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만나다. 여름이다 싶었는데, 어느새 해가 지자 또다시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얇게 옷을 입은 탓에 지은은 반복적으로 팔을 손으로 비벼댔다. 유난히도 푸르른 나무 아래의 벤치에서 지은은 발장난을 치고 있었다. 그러다가 핸드백 속에서 핸드폰을 꺼내어 시간을 보았다. 밤 열시 이십분. 약속했던 시간이 어느새 이십분이나 지나 있었다. 지은은 입술을 뜯으며 불안한 시선을 감추지 못했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이겠지, 바쁜 일이 있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려해도 불안함을 감추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은아.” 지은은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그가 불러주었던 그 이름을 자신이 직접 불러보았다. 처음으로 그가 자신을 불렀을 때를 지은은 기억하고 있었다. 이지은, 흔하고 흔한 그 이름이 그렇게나 듣기 좋았던 적이 없었다. 지은아, 라고 부르던 그의 목소리에 지은은 수줍은 미소를 지었었다. 그때부터였다, 그를 좋아하게 된 것이. 지은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느덧 시계는 열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지은의 얼굴에서 체념한 표정이 읽혔다. 지은은 오늘 밤, 그가 이 자리에 나오지 않을 것이란 것을 사실 알고 있었다. 언제나 자신이 부르면 그 자리에 나타나주던 그였지만, 오늘만은 정말로 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이제 그는 자신에게서 마음이 떠났다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구질구질하게 이미 떠난 사람에게 연연하는 것, 그것은 지은이 가장 싫어하는 일이자, 자신은 죽어도 그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오늘 밤 지은은 그러한 일을 해버렸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더 불러주지. 내 이름…….” 지은은 마지막으로 텅 빈 벤치를 쳐다보며 중얼 거렸다. 지은아, 라고 불러주는 그의 목소리를 한 번만 더 들어 보고 싶었다. 그 설렘을 느껴보고 싶었다. 미칠 것 같이 두근거렸던 그 감정을 잊기가 싫었다. 지은은 벤치에서 멀어지며 어디서부터가 잘못된 것인지 생각해보았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그 감정에 그를 귀찮게 했던 것일까, 아니면 나보다 힘이 들었을 그에게 힘들다고 자꾸 투정을 부렸던 탓일까, 그것도 아니면 그가 정말 나를 사랑한 적이 없었던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는 지은의 눈가에 어느덧 눈물이 맺혀 버렸다. 지은은 울지 않으려고 입술을 꼭 깨물었다. 아무도 없는 어두운 길가에서 혼자서 처량하게 눈물을 흘리는 것이 싫었다. 지은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는 자신에게 지쳤고, 이제 더 이상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요즘 들어 점점 차가워진 그의 태도와 힘들어 보이던 그의 얼굴에서 모든 것을 읽을 수 있었다. 그래도 붙잡고 싶었다. 처음이었다. 누군가를 붙잡고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은. 언제나 연애에서 이별을 고하던 것은 자신이었고, 단 한 번도 헤어지고 아픈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그것이 되지 않았다. 가슴이 찢어지게 아팠다. 그는 알고 있는 지 궁금했다. 자신이 이토록 그를 사랑했던 그 사실을 그는 알고 있는 것인지 너무나 궁금했다. 그와 함께 걷던 길을 혼자서 걸었다. 그와 함께 사랑을 나누던 그 길을 혼자서 걸었다. 그와 함께 일상을 터놓던 그 길을 혼자서 걸었다. 그와 함께 했던 그 길을 혼자서 걸었다. 지은은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금방이라도 자신의 눈앞에 그가 나타날 것만 같았다. 그 길 위를 걷는 것이 괴롭고, 힘들었지만, 그런 부질없는 기대감에 발걸음이 무겁기만 했다. 그가 나타날 것 같아서 그 길 위를 떠날 수가 없었다. 느리고도 느린 발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그가 올 것만 같아서. 정말이지 그가 눈앞에 나타날 것만 같아서……. 길에서 만나다.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언제나 그랬다. 그녀에게 이별을 고한 것을 언제나 후회했다. 단 한순간도 후회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거울 속의 근우는 유난히도 야위어 있었다. 근우는 까끌까끌하게 난 수염을 한 손으로 만지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근우는 오랜만에 수염을 깎으며 지난 밤 도착했던 문자를 다시 떠올렸다. 오늘 밤 열시, 그녀와 늘 함께하던 그 벤치에서 만나자는 그 문자. 근우는 지난 밤 침대에 누워 그 문자를 참으로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가 복잡했다. 그녀를 보낸 것이 후회스러웠지만, 다시 잡을 용기도 없었다. 먼저 이별을 고한 것은 자신이었다. 모든 상황이 너무나 복잡하고 힘이 들어서 이별을 고했다. 항상 바빴던 자신과 그녀였기에 서로에게 부리는 투정을 감싸주지 못했고, 오히려 그러한 투정에 더욱 힘들어 했다. 그녀를 사랑하기에 속박하고 싶었지만, 바쁜 일상은 그녀를 돌아보는 것조차 힘들게 했다. 근우는 자신의 삶에서 그녀를 최우선으로 하는 것이 너무나 버거웠다. 주어진 일들과 풀어야 할 문제들이 언제나 넘쳤고, 그래서 점점 그녀를 돌보는 것이 힘에 부쳤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의 모습에 그녀도 점점 지쳐했다. 그래서 이별을 고했다. 하지만 후회했다. “…무슨 생각인 거야, 지은아.” 근우는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갑자기 자신을 만나자고 하는 그녀의 속을 알 수가 없었다. 보고 싶었다. 이별 후에 그녀는 어떠한지 보고 싶었다. 혹시나 자신처럼 이렇게 초췌하고 야윈 모습은 아닌지, 아픈 곳은 없는지, 너무 많이 힘들어하고 있지는 않은 지 궁금하고, 다독여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를 보는 것이 두려웠다. 그녀의 아픈 모습을 보면 다시 그녀를 붙잡을 것 같아서 두려웠다. 근우는 자신이 그녀를 다시 붙잡을 자격 같은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어느덧 시계침은 열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근우는 거실 소파에 앉아서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그녀의 모습이 자꾸 눈에 밟혔다. 항상 함께 했던 그 벤치에 혼자서 외로이 앉아서 자신을 기다릴 그녀가 눈에 선했다. 가야 한다, 가지 말아야 한다. 가야 한다, 가지 말아야 한다. 두 가지 생각이 근우의 머릿속에서 복잡하게 섞이었다. 그리고 결국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벼운 외투를 입었다. 집을 나선 근우는 그녀가 만나자고 했던 그 벤치까지 무작정 뛰었다. 그녀가 자신을 기다릴 그 모습이 눈에 선해서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10시 23분, 24분, 25분……. 걸음은 점점 느려지고 시간은 점점 빠르게 흘렀다. 마음은 조급한데 다리는 자꾸 무거워만 졌다. 근우는 턱까지 차오른 거친 숨을 내쉬었다. “…지은아.” 근우는 나지막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이름을 불러주는 것을 유난히도 좋아하던 그녀였다. 자기야, 여보야 같은 그 흔한 애칭도 싫어하는 그녀였다. 자신이 지은아, 라고 불러주면 특별해지는 것만 같아서 좋다던 그녀였다. 이름을 불러주면 수줍어하던 그녀의 모습이 보고 싶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면 그녀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근우는 무거워진 발걸음을 천천히 옮기었다. ‘오빠! 나 마트 갔다가 올게요. 이제 재료만 사면 축제 준비 다 된 거 맞죠?’ ‘응. 혼자 가도 정말 괜찮겠어?’ ‘네! 금방 갔다 올게요. 다녀오겠습니다!’ 근우는 언제나 활기가 넘쳤던 그녀의 첫 모습을 떠올렸다. 그저 과 후배로, 아는 동생으로만 생각했던 그녀가 처음으로 자신의 눈 속에, 그리고 마음속에 들어오던 날이었다. 흰 블라우스에 핑크색의 치마를 입고 활짝 웃는 그녀의 모습이 정말로 예쁘게만 보였다. 손을 흔들며 과방을 나서는 그녀의 모습에 근우는 가슴이 뛰었었다. 그렇게 예쁘고 활기차기만 하던 그녀에게서 어두운 모습을 끌어낸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미안했고, 그래서 그녀에게 죄책감을 느꼈었다. 벤치가 눈에 들어왔다. 유난히도 크고 푸른 나무 아래에 홀로 서있는 벤치가 근우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벤치에는 차가운 바람만 흐르고 있었다. 그녀가 다녀간 흔적조차 보이지 않게 차가운 바람만이 그 자리에 있었다. 근우는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다리가 풀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그녀가 꼭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죽을힘을 다해 달려왔었다. 그녀가 너무도 보고 싶었다. 그녀를 붙잡을 용기는 없었지만, 그녀가 보고 싶었다. 이기적이라고 해도 좋았다. 하지만 보고 싶은 그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정말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멀리서라도 지켜보고 싶었다. “…왜 없는 거야, 지은아.” 근우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환하게 웃던 그녀의 미소, 늘 빛나던 눈빛,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그녀의 목소리가 정말로 듣고 싶었다. 웃는 게 무척이나 아름다웠던, 그 누구보다도 미소가 예뻤던 그녀였다. 근우는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을 꺼내었다. 아직도 핸드폰의 배경화면에는 그녀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근우는 핸드폰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12시 34분, 그녀를 다시 붙잡으면 그 전보다 더 큰 사랑을 줄 수 있을까. 12시 35분, 그녀가 다시 자신의 곁으로 온다면 다른 어떤 것보다 그녀를 우선시 할 수 있을까. 12시 36분,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함께 하는 순간마다 그녀를 웃게 할 수 있을까. 12시 37분, 그녀를 다시 곁에 둔다면……, 그녀가 힘들 때마다 내가 안아 줄 수 있을까. 근우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떠한 답도 명확하게 내려지지 않았다. 다시 반복될 똑같은 상황이 두려웠다. 다시 그녀를 붙잡으면, 그녀는 또다시 힘들어 할 것이고, 또다시 아파할 것이고, 또다시 외로워할 것이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를 붙잡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근우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었다. 언제나 그녀와 함께 했던 그 벤치 위에 앉았다. 외롭게 서있는 벤치 위에 앉아서 그녀를 떠올렸다. 누구보다 자신의 마음을 깊게 흔들었던 그녀를 생각했다. 자신을 늘 설레게 했던 그녀를 떠올렸다. 그녀가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를… 볼 자격이 없었다. 길에서 만나다. 지은은 느린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혹여나 그가 있지는 않을까, 작은 기대를 품고 돌아본 길에는 휑하니 바람만 불고 있었다. 어두운 길에는 가로등만 빛나고 있었다. 지은은 고개를 돌려 다시 발을 내딛다가 이내 다시 뒤돌아섰다. 그리고는 다시 벤치가 있던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가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허튼 기대를 품고 있었다. 허무한 기대라는 것을 알면서도 차마 그 벤치를, 이 길을 떠나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한 걸음, 두 걸음, 그리고 세 걸음. 벤치로 향하는 그 걸음이 무거웠다. 그가 없을 거라는 것을 알아서 더욱 그랬다. 마지막 코너만 돌면 다시 그 벤치가 보였다. 지은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괜한 기대라는 것, 터무니없는 기대라는 것을 알면서도 가슴이 떨렸다. 지은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코너를 돌았다. 그리고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의 눈가에 맺혀있던 눈물마저 두 뺨을 타고 흘렀다. 그가 있었다. 너무나도 그리웠던 그가 바로 그 벤치에 있었다. 언제나 함께했던 그 공간에 그가 있었다. 환영은 아닐까, 이것이 그가 너무 그리워 나타난 환영은 아닐까, 여러 번 의심해보았지만, 그는 틀림없이 그였다. “…오빠.” 갈라진 작은 목소리가 조용한 길가에 울렸다. 그리고 멍하니 앞만 보던 그가 고개를 돌려 지은 쪽을 보았다. 지은은 아찔한 현기증이 느껴져 비틀거리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지은은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리가 아팠다. 귓가로 들렸다. 그의 조급한 발소리가 지은의 귓가에 닿았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린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그의 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은아! 지은아, 괜찮아?” 지은아, 라고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마치 그것은 아주 강력한 마법을 푸는 주문과 같이 지은을 흔들었다. 지은은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눈물 맺힌 지은의 시야로 그가 보였다. 걱정스런 눈으로 자신의 두 어깨를 조심히 포개고 있는 그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였다.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말없이 지은은 그 자리에서 눈물을 토해내었다.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그렇게 눈물을 쏟아내었다. 보고 싶었어요. 정말로 많이 보고 싶었어요. 우리 다시 만나면 안 될까요? 내가 더 잘할 게요. 나 아직 오빠 정말로 많이 좋아해요. 우리 정말 이대로 끝나는 건 싫어요. 아직도 이렇게나 좋아하는데……. 목까지 차오른 수많은 말을 뒤로하고, 지은은 그저 그 자리에서 울기만 했다. 펑펑 눈물을 쏟기만 했다. 어둡고 조용한 그 골목에 지은의 흐느낌만이 가득했다. 길에서 만나다. 가슴이 아팠다. 근우는 자신의 앞에서 울고 있는 그녀를 꼭 안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대로 그녀를 품에 안아 버리면 자신이 독하게 먹은 마음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될 것만 같았다. 그녀와 헤어지기 위해 근우는 정말로 많이 힘들었다. 아직도 사랑하는 그녀에게 이별을 고하기 위해 이를 악물고 차가워져야 했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를 품에 안는다면 그 모든 노력이 허사가 될 것이었다. 정말로 많이 보고 싶었고, 너무나 걱정이 되었었다. 이런 모습으로 그녀가 힘들어 할 것이라는 걸 잘 알아서 더욱 걱정스러웠었다. 많이도 야위어 있었다. 더 이상 그녀의 얼굴에서 예쁘고, 환한 그 미소를 찾기가 힘들었다. 근우는 끊임없는 죄책감에 괴로워했다. 그녀의 눈물방울마다 차가운 죄책감이 가슴 아프게 자신을 짓눌렀다. 참아야 한다. 참아야 한다. 근우는 수십 번, 수백 번을 자신을 눌러 참았다. 그녀를 다독이고 싶은 그 마음을 참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가슴 아프기만 했다. 근우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녀의 양 어깨를 포개고 있던 두 손을 조심스럽게 놓았다. 그녀에게서 떠나야 했다. 더 이상 자신으로 인해 아픈 그 모습을 보기 싫었다. 지금 헤어지면 그녀는 아프겠지만, 이내 곧 괜찮아 질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를 붙잡으면 앞으로도 계속 자신의 곁에서 아파할 것이었다. 그녀는 근우의 삶 속에서 일 순위가 될 수 없었다. 해야 할 것들이 많았고, 이루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그런 자신의 삶 속에서 그녀는 절대로 일 순위가 될 수 없었다. 근우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흐느낌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그 울음소리에 자신도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근우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녀에게서 뒤돌아선 근우는 마음을 다잡았다. 멀어져야 한다. 떠나가야 한다. 그녀의 곁에 더 이상 남으면 안 된다. 그녀에게 나는 생채기를 내는 존재일 뿐이다. 그렇게 아무리 마음속으로 외쳐도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 힘들었다. “…지은아.” 나지막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지, 은아.”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근우의 목소리가 어느새 눈물에 잠겨 있었다. “지은아….” 근우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다시 뒤돌아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지은, 아.” 또르르. 눈물 한 방울이 근우의 뺨을 타고 흘렀다. “…….” 더 이상 근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여전히 흐느끼고 있는 그녀만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여름답지 않은 차가운 바람이 어둠 속에서 불어와 두 사람 사이를 감돌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무들이 비비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사이로 힘없는 그녀의 흐느낌만 섞이었다. 지은아, 그녀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닿았다.