀 것은 확실한 것이더냐?" 서문전은 재차 확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을 구성하기 위한 구조물이 전무함은 물론 진세에서 이는 특 유의 기운도 감지되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서문도옥은 자신 있게 조부의 질문에 답했다. "하면 대체....?" "최소한의 자존심이라도 지켜보려 함이 아닐까요?" 서문도옥이 조심스레 말했다. "최소한의 자존심?" "남창지부에서 작은 승리를 거둔 자들입니다. 아마도 그것이 저 들의 다였겠죠. 이후 세상에 정의련이 패종회와 맞서 일전을 벌었 다는 소문을 내는 것입니다. 적당한 피해를 감수한 패배 후에 항복 을 해 오는 것죠. 힘의 우위를 차지하지 못했으나, 당당히 맞섰다는 명분만큼만은 챙길 수 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쿄호호호홋, 정도라 자처하는 놈들의 체면치레하는 말인가?" 적철항이 비웃음을 머금었다. 서문전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손자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체 면을 제 목숨보다 중요시 여기는 정도의 무인들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패종회에게 굴복하는 것은 저들에게 있 어 다시없는 수치일 것이다. 따라서 적정선에서 무공을 겨루다 약세를 인정하는 쪽이 자신들 의 체면을 세우는데 유리할 터. 그런 이유라면 저 정도의 인원으로 동호변에 나선 것이 납득될 수 있었다. 서문전이 손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이었다. 적철항이 뾰족한 소리를 내질렸다. "이, 이게 어찌된 일이지?" 서문전과 서문도옥은 적철항의 시선을 쫓았다. 적철항 정도 되 는 인물이 저토록 동요를 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기 때 문이었다. 정의련 쪽 사람들의 선두 사이로 한 청년의 모습이 보였다. 순박 해 보이는 용모에 비교적 큰 눈을 가진 청년이었다. 예쁘장한 소년 의 인상을 가진 청년은 겉보기에는 별다른 것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를 확인한 서문도옥 역시 두 눈을 부릅떴다. 사해표국에서 그를 만난 적이 있는 서문도옥이다. 당시 도신 독고전륜의 제자를 자처하던 그였다. 모든 것이 거짓으로 밝혀지며 드러난 정체. 그 정체가 서문도옥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백발마신!" 적철항의 인상이 사정없이 찌푸렸졌다. 백발마신이 죽음을 공언 한 것은 자신이었다. 한데 그가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놈이 살아난 것은 둘 째 치고, 자신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는 상황이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적 호법." 적철항의 동요에도 서문전은 침착한 어조였다. ".....? "금강신협이라는 놈의 외양이 백발마신과 아주 흡사하다고 합니 다." "아!" 서문도옥은 조부의 말을 듣고서야 그와 같은 소문을 기억해냈다. "코호호호홋! 그렇군! 그래, 그건 거야." 적철항은 그재야 납득이 간다는 듯 웃음을 되찾았다. "그러고 보니 정말 닳았군. 정말 백발마신이라는 놈이 되살아 난 건줄 알았어." 적철항이 안도하는 사이 정의련의 인물들은 내력을 주입하지 않 아도 서로의 음성이 들릴 정도의 거리에 도착했다. 앞으로 나선 것은 역시나 금강신협이었다. 그는 긴장이라고는 찾아볼수 없는 표정으로 패종회의 백존들을 살펴본 다음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오." 스스로를 밝히지도 않고 대뜸 던진 말에 서문전을 비롯한 백존 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새 우리가 그립기라도 했던 것이더냐?" 금강신협의 말을 받은 것은 포영후였다. 이 자리에서 오랜만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사람은 남창지부를 공 격했던 자신들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금강신협으로 인해 수하 넷을 잃은 포영후의 어조는 좋을 리 없었다. "후훗, 당신에게 한 말이 아니야!" 금강신협이 포영후를 향해 비릿한 미소를 던졌다. 포영후가 당황스러워 하며 혼란을 겪는 사이, 금강신협이 한 사 람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날의 일 장은 제법 고마운 바가 있었소, 적 호법!" ".....!" 적철항의 두 눈이 크게 흔들렸다. 놈은 백발마신을 닮은 것으로 알려진 금강신협이 아니었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그 놈이 다시 살 아 돌아온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노회한 적철항은 금세 평정을 되찾았다. 죽었다고 여겼 던 놈이 살아나 체면에 손상이 온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 뿐이다. 놈은 단전이 파과된 폐인. 그가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이 이외일 뿐, 달리 동요할 이유가 없 음을 깨달은 것이다. "쿄호호홋! 제법 명줄이 긴 놈이구나." 적철항은 특유의 뾰족한 음성으로 선주혁의 말을 여유 있게 받 아냈다. 스스로 동요치 않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간신히 살아났으면 구석에 쳐박혀 귀하게 여긴 목숨이나 이어 나걸 것이지, 이 자리에서 나선 이유가 뭐냐?"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자신의 체면을 깎은 터. 적철항은 이 자리에 나선 선주혁의 만용을 한껏 비웃었다. "나약한 놈들이 저마다 영웅이라 추켜세우니, 우쭐한 기분에 나 선 것일 테지요. 적 호법께서 손속에 사정에 두어 살 길을 열어준 은혜도 모르고 말입니다." 서문도옥이 끼어들어 은영중에 적철항의 체면을 살려 주었다. 말 한다디로 상황을 뒤집은 것과 다듬없었다. "고훗! 그런 거였군. 그런 거야!" 적철항은 서문도옥의 말에 크게 만족했다. "후훗." 두 사람이 말을 주고받는 사이 금강신협은 가볍게 웃음을 지었다. "그러는 적 호법께서는 여인네 속옷을 입는 걸 즐기는데 싫증이 라도 난 것입니까? 이런 자리에까지 나서시다니....?" "이노옴!" 적철항의 두 눈에서 당장이라도 불꽃이 뛸 것만 같았다. "뭐하는 게냐? 어서 놈의 입을 막지 않고서?" 이쯤 되면 격전에 앞서 주고받는 말도 필요 없는 상황이었다. 서 문전은 더 이상 적철항의 체면이 깎이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어 황급 히 명을 내렸다. 그의 명에 포영후 등이 다시 나섰다. 지난 날 남창에서의 치욕을 메우려는 것이다. 당시는 절진에 의해 손해를 입었지만 이곳은 아무 것도 없는 평원. 이번에야말로 놈을 죽일 기회라 여긴 것이다. 포영후와 세 명의 백존의 앞으로 나서는 동안 서문탁이 서문전 에게 다가와 말을 했다. "어째서 백발마신이 정의련 놈들과 함께 있는 걸까요?" "응?" "놈은 정도 무림의 공적이 아닙니까? 한데 서슴없이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면서 저들과 함께 있다는 것은....." 그러고 보니 이상한 일이었다. 제 놈들 체면을 차리는데 급급한 정도 놈들이 백발마신과 함께 행동을 하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없 는 일이었다. "흥! 백발마신과 함께라면 명줄이 조금이라도 길어지리라 생각 했나 보지." 짧은 생각 끝에 서문전이 내린 결론이었다. 이에 서문탁은 부친에게 전음을 보냈다. [보고에 의하면 놈은 적성연격장을 맨몸으로 받아냈다고 합니 다. 단전이 파괴되어 무공을 잃은 놈에게 가능한 일일까요?"] "무슨 말이 하고픈 게냐? 이미 놈이 절진의 힘을 빌렸던 게 밝혀 지지 않았느냐?" 서문전은 아들의 우려를 일축해버렸다. 금강신협이건 백발마신이건 애초부터 위협이 될 수 없다는 확신 이 있기에 서문전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이다. 서문탁은 입을 다물었지만 여전히 표정이 좋지 않았다. 금강신협과 백발마신이 동일인일 가능성과 정의련이 그와 같은 사실을 알고도 함께 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단전이 파괴더어 폐인 이 되거나 죽은 줄 알았던 자가 다시 살아나 멀쩡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더 불안했다. 단지 절진만으로 네 명의 백존을 죽였다는 사실 을 믿기 힘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부친의 예측대로 돌아갔다. 포영후를 비롯한 백존을 상대하기 위해 나선 자는 백발마신이 아니었다. 이는 절진이 설치되지 않은 평원에서 백발마신이 힘을 발휘할 수 없음을 암시하는 단면이었다. 또한 서문도옥의 말처첨 저들이 적당히 체면치레로 승부를 낸 후 항복의 의사를 밝히려는 시도처럼도 보였다. 수많은 고수들을 대신한 채 서른의 나이도 되지 않은 쳥년 둘이 앞으로 나섰기 때문이다. 이에 서문전은 더욱 득의한 표정이었고 서문탁은 아예 뒤쪽으로 물러나려했다. "흥!네놈들이 우리와 상대를 하겠다는 게냐?" 앞으로 나선 두 명의 청년, 남지학과 남궁일을 확인한 포영후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남지학이외다." "남궁세가의 남궁일이오." 두 청년은 자신을 밝혔다. 이에 뒤로 빠지려던 서문탁의 표정이 바뀌었다. 옥용검마는 백발마신을 추앙하는 무리인 천애백의단의 수장으 로 알려져 있었다. 결국 백발마신 뿐만이 아니라 천애백의단마저 정의련과 함께 행 동하고 있다는 뜻. 이와 같은 정황은 항복을 위한 체면치례로 이 자리에 나선 것이 라 여길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서문탁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라온 말을 삼켰다. 백발마신이 함께하니 그를 추종하는 무리가 뒤따르는 것은 당연 한 일이라면 대수롭지 않게 여길 부친이 환히 보였기 때문이다. 괜 스레 나약한 발언을 하여 부친의 힐난을 살 필요는 없었다. "흐흐...., 네놈이 천애백의단을 이끈다는 애송이구나." 한편 포영후는 격전에 앞서 잠시 생각을 정리해야만 했다. 지난번의 수모로 인해 전원이 나서긴 했지만,옥용검마와 애송이 하나 더를 상대하기 위해 네 명의 백존이 협공을 펼치기에는 무 리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옥용검마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었다. 과거 옥용검마와 상 대를 한 적이 있는 고척의 보고에 따르면 그의 무공이 백존의 아래 가 아니라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고척과 포영후와의 차이는 크고도 컸다. 당시 동정호변에 있던 백존 중 최고수였던 임한용과 포영후만 해도 무려 이십구 위의 서열 차이가 났다. 단 한 수만을 앞서는 것 만으로도 큰 차이를 보이는 고수간의 실력이니만큼 포영후와 임한 용의 격차는 엄청난 것이다. 지금 나선 백존들은 모두가 임한용 이상의 고수들. 따라서 전원이 나서서 옥용검마를 상대하는 데는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몇 번에 걸쳐 제법 눈에 띄는 활약을 했다고 해서 기고만장해졌 나보군. 감히 애송이 둘이어 우리를 가로 막다니 말이야." 남지학은 노골적인 멸시를 드러내는 포영후의 말에 조금도 흔들 리지 않았다.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모두 덤비시오." "응?" 포용후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모두 다 덤비라고 했소. 당신들 넷 전부 말이오." "풉!" 포영후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잠시 후. "크하하하핫!" "크흐흐흐흣!" 포영후를 비롯한 네 명의 백존들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의 웃음은 뒤쪽에 서 있는 다른 패종회의 무인들에게도 옮 아갔다. 옥용검마의 발언은 패종회의 입장에서는 가소롭기 그지없는 발 언이었기 때문이다. 서열 이십 위권 내의 포영후가 포함된 백존 넷을 애송이 둘이서 상대하겠다니, 어찌 웃음이 나질 않겠는가?" 미심쩍은 마음에 뒤쪽으로 물러나있던 서문탁마저 실소를 터뜨 릴 정도였다. 하지만 남지학은 여전히 진지한 표정이었다. 그는 잠시 남궁일과 시선을 교환한 뒤 말했다. "먼저 오지 않는다면 이쪽에서 가겠소." "크흐흐흐.....,애송이! 오늘 하늘이 얼마나 높은지 알려주마." 포영후가 치아를 드러내며 으르렁 거렸다. 남지학과 남궁일은 침착하게 발검을 했다. 남지학의 영의검과 남궁일의 창궁검(蒼穹儉)은 둘 다 천하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명검 중의 명검. 어처구니없는 만용을 부리는 두 애송이였지만 두 개의 명검에서 느껴지는 예기에 네 며의 백존은 저도 모르게 표정을 궅혔다. 마냥 방심을 하고 있기에는 검을 뽑아든 두 청년의 기세가 예상 했던바 이상이기에 더욱 그랬다. "먼저 시작하겠습니다." 남궁일이 남지학에게 양해를 구했다. 남지학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수직으로 검을 세우는 남궁일. 정도 무인으로서 결전의 예를 갖추는 것이다. 동시에 그의 전신에서 막강한 기세가 일었다. 그 기세는 검에서 뽐어지는 것과 동화하기 시작했고 곧 남궁일 은 검과 하나가 되었다. 기세만을 보자면 마치 거대한 검 하나가 예 기를 뽐어내는 것만 같았다. 스스로가 유성을 봤고, 유성을 닮고자 했으니, 자신의 장력이 유 성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선주혁의 말에 큰 깨달음을 얻은 남궁일이었다. 이후, 계속적으로 수련에 박차를 가한 남궁일은 당시의 깨달음 을 넘어서는 성취를 얻을 수 있었다. 더불어 그의 몸에 남궁세가의 비전이 펼쳐졌다. 오랜 세월 정의련이 정도 무림의 중심에 서길 염원해온 남궁세 가였다. 남궁일이라는 걸출한 기재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남궁세가 는 천하제일의 고수를 자신들의 가문에서 배출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왔다. 그리고 세가의 원로들은 비전 중의 비전이랄 수 있는 세연유애 대법(世椽遺愛大法)을 찾아냈다. 머나먼 동쪽에서 유래된 선술의 일종인 이 대법은 중원에서 회 자되는 개정대법(開頂大法)과 유사했다. 하지만 유사하다고는 해도 비전의 결과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개정대법은 가히 천하에서 열 손가락 내에 들 정도의 내력을 소 유한 자가 아니면 시전 자체가 불가능하다. 또한 개정대법을 시행 한 자는 원정지기에 큰 손상을 입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었다. 이에 반해 세연유애대법은 같은 심법을 익힌 자 중 일정한 경지 이상만 되면 누구나 전개가 가능했다. 내력을 전수받는 자가 난해하기 이를 데 없는 구결을 완벽히 이 해해야한다는 제약이 있긴 했지만 남궁일의 자질을 고려하면 이는 난항이라 볼 수 없었다. 남궁세가으 원로들은 한 마음으로 모였다. 세가의 부흥을 위해 그들은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고, 스물두 명의 원로들은 각각 정한 바의 내공을 남궁일에게 전했다. 대부분의 인원은 자신의 여생을 편히 보낼 정도의 내력만을 남길 뿐이었다. 결과적으로 남궁일은 범인이라면 상상조차 힘든 엄청난 내공을 소유하게 되었고, 그가 깨달은 여러 무공을 전개하는데 전혀 무리 가 없게 된 것이다. 따라서 검과 완벽한 일체를 아룬 남궁일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도는 단순한 예기를 넘어서고 있었다. 막대한 내력이 뒷받침 되 는 기세는 포영후를 비롯한 백존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할 정도였다. "보통 놈이 아니다. 모두 조심하도록!" 체면을 따질 때가 아님을 자각한 포영후가 수하들에게 경고했다. 이해하기 힘들 일이지만 애송이의 내력이 백존 서열 십칠 위의 자신을 넘어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남궁일이 움직이기 시쟉했다. 그의 신형 전체는 하나의 검로를 쫓아 움직였다. 전신을 검으로 삼아 창궁무애검법을 전개하기 시작한 것이다. 남궁세가가 자랑하는 절대의 무공인 창궁무애검법. 초식이 만들어진 이래 본연의 위력을 한 번도 내지 못했다는 전 설을 안고 있는 무공이다. 그 극강의 검법이 거대한 검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스스로가 검으로 화한 남궁일의 초식은 공격의 범주가 가히 하 늘을 뒤덮는 듯했다. 거대한 검은 수많은 변화에 힘입어 크기를 더했고, 종국에 가서 는 눈부신 빛만이 시야를 채웠다. 포영후의 우측에 서 있던 백존 서열 이십이 위의 승적평(承積平) 이 남궁일의 공세에 반응했다. 서슴없이 남궁일의 검격 내로 뛰어든 승적평의 손에서는 기이한 묵광이 일렁였다. 원을 그리듯 남궁일의 검로를 방해하는 그의 손놀림 뒤에는 그 림자 같은 흑색의 궤적이 선명하게 남았다. 승적평이 전개하는 무공은 중원에서 마야십현수(魔爺十玄手)라 알려진 것이었다. 수공의 완성이라고 평가 받는 희대의 무공인 마야십현수는 전설 속에서나 회자되는 무공이다. 오랜 세월 서역에서 단신으로 중원을 찾아 적수를 찾아다니던 자가 있었다. 스스로가 밝히지도 않고 중원의 절대강자 서른세 명을 패퇴시키 고 다시 서역으로 돌아간 그. 중원에서는 그를 마중제일야(魔中第一爺)라 칭했다. 그가 중원의 절대강자를 제압하며 사용한 무공이 바로 십현수라는 것이었고, 이 후 중원인들은 그의 무공을 마야십현수라 부르게 된 것이다. 중원 무림에는 '완벽을 자부하는 무공을 익혔다는 생각이 들면 묵수를 떠올려랴' 라는 격언이 있다. 이는 무공에 대한 오만을 경계 하는 내용으로 가장 완벽한 초식으로 알려진 십현수를 두고 전해지 게 된 것이다. 승적평은 그와 같은 전설적인 수공을 통해 남궁일일 제압하고자 하는 중이었다. 마야십현수의 위력은 과연 명성 그대로였다. 뒤늦게 검격 내로 뛰어들었건만 승적평은 안전하게 자신의 위치 를 확보했고 난무하는 묵광은 그의 문호를 확고히 방어하는 중이었 다. 하지만 그도 잠시. 공수가 조화를 이룬 마야십현의 특징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승적 평의 수강은 천변만화의 창궁무애검법의 틈을 노리고 들었다. 후발선착의 묘리가 그대로 적용되어 남궁일이 선공을 했음에도 선기가 승적평에게 넘어온 것이다. 거대한 검이 만들어낸 푸른 검광과 승적평의 쌍수가 만들어낸 기이한 묵광은 짧은 순간에도 불구하고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충 돌을 만들어냈다. 귀청을 울리는 굉음과 땅을 울리는 진동이 이어졌다. 무공이 낮은 몇몇이 어지럼움을 느낄 정도의 현란한 공방이 계 속되는 동안 격전의 내용에는 변화가 있었다. 열핏 선기를 잡으며 공격의 횟수를 늘려가는 승적평이 유리해 보이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관전을 하는 패종회의 고수들은 눈살을 찌푸리는 중이었다. 수비를 하는 와중에서 남궁일의 검강은 그 크기를 더하는 중이 였고, 검강에서 비롯된 기운 역시 크기에 걸맞게 커져만 갔다. 다시 말해 남궁일은 아직까지 여력을 가진 채, 싸움을 임하고 있 다는 뜻이었다. 그에 대한 결과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수월하게 남궁일의 검강을 막아내던 승적평이 한 번의 충돌이 있을 때마다 인상을 찌푸리기 시작했다. 묵광을 발하는 손에서 느 껴지는 통증과 막대한 경력에 자꾸만 밀려나려는 몸을 바로 세우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현상이 노골적으로 드러나자 적철항과 서문전,그리 고 그를 지지하는 다섯 명의 절대십가 가주들이 인상을 굳혔다. 서열 이십 위권의 승적평을 밀어붙이고 있다는 것, 이는 곧 자신 들에게도 위협적이라는 뜻이었다. 하찮게만 여겼던 오대세가였다. 그 중에서도 애송이에 불과한 녀석이 자신들에게 위협을 니끼게 할 정도의 무공을 지녔으리라고 그들은 결코 예상치 못했다. 이쯤 되자 회주가 왜 확고한 기만을 다 진 후에 마교를 처리하려 든 것인지 납득이 될 정도였다. 콰아아앙! 대지가 뒤집힐 듯 큰 진동이 일었다. 압도적인 위력을 드러낸 남궁일을 맞이해서도 마야십현수는 그 모용을 발휘해 방어에 충실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공격에 실린 역도는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것. 검강을 방어한 이후, 그 힘을 이겨내지 못한 승적평은 크게 휘청 이며 입에서 피를 쏟아내야만 했다. 그가 흔들리자 초식의 모용으 로 완하하던 힘이 고스란히 땅으로 전해서 엄청난 진동을 만들어낸 것이다. "놈!' 승적평이 내상을 입자, 백존 서열 이십 위의 변덕윤(邊德允)이 준 비하고 있던 장력을 날렸다. 남궁일과 승적평의 싸움에서 균형이 틀어질 때부터 준비했던 강기 였으니 그 위력은 가공하기만 했다. 남궁일이 검강이 더욱 맹렬한 빛을 발한 채 날아오는 강기를 정 면으로 마주했다. 쿠아아앙! 강기와 검강의 충돌은 필연적인 폭음을 만들고, 일대는 다시 한 번 뒤흔들렸다. 땅거죽은 제멋대로 틀어지고, 잔잔하던 동호에 파도가 열기 시 작했다. 한차례의 격돌 이후 검의 형상에서 남궁일이 벗어났다. 변덕윤의 장력에 손해를 봤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두 눈은 이 전보다 더욱 밝게 빛을 내고 있었다. 그것은 승부를 탐하는 무인의 전형적인 눈빛이었다. 이는 남궁일이 변덕윤과의 승부에 흥미를 느낀다는 뜻이었다. "놈!강하다, 어쩜.... 나보다보!" 남궁일의 안광을 확인한 포영후의 결론이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알아 챈 것은 포영후 뿐만이 아니었다. 관전하는 적철항과 절대십가의 가주들 역시 같은 생각을 한 것 이다. 변덕윤이 남궁일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는 힘들었지만, 이미 절대의 영역을 넘어선 자신들의 느낌이 틀릴 리 없다는 사실 또한 간과할 수 없었다. 남궁일의 검이 허공에 떠올라 이기어검을 전개할 준비를 마쳤을 때, 변덕윤과 그 사이에 하나의 인영이 끼어들었다. 독안에서 기이한 빛을 발하는 노인. 절대십가의 가주 중 하나인 행초량이었다. "맹랑한 놈이로고!" 남궁일은 새롭게 등장한 노인을 자세히 살폈다. 특별한 기도를 내뿜지 않는 노인이었으나, 자신이 상대했던 백존들과는 차원이 다 른 고수임을 익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두 눈은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엄청난 고수를 마주했음에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늘 저런 식이군. 역시 패종회에서 믿는 것은 숫자뿐이란 말인 가?" 멀찌감치에서 관전을 하던 선주혁의 말이었다. 차륜전을 펼치는 패종회를 비웃고 있는 것이다. "억울하면 네놈들 모두가 덤비면 될 일이 아니냐?" 행초량이 독안을 빛내며 말을 되받았다. 그의 말에 선주혁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말했다. "안 그래도 그러려는 중이었소." "크하하핫! 얼마든지!" 행초량이 웃음을 터뜨렸다. 얼마 차이도 나지 않는 수위 우위를 자신하는 백발자신이 우스웠던 것이다. 고수의 숫자는 비할 바조차 못되니 더욱 그랬다. 하니잠 그의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막강한 기도를 뿜어내는 일단의 무리가 동호 쪽으로 접근해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누가....?" 행초량이 의아함을 느끼는 순간, 둥근 무엇인가가 날아와 그의 발 앞에 떨어졌다. 데굴데굴 구르는 그것은 사람의 수급이었다. "....!" 수급을 알아본 행초량의 얼굴색이 급속도로 변했다. 수급은 마교에 파견된 세 간세의 것이었다. 하지만 행초량의 안색이 변한 것은 세 명의 간세가 탄로 났기 땐 문도, 그들이 죽임을 당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수급을 던진 일단의 무리들이 문제였다. 주문인지 기도문인지 모를 말을 중얼거리면 포양호를 접근하는 무리의 경신공부는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 는 듯했으나 그 속도가 매우 빨랐던 것이다. 선두에는 한 명이 화려한 장식이 된 왯불을 들고 있었고, 네 명 이 옮기는 교자가 뒤따랐다. 교자 위에는 호안을 가진 중년인이 거만한 자세로 앉아 있었으 며, 그 뒤로 고수의 칭호를 듣기에 충분한 무인들의 행렬이 이어졌 다. "어서 오십시오, 단목 교주님!" 선주혁이 교자 위의 중년인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그리고 이어 종극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조금 늦으셨습니다, 종 장로님." "허허헛, 아직 제대로 판도 벌어지지 않은 것 같은데 뭘 그러는 게냐?" 종극은 선주혁의 말을 친숙하게 되받았다. 농이 섞인 두 사람의 대화가 오가는 동안 패종회 측에서는 일단 의 소란이 일었다. 마교와 정의련이 손을 잡은 것이다.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 또 다시 그들의 눈앞에 펼쳐졌다. 이 렇게 되면 손실 없이 큰 공을 세우겠다는 서문전의 애초 계획은 완 전히 물 건너간 것과 다름없었다. 그 때 종극이 말했다. "게다가 우리가 저들보다는 먼저 도착했으니 뭐라 하면 안 될 일 이지." 종극이 바라보는 방향. 그쪽에서 또 다른 일단의 무리가 동호를 향해 오는 중이었다. 높은 흑색의 관을 쓰고 흑의를 갖춰 입은 노인을 선두로 삼십 여 명에 달하는 노인들이었다. 놀랍게도 노인들은 마치 신선인양 구름 을 타고 동호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들은 정의련과 마교의 인사들이 있는 곳까지 인접해서야 구름 에서 내렸다. 사술임에 분명했지만 진위를 구분하기 힘들어 절로 감탄이 이는 광경이었다. 선주혁이 다시 두 손을 맞잡아 예를 갖췄다. "어서 오십시오, 은 회주님!" "할아버지!" 은설연이 반가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조부에게 달려갔다. 흑색의 관을 쓴 노인은 자애로운 표정으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 듬었다. 천사지황 은적비가 백사회의 일부를 이끌고 등장한 것이다. "사파연합까지!" 순우종명의 놀란 외침이었다. 선주혁은 패종회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서로를 소개하느라 바빴다. "동요할 필요 없어. 어차피 쓸어버렸어야 할 놈들이 한 자리에 모였을 뿐이니까." 그 사이 서문전은 한 마디로 수하들의 동요을 가라앉혔다. 마교와 사파연합이 함께 천애백의단을 지원하는 것은 널리 알려 진 사실. 두 세력이 함께 하는 것은 새삼스러울 일이 아니었다. 또한 아무리 마교와 사파연합이 정의련과 연수를 했다고 해도 여전히 고수의 숫자는 이쪽이 더 많았다. 저쪽에는 기껏 마교의 교주, 백사회의 회주, 그리고 이제는 여섯 만 남은 구대마존 정도가 여전히 불리할 게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다소의 피해는 있겠지만 사파연합, 마교까지 처치한다면 그 정 도는 당연히 감수해야만 할 일이었다. 이 한 번의 승부로 인해 패종회는 무림을 완벽히 장악하게 될 것 이고, 그 절대적인 공로는 모두 자신에게 돌아올 터, 서문전읜 오늘날과 같은 기회가 온 것을 외려 기뻐해야할 입장이 라고 생각하며 스스로의 상황을 정리했다. Chap.12 천음지력(天陰之力)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승부를 목전에 두었지만 긴장감은 패종회 측에만 감돌았다. 분명히 유리한 쪽은 자신들이라 생각하고 있음에도 의외의 상황 에 긴장을 늦추지 못하는 것이다. 반면 상대는 마치 친목의 장이라도 벌어진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백발마신이 나서서 이리저리 소개을 하느라 사뭇 화기애애해 보 이기까지 했다. "쿄호호홋!" 분위기는 적철항의 괴소성으로 인해 전환의 계기를 맞았다. "이러저리 쫓아다닐 필요 없이 한 자리에 모여주니 고맙군. 꽤 흥미가 이는 놈들도 보이고 말이야." 삼패의 일인이며 회의 호법인 적철항이 보이는 자신감이었다. 그의 눈에는 모두가 흥미를 돋울 장난감으로만 보였고, 그와 같은 사실은 패종회 무인들의 사기와 직결되었다. 자신이 속한 쪽이 유리한 상황을 상황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저 괴상망측한 놈은 또 누구냐?" 종극이 미간을 찌푸리면 선주혁에 물었다. "여인네 속곳을 즐겨 입는 변태에요. 정노님께서는 신경 쓰지 마 십니오." "크하하핫! 역시 패종회에는 별 잡놈들이 다 모여 있구나." 종극과 선주혁의 대화에 적철항에 두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극강의 무공을 익힌 이래로 그가 언제 이런 모욕을 받아봤겠는 가?" "이노옴!" 적철항의 노성. 그리고 그의 몸에서 이는 살기가 일대를 휘감았다. 여자 속곳이 어쩌고 하는 말에 웃음 머금었던 상당수의 안색 이 바뀌었다. 단 한 명의 몸에서 이는 가공한 살기에 모두 놀란 것이다. 더불어 패종회의 저력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되었다. "아,아! 당신은 좀 기다려야지, 아직 우리 순서가 아니라고." 선주혁은 얄미운 표정으로 적철항을 만류하면 턱짓을 했다. 그곳에는 아직까지 자세를 풀지 않은 남궁이로가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행초랑이 있었다. "어쨌거나 저 두 사람의 승부가 먼저 아니겠어?" 이제는 대놓고 경어를 쓰지 않는 선주혁으로 인해 적철항의 노 기는 더욱 짙어졌다. 하지만 그는 애써 성질을 죽였다. 난전은 곤란하다는 서문전의 전음 때문이었다. 괜스레 뒤엉켜 들었다가는 백존의 손실이 더욱 커질 것을 우려 한 것이다. "초량! 어서 놈을 죽이게." 적철항은 전신을 휘감은 살기를 거두지 않으며 뾰족한 음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적철항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행초량은 선뜻 움직이질 못 했다. 처음 남궁일을 마주할 때와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자세 를 갖추고 자신을 향한 남지학의 기도는 시간이 지날수록 대단해지 고 있었다. 지금에 와서는 마치 거대한 하늘이 눈앞에 펼펴진 듯해 어디를 공격해야할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남궁일의 기도는 행초량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어 타인은 느끼기 힘들었다. 오직 선주혁만이 흡성대법의 예민하기 이를 데 없는 감각을 통 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먼저 움직인 것은 남궁일이었다. 그는 마치 춤을 추는 듯한 동작으로 검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가슴 쪽을 완벽히 비워둔 체라 일견 그의 행동은 매우 위험해 보 였다. 하지만 행초량은 남궁일이 내보인 허점을 향해 장력을 뿜어내지 못했다. 하늘을 향한 장력이 허무하게 흩어지듯 자신의 장력이 흩어진 후 엄청난 검세가 쏟아져올 것만 같았던 것이다. 이는 고수 특유의 감각에서 비롯된 바, 실제로 현실이 될 가능성 이 매우 높았다. 남궁일의 검이 느릿하게 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루할 정도의 느린 움직임. 그 움직임에 따라 거대한 경력이 행초량을 압박해 들어갔다. 숨 이 막히고 기혈이 들끓을 정도의 압력이 행초량에게 쏟아졌다. 행초량은 억지로 호흡을 고르면 기회를 노렸다. 남궁일의 검이 지면과 수평이 되었다. 그러자 행초량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더 이상 시간을 끌다가는 아무것도 해보지 못한 채, 목숨을 잃게 될 것만 같았다. 그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눈부신 동작으로 허리를 낮추는 행초량. 남궁일의 검극에서 발출되는 막강한 기운을 옆으로 흘리려는 것 이다. 남궁일의 검극이 방향을 바꾸는 미세한 틈을 노려 행초량은 쌍 장을 내밀었다. 그의 손끝에서 폭발이 일고, 그 폭발은 새로운 폭발을 만들어냈 다. 그렇게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폭발이 남궁일을 향해 날아갔다. 마치 벽력탄을 일렬로 늘어세운 후 연속적으로 터뜨리는 것만 같은 장면이었다. 천뢰귀폭장(天雷鬼暴掌). 폭발이 계속 될수록 그 위력이 더해져 인간이 아닌 귀신의 무공 이라 불리는 절대십가의 무공이 전개된 것이다. "타합!" 엄청난 폭음성 가운데 남궁일의 낭랑한 기합성이 터지고 그의 검극이 맹렬한 기세를 담아 춤을 췄다. 고요한 하늘은 검극이 만들어낸 빛을 따라 거대한 벽을 만들었다. 푸른색을 머금은 벽은 폭발을 마주하고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리고 영역을 넓혀 행초량의 신형을 삼켜버렸다. "크아아아악!" 처절한 비명. 그것은 푸른빛에 사로잡힌 행초량의 것이었다. "저럴 수가!" 서문전의 입에서 튀어나온 놀란 외침. 그는 푸른벽에 갇힌 행초량의 신형의 먼저처럼 흩어지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반면 벽 뒤에 서있던 남궁일은 거친 숨만을 몰아쉴 뿐이었다. 처음으로 전력을 기울인 한 수. 지나치게 힘을 쏟아 부은 탓에 그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누구도 능숙치 못했던 그의 힘 조절을 탓하는 이는 없었 다. 패종회의 무인들은 더욱 그랬다. 절대십가의 가주를 단 일 초에 패퇴시킨 청년이다. 누가 그를 비웃을 수 있단 말인가? 아니 그들에게 있어서는 충격을 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이런 개 같은!" 적철항의 입에서 급기야 욕설이 튀어나왔다. 행초량의 죽음은 패종회에 있어서 단순한 손실 정도가 아니었 다. 절대십가는 패종회의 근간이나 다름없다. 호법인 그의 목전에 서 절대십가의 가주가 죽었으니 분노가 치미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 다. "적 노괴!당신의 상대는 나잖아?" 당장이라도 남궁일에게 달려들 것 같은 적철항을 멈춰 세운 것 은 선주혁의 한 마디였다. "이 찢어죽일 놈! 무공을 잃었다고 해서 봐줄 줄 아느냐?" 목에 핏대를 세워 외치는 적철항이었다. 선주혁의 지금 행동이 무공이 폐해져 외려 안전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라 여 기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당신의 상대란 말이지." 선주혁은 만면에 미소를 짓고 앞으로 나섰다. 아직까지 그로서도 적철항과 승부에서 필승을 자신할 수는 없 었다. 적철항 정도의 고수와의 승부는 직접 겨뤄보기 전에는 결과 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선주혁은 적철항을 더욱 자극했다. 조금이나마 그가 심적 동요를 일으킬수록 자신에게 유리해질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아니!자네의 상대는 적 호법이 아닐세." 적철항과 마주하는 자리로 걸음을 옮기던 선주혁을 멈춰 세우는 음성이 있었다. 마치 사방에서 동시에 말을 하는 듯한 목소리, 그것은 육합전성 (六合傳聲)을 연성시켰다. 선주혁을 비롯한 수많은 고수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자신 들의 귀을 속일 정도의 육합전성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 던 것이다. 놀라운 표정을 짓는 것은 적철항을 비롯한 패종회의 무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도 들린 거대한 음성은 귀에 익은 것이기 때문이다. 서문전만이 인상을 와락 쓰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릴 뿐이었다. "회주가....? 잠시 후, 포양호변에는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등장했다. 그들 중 한 명의 얼굴을 확인한 패종회 무인 전원이 부족했다. 머리를 따에 댄 모두가 한 목소리로 외쳤다. "패종천하!무림앙복!" 오늘날 무림의 대혼란을 가져온 주인공. 패종회의 회주 선우단천이 등장한 것이다. 일월신교, 사파연합, 정의련의 모두는 그의 얼굴을 살피기에 바 빳다. 패종회의 회주가 어떤 인물인지 직접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오직 한 사람. 선주혁만큼은 달랐다. 선우단천의 옆에 있는 한 사람을 향해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가 바라보는 곳에는 눈부신 백색으로 온 몸을 휘감은 여인이 있었다. 면사로 얼굴을 가렸지만 선주혁은 그녀를 알아봤다. 그의 입술이 달싹였다. "선우 아가씨!" 선우단천과 더불어 선우유미도 함께 이곳에 온 것이다. "자네에게는 본회의 호법과 겨룰만한 자격이 없다네." 마치 아이 취급을 하듯 말하는 선우단천의 말이었지만 선우혁은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그것은 선우단천이 선우유미의 부친이기 때 문이 아니었다. 상황이 극도로 악화되었음을 깨달았기에 선우단천 의 어조를 따질 틈이 없었던 것이다. 일원신교의 간세를 죽이기 전, 그들에게서 패종회의 회주가 천음 마후을 보다 완벽하게 하기 위해 서역으로 떠났다는 정보를 얻어 냈다. 동호에서의 일전을 계획한 것은 그와 같은 정보 때문이었다. 천 음마후가 없는 사이, 패종회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고자 함이었다. 한데 이 자리에 그녀가 나타난 것이다. 이는 백존 모두가 구음대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 더더구나 패종회의 회주와 삼패가 모두 한 자리에 있는 상황이 니 그야말로 최악의 형국에 접어든 것이다. 선우단천이 선주혁에게 적철항과 싸울 자격을 거론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천음의 힘을 받아 구음대법을 전개하는 백존이 있으니 호법인 적철항이 나설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후우...." 선주혁의 입에서 흘러나온 긴 한숨. 그것은 최악의 상황에 대한 마지막 탄식이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제는 최선을 다해 저들과 맞 이는 것이 최선일 뿐이었다. 그것은 선우유미와의 약속이기도 했 다. 최악의 상황은 전에도 충분히 경험했다. 그 때마다 자신은 살아 남았다. 그러니 미리 좌절할 이유는 없었다. "선우 회주님께서는 소생을 너무 가벼이 보시는 건 아닌지요? 아니면 천음의 힘을 너무 과신하시는 건가요?" 한순간 평정심을 회복한 선주혁이 말했다. 그의 입매에는 미소 까지 그려져 있었다. "하하하핫!이런, 이런! 전 무림이 백발마신에 대해 떠들어 대기 에 대체 어떤 인물인가 했건만.....,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대단 하군." 선우단천의 눈에 이채기 엿보였다. 천음에 대해 알고 있음에도 순간적으로 신색을 회복한 그를 높이 사는 것이다. "과찬이십니다." 선주혁은 이제 포권을 취하는 여유까지 보였다. "자네의 심기가 대단한 것은 인정하네만....,역시나 적 호법이 자네에게 손을 쓸 기회는 주어지지 않을 걸세." 선우단천 역시 여유롭기 그지없는 자세를 유지했다.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하지 않겠습니까? 천하에 구음대법만이 유일한 무공이라 여기는 것은 아니시겠죠?" "호오!자네는 정말이지 본회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구만." 선우단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한 번 선주혁을 인정한다는 식이었다. 그리고 연이어 물었다. "한데도 오늘에 있어 삶을 도모하고자 한단 말인가?" 선주혁은 담담한 표정으로 선우단천의 말을 받았다. "소생이 패종회에 대해 알고 있는 것보다 패종회에서 저희 쪽에 대해 알고 있는 바가 적으니까요." "하하하하핫!" 선주혁의 말은 들은 선우단천이 대소를 터뜨렸다. 그리고는 엄지를 세워 앞으로 내밀었다. "던언컨데 자네야말로 중원 무림을 대표할 영웅이랄 수 있을 걸 세, 하지만....!" 선우단천의 입가에서 미소가 지워졌다. "설령 천신이 하강하여 자네를 돕는다 해도 오늘의 결과에는 변 동이 없을 걸세." 당당하기 이를 데 없는 선우단천의 한 마디였다. 그것이 끝이 아 니었다. "유미야." 나직한 선우단천의 음성. 그것은 천음의 발동에 대한 선언이었다. 면사 위로 드러난 두 눈에 잠시 선주혁을 향하는가 싶더니 선우 유미의 몸에서 음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지금껏 그녀의 몸에서 느껴지던 음기와는 사뭇 다른 기운 이었다. 소름이 절로 돋을 정도의 음기. 순도 높은 음기의 양은 막대하기 이를 데 없었고, 뼈골이 시릴 정도의 기운은 빠른 속도로 동호변을 채워갔다. 동시에 백존들의 기세에도 변화가 있었다. 천음의 기운을 받은 그들이 구음대법을 시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정의련의 인사들과 백사회 소속의 무인들, 그리고 구대마존을 제외한 일월신교의 무인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한 순간 변해버린 패종회 무인들의 기도에 질려버린 것이다. 심지어는 단목하진이나 은적집의 안색마저도 변했다. 천음마후 의 구음대법에 대해 알고 있기는 했지만 설마 이 정도로 대단할 줄 은 미쳐 몰랐던 것이다. 그것은 일월신교의 장로들과 남지학, 남궁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직 한 명. 선주혁만이 침묵 속에서 두 눈을 빛냈다. 천음을 염두에 두고 수 련해 온 그것을 시험할 때가 왔기 때문이다. 그 방법이 효용을 나타낼 수 있다면 오늘의 일천은 패종회가 기 대하는 것처럼 수월하지만은 않게 될 것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 다. "자, 그럼 이제 시작해 봐야하지 않겠나?" 선우단천의 말에 몇몇이 움직였으나 제일 먼저 나선 것은 오가 량(吳佳良)이었다. 구음대법을 시전하고 있으므로 자신이 넘쳤던 것 이다. 그 누가 상대로 나서더라도 상관이 없다는 표정이었다. 선주혁이 진중한 표정으로 오가량에 맞서려 할 때 였다. "잠깐!" 난데없이 들려온 목소리가 선주혁을 멈춰 세웠다. Chap. 1 변수 선주혁은 의아한 표정으로 소리의 진원을 바라봤다. 종극이었다. 그는 잠시 선주혁에게 머물렀던 시선을 패종회 측으로 돌렸다. 이어 한껏 오연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백발마신은 일월신교와 사파연합을 비롯한 무림의 영웅이다. 더불어 정도에서조차 그 를 금강신협이라 칭송하며 떠받들거늘, 그의 명성이 하늘에 닿고 있는 이 시점에서 너 희 패종회의 잡졸들이 그를 상대할 자격이 있다고 보느냐?" 마치 아랫사람에게 훈시를 하는 듯한 종극의 발언에 패종회 인사들의 인상이 동시에 찌푸려졌다. 물론, 당금 무림에서 선주혁보다 명성이 높은 자는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백발마신인 그의 죽음을 기려 천애벽의단이 결성되고 무인이라면 그에게 경의를 주저 하지 않을 정도다. 간신히 그에 준할 정도의 인물이 있다면 오직 한 명. 그간 정도 무림이 자랑해온 금강신협 정도였다. 정도에서는 그를 금강무신이라 칭하 기도 하며 백발마신에 준하는 인물로 떠받들기에 바빴다. 한데 그 금강무신이 백발마신과 동일인임이 드러났다. 결국 정사를 대표하는 절대의 고수가 한 명이란 이야기니 당금천하에서 선주혁의 명 성을 따라갈 이는 아무도 없다고 봐야했다. 심지어는 패종회의 회주를 비롯 천하를 사분한 세력의 주인들조차 명성에 있어서만큼 은 선주혁과 비할 바가 못 될 정도였다. 그러나 염마의 발언 자체만으로는 문제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발언에 수긍하는 패종회의 무인은 아무도 없었다. 특히 구음대법을 연성 한 백존 이상의 인원은 더욱 그랬다. 백발마신 선주혁의 무공이 사뭇 대단한 것은 인정할 수 있었다. 동정호 변에서 다섯 명의 백존과 처절한 혈투를 벌인 것으로 그는 자신의 능력을 입증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천음의 지원을 받는 지금은 최하위 서열의 백존이라 해도 그를 가볍게 누를 수 있는 것이다. 그나마도 선주혁이 정상일 때의 이야기다. 패종회 무인 모두가 주저하다시피 선주혁은 이미 호법인 적철항에게 단전을 파괴당한 상태. 허장성세(虛張聲勢)를 유지하느라 앞으로 나섰을 뿐이라 다들 짐작하는 중이었다. 이에 어차피 선주혁이 직접 나서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무슨 핑계를 대고 다른 자 가 나서느냐가 문제였을 뿐이다. 한데 교묘하게 말을 돌려 자신들을 잡졸이라 칭하며 짓뭉개는 발언을 하자 백존들은 노기가 치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반면 선주혁은 은은한 미소와 함께 뒤로 물러서 사형인 남지학의 옆에 섰다. 선주혁이 순순히 물러나는 모습에 남지학은 약간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그간 사형과 천애백의단을 궁금하게 했던 힘의 정체가 나타날 모양이네요." "아······!" 선주혁의 한 마디에 남지학은 그제야 이해가 된다는 표정이었다. 천애백의단의 행사에 앞서 움직이는 힘에 대해 남지학과 은설연등은 계속 신경을 쓰 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엄청난 능력도 능력이지만 천애백의단의 움직임을 훤히 보 고 있다는 것은 큰 위협일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일월신교나 사파연합에서 패종회와 맞서기 위해 암중에 움 직인다는 것이었다. 남지학은 구대마존을 의식했다. 그들 중 여섯이 중심이 되어 움직인다면 무림매으이 고수들이나 종남파의 몰살도 충분히 납득이 갔기 때문이다. 사파연합에서 모종의 준비를 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기기묘묘한 사술을 이용한다면 종남파를 몰살시킬 여력이 충분했기 때문이다. 이에 남지학이 단목지민과 은설연에게 조사를 부탁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선주혁의 한 마디가 모든 의문을 해소시켜주는 중이었다. 일월신교에서 패종회와 상대하기 위한 수단을 강구했고, 그 결과를 드러내려는 중이기 때문이다. 선주혁이 이처럼 확신을 가진 데는 이유가 있었다. 과거 종극이 시간만 주어진다면 패종회를 상대할 방법이 있다고 말했던 것을 알고 있는 그였다. 거기에 아까부터 느껴지는 이상한 기운이 그로 하여금 결론에 도달하게끔 해 준 것이 다. 그것은 단목하진이 탄 교자 뒤에 있는 세 명에게서 기인한 것이었다. 이곳에 도착하 기 전부터 단목하진은 스스로의 내공으로 막을 형성하여 세 명의 기운을 가리고 있는 중이었다. 사제들이나 입을 법한 모양의 흑의를 입은 셋은 모두 복면으로 얼굴을 가렸 다. 도착해서 지금까지 고개를 숙인 채 외부의 어떤 상황에도 반응을 하지 않는 모습 이 기이해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긴박한 상황 중에서 그들을 주목하는 사람은 선주혁이 유일했다. 기감에 다시없이 민감한 선주혁이 아니고서는 단목하진의 내력으로 인해 그 기운을 느끼기 힘든 상황. 다른 사람들은 일월신교의 무인 중 하나일 뿐인 그들을 주목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 다. 선주혁만이 기이한 기운을 지닌 세 명이 일월신교에서 패종회를 상대하기 위한 최후 의 수단일 것이라 짐작했기에 그들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굳이 먼저 죽겠다는 놈이 있다하여 막을 이유가 없지." 선우단천은 종극의 발언에도 일체의 노기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시종일관 여유를 잃지 않고 아무나 덤벼보라는 의사를 밝혔다. "명성이 하늘을 찌르시는 백발마신을 대신할 놈은 누구냐?" 오가량은 선우단천의 눈짓을 받고서는 종극을 향해 외쳤다. 천음마후가 음기를 제공 해주고 구음대법을 운용하는 중이다. 오가량에게 있어서 지금은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는 상황인 셈이었다. 자신감 넘치는 오가량의 말에 종극이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그리고는 단목하진이 탄 교자의 앞쪽에 서 있는 사제차림의 남자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사제 차림의 남자는 뭔가를 중얼거리더니 들고 있는 횃불을 움직이기 시작했 다.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밝은 빛을 내던 횃불은 허공에 기이한 도형을 그려냈다. 그러자 선주혁이 감지한 묘한 기운을 발하던 세 명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느릿하기 이를 데 없는 걸음걸이로 앞쪽을 향하는 흑의인.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동작의 연속으로 그는 곧 단목하진이 기운을 차단하고 있는 범 주를 벗어났다. 그러자 흑의인이 가진 본연의 기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흡!" 은설연, 단목지민 등은 저도 모르게 헛바람을 들이키며 한 걸음씩 뒤로 물러섰다. 이어 본능적으로 내공을 일으켜 심맥을 보호했다. 흑의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 그것은 소름이 끼칠 정도의 마기(魔氣)였다. 평생을 두고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막대한 양의 마기. 천음마후가 만들어내는 순도 높은 음기와 비할 바는 아니지만 한 개인의 몸에서 저와 같이 막대한 기운을 발출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운 일이었다. 오가량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정면으로 마주 서 있는 그였기에 흑의인의 막대한 기운을 누구보다 절실히 체감하고 있는 것이다. 체외로 막대한 마기를 뿜어내는 것만으로 무공의 고하를 짐작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쉽게 볼 상대가 아닌 것만은 확실할 터. 오가량은 구음대법을 있는 대로 끌어올렸다. 천음마후가 제공해주는 막대한 음기가 단전을 가득 채워 사지백해로 뻗어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 충만한 기운을 재차 확인하고서야 오가량은 다소의 여유를 찾을 수 있었 다. 순간 복면의 흑의인이 고개를 들었다. 여유를 찾는 것처럼 보이던 오가량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흑의인의 두 눈 때문이었다. 아니, 눈빛 때문이었다. 복면 위로 드러난 흑의인의 두 눈이 있는 자리에서는 녹광(綠光)이 일렁이는 중이었 다. 탁한 색체의 녹광은 지나칠 만큼 강렬히 뻗어 나와 본래의 눈이 어떻게 생겼는지 확인조차 힘들었다. 오가량의 안력을 생각하면 이는 납득키 힘든 일이었다. 마치 애초에 눈이 있어야할 곳에 녹광이 대신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네놈은 누구냐?" 무림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과 마찬가지인 자리였다. 오가량은 상대의 기이한 분위기 에 다소 압도되어 약간의 시간을 벌어보고자 했다. 오가량은 괴이한 분위기의 흑의인에게 신분을 물었으나 정작 대답은 염마에게서 나왔 다. "크흐흐흐, 아쉽지만 그는 대답을 못한다네, 그저 일월신교의 하급 무사에 불과하지 만 패종회의 잡졸을 상대하기에는 충분한 실력을 갖추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게." "놈!" 오가량의 눈썹 끝이 하늘을 향해 치켜 올라갔다. 더 이상 망설일 이유도, 시간을 끌 필요도 없었다. 한 차례 노갈을 터뜨린 오가량의 쌍장 사이에서 푸른색을 머금은 백광이 번쩍이기 시 작했다. 강기가 형성되자마자 강렬한 빛을 발한다는 것은 그의 내력이 얼마나 심후하 고 정순한가를 보여주는 단면이었다. 이는 천음의 힘을 빌린 구음대법의 효용이었다. 오가량이 전개 중인 무공은 제세천음신장(制世天陰神掌). 천음마후의 음기를 가장 효율적으로 반영할 수 있도록 고안된 장력이었다. 그의 강기가 완벽한 형태를 갖추고 충분한 내력이 실리자 동호변에 모인 대부분의 무 인들 안색이 변했다. 과연 저와 같은 장력을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가에 대한 의심 이 들었던 것이다. 더불어 저 장력이 자신을 향해 날아올 것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소름이 끼쳤다. 대부 분은 단 일 장조차 감당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오가량의 양 손 사이에 떠오른 경이적인 장력을 확인한 중인들의 시선이 흑의 복면인 에게 향했다. 지독할 정도의 마기를 내뿜어 오가량의 장력만큼이나 놀라움을 자아내게 하던 흑의복 면인이다. 적의 강기가 가진 위력을 확인한 그가 어떤 대비책을 세우고 있는가에 대해 궁금해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중인들의 기대와는 달리 흑의복면인은 아무런 준비동작도 취하지 않고 있었 다. 양손을 늘어뜨린 채, 그저 녹광만을 빛내고 있을 뿐. 마치 승부를 포기한 것처럼 서 있었다. 그 모습에 정의련, 사파연합의 무인들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으나, 오가량은 달랐 다. 천음의 힘을 모르는 상대가 자신을 무시하고 있다고 받아들인 것이다.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릴 놈이로고!" 오가량은 낮은 음성으로 말을 씹어 뱉으며 쌍장을 밀어냈다. 묵직한 동작이 마쳐지는 순간. 눈이 시린 청백광은 더욱 빛을 발하고, 강렬한 빛은 수유의 시간만을 점하고서는 흑 의복면인을 향해 날아갔다. 오가량과 흑의복면인의 싸움을 관전하는 이들은 멀찌감치 거리를 확보한 상태였다. 그들은 저마다 스스로의 무공에 자신을 가지고 있는 무인들이었다. 하지만 장력의 발출과 더불에 소스라칠 정도의 음기의 영향을 받자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고야 말았다. 찰나에 불과한 순간이었으나 음기가 심맥을 파고든 것이다. 안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속도의 강기는 이미 흑의복면인에게 도달해 있었다. 방어자세조차 취할 틈을 찾지 못한 흑의복면인. 이대로 장력에 적중당한다면 어찌될지 결과가 훤히 보이는 상황이어서 중인들의 눈에 는 안타까운 빛이 떠올랐다. 몸에서 발출되던 마기에 비해 너무도 허망하게 당하고 말 았기 때문이다. 퍼억! 매달린 고기를 몽둥이로 후려치는 것과 같은 둔탁한 음향이 흑의복면인에게서 들렸 다. 내력으로 몸을 보호해야할 정도의 굉음과 장력의 여파를 예상하고 있던 중인들의 얼 굴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이는 제세천음신장의 특징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제세천음신장은 음공의 제일이랄 수 있는 장법이다. 천음의 힘을 최대한 이끌어내가 위해 고안된 만큼 그 성질마저도 천음을 닮아 있었다. 다시 말해 천하의 음공을 대표 하는 만큼 공력의 성격 역시 음유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요란한 폭음이나, 지축이 흔들릴 정도의 여파가 생기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음유하기 짝이 없는 장력이니만큼 목표한 대상만을 극음의 기운으로 손상시키는 장법 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한손을 들어 제세천음신장을 막아낸 흑의복면인의 모습은 너무나 멀 쩡해 보였다. 마치 이전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손만을 들고 서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는 오가량의 눈에서 이채는 찾을 수 있을지언정 난색의 기미 는 보이지 않았다. 제세천음신장을 정면으로 마주하고도 몸의 형체를 유지한다는 것은 제법 단단한 몸뚱 이를 지녔다는 뜻이었다. 적어도 금강불괴지신의 초입은 이뤘을 터였다. 그렇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절대에 해당하는 극음의 장력은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보다 내부에서의 타격이 훨씬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저렇듯 멈춰 서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음기에 휩싸인 혈맥이 얼어붙은 듯 굳었 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오가량에게 있어서 석상처럼 굳은 모습을 보이는 흑의복면인은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크흐흐흐흐흐······!" 번들거리는 오가량의 입술 사이에서 득의에 찬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또 나설 자가 있냐는 말을 하려던 오가량의 두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제야 발견했다. 흑의복면인의 눈 부위에서 빛나는 진한 녹광이 더욱 빛나고 있다는 것을·····. 죽은 자의 안광이 저렇듯 타오를 수는 없는 법. 놀랍게도 흑의복면인은 한 손을 가볍게 들어 제세천음신장을 막아낸 것이었다.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그것은 사실이었다. 인정할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오가량도 그랬다. "이, 이럴 리가···?" 뻔히 두 눈으로 보는 바를 믿기 위해 그가 내뱉은 말이었다. 그정도의 여유도 주어지 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인생 모두를 부정해야할 정도였다. 제세천음신장을.·····! 아무런 예비 동작도 없이! 그저 손 하나를 들어 막아냈다는 것은 오가량에게 있어서 그 정도의 충격이었다. 이는 구음대법을 익히고 제세천음신장을 익힌 백존 모두에게 해당하는 일이었다. 그들은 호흡을 멈췄다. 두 눈을 부릅떴다. 모두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오가량의 표정을 내 냈다. 아니, 그것은 자신만의 것이었다. 누군가를 흉내 내었기에 같은 표정이 된 것은 아니었다. 천음의 힘을 빌린 구음대법, 그리고 구음대법에서 비롯된 제세천음신장의 절대적인 위력을 알기에 하나 된 표정을 지은 것이다. "캬아아아아아아아!" 소름끼치는 괴성. 그것이 잃어버린 현실감각을 찾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흑의복면인의 두 눈에 한 자는 족히 되어 보이는 길이로 녹광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마치 제세천음신장에 자극을 한 듯한 모습이었다.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 린 느낌이 이럴 것이다. 내재된 흉성(凶性)을 깨우는 자극. 천하무적을 자부했던 제세천음신장이 고작 그 정도의 자극밖에 되지 못했음을 오가량 은 느낄 수 있었다. 부정하고픈 그 불길한 느낌을 떨쳐내겠다는 듯 오가량의 손이 거칠게 뿌려졌다. 청백광을 발하는 강기는 또다시 소리 없이 음유한 기운을 발하며 흑의복면인을 향해 날아갔다. 그와 동시에 흑의복면인의 신형이 움직였다. 앞으로 내밀었던 손을 그대로 한 채, 흑의복면인은 오가량을 향해 움직였다. 퍼억 하는 둔탁한 음향. 이는 흑의복면인의 손앞에서 제세천음신장이 맥없이 스러지는 것을 입증할 뿐이었다. 그리고 어느새 오가량의 눈앞에 선 흑의복면인. 그의 녹안에서 뻗어 나온 빛이 오가량의 두 눈에 연결이 된 것처럼 보이는 순간. 동호변에 모인 군중은 소리 없는 폭발을 느꼈다. 일체의 폭음도, 물리적인 현상도 불러일으키지 않는 기세의 폭발. 한순간 흐름을 정지시킬 압도적인 기세는 인세에 존재 자체가 비정상적인 마기의 폭 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쿨럭!" 마기의 폭풍이 휘젓고 지나간 자리에서 들려오는 마른 기침 소리가 붉은 안개를 불러 왔다. 오가량의 입에서 뿜어지는 피가 만들어낸 혈무였다. 자신의 눈과 닿아있는 녹광을 피하듯 시선을 아래로 떨구는 오가량. 그의 두 눈이 흔들린다. 격심한 흔들림 속에서 오가량은 확인했다. 흑의복면인의 팔이 자신의 가슴 깊숙이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팔꿈치가 보이지 않을 정도. 이는 흑의복면인의 손이 자신의 몸을 관통했다는 의미였다. 흑의복면인이 제세천음신장을 먼지 털 듯 떨쳐내고는 곧장 자신의 가슴을 꿰뚫었다는 것. 오가량의 두 눈은 생을 마감하는 그 순간까지 흔들려야만 했다. 모든 것을 납득할 수가 없었기에 죽음보다 더 큰 의혹을 지니고 호흡을 멈춘 것이다. 털썩. 흑의복면인이 팔을 뽑아내자 오가량의 몸이 짚단처럼 쓰러졌다. 그 소리가 동호변의 모두에게 선명하게 들렸다. 숨죽여 상황을 판단하기에 여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무거운 침묵. 천음의 힘을 빌린 오가량이 보여 준 엄청난 강기를 인지했기에 더욱 믿을 수 없는 흑 의복면인의 무위. 그로 인해 중인들은 충격에 휩싸인 것이다. 심지어는 그들을 수하로 부리는 일월신교의 교도들조차 입을 벌린 모습이었으니 다른 이는 언급할 필요도 없었다. "오가량이······ 일 수에?" 가장 충격이 큰 것은 백존들일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 지닌 바의 무위만을 가지고도 무림 제패는 어려운 일이 아니라 여겼다. 천음의 힘을 빌리는 것은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함일 뿐, 무림 도모의 결과에 영향을 끼칠 사항이 아니라 여겨 온 것이다. 자연 천음의 힘을 빌렸을 때는 무적이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것은 다시없 는 확신이었다. 헌데 종교적이랄 수 있던 그 믿음이 무너졌다. 너무나도 쉽게! 단 한 번도 염두에 두지 못한 패배였기에 백존들의 충격이 컸던 것이다. "과연·····! 과연 마교로군 감히 중원의 패주를 자처할 만한 역량을 지니고 있 었어!" 무거운 침묵을 깬 것은 선우단천이었다. 그는 충격에 휩싸인 패종회의 다른 이들과 달리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아니 빛나는 두 눈으로 미루어 작금의 상황을 외려 기꺼워하는 듯싶었다. "좋아, 그 정도는 되어야지." 선우단천의 한 마디는 동요하는 백존들을 수습했다. 단 한 마디에 불과했지만 현재의 백존들에게는 막강한 힘을 발휘했다. 사실상 회주인 선우단천의 등장 자체만으로도 패종회 내부의 알력은 종식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셈 이기 때문이다. 서문전 등이 미련을 버렸을 리는 없다. 하지만 작금의 상황은 모든 면에서 선우단천에게 유리했다. 만만히 보았던 정의련이다. 서문전 등은 최소의 피해만으로 정의련을 폐퇴시킬 것을 자신했다. 정의련과 마교, 사파연합의 연합은 완벽한 예측 밖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마교의 교주나 백사회의 회주가 아닌 자가 절대십가의 가주를 상대할 수 있을 것이라 는 것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저들은 예상을 이미 벗어난 상태. 그로 인해 서문전을 따르는 무리는 오늘 막대한 피해를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적철 항이 건재한 만큼 패배할 일이야 없겠지만 피해의 발생은 백존들에게 큰 위험이었다. 그 피해의 대상 중에 자신이 속하지 말라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거기에 흑의복면인의 출현으로 인해 상황은 서문전에게 더욱 불리해졌다. 천음의 힘 을 빌리고도 단 일 수에 백존 중 하나가 목숨을 잃은 것이다. 만약 이 자리에 천음마후, 그리고 선우단천이 없었다면·····? 그야말로 패종회가 일패도지(一敗塗地)의 상황에 몰렸을 것이 자명했다. 필승을 자신 했던 백존들에게는 등에서 식은땀이 흐를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간의 모든 결정은 선우단천이 절대적으로 옳았다는 것이 명확히 드러났다. 그 가 단순한 유흥거리를 위해 중원 제패의 과정에 시간을 끌었던 것이 아님이 입증된 것 이다. 방금 전의 한 마디로 인해 상황은 더욱 확고해졌다. 그는 패종회를 상대하기 위한 마교의 준비에 만족감을 표했다. 이는 선우단천 역시 그에 관해 이미 예상을 해왔고, 또한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 앞뒤 상황을 파악치 못하고 필승만을 자신했던 서문전과는 완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 준 것이다. 결정적인 그의 한 마디로 인해 백존들은 상황을 보다 여유롭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교주가 이미 예상했던 상황이라면 크게 동요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천음의 힘을 빌린 백존의 한 명이 저토록 무력한 모습을 보였다는 것은 충격적인 일 이다. 하나 오가량은 서열 팔십삼 위에 해당하는 하수였다. 구음대법은 서열간의 격차를 더욱 크게 벌린다. 고수간의 한 수, 한 수는 하수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구음대법을 운용하는 자의 능력은 그렇지 않을 때와는 엄청난 차이 가 있기 마련이고, 서열의 격차는 더욱 커지는 것이다. 따라서 교주와 삼패, 절대십가의 가주 전원이 모인 지금에 있어서 흑의복면인의 무위 에 동요할 이유가 없음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백존들의 얼굴에 다시금 자신감이 떠오르는 것을 확인한 선우단천이 입을 열었다. "현당····, 자네 정도면 충분히 상대하지 않겠는가?" 느긋하고 여유 있는 권유에 공현당(孔賢當)은 살짝 고개를 숙여 회주의 명을 받들었 다. 백존 서열 십팔 위의 공현당이다. 절대의 고수라도 기가 질릴 흑의복면인의 무공임에도 서열 십팔위의 공현당이면 충분 하다는 것이 회주가 내린 결론. 패종회의 무인들의 표정에는 이제 담담함이 깃들 정도였다. "유미야···· 천음을 현당에게 집중해 주거라." "····!" 백존들은 회주의 말을 듣고 크게 고무되었다. 그간 천음마후의 음기는 그녀의 의지에 따라 일정 영역에 무작위로 방출된다고 여겨온 그들이었다. 헌데 회주의 말대로라면 특정한 인물에게 천음을 집중할 수 있다는 뜻. 광범위하게 제공되는 츤음만으로도 막대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구음대법이다. 집중 적인 음기를 제공 받을 수 있다면 그 위력은 추측할 수 없을 정도임이 분명했다. 서문전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고개가 아래로 숙여졌다. 회주가 진짜로 서역에 다녀온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아니, 서역까지 다녀왔을 리가 없다. 천음마후에게는 애초부터 저와 같은 능력이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회주는 천음마후의 보완을 위해 서역행에 올랐다고 말했다. 이어 한 명에게 천음을 집중할 수 있는 결과를 들고 왔다. 자신을 제외한 다른 백존 들은 필시 회주가 작금의 상황을 명확히 예측하고 있었기에 그와 같은 준비를 한 것으 로 여길 것이다. 이로서 그간 얻어온 서문 가의 신뢰는 땅에 떨어지고, 서문 가가 상 실한 모든 것은 교주를 향할 것이 분명했다. 서문전은 애초부터 선우단천이 자신들의 상대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 다. 공을 세우고 기반을 닦아 손자에게 건네려는 시도 자체가 무리수였다. 차라리 선우단천에게 총애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게 백배 유리한 상황이 된 것 이다. 회의 절대적인 신뢰를 확립한 회주다. 이제 와서 그가 지목하는 차기 회주에 이의를 제기할 자가 누가 있겠는가? 서문전이 후회와 낙심으로 고개를 떨구는 사이, 공현당은 흑의복면인의 앞에 정면으 로 마주섰다. 그와 더불에 동호 일대를 휘돌든 음기에 변화가 생겼다. 아직까지 음기가 만연해있지 만 공현당이라 불린 자에게 상당량의 음기가 집중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천음의 막대한 음기가 자신의 주변에만 더욱 충만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느낀 공현당 은 구음대법을 극한으로 운용하기 시작했다. 터질 듯 차오르는 막대한 양의 음기. 그 음기가 충만한 내력으로 변환되고 있음이 체내에서 선명히 느껴졌다. 공현당의 표정에서 긴장감이 옅어졌다. 아니 태어나 처음 가져보는 가공할 힘에 황홀 경에 젖어들 정도였다. 이 정도의 힘이라면 전 무림을 홀로 상대한다 해도 두렵지 않 기 때문이었다. 공현당은 주체할 수 없는 힘의 통제를 멈췄다. 자부심을 갖기에 충분한 힘을 과시하 려는 것이다. 공현당이 체내에 응축시키던 힘을 제어하지 않자, 그 막대한 기세가 동정호변으로 퍼 져갔다. "뒤로 물러서!" 남궁백연이 창백해진 안색으로 명령했다. 무공이 떨어지는 몇몇은 이미 입가에 선혈 을 내비치고 있었다. 공현당이 단순히 기세를 내뿜은 것만으로 내상을 입은 것이다. 제자리에 서 있는 자 들보다 물러서는 이의 수가 훨씬 많았다. 공현당의 가공할 기세를 감당하지 못하는 것 이다. 그와 같은 장면에 패종회의 무인들은 만족스러워 했다. 이제야말로 필승의 확신을 되 찾은 것이다. 적철항만이 살짝 미간을 찌푸릴 뿐이었다. 그가 미간을 찌푸린 것은 백발마신이라는 애송이 때문이었다. 절정 고수임을 자부하는 수많은 무인들이 분분히 뒤로 물러서는 가운데 그가 멀쩡한 모습으로 제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주 여유 있는 표정이었다. '설마····?' 잠깐이지만 저 애송이가 내력을 보존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을 품었다. 하지만 적철항은 이내 고개를 저였다. 선주혁의 주위에는 절대십가의 가주를 일 초에 박살 낸 남궁일이 있었다. 과거의 백 발마신에 비해 손색이 없다는 남지학도 함께 였다. 이에 두 사람이 내력으로 선주혁을 보호하고 있다고 여긴 것이다. '단전이 파괴된 놈이 이 정도의 기세를 버텨낼 리는 없으니까 말야.' 적철항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자꾸만 저 놈에게 신경이 쓰이는 건지····, 쯧! 나도 이제 늙은 건가?'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는 것에 대해 적철항은 세월을 탓했다. Chap. 2 강시 공현당의 막대한 기세에도 불구하고 흑의복면인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모습이었다. 메마른 땅에서 절로 흙먼지가 피어오를 정도의 막대한 기세. 그 속에서 흑의복면인의 두 눈에서 내뿜는 안광은 여전했다. 마치 봄의 훈풍을 맞으 며 서 있는 것 같은 여유로움이었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에도 흔들림이 느껴지지 않았다. "제법 기개 있는 모습이군." 한껏 여유로워진 공현당이 입술을 비틀었다. 흑의복면인의 당당한 모습이 눈에 거슬 린 것이다. 대답은 없었다. 공현당은 위압적인 기세에 무게를 더하며 흑의복면인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무럭무 럭 피어오르는 기세는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더해졌다. 청백의 광채가 그의 양손에서 시작되어싿. 구체의 강기를 발출하지 않고 수강을 통해 직접 박투를 벌일 모양이었다. 공현당은 느릿하게 흑의복면인을 향해 다가갔고, 흑의복면인은 다가오는 공현당을 향해 녹광만을 뿌릴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선주혁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공현당과 흑의복면인 사이의 간격이 좁아질수록 흑의복면인의 마기에 기폭이 느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 정도의 막강한 기운을 흘릴 수 있는 고수가 기세에 흔들림이 있다는 것은 말이 되 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것은 마치 심적 동요처럼 느껴지는 흔들림이었다. '이 일을 위해 갑작스럽게 배출한 고수이기 때문인가......?' 저와 같은 고수가 이전부터 마교에 있지 않았음을 선주혁은 알고 있었다. 그는 패종 회를 상대하기 위한 마교만의 비방으로 탄생한 고수인 것이다. 그렇다면 아직까지 스스로의 능력에 확신을 가질 수 없을 수도 있었다. 마치 선주혁 자신처럼. 선주혁은 한조백의 은신처에서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렸다. 수많은 격전 속에서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서 본 그는 수련에서 얻은 경지와 실전에서의 효용은 무관함을 알고 있 었다. 따라서 그 역시도 자신이 달성한 성취가 과연 어떤 위력으로 실전에서 나타날지 확신 이 없는 상태였다. 그로서는 과연 천음마후의 지원을 받는 패종회주와 삼패를 감당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지금의 흑의복면인처럼 크게 동요하지는 않을 수 있었다. 경험때문이다. 위험한 격전을 많이 치를수록 싸움에 임한느 자세는 담대해진다. 선주혁이 흑의복면 인을 경험이 부족한 신진고수라 여긴 것은 이 때문이었다. 흔들리는 기파가 긴장에서 비롯된 동요라 여긴 것이다. 선주혁이 그렇게 결론을 내리는 사이, 공현당은 흑의복면인의 지척에 다가서 있었다. 공현당의 양손에서 빛나는 청백의 광채는 이제 눈이 부실 정도. 선주혁은 흑의복면인의 반응에 더욱 신경을 곤두세웠다. 한 눈에도 가공할 위력이 담 겨진 수강을 저와 같이 동요한 상태에서 어떻게 막아낼 것인지 관심 있게 보려는 것이 다. 또한 백존 중 서열이 상위에 속했음이 분명해 보이는 고수가 발휘하는 천음의 힘이 얼마나 큰지도 확인해야만 했다. 자신의 능력과 천음을 운용한 구음대법의 위력을 모 두 모르는 선주혁에게는 실로 좋은 기회였던 것이다. 공현당의 손이 움직였다. 흑의복면인을 향해서임은 당연한 일. 강기의 청백광은 허공에 긴 호선을 그려냈다. 어린아이라도 볼 수 있을 정도의 속도. 하지만 단순히 느리기만 한 동작은 아니었다. 강기가 발출하는 가공할 음기는 거미줄 처럼 퍼져나가 상대의 전신을 옭아매고 있었다. 함부로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 쉽지 않 을 터였다. 느릿하게 자신을 향해 나아오는 청백의 강기를 향해 흑의복면인 역시 우수를 내밀었 다. 두 사람의 장이 허공에서 마주하는 순간. 관전하는 모든 이의 두 눈이 빛을 발했다. 퍼억! 둔탁하고 미약한 소음. 그것이 전부였다. 엄청난 여파는 존재하지 않았다. 고수들은 드러난 현상의 원인을 알고 있었다. 상쇄(相殺). 공현당과 흑의복면인이 발출한 장력의 크기가 비등하여 두 장력이 소멸되어 버린 것 이다. 눈살을 찌푸린 공현당은 양 다리를 옆으로 벌려 기마세를 취했다. 양손이 단전 아래까지 향했다가 가슴까지 올라왔다. 강기의 광채가 더욱 강해지고 있 으니 한눈에도 공현당이 자신의 모든 것을 끌어내고 있음이 분명했다. 추후에 있을 일 격에 승부를 내고자 함이었다. 반면 흑의복면인은 이제 선주혁 이외의 고수들조차 느낄 정도로 마기의 기폭을 드러 내는 중이었다. 저럴 시간에 차라리 공현당이 내력을 끌어 모으는 것을 방해라도 하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흑의복면인에게서는 별다른 움직임을 찾을 수가 없었다. 패종회와 맞서는 많은 이들은 흑의복면인이 실전경험이 없음을 짐작했고, 이를 크게 안타까워했다. 그 사이 십이 성의 내력을 모두 끌어낸 공현당의 입에서 중후한 기합성이 터져 나왔 다. 기합성과 함께 하는 공현당의 동작은 앞에서 본 바보다 더욱 느렸다. 그의 양 손은 빛 을 발하며 마치 묽은 나무둥치를 미는 마냥 느릿하게 앞을 향했다. 허나 관전하는 모두는 알고 있었다. 저 느린 동작에 상상키 힘든 암경(暗勁)이 담겨진 극성의 음공이 실려있다는 것을...... 짧은 순간 중인들의 시선은 흑의복면인에게 쏠렸다. 흑의복면인은 가공할 마기를 뿜어내긴 해도 실전경험이 턱없이 부족한 신진고수. 과연 저와 같은 엄청난 공세에 어떻게 대응할지 염려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사마를 떠나 지금에 있어서는 흑의복면인의 선전을 염원치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흑의복면인은 자신을 향하는 공격을 마치 보지 못하는 듯 여전히 미동조차 않 고 있었다. 변화는 오직 그의 몸에서 발출되는 마기뿐. 마치 파도의 고저마냥, 아니 거대한 해일의 파도와 잔잔한 수면과의 차이만큼이나 큰 폭으로 몸에서 발출하는 마기의 양에 변화가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너무나도 짧은 주기로 변하는 마기의 양을 느낀 것은 장내에 단 둘밖에 없었 다. 대낮임에도 강렬한 빛을 발하는 횃불로 허공에 기이한 도형을 그려내는 사제차림 의 마교도 한 명과 선주혁이 그 두 사람이었다. 퍼억! 둔탁하지만 강렬한 느낌을 자아내는 충돌음. 급기야 공현당의 공격과 흑의복면인의 방어가 만난 것이다. 두 사람은 서로의 손바닥을 마주 댄 채로 굳은 듯 보였다. 그리고는 잠시간의 정적이 이어졌다. 바람소리 외에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던 정적을 깬 것은 길고 끔찍한 괴성이었다. "크아아아아아악!" 고개를 하늘로 들어 올리며 질러대는 괴성의 주인공은 흑의복면인. 그것은 마치 지독한 통증을 이기지 못한 처절한 비명과도 같았다. 창백한 안색이긴 해도 굳건히 자세를 지키는 공현당과 크게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중인들은 공현당의 승리를 점쳤다. 하지만 그도 잠시. "커어어억!" 메마른 신음성이 흑의복면인의 괴성 속에서 흐르고, 공현당의 입에서는 시커멓게 죽 은 피가 한 사발도 넘게 토해졌다. 비명을 지른 것은 흑의복면인이었으나, 정작 신형을 비틀거리는 것은 공현당 쪽이었 다. 창백한 안색, 그리고 토해내는 피의 양으로 보아 한눈에도 위급한 상황이었다. "현당!" 백존 중 공현당과 친분이 깊은 사마준(司馬俊)의 신형이 화살처럼 쏘아진다. 어느새 가득 모인 진력이 그의 장심에서 발출되어 흑의복면인을 향했다. 흑의복면인이 장력을 막는 사이, 공현당을 빼내오려는 것이다. 퍼억! 앞서 공현당과 흑의복면인의 충돌이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둔탁한 음향이 울린다. 미동조차 없이 공현당의 장력을 막아낸 것과는 달리 흑의복면인의 신형이 튕기듯 뒤 로 밀린다. 비록 한 단계의 서열 차지만 구음대법의 위력이 드러내는 격차는 컸던 것 이다. 그 사이 사마준이 공현당을 부축해 패종회 진영으로 물러났다. "캬아아아아아아!" 협공에 대한 분노인지, 아니면 앞서처럼 고통에 겨운 비명인지 모를 의미의 괴성이 다시금 흑의복면인의 입에서 토해졌다. 공현당을 수하에게 넘긴 사마준이 다시금 앞으로 나섰다. 공현당을 빼내오기 위해 손을 쓴 만큼 자신이 마무리하겠다는 의지였다. 협공과 차륜전에 대한 비난은 없었다. 정의련 측에서는 흑의복면인과 백존들의 가공할 무위에 넋이 나가 있었고, 사파연합 에서는 다소 우려되는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천마맹 측은 흑의복면인의 능력에 대해 자신이 넘치는 관계로 딱히 지적을 하고 나서 지 않은 것이다. 다만 새롭게 나선 자의 일 장에 흑의복면인이 밀려났다는 사실만은 의외라는 표정이 었다. 패종회 측의 체면을 생각해 사마준은 자신이 끼어들어 공현당을 빼내기 위해 한 수를 보탠 것에 대한 변명을 하려했다. 한데 이제까지와는 달리 흑의복면인이 먼저 움직였다. 폭발적이면서 단순한 움직임.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사마준을 향해 이동한 흑의복면인의 일장이 쏘아졌다. 경악을 할 정도의 속도였다. 하지만 사마준은 앞서 흑의복면인과 맞섰던 패종회측 인물들과 다른 방식을 취했다. 흑의복면인의 움직임은 가히 탄성을 자아낼 정도로 신속했지만, 동선의 단순함 역시 극에 달해 있었다. 오직 정면만을 향하는 직선 일색인 움직임. 구음대법의 위력에만 의존해 힘 대 힘으로 누를 생각이 아니라면 피해내는 것은 그다 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사마준은 표홀한 신법으로 흑의복면인의 일장을 쉽게 피해냈다. 그와 동시에 공력이 가득 실린 사마준의 우수가 흑의복면인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선공의 실패 이후 있을 동요를 노린 불의의 일격이었다. 하지만 흑의복면인은 부족해 보이는 경험과는 달리 조금의 당황함도 없이 사마준의 일격을 막아냈다. 다소의 충격을 받은 듯 뒷걸음질을 쳤으나 큰 부상을 입은 것 같지 는 않았다. 사마준은 모처럼의 호기를 놓친 것이 꽤 아까운 모양이었으나, 서두르지 않았다. 그 는 침착한 표정으로 문호를 굳건히 방어하며 다시금 흑의복면인의 공격을 기다렸다. "캬아아아아오!" 흑의복면인은 극노한 듯 괴성을 지르며 앞서보다 빠른 속도로 사마준을 향해 달려들 었다. 이번에도 별다른 초식을 엿볼 수 없는 단순한 동작. 비록 앞서보다 속도가 빠르다고는 해도 사마준의 안력을 벗어날 정도는 아니었다. 사마준은 우측으로 일보를 내딛어 이번에도 가볍헤 흑의복면인의 공세를 피해냈다. 그리고 또 다시 일 장을 쏟았고, 여지없이 흑의복면인의 방어와 마주했다. 뒤로 밀려나 괴성을 질러대는 흑의복면인. 반복되는 장면에 각 세력 간 인사들의 표정이 엇갈렸다. 패종회 측의 표정은 한결 밝아졌다. 천음과 구음대법의 힘을 자부한 나머지 힘의 우 위만을 점하려는 단순한 사고에 빠져있었던 것이다. 힘의 우위는 승패를 결정짓는 하나의 요소일 뿐임을 일시간 망각했었다. 그것은 마치 집단적인 최면상태와도 같았다. 천음과 구음대법이라는 강력한 미약이 모두의 정신을 점령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미망에서 깨어난 지금! 흑의복면인이 가진 압도적인 무위에도 패종회 측 인사들은 다시금 안정을 되찾았다. 사마준이 보여준 한 수가 그들에게 해법을 안겨다준 것이다. 패종회 측 인사들의 안색이 밝아지는 사이, 사마준과 흑의복면인은 벌써 다섯 차례에 걸쳐 공방을 반복했다. 똑같은 과정의 연속이었다. 마치 집착과도 같은 단순한 공격. 이어지는 역습과 방어. 공격의 무용이 증명된지 오래건만 흑의복면인은 단순하고 기계적인 동작으로 또다시 사마준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퍼억, 하는 둔탁한 음향과 뒤로 튕겨지는 흑의복면인의 신형. 급격하고 빠른 움직임의 연속이라 해도 반복에 이은 반복은 지루함을 불러일으킬 정 도였다. 관전하는 대부분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 안에 있는 변화를 눈치챈 것은 소수였기 때문이다. 똑같은 과정의 반복이라고 생각하고들 있지만 소수의 몇몇은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흑의복면인이 뒤로 밀려나는 폭이 점차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격전의 중심에 있는 사마준은 그와 같은 사실을 확연히 느끼는 중이었다. 공격을 피해낸 후 반격을 가할 때, 흑의복면인의 장에서 비롯된 반발력이 점점 강해 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마준의 표정에서 난색을 읽을 수 없었다. 그는 천하에서 가장 강함 힘을 가 진 패종회에서 서열 십일위를 차지하고 있는 절대의 고수였다. 하나의 시도가 뜻대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해서 좌절하는 경우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쾌속한 흑의복면인의 공세. 우측으로 피하는 사마준의 신형. 다시금 날아가는 일장. 신속하게 제 위치를 찾아 공격의 길목을 차단하는 흑의복면인. 여기까지는 앞서와 다를 바가 없었다. 흑의복면인의 장과 사마준의 장이 충돌하려는 순간. 사마준의 장이 기묘한 곡선을 그려내며 흑의복면인의 장을 비켜섰다. 퍼억. 둔탁하긴 매한가지지만 앞서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음향이 터지고, 흑의복면인의 신 형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사마준의 장력이 흑의복면인의 단전을 정확히 가격한 것이다. "좋아!" 백존 중 한명의 입에서 튀어나온 한마디였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사마준의 신형이 뒤쪽으로 튕겨진 흑의복면인을 쫓았다. 지 금껏 보여준 흑의복면인의 괴물 같은 무위를 보아 단전에 적중한 일장이 상황의 끝을 고하지 않을 가능성이 옾았다. 노련한 사마준이 한번의 성공에 자족하지 않고 확실한 결론을 보려하는 것이다. 폭발적인 속도로 흑의복면인을 따라붙은 사마준. 어느새 그는 흑의복면인의 신형이 그리는 궤적의 연장선에 먼저 도착해 있었다. 흑의복면인보다 상위에서 사마준의 장력이 다시 폭발했다. 퍼어어억! 마치 한번처럼 긴 여운을 남기는 음향. 사마준은 무려 세 번에 걸쳐 허공에 떠 있는 흑의복면인을 난타했다. 첫 번째 공격에 서 비롯된 충격 탓인지 흑의복면인은 이렇다 할 방어도 못한 채, 연속된 사마준의 장 력을 고스란히 몸으로 받아냈다. 터어억. 둔탁한 음향 세번이 연속음처럼 들리고 수유의 시간차에 이어지는 소리. 그것은 흑의복면인의 신형이 땅바닥에 처박히는 소리였다. 풀썩이는 먼지. 낙하로 인한 충격 이외에는 일체의 힘도 가미되지 않은 현상이었다. 이는 사마준의 공격에 일체의 여력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증거. 흑의복면인의 신체에 사마준의 공세에 담겨진 힘이 조금의 분산됨도 없이 완벽하게 쏟아졌다는 의미였다. 정의련, 사파연합 인사들의 안색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금강불괴지신이라 할지라도 저와 같은 공세를 받은 이상, 살아남을 수 없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후우......!" 사마준의 입에서 진기를 다스리는 호흡 소리가 흘러나왔다. 방금 전의 삼 장은 그로 서도 무리한 힘을 끌어낸 공격이었던 것이다. "귀교에 더 감춰둔 패가 있으신가?" 몇 번에 걸친 호흡 후, 진기의 안정을 되찾은 사마준이 종극 일행이 있는 쪽을 향해 던진 말이었다. 흑의복면인을 직접 공격한 그가 승부에 대한 결론을 내릴 것이다. 사마준이 질문을 던진 곳은 마교측을 향해서였으나, 제일 먼저 반응한 것은 남지학이 었다. 가공할 마기를 선보였던 흑의복면인이 저 모양이 되었으니 선뜻 나설 자가 없었던 것 이다. 하지만 남지학의 그와 같은 의도는 실제 행동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선주혁 탓이었다. "......?" "아직 승부가 결정되지 않았어요, 사형." 선주혁의 낮은 음성에 남지학은 흑의복면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누운 채로 미동조차 하지 않는 흑의복면인이었다. 누가봐도 즉사했음을 의심치 않는 상황. 하지만 남지학은 앞으로 나서려던 의도를 접었다. 사제가 끝이 나지 않았다고 하면 끝이 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남지학은 신형을 제자리로 돌리는 사이 종극이 입을 열었다. "내놓은 패가 아직 제몫을 하는데 어찌하여 우리가 다음 패를 내놓아야한단 말인가?" 조소에 가까운 표정의 한 마디에 사마준의 안색이 급격히 변했다. 미간에 골 깊은 주름을 잡은 채, 그가 외쳤다. "무슨 말도 안되는......!" "캬아아아아아......!" 사마준의 말은 누구의 것인지 분명한 괴성에 의해 가로막혔다. 수없이 듣는다 해도 익숙해지기 힘든 끔찍한 괴성의 주인공을 알고 있는 사마준의 안색이 급격히 변했다. 그는 괴성이 들려온 위치를 감안해 반대방향으로 신형을 날리며 시선을 돌렸다. 양손 은 문호를 굳건히 해 불의의 습격에 대비했다. 고수 특유의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과연 어느새 몸을 일으켰는지 모를 흑의복면인이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모습이 보였 다. 신형을 급히 뽑지 않았다면 이미 흑의복면인의 급습에 당했을 터였다. "이런 괴물 같은 놈이!" 다시금 엉켜드는 사마준과 흑의복면인. 그들은 또다시 앞서의 과정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공격과 회피, 변초와 적중, 그리고 땅바닥에 처박히는 과정까지. 흑의복면인의 괴소성이 점차 커지고, 바닥에서 일어나 는 속도가 점점 빨라질 뿐, 지루한 반복이었다. "정말이지 대단하군, 둘 다!" 남지학이 작은 음성으로 탄복했다. " 금강불괴지신의 흑의복면인도 대단하지만 저와 같은 공세를 끊임없이 쏟아 붓고 있 는 자도 정말 대단하네요." 은설연 역시 상식을 초월하고 있는 격전을 보며 말했다. "천음의 지원을 받고 있으니까요." 선주혁은 아릿한 눈빛으로 선우 아가씨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이러다간 끝이 없겠군." 주백광도 약간은 질린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뭔가 변화가 있을 겁니다." 계속해 흑의복면인과 사마주느이 격전을 살피며 선주혁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변화?" 은설연의 질문에 선주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요동을 치는 흑의복면인의 마기. 그것은 앞으로 있을 커다란 변화의 전주곡과 같다고 인지하는 선주혁이었다. 한편 흑의복면인과 사마준의 격전을 조용히 바라보던 종극이 걸음을 옮겼다. 땀을 뻘 뻘 흘리며 횃불로 허공에 도형을 그려대고 있는 사제차림의 사내에게로였다. 종극이 몇 마디를 그에게 건네자 사제차림의 사내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자신 감이 결여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종극이 말한 바는 명령이었다. 자신의 판단이나 기준 우위에 선 명령. 사내로서는 선 택의 여지가 없었다. 사내는 곧 동작을 멈췄다. 그리고 입술을 달싹여 다시금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아아!" 시계추처럼 반복된 동작만을 계속하던 흑의복면인의 괴성. 그 안에 담겨진 변화에 선주혁의 안색이 변했다. 지금껏 크나큰 높낮이를 보이던 흑 의복면인의 마기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가공할 정도의 양을 보이던 마기가 더욱 늘어 나 고저의 폭이 훨씬 커졌다. 높아졌을 때 마기의 양은 마치 둑을 무너뜨린 홍수처럼 거칠고 거대했다. '주문과 횃불의 도형이 저 자의 힘과 관련이......?' 사제차림의 마교도를 보며 선주혁이 생각한 바였다. 지금까지 보여준 흑의복면인의 힘만으로도 가공하다는 표현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경험의 부족으로 인한 단순함이 아니라면 저 엄청난 힘을 누가 막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한데 그 힘이 억제되어 있던 것이라면 본연의 능력은 대체 얼마나 대단하단 말인가? 스스로의 깨달음에 아직까지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는 선주혁으로서는 긴장감이 고 취되는 순간이었다. 그는 더욱 눈을 크게 뜨고 흑의복면인의 변화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한계치를 벗어난 마기의 분출은 누구든 느낄 수 있는 거대한 변화였다. 흑의복면인에게 인접해 있는 사마준은 더욱 그랬다. 호흡조차 잇기 어려울 정도의 막 대한 마기를 접한 그의 두 눈이 흔들렸다. '이, 이런 말도 안되는......!' 그가 잠시 동요를 보이는 사이는 절호의 기회. 하지만 흑의복면인은 그 틈을 노리지 않았다. 한차례의 괴성을 질러댄 그는 서서히 걸음을 옮겨 사마준에게 다가갔다. 공포에 질려 도망칠 생각조차 못하는 먹이를 향해 걸음을 옮기는 맹호의 그것처럼, 느릿하고 여유 로운 움직임이었다. "준!" 내력이 가득실린 외침. 그것은 절대십가 가주의 한 명인 나충적의 일갈이었다. 그 외침에 화들짝 정신을 차린 사마준이 신형을 뒤로 뽑았다. 앞서와 달라진 무너가를 확연이 느낀 그는 상대의 변화에 대해 파악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를 확인한 흑의복면인의 신형이 제자리에서 꺼지듯 사라졌다. 어느새 사마준의 눈 앞까지 따라붙은 것이다. 엄엄한 기세를 담고 내밀어지는 일 장. 사마준은 헛바람을 들이키며 물러서는 방향을 틀었다. 이전에 비해 엄연한 차이를 보 이는 속도였고, 맹공이었으나 단순하기는 마찬가지. 사마준은 가까스로 흑의복면인의 공세를 옆으로 흘려보냈다. 놀란 심정 속에서도 고수 본연의 자세를 잃지 않은 사마준은 공격의 실패로 인한 빈 틈을 놓치지 않았다. 열린 상대의 가슴을 향한 일격. 변화를 내포한 강한 일 장이 이번에도 여지없이 상대의 가슴에 작렬하리라는 사마준 의 기대는 오래가지 않았다. 움직임의 속도가 배가된 만큼 흑의복면인의 방어는 사마 준의 변화를 따라잡았던 것이다. 쿠아아앙! 공격을 막아내는 방어의 일 수와의 충돌. 그것은 고수들마저 귀가 멍멍할 정도의 폭음을 만들어냈다. 더불어 사마준의 신형이 뒤로 튕겨져 나갔다. 그가 날아가는 궤적은 입에서 뿜어져 나온 붉은 피가 선명히 보여주고 있었다. 사 장 여를 뒤쪽으로 물러선 후, 간신히 신형을 바로 세운 사마준의 눈에는 경악만이 가득했다. "쿨럭!" 바튼 기침과 함께 한 사발은 족히 됨직한 피가 쏟아지고, 나충적이 그의 앞을 가로막 았다. 흑의복면인의 가공할 힘을 느끼자 절대십가의 일원이자 패종회 서열 칠 위의 그가 직 접 나선 것이다. 승패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의 강적임을 피부로 느꼈으나 더 이상 백 존의 손실이 있어서는 안되었기 때문이다. 나충적이 흑의복면인과 사마준의 사이에 끼어들자, 다른 백존들이 신속하게 사마준 을 부축해 진영으로 돌아갔다. 얼굴이 시커멓게 죽은 사마준은 한 눈에도 생명이 위태 로워 보였다. "충적! 자네의 상대가 아닐세." 놀라운 한 마디. 그것은 패종회의 회주인 선우단천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었다. "회주!" 나충적은 선뜻 인정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를 일견한 나충적은 시선을 돌렸다. 마교도들이 있는 방향이었다. "중원에 대한 꿈을 키우며...... 아주 오래된 전설을 하나 들었소." 시선은 마교를 향했으나 내공을 실은 그의 목소리는 모두의 귀에 선명하게 들렸다. "귀교에 천하를 종말로 이끌 정도의 비방이 간직되어 있다고 하던데...... 이 물건이 바로 그것이오?" "패종회의 회주께서는 실로 귀도 밝으시구려. 본교의 비방에 대한 소문까지 주워들으 시다니......" 종극이 대답을 시작했다. "하지만 조금 잘못된 소문을 들으셨구려. 멸세강마대법은 천하를 종말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종말에서 구하는 구세지법(救世之法)이외다." "후훗. 대법의 이름과는 반대되는 역할을 하는 물건이었구려." 인간의 한게를 뛰어넘은 격전 이후의 대화치고는 차분하고 침착한 대화가 이어졌다. "누구의 손에 칼자루가 쥐어지느냐에 따라 칼의 용도가 바뀌는 것이 아니겠소?" 차분한 대화라지만 내용은 그렇지 못했다. 노련한 종극은 패종회의 회주가 의도하는 바를 익히 짐작하고 있었다. 이 자리에 모 인 대다수는 패종회의 무림 독패를 막고자 하는 중이었다. 한 세력의 패주(敗走)가 무 림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패종회가 가진 압도적인 힘에서 비롯된다. 한데 그 힘마저 무색케 하는 다른 힘을 마교가 가지고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힘을 합쳐 패종회를 막아야할 게 아니라 자칫 마교를 막아야할 상황이 올 수도 있는 것이다. 선우단천은 교묘한 언변으로 그와 같은 상황을 암시하는 중이었고, 종극이 숨도 안 쉬고 답변하는 것은 그에 반박하기 위함이었다. "본좌의 눈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저 물건은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마기만 이 충천해 이지마저 흐려 보이니 살아있는 인간으로 뵈지는 않는구려." 살아있지 않은 자가 저렇듯 움직이며 가공할 힘을 발휘한다는 것. 그것은 무린에게 금기시된 강시술이 사용되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대다수의 무림인들은 선뜻 선우단천의 말을 납득키 힘들었다. 강시가 두려움 의 대상이 될 정도의 무인들은 이 자리에 없었기 때문이다. "구하의 안목이 고명하구려. 그렇소! 멸세강마대법은 역천의 술(術)을 내포하고 있소 이다. 본교는 오늘의 일을 마무리 지은 후, 금기를 어긴 데 대한 책임을 지겠소." 종극은 중인들에게 들으라는 듯 일부러 언성을 높였다. 이는 패종회를 상대하기 위함 외에는 멸세강마대법으로 탄생한 괴물을 사용할 뜻이 없다는 의지를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과연 누가 있어 귀교에 책임을 물을 수 있겠소?" 선우단천의 마지막 말은 종극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시선이 정의련과 사파연합 의 인사들을 향해 있었다. 정의련측 인사들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천음의 힘을 빌린 백존들의 무 위는 실로 가공할 정도였다. 자신들 중 누구라도 저들의 일 장을 받아낼 수없을 것만 같았다. 그런 자들을 가볍게 제압하는 마교의 비법을 확인했다. 강시를 제조하는 것은 금기 중의 금기. 전 무림을 적으로 돌리는 행동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지금 마교가 그와 같은 상황을 두려워할 리가 없었다. 멸세강마대법이라는 비 방으로 만들어진 저 물건은 전 무림을 상대하고도 남을 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 이다. 패종회주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늑대를 피해 범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미는 상황 이 벌어질 가능성이 없지 않은 것이다. 한 눈에도 패종회주의 말에 흔들리는 기색이 역력한 정의련측 인사들의 표정을 보며 종극이 내심 혀를 찼다. 저 정도로 한심한 인간들이 무림의 한 축을 지탱하고 있었다 는 사실이 못마땅했다. '그런 면에서 상당히 비교가 되는군.' 종극의 시선이 스쳐간 곳에는 천사지황 은적비가 있었다. 그는 매와 같은 눈을 차분 히 빛낼 뿐, 시종일관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모래알과 같은 사파인들의 구심점이 될 자격이 충분한 자였다. 빠르게 정황을 살핀 종극이 주름진 입술을 열었다. Chap. 3 금강마고(金剛魔?) "무슨 긴 말이 필요하겠소? 어차피 작금의 상황이 종료되면 세인들은 진실을 보게 될 것이오." 힘이 잔뜩 실린 종극의 음성. 동요하는 군중들을 가라앉히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보였지만 저들에게 달리 방도가 있을 리 없었다. 선우단천은 입을 다물었다. 종극의 침착한 대응이 있었다지만 경천동지할 격전에 집 중되어 있던 군중들의 시선을 돌리기엔 충분했던 자신의 발언이었다. 더 몰아붙여선 이로울 게 없었다. 마교에서 준비해온 괴물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예상 밖의 저 물 건들은 패종회가 달성하고자 하는 위대한 업적에 큰 위협이 된다. 그것은 확실한 사실 이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위기감을 스스로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수하들의 사기에도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가 우려하는 바는 저와 같은 괴물이 하나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마교주가 내공을 이용해 마기를 감추고 있는 범주 내에는 흑의복면인, 아니 멸세강마대법이 만들어낸 기이한 강시 둘이 더 있었다. 자신과 삼패, 그리고 절대십가의 가주 전원이 상대한다 해도 승패를 장담키 힘든 상 황이다. 정의련과 사파연합이 마교와 함께 행동한다면 일은 더욱 어려워진다. 선우단천으로서는 저들에게 의구심을 심어주는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었다. 저들이 단 한 순간이라도 망설인다면 승패는 얼마든지 뒤집힐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와 같은 계기를 만들었으면 그걸로 충분했다. "저 물건에 대해 꽤나 확신이 있는 모양이구려." "암중에 무림을 도모하는 것들을 청소할 정도의 쓸모는 있는 물건이니까." "후후훗! 고작 저딴 물건에 의지하는 것이 귀교 최후의 비방이라니 약간은 실망이외 다." "사냥을 위해서 필요한 사냥개 정도로 생각하시오." 한 순간 패종회를 사냥감으로, 그리고 짐승으로 비유하는 종극의 언변에도 선우단천 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미소는 백존들의 연이은 패배로 위축된 패종회 인사들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대호를 향해 덤벼든 사냥개의 운명을 확인시켜 드리리다." 짧게 종극의 말을 받은 선우단천이 고개를 살짝 돌렸다. "적 호법께서 수고를 좀 해주어야겠소." 선우단천의 말에 적철항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외양과 어울리지 않는 특유의 음 성으로 그가 물었다. "그 정도로 대단한 물건이오?" 적철항은 자칫 오만해보일 수 있는 질문을 특유의 고음과 함께 조심스레 물었다. 서문전의 행사에 직접 나선 바는 회주가 기꺼워할 일이 아니다. 작금의 상황에 비춰 보면 더욱 그랬다. 그런 와중에 교주의 발언에 의구심을 제기하는 것은 좋지 않았다. 한데도 그가 굳이 이런 질문을 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절대십가의 가주들을 물리 고 자신이 나설 것을 권유하는 바에 대한 강조였다. 저 물건을 직접 처리했을 때의 공 로를 확고히 하기 위함이다. "세 호법과 본좌가 아니면 감당키 힘든 물건처럼 보이는구려." 적철항의 저의를 짐작한 선우단천은 순순히 그의 의도에 따라줬다. "회주의 판단이 그러시다면 노구를 움직여야겠지요." 적철항은 한껏 공손한 자세로 선우단천의 명을 받들었다. 거구를 움직여 흑의복면인, 아니 멸세강마대법으로 완성된 강시를 향해 가는 그의 걸 음걸이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강시는 강시일 뿐이라는 선입견 때문이 아니었다. 천음의 지원 을 받는 백존들을 연이어 패퇴시키는 강시의 가공할 힘은 충분히 인지했다. 한계를 벗 어난 힘과 속도는 적철항도 크게 놀랄 정도였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사마준이 이미 증명했듯 승패란 힘과 속도만이 다가 아니었다. 급격히 향상된 힘과 속도로 사마준을 곤경에 몰아넣은 바가 있다지만 그것은 사마준 정도의 무위를 지닌 자에게만 해당되는 일이다. 적철항이 내린 결론에 의하면 서열 오륙 위 내의 백존이라면 누구나 저 물건을 감당 하기에 충분했다. 상당히 위험한 물건임은 분명했지만 그렇다고 정의련과 사파연합의 애송이들의 개입 까지 염려한 정도로 위협적이진 않았다. 여러 면에서 감탄을 금치 못하는 회주였다 하 지만 이번에만큼은 냉철함을 상실한 것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껏 범인의 한계를 벗어난 능력을 보여주던 회주였다. 그러나 저 물건들은 분명 회주의 예상 밖에 있던 변수다. 계산 밖의 상황이기에 교주는 조급해하고 있으리라. 이해가 갔다. 무림제패라는 위업을 코앞에 둔 상황이었다. 사소한 변수라 해도 신경이 곤두서기 마 련이거늘 절대적인 자부심을 가져온 천음과 구음대법이 무너지는 모습을 봤다. 당연 히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대단한 인물이라 해도 회주의 연륜을 생각하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적철항 자신에게는 잘된 일이었다. 저 물건들을 처리한 공로가 보다 높게 평가될 것 이 틀림없는 일이기에...... 적철항이 강시를 향해 나서자 사제차림의 마교도가 다시 횃불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크르르르......" 짐승과도 같은 목 울림소리가 강시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숨막히는 마기 속에서 적철항은 태연한 표정이었다. "캬아!" 괴성과 함께 빛살처럼 쏘아지는 강시의 신형. "흥!" 나직한 코웃음이 터지고 적철항의 신형이 물 흐르듯 움직였다. 느릿한 듯, 여유롭게 움직인 적철항의 신형은 어느새 강시의 뒤편에 서 있었다. 목표를 상실한 강시의 두 눈에서 녹광이 진한 색채를 발했다. 동시에 뒤쪽으로 우수를 내뻗는 강시의 팔. 보통의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각도로 관절이 꺾여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예상 밖의 급습에도 적철항의 대처는 유연했다. 마치 강시가 발출하는 거대한 기운의 흐름을 타듯 자연스럽게 뒤로 물러선 것이다. 그 모습은 마치 유령과도 같아 강시보다 적철항의 모습이 더 괴기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자연스러운 물러섬으로 강시와의 거리가 벌어지자 적철항이 주먹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 장면을 확인한 선주혁의 입매에 고소가 맺힌다. 자신을 죽음 직전에 이르게 한 무 공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와류붕산권. 적철항이 자랑하는 성명절기이자 희대의 권법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강시가 적철항이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리는 사이, 와류붕산권은 여지없이 강시의 몸 에 작렬했다. 쿠아아앙! 그야말로 산이 허물어지는 굉음이 울려 퍼지고 강시의 신형이 뒤쪽으로 맥없이 날아 갔다. 마치 실 끊어진 연처럼 뱅글뱅글 돌면서 날아가는 강시는 무려 백여 장은 됨직 한 거리까지 튕겨진 후에야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와류붕산구너 본연의 위력에 천음과 구음대법이 배합된 결과였다. 적철항의 입매가 호선을 이룬다. 그의 압도적인 무위에 중인들은 경악하고 있음을 느꼈고, 그들의 시선을 즐기는 것이 다. 강시는 움직일 줄 몰랐다. 미증유의 거력이, 와류붕산권에 담긴 가공할 힘의 회전이 강시의 내부를 진탕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장기의 기능이 무용한 강시겠지만 그 충격 을 한 순간 이겨내기는 힘든 것이다. 적철항이 중인들의 시선을 충분히 즐겼을 시간이 지난 후, 강시가 꿈틀거렸다. 벌레 와 같은 꿈틀거림은 제법 큰 폭을 이뤄냈고, 얼마의 시간이 흐르자 몸을 일으킬 정도 가 됐다. 일어나 정면으로 향했던 강시의 시선이 적철항을 향했다. "크르르릉." 나직한 울부짖음. 그것은 확연한 적개심의 표현이었다. 자신에게 고통을 가한 자를 향한 분노. 순간적이었지만 중인들은 그렇게 느꼈다. 하지만 대부분은 찰나의 그 느낌을 부정했다. 강시는 감정을 지니지 않는다. 때때로 거친 흉성을 드러낼지언정 개인을 향한 적개심을 가질 수는 없다. 강시를 부리는 술사 의 명을 따를 뿐이기 때문이다. 콰앙! 짦은 폭음. 강시가 땅을 박찼다. 인지는 나중의 일이다. 공간의 압축. 강시가 보여준 것은 무인들이 꿈에도 그리는 신법의 극의(極意). 시간의 제약을 넘어서 의지보다 앞선 움직임이었다. 측정할 수 없는 속도의 선상에서 땅을 박참과 공격은 동시에 이뤄진다. 뒤늦게 중인들을 경악시킨 것은 강시의 가공할 공세가 이번에도 무위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마치 유령과도 같은 움직임 속에서 적철항은 자신이 원하는 바의 거리를 벌려둔 채, 반격의 고삐를 채고 있었다. 묵직한 일 권. 회전력을 담은 미증유의 거력이 강시를 향한다. 쿠아아아앙! 관전자의 내기를 들끓게 하는 굉음과 함께 다시금 강시의 신형이 바람개비처럼 돌아 날아간다. 적철항의 신형이 빛살처럼 날아 강시의 신형이 날아가는 지점으로 향한다. 등을 보인 채 팽이처럼 돌아오는 강시의 신형을 향하는 또 다른 와류붕산권. 반대의 방행에서 더해진 회전력 탓인지, 이전보다 더 큰 힘을 쏟아 부은 건지 모르겠 지만 더 큰 폭음이 일대를 뒤흔든다. 지면에서 은은한 진동이 느껴질 정도의 굉음과 함께 강시의 신형이 허공에 멈춘다. 이어지는 낙하. 털썩. 회전과 역회전의 거력 때문일까? 유난히 맥없이 들리는 소리와 함께 강시의 신형이 늘어진다. 제멋대로 꺾여버린 몸이 강시의 상태를 증명한다. 백존들의 공세를 하찮게 쳐냈던 강시의 금강석 같은 뼈에 손 상이 간 것이다. 지푸라기처럼 늘어진 강시의 상태를 보아 내부의 근골이 조각이 났음을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강시는 목을 베지 않는 한, 계속 움직여 조종자의 명을 따른다. 하지만 저와 같은 상태에서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해보였다. 몸을 지탱해주는 뼈가 조 각나고 근육이 갈기갈기 찢어졌으니 움직이고자한들 방법이 없는 것이다. 도검불침의 강시를 내부에서 무너뜨린 적철항의 암경은 실로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관전자들은 감탄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껴야만 했다. 적철항은 오연한 표정을 유지하며 서서히 강시에게로 다가갔다. 예의 능공허도의 경 공이 발휘된 그의 신형은 강시의 바로 옆에 떠 있었다. 적철항의 우수가 수도를 만들고, 허공에 들리자 밝은 빛 무리가 맺혔다. 수직으로 내려쳐지는 적철항의 수도 끝에서 강기가 발출됐다. 빛이 향하는 곳은 강시의 목. 끝장을 보려는 적철항의 의지가 강시를 향했다. 퍼억. 둔탁한 음향이 울리고 중인들은 강시의 목이 뎅겅 잘렸을 것을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적철항이 발출한 거력에 강시의 몸이 한차례 들썩였으나 목은 여전히 몸뚱이에 붙어 있었던 것이다. 적철항의 표정이 처음으로 변했다. 그것은 불쾌한 감정일 뿐이었다. 이제 꼼짝조차 못하는 강시였건만 질긴 가죽이 자신 의 강기를 이겨낸 것에 대한 불만이었다. "흥!" 적철항은 나직히 코웃음을 치고 재차 손을 들어 올렸다. 다시금 발출되는 강기. 정확하게 같은 자리를 베어가는 적철항의 강기. 하지만 이번에도 강시는 몸을 들썩일 뿐이었다. 적철항의 눈썹 끝이 하늘을 향해 치켜 올라갔다. "이런 괘씸한......!" 스스로의 노기를 이기지 못한 적철항의 고성이 발해지고 그의 손이 번개처럼 움직였 다. 범인이라면 그저 빛이 번쩍이는 것밖에 보지 못할 속도로 적철항의 강기가 강시의 목 을 향해 쏘아졌다. 들썩이던 강시의 몸은 급기야 허공에 튀어오를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한 순간. 파앗. 이전과는 다른 음향이 들렸다. 적철항의 강기가 강시의 목이 아닌 지면을 베어낸 것 이다. 깊이를 짐작키 어려운 선을 지면에 그려낸 자리에는 축 늘어져 있어야할 강시가 보이지 않았다. 놀랍게도 강시가 적철항의 공세를 피해냈을 뿐더러 몸을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한쪽 다리로 버티던 신형은 잠시 후 다른 다리가 곧게 서며 균형을 잡았다. 흐느적거리는 모습이 간데없이 사라졌다.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하는 그 때. 적철항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호오?" 동그랗게 모였던 적철항의 입술이 긴 호선을 그렸다. "과연......!" 그제야 회주의 말을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다는 듯 적철항이 다시 입을 열었다. "밑천을 드러내길 바란다는 게로군!" 고슴도치처럼 뻗은 수염사이로 드러난 입술은 완연한 미소를 만들어냈다. 거구와 어울리지 않는 매서운 미소였다.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미소. 그 안에 담겨진 의미는 본인만이 알 터였다. "타합!" 이어지는 기합성은 적철항의 입에서 터져 나온 것이었다. 기합과 함께 우수를 앞으로 내뻗었다가 뒤집으며 느릿하게 당겼다. 한눈에도 그가 진력을 끌어올려 무엇인가를 시도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를 입증하듯 거대한 동상과도 같았던 적철항의 전신에서 진득한 묵광이 잠시 엿보 였다. 짧은 번쩍임 이후 빛은 그의 몸으로 갈무리되었고 소매 아래로 드러난 두 손과 얼굴 에서만 번들거림을 볼 수 있었다. 철마금신이라는 별호처럼 온 몸이 쇠로 만들어진 것 처럼 변해버린 것이다. "단단한 몸뚱이가 자랑이라는 거지?" 가소롭다는 식의 한 마디와 더불어 적철항의 신형이 철로 만들어진 탄환처럼 쏘아졌 다. 쿠아아앙! 엄청난 폭음. 적철항이 자신의 육중한 몸으로 강시를 들이받아 버린 것이다. 어깨 등을 이용, 온몸을 사용하는 육탄공격을 고공(?功)이라고 한다. 내기로 몸을 보 호해 벽에 부딪쳐가는 고산벽(?山壁)이라는 수련법을 통해 단련하여 전신으로 공격 을 감행하는 것이 고공이었다. 얼핏 보면 둔해 보이고, 우습게도 보이는 고공. 하지만 그 안에 담겨진 위력만은 측량키 힘든 것이었다. 이를 입증하듯 적철항의 고공에 적중당한 강시는 중인들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측정불가의 거력에 적중당해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 것이다. 쿠르르릉. 은은한 진동과 함께 시야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 아마도 어느 둔덕에 강시가 처박혀 발생한 음향일 터였다. 그 소리와 진동에 중인들 은 혀를 내둘렀다. 저와 같은 고공에 적중당하면 자신들은 시신조차 보존치 못할 것임 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금강마고(金剛魔?). 적철항이 비장의 한 수로 감춰둔 절기이자, 스스로 유사 이래 최강의 파괴력을 가진 무공임을 자부하는 최강의 수법이 펼쳐진 것이다. 관전자 모두를 숨죽이게 한 적철항의 무공. 공기마저 무겁게 가라앉힌 정적은 날카로운 파공성에 의해 깨졌다. 깨진 것은 적막뿐이 아니었다. 일대의 흙과 먼지, 돌멩이들이 분분이 날아오르고 광풍이 몰아치는 현상이 수반된 것 이다. 그것은 시야 밖으로 사라져 어딘가에 처박혀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강시의 움직임 탓 이었다. 강시의 재출현에 놀랄 여유는 없었다. 중인들이 모든 것을 인지했을 때, 강시는 이미 적철항과 재충돌을 감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콰아아아앙! 마치 수십, 수백 개의 벽력탄이 동시에 폭발하는 듯한 굉음과 충격파. 적철항의 모습이 보였다. 지금까지의 오연함을 찾기 힘든 상태였다. 묵철의 그것처럼 번득이는 빛을 머금은 상 체가 고스란히 드러났고, 머리는 엉망으로 헝클어졌다. 무엇보다 무릎 아래까지 땅에 박혀 있는 모습은 조금 전 적철항이 겪었던 곤란을 짐 작케 했다. 모양새가 좋지 않기는 강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하의를 보전하고 있는 적철항과 달리 강시는 나신인 채였다. 달려오던 속도 속에서 의복을 보호하지 않았던 건지, 강 렬한 공방 시에 가루가 되어 날아간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강시의 문제는 의복의 유무에 있지 않았다. 어차피 수치를 모르는 물건이니 사실 의 복 따위는 문제의 대상이 아니었다. 공격을 감행했을 때 사용했을 법한 우수 쪽이 축 늘어져 있었다. 팔 전체의 뼈가 상하 고, 어깨는 물론 늑골에까지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적철항의 금강마고가 또 한 번 신위를 발휘한 것이다. "끝장을 내 주지." 땅위로 솟아오르는 적철항의 목소리가 갈라지고 있었다. 가지고 놀다 끝낼 상대가 아 님을 직감한 것이다. 방금 전의 공격은 실로 위험했다. 은은하게 내장에 통증이 느껴졌다. 금강마고가 흔 들린 것이다. 천음을 제외하고서도 절대로 무너질 리 없는 금강마고라 여겨왔다. 그 신뢰가 깨어지 는 순간, 적철항은 자신도 모르게 위기감을 느꼈다. 경험이 부족한 회주가 기우로 인 해 자신을 앞세운 것이 아니었다. 이 물건은 정말로 위험했다. 우측이 무너진 강시를 향해 적철항이 신형을 날린다. 아니,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을 느끼기도 전, 그의 육중한 몸은 강시와 부딪치는 중이었다. 콰아아앙! 비산하는 흙먼지. 후투투툭. 우박이 쏟아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시야가 확보되고 다시금 적철항과 강시가 보였다. 양팔을 축 늘어뜨린 강시. 그 앞에서 퉁방울만한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는 적철항. 놀랍게도 강시는 남은 좌측만을 이용해 금강마고의 강공을 막아낸 것이다. 남은 한쪽마저 못쓰게 되었다지만 양쪽이 멀쩡한 상태에서도 간신히 막아냈던 앞서 와는 큰 차이가 있었다. 반쪽만으로 방어를 한 것은 앞에 비해 강한 힘을 운용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 괴물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는 건가?' 적철항이 잠시 머뭇거린 이유였다. "크르르르르......" 짐승과도 같은 목 울림소리가 울리더니 그것은 곧 처절한 외침으로 변했다. 누가 들 어도 노기를 이기지 못하는 분노의 외침으로...... 그 외침과 더불어 늘어졌던 강시의 양팔들이 제자리를 찾아들어갔다. 뼈가 부러지는 기괴한 음향과 함께. "적 호법!" 적철항은 삼패 중 한 명인 공손상량의 외침에 지금 자신이 해야할 바를 깨달았다. 강시가 원상태로 회복되는 것을 저지해야 하는 것이다. 콰아아앙! 다시금 적철항의 신형이 쏘아지고 굉음이 터진다. 이번에야말로 끝장을 보겠다는 적철항의 의도를 관전자 모두가 느낄 수 있었다. 적철 항과 강시를 중심으로 하는 일대에 나타난 현상 때문이었다. 적철항이 쏟아 부은 공격과 강시의 방어가 만들어낸 여파라기에는 너무나 엄청났다. 두 사람의 충돌지점을 근원으로 반경 오십 장여의 땅이 엉망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마 치 둘을 중심으로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 같았다. 그 엄청난 광경에 은설연은 다리의 힘이 풀렸다. 태어나 지금껏 자라오면서 그녀의 주변에는 고수가 아닌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펼쳐지는 거대한 힘과 힘의 충돌에 그녀는 두려움을 느꼈다. 나름대로의 자신감을 가지고 남지학과 함께 패종회에 맞서려했던 자신이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수레 앞의 사마귀가 그녀 자신이었던 것이다. 적철항의 공세에 이어진 거대한 여파. 남지학이 강기의 막을 형성해 보호해주지 않는다면 자신은 이 자리에 서 있지도 못했 을 것임을 알고 있는 것이다. 은설연은 맥이 풀려 떨리는 다리에 억지로 힘을 불어 넣으며 남지학을 살폈다. 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자욱한 흙먼지가 가라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워낙 높이 솟구쳤던 흙먼지의 양이 많아 시야가 확보되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남 소협." 은설연의 부름에 남지학이 살짝 고개를 돌렸다. "저런 자들을 우리가 상대하려 했던 건가요?" 은설연이 말하는 바를 모를 남지학이 아니었다. 그는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었다. 그 표정을 확인한 은설연이 조심스레 물었다. "두렵지 않은가요? 저런 장면들을 보고도?" 아무리 그가 최후의 절초를 완벽히 익혔다 해도 저런 괴물들과 겨룰 수 있다는 생각 은 들지 않았다. "두려웠을 거요." '두려웠을 거라고? 그럼 지금은 두렵지 않다는 건가? 남 소협이 익힌 최후 초식은 이 런 괴물들을 상대할 수 있다는 이야기인건가?' 은설연의 눈에 떠오른 의문. 남지학은 마치 그것을 읽기라도 한 듯 부연설명을 했다. "그가 이 자리에 없었다면 나도 두려웠을 거요. 저들과의 승부는 결코 장담할 수 없으 니 말이오." 남지학의 말에 은설연은 아연한 표정이었다. 그가 누군지는 명확했다. 또 그놈의 사 제 이야기란 말인가, 하고 질려 버리는 것이다. "강한 적을 보면 두려운 것은 누구나에게 해당하는 일일 것이오. 하지만 누가 함께하 고 있는가에 따라 그 정도가 달라지기도 하고, 아예 두려움이 사라지기도 하오." 남지학은 잠시 시간을 두었다가 말을 이었다. "아무리 강한 적을 앞에 두어도 두려움을 없애주는 사람이 있소. 사제가 바론 그런 사 람이라 생각하오. 그와 함께 있으면 어떤 난관도 두렵지 않소." "......!" 확신을 넘어선 신념이 느껴지는 남지학의 말에 은설연은 막연히 공감해버리는 자신 을 발견했다. 남지학과 선주혁은 강호초출 중에 무림맹의 공적이 되었다. 한자락 한다는 고수들의 추격을 받으며 서로가 서로를 의지해 살아남았다. 아니, 살아남는데서 그친 것이 아니 라 무림에서 손꼽히는 고수들조차 넘볼 수 없는 높은 경지에까지 올랐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기적적인 성장을 해온 것이다. 그 험난한 길을 함께 해온 동반자. 아마도 그것이 남지학과 선주혁의 관계일 것이다. 스스로보다 더한 확신을 주는 누군 가를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다. 두려움보다 더 큰 신뢰를 주는 이가 있기에 남지학은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도 의연한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은설연은 어쩐지 두 사람이 부럽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저런 괴물들을 보며 두려움 을 느끼지 않게 해주는 사람이 자신에게는 없었던 것이다. Chap. 4 재격돌 흙먼지가 가라앉았을 때, 중인들은 득의양양한 적철항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디로 날아가 버렸는지 강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긴 방어자체가 불가능한 상 태에서 그 엄청난 공격을 받았으니 아무리 단단한 몸뚱이를 지녔다 해도 무사할 리가 없었다. 절대의 비법으로 만들어진 강시라 해도 강시는 강시일 뿐. 한계를 모르는 무공을 익힌 절대고수의 상대는 될 수 없다는 것, 그것이 중인들이 내 린 결론이었다. "제법 쓸 만한 물건이었소만......" 적철항이 턱을 치켜들고 종극을 향해 말을 시작했다. 하지만 마무리는 선주혁을 향해 서였다. "이제 명성이 자자하신 그분이 나오셔야할 차례가 되셨군 그래." 적철항은 곧바로 선주혁을 지목하고 나섰다. 비록 회주가 그럴 자격이 없다고 단정지었지만 그로서는 선주혁에게 계속해 신경이 쓰였다. 분명히 지난 번 녀석의 내공이 흩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럼에도 놈은 자신과 강시의 격전 중에서도 굳건한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백발마신의 죽음을 선언했던 게 자신이었던 만큼, 체면을 위해서라도 녀석은 반드시 자신의 손으로 처리하고 싶었다. 그래서 회주가 끼어들 틈을 주지 않고 선주혁을 지목하고 나선 것이다. 빠른 지목과 도발에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이미 백발마신이 기묘한 절진을 이용한다는 사실을 들은 터. 사실 천음지력의 도움을 받는 한 진 따위를 두려워할 이유는 없었다. 제갈무후가 설 치한 진이라 해도 지금의 자신이라면 가뿐히 파훼할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곤란을 겪는 모습을 세인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백발 마신은 감히 자신과 비견될 수 없음을 명확히 하고 싶었다. 한편 적철항의 노골적인 도발에 선주혁 역시 망설이지 않았다. 강시가 적철항을 상대하는 모습을 보는 동안 선주혁은 한시름을 덜었다. 패종회주와 삼패가 한 자리에 있는 것이 그로서는 가장 큰 걱정이었다. 혼전이 벌어 지더라도 어떻게 해서든 사형이 단독으로 패종회주와 맞서게끔 해야 했기 때문이다. 자신과 마교주, 백사회주, 그리고 남궁일이 있다지만 전력상으로는 약세였다. 절대십 가의 가주 역시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있기 때문이다. 천음의 지원이 없다면 몰라도 선 우 아가씨가 있는 한, 절대십가의 가주들을 상대할 인원이 없는 것이다. 한데 마교의 비책으로 만들어진 강시의 전력이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막강했다. 아직까지 두 구의 강시가 남은 터. 그 둘과 구대마존 중 육인이 합세한다면 사형에게 충분히 기회를 만들 수 있을 거라 는 계산이 선 것이다. 그것이 선주혁으로 하여금 큰 위안이 되었다. "적 노괴! 꽤 지친 모습인데 괜찮을지 모르겠군." 선주혁이 혼잣말인 듯 중얼거렸다. 강시를 상대하는 동안 적철항의 행색이 엉망이 된 것은 사실이었다. 하의 하나만 달 랑 남았고, 머리 역시 형편없이 흐트러져 있었다. 그것을 이용해 적철항을 자극하려는 것이다. 아무리 무공이 일취월장했다지만 천음지력과 구음대법을 운용하는 삼패는 부 담스럽기 때문이었다. "손가락만 움직일 수 있어도 네놈 따위를 죽이는 데는 지장이 없지." 이미 선주혁의 무공을 견식한 바가 있는 적철항이다. 그의 단전이 파훼됐건 그렇지 않건 자신의 마지막 일 장으로 인해 중상을 입었을 터였다. 녀석에게는 이전의 무공을 회복하는 데도 부족한 시간만이 주어졌었다. 적철항이 선주혁을 눈 아래로 여기는 것 은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의 도발에 여유있게 대응하는 적철항의 모습에 선주혁은 고소를 머금었다. 말 몇 마디로 동요를 보일 상대가 아니었던 것이다. '쳇! 소설에 나오는 노괴들은 무공실력에 상관없이 어린애처럼 흥분도 잘 하드만.....! 여기선 당최 안 통하는군.' 선주혁은 내심 투덜거릴 때 적철항이 말했다. "재주를 부려봐라." 적철항의 한마디에 선주혁은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했다. 적철항의 평정을 흐트러뜨 리는 데는 실패했지만 최소한 그의 방심은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필시 지난번에 보였던 자신의 무공을 척도로 삼고 있음이 분명했다. 순간의 방심을 이용한 필살의 한 수. 선주혁은 그것만이 자신에게 주어질 승리의 기회라 생각했다. "사양치 않겠소, 적 노괴." 말을 마침과 동시에 힘차게 진각을 내딛는 선주혁. 가히 천하제일을 자부할만한 내력이 담겨진 일 보에 일대 전체에 그 힘이 미쳤다. 콰아아앙. 엄청난 폭음과 함께 다시금 피어오르는 흙먼지. 이미 뒤집히고, 엉망이 되어버린 주변인지라 선주혁이 원하는 바 이상의 흙먼지가 일 었다. '이놈!' 경신의 공부를 사용하지 않고서는 균형을 잡기 힘들 정도로 흔들리는 땅. 이에 적철항은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최소한 선주혁의 단전이 파훼되지 않았 음을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사뭇 대단한 진각이긴 했지만 그 안에서 위험을 느낄 적철항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미처 알지 못했다. 선주혁이 전력을 다해 진각을 내딛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시야를 가리고도 남을 흙먼지 속에서 선주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적철항은 그런 선주혁의 움직임을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또 쓸데없는 짓을 하는군." 제법 빠르게 이동을 하는 선주혁을 향해 적철항의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자신 정도 의 고수에게 이런 수작이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 애송이를 향한 조소였다. 선공을 양보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벌써 애송을 향해 와류붕산권을 발출했을 그 였다. 그리고 잠시 후, 비릿하게 말려 올라갔던 적철항의 입모양이 비틀렸다. 좌측에서 우로 빠르게 움직이던 애송이의 신형이 둘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분명 진을 설치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설령 나름의 수작을 피워두었을지언정 강 시와의 격전으로 인해 일대가 엉망이 된 지금 진이 운용될 리 없었다. 사술일 리는 더욱 없었다. 눈이 아닌 상댕의 기운을 느끼는 지금, 사술 따위가 혼란을 줄 여지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철항은 더욱 놀라야만 했다. 실재하는 두 명의 백발마신이 있다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적철항의 두 눈이 깊이 가라앉았다. 좋지 않은 상황이다. 하지만 설령 애송이가 둘이라 할지라도 자신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그와 같은 자신 감이 마음의 동요를 가라앉히는 중이었다. 그런 적철항의 두 눈썹이 송충이처럼 꿈틀거렸다. 애송이가 하나 더 늘어났기 때문이다. '셋? 아니...... 넷?' 셋을 확인했다 싶은 순간, 애송이에게서 느껴지는 기감이 넷으로 불었다. 한순간 적철항은 네 명의 애송이에게 포위된 형국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고 넷 중 하나가 자신을 향해 빠르게 접근해 왔다.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나머지도 우직였다. 모주 자신을 향한 움직임이었다. 적철항은 여전히 가라앉은 눈으로 차분히 기다리다 손을 내뻗었다. 장중한 기운을 내포한 일 권. 와류붕산권의 발출이었다. 그가 와류붕산권을 내지른 것은 넷 중 하나를 향해서였다. 그리고 그것은 정확히 선주혁의 본신을 향해서였다. 선주혁은 상대가 망설임 없이 자신을 구분해낸 것에 대해 크게 감탄하며 최대한 빠르 게 신형을 날렸다. 회오리치듯 주변을 휘젓고 가는 와류붕산권의 경력에 흙먼지의 대부분도 걷혀버리고 말았다. "여전히 쥐새끼처럼 잘도 피하는구나." 선주혁의 경신공부만은 인정하던 적철항이 다시금 선주혁을 비웃었다. "어떻게......?" 와류붕산권의 경력에 휘말리지 않고 온건히 피해냈다는데 대한 만족감보다 적철항이 어떻게 자신을 구분했는지가 더 궁금한 선주혁이었다. "흥!" 적철항은 코웃음으로 응대할 뿐이었다. 자신의 기운을 운용해 적철항을 혼란스럽게 하려던 선주혁의 의도가 무산된 것은 실 로 간단한 이치였다. 백존들과 차원이 다른 고수인 적철항은 냉철하게 상황에 대응할 수 있었기에 쉽게 본신을 구분해낸 것이다. 그는 살기의 유무로 본신과 분신을 구분해냈다. 선주혁은 평소 자신이 가진 기운을 운용했을 뿐, 적철항을 향해 드러난 자신의 살기까지 운용하질 못했던 것이다. "뭐......" 선주혁은 씁쓸한 느낌이 혀에서 맴돈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말을 시작했다. "알려줄 마음이 없다면...... 이제부터는 정식으로 해 봐야겠군." "쿄호호호홋!" 고개까지 젖히며 적철항은 웃음을 터뜨렸다. 무엇을 어찌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끝 까지 꼼수로 자신을 어찌 해보려던 애송이다. 그가 무엇을 하고자 하건 적철항으로서 는 가소롭기만한 상태였다. 한데도 허세를 부리는 애송이가 너무나 우스웠던 것이다. "후읍!" 짧은 호흡에서 비롯된 소리와 함께 선주혁의 손 위에 얇고 긴 강기가 떠올랐다. 이지러지는 모양새를 가진 그만의 장법. 북두회류장의 강기였다. "쿄홋!" 짧은 웃음이었다. 도무지 발전이 없는 애송이에 대한 조소였다. 저 장법이 제법인 것은 사실이지만 자신의 와류붕산권 앞에서는 아무런 효용이 없다 는 것은 이미 입증된 사실이 아니던가? 저런 애송이 따위에게 불길함을 느꼈던 자신이 어이없어지는 적철항이었다. 예상보 다 튼튼한 몸뚱이를 지녔던 애송이다. 그게 다였다. 오늘에 있어서 확실히 끝을 봐주 면 될 일이었다. 적철항이 살기를 키우는 사이. 선주혁의 손 위에서 변화가 일고 있었다. 이지러지는 듯한 강기의 모양새가 선명해지 는가 싶더니 날카로운 소음이 일기 시작했다. 가히 상상을 초월할 속도로 회전하는 강기. 그 회전력이 주변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흙먼지가 날아오르고 돌멩이들이 휘말려 들어갔다. 맹렬한 소용돌이의 중심에서 강기가 회전하고, 주변의 모든 것이 딸려 들어 갈 듯 보였다. 코웃음을 치고 있던 적철항마저 두 눈을 휘둥그레 떠야할 정도였다. 선주혁은 계속해 고심했었다.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의 내력을 고스란히 초식 에 운용하는 방법에 대한 고심이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자신의 무위는 손쉽게 배가될 것이었기에. 쉬운 일은 아니었다. 초식이 완성되는데 필요한 절대적인 시간이라는 게 있었다. 타인의 것을 자신이 운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을 뿐, 선주혁 자신은 진정한 천재는 아니었다. 내노라하는 자들이 수백 년에 걸쳐 완성시키는 초식을 짧은 시간 내에 만들 어 내는 데는 무리가 있었다. 한조백의 조언은 그런 선주혁에게 방향을 제시해줬다. 자유로운 사고, 무한한 상상력 ,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바를 하라는 그의 조언이 선주혁의 눈을 뜨게 했다. 만물이 내가 되고, 내가 만물이 된다는 철용백의 말을 들었던 선주혁은 막연한 상상 을 했다. 흡성대법을 이용, 전 우주의 모든 힘을 자신이 운용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삼라만상의 기운을 느끼는 만큼 그 모든 힘을 자신의 것으로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 가 생긴 것이다. 완벽하게 자신의 것을 만들 수 없더라도 그 기운을 운용, 한 수에 담을 수만 있다면 그 파괴력은 이루 말할 수 없을 터. 극강의 한 수를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몇 차례의 실패를 통해 그는 한계를 깨달았다. 인간이 발출한 공격을 흡수하 는 데도 목숨을 걸어야했다. 전 우주의 모든 기운을 담기에는 자신이라는 그릇이 턱없 이 부족한 것이다. 이에 선주혁은 확실한 결론을 내렸다. 절대치라 규정된 한계가 있으면 그것이 무의식 중에서라도 작용을 하여 넘어서기 힘들다는 결론이었다. 한조백이 말한 대로 오랜 세 월의 수련이 가져온 겨로가가 아니더라도 자신은 이미 한계치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다. 정말이지 큰 깨달음을 얻은 자라면 자신이 가진 한계마저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깨달음이라는 것은 머리로 알게 되었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선 주혁은 오랜 수양을 쌓아 깨달음을 추구하는 경지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선주혁에게는 강해져야할 명백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 이다. 한조백은 스스로 무공을 잃었다는 것을 인정함으로서 무공을 회복할 수 있었다고 했 다. 결국 선주혁 역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함으로서 최대의 능력을 발휘하고자 했다. 그 첫 번째 결과물이 지금 선보이는 북두회류장이었다. 우주 전체의 기운을 담은 강 기를 만들어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의지의 범주가 닿는 만큼 빠른 속도로 강기를 회전시키는 것은 가능했다. 타 무림인들처럼 오랜 수련과 깨달음의 연속을 거쳐 온 적은 없지만 소리와 빛의 속 도를 개념에 두고 있는 선주혁이었다. 게다가 북두연환장으로 인해 쾌에 관한 확실한 기준을 세운 그는 누구보다 유리한 입 장에서 극쾌의 회전력을 가진 강기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선주혁의 의지가 행할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회전하는 북두회류장은 평원 에 모인 모든 무림을 경악하게 하는 중이었다. 대막의 용권풍을 인간이 만들어낸 것과 같은 현상에 모두 숨을 죽여야만 했다. 한껏 여유롭기만 했던 적철항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발출되기 전부터 저와 같 은 힘을 보이는 장력을 웃으며 받아들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 역시 있는대로 내력을 끌어올렸다. 눈앞의 애송이는 여전히 불쾌한 점이 있었다. 이에 노련한 경험이나 초식의 우위보다 힘 대 힘으로 승부를 내고자 하는 것이다. 무 인으로서의 승부욕이 다른 모든 것에 앞선 탓이었다. 적철항이 와류붕산권을 쳐낼 준비를 마쳤을 때, 선주혁이 만들어낸 북두회류장은 마 치 의원이 사용하는 침처럼 가늘어져 있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한계치에 투자하는, 바로 선주혁이 얻은 두 번째의 성과였다. 위력 을 배가시키는 특별한 방법을 따로 새각해내지 못한 선주혁은 최대한의 집중을 노렸 다. 지난 날 자신의 강기가 적철항의 와류붕산권에 맥없이 흐트러졌던 것을 생각하며 극 한의 집중을 통해 강기 가체의 유지와 파괴력의 증가를 도모한 것이다. 여파를 대비해 머나먼 곳에서 관전하는 무인들은 선주혁이 만들어내는 강기를 직접 볼 수는 없었다. 거센 소용돌이로 인해 강기 본연의 모습이 가려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위력만은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대막의 용권풍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힘 안쪽에서 피부를 따끔거리게 만들 정도의 예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강하다! 그는 정말 강해!' 은설연이 마른 침을 삼키며 생각했다. 흙먼지 안에서 무너가를 시도했다 실패한 선주혁을 염려치 않을 수 없던 그녀였다. 선주혁, 남지학 사형제에 비하면 여느 범인과도 다름없는 자신의 잣대로 두 사람을 잴 수는 없음을 알고 있다. 그렇다고는 해도 천음지력의 지원을 받는 적철항의 무위는 가히 무적에 가까워보였 다. 그런 자를 상대하는 선주혁의 안위가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허나 백발마신은 역시 백발마신이었다. 경세적인 무위로 백존들을 물리쳤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설마하니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저와 같은 장력과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은 자신의 조부에게조차 무리일 거라 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쿠르르릉. 거산이 붕괴하는 듯한 소리와 함께 선주혁의 강기가 그의 장심에서 떠났다. 잔뜩 인상을 찌푸린 적철항 역시 무겁게 일 권을 내밀었다. 가공할 경력이 와류를 만 들어내며 선주혁의 강기를 마주해갔다. 두 개의 거력이 눈 깜짝할 새에 마주쳤다. 콰콰콰콰콰! 거친 파열음이 울리는가 싶더니 각각의 장력과 권력이 목표를 향해 쇄도해 들어갔다. 마치 서로를 피해 비켜간 것과 같이 보였다. 실제는 달랐다. 선주혁의 북두회류장이 원형을 유지한 채 적철항의 와류붕상권을 뚫고 지나가버린 것이다. 외형상 와류붕산권은 건재했다. 위맹한 경력을 유지하며 선주혁을 향해 날아가는 중 이었다. 반면 북두회류장은 거의 소멸된 듯 보였다. 실낱같은 강기의 원형만을 지키며 적철항 을 향해 날아가는 중이었다. 은설연의 입에서 안타까운 탄성이 흐른 것은 그 탓이었다. 쿠우우우웅. 파앗. 우려한 대로 선주혁 쪽에서는 바위를 으깨는 소리가, 적철항 쪽에서는 미약한 음향만 이 울려 퍼졌다. 하지만 눈으로 파악했던 바와 결과는 크게 달랐다. 선주혁은 가볍게 손을 휘둘러 적철항의 와류붕산권을 와해시켰다. 실체로 아무렇게 나 손을 휘두른 것은 아니었다. 북두회류장에 내력을 실어 보내는 만큼, 최소한의 내 력을 운용하는 북두연환장이 아니라면 불가능할 일일 터였다. 그 정도의 장력으로 방어가 가능했던 것은 중심이 되는 힘을 이미 북두회류장이 흩어 놨기 때문이었다. 반면 적철항은 있는 대로 인상을 찌푸린 채 촤측 어깨를 움켜쥐고 있었다. 손가락 사 이로는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적철항이 중얼거렸다. "피? 내 몸에서?" 완벽 이상의 금강불괴지신을 자랑하는 몸이었다. 와류붕산구너에 전력을 기울인 탓 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스스로의 몸을 믿는 그였다. 선주혁의 장력이 와류붕산권을 통 과하는 것을 보고도 피하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최후의 순간, 고수 특유의 본능으로 몸을 살짝 틀지 않았다면 애송이의 장력이 심장 을 꿰뚫을 뻔했다. 생명의 위협. 백여 년 만에 느껴보는 위기감에 적철항은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아깝네." 마지막 순간 적철항이 몸을 비튼 것에 대한 선주혁의 말이었다. 선주혁의 그 한 마디가 적철항의 감정을 자극했다. 자신의 피를 본 상태였기에 감정 의 동요는 컸다. 무엇보다 애송이가 자신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었다는 사실이, 생생 이 느껴지는 어깨의 통증이, 적철항을 분노케 했다. 그의 두 눈이 불타올랐다. 이어 다시금 그의 몸이 묵광을 머금기 시작했다. 금강마고의 재운용이었다. "곱게 죽이진 않겠다." 금강마고를 운용한 이상 무슨 수작을 부려도 자신의 몸을 해칠 수 없었다. 이는 자신감을 넘어선 확신이었다. 그와 같은 확신은 그의 잔혹한 유희에 대한 탐심을 새삼 불러 일으켰다. 무림을 대표 하는 이들이 보고 있는 자리다. 저들이 우러러 보는 백발마신이 자신의 눈앞에서 얼마 나 참혹하게 유린당하는지 보여주고 싶었다. 그들이 느끼게 될 두려움은 자신을 향할 것이다. 모두가 벌벌 떨며 자신을 대하게 되리라. 슈웃. 적철항의 거구가 가볍게 날아올랐다. 하늘 옾이 솟구친 그의 신형이 공중에서 멈춰 섰다. 족히 십오장 이상은 되어 보이는 높이까지 떠올라 허공에 선 것이다. 한편 선주혁은 자신이 적철항의 몸에 상처를 냈다는 데에 크게 고무되었다. 물론 상 대의 방심 덕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 대단하다는 삼패의 어깨에 구멍을 뚫었다는 사 실은 그를 흥분시켰다. 몇 번에 걸쳐 죽을 고비를 넘긴 보람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나름의 성취가 있었다지만 괴물 이상의 괴물들인 패종회 소속 무인들에게, 특히나 천 음지력의 지원을 받는 그들에게 효과가 있을지에 대해서는 자신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할 수 있어! 아니, 해야만 해!' 그것이 선주혁의 생각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사형이 패종회주와 단독 승부를 낼 수 있게끔 해야만 했다. 목숨을 걸어서라도 반드시 그 일만은 해내야했다. 선주혁에게는 자신에게 주어진 천명 이상의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선주혁이 각오를 다졌을 때, 적철항의 신형은 하늘 높은 곳에 있었다. "타합!" 이전보다 빠르게 북두회류장이 선주혁의 손위에서 발출되었다. 거대한 소용돌이가 하늘을 향해 쏘아진다. 주변의 모든 사물이 선주혁이 발출한 강기에 휘말려 올라갔다. 콰아아앙! 폭발음과 함께 무인들은 격전의 중심에서 더욱 더 멀리 몸을 빼야만했다. 이제는 내 력을 운용해 안력을 증가시키지 않으면 선주혁과 적철항을 볼 수 없을 정도로 거리를 벌린 것이다. "크흐흐흐......" 관전자는 들을 수 없는 웃음소리. 그것은 팔을 교차해 북두회류장을 정면으로 마주했던 적철항의 입에서 흘러나온 소 리였다. 팔에서 전해져 오는 통증은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내력의 대부분을 팔에 집중시키지 않았다면 상처없이 막아낼 수 없을 정도의 공격이었던 것이다. 금강마고의 위력만을 믿고 전신에 힘을 분산시켰다면 무사하지 못했을 위력이었으나 , 결론은 애송이의 공격을 무위로 만들었다. 그것이 적철항을 웃게 하는 중이었다. "인간들이 아니야......!" 주백광의 옆에서 은설연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선주혁의 공격도, 그 공 격을 막아낸 적철항의 방어도, 그녀에게 있어서는 꿈에서조차 상상키 힘든 위력이 깃 들어 있었다. "저런 무인들과 이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는군." 여태 침묵하고 있던 주백광이 중얼거렸다. 숨막히는 긴장의 순간이 아니었다면 은설연은 주백광을 돌아봤을 것이다. 좀더 여유 가 있었다면 입을 열어 한 마디를 던졌을 지도 모른다. 대체 왜 선 소협 주위에는 정상적인 사람이 없느냐고...... 아니, 악을 쓰며 소리를 질러댈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눈을 깜빡거릴 여유도 없었다. 선주혁과 적철항의 공방은 그야말로 수 유의 시간 동안 오고간다. 본다기보다는 거의 느끼는 수준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눈을 뗄 수는 없었던 것이다. 특히나 지금은 적철항의 반격이 있을 차례. 선주혁을 응원하는 쪽에서는 애간장이 탈 수밖에 없었다. "쿄옷!" 뾰족한 기합성과 함께 적철항의 거구가 땅을 향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느린 듯한 낙하였다. 하지만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빠른 시간동안 적철항의 낙하에는 가속이 붙었고 나중에는 시야에서 사라질 정도였다. 선주혁이 다급히 하늘로 장력을 쳐냈다. 적철항이 중인들의 안력을 벗어날 정도의 속도로 낙하하는 동안 그가 발출한 장력은 무려 스물한 번. 스스로 할 수 있는 바, 최고의 속도를 내는 데 집중한 선주혁의 북두연환장이 만들어 낸 결과였다. 스물한 번의 북두연환장은 적철항의 낙하를 늦추는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 북두회류장도, 북두연환장도 무용하게 되자 선주혁은 재빨리 신형을 움직였다. 강시 가 아닌 그가 무조건 정면승부만 고집할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몸을 피하는 선주혁은 적철항이 헛되이 땅을 치는 그 순간을 노리고자 했다. 막 공격 을 한 뒤라면 작은 틈이라도 생길 것이고 그 순간을 파고든다면 앞서처럼 적철항의 몸 에 상처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는 치명적인 요혈을 노려 북두회류장을 펼칠 생 각이었다. 하지만 선주혁은 헛바람을 들이켜야만 했다. 땅에 곤두박질치듯 처박히리라 여겼던 적철항의 신형이 너무나도 표홀한 움직임과 함께 방향을 틀어 선주혁을 향해 돌진해왔던 것이다. 직각에 가깝게 꺾이는 동선이었 음에도 속도는 조금도 줄지 않았다. 아니, 그 짧은 시간 중에도 적철항의 움직임에는 가속이 붙고 있었다. 예측불가의 움직임에 당황한 선주혁이 땅을 박찼다. 이번에는 그가 하늘로 날아오른 것이다. 그러자 적철항의 신형이 그 뒤를 쫓았다. 점점 가속이 붙는 적철항의 움직임이었다. '이거 위험한데?' 선주혁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속도가 붙는다는 것이 가지는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였다. 육탄공격이기에 둔중한 움직임만을 예상했던 선주혁이었던지라 더욱 곤혹스러웠다. 정면으로 마주치지만 않는다면 상대의 공격을 피해내며 충분히 방법을 강구해낼 수 있을 거라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적철항의 금강마고는 그와 같은 여유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는 강시를 상대하 면서도 가진 바 비장의 한 수를 꺼내들지 않았던 것이다. 허공에 떠있는지라 이제는 적철항과 정면으로 승부를 겨룰 수밖에 없어 보이는 상황 이었다. 그러나 중인들의 예상과는 달리 선주혁은 공중에서 기묘하게 몸을 틀어 방향을 바꿨 다. 곤륜의 자랑인 운룡대팔식이 펼쳐진 것이다. 용이 꿈틀거리듯 허공에서 기기묘묘한 변화를 보이는 신법은 보는 이의 탄성을 자아 내게 하기에 충분했다. 선주혁은 운룡대팔식을 전개해 적철항의 움직임을 저지할 방법을 강구하고자 했다. 최소한 가속을 늦출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공중에서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신법은 운룡대팔식만 존재하는 게 아닌 듯 했 다. 잔시 주춤하는 듯 보였던 적철항의 거구가 허공에서 방향을 틀어 쫓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씨팔!" 너무나 다급한 마음에 저쪽 세상에서 쓰던 욕지거리까지 튀어나왔다. 재빨리 천근추를 운용해 착지한 선주혁. 채 숨을 돌릴 틈도 없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틀림없이 적철항이 따라붙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언제까지 도망칠 수는 없어!' 그것이 선주혁의 결론이었다. Chap. 5 진일보(進一步) 그저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주변의 모든 것을 파괴하는 모습을 본다는 것은 실로 오금 이 저릴 일이다. 지금 적철항의 모습이 그러했다. 계속해 붙는 가속은 멈출 줄 몰랐다. 그리하여 경이적인 속도로 움직이는 적철항의 주변은 공간 자체가 일그러지는 모습 을 보일 정도였다. 귀청을 찢는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적철항과는 달리 선주혁의 신법은 그야말로 고요 하기 이를 데 없었다. 닥치는 대로 밀어 젖히며 가속을 더하는 적철항과는 달리 선주 혁은 공기를 거스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계속해도 속도를 높이는 적철항과의 거리를 벌리진 못하고 있었다. 적철항은 자신의 움직임을 가로막는 저항자체를 무시하고 있엇던 것이다. 무시무시한 기세로 적철항이 날아오는 방향 끝에서 선주혁이 신형을 멈춰 세웠다. 그의 앞으로 내밀어진 자색의 거대한 구체가 가슴 높이에 떠오른다. 관전자 중 몇몇은 그와 같은 장면을 이전에 본 적이 있었다. 선주혁이 무림에 길이 남을 대종사의 자질을 가졌음을 확신할 수 있었던 순간에 봤던 무공. 철갑으로 무장한 인마를 단 한 번에 뭉개버렸던 가공할 장력이 지금은 당시보다 더한 기세를 뽐내는 중이었다. 선주혁의 양손이 무겁게 앞으로 향하고 거대한 유성이 지면과 수평으로 날아가기 시 작했다. 북두유성폭. 패종회의 주력 중 하나였던 철갑묵린단을 무용하게 만든 그 절세의 신공이 펼쳐진 것 이다. 쿠아아아앙! 콰아아아아! 폭음과 연이어 들리는 파공성. 북두유성폭이 적철항의 신형을 주춤거리게는 했으나, 그의 움직임을 완전히 멈춰 세 우지 못한 탓이었다. 적철항은 두 눈에서 살기를 뿜어내며 선주혁을 향해 쇄도해 들어가는 중이었다. 애초부터 선주혁은 북두유성폭 일 장으로 적철항을 어쩔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로서는 적철항이 주춤거림으로서 그가 달려드는 속도가 줄었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는 내밀었던 양 장을 거두지도 않은 채, 적철항을 맞이했다. 모든 것을 부수는 거력을 담은 적철항의 전신. 그 거대한 힘과 선주혁의 장심이 맞닿는 순간. 선주혁은 마치 북두연환장을 거꾸로 전개하듯 손을 뒤로 당겼다. 그가 자신의 무공을 자유자재로 전개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면이었다. 최대한의 속도로 당겨진 팔과 함께 그의 신형이 팽이처럼 제자리에서 돌았다. 중심을 비켜 옆으로 돌아가던 그의 팔이 향하는 곳은 지면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적철항의 거대한 체구가 선주혁이 팔을 움직이는 대로 땅을 향해 곤 두박질을 쳤다. 쿠아아앙! 또다시 귀청을 찢는 폭발음이 울렸다. 그 굉음으로 인해 중인들은 단목지민의 놀란 외침을 듣지 못했다. "화무난천장!" 마교가 자랑하는 극유의 장법. 상대의 힘을 역이용하는 최강의 묘가 담겨진 신공이 다시금 선주혁의 손에서 펼쳐진 것이다. 아쉬운 점은 선주혁이 금강마고의 가공할 속도와 힘을 역으로 되돌리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쉬워하는 사람은 단목지민 뿐이었다. 대다수의 관전자들은 저와 같은 공격 의 방향을 바꿨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놀라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와중에 단목지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화무난천장은 일월신교의 무공이다. 외부에 전해져서는 안되는 비기 중의 비기였던 것이다. 한데도 자신의 부친을 비롯한 교도 대부분이 화무난천장을 보고도 아무런 동요를 보 이지 않고 있었다. 아니, 모두가 선주혁이 화무난천장을 이용해 적철항의 공세를 피해 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왜지?' 단목지민은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한편 적철항의 금강마고가 땅을 파헤치고 일대를 크게 진동시키는 동안, 선주혁의 신 형은 하늘 높이 떠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그의 장심 위에는 자색의 구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높이 들렸던 그의 양 손이 지면을 향해 강하게 뻗어졌다. 자색의 유성이 적철항이 만든 거대한 구덩이를 향해 날아갔다. 쿠아아아앙! 적철항의 육탄공격이 만들어냈던 것에 못지않은 폭발음이 구덩이 안쪽에서부터 울려 퍼졌다. 하지만 공격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방금 전의 장력에 전력을 기울인 것이 아니라는 듯, 선주혁은 다시 한번 자색의 유성 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또 한 번 구덩이를 향해 장력을 발출했다. 연속된 두 번의 북두유성폭. 주변의 땅이 뒤틀리고 갈라지는 터에 분분히 신형을 날리는 무인들은 다시 한번 생각 했다. 지금 자신들이 보는 것은 분명 인간의 싸움이 아니라고...... 장력의 위력도 위력이거니와 저처럼 압도적인 위력의 무공을 지속적으로 펼치는 자 들을 인간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금강불괴라 해도 저런 장력을 두 번이나 맞고도 살아남을 수는 없겠죠?" 흙먼지가 걷히길 기다리며 은설연이 물었다. "글쎄...... 저런 장력에 대한 부분은 감히 내가 언급할 수준이 아닌 거 같은데?" 주백광이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하긴...... 세상에 저런 무공을 구사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리라고 누가 생각했겠어요?" 은설연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아무리 선주혁, 남지학 사형제가 대단하다고는 해도 자신의 조부에 비할 바는 아니라 여겨왔다. 하지만 방금 전 선주혁이 보여준 무위를 보자니, 상대가 안되는 쪽은 오히려 조부일 듯 싶었다. "괜찮아야 할 텐데....." 주백광의 한 마디에 은설연은 그제야 감탄만 할 상황이 아님을 깨달았다. 선주혁이 보여준 일 장의 위력이 대단한 만큼 그에게 무리가 갈 터였다. 그런 장력을 연이어 두 번이나 쳐냈으니 적지 않은 내상을 입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만약 적철항이 저 구덩이에서 멀쩡하게 나온다면 선주혁에게 큰 위기가 닥칠 것이 분 명한 것이다. 다행이 짙은 흙먼지 안에서는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죽은 건가?" 상호간에 움직임이 없다는 것. 아무래도 공격을 전개한 것이 선주혁인만큼 죽은 쪽은 적철항일 가능성이 높았다. 은 설연은 기대감 속에서 중얼거렸다. "아닌 거 같군." 주백광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잠시 후, 은설연 역시 주백광이 말한 바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흙먼지 안쪽에서 소름 끼치는 살기가 느껴진 것이다. 그 살기의 주인공이 누군지는 눈으로 보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휘위위위윙. 난데없이 강한 바람이 일대에 가득했다. 놀랍게도 그것은 교묘하게도 지표에 영향을 끼치지 않을 범위로만 불었다. 흙먼지를 걷어내기 위한 한 수. 다시 말해 누군가의 장력이었던 것이다. 자신의 장력을 저토록 교묘하게 전개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중인들을 놀라게 하기 에 충분했다. 더불어 그들은 이처럼 놀라운 장력을 발출한 자를 찾았다. 기이한 청미에 흰자위가 없는 두 눈을 가진 자. 삼패 중 한 명인 공손상량이 그 주인공이었다. 이에 중인들은 마른 침을 삼켰다. 적철항의 괴물 같은 육탄공격보다 저 자의 일 장이 더 두려우리라는 것을 막연히 느꼈던 것이다. 신묘한 공손상량의 일 장에 감탄하는 사이, 선주혁의 모습이 드러났다. 어느새 땅위 에 내려선 그의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두 번의 무리한 장력 전개를 생각하 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앞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구덩이가 보였고, 살기는 그 안쪽에서 시작되고 있었 다. 잠시 후 살기의 진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형편없는 몰골의 적철항. 입가에는 혈흔이 보였다. 아무리 대단한 금강마고라지만 두 번에 걸친 북두유성폭에 멀쩡할 수는 없었던 것이 다. "애송이, 죽여주마!" 진득한 살기가 배어나오는 한마디와 함께 적철항의 신형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선주혁을 향해서였다. 다시금 금강마고를 전개해 육탄공격을 펼치는 것이다. 선주혁은 두 손을 늘어뜨린 채, 날아오는 적철항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패종회에 맞서는 측에서는 염려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선주혁이 앞서 발출했던 무 리한 장력으로 인한 내력을 진정시키고 있지 못한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피해!" 주백광의 외침은 늦은 바가 있었다. 정말이지 눈 깜짝할 사이에 적철항의 신형이 선 주혁과 충돌한 것이다. 다시 한번 천지가 개벽하는 충격이 전해졌다. 시야를 가득 메웠던 흙먼지는 한 순간 걷혔다. 이번에도 공손상량이 신묘한 장력으로 흙먼지를 걷어낸 것이다. 그리고 관전자들은 마른 침을 삼켰다. 적철항과 선주혁이 서로의 어깨를 맞댄 채 서 있었기 때문이다. "설마..... 마주쳐 갔단 말인가? 저 육탄공격을?" 은설연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로 중얼거렸다. 누구의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선주혁에 대해 잘 모르는 자들은 그가 막연히 상대의 공격을 바라보다가 몸을 틀었을 뿐이라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은설연은 그리 생각할 수 없었다. 전혀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일일수록 그는 행해왔다. 저 상황에서 저것만큼은 안된 다고 결론을 내려도 선주혁은 반드시 해내고야 만다. 그러니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여겼다. 멍하니 서 있다 당한 것이 아니라 정면 으로 승부를 내고자 자신도 육탄으로 맞선 것이라고 말이다. 은설연의 추측은 틀리지 않았다. 선주혁은 멍하니 서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또한 무리한 진기의 운용으로 인해 타격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한조백과 함께 하는 동안 스스로 정리하고 생각했던 바가 실전에서 통용되고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다시 한번 정리를 하는 중이었다. 앞서 적철항의 육탄공격을 옆으로 흘렸던 무공은 확실히 화무난천장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화무난천장을 익혔다는 사실을 명확히 알고 있는 단목지민 외에는 그가 펼친 무공과 화무난천장을 연결 지어 생각하지 못할 한 수였다. 본연의 화무난천장과 는 그 운용에 있어서 큰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삼라만상의 기운을 느끼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선 주혁은 생각했다.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패종회의 무인들을 상대할 때 엄청나게 유리 한 고지를 점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패종회 무인들에게 무한에 가까운 천음지력이 제공된다면 자신 역시 그 기운을 운용 할 수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즉, 흡수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는 없더라도 그 기운을 증폭시켜 순간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에 착안을 둔 것이다. 명주운과 함께 도주할 때 모닥불을 앞에 두고 시험했던 바가 그것이었다. 불꽃의 기 운을 순간적으로 수배로 불리는 방법을 연구했던 것이다. 하지만 한조백과 무공을 연구하는 동안, 그와 같은 방법이 그다지 유용하지만은 않다 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어떤 기운을 순간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는 대단 하지만, 놀라움을 주는 이외에는 큰 효용이 없었던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불꽃의 기운을 수배로 늘린다 해도 전문적인 열양장력에 비해 위력 이 미미했던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천음지력을 순간적으로 운용할 수 있다 해도 천음지력이 극한의 위력을 낼 수 있도록 고안된 구음대법에 비하자면 만월 아래의 반딧불과 같았던 것이다. 그와 같은 사실에도 불구하고 한조백과 더불어 생활하는 동안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냈다. 자신이 가진 바를 인정하고 거기에 충실하라는 한조백의 가르침에 근거해 자신 을 돌아본 것이다. 수많은 격전과 생과 사의 기로에서 선주혁이 느낀 바는 적지 않았 다. 그리하여 자신이 부딪친 벽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낸 것이다. 선주혁이 찾아낸 가 능성은 순간적인 흡수와 발출이 가능했었다는 사실이었다. 가공할 상대의 공격 자체를 체내로 받아들이고자 시도해볼 정도의 빠른 흡수 속도였 다. 더불어 그보다 짧은 시간 동안 증폭과 발출을 시도했던 자신이었다. 이는 거의 시간차를 두지 않고 흡수와 발출이 가능하다는 뜻. 그 엄청난 진기의 운용 속도와 자유자재라 말할 수 있는 진기의 변환 자체에 의미를 두고 연구를 시작한 것이다. 발상 자체는 간단한 것이었다. 스스로 한계를 지닌 이상, 일정 이상의 위력을 지닌 공 격 자체를 흡수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흡수할 수 있는 만큼 위력이 줄어든다면 다르다. 즉, 공격을 마주해 위력을 크게 줄인 다음 흡성대법을 운용해 나머지 기운을 흡수해 버린다면 어떤 공격이든 막아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발상 자체는 기발했지만, 아주 짧은 시간이라 해도 여유가 주어지는 것과 그렇지 않 은 것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자칫 자신의 진기마저 역류해 주화입마에 빠져들 가능성 이 높았던 것이다. 그래도 선주혁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강해져야할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목숨을 건 시도는 계속 됐다. 하지만 생각보다 어려웠다. 불가능은 없다고 수없이 되뇌며 수련에 수련을 거듭했지 만, 안되는 일은 안되는 것이었다. 공력의 발출과 흡수가 동시에 이뤄질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생각했던 바가 연이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그는 절박한 심정이 되었다. 아 직은 자신이 삼패 중 제일 약한 적철항조차 감당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 이다. 포기할 수 없는 입장인 선주혁은 처음 취했던 방식을 바꿔 보기로 했다. 계속 되는 반 복 중에서 느낀 자신만의 장점을 또 하나 발견한 만큼 그 장점을 극대화시켜보기로 한 것이다. 공력의 발출과 흡수를 동시에 진행시키려는 시도 중에서 선주혁이 느낀 바는 자신의 내력운용이 그 누구보다 자유롭다는 사실이었다. 단전에 축적한 내력을 기경팔맥을 통해서 운용하는 여타의 무인과는 달리 전신에 내력을 축적하고 자유롭게 운용하는 자신의 특징적 내력운용에 새삼 눈을 뜬 것이다. 자유자재인 내력운용. 이것이 선주혁에게 주는 의미는 적지 않았다. 본시 초식이란 본연의 위력을 최대한 발휘하기 위한 동작을 수반한다. 완성도가 높은 초식일수록 최적의 내력운용을 위한 최적의 형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선주혁의 착안점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동작을 취하지 않고 내력의 운용만을 이용한 초식의 전개. 만약 성공할 수 있다면 무한의 효용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같은 가능성은 방금 전 선보인 화무난천장에서 기대이상의 효과로 드러났다. 어 떤 저항이라 해도 무용하게 만드는 금강마고의 맹공을 무위로 돌린 것이다. 본시 화무난천장은 수많은 변화를 통해 힘을 분산시키거나 되돌린다. 한데 선주혁은 단지 손을 내뻗었다가 당기는 것만으로 그 변화를 대신한 것이다. 이는 겉보기에만 그런 것뿐. 실제로 선주혁의 체내에서는 동작을 대신하여 수많은 변화를 만들어내며 금강마고의 막대한 힘을 분산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깨달음과 수련을 통해 얻은 자신만의 방법이 성공했다는 사실은 선주혁을 크게 고무 시켰다. 아직까지 실행하지 못한 나머지 깨달음을 적용시켜 볼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이 다. 그리고 지금. 선주혁은 다시 한번 내재적 초식의 변화를 활용했다. 외견상으로는 육탄 대 육탄의 무작스러운 충돌로만 보이는 선주혁과 적철항의 정면 승부였다. 하지만 선주혁은 공력의 내재적 운용을 통해 적철항의 금강마고에 담겨진 거력을 분 산시킨 것이다.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의지의 속도를 쫓는 내공의 운용. 이 쾌속한 전환은 즉각적인 역습을 가능케 했다. 즉 공격과 흡수는 불가능했지만, 변 화막측한 화무난천장에 연이어 즉각적인 반격은 가능해졌던 것이다. 동작의 전환이 없는 탓에 반격의 속도는 수유의 시간을 필요로 할 뿐이었다. 그 짧은 사이에 화무난천장의 묘용으로 금강마고의 힘을 분산시킨 선주혁은 혈마자 광기와 묵연수투의 기운을 운용해 역습을 가한 것이다. "쿨럭!" 뒤늦게 바튼 기침을 내뱉으며 물러서는 적철항. 휘둥그레 떠진 두 눈에서는 경악이, 그리고 벌어진 입술 사이에서는 끊임없는 선혈이 흘러나왔다. 놀랍게도 애송이와의 정면승부에서 내상을 입고 만 것이다. 선주혁도 무사하지만은 못했다. 역습을 가할 시간 때문에 적철항의 공력을 모두 분산 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그의 입가에서도 붉은 피가 흘렀다. 똑같이 낭패한 모습이지만 선주혁은 웃고 있었다. 내상의 경중에 큰 차이가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 큰 소리 치긴 어렵겠군, 변태 늙은이!" 선주혁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것으로 관전자들 모두는 알 수 있었다. 격렬한 충돌 이후, 낭패한 모습 속에서 입을 열 수 있다는 사실은 그가 우위를 점했다 는 뜻. 방금 전의 가공할 공방은 백발마신의 우세로 결론지어진 것이다. 저 괴물 이상의 괴물인 적철항을 상대로 한 우세였다. 그것은 패종회를 상대로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장면이기도 했다. "이, 이......!" 얼굴이 썩은 돼지 간처럼 검붉게 변한 적철항은 극심한 통증으로 인해 뒷말을 잇지 못했다. 금강불괴지신을 연성한 이후 이런 통증 자체를 느껴본지 너무 오래된 그였다. 그런 적철항을 향해 선주혁은 손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승부를 마무리 지으려는 것 이다. 선주혁의 손에 북두회류장의 강기가 맺히려는 순간. "커어어억!" 폐부를 쥐어짜는 듯한 신음성과 함께 적철항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충혈된 그의 두 눈이 아래를 향해진다. 자신의 왼쪽 가슴을 뚫고 나온 무엇을 확인하기 위함이다. 무너진 둑으로 쏟아져 나오는 홍수마냥 콸콸 흐르는 선혈. 그 선혈의 중심에는 벌떡이는 붉은 덩어리가 있었다. '심장?' 자신의 심장을 두 눈으로 확인한 적철항. 놀라움과 분노를 이루 말할 수 있겠냐만은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심장이 체내를 벗어난 자는 죽음을 맞이하는 것 외에는 허용되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놀란 것은 죽음을 맞이하는 적철항 뿐이 아니었다. 막 북두회류장을 발출하려던 선주혁 역시 경악을 금치 못하는 중이었다. 아무리 자신 이 우세를 점했다 해도 적철항의 금강불괴지신은 실로 대단하기만 했다. 이미 타격을 받은 만큼 끊임없이 북두회류장을 발출하다보면 승패를 결정지을 수 있으리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한데 누군가가 단 일 수에 적철항의 금강불괴지신을 파훼하고 그의 심장을 끄집어낸 것이다. 파악. 피를 가득 머금었던 적철항의 심장이 터지고, 그 심장을 쥐었던 손이 적철항의 가슴 에서 빠져나왔다. 거구가 땅에 쓰러지자 뒤쪽에서 공격을 감행한 자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강시?" 선주혁은 다시 한번 두 눈을 크게 떠야만 했다. 적철항의 육탄공격에 적중되어 형체조차 남기지 못했을 거라 여겼던 강시가 다시금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멀쩡한 모습을 되찾은 채였다. 쇄애애액. 날카로운 파공성에 선주혁은 저도 모르게 땅을 박찼다. 등골이 시릴 정도의 위험한 무엇인가가 다가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황급히 몸을 피했던 그는 다소 무안한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접근한 자가 노린 것은 자신이 아니라 강시였기 때문이다. "감히! 미물 따위가!" 음침하기 이를 데 없는 음성을 터뜨리며 강시를 덮쳐간 자는 삼패 중 하나인 단무수 였다. 무릎을 굽히지 않는 특유의 신법으로 움직이는 그의 모습은 강시보다 더 강시 같아 중인들에게는 두 구의 강시가 서로 얽히는 듯 보였다. 의외의 상황은 그 순간 벌어졌다. 여태껏 교자에 앉아 있던 마교의 교주가 손을 쓴 것이다. 쿠아아아앙. 귀청을 찢는 폭음성에 강시를 향해 검은 연기와 같은 것을 내뿜는 단무수를 제외한 모든 이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리고는 동시에 이해불가의 표정을 지었다. 단목하진이 손을 쓴 것은 남아 있던 두 구의 강시를 향해서였던 것이다. "캬아아아아아!" "크아아아아아!" 처절한 괴성을 지르는 두 구의 강시는 온건한 모습이 아니었다. 건곤대나이심법을 운 용한 단목하진의 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는 단면이었다. 한데도 단목하진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마치 무엇인가에 쫓기듯 신형을 움직인 그는 사제차림의 교도에게서 밝게 빛나는 횃불을 빼앗아들었다. 이어 주춤거리는 두 구의 강시를 향해 횃불을 휘둘렀다. 그와 같은 광경에 중인들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마교주가 망령이 난 것도 아닌데 공 들여 만든 물건을 스스로 망치려드니 당연한 현상이었다. 더구나 한 구의 강시가 적철항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 이쪽의 전력에 크나큰 도움이 된다는 뜻이었다. 아직 패종회주와 두 명의 삼패, 그리고 백존들이 건재한 지금의 상 황에서 자중지란을 일으키는 그의 저의를 중인들은 알 수가 없었다. "캬아아아아!" 심장부위에 횃불이 닿자, 강시 하나가 끔찍한 괴성을 내질렀다. 동시에 고약하기 이를 데 없는 냄새가 일대에 진동했다. 강시의 가슴에 불길이 치솟는 그 즈음에 선주혁은 마교주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 노 력할 여유를 갖지 못했다. 그의 귀를 파고드는 전음 때문이었다. [교주님을 돕게!] 전음의 주인공은 종극. 선주혁은 어리둥절한 채로 신형을 움직였다. 종극의 음성에 담긴 다급함을 익히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선주혁이 신형을 날리며 남은 강시 하나를 공격해 들어가는 순간, 삼패 중 남은 일 인 인 공손상량이 움직였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단무수가 부활해 돌아온 강시에게 밀리고 있음을 파악한 것이다. 한순간 일대에는 다시금 지독할 정도의 음기가 넘쳐흘렀다. 적철항에 이어 단무수에 게 집중했던 천음지력이 그 범위를 넓힌 것이다. 공손상량이 손가락을 넓게 펼쳐 강시를 향해 가는 모습을 확인 선우단천 역시 신형을 움직였다. 하지만 앞선 두 사람과는 달리 선우단천은 강시의 인근에 이르지 못했다. 그의 앞을 가로막은 한 젊은 청년 때문이었다. "자네가 옥용검마군." 남지학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막아볼 셈인가?" 이번에도 남지학은 입을 열지 않았다. 침착한 태도로 영의검을 뽑아들 뿐이었다. 스르릉. 맑은 소리와 함께 희대의 보검인 영의검의 검신을 드러냈다. "좋은 검이군." "좋은 검이오." 자신의 검을 칭찬하자 그제야 입을 여는 남지학. 그를 보며 선우단천이 미소를 지었다. "자네라면 자격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긴박한 싸움이 양쪽에서 벌어지고 있음에도 선우단천은 태연하기만한 모습이었다. 아니 계속해 미소 짓고 있는 모습이 작금의 상황을 즐기는 듯했다. 호법인 적철항의 죽음 따위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래도 강호라는 곳에서 결국 내 앞에 설 수 있는 자가 자네와 같은 젊은이 뿐이라는 것은 아쉽군, 그래." 아쉬움인지 한심한 감정을 드러낸 것인지 모를 표정으로 선우단천이 말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누군가 제멋대로 휘두를 수 있는 곳은 아니오." 은은한 노기가 서린 남지학의 말에 선우단천이 물었다. "어쩐지 자네가 날 이길 수 있다고 확신하는 듯하군." "사제의 말대로라면 그럴 것이오." "훗!" 남지학의 말을 들은 선우단천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자네의 사제가 확실히 대단하긴 하지만......" 말을 길게 늘인 선우단천의 표정이 갑작스레 굳어졌다. "본좌를 평가하기엔 이르다네!" 지금껏 봄날의 훈풍처럼 잔잔하기만 하던 선우단천의 기도가 급격히 변했다. 폭풍처럼 밀어닥치는 막대한 기세. 그것은 멸세강마대법으로 완성된 강시가 보여주었던 마기나 적철항의 금강마고가 뿜 어냈던 기세와는 확연히 차이가 있었다. 그 강렬한 기파에 강시를 향해 장력을 뿌리던 선주혁이 고개를 돌렸다. '사형!' 사형과 패종회주와의 대치. 다행이 우려하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연유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할 수는 없 으나, 다행스럽게도 사형과 패종회주가 일 대 일의 대치상황에 놓인 것이다. 더구나 지금은 천음마후, 선우 아가씨가 선우단천에게만 천음지력을 몰아주지도 않 는 상황. 적지 않은 부상을 입을 가능성은 있지만 사형의 승리는 확정된 바와 다름없었다. '역시 주인고은 뭔가 달라도 달라!' 무리를 해서라도 사형과 패종회주가 맞붙는 상황을 만들고자 했다. 지금의 사형이라 면 패종회주를 이길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이에 선주혁은 사형이 패종회주를 물 리치고 강호 최고의 무임으로 인정받기를 바라는 것이다. 자신으로 인해 많은 것이 변했지만, 사형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 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사형과 패종회주를 단 둘이 맞붙게 하기란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삼패와 백존이 문제였던 것이다. 한데 기묘한 상황이 벌어지며 자연스럽게 남지학이 패종회주를 상대하게끔 되었다. 이에 선주혁은 크게 될 인물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근데 이놈은 어떻게 해야 죽는 거야?' 생각을 정리하면서도 선주혁은 끊임없이 강시를 향해 공세를 퍼부었다. 자신의 공격 에 곳곳의 뼈가 부러져 제대로 서있지도 못하는 강시였건만 여전히 움직이는 중이었 다. 하긴 적철항의 그 엄청난 공격을 고스란히 받고도 멀쩡히 돌아오는 녀석들이니 쉽 게 죽을 리는 없었다. 지독한 생명력에 치를 떨면서도 선주혁은 마교에서 힘겹게 만든 이 강시들을 왜 미리 부터 처치하려드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강시가 하나 남아 있더라도 삼패 중 둘을 상대하기란 쉽지 않을 터였다. 사형 이 패종회주를 죽이더라도 아직까지 백존의 상당수가 건재한 상황이다. 결국 현재까지도 패종회 측에 비해 우위를 차지하지 못하고 있건만 스스로 전력의 손 실을 자처하는 이유를 그는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캬아아아아아!" 또다시 울리는 처절한 비명성. 심장을 중심으로 불타오르는 강시가 내지르는 소리였다. '뭐야? 내 장력에도 멀쩡한 강시가 고작 횃불 따위에 불타는 거야?' 선주혁이 놀라는 사이에도 단목하진은 계속해 횃불로 강시를 공격했다. 곳곳에 불이 붙어 나뒹구는 강시의 입에서는 끔찍한 괴성이 연신 흘러나와 듣는 이의 모골을 송연 케 만들었다. 그 사이에도 선우단천과 남지학의 대치는 계속되고 있었다. Chap. 6 천외무존(天外武尊) <1> 제법 대단한 무공을 지닌 듯 보여 말을 섞긴 했다. 허나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었다. 공손상량과 단무수 두 사람이 힘을 합치면 이 세상 에서 버텨낼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자신이라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한데 절정의 고수보다 열등하기 짝이 없던 강시는 외려 두 사람을 몰아붙이는 중이었 다. 만약 절대십가의 가주들이 속속들이 덤벼들어 돕지 않았다면 벌써 누군가 부상을 입었을지도 모른다. 마교에서는 진정 괴물을 만들어낸 것이다.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강시의 힘은 훨씬 대단했다. 자신이 가세하지 않는다면 쉽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이에 선우단천은 단 한 수에 승부를 내고자 했다. 패종회 전력의 대부분을 강시 따위 에게 잃을 수는 없었다. 한 수에 승부를 내고자함은 남지학 역시 마찬가지였다. 긴 싸움이 자신에게 불리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단 한 수! 그것만이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였다. 정신을 집중하고 검과 자신을 하나로 합쳤다. 단 한 초식에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검식을 담아내야했다. 더불어 단 한 초식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검식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남지학이 깨달은 무극삼검식의 극의였다. 앞서 선우단천이 그랬던 것처럼 남지학의 기도도 급격히 변했다. 선우단천의 그것처럼 주위의 모든 것을 억누르는 위압적인 기세는 아니었다. 마치 부드러운 물결이 주위를 채워가는 듯한 기도였다. 다만 그 충실, 충만한 기도의 양과 잠재된 힘만큼은 무인 특유의 감성을 자극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속전속결을 짓고 수하들을 도우려던 선우단천 역시 남지학의 기도를 감지했다. 결코 눈 아래로 볼 수 없는 고수. 어쩌면 생명을 걸어야할 지도 모를 상대. 그것이 지금의 남지학이었다. 선우단천은 조급함을 버렸다. 상대를 경시하는 마음도 버렸다. 그가 무인으로서 상대를 대하는 최적의 상태가 되기까지는 찰나의 시간도 필요치 않 았다. 호적수를 만났다는 감각적 인지가 형성되는 순간, 이미 그는 완벽에 가까운 무인으로 화한 것이다. 처음에는 기세만을 내뿜던 선우단천은 실제적인 힘을 가진 무형의 압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 압박만으로도 어지간한 고수라면 피를 내뿜을 정도. 하지만 남지학은 여전히 거대한 산맥처럼 제자리를 지켰다. 아니, 제자리만 지키는 것이 아니었다. 막강한 압력에 굴하지 않고 거친 저항을 펼쳤다. 실제로 격전이 벌어지기도 전에 무형의 기운끼리 험악한 진퇴를 거듭했다. 이제 남은 것은 승패를 결정짓는 단 한 수뿐이었다. 우연치 않게도 동시에 세 곳에서 숨막히는 격전이 절정을 향해 치닫게 되었다. 세 곳에서 비롯된 폭음과 괴성, 암경과 여파만으로도 족히 수천의 인마를 죽일 정도 였다. 일견 상으로는 강시와 패종회 측의 격전이 제일 험악해 보였다. 계속해 백존들 이 싸움에 가담했던 것이다. 이로써 줍녀에 접근하는 것만으로도 위험한 상태. 관전하는 무인들이 저마다 뒤로 물러서기 바쁜 와중에 반대의 행동을 하는 이들이 있 었다. 천사지황 은적비를 비롯한 백사회의 인물 아홉이었다. 그들은 내력을 돋우어 스스로를 보호하며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셋으로 나뉘어 각각의 싸움에 전념하는 이들을 향해 접근했다. 은밀하고 조심스러운 접근이었으나, 경각심을 곤두세운 적에게는 훤히 보이는 움직 임이었다. 백사회의 구인이 접근하는 만큼, 강시를 상대하지 않고 있는 남은 백존들 역시 격전 의 중심을 향해 이동했다. 여차하면 자신들 역시 혼전에 참여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려와는 달리 백사회의 구인은 일정 거리까지 접근한 후,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좀 더 가까운 거리에서 관전을 하고자 했던 시도처럼 보일 정도였다. '이 와중에 사술을?' 백사회의 움직임을 본 은설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격전을 벌이는 모든 이는 사 술 따위로 어떻게 해볼 상대가 아니었다. 눈을 속여 현혹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한데 조부를 비롯한 아홉의 백사회원들은 정확한 간격을 유지한 채 사기를 흘리며 이 동을 마쳤다. 은설연이 아는 한, 저들은 사술을 준비하는 중인 것이다. 백사회원 아홉은 각각의 방위를 점하고 상호간의 기운을 연결하기 시작했다. 사기와 사기가 만났으되 충돌치 아니하고 서로를 끌어당기니 진형을 갖췄다는 증거였다. 잠시 후 백사회의 구인은 수결을 맺은 후, 입술을 달싹이기 시작했다. 천하에서 사술에 가장 뛰어난 구인들이 진형을 갖춰 주문을 외우기 시작한 것이다. 그제야 은설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패종회에 맞서기 위해 준비를 해온 것은 마교만이 아니었다. 사파연합에서도 최후의 일전을 위한 준비를 해왔다. 마교의 비책에 뭔가 문 제가 생긴 것이 분명한 지금, 조부는 지금껏 준비해온 것을 꺼내든 것이다. 그것이 사술이건 아니건 중요치 않았다. 마교에서 만들어낸 강시가 상식적인 강시의 한계를 한참이나 벗어나 있듯, 조부가 준비한 사술 역시 저 엄청난 고수들을 상대로도 뭔가의 효과를 만들어낼 것이라 여겼다. 남지학, 선주혁 사형제가 그러하듯 자신 역시 조부를 믿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사이. 자신이 공격하던 강시를 완전히 불태운 단목하진이 선주혁이 난타하는 강시의 심장 을 향해 횃불을 내밀었다. 소름끼치는 괴성과 함께 몸부림을 치는 강시. 선주혁은 이제 확신했다. 멸세강마대법으로 완성된 강시는 저 횃불에 취약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다. 온몸을 지탱하는 뼈를 모두 분질렀음에도 강시의 몸에서 뿜 어져 나오는 마기의 양은 점차 늘어만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 강시가 반격을 해왔다면 실로 골치 아팠을 일이었다. 단목하진이 강시를 맡자, 선주혁은 신경을 사형에게로 돌렸다. 아직까지 두 사람은 대치중인 상황. 자신이 알고 있는 한 사형의 승리가 확실하지만, 많은 변수가 중간에 있었으니 긴장 감이 고취되지 않을 수 없었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사형을 바라보던 선주혁은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경천동지의 혈전을 벌이고 잇는 강시와 패종회원들, 강렬한 마기를 뿜어내는 강시를 태우고 있는 단목하진, 그리고 가히 막강 자체의 기세를 뿜어 서로를 압박하는 사형과 패종회주 사이에 무엇인가가 연결되는 느낌이었다. 작은 변수가 사형의 목숨을 위태롭게 할 수 있는 상황. 날카로운 신경을 유지하던 선주혁은 그와 같은 느낌의 정체를 찾아야만 했다. 세 곳에서 뿜어지는 막대한 기운이 연결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세 곳에서 발생한 기운이 일정한 흐름을 타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하나, 하나가 막대하기 이를 데 없는 저 기운들을 누가 있어 조종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흘러나오는 기파를 조종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선주혁의 눈이 바쁘게 사위를 살핀다. 구인의 백사회원들이 수결을 맺고 주문을 암송하는 것이 보였다. '사술?' 자신만 해도 사술 따위에 현혹되지 않을 수 있다. 지금 격전을 벌이는 자들은 모두 그 정도의 경지에 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술을 전개하고 있다는 것에는 이유가 있을 터. 순간, 선주혁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일련의 문구들. 나우트 움리오 사하미안 쿰바트 오미하라 우카드메...... 자신이 이쪽 세상으로 넘어오기 전 읽었던 책 속의 주문이었다. '주문!' 선주혁은 마른 침을 삼켰다. 번개같이 머릿속을 강타한 생각 때문이었다. '차원이동!' 소설 속에서 사형이 패종회주를 처리하는 순간, 차원이동이 이뤄진다. 상황이 크게 달라진 지금이었기에 방심을 했다. 사형이 단독으로 패종회주를 상대할 때와는 완전 히 다른 조건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차원이동 자체보다는 누가 사형을 차원이동 시킨 후, 웃음을 터뜨릴 지만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간단했다. 그쪽의 상황 속에서 사형과 관련 없는 모두가 웃을 것이다. 패종회라는 막강한 적이 사라지고, 그 패종회를 무찌른 절 대의 고수까지 사라지면 남은 자들은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영웅은 난세에만 필요할 뿐. 세를 다투는 무인들에게 자신들보다 강한 자를 환영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정사마가 힘을 하나로 모으고 잇는 상황. 모두를 대표해 나서는 만큼 사형이 사라진다 해도 마냥 기뻐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렇게 결론을 지은 후, 선주혁은 막연한 안심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한데 막상 기묘한 느낌을 받게 되자 마음이 다급해졌다. 사형은 절대로 차원이동에 말려들어서는 안된다. 다른 조건, 다른 상황에서의 차원이동이다. 원래의 소설대로라면 주인공인 사형이 차 원이동을 한다 해도 큰 위험은 없을 것이다. 다소의 고난이 있겠지만 그것뿐일 터였다. 여성체인 드래곤을 홀리던, 늙어 죽어가는 드래곤 하트의 내단을 흡수하든, 마나나 내공이 같은 개념으로 사용되는 세상에서 이곳에서보다 훨씬 많은 공력을 쌓던, 닥치 는 대로 마법을 배우건, 하여튼 사형은 지금보다 외려 강해지고 더 많은 것을 성취하 게 될 것이다. 보통의 경우 소설 속 차원이동 한 무림인들은 그러하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른 상황이다. 한 눈에도 차원이동의 원동력은 격전장에 흐르는 막대한 기운이다. 일정한 흐름을 형 성한 이 기운이 주문과 합쳐져 차원이동의 기반을 만드는 것이 분명했다. 이것부터가 문제였다. 선주혁이 알고 있던 상황 속에서는 패종회주와 사형, 그리고 천음지력만이 주문완성의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에 필적하는 수많은 거력들이 난무하고 있다. 다시 말해 조건이 다른 만큼 차원이동 후의 결과가 다를 가능성이 매우 컸던 것이다. 차원이동 자체가 위험할 수도 있고, 생각지도 못한 곳에 떨어져 버릴 수도 있다. 판타지 세계가 아니라 우주의 한 가운데로 이동해버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아무리 사형이라 해도 산소가 없는 곳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은 전무했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가족인 사형이다. 그를 어떻게 될지 모를 상황에 던져둘 수는 없었다. 모든 상황에 우선해 사형의 차원이동만큼은 막아야 했다. 일정한 흐름을 쫓는 거력은 벌써부터 꿈틀대고 있다. 차원이동의 열쇠는 사형과 패종 회주의 격돌일 것이다. 막대한 힘의 충돌이 계기가 되어 차원의 문이 열리게 될 터. 그 전에 막아야만 했다. 결론을 내린 선주혁이 백사회원들을 향해 신형을 날리려는 순간이었다. "타합!" "하압!" 동시에 울려 퍼지는 기합성. 그것은 남지학과 선우단천의 대치가 끝이 났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안돼!' 미처 발을 떼지 못한 채, 선주혁은 고개를 돌렸다. 눈부신 섬광. 미증유의 거력이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에서 생성된다. 지상 최강을 자랑하는 두 명이 전력을 기울인 공격이 서로 마주하는 것이다. 동시다발적으로 다른 두 곳에서도 막대한 기운들이 터져 나왔다. 많은 수의 백존들이 강시를 향해 장력을 발출하고, 단목하진에게 횃불로 공격을 당한 강시는 가공할 마기 를 뿜어냈던 것이다. 그 어마어마한 기운들이 흐름을 타고 있는 거력을 자극한다. 동시에 맹렬한 기운의 폭발이 야기된다. 차원의 개방을 위한 힘이 생성된 것이다. 일련의 과정을 확인한 선주혁. 이미 백사회원들을 저지해 차원이동을 막기에는 늦었음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저 폭발이 끝을 맺을 때, 차원이동은 행해질 것이다. 폭발의 중심에 있는 사형은 반드시 휘말려 들어갈 터. 무엇을 생각할 시간이 허용되지 않았다. 차원이동의 범주 내에 자신이 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했다. 어떻게 해서든 사형을 미지의 세계로 내몰 수 없다는 생각만이 그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선주혁은 전신을 개방했다. 흐름을 타고 응축되었던 거력, 무공의 극을 보여주는 두 무공의 충돌, 주변을 가득채 운 각각의 기운들이 한데 어우러져 차원을 여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에 맞춰 선주혁은 자신의 한계를 고려치 않고 흡성대법을 시전한 것이다. 이곳의 모든 기운이 차원이동의 조건이 된다면 그 기운을 없애는 것으로 차원이동은 이뤄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주혁이 전신을 개방하며 흡성대법을 펼친 데 는 이와 같은 이유가 있었다. 개개인이 무림의 절대자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고수들이 전개한 무공이 한데 어 우려졌다가 선주혁을 향했다. 한순간 밀어닥치는 미증유의 거력을 선주혁은 감히 흩어뜨릴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차원이동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만이 그의 목표. 흡수할 수 잇는 최대의 양을 흡수하고 또 흡수할 뿐이었다. 눈에서 섬광이 번뜩이고 입안에서는 진득한 혈향이 피어올랐다. 그래도 선주혁은 멈추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기운을 흡수할수록 차원이동이 행해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전신이 터져나갈 것만 같았고 시야는 뿌옇게 흐려졌다. 감당키 힘든 통증만이 그가 인지하는 모든 것이었으나 신음을 흘릴 여유조차 없었다. 입을 벌려 신음성을 흘릴 시간동안 조금이라도 더 많은 양의 기운을 흡수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느 한 순간. 귀청이 터져나갈 듯한 폭발음을 들었다. 두 눈을 가득채운 섬광과 함께였다. 선주혁은 알고 있었다. 섬광도. 폭발음도. 자신에게만 들리는 것임을...... 아득한 저 너머에서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누군지 확인할 수 없었다. 섬광에 이어진 것은 세상을 뒤덮는 암흑뿐이었기 때문이다. <2> "무량수불......" 정기 가득한 두 눈을 가진 도인이 나직하게 도호를 읊조렸다. 수백 년의 전통과 함께 해온 명예로운 이름이 패악한 무리의 간계로 인해 더렵혀졌다. 사형들을 모두 잃었고, 남은 한 명인 덕일 진인은 자신의 손으로 직접 죽여야만 했다. 반도의 말로였다지만 덕양 진인에게는 크나큰 상처가 아닐 수 없었다. 마음만 같아서는 진언(眞言)을 읊으며 여생을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청성의 이름이 이렇게 스러져 가는 것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자신에게 큰 기대를 했던 사부 열일 진인과 대사형인 덕청 진인을 생각해서라도 그럴 수는 없었 다. 덕청 진인의 대제자인 일성에게 장문직을 떠안겼지만 태상 장로로서 무공을 전수하 는 데는 그와 같은 이유가 있었다. 청성 무공의 적전을 이어받은 사람은 자신밖에 없 었기 때문이다. "무슨 소리! 당연히 북천검제(北天劍帝)지!" 상념에 잠겨 있던 덕양 진인의 귀에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땀에 젖은 무복을 입은 한 무리의 소년들이 숙소를 향해 걸음을 옮기며 떠드는 소리였다. 수련을 마치고 돌아 오는 나이 어린 속가제자들이었다. 무엇인가에 언성을 높여 떠들던 소년들은 바위에 걸터앉은 삼십대의 도인을 보고 예 를 갖췄다. 공식석상에 거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 덕양 진인이었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질이 장문직을 수행하는 만큼 공석에 나서면 그에게 부담을 줄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 때 문에 소년들은 덕양 진인을 알아보지 못했다. 덕양 진인이 무공을 전수하는 이는 현장문인과 같은 항렬의 제자들 뿐. 갓 입문한 속가제자들이 덕양 진인을 알 리 없었던 것이다. 덕양 진인이 목례로 가볍게 예를 받자 소년들은 다시금 하던 이야기에 몰두하기 시작 했다. "내 생각에도 북천검제가 제일인 것 같아. 현재 무림의 최강자는 북천검제잖아. 그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지." "그렇게 말하면 안되지. 강하다고 전부 존경을 받는 건 아니잖아. 그리고 현 무림의 최강자가 꼭 북천검제라고 단언할 수도 없고 말이야." 짙은 두 눈썹이 고집스럽게 보이는 소년이 언성을 높였다. "훗! 그럼 패악회의 마두를 처단한 북천검제보다 더 강한 사람이 있다고?" 들리는 이야기로 미루어 처음에는 분명 현 무림에서 가장 존경을 받아야할 사람에 대 한 토론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곁가지로 샌 한 마디로 논지가 흐려졌다. 그럼에도 소년들은 그것을 바로잡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혈기왕성한 그들인 만큼 작 은 것 하나라도 지고는 넘어가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왜 없어?" 눈썹이 짙은 소년의 반문에 다른 소년들은 모두 어이가 없는 표정이었다. "대체 누가 있어 북천검제보다 강하다는 거야?" "무존(武尊)! 그 분이라면 북천검제보다 강할 수 있지." 그 말에 다른 소년들이 피식 웃었다. 처음 덕양 진인의 상념을 깼던 소년이 다시 입을 열었다. "무존이라는 별호는 그분이 지난 날 세운 공로를 기리기 위함일 뿐이야. 게다가 지금 은......" 소년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목소리를 조금 낮춰서 말했다. "의식조차 되찾지 못하고 누워계시잖아." 어쩐지 해서는 안될 말 같았지만 이대로 논쟁에서 지고 싶지 않은 그였다. "하지만 그분이 의식을 회복하시면 북천검제도 안될걸? 패종지란(覇宗之亂) 때 무존 의 활약을 생각해 보면 알잖아." "패종지란을 종식시킨 건 북천검제셔. 동호대전 이후, 살아남은 패악회의 주구들의 대부분을 처단한 것도 북천검제시지. 게다가 무존은 의식을 되찾는다 하더라도 더 이 상 무공을 사용하지 못해. 단 한 줌의 내공조차 남지 않았잖아. 그건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라고." 키가 큰 소년이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리저리 어긋난 논지를 하나하나 짚어 가는 것 자체가 피곤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패악회의 회주를 죽였다고 다는 아니지. 당시 무존이 아니었으면 강호는 진즉 패악 회의 손에 넘어갔을 걸!" 패악회란 강호를 도모하던 패종회의 몰락 이후 무림인들이 패종회를 지칭하는 말이 었다. 눈썹이 짙은 소년은 의식불명의 무존과 현재의 북천검제와 비교하기가 버거웠던지 다시금 원론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아니지! 그때도 북천검제께서 계셨으니 절대 그럴 일은 없었지. 강호는 어느 한 세력 이 손에 넣고 좌지우지할 수 없다는 사부님 말씀도 못 들었느냐?" 소년들의 언성은 점점 높아지고 말투고 격해졌다. "너희들이 무존의 활약을 못봐서 그래. 가까이서 그분의 활약을 봤다면 절대 그런 말 못할걸?" "쳇! 넌 꼭 본 것처럼 말한다?" 키 큰 소년이 툭 쏘며 말했다. 그러자 눈썹이 짙은 소년은 잔뜩 고조된 음성으로 대꾸했다. "난 못봤지만 우리 외숙께서 직접 보시고 내게 말씀해주셨어. 무존이야말로 이 시대 최고의 무인이라고!" 열띤 소년의 음성이 소년들의 격렬한 토론에 기름을 붓는 듯 했으나 주제는 또다시 빗나가기 시작했다. "너희 외숙께서 패종지란 때 활약하셨어?" "사문이 어떻게 되시는데?" 여태 말을 하기보다는 듣고만 있던 소년들의 질문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외숙께서는 두 번이나 무존께서 활약하시는 모습을 보셨대 그 중 한 번은 아예 동행 까지 하셨어." "무존과 동행을?" "우와! 진짜?" 소년들이 소란을 떨기 시작했다. 지금은 내공이 전폐되어 보통사람보다 허약한 것으 로 알려진 무존이다. 하지만 삼 년 전 천하를 위진하던 기억은 어린 나이의 그들에게도 선명했다. 그런 무존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흥분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이야기 였다. "그 때 외숙께서 사숙조도 뵈었다고 하셨어!" 눈썹이 짙은 소년은 자랑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않고 말했다. "에? 덕양 사숙조를 뵈었다고?" "그럼 무존께서 사숙조를 돕던 그때, 너희 외숙이 계셨단 말이야?" 아이들의 흥분이 절정에 달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무림 전체를 뒤흔드는 북천검제와 무존이지만 청성 제일의 고수인 덕양 진인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이다. 삼십 대에 청성 제일의 고수가 된 덕양 진인이야말로 그들의 우상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덕양 진인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네 외숙의 별호가 어떻게 되시냐?" 삼십 대의 도인이 갑작스레 자신들의 앞을 가로막자 소년들은 일시 주눅이 든 모습이 었다. 청성에서 도복을 입고 있다는 것을 적전제자라는 뜻. 하산을 하지 않는 이상, 따로 항렬을 표시하지 않는 청성파였다. 도인의 신분을 짐작 할 수는 없지만 삼십 대의 적전제자라면 갓 입문한 속가제자들에게는 한없이 어렵기 만 할 수밖에 없었다. "저희 외숙께서는 최근 풍협(風俠)이라는 별호로 불리십니다." "아!" 덕양 진인은 그제야 소년이 누구의 외질인지 알 수 있었다. 풍협 명주운. 과거 선주혁에게 경신공부를 전수받은 후, 무림에서 손꼽히는 경공의 대가로 불리는 젊은 협객이었다. 동호대전 이후, 패종회 잔당의 소탕에 혁혁한 공을 세워 세간에서는 그를 일컬어 풍 협이라 하고 있었다. 패종회에게서 도주할 당시 명주운, 철무종과 함께 했던 덕양 진인으로서는 다시없이 반가운 이름이기도 했다. "명 도우께서는 무고하시더냐?" 소년은 공손히 대답했다. "최근까지도 패악회의 잔당을 추적하고 계시다 들었습니다." 패종회는 생각보다 방대했다. 당시 살아남은 백존과 백웅들에 대한 소탕은 아직까지 계속되는 중이었다. "그렇구나. 하긴 무존의 무공을 전부받은 유일한 인물이니......!" 덕양 진인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눈썹이 짙은 소년은 크게 고무되었다. 사문의 존장이 무존을 인정하는 발언을 했기 때문이다. 소년은 상기된 표정으로 물었다. "저희 외숙과 안면이 있으십니까?" 덕양 진인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방금 전 네 입으로 이야기하지 않았더냐? 빈도와 네 외숙이 함께 했다고? 빈도는 네 외숙과 함께 무존께 큰 은혜를 입었단다." "......!" 덕양 진인의 말에 스무 명에 달하는 소년들은 한순간 얼어붙었다. 소년이 말했다. 자신의 외숙이 덕양 사죽조를 뵈었다고. 하면 눈앞의 도인이 바로 자신드르이 사숙조인 덕양 진인이라는 뜻이었다. 평소 우상처럼 여겨왔던 분이 눈앞에 있다는 사실이 현실로 다가오는 데는 시간이 필 요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한 명이 외치듯 말했다. "태상장로님을 뵙습니다!" 그러자 화들짝 놀란 나머지 아이들도 저마다 입을 모아 재차 예를 갖췄다. 덕양 진인은 청성의 기둥이 되어줄 동량들을 향해 다시 한번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주 었다. 그리고 물었다. "너희는 청성의 제자가 된 것에 자부심을 느끼느냐?" "네!" 소년들은 한결같이 입을 모아 대답했다. "어째서?" 덕양 진인의 질문에 소년들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태상장로의 면전에서 함부로 발언을 하는 것은 여간 용기가 필요한 일이 아니었다. "정도무림의 아홉 기둥 중의 하나인 청성이기 때문입니다." 키가 큰 소년이 머저 나섰다. 종남이 멸문한 지금 십룡은 구룡으로 숫자가 줄어 있었 던 것이다. 그 후 소년들은 질세라 한 마디씩 했다. 청성의 유구한 역사와 청성이 배출한 수많은 영웅들, 그리고 강한 무공 등등 스물의 소년들은 청성인으로서 자부심을 갖는 이유를 목청 높여 대답했다. 덕양 진인은 그런 아이들의 말을 조용히 들었다. 모두 한 마디씩을 마친 후에야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너희의 말은 모두 맞다. 그러니 청성문하에 있음을 자랑스러워해도 된다. 너희 는 모두 청성의 기둥이 될 터이니......" 자신들이 대청성파의 기둥이 될 거라는 태상장로의 말에 소년들은 감격한 표정을 지 었다. 딱히 무엇을 인정받은 것은 아니었으나 태상장로의 말씀이니 만큼 당장이라도 청성의 영웅이 된 것만 같았다. "하지만! 청성이라는 이름을 어깨에 짊어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고개를 숙이는 순간 청성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강호에서 이름을 짊어진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 너희는 청성의 이름을 위해 목숨을 걸 수 있겠느냐?" 생사를 가르는 혈전이 무엇인지 알 리 없는 소년들이었다. 그저 태상장로의 질문에 무엇인가 벅차오르는 느낌에 저마다 입을 모아 대답할 뿐이었다. "네!" 소년들의 씩씩한 대답에 덕양 진인은 다시금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예외도 있다." "......?" 아이들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청성의 이름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방금 전에 말하고서는 다시 예외를 거론하는 덕양 진인의 말을 선뜻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청성 문하여도, 청성이라는 이름을 짊어지고도 머리를 숙여야 할 때가 있다는 이야 기다." "그게...... 언제입니까?" 키가 큰 소년이 제법 용감한 태를 내며 질문했다. 나름의 반항이다. 청성파의 속가제자가 되어 한없는 꿈을 키워온 소년이다. 가슴 깊 은 곳에서부터 비롯된 자부심이 크기만 하건만 고개를 숙여야 할 때가 있다는 말을 쉽 게 수긍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강호에는 기라성 같은 무인들이 존재한다.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절대의 고수들도 많다할 것이다. 하지만 너희가 고개를 숙일 대상은 아니다. 저 대단한 패종회를 향해 서도 고개를 숙이지 않은 청성이 아니겠느냐?" 그제야 질문을 던진 소년의 얼굴이 풀어진다. 그랬다. 청성파는 패종회와 맞서던 중, 큰 위를 겪었다. 일대 제자의 대다수가 세상을 등졌다. 덕양 진인은 그와 같은 위기를 극복하고 패종회와 맞서는 싸움의 선두에 섰었다. 그러 니 함부로 고개를 숙이지 않는 게 분명했다. 소년들은 생각했다. 청성의 도인들은 속가제자인 소년들이 듣기에는 구름을 쫓는 것과 같은 말을 종종 하 곤 했다. 태상장로인 만큼 좀 더 난해하고 이해하기 힘든 말씀을 하시는 거라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단 한 사람! 청성이 다시 과거의 영화를 꿈꿀 수 있는 은혜를 베푼 그에게는 예외를 두어야 한다. 청성 문하라면 누구나 그에게 머리를 숙이는 것을 부끄러워해서 는 안될 것이다." "그, 그게 누굽니까?" "바로...... 너희가 무존이라 칭하는 사람, 강호에서 천외무존(天外武尊)이라 불리는 바로 그다." "......!" 아이들은 눈을 크게 뜨고 서로의 눈치를 봤다. 특히 많은 시선이 눈썹이 짙은 소년에 게 쏠렸다. 눈썹이 짙은 소년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 자신의 외숙이 한 말이 맞았던 것이다. 무공을 익힌 자라면 누구나 무존에게 경의를 표해야 한다고 했다. 그 말을 오늘에 있 어서 문파 최고의 어른이 옳다 말씀해주시는 것이다. "비단 그가 빈도에게 구명지은을 베풀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무인이 어떻게 살 아야하는지에 대한 극명한 답을 보여주었다. 지금 그가 의식을 잃고 있다 해서 그가 보여준 무인의 길을 잊어서는 안될 일이다." 본인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 덕양 진인의 어조는 격앙되어가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깊어지는 그의 수양을 고려하면 지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단 한 명이 무림을 구하는 일이 가능하다 여겨지느냐? 한 세력이 강호를 지배할 수 없는 것처럼 한 사람이 무림을 구한다고 말할 수도 없는 법이다. 하지만 그는 해냈다. 당시 그의 희생이 없었다면 오늘날 무림은 없었을 것이다." 덕양 진인은 단호한 결론을 내렸다. 당시 동호에서 살아남은 자라면 누구나 자신과 같은 결론을 내렸을 것임을 그는 확신했다. 당시 마교에서 멸세강마대법을 준비했듯 사파연합도 극강의 비책을 준비해왔다. 아수라천멸진(阿修羅天滅陣). 진법과 사술이 배합된 아수라천멸진이 사파연합이 내민 최후의 비책이었다. 극강의 사술을 익힌 고수와 그들보다 더 강한 무공을 익힌 자의 암경이 난무하는 데 서만 전개가 가능한 마진(魔陣)이 아수라천멸진이다. 진이 발동되면 남은 것은 전멸뿐이라 했다. 본래는 패종회의 무림독패를 저지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준비된 마진이었다. 한데 진의 발동과 동시에 문제가 드러났다. 진에 유입되는 암경이 너무나 컸다. 전개한 자들조차 범위 조절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진에 가해지는 힘이 커질수록 진이 영향을 끼치는 범위도 함께 커진다는 것을 몰랐던 사파연합니었다. 천사지황의 말에 의하면 당시 진이 제대로 효력을 발휘했다면 동호대전에서 생존할 수 있는 자는 전무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진을 발동한 자신들조차 전멸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그런 마진의 발동을 저지한 이가 있었으니, 그가 당시 백발마신이라는 별호로 불리던 선주혁이었다. 백발마신은 놀랍게도 마진의 본격적인 발동 직전, 진의 원동력이 되는 미증유의 거력 과 맞서 진을 멈춰 세웠다. 수많은 고수들이 발출한 암경은 물론, 발동의 직접적인 열 쇠가 되는 남지학과 패종회주의 격돌에 맞서 싸운 것이다. 진은 멈췄다. 그가 동호 주변에 있던 모든 무림인들을 구한 것이다. 당시 무림의 모든 힘이 동호변에 있었던 만큼 백발마신이 무림을 구했다는 말은 전혀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마진을 멈춰 세운 그는 삼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말도 허울 좋은 표현일 뿐. 실낱같은 호흡을 간신히 이어가고 있을 뿐이다. 아수라천멸진의 진정한 위력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존재 자체를 무로 돌린다지만 실 제로 얼마나 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갈 수 있는지는 진이 발동을 했어야 알 수 있 었을 것이다. 하지만 생존자들은 말한다. 마진이 제대로 기능을 했다면 자신들은 살아남을 수 없었 을 것이라고. 그들은 백발마신에게 쏟아지는 거대한 기운을 느꼈다. 그와 같은 힘이 백분의 일, 아 니 천분의 일이라도 자신에게 향했다면 결코 생존을 도모하지 못했음을 생존자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진을 파훼한 백발마신이 그와 같은 사실을 몰랐을 리 없었다. 그는 자신이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진의 파훼를 위해 온몸을 던졌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쓰러져 삼년을 보내고 자신들은 살아남았다. 생존자들이 백발마신을 천외무존이라 칭송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희생이 없었다면 오늘날 강호란 초라하기 짝이 없었을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 다. 숙연한 표정의 소년들을 뒤로하고 덕양 진인은 걸음을 옮겼다. '후......! 장문 사질을 봐야겠군.' 하산을 위함이었다. 그간 청성의 재건을 위해 동분서주해온 덕양 진인이었다. 언제든 숨을 거두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무존을 못본지 벌써 일년이 넘었다. 이제 청성이 재건의 기틀을 잡아가니 그를 보러갈 참이었다. 덕양 진인은 두 번이나 무존에게 목숨을 구함 받았으니 그것이 당연한 도리였다. Chap. 7 과거의 영웅 "이제 백마가 아홉 명 밖에 남지 않았다는군." 어깨가 떡 벌어진 거구의 장한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좌석 옆에 놓인 수막만 한 추는 그가 무림인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지독할 정도군." 가지런한 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문사차림의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백마란 과거 패종회에서 백존이라 칭해지던 자들을 말함이었다. "하긴,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 이제 패종회라는 이름은 강호에서 완전히 지워졌다 고 해도 과언이 아니잖아." 가죽으로 만들어진 안대로 좌측 눈을 가린 독두(禿頭)의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흥! 어린 녀석이 하늘 끝에 올랐으니 뭐라도 하고 싶은 거겠지." 어린 아이 팔뚝만한 철장을 의자에 비스듬히 걸친 털복숭이 사내가 코웃음을 쳤다. 이들은 하남사괴(河南四怪)라 불리는 자로 특정한 세력에 속하지 않고 네 명이서만 행동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스스로의 무공에 특별한 자부심을 가진 이들은 누구에게도 머릴 숙이는 것을 싫어했 다. 이들의 무공은 세인들의 인정을 받을 만큼 특출한 것이었지만 그보다 더 유명한 것은 제멋대로인 행동이었다. 강한 무공을 기반으로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든 해야 직정이 풀리는 자들이었다. 심 지어 그것이 악행이라 할지라도 이들에게 있어서는 망설임이 없었다. 거구의 장한은 하남대호(河南大虎) 가상(柯?)으로 천생의 신력을 바탕으로 한 외문 기공으로 호북무림에 명성이 높았다. 문사차림의 사내는 교수백선(巧手白扇) 초명발(草明發)로 수공과 선법의 달인이었다. 독안에 독두의 사내는 잔살사검(殘殺蛇劍) 토중수(吐仲首)로 기형의 검으로 펼치는 사형십팔검법(蛇形十八劍法)과 냉혹한 성정으로 유명했다. 마지막 털복숭이 사내는 혈염난장(血炎亂杖) 독불군(獨不君)으로 이 장에 달하는 철 장으로 주위의 모든 것을 부숴버리는 그의 혈염장법(血炎杖法)은 종종 소림의 장법에 비유되곤 할 정도였다. "목소리를 좀 낮추게. 아무리 그래도 북천검제라 불리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가?" 초명발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흥! 이곳 하남에서 나 독불군이 누구의 눈치를 봐야한단 말인가? 내가 틀린 말 했나?" 독불군이 콧방귀를 뀌었다. "흠, 흠. 눈치를 볼 것까지야 없지만...... 그래도 북천검제는 현 무림의 제일인이나 다 름없네. 마교의 교주를 비롯해, 무림맹의 신임맹주나 천사지황까지도 그에게는 한 수 접어준다지 않은가? 그러니 조심할 필요가 있다는 말일세." "그건 이 친구의 말이 맞네. 무림 전역에 천애백의단이네, 북천검제네 하며 추종하는 놈들이 태반인데.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지." 토중수가 침착한 어조로 초명발의 말을 지지하고 나섰다. "누가 감히 우리 하남사괴의 말씀을 여기저기 옮겨?" 가상이 안 그래도 험상궂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주변을 돌아봤다. 주루를 가득 채운 손님 중 무림인이건 아니건 감히 그의 시선을 받으려는 자는 없었 다. "거참! 마루기를 못 알아듣는군. 자네는 그 이야기도 못 들었나?" 초명발이 부채를 접어 다른 손으로 손바닥을 탁탁 쳤다. 답답한 심경 탓이다. "무슨 이야기?" "세상에 가장 어리석은 짓이 천애백의단, 아니 북천검제를 적으로 삼는 거라는 이야 기 말일세. 거 왜...... 냉염혈화(冷炎血花)라 불리는 그 여자가 한 말 있지 않은가?" 초명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천사지황의 손녀?" "그래!" 초명발이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부채를 탁 쳤다. "은설연! 그녀의 이름이지. 여하튼 그 여자가 지난 삼 년간 북천검제를 지켜보며 한 말이라네." "흥! 어차피 냉염혈화도 천애백의단의 일원이 아닌가? 자기들끼리 추켜세우는 말에 무슨 의미가 있다고......?" 독불군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자네 아까 가상, 이 친구가 한 말 못 들었나? 한 명, 한 명이 일문의 종사를 넘어선다 는 그 백마들이 이제 고작 아홉이 남았을 뿐이라는 이야기? 백마 중 그 행적이 북천검 제에게 알려진 후, 살아남은 자가 단 한 명도 없다네. 그러니 북천검제를 적으로 돌리 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리석은 행동이라는 이야기는 틀린 말이 아니라는 뜻이지." 초명발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사실상 패종지란 당시에는 하남사괴 역시 숨을 죽인 채, 살아야만 했다. 패종회에 투 항하지는 않았지만 감히 그들을 거스를 생각도 하지 못했다. 지금의 백마에는 끼지도 못했던 자들이라 해도 패종회의 무인들은 차원이 다른 무공을 구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 중 가장 강하다는 백마 중 오십여 명을 지난 삼 년간 모조리 주살한 북천 검제와 천애백의단의 무서움은 사실상 과장된 이야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한 잔의 술이 문제였다. 이성을 흐리는 술기운 탓에 그들이 추켜세우는 만큼 자신이 낮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 자리에서 그들을 인정하면 자신은 보잘 것 없어지는 것 같아 괜한 오기가 치밀었다. "그래봐야 사제인 무존의 후광에 호가호위하는 애송이일 뿐이잖아!" 툭, 하고 던진 한 마디였다. 딱히 생각 끝에 나온 발언이라기보다는 삐뚤어진 심사에 근거한 부지불식간의 말이었다. 하지만 그 발언이 마음에 들었다. 무엇인가 북천검제를 인정하지 않을 근거가 되는 듯 했다. 독불군의 말이 이어졌다. "그렇잖아? 사실 무림 각 세력의 주인들이 북천검제에게 한 수 접어주는 게 북천검제 가 두려워서는 아니지 않을까? 그들 스스로가 말하길 무존에게 큰 은혜를 입어 살아 남을 수 있었다고 했으니, 세인들의 눈을 의식해서라도 무존의 사형인 북천검제에게 예우를 해주고 있을 뿐이라고!" 스스로의 발언에 자신감을 얹은 독불군의 언성은 점점 높아졌다. 그가 말을 마칠 때 쯤이 되자 주루 내의 손님들 모두가 들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뭐...... 그 무존이라는 애송이도 그렇지. 매번 패종회 놈들에게 죽기 직전까지 몰리 면서도 큰 소리만 뻥뻥 친 게 다잖아! 혈기에 젖어 큰 소리만 쳐대는 거야 그 나이 때 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거 아냐? 운이 좋아 몇 번이나 살아남았을 뿐이지 대단할 건 없 다고." 한층 기세가 등등해진 독불군의 화살은 이제 선주혁에게까지 향했다. "허헐! 역시 세상사란 다 그렇군!" 난데없이 끼어든 걸걸한 목소리. 그것은 주루 입구에 서 있는 한 노인에게서였다. 봉두난발에 몇 번을 기웠을지 모를 넝마 같은 의복. 새끼줄에 호로병을 엮고 죽장을 짚은 노인의 모습은 영락없는 거지 그 자체였다. "패악회 놈들이 활개를 칠 때는 고개조차 못 들던 놈들이...... 뭇 영웅들이 목숨을 걸 고 악적들을 처단하니 제 세상인양 설치는 꼴이란...... 쯧쯧!" 거지 노인은 마치 누군가에게 들으라는 듯 언성을 높여 말했다. 그 대상이 누군지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독불군의 짙은 눈썹이 하늘을 향해 치켜 올라갔다. 그의 옆에서 초명발이 귀엣말을 했다. "독설개(毒舌?) 편달(扁達)이야. 개방의 늙다리지!" 풍문에 밝은 초명발은 한 눈에 주루의 입구에선 늙은 거지의 정체를 파악한 것이다. 독설개 편달은 개방의 하남성 분타를 이끄는 분타주였다. 개방의 분타주라는 지위가 가벼운 것은 아니었으나, 편달의 무공은 그다지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그는 무공보다 는 대나무처럼 곧은 성품과 두려움 없이 내뱉는 직언으로 더 유명했다. 그럼에도 초명발이 독불군에게 주의를 주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무공이 낮다고 해도 개방의 인물들을 상대한다는 것은 골치 아픈 일이다. 십만을 헤아리는 거지들의 방파 다. 개방에 한 번 밉보이면 중원 어디에 있건 피곤해진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초명발의 주의를 받아들이기에는 편달의 모욕이 지나쳤다. 하남에서 고개를 숙일 일이 없다고 자부하고 살아온 독불군의 입장에서는 더욱 그랬다. "늙어 비틀어진 거지가 주둥아리 단속을 못하는군!" 독불군이 의자에 걸쳐 둔 철장을 집어 들며 살기를 내뿜었다. "이 노화자는 입이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하고 살지. 패악회 놈들이 사라진지 고작 삼 년밖에 안 지났건만 벌써부터 자라새끼들이 당시의 영웅들을 깎아내리는 꼴은 못보고 산다...... 이 말씀이야!" 한 순간 자라새끼가 되어버린 독불군의 두 눈에 핏발이 섰다. "묏자리 알아볼 시간도 부족할 판에 독 어르신 앞에서 망령 난 주둥이를 나불댔으니 후회는 없겠다?" "원래 거지야 묏자리 볼 턱이 없는 거고, 누구 덕에 못난 대가리를 어깨 위에 얹고 사 는지 모르는 놈에게 한 소리할 정도의 시간은 차고도 넘친다네." 편달의 입담에는 거침이 없었다. "패종회가 활개를 칠 때, 숨죽이고 있던 건 정파의 기둥이라던 너희 구파일방 놈들도 마찬가지였지. 아니 이제 팔파일방이라고 해야 하나? 여하튼 모든 일이 끝난 지금에 야 눈치를 보며 무존이네, 검제네 하고 입에 침 튀겨가며 칭송한다고 당시의 비겂함이 사라질 것 같더냐?" 독불군의 신랄한 비판에 편달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지금에 있어서 천외무존, 북천검제라 불리는 선주혁과 남지학을 공적으로 지목하여 추살하려던 곳이 바로 무림맹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거는 과거다. 현재의 무림맹은 천외무존과 북천검제를 대함에 있어 다시없을 예우를 다하고 있다.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있는 무존이 무림맹에 거하고 있음은 온 강호가 다 아는 사실이 다. 패종회의 장악을 당했던 무림맹과 구파일방에게 있어서 두 사람의 은혜는 형언의 한계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그런 과거가 있으니 그분들의 은혜를 더욱 잊지 않으려함이 아니겠느냐?" 편달은 한 치의 물러섬 없이 독불군의 말을 받아치는 중이었다. 사실 독불군 한 사람 이라면 몰라도 하남사괴 전원을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럼에도 편달은 양보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 비단 개방의 분타주라는 신분 때문도 독설로 유명한 자신의 이름 때문도 아니었다. 천외무존은 말했다. 남자라면 가슴을 펴고 당당히 살아야한다고. 그것이 말 뿐이었다면 아무런 감흥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천하에서 가장 강한 세력을 적으로 두고 스스로 죽음을 향해 걸어가며 한 말 이니 무인으로서 어찌 그 말을 쫓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무림공적으로 치부받던 당시였음에도 정도 무림인들까지 가슴을 들끓게 했던 천외무 존의 말이었다. 지금에 있어서 그 말은 무공을 익힌 자라면 가슴 깊은 곳에 담아둔 삶의 기준이 되었 다. 편달 역시 마찬가지였다. 방의 은인을 모욕하는 말을 듣고도 물러서며 스스로 가슴을 펴고 당당히 살 수 없음을 아는 것이다. 최후의 순간까지 스스로를 희생해 수많은 무 림인사들을 살려낸 천외무존을 기억하니 더욱 그랬다. "그럼 숭배해마지 않는 그놈들의 은혜를 가슴에 안고 죽어라, 늙은이!" 독불군이 땅을 박찼다. 그의 철장이 커다란 호선을 그리며 편달을 향해 내리쳐졌다. 편달은 신중한 표정으로 보법을 밟으며 대나무로 만들어진 타구봉(打狗棒)을 휘둘렀 다. 중병인 철장을 맞아 크게 휘어지는 타구봉. 이미 몸의 중심을 철장의 타격선상에서 비켜 세운 편달은 자연스럽게 타구봉을 거둬 들이며 좌정을 내뻗어 역습을 도모했다. 독불군 역시 거저 이름을 날려 온 것은 아니었다. 무거운 철장을 가볍게 회수하며 강맹한 일 장을 뻗는 편달의 발꿈치를 향해 휘둘렀다. 이대로 독불군의 가슴을 가격한다면 철장의 위력에 발꿈치가 박살날 상황. 편달은 재빨리 좌장을 회수하며 우수에 들린 타구봉을 수평으로 찔렀다. 낭창낭창 흔들리는 타구봉은 독불구느이 요혈 여러 군데를 노리는 듯해 일시에 공격 의 방위를 짐작키 힘들게 했다. 개방이 자랑하는 천화봉법(賤化棒法)이 펼쳐진 것이다. 독불군은 상대의 보잘것없는 대나무 지팡이가 생각보다 위험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신형을 뒤로 뽑으며 철장을 회전하여 문호를 방어하려 했다. 하지만 편달의 실력도 녹록치만은 않았다. 거리를 벌리지 않고 독불군에게 달라붙은 채, 계속해 요혈을 노린 것이다. 독불군이 꼼짝없이 당할 상황. 하지만 편달의 타구봉은 독불군의 요혈을 가격치 못했다. 흉험한 기세를 담아 옆구리를 파고도는 추 때문이었다. 편달은 마치 균형을 잃은 듯 비틀거리더니 교묘한 차이로 옆구리를 공격해온 추의 맹 공을 피해냈다. 개방의 구명절초로 유명한 취팔선보(醉八仙步)의 한 수였다. 편달은 그저 추를 피한 것만이 아니었다. 넘어질 것만 같던 그의 신형이 노인답지 않 은 유연성과 함께 튕기듯 바로 서며 곧바로 좌수를 내질러 다시금 독불군을 공격해 들 어갔다. 쇄옥수(碎玉手)라는 개방의 절기로 적중당하면 피륙으로 만들어진 육신은 견뎌내지 못하는 강맹한 위력을 담고 있었다. 개방의 인물들이 무공을 내세우지 못한다는 소문을 익히 알고 있던 독불군으로서는 대경하지 않을 수 없는 공격이었다. 비틀거리는 편달을 보며 잠시 마음을 놓았던 그는 불의의 일격에 놀라 철장을 내밀어 간신히 방어하는 것이 다였다. 카앙. 맨 손과 철장이 부딪쳤는데 놀랍게도 요란한 금속성이 울리며 불꽃이 튀었다. 철장의 중심에서부터 느껴져 오는 진동에 독불군은 다시 한번 크게 놀라야만 했다. '늙은이의 공력이 만만치 않구나! 썩어도 준치라더니...... 구파일방의 일원이라 이건 가?' 패종지란으로 그 위상이 크게 낮아진 구파일방과 무림맹이었다. 무림인들 사이에서는 은연중에 그들이 가진 힘을 격하하는 의식이 생겼고 독불군도 그 중 하나였다. 그 러나 한 분타를 책임지는 위치에 있는 편달의 무공은 그렇게 만만치만은 않았던 것이 다. 독불군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확인한 토중수가 싸움에 가담했다. 이대로 내버려뒀 다간 하남사괴가 하남삼괴로 줄어들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구불구불한 토중수의 기형검이ㅐ 묘한 각도로 뻗어지며 편달의 단전부분을 파고들었 다. 편달은 예의 비틀거리는 듯한 보법을 전개해 가볍게 토중수의 사검을 흘렸다. 하지만 상황은 편달에게도 좋지 못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여태껏 지켜보던 초명발 마저 끼어든 것이다. 초명발이 부채를 넓게 펼쳐 편달의 얼굴 앞에서 흔들었다. 편달의 시야확보를 방해하 려는 것이다. 그 사이, 가상이 정면으로 추를 내밀고, 토중수의 사검이 편달의 다리를 노렸다.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독불군 역시 크게 철장을 휘둘러 편달의 옆구리를 쓸어갔다. 편달로서는 절체절명의 순간이 다가왔다. 하나하나라면 몰라도 하남사괴 전원을 단신으로 상대하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편달은 포기하지 않았다. 채찍처럼 부드러운 곡선을 그려내며 우수를 뻗었 다. 여태껏 그가 보여준 그 어떤 동작에서도 보이지 않던 강맹함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일 장은 독불군을 향했다. 방어를 도외시 하고 내뻗은 일 장은 개방의 비기 중 비기인 강룡십팔장(降龍十八掌) 중 항룡유회(亢龍有悔)의 일초였다. 본래 강룡십팔장은 방주에게만 전수되는 무공. 하지만 방에 공을 세운 자에게는 방주로부터 한 초식에 한해 사사(師事)를 받을 수 있 었다. 그리고 그 한 초식은 지금처럼 생명이 위급한 상황이 아니면 절대로 사용할 수 없다는 제약이 붙는다. 편달에게 있어서는 지금이야말로 그 때가 아닐 수 없었다. 정도 무림의 일절로 손꼽히는 강룡십팔장의 장력이 독불군의 가슴을 가격하는 순간, 그 역시 목숨을 잃을 것이 분명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크아아악!" "아아아악!" 동시에 울리는 다수의 비명성. 자신이 발출할 수 있는 최대의 장력을 쏟아낸 편달은 순간적으로 두 눈을 휘둥그레 떠야했다. 방의 은인을 모독한 자와의 동귀어진을 노렸던 한수였다. 한데 비명성만이 들릴 뿐, 자신의 몸에서는 일체의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곧 볼 수 있었다. 자신을 공격해오던 네 사람이 저마다 오른쪽 어깨를 부여잡고 고통에 겨워하는 모습 을...... 네 명 모두가 어깨 아래의 팔이 사라진 상태였다. '누가......?' 살아남았다는 안도감보다 대체 누가 있어 하남사괴의 어깨 아래를 잘라냈는지가 더 궁금한 편달이었다. 이들이 비명을 지른 것은 거의 완벽한 동시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 정도로 빠른 초식을 구사할 수 있는 자에 대한 의문이 생존을 실감하는 것보다 앞 섰던 것이다. 편달은 어렵지 않게 대도를 어깨에 걸쳐든 사내를 볼 수 있었다. 살짝 치켜든 턱에 하 남사괴를 눈 아래로 보는 모습이 오연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남자. 강호에서 가장 많은 정보를 취급한다는 개방의 분타주인 편달이 그를 모를 리 없었다. "주 대협?" 자신을 한 눈에 알아보는 늙은 거지를 향해 남자가 말했다. "개방의 절초를 구경하느라 조금 늦게 나섰소이다. 다친 데는 없소?" 연배를 따지자면 한참이나 아래인 남자의 어조는 무례할 정도로 거만했다. 하지만 편달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생명의 은인이었으며, 사내의 그와 같은 성격은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주 대협께 구명지은을 입었소이다." "뭐......" 주 대협이라 불리는 남자는 살짝 고개를 비틀어 신음하는 하남사괴를 보며 말했다. "개새끼들 팔 하나씩을 자른 걸 가지고!"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말하는 남자의 말뜻을 편달은 잘 알고 있었다. 과거 천외무존이 말했다. 자신의 친우에게는 두 종류의 사람밖에 없다고. 친구 아니면 개새끼. 그것이 천외무존의 단 하나뿐인 친우, 주백광의 신조였다. 방금 전 천외무존과 그의 사형을 모욕한 하남사괴는 주백광에게 있어 개새끼일 수밖 에 없었던 것이다. "너희......! 나 알아?" 방금 전 스스로 한 말과 태도, 그리고 전광석화를 무색케 하는 쾌도술을 보고 눈앞의 사내가 누군지 짐작치 못할 하남사괴가 아니었다. 지독한 통증 속에서도 초명발이 황급히 대답했다. "쾌도무적(快刀無敵) 주백광, 주 대협 아니십니까?" 패종지란 당시 천애백의단에서 활약한 공은 주백광의 별호를 바꿨다. 무림을 패종회 의 손에서 구해내는데 큰 공을 세운 그를 도귀라 부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흥! 아는군." 주백광이 코웃음을 친 뒤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개새끼 한 마리를 죽이는데 망설임이 없다는 사실도 알겠군." 쾌도무적 주백광과 천외무존 선주혁이 둘도 없는 친우라는 것은 세 살배기 어린아이 도 아는 사실. 상황이 최악으로 돌아가고 있음을 깨달은 초명발은 절박하기 이를 데 없는 표정으로 애원했다. "저희가 죽을 죄를 졌습니다. 주 대협께서는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한 팔을 잘려 평생 불구로 살아야하는 원한 따위를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상대는 패종지란 이전부터 무림에서 적수를 찾기 힘들던 고수 중의 고수였다. 게다가 친우인 선주혁과 그의 사형인 남지학의 무공에 자극을 받아 더욱 강해졌다고 하지 않 던가. 작금에 있어서는 홀로 백마를 추살하며 다닐 정도로 절대고수가 된 그였다. 다시 말해 하남사괴라는 이름은 쾌도무적이라는 별호 앞에서는 보름달 아래의 반딧 불보다 못함을 초명발은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그저 목숨을 보전하는 것에 만 온 신경을 쏟아야만 했다. "내게 개새끼한테 베풀 자비는 없다." 주백광의 차가운 음성에 초명발을 비롯한 하남사괴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가 살심 을 품는다면 그 즉시 세상을 하직하게 될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방금 전 네 명의 오른팔이 동시에 잘려나가는 동안에도 그가 대체 무슨 수법을 쓴 건지조차 파악하지 못했던 그들이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짓는 하남사괴에게 주백광이 말했다. "하지만 무존의 명예를 위해 개새끼들을 죽이는 것 자체가 우습지." 주백광의 말에 하남사괴는 자신들의 한쪽 팔이 잘려나갔다는 사실을 잊고 포권을 취 하려 했다. 한 팔이 없는 것을 깨달은 그들은 한쪽 손만을 눈높이로 들어 올린 채 허리 를 연신 숙였다. "그렇습니다. 저희 같은 개새끼들을 죽이시면 외려 무존께 폐가 될 것입니다." "흥! 북천검제가 사제의 희생을 발판으로 호가호위하고 있다고?" 막 살아날 수 있는 희망을 던져주던 주백광이 다시금 북천검제의 이야기를 꺼내들고 나오자 하남사괴의 표정이 금새 또 창백해졌다. 특히 독불군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이었다. "그, 그게......" 뭐라도 한 마디를 하지 않으면 제일 먼저 죽는 것은 자신이 될 것만 같았다. 하나 통 증에, 공포에 얼어버린 혀가 제대로 움직일 리 없었다. "개새끼들 눈에 내 무공은 어떻게 보이나? 천외무존을 친구로 둬서 거들먹거리는 걸 로 보이나?" "처, 천만의 말씀입니다. 주 대협의 무공은...... 저희 따위는 감히 거론할 자격도 없습 니다요." 겉보기에는 제일 유약해 보였지만 삶에 대한 의욕만은 누구보다 강한지 계속해 대답 은 초명발의 몫이었다. 그의 말에 주백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희 같은 개새끼들은 감히 내 무공에 대해 거론할 자격도 없다." 한 마디, 한 마디가 극심한 모독이었으나 하남사괴 모두는 고개를 끄덕였다. 팔이 잘려나간 후, 피가 쏟아지는 걸 보고야 통증을 느낄 정도의 쾌검을 구사하는 주 백광이었다. 목이 땅에 떨어져 자신의 몸통을 두 눈으로 보는 상황이 되고 싶지는 않 았던 것이다. "너희에게는 그런 나조차 북천검제의 일 초도 받아내지 못한다." "......!" 초명발의 눈이 모로 떠진다. 그러게 입을 조심하라고 했던 게 아니냐는 질책이 독불 군을 향하는 것이다. "죽을 죄를 졌습니다. 저희가 주제를 몰라서......" 자비를 구하는 초명발의 말은 주백광의 무뚝뚝한 목소리에 잘렸다. "너희 개새끼들은 죽을 죄를 진 게 맞아. 하지만 천외무존과 북천검제의 자비로 살아 난 줄 알아라." 또다시 희망을 찾은 하남사괴는 반복해 머리를 조아렸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대신!" 주백광의 말에 하남사괴는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었다. "계속해 짖어라. 천외무존과 북천검제가 얼마나 자비로운 사람인지. 그들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평생을 쉬지 않고 두 분을 칭송하겠습니다요." "당연한 일입니다요." 살아났다는 기쁨 때문인지 초명발 외에는 입조차 못열던 나머지 세 사람이 왁자지껄 떠들기 시작했다. "내 앞에서 짖을 필요는 없다. 시끄러우니까." 명백한 축객령. 하남사괴는 떨어진 자신의 팔을 주울 생각도 못하고 허겁지겁 주루를 벗어났다. 주백광은 조금의 미련도 두지 않고 그들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주 대협,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편달이 두 손을 맞잡으며 감사를 표했다. 배분으로 따지면 과례라 할 수 있었으나, 주 백광에게 배분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내 친구를 향해 짖어댄 개새끼들에게 교훈을 주려했으니 내가 외려 감사하오." 얼핏 편달이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겸양하는 듯한 내용이었으나 어조와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주백광은 실제로 편달을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개새끼들을 혼내려는 의도가 전부였 기 때문이다. 다만 편달이 먼저 나섰고 개방의 무공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을 뿐이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알 리 없는 편달은 주백광이 생각보다 겸손한 사람이라 여겼다. 그 때문일까? 조금은 마음이 편해진 편달이 주백광에게 물었다. "무존께서는 좀 어떠신지요?" 편달의 질문에 주백광의 안색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아직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소." "그, 그렇군요. 저희 거지들 모두가 무존의 쾌유를 빌고 있습니다." 편달의 말에 주백광은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그럴 것이오. 그 친구와 나는 아직까지 취할 때까지 술을 마셔보지 못했으니 ......!" 확신에 찬 주백광의 말에 이번에는 편달이 고개를 끄덕였다. Chap. 8 소망, 그리고 희망 <1> 다듬지 않은 수염, 먼지를 가득 뒤집어 쓴 피풍의와 닳아 빠져 남루하기만 한 차림새 ...... 그럼에도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사내의 외양은 사람의 넋을 빼놓을 정도로 출 중했다. 이 사내에게는 옷이 날개라는 말조차 예외인 듯 허름해 보이는 의복이 외려 사내다운 면모를 강조하고 잇어 더욱 사내를 빛나게 했다. 이는 그의 옆에 서 있는 여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내와 마찬가지로 닳아빠진 의복 을 걸쳐 입었음에도 그녀의 용모는 눈이 부셨다. 천상의 선녀가 하강한 게 분명할 거 라는 확신을 줄 정도인 그녀에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전신을 감싸고도는 싸늘한 냉기 일 뿐이었다. 사내와 여인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주위의 사람들은 자리를 비켜서며 감히 고개조차 들지 못하는 중이었다. 극상에 해당하는 예우를 받는 이곳이 정도 무림의 양대 구심점 중의 하나인 무림맹 본단인 것을 생각하면 그와 그녀의 지위와 신분이 범상치 않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 다. 출중한 외모만으로는 무림맹에서 저와 같은 대우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오셨군요." 두 사람의 앞에 선 여인. 완연한 성숙미와 요염함이 전신을 휘도는 그녀는 본의와 무관한 매혹적인 미소로 두 사람을 맞이했다. 이곳이 무림맹 본단이 아니었다면 천하에 염명을 날리는 기녀라 여 겼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녀가 누군지는 교태가 배어 있는 손에 들려있는 옥소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패종지란 당시 여인의 몸에도 불구하고 강호무인의 기개를 일깨워진 여걸 중의 여걸. 옥소선자 몽세화가 바로 그녀였다. "사제는 어떻습니까?" 준미한 사내가 굳건히 다물려 있던 입술을 움직였다. 그는 패종회의 잔당을 처치하고 돌아온 북천검제 남지학이었다. 패종지란 이후, 곤륜 파에서는 그와 선주혁의 파문을 취소했다. 곤륜의 장문인까지 나서서 남지학의 복귀 를 청했다. 하지만 남지학은 그럴 수 없었다. 사제가 이 지경이 된 것에는 분명 사문의 책임도 있 었기 때문이다. 그는 사제에 대한 복수가 끝나지 않았음을 명분으로 내세워 사문의 제 안을 고사했다. 무림의 각 세력 쪽에서 보자면 남지학의 결정은 쌍수를 들어 환영할 일이었다. 선주혁이 의식불명인 상태인 지금 패종회주를 죽인 남지학은 당금의 천하제일인이라 기에 손색이 없었다. 그런 그를 자파로 끌어들일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공을 들인 사파연합의 입장에서는 더욱 그랬다. 사파연합에서는 그가 곤륜 산에서 내려왔음을 고려해 북천검제라는 별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근원을 알리되 이미 곤륜과 구분됨을 별호에서부터 강조한 것이다. 패종회의 잔당이 소탕되는 그 순간. 무림의 구도는 남지학으로 인해 재구성될 것이기에...... "아직은......" 수심이 가득한 몽세화의 목소리. 남지학은 고개를 살짝 끄덕인 후, 다시 큰 보폭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무림맹 에서 마련한 사제의 거처 쪽으로였다. 그의 옆에 서 있던 은설연이 몽세화에게 가볍게 예를 취하고선 남지학의 뒤를 쫓았다. 두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던 몽세화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아직까지도 그에겐 오직 사제뿐이군. 은 소저가 힘들겠어......" 한숨 섞인 몽세화의 말에는 은설연을 향한 연민이 묻어나왔다. "후...... 그녀만 힘든 건 아니지만." <2> "잠시 휴식을 취하고 선 소협을 보는 게 낫지 않겠어요?" 몇 개의 문을 지나 선주혁의 거처를 향하는 남지학에게 은설연이 말했다. 남지학은 아무런 대답 없이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지난 열흘 간 단 한 숨도 자지 않았잖아요. 추살에 성공했으니 조금쯤 눈을 붙인다고 해서 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은설연의 어조가 공격적으로 바뀌었다. "휴식은 사제를 보고 난 뒤에 취하겠소." 무뚝뚝한 남지학의 음성에 은설연은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당신은 지난 삼 년간 한 시도 수지 않고 복수에만 매달려왔어요. 아무리 무공이 대단 하다 하더라도 그렇게 몸을 혹시시켜서는 견딜 수 없다는 거 몰라요?" "한 시도 쉬지 않은 건......!" 남지학이 걸음을 멈춰 세웠다. "사제도 마찬가지요. 지난 삼 년간 그 역시 한 시도 쉬지 않고 죽음과 맞서 싸우고 있 소. 그에 비하면 나의 복수행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요." 남지학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런 남지학의 뒷모습을 보며 은설연은 잠시 침묵했다. 말이야 틀리진 않았다. 이미 죽었어야 하는 선주혁이다. 억지로 생명을 잇고 있을 뿐, 사실상 죽어 있다고 해도 과 언이 아닌 그의 몸이었다. 그러니 지난 삼 년을 죽음과 싸우고 있음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은설연이 외치듯 말했다. 남지학이 제자리에 섰다. 살짝 고개를 옆으로 돌리는 남지학. 뒤쪽 은설연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잠시 머뭇거리던 은설연. 그녀는 곧 주먹을 말아 쥐며 단호히 말했다. "선 소협의 그 사투(死鬪)는......, 당신이 시키는 거잖아요!" 남지학이 뒤쪽으로 몸을 돌린다.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게요?" 못알아들었을 리가 없는 남지학이었다. 은설연이 아는 한 그는 다시없는 천재였다. 그럼에도 반문을 해온다. 스스로 부정하 고자 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랬다. 그렇기 때문에 더 말해줘야 한다고, 지금이라도 남지학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은설연 은 재차 다짐했다. "지금 선 소협의 싸움......, 그건 당신의 고집이 만들어낸 결과일 뿐이에요. 저렇게 해 서 호흡을 잇는 것이 선 소협이 바라는 것인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봤나요?" 남지학의 미간에 골 깊은 주름이 생겼다. "당신은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 사제가 원치도 않는데 억지로 저 상태를 만든 것이라 말하는 게요?" "선 소협이 원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누구도 알 수 없지요. 하지만 저 상태의 선 소 협을 과연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무려 삼 년간이에요. 내기는 물론 진원지기 까지 흩어진 그가 천음지력을 빌어 간신히 살아가고 있어요. 수없이 죽음을 향해 달려 갔던 그가 저와 같이 비참한 상태에서 연명을 하는 걸 바랐을까요?" 종국에는 외치듯 말하는 은설연이었다.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당시 남지학의 손에 패종회주가 죽고, 멸세강마대법으로 완 성된 강시는 공손상량과 단무수를 죽였다. 뿐만 아니라 강시는 자신을 공격해온 대다 수의 백존을 죽이거나 중상에 이르게 했다. 이어진 거대한 폭발. 그 대부분의 힘을 선주혁이 감당했지만 여력 또한 만만치 않았다. 강시에게 중상을 입었던 백존들은 미증유의 거력을 견뎌내지 못했다. 강호제패를 목전에 두었던 패종 회가 단 한 순간에 몰락해 버린 것이다. 대다수는 시신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남은 자들은 도주하기에 바빴다. 이미 패색이 확연해진 이상 활로를 찾아야했기 때문 이다. 단 한 명. 얼굴을 면사로 가린 여인만은 그 자리에 남았다. 그녀는 다시없이 슬픈 두 눈으로 선주혁을 보고 있었다. 남지학은 그녀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천음마후. 패종회가 믿고 있는 천음지력의 근원이 되는 여인이었다. 패종회와 맞서던 자들은 서슴없이 그녀를 죽이려 했다. 하지만 남지학이 막아섰다. 이 자리에 오기 전, 사제가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만큼은 보호해야 한다고.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남지학에게 했던 선주혁의 부탁은 오늘날까지 그가 숨을 쉴 수 있게 만들었다. 극한 의 거력을 흡수하고자 했던 선주혁의 체내는 엉망이 되었다. 한 줌의 내공도 남지 않은 것은 물론 진원지기까지 흩어졌다. 말 그래도 텅 비어버린 몸이 되었다. 타인이 진원지기를 불어넣어주지 않는 이상, 살아갈 수 없게 된 것이다. 허나 그것도 한계가 있다. 인간이 가진 진원지기란 제한된 양 뿐. 더구나 진원지기의 소모란 생명력의 손실과 다름없었다. 진원지기를 소진하면 주입 하는 당사자도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남지학도 주백광도 저마다 자신의 진원지기를 주입시키겠다고 나섰다. 조 금이라도 선주혁이 숨을 쉴 수 있는 시간을 연장시키기 위해서였다. 한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선주혁이 무의식중에도 순음의 기운을 받아들여 체내의 기력을 보충하고 있었기 때 문이다. 그 장소에서 순음의 기운을 발산하는 이는 한 명뿐이었다. 패종회가 여신처럼 모시던 그녀. 천음마후 선우유미였다. 놀랍게도 선주혁은 구음대법을 익힌 적이 없음에도 천음지력을 흡수할 수 있었던 것 이다. 무한에 가까운 천음지력을 발산할 수 있는 천음마후였다. 그녀가 곁에 있는 한 선주 혁은 적어도 호흡을 이어갈 수는 있었다. 텅 비어버린 선주혁의 체내를 그녀의 천음지 력이 끊임없이 채우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것은 선우유미 본인에게 있어서도 천만다행인 일이었다. 아무리 패종회를 처리하 는데 있어 선주혁과 남지혁 사형제간의 공로가 크다 해도 선우유미를 죽이고자 하는 주장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자신들을 대신해 스스로를 희생한 선주혁의 생명을 잇기 위해 그녀가 반드시 필요한 상황에 처하자 그 누구도 선우유미의 목숨을 요구하지 못했다. 선주혁이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 함께하는 조건으로 선우유미를 살려두는 것에 모 두 동의한 것이다. "사제는 선우 소저를 반드시 살려야 한다고 했소." "그건 사적인 감정 때문임을 알고 있잖아요? 당신은 설마하니 선 소협이 지금과 같은 사태를 미리 알고서 선우 소저를 필요로 했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선우유미가 선주혁의 병수발을 드는 동안, 은설연은 그녀와 적지 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개중에는 선주혁과의 관계에 관한 내용도 있었다. 따라서 그녀는 선주혁이 선우유미를 살리려한 건 그녀에게 연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 이라 확신했다. 아무리 선주혁이 대단하다고 해도 저와 같은 상태를 예견하고 자신의 내기를 끊임없이 채우기 위해 천음마후의 안전을 요구했을 리는 없다고 여긴 것이다. "사제가 무슨 목적으로 그런 부탁을 했는지는 중요치 않소." "......?" "당시 사제가 죽었다 해도 나는 선우 소저를 보호했을 것이오. 설령 그것이 내 목숨을 걸어야했던 일이라 할지라도......!" 은설연은 당최 남지학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남지학이라면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사제의 유언과도 같이 되어버린 부탁을 그가 저버렸을 리가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 그가 꺼내는 말이 앞서 자신과 대화한 내용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대화의 요지를 파악치 못하고 뜬금없는 소리를 할 남지학이 아니었다. 그녀는 조금의 인내심을 발휘해 남지학의 뒷말을 기다렸다. "사제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오. 지금 아무리 힘들지라도 이 우형의 간절한 소망임을 안다면...... 그는 멈추지 않아 줄 것이오." "......!" 그제야 은설연은 남지학이 말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남지학은 현실을 외면한 채,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소망하고 있었다. 사제가 이번에도 기적을 만들어 주길...... 그리고 설령 그것이 사제에게 커다란 고난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사제는 자신을 이해 해 줄 것이라 믿는 것이다. 무모할 정도의 신뢰. 그것이 피보다 더 진한 우애를 나누고 있는 이 사형제간에 오가는 것이다. 은설연은 더 이상 남지학을 질책하지 못했다. 무림에서는 누구보다 오랜 시간동안 두 사람을 봐온 그녀였다. 사형의 바람이라면 선 주혁은 삼 년이 아니라 삼십 년이라 해도 버티고 또 버틸 것이다. 사형이 바란다면 염 라대왕과도 일전을 벌이고 다시 돌아오려 들 선주혁임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 다. 은설연이 입을 다물자 남지학은 다시 사제의 거처로 향하기 시작했다. 은설연은 곧바로 그의 뒤를 따르지 못했다. 그녀는 깨달았다. 패종회의 잔당을 모조리 죽인 후라도 그는 쉬지 않을 것이다. 지난 삼 년간 가혹할 정도로 스스로를 몰아붙인 그 이상으로 지낼 것이 분명했다. 자신의 바람으로 쉬지 않고 죽음과 싸우는 사제를 두고 그는 쉴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당신으로 인해 힘들어 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왜 모르나요?' 은설연은 흐려진 눈망울로 남지학의 등 뒤를 바라보다 고개를 숙였다. 잠시 후, 고개를 바로 세우는 그녀. 슬픔에 가득 찼던 모습은 간데없었다. 은설연은 다시 냉염혈화로 돌아와 선주혁의 거처로 향했다. <3> 미닫이문이 조용히 열렸다. 초췌한 모습으로 침상에 누워 있는 선주혁과 그 옆에 면사로 얼굴을 가린 여인이 보 였다. 남지학은 여인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선우유미 역시 의자에서 일어나 예를 갖췄다. "수고가 많으십니다." 남지학은 진심을 담아 감사를 표했다. 방을 개조해 측간과 욕실을 옆에 지어두면서까 지 사제에게 천음지력을 제공해온 그녀였다. 사제가 지금껏 숨을 이어온 것은 전적으로 그녀의 공이랄 수 있었다. 더구나 그녀는 단순히 천음지력만을 제공해 주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뛰어난 의술을 지닌 그녀는 사제를 위한 처방을 내리고 온 정성을 다해 보살피기까지 했다. 지난 삼 년간 시녀조차 마다하고 직접 사제의 병수발을 들어왔다. 이에 남지학은 그녀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선우유미는 영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남지학은 씁쓸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어디에 다녀왔을지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패종회가 무림에 있어서는 공적이지만 그녀에게는 다른 의미. 한곳에 속해 살아오던 이들을 죽이고 돌아온 자에게 염려를 베푸는 것이니 남지학의 마음이 마냥 편할 수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자신은 선우유미의 부친을 죽인 입장이다. 대의를 위함이었다지만 개인적으 로 그녀를 보는 것은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선우유미는 단 한 번도 그 일을 거론치 않음은 물론 원망을 담은 눈길조차 보 낸 적이 없었다. 마치 아무 것도 모르는 것처럼 그렇게 행동해왔다. 사제가 왜 이 여인의 목숨을 반드시 살려야 한다고 했는지 다른 의미에서도 조금은 이해가 되는 남지학이었다. "그는 좀 어떻습니까?" 남지학이 침상으로 눈을 돌리며 물었다. 옳은 일을 행했고, 지금도 하고 있다는 신념 은 변함없지만 어쩐지 선우유미에게 죄책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난 사흘간 급격히 회복되고 있습니다." "회복?" 남지학의 안색이 환해졌다. "네. 예전에 그를 치유했을 때처럼 경이적인 회복력을 보이고 있습니다. 장기가 복원 되고 근육이 되살아나고 있으니 정말 다행입니다." 선우유미의 말에 남지학은 크게 동요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금강불괴지신을 가진 사 제는 겉모습만을 제외한 모든 부분이 엉망이었다. 사제의 기적적인 회복력을 알고 있 기에 한 가닥 기대를 버리지 않아온 남지학이었다. 하지만 부상의 정도가 너무 심한 탓인지 지난 삼 년간 선주혁의 신체는 회복될 기미 가 보이지 않았다. 중상인 채로 그저 호흡만을 이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한데 지금에 와서 급격히 회복하고 있다니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그가...... 의식을 회복할 수 있는 겁니까?"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만...... 조만간 신체의 모든 기능이 거의 정상화 될 거 같습니 다." 선우유미가 말을 마쳤을 때, 은설연이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녀는 보았다. 남지학의 입가에 환하게 피어오른 웃음을...... 삼 년 이래 처음으로 미소를 짓는 남지학이었다. '당신은 사제를 위해서만 웃는군요.' 은설연의 안타까운 심정을 전혀 짐작치 못하는 듯 남지학은 침상으로 다가갔다. 이어 선주혁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몸이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은 의식도 돌아올 수 있다는 겁니다. 아니 사제는 반드시 정신을 차릴 것입니다!" "하지만......" 선우유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남지학은 고개를 돌려 선우유미를 쳐다봤다. "혈맥이 이어졌음에도 그의 몸에는 내기가 쌓이지 않고 있습니다. 의식을 되찾는다 해도......"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못 알아들을 리 없는 남지학이었다. "무공을 되찾을 수는 없겠군요." 남지학이 자신의 말을 받자, 선우유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단 한 줌의 내기조차 몸에 담아 둘 수 없으니 무공을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남지학의 얼굴에 살짝 그림자가 드리워졌다가 금새 걷혔다. "그가 회복되고 의식을 찾는 것만이 중요할 뿐입니다. 무공은 차후 문제죠." 남지학의 말에 선우유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에게 있어서도 선주혁의 무공 따위 는 중요치 않았다. 선주혁이 의식을 되찾아 삶을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선 소협이 회복된 후에도 선우 소저가 곁에 있어야만 한다는 건가요?" 은설연의 질문이었다. "현재로선 그럴 것 같아요. 육체의 대부분은 회복이 되고 있는데, 유독 기를 저장하는 기능만은 깨져버린 사기그릇처럼 돌아오질 않고 있어요." "그가 감당해야만 했던 힘은 수백 명의 무림인들조차 버틸 수 없었을 광폭한 것이었 으니까요." 은설연은 납득한다는 듯 말했다. 사실 선주혁이 아직까지 숨을 쉬고 있고, 더구나 회복을 하고 있다는 것이 더 큰 기적 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어찌되었건 그가 다시 눈을 뜨고 일어선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남지학의 확고한 말에 선우유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없으면 선주혁이 단 한시도 버티지 못하게 된 상황이다. 그녀로서는 큰 부담 이 아닐 수 없지만, 그녀는 그와 같은 상황에 조금도 부담을 느끼지 않는 모양이었다. 남지학은 그런 선우유미에게 마음 속 깊이 감사와 미안함을 가졌고, 은설연은 외려 그녀를 부러워했다. 적어도 선주혁에게 있어 선우유미는 반드시 함께 있어야할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Chap. 9 돌아온 의식 <1> "아! 남 대협!" "남궁 소협, 백 소저!" 두 명의 새로운 방문객을 향해 남지학은 두 손을 맞잡았다. 두 눈이 번쩍 뜨일 정도의 용모를 갖춘 선남선녀는 남궁일과 백화란이었다. 무림맹의 십전성은 천애백의단의 거점으로 이용되는 중이었다. 패종회의 잔당을 처 리하는 주력이 천애백의단이었다. 그들의 활약이 클수록 추락한 무림맹의 위상에 도 움이 될 것임을 알고 있기에 무림맹이 자청해 그들에게 제공한 것이다. 양립이 쉽지 않은 사파연합의 은설연이나 깊은 교분을 맺기에는 거리가 있는 남궁일 이 십전성에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데는 그와 같은 이유가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천애백의단에 속해 패종회의 잔당을 처리하는데 큰 공을 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두 명의 악적을 처단하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남궁 소협도 혁혁한 공과를 올리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남궁일 역시 살아남은 패종회의 무리를 추살하는 중이었다. 이번에는 백마에 속하지 못한, 과거 백웅이라 불리던 패종회의 잔당 다섯을 처단했다고 했다. 남지학은 그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이지요." 남궁일은 겸양을 한 후 물었다. "선 대협의 병세에는 차도가 있습니까?" "사제가 빠른 속도로 회복 중이랍니다." "오!" 남궁일이 두 눈을 크게 떴다. "그가 또 한 번 기적을 만들어낼 지도 모르겠소. 아니, 분명 기적을 만들어낼 것이오!" 남지학의 말에 남궁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 대협이시라면......!" 생략된 뒷말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선주혁이 보여준 모든 것은 기적 에 다름이 없었다. 그러니 한 번 더 기적을 보여줄 수 있다는 희망을 모두가 가지고 있 었던 것이다. 새로운 방문객을 위해 차가 내어지고 좌중은 상호의 인사치례를 끝냈다. 잠시의 여유를 둔 후, 남궁일이 진중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놈들을 처리하고 돌아오던 중 신경이 쓰이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남궁일의 무거운 음성에 은설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과거 옥기린이라 불리던 시절의 남궁일과 지금은 사뭇 다르다. 이제는 창천무룡(蒼天 武龍)이라는 거창한 별호가 당연히 여겨질 정도의 엄청난 고수로 마교주나 자신의 조 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중이었다. 그런 남궁일을 심각하게 만들 일은 선주혁의 병세가 호전되지 않았던 것에 대한 우려 밖에 없다고 여겨온 그녀였다. "무슨 소식인데 그리 말씀을 하시는 것이오?" 남궁일의 신중한 성품을 알고 있기에 남지학 역시 진지한 자세로 물었다. "혹시 하남사괴라는 자들에 대해 아십니까?" "무공은 보잘 것 없지만 하남에서는 행세 꽤나 하고 있는 인물들이라 들었어요." 남궁일의 질문에 대답한 것은 은설연이었다. 적어도 풍문과 견식에 있어서는 이 자리 의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그녀였다. 남궁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자들이 선 대협과 남 소협에게 무례한 발언을 했다는군요." "간이 배밖에 나온 놈들이군요." 냉염혈화라는 별호에 어울리는 은설연의 싸늘한 어조였다. 남궁일은 자신조차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듯하여 고소를 머금고는 말을 이었다. "마침 그 자리에 있던 개방의 분타주와 일전이 벌어졌나봅니다. 한데 그 자리에 있었 던 것은 개방의 분타주 뿐이 아니었더군요. 주 대협이 그 자들의 망발을 들은 모양입 니다." "잘된 일이군요! 개방의 분타주 혼자라면 쉽게 감당키는 힘들었을 테니까요." "네. 위기의 상황에서 주 대협이 손을 쓰셨답니다. 네 명 모두의 오른팔을 잘라 벌을 대신하셨다는군요." 남궁일의 설명에 남지학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보통의 경우 그는 너그러운 편이라 고작 자신을 모욕했다하여 팔을 자를 정도 로 응징했다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남지학은 주백광의 심한 손속을 탓하는 발언을 하지 않았다. 하남사괴라는 자가 모독한 것은 자신뿐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모욕하는 것은 얼마든지 참 을 수 있는 일이지만 사제의 경우는 달랐다. 그 누구도 사제를 모욕하는 것을 용납지 않는 그였기 때문이다. "주 대협께서 많이 너그러워지셨군요. 그런 자들을 살려두다니!" 남지학과는 다른 방면에서 은설연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로서는 감히 남지학과 선 주혁을 모욕한 그들을 살려둔 것이 더 못마땅했던 것이다. "하하핫! 주 대협께서 그들을 보내시며 선 대협과 남 대협의 아량이라고 하셨답니다." 남궁일의 설명에 은설연은 더 이상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주 대협은 의외로 섬세한 일처리를 한단 말이야.' 거침없는 행동과 말보다 도가 앞서는 주백광이었지만, 때때로 생각지도 못한 배려를 하곤 해 은설연을 놀라게 했다. "그 후에 무슨 일이 있었나요?" 은설연이 이와 같이 물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남궁일도 남궁일이지만 이 자리에는 천하제일이라 해도 지나침이 없는 남지학까지 함께하고 있었다. 고작 주백광이 하남 사괴의 팔을 자른 일 때문에 저토록 심각해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역시 은 소저는 날카로우시군요. 그렇습니다. 주 대협이 그들을 놓아 보낸 후, 그들은 감히 하남에 머물지 못하고 산서(山西)로 도주를 한 듯합니다." "산서를 거쳐 대막으로 숨어들 작정이었나 보군요." 은설연의 추측에 남궁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인이 오른팔을 잃었다는 것은 매우 큰 손실이다. 제멋대로 굴며 살아오는 동안 적 지 않은 원한을 쌓아왔을 하남사괴에게 이는 곧 생명의 위협과 다름없었다. 남은 왼팔 만으로는 그간의 은원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을 것이다. 이에 인적이 드문 대막으로 도 주하려던 것이 분명했다. "한데 그들은 미처 대막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양고(陽高)에서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 다." "그들에게 원한이 있던 자가 한둘이 아닐 테니까요." 은설연은 당연한 일이라는 듯 말했다. 그러자 남궁일은 더 한층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게 아무래도 은원의 정리가 아닌 듯 합니다." "패종회 놈들이라도 나타났나요?" 은설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난 삼 년간 패종회의 잔당이 중원을 벗어나려는 시도는 끊임이 없었다. 천의백의단 이, 그리고 남지학이 있는 한, 중원에서는 살아남기 힘들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중원을 벗어나면 추살은 힘들어진다. 남지학이 늘 신경을 곤두세운 채, 동분 서주(東奔西走)하는 데는 패종회의 잔당이 중원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 컸 다. 따라서 남궁일이 저토록 심각한 태도를 견지하는 이유가 패종회의 잔당이 중원을 벗 어났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남궁일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패종회라면 우려할 일이 아니지요." 남지학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사제가 회복될 기미가 보인다지만 아직까지도 의식불명의 상태. 이대로 눈을 뜨지 못할 수도 있기에 단 한 명의 백마도 놓치려 들지 않는 것이다. "문제는 발견된 하남사괴의 시신이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패되었다는 겁니다. 소지품과 하나같이 잘린 우측 팔이 아니라면 신분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말입니다." "사망 추정 시간에 비해 부패의 진행이 빠르다는 겁니까?' 남지학의 표정이 다시금 심각해졌다. "각 세력에서 조사단을 파견했으니 조만간 결과가 나올 것입니다만......" "......" 남궁일의 설명에 모두는 입을 다물었다. 그가 우려하는 바가 무엇인지, 왜 저토록 심각하게 이야기를 꺼냈는지 그들 모두는 알 수 있었다. 시체의 급격한 부패. 이는 전에도 본 적이 있는 현상이었다. 그리고 부패의 원인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설마 마교에서 또다시 그 마물(魔物)을 만들어낸 것은 아니겠죠." 은설연이 쉽게 납득키 힘들다는 표정으로 먼저 입을 열었다. "단목 교주와 종 장로께서 그럴 분이 아니라는 건 우리가 더 잘 알지 않소?" 동호대전 당시 마물이 이상을 보이자 제 손으로 두 마물을 태운 단목하진이었다. 애초에 그는 마물을 만들 때부터 통제 불가의 상황을 우려해 극단적으로 반대했다고 들었다. 염마 종극 또한 강시에 미련을 가질 리 없었다. 아수라천멸진이 아니었다면 통제에서 벗어난 강시가 대참사를 일으켰을 것에 대해 책임을 지겠다고 나섰던 것이다. 무림의 금기를 어겼고, 환란을 불러일으킬 뻔했으니 죄과를 치루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종극은 마교의 장로직에서 물러났다. 사실상 강시가 패종회의 주력 대다수를 처 리했으니 그 공로가 적지 않음을 들어 각 세력의 수장들이 종극의 자결을 막았던 것이 다. 그러니 단목하진이나 종극이 이제 와서 강시를 다시 만들 리는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강시를 만들기 위해 마교가 치러야 하는 끔찍한 희생을 고려하면 더욱 그랬다. 어떤 식인지는 몰라도 교도를 희생해 만들어냈다던 강시가 아니던가? "그렇다면 마교가 아닌 곳에서 멸세강마대법을 완성했다는 이야기인가요?" "다른 종류의 강시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멸세강마대법을 연상시킬 정도로 강력한 마물의 등장을 예고하는 것일 수도......" 은설연의 질문에 남궁일의 추측이 더해졌다. 당시 아수라멸천진은 패종회의 무인들과 강시를 파괴했다. 대부분 시신조차 온건하 지 못했고, 강시의 경우는 흔적도 남지 않았다. 그러니 이들로서는 새로운 마물의 등 장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아니요! 멸세강마대법으로 만들어진 강시가 맞아요." 난데없는 목소리. 그것은 문전에 서있는 단목지민의 음성이었다. "단목 소저?" <2> "그러니까...... 당시에 그 강시가 아수라멸천진에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니라 이 말인가 요?" 은설연은 아무리 진정을 하려해도 진정할 수가 없었다. 그날 강시가 보여준 가공할 위력을 직접 목격한 그녀였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엄청난 마기와 단단한 몸뚱이 외에는 별다를 것이 없는 강시였다. 허나 시간이 흐를수록 걷잡을 수 없이 강해지다가 종국에는 그 무엇으로도 상대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마교에서는 적철항의 공격으로 강시의 마기가 폭주하여 통제가 불가능하게 되었다고 했다. 문제는 거기에 있었다. 통제 불가의 강시가 가지는 힘은 가히 절대의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저희도 천마비강(天魔秘?)이 그 진에 의해 소멸되었다고만 여겨왔어요. 한데 이번 의 조사 결과에 의하면 그것은 분명 천마비강의 흔적이었습니다." "놈이 소멸된 것이 아니라 도주를 했던 것이군요." 남지학이 침음성을 흘리듯 말했다. "당시 패종회와의 격전 때문인지, 아수라멸천진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큰 손상을 입었던 게 분명합니다. 그리고 지난 삼 년간 그 손실을 메우는 방법을 터득한 듯합니 다." 단목지민이 어두운 안색으로 설명했다. "회복의 방법을 터득한다고요? 강시가?" 은설연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강시를 조종하는 자의 명에 쫓을 뿐, 이지를 가질 수 없다. 따라서 방법을 터득한다는 말 자체는 어불성설이랄 수 있다. 그렇기에 은설연은 납득키 힘든 표정을 짓는 것이다. "강시가 학습능력을 가진다는 것은 저희로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만......, 지금 으로서는 그 가설이 허황된 것만은 아닙니다. 동호대전의 마지막 즈음에 천마비강은 감정을 드러내며 독단적인 격전을 벌였습니다. 저희 아버님께서 두 구의 강시를 소각 하신 데는 그와 같은 이유가 있었던 겁니다." "위험한 상황이 발생할 것을 방지하신 거군요." 이지를 가진 천마비강. 생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었다. 그러니 그 마물이 셋으로 불어나는 것은 막고자 한 것이다. "적철항, 그 악적을 죽인 것은 분명 조종에 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자로 인해 타 격을 받은 강시가 복수를 단행한 것이지요. 따라서 천마비강이 학습능력을 가질 가능 성을 배재할 수 없습니다." "그 회복의 수단이라는 게......?" "무공을 지닌 자들의 원정지기를 흡수하는 겁니다." "......!" 그간 멸세강마대법의 완성을 위해 마교가 끔찍한 희생을 치렀다는 이야기는 들었을 뿐, 실제로 무슨 희생이 있었는지 알지 못해온 그들이었다. 이제야 그 내용을 알게 된 것이다. "얼마나 많이 필요합니까?" "그건 알 수 없습니다. 회복의 정도에 따라 다르니까요. 문제는 정말 천마비강이 회복 의 수단을 학습한 것이라면 강호전체가 위험해진다는 것입니다." "회복 이후에도 무림인을 해칠 가능성이 있겠군요." 남궁일의 말에 단목지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본적으로 강한 살의(殺意)를 가진 물건입니다. 종국에는 닥치는 대로 혈향을 탐하 게 될 것입니다." "대비 수단은 강구가 되어 있습니까?" 한동안 침묵 속에 있던 남지학이 물었다. 멸세강마대법을 완성시키고 그들을 조종하던 마교였다. 그러니 누구보다 천마비강에 대해 잘 알고 있을 터. 천마비강의 취약점이 무엇인지 묻는 것이다. "천마비강은 본교의 성화에 두려움을 느낍니다." 단목지민의 말에 좌중의 인물들은 동호에서의 격전을 떠올렸다. 당시 사제차림의 마 교도가 대낮에도 밝게 빛나는 횃불을 휘두르며 강시를 조종했다. 또한 선주혁과 적철항의 가공할 공격에도 되살아나던 강시가 단목하진이 휘두른 횃 불에 의해 불타올랐던 것도 생각이 났다. "약점이랄 수 있겠습니까?" 남지학이 물었다. 기본적이라는 단서를 붙인 단목지민이기에 의문을 가진 것이다. 단목지민은 잠시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이다가 입을 열었다. "멸세강마대법이 완성될수록 천마비강이 가지는 성화에 대한 두려움이 적어졌었다고 합니다. 두 구의 천마비강을 성화로 태운 것은 사실이지만, 이미 통제에서 벗어난 나 머지 하나 역시 그렇다고는 단언키 힘들 것 같습니다." "그, 그럼 놈을 어떻게 죽여야 한다는 거죠?" 다급히 물어보는 은설연의 목소리는 크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강시가 보여줬던 엄 청난 힘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삼패 중 이 인과 절대십가의 가주들, 그리 고 다수의 백존들을 단신으로 상대하던 강시가 아닌가? 강시가 본연의 힘을 회복한다면 천하에서 그 누구도 막을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 야했다. "지금으로서는 최대한 빨리 천마비강을 찾아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마기가 약해진 지 금이라면 다시 성화로 통제가 가능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그럴 수만 있다면 성화로 놈을 태우면 됩니다." "그건 귀 교의 성화로도 통제 불가능의 상태가 될 수 있다는 겁니까?" 남궁일이 물었다. "그럴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단목지민이 힘겨워 보이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녀의 대답으로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천마비강을 성화로 제어할 수 없다면 대량의 살상극이 벌어질 것이다. 무림사 이래 최대의 혈난이 될 것이 분명했다. 아니, 그 이상도 예견할 수 있었다. 피만을 탐하는 놈이라면 말 그래도 종말에 이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3> "사...... 형......?" 그가 눈을 뜬 후의 첫 한 마디였다. "선 공자!" 침상 곁에서 그를 보살피던 선우유미는 복받치는 감정에 겨워 외쳤다. 아련하게 들려오는 여인의 음성에 고개를 돌리고자 했다.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그는 간신히 눈동자를 돌려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봤다. 흐릿하게 인영이 보인다. 점차 선명해지는 영상 속에서 그는 면사포를 얼굴에 드리운 여인을 확인한다. 얼굴을 볼 수는 없지만 그는 몽롱한 와중에도 여인이 누군지 확신한다. "선우...... 아가씨?" "네, 저예요." 맑기만 했던 여인의 음성이 순간적으로 탁해진다. 어깨가 들먹이고 손이 떨린다. "무사...... 했군요." 그는 미소를 지으려고 했다. 고개를 돌리는 것처럼 표정을 짓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자신이 제대로 미소를 짓고 있는 건지 확신할 수 없을 정도였다. "네, 저는 괜찮아요." 이제는 누가 들어도 울먹이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목소리로 선우유미가 대답했다. "다행...... 이네요. 정말...... 다행......" 한 마디, 한 마디가 힘에 겹게 선주혁이 말했다. 선우유미가 그런 숨을 몰아쉬고 있는 선주혁의 손을 잡았다. "그래요. 정말 다행이에요. 당신이......, 당신이 눈을 뜨지 않아서......" 선주혁처럼 힘에 겨운 것도 아닐 진데, 선우유미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지난 삼 년간 간병해온 선주혁이다. 그가 눈을 떴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렇게 가슴이 벅차오를 것이라고는 그녀도 생각지 못했다. 지금은 그저 기뻤고, 행복했다. 그것이 그녀가 느끼는 전부였다. "사...... 형은? 사형도...... 무사한가요?" 선우유미는 소매로 눈물을 훔친 후 대답했다. "네. 남 대협은 무사하세요." 그 말을 듣고서야 선주혁은 다시금 눈을 감았다. 실룩이는 입매. 아마도 다시 미소를 짓고자 하는 듯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잠이 들었다. 너무나 짧은 시간, 눈을 떴다 감은 선주혁을 보며 선우유미는 자신이 꿈을 꾼 것은 아 닌가 싶었다. 하지만 젖은 면사포와 소매. 그리고 붙잡은 선주혁의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너무나 선명했다. '꿈이 아니야! 선 공자가 돌아왔어!' 그녀는 조슴스레 선주혁의 손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방문 옆에 드리워진 줄을 당겼다. 선주혁에게서 일정 거리 이상을 벗어날 수 없는 그녀를 위해 준비된 줄이었다. <4> 봄의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편안한 느낌의 바람이 피부를 간질인다. 그는 웃었다. 싱그러운 풀 냄새. 막 피어오른 꽃향기. 옆에 서 있는 그 무엇보다 알므다운 여인. 그는 다시 웃었다. 먼 곳에서 그와 그의 곁에 서 있는 여인을 보며 은설연이 입을 열었다. "편안해 보이는군요." "그렇구려." 남지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입가에는 잘 보이지 않아도 미소가 맺혀 있었다. 사제가 정신을 차린 지 열흘이 다 되어가는 동안, 그는 내내 이렇게 미소를 달고 다녔 다. 지난 삼 년간 단 한 번도 그가 웃지 않았음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실로 큰 변 화가 아닐 수 없었다. "당신 사제는......" 은설연의 말에 남지학이 선주혁에게서 시선을 떼 그녀를 보았다. "존재 자체가 기적인 사람이에요." 만신창이라는 표현으로도 부족한 몸으로 호흡을 이어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기적이었 건만, 이제는 의식까지 되찾았으니 정말이지 대단한 일이었다. 매번 선주혁을 보며 이해할 수 없다고 여겨왔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녀로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하오." 남지학은 더욱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결국 당신이 옳았군요." "무엇이 옳았다는 게요?" "선 소협을 포기하지 않은 거 말이에요. 아마도 저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선 소협을 그대로 보내주는 게 나을 거라 생각했을 거에요. 누구도 선 소협이 저렇게 깨어나리라 생각지 못했을 테니까요." "그들은 사제를 모르니까......" 남지학은 여전히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미안해요." 은설연이 잠시 주저하다 말했다. "......?" "지난번에 말했던 거. 선 소협을 포기하지 않는 게 모두 당신의 욕심일 뿐이라고 말했 잖아요." "괜찮소. 당신이 말했듯 누구나 다 그리 생각했을 게요." 남지학은 다시 사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 남지학의 대답에 은설연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지난번에 그 말을 하고 많은 후회를 했었기 때문이다. 남지학의 대범한 성품을 알고 있음에도 자신의 말에 의 해 상처를 입지 않았을까 염려해왔던 것이다. 그녀는 남지학의 시선을 쫓아 선주혁을 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는 정말 괜찮은 걸까요?" "뭐가 말이오?" "잃어버린 무공 말이에요." "지금으로서는 회복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뻐해야하지 않겠소?" 흐릿하게 맺혀있던 남지학의 미소가 지워졌다. "약한 무공을 익혔던 자라해도 자신의 무공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잖아요. 하물며 선 소협은 천하...... 제일의 무공을 지녔었어요. 무공을 잃은 상실감이 여타의 사람과 는 비교할 수 없을 거에요." 은설연은 잠시 주저했으나 결국 전하제일을 논했다. 패종지란 당시 선주혁이 지녔던 무공이 가히 천하제일이었음에 이론을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남지학이 무공의 극한을 보여주는 절초로 패종회주의 목숨을 거뒀지만, 아수라멸천 진을 감당해낸 선주혁에 비할 바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흠......" 남지학이 침음성을 흘렸다. "그가 의식을 되찾은 것에 대해 기뻐하느라 차마 거기까지 생각지 못했구려." "아마도 그에게는 당신의 위로가 가장 큰 힘이 될 거에요." 은설연의 말에 남지학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다시 은설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고맙소." "네?" 뜬금없는 감사의 표시에 은설연은 눈을 크게 떴다. "뭐, 뭐가요?" 냉염혈화라는 별호와 어울리지 않게 그녀는 말을 더듬었다. 갑작스레 따뜻한 눈빛과 어조로 자신을 대하는 남지학 때문이었다. 뛰는 가슴을 주체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모든 것이 말이오." 남지학은 은설연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은설연은 그런 남지학의 눈을 감히 마주보지 못하고 그만 눈을 아래로 향하고 말았다. 어쩐지 그가 자신의 두근거리는 마음을 꿰뚫어보는 것만 같아서였다. "지금 내가 생각지 못했던 것을 말해줬듯, 지난 삼 년간 내가 행했을 많은 실수를 막 아준 것...... 잘 알고 있소. 당신에게는 늘 신세만 지는구려." "아, 아니에ㅛ. 남 소협이나 선 소협에게는 저나 사파연합이 많은 신세를 졌으니까... ... 그러니까......" 그녀는 자신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정리조차 못했다. 달아오르는 얼굴 때문에 좀 처럼 집중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소." 남지학이 은설연의 손을 잡아 올렸다. 그리고는 힘을 주며 자신의 말을 마쳤다. '지금......, 지금처럼만 날 대해주면 돼요. 그걸로 충분해요.' 은설연은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는 말을 속으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지금의 그 녀는 강호인들을 벌벌 떨게 하는 냉염혈화가 아니라 가슴에 품은 정인의 앞에선 한 여 자에 불과했던 것이다. Chap. 10 깨진 사기 그릇 십전성이 소란스러워졌다. 친우가 의식을 회복했다는 소식을 들은 한 명 때문이었다. 그는 십전성이 들썩일 정 의 큰 소리로 선주혁을 찾았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호들갑을 다 떨었다. 그리고 술을 찾았다. 이제 막 회복된 환자에게 무슨 술이냐는 만류는 그에게 통용되지 않았다. 선주혁이 정신을 차린 후 마시겠다고 지난 삼 년간 단 한 잔의 술도 입에 대지 않았다며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무려 스무 단지를 쌓아두는 술자리가 벌어지고야 말았다. "크하하핫!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주백광이 아예 사발 째 술을 들이키며 웃음을 터뜨렸다. 술자리가 시작된지 벌써 한 시진이나 되었건만 그는 시종일관 사발로 술을 들이키면서도 조금도 취기를 보이지 않았다. "어째 내가 정신을 차린 것보다 다시 술을 마실 수 있게 된 게 더 반가운 것 같은데......?" 자신이 의식을 차린 것에 이토록 기뻐하는 주백광을 보며 계속 웃던 선주혁이 농담을 던졌다. "크하하핫! 그럴지도 모르지. 자네가 계속 그렇게 누워 있었다면 평생 술을 못 마셨을 지도 모르니까." 주백광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농담을 받았다. 그의 말에 선주혁은 웃음을 지었다. 아마 그의 말은 사실일 것이다. 자신이 계속 의식을 잃고 있었다면, 혹은 그대로 죽었 다면 주백광은 평생 술을 입에 대지 않았을 것이다. 친구를 두고 한 말을 스스로 깨뜨 릴 주백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선 소협, 술은 좀 자제를 하시는 게......" 은설연이 어느새 붉어진 선주혁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엥? 무슨 소리요, 은 소저! 이 친구와는 적어도 삼 일은 마셔야 하거늘......" 지난 날 끊임없이 술을 마셔대던 기억만으로 큰소리를 치던 주백광은 말을 채 잇지 못했다. 분명 그 때와는 달리 붉어져 잇는 선주혁의 얼굴을 본 것이다. 그 때도 무공으 로 취기를 몰아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주혁이 익힌 내공의 특성 탓인지 일정 이상으로는 취하는 모습을 볼 수 없었 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의 주혁은 선우유미가 천음지력을 채워 주지 않는 한, 견딜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자신의 기분만을 생각해 주책없는 말을 하고 있음을 깨달은 주백광이 뒤늦게 말을 멈 춘 것이다. 순간 술자리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모두가 선주혁을 생각해 과거의 모습과 비교하 는 것을 피해왔기 때문이다. "후후훗!" 그런 분위기 속에서 선주혁이 웃음을 터뜨렸다. "모두 그런 표정 지을 필요 없어요. 전 괜찮으니까요." 선주혁이 밝게 말하자 조금은 분위기가 가벼워졌다. 주백광이 선우유미에게 물었다. "주혁의 상태가 정확히 어떤 겁니까?" "주 대협!" 은설연이 주백광의 옷을 가볍게 잡아끌었다. "그의 상태가 어떤지 알아야 치료할 방법이라도 찾을 거 아니오! 만년설삼이든, 이무 기의 내단이든, 그를 치료할 방법이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것이오!" 주백광이 언성을 옾이자 은설연은 그저 답답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남지학도 그렇 고, 주백광도 그랬다. 이 고집불통의 사내들은 선주혁에 관한 일이라면 당최 포기를 모르는 것이다. "선 공자는......" 선우유미가 선주혁의 눈치를 살짝 봤다. "선우 아가씨, 저는 괜찮으니 모두에게 말하세요." 선주혁의 말에 선우유미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선 공자의 몸에는 더 이상의 축기가 불가능합니다. 아마도 지난번 그 일이 원인인 듯 한데......, 쉽게 말씀드리자면 용량 이상의 내용물로 인해 그릇이 깨져버린 것과 같습 니다." 지난번 일이 무엇인지는 모두 알고 있었다. 더불어 선주혁이 인간으로서는, 아니 무신이라 할지라도 감당할 수 없는 거력을 자신 이 받아들였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 그릇을 복원할 방법은 없습니다. 회복을 하려면 원형이 있어야하는데......, 지금 선 공자의 신체는 애초부터 축기의 기능이 없는 듯한 상태입니다." "방법이...... 없단 말입니까?" 주백광이 이전에 비해 한층 기운이 빠진 음성으로 말했다. "네. 다행인 것은...... 그 외의 모든 신체 기능이 정상화 되었다는 겁니다." 콰앙. 주백광의 커다란 손이 탁자를 내리치는 소리였다. 와중에도 내력을 조절한 듯 요란한 소리에도 불구하고 탁자 위의 술 한 방울, 음식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뭐가 다행이란 말이오? 주혁은 천하제일의 무공을 지닌 고수였소. 그런데......, 그런 데 이제 와서 무공을 되찾을 수 없다는 그게 살아있는 거라 생각하는 것이오?" "......" 노기가 넘실거리는 주백광의 말에 좌중의 사람들은 입을 열지 못했다. 동호변에서 선주혁은 누구보다 먼저 아수라멸천진의 발동을 감지했다. 그랬기에 자 신이 그 끔찍한 힘을 감당했던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해 선주혁 자신은 아수라멸천진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는 뜻이었다. 그 누구보다 빠른 신법을 가졌던 그였으니, 아수라멸천진의 범위 밖으로 몸을 빼는 것은 일도 아니었으리라. 그럼에도 선주혁은 스스로를 희생했다. 죽음을 무릅쓰고 모두를 위해 몸을 던진 것이다. 그 혜택은 백화란을 제외한 이 자리의 모두가 입었다. 선주혁이 지금과 같이 됨으로 서 모두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현실과는 다른 우려였다. 아수라멸천진의 거력을 직접 느낀 이들은 그것이 차원 이동의 술법임을 모른 채, 모든 것을 파괴하는 마진으로만 여겼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사실을 알지 못하는 이들은 모두가 선주혁에게 커다란 은혜를 입었다고 생 각했다. 또한 선주혁이 지금과 같이 된 데에는 각자 자신의 책임도 함께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응, 주 형!" "......?" 선주혁의 난데없는 말에 주백광이 눈을 크게 떴다. "살아있는 거야, 나는!" 선주혁의 확고한 음성으로 말했다.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무공을 잃은 거......, 그렇게 대단하지 않아. 늘 내 옆에 있어줘야 하는 선우 아가씨께 죄송하지만......" 선주혁은 선우유미의 눈치를 살짝 본 후, 말을 이었다. "난 사형이 무사하기를 바랐고, 이 자리의 모두 역시 그렇기를 바랐어. 그럴 수만 있 으면 어떻게 되어도 좋다고 생각했지. 심지어...... 내가 죽더라도 말이야." 선주혁의 음성은 담담하고 차분했다. 그가 술에 취해서, 혹은 격앙된 감정으로 말하 는 것이 아님을 누구나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멀쩡히 살아났고, 모두와 함께 있잖아. 그걸로 됐어. 그깟 무공...... 없 어도 사는 데는 지장 없다고. 외려 선우 아가씨께 죄송한 마음만이 더 큰 걸." "저는 아무렇지도 않아도, 선 공자." 선우유미는 따뜻한 눈으로 선주혁을 바라봤다. "하핫! 고마워요, 선우 아가씨." 선주혁은 얼굴을 살짝 붉히며 말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밝고 쾌활한 모습에 외려 다른 사람들이 민망해질 정도였다. 선주혁은 진심이었다. 애초 적당히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무공을 익혔을 뿐이었다. 무공을 익히며 강해지는 즐거움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무공없이는 못 살아갈 정도는 아니었다. 더구나 익힌 무공으로 행해야할 천명과도 같은 일들을 모두 해낸 상태였다. 그러니 더 이상 미련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미래랄 것이 없는 소매치기에 불과했던 자신이다. 세상에 쓸모라고는 하나도 없을.... .., 그런 인간이었다. 한데 이쪽 세상에 와서 많은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영웅 대접을 받고 있었다. 세상을 구했다는 칭송과 함께 하는 여생이 남아 있었다. 게다가 평생을 쓰고도 모자랄 일이 없는 엄청난 보물까지 가진 상태였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가족과 친구가 생겼다는 사실이었다. 혈육 이상의 의미를 지닌 사형 남지학과 진정한 우정을 가진 주백광, 그리고 남궁일, 몽세화, 은설연 등등의 사람들이 진심으로 자신을 아끼고 있음을 선주혁은 느낄 수 있 었다. 저쪽 세상에서는 꿈도 꿀 수 없던 일을 이곳에 와서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선주혁을 감격에 젖게 만드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선우유미였다. 누군가를 사랑할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해온 선주혁이었다. 한데 그녀를 사랑하게 되 었고, 또 사랑을 받고 있다. 본의건 그렇지 않건 이제는 그녀와 평생을 같이 해야만 했 다. 그녀와 함께라믄 것만으로도 불만 따위는 생길 틈이 없을 것만 같았다. "선 공자께서 정말로 고마워해야 하실 분이 또 계세요." 선우유미는 몽세화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 누님!" "아, 아니. 내가 한 게 뭐가 있다고...... 선우 동생에 비하면 난 정말 아무 것도 안했는 걸." 몽세화가 얼굴을 붉혔다. "선우 아가씨께 전부 이야기 들었습니다. 정말 ...... 정말, 감사합니다." 몽세화는 십대의 규수처럼 귀까지 새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천하의 옥 소선자가 저와 같이 순박한 모습을 보이자 모두가 얼굴에 웃음을 머금었다. 다시금 술잔이 돌기 시작하고 담소가 이어졌다. 모두가 지금의 이 자리만큼은 축하와 기쁨만이 가득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최대한 즐기고 싶어 하 는 마음뿐이었다. 앞으로 또 어떤 일이 생길지라도 선주혁이 의식을 잃고 있던 지난 삼 년간의 암울한 기억을 떨쳐내고픈 것이었다. "정말 괜찮은 거야, 사제?" 남지학은 아직도 염려가 되는 듯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네, 사형. 전 지금 다시없을 만큼 행복해요!" "응! 그럼 됐어." 남지학도 그제야 편한 표정을 지었다. "자, 자! 주혁, 내 술잔을 받으라고! 취할 때는 취하더라도 남자라면 끝장을 봐야지!" 주백광이 술을 단지 째로 들어 올려 선주혁에게 내밀었다. 선주혁도 환하게 웃으며 술잔을 받았다. "자, 건배!" 주백광이 두 손으로 사발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아! 주 형!" "응?" 주백광은 입술로 가져가던 손을 멈추고 선주혁을 봤다. "저...... 아! 동쪽의 나라에서는 술잔을 부딪쳐야 제대로 된 건배라고 하더라고! 오늘 은 그 식으로 건배를 해보는 게 어때?" "술잔을 부딪쳐?" 주백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이렇게." 선주혁은 저쪽 세상에서 친구와 술을 마셔본 적이 없었다. 친구라 부를 사람이 없었 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잔을 부딪쳐 건배를 하고팠던 것이다. 손을 내밀어 술잔을 살짝 부딪친 후, 선주혁은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크하하핫! 좋아, 좋아! 이거 뭔가 통쾌한 기분이 드는데?" 잔이 부딪칠 때 나는 맑은 소리가 마음에 들었기에 주백광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역시 단숨에 술잔을 비우고 다시 한번 술단지를 들어올렸다. "한 잔 더!" "좋았어! 한 잔 더!" 선주혁은 주흥이 돋았는지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후, 거침없이 술잔을 내밀었다. 그의 건강을 염려치 않을 수 없었으나 누구도 선주혁을 말리지 않았다. 저렇듯 술을 마실 수 있는 모습을 지금껏 기다려온 그들이기 때문이다. 주백광도 벌떡 일어난 후 술을 따랐다. "자, 건배!" 주백광은 선 채로 건배를 외쳤다. "건배!" 선주혁 역시 잔을 내밀었다. 쨍그랑. "이런!" 주백광이 난색을 표했다. 흥이 돋아 선주혁이 말한 방식으로 건배를 한다는 게 그만 너무 세게 잔을 부딪쳐 사기로 만들어진 사발이 그만 깨져버린 것이다. 익숙지 않은 방법인 탓이었다. "안 다쳤어?" 주백광이 염려스럽게 선주혁에게 물었다. 과거라면 물어볼 필요가 없는 질문이었다. 금강불괴의 선주혁이 아니던가?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고작 사기 조각일 뿐이지만 선주혁의 손에 상처를 내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괜찮아." 선주혁은 재빨리 대답했다. 잔이 깨지는 것을 느끼는 순간, 재빨리 잔을 놓으며 손을 뺏기 때문이다. 내기를 축적 할 수는 없어도 불가사의한 회복력을 가진 신체만은 여전한 듯 했다. 이제는 신체기능이 완전히 돌아온 것이다. 따라서 소매치기의 경력을 가진 선주혁은 재빠른 손놀림의 감각을 가지고 있었고, 베이기 전에 손을 빼낼 수 있었던 것이다. "다행이군." 주백광이 안심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방금 전...... 동작 빠르던데?" "뭐...... 무공을 익히지 못해도 이 정도는 할 수 있지." 선주혁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것보다 이 술은...... 더 못 마시겠네. 깨진 술잔이 단지에 들어가 버렸어." 선주혁이 술 단지 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가 놓친 술잔이 탁자 위에 놓인 술 단지 안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뭐......! 술이야 아직 많으니 걱정할 필요 없지." 주백광은 턱짓으로 쌓여있는 술 단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어 주백광은 자신의 술잔을 비운 후, 빈 잔을 단지에 넣었다. 아예 새롭게 시작하자는 의미에서였다. 그리고는 표정을 굳혔다. 선주혁의 얼굴을 봤기 때문이다. "주혁?" "아!" 술 단지에 빠진 사발을 멍하니 바라보던 선주혁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주백광을 봤다. "이 모습...... 꼭 나 같아서 말이야." 멍한 표정으로 말한 선주혁의 한 마디에 주백광을 비롯한 좌중의 표정이 또 다시 어 두워졌다. 선주혁이 바라보는 것은 깨어진 사발이었다. 주백광이 비운 사발은 단지 위에 둥둥 떠 있었으니, 그 모습을 자신과 같다고 말할 리가 없었다. 이제는 더 이상 술을 담을 수 없게 된 사발의 모습은 진정 선주혁과 다를 바 없었다. 선주혁 역시 더 이상 내기를 축적할 수 없는 신세였기 때문이다. 그가 깨진 사발을 보 며 다시금 자신의 신세를 느낀 것이라고 좌중의 모든 이는 생각했다. 그랬다. 아무리 괜찮다고 말한들 괜찮을 리가 없었다. 무공을 상실한 슬픔이 어찌 다른 행복으로 메워질 수 있겠는가? 자신들이 부담을 느낄까봐 괜찮다고, 행복하다고, 그렇게 말하고 웃음으로 마음을 감 출 뿐이었다. 잠시나마 이 자리를 즐기려했던 것 역시 그런 선주혁의 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자 신들의 웃는 모습이야말로 선주혁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뭐, 뭐야? 왜 갑자기 그렇게들 심각한 표정을 짓는 거야?" 선주혁은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동생." 몽세화가 입을 열었다. "힘든 것을 감추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야. 때로는 겉으로 드러내고 표현하는 게 더 나 을 수도 있어. 여기 있는 모두는 동생을 도울테니 말이야." 그녀는 한껏 조심스럽게, 그리고 한껏 다정한 어조로 말했다. "아, 아니. 몽 누님. 그게 아니고요." 선주혁은 손사래까지 쳐가며 말했다. "거 참! 그게 아닌데......" 자신을 바라보는 모두의 시선에 선주혁은 뒤통수를 긁으며 웃었다. 그가 웃음을 보이자 남지학이 말했다. "더 이상 그 이야기는 그만하지요. 지금은 그저 이 자리를 즐깁시다. 앞으로 또 언제 이렇게 모일 수 있을지 모르니 말입니다." "에? 그건 또 무슨 소리에요? 앞으로 또 언제 이렇게 모일지 모르다니? 이제 자주 모 이면 되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사제가 회복된 것이 널리 알려지면 사제는 정말 분주해질 거야. 강호 의 수많은 단체들이 축하의 사절을 보내올 테니 좀처럼 이런 한가한 시간을 보낼 수 없을 걸." 남지학의 말에 선주혁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사형인 남지학은 다른 모든 방면에서 뛰어날지 몰라도 거짓말에는 전혀 소질이 없음 을 느낀 것이다. 소매치기를 하며 눈칫밥으로 살아온 선주혁이었다. 이리저리 눈을 굴 리며 더듬거리는 남지학의 말이 사실이 아님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요. 지금 약간의 문제가 있어서 그럴 뿐, 저희 조부님도 곧 십전성에 방문하실 거예요. 다른 세력들은 말할 것도 없죠." 눈치 빠른 은설연이 재빨리 남지학을 거들고 나섰다. 오랜 세월을 함께 한 그녀는 남 지학이 선주혁에게 근심을 주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맞아요. 저의 아버님께서도 곧...... 축하하러 오실 거예요." 단목지민 역시 재빨리 말했다. 선주혁의 입매에 미소가 걸렸다. "그 약간의 문제가 가볍지 않은 거로군요. 사파연합과 일월신교......, 아마도 정의련 이나 무림맹까지 나서야할 정도의 문제니 말이죠." 선주혁의 말에 중인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하긴...... 천기를 제 손보듯 하는 사람을 속이려 든 우리가 잘못이지.' 은설연이 남모르게 한숨을 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녀에게 있어 선주혁은 무엇이 든 가능한 사람이었으니, 말 몇 마디로 그를 속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것이 다. "제가 무공을 잃어 쓸모없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문제가 뭔지 알 려 주세요." "그, 그럴 리가!" 님지학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그런 남지학을 보며 선주혁은 싱긋 웃었다. 사형이 그런 마음을 먹지 않을 것임을 누 구보다 잘 아는 그였다. 중요한 것은 이 시선만으로 사형은 솔직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고, 자신은 의문을 해소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사실은......" 남지학이 입을 열자 은설연이 끼어들었다. "제가 설명을 할게요." 이 일을 설명하는 것 자체가 남지학에게 있어서는 부담이라 생각한 그녀가 대신 나선 것이다. 그녀는 동호대란 당시 천마비강이 피해를 입고 도주했으며, 지금에 와서 다시 나타난 것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에 대해서는 강조할 필요가 없었다. 그 날 선주혁 역시 천마 비강의 위력을 코앞에서 봤기 때문이었다. 남지학을 비롯한 이 자리의 다수는 현 무림을 대표하는 고수들이었다. 천마비강이 다 시 나타난 것이 확실하다면 이들의 도움 없이는 막을 방도가 없다고 봐야했다. 물론 천마비강이 완벽히 회복된 것이라면 이들이 모두 합세해도 가능성이 없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 놈이 인성을 갖추고 사고력까지 지녔다고요?" "저희로서는 그렇게 추측하고 있어요." 단목지민의 대답에 선주혁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중인들은 선주혁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의 회복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하지만 선주혁은 범인은 상상도 못할 인재 중의 인재. 그의 한 마디가 무시무시한 천마비강을 상대하는데 큰 도움이 될 수 있음을 기대하는 것이었다. "당시 그 천마...... 뭐라는 강시의 마기가 무척이나 불안했어요. 마치 커다란 해일의 최고점과 수면과도 같은 크기로 마기가 요동을 쳤었죠." 선주혁의 말에 중인들은 내심 '역시'라고 외쳤다. 당시 천마비강의 그런 변화를 제대로 느낀 자는 선주혁과 천마비강을 조종하는 사제 차림의 마교도 뿐이었다. 하지만 그 마교도는 아수라멸천진이 파훼되는 순간의 기운을 버틸 무공이 없었다. 따 라서 그 때 강시의 마기가 어떻게 변하고 있었는지에 대해 감지한 이는 선주혁이 유일 했던 것이다. "그러던 강시의 마기가 나중에는 계속 증가하기만 했어요. 더 이상 고저를 보이지 않 은 거죠. 그 이유에 대해 짐작 가는 게 있나요?" "통제에서 벗어난 이후 마기가 증가하여 유지되었다는 뜻이군." 남지학이 핵심을 짚어냈다. "그렇다면 주문의 효력이 사라진 이후에 마기가 증가된 거군요." 단목지민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주문?" 주백광이 물었다. "네. 천마비강을 조종하는 주문이죠. 성화와 함께하는 주문으로 천마비강을 제어했거 든요." 결국 그 주문과 성화가 강시의 마기에 영향을 끼친다는 이야기군요." 은설연의 가설에 좌중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하기에 충분한 가설이었기 때문이다. "주문만으로도 효용이 있소?" 남지학의 질문에 단목지민이 빠르게 대답했다. "아뇨. 성화가 함께 해야 해요." "그렇다고는 해도 강시가 완벽히 회복된 게 아니라면 마기가 약해진 순간을 노려볼 가능성이 있다는 거군요." 은설연의 결론이었다. "이 사실을 빨리 아버님께 알려드려야 겠어요." 단목지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주혁의 회복을 축하하는 자리였지만 지금에 있어 서 이 정보를 전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세요."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단목지민에게 선주혁은 웃음을 지어 보여줬다. 괜찮다는 뜻이 었다. 단목지민은 가볍게 목례를 하고 신형을 날렸다. 전서를 보내러 가는 데도 경신공부를 사용할 정도니 그녀의 마음이 얼마나 급한지 엿볼 수 있었다. "자, 자! 강시 문제는 그 때 가서 생각하기로 하고...... 우리는 이제 술이나 더 마시자 고." 주백광이 새로운 술 단지의 밀봉을 뜯으며 말했다. 천마비강의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서가 아니었다. 주문에 영향을 받는다지만 그것은 천마비강이 완벽히 회복되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다. 또한 격감한 마기를 가진 강시가 얼마나 강할지 알 수도 없었다. 다시 말하자면 남지학의 말대로 또 언제 이렇게 술을 마실 기회가 주어질지 모른다는 뜻. 주백광은 지금의 이 순간을 즐기고 싶었던 것이다. 친우와 함께 술잔을 기울이는 이 순간을 말이다. 다른 사람들도 함께 술잔을 들어올렸다. 그들 역시 주백광과 같은 생각이었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모두에게 소중했던 것이 다. 왁자지껄 술을 마시고 떠드는 가운데 선주혁이 힐끔거리며 술 단지 안에 빠진 채 깨 져있는 사발을 보는 것을 눈치 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녕 깨져버린 사발에는 술을 담을 수 없다는 건가......?' Chap. 11 깨진 잔에 담겨진 술 <1> 유난히도 야음이 짙게 드리워진 날이었다. 곧 비라도 올 모양인지 하늘 가득한 먹구 름이 달마저 가려 코앞의 손조차 구분키 힘들었다. 그 야음을 가르는 아홉 개의 신형이 있었다. 건물 지붕을 밟으며 이동하는 그들의 움직임은 비조(飛鳥)의 그것보다 빠르고, 새벽 녘 안개가 다가오는 것보다 은밀했다. 허고을 가르는 파공성은 물론, 옷깃이 흔들리는 소리조차 내지 않고 있었다. 쾌속 무비한 속도로 이동하던 그들은 한 골목의 끝에서야 내려섰다. 선두에 선 자가 고개를 살짝 내밀어 전방을 살폈다. 그토록 짙은 어둠 속에서도 그의 시야는 구애를 받지 않는 듯했다. 그곳은 호남성 장사에서 가장 큰 건물이 있는 쪽이었다. 높고 큰 담은 성벽을 연상케 했고, 웅장한 건물들이 줄을 이어선 곳이었다. 사 장은 족히 될 법한 높이의 대문에는 용사비등한 필체로 쓰인 현판이 걸려있었다. 십전성. 정도 무림맹의 양 기둥이랄 수 있는 무림맹의 본단임을 가리키는 글자였다. "마후를 되찾는 것만이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활로입니다." 나직하지만 선명한 음성은 젊은 사내 특유의 생기를 지니고 있었다. 얼굴을 가린다기 보다 어둠에 더 녹아들고자 쓴 복면 아래의 음성에 여덟 명의 흑의 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각각의 눈에서 느껴지는 비장한 결의로 미루어 발언한 자의 말을 이해 못하는 이는 아무도 없는 듯했다. "북천검제, 창천무룡, 쾌도무적...... 그들 모두가 한꺼번에 자리를 비우다니...... 함정 은 아니겠나?" 흑의인 중 하나가 다소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대세력 전체가 심삼치 않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니 그 개 같은 놈들도 함께하고 있다고 봐야겠죠." 젊은 복면인의 대답에 다른 한 명이 물었다. "남지학, 그 자라새끼의 간계는 쉽게 볼 일이 아니네. 그 동안 죽어간 형제들을 생각 해보면......" "지금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언제까지 쫓겨만 다니며 죽음을 기다릴 겁니 까?" "......" 젊은 복면인의 말에 나머지 여덟 명의 복면인은 더 이상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이들은 동호대전에서 살아남은 패종회의 잔당이었다. 일신에 두려울 것이 없는 무공을 지녔건만 북천검제 남지학이나 창천무룡 남궁일을 상대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또한 쾌도무적 주백광 역시 쉬운 상대만은 아니었다. 더구나 천애백의단이라 불리는 떨거지들과 함께였기에 더욱 그랬다. "마후는 선주혁, 그 개 같은 놈의 거처에 억류되어 잇다고 합니다. 십전성 내부의 구 조는 모두 숙지하고 계시니 어떻게 움직여야할지 다시 설명 드리지 않겠습니다." 젊은 복면인은 최대한 조심성을 유지하며 말했다. "흥! 남 가 애송이나 남궁 가의 개자식만 없다면 정면으로 쳐들어가서도 마후를 구해 올 수 있네." "알고 있습니다만......, 더 이상의 인원손실만큼은 피해야 합니다. 이제 남은 것은 저 희 아홉이 다지 않습니까? 후일을 기약하기 위해서라도 모두 보중하십시오." 젊은 복면인의 간곡한 말에 흑의복면인들은 선뜻 동의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일단 침묵을 지켰다. 그가 절대십가의 후예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미 오만방자하던 과거의 그가 아니 었다. 조부와 부친을 잃은 후, 그는 크게 변한 것이다. 본시 뛰어난 자질을 가졌던 그가 신중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을 보이자 효과는 바로 드러났다. 지난 삼 년 간 그와 함께하며 천애백의단의 추격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 증 거였다. 만약 그가 애초부터 지금과 같은 모습만을 보였다면 그의 조부인 서문전이 회주의 뜻 에 어긋나는 생각을 품지 않았으리라. "마후를 구해내면 저희 모두 구음대법 본연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 때를 위 해서라도 저희 아홉 모두가 필요합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남지학 그 자는 회주를 죽일 정도의 고수니까요." 서문도옥의 마지막 말을 듣고서야 복면인들은 포기할 수 있었다. 그의 ㅁ라대로 인정 하고 싶지는 않지만 남지학이라는 애송이는 절대의 고수였다. 구음대법을 사용해 아 홉 모두가 상대한다 해도 승부를 장담키 힘들었다. 설령 이길 수 있어도 손실이 막대할 터. 그렇게 되면 서문도옥이 말하는 훗날의 기약도 수포로 돌아갈 뿐이었다. 단 한 명의 손실이라도 있어서는 안된다는 서문도옥의 말은 스스로 목숨을 아끼고자 하는 욕구 이전의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럼......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서문도옥의 말에 여덟 명의 복면인들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건물에 드리워진 그림자 속으로 모두 녹아들었다. <2> "무엇을 그리 생각하시나요?"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는 목소리였다. 선주혁은 그녀의 음성을 이렇게 가까이서 들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세상에서 가장 행 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한참동안의 상념에서 깨어나 선우유미를 바라봤다. "선우 아가씨와 이토록 오래도록 있을 수 있어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선주혁의 노골적인 대답에 선우유미는 고개를 숙였다. 면사 위로 드러난 얼굴이 붉어 지는 것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저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니까요. 저 같은 놈이 감히 어떻게 선 우 아가씨랑 함께 있을 수 있다고 생각을 했겠어요." "무슨 말씀을? 그 반대가 맞는 말씀이지요. 강호에 그 많은 해를 끼친 저 같은 게 감히 선 공자와 함께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무리일 것입니다. 선 공자의 특이한 상세만 아 니라면......" 선우유미의 말에 선주혁이 정색을 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선우 아가씨의 사정은 이미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 누구도 감 히 선우 아가씨를 비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선주혁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어졌다. "그리고 전! 제 몸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선우 아가씨와 함께 하고 싶었습니다. 선우 아가씨께서 불편해하지만 않으신다면...... 평생토록 이렇게 지내는 게 제 소원이랄 수 있을 것입니다." "선 공자......" 선우유미는 흔들리는 두 눈으로 선주혁을 바라봤다. 선주혁은 그녀의 아름다운 눈망울을 직시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를 바라만 봤다. 그럼에도 선주혁은 가슴 벅찬 행복감에 젖어 들었다. 한동안 그렇게 서 있던 선주혁이 헛기침과 함께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잠시 후, 문이 열리며 몽세화가 들어왔다. "아! 아직 안자고 있었네? 선우 동생이 밤새 간병할까봐 교대해 주러 왔는데......" 사정 상 같은 방내에 놓인 다른 침상에서 자는 선우유미와 달리 몽세화는 옆방에 기 거를 하고 있었다. 침상이 있음에도 늘 선주혁 옆 의자에 앉아 밤을 지새우는 선우유 미를 위해 종종 이 시간 때쯤 교대를 해주곤 했던 것이다. "네. 조금 생각할 게 있어서요." 선주혁이 조금 전의 분위기 때문인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그 때 선우유미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선 공자? 어떻게 몽 언니께서 오신 것을 미리 아신 거죠?" 선우유미의 말을 들은 몽세화 역시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선주혁의 수면을 방해 할 것을 우려, 경신공부를 발휘해 기척을 죽여 방 앞에 이르렀다. 따라서 무공을 익힌 고수라 해도 쉽사리 접근을 알아차리기 힘든 상황. 무공을 사용할 수 없는 선주혁이 그 기척을 알아챘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닐 수 없었 던 것이다. "그게......" 선주혁이 빙긋 웃으며 대답을 하려했다. 허나 곧바로 그의 안색이 변했다. 그리고는 선우유미의 손을 잡아 몽세화가 있는 방문 옆쪽으로 이동했다. "무, 무슨......?" 난데없이 손목을 잡힌 터라 선우유미가 놀라는 사이, 창문을 통해 시커먼 인영들이 나타났다. "감히!" 선자불래(善者不來)요, 내자불선(來者不善)이라. 이 야심한 밤에 흑의로 몸을 휘감은 자들이 선의를 가지고 방문했을 리는 없는 터. 몽세화의 노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질풍처럼 신형을 움직여 나타난 흑의인을 향해 옥소를 뻗어내는 몽세화였다. "흥!" 가벼운 코웃음과 함께 그대로 날아드는 옥소를 잡아채는 흑의인. 그 힘을 이기지 못한 몽세화는 흑의인이 손을 휘두르는 방향으로 이끌렸다. 상대의 힘이 거센 것을 느낀 몽세화는 감히 버티지 못하고 옥소를 손에서 놓았다. 이어 그녀는 신형이 움직이는 기세에 몸을 실었다가 발로 벽을 찼다. 날아갈 때보다 쾌속하게 다시금 흑의인을 향해 이동하는 그녀의 장심에는 위맹한 공 력이 실려 있었다. 하지만 흑의인의 무공은 그녀가 짐작하는 바를 한참이나 넘어서 있었다. 그는 가볍게 몸을 비틀어 몽세화의 일 장을 피해내며 그녀의 완맥을 낚아챘다. 완맥을 잡힌 몽세화는 전신의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며 그대로 축 늘어졌다. "몽 언니!" 선우유미가 놀라 외쳤다. 그녀가 몽세화를 언니[姐]라 부르는 소리에 흑의복면인은 장심에 집중되었던 공력 을 해소했다. 이어 손가락을 세워 아혈(啞穴)과 몇 군데의 혈도를 짚었다. 소란을 일으키는 것을 방 지하기 위함이었다. "마후를 뵙습니다." 나타난 아홉 명의 흑의인들은 선우유미를 향해 일제히 포권을 취했다. "당신들은......?" 선우유미의 음성이 떨려 나왔다. 야밤의 불청객들이 자신을 마후라 부른다는 것은 의 문을 가질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로서는 크게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들과 뜻을 달리했다. 그렇다고 해서 부친의 죽음을, 어린 시절을 함께 해온 가족과도 같은 이들 모두의 죽 음을, 한없이 외면할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살아남은 이들 중 대다수가 선주혁에 대한 복수라는 명분 아래, 강호의 정의라는 이 유 아래, 남지학을 비롯한 천애백의단의 손에 죽어갔다. 그럼에도 그녀는 고개를 돌린 채 지내왔다. 그들이 살아남았을 때, 더 많은 생명이 죽 어야 함을 끊임없이 되뇌며 스스로의 위안으로 삼아 왔다. 죽어간 그들의 영혼을 애도하는 것만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그렇게 믿고자 했다. 한데 그들이 자신을 찾아온 것이다. 선우유미로서는 격동하는 감정을 억누르기 힘든 상황이었다. 흑의복면인들은 일제히 복면을 벗었다. 선우유미에게는 모두가 친숙한 얼굴이었다. "마후! 이제는 안심하셔도 됩니다. 저희가 왔으니까요. 저희와 함께 이곳을 벗어나서 선친의 복수를 합시다!" 서문도옥의 말에 다른 한 명이 말을 이었다. "그렇습니다. 이곳에서 나가셔야 합니다. 선친의 뜻을 이어 저희와 함께 패종회를 다 시 일으켜 세우셔야 합니다!" 낮지만 애절한 음성이었다. "하지만......" 선우유미는 무의식 중에 선주혁을 바라봤다. "흥! 의식을 차렸다더니......!" 그제야 선주혁을 의식한 서문도옥이 이를 갈아붙이며 선주혁을 노려봤다. 나머지 여덟 명의 흑의인들 역시 전신에서 살기를 뿜어냈다. 오늘날 패종회가 이렇게 몰락한 데는 선주혁의 활약이 적다할 수없었다. 자연 이들로 서는 철천지원수가 되는 셈이었다. 선우유미는 선주혁의 앞을 가로 막았다. "모두 멈춰요!" 당장이라도 출수하여 선주혁의 목숨을 빼앗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선우유미가 말 했다. 이글거리는 두 눈으로 선주혁을 바라보던 서문도옥이 먼저 시선을 거뒀다. 하지만 다른 여덟은 쉽사리 포기하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선주혁을 쳐 죽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던 것이다. "무공을 잃어 폐인이 된 놈일 뿐입니다. 마후의 심기를 어지럽히지 않는 게 좋겠습니 다." 예전이라면 타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먼저 나섰을 서문도옥이었다. 한데 그가 냉정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을 보이자 몇몇이 살기를 거뒀다. "페인이 된 저대로 살아가는 게 놈에게는 더 큰 고통일 것입니다." 서문도옥이 나머지에게 말을 하자, 그제야 살기를 거두는 흑의인들이었다. 듣고 보니 그 말이 옳았다. 북천검제라 불리는 애송이에 못지않은 무공을 지녔던 그 가 무공을 잃고 폐인이 되었다. 무인에게 있어서 무공을 잃는다는 것은 절대적인 상실 감을 준다. 그러니 저대로 평생을 사는 게 더 큰 괴로움일 것이라 결론을 내린 것이다. 흑의인들이 모두 살기를 거두고 나서야 선우유미는 한숨을 쉬었다. 일단 선주혁이 위 기를 벗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잠시 호흡을 골라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는 이곳을 떠날 수 없어요." 예기치 못했던 선우유미의 말에 서문도옥을 비롯한 흑의인들은 크게 놀라는 표정이 었다. 서문도옥이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저희라면 마후를 이곳에서 안전하게 모셔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염려치 않으셔 도 됩니다." "아뇨! 제 안전을 위해서가 아니에요." 서문도옥과 흑의인들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한시라도 빨리 그 녀와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좋았다. 한데 전혀 예기치 못하게 선우유미가 자신들과 함께하길 거부하고 나선 것이다. 아무리 다급하다 해도 그녀는 전대 회주의 딸이자, 천음마후였다. 함부로 행동을 할 수 없는 상황인지라 서문도옥은 차분한 어조로 말을 꺼내들었다. "하면 다른 이유라도......?"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묻는 서문도옥의 질문에 선우유미는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잠시 갈등하던 그녀가 결연한 눈빛으로 말했다. "모두 이대로 돌아가 주세요. 그리고...... 그리고 더 이상 저를 찾지 말아 주세요." "마후!" 서문도옥의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격앙된 감정을 억누르고 음성을 낮추기 위함이 었다. "부탁이에요." "마후! 어째서입니까? 어째서 저희를 거부하시는 겁니까? 저희가 이 무림에서 어떤 일을 당했는지 잊으신 겁니까? 마후의 선친께서 어떻게 세상을 뜨셨는지 정녕 기억치 못하신단 말입니까?" 점차 고조되는 서문도옥의 어깨에 손이 올려졌다. 그보다 침착한 표정의 노인이 얹은 손이었다. "아무래도 놈들에게 금제(禁制)를 당하신 모양일세." 그제야 서문도옥이 놀라 물었다. "놈들이 독약이라도?" 독약을 복용시킨 후, 정기적으로 해약을 주는 방법의 금제는 무림에서 흔한 수법이랄 수 있었다. 선우유미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런 게 아니에요. 이곳에 머무르겠다는 건 제 의지에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서문도옥이 두 눈에 핏발을 세웠다. 당최 납득키 힘든 선우유미의 행동 때문이었다. "아버님과 저는 약속했어요. 아버님께서 살아계시는 동안 당신의 뜻에 따르기로...... 그러니 이제는......, 이제는 제가 원하는 삶을 살 거예요." "당신이 원하는 삶이란 게......, 선친을 죽음으로 몰고 간 자들과 함께하는 것입니까?" 서문도옥의 어조가 거칠어졌다. 한 마디, 한 마디에 노기가 담겨져 있었다. 이마에 드 러난 푸르스름한 혈관이 그가 얼마나 노기를 억누르기 위해 노력하는지 고스란히 보 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선우유미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제가 원하는 삶은 천음지력이 누군가를 죽이는데 사용되지 않는 것뿐이에요." "고작 그딴 말을 듣고자 우리가 이곳까지 온 거라 생각하십니까?" 급기야 서문도옥의 한계를 넘어선 선우유미였다. 서문도옥과 백존들로서는 선우유미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개처럼 쫓기다 죽어갈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 유일한 희망이 자신들을 배신했다는 생각에 노기는 걷잡을 수 없이 치솟았다. 그것은 분노 이상의 ㄱ마정으로 그들을 살기에 젖게 했다. "마후......, 당신이 원하던 원치 않던 우리는 당신을 데려갈 것이오!" 이를 갈아붙이며 말을 씹어 내뱉는 서문도옥이었다. "저를 데려가도 소용없어요. 저는 살인을 위해서 천음지력을 사용하지 않을 테니까요." 선우유미 역시 비장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녀의 말은 거짓이 아닐 것이다. 천음지력이 무작위로 방출되는 것이 아니라 특정인 에게 집중할 수 있음이 지난 번 동호에서 드러났다. 다시 말하자면 의도적으로 천음지 력을 제어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고작 그 정도에 포기할 서문도옥과 백존들이 아니었다. "그것은 두고 보면 알 일이지." 숙였던 고개를 꼿꼿이 세우며 서문도옥이 말했다. 이제는 그녀를 위한 예우가 끝이 났음을 알리는 동작이었다. "푸훗!" 현재의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웃음소리였다. 중인들의 시선이 모두 웃음의 진원지로 쏠렸다. 선우유미의 뒤쪽에 서 있는 선주혁이 웃음을 터뜨렸던 것이다. "결국은 그렇게 본색을 드러내는군." "놈!" 서문도옥의 살기가 크게 일었다. "처음에는 선친의 복수니, 어쩌니 하더니...... 결국은 자신들을 위해서일 뿐. 그녀가 어떤 생각이든 관계없다는 거잖아." 선주혁은 마치 서문도옥의 살기를 느끼지 못하는 듯 태연하고 여유롭기만 한 어조로 말했다. "네 놈이 명을 재촉하는구나." 예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손가락 하나로도 선주혁을 죽일 수 있는 서문도옥이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출수하여 선주혁을 죽일 기세를 뿜어냈다. "그를 해치면 이 줄을 당기겠어요!" 어느새 문 옆에 드리워진 줄을 잡은 선우유미가 말했다. 서문도옥의 눈썹이 역팔자로 치솟았다. 한 눈에도 저 줄이 어떤 용도로 쓰이는 건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정녕 당신이?" 서문도옥이 다시금 분노를 일으킬 때, 흑의인 중 하나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작은 빛살 하나가 허공을 갈라 줄의 윗부분을 잘라냈다. 힘없이 늘어지는 줄을 보며 선우유미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히 드러났다. 서문도옥 하나라면 자신이 막아설 수 있을 것이다. 고련을 통해 무공을 익힌 적이 없 다지만 그녀 자신이 가진 가공할 천음지력을 통해 대충 손을 쓰기만 해도 어지간한 고 수는 상대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나머지 여덟 명의 백존은 그녀의 상대가 아니었다. 천음지력으로 스스로를 보 호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혈도가 점해지던 완맥을 잡히던 어떻게 해서든 제압당할 것 이 분명했다. "원수를 감싸기 위해 우리를 저버리려 들다니!" 서문도옥이 걸음을 옮겼다.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살기의 범주에는 선우유미도 포함되어 있었다. 말을 듣지 않으 면 그녀를 죽일 수 있다는 무언의 압력을 넣는 것이다. 그 때 다시금 태연한 말소리가 들렸다. "깨진 사발은 술을 담을 수 없는 법이지." 뜬금없는 소리에 서문도옥이 다시금 선주혁을 바라봤다. 선주혁은 선우유미의 곁으로 나서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사발이 단지에 빠지면 어떻게 될까? 술은 단지 안에 계속 담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무슨 헛소리냐?" "깨진 단지도 술을 담을 수 없겠지? 하지만 술로 만들어진 호수에 담겨진 단지는 어 떨까? 술은 주호(酒湖)에 담겨질 것이고...... 둑이 터진 주호는 어떨까? 바다에 넣으면 주해(酒海)에 담겨진 것이 아닐까?" "선 공자?" 선우유미가 떨리는 음성으로 선주혁을 불렀다. 선주혁은 그녀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아직 제 생각이 옳은지 확신은 없습니다. 그저 이런 생각을 해봤을 뿐이지요. 하지만 예전에도 말씀드렸듯......, 당신이 원하지 않는다면 누구도 당신을 데려갈 수는 없을 겁니다." 선주혁의 말에 선우유미의 두 눈이 크게 흔들렸다. "선우 아가씨, 당신은 저들과 함께 가고 싶습니까?" 선우유미는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럼 됐습니다." "무슨 개소리냐? 의식을 되찾은 게 아니라 미친 채로 깨어난 것이더냐?" 소란을 일으키면 안된다는 사실을 잊은 듯 서문도옥이 언성을 높였다. 그만큼 선주혁 의 망언이 그의 감정을 자극했던 것이다. 살기등등한 서문도오그이 위협에도 선주혁은 여전히 태연하고 여유롭기만 한 어조로 말했다. "무공을 잃은 것에 미련을 두지 않았지. 내게 있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으니......, 무 공도 필요없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리고 나 같은 놈이라도 이 세상에서 필요한 바를 행해야하기 위해서라면 무공을 되찾는 것 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무, 무슨......?" 선주혁의 발언에 서문도오과 백존들은 크게 동요했다. 과거 그가 백발마신으로 불리 던 시절, 그가 얼마나 강했는지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만약 무공을 되찾는다면, 이 자리의 모두는 죽음을 각오해야만 할 것이었다. 하지만 서문도옥의 두 눈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흥! 그깟 허세로 우리를 위협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더냐?" 지난 삼 년간 의식을 잃고 있다 얼마 전에 기적적으로 의식을 되찾은 선주혁이었다. 그의 내력이 모두 흩어졌다는 소문이 중원 전역에 알려진 터였다. 게다가 의식을 찾 은 후에도 천외무존이 다시는 무공을 익힐 수 없는 몸이 되었다는 소문 역시 바람처럼 빠르게 중원에 퍼지고 있었다. 설령 소문이 잘못된 것이라 해도 의식을 되찾고 나서의 짧은 기간 동안 본연의 무공 되찾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서문도옥은 선주혁이 허세를 부리는 거라 단정 지은 것이다. "허세라......? 글쎄?" "지금도 마후의 내기가 놈에게 유입되고 있네. 축기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소문은 사 실일세. 놈의 무공은 회복되지 않았어!" 흑의인 중 한 노인이 서문도옥에게 말했다. 그들 모두는 구음대법을 익히고 있었다. 천음마후의 음기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세심히 느끼는 것이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돌발적이랄 수 잇는 선우유미의 반응에 분노했던 서문도옥도 노인의 말을 듣고서야 천음지력의 흐름을 파악했다. 그의 입매가 비틀렸다. "그렇군! 마후...... 고작 이깟 놈을 살리기 위해 우리 모두를 포기했단 말이오?" 선우유미의 천음지력으로 선주혁이 연명해왔음은 외부에까지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었다. 하지만 천음지력의 흐름과 정황으로 미루어 그와 같은 사실은 쉽게 짐자이 가능했다. 서문도옥의 추궁에 또다시 선주혁의 느릿한 음성이 끼어들었다. "뭐...... 무공을 회복하지 않은 건 사실이야." "무공을 잃었다 해도 네놈 따위에게 베풀 자비는 없다!" 기본적으로 무림인들은 무공을 익히지 않은 자를 상하게 하는 것을 꺼린다. 하지만 서문도옥은 이전에도, 지금에도 그와 같은 것을 개의치 않았다. "말 귀를 못알아듣는군. 애초에 무공을 잃은 적이 없으니...... 회복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야. 적어도 지금의 내 생각은 그래." "끝까지......!" 서문도옥이 불같은 노기와 더불어 선주혁에게 살수를 쏟아내려는 순간이었다. 자신을 향한 선주혁의 태연한 시선이 그의 출수를 늦췄다. 무엇인가 거대한 기세가 선주혁쪽에서 느껴졌던 것이다. '이, 이놈이? 무공을 잃은 놈이 어떻게 이런 기운을......?' 서문도옥이 잠시 망설이는 사이, 선주혁이 말했다. "너희도 많은 피해를 입었지. 사형이 살아있는 내 복수를 한다고 많은 사람을 죽였으 니 말이야. 그냥 이대로 돌아가 보내 줄테니." 완전히 주객이 전도된 상황처럼 말하는 선주혁의 말에 서문도옥과 백존들은 치를 떨 었다. 지독한 수치심과 가증스러운 놈의 태도 때문이었다. 그들의 반응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 듯 선주혁은 선우유미에게 말했다. "선우 아가씨, 잠시 문 밖에 계시겠어요?" "선 공자!" "사실 저들 말대로 제 이야기의 반은 허세에요. 제 생각이 맞는다는 확신은 없으니까 요." 적을 눈앞에 두고 할 소리가 아니었다. 이에 서문도옥과 백존들에게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들은 선주혁이 진짜로 정신이상이 된 것이라 여기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귀머거리 가 아닌 이상, 저 소리를 듣지 못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제 생각이 맞건, 맞지 않건...... 이곳에서 흘리는 피를 선우 아가씨께서 보지 않으셨 으면 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한 번도 사용해 보지 않은 무공이라 조절할 자신이 없거 든요. 제 생각이 맞는다면 저들 모두는 이 자리에서 죽게 될 겁니다." "선 공자......, 당신은 정말......!" 결국 선우유미의 두 눈에서 맑은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당신을 보내지 않을 거예요!" 선주혁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선우유미는 그런 선주혁의 얼굴을 확인한 후, 걸음을 옮겨 방문 뒤에 섰다. 서문도옥 등도 그런 그녀를 막지 않았다. 지금의 상황에서 선주혁이 죽는 모습을 보 여주는 것이 외려 그녀를 자극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럼 시작해 볼까?" 선주혁이 서문도옥 쪽으로 한 걸음을 내딛으며 말했다. "미친놈, 죽엇!" 백존 중 하나가 선주혁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그리고 서문도옥과 백존 전원은 확신했다. 선주혁이 미쳤음을...... 모든 것이 허세에 불과했다는 것을...... 비조처럼 날아가 장력을 휘두르는 동료를 도외시한 채, 그는 손을 앞으로 내뻗고 있 었던 것이다. 공격이 날아오는 방향과 비슷하긴 했지만 명백히 겨냥이 잘못되었음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Chap. 12 연정만리(戀情萬里) <1> "이럴 수가......?" 떨리는 음성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시신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죽은 지 하루박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은설연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시신이 손에 쥐고 있는 검은 아직도 반짝이는 중이었다. 그럼에도 검의 주인은 썩어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 정도로 부패가 진행되었다는 것은...... 놈의 회복이 거의 다 이루어졌다는 뜻이군." 평범하게 생긴 노인이 암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염마 종극. 마교의 장로직에서 물러난 그가 다시 강호에 모습을 드러냈다. 천마비강 때문이었다. 누구보다 강력히 멸세강마대법의 시행을 주장했던 그였다. 따라서 천마비강으로부터 비롯될 혈겁을 막는데 있어서 그가 나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자가 죽은 지 하루밖에 되지 못했다는 것은 그만큼 놈과 가까워졌다는 뜻. 놈이 더 많은 무림인들을 죽이기 전에 막아야지." 비장한 음성의 주인공은 단목하진이었다. 멸세강마대법을 완성시킨 당사자인 만큼 그가 느끼는 책임감은 누구보다 강했다. "지각의 능력이 생긴 것은 확실해 보이지만 흔적을 감출 정도는 아닌 거 같습니다." 흐릿하나마 남아 있는 족흔을 살피며 남궁일이 말했다. "서두르지!" 말을 마친 은적비가 먼저 신형을 움직였다. 천마비강이 불어일으킬 혈겁은 세력을 구 분하지 않을 터였다. 강시의 무지막지한 위력을 알고 있는 그 역시 외면하고 있을 수 만은 없었다. 천사지황의 뒤를 이어 많은 수의 무림인들이 신형을 날렸다. 동호대란의 참가인원 중 상대적으로 고수라 불릴 수 있는 자들이 모두 다시 모인 것 이다. 그들 모두의 표정은 비장하기만 했다. 그들로서는 끔찍한 천마비강의 회복이 조금이 라도 더디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들은 종극의 등 뒤에 엎인 사제차림의 마교도를 보며 또 다른 희망을 품었다. 종극 이 자처해 등에 업은 그 사제의 주문이 천외무존의 조언으로 준비된 비책이었다. 저 비책이 먹히지 않는다면......, 이 자리의 모두는 물론 강호 전체의 미래는 없었다. 아니, 천하의 미래가 없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피에 물든 혈해(血海)가 누구에게 있어 미래가 될 수 있단 말인가? <2> 지독한 악취에 흑백 양도의 고수들은 인상을 찌푸렸다. 하남(河南) 학벽(鶴壁)에 자리한 종도문(宗刀門)에서는 숨을 쉬기조차 버거운 악취가 진동을 하는 중이었다. "아직 혈액이 응고되지 않았습니다." "부패도 거의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여기저기서 시체를 살피며 보고하는 소리가 들렸다. 종도문은 문도 백 여를 헤아리는 정의련 예하의 군소방파였다. 그러나 소수의 문원들 에도 불구하고 개개인이 걸출한 무공을 지녀 내실 있는 곳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하남에 자리한 소림(少林)이라는 거대문파가 아니었다면 종도문의 위상이 어찌되었 을지 모를 거라는 말이 나돌기도 했다. 그런 종도문이 지금은 지독한 악취와 붉은 선혈에 잠겨있었다. "생존자는......?" 단목하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악취나 끔찍한 시체들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들의 손으 로 만들어낸 마물이 참혹한 살상을 저질렀기 때문이었다. 그 역시 종도문에 대해 알고 있었다. 세력 간의 힘겨루기보다 무도 자체를 추구하는 문파였기에 일월신교와 마찰이 거의 없는 곳이었다. 그런 종도문을 이 지경으로 만든 천마비강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는 것이다. "생존자가 있습니다!" 누군가의 외침이었다. 잠시 후, 일월신교의 교도 한 명이 한 소녀를 데리고 왔다. 벽 뒤의 비처에 숨어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했다. 아마도 누군가 소녀를 숨겼으리라. "이 아이 뿐이더냐?" 종극이 어두운 안색으로 물었다. "더 이상은 없는 것 같습니다." 보고를 들은 남궁일이 앞으로 나섰다. "이제 괜찮아." 연신 눈물을 흘리던 소녀는 남궁일의 얼굴을 봤다. "아저씨는 정의련 남궁세가에서 왔단다. 남궁세가가 어딘지 알지?" 소녀는 열서너 살 여는 되어 보였다. 무가의 여식이니 종도문이 정의련 소속임을 알 리라 생각하고 신분을 밝힌 것이다.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들썩이던 어깨도 점차 잦아들었다.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 봤니?" "......" 이미 울음을 멈췄건만 소녀는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남궁일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천마비강은 이곳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는다. 곧 뒤 를 잡을 수 있는 거리에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무턱대고 쫓을 수는 없었다. 이곳에서 무려 백여 명의 무인들을 참살, 원정지기를 흡수했을 터. 천마비강의 회복 정도를 파악해야만 했다. 작은 정보가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살릴 수 있는 때였다. 그 열쇠를 눈앞의 소녀가 쥐고 있는 것이다. "네가 말을 하지 않으면 놈이 더 많은 사람들을 해치게 될 게다. 그러니......" "남궁 공자, 잠시만요......" 백화란이 남궁일의 옆으로 다가섰다. 남궁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끝까지 고 집을 부려 이곳까지 따라 나선 그녀였다. 불시에 가족을 잃는다는 것. 하룻밤 새 천애고아가 되어 세상에 의지할 데가 없어진다는 것에 대해 그녀는 잘 알 고 있었다. 남궁일은 백화란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시간이 더 걸릴 지라도 가급적 이 소녀에게서 많은 정보를 알아내야만 했다. 자칫 이 자리에 모인 전원이 목숨을 잃을 가능성까지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언니는 백화란이라고 해. 넌 이름이 뭐니?" 새롭게 다가온 이가 같은 여자이기 때문일까? 소녀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 유선." "문주의 혈육인가 봅니다." 누군가의 종도문 문주의 성(姓)을 아는 듯 그리 말했다. "언니도 얼마 전에 너와 비슷한 일을 겪었단다. 지금 네가 얼마나 무서운지, 또 얼마 나 슬픈지 언니는 알고 있어." 소녀는 다시 배고하란의 얼굴을 살폈다. 그리고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가늘게 떨리는 몸을 봐서 아직까지 나유선은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 시간을 주세요." 백화란은 그런 나유선의 손을 잡으며 남궁일에게 말했다. 남궁일의 시선은 남지학에게로 향했다. 무림의 수많은 명숙이 다수인 이 자리였지만, 실질적으로 이들을 이끄는 것은 북천검 제였기 때문이다. 남지학은 고개를 끄덕였고, 남궁일은 다시 백화란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백화란은 나유선의 손을 잡고 물었다. "조용한 공간이 있을까요?" <3> "그, 그런 말도 안되는?" 남궁백연이 두 눈을 크게 떴다. "피를 뒤집어 쓴 모습을 의복으로 착각한 것이 아니겠소?" 서동주 역시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듯했다. 사술에 능한 그였지만 강시가 의복을 갖 춰 입는다는 것은 금시초문이었던 것이다. "아뇨. 그 아이는 피에 젖은 의복임을 똑바로 이야기 했습니다. 종도문원들의 도에 여 기저기 찢겨나간 것까지요." "허어......!" 무림맹으로 향하던 중, 급보를 접하고 이곳으로 발을 돌린 덕양 진인이 짧게 기른 수 염을 매만지며 신음성을 흘렸다. 그럿이 천마비강의 요악함에 놀란 탓인지, 와중에 모 든 것을 봤다는 아이의 영특함에 감탄한 탓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아이가 놈의 무위까지 설명하던가?" 열서너 살의 나이에 무엇을 알까 싶겠냐만은 그들로서는 천마비강에 대한 정보가 그 만큼 절박했다. "사라졌다, 나타났다를 반복했다고 합니다. 모습이 드러나는 순간, 여지없이 종도문 원들이 목숨을 잃은 듯합니다." 아이의 안력으로 천마비강의 움직임을 쫓을 수는 없을 터. 더 이상을 기대하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읩고을 갖춰 입을 정도의 지능이 생겼다는 것 이상의 정보를 얻기 힘들 것 같았다. "한 가지 이상한 것은......" 백화란이 조금은 자신이 없는 어조로 말했다. "강시가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고 합니다." "뭐라?" "그럴 리가!" 중인들의 놀란 외침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강시가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 능한데 자신의 신분을 밝힌다는 것은 실로 믿기 힘든 일이었던 것이다. "잘 만들어진 강시 중에는 생전에 인연이 있던 자들을 보면 반응을 보일 때가 있긴 하 오." 은적비가 미간을 찌푸린 채로 입을 열었다. "멸세강마대법이 강시 제조의 극치라면 생전(生前)의 기억이 되살아날 수도 있는 건 가요?" 은설연이 물었다. "그렇다고도 그렇지 않다고도 말하기 힘들겠구나. 천마비강이라는 것이 기존에 알려 진 강시의 모든 것과 다르니 말이다. 설령 강시가 생전의 기억을 한다 해도 일반인과 같은 사고능력을 가지는 것은 무리일 게야. 지독한 마성에 젖어 있는 광인 정도의 수 준은 될지도 모르겠군." 냉혹하기 짝이 없는 천사지황이었으나 손녀에게의 대답만큼은 따스하기 이를 데 없 었다. 여하튼 지금으로서는 상식으로 천마비강을 이해할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사술의 종 사랄 수 있는 은적비가 저리 나오자 강시가 생전의 기억을 되찾았다는 가능성을 염두 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보통 강시는 생전의 무공이 뛰어난 인물을 재료로 해서 만들어지죠?" 은설연이 고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흠...... 나도 그게 걱정이구나. 그렇지 않아도 지독한 마물이거늘...... 무공에 대한 기 억이 되살아났다면......" 은적비의 말에 무림인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동호에서 봤던 그 엄청난 마물이 무공 까지 사용할 수 있다면 상황은 극단적이었다. 이 자리의 누구도 목숨을 보전치 못한다는 말에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이에 단목하진이 빠르게 명을 내렸다. "남은 강시가 누구의 시신이었는지 조사토록 하게." "존명!" <4> "이대로 정면승부를 하는 건가요? 좀 더 명확한 대책이 필요할지도 모르잖아요?" 은설연은 이전에 비해 한껏 맥이 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남아 잇는 천마비강의 생전 신분이 밝혀졌다. 구유마존(九幽魔尊) 헌원필(軒轅苾). 전전대에 마교에서 장로를 지낸 그는 당대의 교주보다 무공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앞에 나서기보다 홀로 괴이한 연구에 몰두하길 좋아하는 터라 교주의 직위를 고사했다고 한다. 기문진식에서 사술은 물론 고대 유물에 대한 관심까지 그가 관심을 가진 범위는 넓었다. 어쩌면 당시 그가 했던 어떤 연구의 결과가 지금처럼 강시가 되어서까지 일정부분 의 식을 되찾는 단초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헌원필의 무공이 그토록 뛰어나다는 것은 무림인들에게 절망적인 소식이었다. 고수 본연의 감각을 기억해내는 것만으로도 천마비강의 위험도가 얼마나 높아지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추적을 늦추면...... 그만큼 놈의 회복이 진행될 것이오." 남지학이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강시와 우리가 다른 점을 생각해보자고요. 강시가 아무리 사고를 할 수 있다지만 우 리만 하겠어요? 함정이라든가......, 그런 걸 준비해 가둘 수도 있잖아요." 은설연이 언성을 높여 말했다. 지금 이대로 천마비강을 상대하는 것이 너무나도 위험 해보였던 것이다. 그리고그녀의 심정은 다수의 무인들도 공감했다. 동호에서 보았던 천마비강에 대한 기억은 악몽 자체였다. 뭔가 손상된 상태라지만 이지를 발휘하고, 무공까지 사용할 지 도 모르는 상태였다. 따라서 당시보다 더욱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것이 그들의 염려였다. 그런 천마비강을 지금 모인 자들의 무공과 인원수만으로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생각이 자꾸만 드 는 것이다. "놈을 가둘 함정을 만드는 것이 가능하겠소?" "세상에 불가능한 일은 없어요." "설령 그런 대단한 함정을 만들 수 있다 해도 그 기간이 얼마나 걸리겠소? 그 사이 죽 어갈 사람들을 생각해야 하오." 남지학은 단호했다. "그렇다고 이렇게 무모하게 죽으러 갈 필요가 있나요?" "놈이 얼마나 회복되었는지 아직은 알 수 없는 상황이오. 미리부터 절망할 이유는 없 소. 더구나 우리게도 대책이 있지 않소?" "효과가 없으면 어쩌죠?"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소.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수단이니만큼 최대한 활 용해봐야 할 것이오." "차라리 놈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최선은 아닐까요? 바다를 건너든, 산맥을 건너든......, 피난처를 찾는 방법도 있잖아요." 은설연의 주장이 지금 두려움을 느끼는 중인들이 가진 심경의 대변이었다. 적어도 자 신들이라면 천마비강을 피해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지금 당장 목숨을 빼앗 기는 것보다 하루라도 더 사는 쪽이 훨씬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체면상 직접 그런 말을 거론할 수 없는 사람이 다수였다. "다른 사람의 죽음을 외면하고 나홀로 살아남을 생각은 전혀 없소." "당신을 비롯한 우리에게 천마비강을 상대해야할 책임은 없어요." 은설연의 말에 단목하진이 나섰다. "천마비강은 본교에서 만든 물건이오. 책임은 우리가 지겠소. 놈을 상대하기가 두렵 다면 모두 돌아가셔도 좋소." 단목하진은 십만의 교도를 통솔하는 교주답게 당당한 모습이었다. 그의 말에 서로가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생존의 확 률이 높아진다. 비록 제한적이라 해도 그것은 커다란 유혹이 아닐 수 없었다. "은 소저, 당신의 말은 틀렸소." 중인들이 눈치를 보는 사이, 남지학이 말했다. "이 자리의 대부분은 그 책임이 있소이다." "......?" "사제가 어찌하여 우리를 살리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했다고 생각하오?" 남지학의 한 마디에 무인들은 고개를 숙였다. 그랬다. 이 자리의 대다수는 선주혁에게 생명의 빚을 지고 있었다. "사제가 자신의 삶을 도모하고자 했다면, 이 자리에서 지금 하늘을 볼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오. 사제의 그런 희생을 통해 살아있는 우리가 삶을 도모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외면한다면...... 과연 사제는 왜 자신을 희생한 것이겠소?" "......!" "적을 두고 등을 돌린다면 어찌 무인으로서 가슴을 펴고, 당당히 설 수 있겠소? 나는 무인으로서의 길을 다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라 생각하오. 그것이 사제가 온 몸을 던 져 내게, 아니 우리에게 준 교훈일 것이오!" 남지학의 한 마디, 한 마디는 비수가 되어 무림인들의 가슴을 찔렀다. 패종회와 맞섰 던 것이 불과 삼 년 전이다. 목숨을 건 일전에 나섰던 그들이 어느덧 삶의 달콤함에 젖 어버렸다. 아니 막연한 강자였던 패종회를 상대하기에 나섰던 것과 절대적인 상대인 천마비강 을 상대하는 자세 자체가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지금 자신들이 가진 삶에 대한 애착은 무인으로서의 삶과는 거리가 있었 다. 피할 수 없는 승부를 외면하고서는 무인임을 자처할 수는 없는 것이다. "정의련은 북천검제와 함께 할 것입니다." 남궁일이 결연한 어조로 남지학에게 말했다. 누구보다 선주혁을 존경하는 그의 입장 에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무림맹도 빠질 수는 없지요." 한조백의 후임으로 무림맹주의 위에 오른 혁련기였다. 주색잡기에 빠져 허송세월을 하는 것만 같았건만 그의 능력은 탁월하다는 정도로는 표현이 부족했다. 고작 삼 년 여의 시간 동안 엉망이 되었던 무림맹을 정상적으로 되돌린 것만 봐도 그 의 역량을 짐작할 수 있었다. 세인들은 그제야 한조백이 방탕하기만 한 것 같았던 혁 련기를 총애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본좌도 간다." 짧디 짧은 한 마디. 그것은 천사지황 은적비의 음성이었다. 아수라멸천진을 발동, 자칫 무림을 공멸의 길 로 몰고 갈뻔했던 사파연합이다. 그 참사를 막아준 것이 바로 천외무존이다. 더불어 목숨의 빚까지 진 터. 혼자 살겠다고 이 자리에서 빠져나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지금은 저토록 반대를 하고 있다지만 손녀인 은설연은 필시 남지학을 따라갈 것이다. 조부로서 손녀를 사지로 몰아놓고 혼자만 살겠다고 도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전원이 지원을 하고 나서게 된 셈이었다. 하지만 정작 천마비강을 상대하기 위해 종도문에서 출발한 이는 많지 않았다. 가공할 힘을 가진 천마비강을 상대하는 데 있어서 숫자는 중요치 않기 때문이다. 어지간한 무공을 지닌 자라면 외려 방해만 될 터. 소수의 강자들만 선별하여 천마비강을 상대하기로 한 것이다. <5> "한 가지만 약속해 줘요." 수색조가 천마비강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는 사이, 무인들은 저마 최후의 일전에 대 비하고 있었다. 남지학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용히 호흡을 고르며 천마비강과의 일전을 위해 마음의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한데 은설연이 다가와 난데없는 약속을 요구하는 것이다. "무엇을 말이오?" "상황이 좋지 않다 싶으면...... 일단 목숨을 구하고 보겠다고 말이에요. 최선을 다했 음에도 상대가 되지 않는 적을 두고 후일을 기약하는 것은 무인으로서 부끄러운 게 아 니잖아요!" 강한 어조로 주장하는 은설연을 보며 남지학은 싱긋 웃었다. "은 소저." "약속해 줘요." "난 죽지 않을 것이오!" "정말이요?" 은설연의 표정이 밝아졌다. "반드시 천마비강을 처치하고 말 것이오." "하지만 천마비강이 완전히 회복되었다면......" "그렇다고 해도 나는 죽지 않겠소." "무슨 비책이라도 있나요?" 은설연이 바짝 다가서며 물었다. "사제와 약속했소. 절대로 죽지 않겠다고!" 남지학의 말에 은설연의 커다란 눈이 흔들렸다. '당신은 이 순간에도 오직 사제뿐이군요.' 남지학은 은설연의 애환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듯 무심하게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난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오." "하고 싶은 일......, 그게 뭔가요?" 은설연은 애써 표정을 밝혔다. 어쩌면 지금의 이 대화가 남지학과 함께할 수 있는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조금이라도 어두운 모습을 그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목소리에 힘이 빠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누군가에게 쫓기지 않고, 또 누군가를 쫓지 않고......, 은 소저와 산천(山川)을 유람 해보고 싶소." "네?" 은설연의 봉목이 크게 떠졌다. "사실 그동안 쫓거나 쫓기기만 하면서 천하를 주유하지 않았소? 훌륭한 경관을 곁에 두고도 감흥을 느낄 여유조차 없었으니 실로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구려. 해서 이번에 는 마음 편히 유람이나 해볼 생각이오." "남 소협!" "아! 물론 은 소저가 허락한다는 전제하에서 말이오. 아무리 빼어난 경관이 눈앞에 펼 쳐진다 해도, 어쩐지 은 소저가 없으면 제 감흥이 나지 않을 것 같은데...... 나와 같이 가주겠소?" 소리를 질러서라도 당신과 함께 가겠다고 말하고픈 은설연이었으나, 그녀는 입을 열 어 대답하지 못했다. 왠지 모를 설움이 한꺼번에 밀려오며 눈물이 치솟았기 때문이다. 아니 기쁨에 겨운 눈물일 것이다. 애써 눈물을 참는 게 쉽지 않아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입을 열면 목놓아 울지도 모를 것만 같아서였다. 무심하기가 목석과도 같아 자신의 마음을 전혀 몰라준다고 그간 얼마나 원망을 했던 가? 그런 남지학이 마지막일지 모를 이 순간에 마음을 드러내 보이니 야속하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 그 복잡한 상황을 만들어낸 감정이 너무도 격해 그녀는 스스로를 제어 할 수가 없었다. "그 눈물......, 허락의 뜻으로 받아들이겠소." 남지학이 그답지 않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결국 은설연은 울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남지학은 어깨를 들먹이며 우는 은설연의 어깰르 살포시 안았다. 은설연은 그런 남지학을 거부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의 품에 파고들어 울고 또 울었다. 서럽고도 기쁘게...... 그런 두 살마의 곁을 지나가며 편복마왕 남백연이 으름장을 놓았다. "오늘 뿐일세. 연아를 울리는 걸 봐주는 거 말이야. 다음에도 그 아이를 울리면 자네 가 아무리 천하제일의 무공을 지녔다 해도 노부가 가만있지 않을게야!" 꽤나 험악한 표정으로 남지학을 위협한 남백연은 뒷짐을 지고 걸어가며 중얼거렸다. "좋을 때구나!" 그의 한 마디에 많은 사람들은 웃음을 머금었다. 천마비강의 소재가 파악되는 즉시 생사를 건 일전을 눈앞에 둔 지금이었다. 한데도 연인은 서로 사랑을 확인하고, 노인은 이를 부러워하며 좋을 때라고 말하니 한껏 고조된 긴장감이 풀어지는 것이다. 모순된 상황이건만 어쩐지 입가에는 미소가 감돌았다. 이는 자리에 남은 모두가 스스로 선택한 길을 후회 없이 가고 있음을 입증하는 단면 이었다. "놈의 위치가 파악되었습니다." 최근 풍협이라 불리며 젊은 무인들 중 두각을 나타내는 명주운의 외침이었다. Chap. 13 결전(決戰) 활현(滑縣) 인근의 강변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마치 가을 하늘의 그것처럼 유난히도 석양이 붉게 드리워진 탓이었다. "크으으으!" 타오르는 듯 이지러지는 석양을 바라보며 흑의의 괴인영이 낮은 신음성을 흘렸다. 잔 뜩 일그러진 인상 중에 유독 시선을 끄는 건 두 눈이었다. 짙은 녹광이 뻗어 나와 기이하기 이를 데 없는 느낌을 자아내기 때문이었다. 형편없이 찢어진 의복이 강바람에 휘날린다. 하늘을 향해 울부짖던 괴인은 들어 올렸던 고개를 바로 한다. "누...... 군...... 가?" 느릿한 어투는 마치 말을 처음 배운 아이의 그것처럼 어눌하기만 했다. 주의를 기울 이지 않으면 알아듣기 힘들 정도였다. 숲을 향한 괴인의 안광이 짙어진다. "쳇! 들킨 건가?" 한 사내가 투덜거리며 나무 뒤에서 나선다. 선이 굵은 용모에 대도를 어깨에 걸쳐 멘 자였다. "설마하니...... 대화가 가능할 정도일 줄이야!" 사내의 뒤를 눈부신 미녀가 따르며 놀라워했다. 주백광과 단목지민이었다. 천마비강을 찾아 강변을 수색하던 두 사람은 괴성을 듣고 이곳으로 향했다. 무엇인가에 괴로워하는 듯한 천마비강을 발견하고 몸을 숨겼으나 그만 들키고 만 것이다. "저 정도면 살아있는 인간과 다름없잖아?" 주백광의 말에 괴인, 아니 천마비강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살아...... 있는......?" "뭐야? 알아듣기까지 하는 거야?" 주백광이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그리고 단목지민에게 물었다. "당신 아버지는 대체 어떤 물건을 만들어낸 거요? 강시라면 거 왜 관절이 뻣뻣한 채 로 깡충깡충 뛰어 다녀야 정상 아니오?" 주백광의 너스레에도 단목지민은 감히 여유를 가질 생각을 하지 못했다. 천마비강에 게서 느껴지는 막대한 마기가 그녀의 신경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단목지민은 후회하고야 말았다. 억지로 고집을 부려 강시를 상대하는 무리에 끼어든 것이다. 한데 저와 같은 마기를 대하자 생각나는 것은 오직 하나 뿐이었다. 자신이 죽을지 모 른다. 아니, 죽을 것이다. 강박에 가까운 한 가지 생각이 엄청난 무게로 자신을 짓누르 자 이 자리에 나선 것 자체가 후회되고 있었다. "강...... 시......?" 자신의 말에 반응을 보이자, 주백광은 곧바로 말을 이었다. 지금으로서는 원군이 오 길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래, 강시! 모르겠냐? 넌 이미 죽은 몸이라고!" 내공을 실어 천마비강을 향해 외친 주백광이 단목지민 쪽으로 살짝 고개를 돌리며 낮 은 음성으로 말했다. "강시와 대화를 하는 것도 제법 재미가 있구려." 주백광의 말에 단목지민은 결국 미미한 웃음을 지었다. 그가 왜 저런 쓸데없는 말을 하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나친 긴장은 본연의 능력을 발휘하는 데 장애가 된다. 아차 하는 순간 죽을 수 있는 상황에서는 최악인 것이다. 그는 자신의 얼굴에 드리워진 공포와 후회를 읽었을 것이 다. 그래서 저런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 분명했다. "죽...... 어? 내...... 가? 난...... 헌...... 원...... 필! 죽지...... 않았어." 아마도 천마비강은 생전의 기억을 되찾아 가는 과정에 있는 듯 했다. 두 눈의 녹광으 로 인해 자세히 살필 수는 없지만 크게 혼란스러워하는 것만은 분명했다. "죽었어! 네놈이 있어야할 곳은 무덤이지, 여기가 아니라고!" 주백광은 다시 한번 내력을 실어 외쳤다. 강변에 있는 다른 이들에게 위치를 알리는 것이다. "크아아아아!" 천마비강은 입을 쩍 벌리며 괴성을 토해냈다. "이런! 내가 성질을 건드렸나 본데?" 아직까지 원군이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적어도 성화와 주문을 외울 사제가 도착하 기 전까지는 시간을 끌어야만 했다. "아, 아니. 뭐...... 그렇다고 화낼 필요는 없다고. 무덤이 답답하면 바람을 좀 쐴 수도 있는 거지. 아하하핫!" 주백광이 애써 천마비강을 진정시켜 보려 했으나 이미 강변은 지독한 마기로 가득 차 오르고 있었다. "크으...... 죽...... 인...... 다!" 낮고 섬뜩한 천마비강의 말에 주백광이 난색을 표했다. "아직...... 대화가 원활히 이뤄질 정도는 아닌가 본데?" 말이 끝나자마자 주백광의 신형이 꺼지듯 사라졌다. 천마비강은 이미 사람을 죽여 원 정지기를 흡수해 스스로를 회복하는 법을 터득했다. 그런 천마비강이 죽인다는 발언 을 한 이상,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가만히 서 있다가 공격을 받게 되면 단목지 민까지 함께 위험에 처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어디에서 말하는 것인지 눈으로 보지 못할 만큼 빠른 속도로 이동에 이동을 거듭하며 주백광이 외쳤다. 단목지민은 그것이 자신을 향한 말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녀는 주백광의 말을 쫓지 않았다. 두려움에 젖어 후회를 했던 것도 잠시. 스스로 미끼가 되어 천마비강의 시선을 돌리려는 주백광을 두고 혼자만 도주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대 일월신교의 십만교도를 이끄는 교주의 딸이었다. 그리고 여자이기에 앞서 당당한 무인이기도 했다. 소매 안쪽에서 엄지손가락만한 막대기를 꺼낸 후, 끝에 달린 줄을 잡아당기는 것이 주백광의 외침에 대한 그녀의 반응이었다. 막대기 끝에서 붉은 불꽃이 쏘아지더니 허공에서 흩어졌다. 신호탄을 발사한 것이다. 하늘에서 빛이 번쩍하자 천마비강의 시선이 그것을 쫓았다. "죽엇!" 그 틈을 놓칠 주백광이 아니었다. 어느새 도신을 드러낸 주백광의 대도가 일순간 서른여섯 번의 초식을 쏟아낸다. 눈부신 도광이 강변에 번쩍인다. 초식과 초식의 간극이 존재하지 않는 극쾌의 도법. 분광심십육절이 펼쳐진 것이다. "드, 들어갔다!" 삽십육 초 모두가 천마비강의 몸에 작열했다. 이 정도라면 끝장을 낼 수 없을지라도 꽤 큰 타격을 입었을 터였기에 주백광은 한숨 을 쉴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만의 바람이었을 뿐임을 깨닫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충격에 겨워 꼼짝도 못하는 것 같던 천마비강이 신경질적으로 손을 휘둘렀고, 막대한 암경이 밀려와 주백광을 강타한 것이다. 대경한 주백광이 다시금 분광삼십육절을 펼쳐냈다. 하지만 한 순간의 방심으로 인해 미처 초식을 다 펼쳐내기도 전에 장력에 적중당하고 말았다. "크억!" 바튼 신음성만을 남긴 채 주백광의 신형이 실 끊긴 연처럼 날아 올랐다가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리고 피를 게워내는 주백광. 그의 눈에 어린 경악은 비단 이십사 초식에 걸쳐 암경을 해소했음에도 이와 같은 위 력이 발휘되었기 때문도, 자신이 단 일 초에 중상을 입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가 놀라는 이유는 천마비강이 발출한 암경 자체 때문이었다. 아무렇게나 손을 휘둘러 발출한 경력이 아니었다. 손짓은 형(形)을 이뤘고, 정해진 투로를 쫓았던 것이 분명했다. 다시 말해 천마비강이 무공을 전개한 사실이 그를 경악케 하는 것이다. 우려하던 바가 현실이 되고 말았다.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주 대협!" 단목지민은 한 사발은 족히 됨직한 피를 쏟아내는 주백광의 모습에 놀란 모양이었다. 그녀는 주백광을 향해 신형을 움직였다. 하지만 채 반도 가지 못해 끔찍한 기운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것을 느꼈다. 천마비강이 다시 한번 장력을 날린 것이다. 단목지민의 눈이 절망에 젖었다. 그녀가 익힌 화무난천장의 수준으로 감당할 수 있는 장력이 아니었던 것이다. 모든 것을 포기하는 순간. 날카로운 파공성과 둔탁한 타격음이 그녀의 코앞에서 들려왔다. 땅바닥을 뒹굴던 주백광이 어느새 그녀의 앞을 가로막아 도를 휘두른 것이다. "주 대협!" "괜찮소?" 천마비강의 장력이 워낙 강력했던 탓에 전신이 여파만으로도 피부가 따가울 지경이 었으나 부상은 없었다. "네, 괜찮아요." 단목지민이 빠르게 대답했다. "다행이구려." 주백광은 어쩐지 힘겨워 보이는 음성으로 말했다. "주 대협?" 단목지민이 부를 때, 그는 이미 비스듬히 쓰러져가고 있었다. 단목지민이 재빨리 주백광을 부축했다. 그의 몸을 받쳐 드는 순간, 단목지민은 뜨끈뜨끈한 액체가 자신의 손을 적시고 있음 을 느낄 수 있었다. "세상에......!" 주백광의 옆구리가 맹수에게 물린 것처럼 뜯겨나가 있음을 발견한 단목지민이 소리 쳤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피 사이로 당장이라도 내장이 흘러나올 듯 보였다. 천마비강의 존재를 잊기라도 한듯 단목지민은 재빨리 주백광을 땅에 뉘였다. 이어 품안을 뒤진 그녀는 단환 한 개를 꺼내어 주백광의 입에 넣었다. 천마비강의 시독(屍毒)은 지독하기 짝이 없었다. 상처를 입게 되는 순간부터 부패가 시작되는 것은 시독 탓이었다. 단목지민이 주백광에게 복용시킨 것은 시독을 중화시 키는 일종의 해독단이었다. "피...... 하......" 주백광은 고통 속에서도 단목지민에게 피할 것을 권유했다. 하지만 그가 말을 할 때는 이미 늦은 상태였다. 천마비강이 두 사람을 향해 다시금 거력을 발출한 것이다. 단목지민은 시선을 주백광의 눈에서 거두지 않았다. 최후의 순간. 자신을 위해 몸을 던진 그의 얼굴을 보며 생을 마감하고 싶었던 것이다. 쿠아아아앙. 엄청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굉음이 귓가를 울릴 때, 그녀는 죽음을 생각했다. 하지만 거칠게 불어 닥치는 바람 속의 모래들이 피부를 따갑게 하는 느낌에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아직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흙먼지 속에서 남지학의 음성이 들렸다. "주 대협을 모시고 뒤로 물러나시오! 어서!" 그제야 단목지민은 남지학이 천마비강의 장력을 막아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재빨리 주백광을 안아든 그녀는 태어나 지금까지 중 가장 빠른 속도로 이동하기 시작 했다. 콰아아아앙. 다시금 울리는 폭음. 그것은 막 도착한 단목하진이 천마비강을 공격한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주문을!" 단목하진의 외침에 종극은 등 뒤의 사제를 땅에 내려놨다. 사제는 연신 주문을 외우며 성화로 허공에 도형을 그리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아!" 흙먼지 속에서 천마비강이 괴성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분명 단목하진의 장력에서 비 롯된 괴성은 아니었다. "효과가 있어요!" 뒤늦게 도착한 은설연의 외침이었다. 그녀 역시 고집을 꺾지 않고 남지학을 따라 나 섰다. 그녀로서는 죽어도 함께 죽는다는 각오였던 것이다. 한데 주문과 성화에 강시가 반응하는 것을 확인했다. 그 사실만으로 은설연에게는 희망이 되어주었다. "조심!" 은설연의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일까? 천마비강의 무시무시한 장력이 은설연을 향해 쏘아졌다. 막강한 경력에 어찌할 줄 몰라 하는 은설연의 몸이 허공에 떠올랐다. 누군가 그녀의 신형을 낚아 채, 장력의 범위에서 벗어난 것이다. "할아버지!" 천사지황 은적비가 손녀의 위기를 보고 구해낸 것이었다. "놈은 아직 본능적으로 무공을 발출하고 있을 뿐인 듯하오!" 은적비가 단목하진과 남지학을 향해 말했다. 막대한 암경에 비해 충실한 바가 느껴지지 않는 장력임을 간파한 것이다. "할아버지, 놈이 주문에 영향을 받고 있어요." 은설연이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조부에게 고했다. 은적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놈의 마기가 잦아드는 순간을 노려야 하오!" 은적비의 외침에 먼저 움직인 것은 남궁일이었다. 창궁검을 곧추 세운 그는 스스로 거대한 검이 되었다. 남궁세가가 자랑하는 창궁무애검법이 전개된 것이다. 지난 삼 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이 신음성을 흘리는 천마비강을 향했다. 쿠아아아앙. 지축을 울리는 거대한 힘. 남궁일의 창궁검은 허공에 멈춰 있었다. 마기가 잦아드는 순간을 정확히 노렸건만 천마비강은 손을 들어 올려 자신을 쳐오는 검을 막아낸 것이다. "매, 맨손으로......?" 검강이 아니더라도 쇠를 무 자르듯 하는 창궁검이었다. 거기에 창궁무애검법까지 더 해졌건만 천마비강이 맨손으로 검을 저지했다. 예건된 천마비강의 강함이었음에도 남 궁일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조심!" 남궁일이 당황하는 사이, 천마비강의 좌수가 그의 옆구리를 파고들고 있었다. 경고성에 정신을 차린 남궁일은 검을 빼내어 수비를 하고자 했다. 하지만 천마비강의 손에 잡힌 검은 꼼짝 조차 하지 않았다. "흡!" 남궁일은 분신과도 같은 창궁검을 손에서 놓고서야 간신히 천마비강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삼 장 여를 뒤로 물러선 남궁일이 놀란 심정을 가라앉히려고 할 때였다. 파앗. 그의 가슴에서 난데없이 피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천마비강의 장력이 곁을 스쳐 지나갔을 뿐인데도 그 여파를 이기지 못하는 것이다. "용조파금수(龍爪破金手)!" 단목하진의 놀란 외침이었다. 용조파금수는 호신강기를 종이처럼 찢는 위력을 가진 수공으로 마교의 절기 중 하나 였다.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는 초식의 전개였으나 그로 인해 비약적으로 늘어난 파괴 력은 남궁일의 상처가 증명하고 있었다. 그 사이 천마비강은 자신을 공격해온 남궁일을 향해 움직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움직였다 느껴지는 순간, 이미 남궁일의 지척에 이르러 있었다. 손가락을 넓게 벌린 천마비강의 좌수가 다시 한번 남궁일을 향해 쏘아지고 있었다. 적광을 띈 강시의 손에 담겨진 위력은 그 결과를 보지 않아도 익히 짐작될 정도였다. 남궁일은 상처를 수습할 여유조차 갖지 못했다. 그는 창궁대연신공(蒼穹大衍神功)으 로 가슴을 보호하며 무한보(無限步)라는 남궁세가 최고의 신법을 전개해 몸을 뒤로 뽑았다. 그럼에도 폭발적인 이동을 해온 강시를 따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천마비강의 좌수가 남궁일의 가슴을 가격하려는 순간이었다. 취파람 소리와 같은 파공성이 들리는가 싶더니 천마비강의 신형이 옆으로 튕겨졌다. 어느새 다가온 은적비의 일 장이 천마비강의 옆구리를 가격한 것이다. 그는 절박한 와중에도 천마비강의 마기가 가라앉고 공력이 다른 곳에 집중되기를 기다렸다가 공격 을 펼쳤다. 노련하지만 냉혹한 한 수였다. 남궁일의 목숨을 구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천마비강 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는 것을 더 중시여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은적비의 시도는 효용이 있는 듯 했다. 무려 십 장여를 튕겨진 천마비강은 괴성 을 질러댔다. 확실히 고통에 겨워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비틀거리던 강시의 마기는 외려 이전에 비해 큰 폭으로 증가했고, 거동에는 불편함이 엿보이지 않았다. "은하철연장(銀河鐵燕掌)을 맞고도......?" 은적비의 미간이 크게 찌푸려졌다. 쾌속한 만큼이나 뛰어난 파괴력을 가진 은하철연 장에 적중당한 것치고 천마비강이 너무나 멀쩡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캬아아아!" 분노를 표줄하듯 소리를 지른 강시가 이번에는 은적비를 향해 달려들었다. 은적비는 물러서지 않고 쌍수를 교차시키며 뻗어냈다. 그러자 난데없는 귀곡성(鬼哭聲)과 함께 거대한 기운이 폭풍처럼 일었다. 귀곡단혼장(鬼哭斷魂掌). 무수한 백사회의 고수들을 무릎 꿇게 한 은적비의 성명절기가 펼쳐진 것이다. 범인이라면 귀곡단혼장이 전개될 때 들리는 괴성을 듣는 것만으로도 이지를 상실하 는 기공(奇功) 중의 기공으로 뛰어난 고수라 해도 시야가 어지럽혀지거나 환각을 보 게 되는 장법이었다. 물론 귀곡단혼장의 무서움은 귀곡성에만 있지 않았다. 무공의 이름 그대로 혼마저 무사하지 못할 가공할 위력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쿠아아아아앙. 귀곡성을 무시한 채로 달려든 천마비강과 은적비의 장력이 충돌했다. 땅이 들썩이고 잔잔하던 수면이 큰 폭으로 움직였다. "할아버지!" 거리를 두고 관전하 은설연의 신형이 날아올랐다. 뒤쪽으로 튕겨져 나간 조부를 받아 들기 위함이었다. 손녀의 부축을 받는 은적비의 흰 수염은 이미 붉게 젖어 있었다. 단 일 장의 부딪침에 내상을 입은 것이다. "물러서거라!" 은적비는 손녀를 가볍게 밀쳤다. 강시가 자신을 노리고 재차 공격해올 것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마비강에게는 그럴 여유가 주어지지 않았다. 은적비를 향해 달려가는 것을 단목하진이 막아선 것이다. 천마비강은 은적비를 상대했던 것과 같은 수법으로 자신을 가로막은 자를 공격했다. 단목하진에게는 익숙한 수공이었다. 천마비강이 펼친 수법이 삼양신장(三陽神掌), 강호에서는 삼양마수(三陽魔手)라 불리는 마교의 절기였기 때문이다. 천사지황을 일 수에 내상으로 몰고 간 가공할 장력이 단목하진의 방어와 맞부딪쳤다. 그럼에도 은적비 때와는 달리 곧바로 굉음이 울리지 않았다. 천마비강의 공세를 몸 옆으로 흘려낸 단목하진이 그 힘을 역이용, 다시 되돌려 냈기 때문이었다. 쿠아아아앙. 뒤늦게 울리는 폭음. 그것은 단목하진의 공력에 자신의 힘까지 더해져 돌아온 공격에 천마비강이 적중당 하는 소리였다. "지금일세!" 단목하진은 붉은 선혈과 함께 다급한 외침을 터뜨렸다. 건곤대나이신공의 극의를 보여 준 한 수였다. 그러나 천마비강이 발출한 장력이 너무나 강했던지라 단목하진 역시 내상을 입고 만 것이다. 천마비강의 신형이 쏜살처럼 뒤쪽으로 튕겨지는 순간, 남지학이 움직였다. 지금과 같은 기회를 다시 만들 수 없음을 알고 있는 남지학은 지닌바 모든 공격을 검 에 쏟아 부었다. 영의검이 찬란한 빛을 발했다. 수천, 수만의 검로가 하나로 합쳐졌다가 다시 셀 수 없는 검로를 쫓아 펼쳐졌다. 콰아아아아앙. 수많은 비치 천마비강의 몸에서 작렬하고 그 여파를 이기지 못한 강물이 폭발하듯 튀 어 올랐다. "하아, 하아!" 진기가 역류할 정도로 공력을 쏟아 부은 남지학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눈에 천마비강은 보이지 않았다. 궁극의 검초에 당한 천마비강의 신형이 강의 중심에 빠진 것이다. "이...... 긴 건가?" 종극이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천마비강에 대한 두려움 탓이 아니었다. 마지막에 보여준 남지학의 검초가 너무나도 엄청났기에 흥분을 하고 만 것이다. 저런 무공이라면 제 아무리 대단한 천마비강이라 할지라도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이야!" 단목하진의 다급한 외침이었다. "놈의 심장을 성화로 태워야 해!" 그제야 종극이 정신을 차렸다. 방금 전 남지학의 검초만은 못해도 과거 적철항의 공격 역시 끔찍하도록 강한 것이었 다. 그럼에도 천마비강은 멀쩡한 모습으로 되살아났다. 그러니 지금도 안심할 상황이 못 되었다. "강시를 건져 내게!" 종극의 외침에 수마(水魔) 표강(豹?)이 강으로 뛰어 들었다. 구대마존 중 일인인 그는 물에서만큼은 종극의 아래가 아님을 자신하는 인물이었다. 그의 모습이 수면 아래로 사라지자 종극은 사제차림의 교도에게서 성화를 건네받았 다. 표강이 천마비강을 끌어내면 곧바로 심장부분을 태울 작정이었다. 남지학의 검공에 의해 강바닥부터 엉망이 된건지 표강은 쉽사리 천마비강을 찾지 못 하는 것 같았다. "어서......, 어서......!" 교주와 님자학의 협공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고 있었음에도 표강이 좀처럼 나오지 않 자 종극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설마 하면서도 염려가 되는 것이다. '최소한 지난번처럼 골격이 무너질 정도는 될 것이 분명해! 움직이지 못하는 천마비 강을 태우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터. 표강, 서두르게!' 종극의 염원을 듣기라도 한 것일까? 잠시 후 표강의 모습이 수면위로 보였다. 종극은 황급히 강가로 다가갔다. 강에 도착하는 동안 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물고기보다 더 자유롭게 수중을 노니는 표강이었다. 그가 물살에 떠밀려 흘러내려갈 리가 없었다. "표 장로!" 종극은 달리는 기세 그대로 속도를 더해 수면을 박찼다. 등평도수(登萍渡水)의 신법으로 떠내려가는 표강을 낚아챈 후, 다시 뭍으로 나왔다. 하지만 이미 표강은 숨을 거둔 후였다. "빌어먹을 강시 놈이 표 장로의 원정지기를 흡수했습니다." 종극이 이를 갈아붙이며 교주에게 보고했다. 단목하진의 얼굴에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그 때, 천마비강이 뭍으로 걸어 나왔 다. 반 나신인 천마비강의 몸은 멀쩡한 상태였다. 단목하진이나 남지학의 공격을 생각하면 기가 질릴 정도여서 종극은 표강의 죽음에 서 비롯된 분노마저 잊었다. "하압!" 다시금 남지학이 검공을 전개했다. 빛의 향연과도 같은 화려한 검광이 천지를 가득 메웠다. 폭풍이 할퀴고 간 듯한 흔적이 지표에 가득했고 강물은 바닥을 드러낼 정도로 출렁였 다. 천지만물 중 그 검세 앞에서 무사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 었다. 하지만 양팔을 교차해 서 있는 천마비강만큼은 멀쩡한 모습이었다. "쿨럭!" 두 번에 걸쳐 무리하게 공력을 운용한 탓에 남지학은 피를 토해내고야 말았다. 그 사이 남지학의 검공에서 비롯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천마비강을 향해 단목하 진이 움직였다. 어느새 종극의 손에서 성화를 건네받은 그는 맹렬한 기세로 천마비강 을 향해 팔을 뻗었다. "캬아!" 교차된 팔위에 성화가 닿자, 남지학의 절대무공에도 꿈쩍 조차 않던 천마비강이 괴성 을 내질렀다.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강시의 몸에 남았던 물이 증발했고, 고약한 냄새가 진동을 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뿐. 뒤쪽에 있던 팔을 뽑아낸 천마비강이 단목하진의 어깨를 강타했다. "크윽!" 고통에 겨운 신음성과 함께 단목하진이 입에서 피를 쏟아내며 뒤로 날아갔다. "교주!" 종극이 신형을 달려 단목하진을 받아든 사이, 천마비강은 시커먼 흔적이 남겨진 팔을 내밀며 남지학에게 달려들었다. 애초부터 두 번이나 자신에게 큰 충격을 준 그를 노린 듯한 움직임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무극삼검식을 펼치는 것이 불가능한 남지학이었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었다. 반드시 살아서 돌아가겠다는 사제와의 약속 때문이었다. 남은 내공을 쥐어짜 신형을 날리는 남지학. 강호 수위를 다투는 곤륜의 경신술이 펼쳐졌으나, 폭발적인 마기를 운용해 이동하는 강시를 떨쳐내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콰아아앙. 천마비강의 몸 쪽에서 일어난 폭발음. 남지학의 위기에 내상에도 불구하고 은적비가 강기를 발출한 것이다. 하지만 천마비강은 파리를 내쫓듯 손을 휘둘러 은적비의 강기를 와해시켰다. 달리는 속도는 조금도 저하되지 않았다. 천마비강의 손에 가공할 마기가 집중되었고, 미증유의 거력이 담긴 공격이 이어졌다. 쿠아아아앙. 귀청을 찢는 폭발음 속에서 은설연의 안타까운 외침이 묻혔다. "남 소협!" 한 마디의 부르짖음과 함께 그녀는 망연자실한 채로 서 있었다. 천마비강이 발출한 일 장의 여파로 수많은 흙먼지가 그녀를 할퀴고 지나가 얼굴에서 피가 흘렀다. 그럼에도 은설연은 통증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 했다. 이제야 남지학의 마음을 조금은 엿볼 수 있게 되었건만, 이번 일전을 끝내고 천하를 유람하자고 약속했건만......, 속절없이 죽어버린 남지학이었다. 저 가공할 장력에 적중당하고 살아남을 수 있는 인간은 존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마지막 진력을 쏟아낸 조부를 부축하고 있지 않았다면 제자리에 그대로 쓰러져버렸 을 지도 모를 은설연이었다. 그런 은설연의 귀에 다시 없이 반가운 음성이 들렸다. "사제!" "남 소협?" 은설연은 다시 없이 빠른 속도로 고개를 돌렸다. 뒤쪽을 향해서였다. 그리고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선주혁과 함께 서 있는 남지학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존이다!" "천외무존이?" "선 대협이 오셨다!" 천마비강의 가공할 무위를 확인한 지금, 모든 것은 절망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나타난 선주혁의 모습이 중인들에게 있어서는 그리도 반가울 수가 없었다. 무공을 상실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왠지 그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희망이 샘솟 는 것이다. "위험했군요, 사형." 선주혁은 부축했던 남지학을 놓으며 말했다. "사제 이게......?" 남지학은 알고 있었다. 천마비강의 공세에서 자신을 끌어낸 것이 선주혁임을...... 또한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그는 확연히 알고 있는 것이다. "이 사제가 우매하여 그만 무공을 상실한 줄만 알았지 뭐에요." 선주혁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축기자체가 불가능한 신체에 대한 진단은 이제 두 번 다시 무공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누구보다 자신의 몸에 대해 잘 알 수 있는 선주혁이었기에 그 말을 고스란 히 믿을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체내에는 단 한줌의 진기도 모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주백광 등과 함께 했던 술자리에서 선주혁은 엉뚱한 생각을 하고 말았다. 깨진 후, 단지에 빠진 사발을 보며 떠올린 생각이었다. 자신이 가진 한계가 곧 그릇의 크기였다. 한계 이상을 담은 자신의 그릇은 차원이동 을 막으며 깨져버렸다. 그로 인해 더 이상 술을 담을 수 없는 사발이 되어버렸다. 그것으로 끝이라 생각했던 선주혁의 눈에 들어온 것은 주백광의 사발이었다. 술 단지 안에 들어간 멀쩡한 사발은 둥둥 떠 있을 뿐, 단지 안의 술과 동떨어진 채였다. 반면 자신의 잔은 비록 깨져있었으나 단지 안의 술을 남은 모습이었다. 만약 자시느이 신체가 그릇이라면 저와 같지 않을까 생각했다. 제한된 그릇이 있기에 더 이상의 기운을 담을 수 없는 것은 아닐까 싶었던 것이다. 스스로의 한계가 된 그릇이 사라진다면......? 그렇다면 진정 흡성대법에서 말하는 천인합일의 경지에 이를 수 있지는 않을까 하는 가설을 세웠다. 애초부터 흡성대법은 전신에 내력을 흩어뜨린다. 비우지 않으면 채울 수 없기 때문이 다. 따라서 텅비어버린 지금이야말로 진정으로 흡성대법을 완성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불가능하다고 여겨왔던......, 우주의 모든 기운이 내 것이 되는 길을 찾게 된 것은 아 닐까 생각한 것이다. 가능성에 대한 기대를 갖게 된 이유가 있었다. 분명 무공을 사용할 수 없음에도 그는 사물의 가진 고유의 기운을 여전히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선우유미가 발출하는 천음지력은 물론이거니와 대기에 가득한 모든 기운이 눈에 보 일 듯 선명하기만 했다. 그 기운을 체내에 담을 수만 없을 뿐이었다. 가능성을 찾은 선주혁은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가설에 체계를 더하기 시작했다. 천마비강은 실로 위험한 마물이었다. 만약 완벽히 회복한 천마비강이라면 사형이 감 당할 수 없음을 선주혁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당시 천마비강의 가공할 힘을 처 음부터 끝까지 느꼈기 때문이다. 사형에게 도움이 될 방법이 있다면 반드시 찾아야만 했다. 가장 확실한 것은 무공을 되찾는 것이었다. 하지만 섣부른 시도는 금물이었다, 축적된 내공이 없는 만큼 과거처럼 몸이 버텨주리라는 확신이 없었다. 내공이 강해질 수록 회복력이 강화된 만큼, 내공이 전무한 지금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 다. 이제는 보통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주화입마를 염두에 두고 가설을 시험해봐야만 했던 것이다. 그런 선주혁이 스스로 세운 가설을 확인하는 계기가 주어졌다. 서문도옥을 비롯한 백 존들의 침입이 그것이었다. 어차피 죽음을 목전에 둔 이상, 주화입마를 겁낼 이유가 없었다. 선주혁은 삼라만상의 기운을 자신의 내공처럼 운용해보고자 했다. 그 기운을 장심에 모아 발출했다. 특별한 초식을 사용했다기보다 그저 한데 모아 앞으로 쏘아낼 뿐이었다. 그리고 결과는 상상이상이었다. 섬광과 함께 서문도옥과 백존은 형체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방벽은 허물어지고 몇 개 의 담을 무너뜨린 장력은 십전성의 외벽까지 뚫었다. 그가 말한 대로 한 번도 써보지 못했던 힘이기에 전혀 조절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선주혁은 그렇게 자신의 무공이 상실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선우유미와 함께 사형을 도우러 나서 이 자리에 오게 된 것이다. 남지학은 선주혁의 말을 선뜻 이해할 수 없었으나, 자세한 사정을 들을 여유는 없었 다. 한 번 공격에 실패한 천마비강이 다시 접근해온 것이다. 슈우우웃! 남지학은 한순간 세상이 변하는 것을 느꼈다. 이번에도 선주혁이 자신을 부축한 채 천마비강과의 거리를 벌린 것이다. 한데 그 속도가 너무나도 빨라 마치 세상에 변해버리듯 느껴진다. 절대의 고수인 남 지학의 안력을 벗어난 속도로 이동했다는 뜻이었다. 남지학은 격정에 일렁이는 눈으로 선주혁을 바라봤다. 그런 남지학을 보며 선주혁이 말했다. "이제 놈은 제게 맡겨요, 사형." 남지학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형을 뒤로한 채 선주혁이 앞으로 나섰다. 그가 움직이는 속도에 놀랐음인지, 아니면 여태껏 상대해오던 자들과 다름을 파악했 음인지 천마비강은 선뜻 공격해오지 않았다. 마치 상황을 파악코자 노력하는 듯 주춤 거리는 모습이었다. 그 사이 선주혁은 옆쪽의 종극과 단목하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단목하진의 손에 쥐어져 있던 성화가 부유하듯 허공에 떠올라 선주혁의 손에 쥐어졌 다. "이게 절대로 꺼지지 않는다는 성화군요." 선주혁의 말에 종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주혁은 타오르는 성화의 위쪽에 손바닥을 올렸다가 손바닥을 뒤집었다. 그러자 마술처럼 성화의 불꽃이 선주혁의 손바닥 위에서도 타오르기 시작했다. 선주혁은 종극에게 다시 성화를 돌려줬다. "어떻게......?" 종극의 떨리는 음성. 성화는 오직 성화봉에서만 타오른다. 다른 곳에 옮기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한데 놀랍게도 아무 것도 없는 맨손바닥 위에서 성화가 타오르고 있으니 종극이 놀라 지 않을 수 없었다. 선주혁은 잠시 불꽃을 응시하더니 마치 무엇인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추을 추듯 일렁이는 불꽃이 강렬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곧 불꽃이 사라졌다. "이걸......" 종극이 다시 성화를 내미는 순간. 이미 선주혁의 신형은 사라졌다. 콰아아앙. 동시에 울리는 강렬한 폭발음. 그것은 삼라만상의 기운을 운용한 선주혁의 북두연환장이 작렬하는 소리였다. "캬아아아!" 천마비강은 뒤쪽으로 물러나 강물에 무릎까지 발을 담근 후에야 신형을 멈춰 세웠다. "흠...... 역시!" 삼라만상의 기운을 운용할 길을 열었다고 해서 당장 우주의 모든 기운을 자신의 것처 럼 여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바를 확인하기 위한 북두연환장이었고, 그 장력을 견뎌내는 천마비강을 보았기에 선주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너무나 여유로워 관전하는 이들을 경악시켰다. 천외무존이라 추앙받는 선주혁이 무공을 회복했다는 사실도 놀라울 진데, 저 궁극 의 마물이랄 수 있는 천마비강을 단 한 수에 밀어내니 더욱 놀라울 수밖에 없었던 것 이다. "그가...... 또 다시 기적을 만들어내는 건가요?" 조부를 부축해 남지학의 곁에 선 은설연이 물었다. "지금으로서는 우리에게 그가 유일한 희망이니......, 그래주길 바랄 수밖에 없을 것이 오." 남지학의 답변에 은설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수천 번을 더 놀라게 해도 좋으니 제발 이번에도 선주혁이 기적을 만들어주길 그녀 역시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저 마물을 상대할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 보였다. 타격을 줄 수는 있다. 하지만 곧바로 회복이 되어버리니 남은 것은 선주혁이라는 희망 자체도 너무나 작게 만 느껴졌다. 그가 과거의 모든 무공을 회복했다 해도, 아니 지난날보다 두 배가 강해졌다고 해도, 천마비강의 상대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한데도 왠지 모르게 주먹을 쥐고 선주혁을 응원했다. 그것은 은설연 뿐이 아니었다. 무림을 대표하는 고수들 모두가 선주혁이 기적을 이뤄내 주길 바라는 것이다. 그가 죽을 것임을, 그 후에는 자신드르이 차례임을 확신하면서도 천외무존이라면, 선 주혁이라면 무엇인가를 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버리지 못했다. 그것은 삶의 연장에 대한 갈망이 아니었다. 중원을 대표하는 무인인 천외무존이기에, 무림을 대표해 무인으로서의 자긍심을 지켜주길 바라는 것이다. 무인은 강자의 손에 죽어야지, 되살아난 시체 따위에게 죽어서는 안되는 일이기에...... 천마비강이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타오르는 듯 붉은 강기가 천마비강의 손위에 맺혔다. 화양폭렬세(火陽爆裂勢). 위맹하기 이를 데 없는 마교의 절기가 또다시 천마비강의 손에서 펼쳐진 것이다. 그 모습을 확인하고도 선주혁은 마치 산보를 나선 양, 여유롭게 걸음을 옮겨 강 쪽으 로 향했다. 한데 갑자기 수면에서 거대한 물기둥들이 솟구쳐 회오리를 치듯 말려 올라갔다. 주변의 기이한 변화에 강시가 동요할 때. 물의 소용돌이가 그 끝을 뾰족히 하여 천마비강을 향해 찔러 들어갔다. 맹렬하기 이를 데 없는 회전력에 거대한 수압, 그리고 선주혁이 운용하는 기운이 더 해지자 수십 개의 소용돌이는 가공할 무기로 화했다. 천마비강 역시 그 위험성을 감지한 듯 선주혁이 아닌 소용돌이들을 향해 화양폭렬세 를 쏘아대기 시작했다. 강렬한 열기를 담은 장력에 물기둥들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수중기를 뿜어냈다. 하지만 물은 얼마든지 있었다. 일그러졌던 형체를 복원한 물기둥들이 다시금 소용돌이치며 천마비강을 향해 쏘아졌 다. 지칠 줄 모르고 화양폭렬세를 쏴대던 천마비강은 이대로는 안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 수면을 박차고 선주혁을 향해 달려들었다. 맹렬한 기세로 날아오는 천마비강을 향해 선주혁은 손을 내밀었다. 가느다란 침과 같은 강기가 그의 손에 맹렬히 회전했다. 주변의 공간이 일그러져 보일 정도의 회전과 함께 북두회류장이 쏘아졌다. 파아앗! "크아아아!" 천마비강은 날아오는 북두회류장을 좌측 팔을 들어 막았다. 비명은 그와 동시에 터져 나왔다. 가느다란 침과 같은 북두회류장에 담겨진 암경이 너무나 거대하여 천마비강은 허리 가 돌아갈 정도였다. 같은 북두회류장이라 해도 이미 한계의 틀을 벗어난 선주혁이었기에 그 위력에 있어 서는 천양지차가 나는 것이다. 그럼에도 천마비강은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팔이 부러진 듯 너덜거리는 가운데서도 오직 접근을 하는 것만이 목표인 듯 선주혁을 향해 달려오는 중이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선주혁의 손위에는 또 하나의 북두회류장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번에는 천마비강의 다리를 적중시키는 북두회류장. 다시 괴성이 터져 나왔고, 천마비강은 남은 한 다리로 땅을 박찼다. 선주혁은 우수를 휘둘러오는 천마비강을 향해 자신도 우수를 뻗었다. 퍼어억. 미약한 소음의 발생. 선주혁이 주변의 기운을 조정하여 굉음이 퍼져나가는 것을 차단했기 때문이었다. 천마비강과 자신의 장력이 만들어낸 충격은 부상을 입은 자들에게는 치명적일 정도 의 굉음이었으므로 선주혁은 애써 음파를 막아낸 것이다. 그렇게 힘을 분산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선주혁은 천마비강을 맞이하여 조금도 밀리지 않고 서 있었다. 허나 서로가 받은 충격은 결코 적지 않은 듯 천마비강도, 선주혁도 서로의 장심을 맞 댄 채 좀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먼저 움직인 것은 선주혁이었다. 그것도 힘겹게 입술을 열 뿐이었다. "이제...... 죽어라!" 그의 말을 알아들었음인가? 천마비강은 두 눈에서 녹광을 빛내며 뒤쪽으로 물러서려 했다. 하지만 선주혁의 손이 더 빨랐다. 그것은 섬광 이상이었다. 존재하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쾌속한 움직임이 환상처럼 선주혁의 손에서 펼 쳐졌다. 순간, 선주혁의 손은 천마비강의 가슴에 닿아있었다. 번쩍. 동공을 마비시키는 붉은 섬광. 연이어지는 빛의 향연. 노을과 어우러지는 연속적인 붉은 섬광이 강변을 가득 채웠다. "캬아아아악!" 처절한 비명. 그것은 심장에서부터 불타오르는 천미비강의 것이었다. 놀랍게도 선주혁의 장심에서 성화 고유의 기운을 수배나 증폭시킨 불꽃이 피어올랐 고, 그 불꽃이 천마비강을 태우는 것이다. 천마비강은 고통 속에서 마구잡이로 장력을 발출해댔다. 하지만 단 일 장도 선주혁을 중심으로 삼 장 이상을 뻗어나가지 못했다. 선주혁의 내력이 천마비강의 장력을 차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천마비강을 상대하면서 점차 삼라만상의 기운을 운용하는데 능숙해졌기에 가능한 일 이었다. 그리고 어느 한 순간. 장력의 발출도, 처절한 비명성도, 가공할 마기도 사라졌다. 공포 그 자체였던 천마비강이 한 줌의 재로 화했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선주혁은 그만 제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아직까지는 익숙지 않은 기운을 너무나 남용한 탓인지, 긴장이 풀려서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선주혁을 보고 웃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두 번에 걸쳐 강호를 구해낸 영웅을 누가 감히 비웃겠는가? 무인의 긍지를 지켜낸 그를 향해 어찌 조소를 머금겠는가? 한데도 웃는 사람은 있었다. 선주혁 자신이었다. 주저앉은 자기를 향해 달려오는 사람들을 보며 다시 없이 밝은 미소를 지었던 것이다. Chap. 14 주문(呪文)의 의미 <1> "예원아!" "주 백부!" 귀여운 여자 아이가 장한의 품에 안긴다. 장한은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대도를 내팽개친 채, 여자 아이를 안아들었다. "어이구! 그새 많이도 컸구나!" "응! 엄마가 많이 먹고 많이 크라고 했어." "하하하핫! 그래, 그래." 사내는 품 안의 아이가 마냥 예쁘다는 표정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다고 너희 엄마처럼 무서워지면 안된다! 알았지?" "주 대협!" 뾰족한 여인의 음성에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다는 사내가 목을 움츠렸다. "헤헷! 제수씨...... 거기 계셨군요." 자신을 흘겨보는 여인의 시선을 외면한 채, 사내는 잰 걸음을 옮겼다. "우리...... 아빠한테 가자, 예원아!" 등 뒤에서 쏟아지는 강렬한 살기에 사내의 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천하에 무서울 것 이 없다는 그였지만, 상대는 자신보다 더 용감무쌍한 여인이었기에 늘 위축이 되고 말 았다. "이보게, 주혁!" "어? 주 형!" 보는 것만으로도 넋이 빠질 것 같은 여인과 함께 차를 마시고 있던 선주혁이 주백광 을 보고는 반색을 표했다. "내가 오자마자 사고를 쳤다네." "에? 또 예원이 엄마를 욕하다 걸렸나?" 선주혁이 실소를 터뜨렸다. "욕은 무슨! 내가 호랑이 간을 삶아먹은 것도 아닌데 감히 그녀를 욕할 수 있겠나? 그 저 예원이보고 엄마처럼 무섭게 자라지 말라고 하는 중에 제수씨한테 걸리고 말았지 뭔가." "하하하핫! 안사람이 뭐가 무섭다고 그러는 건가?" "흠! 자네야 자기 마누라니 안 무섭지. 무림의 아무나 잡고 물어보게. 패악회에 단신 으로 쳐들어가 내 남자 내놓으라고 한 자네 마누라가 무서운지 안 무서운지." "하핫, 안사람이 아무리 무서워 봐야 형수님만 하겠나?" 선주혁도 장난기가 발동한 듯, 주백광의 농담에 흥을 돋웠다. "하긴......! 냉염혈화라면 능히 옥소선자와 비견되고도 남지. 자네 사형제는 어쩌다가 그렇게 무서운 마누라들을 얻은 건가? 그것도 취향인 건가?" "어쩐지 귀가 간지럽더니 두 분이 여기서 제 욕을 하고 계셔서 그랬군요." 난데없는 여인의 음성에 선주혁과 주백광이 제자리에서 펄쩍 뛸 듯 놀랐다. 월동문을 나서는 한 쌍의 남녀를 확인한 둘의 안색은 새파랗게 질렸다. 방금 전 흉을 본 냉염혈화 은설연이 도끼눈을 하고 흘겨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혀, 형수님! 임신 중에 흥분은 지극히 해롭습니다!" 식은땀까지 흘리며 은설연을 진정시키려 선주혁은 옆에 있는 눈부신 용모의 여인 쪽 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 말이 맞지, 유미?" "후훗!" 가히 충격적인 미모를 가졌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여인은 선우유미였다. 그녀는 웃 느라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건 정말이라고요, 형수님! 애가 뱃속에 있을 때는 그 뭐냐...... 태교(胎敎)라는 것 이 아주 중요합니다. 엄마의 생각에 따라 애가 영향을 받는다니까요." "주혁이 그렇다면 그럴 거요, 남 부인. 내 생각에도 임산부가 살심을 품어서 아이에게 좋을 게 하나도 없을 거 같으니 말이오." 아이에게 좋지 않다는 말에 은설연의 눈에서 독기가 사그라졌다. "좋아요. 오늘은 이 정도로 넘어가도록 하죠." 은설연의 말에 선주혁과 주백광은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호호호.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다는 명물 친구분들이 남 부인께는 꼼짝도 못한다는 사실을 강호인들이 알까요?" 월동문을 통해 또 다른 선남선녀가 들어섰다. 남궁일과 그의 아내 백화란이었다. "선 대협을 뵙습니다." 남궁일은 문에 들어서자마자 선주혁을 향해 두 손을 마주 잡았다. 세월이 아무리 흘 러도 한결같이 선주혁에게 극진한 예를 갖추는 남궁일이었다. "하핫, 어서 오시오, 남궁 공자. 아니 이제는 남궁 련주죠, 하핫!" 선주혁도 반갑기 이를 데 없는 표정으로 남궁일과 그의 아내를 맞이했다. "거 참! 예전에는 남궁 부인이 얌전하기 이를 데 없었는데 말이야. 누구누구랑 어울리 면서 많이 무서워졌단 말이지." 주백광은 방금 전 백화란이 한 말 때문인지 괜스레 먼 하늘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 다. "호홋. 제가 무서워진 게 아니라 주 대협께서는 원래 여자를 무서워하시는 게 아니던 가요?" "누, 누가 그런 말을 합니까? 천하의 주백광이 여자를 무서워한다니 그게 말이 되오?" 주백광이 정색을 했다. "호오! 아닌가요?" 이번에는 은설연이 묘한 미소와 함께 물어왔다. "당연히 아니지요." 주백광이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그런데 왜 아름답기 그지없는 단목 소저만 보면 줄행랑을 치실까?" "그, 그거야...... 잘못하다가 내가 원하지도 않은 종교의 신도가 되어야하고......, 단목 소저는 안 무서워도 그녀의 부친이나 늙어도 죽을 생각을 안하는 종 노인 등은 역시나 만만치 않고......" 주백광이 횡설수설하는 모습에 저마다 웃음을 터뜨렸다. "언제까지 그렇게 도망 다니실 수 있을 까요? 단목 소저는 이왕 혼기도 놓친 마당에 누가 이기나 해보자던데?" 은설연의 말에 주백광의 안색이 하얘졌다. "그녀가 그렇게 말했소?" "네. 최근 단목 교주님께서 심하게 혼사를 재촉하신다네요. 그래서 주 대협을 찾으러 간다는 서신을 남기고 가출을 할 생각도 하고 있던 걸요." "허업!" 주백광이 헛바람을 들이켰다. 교주의 딸이 자신 때문에 가출했다고 하면 이후의 상황은 어찌될지 뻔한 일이었다. "자, 자. 단목 소저가 가출하게 되면 맘 편히 술 마실 기회도 없을 텐데 기회 있을 때 술이나 실컷 마셔두라고, 주 형!" "하하하핫!" "호호홋!" 선주혁의 너스레에 다시 한번 웃음을 터뜨리는 사람들이었다. <2> "한 소저가 혼인을 한다고 하더구나." 달빛 아래서도 빛이 나는 듯한 용모를 가진 남지학이 말했다. "네, 저도 들었어요. 혁련 맹주와 잘 어울리니 다행이죠. 한 어르신도 기뻐하실 겁니 다." 님지학이 잠시의 시간을 두었다가 선주혁에게 물었다. "그녀는 좀 어떻더냐?" "유미요?" 남지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사형이 질문하는 의도를 깨달은 선주혁이 말했다. "아직은 소식이 없는 것 같아요. 조만간 소식이 있겠죠." "흐음...... 기대가 크겠군." "네, 누구보다 그녀가 아기를 원하니까요." 선주혁과 남지학은 선우유미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천음마후인 상태로 출산 이 불가능했다. 강한 음기로 인해 태아가 버티질 못하기 때문이었다. 이에 남지학이 발 벗고 나섰다. 남지학으로서는 그녀에게 큰 빚을 지고 있었기 때문 이다. 그는 수개월에 걸쳐 중원 전역을 샅샅이 뒤져 만년화리(萬年火鯉)를 구해왔다. 천음 지력을 중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만년화리의 내단이 거론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효과가 있었다. 천음지력과 선우유미 본연의 음기가 크게 줄어든 것이다. 남 은 음기는 선주혁이 흡성대법의 묘용을 이용해 제거했다. 그로서 선우유미도 임신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좋은 여자야." 님지학이 말했다. "네." 선주혀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한 번쯤은 눈물을 흘리며 원망을 할 법도 한데 그녀는 자신과 사형에게 단 한 번도 내 색을 하지 않았다. 외려 스스로를 죄신으로 생각한다며 두 사람의 행동이 옳았다고 위 로를 하곤 했다. 그런 선우유미가 선주혁은 고맙기만 했다. 안 그래도 자신에게는 과분하기 이를 데 없는 그녀가 아니던가? "잘 해줘라." "평생을 두고 빚을 갚아나갈 생각입니다." "그래야지" 이번에는 남지학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제를 보면 언제나 지금의 상황에 만족하는 것 같아. 정말이지 보통 사람과는 다르 다니까." "정말 만족스러운걸요." 무공을 잃었을 때조차 행복하기 그지없는 선주혁이었다. 그 후 세월이 흘러 아름다운 아내를 둘이나 얻고, 아이까지 두었다. 행복의 조건이 한참이나 추가된 것이다. 저쪽 세상에서의 인생을 생각하면 이보다 행복할 수가 없었고, 하루하루가 감사하기 만 했다. 그런 선주혁의 인생관은 보통의 사람으로서는 체감키 힘든 것이었다. 행복하기 위해 노력을 할지언정, 자신에게 주어진 행복을 알아차리는 것조차 힘든 것이 보통의 사람 들이기 때문이다. 남지학은 선주혁의 그런 면을 높이 사는 것이었고, 선주혁은 예전에 비한 자신이 너 무나 행복할 뿐이라 여기는 것이다. "다음 달에 곤륜에 한 번 다녀올 생각이야." 비록 곤륜파로 돌아가지는 않았지만 남지학에게 있어서는 고향같은 사문이었다. 해 마다 곤륜파를 찾는 것이 이제는 관례처럼 되어버렸다. "이번에는 혼자 가셔야겠군요." 은설연이 임신을 했으니 고산에 오를 수 없을 터였다. "같이 가보는 게 어떻겠냐? 무진 사숙조가 널 꼭 한 번 보고 싶으시다는데." "후훗! 그러죠." 선주혁이 무지막지한 사숙조의 얼굴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을 때였다. 월동문 건너편에 있던 한 사람이 뛰다시피 해 나왔다. 남지학과 선주혁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향했다. "우욱!" 한 손으로 입을 가린 그녀는 연신 구역질을 하며 뛰고 있었다. "설마......?" "호오?" 사형제의 입에서 동시에 튀어나온 소리였다. 그리고 선주혁이 바람처럼 달려갔다. "유미!" 선우유미의 이름을 외치는 선주혁의 목소리에는 기쁨을 넘어선 감정이 담겨있었다. <3> 나 천외무존은 세상 밖의 또 다른 세상이 있음을 증거하기 위해 이 글을 남긴다. 이 주문은 세상과 세상을 연결하는 창(窓)이니, 필요치 않은 자, 지금 읽기를 멈추기 바란다. 나우트 움리오 사하미안 쿰바트 오미하라 우카드메 베네 오 치하 민데 가타 훔 테메시오 아베 에 수호아 고네무하 테메시 크리스타 할 우트 옴바하 리에 미옴드 카타시 오리오 네 메사 타마인 데 사하 이 주문을 외운 후에도 그대가 이 세상에 머물러 있다면, 이 세상에 아직 그대가 할 일이 남아있음이니라. 그대와 가족과 친구, 그리고 세상을 위해...... <종횡무진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